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9) 01/04 09:17 321 line 3 숲은 끝없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사이아는 조그마한 나뭇가지를 들고 빛의 마법을 외워 주위의 어둠을 지웠다. 그러곤 마법의 빛으로 나무들 사이를 누비듯 뻗어 있는 좁은 길을 비쳤다. 평소에 자주 다녀 익은 길이었지만 밤 이라 그런지 전혀 달라 보였다. 레일즈는 저 길이 다른 세계로 이어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탓인지 평소에는 전혀 의식한 적이 없던 숲의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화감도 시간이 지나자 점점 엷어져갔다. 결국 세 사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걸어갔고 숲을 벗어날 무렵에는 동녘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주위 의 나무들만 없었다면 지평선 가까이가 빨갛게 물들어 있 는 것이 보였을 것이다. 이윽고 레일즈 일행의 눈앞에 숲이 보였다. "길이 열린 곳은 10년 전과 똑같은 장소야." 사이아가 생각난 듯 말했다. "우연은 아니겠지.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생기 는 거야?" "왜라니?" 사이아가 물었다. "절벽에 길이 열리는 이유 말이야." 레일즈가 대답했다. "절대로 지진으로 무너진 건 아냐. 소문대로 신들의 장 난일까? 그렇지만 절벽 위에 사는 건 사람이라고 사이아 가 그랬잖아.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저 절벽을……." "그건 말야." 사이아가 말을 정리했다. "올라가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인간과 신이 공존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으면 위대한 마술사들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전설에 나오는 마법 왕국의 후예들 말이지." 비인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레일즈는 어쩌면 그 말이 맞 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절벽을 쪼개놓거나 엄청난 지진을 일으키거나 하는 것 은 다낭에 사는 최고의 마법사들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수 백 년 전에 존재했다고 믿어지는 전설상의 마법 왕국이 저 위에 남아 있다면,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카스툴이라는 이름의 고대 마법 왕국은 위대한 마법 문 명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공중에 거대한 도시를 띄우기 도 하고 최강의 환상 동물이며 마수인 용도 지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후에는 스스로 만들어낸 마술의 폭주로 멸 망해 버리고 말았다. "신이건 사신이건 전설의 마술사들이건 놀랄 필요가 없 지. 절벽 위쪽에는 아무도 모르는 세계니까." 10년 전에 절벽 위로 올라간 여섯 젊은이들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불투명했다. 그때 폭포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둠이 가시고 있긴 했지만 이 번에는 우윳빛 물안개가 주위에 두루 퍼져 여전히 세 사 람의 시계를 차단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호수의 기슭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앉은 순간 지금까지 잊고 있던 졸음과 피로가 엄습해왔다. 세 사람 모두 한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인이 잠깐 쉬자고 말하며 땅바닥 위에 대자로 뻗었다. 그러더니 금세 코를 골기 시작했다. 레일즈는 비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여기 까지 와서 열린 길을 보기 전에는 오기로라도 잘 수 없다 고 생각했다. 사이아는 그의 곁에서 두 무릎을 끌어안은 팔 사이에 얼 굴을 파묻었다가 다시 들곤 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러나 레일즈는 아침 안개가 걷히는 순간을 기다렸다. 사이아가 하고 있는 대로 무릎을 끌어안고 그 팔에 턱을 얹었다. 그러나 시선은 신의 성벽이 있는 쪽에 그대로 두 었다. 드디어 그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에 느낀 것은 아침 햇살이 왼쪽 뺨에 내리쏟아지는 따뜻한 감촉이었다. 햇살은 안개를 흩어지게 하고 주위의 풍경을 점점 선명하게 드러냈다. 이제 잔잔히 물결치는 수 면이 보였다. 그러다 웅덩이의 전체 모습이 확연히 나타났 다. 폭포의 좌우로 이어지는 신의 성벽의 검은색 바위 표 면이 보였다. 그리고……. 길이었다. 뱀비늘 같은 바위 표면을 가진 절벽이 멋지게 좌우로 갈 라져 완만하게 경사진 길이 절벽 안쪽으로 쭉 뻗어 있었 다. 절벽을 따라 떠다니던 구름도 조금 전 사라진 안개처 럼 걷혀나갔다. 그것은 10년 전 그때와 같은 광경이었다. 전모를 드러낸 신의 성벽은 놀라우리만치 높았다. 그러 나 무한한 높이는 아니었다. 레일즈는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사이아도 정신을 차리 고 얼굴을 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었 던 것이다. 비인은 일어날 기색조차 없다. "어, 레일즈!" 