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6) 12/30 09:33 255 line 4 해가 완전히 져 사방이 온통 어둠에 잠기자 레일즈는 결 심을 행동에 옮겼다. 두 모험자는 이미 헛간으로 옮겨간 뒤였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술을 마셨다. 레일즈 집에 남아 있던 술을 거의 다 마셔버렸음 에 틀림없었다. 레일즈는 그들을 위해 지나치게 술을 권하고 싶지는 않 았다. 술에 취해 있으면 근위 기사에게서 달아나기가 어려 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새 갑옷을 꺼내 입고 그 위에 사슬 갑옷 을 겹쳐 입었다. 싸울 생각은 없었지만 일이 어떻게진행 될지 몰랐다. 방패를 들고 검의 상태도 확인했다. 매일같 이 쥐고 지낸 것인 만큼 검은 레일즈 손에 딱 맞았다. 그리 고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도록 자기 방의 창문을 통해 밖 으로 나왔다. 신중하게 행동에 옮길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갑옷 소 리가 크게 울렸다. 누가 이 소리를 듣지나 않았는가 긴장 했지만 집 안이나 헛간 모두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레일 즈는 조심해서 마당을 가로지른 후 문을 통하지 않고 일 부러 옆 담장을 넘어 길로 나섰다. 길에 나서고 나서도 잠 시 동안은 발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자 레일즈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는 곳은 대기소였다. 그런데 갑자기 레일즈의 가는 길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 었다. 근처의 인가에서 새나오는 불빛과 밤하늘에 떠 있는 달빛만으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 런 시각에 도대체 누구가 거리를 나다닌단 말인가. "이런 밤중에 어딜 가는 거지?" 귀에 익지 않은 높은 목소리였다. "당신과 관계 없는 일이잖아."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이러쿵저러쿵 할 짬이 없었 다. 레일즈는 그 사람을 피해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 러자 상대방은 레일즈가 가는 길을 막아서듯 옆으로 움직 였다. 순간 레일즈의 직감이 더듬이를 작동하는 곤충처럼 빠 르게 반응했다. 흐릿하게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크고 깡마른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못 간다." 감정을 누르며 뱉는 소리였다. 섬뜩한 느낌이 들어 레일 즈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누구야, 당신." 입으로는 묻고 있었지만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상태였다. 두 모험자 가운데 도적이 틀림없었다. 일단 혼 자인 것처럼 보였으나 함께 온 드워프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게 분명했다. 레일즈는 자리를 고르면서 천천히 검으로 손을 뻗었다. "잘못했다간 아름다운 어머니에게 울음을 안기게 된다. 내가 좋게 말할 때 집으로 돌아가 다소곳이 잠이나 자거 라." "어머니와는 관계가 없어!" 레일즈는 도적의 말에 골이 나 불쑥 검을 뽑아들었다. "장난 그만두지 못하겠어!" 사내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자세도 낮추었다. 어둠을 통 해 사내가 짧은 검을 뽑아드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아무래 도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레일즈의 머리로 피가 솟구쳐 올랐다. 검술 훈련을 하면서 겨룬 적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실전 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상대는 왕 성에 잠입했다가 아무 탈 없이 도망쳐나올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지닌 도적이었다. 이긴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 다. 그러나 승패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라고 레 일즈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면서 상대와의 거리를 쟀 다. "정말 덤비겠다는 거냐." 도적은 다시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박력이 있 었다. 말을 하는 까닭은 상대도 두렵기 때문이다. 레일즈 는 제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검 끝이 떨리는 것 만은 어쩔 수 없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나." 도적이 그렇게 말할 때 레일즈는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 렀다. "우왓!" 상대는 의외라고 여겼는지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 다. 레일즈는 사정 없이 다음 공격을 펼쳤다. 지금은 밤이 었고 상대의 모습은 그림자처럼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확 히 목표를 잡을 수 없으므로 어쨌든 온 힘을 다해 검을 휘 두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지, 진짜냐!" 