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 지은이 : 나쓰메 소세끼 출판사 : 범우사 1. 누군가 문앞을 총총히 달려가는 발소리가 났을 때, 다이스케의 머리속에는 도마처럼 생긴 커다란 나막신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나막신은 발소리가 멀어져감에 따라 다이스케의 의식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그는 잠을 깼다. 머리맡을 보니 겁동백 한 송이가 다다미 위에 떨어져 있었다. 간밤에 다이스케는 잠자리 에서 그 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의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천정에서 고무 공을 내던지는 것처럼 크게 울렸었다. 그는 밤이 깊어서 주위가 고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들 리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을 더욱 확실히 해두기 위해 오른손을 심장 부위에 얹고 늑골 끝에서 정상적으로 뛰고 있는 맥박을 확인하고서야 잠을 청했다. 잠시 어린애의 머리만큼 큰 꽃의 색깔에 정신을 잃고 있던 그는 자기 무슨 좋은 생각이 나 난 듯이, 누워서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심장의 고동을 살피기 시작했다. 요즈음 그는 잠자 리에서 가슴의 맥을 들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심장의 고동은 여전히 고르고 분명하게 울려 오고 있었다. 그는 가슴에 손을 댄 채로, 그 고동과 함께 따뜻하고도 붉은 피가 천천히 흐르 고 있는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그는 이것이 바로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흐르는 생명 을 이따금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손바닥에 전해오는 시계바늘같은 울림 은, 자기를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경종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경종을 듣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다면, 피를 담은 자루가 시간을 담은 자루의 역할을 겸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얼마나 마음편히 살 수 있을까. 얼마나 맘껏 삶을 누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이스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그는 어떤 압박감도 없는 잔잔한 심장이 커에 의해서 충격을 받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이다. 가끔 그는 잠자리에서 왼쪽 가슴 밑에 손을 댄 채로, 만약 여기를 쇠망치로 한번 친다면-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살아 있다는 엄연 한 사실을 거의 기적과 같은 요행으로만 받아들일 때도 있었다. 그는 심장에서 손을떼고 머 리맡의 신문을 집어들었다. 이불 속에서 두 손을 내어 신문을 펼치자, 왼쪽 면에 남자가 여 자를 칼로 찌르는 장면이 눈에 들었다. 그는 곧 다른 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도쿄 제국대학내에 소동이 크게 다루어져 있었다. 다이스케는 잠시 그 기사를 읽다가 나른한 듯 이 신문을 툭 떨어뜨렸다. 그러고 나서 담배를 피우며 이불을 약간 밀쳐내고, 엎드린 채로 다다미 위의 동백꽃을 들어 코앞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입과 턱수염, 그리고 코가 거의 가려 졌다. 담배 연기는 동백꽃 잎과 꽃술에 얽히어 떠돌 정도로 짙게 새어나왔다. 그는 동백꽃을 하얀 욧잇 위에 내려놓고 일어나서 욕실로 갔다. 욕실로 들어간 다이스케는 이를 구석구석 닦았다. 그는 자신의 고운 이를 항상 자랑스럽 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옷을 벗고 가슴과 등을 깨끗이 닦았다. 그런데 그의 피부는 일종의 강한 광택이 났다. 향유를 발라 문지른 다음 잘 닦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움직이거나 팔을 올릴 때마 다 몸의 지방질 가운데 일부가 연하게 배겨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 또한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다음에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름을 바르지 않더라도 머리 모양이 신기하리만큼 자유자재로 되었다. 수염도 머리결처럼 가늘고 생명감있게 주위를 품위있게 덮고 있었다. 다 이스케는 그 포동포동한 볼을 양손으로 두 세 번 어루만지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비 춰보았다. 그것은 마치 여자가 분을 바를 때의 모습과도 같았다. 사실 그는 필요 하다면 분 도차 바를 수 있을 만큼 자기 몸에 대해 관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나한같은 골격과 얼굴 표정으로 앞에 설때마다 그런 얼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대신 남들이 '멋장이'라고 해도 조금도 쑥스럽지가 않았다. 그는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나이였다. 약 30분 후에 다이스케는 식탁에 앉았다. 뜨거운 홍차를 마시고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있는데, 서생인 가도노가 객실에서 신문을 접어들고 왔다. 그는 네 겹으로 접은 신문을 방석 옆에 놓으면서 과장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선생님, 아주 대단한 일이 시작되었는데요. " 그 서생은 언제나 다이스케에게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경어를 썼다. 다이스케는 처음 한두 번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부르지말라고 했지만 "네네, 하지만 선생님" 하고 그 즉 시 선생님 하며 불렀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그대로 내버려둔 것이 어느덧 습관이 되어 지금 은 그 서생에 한해서는 자연스럽게 선생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런 서생이 다이스케와 같은 주인을 부를 매 선생 이외에 별다른 적당한 호칭이 없 다는 점을, 서생을 두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건 그저 학교내의 소동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고 대꾸하며 다이스케는 침착한 표 정으로 빵을 먹었다. "하지만 통쾌하지 않습니까 ? " "교장 배척이 말인가?" "네, 꼼짝없이 사직이지요" 하며 서생은 기뻐했다. "교장이 사직이라도 하면, 자네에게 득이 될 거라도 있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게 득이 되고 안되고는 통쾌한 것과는 별개의 문젭니다. " 다이스케는 묵묵히 빵을 먹고 있었다. "여보게, 그것은 사실상 교장이 미워서 배척하는 것인지, 그밖에 어떤 이해 문제로 배척 하는 것인지 알고나 있나? 라고 말하면서 다이스케는 쇠주전자의 더운 물을 홍차잔에 부었 다. "그건 잘 릅니다. 그럼 선생님은 그 이유를 알고 계시단 말입니까?" "나도 잘 모르네. 하지만 지금 아무 이득이 없다는 생각만으로 그런 소동을 일으킬 수가 있을까? 그건 하나의 방편에 불과할 뿐이야. " "아 ! 그게 또 그런가요?" 하며 가도노는 약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다음 다이스케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게 되면 가도노페게는 더 이상 말할 필요 가 없었다. 아무리 말해봤자 "아 ! 그게 또 그런가요?"라는 식으로 밀고 나가며 시치미를 떼 곤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대답인지 아닌지 도무지 갈퍼를 잡을 수 없 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다이스케는 그저 그런대로 지나가는 것에 만족해하며 그를 서 생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쓰런데 가도노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그렇다고 집에서 공부도 하 지 않으며 하루종일 빈둥대고 있었다. 그래서 다이스케는 "자네, 외국어 공부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나?" 하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가도노는 언제나 아, 그것도 괜찮겠는데요" 하 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해보겠다는 말을 한 적이 결코 없었다. 아니, 그렇게 의족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다이스케 역시 가도노를 교육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가도노는 머리와는 달리 몸은 잘 움직이는 편이었으므로 다이스케는 그 점을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다이스케뿐만 가니라 그전부터 있어온 아주머니도 요즈음은 가도노 덕분을 톡톡히 보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주 머니와 가도노는 사이가 좋았다. 두 사람은 주인인 다이스케가 집에 없을 때는 이런저런 이 야기를 나누곤 했다. "선생은 도대체 뭘하려는 생각일까요, 아주머니 ? " "저만한 사람이라면 무엇이든 못하겠수. 걱정할 게 뭐 있을라구. "걱정할 건 없겠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어요? " "아마 결혼이나 한 다음 천천히 직장을 구할 생각이겠지 뭐." "신세 한번 좋은 분입니다. 나도 선생처럼 하루종일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들으러 다니 면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 "자네가 말인가 ? " "책은 읽지 않더라도 그렇게 놀면서 지내고 싶어요." "그것 또한 타고난 팔자이니 어디 억지로 할 수 있나." "그게 또 그런가요 ? " 두 사람은 주로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 가도노가 다이스케의 집으로 옮겨오기 2 주일 전에는, 독신인 젊은 주인과 그 식객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갔다. "자네는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나?" "전에는 학교에 다녔지만, 지금은 그만두었습니다. " "전에는 어딜 다녔지 ?" "어디라고 할것없이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금방 싫증이 나는지 모르겠어 요." "금방 싫어지던가 ? " "글쎄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럼 그다지 공부할 생각은 없겠군." "네, 그렇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집안 형편이 정말 말이 아니거든요. " "우리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자네 어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 하더군. " "네, 전에 가까이 사셨거든요." "그럼 어머니는 역시..." "하찮은 부업을 하고 계시지만, 요즈음은 불경기라 그것마저도 그다지 형편이 좋은 것 같 지 않습니다. " "좋은 것 같지 않다니, 자네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 않단 말인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신경을 쓰기 싫어서 물어본 적도 없습니다. 물어봤자 짜증만 내 실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럼 형님은 ? " "형은 우체국에 다니고 있습니다. " "집안 식구는 그뿐인가 ? "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그애는 은행의 말하자면 사환인 셈이죠" "그러면 놀고 있는 것은 자네뿐이잖나?"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면 자넨 집에서 뭘하며 지내나?" "글쎄요, 주로 잠이나 자는 거죠. 아니면 산책이나 나가고 말입니다. " "다른 사람은 모두 돈벌이를 하는데, 자네만 놀고 지낸다는 것 괴롭지도 않나 ? " "아닙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 "그래도 집안 분위기가 왜 화목한 게로군." "싸움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좀 묘한 일이죠." "하지만 어머니나 형님 입장에서는 자네가 하루 빨리 독립해주기 바라지 않는가 ? " "그럴지도 모르지요. " "자네는 어지간히 태평한 젊은이로군. 성격이 원래 그런가? " "네, 조금도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 "그렇다면 자넨 진짜 낙천가로군 그래." "네,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형님은 나이가 몇 이나 되나 ? " "글쎄요, 아마 올해 여섯이 될 겁니다. " "그럼 이제 결혼도 해야 되겠군. 형님이 결혼을 해도 자넨 역시 지금처럼 지낼 생각인 가?" "그건 그때가서 봐야지요. 저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밖에 친척은 없나?" "숙모님이 한 분 계시긴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지금 해안 지방에서 해상 운수업을 하고 계십니다. " "숙모님께서 말인가 ? " " 숙모님이 하신다기 보다는, 말하자면 숙부께서 하시는 거죠." "그럼 거기라도 부탁해서 일을 시켜달라고 하면 되잖나. 해상 운수업이라면 사람이 꽤 필 요한 일일테니까." "제가 천성적으로 게으르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마 거절하실 겁니다. " "그렇게 미리 단정하지는 말게. 사실은 자네 어머니가 우리 집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여 자 네를 내 집에서 지내게 해달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는 걸세. " "네, 뭐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오간 것 같더군요." "그래, 자넨 도대체 어쩔 생각인가?" "글쎄요, 되도록 무엇이든 할 생각을‥‥‥" "내 집에 오고 싶은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러고 싶긴 합니다. " "그러나 지금처럼 잠이나 자고 산책만 해서는 곤란해." "그건 염려마십시오. 몸은 튼튼하니까 목욕물도 길어오겠습니다." "수도가 있으니 목욕물은 길어오지 않아도 돼." "그럼 청소라도 하겠습니다. " 가도노는 그러한 조건으로 다이스케의 서생이 되었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곧 식사를 마치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찻장 뒤에서 무릎을 감 싼 채 기등에 우두커니 기래어 있던 가도노는 이때다 생각하고 다시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오늘 아침엔 심장 상태가 어떻습니까?" 얼마 전부터 가도노는 다이스케의 버룻을 알고 있었으므로 약간 얼버무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오늘은 아직 괜찮아. " "어쩐지 내일쫌은 좀 안 좋으실 것 같군요. 선생님처럼 건강에 너무 신경을 쓰시다간, 마 침내 정말로 병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벌써 나빠졌다네. " 가도노는 입으로는 그저 "네, 네" 하고 대꾸를 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다이스케의 얼굴 과 멋진 근육질의 어깨 언저리를 짧은 겉옷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경우, 다이스케는 언제나 그 청년이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스케의 입장에서 보면, 가도노의 지능 지수 는 소의 수준 정도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와 이야기를 해보면 그 이해력이 보통 사람 의 반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 옆길로 새기라도 하면 당장에 길을 잃고 헤매는 볼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보통 수준을 넘는 이야기는 아예 꺼낼 수도 엄었다. 다이스케의 눈에는 그는 신경이 너무나 무디고 생각이 없는 청년으로밖에 비추어지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그의 생활 태도를 주의깊게 관찰한 결과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호흡하며 논재하고 있는지 의아 해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태평스럽게 빈둥대며 지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지내는 것 을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또한 건 강한 몸 하나만 믿고 거드름을 피우고, 오히려 주인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도 있었다. 다이스 케는 뛰어난 색력과 예민한 감성의 결과인 그 특유의 신경을 갖고 있었다. 어느 정도 교육 받은 지성인으로서 고뇌에 쉽싸이기도 했다. 그러한 정신적 고뇌는 가문 좋은 집안에 태어 난 덕으로 받아야 할, 하늘이 내린 불문의 형벌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러한 고통을 이겨낸 결과 그는 지금의 자기 자신이 되었던 것이다. 아니, 한때는 그러한 고통 그 자체에 인생의 참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가도노가 그러한 것을 알 리는 없었다. "가도노, 우편물이 오지 않았나?" "우편물 말입니까? 아까 오긴 했습니다. 엽서와 편지가 왔던데요. 책상 위에 놓아두었습니 다. 갖다드릴까요?" "아니, 내가 직접 가서 보도록 하지." 시원찮은 대답이어서, 가도노는 벌써 일어나 엽서와 편지를 가져왔다. 엽서에는, 오늘 오 후 두시 도착, 괌 앞면의 여관에 투숙, 우선 이 점을 알리고 내일 오전 만나기 바람이라는 내용이 지극히 간단하게 붓으로 흘려써져 있었다. 그리고 앞면에는 우라진 보초에 있는 여 관 이름과 히라오카 쓰네지로라는 발송인의 성명이 됫면과 같은 거친 글씨로 씌어 있었다. "벌써 왔군,어제 도착했네"하고 다이스케는 혼잣말을 하면서 편지를 뜯었다. 글씨를 보니 아버지의 필적에 틀림없었다. 그 내용은 며칠 전에 돌아왔다, 급한 일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편지를 받으면 곧 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토의 벛 꽃은 아직 활짝 피지 않았지만, 급행 열차는 초만원으로 아주 답답했다는 등의 사소한 깨용이 몇 줄 씌어 있었다. 다이스케는 편지를 접으며 묘한 표정으로 엽서와 편지를 비교해보았다. "자네, 전화 좀 걸어주지 않겠나? 집으로 말일세." "네, 본댁으로 말입니까? 무슨 말씀을 전할까요?"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으니, 내일이나 모레쯤 틀림없이 가뵙겠다 고 말씀드리게." "네, 어느 분께 말입니까?" "아버님께서 여행에서 돌아오시어 할말이 있으니 잠깐 왔다가라고 하시지만, 글쎄, 꼭 아 버님이 아니어도 좋으니 집안 식구 아무에게나 그렇게 전하게. " "네. " 가도노는 급히 일어났다. 다이스케는 식당에서 나와 객실을 지나 서재로 돌아갔다. 서재는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파. 떨어진 동백꽃도 치우고 없었다. 다이스케는 꽃병 오른쪽에 있즌 책장 옆으로 가서, 위에 있던 무거운 앨범을 들고 선 채로 한 장섹 넘기기 시작했으나 중간 쫌 이르자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거기에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의 사진이 있었다. 다이스케는 눈을 내리뜬 채 여자의 얼굴을 물Rm러미 보았다. 2 다이스케가 옷이라도 갈아입고 히라오카의 숙소로 찾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마침 히 라오카가 다이스케를 찾아왔다. 문 앞에 인력거가 멈추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나더니 여기다, 여기다 하며 인력거 채를 내리는 소리는 분명히 3년 전 혜어진 히라오카의 목소리였다 현관에서 맞이하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여관에 지갑을 두고 와서 그러니 우선 20전을 빌 려달라고 하는 말투는 학창 시절의 히라오카를 연상케 했다. 다이스케는 현관까지 뛰어나가 옛벗을 껴안듯이 해서 객실로 데려왔다. "어떻게 된 일인가? 자, 어서 편히 앉게나." "이런, 의자로군" 하면서 히라오카는 안락의자에 몸을 내던지듯 앉았다. 90킬로그램도 넘 는 자신의 체중은 생각지도 않는 주제넘는 몸놀림이었다. 그러고 나서 의자 등에 빡빡 깎은 머리를 기대더니 잠시 방안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집이 아주 좋은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아주 좋군." 다이스케는 말없이 담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그럭저럭 지랬지 뭐. 자, 이제부터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지." "전에는 편지를 자주 보내주어 소식을 잘 알고 있었지만 요즈음은 전혀 소식이 없어서 말 이야." "글쎄, 여기저기 모두 소식을 끊고" 라고 말하면서 히라오카는 갑자기 안경을 벗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몹시 구겨진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을 깜박터리며 닦기 시작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근시였었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보다도, 자네는 어떻게 지냈나?" 하고 말하면서 히라오카는 안경을 쓰기 위해 가느 다란 안경테로 두 손을 뻗쳤다. "나야 여전하지 뭐." "그게 제일 좋은 거라구. 세상이 너무 변해서 말이야." 그러고 나서 히라오따는 얼굴을 찌푸리고 뜰 쪽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갑자기 말투를 바꾸 었다. "야, 벚꽃이로군 ! 이제 막 퍼기 시작하는군 그래. 여긴 기후가 상당히 다른데. " 히라오카의 말투는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아 귀에 거슬렸다. 그래 다이스케도 약간 어색한 말투로 같은 인사말을 했다. "그쪽은 꽤 따뜻하겠지." 그러자 히라오카는 오히려 터무니없이 열띤 어조로 힘주어 대답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갑자기 의식한 듯한 말투였다. "그럼, 아주 따뜻하지 ! " 다이스케는 다시 히라오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히라오카는 궐련에 불을 붙였다. 그때서 야 아주머니가 사기 그룻에 차를 담아들고 왔다. 아주머니는 방금 쇠주전자에 물을 부어버 렸더니 끓이는 데 시간이 걸려 그만 늦었다며 죄송하다는 변명을 하면서 탁자 위에 쟁반을 놓았다. 아주머니가 혼잣말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자단으로 만든 쟁반을 헉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아주머니는 겸연쩍은 웃음을 짓더니 객실을 나갔다. "저분은 누구지 ? " "일하는 아주머니일세. 가정부로 두었지. 밥은 먹어야겠기에." "애교가 넘치는데. " 다이스케는 붉은 입술의 양끝을 활 모양처럼 하면서 비웃듯이 웃었다. "지금까지 남의 집에서 일해본 적이 없는 아주머니이니까." "자네 집에서 아무나 한 사람 데려와도 되잖나. 그럴 사람은 많을텐데 그래. " "모두 젊은 사람들뿐이거든" 하고 다이스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히라오카근 그때서야 비로소 소리내어 웃었다. "젊으면 좋지 않나." "어쨓든 집안 사람들은 좋지 않아." "저 아주머니 외에 또 누가 있나?" "서생이 하나 있지." 가도노는 어느새 돌아와서 부엌 쪽에서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 " "그뿐이지. 왜 ? " "아직도 장가를 들지 않았나 ? " 그 순간 다이스케는 얼굴을 약간 붉혔으 , 곧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해졌다. "그런 일이 있다면 왜 자네한테 알리지 않았겠나? 다이스케는 말을 하다가 불쑥 입을 다물었다. 다이스케와 히라오카는 중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로, 특히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년간은 거의 형제나 다름없이 친하게 지냈다. 그 무렵에는 서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서로에게 힘이 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두 사람의 유일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종 그 즐거움은 성 격이 바뀌는 일도 있었으므로 그들은 서로를 위해서 입밖에 낸 모든 말에는 즐거움보다는 항시 일종의 희생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희생을 즉석에서 치 르고 나면 즐거움의 성격이 어느새 고통으로 변한다는 진부한 사실마저 깨닫지 못하고 있었 다. 1년 후에 히라오카는 결혼을 했다. 그와 동시에 게이한에 있는, 그가 근무하고 있는 은 행의 어느 지점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다이스케는 그곳으로 떠나는 신혼 부부를 신바시 역에서 전송할 때, 밝은 표정으로 곧 돌아오라고 하면서 히라오카의 손을 꼭 잡았었다. 히라 오카는 하는 수 없지, 당분간 참겠네 하고 내뱉듯이 말했으나, 안경 너머의 눈에는 득의양양 한 빛이 부러울 정도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았을 때, 다이스케는 갑자기 그 친구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힌 채 생각에 잠겨 있 었다. 형수와 함께 음악회에 가지고 한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형수와 옥신각신하기도 했었 다. 히라오카는 끊임없이 소식을 전해왔다. 거기서 새살림을 시작했다는 소식, 그후로는 지점에서 근무하는 그의 직장 생활 이야기와 장래의 포부 등 여러 가지 소식을 알려왔다. 편지가 올 때마다 다이스케는 정성껏 답장을 썼다. 그런데 그는 답장을 쓸 때마다 언제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었다. 때로는 도 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쓰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다만 히라오카 쪽에서 지난날 자기에게 잘 해준 일에 대해 어느 정도 고마워하는 뜻을 전해오는 경우에 한해서는 마음이 풀려서 그런 대로 순조롭게 답장을 쓸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편지 왕래가 점점 뜸해져서 한 달에 두 번이 한 번으로 되고, 그 한 번이 두 달, 석 달 만에 이수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편지를 쓰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서, 다만 그 러한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별로 할말이 엄는데도 편지를 쓰곤 했다. 그런 식으로 반 년 이 흐르자 다이스케의 머리나 가슴도 점점 조직이 변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변화와 함께, 히라오카에게 편지를 쓰든 안 쓰든 조금도 불안 하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다이므케가 독립 한 이래 약 1년 동안은 연하장을 보내면서 지금의 주소를 알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이스케에게는 히라오카를 완전히 잊고 지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가 끔 그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여러 면으로 그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다만 그렇 게 생각만 할 뿐, 그차지 걱정할 용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지냈었다. 그런데 2주일 전에 갑자기 히라오카로부터 편지가 왔던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머지않아 게이한을 떠나 도쿄로 이사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점의 발령에 따른 영전의 뜻이 담긴 타동적 인 이동으로 오해하는 일은 없기 바라며, 다른 생각이 있어서 갑자기 직업슬 바꿀 결심을 한 것이므로 도쿄로 가면 모쪼록 잘 부탁한다는 사연이었다. 그런데 그 부탁이 과연 진심인 지, 아니면 그저 한번 해보는 의례적인 부탁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히라오카의 신상에 급격한 변화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 다이스케는 깜짝 놀랐었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그 변화의 자초지종을 들어보려고 잔 뜩 벼르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이야기는 빗나가 쉽사리 본론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 다가 기회를 잡아 그 이야기를 꺼내면 "글쎄, 천천히 얘기하지" 라든지, 얼렁뚱땅 얼버무리 는 바람에 좀처럼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다이스케는 이런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이 근처에서 식사나 하지." 그래도 "앞으로 천천히 하지 뭐"라는 말만 되풀이하려는 히라오카를 억지로 끌고 근처의 양식집으로 갔다. 거기서 두사람은 술을 쾌 마셨다. 마시는것과 먹는 것은 옛날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을 서 두로 이야기를 슬슬 풀어나갔다. 다이스케는 2,3일 전에 구경갔던 니콜라이교회의 부활제 이 야기를 재미있게 했다. 축제는 밤 열두시를 기해서 온 세상이 잠들었을 때 시작된다. 참배자 가 긴 복도를 돌아 본당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수천 개의 촛불이 한꺼번에 켜진다.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줄을 지어 저편을 지날 때, 아무 무의도 없는 벽에 검은 그림자가 커다랗게 비친다. 히라오카는 손으로 턱을 괴고, 안경 너머의 쌍꺼풀을 껌벅거리면서 듣고 있었다. 그날 다 이스체는 새벽 두시경에 넓은 오나리가도를 지나 심야의 어둠 속에 반듯이 나 있는 철로를 따라 우에노 숲까지 가서 전등이 밝혀진 꽃 속으로 들어갔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밤 벚꽃 놀이는 정말 좋더군" 하고 다이스케가 말했다. 히라오카는 말없이 잔을 비우더니 기분이 좀 나쁜 듯이 입가를 움직 였다. "그렇겠지, 나는 아직 본 적이 없지만. -그러나 그러한 풍류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신세지.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건 좀 처럼 생각할 수도 없다네." 히라오카는 암암리에 상대방이 사회 경험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말을 했다. 다이스케는 그 말투보다도 그 내용이 귀에 몹시 거슬렸다. 그는 실생활과 관계가 있는 경험 보라는 부활제날 밤의 경험이 삶에 있어서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이른바 사회 생활과 관련된 경험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네. 괴롭기만 할 뿐이잖는가?" 히라오카는 취기가 가득한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생각이 왜 달라진 것 같군. 하지만 예전에 자네는 그 고통이 나중에 약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나?" "그야 경험이 부족했던 청년 시절에 세속적인 물결에 휩쓸려 입바른 말을 한 것에 불과하 지. 그따위 생각은 버린 지 이미 오래야. " "하지만 자네도 이제는 세상에 발을 내딛어야 하지 않았나? 그때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곤 란하지." "세상에야 벌써 발을 내딛었지. 특히 자게와 헤어진 뒤로는 세상이 아주 넘어진 듯한 느 낌이 들었어. 자네가 경험한 세상과는 그 성격이 좀 다르지만 말이야. " "그렇게 해봤자, 언젠가는 그 물결에 쉽쓸리게 될걸." "물른 생활에 곤란을 느끼게 되면, 나 역시 그렇게 되겠지.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는데 편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며 아무 가치도 업는 경험을 하겠나? 그것은 마치 인도인이 외투를 입고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뭐가 다르겠나?" 히라오카는 양미간에 약간 불쾌한 빛을 나타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다이스케를 뜰어지 게 쳐다보면서 담배를 피웠. 다이스케는 자신의 말이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말투를 약 간 부드럽게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게 음악의 참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 학교 교사인데 한 집만으로는 생활하기가 곤란해서 세 집, 네집까지 드나들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보기에도 참 딱할 정도 라네. 예습을 한다거나, 교단에서 기계적으로 입을 놀리는 시간 외에 는 전혀 여가가 없다니까. 모처럼 일요일이면 푹 쉬어야겠다고 하면서 하루종일 잠만 쿨쿨 자고 말이야. 그러니 어디서 음악회가 있더라도, 외국에서 아무리 뛰어난 음악가가 오더라 도, 그 연주회에 갈 기회가 없는 거야. 결국 그는 음악이라는 아름다운 세계에 전혀 발을 딛지도 못해보고 죽고 말겠지. 나는 그렇게 보기 딱한 무경험은 없다고 생각하네, 먹고 사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경험은 절실할지는 몰라도 어리석기 짝없는 것이지. 빵과 물을 떠난 가치 있는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의 참된 보람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나 를 아직도 철부지로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살고 있는 가치 있는 세계에서는 자네 보다 훨씬 연륜이 깊다고 할 수 있지." 히라오카는 재떨이에 담배재를 털면서 푹 가라앉은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 언제까지나 그러한 세계에서 살 수 있다면 다행이지." 그 무거운 말 끝에는 부에 대한 저주가 담긴 것처럼 들렸다. 두 사람은 잔뜩 취해서 밖으 로 나왔다. 술기운으로 이상한 토론을 했기 때문에 중요한 일신상의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못했다. "조금 걷지 않겠나 ? " 하고 다이스께가 말했다. 히라오카꼬 말콰는 달러 바쁘지 자온 듯 선뜻 대답을 하여 함깨 걸었다. 큰거리에서 방향 을 바꾸어 골목으로 나와 되도록 이야기하기 좋은 조용한 장소를 골라 가는 길에 자연스럽 게 실마러가 풀려서 기대했던 이야기가 나왔다. 히라오카의 말에 따르면, 게이한 지점 부임 당시 그는 사무를 익히고 그 지방외 경제 상 황을 조사하느라 아주 바빴던 모양이었다. 가능한한 그곳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사무 계꽥 을 세우려 했으나, 지휘상 부득이 자신의 계획은 그저 계꽥으로서 미래의 시험용으로 머리 속에 간직해둘 수밖에 업었다. 하긴 처음에는 지점장에게 여러 가지 건의를 하기도 했지만, 지점장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절국은 전혀 상대해주지 않았다. 까다로운 이론을 제안하면 몹시 언짤아라기도 챘다. 풋내기가 무엇을 아느냐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자는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히라오카는 지점장의 그런 태도를, 상대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 니라 오히려 상대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라오카는 그 점이 못마 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마터면 지점장과 싸울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자 어느덧 그런 불만도 사라지고 히라오카는 점차 주위의 분위기 와 융합하게 되었다. 또는 그 자신도 되도록 융합하도록 노력했다. 그러자 그에 대한 지점장 의 태도가 점점 달라졌다. 때로는 지점장이 먼저 의논을 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히라 오카 역시 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된 처지이므로, 상대방이 알지못하거나 답변하기 어려운 일은 가능한 한 피하곤 했다. "무턱대고 아첨을 하거나 나서는 것과는 다르지만" 하고 히라오카는 애써 자신을 정당화 하려 했다. 다이스케는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건 물론 그렇겠지. " 지점장은 히라오카의 장래에 대해서 여러 모로 신경을 써주었다. 자기는 머지않아 본점으 로 돌아갈 차례이므로, 그때는 함깨 가자고 농담조로 약속까지 했다. 그 무렵에는 히라오카 역시 사무에도 익숙해지고, 어느 정도 신임을 얻은데다 교제 범위도 넓어져서 자연히 공 부 할 시간도 얼었는데 때로는 공부가 실무에 방해다 되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한다. 지점장이 히라오카를 허물없이 대하듯이 히라오카도 아랫사람인 새끼라는 행원을 신임하 고 여러 모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 행원이 어떤 기생과 가깝게 지내면서 어느 새 회계에 차질을 빛었다. 그것이 탄로나면 본인은 물른 해고를 당해야 하지만, 그대로 있다 가는 지점장까지 곤란해지는 사태가 될 것 같아 히라오카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사직을 자 청했다. 히라오카의 말에 따르면 대충 그런 상황이었지만, 다이스케는 그가 지점장으로부터 간접 적으로 사직을 권고받아 결단을 내린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히라오차외 말 끝에 "회사 원은 지위가 높으면 높을 수록 유리하지. 사실 새키로서는 그 정도의 과실로 즉각 파면이 된다는 게 억울할 정도지"라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지점장이 실속을 차린 샘이군?" 하고 다이스께가 물었다. "어쩌면 그럴는지도 모르지" 하고 히라오카는 얼버무렸다. "그럼 그 행원이 써버린 돈은 어렇게 대치했나?" "천도 안되는 적은 돈이라 내가 메꾸어주었지. " "용케도 그런 돈이 있었군. 그럼 자네도 어느 정도 재미를 보았군 그래. " 히라오카는 불쾌한 표정으로 다이스케를 쏘아보았다. "재미를 보았다고 가정할지라도 돈은 모두 써버렸지. 생활도 궁색할 정도였어. 그 돈은 빌 린 것이지." "그래 ?" 하고 다이스케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다이스케는 어떠한 경우에도 침착성을 잃 지 않는 사나이였다. 그리고 그외 태도애는 차분하고 밝으면서도 일종의 원만함이 감돌았다. "지점장에게 빌려서 대치했지." "왜 지점장이 직접 그 세키라는 행원에게 빌려주지 않았나?" 히라오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이스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걸었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가 이야기한 것 외에 아직도 무엇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 진상을 캐물을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그러한 호 기심이 일지도 않을 만큼 지나치게 도시화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0세기의 일본 에 살고 있는 그는 나이가 서른 정도밖에는 안되었지만 이미 닐어드미러리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는 인간의 어두운 세계에 대해 놀랄 정도로 촌스러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는 않 았다. 따라서 그는 히라오카의 사직과 관련이 있는 진부한 비밀을 캐내며 기뻐할 만큼 할일 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것보다 몇배나 신나는 일도 그대로 지나칠 정도로 머리가 복잡했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독자적인 세계에서 이미 이 정도로 진화 (진화의 이면에는 반드시 퇴화가 있다는 것을 동서고금을 통해 슬퍼해야 할 현상이지만)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히라오카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다이스케를 구 태의연한 상태에서 벗어차지 못하는 3년 전의 숫총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 러한 철부지에게 자신의 약점을 모두 털어놓는다는 것은 공연히 말똥을 던져 아가씨를 놀라 게 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되기 쉽다. 쓸데없는 행동으로 반감을 주는 것보다는 잠자코 있 는 편이 안전하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의 마음을 이렇게 짐작했다. 그쌔서 히라오카가 자 기에게 아무 대답도 하 지 않고 말없이 걸어가는 것이 어쩐지 바보스럽게 보였다. 히라오카가 다이스케를 어린애 취급하듯이, 아니 그 이상으로 다이스케는 히라오카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30미터쯤 지나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두 사람 다 그러한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처음에 말을 건 것은 카이스케였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글쎄 . " "역시 지금까지의 경험도 있고 하러 같은 직업이 낫겠군." "글쎄, 그렇긴 하겠지만-사실은 자네와 차분히 상의해보려던 참이야. 혹시 자네 형 회사에 일자리가 없을까?" "응, 부탁해보지. 2,3일내에 집에 갈 일이 있으니까. 그러나 얘기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 군." "만약 실업 쪽이 안된다면, 어디 신문사라도 들어갈 생각이네. " "그것도 좋을 거야. " 두 사람은 다시 철길로 나섰다. 히라오카는 저편에서 온 전차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것 을 타고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다이스케는 "그래" 하고 대답하면서 붙잡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자리에서 바로 헤어지지는 않았다. 차가 멈추는 표지판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다비스케가 물었다. "미치요님은 어떻게 지내나? " "그 사람 안부까지 물어주니 고맙군. 여전하지 뭐. 참, 자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더 군. 사실은 오늘 같이 오려고 했는데 전차가 흔들거리면 멀미를 할까봐 그냥 여관에 있으라 고 했지. " 전차가 두 사람 앞에 멈췄다. 히라오카는 세 걸음 앞서갔으나 다이스케의 저지오 그자리 에 멈춰섰다. 그가 타야 할 전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의 일은 참으로 안되었네. " "글쎄, 가슴아픈 노릇이었지. 그때도 역시 그렇게 위로의 뜻을 보내와 정말 고마웠네. 어 차피 죽을 목숨이었다면 애당초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어." "그후로는 어때 ? 아직 소식이 없나? " "응, 이제 더 이상 바라지도 않네. 몸이 너무 약하거든. " "이렇게 움직일 때는 아이가 없는 편이 오히려 편하고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 "그건 그렇지. 차라리 자네처럼 아직 독신이라면 더욱 그렇고. 마음편해서 좋을는지도 모 르지. " "그럼 자네도 그렇게 되면 되잖나." "농담 말게. 그보다도 종종 집사람이 자네가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더군. " 그때 전차가 왔다. 3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나가이 도쿠라는 사람으로, 메이지 유신때 보신전쟁과 도바후시미전 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노인인데 지금은 지극히 마음편히 살고 있다. 관직을 떠나 실업계에 뛰어들어 이것저것 하다보니 최근 14,5년 사이에 대단한 부자가 되 었다. 다이스케에게는 세이고라는 형이 있다. 형은 학교를 졸업 하자마자 아버지가 관계하고 있는 회사에 들어가 지금은 상당한 지위에 올라 있다. 그리고 우메코라는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이를 갖고 있다. 아들은 세이타로라고 하며 열다섯 살이다. 그 아래로 딸이 있는데, 이 름은 누이코이며 열두 살이다. 형 이외에 누나가 있는데, 그녀는 외교관과 결혼하여 지금은 외국에 나가 있다. 형과 누나 사이에 또 한 명, 그리고 누나와 다이스케 사이에도 또 한 명의 형제가 있었으나 그들은 어 렸을 때 모두 죽었다. 어머니도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다이스케의 가족 구성원은 그러하 다. 그 중에서 밖에 나가 있는 사람은 외국에 가 있는 누나와 최근에 독립한 다이스케뿐이 므로 본가 에는 모두 다섯 식구가 남아 있는 셈이었다. 다이스케는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본가에 돈을 가지러 갔다. 아버지의 것인지 형의 것 인지도 모르는 돈으로 살고 있었다. 한달에 한 번뿐만 아니라 심심하면 가기도 했다. 가서 조카들을 놀려주 거나 서생과 오목을 두거나 형수와 연극평을 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다이스케는 형수를 상당히 좋아했다. 그녀는 덴포의 케케 묵은 취향과 메이지의 현대적 감각을 함께 지닌 듯한 여성이기도 했다. 프랑스에 있는 시누이에게 어려운 이름이 붙은 아 주 값비싼 옷감을 보내달라고 부탁해서, 그것을 너댓 사람에게 맡겨 띠를 만들어 몸에 걸치 기도 했다. 나중에 그것이 일본에서 수출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큰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 미쓰고시백화점의 진열장에서 그것을 알아온 것도 바로 다이스케였다. 그리고 서양 음악을 좋아때 종종 다이스케의 권유로 들으러 갔다. 그런가 하면 미신또한 좋아하여 유명 한 관상가인 세키류시와 오지마를 상당히 믿고 있었다. 다이스케도 형수와 함께 두세 번 인 력거를 타고 점장이 집까지 찾아간 적이 있었다. 세이타로는 요즈음 야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때때로 다이스케는 본가에 가서 그 아이에 떼 공을 던져주기도 했다. 세이타로는 회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아이였다. 매년 초여름이 면 많은 군고구마 장사가 갑자기 빙수 장사로 바필 때 제일 먼저 달려가, 덥지도 않은데 아 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아이스크림이 없을 때는 빙수라도 사먹었다. 그러고 나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최근에는 씨름 도장이 생긴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숙부님, 씨름 장사 가운데 아시는 분있어요? 하고 다이스 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누이코란 아이는 무슨 말만 하면 좋아요, 몰라요라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 이나 댕기를 바꾸어 맸다. 요즈음에는 바이얼린 교습소에 다니는데, 집에 돌아오면 톱니를 세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연습을 했다. 하지만 남이 있을 때는 결코 하지 않았다. 방문을 걸 어잠그고 뼈걱뻐걱 소리를 내기 때문에, 형 내외는 제법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이스 케만은 이따금 살짝 문을 열기 매문에 좋아요, 몰라요 하는 투정섞인 소리를 듣기도 했다. 형은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더욱이 회사일이 바쁠 때는 집에서 먹는 것은 아침 식사뿐으로, 두 아이는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이스케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오히려 모르는 편이 더 속편하다는 생각에, 필요하지 않은 한 다람쥐 쳇바퀴도 는 듯한 형의 바깥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다이스케는 조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형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형은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가끔 형과 동생이 얼굴을 마주 하면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형이나 동생이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으로서 태평하게 살고 있는 것이 다. 그야말로 진부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족들 가운데 다이스케가 가장 신경을 트는 것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 나이에도 불구하 고 젊은 첩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다이스케는 오히려 찬성하는 편으 로, 그는 첩을 거느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첩을 거느리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또한 잔소리가 심했다. 어렸을 때 다이스케는 정말 뼈에 사무칠 정도로 호되게 야단을 맞곤 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오늘날에는 무슨 소리를 들어도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다만 조금 귀에 거슬리는 것은, 자신의 청년 시절과 다이스케의 현재를 혼동하여 그 리 다를 바가 없다고 믿고 있는 점이었다. 따라서 다이스케가 당신의 청년 시절과 다르게 처신할 때는 부도덕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다이스케 쪽에서는 무엇이 그리 부도덕하 냐고 반문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결코 언쟁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 다이스케는 어렸을 때는 반발심이 대단했으며, 18,9세 때는 아버지와 정면으로 충돌한 적이 한두 번 있었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좀더 나이가 들자 그러한 반발심도 어느덧 사라졌다. 그후로 여태까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자신의 교육의 효과라 생각하고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다. 사실 아버지의 이른바 덕성 효육은 부자간의 깊고 따뜻한 정을 점차 냉각시켰을 뿐이었 다. 적어도 다이스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것을 정반대로 해석댔던 것이다. 무슨 행동을 하든 혈육의 정을 끊을 수 없는 친아들이 아닌가. 어버이에 대한 아 들 의 천부적 애정은, 아들을 어떻게 다루든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교육을 위해 다소 심 하게 다루더라도, 그 결과는 결코 부모와 자식간의 애정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유교 정신에 철두철미한 아버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자기가 아니었다면 다이스케는 태 어나지도 못했을 거라는 단순한 사실이 아무리 불쾌하고 고통스런 일에 대해서도 부자간의 정을 영원히 보장한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그 신념으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그 결과 자 신에게 냉담한 아들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다이스케의 졸업을 전후하여 아버지의 태도 는 상당히 달라져서 어떤 때는 깜짝 놀랄 만큼 관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이스케의 출생과 더불어 세워진 아버지의 계획 가운데 일부를 그대로 실 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다이스케의 정신적 변화에 따르는 적절한 조치는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의 교육이 다이스케에게 미친 좋지 않은 영향에 대해서는 지금라지 전혀 생각 이 미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에 참가했던 것을 매우 자랑스럴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너 따위는 아직 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배짱이 없는 거라며 몰아세우기도 했다. 마치 배짱 이 인간의 최고 능력인 것 같은 말투로. 다이스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불쾌했다. 그는 같은 사람끼리 서로 마구 죽이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 같은 야만 시대에 있어서는 담력이 생 존에 필요한 요소였을지 모르지만, 오늘날과 같은 문명 시대에는 그 옛날의 활솜씨나 검술 따위는 별 의미가 업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니 담력과는 비교도 안되는, 담력이상으로 가치있는 능력이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이 쓸었다. 다이스케는 아버지로 부터 담력에 대해 또 한바탕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존재는 돌 부처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형수와 한바탕 웃은 일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다이스케는 물론 겁장이라 할 수도 있었다. 또한 겁장이면서 그다 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가. 어떤 경우에는 겁장이라는 것을 자처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어 린 시절 다이스케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한밤중에 아오야마의 묘지까지 간 적이 있었다. 무서움을 참으려 무진 애를 깼지만 한 시간쫌 지나자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가 엄어서 창 백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그 자신도 억울한 생각이 들첬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 로부터 비웃음을 당하자 아버지가 밉기까지 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당신의 소년 시절 에는 담력 수련을 위해 한밤중에 흔자 미시로 북쪽 4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쓰루기산 꼭대기 까지 을라가, 거기에 있는 작은 법당에서 밤을 새우고 해가 뜨면 두 손 모아 절하고서 돌아 오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즘의 젊은이들과는 정신상태부터 다르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는 그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라며 진지한 태도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그런 말을 서슴치않고 할 수 있는 아버지가 웬지 그렇게 안돼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지진을 싫어했다. 순간적인 흔들림에도 가슴이 뛰었다. 어떤 때는 서재에 꼼짝않고 앉아 있다가 한순간 멀리서 지진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면 깔고 앉아 있던 방석도, 다다미도, 심지어 마 루청도 분명히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그 정도로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은 신경이 무딘 미개인이거나, 아니면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다이스케는 그러한 아버지와 마주앉아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방은 차양이 긴 작은 방 이므로 거기 앉아서 뜰을 내다보면 차양 끝으로 막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하늘 이 넓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분위기가 조용하고 차분하여 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살담배를 피우므로 손잡이가 달린 긴 담배합을 이따금 앞으로 끌어당겨 거기에 딸린 재떨이를 탕탕 쳤다. 그럴 때면 그 소리가 조용한 뜰에 올려 듣기 좋은 소리로 변했다. 다이스케는 금빛 궐련 물부리 4,5개비를 작은 화로 안에 묻어놓았다. 코에서 연기를 내는 것 이 싫어져서 팔짱을 긴 채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통통만 편이지만 볼은 홀쭉했다. 짙은 눈썹 아래의 눈꺼풀 은 축 늘어져 보였다. 수염은 하얗다기보다는 약간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야기할 때 상대방의 무릎과 얼굴을 번갈아보는 버룻이 있었다. 그때 눈동자는 마치 흘겨 보 는 것처럼 어른거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묘한 기분을 갖게 했다. 아버지는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사람은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도 생각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남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법이 다. 너도 그렇게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이 마음편할 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교육도 받지 못 한 하류층이라면 몰라도, 최고의 교육을 받고서 놀고만 지낸다는 것도 따분한 노릇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배운 것은 실지로 응용함으로써 취미가 생기는 법이다. " "그야 그렇지요" 하고 다이스케는 대꾸했다. 다이스케가 볼 때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그 어떤 점에 있어서도 확고하지 않으며, 어떤 것을 독단적으로 판정한 후에 시작하므로 조금 도 근본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뿐만 까니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타주 의의 색채를 띠고 있다가도 어느새 이기주의로 변하고 말았다.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알맹 이가 업는 공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고 또한 결국은 할 수 업는 과제이기 때문에, 다이스케는 되도록 아버지와 부딪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이스케는 당연히 자신의 태양계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자기는 어디 까지나 다이스케의 궤도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다이스케도 부득이 아버지라는 늙은 태양의 주위를 예의바르게 돌고 있는 체할 뿐 이었다. "내 말은, 너보고 꼭 돈을 벌라는 건 아니다. 돈을 버는 일만이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라. 돈을 벌지 않아도 괜찮다. 돈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말하게 되면 너도 기 분이 나쁠테니까 말이다. 생활비는 종전과 같이 대주마. 이제는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 이가 되었고, 죽어서 돈을 가져갈 수도 없는 노룻이다. 매달 네 생활비 정도는 어김없이 마 련해주마. 그러니 어서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무슨 일이든 하도록 해라. 그것은 국민의 의무 이기도 하니까. 네나이 벌써 서른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 "서른이 될 때까지 직업도 없이 빈둥빈둥 놀고 있다는 것은, 사정이야 어떻든 눈에 거슬 리는 일이지." 다이스케는 결코 빈둥거리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자신은 직업으로 인한 세속적인 시간이 아닌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수준 높은 인간이라 인식하고 있을 뿐 이었다. 따라서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사실은 아버지가 가엾기만 했다. 아버지의 유치한 머리로는 이렇듯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결과가 자신의 사상과 정서 위에 결 정되어 분출하고 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할수없어서 다이스케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 했다. "네, 딱하기도 합니다. " 아버지는 다이스케를 완전히 어린애로 취급하는데다가, 다이스케의 대답이 언제나 장난기 넘치고 단순한데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말투이 므로 바보 취급을 하면서도 철부지는 나이를 먹어도 어쩔수업고 딱하기만 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이스케의 어조는 아주 태연하고 냉정하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망설임이 없이 언제나 한결같기 때문에, 그를 어쩔수엄는 놈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몸은 건강하냐 ? " "2,3년 동안 감기 한번 걸린 일이 없습니다.." "너는 머리도 나쁜 편이 아니지 않느냐. 학교 성적도 괜찮은 편이고. " "글쎄요. " "그런데도 놀고 있다는 것은 어쩐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그 누구라고 했지 ? 그래, 너를 자주 찾아오던 네 친구 말이다. 나도 한두 번 본 적이 있는데." "히라오카 말씀입니까 ? " "그래, 히라오카, 그 친구는 머리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데, 졸업하자마자 곧 취 직해서 어디론가 갔지 않느냐?" "그 대신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 노인은 쓴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왜 그랬다더냐 ? " "결국 먹고 살기 위해서 일했기 때문이지요." 노인은 그 말의 뜻을 잘 알 수 엄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저질렀느냐?" 하고 아버지가 반문했다.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당연한 일을 하겠지만, 그 당연한 일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허어" 하고 아버지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으나, 곧 말투를 바꾸어서 설교를 하 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실패하기 쉬운 것은 성실성과 열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도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수년간 경험한 일이지만, 어있든 그 두 가지가 부족하면 성공하지 못 하는 법이다. "성실과 열의가 넘치기 때문에 도리어 실패하는 일도 있겠지요." "아니, 그런 일은 거의 없지." 아버지는 중용에 나오는 '성자천지도야'라는 글이 씌어 있는 액자를 자랑스럽게 걸어두었 다. 그것은 이스케 집안의 조상 세대의 옛 영주가 직접 쓴 휘호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것 을 상당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왠지 그 액자가 싫었다. 첫째 글씨가 싫었다. 게다가 그 글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성은 천도라는 글귀 다음에 인도는 아 니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 옛날 영주의 재정 사정이 극도로 나빠져 도저히 견딜 수 없게되자, 그 정리의 책임이 있는 나가이는 영주와 연고가 있는 도시의 상인을 두세 명 불러들였다. 그는 칼을 뽑은 다음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초들에게 잠시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자. 갚을지 못 갚을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처음부터 그것은 자신할 수 없다고 솔직히 털어놓아 그 때문에 만사가 잘 풀렸다. 그 공로로, 영주는 그 글을 써서 나가이에게 하사했던 것이다. 그후 나가이는 언제나 그 액자를 거실에 걸어두고 아침 저녁 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다이스케는 그 액자의 유래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지금부터 15,6년 전에 그 영주 의 집에서 매달 지출이 늘어나 모처럼 회복된 경제 사정이 다시 악화되었을 때도 나가이는 그전의 수완을 인정받아 또다시 그 정비를 부탁받았다. 그때 그는 목욕통에 장작불을 지펴 실제 소비량과 장부에 적혀 있는 소비량의 차이를 조사 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일에만 온갖 정성을 기울인 결과 한달쫌 후애는 훌륭한 대책 을 세울 수 있었다. 그후로 영주의 집은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해나가게 되었다. 지난날 그렇게 성실한 태도로 열심히 일한 경험이 있고, 그런 태도를 벗어나는 일은 생각 할 수조차 업는 나가이는 만사를 오로지 성실과 열의로 해결하려 했다. "제게도 그런성실과 열의는 있지만, 다만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없을 뿐입러다. " "무슨 까닭으로 ? " 다이스케는 다시 말문이 막렸다. 그는 성실이나 열의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돌과 철이 부딪쳐 불꽃이 일어나듯 상대에 따라서 마찰 상태가 순조로을 때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즉 자기가 지니고 있는 특성이라기보다는 오히 려 정신의 교환 작용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상대가 나쁠 경우에는 그런 것이 일어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논어나 명나라의 왕양명이 말하는 연금 을 받고 계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연금이라니 ? " 다이스케는 잠시 아무 말이 언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연금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 다이스케는 나가이에 관한 이야기를, 책벌레에다 편헙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푼내기가 즐겨 말하는, 그 뜻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경구정도로 생각하여 호기심은 일어났지만 아버지 의 말에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약 40분이 지나자, 아버지는 옷을 갈아입더니 인력거를 타고 어디론지 자갔 다. 다이스케도 현관까지 배웅하러 나갔다가 되돌아와서 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객실은 최근에 서양식으로 증축한 것으로, 실내 장식과 그밖의 대부분은 다이스케의 아 이디어를 기초로 하여 전문가에게 주문해서 완성했다. 특히 미닫이위의 교창주위를 장식하 고 있는 무늬는 친지인 어느 화가에게 부탁하여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끝에 이루어진 것이 므로 누구라도 눈길이 가게 마련이었다. 다이스케는 일어서면서 그림 두루마리를 펼쳐 놓은 듯한 옆으로 긴 그림의 색채에 눈길을 던졌는데, 어찌된 일인지 처음보다는 휠씬 품위가 없 는 듯했다. 그는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이것은 정말 사소한 것에 피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되뇌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형수가 들어왔다. "어머나, 여기 계셨군요" 하고 형수는 말하더니 "저, 거기 어디에 내 빗이 떨어져 있지 않 나요 ?" 하고 물었다. 빗은 소파의 다리근처에 있었다. 어제 누이코에게 빌려주었는데 어디 다 두었는지 모른다고 해서 찾으러 왔다는 것이다. 형수는 두 손으로 머리를 누르듯이 하고 빗으로 머리 끝을 찌츠고 난 후 다이스케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넋을 잃고 계시군요" 하고 형수가 놀렸다. "아버지로부터 한바탕 설교를 들었지요." "또요? 왜 그렇게 자주 꾸중을 들으세요? 집에 오시자마자 그러다니, 정말 눈치도 없군요. 하지만 도련님에게도 잘못이 있어요. 아버님 말씀을 좀처럼 듣지 않으시니 말예요." "저는 아버지와 토론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조심스럽게 잠자코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더 문제지요. 무슨 말을 해도 네, 네 하고 대답만 하고는 전혀 말을 듣지 않으 니 말예요." 다이스케는 쓴웃음을 짓고 입을 다물었다. 형수는 다이스케를 향해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큰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눈썹이 짙고 입술이 얇은 편이었다. "자, 앉으세요. 잠시 말벗이 되어드리지요." 다이스케는 여전히 선 채로 형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은 희한한 깃을 다셨군요." "이거요 ? " 우메코는 턱을 끌어당기고 이마를 찌푸리면서 자신의 속옷 깃을 보려고 했다. "일전에 산 거예요." "색이 멋진데요. " "이제 그런 얘긴 그만두고 어서 앉기나 하세요." 다이스케는 형수의 정면에 앉았다. "네, 앉았습니다. " "도대체 오늘은 또 무슨 꾸중을 들으신 거예요?" "무슨 꾸중을 들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국가와 사회를 위하는 마 음에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 마음은 열여덟 살 때부터 오늘 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더군요." "그러니까 이 정도 되신 것이 아니겠어요." "국가와 사회를 위하는 마음으로 일해 아버지만큼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해볼 만한 일이겠지요." "그러니 이제 제발 빈둥거리지 말고 뭐든 할 생각을 하세요. 이렇게 놀고 먹으며 꼬박꼬 박 생활비만 받아가시다니, 정말 뻔뻔스럽네요. " "돈을 달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 "달라고 하진 않았더라도 꼬박꼬박 받아가고 있으니 그게 그거 아니겠어요. " "형님 이 무슨 말을 하시던가요 ? " "헝님은 아예 말도 꺼내지 않으세요." "지독하시군요. 그래도 형님이 아버지보다는 낫군요." "어째서요? -어머나 세상에 ! 또 저렇게 아첨하시네. 도련님 그게 나빠요. 진지한 체하며 남의 말을 농담으로 돌려버리다니." "그게 또 그런가요. " "근데 또 그런가요라뇨? 꼭 남의 일처럼 말씀하시네. 좀 진지해지실 순 없나요 ? " "이상하게 여기에 오면, 마치 가도노처럼 되어버리니 정말 우습군요. " "가도노가 누구죠 ? " "아, 그저 저회 집에 있는 서생입니다. 그는 무슨 말만 하면 언제나 그게 또 그런가요라든 지, 그럴까요라고만 대답하지요." "그 사람이 말인가요? 정말 괴짜로군요." 마이스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우메코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커튼 사이로 맑게 개인 하늘 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키가 큰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얼은 갈색의 새싹이 돋아나고, 부 드러운 우듬지 끝이 하늘과 맞닿은 곳은, 마치 이슬비로 바림된 것처럼 흐릿했다. "날씨 한번 좋군요. 