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로마인 이야기 3권 저자 - 역자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출 판 사 :한길사 출판 년도 :1999년 초 록 :제1장 그라쿠스 형제의 시대 전8권중 3권 제2장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기원전 120년부터 기원전 78년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두 사람이 고귀하지도 유복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려다가 잇따라 죽은 해로부터 10년 뒤, 미천한 가문 출신의 한 사나이 가 로마의 중앙 정계에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였다. 출생지도 로마가 아니었다. 로마와 나폴리를 잇는 간선도로에는 해변을 따라 달리는 아피 아 가도와 내륙을 통해 남하하는 라티나 가도가 있는데, 그 길을 절반쯤 내려간 곳에서 가 도를 벗어나 산길을 따라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에 있는 아르피노에서 태어났다. 이곳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된 것은 기원전 188년에 이르러서였다. 마리우스가 태어나기 30년 전의 일이다. 이런 점에서 마리우스는 프랑스 영토가 된 직후의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 난 나폴레옹과 비슷했다. 마리우스는 비록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야심만만한 지방출신의 젊은이답게 군 인의 길을 지망했다. 전쟁터야말로 진정한 실력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보통 로마 시민과는 달리 이름을 두 개밖에 갖지않은 마리우스의 경력도 군단에서 시작되었다. 남성의 경우, 로마 시민은 보통 세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개인 이름(프라이노덴), 일족 이름(노멘), 가문 이름(코그노멘)의 세 개다. 예컨대 티베리우스는 개인 이름이고, 셈프로니우스는 일족 이름, 그라쿠스는 가문 이름, 즉 성이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코르넬리우스 일족에 속하는 스키피오 가 문 출신의 푸블리우스임을 나타내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코르넬리우스 일족에 속하지만 출신은 술라 가문인 루키우스임을 나타낸다. 영어로 읽으면 줄리어스 시저가 되는 인물의 라틴어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어머니가 그를 부를 때는 "가이우 스야, 밥 먹어라" 하고 말했을 것이다. 이 세 개의 이름 뒤에 존칭이랄까 경의를 담은 별호가 붙는 경우도 있었다. 자마 전투에 서 한니발을 격파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 라는 의미에서 '아프리카누스'를 덧붙여,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 다. 그밖에는 아프리카누스의 형에게 주어진 아시아티쿠스, 메텔루스가 얻은 마케도니쿠스 등이 있다. 나중에 폼페이우스는 위대하다는 뜻의 '마그누스'를 마치 성처럼 사용하여, 스스로 도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고 서명할 정도였다. 이 방법이 많이 쓰인 것은 개인 이름이나 일족 이름만으로는 구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 기도 할 것이다. 일족 이름은 '클리엔테스'들도 자주 사용했고, 노예조차도 자유를 얻은 뒤 에는 옛 주인의 일족 이름을 받아서 자기 이름에 붙였다. 덧붙여 말하면, 해방노예의 이름은 옛 주인의 개인 이름과 옛 주인의 일족 이름 및 노예 시절에 쓰던 개인 이름, 이렇게 세 개 의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인 이름도 다양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가이우스, 티베리우스, 그나이우스, 아피우스, 루키우스, 푸블리우스, 마르쿠스 정도가 고작이다. 이래서는 "가이우스야, 밥 먹어라" 하고 부르면 온동네의 '가이우스'들이 모두 모여드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로 상 상적이지 못했던 평민들은 이것 이외의 이름을 생각해내기가 귀찮았는지, 다섯번째 아들부 터는 퀸투스, 섹스투스, 셉티무스, 옥타비우스, 데키우스, 즉 오남, 육남, 칠남, 팔남, 십남이 라고 불렀다. 물론 이것도 얼마 뒤에는 애초의 의미를 초월하여 독립된 개인 이름으로 정착 하게 된다. 열번째 아들이 아니더라도 데키우스라고 이름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로마인들은 여자 이름에 대해서는 그보다 훨씬 무신경한 경향이 있었다. 원래 여자한테는 개인 이름조차 없었다. 일족 이름의 어미를 변화시킨 것이 그녀들의 이름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는 코르넬리우스 일족에 속하는 스키피오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코르넬리아, 코르넬리아의 어머니이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내는 아이밀리우스 일족 출신이기 때 문에 아이밀리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는 아우렐리우스 일족 출신이기 때문에 아우 렐리아, 하는 식이다. 일족에 여자가 몇 명 있든지 간에, 모두 이런 식으로 같은 이름을 붙 였다. 성은 남편의 성을 따랐다. 이런 로마에서 마리우스를 비롯한 몇몇 시민이 두 개의 이름밖에 갖지 않은 이유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가이우스가 개인 이름이고 마리우스가 가문 이름이라면, 빠진 것은 일족 이름(노멘)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평민 출신이었던 것은 그 자신의 말로 미루어보아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라쿠스 형제에 뒤이어 로마 역사상 주요 인물이 된 마리우스는 '클리엔테스 관계' 밖에 있었던 평민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클리엔테스 관계'로 대표되는 연줄이 없 는 처지에서 능력을 발휘할 곳으로 전쟁터를 선택한 것은 당연했으리라. 그리고 이름이 두 개밖에 없는 이 지방 출신자가 처음으로 주목을 받은 것도 에스파냐 누만티아의 전쟁터에서 였다. 에스파냐 원주민 반란에 애를 먹고 있던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당대 최고의 장군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누만티아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파견했다. 그때 총사령관 막사에 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한 사람이 물었다. "각하에 뒤이어 로마군을 이끌어갈 장군은 누가 될까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바로 옆자리에 있는 젊은 장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사람일 거요."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그해 나이 23세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기원전 132년, 그는 스키피 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따라 로마로 개선했다. 그후 13년 동안 마리우스의 이름은 소문에도 오르내리지 않았다. 아마 각지의 군단을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었으리라. 기원전 119년, 그는 호민관에 취임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살해된 지 2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평민의 대변자로 주목받게 된 마리우스지만, 호민관 시절에는 지위와 권력 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38세인 그에게는 호민관 직책도 원로원 입장권을 얻기 위 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호민관 임기를 평범하게 마친 뒤 안찰관(아이딜리스)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로마 정계에서도 하위직인 안찰관에 낙선해서는 정계에서의 장래가 불안하다. 교양이 없는 마리 우스였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4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결혼했다. 신부는 율리우스 일족에 속하는 카이사르 가문의 여자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에 해당한다. 왕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카이사르 가문은 경제적 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류 집안이었기 때문에, 이 혼인으로 마리우스의 처지가 달라졌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2년 뒤인 기원전 115년에는 법무관(프라이토르)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카이사르 가 문과 인연을 맺은 것이 두 개의 이름밖에 갖지 않은 마리우스에게 다소나마 유리하게 작용 한 덕택이리라. 그 이듬해에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 에스파냐 총독에 취임했다. 하지 만 법무관 시절에도 총독 시절에도 호민관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저 그런 업적밖에 남기지 못했다. 그런 마리우스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가 5년 뒤에 다시 찾아왔다. 이른바 '유구르 타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48세가 된 마리우스는 로마군 총사령관 메텔루스의 부장으로 아프리카에 파견되었다. 누미디아 문제로 원로원이 골머리를 앓게 된 것은 결정적인 군사개입을 결의한 기원전 109 년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니발에 대해 공동투쟁을 펼 공으로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었던 마시니사왕은 기원전 149년에 89세로 세상을 떠나고, 누미디아 왕국은 그의 세아들이 물려받았다. 하지만 왕권을 삼분한 것은 아니었다. 마시니사의 부탁으로 유언 집 행인이 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왕위는 맏아들인 미킵사에게, 나머지 대권은 둘째아 들 그루사와 막내아들 마스타나발에게 물려주었다. 로마와의 관계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 속되었다. 로마와의 긴밀한 관계 덕분에, 또한 아프리카의 강대국 카르타고가 멸망한 덕분 에, 누미디아 왕국은 동쪽으로는 이집트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마우레타니아에 이르 는 북아프리카 제일의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마스타나발의 아들 가운데 유구르타라는 이름의 왕자가 있었다. 그는 영리한 젊은이로 성 장했다. 이 유구르타를 백부인 미킵사 왕은 에스파냐의 누만티아에 파견하여, 스키피오 아이 밀리아누스의 지휘로 누만티아 공략전에 착수한 로마군에 종군시켰다. 동맹국 누미디아는 로마군에 병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누미디아 왕국은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상부상조는 이 관계의 철 칙이었다. 젊은 왕자는 에스파냐 전선에서 눈부시게 활약하여,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일부러 미킵사 왕에게 칭찬과 감사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누미디아 왕국이 존속하려면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미킵사 왕은 누만티아 공략을 끝내 고 귀국한 유구르타를 양자로 삼았다. 그에게는 이미 친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둘 다 아직 어렸다. 그로부터 14년 뒤, 세 형제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미킵사마저 세상을 떠나자 문제가 일어났다. 게다가 누미디아 왕국의 파트로네스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자식도 남기지 않고 11년 전에 사망했다. 또한 혈 통으로 보아도 누미디아 왕국의 파트로네스를 계승할 자격이 있었던 가이우스 그라쿠스도 3 년 전에 죽어버렸다. 로마 원로원을 보증인으로 한 미킵사의 유언은 친아들 둘과 양자인 유구르타가 누미디아 의 왕권을 삼분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149년에 마시니사가 죽었을 때는 기능을 발휘했던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 즉 로마와 누미디아를 잇는 '파이프'가 기원전 118년에는 사라져 있었다. '클리엔테스 관계'는 일종의 '로비'이기도 했다. 파트로네스는 클리엔테스의 뜻을 받아들 여,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클리엔테스의 이익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클리엔 테스에게 중앙 정계의 정보나 동향을 전하고, 어떻게 하면 뜻을 이룰 수 있는지, 또는 지금 상태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게 좋다는 따위의 충고나 조언을 한다. 이 '파이프'가 없어져버 린 뒤 로마와 누미디아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도 당연했다. 미킵사가 죽은 지 1년도 지나기 전에, 왕권 분할에 불만을 품은 미킵사의 친아들 두 명과 유구르타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이들 사이의 권력 투쟁은 곧 내전으로 변했다. 하지만 칼 을 맞대자마자 승부는 금방 판가름나고 말았다. 이긴 쪽은 유구르타였다. 미킵사의 친아들 가운데 하나는 전사하고, 궁지에 몰린 또 다른 아들 아데르발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곤경을 호소했다. 난처해진 것은 로마 원로원이다. 누미디아 왕국은 어엿한 독립국이고, 로마는 동맹국의 내 정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와 동맹국의 관계를 부드럽 게 해주는 윤활유이기도 했던 '클리엔테스 관계'가 누미디아와의 사이에서는 없어져 있었다. 중재 역할을 맡지 않을 수 없게 된 원로원은 두 후계자가 누미디아 왕국 전체를 양분하라 고 제안했다. 서부는 아데르발이, 동부는 유구르타가 통치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상태는 5년도 지속되지 않았다. 군사력에 자신을 갖고 있던 유구르타가 아데르발의 영 토로 쳐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데르발은 당장 궁지에 몰려 전사했다. 아데르발 쪽에서 싸운 사람들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들 중에는 장사 때문에 누미디아에 주재하고 있던 이탈리 아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시민들은 흥분했다. 내정 불간섭 방침을 고수할 작정이었던 원로원도 이번만은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기원전 112년, 로마는 유구르타에게 전쟁을 선포 했다. 로마가 뜻밖에도 강경하게 나오자, 이에 놀란 유구르타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이것은 어 디까지나 국내 문제이고 이탈리아인이 살해된 것은 불의의 사고였다고 해명하려했지만, 사 절은 로마 성벽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클리엔테스 관계라는 '파이프'를 잃어버린 것이 여 기서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111년,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로마군을 맞이한 것은 유구르타가 이끄는 군대가 아니라, 유구르타가 보낸 항복 사절이었다. 유구르타가 원하는 것은 로마가 자신을 누미디아 왕으로 인정해주는 것 뿐이었다. 이 조건만 수용되면 로마의 패권하에서 동맹관계 를 지속하고 싶다고 제의했다. 군단을 이끌고 있던 집정관 베스티아는 유구르타의 왕위를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기정 사실을 인정하는 데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유구르타의 제의를 수 락했다. 강화 조건이었던 유구르타의 로마 진영 방문도 실현되었다. 조인을 끝낸 집정관은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에서 철수했다. 그런데 여기서 유구르타가 이탈리아인 살해에 이어 두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로마에 체재하 고 있던 누미디아 왕족 가운데 그의 사촌뻘 되는 인물을 암살한 것이다. 암살은 성공했지 만 그 하수인이 붙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것을 로마인은 가장 싫어한다. 유구르타를 제압해야 한다는 여론이 다시 일어났다. 이듬해인 기원전 110년, 로마는 다시 아프리카에 군단을 파병했다. 로마군을 맞이한 것은 이번에는 무장한 누미디아 병사들이었다. 미처 전투 준비도 갖추기 전에 허를 찔린 로마군은 당장 포위되어, 모두 전사하거나 유구르타가 내놓은 조건-무장을 해제하고 열흘 안에 아프리카를 떠나라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강화를 맺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후자를 택한 로마군은 굴욕적인 상태로 로마에 돌아갔다. 여기에 또다시 로마 시민들이 흥분했다. 로마인은 패배한 뒤에는 강화를 맺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유구르타는 무기를 빼앗고 쫓아냄으로써 로마인을 모욕하는 실 수까지 저질러버렸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게 된 로마는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유구르타와 싸우기로 결의한 다. 아프리카에 파병할 로마군의 총지휘는 기원전 109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퀸투스 카이 킬리우스 메텔루스가 맡기로 결정되었다. 메텔루스 가문은 그 무렵 원로원에서는 최고의 권 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퀸투스 자신도 귀족다운 품위가 넘치고, 장군으로서의 재능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청렴결백한 신사였다. 원로원은 최고의 카드를 뽑은 것이다. 그리고 총 사령관 메텔루스를 보좌하는 부장으로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사람들 가 운데 실력이 뛰어난 인물로 인정받고 있던 48세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임명되었다. 기원전 109년 여름, 카르타고의 옛터에서 서쪽을 향해 출발한 메텔루스 군대와 누미디아 영토 안에서 맞아 싸우는 유구르타 군대 사이에 첫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메텔루스가 보병대를 지휘하고, 부장인 마리우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싸운 첫번째 전투는 로마군의 숭리로 끝났다. 유구르타는 패퇴하는 누미디아 병사들 틈에 섞여 무사히 달아났다. 하지만 유구르타에게는 유리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지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로마군에 종군했을 당시의 체험으로, 로마군의 전투 방식을 비롯한 모든 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 이점을 살려 게릴 라 전법을 구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강화할 뜻을 언뜻 비침으로써 적의 기세를 슬쩍 피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술책만은 메텔루스가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효과가 없 었다. 메텔루스는 달아난 유구르타를 끝까지 추적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주변의 여러 부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패퇴한 유구르타가 군대를 재편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작전을 폈다. 이 작전을 좀더 빨리 실현하고 게릴라를 경계하기 위해, 메텔루스는 군대를 양분하여 제1군 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제2군은 마리우스에게 맡겼다. 이 전략은 일단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108년의 첫 회전에서 유구르타는 또 다시 패배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좀처럼 적에게 결정타를 가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었다. 메텔루스는 전력 감소를 피하기 위해, 외교전을 통해서 주변 부족이 유구르타에게 등을 돌리게 하려고 애썼지만, 유구르타의 인기가 워낙 높은 탓에 그의 이런 생각이 하루아침에 실현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리우스는 상관인 메텔루스에게 전략 변경을 요구했지만, 메텔루스는 듣지 않았다. 총지 휘권을 장악하지 않는 한 병사들도 자기도 아프리카 땅에서 꼼짝 못하게 될거라고 판단한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을 높이 사서 마리우스를 부장으로 임명했지만, 출신으로 보아 자기 와 같은 반열에 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메텔루스는 당연히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집정관 에 출마하기 위해 제대를 청한 마리우스에게 허가를 내주기를 꺼렸다. 허가를 내주기는커녕, 옆에 있던 20세의 아들을 바라보면서 마리우스를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집정관이 되고 싶다는 얘긴데, 설령 자네가 집정관이 될 수 있다 해도 저애와 비슷한 시 기에 될 테니까, 아직 시간은 충분하지 않은가." 평범한 시민도 법무관 정도는 될 수 있지만, 집정관까지는 어려웠던 것이 당시 로마의 실 정이었다. 그래도 선거일을 열흘 앞두고 제대 허가를 내주기는 했다. 마리우스는 로마군 진 영에서 멀리 떨어진 우티카까지 꼬박 이틀 동안 말을 채찍질하여 달렸고, 우티카에서 배를 탄 뒤 나흘 만에 로마에 도착하여, 민회가 개회되는 시간에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로마에서 열린 민회에서 마리우스는 집정관 출마 의지를 분명히 했을 뿐 아니라 공약도 분명히 밝혔다. 유구르타를 생포하든 죽이든, 유구르타 전쟁을 조기에 종결짓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기원전 108년 말의 민회를 뒤덮고 있던 분위기는 평민 마리우스에게 유리했다. 초반에는 고전하는 것이 로마군의 실태였지만, 그 점을 십분 고려하더라도 지난 몇 년 동안 로마군의 전적은 결코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에서는 북쪽에서 침입한 트라키아족에게 집정관 카토의 군단이 패배했다. 유럽 북쪽에서 쳐들어온 야만족에게는 집정관 카르보네스의 군대가 서전에서 패배했다. 또한 아 프리카에서는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이 유구르타와 싸운 뒤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겨우 목 숨을 건진 형편이다. 지휘관은 모두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집정관들이다. 병역자격의 하한선 을 내리면서까지 병사를 징집한 끝에 잇따라 패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병역 해당자인 로마 시민들은 절망하고 있었다. 민회는 '신참자'인 마리우스을 기원전 107년의 집정관으로 선출했뿐만 아니라, 그가 담당 할 전선을 아프리카로 결정했다. 집정관의 담당전선은 원로원이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 문에, 이것은 민회가 원로원을 이중으로 불신임한 셈이 된다. 그런데도 원로원 쪽에서는 민 회의 솜씨를 구경한다고나 할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50세에 집정관으로 선임된 마리우스는 지금까지 평생을 군단에서 보낸 만큼, 로마 군단의 실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타개해야 할 필요성을 절 감하고 있었다. 집정관에 당선된 뒤, 그는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로마에는 선거 연설을 하는 관습은 없 었지만, 당선된 뒤에 시민들 앞에서 시정 방침을 밝히는 관습은 있었다. 지방 출신에다 평민 출신인 집정관은 포로 로마노에 세워진 연단 위에서 시민들에게 말했다. "시민 여러분, 집정관들이 대부분 당선되기 전에는 겸손한 공복임을 과시해 놓고, 일단 집 정관으로 선출되면 당장 오만하고 게으른 자로 표변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 지만 나는 반대로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집정관이나 법무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느냐 않느냐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도 여러분에 의해 집정관으로 선출된 이상 그 책임을 완수하기가 얼 마나 어려운지는 절감하고 있습니다. 집정관이란 로마 최고의 관직인 동시에 군단의 최고 책임자이기도 합니다. 전투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국가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기를 잊어서 는 안되고, 병사 징집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병사는 시민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병사들이 모두 자진해서 병역에 종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됩니 다. 