레일즈가 휘두르는 칼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면서 상대가 외쳤다. 레일즈는 말없이 검을 내리쳤다. "정말 대단한 개구쟁이로구나. 아, 알았다. 내가 잘못했 다. 항복하지." 레일즈는 검을 높이 쳐든 채 움직임을 멈췄다. "항복한다면 먼저 검을 버려라." "검을 버리면 되는 거지." 의외로 상대는 순순히 레일즈의 말을 따랐다. 쇳덩이가 땅바닥을 두드리는 높은 음이 들렸다. 상대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레일즈는 그 검을 발짐작으로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둠 속인지라 여간해서 짚어지지가 않았다. 레일즈는 안 되겠다 싶어 땅바닥으로 눈길을 돌려 찾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눈앞의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움 직였다.순식간에 레일즈의 무방비 상태인 목에 서늘한 칼 날이 다가왔다. 레일즈가 검을 찾는 순간을 틈타 몰래 갖 고 있던 단검을 뽑아든 것이 틀림없다. "개구쟁인 역시 개구쟁이로군." 의기양양한 소리가 귀에 잡혔다. "으음." 레일즈가 낮은 소리를 질렀다.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얄팍한 수는 싫어한다만 네가 말을 알아듣지 못 해 할 수 없었다." 도적은 무기를 버리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레일즈는 오 금이 저려왔다. 전사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공 포가 몰려오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무기를 버렷!" 사내는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했다. 반사적으로 레일즈 는 발 아래로 검을 내던졌다.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었지?" 사내가 물었다. 술냄새가 확 끼쳐와 레일즈는 얼굴을 찡 그렸다. "알고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린 거 아냐!"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이젠 불쌍한 개구쟁이로군!" 자꾸만 개구쟁이, 개구쟁이 해대는 바람에 레일즈는 속 으로 불쑥불쑥 화가 치밀었다. 그러자 얼마간 공포감이 수 그러들었다. 상대가 틈을 보이지 않나 살폈지만 과연 용의 주도했다. 사내가 낮게 말했다. "이 마을에도 벌써 수배가 떨어졌나?" "그래 왕도에서 근위 기사가 내려왔다. 이제 도망갈 장 소는 다낭 어디에도 없는 셈이지." 레일즈는 침을 삼켜 타오르는 목을 축이며 말했다. 여기 서 기가 꺾이면 완전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고 생각했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고 죽였을 것이 다. "닥쳐!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사내가 어찌나 큰 소리를 질렀는지 레일즈는 귀가 다 멍 멍했다. "평생 동안 도망 다닐 생각인가?" "도리 없지. 잡히면 죽을 테니까." 남자의 말투에 두려움의 기색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레일즈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 봐도 난 어엿한 기사 후보생이다. 내가 진언하면 형이 가벼워질 수도 있지." 레일즈는 상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해댔 다. "네가 기사후보생이라고? 지나가던 동네 개가 다 웃겠 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지." 레일즈는 그쯤 해 두고 상대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상대 도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 도적은 지금까지의 도피생활에서 아주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다 낭의 끝인 이 변경의 마을에서 어떻게 숨어지내 볼까 했 는데 여기까지 재상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낙담하고 말았으리라. 레일즈는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가다듬 었다. 상대의 마음을 조금만 더 흔들어놓으면 될 것 같았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생각이 온통 다른 데 매 달려 있었기 때문인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통 헤아릴 수 없었다. "지, 지진이다!" 먼저 알아챈 쪽은 그 사내였다. 단검 끝이 흔들리며 레일즈의 목에 가볍게 상처를 입혔 다. 그 통증으로 레일즈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흔들리 는 것은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지였다. 그러고 보니 가까이 있는 민가 또한 심하게 흔들렸다. 땅이 쿵쿵 울리는 소리 도 들려왔다. 아주 강도가 센 지진이었다. 서 있기조차 힘 들 정도였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였다. 