론놀이라도 가시지 않겠어요?" "그러죠 뭐. 갈쎄니 어서 그 이야기나 해보세요." "무슨 이야기를요 ? " " 아버님이 하신 이야기말예요 "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셨지만, 그걸 조리있게 그테로 전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워낙 머 리가 나빠서 말이죠." "또 저렇게 딴청부리시내. 얼럭뚱땅 넘어갈 생각일랑 마세요." "그럼 들어보실래요 ? " 우메코는 약간 샐쭉해꼈다. "도련님은 요즈음 억지부리는 개 눈에 띄개 심해졌어요." "뭐, 형수님이 무서워서 물러날 정도는 아니죠. 그런데 오늘은 집이 아주 조용하군요. 웬 일이죠? 아이들은 어디 갔나요?" "아이들은 다 학교에 갔어요. " 그때 열여섯 살쫌 되어 보이는 하녀가 문을 열고 얼굴을 디밀었다 저, 주인어른께서 잠깐 전화를 받아보시라고 합니다라는 말을 전하고서 말없이 우메코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매코 는 곧 일어섰다. 다이스케도 일어섰다. 그가 뒤따라 객실을 나서려고 하자 우매코가 뒤돌아 보았다. "도련님은 여기 그냥 계세요. 할 얘기가 있으니." 다이스케는 형수가 그렇게 명령투로 말하는 것이 언제나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는 차분한 마음으로 형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다시 앉아서 그 그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참 바라 보고 있자 그 색깔이 벽 위에 칠해진 것이 아니라, 자기 눈동자로부터 빠져나가 벽 위에 처 덕처덕 붙는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는 눈동자에서 어떤 빛을 내느냐에 따라 그 그림 속의 인물과 나무가 자기의 생각대로 변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다이스께는 어색한 부분을 모두 바꾸어 칠하고 마침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색채에 휩싸여 황홀한 기 분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자 우매코가 돌아왔기 메문에 곧 정신을 차리게 되었던 것이다. 정색을 하고 우매코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역시 여느때처럼 혼담이었다. 다이스케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우매코 덕택에 사진이나 실물 등 여러 신부 후보자를 접했다. 그러나 마음 에 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처음에는 체면상 적당히 핑계를 대고 거절했으나 2년 전부 터는 갑자기 뻔뻔스러워저서 매번 상대방의 트집을 잡았다. 입과 턱의 각도가 틀렸다거나, 얼굴의 폭에 비해 눈의 길이가 알맞지 않다거나, 귀의 위치가 이상하다는 등 반드시 이상야 릇한 트집을 잡았다. 그런데 다이스케의 말투는 한결같이 심상치 않은 말투였으므로 마침내 우메코도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다이스재가 이렇게 버릇없이 굴며 자신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것은 자 기가 너무 잘하주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당분간 신경을 쓰지 않고 다이스케가 먼저 꺼내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그후로는 혼담 이야기를 입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본인은 조 금도 애태우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조차 헤아릴 수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이다. 그때 아버지가 다이스케의 집안과 인연이 아주 깊은 집안의 딸인 어떤 신부감을 찾아 행 선지에서 돌아왔다. 우메코는 다이스케가 오기 2,3일 전에 그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오늘 부자간에 오간 이야기는 틀림없이 혼담일 것이라 추측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다이스케는 사실상 아버지로부터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할 생각으로 아들을 불렀는지 모르나, 다이스케의 태도를 보고서 좀더 미루어 두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낸 것 같기도 했다. 그 신부감과 다이스케는 좀 특이한 관계가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다이스케는 그 아가씨 의 성씨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은 몰랐다. 연령, 용모, 교육 정도, 성격에 대해서 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왜 그 아가씨가 신부감으로 뽐혔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다이스케의 아버지에게는 형님 한 분이 있었다. 나오키라는 다이스케의 백부는 아버지와 한 살 터울인데, 아버지보다 체격이 작은데다가 얼굴 생김새가 아버지와 너무 닮아서 잘 모 르는 사람은 두분을 쌍둥이로 착각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도 도쿠라고불리지 않았 다. 세이노신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었다. 나오키와 세이노신은 외모뿐 아니라 성격까지 닮은 형제였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그림자 처럼 붙어다니며 같이 놀고 공부도 함께 하러 다니며 책도 한 등불 아래서 읽는 등 상당히 우애가 두터웠다. 마침 나오키가 열여덜 살이 된 가을의 떠느 날, 형제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성 아래 변 두리에 있는 도카쿠사라는 절에갔었다. 그 절은 영주의 보리사인데, 거기에 있는 소스이라는 스님과 아버지는 아주 절친한 사이로 그 스님에게 아버지의 편지를 전하러 갔던 것이다. 편 지의 내용은 함께 바둑이나 두자고 집으로 초대한 것으로 답신이 필요없을 정도의 간단한 것 이었으나, 스님에게 붙잡혀 이것저것 얘기하느라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쯤에야 겨우 절을 나섰다. 그날은 무슨 축제가 있어서 거리는 몹시 붐비고 있었다. 형제가 군중 사이를 겨우 빠져나와 막 어느 골목길로 접어들려고 할 때, 강 건너에 사는 호기라는 자와 길모퉁이에서 부딪쳤다. 그런데 그와 이들 형제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그때 호기는 잔뜩 취해 있었는데, 이들 형제와 몇 마디 언쟁을 하다가 갑자기 칼을 뽑아 내리쳤다. 칼을 맞은 쪽은 형이었다. 부득이 그도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맞섰으나 상대는 평 소에도 악명이 높은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자라 잔뜩 취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만치가 않았다. 그대로 있다가는 형이 질 것 같아 동생도 칼을 뽑았다. 그리하여 형제가 합세하여 그를 엉망진창으로 쳐죽여버렸다. 그 당시는 무사가 무사를 죽일 경우 죽인 사람은 할복 자살을 해야만 하는 관습이 있었 다. 형제는 그럴 각오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도 두 아들을 나란히 앉혀놓고 자신이 직접 그들의 목을 차례로 칠 생각이었다. 그 런데 때마침 어머니가 친척네 제사 준비를 도우러 가서 집에 없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할복 자살을 시키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려는 부정으로 곧 어머니에게 돌 아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래서 어머니가 올 때까지 두 아들에게 훈계를 하기도 하고 할복 할 자리를 준비하게 하면서 되도록 시간을 끌고 있었다. 어머니가 간 곳은 먼 친척이 되는 다카기라는 세도가였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아주 큰 힘 이 되어주었다. 왜냐하면 그 무렵은 개화의 바람이 불어 세상이 새롭게 변하기 시작한 시기 로, 무사의 규정도 옛날처럼 엄하게 지켜지지 않았던 때였다. 게다가 살해된 상대는 악명높 던 무뢰한이었다. 그래서 타카기는 어머니와 함께 나가이의 집으로 와서 당국의 지시가 있 을 때까지 당분간 그대로 두자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후로 다카기는 그들을 위해 바삐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먼저 영주의 중신을 설 득했고, 다시 중신을 통해 영주도 설득했다. 또한 살해된 호기의 아버지 역시 예상외로 사리 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에 자식의 행실이 좋지 않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으며, 칼부 림을 한 당시에도 자기 자식이 먼저 시비를 걸어 행패를 부렸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으니 형 제를 관대하게 처분해달라는 부탁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형제는 한동안 한방에 틀어박혀 두 문불출하고 근신의 뜻을 보이다가 둘 다 남몰래 집을 떠났다. 3년 후, 형은 교토에서 어떤 떠돌이에게 살해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천하는 메이지 시대 가 되었다. 그리고 5,6년이 지나자 세이노신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도쿄로 모셔왔다. 그후 결혼을 하고 도쿠라는 외자 이름을 쓰게 되었다. 그때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다카기는 이미 고인이 되고 양자가 가문을 계승하고 있었다.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그 양자에게 도쿄 로 나와 관직에 오를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이런저런 말로 여러 차례 권유 해보았으나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식이 둘 있었는데, 아들은 교토로 나와 도 시샤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미국에 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고 베에서 실업계에 투신하여 재벌급이 되었다. 딸은 그 지방의 재벌과 결혼했는데, 다이스케의 신부감은 바로 그 재벌의 딸이었다. "사연 한번 복잡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라고 형수는 다이 스케에게 말했다. "아버지로부터 전에도 몇 번 듣지 않으셨나요?" "하지만 신부감에 대한 말씀은 한 번도 없으셨기 때문에 인연이 깊은 집안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죠." "사카와에게 그런 딸이 있었다니,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 "그 아가씨와 결혼하세요. " "형수님도 그러길 바라십니까 ? " "그럼요. 그런 인연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조상끼리의 인연보다는 역시 본인과 인연이 있는 상대여야 결혼을 마음먹기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 "어머나, 그럴까요. " 다이스케는 쓴웃음을 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4. 다이스케는 방금 읽고 난 얇은 와국 서적을 책상 위에 펴놓은 채, 턱을 지고 멍하니 생각 에 잠겼다. 그는 그 책의 마지막 장면을 머리속 가득 떠올렸다-저 멀리 추워 보이는 나무 뒤로 두 개의 작은각등이 소리없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교수대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수 형자는 머두운 곳에 섰다. 한 사람이 신발 한 짝을 읽어버려 춥다고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뭐라고? 하고 되물었다. 신발 한짝을 링어버려 춥다고 하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M은 어 디에 있지? 하고 누군가 물었다. 여기 있다고 누군가 대달했다. 나무 사이로 크고 하얀 팡평 한 것이 보인다. 그쪽에서 구중중한 바랍이 불어온 다. 바다라고 G가 말했다. 잠시 후, 선고문이 씌어 있는 종이와 선고문을 든 하얀 손-장갑 을 끼지 않은-을 각등이 비췄다. ' 낭독해도 좋다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각등이 꺼졌다...K는 이제 혼자가 되었다고 한숨지으며 말했다. S도 죽어버렸다. W도 죽어버렸다. 단 흘로 되고 말았 구나...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올랐다. 코들은 시체를 한 수레에 실은 후 끌어냈다. 길게 늘어진 목, 튀어나온 눈, 입쿨 위에 괸 무시무시한 꽃 같은 피거품에 젖은 혀를 싣고 먼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다이스케는 안드레에프의 (7명의 사형수)의 마지막 장면을 거기까지 떠올리고 나서 오싹 어깨를 움츠렸다. 만일 자기가 그러한 입장에 처한다 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걱정으로 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기는 절대로 죽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형되므로 너무나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압박 사이에 있는 자기 자신을 상상하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번민과 고뇌에 차 꼼짝않고 앉아 있자, 온몸이 뺏뻣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열일곱 살 때 영주의 신하 한 사람을 참살하여 할복 자살을 각오했다는 이 야기글 입버릇처럼 말랬다. 그때 아버지는 백부의 목은 자기가 치고 자신의 목은 조부에게 쳐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는데, 어떻게 그런 참혹한 생각을 해낼 수 있었단 말인가. 아버 지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마다, 다이스케는 아버지가 훌륭하다는 생각보다는 불쾌한 느낌이 앞섰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에 대해 거짓말장이라는 생팍토 들었는데, 차라리 그것이 더 아버지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조부에 대해서도 그런 일화가 있다. 젊었을 때 조부와 함께 검술을 익 히던 한 친구가 남달리 뛰어난 기예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질투심을 사게 되어, 어느 날 밤 논두렁 길을 걸어 성 아래로 돌아오다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때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이 바로 조부였다. 그는 왼손에는 초롱불을 들고 오른손에는 칼을 빼들고 그 칼로 시체 를 두들기면서 "군페이, 정신차려라, 상처는 대단치 않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 백부가 교토에서 살해되었을 당시 두건을 쓴 패거리들이 여관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놀란 백부가 2층 처마 차양에서 뛰어내리나 정원석에 걸려 넘어지자 누군가 위에서 칼로 사정없 이 내리치는 바람에 얼굴이 마치 생선회처럼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백부는 살해되기 열홀 전 밤중에 우비를 입고 우산으로 눈을 피하면서 나막신을 신고 시조거리에서 산조 거리로 돌아온 적이 있다. 여관까지 200미터쯤 남은 지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뒤에 서 나가이 나오키 하고 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우산을 든 채 여관 입구까지 와서 격 자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후 "나가이 나오키는 바로 나다. 무슨 일이냐? " 하고 물었다고 한다. 다이스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용감하다는 생각보다는 무서운 생각이 앞섰다. 그 러한 배짱을 높이 사기 전에 피비린내가 콧등을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다 이스케는, 만약 죽음의 순간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발작의 절정에 이른 바로 그 순간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결코 발작성의 체질은 아니었다. 가끔 손과 발이 떨리는 일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최근들어 갑자기 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격한 심적 상태는 죽음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자연의 단계 이며, 격할 때마다 죽기 쉽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때로는 그 위험한 장난을 시도해보고 싶은 호기심도 일었지만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요즘의 자기 자신을 냉철 히 되새겨볼 때마다 3,6년 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데대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다이스케는 책상 위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약간 열려 있는 툇마루의 유리창 사이로 따뜻 한 바람이 불어와 화분에 심은 아마란스의 붉은 꽃잎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햇빛은 큰 꽃잎 을 비추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허리를 굽히고 꽃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겅충난 수술 에 서 꽃가루를 따다 암술 끝으로 가져가서 정성껏 발랐다. "개미라도 있습니까?" 하며 가도노가 현관 쪽에서 나왔다. 그는 하카마를 입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앉은 채 얼굴을 들었다. "벌써 갔다왔나 ? " "네, 다녀왔습니다. 뭐라 하더라. 아, 내일 이사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잖아도 오늘 찾아 을 생각이었다고 하던데요." "네, 그런데 뭐가 그리 바쁘십니까? 여느때와 좀 달라보이시는데요. 개미 같으면 종유를 부으세요. 그래서 견디다 못해 구멍에서 나오는 것을 하나하나 죽이면 되잖습니까. 싫으시면 제가 죽일까요 ? " "개미가 아니야. 이렇게 날씨가 좋을 때는 꽃가루를 따서 암술에 발라두면 머지않아 열매 를 맺거든. 시간키 있어서 정원사의 말대로 하고 있는 거지. " "일리가 있는 이야기인데요. 정말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분재는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보기도 좋고 취미로도 삼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 다이스케는 귀찮아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제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지"라고 말하면서 일어나 툇마루에 있는 등나무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런 다음 그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가도노는 다이스케가 별반응을 보이지 않자 현관 옆에 있는, 다다미 세 장의 자기 방으로 물러갔다. 가로노가 미닫이를 열고 막 들어가려고 할 때, 툇마루에서 다이스케가 그를 불러 세웠다. "히라오카가 정말 오늘 온다고 했나 ? " "아, 예. 온다고 하신 것 같았습니다. " "그럼 기다려야겠군. " 다이스케는 외출을 미루었다. 사실은 히라오카의 일이 요전부터 꽤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히라오카가 다이스케를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차분하게 지낼 수 없는 처지였 다. 그 자신이 다이스케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자기에게 맞는 일자리가 두세 군데 있어서 당분간 그 일자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볼 생각인 듯했으나 다이스케는 그 취직 여부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를 만나기 위해 진보초의 숙소를 두 번 찾아 갔는데, 탄 번은 그가 외출을 하고 없었다. 또 한 번은 있기는 했지만 양복을 입은 채 방 문 틱 위에 서서 뭔가 성급한 말투로 아내를 호되게 꾸짖고 있었다. 그 누구의 안내도 받지 않 고 복도를 따라서 히라오카의 방 옆으로 다가간 다이스케는 갑작스럽지만 분명히 그렇게 느 껴졌다. 그때 히라오카는 잠간 돌아보더니 "야, 자네 왔나?" 따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안색이 몹시 나빠 보였다. 방안에서 얼굴을 내민 부인은 다이스케의 얼굴을 보자 창백한 볼을 약간 좁혔다. 다이스케는 도저히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어서 들어오라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특별한 일이 있 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잠간 들렀을 뿐인다, 나갈거면 같이 나가자고 말하며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때 히라오카는 하루 빨리 집을 구해서 안정을 되찾고 싶지만 너무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다, 가끔 여관 주인이 소개해주기는 했지만 그것도 아직 사람이 살고 있거나 혹은 지금 도배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차를 하고 헤어질 때까지 그링게 만사가 불평투 성이였다. 그러자 다씨스케 역시 히라오카가 측은하게 여거져, 그렇다면 우리 집에 있는 서 생에게 알아보라고 하겠다, 불경기이므로 비어 있는 방은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 을 하고 돌아왔다. 그후 약속대로 가도노로 하여간 집을 알아보게 했는데, 가도노는 그 즉시 적당한 데를 둘 러보고 돌아왔다. 그래서 가도노에게 안내를 하게 하여 히라오카 부부에게 보이자 그 정도 면 괜찮다는 말을 듣고 헤어졌다는데, 집주인에게도 알려야 하고 또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 으면 다른 데를 알아볼 생각이니 태도를 분명히 해달라는 맡을 가토노에게 전했던 것이다. "자네, 집주인에게 세들겠다는 말은 하고 왔겠지 ? " "그럼요. 돌아오는 길에 들러, 네일 이사하겠가는 말을 하고 왔습니다. " 다이스케는 의자에 앉아서, 도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살림을 시작하는 히라오카 부 부의 앞낱에 대해 생각했다. 히라오카는 3년 전에 신바시에서 헤어졌을 때와는 너무나 변했 다. 그는 처세의 사닥다리를 한두 단 헛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다지 높은 곳까지 올라 가지 않은 것이 다탱이라 말할 수 있고, 남이 보기에도 그다지 큰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었 지만 사실 정신 상태에는 이미 문제가 있었다. 얼마 전 히라오카를 3년 반에 처음 만났을 때, 다이스케는 퍼뜩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3년간에 일어난 자신의 변화를 생각해보 자, 혹시 내 마음의 변화로 인해 그런 생각이 든 것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냉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그후 히라오카가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가서 객실에도 들어가지 않고 함께 탄으로 나왔을 때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 처음의 그 판단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때 히라오카는 얼팔 중심의 근육이 경건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모래가 날려도 강한 자극을 받을 듯판 눈썹과 눈썹의 이음새가 몹시 떨렸 다. 따라서 그의 말은 .그 내용에 관계없이 아주 성급하고 더욱이 애절하게 다이스케의 귀에 울려왔다. 다이스케로서는 히라오카의 모든 거통이 마치 폐가 약한 사람이 답답한 갈분탕 속을 헐떡거리며 헤엄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초조하게 기차를 타고 가는 히라오아의 모습을 바라본 다이스케는 그렇게 중얼거 리면서 여관에 남아 있는 그의 부인을 생각했다. 다이스케는 그 부인을 아주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미치요님, 미치요님 하호 겉혼 전과 마찬가지로 본명을 불렀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와 헤어진 후 여관으로 되돌아가서 미치요를 만나 이야기를 할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지 갈 수가 없었다. 발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으나, 지금의 자기초서는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이유는 조금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딘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갈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면 갈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다만 그런 용기를 내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에 놀아와서도 안절부절 못하고 어딘지 불안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 다. 그래서 다시 밖으로 나가서 술을 마셨다. 다이스케근 술이라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 다. 그날 밤은 정말 곤느레만드레가 될 정도로 마셨다..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어쩐지 이상했었지' 하고 다이스케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비교적 냉정한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 하고 말하면서 가도노가 다시 나왔다. 그는 하카마도 걸치지 않 고 다비도 신지 않은 채 경단 같은 맨발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아무 말 없이 가도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도노 역시 다이스케의 얼굴을 쳐다보떠 잠시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런, 부르시지 않으셨나요? 이런, 이런" 하고 말하며 가도노는 물러 갔다. 다이스케는 가도노의 그런 모습이 그다지 우습게 생각되지 않았다. "아주머니, 부르시지 않으셨다는데요.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손뼉도 치지 않았다고 했는데도"라는 말이 식당 쪽에서 들려왔다. 그러고 나서 가도노와 아주머니가 웃 는 소리가 났다. 그때 기다리던 손님이 왔다. 손님을 맞으러 나간 가도노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들 어와서는 다이스케에게 다가가 선생님, 부인이십니다 하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객실로 들어갔다. 히라오카의 부인은 얼굴이 하얀 데 비해서 머리가 검고 갸름한 얼굴에 눈썹이 짙었다. 언 뜻 보면 어딘지 쓸쓸해 보여 마치 옛날의 풍속화에 나오는 여인을 연상케 했다. 도쿄로 온 후에는 안색이 더욱 나빠진 것 같았다. 처음 여관에서 만났을 때 다이스케는 약간 놀랐을 정도였다. 장시간의 기차 여행으로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아서 그러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런 게 아니라 평상시에도 그렇다는 말을 듣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치요는 도쿄로 오기 1년 전에 아이를 나았으나 태어난 아이는 곧 죽고 그후로 심장이 나빠진 것 같았는데, 아무튼 건강이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중세가 그리 심하지 않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도 차도가 얼자 결국 의사에게 보였더니 정확히는 알 수 업으나 완치되기 어려운 심장병 같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만약 그렇다면, 심장에서 동맥으로 흐르는 피가 조금색 되돌아오는 난증이니 완치는 장담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고 몹시 놀란 히라오카는 미치요의 요양에 정성을 쏟은 결과 1년쫌 지나자 눈에 정도로 건강이 좋아졌 다. 안색도 그전처럼 맑게 보이는 날이 많아져 본인도 기뻐하고 있었는데, 도쿄로 오기 한 달 전부터 다시 혈색이 나빠졌다. 그러나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번에는 심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심장은 그다지 튼튼해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코 그전보다 나빠지지 않 았다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심장의 어느 부분에 이상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진단 이었다. 그것은 미치요가 다이스케에게 직접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때 다이스케는 미치요의 얼굴을 보고, 역시 어떤 걱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미치요는 아름다운 선이 곱게 겁친, 시원스런 쌍꺼풀을 지녔다. 눈은 가늘고 긴 편이나,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볼 때는 더욱 커 보였다. 차이스케는 그것은 눈동자 의 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치요가 결혼하기 전에, 다이스케는 미치요의 그러한 눈매에 자주 눈길을 던졌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눈매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미치요의 얼굴 을 떠올릴 때면, 얼굴 윤곽을 그리기도 전에 그 흐릿하고 검은 눈이 번뜩 생각났다. 복도를 따라 객실로 안내를 받은 미치요는 다이스케 앞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고운 손을 얌전히 포개어 무릎 위에 놓았다. 밑의 한 손 에도, 위의 한 손에도 반지를 끼고 있었다. 위 의 것은 가는 금테두리에 비교적 큰 진주가 박힌 현대식 반지로 3년 전 다이스케가 결혼을 축하하는 뜻에서 선물한 것이다. 미치요는 얼굴을 들었다. 갑자기 다이스케는 언제나 변함없는 그녀의 눈을 보고서 엉겁결 에 눈을 깜짝했다. 기차로 도착한 다음날 히라오카와 함께 오려고 했는데 그만 몸이 불편해 오지 못하고, 그 후로는 흔자서가 아니고는 을 기회가 없어서 여지껏 찾아오지 못했는데 오늘은 마침 하고 말하려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나 난 듯이 요전에 찾아오셨을 때는 히라오카가 막 외출하려 던 때여서 변변히 대접도 못해 참으로 죄송했다고 하며 사과를 했다. "기다리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그녀는 애교있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왠지 그 말 투는 침울했다. 하지만 그것은 미치요의 독특한 점이라는 것을 다이스케는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바쁜 것 같아서. " "하긴 그랬어요. 좀 바쁘긴 했지만, -상관없어요, 계셨더라도. 그건 정말 죄송했어요." 다이스케는 그때 부부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려고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했 다. 여느때 같으면 농담조로, 그때 당신은 히라오카한테 큰소리를 듣고 얼굴을 욜히고 있었 지요?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일이라도 했나 보군요라는 말 정도는 할 추 있는 사이이 므로, 다이스케로서는 미치요의 애교가 그자리를 의식한 듯한 행동으로 여겨져 애처롭게 들 렸기 때문에 농담을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물부리를 문 채로 의자 등에 머리를 기대었다. "모처럼 오셨는데 뭐라도 좀 가져오라고 할까요?" 하고 다이스케가 물었다. 그리고 마음 뽁으로는 자신의 그러한 태도가 미치요에게 어느 정도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오늘은 이것으로 됐어요. 그럴 시간도 없고" 다이스케는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를 긴 채 미치요를 쳐다보았다. 미치요는 몸을 굽히며 사이에서 작은 시계를 꺼냈다. 다이스케가 그녀에게 진주 반지를 선물했을 때, 히라 오카는 그 시계를 아내에게 사주었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같은 상점에서 그 물건을 산 다 음 히라오카와 함께 그 상점 문턱을 넘으려다가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 하고 있다. "어머나, 벌써 세시가 지났군요. 아직 두시 정도밖에 안된 줄 알았는데, 다른 데를 잠깐 들렀다 왔기 때문에" 하고 미치요는 혼잣말을 하듯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바쁘신가요 ? " "되도록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 다이스케는 머리에서 손을 떼고 담배재를 털었다. "3년 동안에 정말 착실한 주부가 되었군요. 그렇다면 할수없지요." 다이스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약간 언짢아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어머나, 하지만 내일 이사를 하게 돼서." 미치요의 소리는 이때 갑자기 활기차게 들렸다. 다이스케는 이사하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으나 그녀의 활기찬 어조를 이용하여 분별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럼 이사한 후에 시간을 충분히 내서 오면 되겠군요." "하지만" 하고 말한 미치요는 약간 당황한 빛을 나타내며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 녀는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때 그녀의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실은 부탁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신경이 예민한 다이스케는 미치요의 말을 듣자마자 곧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사 실은 히라오카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부터, 언젠가 그 문제에 부딪칠 것이라 생각하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게 뭐죠? 어려워 마시고 어서 말씀하세요." "실은 돈을 좀 빌려주십사 하고요" 미치요의 말은 마치 어린애의 말처럼 순진하게 들렸지만 그녀의 두볼은 역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이스케는 이 여인을 이렇듯 난처하게 만든 히라오카의 현재 처지가 너무나 안됐 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치요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일 이사할 비용과 새살림을 꾸려나 갈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히라오카,가 지방의 지점을 떠나을 때 거기서 세 군데 정도에 빛을 졌는데, 그 중 의 한 가지는 빠른 시일내에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쿄에 도착하면 1주일 이내 에 어떻게 해서든지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온데다가, 다른 것처럼 미루어둘 수 없는 사 정이 있어서 히라오카도 도쿄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걱정이 되어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지만 아직 가망이 없어서 어쩔 수없이 미치요를 내세워 다이스케에게 부탁하라고 했다는 것이었 다. "지점장에게 빌렸다는 돈인가요 ? " "아니에요. 그건 언제까지든 연기할 수 있지만 한 가지만은 어떻게 해서든 갚아야 해요. 도꾜에서 활동하는 분에게 지장을 주게 되는 일이라서. " 다이스케는 그것이 정말 사실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500 엔은 약간 넘는다는 것이었다. 다이스케는 속으로 그다지 큰돈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으나, 사실 그는 한푼도 없는 처지였다. 다이스케는 자신은 돈에 쪼들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 사실 은 몹시 쪼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 또 그런 빛을 지게 됐지요? " "그래서 저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요. 제가 몸이 아파서 형편이 나쁘긴 했지만" "그럼 그때 진 빛인가요?" "아니에요. 약값은 얼마 되지 않았는걸요." 미치요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이스케도 더 이상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다만 미치요 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막연하게나마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꼈다. 5 다음날 아침 일찍 가도노는 짐수레 두 대를 빌려서 히라오카의 짐을 찾으러 신바시역까지 갔다. 사실 짐은 오래전에 도착해 있었으나 집이 아찌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그 대로 두었던 것이다. 신바시역까지 갔다오는 시간과 거기서 짐을 신는 시간을 계산해조면 똔 걸려토 반나절은 걸렸다. 다이스케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빨리 가지 않으면 제시간에 도착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도노는 여느때와 같은 식으로 뭘요, 문제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는 시간 관념이 너무나 없는 편이어서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었으나, 다 이스케의 설명을 톤고서야 비로오 과연 그렇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이스케가 짐을 히라_B_카의 집으로 싣고 가서, 짐이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도우라고 말했을 때는 네, 알겠습니다. 걱정마십시요하고 시원스럽게 대답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후 열한시경까지 다이스케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단눈치오라는 사람이, 자기 집의 방을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장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는 생활의 2대 정취 는 그 두 가지 색에서만 일어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따라서 무엇이든 흥분을 요하는 방, 즉 음안실과 서재 등은 가능한 한 빨갛게 칠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침실이나 휴 게실 등 정신적인 안정을 필요로 하는 곳은 푸른색 계통으로 꾸며야 한다는 어느 심리학자 의 학설을 응용한, 시인의 호기심의 만족으로 생각되었다. 다이스케는 단눈치오와 같이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어째서 흥분이 잘되는 빨간색이 필요할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다이스케 자신은 이나리의 도리이를 보아도 그다지 시원 한 답이 떠오르디 않았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머리만이라도 녹색 분위기에서 편안히 잠들고 싶었다. 언젠가 다이스케는 어느 전람회에서 다오키라는 서양화가가 그린, 바다 밑바닥에 서 있는 키가 큰 여자의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다이스케는 많은 작품 중에서 그것만이 좋은 기분으로 그려졌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즉 자기도 그렇게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에 감싸여 있고 싶었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툇마루로 나가서 뜰 정면에 무성한 푸른 것들을 보았다. 꽃은 어느덧 지고, 새 싹과 신록의 계절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화려한 초록빛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듯한 기분 이 들었다. 그러자 그는 눈을 뜨게 하는 자극의 밑바닥에 어딘지 차분한 정취가 흐르고 있 는 것을 기뻐하면서, 사냥 모자를 쓰고 비단 평상복을 걸친 채 문을 나섰다. 히라오카가 이사한 집에 가보니,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집안은 텅비어 있는데다 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하고 히라오카 부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차부 차림의 사나이 흔 자 툇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물어보았더니, 집주인이 조 금 전에 오기는 했지만, 이런 상태로는 어차피 오후가 되어야겠구나 하면서 그냥 돌아갔다 는 것이었다. "주인어른과 부인이 함께 왔던가? "네, 함께 오셨더군요." "그리고 같이 돌아갔나? " "네,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 "짐도 곧 도착할테니 수고하게"라고 말하고 다이스케는 다시 버리고 나왔다. 다이스케는 간다로 들어섰으나 히라오카의 숙소에 들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일이 웬지 마음에 걸렸다. 특히 부인의 일이 걱정되어 잠간 들렀다. 그들은 식사를 하고 있 었다. 하녀가 쟁반을 든 채 문턱으로 엉덩이를 돌리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그 뒤에서 말을 걸었다. 히라오카는 놀란 듯이 다이스케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의 말로는 2,3일 동안 잠을 못 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다이스케는 그들 부부가 붙잡는 것을 뿌리치 고 밖으로 나와서 점심을 먹고 이발을 한 뒤 구단쪽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새집에 들러보았다. 미치요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화려한 무늬의 긴 속옷을 선뜻 내놓은 채 소매를 걷어붙이고 짐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여관에서 보내주었다는 하녀도 와 있었다. 히 라오카는 툇마루에서 고리짝 끈을 풀고 있다가 다이스케를 보자 웃으면서 좀 도와달라 고 말했다. 가도노는 하카마를 벗고 옷자락을 걷어을려 허리띠에 걸친 차림으로 차부와 함께 두 짝짜리 장농을 들면서 런생님, 어떻습니까, 제 옷차림을 보고 옷으시면 안됩니다 하고 말 했다. 다음날 아침 다이스케가 식탁에 앉아 여느때와 같이 흥차를 마시고 있자, 가도노가 방금 세수를 한 얼굴을 번덕이면서 식당으로 들어왔다. "어젯밤에는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저는 퍼곤해서 곯아떨어졌기 때문에 전혀 알지 못했슘 니다. -제가 자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선생님도 참 심술궂으십니다. 도대채 언제 돌아오 셨습니까? 그 때까지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고 히라오카는 평소의 말투로 막힘없이 말했 다. 다이스케는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자네, 짐이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거기에 있었나? " "네, 완전히 정리했습너다. 그 대신 아주 힘들었습니다. 어쨓든 쑤리가 이사할 때와는 달 리 큰 물건이 많았으니까요. 아주머니가 객실 한복판에 서서 이렇게 멍한 얼굴로 주위를 돌 아보고 있는 모습이란, 정말 우습더군요. " "몸이 좀 안 좋기 때문이지."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어쩐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시더군요. 히라오카씨와는 너무나 대 조적이던데요. 그분은 체격이 정말 좋으시더군요. 어제 저녁 함께 목욕탕에 들어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 다이스케는 곧 서재로 돌아가서 편지를 두세 통 썼다. 하나는 조선의 통감부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보내는 것으로, 일전에 보내준 고려 자기에 대한 감사 편지였다. 그리고 다른 한 통은 프랑스에 있는 매형에게 인형의 모조품을 보.내달라는 부탁 편지였다. 다이스케는 오후에 산책을 나가면서 가도노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가노도의 천진난만한 콧구멍을 보면서 부러워했다. 사실 그는 어젯 밤 잠을 이루지 못해 몹시 애를 먹었던 것이다. 여느때와 같이 베개맡의 회중시계가 큰소리 로 올리자 신경이 쓰여 시계를 베개 밑에 밀어넣었었다. 그러나 보리는 여전히 머리속으로 올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그만 꾸벅꾸벅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밤의 정 적을 깨는,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만이 종종걸음으로 머리속을 끊임없이 스쳐가고 있 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어느덧 벌레 소리로 변하여 깨끗한 현관 곁의 정원수 숲속에서 들려오은 듯했다, 다이스케는 어젯밤에 꾼 꿈을 거기까지 떠올리고서, 수면과 각 성 사이를 잇는 일종의 끈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이스케는 어떤 일이든 한번 마음에 걸리면 좀처럼 떨쳐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더 욱이 스스로 그 어리석은 정도를 뚜렷하게 인식 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한 걱정을 떨쳐버리 지 못하든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어색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3,4년 전 그는 평소의 자신이 어떻게 꿈속으로 빠져드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밤에 이불 속으 로 들어가서 어느 정도 꾸벅거리기 시작하면 아아, 바로 이것아다, 이렇게 해서 잠이 드는 것이구나 하고 깜짝 놀라 기도 했다. 그러면 그 순간 눈이 발똥말똥해졌다. 잠시 후 다시 잠 이 들면 아, 바로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거의 매일 밤 그런 호기심에서 같은 일을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마침내 자기 자신도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써떻게 해서든지 그런 고통을 떨쳐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속 깊이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흐릿한 의식을 뚜렷한 의식에 호소하여 동시에 떠올리려 고 하는 것은, 월리엄 제임스가 말한 바와 같이 어둠을 검사하기 위해서 촛불을 켜거나 팽 이의 운동을 관찰하기 위해서 팽이를 돌리는 것과 같으며, 일생동안 잠들지 못 하는 셈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해하고 있긴 했지만, 밤 이 뙤면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하곤 했다. 그러한 현상은 1년쯤 지나자 점차 사라졌다. 다이스케는 어젯밤의 꿈과, 의식과 무의식 사 이의 불분명한 상황을 비교하자 요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든 것은, 의식이 있는 상 태에서 자신의 일부가 자기 자신도 모르게 꿈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기 때문 이었다. 동시에 그러한 작용은 마치 발작이 일어날 때의 상태와 비슷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다이스케는 자신은 격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결코 발작하는 일은 엄을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후 2,3일 동안은 다이스케도 가도노도 히라오카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나흘째 되던 오 후에, 다이스케는 아자부의 어느 집에서 개최하는 야유회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초대 된 손님은 남녀 모두 합해 왜 되었는데, 주빈은 영국의 국회의원인지 실업가인지 하는 키가 아주 픈 남자와 코안경을 쓴 그의 부인이었다. 그 부인은 대단한 미인으로 일본과 같은 나 라에 오기에는 과분할 정도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어디서 샀는지 기후에서 생산되는, 그림이 그려진 양산을 뽐내듯이 들고 있었다. 하긴 그날은 날씨가 아주 좋아서 프록코트 차림으로 넓은 잔디 위에 서 있노라니 벌써 여 름이 왔다는 것을 온몸에 느낄 정도로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영국 신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구인도 맞장구를 쳤는데, 아주 큰소리로 유난히 강조하·는 말투였기 때문에 다이스케는 영국의 인사치레는 그렇게 유별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 부인은 다이스케에게도 몇 마디 말을 걸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언 여서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자리를 떠났다. 그후로는 일본 고유 의상인 시마다 머리를 한 그 집 딸과 오랫동안 뉴욕에서 상업에 종사했다는 어떤 남자가 접대를 맡았다. 그 남자 는 영어 회화에는 아주 자신만만한 사나이로, 어떤 영어 모임에나 빠짐없이 참석하여 일본 인과도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또한 영어로 연설하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 다. 그는 무슨 말이든 따고 나면 아주 우습다는 듯이 껄껄 웃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영국인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다이스케는 저런 행동만큼은 삼가는 것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집 딸의 영어 실력도 대단했다. 그녀는 미국 부인을 가정교사로 두고 영어 공부를 한 어느 부잣집 딸이었 다. 다이스케는 그녀를 생김새와는 달리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면서 대단히 감탄하며 듣고 있었다. 다이스케가 그 원유회에 초대받은 것은, 그 집 주인이나 그 명국인 부부와 개인적으로 친 분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의 아버지와 형의 사교적 세력의 여파로 그에게도 초 대장이 보내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리저리 빠짐업이 돌아다니며 적당히 머리를 숙이고 인 사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형과도 얼굴을 마주쳤다. "야, 왔구나! " 하고 형은 입으로만 인사말을 한 채 모자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날씨가 아주 좋은데요. " "아, 정말 좋은 날이구나. " 다이스케의 키도 그다지 작은 편은 아니지만, 형은 키가 유난히 컸다. 게다가 최근 5,6년 사이에 몸이 점점 불어 풍채가 아주 좋아 보였다. "어떠세요, 저쪽에 가서 외국인과 이야기따도 나누시는 것이 ?" "아니, 난 그런 건 딱 질색이다" 하고 말하며 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큰 배 위에 늘어져 있는 금사슬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어쨓든 외국인은 장단을 잘 맞추는군요. 아니, 좀 지나칠 정도지요. 저렇게 칭찬을 하게 되면, 날씨도 반드시 좋아져야만 하지 않겠어요. ? " "오늘 날씨가 그렇게 좋단 말이니 ? 좀 더울 것 같지 않니 ?" "좀 덥긴 합니다. " 세이고와 다이스케는 약속이나 한 듯이 하얀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를 닦았다. 두 사람은 무거운 비단 모자를 쓰고 있었다 형제는 아무도 없는 잔디밭 나무 그늘까지 갔다. 저뛴에서는 여흥이 시작되었는데, 세이고 는 집에 있을 때와 같은 얼굴로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형처럼 되면, 파티에 초대받아 와도 집에 있을 때나 기분이 같겠지. 이런 식으로 세상살 이에 익숙해져버리면 만사가 시시하게만 여겨지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다이스케는 세 이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늘 어떻게 지내실까요?" "아버지는 한시모임에 가셨다. " 세이고는 여전히 평상시와 같은 얼굴초 대답했으나, 다이스케는 약간 우습게 여겨졌다. "그럼 형수님께서는 ? " "집에서 손님들이나 접대하지 뭐." 형수가 또 불평을 하리라꼬 생각하니 다이스케는 다시 우스워졌다. 다이스케는 세이고가 항상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 바쁜 일의 대부분은 여러 가지 모임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다지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불평 한마디 없이 불규칙하개 술을 마시며, 여자를 상대하면서도 피로한 모습이나 떠드는 기색도 나타내 지 않고 복잡한 새상사를 잊은 듯이 해가 갈수록 몸이 좋아지는 재주에 탄복하고 있었다. 새이고가 술집에 가거나, 요리집에 가거나, 만찬과 오찬에 초대받거나, 구락부에 가거나, 전송 차 신바시에 가거나, 요코하마로 사람을 맞으러 가거나, 오오이소로 문안 인사를 가는 등, 아침부터 밤까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모습을 나타내면서도 잘난 체하거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니지 않는 것은 그러한 생활이 몸애 배어 마치 해파리가 바다에 떠 있으면 서 소금물을 짜게 느끼지 않츤 것과 같을 것이라고 다이스케는 생각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바로 형의 그러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세이고는 아버지와 달라서, 예전부터 다이스케에게 듣기 싫은 설교 따위는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어던 주의라든지 주장 이라든지 인생관과 같은 딱딱한 이야기는 아예 입밖에 내지도 않으므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렇게 딱딱한 철학적 이야기를 무조건 듣기 싫 어한 적도 없었다. 다이스케는 형이 그렇게 평범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다이스케는 그다지 재미는 없어도, 말벗으로 형보다 형수 쪽이 훨씬 편했다. 형은 만나기 만 하면 어김없이 요즘 어떠냐? 하고 시작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탈리아에 지진이 있 었지 않느냐? 터키의 황제가 퇴위하지 않았는가. 그밖에 무코지마의 벚꽃은 이제 다 져버렸 다. 요로하마에 있는 외국선의 밑바닥에는 큰 뱀을 기르꼬 있었다. 누군가가 기차에 치어 죽었다는 등 모두 신문에 보도된 것들이었다. 그 대신 다이스케의 비위를 건드리는 화데는 좀처럼 입밖에 내는 일이 없었다. 형은 언제나 화제가 끊이지 라는 듯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톨스토이란 사람은 이미 새상을 떠났느냐는 등의 모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현재 일본의 소설가로서는 누가 제일 훌륭하냐고 물어볼 때도 있었다. 요컨대 문학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관심하고 또한 놀랄 정도로 무식하니만 존경좌 정멸을 넘어서 태연하 게 물어보기 때문에 다이스케도 언제나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그러한 형과 마주앉아 이야기 를 나누다보면, 재미는 없지만 집요한 점이 없어서 마옴이 편했다. 형은 아침부터 밤까지 밖에서만 돌기 때문에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형수나 아들 인 세이타로, 딸인 누이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이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서 가족과 함깨 새끼 식사를 할 때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 될 정도였다. 따라서 나무 그늘에 서서 형파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다이스케는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형님, 할 이야기가 있는데요. 언제쫌 시간이 나겠습니까?" "시간 ? " 하고 물은 세이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웃었다. "내일 아침은 어떻습니까?" "내일 아침엔 요코하마까지 갔다와야 할 일이 있지." "그럼 오후는요 ? " "오후엔 회사에 있긴 하지만 좀 상담할 일이 있으니 오더라도 여유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 지." "그럼 밤에나 만나뵈야겠군요. " "밤엔 제국호텔에 가야 해. 그 영국인 부부를 내일 밤 제국호텔로 초대하기로 되어 있으 니 안되겠구나." 가이스케는 뽀로통한 얼굴로 형을 적다보다가 그만 형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급한 일이라면 오늘이 어떠냐? 오늘은 시간이 좀 있다. 오래간만에 식사라도 함 께 할까?" 다이스케는 그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클럽에라도 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형 은 장어구이가 좋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비단 모자를 쓰고 장어구이집에 가는 것은 난생 처음인데요" 하고 말하면서 다이스케는 망설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 " 형제는 원유회에서 빠져나와 인력거를 타고 가나스키 다리 옆에 있는 장어구이집으로 들 어갔다. 그 음식점은 냇물이 흐르는데다 버드나무까지 있어 매우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다이스케는 검은 칠을 한 상좌의 장식 기둥옆에 있는 선반에 비단 모자를 올려놓으며 이상 하군 하고 말했다. 그러나 문을 활짝 열어둔 채 2층 방에 단둘이 책상다리를 하고 마주앉 아 있는 것이, 원유회보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은 기분좋게 술을 마셨다. 형은 마시고 먹고 잡담을 하면 그밖에 할 일은 언다는 듯한 태도였다. 다치스케도 하마터면 하려던 이야기를 잊어버릴 뻔했다. 그라나 여종업원이 세번째 술병을 두고 나갔을 때야 비로소 하려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요전에 미치요에게 부탁받은 돈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다이스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세이고에게 염치없이 돈을 부탁한 적이 없었다. 하긴 학교를 톨업한 후 몇 번인가 기생집 출입을 하고 형에게 그 뒷처리를 덮어씌운 적은 있었다. 그때 형은 뜻밖에도 조금도 흔내지 않고, 그래 ? 한심한 놈이군.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두자고 말하고 형수를 통해서 외상값을 모두 갚아주었다. 그후 용돈이 궁할 때마다 형수를 괴롭혀서 뒷처리를 하곤 했다. 따라서 이 런 사건에 관해서 형과 의논하는 것은 아마도 처음인 것 같았다. 다이스케의 입장에서 보면, 세이고는 마치 손잡이가 없는 주전자와 같아 이야기를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얼었다. 그러나 다이스케로서는 바로 그 점이 흥미가 있었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 부부의 이야기를 잡담 형식으로 슬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피고는 귀찮다는 표정도 짓지 않고 그래, 그래 하면서 박자까지 맞추며, 술을 마시면서 다이스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점점 무르 익어 미치요가 돈을 빌리러 왔다는 이야기까지 했는데도 형은 역시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다이스케는 할수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마련쌔보겠다고 약속을 했지요. " "웅, 그래 ? " "어떻습니까 ? " "그래, 네 힘으로 돈을 해줄 수 있느냐?" "저는 한푼도 마련할 수 없지요. 빌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 "누구에게 ? " 다이스케는 처음부터 여기까지 이야기할 생각이었으므로 명백한 말투로 "형님께 빌릴 생 각입니다"라고 말하며 새삼스럼게 세이고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형은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그런 부탁일랑 거절해버려라" 하고 대답했다. 세이고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들어보면, 그런 식으로 남을 돕는 것은 의리나 인정에 관계 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갚을지 안 갚을지 알 수 없는 손득을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그러한 경 우에는 내버려두면 자연히 해결된다는 단순한 단정이었다. 세이고는 그 단정을 중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예를 들었다 세이고의 집안 사람 중에 후 지노라는 사나이가 있는데, 그는 연립주택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최근에 후지노의 먼 친척 이 되는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후지노의 집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그 아들은 후지노의 집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징병 검사를 받기 위해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 는데, 미리 고향에서 보내온 학비와 여비를 후지노가 써버렸다며 세이고에게 돈을 좀 빌려 달라고 부탁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세이고가 직접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로 하여금 그 부탁을 거절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정해진 날까 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무 지장 없이 징병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후지노의 친척 중 한 사람이 받아둔 전세보중금을 그만 다 써버렸는데 세든 사람이 내일 이사한다고 하는데도 아직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하니까 그때도 후지노가 찾아와서 눈물로 호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이고는 그 부탁도 거절케 했다. 그랬지만 별다른 지장 없이 보증금을 내주었다 는 것이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일이 있었으나, 모두 그런 종류의 예뿐이었다. "그러나 틀림없이 형수는 형 몰래 그 부탁을 모두 들어주었을 거예요. 하하하... 형님도 참 순진하시군요"라고 말하며 다이스케는 큰 소리로 웃었다. "행여 그랬을라구 ? " 세이고는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앞에 있는 작은 사기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 다. 6 그날 세이고는 좀처럼 돈을 빌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이스케도 미치요가 불쌍하 다느니 가엾다는 등의 동정적인 말은 되도록 피하려 했다. 미치요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이 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형을 납득시키려면 그런 말로는 도저히 안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감상적인 말을 했다가는 형에게 무시당할 뿐만 아니라, 형은 평 소에도 자기를 비웃는 듯하기 때문에'역시 평소의 다이스케답게 사소한 이야기를 늘어놓으 며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도 아버지가 자기에게 열의가 부족하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런 태도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이스케도 눈물을 흘리면서 남을 감동시키려고 할 정도의 저속한 취미에 젖지는 않았다고 자신했다. 또한 그는 아무리 답답해도 아양을 떨 고, 눈물과 번민과 진지함과 열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어러석은 행동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형은 결코 그런 데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다이스케는 그러한 잔외를 부리 다 실수나 하게 되면 일생 동안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밖에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술을 더 마심에 따라서 점점 돈 문제에서 멀어져갔다. 다만 형과 마주앉아 있 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다는 듯이 떠들어댔다. 그러다 찬물에 밥을 말아 먹자 갑자기 무슨 생각이나 난 듯이 돈을 빌려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히라오카를 취직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안돼, 그런 사람은 싫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은 불경기라 자리가 없어" 하고 말한 뒤 세 이고는 급히 밥을 먹었다. 다음날 다이스케는 눈을 뜨자마자 이렇게 생각했다. '형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동료 실업가를 동원해야 한다. 형제간의 우애만으로는 형을 설득시킬 수 없다. ' 이렇게 생각은 했지만, 형을 몰인정한 사람으로 여기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셩이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자기가 기생집을 드나들며 외상을 진 술값을 형이 아무 말없이 갚아준 일을 생각하자 우습기만 했다. 그렇다면 자기가 지금 여기 서 히라오카를 위해 도장을 찍고 연대 보증이라도 선다면 어떻게 나올지, 역시 그때와 마찬 가지로 깨끗이 처리해줄까. 형은 그것까지 생각하고서 거절한 것일까. 혹은 자기가 그런 무 리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 처음부터 안심하고 빌려주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었 다. 현재 다이스케의 처지는 도저히 남을 위해 도장을 찍어줄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다이스 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이 그 점을 알아차려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면 조금 다른 방법으로 연대 보중을 서서 형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 도 들었다. 그러자 다이스케는 자기도 그다지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쓴웃 음을 지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었다. 조만간 허라오카는 틀림없이 차용 중 서를 들고 자기 도장을 받으러 올 것이다. 다이스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방을 나섰다. 가도노는 식당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으나 젖은 머리로 욕실에서 나온 다이스케를 보자마자 갑자기 앉은 자세를 고치고 신문을 접어 방석 옆으로 밀어두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저런, 매연은 큰일났습니다. " "자네, 그걸 계속 읽고 있었나?" "네, 매일 아침 읽고 있습니다. " "재미있나?"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 "어쩐지라니?" "어쩐지라뇨? 그렇게 정색을 하고 물으시니 대답하기 곤란하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체 로 현대의 불안감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통속적인 냄새는 나지 않나?" "납니다 몹시나죠." 다이스케는 홍차 찻잔을 손에 든채 서재로 돌아가 의자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뜰을 바라보 았다. 뜰에는 혹투성이인 석류의 마른 가지와 잿빛 줄기의 아래쪽에 어두운 녹색과 분홍색 이 뒤섞인 것처럼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다이스케의 눈에는 그것이 잠깐 들어왔을 뿐 곧 자극을 잃어버렸다. 다이스케의 머리속에는 지금 어떤 구체적인 생각이 멈추어 있지 않았다. 그의 사고 능력 은 마치 바깥 날씨처럼 꼼짝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미진과 같은 정체 불명의 것이 무수히 서로 밀고 있었다. 치즈 안에서 벌레가 제아무리 움직여도 치즈가 그 위치에 있는 동안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다이스케도 그 미진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어 다. 다만 그것이 생리적으로 반사해올때, 의자 뒤에서 몸을 옮겨여만 goTEk. 다이스케는 요즘 유행하는 현대적이라든지 불안이라는 낱말을 입밖에 내는 일이 거의 없었 다. 그것은 자기가 현대적이라는 것을 애써 나타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현대적이기 위해서 반드시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이스케는 러시아 문학에 나오는 불안을 기후상태와 정부의 압력으로 인한것이라고 해석 하고 있다. 프랑스 문학에서의 불안은 유부녀의 강간이 많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리 고 단눈치오에 의해 대표되는 이탈리아 문학에서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는 타락으로 인한 자기결손의 느낌이라 판단하고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문학가가 사회를 묘사하는 데 있어 불 안의 측면을 내 세우는 것은 그러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학창 시절에 다이스케는 사물을 이지적으로 의심하곤 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진행되다 가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향하여 돌을 던진 것과도 같은 이 치였다. 돌이켜보면 하늘에다 대고 공연히 돌을 던지는 일일랑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 이 들었다. 선승의 대의현전이라는 경지는, 다이스케로 서는 아직 밟아본 적이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다이스케는 만사를 그렇게 솔직하고 성급하게 의심하기에는 너무도 머리가 좋았 다. 