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주검의 난 (상) 지은이: 아리마사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소개 < 1 > < 2 > < 3 > < 4 > < 5 > < 6 > < 7 > < 8 > < 9 > < 10 > ⊙ 작가소개 ** 오사와 아리마사 1956년 생의 젊은 작가로, 1979년 <<感傷의 도시>>로 제 1회 <소설추리> 신인상을 받으면서 데뷔했으니 올해로 집필 연륜이 15년 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15년 동안 <소설추리> 신인상을 비롯하여, 1986년에는 <<深夜曲馬團>>으로 <일본모험소설대상> 최우수 단편상을, 1991년에는 <신주쿠 상어> <한국어판<<소돔의 성자>>)로 제 12회 <吉川英治 文學> 신인상과,제44회<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 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1993년에는 <<無間人形>> <한국어판<지옥의 인형>)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나오키 상> 수상 이전부터 오사와 아리마사는 이미 우리 독자에게도 퍽 친숙해져 있다고 하겠다. <상속자 TOMOKO>를 시작으로 <신주쿠 상어> 시리즈인 <<소돔의 성자>> <<독원숭이>> <<주검의 난>> 등을 통해 오사와 아리마사가 얼마나 아기자기하고 능숙한 이야기꾼인가 하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다. 또한 <<지옥의 인형>>에 <나오키 상>이 주어진 것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능숙하게 이야기를 끌어감으로써 독자를 즐겁게 해 준 데 대한 하나의 훈장이 되는 셈이다. 그의 장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인 문장과 치밀한 구성력 그리고 독자의 허를 찌르는 교묘한 함정과 반전을 들고 있으나, 그보다는 기본 취재와 자료 조사에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모든 상황과 인물에 사실성 내지는 현실성을 살리고 있다는 것이 강점이라고 할 것이다. 현재 일본추리작가협회 상임 이사직을 맡고 있다. < 1 > 니시신주쿠 2쵸메, 고층 호텔 일층 커피 라운지로 들어선 사내는 <청색> 전문의 장물아비였다. 직사각형이 길쭉한 라운지 -- 입구의 샹들리에를 제외하면, 조명이라고는 각 테이블에 설치된 자그마한 램프뿐이었다. 샹들리에 밑에 잠시 걸음을 멈춘 사내를 사메지마는 등을 돌리고 앉은 채 자세히 관찰했다. 엘리베이터 홀 벽에 붙은 대형 거울이 라운지 입구를 똑똑하게 비춰 주었다. 사내는 옅은 회색 바탕에 스트라이프가 든 셔츠에 감색 넥타이, 비싼 트위드 수트 차림이었다. 왼팔엔 코트를, 오른손엔 세컨드 백을 들고 있었다. 안에는 휴대용 전화가 들어 있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사내 이름은 미모리였다. 법률용어로 장물이라고 하는 도난품은 그 즉시 수배를 하게 되어 있었다. 장물은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기 위해 피해품 물목을 만들어 고물상이나 전당포로 배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물목수배는 <특별 중요물건> <중요물건> <보통물건> 의 세 종류로 분류하여 각각 적색, 청색, 백색 용지를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중요물건>으로 분류되는 피해품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살인, 강도 등 흉악사건의 피해품, 중요문화재, 피해액 빽만엔 이상 또는 50만엔 이상의 상습사건의 피해품, 사회적 영향이 큰 사건의 피해품. 장물아비는 한정된 종류만 취급하는 <전문>과 그렇지 않은 <비전문>으로 나누어진다. <전문>은 대체로 보석, 시계 등 귀금속을 다루는 게 통례였다. 미모리는 <비전문>의 장물아비였다. 그대신 물량의 규모가 컸다. 미모리는 서슴없이 라운지 안쪽으로 걸어갔다. 관엽식물이 시야를 가려 사메지마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게 그 녀석이야." 사메지마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타키자와에게 말했다. 타키자와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젊군." "젊구 말구. 그 바닥의 뉴웨이브야. 나이가 나나 당신과 비슷할 걸." "나는 구두쇠 영감인 줄 알았어. 뒷전에서 꼬무락거리는 매정한 고집쟁이 말야." "제법 거창하게 설치고 다니긴 하지만 좀체 꼬리를 잡히지 않는 녀석이야. 일정한 사무실도 없이 여기저기 호텔을 돌아다니면서 상담을 벌이지, 오늘처럼." "물건은 어디다 두구?" "트럭, 컨테이너, 창고, 페리를 이용하고 있어. 일정한 곳에 모아두는 법 없이 항상 이동시키고 있어. 경찰이 덮친다 하더라도 허탕치기가 일쑤지." 타키자와는 한심스럽다는 듯 턱을 앞으로 바싹 잡아당겼다. 그런 제스쳐를 바라보며 사메지마는 그가 대학시절과 변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타키자와는 학생 때부터 영감 냄새가 물씬거릴 정도로 묘하게도 늙어 보였다. 건방지게 보이는, 턱을 잡아당기는 제스쳐 때문인지로 몰랐다. 언제나 자기 주장은 굽히지 않으면서 남의 말에는 절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그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대학 동기인 타키자와는 사메지마와 같은 해에 상급 공무원 시험 (행정고시에 해당) 을 쳤으나 실패, 재도전한 이듬해에도 낙방하는 바람에 국세청에 취직했다. 그가 국세청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사메지마는 적지 않게 놀랐었다. 국세청은 경찰 이상으로 캐리어와 논캐리어의 차별이 심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캐리어는 상급 공무원 시험 합격자로 本廳에서 채용한 자, 논캐리어는 그 이외의 공무원 - 역주). 국세청 논캐리어는 다시 성(省; 大藏省) 캐리어와 청(廳) 캐리어 두 종류로 분류되었다. 성 캐리어는 대장성서 채용해서 국세청에 배치한 사람들이었고, 청 캐리어는 국세청으로 바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성 캐리어가 우위에 있었다. 도쿄 국세청만 보더라도 국장, 부장, 과장은 성 캐리어 차지였다. 차장급에 와서야 비로소 청 캐리어가 얼굴을 내밀 수가 있었다. 전국적으로 열 한 곳이나 되는 국세국 (지방 국세청) 의 경우, 논캐리어가 국장으로 있는 곳은 한 곳 뿐이었다. 청 캐리어조차도 두세 국에 불과했다. 그 이외의 국장 자리는 모두 성 캐리어의 몫이었다. 논캐리어에게 국장 포스트를 한자리나마 마련해 준 것은 사기 진작을 위한 배려였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내무관료적인 발상이었다. 경찰조직에선 논캐리어라 하더라도 총경이나 경무관까지 승진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성 캐리어 밑에 청 캐리어라는 벽이 있는 국세청에서는 논캐리어의 출세는 이미 한계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단 하나뿐인 논캐리어 국장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밖에 없었다. 타키자와는 그런 국세청에 들어가자마자 사찰 파트를 지원했다. 국세청 사찰 부문은 엘리트 코스가 아니었다. 다른 파트와 인사교류가 거의 없이,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정년퇴직까지 못박히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퇴직한 뒤 세무사 개업을 하더라도 실무에 익숙치 못한 핸디캡이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타키자와의 요청으로 만난 자리에서 사메지마가 받은 명함에는 <도쿄 국세청 사찰부 제5 부문 사찰관 타키자와 켄이치> 라고 적혀 있었다. "제5?" 사메지마가 묻자 타키자와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설명해 주었다. "사찰은 모두 34부문까지 있어. 그 가운데 1에서 15까지는 정보 담당, 21에서 34까지가 실제 행동팀이야. 우리가 부지런히 긁어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이 덮치는 거지." "그래, 날 만나자고 한 용건이 뭐야?" 사메지마 말에 타키자와는 허리를 쭉 폈다. 사메지마 아파트 근처, 나카도 역전 다방에서였다. "알고 있겠지만, 우린 경찰을 전혀 신용하지 않아. 내사하고 있는 얘길 해 주면, 예외없이 정보가 새기 때문이야." 사실이었다. 국세청 사찰부는 내사 내용을 경찰에 귀띔해 주는 법이 없었다. 구체적인 혐의를 확인하면 직접 지검 특수부에 협조를 구했다. 압수수색 영장을 발급받아 덮치는 단계에 가서, 그것도 격렬한 저항이 예상될 경우에만 비로소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할 뿐이었다. 경찰이 국세청의 사찰을 알게 되는 것은 그런 경우뿐이었다. 지검은 당연히 경찰과 접점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검찰도 국세청 사찰 내사 대상에 관한 한 경찰관에게 정보를 흘려 주지 않았다. "사찰 부문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배운 업무수칙이 <경찰을 믿지 말라> 였어." 사메지마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국세청 사찰이 움직여야 하는 부동산 금융관계 대규모 탈세사건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폭력단이 관련돼 있기 마련이다. 형사들은 탈세 혐의엔 흥미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건 검찰의 일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형사들이 흥미를 느끼는 것은 공갈, 상해, 감금, 살인이었다. 국세청 사찰이 개인을 포함한 조직을 상대로 하고 있는 반면, 경찰은 어디까지나 개인이 상대였다. 따라서 개개인의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 형사는 정보제공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필요가 있었다. 국세청 사찰의 내사 정보는 그런 거래에 더할 수 없이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카드였다. 눈이 번쩍할 정보를 하나 가르쳐 주지. 너네가 관여하고 있는 XX부동산, 국세청 사찰이 눈독을 들이고 있어.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는 게 좋을 거라고 사장한테 귀띔해 주라구. 헌데 최근에 일을 저지른 녀석, OO이지? 지금 어딨어? "아무리 열심히 정보를 수집했다 하더라도, 실제 덮쳐 보면 증거는 깨끗이 사라진 뒤야. 당신네들한테 먼저 얘길 건네놓으면." "그렇더라도 털어보면 떨어지는 먼지도 있을 것 아냐? 그게 사찰의 솜씨라고 생각하는데......" "하긴 그래. 헌데 당신네 관내에 미모리라는 장물아비가 있지?" 타키자와는 의자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면서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대부분의 형사라면 이런 경우 어물쩍하는 게 보통이지만 사메지마는 달랐다. "있어." 한마디로 잘라 대답했다. "어디 있는지 좀 가르쳐 줘." "녀석에겐 일정한 사무실이 없어. 도내 호텔 커피숍을 부산하게 돌아다닐 뿐이야." "어딜 가면 만날 수 있을까?" "호텔 이름을 가르쳐 주지. 날마다 거기 가서 죽치고 있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야." "얼굴도 몰라." "그럼 나보고 따라다니다가 저녀석이 그 녀석이라고 찍어달라는 게야?" "사진이 있을 것 아냐, 사진이......." "안됐군. 그런 건 본청 일이야. 본청엘 가서 협조해 달라고 부탁해 봐." 말을 마치고 일어서려는 사메지마의 팔을 타키자와가 잡아당겼다. "본청에 협조를 요청하면 정보가 새게 마련이야. 당신이 도와 줘야겠어." "본청에 드나들 수 있는 입장이 못 돼, 나는." "알고 있어. 높은 사람과 옥신각신하다가 물먹었다면서?" "쓸데없는 소린 관둬." "그래. 어쨌든 당신이라면 입이 무거울 거라고 믿고 이렇게 부탁하러 온 게야." 사메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모리에 대해 궁금한 게 뭐야?" "저녀석이 그녀석이라고 가르쳐 주기만 하면, 그걸로 좋아." "이유를 말해 봐. 미모리가 진짜 타키트는 아니지?" 타키자와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꼭 말해야 되나?" "우리가 심심풀일 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 사메지마는 한숨을 깨물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비록 타키자와가 썩 기분 좋은 녀석은 아니었지만, 사찰관으로서는 상당한 경험을 쌓은 베테랑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알았어. 우리가 노리는 상대는 아키하바라의 사무자동기기 도매업자야. 일반 고객은 상대 않고 주로 기업체, 병원에 컴퓨터를 납품하고 있어. 비록 중고품이긴 하지만 다른데보다 엄청 싼값으로 신형 모델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에 꽤 번창하고 있나 봐. 궁금한 건 그들이 어디서 물건을 떼오는가 하는 점이야. 내사 과정에 퍼시픽 통상이란 회사가 떠올랐는데, 더듬어 올라가자 미모리란 이름이 나왔어. 어떤 사람인가 조사했지. 뜻밖에도 꽤 이름이 알려진 장물아비 였지 뭐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얘기였다. 미모리는 귀금속엔 관심이 없었다. 고액의 장물만 취급했다. 대규모 빌딩털이한테서 사무기기를 넘겨받아 아키하바라 중고 전문업자에게 공급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령 미모리가 장물을 아키하바라에 흘리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경찰이 움직여선 곤란해. 우리가 아키하바라의 탈세 혐의를 밝혀 덮칠 때까지는 잠자코 있어 줘야 해." 타키자와의 말투는 진지했다. 사메지마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장물수사는 방범과 업무였다. 때문에 사메지마는 미모리를 알고 있었고, 미모리도 사메지마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미모리가 사메지마 근처엔 얼씬거리지 않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을지도 몰랐다. "알았어." 사메지마는 뜸을 들인 다음 말을 이어갔다. "미모리 행방을 한번 눈여겨 볼 테니까 시간을 좀 줘. 녀석이 나타날 만한 곳이 잡히면 연락해주지. 그대신 아키하바라를 덮칠 땐 꼭 알려 줘야 해." "녀석이 얘기하고 있는 상대는 누구야?" 타키자와가 초조한 듯이 물었다. "몰라. 여기선 안 보여." 사메지마는 대답하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 40분이었다. "아키하바라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뭐야?" 타키자와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관내 각 세무서에서 올라온 정보 때문이었어. 거기서 납품받아 신품으로 경비를 떨군 회사가 몇 군데 있었어. 허나 신품으로 보기엔 뭔가 좀 이상했다는 게야. 그래서 신품 같은 중고품을 취급하는 사무자동기기 도매상을 훑기 시작한 거구, 결국은 아키하바라를 찾아낸 거야." "당신 혼자서?" "주사(主査) 한 사람, 짝이 있어. 그는 지금 옆길을 훑고 있어." "옆길을?" 사메지마가 되묻자 타키자와는 눈길을 돌렸다. 타키자와가 이처럼 미모리를 감시하고 있으면서 다른 손님들의 옷차림이나 장식품에도 눈길을 보내고 있음을 사메지마는 깨달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형사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습성이었다. "은행에 연락해서 자료를 살펴보도록 시켰어. 이 건과 관련없는 다른 수상한 예금계좌도 전부 카피하도록 했지. 그렇게 하면 우리가 노리는 게 누군지 은행서도 눈치 채지 못할 테니까 말야." "그런 걸 옆길이라고 하나?" 타키자와의 말투엔 다른 기관에 대한 국세청의 우월감 같은게 스며 있었다. 국세청의 상부기관인 대장성(大藏省; 재무부)은 금융기관의 감독관청이기도 했다. 때문에 정보가 필요하면 언제든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난 이 건이 제법 물건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것도 제법 규모가 큰 물건이 될 것 같아." "거래금액이 문제가 되나 보군, 당신네들은." 사메지마 말에 타키자와는 바보같은 소리 작작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문제가 아냐. 실제 탈세액이 중요해. 사찰 솜씨에 따라 엄청나게 차이가 나거든." 바로 그때, 미모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같이 앉아있던 사람도 함께였다. 홀쭉한 키에 스리피스를 단정히 차려 입은, 눈길이 매서운 사내였다. 나이는 마흔 한둘쯤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메지마는 사내 얼굴을 머리 속 깊이 새겨넣었다. "뒤를 쫓을 생각인가?" 두 사람이 라운지를 나가는 걸 지켜보던 타키자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고마웠어." 타키자와는 겉치레 인사를 남기면서 호텔 밖으로 나가는 미모리를 잰걸음으로 쫓아갔다. 미모리가 호텔 입구에서 동행과 헤어져 유리문을 밀치는 참이었다. 동행의 사내는 그대로 로비에 서 있었다. 타키자와가 커피값도 내지 않고 나가 버리는 것을 보고 사메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모리 주변에 코를 킁킁거리며 다니는 게 결코 안전하달 수 없는 일이지만, 타키자와도 본업이 국세청 사찰 담당관이었다. 불필요하게 위험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사메지마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카운터로 갔다. 미모리도 타키자와도 이미 보이지 않았다. 커피값을 내면서 사메지마는 엘리베이터 홀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미모리와 함께 있던 사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녹색 램프가 켜지면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 내리는 손님들과 어개를 부딪쳐 가면서 안으로 들어가려던 사내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리는 손님 가운데 아는 사람이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 몇 마디 주고받았다.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턱이 뾰족한 게 어딘가 무서운 인상을 주는 사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야쿠자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눈매는 산전수전을 겪을대로 겪을 사람만이 갖는 독특한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사내는 상대방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얘기를 나누었던 사람은 뭔가 긴장된 자세로 로비 한복판으로 걸어왔다. 값비싼 낙타 체스터필드, 흰 셔츠 깃, 핀홀로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동그린 게 보였다. 머리는 웨이브를 넣어 올백으로 빗어넘겼고, 무테 안경 속에서 껌벅거리는 큼직한 눈이 사람 좋게 보였다. 사메지마는 라운지에서 나와 그 사내 쪽으로 걸어갔다. 키가 큰 사내는 겨울인데도 햇볕에 검게 그을은 얼굴이었다. 왼손등이 오른손보다 희게 보이는 걸로 보아 꽤나 골프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손목엔 금줄이 감겨 있었다. 사내도 다가오는 사메지마를 알아본 듯, 큼직한 눈이 더욱 커졌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오랜만이군, 하마쿠라씨." "이러지 마십시오. <씨>라뇨, 당치도 않게......." 하마쿠라는 신경이 쓰이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기하군, 대낮부터. 그처럼 경기가 좋은가 보지?" "이러지 마십시오. 경기가 좋다니...... 정반댑니다. 한 아이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하마쿠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러지 말구, 우리 앉아서 얘기하자구." 사메지마는 로비 한구석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하마쿠라도 로비 한복판에 서서 얘길 나누는 것보다는 낫다고 체념한 것일까, 발걸음을 옮겼다. 하마쿠라는 이 근처 고층 호텔을 무대로 한 고급 콜걸의 기둥서방 겸 포주였다. 폭력단의 신세를 지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각성제나 마리화나, 코카인 따위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거느리고 있는 여자는 언제나 3,4명, 게다가 상품관리 측면에서 꽤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소중히 여겼다. 철저하게 정기검진을 받게 하는 한편으로 화대 가운데서 일정액을 아가씨 명의로 정기예금까지 해 주고 있었다. 말하자면, 경우 밝은 포주라고 평판이 자자했다. 매춘이라고는 하지만 호텔 로비나 길거리에서 손님 소매를 끄는 것도 아니었다. 자동차 전화를 접수창구로 삼아 이 일대를 빙글빙글 도는 것이 하마쿠라의 영업방법이었다. "연말부터 찬바람입니다. 다른 걸 시작해야 할까 봐요." 하마쿠라는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엄살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으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겉보기엔 연약한 분위기이지만, 거느리고 있는 여자가 야쿠자에게 붙잡혀 가자 혼자 몸으로 뛰어들어 구해 내올 정도로 당찬 데가 있다는 얘기를 사메지마는 들은 적이 있었다. 하마쿠라는 야쿠자 사무실로 뛰어들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기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까 여자 몸엔 손가락 하나 대지 말아달라고 큰절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이후부터, 얼핏 경박하게 보이는 하마쿠라를 사메지마는 입장이야 어떻든 호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었다. "병에 걸렸다니, 나쁜 병인가?" 사메지마가 물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곧 그만둘 아가씨였어요. 임신을 한 바람에. 손님 아이가 아니라 애인 아이였죠. 낳을 생각으로 죽 산부인과엘 다녔었죠. 허나 얼마 전에 본인은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도 그만 낙태수술을 당하고 말았어요. 울고불고......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가여웠죠. 뭔가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낙태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다른 환자로 착각한 게 아니었을까요? 이 근처엔 꽤 많으니까요. 단골로 다니던 병원이 있었지만 갑자기 복통이 오는 바람에 가까이 있는 다른 병원으로 갔다지 뭡니까. 그래서 그런 변을 당했다는 겁니다. 내가 전화로 따지자 아무튼 태아가 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없다는 거 있죠? 생떼같이 들려 내가 울화통이 다 터지더군요. 게다가 들어낸 태아, 장례라도 치르게 돌려달랬지만 들은 척도 안했어요. 아무리 참으려도 참을 수가 있어야죠." "공갈로 발목 잡히지 않게 조심해. 화가 난다고 함부로 설치지 말구." "어쨌든 사과와 함께 응분의 보상을 받아낼 작정입니다." "그럼, 지금 병원으로 가는 길?" "네. 참, 함께 가 주세요. 사메지마씨 앞이라면 그 사람들도 함부로 생떼는 쓰지 못할 겝니다." "그건 무리야. 내가 나서면 협상만으론 일이 끝나지 않아." "그렇군요.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하마쿠라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사메지마는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영리한 하마쿠라이니까 공갈이 되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윽박질러 보상금을 듬뿍 짜낼 것이라고 믿었다. "헌데, 조금 전 당신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얘기를 나누었던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야?" 하마쿠라는 긴장하면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그야 얼굴이 익었겠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그는 말을 이어갔다. "미쓰즈카씨예요. 사메지마씨가 신주쿠 서에 온 지 얼마나 됐죠?" "4년인가? 곧 5년이 되는군." "그럼 잘 모르시겠군. 그 사람 전에 이거였어요." 하마쿠라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이마에 갖다댔다. "어디서?" "신주쿠. 아니, 요쓰야였던가? 어쨌든 형산 형사였어요." "지금은 꽤 경기가 좋아보이던데?" "그럴 겁니다. 미용 살롱 여사장과 붙어먹었으니까요. 꽤 괜찮은 여자예요. 돈도 넘칠만큼 많구......." "미용 살롱?" "네. 이 호텔 영업장을 가지고 있어요. 최고급의 회원젭니다. 우리 아이들도 한번 보내볼까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입회금이 3백만엔이라는 바람에 포기했죠. TV에도 자주 광고가 나와요.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이라고......." "처음 들어보는데......." "하긴 남자들과는 관계없는 얘기이니까요." 하마쿠라는 그럴 거라는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미쓰즈카씨에겐 자다가 생긴 떡이죠. 결혼한 건 아닌 것 같지만, 비서처럼 궂은일 마른일 혼자 도맡아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마쿠라의 무릎을 툭 쳤다. "미안했어, 바쁜 사람 붙들어서." "아니 괜찮습니다. 그럼, 저는......." 하마쿠라는 벌떡 일어나서 잰걸음으로 호텔 밖으로 나갔다. 사메지마가 신주쿠 서로 돌아오자 방범과장인 모모이가 불렀다. "그 건은 끝났나?" "네." 50대 초반의 경감인 모모이의 별명은 시체였다. 15년 전 교통사고로 외아들을 앗긴 뒤부터 살아가는 정열을 몽땅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언제나 기름기 하나 없는 푸석푸석한 머리, 구김살투성이의 브라운 수트 차림이었다. 일이 있든 없든 돋보기를 끼고 과장석에 앉아 시간을 죽이는게 그의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상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 경찰청에 들어온 사메지마의 지금 계급은 경감이었다. 제대로 되었다면 경정, 빠른 친구들은 총경까지 승진해 있을 나이였다. 그러나 현경 (縣警,지방경찰청 - 역주) 공안 3과 주임경감으로 배속된 스물일곱살 때, 우익 성향이 강한 부하와 충돌한 끝에 나무칼(木刀)로 머리를 얻어맞아 실신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메지마를 내리친 부하는 면직당했고, 얼마 뒤 사메지마도 경찰청으로 복귀했지만, 이번에는 경찰청 공안부 내의 암투에 말려들게 되었다. 동기생인 미야모도 경정이 자살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죽기 직전, 사메지마 앞으로 편지를 보낸 사실이 미야모도의 일기에 적혀 있었다. 경찰청 공안부라면 일본 전국 경찰본부가 수집한 공안 관련 정보가 집결되는 곳이었다. 정보수집과 분석 능력은 군국시대의 특별고등경찰을 훨씬 능가할만큼 우수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보의 가닥잡기는 옛날보다 훨씬 힘이 들었다. 자신이 수집한 정보가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해 허둥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미야모도는 말하자면 가닥을 잘못 잡아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야모도의 실패가 우연한 일이 아니라 계산된 함정이었음을 그는 편지를 통해 사메지마에게 알린 것이었다. 공안엔 양대 파벌이 피나는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야모도는 파벌싸움의 소모품으로 이용당한 것이었다. 양대 파벌은 미야모도의 편지를 내놓으라고 각각 사메지마를 윽박질렀다. 애원하기도, 매수를 시도하기도, 협박하기도 했지만 사메지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메지마의 속셈을 가늠하지 못하게 된 수뇌부는 일단 그를 배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위험인물인 사메지마를 배제하는 데는 양대 파벌 모두 이의가 없었다. 당시 정년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던 외사(外事) 2과장만이 중립을 지키면서 사메지마의 생명을 걱정해 주었다. 경찰을 그만두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한 외사 2과장은 사메지마에게 일선 경찰서 근무를 권했다. 본청 공안부 소속의 캐리어 경감을 일선 서로 전임시킨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인사였다. 사메지마 계급이 경감에 멈춰져 있는 것도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주쿠 서로의 전임은 강등인 동시에 좌천이었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였다. 사메지마가 상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경찰청을 선택했을 때만 해도 경찰관이란 직업에 대해 강한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막연하게 자신의 적성이 경찰관과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8년 동안 엄청나게 변하고 말았다. 그렇던 사메지마가 훌륭한 경찰관이 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된 것이었다. 사메지마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훌륭한 경찰관은 국가나 경찰기구가 원하는 훌륭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법과 정의에 충실한 경찰관이었다. 경찰도 하나의 조직인 이상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 --- 조직의 룰보다 자기 자신의 룰을 우선시키는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사메지마는 피라밋 상층부에서 굴러떨어진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다. 구름 위에서 신주쿠 경찰서라는 지상으로 떨어진 사메지마와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신주쿠 서의 각 부서 책임자들은 하나같이 사메지마를 거부했다. 그러나 단 한사람, 모모이만은 예외였다. 모모이는 누가 배속되어 오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사메지마는 자기를 받아 주지 않은 사람들에게 단 한마디도 섭섭함이나 불평, 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 다만 하루하루 말없이 싸워 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원도 없었다. 단신으로 중요 범인을 쫓는, 위험한 상황이 다반사처럼 계속되었다. 사메지마의 중요 범죄 검거율은 신주쿠 서내에서 언제나 톱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논캐리어 형사들의 반감을 샀다. 사메지마는 고독했다. 그러나 자신의 외로운 싸움을 모모이가 이해해 주고 있음을, 마음 속으로 지원해 주고 있음을 최근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모모이는 사메지마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자리를 걸고 흉악범을 사살한 것이었다 (<소돔의 성자>참조). 그 사건으로 두 사람 사이가 갑자기 친숙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모모이는 여전히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시민의 안전을 지키려는 정열이 남모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그것을 깨달은 뒤부터 상사인 모모이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맡은 수사 진행상황도 모모이에게만은 빠짐없이 털어놓으려고 노력했다. 신주쿠 서에서 사메지마가 신뢰하는 사람은 모모이 이외에 단 한사람, 감식계의 야부뿐이었다. 타키자와로부터 미모리 건에 대해 협조 부탁을 받은 사실을 모모이도 알고 있었다. 물론 모모이가 국세청 사찰의 내사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흘릴 염려는 전혀 없었다. 사메지마는 자기 자리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다가 언뜻 생각이 나서 모모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쓰즈카라는 사람, 알고 계세요? 신주쿠 선가 요쓰야 서 형사였다는......." 사메지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방범과 베테랑 형사들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과장보좌인 신조경위가 헛기침을 하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다른 형사 2명도 뒤를 쫓듯이 나갔다. 그들을 눈으로 쫓던 사메지마는 과장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모이는 천연스런 얼굴로,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처럼 가까스로 코끝에 걸린 돋보기 너머로 서류를 읽고 있었다. 이윽고 모모이가 고개를 돌렸다. "미쓰즈카 다다시 말인가?" "이름까지는 모르지만...... 마흔한둘쯤 되는 나이에 턱이 뾰족한, 키가 큰 사람입니다." 모모이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과 경사로 있던 사내야. 머리회전도 빠르고 힘도 셌었지. 당신이 오기 직전에 그만뒀어. 당신처럼 관내 야쿠자들이 두려워하던 존재였어." "왜 그만뒀습니까?" 모모이는 한숨을 내쉬면서 돋보기를 벗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만나본 게로군, 미쓰즈카를." "우연히 보기만 했죠. 미모리와 함께였어요." 사무실 안에는 모모이와 사메지마 두 사람뿐이었다. "미모리와?" 모모이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우리서로 미모리를 끌어들인 게 미쓰즈카였어." "죽이 맞았나요?" "그럼. 지나칠 정도로 친밀했디. 그게 원인이었어." 사메지마는 말없이 모모이를 바라보았다. 모모이는 얘기를 할까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다. 만약 모모이가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미쓰즈카에 대해 얘기해 줄 사람이 달리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윽고 모모이가 입을 열었다. "당시 관내엔 고이소카이라는 폭력단이 있었어. 지금은 다른 데 흡수되어 없어졌지만. 고이소카이 간부가 각성제를 밀매하고 있다는 정보를 캐치한 미쓰즈카는 호스테스로 있는 간부 애인에게 접근했어. 허나 자주 만나다 보니 어느덧 남녀관계로 발전하고 말았어. 미쓰즈카는 정보를 얻어낼 수단으로 그랬던 것 같아. 허나 호스테스는 그게 아니었어. 미쓰즈카에게 홀딱 반한 거야. 애인이었던 야쿠자를 미쓰즈카에게 넘겨 줄 만큼......." "............." "현장을 덮쳤지. 영장을 발부받아 수사진이 덮치자, 야쿠자 간부는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호스테스를 인질로 잡아 미쓰즈카를 데리고 오라면서 버텼어.' "여자가 배신한 것을......." 모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어. 미쓰즈카가 나타나자, 여자 목에 식칼을 갖다 대면서 어쩔 생각이냐고 물었어. 그 전 해 이혼을 한 미쓰즈카는 독신이었어. 미쓰즈카는 여자를 품은 것은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분명하게 잘랐어."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사내는 여자를 찌르려다가 결국 자기 목에 칼을 꽂았어. 병원으로 옮겼으나 출혈이 심해 어쩔 도리가 없었어. 사흘 뒤 호스테스도 야마노데센 (도쿄 순환 전동차) 에 몸을 던졌구. 즉사였어." 사메지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사건 때문에 고이소카이는 결국 쑥밭이 되고 말았지. 이쪽에선 경찰청 감찰이 출동했구. 미쓰즈카의 수사방법에 문제가 없었는지 조사가 시작된 거야. 서내에서 미쓰즈카는 역시 고립되어 있더군. 형사로서는 우수했던 만큼 프라이드도 높았어. 아마 그 때문이었겠지, 미쓰즈카가 고립된 건. 미쓰즈카를 감싸 주는 형사가 한사람도 없었어. 감사 결과, 의원면직 형식으로 옷을 벗게 되었지." 사메지마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미쓰즈카를 처음 본 순간 위험한 인물이란 느낌을 받은 까닭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미쓰즈카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전형적인 경찰관이었는지도 몰랐다. 인간과 인간이 극한상황에서 맞부딪친 결과로 발생하는 범죄를 일상적으로 대하다 보면 윤리관까지 왜곡되어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범죄자를 상대하다 보면 수사관측의 윤리관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규범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폭력 전담 형사가 일반 시민늘보다 야쿠자들에게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반 시민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세계에서 살다 보면 일상 대화에서 쓰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까지 갭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의사와 환자의 관계와 비슷한 것인지도 몰랐다. 장기 입원환자와 주치의의 대화에 건강한 사람은 위화감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그들에겐 병원이 세계의 전부일 뿐, 바깥세계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었다. 의사와 환자에겐 질병이라는 결초 회피할 수 없는 공통의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양자 사이엔 특수한 신뢰관계가 조성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외부사람이 결코 엿볼 수 없는 완전한 배타적인 관계였다. 범죄와 질병을 같은 차원에 올려놓을 수는 없지만 상습 범죄자와 형사의 관계는 환자와 의사 관계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거기엔 기묘한 프라이드까지 있었다.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프라이드가....... 범죄자도 형사도 서로를 프로라고 인정하게 되면, 그렇지 못한 일반 시민을 아마추어라고 가볍게 보는 버릇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구치소 같은 데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수감된 피의자와 담당관 사이에, <너희들은 익숙한 녀석들이야. 풋나기들, 말썽부리지 않게 잘 보살펴 줘> 라는 따위의 대화가 오가는 것이 좋은 예이다. 