게다가 반대파가 있는 가운데에서 일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책무를 수행하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나와 출신이 다른 분들은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조상들을 가졌고, 무슨일이든 무조건 찬 성해 주는 친척들을 가졌고, 수많은 클리엔테스들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후원자들은 그들 이 실패하는 경우에도 그들을 지켜줍니다. 반면에 내 경우, 나를 지켜줄 것은 나 자신의 능력과 성실함뿐입니다. 사람이 일을 하는 데에는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책무를 완수하고 싶어하는 자에게는, 고생과 위험에 익숙한 자에게는, 위대한 조상의 명성도, 친척이나 클리엔테스들의 세력도 쓸데없는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유구르타를 제압하기 위한 싸움에 여러분을 데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에 대 해 귀족들은 비판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습 니까? 전투에 관한 그들의 지식은 글로 읽거나 남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 지식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직접 전투에 참가한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전술에 관해서도 그들 은 이론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만, 나는 야전에서 배운 실무로서 알고 있습니다.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 에, 공동체에 보다 더 공헌한 사람이 보다 더 고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는 것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고명한 조상들의 초상도 없는 내가 로마 지도층에 들어간 것은 바로 어제 일입니다. 하지 만 상속받은 명성을 더럽히기보다는 스스로 명성을 쌓아올리는 편이 더 나은 삶이라고는 생 각지 않습니까. 그들의 지체 높은 혈통을 보여주는 눈부신 조상들의 초상에 대해, 나는 나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수많은 전투의 상처 자국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명성이나 지위는 고 생과 위험을 견디면서 나 스스로 획득한 것임을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어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배워야 할 필요성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다 해도, 사나이의 역량을 키우는 데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 다른 것을 배웠습니다. 국가에는 훨씬 도움이 되는 것, 즉 적을 무찌르고,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오명만 아니라면 어떠한 평판도 두려워하지 않고, 더위와 추위와 한뎃잠도 견디고, 고생과 굶주림을 참아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칠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총사령관으로서 명령하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시민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병사가 된 여러분은 모든 고난을 나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로마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행군할 때에도, 전투에 임해서도, 나는 여러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휘관인 동 시에, 여러분과 똑같이 위험을 나누어 갖는 전우로서. 신들의 가호에 힘입어, 승리도 명예도 찬사도 모두 우리 것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치고는 꽤 능란한 웅변술을 구사하는구나 생각하겠지만, 역사 가인 살루스티우스가 <유구르타 전기>에서 소개한 마리우스의 연설을 중복되는 부분은 빼 고 소개했기 때문이다. <유구르타 전기>에 실려 있는 마리우스의 연설에서는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 한 비판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고 있어서, 설득력은 있지만 품격이 떨어진다. 하지만 어느 시 대에나 대중은 권력자나 부유층에 대한 비판에는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법이다. 또한 이때 마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병사들을 모집하려 하고 있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63년에 태어났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157년에 태어났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54년에 태어났다. 세 사람 다 동시대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동시대인이라면, 세 사람 다 그 시대의 로 마가 직면해 있던 벽에 부딪쳤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화정 로마의 중심인 귀족계급에서 태어나 자란 그라쿠스 형제는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로마가 패권자가 되었기 때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여러 문제를 넓은 시야에서, 다시 말하면 정치적인 관점에서 추출해낼 수 있었다. 반면에 공화정 로마의 주변부에서 태어나 자란 마리우스는 당면 문제를 정치적으로 생각 하고 대책을 세우는 교육도 받지 못했고 그럴 만한 교양도 없었지만, 직업군인으로서는 뛰 어난 인물이었다. 로마 군단이 양적, 질적으로 수준이 저하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그 자 신의 체험만 가지고도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세 사람 다 실업자 대책에 관여한 셈이 된다. 그라쿠스 형제는 의도적 으로, 마리우스는 '비'의도적으로. 그리고 그라쿠스 형제의 구상은 그들의 죽음으로 중단되 었 지만, 마리우스는 어이없을 만큼 간단하게 그것을 실현해버렸다. 집정관에게는 정규 군단 편성권이 주어진다. 제2권 <한니발 전쟁>에서도 말했듯이, 우선 35개 선거구가 추첨을 해서 그해에 병사를 제공할 선거구를 결정한다. 추첨으로 병역을 담 당하기로 결정된 선거구의 병역 해당자 가운데 17세부터 45세까지의 현역(유니오레스)으로 군단이 편성된다.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는 자라는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무산자)에게는 병역이 면제되어 있었다. 병역이 직접세와 동일시되고 있던 시대였다. 병역 면제는 곧 세금 면제였다. 그런데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직후인 기원전 241년에 이루어진 개정에서는 1만 2천 500아세 이하의 재산밖에 갖지 않은 사람은 병역을 면제받았지만, 그후 100년 동안 군사력 을 증강해야 할 필요에 쫓길 때마다 '면제 하한선'이 점점 내려갔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6천 400아세로 내려갔고, 얼마 후에 다시 4천 500아세로 내려갔다가, 결국 에는 1천 500아세까지 내려가 버렸다. 이는 그때까지 무산자 계급이라는 이유로 병역을 면 제받고 있던 시민들까지도 전쟁터에 끌려나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야전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성공한 마리우스는 이것이야말로 로마 군단의 질적 양적 수 준이 떨어진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프롤레타리아라고 일괄하여 말해도, 그들 대다수는 실업 자가 아니다. 가장이 병역에 종사하는 동안 가족이 먹고 살 만한 재산을 갖지 않은 사람일 뿐이니까, 직업은 가지고 있다. 그 일자리를 팽개치고 병역에 종사한다 해도, 재산이 어느 정도 있으면 그동안 가족의 생활이 보장되지만, 그 재산의 하한선이 계속 내려간다면 전쟁 터에 나가는 병사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또한 병역 자격자의 재산 하한선이 내려갔다고 해서 도시로 흘러드는 프롤레타리아의 수 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그에 따른 사회 불안이 해소된 것도 아니다. 직업조차 없는 그들 은 문자 그대로 무산자였기 때문이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의 권리인 정규 군단 편성을 기존의 징병제가 아니라 지원병 제도로 바 꾸었다. 이에 따라 로마의 병역은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선택에 따른 직업으로 바뀌었다. 마 리우스의 호소에 응해 지원한 로마 시민들 대다수는 농지를 잃거나 하여 실업자가 된 사람 들이다. 시민병이 병역에 종사하는 동안 지급되고 있던 경비는 지원병들의 급료가 되었다. 하지만 시민병에게 주는 경비와 지원병에게 수는 급료는 액수에 전혀 차이가 없었다. 급 료가 되었다고 해서 액수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도시에 거주하는 실업자 로서, 그들은 싼 값에 밀을 공급받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라도 어엿한 시민이 되는 길 을 택한 것이다. 실업자 문제가 복지를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실업이 단순히 생활수단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이유까지 잃어버리는 것 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라쿠스 형제를 다룰 때 이미 언급했다. 그라쿠스 형제는 실업자들 에게 농지를 제공하거나 그들을 이주민으로 한 식민시를 건설하거나 공공사업을 진흥함으로 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들 형제가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마 리우스는 이 실업자들을 군대로 흡수했다. 그러나 로마 군대는 마리우스의 지원병 제도에 따라 직업군인 집단이 되었다 해도, 로마 의 다른 사회 계층에서 유리된 존재는 아니었다. 첫번째 이유는 지원병이 실업자만은 아니 었기 때문이다. 군인도 직업이니까, 상인이나 농민보다 군인을 직업으로 택하고자 하는 사람 들도 지원했다. 두번째 이유는 공화정 로마에서 정치적 출세를 지망하는 자들은 최소한 10년의 군단 경험 을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사견이지만, 고대 로마에서도 특히 공화정 시대의 로마 지도자들이 '잔챙이'가 아니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화 정 시대의 로마 지도자들은,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 겸 변호사 겸 문필가인 키 케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정계와 관계 및 군대 경험자였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공화정 로마의 근간을 건드리는 중대한 개혁이었다. 그런데도 이 렇다 할 반대 없이 순조롭게 실현되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첫째는, 싸움만 했다 하면 패하거나 애를 먹기 일쑤인 당시의 로마군과 그 군대를 이끄는 원로원 계급의 지휘 능력을 로마 시민들이 불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원로원 내부 에서도 이 현상을 어떻게든 타파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둘째, 마리우스의 개혁은 농지개혁을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유층의 반발을 사지 않았 다는 점이다. 셋째, 병역에 끌려나갈 필요가 없어진 하층민들과 가슴을 펴고 당당히 살 수 있는 직업을 되찾은 '전 실업자'들한테 대단한 호평과 환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네번째 이유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체제 밖 개혁'이었던 반면에 마리우스의 개혁은 '체제 내 개혁'이었다는 점이다. 마리우스는 호민관 시절에 개혁을 외치지 않고, 집정관으 로 서 개혁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제 내 개혁이라고 해서 안심했던 원로원은 어리석었다. 마리우스는 이 개혁의 실행자가 됨으로써, 비천한 출신이라 그때까지 갖지 못했던 '클리엔테스'를 갖게 되었기 때 문이다. 우선 그의 휘하에 지원한 프롤레타리아들이 그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그리고 마리 우스의 개혁으로 전쟁터에 나갈 필요가 없어진 하층민들도 그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그라 쿠스 형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중파'라고 불러도 좋은 당파가 생겨난 것이다. 이것 은 본디 비정치적인 마리우스를 정당의 영수로 밀어올리는 얄궂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 체험을 중시하는 마리우스의 성향을 반영하여 그의 군제 개혁이 처음부터 완성된 것은 아 니었다. 그 때문에 유구르타 문제의 조기 해결을 약속하고 집정관에 당선된 것치고는 아프 리카의 전황이 단번에 달라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민회에서 그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마리우스가 얻은 '클리엔테 스'들이 '파트로네스'가 된 마리우스를 계속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과감한 전법이 장기인 마리우스를 총사령관으로 맞이함으로써 아프리카 전선이 활기를 띤 것은 확실하다. 프롤레타리아 출신 지원병들도 열심히 싸웠다. 게릴라 전 법을 구사하는 유구르타의 거점들을 차례로 공략한 로마군은 그해 가을이 끝날 무렵에는 누 미디아의 동쪽 절반을 평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구르타는 여전히 건재했다.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끝나고 있는 것은 마리우 스의 집정관 임기였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절대 지휘권'(임페 리움)을 계속 부여해 달라고 로마 민회에 요청했다. 민회는 그것을 가결했다. 그래서 이듬해 인 기원전 106년에도 마리우스는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 프리카 전선에 파견된 병사들이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도 효력을 발휘했다. 지원병들 은 총사령관 마리우스가 자기들과 똑같은 식사를 하고, 진지를 만드는 작업에도 함께 참여 하고,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적과 맞선다고 써 보냈다. 평민 출신 집정관의 평판 은 실제 전과보다 먼저 높아졌다. 그러나 유구르타 전쟁을 끝내려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이 차 츰 분명 해지고 있었다. 마리우스의 과감한 전법으로 유구르타의 기지는 대부분 로마의 수 중에 들어왔지만, 유구르타의 최대 후원자인 마우레타니아 왕과 유구르타의 사이를 끊지 않 으면 유구르타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군사적 재능보다 외 교적 재능이 필요했다. 마리우스에게는 그 재능이 부족했지만, 그런 마리우스 휘하에 그 방 면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 새로 가담했다. 회계감사관으로 로마에서 부임한 루키우스 코르넬 리우스 술라가 바로 그 인물이었다. 로마 역사상 또 하나의 주인공이 등장한 것이다. 그해에 술라의 나이는 32세였다. 군단에 배속된 회계감사관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군단의 총무 겸 경리라 해도 좋을 만큼, 병사를 지휘하는 것 외의 모든 일을 도맡는다. 공화정 로마의 정계와 관계에서는 등용문으 로 여겨지고 있는 만큼, 민회에서 선출되는 회계감사관 중에는 젊은이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민회에서 뽑힌 술라가 뒤늦게 임지에 도착한 것은 그동안 '로마 연합' 동맹시들을 순 방하며 병력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연합'에서 모집한 기병을 데리고 회계감사관 술라가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유구르타 전쟁이 분기점에 접어들고 있던 시기였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는 달리, 스키피오 가문이 속해 있는 명문 귀족인 코르넬리우스 일족에 속해 있었다. 다만 조상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없었기 때 문에, 귀족이긴 해도 별로 두드러지지 않은 집안 출신이었다. 평민 귀족인 그라쿠스 가문과 는 그 점에서 전혀 다르다. 그런 탓도 있어서 술라의 집은 가난했다. 로마에서는 단독주택을 '도무스'라 부르고, 임 대 아파트는 '인술라'라고 불렀는데, 술라는 귀족이면서도 인술라에 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를 일찍 여읜 모양이다. 완벽한 모국어(라틴어)를 사용하고 그리스어에도 능통했지만, 이런 학 업도 창녀들이 보태주는 돈으로 이루었다고 한다. 술라라면 확실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 다. 고학이라는 말만큼 술라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 독재자 시절에 제작된 근엄한 표정의 초상이 너무 유명해진 탓에, 술라라고 하면 위압적 인 인상을 받게 되지만, 실제의 술라는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호방 한 성격으로, 일개 졸병한테도 농담을 던져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병사들의 요구를 피붙이 처럼 정성껏 들어주기 때문에 평판이 좋았다. 상관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키면서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고, 할말은 거리낌없이 했다. 키가 훤칠하고, 훗날처럼 곰보가 되지 않았던 시절의 그는 살결이 하얀 미남이었고, 행동거지에는 늘 품위가 있었다. 이런 술라에게는 다 른 건 몰라도 열등감에 시달리는 점만은 전혀 없었다. 야심가이기는 했지만, 비열한 야심가 는 아니었다. 32세의 회계감사관은 부임하자마자 총사령관 마리우스뿐만 아니라 병사들한테도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총무나 경리 업무를 처리하는 외에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전선에 참가 할 뿐 아니라, 부족한 실전 경험을 고려하면 과하다 싶을 만큼 홀륭한 전과를 거두곤 했다. 그리고 유구르타와 연합하여 싸우다가 로마군에 참패한 마우레타니아의 보쿠스 왕이 은밀히 강화 의사를 타진해 왔을 때, 거기에 재빨리 반응한 것도 술라였다. 총사령관 마리우스는 외교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보쿠스왕과 교섭하는 일은 술 라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유구르타의 딸을 왕비로 삼은 보쿠스 왕의 제의는 강화를 위한 교 섭이라는 분명한 형태가 아니라, "마우레타니아 백성과 로마 시민의 상호 이익을 위한 대화 에 총사령관이 신뢰하는 인물 두 사람을 보내주기 바란다"는 식으로 에둘러 말한 것이었다. 동료와 함께 보쿠스 왕의 진영에 도착한 술라는 왕을 만나서 강화의 이점을 설명했지만, 보쿠스 왕의 태도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첫번째 회담은 결렬로 끝났다. 태도를 정하지 못하 고 있는 왕을 술라도 굳이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후 유구르타와 보쿠스 연합군은 또다시 로 마군에 패했다. 그리고 또다시 보쿠스 왕은 마리우스에게 교섭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번에는 술라 혼자서 유구르타의 병사들이 배회하는 곳을 통과하는 위험한 역할을 떠맡 았다. 보쿠스 왕을 만난 술라는 둘만의 단독 회담을 요구했다. 통역만 데리고 방에 틀어박힌 두 사람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때 술라는 왕에게, 유구르타를 간계로 붙잡아 로 마군에 넘겨달라는 조건을 제시한 것 같다. 이튿날 보쿠스 왕은 유구르타에게 사람을 보내 잔치에 초대했다. 초대에 응해 도착한 유구르타는 즉석에서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 술 라에게 넘겨졌다. 오랫동안 로마를 괴롭힌 유구르타 문제도 마침내 해결되었다. 로마인들은 모든 것이 마리 우스의 공적이라고 믿고, 그가 아직 아프리카에 있는데도 이듬해인 기원전 104년의 집정관 으로 그를 선출했다. 알프스 북쪽에서 야만족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유구르타는 기원전 104년 1월에 로마에서 열린 마리우스 개선식을 쇠사슬에 묶인 몸으로 장식한 뒤, 포로 로마노 근처의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누미디아 왕국은 전과 마찬가지로 로 마의 패권하에 독립국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원로원은 유구르타의 매제를 왕위에 앉혔다. 로 마는 누미디아를 속주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유구르타는 잘못된 방식을 강행한 바람 에 왕위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역사가 살루스티우스는 정열을 담은 <유구르타 전기>를 저술했지만, 유구르타 전쟁의 역 사적 가치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낳은 것뿐이다. 카르타고의 옛터는 이미 속주가 되어 있었고, 누미디아 왕국은 계속 동맹국으로 남고 마우레타니아도 새로 동맹국이 되었기 때문 에, 로마의 패권은 지중해 서부 전역에 미치게 되었다. 유그르타 전쟁은 로마 역사를 움직인 또 하나의 인물인 술라의 화려한 데뷔 무대가 되었 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명문 귀족 출신이기는 했으나, 기존의 권력자 계급에는 속 해 있지 않았다. 그는 마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나중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그 당 시 권력과 부를 장악하고 있던 원로원 계급의 주변부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술라와 카이사 르의 집안보다 훨씬 역사가 짧아서 평민 귀족이라고 불린 가문에서 태어난 그라쿠스 형제가 오히려 기존 권력 계급의 중심부 출신이었다. 비록 명문 귀족이라 해도 '신참자'가 차례로 등장함으로써 로마의 혼미도 점점 '혁명의 1 세기'의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인간은 먹고 살 수 없게 되면 먹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땅으로 이동하는 법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변치 않는 현상이다. 이런 종류의 민족 이동을 고대에는 야만족의 침입이라고 불렀고, 현대에는 난민 발생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도 마찬가지여서, 로마가 존 속하는 동안은 한시도 이같은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생존이 어려워진 사람들의 이동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든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든 별차이 가 없다. 아무리 평화적으로 이동해 온다 해도 기존 사회를 뒤흔들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 에, 민족 이동은 다소간에 폭력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로마인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로마사 자체와 거의 겹 친다고 말할 수 있다. 기원전 390년에 한때나마 켈트족(갈리아인)에게 수도 로마를 점령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가진 로마인은, 야만족이 침입해 오면 우선 무력으로 물리치는 것부터 생각하고 그대로 실 행했다. 하지만 여유가 있는 시대, 앞날을 생각하여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시대에는 침입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야만족이 사는 곳으로 쳐들어가서 그들을 정복하는 방식을 택했다. 정 복한 뒤에는 도로망을 정비하고 식민시를 세우는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는 방식으로 로 마화를 추진하여, 야만족이 자기네 땅에서도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갈리아인이 살고 있던 루비콘 강 이북의 이탈리아 북부 일대는 이렇게 로마화되었다. 역 시 갈리아인의 거주지역이었던 프로방스(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지방)도 같은 방식으로 로마 화되었다. 로마의 속주로 변한 것이다. 프로방스라는 이름도 라틴어로 속주를 뜻하는 프로빈 키아를 프랑스식으로 발음한 데 불과하다. 로마의 이같은 방식은 오늘날에는 침략노선이자 제국주의로 단정되어 평판이 나쁘다. 오 늘날에는 같은 문제를 인도주의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실정이고,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구르타 전쟁을 어렵사리 끝낸 기원전 104년 당시에 로마인들은 국내에도 여러 가지 문 제를 안고 있어서, 앞에서 언급한 의미의 '여유'가 없었다. 로마 민회가 출마도 하지 않은 마 리우스를 집정관에 다시 선출한 것은 북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야만족을 마리우스라면 격퇴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북쪽 오랑캐들이 오늘날의 덴마크와 독일에서 남하하기 시작한 이후 8년 동안,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로마군은 다섯 번에 걸쳐 파병되었지만, 다섯 번 모두 패배했다. 