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지옥의 인형(상) 지은이: 아리마사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소개 1. 2. 3. 4. 5. 6. 7. 8. 9. ⊙ 작가소개 ** 오사와 아리마사 1956년 생의 젊은 작가로, 1979년 <<感傷의 도시>>로 제 1회 <소설추리> 신인상을 받으면서 데뷔했으니 올해로 집필 연륜이 15년 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15년 동안 <소설추리> 신인상을 비롯하여, 1986년에는 <<深夜曲馬團>>으로 <일본모험소설대상> 최우수 단편상을, 1991년에는 <신주쿠 상어> <한국어판<<소돔의 성자>>)로 제 12회 <吉川英治 文學> 신인상과, 제4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 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1993년에는 <<無間人形>> <한국어판<지옥의 인형>)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나오키 상> 수상 이전부터 오사와 아리마사는 이미 우리 독자에게도 퍽 친숙해져 있다고 하겠다. <상속자 TOMOKO>를 시작으로 <신주쿠 상어> 시리즈인 <<소돔의 성자>> <<독원숭이>> <<주검의 난>> 등을 통해 오사와 아리마사가 얼마나 아기자기하고 능숙한 이야기꾼인가 하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다. 또한 <<지옥의 인형>>에 <나오키 상>이 주어진 것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능숙하게 이야기를 끌어감으로써 독자를 즐겁게 해 준 데 대한 하나의 훈장이 되는 셈이다. 그의 장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인 문장과 치밀한 구성력 그리고 독자의 허를 찌르는 교묘한 함정과 반전을 들고 있으나, 그보다는 기본 취재와 자료 조사에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모든 상황과 인물에 사실성 내지는 현실성을 살리고 있다는 것이 강점이라고 할 것이다. 현재 일본추리작가협회 상임 이사직을 맡고 있다. 1. 해질 녁의 야스쿠니도리, 세 소년이 서 있었다. 오른쪽은 아래위 진 차림, 가운데 소년은 7푼 소매 티셔츠에 검정 반바지, 밑단을 잘라낸 트레이닝 웃도리에 면바지를 받쳐 입은 왼쪽 소년은 길게 길러 묶은 머리를 캡 뒤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세 소년 모두 은제 목걸이와 반지를 덕지덕지 감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감시하고 있는 사메지마 귀에도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열여덟 살 이상은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활기차게 보이지도, 으스대고 있는 것 같지도 따분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흥분에 젖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 몰려 서 있는 것이 극히 당연한, 일상생활의 한 컷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네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자기들 쪽으로 밀려오는 인파를 때때로 흘끔거리기도 했으나 그 시선엔 긴장의 빛이 전혀 없었다.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단순히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진 차림 소년이 웃옷 포켓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익숙한 솜씨로 한대 빼어물었다. 러키 스트라이크였다. 허벅지에 문질러 지포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세 사람 모두 잔잔하게 목을 흔들어댔다. 춤을 추는 것이었다. 헤드폰 스테레오를 귀에 꽂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들려오는 것은 게임센터의 소음뿐, 음악소리 같은 게 울려나오는 곳은 한곳도 없었다. 하지만 세 소년은 춤을 추고 있었다. 눈길은 세 사람 모두 따로따로였다. 세 소년은 팀이었다. 손발이 척척 맞는 이상적인 팀이었다. 그런식으로 3백60도 전방위를 커버하는 것이었다. 보행자 신호가 빨강으로 바뀌자 자동차 물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소년의 모습도 자동차 그늘에 가리워졌다. 사메지마는 신문을 접어 겨드랑이에 꼈다. 약국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미니스커트의 원피스를 입은 소녀 둘이 신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한 사람은 표백한 머리를 길게 길렀고 또 한 소녀는 숏커트였다. 두 사람 모두 검게 그을은 것으로 보아, 막 지나간 여름이 그만큼 즐거웠던 것 같았다. 운동화를 신은 발목엔 흰 양말목이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다. 보행자 신호가 파랑으로 바뀌었다. 두 소녀는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똑바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열여섯 살쯤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담배를 뽑아 불을 붙여 물었다. 두 소녀는 세 소년 쪽으로 가까이 갔다. 건너편 보도로 올라섰다. 숏커트 소녀가 오른쪽 주먹을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장발 소년이 왼손을 벌려 맞받았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남은 손을 벌려 상하로 맞받아 쳤다. 바로 그때, 자동차 물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덩이가 된 다섯 사람은 근처 게임센터로 걸어갔다. 사메지마는 지하도 입구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세 소년의 전방 감시망을 벗어날 때까지 서둘러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계단 벽에 가려, 바깥쪽에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내려왔다 싶자 몸을 날려 달리기 시작했다. 똑바로 지하도를 가로지른 다음, 한번에 2개씩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게임센터 앞으로 나왔다. 입구의 게임 기계엔 긴 머리 소녀와 반바지 소년, 그리고 장발에 캡을 쓴 소년이 매달려 있었다. 반바지 소년과 장발 소년은 여전히 주위를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지하도에서 뛰쳐 나온 사메지마는 반바지 소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한복판에 가리마를 탄 적갈색 머리가 푸석푸석하게 보였다. 얼굴엔 여드름 자국이 덕지덕지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은 시선을 피했다. 사메지마가 눈치 채지 못하게 천천히 몸을 돌린 그는 뭐라고 소곤거렸다. 장발 소년의 뒷모습이 긴장하는게 뚜렷하게 보였다. 이번 역시 - 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자신의 사진이 나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들 10대 패거리들이 한순간에 경찰을 판별해 내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야쿠자 - 성인 범죄자들이라면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사메지마의 정체를 이들은 단번에 눈치채는 것이었다. 도로 건너편에서 감시하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0미터 안으로만 접근하면 악취를 내뿜는 쓰레기라도 본 것처럼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몸을 숨겨 버리는 것이었다. 얼굴을 돌렸던 반바지 소년이 사메지마 쪽으로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장발 소년은 게임센터 안쪽,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숨어 들어가는 참이었다. 사메지마는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이것 좀 보세요, 아저씨." 반바지 소년이 나서면서 길을 가로막았다. "비켜!" "그러지 마시고, 아저씨......" 사메지마는 반바지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왜 이러세요?" 어깨에 얹힌 손을 노려보던 소년은 과장된 몸짓으로 사메지마를 쳐다보았다. "너, 몇 살이냐?" "열일곱이에요." 소년의 말투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모습을 감춘듯, 긴 머리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성인식, 교도소에서 올리고 싶어?" "농담치곤 너무 심하군요." "그게 싫다면 비켜." 입술을 뾰족 내밀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사메지마는 소년을 밀쳐버리면서 게임센터로 들어섰다. 똑바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침 시간대도 그렇고 해서 게임센터 안은 10대들이 가득 차 있었다. 1주일에 두 차례 이상씩 같은 방범과의 소년계가 단속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간대에선 흡연 이외엔 다른 건은 올릴 수 없는 게 실정이었다. 3분의 1쯤은 교복 차림이었다. 장발 소년과 숏커트 소녀가 안쪽 깊숙한 코인 판매기 앞에 있는 게 보였다. 벽을 짚고 있는 장발 소년 손에 매달리듯 해서 숏커트 소녀가 몸을 비꼬고 있었다. 진 차림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게임센터 구조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메지마였다. 오른쪽 경마 머신 옆의 작은 도어는 빌딩 뒤쪽 출구로 통해 있었다. 사메지마는 슬쩍 그쪽으로 향했다. 벽을 짚고 서 있던 장발 소년도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장발 소년이 한발 앞서 도어에 다다랐다. 사메지마의 앞을 가로막는 자세로 매달리듯이 감겨들었다. 반바지 소년과 똑같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왼손은 면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였다. "야호!" 이번은 사메지마도 용서하지 않았다. 오른손으로는 멱살을 잡고, 왼손으로는 오른쪽 어깨를 짓누름과 동시에 발을 걸어 후려쳤다. 장발 소년의 몸이 반회전하는가 싶더니 바닥에 널브러졌다. 상대방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을 틈이 없었다. 소년을 타넘으면서 도어를 밀어 열었다. 오른쪽으로 좁다란 비상계단이 뻗어 있었다. 복도는 좁고 길쭉했다. 정면 유리문에 진 재킷이 등을 기대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왼쪽 발목을 잡혀 비틀거리다가 가가스로 문틀을 잡았다. "아저씨, 아파 죽겠어요." 뿌리치면서 몸을 돌렸다. 장발 소년이 막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그틈을 타 진 차림 소년은 유리문을 빠져 나가 버렸다. 장발 소년의 왼손이 바지 주머니에서 빠져 나왔다. 쥐고 있는 금속제 날개가 빙글빙글 돌더니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나이프로 변했다. "찔러 버릴 테야!" 자세를 낮춘 소년은 사메지마의 허벅지를 노려 칼을 휘둘렀다. 허세가 아니었다. 제법 익숙한 칼 솜씨였다. 사메지마는 잽싸게 몸을 날려 피했다. 장발 소년의 눈이 이글이글 빛을 뿜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귄지 알 게 뭐야. 느닷없이 사람을 내팽개치고 무사할 줄 알았어? 나도 화가 나면 무서운 게 없어. 칼맛 한번 톡톡히 보여 주지." 사메지마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한시라도 빨리 진 차림의 녀석을 뒤쫓아 가고 싶었다. 장발 소년은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손바닥은 사메지마를 향한 자세였다. 손가락끝에 힘을 모아 앞으로 왈칵 덤비는 시늉을 해 보였다. 소년의 페인트 모션 때문에 사메지마는 몸을 돌려 뛰쳐 나갈 수가 없었다. "얍!" 장발 소년은 기합소리와 함께 다시 페인트 모션을 걸었다. 높이 쳐든 소년의 오른손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 아래쪽으로 처져 있던 왼손의 나이프가 덮쳐 왔다. 좁은 복도, 앞뒤로 밖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메지마는 마음을 정한 다음 오른손을 허리 뒤로 돌렸다. 가죽 케이스에 넣어 차고 있던 특수 경찰봉을 더듬어 잡았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장발 소년이 덮쳐 왔다. 사메지마의 눈길은 나이프를 쥐고 있는 장발 소년의 왼손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장발 소년이 오른손에 벗어든 모자로 사메지마의 얼굴을 치는 바람에 눈길이 빗나가고 말았다. 몸을 틀어 피하느라고 피했지만 왼쪽 엉덩이를 찔리고 말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전류처럼 몸을 휘감았다. 사메지마는 이를 꽉 깨물면서 빼어든 특수 경찰봉을 고쳐 잡아 장발 소년의 왼손을 후려쳤다. 탁, 하는 둔탁한 소리에 이어 장발 소년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멍청한 녀석!" 호통을 치면서 사메지마는 팔꿈치로 소년의 이마를 찍었다. 소년은 벽을 타고 털썩 무너져 내리더니 반회전하면서 주저앉았다. "아이쿠!" 부르짖으면서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쥐었다. 뺨이 불룩해짐과 동시에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휘둥그래졌다. 사메지마는 몸을 날려 달리기 시작했다. 왼발을 내디딜 때마다 엉덩이의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다. 유리문을 젖혀 열고 골목길로 뛰어나왔다. 쫓기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카부키쵸로 뛰어들게 마련이었다. 사람이 붐비는 곳으로 숨어들고 싶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절뚝거리면서 사메지마는 달려갔다. 자신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었지만 진바지 덕분에 출혈은 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찔린 부위로 미루어 보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쇼쿠안도리에 이를 때까지 따라잡지 못한다면 사메지마의 패배였다. 물론 그 이전에 진 차림의 소년이 <물건>을 처분해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렇게 할 만한 여유는 없다고 봐야 했다. 지금은 카부키쵸를 향해 달리는 것만으로 힘겨운 상황이었다. 쫓아오는 사람의 시야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물건>을 처분할 여유가 없을 게 분명했다. 같은 이유로, 소년은 어딘가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도 피할게 틀림없었다. 쫓기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한곳에 머물러 있기를 꺼리는 것이었다. 아주 친밀한 사람의 가게라면, 그래서 그 집 주방 같은 데로 숨어들어갈 수 있다면 별문제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직 길거리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게 분명했다. 도큐 문화회관 앞에서 찾아냈다. 햄버거 가게 앞의 인파 속에 서 있었다. 진 차림 소년은 도망의 제2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참이었다. 가게 앞에 줄지어 있는 금속제 쓰레기통 사이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사메지마와의 거리는 30 미터쯤이었다. 진 소년은 사메지마가 접근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것에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복순경 두 사람이 코마 극장 앞을 순찰하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호루라기를 꺼내어 힘껏 불어댔다. 후루룩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보행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메지만에게로 쏠렸다.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정복 순경이었다. 쓰레기통 앞에 얼어붙은 소년이 사메지마를 알아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순경 둘이 사메지마 앞으로 달려왔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오른팔을 쭉 뻗었다. "저놈, 아래위 진 차림의 저놈을 잡아!" 튕기듯이 진 차림 소년이 몸을 날려 도망쳤다. 순경 둘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앞뒤로 소년을 몰았다. 3루 러너의 홈인을 저지하려는 포수처럼 순경 한사람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오른쪽으로 잽싸게 방향을 꺾은 소년을 또 다른 순경이 덮쳤다. "이것 놔! 왜 이래? 이것 놓으란 말야!" 한덩이가 되어 바닥에 뒹굴면서 소년이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일어서!" 순경이 잡아일으키자, 소년은 손을 뿌리쳤다. "이것 놔! 왜 이래?" 사메지마는 한쪽 발을 절뚝거리면서 다가갔다. 두 사람은 보안과 소속의 젊은 순경이었다. 20대 중반이었다. 순경 한사람이 사메지마가 부상했음을 눈치 챘다. "경감님, 피가....." '괜찮아.' "찌른 녀석이 이놈입니까?" 진 소년이 으르렁거렸다. 구경꾼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몸수색을 해 봐." 사메지마가 명령했다. "여기서 말입니까?" 사메지마의 부상을 알아봤던 순경이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그래."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순경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따랐다. "똑바로 서. 두 발을 벌리고 손을 높이 들어." "이건 인권유린이야. 집어치워!" 소년이 으르렁거렸다. "얌전하게 시키는 대로 해." 공개된 장소, 구경꾼들 앞에서 몸수색하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일까, 순경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제법 유식한 척하는군." 사메지마가 소년 앞으로 다가섰다. 소년은 코를 벌름거리면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말해 봐요!" 사메지마는 대답하는 대신, 순경들의 몸수색을 지켜보았다. 순경이 장갑 낀 손으로 소년의 재킷 주머니에서 지갑. 라이터. 담배. 키홀더. 삐삐를 꺼냈다. "이것뿐입니다." 순경이 보고했다. 표정은 냉정한 척했으나 눈길에는 당혹의 빛이 뚜렷했다. "담배 때문인가요, 순경님?" 소년은 입을 씰룩거리면서 비아냥거렸다. "입 닥쳐!" 순경이 호통을 쳤다. "담배 가진 것만으로 이 야단이에요? 순경이라고 이래도 되는 거에요?" 소년은 조금도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머리를 흔들거리면서 다가오더니 사메지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눈자위가 빨갰다.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사람 못살게 굴지 말아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야단들이야!" "조용히 해!" 양쪽에서 소년의 팔을 끼면서 두 순경이 사메지마를 쳐다보았다. "내가 뭘 잘못했어? 말해 봐요!" "장갑 좀 빌려 줘." 사메지마가 순경을 보고 말했다. "네." 순경은 제복 주머니에서 흰 장갑을 꺼냈다. 네 사람 주위에는 이미 수십 명의 구경꾼이 몰려서 있었다. "이쪽으로....." 사메지마가 말하면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흰 장갑을 꼈다. 소년은 입을 꽉 다문 채로였다. "네, 하고 대답해. 그리고 따라와." 네 사람이 이동함과 동시에 흩어졌다가 다시 몰려드는 구경꾼을 향해 돌아가라고 순경이 소리를 쳤다. 하지만 구경꾼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늘어났다. 단념한 순경은 어깨에 꽂고 있던 휴대 무전기로 응원을 요청했다. 사메지마가 햄버거 집 앞에 줄지어 있는 쓰레기통 옆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때, 새로이 순경 4명이 달려왔다. 4명은 잽싸게 흩어져 구경꾼들이 반경 5미터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섰다. "미안합니다. 조금 물러서 주실까요?" 사메지마는 한복판 쓰레기통 위에 종이컵을 올려놓고 햄버거를 먹고 있는 커플에게로 다가섰다. 두 사람은 허둥지둥 뒷걸음질쳤다. 쓰레기통은 스테인레스로 짜맞춘 높이 1미터쯤 되는 상자였다. 앞뒤로 각각 한개씩 뚫려 있는 투입구는 스윙도어식이었다. 사메지마는 장갑 낀 손으로 쓰레기통 뚜껑을 들어올렸다. 옅은 청색의 대형 비닐 주머니가 고정되어 있었다. 던져넣은 쓰레기가 그 안에 담기도록 머리를 쓴 것이었다. 콜라. 쉐이크의 종이컵. 스티로폴 햄버거 케이스. 포장지 따위가 3분의 1쯤 차 있었다. 마시다 남은 것, 얼음을 함께 버린 탓에 내용물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들어올린 뚜껑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사메지마는 소년을 흘낏 바라보았다. "왜 이래요?" 뾰로통 내쏘긴 했으나 파래진 얼굴로 땀을 흘렸다. 사메지마는 비닐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종이 냅킨. 포테이토 플라이. 종이컵 따위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차곡차곡 접힌 비닐 주머니를 찾아냈다. 담뱃갑 2개를 붙여 놓은 크기, 한개 정도의 두께였다. 장갑 낀 손이었지만 촉감으로 내용물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엄지 손가락에 딱 잡히는 크기의 원형 물체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주머니를 열어 속을 들여다보았다. 알루미늄 종이를 받쳐 투명한 시트로 싼 정제가 5단으로 가지런하게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몰라요. 내가 버린 게 아냐." "네놈 지문이 나오면 어쩔래?" 사메지마는 비닐 주머니를 다시 차곡차곡 접어 순경에게 넘겼다. 한박자 사이를 두고 소년이 악을 썼다. "모른다고 했잖아!" "그래?" 말하면서 사메지마는 조용히 소년의 눈을 응시했다. 소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사메지마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동안 눈싸움을 벌였다. 이윽고 소년이 눈길을 내리깔았다. "서로 가자." 사메지마는 선언하듯 말했다. 조사는 사메지마와 신주쿠 서 방범과장인 모모이가 맡았다. 사메지마가 찾아낸 비닐 주머니와 쓰레기통 수거물은 감식계로 넘겼다. 소년은 신주쿠 서에 도착한 이후로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묵비상태인 채로 채취한 지문은 비닐 주머니와 그 속에 담겼던 정제 시트에서 채취한 것과 같았다. 사메지마는 의무실에서 엉덩이의 상처를 치료받으면서 보고를 들었다. 상처는 깊이 3센티미터, 길이 8센티미터로 진단은 전치 2주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소년은 순경 2명의 감시 밑에 빈 조사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치료를 끝낸 사메지마는 서내 로커에 넣어두었던 다른 바지로 갈아 입고 모모이와 함께 조사실로 들어갔다. 순경 한명에게 기록을 담당하도록 하고 사메지마와 모모이는 심문을 시작했다. "우선 이름부터 말해봐. 나는 신주쿠 서 방범과의 사메지마, 이분은 모모이 과장님이시고." 책상을 가운데 놓고 소년과 마주 앉으면서 사메지마가 말했다. 소년은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책상을 응시한 채 꼼짝도 안했다.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나카야마 미치히로, 열일곱 살. 지갑 속에 오토바이 면허증이 들어 있었거든." 모모이가 말했다. 50대 초반의 모모이는 사메지마와 같은 계급인 경감이었다. 기름기 없이 푸석푸석한 반백의 머리, 수수한 갈색이나 회색 수트 차림일 때가 많았다. 평소에도 입이 무거워,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발언 따위와는 인연이 멀었다. 사메지마가 5년 전, 도쿄 경시청 본청 공안부 외사 2과에서 이곳 신주쿠 서 방범과로 전속되어 왔을 때부터 모모이가 과장으로 있었다. 당시 모모이는 서내에서 <시체> 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십수년전, 교통사고로 외아들을 잃은 이래, 매사에 정열을 잃은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모모이가 경찰관으로서는 결코 폐인이 아님을 증명해 보인 것이 바로 2년 전의 권총 밀조범 사살 사건이었다. (<소돔의 성자> 참조). 만약 모모이가 그를 사살하지 않았다면 서내의 외토리인 사메지마는 그 녀석에게 고문사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비록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사메지마와 모모이 사이에는 깊은 신뢰관계가 쌓이게 되었다. "넌 네가 무슨 혐의로 심문을 받고 있는지 알기나 해?" 모모이가 조용히 물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성년이니까 아무 말도 않고 있으면 결국 가정법원 소년부로 넘겨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천만의 말씀이야." 사메지마는 말을 이어갔다. "왜 그런지 자세히 설명해 주지. 미성년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가정법원에서 심리, 소년원으로 보내는 게 보통이야. 그게 바로 보호관찰 처분이라는 거지. 하지만 그건 범죄 내용이 비교적 경미한.... 다시 말하면 가벼운 경우의 얘기야. 중죄를 범했을 때는 가정법원이 아니라 검찰로 넘겨. 형사재판에 회부된다는 뜻이야. 유죄판결을 받으면 교도소행이야. 보호관찰을 받는 소년원이 아니라 교도소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소년은 눈만 치켜올렸다. "그런 공갈엔 안 넘어가." "공갈이 아니야. 이 형사님이 한 얘기, 모두 사실이야." 모모이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네 패거리는 도망쳤지만, 이 형사님을 칼로 찔렀어. 이건 상해죄야. 더군다나 이 사람이 경찰관임을 알고, 널 도망치게 하려고 칼을 휘둘렀다면 공무집행 방해죄가 적용돼." "내가 찌른게 아니잖아!" 소년,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단호한 말투로 소리를 질렀다. "맞아. 네겐 다른 혐의가 있어." "약사법 위반 말이야?"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앞질러 아는 척했다. 모모이는 흘낏 사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왜 약사법 위반이라고 생각해?" "그것 때문에.... 뻔한 일 아냐? 약제사도 아니면서 약을 팔았다고 지금 옭아넣으려는 것 아냐?" "그렇다면 그건 스스로 인정한다는 말이로군.' 모모이가 다짐하듯 말했다" "천만에. 증거가 없잖아? 지문이 나왔다지만, 그건 소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밖에 안되잖아? 팔았다는 증건 될 수 없어요!" "흠." "미성년자라고 만만하게 보지 말아요. 엉뚱한 누명을 씌워 옭아넣으려 하지만 누가 걸려들 줄 알아?" 모모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피울래?" "왜 이래요? 이번엔 함정을 팔 생각이야? 약사법만으로는 성이 안 차 담배까지 끼워 넣으려는 거예요?" "그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어." 모모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알약이 뭔지 알고나 있나?" 사메지마가 물었다. "몰라요. 친구 걸 맡아가지고 있었을 뿐이야."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시침을 뗐다. "그럼, 복용해 본 적은 없단 말이지?" "없어요." "소변검살 한번 해 보고 싶은데..." "소변검사? 뭣 땜에? 쓸데없는 소리 그만둬요. 소변을 채취해서 뭣하게? 사양하겠어요." 모모이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부벼껐다. "만약 네가 거부하면... 법원에 신청해서 감정처분 허가서와 신체검사 영장을 발부받을 수밖에. 그런 다음, 비뇨기과 의사를 불러 네 요도에 고무 파이프를 찔러넣는 거야. 그게 바로 카테테르란 게야. 그걸 삽입하면 마렵지 않더라도 방광에 고여 있던 소변이 저절로 흘러나오게 마련이야. 다만 요도에 파이프를 삽입할 때 조금 아픈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훅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뭣 땜에 그런 짓까지?" "네가 그 알약을 복용했는지 어떤지 확인해 보려구." 모모이가 대답했다. "복용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검사를 해보죠." 사메지마가 모모이에게 말했다. "농담 말아요. 누간 그런 것 한댔어요? 그건 고문이야, 고문." "네 스스로 소변을 받아오면 카테테르는 삽입하지 않아도 되잖아?"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복용했다고 인정하면 검사 안해도 되죠?" 사메지마와 모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복용했다고 인정하면 되는 것 아녜요? 뭐 별난 약도 아니잖아? 잠깐 기분이 좋아질 뿐이야! 금방 효력이 끊어져. 장난감 같은 것이야. 그것보단 <히루시온> 이 훨씬 윗길이야." <히루시온>은 수면제였다. "<히루시온>과는 달라!" 사메지마가 말했다. "물론 달라요. 그 알약은 수면제가 아니니까요." "그럼 뭐야?" "몰라요. 처음 우린 날게 해 주는 약이라고 해서 <훨훨> 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캔디> 라고 해요." "캔디?" "아이스캔디의 캔디 말야. 복용하면 상쾌한 기분이 들고 머리도 맑아져. 멘솔같이 말야." "한알에 얼마야?" "5백엔." 대답하고 난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눈이 둥그래지면서 허둥지둥 덧붙였다. "그렇다고 내가 판 건 아냐. 친구한테 들은 거야." "약효는 얼마동안 지속되나?" "한시간쯤. 금방 끊어져요." "어떤 때 주로 복용하지?" "글쎄요. 따분할 때, 춤추러 갈 때... 여자랑 놀 때." "약을 먹고 여자랑 놀면 기분이 더 좋아진다, 그 말인가?" 사메지마가 따지듯이 물었다. "모든 게 다 그렇잖아? 술도 마찬가지구..." "뭘 알고 싶은 거예요?" "요즘 부쩍 유행하고 있지?" 모모이가 물었다. "어디서 구했나?" "친구 거라고 했잖아요?" "친구 누구?"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입을 봉했다. 눈만 말똥거렸다. "몰라요." "그래?" 사메지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과장님, 알려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럴까?" "쟤 자신은 모르고 있어요. 이걸로 징역 10년이라면..." "뭐라구?!" 느닷없이 나카야마 미치히로가 고함을 냅다 질렀다. "뭣 땜에 징역 10년이라는 게야? 농담, 작작해요!" 사메지마는 나카야마 미치히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입을 꾹 다문 채 웃옷 주머니에서 증거보존용 주머니로 싼 <아이스캔디> 를 꺼냈다. "뭣 땜에 10년이란 거야? 말해 봐요!" "모르고 있었군." 모모이가 <아이스캔디>를 받아들면서 말했다. "뭘?" "이건 말야, 너네가 <아이스캔디> 라고 하는 약이야. 최근 석달동안 시부야. 신주쿠. 록봉기 주변에서 번지고 있어. 복용 10분 뒤에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1시간쯤 지속돼. 아까 네가 말했던 것처럼 한알에 5백엔, 6백엔이야. 그리고 팔고 있는 너네 같은 패거리도..." "판 적 없어!" "입 닥치고 듣기나 해!" 사메지마가 목소리에 힘을 실어 호통치듯 말했다. ".....네 패거리도 이 약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고 있어. 미국에서 들어온 신종 각성제쯤으로 알고 있어. 일종의 사치라고나 할까. 그렇지?" "그래서?" "그래서 소변검사를 해 보자고 한 게야. 이 약이 너희들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건 메탄페타민이란 성분 때문이야. 메탄페타민은 결코 신종 약이 아니야. 50년 전부터 사용해 오고 있어. 겉보기에 약효가 조금 다르게 느껴질 뿐이야. 이건 각성제야!"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깜짝 놀라면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거짓말 말아요!" "거짓말이 아니야." 사메지마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웃기지 말아요. 그런 건 야쿠자들이나 취급하는 바보 같은 약 아녜요? 그런 걸, 그런 걸 우리 같은 애들이 취급할 까닭이 없잖아요?" "취급하긴 했군." 순간,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파랗게 질렸다. 입을 반쯤 헤벌린 채, 얼굴이 일그러졌다.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렇겠지. 각성제 따위는 촌놈들이나 맞는 거니까 말야." "그래요, 이것관 달라요. 각성제는 주사 아녜요?" "먹어도 효과는 있어. 그리고 이 <아이스캔디> 에는 다른 성분도 약간 섞여 있어서 단시간 안에 흡수되지만 메탄페타민이 소량이기 때문에 지속시간이 짧아. 주사용 각성제의 말단가격은 1회분이 5천엔이나 1만엔 쯤이야. 거기 비하면 이건 공짜나 다름없어. 5백엔 동전 한닢이면 살 수 있잖아? 중학생이라도 자기 용돈만으로 충분해. 하지만 각성제인 것은 틀립없어. 싸다고 해서 매일 복용해 봐. 당장 중독되고 말아. 한알로는 듣지 않아. 2알, 3알씩 먹게 돼. 그걸 몇시간 단위로 계속한다고 한번 생각해 봐. 잘난 척하지 마! 정말 똑똑한 녀석은 <아이스캔디>를 만들어 신종이다 어쩌다 하면서 너희들에게 팔고 있는 놈이야. 바보들이 나서서 팔고, 그보다 더 바보들이 사고 있는 게야. 알아듣겠어? 각성제 단속법에 따르면 허가없이 소지하거나 양도 또는 복용한 사람은 7년 이하의 징역이야. 영리목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10년 이하의 징역이구." 사메지마는 숨도 쉬지 않고 주워섬겼다. "이제 알았지? 해서 담배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한 거야."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눈이 둥그래져서 사메지마와 모모이를 번갈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목줄기가 꿈틀꿈틀했다. 얼굴빛이 파랗다 못해 회색으로 변했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아니면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시려는 듯 입을 크게 벌린 채로였다.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재빨리 눈치 챈 사메지마와 모모이가 잽싸게 몸을 피했다.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격렬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위 속에 들어 있던 걸 전부 책상 위에 쏟아냈다.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자발적으로 소변검사를 받았다. 결과, 각성제 양성반응이 나왔다. 각성제 거래는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가 제조업자. 현재 일본에 유통되고 있는 각성제의 대부분은 외국에서 밀조된 것이다. 그 이유로는 각성제의 원료가 되는 약품을 일본 국내에서는 대량으로 확보하는 게 쉽지 않고, 제조과정에서 발성하는 염화수소의 악취때문에 들키키 쉽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제조업자는 대만, 한국 등과 동남아권 조직이 중심이지만, 최근 수년간 적발된 각성제의 9할은 대만서 밀수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두번째 단계는 밀수입 각성제 총판조직. 여기에는 일본측 밀수입업자, 국내 운반조직, 보관 관리책이 포함된다. 세번째는 총판에서 받아 말단으로 흘려 보내는 중간도매상. 이 단계에서 적당한 분량으로 나눠 새로 포장을 한다. 네번째가 말단 밀매인. 밀매인과 최종소비자인 중독환자의 구별은 아주 애매하다. 밀매인으로부터 각성제를 사는 사람이 중독환자이지만, 중독자는 자기가 쓸 약값을 벌기 위해 스스로 팔러나서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판매인과 중독자의 구별이 애매하고 또 대부분의 말단 밀매인이 중독자라는 것은 각성제 사범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근절한다는 게 그만큼 어렵기도 한 것이다. 중독자가 밀매인으로 쉽게 변신하고 있는 한, 중간 도매조직은 중독자 수만큼 밀매인을 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말단 밀매인을 아무리 단속하고 잡아들인다 하더라도 금방금방 구멍을 메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속이 크게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도매조직과 밀매인 사이에는 엄격한 벽이 쳐져 있다. 밀매인의 대부분은 물건을 다른 밀매인으로부터 구입하거나, 드물게는 도매조직으로부터 입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대방의 이름이나 얼굴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경찰에게 불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간 도매조직이 하나 무너지면, 총판조직과 제조업자에게까지 수사의 손길이 뻗치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에는 큰 돈이 움직이기 때문에 비교적 연락이 긴밀한 편이다. 따라서 수사의 손길이 치고 들어가기도 그만큼 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연한 일이지만 도매조직은 자기들에 관한 정보가 유출되지 않게 엄격히 단속하게 마련이다. 만약 수사당국에게 정보를 흘리다가 들키면, 죽음 이외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맞서기 위해 수사원이 취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밀매인을 정보제공자, 다시 말하면 스파이로 이용하는 것이다. 한번 스파이, 즉 가 된 밀매인은 자기가 살아 남기 위해 경찰의 영원한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인 것이 탄로났을 때, 자기를 지켜주는 것은 경찰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는 경찰관과 1대 1이기 때문에 동료 경찰관에게도 좀처럼 알리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그 의 정체가 들통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자기가 체포한 밀매인을 로 이용하는 방법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다. 결국 는 교도소에 쳐박히느냐, 자유롭게 행동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 때의 자유에는 항상 죽음의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설령 유능한 라 하더라도 정체가 들통났을 때, 형사가 1백 퍼센트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로 변신한 밀매인은 언제 들통이 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전보다 더 각성제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그런 생활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파탄이 생기게 마련이다. 각성제 중독이 악화되면 피해망상증에 걸리기 쉽고, 일 경우엔 더욱더 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누가 날 죽이려 한다. -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 그러다가는 마침내 팽팽해져 있던 신경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툭하고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흉기를 휘두르며 내달아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것으로 자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때까지 각성제를 사용하고 있으면 그동안은 초인적인 체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각성제는 생명을 좀먹고 수명을 단축하는 것만큼 단기간에 이상 연소를 시켜 주는 약품이다. 자동차 엔진에 제트 연료를 사용하는 것과 같아, 한순간만은 엄청난 파워를 발휘하게 한다. 그렇게 된 사람에게 남겨지는 것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절망적인 미래뿐이다. 이용하고 있던 가 더는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해 폭주하다가 파멸하는 모습을 수사원들은 자주 목격하게 마련이었다. 개중엔 <녀석도 이걸로 끝이로군. 다른 녀석을 찾아야지. 별수 있냐> 라고 중얼거리는 인정머리 없는 수사원도 있다.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그러나 로 변신시켜 코너로 몰고간 경찰관의 도의적 책임을 추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를 이용하지 않고 각성제 조직을 단속, 검거한다는 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어떻게 하든 없이 꾸려나갈 수 있기를 원했다. 나카야마 미치히로의 심문이 끝난 것은 오후 8시가 지나서였다. 나카야마 미치히로를 유치한 다음, 사메지마와 모모이는 신주쿠 서를 뒤로 했다. "저녁이나 먹고 갈까?" 드물게도 모모이가 먼저 제의했다. 모모이는 동료들과 좀처럼 사적인 시간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방범과 망년회 때도 1차가 끝나면 바로 돌아가 버렸다. 사교적이지 않다, 음울하다는 따위의 남의 평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처럼 보였다. "좋죠." 사메지마도 찬성이었다. "신주쿠는 피하기로 하지." 모모이 말에 사메지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관할서 경찰관들은 그 지역 음식점엔 얼굴이 알려져 있기 마련. 사적으로 식사를 하러 가도 주인이 몹시 신경을 쓴다. 계산을 할 때면 이쪽 의사와는 관계없이 깎아서 청구하기도 한다. - 괜찮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장살 잘하고 있는뎁쇼. 경찰관의 급료가 높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몸과 마음을 있는 대로 쥐어짜야 하는 직업이면서도 그 스트레스를 푸는 데 쓰는 용돈은 내남없이 속이 뻔했다. 그런 사정은 누구보다도 경찰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 미안하군. - 괜찮아요. 또 들르세요. 그런 것을 향응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경찰관이 드나드는 식당은 정치가들이 이용하는 고급 요정도, 레스토랑도 아니었다. 선술집이거나 반반한 식당이 고작이었다. 거기서 오가는 것은 역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나이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마음과 경의였다. 그러나 그게 언젠가는 빚으로 모습을 바꾸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교통 위반을 눈감아 주고, 어지간한 위법은 모른 척 해줘야 했다. 그 자체는 별게 아니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위법사항이 중요범죄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또한 경찰관이었다. 사메지마와 모모이는 요쓰야 3쵸메에 있는 스테이크 하우스로 들어갔다. 두 사람 모두 독신인 탓에 그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모모이는 피레를, 사메지마는 설로인을 주문한 다음 와인으로 건배를 했다. "미안하군. 이런 누추한 집에서 식사를 하자고 해서." 모모이가 쓴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 아가씨도 함께였다면 즐거웠을 텐데..." "아닙니다. 최근엔 별로 나다니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서로 시간이 맞아도 기껏 방안에서 뒹구는 게 고작입니다." 사메지마는 샐러드를 집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은 탓일까, 식당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레코드는 - 아니, 요즘은 CD인가 - 잘 팔리나?" 이번엔 사메지마가 쓴웃음을 지을 차례였다. 쇼의 밴드, <후즈허니>가 데뷔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1주년 기념 투어> 예정도 잡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야. 밴드를 하는 사람이라면 대개 각성제나 마약을 연상하거나, 외모가 기발하다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보통 아니겠어? 내가 그 아가씰 본 건 딱 한번뿐이지만, 곧은 사람이란 것 이외엔 다른 나쁜 인상을 받은 건 하나도 없었어." "너무 꼿꼿해서 속을 썩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사귀면서 저도 지금 말씀하신 색안경에서 벗어난 건 사실입니다. 그건 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경찰관 가운데도 조금은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고?" "네." 두 사람은 마주 보면서 웃었다. "나카야마 말인데..." 모모이가 화제를 바꾸었다. "어쩔 생각인가?" "어쩌고저쩌고 할 것 있습니까?' 미성년이니까 가정법원으로 넘겨야죠." "하긴, 열일곱 살짜리를 로 쓰는 건 무리겠지?" " 이용을 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전, 현경 공안에 있을 때의 일도 있고 해서....." 모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제.마약 사범 이외에도 를 많이 이용하는 부문은 공안수사였다. 사메지마는 스물일곱 나던 해, 어느 현 공안3과 주임경감으로 배속되었다. 그 무렵 그곳 경위와 공안조사관이 과격파 단체 를 둘러싸고 알력을 벌인 사건이 터졌다. 공안조사관이 신분을 위장, 과격단체 멤버에게 접근하고 있음을 안 경위가 그 멤버를 협박한 것이었다. 자기의 가 되어 주지 않으면 공안조사관과 접촉한 사실을 소속단체에 밀고하겠다고 공갈을 친 것이었다. (<소돔의 성자> 참조). 그 사실을 안 사메지마는 비열한 방법이라고 부하를 힐책했다. 동시에 그 멤버와의 접촉도 금지시켰다. 그러나 불만을 느낀 경위는 그 멤버가 경찰의 인 것처럼 꾸민 사진을 소속단체 앞으로 우송했다. 끔찍한 린치가 벌어졌다. 결과, 수사1과와의 공동수사로 과격단체는 궤멸되었다. 린치 사건에 불을 붙인 것이 경위의 밀고였음을 알아낸 사메지마는 그를 질책, 끝내는 난투까지 벌였다. 모조 일본도를 사메지마를 내리친 경위는 옷을 벗었다. 사메지마는 모모이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모모이는 사메지마 얘기가 끝나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로군." "직무 라이벌이 있다는 점에선 그렇죠." "직무 라이벌? 그렇군." 공안경찰 입장에서 보면 공안조사관이 직무상의 라이벌인 것처럼 각성제.마약 사범을 쫓는 형사에겐 후생성 (보사부) 마약단속관이 직무 라이벌이었다. 마약단속관은 후생성 마약과 소속으로 마약단속법 규정에 따라 특별사법 경찰직원의 신분을 보장받고 있다. 각성제 단속에 있어서도 이들에겐 각성제 소지가 허용되고 있기 때문에 함정수사를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점이 바로 경찰관과 마약단속관과의 차이이기도 했다. 마약단속관이 노리는 것이 마약과 각성제임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 철벽에 싸인 조직을 파헤치려고 위장 잠입도 한다. 그 때문에 경찰관과의 접촉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정체가 밝혀지면 못잖게 위험할 뿐 아니라, 그때까지의 잠입 공작이 헛수고로 끝나기 때문이다. "<아이스캔디>는 틀림없이 유행할 겁니다. 녀석들도 반드시 움직일 거구요." 사메지마는 단언했다. <아이스캔디>의 존재가 사법기관에 처음 알려진 것은 아직 한달밖에 되지 않았다. 소년 보도원이 환각상태에 빠진 여고생 둘을 시부야 노상에서 보도한 것이 시발이었다. 약물 복용으로 판단한 보도원은 그 여고생 2명을 신체검사한 결과 <아이스캔디> 4알을 찾아낸 것이었다. 여고생은 디스코텍에서 만난 남자아이들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두번째 케이스는 신주쿠였다. 도쿄 경시청 보안2과와 신주쿠 서 방범과 합동 팀이 톨루엔 밀매조직을 적발했었다. 그때 체포된 사람중의 하나가 <아이스캔디> 10알을 가지고 있었다. 성분분석 결과 각성제임이 밝혀졌다. 체포된 멤버는 알고 지내는 폭력단원한테서 얻었다고 진술했다. 폭력단원이 고교생으로 보이는 노상 밀매단한테서 압수한 거라고 했다. 각성제 경험이 있는 그 폭력단원은 압수한 <캔디>를 맛본 즉시, 각성제 성분이 들어 있음을 안 것이었다. 값이 싼 데다가 실버 그레이의 투명한 알약으로 멋이 있어 <아이스캔디>는 젊은이들, 특히 미들틴과 하이틴을 쉽게 파고들었다. 상황 악화를 우려한 도쿄 경시청 보안2과는 <아이스캔디> 총판조직. 도매조직. 제조업자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검거된 부류는 말단 밀매인들 뿐이었다. 하다 못해 밀매인 팀장급조차 파악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태로 간다면 10대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한때 유행했던 미국 업존 제약회사 계통의 수면제 파동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게 틀림없었다. 각성제는 수면제와는 반대로 정신적 의존성이 높은 것이다. 수면제는 원래 목적인 수면용으로 사용할 때는 의존성이 생기지만 환각용으로 이용할 경우, 육체적 소모를 별도로 친다면 각성제처럼 습관성은 없다. 