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8) 01/03 09:26 320 line 레일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해는 이미 서쪽 하늘로 기 울고 주위는 어슴푸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사이아와 헤어지고 나서 레일즈는 정처 없이 마을 주변 을 돌아다녔다. 기분이 영 찜찜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배가 고픈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에서 새나오는 불빛과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따뜻하게 레일즈를 맞이했다. 현관 앞에 이르니 그날 저녁 과 마찬가지로 집 안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레일즈는 잠시 긴장했지만 곧바로 마음을 놓았다. 누군 가가 어머니와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귀에 익 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부르며 레일즈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현관 입구에서 어머니와 비인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여는 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레일즈를 돌아보았 다. "너 정말 너무해!" 비인은 레일즈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뭐가 너무하다는 거야." "결정했다며? 사이아하고 나를 남겨두고 왕도로 가기로 ……."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비인은 천장을 올려다보았 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연극투의 몸짓은 숲 속에서 정령사의 수행을 닦는 비인에게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았 다. "레일즈가 간다면 나도 갈 테야." 비인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레일즈는 어머니에게 배 가 고프다고 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으로 들 어가자 레일즈는 비인에게 손짓해서 함께 식탁 있는 방으 로 들어갔다. "제대로 차린 식사는 정말 오래간만이야." 갑자기 명랑해진 비인이 말했다. 잠시 후 어머니가 부엌 에서 요리를 날라오자 비인은 환성을 질렀다. 까만 두 눈 동자가 더운 김이 피어나는 수프에 붙박여 있었다. 그러더 니 수프 그릇을 집어들고 정신없이 떠먹기 시작했다. 레일 즈가 멍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동안 순식간에 수프 그릇이 비었다. 그제서야 레일즈도 단숨에 수프를 먹어치웠다. 기분 좋 은 향기가 혀를 자극했다. "그런데 아까 한 이야기……." 비인이 다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지 시선은 텅 빈 수프 그릇에 가 있었다. "레일즈가 왕도로 간다면 나도 따라갈게. 사람의 마음에 도 정령의 힘은 작용하거든. 숲에서 살고 있으면 그런 정 령들과는 교신이 어려우니까 나한테도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그리고가능하다면 사이아도 함께 가자." 비인의 말에 레일즈의 마음이 흔들렸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꿈을 버려 야 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 이아와 비인의 입장도 레일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낭 에 있는 한 모험자로서 살아가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사이아와 비인이 함께 한다면 왕도에서 지내는 생활도 한결 나아질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아마 사이 아는 절대로 왕도에 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새로운 요리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자 비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환성을 질렀다. 그때 레일즈 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해봐!" 비인을 조용히 시키고 레일즈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낮고 길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 생명체가 내는 소리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승의 포효를 닮은 소리. 레일즈는 자기한테만 들리는 게 아닌가 불안했지만 어머니와 비인 도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창 밖에서 들리는 건 아니었다. 아주 가까운 곳. 그 소리 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레일즈는 온 몸이 순식간에 얼 어붙는 듯했다. 그 소리가 발 밑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 문이다. 바로 그때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몸이 의자채 들어올려졌다. 이어서 무언가가 폭발한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심지어 공기까지도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레일즈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방바닥에 냅다 엎어졌고 어머니는 요리 접시를 떨어뜨리고 뒷벽으로 쓰러졌다. 요 리는 비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그의 머리카락을 온통 소 스 범벅으로 만들었다. "엄청나다!" 레일즈는 절규했다. 지진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컸다. 지금까지 발생했던 지진은 모두 이번 지진을 위한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격렬하게 요동쳤다. 격심한 오한이 온 몸에 퍼졌다. 어디로도 도망갈 곳이 없다는 막다른 마음에서 생겨난 공포였다. 지진을 피해 달 아날 길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문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요동이 심해 문까지 기어가는 것조차 불가능 했다. "이상해, 이번 지진은." 비인은 식탁 밑으로 몸을 밀어넣으며 외쳤다. 세상이 지진의 요동에 사방으로 내둘렸다. 절로 비명이 쏟아지면서 차츰 머리가 멍해졌다. 이대로 지진이 계속되 면 몸과 마음이,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말 것만 같았다. 