처음에는 속주를 방어하기 위한 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침입자의 동정 을 살피는 정도였지만, 로마군이 패배를 거듭함에 따라 야만족에 합류하는 갈리아인이 늘어 나자, 로마인들은 점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기원전 105년에는 정규 규모의 군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 군단도 패배를 면치 못하는 바람에 남프랑스는 야만족의 침입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알프스라는 천연의 방벽이 지키고 있는 이탈리아마저 위험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 역시 당시 로마 군단의 질적 저하와 양적 감소 및 지휘관급의 인재 부족을 보여주는 사례에 불과했지만, 마리우스에게는 '신참자'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 다. 그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 기회를 활용하는 데 필요한 준비 기간을 신들이 마리우스 에게 주었다는 점이다. 남하를 계속하던 야만족이 웬일인지 그해에는 남하를 멈추고, 서쪽의 에스파냐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에 군제 개혁을 단행하여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꾸었 다. 하지만 유구르타 전쟁이라는 현안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개혁은 할 수 없었 다. 그는 기원전 104년의 비교적 평온했던 시기를 이용하여 군제 개혁을 확립하려 했다. 마 리우스는 근본적인 개혁을 실행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때를 만난 집정관이기도 했다. 마리우스 이전의 군제와 마리우스 이후의 군제를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단위는 통칭 '집정관 군단'으로 불린 전략 단위로서, 집정관 한 명이 총지휘를 맡는 규모다.(도표 생 략)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가운데 첫번째는 총사령관이 지휘할 수 있는 군단의 수가 신축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방어를 기본원칙으로 하여 성립된 이전의 군제가 로마의 패 권이 미치는 지중해 전역을 염두에 둔 공격형으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재산 정도에 따라 나뉘어 있던 벨리레스, 하스탈리, 프린키페스, 트리알리의 분 류를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 일정 한도 이상의 재산을 가진 시민만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가 아니라 재산과는 상관없는 지원제로 바뀐 만큼, 분류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개혁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지원병과 '로마 연합' 동맹시에서 참가하는 병사 의 구별을 없앤 점이다. 군단 안에서는 로마 시민권의 유무조차도 소멸되었다. 네 번째 개혁은 마리우스가 바꾸었다기보다는 그동안 조금씩 바뀌고 있던 것을 확인한 데 불과했지만, 장교나 막료들도 전처럼 민회에서 선출하지 않고 총사령관이 임명하도록 명시 한 것이다. 이것도 로마군의 기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다섯 번째 개혁은 지원제로 바뀌어 보병 사이의 구별이 없어진 이상, 그 구별을 나타내고 있던 무기와 장비의 차이도 없애버린 것이다. 로마군단의 보병은 누구나 똑같은 투창과 방 패와 칼을 갖게 되었다. 칼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도입한 양날 단검이다. 접근전에서 이 칼이 유리하다는 것은 지난 1세기 동안 이미 증명되었다. 여섯 번째, 마리우스는 지금까지 재산에 따른 계급을 나타내어 벨리테스 하스탈리 프린키 페스 트리알리로 나뉘어 있던 부대 깃발을 폐지하고, 그 대신 모든 군단이 똑같이 은빛 독 수리를 깃발로 삼도록 결정했다. 독수리가 로마를 상징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일곱 번째, 중무장 보병대가 이렇게 바뀌면 기병대도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로마 군단의 기병은 이제 더 이상 상류층 자제의 '사관학교'가 아니었다. 또한 기사로서 병역에 종사할 자격이 있는 재산의 소유자라는 의미에서 통칭 '기사계급'으로 불린 경제인들도, 군대 경력 을 중요시하는 정계에 진출할 야심이 없는 한 일부러 기병에 지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리 우스 이후의 로마군 기병대는 말을 잘 타는 누미디아나 에스파냐, 갈리아, 그리스 등지의 출 신 병사들로 구성된 집단이 되었다. 끝으로 여덟 번째 개혁은, 전에는 '로마 연합' 동맹시에서 참가한 병사들 중에서 총사령관 의 직속 근위대를 선발하던 것을 이제는 로마 시민병을 포함한 군단 전체에서 선발하기로 한 점이다. 이리하여 문자 그대로 최고사령관을 측근에서 호위하는 근위대의 역할이 명확해 졌다. 이런 것들이 마리우스의 개혁으로 바뀐 로마 군대의 외형적인 변화다.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변화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지원제로 바뀜에 따라 실업자를 흡수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결과 병사를 장기적으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군단 안에서는 재산 정도에 따른 계급이 완전히 없어졌다. 로마 시민과 동맹시 시민의 구별도 거의 사라졌다. 필요에 따라 군단 수를 조정할 수 있게 되었고, 장교에 대한 임명제를 도입함으로써 총사 령관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총사령관을 정점으로 하는 장교와 사병의 관계가 보다 긴밀해졌다. 매사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갖게 마련이다. 좋은 면밖에 없는 제도는 신의 솜씨로도 만 들어낼 수 없다. 따라서 개혁이란, 원래부터 나빴기 때문에 고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좋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빠진 면을 고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로마군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이루어진 마리우스의 개혁에도 얼마 후에는 나쁜 면이 나타나게 된다. 대부 분의 역사가들이 비판하는 로마 군단의 '사병화'가 그것이다. 그들은 비난하기를, 마리우스 의 군제 개혁이야말로 나중에 술라와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같은 인물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혁이 이루어진 당초에는 원로원의 완고한 보수파조차도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 하기는커녕, 마리우스는 기원전 104년부터 매년 계속해서 다섯 차례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마리우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이 개혁의 정치적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 다. 하지만 마리우스가 하지 않았다 해도 다른 누군가가 했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연구 자도 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마리우스 개인의 야심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원전 103년, 새로 태어난 로마 군단은 그 어머니인 마리우스의 인솔로 알프스를 넘어 남프랑스에 들어갔다. 북쪽에서 대거 남하하고 있던 게르만족은 아직 이탈리아로 오고 있지 는 않았다. 하지만 로마는 자신의 세력하에 있는 동맹시 마르세유와 속주인 남프랑스를 지 킬 의무가 있었다. 또한 그대로 방치해 두면, 이미 로마화가 이루어진 남프랑스가 게르만화 할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마리우스도 론 강까지 군대를 출동시켰다. 그런데 이해에도 야만족은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 중서부에 눌러 앉은 채 움직일 기미 를 보이지 않았다. 총사령관 마리우스는 병사들이 할일없이 시간을 보냄으로써 연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운하건설 공사를 시키기로 했다. 한니발 시대부터 수량이 많아서 도강이 어 렵기로 이름난 론 강 어귀에 운하를 파게 한 것이다. 나중에까지 '마리우스 운하'라고 불린 이 운하는 마르세유와 프랑스 내륙 사이의 물자 유통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로마군은 대기 하는 중에도 속주의 '사회간접자본' 정비에 힘쓰고 있었던 셈이다. 이때부터 로마군이 어딘 가에 주둔하고 있을때는 그곳에서 토목공사를 벌이는 관습이 정착되었다. 그해 말, 올해도 무사히 끝날 것 같다고 생각한 마리우스는 잠시 수도 로마로 돌아왔다. 민회는 그를 이듬해인 기원전 102년의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54세의 마리우스는 네 번째로 집정관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야만족이 이동을 시작할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급히 로마를 떠난 마 리우스는 티레니아 해를 따라 이탈리아를 북상하여, 제노바를 통해 론 강변에 세워둔 진영 으로 돌아갔다. 이 시대에는 이미 수도 로마와 동맹시 마르세유, 속주인 남프랑스와 에스파 냐를 잇는 로마 가도, 즉 고속도로망이 완성되어 있었다. 적의 출현을 기다리는 동안 기원전 102년으로 해가 바뀌었다. 이동을 다시 시작한 게르만족은 전투원인 성년 남자의 수만 해도 무려 30만 명에 이르렀 다고 한다. 여자들은 물론 가축까지 데리고, 수레에 잡다한 짐을 잔뜩 실은 민족 대이동이 다. 이만한 숫자의 인구가 유럽에서는 그 어디보다도 먹을 것이 풍부하다고 평판이 나 있는 이탈리아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수가 많으면 전원이 함께 행동하기 어렵다. 그래서 게르만족은 부족별로 나뉘어 세 방향에서 침입하기로 했다. 테우토니족은 남프랑스의 바다를 따라 서쪽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간다. 킴브리족은 알프스를 넘어 북쪽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간다. 티그리니족은 동쪽 방 면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간다. 여기에 대처하는 로마에서는, 마리우스가 서쪽을 맡고, 마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된 카툴루스가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킴브리족을 상대하게 되었다. 동쪽에서 이탈리아로 침입하 려면 판노니아 지방(오늘날의 헝가리 서부와 크로아티아 공화국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좀더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서쪽과 북쪽에서 적 을 맞아 싸우기로 한 것이다. 여름, 기다리고 있던 로마군 앞에 먼저 모습을 나타낸 것은 서쪽에서 이탈리아 침입을 노 리는 테우토니족이었다. 마리우스는 론 강 동쪽 연안에 구축한 진영에서 3만이 채 못되는 병사들과 함께 기다렸다. 테우토니족은 남자만 해도 10만 명이 넘었다. 마리우스는 정면으로 대결하는 작전을 쓰지 않고, 일단 적을 통과시키는 전술을 택했다. 게르만족도 진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로마군을 경멸하여, 공격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진영 앞을 지나 동쪽으로 가는 야만족의 흐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졌다. 야만족은 진영 울타리를 지키고 있는 로마군 병사들에게, 로마에 도착하면 너희가 잘있다고 가족에게 안부를 전해주마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마리우스는 신생 로마 군단의 실력을 보여줄 기회는 반드시 온다고 말하면서 애를 태우고 있는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녔 다. 야만족의 긴 행렬이 평원 저편으로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총사령관 마리우스는 전군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싸움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의 무리는 반드시 후방이 허약한 법이다. 마리우스는 수적으로 열세인 아군으로 하여금 적의 배후를 공격하게 한 것이다. 마르세유에서 북쪽으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오늘날의 엑상 프로방 스)에서 벌어진 유명한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는 로마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10 만 명이 넘는 게르만족이 죽거나 붙잡혀 전멸했다. 동맹시 마르세유와 속주 남프랑스는 게 르만족의 위협에서 해방되었다. 동료 집정관 카툴루스가 지휘를 맡고 술라도 막료로 종군해 있던 전선에서는 이쪽과 똑같 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카툴루스는 마리우스와 달리, 적을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쳐 올라가는 전술을 택했기 때문이다. 역시 10만 명 이상이 무리를 지어 남하해오는 킴브리족 에 대해, 2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정면으로 격돌하는 것은 무리였다. 전투에서 패한 것은 아 니었지만, 2만 명의 로마군 병사들은 키가 크고 몸집도 건장한 10만 명의 게르만족 남자들 을 보자마자 주눅이 들어버렸다. 로마군은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쳤다. 바로 이때 카툴루스 는 총사령관에게 어울리는 행동을 취했다. 근위대를 거느린 그는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도망치는 병사들의 선두로 나섰다. 선두를 달리는 총사령관의 왼쪽에는 독수리 군기를 든 기사가 따라갔다. 이를 계기로 공포에 질린 패주는 전략상의 후퇴로 바뀌었다. 카툴루스의 명령을 받은 장교들이 대열도 정비했기 때문 에 로마군은 일사불란하게 또 강 남쪽까지 후퇴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 일대는 비옥하 기로 유명하다. 그해 말까지는 게르만족이 더 이상 남하할 염려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야만족의 3분의 1은 이미 이탈리아 안에 들어와 있었다.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수도 로마에 돌아와 있던 마리우스는, 게르만족이 배를 채우는 데 열중해 있는 동안 그들을 맞아 싸울 태세를 정비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개선식을 연기한 그는 다시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북상했다. 그런 마리우스를 로마 민회는 이듬해인 기원전 101년의 집정관으로 선출 했다. 마리우스의 군대는 또 강 남쪽 연안에서 카툴루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듬해 봄을 기 다려 전개될 대회전은 집정관 마리우스와 전직 집정관 카툴루스의 군대가 연합하여 치르게 되었다. 연합해도 로마군의 병력은 5만에 불과했다. 이에 맞서는 게르만족은 10만 명이 훨씬 넘었다. 기원전 101년 봄, 마리우스와 카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야만족의 남하를 기다리지 않 고 먼저 또 강을 건넜다. 그리고는 바로 북쪽에 있는 베르첼리에서 적이 접근해 오기를 기 다렸다. 베르첼리는 토리노와 밀라노의 중간지점에 펼쳐진 평원이다. 117년 전에 한니발과 로마군의 기병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무엇 때문인지, 전투는 시대가 바뀌어도 언제나 같은 곳에서 벌어진다. 로마군이 도착했음을 안 킴브리족의 왕이 사절을 보내 결전 날짜와 장소를 결정하자고 요 구했다. 이것이 그들의 관습이라는 것이다. 마리우스는 사절을 만나서 말했다. "로마인은 전쟁에 임한 이상 적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관습을 갖고 있소. 그러나 킴브리족에게는 특권을 주겠소. 전쟁터는 베르첼리이고, 날짜는 사흘 뒤로 합시다." 마리우스 휘하 병력은 3만 2천. 카툴루스 휘하 병력은 2만. 합해도 5만 2천 명이다. 그런 데도 전투는 로마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마리우스가 개혁한 로마 군단이 중대 소대 가릴 것 없이 마치 장기판 위의 말처럼 지휘관들의 지시대로 멋지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로마군의 승리는 병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성과였다. 게르만족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그저 힘으 로 밀어붙이는 것에 불과했다. 항복을 거부하고 자결을 선택한 여자들까지 포함하여 12만 명이나 되는 게르만족이 죽었 다. 포로로 잡힌 자는 6만 명에 이르렀다. 남프랑스에 이어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패한 것을 안 티그리니족은 이탈리아 침입을 포기하고 북유럽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마리우스와 카툴 루스는 로마로 귀환했고, 수도에서 거행된 개선식에서는 둘 다 백마 네 필이 끄는 전차를 몰았다. 이탈리아도 야만족의 침입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된 것이다. 56세라면 남자에게는 육체야 어찌되었든, 두뇌의 기능이 쇠퇴할 나이는 아니다. 그런데 마 리우스는 56세를 고비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출세한 몸이면서도, 마리우스는 로마군의 개혁을 생각하고 실현했다.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꿈으로써 하층민들을 병역 의무에서 해방시키고, 일자리를 잃은 시 민들에게는 일자리를 주었다. 그의 개혁에 따라 로마군도 기능을 회복했고, 신생 로마군은 야만족을 상대로 두 번이나 대승을 거두어 마리우스의 개혁이 유효했음을 입증했다. 게르만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직후, 마리우스의 인기는 참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 솟는 상태였다. 민회는 그를 기원전 100년의 집정관으로 다시 선출했다. 마리우스에게는 통 산 여섯 번째였고, 기원전 104년부터 5년 동안 매년 계속해서 집정관에 선출된 셈이다. 지방 출신의 '신참자'는 건국 이래의 명문 귀족도 달성하지 못했던 지위와 영예로 빛났다. 그런데 기원전 100년부터 마리우스를 둘러싼 환경은 1년전의 높은 지지율이 어디로 사라졌나 싶을 만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리우스에 대해 독일 역사가 몸젠은 이렇게 평가했다. "마리우스에게는 정치적 교양의 결여가 치명적이었다." 이 말에 이어지는 몸젠의 평가가 또한 재미있다. 정치적 교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점에서도 아주 재미있다. "마리우스는 (상식을) 경멸하는 데 필요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옳지 않은 일이나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데에는 공포마저 느끼고 있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조직력과 전술력을 겸비하여 장군으로서는 재능이 출중한 인물이었 다. 거칠고 촌스럽긴 했지만 정직하고 소탈하며, 전리품도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는 거 의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 외국 왕들의 매수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았고, 군율을 엄정히 지키 는 데에도 공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병사들과의 교류에도 마음을 썼고, 적과 맞서서도 흔들 리지 않는 용기를 가졌고, 승기를 포착하는 재능도 뛰어났다. 그리스어를 모르고 성장한 것 자체는 결함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어 습득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보기 드물게 피어난 장군인 그를 쓸데없는 열등감에 빠뜨리게 되었다. 확고부동한 자부심만이 열등감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 고 지나친 열등감만큼 상황 판단을 그르치는 것은 없다. 마리우스 자신이 착상하고 실행한 군제 개혁이 성공했기 때문에 생겨난 하나의 중대한 과 제가 개선장군 마리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우스가 도입한 지원제에 따라 로마 군단의 병사들은 직업군인이 되었다. 그들은 마리 우스를 따라 아프리카와 남프랑스, 이탈리아 북부에서 줄곧 싸웠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이겼 다. 하지만 이겼기 때문에 평화가 되돌아오자, 정작 그 평화를 가져온 그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는 상비군 제도가 없었다. 병역을 시민의 의무로 여기는 전통이 계 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필요할 때마다 새로 편성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필요 성이 없어지면 군대는 해산한다. 개선식이 끝나자마자, 7년 동안 마리우스 휘하에서 싸운 병 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대 해산이었다. 시민군일 때는 해산해도 원래의 일자리로 돌아가면 그뿐이었지만, 지원제로 바뀐 이상 해 산은 곧 실업이 된다. 로마 정부는 퇴역병들에게 일자리를 새로 마련하는 형태로라도 '퇴 직금'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새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 '실업수당'도 주어야 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기원전 100년에도 민회가 마리우스를 집정관에 선출한 것은 게르만족을 격퇴한 공로자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한 처리를 그에게 맡긴 것이기도 했다. 로마 시민인 병사들은 곧 유권자였기 때문이다. 마리우스 자신도 이 문제의 해결을 남보다 훨씬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갖은 고초를 겪 고 출세한 '신참자'인 그가 전대미문의 영예를 얻은 것도 모두 부하들이 용감히 싸워준 덕 분이었다. 비천한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파트로네스'로 태어나는 행운을 얻지 못했고, 그 때문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클리엔테스'도 거느리지 못했던 그에게는 7년 동안이나 자신 을 따라준 병사들이야말로 소중한 '클리엔테스'였다. '파트로네스'인 그에게는 그들이 정착 할 곳을 마련해줄 의무가 있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원병이니까 계약제다. 하지만 공화정 시대에는 아직 퇴역한 뒤의 생활까지 보장한다는 조항은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았다. 따라서 마리우스가 느끼고 있던 의무감은 법적 규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리우스의 경우만이 아니라, '클리엔테스 관계'가 로마인의 인간관계에 강한 영향을 준 것은 로마인이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는 정신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 각한다. 로마인이 창안한 법 개념과 의리나 인정은 모순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법률은 엄정하게 시행하려고 하면 할수록 인간성과 마찰을 일으키기 쉬운 법이지만, 그것을 막는 윤활유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이른바 의리와 인정이 아닐까. 법 개념을 확립한 로마인이기 때문에 윤활유의 중요성도 이해알 수 있었던 게 아닐 까. 마리우스와 술라,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도 의리와 인정의 중요성을 이해한 사람 들이었다. 이들과 부하 병사들 사이의 관계를 오늘날의 대다수 학자들이 '사병화'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그들이 인간관계에서 의리와 인정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려 고도 하지 않는 서구의 인텔리들이기 때문이다. 마리우스의 생각은 로마인 사퇴에서는 타당한 배려였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의 말에 따 르면, '평시의 지도자가 아니라 전시의 지도자'였던 마리우스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의무감 을 어떻게 하면 정책화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마리우 스의 두뇌 역할을 맡게 된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숭배자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숭배자가 창시자보다 오히려 과격해지는 것은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니다. 호민관 사투르니누 스는 마리우스에 대한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용하려고 마음먹었다. 호민관은 우선 서민층에 대해 정책 가격으로 밀을 판매하는 '곡물법'을 개정하는 데 성공 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후 1모디우스당 6.3아세로 고정되어 있었던 밀값을 1모디우스당 6분의 5아세까지 인하한 것이다. 이것은 무료 배급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리우스도 이 법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그에게는 이것이 옛 부하들에 대한 '실업수당'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호민관은 해외에 식민시를 건설하는 새로운 '식민법'도 제안했다. 