그런 의미로 볼 때, 각성제와 수면제는 약효가 지속되는 상태가 정반대라고도 볼 수 있다. 각성제는 머리를 맑게, 몸을 가볍게 해 주기 때문에 자신이 만능이라도 된 것 같은 고양감을 준다. 수면제는 움직임을 둔하게, 판단력을 무디게 하여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은 행복감을 준다. 그리고 약효가 떨어졌을 때, 각성제 사용자는 엄청난 피로감에 말려 손끝 하나 움직이기도 싫어진다. 그런 피로감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시 각성제를 찾게 되는 것이다. 중독이 심해지면 환각.환시.망상을 일으키게 되고, 더욱 악화하면 지속적인 착란상태에 빠지게 마련인 것이다. 각성제의 가장 나쁜 점은 이러한 착란상태가 각성제를 사용하지 않을 때도, 또는 끊은 지 1년이 지난 뒤까지도 어느 순간 돌연 재발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소위 플래시백이라고 하는 것이다. 플래시백을 불러일으키는 약제에는 이 밖에 LSD가 있다. <아이스캔디>는 지금까지 청소년들 사이에 번지고 있던 신나나 톨루엔 같은 유기용제 놀이보다 훨씬 싸고 가벼운, 그러면서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장난감이란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밀매 팀장이나 중간 도매조직에 관한 정보를 좀체 입수할 수 없다고 해서 사메지마는 <아이스캔디>가 퍼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말단 밀매인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눈에 띄기만 하면 즉시 체포했다. 물론 뿌리를 뽑는 본격적인 수사가 중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어물어물하고 있으면 <아이스캔디>에 맛을 들인 청소년들이 진짜 각성제 중독에 빠져들고 말 것이 아닌가. 뒤늦게 <아이스캔디> 총판과 도매조직을 뿌리 뽑는다고 해도, 이미 중독된 청소년들은 다른 조직을 통해 각성제 주사를 맞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설령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밀매인 하나하나를 눈에 띄는 대로 잡아들이겠다는 것이 사메지마의 생각이었다. 수사 2과가 <아이스캔디> 출현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또 있었다. "생업의 문제로군." <아이스캔디>가 유행할 것이라는 사메지마의 말에 모모이가 덧붙였다. 사메지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폭력단은 지금 거의 빈사상태에 빠져 있어요. 불황과 개정법 때문에 경제와 관련된 일은 할 수 없게 됐으니까 말이죠." 사실이었다. 땅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토지를 담보로 은행 융자도 받을 수 없었다. 부동산 관련업자들은 운영자금을 마련하러 사채업자를 찾아다니는 형편이었다. 사채업자들 가운데는 폭력단 자금을 등에 업은 고리업자도 적지 않았다. 그런 업자들은 월리가 30퍼센트를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담보도 경우에 따라서는 두번째 세번째 순위라도 받아 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폭력단을 등에 업고 있는 한, 돈 빌려간 사람이 최우선적으로 갚아 주기 때문이었다. 또 이자가 고율이어서 융자기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원금보다 훨씬 많은 이자 수입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이점이었다. 솔직한 말로, 그런 고리업자들은 원금을 받아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석 달치 이자만으로도 원금과 맞먹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1년이든 2년이든,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이자를 받을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이자조차 내지 못하는 채무자도 있었다. 전재산을 처분하더라도 변제할 방법이 없다면 그때부터 배후에 있던 폭력단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위험물 운반에 동원하거나 채무자 장기를 적출해서 팔거나 그도저도 안되면 보험금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단 한푼이라도 더 짜내기 위해 문자 그대로 뼛속까지 후벼파내는 것이었다. 채무자도 그런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자만은 지불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쏟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황과 개정법이 지금 폭력단을 옴쭉달싹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개정법이 시행됨에 따라 폭력단이 경제적 분규에 끼어드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다. 돈을 받아내려고 <폭력단>의 <폭> 소리만 내비쳐도 당장 체포되고 마는 것이었다. 채무자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배짱을 부리기도 했다. 그전 같았으면, 그런 채무자는 목을 졸라 묻어 버리는 것이 폭력단들의 수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폭력단이라 하더라도 <살인>에 이르면 주저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역시 개정법 때문이었다. 폭력단 대책이 얼마나 강화되었는지는 현장 구성원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조직을 위해 살인을 했다가 들통이 나 복역한다고 했을 때 조직이 가족이나 애인의 뒤를 보살펴 주는 것이 지금가지의 관례였다. 형을 마치고 나오면 조직을 위해 고생했다고 해서 나름대로 걸맞는 보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조직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복역중에 조직 자체가 없어져 버릴 가능성조차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복역을 하며, 또 전과자라는 짐을 져야 하는가. 무의미한 일이었다. 빌리는 쪽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어, 처음부터 갚을 생각 없이 폭력단을 등에 업고 있는 사채업자를 찾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개중에는 일부러 라이벌 관계에 있는 복수의 폭력조직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배짱 좋은 사람도 있었다. 돈을 갚지 않았을 때, 한쪽 조직이 손을 쓰려 하면 라이벌 조직 역시 움직이게 마련. 그렇게 되면 집단싸움은 피할 길이 없고 집단싸움이 벌어지면 경찰이 밀고 들어올 것도 뻔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손쉽게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억제장치> 였다. 폭력단 가운데는 이런 뱃심 좋은 사람에 걸려들었다가 <배짱 센 놈만큼 처치 곤란한 것도 없더군> 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때문에 폭력단을 상대로 엄청난 돈을 빌려쓰고도 두려워하기는 커녕 태연하게 버티는 사람조차 있었다. 사업이 완전히 찌그러들어 회수가 불가능함을 알고서도 야쿠자들은 손 한번 못 써보고 이만 갈고 있는 것이었다. 모모이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얼마전 사채놀이를 하는 폭력단을 우연히 만났어. 야쿠자 녀석, 고객의 절반이 짠돌이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군. 손 한번 못 써보고 돈을 떼이게 됐다면서 말야." "그게 바로 위험하다는 증겁니다." 사메지마 말에 모모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야쿠자 입장에서 보면 고리사채는 비교적 정업에 속하는 것이었다. 상대가 신용만 지켜 준다면 이쪽에서 탈법적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또 도박의 자리값도 경기가 좋아 일확천금한 사람들이 상대라면 속임수를 쓰지 않더라도 하룻밤에 몇백만 엔쯤 손쉽게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불황이 깊어짐에 따라 그런 손쉬운 벌이가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야쿠자들이 한번 맛들인 화려한 생활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보다 범죄성이 강한 돈벌이를 찾아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돈 있는 사람을 유괴해서 전재산을 뺏은 다음 죽여 버리는 것 같은 <사업>은 지금까지의 폭력단 범죄에선 찾아볼 수 없는 유형이었다. 살인까지 하지 않더라도 효율 좋은 벌이가 남아 있었다. 마약과 각성제. 경찰의 눈을 피해 손을 댔다가, 붙잡히는 날엔 죄목이 무겁기는 했다. 그러나 경제 관련 일감으로 벌어들일 수 없게 된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형편이 못 되었다. "중독자 스스로가 밀매인이 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약값을 벌기 위해 들치기.공갈.절도까지 서슴지 않아요. 중독자 치고 점잖은 녀석은 없는 법이죠." "앞으로 부쩍 늘어나겠지?" "네. <아이스캔디>가 유행하게 되면 누구든 탐을 내겠죠." "파는 사람도 늘어나고 중독자도 늘어난다는 뜻인가?"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람이 불면..... 하는 노래도 있습니다만, 경제의 거품이 사그라 들면 각성제 중독도 늘어날 겁니다. <아이스캔디>는 바로 그런 시대적 배경을 노린 절호의 상품이라고 볼 수 있어요." "값이 5백 엔이라...... 너무 싸다고 생각지 않나?" "지금가지 상당한 양이 팔렸을 겁니다. 말단 판매인의 마진을 50퍼센트로 본다면 한알에 2백 50엔이에요. 도매가격은 50엔쯤일지도 모르죠." "그 가격엔 만들 수 없어." "물론이죠. 만약 수입품이라면, 제조원가는 한알에 몇 엔밖에 안 될 수도 있구요." "그렇다면 도대체......" "각성제 말단 가격은 1회분이 5천 엔 내지 6천 엔 정돕니다." "1회분이 0.03그램인가?" "네. <아이스캔디> 성분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포도당이 90퍼센트 이상, 메타페타민 함유량은 0.008 정도밖에 안 됩니다." "4분의 1이라 치더라도 1천 엔은 받아야 수지가 맞는다는 계산이 나오는군."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영리한 사람의 짓이라고 봅니다." "영리한 사람?" "5백 엔이라면 소위 출혈 서비스, 개점기념 특별 서비스에 속합니다. 아마 가까운 시일 안에 심한 품귀현상이 나타나겠죠. 그리고는 배 이상의 가격 인상이 뒤따르겠죠." 모모이는 눈을 번쩍 떴다. "싼값으로 보급해서 사용자를 늘이고, 사용자가 늘어나면 값을 올린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총판이나 중간 도매조직이 가만히 있을까? 적어도 말단 판매조직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렇겠죠." 사메지마는 한숨을 내쉰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제조자가 원가 몇 엔으로 언제가지나 <아이스캔디>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겁니다. 가령 10엔이라 하더라도 1백만 알을 만들어야 겨우 1천만 엔이 됩니다. 그 가운데는 원재료비.인건비도 포함되어 있구요. 결국 순이익은 1백만엔 전후라고 봐야 해요. 설비투자까지 해서 그정도 수익밖에 올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다른 합법적인 장사를 하는 게 훨씬 낫겠죠." "그렇다면 중국이라든가, 인건비와 물가가 싼 지역에서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사메지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정이나 분말과 달라, 정제는 부피가 엄청 큽니다. 밀수 대상으로는 효율이 나쁩니다. 수트 케이스에 가득 담아 들여온다 해도 가격이 분말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국적은 아직 밝혀내지 못한 모양이지?" 모모이가 신음하듯 말했다. 일본에 나돌고 있는 각성제를 분석해서 제조국, 또는 지방을 밝혀내는 검사방법을 기타사토 대학에서 개발해 냈다. 우선 원재료인 에페드린 잔류량을 측정하거나 결정화 단계의 온도등으로 생산지의 특색을 규명, 이를 <약물 지문>으로 등록한다. 압수한 각성제를 이 <약물 지문>과 대조하는 방법으로 원산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아이스캔디>는 압수량도 적고 또 함유된 각성제도 미량이기 때문에 아직 생산지를 규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생산지만 밝혀낸다면 도매조직 소재지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되는 것이었다. "대만제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모모이의 말에 그러나 사메지마는 동의하지 않았다. "대만제라면 수입한 결정을 정제로 만들기 위해 재처리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원가도 비싸게 치입니다." "그럼 자넨 어떻게 보고 있나?" "전혀 새로운 인물의 짓이라고 봅니다. 덤핑 서비스 역시 제조자의 아이디어겠죠." ".....어느 나라의?" "일본이라고 봅니다. <아이스캔디>는 일본 어딘가에서 제조한 것입니다." 사메지마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일본!" 모모이는 기가 질린 것 같았다. 현재 일본 국내에는 각성제 밀조가 한 곳도 없다는 것이 경찰 내부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제조공장이 발각되기 쉽다는 것, 그리고 값이 싼 외국제품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또 국내 생산이 없다고 보는 배경엔 밀수 루트만 막아 버리면 각성제 공급을 단절시킬 수 있다는 기분적인 안심감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아이스캔디>가 일본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다면 그러한 안심감 역시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번 압수품으로 <약물 지문> 판정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사메지마가 말했다. "왜?" '과장님은 <아이스캔디>가 일본제라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모모이는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캔디>가 국산이라면, 지금 상황에선 공장이 한곳 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공장만 덮치면 <캔디>를 근절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외국제일 경우, 앞으로 끊임없이 밀수입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팔린다는 걸 알고 나면 새로 손대는 녀석도 나타날 텐데?" "물론이죠. 그래서 <캔디> 공장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서 덮쳐야 합니다. 어물거리고 있다간 큰일이죠. 일본 국내에서 <캔디>가 유행한다는 걸 안 외국업자가 같은 제품을 생산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 아닙니까?" "이미 착수했을지도 모를 일이야." 모모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지금 가격으로는 본전도 건질 수 없기 때문에...... 현 공급자가 값을 올릴 때까지 기다리긴 하겠지." "그렇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사메지마는 모모이를 응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면 최악이야!" 모모이는 나지막하게 잘라 말했다. 2. 이튿날 저녁, 쇼가 사메지마 아파트로 찾아왔다. 쇼는 소속 밴드 <후즈 허니>의 두 번째 앨범에서 자기 노래만 따로 뽑아낸 CD 재킷 사진 촬영 때문에 사흘 동안 해외에 갔다 온 길이었다. 사가지고 온 선물을 들고 묵으로 온 것이었다. 쇼는 지금 머리를 기르는 중이었다. 사내애들처럼 짧게 쳐올려 메슈를 넣었던 것이 지금은 어깨에 닿을 정도로 치렁치렁했다. 쇼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메지마가 보기엔 지금 쇼의 헤어스타일이 한때 유행했던 <매쉬럼 컷>과 비슷했다. 중학 시절, 좋아했던 여학생 헤어스타일과 같은 것이었다. "자, 선물." 쇼는 저녁 7시가 지나 아파트에 불쑥 들어서면서 체인 초밥집 비닐 주머니를 내밀었다. 손에는 또 하나, 큼직한 종이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속을 들여다보았다. 포장된 나무 도시락과 젓가락이 담겨 있었다. "이걸 필리핀에서 사왔나?" "바보. 그건 저녁밥이야. 이쪽이 선물이구." "나중에 천천히 열어보자구."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티셔츠에 아래위 진을 받쳐입은 쇼가 일어서서 냉장고로 갔다. "맥주 있어?" "그럼 기네스도 있을걸." "정말?" 사메지마가 초밥 도시락을 푸는 동안 쇼는 냉장고에서 기네스 캔과 보통 맥주병을 들고 왔다. 글래스 2개를 테이블에 나란히 놓았다. 기네스를 글래스 반쯤 따른 다음, 보통 맥주로 잔을 채웠다. 사메지마가 즐기는 방법이었다. 요즘은 쇼도 맛을 들인 듯했다. "먹자구." 건배를 한 쇼가 젓가락을 들었다. "선물, 먼저 봐두 괜찮아?" "응." 연어알 초밥을 한입 어물거리면서 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메지마는 종이 백을 열었다. 면세점 주머니에 든 위스키와 함께 티셔츠.야구 모자가 들어있었다. "뭐야, 이게?" 사메지마가 야구 모자를 꺼내들자, 쇼는 즐겁다는 듯 쿡쿡거렸다. 짙은 남색 야구 모자엔 엠블럼 대신 날카롭게 입을 벌리고 있는 상어 인형이 달려 있었다. 크기는 모자 창과 비슷했다. "좋지? 보자마자 샀어. 틀림없이 히트할 거야. 한번 써봐." 사메지마는 썼다. 플라스틱으로 된 인형이었지만, 가벼운 모자에 매달린 탓일까, 제법 무게가 느껴졌다. 쇼가 떼굴떼굴 굴러가면서 웃었다. "너무너무 잘 어울리는 것 있지?" "이거 왜 이래?" "거울 한번 봐." 사메지마는 일어서서 욕실로 들어갔다. 표정이 그럴 듯한 상어 인형 대가리가 마치 사메지마 이마에서 툭 불거져 나온 것처럼 보였다. "이걸 쓰고 어떡하라는 거야?" 쇼는 맥주를 마시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마음이 내킬 때 그걸 쓰고 신주쿠 거리를 어정거리면 좋잖겠어?" "미친 소리 작작해." 사메지마는 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오늘밤은 적어도 자리에 들기까지는 쓰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이건 티셔츠지?" "사실은 말야, 시간이 없어 쇼핑도 제대로 못했어. 모자를 사고 보니 티셔츠도 필요할 것 같아 허겁지겁 뒤지구 다녔어." 사메지마는 티셔츠를 펴보았다. 상어 그림이 들어 있었다. 이쪽은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라 선글래스를 낀 상어였다. "그 정도라면 입고 다닐 만하지?" "그런대로......" 사메지마의 쓴웃음을 쇼는 생긋 웃음으로 맞받았다. "같은 걸로, 네것도 샀어?" "응. 투어 때 입으려구." 쇼는 고개를 까닥거리면서 초밥 하나를 입 속에 날름 집어넣었다. "촬영, 괜찮았어?" "그렇지 뭐. 아이들 (idle,우상) 도 아니니까 즐거워할 것도 없잖아?" CD가 잘 안팔리자, 소속 사무실측은 <후즈 허니>를 쇼의 매력으로 팔아보자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이번 촬영도 그 때문이었다. 싱글판 재킷에는 쇼 사진만 싣게 되어 있었다. 쇼는 그게 싫어서 사무실측과 충돌까지 벌였다. 버릇인 신경질이 폭발, 사무실과 인연을 끊겠다는 것을 밴드의 다른 멤버들의 설득으로 가까스로 주저앉았다. <딱 한번만> 이라고 쇼는 단서를 달았다. 멤버들도 한번만 그런 식의 싱글을 팔아보자고 쇼를 납득시켰다. <후즈 허니>의 앨범은 좀처럼 히트를 치지 못했다. 음악성은 물론 보컬을 포함한 기교적인 면은 나름대로 높이 평가받고 있었지만, 히트의 계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밴드 멤버들도 어떻게 하든 계기를 만들어 내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촬영에도 쇼를 내보낸 것이었다. "사흘로는, 글쎄......" 사메지마가 말했다. "새삼 속상해 해도 별수 없는 일이지만...... 카메라맨 녀석, 아이들 탤런트 취급하는 바람에 걷어차 주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어." 사메지마는 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쫓아다녔어, 녀석이?" 실상은 어떤지 모르지만, 해외 로케이션 때, 카메라맨이 모델에게 육체관계를 강요한다는 소문쯤은 사메지마도 듣고 있었다. 쇼는 사메지마를 마주 쏘아보았다. 입가엔 도전적인 웃음이 번졌다. "그랬다면?" "네가 말을 들어 줬을 것 같진 않아.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넌 지금쯤 필리핀 유치장에 있겠지. 살인미수로 말야." 쇼의 웃음에 기뻐하는 빛이 서려 있었다. "자신만만하군." "당연하잖아, 이 바보야." "이상해. 엄청 멋있는 사내였다면 나도 눈 딱 감고 말려들었을지 모를 텐데......" "그래?" "이거였어!" 쇼는 혀를 끌끌 찼다. "내가 홀딱 반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만약, 넌 그 정도로 나한테 반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화를 발칵 낼 것 아냐?" "피이, 그 정도로 자신만만해?" "그럼 어느 쪽이야?" 쇼는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국가권력은 이겨낼 수 없군." "남 듣는 데서 그런 말 하면 못 써. 내가 경찰신분증을 앞세워 널 속이기라도 한 줄 알 것 아냐?" "농담 아냐. 애인이 폭력 담당 형사라고 밝히면 팬이 한 사람도 안남고 모두 도망쳐 버릴 거야." 거짓말이었다. 쇼의 밴드, <후즈 허니>의 데뷔 앨범 타이틀은 캅(경찰관) 이었다. 쇼가 스스로 떠들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애인이 있다는 것, 그 애인이 형사란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걸 사메지마는 알고 있었다. "애 취급받는 것 싫었어, 필리핀서?" "응. 하지만 그런 건 결국 서로가 다 알고 있던 거였어." "뭐가?"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애들만은 아니잖아? 나름대로 고생도 하고 물장사도 해 가면서 겨우 탤런트로 입신을 하거든. <아무개짱> 이라고 카메라맨이 불러댈 적엔 속이 뒤틀릴 게 틀림없어. 그래도 알면서 모른 척한다고나 할까. 사실은 햇병아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애 취급을 하고, 이쪽 역시 시침 딱 떼고 <네-> 대답하는 거야. 결국 그런 식으로 서로가 모른 척 어물쩍 넘어가는 것 같았어."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되는 건가?" "아니. 하지만 난 싫어." "그런 점, 상대방에게 분명히 설명해 줬나?" "이번엔 안했어. 이번 일은 뭐랄까, 한번으로 끝나는 일이니까...... 모든 걸 꾹 참았어.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던 거야." "그랬었군." "훌륭하다, 잘났다고 칭찬해 줄 생각 없어?" "놀림 정말 화를 낼 텐데?" "응. 또 남의 생각을 앞질러 갔군." 연어알 초밥이 한개 남아 있었다. "자기 먹어." "네가 먹어." "난 벌써 먹었어." "어쨌든 네 것이야, 이건." 사메지마가 끝까지 사양하자 쇼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나한테 정말 반한 모양이지?" "넌 언제나 제일 맛있는 걸 맨 처음 집는 버릇이 있어. 난 어느 쪽이냐 하면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게 버릇이야. 처음과 마지막에 제일 맛있는 걸 먹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럼 내가 먹어두 괜찮아?" "처음과 마지막, 양쪽 다 먹어. 그 연어알을 내가 먹으면 매수당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내가 자길 매수해서 뭣에 쓰지?" "록 퀸의 욕구불만 해소에 쓸 수도 있잖아." "좋았어. 채찍과 촛불부터 준비해야지. 엉덩일 속시원하게 두들겨 주지." "엉덩인 봐 줘. 다쳤어." "뭐라구?" "장난감 같은 나이프에 찔렸어." 쇼의 표정이 홱 바뀌었다. "누구한테?" "아직 애야. 길거리에서 약 파는 걸 잡으려다가 그만......" "몇 살쯤인데?" "열일곱." "약이라면?" "<아이스캔디>. 알고 있나?" "들은 적 있어. 훨훨 난다면서? 멋있겠네!" "나는 것관 달라. 시원해진다는구먼. 각성제가 들어 있는 탓에." "각성제?" "그래. 머리 좋은 녀석이 각성제를 알약으로 만들어 팔고 있어." 쇼는 약물류는 전부 싫어했다. 사메지마와 사귀기 전부터 그랬다. "붙잡았어?" "팔고 있던 녀석은. 날 찌른 놈은 놓쳤구." "멍청하긴." "<캔디> 쪽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야." "심해, 상처?" "아니. 개한테 물린 것보다도 가벼워." 쇼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사메지마는 몇 번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쇼는 불같이 화를 냈다. 쇼는 팔짱을 끼고 사메지마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보여 줘, 분명하게." "그래." "분명이야!" "알았어. 참!" 사메지마는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었다. "뭐야?" "이따가 목욕할 때 부탁할 게 있어." 쇼는 의아스런 얼굴, 사메지마는 빙글거렸다. "상처 언저린 아파서 잘 씻지 못했어." "나보구 씻어달란 말야?"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변이 묻어 있을지도 몰라." "지저분하긴!" 쇼가 빽 고함을 질렀다. 나카야마 미치히로를 중심으로 한 10대 말단 밀매 그룹에 <아이스캔디>를 공급한 것은 하즈노 히로시라는 나카야마의 중학교 선배였다. 나카야마의 진술에 따르면 하즈노는 올해 열아홉 살, 수입 중고차 판매회사에 근무하는 회사원이었다. 수트 차림에 핸디폰을 가지고, 자기 것인지 회사 것인지 모르지만 메르세데스를 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밤에는 시부야나 록봉기를 자주 찾는 편으로 디스코텍 뿐만 아니라 호스테스가 있는 고급술집도 드나드는 것 같았다. 나카야마 패거리 입장에서 보면 두 살 위의 하즈노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즈노가 폭력단 멤버라면, <아이스캔디> 도매조직으로 봐서 단번에 몰아붙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카야마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하즈노가 폭력단 멤버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우선 하즈노의 나이였다. 열아홉 살에 폭력단 멤버라면 아직 눈치코치를 배워야 하는 연수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조직이 아무에게나 메르세데스를 이용하게 하고 고급 살롱에 드나들 정도의 대접을 해 줄 까닭이 없지 않는가. 만약 조직 멤버가 틀림없다면 적어도 간부, 그것도 구미쵸(組長)급 간부의 피붙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었다. 하즈노는 <아이스캔디> 1백 알을 3만 엔에 나카야마에게 넘기고 있었다. 나카야마가 하즈노의 제의로 그 장사를 시작한 지 석 달쯤 되었다고 했다. 그 동안 판 것이 줄잡아 5천 개. 오늘 사메지마가 덮친 것과 같은 밀매행위를 한달에 열 번씩, 모두 서른 번에 이르렀으니까 한번에 1백 50알 이상씩 팔았다는 얘기였다. 만약 하즈노가 조직 간부의 피붙이라면 자가 소비 이상의 물량을 가지고 있는 조직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구미쵸의 아들이 각성제 밀매에 손대는 것을 두고 볼 구미가 있을 수 있는가. 현재 어떤 폭력단이든 조직 멤버가 각성제 거래에는 손대지 못하도록 표면적으로는 금지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었다. 조직이 공공연하게 각성제에 손을 대고 있다면, 적발되었을 때 구미쵸 이하 모든 간부가 줄줄이 달려갈 수밖에 없고, 끝내는 조직 자체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웃사람들이 조직 멤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상납금이었다. 상납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성제 밀매에 손을 댔을 경우, 간부들은 알고도 모른 척했다. 그 조직원이 체포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원 개인의 <장사>일 뿐, 조직으로서는 약물취급 금지 지시를 내려놓고 있기 때문에 관련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10명 단위로 쪼개진 소그룹들은 서로 경쟁하다시피 각성제 판매에 열을 올려 이익의 절반은 구미쵸에게 상납하고 있었다. 이 경우도 구미쵸가 각성제 거래 현장에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물론, 구미 사무실에 현물을 보관시키거나 하는 법도 없었다. 때문에 하즈노 히로시가 폭력단 간부의 피붙이라면 각성제를 멀리 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조직의 생리라고 봐야 옳았다. 장사를 할 만큼 대량의 <아이스캔디>를 소속 구미로부터 공급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볼 때, 하즈노 역시 말단 판매인의 한사람으로 봐야 했다. 결국 하즈노를 붙잡아 그에게 <캔디>를 공급해 주는 인물을 밝혀, 한단계 한단계 착실히 수사를 해 나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국 검찰에는 각성제 전담 검사가 배치되어 있다. 각성제 사범 검거 때 필요 불가결한 구속영장과 압수수색영장 발급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검사 역시 사는 사람만 검거하는 것을 꺼려 판매인 체포에 열을 올리는 경향이 강했다. 사메지마가 하즈노 히로시의 사전구속영장과 압수수색영장을 손에 쥔 것은 나카야마 미치히로를 체포한 사흘 뒤였다. 하즈노는 시부야 구 하쓰다이 맨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게이오 선 하쓰다이 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임대 전문 아파트였다. 통상적으로 용의자 검거에 경찰관 한 사람이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 저항을 하거나 도망을 칠 가능성도 있었고, 각성제 사범이라면 그러는 사이에 증거물인 각성제를 처분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대부분 단독으로 용의자 체포에 나섰다. 설령 협력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정복 경찰관의 도움은 받았어도 신주쿠 서 방범과 형사들의 도움은 받은 적도 요청한 적도 없었다. 과장인 모모이를 제외한 다른 과원들과 사이엔 처음부터 신뢰관계 같은 게 없었다. 계급이 경감인 사메지마가 상관임에 틀림없지만 방범과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린 적도 없었다. 군대와 비슷한 조직인 경찰에 있어서 명령이 위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명령 자체가 본인의 의지를 무시한 강제성을 가지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사메지마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일수록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범인의 저항을 받아 부상하거나, 몸을 사리다가 범인을 놓쳐 버리기가 일쑤였다. 사메지마가 가장 꺼리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부상을 하거나, 미스를 범하면 두고두고 당사자 경력에 큰 흠집으로 남는다. 동료로서 신뢰할 수 없는 상대에게 명령을 내려, 그로 인해 경력에 상처를 받는 경찰관을 사메지마는 만들어 내고 싶지 않았다. 이미 경찰관으로서의 경력과 출세를 포기한 사메지마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실패로 인해 다른 범죄를 유발시키거나 새로운 피해자가 나오는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다. 따라서 범인을 체포하려 갈 때 가능한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했다. 권총을 휴대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라도 특수 경찰봉은 반드시 가지고 다녔다. 상대방에게 저항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즈노 히로시 체포엔 권총을 휴대하기로 했다. 각성제 사범은 특히 피의자가 중독환자일 경우 예상 밖의 저항이 흔하기 때문이었다. 또 하즈노 히로시의 배후관계를 분명히 파악 못하고 있는 이상, 그가 권총 같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놓쳐 버린 각성제 사법이 무장을 하고 거기다가 각성제까지 복용하고 나선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사메지마는 맨션 아파트 앞에 주차한 자신의 BMW 안에서 하즈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BMW는 중고였다. 국산차는 잠복 감시나 미행을 할 때 상대방에게 들킬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무리해서 수입차를 마련한 것이었다. 옆으로 넓적하게 퍼진 3층 건물인 맨션 아파트 1층엔 6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제일 왼쪽 칸이 하즈노의 것이었다. 하즈노를 체포하면, 그 즉시 신병을 신주쿠 서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신주쿠 서에서 일단 소변검사를 한 다음, 심문은 모모이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다시 하즈노 아파트로 와서 가택수색을 할 계획이었다. 가택수색 때는 방범과의 다른 형사를 동행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부상을 하거나 사고를 낼 위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모모이에게는 밤 10시가 지나도 연락이 없으면 귀가해도 좋다고 미리 귀띔을 해 두었다. 이미 9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하즈노가 몇 시에 귀가할지 알 수 없었고, 피의자를 심야에 체포했을 경우엔 이튿날 아침이라야 심문이 가능할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즈노가 오후 4시에 근무하는 중고차 판매회사를 퇴근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뒤의 행적은 전혀 파악이 안 되고 있는 상태였다. 술집 순례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어딘가에서 <아이스캔디>를 팔고 있는 것일까. 사메지마는 망설이고 있었다. 하즈노가 귀가했을 경우, 바로 체포할 것인가, 아니면 더 지켜볼 것인가, 결론 내리기가 어려웠다. 하즈노가 나카야마 등에게 <아이스캔디>를 공급한 사실은 이미 확인이 끝났지만, 그러나 그가 나카야마 이외에게도 물건을 공급하고 있는지, 또 자기는 어디서 보급받는지는 파악 못하고 있었다. 하즈노를 체포해서 자백을 받아야만 밝혀질 사실이었다. 이럴 경우, 일본 경찰은 일단 체포해서 면밀한 조사와 심문으로 용의자를 하나하나 밝혀가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상대방의 집요한 저항, 묵비권 앞에서는 별 효과가 없었다. 형사는 피의자를 처음 보는 순간, 육감으로 흑백을 판단한다. 일단 범인으로 판단을 내리면 집요한 녀석인가 아닌가를 속으로 재어본다. 집요하다는 것은 손쉽게 자백하지 않는 성격을 뜻한다. 하즈노가 첫눈에 집요하지 않은 녀석으로 비치면 주저없이 그 자리에서 체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집요한 타입이라면...... 사메지마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각성제 루트를 거슬러 올라가는 데는 피의자의 자백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험을 느낀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게 될 때, 수사 자체가 좌초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태를 피하는 길은 한가지뿐이었다. 피의자를 철저히 마크, 루트를 밝힐 실마리를 잡아 결정타를 날리는 것이었다. 그걸 <내사> 라고 불렀다. 하즈노는 나카야마가 체포된 것을 알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자기 집의 <아이스캔디>는 말끔히 치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열아홉 살이라는 하즈노의 어린 나이가 사메지마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하즈노가 경찰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면 <캔디>를 집에 숨겨두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나이에 비해 교활하고, 또 경찰 동태를 예측할 정도로 영리한 녀석이라면 깨끗이 처분했을 것은 물론, 루트를 숨길 적당한 거짓말까지 준비해 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하즈노를 체포하면 <아이스캔디>의 루트 찾기는 거기서 끝이 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또 다른 밀매인을 미행 체포하는 걸로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하즈노와 대면하는 순간, 그의 인상에 따라 육감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었다. 덮칠까, 아니면 풀어놓고 감시를 계속할까. 판단에 고심하고 있는 것은 사메지마가 경찰관으로서의 경력, 눈 앞의 실적 올리기에만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눈앞의 점수에만 급급하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하즈노를 체포했을 것이다. 10시가 지났다. 사메지마는 대시보드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부벼끈 다음 길게 숨을 내뿜었다. 적어도 오늘밤은 귀가하는 하즈노를 체포하더라도 즉각 심문을 개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편의점에서 뽑아온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바닥에 가라앉았던 커피 가루가 혀끝에 달라붙었다. 미지근한 액체, 쓰기만 했다. 하즈노를 내사한다 하더라도 사메지마에게 주어진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전영장도 정해진 기간 안에 집행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어진다. 물론 혐의 사실이 분명하면 재발급받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하즈노가 영리한 녀석이라면 당분간은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경찰 동태를 예측, 조심을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주의력 역시 풀어지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렇게 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하는 데 있었다. 1주일? 열흘? 아니면 한달? 1년씩은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1년간 <캔디>와 담을 쌓고 지낸다는 것은 장사를 그만두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메지마는 열아홉이라는 하즈노의 나이를 주목했다. 열아홉 살. 스무 살만 되면 성인이기 때문에 열아홉 살 때와는 형이 전혀 달라진다. 미성년 범죄자 가운데는 범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는 녀석도 적지 않았다. - 난 미성년자야. 사람을 죽여도 사형까진 가지 않아. 사메지마 자신도 그런 어설픈 풋나기를 수도 없이 상대해 왔었다. 하즈노는 나카야마로부터 어느 의미에서 보면 존경을 받아왔다. 단순히 돈이 많아 어른들 세계에 끼어들어 한몫하고 있는 데서 받는 존경은 아니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하즈노가 영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카야마는 하즈노의 지시로 <아이스캔디>를 팔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판매 방법도 하즈노가 가르쳐 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는가. 하즈노가 밀매인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 휘하에 밀매 그룹을 조직할 정도의 머리는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처럼 영리한 하즈노가 열아홉 살이라는 자기 나이 - 소년법을 적용받을 수 있는 최후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하즈노가 언제 스무 살이 되는지 사메지마는 모르고 있다. 하지만 지금 숨을 죽이고 있더라도 스무 살이 되기 전 - 물론 앞으로 한달안에 생일을 맞는다면 별문제이지만 - 반드시 <캔디> 밀매를 재개할 게 틀림없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열아홉 살 젊은이, 그것도 아직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어쩌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카야마 미치히로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길거리에서 팔았던 알약이 각성제임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토하기까지 했다. 하즈노 히로시는 그런 나카야마보다 겨우 두 살이 많을 뿐이었다. 정면에서 헤드라이트가 비쳐들자 사메지마는 고개를 들었다. 밤 11시 58분이었다. 2분만 지나면 사전구속영장 유효기간은 6일간으로 줄어든다. 흰색 메르세데스 190이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가려고 코스를 잡고 있었다. 메르세데스는 차머리를 도로 쪽으로 해서 주차장으로 후진해 들어갔다. 라이트가 꺼지고 엔진 소리도 멈추었다. 사메지마는 몸을 낮추었다. 메르세데스 도어가 열렸다. 갈색 소프트 수트 차림의 남자가 내렸다. 홀쭉한 키, 나이와는 달리 수트 차림이 몸에 배어 있었다. 왼쪽 겨드랑이엔 짙은 초록색 세컨드백을 끼고 있었다. 메르세데스의 도어를 잠근 다음, 몸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꺼칠하게 보이는 머리를 뒤로 젖혀 손으로 쓰다듬었다. 버릇인 것 같았다. 맨션 아파트 입구에도 가로등이 서 있었다. 사내는 사메지마의 BMW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가로등 밑을 지나갔다. 사메지마는 지켜보았다. 쭉 찢어진 눈, 반듯한 콧날, 얄팍한 입술, 하즈노 히로시의 눈빛은 사메지마가 예상했던 대로 날카로웠다. 한발짝이라도 더 목표에 접근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능력, 나이에 걸맞지 않는 넉살까지 깃들어 있었다.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과 경계심이 휘몰아치고 있어야 마땅했다. 하즈노의 집은 맨션 아파트 2층 제일 왼쪽, 자기 주차 칸 바로 위였다. 방에 불이 켜지는 것을 사메지마는 BMW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감은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 때문일까. 한가지 일이 잘 풀려가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젊음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보다 훨씬 앞선 영리함과 행동력이 하즈노에게 침착과 여유를 갖게 하고 있는 것일까. 불을 켰지만, 커튼은 닫힌 채로 있는 창문을 올려다보면서 사메지마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간단치 않은 상대였다. 하즈노는 아직 어리다 할 정도로 젊지만 사메지마는 만만치 않은 인상을 받았다. 체포해서 이리저리 닥달을 한다 하더라도 <아이스캔디>의 판매조직을 쉽게 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사메지마는 담배연기와 함께 길게 숨을 내뿜었다. 상대도 혼자, 이쪽도 혼자였다. 뭔가 꼬리가 잡힐 때까지 끝까지 감시를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지고 있는 사전 구속영장 기간이 끝나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감시할 작정이었다. <아이스캔디>가 더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면 그만한 인내쯤은 각오가 되어 있었다. 사메지마는 기다림의 고통에 맞서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3.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신칸센이 완전히 멎기를 기다려 가카와 스스무는 일어섰다. 오후 2시 도쿄 착의 신칸센 특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팔목시계를 흘낏 본 다음 시렁 위의 애터쉐 케이스를 내렸다. 듀랄루민으로 만든 꽤나 묵직하게 보이는 가방이었다. 오늘 스케줄을 머리 속으로 다시 한번 체크해 보았다. 우선 택시로 호텔까지 간다. 체크인과 동시에 전화를 건 다음 샤워를 하면서 샤키를 기다린다. 샤키를 저녁 나절엔 돌려 보내야 한다. 식사는 스미네들과 약속이 되어 있었다. 아마 호텔 중국 식당에서 하게 될 것 같았다. 오늘 흥정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게 틀림없다. 스스무는 될 수 있는 대로 동행을 극소수로 제한해 달라고 스미에게 미리 못을 박아놓고 있었다. 만약 스미가 부하들까지 거느리고 나타난다면, 쫓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스미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머리가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스미 부하 가운데는 골치 아픈 녀석들이 적지 않았다. 멍청한 돌대가리들은 이제 진저리가 났다. 녀석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가 야쿠자다> 라고 떠벌이고 다니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멍청이들이었다. 언젠가 한번 스미와 단둘이서 샤키가 일하는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불평을 한 적이 있었다. - 으스대고 다니는 것, 별로 좋은 일 아니잖아? 안 그래, 스미씨? 그날 일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스스무는 스미를 조금 얕잡아 본 것이었다. 스미는 야쿠자로서는 드문, 살결이 흰 사내였다. 퍼머로 웨이브를 넣어 한복판에 가리마를 탄 헤어스타일에 제법 점잖은 양복차림이었기 때문에 야쿠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키도 컸다. 한번은 즐겨 입는 양복 브랜드를 자랑한 적이 있었는데 서로가 두 벌이나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 하라다씨, 우린 겁을 주고 먹고 사는 사람들이오. 헤네시를 두 병이나 비웠는데도 스미는 전혀 취한 기색이 없었다. 스스무는 꽤 취해 있었다. - 하지만 당신, 별로 무섭게 보이지 않아요. 스미는 싱긋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을 특히 더 잊을 수가 없었다. 스스무와 스미가 앉아 있던 자리를 포함해서 주변 테이블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 한번 맛을 보고 싶다, 그 말씀이요? 스미는 이상하게도 억양이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스스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스미는 다시 한번 웃었다. 이번 웃음에는 서릿발 같은 차가움이 없었다. - 우리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게 생업이요. 하지만 허세로 그렇게 했다가는 언젠가 발목을 잡히고 말죠. 허세나 연기로 돈을 벌 생각이라면 배우가 되어 있겠죠. 스스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얘기는 더이상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무는 어릴 적부터 응석받이, 고집이 세어 꺾일 줄 모르는 녀석이라고 놀림을 받아왔다. 형인 노보루와 나이 차가 많았던 탓에 부모도 스스무를 외아들 다루듯 했다. 도쿄의 사립대학 부속고등학교로 진학한 것도 고향 중학교에서 너무 설친 탓에 폭주족의 노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고향에선 무서워할 게 하나도 없다 -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스스무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카와 가는 - 스스무네가 비록 작은집이었지만 - 건설.운수.TV등 지역 경제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 지역 야쿠자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폭주족 따위는 대부분이 야쿠자의 하부조직에 속했다. 따라서 스스무 자신은 폭주족에 가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잘난 척 뻐기고 다녀도 스스무에게 시비를 걸 멍청이는 없었다. 스스무는 체격이 큰데다가 외모도 깡패들과는 다른 멋이 있었기 때문에 한번 맛을 보여 주자고 폭주족들이 벼를 만도 했다. 그러나 그 폭주족에게 톨루엔을 공급해 주는 지역 야쿠자 구미쵸 클래스가 스스무 아버지 앞에서 꼼짝 못하는 처지였다. 손을 댔다가는 어떤 보복을 당할는지, 아무리 머리가 나쁜 폭주족이라 해도 그만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때 새로 조직된 <교토가이>는 달랐다. 대장이 다른 지방에서 온 녀석으로 주먹도 엄청 세어 전학 온 첫날, 그 학교 대표 주먹을 꺾어 기세를 올렸다. <교토가이>는 오토바이 전문 폭주족이었으나 대장 명령으로 각성제엔 손을 대지 않았다. 무투파를 자칭한 이들은 다른 폭주족 모임을 습격하여 많은 부상자를 내기도 했다. 이 <교토가이>가 스스무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런 소문을 들은 것이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교토가이> 대장은 스스무의 아버지가 거물 인사라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 그래서 어쨌단 말야? 