사이아는 일어서서 레일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열린 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레일즈의 옆 모습을 기대감 섞 인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레일즈는 사이아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신의 성벽에 뚫린 길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갈 수 있을까, 저 위의 세계로?" 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레일즈가 말을 꺼냈다. "그럼, 갈 수 있어, 레일즈!" 사이아는 기쁨에 넘치는 소리를 지르며 레일즈에게 안 겼다. 갈 수 있다! 크리스타니아에 갈 수 있다! 무럭무럭 감정이 고조되며 온 몸이 흥분 상태에 빠졌다. 그래, 이제는 기사가 되어 재상의 졸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 어렸을 적부터 키워온 꿈대로 모험자가 될 수 있다. 사이아와 비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 출발 준비를 해야지." 레일즈는 어깨를 툭 쳤다. "언제 다시 절벽이 닫힐지 모르잖아. 출발은 내일 점심 때로 하고 여기서 다시 만나자." 사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전에 여기서 한숨 자야겠어. 나 이제 쓰러져 버릴 것 같아." 레일즈도 그 말에 찬성이었다. 레일즈는 쓰러질 것처럼 바닥에 누웠다. 그러자 사이아가 염려스러운지 다가와 레 일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옆으로 가로누웠다. 레일 즈는 사이아의 금발에 가만히 손을 뻗고 그 부드러운 감 촉을 잠깐 즐겼다. 그리고 잠을 이루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신 경이 날카로워져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대지진이 있고 신의 성벽에 열린 길을 눈앞에 두고 있어 흥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잠의 신이 찾아들어 레일즈가 골아떨어진 것은 어둠이 완전히 걷히고 나서였다. 사정 없이 내리꽂히는 한낮의 햇살이 레일즈를 깨웠다. 이미 정오는 지나 있었고 해가 서쪽 하늘을 향해 느릿느 릿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폭포수로 얼굴을 씻고 나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레일즈는 사이아와 비인에게 잠깐 동안의 작별을 고하 고 숲 속의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 젯밤 낯설게만 느껴지던 길은 다시 예전의 친숙한 길로 돌아와 있었다. 레일즈는 여는 때와 다름없는 발걸음으로 하크 마을에 도착했다. 햇살 속에 다시 보는 하크 마을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무너지거나 불타버린 집들이 처참한 몰골을 드러낸 채 지 진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합동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 들이 구슬피 우는 소리가 온 마을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 앉히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레일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놀라운 소 식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근위 기사가 그 소식을 전해 주 었다. 지난번에 잡아간 두 사람이 도망쳤다는 것이다. 어젯밤 지진으로 대기소의 감옥이 부서졌기 때문인데 감시하고 있던 근위 기사의 병사는 드워프에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 어버렸고 그 틈을 타 그 둘은 자신들의 무기를 찾아들고 탈옥을 했다고 했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복수하러 올지도 모르겠 습니다. 만일을 모르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근위 기사는 그런 충고를 남기고 달아난 적들을 체포해 야 한다며 황망히 집을 떠났다. 레일즈는 불안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 두 사람은 사형당해야 할 만큼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금 부터 일생 동안 계속 도망치는 생활을 하는 것은 보통일 이 아니겠지만 그들은 모험자들이기에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다. 마음이 정리 되자 레일즈는 여행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슬 갑옷에 녹 방지용 기름을 바르고 부서진 갑옷 연결 용 쇠장식 두 개를 교환했다. 철제 방패를 손질하고 칼날 을 검은 숫돌로 정성스럽게 갈고 가볍게 기름을 칠했다. 취미 삼아 모아두었던 단검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세 개 골라내 그것도 정성스럽게 손질했다. 격투용의 커다란 단검이 하나, 던져서 사용하는 조그마한단검이 두 개였 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가 모험자 시대에 손에 넣었 다가 레일즈에게 준 것으로 강렬한 마력을 띠고 있어 가 볍게 던지기만 해도 그 어떤 화살보다도 빨리 날아가 목 표물을 파고들었다. 무기 이외에도 여행을 나서는 데 필요한 물건을 한 곳에 모았다. 물주머니가 둘, 소형 냄비에 스푼과 포크, 거기다 보존이 용이한 음식물을 찾아내 가죽부대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예비용 옷도 몇 가지 준비했다. 그리고 이들 준비물을 하나씩 단정하게 등짐 자루에 채웠다. 