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4) 12/28 10:01 256 line 레일즈 모자는 하크 마을 사람들에게서 고립되었다. 그 들로부터 무언의 배척을 당하는 것이다. 겉으로야 아무 말 을 하지 않지만 어쨌든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기분은 알아. 아버지는 재상의 주구 노릇 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여왕을 유폐하고 왕위 찬탈을 꾸미는 반역자 말리드 밑에서……." 10년 전의 무장 봉기 때 국왕파의 귀족과 기사에게 협력 해 무기를 든 마을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 봉기를 진압했을 때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거 나 죄수로서 왕도로 연행되었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사람을 잃어버린 슬픔과 증오는 마 을 사람들의 가슴속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리고 원한이 근위 기사단장의 처인 그의 어머니와 아들인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달리 길이 없잖아. 바라든 아니든 나는 피보라 기사의 아들이란 말야!" 사이아는 레일즈의 격한 말에 놀라 어깨를 들썩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난 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어. 달리는 아무런 쓸모 도 없으니까. 근위 기사가 되는 것 말고는 전사로서 살아 갈 길이 없어." 레일즈는 시선을 돌려 증오에 가득 찬 눈길로 절벽을 노 려보았다. 신의 성벽이 어쩐지 자신의 가능성을 꽉 막고 있는 거대한 장벽처럼 여겨졌다. 사이아는 레일즈의 곁에 나란히 서서 절벽을 바라보았 다. "네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잘 알 것 같아." 레일즈는 사이아의 옆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이아의 그 파란 눈동자에는 신의 성벽이 아니라 그 위의 세계인 크리스타니아가 비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저 절벽 위에는 소문대로 신들이 살고 있을 거야. 거대 한 뱀에게 지키게 하고 독기가 서린 구름으로 감싸놓고는 그 모습조차 보여주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야. 가련한 인간 들에게는 하찮은 토지를 안겨주고 자기 만족에 빠져 있을 거야. 틀림없어." 그것은 다낭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의 성벽과 관련된 전 설이었다. 크리스타니아에 사는 신들은 인간의 나라 다낭과의 경 계를 이루도록 거대한 뱀을 돌로 바꾸었다. 돌이 되기 바 로 전에 커다란 뱀은 괴로운 나머지 독이 밴 숨을 내뱉었 다. 그 독기가 안개 구름으로 뒤바뀌어 신의 성벽 주위로 떠다니고 있다는 그런 전설이었다. 단지 소문이고 전설이었다. 그러나 소문이나 전설에는 그 나름대로 몇 가지 진실이 포함되게 마련이었다. 예를 들면 절벽의 위쪽을 뒤덮은 잿빛 구름이 강한 독성 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비상의 주문'으로 구름 속으로 날 아오른 마술사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며 밝혀낸 사실이 었다. 신의 성벽은 단지 지형적인 걸림돌만이 아니라 마법의 개입조차도 거부하는 완전한 결계였다. 신의 성벽을 넘어 서기 위해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수단이 동원되었지만 그 모두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신들은 크리스타니아로 인간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각 교단의 사제들은 사람들에게 설파하고 나섰 다. 마술사들도 이 이상의 희생을 내서는 안 된다고 선언 하고는 크리스타니아로 올라가보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드디어 개척 시대도 끝나고 다낭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 가 이 자그마한 반도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10년 전에 봤잖아, 저 구름이 개이고 신의 성 벽이 크게 갈라져 길이 열렸……." "그건 그랬지." 레일즈도 망연히 절벽 위쪽으로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 보았다. 사이아가 말하는 대로 10년 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신 의 성벽에는 틈이 벌어져 절벽 위로 통하는 길 같은 것이 생겨났었다. 게다가 결코 개일 것 같지 않던 잿빛 구름이 사라져 성벽의 전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진이 일어났던 바로 그때, 사이아와 레일즈는 비인과 함께 이곳 웅덩이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틈이 벌어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폭포의 오른쪽 성벽에 수직으로 균열이 일어나는 듯하 더니 곧바로 바위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러고 나서 절벽의 가장자리에 마치 도끼로 내리친 자국같이 거대한 틈이 벌 어졌던 것이다. 틈 안쪽을 향해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 에 레일즈는 균열된 틈을 따라 올라가기만 하면 크리스타 니아에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레일즈는 사이아와 비인에게 가보자며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레일즈와 친구들이 그렇게 어리지만 않았 어도 틀림없이 모험을 결행했을 것이다. 사실 며칠 뒤 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틈을 타고 올라 신 의 성벽을 넘어갔다. 