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주검의 난 (하) 지은이: 아리마사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소개 < 11 > < 12 > < 13 > < 14 > < 15 > < 16 > < 17 > < 18 > < 19 > < 20 > < 21 > < 22 > ⊙ 작가소개 ** 오사와 아리마사 1956년 생의 젊은 작가로, 1979년 <<感傷의 도시>>로 제 1회 <소설추리> 신인상을 받으면서 데뷔했으니 올해로 집필 연륜이 15년 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15년 동안 <소설추리> 신인상을 비롯하여, 1986년에는 <<深夜曲馬團>>으로 <일본모험소설대상> 최우수 단편상을, 1991년에는 <신주쿠 상어> <한국어판<<소돔의 성자>>)로 제 12회 <吉川英治 文學> 신인상과, 제4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1993년에는 <<無間人形>> <한국어판<지옥의 인형>)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나오키 상> 수상 이전부터 오사와 아리마사는 이미 우리 독자에게도 퍽 친숙해져 있다고 하겠다. <상속자 TOMOKO>를 시작으로 <신주쿠 상어> 시리즈인 <<소돔의 성자>> <<독원숭이>> <<주검의 난>> 등을 통해 오사와 아리마사가 얼마나 아기자기하고 능숙한 이야기꾼인가 하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다. 또한 <<지옥의 인형>>에 <나오키 상>이 주어진 것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능숙하게 이야기를 끌어감으로써 독자를 즐겁게 해 준 데 대한 하나의 훈장이 되는 셈이다. 그의 장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인 문장과 치밀한 구성력 그리고 독자의 허를 찌르는 교묘한 함정과 반전을 들고 있으나, 그보다는 기본 취재와 자료 조사에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모든 상황과 인물에 사실성 내지는 현실성을 살리고 있다는 것이 강점이라고 할 것이다. 현재 일본추리작가협회 상임 이사직을 맡고 있다. < 11 > 게이 바 <마마포스>는 언제나처럼 손님이 없었다. 사메지마가 들어섰을 때, 단 한사람만이 카운터에 상반신을 걸친 채 마담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쇼였다. "변함없이 번창하고 있군." 사메지마의 말에, <마담>이 노려보았다. "정말, 당신만 주책없이 드나들지 않는다면 신주쿠 서 젊은 순경을 잔뜩 불러올 수도 있는데. 그렇게만 되면 가지각색, 골라잡아 먹을 텐데......." 사메지마는 웃으며 쇼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젊은 경찰관과는 연줄이 닿나?" "닿구말구. 젊은 애들에게는 정성껏 서비스하고 있거든. 운동선수처럼 억센 치들 알고 있죠?" 그렇게 말한 광부 출신의 <마담>은 노래까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문화의 숨결 발랄한 대(大) 터미널의 새벽, 치안도 안전한 도쿄의 서부, 내일에의 꿈을 키우며, 젊은 피 용솟음친다. 좋아요, 좋아. 아아, 신주쿠......." 옆에서 쇼가 가락에 맞춰 즉흥적으로 덧붙였다. "......경찰서!" "관둬. 술맛 떨어져!" 사메지마가 비명을 질렀다. <마담>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윙크를 보냈다. "노래 잘 부르죠?" "누구한테서 배웠어?" "말했잖아요, 이래봬도 젊은 애들에겐 인기가 있다구." 사메지마는 쇼를 노려보았다. "두번 다시 그따위 노래 불렀단 봐라!" "어레인지해서 불러볼까?" 쇼는 장난스레 웃었다. "이제 됐어...... 어제는 그 뒤에 어떻게 했지?" "리허설이 제대로 안되는 바람에 스튜디오에서 잤어. 그쪽은?" "병원엘 갔었어." "그래서?" "고참으로 뵈는 간호사밖에 못 만났어. 모르겠다는 거야." "다른 서(署)에도 알아봤어?" "그래. 하지만 그런 녀석 잡아들인 적 없대." 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숨까지 푹 내쉬었다. "모레부터 내가 투어 떠나는 것 알고 있지?" "알고 있어." 사메지마는 대답하면서 아이리시 위스키를 입으로 가져갔다. "어떻게 된 것 같아?" "모르겠어. 하지만 그 병원이 좀 묘한 것 같았어." "어떤 게?" 사메지마는 쇼를 응시했다. "내게도 들어볼 권리가 있어." 쇼가 선수를 쳤다. <마담>은 못 들은 척,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아 문고판 책을 펼쳐들었다. 사메지마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앞에서 국세청 사찰부 친구와 마주쳤어. 어떤 사건의 증거를 확보하려고 찾아왔다는 것이었어. 그녀석 얘기론 병원엔 오너 회사가 따로 있다는 거야. 헌데 그 오너 회사의 사장이란 사람이 바로 내가 만나본 그 병원 고참 간호사였어.' "혹시 원장 부인일지도 모르잖아?" "아니야. 하지만 훨씬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는 것 같았어." "포플린을 어떻게 해 버린 것 아닐까?"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게 된 것 같아?" 사메지마 가슴 속의 불안을 읽은 것이었다. "가능성이 많아." "뭐라구? 정말? 아무리 그렇다지만......." 쇼는 기가 막힌 듯 말을 맺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건 병원이랄 수도 없잖아? 늪이나 다름없는 곳 아냐? 접근한 사람은 모조리 허우적허우적 흔적도 없어져 버리다니......."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갑자기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놀랄 만큼 착한 아가씨야, 미카요는. 밴드맨에게 반한 아이들 가운데는 순정파가 의외로 많아. 겉으로만 아닌 척 허세를 부리지만 모두 비슷비슷해, 그런 아이들은." 사메지마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찾아내! 포플린 말야." "알았어." "끝내 못 찾게 되면, 만약 잘못 되었다면...... 죽인 녀석을 꼭 잡아야 돼!" 사메지마는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쇼는 약이 오른 얼굴이었다. "그렇게도 해 주지 못하면 너무 가엾잖아, 미카요가! 애기를 빼앗긴데다 애인까지 빼앗긴 게." "알고 있어." "그리고......." 사메지마는 다시 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기까지 늪에 빠지면 안 돼! 빠지려거든 내가 신주쿠에 있을 때 빠져!" "끌어당겨 내 주려구?" 사메지마는 쇼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엊그저께 밤 언뜻 가슴을 스친 불안감을 쇼에겐 숨기고 있었다. 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자기는 내 손에 죽어야 해. 다른 녀석이 죽이게 내버려 두진 않을 테야!" 사메지마는 싱긋 웃었다. 쇼가 화난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타키자와가 벌컥 화를 낼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미모리를 잡아들여 샅샅이 털어봐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날 죽여 줘, 오늘밤에도." 사메지마도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쇼의 눈언저리에 개구쟁이 웃음이 번졌다. "안됐네, 오늘 시작했어. 자살이나 하렴." 이튿날 아침, 사메지마가 출근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야부가 어정어정 찾아왔다. "차 한잔 사." 사메지마는 대답 대신 일어섰다. 야부는 가운 차림이 아니었다. 너덜너덜한 재킷에 후줄근한 와이셔츠, 초라할 만큼 작은 넥타이 매듭이 굵직한 목에 힘겹게 감겨 있었다. "나가지." 야부가 앞장을 섰다. 두 사람은 신주쿠 서를 나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층 호텔로 향했다. 서원(署員) 들은 거의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벌써 알아냈어?" 커피숍에 마주 앉자마자 사메지마가 물었다. "어제 마작을 했거든." "땄어?" "잃었어. 얘길 듣자면서 돈까지 딸 순 없잖아?" "잃은 돈, 나보구 내놓으란 거야?" "절반만. 괜찮지?" 야부는 시침을 뚝 뗀 얼굴로 말했다. 사메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되는데?" "핀으로 마이너스 120.6천 엔이야." "일부러 져 줬다는 거야?" 사메지마는 지갑을 꺼내면서 물었다. "물론. 어쩌다 이기면 입이 가벼워지게 마련이거든." "정말?" 되물으면서 6천 엔을 내밀자 야부는 무표정한 얼굴로 덥석 받아넣었다. "그리고 이 커피값도 당신이 내." "알았어. 걱정 말구 얘기나 해 봐. 들은 대로......." "1과는 움직이지 않고 있어. 화학검사에도 살인이란 확증이 안 나왔기 때문이야. 허나 일년 반쯤 전에도 비슷한 변사자를 취급한 적이 있다는 거야." "변사자 신원은?" "50대 여성. 세이조에 사는 주부야. 자택에서 죽어 있는 걸 발견했대. 사인은 이번과 같은 <혈관내 응고증후군> 이었어. 정원 손질을 하다가 쓰러진 듯 손바닥이 긁힌 이외엔 외상이 없었대. 난행당한 흔적도 없었구. 강도. 원한 양쪽으로 알아본 모양이지만 모두 헛수고였대. 데릴사위인 남편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 회장이었다는구먼. 때문에 그 남편을 집중적으로 조사를 한 것 같아." "헛짚었다, 이 말인가?" 야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엄처시하 가정이었어. 죽은 부인이 꽤 화려하게 놀았다는 거야. 부검 결과, 복부 비곗살을 제거하는 미용 성형 수술을 받은 것까지 알게 됐다는 거야. 미용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은 듯, 50대로는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게 감찰의(監察醫) 말이었어." "그런데도 원한 같은 건 없었단 말이지?" "록봉기 언저리에 진을 치고 있는 여드름쟁이와 용돈 때문에 옥신각신한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살인까지야...... 더군다나 그처럼 교묘한 수법으로." "죽은 여인 이름은?" "물어보지 않았어. 알아 줘?" "그래. 주소도 함께." "알았어." "화학검사 파트 쪽은 뭐래? 공식적인 것 말구, 속셈 말야." "같은 증상의 변사체가 또 나타난다면 살인으로 봐야 한다는 게야." "뭘 사용한 것 같대?" "모르겠어. 보통의 혈액응고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거야. 만약 약물에 의한 것이라면, 아직 한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개발품일 거라는 거야." "약품 이외에, 도료(塗料) 같은 것 가운데 그런 증상을 일으키는 독물은 없나?" 야부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없을거야. 약간 긁힌 것 같은 찰과상만으로 목숨을 잃는 독이 있다면 그건 맹독이야. 그런 맹독물이 함유된 일반 소비물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의약품 가운데는?" "그처럼 위험한 약품을 사용할 의사는 없을걸. 잘못해서 주사바늘에 자기 손끝만 찔려도 황천행인데, 누가 손대려고 하겠어?" 사메지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한가지 뿐인데......." 야부는 말을 이어갔다. "미군 같은 데서 유출된 암살용 독약일지도 몰라." "암살용?" "각성제만 하더라도 독일이나 일본 군대서 처음 사용하면서 일반에게로 확산돼 갔어. 그런 독물은 대개 어느 나라 군부와 연관된 경우가 많아." "미군이라......." "하지만 암살용 독물이 포주나 유한 마담 살해에 사용됐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공안(公安)이 연관된 살인이라면 혹시 몰라도." "하긴 그래." 사메지마도 동의했다. 하마쿠라가 미군관계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런 미군이 있다면 당연히 하마쿠라의 손님으로 봐야 했다. 미군 정보부나 그 비슷한 부문에서 일하는 고객과 어떤 트러블이 생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디고>로 가서 아가씨들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마쿠라가 마약에도 손을 댔나?" 야부가 물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신중한 사람이었거든, 하마쿠라는. 마약에 손을 대면 야쿠자와 트러블이 생길 것이 뻔한데......." "마약을 취급했다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게 없는 것도 아닌데......." "짐작 가는 것이라니, 뭔데?" "중남미 루트. 그 지역엔 군부 전체가 마약조직에 오염된 나라도 있어. 마약을 단속해야 할 사람들이지만, 실제는 앞잡이가 되어 있다, 이 말씀이야.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대통령까지 없애 버릴 만큼 마약조직이 막강해. 때문에 그런 독약이 군부에서 흘러나왔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도 않아. 일단 군부서 유출된 뒤엔 일본으로 들여보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일 테구."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걸 취급할 만한 사람들은 조직폭력배 뿐이야. 허나 야쿠자들은 훨씬 손쉬운 방법을 택했을 거야, 살인을 할 땐." "그럴 테지. 바깥에 알리고 싶지 않을 경우엔, 죽인 뒤 어딘가에 묻어 버릴 수도 있을 거구......." "결국 살인 사건일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셈이군." "그래. 때문에 1과가 꿈쩍도 않고 있는 거야. 겨우 포주 한 녀석 입을 막자고 들어본 적도 없는 독약까지 사용할 까닭은 없을 테니까 말야." ".........." 사메지마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야부가 각도를 바꾸어 질문을 던졌다. "공안 쪽엔 연줄이 하나도 없나?" "그건 또 왜?" "CIA에 한번 슬쩍 물어보면 어떨까 해서. 그런 이상한 독물, 당신네들은 사용한 적이 없느냐고 말야." 사메지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본청 공안과 CIA 사이엔 굵직한 파이프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 물어보면서 조속한 회답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본청 경무관 이상의 고위직이라야 ㅎ다. 그런 고위직에는 사메지마를 위해 움직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동일 형태의 변사체가 발견되길 기다려야 하나?" 사메지마가 중얼거리자 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러면 아무리 엉덩이가 무겁다 하더라도 1과가 움직일 수밖에 없어." 점심시간까지 서류작업을 하고 있던 사메지마는 12시 30분이 되자 요요기로 갔다. JR 요요기 역에서 <인디고> 까지는 걷기로 했다. <인디고>는 런치 타임 서비스중이었다. 메뉴를 적은 작은 칠판이 문 밖 둥글의자에 걸려 있었다. 격자 유리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바쁘게 설치던 코지가 기계적으로 외치다가 사메지마임을 알아보고는 멈칫 말끝을 흐렸다. "별일 없었지?" 카운터 안쪽에 이리에 아이가 보였다. 오늘은 민속의상이 아니라 흰 블라우스에 검정색 가죽 타이트 스커트였다. 그 옆의 미카요도 눈을 동그랗게 떠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사메지마는 카운터 빈 자리에 걸터앉았다. "서비스 런치는 끝났나?" "스파게티라면......." 미카요가 대답했다. "여기서 일 돕기로 했나?" "혼자 있는 건 불안해서......." 사메지마는 아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손으로 카운터를 짚고 서서 담배를 피우는 참이었다. "불쑥 이 아가씰 맡아달래서 미안해. 다른데는 부탁할 만한 곳이 없었어." 아니는 쿡하고 웃음을 깨물면서 코지에게 소리쳤다. "스파게티 1인분!" "쇼 언니, 잘 있으세요?" 미카요가 물었다. "그래. 내일부터 투어야." 미카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포플린 일이 궁금했지만 끔찍한 소식을 들으면 어쩌나 망설이고 있는게 분명했다. "아직 아무 연락 없어?" "네, 전화 자동 응답기, 열심히 체크하고 있지만......." 미카요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 아가씨, 당신하곤 어떻게 돼? 조카딸?" 아이가 물었다. "애인이야!" 사메지마는 짧게 대답했다. 코지가 등 뒤에서 스파게티 쟁반을 카운터로 내밀었다. "빠르군." "불평은 먹고 나서 해요." 아이가 톡 쏘았다. 훈제 연어와 양파, 그리고 캐비어를 섞어 크림 소스를 친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한 입 씹어보았다. "맛있군."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착한 사람이더군, 그 아가씨. 요즘 젊은이 치곤 패기도 있구. 뭣하는 사람이야? 설마 여경(女警)은 아니지?" 사메지마는 목이 막힐 정도였다. 미카요가 물컵을 내밀었다. "록싱어예요. 레코드도 취입했어요. 전 무척 좋아해요." 미카요가 대신 대답했다. "록 가수? 정말?" 아이가 눈이 둥그래져서 되물었다. "당신, 알고 보니 정말 별난 경찰관이야. 나이 차가 얼마나 되지?" "쓸데없는 참견은 그만 둬." 아이는 허스키한 웃음을 터뜨렸다. "별일 없었지?" 사메지마가 정색을 하고 아이에게 물었다. "없었어. 아가씨들은 모두 새 일거리를 찾기로 했어." "그게 현명해. 하마쿠라만큼 자상한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을테니까...... 잘 생각했어." "사장님, 정말 자상했어요." 미카요가 끼어들었다. "힘내는 거야!" 사메지마가 격려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코지가 외쳤다. 그룹으로 점심을 먹으러 왔던 유니폼 차림의 여사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었다. "고마워요. 밤에도 가끔 들러 줘요." 계산대로 간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꽤 손님이 많은가 보군." "가게가 멋지잖아요." 미카요가 대답했다. 어느 정도 침착을 되찾은 것같이 보였다. "줄곧 여기서 일할 생각인가?" "채용해 줘야 말이죠. 모든 게 서툴러요. 게다가......." 사메지마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안 돌아오나요? 못 돌아오게 됐나요? 포플린 말예요." "몰라." 사메지마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미카요는 고개를 푹 꺾었다. "시마오카란 간호사 기억나나? 입원해 있을 때 돌봐 줬다던데......." 미카요는 고개를 숙인 채 끄덕였다. "어떤 사람이었어?" "친절했어요."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원장이란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어쩐지 음침하고 징그럽게 느껴졌지만, 그 아줌만 친절했어요. 베테랑 간호사인 것 같았어요." "원장과 얘기할 땐 태도가 어땠어?" "얘기할 때라니요?" "원장한테 함부로 굴지 않던가, 이 말이야. 누가 어른이구 더 높은 사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야." 미카요는 고개를 살랑살랑 내저었다. "원장은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어?" "깡마른 데다가 키도 별로였어요. 머리도 벗겨졌구. 눈빛이 어쩐지 위험한 느낌을 줬어요.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기도 했구요." "마약이나 각성제를 즐기는 것 같진 않았나?" "그럴지도 몰라요." "나이는?" "예순까진 안 된 것 같았어요." "커피는?" 아이가 끼어들면서 물었다. 사메지마는 홀 안을 휘둘러 보았다. 1시가 지난 탓일까,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한잔 마셔야지." 미카요가 커피잔을 받침에 올려놓았다. 드립 페이퍼를 덮은 카리터에 스푼으로 커피가루를 퍼담았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포트를 들어 뜨거운 물을 조금씩 따랐다. 커피가루가 부풀어 오르면서 향긋한 냄새가 은은히 퍼졌다. "솜씨가 제법이군." "도쿄로 와서 처음 2년 동안, 커피 전문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죠." 미카요는 쓸쓸하게 웃었다. "패션 디자인 학원에도 등록했었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말았어요. 자, 다 됐어요." 한모금 입술을 적셨다. "맛 좋군. 훌륭한 솜씨야." 사메지마는 칭찬해 주었다. "맛 좋다, 훌륭하다, 그 말밖엔 몰라?" 아이가 빈정거렸다. 사메지마는 담배를 붙여 물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마디 했다. "맛있다."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결국 형사는 형사일 뿐이야. 어휘가 그렇게 빈약한 걸 보면." "<스테이 히어> 가사 말야." 사메지마는 미카요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절반은 내가 지은 거야." "정말? 정말이세요?" "이 집 마담에게도 좀 가르쳐 줘." "뭔데, 그게?" 미카요가 설명했다. 아이는 웃음을 흘리면서 귀를 기울이다가 <별난 형사!> 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사메지마는 아이를 무시한 채 미카요에게 물었다. "하마쿠라 얘긴데...... 외국인도 있었나, 손님 중엔?" "다른 애들 손님은 잘 모르지만, 제겐 없었어요. 대부분 지명해서 찾아오는 손님들 뿐이니까 다른 애들에 관한 건 정말 몰라요." "외국인이 어떻다는 거야?" 아이가 끼어들면서 묻자, 사메지마는 얼굴을 돌려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마쿠라는 지금 상황으로는 병사로 처리되고 있어. 사인은 <혈관내 응고증후군> 이란 건데, 혈관 여기저기에 혈전이 생기는 병이야. 그러나 원래 이 병은 암이나 백혈병 같은 중병에 걸린 화자에게만 발생하는 거야. 허나 하마쿠라는 그렇지 않았어. 그렇다면 뭔가 그런 증상을 유발시키는 약물을 주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나는." "그런 약물도 있어?" "없어. 알려진 범위 안에선."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만약 그런 약물이 있다면, 특별한 목적에 맞춰서 개발한 것이 틀림없을 거라는 게 전문가들 견해야. 쉽게 말하면 독가스 같은 것이야." "화학병기 말씀이군요." 어느새 사메지마 옆에 걸터앉았던 코지가 아는 체를 했다. "그래. 들어본 적 있나?" "피를 엉기게 하는 약 말입니까?"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뇨." <인디고>에 처음 왔던 날, 사메지마는 코지가 자위대(自衛隊) 레인저 부대 출신이란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전투에 사용될 만한 무기는 아닌 것 같군요. 우선 대량살상엔 효과가 없을 것 아녜요. 주사가 아니라 경구투약(經口投藥) 으로도 그렇게 된다면 몰라도." "그런 것까진 나도 잘 몰라." "적군의 전투능력을 없애기 위해 한가하게 한사람 한사람 주사 놓고 다닐 녀석은 없어요. 그런 것보단 기관총이나 폭탄이 훨씬 빨라요." "그렇다면?" "암살용이겠죠. 혹시 효과가 얼마나 빨리 나타나는지 아세요?" "아니. 며칠씩 걸리는 건 아닌 것 같아. 길어야 한시간, 아니면 몇 분 만에 끝날지도 모르구......." "클라레 같은 것 같군요. 나이프 끝에 발라 쿡 찌르는......." "아마 그럴 거야.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코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런게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일반 사병들은 모르고 있을 겁니다. 특수부대나 정보기관일 겝니다." "그래서 손님 가운데 미군...... 그런 부문에서 일하는 외국인이 없나 한번 물어본 거야." 사메지마는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아가씨들에게도 알아봐 줘?" "응. 그래 주면 고맙겠어." "좋아요. 전화번호나 적어 줘." 사메지마는 명함 뒷면에 집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하마쿠라 사장님은 외국 손님을 싫어했어요. 몹쓸 병을 옮길지도 모른다면서." 미카요가 말했다. "그래. 군인들은 특히 더 위험할지 몰라." 아이가 주억거리며 말했다. "병을 옮기는 건 일본인도 마찬가지 아냐?" "하긴......." "하마쿠라씨는 절대로 그냥 살을 맞대선 안 된다고 아가씨들을 들볶았어요." "월정상납(月定上納) 같은 건 정말 없었나?" "뭔데, 그게?" 옆에서 아이가 물었다. "장사를 시작할 때, 특정 폭력단과 협상을 하는 거지. 한달에 얼마씩 -- 대개 3만 엔에서 5만 엔 사이지만 -- 갖다바치면 다른 야쿠자들도 손을 대지 않아." 사메지마가 설명해 주었다. 섹스 마사지업까지 포함한 유흥업자들은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조직폭력단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지는 않았을 거예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미카요가 고개를 흔들었다. 바로 그 때 사메지마 포켓벨이 울렸다. 서에서 호출한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가게 안에 있는 공중전화로 모모이 과장을 부탁했다. "무슨 일입니까?" "묘한 일이 생겼어. 거기가 어디야? 번호를 얘기해 주면 내가 다시 걸지." 사메지마는 재떨이에 있는 성냥곽을 집어들어 전화번호를 읽어 주었다. "알았어. 기다리고 있어." 몇 분 뒤 <인디고> 전화 벨이 울렸다. "네, <인디고> 예요." 아이는 사메지마에게 얼른 수화기를 넘겼다. "네." 사메지마가 받자 모모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전, 오랜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어. 친절을 베푸느라고 충고를 해 주더군. 본청 2과가 움직이고 있댔어. 뭔가 짚이는 게 있나?" "본청 2과가 말입니까?" "그래. 내사를 시작했다는 거야. 대상인물은 자네구." 모모이 말씨는 조용했다. "만날 필요가 있어. 그러나......." 모모이는 말끝을 흐렸다. 사메지마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본청 수뇌부가 내사를 시작했다면 사메지마에게 이미 미행과 감시가 붙어 있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두 사람이 불쑥 만난다면 모모이까지 말려들 염려가 있었다. "폐를 끼치게 됐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사메지마는 마침내 수뇌부가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 지금 새삼스럽게....... "아니야, 그런 게.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미야, 내말은." "그러시다면...?" "만나서 얘기하지." 모모이는 짧게 잘랐다. 사메지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본청 수뇌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그 일> 이외는 짚이는 게 없었다. 사메지마의 동기생 캐리어 가운데 공안 내부 암투에 말려든 끝에 자살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유서를 사메지마가 보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유서가 공개된다면 현재 경찰청 상층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두 파벌의 추잡스러운 암투가 외부에 폭로되는 것은 물론, 그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시한폭탄과도 같은 그 유서를 사메지마는 어떤 은밀한 곳에 보관해 놓고 있었다. 그것을 내놓으라는 두 파벌의 줄기찬 공갈. 애원. 매수 제의를 거부하면서 지금까지 버텨왔던 것이다. 결과, 사메지마는 캐리어이면서도 일선 서 방범과로 밀려난 것이었다. 유서에 언급된 인물들은 지금도 경찰청 수뇌 고위 간부로 있으면서 톱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에겐 사메지마가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다, 사메지마는 일본 경찰조직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인물이었다. 사메지마가 신주쿠 서로 밀려온 지도 거의 5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음양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괴롭힘을 당했지만, 경찰을 그만두게 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수사 2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표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본칭 수사 2과는 주로 독직(瀆職). 선거법 위반. 경제사범을 담당하는 파트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분야도 맡고 있었다. 경찰관 범죄수사도 2과담당이었다. 수사 2과 과장은 캐리어 차지였다. 수사 2과장을 거친 캐리어가 인사 1과장을 맡게 되어 있었다. 인사 1과는 경감 이상의, 말하자며 경찰 장교급 인사를 담당하는 섹션이었다. 반면, 경위 이하는 인사 2과 담당이었다. 인사 1과장이 캐리어 차지인데 반해, 2과장엔 논캐리어가 취임하는 것이 관례였다. 인사 1과. 2과를 통할하는 경무부장은 당연히 캐리어가 차지했다. 조직 내의 이러한 캐리어 배치구조를 통해 겨우 5백 명 밖에 안 되는 캐리어들은 전국 20만 경찰관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확립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캐리어는 경찰관이면서도 사실은 경찰관이 아니었다. 캐리어에 대한 적절한 호칭은 따로 있다는 것이 사메지마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바로 내무관료였다. 그날 밤 10시가 지난 시각, 사메지마는 가와사키로 갔다. 모모이가 지정한 장소는 가와사키 역 근처의 조그마한 스탠드 바였다. 모모이가 왜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한발짝 들어서면서 사메지마는 금방 ㄲ달을 수 있었다. 뜨내기 손님은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을, 그런 술집이었다. 카운터 안쪽에는 쉰이 다 되어 보이는 사내가 혼자 무료하게 어정거리고 있었다. 카운터 가장자리엔 첫눈에 남창임을 알아 볼 수 있는 두 <여자>가 짙은 화장에 구슬을 박아 번쩍이는 드레스 차림으로 걸터앉아 있었다. 카운터엔 모모이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술집 분위기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시버스 리갈도 한병 보였다. 그러나 남창들은 모모이를 경원하고 있었던 듯 사메지마가 들어서자,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메지마를 알아본 모모이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5미터도 채 안 떨어진 고가철로 위를 전동차가 지나가면서 굉음과 지진을 일으켰다. 모모이는 카운터 사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알았습니다." 사내는 대답과 함께 닦고 있던 글라스를 내려놓고 남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고갯짓을 했다. 남창들은 스툴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섰다. 사내도 카운터에서 나왔다. "한 시간이면 되겠습니까?" 사메지마에겐 눈길 한 번 보내지 않고 사내는 속삭이듯이 모모이에게 물었다. "그래." 모모이는 재떨이에 내려놓았던 담배를 집어들면서 대답했다. "그럼......." 사내는 남창들을 데리고 도어 쪽으로 걸어갔다. 가게는 어두침침했다. 싸구려 합판 도어도, 카운터도 검정색이었따. "뭣하시면 도어를 잠그시죠. 바깥 간판 불도 끌 테니까." "미안하군." "별말씀을......." 사내는 여전히 사메지마를 무시했다. 세 사람이 나가자 모모이가 입을 열었다. "주인 충고를 듣기로 하지. 도어를 잠그는 게 좋겠어." 사메지마는 도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육중한 볼트식 자물쇠를 채웠다. 유선방송의 가요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집이로군요." "가나가와 현경 관할이긴 하지만, 녀석들도 눈을 감아 버린 곳이야." "왜요?" "마약단속반이 연락기지로 이용하고 있기 ㄸ문이야." 모모이가 말한 마약단속반은 경찰청 소관이 아니라 후생성 산하 기구였다. "그럼 아까 그 사내는......?" "단속반 정보원이야. 체포한 게 인연이 돼서 그쪽에 소개해줬지. 경찰에선 저녀석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나 말고는." "제가 두번ㅉ 사람이 되는군요." "음. 자네가 앞으로도 경찰에 남을 수 있다면 그렇게 되는 셈이지." 사메지마는 모모이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진짜야. 생각이 있으면 마셔." 모모이는 시버스 리갈 병을 사메지마 쪽으로 밀었다. 또 전동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술병이 쓰러질 듯 흔들렸다. "밀고가 들어온 모양이야." "바터였나요?" 바터란 봐달라는 조건으로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걸 뜻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닌가 봐. 신주쿠 서 간부 가운데 매수당한 사람이 있다는 게야. 매수한 쪽은 거물 장물아비이구......." 장물아비가 매수했다면 형사과나 방범과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바로 저라는 말입니까?" "계급은 경감이라는 게야. 형사과장, 나 그리고 자네 셋 뿐이야, 경감은." "그렇군요." "특명이 내렸어." "2과로 말입니까?" 모모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부 경찰관의 범죄는 인사과장이 경무부장에게 보고하면, 형사부장을 거쳐 수사 2과장에게 내사명령이 하달되는 것이었다. 내사명령이 내려질 때까지의 과정은 모두 캐리어 루트였다. 내사명령을 받은 수사 2과장은 자기 심복의 캐리어 경감을 책임자로 해서 그 밑에 2명 정도의 특명 형사를 배치했다. 특명형사는 수사 2과 서무나 선거 담당에서 선발했다. 이들은 주로 경장이나 경위급의 논캐리어였지만, 승진시험에 상위 합격한 우수한 경찰관들이었다. "자넨 캐리어야. 만약 자네한테 혐의가 있다면 최고기밀로 다룰 게야, 아마." 경찰청의 비밀보안 등급은 취급주의. 비밀. 1급 비밀. 극비. 최고기밀 등 다섯 단계로 분류되어 있었다. 최고기밀은 경우에 따라서는 수상에게도 보고 않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또 한가지 있어." 모모이는 사메지마를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내게 귀띔해 준 사람은 캐리어가 아니야." 사메지마는 긴장했다. 캐리어 경찰관의 범죄 혐의를 경찰청은 최고기밀로 취급할 만큼 중대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게 관례였다.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논캐리어 경찰관에겐 정보가 흘러가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한해서만은 본청 논캐리어에게까지 알려졌다면 사메지마나 모모이 귀에 들어가도록 일부러 누설시킨 게 틀림없었다. "함정이로군요." "물론. 허나 여기서 심각히 생각해야 할 것은 이 함정이 본청 혼자서 판 것인가, 아니면 외부의 누군가가 꾸민 일에 본청이 눈 딱 감고 협조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야." 사메지마는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본청 혼자 생각이라면 다른 방법을 택했으리라고 봅니다. 캐리어의 범죄라면 파급 영향이 너무 크질 않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다면 외부에서 꾸민 일이야. 누굴까?" "글쎄요." "이 함정은 경찰조직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 판 것 같아. 감찰이사관 (監察理事官) 앞으로 밀고가 들어왔다는 게야. 물론 내게 알려 준 건 다른 사람이지만......." 감찰이사관은 인사 1과장 밑에 있는 경사급의 논캐리어 베테랑이었다. 논캐리어로 경사까지 승진했다면 정년도 얼마 남지 않은 연배였다.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감찰이사관이라는 악역을 맡기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감찰업무는 각 지역 본부장 밑에 있는 감찰 담당이 산하 일선 서의 불시감사. 정례감사. 소행문제 등을 주로 다루는 것이지만, 사메지마 케이스는 물론 일반 감찰업무와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복장이 단정치 못하다거나, 경찰관끼리의 불륜문제 따위와는 성질이 전혀 달랐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모모이를 응시했다. "혹시 그 건 아닐까? 미쓰즈카에 대해 내게 물어봤었지?" "하지만 우연하게 눈에 띈 사람에 지나지 않아요, 미쓰즈카는. 하마쿠라 죽음과 연관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연관된 건 어떤 사람들이야?" "나카노구에 있는 <가마이시 클리닉> 이라는 산부인과 병원입니다." "그곳과 미쓰즈카는 관계가 없나?" "아직 거기까진......." 모모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서두는 게 좋겠어. 내사 상황에 따라서는 인사과장이 서장을 찾아올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털어도 내겐 먼지 한 톨 나올 게 없습니다." "수뇌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면 일이 간단치가 않아!" 사메지마는 심호흡을 했다. 증거를 날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 모모이 말에 담겨 있었다. "내 뒷조사를 할 것 같습니까?" "웃사람 마음에 달렸겠지.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할는지는. 다만......." "다만?" "본청이 외부와 협조를 한다 하더라도 파놓은 함정이 너무 지독하다면 발을 빼 버릴지도 몰라. 뒷일은 함정에 맡겨 버리고 말야." "어쨌든 흐지부지 끝나지는 않을 것이란 뜻입니까?" "자네를 어떤 사건 수사에서 손떼게 할 생각이라면 밀고한 것만으로는 큰 효과가 없어. 견제구에 지나지 않아. 누군지 모르지만 상대는 확실하게 자네를 아웃시키려는 게 틀림없는 것 같아." 그렇다면 또 다른 카드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게 도대체 어떤 카드일까. "조심하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이 없어. 허나......." 사메지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웃사람들이 사메지마를 일개 형사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얌전히 엎드려 조심함으로써 덫을 피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메지마의 제거를 바라고 있는 상황에서 얌전히 숨을 죽이고 있는 건 오히려 웃사람들에게 잡아잡수, 하고 목을 늘어뜨리는 게 될지도 몰랐다. 사메지마가 부정을 저질렀건 말았건, 그들로서는 면직시킬 명분만 잡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었다. 얌전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 그게 바로 혐의를 인정한 증거가 아니냐고 우기고 나올 게 틀림없었다. "밀고자가 따로 있고, 그걸 기회 삼아 지난날 원한으로 자넬 노린다면 일이 꽤 어려워질 거야."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메지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전과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조작해 낼 만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조직폭력배들의 짓은 아니야." 모모이는 단정하듯 말했다. 사메지마는 자기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 생각이 났다. 오늘 아침 야부와 만났을 때였다. "과장님, 시마오카 후미에라는 간호사를 한번 훑어봐 주시겠습니까?" "시마오카 후미에?" "<가마이시 클리닉>의 간호사로 병원의 오너 회사 사장을 겸하고 있습니다.' "묘한 얘기로군." "아마 이름만 빌려 줬겠죠. 그 회사 돈줄은 따로 있습니다." "<가마이시 클리닉>을 덮쳐 보는 건 어떨까? 적당히 다른 명목을 붙여서 말야." 사메지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립니다. 영장을 청구할 만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어요." "혐의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살인. 하마쿠라와 미카요 내연의 남편인 쿠보 히로키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뭣 때문에 살인까지?" "그걸 알 수가 없어요. 그 병원에 뭔가 있기는 분명히 있는데......." 모모이는 새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생각에 잠겨들었다. 눈앞의 술병에는, 사메지마가 들어온 이후 손도 대지 않았다. "웃사람들과 흥정을 해 보는건 어떨까? 