레일즈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 채 지진이 끝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지진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 나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로 끝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마지막 한 차례의 요동이 칠 때 레일즈는 방 한가운데에 서 왼쪽 벽까지 굴러갔다. 몸은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고 두 발은 벽에 붙어 있었다. 그러곤 한 바퀴 굴러 엎어진 뒤 일어섰다. 실제로 요동에 시달린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조금만 더 오래도록 요동 쳤으면 틀 림없이 집이 무너지고 세 사람은 그 밑에 깔려버리고 말 았을 것이다. 방 안은 그야말로 처참한 꼴이었다. 식탁은 벽 끝까지 밀려가 옆으로 뉘어졌고 도기로 만든 식기는 모두 깨져 파편이 방바닥에 깔려 있었다. 여섯 개의 의자는 한 개만 을 빼고 모두 쓰러졌다. 쓰러지지 않은 의자는 이상하게도 평상시 있던 그 자리에 반듯하게 서 있었다. "죽는 줄 알았네." 비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만큼은 그가 하는 말을 겁쟁이라고 놀려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레일즈 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방구석에 램프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부서지 진 않은 채 불만 꺼져 있었다. 그 기름은 평소에 불이 잘 붙지 않아 짜증이 났었는데 이번만큼은 그게 고맙기만 했 다. 그때 비인이 비명을 질렀다. "뭐가 타는 냄새잖아!" 분명 무언가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집에서 불기가 있는 곳이라면……. "부엌이다!" 레일즈는 외치면서 달려갔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곳에 있는 부엌문은 지진을 견뎌내고 닫힌 채로 있었다. 그러나 그 틈에서 새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새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비인, 물을 가져와!" 레일즈가 외치며 문을 걷어차 부수었다. 그러자 곧바로 열기와 연기가 밀려나왔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비인이 다급한 소리로 물었다. "이 방에 떠다놓은 물 없어?" "아까까지는 여기 있었는데." 레일즈는 비인에게 짜증을 냈다. "물을 뜨려면 뒤쪽 우물로 가야지!" "그렇게 하면 늦어서 안 돼." 불길은 부엌의 맨 안쪽에서 번지고 있었다. 지진 때문에 불붙은 장작이 아궁이에서 튀어나왔던 모양이었다. 비인의 말대로 새빨간 불길이 격렬하게 솟아오르기 시 작했다. 물통에 한 번씩 길어와서는 도저히 잡을 수 없을 정도의 불길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엔 물이 없는 거야?" 비인의 목소리는 아주 진지했다. "저 방구석에 물병이 있어. 아까 지진으로 넘어지지 않 았다면 물이 담겨 있을 거야."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인의 기세에 밀 려 레일즈가 대답했다. "어느 쪽 구석?" "왼쪽…… 그래, 바로 그 앞이야." 기억을 더듬으면서 레일즈가 말했다. 부엌에있는 것은 식수용으로 담아놓은 물이었다. 성격 이 까다로운 어머니는 우물물을 싫어해서 숲 속의 샘까지 가서 마실 물을 길어왔다. 비인은 연기를 헤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좀 적긴 하지만 이걸로도 충분해." 조금 있다 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려고 그러니?" 비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도저히 비인에게 맡 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레일즈는 타오르는 불길 앞에 서서 급히 셔츠를 벗었다. 그것을 펼쳐 불길에 뒤집어씌우 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불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 타오르는 불길의 열기로 머리카락이 타들어가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셔츠에도 불이 붙어 새로운 불길이 올랐다. 그렇게 되자 마치 장작불에 낙엽을 갖다 부은 꼴이 됐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하지만 그것이 비인이 만들어내는 소리라는 것을 이해하 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불길과 맞서는 푸르른 정령이여, 아름다운 물의 소 녀여!" 마지막 말만은 레일즈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령 마법을?" 레일즈가 놀란 눈으로 비인을 돌아보았다. 아직 수행중 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정말 정령을 부릴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변화가 일어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실패했다는 생 각이 들어 낙담했을 때 물병 속에서 반투명의 물체가 모 습을 나타냈다. "물의 정령인가!" 레일즈가 외쳤다. 물론 실물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레일즈도 이야기로 들 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의 정령 운디네는 물병에서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내 려와 불길을 향해 기듯이 나아갔다. 레일즈의 눈에는 그 모습이 추악하게 비쳤다. 그러고는 역시 이야기로밖에 알 고 있지 못한 마물들의 이름이 입가에 어른거렸다. 어느 틈엔가 불길은 레일즈의 셔츠를 다 삼켜버리고 새 로운 먹이를 찾아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정령사들 은 이런 상황을 불도마뱀(살라만더)이 춤추고 있다고 표현 할 것이다. 나무가 탁탁 튀는 마른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 다. 불길 곁으로 충분히 다가가자 운디네는 그 모습을 갑자 기 바꾸었다. 분명 살집이 좀 붙은 모습이었는데 순식간에 얇은 막처럼 퍼져 불길 위를 뒤덮었던 것이다. 뜨거운 철판에 산 동물을 올려놓은 것처럼 격렬한 소리 가 났다. 하얀 증기가 여름날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며 불 길을 둘러쌌다. 레일즈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과 불꽃, 짝을 이루는 두 힘이 바로 눈앞에서 싸우고 있었다. 얼마 후 드디어 승패가 갈렸다. 수증기 너머로부터 파랗고 투명한 모습의 조그마한 소 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의 소녀라 불리는 운디네가 비 로소 그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말 고마워, 운디네. 그럼 이제 정령 세계로 돌아가렴. 잘 가!" 