다만 이처럼 변형된 윤리관을 느닷없이 같은 경찰관으로부터 규탄받게 된 것이 미쓰즈카의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물론 모모이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미쓰즈카가 취한 수사 테크닉은 용납받지 못할 방법이었다. 그러나 피의자와 호스테스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와 비슷한 수법으로 범인을 뒤쫓는 형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국세청 사찰이 정보가 누설될까 봐서 경찰을 경원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쓰즈카는 지금, 자기를 헌신짝처럼 내 버린 경찰기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미쓰즈카가 우수한 형사였다는 모모이의 말을 듣자, 사메지마는 더욱 신경이 쓰였다. < 2 > 바람이 심한 날이었다. 오후 4시, 일찌감치 일을 끝낸 후미에는 신주쿠 역 나시구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코트 앞자락을 감싸안으며 웅크린 채 땅만 보고 걸었다. 이 언저리가 특히 바람이 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름이라면 오히려 가슴 속까지 시원해질 바람이었다. 그러나 한겨울에 몰아치는 돌풍은 뼛속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차고 매웠다. 얼굴을 들자, 거대한 묘석처럼 도청사(都廳舍)가 우뚝 시야를 가로막고 나섰다. 저처럼 거대한 건물이 들어섰는데도 어쩐 일인지 이 언저리엔 인기척 하나 없었다. 후미에는 새로 지은 도청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건방지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게 사람의 접근을 꺼리는 것 같은 분위기조차 물씬거렸다. 더군다나 도청사가 들어서고부터 이 언저리의 빌딩 돌풍이 더 심해진 것 같아 무척 밉살스러웠다. 찬바람을 이기지 못해 눈물까지 흘렸다. 이제 다 왔어. 조금만 참자 -- 하고 후미에는 자기 스스로를 달랬다. 1백 미터만 가면 도의회 의사당 지하로 이어지는 신주쿠 역 지하도 입구가 있었다. 계단을 타고 지하로 들어서면서 후미에는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퍼머를 한 짧은 머리가 바람에 날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염색을 벌써 2주일이나 미루어 온 탓에 머리 밑은 눈이 쌓인 것처럼 새하얗게 보였다. 20대 후반부터 희끗희끗해지던 머리가 30대 중반에 들면서는 완전한 백발이 되고 말았다. 때문에 정기적으로 미장원을 찾아 물을 들여야 했다. 일찍 머리가 센 게 병 때문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체질 탓이었다. 작년, 마흔아홉 살 생일을 맞으면서 염색 주기를 조금씩 늦춰오고 있었다. 쉰에 접어든 할머니 머리가 흰올 하나 없이 새카맣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구불구불한 지하도를 걸으면서 후미에는 자신이 개미굴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풍경스럽기 짝이 없는 지하도 -- 그런데도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와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쇼핑가까지는 아직 얼마간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같은 지하도이긴 하지만 이 지역은 훈기가 하나도 없었다. 따뜻한 곳은 쇼핑가 뿐이었다. 그러나 귀를 찢어 버릴 듯이 불어닥치던 찬바람이 없는 것만 해도 살 것 같았다. 내일부터는 작년 설에 샀던 털실모자를 쓰고 다녀야겠다고 후미에는 속으로 생각했다. 작년은 비교적 날씨가 따뜻했던 탓에 모자를 쓰고 다닌 것은 2월 한달 뿐이었다. 3천8백 엔이나 주고 산 걸 한달밖에 쓰지 못해 아쉬웠지만, 올해는 지금부터 써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 아껴쓰면 내년까지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물건 아끼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것은 후미에의 자랑이기도 했다. 지하 쇼핑가에 접어들면서 후미에는 저녁장을 봐갈까 어쩔까 망설이기 시작했다. 야채나 반찬가게는 없었으나 찐만두, 돈까스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밥은 이미 지어두었으니까 반찬될 만한 것을 사들고 들어가면 저녁을 때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들를 곳이 있었다. 거기 가서 장을 보는 것도 괜찮을 성싶은 생각이 들었다. 신주쿠 역에서 야마노데센으로 메구로까지 갔다. 목적지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는 이미 어제 지도로 확인해 놓고 있었다. 메구로 역에서 도영(都營) 버스를 타는 게 제일 편리했다. 전동차도 버스도 아직은 시간이 이른 탓일까, 별로 붐비지 않았다. 메구로 역 앞에도 가게가 즐비했다. 후미에는 다시 장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부터 가야 할 그곳에도 가게는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참기로 했다. 후미에는 시로가네 3쵸메에서 버스를 내렸다.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버스 손님은 여학생과 노인들 뿐이었다. 여학생들의 수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 데다가 시간도 약간 이른 것 같아 걷기로 했다. 뻔뻔스럽고 시건방진 소녀들이었다. 스커트 길이와 헤어스타일에만 신경을 쓴 탓일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여인 냄새까지 물씬거렸다. 이 근처 학교엘 다니는 걸로 봐서 부자집 따님들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후미에 자신과 비슷한 아니거나 몇 살쯤 손아래일지도 몰랐다. 후미에는 결혼을 한 적이 없었다. 단 한번 임신한 적은 있지만, 그것도 이미 25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손자를 봤어도 벌써 봤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뱃속의 아이를 빼앗은 대신 그 아이를 보내 주었다. 그 아이도....... 나이가 얼만데. 걸으면서 후미에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가 후미에에겐 친자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친자식? 조금은 다르게 보일지 몰랐다. 우선 나이 차이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후미에가 없더라도 혼자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후미에는 끝까지 돌봐줄 생각이었다.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나와 그 아이는 숙명의 끈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닌가. 그것은 한평생 끊어지지도, 끊을 수도 없는 끈이 아닌가. 물론 내가 먼저 죽는 건 당연한 일.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눈물을 흘려 줄 것이다. 그것으로 족한 일 -- 여한 없이 나는 지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손질이 잘 된 가로수가 늘어선 길에서 후미에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고급 저택과 맨션 아파트가 즐비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겉보기엔 그리 크지 않은 맨션 아파트였으나 한집 한집 평수는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양을 받은 것인지, 세들어 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엄청나게 비쌀 것만은 틀림없었다. 걸어가면서 주차장을 눈여겨 보았다. 맨션 아파트 주차장 만으로는 모자라 따로 월간 계약으로 쓰고 있는 주차장이었다. 벤츠가 엄청 많이 눈에 띄었다. 후미에가 알고 있는 수입차 이름은 벤츠 뿐이었다. 화살촉 3개가 든 동그라미 마크가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기가 쉬웠다. 핸들이 왼쪽에 붙어 있는 것이 수입차라는 얘길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일본은 자동차가 좌측통행이기 때문에 핸들이 오른쪽에 붙어있다 - 역주). 눈여겨 보자 주차해 있는 차의 절반 가량은 핸들이 왼쪽에 달려 있었다. 그 사내가 몰고 다니는 차는 뭐더라? 포르세, 틀림없이 포르세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그러나 후미에는 포르세가 어떤 모양의 차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 맨션 아파트는 주차장 바로 옆이었다. 파란 타일이 번쩍거리는 6층 건물이었다. 지하주차장 입구는 셔터가 내려진 채 녹색 램프가 켜져 있었다. 그 옆에 적색 램프가 있는 걸로 봐서 차가 드나들 적마다 램프 색깔이 바뀌는 것 같았다. 손목시계를 흘낏 보았다. 5시가 조금 안 된 시간 -- 슬슬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후미에는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로 했다. 아무리 돈많은 사람들만 모여사는 곳이라 하더라도 크로켓이나 야채 샐러드 가게는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가로수 거리를 얼마 걷지 않아 수퍼 비슷한 가게가 보였다. 큼직한 유리창이 달린 가게 입구엔 금속제 카트가 쌓여 있었다. 외국 수퍼를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그래, 귤도 조금 사자. 후미에는 고다츠 (화로가 달린 좌탁 - 역주) 접시에 귤이 몇 개밖에 없던 게 생각났다. 수퍼 앞 인도에는 자동차가 여전히 빽빽하게 주차해 있었다. 빨간 벤츠, 흰색차. 대형차가 많았다. 타고 온 여자들은 후미에와 별로 나이 차가 없었다. 물장사 여자들일까. 자동차 키를 달랑거리며 잰걸음으로 들어가는 모피코트 여자를 보면서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자, 그 언저리를 걷고 있는 여자나, 자동차를 몰고 온 여자나 모두 머리를 단정하게 세트한 빈틈없는 차림들 뿐이었다. 평범하게 보이는 옷도 엄청나게 비쌀 게 틀림없었다. 수퍼 입구에서 후미에는 네살박이 소녀의 손을 잡고 나오는 여인과 마주쳤다. 서른한둘 쯤일까. 화장기 하나 없는 흰 얼굴에 안경을 낀 여인은 블라우스에 판탈롱, 모피코트 차림이었다. 그녀의 블라우스 한장 값이라면 후미에가 입고 있는 코트, 가디건, 스커트를 모두 사고 남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비켜선 후미에를 새초롬한 얼굴로 무시했다. 기분 나쁘게, 건방진 년. 돈많은 사람은 모두 똑같다고 후미에는 생각했다. 동시에 지금 자신의 복장에 갑자기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코트 단추가 모두 잠겨 있는지 살펴보았다. 팔꿈치가 빠진 가디건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손수 짠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못했다. 수퍼 안은 후덥지근할 정도로 따뜻하고 밝았다. 클래식 음악도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입구 가까이엔 외국 캔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수퍼라면 어디나 비치해 놓고 있는 황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후미에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캔 옆은 과일 코너였다. 수박. 복숭아. 딸기. 파파이아. 키위. 망고..... 후미에가 처음 보는 과일들이었다. 한개 4천엔이라는 가격표를 보자 그녀는 입이 딱 벌어졌다. 멜론도 아닌데 그처럼 비싸다니....... 물론 멜론도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귤은 어디 있을까. 이리저리 뒤진 끝에 잔챙이만 골라 담은 주머니를 찾아냈다. 값을 보자 손이 오므라들었다. 5백엔이나 하다니. 후미에 아파트 근처 가게에선 이것보다 몇 개 적기는 하지만 한접시에 3백엔밖에 하지 않았다. 그만두기로 했다. 이처럼 비싼 귤을 사먹는 사람들은 세금 한푼 내지 않고 얼렁뚱땅 돈을 번 벼락부자들일 게 틀림없었다. 육류와 생선 코너는 수퍼 제일 안쪽에 있었다. 활선어 코너 수조(水槽) 에는 왕새우, 전복, 참도미 따위가 꾸물거렸다. 정육 코너엔 흰 서리를 뒤집어 쓴 커트 미트가 진열되어 있었다. <최고급 마쓰사카 쇠고기> (마쓰사카는 미에현 중부의 도시로 쇠고기 명산지 - 역주) 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후미에는 가까스로 한쪽 구석에서 플라스틱 팩에 들어 있는 크로켓을 찾아냈다. 2개들이 하나에 4백 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미에와 비슷한 연배의 주부가 정육 코너에서 걸음을 멈추는 게 보였다. 주부라고 판단한 것은 왼손의 반지, 오른손에 들고 있는 흰 비닐 주머니, 그리고 기장이 긴 평상복처럼 보이는 스커트 때문이었다. "이봐요. 1백 그램 4천 엔짜리 고기 3백 그램만, 그래요, 전골용으로.'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몸에 밴 태도였다. 후미에는 기가 질린 채 그 주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스커트 주머니에서 두툼한 지갑을 꺼냈다. 장보기 때 갖고 다니는 지갑이었다. 1만 엔짜리 지폐가 몇십 장이나 들어 있는 게 엿보였다. 주부는 예쁘게 손질된 손가락으로 그 중에서 2장을 뽑아냈다. "항상 고맙습니다." 흰 가운의 중년 남자가 포장한 고기를 내밀면서 돈을 받았다. 그것을 보자 후미에는 약간 마음이 놓였다. 이 수퍼의 정육과 생선 코너는 그 자리에서 계산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크로켓만 달랑 들고 계산대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싫었던 후미에로서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후미에는 크로켓 팩과 그 옆에 있던 마카로니 샐러드 팩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중년 사내는 흘낏 눈길만 주었을 뿐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고 후미에가 조금 불안해 하고 있는데, 열여덟아홉쯤 되어 보이는 수습 점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후미에는 말없이 왼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1만엔 지폐 한장에 1천엔 짜리 몇장뿐이었다. 네 겹으로 꼬깃꼬깃 접은 1천 엔 지폐를 내 주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거스름돈이라야 겨우 1백 수십 엔에 불과했다. 아파트 근처 가게에서 샀다면 적어도 5백 엔 동전 한닢은 거슬러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기가 막힐 정도가 아니라 울컥 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모두 제정신들이 아니야. 제정신들이라면 이런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야말로 돈을 하수구에 내다 버리듯 쓰는 사람들이었다. "봉투에 넣어 드릴까요?" 젊은 여점원이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투로 물었다. "그래, 그렇게 해 줘." 수퍼 이름이 인쇄된 흰 비닐 주머니에 크로켓과 샐러드를 담았다. 후미에는 잰걸음으로 붐비는 카운터를 빠져 나왔다. 세 군데 계산대 앞 접시엔 하나같이 1만 엔 지폐가 담겨 있었다. 날마다 날마다 장보기에 1만 엔씩. 그것도 반찬 몇 가지 사는 데만. 겨우 수퍼를 빠져 나온 후미에는 인도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차고 건조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머리 속까지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야지. 아직 할일이 남았잖는가. 후미에는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아까 갔던 맨션 아파트를 향해 가로수 길을 또박또박 걷기 시작했다. 쇼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사메지마는 침대에 누워 텔리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나카노구 노가다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퇴근해서 혼자 저녁식사까지 마친 뒤 아파트로 돌아온 건 9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쇼와는 벌써 열흘째 만나지 못했었다. 쇼의 밴드 <후즈 허니>의 첫 앨범이 발매된지 꼭 한달째 되던 날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사메지마는 그날 <후즈 허니>가 라이브 투어를 떠난다는 얘길 들었다. 2주일 예정으로 서일본 일대를 순회한다는 것이었다. 앨범이 나온 직후였기 때문에 손님이 많을 것 같진 않았으나, 쇼를 비롯한 멤버들은 라이브를 못해 몸이 근질거린다고 했다. 지금까지 <후즈 허니>는 도쿄를 제외하면 북칸토 지방 몇몇 도시에서만 라이브 공연을 해 왔었다. 이번은 쿄토를 비롯해서 칸사이 지방 몇몇 도시를 누빌 예정이었다. 쇼는 이번 공연을 무사수행 (武士修行) 이라고 이름붙였다. 전화 벨 소리가 울리자 사메지마는 벽시계를 보았다. 10시 12분. 쇼가 전화를 걸어오는 것은 11시에서 12시 사이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쇼의 전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가도 괜찮아?" 수화기를 들자마자 화난 것 같은 쇼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어디야, 지금?" "하라주쿠." "와." 사메지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사메지마는 다시 텔리비전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쇼의 집은 시모키타자와엿다. 일층에 렌털 비디오 가게와 아이스크림 집이 있는 맨션 아파트 원룸에 살고 있었다. 하라주쿠는 쇼의 무대가 아니었다. 사적인 일로는 가까이 갈 생각도 않는 곳이었다. 쇼의 무대는 신주쿠였다. 신주쿠서 일하고, 신주쿠서 노래부르고, 신주쿠서 스카웃된 쇼였다. 프로로 데뷔한 지금, 프로덕션측은 쇼가 신주쿠에 나다니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다. 쇼가 사귀고 있던 패거리들이 무슨 트러블이라도 일으켜, 거기 휩쓸려드는 게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쇼는 프로덕션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메지마와 만나는 곳은 물론 신주쿠였고, 식사도, 술도, 섹스를 즐기려고 러브호텔을 찾을 때도 신주쿠였다. 쇼와 사메지마의 나이 차이는 열 살도 더 되었다. 그래도 사메지마는 자기가 정말 쇼에게 빠져 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쇼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것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쇼는 사메지마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았다. 밴드의 멤버들도 물론 다 알고 있었다. 형사와 록싱어가 사랑을 나누는 게 보통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르지만, 사메지마는 평범한 형사가 아니었고, 쇼도 통상적인 록싱어가 아니었다. 게다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사메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형사나 록싱어라는 직업에 <보통, 통상적인> 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두사람 관계가 앞으로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쇼는 그런 걸 심각하게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사메지마는 생각은 하지만 결코 입 밖에 내기 않는 타입이었다. 다만 헤어진다 하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먼 훗날의 일이기를 바랐고, 헤어지는 아픔을 이겨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 속의 아픔이란 건, 느끼지 않는 척은 할 수 있지만, 정말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여 그것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쇼와의 이별을 생각하자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겁쟁이가 되고 있음을 사메지마는 깨달았다. 아마도 그것은 쇼를 영원히 잃어 버릴 뻔했던 일년 전의 사건 때문인지도 몰랐다 (<소돔의 성자> 참조). 그런 것은 절대로 쇼가 눈치 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쇼에 대해 우월한 입장에 서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쇼가 그것을 눈치챘을 때, 쓸데없이 이것저것 배려해 주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튀는 공처럼, 불덩이처럼, 그러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고 직선적으로 굵직하게 달리는 강한 쇼를 사메지마는 사랑하면서도 존경했다. 그것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쇼에게 가르쳐 준 것보다도 쇼의 생존 태도에서 배운 것이 훨씬 많다고 사메지마는 느끼고 있었다. 밤 11시가 조금 안 되어 벨이 울렸다. 사메지마는 현관으로 가서 도어록을 풀었다. 형사인 이상, 사메지마도 언제나 도어를 잠그는 게 습관이었다. 얼마간 알콜에 젖은 탓일까, 쇼의 눈자위가 발그스름했다. "아잇 추ㅇ!" 한마디 내뱉으면서 구두를 벗는 둥 마는 둥 뛰어든 쇼는 석유 난로부터 찾았다. 검정 코트에 검정 머플러, 검정 스웨터, 검정 스커트 -- 검정색 일색이었다. 초미니스커트 안에 받쳐입은 타이츠도 검정색이었다. "여학생처럼 보이는 타이츠로군." 코트를 벗어던지고 몸을 구부려 불을 쬐는 바람에 동그란 히프라인이 눈에 두드러지게 보였다. 쇼는 몸을 빙글 돌려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음탕스럽긴!" 사메지마는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향수일까, 샴푸일까, 청결감이 물씬거리는 냄새가 가슴에 스며들었다. 쇼의 머리가 지난번보다 많이 자란 것 같았다. 그래도 남자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눈코 윤곽이 뚜렷한 탓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쇼를 남자로 착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메지마가 <로케트 유방> 이라고 별명을 붙인 가슴이 상대방을 압도할 것처럼 팽팽했다. "여학생 같다니? 중늙은이처럼 그따위 말버릇이 어딨어?" "중늙은이니까." "밥맛 떨어지는 소리 작작해. 중늙은이 만나러 허겁지겁 왔단 말야?" 쇼는 어깨로 사메지마를 밀쳤다. "왜 이래?" 사메지마가 맞받아 밀치자 쇼가 비틀거렸다. "어머, 사람을 쳐?" "하라주쿠서 뭘 먹었어?' 사메지마가 묻자 쇼는 후하고 입김을 내뱉었다. 마늘 냄새가 뒤섞인 민트 껌 냄새가 풍겼다. "불고기?" "맞았어, 안 팔리는 록싱어 아가씨를 불고기로 낚아보자는 대리점 아저씨와." "대리점?" "광고대리점. <캅>이 잘 안 팔린대. 그래서 그걸 CM 송으로나 써보자는 생각인가 봐.' "안 팔려?" "안 팔려!" 쇼는 자르듯이 대답했다. 첫 앨범 타이틀이 <캅>, 형사였다. 쇼가 아니라 다른 멤버들이 재미있다면서 붙인 것이었다. "금방 날개가 돋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레코드 회사는 그게 아닌가 봐. 예상이 빗나가 실망한 얼굴들이었어." 기합소리와 함께 쇼는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언 몸이 녹았는지 스웨터를 벗어던졌다. 티셔츠엔 이라는 로고가 들어 있었다. 같은 티셔츠 10장을 쇼는 사메지마 아파트에도 갖다두었다. "그래서 CM 송으로?" "응. 손쉽게 틀어들 줄 테니까." "그래서?"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사치한 투정이겠지만, 우리 노래가 에스테 살롱인가 뭔가 하는 CM 송으로 타락해서야......." "에스테 살롱?" "흔해빠진 미용 클리닉 비슷한 것." "어디 있는 건데?" "몰라." 대답하면서 타이츠를 벗어던진 쇼는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이 따뜻해." 흐뭇한 웃음까지 할렸다. 쇼의 웃는 얼굴 분위기는 <티없이 해맑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웃음이 번지기 직전까지는 오히려 상처입은 야생동물과 같은 사나움을 느끼게 했다. 사메지마는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침대 옆으로 끌어당겨, 말타듯이 걸터앉았다. 담배를 꺼내어 물자, 쇼도 손을 내밀었다. "나두 한대, 아저씨." 불을 붙여 주자, 쇼는 입에 물고 반듯이 누워 천장으로 눈길을 던졌다.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안 팔리는 건 팔지 못한다, 이건가?" 혼잣소리처럼 종알거렸다. 눈자위에는 약올라 하는 표정이 뚜렷하게 번지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면 결국 안 되는 거지 뭐." 쇼가 다시 종알거렸다. "팔리고 싶어?" 사메지마가 물었다. "어느 정도는. 시늉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많이 팔리리라고는 처음부터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쇼의 <후즈 허니>가 어떤 벽에 부딪쳐 있음을 사메지마도 최근 수주간 동안 줄곧 느껴오고 있었다. <후즈 허니>는 라이브 하우스에서 시작해서 한걸음 한걸음 착실하게 자라온 밴드였다. 라이브 하우스에서는 나름대로 팬을 확보하는 데 성공, 정기공연 입장권은 언제나 매진되었다. 개중에는 열광적인 팬도 있었다. 사메지마 자신도 <후즈 허니>의 사운드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테크닉도 수준급이었고, 무엇보다도 온몸으로 소리를 내지르는 쇼의 보컬이 좋았다. 첫 앨범 <캅>에는 쇼의 가사를 사메지마가 손질해 준 작품도 두 곡이나 들어 있었다. 가사를 만들어 준 걸 사메지마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쇼에겐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때때로 그 곡을 혼자 흥얼거리기도 했다. 만약 쇼가 옆에서 들었다면 배꼽을 잡고 떼굴떼굴 굴렀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라이브 하우스를 주름잡은 실력이 반드시 거대한 대중시장에서도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후즈 허니>가 골목대장 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모든 건 순서와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록이 좋아서 밴드까지 만들어 프로를 지향하던 젊은이들에게, 꿈에도 그리던 첫 앨범을 내놓은 그들에게 첫술에 배가 부르랴, 팔리는 건 기대도 하지 말라고 타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점이 바로 <후즈 허니>가 맞닥뜨리고 있는 벽이었다. 사메지마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벽을 뛰어넘은 사람만이 거물이, 스타가 된다고 말해 봤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건 그들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레코드 회사 사람들로부터도 같은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을 게 틀림없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벽에 부딪쳐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벽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벽에 부딪쳐 겪는 괴로움 그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 주는 것 역시 내키지 않았다. 잘난 척하는 것같이 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라이브에 가서 마음껏 부르짖고 와. 요즘 욕구불만 아냐?" 쇼가 눈을 흘겼다 "욕구불만은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이 사람아." 사메지마가 웃으며 말했다. 쇼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아저씨, 와인 마시고 싶어." 사메지마는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어 보이면서 일어섰다. 냉장고에서 마시다 남긴 백포도주병을 꺼내어 글라스 2개와 함께 들고 왔다. "잔, 필요 없어." 쇼는 상반신을 일으켜 와인을 병째로 나발을 불었다. 마시고 나자 옆으로 비켜앉으면서 침대 한쪽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아저씨 일루 와." "쯧쯧. 꼭 아저씨라고 이름 붙인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부르는 것 같군." 사메지마 말에 쇼는 생긋 웃음을 흘렸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게 되면 <상어>란 이름을 붙여야지." "요노옴!" 사메지마가 덮쳤다. 쇼는 깔깔거리면서 빠져 나갔다. 사메지마에게 붙잡히자 빙글 몸을 돌려 사메지마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두 팔은 사메지마 허리에 감에 조였다. "냄새 좋지? 목욕, 방금했어." 사메지마가 말하자 쇼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깡패형사 냄새!" "죽고 싶어?" 사메지마는 쇼의 머리를 가슴에 힘껏 조여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 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두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은 몽땅 침대 밑에 떨어져 있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언제나 네가 전화 걸던 시간이야." "없다고 그래, 만약 당신 찾는 전화라면......." 쇼가 졸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들었다. "잠을 깨운 건가?" 조용한 목소리, 모모이였다. "아닙니다." 모모이 목소리 이외에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경찰서에서 거는 전화가 아님을 사메지마는 금방 알아차렸다. "조금 전 내가 아는 기수 (機搜, 기동수사대) 쪽에서 문의가 있었어." "무슨 일루요?" "하마쿠라라는 사내 알고 있지, 포주 노릇하는...?" "네." 바로 어제 호텔에서 만났었다. "자기 아파트 부근에서 죽어 있는 걸 발견했대. 외상은 없었지만, 일단 변사로 보고 감찰의 (監察醫)가 검시(檢視)를 한 모양이야. 결과, 작은 상처를 찾아냈어. 목줄기, 머리카락 있는 부분이라는군. 타살 혐의가 있다고 봐서 이쪽으로 문의한 건가봐." "부검 결과는 어떻게 나왔답니까?" "아직은. 만약 그 상처가 원인이라면, 독살로 봐야 할 것 같아. 하마쿠라에 대해 뭔가 짚이는 것 없나?" "독살과 연관될 만한 것 말입니까?" 산부인과 병원과의 트러블이 생각나서 사메지마는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살해당할 만큼 상대를 몰아세우거나 할 그런 위인은 아닙니다." "글쎄. 그 산부인과, 어디 있는지 들어봤나?" "아뇨,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만......." "일단 기수 담당자에겐 그렇게 말해 두지. 만약 저쪽에서 알아내지 못하면 수사 1과를 통해 다시 연락해 올 게야." "알았습니다." "미안해, 늦은 시간에." "원, 별말씀을......." 모모이는 전화를 끊었다. 사메지마는 쇼를 바라보았다. 고른 숨소리만 들렸다. 잠이 든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팔베개를 하고 벽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마쿠라가 산부인과 의사를 협박하다가 살해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마쿠라의 <사업>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을 야쿠자도 적지 않다고 보는게 옳았다. 부검 결과를 보지 않고는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야쿠자 범행으로는 살해 수법이 약간 기묘했다. 야쿠자의 살인은 전시 효과를 노려 반공개적인 대담한 방법을 취하거나, 시체를 포함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는 두가지 중의 하나가 대부분이었다. 전시 효과를 노릴 경우, 사살이나 척살 (刺殺) 과 같은 끔찍한 수단을 동원했다. 범인도 바꿔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없애 버리는 경우는 시체를 깊은 산속이나 쓰레기 하치장 같은 데 묻어 버려, 좀체로 꼬리가 잡히지 않도록 했다. 금전관계 살인일 때 곧잘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하마쿠라의 경우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하마쿠라가 거느리고 있는 아가씨는 겨우 서너 명, 게다가 어제 만났을 때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별로 경기도 좋지 못했다. 그런 하마쿠라를 죽이면서까지 <사업>을 강탈하러 나설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불경기를 견디지 못해 엉뚱한 일에 손을 댔다가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해석인 동시에 현실성도 높았다. 이 경우 엉뚱한 일이란 도박 아니면 마약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메지마는 그의 죽음과는 별개의 실망감을 느꼈다. 사메지마가 하마쿠라에게 가지고 있던 호감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긴 했으나 그래도 법을 가운데 놓고 양쪽으로 갈라선 사람으로서는 결코 흔하다고는 볼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마쿠라의 사인이 어쩌면 가시가 되어 가슴을 찌를지도 모를 일 --- 수사 1과로부터 조회가 오면 좋겠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사메지마는 하마쿠라의 얼굴과 제스쳐를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각오로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하마쿠라의 죽음은 사메지마 가슴에 아픔으로 남았다. < 3 > 풀에서 나온 후지사키 아야카는 수에드 수트 차림인 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34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스포츠 센터에도 샤워가 완비되어 있었으나, 오늘은 아카네를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한달에 한번, 아카네를 찾아가는 날이면 아야카는 정성껏 몸단장을 했다. 34층 스위트룸에서 아야카는 샤워를 한 뒤, 머리 단장에 이어 화장을 시작했다. 아카네와 아야카는 어릴 적에 쌍둥이 같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아카네가 한살 손위이긴 했으나 처음 만나던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 제일 많이 닮은 부분은 눈이었다. 아야카는 자신의 눈을 언제나 화장의 포인트로 삼았다. 아야카의 쌍꺼풀 눈은 평소때는 길쭉하게 보였으나 의식해서 크게 뜨면 보호를 애원하는 어린애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런 표정이, 남녀를 불문하고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무기가 되고 있음을 이야카는 알고 있었다. 여자 얼굴은 헤어스타일이나 의상에 따라 바뀌어지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눈이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양새뿐만이 아니라 눈에 담긴 힘이 그 여자의 매력을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배스룸 거울에 비친 얼굴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광등 탓에 눈의 힘이 빠져, 멍청하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싫어 아야카는 언제나 신주쿠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햇빛을 받으며 화장을 했다. 스칸디나비아 제품인 드레스를 준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호텔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4년째. 방값으로 한달에 3백만엔 넘게 지불했다. 때문에 어지간한 것은 아야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아카네가 만약 의식을 회복한다면 --- 그런 생각 때문에 아야카는 다른 때보다 화장에 더욱 정성을 들였다. 라인을 긋는 손길이 신중해졌다. 그러나 너무 조심하다가는 화장을 망칠 염려도 있었다. 아카네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그 눈에 비치는 물체가 자기 얼굴이기를 아야카는 간절하게 바랐다. 때문에 아카네를 찾아갈 때는 언제나 화장에 정성을 들였고, 옷에도 신경을 썼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여자라면, 자기보다 예쁜 아가씨가 얼마든지 있다고 아야카는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은 아름답기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지성도 갖추었고 게다가 보호본능을 유발시키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아야카는 그 두 가지 무기를 교묘하게 사용해 오고 있었다. 냉정하게 처신해야 할 때는 지성을, 상대방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을 때는 눈빛을 이용했다. 옷도 거기에 맞추어 입었다. 지난 5년 동안, 아야카는 병원으로 갈 적에 같은 옷을 입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오늘 입고 갈 옷도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다. 무엇을 입을까 망설일 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 맞춘 옷 가운데서 제일 비싸고 좋은 옷을 입었다. 그래야만 아카네가 눈을 떴을 때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카네의 병실은 백색의 세계였다. 때문에 아야카는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색 계통을 골라 입었다. 오늘은 오렌지색 수트였다. 목에는 어제 배달된 샤넬 스카프를 감기로 했다. 구두와 핸드백까지 색깔을 맞춰 골라 신고 든 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 서른다섯이긴 했으나 남의 눈에는 결코 서른이 넘지 않게 보일 자신이 있었다. 아야카가 경영하는 살롱은 고객들에게 <나이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권장하고 있었다. 이 캐치프레이즈는 고객의 대부분이 다른 살롱과는 달리 3,40대 개중에는 50대도 끼어 있는 탓에 반응이 좋았다.