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지옥의 인형 (하) 지은이: 아리마사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소개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 작가소개 ** 오사와 아리마사 1956년 생의 젊은 작가로, 1979년 <<感傷의 도시>>로 제 1회 <소설추리> 신인상을 받으면서 데뷔했으니 올해로 집필 연륜이 15년 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15년 동안 <소설추리> 신인상을 비롯하여, 1986년에는 <<深夜曲馬團>>으로 <일본모험소설대상> 최우수 단편상을, 1991년에는 <신주쿠 상어> <한국어판<<소돔의 성자>>)로 제12회 <吉川英治 文學> 신인상과, 제4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 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1993년에는 <<無間人形>> <한국어판<지옥의 인형>)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나오키 상> 수상 이전부터 오사와 아리마사는 이미 우리 독자에게도 퍽 친숙해져 있다고 하겠다. <상속자 TOMOKO>를 시작으로 <신주쿠 상어> 시리즈인 <<소돔의 성자>> <<독원숭이>> <<주검의 난>> 등을 통해 오사와 아리마사가 얼마나 아기자기하고 능숙한 이야기꾼인가 하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다. 또한 <<지옥의 인형>>에 <나오키 상>이 주어진 것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능숙하게 이야기를 끌어감으로써 독자를 즐겁게 해 준 데 대한 하나의 훈장이 되는 셈이다. 그의 장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인 문장과 치밀한 구성력 그리고 독자의 허를 찌르는 교묘한 함정과 반전을 들고 있으나,그보다는 기본 취재와 자료 조사에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모든 상황과 인물에 사실성 내지는 현실성을 살리고 있다는 것이 강점이라고 할 것이다. 현재 일본추리작가협회 상임 이사직을 맡고 있다. 10. '조금만 더 있다가 호텔을 나가 회장으로 갈 거야. 끝나면 멤버들과 헤어져 지난번 얘기했던 친구한테루.' 쇼는 단숨에 주워섬겼다. '어디서 묵을 건데?' '몰라. 친구집에서 자 버릴까?' 쇼는 사메지마의 약을 올렸다. 사메지마가 으르렁거렸다. '훌륭한 생각이군.' 모처럼 만의 휴일이었다. 머리맡 시계가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젯밤 자정이 지나 침대에 들긴 했으나 쇼의 전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눈을 뜬 사메지마였다. 쇼는 목 속 깊이 쿡쿡 웃음을 깨물었다. 도쿄를 떠나기 전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역시 스테이지에서 목청을 높이는 게 가장 좋은 스트레스 발산법인 것 같았다. '거짓말이야. 호텔을 잡아뒀나 봐. 대신 그 사람이 매스터로 있는 가게에서 노랠 불러야 해.' '호텔비 내 주지 않더라도 노랜 불러 줄 생각이었지?' '프로니까 그냥은 안 불러 줄 거라고 지레짐작한 모양이야.' '거짓말 말아!' '호텔 전화번호 알고 싶어?' '응.' 사메지마는 엎드린 채 메모용지를 집으러 팔을 뻗쳤다. 자세에 무리가 간 듯, 옆구리가 걸렸다.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지금 그 소리. 누군가 옆에 있는 것 아냐?' '맞았어. 어제 카부키쵸를 헤매고 있던 열여섯 살 소녀를 잡았거든. 여러가지 타이르느라고 하룻밤 재워 줬지.' '멍청하긴. 고발하고 말 거야, 형사가 음란행위했다고.' '그래, 잘해 봐. 전화는 몇 번이야?' '아직 몰라.' '왜?' '가봐야 알 거니까. 오늘밤 집에 있을 거야?' '아마. 별일없음 있겠지.' '별일없을 걸 어떻게 믿어? 삐삐 쳐?' '그래. 아님 자동응답기에 녹음해 두던가.' '삐삐 안 되면 그럴께.' '거긴 얼마 동안 있을 예정이야?' '하루 아님 이틀. 맛있는 생선이나 실컷 먹을 생각이야.' '마음껏 먹었을 것 아냐, 투어 동안?' '말도 마. 무대 끝나면 한밤중이지..... 지칠 대로 지쳐서......' '대식가한테 한밤중이 무슨 소용이야?' '다음날 공연 때문에 자제한 거야, 투어 동안은.' '즐거워?' '역시 즐겁더군. 노래 부를 때가 젤 좋은가 봐.' 쇼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돌아오면......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한동안은 아무 것도 없어. 자러 갈께.' '오늘 지나면 난 당분간 쉴 날이 없어.' '집 많이 어지럽혔지?' 사메지마는 아파트 안을 둘러보았다. '응. 그런 셈이야. 오늘 세탁이나 할까 해.' '미뤄 놔도 괜찮아. 내가 해 줄께.' '어쩐지 낌새가 수상한데?' '왜?' '뜻밖에 서비스가 좋으니까 말야.' '바보. 뭘 생각하고 있어?' '맛있는 생선이란 게 도대체 뭔가 생각해 봤어.' '안 가르쳐 줘. 호텔 체크인하면 삐삐 칠께.' '그래. 마지막 무대, 잘 해.' '두말하면 잔소리!' 쇼는 전화를 끊었다.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당일치기로 자동차를 몰아 오늘밤 쇼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스미의 동태가 수상쩍은 지금 도쿄를 떠날 수가 없었다. 쉬는 날이긴 했으나 오후라도 다시 <킹덤 하이츠 산노> 를 감시하러 갈 생각이었다.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식빵을 꺼내어 햄과 슬라이스 치즈를 얹어 오븐 토스터에 넣었다. 타이머를 맞춘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낯을 씻고 나와 커피를 끓였다. 우편함에서 신문을 꺼내어 침대 위에 펼쳤다. 방안은 몹시 어지럽혀져 있었다. 세탁물도 쌓여 있어서 오전 남은 시간은 세탁과 청소에 몽땅 바쳐야 할 판이었다. 쇼의 것과 세트로 산 모닝컵에 커피를 따랐다. 오븐 토스터 벨이 울렸다. 잘 구워진 오픈샌드 두 장을 접시에 담아 신문을 보면서 먹기 시작했다. 쇼는 지금쯤 <후즈 허니> 스탭과 함께 회장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밤 공연 사전 점검을 하느라고 부산을 떨다가 그것이 끝나면 분장실에서 잡담을 나누거나 헤드폰으로 스테레오를 듣거나 할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분장을 한 다음 정신집중에 들어갈 것이다. 다음 앨범 노랫말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사메지마는 두 편을 건네주었다. 곡은 쇼가 아니라 밴드 리더인 기타리스트 슈가 맡았다. 올해 스물 여섯 되는 슈는 장발에 안경을 낀 조용한 타입의 남자였다. 스테이지에선 쇼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사메지마가 쇼와 사귀기 시작한 한참 뒤까지 슈는 사메지마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지금은 달랐다. 쇼가 사메지마의 여자임을 인정, 사메지마를 이해해 주었다. 또 적극적으로 <후즈 허니> 의 노랫말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 재능이 있으시군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사메지마가 건네 준 노랫말 두 편을 보고 한 말이었다. - 다른 사람이 쓴 노랫말, 별로 환영 않지만 사메지마씨 것이라면 언제든 좋아요. - 마음에 들지 않음 버려도 상관없어. - 물론이죠. 이래뵈도 우린 프로 아닙니까? 슈는 웃었다. - 하지만 쇼가 쓴 것보단 훨씬 좋아요. 그리고는 혀를 쏙 내밀었다. - 쇼에겐 비밀입니다. 들키면 난 죽어요. - 난 항상 죽는데..... - 그게 사메지마씨 취미 아녜요? 슈는 의미있게 눈을 껌뻑거렸다. - 우린 모두 이렇게 보고 있어요. 쇼와 사메지마씨 관계,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모르지만, 깨어지면 깨어진 대로 쇼는 틀림없이 그만큼 커질 것이라고..... - 커져? - 역시 여잔 흘린 눈물만큼 강해지는 것 아닙니까? - 글쎄. 그럼 남자는? 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물 한 살 때 결혼한 슈에겐 딸이 하나 있었다. - 여자한텐 강해지지 못할 것 같군요. 일에는 더욱 강해질지 몰라도. - 그런 걸 쓴 녀석이 있는 것 같군. - 네. <운 것만큼 남자는 일에 강해진다. 여자는 남자한테 강해지고> 라는 것 말이죠? - 결국 여자의 승리로군. - 여자라기보다 쇼의 승리죠. 슈는 허공으로 눈길을 던지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전화가 울렸다.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잡았다. '네, 사메지맙니다.' 한 호흡 뜸을 들인 다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겝니다.' 사메지마는 살며시 숨을 들이마셨다. 쇼와의 전화로 풀어져 있던 마음이 다시 긴장됨을 느꼈다. '지난번은 여러 가지로.....' 도게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렇게 사메지마의 아파트로까지 전화를 걸기까지는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음이 분명했다. 마약단속관으로서의 도게가 사메지마를 대한 태도는 철면피한 게 틀림없었으나, 사메지마는 도게 자신이 그런 뻔뻔한 사내라고 생각진 않았다. '서로 전화를 걸었더니 오늘 쉬는 날이라고 해서.....' '집 전화번호는 서에서?' '설마. 다른 방법으로 알아냈어요.' 도게가 말했다. '그래, 용건이 뭐요?' 만나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런 거라면 공식적인 절차를 밟도록 해요. 비공식적인 수사정보 교환은 할 수 없소.' '사메지마씨 답잖은 말씀이로군요.' '무슨 뜻이오?' '당신은 언제나 독불장군 아닙니까? 당신이 수사정보를 흘리든 얻어내든 화낼 사람 신주쿠 서엔 하나도 없잖아요?' '뭔가 잘못 알고 있군. 난 방범과의 일개 수사원에 지나지 않아요.' 사메지마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사메지마씨에 대해선 여러 가지로 전설이 많은 거 같더군요.' '그 전설이란 게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지만, 함부로 믿어선 안될거요.' 그날 그 정도로 사메지마를 몰아세운 이상, 반발을 경계한 마약단속관 사무소가 사메지마에 대해 여러가지로 조사를 한 것 같았다. '날 얕잡아 볼 생각이라면 또 몰라도.....' '그런 건 아닙니다, 절대로.' 도게는 펄쩍 뛰듯이 부인했다. '오히려 그 반댑니다. 우리도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사메지마씬 꿈쩍도 않더군요.' 내사중인 피의자를 아무런 사전승낙 없이 잡아들인다면 어떤 형사든 분통을 터뜨리게 마련이다. 게다가 이번 경우의 도게는 사메지마가 하즈노를 마크하고 있는 줄 몰랐다고 시치미를 뗄 수도 없는 형편이 아닌가. 만약 사메지마가 아닌 다른 형사였다면 본청을 앞세워서라도 강력하게 항의, 하즈노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했을 게 틀림없었다. 뿐만 아니라 보복책으로 마약단속관 활동을 방해하고 나섰을 게 분명했다. '우리 주임님은 당신이 단독으로 찾아낸 녀석이기 때문에 본청이 나서지 않는 걸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메지마는 앉음새를 고치면서 담배를 집어들었다. 식욕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한 말로 미루어 도게가 사적인 입장에서 전화를 건 것 같았다. 물론 그 말이 진심인지 어떤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신은 다른 사람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얼마든 보복할 수 있었어요. 하지 않았던 건 그럴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설마 내가 당신과 사귀려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겠죠?' 도게의 쓴웃음 짓는 게 손에 잡힐듯 느껴졌다. '그런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다음 번 만나게 될 때는 한대 얻어맞을 각오로 있습니다.' 사메지마는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렇다면 기대가 되는군.' '사메지마씬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근무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그것과 사메지마씨의 수사능력은 별개라고 봐요. 하즈노를 빼앗기고 나서도 조금도 기죽어 하지 않았어요. 놀랍게도 오히려 더욱 깊이 파고 들었어요, 사메지마씬.' '그래서?' 이번엔 스미를 가로채려는 것일까. 하즈노로부터 정보를, 그것도 핵심정보를 뽑아내지 않는 한, 현재로선 스미를 옭아넣을 만한 혐의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루트를 통해 혐의점을 확보한 것일까. '시간을 좀 내 주셨으면 좋겠군요.' 도게가 말했다. '만나면 당신이 견책을 당할지 모르는데두?' '그런 건 신경 안씁니다. 우리 주임님은 경찰을 아주 싫어해요. 저는 경찰관에 따라 싫어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구요.' 도게는 태연히 말했다. 그렇다고 으스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사메지마씨가 끝까지 경찰 규칙을 내세운다면 별문제이지만.....' '내가 어떻게 하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야. 그래 뭘 원해?' '오늘 오후, 우리 집에서나 당신 집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사메지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노가다 역 근처의 다방을 지정했다. '알겠습니다. 몇 시쯤이 좋을까요?' '몇 시든 관계없어요.' '그럼.....2시쯤?' '알았소.'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도게는 중앙고속도로 서비스 에어리어에서 만났을 때와 똑같은 진 차림이었다. 한낮의 변두리 전철역 언저리에서 수트 차림 남자 둘이 다방에 마주 앉아 있으면 오히려 남의 눈을 끌게 마련. 도게는 그것을 염려해서 진 차림으로 나온 게 분명했다. 사메지마는 면바지에 터프한 니트 재킷 차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도게는 대학 연구원 같은 인상을 풍겼었다. 이렇게 마주 앉자 프리랜서나 디자이너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사법 경찰은 커녕 보통 회사원 같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모습이었다. '고맙군요.' 도게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메지마 건너편에 앉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이 다방은 좌석과 좌석 사이가 떨어져 있는데다가 언제나 적당히 붐비는 집이었다. 다른 손님이나 종업원이 엿들을 염려가 없었다. '각오는 하고 있겠지?' 사메지마가 말했다. '여기서는 주먹을 휘두를 수가 없겠죠? 바로 옆에 파출소가 있으니까.....' 도게는 파출소 쪽으로 눈길을 던지면서 말했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도게를 쏘아보았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도게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물러가자 다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스미는 뭘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몰라. 시치미를 떼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요.' '녀석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아세요?' '오모리 산노.' 사메지마의 말에 도게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사메지마가 알고 있는 데 대한 반응인지, 아니면 스미의 은신처를 확인한 데 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미는 <캔디> 도매 총책이야.' 사메지마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도게도 머리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스미가 주범입니다. 후지노 구미 전체가 관련되어 있다곤 볼 수 없어요.' '제조원은 어디요?' 도게는 사메지마를 마구 쏘아보았다. 눈빛으로 보아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사메지마는 확신했다.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국내 어딜 거요. <캔디>는 절대 수입품이 아니야!' '나도 그렇게 봅니다. 원재료는 어찌 되었건 그런 식으로 만드는 건 일본 국냅니다.' '어딘지 알고 있소?' '아직 완전히는...... 완전히 알고 있다면 벌써 덮쳤겠죠.' '스미를 그냥 놔둘 작정이요?' '사메지마씬?' 사메지마는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웨이터가 아이스커피를 날라왔다. '뭔가 일이 터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아이스커피에 스트로를 꽂으면서 도게가 물었다. '그래요. 뭔가 분명히 터질거요. 터지기만 하면 스미를 검거할 생각이요. 스미 이외에도 몇 녀석 분명히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게가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캔디> 판매 루트를 추적해 왔어요. <캔디> 판매인은 지금까지의 다른 각성제와 달리 어린애가 많은 게 특징이었어요. 아이들을 아무리 잡아들여도 공급 조직까지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죠. 도매 조직에 접근하기 위해선 어른, 밑천을 듬뿍 가지고 있는 어른을 족쳐야 합니다. 하즈노를 바로 그런 판매인이라고 우린 보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꽤나 심하게 족쳐 보았지만 결국 녀석도 눈가리 거래로 물건을 넘겨받은 말단 소모품에 불과했어요.' '그날, 다른 판매인이랑 왜건에 대해서도 정보를 확보했을 것 아니오?' '네. 왜건은 네리아에 사는 트럭 운전기사 소유였어요. 운전기사는 아르바이트로 서비스 에어리어에서의 거래를 거들었던 거구요. 마약 때문에 구미에서 파문을 당한 아사쿠사 건달이 알선해 주더라는 겁니다. 아마 그 건달 녀석이 스미와의 연락을 맡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만 자취를 감추고 말았어요. 마누라도 자식도 없는 몸이니까 당분간 구름따라 바람따라 떠돌아 다니겠죠.' '그 루트로 스미를 찾아낸 것 같군.' '네.' 도게는 대답한 다음 스트로로 커피를 한모금 빨았다. '<캔디> 는 특히 신주쿠, 시부야 일대에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마리를 찾은 건 엉뚱한 곳이었어요.' '어딘데?' '록봉기.' 도게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것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록봉기는 연예인, 스포츠 선수가 많이 몰리는 곳입니다. 그들은 손님 치고도 특별한 존재들이지만, 그들 자신은 절대로 판매엔 손을 대지 않아요. 게다가 씀씀이가 좋고 입도 아주 무겁죠. 자연히 VIP 대접을 받게 마련이죠. 또 이들을 상대하는 판매인도 격이 높아요. 뒷골목 아이들이나 상대하는 판매인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죠.' '록봉기는 코카인이 주류라고 들었는데?' '코크도 늘어나고 있어요. 다른 각성제는 시골뜨기나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캔디>는 달라요. 록봉기에서도 인기가 나쁘지 않아요.' '록봉기 루트를 알아냈소?' '루트라고 할만큼 거창하진 않았어요. 일부에선 <캔디>를 퍼뜨리는 녀석이 있었던 정도였으니까요.' '퍼뜨렸다?' '네. 섹스 때 효과가 좋다고..... 여자였어요.' 사메지마는 도게를 노려보았다. '그걸 알아낸 건 일종의 행운이었어요. 밀고가 들어와 핑크 택배업자를 검거한 적이 있죠. 사무실을 수색하다가 아가씨 사물 로커에서 <캔디>를 찾아냈어요. 호스테스 시절 동료한테서 얻은 거랬어요. 그 동료란 아가씨를 마크하기 시작했죠. 연예인, 스포츠 선수가 단골로 드나드는 고급 클럽 아가씨였어요. 내사해 본 결과 그 집 호스테스와 단골 사이에 <캔디>가 유행하고 있음을 알아냈죠. 하지만 그 클럽엔 아직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클럽 메누에토.' 사메지마가 나직이 말하자 도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구역 밖에 있지만 스미는 클럽 메누에토의 단골입니다. 택배제 아가씨에게 캔디를 건네 준 건 스미의 전속 호스테스였어요.' 핑크 택배제란 우편함 따위에 삐라를 뿌려 고객을 개척하는 출장 콜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통상 마사지와 구별하기 위해 <핑크> 라고 불리기도 하고 <택배> 라고 불리기도 했다. '스미가 자기 단골 호스테스에게 캔디를 공급하고 있다는 말이오?' '가능성 있는 얘기죠. 그리고 그 이상으로 우린 큼직한 단서도 확보했어요.' 사메지마는 도게를 응시했다. 도게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 조직이 경찰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소규모란 것 사메지마씨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마약단속관 사무소는 요코하마 고베 분실까지 포함해서 전국 12곳 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대신 아무리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정보 교류는 아주 신속하게 이루어지죠.' 도게는 남은 아이스커피를 마시느라고 잠시 말을 끊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아주 델리케이트한 것입니다. 어떤 지방의 정치가와도 관련이 있는 재벌이 <캔디>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재벌?' '네. 우리 주임님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재벌이 지원하고 있는 정치가 가운데는 후생성 출신 의원도 끼어 있으니까요.' 마약단속관 사무소는 사법경찰 조직이면서도 후생성 관할로 되어 있었다. 만일 후생성에 영향력이 있는 국회의원이 자기 신변을 내사당하고 있음을 눈치라고 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안 자체가 없었던 걸로 은폐될 게 틀림없었다. 사메지마는 도게가 진심으로 초극비 정보를 알려 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설령 사메지마가 그 정보를 한마디로 흘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게가 사메지마에게 알려 준 사실이 발각되면 그 순간 도게의 앞날로 끝나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폭력단도 관계가 있나요?' 사메지마가 물었다. 지방 재벌이라면 정계, 관계 뿐만 아니라 그 지역 폭력단에 대해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도게는 고개를 내저었다. '야쿠자는 아닙니다. 야쿠자가 관련되어 있다면 의원이나 재벌은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있어요. 관련된 사람은 야쿠자가 아니라 바로 재벌 구성원입니다.' '......믿을 수 없군, 말만 들어서는.' 각성제 밀매가 수입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른 고수입원이 없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매력적이지만 정관계에도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 손을 대기에는 너무도 리스크가 컸다. 만약 사법기관에 잡히기라도 한다면 뇌물수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호된 여론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사메지마의 말에 도게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정보를 입수한 당초엔 반신반의였어요.' '어디서 들었죠, 그 정보?' 사메지마의 물음에 도게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한숨을 내쉬면서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방증은 있나요?' '문제의 호스테스와 애인 관계로 보이는 단골손님이 한 사람 있어요. 한달에 한두 번 꼴로 클럽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마도 지방에서 올라오는 모양이에요. 그 사내가 <클럽 메누에토> 에 스미를 소개한 겁니다. 또 우리 정보에 떠오른 재벌 구성원과 그 사내는 용모가 비슷합니다. '그 사내 이름은 뭐요?' '클럽에선 하라다로 통하고 있어요.' 그 이상은 밝히려 하지 않았다. '하라다......' 사메지마는 지금까지 <아이스캔디>의 수사선상에 떠오른 이름을 머리 속으로 검색해 보았다. 없었다. 하라다라는 이름은 처음이었다. '그 사람이 재벌 구성원이라면, 가명으로 행세하고 있기가 쉽죠.' 도게가 말했다. '하라다와 스미는 어떤 관계요?' '<클럽 메누에토> 에선 친구 사이로 되어 있어요.' '기묘하군.' 사메지마는 중얼거리면서 도게를 응시했다. 마약단속관 사무소로부터 한번 물을 먹은 사메지마였다. 스미, <클럽 메누에토> 등 사메지마도 알고 있는 구체적인 이름을 제외하면 지금 도게가 한 얘기는 가당치도 않는 내용이었다. 정치가까지 주무르고 있는 재벌이 각성제 밀조에 관여하고 있다니, 믿을 수 있는 얘기인가. 그러나 실제로 그런 재벌이 지방에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지방이기 때문에 그 지역 기간 산업을 특정 재벌이 한손에 움켜쥐고, 그 결과 압도적인 힘으로 그 지역 출신의 정치가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었다. 또 정치가와 폭력단 관계도 지방으로 갈수록 연결고리가 단단하여 복잡하게 얽혀들기 쉬웠다. 그러나 각성제를 자금원으로 하는 폭력단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쓴다면 그것은 바로 스스로의 목을 조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정치가가 폭력단에게 요구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었다. 더욱이 그 정치가 위에 자리잡고 있는 재벌에 이르면, 경제적 이유 때문에 각성제 밀매에 손을 댄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게 합당한 절박한 이유가 있어야 마땅했다. '지방이라면 어디죠?' 사메지마가 물었다. 도게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지노 구미는 도쿄 신주쿠와 다마 지구 일부를 자기 구역으로 삼고 있소. 그 상부 조직인 교에이카이쯤 되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후지노 구미 전체나 교에이카이는 관련이 없다고 우리는 보고 있어요. 사메지마씨, 이건 폭력단 범죄가 아닙니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위 레벨 사람들 짓입니다.' '그런 고위 레벨 사람이 어떻게 해서 조직 폭력단과 손을 잡았죠? 제 고향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도쿄에선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요. 도쿄로 올라와 거리를 어정거리다가 그럴듯한 야쿠자에게 접근, 어깨를 툭 치면서 <이봐, 각성제 장사 한번 안해 보겠어?> 라고 말이라도 걸었단 건가?' 사메지마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하라다와 스미가 이어진 데는 또 한사람 중요한 인물이 게재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마땅했다. 그러나 도게는 그 제3의 인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입을 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도게의 뺨이 약간 붉게 물들었다. '물론 우리도 그렇게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사메지마씨, 상상력을 한번 동원해 주세요.' '상상력?'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확보했다면 우리는 벌써 덮쳤을 겁니다. 이번 일은 짐작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사안입니다. 적당히 두들겨 어디서 먼지가 나는지 지켜본다는 건 어림도 없어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면서 한발짝씩 움직이고 있어요, 우리는. 한발 삐끗하면 소장 머리 날리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상대를 옭아넣으려는 것입니다.' '당신 얘기를 엉터리라고 무시해 버리는 건 간단해요, 도게씨. 눈을 뻔히 뜨고 먹이를 뺏긴 나에게, 이 사건은 재벌이 연관되어 있으니까 신중해야 한다고 해 봤자, 먹혀들 것 같소? 후생성의 높은 사람 모가지가 몇 개 날아가든 내가 마음을 쓸 필요는 없어요. 지금 한 얘기가 내 관심을 다른 데로 쏠리게 하려고 꾸며낸 것이라면 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게요. 그런 것쯤은 알고 있죠?' '당신이 그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도 속을 털어놓은 거요.' 도게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거렸다. '잘 들어요, 사메지마씨. 난 니시아라이 약국집 둘째 아들이오.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약대에 진학했으나 막상 약제사 자격을 따고 보니 아버지 약국을 물려받을 생각이 싹 없어지더군요. 흰 가운을 걸치고 이웃 사람들에게 감기약이나 파는 것보다 좀더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큰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소. 해 보고 나서야 안 것이지만 지금 이 일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화려하지도 멋있는 일도 아니오. 우리가 상대하는 건 약물 때문에 머리가 절반쯤 돌아 버린 밀매인이거나, 장사 밑천인 자기 몸뚱이조차 너덜너덜해져, 보기만 해도 입맛이 떨어질 것 같은 매춘부들이오. 거기다가 인색하기 짝이 없는 운반꾼 등 인간 쓰레기 뿐이오. 당신도 그런 치들의 숨냄새만 맡아도 그 녀석이 어떤 약물에 중독되어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어요. 우리는 용의자 한명을 몇 달씩, 때로는 몇 년씩이나 끈질기게 쫓아요. 대부분의 정보는 밀고에 의존하지만 폭력단 내막을 잘 아는 당신네와는 달리, 밀고가 있다 해서 당장 피의자를 검거할 수가 없어요. 당신네가 하지 않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는 차분히 시간을 들여 정보를 하나하나 모아가는 거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검거하는 피의자는 몇십 명이나 죽인 살인자도 아니고, 몇억이라는 돈을 꿀꺽한 사기꾼도 아니오. 기껏해야 폭력단 간부 정도지. 거기 따른 영광이라고 해 봤자 압수한 물건더미가 고작이구. 하지만 몇십 킬로그램을 압수하더라도 결국은 어디선가 또 스며들 것이라고 배짱을 느긋하게 먹는 녀석이 적지 않아요. 그렇게 되는 게 사실이기도 하죠. 다음 편에 다시 반입되는 거죠. 루트를 없애지 않는 한, 돈 가진 녀석에겐 물건이 들어가게 마련이오. 그러나 우리는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죠. 10킬로그램을 압수하면 어딘가에서 10킬로그램분의 환자가 줄어들지도 모른다고 말이오. 바닷물을 스푼으로 뜨는 것이나 다름없는 작업..... 그러나 사메지마씨, 당신이라면 나를 이해해 주리라 믿어요. 내 얘기는 엉터리가 아니오. 지금 이 순간에도 증거를 확보하려고 목숨을 걸고 뛰는 동료가 있어요.' '그래서 하즈노를 검거한 건가?' '맞았어요. 당신 눈앞에서 가로채듯 한 건 사과드리죠. 그러나 당신이 움직이기 시작한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아이스캔디>를 쫓고 있었어요. 이 정보는 본청 보안과에서도 아직 모르고 있어요. 캐치했다면 벌써 관련 의원이 압력을 넣었겠죠. 말하고 싶지 않지만 본청 입장에서 보면 마약단속관 사무소 따위, 보잘 것 없는 조직입니다. 훼방이 된다면 떼어 버리면 되는 것, 얼마든지 정보를 조작할 수 있어요.' 사메지마는 도게를 응시했다. 필사적인 얼굴이었다. '스미와 하라다를 연결시켜 준 인물도 하라다 쪽 사람인가?' 어떤 예감을 느끼면서 사메지마가 물었다. 도게는 고갤 끄덕였다. '그렇소. 이건 우리 쪽에서 캐낸 정보인데 바로 그 인물이 언터쳐블의 핵심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사람이 <캔디> 밀매로 어떤 이익을 얻고 있다곤 보지 않아요. 그게 바로 이번 사람의 가장 거북한 점이기도 해요. 스미와 같은 야쿠자라면 뭣 때문에 <캔디>에 손을 댔는지 뻔한 일이지만 지방 재벌쪽 인사들이 무슨 까닭에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도 할 수가 없어요. 완벽한 증거가 있다면 모를까, 사정 청취조차 엄두도 못낼 상대들입니다.' '하라다와 <클럽 메누에토> 호스테스가 애인관계란 근거는 있소?' '호스테스가 포르쉐를 몰고 다녀요. 하라다가 사 준 거리는 정보가 있어요. 뿐만 아니라 하라다는 현금도 대 주고 있는 모양이오.' '호스테스 이름은?' '샤키, 본명은 가게야마 마사코구요. 하라다와의 관계를 주변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캔디>를 샤키에게 공급한게 스미인지 하라다인지 아직 확인이 안된 상탭니다.' '양쪽 모두일 수도 있겠죠.' '양쪽 모두?' 사메지마는 지난번 <클럽 메누에토> 에서 본 스미와 샤키의 모습을 떠올렸다. '샤키가 하라다와 스미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뜻인가요?' 도게가 다짐하듯이 물었다. '적어도 보통 손님과 호스테스 관계는 아니오.' '그렇다면......' 도게는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은 며칠 전 <클럽 메누에토>에 간 적이 있어요. 스미가 묘한 움직임을 보인 것과 거의 동시에요.' '납치했다는 말이오?' 사메지마는 도게를 응시했다. '네. 전에도 얘기했지만, 스미는 하라다를 하라다로만 알고 있는 데다가 눈가리 거래를 강요당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나 스미가 언제까지나 그런 상태를 용인할 까닭이 없다고 보고 있었어요. 사이가 뒤틀렸을 때 일방적으로 잘린 채 울상만 짓고 있을 야쿠자는 없으니까 말이오.' '그렇다면 애인 관계인 샤키가 하라다의 정체를 벗길 열쇠겠군요.' '스미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샤키를 유괴, 하라다 정체를 알아내려고 하겠죠. 그러나 샤키가 스미와도 붙어먹었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져요.' '하라다에겐 마찬가지죠.' 사메지마가 단정하듯 말했다. '스미와 샤키 관계를 하라다가 모른다면 샤키가 스스로 행방을 감추었더라도 하라다에겐 압력이 되죠. 만약 그렇다면 스미를 하라다와의 관계를 역전시킬 기회를 노리면서 샤키를 잡고 있겠죠.' '스미가 본성을 드러낸 셈이군요.' '당신네 움직임이 계기를 만들어 준 걸 겁니다. 말단 판매인이 검거되자 하라다 쪽은 겁을 먹었겠죠. 발을 뺄 것인가, 도매를 다른 조직으로 넘길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스미를 샤키를 유괴했거나 유괴한 척 꾸며 보이고 있을 게요. 그게 바로 지금 스미가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이유일 게요.' 사메지마는 단정하듯 말했다. 이제야 겨우 눈앞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뭔가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사메지마씨 육감이 맞을 겁니다.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도게도 낮은, 그러나 열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스미에게서 눈을 떼선 안 돼요. 스미가 하라다 목을 조를 때, 녀석을 두들기면 하라다 정체도 밝힐 수 있을 거요!' '감시 태세를 강화하겠습니다.' 말하면서 도게는 사메지마를 흘낏거렸다. '협력해 주시겠습니까?' '위에서 가만 있을까? 당신네 웃사람 말이오.' '이번 사건은 이례적인 것 투성이입니다. 주임님은 내가 설득하죠.' '도게씨.' 사메지마는 새삼스러울 정도로 정중하게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까닭으로 나와 손을 잡겠다는 거요? 당신네 조직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나 한사람 힘을 보태든 않든 큰 차이가 없잖소? 더군다나 난 외부 사람인데, 무슨 까닭으로?' '이유는...... 그래요, 사메지마씨가 신주쿠 폭력조직에 밝기 때문이라고 해 두죠.' '내가 묻고 있는 건 그런 형식적인 이유가 아니오. 일단 등을 밀어냈던 나를 무슨 까닭으로 다시 끌어들이려 하는지, 나와 합동수사를 하겠다는 당신 속셈이 뭔지 그게 알고 싶소.' 도게는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사메지마를 응시한 채 말을 골라가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당신과 함께면 마음이 든든해요. 그래서 손을 잡자고 한 겁니다. 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게 내 본심이오. 이 사건은 엄청난 것이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손댔던 사건 가운데 가장 큰 건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마약단속관 동료를 믿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오. 믿고 있어요. 모두 민완들입니다. 그래도 당신이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스미를 몰아세우고 하라다의 가면을 벗기는 순간, 어쩌면 그 시점에서 우리는 손발이 묶여 버릴지 모릅니다.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어요. 만약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를 대신해서 최후의 최후까지 <캔디> 제조원을 뒤쫓아 밟아 뭉갤 수 있는 건 당신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 가서 도와달라는 건 너무 뻔뻔한 일이니까 이렇게.....' '그게 오늘 날 불러낸 진짜 이유인가요?' 도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사메지마가 말했다.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메지마의 기분을 도게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도게는 고개를 숙였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고지는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지금 어디야?' '역. 택시를 잡을 생각이야. 길이나 가르쳐 줘.' '내가 나가지.' '괜찮아. 가게 비울 수 없잖아?' 고지는 를 둘러보았다. 손님이 네 팀, 모두 단골들이었다. 히라세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사진 현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 시간은 언제나 한가해.' 고지가 말했다. 곧 게이코가 나타날 시간이었다. 그전에 쇼를 맞으러 나가고 싶었다. '알았어. 그럼 개찰구 바로 앞에 있을께.' '혼자야?' '응.' '곧 갈께.' 고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카운터의 전화였기 때문에 리에라는 캐시어 아가씨와 웨이터 둘이 옆에서 엿듣고 있었다. '왔습니까?' 웨이터 한 사람이 물었다. '왔어.' 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종업원들이 쇼의 방문에 고지 못잖게 흥분하고 있음을 알았다. '신나게 됐군.' '유명인이 와 주다니..... 록싱거랬죠?' 두 웨이터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한마디씩 했다. '그렇게 잘 팔리는 가수는 아니야.' '하지만 떠돌이 엔카 패거리와는 차원이 다르잖습니까?' '글쎄.' 고지도 듣기에 별로 나쁘지 않았다. 쇼의 노래를 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다. 자신이 도쿄에서 무엇에 몰두하고 있었는지 그들에게 쇼의 노래가 가르쳐 줄 것만 같았다. '역에 갔다 올께.' '노래 불러 줄까요?' 도어 손잡이를 막 잡았을 때 누군가가 물었다. 다카시(李) 라는 제일 젊은 웨이터였다. 그는 <후즈 허니>의 데뷔 앨범도 가지고 있었다. 고지 얘기를 듣고 산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록을 좋아했다. 다카시의 눈빛은 기대에 차 있었다. 순간, 고지는 다카시가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불러 줄거야.' 고지는 대답하면서 도어를 밀었다. 역원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개찰구 옆에 쇼가 기다리고 있었다. 낡은 가죽 수트 케이스를 다리 사이에 끼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수트 케이스에는 다닥다닥 실이 붙어 있었다. 아마 고물상에서 산 것 같았다. '안녕!' 쇼는 고지를 보자 생긋 웃음을 지었다. 변한 데가 없다고 고지는 생각했다. 검정 가죽 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불록 솟은 가슴을 보자 고지는 욕망이 불끈거림을 느꼈다. 쇼의 가슴은 게이코와 달리 탄력이 넘치는 것 같았다. 게이코의 몸은 성숙한 어른 몸이었다. 쇼에겐 아직도 어딘가 소녀와 같은 딱딱함이 남아 있었다. 그때 그 순간을 고지는 떠올렸다. 억지로 나눈 것 같은 그 관계는 비좁은 2DK (방2,식당,부엌) 의 다다미 넉장반 짜리 방의 2단 침대 밑에서였다. 말 한마디 건넴이 없이 서로의 옷을 벗기고 몸을 포갰다. 쇼의 몸에선 햇볕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건조한 향기가 났다. '하나도 안 변했군.' 쇼는 발딱 일어서면서 말했다. '너도. 머릴 기르고 있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사내처럼 보였던 쇼의 머리가 지금은 어깨까지 치렁치렁했다. '응.' 대답하면서 쇼는 얼굴을 찡그렸다. '안 어울려?' '아니.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야.' 당시 쇼는 주유소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메슈를 먹인 머리하며 말투하며 고지는 틀림없는 레이디즈 (여자 폭주족) 출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러네!' 쇼는 다시 생긋 웃었다. 약간이긴 하지만 쉰 목소리였다. 노래 공연 탓이라고 생각하자 고지는 사랑스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손님 많았어?' 수트 케이스를 집어드는 쇼에게 물었다. '그럼. 서서 보는 사람도 많았어.' '부럽다 부러워.' 고지가 말했다. 복잡한 기분이 사라지고 기쁨만 남았다. '어디로 가?' 앞장 서서 걷는 고지를 따라오며 쇼가 물었다. '우선 호텔로 가서 짐부터 맡기자구. 가는 길목이니까.' '괜찮아, 호텔까지 잡아 줘두?' '오너가 그러고 싶댔어. 마음 쓸 것 없어. 엄청난 부자니까.' '흥.' 오너가 여자임을 쇼에겐 아직 밝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역 앞에 주차해 두었던 고지의 자동차에 올랐다. 호텔까지는 3분도 채 안되는 거리였다. 호텔은 올해 신축한 건물이었다. 대리석을 깐 로비를 가로질러 두 사람은 프론트로 갔다. 로비에도 사람이 없었다. 조명을 밝힌 프론트엔 블레이저 차림의 남자 둘이 지키고 있었다. '저어, 가카와씨와 예약을 한.....' 프론트로 다가서면서 고지가 말했다. '네, 네. 알고 있습니다.' 프론트 담당 남자 얼굴에 밝은 영업용 미소가 떠올랐다. 숙박 카드와 펜을 가죽을 깐 카운터 위에 내밀었다. '여기에 기입해 주세요.' 쇼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펜을 집어 들었다.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써넣었다. 그 사이에 프론트 직원이 키를 찾아 내밀었다. 고지는 쇼 발밑의 수트 케이스를 집어들었다. 별로 무겁지 않았다. '8층 스위트입니다.' '네?' 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카와씨가 그렇게 예약하셨어요.' '그렇게나? 부담스럽게......' 쇼는 고지를 돌아보면서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부담 느낄 것 없어. 정말이야. 그대신 노래 불러주지 않을래?' '무슨 말을 그렇게? 노래야 얼마든지 부를 수 있지만......' '자, 올라가 보자.' 고지는 프론트 담당이 내민 키를 받아들였다. '저어, 짐은 저희들이......' '괜찮아. 내가 들고 가겠어.' 거울처럼 보이는 은색 도어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바깥쪽 벽을 유리로 처리한 탓에 전망을 즐길 수 있었다. '너무 신경쓰지 마.' 쇼가 불쑥 말했다. '쓰지 않아.'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고지가 말했다. 직선으로 산허리를 가로지른 고속도로 램프가 보였다. 시커먼 능선 실루엣이 손에 잡힐듯이 뚜렷했다. 엘리베이터가 8층에 닿았다. 두 사람은 푹신푹신하게 카페트가 깔린 복도로 나왔다. '조용하군. 숙박객, 한 사람도 없는 것 아냐?' 물밑 같은 복도에 단둘이만 달랑 남은 것 같아 고지는 가벼운 긴장을 느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쇼의 분위기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여긴 것 같군.' 복도 막다른 방 앞에 멈추면서 고지는 능청을 떨었다. 키를 꽂아 돌려 도어를 열었다. 널찍한 공간, 소파 세트와 간이 주방을 갖춘 리빙룸과 다이닝룸 겸용이었다. 다이닝 테이블 위에는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굉장하군.' 쇼가 중얼거렸다. 고지는 놀라움을 숨기면서 입구의 조명 스위치를 넣었다. 샹들리에와 플로어 스탠드가 켜졌다. 정면 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열려던 쇼가 리모트 콘트롤 식임을 알아차리고 버튼을 눌렀다. 커튼이 슬금슬금 열리면서 눈 아래로 시가지 야경이 펼쳐졌다. 안쪽에 보이는 또 다른 도어를 고지가 열었다. 베쓰룸의 통로 끝에도 도어가 있었다. 열었다. 더블 사이즈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짐, 여기 둘께.' 고지가 말했다. 정말 멋진 방이었다. 이런 곳에 묵을 기회가 영원히 없을 거 같았다. 아니, 있을지도 몰랐다. 히라세와의 계획이 뜻대로만 된다면......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자 희망이 부품과 동시에 가슴 밑바닥에 묵직한 응어리가 꿈틀거렸다. 지금부터였다. 모든 것이 지금부터였다. 침대 옆에 수트 케이스를 내려놓고 얼른 나왔다. 쇼가 멍한 표정으로 창가에 서 있었다.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하나 집어들고 있었다. '이런 호화스런 방, 처음이야.' 쇼가 불쑥 말했다. '앞으론 이런 방에만 묵게 되겠지. 향료 목욕도 즐기면서......' '내가 그런 바보로 보여?' 고지는 쇼 바로 앞으로 다가섰다. 쇼는 화난 표정으로 응시했다. '잘 됐어, 프로로 데뷔한 것.' '응.' '이젠 인기를 얻어야지.' '너무 그러지 마.'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고지는 팔을 뻗쳐 쇼를 안아올렸다. 쇼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몸을 내맡기지도 않았다. 쇼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쇼는 응하지 않았다. 혀를 밀어넣으려 했어도 쇼는 입술을 열어 주지 않았다. 고지는 얼굴을 뗐다. 쇼가 흘겨 보았다. '오랜만이야.' 고지가 말했다.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쇼는 들고 있던 사과를 고지 입에 쑤셔박았다. 예쁘게 잇자국이 난 사과였다. '노래하러 가자구.' 쇼는 그 말만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 고지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자신과 쇼 사이에는 요 몇년간 엄청난 거리가 생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간격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놓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번엔 아픔을 느꼈다. 쇼는 이제 <동료>가 아니었다. 친구일지도 몰라도 두번 다시 그런 식으로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쇼 탓이 아니었다. 도쿄를 버린 자신 때문이었다. 변한 것은 쇼가 아니라 고지 자신이었다. 주차장에 포르쉐가 주차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고지는 묵직한 응어리가 부풀어오름을 느꼈다. 게이코가 와 있는 것이었다. 게이코는 무대 정면에 위치한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혼자였다. 패셔너블한 진에 얇은 가죽 재킷 차림이었다. 품위있고 세련된, 그러나 아줌마였다. 아무리 멋을 내고 욕심을 부렸어도 검정 가죽바지와 티셔츠에 헌 트레이너를 허리에 두른 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게이코에겐 무리였다. 뭣 때문에 저런 차림으로 나왔을까. 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향해 일어서는 게이코를 보자 고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보다 점잖은, 보다 비싼 수트나 원피스 차림이었다면 게이코가 이겼을텐데...... 쇼와 게이코가 나란히 섰을 때, 누가 승자인지 고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게이코는 젊게 보이려고 했다가 보기 좋게 실패한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쇼와 게이코는 처음부터 겨룰 상대가 못 되었다. 쇼는 자연스러워 어느 한구석 힘이 들어간 곳이 없었다. '아가씨가 그 사람?' 미소진 게이코의 얼굴엔 딱딱함이 서려 있었다. 쇼를 어린 아가씨로 생각해서 얕잡아 본 것일까. 너저분한 풋병아리 가수쯤 손쉽게 휘어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쇼는 반짝이기까지 했다. 자기 무대를 경험하며 노래를 불러온, 팬과 함께 춤추어 온 충실감이 전신에 넘쳐 흘렀다. 눈자위와 서 있는 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그 피로감조차 매력적이었다. 미소를 지으면서도 패배감을 숨기지 못하는 게이코를 보면서 고지는 잔인한 즐거움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쇼를 만나게 한 자기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여왕마마, 놀랐지?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쇼가 까딱 고개를 숙였다. 고지가 게이코를 의 오너라고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오너가 여자인 사실에 눈꼽만큼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어머, 그러지 말아요. 