그 말과 동시에 물의 소녀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방바닥 위에 조그마한 물방울 하나를 남기고. 그러자비인이 빙글거리며 레일즈에게로 눈길을 돌렸 다. 수증기가 점점 엷어지며 새카맣게 타들어간 바닥과 레 일즈의 셔츠가 보였다. 불은 완전히 꺼졌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도 전혀 열기 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단한데." 레일즈는 솔직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두 사람은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어떻게 하 고 있는지 살폈다. 열려 있는 문을 들어서자 어머니는 이 미 엉망이 된 방을 정리하고 계셨다. 어머니가 아무 탈 없다는 것을 확인한 레일즈는 비인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생각했던 대로 마을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지진 때문 에 무너진 집도 눈에 들어왔다. 그 밑에 깔린 사람도 있었 다. 아무리 평소에 사이가 나쁘다 해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는 없었다. 레일즈는 무너져내린 집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해 뛰어갔다. 비인도 혼자 남을까 두려워선지 레일 즈를 쫓아갔다. 레일즈는 다른 마을 사람들과도 힘을 모아 무너진 집 아 래 깔린 사람들을 구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숨이 끊긴 사람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부상 자들이었다. 레일즈는 전사의 기본 교양으로서 지혈 방법을 알고 있 었기 때문에 부상자들에게 간단한 응급조치를 해 주었다. 그러나 불이 붙은 집은 어떻게 손써볼 방법이 없었다. 물의 정령을 불러볼 수 없겠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불길 이 워낙 거세 도저히 힘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비인의 대답이었다. 겨우 불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었고 마치 축제 때처럼 불길이 휘감아오르는 집을 먼발치에서 지켜볼 따름이었다. 부상자들에 대한 응급 조치가 마무리돼 레일즈가 손을 놓게 된 것은 한밤중이 지난 무렵이었다. 그 무렵엔 불 붙 은 집들도 완전히 타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방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횃불 따위를 들 고 나와 어둠을 밝혔다. 지진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시키기 위한 작업이 철야로 진행될 모양이었다. 피곤에 지친 레일즈는 시냇가에 털썩 주저앉아 사람들 이 일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지독한 지진이었지?" 비인의 말에 레일즈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 지진으로 그만 끝났으면 좋겠는데." "모르겠어. 그런데 요새 일어나는 지진들은 정말 이상 해." "그러고 보니 지진이 한창일 때도 그런 말을 했잖아." 레일즈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비인에게 물었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대지의 정령왕이 설치기 때문이 야. 그러니까 지진이 일어날 때는 강한 정령의 힘을 느끼 게 된다구." "그러니까 지진을 미리 알 수 있다는 말이니?" 레일즈의 물음에 비인이 강하게 긍정했다. "그런데 이번에 일어난 지진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 질 않아.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정령사일지라도 이 지진을 가라앉힐 수가 없는 거야." "수행이 모자라서 그러는 거 아냐?" 레일즈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비인을 바라보았다. "아까 정령 부리는 걸 보여줬잖아!" 비인이 필사적인 표정으로 말을 되받았다. "그렇다면 소문대로 사신이 지진을 일으킨다는 거니? 신의 성벽 저 너머에 산다는." "위의 세계에 신 따윈 없어." 그때 두 사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아!" 레일즈와 비인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며 동시에 외쳤다. "한참 찾았잖아." 사이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레일즈 앞으로 돌아와 마주 대하듯 쭈그리고 앉았다. "이런 때에 무슨 일로? 걱정돼서 그랬던 거야?" 레일즈는 다급하게 물었지만 사이아는 가쁜 숨을 가누 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물을 좀 줄까?" 비인이 허리에 차고 있던 물주머니를 열어 내밀자 사이 아는 그걸 받아들고 가죽 냄새가 밴 물을 단숨에 마셔버 렸다. 그리고 얼마 뒤 텅 빈 물주머니를 비인에게 돌려주 면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열렸어……." 사이아는 간신히 한 마디했다. "열리다니, 뭐가?" 말을 하다 말고 레일즈는 사이아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집히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사이아가 외쳤다. "신의 성벽에 균열이 일어났어. 그 절벽을 넘어서위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거야." "위의 세계……, 신의 세계로 말야?" "신 같은 건 없어. 그 위엔 사람이 살고 있어. 그건 틀림 없어." 그러더니 사이아는 폭포 위에서 인간이 만들었다고 생 각되는 물건이 여러 가지 떠내려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왜 이제서야 그걸 알려주는 거야?" 레일즈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가르쳐 줘봤자 아무 소용없잖아. 길이 열리지 않는 한 크리스타니아에는 갈 수 없으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사이아는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을 느 꼈다. "길이 열렸어." 레일즈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이아의 말 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어쨌든 내 눈으로 보지 않고선 믿어지질 않아. 거기로 데려가 줄래?" "지금?" "당연하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일즈는 뛰어가기 시작했 다. "기, 기다려, 레일즈!" 비인이 황당해 하며 일어섰다. 조금 뒤처져 사이아도 따라갔다. 신의 성벽으로 이어지는 숲의 오솔길을 향해서 세 사람 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그 뒤로는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