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대부분의 고객들은 넋을 잃고 <나이에 걸맞는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자신들은 이미 한물 갔다고 생각하고 있던 고객들에겐 그 캐치프레이즈가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 어머, 한물 갔다뇨! 잘못된 생각이세요, 그건. 아야카는 그렇게 일깨워 주었다. -- 손님은 올해 마흔다섯이죠? 하지만 10년은 더 늙게 보이네요. 마흔다섯 살 피부는 훨씬 매끄럽고 아름다워 화장도 잘 받아요. 손님도 나이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되찾아야 해요. -- 그게 가능해? 대부분의 손님은 놀라면서 미심쩍어 했다. 보다 더 아름다워지고 싶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눈곱만큼 남아 있던 꿈이 기적을 바라며 아야카에게 매달렸다. 때문에 아야카 살롱은 언제나 돈많은 손님으로 붐볐다. -- 가능하구말구요. 아야카는 <눈의 힘>을 무기 삼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렇잖아요? 손님 연세는 마흔 다섯. 스무 살 아가씨처럼 싱싱해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마흔다섯의 아름다움을 되찾는 건 어렵지 않아요. 지금 쉰다섯으로 보이는 손님은 마흔다섯을 되찾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훨씬 더 아름다워질 거예요. 마흔다섯 여인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고 깜짝 놀라지나 마세요. 그 말은 마술이나 다름없었다. 젊어지는 것은 무리한 일이지만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지 않게, 제 나이를 되찾는 것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님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아야카는 종업원들에게 절대로 손님을 <사모님> 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단속했다. 이름을 부르도록 시켰다. <아야카씨> <아카네씨> 처럼. 그렇게 불러 주자 손님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젊은 시절, 처녀 시절 기분에 젖어들었다. 쉰이 넘은 <사모님>이 살롱에만 오면 이상스럽게도 소녀처럼 수줍게 웃는 것이었다. 이름을 불러 주자, 처음엔 당황하거나 불쾌하게 여기던 손님들도 어느덧 여학생들처럼 <네에-> 하고 길게 뽑아 대답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를 앞세워 아야카는 살롱을 번창시켜 왔다. 그러나....... 아야카 자신은 결코 <나이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화장품을 다루어 오면서 아야카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나이와 함께 시든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터득했다. 피부가 늙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갓난아기의 피부야말로 최상의 미(美)였다. 나이가 들면 눈동자도 탁해졌다. 티없이 맑은 어린 아이의 눈이야말로 별보다 더 아름다웠다. 화장이란 건 따지고 보면 잃어버린 젊음을 임시로 메우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에 걸맞는 아름다움> 이란 게 만약 있다면, 그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에서 풍겨나오는 어른스러움일 뿐이었다. 돈과 시간으로 사기에는 너무도 비싼 것이었다. 물론 그런 걸 알고 있는 여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여자들이 아카네의 살롱을 찾는 일은 결코 없었다. 에스테 살롱이 여자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름답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움 자체, 다시 말해서 외견상의 변화라고는 볼 수 없었다. 외견상의 아름다움은 바로 젊음 자체였다. 젊음이야말로 아름다움이 아닌가. 아야카는 그렇게 믿었다. 때문에 자신을 젊게 보이려고 세심한 주의와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이야카는 무선전화기 쪽으로 팔을 뻗쳤다. 호텔에 떼를 써서 설치한 전용전화였다. "아래에 와 있어.' 남자 목소리, 시간도 정확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알았어요. 바로 내려갈께요." 아야카는 전화 스위치를 껐다. 미쓰즈카는 지하주차장이 아니라 로비 정면, 호텔 현관 앞에 차를 세워놓고 기다렸다. 회전 도어 바로 코앞에 멈춰 있는 새하얀 밴트레이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흘낏흘낏 돌아보았다. 지난날, 남자들이 고급차를 몰고 와 아야카를 유혹했을 때, 그녀는 어떤 차를 타는 게 자신을 제일 돋보이게 해 줄까하고 망설였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것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돋보인다 하더라도 결국은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핸들을 잡은 사내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야카나 자동차가 아니라 그 사내였다. 진짜 돋보이는 사람은 자동차와 여인을 지배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감색 더블수트를 차려입은 미쓰즈카가, 회전 도어를 바져 나오는 아야카를 보자마자 잽싸게 운전석에서 내려와 뒷자석 도어를 열어주었다. 아야카는 진홍색 가죽 시트에 미끄러지듯 몸을 실을 다음,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앉았다. 미쓰즈카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도어를 닫았다. 그렇게 하면 아야카가 기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돋보이는 것은 미쓰즈카도 자동차도 아니었다. 아야카 자신이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어 천천이 벤트레이를 출발시킨 미쓰즈카는 룸미러로 아야카를 응시했다. "무척 아름답군." "반했어?" "응. 정신을 잃어버릴 만큼. 당장 안고 싶어." "안돼. 병원부터 가야 해요." 아야카는 웃으며 못부터 박았다. 미쓰즈카는 매정하게 자르지 않으면 게걸스럽게 덤비는 타입이었기 때문이었다. "곧장 갈 생각인가?" "응." 아야카는 대답과 함께 시트에 몸을 묻었다. 아카네를 만나기 위한 한시간 30분간의 드라이브였다. 벤트레이는 신주쿠 인터체인지에서 수도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중앙자동차도와 합류하면서 속도를 높였다. "틀어 줘." 톨게이트에서 통행권을 받아들자 아야카가 말했다. 미쓰즈카는 오른손으로 카 스테레오를 조작했다. 코러스 하모니가 잔잔하게 차 안을 메웠다. 클래식 명곡이었다. "미모리완 얘기가 끝났어. 금주 중에 새 물건을 보내 준댔어." "그래? 저쪽 반응은 어땠어?" "몰라. 직접 가마이시에게 물어봐." 미쓰즈카 말투에 희미하나마 혐오감이 섞여 있음을 아야카는 느꼈다. 미쓰즈카는 병원을 싫어했다. 아카네를 만나러 갈 적에도 결코 동행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주차장에서 기다렸다. "꽃은?" "사뒀어. 트렁크에 들어 있어." "아름다워?" "아름답지." 미쓰즈카 눈이 룸미러 안에서 움직였다. "지금 당신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색깔이야." 아카네에겐 언제나 난(蘭)을 들고 갔다. 청초한 동양란, 화사한 서양란. 색깔이 그렇다면, 미쓰즈카가 오늘은 서양란을 산게 분명했다. 난은 정성만 들이면 의외로 오래 갔다. 아카네 병실은 항상 난꽃이 피어 있었다. 개중에는 화분에 심은 것도 있었다. 병문안에는 화분이 좋지 않다고들 하지만 아카네와는 관계없는 얘기였다. 아카네는 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입장이 아니었다. 벤트레이는 야마나시현으로 접어들었다. 미쓰즈카는 운전을 잘했다. 꽤나 스피드를 냈어도 안심할 수가 있었다. 더군다나 벤트레이라면 덤프트럭이나 콘테이너가 아니라면 충돌사고가 나더라도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미쓰즈카는 자신했다. "올 적엔 어느 길로?" "마음대로. 7시까지 도쿄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니까." 7시부터는 유럽 화장품 회사 일본 지사장 등과 저녁 약속이 되어 있었다. 프랑스인인 지사장은 아야카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옷을 입은 걸 보면 입이 함박꽃만큼 벌어질 게 틀림없었다. 파리에서 직접 배달해 온 옷이었다. 그러나 아야카는 그에게 안길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야나기바시랬지?" "응. 날 내려만 주구 가. 끝나면 대절 택시를 부를 테니까." 미쓰즈카 눈이 다시 움직였다. "어딘가 딴 데 갈 생각?" "설마. 게이샤까지 부를 텐데. 난 저녁만 먹어 주면 돼." 미쓰즈카는 입을 다물었다. 질투를 하는 것일까. 아야카는 한순간 이상하게 느껴졌다. 미쓰즈카와 질투는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질투를 해야 할 사이가 되어 있다고 미쓰즈카가 생각하고 있다면 더욱 우스꽝스런 일이었다. 이윽고 벤트레이는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일반도로로 접어 들었다. 저 멀리, 중앙 알프스가 보이는 아름다운 언덕 위에 아카네가 입원한 병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앙 알프스는 밑자락까지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을 게 틀림없었다. 간호사를 따라 아야카는 병실로 들어갔다. 아카네는 널찍한 1인실 한복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커튼을 젖히자, 새하얀 중앙 알프스 능선이 보였다. 병원 앞뜰 시든 잔디밭은 베이지색 카페트처럼 보였다. "투석(透析)이 막 끝난 참이었어요." 간호사의 말에 아야카는 창 밖으로 던졌던 시선을 거두었다. 아카네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머리맡에 설치된 심전도에 그녀 심장 움직임이 파도 그림으로 나타났다. "아카네짱, 내가 왔어." 아야카는 간호사가 침대 옆에 갖다놓은 의자에 앉았다. "부기가 아직 조금 남아 있지만, 곧 사그라들 거예요." 간호사가 말했다. 아야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고 있던 난꽃을 아카네 가슴에 올려놓았다. "봐요, 참 예쁜 꽃이지?" 눈을 꼭 감은 아카네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아야카는 팔을 뻗쳐 아카네 머리를 쓸어올려 주었다. 투명할이만큼 해맑은 이마가 드러났다. 간호사가 말한 것처럼 눈자위와 뺨엔 부기가 남아 있었다. 간호사가 조용히 물러갔다. 아카네에겐 산소 마스크까지 씌어져 있었다. 그밖에도 몸에는 몇 줄기나 되는 고무줄이 달려 있었다. 고무줄은 침대 옆 기계와 병에 연결되어 있었다. "아카네, 눈을 떠봐." 소곤거리듯 말하면서 아야카는 이마를 쓸어 주었다. 아카네가 이 병원으로 옮긴 지도 벌써 6년이 다 되어갔다. 아야카의 미용 살롱이 궤도에 오른 것과 비슷한 시기였다. 그전까지는 도쿄 교외 병원에 있었다. 16년 동안 줄곧 그 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22년 동안 아카네는 의식불명인 채로 숨만 쉬면서 살아온 것이었다. 아야카는 아카네의 팔을 잡았다. 아직 부석부석 부기가 남아 있긴 했으나 뼈만 앙상한 연약한 팔이었다. 일주일에 두 씩 빠짐없이 헬스 센터서 체력단련을 해 온 아야카가 약간만 힘을 주어도 똑 부러질 것처럼 가늘고 연약했다. "줄곧 잠만 잘테야, 아카네?" 아야카는 미소를 흘리면서 아카네 팔을 쓰다듬었다. "아야카는 기다리다 지쳐 할머니가 되고 말 거야." 입을 뾰로통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팔 안쪽을 가볍게 꼬집어 보기도 했다. 아카네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좋겠네, 아카네짱은. 나이도 먹지 않고 잠만 자니까......." 아카네 팔에는 꼬집힌 자국이 또렷했다. 만성신부전(慢性腎不全)에 따른 체액이상으로 아카네는 언제나 부석부석했다. 그러나 이렇게 의식불명이 된 것은 신부전 때문이 아니었다. "아카네짱, 오늘은 무슨 얘길 할까? 후미에씨 얘긴 지난번에 들려 줬지? 그럼...... 그래, 아야카 사업 얘기가 어떨까?" 아야카는 꼬집은 자리를 문질러 준 다음 매니큐어를 발라 주었다. "색깔, 이쁘지? 이 손톱 말야. 옷에 맞춰 칠한 거야. 이봐, 잘 어울리잖아? 이 옷, 아카네에게 보여 주려고 마련한 거야." 아야카는 수트 가슴자락에 손을 갖다 만져 주면서 말했다. "사업 얘긴 그만두는 게 좋겠어. 별로 재미도 없을 테니까." 아야카는 손을 내리면서 말했다. "참, 아카네 젖가슴 한번 보여 줘." 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댔을 적에 젖가슴이 물컹했던 아야카는, 아카네의 젖가슴은 어떻게 변했을까고 갑자기 호기심이 치솟았다. 아야카는 이불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앞자락을 여닫게 된 네글리제에 싸인 아카네의 몸이 손에 닿았다. "옛날, 아야카 가슴이 납작하다고 아카네가 놀렸던 것 생각나? 중학교 1학년 때 말야." 아카네의 네글리제 단추를 풀었다. 위에서 두번째 단추까지 풀고는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젠 납작 가슴이 아니야. 아카네는 어때?' 손바닥에 닿은 체온은 생각했던 것보다 뜨거웠다. 아야카는 아카네를 다시 보기로 했다. 그녀의 몸이 조금은 싸늘하게 식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해 온 아야카였다. 아카네 가슴은 납작했다. 늑골이 앙상하게 손끝에 닿을 만큼 납작했다. 의사를 제외하면 남자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가슴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 애 같아......." 아야카 입언저리에 미소가 흘렀다. 슬쩍 손을 빼네 네글리제 단추를 채우고, 이불을 다독거려 덮어 주었다. 아카네는 꼼짝도 안했다. "남자가 젖가슴을 만져 줄 때, 어떤 기분이 되는지 아카네는 아직 모르지?" 손목시계를 흘낏 본 그녀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속삭였다. "조금 있으면 아야카 젖가슴을 어떤 남자가 애무해 줄 거야. 그 남자, 지금 병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내려오길 초조한 마음으로 목이 빠지라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널 만나러 올 적엔 평소보다 훨씬 더 예쁘게 몸단장을 하거든. 그때마다 그 사내 흥분하는 꼴이란...... 참, 남자들의 흥분이 어떤 건지 모르지?" 한동안 아카네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야카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아카네의 잠든 얼굴이었다. 이처럼 재워두는 데도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모두 아야카가 지불하고 있었다. "눈을 뜨지 않는 한, 넌 나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아니, 이제는 눈을 뜨더라도 옛날처럼 나를 닮진 못할거야!" 손톱끝으로 아카네 눈꺼풀을 슬쩍 건드려 보면서 말했다. 눈꺼풀에도 가늘고 파란 정맥이 두드러져 있었다. 아이섀도우를 한번도 칠하지 않은 눈꺼풀이었다. 아니 립스틱조차도 아카네는 써본 적이 없었다. 만약 아카네가 지금 눈을 뜬다 하더라도 마음은 아직 열네살 그대로일 게 틀림없었다. 눈을 떠,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야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낯선 여자, 낯선 아줌마가 날 노려보고 있어. 아줌마라구? 그랬다. 열네 살 아카네 눈에 비치는 나는 아줌마임이 틀림없을 것 아닌가. 아야카 가슴엔 먹구름이 퍼져 갔다. 그 먹구름은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사촌언니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깊게 해 주었다. 이튿날 오후, 기동수사대 형사가 사메지마를 찾아왔다. 보통 기수(機搜) 라고 줄여 부르는 기동수사대는 경찰청 형사부 소속의 초동수사 전문 파트였다. 형사사건일 가능성이 높은 신고가 들어오면 앞장 서서 출동하는 파트가 바로 기수였다. 때문에 기수는 본청 뿐만 아니라 도내(都內) 수개소에 분주소(分駐所) 를 설치해 두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하면 가장 가까운 분주소가 출동하는 것이었다. 본청 감식과원과 관할서 형사들이 이들과 함께 움직였다. 감식 조사 결과, 범죄 사건임이 밝혀지면 기수는 즉각 수사를 개시한다. 살인, 상해, 강도와 같은 중요 범죄는 초동수사 속도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살인이나 상해사건은 피해자 연고관계를 더듬으면 간단히 해결되는 케이스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경우, 범인이 도망치거나 자살해 버리기 전에 덮치는 초스피드 수사가 필요했다. 때문에 기수의 수사는 언제나 시간적인 제약을 받게 마련이었다. 계통을 밟는 소위 이잡기 수사와는 거리가 있었다. 잡담 제하고 범행의 핵심부터 찌르고 들어가는 수사방법은 단순사건일 경우 나름대로 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동기나 범행 수법이 뚜렷하지 않은 사건일 경우엔 금방 암초에 걸리기 마련이었다. 살인사건일 경우, 기수의 수사 시한은 수일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해결하지 못하면 본청 수사 1과로 넘겨야 했다. 물론, 그 이전이라도 살인사건임이 확인되면 관할서장 명의로 수사 1과의 출동을 요청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살인사건 프로라고 자임하는 1과 형사들은 기수와의 공동수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기수가 두 손을 들 때까지 팔짱을 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수사 1과 베테랑 형사들은 기수의 수법을 <닭장수사> 라고 경멸했다. 문자 그대로 닭장 속의 닭처럼 여기 한번 덥석, 저기 한번 덥석 쪼면서 돌아다니기 때문이었다. 기수가 실적을 올리면 올릴수록 1과가 나설 기회는 그만큼 줄어들게 마련이었다. 반대로 기수가 죽을 쑤면 쑬수록 1과의 기동률은 높아갔다. 사메지마를 찾아온 기수는 무라카미와 노모토라는 형사였다. 무라카미는 경위, 노모토는 경사였다. 노모토는 기수에서 점수를 따서 수사 1과로 옮기는 것이 꿈이었다. 때문에 무라카미를 졸라 사메지마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기도 전에 사메지마는 노모토의 속셈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라카미는 이미 사건을 수사 1과로 넘길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노모토는 그게 아니었다. 하마쿠라 사건을 제 손으로 해결할 속셈으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이 탓에 그만큼 생각이 다른지도 몰랐다. 무라카미는 마흔넷, 노모토는 아직 30대 초반이었다. 논캐리어인 그들이 경찰기구 내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우선 승진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우선순위를 확보한 다음, 검거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했다. 경위, 경감 승진시험으로 톱 클래스로 합격만 하면 그 자리에서 본청으로 발탁되었다. 특히 본청 경무부 인사과는 엘리트 집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논캐리어의 엘리트였다. 전국 20만 명을 헤아리는 경찰관 가운데 캐리어는 겨우 5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엘리트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을 만큼 희귀한 존재가 캐리어였다. 무라카미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노모토는 사메지마가 캐리어 출신임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메지마의 계급이 경감인데도 신주쿠 서의 일개 방범과 형사로 있는 게 이상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태도였다. "사메지마씨는 빠르시군요. 대졸 케이습니까?" 빠르다는 것은 나이에 비해 계급이 높다는 뜻이었다. 논캐리어가 경감이 되자면 아무리 빨라도 고졸은 서른 살, 대졸이라도 스물여덟이 되기 전엔 불가능했다. 경사, 경위, 경감 등 계급별 승진시험을 보자면 각각 정해진 연수의 근무 경험을 쌓아야 했다. 캐리어인 사메지마는 스물다섯 살에 벌써 경감이 되어 있었다. 당시 사메지마는 겨우 9개월간의 실습 경험밖에 없었다. 만약 사메지마를 논캐리어로 본다면, 경감으로 승진되어 있는 걸로 보아 아주 우수한 논캐리어임이 분명한 일, 그만큼 우수한 논캐리어라면 관할서가 아닌 본청 소속이라야 마땅하다는 것이 노모토의 생각이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사메지마가 일본 전국에 5백 명밖에 없는 캐리어 경찰관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은 것이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사메지마는 말머리를 슬쩍 돌렸다. "부검 결과는 나왔나요?" "네. 일단 행정부검으로 처리했는데...... 피해자가 특수한 질병이 없었다면 살인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게 감찰의(監察醫)의 견해예요. 자세한 것은 화학검사 결과를 기다려 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부검은 사법부검. 행정부검. 병리부검 등 3종류가 있었다. 이 가운데 병리부검은 유족의 승낙이 필요하지만 행정. 사법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사인을 규명할 필요가 있는 변사일 경우 언제나 가능한 게 행정. 사법부검이었다. 행정부검은 전신을 구석구석 한군데도 빼놓지 않고 살피는 것이며, 사법부검은 상처 부위만이 대상이었다. 행정부검에서 타살 혐의가 제기되면 감찰의는 경찰 검시(檢視) 담당관에게 연락해서 즉각 사법부검으로 전환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특수한 질병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그게 말입니다......." 노모토는 수첩을 꺼내들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피해자 혈액을 검사한 결과 <혈관내응고증후군 (血管內凝固症候群)> 이 발견됐다는 겁니다. 이는 체내 혈관 여러 군데에 혈액이 응고되는 증상이랍니다. 예를 들어, 뇌혈관에서 이런 증세가 악화되면 뇌혈전 (腦血栓)이 되는 거죠. 이번 사건 피해자의 경우, 체내 여러 군데 혈관에 피가 응고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혈관내응고증후군>은 백혈병, 암, 중증 감염 따위가 주된 원인인데, 피해자에겐 그런 질환을 앓고 있는 흔적이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하마쿠라 혈관에 피가 응고되어 있다, 그런 말인가요?" "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 거의 전신이 그렇습니다. 그런 상태로 일상적인 생활...... 활동을 해 왔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게 감찰의의 말이었습니다." 사메지마는 심호흡을 했다. 호텔 로비에서 만났던 하마쿠라는 그런 낌새가 전혀 없었다. "물론 하루 이틀 사이에 그처럼 진행되었을 까닭이 없다고 했어요." "<혈관내응고증후군>에 걸리면 어떻게 된대요, 의사 말로는?" "우선 내장 여기저기에 혈전이 일어난다면, 혈액이 흐를 수 없게 되니까 내장이 회사하게 되는거죠. 그 결과 급성 신부전, 폐부전 등의 기능장애가 일어납니다. 이번 피해자의 직접적인 사인은 뇌혈전인 것 같습니다. 그냥 뒀어도 며칠 더 버티지 못했을 거라는 게......." 하마쿠라가 죽음을 앞뒀을 만큼 중병에 걸려 있었다는 얘기를 사메지마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감찰의 선생은 살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 건가요?" "아니, 그렇게 단언한 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피해자에게 지금 말한 <혈관내응고증후군>을 유발할 만한 암이나 백혈병을 앓고 있는 증거가 없다는 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가령 뇌혈전 만으로 국한시킨다면, 어느날 갑자기 변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피해자는 거의 전신 혈관에 피가 응고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외부 요인에 의해 <혈관내응고증후군>이 유발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거죠. 피를 응고시키는 약체를 주사했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게 감찰의의 추측입니다. 그러나 감찰의 선생도 그런 약제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목줄기에 상처가 발견되었다면서요?" "네." 노모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가락으로 목 뒤에 움푹 패인 곳을 가리켰다. "이 언저립니다. 3센티미터쯤 패였습니다. 조금 굵은 바늘 같은 것에 찔린 자국같이 뵙디다." "상처 부위는?" "바늘로 찌른 것 치고는 지저분하게 보인다는 게 감찰의 선생의 견해였습니다. 아마도 끝은 뾰족하지만 중간 부분이 매끈하지 못한 걸로 찌른 탓이 아닐까면서......." "출혈은?" "거의 없었습니다. 피하 혈관은 파손됐겠지만 금방 굳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 상처와 사인이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아직 모른다는 말인가요?" "네. 그걸 밝히는 데는 어쩌면 몇 주일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무리한 얘기가 아니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감찰의는 해부의 베테랑이었다. 익숙한 의사라면 시체 한 구를 40분 만에 해부해서 사인을 쪽집게처럼 집어내는 게 보통이었다. 감찰의 제도가 있는 곳은 도쿄,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코베 등 다섯 도시이지만, 그 가운데 감찰의무원 (監察醫務院) 이 있는 곳은 도쿄 뿐이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대학 법의학 교실 의사가 각 현경(縣警)의 촉탁을 겸하고 있었다. 오쓰카의 감찰의무원에는 화학검사실, 병리검사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또 거기서 밝혀낼 수 없을 때는 경찰청 과학수사연구소로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다. 일이 그렇게 되면 사건은 당연히 노모토 손을 떠나게 된다. 살인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찾아내는 순간, 사건은 수사 1과로 넘어가게 마련이었다. 무라카미는 그렇게 될 걸 알고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반대로 노모토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초조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살인이라고 확정되기 전에, 살인이라는 예측을 전제로 움직인다면 그만큼 점수를 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마쿠라는 여자 장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몇 사람쯤 거느리고 있었나요?" "서너 명이라고 하더군요." 사메지마는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를 포함해서 하마쿠라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을 두 사람한테 털어놓았다. "저어...... 그 아가씨들을 만나보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글쎄. 하마쿠라가 살아 있다면 그녀석 자동차 전화로 연락하면 되는데......." 하마쿠라의 죽음은 당연히 아가씨들도 들어서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마쿠라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집 근처 주차장에서 아파트로 가는 길목이었다. 처음엔 구급차부터 불렀으나, 도착했을 땐 이미 죽어있었기 때문에 구급대원이 경찰에 통보했다는 것이었다. 구급차를 부른 사람은 하마쿠라가 입주해 있는 맨션 아파트 관리인이었다. 잠자코 있던 무라카미가 입을 열었다. "하마쿠라는 시로가네 3쵸메 맨션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더군요. 실내엔 싸운 흔적도 없었고, 하마쿠라 장사와 관련된 물건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손님 리스트나, 거느리고 있는 아가씨들 주소록조차 하마쿠라는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그런 건 외우고 있었어요." 사메지마가 설명해 주었다. "하마쿠라는 그런 장사를 하면서도 폭력단이나 동업자와는 완벽할이만큼 발걸음을 끊고 있었어요. 집이 신주쿠와는 관계없는 미나토구 아파트로 정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참, 하마쿠라 신원은 어떻게 해서?" "요쓰야 방범에 있다가 우리 쪽으로 배속된 녀석이 있어요. 그 친구가 당장 알아보더군요." 무라카미가 설명해 주었다. "그랬었군요. 하마쿠라의 아파트에 사업관계 물건이 하나도 없었던 것도 만약에 대비한 안전책의 하나로 그랬을 겝니다. 언젠가 한번 니시신주쿠 야쿠자한테 아가씨를 빼앗긴 적이 있었어요. 그 이후부터 아주 신중해졌어요, 하마쿠라는." 노모토는 실망이 큰 듯,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마쿠라 주변을 훑어 살인일 가능성을 더듬어 내려 해도 거느리고 있던 아가씨나 고객 이름 하나 모르고서야 손가락으로 하늘 겨누기 밖에 안 됐다. 아가씨들은 지금쯤 모두 숨어 버렸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하마쿠라 자동차에도 뭔가 실마리가 될 만한 게 없었나요?" 사메지마의 물음에 노모토가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카폰이 달린 포르세를 샅샅이 뒤졌지만......." "포르세?" 사메지마는 뜻밖이란 듯 다잡아 물었다. "하마쿠라가 포르세를 몰고 다녔나요?" "네. 주차장에 있었어요. 아파트 관리인이 확인해 주더군요." "하마쿠라가 장사 나올 땐 언제나 세르시오를 타고 다녔어요. 흰색 세르시오를." 노모토와 무라마키 얼굴엔 놀라움이 번졌다. "틀림없습니까?" "그럼요. 포르세로는 한꺼번에 아가씨 둘 이상은 실어나를 수 없어요. 내가 알고 있는 한, 하마쿠라가 신주쿠에 올 땐 언제나 세르시오였어요. 그전에는 시마를 몰고 다녔구요." "그렇다면 날마다 어딘가서 바꿔 탄 게 분명해!" 노모토가 부르짖듯이 말했다. 머리회전이 제법인 사내였다. "그렇다고 봐야겠군. 이 언저리 어딘가에 주차장을 계약해 놓고 포르세를 몰고 와서는 세르시오로 바꿔 탔다고 봐야겠군요." "그렇다면, 세르시오엔 어쩌면 리스트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만약 그렇다면 회전식으로 된, 자동차 도둑이 노리지 못할 안전한 주차장일 겝니다. 그런 주차장으로 24시간 영업하는 곳을 한번 찾아보세요." 교통과에 문의하면 관내 주차장에 관한 모든 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그런 사메지마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일까, 노모토가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협력해 주시겠습니까?" 무라카미가 깜짝 놀라며 노모토를 돌아보았다. "사메지마씨도 바쁜 분이야. 억지소린 그만둬!" 노모토가 무척 초조해 하는 게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협력해 드리죠." < 4 > 신주쿠 서 교통과가 협조해 준 덕분에 하마쿠라가 장기 계약한 주차장은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기타신주쿠 2쵸메에 있는 타워식 주차장이었다. 사메지마는 노모토와 무라카미를 데리고 그 주차장으로 갔다. 담당자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사정을 설명하자 하마쿠라의 세르시오를 내려 주었다. 바구니처럼 기계에 매어단 철상자에 자동차를 한대씩 넣어 보관하는 타워식 주차장은 기계를 조작할 담당직원을 고용해야 하는 부담보다는 좁은 스페이스를 최대한 이용, 많은 자동차를 수용할 수 있는 이점이 더 컸다. 다만 설비투자에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월정계약보다는 시간당으로 주차요금을 계산하는 곳이 많았다. 이 주차장도 월정계약 고객은 하마쿠라를 포함해서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흔들흔들 매달려 내려오던 흰색 세르지오는 사메지마 등 세 사람 앞에서 멈추었다. 벨 소리와 함게 램프가 빨강에서 녹색으로 바뀌었다. 기수 소속인 무라카미와 노모토는 넥타이 차림에 코트까지 입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가죽 재킷에 진바지 차림이었다. "잠겨 있군요." 담당직원이 말했다. "열 수 없을까?" 노모토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 직원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스물한두 살, 청색 작업복을 걸친 아르바이트 학생처럼 보였다. 관리사무실로 쓰는 조립식 건물로 가너 니은자형 철사를 가지고 왔다. "어쩌면 삐- 삐- 하는 경보가 울릴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고급차엔 방범용 벨을 다는 사람이 많거든요. 경보음이 울려도 봐 주십시오. 형사님들이 열래서 여는 거니까요." 철사를 도어 유리와 차체 틈 사이로 찔러넣었다. 말했던 대로 독특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못 들은 척, 철사를 이리저리 돌려 도어록을 풀었다. "이것, 시끄럽죠? 앞을 열어 퓨즈를 잘라 버릴까요? 그러면 조용해집니다." 자동차에 대해 제법 아는 게 많았다. "그렇게 해 줘." 사메지마가 말했다. 젊은이는 보네트를 열어 머리를 집어넣더니 퓨즈 한개를 뽑아냈다. 경보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솜씨가 굉장하군." 무라카미가 감탄하자 젊은이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정비사 자격 땄어요. 마음잡고 취직을 했는데, 아버지가 당신 일을 도우라시는 바람에......." "자, 시동도 좀 걸어 주겠어? 여기서 차를 검색하면 방해될테니까 잠시 나갔다 올 생각인데." "자동차 보관증부터 써 주셔야죠. 명함 뒤에 사인을 해줘도 괜찮아요. 만약 잘못 됐을 때 아버지한테 꾸중 듣는 건 저니까요." "그렇게 해 주지." 사메지마는 명함을 꺼내어 뒤에 몇 자 적어 젊은이에게 건네주었다. "방범과? 수사 1과가 아니었군요. 살인은 1과 담당이죠?" "아직 그럴 단계가 아냐. 여기 이 두 사람은 기동수사대야. 권총도 가지고 있어." "정말입니까?" 젊은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모토가 귀찮다는 듯 윗도리 앞자락을 젖혀 보였다. 브로닝 오토매틱이 허리춤에 꽂혀 있었다. 기수의 권총은 뉴넘브만이 아니었다. "이야, 정말이구나! 지금, 네, 지금 엔진을 걸어 드리죠." 젊은이는 스타터를 연결시켜 세르시오 시동을 걸었다. "끌 적엔 여기 이걸 벗기면 됩니다." 사메지마에게 설명했다.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수석과 뒷자리 도어록을 풀어 두 사람을 태웠다. "서까지 드라이브나 합시다." 신주쿠 서 주차장에 차를 세운 사메지마는 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대시보드는 잠겨 있지 않았다. 안에는 검사증이 들어 있었을 뿐이었다. 트렁크도 비어 있었다. 스페어 타이어 밑에도 숨겨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사를 시작한 30분 뒤, 무라카미가 마침내 조수석 시트 밑에서 수첩을 찾아냈다. 빨간 가죽표지, 여자용으로 보이는 수첩에는 고객 리스트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 타입, 섹스 기호에 대한 메모도 있었다. 그러나 아가씨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전화번호는 몰라도 아가씨들의 주소까지 하마쿠라가 암기하고 있다고는 사메지마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 아가씨들 주소를 적어둔 게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무라카미와 노모토는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수사회의 시간이 다 된 것이었다. "어쨌든 빈손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이건 갖고 가겠습니다." 장갑낀 손으로 수첩을 가리키면서 노모토가 말했다. "사메지마씨 덕분입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럼 나 혼자라도 좀더 뒤져보기로 하죠. 뭔가 나오면 곧바로 연락할까요?" "부탁드립니다." 노모토는 얼굴이 환해졌지만, 무라카미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어,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도 괜찮습니까? 사메지마 경감님도 맡은 일이 있을텐데......." "구멍이나 메우는 사람이 돼놔서...... 급한 일은 없어요." 사메지마는 웃어 보였다. "그렇습니까?" "게다가 하마쿠라는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사람...... 사사로운 정을 앞세우는 건 아니지만 가능한 한 협력하고 싶군요."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물러가자 사메지마는 세르시오 운전석에 몸을 묻었다. 신주쿠 서 주차장은 저녁 순찰시간이 된 탓인지 썰렁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하마쿠라는 어딘가에 아가씨들 주소록을 숨겨뒀을 게 분명했다. 포주들에겐 거느리고 있는 아가씨 리스트가 고객 리스트 못잖게,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으로 귀중한 재산이었다. 더군다나 하마쿠라가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젊고 예쁜 콜걸들이라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 중요한 리스트를 함부로 취급할 까닭이 없었다. 사메지마는 핸들을 손에 올려놓은 채 차 안을 다시 한번 휘둘러 보았다. 사물이라고는 하마쿠라가 피우던 것인 듯, 라크 마일드 담뱃갑과 1백엔짜리 라이터 정도였다. 그 이외에 도어 포켓에 도쿄의 도로지도 책이 한 권 꽂혀 있었을 뿐이었다. 다른 게 끼어 있거나 메모된 게 없나 이미 펼쳐본 것이었다. 재떨이도 깨끗했다. 꽁초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사메지마는 다시 도로지도 책으로 눈길을 보냈다. 하마쿠라는 아가씨들을 자동차로 직접 출퇴근까지 시켜 준 것이었을까. 그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택시를 이용하도록 하는 게 훨씬 편리했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도로지도를 비치하고 있었을까. 하마쿠라의 고객은 대부분이 니시신주쿠 초고층 호텔에 체크인해서 여자를 불렀다. 집이나 사무실로 여자를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 이 근처 호텔과 호텔을 오가면서 아가씨를 들여보내고 맞아오는 일이라면 도로지도 따위는 필요가 없지 않는가. 업무용 자동차이니까 드라이브용으로 비치했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사메지마는 도로지도를 뽑아들었다. 구역별로 분류해서 일방통행 표지까지 들어 있는 아주 상세한 지도였다.