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7) 12/31 09:46 301 line "샤일론, 자네는 왜 왔나!" 도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씩이나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왜 날 버리고 도망가지 않은 거야……." 도적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버릴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그렇게 했겠지. 다른 동료들 처럼 말야." 드워프는 그 대답과 함께 뜻밖의 상황 전개에 멍해 있는 사람들을 물리치며 도적에게로 걸어갔다. "일당이 어떤 놈들인지 조사해라. 그리고 누구한테 사주 를 받았는지도." 정신을 차린 근위 기사가 두 모험자를 노려보았다. 그리 고 레일즈 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포상은 뒷날 왕도에서 전달될 것입니 다. 아버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레일즈가 지켜보는 동안 근위 기사는 대기소의 안쪽 방 으로 두 사람을 끌고 갔다. 그 방에는 조그마한 감옥이 만 들어져 있고 죄인들을 문책하기 위한 도구도 갖춰져 있었 다. 아버지가 왕도로 가시고 나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레일즈는 묘하게 뒷맛이 씁쓸했다. 집으로 돌아가야겠 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좀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얼 마 안 있어 안쪽 방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울 려왔다. 그리고 두 사람을 혹독하게 다루는 근위 기사의 날카로운 목소리도 들렸다. 레일즈는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가 없어서 문을 걷어차듯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레일즈는 어둠에 잠긴 밤길을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제2장 신의 나라로 1 풍덩 소리와 함께 폭포의 리듬이 잠시 깨졌다. 커다란 물결이 겹겹이 일어났다가 수면 위로 일정하게 퍼져갔다. 레일즈가 웅덩이 속으로 덥석 뛰어들었던 것이다. 레일 즈는 단숨에 바닥까지 잠수해 들어간 뒤 거기서 수면을 올려다보았다. 수면은 마치 햇살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끊임없이 살랑이며 모습을 바꾸었다. 물은 시원하기 그지 없었다. 숲길을 달려오느라 몸이 달아올라선지 기분이 한 껏 좋았다. 폭포수가 떨어지며 울리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 다. 숨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물 속을 헤엄치고 나서 단숨 에 수면으로 나왔다. 가슴에 담긴 숨을 가쁘게 뱉어내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자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레일즈는 금발을 자연스럽게 쓸어올리며 기슭 쪽을 바 라보았다. 거기에는 따분하다는 표정의 사이아가 레일즈 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발치에는 지금 막 레일즈가 벗 어던져 놓은 셔츠와 바지, 거기에 속옷까지 어지럽게 널브 러져 있었다. "사이아, 이리 들어와. 함께 헤엄 치자!" 레일즈는 큰 소리를 지르며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어떻게……." 사이아가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리자 레일즈는 사이아가 미처 잇지 못한 말을 대신 소리쳤다. "이 나이에 너랑 같이 헤엄 치니, 라고 하려고 했지?" 레일즈는 이렇게 말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 시며 헤엄쳐 기슭으로 다가와서는 바위를 두 손으로 잡고 튀어오르듯 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놀라서 눈길을 돌리 는 사이아에게로 걸어와서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 기 시작했다. 아직 습기가 배어 있는 살에 옷이 달라붙어 입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옷을 다 입었는데도 사이아는 레일즈 쪽을 쳐다보려 하 지 않았다. "부끄러워 할 것 없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도 발가 벗고 헤엄쳤으면서." 레일즈는 사이아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자기를 바라보 게 했다. "옛날하고 지금하고 같니?" 얼굴을 돌린 사이아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옛날이라고 해 봤자 작년 여름 아니니. 뭐 그렇게 한참 옛날인 것처럼 얘기할 건 없잖아." "유감이지만 난 달라. 이젠 조신해졌단 말야." 새침데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사이아가 말했다. "그런데도 몸은 별로 안 큰 것 같은데?" 레일즈는 두 손으로 사이아의 가슴을 만지는 시늉을 했 다. "난 하프엘프잖니." 사이아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레일즈는 따분한 듯이 말했다. "넌 기분이 안 좋니?" 사이아가 장난기 어린 웃음를 띠고 레일즈의 얼굴을 가 만히 들여다보았다. 보통 때는 가느다란 그녀의 눈이 지금 은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떠져 있었다. "왕도에서 도망쳐온 두 사람을 네가 잡았다며?" 그 말을 듣자마자 레일즈의 얼굴이 구겨졌다. "비인한테 들었니?" 사이아는 그렇다고 끄덕거렸다.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난 말야. 그 사람들이 왕성의 보물이 탐나서 도둑 질하러 들어갔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 왕을 구해 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거야." 두 모험자가 잡히고 나서 벌써 열흘이 넘었다. 하지만 그들에 관한 소문을 들은 것은 겨우 어제 일이었다. 