식민시 건설 예 정지에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생각은 했지만 실현하지 못한 카르타고 옛터 이외에 또 다른 북아프리카 지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민관 사투르니누스의 계획안에는, 새 식민처에 이주 할 사람으로 우선 마리우스의 '퇴역병'(베테랑)들이 거론되어 있다. 이 퇴역병들은 1인당100 유겔룸(25헥타르) 토지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마리우스의 처지에서는 옛 부하들에 게 '퇴직금'을 보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원로원이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 이유는 재원 부족이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달리 사투르니누스는 재원 확보 방안까지는 마련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뒤에는 마리우스와 마리우스를 지지하는 서민들이 있다고 확신한 호민관 사 투르니누스는 원로원의 항의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한술 더 뜨고 나섰다.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을 수도 로마로 소집하여, 그들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 민회에서 원로원의 심기를 건드리는 법안까지 가결시킨 것이다. 앞으로 원로원은 민회에서 가결된 법 안에 대해 5일 이내에 그 법안을 인정한다는 것을 선서로 밝히도록 규정한 법안이었다. 선 서를 거부한 자는 원로원 의석을 박탈한다는 규정도 두었다. 원로원의 태도가 강경해진 것은 당연하다. 호민관과 원로원의 대립은 이제 공공연해졌다. 공화정 로마의 세 기둥인 민회와 원로원과 집정관 가운데, 이 대립을 중재할 수 있는 것은 집정관밖에 없었다. 그해의 집정관은 마리우스였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이런 종류의 흥정에 는 서툴렀다. 원로원 의원이기도 한 마리우스는 중재에 나서기는커녕 동료 의원들보다 먼저 호민관이 요구하는 '선서'를 하고 나섰다. 다른 의원들도 마지못해 그를 따랐다. 선서를 끝까지 거부 한 것은 유구르타 전쟁에서 마리우스의 상관이기도 했던 메텔루스였다. 귀족적인 이 사람은 원로원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자진 망명이라는 형태로 로마에서도 떠나버렸다. 마리우스를 존경하고 있던 원로원 의원들도 이때부터는 마리우스에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한편, 호민관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을 굴복시킨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수많은 지지자 를 거느리게 된 그는 이듬해인 기원전 99년의 호민관에 출마하여 연속 재선을 노렸다. 하지 만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다. 사투르니누스는 하수인을 시켜서 그 경쟁자를 살해했다. 원로원 이 기다리고 있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원로원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무질서 상태에 대한 대책으로, '원로원 최종 권고'를 의 결했다. 이것이 의결되면, 실력 행사에 호소해서라도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행 정부의 최고 수반인 집정관의 역할이다. 마리우스가 그런 역할을 맡을 리가 없다고 대수롭 지 않게 생각한 호민관은 카피톨리노 언덕에 지지자들을 소집하여 농성을 벌이면서 기세를 올렸다. 마리우스는 궁지에 몰렸다. 원로원 최종 권고'로 나타난 비상사태 선언의 수행자가 되면, 전례를 충실히 따른 자는 될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가 된다. 마리우스는 원로원 최종 권 고'의 법적인 모순을 밝힐 능력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또한 대립하는 양자 사이를 조정할 만한 정치적 능력도 없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마리우스는 마침내 폭도 진압의 선두에 섰다. 마리우스는 간단히 투항 한 사투르니누스와 그의 일파를 죽이지도 않았고, 감옥에 가두지도 않았다. 그저 포로 로마 노에 있는 한 건물에 감금했을 뿐이다. 그런데 사투르니누스를 증오하고 있던 일파가 건물 지붕을 부수고, 그 안에 있던 자들에게 돌과 기와를 던져 죽여버렸다. 마리우스는 이 무법 행위를 저지하는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평민들은 자기네 대변인이라고 믿었던 마리우스에게 실망하게 된다. 마리우 스는 일부러 도심으로 거처를 옮겨 평민들의 청원을 받기에 편리한 태세를 갖추었지만, 파 트로네스의 집에는 아침마다 '클리엔테스'들이 찾아오는 것이 일상적인 행사로 되어 있는데 도 마리우스의 저택만은 찾아오는 '클리엔테스'의 모습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불과 1년 전 까지만 해도 한 발짝만 거리로 나가도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던 영웅이 이듬해인 기원전 99 년에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는 것조차 포기해야 했다. 그런 마리우스를 비웃기나 하듯, 원로원은 망명중인 메텔루스를 불러들이자는 제안을 압 도적인 다수로 의결했다. 메텔루스와 대면하고 싶지 않은 마리우스는 게르만족에 대한 승리 를 감사드린다는 구실로 그리스의 신전에 가기로 했다. 모두 그 핑계를 믿는 척했다. 같은 해, 마리우스의 아내인 율리아의 친정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역사가 몸젠은, 마리우스에 대해서는 정치적 교양이 결여되어 있다는 엄격한 평가를 내렸지만, 이 사내아이 에 대해서는 '로마가 낳은 유일한 천재'라고 극찬하게 된다. 갓난아기에게는 가이우스 율리 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8년이 지났다. 로마가 표면상으로는 평화를 누린 8년이었다 의적의 위협도 없었다. 속주들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북쪽의 야만족도 마리우스의 단 호한 반격에 겁을 먹었는지,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리우스는 은퇴한 것이나 마 찬가지였다. 호민관 세력도 사투르니누스가 살해된 뒤로는 줄곧 얌전한 상태였다. 재능이 풍 부한 술라조차도 이 시기에는 특기할 만한 행적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는 평화로운 8 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면 밑에서는 흐름이 서서히 큰 물결로 바뀌고 있었다. 자작농을 장려함으로써 사회 기반을 튼튼히 다지려는 시도는 농지개혁법이 좌절되는 바람 에 뒤로 미뤄진 채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농지를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프 롤레타리아가 된 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호민관 사투르니누스는 살해되었지만, 그가 성립시킨 법-빈민층에게 밀을 사실상 무료로 공급하도 록 규정한 법-이 폐지되지 않은 것은, 기득권을 지키는 것 말고는 모든 일에 소극적이 된 원로원 계급이 사회 불안과 연결되는 실업 문제를 복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실업 문제 해결책의 하나이기도 했던 식민시 건설은 북아프리카에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을 이주시켜 정착촌을 만든 뒤에는 중단되어 버렸다. 전쟁이 없는 이 시기에는, 실업자를 대량 으로 흡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인 군대도 편성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의 로마가 누린 평화는 모든 문제를 뒤로 미루었기 때문에 얻은 평화였다. 이런 현실을 인식하고 있던 로마 인도 있었다. 평화가 9년째에 접어든 기원전 91년, 이해의 호민관에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선출되어 있었다. 39세의 이 신임 호민관은, 30년 전에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 반대하는 원 로원의 뜻을 받들어 그라쿠스의 법안보다 더 민중에게 영합한 법안을 잇따라 제출함으로써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실각시키는 데 이바지한 바로 그 호민관의 아들이었다. 원로원파에 속 할 정도니까, 드루수스 집안도 유복한 기득권층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호민관 드루수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제안해 놓고 가결시키지 못한 '시민권 개혁법', 즉 동맹시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되살렸다. 그것도 가이우스 때처럼 우선 라틴 시민권(투표권이 없는 불완전한 시민권) 소유자에게 로마 시민권(투표권이 있는 완전한 시민권)을 주고, 그밖의 이탈리아 반도 주민들에게는 라틴 시민권을 주는 단계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드루수스는 이탈리아의 모든 주민에게 당장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법 안을 제출했다 호민관 드루수스는 비록 나이는 젊었지만, 교양은 원로원에서 가장 지식이 높은 의원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직은 원로원 의원이 아니지만, 장차 국가 의 지도적 위치에 설 것이 확실한 인물로 주목받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었기에, 표면상으로 는 평온한 바다 밑까지 눈길이 닿았을 것이다. 사실 동맹시의 시민권 문제는 그것을 맨 먼저 지적한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래로 로마의 국정 개혁을 가로막는 암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농지개혁도, 경제 구조 변화에 대한 대처도, 군제 개혁조차도 철저히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동맹시의 시민들을 로마인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이탈리아인(이탈리쿠스)이나 동맹 자'(소키)라고 불렀지만, 이들과 로마 시민의 관계는 포에니 전쟁 시대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우선,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가족과 가정을 지킨다는 목적의 방어전이 거의 없어졌 다. 근래에 와서는 마리우스의 지휘로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은 것이 고작이다. 방위를 목적 으로 한 로마 연합'의 의미가 사라져버린 셈이지만, '로마 연합'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동맹시의 시민들에게는 여전히 참전 의무가 존속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둘째, 동맹자가 의무를 충실히 지켜서 참전해도, 그 결과는 로마의 패권을 더욱 넓혀줄 뿐이었다. 게다가 패권이 확대되자, 필요에 따라 로마 시민에게 부과되고 있던 전시국채가 폐지되었고,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역이 지원제로 바뀐 뒤에는 로마 시민의 병역 의 무도 사라졌다. 이른바 피의 세금인 직접세조차도 낼 필요가 엎어진 셈이다. 반면에 동맹시 에서는 여전히 병역이 시민의 의무였다. 그들만은 피의 세금을 계속 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셋째, 마리우스가 군제를 개혁한 뒤에는 로마 시민 지원병과 동맹시에서 소집된 병사들이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같은 중대에서 싸우고, 같은 소대에서 정찰명령을 받는 식이다. 포에니 전쟁 때는 로마 시민만으로 편성된 군단이 주력부대였다. 주력부대라는 것은 그만큼 희생도 컸다는 뜻이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 희생은 평등해진 대신 다른 모든 것이 불평등하게 변해버렸다. 자기들한테는 병역이 의무인데, 로마 시민병에게는 직업이다. 로마는 어쨌든 동맹국에 대해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충실히 지켰고, 따라서 로마의 지원제는 로마 시민에게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맹자'들도 로마의 패권 확대를 도와주었는데, 패권 확대에 비례한 시장 확대에서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훨씬 많은 이익을 본다는 사실이 차츰 분명해졌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단순히 계산한다 해도 다음과 같은 가설이 성립된다.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가 멸망했을 때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린 카르타고인 가운데 10 세 소년이 있다고 하자. 그때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린 카르타고인은 여자들까지 포함하여 5만 명이나 되니까, 영리한 10세 소년이 그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영리하게 생긴 모습이 소년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그를 산 것은 원로원 의원이었다. 소년은 그 귀족 집에서 의원의 아들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다, 외국 아이에게 교육을 베풀기 를 좋아하는 점에서 고대 로마인은 얼마 전까지의 영국인과 비슷했다. 소년은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청년으로 성장하고, 주인은 이 젊 은 노예에게 그리스 상인과의 통상을 맡긴다. 원로원 의원은 '장사'에 종사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해방노예(리베르타스)나 노예의 명의로 장사에 종 사하는 원로원 의원이 많았다. 카르타고 태생의 노예는 '장사'로 뒷돈을 벌고 있는 원로원 의원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 가 된다. 주인은 그에게 자유를 주어 그 공로에 보답할지도 모른다. 공짜로 자유를 되찾을 수는 없다 해도, 이런 일에 종사하는 자에게는 노예라도 보수를 주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 에, 카르타고 태생의 노예도 저축한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어쨌든 그의 신분은 해방 노예로 바뀌었다. 이름도 이제는 로마식으로 바뀌었다. 옛 주인의 개인 이름(프라이노멘)과 옛 주인의 일족 이름(노멘)을 그대로 물려받고, 거기에 카르타고 시절의 가문 이름(코그노 멘)을 덧붙인 이름이다. 성을 보면 출신을 알 수 있으므로 이것 역시 차별이라고 말하는 사 람도 있겠지만, 성이 그리스나 오리엔트나 에스파냐 출신임을 나타내는 사람은 그 당시 로 마에는 수두룩했다. 해방노예만 되면 로마 시민권은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가 3만 아세 이상의 재산을 갖고 5세 이상의 아들을 둔 해방노예에게 로마 시민권 취 득을 인정한 것은 카르타고가 멸망하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 65세가 된 카르타고 출신의 해방노예는 이미 완전한 로마 시민권 소유자 라는 가설이 성립된다. 반면에 '로마 연합' 동맹시의 시민으로서 카르타고 공략전에 종군했 던 사람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물론, 그의 아들까지도 동맹시 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로 마 시민권을 갖지 못한 채 불리한 처지를 계속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 사정이 이래서는 이탈리아인(이탈리쿠스)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것도 당연하다. 로마 시 민권 문제를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제기했을 당시에는 이 문제에 대한 자각이 아직 여물지 않았던 그들도, 그후 30년 동안의 상황 변화 속에서 로마 시민권을 갖지 못한 탓에 겪게 되 는 불리함을 분명히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 연합'의 맹주는 어디까지나 로마다. 이탈리아인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평 등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을 가짐으로써 누릴 수 있는 평등한 대우니까, 로마가 허락하지 않 는 한은 실현되기 어렵다. 하지만 호민관이 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ㅊ제안자인 호민관이 살해될만큼 로마 사회가 혼란스러워진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문제가 시민권에 미치 면, 로마에서는 무산자(프롤레타리아)조차도 기득권 수호에 나서기 때문에, 그 반대는 난공 불락의 철벽으로 변했다.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속에서 시민권 문제는 이제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만큼 물이 채워진 항아리 같은 상태에 있었다. 1만 명의 이탈리아인을 동원하여 로마로 시위 행진을 벌이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나설 테니까 참아달라면서 시위를 말린 사람 이 바로 동맹시의 유력자들과 자주 접촉하고 있던 드루수스였다. 그가 이 법안을 제출하기 로 결심한 데에는 강한 위기의식도 깔려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이 법안을 둘러싸고 민회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반대파는 강경했다. 호 민관 드루수스의 연설은 성난 시민들의 고함으로 자주 중단되었다. 기원전 91년의 집정관인 필리푸스는 드루수스의 법안에 반대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토의에 들어가기 전에 호민관 드루수스는 호민관에게 주어진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인 드루수스 에게는 로마인이 말하는 '간덩이', 곧 배짱이 없었다. 그는 거부권 행사를 통한 정면 대결을 포기하고 회의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를 지지자들이 호위했지만, 그들 속에 반대파가 섞여 있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중에 드루수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쓰러진 호민관 옆에는 제화공이 사용 하는 작은 칼이 버려져 있었다. 드루수스는 다음의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로마인은 언제나 나와 같은 인물을 가질 수 있을까," 유복한 보수파보다 더 완고한 수구파로 변하는 푸어 화이트(미국 남부의 가난한 백인)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호민관 드루수스의 암살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결정타와 비슷한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되었다. 그 한 방울이 떨어짐으로써 항아리가 가득 차 있던 물이 넘쳐흐른 것이다. 시민권 문제가 온건한 방법으로는 실현되기 어렵다고 생각한 '동맹자'들은 절망했다. 여러 부족 사 이에 은밀한 연락이 오가기 시작했다. 드루수스를 제거함으로써 시민권 문제를 조기에 처리 했다고 안심한 로마인들, 특히 위정자 계급인 원로원은 이탈리아인들의 이런 움직임에 주의 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해가 바뀌기도 전에 역사상 '동맹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전쟁이 일어났다. 마치 평원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불이 일어난 것 같았다.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와 남부에 사는 여러 부족들이 일제히 무장 봉기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로마 연합'에 가맹한 도시국 가들이었다. 250년 동안이나 로마의 동맹자였던 그들이 맹주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봉기한 부족들을 북쪽부터 차례로 열거하면, 아드리아 해안 쪽의 피첸토족, 베스티노족, 마루키노족, 내륙으로 들어가서 파엘리노족, 마르시족, 남쪽으로 내려가서 역시 아드리아 해 안의 프렌타노족, 산악 부족인 삼니움족, 이탈리아 남부의 히르피노족 등, 처음 궐기했을 당 시만 해도 8개 부족이 된다. 루비콘 강 이남의 로마 연합 전역에서 북쪽에 해당하는 일대에 사는 에트루리아인과 움 브로족은 아직 태도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남부의 풀리아 지방과 칼라브리아 지방이 참전한 것은 전쟁 2년째에 접어 든 뒤였다. 또한 로마가 전략 요충으로 건설한 식민시(콜로니아)들 가운데 이주자가 로마 시민인 '로 마 식민시'들은 당연히 로마 편에 섰다. 이주자가 라틴 시민권 소유자인 통칭 '라틴 식민시 ' 들도 베누시아 한 곳만 빼고는 모두 로마 편에 남았다. 그들은 다른 라틴 부족과 마찬가지 로 투표권이 없는 로마 시민권은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마저 없어서 봉기한 '동맹자'들에 게 동조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 외에 로마 편에 남은 동맹자로는 로마 영토 남쪽에 펼쳐져 있는 캄파냐 지방의 그 리스계 주민들이 있었다. 이들도 로마 시민권을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봉기한 '동맹자'들 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캄파냐 지방에는 비옥한 경작지가 많다. 게다가 주민들은 주로 상 과 공에 뛰어난 그리스인이다. 나폴리, 폼페이, 베스툼 등 풍요로운 도시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캄파냐 지방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여러 면에서 로마인과 대등했다. 게다가 도시 국가 내의 자치는 보장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요 소에 불과했다. 요컨대 기원전 91년 말에 일어난 동맹시 전쟁은 '로마 연합' 동맹국들 중에서도 비교적 가난한 지방의 주민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거나 로마에는 아닌 밤중 에 홍두깨였다. 130년 전의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이 그토록 원했는데도 끝내 이루지 못한 로마 연합의 해체가 이제 실현되었다. 트레비아, 트라시메노, 칸나에 등지에서 로마가 한니발에게 참패를 맛본 시대에도 로마를 배반하지 않았던 '동맹자'들이 로마에 등을 돌린 것이다. 정치 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동맹시 전쟁'은 로마에 통렬한 타격을 의미했다. 북동쪽과 동쪽 및 남동쪽의 세 방향에서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북쪽의 움브로족과 북 서쪽의 에트루리아인도 아직은 태도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병력을 소집하기 시작 했다는 정보마저 들어오는 형편이었다. 서쪽과 남서쪽에는 티레니아 해가 있다. 로마가 건설 한 가도 덕분에, 반란군은 아무리 먼 곳에서도 한 달 남짓만 행군하면 수도 로마의 성벽까 지 들이닥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로마의 지배에 반대하여 봉기한 여덟 부족은 연합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했 다. 나라 이름은 이탈리아, 신생국 이탈리아의 수도는 아펜니노 산맥 기슭에 있는 코르피니 움으로 정했다. 국가 형태도 결정되었다. 최종 결정권을 갖는 민회와 500명의 유력자로 이루 어지는 원로원, 매년 두 명의 집정관이 선출되어 역시 선거에서 뽑히는 12명의 법무관과 함 께 절대 지휘권을 쥐고 군사와 정치를 담당한다. 공용어는 라틴어, 일반 통용어로는 삼니움 어와 그밖의 방언을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이탈리아 건국을 기념하여 8명의 전사가 칼을 맞대고 있는 도안의 기념 주화까지 만들었다. '동맹시 전쟁'은 오랫동안 함께 산 부부 가운데 아내가 남편한테 이혼장을 내던진 것과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은 것은, 아니 어쩌면 이것도 비슷한 점일지 모르지만 이혼장을 내 던진 쪽이 자기네 권리를 로마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실력 행사를 하기로 결정 한 것이다. 신생국 이탈리아의 수도가 된 코르피니움과 로마의 거리는 불과 120 킬로미터밖에 안된 다. 게다가 로마에서 코르피니움까지는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로마인들이 건설한 발레리우 스 가도가 뚫려 있었다. '동맹시 전쟁'은 모든 의미에서 로마에 뼈아픈 타격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지금까지 로마 군단에서 동맹시 출신 병사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추측해 보아도, '로마 연합' 군대의 절반이 나 되는 병력이 빠져나가 버린 셈이 된다. 빠져나간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로마 집정관 밑에서 참모나 장로로 일하고 있던 동맹시 출신 장교들 중에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도 고향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막사에 서 잠자고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싸웠던 사람끼리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어 싸우게 된 것이 다. 이탈리아인들이 장교부터 졸병에 이르기까지 로마인의 전술을 잘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 다. 