네놈들, 야쿠자가 그렇게 겁나서야 폭주족은 어떻게 하누? 멤버들에게 그렇게 호통쳤다는 얘기를 듣자 스스무는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누구에게 털어놓고 얘기할 수도 없었다. <가카와 가의 스스무짱> 은 두려워하는 게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자 스스무는 도쿄로 가고 싶다고 부모를 졸랐다. 형은 도쿄 어느 대학 4학년에 재학중이었다. 형 역시 그해 여름방학은 도쿄에서 지내겠다고 알려왔다. 형 노보루는 부모의 도움 없이 도쿄에서 직장생활을 할 생각으로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무렵 일본을 덮친 오일 쇼크와 달러 쇼크 여파로 취직하기가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형이 바랐던 TV를 비롯한 매스컴에의 취직은 바늘구멍 못지 않았다. 스스무는 형과 함께 한여름을 도쿄에서 보냈다. 형제가 제대로 대화할 기회를 가진 것은 그해 여름이 처음이었는지도 몰랐다. 일곱 살 위인 형이 스스무 눈에는 묘하게도 지적이며 선이 가는 사람으로 비쳤다. 하지만 가카와 가에 반발, 혼자 힘으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생각을 알고부터 스스무는 형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형이 TV 방송국 하청 프로덕션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버지는 불같이 노했다. 원래부터 병약했던 아버지는 장남인 노보루가 대학만 졸업하면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운송회사를 맡길 생각으로 있었던 것이다. 스스무가 도쿄의 고교로 진학하겠다고 나서자 부모는 또 한번 실망했다. 고향의 고교에 진학하면, 틀림없이 <교토가이>의 노림을 받을 것을 스스무는 알고 있었다. 집단 린치로 폭주족 가입을 강요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걸 피하는 방법은 도쿄로 도망치는 길 뿐이었다.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한 것은 스스무에게 약한 후처로 들어온 계모였다. 계모는 스스무 어머니가 스스무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난 걸 기화로 첩에서 후처로 <승격>한 여자였다. 스스무는 마침내 부푼 가슴을 안고 도쿄에서 형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가카와 가의 연줄로 명문 사립대학 부속고교에 입학이 된 것이었다. 계모는 형제에게 도쿄 요쓰야의 맨션 아파트까지 사 주었다. 하지만 3DK (방 셋에 식당.부엌의 약칭) 에서의 공동생활은 2년밖에 계속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위암이었다. 아버지의 별세로 형은 시골 고향으로 돌아갔다. 2년간의 공동생활로 형제는 굳게 결속되었다. 형이 도쿄에서 취직하려 했던 이유도, 동생이 도쿄의 고교로 진학하고 싶어했던 까닭도 형제는 서로 알고 있었다. 형이 도쿄에 남아 있고 싶어한 것은 큰집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아니, 큰집에 대해 항상 저자세를 취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역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나 큰집을 앞세우면서 자신은 한발 물러서 있어야 하는 그러한 전근대적인 관계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노보루는 스스무에게 털어놓았다. 형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 스스무는 혼자 도쿄서 생활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경제적인 영향은 조금도 없었다. 형은 시골 인습에 대한 반발을 가슴 속에 묻어둔 채 아버지 뒤를 이어 사업체를 맡았다. 1년 뒤 형이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 네가 말했던 <교토가이> 라는 폭주족, 이젠 없어졌어. - 어떻게 된 건데? - 대장이 죽었어. 사고였나 봐. 국도를 질주하던 중 뒤에서 달려온 트럭인가 뭔가 하는 대형차에 떠밀려, 가드레일을 짓이기고는 끝이야. - 그래...... - 그러니까 아무 때나 돌아와도 이젠 괜찮아. 형은 차근차근 말했다. 그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스스무는 <교토가이> 대장을 형이 없애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도쿄 생활이 지금까지만큼 재미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시 두려운 게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버지 대신에 지금은 형인 노보루가 있지 않은가. 그래도 스스무는 대학에 진학, 5년 만에 졸업했다. 그만큼 대학생활을 즐긴 것이었다. 맨션 아파트를 독차지한 데다가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자동차도 샀다. 신장 1미터 80센티미터에 값비싼 고급 옷만 골라 멋을 부린 탓에 여자엔 부자유함이 없었다. 대학 2년. 3년 때는 걸헌팅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다. 여대생뿐만 아니라 호스테스. 병아리 탤런트에까지 손을 뻗쳐 마음 내키는 대로 즐겼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고향에 돌아가면 더 큰 즐거움이 있다는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대학을 졸업한 지도 벌써 8년이나 되었다. 고향이 더 즐거울 것이라는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진짜 즐거움은 지금부터였다. 다카나와 호텔에 체크인한 스스무는 애터쉐 케이스를 들고 16층으로 올라갔다. 도쿄에 와서 머무는 호텔은 미리 정하지 않았다. 같은 호텔을 계속 이용하지 말라는 노보루의 명령 때문이었다. 예약은 반드시 하지만 본명을 사용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트윈룸에 들어서면서 전화부터 걸었다. 제일 먼저 가카와 운송 사장실로 다이얼을 돌렸다. 노보루만 이용하고 있는 직통전화였다. "네." 노보루의 목소리는 어둡고 우울했다. 좀처럼 감정변화를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형이었다. 전화 속에서는 마치 임종을 맞는 환자 같기도 했다. "막 도착했어요." "알았어. 핸디폰, 스위치 넣어둬. 무슨 일이 있음 연락할께." "네." "스미, 감당할 자신 있어?" "모르겠어요, 부딪쳐 보기 전엔." "될 수 있는 대로 녀석 혼자 오게 해. 만약 일이 꼬이게 되거든 호텔 체크아웃하고 요쓰야로 가도록 해." "알았어요." "배짱 두둑히 가져." "알고 있다니까요." 노보루는 전화를 끊었다. 후크를 누르면서 스스무는 길게 숨을 내뿜었다. 자기를 걱정해 주는 노보루를 생각하자 가슴이 저려왔다. 하지만 이것은 형제가 결정한 역할 분담이었다. 노보루는 고향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쿄에서 야쿠자와의 교섭은 전부 스스무가 맡고 있었다. 요쓰야 맨션 아파트는 언제든 사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한 <안가>를 도쿄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야쿠자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어서 다른 번호를 돌렸다. "네! 교에이카이 후지노구미!" 기세등등한 젊은이 목소리였다. "하라답니다. 스미씨, 계신가요?"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젯밤 이미 확인한 일이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80일간의 세계 일주> 주제곡이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야쿠자 사무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스밉니다." 달착지근한 바리톤이 음악을 갈랐다. "하라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몇 시쯤 찾아뵐까요?" 스미가 물었다. 스스무는 손목시계를 보면서 재빠르게 계산해 보았다. "7시쯤이 어떨까요?" "7십니까? 좋아요. 로비로 갈까요?" "아니. 이곳 2층 중국 식당이 좋겠어요. 방을 예약해 두죠." "다카나와죠. 호텔은?" "네.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혼자 와 주셨으면 좋겠군요." "네, 알고 있어요. 주차장에서 기다리게 하죠, 뭐."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그럼...... " 스미는 전화를 끊었다. 일단 이로써 스미와 대등한 담판이 가능하게 된 셈이었다. 스스무는 다시 길게 숨을 내뿜으면서 침대 위에 벗어던져 놓았던 웃옷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불을 붙여 한모금 빤 다음, 샤키 집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부스스 잠을 깰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잠이 덜 갠, 투정부리는 목소리였다. "잠 깼나? 대낮부터 혼자 그 짓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머, 벌써 도착했어?" 입을 쩍 벌리며 하품하는 소리에 이어서 샤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방금." "어디야, 호텔은?" "다카나와." "다카나와? 올 여름 그곳 풀에 갔었어, 다섯 번쯤." "대머리랑 함께?" "아니야. 헤어진 지가 언젠데. 이상한 소리만 골라 하고 있어, 스스무씬." "툭 털고 일어나 곧장 달려와." "나 출근할 때 같이 가 줄래?" "오늘은 안 돼. 사업 파트너와 저녁식사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김새네." "끝나면 가게에 들를께." "몇 시쯤?" "몇 시면 어때서? 손님 구슬리는 호스테스 말툰 집어치워." "어머, 내가 호스테슨줄 여태 몰랐어?" 샤키는 응석부리듯 말했다. "그만두구 싶음 아무 때나 그만두라구, 호스테스는." "싫어." "먹고 살 만하게 됐잖아?" 샤키한테 한달에 1백만 엔씩 건네 주고 있었다. 거기다가 포르세 911 도 무기한 빌려 주고 있었다. "따분한 건 질색이야. 참,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오늘 가게 쉴 테니까 함께 디스코텍 어때?" "디스코?" "마음에 드는 여자 있음 옆에서 거들어 줄께." "너보다 더 좋은 여자, 또 있을려구?" 샤키는 목젖을 굴리며 쿡쿡거렸다. "마음 달뜨게 해 주는군, 바람둥이가." "시골뜨기이니까. 도쿄 아가씨 앞에선 눈에 아무 것도 안 보여." "어머, 그러세요?" 스스무는 애가 탔다. 샤키의 멋진 알몸이 어젯밤부터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빨리 와." "시간, 몇 시까지 있어?" "6시 30분." "충분하군. 반쯤 죽여 줄께." "정말이지?" "응. 대신, 일 끝나면 다시 만나 줘야 해." "할 수 없군. 전화할께." "오케이. 금방 갈께." 샤키는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스스무는 넥타이를 풀었다. 샤키의 아파트는 고단가이니까 30분 거리밖에 안 되었다. 그동안 샤워를 하기로 했다. 샤키가 방에 들어오는 즉시 그 자리에서 한판 벌일 생각이었다. 양장차림 그대로 팔짚고 엎드리게 해서...... 스스무는 양장차림 여인과의 섹스를 즐겼다. 한판 벌인 다음엔 샤키에게 오럴 서비스를 시킬 생각이었다. 오럴은 샤키의 특기였다. 풍만한 가슴을 흔들어대고 거친 숨을 내뿜으면서, 스스무가 그만하란 말을 할 때까지는 결코 입을 떼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이미 하체가 단단하게 머리를 쳐들었다. 샤키는 스스무의 취향을 알고 있었다. 검정색 가터 스타킹에 반짝이가 박힌 대담한 보디콘 원피스 차림이었다. 유방 융기가 드러날 만큼 깊숙이 파인 가슴엔 선글래스 줄이 늘어져 있었다. 이런 차림에 선글래스를 끼고 빨강 포르세를 몰고 다니는 샤키가 뭇 사내 시선을 끌었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스스무는 배스 로브 차림으로 샤키를 맞아들였다. "샤워했어요?" 말하면서 뒤로 손을 돌려 도어를 닫는 샤키를 스스무는 잡담 제하고 바닥에 쓰러뜨렸다. "어머! 왜 이래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샤키의 몸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니 스커트 자락을 걷어올리고 팬티를 무릎까지 벗겨내리자 샤키는 달착지근한 콧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미 이렇게나......" 샤키는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스스무를 돌아보면서 생긋 웃음과 함께 혀를 쏙 내밀었다. 은색의 알약이 보였다. "빨면서 왔군. 밝히긴, 너두 참. 약발, 잘 듣지?"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원래부터 넌 남잘 밝혔잖아?" 스스무는 샤키 몸 속으로 들어갔다. 샤키가 비명을 질렀다. 배스로브 앞자락을 젖히고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1분도 채 안 되어 샤키는 첫번째 고개를 넘었다. <아이스캔디>는 놀라울 정도로 효과가 있었다. "정말......" 한참 뒤 침대에 누운 채로 스스무가 중얼거렸다. 스스무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알몸의 샤키가 고양이 새끼처럼 혀를 움직이고 있었다. "애니타임, 애니웨어 여자야, 넌." "무슨 뜻이야, 그게?" 숨막힌 소리로 샤키가 물었다. 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입에 물었다. 스스무는 길게 숨을 내뿜었다. "언제 어디서든 오케이란 뜻이야. 입 다물고 있으면 절대로 소문도 안 날 테구......" "쓸데없는 소리 그만둬. 앗, 끝나 버렸네." "끝나다니, 뭐가?" "뻔하잖아. 잠깐 기다려." 샤키는 스스무 몸 위로 팔을 뻗쳤다. 아래에 깔린 스스무가 신음소리를 냈다. 샤키가 침대 옆 테이블에서 샤넬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안에서 <아이스캔디>를 한알 꺼내어 입에 넣었다. "이걸 빨면서 서비스해 줄까? 정말 잘 들어." "아까 것, 벌써 약효가 끝났단 말야?" "응. 30분도 채 계속 안 돼. 바람처럼 일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거든." 샤키는 말하면서 다시 스스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스스무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샤키가 이 정도로까지 빠져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샤키에게 <캔디> 맛을 가르친 것은 스스무였다. 고등학교를 중퇴, 록봉기 클럽 호스테스가 된 이래 샤키는 대마초.코카인 등 각성제에 맛을 들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캔디> 였다. 섹스를 밝히는 샤키를 더더욱 황홀경에 빠지게 한 약물이 바로 <캔디> 였던 것이었다. 샤키와는 1년 전, 그녀가 일하고 있던 술집에서 알게 되었다. 일을 그만두고 싶어했기 때문에 한달에 1백만 엔씩, 석 달동안 뒤를 보살펴 주었었다. 석 달 뒤 지금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어도 매달 1백만 엔씩 건네 주고 있었다. 지금의 스스무에겐 샤키가 바로 도쿄 자체였다. 도쿄로 출장 오는 목적은 그러나 샤키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도쿄에 와 있다는 유일한 증거를 그는 샤키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 찾았다. 짧으면 1박 2일, 길 경우엔 1주일을 도쿄에서 보내는 동안 스스무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횟수, 샤키와 섹스를 즐겼다. 고향에는 샤키 같은 여자가 없었다. 단순히 음란만 찾으면 있을지도 몰랐다. 외모가 근사한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만한 외모에 섹스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거기다가 <아이스캔디> 까지 즐기는 여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노보루는 샤키와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게 되면 엄청 화를 낼 게 틀림없었다. 특히 샤키에게 <캔디> 맛까지 가르친 걸 안다면 길길이 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동안은 샤키의 몸맛을 단념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갑자기 스스무는 손가락.발가락 끝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동시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면서 시야가 환해졌다. 하반신에서 퍼져 올라오는 쾌감이 머리 속까지 뒤흔들었다. - 왔구나! 스스무는 눈을 깜박거렸다. 샤키의 침 속에 녹아든 <캔디>가 스스무의 성기 점막으로 스며들어 전신으로 약효가 퍼진 것이었다. 샤키에게도 약발이 퍼진 듯,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콧소리를 읊으면서 몸을 비꼬았다. 수영복 자국이 뚜렷한 샤키의 가슴팍으로 스스무는 손을 뻗쳤다. 젖꼭지는 이미 돌처럼 단단했다. 손가락으로 만지는 순간 샤키는 촉촉한 비명을 질렀다. - 더는 못 참겠군. 스스무는 엄청난 괴력이라도 생긴 듯, 두 손으로 샤키를 안아올렸다. 빨리, 빨리...... 샤키는 눈빛으로 부르짖었다. 샤키를 번쩍 들어 말 타는 자세로 배 위에 앉히고 결합했다. 샤키의 고운 목줄기가 뒤로 젖혀졌다. 두 사람은 부서진 기계인형처럼 격렬하게 몸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스미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타났다. 지금까지 사귀어 오는 동안, 스스무도 야쿠자란 그런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제몫을 해 내는 야쿠자라면 보통 인간보다 앞서는 점이 딱 한가지 있었다. 심리전의 전문가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령 만나기로 한 약속. 정해진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현장에 나타나거나, 상대방이 지쳐 자빠지도록 기다리게 한다. 어느 쪽이 됐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기다리게 할 때에도 중간중간 연락을 하면서 기다리게 하는 경우와, 아무런 연락 한마디 없이 기다리게 하는 경우와는 상대방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가 다른 법이었다. 그리고 나타날 때에도 상대방의 의표를 찔러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온다든가, 그런 것을 예기하고 있는 상대방이라면 달랑 혼자 나타나든가 해서 항상 상대방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었다. 앉는 장소도 미리 계산하는 것이었다. 윗자리, 아랫자리와 같은 단순한 구별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해야 할 경우와, 반대로 몰아세워야 할 경우에 따라서 심리적 효과를 계산하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든 상대방에 대해 정신적 우위를 확보, 이쪽이 바라는 결론을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내놓도록 세심하게 연출했다. 제대로 된 야쿠자라면 그런 테크닉에도 능숙했다. 그런 방법론을 가르쳐 주는 학교는 물론 없다. 보스나 선배들 어깨 너머로 스스로 배워 깨우쳐야 했다. 학력과 이론만으로는 살아 남을 수 없는 세계에서, 더구나 가능한 한 직접적인 폭력행사 없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짜낸 이른바 생존의 지혜인 동시에 전술이기도 했다. 심리전 가운데 가장 단순하면서 효과가 빠른 것이 폭력을 등에 진 공갈이란 것쯤은 스스무도 스미네와 사귀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폭력을 과시하는 방법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 상대방에게 직접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머리 나쁜 야쿠자들이나 할 짓이었다.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가는 패들이라면 자기 패거리 중에 한사람을 상대방과 친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스스무의 경우, 스미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렇게 해서 스스무에게 어떤 압력을 가할 필요가 생기면 스미를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 약간, 착오가 생기는 바람에...... 어느날, 스미가 부상한 몸으로 스스무 앞에 나타났다고 치자. 스스무가 왜 그렇게 됐느냐고 물어도 스미는 좀처럼 분명한 대답을 않는다. 그래도 넌지시 스스무와도 관련이 있음을 내비친다. 신경이 쓰인 스스무가 스미를 몰아세운다. 그러면 그제서야 스미도 내키지 않는 듯한 말투로 구미가 스스무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스스무가 응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자기가 대신 대답했다고 밝힌다. 결과, 구미가 스미에게 <감독 불충분>을 트집잡아 제재를 가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고 전말을 털어놓는다. - 신경쓸 것 없어요. 잊어 주세요. 이건 말하자면 집안 일, 단추를 잘못 잠근 거나 다름없어요. 그러나 숨쉴 틈도 없이 스미는 스스무를 호출한다. 그때에는 구미가 바라고 있는 진짜 요구사항을 스스무에게 통고한다. - 지난번은 내 힘으로 어떻게 막아냈지만 이번은...... 그럴 때 스스무가 구미의 요구를 거절하면, 스스무를 감싸 주느라고 몸까지 다친 스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럴 경우, 스스무는 구미 뿐만 아니라 스미 개인의 분노까지 감당해 내야 할 걸 각오해야 한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모두 연출된 것임을 눈치 챈다 하더라도 스스무에겐 이미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야쿠자는 인간의 그러한 심리적인 허점을 비집고 드는 것이었다. 한번 빠져들면, 모든 것이 그러한 테크닉으로 연출된 것임을 알게 되지만, 그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었다. 상대방 요구를 들어 주는 것 이외에는 빠져 나올 방법이 없는 것이다. 물론 경찰이라는 또 하나의 탈출구가 있긴 하지만. 스미는 스스무가 약속시간보다 20분 일찍 와 있는 걸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라다씨한텐 안 되겠군요." "스미씨가 언제나 일찍 오니까, 나 역시....." 스스무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음식은 제가 마음대로 적당히 주문해 놓았어요. 괜찮죠?" "그럼요. 괜찮구말구요." 종업원이 가져온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으면서 웃음진 얼굴을 끄덕였다. 오늘밤의 스미는 감색 블레이저에 체크 무늬 슬랙스, 흰 와이셔츠에 빨강색 레리멘틀 타이 차림이었다. 스스무는 이태리제 소프트 수트였다. "우선 목부터 축입시다." 스스무는 맥주병을 잡으면서 말했다. "아니, 그럴 수 없어요. 하라다씨부터 받으세요." 스미가 맥주병을 뺏듯이 해서 스스무 글래스에 따랐다. 피딴 (皮蛋, 오리알 요리) 과 해파리 절임 같은 전채가 나왔다. "건배!" 두 사람은 글래스를 부딪쳤다. "혼자 오시라고 한 것, 정말 죄송합니다." 스스무는 숨도 안 쉬고 한잔 마신 다음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하라다씨와 나 사인데......" 느닷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스스무를 스미는 놀랐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사실은 오늘 할 얘기는 단둘이 아니면 여러 가지로 곤란할 것 같아서. 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스미씨만 모셔야 하겠기에......" 스스무는 스미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니, 그냥 차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웨이터가 요리를 날라왔다. 닭고기와 야채볶음, 각시새우찜이었다. 웨이터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스스무는 입을 열었다. "우선 오늘, <물건>을 10만 개쯤 가지고 왔어요. 하지만 당분간 더이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스미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스스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만두기로 했나요?" "아뇨." 스스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더듬거렸다. "그만두기로 한 건.... 아닙니다.... 다만......" "가격 때문인가요?" "한마디로 자르자면 그래요." 스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죠. 지금 가격으로는 언젠가 무리가 올 줄 알았어요." 그리고는 똑바로 스스무를 응시했다. "말씀해 주세요, 얼마면 되겠는지." "지금의 네 배." "네 배?" 한순간, 스미의 온화한 표정이 구겨지는 것같이 보였다. 눈빛에 분노의 기색이 날카롭게 번쩍인 것을 스스무는 놓치지 않았다. "......우리한테 1백60엔에 넘기겠다는 뜻인가요?" "네. 아무래도 지금 값으로 계속하는 건 무리......" "잠깐, 내 말부터 들어 주세요." 스미는 스스무의 말을 중간에서 막으면서 눈을 감았다. 머리 속으로 잽싸게 계산을 해 보았다. "......지금 우린 2백20엔에서 2백50엔으로 넘기고 있소. 그걸 1천엔으로 올려야 한다, 이 말씀이로군." "네." 그만큼 당신네 이익도 늘어나는 것 아니오, 하는 말을 스스무는 꿀꺽 삼켰다. ".....그 값이라면, 언제부터 공급을 재개할 수 있나요?" "내년....." "안됩니다. 너무 늦어요. 지금 물건 만드는 곳은 당신네 뿐입니다. 하지만 내년이라면 반년 뒤가 돼요. 그렇게 오랫동안 공급이 끊기면 만들려고 덤비는 녀석이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란 걸 왜 생각지 않나요?" "하지만 그 값으론 절대로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알고 있어요. 그건 우리도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기간을 너무 벌리는 건 위험해요. 그래선 안 됩니다." "만약 유사품이 나온다 해도 품질이 떨어질 게 분명합니다." "그건 그렇겠죠. 하지만 고객들은 그런 줄 모를 겁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닥에 깔려 있는 밀매인들입니다. 녀석들도 거기에 밥줄을 달아놓고 있으니까 우리가 공급해 주지 않으면 다른 걸로 구멍을 메우러 들 게 분명해요." "그 기간 동안, 그렇다면 다른 물건으로....." "그건 안 됩니다!" 스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왜?" "하라다씨, 당신만큼 우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상황을 잘못 읽고 있다니....." 스스무는 말없이 스미를 바라보았다. "우리들 생업에는 반드시 자기 구역이 있게 마련이오. 막말로 해서 포장마차라도 어제 오뎅이 안팔렸다고 해서 오늘 볶음국수로 바꿀 순 없는 것 아니오? 그렇게 했다가는 처음부터 볶음국수를 팔던 사람한테 얻어맞기 십상이죠." "그럼 당신네들은......" "우린 한동안 그런 장산 하지 않았소. 몇 년인가 전에 트러블이 있었기 때문이죠. 해서 그때까지 취급하던 톨루엔에서 손을 뗐소." 스미는 나지막하게 한마디 한마디 잘라서 말했다. "트러블....." 스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우선 식기 전에 듭시다. 얘긴 먹어가면서 하기로 하구." 스스무도 젓가락을 집었다. 새로 전복 요리가 나왔다. "이봐요. 라오주, 도쿠리로 좀 갖고 와요." 스미가 웨이터에게 명령했다. "알았습니다." 웨이터가 물러가자 스미는 글래스에 남아 있던 맥주를 쏟아붓듯이 들이켰다. 막혔던 숨을 내뿜으면서 물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로 마가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사가 분명한 녀석이죠. 나인 나보다 아래이지만, 나이를 떠나서 즐겁게 부하 노릇을 할 수 있어요, 나는."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군요." 스미는 일단 고개를 한번 내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행중이죠, 지금은." "여행?" 되받아 중얼거리던 스스무는 무슨 뜻인지 알만했다. 복역중인 것이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다른 건이었어요. 도저히 눈감아 줄 수 없는 외국인이 있었어요. 그들과 담판지으러 갔었죠. 마가베가. 결국 한명은 죽고 또 한명은 중상...... 마가베도 난자당해 죽을 뻔했죠." "몇 년이나....." "벌써 3년이 다 되어갑니다.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한 3년 더 걸릴지 모르겠군요. 당시의 우리 생업은 톨루엔과 여자였어요. 외국인과 옥신각신하게 된 건 여자 때문이었구요." "그렇다면 새삼 왜?" 스미는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었다. 망설이는 것 같았으나 결국 입을 열었다. "마가베가 맡았던 건 톨루엔이었어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그땐 마가베가 대신 가게 된 거죠. 한데 그 사건이 터지기 직전, 우리 구역에서 풋나기 그룹이 톨루엔 장사를 하다가 들킨 일이 있었어요. 녀석들에게 인사법을 가르쳐 준다는 게..... 조직의 젊은이들이 좀 심하게 굴었나 봐요. 신주쿠 서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일이 커져 버렸죠." "심하게 굴었다." "사망자가 생겼단 말입니다. 조직에선 즉각 자수를 시켰습니다. 허나 살인 쪽이 아니라 톨루엔 쪽에 독불장군이 한사람 있었어요, 신주쿠 서에. 녀석이 집요하게 뒤를 쫓기 시작했어요. <상어> 라는 별명을 가진 밉살스런 놈입니다. 녀석은 그 사건을 기화로 우리 쪽 톨루엔 루트를 뿌리 뽑자고 덤볐어요. 어쨌든 밥맛 없는, 얘기가 안통하는 벽창호로 경찰조직에서도 따돌림을 받는 사내죠." "<상어> 라고 했나요?" "별명이 그래요. 사메지마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 <신주쿠 상어> 라고 하죠. 신주쿠에서 어슬렁거리는 양아치라도 좋으니까, 한번 물어보세요. 모르는 녀석이 없을 겁니다." 스미가 내뱉는 <상어> 라는 단어엔 어딘가 흉흉한 느낌이 들었다. 스스무는 처음 들어보는 형사 이름 앞에서 발끝이 저려오는 불안감을 한순간 느꼈다. "하지만 결국 녀석은 우리 뿌리까지는 뽑지 못했어요. 하지만 마가베가 여행을 떠나게 된 사건이 뒤를 이어 터졌어요.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톨루엔에서 손을 떼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겁니다. 그 무렵이 우리로선 제일 어려웠던 시기였어요." "마가베씨를 체포한 것도 사메지마라는 형사였나요?" "그는 자수했어요. 허나 어찌 된 까닭인지 마가베는 그 녀석이 마음에 든댔어요. 분명한 사람이어서 기분이 통한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상어는 단지 집요하기만 한 멍청입니다. 모두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바람에 어떻게 된 녀석입니다. 그런 멍청한 녀석을 정말 겁낼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을 것 같습니까?" 스스무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일이 있었던 탓에 당신네는 톨루엔에서 손을 뗀 거로군요." "그렇게 된 셈이죠. 우리가 물러난 자리는 눈깜짝할 사이에 메워지더군요. 그래도 우리 구역에서 새로 시작하는 녀석들에게 우린 언제든 톨루엔을 다시 팔 수 있다고 못을 박았었죠. 때문에 당신 말대로 다른 대용품을 찾자면 톨루엔 파이프를 재개시키는 것 이외엔 다른 길이 없어요. 톨루엔은 무방하지만, 다른 건 안돼요. 다른 각성제는 따로 취급하고 있는 조직이 있어요. 기득권이란 거죠, 그게." "<캔디>는 다릅니까?" 두 사람의 말소리는 자연히 소곤거림으로 변했다. "그건 지금까지 없었던 거니까요. 따라서 처음 손댄 우리한테 기득권이 있어요." "기득권? 그렇군요." "하라다씨, 아까 내가 파이프를 재개시킨다고 했었죠? 하지만 일단 밸브를 잠갔던 파이프를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연다는 건 엄청 어려운 일입니다.젾都鳴?톨루엔은 마가베의 생업이었구요. 가능하다면 그가 나올 때까지 그냥 놔두고 싶은 게 내 솔직한 마음입니다. 녹슨 파이프일지 모르지만 그건 제 것이 아니에요. 마가베 것입니다. 난 그런 일엔 분명한 사랍입니다." 스스무는 입술을 핥았다. 웨이터가 따뜻하게 데운 소홍주 포트를 들고 왔다. 스스무는 말없이 스미에게 따라 준 다음 자기 잔에도 따랐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스미는 열심히 젓가락질을 했다. 스스무도 거기에 맞추어 부지런히 음식을 먹었다. 식욕은 별로 없었다. 이야기에 신경을 쓴 탓이 아니라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샤키와 <아이스캔디> 때문이었다. 이윽고 식탁 위엔 빈 접시만 남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웨이터가 북경 오리말이와 상어 지느러미 수프를 가지고 왔다. "이거, 상어 지느러밉니다." 스스무는 스미와 얼굴을 마주 보면서 웃었다. "녀석도 언젠가 이렇게 푹 고아 삶아봤으면 재미있을 텐데....." 스미의 말이었다. 북경 오리말이를 베어문 스미는 손가락에 묻은 즙을 핥았다. "하라다씨. 값을 올리는 건, 판매조직을 설득할 수 있어요. <캔디>는 인기상품, 그렇다고 한꺼번에 네 배씩이나 값을 올리면 반발이 생기겠지만..... 다른 것들도 지금까지 값이 많이 올랐어요. 하지만 반년씩이나 공급을 중단한다는 건 말도 안됩니다. 너무 심해요." "어느 정도면 기다릴 수 있나요?" "길어야 두세 달, 가능하다면 한달이 좋겠어요. 당신이 가지고 온 10만 정도론 2,3 주일치 밖에 안 돼요. 눈깜짝할 사이에 없어지죠. 만약 공급이 끊긴다면 밀매인들은 다른 곳을 찾아 떠나겠죠." "하지만 기득권이 있다고 방금 말했잖아요?" 스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공급할 물건이 있을 때의 얘기죠. 물건이 없어지면 기득권이고 나발이고 없어요. 아까 말한 톨루엔처럼 다시 시작할 순 있지만, 새로 들어온 녀석들을 쫓아내는 건 안돼요. 다른 녀석들을 배제할 수 있는 건 장사가 계속될 때의 얘깁니다." "그처럼 빨리 밀매인이 흩어져 버릴 수 있나요?" "당신은 그들을 잘 몰라요. 녀석들은 쓰레기예요. 돈이라면 뭐든지 하는 녀석들이죠. 비록 야쿠자이긴 하지만 우리도 경우에 따라선 점잔을 뺄 때가 있지만 녀석들에겐 그게 없어요. 태연히 돌아서서 발뒤축을 물고 늘어지는 녀석들입니다." "그럼 다른 구미들은 어떤가요? <캔디>가 스미씨네 것인 걸 모른다고 하더라도 어떤 다른 구미 것인 건 알고 있을 것 아니오? 만약 조악한 유사품을 제조해서 뿌린다면 싸움이 벌어질 것이 뻔한데도......" "때가 나빠요." 스미는 짧게 자르듯이 내뱉었다. "지금 일본 구석구석을 뒤지더라도 돈이 많이 벌려 낄낄거리는 구미는 한곳도 없어요. 그 정도가 아니라, 불면 날아갈 작은 구미들은 폐업 직전에 몰려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 녀석들이라면, <전쟁>이 싫긴 하지만 다소 의리를 저버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다소 의리를 저버린다 하더라도 <전쟁> 까진 번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압력을, 넌지시 압력을 넣으면......" "그건 우리가 총판이란 걸 선전하고 다니는 거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지간한 녀석들은 손을 대지 않겠죠. 대신에 경찰이 왁하고 몰려올 겁니다." 스스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미가 그런 스스무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캔디>에 관한 한, 당신네와 우린 지금까지 잘해 왔어요. 당신 지혜 덕분이라고 깊이깊이 고마워하고 있어요. 특히 싼값으로 풀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시킨 아이디어는 정말 높이 살만해요. 덕분에 지금 최고 인기품으로 유행하게 된 거죠. 때문에 그걸 놓치기가 싫어요. 절대로 놓칠 수가 없어요. 가격이야 어찌 되었든 공급 중단만은 다시 생각해 주세요." 스스무는 입을 다물었다. 노보루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스미는, 노보루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로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 다음은 끓어 앉겠지. 느닷없이 스미가 테이블을 밀치면서 일어서더니 바닥에 무릎을 끓었다. "부탁합니다, 하라다씨." "이러지 말아요.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일어나세요." "정말? 정말 알아주는 겁니까?" 미심쩍은 눈으로 스스무를 바라보았다. "네. 한달로 하면 어떨까요?" "한달이라면, 실제 공급이 끊기는 건 2주일..... 그 정도라면 어떻게 꾸려갈 수 있어요. 아니, 그 정도라면 오히려 값을 올리는 구실이 될 수도 있어 안성맞춤이죠." 스미의 말투가 빨라졌다. 스스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둘러서 수배해야겠군요." "고마워요, 하라다씨. 당신 배후 인물이 누군지 난 잘 모르지만 당신네들, 정말 머리가 좋군요." "알고 싶은가요? 내 배후 인물?" "알고 싶지 않아요. 서로 모르고 있는 게 좋아요. 얘기가 잘 되어 가는 동안엔." "스미씨, 폐를 끼치게 된 사과를 겸해서...... 이번의 10만 알, 2백에 드리죠." "뭐라고요? 그건 반값밖에 안 되는데......"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걸 대 주는 사람이 나보구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스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라다씨, 당신네는 정말 의리와 인정이 두터운 사람들이군요. 내가 반해 버릴 것 같아요." 스스무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하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스미가 그렇게 감격스러워할 걸 노보루는 이미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스미의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신용하면 안 돼. 녀석들은 아무 때나 불쑥 화를 내는 것처럼 언제든 정말로 울어 보이는 게 장기야. 스미는 손을 뻗쳐 스스무의 손을 맞잡았다. "하라다씨, 오늘밤 우리 한번 실컷 마셔봅시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스미가 그렇게 나오자 매정스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았습니다. 우선 전화부터 걸어야 할 곳이 있으니까......" "그러세요." 스스무는 방에서 나왔다. 샤키와 어울릴 수 있는 건 빨라야 12시가 지나서일 것 같았다. 중국 식당 전화 대신에, 스스무는 로비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네." 회사에 있던 노보루는 첫번째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들었다. "예정대로 얘기를 끝냈어요." "한달인가?" "한달." "2백만 건은?" "녀석,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감격하더군요." "조심해. 오늘밤은 적당한 곳에서 녀석과 헤어져. 호텔엔 돌아가지마. 깊게 빠져들 찬스를 만들면 안 돼." "알고 있어요." "그 외 다른 건 없었나?" "형사 얘기가 나왔어요. 신주쿠 서의 사메지마. 무척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신주쿠 서의 사메지마? 알았어.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군." 메모하는 기척이 수화기를 타고 느껴졌다. "그만 끊겠어요." "조심해." 전화를 끊은 스스무는 중국 식당으로 들어갔다. 카운터로 가서 현금으로 계산을 마쳤다. 갑자기 체크아웃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프론트에 미리 맡겨둔 돈이 모자랄 수도 있기 때문에 사인으로 달아놓는 걸 피한 것이었다. 전도금을 풍족하게 지불해 두면 외출한 곳에서 바로 체크아웃하더라도 호텔은 문제 삼지 않았다. 스스무는 다시 룸으로 들어갔다. 스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은행두부를 먹고 있었다. 4. 사메지마가 하즈노 히로시를 감시한 지 나흘이 지났다. 하즈노가 감시를 눈치 챈 것 같은 낌새는 없었다. 그러나 그 4일 동안 <아이스 캔디> 밀매를 뒷받침할 만한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하즈노가 근무하는 수입 중고차 판매회사 위치는 세다가야 구 치도세다이, 환상8호선 도로변이었다. 유럽 차 전문업체로 종업원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개 하오 8시쯤 퇴근하는 하즈노는 지난 나흘 동안 곧바로 귀가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출근은 11시 전후, 결코 이르다곤 볼 수 없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것이 주업무인 듯,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열심히 일하는 듯했다. 물론 사메지마 혼자 하즈노의 움직임 전부를 감시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멍이 있게 마련이었다. 사메지마는 퇴근 이후의 하즈노 움직임을 중점적으로 감시해 오고 있었다. 하즈노가 바깥일로 돌아다닐 적에 물건을 공급받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드나드는 사람을 특정할 수 없는데다 동료들의 눈도 있는 근무처에 떼온 물건을 보관해 두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난 나흘 동안, 하즈노는 이틀은 시부야에서, 그뒤 이틀은 록봉기와 지유가오카에서 즐겼다. 하즈노의 밤놀이 패턴은 한 지역에 머무는 법 없이 이곳 저곳 옮겨다니는 것이었다. 그런 점으로 봐서 폭력단원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폭력단원이라면 당연히 드나들 수 있는 지역과 그렇지 못한 곳이 있게 마련, 따라서 밤놀이 지역 역시 한정되어 있었다. 또 폭력단원으로 뵈는 사람과의 접촉도 없었다. 하즈노가 나흘동안 드나든 곳은 디스코텍 두 곳, 스낵 세 곳, 클럽 두 곳이었다. 클럽은 록봉기와 지유가오카, 디스코텍은 시부야.록봉기였고, 스낵은 클럽 호스테스와 함께 가까운 곳을 이용했었다. 씀씀이가 무척 헤픈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흘 동안 같은 집을 두번씩 이용하지도 않았다. 또 디스코텍에는 회사 동료로 뵈는 사람과 한번, 머리가 긴 20대 초반 아가씨와 한번 간 게 전부였다. 그 아가씨와는 디스코텍을 거쳐 러브 호텔로 갔었다. 사메지마는 새벽 4시, 러브 호텔에서 나온 수 사람을 미행했다. 하즈노는 아가씨를 숙소까지 바래다 주었다. 아가씨의 숙소는 기누다에 있는 간호사 기숙사였다. 사립대학 부속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올해 스물세살이었다. 사메지마는 반나절에 걸쳐 그 간호사에 관해 조사해 보았다.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면 <아이스캔디> 수급에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메지마가 조사해 본 범위 안에선 간호사는 결백했다. 놀기를 좋아해서 하즈노 이외에도 복수의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그 반면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있는 듯, 아르바이트로 물장사라도 해야겠다고 동료들에게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녀가 <캔디> 밀매에 관여하고 있다면 당연히 거기에 따른 보수도 받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사메지마가 그녀를 결백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바로 거기 있었다. 또 탐문을 통해 안 것이지만, 주변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인물평가는 뭘 숨기고 있을 사람이 아니란 점도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그런 타입의 사람을 공범자로 선택할 까닭이 없지 않는가. 혼자만의 감시는 자기불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하즈노가 어디선가 <캔디>를 공급받는 걸 놓쳐 버린 건 아닐까. 잠을 설쳐가면서 쌓인 피로와 싸우는 이런 감시는 헛수고가 아닐까. 그러나 하즈노가 나흘동안 한번도 <캔디>를 공급받지 않았다고 믿는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었다. 즉, 하즈노가 물건을 떼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팔러다니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만약 이 나흘 동안 하즈노가 이미 체포된 나카야마와 같은 말단 밀매인에게 물건을 넘기는 장면을 목격이라도 했다면 사메지마의 감시에 구멍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하즈노와 같은 소매인은 보통 공급받은 물건을 오랫동안 보관하지 않는게 관례였다. 가지고 있어봤자 1엔짜리 동전 한닢 저절로 굴러 들어오지 않는 법, 오히려 위험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즈노가 말단 밀매인으로 보이는 소년 그룹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것은 물건을 공급받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닷새째, 사메지마는 신주쿠 서로 출근했다. 하즈노를 감시하고 있음을 상사인 모모이에게 보고해 놓고 있었다. 사메지마가 서로 출근한 것은 <아이스캔디> 성분 분석 결과가 오늘쯤 나올 것 같아서였다. 점심시간보다 약간 빠르게 사무실에 나타난 사메지마를 맞아 준 사람은 모모이 혼자였다. 과원은 모두 식사나 외근 나가고 없었다. 비행방지 달이었기 때문에 소년계 응원 나가느라고 바쁜 모양이었다. "표정으로 봐선 아직 빈손인 것 같군." 모모이가 콧등으로 흘러내린 안경 너머로 사메지마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직 나흘밖에 안됐는 걸요, 뭘." 사메지마의 대답에 모모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혼자론 벅차지?" 사메지마는 대답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런 줄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모모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모이는 서류 홀더를 사메지마 앞으로 내밀었다. "자네 육감이 맞았어. 대학에서도 과경연(科警硏) 에서도 <캔디>의 국적을 밝혀내지 못했어. 기존의 <약물지문> 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게야." 모모이는 사메지마를 응시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본청 보안2과도 이 결과에 충격이 큰 것 같았어. <캔디> 수사를 맡을 특별 팀 구성 얘기까지 나온 모양이야." "인력이 있답디까?" "없어." 모모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2과는 지금 맡은 일만으로도 쩔쩔매는 형편이야." 마약.각성제 수사는 내사단계에만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든다. 밀매인 한사람, 밀매조직 한곳 덮치는 데에 경우에 따라서는 6개월에서 1년이 걸리기도 한다. 수사의 대부분을 지금 사메지마가 하고 있는 것처럼 효율 낮은 감시활동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밀매소를 설령 알아냈다 하더라도 당장 덮치는 것이 아니라 출입자를 비디오로 담아가면서 가능한 한 광범한 검거를 노린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검거는 1년에 한두번이 고작이고 그 이외의 시간은 묵묵히 감시와 내사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물론 밀고라도 들어오면 별문제이겠죠." 사메지마의 말에 모모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각성제 수사는 대부분이 밀고에 따라 시작된다. 조직간의 경쟁, 동료간의 시기. 범죄자, 특히 마약.각성제 사범 세계에는 의리도 우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어 주고 있는 것은 약을 입수하는 데 필요한 정보뿐이다. 더군다나 예외없이 누구나 발을 씻어야 한다, 씻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을 씻은 사람 앞에선 열등감을 느끼게 마련이고, 그 열등감은 급기야 증오심으로 번지기도 한다. <각성제를 그만둘래, 인간을 그만둘래?>는 그런 의미에서 명표어에 속한다. 인간이기를 그만둔 동안은 <한패거리> 이다. 거기엔 자기연민 비슷한 연대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으로 되돌아간 사람은 이미 한패가 아닌 것이다. 이는 마약.각성제 상용자들의 증언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마약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을 한패로 맞아 주는 유일한 사람은 같은 중독자들 뿐이었다.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마약을 그만둘 용기를 되찾았을 때 비로소 깨닫는다. 이런 경향은 10대 톨루엔 중독자들에게도 있다. 학교와 가정으로부터 소외된 채 같은 톨루엔 중독자만이 친구로 보였다는 소년을 흔히 볼 수 있다. 자기불신과 불안감이 그런 경향을 더욱 조장하는 것이다. 마약.각성제 중독자들 가슴 속에는 거대한 늪처럼 끝없는 자기 혐오와 인간불신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범죄보다도 밀고에 의한 발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밀고자가 나타날 만큼 <캔디>로 돈을 번 조직이 있다는 얘길 들어보지 못한 데 있어." 불황과 개정법이 폭력단을 코너로 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스캔디>는 누군가의, 아니면 어느 조직의 금고를 두둑하게 채워 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메지마가 이상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그런 소문이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폭력단은 전례가 없는 겨울을 맞고 있었다. 