자네한테 히든 카드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들, 내가 그러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게 그걸 맡긴 사람의 유지(遺志)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사메지마는 단호하게 잘랐다. "그 카드를 사용 않으면 경찰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도?" "경찰관이란 어떤 일이든 두려워함이 없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수직구조 안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만 해서는 절대로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비록 제가 경찰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경찰관들의 자각심을 일깨우는 결정적인 순간의 히든 카드로서만 그것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모모이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어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네와 같은 캐리어가 조직 상층부에 자리잡았다면 일본 경찰도 엄청나게 달라졌을 텐데, 안됐군." 그럴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사메지마였기 때문에 조직 상층부가 아니라 이처럼 일선 서에서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또 일선 서의 한 병졸로서의 싸움을 사메지마는 즐기고 있었다. 총경. 경무관으로 출세하는 것보다 <신주쿠 상어>로 불리는 지금의 자신이 훨씬 더 자랑스러웠다. < 12 > 아야카는 오늘도 야마나시 병원을 찾았다. 잠들어 있는 아카네 머리맡에 덴드로비움을 꽂은 꽃병을 갖다놓는 참이었다. 외날개를 편 괴물처럼, 꽃잎이 힘겹게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오늘 아야카는 순백 수트 차림이었다. 스커트 길이는 지나치게 대담하달 만큼 짧았다. 그러나 쭉 뻗은 각선미엔 자신이 있었다. 중앙고속도로를 달려오면서 미쓰즈카가 쉴새없이 룸미러를 통해 쭉 뻗은 다리와 허벅지 속을 흘끔거리던 걸 아야카는 모른 체해 주었다. 지난번 왔을 때, 아카네에 비하면 아주머니처럼 보였기 때문에 오늘은 대담하게 차려입은 것이었다. 아야카는 아카네 옆에 무릎을 모아 앉았다. 허벅지가 절반 이상이나 허옇게 드러났다. "아카네짱, 이 꽃 예쁘지? 덴드로비움이라고, 물론 난이야. 아야카는 너한테 언제나 난만 가지고 오기로 마음을 정했거든." 아야카는 쉴새없이 얘기를 이어갔다. 아카네는 지난번 왔을 때만큼 부기가 심하지 않았다. 아야카는 손을 뻗쳐, 일주일에 두 번 간호사가 빗겨 주는 아카네 머리를 잡았다. 선명한 오렌지색 매니큐어를 한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둘둘 말았다. "요즘 아야카는 여러 가지로 어려워. 아야카를 괴롭히려는 패거리 때문이야. 하지만 아야카, 지지 않을 거야. 아카네도 옛날에 아야카를 마음껏 괴롭혔지만 아야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잖아?" 그것이 언제쯤이었을까. 아야카가 아카네 집으로 옮겨오고 난 석 달 뒤의 일이었다. 이층 베란다 난간에 올려놓은 화분 5개를 아카네가 모조리 떨어뜨려 깨어 버린 것이었다. 그래, 그날 집에는 아야카와 아카네 둘밖에 없었다. 5월 하순, 구름 한점 없는 상쾌한 날이었다. 아야카는 열어젖힌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하얀 레이스 커튼이 출렁이는 것을 일층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엔 풀냄새가 스며 있었다. 그때까지 아야카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선 창을 열면 건너편 도금(鍍金) 공장의 이상한 냄새가 몰아닥쳤다. 복도에는 언제나 쓰레기 썩는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달에 한번씩 민생(民生) 위원회 아줌마가 찾아왔었다. 화분이 뒷마당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아야카는 듣지 못했다. 어째서 못 들은 것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화분이 5개씩이나 박살이 났었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낯선 집으로 옮겨와, 그때까지 별로 만난 적도 없는 친척과 함께 살게 된 탓에 아야카는 무척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졸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뜬 것은 언제 내려왔는지 아카네가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듣고서였다. -- 피아노, 나도 가르쳐 줘. 처음 아카네가 피아노 치는 것을 봤을 때 아야카는 부러움을 이기지 못해 그렇게 부탁했다. 아카네는 치던 피아노에서 발딱 일어서서 아야카를 노려보았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에 서린 악의를 아야카는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아카네는 묘한 웃음을 흘리면서 붉은 커버를 들어올려 일부러 천천히 건반을 덮었다. -- 가르쳐 줘. 아야카는 그래도 매달리듯 말했다. 아카네는 대답도 않고 붉은 커버의 주름을 매만져 폈다. 그리고는 피아노 뚜껑을 쾅 닫아 버렸다. 기가 막혀 있는 아야카에게 아카네는 기분 좋게 웃어 보이면서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날 이후, 아야카는 두번 다시 피아노를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 가르쳐 주지 그러냐, 아카네짱. 그런 일이 있은 줄을 모르는 아카네 어머니 -- 아야카 이모는 그렇게 말했다. -- 아야카짱도 피아노가 치고 싶지? 그러나 아야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아카네를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아카네도 묘하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주 쏘아보았었다. 두 사람만 있을 때, 아카네는 결코 아야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투명인간을 보는 것처럼 아야카를 무시했다. 아카네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화분을 떨어뜨려 깨어 버린 날, 아야카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아카네짱, 내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어. 누구도 무슨 말을 하지 않았어." 아야카는 손가락으로 아카네 머리를 빗겨 주면서 말했다. 아카네 어머니의 비명이 들려왔다. -- 아카네! 아카네! 부르짖는 소리에 아카네는 아야카를 흘낏거리며 대답했다. -- 네에. 아카네가 거실에서 나갔다. 그때까지 아야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이게 뭐야? 누구 짓이야? 엄마가 그렇게 아끼던 걸! -- 아카넨 몰라요. 피아노만 치고 있었는걸. -- 그럼....... 아카네 어머니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것 뿐, 두 사람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카네가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 아야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카네는 아야카가 싫었던 것이었다. 화분이 깨어진 데 대해 어느 누구도 아야카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만약 꾸중이라도 했다면 해명할 기회가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 네가 그랬지? 왜 그런 짓을? 아카네 어머니는 끝내 물어보지 않았다. 그날 저녁식사 때도 어느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카네 어머니는 화분을 깨뜨린 건 아야카가 분명하다고 믿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야카는 견디지 못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식탁에서 일어섰다. 더 먹으라고 권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카네 부모는 아야카가 죄의식 때문에 그러는 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초 화분, 예쁜 카트레아였지." 그리고 이튿날 아카네가 쓰러졌다. 아카네가 입원하자 아야카는 외토리가 되었다. 아카네는 인공투석(人工透析)을 받아야 했다. 어머니가 병실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원한 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드물게도 아카네 어머니는 학교서 돌아오는 아야카를 기다리느라고 집에 와 있었다. -- 아야카짱, 네게 간절한 부탁이 있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모가 서먹서먹해 하면서 말했다. -- 뭔데? -- 아카네가 지금 입원해 있는 건, 너도 알지? 아카네는 태어날 때부터 신장이 몹시 약했어. -- 응. -- 의사 선생님 말로는 지금 상태로는 아카네가 어른이 될 수 없대지 뭐야. -- 하지만 치료하고 있잖아? 인공투석....... -- 그래.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야. 인공투석으로는 학교에도 갈 수 없구. 그때까지만 해도 이모의 부탁이 무엇인지 아야카는 몰랐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아카네 어머니가 마침내 결심을 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 아야카짱. 아야카짱 신장 한쪽을 아카네에게 줄 수 없을까? 아야카는 이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 신장은 말야, 사람 몸에 2개가 있어. 때문에 하나를 떼내더라도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어. 사실은 이모부나 이모 신장을 아카네에게 주고 싶었지만, 의사가 안된다는 거야. 맞지 않나 봐. 하지만 아야카짱이라면 어쩌면 맞을지도 몰라. 그제서야 아야카는 모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자기가 이런 부잣집 양녀가 되었는지를. 화분 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이모나 이모부가 진짜 부모 못지 않게 자상했던 이유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째서 아카네가 자기를 미워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기 신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도 어린 생각인지도 몰랐다. 아야카 어머니는 방탕한 여자였다. 남편에게 버림받게 되자 자기 만족을 위해 아야카를 데리고 살았다. 술만 마시면 아야카를 못살게 굴었다. 아야카에게 뭔가 귀중한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말대답은 어림도 없었다. 어쩌다 한마디 하기만 하면 끔찍한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남편을 저주하고 아야카를 저주했다. 부잣집으로 시집간 언니까지도 저주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언니한테서 돈을 뜯어냈다. 뜯어낸 돈은 모두 술값으로 날아갔다. 아야카는 언제나 빵부스러기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이모는 그런 아야카를 가엾게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자기 딸과 비슷한 또래의 이질녀가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주정꾼 어머니가 무서워 단칸방 벽장에서 새우잠을 자는 걸 불쌍하게 여긴지도 몰랐다. 그러나 도너가 되어달라는 이모 부탁을 들은 순간, 그런 것은 하나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모든 친절이 신장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예쁜 옷도, 맛있는 음식도, 처음으로 가지게 된 자기 방도 모두가 자기 뱃속에 있는, 자신도 아직 본 적이 없는 신장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밉살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기는 그런 사람이라고 아야카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위해 태어나서 누군가를 위해 자기는 배가 찢겨 죽어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상할 정도로 절망적인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었다. 신장을 한쪽 제공했다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야카는 절망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화분 사건의 경위 설명은 커녕 한마디 변명조차 못했던 아야카가 이번에야말로 이모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었다. 화분 사건 이후 비록 서먹서먹해지긴 했어도 아야카는 이모가 좋았다. 그런 이모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좋아요, 이모. 아야카는 머리를 치켜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아야카짱. 이모는 아야카 두 뺨을 싸안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틀 뒤 아야카는 도너로서의 적성검사를 받으러 아카네가 들어 있는 병원에 입원했다. 거기서 후미에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틀이 지났다. 표면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내사가 시작되었다지만 아직은 사메지마에게 미행이 붙은 것 같지 않았고, 비공식적인 소환이나 조사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비공식적으로나마 소환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꼼짝할 수 없는 증거를 수뇌부가 입수했음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추락한 우상> 이라고는 하지만, 캐리어 경찰관의 그러한 불상사를 본청은 은밀하게 처리하려고 할 게 틀림없었다. 누가 그런 함정을 팠는지, 그것이 특정인물인지 아니면 조직인지조차 사메지마는 알지 못했다. 자기 손에 걸려들어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줄잡아 수십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처럼 음흉스럽고 지능적인 방법으로 도전해 올 만한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사메지마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가마이시 클리닉>과 관련된 누군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지금 현재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 범죄행위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호리 미카요의 중절수술을 살인으로 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의료 미스>로 고소할 수는 있어도 살인 혐의로 입건하기는 어려웠다. 동기를 비롯해서 살인을 입증할만한 정보가 너무도 부족했다. <가마이시 클리닉>과 관련된 누군가가 사메지마를 제거하려고 한다면, 배후에는 엄청난 범죄행위가 숨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했다. 그것이 도대체 어떤 범죄인지 사메지마로서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시마오카 기획을 훑고 있는 타키자와 한테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시마오카 후미에에 대해서는 모모이가 조사해 주기로 약속했었다. 사메지마는 이 이틀 동안 줄곧 시마오카 후미에만 생각하고 있었다. 베테랑 간호사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자기 직업과 경력에 자신을 가진 나머지, 후미에는 어떤 위엄마저 풍겼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사메지마는 딱 부러지게 표현할 수 없었다. 위엄 이상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 -- 다시 말하면 안도감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신의 보증을 받았다고나 할가,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안정감 같이도 보였다. 그러나 그 안정감은 어딘가 비뚤어져 있었다. 본인으로서는 확고한 자신감이겠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가는 실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것처럼 몹시 위험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실이 끊어지면 시마오카 후미에의 본색도 탄로나게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실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연결되어 잇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것을 해명하는 길은 시마오카 기획을 조사하는 것 뿐이었다. 쇼는 연주 투어중이었다. 때문에 사메지마가 쓸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되든 간에, 쇼가 말려들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본청의 내사는 사메지마가 신주쿠 서로 옮겨온 이후의 모든 활동을 대상으로 할 것이 분명했다. 시간도 엄청나게 걸릴 것이었다. 모모이에겐 아직 아무런 통고가 없었지만 신주쿠 서 서장까지 말려들 가능성도 있었다. 이 이틀 동안 사메지마는 은밀하게 미모리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거물 장물아비와 사메지마가 뒷거래를 했다고 한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미모리 밖에 찍힐 사람이 없었다. 사메지마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뇌물 제공자로서 미모리 이름도 거론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일을 꾸민 쪽은 사메지마를 잡기 위해 미모리까지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모리가 그런 희생을 감수하리라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만약 미모리가 자기 앞에 놓인 함정을 눈치 챈다면 거기서 빠져 나가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리칠 것은 물론, 함정을 판 인물이 누군지 짐작 가는 데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위험한 방법이기는 했으나 사메지마는 미모리와 손을 잡고 이 함정을 벗어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었다. 미모리를 이쪽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함정을 무너뜨리는 것쯤 식은죽 먹기보다 쉬울지 몰랐다. 물론, 미모리와 접촉한 사실이 내사과정에서 밝혀지면 사메지마는 더욱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미모리와의 접촉을 다른 사람 -- 예를 들어, 모모이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을 경우, 모모이까지 독직 경찰관이 되고 말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덫을 놓은 사람이 밀고 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건 뻔했다. 2단계 공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것이 사메지마 예금통장 위조가 될는지, 향응을 베출었다는 허위 증언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독직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미모리가 사메지마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 지난 이틀 동안 사메지마 레이다엔 미모리가 잡히지 않았다. 원래부터 은밀히 움직이는 미모리가 요 며칠 동안은 아예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미모리가 어디든 나타나기만 하면 그 즉시로 사메지마에게 정보가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메지마가 손을 써둔 호텔 종업원. 술집 관계자들로부터는 아직 전화 한통 없었다. 전화 벨이 울린 것은 새벽 2시 38분이었다. 오랜 습관에 따라 벨 소리가 나자마자 사메지마는 시계부터 본 것이었다. 물론 자고 있었다. 머리맡 디지탈 사발시계가 세 자리 숫자를 파랗게 비쳐 내고 있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잡아당겼다.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받았다. "사메지마씨?" 잡음이 심했다. 카폰 아니면 휴대폰인 것 같았다. "그래. 당신은?" "미모리야. 날 찾고 있다면서?" 사메지마는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스탠드 불을 켰다. "지금 어디 있어?" "왜 찾는 거야? 잡아넣으려구?" "난 아니야, 잡아넣겠다는 사람은." "그럼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미모리 말투는 어리둥절한 것 같기도 했고,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만나서 얘길 하지. 당신과 내가 함께 덫에 걸렸는지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만나는 게 오히려 안 좋을 텐데." "옳은 말이야. 허나 난 덫을 놓은 녀석이 누군지 알아봐야겠어." "그게 누군지는 나도 몰라. 짐작도 안 가." "이대로 두 손 놓고 있다가는 두 사람 모두 교도소행이야. 더군다나 당신은 전과까지 있으니까 쉽지가 않아!" "웃기는 소리 그만해!" 심한 잡음에 지지 않으려는 듯 미모리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농담이 아냐. 말해 봐,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기다려 줘. 지금 자동차 안이야." "혼잔가?" "아니. 금방 내려 줄 사람과 함께." "어디야, 거기가?" "잠깐, 터널이야. 다시 걸지." 전화가 끊겼다.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내리면서 스탠드 불을 켤 때 눌러놓았던 전화 녹음 스위치를 껐다. 자동응답기 녹음장치로 통화 내용을 모두 녹음한 것이었다. 다시 벨이 울렸다. 사메지마는 녹음 스위치를 누른 다음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이번엔 잡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했다. "날 협박할 생각은 아니겠지?" 미모리가 불쑥 내뱉듯이 말했다. "만나면 알 게 돼. 적어도 난 당신을 옭아맬 생각이 없어." "그쪽은 혼자 나올 생각?" "그래. 나 혼자야." "알았어. 이렇게 하지 오다키바시 네거리 알고 있어?" "알아." "타카다노바바를 향한 왼쪽에 공사중인 빌딩이 있어. 기초 공사가 끝나 뒤쪽으로는 주차도 할 수 있어. 거기서 기다리지.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곳이야." 건설 현장 -- 썩 내키는 장소가 아니었다. "아는 사람 빌딩인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어." "좋아. 지금 곧 출발하겠어. 15분이나 20분이면 도착할 거야. 그쪽은 혼잔가?" "중간에 내려줄 사람이 있지만, 거기엔 혼자야." "그럼......." 사메지마는 전화를 끊었다. 파자마를 벗고 셔츠와 진바지로 갈아입었다. 특수 경찰봉과 수갑은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미모리가 전화를 걸어온 걸 보면, 겉으로는 시침을 떼고 있지만 뭔가 위험을 감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준비를 끝낸 뒤 전화기로 팔을 뻗치던 사메지마는 주춤했다. 안전을 생각하면 미모리를 만나러 가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려 놓는 것이 좋았다. 만약 내사를 맡은 특명형사에게 미행을 당했을 경우, 두 사람의 만남이 증거 인멸을 위한 것이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믿을만한 경찰관은 모모이 뿐이었다. 하지만 내사가 시작되었다는 걸 알려 준 사람은 바로 모모이었다. 또 모모이는 본청의 친구한테서 들었다고 했다. 모모이나 본청 친구는 엄격히 말해서 복무규정을 위반한 것이었다. 미모리와 만나는 것이 새로운 트러블로 확대되었을 경우, 모모이가 두 사람의 만남이 합법적이었다고 증언해 준다면 사메지마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모이와 본청 사람은 복무규정 위반으로 고발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미모리가 덫을 놓은 사람과 손을 잡고 있을 가능성도 현재로서는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사메지마에겐 혼자 맞부닥쳐 보는 것 이외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미모리가 지정한 건설 현장까지는 18분이 걸렸다. 그 시간, 도심 쪽으로 달리는 자동차는 빈 택시 뿐이었다. 건설 현장 주변에는 안전막이 커튼처럼 쳐져 있었다. 사메지마는 현장 앞 일방통행로에서 좌회전했다. 현장에 둘러 쳐져 있는 판자가 두어 장쯤 뜯겨나간 부분이 보였다. 판자 한 장의 높이는 4미터, 폭은 2미터쯤이었다. 입구 쪽에서 본 공사중인 빌딩은 C자 모양이었다. 미모리가 말한대로 7층 빌딩 골조공사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눈금이 잔잔한 초록색 네트가 쳐져 있었다. 입구 한쪽에 작은 가건물이 보였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사메지마는 BMW를 판자 담장에 바싹 붙여 들어갔다. 짙은 감색 메르세데스 벤츠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반사했다. 엔진도 라이트도 꺼져 있었다. 메르세데스 옆에 바싹 붙여 BMW를 세운 사메지마는 차에서 내렸다. 메르세데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사 현장엔 조명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나 주변 빌딩 간판과 네온 빛이 비쳐든 탓에 발 밑을 더듬기에는 불편이 없었다. 그래도 사메지마는 BMW 대시보드에서 손전등을 꺼냈다. 엔진과 함께 라이트도 껐다. "미모리!" 사메지마는 소리쳐 불렀다. 자동차 엔진과 라이트를 꺼 버리자 초록색 네트를 뒤집어쓴 빌딩 골조가 마치 해골처럼 보였다. 말할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해 왔다. "미모리!" 대답이 없었다. 메르세데스로 다가가서 보네트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따뜻했다. 위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사메지마는 홱 돌아서면서 손전등을 비췄다. 바람에 네트가 흔들리면서 어딘가에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사메지마는 네트 이음새를 찾았다. 미모리가 빌딩 골조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조 공사가 끝난 빌딩은 창문과 도어만 안 달렸을 뿐이지 층마다 내부 구획까지 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결코 현명한 짓이 아님을 사메지마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르세데스가 여기 주차해 있는 이상, 누군가가 현장에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네트 이음새를 찾아낸 사메지마는 그 사이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과 벽 곳곳에는 철근이 삐죽삐죽 비어져 있었다. 못이 박힌 나무 토막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아직 습기가 남아 있는 콘크리트 바닥을 조심조심 걸으면서 점퍼 속 주머니에서 특수 경찰봉을 꺼내들었다. 사메지마를 기습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몸을 숨기고 기다리기에는 절호의 장소였다. "미모리, 대답해!" 사메지마 목소리가 천장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층 중앙 부분에 계단이 보였다. 사메지마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무 토막의 못을 밟지 않게 조심조심 계단으로 걸어갔다. 발 밑과 위쪽을 번갈아 비춰가면서 올라갔다. 이층으로 올라갔다.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사메지마는 더욱 신중한 자세로 3층, 4층으로 올라갔다. 최상층인 7층까지 올랐다. 거기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이제 남은 곳은 옥상뿐이었다. 사메지마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7층까지는 바깥 둘레에 네트가 쳐져 있었으나 옥상엔 보이지 않았다. 지상에 있을 땐 별로 느끼지 못했던 찬바람이 얼굴과 목줄기를 에이듯이 휘감았다. 옥상에도 인기척 하나 없었다. 사메지마는 손전등을 껐다. 주위 빌딩의 간판 불빛이 훤하게 비쳐들어, 손전등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계단 난간에 멈추어 서서 눈으로 한바퀴 휘둘러 보다가, 가장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건설 현장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옥상 가장자리엔 아직 난간도 손잡이도 없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약간 턱지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다. 발을 헛딛지 않게 조심하면서 사메지마는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메르세데스와 BMW 보네트가 보였다. 발 밑에서는 네트가 바람에 휘청거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사메지마는 깜짝 놀라면서 시선을 집중시켰다. 메르세데스 옆, BMW 반대편 바닥에 검정 물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감색 자체가 주변 네온 불빛을 반사할 적마다 검정 물체의 형상이 뚜렷하게 사메지마 망막으로 들어왔다. 자세히 살피자, 검정 물체에는 하얀 손과 얼굴이 달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메지마는 목을 움츠리며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오쿠보 역 방향엔 은하수처럼 불빛이 물들어 있었다. 그 건너편으로 밤하늘이 창백하게 걸려 있었다. 신주쿠였다. 옥상 구석구석을 손전등으로 비춰 보았다. 공사 쓰레기로 보이는 나무 조각 이외에는 담배 꽁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사메지마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왔다. 메르세데스 옆에 다가섰을 무렵 경광등을 번쩍이면서 패트롤카가 덮치듯이 입구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다. 패트롤카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옆으로 쓰러진 사내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모리였다. 패트롤카의 순경이 달려오기에 앞서 사메지마는 목동맥을 짚어보았다. 아직 따뜻했지만 맥은 멈춰 있었다. 죽은 것이었다. < 13 > 사메지마는 경찰청 청사 안, 창도 없는 작은 회의실로 연행되었다. 바깥은 이미 훤하게 밝았겠지만, 이 방에서는 확인해 볼 방법이 없었다. 방안에는 사메지마 이외에도 세 사람이 더 있었다. 나이가 제일 젊은 이구치라는 20대 경감이 나머지 두 사람을 지휘했다. 기록을 맡은 경사 옆에 앉은 이구치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든 얘기는 시라사카라는 경위가 맡아했다. 이구치보다 몇 살 손위,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오다키바시 건설 현장으로 달려온 것은 토쓰카 경찰서 패트롤카였다. 오다키바시는 구 경계지역이기 때문에 도로 하나를 가운데 놓고 신주쿠. 나카노. 토쓰카 등 세 경찰서 관할로 나누어져 있었다. 패트롤카는 112 신고를 받고 충돌한 것이라고 했다. 공중전화로 문제의 건설 현장에서 <싸우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는 것이었다. 신고자는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임의동행> 형식으로 <자술>을 한 것이었다. 경위 설명이 끝나자, 이구치가 부하 2명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구치 옆에는 토쓰카 서장이 서 있었다. 꼭두새벽에 급히 불려나온 서장은 영문도 모른 채 사메지마 신병을 본청 2과로 인계할 수밖에 없었다. 사메지마는 이구치 일행이 타고 온 위장 패트롤카에 올랐다. 패트롤카가 토쓰카서를 벗어나오자, 그제서야 비로서 이구치가 자기 소개를 했다. "이구치 요시키 경감입니다. 본청 2과 소속입니다." 나이로 보아 캐리어임에 틀림없었다. "이쪽은 시라사카 경위와 야시로 경삽니다." "수고 많군요." 사메지마는 어중간하게 인사를 했다. 패트롤카 운전을 맡은 쪽이 야시로 경사였다. 그뿐, 본청에 도착할 때까지 네 사람은 입을 다문 채로였다. 이구치는 수사 2과장 직속의 특명 형사 리더임이 분명했다. 실제 수사는 시라사카와 야시로가 맡고, 두 사람의 보고를 이구치가 수사 2과장에게 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사메지마에 대한 조사 내용을 수사 2과장은 형사부장. 부청감. 총감 등 세 사람에게만 보고할 뿐이었다. 미모리의 죽음이 살인으로 결론나더라도 수사 1과가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1과는 과장을 비롯한 전원이 논캐리어였다. 공식적으로 통고한 것은 아니겠지만 캐리어인 사메지마 피의자에겐 논캐리어는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었다. 시라사카와 야시로 두 사람은 논캐리어이지만 진급시험을 톱으로 돌파한 엘리트였다. 그렇지 않다면 2과에서 받아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엄격한 수비(守秘) 의무를 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구치를 비롯한 이 세 사람은 사메지마 내사를 담당하고 있는 특명형사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처럼 민첩하게 사메지마 신병을 인수할 이유가 없었다. 이구치는 사메지마를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온 다음, 이것이 공식심문인지 아닌지조차 밝히지 않았다. 기록을 남길지 말 것인지는 조사 결과에 달려 있었을 뿐, 이구치 개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또 그렇게 할 권한도 없었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형사부장. 부총감. 총감 셋 뿐이었다. 따라서 이 회의실 안에서는 변호사와 상담할 권리는 물론, 피의자 취급을 받으면서도 통상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피의자로서의 최소한의 인권조차 무시되었다. "미모리 오사무와는 면식이 있습니까?" "그래." "뭣하는 사람인지도 알고 있었나요?" "알고 있었어." "체포한 적은?" "없어." "체포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검토해 봤느냐는 뜻이라면 그런 적이 있었어. 언젠가는 두들겨 잡을 생각으로 있었어." "그렇다면 어떻게 서로 알고 지냈나요?" "내 관할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야. 얼굴을 맞댈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미모리는 사메지마씨가 신주쿠 서 방범과 경감임을 알고 있었나요?" "알고 있었어." "두 사람만 만난 적은?" "없었어." "오늘밤이 처음이었나요?" "오늘밤도 만나지 못했어." "그러나 만날 예정이었죠?" "그래. 만나 얘길 해 볼 생각이었어." "무슨?" "누군가가 나와 미모리를 덫에 걸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어. 그것 때문에......." "덫에 걸려고 한다니...... 무슨 뜻입니까?" "나를 독직(瀆職) 경찰관으로 고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십시오." 시라사카는 어디까지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말투만은 정중하게 물었다. "신주쿠 서 경감이 장물아비에게 매수당했다는 밀고가 있었던 모양이야." "경감이 한분 만은 아닐 텐데요." "장물아비 담당이라면 세 사람밖에 없어. 형사과장. 방범과장. 그리고 나." "매수당한 경감이 자기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교묘한 신문이었다. 특명이 나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걸 누구한테서 들었는지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모리를 한번 조사해 볼 생각이었어." "무슨 혐의로?" 사메지마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모모이와 타키자와를 저울에 달아본다면 타키자와 쪽이 가벼울 게 틀림없었다. "내 친구인 국세청 사찰관이 탈세 혐의로 미모리를 쫓고 있었어."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사메지마는 얘기해 주었다." 미모리의 얼굴조차 모르는 타키자와의 부탁으로 함께 호텔 로비에서 숨어 기다리다가 가르쳐 주었던 경위를 털어놓았다. "그때 미모리와 얘기도 나누었었나요?" "아니, 눈치 채면 곤란할 것 같아 말을 걸지 않았어." "이례적이로군요." "이례적?" "국세청 사찰부는 경찰을 신용 않을 텐데요." "타키자와도 그랬어. 허나 내용을 말해 주지 않는다면 협력 못하겠다고 버텼더니 털어놓더군." "타키자와씨 소속을 말씀해 주십시오." "도쿄 국세청 사찰부 사찰 제5." "그 일로 미모리와 흥정해 볼 생각은 없었나요?" "뭣 때문에?" "국세청 정보를 흘려 주면, 미모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게 되질 않습니까?" "타키자와가 노린 것은 미모리가 아니었어. 아키하바라 컴퓨터 도매상이었어. 또 난 장물아비에게 은혜를 베푸는 따위 짓은 하지 않아!" "그럼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도. 내 관할 구역 어느 누구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빚을 진 적이 없어. 단 한번도." "미모리로부터 뭘 받은 적도 없나요?" "없어!" "미모리에 대한 구체적인 수사계획은 있었나요?" "했어. 그게 타키자와가 속셈을 털어놓는 조건이었어." 사라자카는 갑자기 질문 방향을 바꾸었다. "신주쿠 서 경감이 매수되었다는 정보는 어디서 들었나요?" "본청." "본청 누굽니까?" "말할 수 없어." "왜요?"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될 테니까." "평소부터 내사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온 탓이 아닙니까? 실제로는 아무런 정보를 들은 게 없는데도......," "아니, 그런 정보를 듣기 전까지는 내사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듣고 나서는 가능성을 생각해 봤나요?" "물론. 지금 자네가 이렇게 따져묻고 있잖아?" "저희가 내사를 하고 있다구요?" "그렇잖으면 어째서 그처럼 재빨리 토쓰카 서로 몰려왔나? 토쓰카 서에선 날 피의자 취급은 안했어." "무슨 사건에 대한 피의잡니까?" "살인. 미모리 오사무에 대한......." 이구치와 시라사카가 회의실에서 나가 버려 야시로와 둘만 남았다. 사메지마나 야시로나 서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이윽고 시라사카 혼자 돌아왔다. 회의실로 들어서면서 야시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번엔 야시로가 밖으로 나갔다. "담배, 피우시겠습니까?" 시라사카는 회색 상의 주머니에서 마일드 세븐 세 갑을 꺼내면서 말을 이었다. "피우십시오. 방금 매점서 산 겁니다." 사메지마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받았다. 자기 담배는 BMW에 두고 내렸었다. 시라사카는 키도 크고 어ㄲ도 떡 벌어진 게 체격이 좋았다. 네모진 얼굴에 메탈 프레임 안경이 잘 어울렸다. 시라사카는 건너편 테이블에 걸터앉으면서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자넨 안 피우나?" 담뱃갑을 뜯으면서 사메지마가 물었다. 시라사카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끊었습니다. 본청선 지금 금연운동이 한참입니다." 그리고는 입을 다문 채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메지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위에선 무척 난감해 하고 있습니다." 시라사카가 불쑥 한마디 했다. 사메지마는 시라사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경감님이 정말 그랬는지 어떤지 결론을 못 내려서......." "미모리 말인가?" "네." "자넨 어떻게 생각해?" "경찰이란 제 직업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은 것 아닙니까? 제 말 틀렸습니까?" "맞았어." "좋아한다는 것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 때문에 매수당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살인은?" "미모리가 만약 사메지마씨를 독직 경찰관이라고 밀고한 장본인이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울컥 화가 치민 김에 죽여 버렸다?" "네." "흠!" "물론 최악의 케이스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매수당한 사메지마씨는 내사가 시작되었다는 정보를 듣자 미모리의 입을 막으려고......." "위에선 어느 쪽을 택할 것 같은가?" "저로선 알 수 없습니다." "자기들 편리한 쪽으로 몰고 가겠지." 