고지군에게 얘길 듣고 꼭 초청하고 싶었어. 자, 그러지 말고 앉아요.' 게이코가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러면서 서 있는 고지에게 명령했다. '쇼씨한테 뭔가 마실 것을......' 손님을 맞는 사람은 자기, 게이코이며 고지는 아랫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하려는 말투였다. 그러나 고지는 조금도 속상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네.' 싱글거리면서 쇼에게로 눈을 돌렷다. '뭘로 할래?' '맥주, 괜찮겠지?' '알았어. 요기도 좀 해야 할 것 아냐?' '아직 배 안 고파. 노랠 부르게 되면 부른 뒤에......' '오케이.' 고지는 빙그르르 돌아섰다. 게이코가 숨쉴 틈도 주지 않고 얘기를 건네왔다. 호기심 많은 여왕마마는 젊은이들이 고생한 얘기를 특히 좋아했다. 쇼가 오늘의 소가 되기까지, 그리고 출세한 현재도 무엇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인지 궁금해 했다. 어머, 저런, 힘내야지, 하면서 진심으로 동정하고 진심으로 성공을 빌었다. 하지만 게이코는 모르고 있었다. 단 한가지에 모든 것을 걸고 이빨을 깨무는 젊은이들의 사정을 게이코는 결코 알 수 없었다. 당신은 태어날 적부터 여왕마마. 명문에다 돈도 많은 세련된 미인이 아닌가. 그런데도 단 한번의 실패를 이겨내지 못하고 인생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그런 당신이 어떻게 흙탕 속에 딩굴며 입술을 깨물고 싸우는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결국 당신도 나와 같은 도망자일 뿐이다. 고향으로 도망쳐 와서 손에 익은 권력을 휘둘러 사람들 입을 막아놓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패배를 모두가 알고 있지만 결코 입에 담지 않고 있을 뿐. 아름답다고 감탄은 하지만 당신 마음 속에 깃든 기묘한 절망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단 한번의 실패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 그렇게 웃어 버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실패 따위는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게이코는 독신으로 줄곧 여기서 살아오고 있다 -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래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결코 말로 요구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않아도 권력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끄덕끄덕 웃음까지 흘리면서 따를 뿐이었다. 그것은 소박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권력자 눈밖에 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박함으로 오해하는 것일 뿐이었다. 복종할 때는 웃을 수가 없었다. 웃은 것만으로 곤욕을 치른 사람도 있었다. 직업을 잃고 이웃을 잃고 살 곳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물론 가카와 일족에겐 악의가 없었다. 대감님에겐 처음부터 잘못이 있을 수가 없었다. 군림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악의를 품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문을 품을 뿐이었다. - 저 사람, 우리가 하는 일 납득 못하고 있는 것 아냐?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나는 것이었다.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은 거스르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남은 일은 가카와 일족의 <신하> 들이 그런 사람을 말살하는 수단을 재빠르게 강구하는 것 뿐이었다. 에서 게이코의 기분을 상하게 한 탓에 그렇게 된 사람들을 고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코에겐 악의가 없었다. - 그 사람...... 그래, 술버릇이 별로 좋지 않나 봐. 그 한 마디가 숨통을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악의는 없지만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한마디가 어떤 사태를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태어날 적부터 그런 식으로 배우면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고지는 게이코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의 실패로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버린 게이코를 가엷게 생각하는 또 한사람의 고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판 벌여볼까?' 수줍은 듯이 쇼가 말했다. '뭘? 어떡하려구?' '피아노 좀 쳐봐도 괜찮지?' '괜찮지만...... 기타는?' '고지가 켜 줌 좋겠어. 하지만 잠깐만......' '솔로는 싫어?' '응, 발라드......' '발라드?' '이번 투어에서 앵콜 때 두 번 불렀어. 다음 앨범에 삽입시킬까 망설이는 곡이야.' '발라드, 들어본 적도 없는데......' '괜찮겠어?' '그래. 한번 들어보지 뭐.' '고마워.' 쇼는 성큼성큼 무대로 걸어갔다. 다카시가 재빨리 백뮤직으로 켜두었던 CD를 껐다. 다른 웨이터가 스포트라이트 스위치를 넣었다. 쇼의 공연을 모르고 있던 손님들의 대화가 끊겼다. 는 어느새 좌석이 거의 찼다. 게이코가 그랜드 피아노에 앉은 쇼 앞에 섰다. 마이크를 잡았다. 스포트 라이트가 게이코와 쇼를 비추었다. 게이코는 미소를 흘리면서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손님 여러분, 오늘도 저희 를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는 참으로 멋진 게스트를 모셨습니다. <캅> 이라는 앨범으로 데뷔한 록밴드 <후즈허니>의 보결 쇼씨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손님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의 점장 고지군이 도쿄에서 밴드 활동을 할 때의 동료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소속해 있던 밴드는 해산되고 말았습니다만, 쇼씨는 이렇게 프로로 데뷔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무대에서 공연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이번 기회에 <후즈허니>를 응원해 주시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맨 처음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 곳은 무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부스였다. 주로 예약석으로 활용하고 있는, 움푹 파인 벽 속에 세트된 부스였다. 거기엔 가카와 노보루와 가카와 스스무가 앉아 있었다. 평소 에 나타날 때와는 달리 오늘은 러프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달고 다니는 호스테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노보루는 스포츠 재킷에 폴로 셔츠, 스스무는 트레이너에 총대 바지였다. 테이블엔 카뮤 한병이 놓여 있었다. 조명이 어두운 부스, 노보루의 안경이 스포트라이트에 번쩍거렸다. 가카와 형제가 함께한 탓일까, 일부 손님 사이에 긴장감이 서렸다. 두 사람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노보루의 집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 이 곳으로 직행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쇼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게 고지로선 뜻밖이었다. 스타라면 몰라도 갓 데뷔한 록싱거에 흥미를 느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오늘밤 두 사람이 올 것이라는 건 게이코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꽤나 따분한 것일까. 아니면 가카와 형제들도 도쿄의 <유명인>에겐 한수 접고 드는 것일까.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많지는 않았으나 이곳 출신으로 쇼보다 훨씬 더 성공한 연예인들이 몇몇 있다. 그러나 가카와 가가 그런 연예인들과 가깝게 지낸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가카와 그룹의 사원위안회 같은 데서 노래를 부른 가수도 적지 않을 것이고 골프 정도는 함께 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사와의 관계일 뿐 개인적인 친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오늘밤 두사람이 여기에 나타난 것일까. 게이코가 두 사람을 초청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여왕마마의 기분인가. <후즈 허니>가 팔라지 않는다니까 후원할 마음이 생겨 가카와 형제를 끌어들이려는 것일까. 가카와 운수와 가카와 관광 CM송을 쇼에게 맡기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고지는 흥분과 불안이 동시에 피어오름을 느꼈다.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엄청난 협박에 부닥칠 것을. 형제를 집요하게 감시하여 <범죄> 증거를 확보한 그룹이 있는 것을. 게이코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든, 또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이번만은 결코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게이코와 고지의 관계도 앞으로 며칠만 있으면 지금과 전혀 다른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게이코는 고지를 증오할까. 페트로 기르고 있는 강아지가 손을 물었을 때처럼 발칵거릴까. 그때가 다가옴을 고지는 두려워하면서도 즐겼다. 게이코가 미친듯이 앙탈부리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잠자리 이외의 곳에서 게이코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절정에 이르면 운 사람처럼 게이코의 눈자위가 붉게 물드는 것을 고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었다. 한창 불이 붙었을 때는 게이코의 탐욕스런 요구를 소화하느라고 다른 데 정신을 팔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쇼는 까딱 고개를 숙였다. 평소보다 훨씬 심한 허스키로 손님들에게 인사했다. 짧고 퉁명스런, 그러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말투였다. 이 정도의 홀은 쇼도 아주 익숙해 있었다. 재즈 클럽이라고 해도 라이브 하우스엔 다름이 없었다. 라이브 하우스야말로 쇼에겐 최고의 장소였다.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에 손을 올려놓았다. 피아노는 이틀 전에 새로 조율한 것이었다. '발라드는 별로 불러보지 못했어요.' 마이크 위치를 조절하면서 쇼가 말했다. 고개를 훌쩍 쳐들어 흘러 내린 머리를 넘기면서 얼굴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도전적으로 쏘아보았다. '하지만 이 무대엔 발라드가 분위기에 맞을 것 같아서......' 미소를 지으면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렇게 멋진 곳일 줄은 몰랐어요. 평소 저는 신주쿠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노래하고 노는 곳도 더럽고 비좁은 곳이었구요.....' 이쪽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는 손님들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으스대거나 멋부리는 것이 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무의식적인 멋도 있다는 걸 최근 깨닫게 됐어요. 예를 들면 이곳 오너의......' 게이코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어갔다. '저도 언젠가 이런 여자가 되고 싶어요. 건방진 생각일까요?' 게이코가 눈을 크게 뜨면서 미소를 흘렸다. 쇼는 숨을 들이마셨다. '어쨌든 아주 멋있는 곳에서 고지도 일하고 있더군요. 방문할 수 있게 된 것, 고맙게 생각합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하얗게 언 거리 웃음소리조차 안 들려 Shark 언 아스팔트 굳게 딛고 당신은 귀를 기울인다. 약속도 기약도 없는 싸움의 나날 얼마나 얼마나 참아왔나 Shark Shark 당신 뒷모습은 무거워 고지는 숨을 멈추었다. 쇼의 손가락이 춤을 추었다. 발라드 독특의 분위기가 넘실거려 가사만큼 감상적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점점 열기를 더하면서 그러나 어딘가 무거운 절박감을 풍기면서 쇼는 노래를 이어갔다. 붉게 녹아내린 길엔 고함소리 넘실대고 Shark 꼭 깨문 입술 아픔을 참으며 당신 마음을 죽인다. 약속도 기대도 없는 Manhunt City 몇 밤이나 헤아려 왔나 Shark Shark 한순간의 편안도 저 멀리 몇 번씩이나 뒤풀이하는 쇼의 가 차츰 찾아들었다. 박수가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쇼는 수줍은 듯 반짝 웃음을 흘렸다. '별로 평판이 좋지 않은 노래예요, 우리 세계에선. 물론 거짓말이에요. 사실은 어떤 남자를 생각하면서 부른 노래였어요...... 제 애인 자랑하는 노래라고 밴드 멤버들은 불평이 많아요.' 말하면서 쇼는 고지를 돌아보았다. '자, 이번엔 오랜만에 고지의 반주로 제 앨범에 있는 노래를 부르겠어요. 가라오케로도 나와 있는, 좀 요란스런 노래지만 들어 주세요.' 고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가왔다. 어제 집에서 가지고 나온 펜더를 들고 있었다. 고지에게 다시 박수가 터졌다. '곡목은?' 흥분에 휘말림을 느끼면서 고지는 쇼에게 물었다. '들어봤어, 우리 CD?' 쇼가 시치미를 떼면서 물었다. 웃음소리가 물결쳤다. '응.' '그럼 <스테이 히어>.' 다카시가 두 손을 맞잡아 흔들었다. 제일 좋아하는 곡이었다. 고지를 피크를 껐다. 도입부부터 전곡을 카피할 자신이 있었다. <후즈 허니>의 슈에겐 미치지 못하지마 손가락 움직임엔 자신이 있었다. 쇼가 리드를 잡았다. '원 투 쓰리......' 인트로에 들어갔다. 순간, 모든 것이 아득히 멀어졌다. 앰프를 거쳐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음에 전신이 빨려 들어갔다. 'Get Away!' 쇼가 외쳤다. Get Away! 모두 말하지, 빨리빨리 사라지는 게 좋다고! 여기는 도시 밑창, 울부짖는 소리, 밤마다 밤마다...... 눈깜짝할 사이에 전신이 뜨거워졌다. 등에서 겨드랑이 땀이 번져 나왔다. 머리만 냉정하게 리듬을 쫓으며 보칼의 매듭을 이어갔다. 1절이 끝나고 2절이 흘러 퍼졌다. 2절이 끝나자 쇼의 피아노가 끼어들었다. 즉흥연주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처음엔 약간 더듬거리던 손가락이 이윽고 제멋에 겨워 춤추기 시작했다. 마지막, 서로의 눈길을 맞추며 1절을 다시 부른 뒤 로 끝맺었다. 박수가 터졌다. '다시!' 쇼가 속삭이듯이 외쳤다. 그뒤부터는 마치 꿈꾸듯이 이어져 갔다. 즉흥연주를 늘여, 지난날 곧잘 모창했던 블루스 넘버를 불렀다. 손가락이 조금은 말을 듣지 않는 소절도 있었지만 청중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다섯 곡을 연주했다. 박수는 끝없이 이어졌다.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도 게이코까지 계속 박수를 쳤다. 다카시가 물수건을 들고 달려왔다. '최고였어요. 엉망진창이랄 정도로 멋있었어요, 점장님.' 게이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답하면서 고지는 쇼를 바라보았다. 쇼의 얼굴에도 만족감이 넘쳐 흘렀다. '목 좀 축여야지?' '찬 맥주.' 다카시가 달려갔다. '고마워요, 쇼씨. 멋진 무대였어요.' 게이코가 쇼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쇼는 말하면서 똑바로 고지를 쏘아보았다. '기타, 계속했었어?' 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도 고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픔인지 기쁨인지 분간 못할 뜨거움이 고지의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다카시가 맥주를 가지고 왔다. 게이코가 쇼의 글래스에 따랐다. 고지는 눈을 들어 가게 안을 휘둘러 보았다. 가카와 형제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히라세가 보였다. 혼자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히라세는 카운터에 오른쪽 팔을 걸친 자세로 몸을 반쯤 돌려 고지쪽을 보고 있었다. 입가엔 미소가, 눈빛엔 노골적인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고지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지는 못 본 척하고 다시 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피곤하죠? 천천히 마시면서 쉬어요. 고지군, 쇼씨 불편 없도록 잘 돌봐 드려.' 쇼가 약간 놀란 얼굴로 게이코를 바라보았다. 게이코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두 사람만 남겨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랐어. 그렇게 멋진 소리가 날 줄은.' 쇼가 말했다. '여기 말이지? 평소 때도 라이브 연줄 하고 있어.' '돈 무척 많이 들였겠네.' '말했잖아, 오너가 엄청난 부자라고......' 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맥주잔을 들었다. 눈은 테이블을 누비면서 인사를 하고 있는 게이코를 쫓았다. '예쁘고 멋있는 여자야.' 쇼의 눈길이 꿈틀하면서 고지의 등 뒤에 못박혔다. '이 도시 최고의 부자에 최고의 미인입니다. 그렇지, 고지?' 고지 어깨 너머로 히라세가 말을 걸었다. 위스키 워터 잔을 든 채 고지 옆, 쇼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입가에는 의식적인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고지 친구인 히라세라고 합니다. 쇼짱 팬이기 때문에 오늘 억지를 부려서 끼어들었어요. 시골뜨기이지만 잘 부탁합니다.' 손을 내밀었다. 쇼는 글래스를 내려놓고 맞잡아 주었다. '처음 뵙습니다, 쇼에요.' '이 감격!' 히라세가 말했다. 고지는 저도 모르게 사나운 눈길로 히라세를 쏘아보았다. '그런 얼굴로 보지 마. 우린 친구 아냐. 이 친구 무척 으스댔어요. 자긴 프로 록싱거와 밴드를 함께 했다면서...... 그러지 마, 고지.'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고지는 화를 참으려고 애를 썼다. 히라세가 이처럼 뻔뻔하게 나올 줄은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이 녀석이 정말 쇼를 어떻게 해 볼 생각인가. '고지와 동갑이세요?' 쇼가 물었다. '그래요. 도쿄 있을 때 얘기 못 들은 모양이군요. 중학교 땐 곧잘 어울려 다녔는데......' 쇼는 고지에게로 눈길을 돌려 그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개구쟁이였지?' '그렇지도 않았어. 이녀석이 여러 가지로......' '여잘 알게 해 준 것도 나였어요.' '입 닥쳐!' '왜? 점잔 빼려구?' '그런 게 아냐.' '괜찮아. 이제 우린 어른인데 뭘.' 쇼가 달래듯이 말했다. '봐, 쇼짱도 저렇게 말하고 있잖아? 맨 처음 부른 노래, 무척 좋았어요. 곡명이 뭡니까?' '<샤크>' '멋지군. <샤크> 라면 상어죠? 머리가 나빠 잘 모르긴 하지만......' '맞아요, 상어예요.' '상어가 애인이세요?' 히라세가 뭘 노리고 있는지 그제야 알 수가 있었다. 애인이 형사라는 고지의 말을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별명이 <상어> 에요.' '굉장하군. 뭣하는 사람입니까? 주먹으로 먹고 사나요?' 쇼가 웃었다. '아뇨. 그렇진 않아요.' 히라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런 건 싫어하나요?' 뭘 말하고 싶은 건가. 고지는 히라세를 노려보았다. 히라세는 쇼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듯 뚫어질 듯 쏘아보고 있었다. '주먹쟁이 무척 많이 봐 왔어요. 전 신주쿠에서 자랐거든요. 하지만 좋아할 만한 주먹, 만난 적이 없어요.' '야쿠자 출신은 어때요?' 쇼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히라세씨가 그러세요?' 히라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교 중퇴해서 폭주족을 했죠. 선배에게 끌려 한동안 구미 생활도 했구요.' '그러고 보면 그렇게도 보이네요.' '싫으세요?' '지금은 싫지 않아요, 히라세씨.' '정말?' '고지의 친구니까요.' 쇼는 고지를 바라보았다. 고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도 친구가 되어 주세요.' '이미 친구가 된 것 아녜요?' '아, 그렇게 되나? 역시 쇼짱은 멋이 있어요.' '히라세씨도 뭔가 악기 만질 줄 알아요?' '아니, 난 음치예요. 퉁수 불게 하는 건 잘 하지만..... 앗, 이런 지저분한 말은 해서 안 되는 건데.' '히라세!' '알았어, 너무 그러지 마.' 히라세는 고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쇼가 물었다. '여기서도 밴드 하고 있어?' 고지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젊은 녀석들 봐 줄 땐 있어도......' '봐 주다니?' '오너가 그런 걸 즐겨. 이름 없는 새싹 후원해 주는 것 말야.' 고지의 눈이 자연스럽게 게이코를 쫓았다. 카운터에 기대서서 단골인 양복점 사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전 이외에도 세 곳의 가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로 만족해, 고지는?' '응. 마음 쓸 것도 없어. 취미로 어쩌다가 하는 것이니까.' '그래?' '하지만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면 몸이 뜨거워지지.' '그래?' 쇼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는 그런 이야기를 더 계속하는 게 좋을지 어떨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히라세가 끼어들었다. '이곳 마담, 가카와 재벌의 장녀예요. 독신이기도 하구요.' '어머, 재벌?' 그러나 쇼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운송회사, 백화점, 버스, 부동산, TV방송국, 신문...... 뭐든 다 가지고 있어요. 저 마담 아버지가 오너예요.' '굉장하네요.' '정정해요, 아직. 포르쉐 타고 다니면서......' '관계없잖아, 그런 얘기.' 고지가 말했다. 히라세의 말투가 묘하게도 초조감에 젖어 있는 것 같이 들렸다. '하지만...... 마담은 쇼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잖아? 가카와 운송 CM에 기용될 지 누가 알아? 마담 사촌오빠도 왔었어. 가카와 운송 사장 말야.' '그래?' 'CM 어때요? 이런 시골이라서 별로 안 내키나요?' '그런 건 아녜요. 하지만 CM은 안 어울려.' '쇼짱 자신이 출연하면 될 것 아녜요? CM에 출연한 적 있나요?' 쇼는 웃었다. '없어요.' '한번 부탁해 볼까? 내가 부탁해 보는 건 괜찮죠, 마담에게.' '관둬!' '잘 될 거야. 너도 알잖아?' '안 돼' '후원해 주자구, 우리가. 쇼짱 밀어 주자구.' '고맙지만, 싫어!' 쇼가 단호하게 말하면서 고개까지 내저었다. '왜? 쇼짱 마음 안 쓰이게 하면 되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쇼가 말하면서 히라세를 응시했다. 똑바로 쏘아오는 시선을 맞받으면서 히라세가 순간적으로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요.' 히라세가 말했다. '건배나 하자구.' 글래스를 쳐들었다. '우리의 우정을 위해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녀석이라고 고지는 생각했다. 그러나 쇼는 싫어하는 빛 하나 안 비치면서 맥주잔을 높이 쳐들었다. '건배!' '건배!' 세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11. '미안해. 엉뚱한 녀석이 끼어들어서......' 로열 호텔 현관에 차를 멈추면서 고지가 말했다. '그럴 것 없어.' 쇼가 웃었다. '재미있던데 뭘.' '또라이 같은 데가 있어, 그녀석.' '네 친구이니까......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 '내가 할 말이야. 즐거웠어.' '내일, 푹 자고 있어. 점심께 전화하고 데리러 올 테니까. 볼 것도 없는 곳이지만 내가 안내할께.' '그래도 돼? 폐가 안 되겠어?' '괜찮아. 내일은 가게 쉬는 날이거든. 생선 맛있는 집으로 안내할께.' 고지가 말했다. 쇼는 고지를 응시하면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리고 있을께.' 쇼는 도어를 잡았다. '기다리고 있지, 히라세씨?' 고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는 아직 영업중이었다. 게이코는 양복점 사장과 한잔 하러 자리를 옮기고 없었다. 쇼가 졸린다는 바람에 고지가 호텔로 데려다 주겠다면서 함께 빠져 나온 것이었다. - 이대로 사라지면 안 돼. 일이 있다는 것 잊지 마. 꼭 돌아와야 해. 자리에서 막 일어섰을 때 히라세가 고지의 귀 밑에 대고 못을 박았었다. '괜찮아. 그 녀석은 기다리게 하면 되니까.' 고지의 말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쇼.' 도어를 열면서 쇼는 고지를 돌아보았다. '왜?' '많이 큰 것 같아. 나와 함께일 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역시 프로는 엄청나다는 생각뿐이야.' '그런 소린 그만둬.' 쇼가 고개를 내저었다. '공치사가 아니야. 그렇다고 부러워하고 있는 것도 아니구. 내게 신경을 써 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오늘 비로소 깨달았어. 역시 넌 재능이 있어. 반드시 스타가 될 거야.' 쇼의 눈빛이 따뜻해졌다. '고마워.' 고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상어>, 대단한 녀석인가 보지?' 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잘 몰라. 가까이 사귀면 더 모르게 되나 봐.' '......만나고 싶진 않아.' 고지가 쓴웃음을 지었다. 쇼도 따라웃었다. '폭력 담당인 걸.' '어쩌다가 사귀게 됐누, 그런 녀석과.' 쇼는 개구쟁이처럼 생글 웃음을 흘렸다. '비밀이야.' '그 녀석한테 체포됐었나?' '설마. 나중에 얘기해 줄께.' 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잘 가.' 쇼는 가벼운 동작으로 차에서 내렸다. 성큼 걸음으로 로비 자동 도어 속으로 걸어갔다. 그런 쇼를 고지는 차창 너머로 지켜보았다. 쇼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 계획에 사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게이코 눈 밖에 나고 멸시당하는 것은 신경쓸 일이 못 되었다. 그러나 쇼가 말려드는 것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설령 히라세와 주먹다짐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내일 모레, 쇼가 기차에 몸을 실은 이후라면 뭘 하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쇼에게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어떤 흙탕물을 뒤집어쓰든 상관이 없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히라세가 애매한 웃음을 흘리며 맞아 주었다. '엄청 빨리도 돌아왔군. 옷 입은 채로 했어?' '쓸데없는 소린 집어쳐.' 고지도 옆자리에 걸터 앉았다. 게이코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 1시가 조금 지난 에는 손님이 두 팀밖에 없었다. 고지는 바텐더에게 눈짓을 했다. 맥주를 가지고 왔다. '젖가슴, 사람 죽여 주더군. 애인이라는 경찰관 너무 밝히는 녀석 아냐?' '몰라.' '그러지 마.' 히라세가 왼손으로 고지의 어깨를 주물렀다. 고지는 모른 척하면서 맥주를 마셨다. '사진, 다 됐어.' '그런 월요일에 해.' '뭐? 왜?' '쇼가 머무는 동안은 재미 없어.' '바보. 오히려 더 잘 된 것 아냐? 난 진심이야. 그 여자, 마음에 들었어. CM에 출연시키라고 말할 생각이야.' '싫다고 했잖아, 본인이.' '빈말로 그래 본 것뿐일 거야. 팔리면 그만큼 좋아할 게 뻔해. 연예인 아냐? 얼굴도 이름도 팔리면 팔릴수록 좋은 것 아냐? 유명해진 뒤 그게 우리 덕인 줄 알게 되면 사정이 달라질 거야, 틀림없이.' 고지는 히라세의 손을 뿌리쳤다. 몸을 빼면서 똑바로 히라세를 쏘아보았다. '히라세, 넌 잘 몰라.' '뭘?' '쇼가 싫다고 한 건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야. 걘 그런 아이야.' 히라세는 담배를 빼물었다. 불을 붙여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내리깔았던 눈을 쳐들어 고지를 바라보았다. 사나운 눈빛, 야쿠자의 눈이라고 고지는 생각했다. '잘난 척 뽐내는 게 아니야, 이놈!' '잘난 척하고 있는 게 아니야.'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끼면서 고지가 말했다. '걔, 네 여자야?' '아니야.' '그렇담 나 하는대로 내버려 둬. 잠자코 있으란 말얏!' '히라세!' '시끄러워. 내 마음, 이미 결정했어. 그 여자, 내 것 만들테야. 이번 계획에도 써먹을 생각이구.' 고지는 심호흡을 했다. 히라세의 눈빛은 지금가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나움이 서려 있었다. '잘 들어. 여기 마담 돌아오면 얘길 꺼내겠어.' '안 돼!' '놀고 있네, 병신새끼. 나와 이시와다리가 지금까지 어떤 고생을 해 왔는지 알기나 해? 이제 와서 네놈 혼자 으시대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 '너.....' '잘 들어. 넌 무관하다고 잡아떼더라도 내가 전부 불어 버릴 거니까. 이런 일은 말야, 쇠뿔처럼 단김에 뽑아 버리는 게 상책이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불쑥 내밀어, 상대방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결론을 내버리는 거야. 오늘 해치울거야. 알았지?' 고지는 히라세의 얼굴을 노려 보았다. 정말인 것 같았다. 싫다고 한다면 무슨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원하는 걸 손에 넣는거야. 이미 발판은 마련되어 있잖아? 시시한 생각으로 움츠려들 것 없어.' '쇼가 말려드는 게 싫어서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녀를 품는 것도 품는 것이구...... 이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 '뭘 보구 그 여자한테 그렇게 집착하누?' '내가 원하던 타입이야.' 히라세는 내뱉듯이 말하면서 히죽 웃음을 흘렸다. '게다가 형사 애인이란 것도 마음에 들었구. 신주쿠에서 아무리 으스대는 녀석이라도 여긴 도쿄가 아니잖아? 어쩔 수 없다, 그 말씀이지.' '그런 문제가 아냐.' 고지가 말하자 히라세는 스툴을 빙그르르 돌려, 고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뭔가 잘못 짚고 있는 것 아냐?' '잘못 짚어?' '그 여자는 말야, 도쿄 여자야. 도대체 도쿄가 너한테 뭘 해 줬니? 그 여자에겐 있는대로 행운을 베풀어 줬는지도 몰라. 일단 꿈을 이뤘으니까 말야. 하지만 너한텐 뭘 해 줬어? 말해 봐.' '그렇다고 쇼가 나쁜 건 아니잖아?' '물론 그렇지. 하지만 나쁜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고 해서 넌 평생을 이 꼴로 보낼 생각이야?' '쇼에게 원한 건 하나도 없어.' '누굴 원망하라는 뜻이 아니야. 난 내 마음에 들었으니까 품어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야.' '쇼 생각도 해 줘야 할 것 아냐?' '예쁜 말만 골라서 하고 있네. 여자란 건 말야, 한번 찍어눌러 버리면 그걸로 끝이야. 어떻게든 할 수 있게 돼.' '쇼에겐 손대지 말아!' '반한 모양이군, 너도.' 고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 수가 없었다. 특별히 쇼가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형사라는 애인과 헤어져 주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한번쯤, 쇼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키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아니면 한번쯤 안아보길 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쇼가 거절한다고 해서 속상해 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호텔 방에서처럼 가슴 두근거리다가 가벼운 실망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그 이상 깊은 상처를 받을 것 같지는 않았다. 히라세는 몸을 일으켰다. 쳐다보는 고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밖으로 나가서 머리나 식히자구.' 가게 사람들이 불안한 눈초리로 고지와 히라세를 바라보았다.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 '그래.' 고지도 퉁명스레 내뱉으며 일어섰다.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다카시 등 웨이터들에게 말 한마디 던지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주차장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갈을 간 바닥에 로프를 묻어 구획을 지어놓은 주차장이었다. 고지의 차, 다카시의 차, 주방장 차, 손님이 몰고 온 아우디, 히라세의 크라운이 주차해 있었다. 자갈 소리를 내면서 두 사람은 마주 섰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 얘기하는 거다!' 히라세는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너와 나 사이에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어.' '뭘 말인가?' 짐작이 갔지만 고지는 되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사업은 사업, 그 여자 문제는 분명히 매듭을 지어야겠어.' 밤공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느껴졌다. 쇼는 지금쯤 샤워를 끝내고 침대로 들어갔을까. 아니면 애인인 <상어> 라는 형사에게 다이얼을 돌리고 있을까. 나는 - 나는 어째서 방으로 따라 들어가지 않았을까. 노래 칭찬만 늘어놓고는 어정어정 발길을 돌린 건 결국 허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쇼의 과거와는 전혀 상관없는 얼치기 야쿠자와 주차장에서 심야의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히라세의 오른손이 바람을 갈랐다. 눈앞에 흰 그림자가 번쩍한 순간, 고지는 콧등에 심한 충격을 느끼면서 비틀거렸다. 히라세가 고지의 얼굴 한복판에 스트레이트를 먹인 것이었다. 안면이 한편으로는 뜨거우면서 한편으로는 마비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끈끈한 감촉이 입술을 타고 흐르다가 턱을 따라 방울방울 떨어졌다. 고지는 눈을 크게 떠서 히라세를 노려보았다. 히라세의 오른손이 다시 움직였다. 필사적으로 왼팔을 들어 막았다. 그 순간, 명치끝에 심한 충격을 느꼈다. 오른손은 페인트, 왼손이 진짜 펀치였다. 숨이 막혔다. 상체가 푹 꺽였다. 히라세의 움직임은 정상적인데 자신만이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히라세가 앞으로 다가서면서 두 손으로 고지의 머리를 움켜 잡았다. 허리가 꺾인 자세에서 얼굴만 쳐들었다. 히라세의 오른 무릎이 치솟아 올라갔다. 다시 충격이 몰아쳐 왔다. 이번은 입 언저리였다. 입술이 마비된 것 같았다. 히라세가 두 손을 놓는 순간, 고지는 뒤로 벌렁 자빠졌다. 자갈이 튕겨 나갔다. 히라세가 내려다보았다. 공포와 정신적 충격으로 고지는 눈조차 감을 수가 없었다. 벌렁 자빠진 자세로 히라세를 마주 쏘아보았다. '남은 건 걷어차는 것뿐이야.' 히라세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말하자면 그런 거야. 상대가 쓰러지면 이쪽이 이긴 거야. 그 다음은, 걷어차는 것 뿐이야. 발길질을 계속하는 거지. 죽어도 좋은 녀석이면 머리와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는 거야. 꼭 살려줘야 할 상대라면 어깨나 다리를 노리구. 알았나?' '뭐, 뭘 말야?'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혀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딱딱한 작은 이물질이 입 안에서 굴렀다. 부러진 앞니 토막이었다. '고지, 네가 졌다는 뜻이야. 솔직하게 인정해.' '그럴 순 없어......' '뭐? 다시 한번 말해 봐!' 히라세가 험상궂은 얼굴로 다가왔다. 고지는 몸을 웅크려 피했다. 히라세가 허리를 세차게 걷어찼다. '이새끼, 정말 뜨거운 맛 한번 볼래?' '이러지 마!' '그럼 졌다고 해. 졌습니다 말해!' '싫어.' '뭐라구?' 갑자기 불빛이 쏟아졌다. 히라세가 얼굴을 들었다. 고지도 고개를 돌렸다. 포르쉐 특유의 헤드라이트가 주차장으로 달려 들어왔다. 게이코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불빛 속에 들어 있는 히라세와 고지의 모습을 눈이 동그래져서 프론트 유리 너머로 쏘아 보았다. '이봐요!' 도어를 열고 나오면서 게이코가 외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일어서!' 히라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지는 두 손을 짚고 일어섰다. 얼굴에서 흐른 피로 흰 셔츠의 3분의 1 이상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게이코가 차에서 내려섰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이봐요, 당신.' 게이코는 히라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히라세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당신, 고지 친구지? 그런데 왜?' 히라세는 대답 대신 고지 쪽으로 턱짓을 했다. 야단맞고 뾰로통해 있는 어린 아이의 몸짓이었다. '대답해 봐요!' 게이코의 음성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고지가 막고 나섰다. '괜찮아요, 마담.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럼 112 신고, 내가 하지.' 차 안으로 팔을 뻗어 카폰을 잡았다. 그제서야 히라세가 능글맞게 입을 열었다. '112에 신고해도 괜찮을까? 천하의 가카와 가가 흙탕물을 뒤집어 쓸 텐데요?' '뭘 그렇게 중얼거려?' '안 그래, 고지?' 히라세가 고지를 쏘아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고지는 좋은 녀석이에요. 마담을 감싸느라고 저렇게 된 겁니다.' '뭘 얘기하고 싶은거야?' 게이코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히라세를 노려보았다. 두 다리를 가볍게 벌린 자세로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서 있었다. '내 친구 중에 배를 좋아하는 녀석이 있어요. 크루저랑 요트 사진 찍으러 항구로 자주 나가죠.' '그래서 어쨌단 말야?' '꿀맛 같은 장사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아녜요? 모두들 엄청나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까지 벌어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게이코는 말이 없었다. 고지 쪽에서 보면 역광인 탓에 표정까지는 읽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나지막한 소리로 게이코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 '그래? 그럼 좋아요. 마담은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해 두지. 얘긴 이쪽에서 꺼낼 수밖에......' '뭘 어쩌려구?' '알 것 없잖습니까?' '뭘 어쩌려는 거야?' 게이코가 같은 물음을 되풀이했다. 히라세는 고지에게로 사인을 보냈다. '마담......' 고지는 오른손으로 입을 닦았다. 격심한 통증이 스쳤다. '가카와 운송 사장님과 전무님......' '그 사람들이 어쨌다는 거야?' '알고 있었습니까?' '뭘?' '저어...... 약 말입니다.' 게이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다만 고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히라세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게이코가 쌀쌀맞게 잘랐다. '당신한테 물은 게 아니야. 난 지금 고지와 얘기하고 있는 중이야.' '잘난 체하는 게 아니야, 빌어먹을! 잘 들어줘.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후회하게 해 줄테니까.' 게이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히라세를 쏘아보았다. '약점을 잡았다, 그 말이지? 하지만 당신이야말로 정신 똑똑히 차려. 후회하지 않으려면.' '빌어먹을! 경찰이 두렵지도 않아?' '경찰이 나섬 당신은 틀림없이 죽어.' 게이코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협박할 생각이라면, 우리 가문의 힘도 알고 있겠지? 이 지역 형님들을 모두 적으로 돌릴 생각?' '야쿠자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아.' 히라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나도 당신 따위, 하나도 두렵지 않아. 그러니까 고지와 내 얘기에 끼어들지 마.' 히라세는 침을 탁 뱉었다. '맘대로 해, 할망구야.' 게이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지를 쏘아보았다. '고지, 당신도 한패야?' 고지는 밤하늘로 눈길을 던졌다. 각오하고 있던 순간이 온 것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속이 뒤틀려 왔다.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지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게이코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담배를 피워 무는 히라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비지니스를 원해?' '그런 셈이야.' 히라세는 크게 입을 벌려 천천히 연기를 뿜어냈다. '조건은?' '50 퍼센트.' '50 퍼센트, 뭣의?' '그쪽 수입의 50 퍼센트를 내놓으란 뜻이야. 아까 언뜻 비친 것처럼 야쿠자를 앞세우려 든다면, 현경 본부에 사진을 제출하겠어. 고지와 나 말고도 한 녀석이 더 있어.' 경멸이 서린 쌀쌀맞은 눈초리로 게이코는 히라세를 응시했다. '당장 대답할 순 없어.' '그러시겠지. 우리 모두 한자리에 모여 맛있는 것 먹어가면서 얘길 나누고 싶은데...... 마담 생각은?' '어쨌든 시간이 필요해.' '어느 정도로?' '내일 고지한테 연락하지.' 게이코 눈길이 고지에게로 옮겨졌다. 쌀쌀맞은 경멸이 서린 바로 그 눈길이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 봐. 그런 얼굴로 손님 앞에 나설 순 없잖아?' '마담, 전 내일......' 쇼를 안내하기로 약속했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쇼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 아닌가. '삐삐 가지고 있지? 개업하면서 지급했던 것 말야.' '네.' 지금은 별 소용이 없어 집에 쳐박아 놓고 있었다. 전지가 나갔을 게 틀림없었다. '외출하게 되면 차고 나가 줘.' 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봐.' 자동차 열쇠는 웃옷 주머니에 들어 있었고, 웃옷은 가게에 걸어놓은 채로였다. '돌아와!' 히라세가 베어내듯 날카롭게 외쳤다. 고지는 입을 다문 채 머리를 숙였다. '내가 태워 주지.' 그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들었다. 스스무가 요쓰야의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가 지나서였다. 좀더 빨리 출발하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스미를 만나 <캔디>를 건네 주고 샤키를 되찾고 싶었었다. 하지만 형인 노보루의 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노보루는 스스무의 얘기를 끝까지 말없이 듣기만 했다. 샤키에게 <캔디>를 공급했던 것, 도쿄 애인으로 삼아 돈까지 대준 일, 그리고 샤키가 스스무의 본명과 연락처를 알고 있었던 탓에, 이렇게 스미에게 정체가 탄로나고 말았다는 것을 모두 털어놓았어도 호통 한번 치지 않았다. 스스무는 노보루에게 얻어터질 각오로 있었다. 어리석은 놈이라는 호통과 함께 주먹이 날아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샤키를 구해 달라고 노보루에게 매달릴 생각이었다. 노보루 몰래 <캔디>를 가지고 가서 스미와 거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스미가 본성을 드러낸 지금, 노보루라는 지휘관 없이 대결한다는 건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설령 샤키를 구해낸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거래는 지금과 전혀 다른 것이 될 게 틀림없었다. 스미의 태도가 표변하리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캔디>의 가격 인하는 물론, 필요할 때 필요한 양을 공급해 달라고 요구할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야쿠자 앞에 무릎을 꿇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은 없게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든, 무슨 일이 있든 스미와의 관계를 적어도 균형 상태로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보루의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노보루는 불기 없는 쌀쌀한 응접실에 바위처럼 앉아 스스무의 얘기를 들었다. '너도 <캔디>에 빠져 있냐?' 스스무의 얘기가 끝나자 제일 먼저 한 질문이었다. '빠지진 않았어. 섹스할 때에만......' 스스무는 필사적인 어조로 말했다. 지금부터는 정말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요즘 갑자기 체중이 줄어들었다. 바지 허리가 헐렁해진 것이었다. 노보루가 눈치 채는 건 시간문제였다. 노보루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간단치 않군. 하나 우선 지금부터 네가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이야. 이건 절대적인 명령이야.' 스스무는 심호흡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께요. 약속해요, 형.' '거짓말하면 안 돼!' 노보루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한번 삐끗하면 너와 나는 파멸이야.' '알고 있어요.' 스스무가 끄덕이자, 노보루는 한참 동안 말없이 스스무의 얼굴을 응시했다. '샤키를...... 샤키를 구해줘요, 형.' '단념할 순 없나?' '못해요, 절대로.' 스스무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 앞에 눈물을 보이는 게 몇 년만일까. '반했나 봐요, 걔한테. 녀석들이 걔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만 해도 미쳐 버리겠어.' '쓸데없는 건 생각지 마. 지금이야말로 냉정해야 돼. 녀석들은 네가 허둥대길 바라고 있어. 그게 녀석들의 수법이야. 겁을 먹고 허둥대면 그 틈을 노려 후려치는 게 녀석들 수법이야.' '알았어요. 노력해 볼께......' 스스무는 훌쩍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되지?' '우선 그 아가씨가 무사한지 어떤지부터 확인해 봐.' '지금?' '당장은 아니야. 도쿄로 가서 스미와 만나기 전에 확인하면 돼. 하지만 지금까지 해 온 방법으로 만나는 건 절대로 안 돼.' 일단 말을 끊은 노보루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스스무는 말없이 노보루를 응시했다. 자그마한 얼굴, 벗겨진 이마...... 이윽고 노보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하도록. 상대방이 장소를 지정하게 해서는 안 돼.' '샤키는...... 샤키는 어떻게 하지?' '신칸센에 태워. 신칸센 안에서 네 핸디폰으로 전활 걸게 하는 거야.' '그럼 여기로?' 스스무는 눈이 둥그래졌다. '그래. 이곳으로 오게 하는 거야. 도쿄에 있으면 위험할 테니까 말야. 내가 역으로 마중을 나가지. 무사히 도착하면 너한테 연락할께. 그동안 너는 녀석들과 함께 있는 거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녀석들이 아가씰 풀어 주지 않을 거야.' '알았어요.' '내가 연락하면 넌 미리 <캔디>를 감춰둔 곳으로 녀석들을 데리고 가. 역 근처의 코인 로커 같은 데가 좋겠지. 단, 파출소가 가까운 곳이라야 해.' '대금은?' '받아야지. 녀석들이 값을 깍으려 들지도 몰라. 그땐 들어 줘.' '하지만 그 뒤엔 어떻게 하지?' '경찰의 힘을 빌려야지.' '경찰을?' '잊었나, 사메지마라는 형사...?' '하지만 어떻게 해서?' '내일 바다로 나갈 생각이야. 넌 밤에 자동차를 몰아 도쿄로 가. 단, 그 전에 나와 함께 에 들려야 해.' '게이코 가게에? 왜?' '거기에서 사메지마의 여자를 만날거야' '록 가수 말이우?' 스스무는 뭐가 뭔지 모를만큼 혼란스러웠다. 뭣 때문에 신주쿠 형사의 애인이 에 오는가.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재미있는 우연이야. 지난날 그 아가씨와 함께 밴드를 했던 녀석이 에 와 있어. 점장으로 말야.' '점장이라면 게이코의 페트?' '그래. 투어중인 사메지마 애인의 밴드가 이 근처까지 왔어. 온 김에 잠시 들르겠다고 한 모양이야. 게이코는 에서 노래를 부르게 할 생각인가 봐. 나도 찬성했어. 한술 더 떠서 가카와 운송 CM송 가수를 찾고 있다고 게이코에게 넌지시 말해 뒀어.' '게이코도 알고 있수?' '아무 것도 몰라. 언제나 제 기분 내키는 대로니까. 젊은 남자 즐기느라고 정신이 없어.' 스스무는 다시 한번 천천히 노보루를 바라보았다. 형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가. 형사 애인을 인질로 잡아 스미 일당을 어떻게 해 보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지름길이 아닐까. 그러나 형의 두뇌를 스스무는 믿고 있었다. 노보루가 그렇게 하겠다는 걸 보면 이미 모든 계산이 끝난 게 틀림없었다. '이곳 일은 내게 맡겨. 넌 어쨌든 신중하게 내가 시킨 대로 움직여. 어떤 일이 있어도 네가 인질로 잡혀선 안 돼. 