그 가운데에는 마을의 실질적 영주이 며 왕위 계승권을 가진 젊은 백작과 사이아의 선배 격인 마술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벽의 틈새는 지진이 있고 나서 열흘쯤 지나자 사라져 버렸고 신의 성벽은 원상으로 돌아가 다시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으로 바뀌었다. 물론 신의 성벽을 넘어간 여섯 사람의 젊은이들은 아직도 다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여섯 젊은이가 신의 나라로 떠날 수 있었던 건 신에게 선택받았기 때문이라고 수군거 렸다. 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절벽을 가르며 그것을 또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겠는가? "신은 선택받은 여섯 사람만을 신의 나라로 불러들이고 다시 문을 닫아버렸어. 어쩌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저 위로 올라가는길은 열리지 않을 거야." 레일즈는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그것은 지식신 라다를 모시는 교단의 사제가 10년 전의 기적을 전할 때 했던 말이었다. "어쨌든 한 번 열린 것만은 분명하잖아. 그런데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니?" "그래, 사실 나도 열렸으면 좋겠어. 그것도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레일즈는 툭 한 마디 뱉었다. "언제쯤 왕도로 출발할 거니?" "다음달까진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야. 이대로 마을에 있어봤자 지긋지긋하기만 해." 은밀하게 내비치는 마을 사람들의 질시는 이제 넌덜머 리가 났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분노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소한 일로 분쟁을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는 않았다. "너 이젠 결심을 굳혔구나." 사이아는 연못의 수면으로 시선을 떨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아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진내온 친구였기 때문에 레일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생 각해 본 끝에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사이아가 뭐라고 하 든 결코 자기 뜻을 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어쩌면 오늘 보고 다시 못 보는 거니?" "아냐,길을 나서기 전날 다시 올게." 레일즈는 망설임을 털어내려는 듯 사이아에게 등을 돌 리고 숲으로 난 오솔길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우리 집으로 와." 사이아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레일즈에게 손을 흔들었 다. 이윽고 레일즈의 모습은 숲의 나무들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레일즈……." 손 흔들기를 멈추고 사이아는 사라진 레일즈를 향해 혼 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 절벽 위쪽에는 말야, 신이 살고 있는 게 아닌 것 같 아." 사이아는 주머니에서 천 조각을 하나 끄집어냈다. 그것은 어제 사이아가 웅덩이 안에서 주운 물건이었다. 물론 폭포 위에서 떨어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천 조각은 많이 달아서 너덜너덜했다. 그러나 사람이 입는 의복의 일부임엔 틀림없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매일처럼 이곳 웅덩이에 찾아오는 사이아는 크리스타니아 에 틀림없이 인간이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될 만한 물건들 이 가끔씩 폭포수에 실려 떠내려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이아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크리스타니아가 신의 세계가 아니라면 저기 로 올라간 사람들도 틀림없이 살아 있을 거야." 3 레일즈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을에 한 걸음 들어선 순간 레일즈는 이상한 분위기가 마을을 감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분위기가 소란 스러웠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 광장 쪽을 들여다보고 있 었는데 모두들 불안한 표정으로 가까이 선 사람들과 쏙닥 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날 아침 비인을 따라 마을을 나설 때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렇다면 그가 마을을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음에 틀림없었다. 레일즈는 마을 사람 하나를 불러세워 사정을 설명해 달 라고 부탁했다. "왕도에서 관리가 왔어. 사람을 찾는 모양인데." 그 사람은 레일즈를 향해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 었다. "찾고 있다니, 도대체 누구죠? 반역자 아니면 죄인?" 어정쩡한 대답에 화가 나서 레일즈가 되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저 관리에게 물어보지 그래. 마침 마을 광장에서 사정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알았어요." 레일즈는 광장을 향해 잰 걸음으로 나아갔다. 광장은 마을의 한가운데 있었는데 마을 전체의 집회를 위해 마련된 것이지만 목적대로 쓰이는 경우는 별로 없었 다. 