시라사카는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시라사카였다. "경솔하셨어요." 시라사카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모리를 만나러 갔던 것? 아니면 죽인 것?" "둘 중의 한쪽이겠죠." 시라사카는 사메지마에 대해 악의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호의를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시라사카에게는 대세에 영향을 미칠 만한 힘이 없었다. 그것은 이구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메지마가 옆얼굴을 응시하고 있자 시라사카도 시선을 돌려 마주 바라보았다. "난 결백해!" 조용히 말했다. 시라사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되물었다. "함정입니까?" "그래." "누굽니까, 덫을 놓은 사람은?" "모르겠어." 시라사카는 시선을 돌렸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사메지마에겐 찬스가 없다는 뜻이 그의 눈길에 담겨 있었다. "미모리 사인은?" "일단 추락사로 보고 있어요. 사법해부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만." 노크 소리와 함께 이구치가 얼굴을 들이밀어 시라사카의 눈짓을 했다. 시라사카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엇갈리듯이 이구치가 들어와 사메지마 건너편에 앉았다. 그믐밤에 만져보기만 해도 캐리어라고, 이구치 얼굴을 바라보면서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흰 살결, 곱상한 얼굴, 경찰관 다운 데는 하나도 없었다. 수트가 아직 몸에 익지 않아 오히려 대학생이라는 게 어울릴 정도였다. 나이는 스물예닐곱 쯤일까. 사메지마가 신주쿠 서로 밀려난 배경을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구치는 몇 번 잔기침을 앴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존경받으면서 거드름 피우는 데 익숙해진 캐리어 경찰관이라면, 경찰조직 안에서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논캐리어였다. "퇴직을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이구치가 물었다. "무슨 이유로?" "어떤 이유든 상관없습니다. 일신상의 사정이라도." "없어!" 사메지마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자택을 조사해 봐도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그럼 열쇠를 주시지요." 사메지마는 키홀더를 내밀었다. "난 어떻게 되는가?" "한동안 청사에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가능하면 이 회의실에서." "눈 좀 붙일 수 있을까?" "여기라도 무방하다면." "청사 안에서 왔다갔다 하는 건?" "야시로 경사가 모시고 다닐 겁니다." 한낮이 지났다. 화장실을 몇 번 다녀왔을 뿐, 사메지마는 회의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야시로가 줄곧 붙어 있었다. 야시로는 머리를 짧게 쳐올린 1과 타입의 형사였다. 약간 뚱뚱하긴 했으나 남자다운 면모였다. 입도 무거웠다. 사메지마와 가능한 한 얘길 나누지 않기로 굳게 결심이라도 한 것같이 보였다. 사메지마가 본청으로 끌려온 지 12시간이 지났다. 의자에 앉은 채 30분쯤 눈을 붙였다. 오전 9시와 오후 1시, 두차례 식사가 배달되었다. 오후 5시 20분, 이구치와 시라사카가 회의실로 돌아왔다. "열쇠, 돌려 드리죠." 이구치는 키홀더를 사메지마 앞으로 내밀었다. 무엇인가를 압수했다는 말도 없었다. "6시에 후지마루 경무관님이 만나러 오실 겁니다." 그 말만 남기고 이구치와 시라사카는 물러갔다. 후지마루 경무관은 형사부장이었다. 신주쿠 서 관내 경찰관 연속 살인사건 특별수사본부 지휘를 맡았을 때 사메지마도 그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일년 전의 일이었다 (<소돔의 성자> 참조). 후지마루는 책사(策士) 로 소문이 나 있었다. 지난날 공안부 암투에서도 중립을 지킴으로써 양쪽 모두에게서 점수를 딴 사람이었다. 6시가 되었다. 야시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메지마 혼자 남게 되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도어가 열렸다. 사메지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지마루 형사부장은 혼자였다. "앉아." 사메지마는 의자에 앉았다. 후지마루도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테이블 위에 손깍지를 꼈다. "퇴직할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없습니다. 경찰관으로서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후지마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쉰을 넘은 나이였지만 머리에는 흰 올 하나 없었다. 몸집에 비해 얼굴이 큰 탓에 작달막한 인상을 주었다. "경솔했다는 이유만으로 퇴직한 경찰관도 있어." 사메지마는 후지마루를 쏘아보았다. "미모리에게 만나자고 한 건 자네였어. 경솔한 짓이라고 볼 수 있어." "함정을 판 게 누군지 알아보려고 만나자고 했던 것입니다." "혼자 만나러 갈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하나?" "만약 누군가에게 함게 가자고 부탁했다면, 그 사람까지 말려들지 모르지 않습니까?" "조금 전, 모모이 경감과 가까스로 연락이 닿았어. 자네에 대한 진술을 받으러 이구치 경감이 방금 떠났어." "가까스로 라고 하신 건 무슨 뜻입니까?" "출장중이었던 모양이야. 어딘지는 모르지만."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짚이는 데가 있나?" "아니, 없습니다." 후지마루는 턱을 낮추면서 끄덕였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우수한 경찰관이란 건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어. 허나 그것과 경찰조직 전체의 규율은 별문제야." "네." "지금 현재, 자네를 살인 용의자로는 보지 않아. 하지만 혐의를 뒤집어쓸 만한 상황에 있었던 건 사실이야." "네." "그게 경솔한 짓이었다고 생각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넨 누군가가 자네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던데?" "네." "경찰조직 내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아뇨." "외부 사람?" "네." 후지마루는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엄숙한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서 큰 눈망울이 사메지마를 쏘듯이 노려보았다. "자네가......." 후지마루는 한마디 한마디 밀어내듯이 말을 이어갔다. "독직 경찰관이었다면 오히려 문제될 게 없을지도 몰라. 소행에 문제가 있고, 매수되기 쉬운 그런 인물이었다면 말야." 후지마루 눈언저리에는 순간적으로 쓴웃음이 번졌다. "공안부에선 자네가 퇴직하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한대 자네 자신이 몸담고 있던 곳이지만, 반드시 환영만 받았다고는 볼 수 없는 곳이야. 허나 그들도 자네가 매수당하거나 할 사람이 아니란 것만은 잘 알고 있어." 후지마루는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물었다. "내부에도 외부에도 각각 문제점이 하나씩 있어. 내부문제는 미모리 오사무의 죽음을 살인사건으로 1과에 넘길 것인가 말것인가야. 1과로 넘기자면 자네가 절대 관여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필요해. 허나 현시점에서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어. 결국 2과가 처리해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살인의 의심을 받는 인물을 경찰청 간부 경찰관으로 그냥 놔두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사메지마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지금 여기서 경찰관으로서의 인생에 피리어드가 찍히려 하고 있었다. "자네가 경찰관으로 있는 한, 1과의 수사대상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고들 주장하고 있어." "경찰관이든 아니든간에 살인 피의자라면 엄정하게 수사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메지마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어갔다. "......설령 대상인물이 캐리어 경찰관이라 하더라도." "당연한 얘기야. 또 하나, 이건 외부문젠데...... 아니, 이것이야말로 진짜 내부문제라고 하는 게 옳을 거야." 사메지마는 후지마루를 응시하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가령 자네가 살인범도, 매수당한 독직 경찰관도 아니라고 치자. 자네 말처럼 함정에 걸려들었다고 쳐. 자네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사실이야 어떻든 결국 법관 판단에 맡기게 되는 거야. 허나 자네를 기소하는 시점에서 경찰청은 자네를 파면할 수 밖에 없어. 다시 말하면, 어떤 경우가 되든간에 자네는 경찰관이라는 직분을 잃게 되고, 경찰청은 경찰관 한 사람을 잃게 돼.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나?"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지마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유죄냐 무죄냐 하는 것과 관계없이 경찰청은 경찰관 한명을 잃게 되는 게야. 경찰관 탓도, 경찰청 책임도 아닌 제 3자가 파놓은 비열한 함정만으로도 그렇게 되는 거야.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럴 경우, 자네뿐만 아니라 경찰청도 함정에 빠지는 것이 되네. 망신스러운 일이지. 음모를 꾸민 녀석...... 범죄자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겠지. 이런 방법도 있구나 하는 게 알려지면 또 다른 어느 누군가가 시끄럽게 구는 형사를 같은 방법으로 꺾어 버리려 할 거야. 어쩌면 이런 더러운 수법이 범죄 세계 상식으로 퍼져 버릴지도 몰라." 후지마루는 잠시 말을 끊고 사메지마를 응시하다가 다시 이어 갔다. "그런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경찰관을 덫에 걸어 범죄자로 조작하는 것, 그러게 해서 수사의 손길에서 벗어나려는 녀석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어. 뿌리를 뽑아야 해!" 후지마루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자네를 처음 만난 건 신주쿠 서 경찰관 연속 살인사건 수사에서였지.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자넨 범인을 체포했어. 그때도 우리는 지금과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어." "경찰의 위신 말씀인가요?" "그래. 자네와 나는 아마도 경찰과 경찰관에 대한 시각이 다를게야. 어쩌면 1백 명의 경찰관이 있다면 시각이나 의식도 1백 가지가 될지 모르겠어. 하긴 이 나라 경찰에서 그런 현상이 용납되자면 좀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허나 가령 1백 가지 시각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은 범죄자가 경찰을 억눌러 승리하는 일이야. 설혹 일시적으로 도망칠 여유를 주었다 하더라도 결국엔 체포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범죄는 예방이 기본이지만, 불행하게도 사건이 터졌을 경우엔 절대로 범인을 놓쳐선 안 돼. 어떤 일이 있어도 진범을 체포해야 하는 거야. 그것은 재판 결과와는 별개 문제야." "경찰관이 살해당하는 것은 경찰기구에 대한 중대 도전이라는 것이 당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는가?" "경찰관은 혼자인 경우든, 다수로 있을 경우든 간에 언제나 경찰기구 자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경찰관이 경찰기구 그 자체인 이상, 가령 혼자 1백 명의 범죄자와 대결하더라도 경찰관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바로 그거야.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경찰관은 항상 그런 입장에 놓여 있고, 또 시민들은 그렇게 해 주길 원하고 있어. 우리는 그것을 신뢰라고 이해하고 있어. 그런 신뢰야말로 범죄를 예방하는 원천이야." "경찰에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려야 한다는 말씀이로군요." "자넨 반댄가?" "반대는 아닙니다. 다만 그런 의식이 성립되기 위해선 우선 경찰이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경찰관도 인간이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후지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자네 생각이 옳을 거야. 허나 경찰관을 한사람의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과 경찰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양립시킬 수가 없어." "공식적인 입장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때문에 우리는 항상 이렇게 부르짖고 있는 것 아닌가? <계속 노력하자>고." 사메지마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지마루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면서 통고하듯 입을 열었다. "이 건은 당분간 수사 2과에서 조사를 계속할 거야. 자네에 대해 어떤 결론이 나오면, 그때 가서 수사 1과로 넘길 것인가의 여부를 판단할 생각이야. 아마 한 2,3일은 걸릴 테지." "그동안 저는 어떻게 됩니까?" "사법경찰관으로서의 직무권한을 중지한다. 신병 구속은 않는다. 이상이야." 사메지마가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오후 8시가 지나서였다. 이구치와 시라사카의 가택수색으로 집안은 어수선했다. 그러나 뒷정리할 기분이 나지 않아 난로에 불만 켜고는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전화기를 살펴보았다. 미모리와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는 이구치가 뽑아가고 없었다. 녹음 테이프를 보충하지 않은 탓에 자동응답기도 작동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형태로 경찰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형사부장이나 특명형사들은 의외로 호의적이었지만, 사메지마는 자기가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깊은 늪에 빠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미모리의 죽음이 살인이었을 경우 -- 살인이 틀림없지만 --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 않고 어물쩍 끝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모리의 죽음이, 신주쿠 서에 독직 경찰관이 있다는 밀고와 무관계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경찰이 어떤 형태로든 사건 해결에 나서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경찰만이 아니라 신문. 방송 등 매스컴에까지 밀고할 게 분명한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메지마의 유죄. 무죄와 관계없이 <독직 경찰관의 살인사건을 경찰이 전조직을 동원해서 은폐하려 하고 있다>고 여론이 들끓을 게 뻔한 일이 아닌가. 경찰 간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여론 재판이었다. 전체 경찰관의 신뢰가 추락되는 것은 물론, 결과적으로는 사메지마의 유무죄와 관계 없이 간부 중의 어느 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었다. 현 시점에서 사메지마가 무죄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러한 간부들이었다. 사메지마에 대한 밀고가 전혀 근거 없는 모함이며, 또 미모리 살해도 함정임을 진범 체포로 증명할 수만 있다면, 간부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은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정을 판 인물조차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매스컴이 떠들고 나서기 전에 진범을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의혹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말썽이 생겼다는 자체만으로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했다. 의혹이 외부에 노출되면, 그 시점에서 사메지마는 옷을 벗어야 했다. 또 판결이야 어떻게 나든 상관없이 체포될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찰이 일반 사회에 대해 <공명성>과 <자정(自淨)작용>을 어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본청 간부 중의 어느 한사람도 옷을 벗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주쿠 서의 경우, 우선 모모이와 서장이 위험했다. 결국 사메지마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 여럿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든 것이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저녁식사도 걸렀다. 그러나 잠은 커녕 배고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다만 몸이 천근처럼 무거워 매사가 귀찮기만 했다. 전화 벨이 울렸다.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네."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들었다. 모모이였다. "나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모모이 목소리는 침착했다. 꽤나 심한 닦달을 받았을 게 틀림없었지만, 그런 낌새는 추호도 내비치지 않았다. "경솔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과장님과 서장님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내 걱정은 안해도 돼. 서장님은...... 땅을 치고 통곡까진 않지만 그 비슷한 상태야." "지금 어디 계십니까?" "서에 있어." "찾아뵙죠." "안 돼. 지금은 서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게 좋아." 모모이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으로 지금 서장이 어떤 상태인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과장님이 저와 바깥에서 만나는 건 위험합니다." "지금 자넨 어떤 상황인가?" "직무권한을 정지당했습니다." "아직 내겐 아무런 통지가 없어." "이번 일로 넋이 나간 사람은 사쿠라다몽 (도쿄 경찰청 - 역주) 에도 있습니다." "그렇겠군. 지난번에도 만났던 바, 기억하고 있지?" "네." "2시간 뒤 거기서 만나기로 하지. 얘기할 게 있어." "하지만 저와 만나는 건......." 모모이는 사메지마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오늘 치바에 다녀왔어. 시마오카 후미에가 전에 근무했던 병원엘 말야. 궁금하지 않나?" "가죠!" 사메지마는 전화를 끊었다. 준비를 하고 아파트를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자 회색 세단 한대가 아파트 앞, 일방통행로에 멈추어 있는 게 보였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야시로가 사메지마 쪽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형사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야시로가 차에서 내렸다. "외출하시려구요?"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 야시로는 애매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어서 심호흡을 하더니 사메지마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제가 맡은 임무는 연락이 오면 그 즉시 사메지마씨 신병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경감님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보호? 누구로부터?" "매스컴으로 부텁니다." 신문사 등에 밀고가 있을 경우, 보도진이 사메지마를 덮치기 전에 뒤로 빼돌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알았어." "시간, 얼마쯤 걸릴까요? 식사하는 데." "늦어질지도 모르겠어." 야시로는 머뭇거렸다. "제 근무시간은 새벽 1시까집니다." "그때까지 돌아올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는데." 야시로는 망설였다. 만일 사메지마가 돌아오기 전에 보도진이 덮치기라도 한다면 야시로 경력은 거기서 끝나기 마련이었다. 야시로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입을 열었다. "시라사카 경위님 얘기로는 사메지마씨가 덫에 걸린 거라고 했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래." 야시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야시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외출하시는 것은 함정에 빠졌음을 증명하기 위해섭니까?" "그래." 야시로는 눈길을 내리깔았아. "그러시다면......." 들릴락말락한 낮은 목소리였다. "한동안 아파트엔 돌아오지 마십시오. 그러시는 게......." "알았어." "시라사카 경위님이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 달라구요."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시로는 길게 숨을 내뿜었다. "저는 차 안에서 자고 있을 테니까......." 차에 올라탄 야시로는 도어를 닫았다. 행운이었다. 자기를 신뢰해 주는 동료가 여기에도 한 사람 있었다. < 14 > 손님을 따라나간 것일까, 오늘밤 가와사키 역 뒷골목 바에 남창은 보이지 않았다. 사메지마가 도어를 밀치고 들어서자 모모이와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바텐더 둘 뿐이었다. "쇼핑할 게 있어서......." 바텐더는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사메지마는 도어를 잠근 다음 모모이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마셔. 목마른 얼굴로 앉았지만 말구." 모모이는 온더록 글라스를 사메지마 앞으로 밀었다. "고맙습니다." 사메지마는 차가운 위스키를 입안에 잠시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모모이 얼굴을 보자 긴장이 풀리면서 손까지 떨렸다. "살해당하기 직전, 그때 그 얼굴과 비슷하군 (<소돔의 성자> 참조)."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그 정도로 수습되었지만......." "또 살해당할 위기에 빠졌나?" "네.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자세히 얘기해 봐." 모모이는 얼룩진 안경 너머로 카운터 안쪽 술 진열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메지마는 얘기를 시작했다. 모모이는 담배를 피워 물고 귀를 기울였다. 얘기가 끝나자 머리 속에서 일단 정리를 해 보려는 듯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이윽고 모모이가 입을 열었다. "미모리는 자네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겠군." "직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밀쳐 떨어뜨렸다고 해도 전 범인을 보지 못했습니다." "엇갈린 게로구먼." "아마도." "미모리가 거기서 살해될 줄은 몰랐단 말이지?" "네. 다만......." "다만, 뭐야?" "겁까지 먹은 것 같지는 않았으나, 미모리가 불안해 한 건 사실입니다." "미모리 소지품은?" "현장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차 안까지 살펴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미모리를 밀쳐 떨어뜨린 게 누구였던지간데 일면식도 없는 사람은 아니었을 거야. 만약 그렇다면 미모리는 자네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미행당하고 있었던가, 위협당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 "위협당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틀림없는 미모리 음성이었나?" "녀석과 전화로 얘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확신은 서지 않습니다." "미모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했다면서?" "네. 누군가를 데려다 주고 있는 길이라는 뜻의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미모리가 자넬 함정에 빠뜨리려는 녀석과 한패일 가능성도 있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패라면 자기가 미끼로 쓰이고 있는 걸 몰랐다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미모리를 죽인 목적이 자네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면?" "그럼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까?" "그룹 안에 균열이 생기는 바람에 입을 봉해야 했다면? 결국 미모리 살해는 일석이조가 되는 셈 아니겠어?" "미모리가 <가마이시 클리닉>이 관련된 어떤 범죄에 한몫을 하고 있었다는 얘긴가요?" "그래." "그렇다면 범인은 미모리 주변도 깨끗이 쓸어 버리겠군요. 자기들 흔적이 꼬리 밟히지 않게 말입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야. 미모리는 원래부터 증거를 남기지 않는 타입이니까 말야." "미모리 주변을 훑어봐야겠군요." "그건 2과에 맡겨 놔." 모모이는 제지하면서 말을 이었다. "또 한가지...... 미모리가 살해되기 전에 함께 있었던 사람인데......." "전화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미모리가 먼저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면, 그 사람을 데려다 준 곳도 현장인 오다키바시와 그렇게 떨어진 데가 아니란 얘기가 돼." "아니면 현장까지 함께 왔을 수도 있구요." "무슨 까닭으로?" "나와 미모리가 만나는 걸 알고 입회하려 했던 것이겠죠." "왜?"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네를 오다키바시에서 죽여 버리라고 했다면 미모리는 어떻게 나왔을까?" "겁에 질려 벌벌 떨었겠죠. 미모리는 형사를 죽일 만큼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런 일에 자기를 끌고 들어갈 생각은 말라고 호통을 쳤을지도 모르구요." "만나는 장소를 오다키바시로 정한 건 미모리였지?" "네." 대답하면서 사메지마는 생각에 잠겨들었다. "왜 그래?" "실은 전화가 두 번 걸려왔었습니다. 차 안에서 카폰으로 걸었던 것 같아요. 첫번째는 잡음이 무척 심했습니다. 터널로 들어간다면서 일단 끊더군요." "두번째 전화는?" "금방 새로 걸어왔습니다. 잡음 하나 없이 똑똑히 들렸어요." "어쨌든 전화를 걸어왔을 때 미모리는 오다키바시 현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봐야겠군." "네. 장소를 지정한 건 두번째 통화 때였습니다." "미모리와 함께 있던 녀석이 범인이라고 한다면, 첫번째 전화를 끊은 직후 공사중인 빌딩이 있다고 가르쳐 준지도 모르겠군." "그러고 보면...... 제가 아는 사람이냐고 묻자 그런 셈이라고 대답하더군요." "2과에도 말해 줬나?" "전화를 녹음한 테이프를 가져갔습니다." 모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구...... 실제로 현장에 도착까지 몇 분쯤 걸렸나?" "18분입니다." "옥상에서 아래까지 내려오는 데는 시간이 얼마쯤 걸렸나?" "발 밑이 편하지 않았으니까 틀림없이 5분 이상 걸렸을 겁니다." "그렇다면 올라가는 시간까지 고려할 때, 미모리는 전화를 끊은 뒤 5, 6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고 봐야겠군." "하지만 그건 다른 목적 없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데만 걸린 시간이니까......." 사메지마는 모모이와 눈길이 마주치자 말끝을 흐렸다. "두번째 전화를 모모이는 현장에 도착해서 걸었다는 뜻인가?"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를 데려다 주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했어. 무슨 까닭으로?" "데려다 줄 곳이 바로 눈앞이기 때문이죠. 미모리가 거짓말까지 할 까닭은 없으니까 그렇게 보는 게 타당하겠죠. 만약 범인과 함께 저를 기다릴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자기 혼자라고 둘러대면 그것으로 그만 아닙니까?" "오다키바시는 관할이 복잡한 구역이지?"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언저리는 나카노구와 구 경계지역이 돼놔서......." 사메지마는 말을 맺지 못했다. <가마이시 클리닉> 과는 직선거리로 1킬로미터 안팎이었다. 그 시간이라면 2, 3분이면 충분히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다. "미모리는 일단 오다키바시를 지나, 동승한 사람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생각이었어. 허나 그 사람은 그럴 필요 없다고 사양했어. 가까우니까 걸어가겠다든가 하는 핑계를 대면서. 미모리는 자네와 만날 때, 그 사람이 동석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어. 때문에 못 이긴 척 현장 부근에서 그 사람을 내려 주었어. 그리고는 차를 세워놓고 7층까지 올라갔어. 자네가 오는 걸 내려다보면서 기다릴 생각으로 말야. 정말 자네가 혼자인지 그것도 확인할 생각이었던지도 몰라."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 네트가 쳐져 있기 때문에 옥상으로 올라갈 때까지는 주변을 둘러볼 수 없습니다." "차에서 내린 그 사람은 제 갈길을 가는 척하다가 미모리 뒤를 쫓아 옥상으로 올라가, 그를 아래로 밀쳐 버린 거야." "범인은 미모리가 저와 만나기로 약속하는 걸 옆에서 들었습니다. 함정 판 게 탄로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미모리를 없애려고 마음먹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것도 모르고 자넨 그 직후에 현장에 나타났던 게야." "전 노가다 아파트에서 자동차로 달려갔었습니다. 범인이 <가마이시 클리닉> 쪽으로 사라졌다면 제가 달려간 반대 방향이니까 알 수가 없는 거죠." 모모이는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상의 안주머니에서 돋보기와 수첩을 꺼냈다. "시마오카 후미에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어. 22년 전의 일이야." "22년 전?" "그래. 당시 후미에는 치바현의 어떤 병원 인공투석 센터에서 일하고 있었어." 사메지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모모이는 돋보기 너머로 수첩 메모를 좇아가면서 얘기를 이어 갔다. "인공투석 센터에는 스도 아카네라는 열네 살 소녀가 입원해 있었어. 후미에가 담당 간호사였어. 스도 아카네는 선천성 신장 기능 장애로 입원했을 땐 상태가 몹시 나빴어. 병원에서는 신장 이식수술을 하려고 도너, 신장 제공자를 찾고 있던 중이었어." "22년이나 된 기록을 용하게도 찾아내셨군요." 사메지마가 말하자, 모모이는 돋보기 너머로 눈길을 보내면서 미소를 지었다. "수사방법이 한가지 뿐은 아니니까." 다시 수첩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스도 아카네 부모는 혈액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요소가 맞지 않았어. 도너 부적격 판정이 내려진 며칠 뒤 스도 아카네 어머니가 아카네보다 한살 어린 소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왔어. 사촌언니 딸이라는 소녀는 장기 제공에 동의했어. 미성년자를 도너로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말도 많았던 모양이야. 그 소녀 부모의 행방을 찾지 못해 보호자의 동의를 얻는 건 불가능했어. 그것과는 별도로 이미 스도 아카네 부모는 그 소녀를 양녀로 입적시키는 수속을 밟고 있었어. 그 소녀, 꽤나 거친 가정에서 태어났던 모양이야. 당시 민생 위원회 기록을 보면 아버지는 행방불명, 어머니는 알콜 중독자였어. 매춘 혐의로 몇 번이나 검거된 적도 있구." 우선 도너로 적합한지 여부부터 검사해 보려고 소녀도 입원하게 되었다. 검사 결과는 합격이었다. 도너로서 적합하다는 판정이 난 것이었다. 의사들은 이식수술 준비에 착수했다. 두 소녀는 이식수술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겉모습도 놀랄 만큼 비슷했다. "수술은 어떻게 됐습니까?" 사메지마가 물었다. 스도 아카네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기억이 났다. 그러나 어디서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모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술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수술을 하루 앞둔 날, 시마오카 후미에와 스도 아카네는 병원 밖으로 산책을 나갔어. 스도 아카네는 휠체어였어. 병원 근처, 제법 길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있었는데 대형 트럭이 추월하면서 시마오카 후미에를 스쳐 버린 게야. 후미에는 쓰러졌고, 휠체어는 아래로 굴러 내려갔어. 환자인 스도 아카네 힘으로는 휠체어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어. 결국 언덕 아래에 멈추어 있던 또 다른 트럭에 부딪치고 말았어. 스도 아카네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어. 뇌를 다쳤던 거야. 생명은 건졌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22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어. 혼수상태에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 갔어. 지금은 야마나시현 특수병원에 입원해 있어. 딸이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자, 부모는 이식수술을 포기했구." "후미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트럭 운전기사는 접촉사고를 부인했어. 허나 후미에에겐 쓰러질 때 다친 것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었어. 그 사건 뒤 후미에는 사표를 내고 행방을 감추었어." "또 한사람, 도너가 될 뻔해던 소녀는 어떻게 됐습니까?" "식물인간이 된 친딸 대신 스도 아카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어. 허나 아카네 부친은 11년 전에, 어머니는 9년 전에 사망했어. 아버지가 조그마한 부동산 회사를 경영하면서 모은 전재산은 결국 그 소녀 차지가 됐어. 허나 현재 그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어. 남편과 사별한 뒤부터 소식이 끊겼다는 게야.' "이름은요?" "양녀가 된 소녀 말인가?" "호적상에는 스도 아야카, 그전 이름은 후지사키, 후지사키 아야카." <인디고> 간판 조명은 꺼져 있었다. 그러나 도어 유리로는 훤하게 불이 내비치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도어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새벽 1시가 거의 다 된 시각이었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 안쪽에서 마주 앉은 젊은 부부 손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이리에 아이가 사메지마를 올려다보면서 맞아 주었다. 밝은 노랑색 면 원피스에 검정 탱크톱, 한걸음 앞선 봄맞이 차림이었다. 동생인 코지와 미카요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우린 그만 일어서자구......." 말하면서 젊은 커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엔 얼음이 녹아 묽어진 온더록 잔 2개가 놓여 있었다. 아이는 벌룬형의 브랜디 잔을 들고 있었다. 커플이 계산을 마치고 나가자 아이는 도어 안쪽 덮개를 내렸다. 사메지마는 카운터 옆에 선 채로였다.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해. 금방 돌아갈 테니까......." "괜찮아. 코지가 친구들과 함께 스키를 타러 간 바람에 심심하던 참이야. 앉아요, 거기." 아이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늘어놓더니, 다시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미카요는?" "코지가 데리고 갔어. 스키는 못 타는 모양이었지만, 기분전환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애인한테서는 여전히 소식이 없구......."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이와 마주 보며 앉았다. 주택가 한복판이라서 그런 것일까. 카페테라스 주변은 물밑처럼 조용했다. 사메지마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척 지친 얼굴이로군. 한잔 하겠어?" 마테르 한병을 꺼냈다. "브랜디로군." "내가 한턱 쓸께. 날이 새기 전엔 잠을 못 자는 버릇이거든." 아이는 글라스에 브랜디를 따랐다. "낮에도 마시지? 그러면서도 견디어 내는 걸 보면 용하군." "원래부터 거칠고 튼튼한 여자야. 하마쿠라도 언제나 감탄했지. 그 사람이 벌지 않아도 두 사람 먹고 사는 건 나 혼자 힘으로도 자신 있었어." 아이는 웃음을 흘렸다. "이 가게는 당신이?" "응, 내 거야. 일하는 게 즐겁거든. 하마쿠라한테 그처럼 아둥바둥 일하라고 말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어. 골프나 치면서 즐기는 게 어떠냐고 한 적은 있어도." "별난 여자로군." 아이는 글라스를 들어올렸다. 한순간 눈이 날카롭게 빛을 뿜었다. "내가 반한 남자에게만 그래!" "그런 일을 하고는 있었지만, 나쁜 사내는 아니었어." "여자한테 정말 잘해 줬어. 천재적이랄 만큼." "인기가 있었지." "그럼. 플레이보이라고 으스대는 녀석들은 눈앞에 여자 10명이 있다 해도 손에 넣는 건 기껏 예닐곱 명밖에 안 돼. 나머지 셋은 죽었다 깨어난대도 함락시키지 못해. 필링이나 패턴이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야. 자기 솜씨로는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는 거지. 하지만 하마쿠라는 달라. 억지를 쓰지도 애원하지도 않아. 그런 타입, 흔치가 않아. 잠자리를 함께 했던, 하지 않았던 절대로 여자들이 싫증을 내지 않아. 호모는 아니었으나 정신적으로 여자들의 생리 같은 걸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어. 여자들은 평소엔 싫어했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면 저 사람 품에 안겨도 좋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하마쿠라는 그 여자 앞에 나타나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니." 사메지마는 고개를 흔들면서 브랜디를 한모금 혀끝으로 핥았다. 달착지근한 맛이 혀끝에 화끈거렸다. "그렇겠지. 함께 자 줘서 고맙다고 여자가 인사를 하고 싶어할 정도야. 데리고 있던 아가씨들과는 몸을 섞지 않았겠지만. 모두들 그 사람한테 반해 있었을 게 틀림없어." 아이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돌봐 주고 있는 건가?" 아이는 사메지마를 흘낏했다. "귀엽잖아? 그 사람한테 반한 아가씨라면." "엄마 같은 말투로군."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몰라. 그래서 헤어진 것일 게구. 그 사람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몰매 따윈 맞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어. 설마 저렇게 비명에 갈 줄이야......."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았어." "그래? 술자리 한번 함께 한 적도 없는데." "그 사람, 눈치 하난 알아 줘야 해. 엄청난 겁쟁이란 것, 당신도 알잖아? 그래서 자기를 해칠 사람인가 아닌가를 금방 알아보는 거야. 상대가 남자였든 여자였든간에." 사메지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 애인만 봐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어. 그 아가씬 당신에게 반하긴 했어도 욕심이 없는 타입 아냐? 