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소돔의 성좌 지은이: 아리마사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 작가소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 작가소개 ** 오사와 아리마사 1956년 생의 젊은 작가로, 1979년 <<感傷의 도시>>로 제 1회 <소설추리> 신인상을 받으면서 데뷔했으니 올해로 집필 연륜이 15년 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15년 동안 <소설추리> 신인상을 비롯하여, 1986년에는 <<深夜曲馬團>>으로 <일본모험소설대상> 최우수 단편상을, 1991년에는 <신주쿠 상어> <한국어판<<소돔의 성자>>)로 제 12회 <吉川英治 文學> 신인상과, 제4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 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1993년에는 <<無間人形>> <한국어판<지옥의 인형>)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나오키 상> 수상 이전부터 오사와 아리마사는 이미 우리 독자에게도 퍽 친숙해져 있다고 하겠다. <상속자 TOMOKO>를 시작으로 <신주쿠 상어> 시리즈인 <<소돔의 성자>> <<독원숭이>> <<주검의 난>> 등을 통해 오사와 아리마사가 얼마나 아기자기하고 능숙한 이야기꾼인가 하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다. 또한 <<지옥의 인형>>에 <나오키 상>이 주어진 것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능숙하게 이야기를 끌어감으로써 독자를 즐겁게 해 준 데 대한 하나의 훈장이 되는 셈이다. 그의 장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인 문장과 치밀한 구성력 그리고 독자의 허를 찌르는 교묘한 함정과 반전을 들고 있으나, 그보다는 기본 취재와 자료 조사에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모든 상황과 인물에 사실성 내지는 현실성을 살리고 있다는 것이 강점이라고 할 것이다. 현재 일본추리작가협회 상임 이사직을 맡고 있다. 1 사메지마가 진바지와 폴로 셔츠를 벗어 개고 있을 때 비명이 울려왔다. 한순간 손길을 멈추었던 그는 로커 도어를 닫아 잠그고 열쇠를 뽑았다. 열쇠에는 손목에 매어달 수 있도록 매직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배스 타월을 허리에 감고 로커실을 나올 무렵 다시 비명이 울려왔다. 로커실 앞 복도 맨 끝이 사우나실, 그 옆에는 휴게실과 수면실이 달려 있었다. 비명이 울려온 곳은 수면실이었다. 전등이 하나밖에 없어 10 평이 채 안되는 수면실은 어두컴컴했다. 사메지마가 싱오쿠보역 근처 복합 빌딩 최상층에 자리잡고 있는 이 사우나에 들른 것은 지난 2주일 동안 오늘이 다섯 번째였다. 이 사우나가 호모 취향자들 사이엔 꽤 유명한 곳이었다. 한바탕 땀을 흘린 뒤 휴게실에서 상대를 골라 수면실로 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때문에 수면실에서는 언제나 가쁜 숨소리, 규칙적으로 마룻바닥이 삐꺽거리는 소리, 신음소리가 울려나왔다. 사메지마가 수면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때, 젊은 사내 하나가 구르듯이 튀어나왔다. 빨갛게 상기된 두 뺨, 콧구멍을 막은 손가락 사이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좀 살려 주세요....." 울상이 된 젊은 사내가 엉금엉금 기어 사메지마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사메지마는 눈을 들어 수면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뒤쫓아 오듯이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었다. 뒤쫓아 온 사내는 머리를 짧게 쳐올린 40대 초반이었다. 젊었을 때는 제법이었을 체격이, 이제는 폭음. 폭식에 시달려 비계덩이로 바뀌어져 있었다. 가슴과 배는 햇볕 한번 구경 못한 것처럼 흰색이었으나 목줄기와 팔뚝은 검게 그을러 있었다. 덩치 큰 사내가 사메지마를 보더니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당신은 뭐야?" 낮은 목소리 - 느닷없는 훼방꾼에 약이 오른 게 분명했다. 사메지마가 대꾸를 않자,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왜, 해 볼테야?" 그는 사메지마를 젊은이로 잘못 판단한 것 같았다. 올해 서른 여섯인 사메지마가 실제 나이보다 10년은 젊게 보이는 것은, 목 뒷줄기를 덮을 정도의 장발 때문이었다. 거의 날마다 계속되는 조깅으로 단련된 몸은 군살 한점 없이 날씬했다. 그렇다고 빈약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사메지마는 자기 발목을 부여잡듯이 매달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젊은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뭐야, 네 녀석은. 할말 있으면 해 봐!" "그렇고 그런 축이었군, 당신도." 사메지마는 덩치 큰 사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조용히 말했다. "뭐라구?" "두들겨 패면서 하는 걸 즐기는 축인가?" "그렇다면 어쩔 테야? 남이 즐기고 있는 불쑥 끼어드는 게 아냐!" 사내가 한발 다가섰지만, 사메지마는 꼼짝도 안했다. 사내가 조금은 기가 질린 채 머쓱해 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는 젊은 사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두들겨 맞는 게 즐거워?" "아냐! 아픈 건 질색이야!" 젊은 사내는 거세게 머리까지 내저었다. 그 바람에 코피가 사메지마의 발등에까지 튀었다. "싫다잖는가." 사메지마는 다시 덩치 큰 사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 새끼가....." 사내는 갑자기 기세를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제법 잘난 척해 보겠다, 이거지?" 고개를 옆으로 젖히면서 사메지마의 얼굴과 몸집을 핥듯이 노려보았다. 사메지마는 사내의 눈길이 자신의 왼손과 뺨에 쏠리고 있음을 느꼈다. 사내의 직업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야쿠자는 아니었다. 야쿠자라면 이렇게 으르렁거리기 전에 주먹부터 내밀었어야 마땅했다. "이봐, 여기 온 건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 아냐? 그런 주제에 잘난 척해서 되겠어?"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난 말야, 즐기러 왔어. 하지만 네녀석 같은 훼방꾼과 마주치면, 임무가 되살아 나고 말아. 언젠가 어디서 내 손에 한번 걸려들었던 녀석이 아닌가고 말야....." "그래?" "거기 꼼짝 말고 서 있어! 도망치면 알지?" 이미 젊은 사내는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강아지를 쫓듯, 젊은 사내를 발길로 한번 걷어찬 뒤 로커실로 걸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있던 회사원풍의 사내를 밀어젖히면서 이쪽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거들먹 웃음까지 번지고 있었다. 사메지마가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 누런 이빨까지 드러내 보였다. 손목에서 열쇠를 풀어 로커 도어를 열었다. "가봐!" 사메지마가 젊은 사내에게 말했다. "네?" "휴게실에라도 가버려!" "하지만....." "코피가 멎거든 다시 와." 사메지마는 덩치 큰 사내가 한쪽 손을 라커 속으로 들이미는 것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젊은 사내는 겁에 질린 채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희고 단정한 얼굴은 코피와 불안의 그림자로 얼룩져 있었다. 덩치 큰 사내가 돌아왔다. 손에는 검정 가죽 표지의 경찰수첩을 들고 있었다. "아니!" 자신의 먹이 - 젊은 사내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뒤쫓을 생각은 없는 듯, 경찰 수첩을 사메지마 얼굴 앞에 바싹 들이밀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메지마의 대답이었다. "아쭈, 거창하게 나오시는군. 머리 밑에 피도 안 마른 주체에!" 사내는 거칠게 부르짖었다. 경찰 수첩을 내보이기만 하면 사메지마가 틀림없이 쩔쩔매리라고 믿었던 것이 보기 좋게 빗나가면서 부아통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었다. 그는 경찰 수첩으로 사메지마의 뺨을 갈기려 했지만, 사메지마가 한순간 빨리 손목을 나꿔채었다. "제법 놀아본 솜씨로군. 그렇다면 경찰서로 끌고 갈 수밖에. 네놈이라고 털어서 먼지 안 나라는 법 없겠지!" 사내가 잡혔던 손목을 뿌리쳐 푸는가 했더니 어느샌가 사메지마의 목줄기를 움켜잡았다. 탄력을 이용해서 사메지마의 얼굴을 자기 앞으로 바싹 잡아당겼다. "관둬! 그따위 수법, 새삼스런 것도 아닌데." 사메지마는 사내가 잡아당기는 대로 몸을 내맡기면서 이죽거렸다. "뭐라구?" 사내는 사메지마의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가까스로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첫눈엔 스물 일고여덟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장발의 젊은이 - 그러나 눈빛에는 보기와는 달리 만만찮은 무엇인가가 서려 있었다. 사내는 사메지마의 정체를 깨달았다. "당신...!" 사내는 숨막히는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거짓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 "남의 운동장에 뛰어 들어와서 함부로 날뛰는 게 아냐!" 사메지마는 목을 감고 있는 사내의 손을 천천히 풀어 손목을 힘껏 죄기 시작했다. 사내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뚜렷해지면서 사메지마의 시선을 맞받아 내지 못하고 눈길을 아래로 깔고 말았다. 입술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그녀석이 어쩐지 수상한 것 같아서..... 조사해 본다는 것이 그만....." "사우나에서 벌거벗은 채로?" 사내는 말문이 막힌 듯 한참 동안 눈만 깜박거리다가는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디 소속이야? 신주쿠?" "내가 밝히면 당신도 소속을 밝혀야 할텐데..... 괜찮겠어?" "그, 그렇군. 그건 곤란해. 이런 데서 벌거숭이로 인사를 나눌 수야 없지." 사메지마는 사내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행패를 부리려면, 너네 운동장에서나 부려." 사내는 다시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잘 있어!" 사메지마가 작별 인사를 하자 사내도 응했다. "잘 있어!"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말했다. 사내는 입을 다문 채였다. 분통스러워 하는 기색이 검은 그림자처럼 한순간 그의 얼굴을 덮었다. 하지만 여전히 입을 꼭 다문 채 뒷걸음질을 치다가 몸을 빙그르르 돌려 로커실로 사라지고 말았다. 로커를 열어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도 몇 번이고 사메지마 쪽을 힐끗힐끗 돌아보았다. 사내가 목에 넥타이를 거는 것까지 지켜보던 사메지마도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우나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냉탕에도 온탕에도 찾고 있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수면실 앞으로 다시 되돌아 왔다.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는 일은 언제나 내키지 않았다. 사내들끼리 부둥켜안고 있는 틈새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도시(盜視) 꾼으로 오인당해 욕먹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면실에도 찾고 있는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장의자가 나란히 놓인 휴게실에는 텔리비전이 켜진 채로 있었다. 맨발에 나비 넥타이 제복을 입은 웨이터가 스낵 카운터에 멍하게 기댄 채 텔리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이렇게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웨이터 임무에는 손님에 대한 서비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의자 위에서 딩굴고 있는 몇몇의 얼굴을 훑어본 사메지마는 안쪽, 화장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쪽 벽면에는 거울과 세면대 그리고 화장대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젊은 사내는 제일 안쪽, 구석진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코피는 이미 멎은 것 같았다. 거울에 비쳐진 퉁퉁 부은 자신의 얼굴을 한심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불쑥 나타난 사메지마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석, 돌아갔어." "잘 됐네요." 사메지마의 단 한마디에 젊은 사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여긴 자주 오나?" "네." 사메지마의 물음에 대답한 젊은 사내는 고개를 한번 세차게 흔든 다음 말을 이었다. ".....한달에 한두 번쯤. 그건 왜요?" 젊은이 목소리에는 혀짜래기 응석투가 짙게 풍겼다. "그 녀석과는 오늘이 처음?" "네. 하지만 전에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날씬한 걸 좋아하나 봐요. 그렇게 난폭한 줄은 몰랐구요." 사메지마는 주위를 한번 살펴보았다. 화장대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즈라는 사내, 혹시 알고 있나? 바싹 말랐지만 검게 그을은 사람..... 왼쪽 어깨엔 문신이 있구." "어떤 문신이에요?" "전갈이 새겨져 있어." 젊은 사내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거울 속의 사메지마를 주시했다. "당신 애인?" "애인의 친구야." 사메지마는 사내의 눈길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자신의 무릎 안쪽을 누군가가 느닷없이 쓰다듬는 것을 느낀 사메지마는 깜짝 놀라 눈길을 쏟았다. 젊은 사내의 손길이었다. 오른손 엄지 손톱으로 무릎 뒤쪽 민감한 부분을 애무하듯 조용히 긁고 있었다. "그 사람 알고 있어요. 게다가 전 당신이 좋아졌어요." 사메지마는 턱을 한번 쓱 문질렀다. "안됐군, 오늘은 시간이 없어. 다음 번으로 미룰 수밖에. 헌데 기즈는 어디서 만났지?" "우린 언제 또 만날 수 있나요?" "내주쯤은 어때?" "내주 언제쯤?" "오늘처럼 금요일." 젊은 사내는 고개를 까딱하면서 다짐을 놓았다. "이맘 때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기즈를 만난 건?" "니시 신주쿠 <아가메무논> 이란 데서. 문신도 보여 줬어요." "했어?"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애인과 함께였어요." "네가?" "아니, 그쪽이....." "그래?" 사메지마는 머리를 주억거리며 젊은 사내의 빈약한 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젊은 사내는 그 위에 손을 포개면서 빙긋이 웃어보였다. "다음 번엔 꼭이에요." "그래..... 꼭이야." 젊은 사내의 살이 용트림하는 것을 본 사메지마는 눈길을 돌렸다. 체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조금 전의 덩치 큰 사내 것의 두 배는 너끈할 것 같았다. 사메지마가 로커실로 되돌아 왔을 때 그 사내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메지마는 벗어놓았던 진바지와 폴로 셔츠를 서둘러 챙겨입었다. 손목시계는 오후 9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약속이 생각났다. <후즈 허니>의 라이브 콘서트가 끝나는 것은 9시 정각. 그 시간에 맞춰 쇼를 마중가기로 한 것이었다. 앵코르를 세 곡 더 연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5분, 그후 분장실로 돌아와 악기 정돈 등 뒤처리하는 데 10분. 그러니까 늦어도 9시 30분까지 라이브 하우스에 도착하지 않으면 쇼가 토라질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3주일 전에 철석같이 해 둔 약속 아닌가.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면 약속 따위, 처음부터 하지도 말라는 게 쇼의 입버릇이었다. 한번 한 약속을 어쩌다 어기기라도 한다면 쇼는 눈에 불이 번쩍하도록 몰아 세웠다. 더군다나 오늘밤 마중가기로 한 것은 드물게도 사메지마가 자청한 것이 아닌가. 구두를 신는 둥 마는 둥 사메지마는 엘리베이터로 달려 들어갔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쇼와의 약속은 오늘 아침부터 줄곧 깜박잊고 있었다. 물론 그걸 쇼에게 자백할 필요는 없었다. 쇼의 신경질은 밴드 동료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유명한 것이었다. 언젠가, 술에 취해 라이브 하우스에 끼어든 양아치가 쇼가 부를 노래 전주곡 연주를 방해하자, 술병으로 대갈통을 내리친 적도 있었다. 사우나 빌딩에서 나온 사메지마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쇼의 라이브 콘서트가 열리고 있는 TEC회관의 위치는 카부키쵸 2쵸메였다. 싱오쿠보 역과 신주쿠 역 중간지점에서 약간 신주쿠 쪽으로 쏠려 있는 곳이었다. 택시를 이용하면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리기 쉬었다. 걷든가, 아니면 신주쿠까지 한 정거장 야마노데센 (도쿄 순환전철) 을 타든가 할 수 밖에 없었다. 신주쿠 역 동쪽 출구에서 카부키쵸로 이어지는 인도의 혼잡스러움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망설이고 있던 사메지마 눈에 다카다노바바 쪽에서 야마노데센의 녹색 전동차가 달려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잽싸게 몸을 날려 뛰기 시작했다. 전동차도 플랫폼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 들어왔다. 차표를 살 여유도 없었다. 급한 김에 바지 뒷주머니에서 경찰 수첩을 꺼내 보이면서 개찰구를 빠져나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전동차가 폼에 멈추면서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사메지마가 뛰어타자마자 문이 닫혔다. 등을 타고 땀이 줄줄 흘렀다. 결국 사우나에 가서는 옷을 한번 벗었다가 도로 주워 입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수확은 있었다. 전동차 문에 기대면서 사메지마는 가까이 다가오는 신주쿠 거리로 눈길을 던졌다. 카부키쵸는 변함없이 사람들의 물결로 붐볐다. 신주쿠도리 주변은 그렇지도 않았지만 3쵸메의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 언저리부터는 걷기조차 불편할 정도였다. 카부키쵸 쪽으로 건너가는 야스쿠니도리 횡단보도 앞에는 신호를 기다리는 인파가 보도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평소 때의 주말과 크게 다른 것은 교차로 주변마다 제복경관의 모습이 엄청 많이 눈에 뛴다는 점이었다. 토요일인 내일, 신주쿠 교엔에서 열리는 국빈원유회 (國貧園游會; 일본 왕실 주최의 정기 가든 파티) 에 대비한 경비 때문이었다. 신주쿠도리. 야스쿠니도리. 메이지도리를 중심으로 한 주요 간선도로에 배치된 경관수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하고 사메지마는 생각해 보았다. 신주쿠구에 깔린 경관만 해도 1천 명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제복 경관을 배치한 곳은 교엔 주변 뿐만 아니라 도쿄 도내(都內) 거의 전역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신주쿠구와 외국 대사관이 몰려 있는 미나토구의 검문 경계가 제일 엄격했다. 경계 규모는 쇼와 왕의 장례 때와 비슷했다. 도쿄 경찰청 관내 경관만으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인근 3현- 치바. 사이타마. 가나가와 등 각 현경으로부터 병력 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이건 구석구석이 경관투성이 아냐?" 신호를 기다리는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내뱉은 소리가 사메지마의 귀를 울렸다. "좋잖는가. 안심하고 취할 수 있을 테니까 말야. 야쿠자들도 얌전을 빼야 할테구." "그렇긴 하지만....." 그 뒷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신호가 파랑으로 바뀌면서 겹겹이 뭉쳐져 있던 엄청난 인파의 거대한 물결이 횡단보도로 밀려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9시 27분. 쇼가 슬슬 사메지마를 찾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빨 빠진 빗살처럼 횡단보도 이곳 저곳에 멈추어 선 자동차 사이를 누비면서 사메지마는 달리기 시작했다. 야스쿠니도리는 인파도 인파였지만, 엉금엉금 기는 자동차 때문에 혼잡이 극에 달했다. 모두 도로변의 불법 주차 때문이었지만, 오늘은 검문에 나선 기동 경찰이 교차로 주변의 버스 전용차선을 가로막고 있는 탓에 더욱 심했다. 코마 극장 앞길은 밤마다 신주쿠에서도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었다. 빠칭코. 게임센터. 선술집. 다방. 라면집. 레스토랑. 안경가게. 중국음심점. 마작집. 카바레. 패션 마사지 등 섹스업에다 고리대금업자와 폭력단 사무실이 빽빽하게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곳이 바로 코마 극장 언저리였다. 그 모든 것이 복합 빌딩에 들어 있었다. 아늑한 분위기의 바 위층엔 패션 마사지 집이, 안경 가게 지하엔 디스코텍이 들어 있거나 다방 아래층의 마작집이 알고 보면 폭력단의 위장 사무실일 수도 있었다. 그런 복합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과, 찾아드는 사람이 어깨를 부딪쳐 가면서 천천히 흘러가는 그 거리를 혼자 잰걸음으로 걸어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잰걸음으로 헤집다가 인파에 밀려 튕겨져 나가기라도 한다면, 카바레 호객꾼에게 걸려들거나, 게임 센터 회전간판에 부딪치기가 일쑤였다. 카부키쵸로 향하는 인파는 야스쿠니도리를 건너자마자 일단 안심이라도 한 듯 갑자기 속도가 떨어졌다. 어정어정 걷는 것 자체가 카부키쵸를 찾아온 목적이기도 했다. 그래도 사메지마는 서둘러야 했다. 팔짱낀 데이트족 사이를 비집기도 하고, 주정꾼을 밀쳐내거나, 묶어올린 아가씨들의 머리다발이 얼굴에 부딪치는 것을 피해 가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카부키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수록 신주쿠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각종 음식과 술냄새에 에어컨 먼지가 뒤섞인 데다가 그 많은 사람들의 체취와 향수가 짓이겨지면서 풍겨내는 것이 바로 신주쿠 냄새였다. 카부키쵸 광장 건너편으로 TEC 회관이 보이자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게임 센터 앞에 몇몇 사람이 둘러서서 웅성대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둘러선 사람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는 곧장 발길을 돌렸지만, 금세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메웠다. 싸움, 그것도 야쿠자가 연관된 싸움이라고 사메지마는 직감했다. 보통 사람들이 치고 받는다면 눈깜짝할 사이에 구경꾼이 몰려드는 게 예사였다. 하지만 신주쿠에서 야쿠자가 낀 싸움이 벌어지면 구경꾼은 그렇게 많이 몰려들지 않았다. 통행인들은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하면서 잠시 걸음을 멈출 뿐이었다. 걸음을 멈추었던 데이트 쌍이 떠나자, 사메지마는 싸움 현장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혀를 찰 정도였다.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뭇매질이었다. 웅크리고 있는 사내를 세 사람이 둘러서서 발길질을 했다. 한 사람이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얼굴을 묻은 채 웅크린 사내는 저항 한번 변변히 못했다. 발길질을 하는 세 사람 가운데 하나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하나이 구미에 충성 서약 의식을 마친 병아리 야쿠자였다. 보나마나 나머지 두 녀석도 뻔했다. 사메지마는 재빨리 주변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제복 경관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웅크리고 있는 사내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풋나기 야쿠자들도 죽일 생각까지는 없는 것 같았다. - 멍청한 녀석들 같으니라구. 사메지마는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유회에 대비하느라고 신주쿠 경찰서는 검문. 검색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 조직 폭력 단체들도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풋나기 야쿠자가, 그것도 떼를 지어 한 사람을 상대로 주먹판을 벌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두들겨 맞고 있는 사내에겐 동행이 없는 것 같았다. 겁을 집어먹고 도망을 쳤던가, 아니면 경관을 부르러 달려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술기운에 어쩌다가 야쿠자들의 성질을 건드린 게 분명했다. 아무리 야쿠자라고 해도, 지나가던 사람이 째려보는 정도만으로는 제 구역 안에서 함부로 주먹질을 않는 게 상례였다. 사메지마는 야쿠자를 싫어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경관 중에는 일반인보다 야쿠자와 더 죽이 맞는 부류가 적지 않았다. 때문에 사메지마처럼 체질적으로 야쿠자를 싫어하는 경관도 있는 반면, 꽤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메지마가 야쿠자를 싫어하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과 가까이 하는 경관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풋나기 아마추어 싸움꾼들보다는 훨씬 상대하기가 쉬운 면도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경찰조직과 야쿠자 조직은 구조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사메지마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싸움현장으로 다가갔다. 폭주족들과는 달리 야쿠자들은 사람을 두들겨 패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때문에 뭇매를 맞고 있는 사내를 그냥 버려둔다 해도 멍이 들거나 코피를 쏟는 정도에 그칠 것이며, 한두 주일만 지나면 깨끗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현장을 목격한 이상, 사메지마로서는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 매맞는 사내를 구해 주는 대가로, 이번엔 내가 쇼한테 두들겨 맞게 되는구나. 우스꽝스런 생각을 억누르면서 사메지마는 걸음을 재촉했다. 새로 나타난 구경꾼 두 사람을 비집고 들어섰다. 매질은 이미 끝난 듯, 사메지마가 다가섰을 때는 하나이 구미 소속 사내가 마지막 발길질을 하려고 오른쪽 다리를 뒤로 빼어 탄력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사메지마는 거칠게 그 사내의 외다리를 걷어올렸다. 뒤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풋나기 야쿠자는 자신의 체중을 실어놓고 있던 왼다리를 걷어채이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뭐야?" "이 새끼가!" 옆에 섰던 다른 두 사람이 험상궂은 얼굴로 사메지마에게 대들었다. "그, 그만둬....." 엉덩방아를 찧었던 사내가 사메지마를 알아보고는 황급히 동료들을 제지했다. "뭐야, 이 새끼는 !" 사메지마의 멱살을 잡은 사내가 으르렁거리는 것을 쓰러졌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서 말렸다. "죄, 죄송합니다.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이 녀석이 뭘 몰라서 이러는 겁니다." 사메지마는 야쿠자들을 무시한 채 뭇매를 맞고 쓰러져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누굽니까, 형님. 이 녀석은 도대체....." "잔말 말고 따라와. 멍청하게 굴지 말구....." 쓰러져 있는 사내가 치명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입술이 찢어져 코피와 함께 범벅이 되긴 했으나 다른 부위는 걱정할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뭇매질로 놀림감이 된 데 대한 심리적인 충격이 큰 것 같았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야쿠자, 그것도 복수(複數) 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유흥가 한복판에서 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에겐 정신적인 충격과 후유증이 오래 가는 게 예사였다. 육체의 상처가 아문 뒤라도 유흥가를 기피하거나, 야쿠자와 폭주족에 대한 병적인 공포감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쓰러져 있는 사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봐, 정신차려. 괜찮아?"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입술과 턱 언저리에는 흘러내린 피와 침이 엉킨 채 말라붙어 있었다. 아직도 두 눈을 꼭 감은 채 신음소리를 흘렸다. 술냄새가 제법 풍겼다. 많이 마시진 않았다 하더라도 취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진바지에 T셔츠, 그 위에 검정색의 얇은 반코드를 겹쳐 입고 있었다. 헤드폰 스테레오의 이어폰이 코트 주머니 밖으로 삐져 나와 대롱거리는 게 보였다. "이봐!"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사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사내 입에서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보새끼!> 라고 말한 것처럼도 들렸다. "일어설 수 있겠어?" "시끄러워!" 사내는 느닷없이 고함을 치면서 사메지마의 팔을 뿌리쳤다. 침이 튀었다. "내버려 둬! 개새끼들!" 두 눈을 번쩍 떠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충혈된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왼뺨의 검푸른 멍도 점점 커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파출소로 데리고 갈까고 망설이고 있을 때, 사내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으로 심하게 채인 아랫배를 누르며 꾸부정한 자세를 취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컸다. 피부는 비록 희게 보였으나 절대로 연약한 체구가 아니었다. "잠깐 기다려!" 사메지마는 사내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사내는 엄청난 힘으로 거세게 뿌리쳤다. 그 바람에 사메지마는 손등을 할퀴고 말았다.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사내는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그늘진 눈빛이었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코트 한쪽 포켓에는 둥그렇게 만 종이가 꽂혀 있었다. 영화 팜플렛 같기도 했다. 사내는 비틀거리며 역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것이 취한 탓인지, 아니면 두들겨 맞은 통증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늘진 눈빛이 사메지마에겐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사내 모습이 카부키쵸 인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사메지마는 그제서야 할퀸 손등으로 눈길을 돌렸다. 사내는 손톱으로 할퀸 두 줄기 생채기를 사메지마의 오른쪽 손등에 남겨놓고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하나이 구미 풋나기 주먹들도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상하게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맙다는 인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사치로움은 이미 오래 전에 버린 사메지마였다. 신주쿠는 다른 지역과 달리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외근 경관은 보통 3,4 년의 경험을 쌓아야 비로소 제 몫을 하게 된다고들 했다. 그러나 신주쿠에서는 일년이면 충분했다. 사고도 범죄도 그만큼 많은 곳이 바로 시주쿠였다. 사메지마가 처음 외근을 시작한 것은 11년 전, 그것도 6개월 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반년 동안 신주쿠 외근 경관의 고달픔을 뼈가 저릴 정도로 깨닫게 되었다. 신주쿠에는 두 가지 법이 있었다. 형법과 폭력 - . 대부분의 이 지역 주민들은 이 두 가지 법에 모두 정통해 있었다. 신주쿠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예외 없이 밥벌이도 신주쿠 안에서 해결했다. 따라서 신주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두 가지 법에 정통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손등의 상처를 문지르면서 걷기 시작했다. 구경꾼들도 대부분 흩어졌으나 몇몇은 그런 사메지마를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TEC 회관의 위치는 카부키쵸 파출소를 비스듬히 건너다보는 곳이었다. 라이브 콘서트 홀은 그 빌딩 지하 이층이었다. 사메지마는 코마 극장. 도호 회관을 지나 파출소 옆 모퉁이를 돌았다. 아침 10시부터 근무하는 제2교대조 순경 한명이 파출소 앞에 서 있다가 사메지마를 발견하고는 거수 경례를 했다. 젊었다. 스물네댓쯤 되었을까. 카부키쵸 파출소에 나이 든 사람을 배속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최연장자라 하더라도 기껏 서른 대여섯 정도였다.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일어난 사건을 알려 줘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싸움판이 벌어졌었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두들겨 맞은 사내나, 두들겨 팬 녀석들이 벌써 떠나 버린 지금, 알려 주는 것이 새삼스럽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복 경관은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특별 경계 때문에 지쳐 있는 상태, 당사자가 떠나 버린 현장까지 달려가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안쓰러웠다. 가볍게 답례를 한 사메지마는 TEC 회관 계단을 한달음에 달려 내려갔다. 콘서트 홀 문을 밀치자 텅빈 객석이 나타났다. 불이 켜져 있는 곳은 무대뿐이었다. 기자재 정리도 벌써 끝나 있었다. 무대 가장자리를 걸터타고 앉아 늘씬한 두 다리를 흔들면서 쇼가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대담하달 수밖에 없는 초미니 가죽 스커트에 검정색 타이츠 차림이었다. 벗어올린 앞머리엔 보라색 망사가 씌워져 있었다. 사메지마를 발견하자 손에 들고 있던 글래스를 무대 위에 내려놓았다. "늦었잖아, 이 엉터리!" 입끝이 뾰족해지긴 했으나 그렇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공연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미안." 사메지마는 무대까지 몇 걸음 남겨놓은 곳에서 멈추어 서며 쇼를 쳐다보았다. 쇼는 올해 스물두 살, 지금 관계하고 있는 <후즈 허니>는 그녀의 두번째 악단이었다. 지난번 악단에서는 베이스와 보컬을 겸했었으나 <후즈 허니> 에선 보컬만 맡고 있었다. 눈.코가 또렷한 얼굴에는 격정적인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의상 따위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 저절로 섹시한 분위가가 물씬거리는 타입이었다. 때때로 사메지마가 <로케트 유방> 이라고 놀려대는 88 센티미터나 되는 가슴과, 60센티미터도 채 안되는 잘록한 허리 덕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더군다나 무대에 오를 땐 언제나 노브라였다. 브래지어를 하면 목소리를 제대로 질러대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일년째 사귀어 오고 있었다. "미팅은 끝났어?" 사메지마의 물음에 쇼는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다시 글래스를 집어들었다. 남아 있던 얼음 조각을 입 안에 쏟아넣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이어서 다리를 세차게 흔들어 반동이 붙자 무대 가장자리에서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사메지마가 받아 안아 줄 것을 믿고 하는 짓이었다. 실제로 그는 두 걸음 앞으로 몸을 내밀어 허공에 뜬 쇼를 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땀내가 뒤섞인 향수 냄새를 은은하게 풍기면서 낭창거리는 여체가 사메지마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이런, 또 이런다....." 야단을 치려던 사메지마의 입은, 그러나 쇼의 입술로 덮여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혀끝으로 사메지마의 이빨을 벌려 그 사이로 물고 있던 얼음 조각을 들이밀었다. 입술을 뗀 쇼는 사메지마의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목구멍 깊숙히 쿡쿡 웃음을 웃었다. "개구쟁이!" 사메지마는 얼음 조각을 씹어삼키고 나서야 간신히 한마디 쏘아 줄 수 있었다. "맛있었지?" 무대 위에는 아직도 라이브 하우스 관계자가 몇 명 남아 있었다. 그러나 쇼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쇼는 미끄러지듯이 바닥에 내려섰다. "어디로 갈 거야?" "배고프지?" "고파. 죽을 만큼." "불고기 어때?" "정말?" "다른 멤버들은 어쩌지?" "사 줄래?" 사메지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공연은 좋았겠지?" "80점." "훌륭해. 내가 축하해 주지." 사메지마는 발 뒤축을 들어 무대 안쪽으로 눈길을 쏟아보냈다. 쇼를 제외하면 <후즈 허니> 멤버는 고작 4명. 드럼. 기타. 베이스. 키보드 뿐인 단촐한 록밴드였다. "가고 없어, 모두." "왜? 보컬 여왕마마가 제멋대로라서 정나미가 떨어지기라도 했나?" 쇼는 장난스레 웃으며 맞받아 왔다. '출세 못한 경관 나부랑이가 사는 밥은 먹기 싫대, 모두들.' "요노옴!" 사메지마는 쇼의 멱살을 나꿔챘다. "아얏! 폭력 형사닷! 누군가 신고 좀 해 줘!" "자꾸 까불면 수갑 채워 쳐넣고 말겠어." "처넣은 뒤 한쪽 구석으로 몰고 가서 엉뚱한 짓 하려구?" "그럼. 경관 그게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해? 거칠기는 프로 레슬러 뺨칠 정도야." "어머, 어머....." 쇼는 허리를 낮추어 트위스트를 추어 보였다. 사메지마를 쳐다보면서 무릎 위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제법 눈요기가 되는군." 사메지마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요즘은 소년계 형사만 보면 가슴이 철렁해. 너 때문에 한바탕 야단을 맞지나 않나 하고 말야." "농담은. 순진한 산골 처녀보구." "자, 각오해?" 사메지마는 수도(手刀)를 내리치는 시늉을 하면서 외쳤다. 두 사람이 구야쿠쇼도리에 있는 불고기집을 나온 것은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쇼와 둘이서 갈비 4인분, 소혀구이 2인분에 맥주 4병을 말끔히 비운 것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의 쇼는 엄청 많이 먹었다. 전신을 흔들어대며 노래를 부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쇼는 식사를 하면서 공연 얘기를 했다. 1백50석 좌석이 모자라 50 명쯤은 서서 관람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후즈 허니>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달에 다섯 번, 라이브 콘서트를 열었다. 지난달엔 어느 프로덕션과 계약이 이루어져 반년안에 데뷔 앨범을 낼 계획도 진행되고 있었다. 30곡이나 되는 <후즈 허니>의 오리지날은 거의 대부분 쇼가 작사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는 사메자마가 수정한 것도 몇 편 있었다. 두 사람은 구야쿠쇼도리에서 야스쿠니도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일년 전, 쇼와 알게 된 무렵의 사메지마는 톨루엔 (환각제의 일종) 도매 그룹을 ㅉ고 있었다. 그룹이라곤 하지만 대부분이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의 소년들이었다. 중학교 동창들인 이들은 어떤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용돈을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페인트 가게에서 톨루엔을 훔쳐서 말단 판매원들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폭주족 출신의 열일곱 살 난 판매꾼 하나가 칼에 찔린 사건이 터졌다. 대퇴부를 찔린 소년이 실혈성 (失血性) 쇼크로 사망하자, 범인인 야쿠자는 신주쿠 경찰서에 자수했다. 도매 그룹은 그 사건을 계기로 해산하고 말았다. 그 그룹의 리더격이었던 사내가 바로 쇼 친구의 애인이었다. 그 자신은 톨루엔을 흡입하지 않았다. 대신 번 돈은 모두 밴드 기자재나 스튜디오 비용으로 썼다. 매니저를 자청하고 나선 그의 애인, 쇼의 친구도 호스테스 노릇을 해가면서 악단을 지원했다. 자취를 감춘 바로 그 리더를 쫓고 있는 사메지마는, 마침 쇼의 아파트로 옮겨간 그의 애인을 만나러 갔었다. 그 무렵의 쇼는 요요기역 부근에 있는 방 하나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인터폰 소리에 도어를 빼꼼 열고 내다보던 그날의 쇼 얼굴을 사메지마는 한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눈 언저리엔 시커먼 멍이, 입술은 찢어진 채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그것이 자취를 감춘 리더를 쫓고 있던 야쿠자한테 얻어맞아 생긴 상처임을 안 것은 물론 그 뒤의 일이었다. "수첩부터 보여 줘." 경관이라고 신분을 밝힌 사메지마에게 쇼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사메지마는 경찰 수첩에서 신분증이 있는 페이지를 열어 도어 틈으로 들이밀어 보였다. "혼자?" "혼자야." "이상하네. 형사는 언제나 두 사람이 한조로 움직이는 것 아냐?" 쇼의 퉁퉁 부은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그것이 웃는 모습임을 깨닫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난 언제나 혼자야. 누구한테 당했어?" "야쿠자." 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소속은?" "몰라. 그런데 무슨 일루?" "당신 친구..... 아키즈키 미카라는 아가씨를 찾고 있어." 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 줘." 도어가 닫혔다. 다시 열렸을 때는 쇼 대신 아키즈키 미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쇼는 방 한쪽 구석에서 헤드폰을 끼고 오선지와 씨름하고 있었다. 진바지에 탱크톱 차림이었다. 미카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들어가도 괜찮지?" 사메지마가 말하자 미카는 쇼를 돌아다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두 사람에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오선지에 뭔가를 열심히 써 넣고 있었다. "뭘 하고 있어?" "작사. 내일까지 가사를 붙여야 할 곡이 있어." 미카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메지마와 미카는 비좁은 부엌으로 가 마주 앉았다. "가쓰를 찾고 있지?" 미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리더의 이름이 가쓰지였다. "그래, 맞았어!" "체포할 생각?"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인 미카의 얼굴을 그녀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덮어 버렸다. 두 손으로 머리카락과 함께 얼굴을 감싼 채 그녀는 꼼짝도 안했다. 사메지마는 기다렸다. 한참 만에 얼굴을 싸안은 손가락 사이로 떠듬떠듬 그녀의 말이 이어져 나왔다. "가쓰가 하는 일, 나도 힘껏 도와 왔어. 가쓰의 음악, 무척 좋아했어. 나한테 잘해 주기도 했고..... 쫓기면서도 내가 제일이라고 말해 줬어. 그 일만 해도 가쓰는 악단 때문이라고 했어....." "쫓기고 있는 것, 알고 있지?" 미카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말을 이었다. "어제, 붙잡힐 뻔한 나를 쇼가 구해 줬어. 대신 두들겨 맞아가면서....." 사메지마는 쇼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방금 쓴 것을 지우고 있었다. "그녀는 사정을 알고 있나?" "아무 것도 몰라. 쟤는 무엇 하나 알려고도 않고 편만 들어 줬어. 일심동체라면서." 미카는 한숨을 푹 쉰 뒤 코를 훌쩍이면서 얘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제 끝났어. 가쓰를 지켜낼 수가 없어. 가쓰와 나 때문에 쇼까지 저런 꼴이 됐그....." "영문도 모른 채 친구를 감싸느라고 야쿠자한테 두들겨 맞았단 말야?" 미카는 얼굴을 감싼 채 고개만 끄덕였다. "경찰엔 신고했나?" "아니, 신고하자고 했지만, 쇼가 듣지 않았어. 신골 하면 나와 가쓰가 더욱 곤란해질 거라면서....." 사메지마는 미카가 도움을 갈망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처음엔 남자 친구가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했겠지만, 야쿠자가 노리고 있는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경찰에 체포되는 것만이 목숨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고 만 것이다. "어디 있지?" "도와 주겠어? 가쓰를....." "해 보지. 원한다면 너한테 들었다는 건 말하지 않을 수도 있어." "정말?" 사메지마는 고개를 주억거려 보였다. "약속하지!" 그건 진심이었다. 미카는 가쓰지가 숨어 었는 곳을 말했다. 키치죠지에 있는 라이브 하우스였다. "고마워. 이 길로 바로 가보지!" 사메지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함께 갈 테야!" 미카가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사메지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두는 게 좋아. 나와 함께인 걸 보면 가쓰가 오해하기 쉬워." "싫어. 데리고 가 줘." 사메지마가 다시 한번 설득하려고 했을 때 쇼가 끼어들었다. "내가 함께 갈 거야." 사메지마는 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널 때린 녀석들이 버티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쇼는 무표정한 얼굴로 태연히 말했다. "그렇다고 죽이진 않겠지. 더군다나 형사와 함껜데 뭐가 겁나?" "얼굴이 팔려, 놈들에게." "괜찮아. 팔려봤자지 뭐. 녀석들에게 빌붙어 살 것도 아닌데." 미카만 데리고 가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사메지마의 머리를 스쳤다. "그래, 같이 가자구!" 사메지마와 쇼는 구야쿠쇼도리에 있는 어느 작은 게이바로 들어갔다. 광부 출신의 마담이 경영하는 <마마포스> 라는 이름의 바였다.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바 안은 한산했다. 8명이 걸터앉을 수 있는 카운터에는 남자 한 사람이 위스키 워터 잔을 앞에 놓고 책을 읽고 있었다. 여장을 한 마담은 카운터 안쪽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역시 문고판을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머, 오랜만이군요." 두 사람이 들어서는 것을 본 마담이 책을 덮으면서 일어났다. 카운터 앞에 앉아 있는 남자도 사메지마가 아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이군, 도비다씨." 인사를 건네면서 사메지마는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자 손님 옆에 걸터 앉았다. "밉살스런 손님이에요. 술집 카운터에 앉아, 이것 보라는 듯이 판례집 따위나 뒤적이다니....." 마담이 울부짖듯 하소연했지만 사메지마는 단지 미소를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도비다는 국선 변호인이었다. 친구와 둘이서 니시신주쿠에 변호사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형사 전문이었다. 도비다는 마주 보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안경낀 보통 키에 머리는 가리마를 반듯이 타서 빗어넘긴 단정한 사람이었다. 법정 밖에서는 절대로 변호사 배지를 달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곳도 차츰 부동산꾼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더군. 내가 여기서 판례집을 뒤적이고 있는 건, 그걸 막아 주기 위해서야." "농담 작작해요. 부동산꾼들이 몰려오면 즐겁지 뭐예요. 돈다발을 뒤집어쓸지도 모를 텐데..... 그런 터수에 변호사가 끼어들어 버티는 건 또 무슨 심술이에요?" 도비다의 한마디에 마담도 지지 않고 맞받아 쳤다. 쇼가 도비다를 보고 머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음, 아가씨로군..... 별고 없지?" 도비다가 가쓰지의 변호를 맡았던 탓에 쇼와도 알게 된 것이었다. "그 일로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쇼는 정중하게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그런 쇼를 사메지마가 노려보면서 한마디 쏘았다. "상대가 형사가 아닐 땐 말씨도 정중해지는군." "시끄러ㅇ!" 그것이 쇼의 대답이었다. 마담이 폭소를 터뜨리면서 제임슨 한병과 얼음통. 글래스를 카운터 위에 내놓았다. 안주는 소라 조림이었다. "마담, <아가케무논> 이라는 술집 들어본 적 있어?" 위스키 워터 잔을 들면서 사메지마가 물었다. "알고 있어요." 문고판을 읽으려던 마담이 사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다. "어떤 가게야?" "저들끼리 모여서 하는 가게. 뜨내기 손님을 별로 없을 거예요. 위장을 한다 해도 금방 들통이 나고 말아요." 사메지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아는 이는 없어?" "카운터를 맡고 있는 애송이는 알고 있어요. 한때 신주쿠 2쵸메서 일했던 아이예요." "나 좀 도와 줄 수 있겠어?" "글쎄요. 어떤 일인데?" "어떤 손님이 들르면 나한테 알려 줬으면 해서....." "그건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내가 직접 가게로 찾아가서 이것저것 캐묻는 것보다는 나을텐데....." "당신이 찾아오는 걸 즐거워할 가게는 하나도 없어요. 물장사들은 야쿠자라면 질색이지만, 경찰도 반가워하지 않아요." "가게에 누를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 손님이 가게를 나오는 순간 덮칠 생각으로 있어." "뭘 잘못한 녀석인데요?" "권총 밀조(密造)." 모른 척하고 듣고 있던 도비다가 얼굴을 번쩍 치켜들었다. 사메지마는 그런 도비다를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 "그 녀석이 판 총에 한사람이 살해되고 또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어. 3주일 전에 말야." "이봐!" 도비다가 끼어들었다. 사메지마는 글래스를 들어 위스키 워터를 한모금 들이켰다. "그 녀석이야?" 사메지마는 여전히 대답을 않고 카운터 안쪽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왼쪽 어깨에 문신을 새긴 놈인가?" 그제서야 사메지마는 도비다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입을 뗐다. "맞아, 그 녀석이야. 당신 덕택에 형기가 짧아져 작년 말 출감한 놈이야. 나오자마자 또 그 짓이야." 머쓱해 하는 도비다를 바라보면서 사메지마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책임질 일은 아니야. 녀석은 총 만들기를 밥먹기보다 더 즐기는 놈이야. 교도소에 처박혀 있더라도 도구만 있다면 쇠창살과 칫솔 만으로도 총을 만들어 낼 게야. 녀석은 제가 만든 총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선 알려고도 하지 않아. 그 총에 사람이 죽든, 평생을 휠체어 신세를 지든 말야." "그런 놈은 교도소로 보내는 대신 손가락을, 열 손가락 전부를 아예 못쓰게 짓뭉개 버려야 해!" 도비다가 남의 일처럼 내뱉었다. 사메지마가 놀라면서 쳐다 보았다. 도비다의 얼굴은 진지했다. "내 직업이 변호사이긴 하지만, 의뢰인 모두가 억울하다곤 생각지 않아. 개중에는 검사의 구형보다 더 높은 형을 살리고 싶은 녀석도 있어." "녀석이 그런가?" "법으로만 따질 때는 놈에게 징역 4년은 너무 심해. 검사가 파악한 죄상에 비해서 말야. 녀석의 죄상은 권총을 밀조한 데 있지, 그 권총으로 인해 사람이 살해된 데 있는 건 아니야. 법으로 따지는 건 그런 거야. 변호사들이 하는 일도 그런 거구." "사람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사형을 시키고 싶은 놈이 있어요." 마담이 한마디 거들자, 도비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았어. 형법에서 제일 무거운 죄가 바로 살인이야. 하지만 법으로는 가장 가벼운 죄가 되지만 끔찍하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지르는 놈이 없는 건 아냐.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 자식을 죽인 부모와, 의지할 데 없는 노인의 전재산을 사기쳐 먹은 놈을 비교해 보자구. 법으로는 자식 죽인 부모의 죄가 더 무거워." "당신은 변호사보다 판사가 더 잘 어울릴 것 같군." 사메지마가 빈정거리자, 도비다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법고시에서 꼬리 쪽에 붙어 합격한 주제로는 판사가 될 수 없어." 사메지마는 머리를 한번 세차게 흔든 다음 마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쨌든 <아가메무논>의 애송이한테 한번 부탁해 줘." 가쓰가 키치죠지의 라이브 하우스에 숨어 있다는 것은 야쿠자들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미카와 쇼를 데리고 전철역에 내려 라이브 하우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역 주변도로에 주차해 있는 자동차 중에는 눈에 익은 메르세데스 벤츠도 섞여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줘." 두 사람을 남겨놓은 채 사메지마는 벤츠 쪽으로 다가가 운전석 창문을 두들겼다. 잠복시켜 놓은 부하 야쿠자들을 지휘하고 있던 간부가 얼굴을 내밀었다. "신주쿠 서(署)에 있는 사람이야!" 사메지마는 상대방이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내뱉듯이 말을 이었다. "여기 있지 말고 사무실로 돌아가!" 간부 야쿠자는 사메지마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그가 야쿠자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알지 못했다. "왜 그래? 당신, 교통과 소속? 신주쿠 서라면 관할이 다르잖아!" 옆에 타고 있는 젊은 부하 앞에서 체면을 지키느라고 세게 한번 버티어 보는 것 같았다. "내려!" 사메지마는 짧게 내뱉었다. 간부 야쿠자는 그 말을 무시한 채 내렸던 유리창을 다시 올리려 했다. 그 순간, 사메지마는 허리춤에서 특수 경찰봉을 뽑아 사이드 윈도를 단번에 부셔 버렸다. 특수 경찰봉은 사복 경관이 보통 때라도 갖고 다니는 도구였다. 지름 2센티미터에 길이가 15센티미터쯤 되는 2단 금속봉으로, 후려치면 길이가 40 센티미터로 늘어나기도 했다. 아끼고 있는 자동차 유리창이 박살나자, 간부 야쿠자는 얼굴색이 바뀌면서 뛰쳐나왔다. "이 새끼가!" 그러나 사메지마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부서진 유리창에 방아를 찧었다. 유리 조각에 얼굴이 짓이겨지면서, 야쿠자의 신음소리가 높아졌다. "불심검문을 했어, 불만 있어?" 사메지마의 일갈에 야쿠자는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불심검문에 반항했다간 공무집행 방해로 얽혀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도 내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애송이가 내리가 사메지마는 차체 위에 손을 올려놓도록 해서 두 사람의 몸수색을 시작했다. 애송이 상의 속에는 날 길이가 20 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등산 나이프가 숨겨져 있었다. "이건 뭐야?" "몰라." "잘났군!" 두 다리를 벌리고 있는 애송이의 샅을 뒤에서 걷어차 버렸다. "왜 그래? 아무리 그렇더라도 너무 심하잖아?" 부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것을 본 간부 야쿠자가 으르렁댔다. "대로 한복판에서 이래도 되는 거야? 폭력 담당 경관이라도 이러진 않아!" "난 말야, 폭력 담당들처럼 야쿠자의 체면 따위는 생각해 주지 않아!" 그 한마디에 간부 야쿠자는 숨이 막혀 버린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 소속이야? 이름은 뭐구....." "방범의 사메지마야! 필요하면 내 얼굴 잘 기억해 둬!" 사메지마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야쿠자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뚜렷해졌다. 경관과 야쿠자의 가치관이 비슷한 것은 양쪽 모두 수직 구조 사회이기 때문이었다. 명령은 절대적이며, 어떤 경우든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결과 명령계통 하부에 있는 현장 요원들은 비슷한 체질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나이의 체면>에 얽매이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보살핌을 받는다 (보살펴 준다)> <신세를 졌다> 는 등 협도(俠道)적인 발상의 근거가 되었다. 심지어는 경관과 야쿠자들 사이에서조차 체면을 세워 준다든가, 보살펴 주고 보살핌을 받는 관계를 낳게 했다. 폭력단 항쟁과 관련해서 많은 범인이 자수해 오는 것은 형량을 가볍게 해 보겠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수를 함으로써 담당 형사들의 체면을 세워 주고, 그것을 발판으로 공존 관계를 공고히 하자는 것이 더 큰 목적일 경우가 많았다. 경찰 수뇌부는 기회 있을 적마다 폭력단 근절을 외쳐대지만, 논캐리어 (非考試派 ; 일본의 경우 비고시파는 승진 등에 결정적인 제약이 따른다) 의 현장 요원들은 그 정도로 해서 폭력단이 호락호락 궤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또 조직이 해체되어 구성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제멋대로 뛰는 것보다는 한덩이로 뭉쳐 있는 것이 대처하기도 손쉽다는 것이 현장 요원들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폭력 담당 경관들은 사메지마처럼 냉혹한 짓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체면을 봐서라도 일단 물러나 줘> 라고 타일렀을 가능성이 많았다. 또 일반 형사라면 우선 폭력배 담당에게 통고한 뒤 행동하기 때문에, 야쿠자 사무실도 사전에 대비책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신주쿠 경찰서에서의 경우, 사메지마는 <체면 세우기>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유일한 형사였다. 사메지마의 이러한 행동 패턴은 신주쿠 경찰서 내에서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폭력단은 더더욱 싫어했다. 통상적인 인사가 통하지 않는 형사였다. 매수할 수 없는 형사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의례적인 인사조차 거부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 눈감아 줄 수 없음을 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메지마에 대한 불안이었다. 형사들이 맡고 있는 방대한 행정 사무량도 이러한 인사 관계를 심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영장 청구를 비롯하여 지원 요청. 검거. 심문. 진술서 작성 등등. 증거 상황에 따라서는 햇빛도 못 보고 엎어 버려야 하는 사건도 적지 않았다. 그럴 경우, 모든 노력이 수포로 끝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담당 검사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했다. 따라서 조서 작성이 손쉬운 자수범을 제외하면, 비록 폭력단원이라 하더라도 무턱대고 잡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밀착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 간부 야쿠자가 악을 썼다. 사메지마는 입을 꽉 다문 채, 녀석의 오른손에 수갑을 채웠다. 수갑 한쪽은 벤츠 차창에 걸었다. 애송이 야쿠자는 기가 질린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번만 봐 줘!" 수갑으로 자동차에 묶여 꼼짝 못하게 된 간부 야쿠자는 오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두구 가버리진 않겠지?" 사메지마는 차가운 눈초리로 야쿠자를 한차례 훑어보면서 입을 열었다. "왜, 안 돼? 공무집행 방해와 무기류 불법소지 현행범으로 체포된 거야, 넌!" "알았어. 곱게 물러갈께." "이미 늦었어." 사메지마는 몸을 획 돌려 걷기 시작했다. 수갑에 묶인 야쿠자가 바락바락 악을 썼지만 뒤돌아 보지도 않았다. "끝났어. 가보자구." 미카와 쇼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온 사메지마가 두 사람을 재촉하듯 말했다. "녀석들이 바로 그 녀석들?" 악을 쓰고 있는 간부 야쿠자와 그 옆에 멍청히 서 있는 애송이를 가리키며 쇼가 물었다. "그래." "가쓰는 괜찮을까?" 미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아직은 괜찮아. 경찰에 신고할까 봐 겁이 나서 녀석들도 라이브 하우스 안까지는 쳐들어가지 못하고 있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지. 아마 주변을 쫙 둘러싸고 있을 게야." "당신 혼자서 연행해 갈 수 있겠어?" 쇼가 물었다. 침착한 목소리였다. "해 보는 거지, 뭐." "별난 형사 다 보겠네." "그래, 별나게도 보이겠지" 사메지마는 라이브 하우스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홀쭉하게 치솟은 복합 빌딩 지하실의 라이브 하우스로 내려가는 계단벽은 온갖 낙서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차해 있는 도요다 크라운과 시마에 눈길이 끌렸다. 길 건너편 이층 다방에도 휴대용 전화까지 든 애송이들이 유리창을 통해 이쪽을 감시하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조금 전 그 벤츠에 카폰이 달려 있던 것이 생각났다. 간부 야쿠자는 현장과는 거리를 둔 곳에서 지령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브 하우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야쿠자 수가 8,9 명은 되어 보였다. 라이브 하우스 출입문은 굳게 닫힌 채 <준비중> 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야쿠자들은 가쓰지가 라이브 하우스에서 나오기만 하면 일제히 덮쳐 어딘가로 끌고갈 생각으로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사메지마는 피우던 담배를 발로 비벼끄면서 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쓰지 얼굴, 알고 있지?" "물론!" 쇼도 사메지마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어떤 녀석이야, 가쓰지란 놈은?" "목소리 하나는 알아 줘야 해. 블루스로 여잘 죽여 주거든! 시시한 녀석이지만 노래 하나는 그만이야." 사메지마는 시선을 돌렸다. 이층 다방 창가에서는 휴대폰을 귀에 바싹 갖다댄 야쿠자 한명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아. 아래로 내려가서 가쓰지를 데리고 나와 줘. 난 여기 이대로 있겠어. 녀석이 이 계단을 제 발로 걸어 올라오면 자수한 게 되는 거야. 하지만 내가 내려가면 그렇겐 되지 않는다고 녀석에게 전해 줘." 쇼는 깊숙이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미카는?" "나와 함께 여기 있는 게 좋겠어. 야쿠자 손에서 구해 주려고 왔다고 알려 줘. 그렇지 않았다면, 미카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을 거라고 말야." "알았어. 감시당하고 있다는 건?" "말해 줘도 좋아. 우리가 돌아간 뒤엔, 결국은 녀석들이 쳐들어갈 거야. 그렇게 되면 다리 하나 분질러지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거란 것도 일러 줘." 사메지마는 바로 옆에서 사람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어느샌가 쇼가 지하 계단을 절반쯤 달리듯이 내려가고 있었다. "이봐요." 채색 유리 램프에서 비쳐진 빨강과 초록의 얼룩 그림자 속에서 쇼가 불렀다. "왜?" "자기 아파트엔 한번도 데리고 가본 적이 없지?" "그렇군." 사메지마는 맨가슴 위에 올려놓은 재떨이에 재를 털면서 대답했다. <마마포스>를 나온 두 사람은 곧장 시모키다자와에 있는 쇼의 아파트로 온 것이다. 일층엔 렌털 비디오 가게와 아이스크림 집이 들어 있는 건물 이층이었다. 요요기에서 이쪽으로 옮겨온 지도 벌써 반년이 가까웠다. "아직 안 돼?"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내가 마누라라도 숨겨놨을까 봐서?" "바보!" 세미 더블베드 위에서 쇼가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이 사메지마의 왼쪽 어깨를 짓눌렀다. "나한테 숨기고 있는 게 많지, 아직도?" "그야 물론,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일을 모두 얘기하자면 36 년은 걸려." "어물쩍하는 건 그만 둬. 날 자기 아파트로 데려가지 않는 건,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야. 그 누군가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를 싫어하는 패거리들이지? 틀림없지?" "그런 녀석들에게 일일이 신경을 썼다간 너하고 카부키쵸를 함께 나다닐 수도 없어." "그럼 이유가 뭐야?" 사메지마는 대답 대신 담배를 길게 한모금 빨았다. 할퀸 손등 상처가 담뱃불빛 속에서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왜 그랬어, 그건?" 쇼가 상처를 가리키며 물었다. "싸움을 말리다 이렇게 됐어." "멍청하긴, 자기답잖게." "그래? 그러고 보면 내 몸엔 멍청이 상처투성이야." "목덜미도?" 사메지마는 싱긋 웃었다. 쇼는 처음 몸을 섞던 날, 머리를 길게 기른 까닭을 물었었다. 그는 말없이 머리카락을 걷어올려 목 뒷줄기를 보여 주었다. 목덜미를 15센티미터 길이로 비스듬히 가로지른 상처 자국이 나타났다. 그날, 쇼는 더이상 캐어묻지 않았었다. "목덜미는 뭘로 얻어 맞았어?" 그녀는 사메지마의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그녀의 검고 큼직한 눈동자에는 사메지마의 얼굴이 똑똑하게 비쳐져 있었다. 비누냄새가 은은한 쇼의 얼굴 표정은 진지했다. "일본도(日本刀)!" "진짜였어?" "아니, 날이 없는 모조품. 진짜였다면 이처럼 굵은 자국을 남기진 않아. 목이 날아가 버렸거나 했겠지." "모조품인줄 알고 휘둘렀어, 상대방도...?" "글쌔. 약이 바싹 오른 탓에 제 정신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죽일 생각이었다면 찌르기만 해도 성공했을 텐데 말야." "하지만, 목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야." "일단 어깨를 친 뒤, 튕기면서 목을 쳤기 때문이야. 정통으로 맞았다면 위험할 뻔했어." "역시 죽일 생각이었나 봐, 상대방은."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담뱃불을 비벼끄자 도기 재떨이 바닥을 통해 따뜻한 열이 가슴팍으로 전해 왔다. "상대는 야쿠자?" "아니." "보통 사람이 일본도로 자기를 죽이려 했어?" 사메지마는 한손으로 재떨이를 들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경관이었어." 가쓰지가 계단을 올라올 때까지, 사메지마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기다렸다. 출입문을 두들겨 안으로 들어갔던 쇼가 다시 밖으로 나오기까지는 거의 15분이나 걸렸다. "가쓰!" 미카의 부르짖음에 사메지마도 재빨리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홀쭉한 키에 짧게 깎은 머리를 치켜세운 사내가 쇼를 따라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수척해진 두 뺨에 굵진한 눈망울, 토라진 소년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응석과 넉살이 뒤섞인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쓰지는 무표정한 눈으로 사메지마를 쳐다보았다. 도망다니기에 지친 모습이었다. 한순간 가쓰지의 눈초리를 맞받아 쏘아보던 사메지마는 다시금 주위를 살폈다. 건너편 다방 창문가에 있던 야쿠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차해 있던 크라운과 시마의 도어가 열려 있었다. 다방이 들어 있는 빌딩 출입구에서도 야쿠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차 2대에서도 야쿠자들이 줄줄이 내려섰다. 차에서 내린 야쿠자들이 자동차 주변에 둘러서서 이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다방에서 내려온 야쿠자들은 사메지마와 가쓰지, 쇼와 미카를 둘러쌌다. 모두 5명이었다. 오른손에 휴대용 전화를 든 사내가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아직 무척 젊은 얼굴이었다. 