#267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10) 01/06 09:54 299 line 약속 시간보다 상당히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사이아와 비인은 벌써 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 모두 튼튼해 보이는 가죽옷에다가 허리에 칼까지 차고 있었다. 레일즈는 절벽이 갈라져 나 있는 길 쪽으로 눈길을 돌렸 다. 길은 어제 아침에 보았을 때와 똑같이 신의 성벽을 깨 끗하게 가르며 안쪽으로 쭉 뻗어 있었다. "자, 출발하자." 레일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눈앞에서 길이 닫혀버리면 그것만큼 분한 일이 없지 않겠어?" 레일즈는 절벽 사이에 생긴 틈을 길이라 부르고 있었다. 일단 가기로 결정한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10년 전에는 1주일 정도 열려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와 같으리 라고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해 만들어진 길이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물가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비 인은 어디 놀러라도 가는 것처럼 경쾌한 발걸음을 놀렸고 사이아는 투명한 목소리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그 늙은이가 용케 허락해 줬구나!" 레일즈가 사이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없으면 도대 체 누가 그 노마술사의 시중을 들어줄 것인가. 그러자 사 이아는 갑자기 어깨가 들썩이며 슬금슬금 레일즈의 얼굴 을 살폈다. "그분 역시 마술사 아냐? 크리스타니아에 흥미를 갖고 계신다구. 나이만 아니라면 자기가 가겠다고 하실걸? 그 리고 자기 제자를 저 위의 세계로 여행을 보낸 것이 처음 은 아니라고." "처음이 아니라니?" "으응, 10년 전에 크리스타니아로 여행을 나선 청년들 가운데 노마술사의 제자가 포함되어 있었어. 나한테는 선 배라 할 수 있는 사람이지." 사이아는 미소 띤 얼굴로 열심히 설명했다. 그 선배 제 자가 노마술사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레일 즈가 괜히 지레 짐작으로 의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 로. 레일즈는 사이아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역 시 노마술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는 이번엔 자신 의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어머니는 다 아시는 것 같더라구." 레일즈는 수줍은 미소를 띠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통하는 거 아니겠어?" "그게 바로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얘기잖아." 레일즈는 문득 슬픈 마음이 들었다. "누구야!" 그때 비인이 겁먹은 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야, 비인!" 사이아가 묻자 비인은 숲 속 한구석을 가리켰다. "숲 속에 누가 있어. 우리를 쭉 미행하고 있는 것 같아." "역시 넌 겁쟁이구나." 레일즈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다람쥐 를 잘못 본 것이 아니냐며 비인이 더 이상 다른 말을 못 하도록 했다. "자, 빨리 가자!" "정말 누가 있다니까." 비인이 필사적으로 주장했지만 레일즈는 상대도 해 주 지 않았다. "머리 좋은 식인곰이 또 나타난 거니?" 레일즈가 비웃듯이 말했다. "사람이다. 그것도 드워프님이시다!" 레일즈의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물론 비인이 아니었다. 그 소리는숲 속에서 들려왔다. "봐, 내 말이 맞잖아!" 비인이 그것 보라는 듯이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레일즈는 비인을 나무라면서 검을 뽑아들고 싸울 자세 를 취했다. 그리고 숲 쪽으로 눈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 을 찾았다. 물론 누가 숨어 있는지 레일즈도 벌써 알고 있 었다. "감옥에서 도망쳤다는 말은 이미 들었다. 거기 있다면 썩 모습을 나타내라!" 레일즈는 숲을 향해 외쳤다. 그 말에 응하듯이 도둑이 먼저 숲의 나무들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 뒤로 드 워프 신관이 따라왔다. "복수하러 왔는가? 공교롭게도 난 너희들과 상대할 시 간이 없다." "복수라니?" 도적은 높은 음으로 웃었다. "어쨌든 검을 집어넣어라. 우린 싸울 생각이 전혀 없으 니."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완전무장을 한 상태여서 마음만 먹 으면 언제라도 덤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 레일즈는 상대의 움직임을 경계하면서 말했다. "생각해 봐라. 우리가 너한테 복수한다고 도대체 무슨 득이 있겠나. 우리들은 사형이 결정된 죄수들이다. 아무리 죄를 더 짓는다 해도 아무런 관계가 없지.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까지 악한들이 아니다." "함께 있는 사람이 행운신의 사제니까 믿어도 좋지 않 겠어?" 사이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레일즈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레일즈는 얼굴을 가로 저으며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정말, 의심덩어리로구만." "앞서도 방심했다가 당한 적이 있으니까 그렇지." 레일즈가 되받았다. 항복하는 척하다가 자기를 함정에 빠뜨린 잔꾀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냐 아냐, 우린 말야, 일부러 널 찾아온 거야. 만나서 꼭 해 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랬지." 