타협을 모르는 그런 아가씨가 아직도 남아 있구나 하고 놀랐어. 처음 봤을 때." "그런데도 날 지치게 만드나?" "거짓말!" 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가씰 안 만났지?" "최근 사흘 동안은." "당분간은 만날 수 없는 거지?" "응." "속마음은 항상 같이 있고 싶은 거지?" "반하면 그렇게 되는 것 아니겠어, 누구나." 아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이쪽도 어느덧 정직한 기분에 젖어들고 있음을 사메지마는 느꼈다. "반할 나름이야. 언제나 그랬다간 몸이 견디어 내지 못할걸." "당신처럼 튼튼한 여자도?" "사랑에 에너지를 쏟지 못하니까 일상생활에서 힘이 넘치게 되는 거야." 아니는 쿡쿡 웃음을 웃었다. 그 순간 사메지마는 아이가 앞으로 하마쿠라 이상으로 사랑할 남자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슬퍼했을까. "손님 가운데 말야......." "미군 관계 사람 말이지? 물어봤지만 없댔어. 외국인 고객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런 일에 관련되었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어. 모두 신원이 확실한 사업가였대.'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도 아카네란 이름, 혹시 들어본 적 있나? 아니면 후지사키 아야카나......." "스도 아카네? 그런 것관 난 인연이 없어. 후지사키 아야카는 누군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구." 아이의 말뜻을 사메지마는 알아듣지 못했다. "인연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이야?" "그렇잖아? 스도 아카네라면 신주쿠에 있는 미용 클리닉 아냐?" 순간, 머리 속이 번쩍하면서 사메지마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신주쿠 호텔에서 하마쿠라와 만났던 날 -- 그것이 최후의 만남이 되고 말았지만 -- 들었던 이름이었다. 그날 사메지마가 미쓰즈카에 대해 묻자 하마쿠라가 가르쳐 주지 않았던다.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 입회금 3백만 엔. "그랬었구나......." 사메지마는 신음을 내뱉으면서 눈을 감았다. 스도 아카네는, 그러나 식물인간으로 22년째 입원해 있다지 않는가. 그동안 의식을 회복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스도 아카네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우연의 일치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이번 음모에는 경찰을 잘 아는 사람이 관련되어 있었다! 경찰이사관 앞으로 밀고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역시 미쓰즈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미쓰즈카를 <가마이시 클리닉>과 연관시킬 자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찾아낸 것이었다. 스도 아카네와 시마오카 후미에. 스도 아카네의 정체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은 한사람 뿐이었다. 타키자와였다. < 15 > 후미에는 통근 러시로 북적대는 플랫폼 제일 끝쪽에 서 있었다. 개찰구를 빠져 나와 계단으로 밀려 올라오는 승객들의 얼굴을, 거기 서 있으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께 밤부터 거의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겨울 아침 차가운 햇살이 눈 속을 헤집자 두통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진통제는 먹지 않았다. 진통제는 반사신경을 무디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야카가 마지막 순간에 와서는 자기만을 의지하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기분을 들뜨게 했다. 그 녀석이 기가 막혀 깜짝 놀라던 얼굴을 보여 줄 수 없는 게 무척 아쉬웠다. 미쓰즈카는 미모리를 죽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미모리를 죽여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아야카는 미쓰즈카와 한 마디도 상의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미모리는 분명 겁에 질려 있었다. 저온 수송용 케이스가 처음 들었던 것보다 3개나 늘어난 데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후미에가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 수송용 케이스를 옮겨 싣는 미모리를 도와 주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혹시 중간에서 케이스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겁에 질리기는 가마이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하 냉동보존실에 숨겨 놓았던 그 젊은 녀석의 시체를 보여 주자 가마이시는 헛구역질까지 했다. 그런 가마이시를 호통쳐 가면서 시체를 분해하고 뼈를 바수어 수송용 케이스에 구겨넣은 것이었다. 열어보면 냉동보존한 태아 조직이 아님을 금방 알아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시체라고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야카가 문제의 케이스 3개는 불량품이니까 적당히 처리해 버리라고 홍콩 지사에 따로 연락했을 게 틀림없었다. <가마이시 클리닉>은 어제부터 2주일 동안 휴진하기로 했다. 어젯밤 비행기로 가마이시가 룩셈부르크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태아조직 수출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남미 조직을 통해 미국으로부터의 주문이 밀려 있었지만, 당분간 문을 닫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때문에 남미조직은 다시 동남아시아로 태아 수집단을 파견할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타이나 필리핀의 가난한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바라지 않는 임신으로 배가 불룩해진 여인들로부터 뱃속의 태아를 사들이는 것이었다. 남미조직이 <가마이시 클리닉>을 소중히 여겨온 것은 보존. 수송기술이 뛰어났던 탓도 있었지만, 동남 아시아 지역을 직접 뛰어다니면서 고생스럽게 태아를 수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갓 태어난 애기를 해체해서 필요한 조직만 공수하기 위해서는 경험 많은 기술자와 위생적인 의료시설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직에 협력할 그런 기술자나 시설이 현지에는 없었다. 때문에 조직은 갓난애기를 <여행자>로 위장해서 비행기에 태워 본국으로 실어나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애기를 여행시킬 경우 사람 눈에 두드러질 위험이 있었다. 또 갓난 애기는 체력과 저항력이 극히 연약하기 때문에 도중에서 숨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미 값을 치른 애기가 도중에서 죽어 버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애기를 판 어머니들이 나중에 돌려달라고 매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지나치게 시끄럽게 굴면 어쩔 수 없이 그 어머니의 입도 막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유산했다> 든가 <사산했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그런가 보다고 하던 당국도 성인 여자가 행방불명되든가 사고로 죽는 사건이 겹치면 눈에 불을 켜고 나서기 마련이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해서 수량은 적지만 보존상태가 좋아 양질인 데다가 추적조사를 받을 위험이 전혀 없는 <가마이시 클리닉> 루트를 남미조직은 애지중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에서 보내온 <물건> 에는 악성 성병에 감염된 것이 거의 없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모든 것을 끝낼 때가 된 것이었다. 지금의 아야카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야카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복수인 동시에 죄갚음이기도 했다. 스도 아카네에게, 22년 전 후미에가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소녀에게 신장을 제공할 수 없게 된 아야카가 온세상의 모든 아카네에게 복수와 죄갚음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그 아이는 목숨까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같은 생명이라도 가치와 가격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단 말이야. 열세 살 때 스스로 목숨 판 돈을 받아들이면서 찢어졌을 가슴을 내가 어루만져 줘야 하는 거야. 처음 만났을 때의 아야카 눈동자를 후미에는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플랫폼 계단으로 그 사내가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하루 중 가장 붐비는 시간인데다가 이른 아침 추위를 막느라고 모두가 두터운 옷차림 --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병원서 만났을 때는 비록 정중한 말투였으나 꽤나 거드름을 피웠었다. 어딘가 사람을 얕보는 분위기까지 풍겼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그는 여느 출근객과 다름이 없는 잠이 덜 깬 우거지 얼굴이었다. 짙은 회색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웅크린 모습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사내가 잰걸음으로 전동차를 기다리는 행렬 꽁무니에 붙어서는 걸 후미에는 매점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딕트>를 바른 뜨개바늘은 왼쪽 팔에 걸고 있는 쇼핑백에 들어 있었다. 포켓에 두 손을 찔러넣고 있었기 때문에 노릴 만한 곳은 목 뒷줄기밖에 없었다. 사내는 후미에보다 적어도 10센티미터쯤 키가 컸다. 도쿄 도심 쪽으로 가는 상행선 전동차가 달려 들어왔다. 어쩔까 하고 망설이면서도 후미에는 사내가 서 있는 행렬 꽁무니에 붙어섰다. 행렬이 너무 길어 사내나 후미에는 하행선 플랫폼이 오히려 더 가까운 곳에 서게 되었다. 전동차 문이 열렸다. 줄이 무너지면서 욱 몰려갔다. 전동차 안은 이미 만원이었다. 차 안의 승객들은 새로 타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밀고 밀리면서도 어떻게 하든 자기만은 전동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래도 플랫폼에 몰려 있는 사람 모두가 탈 수는 없었다. 몇 번씩이나 도어가 닫히려 하다간 열리고 하더니 가까스로 닫혔다. 사내의 혀차는 소리가 후미에 에게까지 들렸다. <낙오자>가 된 게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후미에 뒤에는 길다랗게 행렬이 이어져 있었다. -- 그래, 그렇게 하는게 좋겠어. 후미에는 마음을 굳혔다. 사내는 초조해진 듯 발을 동동 굴리면서 매점 쪽을 흘낏거리다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사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후미에는 짐작이 갔다. 사내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바로 뒤에 붙어섰던 후미에는 눈길을 내리깔았다. 예정된 전동차를 놓쳐 버린 사내는 매점에서 뭔가를 사려는 게 틀림없었다. 신문이나 잡지, 아니면 마실 것일까. 그러나 뒤에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선 걸 보고는 줄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사내는 다리를 쉴새없이 떨었다. 후미에는 목을 길게 뽑아 선로 저쪽을 살펴보았다. 상행선 전동차가 줄을 이어 들어올 시간 -- 서둘 필요가 없었다. 겨울 햇살을 헤집고 커브를 따라 길게 이어진 차체를 흔들면서 붉은 색 전동차가 달려 들어왔다. 사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전동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등 뒤에서 사람들이 욱 밀려들었다. 후미에는 사내 등을 밀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로 힘껏 밀었다. 행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로 앞을 다투느라고 야단들이었다. 밀었다. 밀리는 것보다 더 세게 밀었다. 조그마한 틈만 생겨도 뒤에 선 사람들이 자연스레 발부터 집어넣었다. 후미에도 계속 밀리고 있었다. 좀더 세게, 더욱 세게 밀어야 해. 후미에는 속으로 기합을 넣었다. 사내는 휘청거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화난 눈초리로 후미에를 흘낏 노려보았다. 후미에는 한발 다가서면서 어깨에 온몸의 체중을 실어 사내를 밀었다. 사내가 눈을 깜박거렸다. 의아스러워하는 표정이 다음 순간 경악으로 바뀌었다. 후미에는 젖먹던 힘까지 뽑아 사내를 밀쳐 버렸다. 손은 쓰지 않았다. 어깨만으로 밀었다. 후미에가 급작스레 한걸음 앞으로 다가선 바람에 행렬이 무너졌다. 밀던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어 버렸다. "앗!"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앞으로 밀리는 바람에 발이 허공을 디뎌 버린 것이었다. 플랫폼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사내는 몸을 비꼬았다. 후미에를 올려다보던 눈길이 다음 순간 달려오는, 자기를 덮쳐오는 붉은 색 전동차 쪽으로 향했다. 선로 위로 등부터 떨어진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을 후미에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어서 붉은 색 전동차가 시야를 덮어 버렸다. 후미에가 비명을 지른 것은 주변에 몰려 있던 여학생과 아가씨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뒤였다. 아야카가 목욕탕에서 나오려는 참에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야경을 굽어볼 수 있는 창가에는 주문했던 프로즌 다이키리 글라스가 놓여 있었다. 전화 벨이 울도록 내버려 둔 채 아야카는 머리에 타월을 감았다. 누가 건 것인지 짐작이 갔다. 타월을 감은 채로 머리를 등 뒤로 늘어뜨린 아야카는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나이트 테이블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무척 길었다. 일주일에 하루씩, 아야카는 개점부터 폐점 때까지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을 지켰다. 이날을 노려, 아야카의 <개인치료> 를 받으려는 부잣집 마나님의 예약이 쇄도했다. 마지막 손님이 클리닉을 뒤로 한 것은 밤 10시가 지나서였다. 일이 끝나자 관례대로 클리닉 스탭과 함께 식사를 했다. 돌아온 것은 겨우 20분 전이었다. "나야. 당장 만나서 얘기할 게 있어. 지금 그쪽으로 가겠어." 일부러 귀에서 멀찍이 뗀 수와기에서 예상했던 대로 미쓰즈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절박한 말투였다. "지금 어디야?" "요쓰야. 누굴 만나고 온 참이야." "그럼 들었겠네." "어쨌든 그쪽으로 가겠어. 괜찮지?" 아야카는 눈을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빨간 빛을 뿜는 벌레가 달라붙은 거대한 묘석(墓石) 같은 도청(都聽) 빌딩과, 배스 로브를 걸친 자기 모습이 유리에 겹쳐 있었다. "좋아. 하지만 서둘러 줘.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어." "날아가지." 화를 억누른 목소리에 이어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아야카는 창가로 갔다. 다이키리 글라스를 들어 입술을 적셨다.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여왕이 자신이 통치하는 도시를 굽어보면서 한잔 즐기는 것 같은 우아한 기분에 잠겨보는 순간이었다. 얼음덩어리 사이로 흘러내린 럼주 향기가 달착지근했다. 아야카는 도시 야경이 좋았다. 다른 사람이 득시글대는 레스토랑이나 술집 창가에서가 아니라 자기 혼자만의 야경이 갖고 싶었었다. 누군가와 함께 이 야경을 즐길 생각은 없었다. 자기 혼자, 편안한 자세로 끝없이 바라보고 싶었다. 소파에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날마다 보는 야경이었지만, 눈을 깜박거리는 순간조차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자기 모습이 비쳐진 유리창 너머로 네온의 물결이 펼쳐져 있었다. 그 빛 하나하나에는 혼자, 혹은 두 사람이, 어쩌면 가족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묻혀 있는 것이었다. 모두 합치면 몇만 명, 아니 수십만 명이 될지도 몰랐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은 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었다. 오늘을 되돌아 보면서, 내일을 상상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저 많은 불빛이 제각각 자기 중심으로만 반짝거리는 게 이상스럽기까지 했다. 저렇게 모래알처럼 메말라 흩어져 있는 도시가 그래도 망하지 않고 건재하고 있는게 이상스러울 정도였다. 사람들 가슴 가슴에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가득 차 있을 게 틀림없었다. 사랑보다는 미움과 혐오가 기승을 떨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사랑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증오와 절망에 비하면 사랑과 희망은 언제나 일과정(一過性) 에 그칠 뿐이었다.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이 사랑과 희망이었다. 사라지지도, 잊혀지지도 않는 것은 증오와 절망뿐이었다. 배신당하고, 때로는 배신도 했다. 사랑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 사랑은 금방 막을 내렸다. 그럴 적마다 차갑게 식어가는 마음 한구석엔 또 다른 자기가 속삭여 주었다. <어서오세요> 라고. 그렇다. 차갑게 식은 마음은 일상의 세계. 사랑과 신뢰는 1박 2일, 기껏해야 2박 3일의 짧은 여행에 지나지 않았다. 돌아가야 할 곳은 언제나 같은 곳. 야경을 바라보면서 글라스의 술을 한모금 입에 물었다. 황홀한, 정말 황홀한 순간, 이런 순간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내야 했다. 아니, 얼마든지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여왕은 성을 버리지 않는 법. 여왕이 성을 버리는 것은 죽을 때 뿐이었다. 자신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야카는 알고 있었다. -- 나는 이미 한번 죽을 뻔한 몸. 그때 죽지 않음으로 해서 누구보다도 강한 운을 움켜잡은 것이다. 그 강한 운세는 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 때까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차임 벨이 울렸다. 아야카는 몸을 일으켜 도어 스코프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캐시미어 블레이저 차림의 미쓰즈카가 서 있었다. 가슴에는 엠블럼이 달려 있었다. 센스가 무딘 사내라고 생각했다. 캐시미어 블레이저는 괜찮았다. 그러나 그 나이에 유니폼도 아닌 블레이저에 엠블럼을 달고 다니다니. 게다가 버튼다운 셔츠에 레지멘탈 타이를 매고 있었다. 경찰을 그만둔 지금도 당시의 패션 센스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어를 열었다.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빨리도 왔네." "자동차에 날갤 달았으니까." 미쓰즈카는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갔다. "앉아요." 아야카는 도어를 잠그면서 말했다. 그 한마디에 미쓰즈카는 방안 둘러보기를 멈추면서 창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마시고 있었나?" 글라스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응. 자려던 참이었거든." 아야카는 쌀쌀맞게 말했다. 미쓰즈카가 아야카를 쏘아보았다.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뭔가 망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아야카는 무표정했다. 미쓰즈카 표정에는 망설임 이외에도 초조와 쇼크 그리고 후회가 뒤섞여 있었다. 미쓰즈카는 심호흡을 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블레이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여 문 다음,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시켰나?" "뭘?" 되물으면서 아야카는 미쓰즈카 맞은편 소파에 몸을 묻었다.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손을 뒤로 돌려 머리에 감은 타월을 풀었다. 배스 로브 앞자락이 열려 가슴이 허옇게 드러났다. 미쓰즈카 시선이 한순간 자기 젖가슴에 박히는 것을 아야카는 느낄 수 있었다. "시침 떼지 마. 내가 지금 누굴 만나고 온 것 같아?" "누구?" 타월로 머리를 말리면서 되물었다. "신주쿠 서 시절의 친구. 경무과 소속이어서 내부 움직임에 밝은 녀석이야.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저녁을 사 줘가면서 얘기를 들었어." "재미있는 얘기라도 있었어?" 미쓰즈카는 한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문제의 사메지마가 본청으로 끌려갔어. 허나 수뢰 용의가 아닌 살인사건의 참고인이었어. 미모리를 죽여 버리다니,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나도 놀랐어." "그 여편네 짓이지?" 아야카는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 그 뒤론 아줌마를 못 만났어." "마음대로 해 봐!" 미쓰즈카는 마침내 화를 터뜨렸다. "그 여편네는 정상이 아니야. 뭐라고 한마디 하기만 하면 죽여 버리는 것부터 생각해. 미모리를 죽인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당신은 알기나 해? 경찰이 폭력단을 샅샅이 뒤질 건 뻔해. 만약 그 일이 꼬리라도 잡히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모두들 정신이 나갔어!" "절대로 꼬리 안 잡혀. 모두 실어보냈잖아, 그날 밤!" "기록이 있을 것 아냐?" "없어, 기록 같은 것." 아야카가 잘라 버리자, 미쓰즈카는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뭘 가지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나?" "기록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지고 있었으니까." "뭐라구?" 미쓰즈카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눈만 껌벅였다. "그날 밤, 한걸음 앞서 미모리와 만났었어." "만났다구? 녀석을 만날 땐 나를 통하기로 했잖아?" "그날 밤만은 예외야. 당신 말처럼 무척 불안해 하길래 달래 주려고 만나러 갔던 거야." "그 여편네와 함께?" 미쓰즈카 말투에 질투심이 깃들어 있음을 아야카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 함께였어." 처음 한시간은 두 사람 만이었다. 미모리는 전부터 아야카를 품어보고 싶었다고 했었다. 아야카 발가락을 입에 물고 그렇게 말했었다. 노는 데 이력이 난 미모리와의 섹스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온 정성을 쏟는 미모리와의 섹스보다는 단순히 정복욕만 앞세우는 미쓰즈카와의 섹스가 아야카에겐 더 좋았다. 미쓰즈카는 언제나 아야카에게 수갑을 채우고는 뒤에서 밀고 들어왔다. "그날 밤, 우리와 거래한 모든 서류를 돌려받았어. 홍콩 지사에서 보내온 서류와 숫자가 안 맞아 체크해 봐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게 전부란 걸 어떻게 믿어?" 미쓰즈카 눈빛엔 비웃음이 섰여 있었다. "물론 믿지 않았어. 그래서 뒤로 손을 썼어." "어떻게?" "그녀석 아파트로 가서 수상하게 뇌는 건 몽땅 갖고 와 처분하라고 시켰어." "누구에게? 그 여편네한테 시켰나?" "응." "당신, 그 뒤론 못 만났댔잖았어?" "그걸 시킨 뒤부터 안 만났다는 뜻이었어. 미모릴 죽였는지 어떤지를 전화론 물어볼 수 없잖아?" "시침 떼지 마. 설령 미모리와 이쪽을 연관시킬 증거를 모두 없앴다고 하더라도, 그래 경찰이 사메지마가 미모릴 살해했다고 믿어 줄 것 같아?" "그렇게 되도록 당신이 증거를 준비한다고 했잖아?" "그걸 쓸 수 없게 됐으니까 이러고 있는 것 아냐." "왜?" 미쓰즈카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단칼에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아니었어. 사메지마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서서히 조여 들어갈 생각이었단 말야. 잘 들어. 본청도 바보들만 있는 곳이 아니야. 더군다나 사메지마는 흔해빠진 평형사가 아니야. 캐리어야, 캐리어. 독직사건이 터지면 총감 이하 모든 간부가 파랗게 질리게 마련이야. 조사도 철저할 수밖에 없어. 바깥에 알려지기 전에 진상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야. 때문에 밀고 전화를 걸어놓고 돌아서서 현금따위를 숨겨 놓을 수는 없어. 그러면 함정이란 게 당장 들통나고 말아." "그럼 아직 그러지 않았단 말야?" "내가 오늘 무슨 까닭으로 옛날 동료를 만났을 것 같아? 낮에 녀석 아파트로 갔더니 형사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야. 이젠 그녀석 아파트엔 숨어들 수 없게 됐어. 생각해 보면 서툰 증거 안 만든 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라.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추적해 올지도 모르니까 말야." 아야카는 속으로 아차했다. 미쓰즈카가 사메지마 아파트에 현금을 갖다두지 않았다는 건 너무도 뜻밖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바보 멍청이야. 현금을 숨겨놓았다 하더라도 녀석의 지문이 묻어 있지 않으면 아무 증거력이 없다는 걸 깜박한 걸 보면......." "예금통장으로 했으면 좋았잖아? 사메지마 계좌를 조사해서 본인 명의로 온라인 송금을 했으면." "이미 늦었어." "그럼 사메지마를 막을 수 없게 됐단 말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녀석은 이제 끝났어. 시체와 함께 있는 걸 112 신고로 달려온 순경이 목격했어. 누가 뭐라든 제 1용의자는 녀석이야. 이런 정보가 매스컴에 흘러 들어가는 날이면......." "서둘러 손을 쓰면 되잖아?" "하지만......." "또 뭐야?" "분명 사메지마는 끝장났어. 허나 경찰도 사메지마가 범인이어서는 체면이 말이 아니야. 때문에 필사적인 수사에 나설 게 뻔해. 사메지마 한녀석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 병원에 쏠리는 의혹을 말끔히 씻을 수는 없어." "국세청 사찰 말이야?" "그것도 문제는 문제야." 말하면서 미쓰즈카는 아야카의 얼굴 표정이 변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당신, 설마......." "아줌마가 한 말 생각 안 나? 사메지마와 국세청 사찰부원이 서로 아는 사이라고 했던 것 말야." 미쓰즈카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모두 정신이 나갔군, 나갔어......."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쪽은 아줌마한테 맡기기로 했던 것 아냐?" "기가 막혀서. 그 여편네, 언젠가는 꼬리가 잡힐 거야. 그때가서는......." "아줌마라면 걱정 안해도 돼. 날 끌어들일 정도라면 차라리 자살을 택할 거니까." "그렇게도 자신이 만만해?" "그럼." 미쓰즈카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네 두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설마 모녀지간은 아니겠지?" 아야카는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몰라, 전생에선." "전생이라니...... 빌어먹을! 한잔 마셔야겠어." "여기서 나가면 마음대로 마시러 갈 수 있잖아?" 미쓰즈카는 눈을 치떠서 아야카를 쏘아보았다. "여기선 마시게 할 수 없다, 그 말인가?" "그것보다, 신문사엔 어떻게 흘리지?" "살인사건이 터졌다. 용의자는 현직 경찰관인 것 같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숨기고 있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것만으로 높은 사람 한사람이 옷을 벗어야 돼." "그 뒤엔 어떻게 되지?" "어쨌든 사메지마는 파면이야. 수사착수는 그 뒤가 될 테구." "그걸로 위험은 깨끗이 없어지는 거야?" "글쎄......." 미쓰즈카는 눈을 감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시체는 처분했구, 국세청 사찰부 녀석도 죽었어. 빌어먹을, 의사 녀석은 어떡하지?" "지금 일본엔 없어.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미모리가 가지고 있던 증거도 모두 없애 버렸다니까, 남은 건 그 여편네 한사람 뿐이군." "말했잖아, 아줌마는 걱정 말라구......." "하지만 그 여편네에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도 끝장이야." "아직도 아줌말 의심하는 거야?" 미쓰즈카는 심호흡을 했다.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하는 것같이 보였다. "난 당신한테 빠져 있어. 허나 당신은 나한테 반한 것 같지가 않아." "잠깐." "아니, 내 말부터 들어. 당신은 누구한테도 마음을 주지 않는 여자야. 그래서 내가 반해 버린 건지도 몰라. 당신이 미모리와 몸을 섞었다 해도 난 놀라지 않아. 문제는 말야, 어느 누구한테도 마음을 열지 않는 당신이 그 여편네만은 무조건 신용하고 있다는 점이야. 질투나 시기심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야. 당신이 잘못 되는 날, 나도 끝장이야. 알아듣겠어?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나보구 어쩌라는 거야?" 미쓰즈카가 냉정하게 따져 들어오는 게 너무도 뜻밖이어서 아야카는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그 여편네가 한 짓은 틀림없는 13계단이야. (교수대라는 의미 - 역주) 의사처럼 멀리 떠나보내!" "그럴 수 없어." 아야카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왜?" "아줌마가 한 일은 모두 나를 위해서야. 그런 아줌마를 배신한다면, 아줌마가 조금이라도 그걸 눈치 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미쓰즈카는 움찔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아줌마는 예리한 칼과 같아. 지금은 내가 손잡이를 쥐고 있지만......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미심쩍다고 느끼면 그 순간 손잡이는 칼날로 바뀌고 말 거야. 먼저 쥐고 있는 내 손가락이 몽땅 잘려 나가게 돼!" 미쓰즈카 얼굴에 표정이 싹 가셔졌다. "그 여편네를 없애 버려야 한다는 뜻인가?" "정말 당신 말처럼 곤란하다면." "무서운 사람이군, 당신은." "어째서?" "당신은 결국 나를 거두어 줬어. 거두어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거야. 그런데도 난 그게 내 능력 때문이라고만 믿었어. 하지만 아니었어." "당신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좋아해. 정말 좋아하고 있어." 미쓰즈카는 눈을 감은 채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알고 있어. 허나 당신이 나를 거두어 준 건 그 여편네에 대한 방파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야. 그 여편네를 어떻게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입을 막아 버리려고 날 거두어들인 거야. 내 말 틀렸나?" "그만해. 그런 투로 말하는 것 싫어!" "어쩔 수 없는 일 아냐?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되고 말 거니까." "어째서?" "어째서?" 미쓰즈카는 아야카의 물음을 되받아 돌려 주면서 두 눈을 감았다. "어째서일까. 반했기 때문에? 대우가 좋았기 때문에? 양쪽 모두 다일 거야." "도망치면 될 것 아냐? 당신도 예전엔 형사였으니까, 그때 동료를 찾아가서 모두 털어놓으면 당신만은 눈감아 줄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난 아줌마와 함께 13계단을 올라갈 거구." "그럴 수 없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잖아? 내가 그런 놈이 아니란 걸 알면서 왜 그래?" 미쓰즈카는 절망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야카는 미쓰즈카 에게로 두 팔을 벌려 보였다. 미쓰즈카는 몸을 일으켜 애기처럼 아야카 가슴에 안겨들었다. 아야카의 배스 로브를 헤쳐 애기처럼 젖꼭지를 빨았다. 아야카는 몸을 뒤로 젖히면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타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눈길을 창 쪽으로 옮겼다. 충성을 맹세하는 병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여왕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 16 > "이젠 일어나. 이러다간 영구차가 실러 오겠어." 사메지마는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가슴엔 담요가 한장 걸쳐져 있었다. 머리 속에는 아직 두통과 취기가 남아 있었다. 다시 눈을 감으며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시계를 찬 왼손을 들어올리면서 눈을 떴다. 오전 11시가 이미 지나 있었다. "이런, 야단났군." 가죽소파에 누워 있었음을 깨달았다. 팔을 늘어뜨리자 마룻바닥에 닿았다. 이곳 저곳을 드라이 플라워로 장식한 깔끔한 거실이었다. 이리에 아이가 통나무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느닷없이 털썩 쓰러졌지 뭐야. 며칠 동안 잠도 못 잤나 보지?" "......그랬나?" 사메지마는 심호흡을 했다. <인디고> 카운터에서 브랜디를 마시던 중에 갑자기 취기가 엄습해 온 것이었다. "여기가 당신 방?" "그래요. 가게 안쪽이 살림집이거든. 메고 와서 재워 준 거야. 걱정 마, 그 아가씨를 생각해서 바지는 벗기지 않았으니까." 아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커피, 마시겠어?" "마시죠. 정말 면목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관둬. 취한 척하면서 날 덮치기라도 했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만 폐를 끼친 건......." "없어, 하나도. 형사가 한집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하자 안심하고 마실 수 있어서 좋던데 뭘." 아이는 흰 도자기 모닝컵에 커피를 따랐다. "자, 마셔." "고맙습니다." 사메지마는 테이블 앞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입은 채 잔 탓일까, 양복이 몸에 후줄근하게 감기는 것 같았다. "잠이 깼으면, 자, 여ㄱ어요." 사메지마가 커피를 마시는 걸 본 아이는 타월과 새 칫솔을 내밀었다. "세수하고 와. 일회용 면도칼, 거울 뒤에 있을 거야." 사메지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몇 시에 잠이 들었죠?" "5시쯤이었을까? 조금 전에 일어나서 빨래를 막 끝낸 참이야." 사메지마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아침을 지어야지, 이젠. 밥이 좋아, 아니면 빵?" "그만두십시오. 그렇게까지 폐를 끼쳐서야......." "손가기는 마찬가지야. 뭘로 할래?" 쓸데없는 사양은 말라는 투였다. "그럼 밥. 이미 지었나요?" "물론. 빵을 찾는 것보다 훨씬 고맙지 뭐야. 자, 얼굴 씻고 와요. 세면장은 저쪽이야." 그럼 실례합니다." 사메지마는 조그마한 태피스트리가 걸린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밤낮없이 가게에 매달리면서도, 집안 어느 한구석 지저분한 곳이 없었다.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수염을 깎았다. 상쾌한 기분으로 세면장에서 나오자 된장국 끓는 냄새가 물신 풍겼다. "거기서 TV 라도 보면서 기다려. 조간은 테이블 위에 있어. 싫어하는 음식 있어?" 부엌 칸막이 사이로 아이가 얼굴을 내밀면서 물었다. "뭐든 잘 먹습니다." "낫토 (콩을 삶아 발효시킨 것. 청국장과 비슷 - 역주) 도?" "네, 좋아합니다." "왜 그래? 말투가 왜 그러느냔 말야? 닭살 돋게." "......알았어. 전화를 좀 써야겠는데......." "거기 있어. 맘대로 써." 침대로 사용했던 소파 옆, 소형 원형 탁자에 무선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사메지마는 자기가 덮고 잔 담요를 갠 다음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 의자, 제법 편하지?" 아이가 물었다. "그래, 푹 잤어." "하마쿠라도 여길 오면 거기서 자곤 했어." 사메지마는 고개를 흔들면서 수첩을 꺼내어 폈다. 타키자와에게 연락해서 점심시간에 만나볼 작정이었다. 타키자와가 가르쳐 준 직통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왔다. "네, 사찰 제 5입니다." "여보세요, 전 사메지마라고 합니다. 타키자와씨 안 계신가요?" "잠깐...... 기다리세요." 약간 낭패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화기에선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음악이 그치면서 또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바꿨습니다. 저는 타키자와 상사로서 통괄을 맡고 있는 이토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타키자와를 찾으시는지...... 타키자와가 오늘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방하시다면 제가 대신......." "전 대학 때 친구로 신주쿠 서에서 일하고 있는 사메지마라고 합니다." 자기 소개를 주고받게 되어 사메지마는 소속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사메지마씨...... 경찰관이시군요." "네. 허나 지금은 약간 사정이 있어서 출근을 않고 있습니다만." "그럼 이 전화는 자택에서?" "아닙니다. 아는 사람 집에서 걸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좀 어리둥절해 하는 상대방을 사메지마는 다잡았다. "타키자와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아닙니다...... 실은 오늘 아침 타키자와가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사고?" "네. 출근길 역에서 그만...... 플랫폼으로 굴러떨어졌는데 불행하게도 때마침 전동차가......." 이토는 더듬거렸다. 사메지마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목숨을 잃었습니까?" "네." 이토는 겨우 알아들을 정도의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고 수사는 어디서?" "가나가와 현경 쓰루미 서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사고를 당했는지 아신다면......." "글쎄요, 자세한 건 아직. 플랫폼 제일 앞쪽에 서 있다가 그만......." "알겠습니다." "저어, 사메지마씨는 신주쿠 서 어느 부서에 계시는지......?" "방범괍니다." 실례했다는 인사와 함께 사메지마는 전화를 끊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식탁을 차리고 있던 아이가 물었다. 사메지마는 심호흡을 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아직 지끈거렸지만, 취기는 말끔했다. "이젠 먹어도 돼. 다 차렸어." "고마워. 잘 먹겠어." 사메지마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낫토. 연어절임. 달걀 프라이에 된장국이 곁들여 있었다. 무와 튀김을 넣은 된장국이 시원했다. 밥도 사메지마가 좋아하는 된밥이었다. 젓가락을 들자마자 번개같이 먹어치웠다. 어제 본청에서 준 밥엔 거의 젓가락조차 대지 않은 사메지마였다. "잘 먹는군." 아이가 기쁜 듯이 웃으며 말했다. "맛이 괜찮아. 밥장사해도 괜찮겠구먼."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이런 메뉴, 가게에 내놔 봤자 사먹을 사람 한사람도 없어." "그런가?" "싸면 팔리겠지만. 진짜 밥집처럼 말야. 하지만 식사를 마친 뒤 밥갑 못잖은 커피를 마시는 멍청한 손님은 또 어떻게 보지?" "그렇군." 밥 두 공기를 비우고 나자 배가 불렀다. "하마쿠라도 식욕이 왕성했어. 특히 이런 아침 메뉴를 좋아했어. 그런 사람이 중병에 걸렸을 까닭이 없어." 아이는 설거지를 하면서 단정하듯 잘랐다. 식후 커피도 끓여 주었다. "전화 한군데 더 걸어야겠는데......." "맘대로 써." 사메지마는 신주쿠 서 번호를 눌러 모모이를 연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타키자와가 죽었습니다." "언제?" 