어느 조직이든 말단은 신음과 함께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씀씀이가 좋은 구미가 있다면 틀림없이 구설수에 오르기 마련이었다. - 저쪽은 제법 경기가 좋잖아? 우린 숨이 넘어가는 판에. - 나도 들은 얘기지만, 그 <아이스캔디> 말야, 쟤들이 취급하고 있나 봐. 부러움에서 비롯된 억측이라도 그런 소문이 번진다 해서 이상할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구미가 끼어 있는 건 틀림없습니다. 이 정도로 밀매조직을 확장하는 건 불가능해요, 아마추어로는. 바꾸어 말하면 아마추어가 이처럼 떼돈을 벌게 야쿠자들이 눈감아 줄 턱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야? 구미 이름이 뭔가? 두번째 검거에도 손써온 구미가 없었어. 야쿠자들조차 <캔디>를 누가 취급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대잖아!" 모모이가 말한 두번째 검거란, 길거리 소년 밀매인한테서 빼앗은 <아이스캔디> 소지 혐의로 체포한 폭력단을 가리킨 것이었다. 만약 그 폭력단원이 <아이스캔디>를 다른 구미의 생업이라고 생각했다면 노상 밀매인한테서 강탈하는 일은 발생할 턱도 없었다. 그 구미에 대해 싸움을 거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를 잘라야 하는 것이다. "구미 가운데도 영리한 녀석이 있겠죠. 같은 구미 사람조차 <아이스캔디>를 비밀로 할 수 있는 녀석 말입니다." 사메지마의 말에 모모이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신주쿠의 구미인가?" "아마도." "젊은이들이 상대라면 록봉기나 시부야의 구미일지도 모르지? 하즈노 히로시도 시부야에서 살고 있잖아?" "하즈노도 <캔디>를 취급하고 있는 구미를 모르고 있을 겝니다." "자네가 신주쿠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마약이니까요. 코카인. LSD. 마리화나면 신주쿠 이외의 지역도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이스캔디>는 마약입니다. 더군다나 마약이면서 마약이 아닙니다. 제 보기에 <아이스캔디>를 다루고 있는 건 지금까지 마약을 생업으로 하지 않았던 신주쿠의 어떤 구미인 것 같습니다. 마약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마약을 팔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장사는 없잖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서 비밀을 지키누? <캔디>가 그 정도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면 어느 구미든 손을 대고 싶어할 것 아닌가?" "공급원, <캔디>를 공급해 주는 데가 한곳으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죠.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캔디> 가격이 이상할 정도로 싼 것은 제조자가 국내에 한곳 뿐이란 뜻입니다. 어떤 상품이든 유통구조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중간 마진에 따라 값이 올라갑니다. <캔디>의 경우 비밀이 지켜지고 있는 것과 값이 싼 것은 제조자가 한곳 뿐인데다가 유통도 누군가가 독점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구미 명령으로 <캔디>를 만들고 있다는 뜻인가?" "아뇨. 만약 구미가 관여한 사업이라면 어딘가에서 반드시 정보가 새게 마련입니다. 제조자와 유통을 맡고 있는 구미를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게 옳겠죠." "설마 거기도 눈가리 거래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야쿠자들이 돈을 댈 적엔 그런 거래방법은 용납 않으니까요." 사메지마는 단언하듯 말했다. 눈가리 거래란 도매조직이 소매인에게 물건을 넘길 적에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소매인이 도매조직으로부터 물건을 떼오는 게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다. 정해진 도매상이 있어 그곳을 찾아가면 되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대개 전화로 접선부터 해야 한다. 그러면 연락처를 가르쳐 준다. 전화로 몇 단계 연락처를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어디어디 코인 로커 또는 수하물 예치소에 돈을 갖다놓으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런 다음에 물건은 다른 코인 로커나 무인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찾아가라는 지시가 온다. 도매조직은 소매인이 <소모품> 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 만약 어쩌다 알게 된 소매인에겐 목숨을 걸고라도 비밀을 지킨다는 서약을 받는다. 그렇게 해도 밀고가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세계의 병리적 단면인 것이다. "창구는 한곳 뿐이란 말이지?" "네. 품귀현상을 연출해서 값을 올리기 위해서도 그 편이 편리합니다." "그래서 하즈노를 잡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아마 하즈노는 판매조직으로부터 직접 공급받고 있을 겁니다. 눈가리 거래라 하더라도 하즈노만 감시하고 있으면 도매조직을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사전 구속영장 유효기간이 하루밖에 안남았군. 체포해서 닥달하는 것도 방법이겠는데......" "녀석은 불지 않을 겁니다. 불게 해도 도매조직까지 밝히는 건 무립니다." 모모이는 한숨을 쉬면서 돋보기를 벗었다. "앞으로도 줄곧 혼자 해 나갈 작정인가? 언제 끝나게 될지 가늠도 안 서는 일인데. 그러지 말고 잡아 족치는 게 좋지 않을까?" "녀석, 뜻밖에도 전혀 경계하는 빛이 없어요. 밤마다 노는데 정신이 없더군요. 잡히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 모양이에요. 아마 지금 녀석의 손엔 <캔디>가 한알도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안심하고 있나 봅니다. 체포 수색당해도 먼지 한톨 나올 게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녀석이 밀매인인 한, 언젠가는 물건을 떼받겠죠. 저처럼 마음 푹 놓고 노는 것을 봐서 곧 움직일 것 같습니다." 모모이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런 모모이를 사메지마는 말없이 응시했다. 바로 그때, 또 한사람이 방범과로 불쑥 들어왔다. 두 사람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식계의 야부였다. 야부는 서내에서도 소문난 별종이었다. 차림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대신, 속에 있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이었다. 맡은 사건을 해결 못해 허둥대는 형사를 보면, 설령 본청에서 파견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능한 녀석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러나 감식 수완, 특히 탄도검사에 관한 한 발군의 지식과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모모이와 마찬가지로 사메지마를 이해해 주는 몇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야부는 언제나처럼 구김살투성이의 헐렁한 바지에 역시 후줄근한 웃옷, 좁고 짤막한 넥타이 차림이었다.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컸고 나이가 사메지마와 비슷했지만 훌렁 벗겨진 대머리였다. 헤비 스모커였으나 담배를 사기보다는 남의 것을 슬쩍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오히려 기가 막힐 정도였다. "오랜만에 나온 것 같군." 사메지마늘 보면서 야부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사메지마가 캐묻듯이 말하자, 야부는 아니라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방해가 되었나?" "그렇지는 않지만......" 사메지마는 말하면서 야부를 응시했다. 전해 줄 정보가 없다면 악취미로 장식되어 있는 감식 사무실을 벗어나 어슬렁거릴 사람이 아니었다. 모모이도 말없이 야부를 바라보았다. "정제 마약 뒤쫓고 있다면서?" 다가서면서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가위로 만들어 보였다. 사메지마는 담배를 꺼내어 주었다. "고마워." 언제나처럼 한개비 빼어물고는 갑째로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라이터만은 잊지 않고 항상 가지고 다녔다. "귀도 밝군." "서내에 소문이 난 건 아니야. 다른 루트에서 들었어." "다른 루트?" "밀매인, 사전 구속영장 떨어졌다며?" 야부는 사메지마의 책상의 엉덩이를 걸치면서 말했다. "잘도 아는군." 야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맛있게 담배를 피웠다. "내 친구 가운데 약대를 나왔으면서도 약사가 되지 못한 녀석이 있어. 그놈이 날 찾아왔더군." 원래는 의사가 될 생각이었으나 이름 (<야부>에는 돌팔이라는 뜻도 있다) 때문에 포기했다는 것이 야부의 입버릇이었다. "찾아와? 뭣하러?" "당신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던 모양이야." 피우던 담배로 사메지마를 가리키면서 트림을 했다. 식용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사메지마라는 형사를 아느냐는 거였어. 안다고 했더니 어떤 녀석이냐고 물었어. 민완이냐, 끈기가 있느냐, 마약에 관해선 얼마나 아느냐는 등 시시콜콜 캐묻더군. 만나고 싶어하는 눈치였어." 듣고 있던 모모이가 입을 열었다. "자네 친구란 사람, 마약단속관인가?" "네." 대답하면서 야부는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지검 마약계에서 사전 구속영장이 떨어진 걸 들은 모양이야. 마약단속관 가운데 아는 사람 있나?" "아니." 사메지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뭣하면 소개해 주지. 당신과는 죽이 맞을 거야." "약대 출신인가?" "음. 칸토 마약관은 대부분이 약학사야. 대졸일 경우 반년만 연수를 받으면 되거든." 사메지마는 모모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약관 역시 움직이고 있었군요." "저쪽은 당신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겠지만." 야부가 말했다. "이름은 뭐야, 당신 친구?" 모모이가 물었다. "도게라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 저와 함께 자연계였었죠. 약국집 둘째 아들이어서 약대를 지원했죠. 약국을 물려받는가 싶었는데 마약단속관이 되고 말았더군요. 약대 재학 때 스카웃된 모양입니다." 일반적으로 고졸의 경우, 후생성(보사부)에 들어가 4년간의 연수를 거쳐야 마약단속관이 된다. "거긴 2종 합격의 약학사가 많지. 결국 대부분을 대졸로 메우고 있는 셈이야." 모모이가 말했다. <2종> 이란 <국가공무원 시험 2종> 을 줄인 말인데 1종 합격인 사메지마와 비교해 볼 때 준캐리어라고 할 수 있다. "인테리들이지.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형사들보단 훨씬 똑똑해." 야부는 모모이를 앞에 놓고도 서슴없이 내뱉었다. "녀석들은 음지인생이란 의식이 강해. 내가 감식계임에도 불구하고 걸핏하면 <경찰은 좋군. 사람도 돈도 넉넉하니까> 하고 빈정거리거든." 마약단속관은 직함이 후생성 직원이기는 하지만 일반 직원으로 채용된 건 아니다. 채용 주체는 후생성이 아니라 각지구 마약단속관 사무소로 되어 있다. 따라서 후생성 안에서의 출세를 바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퇴직할 때까지 마약단속관 사무실 소속으로 있어야 한다. 퇴직 후에는 제약회사에 재취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사람도 하즈노를 감시하고 있단 말인가?" 사메지마가 묻자 야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몰라. 그저 당신에 관해 물었을 뿐이야." "뭐라고 대답했나?" 모모이가 약간은 흥미롭다는 투로 물었다. "신주쿠 녀석들이 <상어> 란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싼다고 했죠." 사메지마는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 "물론. 당신이 검거한 악당 얘기도 조금 해줬어. 비뚤어진 사람이긴 하지만 맹꽁이 형사는 아니라고 설명해 줬어." 야부는 빙글거리면서 말했다. "그래, 뭐래?" "<그런가?> 라고 했어." "뭐라구?" "<그런가?> 라고.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를 떴어. 옛날부터 고집불통인 녀석이었어. 한번 마음먹으면 벼락이 떨어져도 꿈쩍 안하지. 제약회사로 갔다면 평생 말단사원 신세를 면치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 "체포하면 심문 때 입회시켜 달라고라도 할까요?" "글쎄." 사메지마 물음에 모모이도 고개를 꼬았다. "당신이 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포하지 않고 있는 게 미심쩍은 모양이었어." 야부가 덧붙여 설명했다. "뭔가 실마리라도 갖고 있는 것일까......" 사메지마가 중얼거렸다. "글쎄." "만나고 싶다는 건 그쪽에서 찾아오겠다는 뜻이겠지?" 모모이가 말했다. 야부는 사메지마 책상 위의 재떨이에 담배를 부벼껐다.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 솔직히 말해 줄 수 없어?" "그건 마약단속관 앞잡이로 묻는 건가, 아니면 신주쿠 서 동료로서 묻는 건가?" 모모이가 농담조로 따졌다. "물론 동료 입장에서죠. 그들에게 아무리 정보를 제공해도 돈 한푼 생기는 것도 아닌데......" "빈손이나 마찬가지야. 아직은 아무 것도 없어. 하즈노란 녀석은 지난번 현행범으로 체포한 말단 밀매소년이 <캔디>를 공급받았다는 상대야. 비록 영장은 발급받았으나, 체포한다 해도 그 윗선을 캐는게 어려울 것 같아 망설이고 있는 참이야." "밀매소년이란, 당신 엉덩이를 찌른 녀석?" "그놈과 한패거리야, 정확히 말하면." 사메지마는 쓴 얼굴로 말했다. "안됐군, 그 녀석. 아예 당신 숨통을 잘랐다면 신주쿠에선 영웅이 되는 건데......" "농담 그만둬. 그런 녀석이 정말 나타나면 어떡하라구." "알 수 없지. 어느 구미에서 현상금이라도 내걸지 누가 알아?" "지금 그렇게 여유있는 구미가 있을려구?" 모모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어디든 겨우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있을 텐데." "<캔디>를 취급하고 있는 구미는 어떨까?" 사메지마는 야부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걸 모르니까 이렇게 속을 썩이고 있는 것 아냐?" "소문도 없어?" "없어, 단 한마디도. 누가 그걸로 먹고 사는지, 나 원 참." "그렇담 손대는 구미가 여럿 나타나겠지. 물건만 있음 비슷한 걸 만들어 내는 것쯤 간단하잖아?" "지금 가격으론 무리야. 그래서 아무나 손을 못 대고 있을 게야." "싸?" "5백엔." "정말 공짜나 다름없군. 가볍게 1알, 2알 맛을 들였다간 온통 마약 중독자 투성이가 되겠군." "그래서 초초해 하는 것 아냐!" "영장 기한, 언제 끝나누?" "내일." 야부가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한번 마약 중독 요리사 살인 현장엘 가본 적이 있어. 끔찍하더군." "발작을 일으켰었나?" 모모이가 물었다. "하루 5,6회 주살 맞았다니까 그런 셈이죠. 자기 왼쪽 손가락 4개째를 자르던 중에 체포됐죠. 아파트였었는데, 가보고 깜짝 놀랐어요. 세탁기.냉장고.텔리비전.시계 등 있는 대로 모두 분해해서 한쪽에 쌓아뒀더군요. 마치 기계 스크랩 공장 같았어요. 옆집의 모녀를 찔렀어요. 어머니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두 살박이 아기는 그만......" 모모이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나는군. 오쿠보 3쵸메 아파트였지. 피해자 모녀는 필리핀인이었구." "네. 가엾게 됐죠. 범인은 거품을 물고 발광을 했죠. 내가 만약 형사였다면 그 자리에서 쏴죽였을 겁니다. 마약에 취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녀석이 많지만, 마약을 복용하면 그렇게 되는 줄 뻔히 알고 있잖습니까? 저지른 뒤에 반성해 봤자죠." "더욱 악질은 마약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녀석들이야." 사메지마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야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 중독자들의 살인만은 참을 수가 없어. 녀석들, 약에 취했을땐 아무 관계도 없는 아기들까지 태연히 죽인다 말야." "하즈노 말인데, 직접 복용하는 것 같진 않던가?" 모모이가 물었다. "현재론 아닌 것 같습니다. 복용하고 있다 해도 그렇게 심하진 않을 거구요. 녀석이 <캔디>에 손을 대고 있는 건 역시 돈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란 말이지......" "제가 미행 감시하고 있는 나흘 동안에만도 한 20만 엔쯤 뿌리고 다녔을 겝니다." "그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면 금방 또 돈이 필요해질 테지." "네." "그럼 조금만 더 고생하면 꼬리를 잡겠군." "그렇게 생각합니다" 야부가 떠벌린 덕분에, 모모이도 사메지마의 미행 감시 계속을 납득한 것 같았다. 결국 하즈노 히로시의 사전 구속영장은 기간이 끝나 버렸다. 그러나 아흐레째, 마침내 하즈노가 움직였다.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전날인 일요일, 하즈노는 하쓰다이 맨션 아파트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전 주일 일요일엔 지유가오카 클럽의 호스테스를 데리고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을 주름잡았던 하즈노였다. 유흥자금이 바닥난 것이 아닐까. 아파트에 틀어박혀 꼼짝 않는 하즈노를 사메지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감시를 계속했다. 이튿날인 일요일, 하즈노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오후 6시에 퇴근을 했다. 자동차를 몰고 회사를 나선 하즈노는, 그러나 집으로도 유흥가로도 가지 않았다. 눈에 익은 흰색 메르세데스 190이 중고차 판매회사를 나와 환상 8호선을 타고 달리자 사메지마도 뒤를 쫓았다. 메르세데스가 고슈가이도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사메지마는 긴장했다. 지금까지 감시해 오던 중 이처럼 이른 시간에 하즈노가 퇴근한 것도 처음이었고, 고슈가이도를 달리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사메지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즈노의 메르세데스가 고슈가이도로 접어든 것은 환상8호선에서 약간 도심부로 쏠린 지점이었다. 그렇다고 도심부로 방향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고슈가이도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차선을 달려갔다. 고슈가이도로 접어들어 얼마 달리지 않아 에이후크 램프가 보였다. 메르세데스는 깜박이를 켜, 그쪽 차선으로 접어들었다. 수도 고속4호선 외곽 방향은 에이후크 다음이 다카이도, 거기서 줄곧 달리면 중앙고속도로로 이어진다. 다카이도에선 외곽 방향 차선으로 들어가는 램프가 없기 때문에 하즈노가 에이후크로 돌아 들어간 것임을 사메지마는 그제야 눈치를 챘다. 중앙고속도로 외곽 방향 차선은 아치오지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자동차도 뜸했다. 메르세데스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추월선으로 접어들어 시속 1백 40킬로미터에서 1백 50킬로미터로 달렸다. 사메지마는 혹시 상대방이 눈치 채지나 않나 조마조마해 하면서 미행을 계속했다. 하즈노의 메르세데스와 사메지마의 BMW는 눈깜박할 사이에 고보도케 터널을 거쳐 사가미코 인터체인지를 지났다. 계속 쾌조의 속도로 달려 우에노하라를 지나 오쯔키에 이르자, 가와구치코 방면이 아니라 가쓰누마.스와코 쪽으로 직진했다. 이윽고 길이 4.7 킬로미터의 사사코 터널로 들어섰다. 사메지마는 조금 앞서부터 앞차와의 거리를 벌렸다. 오쯔키 다음의 하쓰가리 파킹 에어리어를 지나고 나면 가쓰누마 인터체인지까지는 출구는 물론 차를 세워둘 만한 곳도 없었다. 고속도로에서 같은 방향을 달리는 차는 기억하기가 쉽다. 만약 하즈노가 지금 <아이스캔디> 거래를 위해 드라이브를 하고 있다면 당연히 미행에 신경을 쓸 게 틀림없었다. 사사코 터널을 들어서면 전체적으로 자동차 흐름이 나빠지게 마련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앞차에 바싹 달라붙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메르세데스의 미등은 국산차에 비해 붉은 빛이 훨씬 밝았다. 주위가 어두워졌어도 쉽게 구별할 수가 있었다. 직선의 긴 터널을 달리자, 맞달려 오는 차가 보이지 않는 탓도 있지만 수직 굴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지나치게 곧은 길은 좌우가 막혀 있을 때는 오히려 달리기가 거북스러워지는 모양이었다. 사사코 터널을 빠져 나왔다. 가쓰누마 인터체인지까지는 앞으로 약 5킬로미터. 하치오지 톨게이트에서부터 계산하면 60킬로미터를 달려온 셈이었다. 터널을 빠져 나오자, 앞쪽에 대형 트레일러가 한대 달리고 있을 뿐, 메르세데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속도를 높였다. 만약 가쓰누마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갔다면, 오늘밤 미행은 그 지점에서 헛물켜게 되는 것이었다. 1백60킬로미터 가까이 속도를 높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가쓰누마 인터체인지의 표지판이 다가왔다. 메르세데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간 것일까, 아니면 계속 달려간 것일까. 사메지마는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전방을 응시했다. 가쓰누마 인터체인지 램프를 지났다. 앞쪽에는 물론 뒤에도 자동차 불빛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출구를 지나치는 순간, 사메지마는 브레이크 페달을 힘껏 밟았다. 가쓰누마 톨게이트 쪽으로 흘낏 던진 눈길에 흰색 메르세데스가 수은등을 반짝 반사하는 모습이 비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ABS 브레이크가 작동, BMW의 타이어가 흰 연기와 함께 비명을 내질렀다. 사메지마는 사이드 미러로 확인하면서 옆차선을 가로질러 갓길로 차를 몰아넣었다. 기어를 후진으로 바꾸었다. BMW는 중앙고속도로의 갓길을 수백 미터나 후진했다. 가쓰누마 인터체인지 출구까지 되돌아온 것이었다. 그 옆을 사사코 터널을 나서자마자 추월했던 대형 트럭이 굉음과 클랙슨을 울리면서 지나갔다. 사메지마는 톨게이트로 방향을 잡았다. 다행히 요금소는 한곳 밖에 열려 있지 않았다. 창문을 내려 통행권과 경찰신분증을 한꺼번에 제시했다. "방금 흰색 메르세데스가 나가는 것 못 봤소? 젊은 남자가 혼자 타고 있었을텐데......" 창구를 지키는 직원은 60대 남자였다. 감기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배기 가스 때문일까,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벤츠인지 아닌지 확실한 건 모르지만 흰색 승용차가 빠져 나간 건 사실이오. 맞아요, 젊은이 혼자 타고 있었어요." "어느 쪽으로 갔습니까?" "바로 저 앞에서 U턴 해서 도쿄 쪽으로 갔어요." "도쿄 쪽?" "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즈노가 틀림없었다. 뒤쫓아온 자동차가 요금소를 나와 U턴 한다면, 미행이 들통난 게 분명하지 않은가. 단순하면서도 영리한 방법이었다. 사메지마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요금을 지불한 다음 (일본의 고속도로는 후불제이다) BMW를 U턴 시켰다. 상행선 요금소에서 통행권을 받은 다음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상행선은 하행선에 비해 자동차가 많았다. 사사코 터널이 가까워지자 자동차 흐름이 하행선보다 훨씬 더 나빴다. 사메지마는 주행선과 추월선을 누비듯이 달렸다. 차선 변경금지를 어기더라도 메르세데스를 따라잡아야 했다. 하지만 사사코 터널로 접어들자 마침내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체가 심했다. 하즈노가 취한 행동은 미행을 경계한 것이 틀림없었다. 동시에 그것은 <아이스캔디> 거래에 대비한 안전조치를 의미했다. 하행선을 달리다가 상행선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상행선 어디선가에서 거래가 예정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곳이 어디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서비스 에어리어나 파킹 에어리어 어딘가였다. 하즈노는 핸디폰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이용하면 거래장소를 임기응변으로 결정할 수 있지 않는가. 가쓰누마에서 U턴한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가까운 서비스 에어리어나 파킹 에어리어일 가능성이 높았다. 가쓰누마를 지나서 U턴 한다면 쓸데없는 거리를 달리는 것이 되고, 지나기 전이라면 갈 수 없는 장소. 하쓰가리 파킹 에어리어였다. 사사코 터널을 나와 7킬로미터쯤 달리면 되는 곳이었다. 가까스로 사사코 터널을 빠져 나와 자동차 흐름이 좋아지자 사메지마는 속도를 높였다. 파킹 에어리어는 거대한 주차장이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자동차가 드나드는 곳이었기 때문에 은밀한 거래엔 더할 수 없이 좋은 곳이었다. 하쓰가리 파킹 에어리어 안내판이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갔다. 사메지마는 왼쪽 깜박이를 켜면서 진입했다. 파킹 에어리어는 서비스 에어리어와는 달라 주유소나 식당 같은 것은 없었다. 화장실과 간이 매점이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가족과의 드라이브일 경우 오쯔키 앞쪽의 단고사카 서비스 에어리어를 이용했다. 파킹 에어리어에선 자연히 휴게실과 화장실 이용이 주가 되었다. 하쓰가리 파킹 에어리어 주차장은 저녁 시간대라서 그런지 절반 이상이 차 있었다. 사메지마는 BMW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화장실과 매점 주변의 주차밀도가 높았다. 트레일러와 트럭 등 대형차는 거기서 약간 떨어진 지역에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기사가 새우잠을 자고 있는 차도 있었다. 거래를 한다면 가능한 한 사람 눈에 띄지 않을 장소를 택할 것이 틀림없었다. 전화로 서로 연락하면서 이 파킹 에어리어 어느 구석, 지정된 장소에서 하즈노는 물건을 건네받을 것이었다. 흰색 메르세데스를 주차장 출구 가까운 곳에서 발견했다. 라이트는 꺼져 있었으나 엔진은 걸린 채로였다. 사메지마는 그 옆을 지나면서 곁눈질을 했다. 하즈노는 차 안에 없었다. 메르세데스와 몇 대 건너서 BMW를 세웠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점과 공중 화장실과는 멀리 떨어진 탓일까, 자동차도 듬성듬성했다. 이 시간, 중앙고속도로의 상행선엔 귀가를 서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트럭이 되었건 승용차가 되었건 파킹 에어리어에 멈추어 있는 자동차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메지마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기서 거래를 하는 게 틀림없다면, 하즈노를 불심검문, <캔디> 소지의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나 다름없는 일. 하지만 하즈노가 만약 눈가리 거래 (무인 포스트를 이용하든가) 를 하고 있다면 하즈노에게 <캔디>를 넘겨 준 사람을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설령 자동차나 사람을 목격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자백까지 받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현장에서 자백받지 못하면 그 또한 헛수고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래 도중에 덮치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은밀 거래에는 당연히 망보기가 따라붙게 마련이었다. 주차장 이곳 저곳에 흩어져서 미심쩍은 사람이 있나 없나 체크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사메지마는 하즈노의 메르세데스 이외에도 고급차에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도쿄 넘버의 수입차를 주의해 살폈다. 화장실 가까이에 짙은 감색 메르세데스가 보였다. 메르세데스는 남의 눈에 두드러지기 때문에 거래에는 이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도매조직 녀석들은 자동차 3대에 나누어 타고 있을 것이며 그 가운데 가장 평범한 차가 실제 거래를 맡고 있을 것 같았다. 주차장 안엔 하즈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BMW 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신주쿠 지역에서 날뛰는 야쿠자들이라면 대부분이 사메지마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만약 차에서 내려 어슬렁거리다가 하즈노는 별문제로 치더라도, 망보기 녀석들에게 당장 들키고 말게 분명했다. 어느 구미가 관련되어 있는지 그것 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감색 메르세데스 넘버부터 체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사메지마는 깜짝 놀라 숨이 막혔다. 1백 미터쯤 전방에 왜건에서 하즈노가 내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업무용으로 흔히 쓰는 베이지색 왜건이었다. 슬라이드 도어가 열리면서 하즈노가 내린 것이었다. 손에는 수퍼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흰색 비닐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하즈노는 천천히 메르세데스 쪽으로 걸어왔다. 얼굴이 약간 상기해 있었다. 왼손에는 핸디폰을 들고 있었다. 메르세데스 도어를 열고 올라탔다. 흰 비닐 주머니는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아마도 지금부터는 얌전히 도쿄까지 달려가, 시내 어딘가 안전한 곳에 <아이스캔디>를 숨길 게 틀림없었다. 사메지마는 하즈노가 내렸던 왜건을 응시했다. 다른 차에 가려 넘버는 보이지 않았다. 하즈노의 메르세데스가 떠났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주 얌전히 안전운전으로 주차장에서 빠져 나갔다. 하즈노가 파킹 에어리어를 빠져 나갈 때까지, 왜건에는 접근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어쩌면 차 안에 사람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경우, 거래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하즈노가 거래를 재개하고 싶다는 뜻을 전화로 어딘가에 알린다. 저쪽은 자동응답기나 자동전송기로 수신하기 때문에 하즈노가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전혀 없는 것이다. 하즈노는 일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캔디>의 수량과 금액, 그리고 연락처를 알려 주는 것이다. 상대방이 거래에 응할 생각이라면 거기 따른 연락이 있게 마련 - 어제 일요일, 하즈노가 아파트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은 것은 저쪽의 연락을 기다렸던 게 틀림없었다. 그 시점에서도 하즈노는 거래장소를 모르는 것이 상례이다. 아마도 중앙고속도로 하행선을 달리고 있을 때 거래장소를 알려왔을 것이다. U턴을 한 것도 아마 전화 지시에 따른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핸디폰이나 카폰은 도청당하기 쉽기 때문에 대화는 모두 은어를 사용하는 게 상례였다. 지시에 따라 하즈노는 파킹 에어리어로 들어와서 기다린다. 미행이나 잠복 감시가 있나 없나를 확인할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안전이 확인되고서야 비로소 어떤 자동차를 지적해 준다. 하즈노는 그 차로 다가가서 도어를 연다. 안에는 미리 약속한 수량의 <캔디>가 준비되어 있다. 하즈노는 대금을 내놓고 물건을 회수한다. 그뒤에는 얌전히 자기 메르세데스를 몰아 도쿄로 돌아가는 일만 남는다. 하즈노는 자기가 감시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서툰 짓을 했다가는 당장에 거래가 중지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어디선가에서 보복을 당할지도 모를 일, 따라서 신중히 행동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도매조직 사람들은 결코 하즈노에게 얼굴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적발된 것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케이스도 있었다. 폭력단이 아파트를 개조, 빠찡코 경품 매입처처럼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는 창구를 설치했다. 창구 이외에는 모두 철판으로 보강하여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없게 했다. 손님은 창구에서 돈을 지불하고 대신 마약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정 장소는 소문이 퍼지게 마련이며, 따라서 쉽게 탄로나는 것이 약점이다. 또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무장한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고 마약을 거래하는 따위는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장소가 어디가 되었든 사람 눈에 띄기 쉽고, 무장한 자체가 경찰에게 <나 잡아잡수>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무장했느냐고 경찰이 추궁하면 더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주차장에서 망보기꾼과 왜건 주인이 합류할 가능성이 있을까 하고 사메지마는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왜건은 운전기사 한사람, 아마도 시킨 대로 끌고 왔을 기사 한 사람 뿐일 가능성이 많았다. 몇 시 몇 분까지 하쓰가리 파킹 에어리어로 왜건을 몰고 가서, 잠그지 않은 상태로 주차해 놓은 다음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식당에 가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기사가 식당에 머물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사람이 왜건에 <캔디>를 갖다놓는다. 거래가 끝나면 그 사람이 다시 와서 돈을 회수한 다음, 식당에 있는 기사를 전화로 불러 돌아가도 좋다고 명령한다. 그런 시스템이기 때문에, 만의 하나 왜건 기사가 체포된다 하더라도 이쪽 정보는 하나도 새지 않는 것이다. 찬스는 왜건에서 돈을 회수하는 순간을 덮치는 것 뿐이었다. 사메지마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왜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접근해 오는 사람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저 왜건 속에는 지금 몇십만 엔, 어쩌면 몇백만 엔의 현금이 아무렇게나 싸여 있을 것이다. 누구든 도어를 열고 집어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시간 방치해 둘 까닭이 없었다. 매점 쪽에서 진바지에 점퍼를 걸쳐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30대 중반, 안경을 끼고 있었다. 녀석인가? 하지만 사내는 왜건 옆을 지나 곧장 사메지마의 BMW로 다가오더니 역시 그냥 지나쳤다. 이어서 흰 크라운 한대가 미끄러지듯이 주차장을 가로질러 왜건 옆에서 멈추었다. 네리마 넘버였다. 운전석 도어가 열리며 가죽 점퍼의 사내가 내렸다. 이쪽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헤어스타일은 펀치 퍼머였다. 사내는 똑바로 매점 쪽으로 걸어갔다.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내뿜었다. 손바닥엔 땀이 홍건했다. 자칫하다간 이대로 왜건 기사가 돌아와 돈을 실은 채 떠나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건 기사 역시 조직의 일원, 그것도 상당히 신뢰받는 멤버라는 뜻이 된다. 사메지마는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장시간 한자리에 이처럼 버티고 있으면 망보기꾼의 주의를 끌 위험이 있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 사메지마는 왜건을 노려보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왜건의 돈을 회수하러 누군가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특정 혐의를 씌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기꺼해야 절도 현행범 정도일 뿐, 하즈노가 자취를 감춘 지금 <캔디> 밀매와 결부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즈노를 체포 않고 풀어놓은 목적은 <캔디>의 도매조직을 밝혀내는 데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도매조직 녀석을 한명이라도 잡아내기 전에는 하즈노를 체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하즈노만 덥석 체포한다면 도매조직이 전화번호를 바꿈과 동시에 더욱 깊숙이 숨어들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하즈노처럼 도매조직과 직접 연결된 밀매인이 걸려들 때까지 두 손 놓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사메지마가 하고자 하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실을 한가닥 한가닥 더듬어 가는 작업이었다. 거미줄보다 더 가는 실을 더듬어 가다가 그 실끝이 좀더 굵은 실에 이어져 있으면 다시 더듬어 올라간다. 그렇게 더듬어 올라가 보면 언젠가는 <아이스캔디> 제조자와 부닥치게 마련인 것이다. 그 도중에서 관계자들을 체포하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일. 체포된 녀석이 그 다음 실마리를 이어 준다면 몰라도 하즈노처럼 본인조차 분명한 내막을 모르고 있을 경우, 체포는 곧바로 실을 잘라 버리는 가위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도매조직 멤버가 야쿠자라면 어느 구미 소속인지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하즈노를 풀어놓은 값어치는 충분하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그것을 알아낸 뒤에도 한동안 하즈노를 마음대로 움직이게 해서 도매조직 전모를 파악하고 싶었다. 사메지마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눈앞의 근무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끈기있게 기다릴 줄 아는 형사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노리기 시작한 범죄자는 끝까지 관찰한 다음, 가장 취약한 급소를 날카로운 이빨로 물고 늘어졌기 때문에 <신주쿠 상어>로 불리고 있는 것이었다. 상어에게 물리는 것이 범죄자로서는 치명적인 것이 되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누군가가 사이드 윈도를 노크했다. 손가락으로 유리를 두들기는 딱딱한 소리에 사메지마는 허를 찔린 것이다. 왜건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사람이 접근해 오는 것을 전혀 눈치 내지 못한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낯선 남자가 왼손에 담배를 깬 채 허리를 굽혀 차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경 낀 얼굴, 짙은 감색 점퍼 차림. 불을 붙이지 않은 맨담배를 들고 있었다. 아까 BMW 옆으로 지나갔던 사내임을 사메지마는 알아차렸다. 사메지마는 잽싸게 오른쪽으로 허리춤으로 더듬었다. 하즈노를 감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사내는 사메지마를 방해하려고 나선 망보기꾼 중의 한녀석일까. 만약 그렇다면 창유리를 내리는 순간, 녀석이 발사할 가능성도 있었다. 사메지마는 오른쪽 허리춤에 차고 있던 뉴남부의 그립을 잡아쥐면서 왼손으로 창유리를 조금 내렸다. "뭐야?" "미안합니다. 불 좀 빌렸으면 해서요." "다른 데로 가봐!" 그렇게 쏘아 주면서도 사메지마는 왜건에 접근해 오는 사람이 없나 신경을 썼다. 유리를 올리려 하자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아요. 할 얘기가 있어요, 사메지마 경감." 사메지마는 사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놀라움이 전류처럼 전신을 휘감았다. "누구야, 당신?" "내 동창생한테서 얘기 못 들었나요? 야부라는 사내 말입니다." "모르겠는걸." 사메지마는 시치미를 뗐다. 사내는 왜건 쪽으로 눈길을 던지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새하얀 피부, 대학 연구생처럼 보였다. "부탁입니다. 할 얘기가 있어요." 사메지마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 사람이 여기 있는 것은 동료들이 하쓰가리 파킹 에어리어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내뿜으면서 도어록을 풀었다. 사내는 미끄러지듯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고마워요, 경감." "신분증부터......" 사메지마는 왜건으로 눈길을 쏟으면서 말했다. 남자가 신분증을 건네 주었다. <칸토 신에쓰 지구 마약단속관 사무소 단속관 도게 오사무> 사메지마는 신분증을 되돌려 주었다. "말을 걸기까지 무척 힘이 들었어요. 갖고 있죠? 쏘지 않을까 두려웠어요." 도게는 말하면서 담배를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실례했소. 불, 필요 없나요?" "담밴 위장이었죠. 난 피우지 않아요. 동료한테서 한개비 얻어왔죠." 역시 주차장 일대에는 잠복 감시반이 쫙 깔려 있었다. "누굴 노리고 있소?" "같아요. 하지만 사메지마 경감은 하즈노를 쫓아 여기까지 왔구, 우리는......" 말끝을 흐리면서 도게는 턱으로 왜건을 가리켰다. "......저걸 줄곧 쫓고 있어요." "그럼 여기서 거래를 한다는 것까지도?" "네. 미안하지만 여기서 떠나 주세요." 사메지마는 얼굴을 들었다. "여기서 손을 떼라구?" "말하긴 거북하지만, 그렇게 해 주세요. 저 차에서 물건을 가져간 것은 하즈노가 세번째였어요. 왜건은 이 앞쪽 ㅆ까도 파킹 에어리어와 사카이가와 파킹 에어리어에서도 접선이 있었어요." 사메지마는 도게를 바라보았다. 마약단속관과는 거리가 먼 상냥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 정도까지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체포하지 않느냐, 그 말씀이죠?" "네. 도매조직을 파악하고 있다면......" "파악하고 있는 셈이죠." 도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적어도 일부 멤버는 파악하고 있어요. 우린 망원 렌즈가 달린 비디오 카메라에 모두 담고 있죠. 저 왜건에 드나든 녀석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촬영했어요. 언제든 옭아놓을 수 있습니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도게를 응시했다. 도게는 뭔가를 알고 있었다. 도매조직 이상의 뭔가를. "여기서 떠납시다. 저어, 미러를 한번 보세요. 차체에 그림이 있는 대형 트럭이 보이죠?" BMW 후방 20미터 지점에 트럭이 한대 서 있었다. 차체엔 칠복신 그림이 선명했다. "네." "망보기꾼입니다. 기사가 아까부터 이 차를 주목하고 있어요. 떠나주지 않으면 우리 잠복 감시도 헛수고로 끝나고 말아요." 사메지마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당신을 태우고 가도 괜찮은가요?" "새삼 여기서 내려봤자죠. 내가 이 차에 타는 걸 녀석들도 봤으니까요. 당신이 떠나더라도 내가 여기 남아 있다면 이번엔 나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울 겁니다." "알았소." 사메지마는 BMW를 출발시켰다. 가까스로 밝혀낸 거래현장을 알고 보니 이미 마약단속관 사무소가 한발 앞서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쇼크였다. 중앙고속도로로 나온 사메지마는 제한속도를 지키면서 차를 몰았다. 도게는 후방을 확인한 다음, 포켓에서 휴대무선기를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보고를 시작했다. "여기는 도게. 하쓰가리 파킹 에어리어에서 나왔다. 신주쿠 서원도 동행." 잠시 이어폰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알았다. 오버." 도게가 가지고 있는 것은 경찰이 보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성능의 디지틀 무선기였다. 도청당할 염려가 없는 기종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잠복 미행한 건 사메지마씨 혼자였나요?" "그래요. 당신은?" "우린 여기 10명을 동원하고 있어요. 칸토 사무소 인력의 4분의 1이죠." "4분의 1?" "전원이 40명 밖에 안 됩니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선 한건에 전원이 매달릴 때도 있죠." 사메지마는 적이 놀랐다. 칸토 신에쓰 지구를 커버하는 마약단속관 사무소에 단속관이 겨우 40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경찰은 신주쿠 서에만 6백명이나 되지 않는가. "그대신 일단 손댄 건은 끝까지 캐들어 가죠." 사메지마가 놀라는 것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도게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경찰처럼 피라미.대어 가리지 않고 덥석덥석 손대진 않아요. 그러나 손을 댔다 하면 뿌리를 뽑고 말아요." 말투에는 경찰에 대한 강한 경쟁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어떻게 날 알아봤죠?" "이 자동차 넘버가 실마리죠. 당신이 하즈노 영장을 발급받았다는 걸 지검에서 들었어요. 하지만 좀처럼 체포하러 들지 않는 걸 보고 이건 장기 감시에 들어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어떤 타입의 순사관인가를 마침 신주쿠 서에 근무하는 동기생 야부한테 물어봤죠. 야부는 당신이 얼마나 끈질긴 사람인가 가르쳐 주더군요. 우리로선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중간에 당신이 끼어들기라도 한다면 사태가 까다로워지니까요." "그래서 내 뒤를 캐어봤나요?" "네. 당신이 하즈노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동차 넘버쯤 쉽게 알 수 있었어요." 사메지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캔디>에 대해선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나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군요.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말아요. 이 건에 있어선 우리가 한발 앞서 있으니까 손을 떼 줬음 좋겠어요." "협력해서 공동작전을 펼 수 없나요?" "유감이지만, 웃분의 방침이 돼놔서......" 도게는 자르듯이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도매조직을 파악했으면서도 어째서 보고만 있죠?" "그래서 말씀드릴 수 없는 겁니다." "영문도 모르면서 손을 떼란다고 그냥 물러설 사람은 없어요. 당신네가 공을 들이고 있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도 하즈노를 마크해 온 사람이오. 어느 구미가 <캔디> 도매에 관련되어 있는지 그것 만이라도 알아내야 물러설 수 있어요." "사메지마씨가 그걸 알면, 그 구미를 마크, 뒤흔들어 놓을 건 뻔한 일이죠." "당연하죠. 현재론 <캔디>를 취급하고 있는 곳이 한곳 뿐입니다. 그곳만 덮치면 뿌리를 뽑을 수 있어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도게는 나지막하게 잘라 말했다. "어째서?" 사메지마는 도게를 응시했다. 오른쪽 귀엔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도게는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빨간 미등이 줄을 잇고 있는 고속도로 앞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이 어떤 식으로 수사를 하는지 야부한테 들었어요. 당신이 신주쿠 서내에서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지도 들었구요. 외고집의 야부가 당신만은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치켜세우더군요. 최고의 형사라고 말입니다. 녀석이 그 정도로 말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최고의 형사이겠죠." "그런 걸 물은 게 아닙니다. 도매조직을 방치해 두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 내가 하즈노를 풀어놓고 있는 것과는 얘기가 달라요. 내 말 똑똑히 들어요! <캔디>는 곧 품귀상태가 될 겁니다. 이어서 값도 오를 거구요. 값을 올린 다음엔 대량으로 풀어 먹이겠죠. 그렇게 되면 이미 때가 늦어요. 값이 오르고 나면 너도나도 구미마다 유사품을 들고 나올 게 뻔합니다. 일본에서 장사가 된다 싶으면 대만에서도 손대는 녀석이 나타날지 몰라요. 지금이라면 소스가 한곳 뿐이요. 뿌릴 뽑자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요!" "거기까지 꿰뚫어 보고 있나요?" "당연한 얘기가 아니오." "하지만 그래도 <캔디>는 다시 등장할 겁니다." "어떻게? 근거가 뭐요?" 도게는 빈정거림이 어린 눈길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어떤 조직인지, 사메지마씬 알고 있나요?" "무슨 뜻이죠?" "우린 마약단속관이오. 마약 전문가들이오. 각성제는 마약이 아니오!" "하지만 지금...... 마약은, 헤로인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어요." "그래요. 일본인 체질 때문이죠, 그건." "무슨 뜻이오?" "일본인에겐 마약보다 각성제가 더 잘 맞아요. 그 옛날 -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들어설 때까지 - 우리 선배들이 뒤를 쫓았던 건 아편.모르핀.헤로인이었어요. 웃을 일은 아니지만, 당시 헤로인 때문에 목숨을 잃은 단속관도 적지 않았어요. 