그들이 무장 봉기하자, 로마인들은 오랫동안 신뢰를 나누었던 '동맹자'들과 칼을 맞대 야 하는 꼴이 되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지만, 로마인들은 당장 사태의 중대성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각지에 서 동시에 타오른 불길은 모두 수도 로마를 겨냥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어쨌든 로마와 반란 지역은 로마 가도로 이어져있기 때문에, 반란군이 로마를 노리기도 쉽다. 하지만 가도를 따 라 쳐들어올 적으로부터 수도 로마를 지키는 것은 전략 요충마다 건설되어있는 '식민시'들 이다. 이 식민시들은 아피아 어도 연변에 있는 베누시아를 빼고는 모두 로마 편에 남아 있 었다. 반란군은 반드시 식민시를 우선 공격할 거라고 로마인들은 생각했다. 기원전 90년 초, 로마도 적을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우선, 캄파냐 지방에 선을 긋듯이 하여 전선을 북부와 남부로 나누었다. 기원전 90년의 집 정관으로 선출된 푸불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북부 전선, 역시 집정관인 루키우스 율리 우스 카이사르가 남부 전선의 총지휘를 맡기로 결정되었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해에 10세 소년이었던 '로마가 낳은 유일한 천재'의 큰아버지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던 모 양이다. 그리고 이 두 집정관 휘하에는 반란군과의 충돌이 예상되는 지역마다 남북에 각각 5명씩의 군단장(레가투스)이 배치되었다. 총지휘를 맡는 집정관도 각각 군단을 지휘하지 만, 군단장 휘하의 군단들은 필요한 지역으로 신속히 달려가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일 종의 유격대라고 할 수 있다. 로마는 총사령관이 후방에서 지휘하는 전략을 택하지 않았다. 총병력의 절반과 수많은 장교가 적이 되어버렸지만, 전략적 사고는 로마인들 편에 남아 있 었던 모양이다. 군단장들의 면면을 얼핏 보기만 해도 로마가 옛 동지들과의 싸움에 최고의 카드를 내놓았 음을 알 수 있다. 집정관 루푸스가 총지휘를 맡은 북부 전선에서는 게르만족을 무찌른 승장 마리우스가 67 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며 재등장했다. 폼페이우스의 아버지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 본도 최전선에 나섰다. 집정관 카이사르가 총지휘를 맡은 남부 전선에는 48세의 무르익은 나이에 이른 술라를 선두로, 아직은 24세의 청년이지만 훗날 폼페이우스 및 카이사르와 함 께 삼두정치의 일익을 담당하게 될 크라수스도 군단장에 임명되어 있었다. 이에 대항하는 이탈리아 쪽도 로마와 똑같은 진형을 짰으니 놀랄 수 밖에 없다. 북부 전 선의 총지휘는 마르시족 출신의 퀸투스 포페디우스 실로가 맡았고, 남부 전선의 총지휘는 삼니움족 출신의 가이우스 파필루스 무틸루스가 맡았다. 이 두 명의 총사령관 밑에 5명 정 도의 군단장이 있는 것도 로마와 같았다. 게다가 총사령관 이하 모든 병사의 개인이름까지 로마식인 것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서로 가까운 상대가 참다 못해 울화통을 터뜨리 고 말았으니, '동맹시 전쟁'은 로마의 정치적 실책이었다. 도처에서 전개된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로마와 이탈리아가 각각 5만명, 반란군에 대항할 병력이 모자란 로마는 갈리아와 누미디아에 지원군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쟁 2년째인 기원전 90년의 전황은, 전반에는 이탈리아가 우세했고 후반에는 로마의 우 세로 끝났다. 어쨌든 고대 역사가의 말을 빌리면, '털구멍 수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상대 ' 끼리 싸운 것이다. 각지에서 벌어진 싸움은 격전의 연속이었다. 로마는 북부 전선의 총지휘 를 맡은 집정관 루푸스를 잃었다. 남부 전선에서도 군단장 두 명이 전사했다. 이탈리아 쪽의 희생도 컸지만, 로마군도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를 수도 로마로 후송하여 화장할 여유가 없 어서, 전사한 자리에 그대로 매장하기로 결정했을 정도였다 로마 쪽에서 활약한 것은 술라다. 속공을 구사한 그의 과감한 전술에 대항할 수 있었던 지휘관은 이탈리아 쪽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마리우스의 지휘 방법은 전과 달리 소극적으 로 변해 있었지만, 그가 모습을 나타내기만 해도 이탈리아 쪽은 장군도 병사도 모두 마리우 스 휘하에서 게르만족을 상대로 싸우던 시절을 생각하고 그만 주눅이 들어버렸다. 덕분에 마리우스가 지휘를 맡은 군단은 결정적인 승리도 얻지 못했지만 패배를 당하지도 않았다. 기원전 90년 겨울을 맞아 양군 모두 일단 칼을 거두는 계절이 되었다. 동료 집정관 루푸 스가 전사했기 때문에,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수도로 돌아가 민회를 소집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민회를 소집했을 뿐만 아니라, 민회에 법안 하나를 제출했다. 이 '율 리우스 시민권법'(렉스 율리아 데 키비타테)은 '동맹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동맹자'들 이 요구한 것, 곧 로마 시민권 취득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법에는 로마에 겨누고 있던 칼을 거두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집정관 카이사르가 제안한 '율리우스 시민권법'을 로마 민회는 가결했다. 이번에는 성난 고함소리도 없었고, 제안자가 암살당하지도 않았다. 로마인들은 정치적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군사력으로 밀어붙여 진퇴양난의 수렁에 빠지기 보다는, 정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명분은 '이탈리아 인' 쪽에 있었다. 결과는 당장 나타났다. 태도를 결정하지 않고 있던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로족이 로마 편에 가담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북부 전선에서 패하여 코르피니움을 로마에 내준 뒤로는 수도의 소재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형편이었다. '율리우스 시민권법'의 성립으로 전쟁 목적이 사라진 이상,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남부 전선에서는 기원전 89년 내내 전투가 계 속되었지만, 그것은 북부 전선에서 패한 마르시족의 우두머리 실로가 남부 전선의 주력부대 인 삼니움족에 가담하여 분투했기 때문이다. 싸움의 대의명분은 사라졌어도, 싸우는 동안에 싹튼 증오는 남게 마련이다. 증오만 있으 면,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일 지휘관만 있으면, 전쟁은 계속되는 법이다. 이런 이유로 산악 지방에 틀어박혀 저항을 계속하는 잔당이 조금은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동맹시 전쟁'은 사 실상 기원전 89년에 끝났다. 남부 전선의 영웅이었던 술라도 그해 말에는 로마로 돌아갈 수 있었다. 로마가 수렁에 빠 질 게 뻔하다고 생각했던 오리엔트 군주들은 예상외로 빨리 해결된 것을 알고 낙담했다. '율리우스 시민권법'은 오랜 '동맹자'가 이혼장을 들이밀었을 때에야 비로소 성립되었지 만, 단지 '동맹시 전쟁'을 끝내는 역할만 맡은 것은 아니었다. 이 법은, 귀족과 평민이 공직 에 취임할 기회를 균등하게 함으로써 두 계급간의 오랜 항쟁을 끝낸 기원전 367년의 '리키 니우스 법'과 맞먹는 획기적인 법, 즉 로마 국가의 방향 전환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강철같은 결속을 자랑했고, 한니발을 비롯한 외세조차도 그 사실을 인정한 바 있는 '로마 연합'은 마침내 해체되었다. 나풀리에 사는 그리스계 주민도, 토스카나 지방에 많이 사는 에트루리아인도, 이탈리아 반도를 등뼈처럼 달리는 아펜니노 산 맥에 사는 산악 부족도 모두 로마 시민이 되었다. 이탈리아인(이탈리쿠스)은 이제 없어졌다. 이탈리아인이 되살아나려면, 이로부터 1천 950년 뒤에 근대 국가 이탈리아가 탄생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기원전 90년의 '해체'는 130년 전에 한니발이 원했던 형태의 해체는 아니었다. 발 전적 해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한 표현인 형태의 '해체'였다. 도시국가 로마를 떠받쳐온 로마 연합이 해체됨으로써, 로마는 이제 도시국가를 초월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로 진입하게 되었 다. 아테네로 대표되는 도시국가는 그 국가의 핵심적 도시에 사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운영되 는 국가였다. 따라서 시민의 자치는 당연한 이치이고, 거기에 참가하려면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역시 자명한 이치였다. 민주정 체제의 아테네는 물론, 왕정 시대와 공화 정 시대의 로마에서도, 전쟁을 선포하거나 강화를 체결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최고 결정권이 민회에 있었던 것은 정치체제와 관계없이 양국이 모두 도시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주권재민'은 그것을 존중할수록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 될 수밖에 없다. 주권 자인 시민이 갖는 권리는 평등해야 하고, 그 평등은 폐쇄를 통해서 이질적인 분자를 배제하 는 방법으로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정 체제의 아테네에서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이 아닌 한 아테네 시민권을 갖는 것이 인정되지 않았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오랫동안 아테네에 살면서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창설하여 아테네 문화 향상에 이바지한 사람도 끝내 아테네 시민권은 얻지 못했다. 공동체 내부에서의 완전 평등을 금과옥조로 삼으면, 이질분자(바르바로이)를 배제하지 않 을 수 없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명문 귀족, 평민귀족, 기사계급, 평민층, 무산자, 해방노예, 노예, 파트로네스, 클리엔테스 등의 구별이 존재한 로마 사회에서는, 일단 이질분자를 받아 들이기로 결정한 뒤에는 저항도 적었을 것이다. 차별과 구별은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 우에는 계층간의 경직화를 피하려는 노력을 잊어서는 안된다. 로마에서 사회 문제가 일어나 는 것은 각 계층간의 교류가 경직된 경우다. 아테네인이 생각한 동포는 같은 피가 흐르고 같은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로마인이 생각한 동포는 단지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과거에 노예였든 카르 타고 태생이든, 전혀 관계가 없다. 라틴어를 쓰든 말든, 그것조차도 관계가 없다. 로마 시민 권을 취득한 순간부터 그 사람은 동포가 된다. 로마인은 원래 시민권을 주는 데 대범했다. 하지만 제1권에 기술된 시대의 시민권은 이점 이 적었다. 그래서 '로마 연합' 동맹시의 시민들은 굳이 로마 시민권을 갖고 싶어하지 않았 다. 건국하는 과정에는 어떤 나라도 이질분자를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패권국이 된 이후에도 이질분자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국가는 드물지 않을까. 로마인들도 이점이 많아진 시민권을 이질분자에게 주는 데 오랫동안 인색했던 것은 앞에 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이것을 처음 제안한 지 30년이 지나서야 겨 우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두번째 이정표는 세워졌다. 로마인들도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결 국은 그 이정표를 따라 나아가게 되었다. 봉기한 부족들의 우두머리들이 로마에 항복하면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로마인들이 이 전쟁을 단순한 반란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로마 연합'은 해체되었지만, 동맹도시나 동맹부족들의 본거지는 이제 로마 국가를 구성하 는 지방자치단체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 주민들의 민족적, 문화적 독자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후세의 한 연구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인이 실증적으로 인류에게 가르쳐준 것 가운데 하나는 각 지방의 독자성을 유지하면 서도 전체를 통합하는 보편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로마는 속주(프로빈키아)라는 형태로 자신의 통치하에 편입시킨 지방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을 동맹국으로 삼고 있었다. 로마는 이런 동맹국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첫째, 누미디아 왕국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와 동맹국이 '파트로피스'와 '클리엔테 스'의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로마는 '파트로네스'이고 누미디아는 '클리엔테스'다. 왕국이 아닌 아테네나 스파르타나 마르세유 같은 로마 산하의 자치시들도 이런 종류의 동맹관계에 속했다. 사실상 속국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이들 나라나 도시들은 속주가 아니기 때문에 로 마에 속주세를 낼 의무는 없다. 로마에 대한 의무는 로마가 군대를 출동시킬 때 그들이 장 기로 삼는 분야, 예를 들면 누미디아의 경우에는 기병, 마르세유의 경우에는 군선을 참전시 키는 것이었다. 두번째 부류는 로마와 통상적인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이다. 이런 나라들 중에는 셀레우코스 왕조 치하의 시리아처럼 로마와 싸워서 패한 나라도 있지만, 그밖의 나라들은 아직 로마와 직접 대결한 적이 없었다. 이런 부류의 동맹국으로는 로마가 '혼미'를 맞기 시 작한 기원전 133년 시점에서는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폰토스, 카파도키아, 그 동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계승자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시리아와 이집트가 있었다. 모두 다 오리엔트에서는 주된 통치 체제였던 왕정을 채택한 나라들이다. 알렉산드로 스 대왕의 영향 때문인지, 이들 나라의 왕통은 그리스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통치 방식은 모 두 아시아적인 전제국가였다. 이들 가운데 하나인 폰토스 왕국에서는 미트라다테스 6세가 기원전 115년부터 왕위에 앉 아 있었다. 본래는 선왕이 죽은 7년 전에 왕권을 물려받았지만, 어머니가 왕위를 가로채는 바람에 소아시아 일대를 방랑하며 왕권 탈환을 노리다가, 17세가 된 기원전 115년에야 겨우 왕권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사내였지만 영명한 군주였다. 알 렉산드로스 대왕을 흉내냈는지,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옆얼굴을 새긴 기념 주화가 남아 있다. 그것을 보아도 꽤 미남이다. 로마가 혼란기에 접어든 것을 보고, 그는 이 틈을 이용하여 제국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영명한 인물인 만큼 전쟁 준비는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 방식으로 신중하게 추진했다. 폰 토스 왕국의 수도는 그리스인 식민시를 기원으로 하고 있는 흑해 연안의 시노프였고, 이 나 라의 부의 원천은 통상보다 광산에 있었다. 전제국가인 만큼 수익은 모두 왕의 것이 된다. 미트라다테스 6세는 이 수익금으로 사들인 금은보화를 수도에만 두지 않았다. 왕국 안의 각 지에, 특히 내륙지방에 수많은 성채를 쌓고 그것들을 요새로 만드는 동시에 재화 보관소로 삼았다. 위험을 분산시킨 것이다. 돈만 있으면, 용병제가 일반적인 오리엔트에서는 언제 어 디서나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을 추진하면서 미트라다테스는 기회를 기다렸다. 기원전 92년,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에 기회는 찾아왔다. 이해에 인접국 비티니아의 왕이 죽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다. 미트라다테스는 배후에서 손을 써서 자신의 측근을 왕위에 앉혔다. 곧이어 역시 인접국인 카파도키아의 왕위에도 아 들 가운데 하나를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쫓겨난 양국의 왕족들은 동맹관계에 있는 로 마에 호소해 왔다. 강대국이란 귀찮은 입장이기도 하다. 로마의 패권하에 있지 않은 독립국끼리의 다툼이니 까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고 방치해두면 좋겠는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마는 원로 원 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을파견하여 중재에 나섰다. 시찰단의 중재는 일단 성공하여 미트 라다테스가 물러섰기 때문에, 양국의 왕위는 각각 정통 후계자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1년도 지나기 전에 '동맹시 전쟁'이 일어났다. 미트라다테스는 이 전쟁이 오래 지 속될 것이고, 로마는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로마는 국내 문제에 힘을 쏟느라 바깥 세계에 군대를 내보낼 여유가 없어질 것이다. 그는 이틈을 타서 오랫동안 품고 있던 꿈을 실현하기로 작정했다. 프롤로그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계속 평화로울 수는 없다. 국외에는 적이 없다 해도 국 내에 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외부의 적이 접근하지 못하는 건강한 육체라도, 그 육체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내장 질환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니발(리비우스의 <로마사>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입에서 예언과도 비슷한 경구의 말이 나온 때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기원전 147년, 제3차 포에니 전쟁도 어느덧 3년째에 접어든 카르타고 땅에 로마에서 갓 도착한 젊은이의 모습이 있었다. 증원군에 배속되어 바다를 건너온 병사는 아니다. 불과 몇 달 전에 성년식을 치른 이 젊 은이는 이제 단정한 복장을 갖추고 싶을 때는 투니카(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속옷) 위에 토가(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겉옷. 원래는 남녀 계급에 관계없이 널리 이용되었으나, 공 화정 시대에는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만 착용했다)를 걸칠 수 있는 나이인 16세가 되었지 만, 로마의 병역은 17세부터 시작된다. 젊은이는 카르타고 시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 진영 에 총사령관의 초대를 받고 와 있었다. 총사령관의 막사 안에 잠자리까지 제공받은 특별한 손님이었다. 그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로마군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 스는 그라쿠스의 누나의 남편이고, 그라쿠스의 외가는 스키피오 가문이기 때문에, 총사령관 은 그라쿠스의 매형인 동시에 외사촌형도 되는 사이였다. 친척 가운데 성년식을 치른 젊은 이가 있으면 그를 전쟁터로 초대하여 막사 안에서 함께 기거함으로써 지휘관 생활을 실습시 키는 관습은, 로마 사회의 대들보인 상류층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16세의 젊은이가 보기에, 카르타고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은 대국의 수도를 공략한다고 해서 밤낮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긴박한 분위기는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카르타고 시내에는 아직도 5만여 명의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 이 농성자들은 기원전 149 년부터 시작된 공방전을 벌써 2년이 넘도록 견뎌왔다. 하지만 카르타고의 운명은 누가 보아 도 확연할 만큼 소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충 카르타고를 둘러싼 포위망은 완벽했다. 육지와 연결 된 서쪽은 높이 14미터, 폭이 10미터나 되는 삼중 성벽이 지키고 있었지만, 이제는 곳곳이 파괴된 상태였다. 항구 쪽에서 쳐들어갈 준비도 끝나 있었다. 시내에 비축되어 있던 식량도 농성 3년째에는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는 이듬해 봄을 기해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가해질 대공세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총공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대 로마에서는 작전 지역 안에서의 모든 결정은 총사령관에게 일임되어 있었다. 카르타 고의 운명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양할아버 지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친아버지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 나 다른 민족에 대해 개방적이고 관대한 38세의 총사령관은 카르타고의 운명을 혼자서 결정 하는 데 망설임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양고모부인 스키피오 나시카는 로마 원로원에 서 카르타고의 멸망을 주장하는 강경파 카토에 맞서 카르타고의 존속을 주장하는 온건파의 영수였다. 기원전 147년부터 기원전 146년에 걸친 겨울철 휴전기를 이용하여 젊은 총사령관은 로마 원로원에 사람을 보내어 마지막 훈령을 요청했다.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강화를 시도할 것인가를 물은 것이다. 로마에서 회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스 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식탁에는 몇 년 뒤부터 포에니 전쟁사를 저술하기 시작할 그리스 인 폴리비오스도 동석해 있었다. 그리고 휘하 장군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식탁에는 비록 나이는 젊지만 총사령관의 특별 손님으로 대우를 받고 있는 젊은이도 말석에 앉아 있었다. 즉 그리스인 역사가와 로마인 장수들이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는 16세 젊은이의 귀에도 들어 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기원전 146년으로 해가 바뀐 봄에 로마에서 훈령이 도착했다. 그 내용은 카르타고 말살이 었다. 마침내 로마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인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시가 전으로 대항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엿새 동안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시가지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이레째 되는 날 카르타고는 마침내 함락되었다. 수도가 함락된 뒤, 투항 권고를 거부하고 저항한 시민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붙잡혀 노예로 팔렸는데, 그 수가 어린이까지 포함하여 5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랫동안 지중해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카르타고의 멸망에는 승자인 로마인조차도 그 감회 가 여느 때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눈 아래 펼쳐진 카르타고 시가지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않 았다. 건국한 지 700년, 그 오랜 세월 동안 번영을 누린 도시가 잿더미로 변해가는 것을 그 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700년의 긴 세월 동안, 카르타고는 넓은 땅과 수많은 섬들과 바다를 지배해 왔다. 그에 따 라 카르타고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어떤 강대한 제국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방대한 양의 무기와 군선과 코끼리와 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과거의 어떤 제국보다도 용기와 기개가 뛰어났다. 로마의 강요에 굴복하여 모 든 무기와 모든 군선을 빼앗겼으면서도 3년 동안이나 로마군의 공격을 견뎌냈다. 그런데 지 금 그 도시가 함락되고 파괴되어 지상에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는 적국의 이런 운명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렀다. 그는 비록 승자였지만, 인간만이 아니라 도시와 국가, 그리고 제국도 언젠가는 멸망할 운 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트로이, 아시리아, 페르시아, 그 리고 20년 전의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한번 성한 자는 반드시 쇠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역사 는 인간에게 보여주었다.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모르나, 승리한 로마 장군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트 로이군 총사령관 헥토르의 말을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트로이도, 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전사들과 함께 멸망하리라." 