다이스케는 가도노가 칭찬한 소설 (매연)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지 신문을 흥차 찻잔 옆에 둔 채 펴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단눈치오의 주인공은 모두 돈에 쪼들리지 않는 남자이므로 사치스런 생활을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매연)의 주인공은 그 럴 여유가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거기까지 밀고 가는 데도 오로지 애정의 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요키치란 인물이나 도모코란 여자는 참된 사랑으 로 인해 어쩔수 없이 사회에서 냉대당하는 일은 얻었다. 그들을 움직이는 내면의 힘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데 생각이 미씨자, 다이스케는 의아해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경우에 처해 그러한 일을 단행할 수 있는 주인공은 아마도 불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일을 단행하는 데 주저하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오히려 불안에 휩 싸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흔자서 곰곰이 생각할 때마다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요키치야말로 자기보다는 휠씬 특별한 사람이라 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는 단순히 호기심에 이끌려 (매연)을 읽었으나, 요즈음에는 요키치와 자기는 비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종종 읽지 않는 때도 있었다. 다이스케는 의자 위에서 이따금 몸을 움직였다. 그런 식으로 자기는 꽤 침착한 상태라 생 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흥차를 마시고는 여느때와 같이 독서를 시작했다. 두 시간 정도는 아 무런 지장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으나, 마침내 어떤 페이지 중간에 이르자 갑자기 책에서 눈을 떼고 턱을 괸 채 옆에 있던 신문을 들고 (매연)을 읽었다. 호흡이 맞지 않는 것은 마찬 가지였다. 그러고 나서 다른 자질구레한 기사를 읽었다. 오오쿠마 시게노부가 고등상업학교 의 분규를 확대시키고 있는 학생측 편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주 강경한 말로 나와 있 었다. 다이스케는 그러한 기사를 읽으며 그것은 오오쿠마가 학생들을 와세다대학으로 유도 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문을 내던졌다. 오후가 되자, 다디스케는 자신이 안정을 잃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뱃속 에 무수히 많은 작은 주름이 생기고, 그 주름이 서로의 위치와 형상을 끊임없이 바꾸어 전 면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이스케는 가끔 그러한 감각의 지배를 받 는 일이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경험을 오늘날까지 단순한 생리상의 현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어제 형과 함께 장어구이를 먹은 것이 약간 후회되었다. 그는 산책을 나 간 김에 히라오카의 집에 가보려는 생각이 들자 산책이 목적인지 히라오카를 찾아가는 것이 목적인지 자기로서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에게 옷을 내달라고 하여 갈아입으 려고 하는메, 조카인 세이타로가 왔다. 조카는 모자를 손에 든 채 귀여운 등근 머리를 다이 스케 앞으로 내밀고 의자에 걸터 앉았다. "벌써 학교가 끝났니 ? 아주 빨리 끝났구나." "조금도 빠르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세이타로는 웃으면서 다이스케 의 얼굴을 쳐다보았 다. 다이스케는 손벽을 쳐서 아주머니를 불렀다. "세이타로, 초콜릿을 마실래 ? " "네" 다이스케는 아주머니에게 초콜릿 두 잔을 가져오라고 한 뒤 세이타로에게 장난을 걸기 시 작했다. "세이타로, 너 요새 야구만 하더니 손이 아주 커졌구나. 머리보다 손이 더 큰데." 세이타로는 빙긋이 웃으면서 오른손으로 둥근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아이의 손은 정말 컸다. "어제 아버지가 숙부님에게 한턱내셨다먼데요." "그래, 잘 얻어먹었지. 덕분에 오늘은 뱃속이 편치 않아." "또 신경성이시군요. " "신경성이 아니라 진짜야. 이게 다 네 아버지 때문이다. ' "하지만 아버지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던데요." "뭐라고 ? " "내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숙부 집에 가서 맛있는 걸 얻어먹으라고요. " "옮아, 어제의 답례로 말이지 ?" "네. 오늘은 내가 한턱냈으니 내일은 숙부 차례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로구나." "네." "형님 아들이라 아주 빈틈이 없구나. 그러니 지금 초콜릿을 마시면 되잖니. " "초콜릿 정도로는... " "그럼 안 마실래 ? " "마시기야 하겠지만- . " 세이타로의 주문을 자세히 들어보니, 씨름이 시작되면 자기를 에인으로 데려가서 정면의 최상등 좌석에서 관람을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다이스케가 쾌히 승낙하자, 세이타로는 아주 즐거워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숙부님은 지금 놀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아주 훌륭하다던데요. " 다이스케도 그 말에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할수없이 이렇게 대꾸했다. "그 훌륭하다는 말의 뜻은 뻔하지 않겠니 ?" "하지만 저는 그 말은 어젯밤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들었는데요" 고 세이타로는 변명했다. 세이타로의 말에 의하면, 어젯밤 형은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와 형수 이렇게 셋이서 다이 스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며 이야기를 나눈것 같았다. 아이가 말하는 것이니 정확한 내용 은 알 수 없지만, 비교적 머리가 좋은 아이이므로 그때의 말을 단편적으로나마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이스케를 도저히 회망이 없는것 같다고 평한 것 같았다. 그런 아버지에 비해 형은, 비록 지금은 저렇게 지내고 있지만 아는 건 많은 놈이니 당분간 그대로 지켜보 는 것이 나을 것 같고 큰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무슨 일을 할 것이라고 변호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형수가 그 말에 맞장구를 치고, 1주일 전 에 점장이를 찾아갔더니 이 사람은 틀림없이 남보다 높은 위치에 설 것이라며 회망적인 말 로 안심시키더라는 것이었다. 다이스케는 옹, 그리고? 하고 대꾸하며 계속 재미있게 듣고 있다가 점장이 이야기가 나오 자 너무나 우스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곧 옷을 갈아입고 세이타로를 배웅하기 위해 밖 으로 나다가 히라오카의 집을 찾아갔다. 히라오카의 집은 10여 년 동안 계속된 인플레에 따라, 중류층이 절약을 생활화하며 그것 을 고려하여 지은 집이라 구조 자체가 매우 초라했다. 다이스케에게는 더욱 그렇게 보였다. 문과 현관 사이가 1미터 8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부엌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고 뒤에나 옆에도 같은 구조의 비좁은 집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도쿄시의 미약한 팽창에 편승하여 그다지 많은 돈을 지니지 않은 자본가가 얼마 되지도 않는 원금을 2할 내지 3할의 비싼 이자로 회전시킬 속셈으로 인색하게 만들어낸 생존경쟁의 대표물이었다. 오늘의 도쿄시, 특히 도쿄시 변두리에는 가는 곳마다 그런 종류의 집들이 아주 많았다. 그 뿐만 아니라 장마철씌 벼룩처럼 날마다 눈에 띄게 늘었다. 다이스케는 일찍이 그런 현상을 패망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현재의 일본을 가장 잘 대표하는 상징물 로 보았다. 그 집들 중에는 석유통 밑바닥을 이어서 맞춘 다음 4각의 비닐을 덮어씌운 것도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집에 세들어 살다보면 밤중에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에 잠을 깨기 일쑤였다. 또한 문에는 반드시 옹이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미닫이는 틀림없이 고장이 나게 되어 있었다. 늘 돈만 생각하며 매달 그 이자를 받아서 생활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곳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히라오카도 그러한 사람들중 하나였다. 울타리 앞을 지날 때, 다이스케는 무엇보다도 그 지붕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거무틱틱한 기와가 묘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 광택이 없는 그 흙 판자는 물을 얼마든지 흡수할 것 같았 다. 현관 앞에는 요전에 이사할 때 끌어놓은 거적의 짚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다이스케가 객실로 들어갔을 때, 히라오카는 책상 앞에 앉아서 긴 편지를 쓰고 있던 중이었 다. 미치요는 옆방에서 장농 고리를 덜거덕거리고 있었다. 곁에 큰 도리짝이 열려져 있고, 안에서 곱고 긴 속 옷 소매가 밖으로 반쯤 나와 있었다. 히라오카가 미안하지만 잠깐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동안에도, 다이스케는 고리짝과 긴 속 옷, 그리고 가끔 고리짝 속으로 떨어지는 가는 손을 보고 있었다. 미닫이는 열려 있었으나 미치요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히라오카는 붓을 책탕 위에 내던지듯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엇인가 복잡하 게 얽힌 일을 열심히 쓰고 있어서인지 귀가 발갛게 달아 있었고 눈도 충혈되어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요전에는 여러 모로 고마됐네. 그러잖아도 고맙다는 인사라도 할 겸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여지껏 못 가고 말았군. " 히라오카의 말은 변명보다튼 오히려 도전적으로 들렸다. 그는 셔츠도 남방도 입지 않고 바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옷깃을 바르게 맞추지 않았기 때문에 가슴이 약간 나와 있었 다. "아직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겠군?" 하고 다이스케가 물었다. "아직이 아니라, 이대로 가다가는 평생 안정되지 못할 것 같아" 하고 말한 히라오카는 성 급하게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가 왜 그러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다 이스케에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자기 자신에게 그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그가 가엾게 여겨졌다. 그러나 다이스 케는 히라오카의 그런 태도가 몹시 불편하게 생각되었다. 다만 화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집은 마음에 드나? 방 배치는 괜찮은 것 같은데." "응, 글쎄 나빠도 할수없지. 마음에 드는 집에 살려면 주식에라도 손을 대는 수밖에 없을 거야. 요즘 도쿄에 세워지는 고급 주택은 모두 주주들이 짓고 있다고 하잖나. " "그럴지도 모르지. 그 대신 그런 고급 주택 란 채를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집들을 허물 고 있는지 모른다네." "그러니 더욱 살기 좋게 되는 거지." 히라오카는 그렇게 말하고 껄껄 웃었다. 그때 미치요가 나왔다. 그녀는 요전에는, 하고 다 이스케에게 가볍개 인사를 하고 앉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빨간 플란넬을 내려놓으며 다이 스케에게 보였다. "뭡니까, 이게 ? " "까기 옷이예요. 만들어둔 채 아직 풀지 않고 그대로 두었었는데, 방금 고리짝 밑을 보니 이것이 있더군요"라고 말하면서 미치요는 끈을 풀더니 통소매를 양쪽으로 폈다. "원 세상에 ! " "아직도 이런 것을 그대로 두었나? 빨리 뜯어서 걸레나 만들어요. " 미치요는 애기 옷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없이 잠시 내려다보았다. "당신 것과 똑같이 만들 거애요"라고 말하며 그녀는 남편 쪽을 보았다. "이렇게 ? " 히라오카는 비백무늬의 천으로 만든 겹옷 밑에 플란넬을 겹쳐서 맨몸에 입고 있었다. "이제 이건 못 입겠어. 더워서 말이야." 다이스재는 비로소 옛날의 히라오카를 보는 것 같았다. "겹옷 밑에 플란넬을 껴입으면 이펙 돔 덥지. 속옷으로 충분해." "글쎄, 귀찮아서 입고 있지만." "세탁할테니 벗으시라고 해도 좀처럼 벗지 않으세요." "아니, 이제 벗지, 나도 이젠 입기 싫다구 "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처음보다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다. 히라오 카는 오래간만에 한잔하자고 말했다. 미치요도 술상을 준비할테니 천천히 가시라며 부탁이 라도 하듯이 다이스케를 붙잡더니 옆방으로 갔다. 다이스케는 미치요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어떻게 해서든지 부탁한 돈을 마련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네, 일자리는 구했나?" 하고 다이스케가 물었다. "글쎄, 곧 될 것 같기도 바고 안될 것 같기도 하군. 안되면 당분간 놀아야지 어쩌겠나. 천 천히 찾다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뭐." 침착한 말투였지만, 다이스케의 귀에는 오히려 초조하게 들렸다. 다이스케는 어제 형과 이야기했던 것을 히라오카에게 알려주려고 생각했으나 그 한마디를 듣고 잠시 보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돈 문제에 관해 히라오카와 아직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따라서 굳 이 입밖에 낼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렇게 말없이 있으면, 히라오카로서는 내심 무정 한 놈이라고 언짢게 생각할 것이 뻔하지만, 지금 다이스케로서는 그런 비난에 대해서 거의 무감각한 상태였다. 또한 사실 자기는 그런 말을 들어 마땅할 정도로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3,4년 전의 자신을 돌이켜볼 때 지금의 자신은 너무나도 타락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 자기는 분명히 도의심을 떠벌리며 뽐내고 다녔다. 그러나 지 금은 도금한 것을 진짜 금이라 속여 야비하게 돈을 마련하는 것보다도 놋쇠를 떳떳하게 놋 쇠라 하고 거기에 따르는 멸시를 참는 편이 훨씬 더 편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이스케가 자기 자신을 놋쇠로서 감수하게 된 것은, 뜻밖에 엄청난 재난에 휘말려 놀란 나머지 마음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는 소설 같은 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그 자신의 사색과 관찰력에 의해서 스스로 도금을 조금쌕 벗겨온 것에 불과했다. 다 이스케는 그 도금의 대부분을 아버지가 자기에게 덮어씌운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 무렵에 는 아버지가 긍으로 보였다. 많은 선배도 금으로 보였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 역시 모두 금으로 보였다. 따라서 자신의 도금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하루 빨리 금이 되고 싶어서 안달복달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바탕쇠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에는 갑자기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이스케는 또한 이렇게도 생각했다. 3,4년 동안 자기도 이렇게 변했으니, 그동안 히라오 카도 그만큼 변했을 것이라고. 옛날 같으면 히라오카로부터 호감를 사려는 마음으로 이런 경우에 형과 싸우거나 아버지와 말다툼을 해서라도 히라오카를 위해 힘을 썼을 것이다. 그 리고 자기가 그렇게 애썼다는 것을 히라오카에게 지나칡 만큼 과장해서 전했을 것이다. 그 러나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로, 지금의 그는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그 정도로 있지는 않았 다. 그래서 중요한 이야기는 한두 마디로 끝내고 나머지 시간은 이런 저런 잡담을 하며 보냈 다. 그러는 동안 미치요가 술상을 들고 와서는 술을 따랐다. 히라오카는 취기가 오르자 말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취해도 좀처럼 자세 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로 히라오카는 힘이 솟는 듯 어조 또한 즐거움이 넘쳐흘렀다. 그렇게 되면 히라오카는 보통 술꾼 이상으로 말이 유창해지고, 때로는 비교적 진지한 문제를 꺼내서 상대방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했다. 다이스케는 그 옛날, 맥주병을 늘어놓은 가운데 히라오카와 자주 싸웠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히라오카는 그런 상태에 빠졌을 때가 의견을 나누기에 가장 쉽다는 것이었다. 또한 히 라오카는 술을 마시고 본심을 틸어놓을까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오늘 두 사람 사이는 그 당시에 비해 상당히 거리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거리 감을 다시 메우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도쿄에 도착한 다음날, 3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어느 사이에 어로 멀어졌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히라오카의 옛날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술기운이 적당히 올라 기분이 좋아지자 히라오카는 현재의 경제 사정과 당장 해결해야 할 생계 문제,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걱정거리나 불평, 또한 가슴 밑바닥에서 소용돌이치고 있 는 것자지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히라오카의 이야기는 갑자기 높은 평면으로 뛰 어올랐다.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일어서 있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일할 생각이다. 자네 는 내가 실패한 것을 비웃고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말은 비웃는다는 거나 마찬가지 니 상관없다. 그렇지 않나? 자네는 비웃고 있다. 츠러나 그런 자네는 아무 일도 안하고 있잖 온가? 자네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의지를 발전시킬 수 엄는 사람이다. 의지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을 것이 다. 나는 나의 의지가 현실에 맞게 조금이나마 반영되었다는 확증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통해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자네는 단지 생각만 하고 있다. 그 렇다면 자넨 내면 세계와 외면 세계가 완전히 분리된 가운데 살고 있는 거지. 그렇게 엄청 난 부조화를 참고 있는 것 자체가,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크나큰 실패가 아니겠는가. 그 이유를 말해줄까? 내 경우에는 그 부조화를 밖으로 드러낸 것이고, 자네 경우에는 안으로 넣어두었다는 차이일 뿐, 사실 밖으로 드러난 만큼 내 쪽의 실패율이 낮을지도 모르지. 하지 만 나는 자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있어. 그런데 나는 자네를 비웃을 수 없어. 아니, 비웃고 싶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비웃을 수가 없는 거지. " "비웃어도 상관없어. 자네가 나를 비웃기 전에 나는 이미 나 자신을 비웃었으니까. " "그건 거짓말이다. 그렇게 생각지 않나, 미치요?" 미치요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남편의 갑작스런 질문에 빙그레 미소를 짓고 다이스케 를 보았다. "그건 사실입니다, 미치요님" 하고 말하면서 다이스케는 잔을 내밀어 술을 받았다. "그건 거짓말이야. 집사람이 자네를 아무리 변호해준다 해도 그건 거짓말이다. 자네가 다 른 사람을 비웃든 자네 스스로를 비웃든 모두 마음속으로 하는 일이니, 거짓인지 진실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긴 하지만 ..." "그런 농담일랑 그만두게나. " "농담이 아니야, 진심으로 하는 말일세. 하긴 옛날의 자네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동안 너무 나 변했군. 이봐 미치요, 나가이는 누가 보아도 자신만만한 태도지 ? " "아까부터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당신 쪽이 훨씬 더 심한 것 같군요. " 미치요의 말에 히라오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미치요는 술병을 들고 옆방으로 갔다. 히라오카는 상 위에서 안주를 두세 점 집으려다가 갑자기 얼굴을 숙이고 뭐라 중얼거리더 니 곧 거슴츠레한 눈을 들고 말했다. "오늘은 정말 고래간만에 기분좋게 취했군. 이봐, 자넨 기분이 좋지 않나? 자네, 괘씸하기 짝이 없어. 나는 옛날의 히라오카 쓰네지로로 돌아갔는데도, 자넨 옛날의 나가이 다이스케가 아니니 말이야. 제발 옛날의 자네가 되어주게. 그리고 좀 대범해지게. 나도 이제부터 노력할 테니 자네도 그렇게 해주게나." 다이스케는 그 말을 듣고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진실하고 순수한 노력을 인정 하고 그것에 감동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저께 먹은 빵을 지금 내놓으라고 조르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자네는 술을 마셔도 몸만 취하지 정신은 맑은 사람이기에 나도 한마디 하겠네만 . " "바로 그거야, 그래야만 나가이군이지. " 다이스케는 갑자기 말을 하기가 싫어졌다. "자네, 머리는 정상이지 ?" 하고 다이스케가 물었다. "정상이고말고. 자네만 정상이라면 나는 언제나 정상이지." 허라오카는 그렇게 대꾸하더너 다이스케의 얼굴을 물Rm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 다이 스케의 말대로 정신은 맑은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이스케는 하려던 말을 꺼냈다. "자네가 아까부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며 나를 공격했는데, 사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 자네의 공격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생각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지." "왜 일을 않나?" "왜냐고? 그건 내 탓이 아니야. 다 이 세상 때문이지. 좀더 심하게 표현하면 우리 일본과 서양의 관계가 나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 거야. 첫째, 일본만큼 빛을 띠고 가난에 시달 리는 나라는 없지 않나? 자네는 이 빛을 언젠가는 갊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외채 정도야 갚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거든. 일본은 서양에 빛을 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명맥을 이어나갈 수 업는 나라란 말일세. 그러면서도 선진국임을 자처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그 대열에 끼여들려 하고 있어. 그렇기 때문애 주위의 사소한 것들은 저버린 채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건데, 그게 다 억지로 확장한 것이어서 더욱 딱한 노릇이지. (이솝우화)에 나오는, 소와 싸우는 개구리와 같은 격이지 뭔가. 자네, 이제는 배가 갈라질걸 세. 고 영향이 우리 개개인애게 미칠테니 똑바로 보게나. 이렇듯 서양의 압박하에 있는 우리 국민들이기에 마음의 여유가 업고 일다운 일을 할 수 없는 거라구. 모두 긴장된 상태로 교 육을 받고 혹사당하다보니 너나 할 것 없이 신경이 쇠약해질 수밖에. 어디, 자네 말 좀 해보 게. 대체로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일과 눈앞의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 지 않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으니 어쩌겠나, 불행히도 정신적인 가난과 신체적인 허약함 을 함께 지녔다고나 할까. 그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는 타락한 일면도 따르게 되지. 우리나 라 어디를 둘러보아도 밝은 면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잖나. 방방곡곡 온통 암흑이라구. 그런 가운데 나 흔자 무슨 말을, 무슨 일을 해봐야 뭐하겠나. 나는 원래 나태한 사람이지. 아니, 자네와 가까이 지낼 때부터 그랬었지. 그때는 무슨 일이든 자신만만한 체하며 다녔으니, 자 네의 눈에는 앞날이 밝은 것처럼 보였을걸세. 하긴 지금이라도 일본 사회 가 정신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건전하다면 나는 앞날이 밝아지겠지. 그렇게 되면 할일은 얼마든 지 있을테니까. 또한 나태한 나를 자극시킬 만한 요소는 얼마든지 생길 거라고 생각하네. 그 러나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불가능하지. 지금으로선 오히려 그냥 이렇게 지낼 수밖에 없어. 그래서 자네가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순수 하게 받아들여서 그 중에서 나에개 가장 적합한 것과 접촉하며 거기에 만족하고 있네. 나아가서 남들을 내 생각대로 한다는 것은 도 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이스케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고 나서 거북하게 앉아 있는 미치요를 향해 말을 걸었 다. "미치요님,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아주 여유만만하지요? 제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합니까 ? " "어쩐지 염세적인 것 같기도 하고, 여유만만한 것 같기도 하군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 지만 자신의 마음을 좀 속이고 계신 것 같아요. " "허. 어떤 점이 말입니까? " "어떤 점이라뇨? 여보, 당신" 하고 미치요는 남편을 쳐다보 았다. 히라오카는 허벅지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을 괸 채 말없이 있다가, 술잔을 다이스케 앞으로 내밀었다. 다이스케도 말없이 잔을 받았다. 미치요는 다시 술을 따랐다. 다이스케는 술잔에 입술늘 대면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엄다고 생각했다. 원래 히라오카 로 하여금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꺼낸 말도 아니고, 또한 히라오카에게 훈계 를 듣기 위해 방문한 것도 아니었다. 히라오카와 자기는 각자 서로 다른 운명을 지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이야기를 적당히 끝내고, 미치요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갈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히라오카는 취하면 끈질기기 이를 데 없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빨개진 가슴을 내밀고 말했다. "그것 참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정말 재미있군. 나처럼 어려운 처지에서 형식과 고전하고 있는 놈은 그런 건 생각할 수도 없지. 우리 나라가 아무리 빈약하고 나약하다 해도 일하고 있는 동안엔 그런 건 까맣게 잊고 있으니까 말이야. 세상이 타락해도 그걸 알지 못하는 것 은 그동안에도 일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지. 자네같이 한가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빈곤과 우리들의 타락이 걱정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 사회에 쓸모없는 방관자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일세. 다시 말해서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볼 여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되 는 거라구. 일에 쫓겨 바쁘다보면 자기의 얼굴에 신경쓸 겨를이 어디 있겠나 ? " 히라오카는 이렇게 말하는 동안, 자연히 이 비유에 부딪쳐 자기 쪽이 크게 얻어맞은 듯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었다. 다이스케는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히라오카는 곧 뒤를 덧붙였다. "자네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라구. 생활에 어려움이 없으니까 일할 생각이 나지 않는 거야. 그리고 부잣집 도련님이시니 고상한 말만 하고 말이야. " "일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일이 생활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진 짜 가치있고 신성한 노력은 먹고사는 일과는 무관한 것이지. " 히라오카는 이상하게 불쾌한 표정으로 다이스케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렇게 물었다. "왜 ?" "왜라니 ? 생활을 위한 노력은 노력을 위한 노력이 아니기 때문이지. " "나는 논리학의 명제 같은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 게 쉽게 말해주게나." "즉 먹고살기 위한 일은 성실하게 할 수 없다는 뜻이지." "내 생각과는 정반대로군. 나는 먹고살기 위한 것이기에 더욱 열심히 일한다는 생각을 갖 고 있지." "열심히 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실하게 일하기는 어렵지. 먹고살기 위한 일은, 먹 고사는 것과 일하는 것 어느쪽이 목적이라고 생각하나 ? " "물론 먹고사는 쪽이지. " "그것 보게. 먹고사는 쪽이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수단이라면, 먹고살기 쉽게 일하는 방법 을 찾게 마련 아니겠나.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 또한 어떻게 일하든 아무 상관이 업 지. 다만 빵만 얻으면 된다는 데 이르는 것이지. 노력의 내용과 방향 내지는 그 순서마저 외 부의 제약을 받는 이상, 그 노력은 타락의 노력이 될 수밖에 없단 말일세" "아직도 이론적이군. 아무튼 그렇더라도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그렇다면 지극히 고상한 예를 들어 설명해주지. 진부한 것이긴 하지만, 언젠가 어떤 책에 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네. 오다 노부가가 장군이 어느 유명한 요리사를 고용했는데, 그 요리사가 맨 처음 만든 음식을 먹어보니 너무 맛이 없어서 그 요리사를 야단쳤다는 거 야. 요리사로서는 최고의 솜씨를 발휘해서 만든 음식인데 야단을 맞자 그다음부터는 이류나 삼류의 요리를 만들어 언제나 칭찬을 들었다고 하더군. 그 요리사의 경우를 보게. 생활을 위 해 일한 점에선 빈틈이 업겠지만, 자신의 기술인 요리 그 자체를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 보 면 너무나 불성실하지 않나. 두말 할 것 없이 타락한 요리사가 아닐까 ? "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쫓겨나게 되니 어쩔수없지 않았겠나?" "그러니까 하는 말일세. 의식에 있어 여유가 없는 사람이,즉 호기심에서 하는 일미 아니면 진실하게 할 수 없는 것이지." "그렇다면 자네와 같은 신분이 아니고서는 신성한 노력을 할 수 없다는 이치로군. 그럴수 록 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안 그래, 미치요?" "정말 그래요. " "웬지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군. 이래서 이치를 따지는 이야기는 좋지 않은 거 라구" 하고 말하며 다이스케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7 다이스케는.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좀 차지 않습니까? 장작을 더 지필까요?" 라고 말하며 가도노는 갑자기 입구에서 얼굴을 디밀었다. 가노도는 이런 일에 있어서는 빈틈이 얽었다. 다이스케는 가만히 물에 잠긴 채 대답했다. "괜찮아. " "그렇습니까?" 하고 내뱉듯이 말하더니 가도노는 식당 쪽으로 가버렸다. 다이스케는 가도노의 대답이 재미있기라도 한 듯 흔자서 빙긋이 웃었다. 다이스케에게는 그 특유의 이상한 버릇 같은 것이 있었다. 그는 그것 때문에 가끔 고민하기도 했다. 언젠가 어떤 친구가 부친상을 당해 그 장례식에 참석했었는데, 그 친구가 상복 차림으로 푸른 대나 무를 짚고 관 뒤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웃음이 나와 난처했던 일이 있었다. 또 언겐가는 아버지께서 훈계하시는 도중에 무심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갑자기 웃다가 당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집에 목욕탕이 없었을 때는 집 부근의 대중탕에 자주 갔었는 데, 거기에는 건장하고 늠름하게 생긴 때밀이가 있었다. 그 사나이는 다이스케가 갈 때마다 안에서 뛰어나와 밀어드리지요 하고 말하고선 등을 밀어주었다. 다이스케는 그 때밀이가 몸 을 싹싹 밀어줄 때마다 이집트인이 문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아무리 보아도 일본 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 하나 이상한 일이 있었다. 얼마 전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웨버라는 학자는 자기의 심 장의 고동을 마음대로 늘였다줄였다 조절한다는 내용이 있기에, 평소에 심장의 고동을 시헙 하는 버릇이 있는 다이스케는 자기도 한번 해보고 싶어서 나루에 두세 번 조심스럽게 시험 해보았더니 정말 웨버처럼 되는 것 같아 깜짝 놀라서 그만두었다. 욕탕에 조용히 잠겨 있던 다이스케는 무심코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에 얹고 생명의 소리 를 두세 번 듣자마자 웨버의 일이 생각나서 그 즉시 몸을 씻는 데로 내려왔다. 거기서 그는 책상다리를 한 채 자기의 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발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하 여 자기의 신체 일부가 아닌,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거기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 껴졌다.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추하게 보일 정도로 털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푸 른 힘줄은 여기저기 튀어나와 마치 동물 같았다. 다이스케는 다시 욕탕에 들어가서, 히라오카가 말한 대로 할일이 없으니까 이런 일까지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욕탕에서 나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 고 또다시 히라오카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폭이 넘은 서양 면도기로 틱과 볼을 밀 때, 그 날카로운 날이 거울 뒤에서 번쩍이는 빛에 약간 어지러웠다. 그 정도가 심해지자, 높은 곳에 서 아래쪽을 내려다볼 때와 받은 느낌을 받으며 간신히 면도를 끝냈다. 다이스케가 식당 앞을 막 지나려 할 때였다. "선생님은 정말 잘하셔" 하고 가도노가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무엇을 잘한단 말인가?" 하고 나서면서 다이스케는 가도노를 쳐다보았다. "어이쿠, 벌써 끝나셨어요? 빠르기도 하시지" 하고 가도노는 대꾸했다. 그 인사말 때문에 다이스케는 다시 한 번 무엇을 잘하느냐고 물어 볼 수가 업어서 그냥 서재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잠시 쉬면서,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자주 하다가 는 건강에 해로울 것 같아 잠깐 여행이나 다녀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선 그것은 요즘에 거론된 결혼 문제를 피하는 데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다시 히바오카의 일 이 마음에 걸려 그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엉게 생각하면 히라오카의 일이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미치요가 걱정되었다고 해야 옳았다. 다이스케는 그렇게 생 각하면서도 자신이 전혀 부도덕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다이스케가 미치요와 알게 된 것은 4, 5년 전으로 그 당시 그는 아직 학생이었다. 다이스 케는 나가이가라는 명목으로 이미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아, 젊은 아가씨의 얼굴이나 이름을 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치요는 그런 부류의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수수한 성격에 약간 침올한 분위 기를 지닌 여자였다 그 당시 다이스케의 학우 가운데 스가누마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다 이스케나 히라오카와도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미치요는 바로 그의 누이동생이었다. 스가누마의 고향은 도쿄 근처로, 2학년이 되던 봄에 학업을 구실. 고향에 있는 누이동생을 데려오면서 그때까지 지내던 하숙집에서 나와 누이동생과 함께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미치요는 고향에서 여고를 졸업한 상태로, 나이는 분명히 18세라 했으며 화려한 장식용 깃 을 달고 어깨 징그기를 하고 있었다. 그후 곧 그녀는 어느 여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스가누마의 집은 시미즈초에 있었는데, 뜰이 업는 대신 튓마루에 나서면 우에노 숲의 오 래된 삼목이 높이 보였다. 그런데 그 삼목들은 마치 녹슨 쇠처럼 아주 이상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 삼목들 가운데 한 그루는 거의 죽더가고 있었는데,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위쪽 에 저녁이면 까마귀떼가 모여들어 울어댔다. 그리고 그의 옆집에는 젊은 화가가 살고 있었 다. 그의 집은 차도 얼마 다니지 않는 좁은 골목에 있어서 아주 조용한 편이었다. 다이스케는 스가누마의 집에 자주 놀러 갔다. 그가 미치요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인사 만 하고 물러가버렸다. 그곳에 갈 때면 그는 우에노 숲을 구경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두번째 도, 세번째도, 미치요는 다만 차를 들고 나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집이 좁았기 때문에 미치 요는 옆방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이스케는 스가·누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옆방에 있는 미치요가 자기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이스세는 미치요와 어떻게 말을 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사소한 일이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나 소설에 싫중이 난 다이스케로서는 그것 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그러나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역시 시나 소설처럼, 두 사람은 곧 친숙해졌다. 히라오카도 다이스케처럼 자주 스가누마의 집에 몰러 갔다. 어떤 때는 둘이서 함께 찾아 가기도 했다. 다이스케와 미치요는 그렇게 해서 친해졌다. 미치요는 가끔 오빠와 그 두 사람 을 따라 연못 근처를 산책하기도 했다. 네 사람은 그런 식으로 2년 반 정도 가까이 지탰다. 그러다 스가누마가 졸업하던 해 봄, 그의 어머니가 시골에서 놀러 와서 잠시 그의 집에 묵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년에 한 두 번색 상경해서 자식들 집에서 5,6일 청도 있었는데, 한번은 돌아가기 전날부터 열이 나더 니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그겻이 일주일 후에 장티푸스로 판명되어 곧 대학병원애 입원했 다. 미치요는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환자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환자의 경과는 한때 약간 좋아졌으나 다시 악화되어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병원에 스나들던 스가누마도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그의 고향에는 아버지 흔 자 남아 있었다. 스가누마의 아버지는 부인이 죽었을 때나 아들이 죽었을 때도 그 뒷처리를 했기 때문에 스가누마와 생전에 가까이 지내던 다이스케나 히라오카와도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미치 요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녀와 함께 두 사람의 하숙까지 찾아와 작별 인사를 하기 도 했다. 그해 가을, 히라오카는 미치요와 결혼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 것이 바 로 다이스케였다. 하긴 표면상으로는 고향의 선배에게 중매인으로 결혼식에 참석해달라고 부탁하긴 했으나, 그 혼담을 직접 매듭진 것은 다이스케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결혼 후 도쿄를 떠났다. 고향에 있던 미치요의 아버지는 어쩔수없는 사정으로 훗카이도건으로 떠나야 했다. 따라서 미치요는 마음이 허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 아버지를 도쿄로 모셔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이스케는 다시 한 번 형수에게 부탁 해서, 미치요에게 돈을 좀 마련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미치요를 만나서 그 사정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들어보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히라오카의 집을 찾아가더라도 미치요는 무턱대고 모든 것을 틸어놓을 여자도 아 니고, 설령 그런 돈이 필요한 이유를 알게 되더라도 그들 부부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볼 수도 없는 노룻이었다. 다이스케의 속마음은 그가 정말로 알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여기에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 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솔직히 말해, 돈이 필요한 이유를 궁금해할 단계는 이미 지나버린 것이다. 사실 표면적인 사정에 관계없이 미치요에게 돈을 빌려주어 그녀의 마음을 편하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미치요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마련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이스케는 미치요에 대해 그 정도로 정략적인 생각을 일으킬 여유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 이다. 게다가 히라오카가 집에 없는 것을 이용하여 지금까지의 사정 이야기를, 특히 경제 사정 에 관해서라도 자세히 알아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히라오카가 집에 있는 이상, 자세한 이 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설령 알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에서 열까지 곧이들 을 수는 없었다. 히라오카는 현실적인 여러 가지 동기로 다이스케에게 허세를 부리고 있었 다. 그런가 하면 허세를 부릴 수 없는 점에 대해 서는 침묵을 지켰다. 어쨓든 다이스케는 먼저 형수에게 부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웬지 마음이 내키 지 않았다. 지금까지 형수에게 염치없이 조금씩이나마 돈을 부탁한 일이 몇 차례 있긴 했지 만, 이렇게 갑자기 부탁하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수는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으므로 안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형수가 부 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비싼 이자를 주고라도 빌려야겠지만, 다이스케는 가직 거기까지는 생 각하지 않았다. 다만 조만간 히라오카가 연대 보중을 들먹이며 나을 때 그것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라면, 차라리 자기가 먼저 직접 미치요를 기쁘게 해주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 만은 버리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다이스께는 흐린 날씨 때문에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을 것 같은 네시경에 집을 나서서 기차를 타고 형님 댁에 갔다. 아오야마에 거의 이르렀을 때, 전차 왼쪽으로 아버지와 형이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인사할 틈도 없이 스 쳐갔기 때문에 그쪽에서는 물론 다이스케를 보지도 못했다. 다이스케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 렸다. 형님 댁에 들어서자 객실 쪽에서 피아노 소기가 들려왔다. 다이스케는 잠시 자갈 위에 서 서성거리다가 곧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부엌문 쪽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격자문 바깥 에 혜크터라는 몸집이 큰 영국산 개가 큰 입을 가죽끈에 묶인 채 자고 있었다. 혜크터는 다 이스케의 발소리를 듣자마자 털이 긴 귀를 종긋 세우고 얼룩진 얼굴을 급히 들더니 꼬리를 쳤다. 다이스케는 입구의 서생 방을 들여다보고 문턱에서 커생과 정답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 었다. 그러고 나서 서양식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문을 열자, 형수가 피아노 앞에 앉아 두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누이코가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여느때처럼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다이스케는 누이코의 머리를 볼 때마다 그네를 탄 누이코의 모습을 그려보만 다. 검은 머리와 연분흥빛 리본, 그리고 노란색의 비단 허리띠가 한꺼번에 바람에 날려 하늘 로 날리는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형수와 누이코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나 ! " 누이코는 말없이 달려오더니 다이스케의 손을 힘차게 끌어당겼다. 다이스케는 조카의 손 에 이끌려 퍼아노 옆으로 갔다. "어떤 명연주가가 치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했지." 형수는 아무 말도 없이 이마를 찌푸리고 웃으면서 손을 들더니 다이스케의 말을 가로막았 다. 그러고 나서 반대쪽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 여기를 좀 봐주세요. " 다이스케는 말없이 형수와 자리를 바꾸었다. 그는 악보를 보면서 잠시 양쪽 손가락을 멋 지게 움직였다. "이렇겠죠?" 하고 말한 다음 다이스케는 곧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후 약 30분 동안 모녀 는 피아노 앞에 번갈아 앉아 한 곳을 복습 했다. "이제 그만하고 저쪽으로 가서 식사를 해야지. 도련님도 어서 오세요" 하고 말하면서 마 침내 형수가 일어섰다. 방안은 아미 어둑어둑했다. 다이스케는 아까부터 퍼아노 소리를 감상하기도 하고, 형수와 조카의 하얀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기도 하고 간혹 난간의 그림을 바라보면서 미치요의 일 도, 돈을 빌리러 은 일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방을 나오면서 뒤를 돌아다보자, 그림 속의 선명한 남빛 파도가 부서지고 하얗게 밀려오는 부분만 어둠 속에서 뚜렸이 보였다. 다이스 케는 그 엄청난 파도 위에 황금빛 구름 종우리를 전면에 그리게 했다. 그리고 그 구름 봉우 리를 유심히 보았더니 발가벗은 키 큰 여인이 머리를 풀어혜치고 몸을 날려 한 덩어리가 되 어 광란하듯이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발키리를 구름에 비유할 생각으로 이 그림을 주문했던 것이다. 그 는 그것이 구름 봉우리인지, 거대한 체구의 여성인지 거의 분별할 수 가 없었다. 그저 거대 한 덩어리를 머리속에 그리며 흔자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완성된 작품을 벽에 붙여놓고 보니, 선명한 남빛 파도는 처음부터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하얀 거품의 큰 덩어리만이 약간 허옇게 보였다. 거실에는 벌써 불이 켜져 있었다. 다이스케는 거기서 형수와 함께 식사를 했다. 조카들도 함께 먹었다. 다이스케는 세이타로에게 형 방에서 마닐라산 엽귈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여 그것을 퍼우면서 잡담을 했다. 마침내 아이들은 예습을 할 시간이라는 형수의 말에 자기들 방으로 가버리고, 다이스케는 형수와 마주앉았다. 다이스케는 갑자기 돈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색해서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부터 이 야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버지와 형이 인력거를 타고 어딘가 가더라는 이야기와 일전에 형이 한턱냈다는 것, 그리고 왜 아자부와 원유회에 오지 않았는가, 아버지의 한씨는 과장이 심하다든지, 아무튼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듬 이 아니라 아버지와 형이 요즈음 눈에 띄게 바빠져서 최근 4,5일간은 변변히 잠잘 틈도 없 다는 이야기였다. 다이스케는 태연하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길래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 자 형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글쎄요,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아버님이나 형님은 제게는 아무 말도 하시지 않으니 어디 알 수가 있어야죠 하고 대답하더니, 그것보다도 도련님은 요 전의 신부를 하는데 서생이 들어왔다. 오늘 밤도 늦는다. 만일 누구와 누구가 오면 00옥으로 오라 고 전해달라는 전화 내용을 전하고서 서생은 다시 나가버렸다. 다이스케는 다시 결혼 이야 기가 나오자 귀찮은 생각이 들어 그런데 형수님, 부탁이 있어서 왔는데요 하고 바로 용건을 말했다. 우메코는 다이스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다이스케가 이야기를 마치기까지는 10분 정도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결단을 내려서 좀 빌려주십시오." 그러자 우메코는 진지한 표정으로 뜻밖의 질문을 했다. "글쎄요, 그런데 도대체 언제쯤 갚을 생각이세요?" 다이스케는 턱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물Rm러미 형수외 표정을 살폈다. 우메코는 더욱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비꼬는 것이 아니니까 화는 내시지 마세요." 다이스케는 물론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형수가 그런 질문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뿐이었다. 언제 갚겠다느니, 그냥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느니 하고 늘어놓으면 늘어놓 을수록 우스꽝스럴게 될 것이므로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우메코는 다루기 힘든 시동생 의 약점을 알고 나니 다음 말을 하기가 훨씬 쉬웠다. "도련님은 평소에 저를 무시하고 계세요. 아니, 일부러 빈정 대기 일쑤죠. 도련님도 그건 인정하실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어쩌겠어요, 할수없는 일이죠. 안 그래요?" "난처하군요. 그렇게 정색을 하고 따지시니 말예요." "괜찮아요, 그렇게 변명하려 드시지 않아도 뻔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솔직하게 그렇 다고 말씀해주세요. 안 그러면 다음 말을 할 수 없으니까요. " 다이스케는 그저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그렇죠? 그것 보세요. 하지만 그것이 당연해요. 조금도 상관 없어요. 도저히 도련님을 당 해낼 수 없으니까요. 도련님파 써는 이제까지 지내온 것처럼 그런대로 서로 만족하고 있으 니 이의는 없어요. 그건 그렇다치고, 도련님은 아버님마저 무시하고 계시죠?" 다이스케는 형수의 태도가 진지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네, 약간은 무시하고 있지요" 하고 다이스캐는 대답했다. 그러자 우메코는 유좨한 듯이,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리고 계속했다. "형님도 무시하고 말이에요 " "형님을요? 형님은 아주 존경하고 있습니다. " "거짓말 마세요. 이번 기회에 모두 털어놓으세요." "그야, 어떤 점에서는 무시하지 않기도 하지요." "그것 보세요. 도련님은 가족 모두를 무시하고 있는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 "그런 변명은 하실 필요 없어요. 도련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무시당할 이유가 있으니 말이죠." "이제 그만두시지요. 오늘은 몹시 무서우신데요." "이건 모두 진심에서 하는 말이에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이런 일로 도련님과 싸울 생각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말이죠, 그렇게 훌륭한 분이 왜 저 같은 사람에게 돈을 빌릴 필요가 있 을까요? 우습지 않아요? 아니, 말꼬리를 잡고 비꼰다고 생각하시면 화가 나실테지요. 그렇게 생각진 마세요. 그토록 훌륭한 분이라도, 돈이 없으면 저 같은 것한테도 머리를 숙여야 하니 까요." "그래서 아가부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지요. "아직도 제 말을 장난으로 듣고 계시군요." "좀전의 말은 진심입니다. " "그럼, 그것도 도련님의 훌릉한 점일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친구를 도와줄 수 없다면, 어떻게 되지요? 아무리 홀륭한 면이 있더라도 소용없지 않겠 어요. 무능력한 점은 막노동꾼이나 마찬가지잖아요. " 다이스케는 이제까지 형수가 이토록 적절하고 색다른 견해로 자기를 공격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사실 형수한테 돈을 빌려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서, 자기 자신도 그 약점을 암 암리에 느끼고 있었던 것이 다. "형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형수님께 부탁드리는 것 아닙니까 ? " "할수없군요. 도련님은 지나치게 훌륭하시니 말이에요. 그렇지만 도련님 혼자서 그 돈을 다 쓰시면 안됩니다. 진짜로 무능력한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겠지만 도련님에게는 웬지 싫 어요. 좀 너무하잖아요. 다달이 형님이나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타다 쓰는 처지에 다른 사람 일까지 떠맡아서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니 말이에요. 그런 돈을 누가 주려고 하겠어요. " 우메코의 말은 참으로 지당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그 지당성을 뛰어넘어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형수와 형과 아버지는 뒤에서 굳게 단결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남들처럼 일하며 평범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집에서 나설 때, 형수에게 거절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런 걱 정을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해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은 결코 할 수 없 었다. 다이스케는 이 사건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우메코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다이스케를 여러 각도로 자극하려고애썼다. 다이스케는 우 메코의 그런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우메코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는 그는 화를 낼 생각 은 없었다. 그러다가 화제는 다시 결혼 문제로 되돌아갔다. 다이스케는 최근의 신부감에 대 해서 얼마 번부터 아버지에게 두 번이나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논리는 언제 들어도 낡은 사고방식으로 아주 의리깊은 것이 었으나, 그 대신 이 번에는 그다지 위압적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분의 피를 이어받은 사 람과 부부가 되는 것은 훌륭한 일이므로 아내로 맞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은혜를 갚는 셈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이스케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이 훌륭한 일인 지, 무엇이 은혜를 갚는 데 해당하는지, 도무지 논리가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하긴 다이스 케도 그 신부감에 대해 특 별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주장에 대 해 시비를 가릴 필요성은 없었고, 아버지 의견에 따르는 것도 무방했다. 다이스케는 최근 2,3년 사이에 모든 일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 것이 습관이 되어 결혼에 대해서도 그다지 조건을 내세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사가와라는 아가씨는 다만 사진을 통해서 알고 있을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사진은 아 주 아름다웠다. 따라서 아내로 맞을 생각만 있다면 이것저것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울 마음 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그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다이스케의 불분명한 태도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바보 같은 반웅을 보 인다는 식으로 말했다. 결혼을 생사가 달린 일생 일대의 일로 생각하고, 모든 일들을 결혼과 결부시키려는 형수의 말은 이상하게만 들렸다. "하지만 도련님도 평생 혼자 살 생각은 아닐 것 아니에요. 그렇게 건성으로 말하지 말고 적당한 사람이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떨까요?" 하고 우메코는 약간 초조한 듯이 말했다. 다이스케 자신은 일생 동안 혼자서 산다든지 애인을 둔다든지 혹은 기생과 관계를 맺는다 는 뭔가 뚜렷한 계획을 세워놓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그는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른 독신자처럼 그다지 흥미가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것은 그가 한 가지 일에만 집중 할 수 없는 성격인데다가 지나칠 정도로 신경이 예민하고, 게다가 지금까지 예민한 신경을 현대의 일본 사회 상황 때문에 만연한 환상 타파에 쓰고 있다는 점과, 그리고 경제적으로 는 비교적 여유가 있어서 여러 부류의 여자를 왜 많이 알고 있다는 세 가지 점으로 결론지 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자신은 결 혼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자신의 앞날을 자연스럽게 개척할 생각이었다, 따 라서 결혼을 필수 조건으로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서두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며, 또한 너무나 세속적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이스케도 그렇게 철 학적인 논리로 형수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점점 궁지에 몰리자 난처해진 나머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형수님, 반드시 아내가 있어야만 할까요?" 다이스케는 물론 진지하게 이야기할 생각이었지만 형수는 깜짝 놀라면서 자기를 무시하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날 밤 우메코는 다이스케에게 평상시와 같은 수법으로 이야기를 되풀이 한 다음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이상하시군요, 그렇게까지 싫어하다니.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만,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은 싫다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누군가 좋아하는 사 람이 있는 거지요. 그분의 이름이 뭐죠?" 다이스케는 이제까지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고 교제한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이 런 말까지 듣고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갑자기 미치요란 이름이 떠을랐다. 잇따라 좀전에 말한 돈을 빌려달라는 문구가 언뜻 터올랐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형수 앞에서 쓴웃음을 지은 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8 다이스케가 형수와의 교섭에 실패하고 돌아오던 날은 시간이 늦어서 간신히 아오야마 거 리에서 마지막 전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형은 그때까지도 집에 돌 아오지 않았다. 하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우메코는 전화를 받기 위해 두 번이나 자리를 떴다. 그러나 형수의 태도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다이스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 다. 그날 밤은 잔뜩 찌푸린 하늘이 땅 색깔과 같아 보였다, 정류장의 붉은 기둥 곁에 홀로 서 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자 먼발치에서 작은 불덩이가 보이더니 어둠속에서 위아래초 흔들리 며 다이스케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너무나 쓸쓸하게 느껴졌다. 차안으로 들어서니,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검은 옷을 입은 차장과 운전사 사이에 끼어 전차소리에 묻힌 채 가고 있 는데, 달리는 차 외에는 주위가 온통 캄캄하다. 다이스케는 흘로 밝은 곳에 앉아사 전차를 타고 목적지에 이때까지 끌려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가구라자카에 이르자, 양쪽의 이층집 사이로 가늘고 긴 목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중 간쯤 이르자 그것(지진)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다이스케는 바람이 집 용마루에 부딪치 는 줄 알고 물러서서 어두운 처마를 올려다보면서 지붕과 하늘을 번갈아 살펴보고 있자 어 떤 공포가 휩사였다. 문과 미닫이와 유리창이 무딪치는 소리가 순식간에 심해져서 아아, 지 진이로구나 하고 알아차렸을 때는, 그자리에 멈추어 있는 발이 움츠러들어 잘 움직이지 않 았다. 그때 좌우의 이층집이 비탈길을 메우려고 양쪽에서 쓰러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갑자기 오른쪽에 있는 집의 문이 열리면서, 어린애를 안은 한 사나이가 지진이다, 지진이다, 큰 지진이다 하고 외치면서 나왔다. 다이스케는 그 사나이의 소리를 듣고 겨우 안심했다. 집에 도착하자, 아주머니나 가도노도 지진 이야기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스케 는 두 사람 모두 자기보다는 크게 느끼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잠자리에 들자 다시 미치 요의 부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타 해결 방안을 생각해내 지는 못했다. 최근 들어 아버지와 형이 바빠진 것은 무슨 일 때문일까 하고 추측해보았다. 그는 결혼 문제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 신문의 일면에 일본제당주식회사의 뇌물 사건이 처음으로 보도되었다. 설탕 제 조업체의 중역이 회사 공금으로 국회의원 몇명을 매수했다는 이야기였다. 가도노는 여느때 와 같이 중역이나 국회의원이 구속되는 것을 통쾌하다, 통쾌하다 하고 평했지만, 다이스케로 서는 그다지 통쾌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2,3일 후에는 조사받은 사람의 숫자가 왜 많 이 늘어나고, 사회에서는 그 사건을 일대 의혹 사건으로 크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전 신 문에는 그 사건을 영국을 생각해서 터뜨린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 설명에는 영국 대사 가 일본제당의 주를 몽땅 사들였다가 큰 손해를 보고 불평을 호 소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 도 영국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형식상 그렇게 처리한 것이라고 씌어 있었다. 일본제당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동양기선이란 회사는 12퍼센트의 배당을 한 다음 반기에 80만 엔의 결손을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다이스케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 신문 이 이 보도를 놓고 신빙성이 없다고 논평한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자기 아버지와 형이 관여하고 있는 회사예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 다. 그러나 항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형을 모 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믿지는 않았다. 만약 까다로운 감사를 받게 되면 구속될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아버지와 형의 재산이 그들의 능력과 수완만 으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듯이, 다이스케 역시 그 점은 믿을 수가 없었다. 1868년 정부는 요코하마로의 이누를 장려하기 위해서 이주자에게 토지를 나누 어준 일이 있었다. 그때 무상으로 받은 토지를 기반으로 지금은 대단한 부자가 된 자가 있 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이 내린 우연의 인과라 할 수 있었다. 다이스케는 아버지와 형은 그러한 행운을 인위적이고 계획적으로 보호책을 만들어서 조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이스께는 그러한 생각을 갖고 었기 때문에 신문 기사에 대해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아버지와 형의 회사에 대해 걱정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만 미치요의 일만이 다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맨손으로 가기에는 면목이 없는 듯해서 좀더 시간을 두고 해결 방안을 찾아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날마다 독서에 열중하며 4,5일을 보 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후로 문제의 그 돈에 대해서는 히라오카나 미치요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다이스케는마음속으로 은근히 혹시 미치요가 자기의 대답을 들으러 혼자서 찾아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으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드디어 그는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혹시 갈 만한 곳이 없나 하고 여가 시간 이용에 대 한 안내를 뒤적이다가 연극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구라자카에서 에도성을 일주하는 소토보리선을 타고 오차노미즈까지 오는 동안 생각이 바뀌어 모리카와초에 있는 데라오란 동창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친구는 학교를 졸업하자 교사는 싫고 문학을 업으로 삼겠다고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공하기 힘든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을 시작한 지 3 년이 지났으나 아직 명성도 얻지 못하고 생활고를 해결키기 위해 원고 생활을 계속하고 있 다. 다이스케는 그 친구가 관계하는 있는 잡지에 무엇이든지 좋으니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재미있는 것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러가 그것은 잡지 서점 앞에 한 달 동안 내팽개쳐져 있 다가 운명적으로 어디론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마지 막으로 다이스케는 다시는 붓 들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데라오는 만날 때마다 더 써라, 더 써라 하고 글쓰기를 권했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나를 봐라 하고 말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 에 의하면 데라오는 머지않아 고배를 마시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 문학을 대단 히 좋아했는데, 특히 남들이 모르는 작가를 좋아하고 없는 돈을 마련하여 신간 서적을 사들 이는 일이 그의 취미였다. 그가 러시아 문학에 너무나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다이스케가 어 떤 문학가라도 공노병에 걸려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단 러일전쟁을 경험한 자가 아니면 대화할 수 없다고 놀려준 턱이 있었다. 그러자 데라오는 진지한 얼굴로, 전쟁은 언제 든지 하지만 러일전쟁 후의 일본처럼 곤혹을 당하게 되면 시시하지 않는가. 