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3) 12/26 12:24 269 line 레일즈보다 두 살 아래인 비인은 그때만 해도 아주 어렸 기 때문에 혼자서 생활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 래서 마을의 촌장이 거둬들여 열세 살 때까지 키워주었던 것이다. 비인은 열세 살이 되자 스스로 숲 속에서 생활하 겠노라고 말하고는 그 뒤 계속해서 정령사가 되기 위한 수행을 해왔다. "마을에서 살고 있는 정령사들도 있잖아. 정령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너한테 재능이 없어서 그런 거 아냐?" "아냐. 숲 속에 있으면 정령의 소리가 똑똑하게 들린다 구. 아까 레일즈가 칼로 베어낸 잡초한테도 작지만 정령이 있어. 칼에 잘릴 때 겁에 질린 소리를 내는 게 너한텐 안 들렸지?" "정령의 소리 따윈 듣고 싶지도 않아." 자기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 같아 레일즈는 기분이 상했 다. 만일을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온 것이 멍청했다는 생각 이 들었다. 튼튼한 사슬 갑옷에 철제 방패까지 들고 오지 않았는가! 결국 비인의 헛소동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으시으시한 자기의 차림새가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그 자리에 그냥 다 벗어버리고 싶다는 충동마저 일었다. 그러나 내버리고 가 기에는 워낙 비싼 물건이었고 끌어안고 돌아가는 건 더욱 꼴불견이었다. 레일즈는 원망스럽다는 눈길로 자기가 검으로 내리친 자그마한 덤불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뭔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덤불 너머로 어지럽게 널려 있는 낙엽의 흔적이 숲 안쪽 으로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무언가가 달려가면서 남긴 발자국인 것 같았다. 비인이 놀라서 달아난 것처럼 이 발자국 주인도 놀라서 도망간 것일까. 레일즈가 사냥꾼이 아니었으므로 어떤 동물의 발 자국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발자국의 크기로 보아 곰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 도 아니었다. 레일즈는 자신의 발과 견줘보고 대체로 비슷 한 크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꼼꼼히 관찰해 보니 하나의 발자국이 아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두 마리 정 도인 것 같았다. 언뜻 비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아직도 그 발자국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레일즈는 일부러 알려 주어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판단했 다. "어쨌든 식인곰 따위는 어디에도 없어. 알았어?" 레일즈는 못이라도 박아두듯 비인을 향해 소리치고는 요란스럽게 갑옷 소리를 쩔렁거리며 숲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그쪽은 마을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 그러나 레일즈는 들은 체도 안 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 다. "그래, 맞아. 지금 사이아 집으로 가는 길이야." 소년의 말대로 이 길을 쭉 따라가면 조그마한 집이 나오 고 그곳에는 늙은 마술사와 사이아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 가 살고 있었다. 소녀는 늙은 마술사의 제자로 그곳에서 마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발자국 주인이 그 오두막으로 찾 아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레일즈는 그걸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이아에게는 또 한 가지 이야기해야 할 것이 있 었다. "따라올 것 없어." 사이아한테 가는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으면 귀찮으리라 는 생각이 들어서 레일즈는 일부러 골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알았어." 비인은 잔뜩 주눅이 들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마도 마을에서 지낼 생 각일 것이다. 레일즈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발자국의 주인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 가운 데에는 식인곰보다도 훨씬 위험한 동물도 뒤섞여 있게 마 련이다. 2 쏴아쏴아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주위를 울려댔다. 폭포였다. 흐르는 물의 양도 많았지만 우선 크기가 엄청 났다. 쏟아져내리는 동안에 안개로 변한 물방울이 초여름 의 햇살에 퉁겨 조그마한 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다. 폭포수 로 패인 웅덩이 가운데는 커다란 연못만큼이나 큰 것도 있었다. 레일즈는 웅덩이 주변에 서서 꼼짝 않고 앞을 바라보았 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폭포가 아니었다. 그 좌우를 꽉 버티고 선 절벽이었다. 절벽은 수직으로 치솟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거인의 키를 훌쩍 넘을 만큼 높 았다. 다낭 사람들은 이 절벽을 '신의 성벽'이라고 불렀다. 신 들의 세계 크리스타니아와 인간의 세계 다낭의 경계로 창 조된 절벽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절벽은 신의 창조물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지 금까지 이 절벽의 틈을 찾아낸 사람은 없었다. 