도적은 한바탕 웃음을 날리고 나서 말했다. "이야기라기보다는 인사라고 하는 게 맞겠지. 위병에게 서 들었는데 우리들 죄를 가볍게 해 달라고 탄원을 냈다 며?" 왕도에서 파견한 사자에게 레일즈가 그들의 목숨만은 보존할 수 있도록 탄원을 낸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랬다. 하지만 너희를 잡아넣은 것 또한 나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우린 엄청난 포상금이 걸려 있는 분들이니 누가 됐든 그렇게 했을 거야. 그렇지만 사로잡은 죄인의 죄를 가볍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놈은 너 말곤 어디에도 없을 거야." "죽게까진 만들지 않겠다고 너희들에게 약속했기 때문 이지. 사실 마음이 꺼림칙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 탄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인사를 할 이유도 없는 셈이지." 레일즈의 말을 듣고 도적은 배를 잡고 웃었다. "정직하군. 너의 그 정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날 밤, 내가 널 속임수로 궁지에 몰아넣었을 때 넌 그렇게 한 내 행동을 조금도 책망하지 않았어. 평범한 인물이었다면 비 겁한 놈이라고 떠들어댔을 텐데. 그래 그런 저런 이유로 널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일즈의 경계심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뒤를 계속 쫓 아왔다고 하는 이상 불의의 습격을 가할 생각이었다면 언 제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저 사 내의 말이 본심이라는 증거처럼 생각됐다. 그러나 한 가지 의심이 더 남아 있었다. "인사를 하려면 좀더 빨리 했어야지, 왜 지금 하는 거 지?"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가만히 보니까 네가 으시으시한 복장으로 숲을 뛰어들어가지 않겠어? 어디에 가는지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단 말씀이지. 그게 모험자 들의 특징이니까." 도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장황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레일즈는 두 사람을 믿을 수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를 받는 건 영 쑥스러운 일이고 어쨌든 두 사람의 마음만은 기억하겠다. 일생 동안 도망 다니는 것이 보통일 이 아니겠지만 어쨌든 꼭 살아 있길 바란다." 말을 마치고 레일즈는 사이아와 비인을 재촉해 다시 길 을 나서려 했다. "그, 그렇게 서두를 것 없잖아!" 도적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너희들이 어디에 가려고 하는지 아직 가르쳐주지 않았 잖아." "저 절벽 사이로 난 길이 보이지? 저 길을 따라 우리는 절벽 위의 세계로 간다. 모험자로서." 감출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레일즈는 사실대로 말 했다. "정말?" 도적은 자기 눈으로 열려 있는 길을 확인하고 나서 드워 프와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신들에게 선 택되어 신의 성벽 저쪽으로 떠나간 젊은이들이 있었다고. 그 중 한 사람은 틀림없이……." 그러고 나서 도적과 드워프 두 사람은 무언가를 계속 소 곤거렸다. "어쨌든 우리는 가자." 레일즈는 큰 소리로 말했다. 엉거주춤 저들과 이야기나 하고 있다가 길이 다시 닫혀 버리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너희들도 신에게 선택되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고 도적은 묘한 의미가 담긴 웃음을 띠었다. "너희들도라니?" 도적의 말에 레일즈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래, 사실은 우리들도 신에게 선택받아 저 위의 세계 로 갈 참이었지. 여행 동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어때,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끼리 함께 가지 않겠나?" 상대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레일즈는 전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멍청한 친구로군. 일생 동안 도망치는 생활이 큰 일이 라고 말한 사람이 너 아냐?" "그래,내가 그랬지." 레일즈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들은 크리스타니아로 도망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추격당할 염려도 없었다. "어떻게 하지?" 레일즈는 사이아와 비인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난 같이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이아는 불안한 기색이 없지 않았 다. "사람들이 많을수록 즐겁지, 마음도 든든하고." 비인은 그렇게 말하며 악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됐다. 같이 가는 걸로 하지. 잘 부탁한다." "자, 그럼 서로 이름이라도 알고 출발하지." 능청맞은 도적의태도에 레일즈는 거의 질릴 정도였다. "내 이름은 밧소다. 별명이 아니라 진짜 이름이지." "난 샤일론. 행운신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야." 우선 도적이, 그리고 드워프가 자기 소개를 했다. 레일 즈도 정식으로 이름을 밝히고 사이아와 비인을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 동안 밧소와 샤일론은 세 사람이 있는 곳으 로 왔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조심했지만 싸움을 걸어올 기색 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괜찮으리라는 결론을 내린 뒤 레일즈는 안심했다. 