모모이 목소리는 침착했다. 어젯밤 헤어진 뒤 줄곧 방범과 자기 책상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 느낌조차 받았다. "오늘 아침, 플랫폼에서 떨어져 전동차에 깔린 모양입니다. 쓰루미 서에서 수사를 하고 있답니다." "그래? 한번 알아보지." "그리고 미쓰즈카와 <가마이시 클리닉> 관계도 알아냈습니다." "어떻게 연결되어 있어?" "미쓰즈카는 지금 고급 미용 살롱 여사장의 비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모모이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등잔 밑이 어두웠군.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 말인가?" "네." "시마오카 기획에 돈을 대고 있는 것도 바로 거기겠군." "아마도." "헌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나, <가마이시 클리닉>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뛰어볼 생각입니다." "오늘 아침 본청에서 통보가 왔어. 자네는 정직(停職) 중이라고 말야." "네.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한 말은 듣지 않은 걸로 해 주십시오." "안 돼. 무슨 일을 하든 내겐 반드시 알려야 해!" "그러나 과장님까지 말려드시게 할 순 없습니다." "연금이 탐이 나서 여기 이렇게 죽치고 있는 게 아니란 거 자네도 알지?" "그럼 이렇게 해 주십시오. 본청은 지금 제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어젯밤 안 돌아갔었나?" "네. 침몰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당분간은 노가다 아파트엔 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과장님께는 정기적으로 연락드리죠. 제게 연락이 있었다고 본청 2과 시라사카 경위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과장님에게 미칠 누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제가 구속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될 것 같은가?" "아마도. 어떻게 하든 절 제거하겠다면 매스컴을 동원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꽤 심각하군, 상황이." "각오는 돼 있습니다." "한가지만 충고하지. 지금부터 자네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간에 절대로 경찰 직함을 써선 안 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넬 노리는 패거리가 가만 있지 않을 테니까 말야.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 복직이 되더라도 그 일로 다시 발목을 잡고 늘어질지도 몰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험한 말이었다. 모모이가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는 걸로 보아 지금 방범과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라사카 경위에게 너무 기대하지 말 것. 그가 아무리 자넬 믿는다 하더라도 나와 마찬가지로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아. 위에선 자네 운명을 일개 병사에게 맡기지는 않아. 절대로!" "네. 충고, 명심하겠습니다." "쓰루미 서엔 한번 알아보지. 어쩌면 자네에겐 유리하게 적용 될지도 모르겠어. 단, 자네 알리바이가 성립된다면 말이야." 그런가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 사메지마는 미모리 죽음 뿐만이 아니라 타키자와 죽음까지 추궁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경우, 이리에 아이의 증언이 펼요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1대 1의 증언일 경우, 효력이 약했다.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둔다면 어젯밤 여기서 곯아떨어진 것도 경솔한 일이었다. 자기 아파트로 돌아갔다면 잠복하고 있는 형사들이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것이 아닌가.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다. 이구치가 캡으로 있는 2과 특명형사들도 타키자와의 죽음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사메지마 입장이 그만큼 더 나빠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구치가 신중한 사람이라면 사메지마를 당장 구속하려고 서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메지마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유리문에 나붙은 종이쪽지를 본 순간, 사메지마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 사정에 따라 휴진합니다. > 진료 재개 일자까지는 열흘도 더 남아있었다.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이처럼 의사도 간호사도 자취를 감춘 것은 이 병원에서 저질렀던 범죄행위의 증거를 모두 처분해 버렸다는 의미였다. 모든 것을 깨끗이 처분해 버렸기 때문에 <가미이시 클리닉> 은 휴업한 것이었다. 설령 압수수색을 한다 하더라도 무엇 하나 찾아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미모리를 죽인 시점에서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의사도, 시마오카 후미에도 집에서 죽치고 있을 턱이 없었다. 범죄와 연관된 증거가 없는 이상, 얼마나 오랫동안 어디를 어떻게 여행하든 그것은 본인들의 자유였다. 사메지마는 유리문을 흔들어 보았다. 잠겨 있었다. 진 것이었다. 상대는 언제나 이쪽보다 한발 앞서 가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메지마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미쓰즈카 짓인지, 다른 사람의 짓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위험인물이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제거하고 있었다. 하마쿠라. 미모리. 타키자와. 미쓰즈카 짓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한때 우수한 형사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연속살인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기 싫었다. 살인의 죄값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직 경찰관이라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사메지마는 주춤주춤 발길을 돌렸다. 신주쿠 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노가다 아파트엔 야시로가 잠복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제는 갈 곳조차 없어진 것일까. 아니, 있었다. 눈앞에 우뚝우뚝 치솟아 있는 고층 빌딩을 바라보자 언뜻 생각이 났다. 스도 아카네. 스도 아카네를 만나봐야 했다. 그 길은 아직 남아 있었다. < 17 > "이쪽으로 오세요." 의사 지시로 간호사가 앞장 서서 사메지마를 안내했다. 벽과 천장이 모두 흰색으로 통일된 무기미한 느낌을 주는 병원이었다. 신주쿠서 전동차로 거의 2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복도 한쪽 면은 모두 유리였다. 사메지마가 택시를 대기시켜 놓은 병원 정면 현관과 정원이 환히 내다보였다. 재벌 그룹 계열의 부동산 회사가 관리하고 있는 광대한 별장지대 한구석에 들어서 있는 병원은 겉보기엔 요양소 같은 인상을 주었다.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별장 관리사무소를 거쳐야 했다. 여름 행락철에는 이 일대가 피서 인파로 몹시 붐볐다. 카루이자와 보다 거리도 가깝고, 젊은이들 취향으로 꾸민 곳이어서 인기가 높았다. 모모이를 통해 스도 아카네가 입원한 병원을 알아낸 사메지마는 JR 요요기역 앞에서 꽃다발까지 샀다. 별장지대 입구, 인터폰으로 관리사무소에 병원 이름을 댔다. "환자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말에 사메지마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도 아카네씨를 문병왔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이어서 게이트 차단기가 올라갔다. 병원 정문 접수 아가씨에게 다시 한 번 문병왔음을 알려야 했다. 스도 아카네는 인공투석 중이었다. 사메지마는 로비 옆 대기실에서 한시간 가까이 기다렸다. 이윽고 지금 간호사가 병실로 안내하고 있는 것이었다. 건물 내부는 무의미한 백색을 별도로 한다면 놀랄만큼 화려했다. 대기실에는 대형의 진짜 가죽 소파와 대형 텔레비전을 여러 대 갖추어 놓고 있었다. 창 너머로는 눈덮인 중앙 알프스 봉우리가 내다보였다. 병원 내부는 물밑처럼 조용했다. 아무리 병원이라지만, 너무도 조용해서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여긴 환자가 몇 분이나 입원해 있나요?" "병실이 모두 서른이에요." 간호사는 걸어가면서 대답했다. "서른? 그중의 1실은......." "전부 1인 특실이에요. 다 왔어요. 여기예요." 복도 끝방 앞에서 걸음을 멈춘 간호사는 노크와 함께 도어를 열었다. "스도씨, 문병 오셨어요. 오늘은 남자 분이세요." 간호사가 병실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사메지마는 깜짝 놀라 간호사를 쏘아 보았다. 스도 아카네는 식물인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대답은 없었다. "자, 들어가 보세요." 간호사가 옆으로 비켜섰다. 병실로 한 발 들어서면서 사메지마는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 온실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6평쯤 됨직한 공간, 병상(病床)을 제외하면 병실 전체가 난으로 덮여 있었다. 빨강. 하양. 보라, 온갖 색깔이 어우러져 있었다. 대부분이 화분이었다. 병실 입구에서 창과 병상 사이에만 겨우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길이 트여 있었다. 마치 난꽃밭 두렁 같았다. 병상에는 의료기계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놀랐는걸......." 사메지마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동생분이 오실 적마다 가지고 온 거예요. 병실 안은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니까 난도 꽤 오래 가나봐요. 물 주는 게 보통일이 아니지만 ......." 간호사는 사메지마를 보면서 웃었다. "스도씬 난을 무척 좋아했대요...... 굉장하죠?" 이처럼 많은 종류의 난을, 사메지마는 꽃집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 난의 숨결 탓인가, 아니면 환자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일까, 병실은 복도보다 온도가 높았다. "언니가 이렇게 된 걸 몹시도 가슴 아파하나 봐요. 이처럼 올 적마다 좋아하는 난을 갖다놓은 걸 보면." 사메지마는 입을 다문 채 병상 곁으로 다가갔다. 믿어지지가 않을 만큼 희고 투명한 살갗이었다. 마치 유리막대기처럼 가늘고 투명했다. 조금만 힘주어 눌러도 금방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귀품이 서린 반듯한 콧날하며, 만약 눈을 뜨고 있다고 함부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여기 입원한 지도 6년이나 된다면서요?" "네. 이 병원 오픈했을 때부터였으니까요." 치바 병원에서 사마오카 후미에와 함께 사고를 당한 이후 스도 아카네로서는 세번ㅉ 병원이었다. 하치오지의 두번째 병원에서 16년을 보냈던 것이었다. 22년 동안 스도 아카네는 식물인간으로 잠만 자고 있었다. 22년 전에 무슨 변을 어떻게 당했는지, 그녀에게서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설령 그녀가 이처럼 식물인간이 된 원인이 어느 누구에게 의해 계산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형법상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시효가 완성된 지도 오래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는 심호흡을 했다. 스도 아카네를 바라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숨까지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 간호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병원측은 느닷없이 찾아온 낯설은 문병객을 수상쩍게 생각했는지, 간호사 입회를 조건으로 세웠다. 사메지마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마오카 후미에라는 여인이 혹시 문병 온 적은 없었나요? 쉰쯤 된 중년 아줌맙니다만." "시마오카씨? 글쎄요...... 제가 알기엔 그런 분이 찾아오신 적은 없었습니다" 살갗이 희고 몸집이 작은 간호사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사메지마와 함께 스도 아카네를 내려다 보았다. "아름다운 분이세요, 이 환자는. 클레오파트라라고 불러 주는 의사 선생님도 계세요." "동생분도 미인이겠죠?" 사메지마는 슬쩍 물어보았다. "네 무척 아름답고 세련된 분이세요. 멋쟁이에요." "멋쟁이?" "한달에 한번 꼭꼭 문병을 오세요. 들고 오는 꽃보다 더 화사하게 보여요. 그 분이 문병오는 날이면 의사 선생님들이 다 들뜰 정도예요." "이 병원에 아카네씨 같은 환자가......." 간호사는 조금 놀란 얼굴로 사메지마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모르시고 계셨어요? 우리 병원 환자는 모두 스도씨와 같은 증세를 앓고 있는 분들이에요." "그럼 모두 식물인간으로?" "네. 그래서 가족분들이 함께 지내실 수 있는 병실도 준비되어 있어요. 저희들 간호사와 협력해서 환자 목욕을 시키거나 머리를 빗기고 손톱도 다듬어 줄 수 있게 말예요." 사메지마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병원이 많습니까?" "아뇨. 모르긴 하지만 여기 한곳 뿐일 거예요. 일본 전국에도." "장기간 1인실에 입원해 있어야 할테니까 비용도 적지 않겠군요." "네. 따지고 보면 부유층 이외엔 이용할 수 없는 곳이에요, 이곳은." "호텔 정도겠군요." "그런 셈이지요." 사메지마는 다시 한 번 스도 아카네를 내려다보았다. 부유층을 상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로비며 대기실도 그처럼 화려하게 꾸며 놓았던 것이었다. 이 병원의 화려한 모든 설비는 환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문병을 오는 환자 가족을 위한 것이었따. 여기 입원해 있는 환자들 가운데는 복도를 걸어다니거나 창밖 경치를 즐기면서 퇴원할 날을 손꼽아 헤아려 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계적으로 조성된 환경 속에서 말은 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냥 눈을 감은 채 숨만 쉬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눈앞에 누워있는 스도 아카네는 화분에 심어둔 난초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물을 주며 가꾸는 동안은 살아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말라죽어 버리는 게 화분 속의 난이 맞아야 할 운명이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화분의 난은 꽃이라도 피울 수 있지만, 그녀에겐 그런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사메지마는 이 병실에 난을 갖다놓은 사람의 짓궂은 마음 -- 잔인한 악의를 읽을 수 있었다. 스도 아카네의 여동생이 그처럼 언니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난은 스도 아카네의 증오의 상징이었다. 그것도 하나의 복수심일까.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입원비용까지 부담해 가면서 꽃핀 난으로 병실을 메우고 있는 것은 복수 치고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복수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후지사키 아야카. 사메지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율이 등골을 헤집고 지나감을 느꼈다. 아름답고 화사한 멋쟁이 여성 사업가라는 그녀의 잔인한 속마음이 손에 잡힐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늪이기도 했다. 사메지마가 신주쿠로 돌아온 것은 오후 7시가 지나서였다. 네온이 번쩍이면서 신주쿠가 더욱 신주쿠다운 모습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막 잠이 들던 도시가 반짝 눈을 떠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스도 아카네 병실에서 받았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경찰관이었기 때문에 다친 사람, 죽기 직전 단말마의 발버둥을 치는 사람을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이 보아온 사메지마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의 결과였다. 결과에서도 충격은 느꼈다. 그러나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슬픔과 분노는 금방 애도로 모습을 바꾸었다. 죽음은 죽음으로서 -- 비록 잔혹하기는 하지만 -- 완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도 아카네의 모습에서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완결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도 아카네의 상태가 과연 죽음인가 아닌가. 의학적인 판단이나 견해가 어떤 것인지 사메지마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죽음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한다면, 그 죽음은 완결이 아닌 현상유지임이 분명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죽음이 죽음으로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병원에 가족을 입원시킨 사람들은 자기 자식, 부모, 형제들이 소생할지도 모르는, 만의 하나도 안 되는 기적 같은 가능성을 바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들은 환자의 모습을 죽음이 아니라 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도 아카네는 달랐다. 스도 아카네의 입원비를 부담하고 있는 후지사키 아야카가 그녀의 소생을 바라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후지사키 아야카는 스도 아카네가 거기서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사냥꾼이 자기가 잡은 짐승을 박제로 만들어 곁에 두고 쓰다듬으면서 또 다른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식물인간으로 잠들어 있는 스도 아카네 모습을 보면서 아야카는 행복감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끔찍할 정도로 비뚤어진 집념이었다. 후지사키 아야카 마음속의 스도 아카네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런데도 후지사키 아야카는 자신의 환희와 즐거움을 위해 그 죽음을 완결시켜 주지 않고 언제까지나 손아귀에 움켜 쥐고 조물락 거리고 있는 것이다. 사메지마의 발길은 하마쿠라와 함께 미쯔스카를 모았던 그 고층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또 한사람의 스도 아카네 -- 후지사키 아야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경찰관으로서가 아니라 시민의 한사람으로서의 사메지마를 크게 성공한 여성 실업가가 반드시 만나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사건과 관련된 사람 가운데 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후지사키 아야카와 미쯔스카 뿐이었다. 하마쿠라 말이 사실이라면 아야카에겐 미쓰지카가 그림자처럼 붙어다닌다고 봐야 했다. 만약 그 두 사람이 함정을 판 장본인이라면 사메지마에 대해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들을 만나는 것은 하나의 도박이었다. 지금의 사메지마에겐 그들의 불안을 구체적으로 집어낼 직무권한도 충분한 시간도 없었다. 또 함정에 빠졌어야 할 먹이가, 덫을 놓은 사람들 앞에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는 것은 그들에게 보다 강경한 고단위 수법을 쓰라고 재촉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도 했다. 보다 강경한 수단 -- 그것은 하마쿠라를, 미모리를, 타키자와를 죽음으로 몰아간 인물이 사메지마 앞에 불쑥 나타난다는 뜻이었다. 고층 호텔 로비에서 사메지마는 모모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 어디야?" 모모이가 잡담 제하고 물었다. 사메지마는 호텔 이름을 댔다. "지금 로빕니다. 야마나시에서 막 돌아온 길입니다." "야마나시? 그 병원엘 갔었나?" "네." "30분쯤 기다려 줄 수 없나? 거기로 갈 테니까."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런 걸 따지고 생각할 여유가 없어. 지금은." 로비 소파에 몸을 묻고 담배를 피워 문 사메지마는 모모이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어쩌면 매스컴이 벌써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찰청 기자실로 누군가가 밀고를 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지금 자기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쯤 될까 하고, 사메지마는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48시간이 채 안될지도 몰랐다. 공보 담당이 기자들 질문을 일소에 부치며 시침을 엔다 하더라도, 눈치 빠른 기자라면 토쓰카 서로 미모리 사망 사건을 문의해 볼 게 틀림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토쓰카 서장이 긴급호출되었던 것, 수사 2과가 민첩하게 출동했던 것 등을 알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기조 취재가 끝나면, 이번은 공보 담당자가 아니라 인사1과, 어쩌면 경무부장을 겸하고 있는 부총감을 직접 찾아갈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시침을 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협력을 요청한다> 는 형식을 빌어, 시한이 지나면 기자들 앞에 어떤 형태로든 결과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기자들 앞에 내놓을 속죄양이 사메지마밖에 없다면, 만사는 그것으로 끝나게 마련이었다. 모모이는 30분도 채 못되어 달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기자실로 밀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다음은 토쓰카 서로군요." 사메지마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게 될게야. 함구령이 내려져 있겠지만, 함구령 자체가 기자들 호기심만 자극할 따름일 테니까......." "시라사카 경위와는 연락이 됐나요?" "음, 자네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전했더니, 어디 있는지 꼭 알아야겠다는 거야. 이대로라면 자네가 최악의 상태에 빠질 거라면서 말야." 사메지마는 쓴 웃음을 지었다. "쓰루미는 어떤 상황입니까?" "사고사인지 타살인지 아직 결론을 못내리고 있더군. 아침 러시아워라서 플랫폼이 몹시 붐볐다는 게야. 목격자 얘길 종합하면 떠밀린 것 같기도 하지만, 누가 밀었는지는 확실치가 않아. 사건 당시 플랫폼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시간에 쫓기는 샐러리맨들 뿐이었어. 탐문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대부분 버스나 택시를 잡아타고 몰려 나가버렸어. 그 중에 가해자가 섞여 있었다 하더라도 찾아내는 게 쉽지가 않아. 다만 이쪽에서 가해자를 알고 있으면,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나 없나 확인 하는 건 어떨지 모르지만." "문제의 인물이 그 시간, 그곳에 있었어야 할 필연성이 없을 땐 더욱 그렇겠군요." "마음에 짚이는 사람이라도 있나?" "우선 두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미쓰즈카 다다시와 시마오카 후미에. <가마이시 클리닉> 은 문을 닫았더군요." 사메지마의 말에 모모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압수수색을 하더라도 헛수고란 말인가?" "의사인 가마이시나 시마오카 후미에를 붙잡기 전엔 무립니다." "언제부터 휴진이었어?" "그저께부텁니다." 모모이는 천장으로 눈길을 던졌다. "튀어버린 건가?" "가마이신 그렇겠죠. 사마오카 후미에가 타키지와를 죽였다면, 그녀는 아직 근처에서 어정대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도 아카네는 어떤 상태야?" "식물인간이었습니다. 병실엔 난이 가득했구요." "난이 가득했어?" "네. 온실처럼...... 무미건조한 느낌이 들더군요." 모모이 얼굴에 뭔가 더듬고 있는 표정이 번졌다. "왜 그러십니까?" "22년 전 치바 병원서 일어났던 사고 말야. 당시 얘기를 들려 준 간호사도 스도 아카네 병실엔 언제나 난꽃이 꽂혀 있더라고 했어. 아카네 어머니가 난을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야." "난을 갖다둔 건 아마도 아카네에 대한 복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복수? 하지만 아카네는 줄곧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질 않나?" "네. 그렇더라도 전 복수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스도가로 들어간 후지사키 아야카는 한살 위인 아카네한테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을 당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결국은 아카네를 살리기 위해 도너까지 되어야 했으니까요. 그런 아야카를 구해 준 것이 바로 시마오카 후미엡니다."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동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죠. 후지사키 아야카를 위해 아카네를 죽일 생각까지 한 걸 보면 후미에가 느낀 동정심이 단순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카네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저렇게 식물인간이 되고 만 겁니다." 모모이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은 후미에가 틀림없군. 22년 전에도 후지사키 아야카를 위해 그런 짓까지 했다면, 지금 미모리나 하마쿠라를 죽이는 것쯤 별 게 아니었을 테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영장을 청구할 수 없습니다." "뭐가 더 필요해? 후미에를 잡아족치면 어떻게 될게야. 적어도 살인은 인정할지 몰라. 해 보지도 않고 결론부터 내릴 순 없는 것 아냐?" "그러시다면 시라사카 경위에게 지금까지의 경과를 얘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시마오카 후미에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해서 족쳐 봤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그건 1과가 해야 할 일이야." "그러면 이구치 경감이나 후지마루 경무관님께 말씀드려 주세요." "1과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네가 결백하다는 완전한 증거가 필요할 거야." "알고 있습니다." "젠장!" 모모이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딱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뭐야?" "시마오카 후미에가 절 노리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어떻게?'" "후지사키 아야카에게 프레셔를 가하는 거죠. 제가 코너에 몰린 걸 숨긴 채 그녀를 죄붙이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겁니다. 만약 후미에가 알면 틀림없이 움직일 겝니다. 비록 제가 몸을 숨기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찾아올 겝니다." "어디에 숨어? 자넨 이제 아파트론 돌아갈 수 없는 처지야." "제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사메지마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 18 > 그날 밤 아야카는 몹시 즐거운 기분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은 순조롭게 번창해 가고 있었다. 경기 후퇴로 젊은 고객을 상대하는 동업자들이 죽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오늘밤 그녀가 기분이 좋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같은 신주쿠에서 영업하던,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 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동업자가 부도를 냈다는 소식을 오후에 들은 것이었다. 그것으로 신주쿠는 완전히 아야카 것이 된 셈이었다.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을 개업한지 얼마 안 되어 아야카는 동업자 모임에서 오늘 부도를 낸 바로 그 경영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예순이 지난 천박스런 여자였다. 손가락엔 반지가 주렁주렁했고, 마치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야단스런 화장이었다. 아야카가 정중히 허리를 굽히자, 천박스런 할머니 얼굴엔 경멸의 웃음이 번졌다. -- 왜들 이럴까, 요즘은. 별별 사람이 다 미용실을 하겠다고 나서니...... 당신은 어느 집 출신이지? 처음에는 미용실 근무 경력을 묻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천박스런 여왕께서 물으신 것은 아야카도 술집 호스테스 출신이 아니냐는 빈정거림이었다. -- 그쪽 출신들은 자기 얼굴화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지. 허나 쉽지 않아요, 이런 일. 분노와 굴욕감 때문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 손님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끼기나 하는지 몰라. 독립을 하고 싶다면 몸에 익은 장사를 하는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았을텐데....... 여왕마마가 부도를 냈다는 소식은 단골로 드나드는 탈모기(脫毛器) 업자가 물고 왔었다. 덴엔초후의 궁전같은 집도 담보로 들어 있다고 했다. 만약 그 저택이 공매된다면 아야카는 자기가 사고 싶었다. 여왕마마 집이니까 내부장식이 천박스러울 게 틀림없지만, 그것을 두들겨 부수고 새로 꾸민다면 얼마나 유쾌할까. 호텔 방은 호텔 방대로 쓰면서 집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탈모기 업자가 넌지시 알려온 것은 가게를 떠맡을 생각이 있나 없나를 타진하려는 여왕마마의 심부름이란 것도 아야카는 금방 눈치를 챘다. 실수요자에게 에스테 살롱을 그대로 넘길 수만 있다면 낡은 빌딩으로 처분하는 것보다 훨씬 비싸게 팔 수 있다고 여왕마마가 생각한 것이었다. 때문에 동업자 가운데 가장 번창하고 있는 아야카에게 납품업자를 시켜 슬쩍 속셈을 떠본 것이었다. 비록 부도가 났다고 하지만, 재산을 처분할 시간 여유는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카부키쵸 입구에 있는 헐어빠진 빌딩을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같은 신주쿠이긴 해도 그 언저리와는 연관을 맺고 싶지 않았다.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은 젊은 아이들은 상대하지 않는 곳이었다. 엘리트 사원을 남편으로 낚기에 정신이 없는 여사원이나 호스테스 따위를 상대해 봤자 바쁘기만 할 뿐 큰돈은 안되었다. 여왕마마가 부도를 낸 것도 젊은 고객을 확보하려고 다른 살롱과 무리한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자기는 그처럼 어리석지 않다고 아야카는 생각했다. 무리하게 점포를 확장해 가면서까지 천박스런 여왕이 될 생각은 없었다.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 어쩔 줄 몰라하는 상류층 마나님을 상대하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여왕이 아닌가. 다른 날보다 일찍 돌아와 샤워를 마친 아야카는 프로즌 다이키리를 한잔 따라 들었다. 국세청 사찰부 녀석은 처리가 끝났고, 신문사에도 슬쩍 정보를 흘려놓은 지금,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후미에는 정든 아파트를 떠나기 싫어했다. 그러나 사메지마라는 형사가 완전히 범인으로 굳어지기까지는 몸을 숨기는 게 좋겠다고 설득을 했다. -- 너한테 폐를 끼치게 됐어. 서둘러 주말용 임대 아파트로 옮겨간 후미에가 전화를 걸어왔다. -- 괜찮아, 아줌마. 마음 쓸 것 없어요. 그것보다 2,3일이면 끝날 테니까, 그 뒤에 우리 어디 온천이나 가요. 마음 푹 놓고 온천을 즐기면서 생선도 실컷 먹어보고....... 아야카는 넌지시 권해 보았다. 미쓰즈카가 품고 있는 걱정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돌연한 환경변화에 후미에가 불안해 하고 있음을 아야카도 알고 있었다. 후미에 마음 속에는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었다. 베테랑 간호사로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독신녀의 모습과, 필요하다면 언제든 누구나 처분해 버릴 수 있는 냉철한 살인자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하마쿠라. 미모리. 국세청 사찰관을 죽인 게 후미에로서는 부엌의 바퀴벌레를 밟아뭉갠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걸로 해서 자기가 범죄자로 타박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아야카가 보기엔 아줌마 -- 후미에는 양심적으로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아줌마의 양심이었을 뿐이었다. 아줌마 뿐만이 아니라 사람은 모두 그런 것이 아닌가. 거리에 버려진 고양이 새끼를 불쌍히 여겨 집으로 데려가 우유룰 먹이는 사람이, 사업을 위해서는 태연한 얼굴로 영세업자 일가를 집단자살로 몰고 가기도 하는 것이었다. 고양이 새끼는 가슴아파하면서도 목을 매단 노인에겐 차가운 시선을 던지는 것이 인간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숨겨야 한다고 얘기했을 때, 아줌마가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불안과 혼란에 휩싸인 것이었다. 지금쯤 아줌마는 <왜, 어째서 내가 이런 곳으로 쫓겨와야 하나?> 하고 속상해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야카도 가슴이 아팠다. -- 미안, 아줌마. 미안해, 아줌마. 요란한 전화 벨 소리에 아야카는 움찔 놀랐다. 시계를 보았다. 11시 10분 전이었다. 몸을 일으켜 수화기를 들었다. "스도 사장님, 프론트입니다. 지금 여기에 사메지마씨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한순간, 공포감이 가슴을 에이며 지나갔다. 사메지마. 왜? 어째서 지금 여기엘. "바꿔드리겠습니다." 프론트 직원의 정중한 말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바꾸지 마! 난 통화하기 싫어! 할 얘기가 없단 말야! 그러나 수화기는 이미 사메지마가 들고 있었다. "여보세요, 밤늦게 실례가 많습니다. 나는 사메지마라고 합니다." 미쓰즈카, 미쓰즈카가 있어야 하는데....... "네." 그러나 아야카 목소리는 침착했다. 낯선 사람의 돌연한 전화에 따른 의아스러움과 당혹감이 약간 섞이긴 했으나 침착한 목소리였다. 좋아, 이 정도라면 괜찮을 거야. "실은, 스도씨 친구분인 시마오카 후미에씨와 신주쿠 <가마이시 클리닉>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 사메지마 목소리도 침착하고 나직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자신에 넘쳐 있었다. 뭔가를 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마오카씨......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이군요. 또 병원 이름도 처음 들어보구요." "그렇습니까? 시마오카씨를 만나보러 야마나시 쪽에도 가봤습니다만." 야마나시. 야마나시가 어떻게 됐단 말인가. "야마나시라고 하셨나요?" "언니분이...... 사실은 이종언니이지만...... 입원해 있는 병원 말입니다." 순간, 아야카는 발 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 사내는 지금 아카네를 만나고 왔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야카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침착해야 한다. 이 사내는 나한테 손끝 하나 댈 수 없다. 만약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증거가 될만한 건 하나도 없지 않는가. 기껏 속이나 박박 긁어놓고 가는 게 고작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언니를...... 만나보셨군요." '네. 아름다운 난에 묻혀 있더군요.' <무슨 권리로> <무슨 권리로> 아카네를 찾아갔느냐고 따져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상대방한테 이쪽의 약점을 드러내 보이는 짓이었다. "사메지마씨는 지금 로비에 계세요?" "네." 이 남자가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지, 얼마나 초조해 하고 있는지를 넌지시 떠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물론 두 사람만 만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때문에 방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만약 자기를 함정에 빠뜨린 장본인이 아야카임을 사메지마가 알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겠어요.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오늘은 몸시 피곤해서 오래 얘길 나눌 순 없을 것 같은데......." "15분이면 충분합니다." 사메지마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말투가 너무도 단호했기 때문에 아야카는 오히려 안도감마저 느꼈다. "그러시면 로비 옆에 있는 카페테라스에서 기다려 주세요. 저도 준비되는 대로 곧 내려가겠어요." "고맙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아야카는 다시 창가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미쓰즈카가 필요했다. 우선 미쓰즈카에게에 연락하는 게 급했다. 미쓰즈카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불과 한시간 전이었다. 때문에 아직 아파트엔 도착하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네." 수화기에서 미쓰즈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래방인지, 아니면 유선방송이 흐르는 술집인지 젊은 여자 노랫소리가 깔려 있었다. "나예요. 지금 사메지마가 아래에 와 있어. 날 만나재." "뭐라구? 안 돼! 만나면 안 돼. 절대로!" "하지만 벌써 야마나시에도 다녀왔댔어." "야마나시라니? 병원 말인가?" "응." "지금 그쪽으로 가겠어. 기다리고 있어!" "거긴 어디야?" "요쓰야. 20분이면 도착할 거야!" "그처럼은 기다릴 수 없어." 미쓰즈카가 허둥대는 걸 보자 아야카는 더욱 침착해졌다. "만나기로 했나?" "응. 딱 15분 동안만." "멍청이 같으니라구. 얕잡아 봤단 큰코 다쳐. 사메지마라는 형사 말야." "혼자 온 것 같아. 그리고 자기가 형사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던데?" "어쨌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 미쓰즈카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질 까닭이 있겠어? 아야카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메지마를 만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최대 최강의 적인 사메지마를 만나러 내려갈 생각이었다. 밸도 없는 시골뜨기 사내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녀석에게 이 아야카가 진다면 말이나 되는가. 돈도 없고, 경찰이라는 특별한 사회에 속해 있는 중년 사내에게 질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그 조직에서조차 지금 미끄러져 떨어지고 있질 않는가. 