뒤에 서 있던 폴리비오스가 왜 하필이면 지금 그 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스키피오 아이밀 리아누스는 폴리비오스를 돌아보며, 그리스인이지만 20년 지기이기도 한 그의 손을 잡고 이 렇게 대답했다. "폴리비오스, 지금 우리는 지난날 영화를 자랑했던 제국의 멸망이라는 위대한 순간을 목 격하고 있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언 젠가는 우리 로마도 이와 똑같은 순간을 맞이할 거라는 비애감이라네." 함락된 카르타고는 로마 원로원의 훈령에 따라 성벽도, 신전도, 민가도, 시장 건물도, 선착 장도, 창고도 모조리 파괴되었다. 로마군은 돌덩어리와 흙밖에 남지 않은 지표면을 가래로 고른 다음 소금을 뿌렸다. 신들의 저주를 받은 땅에는 소금을 뿌리는 것이 로마인의 방식이 었다. 불모의 벌판으로 변해버린 카르타고.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위 대한 순간에 대한 감회도 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어떤 감회를 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전해주는 사료가 없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였다. 그런 만큼,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종말과 카르타고 멸망에 대해서 남다른 인상을 받았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리고 그는 16세였다. 16세라면, 56세의 폴리비오스나 38세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느꼈던 성자필쇠의 비애감과는 다른 생각을 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예를 들면, 로마만 은 절대로 트로이나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특히 카르타고의 전철을 밟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카르타고는 700년의 역사를 쌓은 뒤에 멸망했지만, 이 무렵에는 로마도 건국된 지 어언 600년이 지나고 있었다. 제1장 그라쿠스 형제의 시대-기원전 133년에서 기원전 120년 서양에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이 있다. 아쉬울 것 없는 혜택받은 환경에서 태 어났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역사상 '그라쿠스 형제'로 유명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야말로 기원전 2세기 후반의 로마에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표현이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외조부가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조부인 티베리 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도 노예 군단을 이끌고 로마 방위의 최전선에서 한니발과 맞서 싸우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전사한 용장이다. 그라쿠스 가문에서는 장자한테 티베리우스 라는 이름을 물려주기 때문에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 이름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 라쿠스인데, 이 사람도 공화정 로마에서 기원전 2세기 전반에 활약한 위정자들 가운데 특기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태어난 해는 분명치 않지만, 성장한 뒤 의 경력에서 역산하면 기원전 220년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90년,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와 싸우기 위해 로마 군단을 이끌고 오리엔트에 상륙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 스의 명령으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한테 가서 로마군에 대한 후방 지원을 요청한 것 이 그라쿠스가 맡은 최초의 공적 임무였다. 기원전 187년, 호민관으로 선출된 그는 이른바 '스키피오 재판'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 스를 변호한다. 이 재판은 사용처가 불분명한 500탈렌트의 행방을 추궁하기 위해 열렸지만, 카토를 선두로 한 정적들의 진짜 목적은 스키피오의 실각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 혼자 나서서 피고를 편드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33세의 그라쿠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들의 보호를 받으며 조국을 위해 그만큼 공헌을 했으며, 공화국 로마에서는 최고 지위 에까지 오른 인물이, 만백성의 감사와 존경을 받은 인물이, 이제 피고석에 끌려나와 앉아 자 신에 대한 탄핵과 비난을 들어야 할 판입니다. 이같은 수모는 스키피오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기보다. 오히려 우리 로마 시민들의 명예를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그라쿠스의 간곡하고도 단호한 변호 덕분에 스키피오를 강제 연행하자는 제안은 부결되었 다. 하지만 정적들의 진짜 목적이었던 '자마 전투의 승자'의 실각은 실현되었다. 스키피오는 정적들의 책략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로마를 떠나 공직생활에서 은퇴해 버렸던 것이다.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는 이때 보여준 그라쿠스의 용기있는 행동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 라쿠스에게 딸 코르넬리아를 시집보내어 은혜에 보답했던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 어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에게 명장 스키피오의 피가 흐르고 있는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스키피오를 변호한 해로부터 5년이 지난 기원전 182년, 38세의 그라쿠스는 안찰관(아이딜 리스)으로 선출되었다. 안찰관의 역할에는 행사 기획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라쿠스가 연출한 경기대회의 화려함은 로마 시민들도 깜짝 놀랄 만한 규모였기 때문에 원로원이 주의를 주었 을 정도였다. 자기가 가진 재산과 '클리엔테스'(후원자)들로부터 받은 헌금으로 비용을 충당 했으니까, 그라쿠스는 이 화려한 경기대회를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동시에 수많은 '클 리엔테스'를 거느린 '파트로네스'(일족의 우두머리)라는 것도 과시한 셈이다. 그라쿠스 가문이 속해 있는 셈프로니우스 일족은 원래 평민 출신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 쟁 당시에도 아직은 평민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로마에서는 집정관을 배출한 집안은 로마 공화정의 위정자 계급인 귀족, 즉 엘리트로 대우받게 되었다. 이것은 제2차 포에니 전 쟁을 귀족계급과 평민층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치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되면, 기원전 3세기부터 집정관을 배출하고 있는 셈프로니우스 일족도 뛰어난 귀족 가문이다. 기원전 2세 기의 로마에서는 귀족과 평민의 구별도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옛날부터 내려오는 유력 가문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스키피오 가문이 속해 있는 코르넬리우스 일족,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배출한 클라우디우스 일족, 한니발에 대해서는 지구전 전술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속해 있 는 파비우스 일족, 로마가 공화국이 되었을 때부터 명문인 발레리우스 일족, 그리고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배출한 율리우스 일족 등의 명문 귀족에 대해, 한니발에게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칼'로 칭송받은 마르켈루스와 그라쿠스 같은 유력한 평민층 가문 은 '평민 귀족'이라고 불러서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후세 연구자들이 선호한 분류 방식이고, 당시 로마인들은 이런 분류에 별 로 집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해마다 두 명씩 선출되는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은 평 민 출신인 것이 통례였으므로, 이론적으로는 해마다 한 사람씩 새로운 귀족이 탄생한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의 '귀족계급'(노빌리타스)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신분 은 아니었다.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파트로네스로서 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리고 있는 '평 민 귀족'도 드물지 않았다. 안찰관을 지낸 지 2년 뒤인 기원전 180년, 그라쿠스는 법무관(프라이토르)에 선출되었다. 화려한 경기대회의 연출자로서 선전이 잘 되어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클리엔테스들이 대 거 투표에 참가했기 때문인지, 또는 '스키피오 재판'에서 보여준 의연한 태도 덕분에 시민들 이 존경을 표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이 모든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법무관으로 선출된 것은 전략 단위인 2개 군단에 대한 '절대 지휘권'(임페리움)을 가질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179년, 41세의 그라쿠스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 에스파냐에 총독 으로 파견되었다. 로마의 통치에 반기를 든 에스파냐 원주민에게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그라쿠스는 타고난 진면목을 발휘한다. 노예로 이루어진 군단을 채찍 대신 자유 민과 동등한 대우로 지휘함으로써 한니발에게 대항한 아버지의 아들다움을 보여주는 위업을 쌓았다. 집요하게 로마에 저항하고 있던 에스파냐는 그후 반세기 동안 평화를 누리게 되었 는데, 이는 그라쿠스가 피통치자의 마음을 헤아린 공정한 통치 체제를 확립한 결과였다. 원 로원도 로마로 귀환한 전직 법무관에게 개선식 거행을 승낙함으로써 그의 공적에 보답했다. 2년 뒤인 기원전 177년, 그라쿠스는 로마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콘술)에 선출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2, 3년 뒤에 조르넬리아와 결혼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딸을 주겠다고 약속한 지 12년이나 지난 뒤에 결혼한 것은 약혼 당시에 코르넬리아가 아직 어린 소녀였기 때문이다. 상당히 나이 차이가 많은 부부였다. 기원전 169년, 그라쿠스는 최고위직은 아니지만 공화정 로마에서는 매우 중요한 관직인 재무관(켄소르)에 선출되었다. 재무관의 임무에는 공공사업 발주도 포함된다. 그라쿠스는 정 부에서 발주하는 건설사업을 일부 업자가 독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하여 가결시 켰다. 그라쿠스는 또한 장인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갖고 있던 포로 로마노 안의 저택을 사 들여, 그 자리에 그리스식 회당(바실리카)을 건설하게 했다. '바실리카 셈프로니아'라고 불린 이 회당은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같은 장소에 '바실리카 율리아'를 세울 때까지 존속 했다. 그라쿠스가 재무관으로 재직중에 수행한 일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은 법안을 제출한 일일 것이다. 5세 이상의 아들이 있고 3만 세르텔티아 이상의 재산을 가진 해방노예 한테는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를 인정한 법안이다. 이 법안이 민회에서 의결됨으로써 전에는 노예였던 사람도 이제는 당대에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해방노예들 중에는 시내에서 상점을 경영하거나 각종 기술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들도 이제는 이웃에서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로마 평민들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신분이 되었다. 수도 로마에 특히 많은 이 새로운 시민들은 거주지에 따라 로마의 4개 선거구(트리 부스) 가운데 하나에 주민등록되었다. 6년 뒤인 기원전 163년, 57세의 그라쿠스는 두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시민권을 얻은 해방노예들이 그에게 몰표를 던졌는지도 모른다. 이를 전후하여 그라쿠스는 시찰단 단장으 로서 오리엔트를 두 번 방문했다. 동맹국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왕이 죽은 뒤 후계자 선정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을 때,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제 로마 의 역할이 되어 있었다. 그라쿠스가 죽은 것은 기원전 153년께로 여겨진다. 아내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 자식을 12명이나 낳았지만, 유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였다.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라는 두 아들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시집간 딸 하나뿐이었다. 티베리우스 는 10세 때 아버지를 여읜 셈이다. 그라쿠스는 두 아들에게 풍족한 재산과 좋은 평판과 많 은 '클리엔테스'를 남기고 죽었지만, 형 티베리우스와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동생 가이우스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코르넬리아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과부의 재혼, 특히 자식을 낳은 실적이 있는 여자의 재혼을 장려했기 때문에 남편을 다시 갖고 싶었다면 그 꿈을 쉽게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위대한 아프리카누스'의 딸이었다. 실제로 청혼하 는 남자도 많았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왕비로 맞아들이고 싶다는 이야기 까지 있었다. 하지만 코르넬리아는 모든 청혼을 물리쳤다. 자녀 양육에 전념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 였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의 양육은 어머니 코르넬리아의 세심한 배려속에 이루어졌다. 코르 넬리아 자신도 당시 로마 교양인의 자격인 그리스어를 읽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두 개의 보석'이라고 부른 두 아들의 가정교사로 그리스에서 학자를 초빙하기까지 했다. 그렇다 고 해서 가정교사나 하인인 노예들에게 두 아들을 맡겨버린 것은 아니다. '자식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맡아보는 밥상머리에서도 자란다'고 말한 여자였다. 코르넬리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와 더불어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오 랫동안 로마 여인의 귀감으로 칭송받게 된다. 두 아들은 이 어머니의 자상한 보살핌을 받으 며 심신이 모두 아름답게 성장했다. 카르타고 멸망의 현장을 목격하고 귀국한 티베리우스가 그후 몇 년 동안 어떻게 보냈는지 는 알 수 없다. 그것을 말해주는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로마의 양갓집 자제들이 밟는 코스를 충실히 따라, 그 당시 부유층 저택이 늘어서 있는 고급 주택가였던 팔라티노 언덕의 집과 군단 사이를 오가며 지냈을 게 분명하다. 스무 살 되던 해에 그는 사제로 선발되었다. 제1권에서도 말했듯이, 로마인들은 전문 사제직을 두지 않았다. 신들에게 제사를 바칠 때 에도 그 행사는 선거에서 뽑힌 시민이 맡았다. 로마는 그러나 다신교 국가이기 때문에 사제 가 나서야 할 자리는 많았다. 군단이 출전할 때는 신들에게 가호를 빌고, 군단이 귀환하면 신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제사는 많아서, 그때마다 젊은 사제도 시민이나 원로원의 높은 신사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런 티베리우스를 원로원 의장격인 '제일인자'(프린키페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크 루스가 눈여겨보았다. 어느날 그는 귀가하자마자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 고 급히 나온 아내에게 그는 다짜고짜 말했다. "클라우디아의 약혼자를 정했소." 자기한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딸애의 약혼자를 결정해 버렸다는 말에, 아내는 기분이 상해서 남편에게 대꾸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두르시는 거예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상대라면 몰라도." 남편의 말을 듣고 아내의 기분이 당장 풀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딸을 가진 어머니가 염 두에 두고 있는 바람직한 사윗감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로마 사회에 변혁을 일으키기 전의 티베리우스는, 딸을 가진 어머니라면 누구나 바라는 이상적인 사윗감 그 자체였다. 티 베리우스와 클라우디아의 결혼은 그로부터 2, 3년 뒤에 이루어진 것 같다. 기원전 137년, 26세가 된 티베리우스는 에스파냐에 파견하기로 결정된 군단의 회계감사관 (콰이스토르)으로 선임되었다. 나중에 동생 가이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 티베리우스는 에스파냐로 가는 길에 토스카나 지방을 지나게 되었는데, 넓은 토지에 자작농들은 보이지 않고 온통 외국에서 끌 려온 노예들만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책임감이 강한 젊은 엘 리트를 놀라게 하는 일은 에스파냐에 도착한 뒤에도 끊이지 않았다. '콰이스토르'는 회계감사관으로 번역되지만, 군단에 소속되면 회계감사만 하는 것이 아니 다. 군단에 필요한 모든 물자의 조달에서부터 병사들에 대한 급료 지급, 그밖에도 전투 지휘 를 제외한 군단 운영을 도맡아야 한다. 말하자면 총무와 경리 책임자이고, 로마로 귀환한 뒤 의 회계 보고도 임무 가운데 하나다. 예비 지도자인 젊은이에게 이런 임무를 경험하게 하는 관습이 로마에 있었던 것은 흥미롭다. 전투 지휘가 임무인 사령관도 현실을 반영하는 돈의 출입을 경험 해야만 비로소 병사들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티베리우스가 종군한 군단이 에스파냐에 파견된 것은 40년 만에 일어난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가 실시한 통치방식은 현지 주민을 고려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했 고, 반세기 동안이나 에스파냐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 왔다. 오랜만에 에스파냐에 파견된 로마군은 반란을 진압하기는커녕 호된 꼴을 당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패했을 뿐만 아니라, 패주하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빼앗기 고 간신히 휴전을 얻어내어 철수하는 불명예스러운 꼴을 당한 것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의 로마군 장병들의 질적 저하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현실도 젊은 티베리 우스에게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이 패전의 뒤처리를 맡은 사람은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승장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였는 데, 그는 정식으로 편성된 정규 군단을 더 이상 믿지 않고, 클리엔테스들에게 호소하여 직접 모병한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로 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티베리우스가 귀국한 해인 기원전 135년에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노예 반 란까지 일어났다. 게다가 반란이 일어난 시칠리아에 파견된 정규 군단은 반란을 진압하기는 커녕 노예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무언가가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것도 당연하다.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가 된 로마인 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로마는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을 채택한 이후 귀족계급과 평민층 사이의 대립으로 어려움 을 겪었지만,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법'으로 모든 공직을 평민층에 개방하고, 기원전 287년에는 평민집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그대로 국법으로 삼는다고 규정한 '호르텐시우스 법' 을 제정하여 귀족과 평민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평민층의 이익을 대변 하는 호민관이 사임한 뒤에는 그를 원로원 의원으로 수용함으로써, 소수 지도 체제의 '소수' 가 배타적이 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국론 분열을 방지해 왔다. 민회도 소홀히 취급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을 시작하거나 끝내는 등의 중대사는 민회가 그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고, 집정관을 비롯한 모든 주요 관직은 민회에서 선출되었기 때문 에 인사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은 시민 각자의 재산 정도에 따라 할당되었기 때문에, 사회 정의라는 측면에서도 형평성을 유지했다. 전쟁 비용을 시민에게 할당하는 이 제도는 비록 강제성을 띠기는 했어도 국고가 충실해진 뒤에는 상환했기 때문에 일종의 전시국채라고 할 수 있는데, 기한이 20년이나 된다는 점과 이자가 한푼도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실질적으로는 임시 목적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게다 가 부유층에서는 돈만 낸 것이 아니었다. 로마인들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른 제2차 포에 니 전쟁은 17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동안 집정관 자격으로 최전선에 나가 싸운 사람은 25 명에 이른다. 그 25명 가운데 무려 8명이 전사했다.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집정관만 해도 이 정도였다. 시민병의 희생도 엄청났다. 하지만 로마는 사회의 상층부에서 맨 아래까지 일치단 결하여 한니발 전쟁을 이겨냈다. 그런데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인 기원전 200년을 경계로 하여 그것이 달라졌다. 우선, 로마군은 연전연승을 자랑하게 되었다. 총사령관 중에는 전사자가 한 명도 없게 되 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일이지만, 매사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함께 갖게 마련이다. 집 정관을 배출한 가문의 자손은 귀족(노빌리스)으로 인정하여 원로원 계급의 폐쇄화를 막으려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10년 간격을 두고 집정관에 재선된 경우는 생각지 말고 1년에 두 명씩으로 단순히 계산하 면, 기원전 200년부터 카르타고가 멸망한 해인 기원전 146년까지 54년 동안의 집정관 수는 108명이 된다. 이들 가운데 과거에 집정관을 한번도 배출한 적이 없는 가문의 출신자, 즉 로 마인들이 '신참자'(호모 노부스)라고 부른 사람의 수는 8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머지 100명 은 코르넬리우스와 발레리우스와 셈프로니우스 등 28개 일족에 집중되어 있다. 귀족과 평민 의 차이도 서로 다투는 계급으로서는 없어졌다. 귀족과 평민간의 혼인도 일상다반사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같은 로마 시민이라도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점점 고정되어 가고 있었다. 원로원은 원래 왕에 대한 자문기구로 생겨난 만큼 결정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원로원 권고'(세나투스 콘술툼)는 원로원에서 토의한 끝에 결정된 원로원의 '조언'일 뿐, 원로원이 그것을 정책화할 권한은 없다. 로마 공화정은 이론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주권재민의 체제였 다. 그런데 한니발 전쟁이라는 비상사태가 그것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당시에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던 로마는 원로원 권고를 그대로 정책화함으로써 이 비상시국을 극복했 다. 하지만 비상사태가 끝난 뒤에도 이 방식이 계속 이어졌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훌륭히 기능을 발휘했기 때문에, 그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탓도 있다. 그 러는 동안, 원래는 권고할 권한밖에 갖지 않은 원로원에 권력이 집중되어갔다. 그것도 로마 의 패권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확대되는 기간과 겹쳤기 때문에 원로원 에 집중된 권력은 엄청난 것이 되었다. 