소문 에 의하면 그들은 유폐된 여왕을 구하려고 목숨을 건 용 사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소문을 듣고 레일즈는 까무러치 는 줄 알았다. 모든 것이 다 아버지의 음모가 아니었나 하 는 생각조차 들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레일즈는 재상 말리드의 사냥개 흉내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 적을 사로잡은 다음날 아침에 근위 기사는 재상에게로 나는 듯이 달려갔고 재상은 즉시 사자를 파견했다. 사자는 재상의 명령을 전해야 한다며 바람같이 하크 마을을 찾아 와서는 치하의 글과 재상에게 받은 금화를 레일즈 집에까 지 일부러 가지고 왔다. 금화는 일종의 상금이었다. 사자 는 아버지가 보내는 편지도 가지고 왔다. 그런 사실은 이미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얼굴 을 마주칠 때마다 레일즈에게 마을 사람들의 무언의 소리 가 들려왔다. 과연 피보라 기사의 아들답다고……. 사냥개의 자식은 역시 사냥개라고……. 그 뒤로 레일즈는 사로잡힌 두 사람의 모험자가 늘 마음 에 걸렸다. 그들이 악한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의뢰받은 사명을 수행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모 험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모험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레일즈는 과거의 아버지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레일즈에게 모험자는 곤란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용사이며 악인을 응징하는 영웅이었 다. 실제로 그들이 여왕 구출에 성공하고 그럼으로써 재상 이 실각했다면 그들은 구국의 영웅이라고 대단한 칭송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지면이 약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자고 있 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의 가는 떨림이었다. "또 지진인가." 레일즈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요즘 이상하게 잦은 것 같네." 사이아는 기쁜 듯이 웃었다. "난 몰랐는걸. 사이아가 지진을 좋아하는지." "지진을 좋아하다니 말도 안 돼. 나도 무서워." 레일즈는 이런 싱거운 얘기를 건네다가 문득 생각에 빠 졌다. 레일즈는 지진에게 진 빚이 있다. 도적과의 대결에서 궁 지에 빠져 있을 때 지진 덕분에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 기 때문이다. 그날 밤 이후 매일처럼 지진이 계속되었다. 큰 지진도 있었고 작은 지진도 있었다. 오래도록 진동이 계속된 경우 도 있고 순식간에 끝난 것도 있었다. 마치 대지가 악몽을 꾸느라 몸을 뒤척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야, 기억나니?" 사이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레일즈는 갑 작스러운 사이아의 말에 잔뜩 인상을 쓰고 대답했다. "기억나다니, 뭐가 말야?" "신의 성벽에 틈이 벌어졌던 것 말야. 그때도 커다란 지 진이 일어났었지." 레일즈는 웅덩이 너머로 솟아 있는 절벽으로 힐끗 시선 을 돌렸다. "그랬지." 레일즈도 생각났다. "그렇지만 그때는 한 번밖에 진동이 없었잖아. 이렇게 지진이 계속되진 않았어." 확실히 이번에는 지진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하크 마 을 사람들은 사신이 재앙을 안겨주려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레일즈도 동감이었다. 좀더 큰 지진이 일어나면 집들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그 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결국 지진은 환영 할 수 없는 재해에 불과했다. "지진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레일즈는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사이아가 불안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난 말야, 하루라도 빨리 왕도를 향해 출발할까봐." 사이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사정을 몰랐다고는 하지만 난 왕성에 잠입해 여왕을 구하려고 한 모험자를 사로잡고 말았어. 재상에게서 포상 과 치하장도 받았고. 어떻게 변명하든 난 재상의 충실한 부하 노릇밖에 못 한 거야.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 어. 그러니까 난 왕도로 갈 테야. 하크에서 사는 건 이제 넌더리가 나!" 마지막에는 거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되었다. "레일즈……." 창백한 얼굴로 사이아가 레일즈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다. 그러나 레일즈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 손길을 피했다. "아……." 슬픈 눈으로 사이아가 레일즈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태 도를 취했는지 레일즈는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레일즈는 사이아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숲의 오솔 길을 향해 힘껏 뛰었다. 마을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이었 다. 그 길이 어쩐지 자신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운명은 하나이고 결코 도망갈 수 없는 것이라는……. 2 "일어났어?" 드워프가 언제나 변함없는 투로 말을 걸었다. "이왕 하는 말이면 아직 살아 있니 하고 물어줘." 두 손을 묶은 쇠사슬을 철렁거리며 밧소가 드워프 샤일 론에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감옥 안쪽의 돌벽에 나란히 쇠사슬로 묶여 있 었다. 이 좁은 방 안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온갖 수단이 다 동원된 고문을 받았다. 