다만 많은 탐험을 통해 이 절벽이 다낭 반도를 대륙에서 뭍으로만 차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이 밝혀졌다. 절벽을 따라 여러 날 동안 항해해도 신의 성벽은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가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급격하게 몰아치는 해류와 암초가 곳곳에 널려 있 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신의 성벽은 바위의 표면에 비스듬한 각도로 무수한 균 열이 나 있는 기묘한 형상이었는데 그 균열 때문에 마름 모 모양이 전면에 걸쳐 도드라져 있어서 뱀의 비늘을 연 상시켰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미끌미끌 검푸르게 빛 나는 모양까지 아주 쏙 빼닮았다. 절벽을 따라 올려다보면 신의 성벽은 묘한 구름으로 가 려져 있었다. 그 구름은 검은 잿빛 안개 같았는데 절벽을 따라 끝없이 퍼져 있었다. 절벽은 그 위에까지 이어져 있 었겠지만 이 구름때문에 전체적인 모습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다만 눈앞에서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폭포수만이 신들 의 세계에서 보내는 사자처럼 인간의 세계 다낭을 찾아왔 다. 그렇게 폭포에서 떨어져 내린 물은 이곳 웅덩이에서 한숨을 돌린 뒤 강을 이루어 바다로 흘러갔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로 인해 숨가쁘게 물거품이 이 는 웅덩이 표면에는 언제나 커다란 백조 한 마리가 유유 히 떠다녔는데 그 백조는 다낭에서는 신의 사자로 여겨지 는 신성한 새였다. 다낭의 건국 신화에 이 반도로 상륙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존재가 다름 아닌 이 백조라고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국의 문장에도 의장화되어 있어서 대단히 소중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그런 연유에선 지 다낭에는 백조가 많이 살았다. 연못이나 호수마다 백조 의 우아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때 레일즈 뒤에서 사람의 기척이 났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탓인지 레일즈는 상당히 당 황했다. 그러나 평온을 가장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으로 숲이 이어지고 나무들 사이 를 누비듯 오솔길이 나 있었다. 레일즈가 바로 조금 전에 지나쳐온 길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숲의 오솔길을 따라 누군가가 레일즈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물을 길러 오는 것인지 오른손에 나무로 만든 물통이 들려 있었다. 예쁜 소녀였다. 엷은 초록빛 옷을 입었는데 손발이 마치 백조의 깃털처럼 새하㎎다. "사이아!" 레일즈는 활기 찬 목소리로 사이아를 불렀다. 그때는 이 미 평소의 모습을 찾고 난 뒤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 그렇게 으시으시한 모습으로……." 사이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말하자면 길어." 사이아는 잰 걸음으로 다가왔다. 등뒤로 길게늘인 금발 이 흔들리며 특징 있게 생긴 그녀의 귀가 보였다 안 보였 다 했다. 끝이 살짝 튀어나온 길다란 귀였는데 그녀에게 숲 속의 요정 엘프의 피가 섞여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레일즈는 그런 것에 신경 쓴 적이 없었다.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사이아가 하프엘프라는 사실을 꺼려한다 든지 괴팍한 노마술사 브라이언 밑에서 수행하는 신출내 기 마술사라는 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이아는 레일즈보다 한 살 위였지만 수명이 긴 대신 성 장이 느린 하프엘프인 만큼 레일즈보다도 두세 살 어려보 였다. "나한테 볼일이 있으면 집으로 오지 그랬어. 이런 곳에 서 괜히 기다리지 말고." 레일즈 곁으로 다가오며 사이아는 토라진 듯한 목소리 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그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대하기가 어려워서……." 레일즈는 어렸을 적에 노마술사의 집을 찾아갔다가 호 되게 당한 기억이 있었다. 움직이는 해골에게 쫓겨다닌 적 도 있었고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마법의 실험 대상이 되어 하루 종일 의식을 잃어버리기도 했었다. 귀중한 약이 든 병을 깨뜨렸다고 노마술사는 레일즈를 개구리로 바꾸 어 얼마나 구박을했는지 모른다. "스승님은 레일즈가 오는 걸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 사이아는 놀리는 듯 빙그레 웃으며 레일즈를 바라보았 다. "농담이 아냐." 얼굴을 찡그리며 레일즈가 대꾸했다. "그보다도 혹시, 너희 집에 누가 오지 않았니?" "우리 집에?" 레일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숲에서 발견한 발자국은 아마도 사람이 남긴 것 같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 덤불 따위에 숨어서 노숙을 할 리가 없지 않는가! "사흘 전에 비인이 놀러 온 것 말고는 아무도…… 그런 데 그게 어쨌다는 거야?" 사이아는 미심쩍다는 듯 다시 물었다. "아냐 아냐,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됐어. 그보다도 사이 아. 지난번에 한 얘기 말야……." 이 이상 물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레일즈는 화제를 바꾸기로 마음 먹었다. "지난번 얘기라니? 너 정말 왕도로 가기로 결심한 거 야?" 사이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왕도에 가서 기사가 되는 거야. 근위 기사단장인 아버 지 밑에서." 