대신 밭에서 수확한 야채를 파는 농부들이나 왕도에서 찾아온 행상꾼들이 노점을 여는 데 이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로도 많이 쓰였다. 광장에도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변경의 하크 마을에 이처럼 사람이 많았는가 하고 놀랄 정도였다. 사람 들의 울타리 너머로 누군가 무슨 소리를 외치고 있는 모 양이었지만 웅성거리는 소리에 파묻혀 도대체 무슨 소리 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느닷없이 상금을 준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상금을 준다는 거지?' 레일즈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군중 맨 앞으로 나섰다. 그때 이야기가 다 끝난 모양인지 돌아서려는 몇 사람의 등의 보였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눈에 익은 갑옷을 입 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근위 기사?" 아버지가 돌아오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 치고 지나갔으나 곧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목소리도 달랐 거니와 뒷모습도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그 기 사의 병사들인 듯 검소한 흉갑만 입은 채 긴 창을 들고 있 었다. "잠깐만!" 레일즈는 얼룩말에 막 올라타려는 기사를 불러세웠다. 날카로운 시선이 레일즈를 향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자 리를 뜨려 했던 청중들이 새로운 사태를 보기 위해 발길 을 멈추었다. "뭐냐, 너는?" 그 기사는 이미 말 위로 올라타고 있었다. "레일즈라고 합니다." 레일즈는 예의 바르게 이름을 댔다. "보기엔 전사 같다만 아직 어린애구나. 용병이냐 아니면 모험자가 될 생각이냐." 근위 기사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레일즈의 갑옷 입은 모 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린애라는 말에 속이 상했지만 눈앞의 기사보다 나이 가 한참 어린 것만은 분명했다.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왕 도에 무슨 변이라도……." "이야기는 지금 막 다 했다. 너 하나를 위해서 다시 반복 할 생각은 없으니 자세한 걸 알고 싶으면 주변 사람들에 게 묻도록 하라." 근위 기사는 귀찮다는 듯이 툭 한 마디 던지고는 말의 배를 박차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레일즈는 그의 교만한 태도에 불쑥 화가 치솟았다. 주인 을 뒤쫓아가려는 병사의 어깨를 잡고는 강제로 멈춰세웠 다. "무슨 짓이야!" 병사는 소리치며 레일즈에게 주먹을 들이밀었다. 그러 나 레일즈는 그 병사의 주먹을 간단히 피하고는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나는 근위 기사단장 랏셀 경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이름만은 거론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한 시라도 빨리 사정을 알고 싶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댔자 애당초 상대하려고도 하 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정을 잘 알 고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랏셀 경의 아드님이시라구요?" 병사는 깜짝 놀라며 레일즈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들여 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만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빨리 가서 주인님께 말씀 드리고 올 테니, 여기서 잠시 기 다려 주십시오." 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했는지 상대방은 레일즈의 말을 믿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마을에 아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려 주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병사는 전 속력으로 주인에게 달려갔다. 레일즈는 병사가 말한 대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마 음 먹었다. 마을 사람들은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틈엔가 전부 흩어진 뒤였다. 얼마 안 돼 앞서 떠난 기사가 병사를 데리고 다시 나타 나서는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한 예를 올렸 다. "아까는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레일즈는 느긋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 버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돌변하는 그 기사의 태도에 분 이 솟았다. "아무쪼록 저희 기사 대기소까지 가시지요. 말씀은 거기 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레일즈는 기사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기사는 말을 타 고 가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 말을 받아들이면 자기 또 한 그 기사와 똑같은 부류가 돼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 었기 때문이다.그러자 근위 기사까지 말을 타지 않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모두 걸어서 이동하게 되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