여자 - 샤키라고 했나? - 대용품은 찾아낼 수 있지만 널 대신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알겠나?' '네, 알았어요.' '만약 네가 인질로 잡힐 것 같으면...... 그땐 여잘 버려! 알았지?' '네.' '좋아. 그럼 내일 밤 에 들렀다가 도쿄로 가. 요쓰야의 아파트로 말야.' '나도 꼭 함께 가야 하우? 형사 애인 노래 들으러......' '봐둬야 해.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넌 그 형사에게 자기 애인을 알고 있다는 걸 알려야 하니까 말야.' '알았어. 좀더 이른 시간에 도쿄로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허둥댈 것 없어. 스미 녀석들은 네가 허둥대길 바라고 있지. 그걸 잊어선 안 돼!' 아파트 주차장에 내린 스스무는 BMW 트렁크와 뒷좌석에서 <캔디> 30만 정이 든 카튼 박스를 꺼냈다. 가로세로 50 센티미터 시트 한 장에 <캔디> 6백25정이 박혀 있었다. 30 만정이면 그 시트로 4백80장이었다. 박스는 모두 4개였다. 한 상자에 시트 1백20장, 7만5천 정이 들어 있었다. 주차장을 나온 스스무는 2LDK 아파트, 커튼을 친 리빙룸에 박스를 쌓아놓았다. 스스무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도로가 한적했던 탓에 생각했던 것 보다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불안과 피로로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있었다. 끊기로 맹세까지 했지만 스스무는 <캔디>를 빨았다. 를 나와 노보루와 헤어져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에 접어들자 더이상 견딜 수 없었다. BMW엔 언제나 <캔디> 3알을 숨겨두고 있었다. 그 중의 한알을 입에 물었다. 도쿄에 도착할 때까지 스스무는 3알 모두 빨아 버린 것이었다. 스미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이래, 잠 못자는 밤이 이어졌다. 그런 데다가 에서 그 아가씨의 노래를 들으면서 위스키 워터를 두 잔이나 마신 게 경솔했다. 졸음이 쏟아진 것이었다. 졸면서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일으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이 아닌가. <캔디>로 잠을 쫓아야지 -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캔디>의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 지금, 깊은 늪에라도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캔디>를 입에 물면, 금방 머리가 맑아지면서 사고력에도 가속이 붙는다. 하지만 효과가 사라지면 나무 인형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머리만이 아니었다. 몸도 관절 마디마디가 제멋대로 삐걱거렸다. 일어서거나 걷는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귀찮기만 했다. 스스무는 소파에 누운 채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곧 먼동이 틀 시간이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창 밖이 감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스미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하지만 비록 전화이긴 하지만 스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걸 생각하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샤키를 한시라도 빨리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과, 모든 걸 내팽개치고 싶은 생각이 머리 속에서 동시에 소용돌이쳤다. - 지금까지 잘도 으스댔지? 꿇어앉아 빌어, 이 새끼! 스미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스미의 부하들이 둘러서서 발길질을 했다. 샤키도 끌려 나왔다.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하얗게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샤키가 흐느꼈다.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사내들이 줄줄이 샤키 위에 올라탔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칼날이 번쩍했다. 스미가 단도를 들고 다가왔다. - 넌 이제 끝장이야. 스미가 말했다. 단도 끝이 스스무의 배에 박혔다. 스스무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이제 알았나? 이새끼!> 라는 호통을 분명히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신이 땀에 젖어 있었다. 냄새도 지독했다. 이런 상태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는가. 스스무는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샤키를 구해낼 때까지는 버텨야 할텐데. 박스를 쌓아둔 곳으로 다가갔다. 자신에게 에너지를 주입하려면 그 길 밖에 없었다. 간단히 꺼낼 수 없도록 박스 포장은 여러 겹으로 되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테이프를 뜯어내려고 해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밀착시킨 테이프 가장자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성난 짐승처럼 으르릉거리면서 주먹으로 박스를 쳤다. 거실 안을 둘러보았다. 사이드보드가 눈에 잡혔다. 무릎 걸음으로 다가가 서랍을 잡아뺐다. 사명(社名)이 든 봉투와 편지지, 볼펜 따위와 함께 중형 카터 나이프가 카페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카터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미끄러져 나왔다. 스스무는 홀린 듯이 칼날을 들여다보면서 계속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 찰칵찰칵. 칼날이 상하로 움직였다. 찰칵찰칵. 이윽고 정신이 들었다. 카터 나이프로 테이프를 잘랐다. 거짓말처럼 잘려 나갔다. 열십자로 붙인 테이프도 잘랐다. 카터 나이프를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박스를 찢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정제 시트가 손에 잡혔다. 샤키를 구해내기 위해서야. 우선 이걸로 몸을 가볍게 해야 하는 거야. 샤키만 구해내면 모든 게 다 잘 될거야. 고향으로 돌아가면 더이상 <캔디>에 손을 안 댈거야. 샤키와 둘이서 얌전하게 살아가야지. 결혼을 해도 괜찮아. 형네와 같은 집을 마련해서 샤키를 사모님으로 불리게 해야지. 현기증이 났다. 눈을 감았다.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손을 짚었다. 공교롭게도 손이 박스 안의 <캔디>를 짚고 말았다. 잡히는 대로 끄집어 냈다. 지금은, 이번만이야.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샤키만 구해 낼 수 있다면 <캔디> 따위, 몇 알을 먹든 상관없지 않은가. 엄지손가락으로 투명한 플라스틱을 눌렀다. 뒤쪽 은박지가 터지면서 알약이 한알 굴러나왔다. 입에 물었다. 열이 내리듯이 머리 속에 싸늘한 기운이 상쾌하게 번져갔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잘 될거야. 잘 될거야. 잘 될거야...... 손목시계를 보았다. 가볍게 팔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몸이 나무인형에서 사람으로 되돌아 온 것이었다. 새벽 5시 3분. 스미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기다리고 있어. 네놈들 생각대론 잘 안될걸! 12. 삐삐가 울렸을 때, 사메지마는 <킹덤 하이츠 산노> 앞 일방통행로 입구에 세워둔 BMW 안에 있었다. 삐삐는 소리 대신 진동으로 작동되도록 스위치를 바꿔 넣어두었다. 작동을 멈추게 해서 액정 표시를 들여다 보았다. 10자리, 낯선 숫자가 나타나 있었다. 손목 시계를 보았다. 새벽 1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좁은 일방통행로 양쪽, 심야의 주택가는 물밑처럼 조용했다. 잠복하고 있는 사메지마도 몰려드는 졸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울린 삐삐가 어떤 의미에선 고맙기까지 했다. 사이드 미러로 주위를 확인한 다음 차에서 내렸다. 하품에 이어 심호흡을 했다. 졸음을 끝내 이길 수 없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BMW 안에는 커피 포트와 카페인 알약과 칫솔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양치질도 잠 쫓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다만 가까이 수도가 있거나 미네랄 워터를 갖추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지만. 언젠가 한번은 물을 준비하지 못한 걸 깜박 잊고 양치질을 한 적이 있었다. 근처에는 콜라 자판기밖에 없었다. 다른 음료는 품절이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치약과 콜라가 뒤섞인 거품맛은 잠을 쫓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지금은 카페인 알약이나 칫솔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산책을 한 다음 전화로 수다를 떨고 나면 정신이 맑아질 것 같았다. 차를 잠근 다음, 3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가능한 한 그 가게는 이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킹덤 하이츠 산노>와 너무 가깝기 때문이었다. 스미나 부하들이 뭔가 사러 들를 가능성이 많았다. 사메지마는 도게와 달라 후지노 구미 사람들에겐 얼굴이 팔려 있었다. 이런 데서 맞부닥친다는 건 잠복 근무중임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편의점의 하얀 불빛으로 주변은 대낮처럼 밝았다. 가게 안에 폭력단으로 보이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음을 확인한 사메지마는 입구 자동도어 옆에 있는 공중전화기로 다가섰다. 본청 소속 수사원들에게는 휴대전화가 지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선 서원들은 특별 수사본부에라도 편입되지 않는 한, 아직은 그림의 떡이었다. 녹색 공중전화 옆에 우산꽂이가 보였다. 저녁 나절 한차례 비가 쏟아졌었다. 우산꽂이 바닥에 고인 물에 가게 안의 형광등이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전화 카드를 전화기에 꽂은 다음, 넘버를 눌렀다. 신호음이 다섯 번쯤 울렸을 때 상대방이 나왔다. 남자 목소리로 호텔 이름을 말했다. 사메지마는 쇼를 찾았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한참 있다가 다시 신호음이 울렸다. '지금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엔 금방 상대방이 나왔다. 삐삐를 치고 나서 쇼는 줄곧 전화기 옆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사메지마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흘렸다. '여보세요.' '어디 있었어?' '오모리 쪽이야.' '결국 일 나갔군.' 쇼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목이 터진 것 같지는 않았으나 평소때보다 훨씬 허스키한 게 오히려 어른스럽게 들렸다. '그렇게 됐어. 거긴 어때?' '피곤해.' '옛날 친군 만났겠지?' '응. 잘한 것 같아, 여기 들른 것.' '변하지 않았어?' '그렇진 않았어. 하지만 좋은 쪽으로 변한 것 같아.' '그래? 잘 됐군.' '응.' 쇼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노래 불렀어, 함께?' '불렀어.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어. 마치 줄곧 계속해 온 것처럼 말야.' '널 위해 연습한지도 모르잖아?' '그랬을지도 몰라.' '좋은 사람이로군.' '응.' '내일도 노래 부르나?' '아니, 내일은 걔가 자동차로 이곳 저곳 안내해 준댔어. 맛있는 생선 먹으러 가기로 했어.' '즐겁겠군.' '그럼. 회 한접시 사다 줄께.' '관둬. 가지고 오는 동안 썩어문들어질텐데 뭘.' 사메지마는 고개를 들었다. 등 뒤에 인기척이 났다. 공중전화 2대 가운데 한대는 비어 있었다. 쇼의 웃음소리가 수화기에서 울려 나와 귀를 간지럽혔다. '그만 끊자구.' '조금도 걱정이 안 되는 모양이지?' '뭘 걱정하라는 거야?' '아무 것도 아냐. 또 전화할께.' '이봐.' '왜?' '맛있는 생선, 실컷 먹고 와.' '알았어.' 쇼는 전화를 끊었다.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도게가 낯선 사내와 함께 서 있었다. '곤란하군. 얼굴 알려진 사람이 어정거리고 다녀서야......' 사내가 말했다. 험상궂은 표정이었다. 마흔 너댓살쯤 되었을까. 올백으로 빗어넘긴 머리, 그러나 벗어진 정수리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체크 무늬 셔츠에 골프 웨어로 보이는 싱글 슬랙스, 밝은 회색 재킷 차림이었다. 눈자위엔 신경질적인 주름이 패어 있었다. '사메지마씨.' 도게가 끼어들었다. '이 분이 이다미 주임정보관님입니다.' 도게의 상사였다. 이다미는 핥듯이 사메지마를 쳐다보았다. '좀 긴급한 일이 생겨서...... 방범의 사메지맙니다.' 이다미는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았다. '저기 가서 얘길 하죠.' 도게가 턱으로 가리켰다. 편의점에서 20 미터쯤 떨어진 곳에 왜건이 한 대 서 있었다. 무선 안테나가 달린 차였다. 왜건에 올라타자 도게가 입을 열었다. '사메지마씨에게 협력을 부탁한 건 접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본청 보안도 아닌 사람이 뭣 때문에 어슬렁어슬렁 끼어들었어?' 이다미가 담배를 꺼내면서 말했다. 라크였다. '사메지마씨는 후지노 구미의 스미를 줄곧 마크해 오면서 <캔디> 건도 주목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협력을 요청했던 겁니다.' '영장은 가지고 있나?' 이다미는 도게를 무시한 채 사메지마에게 물었다. '아뇨.' '어쩔 작정이야, 영장도 없이. 여차하면 긴급체포라도 할 작정인가? 하는 짓이 거칠기 짝이 없군.' '지금으로선 저 아파트에서 범죄가 진행중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까요.' '그럼 뭣 때문에 잠복 감시하고 있나?'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어떤 가능성에 대비한 겁니다.' 이다미는 피우던 라크를 재떨이에 부벼껐다. '신주쿠 서 방범과는 그처럼 한가한 곳인가? 저 안에 지금 누가 있어? 아는대로 말해 봐.' '후지노 구미의 스미, 그리고 록봉기 클럽 호스테스 가게야마 마사코.' '그냥 만나고 있는 걸 뭣 때문에 감시하고 있나?' '주임님.' 도게가 더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사메지마는 이다미를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 두 사람이 방안에 그냥 쳐박혀 있기만 한 거라면 당신이나 내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 설령 서로의 즐거움을 높이려고 각성제를 한두 대쯤 주사하고 있다 해도 말이오. 당신이나 내가 여기 이렇게 있는 건 스미가 풀어먹이고 있는 <아이스캔디> 제조원이 걸려들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가게야마 마사코에겐 기둥서방이 있어. 바로 그 녀석이 <캔디> 제조원이야. 한마디 덧붙이면 마사코가 이 아파트에 있는 건 225의 가능이 높다고 봐.' 225는 경찰 무선 코드로 유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형법 225조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이다미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돌아가!' '거절하겠소. 난 당신 부하가 아니오.' '일이 잘못 되었을 때 당신이 책임질 수 있나? 우린 20명이나 이 사건에 투입되고 있어. 신주쿠 서 외토리 따위가 책임질 수 있느냐, 이 말이야!' 사메지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지난 번, 당신네가 하즈노를 잡아채 갔을 때 난 가만 있었어. 도게씨 말만 듣고 모른 척했어. 이번은 당신네 차례야.' '뭐라구?' 이다미가 호통을 쳤다. '여기가 네 관할이야? 신주쿠로 썩 꺼져! 신주쿠에도 각성제 밀매꾼이나 중독자가 득실거릴 거야. 가서 그놈들이나 잡아!' '이건 내가 쫓고 있는 사건이야.' '잘난 척하지 마! 손을 떼라면 떼!' 이다미가 얼굴을 바싹 붙여 왔다. '거절하겠어.' '마약 단속관을 깔볼 생각인가? 이봐, 경찰 조직이 거대하다고 우릴 깔보고 있는 거야?' '깔보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잖아!' '뭐라고, 이 새끼가!' 이다미가 사메지마의 멱살을 잡았다. 사메지마는 이다미의 손을 뿌리쳤다. 이다미 얼굴이 분노로 시커멓게 물들었다. '도게, 이 녀석을 체포해!' '주임님.' '공무집행 방해 현행범으로 체포해!' '해 볼테면 해 봐.' 사메지마가 나지막한 소리로 으르릉거렸다. '그 잘난 당신 체면 때문에 <캔디> 제조원을 놓쳐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어떻게 책임지려구 이러는 거야? 내가 말하는 건 후생성이나 경찰청 문제가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도 <캔디>로 각성제에 중독되고 있는 중학생, 고등학생들을 어떡하려고 이러는 거야? 말해 봐.' 이다미는 거친 숨을 내뿜었다. '네 녀석 혼자만 잘났다, 그건가? 잘난 척 으스대기만 하는 주제에......' 이다미가 재킷 자락을 헤쳐 수갑 케이스의 뚜껑을 열었다. '도게, 네가 않겠다면 내가 하지.' '뱃지가 압력을 가해도 끝가지 잘난 척하는지 두고 봐야겠군.' 사메지마의 말에 이다미의 표정이 바뀌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눈빛이 이글거렸다. 뱃지란 국회의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새끼, 그런 건 어디서 주워 들었어?' '대답할 필요 없잖아? 한데 어때? 끝까지 버틸 자신 있나?' 이다미는 이빨을 꾹꾹 깨물었다. '직속상관 이름을 대.' '직접 조사해 보시지.' '네놈, 옭아넣을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어떻게? 뱃지가 두려워 적당히 축소했어야 할 수사를 경찰이 끼어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쫓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고 날 옭아넣어?' 이다미의 손이 번쩍했다. 수갑이 사메지마의 광대뼈에 명중하면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도게가 이다미의 손을 잡아 말렸다. '이러심 안됩니다, 주임님.' 사메지마는 얼굴을 만져 보았다. 마비된 것 같았다. 피가 쏟아졌다. 갑자기 전신이 뜨거워졌다. 이다미의 입 언저리에 만족스런 웃음이 번졌다. 사메지마는 잽싸게 잽을 먹였다. '사메지마씨......' '걱정 마. 더 이상은 손대지 않을 테니까.' 이다미는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입술을 지그시 싸눌렀다. 사메지마를 노려보는 눈빛엔 증오가 이글거렸다. '우리가 이렇게 붙어 싸우면, 저쪽 녀석들만 좋아할 뿐입니다.' 도게가 이다미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시끄러워!' 이다미가 억누른 목소리로 으르릉거렸다. '도게, 넌 이 녀석한테 바싹 붙어 있어. 만약 수살 방해하려 들면 망설일 것 없어. 다리에 한방 쏴 버려.' 도게는 숨을 들이마시면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그게 바로 네 임무야. 알았나?' '알았습니다.' 도게는 입술을 내밀면서 대답했다. '썩 꺼져!' 이다미는 꽉 깨문 이빨 사이로 내뱉듯이 말했다. 사메지마는 왜건의 슬라이드 도어를 열었다. 내려서자 도게가 뒤를 따랐다. '도게.' 이다미가 불러세웠다. 도게가 돌아서자 명령을 내렸다. '무선은 두고 가.' 도게는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다음 순간 분한듯 얼굴을 숙이면서 휴대용 무선기를 점퍼에 떼냈다. 잠복 근무 팀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도게는 무선기를 시트 위에 내동챙이치듯 내려놓았다. '잘 감시해.' 이다미는 거세게 왜건의 슬라이드 도어를 닫아 버렸다. 사메지마는 말 한마디 없이 걸어갔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려고 애를 썼다. 도게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한마디 했다. '미안하게 됐군.' '괜찮아요.' 도게는 들릴듯 말듯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덕분에 졸음은 달아났어.' 사메지마가 말에 도게는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주임님은 성질이 단순하면서 급한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경찰도 싫어하고......' '경찰 때문에 수도 없이 쓴물을 들이켰으니까 그럴만도 하죠.' '입장이 바뀌면, 그렇게 할 경관도 없어.' '나도 당한 적이 있죠. 신분증을 제시했는데도 파출소까지 끌고 가더군요.'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해서 걸어갔다. BMW에 타자 사세지마는 대시보드를 열었다. 커피포트를 꺼낸 다음, 안쪽에 들어 있는 구급상자를 잡아당겼다. 룸미러를 들여다보면서 뺨의 피를 닦아낸 다음 반창고를 붙였다. 도게는 말없이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구급상자를 제자리에 밀어넣은 다음 사메지마는 커피포트를 들었다. 쇼가 사다 준 원두를 갈아 만든 커피였다. '고마워요.' 도게는 딱딱하게 인사한 다음 받아마셨다. '맛있군요. 부인이 끓이신 겁니까?' '난 독신이오.' 빈 컵을 받아 사메지마는 자기 몫을 따랐다. '부인한테 거는 전환줄 알았는데......' '잘못 안 거요...... 어쨌든 거기서 전활 건 것은 경솔했는지도 몰라.' '주변 확인은 했겠죠?' '물론.' 커피를 마셨다.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사귀는 여자는 있죠?' '그럼. 지금 여행중이지만.' 도시 이름을 알려 주었다. 도게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거긴 뭣 때문에?' 묻는 말투까지 빨라진 것 같았다. '관광. 가수야. 그렇게 팔리지는 않지만 록가수야. 옛날 밴드 동료가 그곳 라이브 하우스에서 일을 한다든가...... 콘서트 투어 귀로에 잠시 들른댔어.' '바로 거깁니다.' 도게가 말했다. 눈빛이 이상스럽게 번쩍였다. 한박자 늦게 사메지마도 알아차렸다. '그곳이었나?' '네. 지금 총수의 할아버지가 그 곳 현령(縣令) 이었죠.' '이름은? 재벌 이름 말야.' '가카와입니다. 백화점, 운송, 부동산, 신문사, TV방송국, 교통...... 모든 걸 한손에 움켜쥐고 있죠.' '총수는 어떤 사람인가?' '올해 일흔이 되는 노인입니다. 아들은 병으로 죽었고 이혼한 딸 하나가 있을 뿐이랍니다. 해서 가카와 재벌은 지금도 노인이 이끌고 있다는군요. 불원간 조카 한사람을 양자로 들일 계획인 모양입니다.' '조카?' '네, 배다른 동생이 아들 둘을 두었답니다. 동생이 죽은 뒤, 두 아들이 운송회사를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어요. 두 아들 가운데 동생쪽이 하라다와 닮았어요.' '나이는?' '동생인 가카와 스스무는 서른하나입니다.' '형은?' '가카와 노보루, 서른여덟.' '형제가 <캔디>에 관련되어 있다는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나?' '그 지역 마약단속관 사무소가 캐치했죠. 그 일대는 폭력단 단속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 같은 구미가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어요. 이다 구미라고 하는데, 역시 가카와 재벌 영향하에 있죠.' '이다 구미?' 이름은 듣고 있었다. 그러나 도쿄의 신주쿠까지는 진출하지 못한 구미였다. '이다구미와 <캔디>의 관계는?' '없어요. 현내에 유통되고 있는 각성제는 다른 현에서 유입된 것입니다. 과거에도 이다구미가 각성제에 손을 댔다는 기록을 어디에도 없어요.' '그렇다면?' 사메지마는 도게를 응시했다. 가카와 형제가 <캔디>와 연관되어 있는 증거를, 마약 단속관 사무소는 어디서 어떻게 입수한 것일까. 도게는 멍하니 차창 밖으로 눈길을 던진 채 억양 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다 구미를 마약단속관 사무소가 내사한 적이 있어요. 누군가가 대마를 밀재배한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죠. 겨우 1백그램, 기껏해야 2백그램쯤 거둘 수 있는 하잘것 없는 규모였어요. 하나 그걸 조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정보를 얻게 됐어요.' '엄청난 정보?' '1백 킬로그램이 넘는 메탄페타민이 그 현 어딘가에 있다는 정보였어요. 이다 구미 선대 구미쵸는 한국 출신입니다.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동생 뻘 되는 사내가 한국 당국에 쫓기고 있어, 일본으로 밀입국시켜 준 적이 있다더군요. 동생 뻘 되는 사내가 은혜를 갚는다고 메탄페로민 원료 1백 킬로그램을 시멘트 푸대에 넣어 바쳤답니다. 물론 대금을 치러 줬겠지만...... 그 이후 그 사내는 행방불명이 되었다는군요. 살아 있대도 이젠 일흔이 넘었겠죠. 선대 구미쵸는 원료 처분에 골치를 썩인 모양이에요. 경찰에 제출할 수도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궁리한 끝에 어부 손을 빌어 밀봉한 원료를 바다에 숨겼다는군요. 선대 구미쵸는 어떤 인물에게 위치를 귀띔해 주고 죽었어요. 그 인물이 바로 가카와 운송의 전 사장, 다시 말하면 노보루, 스스무 형제의 아버집니다.' '그렇다면 <약물 지문>을 통해 <캔디>의 원료가 한국산임이 이미 밝혀졌을 텐데?' 사메지마의 말에 도게는 머리를 저었다. '행방불명이 된 사내는 그 메탄페타민을 보급한 적이 없었어요. 이건 내 추측이지만, 아마 1차 공정만 거친 것으로 제품화까지는 안된 게 아닌가 합니다. 제품화되지 않았다면 팔 수도 없는 것, 물론 당국에 압수당하지도 않았겠죠. 압수당하지 않았으면 지문 등록도 안 되었을테고, 따라서 국정 규명 역시 불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원료 상태에서 결정을 뽑아낸다는 게 간단히 않을텐데.' '그렇진 않아요. 가장 어려운 게 1차 공정입니다. 1차 공정을 거친 반제품에서 결정을 축출하는 건 비교적 손쉬운 일이에요.' 도게는 일단 말을 끊었다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메탄페타민을 만드는 공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아요. 우선 원재료인 염산 에페드린을 빙초산에 녹여 황산바륨 같은 촉매와 염산을 섞어 가열합니다. 그뒤 촉매제를 여과하여 농축한 다음 에테르로 축출해 내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1차 과정이에요. 원재료 이외엔 모두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알콜 램프와 비이커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다만 한가지 난점은 중간과정에서 발생하는 염화수소의 냄새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겁니다. 자극이 강한 냄새이기 때문에 주택가에선 만들 수 없어요. 바꾸어 말하면 1차 공정을 끝낸 반제품이라면 염화수소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서나 손쉽게 작업을 할 수가 있어요. '2차 공정은 어떤 건데?' '초산 클로로포름을 가해 식히기만 하면 됩니다. 이 냉각공정의 기술 정도에 따라 결정의 품질이 결정되죠. 또 결정상태를 보면 어디서 만든 건지 대체로 판별할 수 있어요.' '제조방법은 한가지 뿐인가?' '아뇨. 아까 말씀드린 1차 공정의 촉매제로 무엇을 쓰느냐에 다라 달라지죠. 한 때 홍콩에서 들여온 것 가운데는 적린이 섞인 게 있었어요. 말하자면 어떤 불순물이 섞여 있느냐 하는 걸로 제조지를 추측할 수 있는 거죠.' '한국산이었나?' 한국산 각성제는 1980년 전후가 피크였다. 당신 한국산 각성제는 대만이나 필리핀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고순도의 고급품이었다. 한 때는 일본 국내에 밀유통되는 각성제의 80 퍼센트가 한국산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렇던 것이 최근 들어선 대만산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일 양국의 단속이 그만큼 심해졌기 때문이다. 대만과의 <무역>은 중국제 권총 밀수 루트까지 겹쳐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산 반제품이라면 순도가 아주 높을 겁니다. 1백 킬로그램으로 완제품 80킬로그램은 만들 수 있을 거에요. <캔디> 한알에 들어 있는 메탄페타민이 0.008 그램이니까 80 킬로그램이라면 1천만정 이상 만들 수 있겠군요. 말단 가격을 5백엔씩 치더라도 줄잡아 50억엔!' '노다지로군.' '네. 일반 각성제로 팔기보다도 마진이 훨씬 크죠.' '가카와 형젠 내사하고 있겠지?' 사메지마는 아까부터 궁금해 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마약단속관 사무소가 그 정도로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면 수사대상 지역을 도쿄로 국한시키고 있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고 있어요, 아주 신중하게.' '누군가를 잠입시켰나?' '네.' 도게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킨 다음 말을 이어갔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거북한 상대에요. 요원을 잠입시킨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소장님 목이 달아날 겁니다. 가카와 형제가 <캔디>에 손대고 있는 증거를 그곳이 아니라 도쿄에서 잡아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그곳에서는 그쪽과 게임이 안될 정도로 우리가 불리해요. 무슨 낌새가 있다 해도 눈깜짝할 사이에 증거를 없애 버릴 테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그곳 현경의 협력도 기대 못할 처집니다. 가카와 일족이 움직이면 본부장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어요.' 사메지마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차창 유리를 내려 연기를 내뿜었다. 지금 쇼가 묵고 있는 도시에서 <캔디>가 반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도쿄의 쇼가 그 도시로, 그 도시의 가카와 스스무가 <캔디>를 가지고 도쿄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가게야마 마사코라는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서. 마약단속관 사무소는 가카와 스스무를 각성제 단속범 현행범으로 체포해야 하는 것이었다. 만약 실패하면 수많은 책임자의 목이 달아나는 것은 물론, 잠입시킨 단속관 목숨도 위태로워지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게야마 마사코가 위험한 처지에 놓였을지 모르는 데도 애써 모른 척하면서 <킹덤 하이츠 산노> 를 덮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 경찰관인 사메지마는 지금 이 순간이라도 가게야마 마사코 안전을 위해 덮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카와 스스무는 <킹덤 하이츠 산노> 근처엔 얼씬도 않게 될게 분명했다. '가카와 스스무를 기다리자!' 사메지마는 짧게, 단호하게 말했다. JR (일본국철) 요쓰야 역에는 수하물 예치소가 없었다. 신주쿠 역에는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역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스스무는 도쿄 역까지 자동차를 몰고 가야 했다. 수하물 예치소가 문을 여는 것은 8시 30분이었다. 스스무는 구개 커피 스탠드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형 노보루와는 핸디폰으로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노보루는 <캔디>를 숨기기 전엔 절대로 스미와 연락을 취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요쓰야의 아파트에서 <캔디>를 한알 입에 문 직후, 스미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후지노구미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을 때 스미는 자리에 없었다. 전화 당번 사내가 연락되는 대로 전화를 해 주겠다고 하자 스스무는 핸디폰 번호를 알려 주었다. 스미도 이미 알고 있는 번호였다. 무작정 스미의 전화를 기다리는게 무척 괴로웠다. 참다 못해 스스무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동안 줄곧 <캔디>를 빨았다. 스스무 점퍼 안주머니에는 <캔디>가 20알도 더 들어 있었다. 한번 빨기 시작한 지금, 모든 게 끝날 때까지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시 20분, 커피 스탠드에 올려놓은 핸디폰이 울렸다. '벌써 도쿄에 와 계시는군요.' 스미의 목소리였다. 도쿄 역 구내는 출근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네. 말씀한 대로 물건도 가지고 왔어요.' '고맙군요. 50만, 모두?' '30만 뿐이오. 지금으로선 최선을 다한 거요.' '할 수 없군. 나머지 20만은 언제쯤 될 것 같습니까?'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샤키와 얘길 하고 싶어요.' 스스무의 말투가 빨라졌다. '좋아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스미는 지금 어디서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일까. 수화기 저쪽은 너무도 조용했다. '......여보세요.' 샤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스무는 핸디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샤키, 어때? 괜찮아?' '응, 괜찮아.' 샤키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무슨 일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스스무가 말을 이으려고 했을 때, 저쪽에서 수화기를 옮겨잡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제 됐죠? 한데, 어디서 만나죠?'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 좋겠어.' '하지만 물건이 30만이나 되고 보면......' '호텔 로비서 만나자구.' '이쪽으로 와 주면 더없이 고마울텐데......' '안 돼.' 스스무는 한숨을 내뿜었다. '우릴 신용 않는군.' '당연하잖아! 뭘 보고 그쪽을 신용한담?' 목소리가 커졌다. 만원에 가까운 커피 스탠드 손님들이 일제히 스스무를 돌아보았다. '샤키를 데리고 내가 지정하는 장소로 와 줘야겠어.' '어쩔 수 없군.' 스미는 혀를 찼다. '어디로 갈까요?' '제국 호텔 로비!' '언제?' 스스무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8시 22분. 앞으로 8분이면 수하물 예치소가 문을 연다. '9시 30분.' '9시 30분? 좋아요.' '시간 지켜!' 스스무는 전화를 끊었다. 커피 스탠드 손님 가운데 몇몇은 아직도 스스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경쓸 것 없어. 이 녀석들은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알 턱이 없잖아. 형 노보루의 번호를 눌렀다. 일요일이지만 이미 사무실에 나와 있을 것이다. 오전 중의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스스무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한 노보루였다. '네.' 침착한 형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요. 9시 30분, 제국 호텔 로비서......' '알았어. 짐은 맡겼나?' '곧 맡길 참이야. 아직 문을 안 열었거든.' '짐부터 맡겨야 해!' '알고 있어요.' '먼저 그 아가씨를 신칸센에 태워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마라.' '네.' '또 연락해.' 전화를 끊었다. 스스무는 일어섰다. 박스 4개를 옮기기 위해서는 도쿄 역 지하 주차장과 수하물 예치소 사이를 네 번이나 왕복해야 했다. 모든 걸 혼자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커피 스탠드를 나와 발길을 옮기면서 스스무는 다시 <캔디> 한알을 입에 물었다. 박스 4개를 모두 옮긴 것은 9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캔디> 덕분에 행동에도 힘이 넘쳤다. 주춤거림 한번 없이 모두 끝낼 수 있었다. 다만 자신이 힘에 넘치는 것만큼 느릿느릿하게 보이는 다른 사람들 움직임이 눈에 거슬렸다. 특히 수하물 예치소의 담당 직원이 너무도 맥이 빠져 있는 것 같아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물표를 받아 주머니에 넣은 다음 BMW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면서 룸미러를 들여다 보았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미러에 스미의 모습이 미친 것이었다. 잔인한 미소를 흘리며 스스무를 보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이제 보니 너 바보로구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스스무는 홱 돌아보았다. 다시 한번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BMW의 뒷좌석엔 아무도 없었다. 환각임을 금방 깨달았다.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목 속 깊숙한 곳이 몹시 메말라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핸들을 잡고 있는 두 손을 내려다 보았다. 손가락 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힘을 주어 핸들을 꼭 잡았다. 조수석의 핸디폰이 보였다. 노보루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지금 노보루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정신 상태가 조금씩 이상해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더욱 불안해졌다. 조금만 더 버티어 내자. 스미에게 <캔디>를 전해 주고 나면 이런 불안, 초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가속 페달을 밟았다. BMW는 묵직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힘겹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럴 때 고장이 날 게 뭐람. 빨강 램프가 켜져 있었다. 어디가 잘못된 걸까. 한참 노려본 끝에 겨우 알아차렸다. 사이드 브레이크였다. 사이드 브레이크 푸는 걸 깜박한 것이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렸다. 가속 페달을 밟은 채로였기 때문에 이번엔 기세 좋게 튕기듯이 달려 나갔다.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 맞은편에 서 있던 국산차 앞부분에 주차장에 충돌음이 울려퍼졌다. 스스무는 혀를 차면서 시프트를 백으로 바꾸었다. BMW 꽁무니가 밴과 부딪쳤다. 큰 충격은 없었으나 밴의 헤드라이트가 박살이 났다. 금속과 금속이 접촉하는 불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딘가 신경을 북북 긁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스스무는 BMW를 뽑아내면서 핸들을 틀었다. 시프트를 드라이브로 바꾸어 가속 페달을 밟았다. 타이어가 비명을 질렀다. 미러 속에 몇 사람이 몰려들고 있는 게 비쳤다. 저것도 환각일 게다. 실물이 아니야. 지하 주차장을 나와 엎어지면 코가 닿는 거리에 있는 제국 호텔로 향했다. 몇 년 전, 도쿄에 올 적마다 대학 시절 친구와 함께 긴자의 술집을 누빈 적이 있었다. 그 무렵엔 자주 제국 호텔에서 묵었었다. 당시 사귀던 호스테스의 이름을 더듬다가 스스무는 까맣게 잊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었다. 스스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순간 갑자기 코끝이 시큰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 어째서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두렵고 초조한 데다가 옛날 사귀던 여자의 이름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다니...... 야쿠자에게 얽혀들어 협박당한 이름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다니...... 야쿠자에게 얽혀들어 협박당한 끝에 녀석들이 시키는 대로 메신저 보이처럼 짐이나 나르고 있다니...... 이래서는 안 된다. 녀석들을 꺾어야 하는 것이었다. 녀석들은 분명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샤키를 노리개로 삼으면서 나를 짓이겨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야쿠자란 그런 녀석들이 아닌가. 녀석들은 나를 만만하게 보고 있다. 귀엽게 자란 겁쟁이 도련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중학 3학년 여름, 전학 온 <교토카이> 보스가 <가카와 가의 스스무짱> 을 얕잡아 본 것처럼. 하지만 그 녀석은 어떻게 되었나? 죽고 말았다. 아니, 살해되지 않았는가! 기껏해야 야쿠자였다. 가카와 가와 맞서기만 하면 맥 한번 제대로 못출 게 뻔하지 않는가. 형과 내가 질 턱이 없지 않는가. 짓이겨진 채 목숨을 잃는 것은 결국 녀석들이 아닌가. 비록 여기가 녀석들의 본바닥인 도쿄라 하더라도 가카와 사람들이 야쿠자에게 꺾일 까닭이 없었다. 나 혼자이긴 하지만 내 배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카와 가의 힘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왼쪽으로 제국 호텔이 보였다. 바로 앞에서 좌회전해서 주차장 진입로로 들어섰다. 잘 보고 있어. 가카와 가의 힘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줄 테니까. 13. '나야. 언제 데리러 갈 거야?' 히라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고지는 머리맡에 놓아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아침 9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기쁨에 찬 히라세의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울적해졌다. 고지는 히라세 전화에 잠을 깬 것이었다. '데리러 가다니, 누굴?' '바보, 뻔하잖아? 쇼짱 말야.' '글쎄. 아직 자고 있을 텐데.' '데리러 안갈 거니?' '가. 하지만 시간 같은 건 약속하지 않았어.' '서둘자구. 오늘 날씨가 아주 좋거든.'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러는 것일까. 어젯밤 내가 게이코에게 묵사발이 된 걸 보고서도 태연히 저럴 수가 있는 것일까. '밥 먹으러 어디루 갈 생각이야?' 히라세가 물었다. '밥을 먹으러 가다니?' '저녁 식사 말야. 쇼짱을 어딘가로 초대할 생각이잖아? 전야제를 겸해 기분 한번 내보자구. 기분 말야.' 너하곤 상관없는 일 아니냐고 쏘아 주고 싶은 것을 고지는 가까스로 참았다. 히라세는 어젯밤부터 속에 숨기고 있던 거친 본성을 있는 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밝고 즐거운 목소리와는 반대로 화가 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나움이 있었다. 만약 쇼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면 어떤 심술을 부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저 혼자 먼저 호텔로 달려가서 쇼를 설득, 어딘가로 끌고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쇼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기라도 한다면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히라세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항구 근처의 <가도야> 에나 갈까 생각하고 있어.' '뭐? 거긴 보통 술집 아냐? 멍청하긴. 거긴 싸구려 생선 뿐이야.' '하지만 신선한 것만 팔아.' '도미라든가 넙치 같은 고급 생선을 대접해야 할 것 아냐? 대스타야, 쇼는. 미래의 대스타란 걸 잊었어?' '그런 건 자주 먹었을텐데 뭘.' '도쿄에서 말야?' 히라세 목소리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래.' '그래도 이곳 최고품을 대접하는 게 좋아.' '그럼 어디가 좋을까?' 고지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기다리고 있어. 내가 알아볼께. 금방 나갈 건 아니지?'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붙을 배짱이었다. 고지는 불안감이 뭉게뭉게 치솟아 오름을 느꼈다. 불안감은 수면 부족의 불쾌감을 더욱 깊게 하면서 생리적인 현상으로 하복부까지 압박해 왔다. '알았지, 고지?' 히라세는 명령조로 다짐을 놓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고지는 수화기를 내동댕이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빌어먹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담. 고지는 요 위에 일어나 앉았다. 고지는 집과 멀지 않은 곳의 2층 아파트 한칸을 빌려 혼자 살고 있었다. 커튼이 쳐져 있는 탓에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씁쓸한 기분으로 방안을 휘둘러 보았다. 하이파이 세트 앰프에서 코드가 축 늘어져 있었다. 헤드폰이 그 옆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그리고 쇼의 앨범 CD <캅>도. 쇼가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자기 전에 기타를 앰프에 연결, CD의 쇼와 섹션을 거듭해 왔었다. 그것이 지금 엉뚱한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었다. 고지는 일어섰다. 서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발끝이 헤드폰에 걸린 것이었다. 약이 올라 걷어찼다. 헤드폰은 코드를 출렁이면서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기타는 에 두고 왔기 때문에 방안에 없었다. 창으로 다가서서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날씨는 참 좋았다.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녹색 산릉선이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커튼을 잡아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얼굴을 창유리에 갖다댔다. 싸늘한 감촉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퉁퉁 부은 입술과 콧마루가 욱신거렸다. 히라세의 전화를 받았을 때도 제대로 입이 움직이지 않았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히라세일 것 같았다. 지난날의 야쿠자 친구를 통해 음식점을 소개받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들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고지씨?'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침착한 나이 든 목소리였다. 마흔쯤 되는 사람이 노인인 척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습니다만.' '가카와야.' 사내의 짧은 한마디에 고지는 전신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가카와. 노보루일까, 스스무일까. 그러고 보면 어젯밤에도 이시와다리가 가카와 형제를 감시하고 있었다. '가카와씨...... 무슨 일이십니까?' '게이코한테서 얘기 들었어. 한번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군.' 고지는 숨을 깊이 한번 들이마셨다. 뭔가 대답을 해야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오늘 쉬는 날이지?' 가카와가 물었다. '네.' 저도 모르게 말씨가 공손해졌다. 상대가 가카와 가, 가카와 가 사람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식사라도 함께 할까?' 말투는 그랬으나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친구들도 함께 데리고 와. 도쿄에서 온 가수가 합석을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사업 얘길 하고 싶으면 우선 만나야 할 것 아냐? 그리고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네. 가지고 있습니다.' '뭘 찍은 것인가?' 뭘 찍은 것이냐구? 침착하면서 빈정거림이 깃든 말투였다. 당신, 도대체 무슨 말을 했어, 지금? 당신네를 파멸시킬 사진을 내가 가지고 있단 말야! '배에서 내리는 사진입니다.' '뭘?' '각성젭니다.' '흠.' 가카와는 일단 한호흡 늦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가지고 와. 한번 보게.' 히라세라면 그냥 듣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봐요, 당신. 그렇게 세게 나와도 괜찮아?> 하고 한마디 쏘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자네 친구, 히라세라고 했나? 지금 얘기 나눌 수 있을까? 거기 있나?' '없습니다.' '전화번호 가르쳐 주겠어?' 경계심이 일어났다. 이 사내가 정말 가카와일까. 가카와의 명령을 받은 누군가가 히라세를 손보려고 나에게 접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전화번호를 근거로 히라세의 은신처를 찾아내어 없애 버리려고 이러는 것은 아닐까. '그쪽 번호를 가르쳐 주시면 전활 드리도록 하죠.' 나는 지금 히라세를 감싸려 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어쩔 수가...... 가카와 가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도 할 수 없지 않는가. '알았어. 번호, 받아 적어.' 그러나 사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10 자리 숫자를 불러 주었다. 자동차 전화이거나 핸디폰 전화였다. 고지는 복창하면서 메모할 종이를 찾았다. 악보였다. 악보가 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걸어 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고지는 대답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걸까. 