레일즈는 마음속의 망설임을 없애려고 단정적으로 대답 했다. "그리고 말리드 재상 밑에서 말이지." 사이아의 목소리는울음에 가까웠다. 그녀는 감정이 격앙되면 언제나 그런 목소리가 되었다. "그래, 그렇게 되는 거지……." 레일즈는 신음하듯 대답했다. "함께 모험자가 되는 것이 어렸을 적부터 우리가 꿈꿔 오던 거 아니니?" 사이아의 얼굴로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레일즈를 바라보았다.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돌렸다. "비인이 정령사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은 우 리들의 모험을 위해서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레일즈는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들의 기분을 모르진 않았다. 레일즈 자신도 똑같 은 생각이었으니까……. 옛날 자신의 아버지처럼 모험자 가 되어 다낭의 여러 곳을 여행하고 성벽을 넘어 신들이 사는 땅으로 가보겠다는 꿈도 꿔보았다. 레일즈는 힐끗 웅덩이 건너편에 우뚝 서 있는 절벽을 바 라보았다. "개척시대라면 몰라도 다낭 반도 안에선 이제 모험자 시대는 막을 내렸어. 이 섬에는 보물이 잠들어 있는 고대 왕국의 유적 따윈 없어. 마수도 요마도 살고 있지 않아. 내 란은 있어도 외적은 없어. 신의 성벽으로 가로막혀 크리스 타니아에 갈 수도 없잖아." "그래, 그 말은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기사가 돼서 뭘 어쩌겠다는 거니. 그 따위 재상 아래서 명예를 얻기란 불 가능해. 사람들이 너희 아버지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나 있니?" "피보라 기사라고 하지." 레일즈의 아버지는 왕도 스파이아에서 근위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었다. 근위 기사단은 원래 왕족의 호위가 그 임무였지만 지금 은 말리드 재상의 사병으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근위대의 기사는 정예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무서운 전투 집단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재상이 출신 성분에 얽매이지 않 고 솜씨 있는 전사를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야심을 지닌 용병이나 모험자들이 잔뜩 몰려들어 엄정한 시험을 통과 한 사람만이 자격을 얻었다. 레일즈의 아버지 랏셀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랏셀은 원래 모험자로서 다낭 왕국에서 상당히 이름 높 은 전사였다. 어렸을 적의 레일즈는 하크 마을에서 어머니 와 같이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매일같이 기다리며 살았 다. 어떤 때는 아버지가 1년 이상 집을 비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레일즈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기는커녕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았다. 아버지가 담담하게 말씀하시 는 모험담에 가슴이 뛰었고 검을 잡을 수 있게 되고 나서 는 아버지만 보면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떼를 쓰곤 했다. 재상 말리드는 아버지의 검술 솜씨를 인정해 근위 기사 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낭 왕국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신 의 성벽을 마주보고 있는 이곳 하크 마을의 영주로 임명 하였다. 왕도에서 사람을 파견하기보다 그 마을 출신인 아 버지를 임명하는 편이 마을 사람들의 반항을 적게 사리라 고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아버지를 시험하려는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하크 마을은 원래 왕가의 직할지로서 반재상파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었기에 아버지가 재상을 암살할 기회를 노리 고 근위대에 지원했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 다. 아버지가 재상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 하크 마을의 영주 로 취임하고 얼마 안 가 반재상파가 행동을 일으켰다. 마 을의 교외에 있는 오래된 성채에 결집해 봉기했던 것이다. 이 반란을 아버지는 많지 않은 병력으로 간단히 진압했다. 그 뒤 1년 정도 영주로서 이 마을에 머물면서 반항 세력 의 잔당을 솎아내는 한편, 마을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해 세금을 가볍게 매기는 등 강온책을 적당히 구사해 마을을 다스렸다. 이런 정책이 큰 효과를 거두어 하크 마을의 치안이 완전 히 회복됐다. 이 공적으로 재상의 신임을 얻은 아버지는 왕도로 소환되어 근위 기사단의 단장으로 발탁되었다. 그 리하여 재상의 기대에 부응해 다낭의 여러 곳에서 전투를 치르며 반재상파의 기사나 귀족들을 차례차례 섬멸시켰 다. 아버지의 무용담은 공포와 함께 다낭의 땅이라면 모르 는 곳이 없게 되었다. 피보라 기사라고 불리게 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레일즈는 또다시 어머니와 함께 하크 마을에서 아버지 가 돌아오기를 매일같이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8년 동안 아버지는 1년에 한두 차례 다녀갈 뿐 소식을 알리는 일조차 없었다. "근위 기사가 되고 나서는 아버지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신 것 같아. 덕분에 나하고 어머니만 신나게 고생하고 있지."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는 동안 레일즈는 자신의 말에 분 노가 서려 있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