스물 대여섯쯤일까, 흰 피부에 떡벌어진 체격, 두 눈은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었다. 세로줄 무늬가 든 더블 수트에 노타이 차림이었다. "열쇠를 부탁합니다." 젊은이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끔찍한 목소리였다. "열쇠를 받아오라는 형님 부탁입니다." 정중하긴 했으나 난폭한 말투였다. 그는 왼손을 내밀었다. "그것 뿐인가, 용건은?" 사메지마는 똑바로 사내를 쏘아보며 말했다. "네, 그 뿐입니다." 사내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수갑을 찬 채로는 간부 체면이 말씀이 아니죠." 사메지마는 사내를 쏘아본 채 바지 뒷주머니에서 수갑 열쇠를 꺼내었다. 젊은 나이에 애송이들을 거느리고 있는 걸 보면, 여차하면 언제든지 앞장 서서 교도소로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야쿠자 세계에서는 하나의 자랑일 수도 있었다. "이름이 뭐야?" 아직 열쇠를 손에 든 채 사메지마가 물었다. "마가베라고 합니다." 젊은이도 끝까지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다음 번은 바로 네 차례겠구먼." 마가베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신주쿠 서의 사메지마야." "알고 있습니다, <신주쿠 상어>."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사메지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한테서 들었어?" "눈과 귀를 자기 운동장 구석구석에 박아두는 것이 야쿠자의 의무죠," "네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그 녀석은 날 몰라보더군." "죄송합니다." 깨물어 누른 나지막한 소리로 마가베는 말했다. 두 눈은 여전히 사메지마를 노려본 채로. 사메지마는 젊은이 손바닥 위에 열쇠를 떨어뜨려 놓았다. "수갑은, 너네 사무실을 커버하고 있는 폭력 담당편에 보내 줘." "아닙니다. 제가 갖고 찾아 뵙겠습니다." "왜?" "창피당한 일,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지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창피 당했다고 생각하나?" "단 한 사람에게, 그것도 대로 한복판에서 꼼짝 못하고 당한게 창피가 아니면 뭡니까?" 사메지마는 천천히 숨을 한번 들이 마셨다. 뱃속 깊은 곳에서 긴장감이 천천히 밀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마가베는 평범한 야쿠자가 아니었다. 보통의 야쿠자라면 상대가 경관일 경우엔 체념해 버리는 것이 상례인데도 마가베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가?" 사메지마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마가베도 고갤 끄덕여 보였다. 일부러 으스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스며나오는 역량으로 말하자면 마가베는 이미 간부 야쿠자를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그럼....." 마가베는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는 눈으로 인사를 건넨 다음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갔다. 가쓰지 쪽으로는 끝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가베가 시마 뒷자석에 올라타는 것을 사메지마는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가베를 위해 도어를 열어 준 사내는 마가베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마가베와는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대결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스쳤다. 그리고 그 대결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가베의 얼굴을 사메지마는 머리 깊숙이 새겨넣었다. 지나가던 택시를 잡은 사메지마는 먼저 가쓰지를 안쪽에 태우고 자신도 올라탔다. 미카가 따라 타는 것을 보고 쇼가 입을 열었다. "난 집으로 갈께." "타고 가. 아직도 녀석들이 득실거리고 있어." "괜찮아." 내뱉듯이 말하면서 쇼가 발걸음을 떼어놓자 택시도 뒤따르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가쓰지는 눈을 감은 채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미카는 반대로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채 꼿꼿한 자세로 앞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가쓰지가 눈을 감은 채 불쑥 내뱉었다. "교도소에 가면, 살해되고 말거야!" 그 말에 끌린 듯이 미카는 가쓰지를 바라보다가 시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겠죠?" 가쓰지는 자포자기한 태도로 사메지마의 동의를 구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저 녀석들은 호락호락 물러갈 놈들이 아녜요. 내가 어디 있든 꼭 죽이고 말 거예요." 사메지마는 쿡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이 귀에 거슬린다는 듯이 가쓰지가 고개를 바싹 쳐들었다. "왜 웃어요? 말 같잖아서?" "녀석들은 네가 생각하듯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게다가....." "게다가 뭐예요?" "넌 그렇게 값어치가 나가는 놈도 아냐!" 가쓰지는 말없이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숨소리조차 거칠어져 갔다. 그러나 그 숨소리에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가쓰....." 미카가 조용히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쓰....." 거듭 부르는 미카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울음이 섞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가쓰지는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화났어? 나한테 화가 났어?" 사메지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쓰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체념이랄 수도, 자조랄 수도 있는 묘한 웃음이 얼굴 가득 번지고 있었다. ".....몇 년이 될지, 형기가 끝나면 다시 악단을 조직할 거야. 꼭 와야 해!" 한참 만에 입을 연 가쓰지의 말에 미카는 그만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메지마는 앞만 똑바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이튿날, 사메지마는 다시 쇼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아침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 진바지에 트레이너 차림의 쇼가 마침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사메지마를 알아본 그녀는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손에는 쇼핑백, 귀에는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외출하는 길인가?" "아침 사 먹으로 가는 참이야." 눈으로 길 건너편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리키면서 여전히 반말투로 대답했다. "함께 가도 괜찮겠어?" "왜? 나한테 볼일 있어?" 사메지마는 대답 대신 말머리를 돌렸다. "노랫말, 다 됐어?" "아직. 밤을 꼬박 새웠지만." 대답하면서 계단을 내려온 그녀는 곧바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스토랑은 한산했다. 안쪽 구석에 있는 부스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주문을 마친 쇼는 다시 이어폰을 꽂으며 쇼핑백에서 오선지를 꺼내었다. "들리니까 얘기 있음, 해도 돼." 그러면서 스테레오 스위치를 넣었다. 사메지마는 묽은 커피를 마시면서 쇼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왼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춰 가며 종이에 무엇인가를 갈겨쓰기 사작했다. 몇 개의 단어가 순서 없이 나열되었다. <최저> 라고 썼다가 지운 자리는 <밑창> 이란 단어로 메웠다. <강철의 눈물> <콘크리트의 허무한 웃음>을 비교해 보다가 <강철의 눈물>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어서 <행복이 아니면 안 된다지만> 이라고 써놓고는 얼굴을 찡그린 채 한참 들여다 보았다. 테이프를 되돌려 같은 부분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들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부분의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적당한 다른 표현이 선뜻 떠오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쇼가 끼고 있는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멜로디가 사메지마에게도 들렸다. 키보드 연주 소리에 맞춘 그녀의 허밍 소리도 같은 멜로디였다. 사메지마는 오선지에 적혀 있는 그 부분까지의 가사를 읽어 보았다. Get Away 모두 말하지, 빨리빨리 사라지는 게 더 좋다고. 여기는 도시 밑창. 울부짖는 소리, 밤마다 밤마다. Get Away 모두 말하지, 빨리빨리 사라지는 게 더 좋다고. 여기는 도시 밑창. 탄식하는 소리, 오늘도 내일도. But Stay Here 눈물 1백 리터쯤 단숨에 마셔 버려요. 행복이 아니면 안 된다지만, 누구 마음대로. 당신은 모르는 이 즐거움, 한밤중 지난 여기 있잖아요. Get Away 모두 말하지, 빨리빨리 사라지는 게 더 좋다고. 여기는 어둠의 밑바닥. 울부짖는 소리, 밤마다 밤마다. Get Away 모두 말하지, 빨리빨리 사라지는 게 더 좋다고. 여기는 어둠의 밑바닥. 탄식하는 소리, 오늘도 내일도. But Stay Here 눈물 1백 리터쯤 단숨에 마시죠, 행복이 아니면 - . But으로 시작하는 두번째 프레이즈에서 생각이 막혀 버리고 만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입을 뾰족 내민 채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오선지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쇼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테이블에 앉은 지 10분이 지나도록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아마도 쇼는 사메지마가 얘기를 꺼내기까지 작사에만 전념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같이 보였다. "레코드로 낼 생각?" 사메지마가 비로소 입을 열어 물었다. 쇼는 고개를 쳐들었다가는 살래살래 내저었다. 사메지마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다시 오선지 위로 눈길을 쏟았다. "두번째는 <어둠의 밑바닥>보다는 <한가운데>가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사메지마의 말에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윽고 볼펜을 들어 <밑바닥> 을 <한가운데> 라고 고쳤다. " - 막다른 골목, 생각이 꽉 막히고 말았어." "그런 것 같군. 알만해, 그 마음." 쇼는 얼굴을 들어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조금은 화가 난 표정이었다. "기분을 거슬렸다면 네 마음대로 해. 옆에서 끼어든 것, 사과할 테니까." 사메지마의 말에 뾰로통해 있던 쇼의 입술이 허물어졌다. "록이야, 이건. 트로트가 아니란 말야." "네가 소매 긴 기모노 차림으로 간드러지게 손을 내저으리라곤 생각지 않아." 쇼는 천장을 쳐다보면서 길게 숨을 내뿜었다. "오케이. 얘기부터 듣지. 무슨 일이야?" "어젠 아무 일도 없었어?" "어제? 아, 돌아올 적에? 별로." 쇼는 쌀쌀맞게 고개를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그게 궁금했어?" "얼굴 상처, 고소할 생각 없어?" "없어." "보복이 두려워서?" 쇼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꽤나 야쿠자가 싫은 모양이네, 이제 보니." "왜 그렇게 생각해?" "뭐랄까, 두들겨 잡을 찬스만 있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사람처럼 보여. 길바닥에 침만 뱉어도 붙잡아 갈 게 분명해." 사메지마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 고소할 생각 없어요. 보복 따위 두렵진 않아. 귀찮아서 그래." "그래?" 사메지마는 계산서를 집으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봐요." "왜?" "뭣 땜에 야쿠자를 그렇게도 싫어해?" 그는 한참 동안 쇼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싫어하는 건 야쿠자 뿐이 아냐. 법을 어겨놓고도 들키지 않았다 해서 시침 뚝 떼고 점잔을 빼는 녀석들은 모두 밉고 싫어!" "그렇담, 이 일본 안에 미운 놈. 싫은 놈 투성이겠네." "그래. 특히 이 나라는 야쿠자들에게 너무 관대해. 겉으로는 서릿발 같아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람을 죽여놓고도 큰소리치고 다니는 야쿠자가 수두룩하게 있어." 쇼는 아무 말 없이 귀만 기울였다. "야쿠자들의 장사 밑천은 위협이야. 자신들이 두려운 존재라는 선입견을 심어놓고 피를 빨아먹는 거지. 보통 사람들은 야쿠자와 맞서다 큰코를 다치기보다는 시키는 대로 하는 쪽을 택하고 말아. 거스르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그만큼 손해라고 믿고 있는 거야. 그 놈이 교도소로 엮여 간다 해도 이쪽이 입은 피해가 보상되는 건 아니란 뜻이지." "그건 당연하잖아?" "당연하다고 믿는 것 자체를 난 싫어해. 야쿠자들이 이용하는 것도 바로 그런 고정 관념이야. 건실한 사업가인 척하면서도 빚받아 내기가 어려울 적에, 또는 토지 명도(明渡)가 제대로 안될 적엔 야쿠자들을 부르지. 그런 녀석들은 야쿠자보다 더 몹쓸 놈들이야." "높은 사람들은 그렇게는 생각지 않을걸." "그래, 맞았어."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잡아들이는 건 언제나 피라미잖아? 진짜 큰죄를 저지른 정치가나 대기업가는 모른 척하고 있어. 내 말 맞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걸 떠들고 다니는 건 어린애들이나 할 짓이지. 세상이 그런 거야. 그래서 모두 약삭빠르게 눈치껏 사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건 현명한 일이 아냐. 그렇게 믿고 있는 녀석들은 언제고 제 발등을 찍히기 마련이야." "찍히지 않는다면?" 쇼는 도전하는 듯한 눈초리로 말했다. "내가 찍어 주지!" "그건 당신이 무술 경관이라서? 경찰 수첩만 펴들면, 언제고 권총을 쏠 수 있어서?" "아냐. 틀려!" "그럼 뭐야? 당신도 다치거나 살해당하는 건 싫겠지? 두렵겠지?" "두렵지." "어제, 야쿠자 자동차, 부셔 버렸지? 뻐기던 녀석 콧대도 꺾어 놓구 말야. 만약 당신이 경관, 그것도 사나운 무술경관이 아니었다면, 녀석들이 틀림없이 죽였을 거야." "그럴지도 몰라." "그럼 어째서 그런 걸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녀? 무술경관이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다고 믿기 때문이지?"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 다만 내 임무니까 한다는 투의 사고 방식은 좋아하지 않아." "중뿔나긴.... 그럼 도대체 뭐야?" 사메지마는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중뿔나는 것까진 괜찮아. 잘난 척 으스대지만 않는다면." 쇼는 깜짝 놀랐다는 듯이 사메지마를 쳐다보았다. "보통 시민들의 경우, 속도위반 딱지를 떼는 교통은 싫어해. 하지만 주정꾼에게 봉변당하고 있을 때, 구해 주는 경관에겐 고마움을 느껴, 그렇지?" "당신은 잘난 척 으스대진 않아?" "내가 잘난 척한다고 생각하는 건 나보다도 훨씬 더 잘난 척하는 사람들 뿐이야. 그런 녀석들일수록 자기들 이외엔 어느 누구도 위세 부리는 걸 용납치 않아." 쇼는 사메지마의 얼굴을 한참 동안 뚫어지듯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신주쿠 상어> 라고 불리게 됐지?" "이름 탓이야. 사메지마니까." "이유는 그것 뿐?" "그 뿐이야." "녀석들 눈엔 당신이 상어로 비친 때문 아냐? 슬금슬금 소리없이 다가와서는 덥석 깨물어 버리는 게....."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쇼는 웨이트레스를 손짓으로 불러 빈 접시를 치우게 했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사베지마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날 상어라고 부르는 녀석들이 신주쿠에서 하루 빨리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야." "나쁜 녀석들 말이지?" "응." 쇼는 연기를 내뿜으면서 사메지마의 눈 속을 뚫어질 듯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신주쿠도 시시해지겠지. 놀러오는 사람이 자취를 감추고 말텐데....." "그럴지도 모르지. 적어도 그 노래처럼은 안 되겠지." 쇼는 머리를 까딱거려 보였다. 그리고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웃을 적의 그녀는 소년처럼 티없이 맑았다. 눈 속 깊이 칼날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날카로운 표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록, 좋아해?" "그럼, 좋아하구말구." "지미헨 이외엔 록이 아니라고 생떼 쓰는 건 아니지?" "디프 퍼플까진 봐 줄 수 있어..... 물론 빈말이지만." "이번 라이브 공연 보러 와요." "그래, 가지!" 사메지마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사메지마는 약속을 지켰다. 2주일 뒤 라이브 공연을 보러 간 그는 <스테이 히어>의 가사가 <어둠 한가운데>로 바꿔졌음을 알았다. 공연이 끝난 뒤 대부분의 관객이 자리를 떴을 무렵, 타월을 목에 두른 쇼가 무대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채 사메지마를 불렀다. "어땠어?" 땀에 흠뻑 젖은 그녀가 물었다. "나쁘진 않았어. 그런대로 들을 만했어." "아는 척 그만해!" 쇼는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스테이 히어>>의 가사는 결국 지난번 사메지마가 본 그 상태에서 큰 진전이 없었다. <행복이 아니면...> 다음 부분은 1절을 되풀이하는 걸로 끝내었다. 사메지마는 웃옷 포켓에서 종이 접은 것을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참고해." "뭔데?" 쇼는 받아든 종이를 펼쳤다. 한번 훑어본 그녀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좋은 노래였어. 하지만 마지막 부분이 약한 게 흠이었어." "이것, 당신이 쓴 거야?" "그래. 다른 사람이 지은 노래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없애버려도 괜찮아." 쇼는 종이쪽지를 조심조심 다시 접어 가슴이 푹 패인 무대 의상섶에 꽂아 넣었다. 그 종이에는 완전히 새롭게 지은 <<스테이 히어>>의 2절 가사가 적혀 있었다. "같이 가요, 한잔 하러. 그 자리에서 리더에게 이 가사 보여 주는 게 좋겠어. 하지만 형사 티 낼 생각이라면 관두구." "아래에서 기다리지." 그것이 사메지마의 대답이었다. 쇼가 잠들기를 기다려 사메지마는 침대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벗어던져 놓았던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은 그는 소리나지 않게 조심조심해서 아파트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잠금장치를 풀어 막 도어를 열려고 했을 때, 쇼가 눈을 떴다. "가려구?" "응." "내달 초에도 라이브 공연이 있어, 프로 데뷔 발표를 겸해서. 꼭 와야 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쇼가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이번엔 늦지 말구, 개막 시간에 맞춰서 말야." "그렇게 하지." 사메지마는 같은 대답을 한번 더 되풀이했다. 베개에 머리를 처박는 소리가 울렸다. "거짓말쟁이!" "잘 자." 사메지마는 도어를 열었다. "안 오면, 112에 신고할 테야!" 쇼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2 신주쿠 경찰서 정원 6백명 가운데 제복 경관은 모두 2백85명이었다. 그 중 72명은 관내 3대 파출소로 알려진 카부키쵸. 히가시구치. 니시구치에 배속되어 있었다. 한 파출소에 24명씩, 5인 1조로 4개조가 낮근무. 제1당번. 제2당번. 비번(非番)을 로테이션에 따라 소화해 내는 것이었다. 신주쿠 서는 총경인 서장을 정점으로 경정인 부서장 밑에 경감이 과장을 맡고 있는 경무과. 총무과. 경비과. 방범과. 형사과. 교통과. 순찰과 등 7개 과가 있었다. 사메지마가 소속된 곳은 방범과였다. 소년 선도와 풍속사범 단속이 주업무였지만, 마약. 각성제. 신나. 톨루엔 등의 암거래 단속도 함께 했다. 사메지마는 나카노구 노가다의 원룸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3년 전 신주쿠 서로 전근된 이래 줄곧 거기서 살았다. 그 전에는 도쿄 경찰청 관사에서 생활했었다. 신주쿠 서 근무는 이번이 두번째였다. 그러나 지난번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사메지마는 스물네 살 때 경위(警衛)로서 신주쿠 서에서 실습 근무를 한 적이 있었다. 대학을 나와 국가공무원 상급시험에 합격한 직후였다. 일반적으로 고졸이나 대졸 경관의 경우, 고졸은 4년, 대졸은 일년 동안 순경 근무를 한 뒤라야 경장(警長) 승진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경위 승진 시험을 치려면 고졸은 3년, 대졸은 일년간의 경장 근무 경력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고졸이든 대졸이든 경위로 4년을 근무해야 비로소 경감 승진 시험을 칠 자격을 얻는 것이었다. 사메지마가 신주쿠 서에서 실습 근무를 한 기간은 경찰대학 수강기간을 포함해서 9개월이었다. 스물다섯 살 나던 해 경찰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경감이 되었다. 고졸일 경우 아무리 빨라도 서른 살, 대졸이라 하더라도 스물여덟 살이 되어야 올라설 수 있는 지위를 그는 대학을 나온 지 불과 일년 반만에 움켜잡은 것이었다. 경찰조직에 있어서 캐리어 (유자격자. 국가공무원 상급시험 합격자 - 역주) 와 논캐리어는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지난번 신주쿠 서 근무 때의 사메지마는 어디까지나 <손님> 격이었다. 국가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엘리트인 그를 함부로 풀어 놓았다가 경력에 흠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다른 경관들이 무척이나 신경을 써 주었다. 마치 상처 부위를 다루듯이 조심조심 대해 주었다. 따지고 보면 그런 대접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메지마와 같은 엘리트 경관은 경감으로 승진해서 2년간의 본청 수습 기간을 거친 다음, 지방과 중앙을 몇차례 왔다갔다 하면 빠를 경우, 20대 후반에 경정으로 승진하게 되는 것이었다. 경정이라면, 거대한 신주쿠 경찰서라 하더라도 부서장에 해당되는 직위였다. 따라서 그처럼 고속 승진의 장래가 보장되어 있는 엘리트에 대해, 아무리 베테랑이라 하더라도 하급 경관이면 누구나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모(母)회사 임원이 될 게 분명한 신입사원을 맞이한 자회사의 현장 주임과 비슷한 경우였다. 이러한 캐리어 제도야말로 일본 경찰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걸 사메지마는 그 후 8년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지금 계급은 경감이었다. 소속되어 있는 방범과 과장과 같은 계급이었다. 그러나 그는 방범과의 1개 수사요원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사메지마와 짝이 되려는 형사는 한명도 없었다. 왜 그렇게 되고 말았는가. 사메지마가 캐리어 제도의 낙오자인 동시에 일본 경찰 기구 자체에 반역한 경관이란 걸 모두가 눈치 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 사메지마는 어느 현(縣) 경찰본부로 발령을 받았다. 캐리어조(組)라면 경비국 공안 3과에 배속되는 것이 관례였다. 엘리트 경관의 대부분은 지방경찰 공안 파트의 요직을 거치면서 출세의 계단을 한걸음씩 한걸음씩 올라가는 것이었다. 공안 3과의 임무는 반정부 단체, 그 중에서도 좌경 단체 감시였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기구로는 공안조사청이 있었다. 여기에 소속된 공안조사원의 경우, 조사권은 있었으나 경찰관과는 달리 체포권. 수사권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좌익 인사에게 접근해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주로 이용하는 수법은 내부 밀고자, 다시 말하면 반정부 단체 조직원을 스파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조직원을 스파이로 만드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직접적인 매수나, 아니면 공통의 취미를 가장해서 친숙해진 뒤, 이쪽 신분을 밝히고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만약 거절하면, 동료들에게 공안조사관과 사귀고 있는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사람은 동료들에게 그런 사실이 알려지는 걸 두려워한 나머지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안조사관의 끄나풀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협력을 약속하면, 그때부터 걸맞는 보수도 지불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휘둘러 가면서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같은 목적을 가진 정부 기구가 2개씩 존재한다는 것은, 마약단속반과 경찰관 관계가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협력보다는 치열한 경쟁심 때문에 오히려 부작용이 더 컸다. 두 기구의 경쟁이 아무리 치열해도 공무원이 희생되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는 없었다. 경찰관이나 공안조사관은 기본적으로 반공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 없이 좌경 활동가를 제물로 삼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사메지마가 주임경감으로 있던 공안 3과는 어떤 과격파 좌익단체의 정보를 제공해 줄 내부 스파이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지방도시이긴 했으나 현청 소재지로서 인구도 많았고, 한때는 광산 노동자가 들끓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좌경 활동이 활발했다. 사메지마 휘하에 가메가이라는 경위가 있었다. 고졸이었지만 성실한 근무태도와 뛰어난 검거 실적으로 30대 중반에 벌써 경위로까지 출세한 사내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성격 자체가 우익적인 동시에 지나칠 정도로 권력지향성이 강한 타입이었다. 때문에 열렬한 반공주의자나 우익 활동가들에게 지나치게 동조할 위험성도 있었다. 현경 고위층도 이를 경계해서 가메가이를 같은 공안이긴 하지만 좌익 담당으로 돌려놓고 있었다. 부임 초, 지역 특성이나 부하 경관의 세세한 성향까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사메지마도 가메가이가 위험인물이란 것만은 차츰 깨닫게 되었다. 캐리어조의 엘리트 경관이 실제 수사활동을 지휘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들을 각 지방 현경에 배치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총경으로 승진하기까지의 수습과정과 같은 것이었다. 재임중에 부하가 불상사를 저질렀다 해도 명백하고 중대한 관련이 없는 한, <재수없게 된 처지>를 동정해 주었고, 따라서 출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가메가이는 나름대로 사메지마를 존경했다. 그러나 토박이 경관인 자기가, 이곳 저곳 옮겨다니는 신출나기 엘리트 경감에게 수사활동 하나하나를 보고하거나 결재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 지방은 음식과 술맛이 괜찮은 곳입니다. 경감님은 앞으로 일년 동안 여기서 푹 쉬십시오. 그 어려운 국가시험 공부하느라고 고생한 머리나 시켜가면서 말입니다." 사메지마가 부임하자마자 가메가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지방근무 발령을 받은 신출나기 엘리트 간부를 맞는 전형적인 태도이기도 했다. 그 지방 논캐리어 경관 입장에서 본다면, 단기간의 임기가 끝나면 떠나 버리는 엘리트 경관은 말하자면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다. 한번 스치고 가면 그 뿐, 지방 붙박이에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 이 경우, 캐리어조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뿐이었다. 첫째, 어디까지나 뜨내기 손님 입장을 지키면서, 그 지역 붙박이 경관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런 것은 완전히 무시한 채 재임기간 중, 직책을 완수하기 위해 부하를 휘어잡으면서 열심히 뛰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후자를 택했다. "말만 들어도 고맙군. 하지만 난 쉬러 온 게 아니야. 이 순간부터 내 직무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내가 여러분한테 배워야 할 게 많을 테니까, 우리 한번 잘해 보자구!" 사메지마의 그런 태도를 가메가이가 아니꼽게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사메지마는 그 즉시 수사중인 사건의 모든 자료 제출과 보충 설명을 요구했다. 그날 이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녀석이 건방지게 군다> 면서 가메가이가 떠벌리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도 사메지마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가메가이는 과격파 계열 좌경 단체에 스파이를 만들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빨갱이 녀석들, 언젠가 내 손으로 박살을 내야지!" 그것이 가메가이의 입버릇이었다. 몇해 전 내분으로 사상자까지 낸 적이 있는 그 단체에 대해 현경 공안부가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가메가이는 그 단체 멤버 중의 한사람과 지방 공안조사국 공안조사관이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멤버의 이름은 후치이라고 했다. 나이는 스물세 살 - 입시학원 교사였다. 과격파 단체 멤버인 동료 교사를 따라 모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었다. 그런 후치이를 제일 먼저 주목한 사람은 가네쿠라라는 베테랑 공안조사관이었다. 그는 후치이가 소속된 바다낚시 클럽에 가입해서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가네쿠라와 후치이는 틈틈이 함께 낚시를 갔다. 해상보안관 눈에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가메가이는 친하게 지내는 해상보안관 입을 통해 가네쿠라의 스파이 공작을 알게 되었다. 후치이는 아직 애송이였다. 소속단체 활동계획을 속속들이 알만한 위치도 아니었고, 그럴 정도의 신임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가네쿠라도 접촉하기가 손쉬웠다고 볼 수 있었다. 과격단체의 핵심 세포라면 낯선 사람과 접촉하는 것은 물론, 동료 활동가 이외의 사람에게 주소와 본명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가네쿠라는 서둘지 않았다. 후치이가 단체 멤버로서 위치를 굳혀 가는 것을 기다리면서 서서히 접근해 갔다. 자신이 공안조사관임을 숨긴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운나쁘게도 가메가이는 가네쿠라를 미워했다. "가네쿠라란 녀석, 거머리보다 못한 놈이야! 하는 짓이 음흉해!" 가네쿠라의 공작 정보를 들은 몇 주일 뒤, 가메가이는 동료 형사와 함께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후치이를 연행했다. 연행해 간 곳은 현경 본부가 아닌 가메가이의 친척이 경영하는 여관이었다. 여관 깊숙한 방으로 후치이를 데리고 들어간 가메가이는 자기가 공안경관임을 밝혔다. 이어서 가네쿠라가 공안조사관임도 알려 주었다. 그는 후치이가 충격으로 파랗게 질려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가메가이는 사진 2장을 후치이 앞으로 내밀었다. 한장은 가네쿠라와 낚시에 열중해 있는 후치이 모습을 망원렌즈로 찍은 것이었고, 다른 한장은 몇년전 내분 때 살해된 멤버의 시체 사진이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후치이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가네쿠라와의 관계를 너네 단체가 알기만 하면 너도 이 꼴이 되고 말아." 후치이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떨기만 했다. 가메가이는 후치이의 어깨를 감싸안아 주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임무 때문에 이러는 거야. 하지만 가네쿠라처럼 엉큼한 짓은 못해. 모임에 참석하게 되거든 가네쿠라가 아니라 나한테 정보를 흘려 줬으면 좋겠어. 그대신 무슨 일이 있든 널 지켜 주겠어. 어때?" "생,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아, 잘 생각해 봐. 허나 한가지 기억해 둘 게 있어. 우린 널 체포한 게 아니야. 따라서 다른 곳으로 도망치더라도 뒤쫓아 가거나 하진 않아. 그러나 너네 패거리는 달라. 어디로 도망치든, 땅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대갈통을 박살내고 말 게야. 알고 있겠지? 7,8 명이 몰려와서 우선 다리를 잘라 버리겠지. 옴쭉달싹 못하게 한 다음 한사람씩 한사람씩 차례로 쇠파이프로 대갈통을 후려칠 게 뻔해. 수박깨기 놀이와 다를 바 없겠지. 그 녀석들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어. 사정을 봐 줬다간 자신들도 배신자가 되고 말 테니까. 너무 끔찍해서 애송이들은 구토를 하면서 쇠파이프를 휘둘러댄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어. 게다가 그런 애송이에게 먼저 손을 대도록 하니까, 빨리 죽지도 못해. 머리통이 깨져 피투성이가 된 채 몸부림치면서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없어....." 후치이는 손을 들고 말았다. 가메가이의 끄나풀이 되기로 마음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사메지마는 그런 모든 과정을 동석했던 가메가이의 동료 형사로부터 듣게 되었다. 사메지마가 가메가이의 협박 사건을 알게 된 것은, 가네쿠라로부터 스파이 공작 방해 사건을 보고받은 지방 공안조사국장이 공안 3과에 비공식으로 항의를 해 왔기 때문이다. 진상을 알게 된 사메지마는 격노했다. 가메가이가 취한 방법은 비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위험부담도 엄청난 것이었다. 협박당한 걸 과격단체가 알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야말로 후치이의 생명은 바람 앞의 등잔불이 아닌가. 사메지마는 가메가이를 질책했다. 덧붙여서 후치이와의 접촉도 금지시켰다. 가메가이도 가만 있지 않았다. 과격파 조직을 짓뭉갤 수 있는 실마리를 가까스로 손아귀에 움켜쥐고 쾌재를 부르고 있던 가메가이였다. 그것을 애송이 상사가 나꿔채 버리자 불같이 반발했다. "일년이면 이곳을 떠나 버릴 경감이 콩놔라 팥놔라 하는 건 지나친 일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얼굴이 시뻘개져서 대들었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잘랐다. "앞으로 만약 후치이와 접촉한다면 - 비록 그게 전화 한통이라 하더라도 본부장님께 말씀드려 공안 3과에서 빼어 버릴테다. 알았나?" 시뻘개졌던 가메가이의 얼굴이 이번엔 새하얗게 변했다. 두 눈에는 증오심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가메가이는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방문을 나서면서 나직하게 내뱉는 소리가 사메지마의 귓전을 울렸다. "네놈 모가지가 얼마나 튼튼한가 두구 보자구!" 가메가이는 후치이의 생명을 걱정하는 사메지마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며칠 뒤, 후치이가 자택에서 무장집단의 습격을 받았다. 목숨은 가까스로 건졌으나 뇌좌상(腦挫傷) 때문에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운나쁘게도 함께 있었던 대학생인 후치이의 동생은 척추손상으로 평생을 휠체어에서 보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현장에는 후치이와 가네쿠라가 함께 찍힌 사진이 여러 장 흩어져 있었다. 현경 수사 1과와 공안 3과는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했다. 무장집단의 절반인 4명을 검거했다. 그 중에는 후치이를 단체에 가입시킨 학원 교사도 끼어 있었다. 나머지 4명은 다른 지방에서 응원온 무장활동의 프로들이었다. 지명 수배령이 내렸지만, 그 중의 2명은 결국 검거하지 못했다. 수사본부를 해체하던 날, 사메지마는 지하주차장에 있었다. 밤 8시가 조금 지난 시각, 가메가이가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수사본부 해산식에서 꽤나 마신 듯, 걸음걸이가 온전치 않았다. 가까스로 도어를 열고 올라탄 가메가이가 자동차를 출발시키자마자 사메지마가 앞을 가로막아 섰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사람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는 것을 본 가메가이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무슨 짓이야?" 창유리를 내리면서 가메가이가 호통을 쳤다. 사메지마는 짧게 말했다. "음주 운전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뭐라구?" 그제서야 사메지마를 알아본 가메가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려!" 사메지마는 짧게 말했다. 후치이가 습격당한 이후,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가 해산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은 공무 이외엔 한마디도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어쩌자는 거야, 도대체?" 사메지마가 뭔가 꺼내어 들고 있는 것을 노려보면서 가메가이는 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것은 수갑이었다. "말한 그대로야. 널 체포한다!" 가메가이는 차에서 내렸다. "훌륭하시군, 경감님." "사진을 보낸 건 네놈이지?" 가메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입가엔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네놈의 밀고로 후치이는 그런 꼴을 당한 게야!" 가메가이는 시침을 떼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술기운으로 붉게 물든 가메가이의 목 언저리가 땀에 젖어들었다. 장마가 끝날 무렵의 후덥지근한 날씨 - 지하주차장엔 습기찬 공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속이 시원하겠군. 계획한 대로 녀석들을 짓뭉개 버렸으니까." "시원하구말구...." 가메가이는 사메지마를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눈은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빨갱이 녀석들이 무슨 변을 당하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야. 저희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바람에, 공안 3과는 손 한번 안 대고 코를 푼 거야. 그런데도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주임경감님께선?" "네 녀석 때문에 공안 3과가 쓰레기통이 되고 말았어. 네놈은 사람도 아냐!" 순간, 가메가이의 입 언저리가 씰룩거렸다. 이어서 왼주먹을 사메지마의 명치끝에 처박았다. 신음과 함께 푹 고꾸라지자, 가메가이는 사메지마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비틀었다. "혼자 점잖은 척하는 게 아냐, 아직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주제에. 산 채로 파묻어 줄까? 이봐, 이곳 우익 중엔 토건업자가 많아. 그런 녀석들에게 부탁하면 네까짓 애송이 하나쯤 흙구덩이에 집어넣는 건 식은죽 먹기야!" 가메가이는 사메지마의 이마로 자동차 보네트에 방아를 찧었다. 사메지마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주차장 바닥에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가메가이가 한쪽 발로 가슴을 짓누렀다. "여긴 사납고 거친 고장이야. 길을 잃은 애송이 경관이 폐광 속에 널브러져 있다 해서 놀랄 사람은 한사람도 없어." 바닥에 쓰러져 쳐다보는 사메지마 얼굴에 퉤하고 침까지 내뱉었다. "우익과는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군." 사메지마는 숨을 몰아쉬면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마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빨갱이 새끼나 감싸는 애송이보다는 훨씬 낫지." 가메가이는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잽싼 눈길로 주차장 안을 휘둘러 보았다. 진짜로 사메지마를 없애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사메지마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움켜잡고 있던 수갑으로 가메가이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가메가이가 욕설과 비명을 내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사메지마는 한손으로 자동차를 끌어당기듯 체중을 버티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부임한 뒤 내 나름대로 이곳 사정을 조사해 봤어. 4년 전, 광산회사 노조위원장이 뺑소니차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더군. 사고차는 토건업자 트럭으로 밝혀졌지. 운전사는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수습사원이었구. 한참 뒤에 자수하긴 했지만, 사고현장은 토건회사나 그 운전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폐광 옆이었어. 유가족들은 피해자가 그날 밤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외출했다고 말하고 있어. 그날 밤 가메가이라는 형사가 현장 부근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 순찰중이던 패트롤카가 목격했다는 얘기도 있어. 물론 그런 사실은 철저히 은폐했겠지. 그 바람에 피해자를 전화로 불러낸 게 누군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어. 결국 단순한 교통사고로 처리되었더군." 가메가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이어서 자동차 쪽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사메지마는 차에 오르려는 가메가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가 뿌리치자 팔꿈치로 관자놀이를 내질렀다. 그 충격으로 반대쪽 측두부가 자동차에 부딪치면서 가메가이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메지마는 가메가이의 멱살을 잡아일으켜 세웠다. "잘 들어. 인간 쓰레기는 경찰관이 될 자격이 없어!" 가메가이가 으르렁 소리와 함께 사메지마에게 부딪쳐 갔다. 휘청대던 사메지마가 자동차에 기대어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 순간, 가메가이는 잽싸게 몸을 날려 두 팔로 사메지마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사메지마는 가메가이의 샅을 힘껏 걷어찼다. 세 번씩이나 걷어차이고서야 목을 조르던 가메가이의 손에 힘이 풀리면서 축 늘어졌다. 가메가이는 급소를 연타당한 통증으로 우거지상이 된 채 사메지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그 우거지 얼굴에 스트레이트를 내뻗었다. 주먹끝에 코뼈가 부러지는 충격이 전해지는 순간, 가메가이는 자기 차 위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그 뿐이었다. 가메가이에겐 몸을 추스를 힘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메지마는 거친 숨결을 내뿜으면서 바닥에 떨어뜨린 수갑을 찾으려고 뒤로 돌아섰다. "넌 죽었다!" 호통소리가 덮쳐 왔다. 뒤돌아 볼 사이도 없이 목줄기와 어깻죽지에 강한 충격을 느끼면서 사메지마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가메가이가 일본도를 머리 높이 쳐들고 있었다. 차 안에 있던 것을 어느샌가 뽑아든 것이었다. 칼집을 들고 있는 왼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 있었다. 코뼈가 부러진 데다가 피범벅이 된 얼굴은 완전히 딴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메지마는 몸을 굴려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했다. 일본도는 시멘트 바닥에 부딪치면서 불꽃을 튕겼다. 목줄기를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바닥 이곳 저곳에 핏줄기가 튕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메가이는 자기가 들고 있는 일본도가 날이 없는 모조칼임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두 손으로 고쳐잡으면서 허리 높이로 겨누었다. "단칼에 꿰뚫어 주지!" 칼끝으로 사메지마를 겨눈 채 덮쳐 왔다. 사메지마는 쓰러지면서도 다리훅치기를 시도했다. 격심한 통증 때문에 몸을 일으켜 맞붙어 볼 자신은 서지 않았다. 가메가이는 발이 걸려 주춤거렸다. 그러나 덮쳐오는 기세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일본도는 옆에 주차해 있던 패트롤카 사이드 윈도우를 꿰뚫었다. 유리창이 깨어지는 소리가 지하주차장 전체에 울려퍼졌다. 가메가이의 두 팔도 절반쯤 윈도우에 처박혀 버렸다. 뽑아내려고 몸부림치는 바람에 팔뚝 여기저기가 유리에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다. 사메지마는 수갑이 떨어져 있는 곳까지 엉금엉금 기어갔다. 목줄기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턱끝을 타고 바닥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시야가 좁아지면서 몸이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수갑을 찾아들어, 아직도 팔을 뽑아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가메가이의 발목과 패트롤카 범퍼를 엮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사메지마는 패트롤카에 기대어 사람들이 달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곧바로 실신하고 말았다. 일곱 달 뒤 사메지마는 본청 경비부 경위과로 전속되었다. 왕족 경비를 전담하고 있는 부서였다. 가메가이는 형사소추 없이 징계면직으로 매듭지어졌다. 경찰청 고위층에서는 당초 사메지마를 인사나 후생 등 내무관리로 돌릴 생각이었으나 적성을 고려해서 경위과로 배치한 것이었다. 거기서 2년을 보낸 사메지마는 공안부 외사 2과로 배치되었다. 계급은 변함없이 경감이었다. 3년 뒤, 사메지마가 서른세 살이 되었을 때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대외적으로는 경찰청 공안부 공안 2과 경정의 자살로 처리된 사건이었다. 자살 이유는 과로에서 온 노이로제로 얼버무렸다. 사메지마의 동기생인 그 경정은 경찰 기구의 출세 계단을 맹렬한 속도로 뛰어오르고 있던 사내였다. 죽기 며칠 전, 그는 사메지마에게 편지 한통을 맡겼다. 속셈은 뻔했다. 사메지마가 자기의 경쟁 상대에서 이미 탈락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는 자살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 또 사메지마가 진상을 알고 있음을 공안부 고위층도 알고 있었다. 사메지마가 경찰생활을 계속한다면 목숨조차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안부 내부 암투에 휩쓸려 들고 만 것이었다. 암투는 계속되었다. 죽은 경정이 남긴 편지를 먼저 손에 넣으려고 서로가 필사적이었다. 온갖 압력과 협박, 애원과 매수가 사메지마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 편지는 양쪽 모두에게 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쌍방의 압력과 감언이설을 모두 무시해 버렸다. 본청 상층부에 사메지마를 편들어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단 한 사람, 퇴임을 눈앞에 둔 외사 2과장만이 중립을 지켜 주었을 뿐이었다. 사메지마가 경찰관을 그만둘 생각이 없음을 확인한 외사 2과장은 일선 서(署)근무를 권했다. "경찰을 그만둔다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건 아니야. 오히려 위험이 배가 될지도 몰라. 그렇다면 일선 서로 가는 게 여기 (본청)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물론 전례 없는 일이었다. 단순한 좌천이 아니라 격가지 엄청 낮추어 버리는 인사였다. 성가신 존재인 사메지마를 눈앞에서 쫓아 버리는 데 대해서는 쌍방 모두가 찬성이었다. 때문에 인사는 이례적일 정도로 빨리 결정되어 사메지마는 신주쿠 경찰서로 전임 발령을 받았다. 신주쿠 서로 결정된 이유는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일본 최대의 유흥가를 관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소속 경관은 24시간 눈코뜰 사이도 없이 직무에 쫓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고위층은 사메지마를 자신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쫓아 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엉뚱한 생각에 골몰하도록 한직에 보낼 생각도 없었다. 사메지마는 신주쿠 서장실 소속으로 방범과에 배속되었다. 다른 과원들 입장에서 보면 추락한 우상이었다. 게다가 그 우상은 경찰 기구를 뿌리째 흔들어 버릴 폭탄을 안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그것을 불발탄으로 처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메지마의 그런 속셈을 주변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메지마가 그런대로 경찰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녀석은 위험해." "언젠가는 피살될지도 몰라." 로커룸에서 소곤소곤 번져가는 소문 때문에 사메지마는 더더욱 외토리가 되었다. 때문에 사메지마는 신주쿠 서 유일의 단독 유격 수사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겉보기에는 형사실에서 책상을 나란히 하는 동료가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외토리였다.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수사, 체포 활동을 사메지마는 대부분 단독으로 꾸려나갔다. 그의 행동은 동료 경관 보기에도 수수께끼였다. 그렇다고 사메지마가 뭐든지 애써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물으면 대체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문제는 사메지마에게 묻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데에 있었다. 3년간의 단독 행동으로 사메지마는 신주쿠 서 방범과 안에서 기록적인 중요 범죄 검거율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 눈 깜짝할 사이에 덮쳐 오는 그에게 두려움의 뜻을 담아 <신주쿠 상어> 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3 신주쿠에 온 것은 이번 주 들어 오늘이 벌써 세번째였다. 이달 들어 두 번씩이나 아르바이트에서 쫓겨났다. 두번째는 쫓겨나기 전에 고참사원으로부터 설교과 야단을 한 바가지 듬뿍 뒤집어쓰기까지 했다. "너처럼 적당히 요령만 피우는 녀석을 제일 싫어해. 인생도 적당히, 일도 적당히 요령껏 얼버무리는 녀석들은 꼴도 보기 싫어. 그건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란 말야! 거울을 한번 들여다 봐. 네 눈은 이미 썩었어. 썩은 녀석 따위, 우린 필요 없어!" 그러나 설교를 늘어놓는 고참사원 녀석을 그는 마음 속으로 경멸했다. 무슨 일에든지 정신없이 매달리는 주제에 혹시 사장이 한마디 하기라도 한다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는 대답밖에 모르는 멍청이였다. 함께 아르바이트하던 다른 친구들도 뒤에서는 그 고참 사원을 아첨꾼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렇게 욕을 먹을 만큼 간교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이 끝난 뒤, 술자리에 어울려 얼큰한 기분으로 그가 설교를 늘어놓았을 때,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느낀 것이었다. "잘 들어. 이 세상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야.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반드시 허공에 뜨고 말아. 아무도 안 본다고 요령을 피우더라도 결국은 들통이 나게 마련이야. 예를 들어, 오늘 들여온 물건의 전표만 하더라도....." 아르바이트 친구들은 황송한 태도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저 아첨꾼이 최소한 술값의 절반쯤 부담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전액을 부담해 주면 더욱 좋겠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참 사원이 째째한 것도 그렇지만, 회사 자체가 구두쇠로 소문난 곳 - 때문에 아무리 고참이라 하지만 월급 액수를 생각하면 선뜻 술값을 내겠다고 나설 용기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체면 때문에 절반쯤 부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참 아첨꾼은 물론 아르바이트들의 속셈을 읽지 못했다. 그는 단순한 거드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거드름꾼이기 때문에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말도 많아졌다. 말투도 그가 존경하는 사장의 복사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껏 거드름을 부리다가도 어느 순간엔 진지한 얼굴이 되기도 했다. "너희들은 참 좋은 녀석들이야. 일도 열심히 하구....." 그럴 때면 웃길 정도로 바보처럼 보였다. "이봐, 넌 아직 맨숭맨숭 하잖아? 한잔도 안 마신 것 아냐? 못 마신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마셔 봐. 마시면 마실수록 마시게 되는 게 술이야." 그는 체질적으로 술이 받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뭘 혼자 중얼중얼하누? 하나도 안 들려. 좀더 큰소리로 말해 봐. 체질? 그건 핑계야, 핑계. 핑계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내가 항상 말했지?" 고참사원은 머리를 한번 내저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알 수 없군, 이 녀석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그러면서 가엾다는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예요. 나름대론 이 친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표정이 좀 어두운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의 옆에 앉았던 녀석이 아양을 떨면서 대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는 첫눈에 그녀석이 자기의 동지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취미까지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녀석은 그의 초대를 즐겁게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가 자랑삼아 내보인 모델건. 수갑. 포스터 등엔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영화나 비디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친절했고, 어떤 경우든 싫은 얼굴은 하지 않았으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녀석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 녀석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서 자기 판단이 틀림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평이 채 안 되는 녀석의 방 한가운데엔 양복장만큼이나 큼직한 불단(佛壇)이 놓여 있었다. "얼마나 주고 샀어, 이걸?" "1백 20만엔." 그는 어이가 없어,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월부로 샀어. 갚아 나가기가 꽤나 벅차. 하지만 이걸 들여놓고 나서 나도 많이 변했어. 다른 사람 얘기에 귀를 기울이게 됐고, 싸움도 않게 됐어. 뭐랄까, 뱃심 같은 게 생겼어." 그는 그 불단을 어디서 어떻게 사들였는지 물어보려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묻는다면, 녀석은 신이 나서 떠들어댈 것이 뻔했고, 그를 자기 세계에 끌어들이려고 덤빌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녀석은 같은 타입의 인간은 걸핏하면 패거리를 만들려고 덤비는 것이었다. 무슨 연구회나 교류회 따위를 만들어 집회를 통해 패거리를 늘려가는 걸 유일한 보람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분 나쁜 족속이었다. 때문에 녀석이 대놓고 <표정이 어둡다>고 했을 때, 그는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똑같은 바보들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바보임도 모르고 있는 바보에게 더이상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이봐, 설마 암사내는 아니지?" 고참사원이 불쑥 그렇게 말했을 때 순간적이긴 했으나 그는 움찔했다. 자기가 암사내가 아님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 눈에는 암사내로 보일지도 몰랐다. 녀석이 고참 사원에게 뭐라고 촐싹댈까 신경이 쓰였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약간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만약 녀석이 <그래요, 이 녀석은 암사내가 분명해요> 라고 했다면 녀석이 불단을 모셔놓고 있는 걸 폭로해 버릴 작정이었다. 녀석도 그의 각오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불단을 모시고 있는 게 알려지면 아르바이트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그러니까 입다물고 있어 줘." 그날, 녀석은 그를 전철 역까지 배웅해 주면서 몇 번이고 다짐하지 않았는가. "염려 마. 나완 상관없는 일 아냐?" 그는 녀석을 안심시킨 후 사철(私鐵)에 올랐다. 그 날, 그는 곧장 자기 집으로 향하지 않고 폴리스숍 <막스 맨>이 있는 신주쿠로 갔다. <막스 맨> 점장 이가와씨는 이 세상에서 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이가와씨는 그를 에드라고 불렀다. 그가 수집한 비디오 가운데서 누가 보아도 그럴 듯한 <귀신경감 아이언사이드> 시리즈에 등장하는 형사 이름이 바로 에드였다. <귀신경감 아이언사이드> 초기 시리즈에는 아이언사이드와 에드 이외에도 이브라는 여자 형사가 등장한다. 풀네임은 이브 화이트필드였다. 아이언사이드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샌프란시스코 시경의 경감이었다. 에드는 바로 그의 조수였다. 그믐밤에 만져 보아도 형사임을 금방 알 수 있는 전형적인 경관인 에드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그 밖에도 그의 비디오 컬렉션에는 <모즈 특별수사대> <하와이 5-0> <특별수사대 형사 샘> <브로브 수사지령> <형사 스타스키 앤드 해치> 등이 들어 있었다. 또 일본 작품으로는 <<태양을 향해 울부짖어라>> 중의 <마카로니 형사와 지판 형사> 편, <<특별기동수사대>> 2부, <<낙오형사>> 가운데 <비정의 라이센스> 초기 시리즈를 갖고 있었다. 같은 시리즈 중에 아마치 시게루가 주연한 <<독불장군>>을 오래 전부터 갖고 싶어했으나 좀체로 눈에 띄지 않았다. <막스 맨>은 폴리스 패션과 모델건 전문 가게였다. 주로 제복 경관의 비품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손님들도 대부분이 유니폼 매니아들이었다. 경찰봉이나 홀스터 등의 인기 상품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그만큼 말썽도 많았다. 그러나 그의 취향을 익히 알고 있는 이가와 점장은 사복형사용 비품이 입수되면 그 즉시 연락해 주었다. 지금까지 그가 <막스 맨>을 통해 입수한 최고의 컬렉션은 커버까지 달린 사복형사용 홀스터와 경찰수첩이었다. 경찰수첩 표지에는 <후쿠시마 현경> 이라고 쓰여 있었다. <경찰청> 로고가 들어 있는 걸 꼭 갖고 싶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LAPD (로스엔젤레스 경찰국) 배도 갖고 있었다. 홀스터는 펑퍼짐한 삼각형이었다. 때문에 뉴넌브 단총을 꽂아 넣기엔 적당치 않았다. 이가와씨는 그 홀스터가 1945년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 경찰의 휴대 총기는 지금처럼 뉴넌브로 통일되지 않아, 개중에는 오토매틱을 차고 다닌 형사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오토매틱은 미군을 통해 입수한 콜트 M1911과 전전(戰前)부터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던 브로님 1910 모델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가 입수한 홀스터는 브로닝에 제격이었다. 그가 형사를 부러워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TV의 형사물 드라마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 형사가 상대방 코 앞에 경찰수첩을 슬쩍 내보이는 순간이 그럴 수 없이 통쾌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복 경관은 시시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유니폼을 입고 있기 때문에 누가 보든 금방 경관임이 들통나고 마는 것이었다. 어수룩하게 생긴 사람이 결정적이 순간에 수첩과 배지를 불쑥 내밀면, 허를 찔린 악한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린다 - 바로 그런 점이 폭풍처럼 그의 쾌감을 자극해 주는 것이었다. 어수룩한 차림이긴 하지만 물론 권총은 차고 있었다. 웃옷 앞자락을 잽싸게 걷어젖히고 번개같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드는 것이었다. 그는 수도 없이 거울 앞에서 연습을 쌓아 왔다. 마침내 왼손을 쭉 뻗으며 오른손으로 허리 뒤춤에서 권총을 뽑아내는 를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연출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럴 경우 권총은 대형 오토매틱보다 마그넘 2.5 인치 리볼버가 제격이었다. "경찰이닷!" 수첩을 내보인다. 깜짝 놀란 악한이 허둥대며 권총을 겨눈다. 다음 순간, 웃옷자락을 젖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긴다. 허둥대던 악한이 맥없이 쓰러진다. 그러면 동료를 돌아보며 한마디 멋지게 내뱉는 것이다. "구급차를 불러!" 그러나 그가 쏜 탄환은 상대방 가슴을 관통했기 때문에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악한은 숨지고 마는 것이다. 일본 형사처럼 수갑을 가죽 케이스에 넣어 허리에 꿰차고 다니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었다. 역시 미국 형사처럼 케이스 없이 수갑만 차고 다니는 것이 - 그것도 한쪽은 바지춤에 끼워넣고 있는 것이 훨씬 멋지게 보였다. 짝을 이룬 권총과 수갑이 옷자락 사이로 자연스럽게 눈에 띄어야만 형사답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번잡한 신주쿠 거리를 오가면서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던 무심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 그가 사복경관임을 눈치 채게 된다면 -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해맑은 아가씨가 권총을 보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친다면, <괜찮아, 난 경찰관이야> 그렇게 은근히 말하면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싶었다. 비행기 안에서 일어난 비슷한 씬을 영화 <<다이하드>> 에서 보고 그는 혼자 유쾌하게 낄낄 웃은 적도 있었다. 사람들이 머리에서 짜내는 건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그가 신주쿠에 온 것도 <막스 맨>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별생각 없이 그는 이가와씨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뭐 재미있는 것 좀 없어, 이가와씨?" "참, 에드라면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군. P.C 내부 사진과 무선녹음 테이프를 입수했어." "테이프라니?" "P.C와 P.S 관할서간의 무선통화야. 단골로 드나드는 워처가 가지고 온 건데 꽤 재미있어." 그 지역 내의 경찰이나 소방.구급차간의 무선통화는 시중에서 팔고 있는 무선기, 그것도 핸디 사이즈를 조금만 개조하면 얼마든지 도청할 수 있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카폰도 물론 엿들을 수 있었다. "어떤 내용인데?" "교통사고와 날치기야. 감찰관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얘기도 들어 있어. 웃기지?" "들려 줄 수 있어?" "물론. 이쪽으로 와." 그의 집에서 신주쿠까지는 세이부신주쿠선을 이용하면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신주쿠 역 히가시구치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께였다. 근처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때우고 <막스 맨>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세이부신주쿠 역에서 쇼쿠안도리를 따라 <막스 맨>이 있는 기오 신사 쪽으로 걸어갔다. <막스 맨>은 기오 신사 근처 허름한 빌딩 이층에 있었다. 그 빌딩 일층은 인디즈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레코드 가게와 CD 가게, 지하엔 만화 전문서점이 들어 있었다. 카부키쵸 러브호텔가 바로 옆이긴 했으나 그 빌딩 주변만은 어쩐지 분위기부터 달랐다. 그가 신주쿠에 자주 들르기는 했어도 <막스 맨>과 영화관 그리고 서점 이외에는 결코 찾지 않았다. 게임 센터엔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술집이나 디스코텍 따위는 더더구나 남의 일이었다. 다만 자신이 진짜 형사였다면 범인을 쫓아 디스코텍에도 들어가 보고 싶었다. 정신없이 몸을 뒤흔들고 있던 아가씨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둥대는 가운데 범인과 격렬한 총격전을 벌이는 것이다. 범인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 있는 아가씨를 구출하려다가 왼팔에 총을 맞는다. 결국엔 범인을 자기 손으로 사살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자기 대신 부상한 형사를 향해 아가씨가 울먹이며 달려온다. "괜찮아. 찰과상인데 뭘....."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그 아가씨를 어떻게 해 보자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를 구한 것은 단순한 직무이기 때문이다. 짝사랑에 빠진 그녀가 상사병을 앓는다 하더라도 새로운 직무가, 그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직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에겐 여자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막스 맨>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온갖 상상을 즐겼다. 방구석에 처박혀 상상하는 것보다 이처럼 거리를 걸어가면서 상상하는 것이 훨씬 더 즐거웠다. <막스 맨>의 단골 가운데는 상의 속에 모델건을 차고 다니는 녀석도 있었고, SWAT 복장을 한 녀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유니폼이 전혀 어울리지 않거나, SWAT 로서는 몸집이 빈약한 탓에 오히려 우스꽝스레 보였다. 감색 수트에 S&W의 M59를 차면서도 흰 양말. 검정구두를 신는다면 개가 보고도 하품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만약 자기가 진짜로 형사가 된다면 흰 양말은 절대로 신지 않을 생각이었다. 또 검정양복은 형사보다는 FBI가 입어야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형사는 진바지에 재킷을 걸치는 게 오히려 터프하게 보여 멋이 사는 것이었다. 