한동안 전화기만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쇼가 이 도시로 찾아왔다. 동시에 히라세, 이시와다리와 함께 다져온 <꿈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모든 게 가닥을 잡을 수 없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히라세는 쇼를 제 여자로 만들려 하고 있고, 게이코는 속이 상해 나를 증오하고 있다. 게다가 가카와까지 쇼를 데리고 오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쇼를 지켜 줄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내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새삼 도망칠 수도 없었다. 지금 내가 빠진다면 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낯선 도시, 정체불명의 사내들 속에 쇼 혼자만 달랑 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애인인 형사가 있는 곳은 몇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도쿄가 아닌가. 그가 쇼를 구할 수는 없지 않는가. 차창에 선팅을 한 네리마 넘버의 메르세데스였다. 방금 <킹덤 하이츠 산노> 지하 주차장에서 달려나왔다. 넘버를 보자마자 도게가 짧게 입을 열었다. '이제 나왔군요.' 사메지마도 머리를 끄덕였다. 메르세데스는 20분쯤 전에, 두 사람이 타고 있는 BMW 옆을 스치듯이 해서 <킹덤 하이츠 산노>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운전석엔 가라키가 타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9시 7분이었다.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도게가 말했다. 메르세데스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멀어져 갔다. 일방통행로 출구 쪽에는 마약단속관 사무소의 밴이 지키고 있었다. '쫓아가야죠?' 도게는 사메지마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사메지마가 말했다. 도게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저 차는 미끼인가요?' '가능성이 높아.' 물론 방금 지나간 메르세데스에 가라키 혼자 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감시나 미행이 염려될 때에는 우선 미끼를 던져 감시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은 프로들의 수법이었다. 더군다나 스미는 지금 유괴와 각성제라는 두 가지 사건을 한손에 주무르고 있지 않는가. 그런 스미가 아무런 대책 없이 모습을 나타낼 까닭이 없었다. '우리 쪽도 눈칠 챘을까?' 도게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끼인지 아닌지 아직은 모르잖아?' '만약 미끼가 아니었다면?' '그렇더라도 이미 미행이 붙었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지.' 사메지마가 냉정하게 자르자 도게가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그래도 괜찮으세요?'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체면 따위, 아무래도 좋아> 라는 걸 새삼 강조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10분이 지났다. '진짜가 미끼로 가장한 것이었나?' 7시 30분 이후, <킹덤 하이츠 산노> 지하 주차장에서 나온 자동차가 여러 대 되었지만 사메지마의 육감에 거슬린 건 한대도 없었다. 스미는 아직 아파트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9시 40분. 빨간 아우디 크와트로가 지하 주차장에서 나타났다. 운전석의 사내는 사메지마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녀석이야!' 사메지마가 말했다. 체념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도게가 움찔했다. 이그니션 키로 팔을 뻗치던 사메지마가 짧게 외쳤다. '엎드려!' 아우디 크와트로는 <킹덤 하이츠 산노> 앞의 일방통행로를 역방향으로 달려 사메지마가 타고 있는 BMW를 향해 덮치듯이 접근해 왔다. 아우디 크와트로는 BMW 옆을 스치듯이 해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뒷좌석에 사람이 타고 있는지 어떤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그래도 사메지마는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BMW 에 시동을 걸어 시프트를 백으로 해서 후진하기 시작했다. 아우디가 사라진 방향으로 U턴을 하자마자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넣었다. '뭘 보고 녀석이라고...?' 도게가 물었다. '스미 정체를 안 뒤부터 여러 각도로 조살 해 봤어. 스미는 한때 소프랜드 (매춘 목욕업) 호스테스와 친하게 지냈어. 지금 마누라를 맞이하기 전에 말야. 그 호스테스가 빨강 아우디를 몰고 다녔어.' '지금 그 차?' 넘버까진 확인 못했지만 틀림없을 거야.' 아우디를 따라잡은 것은 환상 7호선에 접어들어서였다. 외곽 방향 차선을 달리고 있었다. '저거로군.' 4,5대 앞의 아우디를 확인한 사메지마가 중얼거렸다. 아우디 차창에도 검은 선팅이 부착되어 있었다. 카폰 안테나도 도깨비 뿔처럼 삐죽 솟아 있었다. 아우디는 미나미 센소쿠 교차점에서 우회전을 했다. 츄겐가이도로 접어든 것이었다. 도심 방향, 곧장 가면 고단다에 이르는 길이었다. 츄겐가이도는 고단다 역 앞에서 국도 1호선과 합류한다. 계속 가면 메구로, 시로가네 방면이다. 그러나 아우디는 야마테도리와의 교차점에 이르자 왼쪽 깜박이를 켰다. 속력도 그렇게 내지 않았다. 야마테도리는 도쿄 도내 순환선 가운데 가장 안쪽에 있는 일반도로였다. 바깥쪽에서부터 환상8호, 환상7호, 야마테도리 순으로 순환원 궤도가 작아지는 것이었다. 야마테도리에서도 아우디는 외곽 방향 노선을 달렸다. 이어서 이번에는 다마가와도리, 국도 246호선에 이르자 좌회전하여 하행 차선으로 접어들었다.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도 246호선으로 접어들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환상 7호선 바깥쪽 노선을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일단 안쪽 노선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바깥쪽 노선으로 되돌아 나가는 코스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246 호선이나 츄겐가이도나 모두 도쿄 중심부에서 야마테도리, 환상7호, 환상8호를 가로질러 외곽으로 뻗어간 방사선 도로였다. 하지만 아우디가 달려가는 코스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246호선에서 다시 환상7호선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일부러 멀리 돌고 있다고 밖에 볼 수가 없었다. 미행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세다가야 구 우에바에서 환상 7호선에 합류할 무렵 사메지마는 아우디와의 거리를 더욱 넓혔다. 같은 차선을 달리면서 사이에 5대 이상 끼어들어 있게 했다. 아우디는 환상7호로 접어들자 속도를 높였다. 미행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고슈가이도와 마주치는 오하라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신주쿠로 향했다. '신주쿠였나?' 도게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단순히 신주쿠로 가고 싶었다면 코스를 그렇게 잡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설마 구미 사무실로 가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미끼에 걸려든거지.' 스미가 가카와와 만나는 장소로 후지노구미 사무실을 이용할 까닭이 없었다. 만약 경찰이 덮치기라도 한다면 구미 소속 전원이 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우디는 신주쿠 역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초고층 빌딩이 몰려 있는 신주쿠 부도심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14. 10시 50분. 스스무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제국 호텔 로비를 수도 없이 둘러보았다. 샤키와 스미는 말할 것도 없고, 스미가 부리고 있는 부하 야쿠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노보루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호텔 로비는 드나드는 사람으로 몹시 붐볐다. 그것만으로도 스스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여기저기서 외국어로 주고받는 대화 소리가 신경을 북북 긁는 바람에 머리가 우지끈거렸다. 두통이 심해졌다. 영어가 귀속을 후벼팠다. <시끄러워!> 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스스무는 가까스로 참았다. 전화야, 전화. 핸디폰을 꺼냈다. 스위치가 켜져 있었다. 숫자가 불쑥 나타난 것 같아 눈을 닦고 다시 살펴보았다. 이 번호에 걸면 샤키가 있다고 알려 주는 것일까. 하지만 아무런 조작도 하지 않았는데 숫자가 나타날 리가 없지 않는가. 느닷없이 벨이 울리는 바람에 스스무는 깜짝 놀라 전화기를 내팽개쳤다. 전화기는 카페트 바닥을 몇 번 구르다가 멈추었다. 옆 소파에 앉아 있던 백인이 주워들어 스스무 앞으로 내밀었다. 스스무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나꿔채듯이 받아들었다. 백인은 눈이 둥그래졌다. '여보세요!' 스스무는 전화를 받았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하지만 상관 않기로 했다. '스스무짱? 저예요.' 샤키였다. '어디 있어, 지금?' 스스무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제복을 입은 보이가 뭔가 한마디 할듯 말듯 망설이는 얼굴로 스스무를 바라보았다. 스스무는 보이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날 뭘로 알고 있는 거람! '신주쿠 힐튼 호텔.' '뭐라구?' '착각을 한 모양이야. 이쪽으로 와 줘. 부탁이야.' 전화가 끊겼다. 스스무는 멍한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제국 호텔로 오라고 그만큼이나 말했는데...... 도대체 날 뭘로 생각하고 있나, 빌어먹을. '......님.' '손님.' 스스무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보이가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목소리를 낮춰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뭐? 뭘 말이야?' '저어, 말씀하시는 게......' 보이는 곤혹스런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말씀?' 되묻던 스스무는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기분 내키는 대로 너무 큰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각성제에 중독된 미친 녀석이라고 웃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 바보 취급하지 마!' 스스무는 빽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나갔다. 달리면서 욕설을 퍼부어 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녀석들은 나를 바보로 만들고 있어. 샤키를 이용하면 원숭이 부리듯이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주차장으로 가서 BMW에 올라탔다. 요금소 직원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녀석도 나를 비웃고 있어. 네녀석들에게 비웃음을 받을 내가 아니야. 난 네놈보다 몇십배, 아니 몇백배 더 위대한 거물이야. 주차권과 함께 똘똘 만 1만엔짜리 지폐를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신주쿠. 신주쿠. 어떻게 해야 갈 수 있지? 도쿄 지리를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눈 속이 심하게 욱신거렸다.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구역질이 나면서 전신이 진땀으로 흥건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핸들에서 한손을 떼어 주머니의 <캔디>를 꺼냈다. 실을 입으로 찢었다. 한알을 물었다. 다시 한알, 또 한알...... 한꺼번에 3알을 와작와작 씹었다. 빨리, 빨리 머리가 맑아져라! 격심하게 뛰던 심장이 차츰차츰 조용해졌다. 스스무는 핸디폰을 잡았다. 노보루 번호를 눌렀다. '...... 네.' 침착한 노보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스스무는 울음을 터뜨렸다. '형, 녀석들이 날 바보로 만들고 있어.' 훌쩍이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찬찬히 얘기해 봐.' '제국 호텔로 오라고 했어. 제국 호텔로 말야, 제국 호텔. 난 분명히 갔었어. 분명히 갔단 말야. 그런데도 녀석들은 지금 신주쿠에서 기다린대.' '뭐라구? 자세히 설명해 봐.' '그래서 제국 호텔이라고 분명히 말했단 말야.' '물건은 어떻게 했어?' '맡겼어.' '어디다?' '도쿄 역. 도쿄 역 수하물 예치소에.' 그제서야 겨우 <캔디>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신을 휘감고 있던 불쾌감이 사라지면서 기분도 가벼워졌다. 구역질까지 치밀어 오르던 지금까지의 불쾌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었다. '저어......' 스스무는 길게 숨을 내뿜었다. '왜 그러는거야? 괜찮아?' '괜찮아요. 형은 잘 몰라. 거기 한가롭게 앉아 있는 형은 잘 모를거야.' 딸꾹질이 나왔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스스무!' '아무 것도 아니야.' 하품을 깨물면서 스스무는 딸꾹질을 계속했다. 비명이 터졌다. 핸들을 잡고 있는 오른손 손가락이 끔찍하게도 굼벵이로 변해 있었다. 더군다나 깊은 주름살이 패인 갈색과 녹색으로 얼룩덜룩한 굼벵이였다. '이봐!' 눈을 부릅뜨자 굼벵이가 흐릿해지더니 다시 손가락이 나타났다. 좋아, 이건 환각이다. 호통을 치면 사라지는 환각이다. 나는 괜찮아. 염려할 것 없어. 염려할 것 없어. 염려할 것 없어. '염려할 것 없어, 형.' '스스무, 너 좀 이상하구나.' '이상할 것 없대두.' 스스무는 쿡쿡 웃었다. 손가락이 굼벵이가 되었다고 한다면 노보루는 뭐라고 할까. '지금 어디 있어?' '신주쿠. 신주쿠로 가는 중이야.' '그만둬!' '왜? 이대로 물러서라는 거야?' '저쪽은 널 함정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장소를 바꾼 거야. 신주쿠로 가선 안돼, 절대로.' '녀석들 마음대로 하라지 뭐. 난 샤키만 구해 내면 되는 거야. 그리고 나서...... 녀석들에겐 그뒤에 맛을 보여 주자구.' '스스무!' 불러놓고 나서 노보루는 침묵했다. '왜? 뭣 때문에 그러는거야?' '너 정상이 아니로구나.' '정상이야.' '아니야. 좀 이상해!' 노보루는 자르듯이 말했다. '뭔가...... 그래, 또 <캔디>를 먹었지?' '안 먹으면 버틸 수가 없어.' 스스무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노보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운전하고 있나?' 이윽고 노보루가 물었다. '그래요. 신주쿠로 가야 하거든.' '스스무, 부탁이야. 사고내지 마.' '걱정 마. 내 운전솜씨 형도 잘 알잖아.' '잘 들어. 내가 말한 계획,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럼. 샤키를 신칸센에 태운 뒤 형 전화를 기다리는 것, 맞았지?' <캔디>의 효과가 다 된 것 같았다. 한꺼번에 3알이나 씹어 삼켰는데도. 이젠 끝이다. 피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차가워졌던 피가 더워지면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형, 병원에 좀 데려다 줘.' 스스무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 이상해. 이상해졌단 말야. 병인가 봐. 병원에 데려다 줘. 날 좀 낫게 해 줘.' '알았어. 걱정 마, 스스무, 알았어.' 달래듯이 노보루가 말했다. '잘 들어. 네가 할 일은 간단해. 샤키한테 신칸센을 타라고 일러. 그러면 되는 거야.' '응, 신칸센이었지?' '그래. 내가 전화를 하면 그 때 스미에게 물표를 건네 줘. 그러면 끝나는 거야. 그 뒤 너 역시 신칸센을 타고 돌아와.' '고등학교 때처럼 말이지?' '그래. 고교 때처럼.' '돌아갈께, 형. 돌아갈께. 기다려 줄 거지?' '그럼, 기다리고말고.' 마음이 아니라 몸이 신주쿠를 기억하고 있었다. 신주쿠로 가는 길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무의 눈에 저만큼 도청 건물이 보였다. 힐튼 호텔 로비는 시장바닥 만큼이나 혼잡스러웠다. 때마침 외국인 단체가 도착한 듯, 벨 캡틴 주변에는 수트케이스 트렁크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고 프론트도 몹시 붐볐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쪽의 카페테라스 역시 만원이었다. 스미는 계단 뒤쪽 좌석에 앉아 있었다. 록봉기 클럽 호스테스 가게야마 마사코를 옆에 앉혀놓고 쉴새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사코 이쪽에는 또 다른 사내가 바싹 붙어 앉아 있었다. 그 건너편, 비스듬한 좌석엔 도게가 혼자 앉아 있었다. 사메지마는 프론트 안쪽에 있었다. 신주쿠 일대 거의 모든 호텔의 프론트 직원과는 낯익은 사이였다. 하지만 용건이 없을 때는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접객업체인 호텔맨과 형사 사이에 이루어진 암묵의 약속이었다. 신주쿠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야쿠자들은 <상담> 장소로 대개 호텔 프론트와 커피숍을 이용하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거래 상대를 호텔에서 픽업해서 자기들 관할 구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형사들도 끊임없이 호텔을 드나들었다. 프론트 직원들과는 자연히 낯이 익게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호텔측이 손님 정보를 자진해서 경찰에 제공하는 일은 없었다. 손님의 비밀은 - 비록 범죄자라 하더라도 직접 호텔에 피해를 주지 않는 한 - 지켜 주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지금 호텔 카운터 안쪽에 웅크리고 있었다. 때문에 스미가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사메지마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카운터 앞에 줄지어 선 손님들 눈에는 이상하게 비치겠지만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스미가 사메지마의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이상, 대응책은 그것 밖에 없었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던 도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미를 등지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왔다. 사메지마와 몇 미터 떨어진 카운터 바깥쪽에 멈추어 섰다. 여직원이 다가오는 것을 고갯짓으로 말린 다음, 사메지마가 있는 반대쪽으로 눈길을 던진 채 입을 열었다. '전화를 걸었으면 해요. 우리쪽 사람에게도 알려 주고 싶어요. 무선을 두고 온 바람에......' '왼쪽에 공중전화가 있어. 세 사람 동태는?' 사메지마가 물었다. '제법 침착합니다. 여자도 유괴당한 사람 같지가 않아요. 긴장은 하고 있으나 웃기도 하니까요.' 사메지마는 스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리가 멀고, 다른 손님들에 가려 표정 변화까지는 읽을 수가 없었다. '하라다 얼굴은 알고 있나?' '네. 사진을 봤어요. 보내 온 게 있어서......' '고생, 많으시군요.' 사메지마 뒤를 지나가면서 프론트 직원이 말했다. '폐가 많군.' '아닙니다. 별말씀을......' 마음 속으로는 몹시 못마땅해 하면서도 프론트 직원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메지마는 도게를 쳐다보았다. '만약 하라다가 나타나면 어떡할 작정인가? 현장 체포?' 도게는 망설였다. '여기서 그러고 싶진 않군요.' 사메지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붐비는 곳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라다와 스미 일행이 따로따로 흩어지면 증거 확보가 어려워진다. 하라다가 이곳으로 <아이스캔디>를 들고 오리라고는 불 수 없었다. '아마 모두 모이면 장소를 옮기겠지. 그걸 노리자구.' 도게는 보일듯 말듯 끄덕였다. '우리 쪽 사람을 주차장에 배치하죠.' 도게는 카운터를 떠나 공중전화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사메지마는 다시 스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도게도 말했지만, 세 사람의 행동이 사메지마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가게야마 마사코를 강제로 납치한 것이라면 이처럼 사람 많은 곳으로 데리고 올 까닭이 없었다. 호텔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로비가 아니라 적어도 객실을 잡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마사코는 어째서 스미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는 것일까. <킹덤 하이츠 산노>에 스미와 함께 틀어박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유는 한가지 뿐이었다. 마사코는 하라다를 버리고 스미를 택한 것이었다. 동시에 하라다를 쥐어짜려는 스미 계획을 돕기 위해 스미와 함께 행동하면서 하라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미와 마사코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틀림없었다. 하라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하라다가 협박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발로 찾아오는 것이라면 마사코의 존재 이유는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하라다는 마사코가 유괴당했다고 믿는 것일까. 하라다가 마사코의 배신을 눈치 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볼만하겠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스미가 하라다를 얕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 하라다를 엇비슷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면 스미가 이처럼 대담하고 위험한 방법은 취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스미는 하라다로부터 모든 것을 완전히 빼앗으려는 게 분명했다. <아이스캔디> 거래의 주도권뿐만 아니라 여자까지 빼앗아 하라다를 철저하게 바보로 만들려는 게 틀림없었다. 하라다의 이빨을 뽑아 꼭둑각시로 만드는 게 스미의 목적이었다. 명문 출신으로 배경이 아무리 든든하다 하더라도 하라다 개인이 야쿠자와 대등하게 맞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미가 영리한 야쿠자임은 사메지마도 알고 있었다. 영리한 야쿠자를 적으로 돌렸을 때, 일반 시민이 결코 이겨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스미는 하라다를 철저하게 쥐어짤 것이다. 옴쭉도 못하게 해서 완전한 웃음거리로 만들 게 분명했다. 하라다는 스스로의 무력을 깨닫고 결국은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그 순간부터 하라다의 무간지옥 (無間地獄)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나아가도 지옥, 물러서도 지옥. <캔디> 에서 손을 떼려 해도 스미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게 분명한 일이었다. 교도소 복역을 <근무> 라고 부르면서 직무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야쿠자와, 전과 자체를 사회적 치명상으로 생각하는 일반인이 동일한 범죄에 협력했을 때 잃는 것의 크기는 엄청나게 다르기 마련이었다. 하라다가 무슨 까닭으로 <캔디>에 손을 대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해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범죄자로서 재판에 회부되는 사태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스미는 하라다를 치켜세우면서 알랑거렸을지도 모른다. 응석을 받아 주면서 때로는 멍청이 노릇도 했을 것이다. 하라다에게 이용당하는 단순한 야쿠자 역할을 멋지게 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빨을 뽑기 위한 포석에 지나지 않았다. 바보 취급당한 데 대해 하라다가 분통을 터뜨린다 하더라도 <갈 데까지 가보실까?> 라고 한마디 쏘아 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승부가 나고 마는 것이었다. 스미와 같은 야쿠자의 표현을 빌리면 하라다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라다가 상황을 역전시키려 한다면 가카와 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력을 총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댓가를 지불해야 할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도게가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후생성에 압력을 가해 마약단속관 사무소의 손발을 묶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다음은 경찰과 권력자 사이의 물밑 거래 또한 엄청난 규모로 오가게 될 것이고. 그 과정 어딘가에서 누수 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조심성 없이 흘러나온 한마디나 부자연스런 돈의 흐름이 누군가에게 잡히게 되는 것이다. 정치가든 고급관리였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체포와 복역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최후의 악몽일 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이전의 '소문' 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에 말려드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 수상에의 꿈을 포기하거나 정계 진출, 또는 정무차관 자리를 단념해야 하는 것이었다. 출세지향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나 관료로서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물론 사메지마는 그러한 권력자들의 '정신적 사망' 만으로 사건을 끝낼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법 앞에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속담대로 저지른 범죄에 걸맞는 형을 살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범죄가 노출됨으로써 출세길이 막힌 그들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이상의 깊은 상처를 받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사메지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회적 책임이 큰 사람들이 그 책임을 저버렸다면, 거기 따른 형벌 또한 무거워야 마땅하지 않는가. 형벌의 두려움을 알려서 범죄를 예방하자는 것은 사법 관계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스로 법을 만들었다고 으스대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든 법이 정한 가시관을 씌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도게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와 카페테라스로 돌아갔다. 카페테라스 카운터의 구내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제복 차림의 직원이 롱스커트의 웨이트레스에게 몇 마디 소곤거렸다. '......씨, 스미씨 계세요?' 웨이트레스가 객석을 돌아다니면서 불렀다. 스미가 일어섰다. 마사코와 또 한 사내를 자리에 남겨놓은 채 카운터로 다가섰다. 스미는 수화기를 귀에 대면서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한두 마디 나눈 다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자리에 남아 있던 사내에게 눈짓을 했다. 사내는 마사코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게의 연락은 때를 맞추지 못한 것 같았다. 스미 일행이 이곳을 떠나는 것이라면, 사메지마가 주차장으로 먼저 달려가야 했다. 도게가 금방 일어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스미 일행이 아우디를 세워둔 지하 주차장으로 갈 확률은 2분의 1이었다. 다른 곳으로 향한다면, 도게가 뒤를 쫓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사메지마는 잽싸게 프론트 카운터에서 빠져 나왔다. 스미 일행의 눈에 띄지 않게 종업원 전용 계단으로 달렸다. 호텔 안에 잠복할 때는 대개 종업원 전용 출입구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훤하게 알고 있었다. 스미가 타고 온 아우디 크와트로는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홀 가까운 구석에 서 있었다. 사메지마의 BMW는 출입구 근처에 있었다. 스미 일행을 앞지른 사메지마는 종업원 출입구를 이용,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달려갔다. 엘리베이터 홀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스미 일행과 맞부닥치는 위험은 피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먼저 주차장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고 싶었다. 가죽 점퍼에 트위드 바지 차림이었다. 사메지마의 머리 속에 뭔가가 번쩍했다. 사메지마를 등지고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뭔가를 노리고 있었다. 사내의 뒷모습에 기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사메지마는 이그니션 키에서 손을 뗐다. 사내가 주위를 경계하듯 뒤를 돌아보았다. 흰 피부에 단정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사메지마는 그 사내 모습에서 풍겨나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떨고 있었다. 사내의 눈엔 각성제 중독 특유의 광기가 서려 있었다. 어째서 여기에 각성제 중독자가? 그러나 더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스미를 선두로 마사코와 또 다른 사내가 나왔다. 사내가 점퍼 포켓에서 손을 뽑았다. 다음 순간, 여자의 비명이 지하 주차장 안에 울려퍼졌다. 15. 모두 노부루가 세운 계획이었다. 넌 로비로 가선 안된다.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려라 - 형은 그렇게 말했었다. 노보루가 힐튼 전화번호를 찾아 스미를 불러낸 다음 지하 주차장에서 스스무와 만나도록 지시하겠다고 했다. 상대가 준비해 둔 상황에서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노보루의 주장이었다. 비록 로비에서 지하 주차장으로만 장소를 옮기더라도 스미가 설정해 둔 함정은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경우든 상대방이 하자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노보루는 신신당부했다. 스스무는 BMW 에서 기다렸다. 전화가 울렸다. '나야. 지금 연락했어. 그쪽으로 내려가고 있을 게야.' 노보루는 차에서 내리지 말고, 도어를 잠근 채로 스미와 얘기를 나누라고 스스무에게 명령했다. 인기척이 드문 지하 주차장으로 상대방을 유인한 이상, 맞대결의 위험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노보루가 스미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지시하는 것이라고 스스무는 생각했다. 녀석들에게는 맛을 보여 줘야 해. 비록 혼자만이지만 가카와 가 사람을 적으로 돌리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줘야 하는 것이다! 당하기 전에 먼저 죽이면 되는 것이었다. 설령 여기서 안전하게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스미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 뒤를 쫓을 게 틀림없었다. 샤키와 내가 도쿄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스스무는 눈앞에 환해지는 것 같았다. 스미는 샤키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샤키를 유괴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요 며칠 동안 스미가 샤키를 그냥 내버려 뒀을 까닭이 없었다. 녀석은 샤키를 가둬놓고 그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더듬었을 것이다. 지저분한 야쿠자가 억지로 샤키의 가랑이를 벌렸을 것이 아닌가. 스미는 나를 죽인 다음 <캔디>와 샤키를 몽땅 차지할 생각으로 있는 것이다. 분노가, 눈앞의 모든 것이 붉게 물들 정도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스스무는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카터 나이프 손잡이의 딱딱한 감촉이 오른손에 잡혔다. 차에서 내렸다. 이겼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스미를 이걸로 한방 먹여야지. 허를 찌른 반격에 녀석도 깜짝 놀라겠지. 형세가 단번에 역전되는 것 아닌가! BMW 엔진을 건 다음, 도어를 열어둔 채 똑바로 엘리베이터 홀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램프가 켜졌다. 내려오는 화살표가 반짝였다. 녀석들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샤키도...... 이제야 겨우 샤키와 만나게 된 것이다. 가까스로 구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도어가 열렸다. 스미가 보였다. 샤키도. 그리고 또 한 사람 낯선 사내도 있었다. 스미가 놀란듯 눈이 둥그래지더니 자세를 고치면서 무의미한 웃음을 지었다. '하라다씨.' 빈정거리는 것 같은 말투에 스스무는 왈칵 분노가 치솟았다. 카터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샤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어서 비명이 터졌다. '이 새끼가!' 스미 옆에 있던 사내가 호통을 쳤다. 스스무는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스미가 어이없는 눈길로 스스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왼손으로 턱 밑을 누르고 있었다. 목쉰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가......' 왼손 손가락 사이로 피가 솟아 흘렀다. 단 한번 휘둘러 스미의 목을 찢은 것이었다. '이제 알았나? 사람 얕보는 게 아니야!' 스스무가 호통을 쳤다. 그리고 샤키에게로 눈을 돌렸다. '샤키, 이쪽으로 와!' '이 새끼, 이래 놓고도 무사할 것 같아?' '관둬!' 몸을 날리려는 부하를 스미가 오른손으로 막았다. 엘리베이터 벽에 손이 닿았다. 피묻은 손자국이 찍혔다. '샤키!' '싫어!' 샤키가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는 스미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이런 멍텅구리. 하지만 샤키 눈빛에는 공포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무엇 때문에? '샤키, 널 도우러 온 거야. 이쪽으로 와!' '바보. 무슨 잠꼬대야?' 샤키가 악을 썼다. 왜 그래? - 그러나 생각 뿐, 말은 목에 걸리고 말았다. 샤키가 스미에게 달라붙었다. '괜찮아? 구급차를 불러야지, 구급차를......'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스스무의 주변 세계가 빨강에서 차츰차츰 회색으로 바뀌어 갔다. 색깔이 없어지고 있었다. 모든 물체의 색깔이 없어지고 있었다. '이 새끼, 썩 물러서!' 스미 부하가 으르렁거렸다. 스미 한쪽 겨드랑이를 어깨에 메었다. 스미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차츰 회색을 띠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짓들이냐고 부르짖는 소리였다. 무슨 짓을 하느냐구? 샤키를 구하러 온 걸 보고도 모른단 말야? 느닷없이 누군가가 세차게 등을 떼밀었다. 분노가 치솟으면서 다시 눈앞에 붉게 물들어 갔다. 또 나를 바보 취급하는 건가, 개새끼! 스스무는 고함을 질렀다. 카터 나이프를 휘둘렀다. 이번엔 헛손질이 되고 말았다. 낯선 또 다른 사내 얼굴이 보였다. 스미 부하가 또 한녀석 나타난 것일까. 그렇다고 질 수는 없지 않는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샤키의 팔을 나꿔챘다. '샤키, 날 따라와! 오란 말야. 오란 말야. 오란 말야.' '싫어! 이것 놔!' 샤키가 몸부림쳤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그래, 약물 주사를 맞은게 틀림없어. 분노가 몸을 가볍게 해 주었다. 뭔가가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나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왈칵 분노를 터뜨리면서 돌아보았다. 새로 나타난 사내가 특수 경찰봉을 들고 서 있었다. '죽고 싶어?' 카터 나이프를 휘둘렀다. 샤키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샤키를 구해야지. 샤키 몸 속의 약물을 제거해야지. 사내가 물러섰다. '카터를 버려! 경찰이닷!' '약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야.' 스스무가 되받았다. '알았으니까 카터부터 버려. 병원에 데려다 주겠어.' '내가 아냐. 바보! 샤키야. 샤키 몸 속의 약물을 제거해야 해!' '무슨 잠꼬대야?' 야쿠자가 으르렁거렸다. '난 아냐. 난 약물 따위 복용하지 않아!' '알았으니까 날 따라와.' 샤키를 잡아끌었다. 계속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카터를 얼굴에 바싹 갖다댔다. 샤키가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면서 얌전해졌다. 스스무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샤키, 네 몸 속의 나쁜 약물을 금방 제거해 줄께. 널 도와 줄께.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거래가 남아 있었다. 점퍼 주머니에서 물표를 꺼내어 엘리베이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스미 앞에 내던졌다. '이것 가지구 가!' 스미가 잿빛 얼굴을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스미를 돌보고 있던 야쿠자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웃옷 자락을 헤쳐 뭔가를 꺼내어 잡았다. 스스무는 상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샤키를 끌고 가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굉음이 지하 주차장 가득 울려 퍼졌다. 뭐야, 이건? 뭐든 나와 무슨 상관이야. 샤키와 함께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버려!' 등 뒤에서 호통소리가 들렸다. 뭘 버리란 말인가. 뭘 버리란 말인가. 샤키의 몸이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스스무는 혼신의 힘으로 샤키를 끌고 갔다. 도어가 열린 채로인 BMW 가 보였다. 또다시 굉음. 이어서 호통소리가 터졌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샤키를 BMW 조수석에 밀어넣었다. '도와 줄께, 도와 줄께, 도와 줄께......' 스스무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조수석 도어를 닫은 다음 운전석에 올라탔다. 액셀러레이터에 전신의 체중을 실었다. BMW는 튕기듯이 출발했다. 타이어가 비명을 질렀다. 해 냈단 말이야, 해 냈어. 주차장 출구 게이트를 돌파, 지상으로 나왔다. 이대로 계속 달리는 거야. 고향으로, 집이 있는 고향으로. '샤키......' 옆을 돌아보았다. 공포감이 스스무의 심장을 짓이겼다. 샤키의 베이지색 블라우스가 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홀로 다가서면서 사메지마는 스미 옆에 있는 사내 이름이 생각났다. 사세라는 녀석이었다. 평소에는 후지노구미 산하의 데이트 클럽 지배인으로 일하는 다혈질 사내였다. 사세의 얼굴은 창백했다. 스미는 사세보다 더욱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엘리베이터 입구를 가로막아 서 있는 사내가 들고 있는 카터 나이프를 보자, 사메지마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스미가 칼을 맞은 것이었다. 사내의 카터 나이프가 스미의 목줄기를 벤 것이었다. 주저앉은 스미의 발 밑에, 피가 흥건하게 고이고 있었다. 사세가 으르렁거렸다. 사메지마는 특수 경찰봉을 뽑아들었다. 자칫하다간 사세가 사내를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내를 한발 앞서 체포할 생각으로 경찰봉으로 후려쳤다. 효과가 없었다. 사내는 완전히 미쳐 있었다. '죽어 싶어?' 사내가 외쳤다. 치뜬 눈, 입 언저리엔 거품이 허옇게 번져 있었다. '카터를 버려! 경찰이닷!' 사메지마는 별 효과가 없는 줄 알면서도 호통을 쳤다. 예상했던 대로 사내는 뜻도 없는 소리를 외쳐댔다. 하지만 그 순간 사메지마는 그 사내가 하라다임을 알아차렸다. 하라다는 망상 상태에 빠져 있었다. 가게야마 마사코 몸 속의 약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하라다가 마사코의 팔을 나꿔채 끌기 시작했다. 사세는 스미를 돌보고 있었다. 스미가 빈사 상태임을 사메지마는 첫눈에 알아보았다. 하라다가 불쑥 종이조각을 하나 내던졌다. 무슨 교환증인 것 같았다. 종이조각은 스미의 발 밑에 고인 핏덩이에 떨어졌다. '이것 가지구 가!' 으스대듯이 하라다가 외쳤다. 순간, 사세의 표정이 싹 변했다. 일어서서 웃옷 자락을 헤쳐 권총을 뽑아들었다. 은빛의 리볼버였다. 막을 틈도 없이 사세는 방아쇠를 당겼다. '버려!' 사메지마가 외쳤다. 최악의 사태였다. 사메지마에겐 권총이 없었다. 사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이었다. 사세는 사메지마의 경고를 못 들은 듯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사세가 사메지마의 얼굴을 모를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라다를 죽이는 것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사세!' 사메지마는 호통을 쳤다. 하라다를 뒤쫓고 싶었지만 사세를 내버려 둔 채 달려갈 수는 없었다. 이대로 하라다를 쫓아가는 것은 사세의 사정권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비켜!' 사세가 부르짖으면서 몸을 날랐다. 사메지마는 위험을 각오하고 앞을 가로막았다. 사세의 발포는 하라다뿐만 아니라 마사코까지 다치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총을 버려, 사세. 신주쿠 서의 사메지마다!' '입 닥치고 썩 물러서! 안 비키면 네놈부터 없앨테다!' 총구를 사메지마에게로 겨누었다. 사메지마는 경찰봉으로 내리쳤다. 경찰봉은 사세의 오른손에 명중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사세가 비명을 지르면서 총을 떨어뜨렸다. '이 새끼가......' 그래도 사세는 사메지마를 덮쳤다. 눈앞에서 형님 뻘인 스미가 칼을 맞는 바람에, 성난 짐승처럼 흉포하게 날뛰고 있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사세의 어깨에 떠밀려 비틀거렸다. '관두지 못해?' '훼방하는 게 아니야, 빌어먹을 경찰 새끼!' 나둥그러지면서 콘크리트 기둥에 등을 부딪친 사메지마는 숨이 막혔다. 사세가 왼손으로 목을 조여왔다. 사메지마는 가까스로 뿌리치면서 경찰봉으로 사세의 명치끝을 내질렀다. 이어서 머리를 부여잡고 무릎으로 얼굴을 걷어 올렸다. 사세의 코가 문드러지면서 피가 터져 나왔다. 사세는 가까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주저앉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 균형을 잡지 못했다. 사세지마는 사세의 오른팔을 양다리 사이에 끼워 비틀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수갑을 풀어 한쪽을 채운 다음, 가까이 있는 밴으로 끌고 가서 다른 한쪽을 범퍼에 채웠다. '사메지마씨!' 떨리는 목소리, 권총을 뽑아든 도게가 달려왔다. '구급차를! 하라다는 도망쳤어!' 도게는 눈이 둥그래져서 엘리베이터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메지마는 사세를 남겨놓은 채 달려나갔다. 하라다가 마사코를 끌고 간 방향은, 사메지마가 BMW를 세워둔 건너편이었다. 달려가면서 사메지마는 통로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퍼져 있음을 보았다. 하라다 아니면 마사코, 둘 중의 한사람이 부상을 당한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다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타이어 비명이 들려왔다. 충격음이 이어졌다. 출입구 쪽이었다. 사메지마는 발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충격음은 게이트 쪽에서 터진 것이었다. 일방통행로를 거꾸로 달려, 출구로 나간 차가 게이트를 돌파한 것이었다. 하라다였다. 사메지마는 자기 BMW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어디로 갑니까, 사메지마씨!' 도게가 외쳤다. 스미를 안아 일으키고 있었다. '하라다를 쫓겠어!' 사메지마도 외치면서 BMW에 올라탔다. 엔진을 걸어 부서진 게이트를 지나 지상으로 나왔다.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브레이크를 밟았다. 사메지마는 하라다가 몰고 있는 차종도 모르고 있었다. 오가는 자동차를 살펴보았으나 그럴듯한 것은 한대도 없었다. 폭주하는 차도, 클랙슨을 눌러댈 만큼 곡예 운전하는 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세 때문에 하라다를 놓쳐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하라다도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리 권력의 비호를 받는다 하더라도 체포를 면할 길이 없었다. 단 한가지가 사메지마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광란상태의 하라다가 피해망상에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스미를 해친 지금, 하라다의 망상은 현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폭주하는 하라다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16. 로열 호텔 주차장에 히라세의 낡은 크라운이 서 있는 것을 보자, 고지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알았다. 침착해야 한다 - 스스로를 달래면서 차를 세운 다음 로비로 들어갔다. 사람 하나 없는 텅빈 로비엔 비껴든 햇볕이 반짝거렸다. 그 빛을 피하듯이 해서 히라세가 원형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스포츠 신문을 들고 있었다. 유리문을 들어오는 고지를 알아보고 고개를 들었다. '안녕.' 뭣하러 여기 와 있는 거야 - 쏘아 주고 싶은 것을 그러나 고지는 가까스로 참았다. 이제 자신의 기분을 히라세가 눈치채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느라 지쳤어. 올 때가 됐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히라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가카와의 전화를 받은 직후, 고지는 히라세에게 연락하는 대신 아파트를 나온 것이었다. 쇼를 돌려 보내자 - 그 이상 더 좋은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쇼를 깨워 가능한 한 빨리 도쿄행 열차에 태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쇼를 구출하는 길은 이 도시를 떠나게 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불가능해졌다. 히라세는 마치 고지의 속셈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한발 앞서 호텔에 와 있었던 것이었다. 고지가 자기 전화를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호텔로 온 것을 히라세는 나무라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전화가 왔더군.' 고지는 히라세를 바라보았다. '누구한테서?' '뻔하잖아. 그 녀석한테서야. 네가 나한테 전활 안 걸어 줬기 때문에 저쪽에서 내 번호를 알아본 모양이야. 그런 건 간단하잖아, 작은 도시이니까.' 그리고는 잡아먹을 듯한 눈길로 고지를 응시했다. '거래, 엉망으로 만들 생각이야?' 화난 것 같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그럴 생각, 눈꼽만큼도 없어.' 고지가 대답했다. '그럼 전활 걸고 와. 우리 팀웍이 나빠지면 저쪽도 곤란할 것 아냐?' 히라세는 신문을 둥글게 말아 고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퍽 하고 메마른 소리가 났다. 고지는 치솟는 화를 억지로 참았다. 히라세는 어젯밤 이후 완전히 형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 어디로 갈 생각이야?' 고지가 물었다. 히라세는 노래 부르듯이 대답했다. '예정 변경.' '변경?' '우선 쇼짱을 저 사람들한테로 데리고 가야 해. 만나고 싶대, 어쨌든.' '뭣 때문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반한 건지도 모르구.' 