아직 도망중인 동료들과 그 일을 시킨 사람이 누군지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밧소는 아예 모든 것을 깨끗하게 불어버릴까 생 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는 과정 에서 점점 의지가 굳어져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는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연일 계속된 고문 때문에 이미 아픔의 감각조차 마비되 었다. 이런 상태로 며칠이나 더 버틸지 모를 일이었다. 지 금은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기는 살아 있는 건가?" 샤일론이 불쑥 말했다. 밧소는, 넌 참 의리 있는 놈이야, 라는 의미로 샤일롯을 향해 웃어보이려 했다. 그러나 순간 온 몸에 엄청난 통증 이 퍼져나갔다. 아직 아픔을 느끼는 신경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나쁜 놈들,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 보라지." 밧소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피가 섞인 검붉은 침이 바 닥에 얼룩졌다. 이빨도 도대체 몇 개나 부러졌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샤일론의 치유 마법으로 고치면 좋을 텐데, 라 고 밧소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희대의 미남이라는 자 신의 이름이 무색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아까 하는 얘기 들었니?" "듣고 싶지 않았는데 그 자식만 오면 엄청나게 큰 소리 로 이야기는 통에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 없지. 결국 우리 가 사형당한다는 거지 뭐." 밧소는 다시 한 번 검붉은 침을 뱉으면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각오는 했지만 그래도 차라리 목을 쳐서 죽여줬으면 좋겠어." "죽다니 말도 안 돼!" 밧소는 샤일론의 얼굴을 보고 빙긋 웃었다. "난 공주님을 구해낼 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아." "공주님이라니. 제시스 여왕을 말하는 거야?" "나한테는 영원한 공주님이지." 밧소는 정색하며 샤일론의 말을 되받았다. 예기치 않게 온 몸에 힘이 들어가 다시 격렬한 통증이 일었다. 밧소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았다. "공주님이 너한테 이렇게 말했다며? 네가 힘을 키워 다 시 여왕에게 찾아올 것을 기대한다고……. 정말이야?" "그래, 그랬어." 밧소는 격에 맞지 않게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 꿈꾸는 목 소리로 말했다. 밧소 등 다섯 명의 모험자는 10년 전의 정변 때 왕위 계 승권을 버리고 숨어사는 어떤 왕족에게서 정보를 얻어듣 고 왕실의 한 방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성 안으 로 몰래 들어갔다. 그때부터는 밧소의 독무대였다. 샤일론을 포함한 나머 지 네 사람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비밀 통로가 있는 방 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밧소는 도적의 기술을 써서 삼엄한 감시의 눈길을 피해 탑 위에 유폐된 여왕의 방까지 무사히 기어들어갔다. 그러 고는 방문에 걸린 자물쇠도 간단히 풀고 여왕에게 탈출을 권했다. 그러나 여왕은 밧소의 권유를 미소 띤 얼굴로 거절하고 는 나는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제시스 여왕은 대단히 현명한 여성인 것 같아. 자기 혼 자 힘으로는 재상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겠 지." "기다려봤자 시기가 무르익는 건 아냐. 누군가가 들고 일어나지 않는 한." 밧소는 먼 눈길로 말했다. "그럼, 네가 그 일을 하겠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 난 내 그릇의 크기를 알아. 다만 내가 무력하게 지내진 않을 거라는 말이지."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데?" 샤일론이 흥미 있다는 듯 물었다. 밧소는 웃으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뭐, 간단해. 우리들이 살아서 계속 도망쳐 다니면 재상 의 위신도 상처를 입는 거지." 그 말을 듣고 샤일론은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소극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난 찬성이다. 재상에 대한 불만은 왕도를 중심으로 쫙 퍼져 있지. 어떤 계기가 되면 불이 붙을지도 몰라." "당연하다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시궁창 같은 감옥에 서 도망가야 하는데. 이런 쇠사슬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 만 이렇게 경비가 삼엄하니 그 뒤가 문제지. 누군가 소동 이라도 일으켜 주면 그 북새통을 어떻게 이용해 볼 수 있 겠는데." "감옥 안에 있는 이상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지. 지금 으로선 신께서 행운을 안겨주시기를 기대하는 길밖에 없 어." "행운이라고? 그건 바라봤자 헛 거야. 행운이 있다면 지 금 이렇게 감옥에 끌려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믿어야지." 샤일론은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음 깊이 믿으면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법이야. 우리들의 조상이 다낭 반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래 너다운 생각이다.' 밧소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다. 밧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에게 간절 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