물건을 압수할 적마다 순도를 감정하느라고 잇몸에 발랐기 때문이죠. 하지만 일본이 풍요해지면서부터 마약은 자취를 감췄어요. 재미있는 현상이죠. 아무래도 일본인은 일벌레인가 봐요. 풍요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약보다는 일을 하든 놀든간에 더욱 맹렬해질 수 있는 약을 선호한 겁니다. 각성제는 일본인을 위한 약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때문에 설령 <캔디> 소스가 한곳 뿐이고 거기를 덮쳐 뿌리를 뽑는다 해도 같은 물건이 필연적으로 다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우선 <캔디>가 아니더라도 각성제는 얼마든지 있질 않습니까?" "<캔디>가 문제인 것은 어린 아이들 사이에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캔디>가 각성제임을 모르고 사고 파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냥두면 그 아이들 모두가 중독자가 되고 말아요." "그래요. 말씀대로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것 아닙니까. <캔디> 제조자는 한시라도 빨리 쳐넣어야죠. 각성제를 달콤하게 만들어서 아이들 장난감으로 공급하고 있는 녀석, 용서할 수 없죠. 절대로!" "일본인이죠?" "그래요. 우린 그 녀석을 잡아내고 싶어요. 멱살을 잡아 영원히 감옥에 처박아 놓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우선 당신이 손을 떼야 합니다." 도게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도매조직과 그 녀석은 어떤 관계니까?" 사메지마가 물었다. 제한속도 이하로 몰고 있었지만, 어느덧 오쯔키를 지나 단고사카 서비스 에어리어까지 2킬로미터도 채 안남은 지점을 달리고 있었다. 도게는 천천히 머리를 내저었다. 입가에는 쓴웃음 같은 미소를 흘렸다. "가르쳐 드릴 수 없군요. 당신이 손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알아요.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캔디> 관련자를 덮치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인 것도. 단고사카에서 내려 주세요. 거기서 동료들한테 데리러 오라고 연락할 생각입니다." 사메지마는 할 말이 없었다. 초조감이 무럭무럭 치밀어 올랐다. 마약단속관 사무소는 경찰에 대한 라이벌 의식 때문에 협력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단고사카 서비스 에어리어의 진입로가 가까워지자 사메지마는 말없이 깜박이를 켰다. "화가 난 모양이군요. 하지만 난 절대로 섹셔널리즘으로 그렇게 말한 건 아닙니다. 우린 경찰과는 달라요." "무슨 뜻이오? 경찰과는 다르다니, 무슨 뜻이오? 경찰이 당신네들을 훼방이라도 하고 있단 말이오?" 사메지마는 으르렁거렸다. 혼잡스런 주차장 한구석에 차를 세우면서 도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요한 건, 잘 들어요. 중요한 건 한시라도 빨리 <캔디> 공급원을 뿌리뽑는 거요. 도매조직을 덮쳐 소스를 캐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오. 한데도 뭣 때문에 도매조직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거요?" 도게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 록을 풀고는 도어놉을 잡았다. 사메지마는 그런 도게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빨을 꾹꾹 깨물면서 내뱉듯이 한마디 했다. "기다려!" 도게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이러는 거죠?" "난 시키는 대로 당신네 방해가 되지 않게 파킹 에어리어에서 물러났소. 그런데도 당신은 떼라고 말만 되풀이했을 뿐, 정보는 하나도 주지 않았소. 불공평하긴 짝이 없어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오!" 사메지마와 도게는 서로 노려보았다. "때가 되면 가르쳐 드리죠." "그러면 너무 늦어!" "그럼 단 한가지만. 도매조직과 공급원의 관계는 하즈노와 도매조직과의 관계 비슷해요. 어때요? 당신이라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게요." 사메지마는 도게를 노려본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있을 수 없어요. 도매조직이 폭력단이라면 눈가리 거래엔 손대지 않아!" "눈가리가 아니오. 하지만 결국은 마찬가지이겠죠. 공급원은 엄청 영리한 녀석입니다. 때문에 도매조직을 덮쳐봤자 결코 꼬리를 잡을 수가 없어요." "그것만이 이유일 순 없어요. 그것 만이라면 도매조직을 지켜보고 있는 건 무의미한 일이오." "손을 떼 주세요." 도게가 말했다. "그럴 순 없소. 협력해 달라면 그건 가능해요. 하지만 눈도 막고 귀도 코도 막으라면, 거절하겠소." 사메지마는 잘라 말했다. 도게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도게가 겉보기처럼 상냥한 사내가 아님을 그 순간 사메지마는 깨달았다. "결렬이로군!" 쏘아붙인 도게가 BMW 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사메지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쓰가리엔 돌아가지 마시오. 만약 한발짝이라도 들이민다면 공무집행방해로 고소하겠소." 사메지마는 힘껏 핸들을 내리쳤다. 두게는 무선기로 통신을 하면서 BMW 에서 멀어져 가더니 1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멈추어 섰다. 그 순간 사메지마는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U턴 하여 하쓰가리 파킹 에어리어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뾰족한 수도 없었다. 공무집행방해로 고소당하는게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돌아가 본댔자 왜건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낮았고, 설령 아직 남아있다 하더라도 망보기들이 사메지마의 정체를 눈치 챌 게 틀림없었다. 울화통이 터진다고 해서 마약단속관들의 잠복 감시에 냉수를 끼얹을 수도 없는 일. 오히려 <아이스캔디> 취급자를 도와 주는 결과밖에 안 되는 일이었다. 사메지마는 결국 보기 좋게 내몰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도매조직을 상당 부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마약단속관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있는 게 더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그들의 목적이 만약 다른 데 있다면? 이번 경우엔 <아이스캔디> 임은 분명했다. 그들은 <아이스캔디> 제조원 색출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사메지마 입장에서 보면 어린 소년.소녀들에게 <캔디>를 팔고 있는 도매조직을 뿌리뽑는 일이 더 급했다. 도매조직이 폭력단이라면 <캔디>로 번 자금을 바탕으로 또 다른 범죄에 손댈 게 뻔하지 않는가. 도게가 한 말을 거짓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도매조직을 덮치더라도 제조원에 관한 정보는 하나도 얻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도매조직 역시 단일화되어 있는 이상, 제조원에게 적잖은 타격을 줄 수 있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닌가. 만약 경솔하게 덮치지 못할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사메지마 역시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합당한 이유만 있다면. <캔디>를 뿌리뽑는 것만이 목적이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패거리에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결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이튿날 신주쿠 서로 출근한 사메지마는 더욱더 놀라운 정보를 접했다. 아침 일찍, 마약단속관 사무소가 하즈노의 아파트를 급습하여 각성제단속법 위반으로 체포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사메지마는 분통을 터뜨렸다. "나도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야. 지검 마약 담당도 어떻게 된 일이냐고 고개를 꺄우뚱했어. 자네가 발부받은 하즈노 구속영장이 실효된 게 며칠 전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마약단속관 사무소와 어떤 물밑 약속을 한 게 아니냐고 묻더군." 모모이가 말했다. 하즈노의 체포 소식은 검사가 직접 모모이에게 전해 준 것이었다. "틀림없습니까, 하즈노를 덮쳤다는 게?" "메구로 서에 확인해 봤어. 마약단속관 요청으로 신병을 유치하고 있다더군." 칸토 신에쓰 지구 마약단속관 사무소 소재지는 메구로였다. 하지만 사무소엔 구치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체포한 피의자는 가까운 메구로서에 맡겨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심문은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직접했다. 마약단속관의 심문이 가혹하다는 건 야쿠자 세계에선 널리 알려져 있었다. 형사 뺨칠 정도로 피의자를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는 소문이었다. 체포된 피의자의 대부분이 약물 중독자였기 때문에 심문 도중 금단증상이나 플래시백을 일으키는 탓에 그런 소문이 번진 것인지도 몰랐다. 사메지마는 천장으로 눈길을 던졌다. 하즈노를 체포한 것은 의도적인 방해공작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사메지마가 쥐고 있는 단 한가닥의 실을 마약단속관 사무소가 싹둑 잘라 버린 것이었다. "이번 사건에서 저를 내몰려고 그렇게 한 게 분명합니다." 모모이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보고한 사메지마는 잘라 말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자네가 개입하는 걸 그렇게도 꺼리나?" "글쎄요. 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먹이를 덮치기라도 했다면 몰라도...... 그 녀석들에 대해선 과장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그들과 우리 사이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어. 그들이 조직과 자금 면에서 우리가 앞서 있다고 보고 있는 건 사실이야. 게다가 팀웍을 중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드는 걸 아주 싫어하는 풍습이 있어." "자기들은 경찰과 다르다고 말하더군요." "자네도 본청에 있어 봤으니까 알고 있겠지만 그들은 경찰보단 오히려 세관 쪽과 가깝게 지내. 서로 대장성 (大藏省), 후생성으로 소속 부처는 다르지만 적은 인원, 작은 조직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거기 비해서 경찰은...... 가령 마약단속관이 정보를 입수, 세관에 연락해서 나리타 공항 같은데서 용의자를 체포한다 하더라도 신병은 경찰에 맡겨야 하고, 발표 역시 경찰 기자실에서 하는 경우가 많아. 따라서 실적을 날치기 당했다는 기분이 얼마간 있게 마련이야. 경찰과 호흡이 안맞는 이유는 그 밖에도 있어." "뭡니까?" "감각의 차이. 보안형사가 대부분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론보다는 육감을 중시하지. 하나 마약단속관은 과학자나 기술자에 가까운 편이거든. 특히 칸토는 지난번 야부도 말했듯이 약대 출신 뿐이야. 게다가 수사나 체포에 관한 연수기간도 경찰보다 짧기 때문에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형사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 될 수밖에 없어. 형사는 그 이전에 정복경관으로 경험을 쌓지만, 저 사람들은 연수를 마치는 즉시 사복 수사관이 되거든. 인원이 적기 때문에 신출나기라도 약물 지식만 있으면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는 거야." "다시 말하면 이런 거로군요. 형사는 범죄자에 관해선 밝지만, 약물 지식엔 어둡다. 그렇지만 자기네는 현장 경험이 적은 대신 약물엔 강하다, 그런 뜻입니까?" "말하자면 그래. 쫓는 범죄가 모두 같은 것이기 때문에 현장 경험은 금방 쌓을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호흡이 맞지 않는다 - 그럴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경찰은 말하자면 군대였다. 병사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 임무였다. 머리를 쓰는 것은 베테랑이나 간부경찰에게만 허용되어 있었다. 거기에 비해 조직이 작고 학력이 높은 마약단속관은 한사람 한사람이 머리와 몸 모두를 씀으로 해서 비로소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었다. 팀을 만들더라도 잘 될 까닭이 없다고 서로가 경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분명히 말해서 구치 설비가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경찰에 비해 그들의 여건이 좋은 것은 아니야. 후생성 입장에서 봐도 의붓 자식이나 같아. 그런 그들을 지탱해 주는 것은 마약을 박멸한다는 사명감이야." "하지만 2종 시험 합격이라면......" 사메지마는 말끝을 흐렸다. 준캐리어 신분이 분명했지만 경찰처럼 거대한 논캐리어 집단이 받쳐 줄 때에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지위였다. "도게는 웃분이 경찰과는 손을 잡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더군요." "아마 아까 말한 것처럼 본청 보안2과에게 실적을 날치기당한 경험이 있는 모양이로군."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하즈노를 덮쳤을까요? 제가 미워서 그랬다면, 그거야말로 바보 같은 짓 아닙니까?" "물론 그것만은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을 게야. <아이스캔디>에 관한 한, 다른 수사관이 개입하는 걸 단호하게 차단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게야." "그게 뭡니까?" "모르겠어...... 자넨 손뗄 생각인가?" "아닙니다. 도매조직을 반드시 밝혀내고 말 겁니다. 체면 때문이 아니라 일단 손댄 사건이니까 끝까지 추격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우선 어디서부터 시작할 참인가?" "자동찹니다. 어젯밤 하쓰가리 파킹 에어리어에서 본 망보기 자동차부터 ㅎ어볼 작정입니다." 모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겠지. 마약단속관 사무소에서 트집을 잡으면 내가 막아 주지." 그리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캔디>는 저들에게 넘겨 주더라도 <캔디>로 돈을 번 녀석들은 반드시 자네 손으로 수갑을 채워야 해!" 5. 구야큐쇼도리에 있는 바 <마마포스>는 언제나처럼 한산했다. 광부 출신의 마담 혼자 꾸려가고 있는 카운터 뿐인 집이었다.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들어온 사람이 사메지마임을 알자 <마담>은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웬일이야? 나쁜 일이라도 생겼어?" "좋은 일 있음 나한테도 좀 나누어 줘요. 불경기, 불경기 하지만 요즘 같은 불경긴 처음이에요. 손님이라면, 비록 형사라 하더라도 너무너무 반가워 소맷자락에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에요." 카운터 한구석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사메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불경기를 상징하는 얼굴만 모여들 것 같군." "무슨 뜻이에요? 여기서 누굴 기다리기로 했어요?" "그래. 언제나 같은 사람이지만......" "그 아가씨라면 불경기 아니잖아요?" "그렇지도 않아." 사메지마는 <마담>이 날라온 아이리시 위스키로 진한 위스키 워터를 만들었다. 두어 모금 홀짝거렸을 때, 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단스런 긴소매 티셔츠와 몸에 찰싹 달라붙는 검정 진바지에 코트 차림이었다. 티셔츠엔 피흘리는 괴물 그림과 함께 영어로 <먹어줘!> 라고 쓰여 있었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머리만 끄덕여 보였다. 쇼가 옆자리에 앉으면서 숄더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어때, 좀 팔려?" "전연." <마담>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사메지마가 마시던 글래스를 빼앗아 한모금 마셨다. "어머, 너무 진하잖아?" "그래?" 쇼는 대답하는 사메지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왜, 뭣 때문에 부어 있어?" "잘 안 풀리는 일도 있어, 때로는." "점잖은 척하네." 쇼는 되쏘았다. 그러나 별로 가시 돋친 말투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담>도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투어, 언제 떠나지?" "내일 저녁. 밤기차야." "언제까지지?" "2주일. 어쩌면 20일 쯤일지도." "그래? 어디어디 돌 건데?" "북쪽. 네 곳을 돌 예정이야. 끝나면 아는 사람이 경영하는 라이브 하우스를 들르게 될지도 몰라." "네 라이브, 오랫동안 못 봤군." 쇼는 사메지마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함께 갈래?" "그럴 순 없잖아." 쇼는 단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생각만큼 분위기가 뜨거워지지 않을지도 몰라." "왜?" "내 자신이......" 쇼는 더듬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요즘 들어 좀 시들해졌어. 어쩐지 밴드 멤버들 앞에선 기가 죽어." "촬영건 때문에?" "모두들 마음에 두지 않는 척하고 있어. 하지만 난 그렇지 못해. 어쩐지 다른 방향으로...... 내 자신과 밴드 멤버들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걸 밴드 멤버들도 느끼고 있나?" "몰라. 만약 그렇다면 위기라고 봐야겠지?" 쇼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밴드와는 몇 년이나 됐어?" "3년이 다 됐어. 그전 밴드는 1년 남짓하다가 깨어졌구." "깨어진 이유는 뭐였지?" "흔해 빠진 것이었어. 모두들 프로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프로가 된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없었어. 때문에 프로 쪽에서 손을 내민 순간, 제각각이었어. 말하자면 밴드가 프로로 데뷔하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 프로가 되는 것만 생각해 왔던거야. 하지만 저쪽에선 개개인이 아니라 밴드 자체를 평가해 줬던 거였어. 그런 줄도 모르고 스카웃 제의에 마음이 들떠서 다른 음반 회사를 찾아가서 솔로로 데뷔시켜 달라기도, 프로덕션과 상의하기도 하는 등 뒤죽박죽이었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의논도 해 봤지만, 끝내 합의점은 못찾고 말았어." "아깝게 된 것 같군. 기횔 못살려서." "그래도 일단 해 보자고 한 적도 있었어. 우선 밴드로 데뷔해서 다시 기회를 기다려 보자구 말야. 하지만 그때 멤버들은 모두 참을성이 모자랐어." "그 사람들, 지금은 뭘 하고 있나?" "둘은 프로가 되었고, 둘은 발을 씻었어. 한사람은 도쿄를 떠났구." "연락은 주고받나?" "가끔씩. 이번 투어 귀로에 들러볼까 하는 라이브 하우스가 바로 그 사람 거야." "그랬었군."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지레짐작하는 거야?" "뭐라니?" "나하고 그 사람 사이 의심하는 거야?" 사메지마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아니." "무슨 뜻이야? 지금 뜸들인 것 말야." "옛날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의심할 일이 없다...... 그런 생각을 했지. 안 그래?" "밉살스럽긴." 쇼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내가 거기 갔다가 묵고 오겠다면 어쩔래?" "묵기만 하면야......" 쇼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자주 새우잠 함께 잤었어. 지금 밴드 멤버와도 마찬가지구. 곡을 만들거나 노래 맞춰 보느라고 모두 한방에 모여서 말야." "누군가와 몸 섞은 적도 있나, 밴드 멤버와?" 사메지마의 물음에 쇼는 눈을 동그랗게 떳다.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있어." "함께 살고 싶은 생각 든 적은 없구?" "그런 것과는 달라. 반해서 그랬다기보단 우정을 확인한다는 게 순간적으로 그렇게 됐다고나 할까. 때문에 한번으로 끝났어." "그래?" "화났어?" 사메지마는 앉은 채 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나간 일, 화는 내서 뭘 해?" <마담>이 일어서면서 불쑥 한마디 끼어들었다. "어쩐지 오늘밤은 이상해. 한바탕 법석이 벌어지는 것 아냐?" "여기서?" 쇼가 물었다. "아니, 밖에서. 두 사람, 요란스런 것 싫어한다면 나 혼자 갈께. 나갈 적에 문 잠그는 것 잊지 말아요." "요즘은 야쿠자가 얌전하단, 그 말이로군." "당분간은 그렇겠죠. 야쿠자 가운덴 등치고 간 빼가는 녀석도 있으니까 곧 활기를 되찾는 것 아녜요?" "경기 좋은 녀석이 어디 있을려구." 사메지마의 말에 <마담>은 웃음을 지었다. "영리한 야쿠자는 경기가 좋아도 나타내지 않아. 반대로 멍청한 야쿠자는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오늘은 으스대야 하니까 경기 나쁘단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아요." "하긴 그래." "뭘 쫓고 있군, 요즘?" <마담>의 물음에 사메지마는 웃기만 했다. "과연 이상한 밤이야. <마담>이 나한테 그런 걸 다 묻는 걸 보니." "마약!" 쇼가 불쑥 내뱉었다. "마약? 정상업무 아니잖아?" "그래. 하지만 신제품이야. <아이스캔디> 라고 들어본 적 있나?" "물론이죠. 그게 마약이야? 풋나기 꼬마들이 팔고 다니던데?" "어디서 떼오는지, 그걸 모르겠단 말야." <마담>은 허공으로 눈길을 던지면서 길게 숨을 내뿜었다. "나도 들어본 적 없어요. 야쿠자들은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그렇다면 야쿠자들이 내버려 둘 것 같아?" "하지만 얼마든지 보안을 유지할 수 있잖아요? 말단 밀매인들에게 이름 따위 가르쳐 줄 필요도 없을 거구."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어. 하지만 판매 네트워크를 조직하자면 노하우가 필요해. 아무 데서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마약을 사달라고 조르는 녀석들을 긁어모아 봤자, 벌기는 커녕 붙잡혀 가기 십상이야." "그런 노하우, 야쿠자들이 갖고 있나 보죠?" "그런 것에 관해선 프로들이야." "신주쿠에서 각성제로 먹고 사는 구미는 얼마든지 있어요. 세력권은 각각 다르지만." "그래, 그건 사실이야." 대답하던 사메지마는 어떤 생각이 머리 속을 번쩍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각성제를 취급하고 있는 구미를 ㅎ어보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같은 구미 안에서도, 표면상 마약 취급을 금지하고 있는 곳은 자기 구미가 그런 데 손대고 있는 것을 모르는 멤버도 많기 때문에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스캔디>가 마약인 줄은 몰랐어요. 요즘 젊은 애들은 마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 "바로 그걸 노린 거야." "대마초나 코카인보다 훨씬 고루하니까 그렇지." 쇼가 불쑥 내뱉었다. <마담>이 쇼를 응시했다. "쇼짱도 복용한 적 있어? 그런 약물 말야." 쇼는 기분이 상한 얼굴로 글래스를 높이 쳐들었다. "난 이것 하나로 만족해요. 그런 걸로 허세부릴 생각, 눈꼽만큼도 없어요." "그게 오히려 영리한 생각이야. 몸에 나쁜 것도 있지만, 잠시 기분 좋아지려다 돼지우리에 갇힌다면 채산이 맞지 않아. 그런 손해날 짓, 왜 해?" 말을 마친 <마담>은 사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탄광에서도 마약 복용하는 사람 많았어요. 그리고 어부들도. 겨울 밤, 혼자 어둔 바다를 나가는 어부들...... 마약이라도 맞지 않으면 춥고 무서워 견디지 못하나 봐요." "마약은 그런 연약한 사람들만 노리는 거야." 한걸음 더 나아가 어선을 통한 마약 밀수까지 늘어갔다. 한국산 각성제가 대량으로 일본에 유입되던 1980년대 전반에는 양국 밀수선이 공해상에서 만나 물건을 넘기는 소위 박치기가 횡행했다. 현재도 해상거래로 밀반입되는 각성제가 엄청난 양에 달한다는 것이 당국의 얘기였다. "각성제나 마약이 어째서 사람을 그렇게 끔찍하게 만드는지 알아?" <마담>이 쇼에게 물었다. "끔찍하게라니? 머리가 홱 돌아 미쳐 날뛰는 것 말야?" "응. 나도 들은 얘기지만...... 그건 말야, 옛날엔 약국에서도 버젓이 팔았대. 수험생이 밤샘할 때 복용하기도 했고 특공대 병사들에게 먹이기도 했댔어. 요즘의 영양제 같았나 봐. 물론 몸엔 좋지 않았겠지만. 그렇던 그게 끔직한 약으로 변한 건 법률로 금지하고 부터래. 야쿠자들이 은밀히 취급하면서, 단위를 높이는 바람에 말야." "화학조미료도 그렇단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쇼가 아는 체를 하자 <마담>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과 이건 차원이 전혀 달라. 각성제 결정을 은어로는 <고구마 말랭이> 라고 하는데, 그것과 꼭 같은 것이지만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있대. 뭔지 알겠어?" 쇼는 사메지마에게로 눈을 돌렸다. "알아?" "응. 이제 보니 <마담>도 별걸 다 알고 있군. 장뇌야, 그건." "장뇌?" 쇼는 콧등까지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방충제로 쓰는 것 말야?" "그래요. 그걸 갈아서 섞는 거야. 눈으로 봐선 표시가 나지 않아. 하지만 그런 걸 주사해서 몸에 좋을 까닭이 없잖아?" "장뇌는 강심제 원료로도 쓰여. 때문에 너무 많이 맞으면 그걸로 이 세상과는 바이바이야." 사메지마가 설명해 주었다. "방충제를 몸 속에 주사하니까 이상해질 수밖에....." 쇼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렇지? 내게 그런 얘길 해 준 사람도 중독자였어. 그만둬야지, 끊어야지 하고 울먹이면서 주살 놓는 거였어. 그렇게 맞기 싫은 거라면, 죽을 각올 하고 발을 씻으면 되잖느냐고 쏘아 줬지만 끊는게 쉽지 않는 모양이었어. 그뒤 그 사람 낙반사고로 죽었어. 마누라까지 도망쳐 버린 사람이어서 동료들이 장례를 치러 줬어. 화장이 끝난 뒤 뼈를 줏다가 깜짝 놀랐어. 뼈가 말야, 젓가락으로 집으니까 파삭 부서지는 거 있지? 뼈까지 그렇게 누더기가 되어 버리다니......" "설마......" 쇼의 눈이 둥그래졌다. "각성젠 최악의 약이야. 섹스가 잘 되게 해 준다지만 - 호모인 주제에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하겠지만 - 이 세상엔 섹스 이외에도 즐거운 게 얼마든지 있어요. 물론 섹스도 좋지만 즐거움 중의 하나일 뿐이야...... 요즘 마약을 찾는 패거리는 진통이다 뭐다 해서 몸을 추스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섹스를 잘하기 위해서야. 바보들이지. 섹스 한번 잘하려고 몸을 버리려 들다니...... 결국은 평생 해야 할 섹스 횟수를 스스로 줄이는 셈 아니겠어?" "말 한번 잘했다!" 사메지마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마담>이 말을 이어갔다. "나도 몇 번 맞아본 적이 있어요. 처음엔 두통만 심했지 조금도 좋은 줄 몰랐어. 두번째는 힘이 저절로 솟았어. 단번에 빠져드는 사람도 있구 몇 번 되풀이하는 가운데 저절로 빠져드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야." "몇 종류 섞어서 복용하면 비교적 쉽게 빠져 드나 봐." 쇼가 불쑥 내뱉듯이 말했다. 아는 사람 가운데 중독자가 있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사메지마는 쇼에게로 흘낏 눈길을 던지긴 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쇼가 사메지마를 돌아보았다. "그전에 밴드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약물 중독자라고 생각했었지?" "전부는 아니지만 적지도 않아." "그렇지 않아. 뮤지션이 검거라도 되면 신문이 법석을 떨기 때문에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신문이 법석을 떠는 건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소위 유명인을 마약이나 각성제 복용 혐의로 검거하면 경시청은 반드시 기자실을 통해 발표해. 그 결과 평소에 으스대던 유명인의 수갑 찬 풀죽은 사진이 크게 실리지. 하지만 피라미 똘마니들을 약물 복용 혐의로 검거했을 땐 그렇지 않아. 말하자면 검거되면 얼마나 비참한 꼴이 되는지 본보기를 보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비열하긴......" "공명정대하다곤 안해.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약물은 무섭다, 검거되면 비참해진다는 생각을 심어 주게 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효과를 봤어?" "물론. 하지만 요즘 와선 별로인 것 같아." "왜 그렇죠?" <마담>이 물었다. 사메지마는 설명을 이어갔다. "<마담>도 얘기한 것처럼 이전엔 저소득층.육체노동자 등 소위 블루 컬러들에 약물 중독이 많았어.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가혹한 노동을 견디어 내야 했어. 그래서 <힘내는 약> 으로 각성제나 마약을 복용한 거야. 하지만 지금은 전체적으로 풍요해졌고 노동시간도 줄어들어 각성제를 맞아가면서 일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어. 오히려 각성제의 또 다른 효용 - 섹스를 위한 복용이 늘어났어. 그런 녀석들은 각성제에 돈을 들인다고 해도 입고 먹고 사는 데엔 불편을 느끼지도 않아. 따라서 중독자라 하더라도 겉보기엔 보통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그래서 멋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뭐야! 각성제를 맞아도 횟수만 많지 않으면, 먹을 것을 제대로 찾아 먹으면 그렇게 몸을 해치지도 않잖아? 술.담배나 마찬가지 아냐?> 라고 말야. 물론 그렇지 않아. 각성제는 내장을 망칠 뿐만 아니라 뇌까지 망가뜨려. 말하자면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자기를 납득시키려는 자체가 이미 중독이 되어 있다는 증거야." "......끔찍한 일이야." 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각성제나 마약은 자기가 즐기려고 맞을 때까진 피해자가 없는 범죄라고 보는 사람도 있어. 스스로 자기 몸을 망치고 있는 거니까 다른 사람에겐 전혀 피해가 없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어느날 갑자기 이상해져서 길가는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거나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없다고 믿고 있어. 하지만 정말 그럴까? 누구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야, 각성제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그런 얘기, 이제 그만둬. 속이 다 뒤틀려," "그래, 술이나 마시자구." <마담>이 맞장구를 치면서 자기 글래스에 얼음을 집어넣었다. "술도 지나치면 중독이 되지." "그만두지 못해요?" <마담>이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의 네온 간판은 자정이 되면 꺼진다. 하지만 이 도시에선 늦게까지 문을 여는 술집이 적은 탓에 손님들은 대개 새벽 2시, 때로는 3시까지 버티는 경우가 많았다. 네온이 꺼지자 구니사키 고지는 <라라바이 오브 버드랜드> 를 연주하면서 불렀다. 재즈의 스텐더드는 연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너의 취미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밤은 손님이 별로 없었다. 아니, 한팀 뿐이었다. 카운터 앞엔 시의회 의원인 노비다가 상해에서 돈벌이 원정 온 호스테스를 상대로 버티고 있었다. 재즈를 좋아한다면서 고지가 스탠더드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연신 <아> 라든가 <어> 라든가, 신음소리인지 박자 맞추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제딴은 제법 멋을 부린 것이겠지만, 고지의 눈엔 주책바가지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노비다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민속주 양조장 아들로 도쿄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게 큰 자랑인 덜떨어진 중년사내였다. 노비다는 도쿄에서 낙향해 온 뒤부터 호스테스가 들으라는 듯 신주쿠와 긴자 얘기를 늘어놓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 나이에도 차림새는 여전히 아이비 패션, 화려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런 시골 구석에서 뭣 때문에 그렇게 멋을 부려야 하는지 고지로서는 이해하기 힘이 들었다. 하지만 오너가 들를 때면 노비다도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물인 척 거들먹거리지만 역시 가카와 본가 사람들에겐 머리를 들 수 없는 처지였다. 이 도시에서, 아니 이 현에서 가카와 본가와 맞설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정치가도 TV 방송국, 신문사에서부터 종합병원에 이르기까지 주요 산업과 매스컴의 대주주로 군림하고 있는 가카와 본가에는 한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본가의 장녀가 의 오너였다. <라라바이 오브 버드랜드>의 제2코러스에 접어들었을 무렵 와인을 쌓아둔 복도를 통해 게이코가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흠뻑 브랜디에 젖어 있었지만 걸음걸이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크브라운 팬츠 수트에 실크 스카프를 두른 차림이었다. 게이코는 이 도시에서 패션 감각이 가장 세련된 사람으로 꼽혔다. 1년에 네번, 계절따라 유럽으로 가서 주로 밀라노와 파리에서 산더미처럼 사 안고 왔다. 키가 1미터 70센티미터나 되었기 때문에 유럽 기성복도 별문제가 없었다. 도쿄의 대학 재학 시절, 부모 몰래 모델 노릇을 했을 정도였으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게이코가 들어오자, 흰 셔츠에 나비 넥타이를 맨 젊은 웨이터 둘이 주인에게 재롱을 떠는 강아지처럼 날쌔게 달려갔다. 게이코가 재킷을 벗자 얼른 받아들었다. 게이코는 여왕처럼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주었을 뿐, 곧장 고지가 있는 스테이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스테스를 껴안고 있던 노비다가 게이코를 알아보는 것이 한박자 늦었다. 노비다가 호스테스 뺨에 키스를 하려는 바로 그 순간, 게이코가 스테이지에서 쏟아내린 스포트라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게이코의 갸름한 얼굴을 본 순간, 노비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떠밀려 비틀거리던 호스테스가 카운터를 짚으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게이코씨." 하지만 게이코는 노비다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랜드 피아노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굽혀 고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옅은 핑크를 칠한 입술로 미소를 흘렸다. "오랜만이로군, 게이코씨. 지난번 맥주 파티 이후 처음 아니오?" 노비다가 들뜬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자 게이코도 느릿느릿 그쪽으로 돌아섰다. 여전히 미소를 흘린 얼굴로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고 <쉿!>하면서 말를 막았다. 노비다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스툴에 털썩 주저 앉았다. <라라바이 오브 버드랜드>가 끝날 때까지 게이코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고지가 마지막 프레이즈 연주를 마치자 더욱 크게 미소를 지으며, <짝! 짝! 짝!> 입으로 박수소리를 냈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뒤로 젖혀 내리면서 노비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셨죠, 노비다씨." "오, 오랜만입니다." 노비다는 일어서서 머리를 숙였다. 게이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노비다가 데리고 온 호스테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어...... 2쵸메의 <포션>에 새로 온 아가씨, 유카립니다." "유카리씨?"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중국인 호스테스는 미소와 함께 볼품없는 일본말로 <안녕하세요?> 라고 중얼거렸다. "예쁜 아가씨로군. 노비다씰 조심하세요. 소문난 플레이보이이니까." 호스테스의 손을 가볍게 두들기면서 게이코가 한 말에 노비다는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 "괜찮아요, 노비다씨. 여긴 술집 아녜요? 마음 푹 놓고 즐기세요." 게이코는 우아하게 머리를 숙여 보인 다음 고지 쪽으로 다가갔다. 고지는 건반에 손가락을 내려놓았다. 쿵하는 소리가 울렸다. "또 음주운전을 했군요." "응. 돌아갈 적엔 고지가 운전해 주겠지?" 게이코는 똑바로 고지의 눈을 응시했다. "구제 불능이로군요, 무서운 걸 모르는 사람은." 가게 뒤쪽에 있는 주차장에 검정 포르세를 아무렇게나 세워뒀을 게 분명했다. "그것보다 또 한곡 연주해 줘. 재즈 아니라도 좋아. 당신 좋아하는 것으로." 고지는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로선 좀......" "기타라도 괜찮아." 게이코는 스테이지를 가리켰다. 스테이지에는 한달에 두번, 도쿄의 메이저 재즈 밴드를 초청했다. "오늘은 피아노만 치겠어요. 듣고 싶은 곡 있나요?"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이 2년 동안 웬만한 스탠더드 넘버는 그럭저럭 연주할 정도가 되었다. 2년이란 세월은 고지가 게이코와 처음 몸을 섞은 이후 흘러간 시간과 일치했다. 고지는 구인광고를 보고 를 찾아온 것이었다. 라고 명명하기 전의 이 집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스낵이었다. 게이코 아버지가 애인에게 마련해 준 것이란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여인이 교통사고로 죽자 게이코가 운영을 맡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게이코에게 새 장난감을 하나 안겨 준 정도였을 것이다. 실제로 게이코는 내부장식과 새로운 이미지를 심는 데 꽤나 열을 올렸다. 그렇다고 이 술집으로 큰돈을 벌어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손님이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 상황이 1백년이 계속된다고 해도 가카와 가는 말할 것도 없고 게이코 지갑조차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걸 고지도 알고 있었다. 가카와 본가의 재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게이코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게이코는 지금까지 이 도시에는 없었던 술집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종업원을 포함해서 젊은이들이 모여 품위 있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집. 는 영업을 않는 낮시간엔 역내 아마추어 밴드 연습장으로 빌려 주었다. 공회당과 학교 체육관 이외엔 변변한 연습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는 도쿄와 같은 임대 스튜디오가 없었다. 아마추어 밴드에게 홀을 빌려 주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게이코였다. 고지가 지난날 도쿄에서 록밴드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런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프로가 되려는 생각을 이미 오래 전에 훌훌 털어 버린 고지였다. 하지만 한때 프로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던 자부심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듣고 게이코의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 이 도시에도 옛날 자기 같은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야. 그 아이들이 열심히 연습할 수 있게 가게를 개방하고 싶어. 고지는 반대했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게를 빌려 준 뒤, 만약 게이코가 정성들여 설치한 사운드 장치를 엉망으로 만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염려할 것 없어. 자기가 지켜봐 주면 될 것 아냐. - 내가 지켜봐야 해요? - 그럼 지켜보고 있다가 괜찮은 아이들이 있음 가르쳐 줘. 자기와 나 두 사람이 프로듀스해서 프로로 데뷔시켜 주면 좋잖아? 태어날 적부터 돈과 지위를 가진 게이코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스타를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매력있는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거칠 것 하나 없는 게이코였어도 그것만은 어디까지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고지는 수십에 이르는 아마추어 밴드 연주를 스테이지에서 지켜보았으나 프로는 커녕, 작은 라이브 하우스를 메울만한 기량이나 매력을 가진 밴드는 하나도 없었다. 노래가 서툴고 테크닉이 모자라더라도 외모가 멋이 있거나 나름대로의 분위기가 있다면 그런대로 봐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쥐뿔도 없는 주제에 도쿄 제패를 굼꾸는 과대망상의 촌뜨기에는 신물이 날 정도였다. 도저히 <음>이랄 수 없는, 소음에 가까운 불협화음을 듣고 있을라치면 지난날의 밴드가 그리워졌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곳의 엉터리 녀석들에 비하면 차원이 달랐다. 지난날 밴드에선 기타를, 지금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고지였으나 그 피아노 연주조차 이곳 밴드 녀석들의 키보드보다 훨씬 나았다. 고지 아버지가 역전에서 영화관과 식당을 경영하면서 제법 날리던 시절 겨우 5년 동안 피아노 레슨을 받은 것이 고작인데도 그랬다. 요는 근성이 문제였다. 시골 구석에서 애인에게 잘 보이려고 헤어스타일과 옷에 신경을 쓰는 녀석들은 도쿄 싸구려 아파트에서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면서도 프로를 꿈꾸는 사람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근성도 센스도 없었다. 밴드에 근성론을 적용하는 것은 고지 자신이 생각해도 고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밴드에서 손을 뗀 지금,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 옛날 동료를 생각하면 역시 근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지 자신은 계속할만한 근성이 없었던 것이었다. 는 게이코의 이니셜을 따서 붙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고지의 이니셜 역시 였다. 게이코에게 이끌려 처음 몸을 섞던 날 밤, 게이코가 속삭였다. - 의 K 하나, 자기한테 줄께. - 나한테? - 자기가 도쿄에서 찾아내지 못했던 것을 여기서 가지면 좋잖아? 게이코는 고지의 수완을 인정한 것이었다. 얘기 솜씨, 연주 솜씨 이외에도 술집 매스터로서의 수완을 평가한 것이었다. 게이코에겐 아주 냉철한 부분과 로맨틱한 부분이 모순 없이 공존하고 있었다. 냉엄한 부분은 본가의 장려로서 이 도시에 군림하면서 노비다와 같은 시골뜨기를 통렬하게 몰아세울 때 나타난다. 밤마다 여자답지 않게 (이 도시에선 그렇게 말했다) 술을 퍼마시면서 이 지역 매스컴과 몇몇 안되는 예술가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등 마치 픽서처럼 행동하면서도 낮에는 당당한 본가의 장녀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로맨틱한 부분 가운데는 도쿄에서 상처를 받고 패잔병처럼 (게이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돌아온 고지를 감싸안고 도쿄에서 악전고투한 얘기를 듣고는, <모두들 열심이군, 자기 꿈을 위해> 하면서 울먹이는 면이 있었다. 넘치고 부자유스러운 게 하나도 없는 여왕은 타인의 비극에 눈물을 짓는 것이었다. 고지 입장에서 보면 도쿄에서 자신이 뛰었던 길은 남다른 비극도 아닌,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몇백 몇천명이 같은 길을 뛰고 있을 게 틀림없는 평범한 경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쿄의 유명 여자대학 부속고등학교로 진학이 결정되자마자 맨션 아파트를 마련해 주고 돈을 풍덩풍덩 보내 줄 뿐만 아니라 가카와 재벌 도쿄 지사가 뒤를 돌봐 준 게이코로서는 상상은 할 수 있더라도 결코 직접 경험은 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게이코는 고지의 추억담에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가난한 생활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감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고지의 좌절에 죄의식이라도 느낀 듯 고지에게 를 맡긴 것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복받은 사람의 변덕일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차고 넘쳐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뭣 하나라도 부족한 인간을 보면 멸시하든가 죄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죄의식에 발단되는 것은 결국 연민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이 이 술집과 마찬가지로 게이코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지는 알고 있었다. 게이코를 이용해서 이 도시에서 한번 활개를 쳐보자. 막연하지만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게이코는 이외에도 장난감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게이코 혼자의 소유가 아니어서 함께 가지고 노는 <동료>도 있었다. 그 <동료>는 게이코 앞에 무릎을 끓지 않아도 존재를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집안도 좋고 머리도 비상한 남자. 고지처럼 도쿄에서 낙향해 왔으나 돌아오자마자 이 도시에 자신의 작은 제국을 건설한 남자. 게이코도 그 남자에게만은 <대등>을 허락한 것이었다. 그러나 게이코가 눈치 채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그 남자는 게이코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게이코가 <대등>을 허락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 그에겐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게이코가 모르고 있는 일이 또 있었다. 그 남자가 동생과 함께 은밀한 사업에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게이코는 모르고 있었다. 그 사업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재미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다. 고지는 그들의 사업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마음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언젠가 여왕마마가 자기에게 싫증을 느껴 떠나간다 하더라도 이 도시에서 우아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법을 어기는 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고지의 아버지는 고지가 귀향한 얼마 뒤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퇴원은 했지만 후유증이 심해 어머니와 누님이 옆에 없으면 식사조차 못하는 형편이었다. 재산이라고는 집 한채 뿐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어떻게든 먹고 살겠지 하는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것이었는지 고지는 금방 깨달았다. 이 도시에서 그처럼 위험한 장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고지에게 귀띔해 준 사람은 중학 동창생이었다. 고교를 중퇴한 뒤 이 지역의 폭주족을 거쳐 폭력단에 들어간 녀석이었다. 지금은 발을 씻었지만 직업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일과였다. 이름은 히라세였다. 히라세와 그가 바텐더로 일할 때 알게 된 이시와다리라는 사내가 고지의 동지였다. 위험하지만 황금알을 낳는 사업을 빼앗자는데 의기투합을 본 것이었다. 이시와다리는 약학대학을 중퇴한 뒤 건달짓을 하다가 지금은 보험외무원으로 먹고 산다고 했다. 어딘가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였으나 약물에 대한 이시와다리의 지식이 고지에겐 꼭 필요했다. 