히라세는 능글 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우선 전화부터 해.' 히라세는 대답 대신, 프론트의 구내 전화를 눈으로 가리켰다. '어디로 데리고 갈 생각이야?' '시끄러워! 빨리 전화 걸라고 했잖아!' 고지는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히라세, 우리는 한팀이잖아?' '마리나로 갈 생각이야.' 히라세는 혀를 차면서 귀찮다는 듯이 내뱉었다. '마리나?' '그래. 크루저로 바다에 나가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한번 바라보자 이거야. 그리고 나서 맛있는 것 먹으러 가는거야. 저 사람들이 다니는 멋진 요리집이니까, 우리가 생각하던 곳과는 차원이 달라.' 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한 일 없이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카와가 함께라면 제멋대로는 할 수 없지 않는가. '전화나 걸어.' '음.' 쇼가 어떻게 나올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이쪽이 하자는대로 움직여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고지는 전화를 걸었다. 히라세도 함께라고 하자, 괜찮다고만 대답했다. 이미 아침 식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쇼가 내려오기를 고지와 히라세는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아래위 진차림의 쇼가 나왔다. 진 재킷 속에는 검정 탱크톱이었다. 불록하게 솟은 젖가슴에 히라세가 황홀해진 듯했다. '좋군!' 히라세는 중얼거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쇼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눈을 깜박이면서 고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 왜 그 모양이야?' '별것아니야.' 고지는 눈길을 피했다. 새삼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싸웠어?' 쇼는 히라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히라세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아니야. 어젯밤 끝난 뒤 기분이 들떠, 이 녀석이 한바탕 떠들어댔어.' '누구한테 맞았어?' '술 취한 손님한테......' 대답하면서 고지는 쇼에게로 눈길을 쏟았다. '걱정할 것 없어, 가끔 있는 일이야. 과음한 손님들이 말야......' 납득한 건 아니었으나 쇼는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흥!' '자, 이제 가보자구.' 히라세가 말했다. '내 차로 가자구. 2대씩이나 몰고 가는 것도 뭣하잖아? 고지 차는 여기 그냥 놔두자구.' 고지는 머리를 끄덕였다. '어디로?' 쇼가 물었다. '바다는 어때? 어젯밤 손님 가운데 쇼짱 노래에 감동한 사람이 크루저에 초대한댔어.' 히라세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그렇지, 고지?' '응. 오너 친구야.' 고지는 어쩔 수 없이 맞장구를 쳤다. 듣고 있던 쇼가 입을 열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 고지. 자동차도 괜찮구 걷는 것도 좋아.' '그런 게 아니야, 쇼짱. 그 사람, 쇼짱을 만나보고 싶댔어.' 쇼는 히라세를 응시했다. '어젯밤 얘기 계속은 아니겠지?' 다짐을 놓는 말투였다. 히라세는 당황한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냐. CM 과는 관계없어. 정말이야. 단시 쇼짱을 만나고 싶어할 뿐이야.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렇지, 고지?' 고지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히라세를 곁눈질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구!' 히라세는 쇼와 고지 사이에 끼어들면서 두 손을 두 사람 어깨에 걸쳤다. 히라세에게 밀리듯이 발걸음을 옮기던 쇼가 고지를 돌아보았다. 고지는 쇼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히라세는 쇼를 조수석에 태우고 크라운을 몰았다. 가면서 노변의 이곳 저곳을 설명했다. 게중에는 고지가 모르고 있던 것도 있었다. 히라세는 이 도시에 대해 놀랄만큼 자세히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 많은 것을 주워들었는지 감탄할 정도였다. 쇼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일까. '히라세씨, 자세히도 알고 있네.' '그렇지? 고교 때 역사연구회 멤버였다는 건 거짓말이구. 내가 전에 구미에 들어갔었다는 건 얘기했지?' '응.' '구미에 있으면 배우는 것도 많아. 특히 지리는 철저하게 가르쳐 준단 말씀야. 몇 쵸메 몇 번지에 무슨 빌딩이 있고, 건물주는 누구며 지금 자금 사정이 좋은지 나쁜지 모두 알아야 하거든. 선거 땐 누구에게 투표하는가 까지 말야. 현정(縣政), 시정(市政) 역사도 공부해야 돼. 그런 걸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시의원이 누구한테 돈을 받아쓰는가, 저 사람은 공산당원이지만 마작을 아주 좋아한다든가...... 그런 걸 자세히 알아두면 앞으로 뭘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되거든. 맨홀 뚜껑 하나라도 판매 루트를 파고들면 엄청난 돈을 만질 수 있어.' '돈 얘기 뿐이로군.' 고지가 한마디 했다. '당연하잖아. 이봐, 야쿠자는 돈이 전부야. 돈줄에 달라붙게 마련이야. 생각해 봐. 야쿠자로 풀린 녀석들에게 따로 뭐가 있어?' '뭐라구?' '내가 바로 그런 놈이야. 성적이 나빠 학교에도 갈 수 없지, 선생들은 미워만 하지...... 집이 부자라면 몰라도 가난뱅이 아냐. 이대로 버티어 봤자 앞날이 뻔해. 맛있는 것 먹고, 멋진 자동차 몰며 예쁜 여자 품는다는 건 꿈 같은 얘기야. 야쿠자들은 자기네가 경원당하는 걸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모든 걸 이룰 수가 있어. 사람들이 굽신거려 주지, 돈도 굴러 들어오지...... 결국 돈밖에 없잖아?' '그럼 뭣 땜에 야쿠자를 그만뒀어?' 쇼가 물었다. 크라운은 해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광대한 매립지가 반듯반듯하게 구획되어 있었으나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지역 출신 의원이 정부에 압력을 넣어 소요 예산의 절반을 현 정부가 부담하도록 해서 추진한 매립 공사였다. 현 정부가 부담한 공사 대금은 대부분 가카와 재벌계 건설회사로 흘러 들어갔다. 어협(漁協) 소유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매립지도 가카와 그룹 기업이 나누어 가졌다. 가카와 가는 거기에 마리나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리조트 아파트 공사가 지금 한창 진행중이었다. 곧 호텔도 착공할 계획으로 있었다. 지금 공지로 남아 있는 곳도 가카와 재벌계의 창고회사, 운수회사 소유였다. 이 도시의 공공사업은 대부분 가카와 재벌을 살찌게 하는 사업이었다. 그런 건 고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콘트롤하는 사람이 바로 게이코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게이코 아버지는 최근 들어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가카와 계열 기업의 몇몇 사람과 국회의원, 그리고 게이코 뿐이었다. 매립지에 듬성듬성 들어서 있는 조립식 건물엔 하나같이 <가카와> 간판이 달려 있었다. '5년만 지나면 이 언저리도 굉장해질 거야. 거대한 시사이드 리조트가 완성되는 거야. 마리나 옆에 모래를 채우고 바다엔 방파석을 채워 파도가 없는 대형 해수욕장을 만든다는 거야. 저기 창고같은 너저분한 건물도 곧 헐어 버릴 거야. 시사이드 리조트를 건설하게 되면 현 정부가 예산을 지원할거야. 가카와 계열 부동산 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땅을 현 정부에 팔아넘기는 거지. 그러고도 공사는 가카와 계열 건설 회사가 맡는 거야. 리조트가 완성되면 파격적인 가격으로 가카와 계열 관광 회사가 매입할 거구. 그때마다 몇십억, 몇백억이란 돈이 가마와 가로 흘러 들어가는 거지. 전부 가카와 분가, 마담 아버지 금고로 말야.' 전에 한번 히라세가 고지에게도 설명한 적이 있었다. '......야쿠자를 그만둔 이유 말이지?' 쇼의 물음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히라세가 장난기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말하고 싶잖으면 얘기 안해 줘도 괜찮아.' '재능이 딸렸던 게지.' 고지가 말했다. '재능이라니?'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야.' '설마.' '그것뿐이 아니었어, 사실은.' 히라세가 털어놓는 바람에 고지는 적지 않게 놀랐다. '야쿠자로 늙을 생각이 없었던 거야, 처음부터.' '처음 듣는 소리로군.' '그렇겠지. 털어놓은 적이 없으니까.' 히라세는 룸미러로 고지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어 보였다. 친밀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웃음이었다. '그렇잖아? 야쿠자라 하더라도 금방 큰돈이 굴러 들어오는 건 아니잖아? 졸병 노릇하는 동안은 겨우 푼돈 뿐이야. 돈을 제대로 만질 수 있는 건 서른 중반쯤 돼서 중간 보스가 되거나, 아니면 감옥에 갈 각오로 위험한 장사에 손을 대거나 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단 말야. 고교 땐 야쿠자가 된 선배가 지갑에 10만엔씩 넣고 다니는 걸 보고 굉장하다고 생각했지만 스무 살이 지나자 바보같이 보이더군. 난 돈을 벌고 싶었던 것야. 돈 버는 노하우를 배우러 구미에 들어갔던 거야.' 히라세 얘기가 정말인지 어떤지 고지로선 알 수가 없었다. 쇼 앞이기 때문에 자신이 야쿠자를 이용하고 있는 영리한 사람인 척 뽐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쇼와 고지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히라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한가지 남아 있어.' '또 한 가지?'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고 싶었던 일이야.' '뭐야, 그게?' '곧 알게 돼.' 히라세는 다시 한번 싱긋 웃었다. 고지는 아차 싶었다. 크라운이 마리나 진입로를 그냥 스쳐 지나온 것이었다. 곧장 가면 어협 신축 빌딩이 나오고 그 저쪽엔 지금은 사용 않고 있는 창고가 있었다. 그 앞으로는 길도 없었다. '이봐, 마리나를 지나왔잖아?' '알고 있어. 저 앞에서 U턴할 거야.' 히라세는 어항 입구의 신축 어협 빌딩도 그냥 지나왔다. 노폭이 좁아지면서 노면도 형편없었다. 길 양쪽엔 철망이 쳐져 있었다. '막다른 길이잖아?' '걱정할 것 없어.' 폭주족이 침입 못하게 도로엔 직각으로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크라운은 장애물을 피해 핸들을 꺾었다. 정면에 철문이 보였다. 도로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철문은 열려 있었다. '저봐, 열려 있잖아. U턴, 문제 없어.' 히라세는 철문 안으로 차를 몰아 들어갔다. 비포장의 매립지였다. 사람 키만큼이나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하지만 가끔 관계자들이 드나드는 것일까, 자동차 바퀴 자국이 보였다. 히라세는 U턴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그냥 차를 몰았다. 앞쪽은 바다였다. 그 앞에 폐가나 다름없는 창고가 서 있었다. 어협 빌딩을 건축할 때 자재창고로 쓰던 건물이었다. 잡초 지역을 벗어나자 정면엔 바다, 왼쪽엔 자재창고가 보였다. 히라세는 창고 앞에 크라운을 세웠다. '다 왔어. 미안해요, 쇼짱.' 히라세는 느닷없이 조수석으로 팔을 뻗쳤다. 글러브 박스 뚜껑을 열었다. 히라세가 손에 꺼내어 든 것을 보자 고지는 숨이 막혔다. 나무 칼집에 든 비수였다. '무슨 짓이야?' 히라세는 대답 대신 칼집에서 비수를 뽑았다. '두 사람 모두 차에서 내려 주실까?' '왜 이래?' '입 닥치고 내려!' 히라세가 호통을 쳤다. '......이봐요, 데려다 줘...... 데려다 줘, 병원으로......' 샤키가 헛소리처럼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괜찮아. 찰과상일 뿐이야. 걱정할 것 없어.' 스스무는 필사적으로 공포감을 억누르면서 샤키를 안아 일으켰다. 신주쿠에서 요쓰야의 아파트까지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 시트에 쓰러져 있는 샤키를 부축하여 일으키면서 조수석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를 보자 스스무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총알은 샤키의 왼쪽 옆구리를 관통했다. 등골 옆으로 파고든 총알은 옆구리 살을 20 센티미터쯤 찢어내고 빠져나간 것이었다. BMW에 있던 타월로 샤키의 옆구리를 막은 스스무는 자기 아파트로 데리고 들어갔다. 피가 한없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건 좋은 현상이 아닌가. 피가 쏟아지면 샤키 몸 속의 나쁜 약물도 빠져 나오기 마련 아닌가. 스스무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샤키는 지금 커튼을 친 거실 가죽 소파에 누워 있었다. 센터 테이블엔 <캔디> 시트가 몇 개 팽개쳐져 있었다. '아파 죽겠어, 스스무짱.' '괜찮아. 괜찮아. 곧 나을거야.' '의사한테 데려다 줘.' 스스무는 샤키 옆에 무릎을 꺾고 앉았다. 상냥스럽게 내저었다. '샤키 병을 의사는 고치지 못해.' 그리고는 테이블 위의 <캔디>를 집어들었다. '먹을래?' 한알을 뜯어 스스무는 입에 물었다. 그런 스스무를 샤키가 가까스로 눈을 떠 바라보았다. <캔디>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단 한알로는 아무 것도 안 되었다. 샤키가 기침을 하자, 스스무는 허둥지둥 머리를 받쳐 주었다. 샤키가 구역질을 했다. 스스무의 가슴에 쏟아냈다. 갈색 액체였다. '못 견디겠어. 죽으려나 봐. 나 죽는단 말야.' '괜찮아, 더 토해 내. 나쁜 약물 몽땅 토해 버려.' '이상해졌어, 당신.' '이상한 건 너야. 스미가 무슨 짓을 했어?' 스스무는 다시 <캔디>를 한알 입에 넣었다. 조금 전에 물었던 것과 함께 씹어삼켰다. '아무 짓도 안했어......' '거짓말 마!' 스스무는 호통을 치면서 샤키의 몸을 흔들었다. 샤키는 눈을 감았다. 노파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스스무 마음 속의 상냥함이 사라졌다. 회색에 갇혀 있던 분노가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스미가 너한테 나쁜 약물을 주사한 거야! 그 녀석 장난감이 된 거야. 난 널 도우려고 온 거야! <캔디>를 가지고 밤새도록 자동차를 몰아왔어!' 샤키는 눈을 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스스무는 샤키의 블라우스 단추를 거칠게 풀었다. 아까부터 그렇게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던 것이었다. 보라색 브래지어에 싸였던 하얀 젖가슴이 드러났다. 블라우스를 적신 피가 브래지어 아랫부분까지 번져 있었다. 눈을 크게 떴다. 커다란 젖무덤엔 키스 마크가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마치 무슨 짐승이 깨물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 잇자국이 나 있었다. '이건 뭐야? 이게 뭐냔 말얏!' 샤키는 대답대신 앓는 소리를 냈다. '스미와 했지? 했지, 했지, 했지......' 샤키가 힘겹게 눈을 떴다. 마치 도깨비라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공포와 경멸이 서린 눈길이었다. '촌놈!' 샤키가 가냘프게 내뱉었다. 스스무가 샤키의 뺨을 주먹으로 쳤다. 샤키의 머리가 휘청 뒤로 젖혀졌다. 그 순간 스스무는 후회가 되었다. '샤키, 미안, 널 좋아해, 사랑해.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해.' '그럼 우선 병원으로 데려다 줘.' '그래서 말했잖아. 나쁜 약물 뽑아내야 한다구 말야.' 스스무는 샤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쁜 약이라니...... 무슨 뜻이야?' '스미가 너한테 주사한 약 말야.' '하!' 샤키가 내뱉었다. '하, 하.' 무슨 말인지 몰라서 스스무는 얼굴을 들었다. 샤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하하.' 샤키는 웃고 있었다. '당신, 정말 어쩔 수 없는 촌놈이야.' 내뱉듯이 말했다. '당신 <캔디>, 아무 짝에도 소용없어, 당신 그것처럼 말야.' '......무슨 뜻이야?'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스미씬 말야, 훨씬 좋은 걸 줬어. 효과가 훨씬 높은 거였어. 스미씨 그것도 엄청났어.' '이 년!' 스스무가 고함을 질렀다. 목소리에 금속성이 섞여 있었다. '이 년!' '주살 맞으면 하늘에 오르는 것 같았어. 당신이 준 <캔디> 따위, 어린애 장난감이었어.' 스스무는 침을 꼴깍 삼켰다. 목이 탔다. 아파트로 돌아와서 물을 벌써 몇 리터나 들이켰는 지 모른다. '역시 스미와 했구나!' 샤키는 빈정거리는 눈길로 스스무를 바라보았다. '훨씬 전부터 했었어.' 스스무는 숨을 들이마셨다. 마른 목이 부어올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입을 벌리려 했을 때 핸디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17. '이런 멍청일 봤나!' 사메지마가 차에서 내리려고 문을 열었을 때, 호통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울려퍼졌다. 마약단속관 사무소의 이다미가 으르렁거린 것이었다. 이다미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옆엔 도게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두 사람 앞에선 도쿄 경시청 수사1과와 신주쿠 서 형사과 형사들이 현장검증을 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모모이와 경시청 보안 2과의 시모이 경위가 서 있었다. 시모이는 각성제 사범 전담반 책임자였다. 시모이 반원도 현장검증에 참여하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이다미와 도게 쪽으로 다가갔다. 사메지마를 본 이다미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메지마씨!' 도게가 불렀다. 사메지마는 구급차를 따라 스미를 후송한 병원까지 갔다 오는 길이었다. 이다미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당신 기억하고 있어. 우리 잠복 미행을 망쳐 버린 것 말야!' 사메지마는 날카롭게 이다미를 쏘아보았다. '미끼에 걸려 헛물을 켠 건 그쪽이야.' '뭐라구? 이 녀석이!'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이다미를 도게가 막아섰다. '주임님!' '비켜, 이녀석.' 사메지마는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도게씨의 무전기를 뺏은 게 누군데 이 야단이야? 아니면 스미를 잠자코 내버려 두는 게 좋았단 말이야?' 이다미는 왈칵 성질이 돋았다. 잡담 제하고 사메지마에게 달려들었다. 사메지마는 이다미의 팔을 뿌리쳤다. 더이상 손을 쓰지 못하고 이다미는 씩씩거리기만 했다. '이 건에 대해서 정식으로 항의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집게손가락으로 사메지마를 찔렀다. 현장검증을 하던 경찰관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일손을 멈추고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느 정도로 항의할 건가요?'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모모이였다. 시모이도 옆에 서 있었다. '당신은 또 뭐야?' '신주쿠 서 방범과장 모모이 경감님입니다.' 시모이가 대신 말했다. 시모이와 이다미는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당신 부하였군, 이 녀석이.' 이다미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모모이는 태연히 흘려 들었다. '부하라곤 하지만 계급은 같아요.' '그렇다면 신주쿠 서장을 데리고 와! 이런 녀석은 외근으로 돌려 보초나 서게 해야 돼.' 모모이는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한번 생각해 보죠. 한데 마약단속관 사무소측은 스미를 벤 범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겠군요.' '가명을 하라다라고 하는 사냅니다. 본명은 가카와 스스무.' 사메지마가 말했다. 이다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처음 듣는 얘기군요.' 웃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우선 수사망을 좁히고 있어요. 사메지마군이 말한 인상착의를 근거로 해서. 자세한 정보가 있으면 나누어 가질 수 없을까요?' '거절하겠어.' 이다미가 말했다. '가카와는 우리가 오랫동안 쫓아온 범인이야.' '지금은 살인범이기도 하지.' 사메지마가 말했다. 도게가 깜짝 놀라며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출혈과다로 죽었어. 후지노 구미 야쿠자들이 지금 병원으로 몰려들고 있어. 가카와 신병을 빨리 확보하지 못하면 호지노 구미에게 뺏기고 말아.' 사메지마가 선언하듯 말했다. 이다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주임님......' '시끄러워!' 시모이가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이다미씨, 가카와가 제조원임을 밝혀낸 건 분명 당신네 공적이야. 하지만 도매책인 스미가 죽은 데다가 가카와마저 후지노 구미에게 빼앗기고 나면 <캔디> 루트를 밝히는 건 불가능해지고 말아요.' '우리가 밝혀낼 거야.' '한시가 급한 상황이야.' 사메지마가 말했다. '놓친 건 당신 아냐? 그런데도 잘난 척 으스대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다니......' '이건 살인 사건이야.' '살인관 관계없어. 가카와는 우리 것이야.' 이다미는 피우던 담배를 발로 밟아뭉갰다. '가카와는 도망칠 때 무슨 교환증 같은 종이 조각을 내던지고 갔어. 그걸 지금 살인 증거품으로 수거했어.' 사메지마가 말했다. 이다미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가카와는 스미에게 건네 주려고 <캔디>를 가지고 왔어. 가게야마 마사코와 <캔디>를 교환할 생각이었던 거야. 하나 가카와 자신이 <캔디>에 중독된 탓에 돌아 버렸어. 그래서 스미를 벤 거야.' '물표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어요.' 시모이가 사메지마를 흘낏거리면서 말했다. '거래를 하자는 건가?' '물표를 쫓아가면 틀림없이 다량의 <캔디>를 압수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전에 가카와가 사라지고 나면 그 이상의 루트는 밝힐 수가 없어. 모든 걸 가카와에게 뒤집어 씌울 테니까 말야.' 시모이가 말했다. '그전에 우리가 제조원을 덮칠 텐데?' 이다미가 허세를 부렸다. '가능할까?' 사메지마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이다미가 다시 성질을 돋우었다. '가카와는 후생성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인물이지? 만약 지금 이 순간이라도 가카와가 본가로 연락을 한다면 당신네는 옴쭉도 못하게 돼. 잠입한 당신 부하도 포함해서 말야.' '깔보지 마, 이녀석!' 이다미가 사메지마에게로 다가섰다. 도게가 끼어들었다. '주임님, 사메지마씨 말이 맞아요. 가카와를 한시 빨리 붙잡지 않으면 점점 거북해 집니다. 지금은 경찰과 협력하는 게 좋아요.' '이런 배알 없는 녀석!' 이다미가 도게를 꾸짖었다. '그렇게 경찰이 좋으면, 직업을 바꿔!' 도게는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사메지마가 시비조로 대들었다. '배알이 없다니? 누구 보구 하는 소리야?' '뭐라구?' '그쪽 속셈은 훤하게 읽고 있어. 가카와 수배에 협력 않는 건 이미 위쪽에 압력이 들어오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 때문 아니야? 경찰에 정보를 건네 주면 브레이크를 걸 수 없게 되는 것 아니겠어? 그래서 당신은 당신네만으로 가카와를 상대하려는 거지?' 이다미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사메지마는 이다미 정체를 이제야 겨우 알게 된 것이었다. 이다미를 지배하고 있는 건 경찰혐오증 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카와라는 <거물>에 대한 상층부의 대응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사메지마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도 자기 생각대로 수사를 콘트롤할 수 없게 된 데서 온 초조감 때문이었다. 그 초조감의 근원에는 상부 기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마약단속관 전원이 이다미 같은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일. 말하자면 이다미는 경찰을 비롯하여 모든 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관리 근성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메지마처럼 맞대놓고 그걸 지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다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런다면 마약 단속관 전원이 얕잡혀 보일 뿐이야.' 이다미는 말이 막혀 숨만 씩씩거렸다. 이윽고 천장으로 눈길을 던지면서 이빨을 주근주근 깨물었다. '물표를 줘!' '가카와 소재지와 교환합시다.' 시모이가 잽싸게 말했다. 이다미는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가카와가 임원으로 있는 운송회사는 시나가와 구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 또 가카와 자신이 도쿄 학생 시절에 살았던 아파트를 아직도 가지고 있구......' '아파트 주소는?' '오모리.' '학생 시절 살았던 아파트는?' '몰라. 등기부엔 가카와 스스무란 이름이 없었어.' '가카와 출신교는?' 사메지마는 도게를 보고 물었다. 도게는 상사를 곁눈질하면서 대답했다. 사립 명문대학이었다. '가카와는 부속고교를 거쳐 거기로 진학했어요.' '당시 학적부를 조사하면 알 수 있어.' 사메지마의 말에 이다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이미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았던 것은 상대방이 내사를 눈치챌까 봐 이다미가 두려워했다는 증거였다. '가 보겠습니다.' 사메지마는 짧게 모모이에게 말했다. '1과가 화를 낼 겁니다.' 시모이가 당황해 하면서 말했다. 사메지마가 맞대응을 했다. '1과가 쫓고 있는 건 스미 살해범이야. 난 도게 단속관과 함께 록봉기 클럽 호스테스인 각성제 상용자 가게야마 마사코를 추적하려는 거야.' '그런 억지가......' '가카와가 거기 있다면 손을 떼겠어. 1과에게 넘겨 주지.' 시모이는 한숨을 쉬면서 모모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난 모릅니다.' 모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임님.' 도게가 이다미를 바라보았다. '맘대로 해!' 이다미는 내뱉듯이 말했다. 도게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다미를 노려보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는 사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모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되는 거야?' '사메지마 경감.' 모모이가 불렀다. '서에 들러 권총을 가지고 가도록. 각성제 중독으로 돌아 버린 녀석도 위험하지만 후지노 구미 녀석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야.' '알았습니다.' 대답한 사메지마는 BMW로 걸어갔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시모이가 외치면서 사메지마에게로 달려갔다. '수사본부도 아직 설치되지 않았는데...... 사메지마 경감님, 이걸 가지고 가세요. 중간 연락 부탁합니다.' 휴대용 디지틀 무전기를 내밀었다. '범인을 확보하게 되면 꼭 연락해 주십시오. 그렇잖으면 1과한테 맞아죽습니다.' 무전기를 받아든 사메지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틀림없이 연락드리죠.' BMW 운전석 도어를 열면서 도게를 바라보았다. 도게는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이다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다미가 외면을 했다. 도게는 어금니를 꾹꾹 깨물면서 사메지마 옆자리에 올라탔다. '당신한텐 미안하게 됐어.' 자동차를 몰아 지상으로 나오면서 사메지마가 말했다. 도게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사메지마씨가 보통 형사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나도 약간 심술이 났던 거야.' 도게는 한참 사메지마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말했겠죠. 하지만 외부인에게 지적당한 건 솔직히 말해 충격이 컸을 겁니다. 주임님은 그래 보여도 꽤 유능한 마약단속관이에요. 이번 일은 결국 내가 너무 앞질러 달린 건지도 모르겠어요.' 사메지마는 앞쪽을 주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신주쿠 서까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일반 회사라면 인간 관계가 직무에 우선할는지도 모르지.' 도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샤메지마씬 타고난 형사인 것 같군요. 어째서 캐리어 쪽을 택했었나요?' '그땐 내가 이처럼 형사 일에 빠져들 줄 몰랐기 때문이야.' 도게는 납득이 안 된다는 눈으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사메지마와 도게가 신주쿠 서 방범과로 들어갔을 때, 과내엔 형사가 한사람 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는 습관적으로 자기 책상을 살펴보았다. 메모가 몇 장 쌓여 있었다. 그 중의 한장에는, <남자로부터 몇 번 전화. 급한 용무인 것 같으나 이름, 연락처는 안 밝힘> 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줘요.' 그렇게 말한 사메지마는 권총 보관소로 갔다. 홀스터를 착용한 다음 5발이 장전된 38구경 뉴남부를 찔러넣었다. 과로 돌아오자 당직인 풋나기 형사가 수화기를 내밀었다. '전ㅎ니다. 몇 번씩이나 걸어왔던 녀석입니다. 받으시겠습니까?' '받지.' 사메지마는 자기 책상 위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사메지맙니다.' '겨우 연락이 됐군.' 젊은 사내 목소리였다. 말투엔 약간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누구신지?' '누구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야.' 사내가 말했다. 사메지마는 말투를 바꾸었다. '제법 놀고 있군. 도대체 용건이 뭐야?' '당신이 지금 쫓고 있는 사람 있지?' '언제나 누굴 쫓고 있어. 그게 내 임무야.' 사메지마의 의자에 앉아 있던 도게가 눈길을 쳐들었다. '그럼...... 하라다라고 하면 알겠어?' '하라다? 그게 당신 이름이야?' 도게의 얼굴이 긴장이 번졌다. '농담은 집어쳐. 난 하라다씰 만난 적도 없어. 다만 하라다씰 아는 사람의 부탁을 받고 전활 건 거야.' '무슨 부탁?' '지금 이 전화, 당신 이외 누군가가 듣고 있나?' '아니, 여긴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없어.' '그럼 말하지. 당신이 몹시 좋아하는 아가씨, 여행에서 돌아가는 게 좀 늦어질지도 모르겠어.' 사메지마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냉정한 척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군.'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그 사람 부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거니까.' '그 사람 이름은 뭐야?' '나도 몰라. 난 메신저에 불과해.' '잘난 척하다간 큰코 다칠텐데.' '무섭지 않아, <신주쿠 상어> 쯤은.' 사내가 말했다. '용건은 그뿐인가?' '자세한 얘긴 뒤로 미뤘으면 좋겠는데......' '난 그럴 생각 없어.' '그래? 그럼 아가씬 여행에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몇 년 먹을지 알기나 해? 그런 메시지 전한 것만으로도 푹 썩게 될 걸.' '상관없어. 어쨌든 하라다씨가 무사히 도쿄를 떠날 수 있게 해 줬음 좋겠어.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사메지마씨.' 빠르게 주워섬기면서 사내는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입니까?' 도게가 물었다. '아무 것도 아냐. 미안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줘.' 수첩을 뒤져 <후즈허니> 멤버의 번호를 찾았다. 방범과를 나와 복도에 있는 공중전화로 번호를 눌렀다. 두번째 번호를 눌러 리더인 슈와 연락이 닿았다. '사메지마야.' '오랜만이군요. 돌아왔나요?' '아니, 아직이야. 오늘 그쪽으로 무슨 연락 없었나?' '아뇨.' '쇼 친구가 일한다는 가게 이름, 알고 있나?' '아뇨. 들은 적 없는데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니, 그런 건 아냐. 고마웠어.' 사메지마는 전화를 끊었다. 쇼가 가르쳐 준 호텔 번호가 삐삐에 남아 있었다. 번호를 눌렀다. 방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신주쿠 상어> - 사내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사메지마에 대해 알고 있음을 비치고 싶었던 것이다. 쇼가 인질로 잡힌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도시로 갔던 쇼가...... 하지만 왜? 쇼는 <아이스캔디> 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는가. 더군다나 그 도시엔 쇼가 사메지마의 애인이란 걸 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도 하라다 배후의 <캔디> 제조책은 쇼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말했다. 허풍을 떨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찰관 애인을 인질로 잡아놓고 자기 패거리를 눈감아 달라고 요구하는 건 적어도 야쿠자나 프로 범죄자들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프로들에겐 체포당하거나 감옥에 가는 것쯤 처음부터 각오한 리스크가 아닌가. 경찰관이나 그 가족을 상하게 하거나 인질로 잡는 것은 당국자를 <적>으로 인식하는 반정부주의의 과격파들이나 생각할 일이었다. 이념적인 배경이 없는 프로들은 꿈에도 생각 않는 일이었다. <아이스캔디> 제조책 가운데는 과격 좌익분자가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 - 쇼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함께 그런 생각이 사메지마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도게한테서 들은 정보와 그 생각은 전혀 이가 맞지 않았다. 하라다로 알려진 가카와 스스무는 그 지역, 정계, 재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가카와 가의 한사람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무슨 까닭으로? 도대체 누가 사메지마와 쇼의 관계를 알아낸 것일까. 유일한 가능성은 지난날 쇼와 같은 밴드에 소속해 있었다는 친구였다. 그 사내가 <캔디> 제조책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너저분한 사내와 쇼가 밴드를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쇼가 유괴당했다는 것 이상으로 사메지마에겐 충격적이었다. 서로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같은 물건을 보더라도 느끼는 것이 엄청나게 달랐다. 그래도 사메지마는 쇼를 믿고 사랑해 왔다. 2년 전 하마터면 쇼를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었다. ('소돔의 성자' 참조). 그 때, 사메지마는 쇼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비로소 깨달았었다. 그것은 쇼 자신이 사메지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사메지마로서는 쇼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영원히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2년 전 그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담 - 그 말밖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어쩌다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된 것일까. 이유를 추리하려는 이성보다는 감정적인 혼란이 사메지마의 마음을 지배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아무리 끔찍한 생각이 들더라도 제3자에게 알려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스스무를 체포할 때까지 예측 못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사메지마가 약점을 잡혀 있다는 사실이 수사 관계자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가카와 스스무를 체포할 때까지는. 체포라는 결과가 바뀌어져서는 결코 안되는 일이었다. 사명도 아니었고 직무에 대한 충성심도 아니었다. 신념이었다. 도게와 함께 신주쿠 서를 나온 사메지마는 가카와 스스무의 모교로 향했다. 대학 당국이 영장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두 사람은 구내에 병설되어 있는 부속고교 교무실로 찾아갔다. 영장을 청구할 충분한 근거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가카와 스스무의 고교 시절 주소를 확인했다. 가카와 스스무의 백부 되는 사람이 부속고교 출신으로 대학의 이사로 있었음도 확인했다. 20년 전의 일이었다. 그 사람이 이미 수년 전에 타계한 것도 알아냈다. 고교 시절의 가카와 스스무 주소는 신주쿠 구 요쓰야 1쵸메 아파트였다. 당시 학적부에는 동거인으로 <형 노보루> 가 등재되어 있었다. 전화번호도 없었다. 모두 메모한 다음 사메지마는 도게와 함께 요쓰야로 향했다. 임대 아파트라면 근 15년이나 세월이 흐른 지금, 다른 사람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학적부에 적힌 주소는 요쓰야 역에서 걸어서 수분 거리, 아카사카 영빈관 근처로 도쿄의 1등급 아파트였다. 15년 전에도 임대료가 적지 않았을 터, 가카와 가의 재력이라면 오히려 분양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주쿠의 후지노구미 사무실에서라면 자동차로 10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만약 가카와 스스무가 그 아파트에 잠복하고 있다면, 그래서 후지노구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어정거리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후지노구미 입장에서 볼 때, 스스무는 간부를 죽인 범인일 뿐만 아니라 구미의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스캔디> 판매 실태에 관한 정보를 한손에 쥐고 있는 인물이었다. 후지노구미와 가카와 스스무의 관계가 우호적이라면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스스무가 체포되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스스무가 저지른 범죄까지 후지노구미가 뒤집어 쓸 가능성도 있었다. <간부 살해범> 이라는 대의명분이 있는 이상, 스스무의 입을 막는 건 쉬운 일이었다. 경찰보다 한발 앞서 - 최악의 경우 동시에 들이닥치더라도 상관없었다 - 스스무 살해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경찰관의 제지를 뿌리치고라도 스스무를 제거한 뒤 <형님 원수를 갚았다> 고 버티면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 그런 소모품으로 쓸 녀석이라면 후지노구미엔 지천으로 깔려 있지 않는가. 후지노구미도 지금 스스무가 숨어 있는 곳을 찾느라고 법석을 떨고 있을 게 분명했다. 스스무가 스미를 죽이고 도망친 건 사세가 체포된 지금 소문이 퍼질대로 퍼져 있다고 봐야 했다. '만약 가카와가 거기 있다면 어떡할 작정이세요?' 학교에서 요쓰야로 가는 차 안에서 도게가 물었다. '있나 없나 확인하는 게 더 급해. 만약 있다면 즉각 응원을 요청할 생각이야. 후지노 구미가 쳐들어온다면 우리 두 사람만으로는 막아낼 수가 없어. 후지노구미도 이번만은 형사가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망설이지 않을 게야. 구미가 망하느냐 마느냐 기로에 서 있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거야.' '구미쵸까지 <캔디> 판매 혐의로 옭아넣을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렵겠지. 하지만 톨루엔으로 재미를 보던 후지노구미는 마가베라는 간부 후보생이 체포되는 바람에 한동안 곤란을 겪었어. 다행이 거품 경제 덕분에 매춘으로 회생할 수 있었어. 하지만 거품이 꺼진 지금은 거의 <캔디>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일거야. 더군다나 <캔디> 책임자였던 스미가 살해당한 지금 수뇌부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허둥대고 있을 게 틀림없어. 모든 걸 죽은 스미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선 우선 가카와부터 없애야 하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가카와 가가 가만 있을까요? 틀림없이 보복을 할텐데.' '가카와 본가의 톱이 나서면 그렇게 되겠지. 그땐 보복도 메가톤급이 되겠지. 하지만 가카와가 철없이 떠들어대기라도 한다면 본가 사람들도 입장이 곤란해질 게 틀림없어.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고 봐야 해...... 가카와 가가 어떻게 나오든,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후지노구미가 가카와를 없애 버리면 그걸로 끝장이 날 가능성이 높아. 싸움은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는 거니까 말야.' '후지노구미 상부조직은?' '칸토 교에이카이, 오래된 조직이야. 정치가들이 압력을 가해 오더라도 웬만한 건 눙쳐 버릴 힘이 있어.' '그렇군요. 말하자면 상의하달에 소요되는 시간을 적당히 이용하자는 뱃심이겠군요.'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카와 스스무에게도, 후지노구미에게도 주어진 시간은 극히 적었다. 오늘 중에 결판을 내려고 후지노구미는 필사적으로 설칠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쇼가 있다. 사메지마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후지노구미가 한발 앞서 스스무를 처치해 버렸을 때 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협박자는 무엇을 생각할까. 가카와 스스무를 도망치게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후지노구미에게 선수를 빼앗기면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가카와 스스무가 살해된다는 건 쇼 구출의 단서를 잃는 것과 같은 뜻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요쓰야 역이 가까워졌다. 사메지마는 요쓰야 제일중학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아파트는 학교 뒤편에 있었다. '저것이로군요.' 도게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8층의 장중한 건물이었다. 최근의 아파트와는 달리 외장이 화려하지 않았으나 한세대 한세대가 널찍널찍하게 보였고, 장방형 창이 영빈관과 아카사카 쪽으로 툭 터져 있었다. 지하 주차장 입구에는 녹색 램프가 반짝였다. 고교에서 대학까지 가카와 스스무는 이 아파트 701호에서 살았던 것이었다. 701 이라는 호수 번호로 미루어 보아 7층 가장자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메지마는 차를 세운 다음 쌍안경을 꺼냈다. 차창 유리를 내리고 살펴 보았다. 왼쪽 가장자리 창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오른쪽 가장자리는 창문이 열려 있었으나 각도가 나빠 천장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 고급 아파트라면 전속 관리인이 있을 겁니다.' 도게가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민 아파트와는 달리 이런 고급 아파트 관리인은 언제나 입주자를 감싸고 돌게 마련이었다. 서툴게 탐문을 하고 다니면 당사자에게 통보할 염려도 있었다. 사메지마와 도게는 차에서 내렸다. 아파트 앞 도로는 편도 1차선이었다. 아파트 출입구는 지하 주차장 진입로 바로 옆에 있었다. 대형 유리문이 본체에서 툭 불거져 있었다. 야트막한 계단을 올라 유리문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 오른쪽엔 사대별 우편함이, 왼쪽은 관리인실이었다. 안쪽으로 엘리베이터 2대가 보였다. 조명이 낮은 로비는 조금 어두컴컴하게 보였지만 안온한 느낌을 주었다. 관리인실 창문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우선 우편함부터......' 사메지마가 말하면서 우편함으로 다가갔다. 701호 은색 박스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속은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박스 여닫이도 잠겨 있었다. '역시 관리인에게 물어봐야겠군요.' 사메지마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7층으로 올라가 직접 확인하는 것보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커튼이 쳐진 작은 창문 옆에 인터폰이 붙어 있었다. 도게가 버튼을 눌렀다. 안쪽에서 벨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건물 안이 조용했다. 대답이 없었다. '일요일이어서 쉬는가?' 도게가 사메지마를 돌아보면서 중얼거렸다.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오른쪽 엘리베이터였다. 니트 운동복에 진바지 차림의 40쯤 되어 보리는 남자가 내렸다. 회사원 같지는 않았다. 햇볕에 그을은 게 제법 유복한 인상을 주었다. 사내는 초조한 표정으로 곧장 사메지마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을 무시한 채 관리실 인터폰을 눌렀다. 대답이 없자 혀를 찼다. '야난났군. 어쩐담?' 혼자 중얼거렸다. '무슨 일입니까?' 사메지마가 물었다. 사내는 사메지마와 도게를 돌아보더니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메지마는 경찰 신분증을 내보였다. 그러자 사내 입에서 폭포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지하 주차장 내 자리에 낯선 차가 서 있어요. 형사님이라면 어떻게 좀 해 주실 수 있죠?' '낯선 차?' '네. 약이 올라 죽겠어요. 30 분쯤 나갔나 왔더니 그렇게 됐지 뭡니까?' '어떤 자동차던가요?' '벤츱니다. 천박스런 녀석, 금빛 엠블럼에 창유리엔 검정칠을 했더군요. 이곳 입주자는 아니었어요. 관리인에게 따지러 온 겁니다.' 다시 인터폰을 눌렀다. '관리인은 언제나 자리를 지키게 되어 있나요?' '그럼요. 여기서 먹고 자고 하니까요. 누군가 한 사람은 언제나 있어요.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데?' '사메지마씨.' 도게가 긴장된 표정으로 불렀다. 사메지마는 창 옆에 있는 스틸 도어로 다가갔다. 노크를 했다. '여보세요. 누구 안 계십니까? 경찰에서 나왔어요.' 그러고는 창 쪽으로 눈을 돌렸다. 커튼이 흔들렸다. 사내 얼굴이 언뜻 비치더니 사라졌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사메지마는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서둘러요, 도게씨!' 관리인실 도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뭐야? 시끄럽게 구는 새끼가 누구야?' 첫눈에 야쿠자임이 분명한 사내가 몸을 날려 나왔다. 도게가 몸을 돌려 마주 섰다. 사메지마의 직감이 맞았다. 후지노구미가 관리인실을 점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스터 키를 빼앗은 별동대는 7층으로 올라간 게 틀림없었다. 지금 뛰쳐 나온 녀석은 망을 보고 있다가 경찰이란 말을 듣고 한순간 만이라도 사메지마를 저지하려고 뛰쳐 나온 게 분명했다. '당신......' '뭐야, 이 새끼!' 야쿠자가 도게에게 달려들었다. '내버려 둬요. 내버려 두란 말야, 도게씨. 그 녀석, 지금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 '뭐야?' 야쿠자 둘이 또 관리인실에서 뛰쳐 나왔다. 한녀석은 낯이 익었다. 후지노구미 소속이었다. 도게는 달려드는 야쿠자를 뿌리쳤다. '마약단속관이야. 저항은 그만둬!' 목소리를 높였다. '시끄러워!' 진바지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뒷걸음질쳤다.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관리인실에서 느닷없이 험상궂은 야쿠자들이 뛰쳐 나왔으니 그럴만도 했다. 남은 두 녀석이 사메지마에게로 돌진했다. 한 녀석이 사메지마 허리를 감아잡자, 또 한 녀석이 몸을 날려 부딪쳐 왔다. 사메지마는 견디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홀의 복도 바닥에 쓰러졌다. '형사면 다야? 이 새끼, 한번 붙어볼래?' 사메지마 위에 올라타면서 고래고래 외쳐댔다. '윽!' 낙법을 쓰긴 했지만 허리와 어깨가 바닥에 세차게 부딪치는 바람에 사메지마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뉴남부를 더듬었다. 녀석들은 공무집행 방해로 체포당할 걸 각오하고 사메지마에게 덤벼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별동대가 7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픔을 참아가면서 사메지마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뉴남부를 뽑아들었다. 사메지마의 가슴에 올라탔던 야쿠자는 이마에 총구를 갖다대자 숨을 들이마셨다. '쏴! 쏴보란 말야!' 외쳐대면서 물러났다. 사메지마는 일어섰다. 도게가 첫번째 야쿠자와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야쿠자들은 사메지마와 도게를 상하게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마음이었다면 가지고 있는 칼이나 권총을 뽑아들었을 텐데도 끝까지 주먹만 휘둘러 댔다. 7층으로 몰려간 녀석들은 물론 무장을 했을 것이다. 