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사메지마 자신이 살고 있는 나카노구 노가다 언저리가 실려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덜컹하고 크게 울려퍼졌다. 바깥은 제법 어두워졌을 무렵이엇다. 방금 주차장으로 들어온 차는 패트롤카였다. 헤드라이트를 켠 채로였다. 불빛이 세르시오 운전석까지 훤하게 비쳐들었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길이 딱 멈추어졌다. 넘겨 세우던 책장 한 곳에 좁쌀만한 빛 구멍이 보였다. 사메지마는 무릎에 올려놓고 있던 지도책을 들어올렸다. 방금 그 페이지를 프론트 유리 너머로 주차장 형광등에 비춰 보았다. 바늘로 찌른 것 같은 작은 구멍이 있었다. 다음 페이지의 같은 자리를 비춰 보았으나 거기엔 구멍이 없었다. 그대신 왼쪽 윗부분에 바늘구멍이 있었다. 처음 본 페이지의 구멍은 히가시 코엔지 와다 3쵸메, 다음 페이지 것은 시부야의 히타가야 2쵸메였다. 그 다음 페이지엔 아무 것도 없었다. 무슨 의미인가. 사메지마는 지도책을 내려놓았다. 누군가가 펼쳐놓은 지도를 장난 삼아 바늘로 찍었다면 그 다음 페이지 같은 위치에도 구멍이 뚫려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방금 본 두 페이지는 겹쳐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늘구멍 위치는 일치되지 않았다. 그 페이지의 바늘구멍을 발견한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만약 우연히도 타이밍 좋게 패트롤카가 주차장으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들어왔더라도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았다면 절대로 발견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이것이 아가씨들의 집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러나 페이지에는 앞뒤가 있었다. 와다 3쵸메 뒷장은 나카노홍고 국민학교였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으나, 하타가야 2쵸메 뒤쪽은 스기나미구 이즈미 4쵸메였다. 다시 말하면, 바늘구멍 2개는 네 곳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며, 학교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세 군데가 되었다. 하마쿠라가 아가씨들의 주소까지는 암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한번쯤은 찾아가 봤을 가능성이 많았다. 집안에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살고 있는 아파트 모양이나 호수를 직접 봐두면 기억하기 쉬운 일이 아닌가. 하마쿠라가 전동차를 이용했을 까닭은 없었다. 지도에 구멍을 뚫어놓은 언저리까지만 가면 한번 가봤던 집이라 찾기도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비밀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병적이라고 할 만큼 소심한 짓이란 생각도 들었다. 전자수첩 같은 데 입력해서 키워드를 모르면 출력이 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자수첩을 이용하고 있었다면 하마쿠라가 죽은 지금, 내용을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마쿠라 소지품 가운데 전자수첩이 있었다는 말은 없었다. 무라카미도 노모토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르시오 열쇠는 소지품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인사건의 피해자일지도 모를 사람의 소지품을 들고 다니는 건 경솔한 일 --- 게다가 노모토는 가지러 가기가 싫어서 주차장 젊은이에게 시동을 걸게 한 것이었다. 지도책에 뚫린 바늘구멍은 실지답사를 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메지마는 하마쿠라가 거느리고 있던 아가씨 얼굴을, 모두는 아니지만 몇 사람 알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발을 씻은 아가씨도 있을지 몰랐다. 구체적인 건물 이름까지 아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손쉽게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 그러나 상세한 지도였기 때문에 목표 건물을 2개로 좁히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두 건물 모두가 대형 맨션 아파트라면 일이 쉽지 않겠지만, 어느 한쪽이 단독주택이거나 사무실 빌딩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웃에 물어보든가, 중점적으로 감시를 하면 의외로 간단하게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육감수사였다. 관할서의 지원을 요청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마쿠라의 죽음이 살인으로 결론난 것도 아니고, 지도의 구멍이 아가씨들의 주소를 가리킨다는 구체적 증거도 없는 지금, 자칫하다간 웃음거리가 될 염려도 있었다. 아가씨들 얼굴을 확인한 뒤에 노모토에게 알려도 늦지 않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아가씨들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은 사메지마 뿐이었다. 뛰어봐서 잘못된 것이 판명되더라도 헛수고는 사메지마 혼자서 충분했다. 사메지마에 대한 무라카미의 마음 씀씀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것이 현명한 대응일지도 몰랐다. 사메지마는 지도책을 들고 세르시오에서 내렸다. 사메지마는 상체를 일으켰다. 각도를 맞춰 놓은 룸미러를 통해 모피 반코트를 걸친 여인이 아파트에서 나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파트 이름은 <하타가야 소설 하이츠>. 밤 11시 20분이었다. 이 아파트 잠복 감시는 오늘로써 이틀밤째였다. 지도의 바늘 구멍을 발견한 첫날밤은 히가시 코넹지에서 잠복했었다. 그러나 거기엔 일층에 편의점이 들어있는 11층 맨션 아파트와 8층짜리 맨션 아파트가 나란히 붙어 있어 드나드는 사람이 엄정나게 많았다. 하룻밤 지켜보다가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하타가야 쪽은 대지가 널찍한 단독주택과 자동차 판매회사 사이에 낀 4층 맨션 아파트였다. 세대도 열여섯밖에 되지 않아 감시하기가 쉬웠다. 사메지마는 낮엔 신주쿠 서에서 통상근무를 하면서 저녁부터 자정까지만 자신의 BMW를 몰고 와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맡은 일이라곤 데스크 워크 뿐이었다. 그 맨션 아파트 위치는 고슈가이도 신주쿠 쪽 도로변이었다. 사메지마는 맨션을 조금 지난 곳에 차를 세워놓고 시트를 젖히고 누워서 룸미러로 감시하고 있었다. 여자가 손을 드는 게 보였다. BMW 바로 뒤에서 택시를 잡은 것이었다. 택시 헤드라이트가 여자를 환하게 비쳤다. 스물너댓쯤 된 갸름한 얼굴, 눈이 큼직한 미인이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하마쿠라가 세르시오 조수석에 태우고 가는 걸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다. 하마쿠라나 사메지마의 활동무대는 신주쿠였다. 마음만 먹으면 날마다 어딘가에서 맞부딪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택시 넘버와 회사명을 머리 속에 새겨 넣으면서 이그니션 키를 돌렸다. 만일 놓치더라도 택시회사에 조회해 보면 아가씨를 내려 준 지점을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깜박이를 켜 빈 택시가 씽씽 달리는 심야의 고슈가이도 상행선으로 끼어들었다. 사메지마가 밤에만 잠복감시를 한 데는 그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하마쿠라를 포함한 콜걸 관계 사람들은 생활시간대가 심야인 박쥐였다. 손님들의 <주문>이 심야 자정 무렵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호텔에 체크인 하자마자 여자부터 찾는 손님은 별로 없었다. 업무상 호텔에 묵게 될 경우, 밖에서 저녁을 마친 뒤 거나해지면 여자를 찾기 마련이었다. 호텔에 묵게 되었다고 해서 손님들이 모두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도쿄에 살면서도 업무상 호텔 방을 잡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그럴 경우의 손님들은 하마쿠라에게 <예약>을 해 두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하마쿠라는 아가씨들의 스케줄을 조정해서 호텔로 보내는 것이었다. 하마쿠라는 신문광고나 공중전화 부스에 선전 비라 같은 걸로 뜨내기 손님을 유치하지는 않았다. 일종의 회원제 시스템으로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병이나 경찰. 폭력단 개입을 예방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단골들의 알음알음 만으로도 얼마든지 손님을 늘려갈 수 있다고 사메지마에게 자랑삼아 말한 적도 있었다. 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돈만 긁어모을 생각도 없다고 했다. 그러한 하마쿠라의 자세를 보고 아가씨들도 안심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가씨들은 당연히 <영업>에 생활 사이클을 맞추기 마련이었다. 포주인 하마쿠라의 죽음으로 휴업상태가 되었더라도 생활습관을 금방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쇼핑을 가더라도 저녁 시간, 즉 어두워진 뒤가 될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예측한 것이었다. 택시를 잡아탄 아가씨가 낯이 익긴 했으나 이름까지는 몰랐다. 하마쿠라가 가지고 있던 지도책에는 모두 다섯 군데나 바늘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마쿠라는 아가씨 5명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중에서 사메지마가 이름을 알고 있는 아가씨는 한명 뿐이었다. 영업용 이름을 사야라고 하는 아가씨였다. 포르노 비디오 배우였다는 그녀는 키가 크고 몸매도 뛰어났다. 그 아가씨가 호텔 로비에서 어정거리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한번씩 돌아보았다. 하마쿠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 마음씨도 곱고, 저처럼 늘씬한 아이지만 말솜씨는 벙어리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낯가름도 심하구. 단골손님 이외엔 받으려 하지 않아요. 잠자리에서 벗어나면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않고 지낼 때도 많아요. 택시가 오른쪽 차선으로 들어가 산구바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잔 하러 가는 길일까. 사메지마는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되려면 얼마간의 여유가 있었다. 하마쿠라네 아가씨들이 저희들끼리 한잔 하러 갈 적엔 결코 신주쿠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메지마도 알고 있었다. 신주쿠에선 손님들과 맞부닥칠 위험이 있었다. 시부야나 록봉기, 아니면 이케부쿠로 유흥가로 가려는 것일까. 택시는 산구바시에서 요요기쪽으로 달리다가 일방통행로 길목에서 좌회전을 했다. 사메지마는 속도를 줄이면서 뒤를 쫓았다. 택시기사가 미행을 눈치 채기라도 하면 성가시게 될 게 틀림없었다. 여자 손님 혼자라고 친절을 베풀어 주의를 환기시켜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좌회전을 하자마자, 택시가 멈춰 있는 게 보였다. 사메지마는 속도를 높여 택시 옆을 지나쳤다. 주변은 주택가였다. 단독주택과 맨션 아파트가 뒤섞여 있었다. 단 한군데, 가로등 이외에 빛을 내뿜고 있는 흰 간판이 걸려 있었다. 아가씨가 그 간판 옆 계단을 막 올라가고 있는 참이었다. 사메지마는 일방통행로를 한바퀴 돌아 다시 여자가 택시에서 내렸던 곳으로 왔다. 맨콘크리트를 그대로 외벽으로 쓴 참신한 분위기의 빌딩이었다. 일층 바깥쪽엔 화단이, 10단쯤 계단을 올라간 중이층(中二層) 에는 나무 도어가 달려 있었다. 흰빛을 뿜고 있는 간판에는 자그마하게 <인디고(indigo)> 라고 쓰여 있었다. 스낵 아니면 다방인 것 같았다. <인디고> 글씨는 문자 그대로 남색이었다. BMW 창 너머로 눈여겨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간판 불이 꺼져 버렸다. 안에서 스위치를 내린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BMW 라이트와 엔진을 껐다. <인디고>엔 창이 달려 있었으나 사메지마가 조금 빗겨난 곳에 차를 세운 탓에 안에서는 BMW에 타고 있는 사메지마를 볼 수 없었다. 간판 불을 끈 것으로 보아, 그 아가씨가 단순한 손님으로 <인디고>를 찾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왼쪽 사이드 미러에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쳤다. 검정색 페어레이디 Z였다. <인디고> 앞에 주차할 생각인지 BMW 앞에서 왼쪽으로 붙어 들어왔다. 사메지마는 자세를 한껏 낮추었다. 페어레이디Z의 라이트가 꺼졌다. 도어가 열리면서 키가 훌쭉한 여자가 내렸다. 가죽 스윙톱에 가죽바지 차림이었다. 머리를 뒤로 묶었으나 사메지마는 첫눈에 사야임을 알아보았다. 사야는 잰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인디고> 도어를 잡아당겼다. 간판 불이 꺼져 있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사메지마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자정을 몇 분 지나 있었다. 아까 그 아가씨와 사야가 <인디고> 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었을까. 한동안 동태를 지켜보기로 사메지마는 마음을 굳혔다. 만약 약속을 했다면 두 사람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10여 분이 지나자, 사메지마의 예상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이 오토바이가 한대 일방통행로로 달려 들어왔다. 뒷자리엔 머리가 긴 아가씨가 타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사야의 페어레이디Z 바로 옆에 멈추었다. 뒷자리에 타고 있던 여자가 내리면서 헬멧을 사내에게 벗어 주었다. 스물 안팎의 진 재킷에 알로하 셔츠 차림이었다. "그럼, 나중에 전화할께. 안녕." 아가씨가 손을 흔들자, 사내는 대답 대신 배기음을 웅웅 높였다. 오토바이는 오프 로드용이었다. 오토바이가 저만큼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던 아가씨는 진 히프 포켓에 두 손을 찌른 채 계단을 올라갔다. <인디고> 도어를 당겨 열었다. 안에서 흘러나온 빛에 아가씨가 풍선껌을 부풀려 내고 있는게 보였다. 다시 20분을 기다렸다. <인디고>를 찾아올 사람은 이제 더 없는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BMW 에서 내렸다. 차 안에 죽치고 있던 탓에 몹시 피로했다. 주택가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심호흡을 했다. <인디고>에 뒷문이 있는 줄은 생각지도 않았다. 때문에 기지개를 켜, 두 손을 내릴 적까지 목줄기에 나이프를 갖다댄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꼼짝 마, 새끼!" 싸늘한 목소리였다. 등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와서 불쑥 몸을 일으켜 덤빈 것이었다. 사이드 미러에조차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긴장으로 몸이 굳어졌다. 눈만 움직였는데도 오른쪽 귀 밑으로 컴배트 나이프 끝이 보였다. 사메지마는 특수 경찰봉도 차 안에 둔 세컨드 백에 들어 있었다. "무슨 짓이야?" 애써 침착한 소리로 사메지마가 말했다. "시끄러워! 누가 보낸 똘마니야?" 거칠기는 했으나 야쿠자와는 다른 말투였다. 목소리도 어렸다. 사메지마는 대답하는 대신 <인디고>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문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얼렁뚱땅 시침 뗄 생각 마!" 나이프 손잡이가 사메지마 뒷목줄기를 눌러왔다. 동시에 차가운 칼날이 뺨에 닿았다. "<인디고>에 모인 아가씨들의 보호잔가?" "이름을 대랬잖아, 새꺄. 그리고 소속도." "이런 데서 으르렁거리다가 경찰이라도 달려오면 어쩌자고 그래? 난 괜찮지만......." "뭐라구?" 나이프가 뺨에서 떨어졌다. 동시에 상대는 사메지마의 왼쪽 어깨를 잡아 빙글 돌려세웠다. 스포츠 머리의 스물서넛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나이프를 들고 서 있었다. 흰 폴로 셔츠에 진바지 차림이었다. "당신 경찰관이야?" "신주쿠 서 방범과야." 젊은이는 기가 질린 듯 나이프를 든 손이 축 처져 내렸다. "정말이야?"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 했다. "신분증 보여 줘?" "보여 줘!" 사메지마는 경찰수첩을 내보였다. 바로 그때 <인디고> 도어가 열리면서 사람 그림자가 입구에 나타났다. "코지, 왜 그래?" 여자 목소리, 허스키였다. 어느 나라 민속의상처럼 천을 길게 이어붙여 만든 긴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역광이어서 얼굴은 안보였지만 푸석푸석하게 컬한 헤어스타일은 똑똑히 보였다. "누님......." 젊은이가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불렀다. 지푸라기라도 부여 잡겠다는 목소리였다. 사메지마는 젊은이 어깨를 툭 쳤다. "들어가 볼까?" 젊은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칠 정도로 자책하고 있는 것 같아 사메지마가 오히려 이상스러워 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인디고> 계단을 올라갔다. 누님이라고 불린 여자는 담배를 낀 손을 허리에 대고 사메지마를 내려다보았다. 스물여덟아홉쯤일까. 눈도 입도 큼직큼직한 게 퍽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살색이 검은 걸로 보아 히스패닉계 피가 섞인 것 같기도 했다. "진짜 경찰관이야." 여자가 코지라고 부른 젊은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도어 앞에 선 여자 옆을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관?" 여자가 되물었다. 목을 쥐어짜 내는 것 같은 목소리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신주쿠 서 방범과 사메지마." 경찰수첩을 내보이면서 말했다. 여자는 흘낏 사메지마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안을 펴 보여 줘요." 사메지마는 안에 든 신분증을 제시했다. 여자는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담배를 한모금 빨았다. "경감님? 뭣하러?" 고개를 돌려 연기를 내뿜으면서 물었다. "이리로 온 아가씨를 미행하고 있었어." 숨길 필요가 없었다. "뭣 땜에?" "하마쿠라에 대해 물어보려구." "그럴 필요 없잖아?" "그럴까? 지금 당신 가게를 찾아온 아가씨들은 모두 하마쿠라와 함께 일하던 여자들이지?" 여자가 <인디고> 관계자라고 짐작한 사메지마가 따지듯이 물었다. 여자는 다시 담배를 한모금 빨았다. "하마쿠라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밝혀 봐야겠어." "당신은 수사 1과가 아니잖아?" 사메지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허나 하마쿠라는 내 관할에서 일한 사람이야." "걸린 적 있어?" "없었어, 한번도." 여자는 싸늘한 눈으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알고 지낸 사이?" 여자는 코방귀를 뀌면서 말을 이었다. "하마쿠라한테 제법 상납을 받은 모양이군. 아님 여자라도 안겨 줬어?" 사메지마도 여자를 마주 쏘아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런 농담,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녀석을 잡아들이기보다 더 급한 녀석들이 많았던 것 뿐이야." 여자의 눈빛이 흔들거렸다. 기가 꺾였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여자가 한발짝 비켜섰다. "물을 게 있으면 물어 봐." "고마워." 사메지마의 대답에 여자는 뜻밖이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사메지마는 <인디고> 안으로 들어섰다. 삼각형 나무 테이블 한복판에 꽃이 가득한 꽃병이 놓여 있었다. 벽엔 그림 액자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아가씨 넷이 불안한 얼굴로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사메지마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젊은이가 왼쪽에 있는 대리석 카운터에 기대어 섰다. 여자가 도어를 닫았다. "이분, 형사래." 사메지마는 테이블의 네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형사라는 말에 겁먹은 표정을 지은 사람은 없었다. 처음 보는 아가씨는 짧게 커트한 머리에 수에드 원피스. 부츠 차림이었다. 나이는 스물 안팎, 어딘가 쇼와 닮은 분위기였다. 사메지마는 사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랜만이군." 사야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했다. "아는 사람이야?" 사메지마 뒤에서 여자가 사야를 보고 물었다. 이번에도 사야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가씨들을 찾고 있었어." 사야가 사메지마에게로 눈을 치떴다. "무슨 일루?"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하마쿠라 일이 궁금해서. 왜 갑자기 죽었는지......." "우린 몰라." 사메지마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사야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다른 세 아가씨까지 감싸 주려는 것 같은 태도였다. "여긴 뭣하러 모였어?" 사메지마가 물었다. "지금부터 어쩌는 게 좋을까, 의논하러." 여자가 대답했다. 사메지마는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이리에 아이" "아이는 남색이란 뜻의 아이?" "그래요." "하마쿠라와 어떤 관계지?" "옛날 남편." 사메지마는 깜짝 놀랐다. "결혼을 했었나?" "그 사람, 지금 그 장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부부였어. 헤어진게 그 장사 때문은 아니었지만." 사메지마는 고개를 한 번 세차게 흔든 다음 다시 물었다. "좀 앉아도 괜찮아?" 카운터 앞에 나란한, 쇠파이프와 가죽을 엮어 만든 스툴을 가리켰다. "그럼요." 아이의 눈빛에 뭔가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 서렸다. "당신, 경찰관 치고는 좀 별난 것 같아." "그런가?" "신주쿠 상어!" 사야가 나지막하게 부르짖듯이 말했다. 모두 사야에게로 눈길을 모았다. 아이가 되물었다. "뭐랬지?" "신주쿠 상어." 사야가 되풀이했다. "당신이 신주쿠 상어야?" 젊은, 쇼와 닮은 것 같은 아가씨가 물었다. "그래." 아가씨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다른 두 아가씨도 <신주쿠 상어>란 말에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방안 공기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알고 있었어, 미쿠짱?" 아이가 물었다. 쇼와 닮은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쿠라씨가 가르쳐 줬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아이씨와 상의 못할 일이라면 신주쿠 서 형사 --- 신주쿠 상어라는 별명을 가진 형사를 찾아가랬어요. 만약 하마쿠라씨가 단속에 걸려들거나 해서 오도가도 못할 때 도움이 될 거라고 했어요." "아는 형사도 많지만 믿을 사람은 단 한사람, 신주쿠 상어 뿐이랬어요.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랬어요." 사메지마가 미행해 온 아가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난 처음 들어보는데......." 아이가 말했다. 사메지마는 아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당신이 조신한 사람이라서 그래. 그리고 여긴 내 관할도 아니구." 아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사메지마는 재떨이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아가씨들로부터 깊은 얘기를 듣자면 노모토와 무라카미를 부르는 게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이 오면 아가씨들이 입을 봉해 버릴 염려가 있었다. 사메지마는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코지가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고맙군. 뒤에 바싹 다가왔는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어." "역시 난 잡혀 가야 하나요?" 코지가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넨 날 누구라고 착각했지?" "내가 나가보라고 시켰어요. 코지는 자위대 레인저 출신이에요. 성질은 퍽 양순한 아이예요." 아이가 말했다. 조금은 얌전해진 말씨였다. "친동생인가?" "그렇습니다." 코지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안심해. 눈감아 줄 테니." 사메지마는 아이 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뭘, 누굴 경계하고 있었지? 하마쿠라가 어느 폭력단과 트러블이라도?" "몰라. 하지만 뭔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잖음 살해당할 일이 없잖아요? 안 그래요?" 아이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면서 고개까지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메지마는 그 큰 눈빛 속에 깊은 아픔이 서려 있음을 읽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잘 안다면, 알고 있을 거예요. 그 사람 겁이 많아 매사에 신중했어요. 하지만 나름대로 고집은 있었어요. 겁쟁이엔 틀림없지만 비겁하진 않았어요." "알고 있어." "그럼 누가 그 사람을 죽였죠?" 사메지마는 담배를 한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나도 그게 궁금해." 아가씨 얼굴로 번갈아 눈길을 던졌다. "누군가 짚이는 것 없어?" 대답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산부인과가 어떻구 저떻구 했어. 낳을 생각으로 있던 아이를 낙태수술 당했다는 아가씨가 있다고 말야."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아가씨가 누구야?" "그 아가씬 여기 오지 않았어요. 연락이 안 되고 있나 봐요." 아이가 대답했다. "이름은?" "미카요. 호리 미카요." 사야가 말했다. "주소는?" "히가시 코엔지." "와다 3쵸메?" 미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층에 편의점이 들어 있는 맨션 아파트에 살고 있나?" "그 옆 아파트예요. 하지만 집에 없어요. 하마쿠라씨가 그렇게 된 날부터 내내." 사메지마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애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있어요. 밴드를 하고 있나 봐요. 하지만 사는 곳까진 몰라요." "프로 악단인가?" "아닐 거예요. 거의 미카요 아파트서 함게 지내왔나 봐요." "이름은?" "포플린." "포플린?" "별명이 그래요. 본명은 모르구요." "밴드 이름은?" 미쿠는 입을 닫았다. 모르는 모양이었다. "<헬스 키친>." 사야가 대신 가르쳐 주었다. "<헬스 키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살고 있는지는 모르나?" 사야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카요가 포플린에게로 간 것 같아?" "아마. 연락 않는 건 겁에 질려 있는 탓일 거예요. 하마쿠라씨가 그렇게 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가 없으니까, 미카요가 겁을 먹을 만도 해요." 사야가 제법 길게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놀랐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메지마는 다시 아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하마쿠라와는 자주 만났었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한달에 한번 꼴도 채 안됐어요. 전화는 가끔 주고받았지만." "무슨 병을 앓는 것 같진 않았나?" "병을?" "암이나 백혈병 같은......." "도대체 무슨 말이예요?" "알고 있으면 얘기해 줘." "그런 말 한번도 들은 적 없어요. 멀쩡했어요. 그런 겁쟁이가 몹쓸 병에 걸렸다면 야단 법석을 떨었을 거예요."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가씨 쪽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미카요 인상을 가르쳐 줘. 알고 있으면 포플린 인상도......." < 5 > 벤트레이에서 내린 아야카가 안으로 들어갔다. 후미에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가스 곤로가 얹힌 테이블 이쪽 방석 위에 꿇어앉아 뜨개질에 여념이 없었다. 짙은 갈색 스커트 위의 털실뭉치에서 풀려 나온 실가닥이 후미에 두 손 사이에서 어느덧 손수건만한 뜨개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후미에는 등을 동그랗게 굽혀 바늘끝에 눈을 갖다대듯 한 자세였다. 상석격인 창가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안내해 온 종업원이 후미에를 부르려는 것은 눈짓으로 말리면서 아야카는 조용히 옆얼굴을 지켜보았다. 머리 밑은 눈이 쌓인 것처럼 하얗게 보였다. 조금 살이 찐 것 같았다. 어쩌면 피로가 쌓여 부은 것인지도 몰랐다. 방문 앞에 서서 후미에를 지켜보는 아야카에게 칸막이 옆좌석의 남자 손님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오늘 아야카는 광택 나는 바지에 캐이미어 롱코트 차림이었다. 값이 비교적 싼 걸로 유명한 이 복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야카는 방이 따로따로 되어 있는 조용한 고급 요정에서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요정에서 한 번 만났던 후미에가 돈이 아깝다고 두고두고 투덜거렸다. -- 네가 돈이 많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보다 다른 데 쓸 곳이 더 많을 것 아냐? 모밀국수집 같은 데서 만나는 게 난 훨씬 마음이 편해. 맛있는 것 사주려는 네 마음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꼭 요정이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 오히려 피곤하기만 해. 어디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정신이 얼떨떨해진단 말이야. 후미에는 면함없이 손수 짠 가디건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불라우스도 세탁소에 보내지 않고 직접 물빨래를 했음이 틀림없었다. 뒷깃 터진 자리를 꼼꼼히 꿰맨 것이 눈에 띄었다. 후미에가 숨을 길게 내뱉으며 허리를 펴더니 뜨개물을 펼쳐 빛에 비쳐보았다. 칸막이 이쪽 저쪽에서 복 끓이는 김이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술에 취해 떠드는 소리도 왁자지껄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후미에는 홀로 자기 세계에 열중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야카가 입을 열었다. "아줌마!" 후미에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작은 눈이 동그랗게 찢어질 것 같았다. "아이 깜짝이야." 아야카는 입을 뾰로통 내밀어 보였다. "아줌마 뜨개질에만 정신이 팔려서...... 아야캬가 왔는데도 모른 척했잖아?" 후미에 얼굴에 긴장이 풀렸다. 눈 밑이 부석부석한 게 기미까지 끼어 있었다. 마흔아홉, 나이보다 적어도 10년은 더 늙어 보이게 하는 기미였다. 아야카는 앵글 부츠를 벗고 올라섰다. 후미에 건너편에 꿇어 앉아 종업원이 냄비가 얹혀 있는 곤로에 불을 켰다. "식사, 지금 가지고 와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해줘요." 아야카가 웃는 얼굴로 끄덕였다. 코트를 벗어 옆에 개어놓았다. 후미에는 언제나 들고 다니는 쇼핑백에 털실뭉치와 뜨개바늘을 담았다. 아야카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어 카르체로 불을 붙여 물었다. "아줌마, 좀 뚱뚱해졌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후미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재떨이를 이쪽으로 끌어 당겼다. 후미에가 눈을 치떠서 노려보았다. "짓궂긴, 그래. 좀 뚱뚱해졌다. 왜?" "하지만 잠을 잘 못 자는 것 아냐? 눈 밑에 기미가 끼었어." "어머, 그럴 까닭이 있나? 언제나 푹 잘 자는데." "안 바빠, 요즘?" "그저 그래. 이맘 ㄸ면 언제나......." 조금은 더듬거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좀 있으면 바빠질거야. 봄방학이 되면." "환자가 늘어나?'" 후미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쟁반에 복회를 받쳐들고 들어왔다. 반투명의 꽃잎이 쟁반에 가득했다. "어머, 예쁘기도 해라!" 후미에가 보고 감탄했다. "어서 들어요." 아야카는 양념통을 후미에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고마워. 먹기가 아까워." "쓸데없는 소리. 실컷 먹어놔야 돌아갈 때 춥지가 않아. 술도 한잔, 어때요?" "싫어. 한방울도 못마신다는 것 알잖아? 너나 마시렴." 후미에가 맥주 작은 병을 들어 아야카 잔에 따라 주었다. 아야카는 담배를 비벼 끄고 맥주병을 빼앗아 들었다. "자, 조금만." 억지로 후미에 잔에도 따랐다. "우리 건배해요, 건배." "참, 기가 막혀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후미에는 즐겁다는 듯 반쯤 찬 잔을 높이 쳐들었다. "건배! 고마워요, 여러가지로." 아야카가 말했다. "새삼 뚱딴지 같은 소린." 웃으며 말한 후미에는 맥주로 입술을 적셨다. 아야카는 숨도 쉬지 않고 반잔이나 마셨다. 복집이 후덥지근해서 목이 말랐던 것이다. "너네 가게는 요즘 어떠냐?" 후미에가 복회를 한점 양념에 찍어 넣으면서 물었다. 천천히 씹어보다가는 <정말 맛있어!> 라고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걱정 없어.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어요." "정말 재미있는 세상이야. 모두들 그렇게 아름다워지고 싶은가? 나이가 들면 누구나 매한가지일텐데." "어머, 우리 가게엔 아줌마 같은 손님뿐인데...... 그러지 말아요." "나처럼 늙은?" "네." 후미에의 눈빛에 분노 같은 게 번뜩이는 걸 아야카는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지, 모두들?"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워지려는 집념도 더 강해지나 봐요." 후미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난 정말 행복한가 봐. 원래부터 예쁘지 않았으니까 새삼 약올라 할 것두 없구......." 아야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후미에도 묵묵히 젓가락질만 했다. "......이번 일, 힘들었어?" 아야카가 물었다. "조금도." 말하면서 후미에는 입만 댔던 맥주잔을 옆으로 밀어놓고 찻잔을 들었다. "그걸 쓸 수 있게 된 뒤부터는 아주 손쉬워졌어. 하지만 언제나 그걸 쓸 수 있는 건 아니지?" "글쎄. 아직 많이 남아 있어?" "한 3회분쯤 될까? 하지만 그게 없더라도 괜찮아. 지금까지도 그것 없이 해 왔잖아?" "가능하면 아줌마를 귀찮게 만들고 싶진 않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누? 내가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물론 즐거워서 하는 짓은 아니야. 그런 게 즐겁다면 틀림없이 환자야. 하지만 네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아줌마......." "지난번 언뜻 이런 생각이 들더군." 후미에는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목소리도 낮아졌다. 비밀 얘기를 소곤거리는 소녀처럼 보였다. "너와 나는 운명의 끈으로 엮인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운명의 끈......." "그래. 하나님은 내게 남편과 자식을 점지해 주지는 않았어. 그대신 너를 보내 줬어. 너라는 존재를 내게 말야." "아니에요! 나야말로 정말 아줌마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해 할 때가 많아요." 아야카는 진정으로 말했다. 사실이 그랬다. 후미에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오늘의 아야카도 없었다. 그것도 지금의 후미에가 아니었다. 22년 전, 20대 후반에 접어들었던 후미에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아야카도 존재할 수 없었다. 여기 이렇게 옆좌석 남자들의 시선을 받아가면서, 그들로서는 큰마음 먹고 주문한 복 요리를 이번 주 저녁식사로는 가장 싼 걸 먹는다고 속으로 못마땅해 하는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22년 전의 그 일, 난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 "잊어 버려도 괜찮아." 후미에가 따뜻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잊을 수 없어. 얼마 전에도 만나고 왔는데 뭘......." "아카네짱 말이지?" 아야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22년이란 긴 시간은 이미 후미에로부터 후회나 동정 따위의 감정은 빼앗아 가 버렸다. 아니, 후미에는 이 22년 동안 아카네와 아카네에게 한 짓을 한번도 후회하거나 동정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몰랐다. 22년간 후미에가 가꾸어 온 것은 아야카에 대한 사랑 뿐이었다. 후미에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야카를 사랑했다. 아야카가 사랑해 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아야카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아야카는 진실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불안과 고독의 생활에서 아카네 부모가 자기를 건져 주었다고 믿었던 것도 한순간, 그런 행복이 진실을 안 순간부터 공포와 불신의 나날로 바뀌어 버렸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아야카를 운 좋은 소녀라고 믿었을 뿐, 그녀 말엔 귀를 기울이려고도 안했다. 아야카는 당시의 자기만큼 절망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절망이란 것은 실제로 길이 끊겨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끊겨 있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야카는 열세살 자기에게 미래는 없다고 믿고 있었다. 후미에는 그 절망에서 건져내 주었었다. 그것도 눈깜짝할 사이에. 