역시 공노병 에 걸려 있는 편이 비겁할지라도 안전하다고 대답하고, 여전히 러시아 문학을 열렬히 옹호했다. 현관에서 객실로 들어가보니, 데라오는 객실 한가운데에 칠기 책상을 갖차놓고 머리가 아 프다며 머리며를 두른 채 소매를 걷어붙이고 (제국문학)의 원고를 쓰고 있었다. 다이스케가 방해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말하자, 그는 잠간 기다려달라고 하며 오늘 아침부터 벌써 5×5, 그러니까 2엔 50전쯤은 벌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머리띠를 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입을 열자마자 오늘의 일본 작가와 평론가를 신랄하게 매도하기 시작했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 음속으로는 아무도 데라오를 높이 평가해주지 않으니까 그에 대한 반발로 자기 쪽에서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의견을 발표하라고 권하자 그는 그것 은 안된다고 하며 웃어버렸다. 다이스케는 왜안되느냐고 반문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잠 시 후 그는, 하기야 자네처럼 속편하게 살 수 있는 처지라면 얼마든지 말하겠지만 여하튼 먹고살아야 하니까 말이지. 어차피 진지한 장사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다이스케는 그러 면 더할 나위가 없지, 힘을 내게 하고 격려했다. 그러마 데라오는 아니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지 진지하게 되고 싶다. 어때, 내게 돈을 좀 빌려줘서 나를 진지하게 만 들어줄 생각은 없나 하고 물었다. 아니, 자네가 지금 같은 일을 해서 그것을 진지하다고 생 각하게 되면, 그때가서 빌려주겠다는 농담을 하고 다이스케는 밖으로 나왔다. 다이스케는 흥고 거리까지 갔지만 권태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 어느 곳을 걸어도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그렇다고 남의 집을 방문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대단 한 위장병에라도 걸린 사람 같았다. 흥고 4가에서 다시 전차를 타고, 이번에는 덴즈인 앞까 지 왔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150센티미터도 더 되는 것 같은 큰 위 속 에서 부패물이 파도 치듯 울렁거렸다. 그는 세시나 지나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서 가도 노가 말했다. "조금 전 댁에서 심부름꾼이 왔었습니다. 편지는 서재 책상 위에 놓아두었습니다. 영수증 은 제가 간단히 써서 건네주었습니다. " 편지는 옛날식의 편지함 안에 있었다. 그 빨갛게 칠한 표면에는 주소나 성명도 씌어 있지 않은 채 놋쇠 고리를 통한 끼노의 봉한 자리에 먹이 붙어 있었다. 다이스케는 책상 위를 훝 어보고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은 형수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형수에게는 그렇게 고풍스 런 취미가 있는데, 때로는 엉뚱한 경우에 그러한 취미를 적용했다. 다이스케는 가위 끝으로 지노의 매듭을 찌르면서 공연한 수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에 들어 있는 편지는 편지함과는 정반대로 간단한 언문일치로 용건만이 씌어 있 었다. 요전에 일부러 왔을 때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때 너무 서운하게 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어요. 아무쪼록 서운하게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 다. 그 대신 돈은 보내지만 전액을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200엔만 빌려드리니 곧 친구에게 보내드리세요. 이것은 형님도 모르는 일이오니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결혼 문제는 좀더 시 간을 두고 생각해보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진지하게 생각한 후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접힌 편지지 사이에 200엔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다. 다이스케는 잠시 그 돈을 쳐다보면서 우메코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요전 밤에 돌아을 무렵, 우메코는 그럼 돈은 필요없느냐 고 물었다. 빌려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을 때는 그렇게 냉정히 거절했으면서, 이제 단념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거절했던 쪽에서 자기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는 격이었다. 다이스케는 거기에서 여성의 아름다움과 약점을 발견하고 그 약점을 이용하려는 용기를 잃었다. 그 아름다운 약점을 농락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그는 네네,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되겠지요 하고 말하며 형수와 헤어졌다. 다이tm케가 자기의 말을 서운하 게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우메코는 평소의 대담성과는 달리 자신의 행동이 어딘 지 마음에 걸려 드디어 그 편지를 보낸 것이라고 다이스케는 판단했다. 다이스케는 그 즉시 답장을 깼다. 그리고 되도록 부드러운 말을 써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다이스케가 그런 기분이 된 것은 형 때문이 아니었다. 또한 아버지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사회 때문도 아니다. 근래 우메코 때문도 아니었다. 다이스케는 곧장 미치요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사실 200엔은 애매한 금액이었다. 이왕 빌 려주려거든 차라리 부탁한 전액을 보내주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 은 다이스케의 생각이 우메코를 떠나서 미치요에게 향할 때의 일이었다. 게다가 여자는 제 아무리 결단력이 있다 해도 감정에 치우치는 일이 많다고 믿었던 다이스케로서는 우메코의 처사세 대해 불만을 나타낼 수는 없었다. 남을 동정하는 데 있어 탄력성이 있다는 점에서, 여자의 그러한 태도는 오 히려 남성의 강인한 태도보다도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만 약 자기에게 200엔을 보낸 사람이 우메코가 아니라 아버지였다면 액수에 오히려 불쾌한 생 각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이스케는 저녁 식사도 하지 않고 바로 집을 나섰다. 고갠조에서 에도천강변을 따라 강 을 건넜을 때는 조금 전 산에서 돌아올 때와 같은 정신적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비탈길을 덴즈인 옆으로 나서자 가늘고 높은 굴뚝이 절과 절 사이에서 더운 연기를 구름이 많은 하늘 로 내뿜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보고, 빈약한 공업이 생존을 위해서 무리하게 호흡하 는 보기 흉한 것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 근처에 사는 히라오카는 그 굴 뚝을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경우 동정심보다는 미추의 상념이 앞서는 것 이 다이스케의 버릇이었다. 그 순간 다이스케는 미치요의 일은 거의 잊어 보릴 정도로 하늘에 애처롭게 흩어지는 석 탄 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히라오자네 현관 신벗는 곳에 여자가 신는 조리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격자문을 열자 안 쪽에서 미치요가 옷자락 소리를 내면서 나왔다. 그때 방으로 을라가는 입구는 어두컴컴했다. 미치요는 그 어둠속에 앉아서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누가 왔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 것 같 았으나 다이스케의 소리를 듣자마자, 누구신가 했더니... 하고 오히려 낮은 소리로 말했다. 명확히 보이지 않는 미치요의 모습은 보통때보다도 아름답게 보였다. 히라오카는 집에 없었다. 그가 집에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이스케는 오히려 이야기를 하기 쉬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것도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치요는 여느때처럼 침착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문을 닫은 채 그들은 마주앉았다. 미치 요는 하녀도 집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도 근처에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이제 방금 돌아와서 저녁 식사를 끝내던 참이라고 말했다. 이윽고 히라오카의 이야기가 나왔다. 예측한 대로, 히라오카는 여전히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주일간은 그다지 외 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피곤하다며 집에서 잠만 자는 날이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술 을 마셨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 때는 더 마시고 화도 자주 내는데다가 다른 사람들을 욕 하는 일이 잣다는 것이었다. "예전과 달리 성격이 난폭해wu 아주 걱정이에요" 라고 말한 미치요는 은근히 동정을 바 라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녀가 돌아와서 부엌문을 덜 커덩거렸다. 잠시 후 하녀는 대나무로 만든 받침채가 달린 램프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맹장 지를 닫을 때 다이스케의 얼굴을 흘끗 보고 나갔다. 다이스케는 호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냈다. 두겹으로 접은 것을 미치요 앞에 그대로 내놓으 며 부인 하고 불렀다. 다이스케가 미치요를 부인이라고 부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얼마 전에 부탁한 돈인데요. " 미치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들어 다이스케를 보았다. 사실은 곧 오 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그만 늦어졌습니다. 어떻게 빌려 돈을 마련해 처리했나 요?" 하고 다이스케가 물었다. 그때 미치요는 갑자기 불안해졌는지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원망이나 하듯이 말했다. "아직 못했습너다. 글쌔 그게 그렇게 쉽게 처리될 리가 있겠어요?" 미치요는 눈을 크게 뜨고 물고러미 다이스캐를 쳐다보았다. 다이스케는 접힌 수표를 폈다. "이것으로는 안될까요 ? " 미치요는 손을 내밀어 수표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히라오카가 기뻐할 거예요" 하고 말하며 미치요는 조용히 수표를 다다미 위 에 두었다. 다이스케는 돈을 빌려온 좌정을 대충 설명하고 자기는 이렇게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어떤 중대한 일이 발생하여 다른 사람의 일을 도우려 할 때는 무능력헤지니 그 점 은 이해해달라고 변명을 덧붙였다. "그 점은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재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어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하고 미치요는 사과를 했다. 그때 다이스케는 이렇게 다짐을 했다. "그것만으로 어떻게 해결이 될까요? 만약 그것만 갖고는 도저히 해결이 안된다면 더 마련 해볼 수도-." "더 마련하다뇨 ? " "각서를 쓰고 비싼 이자돈을 빌리는 거죠. " "어머나, 그런 일을" 하고 미치요튼 곧 나무라듯이 말했다. "그것만은 안될 일이애요. " 히라오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떳떳하지 않은 돈을 빌렸다가 여기저기 거치 면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히라오카는 처음에는 그곳에서 아주 성실한 사람이라는 평 을 들었으나, 미치요가 애기를 낳고 심장이 나빠지면서 몸도 약해지자 방탕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으므로 미치요는 다만 교제상 부득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개 의치 않았으나 정도가 심해지고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녀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미치요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그럴수록 히라오카의 방탕도 점 점 심해졌다. 그녀는 그의 잘못이 아니라, 모두 다 내 탓이라고 애써 변명했다. 그러나 그녀 는 다시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라도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 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다이스케는 문제의 이면에 숨어 있는 부부 관계를 대충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아 되도록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오려고 하면서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렇게 마음을 약하게 먹으면 안돼요. 옛날처럼 건강해지셔야죠. 그리고 자주 놀러 오세 요. " "정말 그래요" 하고 미치요는 웃음을 지 었다.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표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히라오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2,3일 후 갑자기 히라오카가 찾아왔다. 그날은 건초한 바람이 불어 맑게 개인 하늘에 푸 른 것이 보이는, 평상시보다 더운 날씨였다. 조간 신문에 창포에 대한 안내문이 나와 있었 다. 다이스케가 큰 화분에 사다 심었던 군자란은 드디어 져버리고 그 대신 폭이 호신용의 작은 칼 정도 되는 파란 잎이 줄기를 밀어내고 길게 뻗어나왔다. 거무스름해진 낡은 잎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잎들 가운데 하나는 언제 그렇게 되었 는지 반쯤 끊어져 줄기에서 15센티미터 정도 되는 곳에 뽀족하게 처져 있는 것이 흉하게 보 였다. 다이스케는 가위를 들고 툇마루로 나가 그 잎을 끊어진 곳에서 잘라버렸다. 그 자른 부분이 갑자기 번지는 것 같아 잠시 그대로 쳐다보고 있자 툇마루에서 똑 하고 소리가 났 다. 자른 부분에서 녹색의 진하디진한 즙이 흘러나 왔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그 향기를 맡으 려고 흩어진 잎 사이로 코를 들이밀었다. 툇마루에 떨어진 즙방울은 그대로 두었다. 일어서서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 내 가위 날을 닦고 있는데, 가도노가 다가오더니 히라오카씨가 오셨다고 알려주었다. 다이스 케는 크때 히라오카나 미치요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다. 다만 신기한 녹색의 액 체에 매료되어 비교적 현실과 동떨어진 정취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히라오카의 이름을 듣 자마자 그러한 감정은 이내 사라져버리고 웬지 그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쪽으로 모실까요?"라는 가도노의 재촉을 받았을 때, 다이스케는 응 하고 대답한 뒤 객 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가도노의 안내를 받고 들어온 히라오카를 보니, 벌써 여름 양복을 입 고 있었다. 깃도 흰 셔츠도 새로운데다가 요즘 유행하고 있는 편물 넥타이를 맨, 실업자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세련된 차림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히라오카의 사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요즘 에는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녀도 가망이 없어 매일 이렇게 놀러 다니거나 아니면 집에서 잠이나 잔다고 하며 큰소리 로 웃었다. 다이스케도 그것이 제일 속편한 것이라고 대꾸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잡담을 하 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잡담이라기보다는 다른 문제를 회피하 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어서 서로의 마음 한 구석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히라오카는 미치요의 이야기도, 돈 이야기도 전혀 하지 않았다. 따라서 3일 전에 그가 부 재중일 때 다이스케가 방문한 것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이스케도 처음에는 일부 러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잠자코 있었으나,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불안해서 말을 꺼 냈다. "사실은 2,3일 전에 자네 집에 갔었는데 자네는 집에 없더군." "응, 그랬다지. 그때는 아주 고마웠네. 자네 덕분에 한시름 놓았지. 아니, 자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집사람이 너무 걱정한 나머지 자네에게까지 부담을 주어 미안하군" 하고 히라오카는 냉담한 인사말을 했다. 그러더니, "사실은 나도 그 일에 대 한 인사를 할 겸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지만 정식 인사는 곧 당사자가 올 것이니" 하고 마치 미치요와 자기는 남남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그토록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나? " 돈 이야기는 정도로 끝냈다. 그러나 두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고 그다지 흥미도 없는 것 들로 이야기로 진행되자 히라오카는 갑자기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나는 어쩌면 이제 금융계에서 손을 뗄지도 몰라. 실제로 그 계통은 내막을 알면 알수록 싫어지지. 게다가 이곳으로 온 뒤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니다보니 용기를 잃었어" 하고 히라 오카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고백을 했다. 다이스케는 한마디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그럴 거야."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의 대답이 너무 냉담한 데 놀란 듯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을 이었 다. "요전에도 잠간 얘기했지만, 신문사에나 들어갈까 생각하고 있어. "자리는 있나?" 하고 다이스케는 반문했다. "지금 빈자리가 하나 있는데 될 것 같기도 해." 처음에는 아무리 알아보고 다녀도 허사여서 놀고 있다고 말해놓고, 이제는 신문사에 자리 가 나면 나가겠다고 하는 둥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하는 히라오카에게 충고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다이스케는 그 이야기에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그것도 재미 있겠지 . " 다이스케는 히라오카를 현관까지 전송하고 잠시 미닫이에 몸뜰 기댄 채 문턱 위에 서 있 었다. 가도노도 예의상 히라오카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입을 열었다. "히라오카씨는 생각보다 멋장이인데요. 그런데 옷차림에 비해 집이 너무 초라한 것 같습 니다. " "그렇지도 않아. 요즘은 모두들 그러니까" 하고 다이스케는 대꾸했다. "이제는 옷차림만으로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신사일 까 하고 지켜보면 아주 이상야룻한 집으로 들어가니 말이죠"라고 가도노는 곧 말을 이었다. 다이스케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서재로 들어갔다. 툇마루에 놓아둔 군자란의 초록 색 물방울이 시들어 마르기 시작했다. 다이스케는 일부러 서재와 객실의 간막이를 닫고 흔 자 방안으로 들어갔다. 다이스케는 손님을 보내고 난 후 잠시 혼자 앉아서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특히 오늘과 같이 상황이 어긋날 때는 더욱더 그랬다. 드디어 히라오카는 자기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만날 때마다 예전의 히라오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비단 히라오카뿐만이 아니었다. 그 누구를 만나도 그런 생각 이 들었다. 현대 사회는 인간의 고립된 집합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지는 자연에 속하는 것 이지만 그 위에 집을 짓게 되면 금세 자연과 분리되는 것이다. 그 집안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스케는 문명은 인간들을 고립시키는 것으로 보 았다. 다이스케와 가깝게 지내던 시절의 히라오카는 남이 울어주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었 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러한 기색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으므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애써서 남의 동정을 물리치려는 듯이 행동했다. 고립되어 있어도 세상만은 멀리서 쳐 다볼 수 있다는 오만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이 현대 사회의 참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인지, 그것은 알 수가 없었다. 히라오카와 가까이 지내던 시절의 다이스케는 남을 위해서 울기를 좋아하는 사나이였아. 그러나 점차 그런 경향이 사라졌다. 울지 않는 편이 현대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울지 않으니 현대적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서양 문명의 압박을 받아 그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 는 격렬한 생존 경쟁의 이면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남을 위해 잘 울 수 있는 사 람을 다이스케는 아직 본 적이 없었다. 다이스게는 현재의 히라오카에게 거리감보다도 오히려 혐오감을 느꼈다. 한편 상대방도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옛날의 다이스케도 이따금 자신의 가슴 한구석에 그러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깜까 놀란 일이 있었다. 그때 는 참으로 슬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슬픔도 거의 사라지고 스스로 그 검은 그림자를 조 용히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진실이라 생각했다. 어쩔수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만 그것뿐이었다. 다이스케는 그러한 고독감에 빠져 번민하기에는 너무나도 머리가 맑았다. 그는 그런 경우 를 현대인이 밟아야 할 필수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기와 히라오카 사 이의 거리감은 일반적인 경향에 비추어볼 때 어느 정도 진행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러따 히라오카와 자기가 안고 있는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그 거리감이 남들 보다 약간 빨리 찾아왔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정이란 바로 히라오 카와 미치요의 결혼이었다.미치요를 히라오카에게 소개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 나 그 당시 그는 자기의 행운을 후회할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과거 에 자기가 취한 태도는 역시 현명했다. 그러나 3년 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은 그들에 게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자기만족과 회망적인 생각을 버리고 그 결과 앞에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그리고 히라오카는 자기가 왜 미치요를 아내로 맞이했 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이스케는 무엇 때문에 미치요를 히라오카와 맺어주기 위 해 애썼을까 하는 자책감에 빠지기도 했다. 다이스케는 서재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녁 식사 때 기도노가 흔잣 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하루종일 공부만 하시는군요. 잠시 산책이라도 나가시지 그러서요. 오늘 밤은 도라비사이지요. 연예관서 중국인 유학생들이 연극을 한다더군요. 어떤 연극인지 저와 함께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중국놈들이란 정말 뻔뻔스러워 그 무엇이라도 하는, 그야말로 무사태평한 민족이지 뭡니까. " 다이스케는 또다시 아버지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 용건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되도록 아버지를 만나지 않으려 했었다, 그 무렵에는 집안 사람들과 더욱더 얼 굴을 마주치지 않으려했다. 만나면 존대말을 써가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속으로 아버 지를 모욕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이스케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모욕하지 않고서는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 대 사회의 양상을 20세기의 타락상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최근들어 급속도로 파 급된 지나친 생활욕으로 말미암아 도의심이 회박해wu 일어난 결과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런가 하면 신구 양욕의 충돌로 초래된 결과라고도 생각했다. 결국 눈에 띄게 커진 그 엄청 난 생활욕은 유럽에서 밀려온 해일이라고 결론지었다. 다이스케는 그 두 가지 인수는 어디에선가 평형을 찾아야 하지만 그것은 빈약한 일본이 유럽의 강대국들과 경제력에 있어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에나 이루어질 것이라 믿고 있었 다. 그리고 그러한 날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단정지었다. 따라서 혜어날 수 없는 수 렁에 빠진 대부분의 일본 신사는 탈마다 법률에 저촉되지않을 정도의 죄를 짓지 않을 수 없 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지금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서로가 은연중 알면서도 미소 를 머금고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했다. 다이스케는 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모욕을 가하는 것 과 또한 모욕을 당하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다이스케의 아버지의 경우는 일반 사람들과 비교할 때 약간 특별한 만큼 복잡했다. 그는 메이지유신 전의 무사로서 전통적인 도의본위 교육을 받았다. 그 교육은 정의행위의 표준을 자기 이외 먼곳에 설정하고 사실의 발전에 의해서 중명되어야 할 가까운 참뜻을 안중에 두 지 않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습관에 사로잡혀서, 아직 도 이 교육에 집착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지나친 생활욕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기 쉬운 사업에 손대고 있었다. 아버지는 실제로 그 생활욕 때문에 해마다 몸이 쇠약해wu가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사이에는 당연히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 버지는 그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으로 현재의 사업을 이룩했 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봉건 시대에나 적용되어야 할 교육의 범위가 좁혀지지 않고서는 시시각각으로 현대의 생활욕을 충족시켜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쌍방을 그 대로 존재시키려면 이것을 감행하는 개인은 그 모순감 때문에 크나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얼었다. 만약 마음속으로 그 고통을 감수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고통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좀 모자라기 때문일 컷이다. 다이스케는 아버 지를 대할 때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가짜 군자이거나, 또는 분별심이 부족한 바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몹시 싫었다. 그렇지만 다이스케는 아버지야말로 어쩔 도 리가 업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다이스케는 아직 한 번도 아버지를 모순된 인간이라고 단정한 적이 없었다. 다이스케는 모든 도덕의 출발점은 사회적 사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의 식 속에 있는 도덕을 고정시켜 두고 거기서 반대로 사회적 사실을 발전시키려고 하는 처사 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본의 학교에서 가프치는 윤 리 교육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옛날 식의 도덕을 교육받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인들에게나 먹혀들어 갈 도덕을 애써 이해시키려 하고 있다. 그렇 게 지나친 생활욕에 시달린 불행한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종잡을 수 없는 공론에 불자한 것이다.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 훗날 사회를 관찰하다 보면 과거에 받은 교육을 되새기며 웃어버리거나 모욕을 당한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다이스케의 경우에는 학교뿐 만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가장 엄격하고 보수적인 도덕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한때는 엄청난 모순의 고통을 느끼기도 했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원망스럽게 생각할 정도였 다. 며칠 전 다이스케는 우메코에게 돈을 빌려준 데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러 갔었다. 그때 우메코는 잠깐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나 하고 오세요 하고 주의를 주었다. 다이스케는 아버지는 계십니까? 하고 얼빠진 말을 했다. 계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오늘은 좀 바쁘다 는 핑계를 대고 돌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온 것이니 싫든 아버지를 만나야만 했다. 여느때처 럼 현관 쪽으로 돌아서 객실로 가보니, 뜻밖에도 형인 세이고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술 을 마시고 있었다. 우메코도 곁에 앉아 있었다. 형은 다이스케를 보더니 말했다. "어때, 한잔하겠니 ? " 그러면서 형은 앞에 있는 포도주병을 들고 흔들어보였다. 병에는 아직도 술이 왜 남아 있 었다. 우매코는 손벽을 쳐서 잔을 가져오게 했다. "알아맞혀보세요, 얼마나 오래된 술인지"라고 말하면서 우메코는 한잔을 따랐다. "다이스케가 어떻게 알겠나? " 하고 말하더니 세이고는 동생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다이스케는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아래로 내렸다. 안주 대신 얇은 웨이퍼가 과자 접시에 있었다. "맛있는데요" 하고 다이스케가 말했다. "그럼 어서 언제적 술인지 알아맞혀보세요." "그렇게 오래된 술입니까? 정말 좋은 걸 사셨는데요. 돌아갈 때 한 병 얻어가야겠는데요." "미안해요, 이게 마지막이죠. 누가 선물한 거예요"라고 말하고 우메코는 툇마루로 나가서 무릎 위에 떨어진 웨이퍼 가루를 털었다. "형님,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아주 여유있는 모습이신데요" 하고 다이스케가 말했다. "나도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 요며칠 동안은 너무 바빠서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었지" 하 고 말하더니 세이고는 불이 꺼진 여송연을 입에 물었다. 다이스케는 그 옆에 있던 성냥을 켜주었다. "도련님이야알로 흘가분한 기분 아니세요?"라고 말하면서 우메코가 툇마루에서 들어왔다. "형수님, 가부기자에 가보셨습니까? 아직 안 가보셨으면 한번 가보세요. 아주 재미있던데 요." "벌써 가보셨어요? 놀랐는데요. 도련님은 어지간한 게으름뱅이가 아닌줄 알았는데." "게으름뱅이는 좋지 않아. 공부와 방컁이 다르니까." "억지 말만 하시는군요. 남의 마음도 모르고서"라고 말하며 우메코는 세이고 쪽을 보았다. 세이고는 눈꺼풀이 빨개진 채 멍하니 여송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여보, 당신" 하고 우메코가 조르듯이 말했다. 세이고는 귀찮은 듯이 여'송연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서 말했다. "지금 열심히 공부해뒀다가 언젠가 내라 가난해지면 날 도와주면 좋잖니 ? " "도련님은 배우가 될 생각인가요?" 하고 우메코가 물었다. 다이스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잔을 형수 앞에 내밀었다. 우메코도 아무 말 없이 포도 주병을 들어올렸다. "형님, 요즘은 아주 바쁘셨다지요?" 하고 다이스케는 다시 물었다. "야아, 이겐 지칠 대로 지셨다"라고 말하면서 세이고는 드러누워버렸다. "일본제당사건에 무슨 관계라도 있었나요?" 하고 다이스케가 물었다. "일본제당사건에 관계되지는 않았지만, 무척 바빴었다. " 형의 대답은 언제나 그 정도 이상으로 명백했던 적은 없었다. 사실은 명확하게 이야기하 고 싶지 않은 것이75지만, 다이스케의 귀에는 그것은 형의 타고난 무관심으로, 이야기하는 벗이 마음이 내키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들렸다. 따라서 다이스케는 언제나 쉽사리 그 답변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일본제당도 우습게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떤 방법이 없을까요 ? " "글쎄다. 세상일이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우메코, 오늘은 나오키에게 얘기해 서 혜크터를 좀 운동시키라고 해요. 저렇게 많니 먹고 잠만 자는 건 몸에 좋지 않아"라고 말하며 세이고는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자꾸만 비볐다. "이제 드디어 가서 아버지에게 - 듣고올까" 라고말하며 다이스케는 술잔을 다시 형수 앞 에 내밀었다. 우메코는 웃음을 지으며 술을 따랐다. "신부감 얘기 말이냐?" 하고 세이고가 물었다. "글쎄요, 아마 그럴 겁니다. " "어서 열정을 하는 것이 좋을 거다. 그렇게 노인에게 걱정을 끼쳐 봤자 좋을 거 하나 없 다" 하고 말하더니 세이고는 이번에는 더욱 분명한 어조로 주의를 주었다. "조심해라. 약간 저기압이시니까." "설마 요즘 바빴던 그 일로 인한 저기압은 아니겠지요?" 하고 다이스케는 다짐을 받으려 했다. 형은 벌떡 누운 채 말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 우리들도 일본제당의 중역들처럼 언제 잡혀가게 될 지 알 수 없는 처지니까." "바보 같은 소리 마세요" 하고 우메코가 나무라듯 말했다. "역시 제 게으름이 초래한 저기압일테지요" 하고 말하면서 다이스케는 웃으며 일어섰다. 복도를 따라서 안뜰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보니, 아버지는 책상 앞에 앉아서 찬서 보고 있 었다. 아버지는 한시를 좋아해서 한가한 시간에는 중국인의 시집을 읽곤 했다. 그러나 때로 는 그것이 아버지의 신경을 가장 거슬리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신경이 무딘 형일지라도 되도록 아버지 가까이 가지 않았다. 어쩔수 없이 얼굴을 맞대야 할 경우에는 세이타로나 투이코를 앞세우고 아버지 앞에 나가는 수법을 썼다. 다이스케도 툇마루까지 가서야 비로소 그 생각이 났지만 그럴 필요성까지는 없다고 생각 하고, 객실을 하나 지나서 아버지의 거실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먼저 안경을 벗었다. 읽고 있던 책 위에 안경을 내려놓고는 다이스케 쪽으로 돌 아앉았다. 그러더니 단 한마디를 했다. "왔느냐 ? " 그 어조는 평소보다도 다소 부드럽고 조용한 느낌을 주었다. 다이스케는 무릎 위에 손을 놓으면서, 형이 진지한 얼굴로 자기를 속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이스케는 거기 서 다시 쓴 차를 마시며, 잠시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금년에는 작약꽃이 삘찍 퍼었느니, 차를 딸 때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잠이 오는 철이라느니, 어딘가에 큰 등나무가 있는데 그 꽃의 길이가 1미터가 넘는다는 등, 이야기는 두서없는 방향으로 왜 길게 나갔다. 다이스케는 또한 그 이야기를 하는 편이 마음편했기 때문에 되도록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애썼 다. 결국 아버지는 지겨워졌는지 드디어, 그런데 오늘너를 부른 것은 하고 본론을 얘기했다. 그 다음부터 다이스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공손한 태도로 아버지의 말을 듣 고 있었다. 아버지도 다이스케의 태도를 보고 오랫동안 자기 혼자서 강의라도하듯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절반 이상은 예전에 한 이야기의 되풀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그것을 처음 듣는 것처럼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지루하고 서투른 설교 중에서 다이스케는 두세 가지의 새로운 점을 발견했다. 그 하나는, 너는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하는 진지한 질문이었다. 이제까지 아 버지는 다이스케에게 명령조로만 이야기했었다. 따라서 다이스케는 그런 식의 이야기를 얼 렁뚱땅 넘겨버라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질문을 받자 그렇게 쉽사리 입 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가는 곧 아버지의 노여움을 살 게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2,3년 정도 아버지를 교육한후가 아니면 통하지 않을 이야기였다. 다이스케는 그런 중요한 일에 대해서 자신있게 설명할 만한 계획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자기의 입장으로서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에게 그 말을 그대로 해서 납득시킬 수 있을 때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 다. 아니, 어쩌면 일생 동안 그러지 못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에 들게 하려면 어쪘든 국가니 세상을 위한 명목 좋은 일을, 더욱이 결흔과 양립하지 않는 말을 해두면 되 지만 다이스케는 아무리 자신을 모독할 생각일지라도 그 이야기만은 낯이 뜨거워서 입밖에 낼 수가 업었다. 그래서 할수없이 사실은 여러 가지 계획을 갖고 있는데, 조만간 구체적인 계획을 새워서 의논드릴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하고 나자 너무나 우스웠지만 어 쩔 도리가 없었다. 다음에 다이스케는 독립할 수 있을 만한 재산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다이 스케는, 물론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러면 사카와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 재산은 사카와의 딸이 지참금으로 가져오는 것인지, 또는 아 버지라 준다는 것인지 아주 애매했다. 다이스케는 그 점에 대해서 좀 더 파고들었으나 도무 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 았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차라리 외국에 나갈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다이스케는, 그것도 좋 겠지요 하고 말하며 그럴 뜻이 있음을 나타냈다. 하지만 거기에도 역시 결혼이 선결 문제로 나붙었다. "그 정도로 사카와의 딸과 결혼할 필요가 있나요?" 하고 다이스케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이스케는 아버지를 노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요즘 그는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 은 인간의 타락상 가운데 하나이다, 싸움의 일부분으토서 상대를 노하게 하는 것은 노하게 하는 것 자체보다도 성낸 사람의 안색이 자기의 눈에 얼마나 불쾌하게 비쳐지는가 하는 점 에서 귀중한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기만 하면 벌을 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 을 죽인 따가 받는 죄는, 죽은 사람의 살에서 나오는 피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뿜어져나오는 붉은 피를 보고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그 정도로 신경이 예민했다. 따라서 얼굴이 붉어진 아버지를 보았을 때 이상하게도 불꽤했다. 그러나 그 죄를 두 배로 속죄하기 위해서 무조건 아버지의 뜻에 따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 다. 또한 그는 자기의 능력에 대해 상당히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먼저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 자식의 장래가 걱정이 된다는 것, 자식을 결혼시키는 것은 부모의 의무라는 점, 며느리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과 여러 가지 면모에 대 해서는 본인보다도 부모의 생각이 휠씬 더 현명하다는 점, 이런 조건은 그 당시에는 지나친 보살핌으로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다시 한 번 귀찮게 간섭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날이 있다는 점 등을 아주 열띤 어조로 말했다. 다이스케는 아버지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다 듣고 나서는 여전히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일부 러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럼, 사카와는 그만두기로 하자. 그리고 누구라도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도록 해 라.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 " 그 말은 형수의 질문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다이스케는 형수에게 했던 것처럼 쓴웃음만 짓고 있을 수는 언었다. "달리 결흔하고 싶은 상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다이스케는 명백히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갑자기 짜증난 소리로 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네 생각만 하지 말고. " 다이스케는 갑자기 아버지가 자기의 생각은 아랑곳없이 아버지 자신의 이해 관계로 껑충 옳겨간 것에 깜짝 놀랐다. 그가 그렇게 놀란 것은 논리적이지 못한 그 급격한 변화 때문이 었다. "그것이 아버지께 그토록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니다" 하고 다이 스케는 대답했다. 아버지는 더욱더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다이스케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아무 래도 논리를 떠나 생각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을 꼼짝도 못하게 하는 것 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사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 다이스케만큼 남을 골 탕 먹이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니, 내 입장만을 생각해서 네게 결혼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아버지는 앞서 한 말을 정정했다. "굳이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면 참고삼아 일러두지만, 너는 벌써 나이가 30이 아니냐. 나이가 30이 되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 하는지는 너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긴 지금은 옛날과 다르니까 독신으로지내는 것도 네 자유겠지만, 그일로 해서 부모형제가 피해를 입고 드디어는 너 자신에게도 불명예 스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어떻게 할 생각이냐? " 다이스케는 다만 멍하니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다이스케가 어떤 점에 있 어서 자신을 비꼬았다고 생각했지만, 다이스케는'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후 다 이스케는 말문을 열었다. "하기야 저도 좀 즐기고 다니긴 합니다만 그 즉시 아버지는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얘기가 아니다. " 두 사람은 그만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그 침묵을 자기가 다이스케에게 가한 타격 의 결과라고 믿었다. 얼마 후 아버지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럼, 잘 생각해보도록 해라. " 다이스케는 네 하고 대답하고 아버지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객실에 가서 형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하녀에게 형수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안방에 있다고 하기에 그쪽으로 가 서 문을 열어보았더니 누이코의 피아노 선생이 와 있었다. 다이스케는 선생에게 살짝 인사 를 하고, 우메코를 문까지 불러냈다. "형수님이 아버지께 내 이야기를 일러바치신 거죠?" 우메코는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고 나서 "자, 들어오세요. 참 잘 오셨어요" 하고 말하 더니 다이스케를 피아노 옆으로 끌고 갔다. 10 개미가 안방으로 기어드는 계절이 되었다. 다이스케는 큰 수반에 물을 붓고 그 안에 새하 얀 은방울꽃을 줄기채 담갔다. 메지어 핀 가느다란 꽃이 윤곽이 뚜렷한 수반 가장자리를 뒤 덮어버렸다. 수반을 움직이면 꽃이 쏟아졌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큰 사전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고 나서 그 옆에 베개를 갖파놓고 벌떡 누웠다. 검은 머리. 마치 수반의 그늘처럼 되어 꽃에러 풍겨나오는 향기가 기분좋게 코를 스쳐갔다. 다이스케는 그 향기를 맡으면서 선잠을 잤다. 다이스케는 가끔 외부로부터 지나치게 강한 자극을 받았다. 심한경우에는, 맑게 갠 하늘에 서 쏟아겉 내리는 햇빛의 반사에도 견디지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되도록 집안에 틀어 박혀 아침이나 낮이나 상관없이 잠을 잘 생각만 했다. 그리고 아주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를 그 수단으로 이용하곤 했다. 눈을 감고 눈동자에 와닿는 빛을 차단한 채 콧구멍만으로 조용 히 숨을 쉬고 있다보면 점차 의식이 몽롱해졌다. 그렇게 하는 데 성공하면, 다이스케의 신곁 은 다시 태어난듯이 안정되고 외부의 일을 비교적 차분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 이스케는 아버지에게 불려갔다 온 후로 2,3일 동안은 뜰구석에 퍼어 있는 빨간 장미꽃을 볼 때마다 눈이 너무나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업었다. 그럴 때는 언제나 세숫물통 옆에 있는 개 옥잠화잎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잎에는 하얀 줄무의 서너 개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런데 볼 때마다 개옥잠화의 잎은 자라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얀 무의도 자유 롭게 뻗어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석류꽃은 장미보다도 화려하게 짓눌린 것처럼 답답해 보였다. 또한 그 꽃들은 푸른 잎들 사이로 번뜻번뜻 빛나 보일 정도로 강렬한 빛을 드러내 고 있었다. 따라서 그 역시 지금의 다이스케의 기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이따금 그러하듯이, 지금 그는 마음 한구석에 어두운 그림자가 그리워진 기분이었다. 그러 므로 너무 밝은 것에 접하면 도저히 그 모순을 견딜 수가 없었다. 개옥잠화의 잎 역시 오랫 동안 보고 있으면 슴이 답답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현대의 일본 사회에 만연한, 웬지 모를 불안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 불안은 사람들간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일어 나는 야 만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그는 그러한 심적 현상 때문에 심한 동요를 느꼈다. 그는 신을 믿 고 받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너무나 이성적이어서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성격이었 다. 그러나 서로 믿고 의지한다면 굳이 신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즉 사람 들이 서로 믿지 못할 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은 비로소 존재의 권리를 갖는 멋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이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일삼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은 신에 대한 믿음도, 사람들 상호간에 대해서도 믿음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그 원인이 일본의 경제 사정에 있다고 단정지었다. 4,5일 전에 그는 소매치기와 결탁하여 나쁜 짓을 저지른 형사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 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다른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만약 엄중하게 전 면 수사에 나서면 도쿄는 일시에 거의 무경찰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이스케 는 그 기사를 읽었을 때, 쓴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리고 생활고를 해결해야 하는 박봉의 형 사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사실상 당연하다고도 생각했다. 다이스케는 아버지를 만나서 결흔 독촉을 받았을 때도, 약간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아버지에게 믿음이 얻 는 데서 일어나는, 다이스케로서는 불행한 암시에 불과했다. 그리고 다이스케는 그런 꺼림칙 한 암시를 받은 것을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역시 아버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히라 오카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언다는 아량을 베풀 수 있었다. 다만 그에게 호감이 가지 않을 뿐이었다. 다이스케는 형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형에 대해서도 역시 믿음 은 가질 수가 없었다. 형수는 진실성이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형수는 직접 생활의 난관에 부딪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만큼 형보다도 거리감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다이스케는 평소에 세상을 그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경이 아주 예민 한데도 불구하고 불안한 상념에 사로잡히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것을 잘 알 고 있었다. 불안한 상념은 언젠가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단순히 생 흣카이도에서 가져왔다는 은방울꽃 다발을 풀어서, 그것을 모두 물속에다 넣고 그 아래 누 워 잠을 잤던 것이다. 한 시간 후에, 다이스케는 그 크고 검은 눈을 떴다. 그 눈은 잠시 한 곳에 멈춰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손도 발도 잠들어 있었을 때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마 치 죽은 사람의 손발 같았다. 그때 가만 개미 한 마리가 플란넬 깃을 타고 다이스케의 목으 로 떨어졌다. 다이스케는 곧 오른손을 움직여서 목을 눌렀빠.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긴 작은 동물을 코 위로 가져가서 이마를 찌푸리고 쳐다보았다. 개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다이스케 는 집게손가락 끝에 붙은 검은 것을 엄지 손가락의 손톱으로 튕겼다. 그러고 나서 일어섰다. 그런 다음 아직도 무릎 주위에 기어다니는 서너 마리를 상아로 만든 페이퍼 나이프로 때 려죽였다. 그러고 나서 손벽을 쳐서 사람을 불렀다. "일어나셨습니까?" 하고 말하며 가도노가 달려왔다. "차라도 가져 올까요 ? " 다이스케는 노출된 가슴을 여미면서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누가 오지 않았나?" "네, 오셨습니다. 히라오카씨 부인이.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 하고 가도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왜 깨우지 않았나? " "너무 곤히 주무셔서 말이죠." "하지만 손님이 오셨을 때는 할수없지 않나?" 다이스케의 말투는 약간 강해졌다. "하지만 부인께서 깨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거든요. " "그래서 부인은 그냥 가버리셨나? " "아닙니다. 그대로 가신 건 아니고 잠간 가구라자카에 가셔서 물건을 사갖고 다시 오시겠 다고 가셨습니다. " "그럼 다시 오겠군." "그렇습니다. 실은 깨실 때까지 기다리실 생각으로 이 객실까지 올라오셨습니다만, 선생님 의 얼굴을 보시고는 너무 곤히 주무시니까 금방 일어나시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신 거지요." "그래서 그냥 나갔단 말인가?" "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 다이스케는 웃으면서 부시시한 얼굴을 어루안졌다. 그러고는 얼굴을 씻기 위해 목욕탕으 로 갔다. 머리를 적시고 툇마루까지 돌아와서 뜰을 바라다보고 있자, 자기 전보다는 기분이 아주 상쾌해진 것 같았다. 제비 두 마리가 흐린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 아주 유쾌하 게 보였다. 다이스케는 요전에 히라오카가 다녀간 뒤로 미치요가 찾아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 다. 그러나 히라오카의 말은 좀처럼 사실로 나타나지 않았었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오지 않 는 것인지, 아니면 히라오카가 처음부터 의례적인 인사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 는 없었지만, 그 때문에 다이스케는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 허전 함 역시 일상 생활 가운데 하나의 경험으로 우연히 발견했을 뿐, 그 원인을 분석해본다거나 해결책을 세워야 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거의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경험 자체를 좀더 깊이 파헤쳐보면 그 이상으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처럼 여겨 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쪽에서 히라오카를 방문하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산책을 할 때 발길은 대부분 에도천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벚꽃이 질 무렵에는 저녁 바람을 맞으면서 네 개의 다리를 이쪽 에서 저쪽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등, 긴 둑을 누비고 다녔 다. 그러나 그 벚꽃은 이미 져버리고 어느새 녹음의 계절이 되었다. 다이스케는 가끔 다리 한복판에 서서 난간에 손으로 턱을 괴고 무성한 잎 사이를 똑바로 흐르고 있는 물을 하염없 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 빛이 가늘게 된 끝쪽에 높이 솟아 있는 메지로대 의 숲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고이시가와의 비탈길을 오르지 않고 돌아오게 되 었다. 언젠가는 오오마가리근처에서 전차를 내리는 히라오카의 모습을 50여 미터 앞에서 보 기도 했다. 그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곧바로 되돌아왔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직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 하면서도, 어떤 분야든 생활의 방편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히라오카의 뒤를 밟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는 히 라오카를 대할 때의 웬지 모를 불쾌감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해서 오로지 미치요를 위해서 만 히라오카의 처지를 걱정할 만큼 히라오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히라오카를 위해서 도 그의 성공을 비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다이스케는 지금까지 마음 한구석에 공허감을 안고 살아왔다. 방금 가도노를 불러 베개를 가져오라고 해서 낮잠을 잤을 때는 너무나도 강렬한 우주의 자극을 견딜 수 없게 된 머리를 되도록 푸른 빛을 띤 깊은 물속에 가라앉히고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 남달리 강했다. 따라서 뜨거운 머이를 베개에 묻을 때는 히라오카나 미치요 생 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는 흘가분한 마음으로 잠을 잤다. 그러나 그렇게 곤히 자고 있을 때 누군가 쑥 나타나서 다시 쑥 나가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도 그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어 머리에서 지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도노를 불러서, 자고 있는 동안에 누가 오지 않았나 하고 물어보았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두 손을 이마에 대고, 높은 하늘을 가르고 활기차게 날아가는 제비의 몸롤림 을 툇마루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곧 그것에 눈이 아찔해져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미 치요가 다시 찾아온다는 기대감으로 인해 벌써 마음의 평형을 잃어 사색도 독서도 할 수 없 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이스케는 책장에서 큰 화첩을 꺼내와서 무릎위에 펴놓고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다만 손가락끝으로 차례대로 넘기기만 했을 뿐, 한 폭도 제대로 음 미하지 못했다. 이윽고 브라긴의 그림이 나왔다. 다이스케는 평소에 그 장식 화가에 대해 많 은 관심과 취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눈을 빛내며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그것은 어느 항구의 그림이었다. 배와 돛대와 돛을 배경으로 그 여백에는 눈 에 띄게 화려한 하늘의 구름과 검푸른 물이 있고, 그 앞에는 알몸의 노동자 4,5명이 있었다. 다이스케는 산처럼 불룩한 그들의 근육과 어깨에서 등에 걸쳐 살더미콰 살더미가 만나는 곳 에 이루어진 소용돌이 같은 골짜기를 보면서 잠시 살이 지닌 힘의 쾌감을 인정으나, 화첩을 펼쳐둔 채 곧 눈을 태고 귀를 기올였다. 그러자 부엌 쪽에서 아주머니의 소리가 났다. 그리 고 우유배달부가 빈 병을 들고 재빨리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에 다이스케의 예민찬 청각 신경은 아주 적은 소리조차 놓치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멍하니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도노를 다시 한 번 불러서 미치요가 언제 오 겠다는 말을 하고 갔는지 물어보려고 했으나 너무 유치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뿐만이 아 니었다. 남의 부인이 찾아오는 것을 그토록 기다리는 마음을 드러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었다. 또한 그토록 기다려질 정도라면, 이쪽에서 언제든지 찾아가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모순의 양면을 상대적으로 보았을 메 다이스케는 자신의 몰논리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허리는 의자에서 반쯤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몰 논리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인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자기로서는 이 몰논리 상태가 유일한 사실이기 때문에 어쩔 도려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사실과 충돌하는 논리는 자기와 관계가 없는 명제를 연결하여 이루어진, 자기의 본체를 무시한 형 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후, 미치요가 올 때까지 다이스케는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를 정도였다. 밖에서 여 자 목소리가 났을 때 그는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논리에 있어서는 아주 강한 반면, 심장은 아주 약한 사나이였다. 최근들어 그가 화를 내지 않게 된 것은 오로 지 머리 덕분으로, 화를 낼 정도로 자신을 형편없게 만드는 일을 이지가 허락하지 않게 되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 있어서는 보통 이상으로 정서의 지배를 받아야만 깼다. 손 님을 맞으러 나갔던 가도노가 발소리를 내며 서재 입구애 나타났을 때, 건강미가 넘치던 다 이스케의 볼은 윤기를 잃고 있었다. "이쪽으로 모실까요?" 하고 가도노가 아주 간단하게 다이스케의 의향을 확인했다. 객실로 안내할 것인지, 서 재에서 만날것인지를 묻는 것이 귀찮아서 이렇게 좁혀서물었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응 하고 말하고 입구에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가노도를 내쫓기라도 하는 듯 자신이 직접 튓마루로 나가서 얼굴을 내밀었다. 미치요는 튓마루와 현관이 이어지는 곳에서 서재를 향한 채 우물 쭈물하고 있었다. 미치요의 얼굴은 요전에 만났을떼보다 더 창백했다. 다이스케에게 눈과 턱으로 안내를 받고 서재 입구에 섰을때, 다이스케는 미치요가 숨을 헐떡이는것을 눈치챘다.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다이스케가 물었다. 미치요는 아무 말없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세루로 된 홑옷 밑에 속옷을 겹쳐 있고, 손에는 아주 큰 하얀 백합꽃이 세송이쯤 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꽃을 갑자기 테이블 위로 내던지듯 이 내려놓더니, 그 옆에 있는 의자등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 은행잎 모양으로 땋은 머리를 의자등에 기대며, "아휴 힘들어"하고말하면서 다이스케 쪽을 보고 웃었다. 다이스케는 손뼉 을쳐서 물을 가져오게 하려 했다. 그런데 말없이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다이스케 가 식후에 양치질을 한 유리컵이 있었다. 그안에는 물이 두모금쯤 있었다. "깨끗한 거겠죠" 하고 미치요가 물었다. "그건 아까 내가 마시던것인데" 하고 말하며, 다이스케는 컵을 들었으나, 웬지 망설여졌 다. 그는 앉아 있는 곳에 물을 버리려고 했지만, 미닫이 밖에 있는 유리문 한 장이 방해가 되었다. "이제 곧 가져올 거요"라고 말하며 다이스케는 부엌쪽으로 나갔다. 식당을 지나자 가도노 는 주석으로 된 차단지를 들고 서투른 솜씨로 옥로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다이스케의 모습 을 보더니 변명조로 말했다. "선생님 이제 곧 됩니다 " "차는 나중에 가져와도 돼. 먼저 물이 좀 필요해" 하고 말하며 다이스케는 자신이 직접 부엌으로 나갔다. "네, 그렇습니까? 마실 물 말씀입니까?"라고 말하면서 가도노도 차단지를 팽개치고 뒤따 라왔다. 두 사람은 컵을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마이스케가 아주머니는 어디 갔느냐고 묻자, 가도노는 손님에게 드릴 과자를 사러 방금 나갔다고 대답했다. "과자가 없으면 미리미리 사두었어야지." 다이스케는 수도 꼭지를 틀고 찻잔에 물을 넘치게 받으면서 말했다 "제가 그만 아주머니에게 손님이 오신다는 말을 하지 않았거든요" 하고 가도노는 미안하다는 듯이 거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자네가 과자를 사러 갔으면 되잖나" 하고 다이스케는 부엌을 나서면서 가도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래도 가도노는 다시 말대꾸를 했다. "그런데 과자말고도 살 것이 여러 가지 있다고 해서 말이죠. 발은 아프고 날씨도 좋지 않 아 그만두면 좋을텐데도. " 다이스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로 돌아갔다. 문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미치 요의 얼굴을 보니 그녀는 아까 다이스케가 두고 나간 컵을 무릎 위에 을려놓은 채 두 손으 로 감싸고 있었다. 그 컵 안에는 다이스케가 뜰에 버린 것만큼 되는 물이 들어 있었다. 다 이스케는 찻잔을 든 채로 멍하니 미치요 앞에 섰다. "어찌된 셈이오?" 하고 다이스케가 물었다. "고마워요. 이제 됐어요. 방금 저것을 마셨죠. 너무 깨끗해서" 하고 미치요는 여느때와 같 이 침착한 어조로 대답하며 은방울꽃을 꽃아두었던 수반을 돌아다보았다. 다이스케는 그 픈 수반에 물을 8부 정도 담아두었었다. 물속에 나란히 서 있는, 이쑤시개 만큼이나 가느다란 줄기의 엷은 푸른빛 사이로 도자기의 무의가 마치 처 있는 것처럼 어렴 풋이 보였다. "왜 저런 것을 마셨습니까?" 하고 다이스케는 너무나 어처구니가서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독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고 말하면서 미치요는 손에 든 컵을 다이스케 앞 으로 내놓았다. "독이 있는 건 아니더라도 만약 2,3일이나 지난 물이었으면 어쩔뻔했소 ? " "아니, 아까 왔을 때 그 옆에까지 얼굴을 갖다대고 냄새를 맡아보았어요. 그때 저 서생이 방금 그 수반에 물을 넣고 통에서 옮겼다고 말했거든요. 괜찮아요, 냄새가 아주 좋은걸요." 다이스케는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과연 시적 정서의 발동으로 수반의 물을 마셨는지, 아 니면 너무 목이 말라 마셨는지 캐물을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만약 전자라고 한다 해도 시 적 정서를 뽐내고 소설따위나 흉내 낸 순수한 감정의 발로로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 서 다만 이렇게 물었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미치요의 볼에는 겨우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으면 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개는 덴즈인 앞까지 전차를 타고 가서 흥고까지 물건을 사러 가는 데, 사참들에게 물어보니 흥고 쪽은 가구라자카에 비해서 물펀간이 10퍼샌트 내지 20퍼센트 정도 비싸다고 해서 얼마 전부터 한두 번 이쪽으로 와보았다. 지난번에 들르려 했으나 어느 새 시간이 너무 늦어 서둘러 돌아갔다. 오늘은 들를 생각으로 집에서 일찍 나섰다. 그러나 낮잠을 자고 있기에 다시 거리로 나가서 물건을 사고 돌아가는 길에 들르기로 했다. 그런데 날씨가 이상래지더니 비가 조금색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갖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비 를 맞지 않으려고 너무 급히 왔더니 곧 몸에 무리가 와 숨이 가빠 혼이 났다. "하지만 습관이 돼버렸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아요"라고 말하면서 미치요는 다이스케를 쳐 다보며 쓸쓸한 웃음을 치었다. "심장은 아직도 완치되지 않았나요?" 하고 다이스케는 동정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완전히 좋아지다니, 일생 동안 안될 거예요." 그 절망적인 의미만큼 미치요의 말은 침올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손수건을 다시 소맷자락에 넣었다. 다이스케는 눈을 내리 뜬 그녀의 이마를, 좀더 정확히 말해 머리칼로 이어지큰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미치요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요전의 수표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그녀 는 그 말을 하면서 어쩐지 약간 볼이 붉어진 것 같았다. 눈이 날카로운 다이스케는 그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돈을 빌린 데 대한 수치심 때문이라 해석했다. 그래서 곧 이 야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좀전에 미치요가 들고 들어온 백합꽃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감미롭고도 짙 은 향기가 두 사람 사이에 퍼어오르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코끝에 와닿는 그 강하고 괴로운 자극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해없이 치울 정도로 미치요에 대해 거침없이 행동할 수 는 없었다. "이 꽃은 대체 웬 겁니까? 사오신 건가요?" 하고 다이스케가 물었다. 미치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향기가 아주 좋죠 ? " 그녀는 코를 끝에다 갖다대고 그 향기를 맡는 시늉을 했다. 