생각해 보면 자기와는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점을 슬쩍 건드리면서, 그러나 분명히 깨닫게 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형사라 하더라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었다. 그걸로 만사는 ㄲ끗이 매듭이 지어지는 것이었다. 아야카는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아름답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눈초리엔 힘이 철철 넘쳐나야 했다. 아름다움이야말로 내 무기가 아닌가. 아야카는 배스룸으로 들어갔다. 일단 지웠던 화장을 다시 엷게 한 다음 아야카는 일층으로 내려갔다. 뭘 입을까 한참 망설였다. 수트는 좀 뭣했다. 그러나 남자와 사업 얘기를 할 때는 스커트를 입고 가는 게 유리하다는 것을 아야카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물론 너무 짧은 것은 안 되었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염려가 있었다. 짙은 색 스타킹을 신고, 앉을 때 자연스럽게 무릎이 드러나는 정도의 길이가 가장 알맞았다. 각선미엔 특히 자신이 있었다. 아야카는 V네크 스웨터와 회색 타이트 스커트를 골랐다. 핸드백 대신에 지갑과 담배를 넣은 포치를 들기로 했다. 상대방 태도를 봐가면서 담배를 피울지 말지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로비의 카페테라스엔 손님이 3분의 1쯤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수트 차림의 남녀들이었다. 아야카가 들어서자 가까이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어서 오세요, 스도 사장님." 낯익은 웨이터가 은근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어떤 분과 만나시기로 하셨나요?" "응." 아야카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분이야. 혼자 기다리고 있을걸." "알았습니다." 웨이터는 공손히 머리를 숙인 다음, 다섯 걸음 쯤 떨어진 관엽 식물 뒤쪽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계신 저 손님이십니까?"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넥타이 차림이었다. 체크 무늬 셔츠에 짙은 녹색 바지, 키가 훌쭉한 게 멋진 체격이었다. 눈빛은 날카로우면서도 해맑았다. "스도씹니까?" 낮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옆자리엔 점퍼가 걸쳐져 있었다. 아야카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타입, 나이도 훨씬 젊게 보였다. 서른 이쪽저쪽, 어쩌면 아야카 자신보다 손아래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경박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젊게 보이는 것은 차림새와 장발 때문이었다. 별로 값진 옷은 아니었으나 색깔을 맞춘 센스는 일품이었다. 머리는 앞쪽보다 목 뒷부분을 훨씬 길게 길러 독특한 인상을 느끼게 했다. 경찰관이라기 보다는 디자이너나 카메라맨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아무리 보아도 형사 같지가 않았다. "사메지마씨세요?" "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밤늦게 폐를 끼치게 됐군요. 자, 이리로 앉으십시오." 자기 건너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사메지마 동작 하나하나엔 빈틈이 없었다. 우아하게까지 느껴졌다. 부자연스럽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무뚝뚝한 것도 아니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데다가 물질적으로도 부자유스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난봉꾼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나, 상대할 여자가 없어 속을 태워야 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아야카는 살며시 심호흡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사메지마에게서 남자를 느끼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미쓰즈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다. "우선 마실 것부터 시키시죠." 맞은편 자리에 걸터앉는 아야카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사메지마가 말했다. "프레시 오렌지 주스를 시켜 주세요."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웨이터를 쳐다보았다. 웨이터는 허리를 굽혀 보인 뒤 물러갔다. 아야카는 당혹감과 초조감이 일기 시작했다. 여기는 내 성이 아닌가.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 사내는 마치 자기 집에서처럼 당당하고 침착하게 나를 맞고 있지 않는가. 다시 한번 사메지마 눈을 쏘아보았다. 이번엔 차가운 아픔을 느꼈다. 사메지마 눈길은 똑바로 아야카 눈 속을 꿰뚫고 있었다. 불안이나 동요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눈길이었다. 애매함이나 싸구려 동정심 같은 건 털끝만큼도 없었다. 사메지마 눈 속 저편에는 진짜 사나이 모습이 있었다. 섬세하게 느껴지는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실패와 패배를 모르는 눈이 아니었다. 고통과 슬픔을 겪을대로 겪고 일어선 어른의 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과 안일을 거부하는 반석같은 신념이 번뜩였다. 아야카는 가슴 한복판에서 후회와 두려움이 치솟고 있음을 느꼈다. 절대로 적으로 돌려서는 안되는 사람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다. "간단히 요점만 물어보겠습니다. 본명은 후지사키 아야카씨죠?" "네." 아야자는 자기 목소리가 긴장으로 굳어 있음을 느꼈다. 위압을 당한 건 아니었다. 이쪽에서 압도되고 만 것이었을 뿐이었다. "열세살 때, 스도 아카네씨가 입원한 병원에 후지사키씨도 입원한 적이 있으시죠?" "네." "이유는 신장이식 도너가 되기 위해서였었죠?" "이미 조사해 보셨군요, 자세히." 아야카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대답했다. 사메지마는 수첩이나 메모 같은 건 전혀 보지 않았다. 모든 걸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식수술은 이루어지지 않았더군요. 왜죠?" "직접 보셨죠? 언니가 어떻게 됐는지를." "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자세히 알고 싶군요." 시침을 떼거나 둘러대는 건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야카는 열심이 머리를 굴려가면서 입을 열었다. "사고였어요. 간호사가 언니를 데리고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트럭에 부딪치고 말았어요." "정확히 말해서 부딪친 건 언니가 아니라 언니가 탄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호사였습니다." "정확한 건...... 그랬을지도 몰라요. 이미 20여 년이나 지난 일, 생각만 해도 금찍한 일이어서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알았습니다." 사메지마의 한마디에 아야가는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알았다구? 도대체 뭘 알았다는 걸까. "당시 그 간호사가 시마오카 후미에씹니다. 기억하고 계세요?" "아니요." "그렇습니까? 시마오카씨는 현재 바로 이 호텔 근처에 있는 <가마이시 클리닉> 이라는 산부인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아뇨." "그 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나요?" "네. 왜 그런 걸 저한테 물으시죠?" "<가마이시 클리닉>의 경영모체는 시마오카 기획이라는 회삽니다. 허나 일개 간호사에 지나지 않는 시마오카 후미에씨가 어떻게 해서 개인병원의 오너가 될 수 있었는지, 상당한 관심을 갖게 하는군요." "그런 걸 저한테 물어봤자......." "그럼 미쓰즈카씨는 잘 아시죠? 미쓰즈카 다다시씨 말입니다." "네. 제 어시스턴트예요." "미쓰즈카씨가 알고 지내는 사람 가운데 혹시 미모리씨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요?" "미모리씨......? 글쎄요." "그렇습니까? 야마나시 병원엔 자주 문병을 가시나요?" "저어......." 아야카는 목소리에 힘을 넣었다. 이쪽에서 반격을 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사메지마씨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나 제 언니 일을 조사하고 다니시나요? 뭔가 제가 잘못한 일이라도, 아니면 사메지마씨에게 폐 끼칠 짓이라도 했나요?" "아뇨." 사메지마도 가볍게 눙쳤다. "그런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제 아는 사람 가운데 하마쿠라라는 사내가 있었죠. 2주일쯤 전에 바로 이 자리에서 그와 만나 선 채로 얘길 나누었었습니다. 그는 <가마이시 클리닉>과 트러블이 생겼다고 했어요. 하마쿠라는 이튿날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혈관내 응고증후군> 이라는 특수한 것이었구요. 그 며칠 뒤, <가마이시 클리닉>과 트러블의 원인이 된 환자의 내연의 남편이 심야에 <가마이시 클리닉> 으로 간다면서 나간 뒤 행방붊명이 되었습니다. 신주쿠 서 형사로 근무하고 있는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당연한 일이죠. 나는 <가마이시 클리닉> 으로 가서 시마오카 후미에씨를 만났습니다. 그때, 우연히도 대학시절의 친구였던 국세청 사찰관이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 나오는 걸 봤었죠. 물론 그는 환자가 아니라 국세청 사찰관 자격으로 병원을 찾았던 것이구요. 그는 아까 말씀드린 미모리라는 사내 뒤를 캐고 있었죠. 미모리는 장물아비, 다시 말씀드리면 도둑질한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입니다. 나는 미모리와 <가마이시 클리닉>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마이시 클리닉>이 저지르고 있는 어떤 범죄행위에 미모리도 한몫 끼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헌데 이번에는 그 미모리가 공사중인 빌딩에서 떨어져 죽었고, 뒤이어 <가마이시 클리닉> 배후관계를 조사하던 국세청 사찰관도 출근 도중 전동차 플랫폼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대체 얘기하고 싶은 게 뭐예요?"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어요. 사고인지 살인인지로 말입니다. 미모리와 국세청 사람의 죽음은 타살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 경찰청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가마이시 클리닉> 에 접근한 사람은 줄을 이어 목숨을 잃었어요. 경찰로서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지금까지의 죽음이 동일인물의 범행이라면, 분명히 말해서 범인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겁니다. <혈관내 응고증후군> 으로 죽은 하마쿠라에 대해선 그것이 병사인지 살인인지 전문가들도 결론을 못 내리고 있는 게 사실이에요. 허나 사람으로 붐비는 플랫폼에서 선로로 떨어져 전동차에 깔려죽은 국세청 사찰관의 경우, 틀림없이 어떤 증거가 나타날 겝니다. 누군가가 떠민 것이거나, 누군가에 밀린 것이 분명해요. 그게 누군가는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렇게 수사의 폭을 좁혀가면 반드시 범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만, <가마이시 클리닉> 을 둘러싼 많은 죽음 가운데 단 한건이라도 살인이었음이 밝혀지면 나머지 다른 죽음도 철저한 재수사에 착수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진상을 꼭 밝혀 내고 말 겁니다. 누가 무엇 때문에...... 다시 말하면 무엇을 숨기려고, 지키려고, 사람까지 죽였는가도 반드시 밝혀지게 될 겁니다."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예요." 아야카는 잘라 말했다. 반격이 이처럼 허무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메지마가 아야카에게 고개까지 끄덕여 보인 사실이었다. "나도 오늘 이처럼 만나뵙고 보니까, 후지사키씨가 관계없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는군요. 그 많은 사람의 죽음과 연관되었다고 보기에는 후지사키씨의 사회적 지위나 명예가 너무 무겁군요. 또 무엇보다도 한 여성으로서 무척 매력적인 분입니다. 그런 사람이 살인이나 장물거래 같은 범죄에 손을 댔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싫군요." "이해해 주시겠어요?" 한순간 목소리가 울먹이는 것 같아서 아찔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싶군요." 사메지마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런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모든 범죄행위에 틀림없이 관련되어 있는 특정 인물을 후지사키씨는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떼고 있어요.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군요." 아야카는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사메지마도 조용히 마주 쏘아보았다. 아야카는 다시 공포감이 치솟아올랐다. 이 사내는 아줌마 -- 후미에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제 명예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군요, 방금 하신 그 말씀에."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야카를 물끄러미 노려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지금 하신 말씀, 그쪽 입장만 생각해서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기라도 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법적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사메지마는 한마디로 잘랐다. 고집불통이었다. 지금 자기가 어떤 궁지에 놓여 있는지,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허세인가, 아니면 자신감 때문인가. 아야카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허세로 보고 싶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마도 두번 다시 사메지마씨와는 만나지 못할 거예요. 어떻든 간에 저와 제 언니를 조용히 내버려 두길 바라겠어요." 말을 마친 아야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메지마도 따라 일어섰다. "이렇게 만나 주신 것, 거듭 감사드립니다." 정중한 인사였다. 그런 사메지마 눈을 똑바로 쏘아보면서 아야카도 한마디 톡 쏘았다. "만나뵌 것, 후회하고 있어요."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 19 > 사메지마는 아야카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자신의 강인함이 대견스러웠다. 끝까지 자제심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쏜 화살이 상대방에게 얼마만큼 깊게 박혔는지, 솔직하게 말해서 자신이 없었다. 카페테라스 카운터에서 요금을 지불한 그는 주변을 휙 둘러 보았다.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후지사키 아야카는 혼자 나타났었다. 그렇다면 이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1만 엔짜리로 커피와 오렌지 주스 값을 치르고 거스름돈을 받아든 사메지마는 로비로 나왔다. 그러나 몇 걸음 떼놓지 못하고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홀 기둥 옆에 미쓰즈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사메지마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사메지마도 입을 꽉 다문 채 마주 쏘아보았다. 밝은 소프트 수트에 세컨드 백을 겨드랑이에 끼고 서 있는 미쓰즈카 얼굴은 차갑고도 날카로웠다. 현역 형사의 날카로움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육감으로 범인이 틀림없다고 판단을 내린 형사가 피의자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증거를 잡아보이겠다고 결심했을 때의 표정 그대로였다. 지금 자기 얼굴에도 그런 표정이 나타나 있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15미터쯤 되었다. 미쓰즈카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땡하는 소리와 함께 멈추며 문이 열렸다. 팔짱을 낀 백인 노부부가 내리는 게 보였다. 미쓰즈카가 휙 돌아섰다.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힐 때까지 사메지마와 미쓰즈카는 다시 서로를 노려 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조용히 닫혔다. 사메지마도 조용히 숨을 내쉬면서 다시 발걸음을 ㄸ어놓았다. 회전문을 타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 현관 앞에는 빈 택시 몇대와 검정색 승용차가 멈추어 있었다. 승용차 문이 활짝 열렸다. 앞뒤의 문 4개가 동시에 열린 것이었다. 운전석에서 야시로 경사가 내렸다. 조수석에서는 시라사카 경위, 뒷자석에선 이구치 경감과, 낯선 형사가 한사람 내렸다. 네 사람은 조용히 다가와서 사메지마를 둘러쌌다. "본청까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이구치가 말했다. 사메지마는 시라사카와 낯선 형사 사이에 끼어 뒷자석에 올랐다. 이구치가 조수석으로 옮겨갔다. 위장 패트롤카가 달리기 시작하자 사메지마가 입을 열었다. "구속영장이 떨어졌나?" 시라사카는 사메지마를 흘낏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이구치가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아주 나쁩니다." "타키자와 때문인가?" "그것만이 아닙니다. 정직(停職) 중인 사메지마씨는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만났어요." "누굴 말인가?" "지금 헤어진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럼 묻겠는데, 그녀에 대해서 경찰이 뭔가 수사를 하고 있었나?" "피의 사실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없긴 왜 없어? 있어. 살인 교사." 야시로가 깜짝 놀라면서 사메지마를 돌아보았다. "앞으로 내가 행동제한을 받게 된다면 대신 좀 움직여 줘야겠어. 입증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저희들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이구치가 한마디로 잘라 버렸다. 사메지마는 노기띤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래, 자네들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을지 몰라. 허나 지금 자네들은 내 권리를 침해하고 있어!" 이구치의 단정한 얼굴이 노기로 붉게 물들었다. "도대체 저희들이 무슨 권리를 침해했다는 겁니까? 사메지마씨야말로 자기 입장을 잊고 계세요." "잊은 건 아니야. 내 권리라는 건 행동의 자유야. 다시 말해서, 내가 범하지도 않은 범죄사건의 피의자로 조작되는 걸 스스로 막아야 하는 행동의 자유 말이야!" "어떤 식으로 방지하겠다는 겁니까? 관계자를 협박하는 게 스스로를 지키는 길입니까? 지금 사메지마씨가 취하고 있는 행동은 위험하기 짝이 없어요. 한걸음 삐꺽하는 날이면 전 경찰관이 흙탕물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아무 죄없는 경찰관을 피의자로 조작하는 건 흙탕물이 아니구?" "어거집니다. 사메지마씨가 조금이라도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어 보려고 하는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자네 이해력이 아니야. 일련의 살인사건 진범이 어디 숨어 있느냐 하는 것이야. 나는 그 단서를 지금 자네들한테 가르쳐 주려는 거야." "그게 사실이라면, 법정에서 제출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이구치는 차갑게 잘랐다. "범인이 36계 줄행랑을 놓은 뒤에 말인가?" 사메지마도 노기 어린 말투로 되받았다. "내 행동에 대한 제재는 언제든 가능한 일이야. 허나 진범을 체포할 찬스는 그렇지 않아. 한번 줄행랑을 치고 나면 두번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이구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들이 자신의 행선지를 파악한 걸로 봐서 모모이를 감시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나를 왜 즉각 구속하지 않았나?" 사메지마는 시라사카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못 알아듣겠군요." 시라사카는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그 호텔로 갔다는 건 꽤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 아냐? 안 그래?" 시라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나 지켜본 거지? 혐의 사실을 뒷받침해 줄만한 언동이 없을까고 감시하고 있었겠지.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 가까이에, 다른 수사관을 배치했었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구속영장을 청구하기 위해 2과가 마침내 증거수집에 발벗고 나섰음을 사메지마는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부터 이구치는 담당검사를 찾아가 사메지마를 기소할 수 있는지 없는지 의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거운 침묵을 실은 채 위장 패트롤카는 본청 통용문으로 들어섰다. 사메지마는 지난번 그 소회의실로 끌려 들어갔다. 시라사카와 낯선 형사가 감시역을 맡은 것 같았다. 30분이 지났다. 사메지마는 분노와 초조, 그리고 불안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고함을 지르며 복도로 뛰쳐나가 청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부여잡아 흔들면서 그들의 오류와 어리석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완고한 사고방식을 꾸짖어 주고 싶었다. 이렇게 될 것은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때문에 더욱 경찰관이라는 직업에 집착하고 있었다. 집착하는 자체가 사메지마에겐 이미 하나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마음 한구석에서 체념이 싹트고 있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가 하는 절망에 가까운 무력감이었다. 경찰은 지금 기적이 필요했다. 그 점에서만은 경찰청과 사메지마의 이해가 일치했다. 기적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현직 경찰관이 아닌, 일련의 이상한 사망사건의 새로운 피의자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경찰청이나 사메지마에겐 시간이 거의 없었다. 보도기관에 대한 규제도 이제 시한이 다 됐을 게 틀림없었다. 24시간 안에 속죄양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다. 다시 30분이 지나자 회의실 도어가 열렸다. 사메지마와 다른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지마루 형사부장과 인사 1과장인 무나카타 경무관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물러가!" 무나카타가 시라사카에게 명령했다. 두 사람은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사메지마는 선 채로 후지마루와 무나카타를 응시했다. 두 사람 모두 험상궂게 보일 정도로 심각한 얼굴이었다. "기자실, 민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후지마루가 불쑥 내뱉듯이 말하면서 심호흡을 했다. "사직서를 써 줘야겠어." 후지마루가 말하자, 인사 1과장은 입을 꽉 다문 채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대학 유도부의 선후배였다. "......즉각 수리할 방침입니까?" 한참 뒤 사메지마가 물었다. 무나카타가 후지마루를 흘낏 보면서 입을 열었다. "원칙적으로는 24시간 동안 내가 보관하게 돼 있어." "알았습니다." 후지마루는 물끄러미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이구치 경감 얘기로는 뭔가 급히 조사해야 할 게 있다고 했다던데?" 마지막 기회가 왔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오늘 아침, 쓰루미 사철역(私鐵驛) 에서 전락사(顚落死)한 국세청 사찰관 사인에 관한 일입니다." "뭔가?" "사건이 발생한 건 아침 러시아웝니다. 내일 아침 같은 시간대에, 사진을 가지고 가서 탐문수사를 해 줬으면 합니다." "그건 안 돼. 쓰루미는 가나가와 현경 관할이야." 무나카타가 빠른 말투로 끼어들었다. 사메지마는 후지마루를 바라보았다. 후지마루도 냉엄한 얼굴로 마주 쏘아보았다. "누구 사진을 말인가?" "부장님." 무나카타가 제지하고 나섰다. "누구 사진이야?" 후지마루가 다잡듯이 재차 물었다. "시마오카 후미에라는 간호삽니다. 신주쿠 서 모모이 경감님한테 가면 사진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모모이 경감에게도 정직 처분을 내리는 방향으로 검토중이야." 무나카타가 날카롭게 내뱉었다. "부탁입니다." 사메지마는 후지마루 얼굴에 시선을 박은 채 말했다. "아침 일찍 한번 탐문해 보도록 하지. 결과가 없으면 자네가 퇴직한 다음 재판 때 다시 조사하게 될 게야. 아마 그때 조사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지도 몰라." 후지마루의 대답이었다. "꼭 부탁드립니다. 저는 경찰을 그만두기가 싫습니다." 무나카타가 깜짝 놀라며 눈이 둥그래졌다. "알았어." 후지마루는 쵸점 하나 흩뜨리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어서 무나카타를 돌아보면서 명령했다. "이 건에 대해선 1과를 동원해." 무나카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1과를 동원하시겠다구요? 지금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움직일 까닭이 없습니다. 무립니다." "그렇다면 기동수사대를 움직여. 살인사건에 경험있는 요원을 동원하도록. 사메지마가 퇴직하면 결국 수사 1과가 나설 수 밖에 없는 것 아냐?" 무나카타는 눈을 감았다. "알겠습니다." "가나가와 현경엔 연락할 필요가 없어. 딱 한번의 탐문수사야. 뭐라고 하거든 적당히 시침을 떼." 경찰청과 가나가와 현경 관계는 반드시 협조적이고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전에 연락을 할 경우, 서류가 필요하다는 둥 트집을 잡을 게 뻔했다. 입장이 바뀔 경우, 경찰청 역시 같은 태도를 취할 게 틀림없었다. 무나카타는 한순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말썽이 생기면 제일 먼저 도마에 오를 사람이 후지마루임을 금방 깨달은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즉각 수사 1과장을 부르겠습니다." 후지마루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사메지마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오늘밤은 여기서 묵도록 해. 그리고 기자들과의 접촉도 금지야. 만약 명령을 어기면 자네가 요구한 조사도 해 줄 수가 없어!" "알았습니다." 사메지마가 대답하자, 후지마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나카타에게 눈짓을 했다. 무나카타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후지마루는 육중한 나무 도어를 잡은 채 사메지마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따지고 보면 문제아였어. 허나 훌륭한 경찰관이기도 했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 생각엔 변함이 없을거야." 사메지마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고맙습니다." 후지마루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나무 도어를 열고 복도로 나갔다.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아야카는 창가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나가기 전에 마시던 프로즌 다이키리 글라스가 얼음이 모두 녹은 채 놓여 있었다. 아야카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놓고 도어로 다가갔다. 도어 스코프로 복도를 살폈다. 미쓰즈카가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도어를 열어 주자 입을 꽉 다문 채 안으로 들어왔다. 아야카는 소파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미쓰즈카를 마주 보았다. "만났지?" 아야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한 대로였어. 무서웠어." 미쓰즈카 어깨에 이마를 묻으면서 체중을 실었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미쓰즈카도 아야카를 받아안았다. "그 남자, 자신만만했어." 아야카는 나지막하게 말을 이어갔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우릴 잡아족칠 수 있다는 태도였어. 겉보기는 부드러웠지만, 아니었어. 소름이 돋을 만큼 두려웠어." "나도 봤어." 미쓰즈카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분명히 무서운 녀석이야. 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어. 허나 이제 끝났어, 그 녀석도. 손발이 꽁꽁 묶이고서야 용빼는 재주가 없지." "아줌마를 노리고 있었어. 모두 아줌마 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어. 아카네를...... 아카네가 저렇게 된 것도 아줌마 탓이라고......." "걱정할 것 없어. 녀석은 외토리야.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그래도 몰라, 앞일은. 무서웠어. 그 사내, 그 형사,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어." 사메지마 공포에서 벗어난 지금, 아야카는 자기가 미쓰즈카에 대해 아주 솔직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말했었지? 녀석은 캐리어라고." "캐리어란 게 뭐야?" "공무원 상급시험에 합격한 녀석들. 도쿄 대학 같은 일류 학교 출신으로 펄펄 나는 엘리트들이야." "하지만 그렇게는 보이지 않던데?" "녀석은 낙오한 엘리트야. 머리는 명석하지만 비뚤어진 사람이야. 가만 있었으면 금방 서장으로 출세했을텐데, 제 성질에 받쳐 날뛰다가 쭉정이 형사로 밀려난 거야." "그래, 전에도 한번 그런 얘기, 당신이 한 것 같아. 하지만 그땐 귀담아 듣지 않았어." "그 밖에 다른 말은 없었어?" "거의 그 사람 혼자 떠들었어. <가마이시 클리닉>과 나하고의 관계를 알고 있댔어. 미모리도, 하마쿠라라는 포주에 대해서도 알구 있댔구. 하마쿠라와는 친구였다고 했어. 그래서 자기가 나선 거래. 하마쿠라가 죽기 전날, 이 호텔에서 둘이서 만났대." "그날...... 그랬었군. 녀석도 여기 함께 있었군." "당신도 알고 있었어?" 아야카는 고개를 쳐들면서 물었다. "알고 있었어. 나도 녀석을 봤어. 이리루 올라오려던 참에 하마쿠라와 딱 마주쳤지. 그랬었나? 빌어먹을!" 미쓰즈카는 불쑥 욕설을 내뱉었다. "왜 그래?" "그날 난 일층 라운지서 미모리와 만났던 게야. 그 일 때문에 말야. 녀석이 겁을 먹기 시작한 것 같아 안심시켜 주려구 만났던 게야. 그걸 사메지마가 본 거야! 녀석이 미모리를 감시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맞았어. 죽은 국세청 사찰부 사람이 미모리를 마크하고 있었다고 했어." "하지만 좀 이상하군." "뭐가?" "국세청 사찰부는 경찰과는 손을 잡지 않아. 녀석들은 우리를 -- 아니 경찰을 신용하지 않아." "그 사찰관은 사메지마 대학 동창이랬어." "그래서 두 사람이 협조를 했나?" 중얼거리던 미쓰즈카는 한참 만에 불쑥 내뱉었다. "고약하게 됐군." "역시 그래?" "웃사람이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에 달려 있어. 사메지마냐, 아니면 경찰 체면을 깎는 이상한 소문을 막느냐......." "어느 쪽일 것 같아?" "어느 쪽이 됐건, 이대로는 끝나지 않아. 녀석의 목이 잘리더라도 살인 혐의로 기소를 한다면, 재판과정에서 샅샅이 조사를 하게 될 게야. 녀석도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를 확보해서 맞싸울 게 틀림없어." "그럼 어쩌면 좋지?" 아야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미쓰즈카를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미쓰즈카 뺨을 감싸안고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좋지? 난 어떡하는 게 좋아?" 미쓰즈카는 멈칫거렸다. "이대로는 결국 지고 마는 거야? 경찰에 끌려가게 되는 거야?"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던 미쓰즈카가 입을 열었다. "<가마이시 클리닉>에 대해선 증거가 하나도 없어. 카르테도 전부 처분했다고 했지?" "응." "그렇다면 그쪽은 안심해도 돼. 미모리의 자료도 모두 파기했구...... 그 돌팔이 의사에겐 당분간 돌아오지 말라구 연락하면 그만이구. 앞으로 한두 달 더 머물러 있으라면 돌팔이 녀석도 입이 찢어지겠지. 결국 문제가 된다면 살인 뿐이야." "......역시 아줌마가 문제가 된다는 뜻?" "그래. 당신과 <가마이시 클리닉>을 잇고 있는 건 그 여편네 뿐이야. 꺼림칙한 건 모두 그 여편네가 쥐고 있어." "혹시 아줌마가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어떡하지?" "어디까지 부느냐에 달렸어. 있는대로 몽땅 털어놓는다면 물론 우리도 끝장이야." "입을 다문다면?" "그 여편네에 대해서 경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져." "사메지마는 시마오카 기획도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뗄 수만은 없게 됐군. 다만 그 여편네가 죽인 사람은 <가마이시 클리닉> 으로 봐서 위험한 인물 뿐이었어.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야. 때문에 그 여편네만 입을 다물면......." 미쓰즈카는 말끝을 흐렸다. 아야카 표정이 급변하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있었어? 우리와 관계있는 인물을 죽인 적도 있었냐, 이 말이야!" "세이조에 살던 키타가와 생각나? 키타가와 유지(油脂)의 여회장 말이야." "키타가와? 음,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던 그 할머니 말이지? 나한테도 몇 번이나 추근거렸던......." "우리 클리닉이 효과가 없다면서 떠들고 다녔어. 돈을 돌려달라기에 돌려 줬어. 그래놓고도 여전히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어. 사실은 자기가 노리던 우리 클리닉 남자 종업원이 말을 안 듣자, 화풀이로 그랬던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그 여자 주변엔 우리 단골이 많았어. 그냥 뒀다간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줌마한테 부탁했던 거야." "그 약을 사용했나?" "응." 미쓰즈카는 한순간 넋나간 얼굴이 되었다. "당신은 곤란한 일이 생기면 뭐든지 그 여편네한테만 부탁했었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여편네를 시켜 여기저기서 사람을 죽이게 했어. 엄청난 일이야, 엄청난 일이구말구......."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는 태도였다. "아줌마를......." 그러나 아야카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미쓰즈카도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아야카를 쏘아보았다. "......아줌마를 어딘가 멀리 떠나보내요, 우리." "아무 데도 안 갈걸, 그 여편네는. 당신도 그랬잖아? 부모 자식 같은 사이라구. 어떤 일이 있든 그 여편네는 당신과 떨어지지 않을 거야." 미쓰즈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머리를 바꾸었다. "설마 그 여편네, 그 약, 아파트에 두고 온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은 안해도 좋을거야. 허나 다른 허접쓰레기는 쌓여 있을지 몰라. 뭐든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아줌만." "이런 젠장! 그 여편네 아파트 압수수색이라도 당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야. 그 여편네, 주말 아파트로 옮겨간 건 틀림없나?" "응. 점심 무렵에 전화까지 걸어왔던데...... 걱정할 것 없어, 아줌마는.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건 사실이지만." "도쿄에서 멀리 떠나보내라구." "어떻게 하려구?" 미쓰즈카는 어쩔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아야카를 바라보았다. "당신 생각처럼 할 수 밖에 없어. 어디 먼 곳으로 피신하라고 전하는 거야. 만약 듣지 않는다면......." "그럴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면." 미쓰즈카는 눈길을 돌려 창 밖 야경을 바라보았다. "교도소로 끌려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어." "사형을 받겠지, 우리?" "전모가 샅샅이 밝혀지면, 그 여편네는 틀림없는 사형이야. 당신은...... 글쎄, 사형이 될 지도 몰라. 안되더라도 무기는 각오해야 될 게야." "무기?" "무기징역 말야. 나도 10년은 각오해야 할 거구." 아야카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될 거야, 틀림없이." "그 여편네는 어떤 경우든 길이 없어. 가도 지옥, 돌아서도 지옥이야." 그리고는 결심이 된 것처럼 아야카를 응시했다. "내가 하지. 당신은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당신도 사형당할지 모르잖아?" 미쓰즈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잘 들어. 그 여편네가 죽으면 적어도 일련의 살인사건 범인은 없어지는 셈이야. 그 여편네 증언만 없으면 당신과 나를 살인사건에 연관시킬 수가 없어.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살인을 모두 사메지마 한 사람에게만 뒤집어씌울 수도 없게 되는 거야. 결국 검찰이나 경찰도 어물쩍 넘어가고 말겠지. 사메지마가 설령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하더라도 복직 가능성은 없어. 경찰이 흙탕물을 뒤집어쓴 사건이니까 새삼스럽게 뒤지고 나설 녀석도 없을 거구." "결국 우리만 만만세라는 거야?"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아. 허나 멍청하게 있을 수는 없어. 경찰을 앞질러 그 여편네를 없애야 해. 지금 당장, 내가 달려가도록 하지!" "잠깐. 아줌만 당신이 찾아가더라도 경계할 게 틀림없어. 그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 또 토쿄서 죽인다면, 시체는 어떡하지? 그냥 내버려 둬?" "참, 그렇지. 제일 좋은 방법은 자살이나 행방불명이 되어 버리는 건데......." "그래, 바로 그거야. 어딘가 먼 곳으로 아줌마를 데리고 가는 게 좋겠어." "허나 데리러 가는 건 곤란해. 만약 경찰이 감시라도 하고 있다면, 그걸로 끝장이야." "내가 전화를 걸어 아줌마 혼자 움직이게 하지 뭐. 도쿄를 벗어난 안전한 곳에서 만나면 될 것 아냐?" "당신도 함께 가려구?" "그럼." 아야카는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내가 함께라면, 내가 간다면 어쩌면 아줌마가 죽어 줄지도 몰라. -- 좋아, 네 마음대로 하렴. 아줌마의 대답소리가 귀에 쟁쟁거리는 것 같았다. "어디가 좋을까?" 마음을 굳힌 탓일까, 미쓰즈카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아는 곳이 좋을 거야. 또 우리가 그 여편네를 만나더라도 눈에 두드러지지 않아야 하구." "뭣보다 아줌마가 미심쩍게 생각지 않을 곳이라야 해."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거기밖에 없겠군......." 미쓰즈카가 중얼거렸다. < 20 >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제일 지루하고 길었던 밤이 밝아왔다. 지난번에는 경찰청 이 회의실에서 잠시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안 되었다. 사메지마는 꼬박 뜬눈으로 밤을 밝힌 것이었다. 생각은 끝없이 이어졌다. 경찰관으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생활을. 한 개인으로서의 인생을. 그리고 시민의 입장에서 본 경찰상(警察像)을. 