그리고 이제 신의 성벽을 갈 라내고 쭉 뻗어 있는 길의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레일즈 뒤를 따르는 사람은 네 명으로 불어났다. 걸으면 서 레일즈는 '정말 우리가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은 아닐 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마치 운명에 이끌리는 것처 럼 다섯 사람이 무리를 이뤄 함께 크리스타니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애써 털어냈다. 자신 들은 선택받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크리스타니 아를 향할 뿐이다. 지금 레일즈 일행이 내딛는 걸음마다 신의 성벽이 그리 고 크리스타니아가 쑥쑥 다가오고 있었다. 제3장 은빛 늑대의 소녀 1 레일즈 일행은 드디어 신의 성벽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거대한 절벽은 하늘을 향해 거의 수직으로 치솟아 있었다. 절벽을 따라 쭉 눈길을 올려다보니 마치 지금이라도 무너 져내릴 듯한 착각이 들었다. 레일즈가 이 절벽 아래에 서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 었다. 그러나 절벽의 상공에 떠다니던 잿빛 구름이 걷히고 그 전모를 보는 것인 만큼 여느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해 보였다. 한 마디로 공포스러운 느낌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을 쌓으면 절벽 위에까지 다다 를 수 있을까. 나무 열 개 크기로는 어림도 없었다. 삼십 개 아니 오십 개 이상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눈앞에는 신의 성벽을 가르고 안쪽으로 뻗어 있는 길이 나 있었다. 신들이 산다고 소문이 무성한 성지 크리스타니 아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미지의 세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일 즈는 파란만장한 모험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자, 가자."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레일즈가 말했다. 뒤를 보니 사이아와 비인이 긴장한 얼굴로 서로 고갯짓 을 했고, 드워프 샤일론과 도적 밧소는 대답 대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재촉당하는 듯 레일즈도 힘차 게 한 걸음 내디뎠다. 틈에 들어서자 주위가 갑자기 어둠에 휩싸였다. 양쪽이 경사가 급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햇빛이 비치지 않기 때문 이었다. 머리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마치 실개천이 흐르듯 파란 하늘이 앞뒤로 길게 뻗어 있었다. 길의 너비는 아주 좁아서 두 사람이 걸어갈 수조차 없었 다. 자연히 일행은 한 줄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레일즈가 맨 앞, 다음이 사이아, 비인, 밧소, 샤일론의 순이었다. 다섯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 채 묵묵히 걸어 올라갔 다. "레, 레일즈." 오랜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비인이 말을 꺼냈다. "왜 그래." "지금 길이 닫혀버리면 우린 꼼짝없이 갇히고 말겠지?" "왜 그런 재수 없는 소릴 하는 거야?" 레일즈는 사이아 머리 너머로 비인에게 한 마디 쏘아붙 였다. 그러자 레일즈의 노한 소리가 좌우의 암벽에 반향을 일으켜 메아리를 이루며 틈을 타고 올라갔다. 갑작스런 고 함소리에 놀란 것처럼 머리 위에서 때구르르 조그마한 돌들이 굴러떨어졌다. 레일즈는 당황해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레일즈의 노한 목소리는 계속 메아리를 일으켰다. "절벽을 무너뜨리기라도 하겠다는 거니!" 사이아가 목소리를 깔고 레일즈를 책망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레일즈는 비인을 노려봤다. 정령사가 되려는 소년은 재빨리 사이아 등뒤로 몸을 숨 기고 목을 움츠렸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걱정이라도 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레일즈는 계속 투덜투덜 잔소리를 해댔다. 길 양편의 벽 을 보니 새삼스럽게 숨이 꼴깍 넘어갈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움직일 것 같았다. 만일 그렇게 된 다면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행운신의 가호만 있으면 이 길은 절대 닫히지 않아!" 맨 뒤에서 드워프 샤일론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럼, 가호가 없으면 닫힌다는 말 아닌가." 밧소가 징그러운 소리를 했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잔뜩 배인 웃음이 서려 있었다. 불안감에 휩싸여 레일즈는 올라가는 길의 끝이 어디쯤 인지 가늠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길의 끝은 아직 멀기만 했다. 걸어도 걸어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길도 한 걸음씩 달아나는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었다 "분명히 앞으로 꽤 걸어왔지, 그렇지? 환각의 마법이 걸 리거나 하진 않았겠지?" 불안에 싸인 레일즈가 사이아를 돌아봤다. "괜찮아. 분명히 많이 걸어 올라왔어. 그렇지만 생각했 던 것보다 길이 더 긴 것 같아." 그렇게 대답한 사이아는 약간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그 다지 체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 는 만큼 하늘하늘한 몸매인 데다 마술 수업하랴 가사 돌 보랴 밖에서 놀 시간이 늘 적었기 때문이다. 레일즈는 그녀의 짐을 들어올려 자기 짐과 하나로 묶어 어깨에 짊어졌다. "고마워, 레일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