미국 형사는 언제나 권총을 휴대해야 하기 때문에 웃옷이 필요하지만, 일본 형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권총을 갖고 다니지 않았다. 일본 형사도 TV 드라마에서는 항상 권총을 차고 있으나 물론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기오 신사 바로 앞까지 왔을 때 적색 경광등이 번쩍번쩍 불을 뿜고 있는 게 보였다. 한 개 뿐이 아니었다. 몇 개인지 금방 셀 수도 없었다. 흑백 패트롤카 뿐만 아니라 회색. 검정색 등 위장 패트롤카와 감식용 왜건까지 몰려 있었다. 가슴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세차게 울렸다. 그곳은 카부키쵸 2쵸메의 호텔가였다.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몰려든 경찰차 대수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인사 사건이 틀림없었다. 그는 경찰 발포 사건 기사는 반드시 스크랩해 두고 있었다. 거의가 위협 사격이었고, 대부분이 정복 경관의 짓이었다. 사복 경관이 총을 사용하는 것은 유괴 농성사건 때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돌파작전을 벌일 때 정도였다. 그런 대사건은 일년에 한번 있을까말까 했다. 우선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러브호텔에서 시체가 발견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카부키쵸 러브호텔에서 여인이 살해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호텔 종업원이 언제까지나 방안에 처박혀 있는 손님을 미심쩍게 생각새서 방안을 엿보았더니 이미 숨져 있더라는 게 러브호텔 살인 사건의 패턴이었다. 그는 붉은 경광등 불빛에 빨려들 듯이 사람들이 몰려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한창 현장검증을 하고 있었다. 로프를 친 안쪽 도로 위에는 분필로 사람 형체가 그려져 있었다. 그 주위에는 시커먼 핏자국이 퍼져 있었다. 사건은 러브호텔과 러브호텔 사이를 가로지른 도로 위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분필로 그려진 사람 형체는 둘이었다. 그 주위에는 A.B.C 문자가 쓰여진 삼각형 플래스틱 판이 놓여 있었고, 완장을 찬 감식과 직원이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교통사고일까? 현장을 보면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때, 그는 분필로 그려진 사람 형체 옆에 자전거 2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흰 페인트가 칠해진 그 자전거가 경찰용임을 그는 금방 알아보았다. 현장 옆 러브호텔에서 남자 두 사람이 예순쯤 되어 보이는 여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 남자가 형사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어폰을 꽂고 있었고, 그 중의 한사람은 경찰수첩까지 들고 있었다. 탐문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사건일까. 카메라 스트로보가 번쩍번쩍하는 가운데, 형사들이 도로에 코가 닿을 듯한 자세로 이곳 저곳을 살폈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구경꾼 제일 앞줄에 서게 되었다. "자, 물러나 주세요. 뒤로 물러나 주세요." 로프 옆에 서 있던 <방범> 완장을 찬 정복경관이 두 팔을 벌리며 소리를 질렀다. 손에는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저어..... 무슨 일입니까?" 그는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그러나 정복경관은 못 들은 척, 무표정한 얼굴로 러브호텔 간판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경관이 살해됐어!" 바로 뒤에 서 있던 사내가 귀띔을 해 주었다. 머리를 짧게 쳐 올린 폼으로 봐서 야쿠자 같았다. 겉보기는 사나웠으나 말투는 그렇지 않았다. "경관이?" 그는 앵무새처럼 되받아 물으면서 사내를 바라보았다. "총에 맞아 죽었어, 두 사람 모두." 그는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자전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다면 저 자전거는 피살된 경관이 타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로프 바로 안쪽에는 정복경관 이외에 감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도 서 있었다. 왼손에 들고 있는 무전기에서 심한 잡음이 울려나왔다. 잡음이 끝나자 극히 사무적인 말투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인지 내용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감색 작업복 남자가 취한 행동을 보자, 상황 연락임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네. 현장에 나와 있는 하무라입니다." "지금부터 본청. 공안. 기동 수사대가 합류해서 그쪽으로 갑니다." "네. 알았습니다, 오버." 감색 작업복은 무선통화를 끝내자 다시 팔을 아래로 내렸다. 눈은 여전히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총기에 의한 경관 살해사건 - 그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았다. 폭력단 짓일까. 아니, 과격파가 범인일지도 몰라. 현장 주변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이건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었다. 동료가 살해당한 것이었다. 만약 이것이 영화나 TV 였다면 현장으로 달려온 주인공 형사가 <빌어먹을!> 하고 한마디 내뱉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진짜로 혀차는 소리를 들었다. 혀를 찬 사람은 감색 작업복을 입은 하무라라는 형사였다. 초조한 눈초리로 현장을 노려보던 그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찬 것이었다.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범인은 꼭 잡고야 말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소름이 끼칠 것 같은 긴장과 흥분 때문에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머리 속만은 이상한 열기에 휩싸이면서 고속회전을 시작했다. 저기 있는 로프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수사원의 한사람으로서, 형사의 한사람으로서 범인을 쫓고 싶었다. 상대는 권총을 가진 경관 살해범이 아닌가. 모든 형사가 내일부터 권총을 휴대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여 방향을 잡기 위해 수사회의도 열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회의에도 참석하고 싶었다. 멤버의 한사람으로서.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진짜 살인 현장이었다. 단 한가닥의 로프가 이처럼 엄격하게 안팎을 구획지으리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경찰수첩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경찰청이 발급한 것을), 로프 옆에 서 있는 정복경관에게 슬쩍 보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정복경관이 경례를 붙이면서 로프 가닥을 들어올려 줄 게 분명했다. 사이렌 소리가 울려왔다. 평소 때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같이 다급하고 절박하게 들렸다. 고개를 돌린 그는 그동안 구경꾼이 배나 늘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자, 비키세요, 비켜!" 정복경관이 장갑낀 손을 쭉 내뻗으며 외쳤다. 구경꾼이 양편으로 쫙 갈라지면서 길이 틔었다. 여섯 사람이 그 길을 지나 로프 안쪽으로 걸어갔다. 감색 아니면 회색 양복차림이었다. 체격 좋은 회사원 같은 인상이었다. 앞장 선 사람을 보고 하무라가 정중하게 경례를 했다. "몸소 나오셨군요." "현장 책임자는?" 안경을 낀 마흔댓쯤 되어 보이는 선두의 남자가 물었다. "형사과의 소도야마 계장입니다. 저쪽에 있습니다." "알았어. 수고해!" 남자는 로프를 타넘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여섯 사람의 등장으로 현장 분위기는 한층 더 팽팽해졌다. 누굴까, 저 사람들은. 계급도 높고, 이런 중대 사건을 지휘하기에 걸맞는 형사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거기 있는 사복경관 한사람 한사람은 모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여섯 사람이 나타나자 비록 더욱 긴장된 것 같았지만 움직임은 한결 재빨라졌다. 내가 앞장 섰던 바로 그 사람이라면..... 아니, 그건 시시한 역할이야. 권총을 뽑아들고 직접 범인을 뒤쫓는 일은 하지 않을 게 틀림없어. 나는 역시 현장을 커버하는 사람이어야 해. 범인을 추적하는 수사관이 훨씬 더 멋지지 않는가. 안경낀 남자는 로프 안쪽, 분필로 그린 사람 형체 옆에 서서, 줄곧 그곳에 있던 쉰쯤 되어 보이는 형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기도 거기 있고 싶었다. 확실한 현장, 확실한 직무수행자로서 로프 안쪽에 서서 아직은 알 수 없는 범인의 꼬리를 잡기 위해 이것저것 함께 의논해 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수사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의 그 자신은 너무도 분명한 국외자임을 단 한가닥의 로프가 뚜렷하게 구획짓고 있었다. 로프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된 멤버 뿐이었다. 그는 경관이 아니었다. 자나깨나 부러워하고 있는 형사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권총을 휴대할 수 없다 하더라도, 회사원 같은 차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로프 안쪽에 넣어만 준다면, 형사이고 싶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카메라맨이든, 신문기자라도 좋았다. 수사원이 아니라 한사람의 목격자만 되어도 좋았다. 뿐만 아니라 수사원에게 정보 하나 제공할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까웠다. 만약 자신이 무엇인가를 목격했거나, 들은 것이 있다면, 나아가서 자기 손으로 직접 범인을 잡을 수 있다면..... 지금쯤 로프 안쪽에 서 있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는 생전 처음으로 범죄, 그것도 살인 현장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이 국외자 - 단순한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이윽고 TV 중계차까지 달려왔다. 또 다른 의미에서 현장 분위기가 출렁거렸다. TV 카메라와 마이크를 손에 든 리포터 팀이 로프 주위를 둘러쌌다. 살인 현장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양복차림의 아나운서와, 어딘가 화사하게 보이는 여성 리포터들이 TV 카메라를 향해 열심히 떠들기 시작하자 구경꾼들의 관심도 그쪽으로 쏠려갔다. 특히 여성 리포터가 헤어스타일과 화장에 몹시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을 신기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는 또 다른 사실 한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TV 리포터들은 로프 안쪽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 자못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백주 도심에서 경관이 사살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고 열을 올리고는 있지만 로프 안쪽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도 없었고, 또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경관과 피해자, 그리고 범인뿐인 것이었다. 그는 줄곧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졌어도 로프는 그대로 있었다. 로프를 걷어치울 때까지, 로프가 걷힐 때까지. 그는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마음 속으로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다. 배는 고팠고 화장실에도 가야 했다. 그러나 그런 생리적인 욕구보다는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것이 어쩌면 일생에 단 한번뿐일 수도 있는 범죄 현장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똑똑히 새겨두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했다. 4 아오야마 1쵸메에 있는 빌딩 일층의 카페테라스를 지정한 사람은 <마마포스>의 마마였다. 사메지마가 쇼와 함께 <마마포스>를 찾아간 사흘 뒤의 일이었다. 그날 아침 7시에 <마마포스>의 마마가 직접 사메지마 아파트로 전화를 걸어왔다. "제법 일찍 일어났군." 상대방이 누군지를 안 사메지마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일찍이 아녜요. 가게를 닫고 집으로 돌아온 게 조금 전이니까, 일어난 것도 아니구요." "밤을 샜다는 얘기로군." "지금부터 저의 밤이에요..... 지난번 말씀했더너 그 일, <아가메무논>의 애송이건 말예요." "손이 닿을 것 같아?" "오늘 낮에 만날 수 있어요. 당신은 낮, 제겐 한밤중이지만." "몇 시?" 사메지마는 막 조깅을 끝내고 들어온 참이었다. 운동복이 땀에 흠뻑 젖어 있어 그냥 있으면 감기 들기가 딱 알맞을 정도였다. 매일 아침 한시간 정도 달리기를 하는 것이 사메지마의 첫 일과였다. "4시께가 좋댔어요. 가게로 나가기 전 신주쿠쯤에서." "신주쿠는 안 돼! 내 얼굴을 알고 있는 녀석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 쪽이 귀찮아질 게 분명해." "알았어요. 아오야마 1쵸메쯤은 어때요? 제 아파트와도 가깝구....." "부러운 곳에 살고 있군." "세상 눈을 속이려니까 어쩔 수 없어요." "좋아. 어디서?" "아오야마 트윈 타워 일층에 카페테라스가 있어요. 두 집 가운데 중정쪽을 향해 있는 곳이에요. 홍차를 맛있게 끓여 주는 집이에요." "알았어. 4시랬지?" "3시로 해요. 이쪽으로 정한다면." 경찰서에서 어정대던 사메지마는 2시 조금 못 돼서 긴급통보를 듣게 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카부키쵸 2쵸메 X - X 번지, <호텔 몬타나> 앞에서 13시 5분께 총성이 울렸다는 신고를 112를 통해 접수. 그 직후, 신고자인 <호텔 몬타나> 종업원이 순찰중이던 경관 2명이 호텔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구급대에 연락했음. 쓰러져 있던 경관은 카부키쵸 파출소 소속의 오노우에 후사오 순경과 사카 도시미치 순경으로, 오노우에는 앰블런스가 도착했을 때 숨졌고, 사카는 병원으로 실려가던 도중에 사망. 신주쿠 서 수사과와 경찰청 수사 1과 합동으로 현재 현장검증 중. 전서원(全署員)은 앞으로의 통보에 유의하는 한편으로 관내 수상한 자에 주위를 기울일 것. 두 사람 모두 20대인 오노우에와 사카를 사메지마도 카부키쵸 파출소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사메지마는 외출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책상은 다른 과원과 달리 과장 옆자리에 놓여 있었다. "사메지마!" 모모이 과장이 불렀다. 방범과 형사실은 썰렁했다. 대부분이 일 때문이거나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간 뒤였다. 사메지마는 대답 대신 모모이 쪽으로 시선을 쏟았다. 푸석푸석한 머리에 어두운 얼굴을 한 모모이는 올해 쉰두 살이었다. 계급은 사메지마와 같은 경감으로, 신주쿠 서에서 18년 동안 근무해 오고 있었다. 논캐리어이긴 했으나 한때는 장래가 촉망되던 경찰관이었다. 그러나 14년 전에 돌발한 교통사고에 그는 장래와 희망을 동시에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고속도로 톨케이트 앞에 멈추어 있던 모모이의 승용차를 졸음 운전하던 트럭이 들이받은 것이었다. 트럭 운전사와, 모모이의 여섯 살 난 아들은 현장에서 숨졌고, 그의 아내는 중상을 입었다. 그 뒤 모모이는 이혼까지 했다. 그 이후 모모이는 넋빠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모모이는 웃음과는 담을 쌓고 있었다. 얼굴 표정이 바뀌는 일도 없었고, 모임에도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 관할서 방범과장쯤 되면 스스로 청소년 선도에 앞장을 서거나 각종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모모이는 그렇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돋보기를 끼고 책상 앞에 앉아 서류만 뒤적일 뿐이었다. 사메지마가 방범과에 배치된 것은 모모이가 떠맡아 주었기 때문이란 얘기가 그럴 듯하게 퍼진 적이 있었다. 다른 부서 책임자들은 팀워크가 무너질 염려가 있다면서 배척한 게 사실이었다. 모모이를 대신해서 방범과 대외활동은 과장 보좌로 있는 신조라는 경위가 맡아 꾸려나갔다. 신조는 사메지마를 처음부터 무시하고 있었다. 방범과에서 열심히 뛰어 점수를 따서 언젠가는 공안으로 영전해 가는 것이 신조의 꿈이었다. - 우리 과도 큰일이야. 넋빠진 과장에다가 거추장스런 군더더기까지 새로 끼어들었으니..... 신조가 혼잣소리처럼, 그러나 주위 사람이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로 큰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사메지마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엔 모모이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모모이 얼굴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카 순경 말인데....." 모모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사메지마는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사카도 캐리어조는 아니었지만, 대학을 나온 뒤 경찰에 입문한 젊은이였다. 구(區)의회 의원인 사카의 아버지는 가장 유력한 차기 구청장의 후보였다. "기즈를 쫓고 있다면서?" "네." "잘 될 것 같은가?" "녀석은 출감하자마자 다시 걸찍하게 장사판을 벌였습니다. 다른 꽤나 믿는 데가 있거나, 아니면 떼돈을 긁어 나라까지 팔아먹을 생각인지도 모르겠어요." 모모이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사메지마는 한마디 덧붙였다. "녀석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좋도록 해." 사메지마는 모모이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복도를 나왔다. 서내에는 긴장이 넘실대고 있었다.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비상대책과 수사본부 설치에 대비하고 있었다. 현재, 서내엔 수사본부가 하나도 없었다. 신주쿠 서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타지역에 비해 중대범죄가 두드러질 정도로 많은 것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교엔 원유회가 무사히 끝난 것을 기뻐할 틈도 없이 서장은 이번 사건으로 다시 머리를 싸매게 된 것이다. 경관 피살사건쯤 되면 원유회와의 관련까지 포함해서 본청 공안이 움직일 게 틀림없었다. 고압적인 태도가 몸에 밴 공안 엘리트가 수사에 끼어들면 반드시 갈등과 마찰이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모두들 <공안은 진공청소기> 라고 뒷전에서 쑥덕대었다. 정보를 빨아들일 줄만 알았지, 상대방에겐 티끌 하나라도 내뱉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공청소기>가 수사진에 참여하게 되면 효율적인 수사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발로 뛰면서 잡다한 정보를 긁어모으는 일은 모두 수사경관에게 맡기면서, 머리를 돌려 그것을 분석하고 방향을 잡는 일은 자기들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공안 엘리트의 버릇이었다. 같은 본청에 근무하면서도 수사 1과와 공안 사이에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 수사 1과가 공식적으로 자료 요청을 한다 하더라도 공안이 응해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사메지마는 서에서 나와 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신주쿠 서는 니시신주쿠에 자리잡고 있었다. 카부키쵸가 있는 히가시신주쿠에 위치하고 있는 게 편리하다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 일대는 교통사정이 나빴다. 패트롤카 따위가 쓸모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주쿠도리와 야스쿠니도리의 교통정체는 이미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112신고를 받고 패트롤카가 출동을 서둔다 해도 차고에서 빠져나가는 것부터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해서 카부키쵸에는 매머드 파출소를 설치한 것이었다. 또 사건이 빈발하는 심야에는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훨씬 기동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오야마 1쵸메에서 지하철을 내린 사메지마는 약속장소인 카페테라스로 들어섰다. 케이크를 진열하고 있는 유리 쇼케이스에서부터, 널찍널찍하게 배치된 테이블에 이르기까지 멋의 거리 아오야마 냄새가 물씬거렸다. 손님들도 비지니스맨 일색이 아니라, 쇼핑 나온 주부도 듬성듬성 섞여 있었다. 주부라지만 앞치마 따위는 한번도 둘러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사모님들이었다. 주고받는 얘기도 새로 산 별장이나 골프 회원권에 대한 것일지 몰랐다. 마마는 안쪽 자리에 혼자 달랑 앉아 있었다. 클로스를 덮은 테이블 위에는 전화로 자랑하던 홍차 포트가 놓여 있었다. 마마는 큼직한 선글래스, 챙달린 모자, 헐렁한 블라우스에 팡탈롱 차림이었다. 화장기는 전연 없었다. 사메지마가 맞은편에 앉자, 읽고 있던 하드 커버에서 눈을 떼어 건너다 보았다. "홍차를 드세요. 설탕을 듬뿍 친 밀크티로 말여요." 턱시도를 입은 웨이터가 다가오자 마마가 권했다. 사메지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웨이터도 말없이 물러갔다. "번거롭게 했군." "괜찮아요. 그것보다 큰일났죠?" 마마가 책을 덮으면서 말했다. "온갖 잡놈이 활개치는 세상이니까 별수없지 뭐." 마마는 사메지마의 옷차림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밝은 그린 수트에 마직 노타이 셔츠를 받쳐입고 있었다. "색깔이 좋으네요. 그 아가씨가 골라줬어요?" "내가 직접 고른거야." "사메지마씨도 보기보단 멋쟁이네요. 전 멋쟁이가 좋아요." "그렇게 겁 주는 게 아니야!" 마마는 싱긋 웃음을 흘렸다. "염려 마세요. 저도 그 아가씨 속상하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면서 마마는 왼손을 가볍게 쳐들었다. 사메지마가 고개를 돌려보자 머리를 짧게 깎은 깡마른 소년이 막 카페테라스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아이예요. 이름은 후유키. 사메지마씨야말로 저 아이에게 겁 주는 짓은 말아야 해요." 소년은 흰 셔츠에 몸에 찰싹 달라붙는 진바지를 입고 있었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었으나, 겁먹은 참새처럼 동그란 눈과 붉은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세요?" 소년은 테이블 옆으로 다가와서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머리를 꾸벅 숙였다. 가냘픈 목소리였다. "앉아, 거기. 겁먹을 것 없어. 이분은 내 오랜 친구야. 널 못 살게 굴거나 짓궂게 굴 사람은 아냐." 사메지마도 머리를 주억거려 보였다. "그래, 맞았어. 옛날, 마마한테 한번 바람맞은 뒤론 꼼짝 못하게 된 사람야." 후유키라는 소년의 입 언저리에 맺혔던 긴장이 풀렸다. "그렇게 된 경관도 많은가 보군요." "멍청하긴. 농담도 못 알아듣구......." "허지만 많은 건 사실 아냐?" 사메지마는 마마의 말을 가로 막았다. 후유키는 말없이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사메지마는 명함을 내밀었다. 집과 방범과 전화번호만 적힌 것이었다. 경관이란 단어나 직책은 표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후유키는 명함을 받아들면서 머리를 숙였다. "후유키라고 합니다. <아가메무논> 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마마한테 들었어. 솔직하게 말하지. 기즈라는 사내에 대해 알고 있나? 왼쪽 어깨에 전갈 문신을 새겨넣은 녀석인데....." "알고 있습죠. 자주 들르는 손님입니다." 후유키는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근 들른 건 언제였어?" "어제. 11시쯤이었어요." "일요일인데두?" "저희 집은 일요일에도 열어요." "혼자였어?" "어제는..... 그래요. 혼자였어요.'" "오면 오래 머무나?" "대중 없어요. 한시간쯤 앉았다가 일어설 때도 있구, 가게를 닫을 때까지 버틸 때도 있구....." "가게는 몇 시에 닫는데?" "영업은 새벽 3시까지예요." "우리 가게도 그래요." 마마가 끼어들면서 말을 이었다. "3시까지라지만, 마음에 드는 손님이 있을 경우엔 얼마든지 연장할 수도 있어요." "한주일에 몇 번쯤 오나?" "한번 아니면 두번. 허지만 어젠 한 열흘 만이었을 거예요." "애인이 있다면서?" 후유키는 머리를 꾸벅했다. "어떤 사람이야, 애인이란 게?" "가즈오라는 이름으로, 한때 우리 가게서 일했던 아이예요. 폭주족 출신이라나 봐요. 무섭게 생겼어요." "나이는?" "가즈오 말예요? 스물, 아니면 스물 하나일 거예요." "최근에 가까워진 사인가?" "그런가 봐요. 가즈오가 엄청 존경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어요." "기즈를 " "네" "가즈오에 이끌려 드나들게 된 건가. 기즈가 자네 가게 단골이 된 건?" "그런 것 같았어요." 후유키라는 소년은 말끝마다 <같았어요> <보였어요>를 갖다 붙였다. "뜨거운 사이였나, 기즈와 기즈에게 페라치오 서비스하는 걸 본 적도 있어요." "흔히 있는 일인가?" "그렇지도 않아요. 마마가 싫어해요, 가게서 그러는 걸, 원래 험상궂은 가즈오가 기즈씨와 함께 있을 땐 더욱 거드름을 피워요. 그래서 마마도 못 본 체했나 봐요." "가즈오가 가게를 그만둔 이유는 뭐야?" "손님들이 불평했기 때문이에요." "불평?" 후유키는 마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괜찮아, 애기해도." "언젠가 손님이 가즈오를 데리고 나간 적이 있었어요. 호텔로 갔나 봐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가즈오가 보이지 않더래요. 지갑에 넣어둔 돈도 없어졌구." "경찰에 신고했었나?" 후유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손님, 평범한 회사원이었어요. 부인과 자식들이 알까 봐 쉬쉬 끝내고 말았어요. 경찰에 신고한다는 건 처음부터 생각도 안했나 봐요." "지금 함께 살고 있나, 기즈와 가즈오가?" "모르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가즈오는 기즈의 정체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업을 도와 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두 사람은 어디서 처음 만났대?" "스낵바였대요. 가즈오는 우리 가게를 그만둔 뒤 한때 스낵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어디 있는 스낵? 이름은 뭐구?" "가게 이름은 몰라요. 위치는 몬나카 쪽이라고 들었어요." "몬나카?" "몬젠나카쵸. 기바 쪽에 있는." "지금은 그만뒀겠군." "네." "집은 어디쯤이야?" "들은 적이 없어요. 물어보긴 했으나 가르쳐 주지 않았는지도 몰라요." "오늘은 여기서 곧장 가게로 갈 생각인가?" 후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혹시 기즈가 가계를 들르면 알려 줄 수 없을까? 가즈오 혼자라도 괜찮아.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친구에게 얘기하듯 자연스럽게 알려 주면 좋겠어." "왜요?" 후유키는 불안한 얼굴로 되물었다. "가계는 어느 정도야, 크기가?" "아주 작아요. 20명만 몰려와도 앉을 자리가 없어져요. 때문에 은밀한 얘긴 할 수도 없어요."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기즈나 가즈오가 나타나면 내게 전화를 걸어 빌려간 비디오를 돌려달라고 해. 그러면 아무도 눈치 못 챌 거야." "비디오를 돌려달라구요?" "그래. 사메지마라는 내 이름은 입 밖에도 내지 말구." "그 사람도 알고 있나요. 아저씨 이름을?" "알고 있어." 사메지마는 자기 손으로 기즈를 교도소에 처넣은 적이 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후유키는 사메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겠죠?" "필요한 게 뭐야?" "돈!" 마마가 사메지마에게 뜻 있는 눈길을 보냈다. "얼마나?" 후유키는 한쪽 손을 펴보였다. "5만 엔?" "50만 엔." 사메지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은 어려워. 잘 들어. 기즈는 나쁜 사람이야. 녀석은 권총을 밀조하고 있어. 녀석이 만들어 판 총에 많은 사람이 죽어갔어. 앞으로도 수도 없이 죽어갈 게 틀림없어. 난 그걸 막고 싶어 이러고 있는 게야!" "만약 내가 밀고한 게 들통난다면....." "염려할 것 없어. 어떤 일이 있어도 너네 가게에선 체포하지 않을 테니까. 가게 밖에서 덮칠 생각이야. 네가 알려 줬다는 건 꿈에도 모를 거야. 이번에 잡히면 적어도 앞으로 5년 동안은 나올 수 없어!"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내가 귀띔한 게 탄로나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기즈씨는 야쿠자 맞죠?" "녀석은 야쿠자도 아냐. 어느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아. 야쿠자 상대로 장사를 하는 건 틀림없지만, 누구와도 서약의 잔을 나눈 적이 없는 녀석이야. 때문에 녀석을 대신해서 복수할 사람은 한사람도 없어." 후유키는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쯤 주실 수 있나요, 제 보수로?" "10만 엔." 후유키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지금 줄 수 있어요?" "절반이라면. 나머지는 녀석을 잡은 뒤에." 공안이라면 이런 종류의 수사협력비쯤은 즉석에서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범과에서는 도대체 얼마쯤 부담해 줄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절반만이라도 지출해 주면 좋으련만..... 영수증 없이 경비를 쓸 수 있는 곳은 공안 뿐이었다. "주세요." 사메지마는 지갑을 꺼내었다. 5만 엔을 건네 주고 나자 1천엔짜리 몇 장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 돈을 받아들자 후유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서야 사메지마는 후유키가 차 한잔도 주문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잠깐. 네 주소와 이름을 알려 줬으면 좋겠어." 후유키는 선 채로 이름과 주소를 말했다. 서슴없이 주워섬기는 것을 봐서 가짜가 아니라고 믿었다. 후유키의 주소는 고엔지였다. "전화번호는?" 국번이 3으로 시작되는 스기나미 번호였다. 역시 가짜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고마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구 연락 기다리고 있을께." 후유키가 카페테라스를 나가자, 사메지마는 재빨리 수첩을 꺼내어 메모를 했다. "매사가 분명하군요." 마마가 감탄했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50만엔이라니..... 어린 녀석이 배포 한번 크게 놀죠? 돈만 움켜쥐고 자취를 감춰 버릴 생각이었나 봐요." "그런 일도 종종 있지." 사메지마는 수첩을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조금 있다가 <아가메무논>에 전화를 걸어 후유키가 출근했는지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만약 출근하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아가메무논> 근처에 잠복해서 기즈의 출현을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후유키가 기즈에게 달려가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경우였다. 기즈는 자기가 쫓기고 있는 걸 알면 꼬리를 감출 게 틀림없지 않는가. 그렇게 되면 다시 한동안 구름잡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메지마가 싱오쿠보 사우나에 들른 것도 기즈의 행적을 더듬어 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째서 하필이면 신주쿠에서 어정대고 있는 걸까? 예쁘장한 사내라면 록봉기나 아카사카에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마마는 기즈의 행적을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녀석일수록 이 세상은 좁은 거야. 착실한 사람이라도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은 정해져 있잖아?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바닥녀석들은 평범한 사람 이상으로 낯선 곳을 싫어하거든. 때문에 결국 신주코로 몰려들고 말지." "그러다가 덜컥 수갑을 차는군요, 멍청이들처럼." "멍청이가 아니면, 콩밥 먹을 짓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아!" 사메지마는 잘라 말했다. 5 사메지마가 서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비상 수사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다. 신주쿠 일대 주요 간선도로에 검문소가 설치된 탓에 교통정체는 더욱 격심했다. 과격파들이 즐겨 이용하는 밴이나 왜건 타입 뿐만 아니라 일반 승용차까지 모두 검문대상에 포함시켰기 때문이었다. 경찰 자체도 그러한 검문을 통해 경관 살해범을 찾아낼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오늘 일어난 경관 살해사건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경관을 노린 계획적인 연속범행의 신호라면, 요란스런 검문. 검색만으로도 상당한 제동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물론 범인이 줄곧 신주쿠 관내에 엎드려 있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엔 함께 벌이고 있는 탐문수사를 통해 뭔가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형사과의 모든 형사들은 자기들이 거느리고 있던 끄나풀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된 신주쿠 서에는 각 언론사 기자들이 들끓었다. 오후 6시에 특별수사본부의 첫 기자회견이 열렸다. 회견장에는 기자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경관들도 몰려들었다. 그만큼 정보가 아쉬웠던 것이다. 같은 시각, 사메지마는 서류정리를 끝내고 퇴근 준비를 서둘고 있었다. 모두 기자회견장으로 몰려간 바람에 사무실은 텅비어 있었다. "오랫만이군." 낯익은 목소리에 사메지마는 고개를 쳐들어 보았다. 감색 쓰리피스를 차려입은 남자가 방범과 입구에 서 있었다. 실팍하게 생긴 몸매에 홀쭉한 키, 반듯하게 가리마를 타 빗어넘긴 머리 밑으로 쭉 찢어진 눈이 불을 뿜듯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주억거려 아는 체를 했다. 동기생이었던 고다였다. "바닥살이도 할 만한가?" "용건이 뭐야?" "이런, 총경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경감 주제에....." 고다는 웃으며 말했다. 머리회전이 빠를 뿐만 아니라 경관으로서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윗사람에겐 약하고 아랫사람에겐 강한 타입이었다.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어, 나는." "경관이 피살됐어. 좀더 남아 있을 순 없나? 같은 동료 입장에서 말야." 공안 2과에 있던 동기생이 자살했을 때, 고다는 한쪽 파벌의 젊은 리더였다. 유서로 남긴 편지를 내놓으라고 끈질기게 사메지마를 윽박질렀던 사람이기도 했다. 사메지마는 물끄러미 고다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말, 죽은 사람이 들었다면 눈물을 흘리겠어. 과연 본청 공안 소속 총경님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감격해서 말야." "왜 이래? 네 동료를 죽인 범인을 잡아 주러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고다는 사메지마 쪽으로 다가왔다. "지금 기자회견을 하고 있잖아? 그쪽에나 가보지 그래." "회견은 수사 1과에 일임했어. 우리는 그늘에서 착실하게 움직이는 걸 임무로 하는 사람들이야." 사메지마는 담배를 꺼내었다. "한동안 여기 머물게 될 거야. 해서 인사 겸 찾아왔어." "복도에서 마주치면 경례를 하란 말이지?" "규율을 존중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야. 만약 네가 원한다면 수사본부로 옮겨 줄 수도 있어. 잘만 하면 본청 1과로 컴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 사메지마는 생각해 보는 척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천천히 고다 얼굴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고다는 움찔하면서 한발 뒤로 물러섰다. "넌 아직도 담배를 피우나?" "썩 꺼져!" 고다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난 지금 바빠. 더이상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줬으면 고맙겠어." 고다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화가 난 것처럼 꾸며보이는 것도 그의 장기 중의 하나였다.. "총경 자리에 턱걸이하는 데 20년씩이나 걸려도 좋단 뜻인가? 자칫하면 경감으로 정년을 맞아야 하는데두?"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고다는 사메지마 쪽으로 얼굴을 갖다대었다. "너가 아냐! 총경님이야! 상관에겐 경어를 써! 내 말, 잘 들어. 난 옛날부터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나한테 함부로 굴었다간 일생 동안 이 형사실을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아! 톨루엔 밀매꾼이나 마약중독자 밑이나 닦아 주면서 푹 썩게 될 거야!" 고다는 사메지마가 되쏘아 줄 틈도 주지 않고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방범과를 나서면서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자각할 줄 모르는 멍청이가 제일 골칫거리야, 이 세상에선." 사메지마는 입을 꽉 깨문 채 고다가 사라진 쪽을 한참 동안 쏘아보았다. 그러나 얼굴 표정은 고다가 방안으로 들어올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윽고 사메지마는 한숨을 내쉬면서 피우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다시 방범과 도어가 열렸다. 사메지마는 언뜻 고개를 들었다. 후줄근한 바지, 매듭이 초라한 넥타이, 헐렁한 상의를 걸친 대머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통만큼이나 얼굴도 큼직했다. 두손은 아무렇게나 상의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였다. 상의 무늬와 바지 색깔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것이었다. 대머리 사내는 말도 없이 어슬렁 걸음으로 방범과 안으로 들어오더니, 사메지마 책상 위에 놓인 담배를 한개비 뽑아물었다. "총경님이 방범과가 어디냐고 묻길래 가르쳐 줬지. 혹시 폐가 되지 않았나?" "별로." 기즈는 어떻게 됐어, 그 뒤론?' "드나드는 술집을 하나 찾아냈지." "그래?"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쇠창살을 덧씌운 창문께로 다가갔다. 사메지마는 그의 등을 향해 물었다. "아래층은 어때?" "야단법석이지. 뭐." "총을 사용한 것 같던데?" "그럼!" 사내는 물고 있는 담배에서 재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신주쿠 경찰서 입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부라고 하는 감식계원이었다. 탄도 검사 솜씨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베테랑이었다. 본청 감식과에서 초빙할 때도 많았지만, 야부는 언제나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원래는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이름 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입버릇이었다 (<야부> 에는 돌팔이라는 뜻도 들어있다 - 역주). 4주일 전에 발생한 살인사건의 흉기를 기즈가 만든 총이라고 밝혀낸 것도 바로 야부였다. 야부는 고개를 돌려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흐릿하고 멍청한 눈길이었다. "<호텔 몬타나>의 할머니는 총소리를 한번밖에 듣지 못했다는군.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엄청나게 큰소리였대. 부근 일대를 탐문해 본 결과 총성은 역시 한발뿐이었어." 사메지마는 아무 말도 않고 야부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사카 순경과 - 아니, 이젠 2계급 특진을 했으니까 경사님이지 - 오노우에는 자전거로 순찰중이었어. 사카가 앞장을 서고, 바로 왼쪽비스듬히 오노우에가 따르고 있었지. 탄환은 사카의 몸에서 적출한 한발뿐이었어." "한발로 두 사람을?" 사메지마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래. 탄환은 오노우에 경사 왼쪽 후방에서 날아왔어. 좌견갑골(左肩甲骨) 밑을 파고들어 가슴 한복판을 관통한 다음, 옆에 있던 사카의 등골을 헤집고 들어가 오른쪽 폐를 파열시킨 뒤 늑골에 박혀든 거야. 오노우에는 즉사, 사카는 출혈과다로 10분 뒤에 사망했어." "총 종류는?" "사카 가슴에서 탄환을 적출해 냈어. 납짝하게 변형되긴 했으나 권총 탄환은 아니었어." "엽총?" 야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라이플일 거야. 지금 구경(口徑)을 확인 중이야." "라이플!" "라이플 탄환의 장약량 (裝藥量)은 권총 탄환과는 비교도 안돼. 관통력도 엄청 차이가 나지. 스피드가 빠르기 때문이야. 구경에 따라 다르지만 권총의 경우, 리볼버 44 마그넘은 초속이 3백60미터야. 오토매틱 9밀리미터 루거는 3백40미터구. 경찰이 사용하는 뉴넌브38 스페셜은 2백78미터밖에 되지 않아. 시속으로 환산하면 1천 킬로미터나 되지만 라이플에 비하면 굼벵이 같은 속도야. 일본에서 사슴이나 멧돼지 사냥 때 사용하는 30-30만 하더라도 초속이 7백28미터야. 좀 성능이 좋은 30-06은 8백90미터구. 시속으로 환산하면 3천2백 킬로미터지. 권총 탄환은 빠른 것이라야 겨우 음속(音速) 정도로 날아가지만 라이플은 음속의 배, 또는 세 배야. 때문에 오노우에는 총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숨졌을 게야." 야부는 단숨에 주워섬겼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발사한 것 같아?" "바로 그게 문제야. 그걸 밝혀내는 건 꽤 어려워. 목격자가 있다면 간단하지만 그렇지 못하거든. 그 언저리는 밤보다 낮이 훨씬 더 한적한 곳이니까 이상할 것도 없지 뭐. 허나 발사된 총탄엔 재미있는 특성이 있어. 총구에서 발사된 직후라고 해서 반드시 관통력도 제일 강한 게 아니야. 라이플의 경우, 발사 직후의 탄환은 아직 가속이 붙지 않아 흔들흔들 날아가는 게 보통이야." 야부는 꽁초가 되어 버린 담배를 입에서 뽑아들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탄환을 직선으로 날아가게 하기 위해 총신에 선조(旋條) - 라이플 링을 파놓는다는 것쯤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탄환은 너트 속으로 파들어 가는 볼트처럼 회전력을 타고 총구에서 튀어나가게 되어 있어. 라이플 탄환은 - 지금 내가 말하는 탄환은 탄두 부분을 뜻하는 거야 - 권총 탄환과 달리 길쭉하게 생겼어. 카트리지 부분도 마찬가지야. 때문에 최초의 얼마간은 흔들거리며 날아갈 수밖에 없어. 그러나 그런 흔들림도 일정한 거리가 지나면 차츰 안정되게 마련이야. 그 거리는 대체로 1백에서 1백50미터쯤이야. 거기서부터는 똑바로 날아가는 거야. 중간에 부딪치는 물체가 없다면 중력과 공기저항 때문에 전진 에너지가 소멸하기 시작하지. 그때부터는 다시 흔들거리면서 낙하하게 되는 거야" "그렇다면 라이플은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쏘는 것이 파괴력도 크겠군." "파괴력과 관통력은 달라. 바늘로 찔리는 것과 해머로 얻어 맞는 것과 어느쪽이 데미지가 큰지 생각해 봐. 파괴력과 스피드는 반드시 일치하는 게 아냐. 속도가 느린 탄환은 내부를 휘집다가 체내에 박히고 말아. 탄환이 관통하고 말면, 부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렇게 끔찍하지 않을 경우도 있어. 헌데 이번 사건을 한번 살펴보라구. 오노우에를 관통한 탄환이 사카 몸 속에 박혀들었어. 대단한 관통력 같지만 라이플탄, 그것도 꽤 구경이 큰 것으로 쐈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지근거리에서 쐈다는 뜻인가?" "그럴 가능성이 가장 많아. 복잡한 이론을 떠벌리지 않더라도 말야. 현장 골목은 아주 좁아 시야도 나빠. 위에서 내려다보고 발사한 게 아니라면 현장 조건으로 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쏴서 명중시킨다는 건 불가능해." 이 탄도 전문가는 술은 한방울도 마시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아주 싫어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을 뻘뻘 흘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사관으로서는 일류였다. 탐문을 하고 범인을 뒤쫓아 수갑을 채우는 기술이 뛰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일류 수사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야부는 언제나 머리 속에서 온갖 가설과 상상을 되풀이해 가다가 마침내 길목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현장을 뛰는 형사들에겐 머리를 짜내어 상상할 여유가 없었다. 야부의 상상은 상황과 증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얼토당토 않은 허구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메지마는 야부의 상상에 귀를 기울였다. 신주쿠 서의 다른 형사들은 결과만을 알고 싶어했을 뿐, 상상에까지 관심을 쏟는 이는 한사람도 없었다. 사메지마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야부를 일류 수사관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야부가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는 담배를 바라보았다. "라이플로 지근거리에서 쏘았다는 것까지는 좋아.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야. 알다시피 라이플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덩치가 커. 상의 속에 숨기거나 손가방에 넣어야 들고 다닐 수도 없어. 골프 케디백이나 낚시 케이스쯤은 돼야 가능해. 범인이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 한, 운반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해." "계획범이란 뜻이군." "그래, 그렇다고 봐야지. 아무 목적도 없이 라이플을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다닐 녀석이 있다고는 볼 수 없어. 더더군다나 길가다 우연히 마주친 순경 두 사람을 표적 삼아 사격연습을 할 녀석이 있다면 그놈은 미친놈이야." "흉기가 라이플이란 걸 공표했나?" "아니, 한발밖에 발사되지 않았다는 것조차 발표하지 않았어. 범행에 사용된 흉기에 대해서는 <현재 수사중> 으로 되어 있어." "범인은 라이플을 든 채 차 안에서 경관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고 봐야겠군." 야부는 사메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랬을 거야. 하지만 사람이 탄 채 노상에 멈춰 있는 자동차라면 경관은 반드시 안을 살펴보게 되어 있어. 때문에 경관을 노리는 녀석이 그런 멍청한 짓을 했을 까닭은 없어." "경관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트렁크에서 라이플을 꺼냈을 수도 있잖을까?" "그럼, 거리의 문제는 어떻게 되누? 아무리 서둔다 하더라도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고 총을 꺼내는 동안, 경관은 적어도 1백 미터쯤은 걸어갔을 게야." "총을 차 안에 숨겨뒀을 수도 있을 텐데." "현재론 그게 가장 타당한 가설이야." 야부는 결론 짓듯 말했다. 그러나 얼굴 표정으로 봐서는 달리 할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야부가 물러가자 사메지마는 전화기를 들어 <아가메무논> 으로 다어얼을 돌렸다. "네, 아가메무논입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후유키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야, 사메지마." "아, 네. 아까는 여러가지로 실례 많았습니다." 후유키는 카페테라스에서 만났을 때보다는 훨씬 크고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만약 녀석이 나타나거든 집으로 연락해 줘. 혹시 내가 없더라도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녹음해 주고....." "네, 알았습니다." 후유키의 대답에 겹쳐 남자 두 사람의 카라오케 듀엣이 들려왔다. 곡목은 <<신주쿠 토박이>> 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사메지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사본부 멤버들은 오늘부터 철야 근무에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벌써 경찰 위신을 걸고 범인을 빨리 잡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고다도 철야를 할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이번 경관 살해 사건에도 과격파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권총이라면 폭력단, 엽총이 동원되었다면 과격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야쿠자도 엽총을 사용하는 경우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격파가 권총을 사용하는 케이스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흉기가 라이플로 밝혀짐에 따라 수사본부는 극좌 폭력단의 범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사메지마는 <카부키쵸 경찰관 피살사건 특별수사본부> 라고 써 붙인 방 앞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역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사메지마가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8시 30분쯤이었다. 도어를 열고 들어서자 전화에 부착된 자동응답기 녹음 램프가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뿜고 있었다. 서둘러 거실로 올라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 쇼야. 다음 번 쉬는 날은 언제야? 연락 줘. 메시지는 그것 뿐이었다. 다른 녹음도 없었다. 사메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메시지를 남길 땐, 전화 건 시간도 함께 녹음해 두라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얘기했지만 그걸 지킨 적은 한번도 없었다. 신주쿠 관내에서 몇몇 사람은 사메지마의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메지마가 부탁한 정보를 알려 주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움을 청하는 전화일 때도 있었다. 그런 전화가 언제 걸려온 건지, 녹음 메시지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런 전화 사이에 쇼가 메시지를 남기면서 시간까지 녹음해 둔다면, 훨씬 편리할 게 아닌가. 사메지마는 옷을 훌훌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유니트 타입의 욕실은 몸을 씻기엔 너무 비좁았다. 그러나 신주쿠에서 30분 거리밖에 안 되는 이 언저리에서 사메지마의 월급으로 욕실 딸린 아파트를 구하자면 이 정도가 한계였다. 샤워를 마친 그는 3평 남짓한 거실 겸 침실로 가서 침대 옆의 소파에 몸을 묻었다. 소형 냉장고와 TV가 팔을 뻗치면 닿을 거리에 놓여 있었다. TV 옆엔 미니 전축이 자리잡고 있었다. 최근 들어 쇼의 테이프를 들을 때 이외엔 스위치를 켠 적이 별로 없었다. 분명하게 얘기한 적은 없었으나 사메지마는 쇼의 노래를 좋아했다. 음성도 좋았고, 감성도 발군이었다. 프로 가수로 데뷔한다면 미모도 있고 하니까 꽤 인기를 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문제는 쇼 자신이 과연 프로 가수로 데뷔할 마음이 있느냐 하는 데 있었다. 가수로 성공한 뒤 스스로 스타임을 납득한다면 별문제가 없지만, 그럴 가능성보다는 금방 싫증을 느낄 확률이 더 높았다. - 귀찮고 시시해! 그렇게 한마디 내뱉고는 집어치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쇼가 노래하는 걸 좋아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노래 때문에 인생 자체까지 바꿀 타입은 아니었다. 사메지마는 팔을 뻗쳐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었다. TV 스위치를 넣어 9시 뉴스에 채널을 맞추었다. 오늘밤, 기즈가 <아가메무논>에 나타날 가능성은 적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어제 들른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오늘 낮에 발생한 경관살해사건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기즈는 이미 두 번씩이나 교도소에 갔다 온 전과 2범이 아닌가. 때문에 경관에 대한 경계심도 남보다 예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기즈는 말하자면 프로 범죄자였다. 그는 권총 밀제조자였다. 아마도 최근 10년 동안 기즈는 권총 밀조 이외에 다른 일엔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권총 밀제조는 마약 밀매. 사기. 장물 거래 등과 같이 상습적인 위법행위에 속하는 직업에 속한다. 경마 도박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항상 체포당할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도망다니는 지명수배자와 다름이 없었다. 도망다니는 인간일수록, 그때그때 필요한 생활비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사장 인부 노릇을 하거나, 신분을 속이고 취직을 하거나 했다. 그러나 프로의 경우는 정처없이 도망다니지는 않는다. 자기 일터를 떠나면 장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이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밀고였다. 또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활동을 일시 중단한 채 조용히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도망다니지 않는 만큼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이었다. 신주쿠에서 경관 피살사건이 발생한 이상, 신주쿠 일대에 경관이 쫙 깔려 있을 것이란 걸 기즈쯤 되면 훤하게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기즈가 실로 열흘 만에 어제 <아가메무논>에 들렀다는 후유키의 말도 그런 의미에서 보면 별로 이상할 게 없었다. 수많은 경관이 동원된 원유회 특별 경비기간 동안 기즈는 얌전히 엎드려 있었던 것이었다. 원유회가 끝나고 나서야 그는 슬금슬금 <아가메무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늘 일어난 경관 피살사건으로 기즈는 또 한동안 움직이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사메지마는 그렇게 판단했다. 뉴스가 시작되었다. 경관 피살사건이 톱이었다. 거창하게 떠벌리기는 했으나 경찰이 발표한 정보가 적은 탓인지 내용은 빈약했다. 고다를 비롯한 공안 쪽에서 발표 내용을 적당히 얼버무렸을 것쯤은 쉽게 짐작이 갔다. 현장 리포터가 아직 목격자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 총성은 한발 밖에 들리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화면에는 총성을 들었다는 호텔 종업원이 비쳐지고 있었다. 화면의 종업원은 처음엔 야쿠자끼리 싸움을 벌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총성이 한발 밖에 들리지 않아 바깥을 내다보자 경관 두 사람이 쓰러져 있더라는 것이었다. 현장 주변 호텔가는 밤이 되어야 붐비기 시작하는 곳 - 펨프, 손님을 찾아나선 창녀와 남창도 득시글거렸다. 때문에 범행시간이 밤이었다면 쉽게 목격자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리포터는 아쉬워했다. 그 언저리를 배회하는 창녀라면 범행을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그러나 경찰에 출두해서 자신이 본 것을 털어놓을 창녀는 한 사람도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더구나 리포터가 말한 대로 아시아계 외국인 창녀가 부쩍 늘어난 요즘, 러브호텔 투숙객 가운데서 목격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공안 3과는 어느 극좌 폭력집단이 자기들 범행이라면서 성명서라도 발표하지 않나 하고 목을 길게 빼서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비록 막연한 생각이지만, 이번 범행이 극좌 폭력집단의 짓이 아니라 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극좌 폭력집단이 경관을 살해할 생각이라면 신주쿠 서의 순찰순경이 아니라 좀더 그럴 듯한 표적 - 기동대원이나 왕궁 경관을 노려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래야만 살인까지 투쟁수단으로 보면서 <국가를 상대로 전투를 하는> 극좌단체의 기본인식에 합당한 것이 아닌가. 자신들을 병사로 생각하는 극좌단체의 눈에 경관은 적병(敵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병사가 병사를 죽이는 것은 전투행위일 뿐, 살인이 아닌 것이다. 허를 찔러 기습하는 것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할 때 약자가 취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전술. 전략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 범행은 도시 게릴라전의 전투라고 해야 옳았다. 하지만 전투를 시작했다면 당연히 거기엔 분명한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단 순경을 노린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경찰의 캐리어 구조를 잘 알고 있는 과격파 그룹이 말단 순경을 노림으로써 현장 <병사>에게 염전(厭戰) 풍조를 확산시키겠다고 나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전투의 의의를 생각했다면 첫번째 표적으로는 다른 부문의 경관을 노렸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순찰 경관을 습격한다는 것은 성공 확률이 별로 높지 않은 작전이 아닌가. 직무수행 중의 순찰 경관은 경계심이 높은 법이 아닌가. 더군다나 일본 최대의 유흥가를 순찰하는 신주쿠 서 소속이라면 당연히 긴장감도 높아지는 것이다. 때문에 만약 저격에 실패하면 즉각 반격당할 위험도 적지 않은 것이었다. 총을 한발밖에 쏘지 않았다는 것도 <전투>로 보기에는 이상했다. 뉴스 화면은 현장에서 스튜디오로 바뀌어졌다. 스튜디오 아나운서는 피살된 두 경관이 권총을 포함해서 휴대품은 하나도 빼앗기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두 경관에 대한 원한관계를 포함해서 여러 각도에서 엄중한 수사가 진행될 게 틀림없을 것이라며 아나운서는 뉴스를 마쳤다. 원한관계일 가능성도 있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각종 트러블을 다른 경찰서에 비해 배이상이나 취급해야 하는 신주쿠 경관은 피의자에 대한 태도도 그만큼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오노우에나 사카가 원한을 샀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를 사메지마는 알고 있었다. 사카는 얌전한 타입이었으나, 나이가 한살 많은 오노우에는 말씨조차 약간은 난폭한 편이었다. 불심검문을 할 때도 사카는,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만....> 하고 은근히 시작했다. 그러나 오노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거동이 미심쩍다 싶으면 당장 위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봐, 잠깐. 이리로 오라니까!" 그렇게 불심검문하는 걸 사메지마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오노우에가 사카보다 신주쿠 근무 경험이 많아 익숙해 있는 탓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경관은 동료의식이 강했다. 때문에 사카나 오노우에가 직무수행 과정이나 사생활면에서 누군가의 원한을 샀다 하더라도 그것을 까발릴 동료는 없다고 봐야 했다. 적어도 사메지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사람의 죽음이 가슴 아픈 일이긴 했으나, 사메지마는 경관끼리의 동료의식과는 인연이 멀었다. 경관이 끈끈한 동료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사회로부터의 소외감 때문이었다.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경관은 외부로부터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경관이 동료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는 한, 경관의 범죄는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발각되기 어렵다. 그에 따른 일반시민의 불신은 경관의 소외감을 더욱 부채질하는 악순환을 낳는 것이다. 만약 내부 고발자가 나타나면, 전 경찰기구가 똘똘 뭉쳐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방해하는 것이다. 경찰 내부에서조차 소외당하는 경관은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더이상 경찰생활을 계속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풍조가 바뀌어지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사메지마는 변혁을 갈망했다. 외압으로는 결코 이룩되지 않는 것이 바로 변혁이었다. 경찰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단 한사람이라도 자기와 같은 사람이 경찰 조직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대부분의 경관은 정의를 믿고 법을 지키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 문제는 그러한 순수한 경관들에게 실망과 소외감을 안겨 줄 수밖에 없는 경찰조직이 왜곡되어 버린 데 있었다. 오늘의 일본 경찰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끔찍스럽기까지 했다. 때문에 사메지마는 두 가지 짐을 지고 있는 셈이었다. 범죄와의 싸움과, 왜곡된 조직과의 싸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아이, 보기 싫어!" 수화기를 들자마자 쇼의 앙칼진 목소리감의 사메지마의 귀를 울렸다. "왜 전화 안했어?" "지금 막 들어오는 참이야." "거짓말. 전화받는 분위기로 봐서 이미 샤워까지 끝내고 맥주를 마시면서 TV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노래 따위 집어치우구 경관이 되지 그랬어." "멍청한 소린 그만둬. 뒷골목에서 총맞아 죽는 건 딱 질색이야." "무슨 일이야?" "궁금해서. 피살된 두 사람, 잘 알아?" "응." "왜 살해됐어?" "그건 수사본부에서 밝혀내겠지." "다음 쉬는 날은 언제야?" "금요일." "나흘 뒤? 찾아가도 괜찮아?" 사메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여길 못 와 그렇게 안달이야?" "안달해서 안 될 건 또 뭐야?" "알았어. 그대신 밤외출은 할 수 없는 처지야. 전활 기다려야 하니까." "좋아. 저녁밥 내가 지어 줄께, 싫어하지 않는담." "누가?" "밥 짓는 건 나구, 싫어하는 건 당신이잖아!" "누가 밥을 짓든 난 상관없어." "몇 시쯤 가면 돼?" "저녁 나절. 하지만 너무 늦잖는 게 좋겠어." "5시에 아르바이트가 끝나니까, 6시까진 갈께." "오케이. 지하철 역까지 마중 나가지." "이봐요." "왜?" "뭣 땜에 그렇게 꺼려? 내가 아파트로 찾아간다기만 하면." "꺼리는 것, 하나도 없어." "거짓말쟁이!" 쇼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녀 목소리로 봐서는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쁨이 실려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TV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다른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자신도 휘말려든 공안 내부 암투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또 그 편지를 갖고 있는 한, 계속 감시당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쇼가 좋았다. 현재로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였다. 쇼와 그 편지를 맞바꿔야 하는 사태만은 절대로 없기를 바랐다. 공안 고위층도 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편지와 쇼를 교환해야 하는 사태가 절대로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날 밤,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6 <막스 맨> 에는 결국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온 건 밤 10시가 지나서였다. 지하철 역근처에서 산 햄버거 봉지를 들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혼자 앉아 식사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아파트까지 15분을 걸어오는 동안 햄버거는 싸늘할 정도로 식어 버렸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그는 우선 도어부터 잠갔다. 집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2평도 안 되는 부엌과 3평짜리 다다미방. 재수할 때 쓰던 책상이 지금은 식탁을 겸하고 있었다. 도어를 잠근 그는 곧장 책상으로 다가가서 제일 윗서랍을 열었다. 홀스터에 든 모델건 세 자루를 눈으로 확인했다. 홀스터는 모두 다른 타입이었다. 모델건은 숄더 홀스터에 든 S&W 오토매틱 M39, 팬케이크 홀스터에는 콜드 로만마크 III357 마그넘, 그리고 <막스 맨>에서 산 웨스트 홀스터의 브로닝 1910 모델, 그렇게 세 자루였다. 옆에는 경찰수첩과 수갑, 그리고 특수 경찰봉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입고 있던 점퍼를 벗고 숄더 홀스터를 셔츠위에 맸다. 이어서 수갑을 허리춤에 찼다. 경찰수첩을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넣은 그는 다시 점퍼를 입었다. 서랍을 닫은 다음 현관 쪽으로 나갔다. 현관 홀, 화장실 옆에는 작은 신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거기엔 각종 공구류와 함께 짐 묶을 때 쓰는 밧줄도 한묶음 들어 있었다. 이삿짐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슬쩍 해 온 것이었다. 그는 적당한 길이로 밧줄을 가위로 잘랐다. 거실 겸 침실바닥엔 핑크색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그는 잘라 온 밧줄로 카페트 위에 사람 형체를 만들었다. 그것이 끝나자 거실과 부엌 사이에 허리 높이로 밧줄을 쳤다. 그는 밧줄 바깥쪽에 서서, 거실 안 가구는 무시한 채 바닥에 그려놓은 사람 형체를 응시했다. 차츰차츰 가슴이 두근거려 왔다. 자신이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창 현장검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카메라 스트로보가 번쩍거리며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감식과원이 쪼그리고 앉아 지문이랑 발자국 채취에 골몰하고 있었다. 로프 주변에는 구경꾼이 몰려들어 서로 밀고 밀리면서 안쪽을 들여다보기 위해 목을 길게 뽑고 있었다. 로프 옆에는 장갑을 낀 정복순경이 서 있었다 - 그래 장갑을 깜박 잊고 있었구나. 그는 밧줄을 타넘고 안으로 들어가서 책상서랍에서 흰 장갑을 꺼내었다. 얇은 면장갑이었다. 손목 부분을 죌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장갑을 아무렇게나 점퍼 포켓에 쑤셔넣은 그는 다시 밧줄 바깥으로 나와 두세 걸음 물러섰다. 다시 구경꾼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 밀지 마세요. 물러서 주세요!" 정복경관의 목소리도 들렸다. 한걸음 다가서자 정복경관이 그를 알아보고 경례를 했다. "수고하는군."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경찰수첩을 꺼내어 보이면서 말했다. 