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2) 12/24 09:41 254 line 제1장 신의 성벽 1 멀리 북쪽 바다에 커다란 섬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섬을 '해방된 섬'이라고 불렀다. 잿빛 주문 의 속박에서 해방된 섬이라는 뜻이었다. 그 섬의 왕국들은 대단히 번성했는데 결코 전쟁을 일으 키지 않는다는 맹약을 맺었기 때문에 사람과 물자의 교류 가 대단히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평화는 지긋지긋하게 오래 끌었던 격렬한 전쟁 끝에 얻은 것이기에 국왕과 백성들 모두는 평화를 소중히 여기자고 함께 맹세했다. 그 후로 백 년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이 섬에서는 전쟁 때문에 사람이 다치는 일 같은 것 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란 장대한 강물의 흐름과 같아서 어느 틈 엔가 느슨해지고 만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고 지낸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처참한 대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었고 결국엔 지긋지긋했던 기억조차도 과거의 일로 치부되고 말았다. 마침내 평화에 물들어지낸 사람들은 의문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섬이 여러 왕국으로 나뉠 필요가 있는 가. 이 정도로 서로가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면 통일된 왕 국을 세우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것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생각이 야심에 가 득 찬 인간을 탄생시켰다. 어떤 왕국의 황태자가 섬의 통 일을 목표로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백 년 동안의 평화가 짓밟히고 만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왕국의 왕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섬의 패권을 노리며 군사를 일 으켰다. 전란의 시대가 다시 막을 올렸다. 그 전란 가운데에서 한 왕국이 멸망의 운명을 맞이했다. 전쟁에 패해 왕도는 유린되고 국왕 일가와 유력한 귀족들 이 처참히 살육당했다. 살아남은 귀족과 기사들은 혈혈단 신으로 죽음을 면한 공주를 모시고 한 척의 범선에 몸을 싣고 출항길에 올랐다. 북쪽의 대륙으로, 신천지를 찾아! 범선에는 왕국의 귀족과 기사, 그리고 왕가에 충실한 백 성들이 타고 있었다. 그 수는 어림잡아 1천 명 남짓. 그들 의 항해는 결코 순탄치 못했다. 거센 폭풍우에 휘말려 배 는 형편없이 망가지고 어느 틈엔가 낯선 바다로 떠밀려 와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신들께서는 이 불쌍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며칠 동안의 표류 끝에 범선은 기적적으로 육지에 다다 를 수 있었다. 잃어버린 왕국의 후예들은 이 신천지를 '다 낭'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왕국을 건 설할 것을 맹세했다. 몇 년에 걸친 탐색의 결과 다낭은 대륙의 북쪽으로 튀어 나온 조그마한 반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절대 올 라갈 수 없는 거대한 절벽으로 차단되어 있어, 다낭은 뭍 이면서도 외톨이 섬이기도 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여 기저기서 발견되었지만 주민은 한 사람도 없었다. 넓이는 고향의 섬과 비교하면 절반 정도였다. 사람들은 절벽 저 위로 단절되어 있는 대륙을 크리스타 니아라고 이름 붙이고 거기에는 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표류하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자비심 많은 신들이 다낭의 땅을 개방시켜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 낭 상륙을 기념하는 축제일에 모든 사람들은 크리스타니 아를 향해 오래도록 기도를 올렸다. 다낭이라는 땅을 축복 해 준 신들에게 드리는 감사의 기도였다. 작은 반도라고는 하지만 천 명의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는 엄청나게 넓은 땅이었다. 사람들은 우선 마을을 만들기 시작해 번화한 거리로 발전시켰다. 논밭을 갈고 아이들을 낳아 키웠다. 그리고 생활에 적합한 토지를 찾아내 다시 마을을 만들고 번화한 거리로 발전시켰다. 그렇게 반복하 기를 2백 년. 다낭 반도는 지형의 변화가 대단히 심했지만 기후는 따 뜻했고 자연 재해도 크게 생기는 법이 없었다. 인구는 폭 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신의 성벽이라고 이름 붙인 절벽까 지 순조롭게 개척이 이루어졌다. 그 동안 세 차례의 천도가 있었으며 여덟 사람의 국왕이 즉위했다. 이민 초기의 사람들은 모두 국왕을 공경하고 충성을 맹 세했다. 그러나 국왕의 대가 바뀌면서 고향의 섬에서 평화 가 영원히 계속되지 않았던 것처럼 왕국에 대한 충성심도 묽어져갔다. 여덟 번째 국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돼 서거 하자 왕위 계승권자와 유력한 귀족들 사이에 격렬한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그리고 오랜 싸움과 혼란 끝에 이 권력 투쟁은 말리드라는 이름을 가진 후작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는 대립했던 귀족들을 갖은 모략을 동원해 쫓아내고는 재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이 어린 왕녀 제시스를 여왕으 로 즉위시킨 뒤 스스로 정치의 실권을 모두 장악했다. 