이 정도 준비를 하고 나서면 어머니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레일즈는 자기가 먼저 왕도에 가 있 을 생각이라고 말을 둘러댔다. 어머니는 왕도에 가면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다. 기사 단장이며 백작의 작위까지 지닌 훌륭한 아버지시니 내가 없어도 고독에 사로잡히진 않을 것이다. 레일즈는 잠시 어 머니 걱정을 하다가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여행 준비를 모두 끝내고 보니 벌써 해가 져 있었다. 어 머니와 간단한 저녁식사를 했다. 배가 불러오자 곧바로 졸 음이 쏟아졌다.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인 것만으로는 잠이 형편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레일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옷도 벗지 않고 침대 위에 엎어진 채 골아떨어졌다. 이파리가 살랑거리는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서 장작불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비인은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 불길 속에 불도마뱀이 날뛰는 것이 언뜻언뜻 보였다. 만약 그가 명령을 내리면 이 불꽃의 정령은 입으로 불꽃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것이었다. 살라만더와 운디네, 바람의 정령 실프와 대지의 정령 노 옴 같은 하급 정령은 이미 비인의 친구가 돼 있었다. 그리 고 그 밖에도 스프라이트와 드라이어드 같은 정령의 힘은 언제든지 빌릴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훨씬 더 많은 정령을 부르실 수 있었 어. 정령들에게 여러 가지 힘을 끌어내시곤 하셨지." 비인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정신을 집중시켰다. 살라만더가 천천히 비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불꽃의 정령왕(스프리트 로드) 에프리트의 의사는 전혀 전 달되어 오지 않았다. "그래, 언젠가는 정령왕도 부릴 수 있는 훌륭한 정령사 가 되고 말 테야." 그것은 비인의 어머니가 그에게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정령사는 자기를 위해 정령을 지배하거나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령의 힘을 올바르게 이끌어 사람과 자연을 융 합시키는 것이야말로 정령사의 올바른 사명이었다. 어머 니는 비인에게 언제나 그렇게 가르치셨다. 정령의 힘이 올 바르게 작용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재앙이 닥친다. 예를 들 어 지진이나 폭풍우,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의 재해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병에 걸리는 까닭도 사람의 몸에 깃든 정령의 힘이 어지러워진 탓이었다. 뛰어난 정령사들은 어지럽게 작용하는 정령의 힘을 바 르게 되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뛰어난 정령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어머니는 가르쳐 주셨다. "숲에서 살면서 자연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라. 숲의 정 령들이 전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 다음에는 여행을 떠나야 해. 여러 곳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거야. 그러 면 수많은 정령들을 느낄 수가 있단다."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면서 지금이야말로 여행을 떠날 때라는 다짐을 했다. 그러면서 비인은 자기 자신에게 말했 다. "레일즈와 함께 가면 싸움을 하기 위해 정령을 부려야 할지도 몰라. 정령들도 그건 허락해 줄 거야." 비인은 그의 얼굴을 응시하는 살라만더를 향해 조용히 말을 걸었다. 말없는 살라만더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한 차례, 고개를 끄덕거린 것처럼 보였다. 옆 방에서 자고 있는 노마술사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 다. 사이아는 집 안 정리를 하는 척하면서 내일의 여행 준비 를 몰래 하고 있었다. 서가에서 살짝 주문서를 꺼낸 뒤 노 마술사가 사이아를 위해 만들어준 마술사의 지팡이를 벽 장에서 찾아내 집 밖으로 날랐다. 그 지팡이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은 아직 받지 못했다. 따라서 마법을 걸 때에는 소형 완드(wand, 마술사가 쓰는 작고 가느다란 지팡이)를 마력의 발동체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완드의 힘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초급의 주문밖 에 사용하지 못했다. 사이아는 난해한 상위 고대어의 법칙을 웬만큼 이해는 하고 있었다. 최상급의 주문은 아직 미흡하지만 그 나름대 로 고도의 주문이라면 얼마든지 사용할 자신이 있었다. 어 떤 위험이 닥친다 해도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었다. 사이아는 몇 년 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이 있었다. 사실은 10년 전에 크리스타니아에 올라간 청년들 중에 노마술사의 아들도 섞여 있었다. 입으로야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아들 나셀이 생각 날 때면 노마술사는 슬픈 표정 으로 하루를 다 보내곤 했다. 