우선 외교권이 있었다. 로마의 패권하에 있는 속주나 동맹국의 사절은 원로원에 초대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지방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나가서 해결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둘째는 인사권이다. 주요 공직은 민회에서 선출되었지만, 거기에 출마하는 것을 허락할 것 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는 원로원이 결정했다. 셋째는 재정권이다. 속주의 조세제도를 결정하는 것도 원로원이고, 국고 지불을 결정하는 것은 원로원 의원을 겸한 재무관이었다. 재무관은 5년마다 시민들의 재산 상태를 조사하는 책임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에게는 '국세청'이기도 했던 셈이다. 공공사업 발주권 도 재무관이 쥐고 있었다. 넷째는 사법권이다. 로마 시민에게는 항소권이 있고, 속주민에게도 고발할 권리가 인정되 어 있었지만, 그것을 재판하는 기관의 장은 원로원 의원인 법무관이었고, 평결을 내리는 배 심원단은 원로원 의원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끝으로, 군사권조차도 실제로는 원로원에 있었다. 집정관 선출권은 민회에 있었지만, 선출 된 두 집정관의 임지를 결정하는 것은 원로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직 집정관에게 어느 속 주의 통치를 맡길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원로원이 내렸다. 이 정도의 권력 집중이라도 그것이 사회 불안과 이어지지 않았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는 않았을 것이다. 로마인은 관념적인 그리스인과는 달리, 로마의 독자적 체제인 소수 지도 체제, 즉 공화정 체제 자체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체제가 기능을 제대로 발 휘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문제로 삼았다. 다음 쪽에 있는 표는 병역 해당자로 간주되고 있던 로마 시민의 수인데, 17세부터 60세까 지의 남자로서 병역 형태의 직접세를 낼 수 있는 재산 소유자만 계산한 것이다. <표> 제1차 포에니 전쟁 후(기원전 241년) 제1계급 100,000이상 제2계급 100,000에서 75,000 제3계급 75,000에서 50,000 제4계급 50,000에서 25,000 제5계급 25,000에서 12,000 제1계급과 제5계급의 사이의 격차 10배이상 무 산자계급 12,500미만의 재산밖에 갖지 않은 면세 계급, 따라서 병역도 면제. 제3차 포에니 전쟁후(기원전 146년) 제1계급 1,000,000이상 제2계급 1,000,000에서 300,000 제3계급 300,000에서 100,000 제4 계급 100,000에서 50,000 제5계급 50,000에서 6,400 얼마 후에는 4,500 이하가 되고, 기원전 130년 경에는 1,500까지 떨어짐. 제1계급과 제5계급의 사이의 격차 500배이상 무산자계급 6,400미만(단위: 아세) 대규모 전쟁도 없는 시기인데다 재산의 하한선을 내렸는데도 시민수가 줄어든 것은, 가장 이 종군하고 있는 동안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 만한 재산의 소유 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은 무산자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이다. 로마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확대된 것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로마를 덮친 사회불안은 과거처 럼 평민층이 귀족계급에 대해 정치적 평등을 요구하며 일으킨 항쟁과는 달랐다. 기원전 2세 기 후반부터 시작된 항쟁은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빈민층과 부유층 사이에 일어났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부유층의 재산 규모가 훨씬 향상된 것이 보여주듯이 지중해 세 계의 지배자가 된 로마인데, 왜 공화정 로마의 핵심이었던 일반 시민의 수가 줄어드는 사태 가 일어났는가. <표> 병역 해당자인 로마 시민권 소유자 수의 변천 연대(기원전) 로마 시민권 소유자 수 241 260,000 제1차 포에니 전쟁 종료 225 291,200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기 7년 전 204 214,000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기 2년 전 189 258,314 시리아 전쟁이 끝난 지 1년 뒤 179 258,794 에스파냐에 파견된 병사들이 조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변화하지 않음. 169 312,805 마케도니아 왕국의 멸망 159 328,316 로마에 큰 전쟁이 없었던 시기 147 322,000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136 317,933 대규모 전쟁 없음 사회 불안은 흔히 경제 불안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경제 불안은 실업자 증가라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로마인은 원래 농경 민족이었다. 농민으로서는 근면하고 진취성도 풍부하여 로마 농민의 생산성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갈리아인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또한 농 업은 시민의 직업으로도 홀륭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이야기지만, 독재 관에 추대된 킨킨나투스는 괭이를 버리고 지휘봉을 잡았다가 전쟁에 이기고 돌아온 뒤에는 다시 괭이를 들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당시 로마의 농업은 가족 규모의 자작농이고, 노예 가 있다 해도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후 농경지도 노예도 조금씩 늘어났지만, 자작농이 주류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들 소규 모 자작농들은 제4계급과 제5계급에 속하는 자산가로서 직접세 대신인 병역에 종사하여 로 마의 패권 확립에 일익을 담당해 왔다. 선비와 농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던 점을 제외하 면, 사농공상이란 말은 당시의 로마인을 위해 있었던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이탈리아 안에서 일어난 경제 구조의 변화가 이 중산층을 곧바로 덮치게 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인 기원전 240년부터 속주로 편입된 시칠리아에서 직접세로 들어오는 다량의 밀이 이미 소규모 자작농의 밀생산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 가격 경쟁력에 서 패배한 밀 대신, 로마 농민들은 목축업과 올리브유 및 포도주 생산에 주력하게 된다. 소 규모 자작농이 농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시대에는 그래도 농가가 존립 기반을 가질 수 있었다. 로마의 힘이 강해질수록 도로 같은 사회간접자본도 충실해지고, 그에 따라 동맹 시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체의 생산성이 높아져 올리브유나 포도주 수요도 늘어났기 때문이 다. 그런데 이것도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첫째,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필요한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전시국채 같은 형 태의 채권을 시민들한테 구입하도록 했는데, 기원전 187년에 이 부채를 완전히 갚았다. 기원전 167년에는 임시 목적세인 이 직접세조차도 앞으로는 완전히 폐지하겠다고 발표하 고, 그대로 시행했다. 서쪽으로는 에스파냐에서 동쪽으로는 그리스까지 퍼져 있는 속주에서 '10분의 1 세'라는 십일조세와 광산 수입이 들어오게 되었고, 거기에다 국유지 임대료와 항 만 사용료 등의 간접세를 합하면, 로마 시민에게 '직접세'를 거둘 필요는 없어졌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내가 전시국채라고 의역한 '직접세'는 재산 정도에 따라 부과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폐지 됨으로써 이익을 얻는 것은 부유층이다. '돈이 남아도는 상태'의 첫번째 원인은 여기서 생겨 났다. 두 번째 원인은 로마의 패권 확대에 자극을 받은 즉 시장 확대에 자극을 받은 '기사계급' 의 대두였다. 라틴어의 '에퀴타스'를 기사계급으로 직역하면 기병을 말하나 보다 생각하기 쉽지만, 의역 하면 '경제인'이다. 로마 군단에 기병대를 제공할 의무를 가진, 제1계급에 속할 정도의 자산 가라는 뜻이다. 다만 국정을 담당하는 '귀족계급' 또는 '원로원 계급'과 구별하여 '기사계급' 이라고 불렀던 것은, 명문 귀족이나 평민 귀족과는 달리 집정관을 지낸 조상이 없기 때문에 국정 참여라는 난관에 도전하기보다는 경제활동에 전념하는 길을 택한 자들을 가리키고 있 었기 때문이다. 원로원 계급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사 계급에 속한 자들의 활동 분야는 충분했다. 그리고 로마의 세력 확장이 그들의 시장 확대로 이어졌다. '기사'들의 일도 많았다. 당초의 주된 일은 국가의 하청을 받아 조세를 거두는 청부업자였 는데, 여기에 낙찰되면 수수료가 들어온다. 게다가 납세자들은 흔히 세금을 내기 위해 빚을 지기 때문에 대금업도 그들의 사업이 되었다. 세금을 대신 내주고, 그 돈은 빚으로 하여 나 중에 올려받는 것이다. 로마 원로원은 악질적인 금융업자를 방치하지는 않았지만, 공화정 시 대에는 아직 거기까지는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나중에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가 된 브루 투스는 이자를 무려 48퍼센트나 받으려 했다고 키케로는 어이없어했다. 양심적인 업자라도 이율은 1년에 12퍼센트였다. 군단에 물자를 납품하는 것도 '기사'들의 일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인지는 현대의 군납업자를 생각해 보아도 짐작이 간다. 공공사업도 그들이 도급맡았다. 로마가 풍요로운 국가가 되어가고 있던 이 시기에 석회와 화산재를 혼합한 시멘트가 개발되었다. 기원전 190년부터 기원전 140년까지, 재판이나 상담 이나 시민 집회를 위한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포르키아, 아이밀리아, 셈프로니아 등 세 개의 회당(바실리카)이 건설되었고, 신전은 재건축을 포함하여 8개가 건설되었다. 수도로는 전례 가 없을 만큼 대규모인 마르키아노 수도가 기원전 144년에 건설되었고, 기원전 179년에는 테베레 강에 석조 다리가 놓였다. 이밖에도 도로 보수나 간척사업도 있었다. '기사'들은 동료 끼리 합자회사를 조직하여 이런 대규모 사업을 맡았다. 그들은 로마 이외의 곳에서 벌이는 경제활동에도 회사와 비슷한 이런 조직 형태를 활용한 것 같다. 본사는 로마에 두고 속주나 동맹시 등지에는 지점을 두었는데, 지점에서는 경제적 재능이 뛰어난 그리스계 이탈리아인들이 활약했다.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자들의 암묵적인 지지도 있었기 때문 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법률에는 항상 빠 져나갈 구멍이 있게 마련이다. 대다수 원로원 의원들은 자기 집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재산 을 그들의 명의로 돌려놓은 다음, 이 재산을 운용하는 관리인으로 해방노예를 활용했다. '스 키피오 재판'의 주모자인 카토는 청렴을 자랑으로 내세웠지만, 그 카토조차도 해방노예를 통 해 '장사'에 돈을 투자했다. 요컨대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게끔 되어 있었다. 재산이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투자를 생각한다. 게다가 투자 대상으로 는 토지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를 게 없다. 부동산을 갖지 않은 신분이 라서 정치를 체념하고 경제를 선택한 '기사'들 역시 투자 대상으로는 토지가 제일이라고 생 각했다 그러면 공화정 로마에 투자할 만한 토지는 있었던가. 공화정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제패한 시대에도 로마와 싸워서 패한 도시와 시민을 멸망 시키지 않고 '동맹자'(소키)로 삼는 대신, 상대가 가진 토지의 일부를 몰수하여 로마의 국유 지로 삼는 방식을 택했다. 연구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기원전 140년 당시의 국유지는 50만 헥타르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것은 로마 전체 영토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이런 국유지(아게르 푸블리쿠스)를 로마 시민들에게 빌려주었다. 임대료는 밀밭의 경우는 1년 수익금의 10분의 1, 올리브밭이나 포도밭인 경우는 5분의 1이었다. 소작료로 생각하면 지극히 타당한 액수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국유지 임차권은 자손에게 상속하는 것이 인정되었고,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도 금 지되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는 사유지라 해도 좋았다. 물론 법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국유지였 지만. 이 국유지에 잉여자금이 유입되었다. 목축업이나 올리브 또는 포도재배는 몇 년 뒤에나 회수를 기대할 수 있는 선행 투자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사용할 수 있는 토지가 넓을수록 수익률도 높아지지만, 미리 투자해야 하는 액수도 그만큼 많아진다. 기원전 2세기 전반을 특 징짓는 연전연승으로, 로마에는 노예라는 값싼 노동력이 대량으로 들어왔다. 수요보다 공급 이 많아져 노예 가격이 내려간데다, 로마 시민인 농민과는 달리 로마 시민이 아닌 노예한테 는 병역 의무가 없다는 점도 노동력으로서 노예가 가진 매력이었다. 농민들이 병역에 종사한 뒤 귀향해 보면, 그가 없는 동안 가족 노동으로 얻은 수확물은 노예를 부리는 대규모 농장의 수확물에 밀려 팔리지 않거나 가격이 폭락하여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곤경을 타개하려고 빚을 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헛된 몸 부림에 불과하다. 문제는 로마 농민들의 근로 의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로마 농업의 구조 변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군사력이 자작농이라는 중산층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아는 위정자들이 토지 가 소수의 손에 흡수되는 것을 그냥 방치한 것은 아니다. 이 현상이 아직 뚜렷해지지 않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전에 이미 국유지를 임차할 수 있는 상한선을 500유겔룸(약 125헥타 르)으로 규정한 법률을 가결시켰다. 하지만 여기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농업 은 당당히 할 수 있는 원로원 의원들은 자기 명의로는 규정대로 500유겔룸의 토지만 임차한 다 해도, 가족이나 친척 명의로 많은 토지를 임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법률이 제정된 지 한 세기가 지난 기원전 2세기 후반에는 임차지 제한법은 완전히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병역에 징집될 염려가 없는 안정된 노동력인 노예를 이용하여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면 수 익이 늘어날 건 뻔한 일이다. 아마 로마 전체로 보면 농업 생산은 증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좋은 것이 사회적으로도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자작 농들이 부채 때문에 땅을 빼앗기거나 가격경쟁에 패하여 땅을 헐값으로 내놓은 결과, 실업 자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부가 집중되는 수도 로마로 흘러들었다. 연구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이런 이농민이 로마 인구의 7퍼센트에 이르렀다니까, 엄청난 사회 문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 문제는 복지를 확충한다고 해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이들 실업자는 단순히 일자리 를 잃었기 때문에 생활 수단을 잃은 자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온종일 통 속에 누워 있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철학자 디 오게네스같은 인물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하다. 많은 보통 사람은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해 간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존심은 복지로는 절대로 회복할 수 없다.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일자리를 되찾아주는 것뿐이다. 로마의 '실업자'에 대해, 이제 재산을 잃고 무산자가 되었으니까 병역이나 직접세도 면제 받고 좋은 팔자가 되지 않았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래서는 기원전 2세기의 로마 시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제구실을 하는 어엿한 시민이 아니라는 생각 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인구조사에 나오는 숫자는 병역 해당자뿐인데, 기원전 159년까지 계속 늘어나던 인구가 그해를 고비로 계속 감소하는 추세로 바뀐다. 17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 수가 줄어 든 것은 아니다. 병역에 종사할 자격이 있는 최소한의 재산을 가진 시민 수가 줄어든 것이 다. 병역 자격을 가진 재산의 하한선을 1만 2천 500아세에서 6천 400아세로 낮추었는데도 병사를 징집하기가 어려워, 4천 500아세까지 다시 낮추었지만 시민 수가 줄어든 것이다. 그 대신 병역을 면제받는 무산자 수가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재산의 하한선이 내려간 결과, 전 에는 병역에 종사할 수 없었던 자들까지 군대에 끌려나가는 처지가 되었다. 이 하급 병사들 이 에스파냐 원주민이나 시칠리아의 반란 노예들을 상대로 선전하지 못했다 해도, 그 책임 은 그들한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에스파냐나 시칠리아에서의 싸움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방어전도 아니었다. 그 싸움은 로마라는 국가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런 만큼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의 마음도 흐릿할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134년 여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임기가 시작되 는 이듬해에야 30세가 되니까, 그 무렵에는 아직 29세였다. 하지만 특유의 조용하고 감정을 억제한 말투를 썼는데, 젊은 호민관의 연설은 로마 시민들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들짐승도 날짐승도 저마다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돌아가면 마음껏 쉴 수 있는 곳 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로마 시민들에게는 햇볕과 공기밖에 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도 없고 땅도 없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헤매다닐 수밖에 없습 니다. 전쟁터에서 지휘관은 그들을 독려하면서, 너희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너희의 가족과 조상의 무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고 속임수였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병사들은 조상을 모실 무덤도 없고, 조상을 제사지낼 제단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 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용감하게 싸웠고 용감하게 죽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 니라, 남의 재산과 행운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시민은 이제 승리자이고, 세계의 패권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 까. 로마 시민들은 이제 자기 것이라고는 흙 한줌 갖고 있지 않습니다." 호민관 임기는 12월 10일에 시작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그보다 앞서 농지개 혁 법안을 제출했다. 그의 '농지법'(렉스 아그라리아)은 오늘날의 농지개혁법과는 물론 다르다. 로마인에게 사유 재산의 보호는 자명한 기본권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광대한 토지라도 사유지 는 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라쿠스 가문이 속해 있는 셈프로니우스 일족의 이름을 따서 '셈프로니우스 농지법'(렉스 아그라리아 셈프로니아)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국유지만 대상으 로 하고 있었다. 그라쿠스가 제출한 이 법안은 다음과 같은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임차할 수 있는 국유지의 상한선을 500유겔룸(125헥타르)으로 정한다. 이밖에 아들의 명의로 아들 한 명당 250유겔룸까지의 임차를 인정한다. 다만, 일가족 전체의 임차지가 1천 유겔룸을 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목축용 가축수도 600마리를 상한으로 한다. 2. 국유지 임차권은 상속할 수는 있지만 남에게 양도할 수는 없다. 3. 1천 유겔룸 이상의 토지를 임차하고 있는 자는 그것을 국가에 반환하고, 국가는 반환된 토지의 면적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한다. 그런 다음 국가는 상설 실무위원회를 설치하여 희 망하는 농민에게 임차 농지를 재분배한다. 이 법안은 평등을 겨냥한 개혁안이 아니라 공정을 겨냥한 개혁안이다. 대다수 농민의 임 차지 면적은 30유겔룸(7.5헥타르) 정도였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제창한 농지개 혁은 100년 전에 법제화되었다가 그후 유명무실해진 것을 원상태로 돌려놓은 데 불과하다. 임차료도 변화가 없었다. 임차한 국유지라 해도 사실상 사유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 부과되 는 임차료는 고정 재산세와 마찬가지였다. 다만, 부유층이 친척이나 해방노예의 명의로 땅을 마구 빌리는 상태를 바로잡으려는 의도는 확실히 드러나 있었다.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에 대해 원로원도 처음에는 두드러지게 반대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 았다. 그라쿠스의 법안이 공정성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젊은 호민관의 장인이자 원로원의 실력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도, 그리고 고명한 법률가로서 그해의 집정관에 선출된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도 적극적인 찬성파로 돌아섰다. 기득권을 침해당했다 고 속으로는 그라쿠스의 농지법에 반대했던 원로원 의원들도, 중산층의 감소에 따라 로마의 군사력이 양적, 질적으로 저하되는 현실에는 눈을 감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맞대 놓고 반대를 외칠 수는 없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생각은 확고부동했다. 농민에서 무산자로 전락한 이들에게 농지라는 재산을 주어 자작농에 복귀시킴으로써 로마 시민층의 기반을 건전하게 하고, 실업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사회 불안을 해소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시민층의 건전화만 이루어지면,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구성되는 로마 군단도 다시금 양적, 질적으로 향상하여 원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염두에 두고있는 것은 옛날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벌어진 것 같은 계급투쟁, 즉 다른 계급을 배척해야만 실현될 수 있는 계급투쟁이 아니었다. 이 단계에서는 기득권 세력인 원로원 계급조차도 국론의 분열을 꾀한 다는 구실로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농지를 분배하는 것만으로는 자작농이 농가로서 자립하도록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고는 말할 수 없다. 대평원이 없는 이탈리아 토지에는 올리브나 포도 재배와 목축업이 적합 하다는 것은 로마 최초의 농서를 쓴 카토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선 행 투자가 필요한데, 도시로 흘러든 무산자(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그 자금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호민관 그라쿠스는 반환 토지에 대한 보상금 외에 이들 무산자에게 제공할 보조금도 국고에서 지불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보수파 원로원 의원들이 이번에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나섰 다. 개인에 대한 보조금을 국고에서 지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농지법으로 분 배된 농지의 임차권은 상속할 수 있기 때문에, 사유지로 생각해도 좋았다. 