이상한 일이지만 후미에가 한 일을 알았을 때, 아야카는 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후미에가 두렵다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랑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후미에가 한 행위가 아야카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아야카는 직감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아야카에 대한 후미에의 사랑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 것인지도 알았아. 아야카가 살아오면서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장애인물과 맞부딪칠 때마다 후미에와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 어쩌면 좋지, 아줌마? 어디까지나 물어보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후미에는 그 물음 속에 담겨 있는 애원을 금방 눈치 챘다. -- 나한테 맡겨둬. 후미에는 즐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어느날, 그 장애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한때, 아야카는 후미에가 폭주(暴走) 하면 어쩌나 두려워한 적이 있었다. 맹수 조련사가 맹수에게 잡아먹히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그러나 후미에는 아무리 일이 많아도 결코 스트레스를 느끼거나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후미에가 사람을 죽이고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임을 알고 있는 건 자기 혼자 뿐일 것이라고 아야카는 생각했다.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야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야카가 없다면, 아야카를 위한 일이 아니라면 후미에는 벌레 한마리조차 잡아죽이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못살게 구는 모기를 손으로 때려잡는 것 처럼, 후미에는 아야카의 장애가 되는 사람을 죽여온 것이었다. 처음으로 그 일에 손댄 것은 10년 전이었다. 아야카가 이혼을 결심한 때였다. 더 이상, 같은 공기를 숨쉬는 것조차 싫어진 남편이었으나 그의 재산엔 매력이 있었다. 남편은 아야카가 아이를 낳아 주길 바랐다. 그러나 아야카가 원한 것은 사업이었다. 자기가 세운 계획을 실행해 줄 사람을 원했다. 자기에겐 사업으로 성공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필요한 운도 함께. 물론 후미에가 열세 살 아야카를 위해 한 것과 같은 일을 또 해 주리라고는 그 당시 생각지도 않았다. 아니, 설령 말을 들어 준다 하더라도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내리는 6월 어느날 밤, 당시 살고 있던 코엔지 역 앞 다방에서 후미에를 만나 미지근한 홍차를 앞에 놓고 아야카가 두 시간에 걸쳐 고민을 털어놓았다. -- 어물어물 하다간 죽도 밥도 안 돼. 모두, 모든 걸 나한테 맡겨. 후미에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남편은 사흘 뒤 역 폼에 굴러떨어져, 마침 달려 들어오던 전동차에 깔려 죽었다. 어디까지나 사고로 밖에 보이지 않는 최후였다. 사람 죽이는 재능에 관한 한 후미에는 가히 천재적이었다. 남의 눈에 두드러지지 않는 겉모습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야카가 부르고 있는 것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줌마>에 지나지 않았다. 후미에의 살인은 언제나 놀랄만큼 꼼꼼한 계획을 바탕으로 대담하게 실행되는 게 틀림없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아야카는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후미에는 언제나 틀림없이 실행했고, 단 한번도 누구로부터 의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아카네짱, 어떻던?" 후미에가 물었다. "별로. 항상 그렇지 뭐." 아야카가 대답했다.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아카네에게 한순간이나마 질투를 느꼈다는 얘기를 들려 줘도 후미에가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종업원이 복냄비 재료와 튀김을 들고 왔다. 아야카는 복지느러미 술을 주문했다. "그것, 또 주문하는 게 좋겠지?" 요리 준비를 하는 종업원을 곁눈질하면서 아야카가 물었다. "그것이라니?" "약 말야." "글쎄, 괜찮겠어?" "그럼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세요?" 끓기 시작한 냄비에서 거품을 떠내면서 종업원이 물었다. 후미에와 비슷한 연배라고 아야카는 생각했다. 그러나 접객업에 종사하고 있는 탓일까, 화장도 짙어 후미에보다는 젊게 보였다. 가운데 손가락에 낀 반지가 만약 진짜 보석이라면 월급 이외에도 다른 벌이가 있다는 증거였다. 아야카와 후미에의 시선이 마주쳤다. "허리가 약간 좋지 못해서......." 아야카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 그러세요? 그럼 따뜻한 국물로 푸셔야겠네요. 추운데 가시자면." "그럴 생각이야." 약은 수출대금과 함께 남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미국 제약 회사 신개발품은 그 약은 공개할 수 없는 군부 특정 부처에만 납품했다. 그러나 어느덧 마약대금의 일부로 남미에 유출되고 있었다. 그 약의 실제 효과에 대해서는 아야카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후미에도 처음엔 믿으려 하지 않았다. -- 게 혈액으로 만든 것이라구? -- 그런 것이 아냐, 아줌마. 게 피에도 들어 있는 성분인데, 화학적으로 합성해서 훨씬 강력하게 만든 것이야. -- 그런 약, 정말 있어? -- 이런 약, 팔지는 않아. 산대도 쓸 곳이 없잖아? -- 하긴. 약은 회갈색 가루였다. 먹어선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했다. 다만 위나 장궤양에 출혈이 있는 경우는 달랐다. 분말을 물 같은데 녹여서 혈관에 주입해야만 효과가 있다고 했다. 효과가 강렬하기 때문에 굳이 정맥 같은 데 주사할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약간만이라도, 피가 조금만이라도 번지는 상처로 족하다는 것이었다. 후미에가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 아야카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료 관계자 짓이라고 꼬리가 밟힐 주사기와 같은 도구를 쓸 만큼 후미에가 어리석지 않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후미에와 같은 아줌마가 갖고 있어도 조금도 이상스럽지 않은 도구를 사용했을 게 틀림없었다. "돈은 언제나 그 액수로 괜찮아?" 종업원이 물러가자 아야카가 물었다. 후미에가 한건 해치울 때마다 교통사고 장애아동 육영재단에 아야카가 익명으로 10만엔씩 기부하고 있었다. 10만엔이란 액수도, 기부기관도 후미에가 정한 것이었다. "따로 조금 더 드릴까요?" "필요 없어." 후미에는 단호하게 머리까지 내저었다. 후미에가 이다바시, 목욕탕도 없는 원룸 아파트에 살고 있는 걸 아야카는 알고 있었다. "한달에 한번, 이렇게 맛있는 것 사주는 것 만으로 충분해." 아야카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만날 것 없이 돈만 보낼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은 방법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후미에는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살인의 보수는, 후미에에게 자기 얼굴을 보여 주는 것과, 잠시나마 함께 시간을 보내 주는 것임을 아야카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름깨나 있는 레코드 회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인디스로 불리는 자비 제작판 업자들도 <헬스 키친> 이란 록밴드의 CD를 낸 기록이 없었다. 사메지마는 관내 라이브 하우스를 뒤져 보았지만, 거기서도 <헬스 키친>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쇼에게 연락을 했다. -- 잡아넣으려구, 그녀석? 사메지마의 얘기를 듣고 나서 쇼가 굳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 아니야. 만나서 얘기만 들으면 돼. 살인일지도 모르는 사건 정보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많아. -- 그녀석 패거리 짓이야? -- 아니. 오히려 포플린은 피해자야. 애인 뱃속의 자기 아이를 병원에서 억지로 낙태시킨 것 같았어. 그 문제를 따져 보려고 나섰던 사내가 죽은거야. -- 낙태 수술....... 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메지마와 사귀기 2년 전, 쇼는 딱 한번 중절 수술을 받은 것이 있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할 때, 당연한 일이지만 쇼는 무척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뒤부터 사메지마는 쇼가 원하든 않든간에 피임에 무척 신경을 썼다. 그것은 두 사람에게 있어서 미묘한 문제였다. 게다가 두 사람이 알게 된 계기가 된 것도 쇼가 알고 있던 아마추어 뮤지션을 사메지마가 톨루엔 밀매 혐의로 체포한 사건이었다 (<소돔의 성자> 참조). 사메지마가 체포한 사내는 쇼 친구의 애인인 밀매 그룹 리더였다. 그룹은 밴드에 자금을 대려고 톨루엔 밀매에 손을 댔다가 야쿠자와 트러블이 생긴 바람에 한 녀석이 칼에 찔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찌른 범인을 자수시킨 폭력단은 리더의 뒤를 쫓았다. 사메지마는 리더가 야쿠자들에게 납치되기 직전에 체포했던 것이었다. 자칫했으면 리더가 살해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가 그때, 협조적이었다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다만 쇼는 친구를 돕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렇다고 야쿠자를 두려워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쇼는 친구를 감싸 주려다가 야쿠자들에게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쿠자에게 한 것처럼 사메지마에게도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사메지마는 그녀를 사랑하게 됐는지도 몰랐다. 무엇 하나 무서워할 줄 모르는 쇼의 배짱이 사메지마는 그럴 수 없이 좋았다. 때로는 혼이 날 때도 있었지만, 쇼의 주장은 언제나 고지식했다. 자기 이익이나 보신을 앞세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마쿠라가 거느리고 있던 미카요라는 아가씨를 찾는데 쇼의 힘을 빌리는 걸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레코드 회사에서도 라이브 하우스에서도 실마리를 찾지 못한 지금, 사메지마가 의존할 곳은 쇼뿐이었다. 어떤 록 뮤지션이든 메이저로 데뷔하기 전, 아마추어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방범과 형사에 대해 쇼 이상으로 협력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라이브 하우스나 인디스 수준을 드나드는 뮤지션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하더라도 미카요를 찾아낼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아니면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웬지는 모르지만, 한시라도 빨리 미카요를 서둘러 찾아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당신 혼자? 쇼가 물었다. <헬스 키친>을 찾고 있는 게 사메지마 뿐이냐는 의미였다. -- 그래. -- 알았어. 한번 알아볼께. 쇼는 짧게 대답했다. 쇼가 연락해 온 것은 사메지마가 <인디고>를 찾아갔던 이틀 뒤 오후였다. 드물게도 신주쿠 서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알아냈어." 전화를 받은 사메지마에게 누구라고 밝히지도 않고 쇼가 불쑥 말했다. "어디야?" 사메지마는 메모지를 끌어당기면서 물었다. "니시오기쿠보" "니시오기쿠보?" "나도 함께 갈 테야." 사메지마는 한순간 숨이 막혔다. 말려봤자 듣지 않을 게 뻔했다. 어쩌면 쇼가 함께라면 저쪽도 쓸데없는 경계심을 품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았어." "오늘 밤 좀 늦어질 거야. 기다려 주겠어?" "몇 시쯤?" "12시는 돼야 끝날 거야." "그렇게 늦게까지?" "저쪽도 그때까지 안 자고 있을걸."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집으로 갈께. 기다리고 있어." 쇼는 전화를 끊었다. 사메지마가 수화기를 내려놓은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벨이 울렸다. 기동수사대 노모토였다. "지난번엔 폐가 많았습니다." 노모토의 말투가 어쩐지 서먹서먹해진 것같이 들렸다. <인디고>로 갔던 이튿날, 사메지마는 노모토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세르시오에 꽂혀 있던 지도책으로 하마쿠라네 아가씨 주소를 알아냈다는 것, 미카요라는 아가씨만 연락이 안 되고 있다는 것도 알려 주었었다. "미카요 있는 곳을 알게 될 것 같아요.'" 사메지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늘밤 노모토가 함께 가겠다고 나선다면 좀 성가셔 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기수 담당,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온 노모토의 말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사건, 이미 우리 손을 떠났습니다." "떠났다?" "네, 사건성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 화학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일단 넘기기로 결정이 난 모양입니다." "넘기다니? 1과로 말입니까?" "네, 1과의 판단에 맡기라고 대장님이 지시했습니다. 사메지마씨한테는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쳤습니다마, 앞으로는 1과가 전담해서......." 노모토의 자연스러운 말투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딱딱했다. 사메지마는 기동수사대 내부에서 이러쿵저러쿵 자기 얘기가 오갔음을 당장 눈치 챌 수 있었다. 하마쿠라 건에 사메지마가 끼어들었음을 안, 사메지마 배경을 상세히 아는 어떤 녀석이 노모토를 포함한 담당반원들에게 절대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모토는 만만찮은 야심가였다. 그 야심이 사메지마를 가까이 말라고 브레이크를 걸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화검(化檢) 결과는?" "우리쪽으로 연락하지 않을 겝니다. 1과로 직접 보내겠죠." 노모토는 잡아떼듯이 말했다. 사메지마는 살며시 한숨을 내뱉었다. "알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기면, 협조 부탁드리죠." 판에 박힌 듯한 말투는 같은 경찰관에게가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인사처럼 들렸다. 전화를 끊은 사메지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모이와 눈길이 마주쳤다. "기수가 손을 뗐군요." 모모이는 콧잔등으로 흘러내린 돋보기 너머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직접 당신한테 전화로 알려왔나?" "네"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메지마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흘렸다. 직접 전화를 걸어 준 것은 노모토에게 아직은 어느 정도의 성의가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사메지마와 관계를 일절 끊어버리겠다고 결심했다면, 기수의 상사를 통해 모모이에게 연락하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살인이라고 생각하나?" 모모이가 물었다. 사메지마는 애매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아직은 뭐라고...... 살인으로 생각한다 해도 떠벌리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메지마가 떠들고 다니면 경찰 내부에선 오히려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많았다. 본청 수사 1과는 논캐리어 집단이지만 프로 수사관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대단했다. 본청 과장 가운데는 캐리어도 논캐리어도 많지만, 수사 1과 과장은 언제나 논캐리어가 차지했다. 캐리어는 프로 집단인 1과 형사를 휘어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가 하마쿠라의 변사를 살인사건이라고 강력하게 주장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스스로를 <살인사건의 프로>로 자부하고 있는 1과 형사들이 반발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그들이 보기엔 캐리어의 낙오자인 사메지마는 여전히 풋나기에 지나지 않았다. "있을 법한 얘기야,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모모이가 말했다. 프로가 아마추어를 얕잡아 보는 건 어느 세계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사메지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큰소리로 외쳐대면 못 들은 척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사건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1과가 깔아뭉개어 버릴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하마쿠라는 사회적인 견지에서 볼 ㄸ 결코 중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은밀하게 훑어볼 생각입니다." 사메지마는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게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모모이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른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보일듯 말듯한 제스처였다. 쇼는 진바지에 가죽 재킷 차림으로 사메지마 아파트에 나타났다. 진바지 무릎은 찢긴 채였다. 재킷 속에는 긴 소매 티셔츠를 받쳐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안 추워?" 사메지마도 가죽 점퍼였으나 안은 하이네크 스웨터였다. 쇼가 알면 배꼽을 잡겠지만, 바지 안에도 스키용 타이츠를 껴입고 있었다. 비까지 추적거리는 차가운 밤 -- 경우에 따라서는 바깥에서 잠복도 해야 하기 ㄸ문에 중무장을 한 것이었다. "별로." 쇼는 쌀쌀맞게 내뱉으면서 BMW 조수석에 올랐다. 긴장한 표정이었다. 사메지마는 차의 시동을 건 다음, 엔진이 더워지기를 기다렸다. 4년 된 중고를 사서 벌써 정기검사를 한번 받은 낡을 만큼 낡은 차였다. 쇼는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 쪽지를 꺼내어 오른 손에 꼭 쥐고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사메지마는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자기는 내 남자야." 앞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쇼가 말했다. 여전히 종이쪽지는 꼭 쥔 채로였다. 거기엔 포플린이란 사내의 주소가 적혀 있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맞아!" 사메지마는 포근하게 대답했다. "자기가 내 남자란 것과, 형사란 직업은 아무 관계도 없어!" 쇼는 스스로를 달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입 다물고 있어!" 사메지마는 쇼에게로 흘낏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여전히 앞만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차장 건너편, 3층 아파트의 불켜진 창에 눈길을 박고 있었다. 따뜻하게 느꺼지는 주황색 불빛이었다. "내가 신용하는 형사는 한사람 밖에 없어. 하지만 그것과 그 녀석이 내 남자란 것과는 별개 문제야." 쇼는 턱에 힘을 주면서 말을 이었다. "내 남자라고 해서 형사인 자기를 믿는 게 아니야. 알겠어?" "편파적인 평가는 않겠다, 그런 뜻 아냐?" "맞았어." 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만약 이번 일을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데리고 온 다른 형사가 부탁했다면 난 거절했을 거야." "알고 있어." 쇼는 비로소 사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폭력 담당형사 가운데도 존경할 만한 녀석이 있다는 것과, 내가 자기한테 반해 있는 것과는 별개 문제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야 해!" "말이 많군. 날 믿어!" 사메지마는 자르듯이 말했다. 그 순간 쇼의 코가 벌름거렸다. 화를 터뜨리는가 싶었는데 거칠게 숨만 내뿜으면서 못 박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신주쿠 상어>를 믿어. 자기도 날 믿어 줘!" 눈빛이 반짝했다. 사메지마는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안다면 깜짝 놀랄 거야." "안 놀라. 내가 자길 믿고 있는데 왜 놀라?" 쇼는 이를 꼭 깨문 채 말했다. 사메지마는 오른팔로 쇼의 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쇼는 똑바로 사메지마 눈을 들여다보면서 얼굴을 맞대어 왔다. 사메지마는 조용히 쇼의 입술에 입술을 덮었다. 입술을 ㄸ고 보자, 쇼는 여전히 사메지마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나지막하게 달래듯이 말했다. "키스할 땐 눈을 감아, 이 사람아." "바보." 쇼카 톡 쏘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종이쪽지를 감싸쥔 오른주먹으로 사메지마 가슴을 한대 질렀다. < 6 > 가마이시 원장이 지하 냉동보존실에서 올라오기를 후미에는 끈기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어제 입원해서 중절 수술을 받은 아가씨가 퇴원한 것은 한시간쯤 전이었다. 세르신 정맥주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던지, 오후 내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퇴원이 그처럼 늦어진 것이었다. 카부키쵸 카바레 클럽에서 일한다는 열일곱 살 소녀였다. 가게에선 열아홉 살로 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임신한 사실을 늦게 깨달은 듯, 외래로 왔을 때는 이미 18주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원래부터 생리가 불순해서 두세 달 건너뛸 때도 더러 있었다고 했다. 초음파 검사 결과, 태아는 순조롭게 자라고 있었다. 하루 전에 라미나리야를 넣어 경관(頸管)을 넓혀 놨기 때문에 수술은 손쉬웠다. 초기 중절수술엔 라미나리야 대신 헤가르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두 가지 모두 자궁경관을 넓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는 언제나 라미나리야를 사용했다. 그것은 <가마이시 클리닉>의 중절수술이 D&C (경관 확장, 자궁내용 제거 및 소파) 가 아니라 분만 방법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18주를 초기로 볼 수 없지만, 임신 12주 이내일지라도 태아의 크기가 쓸 만큼 자랐으면 라미나리야를 택했다. D&C를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태아를 손상 없이 깨끗한 상태로 채취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헤가르로 경관을 넓혀 태반집게로 태아를 꺼내는 D&C로는 태아와 태반이 따로따로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태아의 머리가 짓이겨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라미나리야를 사용한 분만일 경우, 시간은 걸리지만 메트로로 당겨내면 자연스럽게 태아가 배출되는 것이었다. 결국 기구로 끌어내느냐, 약품으로 진통을 유도해서 억지로 밀려나오도록 하느냐 하는 차이였다.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는 초기 임신환자보다는 중기 이후의 환자를 환영했다. 임신 22주 이후의 태아는 중절 수술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으나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는 산월이 다 된 중절 환자도 태연하게 받았다. 그러는 이유는 지하 냉동보존실에 숨겨져 있었다. 지하 계단 입구 도어에는 잠금장치가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열쇠 한쌍은 후미에가, 또 한쌍은 후지사키 아야카가 가지고 있었다. 원장인 가마이시도 후미에가 없으면 지하실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가마이시 클리닉> 의 토지. 건물. 비품은 후미에가 명의상 사장으로 있는 시마오카 기획이라는 회사 소유였고, 시마오카 기획의 주식은 모두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이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가마이시 클리닉>의 경영자는 아야카였다. 아야카가 사용하고 있는 스도 아카네라는 이름은 야마나시 병원에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사촌언니 이름이었다. 가마이시가 이윽고 계단을 올라왔다. 소독복과 일회용 장갑을 벗어던졌다. "어떻게 됐어?" 소독복 벗는 것을 도우면서 후미에가 물었다. "걱정할 것 없어." 가마이시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으면서 대답했다.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 지하실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두 사람 뿐이었다. 간호사 두 사람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가마이시 클리닉>은 다른 데보다 간호사 월급이 많았다. 대신에 2년마다 갈아치웠다. 물론 후미에는 예외였다. 후미에는 6년째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니, 6년 전 아야카의 부탁으로 후미에가 <가마이시 클리닉> 창설을 도운 것이었다. 가마이시를 아야카에게 소개한 것도 후미에였다. 후미에가 가마이시를 처음 만난 것은 11년전, 토치기의 어떤 사립병원에서였다. 후미에는 거기서 일년쯤 근무했다. 가마이시가 의사면허를 취소당한 무자격 의사임을 눈치 챈 것은 후미에 뿐이었다. "연락해도 괜찮아?" "그럼. 내주쯤 가지러 와도 좋다고 일러." 가마이시는 올해 쉰 여덟, 중성적인 남자였다. 깡마른데다 머리숱도 적고 손발도 가냘팠다. 독신으로 술. 담배는 물론, 도박과도 거리가 멀었다. 가마이시 취향은 열두 살 이하의 소녀였다. 그런 병적인 취향 때문에 결국 의사면허까지 취소당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 때문에 일년에 두 번, 아야카가 대 주는 돈으로 독일이나 타이를 찾았다. 일본 국내에서 꼬리가 잡히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알았어요." 후미에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마이시는 훅하고 한숨을 내뿜으면서 후미에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몹시 힘드는군." 희멀건, 맥빠진 눈이었다. 가마이시 눈은 언제 봐도 초점이 흐리멍텅했다.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눈길이었다. 처음에는 후미에도 몹시 기분 나빠 했다. "퇴근해요.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수술실 뒷처리는 끝났지만, 아직 병실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할까?" 그러면서도 가마이시는 약간 허둥대듯 후미에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후미에가 날카롭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별 것 아니야. 다만 슬슬 어딘가 바람이나 쐬러 갔으면 해서." 후미에는 가마이시를 노려보았다. 가마이시는 눈길을 내리깔았다. "아니, 당장 그러겠다는 건 아니야." "이번 일 끝나면, 사장님께 내가 말씀드려 볼께." "그래 주겠어?" 마음 놓았다는 듯이 가마이시는 얼굴의 긴장을 풀었다. "이번엔 룩셈부르크에를 한 번 가보고 싶어. 첸마이 (타이 북부 도시 - 역주) 는 이제 지겨워." "상대를 바꾸면 될 것 아니야. 얼마든지 있댔잖았어. 아이들을 팔러 오는 사람이?" "그게 말씀이야...... 저쪽도 날 알아보곤 값을 엄청나게 부르고 있어. 게다가 열다섯 살 짜리를 열한 살이라고 사기치는 녀석도 있구......." 후미에는 허리에 손을 대고 버티듯이 곧추섰다. "그래서 사장님한테 바가지를 씌울 생각이야?" "그런 건 아냐!" 가마이시는 눈이 동그래지면서 재빨리 부인했다. 놀란 얼굴을 하자, 변태에겐 어울리지 않는 긴 속눈썹이 두드러져 보였다. 후미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실적이 꽤 괜찮았잖아? 35주. 30주가 둘씩이나 되고, 이번 것도 제법 물건이 좋으니까......." "보너스를 줬으면 좋겠다, 이 말이지?" 가마이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웃음을 지었다. "그래 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어." "생각해 보지." "부탁해, 시마오카군." 후미에는 날카롭게 가마이시를 노려보았다. "시마오카, 씨......." 가마이시는 호칭을 바꾸었다. 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환자나 다른 간호사가 있을 때만이었다. 두 사람 만일 때는 이런 사내에게 군이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세요." 후미에는 등을 밀듯이 말했다. 가마이시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의와 코트를 벗어둔 진찰실로 걸어갔다. 잰걸음이었다. "그럼, 먼저 가요." 진찰실을 나온 가마이시가 인사를 했어도 후미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층 병실로 올라가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부도심(副都心), 네온이 번쩍이는 쪽으로 가마이시가 비에 젖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가마이시 자동차는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있었다. 가마이시 집은 코엔지에 있는 맨션 아파트였다. 한번도 가 본 적은 없었지만, 가마이시가 직접 촬영해 온 어린이들 비디오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한번은 가마이시가 지갑 속에 여덟살짜리 소녀 사진을 넣고 다니는 것을 보고 속이 메스꺼워 혼이 난 적이 있었다. 보통 사진이 아니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서비스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후미에는 병상 시트를 걷어냈다. 시트는 몹시 지저분했다. 피와 오물이 덕지덕지해서 언제나 전문 세탁소에 맡겼다. <가마이시 클리닉>은 신주쿠구와 나카노구 경계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택 밀집지역에 비집고 들어선 40평 짜리 이층으로, 6년 전에 지은 건물이었다. 후미에가 때때로 묵을 경우를 제외하면 밤엔 아무도 없었다. 이층은 입원실 둘과 당직실이었고, 진찰실. 수술실. 대기실은 일층에 있었다. 병실 청소를 끝낸 후미에는 일층으로 내려왔다. <가마이시 클리닉> 건물엔 최신식 경보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다. 화재와 도둑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난방장치 스위치를 끄면서 후미에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진찰실 이외의 전등도 모두 껐다. 후미에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2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그냥 당직실에서 눈을 붙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젯밤도 병원에서 묵었지만, 택시값이 아까웠다. 경보 시스템 스위치는 넣지 않은 채 진찰실 조명을 껐다. 복도와 계단에는 비상구 위치를 알리는 조명이 있어서 아무 불편이 없었다. <가마이시 클리닉>은 막다른 골목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밤만 되면 물밑보다 더 조용했다. 계단을 막 올라가려는 찰나에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뭔가 무거운 것을 내려놓는 것 같은 소리였다. 가마이시가 되돌아 온 것일까. 후미에는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원 출입문은 짙은 색깔이 든 유리문이었다. 뭔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누군가가 문 밖에서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후미에는 긴장했다. 도둑놈인가. 바깥의 그림자가 유리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후미에는 허둥대거나 하진 않았다. 계단 중간쯤에 서 있는 자기가, 바깥 그림자 눈엔 띄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리문이 흔들렸다. 잠겨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해 흔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후미에는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올라갔다. 병실 창문으로라면 현관을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실로 들어가 창가에 찰싹 붙어 커튼 틈으로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긴 여자라고 생각했다. 검정 바지에 더플 코트, 목 뒤에서 묶어내린 머리가 허리까지 치렁치렁했다. 긴급 환자인가. 여자가 이층을 올려다보는 바람에 후미에는 한걸음 물러섰다. 순간, 똑똑히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남자였다. 그것도 낯이 익은 남자였다. 어디서 만난 사람일까. 기억을 더듬으면서 후미에는 다시 아래로 눈길을 쏟았다. 사내가 더플 코트 주머니에서 음료수 병을 꺼내고 있는 게 보였다. 취한 것일까, 조금 비틀거렸다. 이미 현관 앞에도 음료수 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좌우 포켓에 한개씩 넣어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무슨 꿍꿍잇속인가. 사내는 웅크리고 앉아 병마개를 땄다. 주위를 한번 휘둘러 살피더니 병을 치켜들어 내용물을 현관 주변에 뿌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후미에는 창에서 물러섰다. 사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가마이시 클리닉> 에 위험을 가하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소리 안 나게, 그러나 잽싸게 내려왔다. 일층 복도로 내려오자, 평소 코에 익은 약품 냄새와는 다른 휘발성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석유였다. 무슨 까닭일까. 이 사내는 이 <가마이시 클리닉>에 불을 지르려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후미에는 잰걸음으로 진찰실로 들어갔다. 약품장에서 이소졸을 꺼내어 일회용 주사기에 뽑아넣었다. 이소졸은 생리식염수를 섞어 묽게 한 다음 환자의 정맥에 주사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주사바늘에 캡을 씌워 기운 포켓에 넣은 다음 복도로 나왔다. 단 1초라도 어정거릴 여유가 없었다. 사람 그림자는 여전히 현관 바깥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사내는 깜짝 놀라면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정면에서, 그것도 가까이서 보자 그가 누군지 후미에는 금방 알아차렸다. "들어오세요." 후미에는 침착하게 말했다. 사내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할말을 찾는 듯 입술을 몇 번 핥았다. 얼굴색이 말이 아닐 만큼 초췌했다. 게다가 우산도 안 가진 듯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후미에는 다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염려 말아요. 경찰 따윈 안 부를 테니까.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원장님도 후회하고 있어요. 당신과 만나서 마음을 툭 털어놓고 얘기하고 싶댔어요." "원장이?" 비로소 사내 입에서도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취해 있는 게 분명했다. 혀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을 만큼 취해 있었다. "원장, 지금 안에 있어?" 후미에는 머리를 끄덕였다. 미소를 지으면서 사내 발 밑을 보았다. 반쯤 빈 음료수 병이 보였다. 또 한병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이층에서 자고 있어요. 무슨 소리가 나는 바람에 나 혼자 잠이 깨서......." 사내는 비틀, 상체가 흔들렸다. "내 애기 돌려 줘!" 불쑥, 그러나 피맺힌 절규였다. "우리 애기, 돌려달란 말이야!" "그래서, 그 때문에 들어오시라는 것 아녜요. 자, 들어오세요!" 달래듯이 후미에는 말했다. 이어서 나직한 목소리로 조용하게 덧붙였다. "난 당신 편이에요. 끝까지 중절을 반대했어요. 하지만 원장 선생님은, 애기가 장애 상태로 태어난다면 젊은 당신네 부담이 너무 크다면서......." "그런 말, 다른 병원에선 한마디도 안했어. 들어본 적도 없어!" 사내는 목소리를 높였다. "쉿. 목소리가 너무 커요. 이층엔 다른 환자가 자고 있어요. 당신 애인과 같은 또래 아가씨 환자예요." 사내 얼굴에 동요의 빛이 스쳤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보통 땐 그래요. 하지만 오늘은 달라요." "그 여자, 낳으러 왔나? 아님 중절하러?" "낳으려고 입원했어요." "그럼 내가 가르쳐 줘야겠군. 이따위 병원, 금방 퇴원하라고 말야. 여긴 애길 잡아먹는 병원이라고 가르쳐 줘야겠어." 사내는 느닷없이 안으로 돌진했다. 후미에를 밀쳐내고 구두를 신은 채 현관으로 올라섰다. "이봐! 이봐아......." 복도를 지나 계단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잡았다. 후미에는 가운 포켓에 손을 넣어, 주사바늘 캡을 벗겼다. "이쪽이에요.' 계단 아래서 후미에가 속삭이는듯 말했다. 사내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는 표정으로 후미에를 돌아보더니 계단 중턱에 주저앉았다. "원장을 불러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쌌다. "어디서 까불고 있어, 까불고 있긴?!" 손가락 사이로 말이 새어나왔다. "지금 불러올께요." 후미에는 사내 옆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갔다. 