경찰을 그만두게 되면 자기에게 유서를 맡기고 죽은 미야모도의 유지를 알리는 기회 역시 영원히 없어지게 마련이었다. 공개해 버리는 것만이라면, 경찰을 그만둔 뒤라도 주간지나 신문 따위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살인과 수뢰 혐의로 경찰에서 쫓겨난 사람의 얘기에 누가 얼마나 귀를 기울여 줄지 자신이 없었다. 미야모도 유서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혼자 간직해 온 것이 잘못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메지마가 그 많은 협박과 애걸, 매수 제의에도 흔들리지 않고 유서를 숨겨 지켜온 것은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경찰 자체가 상처를 받는 게 두려워서였다. 이 나라 경찰이 많은 결함과 모순을 안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공평하지도 않고, 만족스럽지도 않은 상황하에서 그래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묵묵히 직무를 수행하는 충직한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계급이 오르고, 칭송받자고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혹한 직장에 매달려 있는 것은 단 한가지,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명감이 지나치면 경우에 따라서는 오만함이 될 수도 있고, 또 권력 과시와 이어질 수도 잇었다. 그러나 눈보라가 치는 겨울 밤, 발이 얼지 않게 제자리 걸음을 뛰면서 호호, 입김으로 손을 녹이는 잠복근무가 권력에 대한 동경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누구나 얼굴을 돌리게 마련인 유혈이 낭자한 사고나 폭력 현장에서 헛구역질을 억누르고, 수면부족으로 지친 몸을 채찍질해가면서 증거수집에 열을 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결코 누군가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런 일들이 모두 그 사회에 필요하기 때문이며,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직무를 경찰관 이외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랑이기도 했다. 만약 그런 자부심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잃어 버린다면, 경찰관은 단순한 권력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었다. 경찰관은 무장을 하기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폭력>은 법으로 보호받기도 했다. 때문에 자신을 권력자라고 믿는 순간부터 부패가 싹트기 마련이며, 한번 싹이 튼 그런 종류의 부패는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권력자라고 오신(誤信) 하고 있는 경찰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자 속의 썩은 사과의 예화(例話) 처럼 어떤 조직이든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 혹은 잘못된 사고의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었다. 부패한 경찰관은 대부분의 경우 경찰관이라는 직업에 대해서가 아니라, 경찰조직 자체에 절망한 나머지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유서를 공개한다면 경찰조직에 대한 그러한 절망감을 불러일으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열악한 현장 근무를 하는, 명령계통 최하부에 있는 수많은 착실한 경찰관들이야말로 조직체로서의 경찰을 지탱하고 기능하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유서 내용은 그 버팀목을 움직이는 명령계통 상층부에 대한 엄청난 불신을 증폭시키는 것뿐이었다. 유서를 공개함으로써 상층부에 제거되어야 할 인물을 제거했다고 치자. 조직 중추가 어느 정도 정화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관례가 시정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긍정적인 측면 이상으로 엄청난 불신과 절망감이 조직의 버팀목인 현장 경찰관 아이에 증폭될 염려가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의 사메지마 입장과 비슷한 것이기도 했다. 사메지마가 독직에 살인 혐의까지 뒤집어쓴 더러운 경찰관이란 풍분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결과적으로 경찰관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엇다. 만일 이것이 공개된다면, 그리고 사메지마에 대한 혐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경찰은 어쩔 수 없이 단호한 조처로 그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까지 유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 사메지마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만약 경찰이 경찰관 피의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증거를 은폐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 한순간에 모든 신뢰는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사메지마가 결백하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그런 사태는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미야모도 유서 문제에 대해서도 자기가 이번 일과 꼭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현장 경찰의 사기 저하를 염려한 나머지, 어느 사이엔가 있었던 것을 없었던 걸로 하고 싶은 바램이 저도 모르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거나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한가지 밖에 없는 것이었다. 유서를 공개해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길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런 사태를 유발한 환경을 개선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과연 자기 혼자 힘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그런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과연 있을까. 누구에게 물어볼 문제도 아니었다. 어드바이스조차 기대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날이 밝았다. 타키자와가 죽은, 출근 러시아워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그 시간도 지나갔다. 9시가 되고 10시가 되었다. 사메지마에게 상황을 알려 주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대로 사메지마를 감시하고 있는 2과 형사들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11시가 지났다. 칙칙한 커튼이 쳐진 창곁으로 다가갔다. 철창 사이로 햇빛을 받고 있는 합동청사 건물이 보였다. 정연하게 늘어서서 위엄을 자랑하고 있는 건물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사람들 모습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 직무 내용은 다르겠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가 모여 이 나라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공무원. 세금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 그리고 직무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지킨다는 자긍심.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국민은 눈에 보였다.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국민이었다.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한사람 한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멋없고 시시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한사람 한사람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동물이었다.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가족과 친구의 행복을 바라면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행복은 그러나 수입과 지위 그리고 권력의 크기만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 -- 자기 존재가 걸어온 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며, 자기가 정한 룰을 지켜왔는가를 자문(自問)해 볼 필요가 있었다. 룰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것도 행복감의 하나가 아닌가. 사메지마는 자신을 위해 경찰관이 되었다. 스스로가 정한 룰에서 벗어난 적이 한번도 없었음은 자랑인 동시에 행복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이런 식으로 경찰을 그만두고 싶지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한 경찰관이었고, 또 집념에 가까운 정도로 충실히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자부심과 행복을 느껴온 것이었다. 그것을 이런 식으로 버릴 수도, 빼앗길 수도 없었다. 싸우고 싶었다. 누가 뭐라든 자신의 행복과 자긍심을 위해 싸우고 싶었다. 11시 48분, 소회의실 도어가 열렸다. 무나카타와 모모이가 들어왔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모모이는 손을 뒤로 돌려 천천히 도어를 닫았다. 굳은 표정의 무나카타가 입을 열었다.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결론부터 말하지. 자네의 직무권한 정지가 해제됐어. 자세한 건 모모이 경감한테 듣도록. 12시부터 점심을 겸한 회의가 있어서 난 이만 실례하네." 무나카타는 사메지마를 감시하고 있던 두 형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고했어. 자기 부서로 돌아가도록!" 두 형사와 무나카타가 회의실에서 물러났다. 사메지마는 선 채로 모모이를 쏘아보았다. 모모이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앉지 그래." 사메지마는 앉았다. 모모이도 의자를 끌어당겼다. "출동한 것은 1과의 무라우치 반이었어. 알고 있나, 그 사람?" "네." 무라우치는 신주쿠 서 형사과에서도 근무한 사람이었다. 기동 수사대로 뽑혀 갔다가 수사 1과로 옮겨갔다고 듣고 있었다. 신주쿠 서 지역에 강했기 때문에 기동수사대에 있을 때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었다. 입이 무거울 뿐만 아니라 몸을 아끼지 않는 전형적인 수사형사였다. "시마오카 후미에 꼬리를 잡았어. 오늘 아침, 무라우치 반이 일제히 탐문수사를 벌인 끝에 마침내 꼬리를 잡은 게야. 어제 사건 현장 바로 옆에 있었다는 2명이 후미에 사진을 금방 알아보더라는 게야. 타키자와 바로 뒤에 서있던 사람이 틀림없댔어. 후미에 주소는 이다바시 아파트였어. 시마오카 기획 대표자로 등록된 바로 그 주소였어. 즉각 압수수색을 했지. 본인은 도망친 뒤였으나 유류품이 있었다는군." "뭡니까, 유류품은......?" "세컨드 백. 미모리 것이었어. 오다키바시에서 들고 와 놓고는 처분하는 걸 잊어 버렸던 모양이야. 아니면 뭔가 필요해서 그냥 숨겨둔 건지도 모르구...... 어쨌든 벽장 속에서 찾아냈어."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역시 시마오카 후미에가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후미에 구속 영장도 떨어졌어. 우선 타키자와 살해 혐의로 말야." "무라우치씨를 만나보고 싶군요." 모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서는 아직 일을 크게 벌이길 꺼려하는 것 같아. 후미에를 검거하기 전엔 사건 전모를 밝힐 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지금 움직이고 있는 건 무라우치반 뿐이야. 무라우치는 자네 협력이 필요하댔어." 사메지마는 눈을 감았다. "무라우치씨가 맡아 준 게 다행이었군요." "그래. 무라우치가 아니었다면...... 자넨 이미 손발이 묶여 있었을 테구...... 꼬리를 잡았다고 해서 그처럼 잽싸게 압수수색까진 하지 못했을 게야. 한밤중에 홍두깨식으로 떠맡은 사건이었으니까." 사메지마는 계속해서 머리를 끄덕였다. "자넨 지금부터 시마오카 후미에의 미모리 살해사건 증거 확보에 협조 수사를 하기로 돼 있어. 미모리는 자네 관할의 장물아비였으니까......." "알겠습니다. 우선 뭣부터 해야 하나요?" "후미에의 행방을 찾아야 해. 이틀째 아파트를 비우고 있어. 어딘가에 숨어있는 게 분명하지만, 후미에 혼자 생각으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갈만한 곳이 어딘지, 무라우치가 몹시 궁금해 하고 있어. 짚이는 곳 없나?" "<가마이시 클리닉>은 어떻습니까?" "그곳은 벌써 덮쳤어. 미모리 살해 용의가 굳어지면 압수수색을 하게 되겠지." 사메지마는 숨을 들이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마이시 클리닉> 원장은 어떻게 했나요?" "해외여행 중이야. 압수수색에서 뭔가를 잡아내면 나리타에 내리는 즉시 검거할 수 있어." "남은 건 후지사키 아야카로군요." "허나 직접 연관시킬 만한 증거는 하나도 없어. 무라우치는 아직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어." "무라우치씨부터 만나봐야겠군요." 사메지마는 일어섰다. "후지사키 아야카가 후미에를 어딘가 멀리 떠나보냈다면, 공개수사를 하기 전엔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공개수사는 무리야. 위에서 들어 줄 턱이 없어. 후미에를 검거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그렇지만 만약 아야카가 후미에를 잘라 버린다면......." 사메지마 말에 모모이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상도 영원히 묻히고 마는 거지." 병원으로 숨어드는 일쯤 후미에에겐 식은죽 먹기보다 쉬웠다. 어젯밤 늦게 아야카로부터 연락을 받은 후미에는 한숨도 안자고 계획을 짰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몹시 지끈거렸다. 아침 8시 30분, 후미에는 JR 신쿠투 역이 하루 중 가장 붐비는 시간대를 노려 하행선 열차에 올랐다. 보통열차 (완행열차) 로 한번 갈아탔다가 다시 급행을 바꿔 타고 야마나시로 갔다. 급행열차에서 내린 다음 지방 전동차로 야마나시 다카하라 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였다. 야간에도 문병객이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을 후미에는 아야카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아카네를 만나는 게 몇 년 만인가. 아야카는 어재서 지금 새삼스레 그런 결심을 했는지, 후미에에게 전화로는 알려 주지 않았다. -- 끝나면, 지난번 얘기했던 것처럼 온천이나 가요. 나도 그쪽으로 갈 테니까 만나서 함께 완행 전동차를 타는 거야, 아줌마. 야마나시에서 나가노를 거쳐 군마로 가는 거야. 쿠사즈 온천도 있구 하니...... 내키지 않음 유자와까지 가는 것도 괜찮아. 벌써 가슴이 다 두근거리네, 아줌마. 우리 둘만 오붓하게 한번 지내보자구요. 어린애처럼 아야카는 재잘댔다. 후미에는 그런 아야카가 어쩐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그걸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저렇게 재잘대고 있는 게야.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좋지 못한 일인 것만은 분명해. 그러나 주말용 임대 아파트에서 나와도 좋다는 말이 후미에에겐 무엇보다도 반가왔다. 그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었다. 후미에의 아파트도 결코 넓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과는 전혀 얘기가 달랐다. 모든 것이 작은 사이즈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여유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호텔 방처럼 생겼지만, 관리는 호텔만큼 치밀하지 못했다. 생생한 생활과 비현실이 교묘하게 엉켜 있는 곳이었다. 같은 층의 입주자는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일본인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모습이지만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파트 여기저기 따로 입주해 있으면서도 밤만 되면 후미에 바로 옆집에 모여 도어까지 열어놓은 채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두렵고 불안해진 후미에는 현관 도어를 두 겹 세 겹 잠그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뜨개 바늘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런 그 아파트에서 나와도 좋다는 말은 후미에에겐 더할 수 없는 낭보였다. -- 그럼 여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거야? -- 물론. 미안해, 아줌마. 며칠간이었지만 불편한 곳에 있게 해서. -- 아카네한테 가기 전에, 잠시 집에 들르는 건 안 될까? 온천엘 가자면 입을 옷도 챙겨야 하구....... 그러나 수화기 저쪽의 아야카는 대답이 없었다. 후미에가 <괜찮아, 갈아입을 옷 없으면 없는 대로 견디지> 라고 막 입을 떼려 했을 때, 아야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 미안, 아줌마. 그건 안 돼. 여러가지로 사정이 좋지 못해....... 우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후미에는 자기의 불안이 적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화로 물어보고 싶은 것을 후미에는 억지로 참았다. 만나면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 아이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만나기만 하면 난 당장 알 수 있질 않는가. 다카하라 역 주변엔 지저분한 원색의 싸구려 토산품 가게가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대부분이 중학생이나 고교생이 좋아할만한, 쓸모없는 봉제인형. 쿠션. 키홀더 따위 장난감 뿐이었다. 후미에는 역에서 나누어 준 관광지도를 들고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도 10대 아이들로 붐볐다. 아무리 높여 보아도 중학생, 기껏해야 고등학생들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평일, 학교는 어떡하고 이런 데서 재잘대고 있는 것일까. 두통약과 커피를 한꺼번에 마셨다. 한동안 눈을 감고 앉아 있자, 두통이 얼마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약을 마신 것은 병원에 찾아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광지도에 따르면 역에서 걸어서 15분쯤 되는 곳에 미술관이 있었다. 거기서 저녁 나절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아야카는 후미에가 편하도록 환자 이름을 하나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후미에는 게이트를 뚫고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병원이 병원인 이상,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후미에는 눈을 감고서도 알아맞출 자신이 있었다. 큰 병원에서 몇십 년이나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한걸음 안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길을 잃고 헤맬 염려는 전혀 없었다. 오후 6시. 역 앞에서 택시를 불러탄 후미에는 곧장 별장지 게이트로 들어갔다. 5시께부터 비가 쏟아지면서 날씨도 무척 차가워졌다. 택시기사가 올해는 비가 너무 잦다고 투덜거리면서, 밤이 되면 비가 눈이 될지 모르겠다고 상을 찌푸렸다. 후미에는 털실로 짠 모자를 푹 눌러쓴 데다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게이트에서 일단 멈추면서 택시기사가 후미에를 돌아보았다. "문병 가는 환자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시모무라 코이치로" 택시기사는 후미에가 말한 이름을 그대로 인터폰에 옮겼다. 게이트가 열렸다. 시모무라 코이치로는 아카네 바로 옆병실에 입원해 있는 환자였다. 스물세 살의 청년 -- 자동차 배기 가스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이곳에 입원하는 신세가 됐다고 했다. 아버지는 유명한 건축가였다. 후미에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아야카가 간호사한테서 듣고 온 얘기로는 환자 어머니가 한달에 한번 꼴로 문병을 오고 있을 뿐, 아버지인 건축가는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물세 살 젊은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다니....... 도대체 무슨 까닭이었을까. 문병을 오지 않는 걸로 봐서 아버지와 어떤 트러블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유명한 데다가 돈까지 갖춘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민을 반드시 한가지씩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은 공평했다. 고민이나 고통거리 하나 없는 인간이 이 세상에 있을 까닭이 없었다. 택시가 별장지를 헤쳐 나가는 동안, 후미에는 자기가 처음 생각했던 계획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됨을 깨달았다. 병원은 별장지역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처음 후미에는 병원 못 미친 곳에서 택시를 내려, 병원 당국자 몰래 숨어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랬을 경우, 돌아나올 적엔 걸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해가 저문 별장지는 칠흑보다도 더 어두웠다. 택시 헤드라이트에 비쳐드는 것이라고는 잎이 떨어진 앙상한 수목과 덧문을 닫은 건물, 그리고 은빛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빗줄기 뿐이었다. 후미에는 전신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지금 찾아가는 병원은 질병이나 상처 치료와는 전혀 무관한 곳임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낮이나 여름은 어떤지 몰라도, 차가운 겨울 밤, 별장지 안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기 위해서였다. 눈 뜨기를 기대할 수 없는 가족을 맡겨놓고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으로 죄의식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접어두어야 할, 아니면 깨끗이 잊어 버려야 할 죄의식을 그런 식으로 달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자 가족들의 그런 마음을 후미에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중환자를 돌보는 일은, 어둡고 끝없는 긴 터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가족들은 동정과 초조, 기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때로는 건강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까지 안고 살아야 했다. 질병과의 싸움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일상생활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끈기도 있어야 했다. 입원생활이 길면 길수록, 환자와 가족은 의사와 간호사를 자기 편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에 가서는 완전한 타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환자나 가족 편에 서서 질병과 싸워 주는 의사, 간호사는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환자는 환자 자신의 힘으로 완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는 결코 그렇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자칫하면 입원환자가 자기는 버림받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만성적인 중환자 간병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가족의 마음을 비난하는 것도 쉽고, 이해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간병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은 당사자만이 갖는 절박감이며, 당사자에게만 결정권이 있었다. 이 병원에 가족이 입원해 있음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는 가족도 있을 것이고, 안전한 금고에 맡겼다는 안도감에서 까맣게 잊어 버린 가족도 물론 있다고 봐야 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타인이 이러쿵저러쿵 입을 뗄 일은 아니었다. 후미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카네는 그것과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지금 후미에의 마음 속엔 <그 당시의 아카네> 밖에 없었다. 22년 전의 아카네 -- 아름답고 교만하고 화 잘 내는 공주 같은 아카네였다. 아야카가 아카네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후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아야카는 정기적으로 아카네를 문병하고는 있었지만, 거기 대해서 후미에에겐 한마디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후미에는 22년 동안 아카네를 한번도 만나러 온 적이 없었다. 지금의 아카네를 보기 전에는 아야카가 어떤 기분으로 문병을 다녔는지, 또 자기가 어떤 기분이 될는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자기가 하려는 일이 아야카를 위한, 또 그녀의 부탁을 들어 주는 마지막 살인임을 후미에는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두번 다시 자기를 위해 누구를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는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이었다. 공사중인 빌딩에서 사내를 밀쳐 떨어뜨린 것도, 따지고 보면 후미에 자신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사내는 아야카 육체가 목적이었다. 목적을 이룬 뒤면 아야카를 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아이 -- 아야카가 한번 몸을 섞었다 해서 사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여자가 아님을 그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죽인 것은 아니었다. 사내가 사메지마라는 형사와 만나기로 약속한 바람에,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미쓰즈카도 입버릇처럼 사메지마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는가. 솔직히 말하면 미쓰즈카도 살려두고 싶지 않았다. 미쓰즈카도 그 아이를 한번 이용해 보려고 언젠가는 꿍꿍이를 꾸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미쓰즈카를 조심하라고, 아야카에게 몇 번이나 은근히 귀띔을 해 온 후미에였다. 그러나 미쓰즈카는 그 아이기 직접 찾아내서 한쪽 팔로 부리고 있는 사내였다. 신주쿠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실업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미쓰즈카와 같은 사내가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언젠가 그 아이도 그런 뜻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미쓰즈카가 곁에 있으니까 여러 가지로 편리해.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 심하게 말해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미쓰즈카에게 맡겨 버리면 그걸로 오케이야. 이런 사업을 하다 보면 온갖 사람...... 헐뜯고 빈정대는 사람이 수도 없어. 그걸 미쓰즈카가 깨끗이 처리해 주고 있어. 어쩌면 앞으로 그 아이는 나보다 미쓰즈카를 선택할지도 몰라. 최근 나한테 지나치게 마음 쓰고 있는 것도 꺼림칙하거든. 아야카가 마음을 써 주기 시작하자, 후미에는 어쩐지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았다. 그 아이 -- 아야카가 언제까지나 응석받이로 있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 아이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괴로움도 참고 견딜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택시가 병원 현관에 닿았다. 요금을 받으면서 택시기사가 물었다. "기다릴까요? 전화로 불러도 금방 달려올 수 있지만......." 후미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기다려 주세요. 30분이나 한시간쯤. 괜찮겠죠?" "그러죠."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에서 내린 후미에는 병원 입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스테인드 글라스 창이 내부 불빛을 받아 알록달록하게 반짝였다. 후미에가 지금가지 보아온 모든 병원 건물과는 전혀 다른 모습, 오히려 교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설계를 맡은 사람은 이 병원의 목적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병원이라기보다는 요양소 분위기가 풍기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것도 종교단체가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후미에는 대형 유리 도어를 살짝 밀어보았다.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공간이 휑뎅그렁했다. 안쪽, 호텔 프론트처럼 생긴 카운터에 흰 가운 차림의 사내가 한사람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카운터 앞에는 가죽 소파 세트, 그 옆엔 난로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후미에는 곧장 카운터로 다가갔다. 백색 나선 계단 저쪽 벽에는 종교화가 걸려 있었다. 건물 안은 따뜻하고 조용했다. 카운터 앞에 서자 난로 열기가 후끈거렸다. "문병 오셨군요." 흰 가운 사내가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네." 후미에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느 환자분이신지...... 이름을." "시모무라 코이치로." "가족 되세요?" "숙모예요." "여기 사인을 해 주십시오." 사내는 가죽표지의 큼직한 노트와 금색 펜을 내밀었다. 후미에는 털실 장갑 낀 손으로 펜을 들어 시모무라 후미코라고 적어넣었다. "주무시고 갈 예정입니까?" "아뇨. 30분쯤 함께 있다가 돌아갈 생각이에요." "알겠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카운터 밑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뒤쪽 문이 열리면서 흰 가운에 가디건을 걸쳐 입은 젊은 간호사가 나왔다. "시모무라 코이치로씨를 문병 오신 분입니다." "네." 간호사는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까딱했다. 얌전히 허리를 굽혀 카운터를 빠져 나온 간호사가 앞장을 섰다. "이쪽으로 오세요." 고무창을 댄 샌들이 소리 없이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갔다. 후미에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이층은 일층과는 판이하게, 아무 장식도 없는 백색 복도가 밋밋하게 뻗어 있었을 뿐이었다. 계단과 거의 맞물린 곳에 마련된 널따란 대기실엔 대형 TV와 응접 세트가 놓여 있었다. 간호사는 텅빈 대기실엔 눈길 한번 던지지 않은 채 곧장 복도를 걸어갔다. 후미에는 너스 스테이션이 있어야 할 곳에 보이지 않자 속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어느 병원이든 너스 스테이션은 복도 중앙에 자리잡고 있엇다. 호출이 있으면 어느 병실이든 금방 달려갈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는 복도 중앙밖에 없었다. 복도 안쪽으로 걸어가는 간호사에게 후미에가 말을 걸었다. "저어......." 간호사는 말없이 고개만 돌렸다. "간호사분들은 어디에 머물고 있죠?" "너스 스테이션 말씀이세요?" "네." "방금 지나온 도어가 너스 스테이션이에요." "네? 네......." 그제서야 후미에도 알 만했다. 복도 양쪽에는 호텔처럼 도어가 나란히 달려 있었다. 도어엔 각각 입원환자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단 한군데 도어에는 이름표 대신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후미에는 걸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심전도 모니터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화면에 비쳐지는 것은 기적 아니면 조용한 죽음뿐이었다. 간호사는 복도 끝 왼쪽에서 두번째 도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후미에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위화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보통 병원 입원병동이라면 저녁 급식이 끝난 무렵, 음식 냅새가 건물 전체에 배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음식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았다. 간호사가 노크와 함께 도어를 밀어 열었다. "시모무라씨, 문병 오셨어요." 안쪽에다 알렸다. 간호사는 환자가 결코 대답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환자들이 물체가 아니라 사람이란 것은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간호사 자신들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물론 안에서 대답소리가 들려올 까닭이 없었다. "들어가 보세요." 간호사는 한쪽으로 비켜서서 후미에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창에 두꺼운 커튼이 쳐진 병실 안은 무척 밝았다. 온도도 복도보다 얼마간 높은 것 같았다. 창가 병상에 젊은이가 누워 있었다. 후미에가 서 있는 곳에서는 검은 머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후미에는 방 한복판에 서서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카네가 입원해 있는 옆방도 꼭 같은 구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상으로 다가섰다. 앙상하게 마른 젊은이가 조용히 숨만 쉬고 있었다. 눈 밑엔 검게 기미가 끼어 있었다. 비록 눈을 감고 있지만, 아주 신경질적인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후미에는 TV카메라를 찾아 눈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병원에서 환자 병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TV카메라를 설치해 둔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급작스럽게 용태가 악화되는 경우는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의사와 간호사 손을 줄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기능적이었다. 그러나 TV카메라는 눈에 띄지 않았다. 후미에는 아야카가 하던 말을 머리에 떠올렸다. -- 환자와 가족의 교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는 병원이야, 그곳은. 문병 온 가족은 마음만 있으면 몇날 며칠이고 환자와 함께 지낼 수도 있어. 문병객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려고 카메라는 설치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후미에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젊은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문고판 책과 도수 높은 안경이 놓여 있었다. 안경알에는 먼지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이윽고 몸을 돌려 도어 쪽으로 걸어갔다. 살며시 열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안내해 준 간호사는 가고 없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복도로 걸어다니는 게 이제는 습관처럼 몸에 익어 있었다. 잽싸게 복도로 나온 후미에는 복도 끝방으로 다가갔다. <스도 아카네> 이름표를 확인한 다음, 놉을 돌려 도어를 열었다. 미끄러지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꽃냄새가 물씬 코를 찔렀다. 소리나지 않게 도어를 닫은 다음, 몸을 돌린 후미에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병실은 온통 난(蘭) 투성이였다. 난꽃밭 한가운데에 병상 하나가 달랑 놓여 있었다. 후미에는 한동안 눈 한번 깜박거림이 없이 방안을 바라보았다. 아카네에 대한 아야카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무릎이 조금씩 떨려왔다. 병상으로 다가서기를 거부하는 무엇인가가 마음 한구석에서 치솟아오름을 느꼈다. 아카네를 보는 것이 두려워졌다. 아카네 얼굴을 보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지. 후미에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러나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들어 주지 않았따. 후미에는 핸드백과 함께 들고 있는 쇼핑백에 손을 집어 넣었다. 뜨개바늘을 꼭 잡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병상으로 다가섰다. 아카네가 잠들어 있었다. 후미에는 숨이 막혔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아카네가 거기 누워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의 아야카 눈동자를 후미에는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후미에는 지금까지 중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어린이를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었다. 또 수많은 어린이가 끝내 숨을 거두는 것도 지켜보았다. 어린이는 어른들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분명하게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몸 속으로 파고든 질병이 끝내는 목숨까지 앗아가 버릴 것이라는 걸 어른들보다 훨씬 깨끗하게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런 어린이들일수록 예외 없이 눈동자가 깨끗하고 해맑았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세계 구석구석 어디를 뒤져 봐도, 어떤 사람을 만나봐도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각오한 어린이처럼 해맑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 눈동자에는 이 세상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하는 바램과, 감겨지는 최후의 순간까지 눈에 비친 모든 영상을 똑똑히 기억해 두려는 발버둥이 함께 서려 있는 것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짧고, 봐두어야 할 것은 너무도 많았다. 