다이스케는 문득 발을 똑바로 버티고 몸을 뒤로 젖혔다. "그렇게 가까이서 맡으면 안됩니다. " "아니, 왜요 ? " "무슨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좋지 않아요." 다이스제는 약간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자 미치요는 얼굴을 제자리로 돌렸다. "이 꽃을 싫어하시나요?" 다이스케는 의자 다리를 비스듬히 세우고 몸을 뒤로 젖힌 채 아무말 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사오지 말 걸 그랬군요. 사온 보람이 없으니 말예요. 길을 돌아서 갔다왔는데. 게다 가 비까지 맞고 숨도 차고." 비는 본격적으로 내렸다. 빗방울이 물받이에 모여서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이스케 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눈앞에 있는 백합 다발을 들고 밑을 묶은 축축한 짚을 풀렀다. "제게 사다주신 거니 빨리 꽃아야겠군요" 하고 말하면서 다이스케는 그 즉시 옆에 있는 큰 수반에 꽃을 던져넣었다. 줄기가 너무 길어서 뿌리가 물을 튕기고 튀어다을 것처럼 되었 다. 다이스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줄기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테이블의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반 정도의 길이로 잘랐다. 그런 다음 큰 꽃을 은방울꽃 위에 띄웠다. "자, 이제 줬군요" 하고 말하며 다이스케는 가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미치요는 이상하게 멋대로 꽃힌 백합꽃을 잠시 보고 있다가 갑자니 묘한 질문을 했다. "언제부터 이 꽃이 싫어지셨나요?" 미치요의 오빠가 살아 있었던 시절, 어느 날 다이tm케는 백합꽃을 사들고 다니나카에 있 는 그들 오누이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뚱딴지같이 미치요에게 꽃병을 씻어 오라고 한 뒤 자기가 사간 꽃을 직접 정성스럽게 꽃아서 미치요와 그녀의 오빠에게도 상좌 로 향하게 하여 바라보게 한 적이 있었다. 미치요는 그것을 기억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는 당신도 이 꽃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지 않으셨나요?" 하고 미치요가 말했다. 다이스케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서 하는 수 없이 쓴웃음 을 지었다. 그러는 동안에 비는 더욱더 세차게 내렸다. 집을 에워싸고 비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가도노가 나오더니, 약간 추운 것 같습니다, 유리문을 닫을까요? 하고 물었다. 유리 문을 닫자 두 사람은 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나뭇잎이 온통 비에 젖어, 조용한 습 기가 유리창을 지나 다이스케의 머리로 불어오는 것 같았다. 세상에 떠 있는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대지 위에 차분히 개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다이스케는 오랜만에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좋은 비로군요" 하고 다이스케가 말했다. "조금도 좋지 않아요. 저는 짚신을 신고 왔거든요." 미치요는 오히려 원망스럽다는 듯이 물받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가실 때는 인력거로 보내드릴테니 푹 쉬었다 가세요." 미치요는 그의 말대로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정면으로 다이스케 쪽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여전히 한가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하고 그녀는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나 그 눈가에는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까지 미치요의 그늘에 가려서 그 존재조차 잊고 있던 히라오카의 얼굴이 그때 분명히 다이스케의 마음의 눈동자에 비친다. 다이스케는 갑자기 어두운 곳에서 엄습을 당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치요는 역시 언제나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자였다. "히라오카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하고 그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러자 미치요의 입가는 약간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하지요. "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했나요?" "그 문제는 이제 마음이 좀 놓여요. 다음달부터 신문사에 나갈 것 같다고 하더군요. " "그거 잘됐군요.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당분간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네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하고 미치요는 낮은 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때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아주 귀엽게 느쪘다. 그는 곧 이렇게 물었다. "저쪽에서 뭐라 재촉하지 않나요?" "저쪽이라뇨-" 하고 말을 트린 미치요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저, 사실은 오늘 그 일로 사과를 드리러 왔어요" 하고 말하면서 그녀는 숙였던 얼굴을 다시 들었다. 다이스케는 조금이라도 어색한 모습을 보여서 더 이상 그녀의 약한 마음에 고통을 줄 수 가 없었다. 또한 일부러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말을 걸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드는 일은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용히 미치요의 말을 듣기만 했다. 일전의 200엔은 다이스케로부터 받은 즉시 빛을 갚으려 했으나, 새로 집을 얻다보니 여러 모로 돈이 들어 그 돈을 좀 쓴 것이 문제였다. 나머지는 빛을 갚으려 생각했으나 이번에는 그날그날의 생계가 문제가 되었다.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하는 수 없이 곤란하면 쓰 고, 또 곤란하면 쓰다보니 어느새 거의 다 업어지고 말았다. 하긴 그렇게라도 했으니 하루하 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돈을 그냥 갖고 있다가 다급할 때마다 써 버려서 중요한 차용 중서를 써준 빛은 아직도 갚지 못한 형편이다. 그것은 허라오카 탓이 아니다. 모두 다 내 잘못이다. "너무 면목업는 짓을 했다는 쌩각에 정말 후회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돈을 빌릴 때는 결 코 당신을 속일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알아주세요" 하고 미치요는 몹시 괴로운 듯이 변 명했다. "어차퍼 당신에게 드릴 돈이니, 어떻게 쓰든 누가 뭐라고 말하겠어요. 도움이 되었다면 그 것으로 좋은 것 아니겠어요?" 하고 다이스케는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고 망신이란 말을 유 난히 진지하게, 또한 느렷하게 울리게 했다. 미치요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이제 겨우 안심이 되는군요." 비가 계속 내렸기 때문에 돌아갈 때는 약속대로 인력거를 불렀다. 좀 추운 것 같아 세루 위에 남자의 하오리를 입혀주려고 하자 미치요는 웃으면서 입지 않는다고 했다. 11 어느덧, 여름옷을 입고 다닐 때가 되었다. 2,3일 동안 집에서 생각만 하고 뜰만 바라보고 있던 다이스케는 겨을 모자를 쓰고 밖에 나가자 갑자기 더위를 느졌다. 자신도 세루로 된 옷을 벗어야겠다고 생각하고 5,7백미터쯤 걸어가는 동안 겹옷을 입은 사람을 둘이나 만났다. 그런가 하면 새로 연 얼음집에서 서생이 컵을 손에 들고 차가운 것을 마시고 있었다. 다이 스케는 그때 조카인 세이타로 생각이 났다. 요느음 다이스케는 그전보다도 더 세이타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하고 있으면 인간의 껍질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엄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돌아다보니 자기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오랜 동안의 생존경쟁을 통해 얻은 결과라고 생각하니, 그다 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요즘 세이타로는 공타기 연습에 열을 을리고 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얼마 전에 아사쿠 사의 오쿠야마에 데리고 갔던 일로 얻은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그 외곰은 형수의 기질을 그 대로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형님의 아들답게 외공이면서 어딘지 여유있고 의 젓한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세이타로를 상대하고 있으면, 그 아이의 흔이 자기에게 자연스 럽게 전해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사실 다이스케는 언제나 경계심을 잃지 않는 사람들 에게 둘러싸여 있는 듯한 느낌에 너무나 고통스러됐던 것이다. 세이타로는 이번 봄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자 갑자기 키가 부쩍부쩍 자라는 것 같았 다. 앓으로 1,2년이 지나면 음성도 변할 것이다. 그후로는 어떻게 커갈지 모르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점잖은 차림으로 거지처럼 무엇인가를 구하며 거리를 배회할 것 이다. 다이스케는 도랑가로 나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건너편 둑에는 진달래가 떼지어 흥백의 무의를 푸른 풀 사이로 드러내고 있었 는데 이제 아무 흔적도 언이 사라져버리고, 끊임엄이 풀이 자라고 있는 높은 비탈 위에 우람한 소나무 수십 그루가 늘어서 있었다. 하늘은 맑게 개여 있었다. 다이스케즌 전차를 타고 본가로 가서 형수와 농담이나 하고 세이타로하고도 놀려고 생각했으나 갑자기 그러기가 싫어졌다. 그리고 그 소나무를 보면서 지칠 때까지 도 랑길을 따라 걷고 싶었다. 신미쓰케에 이르자, 바삐 오고가는 전차가 마음에 걸려서 도랑을 가로질러 초흔사옆을 지나 반초로 나섰다. 그곳을 배회하다보니 아무 목적 없이 그렇게 걷 고 있는 것이 너무나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그는 목적이 있어서 걷는 것은 천민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경우에 한해서는 그 천민 쪽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완전히 권태감에 사로잡혔다고 깨닫고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구라자카에 이르자 어 느 가게에 서 큰 축음기를 틀어놓고 있었다. 심한 금속성의 자극을 떤 그 소리로 인해 다이 스케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됐다. 집의 문을 들어서자 이번에는 가도노가 주인이 업는 틈을 타서 큰 소리로 비파가를 부르 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스케의 발소리를 듣자 딱 그쳤다. "아니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가도노가 현관으로 나왔다. 다이스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모자를 현관에 걸고 툇마루에서 서재로 들어갔다. 그 리고 일부러 미닫이를 닫아버렸다. 뒤따라 찻잔에 차를 따라 들고 온 가도노가 물었다. "닫아둘까요? 덥지 않습니까?" 다이스케는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고 있다가 역시 명령조로 말했다. "닫아두게. " 가도노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미eke이를 닫고 나갔다. 다이스케는 어두컴컴해진 방안에서 10분쯤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이스케는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윤이 나는 피부와,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운 근육을 지닌 사나이였다. 그는 이제껏 큰 병을 앓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에 있어 축복을 받 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래야만 살맛이 난 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건강은 다른 사람의 배이상으로 가치가 있었다. 그의 정신력 은 몸만큼이나 강인했다. 그러나 언제나 논리에 시달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따금 머리의 중심이 활을 쏠 때의 과녁같이 이중, 또는 삼중으로 겁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특히 오늘은 아침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지스케가 자기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것은 바로 그런 때였다. 그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그 문제에 사로잡혀 면밀히 분석해보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단지 철학적인 호기심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또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사가 그의 머리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믄란시킬 때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처 럼 권태의 결과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결론 은 그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정과도 다름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인간 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태어난 인간에게 처음으로 어떤 목적이 부여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어떤 목적을 만들어서 그것을 부여하는 것이 야말로 한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이미 태어날 때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얼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은 태어난 본인이 본인 자신에게 만든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을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다. 자기 존재의 목적은 자기 존재의 과정을 통해 이미 온 세 상에 발표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인 의미에서 출발한 다이tm케는 자기 본래의 활동을 자기 본래의 목적으로 삼 고 있었다-걷고 싶으니 걷는다. 그러면 걷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생각한다. 그러면 생각 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 이외의 목적으로 걷거나 생각하는 것은 보행과 사고의 타락이 되는 것처럼 자기의 활동 이외에 일종의 목적을 세워서 활동하는 것 은 활동의 타락이 된다. 따라서 자기의 모든 활동을 내세워 이것을 방편의 도구로 삼는 것 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파괴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다이스케는 이제까지 머리속에 원망과 욕구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 는 것을 자기의 목적으로 삼고 존재하고 있었다. 양립될 수 없는 두 개의 원망과 욕구가 가 슴속에서 서로 싸우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모순에서 비롯된 하나의 목적의 소 모로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목적 없는 행위를 목적으로 삼고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고 졀코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을 가장 도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가능한 한 실행에 옳기려고 노력하는 다이스케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다가도 자기도 모르게 저버린 문제에 사로잡혀, 자기 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일 까 하고 의문을 갖게 되는 일도 있었다. 그가 반초를 산책하면서 왜 지금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때 그는 자기 자신도 자신의 활력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굻주린 행동 은 단번에 수행하는 용기와 흥미가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 행동의 의의를 도중에 의심 하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것에 권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권태에 사로잡히 면 논리와 흔란을 가져온다고 믿고 있었다.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때 무엇 때문에라는, 앞뒤 가 뒤바꿔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권태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문을 꽉 닫아버린 방안에서 한두 번 머리를 누르고 흔들어보았다. 그는 옛부터 사색 가들이 일삼던 무의미한 의의를 머리촉에 또다시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슬쩍 눈앞 에 나타났을 때, 또 시작이구나 하는 식으로 바로 지워버렸다. 동시에 그는 자기는 생활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따라서 행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원만히 수행하는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는 오직 황야의 한복판에 흘로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넋을 잃고 어리 등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상한 생활욕의 만족을 열렬히 바랐다. 또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도의욕의 만족을 높이 사려고 하는 사나이였다. 그리고 어떤 절에 이르면 그 두 가지가 불꽃을 튀기고 맹렬 히 싸우는 관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활욕을 낮추고 거기에 만족해하고 있 었다. 방은 평범한 일본식 방이었다. 이렇다 할 정도의 대단한 장식도 업었다. 멋진 액자 하 나 없었다. 색채로서 눈을 끌 만큼 멋진 것이라면 책장에 늘어놓은 양서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지금 그 책들에 둘러싸여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자기의 의식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주위의 사물에 대해 좀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 다고 생각하면서 방안을 빙빙돌았다.그러고 나서 다시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마 침내 이 불안정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입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역시 미치요님을 만나야겠구나. " 그는 마음에도 없는 곳을 거닐고 다녔던 것을 후회했다. 다시 한번 거리로 나서서 히라오 카의 집으로 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모리카와초에서 데라오가 찾아왔다. 그는 새 밀짚모자를 쓰고 작아 보이는 얇은 하오리를 입고 덥다, 덥다 하면서 달아오른 얼굴을 닦았 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왔단 말인가? " 하고 다이스케는 정떨어지게 내뱉었다. 그는 데라 오하고는 뎡소에도 이런 말투로 대하고 있었던것이다. "이 시간이 남의 집을 방문하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지. 자네 또 잠잤군 그래. 이래서 직업 이 없는 사람은 나약해서 안된단 말이이야. 자네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태어났나?" 하고 말 하더니 데라오는 짚모자로 자꾸만 가슴언저리를 부볐다. 아직 그다지 더위를 탈 때가 아니 었기 때문에 데라오의 그런 행동은 아주 애교가 있어 보였다. "무엇 때문에 태어났건, 그런 쓸데없는 참견 말게. 그것보다 자네야말로 뭣 때문에 찾아왔 나? 또 '한 열흘 정도만'인가? 돈 이야기라면 이제 꺼내지도 말게" 하고 다이스케는 서슴지 않고 앞질러 거절했다. "자네도 왜나 예의가 없는 친구로군" 하고 데라오는 하는 수 없이 대꾸했다. 그러나 별로 감정을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 정도의 말은 데라오에게는 조금도 실례가 되지 않 는 것이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데라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이스케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벽 을 보고 있는 것보다도 더 어떤 느낌이 없는 일이었다. 데라오는 호주머니에서 때묻은 가제 본한 책을 꺼냈다. "이것을 번역해야만 해." 다이스케는 여전히 말이 엄었다.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다고 그렇게 태평스런 얼굴을 하지 말게 진지해보라구. 나에게 생 사가 달린 일이니까"라고 말하고서 데라오는 작은 책을 의자 모서리에 세 번 탕탕 쳤다. "언제까지 해야 하나 ? " 데라오는 책장을 재빨리 넘겨보였다. "2주일간" 하고 그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한 다음에 "어쨌든 그때까지는 해치워야 해, 먹고사는 데 문제가 있으니 하는 수 없어"라고 설명했 다. "대단한 기세로군" 하고 다이스케는 그를 놀렸다. "그래서 흥고에서 이렇게 찾아왔지. 돈은 빌려주지 않아도 좋아. 빌려주면 더할 나위 없지 만-그것보다도 좀 모르는 것이 있어서 물어보려고 말이야. " "정말 귀찮게 구는군. 오늘은 머리가 아파서 그런 일은 할 수 없어. 적당히 번역해도 상관 없지않나. 어차피 원고료는 페이지를 쳐서 주는 것일테니. " "먹고사는 게 힘들다고 해서 그렇게 무책임한 번역은 할 수 없잖나. 오역으로 지적되면 됫일이 귀찮거든." "하는 수 없군" 하고 말하면서, 다이스케는 여전히 여유있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러자 데라오는 "이봐" 하고 말했다. "농담이 아니야. 자네처럼 빈등빈등 놀고먹는 사람 은 가끔 이 정도의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을걸세. 난들 번역을 잘하 는 사람한테 갈 생각이라면 뭣하러 자네한테까지 찾아왔겠나?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네와 는 달리 모두 바쁜 사람이거든" 하고 조금도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싸움을 하거나 상대방의 요푸를 들어주거나 그 어느 한쪽을 택해야겠다고 생 각했다. 그는 성격적으로 이러한 상대를 경멸할 수는 있으나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럼 되도록 분량을 적게 하기로 하지" 하고 전제한 뒤 다이스케는 부호가 붙어 있는 곳 만을 보았다. 그는 그 책의 줄거리마저 물어 볼 용기가 업었다. 데라오가 표시해놓은 부분에 도 애매한 곳이 아주 많았다. "야, 고마워" 하고 데라오는 곧 책을 덮었다. "모르는 곳은 어떻게 하지? "하도 다이스케가 물었다. "어떻게 하긴.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다지 잘 알 수 없을텐데 뭘. 첫째 시간이 없어서 어 쩔 도리가 없어" 하고 데라오는 오역보도 생활비 쪽이 더 중요한 문제나 되는 듯이 아예 그 렇게 정하고 말한다. 번역 문제가 끝나자, 데라오는 여느때와 같이 문학 이야기들 꺼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도, 그때부터 그는 번역과는 달리 아주 열을올렸다. 다이스케는 현재의 문학자들이 발표하는 창작물 가운데도 데라오의 번역과 같은 부류의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데라오의 모순을 우습게 생각했다. 그러나 귀찮아서 아예 입을 열지 않았다. 데라오 때문에 다이스케는 그날 히라오카를 방문딸 기회를 놓치고말았다. 저녁 식사를 하 고 있을 때, 마루쩽에서 소포가 도착했다. 젓가락을놓고 펴보니 아주 오래전에 외국에 주문 했던 두세 권의 신간 서적 이었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고 서재로 갔다. 한 권 씩 차례로 들고 두세 페이지를 넘기듯이 보았으나 어디에도 자기의 주의를 끌 만한 곳이 없 었다. 나머지 한 권은 그 이름마저 이미 잊고 있은것이었다. 언젠가 읽을 생각으로 가지런히 정돈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에 꽃아두었다. 툇마루에서 밖을 내다보니 청명한 푸른 하늘 은 그 빛을 잃어가고, 한층 짙어 보이는 이웃집 오동나무 위로 회미한 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때 가도노가 큰 램프를 들고 들어왔다. 램프에는 비단 잔주름이 세로로 흠이 나 있는 파란 갓이 씌워져 있었다. 가도노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다시 툇마루로 나가면서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제, 슬슬 개똥벌레가 나을 때가 되었는데요." 다이스케는 우습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직 나올 때가 안됐어." 그러자 가도노는 여느때와 같이, "그럴까요"라는 대꾸를 했으나 진지한 말투로 "옛날에는 개똥벌레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많았는데 요즘에는 문필가 양반들이 그다지 떠들어대지 않 는 것 같습니다.그 이유가 뭘까요? 개똥벌레나 까마귀는 요즘 아주 보기 드물지요"라고 대 답했다. "글쎄, 왜 그럴까?" 하고 다이스케도 얼빠진 체하다가 진지한 말투로 웅수했다. 그러자 가도노는, "역시, 전등에 압도되어 점점 모습을 감추는 것이지요"라고 말을 끝내 고, 흔자서 "에혜, 에혜" 하고 신소리의 결말을 내더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다이스케도 그 뒤를 따라 현관까지 나갔다. 그러자 가도노는 뒤를 돌아보았다. "또 나가십니까? 좋습니다. 램프는 제가 잘 두겠습니다. -아주머니가 아까부터 배가 아프 다고 누워 있는데, 대단치는 않을 겁니다. 그럼 안녕히 다녀오십시요." 다이스케는 문을 나섰다. 에도천에 이르렀을 때, 냇물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은 어두 워졌다. 그는 처음부터 히라오카를 방문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여느때와 같이 냇가를 걷지 않고 바로 다리를 건너서 곤고사의 비탈길을 올라갔다. 사실 다이스케는 그후로 미치요와 히라오카를 두세 번 만났다. 한번은 히라오카로부터 꽤 나 긴 편지를 받았을 때였다. 편지에는 도쿄에 온 이후 여러 모로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인 사가 씌어 있었다. 그런 다음 그후 여러 친구와 선배의 도움을 받았으나, 최근에 어떤 친 지 의 주선으로 모 신문사 경제부의 주임기자 자리에 대한 의뢰를 받았다. 자신도 그렇게 해볼 생각이 든다. 그러나 상경 당시 자네에게 부탁한 일도 있고 해서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될 것 같아 일단 자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는 내용이었 다. 다이스케는 그 당시 히라오카로부터 형의 회사에 취직시켜달라는 부탁을 받고도 조금도 힘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답신을 재촉받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편지 한 통으로 취직문제는 어림었겠다고 알리는 것도 너무 냉담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날 찾아가서 형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당분간 이쪽은 단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때 히라오카는 자기도 대충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묘한 시선으로 미치요 쪽을 보 았다. 또 한번은, 드디어 신문사 쪽이 결정되었다며 자네와함께 기분좋게 술이나 하고 싶다. 어 느 날 와달라는 엽서가 왔을 때, 공교롭게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하고 산책 나온 김에 사과 를 하기 위해 들렀던 것이다. 그때 히라오카는 방 한가운데 벌떡 누워 있었다. 그는 어제밤 어느 모임에 나가 과음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핏발이 선 눈을 자꾸 비볐다. 그는 다이 스케를 보고 갑라기, 자네처럼 독신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 나도 흔자 몸이라 면 만주나 미국이라도 갈텐데 하고 말하며 아내가 있는 것에 대해서 거듭 불평을 했다. 미 치요는 옆방에서 조용히 일을 하고 있었다. 세번째는 허라오카가 신문사에 나가고 없을 때 방문했다. 그때는 별다른 용무가 있어서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30분정도 툇마루에 걸터앉아 미치요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 아왔다. 그후로는 되도록 고이시가와 쪽으로는 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오늘밤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다케바야초로 올라가 그곳을 가로질러 2,3백 미터쯤 가자 히라오카라는, 처마에 단 등 앞에 이르렀다. 격자문 밖에서 소리를 지르자 하녀가 램프를 끄러나왔다. 그러나 히라 오카 부부는 집에 없었다. 다이스케는 어디에 갔느냐고도 묻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전차를 타고 흥고까지 갔다. 그리고 간다에서 내려 어느 맥주홀에 들어가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 다. 다음날 눈을 뜨자, 여전히 뇌의 중심에서 반지름이 다른 원이 머리를 이중으로 막은 것처 럼 느껴졌다. 그럴 때 다이스캐는 머리의 안과 바깥쪽이 질이 다른, 잘라서 맞춘 세공으로 되어 있는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스스로 머리를 흔들어보고 그 두 가지것을 흔합시 키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는 지금 배개 위에 머리를 묻고 오른손 주먹을 쥐고 귀 위를 두세 번 쳤다. 예전부터 다이스케는 이러한 머이의 이상을 취기 탓으로 돌린 적이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그다지 정신이 흐려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푹 자고 나기만 하면 가뿐해 졌던 것이다. 언젠가 형과 술 마시기 시합을 하여 세 흡들이 술병을열 세 병이나 해치운 적이 있었다. 그 다음날, 다이스케는 쌩쌩한 얼굴로 학교에 나갔다. 그러 나 형은 이틀 동안이나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며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나이 의 차이라고 말했다. 다이스케는 머리를 탁탁 치면서, 어젯밤 마신 맥주는 그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다이스케는 아무리 머리가 이중이 되어도 머리를 쓰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때로는 단지 머리를 쓰는 것이 귀찮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복 잡한 일도 충분히 견디어낼 자신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이상을 느껴도 뇌 조직의 변화로 인해 정신 상태가 이상해지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으로 그런 느 낌이 들었을 때는 놀랐다. 두번째는 오히려 신기한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대부분의 경우에 이 경험이 정신력의 저하에 따르게 되었다. 생활이 충실치 못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그 점이 불쾌했다.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또 한 번 머리를 흔들었다. 아침 식사 때 가도노는 조간 신문에 나와 있는 뱀과 독수리의 싸움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다이스케는 상대를 하지 않았다. 가 도노는 또 시작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고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더니 아주머니를 위로했다. "아주머니, 그렇게 일하시면 몸에 해로워요. 선생님의 상은 제가 치울테니 어서 가서 쉬세 요." 다이스케는 비로소 아주머니가 아프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떤 식으로든 걱정을 하는 듯한 말을 해야 했지만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나이프를 놓자마자 다이스케는 곧 흥차 찻잔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시가 지나 있었다. 잠시 뜰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차를 마시고 있는데, 가도노가 들어왔 다. "본댁에서 모시러 왔는데요." 다이스케는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서 데리러 올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시 물어보아도, 가 도노는 차부가 어쩌고저쩌노하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그래서 다이스케는 머리 를 흔들며 현관으로 나가보았다. 거기에는 형의 인력거를 끄는 가쓰라는 차부가 있었다. 그 는 고무 바퀴가 달린 인력거를 현관에 바짝 대고서 공손히 인사를 했다. "가쓰 무슨 일로 왔나 ? " 그러자 가쓰는 황송하다는 태도로 말했다. "마님께서 인력거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 " 물론 가쓰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오시면 아실 거라고-" 하고 그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말끝을 흐렸다. 다이스케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를 불러서 옷을 챙겨달라고 하려다가 배가 아픈 사 람을 시키기가 뭣해서 직접 장농 서랍을 뒤저서 재빨리 차려입고 가쓰가 끄는 인력거를 타 고 집을 나섰다. 그날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가쓰는 괴로을 듯이 앞으로 몸을 굽히고 달렸다. 거기에 올 라탄 다이스케는 이중의 머리가 빙빙 돌 정도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수레 바퀴가 힘 차게 굴러가면서 의식이 희미한 능력을 반수상태로 하늘로 태우고 가는 장면을 그려지자 기 분은 더없이 유쾌했다. 아오야마의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일어났을 때와는 다르게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하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생 방을 들여다보았더니 나오 키와 세이타로가 흰설탕을 뿌린 딸기를 먹고 있었다. "야, 맛있겠는데. " 그러나 나오키는 곧 자세를 가다듬고 인사틀 했다.세이타로는 입가를 적신 채 갑자기 이 렇게 물었다. "숙부님, 부인은 언제 얻지요?" 나오키는 히쭉히쭉 웃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할수없이 이렇게 대꾸했다. "오늘은 왜 학교에 가지 않았지 ? 그리고서 아침부터 딸기나 먹고" 하고 놀리는 것처럼, 그런가 하면 꾸짖는 투로 말했다. "오늘은 일요일이잖아요"라고 세이타로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 참, 그런가?" 하고 다이스케는 놀랐다. 나오키는 다이스케의 얼굴을 보고 드디어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다이스케도 잠시 웃다 가 객실로 갔다. 그런데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새로 깐 다다미 위에 둥근자단을 도려낸 쟁 반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 놓인 찻잔에는 교토의 화가인 아사이 모쿠고의 그림이 넣어져 있 어저 있다. 텅 빈 넓은 객실에 아침의 초록빛이 뜰에서 비쳐들어 모든 것이 고요하게 보였 다. 문밖의 바람은 갑자기 누그러진 것 같았다. 객실을 지나서 형의 방 쪽으로 가자 인기척 이 났다. "어머나, 하지만 그건 너무해요"라는 형수의 소리가 들렸다. 다이스케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형과 형수와 누이코가 있었다. 허리띠에 금사슬을 달고 요즘 유행하는 비단 겉옷 차림으로 문 쪽을 보고 서 있었다. 그는 다이스케를 보더니 우메코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왔구나. 여보, 그러니 다이스케에게 데려다달라고 해요." 다이스케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우메코가 다이스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련님, 오늘은 물론 한가하삐겠죠 ? " "네, 한가합니다" 하고 다이스케는 대답했다. "그럼, 함께 가부기자에 가기로 해요." 다이스케는 형수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속에 일종의 우스꽝스러운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때처럼 형수를 놀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귀찮아서 태연한 얼굴로 대꾸해 주었다. "네, 좋습니다. 그러시죠" 하고 그는 기분좋게 대답했다. 그러자 우매코는 이렇게 되물었 다. "하지만 도련님은 이미 한 번 보셨다면서요?" "한 번이건 두 번이건 전 괞찮습니다. 어서 가시죠" 하고 말하며 다이스케는 우메코를 보 고 빙그레 웃었다. "도련님도 구경이라면 어지간히 좋아하시는군요" 하고 우메코가 짓궂게 말했다. 다이스케는 더욱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형은 볼일이 있다고 하면서 곧 나갔다. 일이 끝나는 대로극장 쪽으로 오기로 했다는 겻이 었다. 그때까지 누이코와 둘이서 보고 있으면 될헨데도, 우메코는 그것이 싫다고 말했다. 그 러면 나오키를 데리고 가라고 하자 나오키는 외출복을 차려입고 거북하게 앉아있을 수 없다 고 대답했다. 그래서 별수없이 다이스케를 데리러 보냈던 것이다. 형은 나가면서 이렇게 설 명해주었다. 다이스케는 약간 이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지만 다만, 그런가요 하고 대꾸했다. 그리고 형수는 막간에 말벗이 필요하고 만일의 경우에 여러 가지 일을 부탁하기 위해 일부 러 자기를 불러오게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우메코와 누이로는 몸치장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이스케는 그 감독자가 두 사람 곁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장 난삼아 농담도 했다. 누이코는, 숙부님은 너무해요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아버지는 오늘 아침 일찍 외출을 하시고 집에 없었다. 형수는 어디에 가셨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다이스케는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안 계시는 것이 고맙기만 했 다. 며칠 전의 면담 이후로 다이스케는 아버지와 단 두 번밖에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그것 도 겨우 10분 내지 15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야기가 복잡해질 것 같으면 급히 공손하게 인 사를 하고 일어서기 일쑤였다. 형수는 화장대 앞에서 여름 허리띠의 끝을 만지면서, 아버지 는 객실 쪽으로 나와서 아무래도 다이스케는 요즘 약간 침착성이 없어졌다, 내 얼굴만 보면 도망칠 준비부터 한다고 말하며 화를 냈다는 말을 다이스케에게 해주었다. "형편없이 신용이 떨어졌군요." 다이스케는 이렇게 말하고 형수와 누이코의 양산을 들고 한발 먼저 현관으로 나갔다. 거 기에는 인력거 세 대가 나란히 대기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바람이 두려워 사냥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바람은 겨우 자고, 구름 틈으로 강한 햇빛이 머리 위를 비췄다. 앞서가는 우메코와 누이코는 양산을 폈다. 다이스케는 가끔 손등 으로 이마 앞을 가렸다. 형수와 누이코는 아주 열띤 자세로 연극을 관람했다. 다이스케는 두번째 보아서인지, 아니 면 최근 며칠 동안의 뇌의 상태 때문인지, 그렇게 한결같이 무대에만 정핀을 쏟을 수가 없 었다. 계속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열이 나서 가끔 부채를 들고 바람을 옷깃에서 머 리 쪽으로 보냈다. 막간에 누이코는 가끔 다이스케에게 묘한 일을 물었다. 왜 저 사람은 대야로 술을 마시느 냐, 왜 중이 갑자기 대장이 되는가 등등 대개 설명하기 힘든 질문뿐이었다. 우메코는 누이코 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웃기만 했다. 다이스케는 문득 2,3일 전에 신문에서 본 어느 문학자의 연극평을 떠을렸다. 거기에는 일본의 각본에 너무나 엉뚱한 줄거리가 많아서 마음 편히 관람을 할 수 없다고 씌어 있었다. 다이스케는 그때, 배우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구태여 그런 사람에게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작자에게 해야 할 불평을 배우한테 해대는 것 은, 지카마쓰의 작품을 알기 위해서 고시지의 조루리를 듣고 싶어하는 바보와도 같다는 말 을 가도노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가도노는 언제나 처럼 그런가요 하고 대꾸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 고유의 연극을 많이 보아온 다이스케는, 물론 우메코와 까찬가지로 예술의 감상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대에 있어서의 예술의 의미를,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서만 적용시켜야 한다는 좁은 뜻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메코와는 말이 아주 잘 통했다. 이따금 얼굴을 맞대고 전문가와 같은 비평을 하다보면 서로 감동할 정도였다. 그 러나 다이스케는 그 연극에슨 이미 어느 정도 싫증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연극 도중에 그 는 쌍안경으로 저쪽을 봤다가 이쪽을 봤다가 했다. 한쪽에는 기생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그 중 에는 쌍안경을 다이스케 쪽으로 향하고 있는 기생도 있었다. 다이스케의 오른쪽에는 자 기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가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앉아 있었다. 다이느케는 그 아내 의 옆모습을 보고, 자기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기생과 아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이스케의 왼쪽으로는 같은 일행인 남자 네 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박사들이었다. 다이스케 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리를 단둘이서 다 차지하고 있 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형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는데 단정하게 양복을 입고 있 었다. 그리고 그는 금테 안경을 쓰고, 무엇을 볼 때는 틱을 앞으로 내밀고 약간 위를 향하여 보는 버룻이 있었다. 다이스케는 그 남자를 보았을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러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그 남자와 같은 사람은 젊은 여자였 다. 그 여자는 아직 스무 살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관람객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대부분 겉 옷을 입지 않고 앞머리를 보통보다는 상당히 쑥 내밀게 빗고 턱을 목 언저리에 딱 붙어앉아 있었다. 다이스케는 앉아 있기가 지겨워서 여러 차래 자리에서 일어나 뒷도로 나가서 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형이 오는 즉시 형에게 누이코를 인계하고 재빨리 돌아가려고 생각했 다. 한번은 누이코를 데리고 그 근처를 빙빙 돌기도 했다. 나중에는 술이라도 시켜서 마실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형은 해가 거의 질 무렵에야 왔다. 형이 너무 늦었지 않느냐고했을 때, 다이스케는 띠 사 이에서 금시계를 꺼내 보였다. 여섯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형은 여느때와 같이 태연한 철 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형은 밥을 먹을 때 일어서서 복도로 나가더니 좀처럼 돌 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다이스케가 무심코 뒤돌아보았더니 한 줄 뒤 옆자리에 있는 금테 안경을 쓴 사나이한테 가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젊은 여자에게도 가끔 말을 거는 것 같 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살며시 미소만 지을 뿐 곧 무대 쪽똑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이스케는 형수에게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보려고 하다가 형은 사람모이는 곳에 나오기 만 하면 언제나 그렇게 당당하게 처신할 정도로 세상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는 사나이이므로 신경을 쓰지 않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자 막간에 형이 입구까지 돌아와서 다이스케에게 잠간 이리오라고 하며 그 금테 안경 을 쓴 사나이의 자리로 데리고 가서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다이스케에게는 이분이 고베의 다카기씨라고 소개했다. 금테 안경을 쓴 신사는 젊은 여자를 돌아보며 내 조카딸이 라고 말했다. 여자는 얌전하게 인사를 했다. 그때 형은 사카와씨의 따님이라는 말을 덧붙였 다. 다이스케는 이름을 들었을 때, 마슴속으로 어이쿠, 된통 걸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척하고 적당히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형수가 슬쩍 자기 쪽을 돌아 그들과 5,6분 이야기률 나누다가, 다이스케는 형과 함께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사카와의 딸을 소개 받기 전까지는 형이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칠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 다. 너무나 타산적으로 보였다가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참고 앉아 있었다. 형도 연극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가 업는 것 같았지만 여느메와 같이 의젓하게 앉아서 검은 머리를 그슬릴 정도로 업궐련을 퍼워댔다. 가끔 연극을 평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형의 말은 고작 누이코, 저 막 참 예쁘지 하는 정도였다. 우매코는 평소의 호기심과는 달리, 다카기에 대해서나 사카와의 딸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포 한마디의 비평도 하지 않았다. 다이스케의 눈에는 형수가 그렇 게 시치미를 때고 있는 므습이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는 가끔 형수의 책략에 걸려 드는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이번의 연극도 평소 같으면 심심 풀이 정도로 여기고 웃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일 자기가 결흔할 마음이 있었다면 도리어 이 연극을 이용해서 자기가 직접 재미있는 희극으로 완성시켜서 일 생 동안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만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형수마저 아버지와 형과 공모하 여 자기를 점점 궁지로 몰고 간다고 생각하니, 이런 처사를 단순히 웃어 넘길 수만은 없었 다. 다이스케는 앞으로 형수가 이 사건을 어떻게 발전시킬 속셈일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집안 식구 중에서 이런 계획에 가장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 바로 형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형수가 이 일로 계속 자신을 몰아붙일 경우, 다이스케는 점 차 가족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이 머리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연극은 열한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밖으로 나와 보니,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고요한 밤을 전등이 회미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 극장에 딸려 있는 찻집에서 이야기 를 나눌 틈도 없었다. 세 사람을 태우고 갈 인력거는 대기해 있었으나, 다이스케는 인력거 를 예약해두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그러싸 인력거를 기다리기가 귀찮아서 형수의 만류 를 뿌리치고 찻집 앞에서 전차에 을랐다. 스키야바시에서 전차를 갈아타 위해 어두운 길에 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를 업은 아낙네가 힘들어 보이는 얼굴로 저편에서 다가왔다. 전차 는 건너편을 두세 번 통과했다. 다이스케와 궤도 사이에는 흙인지 돌인지를 쌓은 것이 높은 제방같이 가로막혀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잘못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머니, 전차를 타려면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야 됩니다" 하고 가리키면서 그는 걷기 시작했다. 아낙네는 고맙다고 말하고 뒤를 따라왔다. 다이스케는 손으로 더듬듯이 어두운 곳을 잘도 걸어갔다. 도랑가를 목표로 왼쪽으로 25미터 정도 걸어나가자 간신히 정류장긔 푯말이 있는 곳에 이를 수 있었다. 아낙네는 거기서 간다바시 방향으로 가는 전차를 탔다. 다이스케는 흔 자서 반대 방향인 아카사카행을 탔다. 차안에서는 졸립긴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흔들리 는 가운데 오 늘밤의 수면이 걱정되었다. 그는 너무 지쳐서 낮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 염 중이 났지만, 어떤 할 수 없는 흥분 때문에 고요한 밤을 포근하게 보낼 수 없을 때가 많았 다. 그의 머리속에는 오늘 낮 동안에 번갈아 흔적을 남긴 색채가 시간과 형상에 관계없이 한꺼번에 어 른거렸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성격의 어떤 일이었는지조차 확실하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집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위스키의 힘을 빌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그 알 수 엄는 화려한 색조의 반조로서 미치요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리고 거기서 자신이 안주할 수 있는 땅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안주의 땅은 눈에 명확히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심적 상태로만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그 는 미치요의 얼굴이나 태도, 말씨나 부부 사이, 건강 상태나 처지를 하나로 묶은 것을 자신 의 기분에 맞는 대상으로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날 다이스케는 다지마에 있는 친구로부터 긴 편지를 받았다. 그 친구는 학교를 졸업 하자 곧 고향으로 돌아간 후로는 도쿄에 온 적이 한 번도 얼었다. 본인은 물론 산속에서 살 생각이 없었으나, 부모님의 뜻을 거역할 수가 언어서 어쩔수없이 고향에 묻혀버렸던 것 이 다. 하지만 1년 가까이 다시 한번 아버지를 설득해서 도쿄로 나올 생각이라고 성가실 정도 로 편지를 보내왔으나, 요즘에는 드디어 단념 했는지 불평 비슷한 하소연 한번 하지 않았다. 그의 집안은 유서깊은 가문으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산림을 해마다 벌채하는 것이 주된 생 업이었다. 이번 편지에는 그의 일상 생활이 아주 자세하게 씌어 있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동장으로 추대되어 연봉 300엔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농담조로 쓰고, 또한 애써 진지한 말 투로 졸업하고 바로 중학교 교사가 되어도 그 세 배는 받을 수 있다고 하며 자기와 다른 친 구를 비교하기도 했다. 그 친구는 고향으로 돌아간 지 약 1년 후에 교토의 어느 부잣집 딸과 결흔했다. 그것은 물론 부모님의 뜻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이를 낳았다. 아내에 대해서는 결흔했을 때 이 외에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아이의 성장에는 흥미가 있는지 이따금 다이스케가 우습게 여 길 만한 소식을 전해왔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읽을 때마다, 자기의 아이에 대해서 만족해하 는 친구의 생활을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 때문에 아내에 대한 생각이 신흔초에 비해 서 얼마나 변했을까 하고 의문을 갖기도 했다. 가끔 그는 말린 은어와 곶감을 보내왔다. 다이스케는 그 답레로 대개는 새로 나온 서양의 문학서를 보냈다. 그러자 그 답장으로 그것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중거가 될 만한 비령문을 반드시 보내왔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중에는 받았다는 인사 편지조차 없었 다. 다이스케가 일부러 물어보아야만, 책은 고맙게 받았다. 다 읽고 나서 고맙다는 인사 편 지를 띄을 생각이었는데 그만 늦어졌다. 사실은 아직 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읽을 시간 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읽고 싶은 생각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읽어봐도 이해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답신이 왔다. 그다음부터 다이스케는 책을 보내지 않고 그 대신 새로 나온 장난감 을 사서 보내기로 했다. 다이스케는 친구의 편지를 봉투에 넣고, 자기와 생각이 비슷했던 옛친구가 그때와는 전혀 반대되는 사상과 행동에 지배되어 생활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생명의 현의 진동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울림을 아주 면밀하게 비교했다 그는 친구의 결흔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산중에서 나무와 골짜기에 둘러싸여 살고 있 는 사람은 부모가 정해준 아내를 맞아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드는 같은 논법으로 어떤 의미의 결흔이든 도시인들에게는 불행을 가져온다고 단정했다. 그 이유는 도시는 인간의 전람회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앞서의 그 전제하에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러한 경로를 더듬었다. 그는 육체 와 정신에 있어서도 여러 종류의 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시인들은 고든 종류의 미 에 접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종류의 미에 접해서 그때마다 갑에 서 을로 마음을 옮기고, 을에서 병으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 고 단정했다. 그는 이것을 자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믿었다. 그 진리에서 출발하여 도시적 생활을 하는 모든 남녀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에 있어서 누구나 시시각각으로 감당해낼 수 없는 변화에 쉽쓸리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을 좀더 부 연하면, 기혼의 한 쌍은 두 사람 모두 세속에, 이른바 불의의 상념에 쉽쓸려 과거에서 생긴 불행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이스케는 뛰어난 감성을 지닌메다 사람들을 접촉 하는 데 있어 가장 자유로운 도시인의 대표자로서 기생을 선택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정부를 몇 명이나 바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통의 도시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 겠지만 모두 기생이라 볼 수 있었다.다이스케는 변함엄는 사랑을 주장하는 사람을 이 세상 최고의 위선자라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다이스케의 머리속에 갑자기 미치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다이스케는 이 논리 중에 어떤 인수를 참작했어야 하는 것을 깜빡 잊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인수는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자 기가 미치요에 대해 품고 있는 애툿한 감정도 이 논리에 의해서 사만 현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의 머리는 그 즉시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의 마음은 분 명히 그렇다고 느낄 만한 용기가 없었다. 12 다이스케는 형수의 적극적인 공세가 두려웠다. 또한 미치요에게 끌리는 마음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피서를 떠나기에는 아직 좀 일렀다. 그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그다지 하고 싶은 마 음이 없었다. 책을 읽어도 그 검은 문자 위로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차분히 생각하면 연꽃 실을 끌어당기듯이 생각이 나오지만, 나온 것을 한데 모아보니 무서운 것뿐이었다. 결 국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기 자신이 무서워졌다. 다이스케는 창백하게 보이 는 자신의 머리를 밀크 계이크처럼 회전시키기 위해 잠시 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별장으로 갈까 했다. 그러나 거기에 가 있는 것은 도쿄의 본가로부 터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우시고매에 있는 것과 별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 다. 다이스케는 여행 안내서를 사와서 갈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업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어디론가 가려고 했다. 그러 기 위해서는 일단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이스케는 기차를 타고 긴자까지 갔다. 쾌청한 날씨의 바람이 도로를 스쳐가는 오후였다. 신바시의 백화점을 한바퀴 둘러보고 교차시 쪽으로 통하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내려갔다. 그 때 저 멀리 보이는 집이 다이스케의 눈에는 연극의 배경처럼 납작하게 보였다. 푸른 하늘은 지붕 바로 위에 칠해져 있는 것 같았다. 다이스케는 양품점을 두세 군데 돌며 필요한 물건을 샀다. 그중에는 비교적 비싼 향수가 있었다. 시세이도에서 치약을 사려 했는데, 젊은 점원이 다이스케가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내놓고 자꾸만 사라고 했다. 다이스케는 얼굴을 찌푸리며 가게를 나왔다. 그는 종이로 싼 물건을 겨드랑이에 끼고는 긴자 변두리까지 갔다. 그리고 다이곤가시를 돌아 가지바시에서 마루노우치로 향했다. 그는 목적지도 없이 서쪽으로 걸어가면서 이것도 간편한 여행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지쳐서 인력거를 잡을까 하다가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띄지 않아 또다시 전차를 타고 집으 로 돌아갔다. 집에 당도해 들어서니, 현관에 세이타로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가도노에게 물어보자 네,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다이스케는 바로 서재 로 들어갔다. 세이타로은 다이스케의 커다란 의자에 깊숙히 앉아서 테이블 앞에서 알래 스 카 탐험기를 읽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메밀만두와 찻잔을 얹은 쟁반이 함께 놓여 있었다. "세이타로, 이게 뭐야. 주인도 없는 방애서 맛있는 것을 대접받고 있다니. " 그러자 세이타로는 웃으면서 우선 알래스카 탐험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의자에거 일어 섰다. "그대로 있어도 돼"라고 해도 세이타로는 말을 듣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세이타로를 붙들고 여느때처럼 놀려댔다. 세이타로는 얼마 전에 다이스케가 극장에서 하품했던 횟수를 알고 있었다. "숙부는 언제 장가 가세요?" 하고 세이타로는 얼마 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이날 세이타로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왔던 것이다. 그 내용은 내일 열한시까지 잠시 왔다 가라는 것이었다. 다이스케는 아버지와 형으로 부터 이렇게 자주 불려가는 것이 귀찮았다. 그래서 다소 화가 난 투로 세이타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뭐야, 너무하군. 용건도 말하지 않고 사람을 마구 불러대다니." 세이타로는 여전히 싱글거리고만 있었다. 다이스케는 그것으로 말을 딴데로 돌려버렸다. 두 사람의 주된 화제는 신문에 나온 씨름 대회가 되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가라고 했지만, 세이타로는 예습할 것이 있다고 하며 사양하고는 집으 로 돌아갔다. 그런데 가기 전에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내일 오시지 않는 건가요?" 다이스케는 별수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응 어찌될지 모르겠다.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려라." "언제요?" 하고 세이타로가 되물었을 때, 다이스케는 오늘이나 내일이라고 대답했다. 세이 타로는 알았다는 듯이 현관까지 나가서 신발벗는 곳에 내려가면서 돌아보더니 갑자기 "어디 로 가시는데요?" 하며 다이스케를 쳐다보았다. "어디냐고? 알게 뭐냐.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지." 그러자 역시 세띠타로는 싱글싱글 웃더니 격자문을 나섰다. 다이스케는 그날 밤 즉시 떠 나려고 가도노에게 여행 가방 안을 깨끗하게 해놓으라고 하고는 휴대품을 조금 챙겨넣었다. 가도노는 잔뜩 호기심어린 눈으로 다이스케의 가방을 쳐다보았다. "좀 도와드릴까요?" 하며 가도노는 우뚝 서서 물었다. "아니 괜찮아" 하고 거절하면서 파이스케는 집어넣었던 향수병을 꺼내 겉을 싼 종이를 뜯 어서 마개를 빼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가도노는 약간 정나미가 떨어진 양 자기 방으로 갔 다. 그런데 2,3분 후에 다시 나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차를 준비하게 할까요?" 다이스케는 여행 가방을 앞에 두고 얼굴을 들었다. "그래, 좀 있다가 들도록 하지. " 정원을 보니 깽올타리에 있는 상록교목 꼭대기에 아직 밝은 햇살이 방황하고 있었다. 다 이스케는 밖을 내다보면서 이제부터 30분 안에 행선지를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때나 자기가 떠나려는 시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그 기차가 닿는 곳에서 내려 그곳에서 내일 까지 지내다가 다시 새로온 운명에 자신을 맡길 생각이었바. 물론 여비는 충분치 않았다. 다이스케의 여장에 적합한 숙박을 계속한다면 일주일도 지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무심했다. 다급해지면 집에다 돈을 보내달라고 연락할 생 각이었다. 그리고 본래 기분 전환을 목적으로 떠날 생각이었으므로 사치스런 데는 눈을 돌 리지 않을 결심지었다. 그리고 기분이 나면 짐꾼을 고용해서라도 하루 종일 걸을 각오도 했 다. 그는 다시 여행 안내서를 펼치고 작은 숫자를 열심히 검토해보았지만 도무지 결정을 내 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다시 미치요 생각이 났다. 출발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만나보고 도쿄 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들었다. 여행 가방은 오늘밤 안에 정리를 해서 내일 아침 갈 수 있 에 해두면 된다. 다이스케는 빠른 걸음으로 현관까지 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가도노도 뛰어 나왔다. 다이스케는 입고 있던 그대로 벽의 못에 걸린 모자를 집어들었다. "또 나가십니까? 뭘 사러 가시나요? 괜찮다면 제가 사오겠습다" 하고 가도노가 놀란 듯이 말했다. "오늘밤은 그만두겠어" 하고 대꾸한 뒤 다이스케는 밖으로 나갔다.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아름다운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모습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상쾌한 바람이 옷깃 을 스쳤다. 그러나 밤을 힘차게 움직인 다이스케는 2,3백 미터쯤 걸었을 때 이마에 땀이흘렀 다. 그는 머리에서 사냥 모자를 벗었다. 검은 머리를 밤이슬을 적시며 가끔 모자를 일부러 흔들면서 걸었다. 히라오카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의 검은 그림자가 박쥐처럼 조용히 여기저기서 움 직였다. 볼품업는 판자 올타리 틈에서 불빛이 나와 길을 밝혀주었다. 미치요는 그 불빛 아래 서 신문을 읽고 있고있다. 이제 신문을 읽느냐고 물었더니 두번째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한가하십니까?" 하며 다이스케는 방석을 문틱 위로 옮겨 놓고 툇다루로 몸을 반 쯤 내놓고는 장지문에 기대었다. 히라오카는 집에 없었다. 미치요는 방금 목욕탕에서 돌아왔다며 부채까지 무릎 옆에 놔두 고 있었다. 그녀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온화한 얼굴로, 히라오카는 곧 돌아을 거라며 기다리 라고 하고는 다실로 차를 가지러 갔다. 머리는 서양식으로 묶고 있었다. 히라오카는 미치요의 말과는 달리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다이케가 언제나 이렇게 늦느 냐고 묻자 그녀는 웃음을 지으면서 대채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이스케는 그 웃음에서 쓸 쓸한 느낌을 받고서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부채를 집어들더니 소매 밑을 부쳤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의 경제 사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요즘생활비 에는 어려움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미치요는 그럼요 하면서 다시 좀전과 같은 웃음을 지 었다. 다이스케가 즉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당신 눈에 그렇게 보여요?" 하며 이번에는 그녀가 되물었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내려놓고 목욕탕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된 예쁘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다디스케 앞에 펴보였다. 그 손가락에는 다이스케가 선물했던 반 지 외에 다른 반지는 없었다. 자신의 기념을 언제나 잊지 않았던 다이스케는 미치요의 뜻 을 잘 알 수 있었다. 미치요는 손을 당기면서 동시에 얼굴을 확 붉혔다.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나쁘게 생각하진 마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다이스케는 가엽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다이스케는 아흡시경에 히라오카 집을 나왔다. 그는 거기서 나오기 전에 지갑 속 에 있던 것을 꺼내어 미치요에게 주었다. 그는 먼저 아무렇지도 않게 호주머니 것을 가슴 근방에서 열어서 안에 있는 지페를 세지도 않고 손에 쥐고는 대수롭지 않게, 이것을 드릴테 니 쓰라고 하며 미치요 앞에 내놓았다. "안돼요. " 그녀는 하녀를 의식한 듯 낮은 소리로 말하며 도리어 양손을 몸에 바짝 붙였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한번 내민 손을 그대로 거둬들일 수는 없었다. "반지를 받았으면 이것을 받아도 어차피 똑같지요. 돈이 반지라 여기고 받으세요" 하코 다이스케는 웃으면서 말했다. 미치요는, 하지만 너무 미안해서 하며 주저했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가 알면 야단 맞느냐 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야단을 맞을지 칭찬을 들을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역시 우물쭈물하 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야단 칠 것 같다고 생각되면 히라오카에게 말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 냐고 충고를 했다. 미치요는 그래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물론 내민 돈을 도로 집어넣을 수는 얼었다. 어쩔수없이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바닥을 미치요의 가슴 가까이 까지 가걱갔다. 동시에 얼굴도 30센티미터 정도 거리로 들이댔다. "괜찮으니까 받아두세요" 하고 그는 분명하면서도 낮은 소리로 말했다. 미치요는 턱을 옷깃에 파묻은 채 뒤로 당기면서 말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지폐는 그 위 에 떨어졌다. 그때 그녀는 긴 속눈샙을 두새번 껌벅거렸다. 그러고는 손바닥에 떨어진 것을 띠 사이에 끼어넣었다. "또 오겠습니다. 히라오카에게 안부나 전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는 다이스케는 밖으로 나 왔다. 거리를 가로질러 골목길로 내려오자 주위는 이미 아주 어두웠다. 다이스케는 아름다운 꿈 을 꾸는 것처럼 어두운 밤을 가로질써 걸었다. 그는 30분도 되지 않아서 집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하늘 높이 떠 있는 별을 머리에 이고 조용 한 고급 주택가를 걸어다녔다. 