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1) 12/23 16:02 204 line 프롤로그 거대한 범선 한 척이 파도 사이에 떠 있다. 파도는 잔잔하여 범선은 마치 대지 위에 붙박여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범선 또한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아 니, 사실은 움직일 수가 없다. 세 개의 돛대 가운데 두 개가 부러지고, 나머지 한 개도 돛이 남김없이 뜯겨졌다. 마치 부상당한 전사처럼 거대한 체구를 주체하지 못한 채 파도 틈에 가로놓여 있을 뿐이 다. 갑판 위에도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 만 그림자 하나가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듯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소녀였다. 나이는 열다섯이나 여섯쯤 되었을까. 다 부서 져가는 범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 고 있다. 허리까지 늘어지는 긴 머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 이는 금빛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소녀의 두 눈은 고요히 감겨 있다. "공주님, 여기 계셨습니까?" 드디어 갑판 위에 움직이는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소 녀와는 약간 떨어진 거리였다. 그 남자의 차림새는 한눈에 보기에도 뱃사람이었다. 피부는 검게 탔고 머리카락은 소 금기에 절어 불그스름한 갈색으로 탈색돼 있었다. 위통을 벗어젖힌 그의 몸 여기저기에 새겨진 상처 자국들은 바다 와의 싸움에서 얻었음에 틀림없으리라.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슴에 모으고 있던 손을 스르르 밑으로 내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푸른 눈으로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폭풍이 걷히기는 했지만 언제 다시 갑판이 요동칠지 모릅니다. 이럴 때 바다에 떨어지시기라도 하면 큰일 납니 다." 남자는 갑판 위에 널브러진 판자조각과 끊어진 로프를 바다에 내던지면서 차츰차츰 소녀 쪽으로 다가왔다. 소녀 가 선실로 돌아가는 안전한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선장님……." 소녀는 돌아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갑판에 올라와본 것뿐이에요." 선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로프를 줍던 손길을 거두었다. 소녀를 부르는 것이 혹시 사신(死神)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선원들도 일어날 겁니다. 남아 있는 돛 대에 예비용 돛을 달면 배도 다시 움직일 테고……. 이제 망보는 사람만 정해 두면 머지 않아 육지를 발견할 수 있 을 겁니다. 북쪽 대륙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게틀림없습 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지금 한 말을 믿지 않 고 있었다. 출항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밤에 거센 폭풍우에 휘말려,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과 소용돌이치는 파도 사 이에 떠밀려다니면서 배는 완전히 그의 통제 밖에 있었다. 그나마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장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여러 날에 걸친 폭풍우 에 선원들 몇 사람이 파도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고, 부 러진 돛대에 깔려 목숨이 끊어진 사람도 하나 둘이 아니 었다. 그렇지만 선장과 선원들은 폭풍우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폭풍우를 극복한 것은 어제 아침의 일. 그러나 마음을 놓은 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날 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 낸 하늘의 별자리는 생소하기만 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배가 떠밀려왔던 것이다. 게다가 폭풍우 속에 많은 양의 식료품이 바다에 휩쓸려 갔고 마실 물이 들어 있던 물통도 태반이 부서지고 말았 다. 남은 양으로는 범선에 탄 천 명 가까운 사람을 먹여살 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절약에 절약을 한다고 해도 닷새 이상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엄청난 폭풍우에 비한다면 배가 가라앉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행운이라 할 만했다. 다만 그 행운 도 지금부터 며칠 사이에 육지에 다다르지 못하면 물거 품이 되고 말 것이다. 서서히 말라죽는 고통은 물에 빠져 맞이하는 죽음보다 훨씬 비참한 최후일 수도 있다. 절망과 피로에 젖은 선원들은 모두 배 밑바닥에서 잠들 어 있었다. 사실 선장 자신도 바로 전까지 방에서 죽은 듯 이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잠에서 깬 뒤 소녀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둘러 갑판 위로 올라왔던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이 죽는다 해도 이 소녀만은 살아야 한 다. 선장은 그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잃어버린 왕국의 마지막 왕족인 이 소녀만큼은……. "자, 이제 그만 선실로 돌아가시죠. 너무 오래 햇볕을 쐬 면 열병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소녀의 발걸음이 다시 멈춰졌다. 소녀는 멈춰선 채로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살짝 고개 를 숙였다. 선장은 '내가 못 할 말을 한 건 아닌데……'라 고 생각하며 서둘러 소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소녀는 다시 얼굴을 들고 배의 앞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선장도 배의 앞쪽을 돌아보았다. 범선은 거의 정북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잔잔한 파도가 이는 바다만이 펼쳐 져 있을 뿐, 무엇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소녀의 행동을 보는 선장의 눈은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 었다. "또 그래요. 누군가가 나를……." 소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요." 