어수룩하게 보았던 그가 형사임을 알아차린 구경꾼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슬쩍 로프를 타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감식과원이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점퍼 포켓에서 장갑을 꺼내어 끼면서 사람 형체가 그려진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흉기는?" "권총입니다. 아마 마그넘이겠죠."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끔찍하군. 추정 사망시간은?" "30분쯤 전입니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그럼 아직 이 근처 어디에 있겠군. 범인 말야." "지금 수색중입니다." "조심해서 하도록. 녀석은 마그넘을....." 잠시 하던 말을 중단한 그는 허리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휴대 무전기를 뽑아들었다. "네, 여기는 현장. 특별수사대야. 무슨 일이야?" "응원을 -." 탕! 하는 총성에 이어 무전기에서는 잡음만이 흘러나왔다. "가자!" 그는 잽싸게 오토매틱을 뽑아, 제1탄이 약실로 들어가게 조작한 다음 몸을 날렸다. 로프를 훌쩍 뛰어넘었다. 총구가 하늘을 향하도록 쳐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식의 1인극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연기나 줄거리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언제나 막판은 총격전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리프는 역시 <구급차를 불러!> 였다. 어느덧 11시가 가까워졌다. 배가 몹시 고팠다. 책상 위에 내팽개쳐 놓았던 햄버거 봉지를 집어든 그는 밧줄 안쪽으로 들어갔다. 형사는 언제나 사건 현장에서 식사를 해야 멋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쪽 무릎을 꺾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람 형체를 노려보면서 햄버거를 덥석 베어물었다. 동일한 범행이 이번으로 벌써 네번째였다. 보통 수사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수사본부는 특별수사대인 그를 현장에 파견한 것이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그는 밧줄로 만든 시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지만, 햄버거를 씹는 입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프로의 짓 같습니까?" 애송이 형사가 공손하게 물었다. "그럴거야. 그것도 솜씨가 뛰어난." 대답하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극>은 잠시 중단하고 냉장고에서 우유 팩을 꺼내었다. 1리터 짜리를 팩째로 벌떡벌떡 마셨다. 입 안에 남아 있던 햄버거 조각을 우유와 함께 삼키던 그는 갑자기 범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연극> 속의 살인사건이 아닌 신주쿠의 살인 사건이었다. 경관을 죽이다니, 도대체 어떤 녀석일까. 프로 킬러라면 정복경관을 죽이지는 않는다. 경관을 꼭 죽이고 싶다면 정복이 아니라 형사를 노려야 마땅한 일이었다. 형사를 죽이는 것은 궁지에 몰린 신디게이트들의 상투수단이 아닌가. 나는 언제 또다시 살인현장과 마주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날마다 신주쿠 거리를 헤맨다 하더라도 두번 다시 그런 행운이 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신주쿠라지만 날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신주쿠 서 가까이에 있다가 패트롤카가 출동할 때 뒤쫓아 가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에겐 자동차가 없었다. 또 패트롤카 출동지가 살인현장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로프 안쪽으로 들어가 있고 싶었다. 안쪽 멤버가 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살인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패트롤카가 여러 대 몰려들었어도 대부분의 경우 범죄현장이 집안이었기 때문에 엿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자기가 살인 수사현장에 참가한다면 무엇부터 어떻게 손을 댈 것인가. 그러고 보니 오늘 살인현장을 눈앞에 두고서도 형사 한사람 한사람의 움직임은 눈여겨 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사진을 찍는 형사가 있었던 것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지문은? 발자국은? 또 오늘 현장에 있던 형사들이 권총을 차고 있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상의자락을 눈여겨 보았다면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현장으로 뛰어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형사들도 현장을 떠났을 게 아닌가. 현장을 백번만 훑어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형사들이 1백번씩이나 현장을 드나든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지금쯤 범인을 체포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속살인, 연속살인 - 그러한 생각이 언뜻 그의 머리를 스쳤다. 이번 경관 살해사건이 연속살인의 시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연속살인이라면 같은 형사가 수사를 담당할 게 틀림없었다. 그 자신이 현장에 있을 수 있다면, <연극>도 훨씬 실감나게 엮어갈 수 있지 않는가. 온갖 장면을 빠짐없이 지켜볼 수 있지 않은가. 취미삼아 경찰 무선을 감청하는 액션 밴더라는 패거리가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청이 가능한 것은 경찰서 단위 통신에 국한되어 있었다. 출동한 패토롤카와 경찰서 본부간의 무선통신은 가능했지만, 경찰청이 앞장 서는 대사건일 경우, 디지탈 무선이 사용되기 때문에 감청은 불가능하다고 이가와씨가 말한 것이 생각났다. 살인사건이라면 본청 수사 1과가 출동하는 건 당연했다. 1과 소속의 위장 패트롤카 무선을 엿들을 수만 있다면 살인현장 뿐이 아니라 범인 체포현장까지 목격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가와씨 얘기대로라면, 경찰청 무선도 얼마 전까지는 디지탈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액션 밴더가 늘어남에 따라 디지탈 무선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했따. 그러나 이유는 그것 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범인이 무선을 감청하면서 요령껏 도망다니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목격자가 되고 싶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시 한번 현장에 있고 싶었다. 만약 자신이 큰 사건이 터질 적마다 현장에 나타난다면 형사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어서 대사건 발생을 사전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7 회색 탱크톱에 무릎 아래를 잘라낸 진 반바지 차림의 쇼가 개찰구로 나오는 게 보였다.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자, 받아." 쇼핑백을 받아들면서 사메지마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꽤 무거운데." "식칼. 도마. 소금. 후추. 간장. 접시. 프라이팬. 냄비....." 쇼는 걸으면서 주워섬겼다. "뭐라구?" 사메지마가 발걸음을 멈추면서 되물었다. "자기 집에 뭐가 있구 뭐가 없는지 난 전연 모르잖아? 그래서 집에 있는 걸 몽땅 싸들고 나왔지 뭐. 아르바이트 집까지 들고 갔다 온거야." "물어보지도 못해? 식칼 정도는 집에도 있다구." "귀찮았어. 또 손에 익은 게 쓰기가 편리도 하구." "말하는 게 제법 살림꾼 같군." 쇼가 걸음을 멈추면서 홱 돌아섰다. 그 서슬에 쇼핑백을 안고 바로 뒤따르던 사메지마는 그녀와 부딪칠 뻔했다. "말만은 살림꾼이라니? 내가 만든 요리는 먹을 게 못 된다는 뜻이야, 뭐야?" "그런 게 아냐. 내 말은....." "그렇담 입다물고 있어!" 쇼는 사메지마를 데리고 상점가로 갔다. 그녀는 물건 살피는 건 꼼꼼했지만 사는 것은 놀랄 정도로 대담했다. 지불도 모두 그녀가 했다. "내가 낼께." "시끄러워. 내가 만들 요리니까 재료도 내 돈으로 사야 해!" 사메지마는 두 손에 쇼핑백을 들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쇼가 온대서 부엌 청소는 미리 해 두었었다. 그녀의 아파트를 보고 쇼가 정갈한 걸 좋아한다는 걸 사메지마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는 들고 온 식품을 부엌 바닥에 내려놓았다. "얼른 만들께." 쇼는 곧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사메지마는 탱크톱 위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그녀의 앞가슴을 옆눈으로 흘끔거렸다. 맨살이 드러난 어깨 밑을 덮고 있는 무명 천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보였다. "제법 갖춰 놓고 사네." 부엌 찬장을 들여다보면서 쇼가 감탄했다는 투로 말했다. "우선 한잔 하자구." 사메지마는 냉장고에서 캔맥주 2개를 꺼내었다. "혼자 마셔. 난 바빠." 쇼는 장 봐온 것을 꺼내 다듬으면서 들은 척도 안했다. "함께 마시자구....." 사메지마는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맥주 캔을 쇼의 허벅지에 갖다대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무슨 짓이야, 이 바보!" "건배!" 그녀 눈앞에 맥주 캔을 들어올려 보였다. "나 참, 기가 막혀서." 뾰로통해지긴 했으나 쇼는 결국 맥주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뚜껑을 따서 사메지마의 캔에 가볍게 부딪쳤다. 쇼가 한모금 마시는 것을 본 사메지마는 팔을 잡아당겨 끌어 안았다. "왜 이래, 바보처럼." 허기진 사람처럼 쇼의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그녀는 맥주가 쏟아지지 않게 캔을 높이 쳐들었다. 처음엔 앙탈을 부리던 그녀도 몸에 불이 붙은 듯, 적극적으로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메지마가 탱크톱 안으로 손을 밀어넣자 입술을 떼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 "무슨 짓 하려고 이래?" "부엌에 서 있는 여자가 훨씬 더 섹시하게 보여서 그래. 침대에 누워 있을 때보다 남자 마음을 더 애태운단 말야." 사메지마는 익숙한 솜씨로 브래지어 고리를 벗겼다. "이러지 마!" 사메지마 손가락이 젖가슴에 닿자 쇼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말했지만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눈 언저리도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왼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그녀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이러지 말라니깐......" 쇼는 사메지마의 눈 속을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사메지마의 손은 팬티 속을 더듬고 있었다. 쇼의 무릎이 꺾이었다. 사메지마가 받쳐 안으면서 그녀 허리 밑에 걸쳐 있던 바지랑 팬티를 말끔히 벗겨내렸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네가 만든 요리를 훨씬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어." "바보!" 사메지마의 품에 안긴 쇼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으면서 속삭였다. "빨리 벗어요, 음탕한 형사님!" 쇼가 요리한 식사는 크림 소스를 곁들인 연어와 필레 스테이크였다. 그녀가 갖고 온 와인 2병 가운데 한병을 몽땅 비웠고, 남은 한병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쇼가 설거지를 시작하자, 사메지마는 TV를 켰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민방 뉴스에 채널을 맞추었다. 뉴스 세 건이 끝나자, CF에 이어 화면엔 스튜디오의 캐스터가 나타났다. - 신주쿠에서 발생한 경관 피살사건의 속보입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 범행에 쓰인 흉기는 라이플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본 프로그램 스탭진이 독자적으로 취재한 결과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총기와 탄도학의 전문가 얘기를 들어보시겠습니다. 화면이 바뀌면서 사메지마로서는 낯선 얼굴이 사무실처럼 보이는 좁은 방에서 떠벌리고 있는 VTR이 비쳐졌다. - 순직한 두 경관의 위치와 총성이 한발밖에 울리지 않은 것 등을 종합해 보면 범행에 사용된 총탄은 관통력이 엄청나게 세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 남자의 직업이 <총기평론가> 임을 알리는 자막이 화면에 비쳐졌다. 그러나 희끗희끗한 백발과 얌전한 얼굴만을 본다면 총기류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 같았다. - 보통의 권총탄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물론 권총탄에도 KTW 라고 해서 특수가공으로 관통력을 높인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국내에선 구하기가 퍽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총기의 나라 미국에서도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라이플탄은 다릅니다. 사냥용으로 허가만 받으면 누구든 살 수 있습니다. 엽총 소유자라면 누구나 입수가 가능합니다. 화면에 다시 스튜디오가 나타났다. - 경찰은 범행에 쓰인 총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발표도 않고 있죠? - 그렇습니다. 두 피해자가 단 한발에 당했다는 사실조차도 발표 않고 있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경찰 발표를 지켜봐야겠군요. 사메지마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갑자기 TV 화면이 시커멓게 죽어 버렸다. 고개를 돌려보자, 쇼가 리모콘을 들고 등 뒤에 서 있었다. 'TV 따위 볼 필요 없잖아?' 탱크톱과 삼각 팬티위에 앞치마를 걸친 모습이었다. "미안" 사메지마가 담배를 한모금 빨아들이면서 가볍게 사과하자, 그녀는 생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신곡 테이프 갖고 왔어. 노래말도 함께 봐 주겠어?" "그러지." "고마워." 쇼는 카세트 테이프와 오선지를 꺼내었다. <<스테이 히어>> 이후, 쇼는 신곡을 만들 적마다 반드시 사메지마에게 노랫말 수정을 부탁했다. "참! 첫 싱글, <<스테이 히어>>로 결정했어. 인세 생각해 줄께." "필요 없어." 사메지마는 오선지에서 눈을 떼면서 말했다. 가사는 1절만 적혀 있었다. 그것도 지워 버리기 쉽게 연필로 쓴 것이었다. "왜 필요없어?" "돈 벌라고 쓴 게 아니니까." "겉멋만 늘어가지곤. 히트하면 우리 두 사람 작사가나 되어 볼까?" 쇼는 사메지마가 몸을 묻고 있는 소파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경찰 그만두구 말인가?" "싫음, 그만두잖아도 괜찮아. 펜네임을 쓰면 되잖아?" "펜네임 따윈 필요없어." "멋지잖아, <신주쿠 상어> 라면....." "농담은 관둬." "그럼 <색골 형사>는 어때?" "<후즈 허니>의 리드 보컬이 형사와 붙어먹었다고 주간지가 법석을 떨게?" "그럼 더욱 멋질 텐데. 선글래스 끼고 카부키쵸 러브호텔을 빠져나오는 장면, 사진에 찍히면....." "제발 좀 봐 줘." 쇼는 갑자기 뾰로통해졌다. "애인이 록 가수란 게 창피해서?" "아냐!" "그럼 봐 줄 것도 없잖아?" 사메지마는 들고 있던 오선지를 내려놓으며 쇼를 바라보았다. "네가 너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난 그걸로 만족해. 넌 내 여자야. 하지만 록 가수로서의 너는, 네 노래를 좋아하는 모든 녀석들의 여자야. 안 그래?" 쇼는 얼굴이 울상이 되면서 기뻐했다. "그래, 맞아." "때문에 록 가수로서의 네 뒤를 내가 졸졸 따라다닐 필요는 없어." "내가 경찰 노래 만드는 건 싫어?" "노래는 노래야." "제목을 <<상어>> 라고 하면 어떨까?" 사메지마는 말없이 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네, 사메지맙니다." 수화기를 들면서 말했다. "후유키예요. 지금 막 이쪽으로 걸려왔어요. 가즈오가 들르지 않았느냐고 묻는 목소리가 그 사람 같았어요." 가라오케 볼륨에 지지 않겠다는 듯 후유키의 악쓰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귓전을 울렸다. "기즈?" "네, 틀림없어요. 제가 직접 받았어요." "뭐라고 하던?" "말했잖아요? <가즈오가 들르지 않았느냐> 묻더라고 말예요. <오시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더니 <최근에 들른 게 언제였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최근엔 오시지 않았어요. 혹시 오시면 어느 분이 찾는다고 전할까요> 라고 대답했더니 그냥 끊어 버렸어요." "알았어. 만약 가즈오가 들르거나, 다시 전화가 걸려오거든 알려 줘." 사메지마는 전화를 끊었다. 쇼가 말없이 내민 카세트 테이프를 받아 미니 콤포넌트에 세팅했다. 스튜디오를 빌려서 녹음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초퍼 베이스의 도입부에 이어 쇼의 노래가 흐르다가 사운드가 일거에 폭발했다. "첫부분 짜임새가 좀 모자라는 것 같지?" 쇼가 무릎으로 박자를 맞춰가면서 말을 이어갔다. "슬로 다운, 슬로 다운, 이러다간 우리도, 끝나고 말지 대신 컴 히어, 컴 히어면 어떨까?" 기즈가 무슨 까닭으로 가즈오를 찾고 있는 것일까. 만약 두 사람이 다툰 끝에 가즈오가 뛰쳐나간 것이라면, 가즈오를 잡아 족치면 기즈에 대한 건 모두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아가메무논>에 전화까지 건 걸 보면 그도 가즈오의 행방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사업>상 급하게 가즈오가 필요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얏!" 쇼가 앙칼지게 외쳤다. "미안. 아무래도 지금 나가 봐야겠어." 쇼는 금방이라도 히스테리를 터뜨릴 것 같더니 용하게도 참아내었다. 대신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나도 데리고 가 줘." 사메지마는 대답 대신 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해가 안됨, 데리고 가 줘!" 쇼의 두 눈엔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오늘밤 잠복미행으로 기즈의 본거지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기즈가 <아가메무논>에 나타날 때까지 잠복해 있다가 뒤를 쫓아볼 작정이었다. 본거지를 확인한 다음 압수 수색영장과 구속영장을 발급받아 덮칠 계획이었다. 잠복미행은 상대방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별로 위험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체포하러 갈 때는 총을 휴대할 생각이었다. 기즈가 자기를 잡으로 온 게 사메지마임을 안다면, 지난번 원한도 있고 하니까 거세게 저항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만약에 대비해서 자신이 만든 총기류로 방어선을 쳐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가메무논> 까지 총을 들고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사메지마는 쇼를 데리고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빨리 옷 입어!" <아가메무논>은 고슈 가도에 붙은 일방통행로변에 자리잡고 있는 빌딩 4층에 있었다. 사메지마는 쇼를 데리고 건너편 빌딩 이층에 있는 24시간 영업 다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아가메무논> 빌딩 입구를 지켜볼 수 있게 창가 자리에 앉았다. 사메지마는 다방의 공중전화로 후유키를 찾았다. 다방 전화번호를 알려 준 다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쇼를 찾도록 지시했다. 기즈가 <아가메무논> 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쪽이 놓쳤을 때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기즈가 나타나는 대로 쇼는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후유키는 그 이후로는 전화도 없었고 기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알려 주었다. "아직 그 녀석을 쫓고 있어, 도비다 변호사와 얘기했던?" 다방은 한산했다. 두 사람이 있는 언저리엔 손님이 한사람도 없었다. "그래." 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주문했던 푸딩 아라모드에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어떤 녀석이야?" "알고 싶어?" "별로. 하지만 심심하잖아." 사메지마는 다방 안을 휘둘러 보았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는 카운터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이었고, 다른 손님 - 젊은이 넷은 TV 게임에 여념이 없었다. 얘기 소리가 그쪽까지 들릴 염려는 없었다. "총에 미친 사내야. 나이는 서른다섯, 나보다 한살 적어. 출신지는 도쿄, 가메이도 언저리야." "어쩌다 총에 미쳤을까?" "중학생 때, 모델건을 산 게 계기가 되었나 봐. 사내아이들이라면 한번쯤은 총에 빠지는 시기가 있어. 녀석은 도가 지나쳐 본격적인 수업까지 받게 됐지만." "본격적인 수업? 총을 가르쳐 주는 데도 있어?" "우에노에 총 만드는 명인이 한사람 있었어. 문신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이지만, 실제는 총 밀제조자였지. 녀석은 그 명인의 제자로 들어가 총만들기와 사내 맛을 배운 게야." "호모야?" "여자를 품을 때도 있긴 있나 봐. 그러나 기본적으로 호모야. 그것도 젊고 거친 사내를 즐겨 찾아. 폭주족이나 스트리트 키드로 불리는 신종 부랑아 따위 말야." "명인은 어떻게 됐어?" "죽었어. 그가 만든 총에 살해된 야쿠자의 정부(情婦) 칼에 찔려서 말야. 죽은 야쿠자나 그 정부도 명인의 친구였지. 게다가 총을 사간 녀석을 명인에게 소개한 것은 바로 그 야쿠자였구." "그 야쿠자는 자신의 소개로 총을 사간 녀석의 손에 죽었단 말야?" 쇼는 푸딩에 생크림을 발라 떠먹으면서 물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눈길은 줄곧 맞은편 빌딩 입구에 박아놓은 채로였다. "끔찍한 얘기네." "바닥 세계는 그처럼 좁아. 곧장 친해지기도 하구, 금방 원한을 사기도 해." "스승이 살해된 뒤엔 어떻게 됐지, 그 사람은?" "경찰이 몰려오기 전에 명인이 쓰던 도구랑 만들고 있던 물건을 몽땅 딴 곳으로 숨겼어. 그리곤 스승을 찌른 여자를 쐈어. 경찰이 연행하려는 순간에 말야." "죽었어, 그 여자?" "아니. 총알은 여자 옆에 있던 형사 팔에 박혔어. 녀석은 현장에서 붙잡혀 2년 형을 언도받았어. 그게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이야. 경찰이 아무리 추궁해도 녀석은 도구를 어디 숨겼는지 끝내 불지 않았어." 2년 형을 살고 나온 기즈는 곧바로 총기 밀제조에 손을 댔다. 공업고등학교를 중퇴한 데다 원래부터 손재주가 비상했던 그는 눈깜짝할 사이에 죽은 스승의 수준을 뛰어넘게 되었다. 당시엔 총기 밀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어쩌다 있다 하더라도 금방 적발되고 말았다. 그러나 때마침 터진 저 유명한 칸사이 야쿠자 전쟁으로 총기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기즈는 칸사이로 숨어들었다. 밀수권총이 대량으로 나돌기 시작하자 밀제조나 개조권총의 수요는 시들해지고 말았다. 그 무렵 기즈는 도쿄로 돌아와 단순한 개조총이 아닌, 칼을 지팡이로 위장하는 것처럼 특수 변조총을 만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어떤 건데, 특수 변조총이란 게?" "우산처럼 보이게 만들거나, 손가방이나 책 속에 총을 장치하거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 들고 다녀도 들킬 염려가 별로 없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야쿠자 두목들이 호신용으로 대량 사들이는 바람에 녀석의 장사는 날로 번창했어." 총이 대량으로 보급되면, 총격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법 - 대립조직으로부터 두목을 지키려던 보디가드가 엉겁결에 엉뚱한 사람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에 맞아죽은 사람은, 야쿠자 두목과 보디가드가 타고 있는 차와 접촉사고를 일으킨 승용차의 운전자였다. 사건 직후 자수한 보디가드는 죽은 운전자를 대립조직의 총잡이로 착각했다고 진술했다. 그 운전자는 선량한 부동산 업자였다. 몰고 다닌 승용차가 수입차였던 탓에 야쿠자로 오해받아 목숨을 잃게 된 것이었다. 보디가드의 진술로 변조총의 공급원이 기즈임을 안 사메지마는 그의 아지트를 찾아내어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2년 뒤인 작년 말 교도소를 나오자마자 기즈는 총기 밀제조와 밀매를 다시 시작한 것이었다. "기즈는 집과는 별도로 작업장을 갖고 있어. 하지만 그곳이 어딘지 철저하게 입을 봉하고 있어. 바로 녀석의 공방(工房)인 셈이지. 그 곳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상습범으로 처벌할 수 없음은 물론, 녀석은 언제든 장사를 재개할 수 있어." 4주일 전, 아시아계 매춘 그룹 리더 두 사람이 총에 맞아, 한사람은 죽고 또 한사람은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었다. 신주쿠 일대의 아시아계 외국인 불법노동이 날로 늘어나, 개중에는 조직화를 시도하는 그룹도 등장하게 되었다. 총격을 당한 두 사람은 아시아계 창녀를 관리하는 펨프 겸 보디가드였다. 너무 노골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신주쿠 일대의 폭력단과 대립될 수 밖에 없었다. 몇 차례 옥신각신하다가 폭력단측 애송이가 가벼운 부상을 당했다. 리더격인 두 사람은 10여 명의 창녀와 보디가드 4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모두가 정식 취업 허가를 받지 않은 외국인들이었다. "그 외국인들과 맞선 폭력단은 네 친구를 못살게 굴었던 바로 그 패거리들이야." "그 녀석들?" 쇼는 내뱉듯이 말했다. 카부키쵸를 근거로 한 폭력단은 전부 20개나 되었고, 그들이 개설한 사무소를 모두 합치면 2백 개소 가까이 되었다. 개중에는 칸사이계 폭력단의 <출장소>도 있었다. 가쓰지를 쫓던 폭력단은 칸토 교에이가이 계열의 후지노구미였다. 지역 내 유흥업소로부터의 텃세가 주수입원이었으나 당연히 매춘과 환각제 밀매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그럼 그날 키치죠지에 있던 녀석들 중의 누군가가 범인이야?" "응. 녀석은 곧바로 자수해 왔어. 그러나 권총의 출처는 끝내 불지 않았어. 하지만 감식계가 기즈가 만든 것임을 밝혀냈어." "누구야, 쏜 녀석이?" "마가베라는 놈이야." 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녀석 말이지?" "그래. 마가베 혼자 아시아인 그룹의 아지트로 쳐들어가 리더를 쐈어. 녀석도 칼에 찔려 중상을 당했구." 중상임에도 불구하고 마가베는 직접 자동차를 몰아 신주쿠 서로 자수해 왔었다. 칼에 찔린 옆구리와 등에서 쏟아진 피로 자동차 안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경찰서로 들어온 그는 보초를 향해 외쳤다. "<신주쿠 상어>를 불러 줘!" 한마디를 외치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출혈과다로 혼수상태로 빠졌던 그가 의식을 회복하는 것을, 사메지마는 병상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가베는 자기 범행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나 권총을 기즈로부터 입수한 게 아니냐는 사메지마의 추궁에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마가베가 사용한 총은 라이터 모양으로 생긴 것이었다. 손 안에 숨겨들고도 22구경 탄환 두발을 쏠 수 있는 것이었다. 마가베는 그 총으로 리더의 미간과 목을 각각 명중시켰다. 아지트에 들어갈 때, 신체검사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라이터 총을 준비한 것이었다. "어머!" 쇼가 짧게 부르짖었다. 일방통행로에 택시 한대가 들어와 멈추었다. 체크 무늬 재킷에 선글래스를 낀 깡마른 사내가 내렸다. <아가메무논>이 들어 있는 빌딩을 쳐다본 사내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녀석이야!" 사메지마는 내뱉듯이 말했다. 8 기즈가 <아가메무논>이 들어 있는 빌딩으로 들어간 10분 뒤, 다방 전화가 울렸다. 사메지마는 벌떡 일어섰다. 후유키가 걸어온 전화였다. "저어..... 비디오 때문입니다만....." 후유키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알고 있어. 고마워. 이젠 신경쓸 것 없으니까 일이나 잘해." 사메지마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럼 난 가볼께." 뒤돌아 보자 쇼가 코 앞에 서 있었다. "다음 번 쉬는 날, 짐 가지러 가도 괜찮겠어?"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도 마주 끄덕이면서 생긋 웃음을 지었다. "요리, 제법 맛있던데." "정말?" 쇼는 얼굴이 환해지면서 밖으로 나갔다. 사메지마는 수첩을 꺼내어 기즈가 타고 왔던 택시회사 이름을 적었다. 만약 오늘밤, 일이 잘못 돼서 기즈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택시기사가 어디쯤서 그를 태웠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메지마는 자리로 돌아와 빌딩 입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기즈가 이처럼 빨리 움직일 줄은 전혀 뜻밖이었다. 경관 2명이 피살된 사건이 일어난 지 아직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기즈는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었다. 교도소에서 출감한 이후, 언제나스스로 자동차를 몰고 다녔다. 그런 기즈가 오늘밤 택시를 이용한 것은 검문을 경계한 게 분명했다. 오늘밤 외출이 기즈로서는 엄청난 위험을 각오한 것이었다. 역시 가즈오와의 사이에 뭔가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아가메무논>의 종업원이 가즈오를 숨기고 있거나, 아니면 가계에 나와 있는데도 전화로 시침을 떼고 있다고 기즈가 판단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 기즈를 잡아넣을 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공방까지 싹쓸어 버리겠다고 사메지마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자정에서 몇 분 지나고 있었다. 오늘은 금요일 밤, 택시 잡기가 손쉽지 않을 시간이었다. 기즈는 <아가메무논>으로 콜택시를 부르든가, 아니면 택시 잡기가 손쉬울 시간대가 되기까지 술을 마실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판단했다. 사메지마는 식은 커피를 두어 모금 마셨다. 술은 이미 완전히 깬 뒤였다. 지금부터 경찰서로 돌아가서 위장 패트롤카를 몰고올 시간적 여유가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것보다는 전화로 누군가 손 빈 녀석에게 몰고 오도록 시키는 게 더욱 확실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된 데다가 한창 붐빌 시간대인 지금, 손 빈 위장 패트롤카가 남아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사메지마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로 전화를 걸었다. 역시 위장 패트롤카는 모두 출동하고 한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동차를 몰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사메지마 차는 통상장비의 중고 BMW 였다.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 둔 채로였다. 무리를 각오하고 BMW로 한 것은 오늘밤과 같은 미행 때 상대방에게 들킬 염려가 적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저녁, 아파트에서 나올 무렵의 사메지마는 상당히 취해 있었다. 신주쿠까지 운전해 온다는 것은 파면당할 위험이 너무도 높았었다. 사메지마는 택시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경찰은 택시회사에 긴급 배차를 요청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물론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대체로 택시회사는 자발적으로 우선 배차를 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택시는 15분쯤 뒤에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그전에 기즈가 움직인다면 오늘밤 모든 것은 헛수고로 끝나 버리는 것이었다. 잡담 제하고 임의동행을 요구하든가, 기즈가 타고 사라지는 택시를 기억해 두었다가, 내려 준 장소를 확인해 보든가 하는 길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기즈도 경계가 심한 신주쿠 언저리에서 어슬렁대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임의동행에 기즈가 응한다 하더라도 공방을 찾아내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공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기즈를 미행하는 것 이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택시는 12분 뒤에 도착했다. 사메지마는 서둘러 차값을 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택시기사는 경찰 요구로 배차 지시가 내려진 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 손님이 형사라 하더라도 요금은 요금대로 또박또박 내어야 했다. 사메지마는 택시에 올라타 경찰수첩을 제시하고는 사정 얘기를 한 뒤 협조를 부탁했다. 심야 대목 시간대에 경관을 손님으로 태우게 된 게 못 마땅하다는 듯 택시 기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특별수고료야. 요금은 요금대로 계산할 테니까, 우선 받아 둬." 사메지마는 5천 엔 지폐 한장을 건네 주었다. 기즈를 체포하기 위해서는 영수 처리를 할 수 없는, 그래서 정산도 안 되는 수사비가 엄청나게 필요했다. 그 모두는 기즈의 공방을 찾아냈을 때에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메지마는 택시를 일방통행로 입구 쪽으로 이동시켰다. 라이트를 완전히 끄도록 한 다음, 다시 택시에서 내렸다.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며 어정대거나, 택시 안으로 들어가 운전사와 잡담을 나누기도 하면서 사메지마는 시간을 보냈다. 팁 5천 엔이 약효를 발휘한 것일까, 택시기사는 어느 정도 호의적인 태도로 사메지마를 대해 주었다. 새벽 2시가 조금 지나, 황색 램프를 켠 택시 한대가 <아가메무논> 빌딩 앞에 멈추어 섰다. 벌써 3대째였다. <아가메무논> 빌딩에는 다른 술집도 꽤 세들어 있는 탓에, 콜택시를 부르는 취객도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마침 차 안에 있었다. 룸미러 각도를 조절해서 빌딩 입구를 주시했다. 홀쭉한 키에 깡마른 사내가 잰걸음으로 택시에 올라타는 게 룸미러에 비쳤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근처 네온사인 불빛으로 기즈의 얼굴을 가까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시동을 걸어 줘." 시트를 뒤로 젖히고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을 듣고 있던 택시 기사가 허둥대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라이트는 켜지 말구!" 기즈를 태운 택시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사메지마는 몸을 낮추었다. "자, 뒤따라 가자구!" "마침내 왔군요, 형사님." 택시기사는 힘차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사메지마는 기즈가 타고 간 택시회사 이름을 수첩에 적어넣었다. 심야에 택시가 택시 뒤를 쫓는 미행은 실패할 염려가 별로 없었다. 다만 신호에 걸리든가 해서 2대가 나란히 멈추어 서게 되었을 때가 문제였다. 사메지마의 얼굴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 주의하면 되는 것이었다. 기즈가 탄 택시는 고슈 가도로 나와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더니 곧장 신주쿠도리로 접어들어 직진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짐작은 갑니까, 형사님?" "후카가와 쪽으로 갈 것 같군." "그렇다면, 한조몽에서 왕궁을 돌아 에이다이도리로 길을 잡겠군요." 기즈와 가즈오가 처음 만난 것이 몬젠나카쵸 스낵바였다는 후유키의 말이 사메지마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즈는 원래 고토구 출신이었다. 프로 범죄자들은 낯선 곳에서 사는 것을 꺼리는 습관이 있었다. 추적을 받았을 때, 몸을 숨길 수 있는 친구집이 있거나 아니면 뒷골목 구석구석까지 훤히 알고 있는 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또 몬젠나카쵸 언저리 스낵바에는 먼 곳에서 일부러 원정오는 손님이 극히 드물었다. 있다 치더라도 치바 방면 - 다시 말하면 동쪽 지역 손님밖에 없었다. 기즈가 탄 택시는 오데마치에서 우회전해서 에이다이도리로 접어들었다. 에이다이바시를 건너자 도로는 한적했다. 기즈가 탄 택시도 스피드를 높이기 시작했다. 에이다이도라는 노면이 엉망이었다. 시속이 70 킬로미터를 넘자 택시는 심하게 뒤뚱거렸다. "에이다이도리는 말이죠, 노면이 말씀 이니기론 도쿄 도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겁니다." 굉음을 울리며 추월해 가는 대형 트럭은 시속이 1백 킬로미터는 되어 보였다. "저런 괴물이 쉴새없이 과속으로 달려 댄대서야 견디어 낼 재간이 없긴 하겠지만....." 택시는 몬젠나카쵸 네거리를 지나 도미오카 하치만 앞에서 방향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우회전하자마자 라이트를 끄면서 세워 줘.'" "'네에?'" 기즈가 우회전한 뒤 얼마쯤 가서 멈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십 미터 지점에서 멈출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기즈는 택시에서 내릴 때, 반드시 주위를 경계할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그럴 때, 택시 한대가 지나쳐 가면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토구의 이 언저리는 스미다가와 지류가 많았다. 오요코가와. 센다이보리가와. 헤이큐가와 등이 아라가와와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다리가 적지 않았다. 우회전해서 얼마 가지 않아 저만큼 작은 다리가 보였다. 기즈가 탄 택시는 그 다리를 지나 좌회전했다. 언저리의 좁은 길은 대부분이 일방통행이었다. "좋아, 라이트를 끈 채 달리라구!' " 가로등이 길을 밝히고 있어 추돌할 염려는 없었지만 택시기사는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쉽잖겠는데요.'" 입으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그는 사메지마가 시키는 대로 했다. 다리 앞에 이르자 사메지마는 택시를 세웠다. 다리 건너, 왼쪽으로 2백 미터쯤 들어간 곳에 브레이크 라이트와 룸 라이트를 켠 택시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즈가 차에서 내렸다. 사메지마의 택시가 뒤따르고 있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택시에서 내린 기즈는 곧장 오른쪽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메지마도 몇 분 기다렸다가 택시에서 내려 기즈가 들어간 건물 앞까지 걸어갔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임대 전용 아파트였다. 3층 높이에 가로로 펑퍼짐한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는 보이지 않았다. 각층마다 네 세대씩 자리잡고 있었다. 불이 켜진 곳은 이층 왼쪽 끝집뿐이었다. 일층 입구로 들어선 사메지마는 현관 홀에 비치된 우편함을 살피기 시작했다. 불이 켜진 집은 204호였다. 204호 우편함에는 명패가 없었다. 아파트 이름과 주소를 메모한 사메지마는 타고온 택시가 멈춰 있는 곳으로 되돌아 왔다. 잠복미행을 성공적으로 끝낸 셈이었다. 남은 것은 공방을 찾아내는 일 뿐이었다. 9 마침내 오고 말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날 이후, 어떤 생각이 머리 속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로프 안쪽에 서서 형사와 똑같은 눈으로 현장을 보는 것 - 자기 자신도 한정된 현장 멤버의 한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가지 방법밖엔 없었다. 잘만 하면 그는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멤버의 한사람이 될 수 있었다. 멤버가 되는 것, 로프 안쪽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형사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과는 다르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그는 다른 것이었다.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형사와 같이 로프 안쪽에 서 있는 특별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구경군이나 TV 보도진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그들과 다른 인간이다. 로프 바깥쪽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좀더 일찍 깨달아 훨씬 이전부터 로프 안쪽에 동참했어야 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앞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출구를 찾아 더듬던 어둠 속에서 바로 코 앞에 계단이 나타났을 때처럼 속까지 후련했다. 멤버가 되는 것 - 그 형사들과 한편이 되어야 했다. 사고력에 가속이 붙으면서 모든 계획이 차례차례로 눈앞에 떠올랐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전화였다. 신주쿠 역 공중전화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10초간, 그 이상은 위험했다. 그는 세이부신주쿠 역에서 내렸다. 그날로부터 꼭 일주일이 지났다. 경관 살해범은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경관 살해가 연속살인의 신호라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범인이 앞으로도 누군가를 반드시 계속 죽여 주어야 했다. 범인은 라이플로 경관을 사살했다. 라이플이라면 멀리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형사들은 틀림없이 고층건물이나 빈 빌딩옥상을 집중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신주쿠 역 히가시구치 공중전화 앞에서 그는 메고 있던 숄더백을 한번 추슬려 올렸다. 손가락끝도 땀에 젖어 있었다. 4개나 되는 전화 부스엔 모두 사람이 들어 있었다. 그 중 오른쪽 가장자리 부스가 곧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일즈맨처럼 보이는 양복차림의 사내가 수첩을 닫으면서 수화기를 든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는 숄더백 안으로 한쪽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는 흰 장갑이 들어 있었다. 재빨리 장갑을 낀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이 계절에 장갑을 끼고 있으면 눈에 두드러질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일즈맨이 전화 부스문을 밀쳐 여는 것을 본 그는 시침을 떼고 옆 부스 앞으로 옮겨 섰다.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상대방이 이쪽 얼굴을 쉽게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빈 부스를 두고 엉뚱한 곳에 줄서 있는 그가 이상스럽다는 듯 세일즈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 뿐, 잰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이 거리에선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게 불문률 아닌가. 스쳐 지나가면 그 뿐, 금방 잊어 버리는 것 -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달랬다. 그래도 불안은 가셔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세일즈맨이 걸어간 쪽을 살펴보았다. 세일즈맨은 앞만 바라보면서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오른손을 뽑아 부스 문을 슬쩍 밀어 열었다.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 길 쪽을 등지고 섰다. 제1단계 돌파.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을 눈여겨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10엔짜리 동전을 꺼내었다. 전화기에 집어넣기 전에 장갑낀 손으로 몇 번이나 문질러 닦았다. 전화기에 담긴 동전이 한두 개가 아닌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형사라 하지만 그가 사용한 동전을 구별해 찍어낸다는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리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전화 카드는 통화가 끝난 뒤 빼낼 때까지 몇 초밖에 안 되긴 하더라고 여분의 시간이 걸렸다. 때문에 동전을 쓰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수화기를 들어 전화기 위에 올려놓은 다음, 10엔짜리 동전 2개를 공중전화에 집어넣었다. 땀이 줄줄 흘렀다. 장갑낀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마지막 네 자리 숫자는 <0110> - 경찰서 전화번호 마지막 숫자는 모두 110이었다. 끝숫자를 누르자마자 그는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귀에 닿지 않게 조심했다. 경찰이라면 수화기에 묻은 땀으로 혈액형을 알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네, 신주쿠 경찰섭니다.'" 여자 교환수 목소리였다. 첫번째 신호가 끝까지 울리기도 전에 응답해 온 것이었다. 너무도 재빠른 데 질린 탓일까, 그는 훅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여보세요, 무슨 일입니까?" "..... 여보세요."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직은 괜찮아. 긴급 110과는 다르지 않는가. 경찰서엔 하루종일 온갖 사람이 전화를 걸어올 게 분명한 일 - 때문에 전화건 사람을 무조건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이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은 형사가 아니라 교환수가 아닌가. "여보세요, 신주쿠 섭니다. 말씀하세요." "저어..... 수사본부를 바꿔 줘요." "어떤 수사본붑니까?" 그는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지금부터 시간을 너무 끌면 안된다고 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경관 살해사건의....." "잠시 기다려 주세요." 교환수 목소리에 경계의 빛이 서리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내선 호출 신호 소리가 그의 귓전을 잔잔하게 흔들었다. 이번에도 단 한번 뿐이었다. "네, 1계입니다." 남자 목소리였다. 딱딱한 말투, 그는 지금 형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여보세요, 여긴 수사 1곕니다." 전화를 받은 형사는 독촉하듯이 말했다. 그는 숨을 들이마신 다음, 단숨에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소도야마에게 전해 줘. 또 한다구 말야. 경관이 또 죽어. 난 경관이 밉단 말얏!"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지는 미리 연습해 두었었다.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미안합니다. 전화가 멀어서 잘 안 들리는군요. 뭐라고 했죠? 뭘 또 한다는 것이죠?" 그는 수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같은 말을 되풀이할까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번뜩 정신이 들었다. 들리지 않았을 까닭이 없지 않는가. 형사는 시간을 끌 생각이었던 것이다. 역탐지를 할 수 있도록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벌려고 한 것이다. "또 경관이 죽어!" 그는 수화기를 후크에 걸었다. 긴장한 탓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 것일까, 철컥하는 소리가 부스 안을 가득 울렸다. 서둘러, 얼른 여기서 피해야 해. 그는 허둥대며 부스 문을 잡아당겼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장갑을 끼지 않은 왼손을 내밀던 그는 허둥대며 팔을 움츠렸다. 그러느라고 잡아당긴 문짝에 얼굴을 부딪치고 말았다. 아픔을 느낄 여유도 없이 그는 전화 부스 밖으로 빠져나왔다. 전화 부스 밖에는 열 일고여덟쯤 되어 보이는 소녀 둘이 서 있었다. 두 소녀는 머리를 문에 부딪쳐 가면서 튀어나오는 그를 눈이 동그래져서 바라보았다. 그는 장갑낀 오른손을 얼른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두 소녀를 무시한 채, 태연한 얼굴로 걷기 시작했다.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직 장갑도 낀 채로였다. 두번째 계획을 실행해야 할 차례였다. 카부키쵸는 아직 사람이 크게 붐비지 않았다. 코마 극장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가면서 그는 오른손으로 숄더백 안을 더듬기 시작했다. 백 안에는 따로 잔물건을 넣어두는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손가락끝에 길쭉한 촉감이 전해졌다. 바로 두번째 계획에 포함된 물건이었다. 영화관으로 둘러싸인 카부키쵸 광장은 언제나 사람으로 붐볐다. 화단 가장자리를 둘러싸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거나 서 있었다. 대부분이 약속한 상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얼른 끝내고 <막스 맨> 으로 가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광장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대형 화단에는 빨강이랑 노랑꽃이 만발해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선글래스를 낀 인상 나쁜 남자가 화단 가장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대여섯 명씩 짝을 이룬 여자애들이 여기저기에 무리지어 재잘대고 있기도 했다. 주변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선전 방송, 게임 센터의 전자소음이 뒤섞여 사방이 빌딩으로 둘러싸인 광장은 귀가 멍멍할 정도로 왁자지껄했다. 그는 더위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 광장은 신주쿠에서도 특별히 기온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벨 소리가 울려퍼졌다. 주변 영화관에서 상영 개시를 알리는 벨이었다. 그 소리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숄더백에 오른손을 꽂아넣은 채 화단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선글래스의 인상 험악한 사내가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그는 움찔했다. "늦었잖아?" "미안." "벌써 시영(始映)벨이 울렸단 말야!" 코를 찌르는 향수냄새와 함께 검정 팬츠 수트에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 그의 앞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선글래스 사내는 이미 몸을 돌려 안쪽 영화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여인은 선글래스 사내에게로 달려가 팔짱을 꼈다. 그는 앉음새를 고치며 주위를 살폈다. 숄더백은 무릎 위에 안고 있었다. 천천히 오른쪽 무릎 아래로 숄더백을 늘어뜨렸다. 백 속에 넣은 오른손으로 속주머니를 더듬어 길쭉한 물건을 꺼내었다. 시선은 정면에 던져놓은 채로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래쪽, 특히 숄더백이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자연스런 동작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를 눈여겨 보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숄더백 밑바닥을 화단 안쪽으로 슬쩍 밀어넣었다. 가장자리에서 10센티미터쯤 되는 곳이 적당했다. 어젯밤, 그는 카터로 숄더백 바닥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 구멍을 통해 손끝으로 집은 길쭉한 것을 화단 흙바닥으로 밀어내었다. 그것은 소리도 없이 풀과 화초 사이에 떨어졌다. 자기가 떠난 뒤, 누군가가 발견해 내지나 않을까고 그는 걱정이 되었다. 남의 눈에 두드러지는 것도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나중에 찾아내지 못할 만큼 깊숙하게 숨겨지는 것도 좋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여인이 재잘대면서 그 앞을 지나갔다. 일본말이 아니었다. 그는 숄더백을 왼손으로 받쳐 다시 무릎 위에 올려안았다. 그러면서 백 속의 오른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쿵쿵거리던 가슴 고동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대충 끝낸 셈이었다. 남은 일은 <막스 맨>에 들러 이가와씨와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디 있는 공중전화를 이용할지, 그것도 이미 정해 놓고 있었다. 전화를 건 다음 곧장 이곳, 카부키쵸 광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지 않는가. 10 또 경관이 피살되었다는 얘기를 사메지마는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중국집에서 들었다. 그 중국집은 기즈의 아파트와 가까운 에이다이도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시간쯤 전에 기즈도 거기서 저녁식사를 했었다. 식사를 마친 그는 곧장 아파트로 돌아갔다. 한동안은 외출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사메지마도 저녁식사를 서둘기로 한 것이었다. 이 사흘 동안, 기즈는 식사와 가벼운 쇼핑 이외엔 외출다운 외출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식당 음식에 차츰씩 질리고 있었다. 수퍼에서 사먹는 도시락이나 햄버거는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그러나 잠복감시를 교대해 줄 요원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메지마가 잠복감시를 하고 있는 곳은 어느 철공소 자재 야적장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관리사무소였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기즈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비스듬히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철공소 주인을 설득해서 당분간 은밀하게 빌려든 것이었다.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노천 주차장에는 기즈의 세드릭이 주차해 있었다. 하루종일 그렇게 주차해 있다는 것이 이웃 사람들의 얘기였다. 더러는 눈에 띄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도 대체로 한두 시간이면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라고 했다. 관리사무소는 한평 반 남짓한 가건물이었다. 비바람은 피할 수 있었으나 햇볕이 쨍쨍한 한낮에는 사우나탕 못지 않았다. 금연을 조건으로 빌려든 곳이었기 때문에 담배 한대 피울 수 없었다. 하루 종일 간이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고역을 벌써 사흘째 계속하고 있는 사메지마였다. 밤 9시. 중국집도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사메지마가 들어선 것은 흰 가운을 걸친 초로의 주인이 휘장을 막 걷으려는 순간이었다. "볶음밥이라면...." 주인의 호의로 사메지마는 저녁 굶는 것만은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볶음밥은 금세 나왔다. 사메지마가 숟가락을 들자, 주인은 TV 채널을 NHK에 맞추면서 객석에 걸터앉았다. - 신주쿠에서 또 경관 피격사건이 발생, 한명이 사망하고 한명은 중태에 빠졌습니다. 톱뉴스 제1성을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사메지마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화면을 응시했다. 사건 발생시간은 오후 6시 40분께, 막 어두워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순찰중이던 신주쿠 서 교통과 패트롤카가 기타신주쿠, 통칭 세무서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중, 뒤따라 달려온 오토바이가 오른쪽에 바싹 붙어 멈추면서 발포했다는 것이다. 연속 두 발이었다. 운전석에 잇던 가나이 경장은 머리를 맞아 중태, 오른쪽 어깨를 맞은 조수석의 하세베 순경은 총알이 왼쪽폐까지 관통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숨이 끊겼다. 범인은 얼굴 전체를 덮는 헬멧을 쓰고 있었고, 오토바이 넘버판에 흙탕이 칠해져 있었다. - 경찰은 총탄 감정을 서둘고 있습니다만, 지난주 카부키쵸 2쵸메에서 발생했던 경관 살해사건과 동일범일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번 범행에 쓰인 총은 라이플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메지마는 들고 있는 숟가락을 놓았다. 어느새 식욕도 싹 가셔지고 말았다. 범인은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고, 더군다나 패트롤카 바로 옆에 붙어서 발포했다면 라이플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 현장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범인은 검정 점퍼에 진바지 차림입니다. 그러나 헬멧 때문에 얼굴 모습은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화면엔 병원이 비쳐졌다. 리포터는 병원 입구에서 중계를 시작했다. - 중태에 빠진 가나이 경장이 입원하고 있는 도쿄 의과대학 부속병원입니다. 이곳은 현장과도 가깝고, 또 가나이 경장이 근무하고 있는 신주쿠 서와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6시 40분께, 가나이 경장은 구급차가 아니라 패트롤카에 실려 이곳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응급처치에 참가한 의사들 얘기로는, 두부에 박힌 탄환은 적출해 냈으나 아직 의식불명으로, 낙관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범인이 무슨 까닭으로 경관을, 그것도 신주쿠 서 소속 경관을 계속 노리고 있는지 수사본부는 지난주 범행까지 포함해서 수사 방향을 대폭 수정해야 하는 곤경에 빠져있다고 보겠습니다. 카메라는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 그럼 방금 끝난 신주쿠 서 특별수사본부의 기자회견을 보시겠습니다. - 직무수행중의 정복경관을 연속적으로 저격하는 행위는 법치국가에 대한 도전입니다. 법을 지키고 집행하는 경관 살해는 법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로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수사본부는 수사요원을 대폭 늘려서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절대로 재발하지 못하도록 수사에 총력을 경주할 각오로 있습니다. 경찰청 형사부장이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 눈빛엔 강한 분노가 이글거렸다. 연속된 경관 피살사건으로 경찰청 위신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이어서 화면에 나온 평론가가 범인 상(像)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다. -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범인이 경찰과 경관에 대해 엄청난 증오심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에 어떤 형태로든 경관과 트러블이 있었던 범인이, 그것을 계기로 경찰 전체를 증오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신주쿠에서 범행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트러블은 당연히 신주쿠에서 일어났었다고 봐야 하겠죠. -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반체제 사상을 가진 게릴라 그룹, 다시 말하면 테러리스트의 범행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경관은 적군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선 죽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 범행 성명이 없어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만약 테러리스트의 범행이라면 앞으로 점점 더 확산되어 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겠습니다. 사메지마는 볶음밥을 반쯤 억지로 뱃속에 퍼넣었다. 범행은 정확히 일주일 간격, 월요일에 되풀이된 것이었다. 계획된 연속범행임에 틀림없었다. 같은 요일에 범행을 되풀이하는 것은 별로 드문 일이 아니었다. 방화 따위는 더욱 더 그랬다. 방화는 유쾌범적(愉快犯的) 요소가 강한 범행이었다. 화재 규모보다는, 현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허둥대거나 법석을 떠는 것을 보고 즐기고 싶어서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범인은 매주 보는 TV의 특정 프로그램이 끝난 뒤라든가, 직장의 정기적인 특정행사가 있었던 날에 맞추어 일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휴일만 골라서 범행을 되풀이한 예도 있는 걸 보면 생활 속의 규칙성이 연속범을 만들어 낸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범인의 꼬리를 잡는 일도 한결 손쉬운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연속범죄는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간격도 짧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일주일 단위라면 연속범죄로서는 상당히 짧은 사이클이었다. 좀더 에스컬레이트되면 사흘마다, 또는 하루 건너로 잦아지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에 따라 검거의 찬스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피해자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수사본부가 안고 있는 딜레마이기도 했다. 신주쿠 서 소속 전 경관에게 총기 휴대령이 내려질 가능성도 있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중국집을 나온 사메지마는 관리사무소까지 걸어갔다. 걷는 동안 담배를 피웠다. 한밤중, 관리사무소에서 불빛을 비쳐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기즈의 아파트엔 불이 켜져 있었다. 사메지마는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작은 창을 통해 기즈의 아파트를 지켜보았다. 수사본부 인원 보강을 위해, 경찰청 뿐만 아니라 신주쿠 서 다른 파트 사람도 동원될 게 분명했다. 그럴 경우 우선 경비과와 방범과 사람이 차출되는 것이 순서였다. 지금 사메지마는 수사본부로 동원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기즈의 공방을 찾아내는 것이 더 급했다. 아파트를 이렇게 지키고 있는 지금, 공방을 확인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공방을 덮쳐 싹 쓸어 버리면, 아무리 기즈라지만 몇 년 뒤 출소한다 하더라도 한동안은 장사를 재개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기즈도 살림집과 공방을 엄격히 구별해 놓고 있는 것이었다. 권총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반(旋盤)을 비롯해서 엄청난 공구와 설비가 필요했다. 또 탄환이 없으면, 총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 낸다 해도 쓸모가 없는 것 - 따라서 기즈는 상당한 양의 각종 탄환을 공방에 보관해 놓고 있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읽고 있었다. 괴롭고 따분한 잠복감시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기즈는 술이나 섹스는 없어도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총을 만들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유흥가와는 담을 쌓고 있어도 태연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만들다 둔 총을 내버려 둔 채, 저처럼 아파트에 처박혀 있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기즈를 검거한 것은 사메지마가 신주쿠로 옮겨온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기즈가 호모임을 밝혀낸 것도 사메지마였다. 기즈는 자기가 지명수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기즈의 총 만드는 솜씨는 야쿠자 두목들 사이에는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야쿠자들이 기즈와의 접촉방법을 경찰에 알려 줄 까닭이 없었다. 기즈는 기즈대로 자기가 정한 특수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고객과의 접촉을 피했다. 수사 4계 요청으로 방범과에서는 다른 형사가 기즈의 행방을 뒤쫓고 있었다. 보조수사를 맡겠다고 자청한 사메지마는 우에노 경찰서로 가서 기즈의 기록과 행적을 조사했다. 그 결과, 기즈가 드나듬직한 술집을 몇 군데 찾아냈다. 모두가 호모를 상대로 하는 술집이었다. 얼굴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 사메지마가 잠복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기즈를 검거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체포당할 때, 기즈는 별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기즈는 그 술집에서 사메지마와 두어 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사메지마가 형사임을 안 기즈는 마음 속으로 크게 놀란 것같이 보였다. "형사라면 첫눈에 알아본다고 자신하고 있었어. 특히 신주쿠 서 형사라면 말야. 헌데 당신한테선 형사 냄새라곤 눈곱만큼도 안 났어." "유감이군." 기즈는 껄껄 웃었다. 기즈는 피부가 하얀데다가 눈이 쭉 찢어 진 게 보기 드문 미남형이었다.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여자들이 따를 얼굴이었다. 그런 기즈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웃는 모습이 사메지마에겐 섬뜩하게 느껴졌다. "새로 온 애송인가?" "그런 셈이야." 신주쿠 서로 실려가는 패트롤카 안에서 다른 형사가 사메지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사메지마는 다른 차를 타고 서로 갔다. 심문실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 수갑을 찬 채 혼자 앉아 있던 기즈가 불러세웠다. "경감이라면서, 당신?" 기즈가 불쑥 물었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부하 한명 없는 경감이라구..... 당신 동료가 알려 주더군." 사메지마가 돌아서자 기즈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다음에 또 만나면....." 기즈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사내 맛이 얼마나 좋은지 가르쳐 주지." "사양하겠어." "아니, 꼭 가르쳐 주지. 가르쳐 주라고, 당신 동료가 내게 부탁했어." 말을 마친 기즈는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사메지마를 강간하겠다는 예고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도록 불을 붙인 것은 같은 방범과 형사였다. 그때, 사메지마는 등 뒤로 형사실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꼈다. 기즈를 심문한 형사들은 공방에 대해선 한마디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재범임에도 불구하고 기즈의 형기는 대폭 낮아졌다. 그때 사메지마는 심문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포켓 벨 소리에 사메지마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신주쿠 서로부터의 호출이었다. 사메지마는 벨 스위치를 끊었다. 