말 리드 후작의 등장으로 권력 투쟁은 궁정 내의 싸움으로 끝나고 내란으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 동안에 불과했다. 이 야심만만한 재 상은 어린 왕녀를 유폐시키고 마치 국왕처럼 독재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를 쫓아내겠다며 힘 있는 귀족들이 차례로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러나 말리드 후작은 재상이라는 지위를 교묘하게 이 용하여 반대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해 나갔다. 결국 내란은 2년여 만에 싱겁게 끝나고 그에게 반대했던 귀족과 기사 들은 차례차례 처형당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대숙청은 궁정 내로만 한정되지 않 고 지방 영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왕국의 요직에 있던 사람들이나 지방 영주들 가운데 태반이 말리드와 끈이 닿 는 사람들로 대체되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건 대략 10년 전이었다. 여왕은 이 제 성인이 되었을 테지만 아직 유폐된 신세로 공적인 자 리에는 일체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다. 말리드 후작은 변함 없이 재상의 자리에 앉아 마음 먹은 대로 권력을 휘두르 고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를 기쁘게 생각하고 있 진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재상에게 복종을 맹세하면서도 그를 실각시킬 계책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변장을 하고 이름을 숨긴 채 재상을 타도할 기회를 노리는 사람 들도 아직 적지 않았다. 왕도 스파이아에 부는 바람은 언뜻 보기엔 평온하게 느 껴지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엄청나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주민들은 머지 않아 엄청난 폭풍이 몰아쳐 올 것 이라는 섬뜩한 두려움을 품은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아직은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러니 왕도에서 멀 리 떨어진 변경 마을에서 폭풍의 전조 따위로 공포를 느 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숲 속의 나무들이 차례차례 뒤로 물러선다. 땅바닥을 차는 소리와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겹쳐 들린다. 숲 속의 오솔길을 한 젊은이가 냅다 달리고 있었다. 사 슬 갑옷(체인 메일)을 몸에 두르고 왼손에는 대형 방패(라 지 쉴드)를 들었으며 허리에는 장검을 찼다. 그의 이름은 레일즈. 바로 전날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았다. 어느덧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받을 만한 나이에 들어선 셈이다. "비인! 아직도 멀었니?" 레일즈는 몇 발 앞을 달리는 사내아이의 뒤에 대고 소리 를 질렀다. "이제 다 왔어!" 대답하는 아이는 여드름투성이 소년이었다. 검은 머리 카락을 짧게 자르고 있는 탓에 이마에도 군데군데 여드름 이 보였다. 소년은 이 숲 속에 살면서 정령사(sharman)가 되기 위해 수행을 쌓고 있었다. 정령들은 자연이 지닌 힘의 원천이므 로 사람이 많이 모여사는 번화가에서는 그 작용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령들의 힘을 빌려 마법을 거는 정령사들 은 자연의 힘이 강한 장소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 소 년 또한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중이었다. 집에서부터 한참을 달려왔기 때문에 레일즈는 심한 피 로를 느꼈다. 한참 전부터 그만 뛰고 걸어갔으면 하는 마 음이 굴뚝 같았지만 앞서 가는 비인이 계속 뛰어갔기 때 문에 어떻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눈앞을 달리 는 비인의 가벼운 차림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레 일즈는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금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땀이 흘러 나오고 금속 갑옷이 날카로운 비명을 울렸다. 비명을 울리 는 것은 갑옷뿐만이 아니었다. 심장도 비명을 울리고 있었 다. 아니 온 몸의 근육들 또한 비명을 울렸다. 그런데 앞서가던 비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멈 춰섰다. 그러나 가속도가 붙어 있던 레일즈는 갑자기멈춰 설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비인의 등에 그대로 부딪쳐버 리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넘어진 것은 비인이었다. 레일 즈와 부딪치자마자 나가떨어지더니 머리부터 땅바닥에 곤 두박질쳤다. 그러곤 두 바퀴 정도를 빙그르르 돌더니 나무 밑동에 부딪치고 나서야 멈추었다. "정말, 너무해!"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비인이 땅바닥에서 일어났다. "네가 갑자기 멈춰서서 그랬잖아! 어쨌든 미안해. 그런 데 도대체 식인곰이 나타났다는 수풀이 어디쯤이야!" 레일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년에게 물었다. 