그런데 그 마음의 고통은 세 월이 지나며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심하게 노마술사를 슬 프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이아로선 노마술사의 고 통을 풀어줄 방법이 없었다. 사이아는 노마술사와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었다. 그녀 는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받은 인생이었다. 그녀의 양친은 모두 인간이었다. 그러나 조상 어딘가에 섞여 있던 엘프의 피가 나타나 하프엘프로서의 생을 얻었다. 사이아는 가족 들 모두에게서 소외당하고 심한 구박을 받았다. 그 무렵 왕도에 설치된 학원의 도사(導師)였던 노마술사가 그녀에 관한 소문을 듣고 거둬들여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디 다 른 곳에 버려졌거나 인신매매를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이아의 소원은 단 하나, 나셀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어 떻게든 노마술사에게로 데리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것 이 자기를 거두고 이렇게까지 길러주신 노마술사의 은혜 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사이아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등짐 자루의 끈을 꽉 조여 맸다. 동이 트기까진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어 지럽혀진 실내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노마술사가 눈을 뜨기 전에 이 오두막을 떠나야 했다. 내일이면 사이아는 크리스타니아의 대지에 서 있을 것 이다. 그리고 그 대지의 어딘가엔 분명 나셀이 살아 있을 것이다. 4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과 작은 새들이 지저귀 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제 침대에 뛰어들던 그 자세로 잠 이 깨긴 했지만 기분은 쾌적했다. 레일즈는 마음속에서 솟 구쳐오르는 흥분에 몸을 떨었다. 10년 전의 청년들도 이런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을까. 방에서 나오자 청소를 하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 였다. 레일즈는 평상시보다 얌전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어 머니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살짝 웃으실 뿐이었다. 집 뒤 우물가로 가 땀이 밴 셔츠를 벗은 뒤 우물물을 길 어 먼저 얼굴을 씻었다. 그런 다음 수건에 물을 적시고 꼭 짠 뒤 윗몸을 깨끗하게 닦았다. 우물물은 차가우면서도 상 쾌했다. 집 안으로 돌아가 바지와 속옷마저 훌러덩 벗어던지고 는 새로 장만한 속옷을 입었다. 레일즈에게 갑옷을 입는 일은 오래된 습관처럼 익숙한 것이었으므로 갑옷 밑으로 면복을 받쳐입는 것으로 시작해서 위아래로 나뉜 사슬 갑 옷을 연결용 쇠장식으로 이어붙이고 나서 허리에 벨트를 두르는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전날 골라 놓은 세 개의 단검을 하나씩 벨트 에 꽂았다. 그리고 조그만 주머니를 연결시켜 그 안에 값 비싼 보석을 두세 개 넣어두었다. 사람이 살고 있다면 보 석이나 금화는 절대적으로 유용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재 상에게서 받은 포상 금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도 등짐 자 루 속에 넣어두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렇게 했다. 물론 치 하장은 집에 내던져 두었다. 재상의 권력도 크리스타니아 에서는 무용지물일 것이다. 머리를 지켜주는 후드는 성가시다는 느낌이 들어 등뒤 로 떨구고 등짐 자루를 짊어졌다. 그리고 가죽과 펠드 천 을 덧붙인 짙은 감색의 망토를 어깨의 연결 쇠장식에 붙 였다. 손에는 가죽 장갑을 끼고 역시 가죽으로 만든 부츠 를 신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을 벨트에 늘어뜨리고 왼 손에 방패를 들었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럼, 제가 먼저 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남기고 레일즈는 낳고 자란 집을 뒤로 했 다. 오랜 세월 정든 집도 어머니의 얼굴도 돌아보지 않았 다. 아버지가 항상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다. "다녀 오거라." 어머니가 레일즈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꼭 돌아와야 한다." 그 말에 레일즈의 발걸음이 잠깐이지만 멈췄다. 어머니 는 지금 그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러나 레일즈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숲의 오솔길을 통해 레일즈는 사이아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무거운 갑옷도 거추장스런 짐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 다. 레일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낮이 되기 전에 목적한 장소에 도착했다. 숲의 오솔길을 벗어나 조금 떨어진 곳, 언제나 사이아와 만나는 바위 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