서로 불려가서 수사본부에 배속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경관 살해범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경관이 그 사건에만 매달릴 수는 없지 않는가. 범죄자는 경관 살해범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위신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경찰기구에 대한 반발심이 사메지마로 하여금 기즈에게 집착하게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기즈는 사메지마 자신이 교도소로 보냈던 녀석이었다. 내일은 어쩔 수 없이 서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겠지만, 오늘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즈를 감시해야 한다고 그는 마음을 굳혔다. 서둘러. 빨리 움직여 봐! 사메지마는 기즈 아파트의 불빛을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수사본부가 자네를 원하고 있어." 모모이가 말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튿날 아침, 출근 직후의 일이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양쪽에서 야단들이야. 죽은 사카 순경 아버지와 본청에서." "저하곤 관계 없는 일입니다." "지명 차출이야. 본청 공안이 자네 아니면 안 된다는 게야." 모모이는 사메지마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을 이었다. "경험자가 필요하다는 게야!" "고다 총경이 그럽디까?" 모모이는 긍정도 부정도 안했다. 고다는 인원보강을 핑계삼아, 사메지마를 끌어들여 턱짓으로 부려보고 싶은 생각일 게 분명했다. 사메지마가 마주 쏘아보자, 모모이는 슬쩍 시선을 비켰다. "기즈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이번엔 녀석의 일터까지 꼭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며칠이나 잠복하고 있나?" "사흘입니다." "그럼 쳐들어가도 괜찮을 텐데?" "안됩니다. 살림집은 덮쳐봤잡니다. 공방이 어딘지 알아낼 때까진 그냥 둬야 합니다." 모모이는 눈을 감았다. "공안에게 사정얘길 하면, 기즈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지?" "공안의 힘으론 경관 살해범을 잡아낼 수 없을 겝니다." "어째서?" "범인은..... 극좌가 아닐 테니까요." "그럼, 자네가 직접 말해 주겠어?" 모모이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습니다." 사메지마는 자기 책상으로 가서 기즈 구속영장과 수색영장 청구서를 작성했다. 그것이 끝나자 곧바로 수사본부가 설치된 방으로 갔다. 수사본부는 때마침 아침 회의를 막 끝낸 참이었다. 탐문수사팀이 우르르 몰려나간 뒤를 야부가 어슬렁어슬렁 따라나왔다. "이따가 전화해 줘." 사메지마가 옆을 스칠 때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수사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고다는 안쪽, 화이트 보드 앞에 있었다. 포켓에 두 손을 찌른 채 오만한 태도로 신주쿠 서 수사과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사메지마가 들어서자 웅성대던 수사본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가 목소리를 낮춘 것이다. 개중에 몇몇은 사메지마를 주시하기도 했다. 그 바람에 고다도 사메지마가 들어선 것을 알게 되었다. "수고하게 됐군. 자린, 적당한 데 마음대로 골라 앉아." 사무적인 말투였다. 그 한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수사과장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고다 총경님!" "뭐야, 사메지마 경감." 방안은 물밑처럼 조용해졌다. "수사본부로의 차출은 사양합니다." 고다 얼굴에서 표정이 싹 가셨다. "수사를 계속해야 할 사건이 있단 뜻이군. 그렇담, 그 사건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 "안됩니다. 단독수사였기 때문에." "단독수사? 신주쿠 서에선 그런 수사를 허용하고 있단 말인가?" "총경님....." 수사과장이 끼어들려는 것을 고다는 손을 들어 막았다. "서장이 명령한다면, 그건 듣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대답을 마친 사메지마는 몸을 돌렸다. "사메지마." 사메지마는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고다의 입이 일그러졌다. "말씨가 제법 공손해졌군. 그렇다고 서내에서 널 감싸 줄 사람은 한사람도 없어. 권총 밀제조자를 뒤쫓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 그 따위는 문제도 아냐. 권총 밀제조자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지원해 줄 여유가 없어. 뭐가 잘났다고 혼자 그렇게 날뛰는가?" "........." "평경관으로 떨어지고 싶어?" "공안의 총경님이라면 일선 경찰서 인사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고다는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들릴락말락한 낮은 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썩 꺼져!" 사메지마는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방범과로 돌아온 사메지마는 구내전화로 야부를 찾았다. 사메지마임을 안 야부의 목소리는 금방 따뜻하게 바뀌어졌다. "시원한 냉커피라도 마실까?" 15분 뒤, 사메지마는 니시신주쿠의 고층 호텔 지하 일층의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이 호텔의 로비는 이층이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층 아니면 이층 라운지에 있는 커피숍을 이용했다. 지하 일층 커피숍은 폭이 좁은 대신 좌우가 길쭉했다. 손님도 별로 없었다. 안쪽 제일 구석진 자리에 사메지마와 야부는 마주 앉았다. "본부는 신문. TV와 협정을 맺은 모양이야. 실은 어제 범행 예고가 있었어." 야부는 아이스커피 한잔을 단숨에 들이킨 다음 추가로 한잔을 더 시켰다. "극좌?" 야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닌 것 같아. 더빙한 테이프를 갖고 왔어. 들어볼래?" 수사본부는 극좌집단의 범행 성명에 대비해서 외부에서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녹음하고 있다고 야부는 덧붙여 설명하면서, 풍성한 상의 속에서 헤드폰 스테레오를 꺼내었다. "나한테 들려 주는 까닭이 뭐야?" 고다가 야부를 앞세워 자기를 끌어들이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사메지마의 머리를 스쳤다. 다른 형사들 앞에서 사메지마로부터 망신을 당한 고다였다. 그러나 사메지마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휘하에 끌어들이려고 날뛸 게 틀림없었다. "우선 들어보기나 해." 사메지마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잡음에 이어, 공중전화에서 건 게 분명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 소도야마에게 전해 줘. 또 한다구 말야. 경관이 또 죽어. 난 경관이 밉단 말얏! 테이프는 이쪽 대응을 잘라내고 새로 편집한 것이었다. - 또 경관이 죽어! 사메지마는 눈을 들어 야부를 바라보았다. 젊은 남자 목소리처럼 들렸지만, 긴장으로 높아진 중년 목소리 같기도 했다. - 아까 전화했던 사람이야..... 카부키쵸 광장 화단에 증거를..... 갖다뒀어..... 한번 가봐..... 제일 큰 화단 안에..... - 난..... 절대로 붙잡히지 않아..... 테이프는 거기서 끝났다. "화단 얘기는 첫번째 전화가 걸려온 한시간 뒤였어. 시간은 오후 3시 18분과 4시 20분이었어. 두 번 모두 공중전화를 썼어. 역탐지는 불가능했어. 목소리를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동일인물이야. 두 번째 전화가 첫번째보담 훨씬 침착한 것 같지?"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처음인가?" "아니. 통신사랑 방송국에도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전화가 몇 통 걸려왔다는구먼. 대부분이 짓ㄱ은 장난으로 밝혀졌어." "소도야마 계장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또 한가지 주목할 게 있어. 두 번째 전화를 받은 직후, 순찰대가 카부키쵸 광장 화단에서 라이플 탄피를 찾아냈어." "구경은?" "5.56 밀리미터." "같은 것이었나?" 아부는 고개를 흔들었다. "두 사건에 사용된 탄환은 모두 30-06이었어. 밀리미터로 환산하면 7.62야. 5.56 밀리미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 5.56은 미군 제식(制式) 라이플 탄환이야. 요코스카 선물 가게엘 가면 5.56 탄피로 만든 키홀더 따위는 수두룩해." "어딘가 가짜 냄새가 나는군." "그래. 하지만 소도야마를 지명해서 걸어온 바람에 일이 고약하게 됐어. 그리고 전화가 걸려온 타이밍. 보통 그런 전화는 범행 이튿날 제일 많이 걸려오다가 날이 갈수록 차츰차츰 줄어드는 게 보통이야. 어제, 범행을 예고한 전화는 이것 밖에 없었어." 수사본부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일단 가짜로 치부하면서도 범인이 수사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고단수를 쓰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 않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건 그렇구, 나한테 할 얘긴 뭐야?" 사메지마는 야부에게 물었다. 두 잔째 냉커피를 스트로로 빨아들이던 야부가 입을 열었다. "어제, 두 번째 범행현장에선 탄피를 찾아내지 못했어." 사메지마는 야부를 응시하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30-60은 라이플 탄환이야. 하지만 어제 범행은 라이플론 무리야. 오토바이를 탄 범인이 라이플을 등에 메고 있었다 하더라도, 바로 옆에 있는 차를 장총으로 쏜다는 건 어려워. 총을 벗겨들어 겨누는 동안, 주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도 눈치 채게 마련이야. 목격자 말을 종합하면, 범인은 그처럼 긴 총은 갖고 있지 않았어." "라이플 총신을 짧게 자를 수도 있겠지." "그것도 한번 생각해 봤어. 산탄총 총신 앞부분을 잘라내는 건 미국에선 흔한 일이야. 탄환의 산개(散開) 패턴이 넓어지기 때문에 지근거리라면 조준할 필요도 없어져. 샤워 물줄기 처럼 탄환이 퍼져 가기 때문이야. 그러나 라이플을 그렇게 한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어.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총신 앞부분을 짧게 하면 탄환의 탄도가 흔들려 명중률이 떨어져." "범인이 그런 것까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지. 단순히 들고 다니기 쉽게 잘라냈을 수도 있잖을까?" "헌데, 그렇게 볼 수 없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 탄피를 못 찾아냈다는 게 바로 그것이야." 야부는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를 이어갔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7밀리미터가 넘는 큰 구경 라이플은 볼트 액션이야. 볼트액션이든, 오토매틱이든 관계 없이, 탄피가 튕겨나가지 않으면 다음 탄환은 쏠 수 없어. 리볼버 권총처럼은 안 된다는 뜻이야." 총탄은 대개 약실과 탄두,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탄두는 문자 그대로 날아가는 머릿부분으로 금속덩어리이다. 약실은 화약이 장전된 길쭉한 원통형인데 바닥 부분엔 뇌관이 붙어 있다. 방아쇠를 당기면 격철이 뇌관을 치고, 그때 일어난 작은 폭발력이 약실 내부에 장전된 화약을 폭발시켜, 그 힘으로 탄두가 발사되는 것이 바로 총의 시스템이다. 탄두가 발사되고 나면 빈 약실은 총에는 불필요한 단순한 금속통 - 바로 탄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원래 총 내부에는 그러한 폭발과 연소시키는 공간 - 약실이 한개 뿐이다. 리볼버 권총과 같이 연뿌리 단면도처럼 생긴 탄창에 수납되는 탄환 숫자만큼 약실이 여러 개 있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사례이다. 또 이련수평형 (二連水平形) 산탄총처럼 2개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모든 총 - 오토매틱 권총이나 라이플은 모두 약실이 한개 뿐이었다. 따라서 탄두가 발사된 뒤 탄피는 다음 총탄 발사의 훼방꾼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화약 연소 가스 압력으로 저절로 튕겨져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오토매틱인 것이다. 볼트액션식은 약실 덮개에 붙어 있는 볼트를 일일이 전후로 움직여서 탄피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라이플로 두 발을 쏘자면 첫발을 쏜 뒤, 약실에서 탄피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야부는 지금 그 제1탄의 탄피가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장은 교통량이 엄청난 지역이니까 튀어나온 탄피가 달리는 자동차에 부딪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을 수도 있겠지. 허나 목격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범인은 볼트 조작 없이 계속해서 두 발을 쐈어." "그렇다면 고도의 기술자가 개조한 총을 사용했다는 뜻인가?" 야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개조한 총이라기보다는 새로 만든 전혀 다른 총일 게야. 권총 크기에 라이플탄을, 그것도 복수의약실을 갖추고 있어 탄피 배출 조작 없이 연속 발사할 수 있는 총....." "라이플탄을 사용할 수 있는 권총은 없나?" "미국제 권총 중엔 그런 것도 있긴 있어. 그러나 볼트액션의 단발이야. 보통의 경우, 권총으로 라이플탄을 발사한다는 건 별로 의미 없는 일이야. 강한 위력이 필요할 땐 마그넘 모델을 쓰면 되기 때문이야. 장탄수(裝彈數)도 많을 뿐 아니라 라이플탄에 비하면 사용하기도 손쉬워. 원래 라이플탄을 짧게 한 게 바로 권총용 마그넘탄이거든." "그럼 범인은 무슨 생각으로 힘들여 그런 총을 만들었을까?" 야부는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그게 바로 문제야. 무슨 까닭으로 그처럼 위력이 센 총이 필요했을까?" "미국이라면, 굳이 권총에 라이플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위력이 엇비슷한 강력한 마그넘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단 말이지? 그러나 일본에서는....." 사메지마는 끝까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갑자기 기즈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야부가 그 뒤를 이어갔다. "일본에선 그처럼 강력한 권총과 탄환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허나 라이플탄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탄환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면, 거기게 맞는 총도 만들어 낼 수 있어." "그러나 그런 기술을 갖춘 녀석이 흔치는 않을 텐데." "그래. 만약 범인이 사용한 총이 복수약실형이라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만들지 않았던 신형이야. 또 라이플탄의 복수약실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냐." "결국 얘기는 그렇게 되는가?" "그렇게 되지!" 야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11 사메지마가 잠복감시한 엿새째 되는 날 밤, 기즈는 마침내 움직였다. 그날, 기즈는 저녁 식사 하러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오후 3시쯤 편의점에서 엄청난 양의 식료품을 사들였다. 사메지마의 저녁식사는 언제나 기즈와 비슷한 시간에 했다. 기즈가 <식사 외출>을 안하면 사메지마도 관리사무소를 떠날 수 없었다. 기즈가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라야 사메지마도 도시락을 사러 가거나, 아니면 손쉽게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점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가능한 한 기즈와 같은 사이클로 식사를 했다. 기즈가 오후 7시에 저녁식사를 했다면, 새벽 1시쯤이면 시장기를 느낄 게 분명한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자지 않고 있다면, 미리 인스턴트 식품을 준비해 두었거나 아니면 밤참을 사먹으로 심야영업 식당을 찾아가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기즈의 생활 패턴을 파악한다는 것은 바로 그의 생각 뿐만 아니라 의식구조를 알아내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이었다. 기즈는 분명히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다. 촉각을 곤두세운 채, 자그마한 허점도 노출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즈오로 여겨질 만한 녀석은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기즈가 들어 있는 맨션 아파트 주민에 대한 탐문도 하지 않았다. 기즈 정도의 신중한 프로라면, 주변 주민에 대한 탐문이 있을 경우 금방 눈치 채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공방 근처엔 결코 얼씬도 않을 게 분명했다. 기즈의 생활 패턴은 단순했다. 대개 오전 10시쯤 아파트를 나와 근처 다방의 모닝 서비스로 아침식사를 때웠다. 정기구독을 않고 있는 기즈는 다방에서 그날그날 신문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일단 집으로 돌아와서 오후 3시쯤 다시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모밀국수 따위로 간단한 점심을 한 뒤, 빠칭코를 하거나 렌털 비디오숍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 7시쯤 다시 집을 나와 저녁식사를 했고, 그 뒤엔 일절 외출을 안했다. 기즈가 돈에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총을 팔아 모아둔 돈이 적지 않다고 봐야 했다. 기즈로부터 특제품 변조총을 샀던 어느 폭력단 간부는 총값으로 1백만엔이나 지불했다고 밝힌 적도 있었다. 겉모양은 평범한 장신구로 위장되어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호신용으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즈의 특제품은 그만큼 비싸게 팔렸다. 그 날, 저녁식사 때도 외출 않은 기즈가 아파트에서 나온 것은 밤 9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폴로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었다. 보통 때와 전혀 다름이 없는 복장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큼직한 종이 백을 들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기즈는 걸어서 몬젠나카쵸 스낵바로 갔다. 사메지마가 잠복을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스낵바는 에이다이도리를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빌딩 지하였다. 어쩌면 가즈오와 처음 만났던 곳인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사메지마는 지난 닷새 동안 후유키에게 몇 번씩이나 전화를 걸었었다. 가즈오의 행방을 묻는 전화는 그 이후에도 이틀에 한번꼴로 걸려온다는 게 후유키의 대답이었다. <아가메무논>에 불쑥 나타났던 날도 기즈는 집요할 정도로 가즈오의 행방을 물었다고 했다. 기즈가 스낵바로 들어가자, 사메지마는 길 건너편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15분쯤 지나가 기즈가 지하 계단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메지마는 허둥대면서 자세를 바로 했다. 기즈는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려 에이다이도리를 건너 아파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아파트로는 들어가지 않고 차츰씩 발걸음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기즈가 스낵바에 들른 것은 가즈오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한 것일 거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일까, 거리엔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사메지마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기즈를 뒤따랐다. 기즈가 가고 있는 방향은 남쪽이었다. 에이다이도리를 등지고 펼쳐져 있는 매립지 쪽이었다. 매립지라곤 하지만 이미 주택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기즈는 에이다이도리에서 세어서 두 번째 다리를 건넜다. 목적지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음식점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사메지마는 긴장했다. 설마 이처럼 가까이 공방을 설치해 놓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기즈가 만약 <일터>로 간다면 그 때는 자동차를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해 온 터였다. 기즈가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헤이큐가와 지류와 맞닿는 골목길이었다. 놀잇배. 거룻배. 수상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지류는 그러한 배나 수상건물 때문에 끌어들인 수로처럼 보였다. 실제로 지류 한쪽은 막혀 있었다. 반대측 흐름은 헤이큐가와와 합류하여 시오미 운하.도요스 운하를 거쳐 아라가오와 함께 도쿄 만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기즈는 배 모양을 한 수상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도미가와 마루> 간판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한동안 기다렸지만, 기즈가 나올 낌새는 전혀 없었다. 사메지마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도미가와 마루에는 <보리멸. 양태. 문절망둑 튀김> 이라고 쓰인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낚싯배와 놀잇배 영업도 함께 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물살 가르는 소리가 사메지마의 귓전을 흔들었다. 하류 쪽에서 좁은 수로가 가득 찰 정도로 폭이 큰 놀잇배 한 척이 거슬러 오고 있었다. 평평한 지붕이 덮인 탓에 집 모양을 한 놀잇배에는 작은 초롱이 무수하게 반짝거렸다. 배가 다가옴에 따라 수로 양쪽에 계류해 둔 작은 낚싯배와 모터 보트가 물결을 받아 심하게 일렁거렸다. 그 놀잇배는 <도미가와 마루>네 소유였다. 놀잇배가 가게 옆에 나무를 짜서 만들어 붙인 선착장에서 멈추자 뱃사공의 전송을 받으며 승객들이 쏟아져 내렸다. 모두 줄잡아 50명은 되어 보였다. 도쿄 만 밤바람을 쐬며, 배 안에서 생선튀김을 안주로 술을 질탕 마신 듯, 승객들은 모두 비틀걸음이었다. 사메지마도 흩어지는 승객들 틈에 섞여 들어 수로변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상호(商號)를 염색한 짧은 덧옷을 걸친 사공들이, 손님이 내린 놀잇배 뒷설거지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봐, 손님 왔어!" 가게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사공 한 사람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정말 오랜만인데!" 사공은 가게 앞에 서 있는 기즈를 알아보고 반갑게 외쳤다. 기즈 옆에는 <도미가와 마루>의 주인인 듯한 초로의 남자가 서 있었다. "미안하군, 수고를 끼치게 돼서....." 기즈의 목소리는 사메지마가 숨어 있는 곳에서도 똑똑하게 들렸다. "무슨 섭섭한 소릴. 준비가 끝날 때까지 안에서 맥주라도 마시면서 기다려." 사공은 선선하게 대답했다. 놀잇배에서 내린 손님들이 모두 흩어지자 사메지마도 수로 쪽에서 물러났다. 사공과 기즈가 주고받는 말로 미루어 두 사람은 꽤나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나이까지 비슷했다. 어쩌면 두 사람이 동창생일는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기즈는 여기서 배를 탈 작정인가. 사메지마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만약 기즈가 배를 타고 공방으로 간다면 뒤쫓아 갈 방법이 없었다. 기즈가 공방에서 작업하고 있는 현장을 덮치고 싶었다. 기즈에 대해 아직 영장이 발급된 것은 아니었다. 법원에 제출할 소명자료(疏明資料)는 모두 갖추어 놓고 있었다. 모모이의 결재를 받아 제출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모이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부서장의 허가를 받으려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서류가 부서장에게까지 올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모터 시동을 거는 날카로운 소리와 물살 가르는 소리에 사메지마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놀잇배 옆에 계류되어 있던 4인승 모터 보트에 기즈와 사공이 타고 있었다. 사공은 익숙한 솜씨로 키를 조종하여 수로둑과 놀잇배 사이로 모터보트를 몰아나갔다. 사메지마는 수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 지리는 조금 전에 눈여겨 봐 두었었다. 이 수로는 헤이큐가와와 합류 지점까지는 외길로 흐르다가 거기서부터는 세 갈래로 나뉘어졌다. 따라서 모터보트는 서쪽 도요스 운하나 동쪽 시요하마 운하가 아니면 곧장 남쪽으로 뻗은 시오미운하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세 방향 중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그것 만이라도 확인해 두고 싶었다. 모터보트가 놀잇배 사이를 빠져나오기만 하면 금방 스피드를 올릴 게 분명했다. 때문에 그전에 수로 교차점이기도 한 모래톱까지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메지마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모터보트 엔진 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수로 옆길을 정신없이 뛰어갔다. 다행히 수로 옆길은 도로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모터보트에 탄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전신이 땀에 젖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계속해 온 조깅의 성과를 지금 테스트하고 있는 셈이라고 사메지마는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달렸다. 앞쪽에 수로를 가로지르고 있는 다리가 보였다. 에츄지마와 후루이시바라는 섬을 잇는 낚시 다리였다. 그 다리만 넘으면 바로 수로 합류점이었다. 낚시 다리 위에서라면 모터보트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메지마는 더욱 속력을 내었다. 모터 보트가 물살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사메지마를 앞질러 나갔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달렸다. 아침내 낚시다리에 닿았다. 수면에는 흰 항적이 남아 있었다. 어깨로 숨을 헐떡이면서 다리 난간을 잡고 모터보트 행방을 쫓았다. 모터보트는 시오하마 매립지와 이어진 시라스나바시 밑을 지나고 있었다. 남쪽이었다. 똑바로 헤이큐가와를 따라 내려간 것이었다. 그쪽으로 곧장 가면 하마자키하시를 지나 시오미 운하와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거기서 시오미 운하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시노노메 운하까지 갈 것인가, 지금 서 있는 낚시 다리에서 확인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사메지마는 손바닥이 온통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숨을 고르면서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지금 기즈를 옭아넣자면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공방을 덮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모터보트가 <도미가와 마루>로 되돌아 온 것은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사공 혼자 타고 있었다. 기즈는 모터보트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에 공방을 설치해 두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미행당하는 것을 걱정해서 모터보트를 이용한 것일까. 기즈가 사메지마의 감시를 눈치 챘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만약을 염려해서 보트로 일단 엉뚱한 곳까지 가서 거기서 전동차나 택시를 타고 공방으로 갔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항상 그처럼 신중한 방법으로 공방엘 드나들었다면, 꼬리를 잡아내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사메지마는 속으로 감탄했다. 자신의 공방을 숨기기 위해 기즈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메지마는 기즈를 태워다 준 사공이 <도미가와 마루> 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알로하 셔츠와 진바지로 갈아입은 사공은 기즈와 비슷한 서른 대여섯쯤 되어 보였다. 사공의 집은 별로 멀지 않았다. 맨발에 대나무 샌들을 끌면서 사공이 들어간 곳은 차고가 딸린 20평 남짓한 이층집이었다. 4륜 구동차 옆엔 어린이 세발 자전거가 얌전히 서 있었다. 사공은 그 집 아들인 듯, 문패엔 도미가와라고 성만 적혀 있었다. 사메지마는 일단 신주쿠 서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미가와가 기즈를 태우러 가느냐, 않느냐에 따라 기즈의 공방이 물길로만 갈 수 있는 곳인지 어떤지는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미가와를 족쳐, 그가 기즈를 태우러 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면, 사메지마는 그 보트에 동승해서 공방을 덮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메지마가 도미가와와 일단 접촉하고 나면 기즈 체포를 미적거리고 있을 시간적 여유는 전혀 없다고 봐야 했다. 도미가와가 기즈와 친하면 친할수록 사전에 귀띔해 줄 위험이 높기 때문이었다. 도미가와가 기즈의 공방 위치를 알고 있을 확률은 반반이었다. 알고 있으면서 기즈를 태워다 주고 있다면 그만큼 보수도 높을 것이며, 당연히 기즈를 감싸 주려 할 게 틀림없었다. 집 위치만 보더라도 도미가와와 기즈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친숙하게 지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동창생일 가능성도 많았다. 기즈의 편의를 봐 주고 비밀을 지켜 주는 건 돈 때문만이 아니라 우정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메지마가 신주쿠 서에 되돌아 온 것은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수사본부엔 많은 수사요원이 야간 근무를 하고 있었다. 범인이 사용한 총이 기즈의 제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야부가 수사회의에서 지적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적어도 야부와 야부의 상상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주쿠서 뿐만 아니라 도쿄 경찰청 관내에서 야부의 상상력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한사람 뿐이라고 사메지마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야부가 총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할 까닭이 없지 않는가. 사메지마는 권총 보관고로 갔다. 예상했던 대로 거의 텅비어 있었다. 평소엔 거의 휴대 않고 맡겨뒀던 권총을, 경관 피살 사건 이후, 너도나도 찾아간 것이었다. 비번 형사 것을 제외하면 사메지마와 모모이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경감용인 뉴넌브 모델은 미국 스미스 & 웨슨사의 38구경 리볼버 M36을 베이스로 해서 일본 신중앙공업사가 만든 2인치 총신의 리볼버였다. 장탄수는 다섯발, 38스페셜 탄환이었다. 총이 작은 것만큼 반동이 커 결코 명중률이 높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사메지마는 오른쪽 허리에 홀스터를 고정시킨 다음, 주차장에 박아두었던 BMW에 올라탔다. BMW는 기즈의 잠복 감시를 시작하면서 서로 옮겨다 놓았던 것이다.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면 언제나 주차장부터 만원이 되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서둘렀기 때문에 BMW 주차 스페이스를 확보할 수가 있었다. 수사본부 인원을 증강한 뒤부터는 주차위반으로 견인해 오는 차를 보관하고 있는 계약주차장까지 수사요원들 차로 붐비고 있었다. <도미가와 마루>가 낚싯배까지 운영하고 있다면 새벽부터 영업이 시작된다고 봐야 했다. 따라서 영업을 시작하기 전에 부닥쳐 보자면, 노가다 아파트에 들러 눈을 붙이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메지마는 BMW를 몬젠나카쵸로 몰았다. <도미가와 마루>가 있는 수로 가까운 일방통행 도로에 BMW를 세운 사메지마는 차안에서나마 눈을 붙이기로 했다. 사메지마가 눈을 뜬 것은 새벽 4시였다. 주위는 아직도 캄캄했다. 차에서 내려 맨손 체조로 몸을 풀었다. 오늘 하려는 일은 자기가 생각해도 엄청난 도박이었다. 실패한다면 기즈를 놓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메지마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지는 것이었다. 자동판매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단숨에 들이마시고는 도미가와 집으로 향했다. 권총은 폴로 셔츠 위에 걸쳐입은 상의자락 속에 숨기고 있었다. 동녘엔 짙은 구름이 덮여 있었다. 하루 종일 햇볕 보기는 틀린 날씨였다. 조금 있으면 성질 급한 낚시꾼이 배를 빌리러 몰려들 시간이었다. 도미가와네 집에도 벌써 불이 켜져 있었다. 새벽 장사하는 사람들의 부지런함에 혀를 내두르면서 사메지마는 현관 차임벨을 눌렀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도미가와 가족들이 새벽부터 들이닥친 형사를 보고 얼마나 놀랄 것인가를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만에 하나, 도미가와가 도망칠 때를 대비해서 이미 집 주위도 살펴 두었었다. 뒷문은 없었다. 이 집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은 현관 뿐이었다. 창문으로 도망치려 해도 옆집이 바싹 붙어 있어 사람 하나 지나칠 만한 공간은 남아 있지도 않았다. 어린애라면 몰라도 어른은 절대로 몸을 비비고 빠져나갈 수 없었다. 불빛을 내비치고 있는 곳은 현관 바로 왼쪽 창문이었다. 부엌인 모양이었다. "누구세요?" 벨을 누른 잠시 뒤, 조금은 의아스러워하는 여자 목소리가 대답을 했다. 이어서 드르륵 창문이 열리면서 트레이닝복에 에이프런을 걸친 30대 여인이 사메지마를 미심쩍은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짧게 커트한 머리,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된장국 냄새가 풍겨왔다. "새벽같이 찾아와 미안합니다." 사메지마는 머리를 숙이면서 경찰수첩을 내어 보였다. "신주쿠 경찰서의 사메지마라고 합니다. 도미가와씨도 일어났습니까?" 여자는 잠시 주춤하면서 다시 한번 사메지마를 훑어보는 것 같더니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오!" 도미가와가 창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정 셔츠를 입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긴장한 목소리였다. 짧게 깎은 머리, 햇볕에 그을은 정한(精悍)한 얼굴이 방금 일어난 탓일까, 생각보다는 희게 보였다.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폐를 끼치게 됐군요. 기즈 가나메씨 문제로 잠시 물어볼 게 있어서....." 도미가와는 전신이 굳어지면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얼굴도 약간 창백해진 것같이 느껴졌다. 알고 있다고 사메지마는 판단했다. 이 사내는 기즈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아침을 먹고 서둘러 일을 나가야 합니다만." 도미가와는 퉁명스럽게 꼬리를 뺐다. "별로 시간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어젯밤 기즈씨와 만나셨죠?" 도미가와는 느닷없이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고개가 뒤로 벌렁 젖혀졌다. 눈도 둥그래져 있었다. "어머, 왜 그러세요? 여보, 정신차려요!" 바로 등 뒤에 서 있던 여인이 놀라면서 부르짖었다. 사메지마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눈으로 현관 도어를 가리켰다. "잠시면 됩니다." 도미가와는 길게 숨을 내뿜었다. "무슨 일이예요, 여보?" "시끄러워!" 버럭 소리를 지른 도미가와가 창곁에서 물러섰다. 이어서 현관 열쇠 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메지마는 신중하게 한발 뒤로 물러섰다. 느닷없이 저항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도미가와가 기즈의 내막을 알고도 도와 주고 있다면, 사메지마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미가와는 아래위 모두 오렌지색 줄무늬가 든 검정옷 차림으로 현관 턱에 버티어 섰다. "꼭두새벽부터 정말 미안합니다."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마주 서고 보니 도미가와는 사메지마와 비슷한 키였다. 몸매도 암팡질 만큼 단단하게 보였다. "기즈는 내 친구야, 중학교 때부터." 도미가와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럼,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겠군요." 도미가와는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집안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봐, 잠시 나갔다 올께!" 대나무 샌들을 신으면서 턱으로 수로 쪽을 가리켰다. 사메지마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족에게는 기즈의 얘기를 덮어두고 싶어하는 도미가와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앞장 서 가는 도미가와를 따라 사메지마는 <도미가와 마루>가 있는 수로 쪽으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도미가와는 동녘 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씨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수로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이르자, 도미가와는 걸음을 멈추고 사메지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 신주쿠 서에서 왔나?"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가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한대 피워 물었다. 필터가 달리지 않은 <피스> 였다. 담뱃가루가 입 안으로 빨려들었는지 침을 뱉었다. "가나메 녀석을 체포할 텐가?" "녀석이 만든 총에 또 사람이 죽었어." 사메지마도 말투를 바꾸었다. 도미가와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제 녀석을 실어다 줬지? 모터보트로." 도미가와는 말없이 눈을 치켜떠서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어디까지 태워다 줬나?" 도미가와는 눈길을 돌려 계류되어 있는 놀잇배와 모터보트를 바라보았다.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던져 샌들로 뭉개었다. "당신 이름은 뭐야?" "사메지마. 신주쿠 서 방범과 소속이야." 도미가와가 머리를 숙인 바람에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사메지마는 다그치듯이, 그러나 조용한 말투로 물었다. "기즈는 지금 어디 있어?" 도미가와는 길게 숨을 내뿜었다. 혀끝으로 이빨과 잇몸을 핥으면서 멀리 수로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뺨도 불룩해졌다. "이번에 잡히면, 꽤 오래 썩겠지?" 도미가와는 의식적으로 사메지마의 시선을 피하면서 물었다. "본인 하기 나름이야." "녀석은 일종의 환자야. 그렇지만 않다면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냐. 참을성도 있고 머리 회전도 빨라. 어릴 적부터 죽이 맞았어. 우린." "도움받은 게, 마음에 빚진 게 있나?" "없어. 아니, 그런 걸 따지자면 한이 없어!" 도미가와는 비로소 사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도박에 빠져 배랑 집을 뺏기게 된 적이 있었지. 사기 마작에 걸려들었던 게야. 녀석들 뒤에는 폭력단이 버티고 있었구. 가나메가 사이에 들어 배 빼앗기는 건 면할 수 있었어." "폭력단 이름이 뭐야?" "그런 건 알 필요 없잖아?" "어느 폭력단이었어?" 도미가와는 몇 번 혀를 차다가 대답했다. "라라오라고, 신주쿠에 본거지가 있어." 그 두목은 기즈의 단골 고객 중의 한사람이었다. "마작판에 당신을 꾀어넣은 건 기즈였나?" "그렇다고 문제될 건 없잖아?" 도미가와가 목소리를 높였으나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미가와는 자신이 기즈가 꾸민 함정에 빠졌던 것임을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까지 엮어넣을 생각은 없어, 기즈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기만 하면." "친구를 배반하란 말이야?" 사메지마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도미가와는 기즈를 공방까지 직접 데려다 준 것이었다. "그렇잖음 당신도 한패거리로 엮어넣을 수밖에 없어. 가족은 어쩔 생각이야?" "치사스럽게 굴지 마!" 도미가와는 표정을 바꾸면서 쥐어짜는 소리를 내질렀다. 사메지마는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기즈는 살인자와 한패거리야. 야쿠자끼리 죽이고 죽는 것까진 그래도 괜찮아. 허지만 유탄에 아녀자나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 건 참을 수 없어. 기즈가 만든 총에 벌써 많은 사람이 살해됐어. 당신 가족도 그렇게 목숨을 빼앗길 수 있어! 그런 걸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나?" 도미가와는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똑똑히 봐둬!" 사메지마는 상의자락을 젖혔다. 권총을 본 도미가와의 눈길이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나도 이미 목숨을 내걸었어. 하지만 녀석을 못 잡으면 모든게 헛수고야! 살인자만 늘어나게 돼!" 도미가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즈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당신 혼자 쳐들어갈 생각이야?" "그래!" "설마 가나메를 그 자리에서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수갑을 채워 재판정으로 끌고 가야 해!" "가나메는 두번 다시, 죽었으면 죽었지 교도소로 끌려갈 생각은 없다고 했어. 첫번째는 물론, 두번째도 교도소에서 끔찍한 짓을 당했다고 했어. 밤마다 남자를 상대해 줘야 하는 끔찍한 짓을!" "..... 당신은 그것까지도 알고 있었나?" "암. 하지만 녀석은 나처럼 호모가 아닌 사람에겐 손을 대지 않아. 우린 그냥 친구 사이야." 사메지마는 담배를 꺼내었다. 한대를 다 피울 동안 아무 말도 안했다. 도미가와도 생각에 잠겨들었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나자 사메지마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데려다 주는 거지?" 도미가와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보트에 타라구, 형사님!" 12 모터보트가 속력을 높이자 온갖 냄새가 뒤범벅이 된, 운하 특유의 냄새가 사메지마의 코를 찔렀다. 바다냄새 같기도 하고 배기 가스 냄새 같기도 한 그 냄새는 물보라가 되어 덮쳐오는 물방울 하나하나마다 녹아들어 있었다. 운하 주변은 습도가 높았다. 물보라를 뒤집어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습기때문에 입고 있는 옷이 금방 축축해지게 되어 있었다. 잔뜩 찌푸린 날씨 탓인가, 수면도 우중충했다. 수심도 실제 이상으로 더 깊게 느껴졌다. 스크루가 휘저어 뒤로 밀어낸 흰 물살이 묘하게도 사메지마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 물 위를 달리고 있음을 실감나게 해 주었다. 수면은 잔잔했다. 보트가 달리기에는 쾌적한 컨디션이었다. 보트 속도는, 저만큼 높이 걸려 있는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릴 때보다 훨씬 더 빠른 것 같았다. 좌우 시계(視界)를 따라 펼쳐졌다가 멀리 사라져 가는 거리 풍경이, 지금까지 보아온 도쿄 모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곳 저곳에는 작은 선착장이 흩어져 있었고, 강둑과 이어진 도로나 건물로 편리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모터보트는 네번째 다리인 시라사기바시 밑을 빠져 나갔다. 전방으로 또 다른 다리가 보였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사메지마는 손목시계를 흘낏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새벽 5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저 앞에 있는 에다가와바시를 지나면 시노노메 히가시 운하로 들어가. 물길을 따라 수도 고속도로 밑을 지나면 오른쪽에 건물이 나타날 거야. 가나메는 그 건물 안에 있어." 도미가와가 선 채로 모터보트 타륜을 조종하면서 외치듯 대답했다. 보트가 출발한 뒤 처음 나누는 대화였다. "언제부터 기즈를 태워 주기 시작했나?" "녀석이 붙잡히기 일년 전부터." "줄곧 한곳에서만?" 도미가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다가와바시를 지나 한동안 곧장 달리던 모터보트는 운하 합류점에 이르러 속도를 늦추었다.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지금까지 달려온 운하보다 훨씬 폭이 넓은 운하로 접어들었다. 시노노메 히가시 운하였다. 앞쪽에는 수도고속도로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까이 이르면 엔진을 꺼 줘." 기즈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모터보트 엔진 소리를 듣고 기즈가 저항해 온다면, 도미가와까지 엉뚱하게 휘말려 들 위험이 있었다. 수도고속도로 바로 앞에서 도미가와는 모터 출력을 줄였다. 엔진 소리가 낮아지는가 했더니 완전히 조용해지고 말았다. 보트는 지금까지 달려온 관성의 힘으로 전진을 계속했다. "여긴 어디쯤이야?" 사메지마는 큰소리로 물었다. "시오미와다쓰미야. 저 앞쪽은 저목장(貯木場)이구." "기즈가 있는 곳은 어디야?" 도미가와는 오른쪽 다쓰미 창고 지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중의 한 건물 - 빛바랜 벽돌로 초석을 쌓아올린 작은 창고가 눈에 잡혔다. 운하 쪽으로 금속제 도어가 달려 있었다. 물에서 직접 올라갈 수 있도록 돌계단이 쌓여 있었다. "저 건물인가?" "미야마 운수의 창고야." 사메지마는 도미가와를 응시했다. 미야마 운수는 서일본 최대를 자랑하는 광역폭력단이 지배하고 있는 산하 기업이었다. 기즈가 칸사이에 머물고 있을 때 관계를 맺어 안전한 일터를 확보한 것이었다. 어떤 폭력단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지금까지의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다. 서약의 잔까지 주고받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칸사이의 야쿠자 두목들을 위해 특제총을 공급해 온 것만은 이제 분명해진 것이었다. 미야마 운수를 산하에 두고 있는 광역폭력단은 칸토 지역 폭력단과의 협약 때문에 도쿄엔 진출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이곳 창고도 경찰의 감시대상에 들어 있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 본 적 있나?" 사메지마는 도미가와의 표정을 눈여겨 살피면서 물었다. 도미가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나메는 어느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하고 있어. 창고 직원들도 출입을 못하게 해. 안쪽은 반지하실로 돼 있구, 출입문도 저것 하나뿐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안전하게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아파트나 주택 한구석에 공방을 차리고 있었다면, 일제단속에 걸려 벌써 들통이 났을 게 틀림없었다. 모터보트는 천천히 돌계단 가까이 접근했다. "언제 데리러 오기로 했어?" "내일 밤. 어젯밤처럼 마지막 놀잇배가 들어온 이후에." 사메지마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난 어떻게 하면 되지?" 도미가와가 물었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말없이 창고 출입문을 찬찬히 살폈다. 빨갛게 녹이 슨 게, 한번도 여닫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볼트가 박혀 있었다. "저 문, 열쇠로 여나?" "몰라." "들어갈 때, 기즈는 어떻게 열었지?" 창고 안이 지하실로 되어 있다면 문을 안에서 잠글 필요는 없었다. 바깥에서 볼트에 자물쇠라도 걸어두면 그걸로 충분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용하지 않을 땐 저기 저 볼트에 쇠사슬을 감아 자물쇠를 채웠어." 원래 안쪽에선 잠글 필요가 없었다 하더라도 기즈가 공방으로 쓰기 시작한 이후에 따로 볼트를 박아 잠금장치를 설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출입문 언저리엔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안엔 전화가 있나?" "없어. 전기는 끌어다쓰겠지만." 출입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 시간을 끌게 되면, 기즈가 안에서 웅크린 채 저항해 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손쉽게 놓치지는 않겠지만 일이 상당히 복잡해질 것만은 틀림없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구!" 사메지마가 명령하듯 말하자, 도미가와는 깜짝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뭐라구?" "돌아가자고 했어." "무슨 뜻이야?" "저 철문을 바깥에선 부술 수 없어. 내일밤, 당신이 녀석을 데리러 올 때 나도 함께 와서 수갑을 채울 작정이야." 도미가와는 한동안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당신도 장살 해얄 것 아냐? 지금이 한창 붐빌 시간일 텐데." 사메지마는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날 믿는다는 뜻이군. 정말 내가 가나메한테 알리지 않을 거라구 생각하나?" "당신 말구 이곳을 아는 사람 있나, <도미가와 마루>에?" "없어." "그래?"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철문을 살펴보았다. 그런 사메지마를 곁눈질하면서 도미가와는 엔진을 걸었다. 모터보트가 예각을 그리면서 방향을 바꾸었다. ".....난 어떻게 되지?" 선착장으로 되돌아 오자 도미가와가 물었다. 사메지마는 한동안 담배만 피우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가 노리는 건 기즈 한녀석 뿐이야!" 말을 마친 사메지마는 선착장 계단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도미가와가 배를 매려던 밧줄을 움켜쥔 채 멍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일 밤 다시 보자구." 그 한마디를 남긴 채 사메지마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13 그는 뛸 듯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그에 따라 기대와 불만이 동시에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경찰은 어째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에 대한 것은 TV는 물론, 신문에조차 한줄도 나지 않았다. 카부키쵸 광장 화단에서 탄피 수거하는 모습을 그도 똑똑히 지켜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 직후 많은 형사들이 몰려와서 아무 관계도 없는 담배꽁초, 씹다 내뱉어 버린 껌, 빈 깡통 따위를 화단 이곳 저곳에서 긁어 모아 갔다. 주변에 로프를 쳐놓고, 흰 장갑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는 뭔가 허전함을 느껴야 했다. 동원된 형사수가 기대했던 것보다 적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막스 맨>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로 두 번째 전화를 건 몇 분 뒤, 정복 경관이 광장으로 달려왔었다. 모두 4명이었다. 그들이 손을 나누어 화단을 뒤진 지 얼마 안 되어 M16 탄피를 찾아냈다. 그 중에 나이든 경관이 어깨에 꽂고 있던 휴대무선기로 결과 보고를 했다. 그는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햄버거 가게 앞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선 연락을 하자마자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는 패트롤카와 함께 감식계 사람들이 몰려왔다.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구경꾼이 몰려들자, 그는 서슴없이 제일 앞줄에 끼어들었다.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자기가 갖다둔 걸 누군가가 봤다면, 그래서 경찰에게 밀고를 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조금 전까지 여기 앉아 있던 사람, 혹시 기억할 수 없느냐고 형사들이 탐문을 시작한다면,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신고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런 생각을 하자, 구경꾼 맨 앞줄을 지키는 데에도 상당한 용기와 배짱이 필요했다. 찾아낸 탄피를 받아든 흰 장갑낀 형사는 그 자리에서 비닐 봉지에 담았다. 몰려든 구경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영문을 몰랐다. 알고 있는 사람은 형사들과 자신 뿐이었다. 더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으로 가슴까지 쿵쿵거렸다. 몸은 비록 로프 바깥쪽에 서 있었으나 마음은 안쪽에 있었다. 그는 치밀어 번지는 웃음을 억누르면서 형사들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눈을 내리깔고 손에 들고 있는 음료수를 빨대로 홀짝거렸다. 뭔가 모자라는 것 같은 허전함은 현장에 출동한 형사가운데 <알 만한 사람>이 한 사람도 끼어 있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무라도, 소도야마 계장도, 안경낀 높은 사람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짓궂은 장난이란 걸 눈치챈 것일까. 집으로 돌아온 그는, 부푼 기대와 함께 7시 뉴스를 켰다. 그 사이 탄피를 찾아냈다는 것과, 전화가 걸려왔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탄피는 벌써 몇 년인가 전에 시부야 잡화점에서 산 키홀더에서 뜯어낸 것이었다. 홀더의 링 부분은 뺀찌로 뜯어내어 버렸고, 그 잡화점도 이제는 폐업하고 없었다. 또 자기 목소리가 TV에서 흘러나온다 해도 불안해 할 일은 전혀 없었다. 일단 전화선을 타면 목소리가 변형되고, 그것을 녹음했다가 재생할 때는 더욱 바뀌어지기 때문에 알아차릴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자기가 건 전화가 녹음되리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수사본부 멤버라 하더라도 외부 전화는 틀림없이 모두 녹음했을 게 아닌가. 경관을 죽일 정도의 녀석이라면 드라마 세계에서는 반드시 범행 성명을 발표했다. 뉴스가 시작되는 순간, 그의 부푼 기대는 금방 경악으로 바뀌어지고 말았다. 범인이, 진짜 범인이 또다시 경관을 살해한 것이었다. "설마!" 그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번엔 패트롤카에 타고 있던 경관이 저격을 당한 것이었다. 한명은 죽고 또 한명은 중태라고 했다. 다음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불만이 전신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가 건 전화나 탄피에 대해선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 뉴스 아나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공표하지 않는가. 모든 것을 장난으로 보고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일까. 아니면 그 전화가 진짜 범인이 건 것으로 판단하여 은밀히 수사를 펼치고 있는 것일까. 예고한 날, 제2의 범행이 일어났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이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일주일 간격.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자신이 범인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예고한 날이나, 첫번째 범행이 있었던 날은 모두 월요일이었다. 범인도 월요일마다 범행을 되풀이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월요일의 살인마.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범인은 내주 월요일에도 신주쿠에서 경관을 죽일 게 틀림없다고 믿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마음 속에서는 새로운 환희가 치솟아 올랐다. "마침내 해 냈다! 나도 해 냈다구!" 그는 혼자 외쳐댔다. 그는 범인과 같은 리듬을 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가 로프 안쪽으로 들어서게 된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경찰도 틀림없이 그를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아닌가. 그렇다면..... 다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진짜 범인으로 판단했다면, 집요한 수사가 - 그가 건 전화와 탄피에 대해 집요한 수사가 계속될 것이 아닌가. 그는 뉴스를 쫓아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범인이 어떤 총을 사용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첫 범행에 쓰인 총이 라이플임을 안 것은 지난 금요일 뉴스를 통해서였다.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오자마자 켠 뉴스가 때마침 그런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당분간 날품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기로 작정한 그는 하루 건너씩 일터로 갔다. 빌딩 청소와 공사현장의 차량유도가 그의 일이었다. 금요일 밤 10시 뉴스에서 총기평론가가 범행에 쓰인 총을 밝혀 준 것이었다. 라이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얼핏 머리에 떠오른 것은 M16 아설트 라이플이었다. 미군의 기본 장비인 그 총은 구경이 5.56 밀리미터, 세미. 풀오토 전환 기능이 달려 있어서 연속사격도 가능했다. 경찰은 그 이후에도 총에 대해선 완전히 입을 닫고 있었다. 두번째 범행이 있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기자회견에서 총에 대한 질문이 있긴 있었지만 <수사중> 이라는 한마디로 눙쳐버렸다. 과격파의 소행인지, 경관을 증오하는 이상성격자의 짓인지 하는 질문에도 역시 <수사중> 이라는 답변만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범인은 M16을 사용한 것이었을까. 그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범인이 사용한 총의 구경이 5.56 밀리미터라면, 그것이야말로 자기와 범인이 <일심동체> 라는 증거가 아닌가. 그렇다면 자기가 직접 범인을 찾아내는 것도 가능할지 모를 일이었다. 형사들과 한번 얘기를 나누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도와 주지 않는다면, 형사들 힘만으로는 범인을 잡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사들을 조종해서 범인이 있는 곳으로 유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범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특별한 인간임이 이제 비로소 증명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범인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진짜 범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가는 일이었다. 진범이 체포된다면, 그때는 자신이 누구임을 밝혀도 무방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이 분명했다. - 어떻게 해서 범인에 대해 그처럼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나요?' - 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인터뷰에선 그렇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그 말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은 수사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영웅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상상의 세계가 점점 더 크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좋지 않는가, 한동안 상상의 세계에서 마음껏 즐겨보는 것도. 싫증이 나면, 그때 범인을 추적해도 무방하지 않는가. 진짜 특별수사관이 방안에 앉아서 목을 죄어가는 것이었다. 범인이 안다면, 경악으로 숨이 막힐 게 분명했다. 14 방범과는 썰렁했다. 평소에 비해 사람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수사본부로부터 협력 요청을 받은 신조가 기다렸다는 듯이 부하를 데리고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서내에서 뿐만 아니라 기동수사대. 본청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수사본부로 옮겨왔었다. 모모이는 언제나처럼, 그 큰 키를 고양이처럼 움츠린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년퇴직 때까지 저런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게 틀림없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만약 민간기업이었다면 벌써 권고사직을 당했을 모모이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경찰도 아직은 관공서의 전통과 관례를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모모이도 한때는 정의의 피를 끓이면서 범인을 쫓던 사나이였다. 사메지마가 책상 앞으로 다가서자, 모모이는 돋보기 너머로 눈길을 치켜올렸다. "기즈 영장 때문에....." 모모이는 돋보기를 벗어 읽고 있던 수사 자료 위에 올려놓았다. 철야라도 한 사람처럼 지친 표정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읽어 봤어." 지친 목소리, 분명하지 않은 말투였다. 마치 오늘 아침 신문을 - 그것도 별다른 뉴스가 없는 - 읽었느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처럼 씨알머리없는 태도였다. 사메지마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런 사메지마의 태도가 모모이에겐 뜻밖인 것 같았다. "웃분은 모두 바쁜 것 같아. 아직 결재가 나지 않았어." 모모이는 다시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얘기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기즐 덮치겠습니다." 사메지마의 말에 모모이는 다시 얼굴을 쳐들었다. "현행범 체포엔 영장 따위, 필요 없을 테니까요." 모모이는 사메지마를 응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꽤 급해진 모양이군." "상황이 어떤지, 얘기해 드릴까요?" 모모이는 턱을 쑥 내밀면서 텅빈 사무실을 휘둘러 보았다. 그런 모모이가 사메지마에겐 학급 폐쇄일에 마지막 수업을 하고 있는 교사처럼 보였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함께 식사나 하러 가지. 지금은 식당도 조용할 게야." 모모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구내식당으로 갔다. 모모이 말처럼 식당은 텅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모모이는 사메지마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신조처럼 드러내 놓고 적의를 보인 적도 없는 반면,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다른 부하들과 똑같이 대해 주었을 뿐이었다. 호의도 악의도 없는, 단순한 무관심이었다. "먼저 말해 둘 게 있어." 자리를 잡자마자 모모이가 말했다. 두 사람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나보구 뭐라고 쑥덕거리고 있는지 알고 있어. 자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야. 자넨 고립되어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허나 경찰이란 조직에는 수평과 수직 밖에 없어. 또 경관은 그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게야. 바깥으로 나가서 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수평. 수직이겠지만, 거기에 밀착해 있지 않으면 경관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범죄자들로부터는 미움을 받고, 시민들에게선 경원당하게 마련이지. 그게 경관이야. 헌데 자네는 그 수평. 수직을 모두 무시하고 있어. 있어선 안 될 일이야. 자네가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수평. 수직을 무시하고 있는 한,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것이 경찰 조직의 생리야." "알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지금까지 나는 자네한테 악의를 품어본 적이 한번도 없어. 왜냐하면, 나 자신도 경찰의 수평. 수직 관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자네와 연대할 마음도 없었고, 또 같은 아웃사이더끼리 아옹다옹하고 싶지도 않았어. 그러나 최근 열흘 동안에, 그렇던 내 마음이 바뀌고 말았어." 사메지마는 모모이를 응시했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다만 사메지마에게가 아니라 제자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말투가 차츰차츰 바뀌어 갔을 뿐이었다. "내가 그만두지 않고 있는 건, 나름대로 경관이란 직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용감하기는 커녕, 안에서 보면 오히려 여성적인 부분도 적지 않은 사회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경관이란 직업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런 경관이 연속해서 살해당하고 있어. 더욱 우리 관내에서 같은 서원이 말야. 피해자는 모두 젊은 사람들이야. 지금부터 한창 날개를 펴갈 사람들이었어.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한시 빨리 범인을 잡고 싶어하는 것은 같은 경관으로서 당연한 일이야. 헌데 자네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겠지만, 수사본부 차출을 거부했어. 자네 입장에서는 기즈를 붙잡는 게 절대적인 일일지 모르지만, 같은 경관으로서 경관 살해범 추적보다 그 일을 더 중요시하고 있는 건 유감스런 일이야. 난 그렇게 생각해." 사메지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모모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수사본부에는 몇백 명이나 되는 형사가, 아마도 단 한사람 뿐일 범인을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이었다. 범인을 붙잡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공적은 몇백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메지마 자신은 지금 1대1로 범인을 쫓고 있었다. 모모이가 그것을 지나친 이기주의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비겁하다고 욕을 먹을지 모르지만..... 자넨 아주 우수한 경관이야. 그게 나하고는 다른 점이지. 신조 같은 녀석들은 그래서 더욱 자넬 싫어하고 있는 게야. 