사메지마는 바닥을 향해 뉴남부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공기를 찢으며 울려퍼짐과 동시에 전원이 선 자리에 얼어붙었다. '네 녀석들 몸통도 날려 버릴 테다!' 사메지마가 으르렁거렸다. 도게가 사메지마 옆으로 다가섰다. 입술이 부어올랐고 이마가 찢어져 있었다 야쿠자들을 노려보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들었다. 브로닝 7.62 밀리미터 구경이었다. 옷 속에 차고 있으면 거의 표가 나지 않는 소형 오토매틱이었다. 경시청 특수 경호 경찰관이 애용하는 총이었다. 슬라이드를 당기자 제1탄이 약실로 들어갔다. 사메지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도어가 열렸다. 시모이가 준 무전기를 꺼내어 도게에게 넘겼다. '사용법은 알고 있지? 지원을 요청해 줘.' 도게는 눈이 둥그래졌다. '사메지마씨!'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까지 높였다. '혼자 올라갈 생각인가요?' '이 녀석들이나 7층으로 올라간 녀석들이나 모두 체포당할 각오로 왔어. 가카와를 죽이는 게 그만큼 절박하고 중요하다는 뜻이야. 녀석들에겐.' '만용입니다. 혼자 뛰어들다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쇼의 일도 있지 않는가. <캔디> 루트 해명만이라면 과연 혼자 뛰어들 용기가 났을지 어떨지 사메지마로선 단언할 수가 없었다. '이 녀석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도게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메지마 얼굴에 뭔가 절박감이 서려 있는 걸 읽었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도 더이상 아무 말도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7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올라가기 시작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숨을 내뿜은 목줄기가 떨렸다. 두려웠다. 후지노구미 야쿠자들도 이번만은 사메지마에게 반격을 가할 것이 분명했다.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이처럼 두려워지기는 신주쿠 교엔에서의 총격전 ('독원숭이' 참조) 이후 처음이었다. 당시 사메지마는 함께 싸우다 숨진 대만인 형사의 유지를 이어받아 몸을 내던졌었다. 무엇보다도 강한 사명감이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지금은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사명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경찰관으로서의 사명감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쇼를 구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사메지마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지갑이 든 안 포켓을 더듬었다. 지갑 속에는 죽은 두 대만인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별명이 <독원숭이>인 유진생과 형사 곽영민의 사진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사진에 얘기를 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사메지마는 스스로에게 기합을 넣었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 닿았다. 그것은 돌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스스무는 노보루와 한참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무가 스미를 칼로 베었다는 말을 듣자 노보루는 경악했다.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됐니?' '어쩔 수 없었어, 형. 어쩔 수가 없었어!' '녀석들이 먼저 손을 썼나?' '그런 정도가 아니었어. 날 죽이려 했단 말야......' 스스무는 울먹거렸다. 스스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형한테 매달린 어린애처럼 울어젖히고 싶었다. 그리고 <이건 꿈이야. 나쁜 꿈을 꾼거야> 라고 달래 주기를 바랐다. '부상은, 부상은 어느 정도야?' '난 괜찮아, 난. 하지만, 하지만 녀석들이 총을 쐈어. 샤키를 쐈단 말야......' 통화를 하는 중에는 샤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눈은 뜨고 있었으나 한 곳만 응시했다. 스스무가 손을 꼭 쥐어 줬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봐, 진정해. 침착해야 돼!' 노보루는 스스무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손을 썼어. 손을 써뒀어. 중요한 건 네가 거기를, 도쿄를 빠져 나와야 한다는 점이야. 무사히 이리로 오기만 하면 어떻게 될 거야.' '안 돼. 이제 끝났어. 샤키를 두고 혼자만 갈 순 없어. 난 사람을 죽였어.' '정신 똑바로 차려! 네가 거기서 포기하면 아무 것도 안돼!' '경찰이 쫓고 있을 거야. 형, 나 죽을 거야. 형과 가카와 가문에 폐가 안 되게 여기서 죽을께, 샤키와 함께 죽을께.' '바보같은 소리 그만둬. 네가 죽는다고 해결될 건 하나도 없어. 내 말 잘 들어. 그쪽 형사한테 손을 써 놨어. 듣고 있나? 내 말 듣고 있나?' '응...... 듣고 있어.' 스스무는 코를 훌쩍이면서 대답했다. 오한도 들었다. 전신의 살갗이 까칠까칠하게 느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몽땅 곤두서서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토할 것 같았다. 끔찍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형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 지마, 사메지마야. 신주쿠 서 형사야. 잘 들어. 그쪽으로 형사가 대거 몰려들면 그걸로 끝장이야. 지금이라면 어떻게 할 수가 있어. 사메지마가 야쿠자들을 막아 줄 거야. 그러라고 연락을 했어.' '연락? 무슨 연락? 형이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여기서도 이상한 녀석들이 날 협박했어. 돌아온 뒤 얘기해 줄 생각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전화로 말하지. 게이코 가게 점장과 그 녀석 친구야. 양아치 같은 녀석이야. 돈이 목적이야. 그 녀석한테 시켰어. 녀석, <캔디> 사업에 한몫 끼어들겠다는 거야.' '뭘 시켰어? 어떻게 했는데?' 혀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 '사메지마 애인을 납치했어. 쇼 말야. 잘 들어, 쇼를 납치했어. 쇼란 이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쇼, 쇼랬지?' '그래. 인질로 잡고 있어. 사메지마는 널 도와줄 거야. 벌써 뛰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형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현관 쪽에서 격렬한 소리가 터졌다. '잠깐, 누가 왔나 봐.' '문은 잠갔나?' 형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체인까지 걸었어. 하지만......' 스스무는 핸디폰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현관 도어가 열려 있었다. 분명히 잠가놓았던 도어가 열려 있었다. 안쪽으로 밀려 열린 도어가 체인록에 걸려 있었다. 그 틈으로 누군가가 손을 들이밀어 체인걸이를 더듬고 있었다. 벗겨낼 수 없음을 알자 거세게 도어를 흔들어댔다. 닫았다가는 왈칵왈칵 열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 힘을 견디다 못한 체인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완전히 떨어져 나갈 때까지 계속한 모양이었다. 체인이 당겨질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집안의 창문 유리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도어를 열고 있어. 체인을 떼내고 있단 말얏!' '이 새끼, 이것 열지 못해?' '문 열라고 호통을 치고 있어.' 문 밖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 거세게 들려왔다. '야쿠자야, 야쿠자. 복수하러 왔어!' '경찰을 불러! 112에 전활 걸어!' '하지만......' '잘 들어. 경찰이라면 어떻게 해 볼 수가 있어. 이렇게 된 이상 후지노 구미에게도 손을 쓰겠어. 지금은 112가 최선의 길이야.' '체포된단 말야. 경찰에 연락하면 당장 수갑을 채운닷 말얏! 형, 난 사람을 죽였어!' '죽었다고 단정할 수 없어, 아직은. 게다가 상댄 야쿠자야. 그쪽도 널 해치려 했다면서? 우리에겐 인질이 있어. 괜찮아, 중벌은 받지 않을거야.' 스스무는 손에 들고 있는 핸디폰과 현관 도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형 목소리가 내 곁에 있다. 그런데도 지금, 체인 받침대가 점점 떨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저게 벗겨지면 죽게 되는 것이다. 야쿠자들이 막 밀려들어 난도질을 할 것 아닌가. 스스무의 목에서 비명 같기도, 부르짖음 같기도 한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스스무는 잽싸게 몸을 돌려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센터 테이블 위의 <캔디> 시트를 움켜 잡았다. 양손의 엄지로 <캔디>를 몽땅 뽑아내어 입 안 가득히 털어넣었다. 와삭와삭 씹어 꿀꺽 삼켰다. 목에 걸리는 바람에 심한 기침이 쏟아졌다. 위 속에 든 것이 뒤틀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 구토를 했다. 하지만 올라온 것은 가느다랗게 늘어진 타액과 반쯤 녹은 <캔디>뿐이었다. '스스무! 왜 그래, 스스무!' 테이블에 내려놓은 전화기에서 노보루의 고함소리가 울려 나왔다. 현관 쪽에서도 덜커덕하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스스무는 누워 있는 샤키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지저분해진 입가를 닦은 다음 꼼짝도 않고 있는 샤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담?' 중얼거렸다. 샤키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군, 이상해......' 샤키가 조금 움직였다. 스스무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샤키가 스스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분노도 경멸도 사라진 깨끗한 눈빛이었다. 스스무도 마주 바라보았다. 샤키의 입이 움직였다. 메마른 소리를 힘들게 내뱉었다. 귀를 가까이 갖다대고서야 가까스로 알아들을 정도로 가냘팠다. '모두들 바보였어......' '그럴까?' 스스무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샤키, 난 네가 좋아. 너 같은 여자, 시골엔 없어. 정말 너무너무 좋아. 함께 살고 싶어......' 샤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18. 엘리베이터 도어가 열렸다. 그 순간 복도에서 고함소리가 터졌다. 고함소리가 터진 곳은 엘리베이터 오른쪽 복도 끝이었다. 널찍한 복도에서는 푹신푹신한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사메지마는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으로 열린 스틸 도어 속으로 사내들이 몰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사메지마도 뛰어갔다. 으르렁거리는 소리, 호통소리, 비명이 범벅이 되어 울려 나왔다. 묵직한 물건이 쓰러지는 소리,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도 뒤를 이었다. 몸을 날려 들어갔다. 받침째로 떨어진 체인이 안쪽으로 열린 도어 손잡이 밑에 덜렁거리는 게 보였다. 실내엔 사람이 무더기로 얽혀 있었다.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경찰이닷!' 사메지마는 뉴남부를 겨누면서 외쳤다. 사람 무더기가 무너졌다. 그 중심에 카터 나이프를 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넌 뭐야?' 웅크린 사내가 금방 모습을 감추었다. 대신 비수를 뽑아든 전투복 차림의 젊은 녀석이 사메지마에게로 몸을 날려왔다. '저항은 그만둬!' 사메지마는 방바닥을 향해 뉴남부 방아쇠를 당겼다. 굉음과 함께 덤벼들어 오던 사내의 오른쪽 무릎이 휘청했다. 발에 총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쓰러져 몸부림을 쳤다. '날 쐈겠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면서 이리저리 뒹굴었다. '이 새끼!' 총소리가 몇 발 울렸다. 조금 전에 사라졌던 카터 나이프의 사내 모습이 다시 사메지마 시야에 들어왔다. 벌떡 일어나서 카터 나이프를 미친 듯이 휘둘러댔다. 총성과 함께 황색 섬광이 번쩍였다. 사내의 허리가 꺾이면서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그만두지 못해?' 군용의 대형 콜트 오토매틱이 쓰러진 사내를 계속 겨누었다. 전투복의 풋나기와 쓰러져 있는 사내, 그리고 비수와 은색 리볼버를 든 녀석 등 방안의 사람은 모두 4명이었다. 사메지마는 총구를 위로 향하게 해서 뉴남부 방아쇠를 당겼다. 정면의 커튼이 쳐진 유리창이 박살났다. 군용 오토매틱을 든 사내가 깜짝 놀라 비틀거리면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 그러나 치켜뜬 눈빛은 이글이글 불을 뿜었다. '죽여 줄께!' 그래도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로 다시 총을 겨누었다. 사메지마는 다시 한발 쏘았다. 이번엔 군용 오토매틱을 든 사내의 팔에 명중되었다. 두 손으로 조준하고 있던 오토매틱 총구가 밑으로 축 처지면서 불을 뿜었다. 사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총을 버렷! 무기를 버렷!' 사메지마가 으르렁거렸다. 야쿠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무기를 버렸다. 사메지마는 두 팔을 쭉 뻗어 얼굴 높이로 뉴남부를 겨눈 채 실내로 성큼 들어섰다. 남은 총알은 한 발 뿐이었다. 복도 바닥에는 항아리와 거실 도어의 유리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사메지마 구둣발에 밟히는 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졌다. 사메지마는 야쿠자들을 겨눈 채 재빨리 상황 판단을 해 보았다. 쓰러져 있는 사내한테 달려가 용태를 살펴보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그 틈을 노려 야쿠자들이 역습해 올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바닥으로 내던진 권총과 나이프는 바로 야쿠자 발 밑에 있었다. 사메지마는 갑자기 주변이 물밑처럼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바로 눈앞에 쓰러져 있는 전투복 풋나기의 신음소리 이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건물 전체가 지금까지의 고함소리와 총성에 겁을 먹고 숨을 죽인 것 같았다. 사메지마를 포함해서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깨로 숨을 쉬었다. 어떤 야쿠자는 사메지마를 노려보았고, 어떤 녀석은 눈을 내리깐 채, 사메지마 쪽에선 사각이 되어 보이지 않는 위치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목이 탔다. 권총을 겨누어 쥔 두 손이 마치 석고를 고정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 있었다. 대치 상태는 실제 몇 분밖에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사메지마에겐 영원처럼 느껴졌다. 사메지마를 노려보던 야쿠자들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글거리던 증오와 초조의 빛이 싹 가시면서 체념한 듯 눈길을 돌려 버린 것이었다. 그 까닭을 사메지마는 금방 깨달았다. 패트롤카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귀청이 찢어질 듯 커졌다가 갑자기 뚝 그쳤다. 기동대와 방탄복을 착용한 형사들이 실내로 몰려든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권총을 내리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경찰관으로 방안이 가득해진 한참 뒤까지도 사메지마 두 팔의 경직 상태는 풀리지 않았다. 젖먹던 힘까지 뽑아올린 다음에야 가까스로 천천히 총을 내일 수 있었다. 구급차가 도착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사메지마는 경찰관들이 둘러싸고 있는 사내에게도 다가갔다. 베개 대신 둘둘 만 방탄복으로 머리를 받쳐놓고 있었다. '움직여선 안 됩니다.' 시모이가 사메지마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방탄복은 시모이 것이었다. 사내는 문자 그대로 피투성이였다. 여기저기 칼을 맞은데다가 총알도 몇 발 관통당한 것 같았다. 어디가 상처 부위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전신이 피범벅이었다. 반쯤 눈을 감고 얕은 호흡을 헐떡거렸다. 시모이는 다시 사내에게로 눈을 돌렸다. 시모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사내가 죽으면 큰일이라고, 제발 목숨을 유지해 달라고 마음 속으로 빌고 있었다. 방안에는 또 한 사람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가게야마 마사코였다. 마사코는 피가 흥건히 괴인 장의자에 누워 있었다. 수사관 한 명이 웃옷을 벗어 덮어 주었다. 사메지마는 사내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가카와! 내 말 들리나, 가카와!' 감고 있던 사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가카와!' 초점 잃은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사메지마를 찾았다. '아, 아아.....' 사메지마 부름에 대답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신음 소리일까. 사내의 입에서 가냘픈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메지마야! 알아들었나? 신주쿠 서의 사메지마야!' 시모이가 깜짝 놀라며 사메지마를 쏘아보았다. 죽어가고 있는 사내에게 무슨 까닭으로 자기 이름을 알려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가카와는 반응을 보였다. 눈꺼풀의 경련이 더욱 심해지면서 사메지마를 보려고 애를 썼다. '<캔디> 제조원은 너지?' '아......' 사내는 입을 움직여 보려고 애를 썼다. 보라색 입술이 벌어지면서 혀가 뭔가를 찾듯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시, 시......' 시모이가 얼른 귀를 갖다댔다. '쇼...오......' 사내는 그 한 마디를 흘리고는 눈을 감으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길게 이어지던 신음소리가 이윽고 멈추었다. 시모이가 얼른 맥을 짚어 보았다. '몹시 약해......'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가카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쇼 - 사내는 분명히 쇼라고 말했다. 쇼를 가리킨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쇼의 이름을 알아낸 것일까. 이 사내는 어제 도쿄에 도착했다. 아무리 늦추어 잡아도 어젯밤에 고향을 출발했을텐데 어떻게 알았을까. 쇼가 유괴 감금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젯밤 사메지마와 통화한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사내가 납치 현장에 있었으리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사메지마는 방안을 휘둘러 보았다. 이 사내, 가카와가 <캔디> 제조책이었다 하더라도 단독범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쇼를 납치해 간 공범이 움직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구급대가 도착했다. 대원은 가카와와 마사코의 지혈 처치부터 서둘렀다. 잠시 조용하던 방인 다시 부산해졌다. 대원은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사메지마는 물러서서 다시 한번 실내를 살펴보았다. 난투와 총탄으로 가구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집안 전체에 기묘하게도 생활냄새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응접 세트를 비롯한 가구는 아무리 보아도 임시로 빌려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센터 테이블의 유리판에도 금이 죽죽 나 있었다. 그 위에 <아이스캔디> 시트가 흩어져 있었다. 테이플 밑에 핸디폰이 팽개쳐져 있었다. 사메지마는 장갑을 꼈다. 현장보존 측면에서 보면 규칙에 위반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핸디폰을 집어들었다. 표지판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전원은 켜져 있었다. 귀에 갖다 대 보았다. <사--> 하는 잡음이 들렸다. 사메지마는 움찔 놀랐다. 이 전화는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 핸디폰이 가카와 것이라면 그는 습격당하기 직전, 공범인 제3의 인물과 통화를 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군다가 그 제3의 인물은 피습 상황을 전화로 듣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메지마씨.' 시모이가 불렀다. 구급대원이 지혈 처치를 하고 있는 도중에 가카와가 숨을 거둔 것이었다. 청진기로 가카와의 가슴을 더듬던 대원이 고개를 흔드는 것이 보였다. 마사코는 이미 밖으로 옮겨간 뒤였다. '끝났어.' '끝났다고만 말고 어떻게 해 봐! 이 녀석, 죽어선 안돼!' '보안2과 형사 한 사람이 으르렁거렸다. '억지 부리지 말아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선 병원으로 옮겨 줘. 그래도 소생 못하면 포기할 테니까.' 시모이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이봐요. 심장박동 정지, 동공 확대, 맥박 정지......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은 죽었어.' '부탁이야!' 시모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구급대원은 입을 꾹 다물면서 동료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가카와를 들것에 눕혀 고정시키기 시작했다. '거들어 줘.' 시모이가 수사관에게 지시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수사관 둘이 구급대원과 힘을 합쳐 가카와를 들고 나갔다. '......들리나?' 사메지마는 핸디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판사판이었다. 상대방이 잡담 제하고 전화를 끊어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전화 저쪽은 잠잠했다. 하지만 사메지마는 분명히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전화기를 귀에 바싹 갖다 댄 채 숨을 죽이고 있다고 확신했다. '난 신주쿠 서 사메지마다.' 방안의 수사관 전원이 움직임을 멈추고 사메지마를 주시했다. '내 목소리, 들리지?' 시모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눈짓 물음에 사메지마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됐어?' 불쑥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주쿠 서로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침착했다. '가카와 스스무 말인가?' '그래.' 사메지마는 긴장감 때문에 위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사실 그대로 알려줘야 하는가. 그랬을 경우 쇼는 어떻게 되는가. '아마 어려울 거야.' '......'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다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랬나?' '야쿠자 짓이야. 난...... 말리려 했지만 한발 늦었어.' '......각오는 돼 있겠지?' '무슨?' '그렇다면 좋아.' '잠깐!' '넌 이쪽 요구를 지키지 못했어.' '그 따위 요구를 따를 줄 알았나? 그쪽이야말로 죄가 더욱 무거워진다는 걸 알라구!' '너 때문이야.'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사메지마는 겨우 참았다. 지금은 이 사내의 분노를 자신이 몽땅 뒤집어쓰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다. 쇼가 아닌 자신에게 화를 내게 만들어야 했다. '......그럴지도 몰라.'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사내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어떡할 셈이야?' 사메지마는 약을 올리듯이 따졌다. '내가 밉지도 않아?'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이제 끝장이야.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이젠 끝장이야.'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마음을 정한 사메지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날 만날 생각은 없나? 가카와 스스무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지 않나?' '너라면 설명할 수 있다. 그 말인가?' 사내 목소리가 이상했다. 사메지마는 움찔했다. 사내는 울고 있는 것이었다. '암, 가능하고말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으로 와. 나 있는 곳으로 와. 그때까지 내가 맡아 있지.' 사내는 전화를 끊었다. 사메지마도 핸디폰을 귀에서 뗐다. '끊겼어.' '한번 보여 주세요.' 사메지마는 핸디폰을 시모이에게 건네 주었다. '리다이얼 버튼이 있어요. 이걸 누르면 직전에 누구와 통화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시모이는 버튼을 눌렀다. '인디케이터에 번호가 표시되는군요. 자, 받아적어!' 수사관 한사람이 서둘러 메모하기 시작했다. '03, 3232......' 거기까지 듣다가 사메지마는 실망했다. 표시된 번호는 도쿄 번호였다. 메모한 수사관이 번호를 되풀이해 읊었다. 사메지마는 수첩을 꺼내어 폈다. '어디 번호인지 알 수 있을까요? 신주쿠인 것 같습니다만......' '후지노구미 본부 번호야.' 리다이얼은 이쪽에서 건 번호만 기억하게 되어 있었다. 가카와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곳이 후지노구미 본부였다는 의미밖에 없었다. 그 사내가 후지노구미 본부에 버티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이건 나중에 천천히 조사해 보겠어. 입력되어 있는 번호가 많을 거야.' 말하면서 시모이는 핸디폰을 증거품 주머니에 담았다. '잠깐 내려갔다 올께.' 사메지마가 말했다. 현장검증에는 입회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1층으로 내려갔다. 한걸음 앞서 현장검증이 실시되고 있었다. 도게가 보였다. 로비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1층의 현장검증은 관리인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간 사메지마는 후지노구미 특공대가 관리인 부부를 협박, 701호 열쇠를 뺏은 다음 묶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친 데는 없었다. 로비 복도에서 위협발사한 상황과 경위를 사메지마는 간단하게 진술했다. 나중에 7층에서의 발포 경위도 설명해야 할 것이며, 어쩌면 그 문제로 청문회에 소환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정청취가 끝나자 사메지마는 도게 건너편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경찰관들 사이에 도게만 외토리가 되어 있었다. 도게는 말없이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다치고 지친 탓일까,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사무소엔 알렸나?' 사메지마 물음에 도게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임님은 오늘 중으로 후지노구미를 덮치겠죠. 나는 제외되었지만......' '그 다음엔?' 도게는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멍청한 눈빛이 점점 날카롭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쪽 하기 나름이겠죠. 어떻든 <캔디> 루트 추적은 이걸로 끝이 나 버렸으니까......' '경시청이 안 움직이는데 마약단속관 사무소도 움직일 생각이 없나?' '단정할 수 없어요. 하지만 가카와가 죽어 버렸으니까, 녀석들 현물을 전부 처분한 뒤 모든 걸 가카와에게 뒤집어씌워 버리겠죠. 또 웃사람들이 죽은 사람 명예 지켜 주자고 압력을 넣을 까닭도 없을거구......' 그것은 수사 한계와 연관된 문제이기도 했다. 가카와 스스무에 대해선 그가 살인범인 데다가 <아이스캔디> 중독자이므로 수사당국에 압력을 가할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가카와 스스무가 이미 죽어 버렸기 때문이며, 만약 앞으로 살아 있는 가카와 가 관계자에게까지 수사의 손길이 뻗치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는 끝낼 수 없어.' 사메지마가 말했다. 도게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가카와의 공범이 막판에 인질을 잡아놓고 나를 협박했어. 가카와가 도망가게 눈감아 달라고 말야.' 도게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면?'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녀석은 - 어쩌면 녀석들일지도 모르지만 - 내 애인을 인질로 잡고 있어. 어쩌면......' 쇼가 벌써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캔디> 제조 그룹이 이 상태에서의 사건 종식을 바란다면, 쇼의 생명은 바람 앞의 등잔불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정말입니까?' 기가 막힌 듯 도게는 말을 더듬거렸다. '왜 여태...... 잠자코......' '말해 봤자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 후지노구미의 보복조차 막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구.' 도게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도대체...... 그러고도 사람입니까?' '물론 이대로 끝나게 하진 않겠어. 난 녀석들을 찾아갈 생각이야.' 사메지마의 말투는 단호했다. '지금 말입니까?'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요. 일이 이렇게 됐는데 경시청이 당신을 보내줄 것 같습니까?' '방법이 있어.' 사메지마가 잘라 말했다. 도게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전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당신이란 사람을......' 그리고는 발끝을 내려다보다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사메지마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알았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도게는 수첩을 꺼냈다. 메모한 다음 한장을 찢어 앞으로 내밀었다. '이 사람과 연락을 취하도록 하세요. 나도 연락해 두죠. 사메지마씨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 줄 겁니다, 틀림없이.' 사메지마는 메모를 보았다. <이시와다리 데루히사> 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우리 쪽 잠입 수사관입니다.' 도게가 말했다. 노보루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삐꺽 소리가 났다. 눈을 감았다. 스스무가 죽는다...... 바보 녀석.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응석받이인 데다가 겁이 많으면서도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던 녀석. 바보 녀석. 한때 노보루는 스스무가 정말 난폭자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두려워하진 않았다. 다만 자신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자기와 같은 인생을 살아 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던 노보루가 변한 것은 그해 여름부터였다. 도쿄의 여름. 속으로는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스스무와 함께 지냈다. 당시의 노보루는 가카와 가와의 연줄을 끊고 살아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큰집 그늘 밑에 빌붙어서 언제까지나 아양을 떨면서 살아간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었다. 파트 타임으로 돈을 모아 요쓰야의 아파트에서도 나올 생각이었다. 또 학비도 가능한 한 자력으로 조달할 각오였다. 노보루가 그렇게 결심한 것은 그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큰집 그늘로 인해 자존심이 상처를 받았고, 그 고통이 독립 의지에 불을 붙여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의를 그 해 여름 스스무가 무너뜨렸다. 일곱 살 아래인 동생을 돌보느라고 시간을 허비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결의는 단지 감상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무가 시간을 빼앗았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계획이 그만큼 안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보루는 그해 여름을 기점으로 자신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멍청한 언동으로 불쾌감을 주던 동생을 역까지 마중나가, 가보고 싶다는 곳을 안내해 주고 밥까지 사 주었었다. 도쿄에 온 첫날 첫 식사 때의 스스무 행동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노보루의 단골 식당에서였다. - 맛 없어, 이건! 스스무는 주문한 햄버거 정식을 몇 입 먹지도 않고 고함을 질렀다. 노보루는 묵묵히 먹었다. 부모 슬하를 떠나 도쿄에서 생활한지도 3년이 넘었었다. 처음 혼자 식사를 했을 때 노보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맛이 없느냐고 불평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익숙해진 것이었다. 도쿄 생활에 익숙해졌다는 것은 부모가 해주는 따뜻한 밥보다 식당 밥이 훨씬 입에 맞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 싫으면 먹지 마. 노보루가 퉁명스레 쏘았다. 스스무는 외면을 했다. 테이블 위에 쌓인, 표지가 지저분해진 만화잡지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 형, 담배 있어? 묘한 응석이 깃든 말투였다. 노보루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식당 안을 휘둘러 보았다. 이쪽을 주시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대부분의 손님은 혼자 온 젊은이였다. 만화를 보면서 묵묵히 식사를 했다. - 형, 담배 있어? 그때의 스스무 한마디로 형제간의 굳건한 유대가 맺어졌다. 노보루는 셔츠 포켓에서 마일드 세븐과 라이터를 꺼내어 건네 주었다. 스스무는 익숙한 솜씨로 한개비 뽑아들더니 불을 붙였다. 담배 피우는 중학생을 호통친 손님은 한사람도 없었다. 노보루도 스스무도 고향에선 항상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노보루는 '가카와 가 작은집의 상냥한 도련님' 으로, 스스무는 '난폭한 스스무짱' 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도쿄에선 단지 평범한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뒤 며칠 지나지 않아 노보루는 스스무의 정체가 고집쟁이 응석받이임을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동생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스스무는 노보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고교에 진학한 뒤엔 지금처럼 으스대면서 살 수 없게 된다는 것, 타지방에서 전학 온 녀석이 새로 조직한 폭주족이 자기를 노리고 있음을 털어놓았다. 무서워 견딜 수 없다는 것도 털어놓았다. 스스무는 겁에 질려 있었다. 린치당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로 인해 지금까지 '가카와 가의 스스무짱' 으로 대접해 주던 주위의 눈길이 바뀌어 버릴 것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노보루는 동생 역시 가카와 가의 멍에에 짓눌려 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스스무의 공포를 어떻게든 씻어 주고 싶었다. 이윽고 노보루는 스스무가 벌벌 떨던 공포의 대상을 제거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보루가 그렇게 도망치려 했던 가카와 가 산하로 복귀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럴 즈음의 노보루는 두번 다시 가카와 가의 그늘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그해 여름, 가카와 가 그늘에서 벗어나자고 결심하게 만든 사건을 노보루는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스스무는 공포의 대상을 털어놓았다. 노보루는 그것을 제거해 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노보루가 스스무에게 뭔가 털어놓는다 하더라도 스스무가 노보루를 위해 뭔가 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형제 관계는 결국 일방적인 것이었다. 스스무는 노보루를 믿고 의지했다. 노보루는 스스무를 의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동생이 얼마나 어리석고 연약한지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스무를 사랑했다. 귀엽게 생각했다. 지금 그 스스무가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 충격과 슬픔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노보루는 아내보다 스스무를 더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장 도쿄로 달려가서 스스무를 돌봐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노보루는 눈을 떴다. 몸에 익숙해진 가카와 운송 사장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창 밖의 경치는 어릴 적과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지금부터 자신에게로 몰려들 운명을 어떻게든 막아낼 생각이었다. 그해 여름, 모든 것을 팽개치고 살아가자고 결심했을 때처럼 괴롭고 슬펐다. 아니, 지금이 훨씬 더 괴로웠다. 하지만 이것을 이겨내야 하지 않는가. 지위와 명예 따위 이제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아깝다고 생각했다면 그 일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대답하는 노보루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도어가 살며시 열렸다. 그해 여름, 노보루로 하여금 가카와 가를 벗어나자고 결심하게 만든 사람이 들어왔다. 가카와 게이코였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게이코 모습은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끔찍했다. 머리도 빗지 않았고 화장기도 거의 없었다. 눈 밑에는 시커멓게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눈 밑 근육이 축 처져 있는 게 실제보다 훨씬 더 나이 들게 보였다. '......어떻게 됐어?' 이윽고 게이코가 입을 열었다. 노보루는 게이코의 얼굴을 보면서 일요일에도 출근한 비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게이코라면 그게 가능했다. 게이코 부녀는 이 도시에서 불가능한 게 없었다. 그러나 늙어빠진 게이코 아버지에겐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무가 죽었어.' 노보루가 말했다. 게이코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조용한, 그러나 격렬한 어투로 되물었다. '왜?' '도쿄에서 일이 잘못됐어......' 게이코는 비틀거리면서 다가섰다. '무슨 말이야, 그게?' 노보루는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한대 줘.' 장남이 태어난 걸 기회로 담배를 끊었었다. 노보루에게 결코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는 아내가 단 한번, 갓난아기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강력하게 항의했기 때문이었다. 게이코는 들고 있던 백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노보루는 불을 붙여 한모금 깊이 들이마셨다. 오래 끊었던 탓에 숨이 막혔다. 눈물까지 고여 앞이 흐릿해졌다. '말해 줘. 무슨 일이야?' 게이코가 다잡아 물었다. 노보루는 게이코를 쳐다보았다. '말했잖아, 죽었다구. 살해된거야.' '누구에게?' '야쿠자들이 그랬겠지. 경찰은 아니었어.' '왜?' '거래에 문제가 생겼었어. 녀석들 똘마니가 체포됐단 얘길 듣고 손을 끊으려 했었어. 녀석들은 스스무가 도쿄에서 사귀고 있던 아가씨를 인질로 잡았어.' 게이코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노보루를 바라보았다. '스스무는 그 아가씰 구출하려고, <캔디>를 있는대로 싣고 도쿄로 달려갔어. 어제, 그 일이 있은 직후였어. 스스무는...... 스스무가 야쿠자 간부를 칼로 베었어. 멍청한 짓을 한 거야. 선선히 <캔디>를 내주고 여자를 인수해서 돌아왔으면 됐을 것을...... 그 아이는 겁쟁이야. 겁쟁이였기 때문에 함부로 날뛴 거야. '경찰은?' '곧 오겠지. 어떻게 하든 난 스스무를 돕고 싶었어. 어제 그 여가수, 신주쿠 형사 애인이야.' '뭐라구?' '사메지마라는 형사야. 그 가수를 이용해서 사메지마에게 압력을 넣으려고 했었어. 한발 늦고야 말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게이코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네가 귀여워하던 애송이와, 그 녀석 친구인 똘마니를 앞세웠지. 우리와 거래를 할 생각이 있으면, 우선 날 도와 달라고 했었어.' '고지에게 뭘 시켰어?' 게이코가 목소리를 높였다. 노보루는 게이코를 응시했다. 게이코의 눈빛은 노기로 이글거렸다. '반했나, 그 애송이한테?' '말해 줘! 고지한테 뭘 시켰어?' '발목을 물렸는데도 여전히 귀여워하고 있나?' '누가 그 말 하랬어? 걔한테 도대체 무슨 일을 시켰는지 말해 보란 말얏!' 노보루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 여가수를 데리고 나오게 해서 감금시켰어.' '어딨어, 지금?' 노보루는 대답 대신,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게이코는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앙탈을 부리지 않는가. 노보루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날 두들겨 패겠다면 맞아 줄께. 얼마든지 앙탈을 부려봐. 그러면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살갗도 맞닿을 게 아닌가. '어디 있는지 알아봤자 소용이 없어.' '어쩌려구 그런 짓까지......' '걱정할 것 없어. 큰집엔 폐가 되지 않을 테니까. 모든 책임, 나와 스스무가 뒤집어쓸 생각이야.'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그런 뜻으로 말했어!' 노보루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어쩔 수가 없어. 야쿠자가 빈사상태이거나 죽었구, 스스무도 죽었어. <캔디>는 몽땅 경찰에 압수당했어. 이런 판에 뭘 어떡하란 말야. 난 형사와 얘길 했었어, 전화루. 스스무가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됐는지 이쪽으로 와서 자세히 설명하라고 요구했어. 애인이 죽어도 좋다면 오지 않아도 된다고 못을 박았어!' 게이코는 말문이 막혔다. 목구멍에서 꾸룩거리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느라고 그러는지도 몰랐다. '......왜, 뭣 때문에?' 노보루는 게이코를 쏘아보았다. '처음으로 그렇게 물어보는군. 뭣 때문이냐구 말야. 넌 한번도 나한테 뭘 물어본 적이 없었어. 내가 도쿄의 야쿠자를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도 그랬어. 그 녀석들한테 <캔디>를 공급하는 걸 알았을 때도 뭣 때문에 그러느냐고 묻지 않았어. 그랬던 네가 이젠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내게 묻고 있어.' 게이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빠가 하고 싶어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한 거니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내 말을 들은 이유가 뭐야? 작은집 부탁이어서? 큰집 의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무 관계도 없어.' 게이코는 눈을 감았다. '그래...? 너도 변했군.' '미워하고 있어, 아직도...?' '미워할 까닭이 없잖아?' '사과하고 싶었어. 마음 속으론 줄곧 사과하고 싶었어.' '하지만 사과하지 않았어. 큰집 사람은 작은집 사람에겐 머리가 숙여지지 않았던 거야.' '그런 투로 말하지 말아요!' '그런 말투였었어. 사촌 사이라고 말했었지? 하지만 사촌 사인 결혼도 가능하다고 했던 내 말, 기억하고 있나?' 게이코는 말 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눈물이 한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넌 이렇게 말했어. <하지만 작은집 며느리론 갈 수 없잖아?> 라고 말야.' 게이코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노보루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줄곧 가슴에 담고 있었어?' '그럼.' 노보루는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해 초여름, 고교 2년생인 게이코와 렌트카로 드라이브를 갔었다. 그때 이미 게이코는 처녀가 아니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남자와 어울리고 있다는 소문을 노보루도 듣고 있었다. 도쿄의 여자대학 부속고교 재학생으로 록봉기를 휩쓸고 다녔다. 그때 이미 눈이 부실만큼 예쁜 여자였다. 노보루를 시시한 사내라고 거부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툰 사람에겐 안기고 싶지 않다고 했더라면 마음이 홀가분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마음 속으로 좋아했었다. '네가 그 변변치 못한 사내와 이혼한 건 잘한 일이야.' '왜 도와 주지 않았어?' '도와 줘? 뭣부터 도와 줘야 하나? 하인이 여왕마마를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어?' 게이코는 숨을 내뿜었다. 길고 슬픈 숨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카와 운송 사옥은 조용했다.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느라고 숨소리까지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럴 까닭이 없었다. 두 사람의 대결상황은 털끝만큼도 밖으로는 새어나가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게이코가 물었다. '될 대로 되겠지.' 노보루가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자 기분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런가. 탈출한 것인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겨우 가카와 가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범죄자라는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더러워진 비옷 같은 것이었다. 피부에 찰싹 달라붙은 데다가 악취마저 풍겼다. 찬비가 쏟아지면 빗방울 감촉 하나하나가 직접 온몸에 전해진다. 마침내 여기저기 찢어져 빗물이 흘러 들어오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은 가카와 가의 우산은 아니었다. 노보루는 언젠가 반드시 이렇게 될 것이라고 자신이 확신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가카와 가의 우산을 벗어나는 길은 이것 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모든 사실이 알려졌을 때 이 도시 사람이 얼마나 놀랄 것인가 쉽게 상상이 갔다. - 뭣 때문에 그런 바보 짓을. - 뭐가 부족해서?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큰아버지께 말씀을 드려. 나와 스스무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 너와 큰집에 불똥이 튀지 않게 손을 써야 해. '그런 경우없는 소린 말아요.' '경우없는 소리?' '그래요! 오빠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 아냐? <나와 스스무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 결과 스스무는 죽었고 난 파멸하게 됐어. 그러니까 넌 잠자코 도망을 쳐라......> 그런 뜻 아녜요? 그런 경우없는 말이 어딨어?' 노보루는 게이코를 쏘아보았다. 게이코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뭘 걱정하고 있는 거야?' '걱정하고 있는 게 아냐!' 게이코는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제멋대로인 오빨 용서할 수 없어요!' '작은집 주제에 건방지게 놀고 있다는 뜻이야?' '바보!' 