잠깐 사이에 상대도 정신을 딴 데 쏟았기 때문에 지금이라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일즈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사슬 갑옷으로 보호 장치를 한 오른손으로 상대의 단검 을 힘껏 내쳤다. 사슬 갑옷이 단검 날에 부딪치자 불꽃들 이 사방으로 튀었다. 갑자기 반격을 당한 도적은 엉겁결에 단검을 놓쳤다. 그 러자 레일즈는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이번에는 왼손에 들고 있던 방패로 상대의 얼굴을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나며 확실하게 상대를 강타한 느낌이 전 해져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지진은 이미 끝났고 사내는 레 일즈의 발 아래 쓰러져 있었다. 숨이 끊어지진 않았다. 다 만 정신을 잃었을 뿐이었다. 검을 집어들고 레일즈는 사내의 옆구리를 가볍게 걷어 찼다. 몇 차례 그렇게 하자 사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 다. 그는 얻어맞은 턱 주위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뼈가 부 러지지나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정말 장래가 걱정되는 개구쟁이로군!" 사내가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재상이 아끼는 좋은 기사가 되겠구만." "그래, 그럴 생각이지." 사내는 완전히 포기했는지 레일즈의 말을 순순히 따랐 다. "아까 한 이야기는 진심인가." 몸에 붙은 흙먼지를 털어내면서 사내가 말했다. 레일즈는 무슨 이야기를 말하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사형당하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 말이야." "아, 정직하게 말해서 목숨은 건지겠지만 그 뒤로는 은 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바랄 수 있을 뿐이지." 이것은 사내의 탄원하는 듯한 태도에 동요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형을 줄이도록 탄원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지 금 상태에선 그것이 받아들여지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 다. 검을 든 레일즈에게 이끌려 도적은 얌전히 대기소까지 걸어갔다. 레일즈는 그저 신고만 할 생각이었는데 스스로 적을 사로잡고 말았다. 마치 말리드 재상의 개라도 된 듯 한 느낌이 들어 자신이 한없이 혐오스러웠다. 아버지 입장 에서 보면 더 이상 바랄 나위 없는 멋진 행동이리라. 그것 또한 레일즈를 화나게 만들었다. 대기소의 문도 그 사내에 게 열게 했다. 보잘것없는 대기소 방 안에는 두 사람의 병사가 대기하 고 있었다. 둘 다 기사의 부하 병사들이었다. 하크 마을에 는 몇 명의 병사밖에 상주하고 있지 않으며 마을의 치안 은 거의 자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변경의 작은 마을 인 만큼 별다른 사건이 일어날 일도 없었다. "아니, 레일즈님 아니십니까." 병사 가운데 한 사람이 레일즈를 기억하고 있었다. "적을 하나 사로잡았소. 또 한 사람은 우리 집의 헛간에 서 자고 있고." "정말입니까. 큰 공을 세우셨군요." 두 병사는 이상한 물건이라도 바라보듯 레일즈가 데리 고 온 사내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병사들의 말투와 태도가 보기 싫어 레일즈는 빨리 근위 기사를 불러달라고 부탁했 다. 한 사람이 눈치 빠르게 서둘러 대기소 밖으로 달려나갔 다. "근위 기사까지 와 있단 말인가." 도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치 대도라도 된 기분이로군. 여왕 폐하를 잠깐 뵙고 나온 것뿐인데." "그것이 대죄 아니고 뭐야!" 도적의 말에 독이 오른 병사가 멱살을 잡고 힘껏 주먹질 을 했다. "얌전히 있는 사람을 그렇게 때릴 필요까진 없잖소." 화가 나 있는 레일즈가 병사를 나무랐다. 병사는 당황했 는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레일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얼른 놓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두 세 번은 더 주먹질을 했을 것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근위 기사가 왔다. 촌장 타켄도 함 께였다. 아마도 지금까지 촌장 집에서 술대접을 받고 있었 던 모양이었다. 거친 숨결에 술냄새가 섞여 있었다. 흥분한 얼굴로 근위 기사는레일즈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까 일어난 지진 덕분입니다." 레일즈는 집에 돌아가고 나서부터의 일을 간단히 근위 기사에게 전했다. "틀림없이 하늘의 신들이 도와주신 겁니다." "정말 그래요. 우리 나라엔 지진이 일어나는 법이 거의 없는데 말입니다. 아마 십 년 만이지요." 근위 기사에게 아부하듯 촌장이 말했다. "그보다도 한시라도 빨리 나머지 한 놈도 잡아들여야지 요." 근위 기사가 그렇게 말할 때였다. 등뒤의 문이 삐꺽이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문으로 한 사람이 모 습을 나타냈다. 도적과 짝을 이뤄 다니던 드워프였다. 레일즈는 깜짝 놀라서 드워프를 바라보았다. 동료를 구 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인가? 그러나 손에 무기를 들고 있 지 않았다.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