그 사업을 빼앗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님은 고지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게이코 한사람 만이 아니라 그녀가 유일하게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가카와 노보루를 상대로 겨루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업이라면 가카와 가를 상대로 싸울 생각은 고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이 빼앗으려고 하는 노보루의 사업은 어떤 일이 있어도 표면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만약 표면화가 되기만 한다면, 그 순간 가카와 가의 위신은 쑥밭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잃어버리는 것이 많은 치명적인 사업에 가카와 형제가 손을 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업이란 게 아마도 각성제 밀조일 것이 분명했다. 고지는 아직 확실한 내용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은 히라세가 야쿠자 시절의 동료로부터 주워들은 소문 정도였다. 가카와 가는 이 도시의 폭력단에게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 야쿠자들도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으나 진상을 알아볼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 것이었다. 히라세 얘기를 들어보면 이곳 폭력단은 현내의 온천장과 시내 유흥가로부터 적지 않은 상납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마약과 각성제 취급을 금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작지만 결속력이 강한 구미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런 금령을 어긴 녀석도 없었고 다른 현의 폭력단이 이곳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말하자면 무풍지대였다. 선거 때도 가카와 가의 후원을 받는 보수당원만이 당선됐고, 폭력단 세계에서도 같은 구미가 몇십 년씩 계속해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게이코가 아무 것도 모르고 단지 가카와 가 형제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본가의 장녀라는 입장을 떠나서 보더라도 게이코는 아주 영리한 여자였다. 형제가 손대고 있는 위험한 사업 내용을 눈치 채지 못했을 턱이 없었다. 게이코가 지금의 게이코로 변모된 것은 도쿄에서 고위 관료와의 결혼에 실패하고서 부터라고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단기 유학을 포함하여 <신부 수업>을 마친 그녀는 통산성 (상공부) 관리와 결혼했다. 결혼식에는 수상까지 참석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1년 반이 채 못 되어 파경을 맞았고, 게이코는 부모가 마련해 준 고지마치의 호화 맨션 아파트를 뛰쳐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원래부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시기심 많은 아가씨였다. 그렇던 게이코가 지금은 어딘가 인생을 포기한 것 같은 분별없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던져 버렸다>는 말이 지금의 게이코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미인에다가 돈도 많고 영리한 그녀가 단 한번의 결혼 실패로 인생을 내던져 버린 것이었다. 게이코는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아버진 한번도 날 꾸짖은 적이 없었어. 언제나 게이코, 게이코 하시면서 귀여워해 주셨지. 그렇던 아버지가 단 한번, 날 두들겨 팰 정도로 화를 내셨어. 바로 내가 이혼했을 때였어. 이 세상엔 날벼락을 맞을 사람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남자든 여자든. 특히 도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무풍지대인 이 도시에서는 본가의 장녀가 결혼에 실패한 것을 엄청난 일로 받아들였다. 게이코를 볼 적마다 누구든 그 일부터 상기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게이코가 결코 고향을 뜨려 하지 않는 것을 고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게이코는 물론 가카와 형제에게는 고지가 알 수 없는 어떤 특별한 무엇이 이 도시에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치.경제는 물론 범죄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명가>의 후예로 태어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게 분명했다. 고지가 히라세와 이시와다리를 데리고 그런 <명가>를 상대로 한판 벌이려 한다면,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빈주먹이란 사실이야말로 세 사람의 유일한 무기였다. "그럼 <버몬트의 달>, 괜찮겠죠?" 고지는 게이코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물론 좋아해, 그 노래." 게이코는 대답하면서 머리를 까딱해 보였다.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읽어내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 쌍꺼풀에 싸인 커다란 눈동자, 에로틱하게 느껴질 정도로 볼록한 뺨. 1미터 70센티미터의 장신이 결코 엉성하게 보이지 않는 균형잡힌 몸매. 알몸의 게이코는 절대로 일본인 같지 않았다. 여자에 관한 한 아쉬움 없이 살아온 고지였지만, 게이코만큼 예쁘고 풍만한 젖가슴을 가진 여인은 별로 없었다. 나이는 서른둘. 하지만 서른도 안 되어 보였다. 고지가, 왜 연예계로 가지 않았느냐고 물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게이코는 웃기만 했다. 게이코와 같은 상류사회 사람에겐 연예계 따위, 발 아래 세계였다. 프로듀스엔 흥미를 느낄 수 있어도 스스로가 상품이 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버몬트의 달>을 연주하는 동안, 노비다가 슬금슬금 나가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고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노비다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고지의 그런 제스처를 등을 돌리고 있는 게이코도 눈치 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게이코는 돌아보지 않았다. 고지의 얼굴만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눈엔 게이코가 고지에게 반해 있는 줄 오해하기 알맞은 자세였다. 실제로 게이코는 자주 고지에게 좋아한다고 속삭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귀여운 페트에게 하는 말과 별로 다름이 없다는 걸 고지는 알고 있었다. 게이코가 눈치를 챘을까. 어쩌면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런 감정을 게이코는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지는 연주를 마쳤다. "멋졌어, 정말." 게이코는 미소를 지었다. 웨이터가 각얼음을 넣은 헤네시 X.O 를 들고 왔다. 게이코는 잔을 받아 한모금 마셨다. "오늘은 어디어디 다녀왔나요?" 고지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면서 담배를 꺼냈다. "언제나 그게 그거지 뭐. 로열 호텔에서 도예가 파티가 있었어. 신문사 문화부랑 TV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어. 이리로 함께 오고 싶어했지만 거절했어. 술버릇 나쁜 친구들이어서 그랬어. 오늘 여긴 어땠어?" "한가했어요. 노비다씨 이외엔 다섯 팀쯤. 일찌감치 왔다 갔어요. 참, 시마자키 선생이 안부 전해 달라더군요." "건강은 어땠어, 그 할아버지?" "건강했어요. 도쿄 대학병원에 있는 아드님이 내년쯤 귀향한다더군요." "병원 물려받으려는 거겠지. 도쿄에서 달라붙은 간호사 데리고 올거야, 틀림없이." "아는 사입니까?" "글쎄......" 게이코는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이코가 돌아다니면서 얻어 듣는 그런 정보는 언제나 이 지역 가십의 노른자위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고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주가 될 것 같지만, 옛날 동료가 절 만나러 온다고 했어요." "옛날 동료?" "밴드 시절의 멤법니다." "지금 뭣하러?" "프로죠, 그 사람은. 콘서트로 센다이까지 온 김에 들르겠다면서......" "프로...... 이름은?" "말해도 모를 겁니다. 쇼라고 합니다." "혼자 오나?" 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코의 눈빛에 뭔가가 서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꼬집어 말하기가 어려웠다. "여자로군." "네. 새로운 밴드의 보컬을 맡고 있어요. <후즈 허니> 라고......" "<후즈 허니>?" 게이코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직 앨범을 한장밖에 내지 못한 풋나기이니까요." "팔리긴 하나?" 고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게이코는 눈빛으로 얘기를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참 좋아요. 가창력도 뛰어나구." "묵어갈 생각인가, 그 사람?" 아무렇지 않는 듯 슬쩍 물어보는 말이었다. 그래도 고지는 허둥대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집에 재워 줄 순 없어요." "바보 같긴. 그런 뜻이 아니야. 여기서, 이 도시에서 하루 묵을 생각인지 어떤지 물어본 거야." "아, 그건...... 네. 제 생각으론 여기서 노래를 몇 곡 부르게 했으면 어떨까 하는데요. 개런티는 없어도 괜찮을 것 같으니까." "어머, 그건 안돼요. 프로를 어떻게 공짜로...... 노랠 부르게 하면 정당한 개런티를 지불해야지."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고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노래 부르라면 거절할 턱이 없어요. 물론 개런티는 생각도 않을거구." "왜? 프로가 됐으니까 옛날과 다를 지도 몰라. 자주 연락은 주고 받는 사이?" "네. 이 가게 오픈할 때도 안내장 보냈어요. 얼마 전 모처럼 전화로 얘길 나누었구요." "그럼 변했을지도 모르겠군. 그 아가씨에 대해 그처럼 자신이 있나, 고지는?" "한때 함께 일했으니까요." 게이코는 즐겁다는 듯 글래스를 만지작거렸다. "예뻐?" "그저 그래요." "분위기는 어때?" "뭐랄까, 으스대는 편이랄 수 있어요." "으스댄다? 양키처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좀더 개성적인...... 불덩어리라고나 할까." "같이 잔 적도 있어?" "네? 아니, 없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랬는지 어떤지조차 희미하지만 단 한번 날샐 무렵 눈깜짝할 사이에 얼떨결에 어울린 적이 있었다. "흠." 함께 잔 적이 없다는 대답에 게이코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혼자 찾아오잖아?" "뭐랄까. 옛날 밴드 동료들은 서로 묘한 그리움 같은 걸 느끼고 있나 봐요. 밤낮 함께 생활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전혀 만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자기도 그림움을 느껴?" "어쩔 수 없이......" 게이코는 물끄러미 고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꽉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만약 우리 가게에서 불러 주겠다면 기회를 만들어 보자구. 반주는 어떡하지? 가라오케로?" "제가 맡죠. 그 녀석도 키보드를 연주한 적이 있어요." "기대가 되는군.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노래를 부르라 해 놓고 입을 싹 씻을 순 없잖아? 호텔 숙박비, 우리가 지불하기로 해요. 로열에 예약해 둘 테니까." "미안합니다. 그 정도라면 녀석도 만족할 겁니다." 게이코는 머리를 끄덕였다. 몸을 흔들어대듯이 피아노에서 물러나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이쪽을 돌아보면서 다시 물었다. "하지만 새삼 왜 찾아올까? 단지 가까이 왔던 김에 들르는 걸까?" "아마 그럴 겁니다. 그 밖에......" "그 밖에 또 뭐? 자길 끌어들이러 오는 걸까? 지금 밴드에 말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 고지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러진 않을 겁니다, 절대로. 지금 그쪽 기타는 나보다 훨씬 우수해요. 아마도..... 얼마간 슬럼프에 빠진 탓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그래서 옛날 동료와 만나 자기와 처음 음악을 시작했던 때를 되돌아 보고 싶어진 것이겠죠." 게이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계산대 쪽으로 걸어갔다. 캐시어가 게이코의 검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걸어가는 게이코의 옆얼굴이 싸늘하게 보여 고지는 한순간 후회를 했다. 질투를 하는 것일까. 얼마간은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게이코가 경계하는 것은 쇼와 자기가 하루 이틀 밤, 옛날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관계를 되풀이하는 것보다도, 남녀의 기분과는 무관한, 고지 자신을 스카웃해서 도쿄로 데리고 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임이 틀림없었다. 마음에 드는 페트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걱정. 쇼가 게이코와의 이러한 미묘한 관계를 꿰뚫어 볼 수 있을까? 꿰뚫어 볼 게 분명했다.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쇼가 아닌가. 그리고는 어떻게 생각할까. 알 수 없었다. 자기가 낙향한 이후 성숙한 만큼 이 2년 반 동안 쇼도 성숙했을까. 고지로서는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6.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자동차 번호가 아니라, 하즈노 고객 중의 한사람이었다. 하즈노가 고교를 중퇴하면서 처음 취직한 곳은 역시 수입 중고차 회사였다. 지금 근무하는 회사와는 달리 사채업자의 담보물도 처분해주는 약간 뒤가 구린 곳이었다. 하즈노는 약 8개월간 근무하다가 지금 회사로 옮겼지만, 먼젓번 회사에서 알게 된 손님 중에 자그마한 연예 프로덕션 사장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 프로덕션은 폭주족 출신으로 구성된 록큰롤 밴드도 거느리고 있었다. 우연히도 그 밴드 멤버와 하즈노가 아는 사이임을 사메지마가 밝혀낸 것이었다. 멤버 이름은 히노하라 게타였다. 사메지마는 자동차 시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들고 있는 프로필 노트의 사진과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아래위 가죽 옷차림의 사내를 비교해 보았다. 노트는 프로덕션이 영화사나 TV 방송국에 세일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거기 적힌 것을 보면 히노하라 게타는 올해 스물두살, 신장 1미터 82센티미터 체중은 80킬로그램. 특기는 가라데와 오토바이 타기였다. 오토바이는 한정해제 면허까지 가지고 있었다. 스무살 때 폭행상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던 전과는 나와 있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삼촌인가 누군가가 우익단체 거물로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게 없다고 큰소리치고 다닌다고 했다. 실제로 전에 있던 프로덕션에서는 같은 소속의 열아홉 살 난 소녀 탤런트를 성폭행, 고소당할 뻔했다는 정보도 있었다. 자기는 야쿠자.경찰 양쪽 모두에 빽이 있다고 자랑한다는 것이었다. 하즈노 히로시와는 하즈노가 잠시 발을 들여놓았던 폭주족의 선후배 관계였다. 히노하라는 대갈못이 숭숭 박힌 검정 가죽 팬츠 수트에 부츠를 신고 있었다. 사메지마의 BMW 가까이 세워둔 대형 오토바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법률로 금지된 쵸퍼 핸들을 장착한 1천CC 였다. 장소는 록봉기 네거리에서 이쿠라가다쵸 쪽으로 가는 길목, 시간은 새벽 3시였다. 가로등 불빛으로 들어선 순간 히노하라의 얼굴이 불쾌한 것을 사메지마는 놓치지 않았다. 히노하라는 피우던 담배를 불도 끄지 않고 내던지면서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사메지마는 차에서 내렸다. 도어 닫는 소리에 히노하라는 흥미 없다는 듯 눈길을 한번 던졌을 뿐이었다. "히노하라 게타씨죠?" 사메지마가 묻자 턱을 쑥 내밀면서 실눈을 떴다. "뭐요?" 쉰 것 같은 그러나 묘하게 높게 울리는 목소리로 되물으면서 사메지마가 내민 경찰신분증을 응시했다. "당신 친구 일로 잠시 물어볼 게 있소. 10분쯤 얘길 나눴으면 좋겠는데......" "피곤해요. 내일하면 안 돼?" 내뱉듯이 말하면서 히노하라는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알아요, 피곤하단 걸. 우선 보기에도 술을 한잔 걸친 것 같은데 그런 상태로 오토바일 모는 건 위험해요. 바로 저기 있는 철야다방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귀찮게 굴지 마. 당신, 어느 서 소속이야? 아자부 교통과야?" 히노하라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신주쿠 서 방범과 소속이오." "신주쿠? 그렇다면 관할이 다르잖아! 뭘 그렇게 잘난 척 거드름을 피워? 날라가고 싶어?" "날라가고 싶으냐라니?" "파출소 근무를 하고 싶으냐, 이 말씀이야. 당신 같은 졸때기 형살 일일이 상대할 만큼 한가하지 못해!" "꽤나 중요한 얘기요, 내가 말하는 건." "시끄러워! 저리 썩 비키지 못해?" 오토바이 앞을 막아선 사메지마를 향해 고개짓을 하면서 엔진을 걸었다. "오토바일 1센티미터라도 움직이면, 음주운전 현행범으로 체포할테다!" 사메지마가 말했다. 히노하라 얼굴색이 싹 바뀌었다. "뭐야, 당신. 날 겁 줄 생각이야?" "겁 주자는 게 아냐. 지나치게 으스대다간 큰 코 다친다는 걸 가르쳐 주고 있을 뿐이야." "이 새끼가......" 히노하라는 키를 돌려 엔진을 껐다. 느릿느릿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공갈이라도 치듯이 사메지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봐, 당신 이름이 뭐야?" "사메지마." "방범과라고 했지?" "그래!" "신주쿠 서장, 지금 누구지? 뭣하면 서장한테 직접 말해 줄 수도 있어." "서장을 만나고 싶으면 지금 같이 갈까? 대여섯 시간만 기다리면 출근할 테니까 말야." "멍청하긴. 그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말해 두지만 본청 경무관급은 모두 날 알고 있어. 당신 같은 졸때기 날려 버리는 것쯤 식은죽 먹기야." "반가운 얘기야. 얘기만 들을 수 있다면 어디로 쫓겨가든 상관없어." 히노하라는 기가 질렸다는 듯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봐, 잘 들어. 경찰신분증 앞에서 벌벌 떨길 바라는데, 그건 착각이야. 당신과 얘기 나누고 싶은 마음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썩 꺼져!" "하즈노 히로실 알지? 지난주 각성제단속법 위반으로 검거됐어." "몰라. 얘기하기 싫댔잖아!" 사메지마는 무시한 채 계속했다. "당신과 하즈노는 선후배 관계야. <데이도렌고> 라는 폭주족에 함께 있었지? 게다가 당신이 소속되어 있는 프로덕션 사장은 하즈노를 통해 벤츠를 구입했구." "그래? 그런 줄 몰랐군. 그래서?" 사메지마는 히노하라를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경찰관을 지나치게 얕봤다간 큰코 다칠텐데......" "그러면 누가 겁먹을 줄 알아?" 히노하라는 쉰 목소리로 악을 썼다. "저쪽 벽에 두 손을 짚어 주겠어?" "왜 이러는 거야?" 히노하라의 표정이 바뀌었다.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 순간 사메지마는 확신했다. 그 때문에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불심검문이야. 우선 소지품 검사부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히노하라가 사메지마를 들이받았다. 엄청난 힘, 느닷없는 기습에 사메지마는 벌렁 자빠졌다. 히노하라는 오토바이에 올라타면서 엔진을 걸었다. 히노하라가 스탠드를 올리기 전에 몸을 일으킨 사메지마는 목을 잡아 끌었다. 오토바이가 기우뚱, 쓰러질 것 같았다. 그 밑에 깔렸다간 큰일이라는 듯이 히노하라가 훌쩍 뛰어내렸다. "이 새끼!" 히노하라는 사메지마의 팔을 뿌리침과 동시에 팔꿈치로 옆구리를 쳤다. 오토바이가 쿵하고 넘어졌다. 미러가 박살이 났다. 사메지마는 비틀거렸다. 히노하라는 한발 다가서면서 사메지마 쪽으로 등을 보이면서 전신을 비틀거렸다. 가죽 재킷의 등에 그려져 있는 또아리튼 뱀 그림이 사메지마의 눈 속으로 뛰어들 듯이 꿈틀했다. 상대방의 그러한 움직임이 뭘 뜻하는지 순간적으로 깨달은 사메지마는 두 팔을 벌리면서 허리를 낮추었다. 묵직한 돌려차기가 사메지마의 팔에 명중했다. 튕기듯이 비틀거리던 사메지마의 등이 세차게 벽에 부딪쳤다. 숨이 콱 막혔다. 히노하라는 빙그르르 한바퀴 몸을 돌렸다. 자세로 보아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거기 서!" 사메지마가 외쳤다. "안 서면 쏜다!" 히노하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메지마는 뽑아든 뉴남부 총구를 하늘로 치켜세우면서 몸을 추스렸다. "사람 놀리고 있네...... 당신 고소할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맨주먹인 사람에게 총을 겨누다니!" 히노하라는 둥그래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거기 손을 짚고 있어!" 사메지마는 히노하라의 고함소리를 무시한 채, 방금 자신이 부딪쳤던 벽을 가리켰다. 히노하라가 시키는 대로 하자, 권총을 집어넣은 다음 다가갔다. 장갑을 낀 사메지마는 익숙한 손길로 몸수색을 했다. 15센티미터쯤 되는 버터플라이 나이프와 은박지에 싼 <물건>이 든 비닐 주머니를 찾아냈다. "이건 뭐야? 말해 봐!" 히노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비닐 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어 은박지를 벗겨보았다. 커피 슈거와 비슷한 반투명 결정이 든 작은 비닐 주머니와 앙증맞은 도널드덕이 빽빽하게 인쇄된 박음눈이 든 종이조각이 들어 있었다. "<고구마 말랭이>와 페이퍼 아시드. 멋진 걸 숨기고 있었군." <고구마 말랭이>는 각성제 결정, 페이퍼 아시드는 종이에 LSD를 물들인 것이었다. 은박지에 싼 걸로 보아 각성제 결정을 은박지에 올려 놓고 라이터로 불로 가열, 피어오르는 증기를 흡입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알게 뭐람." 히노하라는 시침을 뗐다. 사메지마는 <물건>을 다시 비닐 주머니에 넣은 다음 수갑을 꺼냈다. "각성제 및 마약단속법 위반 현행범 용의로 체포한다!" "알았어!" 히노하라는 벼락 같은 고함과 함께 사메지마를 돌아보았다. "뭐든 털어놓을께. 한번만 봐 줘." "뭘 털어놓겠다는 게야?" "하즈노에 대해 알고 싶다면서?" "하즈노에 대해 뭘 알고 있어?" "그걸 조사하고 있는 것 아냐? 하즈노가 팔고 있는 것 말야." "너도 한몫 거들고 있나?" "난 아니야. 돈엔 궁하지 않아. 그것도 내가 즐기려고 갖고 있던 거야. 사람에 팔거나 하진 않아." "그럼 하즈노는 뭣 때문에?" "뭐긴 뭐야, 돈 때문이지. 그녀석 그전 회사에서 일할 때, 돈벌이 될 만한 일 없겠느냐고 보채길래 소개해 줬던 거야." "누구에게?" "고가라는 사채업자. 신주쿠에 있어." "고가?" "고가 다케오. 사무실은 <가이센로> 라는 중국집 위층에 있구." 사메지마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겨우 실마리를 손에 움켜쥔 것이었다. 하쓰가리 파킹 에어리어에서 본 짙은 감색 벤츠는 <가이센로> 주인인 중국인 소유로 되어 있었다. 캐어들어 갔다면 그날 운전사가 소유자 본인이었는지, 아니면 차를 빌려간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을 자극, 경계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몰라 사메지마는 그쪽은 더이상 추궁하지 않고 하즈노의 주변 인물 조사에 나섰던 것이었다. 칸토 신에쓰 지구 마약단속관 사무소가 하즈노를 체포한 지도 벌써 열흘이나 되었다. 하즈노 심문을 통해 얻어냈을 정보는 단 한가지도 사메지마에겐 흘러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즈노 주변인물 조사에 나섰던 것이었고, 이제서야 겨우 뭔가를 움켜쥐게 된 것이었다. 고가 다케오는 <마루세이 금융> 이라는 사채회사 사장이었다. 비록 폭력단에 적은 두지 않고 있으나 기업 사제로 불리는 특수한 입장이었다. 쉽게 폭력단을 자금원으로 해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마루세이 금융>의 배후도 사메지마는 알고 있었다. 칸토 교에이카이 계열의 후지노구미였다. 매춘과 톨루엔 밀매가 주업인 구미였다. 각성제는 취급하지 않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고가는 하즈노에게 어떤 벌이를 가르쳐 줬나?" "그것까진 몰라." 히노하라는 다시 시침을 뗐다. "고가와 넌 어떤 사이야?" "폭주족으로 있을 때, 고가는 밥도 사 주고 술도 사 주던 사람이야. 지금은 발을 씻었으니까 가까이 하지 않아." "발을 씻어? 누가?" "물론 나야." "그럼 이건 뭐야?" "아까 말했잖아? 내가 혼자 즐기려던 것이라고." "고가한테서 공급받은 것 아냐" "아냐. 고가와 만나지도 않아. 하즈노를 소개할 때도 전화만 했었어" "그럼 이건 어디서 입수했어?" "시부야 밀매인한테서 샀어." "고가 배후가 누군지 알고 있나?" "야쿠자겠지. 어느 구미인진 몰라!" "그래?" 말하면서 사메지마는 히노하라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뭣하는 짓이야?" 히노하라는 고함을 질렀다. "모두 털어놓았잖아? 봐 줘야 하잖아!" "누가 봐 준댔어?" "이 새끼가!" 히노하라는 수갑찬 손으로 사메지마의 멱살을 잡아 앞으로 당겼다. "똑똑히 기억해 둬. 위에 얘기해서 목을 잘라 버릴 테니까. 너 같은 쓰레기 폭력형사 따윈 한번 훅 불면 흔적도 없어져." "마음대로 해 봐. 그대신 밑구멍에서 피조차 안 나올 만큼 흠씬 두들겨 팬 다음 징역 맛을 톡톡히 보여 줄 테니까." 사메지마는 히노하라의 눈을 노려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히노하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사메지마는 수갑줄을 당겨쥐고 BMW로 끌고 갔다. "후지노구미." 모모이가 행동을 멈추었다. 히노하라를 신주쿠 서로 연행, 우선 구치시킨 다음 모모이의 출근을 기다리던 사메지마의 보고를 듣고 있던 중이었다. 조간을 들고 출근한 모모이는 말없이 사메지마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며 직접 차를 따르고 웃옷을 벗어 의자에 걸던 도중에 손길이 딱 멈추어 버린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하즈노에게 <캔디> 도매를 맡기고 있는 건 후지노구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모이는 의자에 앉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마가베가 들어가 있지?" "네. 최소한 앞으로 3년은 더 썩어야 할 겁니다." "그 녀석이라면 그 정도의 머린 있었겠지만......" 마가베는 후지노구미 제1의 인재로 알려진 야쿠자였다. 지난날 사메지마가 추격하던 중 모모이가 사살한 권총 밀조범이 만든 총으로 외국인 2명을 사살한 죄로 복역중이었다. 자신도 칼에 찔려 반사반생의 피투성이로 자동차를 몰아 신주쿠 서로 와서 사메지마를 찾다가 실신해 버린 것이었다. "마가베가 그렇게 된 뒤, 한때는 붕괴 위기까지 맞았다면서?" 모모이의 물음에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동태는 어때?" "특별히 두드러진 건 없습니다. 여전히 호테토르 (호텔 출장 매춘의 일본식 표현) 가 생업인 모양입니다만......" "고가는 꽤 어려울 텐데?" "도산으로 돈 떼인 게 적지 않을 겝니다. 아직은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것 같지만......" "고가란 말이지......" 모모이는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히노하라란 녀석이 <캔디>에 손댔을 가능성은 없나?" 사메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녀석이 소지하고 있던 건 <고구마말랭이> 와 L이었어요. 만약 관련되어 있다면 <캔디>도 가지고 있었을 테죠." "우선 조사해 볼까? 마약단속관들, 아직 히노하라엔 손댄 것 같지 않지?" "네. 하즈노가 털어놓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조살 않고 있거나, 어쨌든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백하지 않았다곤 볼 수 없을 게야. 히노하라 따윈 거들떠보지 않고 직접 고가를 내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고가를 건드리면, 당장 후지노구미에게 통보가 갈 텐데요." "고가와 후지노구미를 잇는 파이프를 알고 있나?" "아뇨." 사메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폭력단 담당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 내가 한번 알아보지. 그동안 히노하라를 족쳐 보라구." "곧잘 으르렁거리는 놈입니다. 친척 가운데 거물이 있다면서......" 모모이는 사메지마에게로 흘낏 눈길을 던졌다. "그래, 뭐라고 으르렁거렸어?" "좌천시키겠다고......" 모모이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재미있군." 관할서 형사과 4계, 폭력단 담당형사는 관내 구미와 주요 멤버의 동태를 잘 알고 있게 마련이었다. 구미 내의 자질구레한 인사이동과 가벼운 여행도 체크하고 있었고, 사업방향이나 업종전환 등 은밀한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 특히 어느 구미든 있게 마련인 젊은 간부후보생의 동태를 면밀히 체크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전쟁> 이나 몫이 큰 거래를 예측해 내기도 했다. <마루세이 금융>의 고가와 후지노구미를 연결하는 파이프 역시 그런 젊은 간부 후보생이었다. "스미라는 녀석이 파이프 역이라는군. 마가베의 동생 뻘인데, 마가베 그늘에 가려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그가 달려 들어간 뒤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게야." "스미....." 모모이의 말에 사메지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나인 얼마쯤 된 녀석입니까?" "서른 이쪽저쪽인가 봐. 마가베보다 손위라니까...... 이쪽으로 자료를 보내달라고 부탁해 놨어." 사메지마가 처음 봤을 때 마가베는 스물 대여섯 살 - 그때 이미 후지노구미 중견간부를 앞지르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후지노구미의 상부조직 교에이카이는 칸토 지방 남부를 세력권으로 하는 광역 폭력단이었다. 작은 구미들과는 달리 광역 폭력단에는 젊고 유능한 인재가 많았다. 그들은 본가 본부의 인정을 받아 고속출세를 하게 마련이었다. 마가베가 바로 그런 젊은 인재의 전형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출감하면 즉시 본가의 발탁을 받아, 어제까지 형님뻘로 모시던 구미쵸들을 발 아래 거느릴 수 있게 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야쿠자 사회는 실력 제일주의 세계였다. 대기업은 처음부터 입사시험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기 때문에, 하청회사 사원이 본사 간부로 출세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야쿠자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방계이든 본가이든 간에 구미에 입회하는 순간, 모두가 평등한 것이었다. 실력 있는 자를 발탁하지 않는 구미는 결국 도태당하고 마는 것이었다. "스미는 아마 야쿠자처럼 보이지 않는 녀석일지도 몰라. 대학을 중퇴한 녀석인데 구미 안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나 봐. 솔직히 말해서 형사과 4계 사람들도 판단이 서지 않는댔어. 아마 마가베의 인상이 너무강렬했던 탓인 것 같아." "마가베가 동생뻘로 발탁했다면 멍청이일 까닭이 없습니다." 모모이는 생각에 잠긴 눈길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히노하라의 심문은 일단락이 된 셈이었다. 명색이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본청 보안 2과가 신병을 넘겨받고 싶어했다. 사메지마는 깨끗이 양보해 주었다. 히노하라로서는 불운이었다. 빽이 아무리 든든하다 하더라도 본보기로 여론재판을 면하기는 어렵게 된 것이었다. "스미를 내사해 볼까. 어쩌면 마약단속관 사무소에서 먼저 손을 댔을지도 모르지만." 정면으로 부딪쳐 봐도 쉽게 꼬리를 잡을 수 없는 상대라고 보고 하는 말이었다. "마약단속관 사무소의 도게 말로는 도매조직 녀석들도 <캔디> 제조원과는 눈가리 거래를 하고 있다더군요. 만약 그렇다면 스미는 구미 내의 누구에게도 거래방법을 밝히지 않고 있을 겁니다. 체면이 깎일 테니까 말이죠." "다른 혐의로 일단 스미를 연행해서 족치는 것도 한 방법이야.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가 마약단속관 사무소보다 융통성이 많아." 그렇게 하면 마약단속관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지만, 자칫하다가는 제조원을 밝힐 실마리가 끊길 위험도 있었다. "스미가 만약 영리한 녀석이라면, 제조원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가장해서 이미 정체를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길도 있겠군. 어느 쪽일 것 같아?" "한번 조사해 보죠." "저 녀석입니다. 한복판의 키가 큰..." 4계의 다쿠보 경장이 사메지마에게 귀띔을 했다. 사메지마와 동년배인 다쿠보는, 사메지마가 스미의 얼굴을 확인해 달라고 하자 긴장된 표정으로 따라나선 것이었다. 두 사람은 햐쿠닌쵸 맨션아파트 앞에 멈추어 있는 사메지마의 BMW 에 타고 있었다. 스미는 젊은이 너댓 명에 둘러싸이듯이 해서 아파트에서 나왔다. 홀쭉한 키에 수수한 소프트 수트 차림이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는 모습하며, 젊은이들을 거느리지 않았다면 결코 야쿠자로는 보이지 않는 용모였다. "고마워. 이제 서로 돌아가도 좋아요." 사메지마의 말에 다쿠보는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걸로 끝난 겁니까?" "그래요. 지금부터는 나 혼자라도 괜찮아요." 독불장군, 반항아로 알려진 사메지마를 돕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동료들 눈도 있고 해서 억지로 따라나온 것이었다. "미행해서 주거를 확인할 생각이십니까?" "아니. 자택 주소는 알고 있어요. 이사가지 않았다면...." "와세다 쓰루마키쵸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결혼도 했구요." "그럼 이살 가지 않아군."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미는 3년 전 공갈미수로 검거된 적이 있었다. 주소도 당시 조서에 적힌 그대로였다. 다쿠보는 한숨 놓았다는 얼굴로 자동차 도어를 열었다.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번 다시 사메지마와 관련을 맺고 싶어하지 않는 기색이 뚜렷했다. 모모이와 야부를 제외하면 서내에서 사메지마와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마음 속으로 존경한다는 외근 순경은 몇 사람 있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나타내면 동료들 사이에서 당장 따돌림을 받게 마련이었다. BMW 에서 내린 다쿠보는 잽싸게 주위를 둘러본 다음, 날랜 걸음걸이로 스미가 간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사메지마는 BMW의 시계를 보았다. 밤 9시 40분이었다. 한잔 하러 가는 것일까. 스미의 신변을 둘러싸고 있는 녀석들은 모두 스미보다 나이가 젊은, 그래서 직속 부하로 보이는 패거리들이었다. 자기 부하만 거느리고 어슬렁거릴 수 있는 걸 보면 구미 내의 발판도 꽤 튼튼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웃사람의 미움을 사거나 때로는 한방 얻어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스미가 거느리고 다니는 녀석들도 사메지마에겐 낯이 설었다. 넷 모두 야쿠자 냄새를 풀풀 풍기는 녀석이었다. 사메지마가 네 녀석의 얼굴이 낯설다고 해서 그들 역시 사메지마를 알아보지 못한다고는 볼 수 없었다. 사메지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얼굴이 알려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심성 없이 차에서 내려 접근하는 건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스미는 세이부 신주쿠 역 근처 불고기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나온 것은 밤 11시께, 다시 클럽 두 곳을 들렀다. 사메지마는 주의 깊게 미행했다. 새벽 1시 20분, 보디가드 중의 한녀석이 먼저 술집에서 나와 자동차를 가지러 갔다. 주차장에 세워둔 흰 메르세데스를 몰아 술집이 세든 빌딩 앞에 세웠다. 이윽고 부하 3명과 함께 스미가 나왔다. "오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굵직한 부하 목소리와 따라나온 호스테스의 간드러진 소리가 겹쳐 울렸다. 부하 셋을 남겨놓은 채 스미는 메르세데스 뒷좌석에 올랐다. 메르세데스엔 카폰 안테나가 달려 있었다. 메르세데스는 카부키 2쵸메에서 메이지 도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쓰루마키 아파트로 간다면 메이지도리를 가로질러 누키벤텐에서 오쿠보도리로 빠져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메르세데스는 메이지도리에서 우회전, 야스쿠니도리 네거리에서 다시 좌회전을 했다. 한바퀴 돌아서 가는 것일까. 사메지마는 신중하게 뒤를 쫓으며 혼자 생각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가이엔 니시도리로 다시 우회전을 했다. 집과는 반대방향이었다. 한적한 가이엔 니시도리를 메르세데스는 고속으로 달려갔다. 요쓰야 4쵸메를 지나 오른쪽 커브에 들어서면서 왼쪽 깜박이를 켰다. 다이쿄쵸에서 게이오 병원 옆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가이엔 히가시도리에서 우회전, 아오야마 1쵸메로 방향을 잡았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오야마 1쵸메의 신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시부야, 좌회전하면 아카사카, 직진하면 록봉기였다. 메르세데스는 직진했다. 아오야마 1쵸메 네거리를 지나 첫번째 신호에서 좌회전, T자에 이르자 오른쪽으로 꺾였다. 록봉기로 가는 코스였다. 술이 모자라 한잔 더 하러 가는 것일까. 그러나 록봉기는 분명히 후지노구미 세력권이 아니었다. 물론 야쿠자가 자기 세력권 이외 지역으로 한잔 하러 가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기 집 근처도 아니고 또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이례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와 만날 약속이라도 있는 것일까. 사메지마는 긴장했다. 만약 누굴 만날 약속이 되어 있다면 상대방은 록봉기를 세력권으로 하는 구미 사람이거나 <캔디> 제조원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메르세데스는 노기사카 네거리를 거쳐 방위청 정문 앞을 지나갔다. 록봉기 네거리 못 미친 지점에서 인도 쪽으로 붙었다. 양깜박이를 켰다. 운전기사가 열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미는 뒷자석 도어를 열고 차에서 내렸다. 사메지마는 그 옆을 지나갔다. 차에서 내려선 스미는, 한방울도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또록또록 했다. 메르세데스가 멈춘 1백 미터 전방, 아자부 경찰 파출소 앞엔 패트롤카가 멈춰 있었다. 사메지마는 그 뒤에 BMW를 주차시켰다. 파출소에서 뭔가 시비를 걸 것 같은 기세로 순경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사메지마가 제시한 경찰신분증을 보자마자 경례를 붙이면서 물러갔다. 파출소 안에선 또 다른 순경 한명이 아폴로 모자를 거꾸로 쓴 소년 둘을 심문하고 있었다. 이날 밤, 사메지마는 밝은 회색 재킷에 진바지 차림이었다. 방위청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스미가 막 횡단보도를 건너는 참이었다. 운전기사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10미터쯤 남겨둔 지점에서 사메지마는 가드레일을 타넘어 길을 건넜다. 인도에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많지도 않았다. 스미와 마주치는 걸 피하려 사메지마는 도로를 건너자마자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수화기를 들면서 돌아보았다. 스미가 횡단보도 바로 앞 빌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1층에 철야다방이 들어 있는 빌딩이었다.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 부스에서 나왔다. 도로 쪽은 유리벽이었기 대문에 다방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스미는 보이지 않았다. 빌딩 입구에서 서너 계단 낮은 위치에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사메지마는 엘리베이터 표시판을 살펴보았다. 노란 램프가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더니 딱 멈추었다. <클럽 메누에토> 라고 쓰여 있었다. 다른 층은 간판이 복수였으나 3층만은 하나뿐이었다. 사메지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몸을 피했다. 스미가 혼자 들어간 걸로 보아 누군가와 <클럽 메누에토> 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 꼭 알아내고 싶었다.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상대방이 스미와의 관계가 알려지는 걸 꺼린다면, 들어갈 때는 물론 나올 때에도 따로따로일 게 틀림없을 것이다. 스미가 사메지마의 얼굴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신중히 행동하면 스미의 눈에 띄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일 - 마음을 굳힌 사메지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3층에서 내린 사메지마는 육중한 금속 도어를 밀어 열었다. 스포트 라이트의 원이 도어에 새겨진 <클럽 메누에토> 글자 위에서 일렁거렸다. "어서 오세요." 머리를 찰싹 붙여 빗어넘긴 검정 양복의 사내가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입구의 클로크에서 흑인 혼혈로 보이는 늘씬한 여자가 사메지마를 맞아 주었다. "혼자세요?" "음, 약속이 있어." 사메지마는 얼른 둘러댔다. "이쪽으로 오세요." 검정 양복 사내가 앞장을 서서 보라색 라이트가 켜진 통로를 걸어갔다. 통로 양쪽 부스에는 대담한 미니 수트 차림의 아가씨들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모두 스물두셋 밖에 안되어 보였다. 홀은 어두컴컴했다. 가죽 칸막이가 된 테이블에만 촉광 낮은 조명이 부착되어 있었다. 아가씨들이 움직일 때마다 팔찌와 목걸이, 그리고 깊게 파인 앞가슴이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반사했다. 웃음소리, 속삭이는 소리에 섞여 피아노 연주 소리가 홀 구석구석으로 울려퍼졌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수상한 느낌이 드는 클럽이었다. 젊고 예쁜 호스테스의 절반 가량은 백인이거나 흑인이었다. 절대로 거리엔 입고 나설 수 없는 섹시하고 화려한 차림들이었다. 유리 칸막이로 된 C자형 부스는 꽤 널찍했다. 3분의 2쯤 찬 부스 하나하나엔 적어도 호스테스가 2명씩 들어 있었다. 통로 정면의 흰 그랜드 피아노엔 어깨가 완전히 드러난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앉아 연주하고 있었다. "좋으시다면 여기서......" 통로 중간쯤에 이른 검정 양복 사내가 왼쪽의 빈 부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사메지마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엉덩이가 절반쯤 파묻힐 만큼 푹신푹신했다. 검정 양복 사내가 무릎을 끓었다. "지명하실 아가씨가 있으시면....." "없어." 사메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크레디트 카드를 갖고 나온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클럽격에 맞추어 잔술 대신 한병을 주문하면 최소한 10만 엔 가까이 날아갈 게 분명했다. "어느 분과 약속을 하셨는지요?" "다쿠보라는 사람." "다쿠보씨...... 그럼 다쿠보씨 것으로 할까요, 아니면 손님 명의로?" "다쿠보가 맡겨둔 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 난 여기가 처음이야." "알아모시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검정 양복이 물러가자, 엇갈리듯이 아가씨 둘이 부스로 들어왔다. 한 아가씨는 흑인이었다. 배꼽 언저리까지 V자로 판, 반짝이를 박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또 한사람은 허리를 약간만 굽혀도 틀림없이 팬티가 보일 초미니 차림, 스무 살도 채 안 되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드문 미인인 데다가 편하게 해주는 타입이었다. "처음 뵙겠어요." "처음 뵙겠어요." 흑인 아가씨는 억양이 어색했으나 유창한 일본말로 인사했다. 두 아가씨는 사메지마를 가운데 놓고 양쪽에 붙어 앉았다. 의식적으로 허벅지를 밀착시켜 왔다. 바로 옆 부스에서 탄성과 함께 웃음소리가 터졌다. 사메지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잡지와 TV에서 몇 번 본 레이싱 드라이버가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드라이버 이외에 남자가 2명 더 끼어 있었다. 사메지마가 고개를 바로 하는 순간, 흑인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생긋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무척 즐거운가 보죠?" 검정 양복이 다가왔다. "다쿠보씨 명의로 맡겨둔 술병은 없더군요. 새로 주문하시겠습니까?" "그럼 우선 맥주라도 마시면서 기다리기로 하지." 한 호흡, 뜸을 들였다가 <알았습니다> 라고 검정 양복이 대답했다. 눈빛엔 얕잡아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메지마는 모른 척하면서 담배를 꺼냈다. 미니 아가씨가 라이터를 켜서 내밀었다. "아오이라고 해요. 예쁘게 봐 주세요." "난 사메지마라고 해." "전 케이예요." 흑인 아가씨가 말했다. "케이? 일본말을 아주 잘하는군." "이 클럽에서 학교엘 다니게 해 줬어요." "학교?" "일본어 학교. 클럽이 학비를 대 주고 있어요." 아오이가 설명하면서 날라온 맥주 작은 병 뚜껑을 땄다. 맥주 3병과 함께 조개찜.초묻힘 등 주문도 하지 않은 안주가 담긴 유리그릇이 즐비하게 따라나왔다. 신주쿠의 바가지 스낵에서 곧잘 쓰는 수법이었다. 어쩌면 요금도 별반 차이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게에서 수업료까지 대 주다니, 대단하군." 사메지마가 케이 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월급에서 공제하는 걸요 뭐. 그래서 항상 쩔쩔매죠, 돈이 없어서." 케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맘 좋은 아빠, 빨리 찾아야 할 텐데." 진담 같기도, 농담 같기도 한 말투였다. "사메지마씬 뭣하는 분이세요?" 아이오가 상체를 찰싹 붙이면서 물었다. "뭣하는 사람으로 보여?" 사메지마는 되물으면서 홀 안을 살펴보았다.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손님들이 강한 조명을 뿜어내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잘 볼 수가 없었다. "카메라맨 아니세요?" 아오이가 아는 체를 했다. "아님 디자이너? 어쨌든 보통 회사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보이나?" "네. 눈빛이 제법 날카로우세요." "야쿠자처럼?" "쉿." 아오이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댔다. "못써요, 큰소리로 그런 말을 하다니. 손님 중에도 꽤 있어요." "지금도?" "글쎄요. 있다 해도 어두워서 알아볼 수 없어요. 록봉기에선, 장사가 잘 되는 집이라면 대체로 그런 단골이 많아요." "무섭지 않아?" "이런 고급 클럽에 올 수 있다면 대개 간부들로 봐야 하잖아요? 법석을 떨기는 커녕 돈만 잘 쓰더군요." "그렇겠군." 사메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메지마씨도 정말 그런 사람이에요?" "아니야." "그렇죠? 조금 무섭게 생기긴 했어도 그런 사람들로는 안보여요." 검정 양복 사내가 다시 다가왔다. "아오이씨." 무릎을 꿇고 앉아 속삭였다. 아오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마시던 글래스에 덮개를 씌우더니, <즐거웠어요. 실례할께요.> 하고 일어섰다. "벌써 가려구?" "죄송해요. 손님이 찾고 있나 봐요." 살며시 웃어 보인 아오이는 육감적인 히프를 흔들며 부스에서 나갔다. 사메지마는 케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인기가 좋은 모양이지?" "아오이짱 말예요? 그래요, 굉장해요." "넌 미국에서 왔나?" 케이는 고개를 까딱했다. "샌프란시스코." 거침없는 미국식 발음이었다. 가까스로 스미를 찾아냈다. 비스듬한 각도의 건너편 부스에 앉아 있었다. 스미는 혼자였다. 가슴이 엄청 큰 흰색 초미니 아가씨가 옆에 붙어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가슴 크기라면 쇼와 한번 겨루어 볼 만했다. 테이블에는 브랜디가 병째로 놓여 있었다. "처음이세요, 이 집?" 케이가 사메지마의 허벅지를 쓸면서 물었다. "응. 친구가 만나자고 해서 왔는데...... 아직 안 오는군. 여긴 몇시까지지?" "지금 몇 시예요?" 케이가 사메지마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홀 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어머, 벌써 2시네." 천장의 조명이 한꺼번에 빛을 쏟아냈다. 최저선으로 낮추었던 조도를 일거에 최대한으로 높인 것이다. "눈이 다 부시는군." 사메지마는 눈을 껌벅거렸다. "문닫을 시간이에요. 라스트 타임."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는 손님은 한사람도 없었다. "모두 그냥 앉아 있잖아?" 케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클럽, 2시까지. 하지만 손님 그냥 있어요. 어떤 날은 4시까지."