게이코가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왔다. 책상 위의 전화기를 집어던지고 사무용품을 쓸어 버리면서 노보루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바보, 바보, 바보, 바보......' 어깨를, 얼굴을, 이마를 주먹으로 수도 없이 두들겼다. 아픔 속에서도 노보루는 지금까지 듣고 싶었던 말을, 채워지지 않았던 기분을 비로소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행복이었다. 19. '왜? 뭣 때문에?' 고지는 가냘프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크게 숨을 쉬려고 해도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이 몰려들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이었다. 기름자국이 여기저기 번진, 먼지투성이의 낡은 창고 바닥에 쓰러진 뒤에도 히라세에게 계속해서 걷어차인 것이었다. - 죽어버려, 이 새끼, 죽여 버릴 테닷! 몇 번씩이나 부르짖으면서 그때마다 발길질을 했다. 정말 죽일 생각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공포가 엄습해 왔다. 고지는 어느덧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내 고객이 요구했어. 쇼짱을 가두어 두라고 말야.' 고지는 천천히 눈을 움직였다. 히라세는 지금, 쓰러져 있는 드럼통에 걸터앉아 있었다. 옆에는 핸디폰이 놓여 있었다. 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히라세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무실로 사용했던 안쪽의 작은 방으로 쇼를 끌고 갔었다. 거기서 히라세가 쇼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고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10분쯤 있다가 히라세 혼자 돌아왔을 때 고지가 따지고 들었다. - 뭣 때문에 이러는 거야? 쇼는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런 피투성이로, 얼굴이 퉁퉁 부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히라세는 태연했다. 고지 자신을 두들겨대면서 히라세는 쇼가 있는 창고 안쪽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만 해도 고지는 전신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난.' 히라세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두렵지...... 겁나지 않아?' '뭐가? 내 뒤엔 천하의 가카와 가가 버티고 있어. 국회의원이라도 가카와 가 앞에선 쪽을 못 써. 경찰이든 뭐든 두려울 게 하나도 없어.' 히라세는 창고 천장을 향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철골에 비닐판을 엮은 천장으로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음식 쉰 것 같은 기계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히라세는 피우던 담배를 내던지고 핸디폰을 집어들었다. 번호를 누른 다음 귀에 갖다댔다. 한참 동안 기다리다가 혀를 차면서 핸디폰을 내렸다. 몇 번씩이나 같은 행동을 되풀이했다. 히라세가 뭘 하려는지 고지도 알고 있었다. 이시와다리와 연락이 닿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이시와다리는 영리했다. 히라세가 너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바람에 도망친 게 분명했다. 약삭빠른 이시와다리는 어딘가로 몸을 숨겼는데 멍청한 나는 여기 이렇게 있다니. 전신을 두들겨 맞은데다가, 그렇게 아끼던 친구까지 끔찍한 변을 당하게 하다니, 쇼가 살해되기라도 했다면...... '이봐, 히라세, 쇼는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 풀어 줘, 부탁이야.' '바보 녀석. 또 그 소리야? 더 차이고 싶어서 그래? 관계가 없다니, 바보 소리 작작해. 지금 풀어주면 일이 어떻게 되는지 생각이나 해 봤어?' 그 말에 고지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말투로 보아 쇼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이시와다리 이 새끼가 속을 썩이고 있어.' 히라세는 중얼거리면서 발뒤축으로 드럼통을 찼다. 구두 앞부분엔 고지의 피가 얼룩덜룩 말라붙어 있었다. 히라세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쇼짱 이리로 데리고 와서 돌림방이나 할까?' '관둬!' 히라세는 무릎을 툭툭 치면서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너, 사실은 쇼짱과 한 적이 있지?' '없어.' 히라세가 드럼통에서 내려섰다.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거리가 좁아짐에 따라 공포감 때문에 고지의 몸이 굳어졌다. 히라세가 웅크리고 앉았다. 벨트에 꽂힌 단도 손잡이가 보였다.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고지의 고개를 들어세웠다. '거짓말 마. 한 게 틀림없지?' 고지는 눈을 깜박거렸다. 또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했지?' 움켜잡은 머리카락을 세차게 흔들어댔다.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다. '했어.' 가까스로 대답했다. '어땠어? 맛, 괜찮았어?' 히라세는 금방이라도 혀를 핥을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기억 없어. 오래 전 일이어서......' '질퍽했어? 반응도 빠르구?' '잊었어......' '시침 떼구 있네, 새끼가!'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고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멈추었던 코피가 다시 콸콸 쏟아졌다. '너 혼자 즐겼다니 말이나 돼? 잘 들어. 그 여자, 이젠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죽이기 전에 내가 한번 즐겁게 해 주지. 잘 보고 있어. 그 여자, 환희에 겨워 우는 모습 말야.' '음, 음......' 고지는 신음했다. 신음소리 내는 것 이외는 달리 대책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마담은 어땠어? 30대 여인...... 집요하지?' 히라세는 고지의 신음소리엔 아랑곳 않고 혼자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네놈 혼자 즐겨왔잖아? 두고 봐, 나도 언젠가는 마담을 품을 테니까. 엄청 맛있게 생긴 여자야, 마담은. 남자 전신이 녹아들지 않던? 말해 봐!' 엎드려 있는 고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후루룩후루룩 연이어 들려왔다. '음!' 히라세가 몸을 일으켰다. 호루라기가 아니라 핸디폰 소리였다. '네, 네.' 핸디폰을 집어든 히라세가 허겁지겁 대답했다. '네.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언제쯤 오실 겁니까, 이리루......'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귀를 기울였다. '네, 알았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아, 네...... 그리고 이번 일의 보수 말인데...... 네. 얼마요? 좋습니다. 현금으로 주시겠죠? 언제? 오늘? 물론 만족하구 말구요. 애프터서비스에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가 끝난 듯, 핸디폰을 내려놓았다. '우선 2천만 엔이래. 멋있잖아? 각성제 사업 얘긴 이 일 끝낸 뒤 천천히 하겠어.'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핸디폰을 집었다. 이시와다리 집 번호를 눌렀다. 응답이 없자 혀를 찼다. '빌어먹을...... 바보 멍청이 때문에 제대로 뭘 할 수가 있어야지.' 히라세는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초조한 마음 때문일까. 거푸거푸 빨았다. 뭔가 생각에 잠겨든 듯 얼굴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쩔 수 없지. 역시 이렇게 되고 마는군. 그릇이 작은 건 어쩔 수가 없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고지를 내려다 보았다. '네놈들도 그런대로 한몫 거들어 준 셈이야. 넌 마담에게 줄을 대어 주었구, 이시와다리도 나름대로 열심히 해 줬어.' '무, 무슨 뜻이야?' 고지가 메마른 소리로 물었다. '듣고도 몰라? 여기까지 온 과정을 얘기한 거야.' '히라세..... 너 좀 이상하구나.' '아무 것도 모른 입 닥치고 있어.' 히라세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모든 걸 네놈도 곧 알게 될테니까......' '정직처분?' 모모이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되물었다. '지금 당장 말인가?' 요쓰야 아파트의 현장검증이 끝난 뒤 본청 수사1과의 간단한 심문을 받은 사메지마가 신주쿠 서 방범과로 막 돌아온 길이었다. '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저에게 정직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마약단속관 사무소 항의에 따른 것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서장님 의견을 들어봐야겠군.' 모모이는 책상 건너편에 서 있는 사메지마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사건에 대해 본청 보안2과와 수사2과도 제가 확보하고 있는 정보를 캐내려고 눈이 뻘개져 있을 겁니다.' '그게 싫어서?' '아닙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해서 터졌나 설명할 시간은 지금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번지고 있는 사건의 맥을 끊을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모모이는 돋보기를 벗었다. 과내의 형사 몇 사람이 이쪽으로 신경을 쏟고 있었다. '식당으로 가지.' 사메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모이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었던 웃옷을 집어들었다. 걸어가면서 물었다. '발포 판단에 대해선 다른 말 없었나?' '별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가카와 스스무를 지켜내지 못한 건 유감입니다만......' '수사1과 반응은?' 사메지마는 모모이를 곁눈질했다. '제가 경찰관인 걸 몹시 아쉬워하는 것 같더군요.' '엄청 쥐어짜인 모양이로군.' '지금부터겠죠, 쥐어짜이는 건.' 모모이의 눈 언저리에 쓴웃음 같은 주름이 잡혔다. 쥐어짜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카와 스스무도, 그를 노렸던 후지노구미 특공대도 수사1과의 사냥 대상이었다. 다른 데서 손을 내민다 하더라도 보안2과나 수사4과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 것을 일선 서인 신주쿠 서의 일개 방범과원이 모든 걸 멋대로 해치웠으니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앞으로 가카와 스스무가 죽은 건 사메지마 때문이라는 문책론이 대두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수사1과 형사들은 사메지마에 대한 분노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비록 중도탈락은 했지만 사메지마가 캐리어 출신이라 하더라도 그들로서는 <주제넘은 녀석> 임이 분명했다. 본격적인 사정 청취는 지금부터였다. 그 과정에서 사메지마의 직무직권에 관한 규정 위반 여부를 철저하게 조사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리 털고 쥐어짜 봤자, 현 단계에서는 사메지마가 파면당할 건덕지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카와 스스무의 공범은 쇼를 인질로 잡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쇼의 방면을 조건으로 사메지마와의 대결을 바라고 있었다. 그 범인의 논리를 지금 단계에서는 경찰이 수용할 까닭이 없었다. 진행중인 쇼에 대한 범죄는 신주쿠 서는 커녕 경시청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관할 밖이 아닌가. 현경 본부의 협력을 요청하자면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하지 않는가. 그 지역 명문이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지면 현경 고위층이 전력을 다해 정보를 수집, 신중하게 사실확인에 나설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 결과, 사실무근을 앞세워 협력을 거부할 가능성도 있었다. 설령 협력에 응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24 시간쯤은 사실 확인에 허비된다고 보아야 했다. 또 그 과정에서 공범자측에 모든 정보가 흘러들어갈 게 분명했다. 사메지마는 그 사내와의 통화에서 분명하게 느낀 것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공범 가운데서 그 사내는 가카와 스스무와 특별히 친한 관계라는 것, 적어도 통화했던 그 시점에서는 모든 것을 가카와 스스무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마약단속관 사무소가 우려하고 있던 수사당국에 대한 압력을 그 사내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동료를 잃음으로써 두려움이 없어진 공범자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때문에 사메지마는 상대방이 제시한 조건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범은 가카와 스스무의 죽음을 이용해서 수사의 손길을 막으면서 사건을 종결시킬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갈 막다른 골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는지 사메지마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공범자의 그런 선택이 바로 쇼가 관련되어 있는 부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카와 스스무가 야쿠자를 이용하려다가 되잡혀 자멸한 것처럼 공범자인 그 사내 신변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긴 것일까. 가카와 스스무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명문의 정치력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파멸을 모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진상을 알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마약단속관 사무소가 잠입시킨 수사원뿐이었다. 이쪽에서 공범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이시와다리라는 수사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식당 구석자리에 마주 앉자 먼저 모모이가 물었다. '시간이 없다니, 무슨 뜻인가?' '가카와 스스무에겐 공범이 있습니다. 고향에 버티고 있는 그 녀석이 어쩌면 주범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내와 통화를 했습니다.' '통화를?' '가카와 스스무의 아파트 거실에 통화중이던 핸디폰이 떨어져 있더군요. 가카와는 여기서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공범자에게 보고했던 것 같습니다.' 사메지마를 바라보던 모모이는 식당 입구로 눈길을 던졌다. '결국 주범으로 보이는 그 사내는 자네 손으로 체포하고 싶다, 그 뜻인가?' '아뇨.' 사메지마는 일단 심호흡을 한 다음 단숨에 털어놓았다. '그 녀석이 쇼를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녀석은 쇼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가카와 스스무를 도쿄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가카와 스스무가 죽은 것을 알고 나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저보고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모모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굴 근육이 얼어붙은 것 같은 표정으로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재미없군, 그건.' '네.' '자넬 원망하고 있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제가 가카와를 도와 주지 않았다고.' '어디야?' 사메지마는 도시 이름을 댔다. '보수 왕국인가?' '네. 가카와 가는 정계, 관계, 재계를 한손에 움켜쥐고 있는 모양입니다.' 모모이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시간이 없다...... 그렇군, 시간이 없군.'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는 악화됩니다. 그 사내는 가카와 스스무와 무척 친밀한 사이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그 녀석이 가카와 가 사람이 아니라면 그 집 힘을 동원하기가 쉽지는 않겠지.' '기발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기발한 사람?' '공범자를 도망치게 하려고 경찰관 애인을 인질로 잡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래. 조직 폭력배 따위는 생각도 못할 일이야.' '공범자도 가카와 가의 인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뭘 근거로?' 사메지마는 약간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모두 제 육감입니다만...... 가카와 가가 어떤 집안인지 도게 단속관한테서 자세히 들었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더군요. 조직 폭력단 역시 가카와 가 산하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가카와 스스무는 그 지역 폭력조직을 통하지 않고 가명까지 써가면서 직접 도쿄의 후지노 구미와 접촉해 왔습니다. 그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 건 가카와 스스무가 가카와 가에 의존하는 걸 무척 싫어한 건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카와 가가 각성제 밀매라는 범죄에 관련된 사실이 그 지역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걸 꺼려서 그렇게 했다고 봐야 합니다. 가카와 스스무에게 불똥이 튀자 어떻게 손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쇼가 제 애인이라는 걸 알아낸 공범자는 쇼를 유괴, 저를 손아귀에 넣으려 했던 겁니다. 어떻게 보면 경찰조직을 전혀 모르는 유치한 방법이죠. 하지만 그건 가카와 스스무의 발상이 아니라, 줄곧 그 지역에 버티고 있던 공범자가 꾸민 일로 보입니다. 공범자가 좌익과격파 출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군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그런 발상을 했을까. 어쩌면 지배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일지도 모르죠. 이해관계가 분명하고 강자가 뚜렷한 지방에서라면 상대방을 언제나 이쪽 의지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겠죠. 아니, 이쪽이 가만 있어도 모든 건 자동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됩니다. 그런 데에 익숙해진 인물이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상대를 굴복시키려 할 때 어떤 방법을 쓸까요? 가족을 인질로 잡으면 쉽게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역시 정치력을 동원해 오겠군.' 모모이는 지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겠죠. 하지만 저와 직접 만나자고 하는 걸 보면 정치력에 의존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죠.' '체포될 각오가 돼 있다?' '가카와 스스무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데다가, 관계없음을 위장할 수 없는 위치의 인물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겠죠.' '가카와 스스무에게 모든 걸 뒤집어 씌울 수도 있잖아?' '어떠한 이유로 해서 그게 불가능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약단속관의 내사를 눈치챘거나 아니면 또 다른 일이 생겼거나......' '또다른 일이라면?' '글쎄요. 저로선 짐작조차 안 갑니다.' 모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애인이 인질로 잡힌 건 확실한가?' '어젯밤 이후 연락이 끊겼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제게 삐삐를 쳤을텐데,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모모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녀 생명에 위험이 미칠 가능성도 있나?' '만약 공범자의 기분이 바뀌어 모든 걸 가카와 스스무에게 뒤집어 씌우고 시침을 떼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공범자가 쇼를 죽여 어딘가 묻어 버리고 두 손을 툭툭 털고 나선다면...... '정직처분을 원하는 이유는 뭔가?' '지금 수사1과의 제약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분증과 수갑은 서에 맡겨두겠습니다. 권총은 본청 감식과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예치증도 지금 드리죠.' 주머니를 뒤적이는 사메지마를 모모이가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어. <아이스캔디> 밀매 루트 규명은 본서 방범과의 현안이기도 해. 자세 애인 인질건에 대해선 난 안 들은 걸로 하겠어. 죽은 가카와 스스무 범행을 입증할 보강 수사를 자네가 해 주게. 저쪽 현경에는 내일 아침 내가 연락하지. 자넨 당장 출발하도록.' '과장님.' 사메지마는 깜짝 놀라며 모모이를 응시했다. 모모이의 표정은 엄숙했다. '이미 본청 수사1과와 보안과에서 현경에 연락했을 거야. 자세 생각처럼 공범자가 가카와 스스무의 친족이라면 시간이 별로 없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지역 현경보다 한발 앞서 공범자와 접촉해야 해!' '그건 안 됩니다. 수사1과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과장님에게까지 책임 문제가 파급됩니다.' '나는 신주쿠 서 방범과장으로서, 본청 수사1과 의사와 관계없이 부하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어. 계급은 같은 경감이지만 자네도 본서 방범과 과원인 이상 내 지시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어. 자네 정직처분은 서장님과 상의해서 결정할 생각이야. 하지만 그것도 마약단속관 사무소나 본청 수사1과로부터 공식적인 요구가 있을 경우에만 고려할 문제야.' 모모이의 말투는 단호했다. 사메지마는 모모이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서둘러!' 그것이 모모이의 대답이었다. 20. '이렇게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 가지로 폐를 끼치는군요.' 인사를 한 다음 노보루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현경 본부 형사부장의 전화였다. 도쿄 경시청 수사1과의 조회로 동생 스스무의 사망을 알려온 것이었다. 총에 맞고 칼에 찔린 출혈과다가 사인이었으며 범인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고 했다. 형사부장은 정중한 위로의 말과 함께 어떻게 그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는지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는 대로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필요하면 가카와 운송 도쿄 지점 사람이 노보루를 대신해서 스스무의 시신 확인을 해도 좋다는 것과 부검이 끝나기 전엔 운구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려 주었다. 스스무가 도쿄 폭력단에게 <아이스캔디>를 공급하고 있었던 사실을 아마도 형사부장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내일이라도 다시 정중하게 전화를 걸어서 이것저것 물어볼 게 분명했다. 어쩌면 스스무 아파트를 수색하겠다고 나설지로 모를 일이었다. 모든 것을 있는 대로 털어놓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노보루는 불끈 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현경도 공범자 색출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 틀림없으며, 조심스럽게 노보루 자신에 대한 수사도 착수하게 될 것이었다. 겁날 것은 없었다. 조사를 하겠다면 선선히 응해 줄 작정이었다. 경찰이 공범자를 필요로 한다면 서슴없이 자신을 던져 줄 생각이었다.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게이코에게까지 파급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또 큰집을 지켜 줘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았다. 큰집이 아니라 게이코를 지키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사람, 진정으로 사랑해 온 여자를 지키는 일이었다. 노보루는 닫혀 있던 게이트를 연 다음 자동차에 올랐다. 직접 운전해서 외출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 도시에선 메르세데스가 사람들 눈에 두드러지기 때문에 아내가 쇼핑 때 사용하는 국산 세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게이트 열쇠는 2개 뿐이었다. 그 중 하나는 핸디폰과 함께 오늘 낮 히라세에게 주었다. 전화를 받은 고지의 말투로 보아 고지가 자신을 믿지 않는 것 같아서 직접 히라세와 접촉한 것이었다. 히라세와 연결시켜 달라고 고지에게 부탁했던 것은 그를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어젯밤 늦게 게이코의 연락을 받자마자 노보루는 가카와 운송 총무부의 어떤 남자와 접촉했다. 그 남자는 경찰이나 야쿠자와의 트러블 예방을 위해 특별히 고용한 경찰 OB 였다. 해마다 모집하는 신입사원 가운데는 폭주족 출신도 적지 않았다. 게중에는 지난날 동료와 손을 잡고 하물을 빼돌리는 엉큼한 녀석도 있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현경 방범부 소년과의 퇴직 형사를 채용한 것이다. 사내는 눈깜짝할 사이에 히라세에 관한 모든 것을 밝혀냈다. 고지에게 전화를 건 시점에서 노보루는 히라세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먼저 고지에게 전화를 건 것을 그때까지 에서 착실히 일했던 고지의 이미지와 게이코가 들려 준 공갈 얘기가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이코가 고지를 페트 삼아 귀여워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게이코가 다른 사람에겐 결코 밝히지 않는 속마음을 고지에게만은 털어놓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고지가 그것을 이용해서 일확천금을 노릴 인간으로는 보지 않았다. 별로 접촉해 본 일은 없었지만 고지를 그런 인간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설령 고지가 돈을 위해서라면 태연히 배신할 인간이라 하더라도 게이코가 곁에 두고 귀여워했기 때문에 그런 인간으로는 보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때문에 노보루는 게이코가 말한 또 한사람, 히라세라는 녀석의 뒤를 캐보게 했던 것이었다. 히라세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너저분한 인간이었다. 폭주족, 고교중퇴, 폭력단 수습생. 하지만 야쿠자로서도 한사람 몫을 해내지 못하고 탈락한 녀석이었다. <한탕 걸쭉하게 해야지> 가 입버릇이었다. 주정꾼인데다가 폭력까지 휘두르는 아버지와 사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어머니 밑을 고교 중퇴와 동시에 뛰쳐 나온 것이었다. 형님 뻘이었던 야쿠자들도 히라세를 <무슨 일을 저지를지 가늠이 안가는 녀석> 으로 보는 부류와 <배짱은 쓸만하지만 속을 내보이지 않는 엉큼한 녀석> 으로 경원하는 부류로 의견이 엇갈렸다. 하지만 조직 속에서는 자랄 수 없는 녀석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정식으로 맹세의 잔을 나누기 전에 히라세가 야쿠자 사회에서 발을 씻은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령 맹세의 잔을 나누어 정식으로 구미 멤버가 되었다 하더라도 히라세는 천덕꾸러기 노릇밖에 못했을 것이라고 총무과의 퇴직 형사는 말했다. 사회의 쓰레기들이 모여 이룩한 야쿠자 사회조차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인간이 있는가 - 노보루는 이상한 감개 같은 걸 느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그처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느냐고 노보루는 퇴직 형사에게 물어보았다. 퇴직 형사의 대답은 아주 명쾌했다. -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예요. 조직의 체면보다 자기 이익을 우선시키는 녀석입니다. 어느 정도 직위가 올라간 뒤라면 용납될 수도 있지만 똘마니 주제에 그렇게 놀아서야 발붙일 수가 없습니다. 엉덩이에 뿔이 난 수습생을 두들겨 가르쳐 써먹을 여유가 요즘 야쿠자들에겐 없기두 하구요. 그렇다면 공갈 계획을 세운 것은 히라세일까. 히라세가 고지를 꼬드긴 것일까. 둘 중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알아보려고 노보루는 우선 고지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히라세와 고지의 팀웍이 얼마나 단단한가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대답은 금방 나왔다. 히라세가 주범이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신주쿠 서 형사의 애인을 인질로 잡기 위해서는 야심에 눈이 어두워진 바보가 필요했다. 히라세야말로 완벽한 바보였다. 노보루의 연락을 받고 가카와 운송 사장실로 들어선 히라세는 이미 노보루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으스대기 시작했다. 노보루는 적지 않게 놀랐다. 이 도시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가카와라는 이름 앞에선 주눅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화를 받으면서 허둥대던 고지의 반응이 전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히라세는 별도의 보수를 조건으로 쇼 납치와 사메지마에의 메신저 역을 수락했다. 히라세는 자신이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 호화여객선의 1등 선실 티켓을 손에 넣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돈과 가카와의 막강한 영향력이라는 티켓을.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림없는 착각인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히라세가 탄 배는 이미 한쪽 고물이 물에 잠기기 시작한 침몰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배 이름은 <가카와 형제호>. 히라세로서는 <타이타닉 호> 라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폐창고 바로 옆까지 오자 겨우 히라세의 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무성한 잡초는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이곳은 항만사업 시공업체인 가카와 건설로부터 연초에 가카와 운송이 분양받은 땅이었다.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라고 일단 매입한 뒤 노보루는 총무부로 하여금 게이트 열쇠를 바꾸도록 했었다. 이용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외부인의 접근을 엄격하게 차단한 것이었다. 가카와 가 사람들에겐 지킬 수 있는 비밀과 지켜내기 어려운 비밀이 있었다. 차에서 내린 노보루는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4백 평방미터가 넘는 대지에 세워진 철골의 장방형 창고 건물은 한쪽이 항구 제방과 접하고 있었다. 제방 높이는 해면에서 8미터나 되기 때문에 바다 쪽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창고엔 문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입구에 전선을 감는 데 쓰이는 거대한 목제 드럼이 쌓여 있어서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또 그 부분은 천장이 양철판이었기 때문에 낮이었지만 어두컴컴했다. 환한 바깥에서 들어선 노보루는 그 자리에 한순간 멈추어 서서 눈이 익기를 기다렸다. 안쪽에서 얘기 소리가 들려왔다. 억양이 없는 높은 목소리로 보아 히라세인 것 같았다. 드럼이 쌓인 곳을 지나 밝은 곳으로 들어섰다. 비닐 지붕으로 황금색 햇볕이 환하게 내부를 비추어 주었다. 기름 얼룩과 물이 고인 콘크리트 바닥에 박힌 철기둥이 철골 석가래와 변색된 반투명 비닐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히라세는 제일 안쪽, 드럼통에 걸터앉아 있었다. 2미터쯤 떨어진 곳에 고지가 웅크리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히라세가 하던 말을 중단했다. 노보루는 천천히 다가갔다. 히라세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기세 좋게 드럼통에서 뛰어 내렸다.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죠?' 노보루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건?' 고지는 보기에도 끔찍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꼼짝도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뭐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말 안듣는 녀석 손 좀 봤을 뿐이니까요.' 고지를 바라보면서 노보루는 동정과 쾌감이 뒤섞인 기묘한 기분에 잠겼다. '아가씬 어디 있어?' '안쪽에 있습니다. 꽤나 조용하고 얌전한 아가씨죠?' 그렇게 대답하는 히라세의 눈빛에는 그늘진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보수는 가지고 오셨겠죠?' '여기 있어.' 노보루는 들고 있던 종이 백을 조금 움직여 보였다. 현금 2천만 엔이 들어 있었다. '고맙군요.' 노보루는 다시 고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목숨엔 지장이 없겠지?' '글쎄요. 죽는다 해도 대수로울 것 없는 녀석 아닙니까?' 히라세는 내뱉듯이 말했다. '쓸데없는 녀석들이 너무 많아요, 요즘은.' 못난 부하를 앞에 놓고 탄식하는 상사같은 말투였다. 노보루는 혐오감이 치밀어오름을 느꼈다. 하지만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 똘마니에게 인간적인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떡할 작정입니까, 지금부터?' 히라세가 물었다. '우선 아가씨부터 만나봐야겠어. 넌 그냥 여기 있어.' 히라세는 머리를 끄덕였다. 노보루는 안쪽 사무실로 다가갔다. 등을 돌려 몇 걸음 떼어놓지 않았는데 뒤에서 히라세가 불렀다. '저어......' '뭐야?' 노보루는 계속 발걸음을 옮기면서 되물었다. '<교토카이> 를 기억하고 있나요?' 노보루는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생각나지 않았다. '뭐라고 했나?' '<교토카이> 라고 했어요.' 히라세가 되풀이했다. 노보루는 돌아섰다. '보스를 처치한 건 가카와씨죠?' 히라세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노보루는 생각이 났다. 스스무를 노리던 폭주족 이름이었다. 이 지역 야쿠자를 시켜 처치했었다. 10년도 훨씬 더 된 옛날 얘기였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듣겠군.' '시침 떼지 마십시오.' 히라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눈은 하나도 웃지 않았다. '절 무척 귀여워해 줬어요, 그 보스가.' 그 순간 노보루는 차가운 기운이 뱃속에서 치밀어오름을 느꼈다. 공포감이었다. 노보루는 히라세라는 똘마니에게 두려움을 느낀 것이었다.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건가?' 노보루는 자신의 동요를 눈치 채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히라세를 응시했다. '가카와씨 짓인지 아닌지 진상을 알고 싶어요.'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노보루는 공포감을 억누르면서 대답했다. '했다고 한다면 스스무겠지.' '그렇습니까?' 히라세는 싹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스스무씨한테 물어봐야겠군요.' 두번 다시 그럴 기회는 없을 거야 -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노보루는 가까스로 참았다. 히라세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노보루가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상하고 있던 대답을 들었다는, 일종의 오만스러움 같은 게 보였다. '그건 물어봐서 뭣하려구?'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히라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빛이 순간적으로 초점을 잃어버린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알아 주셨으면 해서요.' 히라세는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뭘?' '<교토카이> 시절, 보스가 날 무척 아껴 줬다는 걸 말입니다.' 노보루는 혀끝으로 입술을 적셨다. 목이 몹시 마름을 느꼈다. '증오하고 있나?' 히라세는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표정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기세등등하던 태도가 모두 연기가 아니었나 할 정도로 히라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새삼 뭘 어쩌자는 건 아닙니다. 단지 진상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노보루는 심호흡을 했다.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히라세에게 등을 돌린 채 사메지마 애인과 얘기를 나눌 상황이 못 되었다. 단지 어리석기만 하다고 생각한 똘마니가 무척 위험한 녀석임을 노보루는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다. 총무부의 퇴직 형사가 들려 준 야쿠자의 말처럼 히라세에겐 속을 알 수 없는 섬뜩함이 있었다. 무슨 짓을 어떻게 저지를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숨기고 있는 녀석이었다. '보스의 이름이 뭐랬지?' '마에다라고 했죠.' 마에다, 그랬다. 분명 마에다라는 이름이었다. 자동차 판매회사 사원이었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이 도시에 온 녀석이었다. 덤프 트럭을 이용했었다. 가드레일로 밀어붙여 묵사발을 만들어 버렸었다. 심야의 국도에서였다. - 일 끝냈습니다. 그런 전화를 받은 건 이튿날 아침이었다. 덤프 트럭 운전기사는 현장에서 자수했다. 지금은 어딘가에서 윤택하게 살고 있을 것이었다. 경찰도 피해자가 폭주족이었던 탓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원수를 갚고 싶나?' '설마. 모두 지나간 일 아닙니까?' 히라세는 웃었다. 하지만 그 순간 노보루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이 똘마니 녀석은 그 옛날부터 자기 형제를 노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이번의 공갈도 복수의 일환이었다. '그럼 원하는 게 뭐야?' '없어요. 이쪽 조건은 이미 말씀드렸구요.' '50 퍼센트?' '네. 비지니스 파트너로 한몫 끼워 주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독차지할 생각이지. 그게 네 녀석이 노리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그때까지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공포감이 훨씬 가벼워졌다. '뭐가 그렇게 이상합니까?' '이상하다니?' '웃었습니까, 방금.' '이상한 건 하나도 없잖아?' '하지만 웃었잖습니까?' 히라세는 미간을 찡그렸다. 불안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랬었나?' 갑자기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뭣 때문에 자기는 사메지마를 이곳까지 오라고 했을까. 만나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스스무의 마지막 모습은 알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 아가씨를 빨리 보내 버리자. 이젠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지 않는가. 언뜻 정신이 들자 히라세가 눈앞에 다가서 있었다. 깜짝 놀라 몸을 빼려고 했으나 한발 늦고 말았다. 히라세의 손에 멱살을 잡혔다. '무슨 일이 있었죠?' '이것 놔. 아무 일도 없었어.' 억지로 평정을 되찾으면서 말했다. 히라세의 손에 하얀 빛이 번쩍 했다. 비수가 코끝을 싸늘하게 눌러왔다. '말해 봐. 무슨 일이지?' 얼굴 표정이나 말투가 딴 사람처럼 표변한 히라세가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오후 4시 20분. 신칸센은 플랫폼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그 역에서 열차를 내린 사람은 사메지마를 포함해서 2,3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일요일 저녁이기도 해서 차 안도 별로 붐비지 않았다. 플랫폼에 내려선 사메지마는 곧장 출구 계단으로 걸어갔다. 도게가 귀띔해 준 잠입 수사관과는 아직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사메지마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카와 스스무의 형 노보루를 만나러 갈 작정이었다. 거기서 뭔가 실마리가 잡힐 것이라고 확신했다. 출구 계단 가까운 곳의 벤츠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남자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자연스럽게 사메지마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사메지마씨죠?'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면서 사내를 돌아보았다. 스물여덟 아홉쯤 되어 보였다. 가리마를 타서 빗어넘긴 헤어스타일이 촌스런 플라스틱테 안경, 그래도 넥타이 차림이었다. '그렇습니다만......' 사내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게씨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시와다립니다.' 사메지마는 안도와 함께 또 다른 의문을 느꼈다. '어떻게 여기까지?' '내 소재지를 못 찾아낸 도게씨가 비상연락망으로 사메지마씨가 탑승한 열차편을 알려왔더군요.' 사메지마가 도쿄 역에서 도게에게 전화를 건 것은 사실이었다. 가르쳐 준 이시와다리의 번호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출중이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이시와다리는 표정이 별로 없는, 어느 쪽이냐 하면 어두운 인상의 사내였다. '아래에 차를 세워 뒀어요. 자세한 얘긴 거기서......' 신칸센 역은 재래선 역과 별도로 새로 건축한 건물이었다. 주변엔 아직 다른 건물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얼핏 보기엔 썰렁한 느낌을 주는 역전 로터리에 해치백 타입의 국산차가 세워져 있었다. 이시와다리 차였다. 이시와다리는 운전석에 앉아 신중하게 안전 벨트를 맨 다음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어서 연락을 끊고 있었던 겁니다.' '그럴만한 까닭?' 이시와다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당신 애인 때문이죠. 내 임무는 가카와 노보루와 스스무가 <아이스캔디>의 공급원이라는 증거...... 다시 말하면 <캔디> 밀조공정을 밝혀내는 것이었어요. 어느 단계까지는 순조로웠죠. 두 사람은 사촌누이인 가카와 게이코의 크루저를 빌려 배 안에서 <캔디>를 정제, 알약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배에서?' '네. 크루저라곤 하지만 아주 대형입니다. 캐빈만 하더라도 반제품 각성제를 정제하는 공정엔 충분할 만큼 넓죠. 먼 바다로 나가 닻을 내리기만 하면 그걸로 거리낄 게 없으니까 아주 편리하죠.' '그럼 캐빈에서 작업한 사람은?' '형제 두 사람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담한 증거는 없습니다.' '두 사람만으로?' '사메지마씨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이 지역에선 두 형제가 그런 일에 제3자의 협력을 구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포장은 어떻게? 밀매되고 있는 <캔디>는 플라스틱 시트에 들어 있던데......' '포장은 별도라고 봅니다. 아마도 다른 현의 전문업자를 이용했겠죠.' '그건 그렇고...... 연락을 끊고 있었던 이유는 뭐였소?' 자동차는 시의 메일 스트리트로 보이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현청, 시청, TV방송국, 경찰본부 건물이 모여 있는 지역을 지나자 이번에는 백화점, 대형 수퍼, 은행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저께 나는 가카와 형제가 <캔디>가 든 것으로 보이는 포장상자를 크루저에서 내리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때 또 다른 인물이 나와 함께 있었죠. 히라세 나오미란 사냅니다. 폭주족 출신으로 이 지역 폭력단인 이다구미에서 수습을 받다가 뛰쳐 나온 흉폭한 녀석이죠. 히라세는 가카와 형제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갖고 있는 것 같더군요. 야쿠자 노릇할 때 뒤동냥한 정보로 가카와 형제를 주목, 공갈 재료를 찾고 있었어요. 흉폭한 데다가 머리도 제법 굴릴 줄 알아 다루기가 힘든 녀석이에요. 이다 구미를 다른 건으로 내사하고 있던 나는 가카와 형제가 <캔디>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히라세와 손을 잡았던 겁니다. 녀석은 녀석대로 약물에 밝은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손잡기가 쉬웠어요. 이다구미 가운데는 가카와 형제가 <캔디>에 손을 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 챈 녀석도 있었지만, 깊게 파고들어 갈 용기는 없었던 것 같았어요. 하지만 두 사람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히라세는 달랐어요. 히라세에겐 가카와 형제 동태에 밝은 정보원이 한사람 있어요. 구니사키 고지라는 중학 동창생이에요. 구니사키는 당신 애인과 한때 같은 밴드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이죠. 지금은 가카와 게이코의 제비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라이브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람은......' '구니사키 고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니사키는 점장입니다. 오너는 가카와 게이코이구요. 이름은 라고 합니다. 어젯밤 당신 애인이 에 출연했는데 그 직후 가카와 스스무는 도쿄로 떠났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 히라세가 내 아파트로 전활 걸어왔더군요. 어젯밤 늦게 히라세는 가카와 형제가 <캔디>와 연관된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게이코를 협박했었죠. 폭로되는 게 두렵다면 <캔디> 사업에 자기도 한몫 끼워달라고 요구했다는 겁니다. 그 시점에서 내 임무는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증거 사진을 가지고 도쿄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확보한 정보와 합하면 가카와 형제를 연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한데, 뜻밖에도 히라세는 가카와 노보루의 제의로 당신 애인을 유괴하기로 했다면서 내게 협력을 강요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잠입 수사의 한계를 넘어선 일입니다. 사태가 뜻밖의 상황으로 접어들었다고 판단한 나는 도쿄의 주임 정보관님에게 연락을 드렸던 겁니다.' 이시와다리는 일단 말을 멈추었다. 사메지마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우리 주임님을 심하게 몰아세웠다면서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사메지마는 쇼에 대한 정보를 한시라도 빨리 듣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대답했다. '주임님의 지시는 대기하고 있으라는 것이었어요. 물론 유괴의 공범 노릇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명령도 함께 내렸구요.' 사메지마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다미는 쇼가 유괴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메지마에겐 단 한마디도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도게는 모르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정보를 이다미 혼자 거머쥐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쇼에게 만의 하나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이다미를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시와다리도 사메지마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다. '먼저 말했어야 하는 걸 그만...... 