사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금방이라도 코를 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추위에 떨다가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자 취기가 휘몰아친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어요." 후미에는 왼손으로 젖은 사내 어깨를 잡았다.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후미에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주사기를 가운 포켓에서 잽싸게 뽑아들었다. 포플린의 집은 오메카이도에서 니시오기쿠보 역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는 맨션 아파트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건물, 일층에서 살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역전으로 뻗은 도로 한쪽 구석에 BMW를 세웠다. 바로 옆에 공중전화 부스가 보였다. 그 건너편이 포플린이 살고 있는 아파트였다. 상당히 낡은 건물이었다. 새벽 1시가 조금 지난 시간, 일층에 불이 켜진 창은 한집밖에 없었다. "전화할 테야?" 쇼가 사메지마를 돌아보며 물었다. "공통의 친구도 함께야?" "함께야. 하지만 그녀석 이름까지 댈 생각은 없어." 쇼가 자르듯이 말했다. "그럼 내가 전화하지." 사메지마는 BMW 에서 내려갔다. 전화 부스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는 메모된 번호 버튼을 눌렀다. 첫번째 신호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이 나왔다. "여보세요!" 젊은 여자 목소리였다. "쿠보씨 댁이죠?" 사메지마는 정중하게 말했다. 쿠보 히로키가 포플린의 본명이었다. "네......." "밤늦게 죄송합니다. 나는 사메지마라는 사람인데...... 히로키씨 지금 집에 있나요?" "없어요." "외출중이세요?" "네." 가냘프고 어딘가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미카요씨죠?" 사메지마는 한걸음 다가서듯 말했다. "네." 목소리는 더욱 불안해졌다. "<인디고> 마담과 사야씨로부터 당신 얘길 들었어요. 난 하마쿠라씨와도 알고 지낸 신주쿠 서 방범과 사메지맙니다. 몇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신주쿠 서!" 미카요는 그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당신을 어떻게 하자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럼 포플린을?" 미카요의 부르짖음에 사메지마는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다. 미카요와 포플린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아니, 하마쿠라씨 일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곧 찾아가도 괜찮겠죠? 실은 바로 앞에서 전화를 걸고 있어요." 미카요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저어......." "귀찮게 굴진 않을 테니까......." "......네." 착 가라앉은, 체념한 목소리였다. 사메지마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쇼도 차에서 내려왔다. "가보려구?"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두 괜찮아?" "응." 잠시 생각하던 사메지마는 쇼를 데리고 길을 건너갔다. 아파트 일층 부분은 맨흙이었다. 비로 질퍽하게 젖어 있었다. 사메지마는 문패가 없는 도어 앞에 걸음을 멈추고 버튼을 눌렀다. 한참 기다려서야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세요?" 전화로 들었던 바로 그 여자 목소리였다. 사메지마는 투시경(透視鏡) 앞에 경찰수첩을 가져다댔다. "사메지맙니다." 열쇠 따는 소리, 도어록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표면이 삭아 까칠까칠해진 크림색 스틸 도어가 삐꺽거리면서 열렸다. 아래 위 모두 헐렁한 땀옷을 걸친 여자가 서 있었다. 기껏해야 스물 안팎 밖에 안 됐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짐작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 큰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촉촉했다. 머리에는 강력한 탈색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었다. 키는 겨우 사메지마 턱 근처밖에 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현관 바닥으로 눈길을 던졌다. 여자용 샌들과 하이힐, 남자용 운동화와 부츠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혼자세요?" 여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면서 사메지마와 옆에 서 있는 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쇼라고 해." 쇼가 생긋 웃음을 흘리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이녀석 동행이야." "알고 있어......." 여자 --- 미카요가 눈을 깜박이면서 말을 이었다. "<후즈 허니>의 보컬이죠? CD샀어." "고마워." 쇼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미카요도 멈칫멈칫하면서 맞잡았다. 사메지마는 쇼를 돌아보았다. "안 팔린다고 앓는 소리만 하더니...... 산 사람도 있잖아?" 쇼는 못 들은 척 했다. "미안. 이처럼 늦게." 쇼는 사메지마를 흘낏거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 녀석이 네 얘길 듣고 싶어 안달이지 뭐야. 네 애인, <헬스 키친>의 베이스지? 그래서 내가 수소문해서 도와 준 거야." 미카요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좀 들어가도 괜찮죠?" 사메지마의 말에 미카요는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아담한 2DK (방 둘에 부엌과 식당) 였다. 들어서면서 오른쪽에 미닫이 방, 왼쪽으로 부엌, 그 안쪽에 다다미 6장짜리 방이 보였다. 다다미 방 복판에 고다츠 (열기구가 달린 좌탁) 와 그 밖에 옷. 잡지. CD. 기타 따위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벽엔 빈틈 하나 없이 각종 포스터가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고다츠 위에는 커피를 마시다 만 모닝컵과 인스턴트 거피병. 여성 주간지가 놓여 있었다. 재떨이엔 샐럼 라이트가 연기를 내고 있었다. 사메지마와 쇼는 고다츠 밑으로 무릎을 넣고 미카요와 마주보게 앉았다. "하마쿠라씨 건을 조사하고 있어요. 그래서 <인디고> 에도 찾아가 모두들 만나봤어요." 사메지마가 말머리를 열었다. 그러나 미카요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라보기만 했다. 두 손은 겁먹은 사람처럼 고다츠 밑으로 넣은 채로였다. "사야씨로부터 아가씨가 무척 두려워하고 있단 얘기도 들었어." 미카요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엇다. "물어보기 민망스런 것이지만...... 애기 문제로 의사와 트러블이 있었다면서?" 미카요가 불쑥 입을 열었다. "지금 몇 시쯤 됐어요?" "1시 40분쯤 됐을거야." 미카요는 끄덕이면서 목을 움츠렸다. "왜? 무슨 일이라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녜요!" 미카요는 머리까지 내저었다. 사메지마는 숨을 한번 길게 들이마신 다음 말했다. "의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 미카요는 손을 뻗쳐 재떨이에서 혼자 타고 있는 담배를 비벼 껐다. 담배가 터져 가루가 될 때까지 집요하게 뭉갰다. 한참 만에 미카요는 입을 열었다. "......낳을 생각이었어요. 포플린도 낳으랬어요. 건강하게, 훌륭한 로커로 키우쟀어요. 부모. 자식 손을 맞잡고 연주하자면서......." 눈을 재떨이에 박은 채 말을 이어갔다. "집 가까운 코엔지 병원엘 다녔어요. 하마쿠라씨도 그렇다면 좋다고, 일이 끝나면 언제든 다녀오라고 했어요. 전 손님 받을 땐, 언제나 그걸 사용했기 때문에 틀림없는 포플린 애기였어요. 그래서......." 말이 끊겼다. 사메지마는 기다렸다. "......그렇게 되지만 않았다면 다음다음 달이 산월이예요. 신주쿠로 놀러갔다가 복통이 심한 바람에...... 근처 병원을 찾았어요. 처음엔 코엔지 단골병원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도중에 어떻게 되면 큰일이란 생각에서. 학생 때 두 번 중절수술을 받은 적이 있어서 무척 불안했어요. 그래서 니시신주쿠의 병원으로 간 건데...... 의사 선생이 진찰해 보더니 태반 박리(剝籬) 라면서 즉시 수술 않으면 위험하댔어요. 애기는 죽지만, 그냥 두면 나까지 죽게 된다면서...... 그래서 수술을......." 미카요는 얼굴을 들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면, 줄곧 다니던 병원에서 받고 싶다고 했어요. 하지만 1분 1초가 급하다면서, 나보고 죽어도 좋으냐고 하는 바람에......." "그래서 거기서 수술을 받았나?" 미카요는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마취에서 깨서, 애기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슬퍼져서 펑펑 울었어요. 간호사가 상냥하게 돌봐 줬지만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포플린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사과하면서...... 무덤이라도 만들어 주고 싶어서 의사 선생에게 애기를 달라고 했더니, <당신 애기, 선천적인 장애가 있어서 낳더라고 얼마 못 살 거라고 했잖아? 안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처분했어.> 라는 거예요." "처분?" 미카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몹쓸 약 먹은 적 없느냐는 거예요. 신나나 수면제 같은 것. 그 때문에 애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난 한번도 그런 것 가까이 한 적이 없어요. 신나도 중학교 1학년 때 딱 한번 마셔봤지만 머리만 아파 그만뒀어요. 하지만 의사 선생이 나한텐 애기를 보여 주지 않았어요. 포플린도 화를 냈지만, 포플린이 따졌어도 전혀 상대를 해 주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하마쿠라씨에게......." "교섭을 부탁했나?" 미카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자위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뒤 코엔지 병원에도 가 봤나?" "갔었어요. 하지만, 당시 그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면서 꼬리를 뺐어요." 의사들도 대체로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불리한 얘기는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마쿠라씨한테 얘기한 게 언제쯤이었지?" "하마쿠라씨가 그렇게 되기 사흘 전, 하마쿠라씨가 전화를 걸어 줬지만, 전화로는 얘기가 안 된다면서......." "그래서?" "직접 의사를 만나야겠다고 했어요." "병원 이름은?" "<가마이시 클리닉>." "어띠쯤 있어?" "니시신주쿠요." 대답한 미카요는 나지막하게 <포플린> 이라고 중얼거렸다. "포플린, 지금 어디있어?" "신주쿠." "일 때문에?" 미카요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놀러?" 미카요는 굳은 표정을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런 시간에 뭘 타고 갔어?" "자전거." "혼자?" "네." "누굴 만나러 갔나? 혹시 <가마이시 클리닉>의 누군가를?" 미카요는 어느 정도 긴장을 풀었다. "포플린, 복수해야겠다면서. 하마쿠라씨, 그 병원 녀석들이 살해한 게 틀림없다면서, 여기서 나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미카요, 두고 보자면서...... 몹시 취했어요. 내가 말렸지만, 듣지 않았어요. 맛을 보여 줘야 한다고......." "그래서?" "난로의 석유, 병에 담아서......." 사메지마는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몇 시쯤이었어, 여길 나간 게?" "몰라요. 1시가 채 안 된 시간이었을지 몰라요." 미카요는 두 손으로 얼굴을 쌌다. "내가 전화 걸기 전이었나?" "네. 훨씬 전이었어요." 쇼가 사메지마에게로 눈을 돌렸다. "난 여기 있을께." 미카요는 고다츠에 엎드렸다. "알았어. 연락하지." 사메지마는 시계를 보았다. 2시 40분. 신주쿠 서에 연락해야 했다. 지금 여기서 자동차로 달려가서는 너무 늦을지 몰랐다. "전화 좀 쓰겠어." 이미 불을 지른 뒤라면 어쩔 도리가 없겠지만 미수로 끝내게 할 수만 있다면 쿠보 히로키의 죄도 그만큼 가벼워진다. 신주쿠 서와 연락이 되었다. 우선 니시신주쿠에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는가부터 물었다. 교환대에서는 없다고 했다. 사메지마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순찰과를 바꿔달라고 했다. 당직이 나오자 즉각 패트롤카를 출동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끊자 사메지마도 서둘러 쿠보 히로키 아파트를 뛰쳐 나왔다. < 7 > 패트롤카와 엇갈리면서 후미에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게 달려온 패트롤카는 <가마이시 클리닉> 바로 옆에 멈추어 섰다. 제복 경찰관 두 사람이 내렸다. 한사람이 <가마이시 클리닉> 유리문을 노크했다. 또 한 사람은 회중전등으로 주변을 살폈다. 후미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기고 지켜보았다. 경찰관은 어깨에 걸고 있던 무선기로 어딘가 연락했다. 그 사내는 한달 전에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 중절수술을 받은 아가씨의 애인이었다. 지저분한 장발을 봤을 때 당장 알아차렸어야 마땅했다. 임신 30주째, 태아는 순조롭게 자라고 있었다. 다만 가벼운 위염으로 복통이 오자 당황해서 <가마이시 클리닉> 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모자수첩까지 가지고 있는 걸로 보아서 출산할 생각임은 금방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수첩에는 애기 아빠 되는 사람 이름이 없는 데다가 몰골도 별로 맵시가 없어 가마이시가 욕심을 냈다. 따라온 애인이라는 사내도 만만하게 생겨 후미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태아는 발육이 잘 되었으면 잘 되었을수록 비싸게 넘길 수 있었다. 가마이시가 교묘한 거짓말로 수술을 권했다. 큼직한 태아를 적출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러나 뒤가 나빴다. 하마쿠라라는 남자였다. 하마쿠라의 전화를 받고 가마이시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당장 아야카에게 연락하라면서 허둥댔다. 후미에는 아야카에게 연락했다. 아야카는 미쓰즈카를 시켜 뒷조사를 했다. 후미에는 미쓰즈카가 싫었다. 그 사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샘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쓰즈카는 아야카에게 반해 있었다. 그러나 아야카와 후미에 사이의 끈끈한 유대를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아야카가 후미에에게 마음 쓰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후미에 입장에서 볼 때, 미쓰즈카는 으스대기만 하는 풋나기 야쿠자와 별반 다른 데가 없었다. 게다가 야아카가 부리는 사람이었다. 그 사내가 아야카를 감쪽같이 속여 재산을 몽땅 가로채려 하고 있는 것쯤은 후미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 그따위 녀석에게 아야카 재산을 넘겨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이 이만큼 번창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가마이시 클리닉> 덕분이었다. 미쓰즈카가 제법 으스대고는 있지만 아야카를 위해 한 일은 자신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아야카도 물론 그런 것쯤은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하마쿠라의 처분도 후미에에게 부탁한 게 아닌가.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 얼빠진 년의 애기를 중절한 게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후미에는 생각했다. 결국 하마쿠라 뿐만 아니라 지저분한 장발 사내까지 처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게다가 그 사내는 이 병원에 불까지 지르려 하지 않았는가. 이소졸 주사로 사내는 맥없이 죽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통상 정맥마취에는 0.5cc를 40배로 희석해서 사용했다. 그렇게 희석된 것을 5cc나 10cc만 주사해도 의식을 잃는 사람이 있었다. 통상 사용량의 20배를 한꺼번에 주사한 것이니까 간단할 수 밖에 없었다. 시체는 지하 냉동보존실에 옮겨다 놓았다. 거기라면 당분간은 부패할 염려가 없으니까 기회를 봐서 처분하기도 쉬웠다.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장기를 따로 이용하지 못하게 된 게 아쉽다면 아쉬웠다. 좀더 신경을 썼으면 뇌사상태로도 만들 수 있었는데....... 그렇게만 했다면 분해해서 다음 번 물건과 함께 보낼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지나간 일을 새삼 곱씹어봐야 속만 상할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하마쿠라. 장발 사내가 아니었다. 애기 엄마, 아가씨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아가씨가 납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하마쿠라와 장발 사내가 <가마이시 클리닉> 주변을 맴돈 것이 아닌가. 경찰관들이 무엇 하나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장발 사내가 뿌려놓았던 석유는 모두 비에 씻겨 내려갔고, 석유는 세면대에 쏟아 물로 씻어내린 뒤, 병도 처분했었다.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한 경찰관들은 후미에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패트롤카에 올랐다. 사메지마가 도착했을 때, <가마이시 클리닉> 막다른 골목 입구에는 불을 모두 끈 패르롤카가 멈추어 있었다. 순경 2명이 타고 있었다. 사메지마가 BMW를 세운 뒤 다가가자 두 사람은 패트롤카에서 내려 경례를 붙였다. "수고하는군. 현장 도착은?" "2시 48분이었습니다. 부근을 검색해 봤습니다만 수상한 사람은 물론, 말씀하신 인물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양식 이층 건물인 <가마이시 클리닉> 왼편은 주차장, 오른쪽은 주택이었다. 헐고 새로 지으려고 누군가 사들인 듯 주택 3채 가운데 한채는 빈집이었다. 순경한테 회중전등을 빌린 사메지마는 <가마이시 클리닉> 정면 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출입구는 이곳 한곳 뿐으로, 이렇게 잠겨 있었습니다. 전화도 걸어봤으나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비닐 덮개를 씌운 제모(制帽)에 비옷을 걸친 순경이 뒤따라 와서 설명해 주었다. 사메지마는 회중전등으로 현관을 비춰 보았다. 지면과 갈색 유리문 사이에는 야트막한 돌계단이 2단쯤 쌓여 있었다. <진료시간, 월 - 금요일, 오전 10시에서 12시, 오후 2시에서 4시까지. 토.일요일 휴진. 가마이시 클리닉 산부인과 전문> 이라고 쓰인 플레이트가 안쪽에 걸려 있었다. 문 바깥에는 경비보안회사의 은색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비에 젖은 돌계단이 회중전등 불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날씨가 꽤 춥군." "눈으로 바뀔지도 모르겠군요." 사메지마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에서 몇 분 지나가 있었다. 니시오기쿠보에서라면 자전거로 한시간 거리였다. 그런데도 방화는 커녕 쥐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던 도중에 불심검문에 걸려 연행당했거나, 아니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갔을 가능성이 많았다. "알았어. 미안하게 됐어, 빗속에 헛걸음을 시켜서." 막연한 상황에서 날 밝을 때까지 잠복 감시를 계속하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경을 돌려보낸 뒤, 한시간쯤 직접 지켜보기로 사메지마는 마음을 굳혔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순경도 이상스럽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거수경례를 한 다음 패트롤카로 돌아갔다. 패트롤카가 떠나자, 사메지마는 BMW를 막다른 골목 입구가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겼다. 30분쯤 지켜보다가 쿠보 히로키 아파트로 전화를 걸어볼 생각이었다. < 8 > 후미에가 잡은 택시기사는 친절했다. 혼자 외롭게 살고 있는 친척이 급한 병으로 쓰러졌다는 후미에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주소만 가지고 니시오기쿠보 아파트를 찾아 준 것이었다. "니시오기쿠보 사카이 코포, 바로 저거로군요." 초로의 개인택시 기사는 속도를 늦추어 빗속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외치듯이 말했다. "어머,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쉽게 찾았군요." "아니, 뭘. 그 친척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겠다면...... 여기서 기다릴까요?" 기사는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후미에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 괜찮아요. 엄살이 심한 사람, 가벼운 감기 몸살일지도 몰라요. 심하면 구급차를 부르죠 뭐." "그렇습니까?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인도로 내려서서 우산을 펴드는 후미에를 남겨놓고 택시는 휭하니 달려갔다. 두 군데 전화를 걸어보았었다. 코엔지 쪽엔 자동응답기 테이프가 돌았고, 니시오기쿠보 쪽 번호엔 금방 젊은 여인이 나왔었다. 후미에는 아무 말도 않고 끊었다. 한동안 빗속에 서서 길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불켜진 집이 일층엔 한집 밖에 없었다. 거기에 그 아가씨, 호리 미카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후미에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우산을 든 왼팔에 걸고 있는 쇼핑백을 더듬었다. 안에는 털실뭉치. 뜨개바늘. 지갑 따위가 들어 있었다. 저 집으로 찾아가 볼까. 미카요 혼자라면 간단히 끝낼 수 있었다. 허나 만약 다른 사람이 함께라면...? 이런 시간에 후미에가 불쑥 찾아가면 미카요가 놀라 수상하게 여길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사내, 쿠보 히로키 일로 찾아왔다고 하면 일단 집안으로 들어가게는 할 게 틀림없었다. 미카요는 오늘밤 히로키가 <가마이시 클리닉>에 왜, 무슨 짓을 하러 갔는지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때문에 더군다나 더 살려 둘 수가 없었다. 쿠보 히로키가 돌아오지 않는 걸 수상히 여겨 경찰에라도 신고하는 날이면 아주 성가셔지게 되는 것이었다. 특히 <가마이시 클리닉>이 미카요에게 억지로 중절수술한 것을 경찰이 알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후미에는 움찔했다. 노려보고 있던 아파트 문이 갑자기 열렸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짧게 커트한 진바지 아가씨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후미에는 얼른 우산을 접은 다음, 등 뒤에 있는 자동판매기 사이로 몸을 숨겼다. 후미에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가로등 밑에 서서 우산도 받지 않은 채 가죽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자세로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이쪽이지? 그렇지?" 오메카이도 쪽을 돌아보며 낯선 아가씨가 말했다. 무릎이 너덜너덜한 진바지하며, 미카요 커플과 잘 어울릴 지저분한 분위기였다. 열려 있는 아파트 문 사이로 우산을 든 미카요가 밖으로 나왔다.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탓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빨리 가자구......."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아가씨가 재촉했다. 미카요는 주저주저하면서도 뒤를 따랐다. "집안에 죽치고 있으면 오히려 기분이 우울해져. 이걸 붙여 놓으면 알고 찾아올 거야." 그래도 미카요는 멈칫거렸다. 문을 닫고 우산을 받쳐들었다. "뭣하고 있어?" 아가씨가 되돌아 가서 미카요가 들고 있는 종이쪽지를 나꿔채더니 테이프로 도어에 붙였다. "자, 됐어. 뭘 좀 먹어야지. 배 안 고파?" 미카요 등을 밀어 함께 걸어나왔다. 오메카이도 쪽으로 걸어갔다. 우산을 든 미카요가 허둥대며 쫓아갔다. 미카요는 수에드 바지에 가죽 코트라는 끔찍스러운 차림이었다. 두 사람 모습이 멀리 사라지자, 후미에는 자동판매기 그늘에서 빠져 나와 쪽지가 붙어 있는 도어로 달리듯 다가갔다. <오메카이도 입구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 있을께.>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면 24시간 영업의 패밀리 레스토랑 앞을 방금 택시로 지나온 생각이 났다. 두 사람은 거기로 간 것이었다. 둘이서 쿠보 히로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머리 짧은 낯선 아가씨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후미에는 불안해졌다. 두 사람 모두 처치해야 하는 것일까. 일단 약은 훙분히 준비해 가지고 왔다. 우선 동정부터 살펴봐야지.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가서 미카요가 눈치 채지 않게 지켜보고 나서 결정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후미에는 두 사람이 걸어간 방향으로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후미에가 깜짝 놀란 것은 이처럼 늦은 시간, 곧 날이 밝을 무렵인데도 패밀리 레스토랑에 손님이 북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의 3분의 1쯤 자리가 차 있었다. 개중에는 물장사로 뵈는 화려한 여자 손님까지 보였다. "저기가 좋군. 저기 앉으면 안 될까?" 자리로 안내하러 다가온 웨이터에게 후미에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창가 부스가 아니라 손님이 별로 없는 카운터였다. 웨이터는 후미에를 카운터 가장자리로 안내했다. 카운터 반대쪽 부스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미카요는 이쪽으로 등을 돌린 자세였다. 이런 패밀리 레스토랑은 의자 등받이가 높았기 때문에 이쪽에서도 미카요 한쪽 팔밖에 보이지 않았다. 건너편에 앉은, 머리 짧은 아가씨는 얼굴이 똑똑히 보였지만, 그쪽에서는 후미에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후미에는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거리가 너무 떨어진 데다가 음악소리까지 겹쳐 두 사람의 얘기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후미에는 쇼핑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오렌지 주스가 나왔다. 스트로로 한번 홀짝 빨던 후미에는 너무 시어 얼굴을 찡그렸다. 조금도 맛 없는 것 -- 모두들 왜 비싼 돈을 내고 사먹는 것일까. <주문하신 이상의 음식을......> 하고 바보처럼 읊조리는 웨이터에게 후미에는 웃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달랑 오렌지 주스 한잔 뿐인데, <이상의 음식>은 무슨 얼어죽을....... 웨이터가 물러가자 쇼핑백을 들여다보았다. 털실뭉치에 뜨개바늘 4개가 꽂혀 있었다. 인간의 혈액은 13종류의 단백질성 인자와 칼슘. 인지질(燐脂質)의 작용으로 응고된다. 우선 혈관 손상으로 출혈이 시작되면 혈액 중의 혈소판이 파괴되어 트롬보 플라스틴이 나타난다. 이 트롬보 플라스틴은 혈장(血漿) 속의 칼슘을 비롤한 다른 인자와 반응하여 프로트롬빈이라는 물질을 분해한다. 프로트롬빈이 분해되면 트롬빈이라는 효소로 바뀌는데, 이것이 역시 혈장 속에 있는 피브리노겐을 피브린으로 바꾸어 준다. 피브린 분자는 한데 몰려 망을 형성해서 혈구(血球)를 감싸준다. 그 결과 혈액은 반고체화 상태의 혈병(血餠) 으로 변해 상처를 막아 더 이상 피가 흐르지 못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바로 단백질 분해효소의 활성화 연쇄반응이기도 했다. 이러한 반응이 혈관 안에서 무제한적으로 일어나지 않게 막아 주는 것이 안티트롬빈. 헤파린과 같은 응고저지 인자였다. 역시 혈장 속에 포함되어 있어 균형을 취해 주는 것이었다. 혈우병(血友病) 등의 치료제로 쓰이는 지혈제(止血劑) 로는 비타민 K가 주로 이용되고 있다. 혈액응고를 촉진시키는 비타민K는 간에서 이루어지는 프로트롬빈 합성을 원활하게 해 준다. 또 포유동물의 뇌나 폐 등의 추출액에는 트롬보플라스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 혈장에서 뽑아낸 응고인자 농축제제와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후미에의 쇼핑백에 들어 있는 혈액응고제는 앞에서 밝힌 지혈제와는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 약이었다. 심장이라는 펌프에서 쏟아낸 혈액은 사람 체내를 약 1분에 한바퀴 돌게 된다. 혈액 속에 세균을 비롯한 독소가 들어 있어도 간단히 전신으로 퍼지지 않은 것은 림프구. 백혈구가 막아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미에가 가지고 있는 혈액응고제는 <이물(異物)> 이면서도 백혈구의 공격을 받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을 원료로 해서 만든 것인지는 모르지만 특성으로 미루어 보아 혈우병 치료제와 마찬가지로 역시 인간 체액(體液) 에서 추출한 재료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원리적인 것은 그전 간호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후미에도 이 약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치료제로 개발된 것이 아님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후미에가 가지고 있는 응고제는 0.1 그램을 1cc의 생리식염수에 섞기만 하면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응고제를 생리식염수에 녹이면 회갈색 점액으로 변했다. 후미에는 그 점액을 뜨개바늘 2개에 발라 언제나 쇼핑백에 넣어 들고 다녔다. 뜨개질 대바늘은 끝이 뾰족했다. 끝에서 5밀리미터쯤 되는 곳에 후미에는 면도칼로 가느다란 홈을 몇 개씩 팠다. 바늘끝을 점액상태의 응고제에 담가두면 그 홈에 극히 소량이지만 응고제가 스며드게 마련이었다. 깊이 찌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혈관은 찢어야 했다. 그것도 될 수 있는 대로 굵은 혈관이 효과적이었다. 혈관을 찢었는지 아닌지는 약간이라도 피가 나왔느냐 아니냐로 판단할 수 있었다. 혈관이 굵으면 굵을수록 응고제도 그만큼 빨리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응고제는 정반대되는 두 가지 단계로 작용했다. 아마도 약 속에 포함된 두 가지 인자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첫단계에서는 혈액이 굳어지는 것을 막는 헤파린에 자극하여 이를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혈관에 유입된 응고제는 당장 굳어지지 않고 혈관 속을 흘러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십 초가 지나 체내 혈관으로 골고루 퍼진 뒤에는 2단계로 정반대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헤파린을 억제하여 혈장에서 프로트롬빈을 폭발적으로 방출시켜 피브린이 대량으로 조성되는 것이었다. 혈관 내에서 피가 엉기면 당연히 혈액순환도 멈추게 된다. 혈액순환을 막는 엉긴 핏덩이가 바로 혈전(血栓) 이었다. 잘 알려진 것으로는 뇌혈관을 막아 버리는 뇌혈전이 있지만, 그 이외에도 전신에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혈관내 응고증후군>도 있다. 이것은 전신의 혈관 여러 곳에 작은 혈전이 무수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냥 두면 확실하게 죽게 된다. <혈관내 응고증후군> 에는 일반적으로 그런 현상을 유발하는 원인 질환이 있게 마련이었다. 암이나 백혈병, 그 이외에 태반 조기박리(早期剝離)와 같은 산부인과 질환도 원인 질환으로 꼽히고 있다. 때문에 후미에도 <혈관내 응고증후군> 증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혈관내 응고증후군>이 원인 질환이 없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겅강체에 강제로 <혈관내응고증후군>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바로 후미에가 가지고 있는 혈액응고제였다. 미국에서 밀반입된 그 약에는 <딕트> 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혈관내응고증후군> --- Disseminated Intravascular Coagulation Syndrome 의 머리글자를 모은 DIC에 Trigger (방아쇠) 의 T를 붙여 만든 것이라고 후미에는 들었다. <딕트>는 쉽게 말해서 질병으로 위장해서 사람을 죽이는 약이었다. 개발한 제약회사도 약효능을 알고 시판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결국 미군의 특수무기 개발부에 양도하고 말았다. 특수무기로 제조된 <딕트>가 남미 마약조직을 거쳐 후미에 손에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었다. 투구게의 혈액은 극히 미량의 내독소(內毒素) 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서 응고한다. 이는 혈구에 포함되어 있는 응고단백질인 코어규로겐과 응고효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러한 민감한 반응을 이용하여 백신이나 방사성 약품의 오염 여부를 검사하는 시약으로도 사용했다. 현재는 이 반응을 응용해서 1억분의 1그램 이하의 내독소(內毒素) 까지 검출해 내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모든 지식을 후미에는 아야카와 식사를 마친 뒤 도서관으로 가서 관계서적을 뒤적여 알아낸 것이었다. 털실뭉치에 꽂아둔 뜨개바늘은 2개에 언제나 <딕트>를 묻혀두는 것은 후미에는 잊지 않았다. <딕트>는 음주나 가벼운 운동 뒤에는 더욱 효과가 빨랐다. 저 두 아가씨가 맥주라도 마셔 준다면 아주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텐데, 하고 후미에는 생각했다. 화장실 같은데서 스쳐 지나가면서, 백에서 꺼낸 뜨개바늘로 잘못한 것처럼 슬쩍 찔러 버리면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였다. <딕트>는 대개 약 1분이면 효과가 나타났다. 우선 속이 답답해지고 현기증이 나서 서 있을 수도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한번 제대로 못 지를 만큼 빠른 속도로 전신의 혈관에 피가 엉겨 혈전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 뒤에는 구급차로 병원에 싣고 가봤자 손쓸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에 죽어 있겠지만. 순서는 누가 먼저든 상관없었다. 한 사람이 화장실로 가기만 하면 바로 뒤쫓아 가서 용변을 보기 전에 뜨개바늘로 찌를 생각이었다. 아마도 변기에 걸터앉은 채로 꼼짝 못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 뒤에는 남은 사람이 기다리다 못해 화장실로 달려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미카요가 아니라, 낯선 아가씨가 먼저 화장실에 가 주면 더욱 좋았다. 그 아가씨를 처치한 다음 우연을 가장해서 미카요에게 말을 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에 간 친구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미카요가 걱정을 한다면 함께 가보자고 하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었다. 뜨개바늘에 찔렸다고 야단법석을 부릴 사람은 없을 것이고, 뒤에 부검을 한다 하더라도 일본 의사 가운데는 <딕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직 한 사람도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후미에는 <딕트>를 바른 뜨개바늘을 언제나 털실뭉치에 꽂아 가지고 다녔다. 꼭 누굴 죽이겠다는 생각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도쿄라는 도시는 치한. 날치기는 물론 온갖 몹쓸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신주쿠는 특히 더 그랬다. 반년쯤 전, 후미에는 니시신주쿠 지하도에서 하마터면 돈을 털릴 뻔한 적이 있었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10대 3인조가 후미에를 보고 길을 막아선 것이엇다. 그 중의 한녀석은 어깨로 후미에를 세차게 밀어젖혔다. -- 아줌마, 사람을 밀치면 되나? 진바지 차림의 소년이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다른 두 녀석은 능글맞게 웃으며 지켜보았다. 밤 9시밖에 안 된 시간이었는데도 지하도에 다른 행인은 보이지 않았다. -- 뭐야, 이놈! 후미에는 한껏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얘들이 날 놀리느라고 이러는 것이구나 하고만 생각했다. 설마 돈을 뜯어내려고 그러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 사람을 쳐놓고 웬 큰소리야?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봐야겠어. 크게 다친 데가 없나....... -- 무슨 뚱땅지 같은 소리야? 왜 생사람 잡고 트집을 부려? 후미에는 얼굴을 찡그리며 호통을 쳤다. 바로 그때 오른편에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돌리자 또 한 녀석이 카터 나이프 날을 밀어냈다 당겨넣었다 하고 있었다. 후미에는 공포라기 보다는 충격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폭주족이나 학생건달 등 소위 불량소년들과는 분위기부터 전혀 달랐다. 입고 있는 옷도 진바지. 트레이너. 요트 파카 같은 것이었고, 한 녀석은 스케이트 보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있엇다. 머리도 펀치퍼머로 야단스럽게 꾸미지 않은 평범한 모양이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열서너 살짜리 소년에 불과했다. -- 돈 좀 빌려 줘, 아줌마. 제발 부탁이야. 가운데 서 있던 소년이 갑자기 응석부리듯 말하면 두 손까지 모았다. -- 게임 센터서 몽땅 써 버렸어. 돌아갈 차비도 없어. 그러니까 제발....... 말투에는 후미에를 놀리는 빛이 뚜렷했다. 양쪽에 선 소년은 그냥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 무슨, 바보 같은 짓들이야, 이게. 후미에가 쏘아붙이자 소년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 뭐야? 