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홀 안을 휘둘러 보았다. 대부분의 손님이 보통 월급쟁이가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수트 차림은 별로 없었다. 거의가 트레이너이거나 가디건.스포츠 재킷 같은 걸 걸친 사람들이었다. 화려하고 값비싼 차림새였다. "죄송해요. 전화 좀 가져다 주세요." 스미 시중을 들던 흰 미니 아가씨가 검정 양복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스미는 다리를 꼰 채 두 팔을 펴서 소파 등받이에 걸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사메지마와 아가씨의 눈길이 마주쳤다. 스물 안팎의 나이, 오싹해질 정도로 음탕한 빛이 서린 눈이었다. 아가씨는 한순간 사메지마를 응시했으나 검정 양복 사내가 무선전화를 들고 오자 눈길을 돌렸다. "저 아가씨, 무척 아름답군." 전화기를 받아든 아가씨는 스미가 불러 주는 대로 버튼을 눌렀다. "누구? 샤키짱 말예요? 대단한 인기예요." 케이가 말했다. 샤키라는 아가씨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신호음을 확인한 다음 스미에게 건네 주었다. 스미가 꼬았던 다리를 풀면서 받아들였다. 사전에 만날 약속을 하지 않고 여길 들른 것일까. 사메지마는 두 사람에게 눈길을 박은 채 혼자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폐점시간 직전에 혼자 와서 샤키라는 아가씨를 지명한 걸로 봐서 애인관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옆의 손님, 자주 오는 사람인가?" 케이에게 물었다. 옆 부스의 레이싱 드라이버 일행이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검정 양복 사내들이 일제히 소리를 높였다. "누구? 몰라요. 난 한번도 시중든 적이 없어요." 케이가 대답했다. 사메지마는 다시 스미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스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옆 부스 일행이 자리를 뜨는 바람에 눈길을 던졌던 김에 무심히 사메지마 쪽도 보고 있다는 투였다. 사메지마는 슬쩍 눈길을 피했다. 홀 안이 이렇게 밝아질 줄은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긴장감이 전신을 휘감아 왔다. 다시 한번 스미 쪽을 바라보았다. 스미는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얼굴은 사메지마 쪽을 향한 채 옆에 앉아 있는 샤키에게 뭔가 말을 건넸다. 샤키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물러설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사메지마는 검정 양복 사내에게 손짓으로 계산서를 가져오게 했다. 계산서엔 6만2천 엔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메지마는 크레디트 카드를 꺼내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영수증은 어떡할까요?" "필요 없어." 검정 양복의 웨이터는 목례를 한 다음 물러갔다. 모모이라면 어쩌면 필요 경비로 인정해 줄지도 모를 일, 그러나 사메지마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사인을 마친 사메지마는 일어섰다. 스미의 눈길이 자신을 쫓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미는 사메지마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로크 카운터 앞을 빠져 나왔다. 따라온 케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 기다렸다. 사메지마는 클럽 입구를 등지고 서 있었다. 자기를 바라보는 케이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사메지마는 자기 등 뒤에 누군가가 다가서고 있음을 알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사메지마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올라온 엘리베이터 도어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스미였다. 약간 다리를 벌린 자세로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른 채 서 있었다. 그 바로 뒤에 샤키 모습이 보였다. "나 말인가?" 사메지마가 되묻자 스미는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볼 일이 있겠어?" 스미는 엷은 웃음을 흘렸다. "뻔한 얘기 아닙니까? 절 찾아온 것 아닙니까?" 그리고는 샤키 어깨를 감싸안았다. 샤키도 스미 허리에 팔을 감으면서 사메지마를 쳐다보았다. 반쯤 열린 입술 사이로 혀끝이 보였다. "샤키, 잘 봐둬. 이 손님 얼굴 말야." "응. 하지만 왜?" 혀 짧은 소리로 샤키가 되물었다. "그냥. 잘 봐뒀다가 이 다음에 또 오거든 나한테 알려주기나 해." 말하면서 스미는 샤키 얼굴에 자기 얼굴을 덮어갔다. 요란하게 입술과 입술이 마찰하는 소리를 내면서 키스를 했다. 사메지마는 두 사람에게 눈길을 박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눈이 둥그래진 케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넌 배웅 안해도 좋아." 스미가 말하면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얼굴엔 기분 나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함께 타고 내려가도 괜찮겠죠?" "그럼." 사메지마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스미는 사메지마 옆에 나란히 섰다. 아가씨들의 인사소리 속에 엘리베이터 도어가 닫혔다. 1층 버튼을 누른 스미는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묘한 곳에서 만났군요." "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 당신과 나 말야." "딱 한번." 스미는 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 형님 재판정에서였죠." 그랬던가? 마가베 재판 때 스미가 방청왔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사메지마는 증인으로 출석했다. "총경쯤 되면 월급이 괜찮은 모양이죠? 이런 집엘 다 오다니...... 아님 수사비로 떼나요?" 스미는 웃음진 얼굴로 말했다. 사메지마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똑바로 스미를 노려보았다. 스미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야말로 경기가 좋은 모양이군. 모든 구미가 먹고 살기 어려워 끙끙 앓는 판에......" "호유할 마음조차 식어 버리면 우린 끝장이니까요. 마누라를 팔아서라도 즐겨야 할 땐 즐겨야죠." "그래서 팔았나?"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자면." "요즘 뭘로 먹고 사나?" "생업이 있ㅈ습니까, 착실한 생업."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멎으면서 도어가 열렬한 스미의 운건기사겸 보디가드가 사메지마를 보더니 얼굴색이 변했다. "모셔다 드릴까요, 사메지마님." 스미가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정중하게 말했다. "아니, 사양하겠어." 말하면서 스미를 노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스미는 기가 질린 얼굴로 물었다. "좋을 때 술이나 실컷 마셔둬." "무슨 뜻입니까?" "곧 형님을 만나게 해 주지." "뭐라구? 이녀석!" 운전기사가 호통을 쳤다. "입 닥쳐, 이 멍청아." 스미가 말렸다. 그리고는 사메지마를 향해 한마디 덧붙였다. "좋습니다. 그땐 형님과 한방을 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7. 무더운 밤이었다. 바람 한점 없었다. 해상엔 눅진눅진한 공기가 흰 아지랭이처럼 피어올라 왔다. "빌어먹을, 무척 덥군." 히라세가 중고 크라운 재떨이에 담배를 부벼껐다. 펀치 퍼머를 한 머리에 텁수룩한 수염. 땀옷, 맨발에 샌들을 꿰찬 차림으로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녀석들 움직일 낌새조차 안 보이는군. 저희들 멋대로 하는 게 몸에 배서 그런가." 말하면서 캔맥주를 들이켰다. 조수석의 이시와다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말이 없는 사내가 보험 외무원을 한다니, 고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코미디언들이 집에만 돌아가면 의젓해져서 말이 없다지만, 이시와다리 역시 그런 타입인가. 할머니 손님들 앞에선 키들키들 웃어가면서 비위를 맞추고 쓰잘데없는 우스갯소리로 갖은 아양을 다 떨었을 주제에...... 검은 테 안경을 낀 이시와다리는 가리마 탄 머리, 트레이너 상의에 진바지를 받쳐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직업상 수트만 입은 탓인지도 몰랐다. 1미터 70센티미터가 될까말까 한 깡마른 체격이었다. 히라세 말로는 마작.경마 등 도박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아, 그 때문에 대학은 물론 근무처에서도 일만 저질렀다고 했다. 히라세는 걸쭉하게 트림을 하더니 땀옷 상의 주머니에서 하이라이트 갑을 꺼냈다. 누렇게 찌든 이빨로 한개비 빼어물었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교를 퇴학당할 때까지 톨루엔에 빠져 있었던 탓에 이빨이 망가진 것이었다. "고지." 히라세는 뒷좌석을 돌아보면서 불렀다. "네가 일하는 집 마담, 납치해 버릴까? 된통 겁을 주면 털어놓을 지도 모르잖아, 어디 숨겨놨는지?" "마담이 모르고 있으면 어쩌려구?" "모를 턱이 없잖아? 붙어먹은 사인데, 사촌 사이라지만...... 어쩌면 이봐, 형제 양쪽과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닐까? 3P란 것 들어본 적은 있지?" 히라세는 이시와다리 팔을 툭툭 치면서 외설스럽게 낄낄거렸다. "사촌끼리 붙어먹은 것, 틀림없을 거야. 고지, 넌 나이 어린 정부, 제비야. 페트란 말야." 히라세는 다시 쿡쿡 웃었다. 이시와다리도 소리없이 웃었다. 웃는 얼굴이 오히려 더 음침하게 보였다. "유괴해 봤자야. 물건 소재지를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전엔." "1주일 넘게 사장 녀석의 뒤를 쫓아봤지만...... 집에 숨겨두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디지?" "집엔 없을 거야." 이시와다리가 불쑥 내뱉듯이 말했다. "어떻게 알아?" "위험하니까. 안그래, 이시와다리?" 고지의 말에 이시와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라세는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내뿜으면서 창 밖으로 피우던 꽁초를 내던졌다. "어쨌든 이제 교대 좀 해 줘. 두 사람 가운데 누구든." "난 무리야. 가게엘 나가야 하니까." "하루쯤 빠져도 괜찮은 것 아냐?" "그럴 순 없어. 마담, 그래봬도 꽤 까다로운 데가 있거든." "엉덩판에 깔려가지곤...... 마누라도 아닌데 뭘 그렇게 쩔쩔매누?" 히라세는 이시와다리를 돌아보았다. 이시와다리는 빙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벌써 1주일째, 히라세는 가카와 운송 사장을 미행하고 있었다. 사장인 가카와 노보루가 회사에서 나오는 순간 따라붙어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더이상 외출 않음을 확인한 다음 새벽 3시가 돼야 철수하는 것이었다. 히라세가 눈을 붙이는 것은 가카와가 회사에 머무는 동안이었다. 가카와가 아침에 집을 나와 회사에 이를 동안은 이시와다리가 미행을 맡고 있었다. 토요일.일요일은 교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한사람이 미행을 했다. 목표는 <물건>에 있었다. 가카와 형제와 게이코의 밀조 장소를 알아내서 증거품으로 <물건>을 훔쳐낸 다음 세 사람을 협박할 계획이었다. 돈이라면 썩어문드러질 만큼 가지고 있는 그들이었다. 한사람에 1억씩만 준다면 물러설 생각이었다. 돈 대신 현물로 받아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이시와다리가 팔아넘길 루트를 알고 있다고 했다. "네가 교대해 줘, 고지. 너 혼자 편하게 지낸다는 건 말이 안 돼."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물건>을 손에 넣은 다음 그들과 교섭하는 게 누군데. 가장 위험한 일을 맡은 건 바로 나야." "걱정할 것 없어. 그 형제는 구미와 무관한 사람들이니까 성가신 일 없을 거야. 일이 꼬일 것 같으면 내가 구미 사람을 만나두 되구." 히라세가 말하는 <구미 사람> 이란, 그가 구미에 있을 때 형님으로 모시던 사람이었다. 각성제 소문을 듣고 히라세에게 귀띔해 준 것도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형제는 <물건>을 이쪽 구미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도쿄에 공급하고 있어. 만약 그 형제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저기 떠 있을거야." 히라세는 크라운이 서 있는 부두 앞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어항을 겸한 큰 항구였다. 어업조합 연합이 반년 전, 2년 공사 끝에 준공시킨 항구였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부담한 막대한 규모의 공사비는 모두 가카와 건설로 흘러 들어갔다. "뭣 때문에 각성제에까지 손을 댄담?" 고지가 중얼거렸다. "돈 때문이겠지. 세금 한푼 안 내도 되는 돈." "돈이야 썩어문들어질 만큼 갖고 있을 텐데?" "가진 사람들이란,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욕심이 생기는 법이야. 없는 사람들은 이해 못할 게야." "이유는 그뿐일까?" "물어보면 될 것 아냐, 사장이란 녀석한테. 흥정할 때 말야. 점잖은 사람이 뭣 때문에 약물에까지 손을 댔느냐구......" "그러지." 고지는 대답하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곧 날이 샐 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게이코를 아파트까지 태워다 준 다음, 집으로 갔더니 히라세와 이시와다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흘에 한번씩 이렇게 모여 회의를 갖는 것이었다. "난 이제 돌아가야겠어." 이시와다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 자동찬 어디 뒀지?" "국도 자판기 앞에." "그럼 거기까지 태워 주지. 고지, 교대해 주는 거지?" "내주부터 그럴께." "뭐라구? 내주부터" "옛날 밴드 동료가 오게 돼 있어. 이번 주엔 그녀석 뒤를 돌봐 줘야 해." "어떤 녀석인데?" 히라세에겐 얘기하고 싶지 않았느나 어쩔 수 없었다. "프로로 막 데뷔한 밴드야. <후즈 허니>라고......" "뭐? 밴드 전원이 오나?" "아니. 보컬 아가씨만. 그 녀석이 옛날 동료야." "예뻐?" "그저 그래." "했어, 전에?" 히라세가 상체를 불쑥 내밀면서 물었다. 이 녀석 머리 속엔 지겨울 정도로 여자와 하는 일밖에 들어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응? 그런 사이가 아냐." "진짜로 말하면 했지? 록밴드선 아무하고나 서로 섞여 한다면서?" 이시와다리의 어깨를 팔꿈치로 치면서 낄낄거렸다. "안했다고 하면 그렇게 믿어!" "그렇게 신경 곤두세울 것 없어. 도쿄 여자라고 맛이 다른 것도 아닐 테구. 나한테 소개해 줄래?" "가게로 와." "거긴 갈 수 없잖아. 난 사장 녀셕 뒤를 쫓아야 한다는 것 알잖아." "올 거야, 반드시. 가카와 사장도." 어젯밤 노보루가 에 들렀다. 2주일에 한번꼴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젯밤 게이코가 얘기해 주자 노보루도 흥미를 나타냈다. "그래? 그럼 나도 갈 수 있겠네!" 히라세가 외치듯이 말했다. "즐기는 편이지, 그 여자?" "몰라!" "신경질은...... 네 아파트에 묵나?" " 에서 노래해 주는 값으로 마담이 로열 호텔 방을 잡아놨어." "멋지군. 끝난 뒤에 나한테 소개해 줘. 사이좋게 될 거니까." "사이좋게?" 히라세의 뻔뻔스러움에 고지는 속이 부글거렸다. "네가 말했잖아, 가수라고. 유명인관 처음이 되는군." "아직 그렇게 팔리는 편은 아냐." "넌 모르고 있구나. 가수는 히트 한번만 치면 바로 메이저가 되는 거야."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 "뭘 그렇게 신경써? 소개만 해 주면 될 걸 가지구." 히라세는 반쯤 정색을 하고 고지를 쏘아보았다. 고지도 맞받아 노려보았다.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니지만...... 엉뚱한 말 떠벌리는 게 아냐!" "엉뚱한 말이라니? 도쿄 여자라고 폼잡는 거야, 뭐야? 여잔 다 마찬가지야. 술에 흠벅 취하게 한 다음......" "무슨 소릴 늘어놓고 있는 거야?" "걱정할 것 없어. 내 필살의 테크닉을 한번 맛보기만 하면......" 히라세는 이시와다리에게 눈짓을 해 보이면서 빙글거렸다. 이시와다리도 마주 빙글거렸다. "밴드라면 약도 갖고 있겠지? 대마초라든가......" "그런 건 싫어하는 여자야." "완고한가?" "그런 건 아니지만...... 특별나긴 좀 특별나." "그야 그렇겠지. 록싱거라면 으레 그런 것 아냐?" "엉뚱한 짓 했다간 큰코 다쳐!" 어쩔 수 없이 고지는 입을 열었다. "왜?" "남자가 있어." "있대도 대수로울 것 없어. 함께 오는 건 아니잖아? 아님 녀석이 야쿠자란 뜻?" "그 반대야." "반대?" "형사야. 전화로 얘기 들었어. 신주쿠 서 형사라고." "뭐라고, 형사?" 히라세가 깜짝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아냐? 정말 형사야?" "정말이야." "뭣 때문에 형사 따위와 사귀누?"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쇼를 - 그 여자 이름이야 - 죽이려고 노리던 정신이상자가 있었는데 그 녀석이 피스톨을 발사하기 직전 그 형사가 쏴서 잡았다는 게야." "멋있는 얘기로군." 히라세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녀석 죽었나?" "아니. 하지만 그녀석, 그 밖에도 신주쿠 서 형사를 엄청 살해했기 때문에 사형 아니면 무기일 거야." 이시와다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얘기, 나도 들었어. 주간지에도 났었지?" "글쎄." 고지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 형사, 신주쿠 서 방범과 아냐?" "몰라. 쇼는 이름도 얘기해 주지 않았어." 쇼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입에 담는 동안 고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히라세가 말한 것처럼 쇼는 곧 스타로 올라설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그 스타의 친구, 단 한번이었지만 함께 자기도 한 친구. "형사의 애인이라면 최악이야." 이시와다리가 내뱉듯이 말했다. "하긴 그래?" 어쩔 수 없다는 듯 히라세도 맞장구를 쳤다. "가까이 해서 득볼 게 하나도 없어." "그럼 가게엔 안 들를 건가?" "글쎄, 노래 들으러 가는 건 무방하잖아? 밥맛 없는 엔카 따위, 온천장을 순회공연하고 있지만, 록은 콘서트라도 가지 않으면 들을 기회가 없잖아? 고지, 너도 함께 연주하나?" "응." 목소리가 들뜨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럼 꼭 봐둬야겠군" "난 관두겠어." 이시와다리가 잘라 말했다. "록은 질색이야." "너도 늙었군." 이시와다리는 히라세나 고지보다 한두 살 위였다. "엔카가 훨씬 좋아. 록은 시끄럽기만 하구." 이시와다리는 드물게도 자기 주장을 내세워 보였다. 나이가 위이면서도 히라세 앞에서는 고개를 못 쳐드는 이시와다리였다. 고지가 보기에는 히라세의 주먹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히라세는 여자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흉폭한 데가 있었다. 중고등 시절의 히라세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사나웠었다. 구미에 가입했을 무렵엔 언제나 나이프와 같은 흉기를 지니고 다니면서 걸핏하면 휘둘러댔다. 이 자동차에도 어쩌면 목도를 싣고 다니고 있는지도 몰랐다. 거칠고 사납기는 했어도 바탕은 단순한 사내였다. 적어도 그 시절의 히라세는 그랬다. 고교를 중퇴한 히라세는 외로웠던 탓일까, 학교 근처의 고지 패거리가 모이던 다방에 자주 나타났었다. 차를 사 주기도 하고 빠찡코 밑천을 대 주기도 했다. 고지가 고3이 되었을 때 자동차로 소프랜드 (목욕탕 매춘) 로 데려가서 면총각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 무렵의 히라세는 이미 구미의 수습 멤버였기 때문에 선배들의 입김이 듣는 집의 인기 아가씨를 고지에게 붙여 준 것이었다. 그 아가씨가 히라세의 형님 뻘 되는 사람의 여자라는 것을 고지는 나중에 들었다. 그래도 히라세는 한때 그 아가씨에게 빠져 있었다. 히라세가 구미에서 탈퇴한 이유를 고지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히라세는 당시의 형님뻘 야쿠자와의 사귐을 이어오고 있고, 구미를 <우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히라세는 히라세대로 야쿠자로서의 자기 앞날이 밝지 못함을 깨달은 것 같았다. 언제였던가, 고지가 낙향해서 히라세와 처음으로 술잔을 기울이던 날 밤,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결국 야쿠자 세계에서도 머리가 나쁘면 출셀 못해. 돌대가리 쫄병들은 소모품일 뿐이야. 난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하기 싫은 놈이야. 일류 야쿠자가 되려면 법률 같은 걸 열심히 배워야 해. 그래서 안 되겠다고 결론을 내린 거야. 재능이 없으면 일찌감치 걷어치우는 게 상책 아니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고지는 자기가 고교를 중퇴한 불량소년으로 시골 구석에서 말썽이나 피우던 히라세의 몇 안 되는 친구 중의 한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고지 자신은 그처럼 불량하지 않았으나 록이 좋아 머리를 기르고 항상 혼자 기타를 켜며 지냈다. 때문에 클라스 메이트로부터 경원당하긴 히라세와 마찬가지였다. 고지도 히라세도 자신들 속에 숨어 잇는 자기들만의 가능성을 꽃피워 보고 노력했지만 결국 좌절하고 만 것이었다. 프로 밴드가 되는 데는, 한사람의 몫의 야쿠자가 되는 데에는 재능이 약간 모자랐던 것이었다. 다시 히라세와 친하게 되었다. 지금의 히라세에겐 하는 일이 없었다. 틈틈이 지난날 구미 관계로 얻어걸리는 운송업무나 경비원 흉내같은 아르바이트로 푼돈을 벌어 쓰고 있었다. 7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이에 사람을 이용하거나 함정에 빠뜨리는 일을 별로 망설이지 않고 해치울 만큼 변해 있었다.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버릇이 없어진 대신에 4년 동안의 야쿠자 생활을 통해 간교스러움에 익숙해 있었다. 히라세의 그런 변화를 느낄 적마다 고지는 공연히 불안해졌다. "그럼 넌 안 와도 좋아." 히라세가 말하자 이시와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도착하지, 쇼라는 아가씨?" 히라세는 크라운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면서 물었다. 이어서 조수석 등받이에 왼손을 짚고 고개를 돌려 잽싸게 차를 돌렸다. 히라세의 운전 솜씨는 거칠기는 했으나 능숙했다. 폭주족 출신 가운데도 히라세만큼 운전 솜씨가 훌륭한 녀석은 별로 없었다. <교토가이> - 그런 이름이었다. 초대 보스가 사고로 죽은 뒤 세력이 약해졌다가 곧 해산되고 말았다. 고지가 고2때였다. 히라세는 죽은 보스에 심취해 있었다. "내주 목요일." "그럼 열흘이나 남았군." 히라세는 엄청난 스피드로 항만시설 사이사이를 누볐다. 이쪽엔 인기척이 없었으나 어항 쪽은 시끌벅적했다. 날새기 전에 그물을 걷으러 나갔던 배들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창문을 내리자 아침 햇살을 반사하기 시작한 바다 위를 달려오는 어선의 엔진 소리와 바다 내음이 밤을 꼬박 샌 고지의 머리 속을 해맑게 해 주었다. 가카와 운송 주식회사 본사 빌딩은 시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쏠린 현(縣) 경찰본부와 UHF TV 방송국 사이에 솟아 있었다. 현내에 별도로 배송 센터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콘테이너 모터 풀을 가지고 있었다. 8년 전에 건축한 빌딩 최상층은 9층에 회장실과 사장실이 있었다. 가카와 운송의 회장은 가카와 본가 증손이며 가카와 그룹 회장인 히코이치로가 겸임하고 있었으나 실제 회장실로 출근하는 것은 1년에 두세 번이 고작이었다. 오후 9시, 스스무는 형 노보루와 함께 사장실에 마주 않아 있었다. 사장실의 북쪽과 동쪽 벽면은 대형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북쪽 창으로는 시 중심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조명 배열에 따라 현 청사, 역 빌딩, <가카와 백화점> 등 대형 건물을 하나하나 구별할 정도로 잘 보였다. 스스무가 어릴 적에만 해도 가카와 운송 빌딩은 좁고 길쭉한 6층짜리에 지나지 않았다. 6층 가장자리의 아버지 사무실에서 역에 드나드는 열차를 내려다보면서 한량 두 량 하고 화차를 세어보는 것이 스스무의 즐거움이었다. 도시 불빛은 이 빌딩으로부터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수백 미터 범위에 밀집되어 있었다. 거기서 2킬로미터만 벗어나면 불빛이 듬성듬성했다. 그 밖을 벗어나면 불빛을 하나 둘 셀 정도로 한적했다. 동쪽 창으로는 불빛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8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점엔 고속도로가 뻗어 있었다. 스스무는 고속도로를 덮고 있는 직선의 불빛 행렬을 좋아했다. 꼬리를 물고 달리는 불빛을 보고 있으면, 어릴 적 아버지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던 열차 행렬 생각이 되살아 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사무실을 그렇게 자주 찾아간 것 같지는 않았다. 형인 노보루는 장남인 데다가 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7년동안이나 외아들 노릇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주 사무실로 데리고 갔던 것 같았다. 초겨울 어느날 오후를 스스무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금방 눈으로 바뀔 것처럼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장실의 발갛게 단 대형 석유난로 옆에서 스스무는 흰 증기를 내뿜는 기관차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기관차 대신, 줄지어 들어선 빌딩 옥상에서 내뿜는 보일러 연기 줄기를 세어야 하는 것이었다. 스스무는 도쿄에 전화를 걸려고 노보루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가카와 운송 빌딩은 지하에서 2층까지는 각종 상점이, 3층에서 5층까지는 다른 기업에 임대를 주고 있었다. 실제로는 가카와 그룹 부동산 관리 부문 소유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카와 운송 역시 임대 입주자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6층에서 9층까지의 가카와 운송 사옥에는 숙직사원 5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숙직사원은 모두 7층에 있었다. 6층과 8층의 불이 모두 꺼져 있는 것을 스스무가 조금 전 들어오면서 확인을 했다. 9층에도 불이 켜져 있는 곳은 이 사장실뿐이었다. 가카와 운송은 도쿄 시나가와 구 오모리 역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다. 아파트는 모두 6세대, 그 중의 4세대 분은 가카와 운송 사원이 도쿄 출장 때 숙소로 이용하고 있었고, 나머지 2세대분 가운데 한곳엔 전송기가 부착된 전화가 가설되어 있었다. 그 번호로 전화를 걸면, 전송기가 작동하여 자동적으로 요쓰야 맨션 아파트의 자동응답 전화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후지노구미가 스스무가 연락하고 싶을 때는 그렇게 해서 메시지를 자동응답기에 녹음시키는 것이었다. 전송전화가 가설되어 있는 아파트는 가카와 운송이 스즈키 도시오라는 가공인물 명의로 임대한 것이지만 집세는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온라인 송금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 집에서 요쓰야 아파트로 전화를 걸어 자동응답기 녹음을 재생시켜 본 결과 스미가 연락을 원하고 있음을 안 것이었다. 약속한 한달 기한까지 아직 2주일이나 남아있었다. 그런데로 연락을 원하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좋지 못한 정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쪽에서의 콜백은 스미가 연락해 온 이튿날 밤 10시, 스미의 자택으로 직접 걸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됐어. 이제 끝났어." 책상에 앉아 말없이 서류를 ㅎ어보고 있던 노보루가 고개를 들면서 입을 열었다. 테 없는 안경 렌즈가 스탠드 불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났다. 형도 이제 흰머리가 생겼군. 노보루의 가족은 이 지역 최대 규모 종합병원장의 딸인 아내와 두 아기 등 셋이었다. "가보게요?" 스스무는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물었다. 전화는 언제나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공중전화를 이용했었다. 인터체인지에서 하행선을 타고 4킬로미터쯤 달려가면 휴게소가 있었다. 스미에게 만일의 사태가 생겼다 하더라도 전화 역탐지만 경계하면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스미는 스스무의 본명은 물론 주소도 모르고 있었다. 노보루와 나란히 사장실을 나온 스스무는 노보루가 문단속을 하는 동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채 기다렸다.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스무는 형을 관찰해 보았다. 노보루는 스스무에 비해 10센티미터 가량 키가 작았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얼굴도 작았다. 안경 낀 눈이 큼직해서 얼핏 보기엔 나약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신중하고 사려가 깊은 반면, 일단 결단을 내리고 나면 스스무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행동력도 있었다. 때문에 스스무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형을 존경했다. 이 도시에 살면서 형과 손을 잡고 있는 한 눈곱만한 불안도 없다고 믿었다. 지하 주차장엔 흰색 왜건이 가카와 운송 영업차와 나란히 서 있었다. 평소 스스무가 몰고 다니는 BMW는 남의 눈에 두드러지기 때문에 일할 때는 언제나 왜건을 이용했다. 이 도시에도 몇십 대나 굴러다니는 국산차였다. 형을 조수석에 태우고 스스무는 차를 몰았다.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않는 형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에 접어들자 비로소 노보루가 입을 열었다. "신주쿠 서 형사건, 내일 보고서가 도착할 거야." "힘이 좀 든 모양이지?" 스스무가 물어보았다. "상대가 형사이니까. 아무리 솜씨 좋은 녀석이라도 간단하진 않았을 게야." 스미가 싫어하는 형사의 뒤를 캐어보자고 나선 건 노보루였다. 스미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그 형사가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쩔 생각이야, 형은?" "데이터를 보기 전엔 뭐라고 말할 수 없어. 돈으로 구워삶을 수 있다면 우리 편으로 싸안아도 좋다고 봐. 그렇게 안 되면 다른 약점을 찾아야겠지." "약점 같은 게 있을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봤어? 출세욕이 강하면 웃사람에겐 약할거구, 결혼을 했다면 마누라나 처가집에겐 한수 접을 수밖에...... 만약 후견인이 경찰간부가 아니라 다른 업계 인사라면 그쪽을 공략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야." "그래서 그 형사를 어디다 써먹지?" "지금 당장 써먹자는 건 아냐. 만일에 대비한 보험 같은 거야." 서비스 에어리어 진입로가 보이자 스스무는 깜박이를 켰다. 속도를 줄여 진입로로 들어섰다. 대형 트럭 몇 대가 서 있을 뿐 휴게소 주차장은 한산했다. 공중 화장실 가까이 있는 전화 부스 앞에 왜건을 세웠다. 엔진을 켠채 사이드 브레이크를 건 스스무는 차에서 내렸다. "갔다 올께요."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유리를 조금 내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주차장 안을 휙 둘러보았다. 전화 부스로 들어선 스스무는 카드를 꽂아넣고 스미 집 번호를 눌렀다. 10시 2분. 신호가 세 번 울리자 스미가 직접 받았다. "하라답니다. 전화를 주셨더군요." "네. 번거롭게 해 드려 미안하군요." 스미는 면목이 없다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급히 서둘 것까진 없다고 봅니다만, 그래도 일단 알려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무슨 일입니까?" "글세, 어디서부터 얘길 시작해야 좋을지...... 우선 지난번 그 건인데 좀 당겨 줄 수 없나요?" "왜요?" "그러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아서요. 약간 트러블이 생겨서....." "트러블?" "전화론 얘기하기 거북하군요." 스스무는 입을 다물었다. 스미도 더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스스무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건강이 안 좋은가요?" "글쎄요...... 쉽게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불안감이 치밀어올랐다. "가까운 분이세요?" "아니...... 가깝진 않아요. 우리 하청업체의 하청쯤 되는 녀석들입니다." "녀석들? 한사람이 아니군요." "두셋쯤 되나 봐요." 스미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럼 당신 가족 가운덴 아직?" "네. 물론 절대 안전합니다. 다만 병이 커지면 당분간 움직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우선 <물건>을 받아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오히려 당분간 조용히 엎드려 있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건 곤란해요. 우리 쪽 자금 운용문제도 있고 해서. 가능하면 새 하청업자를 위해서라도 <물건>을 일찌감치 보내 주면 고맙겠어요." "그럼 병에 걸린 사람이 <물건>을......?" "그렇게 됐어요." 스미는 짧게 잘라 대답했다. 밀매인 수명이 체포되었다. 더군다나 그들 모두 <아이스캔디>를 소지한 채 잡혀갔다는 게 스미의 보고였다. "대금은 어떻게 됐나요?" "지불한 녀석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녀석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받은 타격이 커요." "하지만 그건 반값으로 드린 것 아녜요?" "반값이라도 하더라도 타격은 타격입니다. <물건>을 빼앗긴데다 돈도 못 받았으니......" 스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능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새로 <물건>을 보내 주셨으면, 그래서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 있게 해 줬으면 합니다. 우리 나름대로 여러 가지 계획도 있고 하니까....." "질병은 걱정 안해도 되나요?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되거나......"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럴 걱정은 없어요.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우리 선에서 완전 차단시킬 겁니다." "......" "그건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어요." 스미의 말투도 단호했다. "......그럼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이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니까요." "그러죠. 참, 먼저 말씀드리는 건데 만약 <물건>을 가져오시게 되면...... 최소한 50만은 있어야겠어요." 50만 정 - 지난날 가격으로도 2천만 엔, 새로 올린 값이라면 8천만 엔이었다. 판매가격으로는 5억 엔이 너끈했다. "생각해 보겠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리로 하든 사무실로 걸어 주시든......" 전화 카드의 도수 (度數, 일본은 금액이 아니라 통화도수로 계산하는 카드도 있다) 가 50에서 10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스스무는 전화를 끊었다. 신호음과 함께 카드가 튀어나왔다. 빼어서 주머니에 넣은 스스무는 왜건으로 다가섰다. 노보루가 말없이 스스무를 바라보았다. 운전석에 오른 스스무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어 차를 출발시켰다. 고속도로 주행선에 접어들자 스스무는 간단히 경과를 설명했다. "- 말도 안되는 소리야." 듣고 나서 노보루가 잘라 말했다. "그처럼 무모한 거래엔 응할 수 없어." "물론이야." "생각해 봐. 밀매인이 체포되고 <캔디>를 압수당했다는데, 새로 <물건>을 갖다 줄 그런 멍청이가 있을 것 같아? 스미네가 정말 안전한지 어떤지 확인할 때까진 절대로 거래를 재개할 수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스미 녀석, 도데체 무슨 꿍꿍일까?" "엉덩이에 불이 붙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더욱 조심해야잖겠어?" "녀석은 지난번에 10만정을 받아갔어. 그걸 잘만 팔았으면 적어도 2천만에서 2천 5백만 엔은 너끈해. 맞돈으로 판 걸 절반으로 본다면 1천만엔이라는 계산은 쉽게 나와." 중간도매에 넘길 때 전부 맞돈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스미가 밝힌 적이 있었다. 물건을 가져갈 때 절반, 나머지는 팔아서 갚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도매인에게 맞돈을 낼 만한 힘이 없을 경우엔 어쩔 수 없는 일 - 수백만 엔이란 대금을 손쉽게 움직일 수 있는 실력이라면 처음부터 마약이나 각성제를 팔러 나서지 않았을지도 모르잖는가. "거래가 동결되면, 그래서 수금이 안 되면 결국 구미 내부의 상납금까지 영향을 받아. 웃사람들의 눈길을 곱게 다듬기 위해선 수금을 서두를 수밖에." "하지만 우리가 그것까지 신경써 줄 필요는 없다고 봐요." "물론. 하지만 그렇게 딱 자르면 녀석이 가만 있을 것 같아?" "글쎄." 스스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캔디>가 필요했다. 오늘밤처럼 긴장하거나, 머리를 굴려야 할 일이 생기면 <캔디>가 필요해지는 것이었다. <캔디>를 빨면 머리가 맑아져서 좋은 아이디어를 짜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형한테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거래 목적 이외에는 가지고 다니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는 형이었다. "어쩌지?" 스스무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아예 후지노구미와는 관계를 끊어 버릴까?" "그건 안 돼. 게이코와의 관계도 생각해 줘야 해." 노보루의 말을 듣자 생각이 났다. <캔디>를 도쿄에 내다팔자고 결정 했을 때, 게이코가 길잡이 역을 맡았었다. 당시 게이코는 1년에도 몇 번씩 해외 여행을 했고, 귀국길엔 도쿄에 들러 마음껏 즐겼었다. 그때 어울렸던 록봉기의 게이보이로부터 스미를 소개받은 것이었다. 스미에게 반해 있었던 게이보이는 스미의 환심을 사려고 자신의 거물 단골인 게이코를 갖다붙여 준 것이었다. 스미가 야쿠자임을 안 게이코는 더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으나 그 루트를 스스무가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게이코의 친척 입장에서 스미와 접촉, <캔디> 총판을 제의했다. 게이코를 중간에 넣은 것이 위험한 일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보험일 수도 있었다. 스미는 게이코의 배경이 얼마나 어마어마한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무의 뒤를 캐보려 하지 않았다. 반면에 마음만 먹으면 게이코를 단서로 해서 스스무의 정체를 손쉽게 파헤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게이코에게 손을 대는 것은 구미 내에서의 스미 자신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 야쿠자는 절대로 정치가에겐 손을 대지 않는다. 노보루는 그렇게 말했다. 가카와 본가는 정치가라면 꽤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스미 입장에서 보면 칼을 휘둘러댈 상대가 아니었다. "게이코를 끌어들인 건 형이었어." 스스무가 말했다. "그건 그것으로 좋은 거야. 게이코와 우리가 공동운명체란 것도 아주 중요하니까 말야." 노보루는 침착하게 말했다. 형이 게이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스스무는 알 수가 없었다. 여섯 살 손아래인 게이코와는 한때, 동생인 스스무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촌누이였다. 게이코 남편이었던 공무원과 노보루는 몇 번인가 얼굴을 맞댈 기회가 있었다. - 형, 어떤 사람이었어? 게이코 결혼식 때만 얼굴을 내밀었던 스스무는 사촌자형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노보루는 서슴없이 한마디로 잘라 대답했었다. - 시시한 녀석이야. 직함 이외엔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는 사내야. 그 말을 듣자 스스무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노보루가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에 대해 그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이코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 그런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내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어쩐지 그것만은 형 앞에서 입에 담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게이코는 이혼을 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소식을 들은 노보루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형제는 한달에 한두번 게이코와 만났다. 같이 만날 때도 있었고 따로따로 만날 때도 있었다. 스스무는 딱 한번 게이코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게이코가 귀향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형 노보루는 어땠을까. 자기가 없을 때 게이코의 꼬드김을 받아들여 함께 잔 적이 없을까. 그것 역시 대놓고 물어볼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형 노보루가 게이코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안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애정일 수도 있고 어쩌면 증오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한 기분 때문에 <아이스캔디> 사업에 게이코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게이코는 <도쿄의 야쿠자를 소개해 달라>고 형제가 부탁했을 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 한번 찾아볼께. 그렇게 말한 이튿날 에 들른 스스무에게 스미의 명함을 건네 주었다. - 내가 소개하더라고 밝혀도 괜찮아. 도전하는 것 같은 눈초리로 스스무를 응시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날 밤 스스무는 노보루가 정해 준 범위 내에서 게이코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 재미있겠네. 그것이 게이코의 반응이었다. <재미있겠네> - 가카와 본가의 장녀는 각성제 밀조를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노보루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게이코 역시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스스무가 노보루는 존경하지만 게이코에 대해서는 어쩐지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 두려움이 게이코의 성격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가문에 대한 것인지 솔직히 말해서 스스무 자신도 몰랐다. "어떻게 처리하지?" "한 이틀쯤 끌도록 해. 그 사이 후지노구미를 조사해 보는 거야. 스미 엉덩이에 붙은 불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는 게 좋아." 스스무의 물음에 노보루가 대답했다. "만약 정말 불이 붙었다면?" 노보루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어렵군." 스스무는 제일 가까운 인터체인지에서 U턴 해서 시가지를 향해 왜건의 속도를 높였다. "녀석이 울든가 우리가 울든가 둘 중의 하나로군." "우리가 울어야 할 경우란 건 저쪽을 밀어 주자는 의미야?" "아니!" 노보루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은 그렇지 않아. 녀석은 곤란하게 됐으니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어. 밀매인이 검거된 것도 자기네 잘못이 아니라고 버티고 있어. 서로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얼버무릴 속셈인 것 같아. 만약 우리가 거절하면, 스미는 그걸 우리 빚으로 치부할 게야." "어림없는 소리. 모두가 저네들 탓인데." "물론 그렇지. 우리는 안전권에 숨어 있는데 스미는 몸으로 때우고 있어. 때문에 어떤 트러블이 생기면 스미가 강경한 태도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야."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스스무는 초조한 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불안감은 오히려 더욱 깊어졌을 뿐이었다. "문제는 스미가 이판사판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데 있어.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이번엔 우리가 우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그럴 순 없어. 우린 약점이 하나도 없어. 모른 체해 버리면 그걸로 끝이야." "녀석이 자신 있게 50만이란 숫자를 제시한 건 뭔가 우리 약점을 거머쥐고 있다는 뜻이야. 스스무......" 노보루는 스스무를 응시했다. "왜 그래요?" "발목 잡힐 만한 일 정말 하나도 없나? 게이코 관계 말고는." "없어요. 정말 없어!" "녀석에게 본명이나 주소를 흘리진 않았겠지?" "그럴 턱이 없잖아? 상대가 야쿠자인데." 노보루는 길게 숨을 내뿜었다. 시트 깊숙이 몸을 묻으며, 자동차가 한대도 없는 텅빈 고속도로 전방으로 눈길을 던졌다. "한번 버티어 봐?" "그래요. 버티어 보기로 해요." 스스무가 맞장구를 쳤다. "스스무." 노보루가 중얼거리듯이 불렀다. "네?" "널 믿는다." "당연한 얘기 아녜요?" 스스무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형이 두려웠다. 8. 기치조지 역 근처 다방, 사메지마는 밖을 감시하고 있었다. 2층 창 밖으로 가게 앞에 즐비하게 세워둔 자전거가 보였다. 지금 바로 그 한구석에 젊은이가 50 CC 오토바이를 세우려 하고 있었다. 가죽 점퍼에 진바지 차림이었다. 풀페이스 헬멧을 벗어 시트 위에 올려놓으면서 얼굴을 쳐들었다.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빗어넘긴 머리가 번쩍번쩍했다. 사메지마를 향해 웃어 보이면서 빌딩 바깥쪽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어서 오세요." 자동 유리문을 빠져 나온 젊은이는 사메지마 쪽으로 거침없이 다가왔다. "늦었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 좀 알아냈나?" 사메지마가 묻자 고개를 흔들면서 두 손을 벌려 보였다. "아무것도......" 손바닥엔 군데군데 검정 잉크 얼룩이 번져 있었다. 사내는 사메지마 건너편에 앉으면서 다가온 웨이트레스에게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어땠어, 사정은?" "역시 상당히 어려운 모양입니다. 마침 <마루세이> 에서 수금원 노릇을 했던 녀석을 찾아냈었죠. <정신이 번쩍나게 뜨거운 맛 한번 볼래?>가 그녀석 입버릇이었죠. 지금은 그만뒀지만, 녀석 말로는 요즘 교에이카이는 상납금 때문에 죽을 지경인가 봐요. 하부 구미는 어디다 다 비명을 지른다면서......" 사내 이름은 하야사카라고 했다. 올해 스물다섯 살 - 3년전 카부키쵸에서 사메지마에게 체포당한 걸 계기로 폭력단 준구성원에서 발을 씻은 녀석이었다. 복싱에도 약간 손을 대고는 있지만, 그 보다는 오토바이에 미쳐 있었다. 폭력단을 탈퇴하면서 하야사카는 구미에서 형님으로 모시던 선배한테 많은 시달림을 받았었다. 발을 씻으려면 5백만 엔을 내놓든가, 손가락을 자르라는 것이었다. 하야사카는 폭력배답지 않게 만화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 전문학원에 다니면서 더욱 갈고 닦았다. 이야기 엮기와 인물 그리기엔 뒤지는 편이었으나 총이나 자동차 같은 기계류 묘사는 단연 발군이었다. 폭력단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오토바이 구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캐치 바 (손님을 강제로 끌어들여 바가지 씌우는 술집)>의 주먹 노릇한 게 계기가 된 것이었다. 형님으로 모시던 선배는 하야사카에게 왼쪽 새끼손가락이 아니라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자르라고 몰아세웠다. 오른손 집게를 자른다면 정밀한 기계 그림은 더이상 그릴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메지마는 즉각 움직였다. 하야사카 몰래 선배 야쿠자를 감시한 끝에 각성제 복용 현장을 덮쳐 교도소에 처넣은 것이었다. 2년형을 언도받은 그는 구미로부터도 파문을 당했다. 하야사카는 완전히 발을 씻을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인기 만화가의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야사카가 두번 다시 야쿠자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사메지마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주쿠엔 양아치 시절에 사귄 친구들이 아직도 많았다. 