사메지마씨의 아가씨에겐 별일이 없을 겁니다. 가카와 노보루도 그녀를 다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명령했으니까요.' 그 말을 듣자 약간이기는 했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당신은 연락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는 건가?' '네. 하지만 도게씨의 비상연락을 받고 도쿄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사메지마씨와 접촉하기로 결심한 겁니다. 사메지마씨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내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 수집한 내사 정보를 주임님이 깔아뭉개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도게씨가 가르쳐 주더군요.' '글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건 제쳐두고라도 젊은 여성이 유괴 감금되었다는 보고를 듣고도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지시를 내리다니...... 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짐작이 갑니까?' '엄청난 일을 하고 있었군요.' 사메지마는 말투를 바꾸어 정중하게 말했다. '이렇게 생겼으니까......' 이시와다리는 수줍은 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누구도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덕분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럴지도 몰랐다. 젊지만 어두운 얼굴의 이 사내가 마약단속관일 줄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사내에게 부여된 임무가 가혹하고 고독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현재 내가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히라세가 그녀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아마도 가카와 노보루의 지시로 어딘가에 감금해 두고 있을 겁니다.' '구니사키 고지는?' 이시와다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와도 연락이 안됩니다.' 사메지마는 숨쉴 틈도 없이 되물었다. '가카와 노보루의 목소리는 듣기에 어떻든가요?' '직접 얘길 해 본 적이 없어요...... 역전에 있는 노보루 자택을 살펴보러 갔었습니다. 담장 너머로 밖에 엿볼 수 없었습니다만, 본인 차는 있는데 부인차가 안 보이더군요. 가카와 노보루가 출근할 때는 운전 기사가 또 다른 차로 모시러 옵니다. 한데 오늘 부인은 아이들과 정원에서 놀고 있더군요.' 사메지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카와 노보루 차는 어떤 겁니까?' '메르세데스 벤츱니다. 부인 것은 국산인 디아만테구요.' '그럼 안 보이는 차가 디아만테?' '네.' '누굴 빌려 준 걸까요? 아니면 가카와 노보루가 이용하고 있는 걸까요?' 사메지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선 당신 애인이 묵고 있던 로열 호텔로 가보기로 하죠.'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할 순 없지만 쇼의 행선을 알려줄 실마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그곳밖에 없었다. '이 지역 최고급 호텔입니다. 물론 가카와 재벌 계열입니다만.' 로열 호텔은 메인 스트리트에서 조금 물러선 자리에 우뚝 솟아 있었다. 앞쪽은 주차장, 뒤쪽으로 널찍한 정원을 등지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이시와다리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저게 구니사키 자동찹니다.' 낡은 RX-7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시와다리는 자신의 해치백을 바로 그 옆 빈자리에 세웠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이시와다리가 RX-7 보네트에 손을 대 보았다. '열기가 하나도 없군요.' 주차장 담당 직원은 없었다. 두 사람은 호텔로 다가갔다. 유리 자동 도어로 들어서자 바로 대리석 바닥의 길쭉한 로비였다. 샹들리에 조명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게 느껴졌다. 프론트로 다가간 사메지마는 경찰 배지를 내보였다. '투숙객 가운데 아오키 쇼라는 여성이 있죠?' '아오키씨......' 프론트 담당은 블레이저 차림의 젊은 여자였다. 사메지마의 경찰 배지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 같은 블레이저 차림의 30대 남자가 다가왔다. 앞에 놓인 단말기 키보드를 두들겼다. '8101 호실 손님이군요. 지금 외출중이신 모양입니다.' 룸키는 보관해 두는 선반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방엔 아무도 없나요?' 이시와다리가 물었다. '네. 아무도 안 계실 겁니다.' '외출하는 모습을 혹시 본 사람이 없을까요?' '......누군가가 데리러 왔더군요. 그분과 함께......' '몇 시쯤이었나요?' '점심께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왔던 사람은 어떤 모습이던가요?' '한분은 체크인 때 함께 오셨던 분이었어요. 또 한분은......' 인상으로 보아 히라세가 틀림없다고 이시와다리는 생각했다. 쇼는 구니사키, 히라세와 함께 나간 것이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 같은 건 없었나요?' '글쎄요. 별로 이상한 낌새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방을 좀 살펴볼 수 없을까요? 호텔측에서 입회해도 무방합니다.' 사메지마 요구에 프론트 직원은 망설이다가 좋다고 말했다. 프론트 직원과 함께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8101 호는 복도 끝방이었다. '이 방은 스위트룸입니다.' 프론트 직원이 열쇠로 도어를 열면서 말했다. 사메지마와 이시와다라는 안으로 들어갔다. 메이드가 청소를 끝낸 듯 널찍한 실내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다이닝룸을 겸한 거실을 거쳐 침실로 들어섰다. 옷장 앞의 수트케이스를 제외하면 쇼의 사물이라고는 침대 옆에 놓여 있는 헤드폰 스테레오 뿐이었다. 사메지마는 헤드폰 스테레오를 귀에 갖다대 보았다. <후즈 허니>의 신곡 시작(試作) 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굉장하군요. 1박에 얼마쯤인가요?' 이시와다리가 물었다. '7만엔을 받고 있습니다.' 프론트 직원이 경계하듯 대답했다. '방값은 아우키씨가?' 사메지마가 물었다. 쇼를 성만으로 불러보는 게 얼마 만인가 생각하면서. '아닙니다......' 프론트 직원은 말끝을 흐렸다. '그럼 지불은 누가?' 이시와다리가 물었다. 프론트 직원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아오키씨가 중대한 범죄에 말려들었을 가능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 경찰은.' 사메지마가 말했다. '......가카와씹니다.' '가카와, 누굽니까?' '게이코씹니다.' 대답한 프론트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이시와다리가 사메지마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사메지마는 끄덕여 보이면서 방에서 나가자는 뜻을 전했다. 두 사람을 가카와 운송 본사로 자동차를 몰았다. 로열 호텔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가카와 노보루는 자리에 없었다. 오후 4시쯤 퇴근했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어디로 가죠?' 자동차에 오르면서 이시와다리가 물었다. '가카와 노보루는 사망에 대해 정식으로 통고를 받았을 거야.' '그렇다면 지금쯤 사메지마씨 애인과 함께 있기가 쉽겠군요.' '히라세 나오미, 구니사키 고지도 함께 있을 게야.' '거기가 어딜까?' 이시와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얌전하게 보이는 이 마약단속관이 자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사메지마도 눈치를 챘다. 이다미의 지시를 거부했다면 쇼가 어디에 감금되어 있는지 알아낼 기회가 있었던 것이었다. '알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이 한사람 있어.' 사메지마가 말했다. '가카와 게이코 말인가요?' 이시와다리가 사메지마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맞았어!' 21. 안쪽 사무실만은 바닥이 마루였다. 지금 그 마룻바닥에 비수가 꽂혀 있었다. '젠장, 정말이야, 그게?' 히라세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쓸어올렸다. 가카와 노보루는 침착한 눈으로 그러는 히라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카와 노보루를 꿇어앉힌 히라세는 두 다리를 벌린 자세로 맞은편에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도 히라세는 어떤 위압감을 느꼈다. 가카와 노보루의 위엄은 머리가 헝클어지고, 칼 맞은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지는 속으로 적지 않게 감탄했다. 고지는 쇼의 무릎에 기대어 있었다. 기분은 최악이었다. 구토기가 끊임없이 치밀어 올라왔고 머리도 깨어질 듯 욱신거렸다. 한쪽 구석엔 피섞인 구토물이 쌓여 있었다. '여길 떠나는 게 좋아. 널 위해서 하는 말인데......' 가카와가 조용히 말했다. '너라니? 말 조심해, 이 새끼야!' 히라세가 으르렁거리면서 마루에 꽂힌 비수를 뽑아 가카와의 목에 갖다댔다. '너 때문이야. 너네 형제가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었어.' 가카와는 눈을 감았다. '2천만 엔 손에 넣었잖아?' '그까짓 푼돈 말야? 네놈들 <캔디>로 도대체 얼마나 벌었어?' '한푼도 번 것 없어.' '뭐?' '지금부터 벌 예정이었지. 처음엔 손해볼 각오로 싼값에 뿌렸거든. '누굴 바보로 알아?' '정말이야. 스스무가 저 꼴이 되는 바람에 끝장이 나고 말았어.' 가카와는 눈을 떴다.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 골방 같은 곳으로 자리와 함께 끌려온 가카와가 고문 못잖은 윽박지름을 받으면서 히라세에게 털어놓은 얘기를 고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겨지지가 않았다. 가카와 형제가 각성제를 밀조하고 있다는 증거를 확보, 거금을 움켜쥘 기회를 가까스로 잡았었는 데 일장춘몽으로 끝이 나고 말다니. 동생인 스스무는 살해되었고, 경찰이 움직이고 있질 않는가. '너라면 경찰 따위 어떻게 할 수 있잖아!' '이렇게 된 지금은 방법이 없어.' '그렇더라도 손을 쓸 순 있잖아?' '움직이고 있는 건 현경이 아니야. 도쿄 경시청이야.' '경시청이면 어떻다는 거야?' '경시청 형사와 통화를 했어.' '사메지마 말야? 별것 아니야, 그따위 녀석은.' 쇼의 무릎이 움찔하는 것을 고지는 등으로 느꼈다. '그래서 날 납치한 거야?' 쇼가 말했다. 히라세와 가카와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그래.' 이윽고 가카와가 입을 열었다. '스스무와 야쿠자 사이가 뒤엉켜 옥신각신하게 되자 도움을 받을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던 거야. 사메지마 형사의 뒤를 캔 끝에 아가씨가 애인이란 걸 알아낸 거야.' '고지, 날 부른 건 그 때문이었어?' '아, 아니야......' 고지가 허둥거리며 부인했다. 쇼의 눈빛은 진지했다. 가카와가 입을 열었다. '우연이었어. 아가씨가 이리로 오게 되어 있는 걸 안 건 우연이었어.' 히라세가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넌 말야, 끝까지 손 안 대고 코를 풀어왔어. 가카와 가 도련님답게 말야. 약삭빠르게 동생을 앞세웠고 날 앞세웠어.' 내뱉듯이 말했다. '그 녀석 뭐랬지?' '그 녀석?' '<상어>' 쇼가 말했다. <상어> 라는 말투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가카와는 그 따뜻함에 마음이 쓰였다. 동그랗게 뜬 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만나러 온댔어. 날 만나겠다는 거야.' '그럼 그 녀석 틀림없이 오겠군.' 쇼가 말했다. 스스럼없는 말투 - 흐린 하늘을 쳐다보면서 <비가 오겠군> 할 때와 똑같은 말투였다. '바보같은 소리 하는 게 아니야, 쇼짱.' 히라세가 고양이 울음 같은 소리로 말했다. '여긴 도쿄가 아니야. 도쿄 도내 일선 서 형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따라서 올 까닭이 없단 말야. 안 그래?' 가카와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가카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쇼가 입을 열었다. 타이르듯 한마디 한마디 똑똑하게 발음했다. '당신은 그를 몰라. 그가 온댔으면 오는거야.' 히라세의 얼굴이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반한 모양이군, 쇼짱.' '......자기를 증오하지 않느냐고 묻더군.' 가카와가 말하자 히라세가 고개를 홱 돌려 노려보았다. 가카와는 말을 이어갔다. '스스무를 도와 주지 못한 자기를 증오하지 않느냐고 말야.' '제법 잘난 척을 했군.' 히라세는 퉤하고 침을 뱉었다. 이어서 치켜뜬 눈으로 쇼를 바라보았다. '도쿄 형사가 무슨 소릴 지껄였건 신경쓸 것 없어. 여기는 여기대로 해 나가면 그만 아니겠어?' '......결국 알게 될거야.' 나지막한 소리로 쇼가 말했다. '입 닥치고 있어! 까불면 당장 깔아뭉개 줄 수도 있어. 진짜 남자 맛이 어떤가 한번 볼테야?' 쇼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지금까지 줄곧 침착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마치 성난 맹수처럼 눈빛이 이글거렸다. '할 테면 해보지 그래? 네 그 쓰잘데 없는 연장이 날 울려 줄 것 같아? 정신 똑똑히 차려, 이 촌놈아!' 히라세가 씩 소리를 내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이어서 쇼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쇼의 입술이 찢어져 피가 튀었다. 쇼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맛을 보여 주지!' 고지는 필사적으로 히라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관둬! 그만두란 말얏!' 히라세가 고지를 내려다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네깐 놈 죽어 버려!' 비수를 높이 쳐들었다. 고속도로 쪽으로 메인 스트리트를 달려갔다. 는 시가지 동쪽에 있었다. 는 빌딩이 아니라 화사한 단독주택 같은 건물이었다. 나무틀에 유리를 박은 정면 부분에 라는 자그마한 간판이 서 있었다. 간판엔 아직 조명이 들어오지 않았다. 뒤쪽으로 자갈을 깐 주차장이 있었다. 검정색 포르쉐가 한 대 서 있었다. '가카와 게이코 찹니다.' 이시와다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이시와다리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늘은 쉬는 날일 겁니다.' 가을 해가 이미 기울고 있어 자갈 위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단 들어가 보자구.' 사메지마가 말했다. 주차장을 돌아서 포치를 갖춘 정면으로 나왔다. 내부엔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창에 바싹 붙여 빽빽이 들여놓은 화분의 관엽식물 잎이 간접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따뜻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도어 앞에 이르자 이시와다리가 사메지마를 돌아보았다. '사메지마씨.' 도어 유리에 여자 글씨의 알림 쪽지가 붙어 있었다. - 당분간 휴업 K&K - 사메지마는 조심스레 숨을 들이마시면서 도어를 밀쳐 열었다. 조명이 켜진 정면 부분에서 안쪽으로 길다랗게 복도가 뻗어 있었다. 복도 양쪽의 와인 선반엔 술병이 꽉 차 있었다. 정면의 밝은 부분이 대기실인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둠침침했다. 가게 안엔 인기척이 없었다. 사메지마는 와인이 쌓여 있는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가 끝나자 널찍한 홀이 눈에 들어왔다. 정면 안쪽으로 카운터와 그랜드 피아노를 갖춘 스테이지가 보였다. 그 좌우 벽을 따라 한단 높은 부분에는 호화로운 가죽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왼쪽의 검정 커튼이 쳐진 곳이 클로크 카운터였다. 그랜드 피아노 위로 핀포스트가 내리비치고 있을 뿐 불이 켜진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사메지마는 복도가 끝나는 부분, 홀 입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랜드 피아노를 내리비추고 있는 빛줄기 저쪽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담배연기가 빛줄기 속에서 일렁이며 피어올랐다. 너무도 조용해서 심야로 착각할 정도였다. 사람이 움직였다. 빛줄기 바로 옆에 검정 원피스 차림의 여자 모습이 나타났다. 화장기는 없었으나 단정한 얼굴이었다.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쓸어올렸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휴무에요.'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소곤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쓸어올린 머리카락이 어깨 부분에서 일렁이면서 빛을 반사했다. '가카와 게이코씹니까?' 사메지마가 물었다. 여인이 얼굴을 쳐들었다. 정면으로 이쪽을 쏘아 보았다. 화사한, 유리 세공품처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게다가 귀품스럽기도 했다. 큼직한 눈동자에 투명하리만큼 희고 섬세한 콧날과 입술. 여인은 커다란 눈으로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네, 그래요.' '도쿄 경시청 신주쿠 서의 사메지맙니다. 이쪽은 칸토 신에스 지구 마약단속관 사무소의 이시와다리씨구요.' 여자의 눈동자가 조금 더 커졌다. 깊게 파인 검정 원피스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하얀 쇄골이 반짝거리면서 아래위로 들먹거렸다. '가카와 노보루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사메지마가 물었다. 여인은 말없이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대답할까말까 망설인다기보다 할말을 찾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당신이 쇼씨의?' '그렇습니다. 쇼가 제 애인입니다.' 망설이면서 물은 가카와 게이코의 말을 덮어싸듯이 사메지마가 대답했다. 가카와 게이코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저는...... 노보루씨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물어봤지만 가르쳐 주지 않더군요.' '가카와씨가 쇼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나요?' '......네.' '구니사키 고지는 어떨까요?' 가카와 게이코는 움찔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아마...... 함께겠죠.' 대답과 동시에 눈을 내리깔았다. 이시와다리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크루저를 가지고 계시죠?' '네.' '가카와 노보루, 스스무씨 형제가 자주 사용한 걸 알고 있었나요?' '네. 전 선박 면허가 없기 때문에 제가 타고 싶을 땐 언제나 노보루씨나 스스무씨에게 부탁을 했으니까요.' '다른 크루저는 없었나요?' '있었습니다만......' '크루저는 지금 어디 있나요?' '마리나에 있겠죠.' '나중에 안을 한번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오랫동안 전 이용하지 않았어요.' 말을 마친 가카와 게이코는 스테이지 바닥에 눈길을 박았다. '여행이라도 떠날 계획인가요, 지금부터?' 이시와다리의 물음에 가카와 게이코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없어요.' '알겠습니다.' 이시와다리가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사메지마는 꼼짝도 않고 가카와 게이코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가카와 게이코가 입을 열었다. '어제 여기서 노랠 불러 줬어요. 아주 멋있는 노래였어요. 남다른 재능을 타고났더군요.' 고개를 들어 사메지마의 눈길을 맞받았다. '프로 가수 분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실례일지 모르지만......' '그 사람에겐 노래가 전부입니다.' '그럼 당신은? 당신 존재는 어떻게 되나요?' '노래에 비하면 작아질 수밖에 없어요.' '당신 경우는 어떤가요? 일과 그녀를 비교하면......'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쇼를 잃게 되더라도 아마 경찰 노릇을 계속하겠죠. 하지만 그럴 때 내 자신이 어떤 상황에 빠져 있을지 상상이 안 가는군요.' '왜 당신 것으로 만들지 못하나요? 결혼해서 옆에 잡아두면...... 자신이 없으세요? 아니면......' 눈빛이 날카로워지면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록 가수를 아내로 맞으면 경찰관으로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결혼을 못하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사메지마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경찰관으로서의 앞날엔 큰 기대를 않고 있어요.' '왜요? 전 관료를 몇 사람 알고 있어요. 경찰 관계 사람은 잘 모르지만, 관료들은 모두 장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더군요. 형사들은 다르나요?' '형사가 다른지 어떤지 난 잘 몰라요. 다만 난 그렇지 않아요.' '뭔가 미스를 저질렀나요?' '.....그런지도 모르죠.' 사메지마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메지마씨 계급은?' '경감입니다.' 가카와 게이코는 눈을 깜박거렸다. '경감님이라면 간부 아니세요?' '그렇죠.' '이혼한 제 전 남편은 통산성에서 근무했어요. 상급시험 (행정고시) 에 합격한 사람이었어요. 머리가 굉장한 사람이기도 해요. 하지만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는 데는 아주 무능했어요. 당신이 그녀와 결혼 않는 것도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어서인가요?' '......그녀의 행복은 그녀 자신이 결정할 문젭니다. 결혼이란 나 혼자 바란다고, 또 그녀 혼자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지금 결혼하면 자유롭게 노래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문제는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녀가 그렇게 믿고 있는 게 나는 중요하다고 봐요.' '잘못을 바로잡아 볼 생각은 없으세요?' '잘못?' '결혼하면 마음대로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는 게 잘못된 생각 아녜요?' '노랠 부르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녑니다. 가수인 그녀 행복이 그녀 애인인 내 행복과 일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택권은 그녀에게 있어요. 잘못된 생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이 경우 별로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가카와 게이코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메지마씨라고 하셨죠?' '네.' '<상어> 라고 불리기도 하나요?'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녀는 당신을 노래로 불렀어요. 발라드였어요, 아주 멋진.' 천천히 눈을 돌려 무대를 둘러보았다. '이 가겐 저의 보물이에요. 보물이 한개뿐은 아니지만, 이 가게를 잃는다면 살아갈 용기도 함께 사라지고 말 거에요.' '누군가가 빼앗으려 하고 있나요?' '모르겠어요, 그건.' 가카와 게이코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노보루씨가 어디로 갔는지 전 모르지만 알아낼 방법이 있을 거에요.' 22. 비수가 내리꽂혔다. 그러나 고지 옆에서 살짝 벗어난 마룻바닥이었다. 눈이 휘둥그래져서 바라보는 고지에게 히라세는 능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번 그래 본 거야. 친구인 널 내가 죽일 까닭이 없잖아? 그런 짓 했다간 쇼짱한테 미움만 받을 것 아니겠어?' 그리고는 노보루를 돌아보았다. '각성제, 아직 많이 남아 있지?' '반제품이라면 있어.' '얼마나?' '40 킬로그램.' 히라세는 싱긋 웃음을 흘렸다. '괜찮군. 배에 있나?' '아니.' '그럼 어디야?' 노보루는 입을 꾹 다문 채 히라세를 응시했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광폭한데다가 머리도 쓸 줄 아는 위험한 사내와의 대결에서 다시 한번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가 온 것이었다. '어디냐고 묻고 있잖아!' '이런 상황에선 가르쳐 줄 수 없어.' '뭐라구? 이 새끼가.' '그 칼 이리 줘. 그러면 가르쳐 줄께. 각성제는 네 것이야. 그 2천만 엔도 마찬가지구. 하지만 칼을 건네 주지 않으면 말해 줄 수 없어.' '빌어먹을! 놀고 있네. 이봐, 칼을 건네 주고 나면 난 끝장이 날게 뻔한 데두 네 말을 들으라는 거야?' '널 죽여봤자 내가 득을 볼 건 하나도 없어.' '너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히라세가 으르렁거렸다. 노보루는 눈길을 돌려 고지를 바라보았다. 고지는 쓰러져 있는 쇼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얻어맞고 쓰러질 때의 충격으로 아가씨는 실신한 것 같았다. 입 언저리에 피가 번져 있었다. '어떡할 거야?' 노보루가 물었다. '아저씨.' 히라세는 노보루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직도 사장티를 낼 생각이야? 난 네 부하가 아니야. 귀하신 몸이라고 누구든 자기 말에 굽신거릴 줄 아는 모양인 데, 천만의 말씀이야.' 아가씨가 신음소리를 냈다. 고지가 어깨를 잡아흔들었다. '쇼, 쇼......' 아가씨가 눈을 떴다. 멍한 눈길, 뇌진탕이 분명하다고 노보루는 생각했다. 아가씨는 기침과 함께 입 안에 고여 있던 피를 토해냈다. '미안해, 쇼짱. 울컥하는 바람에 그만......' 히라세가 거창스런 제스처로 사과를 했다. 히라세를 바라보는 쇼의 얼굴에 차츰씩 표정이 살아났다. 이상스러웠다. 아가씨 얼굴엔 두려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여기서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가씨 얼굴에 공포의 빛이 번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만 분노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만 풍겨냈을 뿐이었다. '내가 미워졌지?' 익살스럽게 히라세가 말했다. '이가 부러졌어.' 그게 쇼의 대답이었다. '뭣 때문에 그렇게 대들었어, 쇼짱. 우는 모습 한번 보고 싶어. 한번 울려 줄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둬.' 노보루가 말했다. 히라세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각성제 가지고 얼른 꺼져. 지금쯤 경찰이 날 찾고 있을 거야.' '내가 꺼지는 건 네놈들 모두 죽이고 나서야.' 바로 그때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실내는 어느덧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가운데 마룻바닥의 핸디폰이 반짝반짝 빛을 뿜었다. 모두 입을 다문 채 울리고 있는 핸디폰을 바라보았다. '누가 건 거야?' 히라세가 중얼거렸다. '핸디폰은 원래 내 것이야. 누군가가 날 찾고 있는 걸 거야.' '받을 필요 없어!' 전화를 바라보던 노보루는 히라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각성제 필요 없다는 건가?' '잘난 척하는 게 아니야!' 전화는 계속 울렸다. '스위치 꺼 버릴까?' 히라세가 팔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고지가 잽싸게 전화기를 집어올렸다. '이 새끼가!' 어디에 그런 체력이 남아 있었을까. 믿을 수 없이 재빠른 행동이었다. 전화를 움켜잡자마자 고꾸라지듯이 방 밖으로 굴러나갔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창고 안으로 도망쳤다. 히라세가 비수를 쳐들고 뒤를 쫓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고지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노보루가 벌떡 일어나서 방 밖으로 나갔다. 히라세가 비수를 겨누어 들고 고지에게도 덮쳐 갔다. '이 새끼! 거기 서지 못해?' '마담!' 고지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마담! 미안해요, 고집니다......' 고지가 비틀거렸다. 옆구리에 비수가 꽂혔다. '여긴 항구...... 창고터예요......' '전화 이래 내!' 히라세가 두 손으로 고지의 오른손 어깨를 움켜잡았다. 고지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마담...... 죄송합니다, 정말......' 고지는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용서해 주세요, 마담......' 히라세가 고지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그래도 고지는 젖먹던 힘까지 뽑아올려 핸디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노보루가 몸을 날려 히라세 등에 부딪쳐 갔다. 히라세는 발을 굴리면서 돌아섰다. 눈썹이 치켜 올라간 게 더욱 포악스럽게 보였다. 입을 꽉 다문 채 노보루 배에 펀치를 퍼부어댔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노보루의 머리카락을 움켜잡더니 무릎으로 얼굴을 짓이겼다. 묵직한 충격과 함께 코뼈 부러지는 소리가 노보루 얼굴에서 뒤통수 쪽으로 울려 나갔다. 울컥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노보루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무너져 내렸다. 멀리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껌벅거려 보았다. 얼굴 하반부가 마비된 것 같았다. 뜨거운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노보루는 코를 싸쥐고 눈을 떠보았다. 부서진 핸디폰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검정 그림자처럼 웅크리고 있는 고지에게 히라세가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쉴새없이, 끝도 없이 걷어찼다. 쿡쿡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퍼졌다. 그때마다 고지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얼굴을 바닥에 찰싹 갖다붙인 고지는 달리 움직여 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고지!' 수화기를 귀에 댄 가카와 게이코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쳐댔다. '여보세요, 고지. 고지!' 숨을 들이마시면서 옆에 서 있는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항구 쪽이에요...... 아마 마리나 안쪽의 낡은 건자재 창골 거에요. 노보루씨 회사가 올 연초에 제 아버님한테서 매입한 곳이에요.' 사메지마는 이시와다리를 건너다보았다. '어디쯤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시와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112에 신고해 주시겠습니까?' 사메지마가 가카와 게이코에게 말했다. 가카와 게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메지마는 가카와 게이코가 들고 있는 수화기를 받아 귀에 바싹 갖다댔다. 통화중인 신호가 삑삑 울려나왔을 뿐이었다. 23. '고지, 너 참 멍청한 놈이로구나.'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면서 히라세가 중얼거렸다. '정말 널 죽이고 말았구나. 죽이고 말았어. 네가 나빴어. 내 말 안들은 네가...... 함께 손잡고 살아갈 생각이었는데......' 히라세의 양쪽 팔꿈치까지 피에 젖어 있었다. 고지의 몸에서 뽑아내 들고 있는 비수가 번쩍번쩍 빛을 뿜었다. 창고 안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풀벌레 울음소리는 요란했다. '고지!'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가 사무실로 쓰던 골방 문에 기대어 서서 움직임을 멈춘 젊은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히라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노보루는 허둥지둥 아가씨를 끌어안았다. '안 돼!' '이것 놔!' 아가씨는 몸부림을 쳤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히라세에게 달려들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서야 히라세는 제 정신이 들었다. '뭐야? 왜 이러는거야?' 노보루를 밀쳐 버린 다음, 아가씨의 진 재킷 자락을 움켜잡았다. 아가씨의 몸을 잡아당겨 이리저리 흔들어 돌렸다. 재킷이 벗겨졌다. '이년이!' 벗겨든 재킷을 내던진 히라세는 아가씨의 탱크톱을 찢었다. 브래지어에 쌓인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다. 그 가슴에 히라세는 비수날을 갖다댔다. '벗어!' 아가씨 눈에서 이글이글 빛이 쏟아져 나왔다. '하고 싶음 네가 벗겨!' '이년이......' 브래지어를 나꿔챘다. 아가씨가 무릎으로 히라세 하복부를 걷어올렸다. 히라세가 신음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가씨가 잽싸게 몸을 돌렸다. 창고 출구를 향해 달렸다. 히라세는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면서 뒤를 쫓으려고 일어섰다. '가르쳐 주지!' 노보루가 호통치듯 말했다. '가르쳐 줄 테니까 돌아와!' 게이트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2미터가 넘는 펜스 꼭대기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어쩌죠?' 펜스 쪽엔 잡초가 무성했다. 시야가 막혀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으로 하루살이를 비롯한 곤충이 몰려들었다. 이시와다리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사메지마는 차에서 내렸다. 펜스 저쪽에서 미풍이 불어왔다. 눅진눅진한데다가 바다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다. '전 건너편은 어떤 상탠가?' '바답니다. 방파제가 높아 들어갈 수가 없어요.' 유리를 내린 운전석 창으로 이시와다리가 머리를 내밀었다. 사메지마는 깜짝 놀라며 펜스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였다. 이시와다리를 바라보았다. 이시와다리도 긴장한 얼굴로 마주 바라보았다. '들었습니까?' '들었어.'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시와다리는 심호흡을 하면서 시동을 걸었다. '물러서 주세요. 자동차로 밀어버릴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해 보겠어요.' 웅웅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해치백이 후진을 했다. 노면이 진흙탕이었기 때문에 4,5 미터밖에 후진할 수가 없었다. 사메지마는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이시와다리가 엔진을 공회전시켰다. 두번 세번 공회전시켜 힘을 높인 다음 클러치에서 발을 뗐다. 해치백이 돌진해 갔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차머리가 게이트에 쳐박혔다. 하지만 양쪽 기둥 때문에 게이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해 보죠.' 말하면서 이시와다리를 해치백을 후진시켰다. 게이트 철선에 차체가 긁히는 금속성이 귀를 찔렀다. 다시 한번 해치백이 게이트에 충돌했다. 게이트의 중간 부분이 휘어졌다. '그대로 있어!' 사메지마가 외치면서 해치백 보네트로 올라갔다. 넘어지듯이 휘어진 게이트 꼭대기 철선에 구둣발을 걸었다. 체중을 실어보았다. 심하게 흔들리기는 했으나 철선이 끊길 것 같지는 않았다. 탄력을 붙여 사메지마는 게이트를 뛰어넘었다. 잡초 위에 떨어져 딩굴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 대답하면서 사메지마는 일어섰다. 잡초 사이로 타이어 자국이 길처럼 이어져 있었다. '한번만 더 부딪치면 넘어뜨릴 수 있을 겁니다.' 이시와다리는 다시 해치백을 후진시켰다. 사메지마는 타이어 자국을 따라 걸어갔다. 길로 자란 잡초에 몸이 묻힐 지경이었다. 원래 수분이 많은 매립지인데다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은 탓에 풀이 제멋대로 자란 것이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타이어 자국 저쪽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앞으로 나갈수록 풀벌레 소리가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요란스러웠다.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소리였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러나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분노와 고통이 뒤섞인 소리였다. 사메지마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방 헛발을 딛는 바람에 비틀거렸다. 등 뒤에서 다시 충돌음이 울려왔다. 꼬리를 길게 뽑는 금속음에 이어 엔진 소리가 다가왔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뒤돌아볼 생각도 않고 달렸다. 타이어 자국길이 중간에서 커브를 그렸다. 사메지마는 헤드라이트가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돌아와!' 남자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방향으로 사메지마는 접근해 갔다. 급한 발자국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잡초숲이 끝나면서 정지(整地)가 잘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왼쪽으로 시커먼 실루엣 같은 건물이 보였다. 그 바로 앞에 자동차 2대가 서 있었다. 등 뒤에서 빛이 비쳐왔다. 게이트를 돌파한 이시와다리의 해치백이 달려온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면으로 헤드라이트를 받으면서 쇼가 달려오는 게 똑똑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래는 진 차림이었으나 상반신은 완전 알몸이었다. 사메지마가 <로케트 유방> 이라고 부르는 풍만한 가슴이 출렁거렸다. 입 언저리엔 피얼룩이 져 있었다. '쇼!' 사메지마가 외쳤다. 쇼도 깜짝 놀란 듯 눈이 둥그래졌다. 역광인 탓에 사메지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사메지마는 쇼 등 뒤로 쫓아오는 사내 모습을 확인했다. 펀치 퍼머에 화려한 색깔의 스포츠 웨어 차림, 가슴엔 흥건하게 피얼룩이 져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 흥분으로 눈이 뒤집혀 주위 상황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손에는 피범벅이 된 비수를 들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몸을 날렸다. 충돌하듯이 쇼를 부둥켜안고는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몸을 굴렀다. 젖가슴이 사메지마의 몸에 짓눌리는 바람에 쇼가 비명을 질렀다. 뒤쫓아 온 사내가 고함을 지르면서 비수를 내리찍었다. 제 힘에 못 이겨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비수가 땅바닥에 꽂히면서 불똥이 튀었다. 사메지마는 쇼를 밀어젖히고 일어섰다. 사내가 땅바닥에 꽂힌 비수를 뽑았다. 두 손으로 비수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넌 뭐야?' 사내는 금속성 고함을 질렀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신주쿠 서로 전화를 건 녀석이었다. 하지만 사메지마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허리에 차고 있던 특수 경찰봉을 뽑아 사내 얼굴을 후려쳤다. 사내는 비수를 들어 막으려 했으나 허사였다. 사메지마가 혼신의 힘으로 내리친 경찰봉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사내 얼굴이 터지면서 피가 뿜어나왔다. 눈을 뜰 수가 없는지 비틀거렸다. 그러나 쓰러지지는 않는다. '이 새끼, 죽여버릴 거야!' 비수를 내리쳤다. 사메지마는 몸을 피하면서 사내 허리춤을 걷어찼다. 사내는 뒤로 비틀거리다가 디아만테 차체에 등을 세차게 부딪쳤다. 사메지마는 다가섰다. 사내 목줄기를 경찰봉으로 후려치면서 발을 걷었다. 사내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른손이 비수에서 떨어져 나갔다. 왼손만으로 다시 고쳐잡았다. 사메지마는 사내 얼굴을 무릎으로 걷어올렸다. 사내 머리가 사메지마 무릎과 디아만테 도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바람에 도어가 우그러졌다. 사메지마는 힘이 쭉 빠진 사내 멱살을 잡아끌어 일으켰다. 비수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사내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코가 뭉개진데다가 이마가 깨어졌고 앞니도 몇 개 부러진 것 같았다. 그래도 실신은 하지 않았다. 증오에 찬 눈으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가르쳐 주지. 사메지마, 신주쿠 서의 사메지마가 바로 나야.' 사메지마는 사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거칠게 내뿜었다. 사내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눈동자만 움직였다. 사메지마 등 뒤로 다가선 사람을 본 것이었다. '이, 이제야 왔군. 왜 이렇게 늦었어?' 사내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을 죽여, 이시와다리.' 이시와다리가 사메지마 옆으로 다가와 섰다. 사내는 눈이 둥그래져서 이시와다리를 노려보았다. '죽이라고 했잖아. 안 들려?' '그건 무리한 주문이야.' 사메지마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왜? 왜 안된단 말야? 죽여 버려, 이사와다리......' 부러진 이빨 사이로 숨새는 소리와 함께 피거품을 토해 내면서 사내가 말했다. 이시와다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사내를 바라보면서 웃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히라세, 내 본직은 마약단속관이야.' 이시와다리는 수갑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본 히라세는 입을 딱 벌렸다. 주변 일대를 울리는 외마디 고함이 터졌다. 고함을 지르면서 이시와다리에게 대들려고 몸부림을 쳤다.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믿을 수 없을만큼 광폭하게 날뛰었다. 사메지마는 사내 목 밑으로 오른팔을 감아 차체에 방아를 찧었다. '그 수갑은 넣어둬.' 사내를 땅 위에 쓰러뜨려 두 손을 등 뒤에 모은 다음 무릎으로 누른 사메지마는 자기가 휴대하고 있던 수갑을 채웠다. 사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일어서서 사메지마는 웃옷을 벗었다. 두 손으로 가슴을 싸안은 채 쇼가 서 있었다. 웃옷을 어깨에 걸쳐 주었다. 쇼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쓰러져 있는 사내의 등에 눈길을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쇼.' 부르는 소리도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쇼!' 그제서야 쇼의 눈이 움직였다. 사메지마의 가슴팍을 쏘아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랐단 말야!' 쇼가 중얼거렸다. '뭐? 뭐라고 했어?' 사메지마가 부드럽게 되물었다. '아무 것도 아냐.' 쇼가 고개를 살랑살랑 내저었다. 그리고는 사메지마를 끌어안으면서 어린애처럼 큰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24. 사메지마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쇼가 손을 꼭 잡은 채 따라왔다. 회중전등을 든 이시와다리도 함께였다. 쇼가 걸음을 멈추었다. 바닥에 웅크린 채 숨이 끊긴 젊은이의 얼굴이 회중전등 불빛에 잡혔다. 아무 말도 못하고 쇼는 사메지마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아 얼굴을 묻었다. '구니사키 고지로군요.' 이시와다리가 말했다. 세 사람은 한동안 구니사키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을 밟는 삐꺽하는 소리가 창고 안쪽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이시와다리가 반사적으로 회중전등을 비추었다. 수트 차림의 피투성이 사내 모습이 보였다. 문드러진 코, 웃옷과 와이셔츠는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눌라울만큼 가카와 스스무를 닮은 얼굴이었다. 스스무보다 마르고 작은 체구였으나 대신 지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사내는 가늘게 뜬 눈으로 사메지마와 이시와다리를 바라보았다. '가카와 노보루씬가요?' 사메지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퉁퉁 부어오른 입술이 움직였다. '어떻게 됐어?' '히라세 나오미를 체포했습니다.' 사내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사메지마 형사?' '그렇습니다.' 사내 목의 울대가 꿈틀했다. '면목없는 짓을 했어...... 아가씨를 다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일단 말을 멈추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스스무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그 녀석...... 괴로운 죽음이었나?' '괴로웠겠죠,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하지만 각성제로 망상 상태에 빠져 있었어요. 고통을, 아픔을 느꼈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카와는 느릿느릿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 <아이스캔디>는 내 아이디어로 시작했던 거야...... 스스무는, 그 녀석은 심부름이나 했구.' 사메지마는 듣기만 했다. '비겁한 놈이었어, 난. 스스무는, 내 동생은 각성제에 빠져 있었으나 제가 좋아하는 여자를 구하려고 도쿄로 달려갔던 게야. 난 언제나 여기에 있었어. 여기 있으면서 그 녀석에게 이걸 해라, 저걸 해라 명령만 내렸던 거야...... 끝내 그 녀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어......' 가카와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왜 그랬습니까?' 사메지마가 물었다. '당신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뭣 때문에 각성제 따위를 밀매했나요? 돈 때문이라곤 보기 어렵군요. 왜죠?' 가카와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윽고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더럽히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몰라.' '더럽히고 싶어서?' '전부 더럽히고 싶었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사메지마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쇼를 끌어안았다. 쇼의 체온과 바들거림이 생생하게 전해왔다. 가카와는 심호흡을 했다. '각성제 남은 게 많아. 바깥 자동차에 실려 있어. 스스무 아파트에서 몽땅 싣고 온 거야.' 이시와다리가 잽싸게 사메지마를 바라보면서 회중 전등을 내밀었다. 사메지마가 받아들자 몸을 날려 달려나갔다. 한참만에 돌아온 이시와다리가 입을 열었다. '저 각성제, 당신 겁니까?' '그래. 처분해 버릴 생각이었어.' 말하면서 가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와다리가 수갑을 꺼냈다. '각성제 단속법 위반 현행범으로 당신을 체포합니다.' 회중전등 불빛을 받아 수갑이 번쩍거렸다. 이시와다리는 가카와 두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가카와는 저항하지 않았다. 쇼가 사메지마 품에서 빠져 나갔다. 구니사키 고지의 시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사메지마도 말없이 다가가 옆에 섰다. '미안.' 사메지마가 말했다. 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내 탓이야, 모두.' '아니야.' 쇼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당신 탓이 아니야, 절대로. 하지만 슬퍼......' 그 자리에 울음을 터뜨렸다. 사메지마는 선 채로 울고 있는 쇼를 바라보았다. 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코 앞에까지 다가왔다. 그 순간 사메지마는 풀벌레 소리가 뚝 멈추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사이렌 소리가 그쳤다. 대신에 사람 떠드는 소리와 몇 대나 되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창고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쇼가 꿈틀거렸다. 조심조심 팔을 뻗어 구니사키 고지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사메지마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조용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