캐리어 코스를 달려온 탓에 현장 경험이 전연 없던 자네가 지금은 과내(課內) 최고의 형사가 됐어. 좋아할 사람이 있을 턱이 없지. 모두들 속으로는 자넬 운좋은 녀석, 밑바닥 험한 꼴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러키 보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어. 나처럼 쓸모없는 사람은 전열(戰列)에 가담할 필요는 없어. 허나 자네는 그렇지 않아. 수사본부에 꼭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때문에 자네 스스로가 거절하라고 말했던 거야." "과장님도 우수한 경관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얘긴 하고 싶지 않아." 모모이는 차갑게 자르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 난 내 얘길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네 얘길 하고 있어. 날 비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내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바꿀 마음이 없어." 사메지마는 길게 숨을 내뿜었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자네 얘길 들어보자구." 사메지마는 기즈에 대한 지금까지의 수사과정을 자세히 얘기했다. 지금까지 안개 속에 갇혀 있던 기즈의 공방을 이번에는 확실하게 덮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특히 힘주어 강조했다. 그리고 경관 살해범이 사용한 총이 기즈의 특제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야부의 추론도 함께 털어놓았다. 모모이는 구내 식당의 살풍경한 벽에 눈길을 박은 채 사메지마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얘기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은 그런 자세로 앉아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기즈가 <아가메무논>에 나타난 건 언제였나?" "지난주 금요일, 꼭 일주일 전입니다." "자넨 비번이었지?" 사메지마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즈가 경관 살해범일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 "만약 동일범의 연속범행이라면 기즈일 가능성은 제롭니다. 두 번째 범행이 일어난 그 시간, 기즈는 제 감시범위 안에 있었으니까요." "기즈가 꼬리를 만 채 조용이 엎드려 있다..... 이런 뜻이군." "그렇습니다." "그런 기즈가 어째서 <아가메무논>에 나타났나? 설령 애인과 싸웠다 해도, 그래서 화해가 급하다 해도, 그날 신주쿠에 나타난다는 건 녀석으로 봐선 상당히 위험한 일일 텐데 말야." "무슨 일이 있어도 가즈오와 연락할 일이 있었던 것이겠죠." 모모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어서 분명치 않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TV가 범인이 사용한 흉기를 라이플이라고 밝힌 게 바로 그 금요일이었지?" 사메지마는 모모이를 응시했다. TV에 나온 총기평론가가 흉기를 라이플로 추리한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그때까지 흉기가 라이플이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수사본부가 공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문은 <단총(短銃)에 의한 범행> 으로만 보도했다. 수사본부가 <라이플 범행> 임을 인정한 것은 TV 방영이 나간 이튿날이었다. 그러나 사용총기의 구경 등 자세한 것은 아직 공표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즈도 그 TV를 보고 불안을 느껴서?" 있을 법한 얘기였다. 후유키가 기즈로 보이는 사내로부터 방금 전화가 걸려왔다고 연락해 온 것은 TV 뉴스가 끝난 직후였다. "가즈오라는 애인이 기즈 몰래, 라이플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한 총을 갖고 나갔다면, 그리고 기즈가 TV를 보고 흉기가 라이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불안에 휩싸이는 건 당연한 일이야." 모모이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가즈오가 범인이 아니면, 가즈오로부터 총을 입수한 녀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군." "영장을 청구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한 얘길, 서장님과 수사본부 회의에서 다시 한번 설명하면 가능하겠지. 허나 그렇게 되면 그 순간부터 기즈는 더이상 자네 혼자만의 먹이가 아니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사메지마는 한마디로 잘랐다. 바로 그때 고다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덮쳐왔다. "이봐. 방범과는 그렇게도 한가롭나? 경감 두 사람이 이 시간에 식사를 즐기고 있다니....." 트레이를 받쳐들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엉덩이를 걸치며 빈정거렸다. 공안 소속으로 뵈는 형사 두 사람도 함께였다. 사메지마는 못 본 척했다. 모모이도 그쪽으로 흘낏 눈길을 보냈을 뿐이었다. "저 사람과 동기라면서?"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사본부는 아직 가닥도 못 잡고 있어." 모모이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고다의 빈정거림은 계속되었다. "뱃심 한번 부럽군. 동료를 살해한 범인을 잡겠다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같은 서 소속이면서 한가롭게 밥상머리 잡담이라..... 정말 부럽군." "이곳 구내식당, 보기보단 맛이 없어요." 고다 옆에 앉은 형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본청 밥맛이 그립다, 이건가?" 고다는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모모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고다는 두 사람 쪽으로 경멸에 찬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모모이는 다시 고개를 바로 해서, 사메지마에게만 들리도록 한껏 낮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을 도와줄 순 없어. 범인은 우리가 잡아야 해!" 사메지마가 <도미가와 마루>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가 채 못되어서였다. 놀잇배는 아직 돌아오지 ㅇ았었다. 10시가 지나서 놀잇배가 돌아왔다. 주말인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거의 만원이었다. 승객이 80여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승객이 모두 내리기를 기다려 사메지마는 수로 쪽으로 다가갔다. 도미가와가 고개를 쳐들며 아는 체를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도미가와는 배를 계류할 밧줄을 들고 한쪽 발은 뱃머리, 또 한쪽 발은 선착장을 딛고 서서 사공들의 뒷정리를 지휘하고 있었다. 뒷정리가 대충 끝나자 그는 사메지마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주위가 너무 어두워 도미가와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사메지마는 돌계단을 내려, 선착장으로 다가갔다. "됐어. 타라구." 도미가와는 놀잇배에서 곧바로 모터보트로 건너뛰었다. 사메지마도 보트에 올랐다. 도미가와는 이미 뱃심을 정한 것 같았다. 어제 오늘 이틀 동안 기즈에게 알릴까 말까로 꽤나 고심을 했겠지만 그런 흔적은 전혀 없었다. 도미가와는 피우던 담배를 수로 가운데로 던져 버리면서 입을 열었다. "출발해도 좋지?" 사메지마는 시트에 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가와는 엔진을 걸어 보트를 출발시켰다. 첫번째 다리인 낚시다리를 지나치자 도미가와가 외치듯이 말했다. "오늘도 당신 혼자 올 줄은 몰랐어!" "여럿이 몰려가면, 기즈는 그 지하실에서 농성할 게 틀림없어. 그렇게 되면 몇날 며칠 걸릴 것 아냐?" "형사는 2인1조로 움직이는 것 아냐?" "보통은 그렇지." 보트는 시라스나바시. 하마자키바시를 지나자 속도를 늦추었다. 시오미 운하 합류점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당신은 보통이 아니란 뜻인가?" "글쎄." "그러고 보니 머리도 장발이군. 형사라면 짧게 깎아야잖아? 나처럼 말야." 사메지마는 조금 불안해졌다. 도미가와가 너무 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긴장감이나 꿍꿍잇속을 감추느라고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지도 몰랐다. "기즈와 친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어?" 도미가와는 잠깐 말문이 막혀 버린 것 같았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죽이 잘 맞았나?" 사메지마는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찬 권총을 툭툭 쳐보였다. 어쩌면 자신이 오늘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셈이야. 함께 수업 빼먹고 빠칭코에 미치기도 했으니까." "어떤 녀석이야, 친구로서의 기즈는?" "참을성이 대단한 놈이야. 언젠가 고교생 깡패들에게 몰매를 맞은 적이 있었어. 하지만 비명은 커녕 신음소리 한번 내뱉지 않더군. 입을 꼭 다물고 패는 대로 맞으면서 녀석들을 노려보더군. 뱃심이 두둑한 녀석이란 걸 그때 처음 느꼈어. 갖고 있는 모델건을 깡패들이 뺏으며 하자, 녀석도 그때는 냅다 고함을 지르며 대들더군. 그 때문에 떡이 되고 말았지만....." 시라사기바시. 에다가와바시를 지났다. 시노노메 기다운하와 히가시 운하 합류점을 비스듬히 왼쪽으로 꺾자 전방에 수도 고속도로 9호선이 보였다.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허공에 걸린 불빛 구름다리처럼 보였다. "이렇게 맞으러 가면, 기즈는 어떻게 하고 있었어?" "보트를 접안시키면, 기다렸다는 듯이 언제나 전등을 끄고 밖으로 나왔어. 철문을 잠근 뒤에 돌계단을 내려 보트에 오르곤 했지." 기즈가 철문을 닫기 직전에 덮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메지마가 와 있는 걸 눈치 채면, 철문 열쇠를 운하에 던져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고속도로 바로 밑에 이르자 사메지마는 보트 엔진을 끄도록 지시했다. 머리 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위쪽에 고속도로 램프가 있었기 때문에 보트 몰기가 별로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변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내가 돌계단으로 뛰어내린 뒤, 당신은 멀찌감치 물러서서 기다려 줘. 신호를 보내면 다시 엔진을 걸어 주구." 사메지마는 점점 다가오는 돌계단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표면에 물이끼가 끼어 있어 무척 미끄럽게 보였다. 빛이 새지 않게 안쪽에서 빈틈없이 막아 버린 것일까, 철문 쪽도 캄캄했다. "이봐요, 형사 양반....." 도미가와가 불러세웠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돌렸다. 램프 때문일까, 도미가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다. "..... 조심해!" 도미가와는 몹시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함정 파놓은 것을 뒤늦게나마 후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메지마는 이미 물러설 수 없는 처지였다. 보트 측면이 둑에 부딪쳐 소리를 내기 전에 사메지마는 돌계단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생각했던 대로 물이끼가 무척 미끄러웠다. 하마터면 기우뚱 자빠질 뻔했다. 두 손을 짚어 가까스로 물에 빠지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자신이 뛰어내린 반동으로 보트는 1미터쯤 뒤로 밀려난 채 일렁이고 있었다. 도미가와는 조종석에 앉은 채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돌계단은 모두 일곱 계단이었다. 사메지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오라가면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이미 실탄이 가득 장전되어 있었다. 움직임이 둔해질 것 같아 방탄복은 처음부터 입을 생각이 없었다. 철문은 슬라이드식으로 여닫게 되어 있었다. 돌계단 제일 윗단은 에이프런처럼 앞쪽으로 불거져 나와 있어, 아랫단보다는 조금 널찍하게 보였다. 거룻배 따위가 접안해서 물건을 손쉽게 싣고 내릴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 분명했다. 철문 손잡이 바로 옆에 자리잡고 선 사메지마는 도미가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도미가와는 엔진시동을 걸었다. 날카로운 모터 소리가 수면을 두들기며 울려퍼졌다. 기즈가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푸는 순간을 노려 몸을 비집고라도 덮칠 생각이었다. 습기로 눅진눅진한 바람이 사메지마를 휘감으며 불어왔다. 철컥하고 열쇠 따는 소리가 들리면서 굳게 닫혔던 철문이 빼꼼 열렸다. 그 순간, 사메지마는 두 손으로 철문을 활짝 밀어젖혀 열면서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강렬한 광선이 두 눈을 덮어왔다. 바로 정면, 철봉을 엮어 박은 기둥에는 스포트라이트가 몇 개씩이나 매달려 있었다. 철문쪽으로 향해진 그 중의 한개가 강렬한 빛을 쏘아 사메지마의 눈을 덮어 버린 것이었다. 아차 싶어 몸을 트는 순간, 굉음이 오른쪽 귀뿌리를 흔들었다. 사메지마는 그 자리에서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벌겋게 단 쇠 해머로 오른쪽 옆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뜨거운 충격이 전신을 헤집었다. 격통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사메지마는 반듯하게 누워 주변을 살폈다. 도어 안쪽 폭은 바깥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컸다. 수로쪽 벽면과 직각으로, 쇠로 만든 선반이 달려 있었다. 크고 작은 상자로 가득한 선반엔 50 센티미터 간격으로 철판을 박아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그 철판 사이로 기즈의 모습이 보였다. 기즈는 선반을 바리케이트 삼아 사메지마를 노리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석 장째와 넉 장째 철판 사이로, 쇠파이프 4개를 길쭉한 상자에 담아둔 것 같은 특제총을 사메지마 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4개의 파이프 중 한개에서 쏘아낸 탄환이 사메지마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귓속을 후벼파는 것 같은 격통 때문에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사메지마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억지로 눈을 떠서 권총으로 기즈를 노렸다. 죽여선 안 된다. 격통 속에서도 조금은 남아 있던 이성의 외침소리에 사메지마는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쏘더라도 하반신을 쏠 생각이었다. 개조총을 앞에 놓고 있던 기즈는 눈에 불을 켠 채로 사메지마를 내려다 보았다. 사메지마는 조준할 여유가 없었다. 머리속을 헤집던 격통이 마침내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15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사메지마는 기가 막혔다. 어느 사이엔지 등 뒤로 돌려진 두 손엔 수갑이 채여 있었고, 수갑고리는 방한복판에 세워진 철골(鐵骨)에 걸려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친다해도 철골을 등지고 뱅글뱅글 도는 것 이외엔 딴 도리가 없게 된 셈이었다. 의식은 되찾았어도 오른쪽 귀 부분의 격통과 두통은 조금도 가셔지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천천히 공방 안을 살펴보았다. 거의 정사각형 방이었다. 넓이는 20평쯤 되어 보였다. 창고전체 면적의 약 10분의 1쯤인 것 같았다. 네 구석과 한복판에 세워진 철골 기둥이 천장을 받쳐 주고 있었다. 창은 하나도 없었다. 조명도 철골에 매어단 스포트라이트 뿐이었다. 스포트라이트는 입구 정면 쪽으로 한개, 좌우로 각각 한개씩, 모두 3개였다. 운하 쪽 벽 중앙 부분이 바로 철문이었다. 철제 선반도 기즈가 바리케이트로 이용했던 것 이외에 2개가 더 있었다. 철문을 등에 진 오른쪽 벽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철제 선반 바로 앞에는 길이 2미터, 폭 1미터의 장방형 공작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벽을 따라 설치한 선반에는 용접할 때 쓰는 탱크류와 쇠톱 등이, 공작대에는 선반(旋盤)과 바이스를 비롯한 각종 공구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건너편, 왼쪽 벽 앞에는 굵기와 길이가 다른 각종 파이프와 철강제가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었다. 그 안쪽에는 간이 침대와 소형 냉장고, 그리고 이동식 화장실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탄약 상자와 완성된 총은 침대 머리맡 나무 선반에 보관되어 있었다. 조금 전에 사메지마를 쏘았던 4연장(連裝) 총과 사메지마의 권총도 함께였다. 방바닥은 콘크리트였다. 기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메지마는 격통과 싸우면서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즈가 바리케이트로 이용했던 철제 선반이 보였다. 바닥에서부터 3단째까지에만 상자가 쌓여 있었다. 제일 아랫단에는 길쭉하게 생긴 상자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윗단의 것은 모두 빈 상자들이었다. 작은 것은 비디오 테이프통 만했고 큰 상자 겉에는 NTT (일본 전신전화-역주) 마크가 들어 있었다. 그 건너편, 공작대와 마주 보는 곳에는 낡은 침대 매트를 쑤셔박아 놓은 나무틀이 높여 있었다. 침대 매트 이곳 저곳에는 작은 구멍이 수도 없이 뚫려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사메지마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완성된 총을 바이스로 공작대에 고정시켜 시사(試射)해 본 것이 분명했다. 한밤중이라면 총소리에 놀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설령 소리가 바깥으로 울려퍼진다 하더라도 창고 옆을 지나가는 고속도로 소음에 묻혀 버릴 게 틀림없었다. 들어서서 왼편, 사메지마가 쓰러졌던 위치의 연장선 콘크리트 벽에는 총알 자국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총알은 사메지마의 귀 뒤 1미터도 채 안되는 지점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고개 돌리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관자놀이를 관통당했을 게 틀림없었다. 사메지마가 움직일 때마다, 수갑고리가 철골에 부딪쳐 철컥거렸다. 오른쪽 귀는 완전히 먹통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총성에 고막이 상했는지, 아니면 탄환이 스친 충격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원인이 무엇이었든간에 전혀 들리지가 않았다. 사메지마는 등 뒤의 손으로 철골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왼쪽 포켓에 넣어둔 키홀더가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수갑열쇠도 함께 달려 있는 키홀더였다. 철골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두통이 더욱 심해지면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기즈는 도망치고 만 것일까. 이처럼 많은 완성품을 내팽개친 채 도망쳤을 까닭이 없었다. 도미가와와 함께 일단 뭍으로 돌아갔을 게 분명했다. 도미가와는 역시 사전에 기즈에게 귀띔을 해 주었던 것이다.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 탓에 일이 이렇게 되고 만 것이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주르륵 무너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돌아올 작정이라면, 더군다나 이처럼 묶어 가둬 놓고 있는 걸 보면 기즈는 결국 자신을 없애 버릴 생각임이 분명했다. 하룻밤, 아니면 이틀 밤을 이렇게 묶인 채 지새워야 하는가. 사메지마를 이렇게 몇날 며칠 처박아 놓고 기진맥진해지기를 기다려 손을 쓸 생각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틀씩 허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흐릿해지는 머리를 흔들면서 사메지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즈는 오늘밤 안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날이 새기 전에 필요한 물품을 옮겨 실은 다음, 사메지마의 머리에 총알을 한방 멋지게 쏘아박고는 철문을 봉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 뒤 도미가와의 입만 막으면 영원한 비밀로 끝나지 않는가. 사메지마도 모모이에게 이곳 위치를 정확히는 얘기하지 않았다. 사메지마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어 모모이가 의구심을 느낀다 하더라도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는 움직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뒤로 꼬아 손목시계를 보았다. 자정에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있었던 시간은 20분밖에 되지 않았다. 기즈는 자동차를 수배하러 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자동차를 <도미가와마루>에 갖다둔 다음, 이리로 물건을 가지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늦춰잡아도 앞으로 한시간 밖에는 여유가 없었다. 사메지마는 수갑을 풀 만한 도구가 없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 것도 없었다. 철골을 중심으로 반경 1미터 안에는 티끌 하나 없었다. 다리를 쭉 뻗어 발톱끝 닿는 데까지 살펴봤지만 역시 허사였다. 엄청난 아이러니였다. 방안에는 아세틸렌 램프를 비롯해서 쇠톱. 뺀찌는 물론 갖가지 도구가 즐비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사메지마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놓여 있었다. 그런 사정을 훤히 알고 있을 기즈가 어디선가 비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런 연락도 못했을 때, 모모이가 어떻게 대응할지 사메지마는 생각해 보았다. 벽화처럼 말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그가 수사본부를 설득까지 해 가면서 움직여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설득에 나섰다 하더라도 고다가 믿어 줄 턱도 없었다. 믿어 준다면 믿어 주는 대로, 이번엔 모모이가 코너에 몰릴 게 뻔한 일이었다. 어쩌면 중징계를 당할지도 몰랐다. 수백 명의 수사요원이 동원되고 있는 중요 사건의 중대 단서를 보고도 않고 사메지마에게 단독수사를 계속하도록 했다면 얼마든지 문제를 삼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방범과장으로 경찰 생활을 마감하겠다는 모모이의 꿈은 꺾이고 말 것이다. 모모이가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신주쿠 서에서 사메지마의 뒤를 받쳐 줄 수사관은 한 사람도 없었다. 신주쿠 경찰서 뿐만이 아니었다. 도쿄 경찰청 관내 모든 경찰서도 마찬가지였다. 또 모모이가 행동을 개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즈가 도망치고 난 뒤인 내일 오후부터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메지마의 운명은 절망적이었다. 자정을 10분쯤 지났을 무렵, 모터보트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사메지마는 철문 쪽으로 왼쪽 귀를 기울였다. 쇠사슬을 풀어 빗장 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사메지마는 몸을 일으켜 철문 쪽을 향하면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손목에는 어느덧 피가 축축하게 번져나고 있었다. 수갑을 풀어보려고 몸부림친 결과였다. 철문이 열렸다. 멀어져 가는 모터보트의 엔진 소리를 더욱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기즈의 모습이 나타났다. 진바지 위에 작업복으로 보이는 점퍼를 입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철문부터 닫아 잠갔다. 이어서 사메지마 쪽을 향해 버티어 섰다. 창백한 혈색, 차가운 분위기의 미남이었다. 입술과 콧날, 그리고 눈매에 이르기까지 섬뜩할 정도로 비정하게 보였다. 특히 단정한 콧날은 성형수술로 높여 다듬은 것처럼 보였다. "오랫만이군." 사메지마가 메마른 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기즈는 대답이 없었다. 입을 꽉 다문 채 사메지마를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기즈는 점퍼 포켓에서 면장갑을 꺼내어 꼈다. "30-60 라이플탄을 발사한 총은 네가 만든 거지?" 사메지마가 물었다. 그러나 기즈는 아무 말 없이 눈길을 돌리더니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침대 머리맡에 있는 나무 선반으로 다가갔다. 선반에 쌓인 탄환 상자를 자루에 주섬주섬 주워담았다. 라이플용에서 쇼트건, 권총용에 이르기까지 수백 발은 되어 보였다. 자루가 가득 차자 테이프로 봉한 다음 철문 가까이 끌어다 놓았다. 이어서 완제품 총 한자루 한자루에 건 오일을 스프레이한 다음 쿠킹 랩으로 꼭꼭 쌌다. 한자루 한자루 정성들여 싼 다음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크고 작은 것을 합해 모두 열세 자루나 되었다. 침대 시트를 벗겨 총을 한꺼번에 말아 싸서 역시 철문 옆으로 옮겨다 놓았다. 이제 선반에 남은 것은 사메지마의 권총 한자루 뿐이었다. 기즈는 그 총을 잡아 래치를 눌러 탄창을 열었다. 탄환이 가득 든 것을 확인한 기즈는 사메지마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권총을 바지 뒷주머니에 꽂았다. 그런 다음 타월로 실내 구석구석을 닦기 시작했다. 지문을 지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메지마는 말없이 기즈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기즈의 행동에는 허점이 하나도 없었다. 철저하달 정도로 꼼꼼했다. 냉장고 바닥까지 타월로 닦았다. 방바닥은 물론 쌓여 있는 쇠파이프도 하나하나 전부 닦았다. 그냥 있어도 습도가 높아 무더운 공방 안에서 중노동을 계속하고 있는 기즈는 금방 땀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기즈는 이마에서 땀이 뚝뚝 방울져 떨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일에만 열중했다. 말 한마디 없이 바닥에 떨어진 땀방울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닦아내었다. 닦기가 끝나자 기즈는 타월로 쌓아둔 짐 위로 던지면서 사메지마 눈앞으로 다가섰다. 점퍼 속에 받쳐입은 티셔츠가 땀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기즈는 점퍼 파스너를 내렸다. 점퍼뿐 아니라 티셔츠까지 몽당 벗어던졌다. 하얀 피부에 매달린 땀방울이 반짝반짝 빛을 반사했다. 왼쪽 어깨엔 독침을 곧추세운 전갈이 한마리 새겨져 있었다. 정교하고 입체감 있는 문신이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살아 있는 진짜 전갈로 착각할 정도였다. 땀에 젖은 가슴을 들먹거리며 기즈는 사메지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장갑을 벗어 오른손으로 땀을 훔쳤다. 이어서 사메지마의 뺨을 움켜잡았다. 진한 채취가 사메지마의 코를 찔렀다. 기즈는 계속해서 오른손으로 땀을 닦아 사메지마의 목줄기나 뺨에 갖다 발랐다. 사메지마의 얼굴은 기즈의 땀으로 얼룩져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기즈는 줄곧 사메지마의 눈 속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기즈는 한발 물러서서 머리에서 발끝에 이르기까지 사메지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당신 탓이야!" 기즈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메마른, 그러나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 "당신 때문이야, 여길 걷어치우게 된 건." "그래도 헛수고야. 도미가와나 넌 금방 붙잡혀." 그 말에 기즈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그럴까? 뒤쫓아 올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당신은 언제나 외톨이 아냐?" 말을 마친 기즈는 작업대로 가서 대형 카터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왼손에 카터 나이프, 오른손엔 권총을 뽑아들었다. 격철 소리에 이어 탄창 회전음이 들려왔다. 기즈는 사메지마의 미간을 겨누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카터 나이프 끝은 어느 사이엔가 사메지마의 목줄기에 닿아 있었다. 기즈는 칼날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해서 힘을 가했다. "배는 나오지 않았군." 기즈가 말했다. "그럼....." 사메지마는 총구를 응시하면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반갑군. 난 뚱뚱이를 싫어하거든!" 기즈는 번개같이 카터 나이프를 아래쪽으로 그어내렸다. 사메지마는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날카로운 통증이 한순간 배꼽 언저리를 헤집고 들었다. 폴로 셔츠는 보기 좋게 두 쪽이 나 있었다. 기즈는 사메지마의 맨가슴을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사메지마도 자기 몸을 살펴보았다. 명치 바로 아래에서부터 배꼽에 이르기까지 살갗이 날카롭게 찢어져 있었다. 번져나온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기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핥아 줄까?" "사양하겠어." "체면차릴 것 없어. 핥아 주길 바라지, 속으로는?" 사메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즈는 총구를 다시 치켜올렸다. "핥아 주길 바라지?" 사메지마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 들어가 시야가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것 봐!" 기즈의 목소리는 기쁨과 기대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핥아 줄 수 없어. 벌이야, 벌!" 사메지마는 <후우> 하고 숨을 내뿜었다. "몸매가 좋군. 헬스 센터에서 단련한 건가?" 기즈가 물었다. 사메지마는 숨을 꼴칵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몸매를 가꾸나? 이렇게 아름답게 말야." "조깅을 하지." "날마다?" "별일 없으면, 아침 일찍." "훌륭해. 정말 멋진 몸매야..... 언젠가 한번 약속했던 것, 기억하고 있나?" "무슨 약속?" '당신한테 가르쳐 주기로 했었지, 남자 맛을.' 사메지마는 눈을 감았다. "그 따위 짓하고 있을 시간이 네겐 없어! 가즈오가 들고 나간 총에 경관이 살해되고 있는 걸 모두 알고 있어!" "그래? 허지만 내가 죽인 건 아니잖아? 내가 죽이고 싶은 경관은 사메지마 경감 한사람 뿐이야!" 카터 나이프 끝이 사메지마 허리끈에 닿았다. 기즈가 힘을 주자 벨트는 두 동강이 났다. "당신을 실컷 즐긴 뒤에 죽여 주지!" 기즈는 뉴넌브를 사메지마에게 흔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엉터리야. 이 총은. 모방을 해도 제대로 해야지, 이게 뭐야? 이건 총도 아니야!" "그렇게도 마음에 안 들면, 돌려 주면 될 것 아냐?" 사메지마가 쏘아 주자, 기즈는 요란하게 웃어젖혔다. "과연 사메지마 경감이로군. 좋아, 돌려주지. 한발만 쏘고는 금방 돌려 주지." 사메지마는 한숨을 쉬었다. 절망이 독(毒)처럼 몸 구석구석을 돌면서 힘이란 힘은 모조리 앗아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가즈오가 들고 나간 총 얘기나 들려 줘. 네가 선물로 준 건가?" "훔쳐간 거야. 오사카는 지금 <전쟁> 전야와 같은 상황이야. 트럭을 관통할 수 있는 총이 필요하댔어. 트럭이나 덤프로 사무실을 덮치는 게 유행이야, 칸사이에선." "그래서 라이플탄을 발사할 수 있는 총을 만들었다는 겐가?" "그래. 2연수평(二連水平) 쇼트건과 같은 구조야. 중절식(中折式)으로 탄환이 두 발 들어가. 하지만 절대로 총으론 보이지 않아." 그래서 현장에 탄피를 남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수평 쇼트건은 총신을 꺾지 않는 한, 탄피도 배출되지 않는 총이었다. 사메지마의 숨결은 점점 거세어져 갔다. "탄환은 모두 몇 발이나 남아 있어?" "주문받은 건 열 발이었어. 총과 세트로 묶어놓은 것을 가즈오가 들고 나갔어." "싸웠나?" "버릇을 고쳐 주느라고 야단을 좀 쳤지. 그랬더니 집을 뛰쳐나가 버렸어." "버릇?" "걔는 도벽이 병이야. 내 지갑까지 그냥 두지 않았거든." "주문한 칸사이 녀석이 화를 냈겠군. 때맞춰 물건이 손에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할 것 없어. 여기 일이 끝나면 곧장 오사카로 달려갈 생각이니까....." "검문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요코하마까진 물길을 이용할 생각이야. 거기서 렌트카를 빌리면 만사 오케이야. 검문은 기껏해야 도쿄 도내 뿐일 테니까 말야." "가즈오는 어쩌지? 경관 살해는 가즈오가 하수인인가?" "글쎄. 하지만 그런 멍청한 녀석은 경관에 사살되어도 괜찮아." "허세 작작 부려. TV 뉴스를 보고 걱정이 돼서 <아가메무논> 까지 달려간 주제에....." "자세히도 알고 있군." 기즈는 카터 나이프로 사메지마의 바지를 찢기 시작했다. "가엾게도 쪼그라들어 있군. 걱정할 것 없어. 금방 큼직하고 힘차게 만들어 줄 테니까." "가즈오가 범인이지?" "아냐! 틀려!" 기즈는 기가 막히다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 녀석에겐 그런 배짱이 없어. 총을 들고 나가긴 했지만, 주체할 수가 없어 누군가에게 팔아넘겼을 거야, 틀림없이....." "누군지 알고 있나?" "알고 있다면 벌써 찾아왔지, 내가 보고만 있었겠어? 허락도 없이 내 작품을 휘두르고 다니는 걸 그냥 뒀을 것 같아?" "그렇다면 협조하는 게 좋아. 자칫하면 너도 경관 살해 종범(從犯)으로 몰려." 기즈는 사메지마의 샅에서 눈을 떼면서 얼굴을 쳐들었다. 카터 나이프는 여전히 허벅지 안쪽에 밀착시켜 놓은 채로였다. "경관을 죽인 녀석이라면 반드시 자폭하고 말 거야. 아니면 막다른 골목에 몰려 사살당하든가..... 경관도 생포하기보단 쏴죽여 버리고 싶을 테구." "가즈오는 어쩌지? 연락할 길도 없지?"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오사카엘 가면 귀여운 녀석들이 얼마든지 있어. 이런 거추장스런 건 달고 다니지 않는....." 사메지마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샅을 헤집었기 때문이었다. 기즈는 능글능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심해, 아직 달려 있으니까. 허나 곧 없애 주지." 사메지마는 눈을 감았다. 통증과 절망, 그리고 공포감으로 인해 저절로 눈물이 솟아나왔다. "깨끗이 잘라낸 뒤, 네 몸 속으로 내것을 밀어넣어 줄께. 즐겨가면서 대갈통엔 납덩이를 처박아 주지." "사양하겠어." 사메지마가 말했다. 음성은 콧소리로 변해 있었다. "거절해선 안 돼! 특별지명이니까....." 이죽거리던 기즈가 고개를 홱 돌렸다. 사메지마에겐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이어서 손목시계를 흘낏 보았다. "벌써 이렇게 됐나? 날 데리러 오는 모양이로군." "빨리 가봐." "서둘 것 없어. 천천히 해도 괜찮아." "빨리 가보라니까!" 사메지마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기즈는 한순간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눈이 둥그래져서 사메지마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웃음을 흘렸다. "기다려 주겠지, 도미가와도. 모처럼의 기회 아닌가. 10분이면 충분해." 사메지마는 철문 쪽으로 왼쪽 귀를 기울였다. 보트 엔진 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기즈는 뉴넌브를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넣으면서 철문 쪽으로 다가갔다. "누구야?" "나야." 도미가와의 목소리였다. 기즈는 빗장을 풀어 철문을 열었다. 바깥을 내다보던 기즈의 등줄기가 꿈틀했다. "바보 새끼!" 한마디 부르짖으며 기즈는 바지 주머니에 꽂힌 권총을 뽑았다. 바깥에서 버티는 힘을 밀쳐내고 철문을 닫으려 발버둥치면서도 벌어진 틈사이로 권총을 겨누었다. 뉴넌브의 요란한 발사음이 연거푸 울렸다. 두 발이었다. 기즈가 바깥을 향해 쏜 것이었다. 권총을 거둔 기즈는 젖먹던 힘까지 뽑아올려 철문을 닫았다. 철문과 벽 사이에 벌어졌던 틈이 몇 센티미터쯤 좁아졌다. 그순간, 이번에는 바깥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기즈의 머리가 뒤로 벌렁 젖혀지는가 싶자, 그 자리에 풀썩 나자빠졌다. 눈길을 사메지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기즈를 내려다보았다. 단정했던 콧날이 으깨어져 있었다. 총알이 관통한 구멍에서 금방 핏줄기가 치솟아올랐다. 누군가가 철문 틈으로 손을 들이밀어 천천히 열었다. 모모이가 권총을 들고 서 있었다. 재킷 오른쪽 어깨 부분이 찢겨져 있었다. 모모이는 입구에 선 채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벌거숭이에 피투성이가 된 사메지마를 보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살아 있었나?"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감 때문일까, 무릎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모모이는 다가와서 상처를 살펴보았다. 쓰러져 있는 기즈 쪽엔 눈길 한번 던지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사메지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모이는 사메지마를 흘낏 바라보던 눈길을 돌려 공방 내부를 한바퀴 훑었다. "우리 과에 <시체>는 하나만으로 충분해!" 그것이 모모이의 대답이었다. <시체>는 모모이의 별명이었다. 16 <월요일의 경관 살해>가 이제는 요일과도 관계 없이 터졌다. 토요일,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와서 뉴스를 켠 그는 또 경관이 피살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최근의 그는 TV 뉴스 보는 것이 중요한 일과의 하나였다. 모든 채널의 뉴스를 녹화한 뒤 경관 피살사건에 관련된 것만 따로 편집해서 모아놓고 있었다. 어젯밤 TV 프로그램에서 그는 지난주 발생한 사건에 쓰여진 흉기가 라이플임을 알게 되었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밤 10시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이었다. - 내주 월요일에는 톱뉴스가 경관 살해사건이 아니기를 빕니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캐스터는 그렇게 작별인사를 했다. 월요일이 경관 피살의 날임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 유탄에 맞을 위험도 적지 않을 테니까, 월요일엔 조심해야죠. - 경관이 다가오면 가슴이 덜컥해지더군요. 어디서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잖아요? - 오히려 스릴이 있어서 좋아요. 신주쿠엔 월요일마다 반드시 올 생각입니다. - 꺼림칙하지만 직장이 신주쿠이니까 어쩔 수 없어요. 하루 빨리 범인이 잡히기를 빌어야죠. 요즘 경관들도 눈에 불을 켜고 있더군요. 신주쿠에서 가두 인터뷰에 응한 시민들은 그렇게 멋대로 떠들어댔다. 그러나 월요일이 범행의 날이란 것을 맨 처음 알아낸 사람은 자기라는 게 그는 더할 수 없이 자랑스러웠다. 범인 이외에 두 번째 범행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자기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나 세 번째 월요일엔 경찰도 더욱 경계를 강화할 것이 분명했다. 범인도 그것을 알고 범행을 앞당겨 버린 것이었다. - 오늘 새벽 3시 40분께 신주쿠 카부키쵸 2쵸메의 오쿠보 공원에 여인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카부키쵸 파출소 근무 모리오 다카시 순경 24세와 하야미 미치오 순경 26세가 공원 화장실에 숨어 있던 정체불명의 남자로부터 총격을 받았습니다. 목을 관통당한 모리오 순경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하야미 순경은 왼쪽 어깨를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하야미 순경은 도망치는 범인을 향해 권총을 한발 발사했으나 범인을 맞추지는 못했습니다. 경찰은 최근 잇따라 발생한 경관 살해사건의 동일범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경관 살해사건은 지난주와 이번 주 월요일에 연속적으로 일어나 3명이 숨지고 한명은 아직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 사건으로 사망 경관은 4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한편, 중상을 입은 하야미 순경에 따르면 범인은 키가 크고 오토바이용 헬멧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현장은 도립(都立) 오쿠보 병원 철거지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호텔가(街) 한모퉁이이기 때문에 새벽시간에는 인적이 드문 곳이라고 합니다. 수사본부는 지난 두 번의 범행이 모두 월요일에 발생한 것에 주목하여 내주 월요일엔 계엄태세에 들어갈 준비를 서둘고 있습니다. "아뿔싸!"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칠 만큼 아쉬워했다. 어째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일까. 왜 좀더 일찍 두 번째 범행 예고 전화를 걸지 못했을까. 이로써 수사본부에 대한 자신의 신용에 금이 간 건 아닐까. 그는 조바심이 났다. 더군다나 이번 범행에서 범인이 확실한 목격자 - 중상이지만 의식이 확실한 피해자 - 를 남겨놓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지금까지 자신이 <수사>해 온 결과를 서둘러 수사본부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밤 9시 정각이었다. 지금 곧바로 신주쿠로 가서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전화는 반드시 신주쿠에서 걸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만약의 경우, 역탐지를 당했다 하더라도 신주쿠 공중전화에서 자신의 주소지를 더듬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인파로 붐비는 신주쿠에서는 전화 부스를 벗어나기만 하면 붙잡힐 염려도 없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경관이 아무리 눈치 빠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전화 건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그는 서둘러 옷부터 갈아 입었다. 전화만 걸고 돌아오는 데는 한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아파트를 나와 거의 달리다시피 전철 역으로 갔다. 피크 타임이 지난 탓일까, 전동차는 좀체로 오지 않았다. 그는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신주쿠 역에서 전동차를 내린 것은 9시 42분이었다. 어디서 전화를 걸 것인지는 이미 정해 놓고 있었다. 히가시구치 지하, JR 매표장 가까이에 있는 공중전화가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은 항상 도떼기 시장처럼 붐볐기 때문에,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인파 속으로 묻혀들 수 있었다. 히가시구치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토요일인데도 유독 오늘만은 평소보다 사람이 적은 것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은 장갑 대신 손수건을 이용하기로 했다. 땀을 닦는 척하면서 손수건으로 수화기를 싸든 다음, 번호판에도 역시 손수건을 덮어 버튼을 누르면 지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보세요. 신주쿠 섭니다." 오늘은 처음부터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소도야마 계장님 부탁합니다." 그는 서슴없이 말했다. 옆에서 누가 듣는다 해도 회사원의 대화쯤으로 여길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수사과 말입니까?" 저쪽 사내가 반문했다. "그래, 본부의....." 그는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했다. 지난번과 같은 긴장감이나 공포감은 없었다. 자신은 이미 형사들과 한패거리가 되었다는 생각에서 얼마든지 태연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말도 거침없이 술술 이어졌다. "소도야마 계장니임....." 구내전화 연결음과 함께 온갖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전화 벨 울리는 소리, 고함소리 등등. 오늘 새벽에 발생한 세 번째 사건 때문에 법석을 떨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안 계셔? 참, 그렇지. 여보세요,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소도야마 계장 친굽니다." 그는 조금 맥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시죠? 전할 말씀이 있으면....."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수화기를 고쳐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계장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나요, 지금 거기에?" "무슨 뜻이죠?" 전화를 받고 있는 형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지난번 카부키쵸 광장 화단에 선물을 남겨놓았던 사람입니다만....." 저쪽에선 대답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손목시계 초침을 응시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했다. "당신, 그건 장난이었지?" 갑자기 형사가 호통을 쳤다. 날카롭기 짝이 없는 호통이었다. "천만에!" 그는 깜짝 놀라면서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걸 장난으로 받아들이다니, 뜻밖이었다. "소도야마 계장님 이름은 어떻게 알아냈어?" "내 단골이니까....." 그는 웃음을 깨물며 대답했다. "이 새끼가!" 형사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비록 전화이긴 했어도 이쪽이 겁먹기에 충분한 위력이 실려 있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잠깐 기다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수화기를 옮겨 받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말씀하세요." 콧소리가 섞인, 그러나 제법 의젓한 남자 목소리였다. "당신은 누구시죠?" "고다라고 합니다. 경찰청에서 지원나온 총경입니다." 됐다! 마침내 성공했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첫번째 사건이 발생한 날, 조금 늦게 현장에 나타났던 안경낀 그 사람인지도 몰랐다. "고다 총경님, 알았습니다. 그럼 조금 이따가 다시 전화 드리죠.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용건은 뭡니까?" "나에 대한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그는 전화를 끊었다. 17 "끊겼어!" 고다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짧게 내뱉었다. "역탐지, 실패!" 형사 한 사람도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 녀석은 가짜야." 사메지마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수사본부에 출두한 지 벌써 2시간이나 되었다. 모모이와 야부도 함께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녀석은 한껏 즐기는 목소리였어. 그 녀석이 가즈오이거나, 가즈오의 친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어? 있다면 근거를 대봐!" 고다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사메지마를 향해 삿대질까지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씨근거리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흉기 제조현장을 네 마음대로 덮친 것부터가 잘못된 거야. 도대체 결과가 뭐야? 시체만 1구 늘어난 것밖에 더 있어? 상사도 상사지, 나원 참, 기가 막혀서. 영장도 없이 부하를 시켜 덮치게 해 놓곤 어슬렁어슬렁 뒤따라 가서 피의자를 사살해 버리다니..... 도대체 매스컴엔 뭐라고 해명해야 하나?" 반쯤 풀어 버린 넥타이, 소매를 걷어올린 와이셔츠는 주름투성이였다. 수면 부족으로 눈 밑엔 시커먼 얼룩이 번져 있었다. 수사본부 안은 물밑처럼 조용해졌다. "기즈가 죽은 걸 발표하면 범인이 튀어 버릴지도 몰라. 적어도 가즈오는 그렇게 하겠지. 그렇게 되면 범인에 대한 단서 잡기가 더욱 어려워져!" 사메지마는 나지막한, 그러나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다는 기가 막힌다는 듯 경찰청 형사부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무관님....." 그러나 후지마루 형사부장은 입을 다문 채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형사부장의 계급은 고다보다 한계급 높은 경무관이었다. 고다는 후지마루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공안부를 대표해서 이 자리에 와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이 극좌가 아니라 하더라도 경찰 전체에 미칠 영향은 좌시할 수 없습니다. 독불장군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메지마군!" 후지마루가 불렀다. 사메지마는 후지마루를 똑바로 응시했다. 올해 51세인 후지마루는 차기 아니면 차차기 경찰청장 후보로 꼽히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안부 암투에서 어느 쪽 편을 들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형적인 책사(策士) 타입이었다. "기즈에 대한 자네 집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허나 기즈가 이번 경관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 시점에서 즉각 우리한테 알려 줬어야 마땅한 일이야. 모모이 경감에게도 책임이 있어." 그것 보란 듯한 얼굴로 고다가 조끼 주머니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기즈 사살에 대한 사후 처리는 사문회(査問會) 에서 결정되겠지만..... 내 개인 생각으로는, 보고서 대로라면 불가피했던 일이라고 판단해. 과정은 비록 경솔하긴 했어도 말야." "감사합니다." 모모이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기즈는 개인적으로도 사메지마 경감을 증오하고 있었던 것 같아. 또 사메지마 경감의 부상 상태로 미루어 기즈의 정신상태가 정상적이었다고는 보기 어려워. 모모이 경감이 도미가와를 몰아세워 미야마 운수 창고까지 안내하게 한 것도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경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어." 모모이는 차렷 자세로 머리를 숙였다. 후지마루는 고다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만일 사메지마 경감이 기즈에게 살해당했다면, 피살 경관이 한명 더 늘어나는 것 아니겠어? 그랬을 때의 경찰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본 적 있나?" "죄송합니다." 고다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메지마가 퇴원한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카터 나이프로 베인 상처 이외에도 뇌진탕, 오른쪽 고막손상 등이 겹쳐 전치 3주일의 진단을 받았다. 고막이 기능을 회복하자면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퇴원은 물론 사메지마가 고집한 것이었다. 기즈의 공방에 대한 현장 검증은 아침 일찍 실시되었다. 후지마루의 판단으로 언론에는 밝히지 않고 있었다. 사메지마와 모모이는 따로따로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징계 여부에 대해선 아직 아무런 결정도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형사과의 소도야마 계장이 세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형사 3명도 함께였다. 그 중엔 <아가메무논>의 후유키도 끼어 있었다. 그 뒤로 머리를 짧게 깎은 30대 중반의, 눈이 부리부리한 깡마른 남자와 후유키 또래의 소년이 따라 들어왔다. 세 사람 모두 사리처럼 생긴 원색 옷에 엷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들 이러세요?" 깡마른 남자가 소도야마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여자처럼 말했다. 후유키도 사메지마를 알아보고 한마디 했다. "뭐예요?" 고다가 성큼 세 사람 쪽으로 다가서자 소도야마가 세 사람을 몰아세웠다. "좀 조용히들 해!" "어머머, 영장도 없이 남의 가게에, 그것도 한창 영업중인 가게에 쳐들어와서 무슨 큰소리예요, 큰소리가.....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예요?" "난 경찰청의 고다라고 해. 협력해 줬으면 고맙겠어." "얼렁뚱땅하지 말아욧!" 마마로 보이는 깡마른 사내가 쏘아붙이자, 고다는 마치 뺨이라도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호모 나부랑이가 어디서 큰소릴 쳐, 큰소리는!" 고다가 버럭 호통을 쳤지만, 마마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뭐예욧? 호모 나부랑이라구?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당신네 경관 가운데는 호모가 한사람도 없어? 이런 일 당하고도 내가 가만 있을 줄 알아요? 차별대우한다고 신문에 투서라도 하고 말 거예요!" "고다 총경 !" 후지마루가 끼어들었다. "어머, 당신이 총경님? 이제 보니 엄청 높은 분이었군요. 그렇다고 내가 새삼 겁을 먹으리라곤 기대하지 말아요. 아무리 권력이 세다 하더라고 신문에 얻어맞는 건 경찰이니까 내가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모모이가 사메지마에게 눈짓을 했다. "후유키 !" 사메지마가 불렀다. "네." 겁먹은 목소리였다. 마마도 입을 다물었다. 놀란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와서 테이프 한번 들어 주겠어? 가즈오 목소린지 아닌지 그것만 말해 주면 돼.'" 후유키는 마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마는 경계심과 시기심이 뒤섞인 눈초리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정말 그것 뿐이야?" 사메지마는 고개를 주억거려 보이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당신, 누구야?" "방범과 사메지마." 후유키가 마마의 귀에 대고 뭔가 속삭였다. <마마포스> 라는 소리도 들렸다. "<마마포스>의 단골손님이에요?" 마마가 사메지마를 보고 물었다. "그래. 몇 해 전부터." 마마는 한참 동안 사메지마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마마포스> 단골손님이라니 한번 믿어보죠." 고다는 일이 우스꽝스럽게 되어간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휘둘러 보았다. 그러나 웃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부탁해!" 사메지마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마는 크게 한번 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요..... 한번 들어보자구." 마마는 후유키와 젊은이를 데리고 사메지마 앞 테이블로 다가갔다. 고다는 숨을 거칠게 내뿜으면서 수사본부에서 뛰쳐나갔다. 그 뒤를 공안부 형사들이 허둥지둥 따라갔다. 세 사람이 의자에 앉자, 야부는 전화에 연결된 테이프 레코더를 켰다. 전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네요." "아녜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세 사람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 야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테이프를 껐다. 이어서 수사본부에 걸려온 또 다른 전화와 범행 성명 테이프를 틀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모두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수고했어." 사메지마가 말을 이어갔다. "가즈오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나?" "몰라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즈라는 사람과 함께 산것 같았지만....." "그건 알고 있어." 몬젠나카쵸의 기즈 아파트 수색에서도 가즈오 행방에 대한 실마리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마마가 서 있는 사메지마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른쪽 귀에 가제를 대고 붕대를 감았지만, 사메지마는 여전히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구토기는 어느 정도 진정되어 있었다. "기즈는 총 밀제조범이었어. 가즈오가 훔쳐낸 그 중의 한자루가 경관 살해 사건의 흉기로 쓰이고 있어." "설마!" 마마는 눈이 휘둥그래졌고, 후유키는 파랗게 질렸다. "범인이 가즈오짱이란 말예요?" "확실한 건 아직 몰라. 허나 범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범인이 누군가 잘 알고 있을 게 틀림없어. 그래서 찾고 있는 중이야." "설마..... 어쩜 가즈오짱도 살해당할 위험이 높다고 보세요?" "그럴지도 몰라." "야단났네!" "마음에 짚이는 건 혹시 없나?" 마마와 두 소년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 게 금방 생각나나요?" "가즈오가 기즈와 동거하기 전엔 어디서 살고 있었나?" "사사즈카에 있는 원룸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어요. 허지만 그 아파트에서 나온 건 옛날 옛적이에요." "그 아파트 주소는?" "가게에 가면 적어둔 게 있을 거예요." "알았어. 다른 건 생각나는 게 없나? 가즈오 고향은 어디야?" "치바현 사쿠라라고 들었어요. 어디쯤인지는 모르지만....." "폭주족 출신이었대지?" 사메지마가 후유키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물었다. 후유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룹 이름은?" "쿄사쓰카이..... 한자로는 <凶殺界> 라고 썼나 봐요." 바로 그때 형사 한사람이 잽싸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사메지마는 <쿄사쓰카이> 라고 적은 메모지를 그 형사에게 넘겨 주었다. "치바 현경 교통과를 불러 줘." 메모지를 받아든 형사는 마마 등 세 사람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가즈오의 성은 뭐야?" "미야우치예요. 미야우치 가즈오." 마마가 대답했다. 각 현경 교통과.고속도로 기동대 등에는 폭주족 전과자 리스트가 비치되어 있었다. 치바 현경 교통과가 연결되자 형사는 가즈오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현경 교통과는 그에 관한 자료를 찾는 즉시 팩스로 보내겠다고 했다. "기즈 이외에 사귀는 사람은 없었나? 여자라도 괜찮아. 도쿄로 온 이후에....." 사메지마가 물었다. "가즈오짱은 아마 고교를 중퇴하고 도쿄로 왔을 거예요. 처음엔 미용학원에 다니다가 성격에 안 맞아 그만뒀댔어요. 편의점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왔었어요." "물장사는 당신네 가게가 처음이었나?" "다방 같은 데서 일한 적이 있다고 했어요." "그때까지 가즈오는 <처녀> 였나?" "설마! 무척 밝히는 아이였어요. 우리 가게로 왔을 무렵엔 이미 몇 사람씩이나 경험한 것 같았어요." "그럼 <아가메무논> 에서 일하기 전에도 애인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군." "그랬을 거예요. 우리 가게에서 사귄 사람은 기즈씨 한사람 뿐이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장난이었을 거예요." 마마는 후유키와 또 한 소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동의를 구했다. "있답니다!" 치바 현경과 통화하고 있던 형사가 후지마루에게 부르짖듯이 보고했다. "지문도 있답니다." "사진과 함께 즉시 보내달라고 해!" 후지마루가 지시했다. "그리고 4반(班)은 즉각 치바 본적지로 출동해. 치바 현경에겐 내가 따로 지원을 부탁할 테니까!" 형사 8명이 수사본부를 뛰쳐나갔다. 수사본부의 공기도 표변했다. "가즈오 친구에 대해선 아는 게 없나?" 사메지마가 묻자 세 사람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가즈오짱과는 그렇게 마음이 맞지 않았어요. 그 아이가 하드게이 취향이었기 때문에." 사메지마는 천장을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후지마루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좀 쉬도록 해. 그 몸으론 무리야. 계속하는 게." "괜찮습니다." "여기 책임자는 나야! 여기 있는 동안은 내 지시를 따라!" "네." 사메지마는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후지마루의 명령으로 소도야마 등이 세 사람을 별실로 데리고 갔다. 이번엔 <아가메무논> 마담도 다소곳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후지마루는 사메지마와 모모이를 자기 자리로 불렀다.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두 사람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허나 자네들이 공명심 때문에 수사를 그런 식으로 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아. 그러나 피의자가 현장에서 숨졌다는 사실은 유감스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어. 피의자를 사살한 건 경찰청 기본방침과도 어긋나는 일이야..... 모모이 경감!" "네!" 모모이가 차렷자세로 대답했다. "오늘 날짜로 방범과 사메지마 경감을 신주쿠 서 연속 경관 살인 사건 특별 수사본부로 차출한다. 할말 있나?" "본인이 거절 않는 한, 저로선 상관없습니다." 후지마루는 사메지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때?"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좋아. 모모이 경감은 방범과로 돌아가도록 해. 퇴근해도 좋구." 모모이는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다시금 <시체> 라는 별명이 걸맞게 모모이의 얼굴에 생기가 싹 가셔져 있었다. 지금부터 모모이는 아들 이외에 새로운 넋을 짊어지게 된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병원으로 자기를 마중 왔던 모모이가 불쑥 내뱉었던 말이 생각났다. - 불단(佛壇)에 위패가 하나 더 늘었어. 그 위패에는 <기즈 가나메> 라고 쓰여 있을 게 틀림없었다. 모모이가 물러가자, 후지마루는 자리에 앉은 채 사메지마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 얘긴 많이 들었어." "저도 경무관님에 대해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 과거에 대해 새삼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지 않아. 중요한 건 이번 사건의 범인을 잡아내는 일이야. 제2범행과 제3범행 간격이 이틀로 줄어들었어. 그게 몹시 걱정스러워. 난 이번 사건만은 현행범 체포를 원하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나?" <현행범 체포> 라면 제4범행 현장에서 범인을 덮친다는 뜻이었다. 범행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는 것과, 그 이외의 장소 - 가령 집에 숨어 있는 것을 덮치는 것과는 경찰의 수사능력 평가에도 그만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현행범 체포의 경우는 대개 운이 좋았다는 쪽으로 평가가 내려지지만, 집에 숨어 있는 범인을 덮쳤다면 그만큼 경찰 수사가 치밀하고 과학적이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행범 체포를 원하지 않는다는 후지마루의 말에는 다른 뜻도 담겨 있음을 사메지마도 금방 깨달았다. 후지마루는 사메지마가 취했던 기즈 체포 방법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좋아. 오늘은 곧바로 퇴근해서, 내일 하루 푹 쉬도록 해. 모레부터는 전력을 쏟아 줬으면 좋겠어." 그때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형사 한사람이 잽싸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고다 총경님에게 온 전ㅎ니다. 아까 그 녀석입니다." 18 구내식당에서 연락을 받고 달려온 고다는 다른 사람에겐 말한마디 건네지 않고 수화기를 받아들였다. 야부는 전화 목소리가 사무실 어디서든 들리도록 모니터를 조작했다. "우선 누군지 이름부터 듣고 싶군. 내가 누구란 걸 말했으니까 이번은 당신 차례야." 고다가 말했다. 그것은 이런 경우의 정석이기도 했다. 전화를 걸어온 사나이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에도야." "에도씨? 좋아,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번 들어보자구." 고다는 능숙하게 감정을 콘트롤하면서 말했다. 조금 전까지 흥분했던 흔적은 이미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난 경관을 조금도 미워하지 않아. 아니,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어." "그래? 그렇다면 어째서 경관을 죽였지? 부모 형제, 애인과 아내, 어린 자식이 있는 한창 나이의 경관을 왜 죽였어?" "어떤 일 때문에 경관을 미워하게 됐어." "어떤 일? 자세히 듣고 싶군." "지금은 안 돼." "헛소리는 이쯤 해 두는 게 좋을 텐데....." "어쩔까 하고 나도 망설이고 있는 참이야!" 사메지마는 메모지에 <총기 입수 경로> 라고 적어 고다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고다는 무시했다. "한번 만나서 얘기하는 건 어때?" "사양하겠어. 아직 죽고 싶진 않으니까 말야." "경찰이 당신을 죽이진 않아." "그럴까? 경관 살해범은 어느 나라에서나 극형이야. 동료가 살해당하면 경찰도 이성을 잃게 되는 것 아냐?" "경찰로부터 끔찍한 일을 당한 적이 있나?" "그 얘긴 다음에 하기로 하지. 지금 나도 망설이고 있는 중이야. 이번에도 경관을 죽일까, 아니면 보통 사람을 죽일까고 말야." 고다의 표정이 바뀌었다. "당신은 경관을 증오하고 있지?" "나중에 또 전화하겠어." "기다려. 지난번 당신이 우리에게 전해 준 탄피가 바로 범행에 사용했던 건가?" "다시 걸지." 전화가 끊겼다. "신주쿠 역 근처 공중전화라고 합니다." 전화가 끊긴 직후, 전화국과 연락해 본 형사가 보고했다. 고다는 돌아보지도 않고 호통을 쳤다. "대응이 잽싸지 못해! 너무 느려!" 옆에 있던 후지마루가 조용히 물었다. "어느 공중전화였는지는 모르구?" "네,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아마 녀석은 신주쿠 역 주변의 공중전화만 이용했겠죠, 지금까지." 사메지마가 말했다. 야부가 사메지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5.56 탄피는 역시 미군에서 유출된 것이었어. 한국 제품인데 몇 년 전에 발사된 것 같더군." 사메지마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다가 다가와서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아직 여기 있었어? 사정 설명은 이미 끝났을 텐데..... 그 호모 애인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 "그렇잖아도 지금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사메지마도 쌀쌀하게 응수했다. 참고인 진술을 끝낸 <아가메무논>의 세 사람이 별실에서 나와 수사본부 출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바래다 주지." 사메지마가 다가서며 말했다. "패트롤카라면 사양하겠어요. 가게 앞에서 누가 보면 창피할 것 아녜요?" "내 차야, 패트롤카가 아니구." <아가메무논> 마마는 잠시 망설이다가 사메지마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좋아요!" "한잔하고 가도 괜찮겠지? 물론 내 돈 내고 말야." <아가메무논>이 들어 있는 빌딩 앞에서 차를 멈추며 사메지마가 말했다. "음주 운전, 자신 있으세요?" "차는 두고 갈 생각이야. 주차위반 쯤은 눈감아 줄 테니까." 사메지마는 어깨까지 으쓱해 보였다. "그 상처에 마셔도 괜찮아요?" "맥주 정도라면....." "우리 가게에선 <처녀> 손님은 사양하고 있지만....." 마마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좋아요. 오늘은 어차피 망친 장사..... 놀랐던 김에 나도 한잔 하죠, 뭐." "고마워." 