그는 한밤중까지 계속 걸어다녀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생각 이 들었다. 한참 걸어다니다보니 다시 집앞이었다. 안은 조용했다. 가도노와 아주머니큰 다 실에서 잡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늦으셨군요. 내일은 몇 시 기차로 떠나십니까?" 현관으로 올라서자마자 가도노가 이렇게 물었다. 다이스케는 미소를 지으면서, "내일도 그만두겠어" 하고 대답한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벌써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다이스케는 아까 마개를 빼고 향수를 베개 위에 한 방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왠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을 든 채 일어서 서 방 네 구석을 돌며 한두 방울씩 뿌렸다. 그렇게 기분을 푼 뒤 횐 바탕의 유카타로 갈아 입고는 새 솜을 넣은 잠옷 차림으로 손발을 편안하게 쭉 펴고 누웠다. 그리고 장미 향기가 가득한 가운데 잠이 들었다. 잠이 깼을 때는, 해가 이미 떠 툇마루에 황금빛 햇살이 가득했다. 베개맡에는 신문 두 장 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이스케는 가도노가 언제 덧문을 열고 들어와서 신문을 놓고 나 갔는지 전혀 몰랐다. 다이스케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목욕탕에서 몸을 닦고 있는 데 가도노가 조금 당황한 모습으로 오더니 말했다. "야오야마에서 형님이 오셨습니다" 다이스에는 곧 나가겠다고 대답하고는 깨끗하게 몸을 닦았다. 객실은 아직 청소가 되어 있는지 안되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뛰쳐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서두르지도 않고 평 소처럼 머리를 빗고 면도를 한 다음 천천히 다실로 갔다. 거기서 느긋하게 밥상을 대할 생 각은 나지 않았다. 그는 선 채로 흥차 한잔을 흘짝 마시도 수건으로 잠시 콧수염을 문지르 다가 그것을 거기에 내팽개치고는 바로 객실로 나갔다. "형님 " 하고 그는 인사를 했다. 형은 여느때처럼 불이 꺼진 짙은 색의 여송연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는 태연히 다이스케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다이스케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방에 아주 좋은 향기가 감도는데, 네 머리에서 나는 거냐?" "아마 그럴 겁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그는 어젯밤의 향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형은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허어, 아주 멋진 짓을 다 하는구나." 형은 여간해서 다이스케를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어쩌다가 오면 그것은 꼭 와야 할 용건 이 있을 때였다. 그러고는 볼일만 끝나면 즉시 돌아갔다. 오늘은 무슨 일띠 생겼음에 틀림업 다고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 어제 세이타로를 적당히 얼버무려서 돌려보낸 일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다. 5,6분 정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형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어제 저녁때 세이타로가 돌아와서 숙부는 내일부터 여행을 떠난다고 하기에 찾아왔다. " "네, 실은 오늘 아침 여섯시경에 출발하려 했지요" 하고 다이스케는 거짓말을 지극히 진 지하게 했다. 형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여섯시에 여행을 떠날 만큼 일찍 일어나는 너라면, 지금 시간에 일부러 아오야마에서 찾 아오지 않는다. " 새삼 용건을 들어보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자기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 수행에 불과했다. 즉 오늘 다카시와 사카와의 따님을 초대해서 오찬을 베풀 예정이니 다이스에도 참석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이었다. 형의 말에 의하면, 어제 저녁 세이타로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몹시 언짢아하셨다. 우메코 는 애를 태우며 다이스케가 출발하기 전에 만나서 여행을 연기하도록 말하라고 했다. 형은 그것을 말렸다 한다. "아니, 설마 그 녀석이 오늘밤 안으로 출발하겠어 ? 지금쯤은 가방 앞에 앉아서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내일이 되어보라고, 가만 놔두어도 올테니 하며 내가 형수를 안심시켰지" 하고 세이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다이스케는 조금 화가 나서 말했다. "그렇다면 가만 놔두었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여자란 성질이 급해서 아버지가 언짢아하시니 어쩜 좋으냐고 하며 오늘 아침 일 어나자마자 나를 졸라대지 많겠니" 하며 세이고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오히 려 귀찮다는 얼굴로 다이스케를 쳐다보았다. 다이스케는 가겠다, 가지 않겠다 하고 시원스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만은 세 이타로에게 했던 것처럼 적당히 얼버무려서 돌려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오찬 초 대를 거절하고 여행을 떠나려 해도 이제는 돈이 없었던 것이다. 형이나 형수 아니면 아버 지, 어쨓든 반대파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해서는 안될 처지였다. 그러자 좋지도 나쁘지도 않 은 다카기와 사카와의 딸 이야기를 꺼냈다 다카기는 10년 전에 한번 만났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어서 며칠 전 극장에서 보았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와는 반대로 사카와의 딸은 바로 얼마 전에 사 진을 보았는데도, 실제로 보았을 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진은 모한 것으로, 먼저 사 람을 알고 나서 사진을 보았을 때는 알아보기 쉽지만 그 반대로 사진을 통해 본 사람을 직 접 만났을 때 금방 알아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죽음에서 삶을 이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에서 죽음으로 옳긴다는 것은 자연의 순서라는 진리에 귀착 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고 다이스케는 말했다. 형은 당연한 말이라고 대답했지만 별로 감탁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여송연이 타들어가 서 콧수염에 불이 붙으려는 것을 얼른 바꾸어 물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 꼭 오늘 여행을 떠날 필요는 업겠지 ?" 다이스케는 여행을 떠나지 않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오늘 점심때 을 수 있겠구나." 다이스케는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엄었다. "그럼 나는 잠시 들를 곳이 있어 가봐야겠으니 틀림없이 와야 한다. " 형은 여전히 바쁘게만 보였다. 다이스케는 이제 배짱을 내밀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기분에서 상대방을 기분좋게 하는 대답만 했다. 그러자 갑자기 형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그 여자와 결혼할 생각은 없는 거냐? 괜찮은 상대 아니냐. 그렇 게 네 맘에 꼭 드는 상대만 찾는 것은 웬지 겐로쿠 시대의 색골 같아서 우습지 않니. 그 시 대 사람들은 남녀끼리만이 아닌, 아주 회한한 연애를 한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구 나. 어쨓든 아무래도 좋으니, 되도록 어르신네들이 노하지 않게 처신해라. " 형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다이스케는 객실로 돌아가서 한동안 형의 경구를 되새겼다. 자기도 결혼에 대해서는 실제 로 형과 같은 의견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결혼을 권하는 쪽도 화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형과는 반대로 자기에게 유리한 결론을 내렸다. 형의 말에 의하면, 사카와의 딸은 이번에 오래간만에 관광차 숙부를 따라 상경했으며 숙 부의 볼일이 끝나는 대로 다시 함께 고향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 기회를 이용해 서 두 집안끼리 인연을 맺어 상부상조하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요전 여행 때 이런 기회를 만들어놓고 돌아왔는지 다이스케는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자기는 단지 그 사람들과 같 은 식탁에서 맛있게 오찬을 들고 나면 사교상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그 이상으로 어떠한 발전이 필요하게 될 때는 그때 가서 적당히 대처할 수밖에 첩다고 생각했 다. 다이스케는 아주머니를 불러서 옷을 챙겨오라고했다. 귀찮긴 했지만 예의를 갖추기 취해 가문을 넣은 여름 예복을 입었다. 하카마는 홑것이 없어서 집에 가서 아버지 것이나 형 것 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이스케는 그 까다로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연회나 초대, 송별 파 티의 기회가 있을 때는 대체로 어떻게 해서든 참석했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의 얼굴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백작이나 자작과 같은 귀족도 있었다. 그는 그러한 사람들 과 한데 어울려 교제하며 손도 득도 느끼지 않았다. 말씨나 행동은 어디를 가더라도 똑같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 점이 형과 똑같아 보였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은 이 형제의 성격이 너 무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다이스케가 아오야마에 도착한 것은 열한시 오분 전이었는데, 손님은 아직 와 있지 않았 다. 형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었다. 형수만이 착실히 준비를 끝내고 객실에 앉아 있었다. "도련님도 여간 무심한 분이 아니시더군요. 사람을 따돌리고 여행을 떠나려 하다뇨" 하고 우메코는 다치스케를 보자마자 마군 퍼부었다. 그녀는 경우에 따라 결코 논리적이지 못한 여자였다. 그때도 자신이 다이스케를 따돌린 데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못 미친 인사 방식이었다. 그것이 다이스케에게는 애교로 보였다. 그는 곧 자리에 앉아서 우메코의 온에 대한 평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안에 계시다고 했지만 일부러 가지 않았다. "금방 손님이 오시면 제가 안으로 알려드리러 가겠어요. 그때 인사드리면 되죠 뭐" 하고 다이스케는 아버지께 가뵈라는 형수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고는, 여전히 평상시처럼 쓸데없 는 말을 지껄였다. 그러나 사카와의 딸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메코는 어떻게 해서라도 화제를 그쪽으로 돌리려 캤다. 다이스케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도 역력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더 딴청을 부리며 상대했다. 그러던 중 기다렸던 손님이 와서 다이스케는 약속대로 바로 아버지에게 알리러 갔다. 추 측했던 대로였다. "아, 그래" 하며 아버지는 바로 일어섰다. 다이스케에게 잔소리 할 틈도 없었다. 다이스케는 객실로 돌아와서 하카마를 걸친 다음 응접실로 나갔다. 손님들과 주인은 모두 그곳에서 대면했다. 아버지와 다카기가 제일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우메코는 주로 사카와의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형이 오늘 아침 차림 그대로 조용히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형은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을 때 다이스 케를 돌아보고는 "꽤 일찍 왔구나" 하고 낮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식사 장소로는 웅접실 옆방을 사용했다. 다이스케는 열려 있는 문틈으로 휜 식탁보의 모 서리 색깔이 아주 화려한 것을 보고는 점심은 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메코는 잠 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옆방의 입구를 들여다보러 갔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이쪽으로" 하며 아버지가 일어섰다. 다카기도 가볍게 인사하고는 일어섰다. 사카와의 딸도 숙부를 따라 일어섰다. 그때 다이스 케는 그녀의 하반신이 비교적 가늘고 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식탁에서는 아버지와 다카기 가 한가운데 마주보고 있었다. 다카기의 오른쪽에 우메코라 앉고, 아버지 왼쪽에 사카와의 딸이 자리를 잡았다. 여자끼리 마주본 것처럼 세이고와 다이스케도 마주앉았다. 다이스케는 양념통 꽃이를 사이에 두고 약간 비스듬한 위치에서 따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 데 뒤 창문에서 비치는 햇빛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 특히 코 언저리에는 너무 어두운 그 림자가 드러궈져 있었다. 그 대신 귀에 접한 얼굴빛은 분명히 옅은 분흥빛이었다. 특히 아주 작은 귀가 햇빛을 재뜰고 아주 섬세하게 보였다. 피부와는 달리 그녀는 짙은 다갈색의 커다 란 눈을 가졌다. 그 두 가지 대조로 인해 아주 개성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비교적 둥 근 편이었다. 식탁은 인원수에 비해 그다지 넓지 않았다. 방에 비하면 오히려 너무 작은 편이었다. 화려 한 꽃 레이스가 달린 순백의 식탁보 위에 놓여 있는 나이프와 포크의 색이 눈에 띄게 두드 러졌다. 식탁에서는 주로 평범한 잡담이 오갔다. 처음에는 그것마저 흥미롭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런 경우 아버지는 주로 당신이 좋아하는 고서화나 골동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리고 마 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강고에서 꺼내와 손님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아버지 덕분에 다이스 케는 그 방면에 어느 정도 안목을 갖게 되었다. 형도 그와 같은 이유로 화가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형은 족자 앞에 서서 아하 구영이군, 아하 응거로군 하고 말할정도였다. 그러나 진지한 태도로 그러는 것은 아니었차. 그리고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감정하는 데 돋 보기 같은 것을 휘두르지 않는 점만은 세이고나 다이스케도 똑같았다. 옛날 사람들은 아버 지처럼 그런 파도를 그리면서까지 작품을 감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작품에 대해서도 규 범에 어긋난다는 비평을 아직 한 번도 한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무미건조한 대화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마침내 고서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 다. 그러나 한두 마디에서 다카기는 그런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아 버지는 노련한 분이시므로 그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다시 평범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따분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쩔수없이 아버지는 다카기에게 어떤 방면에 취미가 있는지를 착인하려 했다. 그러나 다카기는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없다 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다카기를 세이고와 다이스케에게 맡겨 서 잠시 대화의 흐름을 바꾸게 했다. 세이고는 어렵지 않게 고베의 여관에서 부터 남공신사 에 이르기까지 닥치는대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렇게 하면서 사카와의 딸에게도 자연스럽게 한마디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간단하게 한마디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이 스재와 다카기는 맨 처음에 동지사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미국 대학의 상황으 로 옮겨갔다. 마지막에 에머슨과 호돈의 이름이 나왔다. 다이스케는 다카기한테 그 방면에 지식이 있다는 것만을 확인했을 뿐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문학에 대한 이 야기는 다만 두세명의 작가와 책이름으로 끝냈을 뿐 더 이상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우메코는 말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끊임없이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 노력의 목적은 물론 자기 앞에 있는 딸의 겸손과 침묵을 깨는 데있었다. 그녀는 예의상 우메코의 끊임없는 질문 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 쪽에서 먼저 우메코에게 묻거나 이야기를 거는 적 극적인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말할 때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이는 버룻이 있었을 뿐이었다. 다이스케는 그것 역시 깊은 관심의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교토에서 교육을 받았다. 음악은 처음에는 거문고를 배웠는데, 나중에는 피아노로 바꾸었다. 바이올린도 조금 배우긴 했지만 손놀림이 어려워서 거의 만지지 않고 있으며 연극은 좀처럼 관람한 일이 없었다. "요전의 연극은 어떻던가요?" 하고 우메코가 물었을 내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이스케의 눈에는 그녀의 태도가 연극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우메코는 계속해서 연극 이야기를 하며 그 배우는 이렇고, 또 어떤 배우는 저렇다는 등평을 하기 시작했다. 다이스케는 또 형수가 논리를 벗어났다고 생각 했 다. 할수없어서 다이스케는 옆에서 한마디했다. "연극은 싫어하셔도 소설은 읽으시겠죠?" 그렇게 묻고 연극 이야기를 끝내게 깼다. 사카와의 딸은 그때 처음으로 잠시 다이스케 쪽을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분명했 다. "아니에요, 소설도 역시." 따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주객은 모두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다카기는 그녀를 위해 변 명을 해야만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교육을 맡은 미스 뭐라고 하는 부인의 영향으 로 그녀는 어떤 면으로는 거의 청교도와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지간히 시대에 뒤졌다고 설명한 뒤 비평까지 덧붙였다. 그때는 물론 아무도 웃 지 않았다. 기독교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씨 않은 아버지는 칭찬의 말을 던졌다. "그거 다행이군요. " 우메코는 그러한 교육의 가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에도 없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업는 말을 했다. "그렇군요. " 세이고는 우메코의 말이 상대방에게 너무 무거운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즉시 화제를 바 꾸었다. "그럼 영어는 잘하시겠네요 ? " 따님은 아니오 하며 약간 얼굴을 붉혔다. 식사가 끝나자 그들 모두는 다시 응접실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촛불을 덧붙이 듯 새로운 방향으로는 갑자기 불이 옳겨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자 우메코는 자리에서 일 어나더니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한 곡 어떠세요?" 하며 우메로는 사카와의 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물론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러면 도련님이 먼저 한 곡 치세요" 하고 이번에는 다이스케에게 말했다. 다이스케는 여러 사람 앞에서 연주할 정도로 잘 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 지만 안하겠다고 하면 또 여러 말이 오갈 것 같고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았다. "그냥 열어두세요. 곧 할테니까요" 하고 대답만 하고는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계속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손님은 돌아갔다. 주인 네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님들을 현관까 지 배웅했다. 안으로 들어갈 때였다. "다이스케는 또 돌아간 것은 아니겠지 ?"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다이스케는 한걸음 뒤에서 양손이 문 위에 가로 댈 나무까지 닿을 정도로 기지개를 켜고 는 사람이 없는 응접필과 식당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가 객실로 들어갔다. 거기서는 형 과 형수가 마주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 바로 가면 안된다. 아버지께서 할 얘기가 있으신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보아라" 하 며 형은 일부러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우메코는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잠자코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이스케는 흔자서 아버지 방에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어떻게 형 부부를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태도로 보아 도무지 그렇게 해줄 것 같지 않아서 드디어 그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하녀가 왔다. "저, 도련님 잠시 안방으로 오시라는데요." "응, 지금 간다" 하고 대답한 뒤 다이스케는 형 부부한테 나 흔자서 아버지를 만나면, 아 버지의 적극적인 기세에 반해 나는 흐리터분해서 어쩌면 노인네를 대단히 노하게 할지 모른 다. 그렇게 되면 형 부부도 나중에 아주 골치아픈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a무 핑계 대지 말고 함께 가달라. 형은 따지는 것을 싫어해서 까짓것 그러지 뭐 하는 태도를 보 였다. "자 그럼 가자" 하며 형이 일어섰다. 우메코도 미소를 지으면서 곧 일어섰다. 세 사람은 복도를 지나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 아 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앉았다. 거기서는 우메코가 다이스케의 행동에 대해 아버지께서 꾸중하지 않도록 적당히 처리했 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가능한 한 방금 나간 손님 쪽으로 끌고 갔다. 우메코는 사카와 의 딸을 재우 얌전하고 착해 보이는 아가씨라고 칭찬했다. 그 말에는 아버지도 형도 다이tm 케도 같은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형은 만일 미국인으로부터 교육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좀 더 서양식으로 시원시원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의아심을 나타냈다. 다이스케는 형의 말도 일 리가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형수는 잠자코 있었다. 그래머 다이스케는 얌전한 태도는 수줍어하는 성격 때문 일 거라며 미국인으로부터 받은 교육과는 별개의 문제로 일본 남녀의 사교적 관계에서 오는 것일 거라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그럴 것이라고 했다. 우메코는 교육을 받은 곳이 교토이때 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그 이유를 돌렸다. 그 말에대해 형은 도쿄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 당신 같지는 않다. 대꾸했다. 그때 아버지는 엄한 얼굴을 하며 재떨이를 두드렸다. 그만하면 외모도 상당히 뛰어나지 않느냐고 우메코가 말했다. 말에는 아버지도 형 도 이의가 없었다. 다이스케도 동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사카이의 딸에 대해서는 그정도로 이야기를 끝내고 다카기의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온건하고 호인이라는 점에 대해 모두 공감을 나타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누구도 따님의 부모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견실하고 수수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아버지가 세 사람 앞에서 보증했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같은 현 의 어느 고액 납세의원으로부터 누군가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사카와 집안의 재 산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아버니는 그래도 일반 실업가보다는 기초가 단단해서 결코 흔들리는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사카와의 딸이 그 정도면 아주 흘릉한 신부감이라는 결론이 났을 때, 아버지 가 다이스케에게 물었다. "이의는 없겠지 ? " 그 어조라 할까, 뜻 역시 어떻게 하겠느냐는 정도의 말이 아니었다. "글쎄요" 하며 다이스케 역시 애애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다이스케를 쳐다보고 있던 아버지의 주름잡힌 이마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좀더 잘 생각해보렴" 하고 참다못한 형이 다이스케를 위해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13 나흘쯤 지나서 다이스케는 다시 아버지의 명령으로 다카기가 갈 때 신바시까지 전송했다. 그날은 도무지 눈이 떠지지 않는데도 어쩔주없이 일찍 일어나서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바람 을 천 탓인지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대합실에 들어서는 그를 보 자 마자 우메코는 안색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다이스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모자를 벗고는 가끔 젖은 머리를 눌렀다. 다카키는 갑자기 다이스케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어떠세요, 이 기차로 고베까지 놀러 가지 않겠습니까?" 다이스케는 다만 고맙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드디어 기차가 출발 하기 직전에 우메코 는 일부러 창문으로 다가가서 특히 따님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가까운 시일내에 다시 한 번 꼭 오세요." 따님은 창문 안에서 상냥하면서도 정중하게 인사했픈데, 창밖으로는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을 전송하고 다시 개찰구를 나온 네 사람은 거기서 각기 흩어졌다. 우메코는 다 이스케를 아오야마로 데려가려 했지만 다이스케는 머리를 흔들며 응하지 않았다. 인력거를 타고 우시고메로 돌아간 다이스케는 그대로 서재로 들어 가서는 벌렁 누웠다. 가도노는 잠시 차이스케의 상태를 들여다보러 왔다가 그의 평소 태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 에 말도 걸지 않고 의자에 걸쳐놓은 하오리만 들고 나갔다. 다이스케는 드러누워서 자신의 가까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했다. 이렇게 있다가 는 꼼짝업이 결흔을 해야 할 판이었다. 신부감은 이제까지 많이 거절해왔었다. 그러나 더 이 쌍 거절하다가는 아버지는 자기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하거나 노발대발할 게 뻔했다. 만일 아버지 쪽에서 진절머리를 내며 결흔 권유를 이것으로 단념해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 지만 노발대발할 경우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키지도 않는데 그러겠다고 말한다 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다이스케는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어떤 일을 꾸며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야 할 일을 그 계 획대로 강요하는 근대적 성격이 아너었다. 그는 자연의 순리야말로 인간이 만든 어떤 계획 보다 위대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카신의 자연에 역행하는, 아버지의 계획대로 강요한다면 그것은 쫓겨난 아내가 이흔장을 방패로 부부 관계를 입중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전혀 언었다. 아버지에 게 이치를 따져 공격한다는 것은 매우곤란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다이스케에게 이로울 일이 하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노여움만 사게 될테니, 이유를 말하지 않 고 결혼을 거절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형, 그리고 형수 가운데 아버지의 인격을 가장 의심했다. 이번 혼담만 해도 결혼 그 자체가 반드시 아버지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까지 확실했다. 그렇지만 아버 지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심중을 이렇게 억측 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부모 자식 중에서 자기만이 유독 불 행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다만 이 일로 인해 아버지와 더 이상 거리감이 생기 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는 극단적인 결과로서 부자간의 절연상태를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고통 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 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생길 재원의 두절 쪽이 두려웠다. 평소 다이스케는 만일 감자가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것이 된다면 인간은 그것으로 끝장이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앞으로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서 만일 금전상의 관계가 끊어진다 면 그는 싫든 좋든 어쩔 수없이 다이아몬드를 내던져버리고 감자에 매달려야 한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는 자연의 사랑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랑의 대상은 바로 남의 아내였다. 그는 누워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뭔가 시원한 결론을 얻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수명을 정할 권리가 언듯이, 자신의 미래 역시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자신의 수명을 대충 짐작할 수 있듯이, 자신의 미래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 고 헛되이 그 그림자를 잡으려 애썼다. 그때 다이스케의 뇌의 활동은 땅거미를 놀라게 한 박쥐와 같은 환상을 번뜻 연출해내는 데 불과했다. 그 날개치는 빛을 쫓으며 누워있다보니 머리가 바닥으로부터 등실등실 떠오르 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가 어느새 가벼운 잠에 빠졌다. 그러자 갑자기 누군가 종을 귀에다 대고 울렸다. 다이스케는 화재라는 생각조차 들기도 전에 눈을 떴으나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이런 소리를 듣는 필이 아주 잦았다. 어떤 때는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도 울렸다. 5,6일 전 그는 그의 집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때 그는 분명히 다다미의 움직임을 어깨와 허리, 그리고 등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또 꿈속에서 느끼던 심장의 고동을 잠이 잰 후까지 지속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성도처럼 가슴에 손을 얹 고 눈을 뜬 채 가만히 천정을 응시했다. 다이스케는 이때도 경종 소리가 귓속에 짜릿하게 전해질 때까지 누워서 기다렸다. 그리고 일어났다. 다실로 가보니 자기 밥상 위에 발이 쳐진 채 화로 옆에 놓여 있었다. 기등에 걸린 시계를 보너 열두시를 지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식사를 끝냈는지 자기 방에서 밥통 위에 팔베개를 하고는 졸고 있었다. 가도노는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이스케는 목욕탕으로 가서 머리를 적신 뒤 흔자 다실의 상 앞에 앉았다. 쓸쓸히 식사를 마치고 다시 서재로 돌아갔는데, 오래간만에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터 읽기 시작했던 양서를 책갈피가 끼워진 곳에서 펼쳐보니, 앞뒤 관계가 전혀 떠오 르지 않았다. 그런 현상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독서열이 대단했다. 졸 업을 한 후에도 읽고 싶은 책을 아무 걱정 없이 모두 사 읽을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자랑 스럽게 여겼다. 하루에 단 한 페이지라도 읽지 않으면 습관상 웬지 허전함을 느꼈다. 따라서 어떤 일이 있어도 가능한 한 시간을 내서 활자와 멀어지는 일이 없었다. 어떤 때는 독서 그 자체가 유일한 자기 본령인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다이스케는 멍하니 담배를 퍼우면서 읽기 시작 페이지를 두 세 장 뒤로 넘겨보았다. 그곳에 어떤 논의가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머리를 정리하는 데 애깼따. 그 노력 은 거룻배에서 선창으로 옮기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어긋난 단면의 갑에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사람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갑자기 을로 옮기게 된것과 마찬가지였다. 다이스 케는 그래도 두 시간 정도 활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으나 결국 견디지 못했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활자의 집합으로서 어떤 의미를 갖고 그의 머리에 비쳤지만 도무지 무슨 말 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얼음주머니를 사이에 두고 얼음을 먹으려 들 때처럼 어딘가 불만스 러됐다. 그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이럴 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리라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 젠 편안히 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 고통은 여느때와 같은 권태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짜중이 난다는것보다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어서서 다실로 들어가 개켜놓은 하오리를 다시 걸쳤다. 그리고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나막신을 신고 뛰어나가듯 문을 나섰다. 시간은 네시쯤이었다. 가구라자카를 정처 언골 내려가서 눈에뛴 첫 기차를 탔다. 차장이 행선지를 물었을 때 입에서 나오는 대 아무 렇게나 대답했다. 지갑을 열어보니 3천 대로 남았던 여행 비용 나머지가, 세 겹으로 된 지갑 깊숙이 들어 있었다. 다이스케는 승차권을 산 뒤 언제나처럼 숫자를 살펴보았다. 그는 그날 밤을 아카사카의 어느 대합실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 다. 젊고 아름다운 어느 여자가 어떤 남자와 관계해서 그의 아이를 갖게 되어 드디어 출산 을 했는데 눈물을 흘리 슬퍼했다. 나중에 그 이유를 물어보니 이런 나이로 아이를 낳게 것 이 한심하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오로지 사랑만을 하는 시기가 너무나 짧은데다가 부모 자식의 관계를 생각하자 어린 나이에 일종의 덧엄음을 느꼈던 것이다. 하긴 물론 착실한 여 인은 아니었다. 다이tm케는 육체의 미와 영흔의 사랑에만 자신을 바치고 그 외의 것을 생각 하지 않는 여자들의 심리가 그대로 드러난 그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여겼다. 다음날 다이스재는 또다시 미치요를 만나러 갔다. 그때 그는 마음속으로 지난번에 주고 온 돈을 그녀가 히라오카한테 이야기했는지 했는지, 만일 했다면 그 일 때문에 그들 부부에 게 무슨 일이나 있지않았는지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들렀다는 구실을 만들었다. 그는 그것 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드디어 미치요 쪽으로 생각을 돌 린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이스케는 집을 나오기 전에 어제 저녁때 입었던 옷들을 모두 갈아입고 기분을 새롭게 했 다. 밖은 온도계의 눈금이 나날이 올라갈 무렵이었다. 걷고 있노라면 축축한 이슬이 기다려 질 정도로 햇살이 강했다. 다이스케는 어제 저녁때 일로 이러한 기분에 빠지는 자신의 검은 그림자가 마음에 걸렸다. 넓은 차양의 여름 모자를 쓰면서 빨리 우기로 접어들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 우기는 벌써 2,3일 눈앞에 다가왔다. 그의 머리는 그것을 예보하듯 잔뜩 무거 웠다. 히라오카의 집 앞에 왔을 때는 찌무룩한 머리를 두텁게 덮은 모근이 후끈거렸다. 다이스 케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모자를 벗었다. 격자문은 잠겨 있었다. 무슨 소리가 나기에 뒤로 돌아가보니 미치요는 하녀와 풀을 먹인 것을 판자에 펴서 말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미 치요는 헛간 벽에 비스듬히 세워둔 판자의 중간에서 가느다란 목을 앞으로 내밀고 허리 를 굽힌 채 몹시 구겨진 것을 비벼서 정성것 펴고 있던 손을 멈추고 다이스케를 보았다. 잠 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스케도 한참 동안 서 있기만 했다. "또 왔습니다" 하고 다이스케가 말했을 때 미치요는 젖은 손을 gms들며 뛰어들어가듯이 부엌으로 올라갔다. 동시에 앞으로 돌아오라고 눈짓을 했다. 그녀는 신발을 벗어놓는 데로 내려가서 자기가 직접 격자문을 열면서 "조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 하고 말했다. 그녀 는 지금까지 해가 비치는 맑은 공기 아래서 손을 놀린 탓인지 볼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 이 평소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는 이마 위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다이스케는 격자문 밖에 서 미치요의 아주 연뱍한 피부를 바라보며 문이 열리는 것을 조용히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셨죠?"라고 말하며 미치요는 다이스케가 들어을 수 있도록 한 발 옆으로 물 러섰다. 다이스케는 미치요와 거의 스칠 정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객실로 들어가보니 히라오카의 책상 앞에 보랏 방석이 단정히 놓여 있었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보았을 캐 좀 언짢은 생각 이 들었다. 흙에 길들여지지 않은 정원이 노랗게 빛나는 곳에 기다란 잡초가 보기 흉하게 자라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바쁜데 찾아와 방해를 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평범한 변명을 하면서 아무 멋없 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때 미치요는 집이 너무 어수선해서 정말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녀는 물을 만저서 조금 부은 손을 무릎 위에 포개놓고, 너무 심심해서 방금 풀먹인 것을 널고 있었다고 했다. 미치요가 말한 심심하다는 뜻은 남편이 항상 밖으로만 돌기 때문 에 흔자 집에 있는 시간이 무료하고 괴롭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이스케는 일부러 놀리듯 이 말했다.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군요." 미치요는 자신의 허전한 심정을 다이스케에게 호소하려 하지도 않고 잠자코 옆방으로 갔 다. 장농 고리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그녀는 빨간 비로드로 덮어씌운 작은 상자를 들고 왔 다. 그녀는 다이스케 앞에 앉아서 그것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오래전에 다이스케가 선물한 반지가 분명히 들어 있었다. "받아주시겠죠?" 하고 그녀는 다키스케에게 사죄하듯이 말하더니 곧바로 일어서서 옆방으 로 갔다. 그러고는 남의 눈을 의식하는 듯이 기념 반지를 대충대충 장농에 집어녈고는 제자 리로 돌아왔다. 다이스케는 반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정원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한가하면 뜰의 풀이라도 뽑는 게 어때요?" 그러자 이번에는 미치요가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후 다이스케는 다시 새삼스럽게 물었 다. "요전 일을 히라오카에게 말했습니까?" 미치요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오. " "그러면 아직 모릅니까?" 하고 다이스케가 되물었다. 그때 미치요는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요즘 히라오카는 좀처럼 차분히 집에 있지 않아서 그 만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럴명했다. 다이스케는 물론 미치요의 설명을 거짓말이라고는 여기 지 않았다. 그러나 5분이면 남편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여지껏 하지 않았다는 것은 미치요 의 가슴속에 웬지 말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녀를 히라오카에 대해 그만큼 죄많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이스케 는 그 일로 그다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법률의 제재는 접어두더라도 자연의 제 재로서 히라오카도 이 결과에 대해 분명히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었다. 다이스케는 미치요에게 히라오카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미치요는 여느때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바 아내에 대한 히라오카의 태도가 예전과는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다이스케는 그들 부부가 도쿄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것을 눈치챘다. 그 후 로는 두 사람을 그다지 신경을 쓰고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좋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다이스케라는 제3자가 두 사남 사이에 끼여들어 그들 사이가 멀어졌다면 다이스케는 그 점에 대해 좀더 주의를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믿을 수 가 없었다. 그는 그 결과의 일부를 미치요의 건강 상태로 돌렸다. 그리고 그 점으로 인해 남 편의 마음이 달라진 것이라고 단정했다. 또 조금은 아이의 사망으로 인해, 그런가 하면 히라 오카의 방탕에도 그 원인이 있으며, 사회인으로서의 히라오카의 실패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 각했다. 마지막으로 히라오카가 주색에 빠져 경제 사정이 나빠진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 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히라오카는 얻어서는 안될 사람을 얻었으며, 미치요 는 시집가서는 안될 사람에게 시집갔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의 부탁으로 미치요를 그와 맺어주는 역할을 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자기가 미치요의 마음을 움직이 게 해서 히라오카가 아내에게 소홀해졌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었다. 동시에 미치요에 대한 다이스케의 애정은 그들 부부의 현재의 관계를 필수 수건으로 더해 간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미치요가 히라오카와 결흔하기 전에 그녀와 다이스케의 사 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잠시 제쳐두고라도, 그는 현재의 미치요에게 결코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병든 미치요를 그저 옛날의 미치요보다는 가엽게 여겼고, 또한 아이를 잃은 그 녀를 옛날의 그녀보다 가엾테 여겼다. 또한 남편의 사랑을 잃어가는 그녀가 너무나 가여웠 다. 그는 생활고에 허덕이는 그녀를 아무 걱정없던 옛날의 그녀보다는 안쓰럽게 여겼다. 그 러나 다이스케는 이들 부부 사이를 정면에서 영원히 떼어놓을 정도로 대담하지는 않았다. 그의 사랑은 그렇게 무분별하지 않았다. 미치요의 당장의 고통은 경제 눈제였다. 히라오카가 월급을 받아 댈 수 있는 생활비를 생활비로 돌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의 말투에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이스케는 그것만 이라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히라오카를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지요." 미치요는 쓸쓸한 얼굴로 다이스케를 보았다. 잘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녀의 입장이 더 난처해지리라는 것을 다이스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렇게 하겠다고 주 장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일어서서 옆방으로 가더니 봉한 편지 한 통을 가지고 왔 다. 편지는 연푸른색의 봉투에 들어 있었다. 홋카이도의 부친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봉투 안에서 기다란 편지를 꺼내어 다키스케에게 보였다. 편지의 내용은 그곳 사정이 어렵다는 것과 물가가 비싸서 생활을 꾸려나가기 어렵다는 것,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는 것, 도쿄로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볼 수 없느냐 는 등 모두 딱한 이야기뿐이었다. 다이스케는 공손하게 편지를 말아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미치요의 아버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전답을 가지고 있었다. 러일전쟁 때 주위 사람의 권유로 주식에 손을 댔다가 완 전히 실패해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미련없이 팔고 홋카이도로 떠났던 것이다. 그후의 소식은 다이스케도 이 편지를 보게 될때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친척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은, 미치요의 오빠가 살아 있을 때 자주 듣던 말이었다. 예상한 대로 미치요 는 아버지와 히라오카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정말 부러워요" 하고 미치요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부정 할 용기가 없었다.한참 후 미치요가 다시 물었다. "왜 아직도 열혼을 하지 않았나요? " 다이스케는 그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다이스케는 잠시 동안 미치요의 얼굴을 묵묵 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지더니 여느때보다 눈에 릴 정도로 창백 해졌다. 그때 다이스케는 그녀와 마주보고 앉아 있는 위험성을 비로소 깨달았다. 자연의 애 틋한 정에서 흐르는 대화가 무의식 중에 그를 자극시켜 도의적 한계를 넘게 하는 위험성이 지금의 2,3분내에 있었다. 다이스케는 물론 그보다 더 앞으로 나아간다 해도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제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는 대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외국 소설을 읽을 때마 다 거기에 나타난 남녀간의 사랑이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너무나도 문란하며, 또한 너무나도 직선적으로 진한 것을 평소부터 이상히 여겨왔다. 원어로 읽으면 또 몰라도 일본어로는 번 역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과 미치요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외국 소설에 나오는 멋진 표현을 인용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적어도 둘 사이에서는 평범 한 말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갑의 위치에서 을의 위치로 바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간신히 넘겼다. 그가 돌아갈 때 미치요는 현관까지 따라나오면서 말했다. "너무 쓸쓸하니 또 오세요. " 하녀는 아직도 뒤쪽에서 풀먹인 것을 널고 있었다. 밖으로 나간 다이스케는 비틀거리며 100미터 정도 걸었다. 적당한데서 일단락지었다는 의 식이 있어야 할텐데 그는 전혀 그러한 만족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커녕 미치요와 마주앉아서 좀더 자연이 명한 대로 하고 싶은 말이나 다 하고 돌아왔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 회도 없었다. 그는 그때 일단락짓는 거나 5분, 10분 후에 일단락짓는거나 똑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현재 자신과 미치요의 관계는 요전에 만났을 때 이미 발전하고 있었다고 생각 했다. 아니, 그보다 더이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이스케는 자기와 그녀의 과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되돌아보고 어떤 시기에서나 두 사람 사이에서 타고 있는 사랑의 불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녀가 히라오파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자기와 결혼한 거나 마찬가 지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그러한 느낌 으로 물었다. "안색이 아주 나쁘신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다이스케는 목욕탕으로 가서 창백한 이마의 땀을 깨끗이 닦아냈다. 그리고 너무 길게 자 란 머리를 냉수에 적셨다. 그리고 이틀 정도 전혀 외출을 하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오후에 그는 기차를 타고 신사로 히라오카를 찾아갔다. 그는 히라오카를 만나 미치요를 위해 분명 히 이야기를 할 결심이었다. 명함을 급사에게 주고 먼지투성이 접수계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는 자주 소맷자락에서 손수건 꺼내어 코를 감쌌다. 이윽고 2층 응접실로 안내되었 다. 그곳은 통풍이 잘 되지 않는 무덥고도 음침한 좁은 방이었다. 다이스케는 거기서 담배를 퍼웠다. 편집실이라고 씌어진 문이 시종 열리면서 사람이 들락날락했다. 다이스케가 만나러 간 히라오카도 그 출입문에서 나타났다. 그는 지난번에 보았던 여름 양복을 입고 여전히 깨 끗한 옷깃을 하고 있었다. "야아, 오래간만인데" 하고 그는 바쁜 것처럼 다이스케 앞에 섰다. 다이스케도 상대방의 자세에 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바쁜 편집 시 간이라 여유있게 말할수 없었다. 다이스케는 새삼 히라오카의 형편을 물었다. 히라오카주머 니에서 시계를 꺼내서 보며 말했다. "미안하시만 한 시간 후쫌 다시 와주게. " 다이스케는 모자를 들고 다시 어둠고 먼지투성이의 계단을 내려갔다. 밖으로 나오자 그런 대로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다이스케는 아무 생각 없이 그 근방을 걸어다녔다. 그리고 드디 어 히라오카와 만나면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낼까 하고 궁리했다.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조금 이라도 편안하게 살 누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도리어 히라오카의 감정을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경우 극단적으로는 히라오카와 자기는 완전히 등 을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떤 식으로 미치요를 보호해야 할지 그 대안이 없었다. 다이스케는 미치요에게 접근해서 자기뿐만 아니차 두 사람 사이를 그 이상으로 어떻게 할 용기도 없으면서 동시에 그녀를 위해 무슨 일을 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오늘 히라오카와 만나 이야기를 하려는 생각은 이지의 작용에서 나온 안전책이라기보다는 선풍에 휘말린 모험의 작용이었다. 그것은 평소의 다이스케답지 않은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시간 후에 그는 다시 편집 실 입구에 섰다. 그리고 히라오카와 함께 신문사 문을 나섰다. 뒷골목을 3,4백 미터쯤 갔을 때 히라오카가 앞서서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객실 처마 끝에 시원스럽게 풍경이 걸려 있었고, 좁은 뜰은 온통 물로 젖어 있었다. 허라오카는 웃옷을 벗더 니 즉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다이스케는 그다니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부채를 집어들었다. 대화는 신문사내의 상황부터 시작되었다. 히라오카는 바쁜 것 같지만 오히려 편안한 장사 여서 좋다고 했다. 그 말투로 보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다이스케는 무책임해서 그럴 거라고 놀렸다. 그러자 히라오카는 진지한 얼굴로 변명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문 사업만큼 경쟁이 치열하고 기민성 있는 두뇌를 필요로 하는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지, 글만 잘 써서는 안되겠지" 하고 다이스케는 별로 탄복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자 히라오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경제 방면 담당인데, 단 그것만으로도 썩 재미있는 사실이 들추어지고 있지. 가만, 자네의 집 회사 내막이라도 써 보여줄까." 히라오카의 역할을 잘 아는 다이스케는 그런 말을 듣고 어리등절해 하지는 않았다. "그것도 재미있겠지. 다만 공정하게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군." "물론 거짓은 쓰지 않을 생각이야, " "아니, 우리 형 회사만이 아니라 모든 기업의 부정부패를 그대로 써달라는 뜻이지. " 그때 히라오카는 악의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함축성있게 말했다. "일당 사건만으로는 부족하니까" 그러자 히라오카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불안한 눈길로 다이스케를 쳐다보더니 말했 다. "그야 나도 진즉부터 어떻게 해볼 생각이었는데, 지금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군. 좀더 기다 려줘. 그래서 자네 형과 아버지의 일도 이렇게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니까." 다이스케에게는 너무나도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기 보다는 오히려 어떤 중 오를 느꼈다. "자네도 참 많이 변했군" 하고 다이스케는 쌀쌀하게 말했다. "자네가 변했듯이 나도 변했지. 이렇게 달라진 거야 하는 수 없지. 그러니 좀더 기다려줘" 하고 대답한 다음 히라오카는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의 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은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 졌다. 그래서 어설프게 빛이나 재촉하러 온 것은 아니라고 변명한다든지, 히라오카가 그 의 표를 찌른 것이 못마땅해서 그런 착각은 착각으로 상관없다고 하면서 자기는 자기 식으로 나아가려는 태도로 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곤란한 것은, 히라오카의 생활 형편을 미치요 의 호소에 의해 알았다고 했다가는 그녀의 입장이 난처해진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그 이 야기부터 꺼내지 않고서는 충고도 조언도 전혀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할수없이 다이스케는 이야기를 돌려서 했다. "자네는 요즘 이런 데를 자주 드나들어서 이 집 사람들과 모두 잘 아는 것 같군. " "자네처럼 주머니 형편이 좋지 않아서 호화롭게 쓰지는 못하지만 다 일 때문이니까 할수 없지" 하고 대꾸하더니 히라오카는 재치있는 손놀림으로 술잔을 입에 댔다. "내가 참견할 건 아니지만, 그러고도 생활을 해나갈 수 있나?" 하고 다이스케는 태연히 말했다. "응,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지" 하고 히라오카는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극히 마음에 없는 대답을 했다. 다이스케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수가 없어서 이렇게 물을수 밖에 없었다. "평소 같으면 지금쯤 집에 가 있겠군? 일전에 내가 찾아갔을 때는 퍽 늦는 것 같던데." 그러자 히라오카는 역시 문제를 회피하는 투로 말했다. "바로 귀가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 직업의 성격이 이렇듯 불규칙하다보니 할수없지 뭐" 하고 그는 다소 자신 을 변명하듯이 애매하게 말했다. "미치요님이 좀 적적하겠군. " "뭐 괜찮아. 그 사람도 많이 변했으니까" 하고 말하며 히라오카는 다이스케를 쳐다보았다. 다이스케는 그 눈동자 속에서 웬지 모를 두려움을 느쪘다. 어쩌면 이들 부부의 관계를 원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것은 무리인 듯싶었다. 만일 그들이 자연의 도끼로 갈라지기라도 한다 면 자신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업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신과 미치요는 그만큼 가까워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한 것처럼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변했다 하더라도 다만 나이가 들었다는 것뿐이겠지. 돌아가서 미 치요님을 좀 위로해주라구."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나?" 하고 말하자마자 히라오카는 술을 쭉 들이켰다. "그렇게 생각하냐니,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하고 다이스케는 생 각없이 함부로 대답했다. "자네는 미치요를 3년 전의 미치요로 생각하는가 보군. 아주 변했어. 그렇지, 너무나도 변 했다구" 하며 히라오카는 또 쭉 틀이켰다. 다이스케는 무의식 중에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똑같아. 내가 보기엔 똑같다구.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데." "하지만 집에 가도 아무 재미가 없을 정도라구. 그러니 어쩌겠나" "그럴 리가 있나. " 히라오카는 눈을 등그렇게 뜨고는 다시 다이스케를 쳐다보았다. 다이스케는 약간 숨이 찼 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이 번갯불에 맞은것 같은 그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는 평소와 달 리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을 다만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자기 앞에 있는히 라오카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히라오카 부부를 3년 전과 똑같이 생각하고 그것을 기화로 미치요에 대한 연모의 정을 완전히 떨쳐버리려는 최후의 시도를 무의식적으로 했을 뿐이었다. 자핀과 미치요와의 관계를 히라오카에게 숨기기 위한 호도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에게 배신감을 안겨주는 행동을 하기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도 고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참 후 다이스케는 다시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밖으로만 나돌다보면 자연히 돈도 많이 쓰게 되니까 집안 살림도 어렵게 되고 가정에 대해서도 점점 홍미를 잃게 될 것 아닌가?" 히라오카는 휜 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리며 말했다. "가정이라고? 가정도 그다지 고맙지 않아. 가정을 중히 여기는 것은 자네 같은 독신자가 아닐까. " 그 말을 들었을 때 다이스케는 히라오카가 미워겼다. 그 순간 그는 그렇게도 가정이 싫다 면 어쩔수없겠지, 그 대신 네 아내를 내가 맡겠다고 분명히 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문답은 거기까지 가기에는 아직도 상당한 간격이 있었다. 다이스케는 다시 한 번 다른 식으로 히라오카의 속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 "자네가 막 도쿄로 왔을 때 내가 말했지. 무엇인가 해보라고." "웅, 그리고 자네의 소극적인 철학을 듣고 놀랐었지." 다이스케는 실제로 히라오카가 놀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히라오카는 열병에 걸 린 사람처럼 어떤 행위에 목말라 있었다. 그는 그 결과로서 부를 열망했는지 아니면 명예, 권세, 그것도 아니면 활동으로서의 행위 그 자체를 원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처럼 정신적으로 뒤떨어진 사람은 어쩔수없이 그렇게 소극적인 의견밖에 내놓을 수 없 지만, 어떤 외견이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잖나. 먼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에 적합한 의견이 나오는 것이니 그때 내가 말한 것온 나한테만 통하는 것이겠 지. 결로 자네 신상에 대해 왈가왈부하려는 것은 아니라구. 라는 그 때의 자네 의욕에 탄복 했네. 그때 자네가 말한 것처럼 자네는 더할 나위 없는 활동가지, 부디 그렇게 해주기 바라 는 마음이야." "물론 그렇게 할 생각이야." 히라오카의 대답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다이스케로서는 의아할 수 밖에 얽었다. "신문으로 할 작정인가 ? " 히라오카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곧 자신있게 말했다. "신문사에 있는 동안은 그럴 생각이야."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나 역시 자네의 전생애를 묻는 것은 아니니까.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해. 그러나 신문으로 재미있는 활동을 할 수 있을까 ? " "할 생각이야" 하고 히라오카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이야기는 거기까지 진행되었지만 추상적인 흐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이스케는 말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히라오카의 속마음을 확인하는 일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다이스케는 웬 지 책임있는 정부 위원이나 변호사를 상대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다이스케는 용기를 내어 정략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군신 히로세 중좌의 예를 들었던 것이다-히로세 중좌 는 러일전쟁때 폐색대에 참가했다가 전사했기 때문데 그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우상화되어 드디어는 군신으로 숭상받았다. 그러나 45년이 지난 오늘날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영웅의 생명은 그렇게도 짧은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엄는 것이, 영웅 이란 대부분 그 시대에 지극히 중요했던 인물로 이름만은 훌륭한 것 같아도 본래는 매우 실 제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중요했던 시기가 지나면 세상은 그 자격을 빼앗고 만다. 러시아 와 한참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중요했을 뿐, 평화가 찾아들자 그 이름 높던 히로세중좌도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웃 사람에 대해 타산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웅 대해서도 타산적이다. 그래서 이러한 우상에도 언제라 신진대사나 생 존경쟁의 원리가 적용된다. 그래서 나는 영웅 따위로 존경받고 싶은 생각은 도무지 없다. 그 러나 야심에 차고 패기있는것이 있다면, 일시적인 칼의 힘보다 영원한 필봉으로 영웅이 되 는 것이 보다 더 생명력이 있을 것이다. 신문은 그 방면의 대표적인 사업이다. 다이스케는 여기까지 말해보았는데, 히라오카를 기분좋게 해주기 위해 시작한 이야기로 말 자체가 너무 유치해서 내심 우습게 생각되어 신이 나지 않았다. 히라오카는 아주 간단하 게 대꾸했다. "고맙네. " 히라오카는 화를 낸 것도 아니지만 조금도 감격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한마디로 알 수 있 었다. 다이스케는 히라오카를 너무 얕잡아 본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사실 다이스케는 그의 마 음을 움직여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원래의 의도대로 유도하려고 생각했었다. 다이스케는 그렇게 살짝 돌아서 어렵게 시작한 출발점에서 얼마 나아가지도 못하고 또다시 실패하고 말 았다. 그날 밤 다이스케는 결국 우물쭈물하다가 히라오카와 헤어졌다. 그 결과 무엇 때문에 히 라오카를 신문사로 찾아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히라오카 쪽에서 보면 더욱 그러했다. 히 라오카 역시 다이스케에게 무엇 때문에 신문사까지 찾아왔는지를 돌아갈 때까지 캐묻지 않 고 말았다. 다음날 다이스케는 흔자 서재에 틀어박혀 머리속으로 어제 저녁의 일을 몇 번이나 되새겨 보았다. 두 시간이나 함께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히라오카에 대해 진지했던 것은 미치요를 변호했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 동기가 진지했을 뿐, 주고받은 말은 역시 적당히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실속없는 말뿐이었다. 좀더 심한 표현을 쓰면, 거짓말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진지했다고 믿었던 동기조차도, 알고 보면 자신의 미래를 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히라오카가 볼 때는 처음부터 진지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그밖의 이야기는 처 음부터 히라오카를 현재의 입장에서 자기가 바라는 곳으로 유도하려는 계획하에 상대했던 타산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히라오카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만일 다이스케가 대담성을 발휘해 미치요를 내세우며 자기의 생각을 거리낌엄이 털어놓았 다면 보다 더 강경한 이야기로 히라오카를 좀 더 설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의 폐 부를 찌를 수 있었을 결과가 된다. 그러면 그들 부부는 다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이스케는 어느새 안전하고도 무능력한 태도를 취하며 히라오카와 만났던 것을 어리석게 여겼다. 만일 그런 태도로 히라오카와 맞설 경우 한편으로는 미치요의 운명을 히라오카에게 맡기지 못한다는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뻔뻔스럽게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모순을 범하 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스케는 옛날 사람들이 머리가 좋지 못해서, 실은 이기 본위의 입장을 취하며 스스로 는 남을 위한다고 굳게 믿고는 함께 울고 웃고 화를 내어 그 결과 드디어 상대를 자기 마음 대로 다를 수 있었던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자신의 머리가, 그 정도로 나빴다면 어제 히라오카와 이야기를 나눌 때 좀더 감격해서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b그는 주위 사람들, 특히 아버지로부터 열의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다이스케의 생각은 이러했다-인간은 열의를 갖고 대할 만큼 고상하고, 진지하고, 순수한 동 기나 행위를 언제나 갖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하잘것 없는 동기나 행위뿐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러한 동기나 행위에 대해 열의를 보이는 사람은 분별심없고 어리석기 악없는 사람이 거나 열성을 자랑하며 자기를 치켜올리는 사기꾼에 불과하다. 따라서 냉담한 태도는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다운 것이라 할 수 있 다. 그는 자신의 동기나 행위를 진지 하게 되새겨본 결과, 대체로 너무나도 능글맞고 불성실하고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결국은 열의를 갖고 그것을 수행할 마음이 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있었다. 