때문에 한점 그늘도 그 눈동자엔 서려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하나라도 더 많이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가슴 속에 담아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열세 살 아야카의 그런 눈동자를 본 순간, 후미에는 이 소녀도 몹쓸 병에 걸려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맑은 눈동자에 담긴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죽음을 앞둔 어린이 눈동자의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무엇이 아야카에겐 깃들여 있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그리고 고독이었다. 아야카가 누군가를 저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야카를 그처럼 절망과 고독에 몰아넣은 원인은 눈앞에 있었다. 바로 아카네였다. 치료를 받으려는 게 아니라, 도너로서 장기를 적출하려고 아야카가 입원했음을 안 순간 후미에는 경악했다. 아야카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저처럼 눈동자가 아름다울 수 있는가. 아야카와 얘기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야카는 후미에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오면서 이미 마음의 문을 꼭꼭 닫아 잠가 버린 것이었다. 가슴 속에 거대한 얼음덩이를 안고 있었다. 동시에 차가운 얼음덩이에 가슴살이 닿지 않게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아카네는 수술을 기다리면서 공주처럼 뻐기고 있었다. 그런 아카네를 보면서도 후미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병약한 어린이는 부모의 과보호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구제받을 수 없는 응석받이로 변해 버리는 것이 일쑤였다. 아카네는 그런 응석받이의 전형이었다. 후미에는 아카네처럼 마음이 비뚤어져 버린 아이를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음의 문을 닫은 소녀와 마음이 비뚤어진 소녀. 그러나 그 두 소녀는 놀랄만큼 겉모습이 비슷했다. 눈동자만이 뚜렷하게 차이가 났을 뿐이었다. 절망과 고독에 갇힌 아야카의 눈동자는 해맑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앙탈부터 부리는 아카네의 차가운 눈동자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두에 대한 분노였다. 비록 소녀였지만 두 사람 모두 타고난 미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동정이었을까. 처음 후미에는 아야카가 도너 수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의 문을 꼭꼭 쳐닫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두려움을 풀어 주는 것이 간호사인 후미에의 직분이었다. 그러나 닫혀 있던 아야카의 마음이 조금씩 열려감에 따라, 후미에는 간호사의 직분을 뛰어넘어 아야카의 마음을 치료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데다가, 이모집으로 옮긴 뒤에는 결정적인 절망과 공포를 맛봐야 했던 아야카에게 남은 것은 고독 뿐이었다. 후미에는 아야카가 결코 고독한 몸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후미에 자신이 틀림없는 아야카의 편임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후미에는 아야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결코 되돌아 올 수 없는 부분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그래놓고도 아무 것도 해 주지 않으면 그것은 또 한번 아야카를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까스로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아야카를 보다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후미에가 손을 떼면 아야카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마음의 문을 연 것을 후회할 게 틀림없었다. 말만으로는 이제 더 이상 증명해 보일 게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후미에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아야카와 한편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죄의식도,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이미 그것은 아야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증명하는 길이었다. 의료기술의 한계에 따라 환자의 죽음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데 후미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후미에의 직업이기도 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괴로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속에서 삭여낼 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야카의 마음이 죽음을 맞아들이고 있는 것만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아야카 마음의 죽음은 의료기술 한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따라서 후미에 자신의 손으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막아내지 않으면....... 후미에는 자기 마음 또한 어느 한구석부터 죽어갈 것이라는 예감마저 들었다. 후미에는 아야카에게 사전에 약속은 커녕 귀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실행했을 뿐이었다. 후미에는 자기가 놓아 버린 아카네의 휠체어가 맹렬한 속도로 언덕을 굴러내려 멈추어 있던 초록색 트럭에 부딪치는 것을, 언덕 위에서 꼼짝도 않고 지켜보았다. 엄청난 소리가 울려왔다. 휠체어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동시에 그 순간부터 후미에와 아야카 두 사람 인생의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후미에는 아카네를 그윽이 굽어보고 있었다. 원래부터 살갗이 흰 소녀였다. 지금은 피부 밑의 정맥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투명하기까지 했다. 후미에는 입 속이 까칠까칠 말라 있음을 느꼈다.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뭔가 한마디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혀로 까칠한 입천장을 핥았다. 후미에는 오른손으로 뜨개바늘을 꽉 잡았다. 아카네 얼굴에서, 희고 아름다운 열네살 그대로의 공주 얼굴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가슴 속을 찌르는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아카네는 여기 이렇게 누워 있어. 누워 있단 말야. 누워 있단 말야. 누워 있단 말야....... 이제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 아이의 희고 가는 팔에 <딕트>를 바른 뜨개바늘을 꽂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바램은....... 나는 그 아이 편이 아닌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아이를 배신하지 않기로 이미 결심하지 않았는가. 후미에는 깊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마치 물에 빠졌던 사람이 가까스로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휘파람처럼 울렸다. 찰칵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후미에의 전신이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사내가 서 있었다. 혼자 도어를 등지고 서 있었다. < 21 > 시마오카 후미에는 눈이 둥그래져서 사메지마를 쏘아보았다. 놀라움과 동요로 어개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여기서 뭣하고 있는 거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잘못한 사람을 꾸짖는 목소리였다. "당신은 여기 왜 왔어?" 후미에도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당신이나 후지사키 아야카가 나타날 줄 알았기 때문이오." 사메지마는 조용히 대답했다. "뭐라구? 뭐라구 했어?" 사메지마는 후미에를 노려보면서 한발짝 다가섰다. 스도 아카네 병실은 사메지마 일행이 숨어 있던 너스 스테이션 옆 빈 병실보다 훨씬 온도가 놓았다. TV카메라는 환자나 문병객 눈엔 결코 띄지 않는 곳 -- 에어컨디셔너 통풍구 내부에 세트되어 있었다. 이 병원 원장은 그것도 <자상한 배려> 의 하나라고 했다. 환자 용태를 모니터하기 위해서 TV 카메라가 불가결했지만, 눈에 띄는 곳에 달아두면 문병객이 불쾌하게 생각할 염려가 많았다. 이 병원의 경우, 강한 발언권을 가진 쪽은 환자가 아니라 가족이었다. "당신 구속영장이 떨어졌어요. 대장성 (大藏省, 재무부) 국세청 사찰관 타키자와 켄이키씨 살해 혐의입니다." "그런 것, 난 몰라욧!" 후미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얘기는 경찰청에 가서 듣기로 하죠. 함께 가 주시죠." "도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난 아무 데도 안가! 쓸데없는 소린 그만두세요." 사메지마는 조용히 후미에를 응시했다. "시마오카씨, 우리는 지금 거기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스도 아카네씨와 당신, 그리고 후지사키 아야카씨와의 관계도 알고 있어요." "뭘 안다는 거야? 가까이 오지 마!" 후미에는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사메지마가 다시 한걸음 좁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 등 뒤에서 도어가 열렸다. 수사 1과 무라우치가 형사 2명을 데리고 들어와서 사메지마 옆에 버티어 섰다. "뭐야, 당신들은. 사내들만 이렇게 몰려와서 뭘 어쩌자는 거야?" "시마오카씨." 사메지마는 후미에가 오른손을 넣고 있는 쇼핑백에 눈길을 박은 채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저항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요." "내가 어디로 가든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야? 당신들이 날 막겠다구? 어림 없는 소리!" 두 형사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후미에는 잽싸게 쇼핑백에서 오른속을 뽑았다. "조심해!" 사메지마가 외쳤다. 후미에는 대나무로 만든 뜨개바늘을 꼭 쥐고 있었다. 끝부분이 꺼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 대바늘엔 맹독이 묻어 있어. 약간 긁히기만 해도 끝장이야!" 형사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빌어먹을!" 무라우치가 혀를 차면서 상의 앞자락을 열어젖혔다. 권총을 뽑을까말까 망설였다. "물러서! 물러서란 말얏!" 후미에는 날카롭게 외쳐댔다. 형사들은 뜨개바늘이 닿지 않을 거리로 물러 섰다. "난 나갈테야. 당신들과 멍청한 얘기나 주고받고 있을 시간이 없어!" "약속이 있는 거죠?" 사메지마가 물었다. "뭐라구?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후지사키 아야카과 만나기로 되어 있는 것 아니오? 그녀도 행방을 감췄어. 당신과 함께 어디로 도망칠 속셈으로......." "그 아이가 왜 도망을 쳐야 돼? 그 아이는 훌륭한 사업가야!" "하지만 살인 공범이기도 하지. 당신과 함께......."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단 말야, 그 아이는." 후미에는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바람에 쓰고 있던 철실모자가 벗겨져 아카네 가슴 위로 떨어졌다. "헛소리 작작하라구. 당신들 도대체 그 아이를 어쩔 생각이야? 그 아이가 도대체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용서 못해!" "그렇다면 경찰청으로 가서 자세히 밝히면 될 것 아니오?" "그런 말에 내가 넘어갈 것 같아? 어림 없어. 어림없구말구." 후미에는 무기미한 미소를 흘리면서 뜨개바늘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물러서려던 형사가 비틀 쓰러지면서 아카네 병상에 고정시켜 둔 기계에 부딪쳤다. 엄청난 소리가 울렸다. 후미에가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다른 형사가 잽싸게 덮쳤다. 오른팔로 후미에 상체를 감아 조였다. 그러나 후미에는 중년 여인으로선 상상도 못할 엄청난 힘으로 형사를 뿌리쳤다. "이것 놔! 이것 놓으란 말얏!" 사메지마는 특수 경찰봉을 뽑아들었다. "뜨개바늘부터 내리쳐!" 무라우치가 말했다. 이어서 열려 있는 도어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뭣하고 있어? 빨리 지원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5,6명이 달려 들어왔다. 협력 요청을 받고 나온 야마나시 현경 병력이었다. 난 화분이 쓰러지면서 꽃잎이 병실 바닥에 흩어졌다. "조심해. 대바늘엔 맹독이 묻어 있어!" 무라우치가 정복 순경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경찰들도 사메지마처럼 경찰봉을 빼들었다. 후미에는 경찰관에게 포위된 채 주춤주춤 물러섰다. 한복판에 서 있는 사메지마 얼굴과, 병상의 아카네에게로 눈길을 번갈아 보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거야. 당신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든 거야!" 사메지마의 말에 후미에의 눈빛이 움직였다. "그래, 맞았어. 내가 그랬어. 하지만 당신들은 몰라. 절대로 알 수 없어!" 후미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눈이 번쩍번쩍하면서 말할 때마다 침이 튀었다. "뭣 때문에 그녀를 그처럼 감싸 주고 있나? 그녀가 당신한테 도대체 뭘 해 주었길래 그러는 거야?" "뭘 해줬느냐구? 당신이 알 바 아냐. 알 까닭도 없구!" 후미에는 소리 높여 웃었다. "그 아이가 내게 뭘 해 주었느냐가 아니야. 내가 그 아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느냐, 그게 중요한 거야." "바보 같은 소리. 당신이 도대체 뭐야? 그녀의 어머니라도 된단 말인가?" "모르겠지? 그걸로 좋은 거야. 어느 누구도, 더군다나 당신같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일이야." 말이 끝나는 순간 정복 경찰관 한 명이 경찰봉을 휘두르며 덮쳐 갔다. 후미에는 왼손으로 경찰봉을 막았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후미에의 얼굴이 구겨지면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다른 경찰봉이 후미에 무릎을 내리찍었다. 병상에 털썩 쓰러졌다. 침대 옆 캐비넷에서 꽃병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이어서 도 다른 경찰관이 후미에의 어깨와 허리를 경찰봉으로 내리쳤다. 후미에는 오른손을 내려 부러진 왼팔을 감싸안았다. 사메지마는 경찰관을 밀어젖히고 후미에의 등을 덮쳤다. 두 사람 밑에 깔린 아카네의 몸이 흔들렸다. 사메지마는 두 손으로 후미에의 오른팔을 잡아당겨 올렸다. 후미에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메지마가 후미에의 오른 손목을 안쪽으로 꽉 잡아누르자, 뜨개바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됐어!" "수갑, 수갑을 채워!" 후미에의 오른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사메지마는 후미에를 당겨 일으켰다. "아, 아......." 후미에의 입에서 메마른 신음이 새어나왔다. 감은 두 눈에선 고통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미에는 천천히 눈을 떴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사메지마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후미에 입언저리에 애매한 웃음이 번졌다. 사메지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후미에 코트 앞자락이 열려 있었다. 가디건 밑으로 흰 블라우스가 보였다. 사메지마는 가디건을 열어젖혔다. 후미에는 사메지마가 하는대로 가만 있었다. 블라우스 오른쪽 가슴에 핏방울이 번져 있었다. "이런! 의사를 불러! 빨리!" 사메지마가 부르짖었다. "제 가슴을 찔렀어!" 후미에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털썩 사메지마에게로 쓰러졌다. 사메지마는 후미에를 받아안고 얼굴부터 들여다보았다. "정신 차려! 무슨 짓이야, 이게!" 후미에는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았다. 경찰관과 함게 의사가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스스로 독을 찌른 겁니다." "독이라니, 무슨 독입니까?" "그건 나도 몰라요. 다만 혈관에 혈전을 일으키는 독이란 것 밖에......." "그런 독도 있나요?" 의사는 후미에의 맥을 짚어보았다. 간호사가 스트레쳐를 병실로 밀고 들어왔다. 사메지마는 의사와 다른 경찰관 힘을 빌어 후미에를 스트레쳐에 실었다. 후미에의 얼굴이 점점 검푸르게 변해 가고 있었다. "안 되겠군." 의사는 후미에의 가슴을 풀어젖힌 다음 청진기를 갖다댔다. "그 독에 대해 좀더 자세히 얘기해 주십시오."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녀라면 알고 있겠지만...... <혈관내 응고증후군> 을 일으키는 건 분명합니다." "<혈관내 응고증후군>?"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사는 신음소리를 냈다. 후미에의 몸 여기저기에 청진기를 갖다대다가 간호사를 향해 재빠른 어조로 처방을 내렸다. "이 사람 이름이 뭡니까?" "시마오카 후미에, 간호삽니다." "간호사? 시마오카씨! 시마오카씨! 내 말 들립니까?" 의사는 몇 번이고 후미에의 이름을 외쳐댔다. 반쯤 감긴 후미에의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켰다. "지금 헤파린 주사를 놓습니다. 시마오카씨, 정신 차려요!" "......끝났어...... 아아...... 이제...... 모두...... 다...... 끝 --- 났 --- 어......." 후미에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당신, 해독하는 법 알고 있나? 시마오카, 알고 있나?" "......몰라 ......나도 몰라." 의사는 초조한 눈으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간호사가 달려온 주사를 연거푸 몇 대나 후미에의 팔에 꽂았다. "어떻습니까, 용태가?" 무라우치가 물었다. "어떻구 자시구 할 것 없어요. 그런 독은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치료를 하고 싶어도 손쓸 방법을 알아야......." 의사는 내뱉듯이 말했다. 후미에의 용태가 절망적임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했다. 사메지마는 후미에의 귀에 입을 바싹 갖다댔다. "시마오카씨! 시마오카씨!" 후미에의 눈동자가 보일 듯 말 듯 움직였다. 자기를 알아보는지 어떤지 사메지마는 자신이 서지 않았다. "사메지맙니다. 잘 들어요. 후지사키 아야카는 지금 어디 있나요?" "아, 아......." "후지사키 아야카, 어디 있어?" 한마디 한마디 떼어서 외쳤다. "아야카? 아야카?" "의식이 혼탁해 있어요." 의사가 중얼거렸다. "그래, 아야카는 어디 있어?" "여기...... 여기......." 후미에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손목엔 수갑이 채워진 채로였다. "여기......." 숨쉬기조차 괴로운 듯, 후미에의 가슴이 아래위로 크게 들먹였다. 오른손으로 가슴과 배 언저리를 가리켰다. "여기......." 이윽고 길게 숨을 들이마시자 휘파람 소리가 신음처럼 뒤를 따랐다. 의사는 혀를 차면서 후미에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후미에의 몸이 활처럼 휘어졌다. 의사는 이곳 저곳 바쁘게 청진기를 갖다대다가 후미에 눈꺼풀을 뒤집어 보았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이윽고 내뱉듯이 입을 열었다. "임종입니다." 사메지마는 후미에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반쯤 감은 상태에서 움직임이 멎어 버린 것이었다. 허옇게 드러난 배 위에 수갑이 차갑게 반짝거렸다. 사메지마는 열쇠를 꺼내어 수갑을 풀었다. 후미에의 목숨이 빠져 나간 손가락이 흔들거렸다. 수갑을 뽑고 나자 손가락이 양쪽 젖가슴 사이로 미끄러져 내렸다. 후미에의 젖가슴은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희고 풍만했다. "여기 세워 주십시오." 사메지마는 야마나시 현경 패트롤카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도로에 하얗게 눈이 덮여 있음을 알았다. 주변 전체가 눈세계였다. 한시간 30분 전부터 비가 눈이 되어 쌓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자기가 타고 온 패트롤카 바로 뒤에 경찰청 수사 1과 위장 패트롤카 2대가 막 멈추어 서는 참이었다.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주변 침엽수의 설화(雪花)가 툭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높직한 통나무집이 눈앞에 보였다. 덧문이 내려져 있었으나 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건물 뒤편에 세워둔 자동차를, 순찰하던 현경 패트롤카가 발견한 것은 40분 전이었다. 넘버를 조회한 결과 요쓰야에 있는 스낵바 점장(店長) 차임이 판명되었다. 5분 전에, 스낵을 찾아간 모모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점장은 가게에 있었다. 자동차는 단골손님에게 빌려 주었다는 거였다. 별장 부지는 줄잡아 3백평은 넉넉할 것 같았다. 관리사무소 얘기로는 도쿄 체인 약국 사장의 소유라고 했다. 확인 전화를 걸어보았다. 전화를 받은 사장 부인은, 잘 아는 사람에게 여벌 열쇠를 한벌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잘 아는 사람이란 바로 자기가 단골로 다니는 뷰티 클리닉의 지점장이라고 했다. 그 지점장은 오너가 사용하지 않는 날을 골라, 자기네 집 미용사들을 데리고 별장에 가서 묵고 온다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일찍, 본점 전무로부터 별장 열쇠를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알려왔다는 것이었다. 사장 부인과 지점장에겐 굳게 함구령이 내려졌다. 사메지마는 통나무집 앞마당에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게 쌓인 눈을 바라보면서, 시마오카 후미에가 이 일을 알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후미에는 병원 현관에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그 병원에서 통나무집까지는 겨우 5백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 아침, 후지사키 아야카와 미쓰즈카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사메지마는 두 사람이 후미에를 없애기로 했음을 즉각 알아차렸다. 아야카가 식물인간인 스도 아카네 살해를 부탁한 것은 후미에를 도쿄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후미에가 아카네를 죽인 뒤엔 병원 언저리, 사람 눈이 없는 곳으로 불러 이번엔 스스로가 후미에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후미에 핸드백엔 전화번호로 보이는 숫자가 적힌 쪽지가 들어있었다. 번호는 관리사무소에 등록된 통나무집 전화였다. 후미에는 <일>을 마친 다음,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가서 전화를 걸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아야카가 그러라고 시킨 게 틀림없었다.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입김은 금방 하얗게 변했다. 곧장 눈 위를 걸어 통나무집으로 갔다. 임의동행을 요구하자면, 아야카의 아름다운 가면부터 벗겨야 했다. 후미에를 덮치는 데 실패한 교훈을 살려 사메지마는 단신으로 아야카와 미쓰즈카를 만나러 가겠다고 고집했다. 무라우치도 사메지마 뜻을 받아들였다. 육중하게 보이는 떡갈나무 도어에는 청동 노커가 달려 있었다. 사메지마는 노커를 두들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패트롤카 3대는 거대한 전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노커 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대답이 없었다. 사메지마는 관리사무소에 비치되어 있는 여벌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무라우치는 만약 사메지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기 책임이라면서 권총을 억지로 허리춤에 꽂아 주었다. "누구야?" "신주쿠 서 사메지마." 도어 안쪽은 다시 잠잠해졌다. "여벌 열쇠를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순순히 여는 게 좋겠어." "무슨 일이야?" "시마오카 후미에." "그 사람이 어째서?" "우선 문부터 열어. 이런 상태로 얘길 계속할 생각이 아니라면." "여벌 열쇠를 가지고 있대도 함부로 열고 들어올 권리가 없어, 당신한테는." "내가 여길 어떻게 알아냈는지 한번 생각해 봐. 당신도 형사였다니까,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알 것 아냐?" 찰칵하고 열쇠 따는 소리가 들렸다. 사메지마는 도어를 밀어 열었다. 터틀 스웨터에 짙은 회색바지를 입은 미쓰즈카가 버티고 서 있었다. 미쓰즈카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메지마를 쏘아보았다. 한순간 눈빛이 번쩍 움직이면서 사메지마 뒷편을 살폈다. "후지사키 아야카도 함께 있지?" "그래서?" "그녀와 얘길 나누고 싶어." "얘기할 것, 하나도 없어." 사메지마는 못 들은 척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섰다. 미쓰즈카가 막아서면서 사메지마 허리춤을 더듬었다. 사메지마는 미쓰즈카 눈을 노려보았다. 미쓰즈카가 뜨거운 것이라도 만진 듯 잽사게 손을 뺐다. 점퍼에 덮인 허리춤의 권총 손잡이가 만져진 것이었다. "왜 이래? 그리고 이건 또 뭐야?" "걱정할 것 없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차고 온 거니까. 사용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미쓰즈카는 못 믿겠다는 듯 사메지마를 노려보다가, 마침내 한발 물러섰다. 나무결을 맞추어 꾸민 거실은 천장도 높직했다. 한복판의 굵은 기둥 2개가 서까래를 떠받치고 있었다. 안쪽 벽에는 플라잉 피싱 낚싯대가 여럿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 대형 석유 온풍기가 보였다. 히터 옆에 후지사키 아야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롱스커트에, 역시 길이가 긴 가디건 차림이었다. 아야카는 약간 불안한 눈초리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사메지마는 성큼성큼 걸어가 두 사람 중간에 섰다. 도어를 닫은 미쓰즈카는 망설이는 것 같더니 문 앞에 그냥 서 있었다. 집안은 밖에서 들어온 사메지마조처 땀이 배어나올 정도로 더웠다. "2시간쯤 전에 <가마이시 클리닉>의 서류상 오너이면서 간호사였던 시마오카 후미에가 이 앞 병원에 나타났었어. 당신 언니가 입원해 있는 바로 그 병원에." 사메지마는 아야카 눈을 쏘아보면서 얘기했다. 아야카는 무표정했다. "시마오카 후미에는 국세청 사찰관 살해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어. 또 그녀 아파트를 수색한 결과 오다키바시 건축현장에서 떨어져 죽은 미모리 오사무 것으로 보이는 세컨드 백을 발견했어. 그 속에 든 수첩에서 미쓰즈카 당신 집 전화번호, <가마이시 클리닉> 번호 뿐만 아니라 후지사키씨, 당신이 쓰고 있는 휴대폰 번호도 찾아냈어." 아야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미쓰즈카가 움직였다. 사메지마 옆을 지나 아야카 곁으로 다가갔다. 아야카는 오른손으로 미쓰즈카 왼팔꿈치를 꼭 잡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미쓰즈카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메지마를 쏘아보았다. "내일 <가마이시 클리닉>을 압수수색하게 되어 있어. 또 경우에 따라서는 ICPO (국제형사기구, 인터폴)을 통해 유럽에 가 있는 가마이시 의사의 신병도 확보할 생각이야."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사메지마는 심호흡을 했다. "시마오카 후미에는......." 아야카가 반사적으로 눈을 들었다. 후미에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다른 환자 문병객을 가장해서 병원으로 들어갔어. 스도 아카네 옆병실 환자 이름을 둘러댄 거야. 이어서 후미에는 스도 아카네 병실로 숨어 들어갔어. 그 병원 모든 병실에는 문병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TV 카메라가 달려 있어. 때문에 후미에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잠복한 경찰관이 모두 지켜볼 수 있었던 게야." 아야카가 입을 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천천히 이어졌다. "언니에게 무슨 변이라도?" 사메지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시마오카 후미에는 맹독을 바른 대바늘을 가지고 있었어. 그걸로 당신 언니를 찌를 생각이었는지도 몰라. 허나 그녀는 10분 가까이 언니 병실에 머물렀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하니,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어." 아야카는 안도의 숨을 내뱉으면서 미쓰즈카 옆얼굴을 흘낏 바라보았다. 미쓰즈카는 굳은 얼굴로 사메지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마오카 후미에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나온 경찰청 수사 1과 형사, 그리고 야마나시 현경 경찰관이 병실로 들어간 것은 그 뒤였어. 그녀는 격렬하게 저항했어." 아야카의 입술이 받르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마오카 후미에는 후지사키씨 당신을 <그 아이> 라고 불렀어. 또 내가 당신을 해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외쳤어." "그만해!" 미쓰즈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새끼, 얄밉게 놀지 마!" "뭐가 얄밉다는 거야? 나는 있었던 일을 그대로 얘기하고 있을 뿐이야. 그런데도 이것이 후지사키씨 당신을 괴롭히는 일이라면...... 그건 바로 당신과 시마오카 후미에가 밀접한 관계라는 증거야. 언젠가 당신은 나한테 부인했지만." 아야카는 눈을 크게 떠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계속해 주세요." "그녀는 당신 언니가 저처럼 식물인간이 된 건 자기 탓이라고 했어. 왜 그렇게 했는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우린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어. 내가 물어봤어. 어째서 그처럼 당신을 감싸 주느냐고. 도대체 당신이 그녀에게 뭘 해 줬길래 그러느냐고 말야." 아야카는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신 다음, 그대로 멈추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어. 미소까지 띄우면서 말야. 당신이 그녀에게 뭣을 해 주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아이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가가 중요해> 라고." 후지사키 아야카 눈에서 눈물이 번뜩였다. 이런 상황이긴 했으나, 눈물을 머금은 그녀 얼굴은 역시 아름답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나는 다시 물어봤어. 그녀는 당신의 무엇이냐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어. 곧바로 엉켜붙어 몸싸움이 벌어졌고, 그녀 팔이 부러졌어." 아야카는 눈을 감았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어서 그녀는 맹독이 묻은 대바늘로 자기 가슴을 찔렀어." 아야카가 깜짝 놀라며 눈이 둥그래졌다. "......고의인지 사고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어. 허나 내 생각으로는 그녀가 자기 의지로 자기 몸을 찌른 것 같아. 의사가 달려오는 동안, 이미 그녀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어. 난 그녀에게 물었어. 당신이, 후지사키 아야카가 어디 있느냐고 말야. 귓전에 대고 외쳤어. 다만 그녀는 아야카, 아야카 하고 불러댔어. 그리고 숨이 넘어가는 순간, 여기라고 말했어. 자기 가슴을 가리키면서 여기, 여기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어." 아야카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떨림을 막으려고, 미쓰즈카 팔에 힘껏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미쓰즈카는 사메지마를 노려보면서 아야카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굳세게 얽히는 것을 사메지마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줌마! 아줌마아......." 아야카는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미쓰즈카, 당신은 이곳에서 시마오카 후미에를 죽일 작정이었어. 후지사키 아야카와 공모해서 후미에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던 거야!" "잠꼬대는 그만 둬!" "시침 떼지 마. 그렇지 않았다면 자취를 감추었던 시마오카 후미에가 새삼스레 이 야마나시엔 왜 나타났어? 후미에는 후지사키씨, 당신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온 게야. 그러나 후미에는 망설였어. 왜, 지금 새삼스레...... 하는 생각에서 말야. 어째서 지금 와서 스도 아카네를 죽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게야. 후미에는 이미 스도 아카네에게 한번 손을 댔던 사람...... 새삼스레 죽이기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때문이야. 그 때문에 후미에는 10분씩이나 그 병실에서 멍하게 서 있었던 거야." 아야카의 얼굴에는 표정도 핏기도 싹 가셔졌다. 사메지마는 아야카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째서 그처럼 충격을 받아? 당신은 그녀를 마음대로 이용해 왔어. 내가 알기만 해도 그녀는 당신을 위해서 세 사람이나 살해했어. 아마 실상은 더 많을 거야. 그래놓고도 마지막 순간에 와서 자기들이 위험해지니까 당신은 그 시마오카 후미에마저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어. 그런 당신이 시마오카 후미에가 죽었다는 얘기에 어째서 그처럼 충격을 받고 있나? 당신은 여기 있다고 가슴을 가리키며 시마오카 후미에가 죽어갔다는 말에 왜 새삼 충격을 받느냐, 이 말이야!" "이 새끼가!" 미쓰즈카가 잡고 있던 아야카의 손을 풀면서 사메지마를 덮쳤다. 사메지마는 몸이 붕 떴다고 느껴진 순간 뒤로 나가 떨어지면서 나무기둥에 등골이 부딪쳤다. 숨이 막혔다. 한순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덮쳐 온 미쓰즈카가 사메지마 허리춤을 더듬어 권총을 뽑으려고 했다. 사메지마는 무릎으로 미쓰즈카 하복부를 걷어올렸다. 신음소리와 함께 주춤 물러서는 미쓰즈카 턱에 이번엔 오른주먹을 날렸다. 미쓰즈카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메지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덫에 걸어 <가마이시 클리닉>에 접근 못하도록 했지? 그게 당신 지혠가, 아니면 이 여자 머리에서 나온 건가? 더러운 꾀만 늘어가지고......." "이새끼!" 벌떡 일어난 미쓰즈카가 사메지마 가슴으로 몸을 던져왔다. 두 사람은 엉켜붙은 채 바닥에 나둥그러졌다. 미쓰즈카는 사메지마 두 귀를 움쳐쥐고는 얼굴에 박치기를 했다. 충격으로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그래도 사메지마는 미쓰즈카 팔을 뿌리치면서 팔굽으로 얼굴에 방아를 찧었다. 피가 튀었다. 사메지마 코에서도, 찢어진 미쓰즈카 입술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사메지마는 미쓰즈카 목줄기를 잡아 일으켜 세운 다음, 허리춤에서 수갑을 뽑았다. 미쓰즈카 눈이 둥그래졌다. "이게 뭔지 알겠나?" 사메지마는 헐떡이면서 피투성이가 된 미쓰즈카 얼굴에 수갑을 들이밀었다. "이건 말야, 시마오카 후미에의 오른 팔목에 한번 채웠던 수갑이야. 허나 후지사키 아야카 당신이 여기 있다면서 가슴을 가리키고 숨을 거둔 뒤에 풀어 줬던 게야. 당신 손목에 채우겠다고, 반드시 채워 보이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야!" 미쓰즈카는 입을 꽉 다물면서 사메지마를 뿌리치려고 몸부림을 쳤다. 사메지마는 잡담 제하고 수갑으로 얼굴을 내리찍었다. 분노가 서린 일격이었다. 미쓰즈카는 그 자리에서 쭉 뻗고 말았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22 > 미쓰즈카 다다시는 상해와 공무집행방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고, 후지사키 아야카는 임의동행 형식으로 각각 다른 패트롤카에 실려 도쿄 경찰청으로 이송되었다. 이튿날 심문에서 후지사키 아야카는 스도 아카네에 대한 살인 미수 교사를 시인했다. 미쓰즈카 다다시는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다. 의사법 위반으로 수배된 <가마이시 클리닉> 원장 가마이시 요시로는 브뤼셀 공항에서 붙잡혔다. 그의 진술을 통해 포플린 -- 쿠보 히로키가 시마오카 후미에 손에 살해됐음이 밝혀졌다. 가마이시와 후미에가 공모해서 아무 이상 없는 태아를 억지로 유산시켜 동결 보존한 다음 미모리를 통해 <수출> 했음도 밝혀졌다. 가마이시는 그 모든 작업이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 사장, 후지사키 아야카 지시에 따른 것이었음을 자백했다. 가마이시는 이미 18년 전에 의사 면허가 취소된 돌팔이였음도 밝혀졌다. <가마이시 클리닉> 을 무대로 한 태아 밀매사건은 가마이시의 진술로 진상이 밝혀졌지만, 시마오카 후미에 짓으로 추정되는 몇 건의 살인사건 전모 수사는 원점을 맴돌았다. 후지사키 아야카의 살인교사 여부에 대해 미쓰즈카는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고, 아야카 역시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었다. 전모를 밝히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타키자와 켄이치와 하마쿠라 요스케 피살사건에 대해서 검찰은 <피의자 사망> 으로 매듭을 지었다. 사메지마는 쇼를 데리고 <인디고>를 찾았다. 스키에서 돌아온 미카요는 <인디고>에 눌러앉은 것 같았다. 이리에 아이와 미카요에게 사메지마는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전부 들려 주었다. 미카요가 울음을 터뜨리자 쇼는 어깨를 감싸안아 주었다. "그럼 그동안 당신, 옷을 벗을 뻔했단 말이지?" 아이가 물었다. "그럼. 여기서 묵었던 날, 그때가 제일 위험했던 순간이었어." 쇼가 미카요를 안은 채, 사메지마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아이가 눈치를 채고 얼른 입을 열었다. "제법 무드가 있었어. 하지만 술에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쇼는 말없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사메지마를 찔렀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아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마쿠라 묘 (화장한 유골을 봉안하는 납골당을 일본에서는 묘라고 한다 - 역주), 어디지?" 아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 유골, 아직 집에 있어. 어디 좋은 데 없어? 도시 한복판이 좋을까, 아니면 시골이 좋을까......." "시골이 좋겠어. 자형도 도시엔 이제 질렸을 테니까." "그렇군." 아이가 생긋 웃음을 흘렸다. "그 사람, 도시 한복판에 두면 저 세상에서도 여자한테서 발을 씻지 못할 테니까......." "야마나시는 어때?" 사메지마는 스도 아카네 병실에서 내다본 눈덮인 미나미 알프스를 머리에 떠올리며 말했다. "야마나시? 좋겠어요. 위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고속도로를 타면 금방 다녀올 수도 있구......." 코지가 찬성했다. "그래, 생각해 보지."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메지마는 스도 아카네를 생각하고 있었다. 스도 아카네의 존재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번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스도 아카네 자신은 그것도 모른 채 22년간 잠만 자고 있었다. 지금도 계속 자고 있는 것이었다. 난초에 묻혀서. 그러나 그 병실엔 더 이상 난이 늘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한촉 또 한촉 시들다가 언젠가는 병실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메지마는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