이 할망구가. 돈 내놔! 후미에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나꿔챌 듯이 덤볐다. 바로 그때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게 회사원인 듯한 남자들이 한떼 후미에 뒤쪽에서 다가왔다. 소년들은 겁먹은 표정이 되더니 나꿔채려던 쇼핑백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나지만한 소리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욕설을 내뱉고는 뺑소니를 쳤다. -- 이 썩어뒈질 년! 후미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지만 한동안은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몸이 떨리는 것은 분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녀석들이 남자 어른들은 보기만 해도 뺑소니를 치면서, 자기들 보기에 만만한 나이 든 여자들에게는 그처럼 난폭하게 덤벼든 것이었다. 비겁한 녀석들! 약자에게 잔인하게 구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 벌레를 잡아죽이면서 깔깔대는 것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 후미에가 화가 난 것은, 방금 자기가 겪은 일이 소년들에게는 기분풀이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공갈이 범죄임을 그 녀석들도 알고 있었다. 공갈은 단순히 금품만을 뺏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정신까지 넝마처럼 엉망으로 만들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무력감을 두고두고 가슴앓이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그처럼 잔혹한 짓인줄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자기보다 약한 자는 못살게 굴면서도, 강한 자 앞에서는 쩔쩔매는 비굴함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소년들의 부모는 도대체 자기 자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후미에는 소년들이 아니라 그들 부모에 대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증오심 때문에 눈앞이 아찔해지기까지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후미에는 언제나 뜨개바늘에 <딕트>를 묻혀 털실뭉치에 꽂고 다녔다. 만약 또 그런 소년들이 나타나면 이번에야말로 맛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창피스러운 짓이며, 또 그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괴로워하면서 깨달아야 했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자식 교육에 무책임했던 죄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후미에 쪽을 보고 앉아 있던 미카요의 동행 아가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면서 걸어나왔다. 후미에는 그녀 얼굴을 응시했다. 고집 센 얼굴이었다. 아무렇게나 깎은 머리가 쭈뼛쭈뼛 자란 것 같은, 후미에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이었다. 화장기는 거의 없었다. 입술에만 엷게 루즈를 칠했을 뿐이었다. 스스로가 여자란 것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사람같이 보였다. 그렇다고 결코 못난 얼굴은 아니었다. 머리를 길러 예쁘게 빗고 단정하게 차려입으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인임에 분명했다. 그 아가씨는 후미에 옆을 지나 한쪽 구석에 있는 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어디로 전화를 거는 것일까. 친구를 더 불러낼 셈인가. 아가씨는 수화기를 목과 어깨로 낀 다음 동전을 집어넣고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기는 했으나 얘기는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다시 버튼을 눌렀다. 도대체 무슨 짓이람. 마침내 아가씨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후미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전화 부스에서 나온 아가씨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후미에가 앉아 있는 카운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화장실로 간 것이었다. 후미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을 앞질러 몸이 먼저 움직여 준 것이었다. 아가씨보다 두세 걸음 뒤쳐져서 화장실로 따라갔다. 아가씨가 스윙식 도어를 미는 게 보였다. 후미에는 오른손을 쇼핑백으로 가져갔다. 털실뭉치에 꽂아둔 뜨개바늘 4개 중에 2개는 밑부분이 동그랐고, 나머지 2개는 네모진 것이었다. 후미에는 오른손으로 네모진 뜨개바늘을 잡았다. 어깨로 스윙도어를 밀었다. 가죽 재킷 뒷모습이 2미터쯤 앞쪽에 있었다. 화장실엔 다른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후미에는 아가씨 피부가 드러난 곳 -- 목줄기와 손목을 눈길로 핥았다. 손목 안쪽을 찔러 버릴까.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비명이었다. 아가씨가 빙그르르 돌아섰다. 후미에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의아스러워 하는 얼굴이었다. 쇼핑백 속에서 뜨개바늘을 잡아쥐던 후미에의 오른손이 딱 멈추어졌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후미에 바로 옆을 지나갔다. 아가씨 눈길도 아래로 쏠렸다. "기다려!" 이번에는 분명한 말소리가 후미에 등 뒤에서 들려왔다. 또각또각하는 하이힐 소리가 화장실 가득히 울려퍼졌다. 아가씨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래졌다. 자기 앞으로 뒤뚱뒤뚱 다려오는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오버올 차림의 애기에게 눈길을 쏟고 있었다. 사내아이였다. 화장실로 뒤뚱뒤뚱 달려 들어온 아이는 아가씨 앞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들어 빤히 올려다보았다. -- 이런 시간에 하필이면....... 후미에는 마음이 흔들렸다. 동시에 아가씨도 자기와 같은 생각임을 알아차렸다. 사내아이를 본 순간, 아가씨 눈빛에 가벼운 놀라움이 서렸다. 이어서 자기를 빤히 올려다보는 아이를 내려다보는 눈길은 따뜻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풍기고 있던 억센 분위기를 순간적으로 녹여 버린 것 같은 따뜻함이었다. 놀라움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아이를 아이로 어르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 같은 기묘한 따사로움이 깃든 표정이었다. 상냥스러워진 눈길이 얼굴 전체 분위기를 순간적으로 부드럽게 만들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티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런 표정 변화를 바라보던 후미에의 마음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아가씨는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후미에 가슴 가득히 퍼졌다. 그러나 말없이 눈길을 쳐드는 아가씨 얼굴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험악스럽게 노기가 서린 것 같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후미에를 쏘아보았다. 차가움에서 상냥함으로, 다시 차가움으로 변해 버린 아가씨 표정을 보는 순간, 후미에는 저도 모르게 뜨개바늘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말았다. 자신의 속마음 -- 살기를 눈치 챈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가씨 눈길이 자기를 노려보는 것이 아님을 금방 깨달았다. 불쑥 후미에 앞을 가로막은 새빨간 옷차림의 여인을 아가씨는 이글이글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렬한 향수가 후미에 코를 찔렀다. 밤장사 여인임이 분명했다. 새빨간, 허리를 잘록 조인 타이트 스커트 수트에 15센티미터는 됨직한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두 번 세 번 덧칠을 한 것 같은 짙은 화장이었다. 여인은 아직도 아가씨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꺾어 주저앉았다. "왜 말을 안 들어?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야잖아?" 신경질적인 부르짖음이었다. 엉덩이를 하이힐 뒤축으로 받치려고 애를 썼지만 좀체로 균형을 잡지 못했다. 꽤 취한 것 같았다. "잘못했습니다, 해야지!" 여인은 계속 아이를 야단쳤다. 그제서야 아이도 여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잘못했습니다, 해!" 여인은 다시 되풀이했다. 아가씨나 후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한자리에 가만 앉아 있지 못하니? 망할 놈 같으니라구!" 여자가 쉰 목소리로 악을 썼다. 후미에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버릇이 저 모양인가! 여자는 후미에가 이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들어올 때 본 화려한 여자 패거리 중의 한사람이었다. 아마도 아이는 탁아소에 맡기고 밤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시간이었다. 일이 끝나,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면 곧장 집으로 가서 재워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쓸데없는 수다를 떨려고 지겨워하는 아이를 야단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 아닌가. 그녀들의 추잡스런 수다와 깔깔거리는 소리를 후미에는 카운터에서 줄곧 듣고 있었다. 동료의 험담, 손님들 점수매기는 얘기 뿐이었다. 여인을 노려보던 아가씨가 눈길을 돌렸다. 아가씨가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후미에는 쉽게 알아차렸다. 여인의 옆얼굴을 쏘아본 아가씨 얼굴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후미에는 금방이라도 아가씨가 여인에게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쉬 하려구?" 여인은 아이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비틀거릴 정도로 난폭하게 오버올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휙 몸을 돌렸다. 후미에만 눈치 챈 것이지만 아가씨는 심호흡을 하면서 토일렛 안으로 들어갔다. 쾅하는 문 닫는 소리에 이어 찰칵하는 빗장 거는 소리가 울렸다. 후미에는 살짝 막혔던 숨을 내쉬었다. 술취한 엄마와 세살박이 아이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분명한 것은 아가씨를 처치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후미에도 비어있는 토일렛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잠갔다. 물론 미카요를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밤은 어려울지도 몰랐다. 지금 칸막이 저쪽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 아가씨와 함께 있는 한,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야무지지 못하고 칠칠치 못한 아가씨라고만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지도 몰랐지만, 오늘밤만은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후미에는 뚜껑 덮인 변기를 걸터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마음이 약해진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미카요만이라도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자칫 했다간 자기뿐만이 아니라 아야카에게까지 돌이킬 수 없는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이었다. "......빨리, 빨리. 쉬 한댔잖아!" 바로 건너편 토일렛에서 술취한 엄마의 금속성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그 여자 목을 뜨개바늘로 쿡 찔러 버리고 싶었다. 남의 <사업>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후미에의 마음까지 산란하게 만든 여자였다. 물 흘리는 소리와 함께 아가씨가 토일렛에서 나갔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나가기로 하자. 어쩌면 미카요가 아가씨와 교대로 화장실로 올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때까지는 이 모자(母子)가 없어져 줬으면 좋으련만은. 후미에는 생각에 잠겨들었다. 포켓벨이 울렸을 때, 사메지마도 슬슬 <가마이시 클리닉> 감시를 끝내려던 참이었다. 포켓벨을 보았다. 쇼가 걸어온 것이었다. 연락 전화번호가 액정(液晶) 으로 나타났다. 낯선 번호다. 불안에 젖어 숨도 제대로 못 쉬던 미카요를 쇼가 기분전환 삼아 데리고 나간 게 분명했다. 뒤로 젖혔던 시트를 바로 세운 뒤 시동을 걸었다. 와이퍼로 프론트글라스 물방울을 닦아냈다. <가마이시 클리닉>은 부도심(副都心) 빌딩 골짜기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내일 -- 이젠 오늘이지만 -- 낮에 다시 한 번 찾아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주변에 수상한 낌새를 느낀 게 없느냐고 물어보면서 여러 가지를 훑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었다. 라이트 스위치를 넣어 대시보드 시계를 보았다. 4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다. 결국, 쿠보 히로키 아파트로 전화도 안 건 채 한시간 가까이 잠복한 셈이었다. 큰길로 나가 공중전화를 찾아 포켓벨로 연락해 온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볼 생각이었다. 어쩌면 쿠보 히로키도 돌아와 세 사람이 함께 있을지도 몰랐다. 오메카이도에서 공중전화를 찾아낸 사메지마는 BMW를 세웠다. 번호는 패밀리 레스토랑 전화였다. 점원에게 쇼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포플린, 돌아왔나?" "아니. 거기 없었어?" 쇼가 의아스럽다는 듯 되물어 왔다. "둘이 함껜가, 아직?" 사메지마가 물었다. "응." 그렇다면 역시 도중에 불심검문에 걸렸거나, 술을 이기지 못해 어딘가에 쓰러져 있거나 둘 중의 하나로 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 안 갔었어?" 쇼가 물었다. "응." "미카요, 한숨 놓겠네. 얼른 알려야지." 쇼는 전화를 끊으려 했다. "잠깐!" 사메지마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이 뭉게뭉게 치솟고 있음을 느꼈다. 하마쿠라는 담판을 하겠다면서 <가마이시 클리닉> 으로 간 직후 기묘한 죽음을 맞았다. 바로 그 <가마이시 클리닉>에 불을 지르겠다고 나간 쿠보 히로키의 행방이 지금 묘연해 있었다. 만약 어딘가 파출소로 연행되어 갔다면 소지품 검사에서 방화 미수범으로 입건 대상이 되어 있어야 마땅했다. 술에 엉망으로 취해 있다면 일단 유치한 다음 날이 밝은 뒤 조사를 받은 게 분명했다. 그럴 경우엔 파출소에서 관할서로 넘기는 게 관례였다. 니시오기쿠보에서 <가마이시 클리닉> 사이 지역의 관할서에 문의해 보면 그런 용의자가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물론 해당자가 없다고 해서 쿠보 히로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판단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었다. 술에 취해 어딘가에 쓰러져 잠이 들었을 수도 있고, 친구집에 들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패트롤카 출동을 요청한 것은 자기 소속 경찰서였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다른 서에까지 여기저기 문의를 하게 되면, 만일 쿠보 히로키가 미수인 채 돌아와도 눈감아 줄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메지마는 치솟아오르는 불안감을 꿀꺽 삼켰다. "왜? 어쩌려구?" 쇼가 물었다. "거기 붐비는 곳이지?" "응, 취한 사람이 많아." ;지금 곧 갈께. 될 수 있는 대로 미카요 옆에 붙어 있도록 해." "화장실 갈 때도?" "그래. 혼자 내버려 두지 말아!" 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사메지마가 헛소릴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일년쯤 전에 쇼를 쏘아죽이려던 녀석을 위기일발의 순간에 사메지마가 체포한 적이 있었다. "알았어. 빨리 오기나 해!" 사메지마는 전화를 끊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 도착한 사메지마는 선걸음에 쇼와 미카요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레스토랑 안이 그렇게 붐비지는 않았다. 절반 가까운 손님들이 쇼의 말처럼 일이 끝난 물장사들 아니면, 술에 취한 채 첫 전동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혼자 와서 문고판을 일고 있는 중년 여인과, 뭔가 끄적거리고 있는 글장이풍의 사내도 한사람 눈에 띄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주차장에 세워둔 BMW에 올라타긴 했으나 사메지마는 금방 출발하려 하지 않았다. 뒤를 쫓아나오는 미심쩍은 녀석이 있나 없나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없었다. 세 사람은 니시오기쿠보 사카이 코포로 갔다. 쿠보 히로키가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미카요는 어느 정도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히로키가 갔을 만한 곳은 전혀 짐작도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지?" 5시가 가까워지자 쇼가 물었다. 사메지마가 혼자 줄곧 생각해 온 문제였다. 하마쿠라의 죽음을 타살로 단정할 만한 근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만약 타살이라고 본다면 미카요 신변도 위험해질 가능성이 많았다. "<인디고>를 알고 잇지?" 사메지마가 묻자 미카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거기 가 있는 게 좋겠어." "포플린은?" 미카요는 고개를 반짝 쳐들면서 되물었다. "전화번호와 함께, 돌아오면 연락해 달라는 메모를 남기면 어떨까?" "하지만......." "사전에 의논 한마디 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고 나면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가씨 아파트로는 돌아가지 않는 게 좋겠어." 쇼가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그처럼 위험한 상황이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함께 있을께." 쇼가 결심한 듯 말했다. "일은 어떡하구?" "오후부터니까 괜찮아. 점심 때까지 여기 있다가 미카요와 함께 나가지 뭐. 그 사이 포플린이 돌아오면 자기한테 전화할께." 사메지마는 미카요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미카요는 매달리는 듯한 표정으로 쇼의 옆얼굴에 눈길을 박고 있었다. "알았어. 단, 낯선 사람에게는 절대로 문을 열어 줘서는 안 돼! 아무도 없는 척하고 있어. 만약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 하거든 112에 신고하구." 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청껏 고함을 지르지 뭐. 그렇지 않아도 최근 발성 연습을 못해 목이 근질근질한 참인데......." 짓궂게 웃어 보였다. "난 서에 가 있겠어. 숙직실에서 잠깐 눈을 붙인 다음, 다시 <가마이시 클리닉>을 한번 훑어볼 생각이야." "응." "포플린이 안 돌아오면 난 어떡해?" 미카요가 불쑥 내뱉듯이 말했다. "돌아와!" 쇼가 달래듯이 말했다. "너한테 반한 사람, 가긴 어딜 가!" 그리고는 사메지마에게로 눈을 돌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사내란, 제가 반한 여자 있는 곳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 사메지마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뭉게뭉게 일고 있는 불안감을 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쇼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슴 가득히 치솟아오르고 있음을 느꼇다. < 9 > 신주쿠 서 휴게실에서 3시간쯤 눈을 붙인 사메지마는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감식계를 찾았다. 감식계에 출근한 사람은 야부 뿐이었다. 야부는 대머리가 훌렁 벗겨진, 얼굴이 넓적하고 뚱뚱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땀을 뻘뻘 흘렸다. 서내에 있을 때는 구김살투성이의 후줄근한 셔츠에, 언제 세탁한지도 모를 꾀죄죄한 흰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지저분하고 무능하게 보였으나 실은 탄도검사에 관한 한, 경찰청 관내에서 다를 사람이 없는 감식관이었다. 업무 이외엔 무슨 일이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아 서내에서도 별난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 탄도검사 뿐만이 아니라, 이름 때문에 (<야부>는 돌팔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 역주) 의사 되기를 포기했다는 본인의 말처럼 법의학 지식도 풍부했다. "일찍 나왔군." 최근 들어 부쩍 애용하고 있는 해골 모양 컵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야부는 사메지마가 들어서자 약간 놀랐다는 얼굴로 말했다. "커피 한잔 얻어마실까 해서......." 야부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사메지마는 손님용으로 비치해 둔 수류탄 모양의 컵에 커피를 따랐다. 커피 메이커는 야부가 사다놓은 사물(私物) 이었다. 화염병을 뜻하는 동그라미 안에 X자가 쓰여진 용기를 들어 인공감미료를 조금 커피에 탔다. "밤을 샜나?" 야부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가위를 만들어 보이며 물었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담배를 꺼내어 야부에게로 내밀었다. 한개비 뽑아 불을 붙여 문 야부는 천연스럽게 담뱃갑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새벽까지......." "뭔가 큼직한 걸 물었나 보군." "그렇지도 않아." 사메지마는 고개를 내저으며 커피를 한모금 마신 다음 말을 이었다. "<가마이시 클리닉> 이라고, 혹시 아나?" "나카노와구 경계에 있는 낙태 전문 말야?" 야부는 빈정거리듯 내뱉었다. 사메지마는 야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곳인가, 거기가?" "불량 소녀들과 물장사들을 단골로 잡고 있나 봐. 보건소에서도 한때 주목을 하는 것 같았으나 이것저것 위의 눈치가 이상해지는 바람에 슬며시 물러앉고 말았다더군." 사메지마가 담배를 내놓으라고 하자, 야부는 한개비만 뽑아 주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하마쿠라 건, 뭔가 정보가 들어왔나?" 사메지마가 물었다. 야부는 감찰의무원(監察醫務院) 의사 중에도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행정부검한 녀석 말이지? 화학검사에서 꽤 골치를 앓고 있나봐. 살인인가?" 야부는 사메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메지마가 뭔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짐작한 것 같았다. 모모이와 야부에게만은 속을 털어놓고 지내왔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것 같아. 기묘한 독약을 사용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가마이시 클리닉>과 관계가 있나?" "응." "감찰의무원 화검(化檢) 기사(技師)는 내게 빚이 있어. 마작판에서 흠뻑 뒤집어 씌웠거든." 야부가 으스대듯 말했다. "얼마쯤인데?" "말하면 갚아주려구?" "담뱃값으로 때우지." 사메지마는 야부가 담배를 넣어둔 가운 포켓을 가리켰다. 야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이걸로 때우자는 게야?" "뭣하면 한갑 더 줄 수도 있어." "할 수 없군. 한번 알아보지." "본청 1과 움직임도 함께." "담뱃값 한번 되게 비싸군." 야부는 투덜거렸다. 점심시간이 조금 못 돼서 쇼가 전화를 걸어왔다. 쿠보 히로키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지금부터 미카요를 데리고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미카요가 <인디고>에 가 있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겁에 질려 있어." 쇼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뭔가 소식이 있으면, <인디고>로 연락한다고 전해 줘." "응." 쇼는 전화를 끊었다. 사메지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마이시 클리닉>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모모이가 불러세웠다. "그 건, 뭔가 또 벌어졌나?" "어젯밤 하마쿠라를 트러블에 말려들게 한 아가씨의 애인이 <가마이시 클리닉>을 불싸지른다며 나간 이후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모모이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패트롤카 출동을 요청했던 건 그 때문인가?" "네, 4시까지 잠복감시했지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제, 비가 많이 왔지?" 사메지마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가마이시 클리닉> 으로 가는 길인가?" "그럴 생각입니다. 어젯밤 일을 핑계 삼아 주변을 좀 캐볼까 해서요." 모모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1과 동태는 알고 있나?" "아뇨." "조심해!" 만약 본청 1과가 살인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개시했다면, 그런 줄도 모르고 사메지마가 뛰어다니는 것은 남의 밥상을 가로채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본청에서 압력이 내려오게 마련이었다. 하마쿠라의 죽음이 살인으로 판정나더라도 수사본부는 시체 발견지 관할인 타카나와 서에 설치되는 것이었다. 신주쿠 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건이었다. "알겠습니다." "아마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있을 거야. 수사본부를 설치했다면 이쪽으로도 통지가 왔을 게야."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주억거리던 모모이는 책상 위 서류로 눈길을 내리깔았다. <가마이시 클리닉>에 도착한 것은 12시 10분이었다. 오전 진료시간이 막 끝났을 무렵이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평소처럼 환자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입구 돌계단 앞에 걸음을 멈추고 짙은 색깔의 유리문을 쳐다보았다. 유리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회색 양복의 남자가 중년 간호사의 배웅을 받으며 나왔다. 사메지마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타키자와였다. "여러 가지로 폐가 많았습니다." 돌계단 위에서 간호사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던 타키자와도 사메지마를 알아보고 주춤거렸다. "웬일이야?"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사메지마는 대답 대신 고개만 약간 끄덕여 보였다. 타키자와를 배웅하던 간호사가 의아스러운 눈길로 사메지마를 내려다 보았다. 타키자와는 슬쩍 눈길을 돌리더니 다시 간호사 쪽을 향했다. "그럼......." 목례를 한 다음 돌계단을 내려왔다. 사메지마는 타키자와를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아 보조를 맞춰 앞장 서서 걸어갔다. 열 걸음쯤 가서 멈추어 서면서 고개를 돌렸다. <가마이시 클리닉> 유리문은 닫혀 있었다. 타키자와는 말없이 사메지마를 쏘아보았다. <가마이시 클리닉>을 찾아온 목적을 사메지마가 눈치챌까 봐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한창 스피드를 내 달리는 발목을 잡히지 않으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형사와 똑같은 버릇을 가지고 있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사메지마는 먼저 속을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지난번 당신과 호텔서 헤어진 뒤 어떤 사람을 만났어. 포주 노릇을 하고는 있었지만 바탕은 착실한 녀석이었다. 어떤 아가씨 문제로 이 병원과 트러블이 생겼다고 했어. 이튿날 죽은 채로 발견됐어. 자연사인지 살해된 건지 아직 결론을 못 내리고 있어." 타키자와는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이 설치고 다니나? 살인은 1과 담당으로 들었는데......." "죽은 녀석은 내 관할에서 장사를 했어. 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거야. 살인인지 아닌지 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어." 타키자와는 한동안 사메지마를 노려보다가 어깨 힘을 빼면서 고층 빌딩이 빽빽한 곳으로 눈길을 던졌다. "차 한잔, 어때?" "좋지."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 2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다방이 보였다. 마주 앉아 커피를 주문한 타키자와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두 다리를 쭉 뻗고 한쪽 팔을 옆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빚이 있지, 당신한테는?" "빚으로 생각하는 건 당신 마음이야." "거길 가서 뭘 어떡할 생각이야?" 타키자와는 담배를 입에 물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사메지마를 건너다보면서 물었다. "죽은 녀석이 데리고 있던 아가씨가 거기서 중절 수술을 받았다는 거야. 아니, 수술을 당했다는 게 옳을지도 몰라. 아가씨는 애기를 낳을 생각이었나 봐. 담판하러 갔던 사내는 죽었고, 또 어젯밤 술이 취해 그 병원으로 달려간 애기 아버지였던 젊은이는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어. 실제로 병원까지 갔었는지를 확인해 봐야겠어." 타키자와는 담배연기를 훅 내뿜었다. "취한 기분에 다른 여자를 찾아간 건지도 모르잖아?" "그럴지도 몰라." 타키자와는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다시 물었다. "뭣하는 녀석이야, 그 젊은이는?" "록밴드 멤버. 아마추어지만." "밴드맨인가?" 타키자와는 내뱉듯이 말했다. "정말 아빠 노릇을 할 생각이었을까?"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일 이유도 없어." 타키자와는 사메지마를 곁눈질했다. "기껏해야 콜걸과 기둥서방 아냐. 애기 한둘 낳는다고 정리가 될 것 같은가?" "발을 씻을 예정이었어." "지나치게 편을 드는군. 관할 형사라면 그래야 하는 건가?" "관할 콜걸이라서 편을 들어 주고 있는 게 아냐!" "그럼 밴드맨이라서? 나도 들었어. 가수 아가씨와 깊은 관계란걸." 사메지마는 화가 치솟는 걸 억지로 눌러 참았다. 타키자와가 일부러 사메지마를 화나게 하려는 게 분명했다. 화를 울컥 내면서 <그만둬!> 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미모리 말인데...... 슬슬 두들겨 볼까 생각중이야." 타키자와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용의로?" "뻔하잖아? 장물거래야. 아키하바라와의 관계도 차근차근 캐 볼 생각이야." 타키자와는 거세게 콧김을 뿜었다. "날 협박하는 건가?" "천만에. 그쪽에서 날 약올린다면 나도 가만 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 타키자와는 난폭하게 담배를 비벼껐다. "나 원 참......." 한마디 내뱉었다. "......간단찮은 사람들이로군. 경찰관들 말야." 사메지마는 말없이 타키자와를 응시했다. 미모리를 잡아들여 아키하바라 사무자동화 기기 도매상과의 관계를 족친다면, 미모리를 통해 국세청 사찰의 내사 정보가 새어나갈 것은 뻔한 일이었다. 물론 사메지마가 넌지시 귀띔을 해 준다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타키자와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병원도 아키하바라 도매상에서 컴퓨터를 사들였어. 그래서 확인하러 갔던 거야." "그럼, 경영 내용도 얼마간은 살펴봤겠군." 국세청 사찰의 타키자와가 <가마이시 클리닉>을 찾아갔다 해도, 그로 인해 아키하바라 도매상을 내사하고 있는 정보가 샐 염려는 없었다. 타키자와가 노리고 있는 게 도매상이란 걸 <가마이시 클리닉>이 눈치 채지 못하게 적당히 얼버무렸을 터이고, 만약 엉뚱한 소리를 떠벌리고 다닌다면 진짜 세무사찰을 하겠다고 단단하 못을 박았을 게 틀림없었다. "훑어봤어." "얘기해 봐." 타키자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수첩을 꺼냈다. "병원의 경영 모체는 따로 있어. 원장은 고용 의사야. 토지. 건물은 물론 설비까지 시마오카 기획이라는 회사 소유로 되어 있어. 시마오카 기획 대표자는 시마오카 후미에.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몰라." "시마오카 기획에 대해서는?" "내가 노리는 건 따로 있어. 거기까진 훑어보지 않았어." "경영상태는 건전해?" "지나칠 만큼. 저 정도의 다른 개인병원이라면 납세액이 3분의 2정도밖엔 안 될 게야. 온갖 핑계를 다 갖다붙여 경비로 떨어 버리거든."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는 뜻인가?" "표창감이야." "수상하다는 생각은 없구?" "이봐, 우리는 탈세액에 모든 걸 걸고 있어. 낼 걸 분명히 내기만 하면 몇 사람 죽고 다치는 건 우리가 알 바 아니야." "도매상과의 관계는 어때?" "아는 의사가 소개해 주더라는 게야. 중고이긴 하지만 물건도 괜찮고, 값도 싼 컴퓨터를 취급하고 있다면서 말야." "경비로 떨 생각이라면 중고보다는 비싼 신품을 설치하는 게 더 좋을 텐데도?" "<가마이시 클리닉>은 분명히 중고라고 밝혔어. 세무신고 가격도 신품이 아니었구." "정직한 사람들이로군." "그런 사람도 더러는 있어. 고용 원장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메지마는 타키자와 쪽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시마오카 기획에 대해서도 좀 알아봐!" "뭘?" "뻔하잖아? 누가 그 병원에 뒷돈을 대고 있는지 그걸 알고 싶어."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 병원에 문제가 있다고 보건소에서 지적이라도 했나? 아니면 의사가 진료 미스를 숨기느라고 시끄럽게 구는 환자를 없애 버리기라도 했나?" "몰라!" 사메지마는 솔직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얘기가 안 되잖아?" "그래서 못해 주겠다는 건가?" 사메지마는 타키자와를 노려보았다. "할께. 해 줄께. 하지만 이걸로 빚은 모두 갚는 셈이야. 미모리에겐 손대지 말아. 알았어?" 타키자와는 체념한 듯이 말하면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정말 의심이 많은 녀석이군. 우리도 의구심 많기로는 남에게 뒤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상대에 따라서지." 사메지마는 쌀쌀맞게 내뱉었다. 국세청 사람이 나갈 적에 입구에서 마주친 남자를 본 순간 후미에는 깜짝 놀랐다. 새벽녘, 니시오기쿠보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미카요를 데리러 왔던 남자였다. 훌쭉 큰 키며 마른 체격, 무엇보다도 길게 기른 뒷머리 때문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차림새도 그대로였다. 그 사내도 국세청 사람인가. 그럴 까닭은 없었다. 타키자와라고 한 국세청 사람은 보기에도 그럴 듯하게 수트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지만, 그 사내는 가죽 점퍼 차림이었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임은 분명했지만 동료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체가 뭐람. 후미에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느닷없이 국세청 사람이 나타나 개인병원 실상을 무작위로 조사하고 있으니까 협조해 달라면서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리고 그 국세청 사람은 오늘 새벽 미카요와 함께 있던 사내와도 아는 사람이었다. <가마이시 클리닉>이 세무서의 주목을 받을 염려는 없다고 아야카는 말했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있었고, 지하 시설은 아예 설비투자로 신고하지도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지하 시설이 꼬투리가 되어 이 병원의 설립 목적을 의심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인공수정도 하지 않는 소규모 산부인과에 그런 대규모 냉동보존 시설이 있다면 누가 보든 부자연스럽기 때문이었다. 타키자와가 다녀간 뒤, 가마이시는 불안감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후미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가마이시에게 속을 들여다뵈고 싶지는 않았다. "보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 다른 간호사에게는 들리지 않게 가마이시는 소리를 죽여 후미에에게 말했다. "우릴 수상하게 여겨 조사하러 온 건 아니었잖아? 그 사람 하던 말 못 들었어? 무작위 발췌 검사 같은 것이라고 했잖아? 자기도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뒤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야." 타키자와의 말을 후미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대로 믿었었다. 타키자와가 돌계단 아래서 그 사내와 만나기 전까지는. "하지만 지하실은......." "그건 장부에 올라 있지 않으니까 세무서에서 알 턱이 없어." 말을 마친 후미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만약 무작위 조사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여기를 찾아온 것일까. 미카요의 애인인 그 젊은이를 죽인 게 잘못이었을까. 