여기서 그는 하나의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자기와 미치요와의 관계를 자연이 명령하는 대로 계속 발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그 반대로 아무것도 몰랐던 옛날로 돌아갈 것인 가, 그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삶을 이끌어나갈 우 없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밖의 방법은 모두 거짓으로 시작해서 거짓으로 끝날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다른 방법은 모두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이 없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무능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치요와의 관계를 천의( 그는 그것을 천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에 따랐을 때 일어날 엄청난 일게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천의에는 어긋나지 않지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의에 어긋나는 사랑은 주인공이 쭉은 후에야 비로소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마련이었다. 그는 만일의 사태에 일어날 비극을 머리속으로 그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그는 다시 반대로 미치요와의 영원한 이별을 상상해보았다. 그때는 천의에 따르기보다, 자 기 의지에 따르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그 수단으로 아버지와 형수로부터 권 유받은 결흔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흔을 받아들이는 것이 모든 관계를 새롭 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4 다이스케는 자연아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의지인이 될 것띤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 는 조금도 응통성 없는 방침 아래, 더위와 추위에 대해 아주 예민한 반웅을 나타내는 자기 를 기계처럼 속박하는 어리석은 일을 아주 싫어했다. 동시에 그는 그의 생활이 일대 단안을 내려야 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결혼 문제에 대해 잘 생각해보라는 말을 듣고 돌아온 뒤 아직 까지도 진지하게 생각 해본 적이 업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저 오늘도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의 숨을 내쉰 뒤 그 대로 흘려버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 무슨 말이 없지만 아무래도 2,3일 사이에 호출될 것 만 같았다. 다이스케는 물론 호출당하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또다 시 불러들일 경우 까버지의 기분에 맞춰 그자리에서 적당히 대답을 만들 생각이었다. 다이 스케는 아버지를 바보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모든 대답은 그런 식으로 상대와 자신의 입 장을 잘 혜아려 임기응변으로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미치요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극단적인 데까지 발전시킬 생각이 아니었다면 다이스 케는 아버지에 대해 물론 그러한 조처를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상대방의 기분 에 관계없이 지금 당장 손에 쥔 주사위를 던져야 했다. 위로 된 눈이 히라오카를 배신하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주사위를 던진 이상 하늘의 뜻에 따 를 도리밖에 없었다. 주사위를 손에 쥔 이상, 아니 주사위를 던져야 할 운명인 이상, 주사위 의 눈을 결정해야 할 사람은 자기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다이스케는 최후의 결정권은 바로 자기 자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형도 형수도 히라오카도 결단의 지평선 위에 설 수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대단히 비겁했다. 며칠동 안 그는 손바닥 위에 놓인 주사위에서 운길을 떼지 못했다. 오늘도 역시 쥐고 있었다. 하루 빨리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어 그 손을 가볍게 털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쥐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 그지없었다. 가도노는 가끔 서재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이스케는 책상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산책이라도 좀 하시지 그러세요. 그렇게 공부만 하시면 몸에 좋지 않을텐데요. " 가도노는 한두 번 그런 말을 했다. 다이스케는 정말 안색이 좋지 않았다. 여름철이 되었는 데도 가도노는 매일 더운물을 데워주었다. 다이스케는 목욕탕에 들어갈 때마다 오랫동안 거 울을 보았다. 수염이 짙어서 조금만 자라도 보기 흉했다. 만져보았을 때 꺼칠꺼칠하면 더 욱 더 불쾌 했다. 밥은 여전히 평상시와 같이 먹었다. 그러나 운동 부족과 일정하지 않은 수면 시간, 그리고 정신적인 불안으로 배설 기능에 이상이 생겼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그것을 아 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는 생리 상태의 이상으로 괴로워할 여유가 없을 만큼 한 가지 일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것이 습관이 되자, 끝도 없디 빙빙 돌고 있는 쪽이 한계선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결국 다이스케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자책감에 빠졌다. 할수없이 미치요와 자신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단으로 그는 사카와 집안과의 혼담을 거절하려고까지 생각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러나 미치요를 잊는 수단으로서 그 흔담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혼담을 거절하는 것은 그 흔자서도 얼마든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었다. 다만 그 결과 자 신과 미치요에게 틀림없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시 무서워졌다. 다이스케는 아버지의 재촉을 은근히 기다렸다. 그러나 좀처럼 아무 소식도 업었다. 미치요 를 또 한번 만나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다. 결혼은 도덕적 형 식에 있어서 자신과 미치요를 갈라놓지만, 도덕적 내용에 있어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다이스케의 머리속에 점점 자리잡혀가기 시작했다. 이미 히라오카와 결혼한 미치요와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해서, 자기가 결혼을 하더라도 같은 관계가 계 속된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남의 눈에 비정상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마음을 속박할 수는 없는 일히고, 그것은 점점 고통을 더할 뿐이라는 것이 다이스케의 논법이었다. 따라서 다이스케 는 흔담을 거절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결심한 다음날 다이스케는 오래간만에 이발을 하고 면도를 했다. 장마철로 접어들 면서 2,3일 동안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서인지 길거리도 나뭇가지도 아주 깨끗했고 햇빛도 전보다 더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빛은 습기 때문에 거의 반사 력을 잃은 것처럼 부드럽게 보였다. 다이스케는 이발소에서 거울을 들여다 보며 여느때와 같이 통통한 볼을 만지면서 오늘부터 드디어 적극적인 자세로 행동 개시에 들어간다고 생각 했다. 아오야마에 가보니 현관에 인력거가 두 대쯤 있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인력거꾼은 발을 올려놓을 부분에 기댄 채 잠이 들어 다이스케가 지나가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객실에는 우메코가 신문을 무릎위에 올려놓은 채 복잡하게 얽힌 뜰의 초록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 었다. 역시 졸리는 모양이었다. 다이스케는 느닷없이 우메코 앞에 앉았다. "아버지는 계십니까?" 형수는 대답하기 전에 일단 다이스케의 차림을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도련님 좀 야윈 것 같은데요." 다이스케는 또 볼을 만졌다. "그럴 리가 업는데요" 하고 그는 부정했다. "하지만 얼굴이 너무 안돼 보여요" 하고 우메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이스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정원 때문이겠지요. 저 초록빛 때문에 그럴 겁니다" 하며 다이tm케는 뜰의 정원수 쪽 을 보다가 "그러니 형수님 역시 얼굴빛이 좋지 않아요. " "저도 요 며칠간 몸이 찌뿌등하군요. " "어쩐지 멍하니 앉아 계시더라. 감기라도 걸렸습니까?" "왜 그런지는 몰라도 자꾸 선하품만 하게 되네요." 우메코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곧장 무릎에서 신문을 내려놓고 하녀를 불렀다. 다이스케는 다시 한 번 아버지가 집에 계신지 확인했다. 우메코는 다이스케의 질문을 이미 알고 있었다. 형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관에 있는 인력거는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이 타고온 것이 다. 다이스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손님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형수 는 확실한 걸 모르니까 목욕탕에 가서 세수하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하녀가 아주 좋은 냄새 가 나는 녹나무잎떡을 오목 들어간 접시에 담아서 가져왔다. 다이스케는 녹나무잎떡을 손에 들고는 몇 번이나 냄새를 맡았다. 우메코가 시원스러운 눈매로 돌아왔을 때 다이스케는 떡 하나를 들면서 말했다. "형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우메코는 즉시 진부한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는 것처럼 한참 안 툇마루 끝에 서서 뜰을 바라보고 있다가 대꾸했다. "2,3일 동안의 비로 이끼 색깔이 완전히 살아났어요." 그녀는 평소에 어울리지 않는 관찰을 하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형이 어떻다구요?" 하고 그녀는 되물었다. 다이스케가 다시 한번 똑같이 묻자 그녀는 아주 무관심한 태도로 대답했다. "어떻다니요, 여전하줘 뭐." "여전히 밖으로만 도십니까 ?" "그럼요 아침에도, 밤에도 좀처럼 집에 있는 시간이 드물어요" "그런데도 형수님은 쓸쓸하지 않으세요?"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배봐야 뭐하겠어요" 하고 우메코는 웃었다. 그녀는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건성으로 대답했다. 다이스케도 평소의 자신을 되돌아보고는 진 지하게 그런 것을 물어 본 지금의 자신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겼다. 오늘날까지 형과 형수를 지켜보아왔으면서도 여지껏 한 번도 그런 데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형수도 또한 다이스케가 알아차릴 정도로 불만스런 기색을 보인 일이 없었다. "세상 부부들은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모양이지요" 하고 다이스케는 흔잣말처럼 말하고, 우메코의 대답을 듣고 싶어한 것도 아니어서 그녀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다만 다다미 위 의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우메코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뭐라구요 ? " 다이스케가 그 태도에 깜짝 놀라서 순간적으로 그녀 쪽으로 시선을 옳겼을 때였다. "그러니까 도련님은 아내를 얻으면 언제나 집에만 있으면서 잔뜩 사랑해 주시라구요. " 다이스케는 처음으로 상대가 우메코이고, 자신이 평소의 다이스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래서 되도록 평소의 자기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흔담의 거절과 그 뒤에 일어날 미치요와 자신의 관계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 가서 우메코의 말 상대가 되려고 해도 무의식 중에 그녀가 예기치 못 한 말들이 나왔다. "도련님 오늘따라 좀 이상하시네요" 하고 끝내는 우메코가 말했다. 다이스캐는 평소에 형수의 말을 측면으로 비켜서 받아들이는 방법을 얼마든지 알고 있었 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하는 것이 경박스럽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진지하게 어떤 점이 이상한지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우매코는 다이스케의 질문이 너무나 우스워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다이스재가 다시 부탁하자 그러면 말해주겠다고 하더띠 다이 스케의 이상한 언행들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우메코는 물론 진지한 체하며 다이스케의 행동 을 해석했다. 그중에 "형님이 자주 집을 비워 너무 쓸쓸하지 않느냐고 하며 동정해주시니 말이에요"라는 말이 있었다. 다이스케는 거기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아니에요. 내가 알고 있는 부인 중에 그런 사람이 아나 있는데 너무 안돼 보여서 형수님 의 의견을 듣고 싶어 여쭤보았을 뿐, 결코 형수님을 놀리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 "정말인가요? 그분이 누군데요?" "이름은 말하기 곤란합니다. " "그렇다면 도련님이 그분 남편에게 아내를 좀더 사랑해주라고 충고 하시면 되잖아요. " 다이스케는 살며시 미소를 흘렸다. "형수님도 그렇게 챙각하세요 ? " "당연하지요. " "만일 남편이 내 충고를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요?" "그렇다면 어쩔수없죠 뭐." "그대로 놔둬야 할까요 ? " "그대로 놔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다면 그 부인은 남편에게 아내의 의무를 다할 필요가 있을까요?" "자꾸 이런저런 구실을 내세우시네. 하긴 남편이 잘해주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 요." "만일 그 부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왜 그 사람과 결흔하지 않 았을까요 ? " 다이스케는 잠자코 생각하다가 잠시 후 형수를 불렀다. 우메코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다 이스케의 말투에 새삼스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이스케는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저는 이번 흔담을 거절하겠어요." 궐련을 쥔 다이스케의 손이 약간 떨렸다. 우메코는 도리어 표정을 잃은 얼굴로 그 이유를 물었다. 다이스케는 우메코의 표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이제까지 결흔 문제에 대해 형수님께 몇 번이나 폐를 끼쳤으며 이번에도 염려를 끼 치게 되는군요. 저도 이제 30이 다 되었으니 이제는 형수님이 권하는 대로 해야겠지만 생각 한 바가 있어서 이 혼담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아버님께도 형에게도 미안하지만 어쩔수없습니다. 당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거절하겠어요. 요전에 잘 생각 해보라는 아버님의 말씀에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역시 거절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실 은 오늘 그 일로 아버님을 뵈러 왔는데 형수님께도 말해두는 겁니다. " 우메코는 다이스케의 진지한 태도에 평소와는 달리 쓸데없는 말도 하지 않고 다 듣고 나 서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그것은 극히 간단하 고도 실제적인 짬은 말이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여간 곤란하시지 않을텐데요." "아버님께는 제가 직접 말씀드릴테니 염려마세요." "하지만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었는데요."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되었건 저는 아직 확실하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 "하지만 분명히 싫다는 말도 하지 않으셨잡아요. "그래서 지금 그 말을 하러 온겁니다" 다이스케와 우메코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다이스케로서는 이미 할 말을 다 해버린 기분 이었다. 더 이상 우메또에게 자기의 입장을 설명 할 생각은 없었다. 우메코는 해야 할 말,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것을 앞의 문답에 즉시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모르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예요" 하고 우메로는 겨우 말했다. "왜요?" 하고 다이스케는 냉정하면서또 침착하게 물었다. 우메코는 눈썹을 움직였다. "뭐라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군요. " "아무래도 괜찮으니 말해주세요. " "도련님처럼 그렇게 몇 번이나 거절해도 결과는 뻔하지요" 하고 우메코가 설명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그 뜻을 즉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업다는 표정으로 우 메코를 쳐다보았다. 우메초는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부연하려 했다. "결국 도련님도 언젠가 한번은 결혼을 할테니까요. 싫어도 할수없는 일이에요. 언제까지나 그렇게 멋대로 행동하다가는 아버님께 미안 할 뿐이지요.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마음에 들 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일 거예요. 도련님한테는 어떤 아가씨를 보여드려도 싫다고 할테니까 요. 도련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거계요. 그러니 아내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체념하고 얻는 수밖에 없어요. 가족들이 제일 낫다고 생각한 상대를 잠자코 맞이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지요. 그래서 아버님께서 이번 에는 하나에서 열까지 도련님과 상의하지 않고 처리할지도 몰라요. 아버님 입장에서 보면 그게 당연하니까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버님 생전에 도련님의 신부 얼굴을 볼 수 없 을테니까요." 다이스케는 형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중단되어도 쉽게 입을 열 지 않았다. 만일 반박했다가는 이야기만 점점 복잡하게 되고, 자키의 생각이 그녀에게 결코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실 서로 곤란할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형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수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제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아무 걱정마세요. " 그 말투는 우메코의 간섭을 귀찮아하는 것처럼 들렸으므로 그녀는 잠자코 있지 않았다. "그야 도련님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시겠죠. 앞으로는 도련님 일에 참견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아버님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매달 아버님은 도련님이 달라는 것만큼 생활비를 대주고 계신데, 즉 도련님은 학창 시절보다 아버님을 더 귀찮게 하고 있 어요. 그렇게 여전히 도움을 받으면서 이제와서 처른이 되었다고 전처럼 아버님 말씀에 따 르지도 않고 도련님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통할 리가 있겠어요 ? " 우메코는 약간 격했는지 계속 열띤 어조로 말하려고 하는 것을 다이스케가 가로막았다. "하지만 결흔을 하게 되면 아버지의 신새를 더 지게 될텐데요." "그런 걱정일랑 마세요. 아버님께서는 그런 걸 더 좋아하실테지까" "그렇다면 아버지는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라도 어떻게 해서든 얻게 할 결심이시군 요." "도련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몰라도 그런 사람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지 않 겠어요?" "어떻게 그것을 아시죠?" 우메코는 생기에 찬 눈으로 다이스재를 한참 쳐다보더니 말했다. "도련님은 마치 변호사 같은 말을 하시큰군요." 다이스케는 창백해진 이마를 형수 가까이했다. "형수님, 사실은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요" 하고 그는 낮은 소리로 잘라 말했다. 다이스케는 자주 농담으로 그런 말을 우메코에게 했었다. 우메코도 처음에는 정말인 줄 알고 슬며시 뒷조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농담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는 전 혀 믿지 않았다. 다이스케가 그 말을 꺼내도 전혀 대꾸하지 않았으며 농담으로 받아들일 뿐 이었다. 다이스케 또한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너무나 태연했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사정이 달 랐다. 얼굴 표정이며, 눈매, 낮은 목소리 밑에 깔린 힘, 그리고 앞뒤 상황 등 모든 점에서 우 메코를 놀라게 했다. 우메코에게는 다이스케의 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느껴졌다. 다이스케는 허리띠 사이에서 시계를 꺼내 보았다.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은 좀처럼 돌아갈 것 같지 않았다. 하늘은 다시 흐려졌다. 다이스케는 일단 포기하고 다시 기회를 봐서 아버지 와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 오겠습니다. 아버지는 다음에 와서 뵙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하며 다이스케는 일어섰다. 우메코슨 어느새 기분이 전환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남을 감싸주는 자상한 마음씨를 지녀 서 어려운 사람을 중간에 외면해버리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다이스케를 붙잡고 좋아하 는 여자의 이름을 물었다. 다이스케는 뭍론 대답하지 않았다. 우메코는 제발 좀 말해달라고 졸라댔다. 그래도 다이스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우메코는 그런데 왜 그 여자와 결흔하 지 않느냐고 물었다. 다이스케는 단순히 결혼할 수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우메코는 드디어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진실을 무시했다고 서운해했다. 왜 처음부터 털어 놓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는가 하면 안됐다고 하며 동정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이스케는 미치 요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우메코는 포기했다. 다이스케가 정말로 돌아가 려고 할 때였다. "그러면 도련님이 직접 아버님께 말씀드리세요. 그때까지 나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겠어 요." 다이스케는 그러는 것이 좋을지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 다. "글쎄요" 하고 그는 잠시 쌍설이다가 "어차퍼 거절하겠다는 말을 하러 와야 하니까"라고 말하고는 형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씀드리는 쪽이 좋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잠자코 있을테니 도련넘이 직접 말씀드리세요. 그러면 되죠?" 하고 우메코는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부탁하고는 다이스케는 밖으로 나갔다. 길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요 쓰야에서 걸어갈 생각으로 일부러 시오초행 기차를 탔다. 연병장 옆을 지날 때 무거운 구름 이 서쪽에서 사라지면서 장마철에는 보기 드문 석양이 바퀴에 비추어 바퀴가 돌 때마다 강 철처럼 빛났다. 저 멀리 일력거는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철판은 인력거가 그토록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널었다. 태양은 피처럼 아주 새빨갛게 비추었다. 다이스케는 그런 광경을 보면 서 바람을 가르며 기차에 실려갔다.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거의 종점에 이르렀을 때는 정신이 몸을 거역했는지 정신이 몸에 거역당했는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어서 빨리 기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다이스케는 흑시나 해서 가져온 우산을 지팡이처럼 질질 끌면서 걸었다. 걸어가면서 다이스케는 오늘 자기 운명의 절반을 스스로 파괴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중얼 거렸다. 이제까지는 아버지와 형수를 상대로 적당한 간격을 취하며 자기 자신을 온건하게 관철해왔으나, 이번에는 본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관철할 수 얼게 되었다. 동시에 예전처럼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회망은 적어졌다. 그러나 아직 제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가능성 은 있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속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다이스케는 지금까 지의 자신의 태도를 비웃 었다. 어쨋든 그는 오늘의 고백으로 자기 운명의 절반을 파괴했다고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대 가로 받게 될 고통을 미치요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는 다음에 아버지를 만나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기 위해 단단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 각했다. 그래서 미치요와 만나 이야기를 해보기도 전에 다시 아버지로부터 호출당하는 것이 나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늘 자기 의사를 아버지에게 말씀드릴지의 여 부를 형수에게 맡긴 것이 후회스러웠다. 오늘밤이라도 말씀드린다 아니면 내일 아침에 호출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 오늘밤 안으로 미치요를 만나서 자기의 생각을 말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밤이라서 그녀를 찾아가기가 다소 거북스러웠다. 쓰노카미를 내려갈 매 사방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사관학교 앞에 있는 연못가로 나와서 2,3백 미터쯤 걸어 사도하라초로 돌아가야 할 것을 다이스케는 일부러 전차길을 따라 걸었 다. 그는 여느때처럼 집으로 돌아가서 하룻밤을 서재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없었던 것이다. 연못을 사이에 두고 소나무가 쭉 늘어서 있는 높은 뚝 쪽을 전차가 빈번히 지나갔다. 다 이스케는 가벼운 상자가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쌩쌩 달려가는 모습에 경쾌함을 느꼈다. 그 런가 하면 자신과 같은 길을 마구 왕래하는 소도보리선 전차는 평소보다 시끄러워서 짜증이 났다. 우시고메미쓰케까지 왔을 때 멀리 고이시가와의 숲 여기저기에 눈부신 햇살이 내리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이스케는 저녁 식사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미치요의 집 쪽을 향 해 걸어갔다. 약 20분 후 그는 안도 언덕을 올라가서 덴즈인의 불에 탄 옛절터 앞으로 나왔다. 커다란 나무가 좌우로 뒤덮고 있는 사이를 왼쪽으로 빠져서 히라오카 집 근처까지 오자, 여느때처 럼 판자 울타리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울타리에 몸을 기깬 채 꼼짝 않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동안은 아무 소리도 얼이 고요했다. 다이스케는 문 안으로 들 어가 격자문 밖에서 계십니까 하고 입을 떼려고 했다. 그러자 툇마루 가까이에서 철색 하고 정강이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누군가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윽고 말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인지 똑똑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히라오카와 미치요의 목소 리였다. 잠시 후 말소리가 뚝 그쳤다. 그러자 다시 툇마루 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털색 주저앉는 소리가 분명히 들려왔다. 울타리 옆에 서 있던 다이스케는 조용히 발 길을 옳겼다. 그러고는 원래 왔던 길하고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참 동안은 써디를 어떻게 걸었는지 전져 의식이 업었다. 걷고 있는 동안 다이스케의 머 리속에는 좀전의 광경만이 어른거렸다. 그것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번에는 자신의 행등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졌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듯 비열한 짓을 하면서 마치 기겁이라도 한 듯 돌아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두운 골목길에 서서 온 세상이 밤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기뻐했다. 더구나 장마철의 무거운 공기에 쉽싸여 걷고 있자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가구라자카로 나왔을 때 갑자기 눈이 부셨다. 몸 을 감싼 수많은 사람과 불빛을 보자 머리가 빙빙 도는 듯했다. 다이스케는 도망치듯 와라다 나를 올라갔다. 집에 들어서니 가조노가 여느때처럼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꽤 늦으셨군요. 저녁은 드셨습니까?" 다이스케는 별로 생각이 없어 먹지 않겠다고 하고는 쫓아내듯이 가도노를 서재에서 나가 게 했다. 그러나 2,3분도 채 지나지 않아 손뼉을 치면서 그를 불렀다. "우리 집에서 누가 오지 않았었나? " "아니오. " "그러면 줬다. " 가도노는 싱겁다는 듯이 입구케 서 있다가 대꾸했다. "그럼 댁에 가신 것이 아니었나요?" "왜 ?" 하며 다이스케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나가실 때 그런 말을 하셨으니까요." 다이스케는 가도노를 상대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집에 갔었지. 집에서 심부름꾼이 오지 않았다면 줬다. " "하아, 그렇습니까?" 하고 가도노는 내뱉듯이 말하며 나갔다. 다이스케는 아버지파 다른 일보다 자기일에 대해서만은 대단히 성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 었기 때문에 어쩌면 돌아온 뒤 바로 심부름꾼을 보내지 않았나 하는 두려운 생각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가도노가 자기 방으로 물러간 뒤 내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미치요를 만나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밤 다이스케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미치요를 만날 방법에 대해 궁리를 했다. 인력거 꾼에게 편지를 전해서 집으로 부르면 오기는 하겠지만, 이미 오늘 형수에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내일이라도 형이나 형수가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또 히라오카 집으로 가서 만난다는 것은 다이스케에게 어떤 고통이 따랐다. 할수없이 다이스케 는 자기나 미치요와 아무 관계가 없는 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밤중에 비가 세차게 퍼부어 매달아놓은 모기장이 춥게 느껴질 정도로 빗소리가 온 집안 을 에워쌌다. 다이스케는 그 소리를 들으며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비는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다이스케는 눅눅한 튓마루에 서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젯밤의 계획을 다시 바꾸었다. 그는 미치요를 음식점으로 불러내서 얘기한다는 것이 불쾌 했다. 가능하다면 푸른하늘 아래 야외에서 만나고 싶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그렇게 할 수 도 없었다. 그렇다고 히라오카 집으로 찾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아무래도 그녀를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가도노가 좀 방해가 되지만 그의 방에 들 리지 않게 이야지를 하지 안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다이스케는 열두시 조금 전까지는 멍 하니 비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점심 식사를 끝내자마자 고무 비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빗속을 걸어서 가구라자카 아래까지 와서 아오야마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내일 찾아가겠다고 선수를 쳤다. 전화는 형수가 받았다. 형수는 어제 말했던 멋은 아직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다이스케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벨이 울려 전화를 끊었다. 다음에는 히라오카의 신문사에 걸어서 그가 출근했는 지를 알아보았다. 다이스케는 비를 맞으며 다시 언덕을 올라갔다. 꽃집으로 들어가서 커다란 백합꽃을 한아름 사들고 집으로 졸아갔다. 젖은 꽃을 두 병에 나누어 꽃았다. 남은 것은 수 반에 물을 채워 줄기를 짤게 잘라서 넣어두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미치요에게 편지를 썼다. 내용은 극히 간단했다. 급히 만나서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와달라고만 했다. 다이스케는 손뼉을 쳐서 가도노를 불렀다. 가도노는 풍쿵거리며 나타났다. 그는 편지를 받 으면서 말했다. "향기가 아주 좋은데요. " "인력거를 가걱가서 모시고 오도록. " 가도노는 빗속을 뚫고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다이스케는 백합꽃을 바라보면서 방안 가득한 강한 향기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그 향 기를 통해 분명히 지난날의 미치요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떨쳐버릴 수 없는 옛날의 그림자가 연기너럼 휩싸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에야 비로소 자연의 옛날로 돌아가는구나.' 빨리 돌아가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왜 자연에 저항했을까 하는 생 각을 했다. 그는 빗속에서, 백합꽃에서, 지난날의 추억에서 진실되고 꾸밈없는 평화스러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의 어디에도 욕망은 없었다. 이해도 없었다. 자기를 압박하는 도덕 역시 없었다. 구름 같은 자유와 물 같은 자연이 있을 뿐, 모든 것이 행복했고 모든 것이 아 름다웠다. 얼마 후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이 한때의 행복에서 생기는 영원한 고통이 그때 갑자기 그의 머리를 강타해왔다. 그의 입술은 파랗게 질렸다. 그는 조용히 자기 자신과 손을 바라보 았다. 손톱 밑을 흐르고 있는 피가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일어서서 백합꽃 가까이 갔다. 입 술이 꽃잎에 닿을 정도로 다가가서 강한 향기를 실컷 맡았다. 그는 꽃잎에서 꽃잎으로 입술 을 옮기면서 달콤한 향기에 정신을 잃고 방안에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파침내 그는 팔 짱을 긴 채 서재와 객실 사이를 서성거렸다. 그의 가슴은 계속 뛰고 있었다. 그는 가끔 의 자 모서리나 책상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다시 걸어다녔다. 그는 웬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한 곳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가 하면 무엇인가 생각하기 위해 무턱대고 멈춰서 야 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점점 흘렀다. 다이스케는 계속 탁상시계 쪽을 보았다. 그리고 마치 훔 쳐보는 눈길로 처마 밖의 비를 보았다. 비는 여전히 하늘에서 똑바로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좀전보다 어두워졌다. 겹친 구름이 한 곳에서 소용돌이치며 점차 땅 위로 밀어닥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 비에 빛나는 인력거가 나타났다. 바취 소리가 비를 압도하며 다이스케의 귀에 울렸을 때 그는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면서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다. 미치요는 가도노의 안내를 받아 현관에서 복도를 거쳐 들어왔다. 평상시와 다른 감색 비 단 옷감에 당초 무의의 흩겁 띠를 졸라맨 차림이어서 첫눈에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안색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좋지 않았지만 객실 입구에서 다이스케와 마주쳤을 때 눈도 눈썹도 입 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문턱에 서 있는 동안에는 발도 움직일 수 없다며 안으로 들어을 생 각도 하지 않았다. 미치요는 편지를 보자마자 무슨 일이 생길 것을 예기하고 왔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기쁨, 그리고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인력거에서 내려서 객실로 올때까 미 미치요는 그러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가 엄었다. 그녀의 표정은 거기서 굳어졌다. 다이스 케의 모습은 미치요에게 강한 충격을 줄 정도로 강렬했다. 다이스케는 의자를 가리켰다. 미치요는 거기에 걸터앉았다. 다이스케는 그 맞은편에 앉았 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마주앉았으나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요?" 하고 미치요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네" 하고 다이스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그 이야기를 끝으로 한참 동안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하고 미치요가 다시 물었다. "네" 하고 다이스케는 아까와 똑같이 대답했다. 두 사람 다 여느때처럼 가볍게는 말하지 못했다. 다이스케는 술의 힘을 빌려야만 자기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는 자기의 진 심을 털어놓을 때는 반드시 평소의 자기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삼 미치 요를 대하고보니 처음으로 한 방울의 술이 그리워졌다. 몰래 옆방으가서 평소에 마시던 위 스키를 마실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달았다. 왜냐하면 대낮에 맑은 정신으로 하지 않은 것은 진실의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대담해지는 것 은 비겁하고도 잔인한 행위로, 상대를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사회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대신 미치요에 대해서만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비겁해지거나 치사해지지 않을 만큼 그는 미치요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때 그 즉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었다. 또다시 물었을 때는 더욱더 그러했다. 세번때는 할수없이 입을 열어 야 했다 "그래요,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 다이스케는 궐련에 불을 붙였다. 다이스케가 대답을 질질 끌 때마다 미치요는 안색이 점 점 나빠졌다. 빗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두 사람은 비 때문에, 빗소리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같은 집에 있는 가도노나 아주머니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립된 상 태 그대로 백합꽃 향기에 취해 있었다. "방금 밖에 나가서 저 꽃을 사왔지요" 하며 다이스케쓴 주위를 돌아보았다. 미치요도 다이스케를 따라 방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 셨다. "오빠와 당신이 시미즈초에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려고 되도록 많이 사왔어요" 하고 다이 스케가 말했다. "정말 향기가 좋군요" 하며 미치요는 나부끼듯이 벌어진 꽃잎을 바라보다가 다이스케 쪽 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하더니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기억 이 납니까 ? " "그럼요. " "당신은 밝은 깃을 달고, 머리를 은행잎처럼 쪽지고 있었지요." "그것은 도쿄에 온 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어요. 곧 그렇게 하지 않았답니다. " "요전에 백합꽃을 갖고 왔을 매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어머나, 알고 계셨군요. 하지만 그때뿐이었지요." "그때는 머리를 그렇게 하고 싶었었나요?" "네, 변덕이 심해서 그렇게 하고 싶었지요." "그 쪽진 모습을 보니 옛날 일이 생각나더군요." "그래요?" 하며 미치요는 수줍은 듯이 대꾸했다. 미치요가 시미즈초에서 살 때 다이스케와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 후의 일인데, 고 향을 떠나온 지 얼마 안되는 그녀의 머리 모양을 다이스케는 아주 보기 좋다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웃음으로 답했는데, 그후로는 결코 은행잎 모양으로는 쪽을 지지 않았 다. 두 사람은 지금도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헌다. 그러나 서로가 말하려고 하지 않 았다. 미치요의 오빠는 그녀와느 달리 성격이 활달하고 붙임성이 있어서 친구들에게 아주 인기 가 좋았다. 특히 다이스케는 그와 아주 친했다. 그는 자신이 활달한 만큼 온순한 누이동생을 귀여워했다. 함께 고향을 떠나 같은 집에 있었던 것도 누이동생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의무 감에서보타 누이동생에 대한 사랑과 아직은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는 미치요를 데려오기 전에 이미 다이스케에게 그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 다이스케는 보통 청년처럼 대 단한 호기심을 가지고 그의 계획을 찬성했다. 미치요가 오고 나서부터 그와 다이스케는 더욱더 친해졌다. 누가 더 가까워지려고 했는지 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죽은 후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마다 다이스케는 그 우정 속에는 반드 시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다이스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의 생각은 비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는 생전에 그 의미를 은밀히 미치요에게 말해두었는지도 모른다. 다이 스케는 다만 미치요의 행동과 말 가운데서 다소 특별한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 다이스케는 그 무렵부터 그녀의 오빠와 예술을 논하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그 방면에 있어서 보통 이상의 감수성을 가지지 않았다. 이야기가 깊이 들어가면 정직하게 고 백하고는 필요없는 이론은 피했다. 어디선가 아비타 엘레간티아름이라는 말을 알아와서 다 이스케의 별명처럼 써먹었던 것도 그무렵의 일이었다. 미치요는 그들의 이야기를 옆방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 역시 아비타 엘레간터아름이라는 어휘를 알게 되었다. 어 느 날 그녀가 그 뜻을 오빠에게 묻자 그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오빠는 누이동생의 예술에 관한 교육을 다이스케에게 완전히 맡기려는 듯했다. 다이스케 가 자주 찾아와 예술 분야에 대해 누이동생의 눈을 뜨게 해주게끔 가능한 접촉의 기회를 많 이 갖게 하도록 애썼다. 다이스케도 그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스스 로 그 15 미치요를 만나서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해버린 다이스케는 그녀를 만나기 전에 비해 훨씬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예상했던 대로 된 것일 뿐 의외의 결과 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그는 오랫동안 손메 쥐고 있던 주사위를 던진 사람과 같 은 기세로 일어났다. 그는 자신과 미치요의 운명에 대해 어제부터 어떤 책임을 져야만 한다 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것은 자기가 바라던 책임임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그토록 무거 운 짐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괴롭지 않았다. 그 무게에 눌려서 오히려 발이 저절로앞 으로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스스로 개척한 이 운명의 단편을 머리에 이고 아버지와 맞설 준비를 했다. 아버지 뒤에는 형이 있고 형수가 있었다. 그들과의 논쟁 뒤에는 히라오카 가 있었다. 그들을 통과하고 나면 어마어마한 사회가 있었다. 개인의 자유와 감정을 조금 도 참작해 주지 않는 기계와 같은 사회가 있었다. 지금 다이스케에게는 그 사회가 온통 암흑으 로 보였다. 그는 모든 것과 싸울 각오를 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용기와 담력에 놀랐다. 그는 오늘날까지 열성적으로 덤벼드는 것을 싫어하고 위험을 두려워하며 도박을 좋아하지않는 신중하고도 태평스러운 훌륭한 신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덕상 중대한 의미의 비겁함은 아직 저지른 일이 없지만 겁장이라는 자 각은 좀처럼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는 통속적인 어느 외국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다. 그중 어느 호에서 (등반 사고)라는 제 목의 글을 읽고 언젠가 가슴 설레이던 적이 있다. 거기에는 높은 산을 오르는 모험가들이 당한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눈사태를 만나 행방불명이 되었던 사람의 뼈가 40 년후에 빙하 끝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와 네 명의 모험가가 낭떠러지 중턱에 곧게 솟은 커다랗고 평평한 바위를 넘을 때 어깨에서 어깨로 원숭이처럼 서로 포개져서 맨 욋 사람의 손이 바위 끝에 걸리자마자 바위가 무너져서 허리 밧줄이 끊겨 위 세 사람이 겹 쳐진 채 완전히 거꾸로 네번째 사나이를 지나 저 멀리 아래로 떨어진 이야기가 두세 점 삽 화와 함깨 실려 있었다. 그때 다이스케는 그 절벽 옆에 있는 하얀 공간 너머로 보이는 널은 하늘과 아득히 먼 계곡을 그려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현기중마저 났다. 다이스케는 지금 도덕이라는 범위내에 있어서 그 모험가들과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그런 경우를 낭하고 보니 전혀 기가 꺾이지 않았다. 기가 꺽여 서 망설이는 쪽이 그로서 는 더욱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를 만나서 자기의 생각을 말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일정에 지 장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미치요가 다녀간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어서 상황 을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집에 안계셨다. 다음날 다시 걸었더니, 이번에는 일이 있다고 하며 오지 말라고 했다. 다음에는 알릴 때까지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이스케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도 형수나 형으로부터 아무 소식이 업었다. 다이스 케는 처음에는 식구들이 자기에게 되도록 긴 반성의 시간을 주기 위해 책략을 꾸민 것 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는 잠자코 있었다. 세끼 식사도 즐겁게 들었다. 밤에도 비교적 편안하 게 지냈다. 비가 그친 사이사이에 하늘이 보일 때는 가도노와 함께 한두 번 산책을 했다. 그 러나 집으로부터 아무 소식이 오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절벽에 오르다 쉬는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자기 쪽에서 아오야마의 집을 찾아가기로 결정 했다. 형은 여전히 집에 없었다. 형수는 다이스케를 보더니 딱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스케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자 형수는 그러면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아버님의 형편을 여쭤보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우메코의 태도는 아버 지의 노여움으로부터 다이스케를 구해주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를 따돌리는 것 같기도 했 다. 다이스케는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쪽일까 궁금해하며 기다렸다. 기다리면서도 이왕 각 오한 것이니까 하며 몇 번이나 마음을 다졌다. 안에서 우매코가 나오기까지는 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다이스케를 쳐다보며 딱하다는 듯치 오늘은 형편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할수없이 다이스캐는 그러면 언제 오면 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물론 여느때와 같은 활기찬 모습은 온데 간데 없는 맥빠진 질문이 었다. 우메코는 다이스케의 모습에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2,3일내로 반드시 형편이 좋은 날을 책임지고 알려줄테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라고 혔다. 다이스케가 안의 현관을 나설 때 우메코는 일부러 같이 나오면서 충고를 했다. "이번에야말로 잘 생각하고 오세요. " 다이스케는 대꾸도 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도 다이스케는 불좨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며칠 전 미치요를 만난 후로 누 려온 마음의 평화를 아버지와 형수의 태도로 인해 어느 정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더해갔 다. 나는 내 생각을 아버지께 그대로 말씀드린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생각을 마구 말하겠지, 그러면 충돌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깨끗이 감수하겠다, 그것이 다이스케의 생 각이었다. 아버지의 처사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 처사는 아버지의 인 격을 반사하는 것만큼 다이스케를 몹시 불쾌하게 했다. 다이스케는 걸어가면서 무엇 때문에 이렇듯 고생하면서 아버지와의 만남을 서둘렀을까 하 고 후회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자신의 대답에 불과한 것이니 아쉬운 사람은 오히 려 대답을 기다리는 아버지일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부러 자기를 퍼하려고 만날 날을 미룬다면, 그것은 그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이 늦어지는 좋지 않은 결과밖에 안되는 것이 었다. 다이스케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결정을 이미 어느 정도 해버린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 다. 그는 아버지가 날짜를 정해 호출할 때까지 잠자코 있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다만 간간이 불쾌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 불쾌한 감정의 그림자는 가라운 미래에 있어서 반드시 그 어둠을 더해가는 성질을 띤 것 이었다. 그밖에 자기의 운명과 관련된 두 개의 조류가 눈앞에 나타났다. 하나는 미치요와자 기가 이제부터 흘러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하나는 히라오카와 자신을 반드시 한 곳에 휩쓸리게 하는 굉장한 것이었다. 다이스케는 일전에 미치요를 만난 후로 한쪽은 포 기하고 있었다. 비록 이제부터 그녀의 얼굴을 본다 하더라도-하긴 오랫동안 보고 있을 생각 은 아니었지만-앞으로 두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는 당분간 지금과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점에 관해 다이스케는 뚜렷한 계획을 세워놓지 않은 상태였다. 히라오카와 자신에게 닥칠 일에 대해서도, 그는 다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하긴 그는 기회를 보아 적극적으로 대응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러 나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세워놓지 않았다. 어떤 경우든 결코 그르칠 수 없다고 맹세했던 것은 히라오카에게 사실을 고백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따서 히따오카와 자기가 구성해 야 할 운명의 흐름은 막막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한 가지 걱정은 그 무서운 폭풍 속에서 미 치요를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데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정 리되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 사회는 제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기 행위의 권한은 자기가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점에 있어서 그는 사회와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간주한 상태에서 행동할 생각이었다. 다이스케는 자신의 세계를 이렇듯 좁은 시야로 보고, 순간적으로 그 관련성을 검토했다. "그럼 되겠지" 하고 그는 중얼거리며 다시 집을 나섰다. 그리고 1,2백 미터쯤 걸어서 자주 타는 정거장에 도착해 깨끗하고 빠를 것 같은 인력거를 골라 뛰어올랐다. 그리고 갈 곳도 없으면서 적당히 거리를 지명해서 두 시간 정도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왔다. 다음날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서재에서 자기 세계의 중심에 서서 좌우 전후를 빠짐없이 돌 아본 뒤 "좋아" 하며 밖으로 나가서 아무 생각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집으로 왔다. 사흘째도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로 에도천을 건너 서 미치요를 찾아갔다. 그녀는 얼마 전의 일을 까맣게 잊은 듯이 말했다. "왜 그동안 오시지 않았나요?" 다이스케는 오히려 그렇게 태연한 태도에 놀랐다. 미치요는 일부러 히라오카 책상 앞에 놓아두었던 방석을 다이스케 앞으로 밀어놓았다. "어째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시는 거죠?" 하며 그녀는 다이스케를 강제로 앉게 했다.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다이스케의 머리는 점차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인력거를 타고 목적지도 없이 돌아다니느니 30분이라도 빨리 이곳으로 놀러오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 각이 들었다. 돌아을 때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위로하듯 말했다. "또 오겠습니다. 틀림없으니까 안심하고 있어요." 미치요는 다만 미소를 지었다. 그날 저녁때야 비로소 아버지가 소식을 보내왔다. 그때 다이스케는 아주머니의 시 중을 받으며 밥을 먹고 있었다. 밥공기를 상 위에 내려놓고 가도노에게서 편지를 받아 읽어 보니 내일 아님 몇 시까지 오라는 내용이었다. "무슨 공문서 같군" 하면서 다이스케는 일부러 엽서를 가도노에게 보였다. "아오야마의 본댁에서 온 것입니까?" 하며 가도노는 정중하게 보고 있다가 별로 할 말이 없으니까 앞을 뒤집어보더니, "어른들은 역시 필적이 좋으십니다" 하고 겉치레 인사를 한 뒤 나갔다. 아주머니는 아까부터 달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십간이라든지, 8월 초하루, 또 승부의 날, 손톱을 자르는 날, 공사를 하는 날 등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다이 스케는 처음부터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또 가도노의 직장을 부탁했다. 한 달에 15엔이라도 좋으니 어디든 취직시켜달라고 했다. 다이스케는 어떻게 대답했는지 모를 정도 로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다만 마음속으로 가도노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큰일 이라고 중얼거렸다. 식사를 끝내자마자 홍고에서 데라오가 왔다. 다이스케는 가도노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동 안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가도노는 대수릅지 않게 말했다. "안계시다고 할까요 ? " 평소와는 달리, 며칠 전부터 다이스케는 한두 번 사람을 피했다. 찾아온 손님 중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사람은 두 번쯤 따돌렸다. 다이스케는 데라오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데라오는 여느때처럼 혈안이 되어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그 모습을 보고 여느메처럼 비로는 태도로 대할 수가 없었다. 번역 이건 개작이건 살아있는 한 무엇이든 하려고 드는 데라오 쪽이 자기보다 사회인 같아 보였 다. 자신이 만일 인생에 실패해서 그와 똑같은 처지가 된다면 과연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 을까 생각하니 다이스케는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기는 데라오보다 더 좋지 않은 처지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하며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데라 오를 무시하는 눈으로 맞을 수가 없었다. 데라오는 요전의 번역을 겨우 월말까지 끝냈는데, 책방에서 형편이 좋지 않아 가을까지 출판을 보류한다고 해서 즉시 번역료를 받지 못해 고심하다가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면 책 방과 계약도 하지 않고 시작한 일이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책 방쪽이 약속을 어긴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대답은 애매모호했다. 다만 생활에 어려움을 느 끼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차질이 생기는 데 익숙해진 데라오는 도 의적으로 누구를 원망하거나 불만을 품지 않았다. 나쁜 놈이라든지 괘썸하다든지 하는 것은 말뿐이며,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오로지 밥과 고기인 것 같았다. 다이스케는 그의 처지가 너무 딱해서 얼마쯤의 생활비를 빌려주었다.데라오는 고맙다고 말하며 돌아갔다. 돌가기전에 실은 책방에서도 돈을 미리 조금 받긴 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써버렸다고 털어놓았다. 데라오가 돌아간 뒤 다이스케는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일종의 인격이 라고 여겼다. 다만 그렇게 되는대로 살아서는 안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의 문단이 이런 인격을 필요로 하여 자연스레 배출해낼 정도로 딱한 상황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자 다이스케는 웬지 씁쓰레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다이스케는 자신의 앞날을 몹시 걱정했다. 만일 아버지로부터 물질적 공급이 끊 어진다면 자기는 과연 제2의 데라오가 될 각오가 되어 있을까 하는 의혹이 일었다. 만일 붓 을 들고 데라오의 흉내마저 낼 수 없다면 그는 당연히 굻어죽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붓을 들지 않으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눈을 뜨고 가끔 모기장 밖에 있는 램프를 쳐 다보았다. 한밤중에 그는 성냥을 켜고는 담배를 피웠다. 몸을 몇 번이나 뒤치락거렸다. 잠못 이를 정도로 무더운 밤은 아니었다. 기가 또다시 내렸다. 다이스케는 겨우 잠이 드는가 했더 니 빗소리 때문에 다시 잠이 깼다. 그렇게 자는 등 마는 등 하다보니 날이 샜다. 다이스케는 정각이 되어 나갔다. 굽 높은 나막신에 우산을 받치고 나가 전차를 탔는데, 한 쪽 창문이 닫힌데다가 가죽 끈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너무 맡아서 잠시 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무거웠다. 수면 부족 탓인 듯싶어 거북하게 손을 뻗쳐 자기 뒤의 창문만을 열어놓았 다. 비는 사정없이 옷깃에서 모자로 불어닥쳤다. 2,3분 후 옆사람에게 폐가 되는 것을 눈치 채고 다시 창문을 올렸다. 바깥쪽 유리 표면에는 빗방울이 물로 흘러내려 바깥의 모든 것이 다소 비뚤어저 보였다. 다이스케는 고개를 돌려 바깥을 내다보면서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그러나 세상 모습이 달라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창을 통해 비스듬히 먼데를 볼 때는 더욱더 그러했다. 벤케이바시에서 갈아타자 사람도 뜸해지고 비도 적게 내렸다.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세상 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심사가 뒤틀린 아버지의 얼굴이 여러 가치 표정으로 그의 머리를 자극했다. 상상의 담화마저 분명하게 귀에 울렸다. 전에 여느때처럼 일단 만나기 전에 실은 났다. "우중충한 날씨군요" 하며 형수는 상냥한 태도로 자기가 직접 차를 준비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차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아버님께서 기다리실테니 잠깐 가서 말씀드리고 오겠어요" 하며 그는 일어섰다. 형수는 불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도련님, 되도록 나이드신 분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마세요. 아버님도 언제까지나 사시는 건 아니니까요." 다이스케가 형수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것은 그때가처음이었다. 그는 갑자기 움막에 떨어 진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담배함을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다이스케의 발소리를 뜯고서도 얼굴 을 들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아버지 앞으로 가서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틀림없이 못마땅 한 표정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온화한 표정으로 따뜻하게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다. " 그때 다이스케는 아버지의 볼이 어느새 너무나 흘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 살 이 찐 편이어서 그렇게 변한 모틉이 다이스케의 눈에는 더욱더 두드러졌다. 다이스케는 자 기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 " 아버지는 따뜻한 표정을 지으며 다이스케의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 러나 잠시 이야기하는 동안에 "나도 이제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라고 말하는 태도가 여느때의 아버지와는 전혀 달라서 다이스케는 조금 전 형수가 한 말을 그대로 흘려버릴 수 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이 탓인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머지않아 실업계를 떠나겠다는 뜻을 다이스케 에게 비췄다. 그러나 지금은 러일전쟁 후의 상공업 팽창으로 인해 자기가 이끌어온 사업이 극도의 불경기에 처했으므로 그 어려움을 극복해내지 않고는 무책임한 비난을 면할 수가 없 으니 당분간 참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정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었다. 다이스케는 아버지 의 말을 지극히 지당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사업의 어려움과 위험성, 그리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일과 그런 문제점으로 인한 당사자의 엄청난 심적 고통 및 긴장에대해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삐방의 대지주들은 보기에는 그저 그런 것 같지만 실은 도시의 사업가들보다 경제적 기반을 훨씬 더 굳게 다저 놓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점을 강조하며 이번 흔담을 성사시키려고 애쎴다. "그러한 친척이 한 집 정도 있다는 것은 퍽 마음 든든한 일이지. 이런 경우 얼아나 필요 한 일이냐"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다이스케는 부모로서는 오히려 너무 노골적인 이 정략 결흔의 의미에 새삼 놀랄 만큼 아 버지를 과대평가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지막 면에서 아버지가 지금까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진 데 대해 오히려 유꽤하기까지 했다. 그 자신도 필요에 따라서는 정략 결흔도 있다 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에 대해 여느때와는 다른 동정심이 일었다. 그 얼굴, 그 목소리, 다이스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는 노력, 그 모든 것으로서 노후의 가련함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이스케 는 그런 것까지 아버지의 책략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아지 좋으실 대로 정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미치요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끝낸 이제 와서 아버지에 따르는 효도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태도가 불분명했다. 자 그대로, 어느 누구의 명령도 그대로 따른 적이 없는가 하면 누구의 의견에도 노골적으로 맞 선 적이 없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맺고 끊는 맛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자신도 이 두가지 비난 가운데 어느 하나를 들었을 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 주된 원인은 꾀가 많아서도, 맺고 끊는 맛이 없어서도 아니 며 오히려 융통의 재주가 있는 두 눈이 있어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능력 때문에 이제까지 외곬으로 일관하는 용기를 꺾게 되었다. 그래서 불분명한 태 도를 취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무사태평한 태도는 생각이 부족해서 그런것이 아니라 오히 려 명백한 판단에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은, 그가 생각한 수조차 없는 과감한 태도로 믿는 바를 단행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미치요의 경우가 바로 그 적절한 예였다 그는 미치요에게 털어놓은 자신의 마음을 아버지 앞에서 백지화할수는 없었다. 동시에 아버지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평소의 다이스케가 이런 경우에 취해 야 할 태도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미치요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아버지가 만족할 수 있 는 결혼을 하겠다고 말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지금가지 다이스케는 그런식으로 쌍방을 조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로 나가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지금 의 그는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일정한 틀에서 반쯤 뛰쳐나와 다른 사람과 악수하기에는 너 무 늦었다. 그는 미치요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그만큼 깊고 무거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신념은 자기 자신의 판단과 어떤 연민의 정에서 왔다는 생각이 엄청난 파도처럼 그의 머 리를 지배했다. 