사메지마는 <아가메무논> 으로 들어섰다. 10평 남짓한 홀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밝고 청결했다. 대리석 카운터에 걸터앉자, 마마가 안으로 들어가 맥주잔을 내놓았다. 맥주잔은 금방 이슬이 맺힐 정도로 차가왔다. 후유키가 냉장고에서 하이네켄과 기네스를 꺼내었다. "마마, 반반씩?" "그럴까?" 사메지마가 보는 앞에서, 하이네켄과 기네스를 반씩 섞어 잔에 따랐다. 사메지마도 같은 것을 마시기로 했다. "건배. 협력해 줘서 정말 고마워." 사메지마는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정말 지쳤어요." 마마가 잔을 부딪쳐 왔다. 처음 봤을 땐 30대 중반쯤으로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자 이미 마흔을 훨씬 넘은 게 확실했다. "관리들이란 모두 똑같은가 봐요. 거만스러운 것 말예요." "오늘과 같은 일, 자주 겪었나?" "아뇨." 마마는 담배를 한대 꺼내어 피워 물었다. 길쭉한 손가락, 잘 손질된 손톱이 반짝반짝 빛을 반사했다. "저 말이죠, 옛날 한때 자위대에 있었어요. 그것도 공정부대에." 사메지마는 깜짝 놀라려 눈을 치켜떴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전 아니에요. 범행이 있던 날, 전 여기 가게에 있었어요. 증인은 얼마든지 세울 수 있어요!" 사메지마의 놀라움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마마가 빠른 말투로 해명했다. "하지만 라이플 사격엔 자신이 있어요. 공정대원은 모두 그랬어요." "기즈가 만든 것은 라이플탄을 두 발 연속 발사할 수 있는 변조총이었어. 게다가 녀석 말로는 절대 총으론 보이지 않는다는 게야." 오쿠보 공원에서 피격된 하야미 순경도 범인이 어떤 총을 사용했는지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또 기타신주쿠 노상에서의 범행을 목격한 자동차 운전사는 오토바이의 사내가 <가방처럼 생긴 검정 물체>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고 말했었다. 두 사람의 증언을 종합하면 범인이 갖고 있었던 것이 어떤 것이던 간에 결코 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즈씨는 어떻게 됐죠?"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 "당신 부상, 기즈씨와 관계있는 거예요?" 사메지마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하자면 그래." "...... 그러고 보니 싱오쿠보 사우나에서 미유키라는 남자애를 도와 준 사람, 당신 맞죠? 깡마르긴 했어도 그것만은 엄청나게 큰 아이, 기억나세요" 물론 사메지마는 기억하고 있었다. 경관이 못살게 굴던 젊은 사내였다. "미유키가 말한 인상이 어쩐지 당신과 비슷하네요. 장발에 조금은 무섭게 보이는 위험한 타입......" "기억하고 있어." "미유키군. 그 뒤 여길 와서 당신이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어요. 아마 당신한테 홀랑 반했나 봐요." 마마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을 이었다. "참! 그 아일 못살게 군 사람도 경관이었대죠? 그 경관도 오늘 우리한테 으스대던 총경과 같은 타입이었을 거예요, 분명히." "글쎄....." "<처녀> 라면 죽고 못 사는 아이도 많아요. 이리저리 꼬셔서 엉뚱한 사람을 그 길로 끌어들이는 게 무척 즐거운가 봐요." "가즈오는 <그 연기> 에도 정말 능숙했어요." 후유키는 사메지마 옆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어머, 무슨 뜻이지?" "여기서 일하곤 있지만, 자기는 아직 <처녀> 라고 손님을 곧 잘 속였어요. 그러면 <처녀> 정복을 즐기는 아저씨들이 제법 돈을 뿌리면서 덤벼든댔어요." "순진한 척 시침을 뗀단 말이지?" "그래요." 마마가 쿡쿡 웃음을 깨물었다. "아픈 척도 한단 말이지? 징그럽게....." "꽤 열을 올린 아저씨도 있었나 봐요." 경찰서에 함께 왔던 쯔미네라는 소년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래, 그래. 이제 생각났어. 가즈오짱한테 선물 공세를 했던 사람 말이지? 돈푼깨나 만지는 사람 같았어. 헌데 최근엔 안 보이던데?" "가즈오가 그만둔 때문이겠죠." "그래서 가즈오가 말을 들어 줬나?" 사메지마가 물었다. "글쎄요. 했는지 어떤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죠." "그건 못한 것 같았어요. 못했으니까 그렇게 열을 올렸다고 봐요." 쯔미네가 말했다. "뭣하는 사낸데?" "치과의사였을 거예요. 한번 결혼했으나 곧 이혼했다더군요. 돈은 무척 많은 사람인가 봐요." "이름은?" 마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쯔미네와 후유키가 망설이고 있는 마마를 응시했다. "하라랬어어요, 하라 선생." 마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병원은 가와사키에 있댔어요." 쇼의 얼굴빛이 바뀌어졌다. 그 이튿날 오후였다. 아르바이트가 일찌감치 끝나자 사메지마의 아파트로 달려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커다란 폭죽이 귓가에서 폭발했지." 사메지마가 능청을 떨었지만, 끝까지 얼버무릴 수는 없었다. "기즈란 사내를 덮치려고 일부러 휴가까지 얻은 거였지? 그때 다친 거야?" "그런 셈이지." 어젯밤, 사메지마는 모처럼 자기 침대에서 한숨 푹 자려고 했으나 밤새 부스럭거리기만 했다. 잠만 들면 꿈에 카터 나이프를 든 기즈가 나타났다. 기즈의 땀냄새가 아직도 사메지마 코끝에 남아 있었다. 쇼가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아 뭐라고 말을 했다. 사메지마는 왼쪽 귀를 쇼 쪽으로 기울였다. 그것을 보고 쇼는 모든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다친 곳은 여기 뿐이야?" "다른 데도 약간....." "똑바로 말해!" "카터 나이프에 베었어. 배. 허벅지 안쪽을..... 꿰맬 정도는 아니야." 쇼는 얼굴을 홱 돌렸다. "멍청한 녀석!" 나지막한 부르짖음이었다. 그것을 들으면서 사메지마는 사살되기 직전 기즈가 외치던 말이 생각났다. 사메지마 얼굴에서 눈길을 뗀 쇼는 창 너머 환상도로 (環狀道路) 7호선 방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옆얼굴만 보아도 몹시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쇼의 눈빛이 몹시도 쓸쓸하게 보였다. "기즈는 어떻게 됐어?" "알고 싶어?" "말하고 싶지 않으면 관둬." 쇼는 사메지마에게서 얼굴을 돌린 채로 말했다. 눈 가장자리엔 어느샌가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죽었어!" 쇼는 다시 사메지마 쪽으로 얼굴을 홱 돌렸다. 그 바람에 고였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신문엔 나지 않았던데?" "신문 따위도 보나?" "그래서 섭섭해? 네 녀석 이름이 나지 않았나 걱정이 돼서 봤어. 신주쿠 서 순경들이 여기저기서 총맞아 죽어갔잖아? 내가 걱정한 게 그렇게도 섭섭해?" 쇼가 부르짖었다. 정말 화가 난 것이었다. "미안해." "이미 늦었어. 나 갈테야!" 쇼는 발딱 일어섰다. "기다려." 사메지마가 팔을 잡아당기자, 쇼는 세차게 뿌리쳤다. "당신은 역시 어쩔 수 없는 곰바위 경관이야, 정의의 사나인 척하는. 부상을 당하든, 얻어터지든, 내가 아니면 누가 하나 하면서 육법전서를 등에 짊어지고 쫓아다니는 멍청이야! 그러다가 죽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지? 그게 소원이지?" 사메지마는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진 않아. 무서웠어. 정말 죽는 줄만 알았어." "거짓말!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허풍을 떨었겠지. 자, 어서 쏴! 라고 말야." "아니야!" 사메지마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쇼도 잠잠해졌다. "정말 무서웠어. 기즈는 날 죽일 생각이었어. 천천히 피를 말려가면서 죽일 생각이었어. 카터 나이프로 저며내다가 마지막엔 내 권총으로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다고 했어." "귀는 어쩌다가?" "기즈가 바로 옆에서 느닷없이 쐈어. 총알이 스치기만 한 게 만번 다행이었어." "전혀 안 들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는 꼴깍 침을 삼켰다. 분노가 공포감으로 바뀌어진 것이었다. 귀가 안 들린다는 게 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것이라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하지만 네 노랫소리가 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어." "거짓말!" "정말이야. But Stay Here 라고 노래하고 있어." "맞아죽을 뻔했어?" 쇼의 눈엔 다시 눈물이 고였다. "응. 날 거세한 뒤 강간하겠다고 했어. 녀석은 호모였거든. 끝낸 뒤에 머리통을 날리겠댔어." 쇼는 세차게 머리를 내저었다. "지독한 새끼!" "그래, 정말 지독한 녀석이었어. 경찰 그만 두고 싶었어, 그땐." "하지만 지금은 But Stay Here 지?" "그럼!" "도시 밑창에서?" "어둠 한복판에서!" 쇼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바보!" 짧게 외치면서 사메지마에게 매달렸다. 맞받아 안으면서 사메지마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살살 좀 안겨, 난 환자야." "죽다 살아온 주제에 찬밥 더운밥 찾아?" 쇼는 입술로 사메지마의 입술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입술 뿐만 아니라 눈두덩. 콧잔등으로도 쇼의 입술이 더듬어 내려갔다. "죽다 살아왔으니까, 상냥한 게 그리운 거야!" 사메지마의 손이 어느샌가 미니스커트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왜 이래?" 쇼는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미니스커트 속으로 들어온 손을 뿌리쳐 내지는 않았다. 한참 뒤, 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경관 중엔 호모가 한 사람도 없어?" "글쎄." "당신이 제1호가 될 뻔 했네." 사메지마는 쇼를 바라보면서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쇼가 사메지마의 팔을 힘껏 물어뜯었다. 이번이야말로 진짜 비명이 사메지마의 목구멍에서 터져나왔다. 쇼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사메지마는 쇼의 테이프를 들어보기로 했다. <<스테이 히어>>를 비롯해서 몇 곡을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이었다. 이미 라이브 회장(會場)이나 인디즈를 취급하는 레코드 가게에서 팔고 있었다. <후즈 허니> 팬이 확실히 늘어나고 있는 증거일까, 1차 발매 테이프는 거의 품절이 됐다고 했다. "라이브, 언제라고 했지?" "내주. 이번엔 신곡이 없으니까 멤버 모두가 가벼운 마음이야." "데뷔곡 녹음은?" "라이브를 끝낸 뒤 레코드 회사와 절충하기로 했어. 가을쯤 돼야 낼 수 있을 것 같아."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주까진 경관 살해범, 잡을 수 있어?" "글쎄. 무슨 요일이지?" "토요일. 장소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TEC 홀. 입장권도 이미 매진됐어." 된장국을 끓이던 쇼가 고개를 돌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담 난 갈 수가 없겠군." "경찰수첩 내보이면 들여보내 줄 텐데....." "그것 좋은 아이디어로군. 소년계 경관도 함께 데리고 가서 일제단속을 한번 해 봐? 미성년자 음주. 흡연이 수두룩하겠지. 다른 것도 제법 튀어나올 테구." "해 볼 테면 한번 해 봐. 성한 왼쪽 귀에 드럼 스틱을 쑤셔박아 줄 테니까." "그것만은 사양하겠어. 또 악몽에 시달리고 싶진 않아." 음식 쟁반을 들고 들어온 쇼가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표정도 진지했다. "어젯밤, 가위 눌렸어?" "응." "오늘은 괜찮을 거야." 쇼는 분명한 어조로 한마디 덧붙였다. "또 가위 눌리면 내가 노래 불러 줄께. 귓전에 대구." 19 미야우치 가즈오의 소재는 좀처럼 밝혀지지 않았다. 치바 현 고향집을 찾아간 형사는 최근 3년간 그가 한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전화도 2년 전에 한번 걸려왔을 뿐, 그 뒤로는 소식이 두절되었다고 했다. 지난날의 폭주족 패거리와 교우관계를 훑어봤지만 역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폭주족 시절, 가즈오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무면허 운전으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가즈오의 신장은 1미터 72센티미터, 결코 장신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하야미 순경과 키가 비슷했다. 비슷한 키의 형사가 헬멧을 쓰고 오쿠보 공원에 서 보이자, 그보다는 조금 컸던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가즈오가 범인이 아니라면, 그가 이미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중요 참고인으로 가즈오를 공개 수배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범인을 자극할 염려가 높다면서 후지마루가 억누르고 있었다. 자신을 에도라고 밝힌 사내로부터는 더 이상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나흘이 흘러갔다. 수사본부의 긴장도 더욱 높아져 있었다. 범행 사이클이 단축되고 있는 데 따른 긴장이었다. 수사는 미야우치 가즈오 선뿐만 아니라 여러 각도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신주쿠 역 구내에서 모델건을 소지하고 있던 사내가 승객의 신고로 철도경관에게 체포되었다. 그 사내는 연속살인 범인이 나타나면 한번 멋지게 대결해 볼 작정이었다고 진술했다. 또 <지평선의 불> 이라고 밝힌 단체가 TV 방송국에 범행 성명을 보내왔다. 그 성명에는 이틀 뒤 새로운 범행이 있을 것이라는 예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고된 날 범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사본부는 범행 성명을 낸 사내 음성과 에도의 전화 녹음 테이프를 비교 감정해 보았다. 결과는 다른 사람으로 밝혀졌다. 수사본부가 가지고 있는 유력한 실마리라고는 미야우치 가즈오에 관한 것 뿐이었다. 두 번째 범행이 있은 뒤, 수사본부는 시민의 제보를 기다리는 전화까지 새로 설치했다. 그것은 공안이 과격파 아지트를 적발해 낼 적에 상당한 효과를 본 작전이었다. 고다의 제안으로 전화가 설치되자, 많은 날은 하루 30여 건의 제보가 밀려들기도 했으나 대부분이 장난전화였다. 그래도 수사요원들은 제보된 내용 하나하나를 확인하러 뛰어다녀야 했다. <지평선의 불> 이란 단체가 신주쿠에 출점(出店)하고 있는 몇몇 백화점에 협박장을 보낸 사실이 밝혀졌다. 요구한 돈을 내놓지 않으면 매장에서 손님을 죽여 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협박에 굴복한 그 중의 한 백화점으로 돈을 받으러 온 범인을 잠복하고 있던 경관이 체포했다. 48세의 남자였다. 그 사내는 상법(商法)이 개정된 이후 몇 번씩이나 단속에 걸려들었던 외토리 총회(總會)꾼이었다. 철저한 수사 결과, 단순한 <편승(便乘) 범행> 으로 밝혀졌다. 그 이외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밀고와 범행 성명이 몰려 들었다. 거르고 거른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에도라는 사내 뿐이었다. 사메지마는 가와사키의 미야마에다이라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다. 가와사키 시내에도 <하라 치과>가 몇 군데 있었으나, 그곳 의사들은 모두 <아가메무논> 마마의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가와사키 치과의사회에 문의해서 하라라는 치과의사 가운데 개업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오늘은 미야마에다이라에 옛날부터 있던 치과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대를 이어 줄 자식이 없는 늙은 원장은, 개업 않고 있는 치과의사 2명에게 일주일에 사흘씩 진료를 맡겨놓고 있었다. 그 중의 한사람 성이 하라라고 했다. 사메지마는 <도야마 치과> 라고 먹으로 쓴 간판이 걸린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철근 이층 건물은 산호수(珊瑚樹)가 둘러싸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현관 앞 포치가 건물의 역사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층은 살림집, 일층이 진료소였다. 현관 나무 도어의 흰 페인트도 여기저기 을씨년스럽게 벗겨져 있었다. 최근에 바꿔 달았는지, 놋쇠 손잡이만은 반짝반짝했다. 사메지마는 놋쇠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진료시간은 <오후 1시에서 6시까지>로 되어 있었다. 지금은 2시를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대기실이었다. 벽에 붙여서 낡은 소파가 2개,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화로가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쓰인 흔적이 없는 화로였다. 장식물이라기 보다는 둘 곳이 마땅찮아 대기실 한구석에 갖다놓은 것 같았다. 대기실은 어두컴컴한 게, 인기척조차 없었다. 대기실과 진료실 경계에 있는 접수창구 너머로 흰 가운을 입은 초로의 여인이 사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처음 오신 환자세요?" 사메지마는 경찰수첩을 내어보였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가까이서 보자 초로는 커녕, 일흔이 다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하라 선생, 지금 계십니까?" "하라 선생의 진료일은 수.금과 토요일 오전입니다." 여인은 무뚝뚝한 소리로 대답하면서 돋보기 너머로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무슨 일이죠?" 진료실 안쪽에서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왔다. 치과에서만 들을 수 있는 독특한 소리였다. "내일 오면 하라 선생을 만날 수 있을까요?" "무슨 용건으로 그러세요?"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하라 선생이란 분, 결혼은 했나요?" 노파는 턱을 낮추며 미심쩍은 눈초리로 사메지마를 아래위로 훑었다. "남의 사생활은 잘 모르지만....." 사메지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금속성이 뚝 그쳤다. "무슨 일이죠?" 흰 가운에 마스크를 한 30대 중반의 남자가 한손에 핀세트를 든 채로 진료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핀세트에는 약을 묻힌 약솜이 끼워 있었다.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경찰수첩을 내어보였다. "하라 선생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볼 일이 있어서....." "하라는 나와 같은 치과대학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마스크를 하고 있는 탓일까, 목소리가 분명치 않았다. "하라씨는 독신인가요?" "네. 한번 결혼하긴 했으나 이혼했죠." 사메지마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다시 물었다. "직접 만나봤으면 하는데..... 집이 어디쯤이죠? 별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닙니다. 난 신주쿠 서에 근무하는 사메지마라고 합니다." "하라가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아닙니다. 신주쿠에서 어쭙지 않은 사건이 생겼죠. 시시한 싸움이었지만, 하라 선생이 혹시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나 해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하니까요, 우리는." 탐문수사를 할 때, 본인 이외에는 진짜 이유를 밝히지 않는 것이 기본상식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라는 신주쿠엘 자주 간 것 같군. 허나 지금은 여행중입니다." "여행? 어디로 갔습니까?" "하와이라더군요. 붐비는 여름 휴가철을 피해 일찌감치 놀다 온다면서, 떠난 지 벌써 2주일이나 됐어요. 여름엔 나도 2,3 주일 휴가를 얻을 작정이니까, 피장파장이죠 뭐." "귀국 예정일은 언젭니까?" "토요일쯤 돌아올 예정이랍디다. 독신이니까 한결 느긋하겠죠, 하라는." "미야우치 가즈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요?" "없어요, 그런 이름 들어본 적." 대답하면서 치과의사는 사메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주쿠에 있는 <아가메무논> 이란 술집에 대해 하라 선생이 말한 적 없던가요?" "없어요. 하라는 좀 이상한 데가 있는 녀석입니다. 도쿄에 잘아는 술집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몇 번 부탁했지만 한번도 들어 준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하와이로 떠난 건 언제죠?" "가만 있자..... 20일 예정으로 떠났으니까, 지지난주 월요일 이었을 겝니다." "혼자였습니까?" "글쎄, 그런 것까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접수 데스크의 노파가 앙칼지게 불렀다. "자, 이제 됐죠?"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하라씨 주소를 알고 싶습니다." "성 프란체스카 의과대학 치학부에 문의해 보세요. 그 정도는 가르쳐 줄 겝니다." 치과의사는 핀세트를 흔들면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메지마는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인사를 한 뒤 현관 쪽으로 향했다. 등 뒤로 노파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치과의사 하라 요시아키가 근무하고 있는 성 프란체스카 의과대학에서 사메지마는 그의 주소와 본적지를 알아냈다. 하라는 가와사키 시 무사시 고스기의 도큐센 전철역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그의 맨션 아파트는 2주일 이상 비워둔 흔적이 뚜렸했다. 지지난주 월요일이라면 첫번째 범행이 있었던 날이었다. 신주쿠 서로 돌아온 사메지마는 나리타 - 하와이 라인을 가지고 있는 모든 항공사에게, 당일 승객명부에 <하라 요시아키> 라는 이름이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객기 승객명부는 모두 컴퓨터로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항공사로부터 바로 그날, 하와이행 승객 가운데 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연락이 왔다. 사메지마는 그 두 편의 승객명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 중 한편의 명부엔 와 함께 라는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기즈의 아파트를 뛰쳐나오긴 했으나 가즈오에겐 따로 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자기에게 열을 올렸던 하라에게 연락했다고 봅니다. 어쩐지 가즈오는 꽤 앙큼한 성격 - 여자로 치면 중년남자 등을 쳐서 즐기는 불량소녀 타입으로 느껴집니다..... 제 사람 만들어 보려다가 실패했던 젊은 녀석이 뜻밖에도 스스로 연락해 오자 하라는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하와이 여행에까지 가즈오를 데리고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열린 수사회의에서 사메지마는 자신의 탐문 결과를 보고했다. 회의에는 1백여 명의 수사요원이 참석했다. "아무리 돈 많은 독신이라지만, 어제 오늘 연락해 온 사람을 20일간씩이나 해외여행에 데리고 갈 수 있을까?" 신주쿠 서 형사과장인 요나이가 반론을 제기했다. 요나이도 사메지마나 모모이와 같은 경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눈길이 사메지마에게로 쏠렸다. "항공권을 알선한 여행사 얘기로는, 하라는 처음엔 혼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라가 지정한 하와이 리조트 호텔엔 싱글룸이 없어 더블 아니면 트윈을 예약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미야우치 가즈오를 데리고 간다 하더라도 숙박비는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왕복 항공료와 식사대가 추가될 뿐이죠. 또 당초 한명으로 되어 있던 골프 예약도 하라는 출발 직전에 2명으로 늘렸다고 합니다." "가령 미야우치 가즈오가 하라 요시아키와 함께 여행중이라면, 가즈오가 들고 나온 기즈의 변조총은 어떤 경로를 통해 범인 손으로 넘어갔을까?" 사회를 맡고 있던 경찰청 수사 1과의 도네자키 총경이 물었다. "미야우치 가즈오가 기즈의 아파트를 뛰쳐나온 바로 그날, 하라와 함께 여행을 떠난 건 아니라고 봅니다. 처음엔 몸을 숨길 만한 곳 - 허물없는 친구집을 찾았겠죠. 허나 그런 친구 집은 기즈가 밀어닥칠 위험이 높다는 걸 깨닫고 하라에게 연락한 게 아닐까요? 하라가 함께 하와이 여행을 떠나자고 제의하자, 기즈네 아파트에서 들고 나온 총이 거추장스러워 누군가에게 맡겼거나 처분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럼 미야우치 가즈오는 지금 어디 있나?" 도네자키 옆자리에 앉아 회의를 지켜보고 있던 후지마루가 물었다. "하라와 동행하고 있다면 오아프 섬 힐튼 하와이언 빌리지에 머물고 있습니다. 현지시간으로 어제까지는 같은 섬의 마카하 쉐라톤에 체제했습니다." "귀국은 내일, 토요일이랬지?" "여행사에 알아본 결과, Y.하라와 K.미야우치 두 사람 모두 귀국 항공편 예약 확인을 끝냈다고 합니다. 그 비행기는 내일 오후 2시에 나리타 공항에 도착합니다." "좋아, 미야우치는 나리타에서 연행하기로 하지. 신문기자들이 눈치 채기 전에 총을 어떻게 처분했는지 알아내야 해. 공항경찰의 협력을 얻어 공항 빌딩에서 심문을 하도록. 미야우치가 총의 행방을 부는 즉시 행동을 개시할 수 있도록 이쪽엔 별동대를 대기시켜 놓을 것. 그때까지는 완벽하게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도록." 후지마루는 단호한 어조로 결론을 내린 다음, 사메지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로는 미야우치 가즈오만이 유일한 단서야. 이 실마리가 범인에게까지 이어졌으면 좋겠군." 사메지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고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류철을 들고 있는 그는 사메지마의 보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고다는 사메지마가 수사본부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면서 후지마루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었다. 수사본부 안에서는 사메지마가 기즈를 코너로 몰고 간 데 대해서는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그런 사메지마를 구출하기 위해 <시체>로 불리던 모모이가 피의자를 사살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모두가 경악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모모이를 경멸하고 있던 형사들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모모이는 그러한 변화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사메지마를 구출하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방범과 과장석을 지키고 있었다. 수사본부에 파견된 신조는 그 때문에 초조함을 느꼈는지, 적극적으로 고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런 시조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젊은 형사들은 의식적으로 사메지마를 따랐지만, 사메지마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수사본부가 해체되고 나면 사메지마도, 신조도, 또 젊은 형사들도 다시 방범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과내(課內) 파벌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사건 발생 이후, 수사본부로 범행 성명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오고 있습니다. 전화 녹음 테이프를 중심으로 해서 가장 유력한 피의자인 <에도>에 대한 전문학자들이 심리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배포된 보고서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고다의 설명에 따라 형사들은 앞에 놓인 자료를 펼쳤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올 때, 입구에서 고다 부하인 본청 공안형사로부터 건네받은 자료였다. "사메지마 경감! 당신은 내 보고를 아예 무시할 생각인가?" 고다가 느닷없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회의 참석자 가운데 사메지마만이 자료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전혀 흥미가 없다면, 퇴장해도 좋아!" 사메지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료를 배포한 형사를 바라보았다. 형사는 헛기침을 하면서 얼굴을 돌렸다. 사메지마에게만은 자료를 건네 주지 않았던 것이다. 후지마루가 탐색하는 눈초리로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사회를 보던 도네자키가 뭐라고 입을 열려 하자, 고다가 가로막듯 보고를 이어갔다. "실례했습니다. 보고를 계속하겠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에도>는 20대의 젊은이로서 고졸 또는 전문대학이나 대학 교육을 받은 고학력 소유자입니다. 체형은 깡말랐거나 조금 뚱뚱한 타입. 스포츠를 싫어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반면 성격 자체는 아주 격렬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유흥가 등에서 공갈당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들치기 같은 경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옷차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말하자면 요즘 젊은이와는 조금 다른 유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경찰조직을 비롯해서 범죄. 총기 등에 강한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범행을 저질렀을 경우, 정신구조상 자신의 범행을 과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타입입니다. 사상적으로는 정치나 사회운동에 무관심하거나 보수적이지만, 본인의 마음가짐과는 반대로 불심검문에 걸려들기 쉬운 겉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보행속도는 극단적으로 빠르든가, 아주 느리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길을 가다가 어떤 일에 흥미를 느낄 경우,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그 반대일 경우엔 어슬렁거리기만 하는 등, 모든 행동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성적(性的)으로 미숙하기 때문에 결혼도 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종합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사람은 교우관계 폭도 극히 제한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거기서 일단 말을 끊은 고다는 회의 참석자를 죽 훑어보았다. 사메지마와 눈길이 마주쳤을 때도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 앞에 말씀드린 자료를 바탕으로 <에도>의 범행동기를 고찰해 보면, 과거에 신주쿠 서원(署員)으로부터 불심검문을 당했을 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경관을 증오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만약 경관을 증오할 만큼 집요한 불심검문을 받았다면, 당시 외근 형사의 업무보고 기록이 신주쿠 서에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그 기록을 정밀하게 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령 <에도>가 범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범인이 가지고 있는 경관에 대한 증오심은 <에도>와 동일한 이유에서 싹텄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겠습니다." "논리적인 의견이로군." 후지마루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고다를 바라보았다. "그 일은 고다 총경이 맡도록 해. 신조 경위, 당신도 협조해." "넷!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도>가 또 전화를 걸어올지도 모르니까, 고다 총경은 서내에 대기하고 있도록. NTT 요도바시 영업소에서도 역탐지 소요시간 단축에 최대한 협조한다고 했어." "다른 얘기가 없으면....." 도네자키가 좌중을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 "..... 오늘도 각자 안전에 조심하면서 범인 체포에 총력을 기울여 주기 바랍니다. 흉악한 총기로 무장한 범인과 맞서기 위해서 여러분도 권총을 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총기 사용시에는 항상 신중을 기하도록 거듭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이상." 형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그 중엔 감식과의 야부 모습도 끼어 있었다. 총기에 대한 전문적인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의 어드바이저를 겸해서 출석한 야부는 기즈 공방에 대한 검증 결과를 오늘 직접 보고했다. 사메지마는 야부를 불러세웠다. 막 도어를 나가려던 야부가 걸음을 멈추며 싱긋이 웃어 보였다. "녀석이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나오는군..... 귀는 좀 어때?" 고다의 심술이 역겹다는 표정이었다. "어린애들 싸움 같지? 그렇게 아프진 않아."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해서 수사본부를 나왔다. "고시에 합격한 귀한 양반들은 한결같이 세상 물정이 어두워. 싸우는 것조차 어린애처럼 하니....." 사메지마가 고시에 합격한 엘리트란 걸 야부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구, 고다 총경이 보고한 <에도>의 인간형이 야부, 당신 복사판 같더군. 나이만 달랐을 뿐....." "물론이지. 입장이 달랐다면, 나도 기즈처럼 총 밀조 명인이 됐을지 몰라." 야부는 태연하게 말했다. "기즈 공방에서 뭔가 좀 찾아냈어?" "그럼. 산더미만큼. 알고 싶은 게 뭐야?" "가즈오가 들고 나간 총엔 어떤 장치가 붙어 있었어?" "그게 궁금해? 그럼 내 <실험실>로 초대해야겠군." "비커로 커피를 마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 "손님용으로 진짜 커피잔을 한개 마련해 놨어." 진짜 커피잔이란 건 수류탄 모양으로 도기를 구워 만든 모닝컵이었다. 야부는 동그라미 안에 X자가 표기되어 있는 병에 담긴 저칼로리 감미료를 컵에 따랐다. 동그라미 속에 X자를 표기한 것은 화염병의 약호(略號)였다. 야부는 감식실 가득히 기즈 제품을 쌓아놓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한자루 한자루엔 사용 탄환과 성능을 적은 태그가 달려 있었다. 그것은 모두 운하변에 있던 공방에서 압수해 온 것들이었다. "모두 조사해 봤어?" 야부가 끓인 커피를 받아들고 사메지마는 총이 쌓여있는 테이블로 다가섰다. "대충대충 훑어봤어. 미완성품을 포함해서 지금부터 정밀하게 살펴볼 작정이야. 본청에서 쓸어가지만 않는다면." "어때, 물건은?" "천재야, 기즈는. 총이란 흉칙한 물건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이해하고 있어. 명중 정도(精度)가 필요한 총, 그렇지 않아도 되는 총을 분명히 구분해서 "도에 맞춰 하나하나 손으로 다듬어 만들었더군." "꽤 비싸게 팔렸던 모양이야." "그렇겠지. 가령 이 총 말야. 두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겠지만..... 바로 당신 머리를 뻥 뚫어 버릴 뻔한 총이야." 사메지마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야부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총신 4개를 상자처럼 엮어 만든 바로 그 총이었다. "이건 이연장(二連裝)의 각각 다른 타입 총 2개를 상하로 세트한 거야. 사수 쪽에서 봐서 오른쪽 아래위가 222레밍턴을 사용하는 라이플, 왼쪽 상하는 12번경(番徑) 산탄총이야. 방아쇠도 좌우에 한개씩 따로 붙어 있어. 다시 말하면 방아쇠를 한번 당길 적마다 상하의 격침(擊針)이 거푸 떨어지게 되어 있어. 당신을 쏜 건 오른쪽 위의 222라이플이었어. 만약 왼쪽 산탄을 쐈다면 당신 어깨 위엔 아무것도 안 남았을 거야. 녀석이 산탄을 쏘지 않은 건, 신성한 일터를 당신 뇌수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야." "끔찍한 소리는 그쯤 해 둬." "첫발이 빗나가고 말자 녀석은 방법을 바꾸기로 한 거야..... 이번엔 이 총을 한번 봐." 야부는 비디오 테이프 케이스처럼 보이는 작은 상자를 가리켰다. 케이스 표면에는 채플린의 라임라이트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거야말로 스파이 영화 소도구 같은 거야. 뚜껑을 여는 순간 22구경 탄환이 발사되게 되어 있어. 총구는 뚜껑 접합부 바로 위에 있어. 이 작은 구멍이 바로 총구야." "메키니즘은 어떻게 되어 있어?" "총의 메카니즘이란 건 따지고 보면 안전핀을 조금 복잡하게 한 것과 같아. 스프링과 그것을 억누르는 장치와 푸는 장치만 있다면 충분하거든. 격침은 못으로 대신 할 수 있어. 기즈가 만든 총은 몇백 발씩 쏘는 게 목적이 아냐. 기본적으로는 1회용 소모품이나 다름없어. 그래서 녀석도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시험해 본 거야." "명중률은 어느 정도야?" "그건 총신과 본체 모양에 따라 달라. 총신이란 발사된 탄환이 빠져나가는 파이프 부분이야. 탄환의 회전운동에 대해선 지난번에 얘기했지만, 요컨대 회전운동을 왜곡시키지만 않는다면 총신이 다소 짧더라도 명중률엔 큰 영향이 없어. 최소한의 길이만 확보되어 있으면 무방해." "하지만 지난번엔 총신을 잘라내면 명중률이 떨어진다고 했잖아?" "그건 이미 완성된 제품, 시판하고 있는 라이플 총신을 잘라냈을 경우를 말한 거야. 나도 기즈의 총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거지만, 녀석은 절대로 그렇게 서툰 짓은 하지 않았어. 녀석은 총을 사랑하고 있었어. 총의 마력.파괴력에 매료당했다고도 볼 수 있어. 녀석의 작품에는 세련미가 있어. 비록 개조총이라 하더라도 총인 이상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메지마는 기즈가 뉴넌브를 엉터리 총이라고 내뱉던 말이 생각났다. "또 한가지, 만약 아마추어가 시판중인 라이플 총신을 잘라낸다면, 그 속의 선조(旋條), 라이플링까지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총구면에 금속 찌꺼기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탄환이 그 금속 찌꺼기에 스치기만 해도 어디로 날아갈지 가늠할 수 없게 되고 말아. 총구면 상태는 라이플링 못잖게 명중률을 좌우하는 중요 요소야. 기즈의 총은 비록 총신은 짧지만 권총이나 라이플을 만들 때 그 모든 요소에 최대한 신경을 썼어." "총 본체의 모양에는 어떤 의미가 있지?" "반동 흡수력을 뜻하고 있어." 야부는 사메지마가 차고 있는 뉴넌브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약실 안에서 일어난 폭발 에너지가 유일한 분출구인 총구 쪽으로 탄두를 밀어내게 되어 있어. 허나 그것만으로 폭발 에너지가 모두 소멸되는 건 아니야. 약실 후부, 다시 말해서 사수쪽으로는 반동력이 나타나게 마련이야. 기즈는 라이터 모양으로 만든 총에는 22구경의 작은 탄환을, 서류가방 모양으로 크고 무겁게 만든 총에는 산탄이나 45구경. 라이플탄을 사용하고 있어. 조금만 머리를 쓰면 비록 총 본체는 작더라도 대구경(大口徑) 탄환 발사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어. 허나 기즈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정확히 조준하지 않으면 명중시킬 수 없다는 뜻인가?"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었을 거야. 총신은 우선 사수가 잡기 쉬워야 해. 봉제인형에도 총을 숨겨넣을 수 있지만, 너무 부드러워서 꽉 잡기가 쉽지 않아. 때문에 그런 총은 별로 안 만들어. 기즈 총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우산이지만, 역시 대구경 탄환은 사용하지 않았어. 우산은 겨누기도 쉽고 두 손으로 꽉 잡는 데도 불편이 없어. 그런데도 왜 대구경 탄환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야부가 물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 "무게 때문이야. 발사 때의 반동력을 총 본체가 얼마나 흡수해 주느냐에 따라 사수에게 전달되는 충격도 달라져. 흡수력은 총 본체 무게에 비례하는 거야. 또 가벼울수록 조준 오차도 그만큼 커지게 마련이야." "겨누기 쉽고 묵직한 게 좋다는 뜻인가?" "그래. 구경이 클수록 무거운 것도 그 때문이야. 총 무게가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사수가 받는 반동도 엄청나. 반대로 무거울수록, 구경이 엄청 크더라도 사수의 팔이 튕겨져 나갈 정도의 반동은 없어." "30-06은 어떤가?" "물론 총신이 무겁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돼. 기즈는 자기 고객이 총에 서툴다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만들었어. 장인(匠人) 치고도 초일류인 셈이야." "변태성격자로도 그렇지!" 사메지마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지. 범인이 갖고 있는 총은 겉보기가 어떻게 생겼든 상당히 무거운데다가 사수가 잡기 쉬운 모양일 게 틀림없어." "게다가 절대로 총으로는 보이지 않는 형태일 게구. 어떤 모양일까, 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건." 야부는 사메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공방에서 압수해 온 것 가운데 30-06을 사용할 수 있는 총은 없었어. 양복에 비유하자면 단 한벌만 만든 것을 범인이 입고 있는 셈이야." 20 사메지마는 소도야마와 함께 나리타 공항 세관 특별검사실에 있었다. 대여섯 평쯤 되어 보이는 특별검사실은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출입문 맞은편 벽에는 가슴 높이로 너비가 길쭉한 거울이 박혀 있었다. 방 한복판에는 4인용 테이블과 의자가, 구석에는 벤치가 놓여 있었다. 입국심사가 끝나는 대로 공항경관이 임의동행 형식으로 가즈오를 이 방으로 데리고 오게 되어 있었다. 도어는 열어놓은 채로였다. 속칭 핸들러라고 하는 검사관이 마약견(痲藥犬)을 데리고 바깥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핸들러는 트렁크와 수트케이스를 비롯한 승객들이 맡긴 짐을 마약견으로 체크하는 것이었다. 여객기 화물실에서 짐이 쏟아져 나오면 마약견이 회전 에스컬레이터 위로 잽싸게 올라가 마약 냄새를 맡아내는 것이었다. 2시 20분. 정복경관 4명이 반바지에 요트 파카를 걸친 소년을 데리고 복도 저쪽에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사메지마는 몇 분 전 휴대용 무선기를 통해 미야우치 가즈오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사메지마는 왼쪽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뽑았다.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 그로서는 왼쪽에 이어폰까지 끼고 있으면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울 저편에는 본청 수사 1과 형사를 비롯해서 수사원 6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소년이 검사실에 들어서자 정복경관 2명은 그대로 돌아갔고 나머지 2명은 출입문을 막고 서서 지시를 기다렸다. 햇볕에 새카맣게 그을은 미야우치 가즈오는 선글래스에 줄을 달아 목에 걸고 있었다. 요트 파카 안에는 컬러풀한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가슴팍과 팔다리는 튼실한 근육질이었으나 체모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동행자는 별실, 2호실에 있습니다." 경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 경관이 말했다. "수고했어요. 거기도 한사람 배치해 주시오." 사메지마가 지시를 내리면서 도어를 닫았다. 미야우치 가즈오는 전혀 표정이 없었다. 긴장은 하고 있었으나 두려워하는 빛은 조금도 없었다. 눈을 깜박거릴 적마다 체형과 어울리지 않는 긴 눈썹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신문은 주로 사메지마가 맡기로 이미 소도야마와 합의가 되어 있었다. "앉아. 난 신주쿠 서의 사메지마, 이쪽은 소도야마씨야. <아가메무논> 에서 일한 적이 있는 가즈오가 틀림없지?" 사메지마가 신문을 시작했다. 가즈오는 그동안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눈을 치켜떠서 사메지마와 소도야마를 비교해 가며 살폈다. 몸짓 하나하나에서 자연스럽게 교태가 풍겨나왔다. "우선 앉아." 사메지마가 재촉하자, 가즈오는 의자를 당겨 털썩 엉덩이를 걸쳤다. "하와이는 어땠어?" 가즈오는 여전히 입을 봉한 채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재미있었어?" 가즈오는 고개만 끄덕였다. "얼마나 머물렀어?" "20일."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사메지마는 왼쪽 귀를 가즈오 쪽으로 기울였다. "미안하지만, 좀 큰소리로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보다시피 귀를 다쳤어." "20일간 있었습니다." "그래? 너 없는 동안, 일본에선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어. 소식 들었나?" 가즈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아직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즈 가나메를 알고 있지? 한동안 함께 살았던 사내야." 가즈오의 눈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몰라요, 그런 사람." "그럴까? 네가 기즈와 동서(同棲)했던 걸 아는 사람이 많아!" "몰라요! 모른단 말예요!" "기즈를 끌고 들어가는 게 꺼림칙하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기즈는 죽었어." 사메지마는 느닷없이 히든 카드부터 내보였다. 가즈오의 눈이 한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때문에 기즈에 관한 건 우선 접어놓아도 괜찮아. 먼저, 하와이로 떠나기 전 며칠 동안 네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얘기해 줄 수 있겠어?" "왜 그러세요?" "얘기해 줘!" 가즈오는 생각에 잠겨들었다. 천장을 쳐다보다가는 눈길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는가 하면 이번에는 거울을 바라보기도 했다. 시선이 쉴새없이 흔들렸다. "하라씨와 함께 있었어요." "언제부터?" "지난달 초순부터예요." "요일은?" "모르겠어요. 목요일 아니면 금요일이었을 거예요." 사메지마는 수첩의 캘린더를 내보이면서 따지기 시작했다. "네가 하라씨와 함께 일본을 떠난 게 지난달 13일, 월요일이었어. 지금 하라씨 얘기도 듣고 있으니까 둘러대어 봤자 금방 탄로나고 말아." 가즈오는 심하게 눈을 깜박거리다가 대답했다. "토요일." "날짜로는 11일이었군. 그전엔 어디 있었지?" "친구집." "친구 누구? 이름을 대봐." "왜요? 뭣 때문에요? 어째서 꼬치꼬치 따져 물으세요?" "친구한테 확인해 봐야 하니까." "나쁜 짓한 것 하나도 없어요." "알고 있어. 허나 네 친구가 그걸 우리한테 증명해 줘야 완전히 믿을 수가 있어." "뭘, 어떤 걸 증명해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금요일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치자구. 그 사건이 기즈와는 관계가 있지만 너와는 무관하다는 걸 누군가가 증명해 줘야 할 것 아냐? 그래서 네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를 묻고 있는 거야." "금요일에 말입니까?"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아르바이트할 때 사귄 친구집에 있었어요. 그러나 그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폐를 끼치진 않아." "하지만..... 가르쳐 드리기 전에 우선 그 친구한테 전화부터 걸게 해 주세요." "말한 뒤에 걸어도 무방하잖아?" 가즈오는 망설이고 있었다.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잖음 일이 귀잖게 꼬일지도 몰라." "귀찮게 꼬이다뇨?" "...... 사람이 죽었어." "어디서, 누가 죽었어요?" 사메지마는 대답 대신 가즈오를 쏘아보았다. 가즈오는 지금, 기즈 아파트에서 총을 들고 나온 게 탄로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연속적인 피살 사건은 정말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이윽고 가즈오가 친구 이름을 말했다. "스나가미, 스나가미 고이치." "한자로는 어떻게 쓰지?" 사메지마는 메모지를 내밀었다. 가즈오는 <砂上幸一>이라고 써보였다. 사메지마는 한자 하나하나의 뜻을 새겨가며 큰소리로 읽었다. 거울 뒤쪽에 있는 형사들에게 들려 주기 위해서였다. "어디서 살고 있나?" "나카노." "몬젠나카쵸에서라면 지하철 도자이센으로 곧장 갈 수 있겠군." 사메지마가 말하자 가즈오는 놀랐다는 듯 얼굴을 쳐들었다. "전화번호는?" "수첩에 적혀 있어요. 지금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럼 너도 걸 수 없겠군." 말하면서 사메지마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뭣하는 친구야?" "여러 가지." "여러 가지라니?" "처음엔 회사에 취직을 했었지만, 시시하다면서 그만뒀어요. 그 뒤론 아르바이트를 여러 가지....." "지금은?" "몰라요. 저어..... 담배 좀 피워도 되나요?" 사메지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즈오는 요트 파카 포켓에서 버지니아 슬림 멘솔을 꺼내어 불을 붙여 물었다. "사귄 지 오래 되나, 스나가미와는?" "3, 4년쯤 됐어요." "스나가미네 집에 있었던 건 언제였어? 금요일? 아니면 목요일?" "금요일 저녁이었어요." "그전엔 몬젠나카쵸에 있었나?" 가즈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몬젠나카쵸에서 나온 건 몇 시쯤이었어?" "3시께." 기즈가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는 시간대였다. 그 틈을 노리고 있다가 짐을 꾸려 뛰쳐나온 것 같았다. "그 길로 곧장 스나가미에게로 갔었나?" 가즈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했어, 주인도 없는 집에서?" '열쇠 두는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갔죠.' "아파트인가, 스나가미 집은?" "네." "다시 말하면, 스나가미가 외출할 때 열쇠 감춰 두는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뜻인가?" "네." "하라씨한테 연락한 건?" "금요일 밤." "하라씨에게 전화 걸 때 스나가미도 함께였나?" "저 혼자였어요. 그날 스나가미는 무척 늦었어요." "몇 시쯤이었어, 스나가미가 돌아온 건?" "11시 좀 지나서....." "꽤나 늦었군. 한잔 한 것 같던가?" "한잔 걸친 뒤에 싸움도 했었나 봐요. 피투성이였어요." "싸움?" "잘은 몰라요. 취한데다 기분도 무척 나쁜 것 같았어요. 전철 역도 못 알아봐서 내려야 할 곳을 몇 번씩이나 지나쳤나 봐요." "그 정도로 취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얻어맞아 정신이 왔다갔다했다는 뜻인가?" 가즈오는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요." "스나가미는 몇 살쯤 됐어?" "스물넷." 사메지마는 의자에 기대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거울 뒤쪽, 별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형사들이 나카노에 살고 있는 스나가미 고이치를 수배해 주도록 도쿄에 연락했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가즈오는 입을 꽉 다문 채로였다. 그러나 사메지마는 가즈오가 마음 속으로 어떤 결단을 내리고 있다고 느꼈다. "스나가미는 네 애인이었나, 옛날엔?" 가즈오는 사메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한 저항감이 실린 눈빛이었다. 사메지마가 호모에 대해 차별의식을 갖고 있나 없나를 민감하게 더듬고 있는 눈초리였다. "그냥 친구예요." 사메지마 표정에서 차별의식을 찾아내지 못한 탓일까, 가즈오는 불쑥 내뱉었다. "스나가미네 집에 그냥 있지 않고 하라씨한테 연락한 이유는 뭐야?" 가즈오는 테이블 위로 눈길을 내리깔았다. "스나가미는 너한테 상냥스러웠나, 아니면 무섭게 굴었나?" "상냥스러웠지만 무서웠어요." "어떤 때 무섭게 굴었나?" "내가 호모 티를 낼 때." "네가 치근덕거리는 걸 싫어했단 말이지?" 가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나가미를 좋아했나 보군." 가즈오의 눈길이 테이블 위 어느 한점에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몸집이 컸나?" "키가 무척 컸어요. 다리도 길어 스타일이 멋있었어요." "힘도 세?" "네." "싸움 솜씨도 좋아?" "그런 편이에요." "그처럼 힘도 세고 날쌘 녀석이 얻어터지고 왔단 말이지?" "상대는 야쿠자였대요. 처음엔 한놈인줄로만 알았는데 패거리로 몰려왔대나 봐요." "그래서 힘이 쭉 빠지고 말았겠군." "그랬나 봐요." "그렇게 당하면 반드시 앙갚음하는 성질인가, 스나가미는?" "처음이라고 했어요. 그처럼 얻어터진 건 난생 처음이랬어요." "장소는 어디라고 했어?" "말 안했어요. 허지만 신주쿠였을 거예요. 그날, 신주쿠 카부키쵸로 무슨 노래를 들으러 갔다 돌아오던 길이랬어요." "노래? 콘서트 말인가?" "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는 거의 빼놓지 않고 들으러 간댔어요."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데?" "몰라요. CD나 테이프도 많이 갖고 있지만 손도 못 대게 하니깐요." "금요일 오후, 기즈의 아파트를 뛰쳐나와 곧장 스나가미네 집으로 갔단 말이지? 도착한 건 몇 시쯤이었어?" "4시, 아니면 4시 30분쯤." "스나가미가 돌아올 때까지 줄곧 아파트에 혼자 기다리고 있었나?" "네." "식사는 어떡허구?" "배가 고파 빵을 사러 가긴 했어요." "그럼 일단 외출한 것 아냐?" "아파트 근처에 가게가 있었어요. 빵만 사가지곤 금방 돌아왔어요." "따분하지 않았나?" "별로, TV가 재미있었어요." "밤 11시쯤 스나가미가 돌아왔다고 했지? 술에 취한데다 싸움에 져서 피투성이가 돼서..... 게다가 기분도 몹시 상해 있었구. 널 보곤 뭐랬어?" "<뭐야? 너로군> 하더니 <뭣 때문에 네가 날 기다리고 있나> 라고 했어요." "그래서 넌 뭐라고 했어?"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했어요." "진짜 하룻밤만 묵을 생각이었나?" "하라씨한테 전활 했더니 함께 하와이 여행이나 가쟀어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해 놓은 터라....." "하지만 속마음은 하와이 여행보다 스나가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이 말인가?" "이전부터 좋아했으니까요." "기즈와 사귀기 전부터?" 가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스나가미는 호모가 아니라서 널 받아들이지 않았단 말이지?" "네. 그 집에 억지로 오래 머물려 하다간 두번 다시 만나 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이튿날, 토요일에 만나자고 하라씨에게 연락했어요." "두 사람이 만나선 곧장 하라씨 집으로 갔었나?" 가즈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함께 식사하구 술도 마셨어요. 그 뒤에는 베이브리지로 가서....." "요코하마 베이브리지? 하라씨는 자동차를 갖고 있나?" "서브를 직접 몰고 다녔어요." "네가 스나가미 집에서 나온 건 토요일 몇 시쯤이었나?" "5시쯤. 하라씨와 만날 약속이 7시였으니까요." "어디서?" "시브야." "시브야 어디?" "<아큐라스> 라는 다방이었어요." "만나서 바로 식사하러 갔나?" "네." "네가 나올 때, 스나가미는 뭘 하고 있었어?" "자고 있었어요." "컨디션이 안 좋았나?" "네." "시브야로 가는 도중에 들른 곳은 없었나?" 가즈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기즈 집에서 뛰쳐나왔을 때, 짐이 많았나?" "..... 조금." "조금이라니?" "옷가지들이....." "그 외에는?" "그 외라뇨?" 가즈오가 사메지마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갖고 나온 건 네 물건뿐이었나?" "네." "그래?" 사메지마는 다시 담배를 붙여 물었다. 가즈오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스나가미는 어떤 녀석이야?" 가즈오는 약간 놀라는 표정이었다. "스나가미 말야. 네가 좋아한다니까 좋은 녀석이겠지. 아니면 재미있는 녀석인가?" "상냥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예요." "사람은 모두 그런 것 아냐? 기분 좋은 땐 부드럽구, 화를 내면 무서워지구." "그런 뜻이 아녜요. 새나 고양이 따위 동물들에겐 엄청 상냥해요. 차에 치인 고양이 새끼를 집으로 안고 와서 기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사람한테는 곧장 무섭게 화를 낸단 말예요. 고양이한텐 끔찍하게 잘해 주면서 사람한텐....." "사람을 싫어하는가 보군." "그럴지도 몰라요." "어떤 경우에 화를 내나, 사람한테?" "으스대는 녀석, 잘난 척하는 녀석은 꼴도 보기 싫댔어요." "야쿠자들이 곧잘 잘난 척 뻐기지." "네. 경관들도 그렇구요." 말하면서 가즈오는 사메지마와 소도야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경관도 으스대는 축에 드니까 싫단 말이지?" "으스댈 줄만 알았지 맡은 일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게 경관들이랬어요. 길거리 여기저기서 건방을 떨고 서 있다가 <이봐, 잠깐!> 하면서 아무나 붙잡고 불신검문한답시고 으스대면서도 야쿠자들에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게 경관이라고 했어요. 신주쿠 경관은 야쿠자 앞에선 찍소리도 못한댔어요." "그렇게 말한 건, 스나가미가 야쿠자한테 얻어맞고 있을 때, 경관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럴지도 몰라요." 사메지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면서 소도야마 쪽으로 눈을 돌렸다. 소도야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10일인 금요일, 신주쿠 일대에 수많은 경관이 깔려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교엔에서 열린 원유회 경비 때문이었다. "양복 말고도 들고 나온 게 또 있지? 기즈 아파트에서 도망쳤을 때 말야!" 가즈오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뭐야, 그게?" "양복뿐이었어요!" "그래? 네가 뭔가 엉뚱한 걸 들고 나갔다던데, 기즈 말로는?" "거짓말이에요!" "그래?" 사메지마는 가즈오를 쏘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다시 테이블 위에 붙박힌 채로 있었다. "하라씨를 만나러 갔을 때, 짐도 몽땅 들고 갔었나? 스나가미 아파트에 두지 않구?" 가즈오는 입을 봉한 채 대답이 없었다. 노크 소리에 소도야마가 일어나 도어를 조금 열었다. 도어 틈으로 메모지를 받아든 소도야마는 슬쩍 훑어본 다음 사메지마에게 건네 주었다. <스나가미 고이치, 나카노구 야요이쵸 1쵸메 X전 X호, 야요이 제2 코포 203호. 전화 385-XXXX. 전과 없음. 총기류 불법소지 혐의로 수색영장 청구중. 재택여부 전화로 확인하지 않았음. 수사본부 2반.8반.13반 급거 출동했음.> 메모지를 접어 가슴 포켓에 넣은 사메지마는 가즈오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가즈오의 눈빛엔 비로소 두려움이 실렸다. "기즈 아파트에서 나올 때, 기즈가 만든 것을 하나 들고 나왔다는 것쯤, 다 알고 있어. 속이 상한 김에 기즈를 한번 곯려 주자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생각해. 허나 기즈가 뒤쫓아 오는게 두려워서 넌 그걸 어딘가에 버렸거나 숨겼겠지. 그렇지?" "몰라요! 갖고 나온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말했지! 기즈는 죽었어. 세삼 두려워할 것 없어." 가즈오는 눈을 크게 떠서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그럼 죄가 되지 않는단 말이에요?" "죄가 되고 않는 건 네 하기 나름이야." "협박이에요? 그럼 한마디도 말 않겠어요!" "좋아, 그렇다면 모두 털어놓지. 네가 하라씨와 함께 하와이로 떠났던 날, 신주쿠 서 경관 2명이 살해됐어. 그 다음 주에 또 한사람이 피살되고 한사람은 중상을 당해 생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살아났어. 같은 주 주말, 지난주 토요일에도 경관 한명이 살해되고 한명은 중상을 당했어. 범행현장은 모두 신주쿠였고, 피격당한 경관도 모두 신주쿠 서 소속이야. 경관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어. 여섯 사람 모두 네가 기즈 아파트에서 들고 나온 총에 맞은 거야!" 가즈오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만큼 눈이 휘둥그래졌다. "거, 거짓말! 누가 속을 줄 알아요?" 애써 여자인 척하던 태도도 사라져 버렸다. "잘 들어! 네가 훔쳐낸 총으로 누군가가 경관을 죽이고 있어!" "몰라요! 난 모르는 일이야! 모두 거짓말이야!" "가즈오! 진상을 말해 봐! 넌 지금 막다른 골목에 서 있어. 만약 네가 스나가미에게, 금요일에 당한 복수를 하라고 총을 넘겨 줬다면....." "안 줬어! 줬을 까닭이 없잖아!" 가즈오는 몸까지 들썩이며 부르짖었다. "그 집에 그냥 두고 나왔을 뿐이야. 사용할 줄도 모르고 거추장스러워 스나가미 아파트에 맡겨놓고 왔어. 정말이야!" "그게 총이란 걸 스나가미에게 말했나?" 가즈오는 다시 입을 봉했다. 눈만 계속해서 깜박거렸다. "가르쳐 줬어?" "말했을지도 몰라요.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맡겨놓고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하와이에서 돌아와서, 알고 지내는 야쿠자한테 팔아넘길 생각이었어요." "스나가미에겐 뭐라고 말했나?" "팔면 반으로 나누기로..... 그때까지 맡아달라고 했어요. 뭐냐고 묻길래 피스톨 비슷한 거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뭐라고 했어, 스나가미는?" "정말이냐면서 벌떡 일어나더군요. 하지만 포장해서 끈으로 묶어놨기 때문에..... 열어보면 안 된다고 내가 말렸어요." "어떻게 생겼어?" "몰라요. 크기는 이 정도쯤 될까, 기름종이와 포장지로 두 겹이나 싸서 종이주머니에 넣어 묶었더군요." 가즈오는 사방이 3, 40 센티미터쯤 되는 크기를, 손을 벌려 그려보였다. "무게는?" "3킬로그램쯤. 무거웠어요." "멍청한 자식!" 사메지마는 저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소도야마가 일어서면서 고개를 주억거려 보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메지마가 다가가 도어를 열었다. 하라를 맡았던 형사가 서 있었다. "조사, 끝났습니다." 사메지마는 가즈오를 돌아보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사메지마와 눈길이 마주치자 애원하듯 말했다. "화장실, 화장실에 갔다 오게 해 주세요." 도어 밖에 서 있던 정복경관이 들어와서 가즈오를 데리고 나갔다. "조서를 만들어야지!" 소도야마의 말에 사메지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즈오가 돌아오자 서기(書記) 형사를 불러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가즈오는 자신이 스나가미의 공범으로 엮이어 들어가지나 않나 하고 무척 두려워했다. 사메지마에게 얘기했던 내용을 옮겨 쓴 조서에 서명과 함께 손도장을 찍었다. 조서작성이 끝나자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본청 수사 1과 경감이 들어왔다. "스나가미 아파트에서 탄피 5개를 찾아냈다는군. 허나 스나가미는 집에 없었어. 총도 탄환 남은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어. 옆집 사람말로는 점심 나절께 외출하는 소리가 들렸대." "서둘러 도쿄로 돌아가야겠어. 스나가미가 오늘 일을 저지를지 몰라!" 사메지마의 말투는 단호했다. 21 저녁 러시아워에 걸려,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신주쿠서에 도착했다. 몰려든 기자들 눈을 피해 가즈오를 태운 자동차는 뒷문으로 들어갔다. 후지마루가 수사본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로 이미 보고한 것이었으나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자세히 설명했다. 스나가미 아파트에 잠복하고 있는 3개반을 제외한 긴급 수사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가 시작된 건 5시 20분이었다. 쇼의 라이브가 시작되는 건 7시. 이번에도 결국 갈 수 없게 되었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수사본부는 이미 스나가미의 사진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취직하고 있던 때의 사진이었다. 머리를 짧게 깎고 넥타이까지 맨 단정한 모습이었다. 가즈오가 보고, 지금은 그때보다 좀 마른편에 머리도 길게 기르고 있다고 말했다. 회의 참석자에게도 사진이 배포되었다. 사진을 보면서 사메지마는 눈빛이 몹시 어두운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깊은 암울에 젖어 있는 눈빛이었다. 광기와는 다른, 어딘가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입 언저리에서는 강한 자기애(自己愛)가 풍겨나고 있었다. 사진에서 눈을 떼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하는 쇼크와 함께 전신이 경악에 휘말려 들었다. 다시 한번 사진을 찬찬히 살폈다. 중점 감시지역을 어디로 할 것인가로 회의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파트에서 총을 찾아내지 못한 것은, 스나가미가 들고 나갔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이 바로 네 번째 범행일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틀림없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사메지마는 스나가미를 알고 있었다. 그날, 싱오쿠보 사우나에서 쇼를 맞으러 TEC 홀로 가던 도중에 봤던 사람이 틀림없었다. 하나이구미 풋나기들에게 두들겨 맞던 사내가 바로 스나가미였다. 웅크리고 있는 젊은이를 풋나기 야쿠자 3명이 둘러싸고 있었다. 한사람은 목을 누르고 있었고, 나머지 두 녀석은 번갈아 가며 발길질을 했었다. 길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긴 했으나 누구 하나 말리려 드는 사람은 없었다. 상대가 야쿠자임을 안 순간, 걸음을 멈추었던 사람들도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때 사메지마 자신도 <바보 같은 짓> 이라고 혀를 찼던 생각이 났다. 발길질을 하는 피라미들이 아니라, 얻어맞고 있는 젊은이를 생각해서였다. 동정이 아니라 경멸이었다. 신주쿠 거리에 형성되어 있는 암묵의 룰을 깨뜨려 버린 젊은이를 얕잡아 본 것이었다. "시끄러워!" "내버려 둬! 개새끼들!" 젊은이의 부르짖음이 아직도 귓전에 남아 있었다. 좀더 일찍, 누군가가 말려 줬다면 그렇게 부르짖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시로부터, 통행인으로부터, 그리고 경관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분노하지도 않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날 그 순간부터 스나가미 가슴 속에는 신주쿠 서 외근 경관에 대한 증오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게 아닐까. 놀라움은 곧바로 후회로 바뀌었다. 풋나기 야쿠자의 뭇매질을 어느 누구도 말려 주지 않은 데 대한 분노. 그것은 매질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도와 주지 않은 사람 - 경관에 대한 분노였다. 과잉경비를 걱정해야 할 만큼 거리엔 경관이 엄청나게 깔려 있었다.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그 많은 경관을 눈앞에 두고도 보호받지 못한 분노. 그렇게도 많은 경관이 신주쿠를 덮고 있는데도 두들겨 맞아 쓰러져도, 발길질에 피를 흘렸어도 신고해 준 사람은 물론, 현장으로 달려온 경관은 한사람도 없었지 않는가. 아픔과 굴욕, 분노와 절망이 마침내 증오로 바뀌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쓰러져 있던 젊은이에게 사메지마는 자기가 경관임을 알려주지 않았었다. 그것을 생각하자, 엄청난 후회가 가슴 속에서 회오리쳐 올랐다. 만약 가르쳐 주었었다면, 경관이 결코 외면하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더라면. 스나가미의 경관에 대한 증오심이 적어도 살의로까지는 확대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날 자신은 분명히 길을 서둘고 있었다. 쇼와의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경관이란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스나가미가 제 갈길로 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둔 것이었다. 목구멍에서 새삼 쓴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늦었지만 스나가미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경관이었음을. 그리고 사메지마 자기 이외에 다른 경관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스나가미 고이치는 지난달 10일,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들으러 신주쿠 카부키쵸를 찾아왔다. 