경찰은 그 이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새벽녘 패트롤카가 달려왔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후미에는 점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지하실에 젊은이 시체가 있다는 건 아직 가마이시에겐 얘기하지 않았다. 가마이시는 후미에가 아야카를 위해 해 온 일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안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젊은이 시체를 처리하자면 가마이시의 도움이 필요했다. 서둘 필요는 없었지만 미리 얘기해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했다. 지하 냉동보존실에 성인 남자 시체가 들어 있는 걸 알면,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는 가마이시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가마이시가 냉정을 되찾은 뒤에 얘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오늘 새벽 미카요를 죽이지 못한 건 유감스런 일이지만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은 게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사장님께 연락할 테니까 그동안 식사나 하고 와요." 그래도 불안에 떨고 있는 가마이시를 보자 후미에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왔다. 변태인 주제에 겁은 많아가지고....... 지금까지 해 온 짓을 생각하면 내일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할말이 없을텐데. "빨리 나가요!" 진료실에서 아직도 어정대고 있는 가마이시를 후미에는 앙칼지게 몰아세웠다. 다른 간호사들은 이미 식사하러 나가고 없었다. 풀이 죽은 가마이시는 가운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후미에는 점심 먹으러 나가지 않았다. 대개 아침에 먹다 남은 밥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이 근처 식당은 점심 무렵은 시장바닥보다 더 붐비는 데다가 값도 비쌌다. 그 정도라면 주먹밥으로 때우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주먹밥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갖고 왔다 하더라도 식욕이 없었다. 다만 혼자 여러 가지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가마이시가 나가자 후미에는 원장 의자에 몸을 묻었다. 미카요와 낯선 아가씨가 그 남자와 함께 레스토랑에서 나갔을 때, 후미에는 뒤밟는 것을 단념했다. 그 사내는 뭔가 방심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술에 취해 불을 지르러 왔던 미카요 애인과는 전혀 달랐었다. 나이도 많았고, 레스토랑 안을 휘둘러 보던 눈길도 사납고 날카로웠다. 후미에는 가지고 다니던 문고판을 읽는 척하면서 눈길이 마주치는 걸 피해 버렸다. 후미에는 일어서서 뜨거운 차를 따라 한모금 마셨다. 아야카에게 연락하기 전에 우선 자기 생각부터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 젊은이를 죽인 게 아야카에게 누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기가 해 온 일과 수법에 대해 아야카가 뭐라고 한 적도 없었다. 아야카가 완전히 자기를 신뢰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야카 인생의 그늘진 부분을 몽땅 대신 짊어져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밝고 화려한 세계에 살 수만 있다면 자기는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해온 일은 지옥에 떨어지기 딱 알맞은 짓이었다. 그러나 유일한 위안은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모든 것은 그 아이를 위한 것. 처음 만났을 때 본, 모든 걸 체념한 불행한 소녀 -- 아야카의 그 애처로운 눈빛은 죽어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아야카를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었다. 죽는 것조차 겁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죽으라고 한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딕트>를 바른 뜨개바늘을 망설임 없이 목에 꽂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죽는다고 해서 잃어버릴 것도, 후회할 것도 하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후미에의 불안감은 차츰씩 사그라들었다. 자기 한 몸 없어짐으로 해서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된다면 겁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기는 언제 죽어도 두렵지 않는 사람이라고 후미에는 생각했다. 대기실 쪽에서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현관 도어를 열면 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후미에는 혀를 차며 일어났다. 가마이시가 나간 뒤 유리문 잠그는 것을 잊어 버린 것이었다. 오후 진료는 2시부터였다. 때문에 그때까지는 언제나 문을 걸어두었다. 가운 위에 걸쳐입은 가디건 단추를 잠그면서 복도로 나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딱 멈추어졌다. 그 사내가 서 있었다. 큰키에 날카로운 눈빛, 머리가 긴 사내. 후미에는 다가가기가 두려워진 것일까, 갑자기 다리가 천근처럼 느껴졌다. 사내는 똑바로 후미에를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후미에가 물었다. 남자는 목례를 하면서 점퍼 포켓에 손을 넣었다. "점심 시간에 미안합니다. 신주쿠 서 방범과의 사메지맙니다. 원장님 계신가요?" 점포 포켓에서 경찰 수첩을 내보였다. 경찰관! 후미에의 발걸음은 남자와 2미터 거리에서 완전히 멈춰졌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날카로운 눈길은 여전히 후미에 얼굴에 박은 채였다. "원장님은 방금 외출하셨어요...... 무슨 일이시죠?" "이곳 환자 일로 두어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환자에 대해서는 일절 말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만......." 후미에는 용기를 내어 한발 다가선 뒤, 슬리퍼를 꺼내어 남자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이 형사는 날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해. "우선 들어오시죠." 재빨리 시계를 보았다. 1시 20분 전. 한시간 안에는 가마이시가 돌아올 염려는 없었다. 사메지마라고 이름을 밝힌 형사는 슬리퍼를 신으면서 복도와 대기실로 눈길을 돌렸다. "지금 여기엔?" "저 혼자예요." "여기서 근무하세요?" "네. 간호사예요." "이름은요?" "시마오카라고 합니다." "시마오카씨로군요. 전 사메지마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이름을 밝혔다." "이리로 앉으세요." 후미에는 대기실 소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사메지마는 엉덩이를 걸쳤다. "원장님은 두어 시간 있어야 돌아오실 텐데......." "시마오카씨는 줄곧 여기서 근무해 왔나요?" "네." "베테랑이시군요." 말하면서 사메지마는 싱긋 웃음을 흘렸다. 웃는 얼굴이 제법 멋있다고 후미에는 생각했다. "혼자 몸이니까요. 달리 할일도 없구......." 사메지마는 커다랗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는 몇 사람쯤 일하고 있나요?" "저를 포함해서 간호사가 셋, 그리고 원장님...... 모두 네 사람이에요." "그럼 다른 두 간호사는?" "한 사람은 오늘 쉬는 날이에요. 또 한 사람은 점심식사하러 나갔구요. 모두 갓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후미에는 생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는 얼굴에는 자신이 있었다. 언제나 환자들을 북돋워 주는 <상냥한 간호사 이미지>가 깃들여 있음을 후미에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네 사람 만이라니, 뜻밖이군요. 손이 달리진 않나요?" "원장님이 앓아눕거나 형편이 나쁠 땐 대학병원 젊은 닥터를 임시로 모셔오기도 하지만...... 산부인과는 응급환자가 별로 없으니까 그런대로......." 사메지마도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님도 베테랑 닥터시겠죠?" "네. 오랫동안 대학병원 산부인과에 계셨던 분이세요." "호리 미카요라는 환자, 혹시 기억하고 있나요? 머리에 물을 들인, 좀 야단스런 타입의 아가씬데." 후미에는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사님두...... 여긴 신주쿠예요. 단정스럽고 수수한 환자는 별로 없는 곳이에요." "그렇다면 기억이 없다는 뜻이로군요." "네. 어떤 환자인지는 카르테를 보면 금방 알 수는 있어요. 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환자에 대해선 얘기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규칙이에요." "참, 그랬었죠." 사메지마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다른 걸 한가지 물어보죠. 어젯밤엔 몇 시까지 계셨죠?" "환자가 퇴원한 직후, 뒷정리를 하고 퇴근했어요. 아마 1시쯤이었을 거예요. 하루쯤 더 입원해 있을 줄 알았는데......." "원장님은?" "자정께 퇴근하셨어요." "환자가 있었기 때문에?" "네. 그렇지 않았다면 오후 6시엔 퇴근하셨을 거예요."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누군가 원장님을 찾아온 사람은 없었나요?" "원장님을 말입니까?" "네. 이 병원이란 뜻입니다만......." "아뇨. 없었습니다." 후미에는 고개까지 내저었다. "가령 원장님이 퇴근하려 했을 때 누군가 이 근처에 어정댄 사람도 없었나요?" "그런 기억은 없군요. 왜 그러시죠?" "아니, 별것 아닙니다. 어젯밤 늦게 112 신고가 들어왔었죠. 이 근처에 수상한 사람이 어정대고 있다는...... 그래서 패트롤카까지 출동했었죠." "어머, 그렇담 제가 퇴근한 뒤일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뒤에?" "그걸 조사하러 이렇게......." "그럼 아까 말씀하신 호리씨라는 환자도 관련이 있나요?" "아니, 그 사람 애인이 어젯밤 술에 취해 나간 뒤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혹시 이 병원을 찾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무슨 까닭으로요?" "이 병원에서 받은 수술에 납득 못할 점이 있다더군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떤 점이 그렇다는 겁니까?" 사메지마는 똑바로 후미에를 쏘아보았다. "낳을 생각으로 있던 아기를, 순조롭게 자라고 있던 태아를 어째서 중절해야 했는지 그게 납득이 안 간다고 하더군요." "네? 설마, 그런 일이......." 후미에는 깜짝 놀랐다는 듯 짧게 부르짖었다. "뭔가 하는 병 때문에, 즉시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뭐 그렇게 주장했다더군요, 여기 의사 선생이." "그렇다면 조기박리(早期剝離) 였나 보군요." "조기, 뭐라구요?" "태반이 너무 일찍 박리됐다는 뜻이에요. 그냥 내버려 두면 태아 뿐만 아니라 모체도 위험해집니다. 때문에 진단 직후 바로 수술을 하게 되죠...... 어머! 잠깐 기다려 보세요." 후미에는 손을 이마에 갖다대고 생각에 잠긴 시늉을 했다. "그게 언제쯤이었죠?" "3주쯤 됐을 겝니다." 후미에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났어요. 이제 생각이 나는군요. 그 환자인지 어떤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수술을 했었어요. 스무 살 안팎의 어린 아가씨가 복통이 심하다면서 찾아왔어요. 선생님이 진단한 결과 조기박리로 밝혀졌어요. 구급차로 큰 병원으로 옮길 여유도 없었습니다." "정말 그런 겁니까?" "조기박리 땐 1분 1초를 다툽니다. 남자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출산도 질병은 아닙니다만, 역시 목숨이 걸린 엄중한 상황이에요."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특히 그처럼 어린 아가씨 중에는 자기 몸을 함부로 내굴리는 사람이 적지 않아요." "함부로 내굴린다?" "네. 몇 달이 경과했는데도 임신한 줄도 모르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개중에는 몹쓸 약을 가까이 하기도 하고......." "수면약 같은 것 말이군요." 후미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지역 산부인과에는 별별 사람이 다 찾아와요. 대부분이 어린 사람들이예요. 어린 사람들은 역시......." 후미에는 말끝은 흐렸다. 사메지마는 눈 한번 깜박 않고 쏘아보았다. "만약 호리씨라는 환자가 그 사람이라면, 애석하달까, 불행하달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군요. 아직 젊으니까 다음 번엔 꼭......."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는 질문입니다만...... 그렇게 해서 중절한 태아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어떻게 하다뇨?" "중절수술로 꺼낸 태아의 뒷처리 말입니다." "태아라고는 하지만...... 중절은 대부분 초기에 하기 때문에 핏덩이나 다름없어요. 하수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요." "어느 정도 형체를 갖추었거나, 환자가 묻어 주겠다고 할 경우엔 어떻게 합니까?" "임신 5개월 이상일 경우엔 중절 수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태아에 어떤 장애가 있어 사산을 한 경우엔 사산증명서를 발행해서 구청으로부터 화장 또는 매장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환자가 희망하지 않으면 어떻게 처리합니까?" "업자들에게 맡기죠." "업자?" "네. 그런 오물처리자가 제법 많이 있어요." "장애가 있는 태아가 많은가요?"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병원은 적다고는 할 수 없어요. 신나나 각성제 따위를 가까이 한 경우,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은가 봐요." "그렇겠군요." "그만큼 여자가 불리하달까 불공평하다는 얘기예요. 꼭같이 철없이 몰려다니며 놀았는데, 업보를 뒤집어쓰는 건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니까 말예요." 후미에는 정말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함께 따라왔던 남자는 기억하고 있나요?" "아뇨. 진찰이 끝나자마자 수술 준비하느라고 눈코 뜰 사이가 없었어요." 후미에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렇군요. 형사님은 그 아가씨를 만나보셨나요?" 사메지마도 신중했다. 후미에가 슬쩍 던진 올가미에 걸려들 그가 아니었다. "글쎄...... 방금 얘기한 그 환자가 호리씨인지 아닌지......." "만약 같은 사람이라면...... 검사 받으러 오게 되어 있을 거예요. 꼭 오라고 했으니까요. 아직 들르진 않았지만." "호리씨는 임신 초기부터 단골로 다니던 병원이 따로 있는 모양이더군요." "어머, 그럼 어째서 그 병원으로 가지 않구 이리로 왔을까? 꼭 우리 병원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1분 1초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방금?" "구급차 말이로군요. 보통 때라면 그렇게 했겠죠......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간호사 입장에서 볼 때 원장님이 취한 조치는 정당했다고 생각해요. 만약 그 아가씨 단골 의사 선생님이 따로 어떤 치료를 해 온 것이 아니었다면 말예요." "글쎄요. 거기까진 문외한인 나로선 알 수 없군요." "그렇겠죠." 후미에는 그것 보라는 듯 쌀쌀맞게 말했다. "적어도 저는 그 아가씨의 힘이 되어 주려고 애를 썼어요. 아마 원장님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애기를 없앤 쇼크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의료 미스라고 어거지를 쓴다는 건......." 후미에는 사메지마를 쏘아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렇군요." "원장님을 꼭 만나셔야 하나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한두 시간 있어야 돌아올 텐데...... 식사하러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사메지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마오카씬 식사하러 안 나가세요?" "도시락을 갖고 다녀요, 전." "......잘 알겠습니다. 폐를 너무 많이 끼친 것 같군요." 사메지마는 몸을 일으켰다. "나중에 다시 오실 생각이세요?" 후미에가 물었다. 그러나 금방 후회했다. 이쪽이 경계하고 있는 걸 눈치 채게 하지나 않았나 가슴이 덜컹했다. "아니...... 아마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겝니다." 사메지마는 분명하게 자르면서 머리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저희들 입장은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알았습니다." 사메지마는 구두를 신은 다음, 벗은 슬리퍼를 신장에 넣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후미에도 허리를 굽혔다. "참!" 사메지마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을 이었다. "시마오카씨 풀네임을 듣고 싶군요." 마음을 놓았던 후미에는 다시 경계심으로 전신이 굳어졌다. "어머, 그건 왜요?" "일단 보고서를 써야 하니까요. 만나뵌 분 이름이 필요해요." "후미에예요. 그냥 히라가나로 표기합니다." "그렇습니까?" 사메지마는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실례 많았습니다." 사메지마가 유리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후미에는 꼼짝도 않고 지켜보고 서 있었다. 어쩐지 일이 엄청나게 잘못 돼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책임의 절반은 말할 것도 없이 후미에 자신에게 있었다. 사메지마라는 그 형사를 없애 버릴까. 언뜻 떠오른 생각을, 그러나 후미에는 얼른 지워 버렸다. 형사를 죽이는 일은 쉽지가 않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경찰조직 상층부에 압력을 넣는 것은 어떨까. 물론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후미에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야카라면 가능할 게 틀림없었다. 아야카에겐 그 사내 -- 미쓰즈카가 있지 않은가. 미쓰즈카는 신주쿠 서에서 근무한 형사였다. 이럴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야카가 지금껏 먹여 살린 보람이 없질 않는가. 아야카에게 연락하는 게 좋겠다고 후미에는 생각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 10 > 아야카가 묵고 있는 호텔 3층 중국식당은 광동요리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 룸에는 아야카를 주빈으로 한 비지니스 오찬이 진행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아야카를 비롯해서 다이어트 식품 전문상사 사람 3명과 아야카의 사업 자문역을 맡고 있는 오시카와 하루요등 5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12시 30분에 시작된 오찬은 한시간이 지난 지금, 가벼운 면류가 나오는 걸로 보아 대체로 끝이 나고 있었다. 덴마크산 섬유식품과 비타민이 포함된 알약을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에 납품하려고 상사 사람들은 내심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접대 상대가 남자가 아닌 여성인 탓에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게 아야카 눈에도 뚜렷하게 보였다. 아야카에겐 긴자의 일류 술집도, 골프도, 소프랜드 (터키탕 - 역주) 도 소용이 없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들고 와 의자 밑에 놓아둔 커다란 쇼핑백에는 도자기나 크리스탈 그릇이 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 아야카에게 줄 뇌물성 선물이었다. 아야카는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저들이 권하고 있는 다이어트 식품이 아무 약국에서 손쉽게 살 수 있는 싸구려가 아니라면 클리닉의 <추천약> 으로 취급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의약품이 아니라 건강식품으로 허가받은 제품이기 때문에 클리닉에서 판다 하더라도 약사법에 걸릴 염려는 없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검정 제복의 웨이터가 살며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무선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스도 사장님을 찾는 전화입니다." "어머...... 잠시 실례하겠어요." 상사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다음 전화기를 받아들였다. 머리를 한쪽으로 쓸면서 귀에 바싹 갖다댔다. 그러는 자기 제스쳐를 상사 사람들이 홀린 듯한 눈으로 바라보자, 아야카는 적이 만족스러웠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스도예요." 미쓰즈카였다. "니시신주쿠서 연락이 왔어. 당장 만나 얘기할 게 있댔어. 당신이 휴대폰 스위치를 꺼놓은 탓에 나한테로 연락한 게야." "그쪽 누군데?" 물으면서 아야카는 하루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루요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옆에 놓아둔 서류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아야카 스케줄이 적혀 있는 노트였다. 가방 속에는 휴대폰도 들어 있었으나 식사를 시작하면서 스위치를 꺼버린 것이었다. 일부러 상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루요에게 그렇게 명령했었다. 이 오찬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여자 쪽이야." 후미에였다. 무슨 일일까. "알았어요. 오늘밤......." 말끝을 흐리면서 하루요가 펼쳐 내민 노트를 받아들였다. 매니큐어를 칠하지 않은 하루요 손가락이 필요한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루요는 외국어 대학을 나온, 올해 서른다섯의 노처녀였다. 모습 자체가 남자와는 인연이 멀었다. 화장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명한 판단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애를 쓰고 분칠을 한다 하더라도 개꼬리를 황모로 바꾸는 건 불가능한 일임을 하루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루요 손가락끝을 좇아 오늘 저녁 스케줄을 확인했다. "11시 30분으로 해 주세요. 장소는 그쪽에 맡기겠어요." "알았어." 미쓰즈카는 전화를 끊었다. 아야카는 전화 스위치를 끈 뒤 생긋 웃음과 함께 웨이터에게 돌려 주었다. 그러나 가슴 속에서 치솟는 불안감은 억제할 수가 없었다. 니시아자부에서 새로 개업한 프랑스 식당에서 여성지와의 인터뷰가 끝난 것은 11시 10분이었다. 풀코스 식사를 겸한 인터뷰는 잡지사가 스타일리스트까지 동원할 만큼 거창한 것이었다. 스타일리스트는 사진 촬영을 돕기 위해서였다. 준비해 온 옷은 이태리 2류 브랜드였다. 화려하게 보인 반면, 그만큼 촌스러운 원피스였다. 아야카는 기분이 상했으나 기사 효과를 위해서 참기로 했다. 머리손질과 화장만은 단골 미용실 사람이 맡아 준 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길로 하루요를 돌려 보낸 다음, 아야카는 벤트레이 뒷자석에 몸을 묻었다. 도어를 닫은 미쓰즈카가 취재진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운전석에 올랐다. 아야카는 사이드 윈도를 내려 상냥스레 손을 흔들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카메라맨과 인터뷰 여기자가 머리를 숙여 작별인사를 했다. 벤트레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잡지사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유리창을 올린 아야카는 시트에 몸을 묻으면서 한숨을 조용히 내뱉었다. "담배 있어?" 룸미러 속에서 미쓰즈카 눈이 움직이면서 사이드 보드를 열었다. 카르체가 박스째 들어 있었다. "그걸로는 안 돼. 좀더 센 걸로." 미쓰즈카는 한손으로 윗도리 주머니에서 쇼트 호프와 라이터를 꺼내어 뒤로 넘겼다. 아야카는 한대 뽑아 불을 붙여 물었다. 담배는 가끔 피웠다. 피부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2,3일에 한두 개비꼴로 피웠다. 길게 들이마셨던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지?" "산구바시서 기다리기로 했어. 다른 사람에겐 알리고 싶지 않은 얘긴가 보더군." "그럼 적당히 돌아다녀야겠군." 벤트레이는 요요기 공원 앞 언덕을 올라, 체육관 못 미친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미에를 태웠다. 후미에는 언제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가디건을 덧입고 쇼핑백을 든 채 길가에 서 있었다. 후미에 바로 앞에 벤트레이를 세운 미쓰즈카는, 그러나 운전석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후미에도 도어를 열어 주는 것 따위는 처음부터 기대도 않는다는 듯, 직접 열고 올라탔다. 이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싫어해서 눈에 안 보이게 으르렁대고 있음을 아야카도 알고 있었다. 아야카는 오른쪽으로 비켜앉았다. "어여차!" 후미에는 기합을 넣으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도어를 잡아당기는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간 탓에 난폭하게 닫히는 소리가 차 안을 찢었다. 불끈해진 미쓰즈카는 룸미러로 후미에를 노려보았다. "출발해." 아야카가 짧게 지시했다. 벤트레이는 요요기 공원 순환 코스로 접어들었다. "웬일이야, 아줌마. 이렇게 허겁지겁 연락을 다하구." 아야카가 묻자, 후미에는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너한테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까 봐." "왜?" 후미에는 조용히 얘기를 시작했다. <가마이시 클리닉>에 불을 지르려던 사내가 있었다는 얘기에 그때까지 웃고 있던 아야카 얼굴이 굳어졌다. 후미에가 그 사내를 없애 버렸다는 말에 한순간 안도의 미소를 흘렸지만 뒤이어진 얘기에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은 신주쿠 서 형사와 국세청 조사관이 엇갈리듯이 <가마이시 클리닉>을 찾아왔다고 했다. 형사는 방화를 기도했다가 행방불명된 사내 때문에, 국세청 조사관은 클리닉 경영상태를 추궁했다는 것이었다. "내 보기엔 국세청은 크게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아. 문제는 형사야." "그 젊은 녀석 시체는 지금 어디 있어?" "지하 냉동고. 분해하자면 가마이시 도움이 필요해. 그에게 얘기하기 전에 먼저 너한테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시체는 좀 곤란하지?" 아야카가 미쓰즈카 등에 대고 말했다. 미쓰즈카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죽여 버린 건 최악의 선택이야." 미쓰즈카 말을 후미에가 물고 늘어졌다. "우리 병원에 불을 지르려 했어. 그 피라미 녀석이!" "112에 신고했으면 됐잖아?" "뭐라구? 낙태수술한 걸 온 세상에 다 알리려구? 말도 안되는 소린 집어쳐." "의료 미스로 얼버무릴 수도 있잖아? 그게 훨씬 좋았을 거야."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해요. 그런 소문이 한번 쫙 퍼져 봐. 환자들이 뚝 끊기고 말 것 아냐?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 "그만!" 아야카가 말리며 끼어들었다. "사람 죽이는 걸 너무 간단히 생각하고 있는 것 아냐?" 미쓰즈카는 들은 척도 않고 내뱉듯이 말했다. "당신이 멍청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선 거야. 지난번에도 마찬가지였구. 당신은 까짓 포주녀석 하나 제대로 달래 보내지 못했잖아?" "그만둬! 이제 그만하란 말야!" 아야카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두 사람은 입을 닫았다. 후미에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미쓰즈카 등을 노려보았다. 미쓰즈카도 지지 않고 룸미러로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보냈다. 아야카는 한숨을 깨물면서 후미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지하실에 있는 게 얼마나 되지?" "셋. 그리고 그 젊은 녀석." "쓸 순 없겠지, 그건?" "쓸모가 없어졌어. 죽은 지 벌써 24시간이나 됐으니까." "나머지 셋은 괜찮아?" "그건 언제나처럼......." "좋아. 그럼 한몫에 처분하기로 하지." 말을 마치며 미쓰즈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모리한테 연락해서 모두 가져가도록 해 줘." "시체까지? 녀석 기절할지도 모르는데." "분해해 버리면 모를거야. 다른 것과 같은 케이스에 담도록 해." 후미에가 말했다. "그렇게 궁색스럽게 처리할 게 아니라 바다에 던져 버리든가 어디에 묻어 버리는 게 더 간단해. 이빨은 뽑아 버리고 말야." "안 돼. 섶을 지고 불에 들어가려구? 물 건너 보내서 그쪽이 처리하도록 하는 게 제일 안전해." "숫자가 엄청 늘어날 걸. 어른 시체를 분해해서 케이스에 담는다면.......'" "당신이 알 바 아니잖아? 직접 손대는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 걱정이!" 후미에가 쏘아붙였다. 미쓰즈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신주쿠 서 형사와 국세청에도 손을 써두는 게 좋겠지?" "국세청은 사찰 5부문의 타키자와, 형사는 신주쿠 서 방범과 사메지마라고 했어." 후미에가 알려 주었다. 미쓰즈카가 느닷없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왜 이래?" "사메지마라구?" 미쓰즈카가 뒷자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벤트레이 뒤에 붙어오던 택시가 하이빔을 번쩍이면서 클랙슨을 울렸다. 미쓰즈카는 도어를 열더니 머리만 내밀고 고함을 질렀다. "시끄러워!" 도어를 닫고 비상 깜박이를 켠 뒤 다시 몸을 돌려 후미에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아야카가 물었다. "아니, 내가 그만둔 뒤에 들어온 사내야." 미쓰즈카가 내뱉듯이 말했다. 표정까지도 바뀌어 있었다. "그럼 왜?" "그 녀석은 아마 캐리어일 거야. 제대로 됐다면 본청 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이지만...... 웃사람과 충돌하는 바람에 중간에서 꺾인 녀석이야." "그럼 별 문제가 없겠군." "맞았어. 신주쿠 서 형사로 굴러떨어진 주제에 겁없이 맹렬히 뛰고 있어. 검거율은 언제나 톱, 야쿠자들이 <신주쿠 상어> 라면서 쩔쩔맬 정도야." "<신주쿠 상어>?" "작년, 신주쿠 교엔에서 큰 소동 일어났던 것 기억하고 있나?" (<독원숭이> 참조) "홍콩 마피아가 어쩌구저쩌구한 사건 말야?" "대만 마피아야. 무투파(武鬪派) 이시와구미 조직원을 파리 잡듯이 죽이고 다닌 대만 특수부대 출신 킬러, 기억나지? 그 녀석을 혼자 해치운 게 바로 사메지마야!" "힘깨나 쓰는가 보지?" "직접 만난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야쿠자 얘길 들어보면 대단한 녀석 같아." "형사시절의 당신처럼?" "몰라. 어쨌든 난 만나본 적이 없는 녀석이야." "만나보겠어?" 아야카의 물음에 미쓰즈카는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비상 깜박이를 끄더니 다시 출발했다. "......아마 돈으론 어림도 없을 거야. 그렇다고 집념과 끈기덩이인 녀석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구." "아줌마한테 맡기면?" "어림없는 소리. 성공할 턱이 없어. 만약 일이 잘못 되는 날이면 모든 건 그 순간에 끝이야!" "날 못 믿는단 말이야? 잡혀가서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뜻이 아니야! 벙어리가 되더라도, 한마디도 지껄이지 않더라도 이쪽이 끝장나는건 마찬가지야!" "경찰과 국세청이 연계해서 우릴 노릴 가능성이 있다고 봐?" 아야카는 불안을 억누르면서 물었다. "없어. 국세청 사찰은 경찰을 신용하지 않아." "그럼 그 두 사람은 어째서?"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는지도 몰라. 캐리어라면 그럴 수도 있어." "국세청 사찰이 함께 병원 내막을 훑는다면 아줌마 이름이 제일 먼저 튀어나올 텐데......." "내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후미에는 아야카의 손을 다정스레 토닥거렸다. "한가지...... 사메지마 그 녀석에겐 단짝이 한놈도 없어. 서내서도 철저히 경원당하고 있어. 때문에 사메지마 입만 막을 수 있다면......." "내가 한 번 해 볼께." "잠깐." 아야카는 후미에를 제지했다. 한가지 아이디어가 번쩍 머리 속을 스쳤다. "경찰을 그만두게 하면 겁날 게 하나도 없는 것 아냐?" "그야 두말할 것도 없지." 아야카는 후미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줌마는 국세청 사람을 한번 조사해 봐요. 신주쿠 서 쪽은 내가 어떻게 해 볼 테니까." "내 도움은 필요 없다, 이 말인가?" "아니, 필요할 거야. 아줌마가 꼭 있어야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연락할께, 부탁해요!" "미카요는 어쩌지?" "아직은 그냥 내버려 둬. 형사와 국세청 녀석이 더 급해." 이어서 아야카는 룸미러에 비친 미쓰즈카를 바라보았다. 미쓰즈카는 자동차 속도를 높였다. 이윽고 벤트레이는 JR 요요기 역 앞에 멈추어 섰다. "꼭 연락해야 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짐하듯 말하면서 후미에는 벤트레이 도어를 열었다. 자기 혼자 중간에서 내려야 하는 게 약이 올라 못 견디면서도 억지로 숨기고 있는 게 아야카 눈에도 뚜렷이 보였다. 차에서 내린 후미에는 아쉬운 눈초리로 아야카를 응시했다. 그렇다고 아야카는 창유리를 내릴 생각은 없었다. 고개만 끄덕여 준 다음, 미쓰즈카에게 떠나자고 나직하게 명령했다. 요요기 역이 안 보일 지점에 이르자, 아야카는 두 대째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한숨을 섞어 내뱉듯이 말했다. "그 일 당분간 손떼야겠어." "벌만큼 벌었지?" "당신이 꺼려하는 것쯤 알고 있어."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아, 그런 장사는." "하지만 그걸로 지금까지 기반을 다져왔어." 처음에는 가벼운 생각으로 손댄 일이었다. 화장품 메이커가 태반에서 추출한 엑기스로 검버섯이나 기미 없애는 약품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었다. 그 즉시 후미에를 시켜 이리저리 알아보았다. 결과, 태반보다도 더 값진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태아였다. 멕시코에서는 자연 유산한 태아의 뇌세포를 이식해서 도파민 부족을 해소시킴으로써 파킨슨병을 치료한 수술 예도 있었다. 파킨슨병 만이 아니었다. 연소성(年少性) 당뇨병에는 태아의 췌장조직이, 소아 백혈병에는 골수가, 파라증후군에는 간세포가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태아 조직을 이식하는 경우, 거부반응이 별로 없다는 큰 이점이 있었다. 또 임신 7개월 이상의 태아 신장을 세포 배양하면 혈전 용해제 원료가 된다. 배양방법만 정확하다면 바이러스 진단이나 백신 제조에도 이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효과가 큰 태아조직의 이식에는, 그러나 윤리문제라는 커다란 장애가 있었다. 때문에 합법적인 미국의 태아조직 전문 장기 뱅크에서도 코너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돈줄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유전병 따위엔 태아조직 이식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했다. 최초로 확인한 사람들은 홍콩 범죄조직이라고 아야카는 들었다. 동남 아시아에서 태아를 대량으로 사들여 마약 루트를 통해 멕시코로 반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존이나 수송방법이 좋지 못해 도중에 부패해서 쓸모 없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아야카는 미쓰즈카를 통해 미모리를 앞세워 홍콩 조직과 접촉을 시도했다. <가마이시 클리닉> 에서 채취한 태아조직을 완벽하게 보존, 포장해서 홍콩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인보이스와 패킹 리스트는 <화장품 원료>로 위장했다. 홍콩 조직은 그것을 멕시코로 보냈다. 실제로 <스도 아카네 뷰티 클리닉>은 중국산 화장품. 발모제 따위를 수입하기 위해 홍콩에 단골회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장품 원료> 무역을 은폐하기 위한 터널 회사로 바뀌어 있었다. <가마이시 클리닉>이 가능하면 일반적인 중절수술을 기피하고 있는 것도 아야카 명령 때문이었다. 통상적인 중절수술일 경우, 재료가 되는 태아가 엉망이 되는 탓에 필요한 세포를 추출, 배양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태아를 성장시킨 다음 출산과 똑같은 방법으로 채취하는 것이었다. 태아가 크면 클수록 이용가치도 높았다. 당연히, 그렇게 해서 채취한 태아는 모체 밖에서도 살아 있게 마련이었다. 인큐베이터에 넣어두면 순조롭게 애기로 자랄 수 있는 케이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태아들은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는, 잉태될 때부터 버림받은 생명이었다. 그렇다면 살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을 위해 이용한다고 해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지 않는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어." 불쑥 내뱉은 미쓰즈카가 뒤를 이었다. "당신처럼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가 뭣 때문에 그런 장사를 하고 있는지......." "당신은 몰라요." 아야카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면서 말했다. "그래, 난 모르겠어." "나하고 아줌마 사이도...... 마찬가지지?" "그래." "언젠가 얘기해 줄께." 그리고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하지만 지금은 형사녀석 문제가 더 급해. 나한테 멋진 아이디어가 있어. 그걸 더욱 부풀려 올릴 수 있도록 도와 주겠어?" "좋지!" 룸미러 안에서 미쓰즈카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 눈초리는 기대에 차 있었다. "좋아." 아야카는 생긋 웃음을 흘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호텔로 돌아가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