선장은 가슴의 고동 소리가 가빠짐을 느꼈다. 소녀가 환 청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역시 열병에 걸리고 만 것일까? "잘못 들으셨겠죠. 그보다도 빨리 선실로 돌아가시죠." 선장은 무례임을 알면서도 소녀의 오른팔을 잡고 선실 로 데려가려고 했다. "잠깐만!" 소녀는 그 나이의 아이답지 않은 힘으로 선장의 손을 뿌 리치고는 팔을 앞으로 뻗으며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 켰다. "저걸 보세요." 선장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소녀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 보았다. 더없이 높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솜털 같은 구름이 여러 개의 덩어리를 이룬 채 떠다니고 있었다. 그 구름 사 이로 조그마한 흰색 점이 보였다. 소녀는 그걸 가리키고 있었다. "새입니까?" 선장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 시력이 좋은 선원을 데려오면 무슨 새인지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바다 새들은 뭍 가까운 곳에 둥지를 틀게 마련이므로 가까이에 섬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섬이란 게 이 범 선보다도 작은 무인도일지도……. 그렇지만 실오라기만한 희망일지라도 분명 반가운 일이 었다. "저 새가 내게 말을 걸고 있어요." 소녀는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부풀어오르던 희망이 다시금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소녀가 제정신을 잃어버리면 왕국의 재건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소녀의 모습은 평상시와 큰 차이가 없었 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싶어 선장이 혼란스러워하 는 사이에 조그맣게 보이던 새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어 쩐지 범선을 향해 곧바로 날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단히 큰 새였는데 순백색 깃털에 휩싸여 거의 날개짓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하늘을 미끄러져 내리듯 날고 있었다. 선장은 이 새가 어떤 새인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 다. 바다새라면 거의 다 알고 있었지만 이 새만큼은 전혀 기억이 없었다. "백조……." 소녀가 놀라운 듯 말했다. "백조요?" 소녀의 말을 들은 선장도 놀랐다. 백조라면 이름만은 알 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새가 아니기 때문에 모습을 보고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새가 이런 곳을 날고 있다니… ….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마법사가 변신의 재주를 부린 것일까? 그런 의문까지 떠올랐다. 마법사라면 소녀에게만 말을 붙일 수 있을 텐 데.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걱정했던 대로 사신의 화신일지 도 모른다. "공주님,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요물일지도 모릅니다." 긴장된 목소리로 선장이 소곤거렸다. 그러면서 무의식 적으로 허리에 찬 곡도 쪽으로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선장님. 목소리에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 아요. 다만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전하려고 하는 것 같은 데……." 소녀는 귀를 맑게 하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선장도 소녀가 하듯 눈을 감았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포기한 채 다시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니 백조가 범선의 바로 위에 와서 크게 원을 그리듯 날고 있 었다. 소녀 쪽을 바라보니 닫혀 있는 소녀의 눈이 백조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소녀와 백조의 마음이 하나로 융합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너를 따라가면 되겠니?" 소녀는 맑은 눈을 크게 뜨며 우아하게 하늘을 나는 백조 에게 말을 붙였다. 선장은 혹시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조치하기로 하고 지 금은 되는 대로 놔둬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드디어 백조는 크게 두 번 날개짓을 하더니 날아온 방향 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 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원을 그리면서 기다리고 있 었던 것이다. "선장님, 백조를 따라가세요. 저 새가 우리들을 신천지 로 이끌어줄 거예요." 소녀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저 새가…… 신천지로?" 이건 기적인가 아니면 환청인가. 혹시 내가 열병에 걸린 건 아닐까? 소녀의 말은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눈앞에서 맴도는 백 조의 움직임은 소녀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선장이 보 기에도 저 백조가 범선을 유인하고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 았기 때문이다. "부탁이에요, 선장님. 나를 믿고……." 선장은 소녀를 믿을 수도 없었고 의심할 수도 없었다. 판단을 내릴 만한 근거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 하더라도 며칠 안 가서 파멸하고 말리라는 사실뿐이었다. 백조는 변함 없이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선장은 멍한 눈으로 백조를 바라보았다. 비상하는 백조의 모습은 한없 이 우아해 보였다. 그 고귀한 모습이 선장의 결심을 굳히게 해 주었다. 저 처럼 아름다운 생명체가 사신의 화신일 리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공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거센 폭풍우에 휘말려 여기까지 왔다. 이대로 저 신비로 운 백조를 따라 표류하는 것도 어쩌면 운명일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선장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우리들의 표류는 도대체 어디쯤에서 끝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