그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섰다. 그는 평소의 자기다운 태도를 보이기 위해 말을 삼가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눈에는 평소의 다이스케와 다름없었다. 오히려 다이스케는 아버지가 달라진 것에 놀랐고, 사실 며칠 전부터 계속 거절당한 것도, 당신의 뜻에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아버지가 일부러 미룬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오늘 만나면 반드시 잔뜩 찌푸린 얼굴로 대하리라 생각하고 각오를 단단히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꾸중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다 이스케로서는 오히려 그러는 쪽이 마음이 더 편했다. , 걷잡을 수 없는 아버지 분노에 대한 자기 반동을 심리적으로 이용해서 단호히 거절하려는 속셈까지 있었다. 다이스케는 아버지 의 모습, 아버지의 말투, 아버지의 주된 뜻, 모든 것이 기대와 달라 결심이 흔들리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러나 그는 이 괴로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마음을 다졌다. "아버지의 말씀은 지당하시지만, 저는 이 결혼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절 할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했습니다"라고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때 아버지는 다이쓰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한참 후 아버지가 말했다. "용기라니 ?" 하며 아버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뱃대를 다다미 위에 내던졌다. 다이스케는 무릎을 내려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당사자가 아음에 들지 않는 거냐?" 하고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다이스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까지 아버지께 자신의 생각을 겨우 4분 의 1 정도밖에 털어놓지 않았다. 그 덕택으로 아버지와 평화스러운 관계를 겨우 지속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미치요에 대한 일만은 처음부터 결코 숨길 생각이 없었다. 자기 앞에 당연히 떨어진 결과를 책략으로 피하는 비겁한 짓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만 아 직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여겼다. 따라서 미치요의 이름은 전혀 입밖에 내지 않았다. 드디어 아버지는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무슨 일이든 네 멋대로 해라." 다이스케도 불쾌했다. 그러나 별도리 없이 인사를 하고 아버지 앞에서 물러나려 했다. 그 때 아버지가 한마디했다. "나도 이제는 너를 도와줄 수 없다. " 다이스케가 객실로 돌아왔을 때 우메코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 " 다이스케는 아무 말도 할 수 얼었다. 26 다음날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도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귀에 생생했다. 앞뒤 상황으로 볼 데 다이스케는 그 말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 해야만 했다. 적어도 아버지로부터의 물질적 도움은 이미 끝났다고 각오해야 했다.다이스케가 가장 두려워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아버 지 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이번 혼담은 거절한다해도 다음에는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이 들었다. 어떤 혼담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수긍할 만한 이유를 명백하게 대야만 했다. 그러 나 다이스케는 그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의 인생 철학과 근본적으로 모순되 는 문제로 아버지를 속인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다이스케는 어제의 일을 떠올기며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자 기 자신이 일으킨 일에 대한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높은 절벽 끝까지 밀린 기분이었 다. 그는 그 첫번째 방안으로 무슨 직업이든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에는 직업이라는 문자만 맴돌 뿐 직업 그 자체는 형태를 갖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까 지 어떤 직업에도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직업을 떠올리더라도 다만 수박 한기 식일 뿐, 확고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세상이 평평하지만 복잡한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자신은 어떠한 색도 띠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직업을 다 떠올려본 그는 표박자에서 생각이 멈추었다.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의 모 습을 개와 사람의 경계를 헤매는 걸 식 부리 가운데서 발견했다. 생활의 타락은 정신의 자 유를 모두 빼았아간다는 사실로 인해 그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육체에 더럽 고 추악한 모든 것을 연관시킨 후 자신의 정신 상태가 얼마나 형편없어질까 하는 생각을 하 자 몸이 오싹해졌다.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정신적으로 빈곤한 상태하에서 이끌고 다여야 했다. 미치요는 정신 적으로 볼 때 이미 히라오카의 아내가 아니었다. 다이스케는 평생 그녀를 책임질 생각이었 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볼때 어느 정도 확고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의 내면적 부실과 사회 적으 로 형편없는 사람의 내면적 충실은 결과적으로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 을 때까지 미치요를 책임진다는 것은 막연한 목적에 불과할 뿐, 결코 어떤 사실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이스케는 혹내장에 걸린 사람처럼 넋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그는 또 미치요를 찾아갔다. 그녀는 전날과 같이 차분했다. 그녀는 미소를 띤 환한 얼굴로 대해주었다. 그녀의 눈가는 봄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상큼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다이 스케는 그녀가 결사적으로 자기를 믿고 의지하려 애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눈앞에서 확인하자 애련의 정과 가엽은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악한처럼 가책했다. 따라서 생각 했던 것을 전혀 말하지 못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을 때 그는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만들어서 우리 집에 오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미치요는 네 하고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그러자 다이스케는 몸을 에이는 듯한 괴로움을 느쪘다. 얼마 전부터 다이스케는 마음에 켕기긴 했지만 미치요를 찾아갈 때마다 히라오카가 없을 때를 택해야 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마음에 켕긴다기보다 오히려 점점 가기가 싫어졌다. 게다가 히라오카가 없을 때를 골라 찾아가다가는 하녀가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기분 탓인지, 하녀는 차를 가져올때도 몹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치요는 전혀 모른체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너무나 태연 했다. 물론 히라오카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어쩌다가 넌지시 한 두 마디 던져도 미치요는 오히려 응하지 않았다. 다만 다이스케의 얼굴을 보는 동안만은 기 쁨으로 충만해지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이제라도 금방 혜어날 길 없는 검은 구 름이 몰려을 것 같은 걱정을 드러내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다이스케 앞에서는 조금도 불안 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신경이 예민한 여자였다. 그러나 요즘의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볼 때, 다이스케는 그녀의 주위 환경이 아직 그다지 험악하지 않다는 생 각보다는 자신의 책임이 한층 무거워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좀더 할 얘기가 있으니 우리 집으로 와주십시오" 하고 전보다는 더 진지하개 말하고 다 이스케는 미치요와 혜어졌다. 이틀 후 미치요가 올 때까지 다이스케는 어떠한 새로운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하고 있었 다. 그의 머리속에는 직업이라는 두 글자가 커다란 해서로 새겨졌다. 그것을 밀어젖히자 물 질적 공급의 두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미치요의 험난한 앞 날이 펼쳐졌다. 그의 머리에는 불안한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그 세 가지가 뒤범벅이 되 어 잠시도 쉬지 않고 빙빙 돌자 그의 주위가 온통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배를 탄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머리가 빙빙 도는 가운데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 한가운데서 의연 함을 잃지 않았다. 아오야마 집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다이스케도 물론 어떤 소식이 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애써 가도노와 실없는 잡담 이나 했다. 가도노는 그렇게 무더운 날 자신 의 몸조차 힘예 겨워할정도로 할일없는 사나이였기 때문에 다이스케가 생각한 대로 퍽 자랑 스럽게 말을 했다. 그러다가 지치면 이런 말도 했다. "선생님, 장기나 한번 두시죠?" 저녁때는 뜰에 물을 뿌렸다. 두 사람 다 맨발로 물이 가득 든 통을 하나씩 들고 마당에 아무렇게나 물을 뿌리고 다녔다. 가도노가 옆의 벽오동 꼭대기까지 물을 뿌려보이겠다며 통 바닥을 치켜든 찰나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울타리 옆에는 분꿎이 가득 괴어 있었다. 세숫물을 떠 놓은 푼주 그늘에 자라난 베고니아 잎이 뚠에 띄게 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장마는 겨우 끝나서 낮에는 구름 천지였다. 강렬란 햇빛은 넘은 하늘이 훤히 비칠 만큼 빛나고, 하늘 가득한 열을 지상을 향해 강하게 발산 하 는 날씨가 되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다이스케는 머리 위의 별들을 을려다보았다. 아침 에는 서재로 들어갔 다. 2,3일은 아침부터 매미 소리가 들려왔따. 목욕탕으로 가서 자주 머리를 식혔다. 그러자 이때다 싶었는지 가도노가 목욕탕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정말 찌는 듯한 더위인데요. " 다이스케는 이틀 동안은 그렇게 빈둥빈둥 지냈다. 사흘째 대낮에 그는 서재 안에서 이글 이글 타는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뜨거운 태양이 내뱉는 입김을 맡았을 때 갑자기 너무나 무서웠다. 그것은 그의 정신이 그토록 맹렬한 기후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더위에도 불구하고 미치요는 일전의 약속을 지켰다. 다이스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 을때 자기가 직접 현관까지 뛰어나갔다. 마치요는 격자문 밖에 서서 보따리늘 든 채 양산을 접고 있었다. 집에서 입고 있던 차림 그대로 나왔는지 수수해 보이는 휜 바탕좌 무명 흩옷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중이었다. 다이스케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운명이 그녀 의 미래를 오려내서 심술궂개 자기 눈앞에 가져 다준 것처럼 느껴쪄 자기도 모르게 웃으면 서 말했다. "사랑의 도피라도 하려는 것 같은데요." "물건 사러 나왔다가 들르지 않으면 어려우니까" 하고 그녀는 온화한 얼굴로 진지하게 대 답했다. 그러고 나서 다이스케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다이스케는 즉시 부채를 내놓았다. 햇볕 때문인지 미치요의 볼은 약간 달아 있었다. 평소 의 지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눈도 활기차게 보였다. 다이스케는 생기에 넘치는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채 잠시 동간 만사를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아름다음을 아무 도 모르게 망가뜨러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라는 생각이 들자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는 오 늘도 그 아름다움의 일부분을 어enq게 하기 위해 미치요를 불렀을 것이다. 다이스케는 몇 번이나 자기의 생각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행복해하는 얼굴로 자기 앞에 있는 젊은 여인에게 조금이나마 걱정을 끼치게 한다는 것은 다이스케로서는 대단히 부도덕 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미치요에 대한 책임감을 깊이 느끼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이후의 사정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대신 일전에 한 고백을 같은 방에서 되풀이하며 단순한 사랑의 쾌감에 모든 것을 내맡겨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이스케는 겨우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후 히라오카와의 관계에 있어서 별로 변한 것은 없습니까?" 미치요는 이 질문을 받았을 때도 여전히 행복해했다. "있었다 해도 상관없어요. " "당신은 그만큼 나를 믿고 있습니까?" "믿지 않고는 이렇게 있을 수 없지 않겠어요? " 다이스케는 눈이 부실 만름 뜨거운, 가을 같은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그 정도로 믿을 만한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하고 다이스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지만 머리속은 화로처럼 달아올랐다. 그러나 미치요는 그 말이 마음에 걸리지도 않는 지 왜냐고 되묻지 않았다. 다만 간단하게 대꾸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웬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그래요 ? " 다이스케는 진지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사실 나는 히라오카보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놈입니다. 과대평가하게 되면 곤란하니까 모두 말해버리겠지만" 하고 전제한 다음 자신과 아버지와의 오늘날까지의 관계 를 자세히 말하고는,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제구실을 하지 못할 거요. 아니 반 사람 몫도 할 수 없을 거요. 그래서 " 하며 머뭇거렸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세요? " "그래서 내가 생각한 대로 당신에게 책임을 다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 이오. " "책임이라니, 무슨 책임을요? 좀더 명확하게 말씀해주셔야지, 잘 모르겠어요. " 다이스케는 평소 물질적인 면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빈곤할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만족시 킬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물질적 풍요로움 또한 미치요에 대한 책임의 하나라고 생각했을 뿐, 그밖에 어떤 명확한 관념을 갖고 있지 못했다. "도의상의 책임이 아니라 물질적 책임 말이오."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아요." "바라지 않는다 해도 반드시 필요해집니다. 앞으로 내가 당신과 어떻게 지내든, 물질적 풍요로움이야말로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강력한 해결책이 될 거요." "해결책이고 뭐고 이제 와서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것은 뻔하지요. " 미치요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지금 당신 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 아닌 가요? 그 정도는 처음부터 알고 계셨을텐데요" 다이스케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머리를 감싸며 흔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 미치요는 눈물을 글셍거렸다. "만일 그것이 걱정이 된다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아버님과 화해해서 종전처럼 지 내면 되잘아요. " 다이스케는 갑자기 미치요의 팔목을 움켜쥐고는 힘주어 말했다. "그랄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을 거요. 그저 마음에 걸려 당신에게 사과하는 거요." "사과라뇨?" 하고 미치요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이스케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 때문에 그 렇게 되었는데 당신이 사과하다니, 오히려 제가 미안하군요. " 미치요는 소리 내어 울었다. 다이스케는 달래듯이 말했다. "그러면 기다려주시겠어요 ? " "당연하지요. " "앞으로 더 큰 어려움이 있을 거요." "그런 건 알고 있어요. 어떤 일이 닥쳐도 괜찮아요. 저는 요전날터 만일의 경우 죽을 각오 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다이스케는 겁이 나서 소름이 끼쳤다.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소? " "그런 건 없어요. 무슨 일이든 당신 뜻에 따르겠어요." "멀리 떠나는 건. " "그것도 좋아요. 그냥 죽어버리자고 하면 전 죽겠어요." 다이스케는 또 오싹했다. "이대로는" "이대로도 좋아요. " "눈치챘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괜찮아요. 언제 죽더라도 괜 찮아요." "그런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이대로 산다 해도 저는 그리 오래 살 수 없을텐데요 뭘" 다이스케는 굳어진 채 몸을 잔뜩 움츠리고 미치요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히스테리의 발 작을 일으킨 것처럼 마음놓고 울었다. 한바탕 울다가 발작은 점점 가라앉았다. 그후로는 평 소와 다름없이 조용하고 정숙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눈썹 주위가 큐난히 시원스럽게 보였다. 그때 다이스케가 물었다. "내가 히라오카률 만나서 해결해도 좋겠습니까?" "그런 일을 할 수 있으시겠어요?" 하며 미치요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다이스재는 분명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알아서 하세요" 하고 미치요가 말했다. "그러지요. 우리 두 사람이 히라오카를 속인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사실을 잘 납득할 수 있게 말해야겠지요. 내가 잘못한 것은 분명히 사과할 생각이오. 그 결 과는 내 생각대로 되지 않올지도 모르오. 하지만 어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기더라도 그렇게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할 작정이오. 이렇게 어쩡쩡한 상태로 서는 서로 고통스럽노 히라오카에게도 좋지 않아요. 다만 내가 결단을 내려 그렇게 하면 히라오카에 대한 당신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아 그것이 딱하지만, 난처해지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요. 자기 행동 에 대해서는 아무리 떳떳하다 해도 도의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 아무리 고통스런 일이라 해도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만은 히라오까에게 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게다가 이제부 터 우리가 취할 태도가 달린 일이니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잘 알겠어요. 어차피 잘못되면 죽을 각오이니까요." "죽다니, 설사 죽는다 해도 지금부터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어디 있나요? 또 그런 위험 이 따르는 일이라면 뭣 매문에 내가 자진해서 히라오카에게 이야기하겠어요?" 미치요는 또 울기 시작했다. "자, 내가 잘못했소. " 해가 지려 하자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바래다주지는 않았 다. 다이스케는 서재에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한 시간쯤 지냈다. 미치요를 만나 자신의 계획 을 틸어놓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히라오카에게 만나자는 편지를 쓰려고 붓을 들자 갑 자기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져 근계다음을 써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셔츠만 입은 채 맨발로 갑자기 뜰로 뛰쳐나갔다. 미치요가 돌아갔을 메 정신 없이 낮잠을 자던 가도노가 박 박 깍은 머리를 양손으로 누르면서 툇마루에 나타났다. "아직 빠르지 않습니까? 햇볕이 비치고 있는데요." 다이스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뜰 구석으로 들어가 대나무 잎을 앞쪽으로 쓸어냈다. 가도노도 할수없이 옷을 벗고 내려왔다. 좁은 뜰이지만 흙이 말라 있어서 충분히 적시는 데 는 왜 힘이 들었다. 다이스케는 팔이 아프다며 적당히 해놓고는 발을 닦고 툇마루로 올라갔 다. 그가 담배를 피우며 툇마루에서 쉬고 있자 가도노가 그 모습을 보고 놀렸다. "선생님, 심장의 고동이 약간 좋지 않은 것 아닙니까?" 밤에는 가도노를 데리고 가구라자카의 잿날에 나가서 가을이 되면 볼만한 화분을 두세 개 사와서 이슬이 내리는 처마 밑에 나란히 놓았다. 밤은 깊고 하늘은 높았다. 별빛은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그날 밤 다이스케는 일부러 덧문을 잠그지 않고 잤다. 문단속을 하지 않은 데서 오는 무서움은 전혀 없었다. 그는 불을 끄고 모기장 속에서 뒹굴면서 깜깜한 가운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속에는 낮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제 2,3일 후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그러다가 어느새 위대한 하늘과 위대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결단을 내려 히라오카에게 편지를 보냈다. 다만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 는데 자네의 형편을 알려달라, 나는 언제라도 좋다고 간단히 썼지만 그는 일부러 봉함 편지 를 보냈다. 풀을 붙이고 붉은 우표를 붙였을때 드디어 그는 모험삼아 증권에 손을 댄 기분 이었다. 그는 가도노에게 그 운명의 서신을 우편함에 넣으라고 시켰다. 가도노에게 건네출 때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막상 건네주고 나자 담담하기만 했다. 3년 전 미치요와 히라오카 를 맺어주려고 애쓴 일을 생각하니. 마치 꿈만 같았다. 다음날은 히라오카의 답신을 은근히 기다렸다. 그 다음날도 기대하며 하루종일 집에 있었 다. 사흘, 나흘이 지나갔다. 그러나 히라오카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러던 풍 아오야 마의 집으로부터 다달이 받아온 생활비를 받으러 갈 날이 다가왔다. 갖고 있던 돈은 거 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다이스케는 요전에 아버지를 만난 뒤로, 이제는 집으로부터 생활비 를 받을 수 없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슬렁어슬렁 찾 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는 두세 달 정도는 책이나 옷가지 등을 팔면 어떻게 되리라는 안일 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이 해결되는 대로 천천히 일자리나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람은 그리 쉽게 굶어죽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살아간 다는 반속담의 진리를 경험하기 전부터 믿기 시작했다. 닷새째 되던 날 드디어 그는 그 더위에도 불구하고 기차를 타고 히라오카의 신문사까지 찾아갔다. 그러나 히라오카는 2,3일 전부터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이스케는 밖으로 나가서 지저분한 편집국 창문을 올려다보면서, 오기 전에 일단 전화로 알아볼 것을 잘못했 다고 생각했다. 앞서 보낸 편지는 과연 히라오카의 손에 전해졌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다이 스케는 수신인 주소를 일부러 신문사로 적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간다로 가서 단골 가게에 들러 팔아야 할 불필요한 책이 있으니 보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밤은 뜰 에 물을 뿌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는 하얀 망 셔츠를 입고 있는 가도노의 모습을 멍하 니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은 지치셨습니까?" 하고 가도노가 물통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다이스케의 가슴은 불안에 눌려 분명한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저녁밥을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 채 몇 수저 뜨다가 수저를 놓았다. 그는 가도노를 불러서 말했다. "자네 히라오카 집에 가서 지난번에 보낸 편지를 받았는지 물어보고, 받았다면 그 대답을 듣고 오게. " 가도노가 무슨 뜻인이 모를 것 같아, 다이스케는 앞서 여차여차한 편지를 신문사 쪽으로 보냈다는 것까지 설명해주었다. 가도노를 보낸 뒤 다이스케는 툇마루로 나가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가도노가 돌아왔을 때 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하고 가도노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히라오카씨는 계셨습니다. 편지는 보 셨답니다. 내일 아침에 오시겠다고 하시던데요. " "그래, 수고했네" 하고 다이스케는 대꾸했다. "실은 벌써 오시려 했는데 집안에 환자가 생겨서 늦어졌으니 잘 말 해달라고 하시더군요. " "환자?" 하고 다이스케는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가도노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대답했다. "네, 여하튼 아주머니가 몸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가도노가 입고 있는 휜 바탕의 무명 홑옷만이 어렴풋이 다이스케의 눈에 아른거렸다. 별 빛은 두 사람의 얼굴을 밝히기에는 아직 너무 희미했다. 다이스케는 앉아 있는 등의자의 팔 걸이를 양손으로 왁 움켜쥐 었다. "많이 나쁘던가?" 하고 그는 세차게 다그쳤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뻣 같았습니다. 하지만 히라오카씨가 내일 오신다니까 대단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다이스케는 조금 안심했다. "어떻게 아프다던가 ? " "여쭤보지 못했습니다. " 두 사람의 문답은 그것으로 끝났다. 가도노는 어두운 복도를 되돌아가서 자기 방으로 들 어갔다. 다이스케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한참후 램프 뚜껑이 등피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 다. 가도노는 불을 켠 것 같았다. 밤이 깊었는데도 다이스케는 계속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러자 가슴이 두근 거렸다. 팔걸 이를 움켜쥔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다이스케는 또 손뼉을 쳐서 가도노를 불렀다. 그러자 그 휜 바탕의 무명 홑옷이 다시 복도 끝에 어렴풋이 보였다. "아직 불을 켜지 않으셨군요. 램프를 켤까요?" 하고 가도노가 물었다. 다이스케는 괜찮다고 하며 다시 한 번 미치요의 일을 물어보았다. 간호원이 있더냐, 히라 오카는 어떻던가, 신문사를 결근한 이유가 아내의 병 때문인 것 같던가 등 궁금한 것을 모 두 물어보았다. 그러나 가도노의 대답은 방금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적 당한 억측에 불과했다. 그래도 다이스케는 흔자서 속을 끓이고 있는 것보다는 견디기 쉬웠 다. 자기 전에, 가도노가 편지가 왔다며 웬 편지 한 통을 들고 왔다. 다이스케는 어둠 속에서 그것을 받고는 별로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가도노가 재촉하듯 물었다. "본댁에서 온 것 같습니다. 등불을 가져올까요?" 다이스케는 그때야 비로소 서재에서 램프를 가져오게 한 뒤 겉봉을 뜯었다. 편지는 우메 코가 보낸 것으로 꽤 긴 것이었다. 요즘 흔담 문제로 도련님도 웨나 고민이 되셨겠지요. 이곳에서도 아버님을 비롯하여 형님, 그리고 저도 대단히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앞서 오셨을 때 결국 아버님께 확고한 자세로 거절하셨다니 무척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어쩔수없는 일이라며 채념하고 있습 니다. 그러나 그 당시 아버님은 이제 네 일에 상관치 않을테니 그렇게 알아라 하며 화내셨 다는 것을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그후 오시지 않는 겻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매달 생활비를 드리는 날은 설마 오시겠지 하고 있었는데, 역시 오시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 습니다. 아버님은 놔두라고 하십니짜. 형님은 워낙 느긋하신 분이라 곤란하면 오갰지, 그때 가서 아버님깨 용서를 빌라고 하면 된다, 만일 오지 않으면 내가 가서 잘 타일러보겠다고 하시는군요. 하지만 혼담에 택해서는 새 사람 모두 단렴하고 있으니 그것은 염려하지 않아 도 될 것입니다. 하긴 아버님애서는 아직도 화가 풀리시지 않은 듯합니다. 제 생각에, 당분 간은 옛날처럼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오시지 않는 쪽이 오히려 도 련님을 위해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갓은 다달이 드리던 생활비 문제입 니다. 그렇게 갑자기 돈을 받으러 오시지 안아 당 장 생활이 곤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딱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그 생활비를 마련해 보내드리러, 그것으로 다음달까지 어떻게 견디어보도록 하세요. 그러다보면 아버님도 화가 풀리실테니까 요. 또 형 님에게도 그렇게 말씀드리게 하겠습니다. 나도 기회가 있을 때 아버님께 마음을 푸시라고 말씀드리겠어요.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가만히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편지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지잔 여자들 특유의 중복된 내용이었다. 다이스케는 봉투 안 에 든 수표를 꺼낸 다음 편지만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은 후 잘 접으면서 형수에게 무언의 감사를 드렸다. 편지의 문체가 언문일치인 것은 일찌기 다이스케가 권했던 그대로를 쓴 것 이 었다. 다이스케는 램프 앞에 있는 봉투에서 여전히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의 수명 이 또 한 달 연장된 셈이었다. 조만간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는 다이스케에게는, 형수의 뜻은 고맙지만 오히려 해가 될 뿐이었다. 다만 히라오카와 결판을 내기 전에는 일하 지는 않을 생각이었으므로 형수의 중여물이 이런 경우에는 그에게 양식으로서 아주 귀중한 것이었다. 그날 밤도 모기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램프를 껐다. 덧문은 가도노가 닫으러 왔기 때문에 고장이 났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덧문은 유리창이기 때문에 창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다만 어젯밤보다는 어두웠다. 그래서 날이 좀 흐린가 생각하고 일부러 툇마루 까지 나가 처마를 올려다보니 빛나는 물체가 하늘에 언을 그으며 비스듬히 흘러갔다. 다이스케는 또 모기장을 걷고 들어갔다. 잠이 오지 않아서 부채질을 했다. 아오야마의 집 일은 그다지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직장도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배짱이 생겼다. 다만 미치요의 병과 그 원인, 그리고 결과로 인해 다이스캐는 머리가 산란했다. 그 리고 히라오카와 대면하는 모습도 여러가지로 상상해 보았다. 그것 역시 머리속을 복잡하 게 만들었다. 히라오카는 내일 아침 아흡시쯤 너무 더워지기 전에 방문하겠다고 전해왔다. 원래 다이스케는 히라오카를 만나 무슨 이야기부터 꺼낼까 하는 그런 형식적 문구를 생각해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고, 이야기의 순서는 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결코 걱정을 할 필요는 업었다. 하지만 다만 자신의 생각을 되도록 온건하게 상대방에게 전하고 싶다. 그래서 지나친 흥분을 삼가고 아주 편히 쉬고 싶 었다. 가능한 잠을 푹 자려고 눈을 감았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오히려 지난밤 보다 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럭저럭 또 여름밤이 지나고 회미하게 동이 트기 시작했파. 다이스케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섰다. 맨발로 툇마루 쪽 뜰로 뛰허내려 차가운 이슬을 마 음껏 밟았다. 그리고 다시 툇마루의 등의자에 기대어 해가 뜨기를 기다리다가 잠깐 졸았다. 가도노가 잠에 취한 눈을 비비며 덧문을 열었을 때 다이스케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 니 어느새 붉은 태양이 솟아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하고 가도노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다이스케는 곧 바로 목욕탕으로 가서 물을 끼얹었다. 아침 식사는 하지 않고 홍차만 한 잔 마셨다. 신문을 보았지만 도무지 눈에 들에 오지가 않았다. 읽을수록 읽은 것이 떼지어 모였다가 사라져버렸다. 다만 시계 바늘에 신경이 쓰였다. 히라오카가 오겠다는 시간은 아 직 두 시간쯤 남았다. 다이스케는 그동안 어떻게 지낼까 하고 고심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그동안 푹 자고 눈을 뜨는 순 간 자기 앞에 히라오카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무슨 일을 생각해내려고 애를 썼다. 문득 책상 위에 있는 우메코의 편지가 눈메 띄었다. 다이스케는 이거다 하며 애써 책상에 앉아서 헝수에게 감사의 뜻이 담긴 답장을 썼 다. 되도록 정중하게 쓰려고 했는데, 봉투에 넣어 수신인의 이름과 주소를 다 적고 시계 보 니 겨우 1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자리에 앉은 채 불안한 눈길로 허공을 쳐다보 았다. 머리속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섰다. "곧 돌아을 거니까, 히라오카가 오면 잠간만 기다리라고 하게." 다이스케는 가도노에게 그렇게 말한 뒤 밖으로 나갔다. 뜨거운 햇볕이 무서운 기세로 다 이스케의 얼굴 정면을 비친다. 그는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눈과 눈썹을 움직였다. 우시고메미 쓰케로 들어가서 이이다마치를 빠져나가 구단자카로 나아서 어제 들렀던 헌책방으로 들어갔 다. "어제 필요없는 책을 가져가시라고 부탁했는데 당분간 보류할 생각이니 그렇게 아십시오" 하고 어제 한 말을 취소했다. 돌아을 때는 너무 더워서 기차로 이이다바시까지 가서 비사문 앞으로 나왔다. 집앞에는 인력거 한 대가 서 있었고 현관에는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이스케는 가도노의 말을 듣기도 전에 히라오카가 온 것을 알았다. 땀을 닦고 갓 빨아놓은 무명 흩옷 으로 갈아입고는 객실로 나갔다. "일부러 사람을 또 보내서" 하고 히라오카가 말했다. 역시 양복을 입고, 더운 듯이 부채질 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더운데 와주어서" 하고 다이스케도 자연히 형식적인 말투가 되지 않을 수 업었 다. 두 사람은 잠시 날씨 이야기를 했다. 다이스케는 즉시 미치요의 상태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웬지 물을 수가 업었다. 그러던 중 형식적인 인사도 끝났다. 따라서 그런 자리를 마 련한 쪽에서 본론을 꺼내는 것이 당연했다. "미치요님은 아프시다고 " "응, 그래서 신문사도 2,3일 쉬었지. 자네한테 답장하는 것모 잊고 말았어. " "그건 괜찮지만, 미치요님이 그렇게까지 나쁜가?" 히라오카는 뭐라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걱정할 정도로 심한 건 아니지만 결 코 가벼운 편은 아니라는 뜻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말했다. 일전에 한참 더울 때 가구라자카로 물건을 사러 나왔다가 다이스케한테 들른 다음날 아침 미치요는 히라오카의 출근 준비를 도와주다가, 그의 양복 깃에 단 장식을 손에 쥔 채 졸도 했다. 히라오카도 놀라서 출근 준비는 제쳐놓고 미치요를 지켜보았다. 10분 후, 미치요는 이 제 괜찮으니 신문사에 출근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입가에 애써 미소를 띄웠다. 누워 있기는 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만일 나빠지면 의사를 부르고 급한 경우에는 신문사로 전화를 걸으라고 말하고 그는 출근했다. 그날 밤 그는 늦게 돌아왔다. 미치 요는 기분이 좋지 않다며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어떠냐고 물어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 음날 아침 일어나보너 그녀의 안색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히라오카는 놀라서 의사를 불러 왔다. 의사는 그녀의 심장을 진찰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졸도는 빈혈 때문이라 했다. 그리 고 아주 심한 신경쇠약에 걸려 있다는 말을 했다. 히라오카는 그날부터 신문사를 쉬었다. 본 인은 괜찮으니까 출근하라고 부탁하듯 말했지만 히라오카는 듣지 않았다. 간호한 지 이틀째 되던 날 밤 미치요는 눈물을 흘리면서 히라오카에게 꼭 사과해야만 할 일이 있으니 다이스 케한테 가서 그 이유를 물어보라고 말했다. 히라오카는 그 말올 들었을 때 처음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뇌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럴 거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알았다는 말을 하면서 그녀를 달랬다. 사흘째 되던 날도 그녀는 같은 말을 했다. 히라오카는 그때야 비로소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저녁때 가도노가 편지의 대답을 들으러 일부러 고이시가와까지 찾 아왔다. "자네가 할말이 있다는 것과 미치요의 말이 무슨 관계가 있나?" 하고 히라오카는 이상하다는 듯 다이스케를 쳐다보았다. 히라오카의 이야기는 조금 전부 터 다이스케의 가슴을 찔렀지만 그 뜻하지 않은 질문에 다이스케는 갑자기 가슴이 막혔다. 히라오카의 질문은 실로 의표플 찌른 순진하고도 악의없는 것으로 다이스케를 꼼짝 못하게 했다. 그는 여느때와는 달리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 는 평소와 다름엄는, 차분하고도 당당한 태도였다. "미치요님이 자네에게 사과할 것이 있다는 것과 내가 자네에게 할말이 있다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거댜. 흑은 같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것을 자네에게 말해야만 해, 말해 야 할 의무가 있으니 자네와 나의 우정을 생각해서 쾌히 내 의무를 다하게 해주게." "뭐야, 새삼스럽게" 하며 히라오카는 비로소 정색을 했다. "아니, 서론이 길면 변명처럼 들릴테니까 나도 되도록 솔직하게 말해버리고 싶은데, 좀 중 대한 일인데다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경향이 있고 만일 중간에 자네가 격해질 경우 무 척 곤란하니까 끝까지 들어주었으면 좋겠는데 " "그게 뭐지 ? 그 내용이 말이야" 호기심과 함께 히라오카의 얼굴이 더욱더 진지해졌다. "그 대신 얘기를 다 한 뒤에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나 역시 잠자코 끝까지 듣겠 네. " 히라오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안경 너머의 커다란 눈으로 다이스케를 지켜보 고 있었다. 밖은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고 툇마루까지 비쳤지만 두 사람은 거의 더위를 잊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한층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히라오카 부부가 도쿄로 나온 이래 자신과 미치요와의 관계가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오늘날에 이르렀는가를 상세하게 말하기 시작했 다. 히라오카는 굳게 입술을 다 물고 다이스케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다이스케 가 모든 것을 말하는 데는 약 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히라오카로부터 네번 정도 극히 짤 막한 질문을 받았다. "그동안의 일은 대충 이렇다" 하고 다이스케가 설명의 결말을 지을 때 히라오카는 다만 신음하듯 깊은 한숨으로 대신했다. 다이스케는 너무나 고통tm러웠다. "자네 입장에서 보면 나는 자네를 배반한 것이지. 괘씸한 놈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할말이 없네. 미안해." "그러면 자네가 한 짓을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거로군. " "물론. " "나쁜 줄 알면서도 지금까지 진행해왔다는 거지 ?" 하고 히라오카는 거듭 물었다. 그러나 앞서의 말투보다 약간 절박하게 들렸다. "그래. 그러니, 이 일에 대해 자네가 우리들에게 가하려는 제재는 서슴없이 받을 각오가 되어 있네. 지금 말한 것은 그저 사실 그대로 말한 것일 뿐. 자네 처분에 따를 생각이야 " 히라오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그는 다이스케 앞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말했다. "일이 이렇게 줬는데, 자네는 내 자존심이 회복될 수 있다도 생각 하나? " 이번에는 다이스케가 아무 말도 못했다. "법률이나 사회적 제재 따위는 나는 전혀 몰라" 하고 히라오카는 다시 말했다. "그러면 자네는 당사자의 자존심만이 회복될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 건가? " "그렇네. " "미치요님의 마음을 돌려서 자네를 종전보다 사랑하게 하고 나를 사갈처럼 미워하게 한다 면 어느 정토 속죄가 되겠지." "그렇게 할 수 있겠나?" "할 수 없네" 하고 다이스케는 딱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렇게까지 만들어놓고 여전히 극단적인 상황 을 만들 생각이 아닌가?" "모순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관례로 정해진 부부 관계와 자연의 사실로 맺 어진 부부 관계가 완전히 다른 모순이니까 어쩔수없다고 생각하네. 나는 세상의 관례로서 미치요님의 남편인 자네에게 사과하는 것일세. 그러나 내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모 순도,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네." "그렇다면" 하고 히라오카는 약간 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은 세상 관례에 따른 부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말씨로군." 다이스케는 동정어린 표정으로 히라오카를 쳐다보았다. 히라오카의 험한 눈썹이 약간 부 드러워졌다. "히라오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 문제는 남자들 체면에 관한 중대한 사건이지. 그래서 자네가 자네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 유지하려 하지 않아도 암암리에 그런 감정이 살 아나서 자연히 격해지는 덧은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런 관계가 되기 전인 학창 시절의 자네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내 말을 잘 들어주지 않겠나?" "자네는 미치요님을 사랑하지 않았어."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그건 -. " "그건 쓸데없는 참견이지만 나는 말을 해야겠어. 이번 일에 있어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그 점에 있으니까 말이야." "그럼 자네한테는 책임이 없단 말인가? " "나는 미치요님을 사랑하네. " "자네는 남의 아내를 사랑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 ? " "어쩔수없는 일이지. 미치요님은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자네소유다. 하지만 물건이 아 닌 인간이니까 누구도 마음까지 소유할수 는 없지. 따라서 그 누구도 애정의 증감이나 방향 을 명령할 수는없네. 남편의 권리는 거기까지 닿지 못하니까. 그러니 아내의 사랑이 다른 곳 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남편의 의무일 거야." "설사 내가 자네 말대로 미치요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 라 해도-" 하고 히라 오카는 애써 자신을 억제하듯 주먹을 쥐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상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자네는 3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지 ?" 하며 히라오카는 말을 바꾸었다. "3년 전이라면 자네가 미치요님과 결흔했을 때로군." "그래. 아직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나?" 다이스케는 그 즉시 3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의 기억이 어둠속을 돌아다니는 횃불처 럼 빛났다. "미치요와 나를 맺어주겠다는 말을 꺼낸 것은 바로 자네였네." "그녀와 결흔하고 싶다는 뜻을 나한테 털어놓은 것은 자네였어." "난 그걸 잊지 않고 있어. 오늘날까지 자네의 따뜻한 마음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히라오카는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밤에 자네와 함께 우에노를 빠져나가 야나카로 내려갔을 때였지. 비가 온 뒤라 야나카의 길은 좋지 않았어. 박물관 앞에서부 멀리 있는 다리까지 갔을 애 나를 위해 울었네 " 다이스케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그때만큼 친구를 고맙게 여긴 적이 없었어. 그날 밤 나는 너무 기뻐서 잠을 이를 수가 없었지. 달이 밝은 밤이어서 달이 질 때까지 일어나 있었네." "나도 그때는 기분이 참 좋았었지" 하고 다이스케는 꿈을 꾸듯 말했다 그러자 히라오카는 닥쳐 하고 말할 정도의 기세로 가로막았다. "자네는 어째서 그때 나를 위해 울었지 ? 왜 나를 위해 미치요와 결혼을 주선하겠다고 맹 세를 했느냐 말이야. 오늘날 이런 일을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왜 그때 가만히 있지 않았나. 나는 자네에게 이토록 가흑한 복수를 당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히라오카의 목소리는 떨렸다. 다이스케의 창백한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그는 호소하듯 말했다. "히라오카, 나는 자네보다 더 먼저 미치요님을 사랑했다. " 히라오카는 어이없다는 듯이 다이스케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었어. 자네가 미치요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내 장래를 회생해서라도 자네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 친구의 본분이라고 여겼지. 그러나 바로 그것이 문제였어. 내가 지금과 같이 생각이 깊었더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때 나는 생각이 너무 얕아서 자연을 경멸했지. 나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너무 후회스럽다.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네를 위해 후회하고 있어. 내가 자네에 대해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 는 것은 이번 건보다 오히려 그때 내가 공연히 나선 바로 그 의협심에 있네. 용서해줘. 나는 이처럼 자연에 복수당하고 자네에게 이렇게 빌고 있네." 다이스케는 눈물을 흘렸다. 히라오카의 안경이 흐려졌다. "이것도 다 운명이니 어쩔수없는 노룻이지." 히라오카는 신음하듯 말했다. 두 사람은 겨우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 일에 대한 해결책으로 생각해 둔것이 있다면 어디 한번 들어보세" "나는 자네 앞에서 빌고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어떻게 내가 먼저 그런 말을 꺼낼 수 있 겠나. 자네 생각부터 듣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네 " 하고 다이스케가 말했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네" 하고는 히라오카는 머리를 감싸고 있기만 했다. "그렇다면 말하겠네. 미치요님을 포기하지 않겠나?" 하고 다이스케는 대담하게 말했나. 히라오카는 머리에서 손을 매고는 힘없이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렇게 하지. " 그리고 그는 다이스케가 뭐라 대꾸를 하기 전에 다시 되풀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해. 나는 자네 말대로 미치요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르네. 그러나 미워하지는 않았어, 미치요는 지금 병석에 누워 있네. 더구나 병세 또한 약한 편이 아너야. 누워 있는 환자를 줄 수는 없어. 병이 나을 매까지 자네에게 주지 못할테니, 그때까지는 내 가 남편이니까 남편으로서 돌볼 책임이 있어." "나는 자네에게 사과했네 미치요님도. 자네에게 사과했고 말이야. 자네 입장에서 보면 두 사람은 괘씸하기 그지 없겠지만-아무리 사과해도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어쨓든 병 석에 누워 있으니 " "그건 알고 있어. 그녀가 병석에 누워 있는 것을 이용해 앙갚음으로 내가 학대라고 할 것 처럼 생각하겠지만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그러지 않을테니 걱정말게."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마옴속으로 히라오카에게 감사했다. 히라오카 는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난 이상, 남편의 입장에서도 이제는 자네와 친구로서 지낼 수 없네. 오늘로 우리 둘의 사이는 끝난 거야. 그리 알게. " "어쩔수없지" 하며 다이스케는 고개를 떨구었다. "미치요의 병세는 방금말했듯이 가볍지 않아. 앞으로 어떻게 전혀 알 수가 없네. 자네도 걱정이 되겠지만 우리 사이는 이제 끝난 것이니 어쩔수없어. 내가 있든 없든 내 집에 출입 하는 것만은 삼가해주게. " "알았네" 하고 다이스케는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다. 히라오카는 일어섰다. "이봐, 5분만 더 있어줘" 하고 다이스케가 부탁했다. 히라오카는 자리에 앉은 채 말이 없었다. "미치요님의 병은 갑자기 위험해질 우려가 있나? " "글쎄. " "그것만 좀 말해줘. "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냐." 히라오카는 가라앉은 말투로 땅이 꺼질 듯이 한숨지으며 대답했다. 다이스케는 몹시 견디 기 힘들었다. "만일,만일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딱 한 번만 만나게 해주지 않겠나. 그 외는 아무것 도 부탁하지 않겠네. 다만 그것뿐이야. 그것만 꼭 들어주게. " 히라오카는 입을 다문 채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너무나 괴로워서 양 손 바닥을 때가 밀릴 정도로 문질렀다.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구" 하고 히라오카는 무겁게 대답했다. "그럼 가끔 병세를 알아보러 사람을 보내도 되지 ?" "그건 곤란해. 자네와 나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앞으로 내가 자네와 교섭이 있다면 그 건 미치요를 넘겨줄 때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 다이스케는 전기가 오른 것처럼 의자에서 펄쩍 뛰었다. "앗, 알았네. 미치요님의 시체만을 보여줄 작정이군. 그건 너무했네. 그건 너무 잔인해." 다이스케는 테이블 가를 돌면서 히라오카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른손으로 히라오카의 신 사복 어깨를 누르고 앞뒤로 흔들었다. "너무했어, 너무해."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의 눈에 담긴무서운 빛을보았다.그는 다이스케에게 어깨를 흔들리면 서 일어섰다. "그럴 리가 있겠나" 하며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의 손을 붙들었다. 두 사람은 마귀에 흘린 듯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았다. "침착해" 하고 히 라오카가 말했 다. "나는 침착해" 하고 다이스케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은 거친 소리 사이로 답답하듯 고 통스럽게 새어나왔다. 잠시 후 발작의 반공이 왔다. 다이스케는 자신을 지탱할 힘이 빠지자 다시 의자에 힘없이 앉아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17 다이스케는 밤 열시가 지나서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지금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하고 가도노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잠간" 하고 애매한 대답을 한 뒤 다이스재는 데라마거리까지 왔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여어 거리는 아직 초저녁이다. 무명 흩옷을 입은 사람 몇 명이 다이스케의 앞뒤를 지나갔다. 다이스케에게는 그것이 다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길 양옆에 있는 가 게는 모두 밝았다. 다이스케는 눈이 부셔서 전기불이 드는 골목길로 돌아갔다. 에도천 가로 나왔을 때 음침한 바람이 살짝 불었다. 검은 벚꽃 잎이 조금 움직였마. 다리 위에 서서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곤고사 언덕에서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이와자 키가의 높은 축벽이 좌우에서 좁은 언덕길을 지나고 있었다 히라오카가 살고 있는 거리는 더 조용했다. 대부분의 집들은 불이꺼져 있었다. 저쪽에서 달려오는 빈 수레의 바퀴 소리가 그의 가슴을뛰게 했다. 다이tm케는 히라오카 집의 울타리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런데 집안은 너무 어두웠다. 굳게 닫힌 문 위에 처마등이 덧없이 문패를 비추고 있었다. 처마등의 유리에 도마뱀붙이의 그림자가 비스듬히 비쳤다. 다이스케는 그날 아침에도 거기에 갔었다. 그는 낮부터 시내를 방황했다. 하녀가 물건을 사러 나오면 붙잡고 미치요의 상태를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하녀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히라오카의 므습도 보이지 않았다. 올타리에 기대어 귀를 기울여봐도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의사를 붙잡고 자세한 상태를 알아보려 했지만 히라오카의 문전에는 의사가 타고 다닐 만한 인력거가 서 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강한 볕을 쪼여서인지 현기증이 나기 시작 했다. 서 있으려니 쓰러질 것 같아 걸으니까 대지가 커다란 파문을 그렸다. 다이스케는 괴로 움을 참으면서 기어가듯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저녁밥 도 먹지 압고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 뜨겁던 태양은 겨우 서산에 지고 별빛이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다이 스케는 어둠과 서늘함 속제서 비로소 의식을 되찾아 이슬을 맞으면서 또다시 미치요가 있는 곳까지 갔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그 집 앞을 두세 번 왔다갔다했다. 처마등 아래에 멈춰설 때마다 귀를 기올였 다. 그리고 5분 내지 10분 정도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집안 상황은 좀처럼 알 수가 업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다이스케가 처마등 파래에 멈춰설 때마다 도마뱀붙이가 처마등 유리에 찰싹 몸을 붙이고 있었다. 검은 자취는 비스듬히 비친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도마뱀붙이에 눈이 갈 때마다 몹시 불쾌했다. 이상하게도 꼼짝도 않고 있는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신경이 예민해지면서 미치요가 위험하다고 상상했다. 미치요 는 지금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어쩌면 지금쫌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자기를 만나고 싶어서 죽지도 못하고 간신히 숨 쉬며 버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이스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히라오카의 문을 두드리 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디라오카의 것에는 손가락 하나 건드릴 권 리 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너무 겁이 나서 뛰기 시작했다. 조용한 골목길 안에 자기 발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뛰면서도 여전히 겁이 났 다. 걸음을 늦추었을 때는 숨이 막혔다. 길가에 돌 계단이 있었다. 다이스케는 거의 정신없 이 거기에 주저앉아 이마를 손으로 누르면서 몸을 꿍크렸다.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떠보니, 커다란 검은 문이 있었다. 문 위에서 굵은 소나무가 산울타리 바깥까지 가지를 뻗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절 입구에서 쉬고 있었던 것 이다. 그는 일어나서 힘차게 다시 걸어갔다. 조금 걸어서 다시 히라오카의 골목길로 들어섰다. 꿈을 꾸듯 그는 또 처마등 앞에서 멈춰섰다. 도마뱀붙시의 그림자가 또 한 곳에 비치고 있 었다. 다이스케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드디어 고이시가와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날 밤 그는 불덩이처럼 뜨겁고 빨간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머리가 빙빙 도는 듯했다. 그 는 그 바람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 쳤다. 그러나 의지와는 달리 그의 몸은 나뭇 잎처럼 빙그르르 눌꽃 바람에 감겨 갔다. 다음날, 붉은 태양은 또다시 높이 솟았다. 밖은 강렬한 빛으로 온통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이스케는 여덟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휘청거렸다. 평소와 다름 엄이 물을 끼얹고는 서재로 들어가서 잠자코 움츠리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가도노가 손님이 왔다는 말을 하러 다가 그만 입구에 서서 놀란 듯이 다이 스케를 쳐다보았다. 다이스케는 대답하는 것도 귀찮았다. 누가 왔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손 으로 받치고 있던 얼굴을 절반쯤 가도노 쪽으로 향했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형 세이고가 불쑥 들어왔다. "아, 이곳으로" 하며 다이스케는 자리를 권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세찌고는 자리에 앉자 마자 접부채를 꺼내어 모시 윗옷의 깃을 열어 젖히고 부채질을 했다. 이 더위에 지방질이 타서 괴로운지, 거친 숨을 쉬 었다. "정말 덥구나" 하고 세이고가 말했다. "집에도 별일 없습니까? " 하고 다이스케는 지칠 대로 지친 사람처럼 물었다. 두 사람은 여느때와 같은 잡담을 했다. 다이스케의 태도는 물론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세 이고는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야기가 끊어졌을 때 였다. "오늘은 실은" 하면서 세이고는 품속에 손을 넣더니 웬 편지를 꺼냈다. "실은 너한테 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하며 세이고는 봉투 뒤를 다이스케 에레 보이면서 물었다. "이 사람을 아니 ?" 거기에는 히라오카의 주소와 성명이 자필로 씌어 있었다. "압니다" 하고 다이스케는 거의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원래 네 동급생이라고 하는데, 정말이냐7" "그렇습니다. " "이 사람의 아내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 형은 다시 접부채를 들고 두세 번 탁탁 치더니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는 말소리를 낮 추었다. "이 사람의 아내와 너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 다이스케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게 묻는 말에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그동안의 일을 어떻게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형은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는 트것을 15센티미터쯤 되 감았다. "실은 히라오카라는 사람이 아버지 앞으로 이런 편지를 보내왔는데, 읽어보겠느냐?" 하면 서 형은 다이스케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다이스케는 잠자코 편지를 받고는 읽기 시작했다. 형은 조용히 다이스케의 이마 부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편지는 아주 작은 글씨로 씌어 있었다. 한줄 두줄 읽어감에 따라 다 읽은 부분이 다이스 케의 손끝에서 길게 드리워졌다. 그것이 60센 티미터가 넘어도 아직 끝날 기색이 없었다. 다 이스케외 눈은 아찔아찔했다. 머리가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는 억지로라도 끝까지 읽어야 만 한다고생각했다. 그는 온몸이 마구 죄어드는 듯했다. 겨드랑이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겨우 다 읽었을 때는 손에 든 편지를 감을 용기도 없었다. 편지는 펼쳐진 채 테이블 위에 길게 놓여졌다. "거기에 씌어 있는 것이 사실이냐?" 하고 형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사실입니다" 하고 다이스케는 간단히 대답했다. 형은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부채질을 멈추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형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바보 같은 짓쓸 했단 말이냐?" 다이스케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네가 결흔할 생각만 있다면 상대는 얼마든지 있잖니 ?" 하고 또 형이 말했다. 다이스케는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세번째로 형이 이렇게 말했다. "너라고 연애하지 말란 법은 업겠지. 하지만 이런 괘씸한 짓을 한다면야, 이제까지 돈 쓴 보람이 없지 않느냐?" 다이스케는 이제 와서 형에게 자기 입장을 설명할 용기도 없었다. 그는 바로 며칠 전까지 만 해도 완전히 형과 같은 생각이었다. "형수는 울고 있다" 하고 형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하고 다이스케는 꿈속에서처럼 대꾸했다. "아버님은 화내고 계시다. " 다이스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멍하니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평소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놈이었지. 그래도 언젠가는 생각을 고쳐먹겠지 하고 믿어왔는데, 이번만큼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도 체념해버렸다. 세상에 엉뚱한 사람만 큼 위험한 사람은 없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심할 수 엄지. 너는 네 뜻대로 하는 것이니 좋겠지만, 아버님과 나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 해봐라. 너도 가족의 명예 라는 생각쯤은 갖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 다이스케는 형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다만 온몸에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형 앞 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정도로 마음이 흔들 리지는 않았다. 모든일을 순조롭게 넘기기 위해 변명을 해서 세속적인 형으로부터 이제 와서 동경을 받으려는 신파극을 버일 생각은 물론 없었다. 그는 스스로 정당한 길을 걸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것을 이해해 줄 사람은 오직 미치요뿐이었다. 아버지도 형도, 사회도 모두가 적이었다. 그 들은 두사람을 타오르는 불꽃속에 넣고 태워버리려 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미치요와 껴안 고 되도록 빨리 불꽃 바람에 타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형에게는 아무대답도 하지 않 았다. 무거운 머리를 받친 채 돌처럼 굳어 있었다. "다이스케"하고 형이 불렀다. "오늘은 아버님 심부름으로 온것이다. 넌 얼마 전 부터 집에 오지 않았어. 평상시 같으면 아버님이 불러서따지셨겠지만, 오늘은 얼굴도 보기 싫으니까 나 보고 가서 사실여부를 확인하라 하시더구나 만일 네가 변명할 것이 있다면 들어보고, 만약 사실이라면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다. 평생 다이스케는 만나지 않겠다. 어디가서 무엇을 하건 상관하지 않겠으며, 그 대신 앞으로 자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겠으며, 또 부모라고 생각하지 도 말라, 당연한 일이지, 네말을 들어보니 히라오카의 편지내용이 사실아라는데 할 수 없다. 게다가 너는 후회하지도 않고 잘못했다는 말도 할 것 같지 않으니 나도 집으로 돌아가서 아 버님께 잘 말씀드릴 수도 없구나, 아버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알았 니, 아버님 말씀을 ?" "잘 알았습니다"하고 다이스케는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너는 바보다" 하며 형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다이스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인간쓰레기다" 형이 또 말했다. "넌 계속 지나칠 만큼 고집스럽게 벙어리처럼 입을 다 물고 있구나, 그리고 부모형제의 얼구에 먹칠을 했으니 도대체 교육은 무엇때문에 받은거 냐?" 형은 테이블 위의 편지를 들더니 말기 시작했다. 조용히 방안에 두루마리 종이 소리만이 바삭바삭 들렸다. 형은 편지를 원래대로 봉투에 넣고는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럼 가겠다. " 형은 이번에는 보통때와 다름업는 말투로 말했다. 다이스케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나도 다시는 네 얼굴을 보지 않겠다- 하고 형은 내뱉듯이 말한 뒤 현관으로 나갔다. 형이 가버린 뒤 다이스케는 한동안 그대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가도노가 찻잔을 치우러 왔을 때 다이스케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가노노, 나는 잠시 직장을 알아보고 오겠다. " 다이스케는 손수건을 머리에 얹고는 양산도 받치지 않은 채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거리 로 뛰어나갔다. 그는 푹푹 찌는 듯한 거리를 뛰듯이 걸어갔다. 햇볕은 그의 머리 바로 위에 서 쏟아지고 있었다. 마른 먼지가 그의 맨발을 불티처럼 둘러쌌다. 그는 바삭바삭 타들어가 는 기분이 들었다. "타들어간다, 타들어간다"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이이다바시로 와서 전차를 타고 똑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차 안에서 다이스케는 옆사람 에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아, 움직인다. 세상이 움직인다. " 그의 머리는 전차의 속력자 함께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머리가 불같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계속 한타절 타고 가면 태워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새빨간 우체통이 눈에 띄었다. 그러자 그것이 머리속으로 들어와 마찬가지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양산을 락는 가게 간판에 빨간 양산 네 개가 겹쳐진 채 높이 매달려 있었다. 양산 색이 또 다이스케의 머리로 뛰어들어와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모퉁이에서 딸간색 의 커다란 고무풍선을 팔고 있었다. 전차가 급히 모퉁이를 돌 때 고무풍선이 뒤쫓아와서 그의 머리에 달라붙었다. 소포우편을 실은 빨간차가 전차와 스치듯 지나갔을 때 또 그 색깔이 그 의 머리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담배 가게의 포렴이 빨갛다. 방매 깃발도 빨갛다. 전주가 빨 갛다. 붉은 페인트칠을 판 간판이 계속 이어졌다. 다이스케의 머리를 중심으로 뺑글뺑글 돌 았다. 다이스케는 머리가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타고 가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