바로 그날 폭력단으로 보이는 수명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폭력단의 뭇매질을 말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주쿠 교엔 원유회 경비 때문에 수많은 경관이 신주쿠에 배치되었으면서도 현장에 출동한 경관은 한사람도 없었다 - 분통이 터진 스나가미는 마침내 경관에 대해 살의를 품기에 이르렀다고 보겠다. 어쩌면 그 이전에 불심검문을 당한 적이 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경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중, 이번 사건이 기름에 불을 붙인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날 본서(本署)에는 그와 같은 폭행사건이 있었다는 기록조차 없다. 이는 곧 경관이 스나가미를 적절히 보호해 주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후지마루가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지는 않아. 한발 늦었지만, 나는 현장에 있었다! 사메지마는 그렇게 부르짖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스나가미의 범행은 말하자면 원한 때문이다. 이럴 경우 범행을 계속함에 따라 살의 또한 더욱 에스컬레이트되는 것이 상례이다. 고다 총경과 전화 접촉을 하고 있는 <에도>를 스나가미라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없지만, 앞으로 스나가미가 반드시 경관만을 범행대상으로 선정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스나가미가 관내에서 범행을 계속한다면 신주쿠에 있는 모든 사람이 표적이 될 위험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다가 수사본부로 들어왔다. 고다는 자원해서 가즈오 심문을 맡고 나선 것이었다. "뭣 좀 나왔나?" 후지마루가 묻자 고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에도>란 이름을, 스나가미는 물론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들어본 적이 없답니다." "그래....." 그러나 고다의 표정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밝았다. "몇 가지 밝힐 게 있습니다만....." 고다는 후지마루의 양해를 얻어 말을 이어갔다. ".....미야우치 가즈오 진술을 바탕으로 스나가미가 지난달 10일, 무엇 때문에 신주쿠에 왔나를 알아보았습니다. 콘서트 때문이란 것은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날 신주쿠 관내에서 어떤 콘서트가 열렸는지 경비과에 물어보았습니다." 모든 수사원이 고다를 주시했다. 사메지마도 마찬가지였다. 고다가 밉살스런 경관이긴 했으나 결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신주쿠 서와 요쓰야 서 관내를 합치면 신주쿠에는 1백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나 홀이, 영화관을 제외하면 열여섯 군데가 됩니다. 그 가운데 콘서트 활동이 허가된 곳은 열 군뎁니다. 지난달 10일, 네 군데서 가수나 밴드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 네 곳은 후생연금 홀. 코마극장. 시어터 애플. 루미네 홀입니다. 후생연금 홀에서는 인기가수 마쓰기 유리의 뮤지컬, 시어터 애플에선 일본 록 가수 안도 요시키의 콘서트, 루미네 홀에선 샹송 가수 사카이 미쓰코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고다는 거기서 일단 숨을 돌리면서 회의 참석자들을 훑어보았다. "그날 있었던 콘서트 가운데 마쓰기 유리의 뮤지컬이 오늘부터 사흘 동안 코마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스나가미 고이치가 그곳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고다는 말을 마치면서 후지마루를 돌아보았다. 후지마루의 얼굴은 몹시 긴장해 있었다. "스나가미가 코마 극장 안에서 발포할 지도 모른다, 이 말인가?" "스나가미가 마쓰기 유리를 보러 신주쿠로 온 데서 모든 것이 시작됐습니다. 스나가미가 마쓰기 유리의 열렬한 팬이라면, 콘서트 회장에서 사건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후지마루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공연은 몇 시부터야?" "6시 30분 개장, 7시 개막입니다." "즉각 주최자에게 연락해!" "공연 중지를 요청합니까?" "그래!" "만약 공연을 중지하면, 실망한 스나가미가 자포자기적으로 행동할지도 모릅니다." 고다가 물고 늘어졌다. 후지마루는 난처한 듯 망설이다가 결단을 내렸다. "코마 극장 주변에 비상경비망을 펴도록! 사복경관을 총동원해서 극장 안팎에 배치하라! 전원 방탄복 착용. 개장 전에 스나가미를 찾아 신병을 확보하도록. 현장 지휘는 고다 총경과 도네자키 총경이 맡는다. 이상!" 수사원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고다 총경님." 사메지마는 잰걸음으로 고다에게 다가갔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던 고다가 걸음을 멈추자, 다른 사람들도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야?" "라이브 하우스는 어떻게 합니까?" "라이브 하우스?" "신주쿠엔 아마추어를 포함한 밴드에게 스테이지를 제공하고 있는 라이브 하우스도 꽤 많습니다." "그래서?" "스나가미 고이치가 그런 라이브 하우스에 가봤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데요....." "카부키쵸에만 라이브 하우스가 도대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 데선 경비과에 일일이 신고도 하지 않아. 공연 스케줄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을 거야. 걱정이 되거든 당신 혼자 조사해 봐!" 고다는 몸을 돌렸다. "스나가미 고이치 아파트에 마쓰기 유리의 레코드나 포스터가 있습디까?" "몰라. 궁금하거든 직접 확인해 봐!" 등을 돌린 채 내뱉듯이 말했다. 전화 벨이 울렸다. 당직 형사가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고다 총경님." "뭐야?" 고다가 초조한 얼굴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한시빨리 코마극장으로 달려가고 싶어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에도> 전ㅎ니다." 긴장이 몰아닥쳤다. 후지마루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못을 박았다. "녀석이 스나가미든 아니든간에 우리가 스나가미 이름을 확인한 사실을 눈치 채게 해선 안 돼. 절대로!" 고다는 머리를 끄덕인 다음, 사메지마를 날카롭게 쏘아보면서 전화기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NTT 요도바시 영업소에도 즉각 연락이 취해졌다. "고다야." "<에도>야. 오랜만이군." 녀석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렸퍼졌다. 즐기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고다는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오랜만이야." "당신이 자리에 없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어." "그럴 턱이 있나? 언제나 당신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말? 즐겁게 해 주는군. 오늘은 집으로 가는 길에 신주쿠엘 잠깐 들렀지." "그래? 신주쿠에서 뭘 할 작정인데?" "글쎄..... 뭘 할까 생각중이야. 헌데 나에 관한 걸 뭣 좀 알아냈나?" "아니, 두 손 들었어." "설마. 일본 경찰은 우수하잖아. 나한테 관심이 있다면, 실마리될 만한 걸 하나 가르쳐 주지." "어서 말해 봐!" "난 지금까지 한번도 경찰에 붙잡힌 적이 없어. 때문에 기록을 조사해 봤자 헛수고야. 경찰에 한번 붙잡혔던 사람은 경관을 겁내지만 난 그렇지 않아. 게다가 나 같은 인간은 당신들과 같은 타입이니까 더욱 힘들거야." "같은 타입?" "그럼! 당신들과 나는 법을 가운데 두고 맞보고 서 있지. 말하자면 거울과 같은 거지. 아니,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난 당신들 바로 곁에 서 있다고도 볼 수 있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내가 어째서 그처럼 사격솜씨가 좋은지 생각해 봤나? 한번도 빗나간 적 없이 명중시켰는지 말야." "경찰이나 자위대와 관련이 있다, 이런 뜻인가?" <에도>는 쿡쿡 웃었다. "잘 한번 생각해 봐. 그럼 나중에 또 걸께." "잠깐! 서둘 것 없잖아? 아직 시간이 충분한데....." "역탐지 당하는 건 사양하겠어. 난 지금부터 꼭 가야 할 데가 있어." "사람이 많은 곳인가?" "글쎄, 나중에 걸지." 전화는 끊겼다. "..... 아닐지도 모르겠군." 후지마루가 중얼거리듯 말했따. - 신주쿠 역 주변 각국(各局)에게, 신주쿠 역 히가시구치 지하, 매점 옆 공중전화, 번호 요쓰야 - 6579. 되풀이한다. 매점 옆 공중전화, 번호 요쓰야 - 6579. 거동이 수상한 자를 찾아라! 수사본부에 설치되어 있는 서외(署外) 활동용 무선기를 통해 무선 담당이 지령을 내렸다. 역탐지에 성공한 것이었다. - 여기는 신주쿠 203, 신주쿠. 몇 분 되지 않아 연락이 들아왔다. - 여기는 신주쿠, 말하라. - 문제의 전화 주변을 방금 검색했으나 수상한 자 발견 못했습니다. 엄청 붐비는 곳이라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선 담당이 후지마루를 쳐다보았다. "좋아. 어쩔 수 없겠지!" - 신주쿠로부터 신주쿠 203에게. 알았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코마 극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고다는 후지마루 앞에서 차렷자세로 말했다. "알았어. 주최자에겐 자네가 직접 사정 설명을 하게. 인명에 최우선을 두고 행동해 주길 부탁하네." "알았습니다." 고다는 뛰쳐나갔다. 사메지마는 시계를 보았다. 6시를 조금 지나 있었다. 코마 극장의 뮤지컬과 쇼의 라이브 콘서트는 똑같이 6시 30분에 개장, 7시에 시작하게 되어 있었다. 고다의 추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메지마는 스나가미와 자기가 조우했던 얘기를 후지마루에게 보고할까말까 망설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사메지마는 수사본부에서 나와 나카노로 자동차를 몰았다. 나카노의 그 언저리는 전형적인 주택 밀집지역이었다. 다닥다닥 붙여 지은 건물 사이로 난 도로는 자동차 한대가 겨우 빠져나갈 만큼 폭이 좁았다. 게다가 굴곡이 심해 자칫하다간 대문 기둥이나 담벼락에 부딪치기 딱 알맞았다. 좁은 도로 양쪽엔 오두막. 초라한 아파트. 기숙사. 편의점. 담배가게. 세탁소. 식당 등이 담벼락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전형적인 대도시의 미로였다. 사메지마는 도중에서 자동차를 몰고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 무리해서 끝까지 들어간다 하더라도 일방통행 지역이 많아 같은 길로는 되돌아 나올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경관이라면 지도읽기엔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처음 와 보는 주택 밀집지역의 복잡한 뒷골목을 더듬으며 집을 찾는다는 것은 손쉽지가 않았다. 가까스로 찾아낸 야요이 제2 코포는 목조 모르타르의 이층 아파트였다. 철계단이 달린 도로 쪽 정면은 폭이 좁았지만, 안쪽으로 길쭉하게 각 세대가 이어져 있었다. 왼쪽엔 같은 형태로 지은 야요이 제1 코포, 오른쪽엔 절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파트 주변엔 자동차가 한대도 안 보였다. 좁은 도로변에 낯선 차가 주차해 있으면 금방 두드러져 보일 지형이었다.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사메지마는 형사들이 잠복중임을 금방 깨달을 수가 있었다. 아파트 일층의, 절 담벼락 그늘 속에 4명, 경내에 4명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잠복에 동원된 형사가 3개 팀 18명임으로 나머지 10명은 스나가미가 들어 있는 옆집 등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잠복 팀 현장지휘자는 13반 반장인 본청 수사 1과의 야기 경감이었다. 야기는 스나가미의 옆집인 204호에 있었다. 아파트 계단 뒤쪽에 숨어 있던 형사로부터 야기의 소재지를 확인한 사메지마는 곧장 204호로 가서 현관을 두들겼다. 물론, 스나가미는 집에 없었다. 각층마다 4세대가 들어 있었다. 이층 안쪽에서부터 201, 202, 203, 204호로 되어 있었다. 204호는 계단에서 제일 가까웠다. "네." 합판에 불투명 유리를 박은 도어 안쪽에서 불안스러워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주쿠의 사메지마라고 합니다. 야기씨, 안에 계십니까?" 도어가 열렸다. 남자들의 채취가 물씬 풍겨나왔다. 도어를 연 사람은 열여덟쯤 되어 보이는 진바지 차림의 젊은이였다. 입구 가까이 판자로 막은 부엌에는 방탄복을 입은 형사 4명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 중엔 야기도 끼어 있었다. 유도선수 못잖은 체격이었으나 짧게 깎은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반소매 흰 셔츠 위에 방탄조끼를 겹쳐 입었고, 왼쪽 허리춤엔 권총을 차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입구를 막아선 젊은이를 밀치며 안으로 들어서는 사메지마를 쳐다보면서 야기가 물었다. 야기는 왼쪽 귀에 휴대용 무선기의 이어폰을, 오른손에는 디지탈 무선기를 들고 있었다. 디지탈 무선기는 본청 통신 수신용이었다. 사메지마가 수사본부의 지시 없이 이리로 온 것임을 야기도 알고 있었다. "스나가미 방을 좀 보고 싶어서요...." 사메지마는 손만 돌려 현관 도어를 닫았다. "뭣 때문에?" "스나가미가 오늘 누구 콘서트에 갔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사메지마는 급한 마음을 지그시 억누르면서 말했다. 벌써 6시 5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코마 극장 아니었나? 그렇게 들었는데." "그걸 다시 확인해 보자는 겁니다." 야기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사메지마를 응시했다. "본부에서도 알고 있나?" "아뇨." 야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지. 허나 금방 끝내야 해!" 야기는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사메지마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열쇠를 받아든 사메지마는 곧장 203호로 갔다. 장갑을 낀 다음 뒷주머니에 꽂고 있던 회중전등을 뽑아들었다. 실내는 204호와 같은 구조, 부엌이 딸린 원룸이었다. 들어선 왼쪽이 부엌, 그 옆에 화장실이 달려 있었다. 판자로 막은 다다미 3장 넓이의 부엌 안쪽이 방이었다. 문이 꼭꼭 닫혀 있었으나 그래도 204호에 비하면 훨씬 시원했고 집안 공기도 맑았다. 잠복근무에 협조하느라고 204호 주인인 그 젊은이가 꽤나 고생하고 있다고 사메지마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싱글베드와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문고판 수십 권과 만화가 꽂힌 책꽂이도 있었다. 그 옆엔 TV와 비디오.소형 전축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회중전등으로 비추며 벽을 한바퀴 휘둘러 보았다. 204호실 쪽으로 벽장이 보였다. 벽장문엔 여성 록밴드 Show-YA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실내엔 생각했던 것보다 음식 냄새가 배어있지 않았다. 스나가미는 대부분 외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메지마는 소형 전축이 놓인 곳으로 다가갔다. 비디오가 들어 있는 TV대 라크 제일 아래칸에는 비디오 테이프와 CD 케이스가 10개쯤 들어 있었다. 그 옆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게 보였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약협(藥莢) 5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따. 30-06 약협은 길이가 6센티미터, 사메지마의 새끼손가락과 크기가 거의 비슷했다. 앞쪽, 탄두를 박아넣는 부분에서 약 1센티미터쯤은 잘록하게 되어 있었다. 수색영장 집행 때는 아파트 관리인이나, 주인을 입회시켰겠지만, 스나가미의 귀가에 맞출 수 없을 염려가 있어 수사본부는 증거품 압수를 신병확보 뒤로 미루어 놓고 있었다. 약협은 세로로 나란히 높여 있었다. 사메지마는 라크 유리문을 열었다. 약협엔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CD 케이스를 꺼내었다. 가요곡과 록으로 구분되어 있긴 했으나 모두 여자 가수의 것이었다. 이어서 소형 전축으로 눈을 돌렸다. CD 플레이어에 더블 카세트가 내장된 것이었다. 위로부터 튜너.카세트 데크.CD 플레이어를 겹쳐 쌓은 옆에는 스피커가 세트되어 있었다. 튜너 위에는 카세트 테이프 20개가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케이슬 살펴보았다. 거의 대부분이 인덱스가 없는 것이었다. <마쓰도야 유미>나 <요시다 미나코>등 오래 된 테이프엔 인덱스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마쓰기 유리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무심코 내뻗은 손끝에 무언인가가 부딪쳤다. 회중전등으로 비춰 보았다. 헤드폰 코드가 감겨 있는 워크맨이었다. 테이프도 들어 있었다. 사메지마는 들어올려 버튼을 눌러 테이프를 꺼내었다. 새 것처럼 보였다. 인덱스도 없었다. 다시 끼워 넣은 다음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스나가미가 집을 나서기 전, 무슨 노래를 듣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사메지마는 헤드폰을 왼쪽 귀에 갖다대었다. 도중에 정지시켜 두었던 사운드가 헤드폰에서 울려나왔다. 음량은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사메지마의 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불안하게 생각한 탓일까. 야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재빨리 테이프를 정지시키면서 헤드폰을 벗었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번져나고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한꺼번에 몽땅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사메지마는 방 밖으로 나왔다. 야기가 입구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메지마가 다가서자 라이트를 얼굴에 비추었다. "뭣하고 있었어, 도대체......" 야기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메지마의 얼굴이 너무도 핼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합니다.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사메지마는 열쇠를 돌려 주었다. 순간적이긴 했으나 헤드폰에서 흘러나왔던 쇼의 노랫소리가 아직도 왼쪽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신주쿠로 돌아갈 건가?" 복도로 나오면서 야기가 물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놓던 사메지마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야기의 무선으로 수사본부에 연락해서 코마 극장 경비경관을 TEC 홀로 재배치하도록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마 극장 경비지휘자가 고다였다. 더군다나 고다는 스나가미가 코마극장으로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고다를 무선으로 설득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나가미가 노리는 것이 마쓰기 유리가 아니라 쇼라 하더라도 현재로선 확률이 반반밖에 되지 않았다. 양쪽 모두 표적이 아닐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TEC 홀에 경비인력을 반쯤 할애한다 치더라도, 그로 인해 코마 극장이나 다른 곳의 경비가 영향을 받게 된다면 - 고다가 아니더라도 선뜻 단안을 내리지 못할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었다. 한가지 실낱 같은 희망이 있다면, TEC 홀이 코마 극장보다는 훨씬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TEC 홀로 가는 스나가미를 코마 극장 주변에 배치된 경관이 발견해 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TEC 홀에 연락해서 쇼의 출연을 막는 일이었다. "야기 경감님, 본청 전ㅎ니다." 204호에서 형사가 불렀다. 혹시 스나가미를 붙잡았다는 연락이 아닌가고 생각한 사메지마는 야기를 따라 204호로 들어갔다. "네, 13반 야깁니다." 야기는 무선기를 받아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서 대답했다. "네..... 네..... 알았습니다." 야기는 그렇게 대답한 뒤 이어폰을 뽑았다. "잡았답니까?" 목을 빼서 눈치를 살피던 형사 한사람이 물었다. 궁금하기는 사메지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렇게 되었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녀석이 이번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야쿠자를 쐈어. 30분 전, 하나이구미 카부키쵸 본부 엘리베이터에서 피라미 한녀석이 총에 머리를 맞아 숨졌어. 엘리베이터 벽에 박힌 탄환은 30-06 라이플탄으로 확인됐어. 녀석의 총이었어." 틀림없었다. 스나가미는 경관 살해로 시작한 자신의 연속살인을 오늘 라이브 콘서트 홀에서 매듭을 지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경관만 계속 죽이다가, 자신에게 뭇매질한 풋나기 야쿠자를 죽인 데 이어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되었던 라이브 콘서트를 덮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나가미는 지금 사건의 전말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사메지마의 오랜 육감이 그렇게 결론을 내려 주었다. "전화 좀 빌리겠습니다." 사메지마는 204호 집주인인 젊은이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전화는....." 젊은이는 창피하 듯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요금이 밀려서 통화정지를 당했습니다. 시골에서 송금이 늦어진 바람에....." 사메지마는 204호에서 뛰쳐나왔다. 제2 야요이 코포 못 미친 곳에서 공중전화를 본 생각이 났던 것이다. 철계단을 뛰어내려 곧장 달려갔다. 녹색 공중전화가 보였다. 아래위에 저지를 걸친 젊은이가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달려가면서 경찰수첩을 펼쳐들었다. "미안, 긴급 용건이야. 나부터 걸게 해 줘요!" 젊은이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쓰세요." 다행스럽게도 TEC홀 전화번호는 수첩에 메모되어 있었다. 손목시계는 7시 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젊은이가 꽂아넣었던 전화 카드를 그대로 밀어 넣으며 TEC홀 번호를 눌렀다. 통화중이었다. 다시 한번 버튼을 눌렀다. 역시 통화중이었다. 젊은이에게 수화기를 돌려 주면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사메지마는 뛰기 시작했다. 자동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대로 출발시켰다. 지금 이 시간에 신주쿠로 가자면 혼고도리를 거쳐 야마데도리로 나가, 혼잡한 오메 가도를 피해 사카에쵸도리로 해서 니시신주코로 향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혼고도리를 달려 야마데도리로 나왔다. 좌회전하면 오메 가도, 우회전하면 호난도리의 연장선인 사카에쵸 교차점이었다. 그러나 우회전 차선은 정체가 엄청났다. 오히려 오메 가도 쪽 소통이 괜찮게 보였다. 사메지마는 차에 특수장비를 갖추지 않은 자신을 저주했다. 중앙선을 넘어 반대차선으로 역주행하고 싶어도 BMW엔 사이렌 조차 없었다.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오메 가도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5백미터도 채 못 가서 정체에 걸렸다. 야마데도리와 오메 가도가 교차하는 나카노사카우에 교차로에서부터 차가 밀려 있었다. 네거리 한번 건너는 데 신호를 두세 번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사메지마는 주먹으로 핸들을 쳤다. 비상등을 켜서 왼쪽 차선으로 끼어들었다. 1백50미터 전방, 나카노사카우에 교차로엔 지하철 마루노우치 역이 있었다. 나카노사카우에 다음 역은 신주쿠 역이었다. BMW에서 내린 사메지마는 지하철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BMW는 비상등을 켠 채 주차금지 구역에 내팽개쳐 놓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형편이 아니었다. 1백50미터를 전력 질주한 사메지마는 같은 속도로 나카노사카우에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개찰구 앞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전화기쪽으로 향하는 순간, 열차가 플랫트폼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케부쿠로 행이었다. 경찰수첩을 내보이면서 개찰구를 빠져나와 전동차에 뛰어올랐다. 22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잠깐이면, 이제 몇 분만 더 기다리면 신주쿠에 도착한다면서 사메지마는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7시 20분. 개연(開演)이 조금 늦어졌다 하더라도 쇼가 첫곡을 부르고 있을 시간이었다. 사메지마는 눈을 감았다. 드럼과 기타.베이스가 엮어내는 전주곡에 이어 쇼가 마이크를 들고 무대에 뛰어오르는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스나가미는 쇼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느닷없이 총격을 가할 작정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스나가미는 <후즈 허니>의 팬이었다. 직접 라이브 콘서트에 가서 자체 제작한 테이프까지 산 열렬한 팬이 아닌가. 눈을 떴다. 문에 손을 짚고,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앞 머리카락이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눈빛엔 초조와 분노, 그리고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열네 살이나 어린 연인. 경관과 록싱어. 사메지마는 두려웠다. 쇼를 잃는다는 공포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스나가미는 우선 조용히 노래를 들을 것이다. 쇼의 노래를 끝까지 듣지 않고는 못 배길 게 틀림없었다.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불사르며 부르는 쇼의 노래를 한 소절도 듣지 않고 모든 것을 끝낸다는 것은 아무리 스나가미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뱃속 깊숙이서 뽑아올린 묵직한 목소리가 드럼. 기타. 베이스. 키보드 사운드에 부딪치면서 울부짖듯 외치는 열광의 순간 순간. 숨가쁜 리듬과 박자에 실린 쇼의 부르짖음은 모든 청중의 귓속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온몸에서 분수처럼 터져나오는 땀과 열정, 불꽃 같은 노래가 장내 공기를 찢고 청중 한사람 한사람의 가슴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몸집은 아담했지만 한번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1분 1초도 멈춤 없이 한없이 뛰고 흔들어대는 쇼였다. 기타와 눈이 마주쳤는가 하면, 베이스에 몸을 내맡겼고, 키보드에 다가섰다가는 어느 사이엔가 드럼을 싸안 듯이 상체를 굽혀 갔다. 모든 관객의 눈길을 휘어잡아 함께 춤추며 외쳐대기를 요구했다. 라이브 회장 전체가 용트림하면서 쇼의 일거수 일투족에 따라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노브라 의상 밑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로케트 유방>에 수백 개의 눈초리가 쏠려 있는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쇼의 라이브는 언제나 그처럼 광란적이었다. 사메지마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스나가미는 쏘지 못할 것이다. 결코 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앵콜 곡이 끝날 때까지는. 청중에 대한 쇼의 인사가 끝날 때까지는. 사메지마는 숨을 들이마셨다. 치솟는 울음을 참을 때처럼 가슴이 막혀 왔다. - 쇼가 약속을 지켜 주기만 한다면..... <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던 그 말 그대로 정말 경찰에 신고만 해 준다면..... 사메지마는 자신의 휴대용 무선기를 BMW에 두고 온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어쩌면 지금쯤 코마 극장 언저리에서 스나가미를 붙잡았다는 연락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무선기가 없는 지금, 마음만 더 초조해질 뿐이었다. 차창 밖이 갑자기 훤해졌다. 전동차가 신주쿠 역 구내로 접어든 것이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인파를 헤치며 사메지마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통로도, 개찰구도 사람의 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의 물결은 카부키쵸로 흘러가고 있었다. 히가시구치 출구까지, 사람의 물결 위를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고 착각할 정도였다. 정신없이 통로를 달렸다. 팔짱낀 젊은 남녀를 밀어젖히고, 나이 든 사람을 걷어 차버릴 것 같은 기세로 사메지마는 달려갔다.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바로 옆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그라나 전화기마다 사람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히가시구치 출구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공중전화는 여기저기, 눈에 띄기 쉬운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모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같은 역구내지만 좀 후미진 구석에 있는 전화 부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 전화가 어디쯤 자리잡고 있는지 사메지마는 알고 있었다.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에 한대, 계단 뒤에 2대 - 그 중의 한대는 비어 있었다. 나란히 놓인 왼쪽 전화에는 감색 양복을 입은 몸집 작은 사내가 서 있었다. 이쪽으로 등을 돌린 채 가끔 주위를 살피면서 오른쪽 귀에 수화기를 대고 있었다. 사메지마가 뛰어가자, 그 사내는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뜨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사메지마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비어 있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왼쪽 귀에 수화기를 대고 동전을 넣은 후 TEC홀 번호를 돌렸다. 이번에 신호음이 울렸다. - 자, 빨리 나와!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어! "네, TEC 홀입니다." <후즈 허니>의 격렬한 사운드와 악쓰는 것 같은 사내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나왔다. - 다행이다! 아직 연주가 계속되고 있잖는가! "나는 사메지마라는 사람입니다. 쇼씨에게 긴급한 용건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통화를 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주중엔 손님을 불러 드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사내는 사운드에 지지 않겠다는 듯 목이 터져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손님이 아냐! 지금 연주중인 <후즈 허니>의 보컬 싱어야!" "뭐라구요? 더더욱 안 됩니다. 공연은 9시에 끝나니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나는 경관이얏!" 왼쪽에서 철컥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오른쪽 귀가 안 들려 왼쪽 귀에 수화기를 대고 있는 사메지마도 금방 알아차릴 만큼 요란한 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눈이 동그래진 양복차림의 남자가 입까지 벌린 채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요란했던 소리는 수화기를 두들기듯이 전화를 끊는 소리였다. 사내는 공포와 경악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사메지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른일고여덟쯤 되어 보이는 대머리였다. 양복차림이 몸에 익지 않은 탓일까, 넥타이 맨 솜씨가 나이에 비해선 서툴게 보였다. 사내는 입을 달싹거리며 무슨 소린가 내질렀다. <경관>이라고 한 것 같았으나 분명치는 않았다. 사메지마의 왼쪽 귀는 록사운드와 TEC홀 남자 직원 악쓰는 소리로 막혀 있었다. "경관? 장난은 그만두세요!" "장난이 아냐! 긴급사태야!" "어쨌든 연주가 끝날 때까진 바꿔 드릴 수 없습니다! 9시쯤 다시 거세요!" TEC홀 직원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메지마도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연주중이던 쇼가 무대를 내려오기라도 한다면, 스나가미도 뭔가 이상하다고 낌새를 챌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메지마는 고개를 들었다. 양복차림의 사내가 인파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사내가 잊고 가버린 듯, 숄더백이 전화기에 옆에 놓여 있었다. 사내의 모습이 지하가 인파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복경관 2명이 사메지마를 향해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정복경관은 신주쿠 역 히가시구치 파출소 소속 순경이었다. 두 사람은 사메지마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면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사메지마 경감님! 방금 여기서 이 공중전화를 사용했습니까?" "내가 쓴 건 이쪽이야." 그제서야 사메지마는 무슨 일인가를 깨달았다. "<에도>였나?" "네!" 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메지마는 사내가 사라진 쪽으로 눈을 돌렸다. 토요일 밤의 엄청난 인파만 넘실대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이는 서른입곱이나 여덟, 감색 양복에 안경을 꼈어. 키는 1미터 60센티미터쯤..... 그리고 이게 그녀석의 가방이야." 사메지마는 숄더백을 가리켰다. 순경 한사람이 그 자리에서 휴대용 무선기로 <에도>의 특징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서른일고여덟쯤이라고 했습니까?" 다른 순경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회람에는 <에도>가 20대 젊은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사메지마는 발걸음을 떼어놓으면서 대답했다. "경감님, 어디로 가십니까? 코마 극장 쪽입니까?"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잡았나?" "아직입니다." 순경은 고개까지 내저었다. "날 따라와!" 사메지마는 뛰기 시작했다. 두 순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따라와!" 사메지마가 다시 버럭 고함을 지르자 그제서야 달려오기 시작했다. 순경 한명은 장갑낀 손으로 <에도>의 숄더백을 움켜쥔 채로였다. 사메지마는 곧장 지하가로 향했다. 지하가 <서브나드>를 이용하면 야스쿠니도리.신주쿠도리도 지하에서 가로지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하가에도 인파가 넘쳐나고 있었으나 지상에서처럼 교통신호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을 단축할 수가 있었다. <서브나드> 정면 계단을 뛰어올라 사메지마는 야스쿠니도리쪽 인도로 나왔다. 거기가 바로 카부키쵸 1쵸메였다. 사메지마는 계속 달렸다. 코마 극장이 들어있는 신주쿠 도호회관까지의 일방통행 도로도 인파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에 비상배치된 경관 모습이 보였다. 정복과 사복이 뒤섞여 있었다. 언제나 어깨를 으스대며 돌아다니던 풋나기 야쿠자 모습은 눈을 닦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달 10일, 바로 그날부터 야쿠자는 꼬리를 감아 숨어 버린 것이었다. 정복경관의 경비가 삼엄해진 탓도 있었지만, 사복형사들이 요소요소 길목을 눈을 번뜩이며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사복들의 순찰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방범과 형사들은 날마다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양상이 전혀 달랐다. 신주쿠 서의 모든 형사, 아니 도쿄 전역 형사를 총동원했을 만큼 수많은 사복들이 카부키쵸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눈치빠른 야쿠자와 펨프.날치기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형사가 동원되었다 하더라도 토요일 밤, 카부키쵸로 흘러 들어온 인파에 비하면 새발의 피밖에 되지 않았다. 겨우 0.34 제곱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카부키쵸에는 음식점. 술집이 2천여 개나 몰려 있었다. 주말 하룻밤에만 40 여만 명의 인파가 붐비는 곳이었다. 그런 카부키쵸에 1천명의 경관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그 비율은 4백대 1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4백명 가운데서 순간적으로 한사람을 찍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설령 그 대상이 자기 마누라이거나 자식이라 하더라도 힘든 일이었다. 도호 회관 앞까지 달려온 사메지마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코마극장 입구에서 시작된 사람의 행렬이 도호회관 전체를 한바퀴 감아 버릴 정도로 늘어서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행렬은 천천히 극장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극장 입구에는 무전기를 든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메지마는 금방 깨달을 수가 있었다. 주최자로부터 공연 중지를 거부당한 고다가 입장객 한사람 한사람을 입구에서 체크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코마극장 수용인원은 총 2천3백명. 경찰과 주최자는 개장시간이 지나고서야 입장객 체크에 가까스로 합의를 봤을 게 틀림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까지도 입장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카부키쵸 광장 주변에 배치된 모든 수사원의 시선은 코마 극장의 입장객 행렬에 쏠려 있었다. 도중에 꽁무니를 빼는 녀석은 없나, 거동이 수상한 자는 없나 하고 그쪽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다. TEC홀이 있는 TEC회관은 코마 극장 길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방향으로 봐서는 극장 뒤편이라고 봐야 했다. 때문에 카부키쵸를 거치지 않더라도 후린회관등이 있는 구챠쿠쇼도리에서 직접 들어갈 수도 있었다. 더욱이 그쪽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코마극장을 등에 지고 카부키쵸 파출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TEC회관은 길을 가운데 두고 카부키쵸 파출소와 비스듬한 각도로 맞보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러나 파출소와의 거리는 코마극장 쪽이 훨씬 가까웠다. 게다가 TEC회관 지하 이층에 있는 TEC홀 입구 계단은 파출소에서 보면 사각(死角)에 해당되는 옆쪽에 있었기 때문에 드나드는 사람을 감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메지마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TEC회관 쪽도 잠잠했다. 늘어선 행렬을 돌아 카부키쵸 광장을 가로질러 사메지마는 TEC회관 쪽으로 걸어갔다. 순경 두 사람도 곤혹스런 표정을 짓긴 했으나 뒤따라 갔다. TEC홀로 이어지는 계단은 지하 일층 입구에서 일단 방향을 꺾어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지하 일층 계단이 꺾인 곳에서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 오는 순경들을 돌아보았다. 지하 일층인데도 <후즈 허니>의 드럼 두들기는 격렬한 박자가 발바닥을 울렸다. "자네 두 사람, 이름이 뭐야?" 사메지마는 발 밑으로 보이는 TEC홀 출입문에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물었다. 두 순경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에도>의 숄더백을 든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경장인 와타나베입니다." 나이는 서른쯤 되어 보였다. "사카에 순경입니다." 이쪽은 와타나베보다 두세 살 아래였다. 사메지마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면서 숨결을 가다듬었다. 두 순경도 아직 헐떡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자네 두 사람, 어쩌면 1계급 특진 찬스를 잡게 될는지도 몰라." 두 사람은 눈이 둥그래졌다. "무슨 뜻입니까?" 오타나베가 물었다. "이 아래 있는 라이브 하우스에 녀석이 숨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아!" "설마!" 사카에가 어깨에 매단 휴대용 무선기 마이크를 잡았다. "침착해!" 사메지마가 제지하면서 말을 이었다. "있는지 없는지 아직 확인한 건 아니잖는가! 또 지금 경찰이 이쪽으로 밀려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아래층 홀은 걷잡을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아!" 만약 TEC홀에 스나가미가 없는데도 경찰대와 함께 사메지마가 스테이지를 덮친다면 쇼의 성깔로 봐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라이브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벌은 절교일까, 아니면 술병에 머리통이 박살나는 것일까. 머리통이 박살날 때, 이 두 사람은 폭력상해 현행범으로 쇼를 체포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는 대로 쇼는 라이플의 표적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는가. 쇼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 이 순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사메지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우선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녀석 사진은 갖고 있나?"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사진보다는 훨씬 장발이구, 말라 있어. 키는 커. 나보다 더 클 게야.' 사카에가 침을 꼴깍 삼켰다. 긴장으로 얼굴도 창백해졌다.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야. 출입구 계단은 여기뿐이야. 엘리베이터가 있긴 하지만, 연주중엔 사용 못하게 되어 있어. 녀석이 안에 있는 걸 확인하면 밖으로 나와서 신호를 보낼께. 만약 들어가서 5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거든 자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줘야 해. 조심해서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슬쩍 들어와야 해. 절대로 방심해선 안 돼!" 와타나베가 권총 케이스 커버를 벗겼다. 그의 얼굴도 긴장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함부로 쏴선 안 돼.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 패닉 상태에 빠지면 수습이 불가능해져!" "잘 알겠습니다." "내가 신호하면 응원대를 불러와!" "네!" 사메지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콘서트 홀 출입문 앞에서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보았다. 7시 40분이었다. 쇼의 노랫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사메지마는 위쪽에 있는 두 순경을 쳐다보고 시계를 가리키며 손가락 5개를 펴보였다. 지금부터 5분 뒤라는 제스쳐였다. 도어를 밀쳐 열었다. 해머처럼 열기와 소리가 얼굴을 덮쳐 왔다. 기타 솔로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8평 남짓한 무대 위에서 쇼가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스팽글을 박은 보라색 탱크톱에 역시 짧은 보라색 바지차림이었다. 가슴팍의 땀방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반짝반짝 반사했다. 객석은 초만원이었다. 의자에 않아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어깨와 어깨를 부딪치면서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귀청을 찢을 듯한 기타의 애드리브 파트가 땀과 열기로 후덥지근한 실내 공기를 광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관객은 어림잡아 1백50명은 되어 보였다. "입장권, 갖고 계세요?" 비좁은 입구를 가로막듯이 놓여 있는 책상 앞에 앉았던 소녀가 장내 소음에 지지 않겠다는 듯 악을 쓰면서 물었다. "사메지마야. 쇼가 맡겨뒀을 텐데....." 사메지마는 턱으로 무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녀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늦으셨군요! 초만원이지만, 어서 들어오세요!" 기타 솔로가 끝나자 베이스가 뒤를 받았다. 객석 앞쪽이 한층 더 소연(騷然)해졌다. 쇼가 리듬을 타고 베이시스트에게 다가가 허리를 낮추면서 가슴을 흔들며 목마른 표정으로 베이시스트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땀방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진주처럼 반짝거렸다. 사메지마는 객석 중앙통로로 들어갔다. 중앙통로 좌우로 6석 10줄씩 객석이 배열되어 있었다. 자유석이었으나 모두 매진된 듯, 통로까지 관객으로 넘쳤다. 베이시스트 옆을 벗어난 쇼가 이번엔 드럼 쪽을 돌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드럼이 빠른 템포로 격렬하게 울어대자 키보드와 함께 기타.베이스가 합류했다. 장내가 한층 더 소용돌이쳤다. 사메지마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스테이 히어>>의 인트로덕션이 울려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입 안도 바싹 말랐다.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눈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우선 키 큰 사람부터 찾기 시작했다. 모든 관객이 스테이지에 시선을 박은 채 스텝을 밟으며 어깨와 고개를 격렬하게 흔들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서서히 앞쪽으로 나아갔다. 청중의 6할이 남자였다. 전형적인 펑크가 있는가 하면, 보통의 젊은이도 적지 않았다. - Get Away! 쇼가 외쳤다. 백코러스도 외쳐댔다. - Get Away! 관객들도 백코러스에 목청을 합쳤다. 전에 듣던 때보다 기타사운드가 훨씬 무거운 것 같다고 사메지마는 생각했다. - 모두 말하지, 빨리빨리 사라지는 게 더 좋다고! 맨 앞줄에서 있는 관객의 뒷모습이 보였다. 앞줄 왼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이 다른 관객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 여기는 도시 밑창. 울부짖는 소리, 밤마다 밤마다! 짧게 깎은 머리, 시원스런 마 재킷에 진바지. 오른쪽 어깨에 검정 멜빵 줄이 보였다. - Get Away! - Get Away! - 모두 말하지, 빨리빨리 사라지는 게 더 좋다고. 여기는 도시 밑창. 탄식하는 소리, 오늘도 내일도! 열광의 도가니였다. 급박한 박자임에도 블루스의 분위기를 풍기는 <<스테이 히어>>는 <후즈 허니>의 오리지날 넘버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곡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뒷모습을 확인한 순간부터 그렇게 격렬한 사운드도 사메지마의 왼쪽 귓전에서 멀리 물러나고 있었다. 쇼의 외침도, 날카로운 기타 소리도, 베이스의 으르렁거림도, 키보드의 목메인 부르짖음도, 급박한 드럼 소리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사내의 머리가 흔들거렸다. 사메지마는 계속 쏘아보았다. 오른쪽 어깨에 메고 있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내보다 앞쪽으로 나서는 것은 눈치 채일 위험도 높았지만, 더 이상 나갈 곳도 없었다. 중앙통로 맨 앞부분, 무대 바로 밑에까지 관객들이 한덩어리로 엉켜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즈 허니>를 뒤쫓아 다니는 열성 팬들이었다. 사내는 <<스테이 히어>>에 완전히 취해 있는 것 같았다. 머리 뿐만 아니라 어깨까지 흔들고 있었다. 1절이 끝날 무렵, 쇼가 물러서면서 기타가 앞으로 나왔다. 사내는 오른손으로 멜빵 줄을 잡았다. 사메지마는 발뒤축까지 들어 사내의 오른손을 응시했다. 사내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여가가 허리를 흔드는 틈 사이로 그 손이 얼핏 보였다. 아니었다! 사메지마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판단했다. 사내가 어깨에 메고 있는 것은 휴대전화였다. 검정색의 얇은 사각형 상자 위엔 수화기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잘못 짐작한 것이었다. 그 사내는 스나가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메지마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기즈 공방에서 봤던 철선반이 머리 속에 불쑥 떠올랐다. 총을 조준한 기즈가 은폐물로 이용했던 바로 그 철선반이었다. 여러 가지 카톤 박스가 쌓여 있던 바로 그 선반 제일 아래 칸에는 우산통처럼 길쭉하게 생긴 상자가 몇 개 있었고, 그 위에 비디오 테이프 상자가 쌓여 있었다. 또 하나, NTT 마크가 인쇄된 큰 상자도 한 개 있었던 생각이 났다. 사메지마는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마침 사내도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깨에 메었던 휴대용 전화를 벗겨 손에 들고 있었다. 흔들어대는 관객 어깨 너머로 사메지마와 사내의 시선이 부딪쳤다. 스나가미 고이치였다. 그러나 사메지마를 못 본 듯, 음울한 눈길로 출입구 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메지마도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타나베와 사카에의 제복이 눈에 띄었다. - Get Away! 모두 말하지, 빨리빨리 사라지는 게 더 좋다고. 여기는 어둠의 밑바닥, 울부짖는 소리, 밤마다 밤마다.... 스나가미는 휴대전화를 옆으로 눕혀 높이 쳐들었다. 배터리 박스 밑바닥이 입구 쪽을 향하게 되었다. 사메지마는 오른손으로 권총을 뽑아들었다. 천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뉴넌브는 사운드를 흩날려 버릴 만큼 요란한 굉음과 불꽃을 뿜어냈다. "엎드렷!" 사메지마는 목청껏 외쳤다. 비명과 함께 관객들이 의자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휴대용 전화 밑창에서 불꽃이 번쩍했다. 사메지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총알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총을 버려! 스나가미!" 스나가미가 눈이 찢어질 것 같은 얼굴로 사메지마를 노려보았다. 이어서 고개를 돌려 무대 한복판에 얼어붙어 있는 쇼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사메지마의 오른손 엄지가 뉴넌브 격철을 쳐올렸다. 실리더가 회전하면서 격철은 다시 제자리에 고정되었다. 기즈가 엉터리라고 매도했던 총신이 짧은 38구경 리볼버의 조문(照門)과 조성(照星)이 일직선으로 스나가미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스나가미는 격렬한 표정으로 사메지마와 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윽고 스나가미는 쇼에게 시선을 박은 채 휴대전화를 그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스나가미의 오른쪽 손가락이 전화기 옆에 달린 기묘한 돌기에 닿는 순간, 사메지마는 방아쇠를 당겼다. 이번엔 불꽃이 곧장 스나가미를 덮쳐 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요란한 총성이 스테이지로 울려퍼졌다. 스나가미의 몸뚱이가 어깨를 세차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한바퀴 빙그르르 돌아 무대에 부딪치면서 쓰러졌다. 장내는 또다시 비명에 덮였다. "구급차!" 사메지마는 고개짓 한번 없이 외쳤다. 객석 밑에 엎드려 떨고 있는 관객을 타넘으면서 스나가미에게로 다가갔다. 스나가미는 왼쪽 어깨를 바닥에 댄 채 두 다리를 꼰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휴대용 전화는 배 밑에 깔려 있었다. 오른쪽 어깨는 피투성이였다. "스나가미! 내 말 들려?" 사메지마가 외치가 스나가미는 힘겹게 눈을 떠서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탄환은 오른쪽 어깨뼈를 박살낸 채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입에서 피가 흐르지 않는 거로 봐서 폐는 상하지 않았다고 사메지마는 확신했다. <엉터리>는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적인 반동으로 조준이 위쪽으로 빗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을 게 분명했다. 사메지마는 스나가미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스나가미가 다시 눈을 떠서 사메지마를 바라보았다. 뺨에는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멍든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를 기억하나?" 사메지마가 물었다. "기억해?" 스나가미는 괴로운 듯 눈을 껌벅이며 사메지마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신차려! 구급차가 금방 올 게야." 스나가미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서 사메지마는 몸을 일으켰다. 스나마기마 쏜 총알이 날아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타나베가 오금 저린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벽에 걸린 스피커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총알은 스피커를 관통해서 콘크리트 벽에 박힌 것이었다. 사메지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뿜으면서 무대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메지마를 내려다보고 있는 쇼의 가슴이 아직도 격렬하게 상하로 물결치고 있었다. "설마..... 설마 했더니....." 쇼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내저었다.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분명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 진짜로 경관을 끌고 쳐들어오다니, 기가 막혀서!" 23 어디를 어떻게 달렸는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이 어느샌가 <서브나드> 지하가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정복경관 2명을 데리고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본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진짜 형사였던 것이다. 바로 옆에서 전화를 걸던, 머리에 붕대 감은 남자는 진짜 경관이었던 것이다. 저 세 사람이 지금 자기를 체포하러 달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세 사람은 그가 서 있는 앞을 그냥 지나쳐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심상치 않은 사건이! 그는 <막스 맨>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수사본부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다 총경은 자리에 없었다. 약이 올랐었다. 범인이 퇴직 경관이거나 자위대 출신일 것이라는 엄청난 추리를 들려 줄 생각이었는데, 고다가 자리에 없다는 말에 그는 전신의 힘까지 쭉 빠졌었다. 그 자신도 경관이 되고 싶었지만, 키가 너무 작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0여 년 -. 그러나 로프 안쪽에 서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한시도 버린 적은 없었다. 그는 선 자리에서 잠시 망설였다. 세 사람이 저렇게 허둥지둥 달려가는 걸로 봐서 큰 사건이 발생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고다가 수사본부에 없었던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몰랐다. 마음을 굳혔다. 그는 세 사람 뒤를 따라 계단을 뛰어올라 카부키쵸로 나왔다. 코마극장 주변에 경관이 쫙 깔려 있는 것을 본 순간, 그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흥분과 공포를 지그시 누르면서 그는 세 사람 뒤를 쫓았다. 오늘 아르바이트가 면접시험장 인원정리였기 때문에 그는 모처럼 감색 양복을 차려입고 나왔었다. 그런 양복차림이라면 남의 눈에 두드러질 염려도 없었다. 범인은 코마 극장 안에 숨어든 것일까. 그러나 세 사람은 코마 극장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아까처럼 급하게 달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앞장 선, 붕대를 감은 사복차림의 발걸음은 달리는 것 못잖게 빨랐다.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정복순경 가운데 한사람이 백을 들고 있는 것을 본 순간 그는 또다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자기가 메고 다니던 숄더백이 분명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허둥지둥 도망치느라고 그만 잊어 버리고 온 바로 그 백이었다. 백 속에는 아르바이트 회장(會場) 지도와 취직정보지.장갑이 들어 있었다. - 이제 끝장이구나! 그는 울고 싶었다. 경찰이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곳부터 뒤져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내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래도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에 가던 세 경관이 코마 극장 앞에서 방향을 꺾어 카부키쵸 파출소 건너편 건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공포감보다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 앞을 섰다. 세 경관이 지금 쫓고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건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TEC 회관이라는 간판이 걸린 빌딩 지하 일층에 서 있었다. 그는 일층 계단에 몸을 기대어 아래쪽 세 사람을 지켜보았다. 붕대 감은 남자 혼자만 지하 이층 홀로 들어갔다. 정복경관 두 사람이 권총 케이스 커버를 벗기는 것을 본 그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었다. 틀림없었다. 진짜 범인이 저 아래에 있는 것이다. 정복경관 2명이 언제든 권총을 뽑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였다. 정복경관은 위쪽에서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극도로 긴장한 두 사람은 지하 이층 홀의 출입문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세 사람뿐인가. 세 사람의 힘만으로 연속살인범을 체포할 생각인가. 아니면 뒤이어 경찰이 몰려올 것인가. 정복경관이 행동을 개시했다. 손목시계를 보면서 홀의 출입문 손잡이를 잡는 것이 보였다. 도어가 열리자 격렬한 록사운드가 울려나왔다. 아까 형사가 들어갔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도어를 닫지 않았다. 정복경관은 도어를 활짝 열어놓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열광으로 울부짖는 소리에 섞여, 총성이 분명한 탕! 탕! 하는 폭발음이 두 발 연속해서 울려나왔다. 비명소리와 함께 음악이 멎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홀 안으로 들어선 순간, 호통소리와 총성이 동시에 터졌다. 정면 무대엔, 밴드를 등지고 예쁜 여자가 서 있었다. 관객은 모두 의자 밑으로 몸을 숨기느라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서 있는 사람은 객석 뒷부분의 정복경관 2명과, 무대 가까이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있는 또 한사람 - 붕대 감은 사복, 그렇게 3명뿐이었다. "구급차!" 붕대 감은 사내가 외쳤다. - 그래,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마침내 범인을 체포하는 그 순간에 그도 현장에 입회하고 만 것이었다. 통로에 서 있던 정복 한명이 몸을 돌려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이번에도 그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홀 밖으로 뛰쳐나갔다. 붕대 감은 남자가 스테이지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사내 옆에 웅크리고 앉아 뭔가 얘기를 나누었다. 무슨 얘긴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진지하고 절박한 표정의 옆 얼굴만은 그의 마음속에 똑똑하게 새겨졌다. - 저 형사가 체포한 것이다. 저 형사가 범인을 쏘아 쓰러뜨린 것이다. 저 형사가 바로 영웅이다. 나도 저 형사 바로 옆에 서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범인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똑똑히 봐두고 싶었다. 자기가 추리했던 그대로인지 아닌지도 알고 싶었다. 전직 경관 아니면 퇴직 자위대원일 것이라는 자신의 상상이 정확했는지 어떤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우물쭈물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관객을 헤치며, 끌려들듯이 무대 쪽으로 다가갔다. 붕대 감은 형사와 정복이 쓰러져 있는 사내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형사는 스테이지 위의 아가씨와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사내는 짧은 머리에 키가 훌쭉한 젊은이였다. 상의 오른쪽 어깨 부분이 검붉게 피에 젖어 있었다. 그는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경관 바로 옆까지 다가갔다. 그가 다가서는 기척에 형사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한순간 그를 응시하던 형사가 눈길을 돌렸다. 그에 대한 걸 깡그리 잊어 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형사의 얼굴에는 긴장과 안도, 그리고 웬지는 모르지만 슬픈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24 "정말 깜짝 놀랐어. 천지가 새로 개벽하는 줄로만 알았으니깐." 목격자 진술을 마치고 나온 쇼가 신주쿠 서 복도에서 사메지마를 보고 눈을 흘겼다. 쇼는 스나가미라는 이름까지는 몰랐지만, 라이브 때마다 들으러 온 그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라이브는 엉망진창이 됐지?" 사메지마의 말에 쇼는 말없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사메지마는 쇼의 손을 슬쩍 잡아쥐었다. 쇼도 맞잡아 왔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제서야, 지금에 와서야 몸이 마구 떨리네. 날 죽이려 했다니..... 기가 막혀서." "동반자살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야." "누구 맘대루?" 사메지마는 걸음을 멈추고 쇼를 응시했다. "왜 그래?" 웃음과 울음이 범벅이 된 얼굴로 쇼는 사메지마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 네 그 <로케트 유방>에 구멍이 안 뚫린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얼빠진 소린 그만둬!" 쇼는 사메지마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더 이상 북받쳐 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울지 마. 이렇게 찔찔거려서야, 어떻게 록 퀸이 되누?" "시끄러워!" "레코드 회사는 입이 찢어지겠군. 데뷔하기도 전에 PR부터 엄청나게 됐으니까 말야." "죽여 버릴 테야!" 쇼는 두 손으로 사메지마의 목을 조였다. 지나가던 형사와 정복경관이 어이가 없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이런! 이봐, 이것 놔!" 사메지마는 허둥지둥 목에 감긴 쇼의 손을 풀었다. 거기엔 고다도 있었다. 굴욕과 헛수고로 맥이 빠져, 사메지마와 쇼를 보고도 말 한마디 못한 채 우뚝 서 있기만 했다. 사메지마의 시선을 따라 쇼도 고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참 더러워서. 공명심만 앞서 가지곤....." 고다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며 눈길을 내리깔았다. "모두 당신 덕분이야. 스나가미가 콘서트에 올 것이란 걸 알아낸 건 바로 당신 아냐?" 사메지마는 조용히 말했다. 고다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씹어뱉듯이 응수했다. "용납할 수 없어. 난 절대로 용납 못해! 네 수법은 경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시끄러워! 네 꼴은 두번 다시 보기도 싫어. 잘 들어. 난 너를 밟아뭉개 버릴 거야, 반드시..... 맹세해도 좋아!" 쇼가 느닷없이 고다에게 삿대질을 했다. 말릴 틈도 없었다. "X팔새끼!" 고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금방 따귀라도 때릴 것 같은 기세였다. 가까스로 자신을 억제한 고다는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날뛰지 마. 사살당해도 좋아?" 사메지마의 말에 쇼는 코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되면, 날 대신해서 저 녀석을 쏴 줄래?" "가자!" 사메지마는 쇼의 팔을 잡아끌었다. 집으로 가기 전에 한군데 꼭 들를 곳이 있었다. 방범과 형사실 앞에 이르러, 쇼를 복도에 기다리게 해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모이 혼자 과장석에 앉아 있었다. 사메지마가 들어서자, 귀찮다는 듯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길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고했어." 모모이가 억양 없는 소리로 말했다. 사메지마도 머리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과장님. 퇴근해도 괜찮겠습니까?" "수사본부 일은 모두 끝났나?" "네, 오늘 일은." "그래?" 모모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생각난 듯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기즈 무덤, 어디로 할 건지 결정했어. 아들놈이 들어 있는 곳이야. 납골식, 내일 할 생각이야." "저도 참석하죠." 모모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서 사메지마는 말을 이었다. "또 방범과의 짐 노릇을 해야겠습니다." "그래야겠지....." 모모이는 창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TV중계차 라이트를 받아 신주쿠 경찰서 청사의 앞쪽이 대낮처럼 훤했다. "..... 상어가 방범과로 돌아온다, 이 말인가? <신주쿠 상어>가 돌아온다, 이거지?" 사메지마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경례를 했다. 그가 도어를 열고 나왔어도 모모이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누구와 얘기했어?" "경관." 걸어가면서 사메지마는 짧게 대답했다. "그런 것쯤은 나도 알아. 경관 누구하구?" 쇼는 안달이 나서 매달렸다. 사메지마가 어깨를 감싸안았다. 쇼는 깜짝 놀라면서 사메지마에게 체중을 내맡겼다. 사메지마는 감싸안은 쇼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기면서 대답했다. "신주쿠 서 최고의 경관과 얘길 나누었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