사메지마가 부탁한 건 아니었으나 하야사카는 그런 친구들로부터 들은 얘기나 전화로 입수한 정보를 때때로 알려왔다. 사메지마가 <형님>을 제거해 준 데 대한 하야사카 나름대로의 보은이었다. 하야사카의 정보를 근거로 사메지마는 직접 누군가를 체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야사카와 같은 선의의 제보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메지마 나름대로의 원칙 때문이었다. 하야사카는 밀고를 한 것이 아니라 사메지마를 돕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메지마는 하야사카의 제보를 포함해서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자기 집 PC에 분류 입력해 놓고 있었다. 축적된 정보는 신주쿠 폭력단의 동태 분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메지마는 이번에 처음으로 하야사카에게 <마루세이 금융>과 배후인 후지노구미에 대한 정보 수집을 의뢰한 것이었다. 자신이 움직이고 있음을 스미가 알고 있는 지금 늑장을 부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노리고 있는 것이 <캔디> 임을 스미가 눈치챘는지 어떤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돌대가리 야쿠자가 아닌 이상, 당분간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거나 한탕 크게 벌인 다음 한동안 자취를 감추거나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후지노구미의 동태는 어때?" "다른 곳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요즘은 모두 허덕인다는 얘기니까요. 다른 구미에 비해 두드러진 게 한가지 있긴 하지만......" "뭐야, 그게?" "차입 아닐까요? 교도소에서 고생하는 녀석들에게 돈이다, 밥이다, 넣어 주는 것 말예요. 후지노구미는 차입엔 돈을 아끼지 않고 풍덩풍덩 쓴다는 소문이에요." 야쿠자는 겉멋이랄까, 허세부리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교도소에 들어가면 오히려 더 심해진다. 감방에서 읽는 잡지는 물론 간식 따위로 현금이 더욱 필요하게 된다. 자유가 전혀 없는 감방에서 썩는 것을 야쿠자들은 무척 두려워한다. 어깨로 바람소리를 내며 으스대던 그들이지만 교도소에 처박히는 순간부터 우선 마누라가 도망쳐 버리지는 않나 하는 시름에 잠기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지난날과 달라 복역중인 멤버의 뒤를 보살펴 주는 구미가 드물었다. 돌봐 주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복역기간 중엔 적어도 굶어죽을 염려도 없었고, 병에 걸리면 치료까지 해 주지 않는가. 밖에서 고달프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야쿠자들 사이엔 농담반 진담반으로 그런 얘기까지 퍼질 정도였다. "차입에 돈을 풍덩풍덩?" "네. 복역중인 야쿠자의 내연의 처한테 돈을 가져다 줬다는 겁니다. 보자기에 싼 게 한 4,5 백쯤 되잖을까 하는 얘기였어요." 사메지마는 그게 마가베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복역중인 모든 멤버에게 그런 거금을 썼을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마가베는 스미의 형님 뻘이었다. 상납해야 할 돈이긴 했으나 벌고 있는 스미가 모시던 형님에게 차입해 달라고 내연의 처에 갖다 줬다고 한다면 구미 상층부도 입을 다물 가능성이 높지 않는가. 스미가 벌어들이기 때문에 후지노구미는 복역중인 녀석들에게 정을 베풀 수 있는 것이었다. "<캔디>에 대해서 뭣 좀 알아냈나?" "전혀. 꽤나 신중하게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팔고 있다는 것, 유행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어디서 어떻게 흘러나오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사메지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로 수고 많았어." "무슨 말씀이세요, 섭섭하게. 시킬 일, 다른 건 또 뭐 없습니까?" 사메지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딱 한가지만 더 수고해 주겠어?" "물론입니다." "후지노구미에 스미란 사내가 있어. 젊지만 꽤 거물이야. 그 녀석이 항상 거느리고 다니는 보디가드와 운전기사의 이름을 알아낼 수 없을까?" "간단한 일입니다. <마루세이> 친구한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부탁해." "사메지마 아저씨." "왜?" "저도 부탁드릴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하야사카가 새삼 공손해지는 걸 보고 사메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 차례다, 이 말이지? 그래, 뭐야?" "언제든 시간이 나면, 우리 선생님 한번 만나 주시지 않겠어요?" "선생님이라니? 만화가 말야?" "네. 언젠가 한번 신주쿠 서에 아는 형사가 있다고 했더니 만나게 해 달라면서 못살게 들볶아요. 자기도 그런 걸 그리고 있으니까 관심이 많은 모양이에요." "그런 거라니, 형사 만화?" "네. <들개> - <스트레이 도그> 라는 별명의 독불장군 형사가 주인공이에요. 아주 인기가 높아요." "권총을 탕탕 쏴대는 거겠지?" "그건 제 단골 아닙니까? 그로크 17을 사용하죠." "그로크17?" "모르세요? 대부분의 부품이 플라스틱이어서 X선에도 걸리지 않아요. <다이하드2> 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말한 바로 그 권총...... 오스트리아제, 9밀리미터 탄환이 더블 컬럼에 17발 들어 있는 것 말예요." "17발이라구?" "네. 아저씨는 어떤 걸 소지하고 있죠?" "지금은 안 가지고 있지만, 뉴남부야." 하야사카는 쯧쯧하고 혀를 찼다. "구식이군요. 요즘 핸드건은 9밀리미터가 주류에요. 베레터, 그로크, 스테어...... 전부 9밀리 아녜요? 장탄수도 모두 15발 이상이구. 뉴남부는 38스페셜이죠? 총알도 겨우 5발 뿐이구. 이길 수 없어요, 총격전이라도 벌어진다면." "총격전이 그렇게 흔하지 않아. 또 그런 일이 벌어지면 기동대가 출동하게 돼 있구." "많이 뒤처져 있군요, 일본 경찰은." 하야사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메지마는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좋은 게야. 우리가 그런 최신식으로 중무장을 하게 되면 너희들도 그만큼 총맞을 위험이 많다는 것이니까 말야." "하지만 금방 퍼질 겝니다, 그런 게. 엔으로 못 살 게 없잖아요? 38구경의 썩은 리볼버론 못 버텨낼 테니까 두고 보세요." "그때가 되면 그때대로 대책이 있겠지." "<신주쿠 상어>가 그런 맥빠진 말을 늘어놓다니...... 어떻게 된겁니까?" "그렇다고 내가 사형집행인은 아니잖아?" "농담이 아녜요. 무장하는 야쿠자들이 점점 늘고 있어요." "알았어. 그 얘긴 너네 선생을 만나서 계속하기로 하자구." "만나 주시는 겁니까?" "물론." "선생님이 정말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난 <마루세이> 녀석에게 그걸 알아볼께요." 하야사카는 손목시계를 흘끔 보면서 일어섰다. "가봐야겠어요. 오늘부터 3일간은 선생님 작업실에서 묵어야 합니다. 권두 컬러를 그려야 하기 때문에 이번 주는 지옥이에요." "열심히 해." 하야사카가 뛰어나가는 것을 눈으로 쫓으면서 사메지마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그러고 보면 마가베와 처음 만난 곳도 기치조지였다. 그때 마가베는 아직 젊은 졸병이었으나 역량은 간부를 앞지르고 있었다. 상대가 형사일 때는 주눅이 드는 야쿠자가 많았으나 마가베는 눈곱만큼도 그런 빛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마가베는 형사라도 태연히 찌를 사람이었다. 하지만 요즘 야쿠자 사회에서는 그 정도로 배짱이 센 사내는 좀처럼 출세할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출세할 기회는 주어지지만 배짱이 두둑한 탓에 목숨을 잃거나 장기복역으로 썩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마가베가 출감하자면 적어도 앞으로 3년은 더 있어야 했다. 만약 그때 후지노구미가 해산되고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솜씨를 아깝게 여긴 상부조직에 스카웃되어 같은 계열의 다른 구미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선 뜨내기이기 때문에 별로 재미를 못 볼 가능성이 많다. 꾹 참고 한단계씩 한단계씩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깨끗이 발을 씻어 버릴 것인가. 마가베와 같은 사나이는 야쿠자 이외에 달리 살아갈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 그래서 모든 것을 꾹 참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타입이 깨끗이 발을 씻고 착실하게 일하기 시작하면 성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발목을 잡거나 뜯으러 오는 옛날 패거리들을 뿌리치는 게 어려울 뿐이다. <사나이다움>을 최대의 미덕으로 삼는 야쿠자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비록 발은 씻었지만 지난날 동료들을 뿌리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마가베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동시에 신주쿠라는 <전장> 에서 수많은 투쟁을 지켜본 베테랑 병사의 본능으로 판단할 때 그건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스스무와 노보루는 근무장소가 달랐다. 노보루는 본사, 스스무는 배송 센터 내의 배송관리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스스무의 직함은 전무이사, 배송관리 담당이었다. 제휴관계에 있는 타현의 운송업자.창고업자와 협의할 일이 많아 출장이 잦은 편이었다. 그날 밤, 당일치기 출자에서 돌아온 스스무는 10시가 지나서 노보루 집으로 갔다. 벽난로까지 갖춘 거실은 거의 20평이나 되었다. 저녁을 먹고 왔다는 스스무의 말에 형수는 간단한 안주와 술을 갖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락을 비롯해서 아이들 등교 준비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노보루 부인은 늦어도 밤 11시엔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은 쌀쌀했다. 폴로 셔츠에 얇은 가디건을 걸친 노보루는 난로 앞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난로엔 불이 이글거렸다. "올들어 처음 불을 지핀 모양이군요." 스스무는 건너편 소파에 앉으면서 난로 불길로 눈길을 던졌다. 노보루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법 쌀쌀해져서 말야. 조금 성급하단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지 않아요. 나도 자동차 히터를 켰었는데 뭘." 스스무의 대답을 들으면서 노보루는 옆에 있던 서류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흥신소 보고서, 읽어볼래?" 스스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장시간을 운전한 끝이라 모든 게 귀찮았다. "재미있는 게 좀 있어요?" "스미가 싫어할 만해. 대단한 사내야." "실패한 엘리트랬죠?" "상급 공무원 시험 (행정고시)에 합격했어. 제대로 풀렸다면 지금쯤은 경무관이야. 신주쿠 서 서장과 같은 계급이지." "나이는?" "나와 동갑이야." "젊군요." 스스무는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의 끈덕진 중년 사내를 상상하고 있었다. "응. 게다가 독신이구." "독신?" "이번 조사는 형사 출신이 하고 있는 흥신소에 부탁했었어. 꼼꼼이 잘 조사했더군." "위험하지 않을까요? 경찰 출신이라면 서로 줄이 닿아 있을지도 모를 텐데......" 노보루는 머리를 저었다. "걱정 없어. 여러 가지 원인으로 목이 잘린 사내니까. 물론 줄은 있겠지만, 저도 먹고 살자면 입에 자물쇠를 채울 게야." 스스무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운전중에 빨았던 <캔디>의 약효가 떨어지면서 몸이 천근처럼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래, 그것뿐?" "여자가 있어. 사귀고 있는 여자...... 형사 애인 치고는 별종에 속해." "호스테스 따위?" "아니. 가수야. 그것도 프로 록밴드의 보컬." "뭐라는 밴든데?" "<후즈 허니>. 데뷔한 지는 1년밖에 안 됐어."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별로 안 팔리는 모양이야. 하지만 록밴드라면 이용가치가 높아." "어떻게?" "정신차려! 록밴드라면 알아들어야 할 것 아냐? 마약. LSD. 마리화나에 빠져 있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녀석들이란 걸 몰라서 물어?" "그렇군요." "게다가 이 사내는 방범과 경감이야. 애인이 약물에 중독되어 있다면 체면이 말씀이 아니야." "그 여자, 중독자야?" "몰라. 지금 그 여자에 대해 조사하고 있어. 만약 약물에 빠져 있다면 그걸 꼬투리 잡아 형사의 목을 조여볼 생각이야." "애인을 감싸 주고 있을까?" "물론. 애인인데다가 만약 들통이 나면 옷을 벗어야 할 테니까." "약물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 "빠져들게 해야지, 이쪽에서." 노보루는 차갑게 내뱉었다. "빠져들기만 하면 우리 꼭두각시가 되는 것 아니겠어?" "록싱거......" 스스무는 하품을 했다. 노보루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했다. "왜? 그렇게도 피곤해?" "네. 어쩐지 오늘은......" "아직 신주쿠 얘기 많이 남아 있어." "알았어요." 스스무는 앉음새를 고쳤다. 너무 허물어져 있으면 <캔디> 중독을 노보루가 눈치 챌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후지노구미 건인데...... 스미 녀석, 구미 안에서 제법 큰소릴 치고 있다는군. 돈을 젤 잘 벌어온다고 칭찬이 자자한 모양이야." "역시 <캔디> 효과가 크군요." 스스무는 간신히 졸음을 쫓으면서 말했다. "그래. 하지만 너무 으스댄 바람에 물러설 수가 없게 된 것 같아. 게다가 녀석은 복역중인 <형님>을 보살피는 데 돈을 너무 많이 쓰고 있어." "그 얘긴 나도 녀석한테서 들었어. 형님뻘 야쿠자를 교도소로 보낸 게 바로 신주쿠 서 그 형사였다는 것도."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유리가 난로 불빛을 받아 빨갛게 번쩍였다. 집안은 조용했다. 노보루 부인과 아이가 자고 있는 2층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밀매인이 체포됐다는 건 정말인 모양이야. 하지만 검거한 건 경찰이 아니었어." "그럼?" 노보루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약단속관 사무소였어. 때문에 거기 관한 정보는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어. 경찰과 달라 그쪽은 정보가 새지 않는 모양이야. 후지노구미를 내사하고 있는지 어쩐지조차 확인할 수가 없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유?" "한가지 분명한 것은 스미와의 거래를 지금 식으론 계속할 수 없다는 거야. 지난번 건넨 물건은 모두 압수당했다고 봐야 해. 따라서 녀석도 생각했던 만큼은 수금을 못했을 거구. 50만 정도 아마 외상으로 달랄게 분명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캐시가 아니면 위험해서 거절한 수밖에 없어. 이 1주일 동안 녀석은 돈을 마련하느라고 분주하게 쫓아 다니고 있어. 하지만 50만 정쯤 되면 올린 값으로 8천만이야. 그만한 돈은 쉽지 않아." 스스무는 노보루를 바라보았다. "결론을 내린 모양이군요, 형은." "그런 셈이야. 스미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어." 스스무는 또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지금 얼마쯤 남아 있수?" "완제품 30만, 원료가 1백만 정분." "그럼 배는 또 언제 출항시키지?" "내주 말쯤이 어떨까 하는데, 네 생각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거기 대해선. 토요일엔 골프나 갈까 했었는데......"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서둘러야 할 건 없잖수? 스미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한 이상......" "녀석이 그것으로 물러선다면 그렇겠지. 잘 안 되었을 경우의 대비책도 세워두는 게 좋아." "형답지 않게 뭘 그렇게 약한 소릴 해요? 왜, 뭣 땜에 일이 꼬일 거라고 생각하우? 별일없을 거요." 스스무는 불안했다. 형답지 않는 얘기였다. 형이 신중한 사람인 건 틀림없지만, 이번에는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이 쏠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를 테니까 그럴 수밖에. 값을 올린 직후에 밀매인이 검거됐어. 스미도 괴로운 입장에 몰렸어. 괴로울 때 인내하는 사람 뿐이라면 야쿠자의 세계가 일반 사회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것 아니겠어?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녀석들은 참을성이 하나도 없어." "알았어. 내일 스미한테 전화를 한번 해 보겠어.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아직 확실히 모르니까......"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발 밑에 독사가 몰려든 것도 모르고 태연히 걷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야." 형이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독사라니, 스미 말유?" "그럴지도 몰라. 아님 아주 엉뚱한 녀석일 수도 있고. 어쨌든 뭔가 일이 터졌을 때 허둥대지 않게 대비하고 싶어." "형이라면 걱정 없어." "나만이 아니야. 너도 있잖니?" 난로 불길을 바라보며 노보루는 눈길을 스스무 쪽으로 옮겼다. 스스무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나 말이우? 난 괜찮아요. 형이 뒤에 있는데 걱정할 게 뭐 있겠수?" 스스무는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여보세요......" 그것이 스미의 목소리라고는 처음엔 스스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목소리가 낮은 데다가 뭔가 몹시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라다 라고 합니다만......" 이쪽 이름을 밝히자, 갑자기 스미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반갑군요.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좀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미안합니다." "아뇨. 이쪽이 무리한 부탁을 드린 거니까...... 헌데, 어떻게 됐죠?" "저어...... 그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지만 50만은 좀......" "어렵습니까?" "네." "그럼 얼마나?" "지금은 수중에 가진 게 전혀 없는 상황이라서." "하지만 지난번 약속으로 보면 10일 후쯤이면 물건이......" "그게 말이죠." 스스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이쪽 일부에서 신중론이 제기되는 바람에......" "몇몇이 앓아 누운 것 때문인가요?" 스미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네, 바로 그 때문에." "그렇다면 전혀 걱정할 게 없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좀 안 될까요? 부탁입니다, 하라다씨. 나와 당신 사인데 숨기거나, 못할 일이 없잖습니까?" 노보루가 말했던 것처럼 스미는 <나와 당신 사이>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미씨를 위해서 어떻게 할 수 없을까고 열심히 뛰어보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역시 신중론을 꺾을 수가 없더군요." 스스무는 빨리 통화를 끝내고 싶었다. 스미도 체념할 것 같은 눈치가 보였다. "스미씨, 모처럼 여기까지 꾸려온 신뢰 관계를 허물어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만은 좀 참아 주세요." 스미의 숨소리가 묵직하게 들렸다. "그렇게 되고 마는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스무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깨물었다. "그럼 이번은 안 된다 치고 다음은 언제쯤?" "최소한 한달은 걸릴 것 같군요." "한달? 음...... 너무 길군." "네.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생각했던 것만큼 쉽게 물건이 모이지 않는군요." "그쪽에서 좀 무리를 해 주면 기간이 단축되겠죠?" "......역시 한달은 걸려야 할 것 같군요." "하라다씨, 너무 심하지 않아? 한달이라니!" "네?" "그렇다고 생각 안해요? 서둘러 물건을 보내달라는 이쪽 요구가 무리라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처음 약소했던 것보다 20일 이상 늦어질 수밖에 없다니...... 도대체 나와 당신 사이에 오간 얘기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요?" "하지만 그쪽에 환자가......" "그건 걱정할 것 없다고 했잖소? 환자 발생건을 이쪽에서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쪽에선 알 수도 없었던 일 아니오? 말하자면 그건 이쪽의 성의요. 그런데도 약속을 뒤엎어 버리다니...... 괴롭군요, 괴로워." "뒤엎어 버리다니, 말씀이 좀 심하군요." "하라다씨, 난 필사적이요. 그 물건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내 목숨이 걸려 있어요. 그래서 알리고 싶지 않았던 좋지 못한 얘기까지 알려 드린 거예요. 그런 내 각오를 좀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것 아니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스미씨,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둘러대고 있단 말이오?" "거짓이다, 정말이다 하는 문제가 아니오. 하라다씨, 설령 당신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난 그말 속에서 당신의 개인적인 성의 같은 걸 전혀 느낄 수가 없어요. 그게 섭섭하다는 거요!" "내 성의?" "그렇소.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당신이라면 어떻게 꾸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난 기대하고 있었소. 바보처럼 말이오." 스스무는 할말이 없었다. 스미가 느릿느릿 칼을 뽑고 있음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전화 카드 표시 숫자가 <1>로 바뀌면서 겨고 신호음이 울렸다. "저어...... 잠시 뒤 다시 걸겠어요. 카드가 다 된 것 같아요." "끊어도 좋아요. 내가 그쪽으로 걸면 되니까." 스미가 말했다. "그쪽에서?" 깜짝 놀란 스스무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에 대한 스미의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표시가 <0>이 되면서 전화가 끊겼기 때문이었다. 신호음과 함께 카드가 튀어나왔다. 수화기를 움켜쥔 채 스스무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날 밤 스스무는 전화를 걸러 혼자 파킹 에어리어까지 차를 몰고 온 것이었다. 전화 부스에서 나온 스스무는 타고 온 BMW로 다가갔다. 전화 카드는 여분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 다시 걸면 위협에 굴복한 것 같은 이상을 스미에게 줄 염려가 있었다. 먼저 노보루와 의논해야겠다는 생각에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10분이었다. 대시보드로 팔을 뻗었다. 핸디폰이 잡혔다. 전화를 꺼내면서 대시보드 안쪽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사각형 사탕통이 만져졌다. 동전으로 사탕통 뚜껑을 열었다. <캔디>가 손바닥에 쏟아졌다. 한 알을 집어 입에 물었다. 약효가 번질 때까지 기다리자. 그 편이 훨씬 낫다고 스스무는 자신을 타일렀다. 시트에 몸을 기대면서 숨을 내뿜었다. 반사작용 탓일까, 최근엔 <캔디>를 입에 물기만 해도 손과 발끝이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캔디> 성분이 혈관으로 녹아 들어가기까지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릴 텐데도 기분이 앞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 <캔디>를 하루에 한알씩은 먹어야 했다. 기분이 앞지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러다가는 보통 사탕을 입에 물어도 같은 반응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제는 이 도시에 머물고 있는 동안엔 <캔디>의 쾌감을 함께 나눌 섹스 상대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주사로 맞는 각성제와는 달리 메타페타민 함유량이 낮은 <캔디>를 습관적으로 복용하면 지속시간이 짧아지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지금은 여자와 만나기 전에 먹으면 한창 열을 올려야 할 때 약효가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캔디>로 섹스를 즐기자면 어쩔 수 없이 여자 눈앞에서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캔디> 맛을 들이기 시작한 초기단계에서는 여자와 만나기 전에 먹더라도 섹스를 끝낼 때까지 효과가 지속되었다. 자신의 체질적 변화에 스스무가 어느 정도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캔디>에 함유된 각성제 성분은 아주 미량이 아닌가. 게다가 식사도 규칙적으로 하고 있고, 내장의 다른 부위도 모두 튼튼하지 않는가. 스스무는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샤키와의 섹스 신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반신이 단단해짐을 느꼈다. 지금 여기에 샤키가 있다면 잡담 제하고 덮쳐 눌렀을 것이다. 샤키도 거친 숨을 내쉬면서 스스무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허리를 흔들어댈 게 틀림없었다. 이윽고 마지막엔 한방울도 남김없이 스스무의 몸에서 뿜어나온 생명을 받아마셨을 것이고...... 전화 벨이 울렸다. 너무도 뜻밖이었기 때문에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조차 들었다. 스스무는 멍하니 차창 밖으로 던졌던 눈길을 돌려 차 안을 살폈다. 대시보드 뚜껑 위에 올려놓았던 핸디폰 벨이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핸디폰은 전원을 켠 채 대시보드 깊숙이 넣어둔 것이었는데 대시보드 뚜껑이 열린 탓에 수신이 가능했던 것이다. 스스무는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스스로의 귀에도 텅빈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정말 끊어 버리다니...... 너무 매정하군, 하라다씨. 가카와씨라면서, 거기서는?" 스미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전신을 휘감아 왔다. "스미씨......" 경솔했다고 생각했다. 잘못걸려온 전화로 시치미를 뗐어야 했는데. <캔디>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머리를 부지런히 굴렸다. 이런 경우엔 자기 머리도 쓸 만하다는 자신이 있었다. "이쪽 번호를 용하게도 알아냈군요." 이번엔 목소리가 아주 침착했다. "그야...... 우리가 어디 하루 이틀 사귄 사이인가. 알아내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어요, 가카와씨." "이름까지도?" "그런 셈이죠. 하나 당신이 가카와씨였건, 하라다씨였건 이쪽은 아무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캔디> 50만을 언제쯤 가져다 줄 수 있느냐에 있으니까." "그건 이미 얘기한 대로......" "그럼 이렇게 하기로 하지." 스미는 스스무의 얘기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투였다. "내주쯤, 중반이 좋겠군. 이쪽으로 와 줄 수 없겠소?" "가는 건 언제나 가능하지만......" 스미는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가카와씨가 내 애인도 아닌데 빈몸으로 와봤자 소용이 없어요. 당신 몸을 기다리는 건 내가 아니라 록봉기의 그 아가씨 아닐까. 가카와씨가 반해 있는......" 그런가. 그렇게 된 건가. 스스무는 눈을 감았다. 샤키였다. 스미는 샤키를 통해 본명과 전화번호를 알아낸 것이었다. "만약 와 준다면 그 아가씨와 함께 마중을 나가죠. 가카와씨가 온다면 그 아가씨, 일을 쉬고라도 달려갈 거요." 스미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러나 빈틈없는 공갈이었다. "그 아이 얘긴 그만둡시다." 스스무의 손바닥엔 땀이 홍건했다. 전화기가 미끄러질 정도였다. "좋은 아가씨더군요. 우리가 맡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스미의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멀어져 갔다. 더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샤키를 인질로 잡겠다는 뜻이었다. "그래봤자 호스테스에 불과한 여잔데 뭘." 가까스로 스스무는 한마디 버티어 보았다. "그래? 그래봤자란 말이지. 소모품이란 말이지, 소모품." 죽이겠다는 뜻일까? "그 정도 몸매라면 우리가 관리해 주면 훨씬 많이 벌어들일 거요." 스스무는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나감을 느꼈다. "어쩌면 원망을 들을지도 모르겠군. 가카와씨가 무척 매정한 사람이라고......" "눈감아 줄 수는 없나요?" "물론, 손끝 하나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다른 사람의 사랑을 훼방 놓을 만큼 멋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스스무는 심호홉을 했다. 예상 밖이었다. 스미가 이처럼 아슬아슬하게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샤키를 인질로 잠아 <캔디>를 요구할 줄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스미씨." "네?" "<물건>은 어떻게 해 보겠어요. 그대신 대금은......" "그건 염려 말아요. 준비해 둘 테니까." 스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정말이냐고 되묻고 싶은 것을 스스무는 간신히 참았다. 스미가 지금 일부러 화를 터뜨리지 않고 오히려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미에게 꼬투리 잡힐 말이라도 지금 스스무가 내뱉는다면, 마치 용암이 분출하듯이 스미가 호통과 함께 협박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았습니다." "이쪽에서 연락하죠." 스미가 잽싸게 말했다. "한동안 돌아다녀야 하니까, 가카와씨가 날 찾는 게 쉽지 않을 거요." "그렇습니까?"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스미가 전화를 끊었다. 끊긴 핸디폰을 스스무는 힘 주어 고쳐잡았다. 노보루, 아니면 샤키? 우선 샤키가 일하고 있는 술집 번호부터 눌렀다. 만약 샤키가 출근해 있다면 당장 도망치라고 말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곳으로 오겠다면 와도 좋은 일, 어쨌든 스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게 급했다. "......네. <클럽 메누에토> 입니다." 남자 목소리였다. "샤키씨 부탁합니다." "죄송합니다. 샤키씨, 오늘 안 나왔군요." "오늘 안 나왔다?" "네." "하라답니다만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하라다씨. 샤키씨, 감기에라도 걸린 모양입니다. 어제부터 쉬고 있어요. 지금 어디 계시죠?" "여행중인데......" "그렇습니까? 그럼 어떡하죠?" "괜찮아요. 다시 전화 걸지." "죄송합니다." 스스무는 전화를 끊었다. 샤키의 아파트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을 때 응답이 있었다. "여보세요." "네에. 누구세요?" "냐야." "놀랐지? 집에 있는 줄 알았지? 미안. 샤키짱, 외출중이에요. 삐하는 신호음이 울리거든......" 자동응답기 소리였다. 스스무는 전화를 끊었다. 샤키는 벌써 납치당한 것이었다. 입술을 깨물면서 핸디폰으로 핸들을 힘껏 내리쳤다. 샤키. 스스무는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샤키. 무슨 봉변인가. 나는 샤키에 반한 게 틀림없어. <캔디>와 섹스로만 이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까닭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다 흘리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샤키가 납치당했다. 외설스럽고 거칠기 짝이 없는 스미의 부하 녀석들에게 끌려간 것이었다. 샤키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몸을 비틀면서 덮쳐 오는 사내로부터 도망치려고 울부짖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샤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구해 내야지! 편의점 자동 도어 사이로 까까머리의 땅딸막한 사내 모습이 나타났다. 야단스런 점퍼하며 차림새로 보아 한눈에 야쿠자임이 확연했다. 두 손에 흰 비닐 주머니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음료수병과 경마신문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 가라키라는 사내였다. 스미의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 나이는 스물예닐곱쯤이었다. 사메지마는 BMW에 앉은 채 가라키가 메르세데스의 운전석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라키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가까운 세다가야 사쿠라 죠스이였다. 시간은 오후 8시, 가라키는 6시가 조금 지나 햐쿠닌쵸의 후지노구미 사무소를 나와 사쿠라 죠스이의 아파트로 왔다. 가라키가 몰고 있는 흰색 메르세데스는 스미 전용차였다. 하지만 오늘 저녁 스미는 그 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어제부터 이틀 동안 스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일단 아파트로 돌아온 가라키는 30분도 채 안 되어 밖으로 나왔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이 바로 이 편의점이었다. 산더미처럼 싸안은 가라키는 다시 자동차에 오른 것이었다. 곧장 아파트로 돌아갈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먹고 쓸 것이라면 퇴근길에 사들고 갔어야 마땅한 일, 아마도 아파트로 돌아간 뒤 쇼핑하러 나와야 할 까닭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메르세데스는 고슈가이도로 들어서자 신주쿠 쪽, 상행선으로 방향을 잡았다. 환상7호선, 오하라에서 우회전하여 메구로쪽으로 향했다. 스미의 주변에 묘한 낌새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사흘 전부터였다. 우선 일과처럼 보였던 술집 순회를 딱 멈추었다. 이어서 스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됨과 동시에 부하 한녀석이 쓰루마키쵸의 스미의 맨션 아파트에 틀어박혔다. 스미 마누라와 아이는 그전 날 여행 차림으로 맨션 아파트를 떠났다. 관리인에게는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채로였다. 가라키를 포함한 스미의 부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무소로 출근, 업무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술 마시러 가는 건 생각도 않는 모양이었다. 어떤 일에 대비한 대기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후지노구미 전체가 그런 것은 분명 아니었다. 스미 그룹을 제외한 후지노구미 움직임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스미와 그 부하들만이 뭔가를 시작한 것이었다. 환상7호선은 몹시 혼잡스러웠다. 공사 구간이 많은 탓에 이곳 저곳 정체가 심했다. 때문에 미행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멈추어 있을 때, 운전자는 자연히 룸미러로 눈길을 던져서 뒤쪽을 살피기 마련이었다. 엉금거리는 자동차 물결, 사메지마는 가라키가 탄 흰색 메르세데스의 3대 뒤에 붙어 있었다. 편의점을 나온 가라키는 미행을 경계한 듯 천천히 달렸다. 그러나 길이 트이면 순식간에 속도를 높여 차선을 누비듯 몇 대씩 앞질러 갔다. 그리고는 뒤쫓아 오는 차가 없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무리하게 뒤쫓지 않았다. 오랫동안 단독수사를 해 오는 동안, 미행하는 자동차가 어디로 향해 달릴 것인지 육감으로 거의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간한 일이 아니면 바짝 붙지 않았다. 특히 오늘 같은 겨우, 가라키가 미행을 떼놓으려고 저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미행 유무를 확인하려고 재주를 피우는 지금 바싹 붙어갈 필요가 없었다. 만약 가라키가 미행당하고 있음을 챈다면, 떼어 버리려 하기보다는 U턴해서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 버릴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메르세데스는 환상7호선을 따라 곧장 달렸다. 가키노키 사카를 넘어 메구로 구에서 오다 구로 접어들었다. 미나미 센소쿠를 지나 국도1호선을 가로질러 도카이도 선으로 접어들었다. 오모리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점이었다. 사메지마는 BMW 대시보드에서 칼로리 메이트를 꺼내어 씹었다. 작은 병에 들어 있는 미네랄 워터를 병째로 마셨다. 아침식사 이후 온종일 아무 것도 안 먹었기 때문에 몹시 배가 고팠다. 메르세데스는 왼쪽으로 방향으로 바꾸었다. 미나미 우마고메 2쵸메, 오모리 해안으로 나가는 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한참 달려 산노 주택가로 들어갔다. 사메지마는 속도를 줄였다. 오가는 자동차가 별로 없어 미행이 탄로날 위험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일방통행의 좁은 길로 좌회전했다. 사메지마는 뒤쫓지 않고 도로 입구에 차를 세웠다. 칼로리 메이트를 입에 문 채 BMW 에서 내렸다. 일방통행로 왼편에 대형 맨션 아파트가 솟아 있었다. 옆으로 퍼진 5층 건물, 겉에 타일을 붙인 고급 아파트였다. 가라키는 가드레일에 바싹 붙여 메르세데스를 세웠다. 너무 붙여 세운 탓에 운전석 쪽 도어가 열리지 않아 양깜박이를 켜둔 채 조수석으로 힘겹게 내렸다. 사메지마는 얼른 몸을 숨겼다. 차에서 내린 가라키는 주변을 조심조심 살폈다. 맨션 아파트의 1층에 주차장이 있었으나 가라키가 주차할 스페이스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주차장 왼편의 출입게단을 가라키는 비닐 주머니를 들고 올라갔다. 유리 자동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사메지마는 괜찮다 싶을 만큼 기다렸다가 맨션 아파트로 다가갔다. 출입구가 이중 자동문으로 되어 있는 고급 맨션 아파트였다. 집합식 인터폰을 갖춘 오토 로크 시스템이었다. <킹덤 하이츠 산노> 라는 청동판 표시가 보였다. 두 자동문 사이에 관리인실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야간엔 근무자가 없는 것 같았다. 10분도 채 안되어 가라키가 다시 나타났다. 비닐 주머니 대신 종이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부피는 큼직했으나 내용물은 가볍게 보였다. 의류일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메르세데스에 올라탄 가라키는 일방통행로 안쪽으로 요리조리 달려 환상7호선으로 나왔다. 환상7호선으로 나온 가라키는 도중에 한눈 팜이 없이 곧장 사쿠라죠스이 아파트로 돌아갔다. 이윽고 자정이 되자 방에 불이 꺼졌다. 그때까지 사메지마는 BMW 안에서 지키고 있었다. 이튿날 사메지마는 <킹덤 하이츠 산노>의 관리인을 찾아 여러 가지 기초 조사를 했다. <킹덤 하이츠 산노>는 6년전 억 단위로 분양한 초고급 아파트로 모두 12세대였다. 최근 1년 사이에는 새로운 입주자가 없었으나 현재 302호와 501호가 비어 있다고 했다. 그 가운데 302호는 팔린 것이었지만 501호는 빚에 넘어간 듯 소유자 행방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사메지마는 <킹덤 하이츠 산노>의 관리를 맡고 있는 시부야의 빌딩 관리 전문회사를 찾아갔다. 그 결과 501호의 새 소유자가 신주쿠 금융회사임을 알게 되었다. 금융회사의 이름은 <마루세이 금융> 이었다. 9. "보여?" 히라세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이시와다리에게 물었다. 고지 역시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낚싯대를 쥔 왼손의 손목시계로 눈길을 쏘았다. 세 사람은 어항 돌출부 제방에 앉아 있었다. 30분쯤 전, 바로 옆 마리나 신항에서 크루저 이 출항하는 것을 지켜본 것이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이시와다리는 대형 망원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로 수평선 저쪽을 살피고 있었다. 고지와 히라세는 낚시꾼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히라세가 국민학교 때 사용했다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낚싯대였다. 기름칠을 않은 데다가 바닷물에 삭아 릴 핸들은 꿈쩍도 안했고 실도 너덜너덜한 것이었다. 그래도 찌를 달고 낚시집에서 사온 새우를 바늘에 꿰어 바다에 던져놓고 있는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2시께였다. 고지가 불안해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젯밤 쇼가 전화로 오늘 저녁에 도착한다고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안 되겠군. 고정 삼각을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이시와다리가 카메라를 내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어쩜 녀석들도 낚시를 즐기는 것 아냐? 날씨도 좋고 하니까 말야." 히라세가 말하면서 낚시를 들어올렸다. "이것 봐라. 미끼가 없어졌잖아!" 웅크리고 앉아 다시 새우를 바늘에 꿰었다. 쌀쌀하던 며칠 전과는 다르게 따뜻한 날씨였다. 바다도 잔잔했다. 수면이 햇빛에 번쩍거렸다. 가카와 노보루를 감시하던 히라세가 두 사람을 소집한 것은 오전 11시쯤이었다. 아침 6시까지 게이코에게 시달린 고지는 술까지 덜 깬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이 들었다. 오늘 쇼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탓일까, 어젯밤 게이코는 몇 번씩이나 고지에게 달라붙었다. 그것도 샴페인을 마셔가면서. 선글래스를 꼈는데도 해면에 반사된 햇빛이 바늘처럼 눈 속을 후벼팠다. 가카와 노보루는 10시에 집을 나와 드물게도 스스무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한시간쯤 있다가 이번에는 스스무의 BMW로 마리나 신항으로 향했다. 한달에 한번꼴로 가카와 형제가 마리나 신항에 계류된 크루저 을 사용하고 있음을 고지는 알고 있었다. 의 소유자는 게이코였다. 때문에 게이코는 고지에게 1급 소형선박 면허를 따라고 졸라댔다. 고지는 시간이 없어 면허를 따지 못했으나 노보루와 스스무는 가지고 있었다. 노보루는 대학시절 요트부에서 활동했고, 스스무는 스쿠버 다이빙을 했기 때문에 반년 전 1급 소형선박 면허를 취득한 것이었다. "아직 보여?" 히라세가 이시와다리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이시와다리는 한단쯤 높은 바다 쪽 제방에 책상다리를 하고 있었다. "응. 똑똑하진 않지만."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이시와다리가 대답했다. "뭘 하고 있어?" "몰라. 낚시질하는 것 같기두 하구." 고지는 이시와다리가 망원 렌즈를 대놓고 있는 방향으로 발돋음을 했다. 남동쪽, 강한 역광이어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거리는 얼마쯤 돼?" 고지가 물어보았다. "글쎄. 그렇게 먼 것 같진 않아. 10킬로미터도 안 되는 것 같아." "움직이고 있어?" "아니. 멈춰 있나 봐." "역시 낚시인가?" 혀를 차면서 고지는 히라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히라세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수평선 저쪽을 실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유하게 배를 내어 낚시를 즐긴다, 이 말인가? 요즘 뭐가 잡히지?" 고지는 중얼거리면서 낚시를 들어올렸다. 또 미끼가 안 보였다. 숭어새끼 따위가 껍질만 남기고 날쌔게 파먹은 것이었다. "낚시하기엔 좋은 철이지. 전광어, 방어새끼 따위가 줄줄이 낚이지." 히라세가 수평선을 바라본 채로 말했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이 이시와다리에게 말했다. "이봐, 녀석들 근처엔 다른 배는 안보여?" "다른 배?" "그래. 작든 크든 좌우간 다른 낚싯배는 안 보이느냐, 이 말이야." "근처라니 어디쯤?" "바로 옆. 소릴 지르면 들릴 정도의 근처 말야." "기다려 봐." 이시와다리가 천천히 카메라를 움직였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없어...... 그림자도. 어선 같은 게 지나갔을 뿐이야." "한척도 없어?" "그래, 한척도." 이시와다리가 카메라에서 눈을 떼면서 피곤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이상하군." 히라세가 중얼거렸다. "뭐가 이상해?" 고지가 물었다. 이시와다리는 고지를 바라보면서 낚시를 당겼다. 이시와다리 낚시에도 미끼가 달아나고 없었다. "배낚시든 뚝방낚시든 간에 그냥 물 속에 실을 드리워 놓고만 있는게 아냐." "포인트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냥 밋밋하기만 한 바다 밑엔 고기가 안 모여. 목을 찾을 줄 알아야 해. 고기떼가 몰리는 포인트가 따로 있어. 조금이라도 낚시에 눈을 뜬 녀석이라면 배를 포인트 복판으로 몰고 가기 마련이야. 낚싯배 치고 어군탐지기 없는 배는 없어." "저쯤에서 어군을 발견한지도 모르지. 탐지기로 말야." "그렇다면 고깃배는 왜 한척도 안 보여? 낚싯배든 고깃배든 근해에선 대개 한곳에 몰리기 마련이야. 고기가 잡힐 만한 포인트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물고기 떼도 움직일 것 아냐? 한곳에만 몰려 있는 게 아니라......" 이시와다리가 말하자 히라세는 머리를 저었다. "물론 고기떼도 움직여. 그렇지만, 작은 물고기는 중간치가, 중치는 큰고기가 잡아먹게 되어 있어. 때문에 고기떼가 몰리는 포인트엔 반드시 작은고기. 중치. 큰고기가 우글거리게 마련이야. 요즘 잘 잡히는 고기는 모두 정어리. 전갱이를 잡아먹는 것들이기 때문에 포인트에 몰려들 수밖에 없어." "네 말은 저녀석들 배 근처에 다른 배가 한척도 없는 걸로 봐서 저 해역이 낚시 포인트가 아니란 뜻이야?" 고지가 확인하듯이 물었다. "그래. 만약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얼빠진 녀석이거나 위장술이거나 둘 중의 하나야." "원래부터 얼빠진 녀석, 멍청이들 아냐?" 이시와다리가 빈정거렸다. "가카와 동생 쪽은 다이버야. 그만 한 것쯤 모를 까닭이 없어." "그럼 잠술 하고 있나? 어장에서 잠술 하면 어부들이 가만 있지 않을텐데." 고지가 말했다. "다이빙도 아무 것도 없는 해역에선 안해. 게다가 지금은 수온이 높은 계절이기 때문에 수중이 혼탁해. 잠술 한다 하더라도 시야가 별로 좋지 못하단 말야." "자세히도 알고 있군." 이시와다리가 감탄하듯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부였거든." 히라세가 내뱉듯이 말했다.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대끝이 약간 휘어지면서 떨렸다. "앗! 낚인 것 아냐?" 이시와다리가 소리쳤다. 등에 검정 얼룩이 박힌 자그마한 흰 고기가 한마리 달려 올라왔다. 히라세는 혀를 찼다. "복어로군, 복어." "복어? 못 먹는 거야?" 이시와다리가 몸을 숙여 들여다보았다. 히라세는 왼손으로 물고기를 잡아 바늘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줄만 끊기고 말았다. 복어가 바늘을 통째로 삼킨 것이었다. 히라세 손아귀에 든 복어는 금방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복어란 건 말야, 이빨이 면도날 같아. 낚시바늘도 가는 것은 잘라 버려. 그리고 요런 새끼 복어에도 독이 있어. 게다가 이처럼 미끌미끌하구......" 히라세는 제방 위에 복어를 떨어뜨렸다. 10센티미터쯤 되는 복어는 부푼 채로 꼬리지느러미를 파닥거렸다. "독을 빼내도 못 먹어?" 이시와다리는 신기하다는 듯 파닥거리는 복어를 들여다보았다. "간 뽑아내면 남는 게 뭐가 있겠어?" 쉬, 쉬 하는 소리가 울렸다. 복어의 울음 소리였다. 복어가 이제는 볼이 되어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풍선처럼 부풀리며 지느러미를 파닥거렸다. "낚시에서 젤 재수 없는 놈으로 쳐." 히라세는 말하면서 한쪽 발을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부풀어오른 복어를 짓뭉개어 버렸다. 작은 파열음이 울렸다. 고지는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내장이 터져 나왔잖아!" 이시와다리의 불평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짓뭉개진 복어를 히라세가 걷어차 버렸다. 풍덩 소리와 함께 고지 발 밑 바다에 죽은 복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물결을 따라 흘러갔다. "이렇게 하는 거야, 원래." 히라세가 즐겁다는 듯 흥얼거렸다. 고지는 길게 숨을 내쉬면서 먼 바다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렇다면 저 녀석들 도대체 뭘 하는 걸까?" "이시와다리, 사진 찍어둬. 그리고 저 녀석들 돌아오기 전에 마리나에 먼저 가 있자구." 히라세가 말했다. 고지는 히라세를 바라보았다. 히라세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가지고 올 거야, 녀석들. 틀림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