막 아침밥을 먹고 났을 무렵 비인이 나는 듯이 뛰어들어 와 식인곰이 나타났다고 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곰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숲에 는 비인뿐만 아니라 성격이 별난 늙은 마술사와 그에게 마술을 배우는 소녀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일즈는 완 전무장을 하고서 비인을 좇아서 숲으로 들어섰다. 곰 한 마리 정도라면 혼자서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이럴 때를 위해 매일같이 검술 연습을 해 오지 않았던가. 레일즈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주위를 찬찬히 둘 러보았다. "저 수풀이야." 비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길에서 약간 떨어진 커다란 나 무의 그늘께를 가리켰다. 레일즈가 있는 곳에서 약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장소였 다. 칙칙한 빛깔의 잡초와 짧은 가시가 촘촘히 난 관목들 이 만들어놓은 덤불이었다. 마치 무리를 지어 주위의 커다 란 나무와 경쟁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덤불의 높이는 기껏해야 레일즈의 허리쯤밖 에 되지 않았다. "저, 저걸 말한 거야?" 정말 그러냐는 듯이 레일즈가 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목 소리가 험악해졌다. "그, 그래!" 레일즈의 화난 모습에 질렸는지 비인이 쭈뼛거리며 대 답했다. 레일즈는 마뜩찮다는 표정으로 덤불 쪽으로 다가서며 허리에 찬 벨트에 매달린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덤불을 힘껏 내리쳤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숲 속의 정적을 깨뜨렸 다. 비인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잔뜩 목을 움츠렸다. "이 따위 덤불 속에 어떻게 식인곰이 산단 말이냐!" 레일즈는 한 마디 한 마디를 힘주어 말했다. 그가 휘두른 검이 지나가자 잘려나간 잡초가 공중으로 튀어올라 낙엽이 깔린 땅바닥으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인은 눈을 떴다. "정말 봤어. ……아니, 봤다고 생각했어. 내가 숲 속을 걷고 있는데 저 덤불이 움직이면서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 났단 말야.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얼 마나 놀랬는데!" "커다란 그림자였단 말이지." 레일즈는 방금 검을 내두른 덤불을 향해 다시 검을 들이 밀었다. "아, 그 곰 재주도 좋다. 어떻게 이런 조그마한 덤불 속 에 몸을 숨길 수 있니." 이 숲에 사는 곰은 큰 놈일 경우 레일즈 키의 두 배가 넘기도 했으므로 레일즈는 비인의 말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곰이란 건 웅크리면 조그만해지잖아!" "덤불 속에 숨어서 먹이감을 기다리는 식인곰이 세상에 어딨냐! 정말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레일즈는 숨을 고르며 검을 거두었다. "그 식인곰 머리 한 번 끝내준다." 비인은 계속 반론을 해 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이치에 닿 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점점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아마도 비인이 커다란 그림자를 본 것은 아닌 모양이었 다. 무슨 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도망쳐온 것이 틀림없었 다. "그렇게 머리 좋은 곰이라면 어떻게 네가 도망쳐서 도 와달라고 올 수 있었겠니. 곰이 사람보다 빠르다는 건 상 식 아냐?" "그건 그래……." 비인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러 나 레일즈가 힐끗 노려보자 당황하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짐승이 무서우면 숲 밖으로 나오는 게 좋지 않 겠어?" 사실 레일즈는 마을로 돌아오라고 비인에게 수도 없이 권했다.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된 소년이 숲 속에서 혼자 살 기에는 여러 모로 힘겹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비인은 그것 만큼은 레일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숲에서 살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정령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어." 비인은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했다. "훌륭한 정령사가 되라고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 단 말야. 그렇지 않으면 너한테 혹밖에 더 되겠어? 데리고 있기도 뭐하고 떼어버리기도 뭐한……." 비인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 다. 7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비인의 어머니는 맹수로부터 나이 어린 비인을 지키려 다 그만 변을 당하고 말았다.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고 만 아이는 그때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비인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숲 속의 맹수들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