하지만 이것은 어 디까지나 표면상의 이유였고, 그들이 정말로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드러내 놓고 반대할 수 없는 부정 임차 농지의 반환이었다. 반대파는 옥타비우스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그라쿠스와 같은 호민관이지만 보수 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네 명의 호민관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그 법안은 민회에 제출할 수 없게 된다. 옥타비우스는 법으로 인정되어 있는 거부권(비토)을 행 사한 것이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나이도 같고, 소년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 였다. 둘 다 양갓집 출신이라서, 오전에는 양갓집자제의 관습에 따라 집에서 가정교사와 함 께 공부를 한 다음, 오후가 되면 성 밖의 마르스 광장에 있는 체육관에 가서 신체 단련에 힘쓰는 친구 사이였다. 불알 친구의 거부권 행사는 티베리우스에게는 예기치 못한 타격이었 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농지개혁을 단념할 마음도 없었고, 일보 전진을 위한 반보 후퇴의 마음도 없었다. 그렇다고 막후에서 공작하여 옥타비우스를 구슬리는 것은 티베리우스의 성 격으로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당당한 논쟁으로 옥타비우스를 설득 하려 했다. 날마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이 계속되었다. 논쟁이 아무리 뜨거워져도 서로 욕 하거나 상대의 약점을 꼬집지 않았고, 거친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 졌어도 예의와 품위는 엄정하게 지켰다. 옥타비우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자주 설복당하는 것 같았지만, 논쟁이 끝나면 배후에 있는 반대파 사람들이 그를 격려하며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옥타비우스가 거부권 행사의 뜻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그라쿠스는 마침내 최후의 수단에 호소하기로 결심한다. 옥타비우스를 호민관에서 해임하는 로마 역사상 전례가 없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민회에 회부하면 가결될 게 분명한 농지법을 성립시키려면 그 방법밖 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시민의 권리 수호를 망각한 호민관은 더 이상 호민관 자격이 없 다는 그라쿠스의 말에 시민들은 찬성표를 던졌다. 거부권을 행사할 사람이 없어진 뒤, 민회 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법을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했다. 부정 임차된 국유지를 환수하여 무산자에게 재분배하는 실무를 담당한 '3인 위원회''도 활 동을 개시했다. 위원으로는 티베리우스가 직접 취임했고, 나머지 두 위원으로는 장인인 아피 우스 클라우디우스와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선임되었다. 하지만 동생 가이우스는 원 주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에스파냐에 주둔하고 있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에 종군하러 곧 로마를 떠나야 했고, 장인인 아피우스는 노환으로 병석에 누울 때가 많았다. 티 베리우스는 혼자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티베리우스한테서 잠잘 시간마저 빼앗 아 버렸다. 30세의 한창 나이니까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법안이 성립된 뒤에도 반대파는 농지 임차를 원하는 사람들과 대화 할 장소 제공을 거절 하는 따위의 고식적인 수단으로 방해를 계속했지만, 젊은 호민관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농지법이 성립된 뒤,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직에 부여된 시민 보호라는 측면을 농지법 이 성립되기 전보다 훨씬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하지만 당초에는 그를 지지했던 원로원의 양식있는 온건파가 티베리우스한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부정 임차한 토지를 국가에 반환할 때는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조 차도 변함없이 그라쿠스를 지지했다. 불법행위는 허용되어서는 안되고, 얼핏 보기에 부유층 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라쿠스의 행위도 옥타비우스를 호민관에서 해임하는 데 필요 한 표를 획득하기 위해서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 었다. 그런데 때마침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3세가 죽으면서 그의 왕국을 로마에 유증했 다.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이 페르가몬 왕국의 영토에서 들어오는 조세를 영 농 자금의 재원으로 삼자고 나온 것이다. 원로원이 로마의 세력하에 들어온 지방을 로마의 속주로 재편성할 권한을 갖게 된 지 70 년이 지났다. 어떤 지방을 속주로 삼기로 결정되면, 원로원 의원 10명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그곳을 방문하여 실태를 조사한 뒤, 그 보고서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통치 체제를 창안하고, 이것이 원로원에서 의결되어야만 비로소 속주의 통치 형태가 결정된다. 말하자면 외교 문제 와 관련된 안건은 본래 원로원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라쿠스의 제안은 원로 원의 권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여졌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자금이 필요했다. 유민들을 농지에 정착시키려면 당장의 생활비와 선행 투자비까지 주어서 분배한 땅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을 갚지 못해 땅을 내놓게 되면, 결국 도로아미타불로 끝날 터였다. 임차권은 양도할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먹을 것이 없어지면 법이고 뭐고 따질 형편이 못 된다. 그라쿠스는 농지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에 호소해서라도 재원을 확보 하는 것이 선결 문제라고 생각했다. 국고 지출을 꺼리는 재무관 때문에 애를 먹고 있던 그 에게, 후사가 없는 아탈로스 3세가 페르가몬 왕국을 로마 시민에게 유증했다는 소식은 천우 신조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라쿠스의 방식을 원로원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원로원의 반대는 강 경했다. 그라쿠스 역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탈로스 3세의 유언에는 페르가몬 왕국 을 로마 시민에게 남긴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로마 시민의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 가를 반드시 원로원이 결정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그라쿠스는 주장했다. 그라쿠스의 제안 은 귀족과 평민 모두 참석할 수 있는 민회가 아니라 평민만이 참석권을 가진 평민집회에서 가결되었고, 평민집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그대로 법제화할 수 있다고 규정한 '호르텐시우스 법'에 따라 정책으로 성립되었다. 이는 원로원이 국정을 주도함으로써 유지되어온 과두정 체제에 대한 최초의 명백한 도전 행위였다. 원로원을 거점으로 삼아온 위정자 계급은 70년 동안이나 안주해온 체제가 흔들리 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게다가 그 체제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들 계급의 일원으 로 생각하고 있던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열렬히 지지해준 이들의 태도가 곤혹스러운 처지가 된 것을 티베리우스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것이 오히려 그의 의지를 강화시켰다. 법률로 성 립되어 실행 단계로 넘어간 농지법은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도중에 흐지부지 끝내서는 안되 었다. 계속 추진함으로써 공화정 로마의 기반을 확고하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로마도 멸 망한 다른 나라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위기의식이 계속 고립되고 있는 그를 지탱해 주었다. 30세의 호민관은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호민관에 재선되어 개혁을 계속 추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12월 10일부터 시작된 호민관 임기는 벌써 절반이 지나 가 버렸다. 호민관 선거는 매년 7월에 실시된다. 7월에 다른 사람이 호민관에 선출되어도 그 의 임기는 아직 반년이 남아 있지만, 그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선출되면 남은 반년의 임기 중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티베리우스는 그 점을 우려 했다. 한니발 전쟁 이후 로마는 비상시국이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집정관의 연임을 허용하 지 않는 제도로 돌아가 있었다. 다른 관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호민관의 연임을 금지한 법은 없었다. 호민관만은 국가의 공직이 아니라 평민층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국가 를 구성하고 있는 일부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애당초 호민관 제도를 창설한 이유였 다. 기원전 4세기에 이미 호민관 경력자에게는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석을 제공한다고 규정한 법률이 성립되었다. 건국 이래의 명문 귀족이 아닌, 이른바 평민 귀족들에게는 호민관을 지 인 뒤 원로원에 들어가 법무관을 거쳐서 집정관에 이르는 길이 정치 경력의 엘리트 코스였 다. 지금까지 호민관의 연임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호민관을 계속하기보다 원로원에 들어가는 편이 출세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호민관은 법적으로는 공직이 아니었지만, 실제로 는 모든 점에서 연임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다른 공직과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나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법으로 밀고 나아가기로 결심 했다. 그 무렵, 그의 주위에는 열광적으로 그를 지지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도 대부 분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부유층 출신이었다. 이 젊은이들이 재선 가능성을 탐색 하기 위해 여론을 조사하며 뛰어다녔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돌아온 정보에 따르면, 뜻밖 에도 티베리우스의 재선은 어렵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으로 손해를 보는 원로원 의원들의 반대는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었 다. 개혁에는 찬성하지만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 체제를 무너뜨릴 마음이 없는 그들의 반대 도 이 무렵에는 명백해졌다. 하지만 호민관 선거는 평민집회에서 실시된다. 원로원 및 민회 와 따로 독립된 평민집회의 투표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 평민집회에서 당선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평민층의 지지조차 위태로워졌다는 뜻이다. 직접민주정치의 결함 가운데 하나는 투표장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의 의견이 더 많이 반 영되는 데 있다. 수도 로마에서 열리는 평민집회의 결정을 좌우하는 것은 먼 곳에 사는 로 마 시인보다 수도 로마에 사는 주민들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수도 로마에 거주하는 평민층 에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농경지를 분배하여 건전한 자작농을 육성한다는 그 라쿠스의 농지개혁은 그들과는 직접 관계가 없을 일이었다. 그래도 공공의식이 강한 로마 평민들은 그라쿠스의 농지법에 찬성했다. 재산이 없는 무산 자와 실업자의 증가가 사회 불안의 원인이라는 것은 부유층보다 무산자와 직접 접촉할 기 회가 많은 평민들이 더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평민층은 평민집회를 갖고 호민관까지 두고 있었을 정도니까, 평민이라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 평민층을 대표하는 사람이 호민관이다. 매년 4명씩 선출되 는 호민관은 동등한 지위와 권한을 갖는다. 그런데 그라쿠스는 동료 호민관인 옥타비우스의 해임을 감행했다. 그때는 해임안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자기네 대표인 호민관을 해임하는 전 례없는 일을 저질러버린 로마 평민층의 마음속에는 그 일이 아직도 께름칙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라쿠스의 재선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결심한 반대파가 그들 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재선되어 자기 개인에 대한 권력 집중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반대파 가 내건 기치였다.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진 일도 사리사욕 때문 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은 어제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로마는 공화정 국가다. 독재 자를 꿈꾸고 있다는 비난만큼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쉬운 말은 없었다. 이리하여 그라쿠 스의 재선에 확실히 찬성표를 던질 평민은 농지개혁으로 직접 이익을 얻는 도시 프롤레타리 아트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로마의 선거제도는 재산이 많을수록 표를 많이 가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수도 적지 않았고, 또한 로마에서 열리는 평민 집회에는 모두 모일 수 있다는 이점도 갖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이들에게 주어지는 표수 자체는 극히 적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티베리우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무산자가 아닌 평민들의 지지를 되 찾을 방법을 궁리했다. 유산자이므로 당연히 병역 의무가 있었다. 또한 평민들 중에는 해외 까지 시장을 확대한 경제인도 많았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병역 기간 단축을 제안하는 법안과 사법에 관한 법안을 제출했다. 후자는 그때까지 원로원이 독점하고 있던 배심원을 원로원 의원과 '기사계급', 즉 부유한 평 민으로 반반씩 구성하자는 법안이다. 이것으로 티베리우스는 호민관 재선에 필요한 표를 획 득하려고 생각했다. 이 두 가지 법안에 대한 평판은 당장 평민 사이에 퍼졌다. 아직 법안이 의결되지도 않았는데, 그라쿠스에 대한 그들의 호의는 다시금 확실해졌다. 반대파의 위기감 은 더한층 높아졌다. 곧 찾아온 호민관 선거일, 투표장을 가득 메운 유권자들은 평민집회가 열리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도착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열광적인 환호로 맞이했다. 호민관 재선의 길은 활짝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하지만 그라쿠스에게 표를 던지려고 예년보다 많은 시민이 모인 것이 뜻하지 않은 사태를 낳았다. 카피톨리노 언덕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가장 높지만, 언덕 위의 면적은 어느 언덕보 다도 좁다. 그 좁은 언덕 위에는 최고신 유피테르를 모시는 신전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신 전이 다섯 개나 서 있다. 평민집회가 열리는 장소는 최고신 유피테르 신전 앞 광장이지만,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서 가장 넓은 그곳도 빽빽이 모여든 평민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거기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피데스(신의의 신) 신전 안에서는 위기감에 사로잡 힌 원로원 의원들이 회의를 열고 있었다. 유권자가 평소보다 많이 모인 집회장에서는 여느 때처럼 질서있는 선거를 진행하기가 어 려워져 있었다. 찬성파 시민들 외에 반대파 시민들도 함께 모여 있었던 것이 혼란을 가중시 켰다. 반대파 시민들이 그라쿠스가 서 있는 신전 정면의 계단을 향해 떼지어 나아가기 시작 했다. 찬성파 시민들은 그들을 물리치려고 했다. 바로 그때 찬성파 원로원 의원인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원로원에서 진행된 토의 상황을 알려주려고 달려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라쿠스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가 가까운 신전의 계단 위에 올라가서 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본 그라쿠스가 군중에게 길을 열어주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플라쿠스는 겨우 그의 곁에 올 수 있었다. 플라쿠스의 보고에 따르면, 반대파 의원들이 집정관에게 실력행사 를 호소했지만 집정관이 승낙하지 않자, 그들은 하인들과 노예들한테까지 무기를 주어 자기 들끼리라도 그라쿠스의 재선을 저지할 태세라는 것이었다. 이를 안 그라쿠스 지지자들도 태도가 강경해졌다. 그들은 일제히 토가 자락을 걷어올려 허리께에 묶었다. 지금까지 군중을 정리하는 데 사용하고 있던 몽둥이를 하나씩 나누어 들 었다. 이쪽도 당장 실력행사에 돌입할 태세였다. 신전 앞 계단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그라쿠스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그라쿠스 는 설명하려고 했지만, 거기까지는 목소리가 미치지 않는 것을 알고, 위기가 임박했다는 것 을 몸짓으로 전하기 위해 머리를 손으로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이를 목격한 반대파 시민들은 원로원 회의가 열리고 있는 피데스 신전으로 달려가, 티베 리우스 그라쿠스가 시민들에게 왕관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말에 원로원 회의장 전체가 술렁거렸다. 최고제사장인 스키피오나시카가 집정관을 다 그쳤다. 폭군을 타도하여 국가를 독재자의 손에서 구출하기 위해 실력행사를 하러 나가자고. 집정관 스카이볼라는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 "저들이 폭력으로 나온 것도 아닌 터에, 재판도 하지 않고 시민을 사형에 처할 수는 없소. 만약 평민들이 티베리우스의 강요에 못 이겨 비합법적으로 그를 호민관에 선출했다면, 그건 법적으로 무효가 될 뿐이오." 이 말을 들은 나시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했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방금 보았듯이, 우리 공화국의 최고위직에 있는 집정관은 우리나라 를 배신했소. 로마 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나를 따르시오!" 이렇게 말하면서 나시카는 토가 끝을 들어올려 그것으로 머리를 덮었다. 이것은 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바치는 사제의 모습이다. 그런 모습으로 나시카는 피데스 신전을 나 가, 평민집회장인 유피테르 신전 앞 광장으로 갔다. 토가 자락을 왼손에 쥐고, 의자를 부숴 얻은 철제 의자 다리를 오른손에 쥔 원로원의 강경파 의원들이 최고제사장의 뒤를 따랐다. 평민들은 최고제사장을 앞세우고 나타난 원로원 의원들의 권위에 눌려 그 앞을 막아서기 는커녕 일제히 앞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망을 서두른 나머지, 발이 걸려서 넘어진 동 료까지 짓밟고 달아났을 정도였다. 이리하여 로마의 수호신들을 모신 신전 앞에서, 개혁파와 거기에 반대하는 보수파가 정면 으로 부딪쳤다. 개혁파는 비록 젊음에서는 보수파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나무 몽둥이밖에 갖 지 않은 처지여서 철제 의자 다리를 휘두르는 보수파에 밀렸고, 티베리우스를 지키면서 그 의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까지 도망치는 형편이었다. 티베리우스 자신도 도망치기 시작했 지만, 누군가가 그의 토가 자락을 움켜잡았다. 토가가 벗겨졌다. 짧은 투니카만 입은 차림으 로, 호민관은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포로 로마노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따라 도망쳤다. 그러나 도중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일어나려는 티베리우스를 추격자들 가운데 하나가 철봉 으로 내리쳤다. 계속해서 두번째 타격이 가해졌다. 티베리우스 외에 이날 살해된 그의 지지 자 수는 무려 300명에 이르렀다. 모두 철봉에 맞아 죽었다. 칼에 찔려 죽은 시체는 하나도 없었다. 티베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반대파의 증오는 그들을 죽인 뒤에도 가라앉지 않았 다. 그들은 시체를 거두게 해달라는 유족들의 간청도 뿌리치고, 티베리우스와 그의 일파 300 명의 시체를 테베레 강에 던져버렸다. 비극으로 끝난 이 참사에 원로원의 양식있는 의원들은 아연실색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시민들도 후회로 가슴을 쳤다. 왕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왕이 바뀔 때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공화정으로 바뀐 뒤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동포끼리 피 를 흘리면서 싸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평민층의 권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신변불가침권까지 부여받고 있던 호민관이 재직 중에 살해된 것이다. 티베리우스가 설령 재선되지 않았다 해도, 그의 호민관 임기는 그해 12 월 9일까지 보장받고 있었다. 원로원은 평민층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평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던 스키피오 나시카를 오리엔트로 보냈다. 그 지방 속주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라는 구실을 붙였지만, 사실상의 해외추방이었다. 또한 농지법은 그대로 존속시키기로 결의했다. '3인 위 원회'는 티베리우스의 죽음으로 빈 자리가 하나 생겼기 때문에,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의 장인이기도 한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새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나머지 두 위원에는 에 스파냐에서 귀국한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그대로 유임되었지만, 아 피우스가 얼마 후 병사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의 친구인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새로 취임했 다. 원로원은 비록 티베리우스는 죽었지만 농지개혁은 계속된다는 것을 평민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133년 여름에 일어난 이 참극을 불행한 사고로 여겨 과거지사로 돌리 고 싶어했지만, 이 사건은 그후 100년 동안 이어진 '로마 내전'의 단서가 되었다. 내전은 폼 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인 역사가 아피아노스는 기원전 133년부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항쟁을 거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 라의 연합군을 격파한 기원전 31년까지의 100년 동안을 다룬 저서의 표제로 복수의 내전을 나타내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직역하면 "여러 내전기"가 된다. 이 100년도 로마인에게는 '전쟁'이었다. 포에니 전쟁과 다른 점은 적이 '밖'이 아니라 로마인 자신이라는 '안'에 있었다 는 것뿐이다. 30세에 죽은 티베리우스가 호민관으로서 실제로 활동한 기간은 7개월도 채 안되었다. 하 지만 너무나 급속히 대국이 되어버린 로마에 어떤 '내장 질환'이 생겼는지가 이 젊은이를 통 해 비로소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리고 과거에 멸망한 강대국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으면 그 질환을 치료하는 것이야말로 로마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라고 티베리우스는 호소 한 것이다. 죽는 순간, 티베리우스의 마음속에는 어쩌면 분하다는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 어도 한 가지 사실만은 그에게 위안을 주었으리라. 기원전 159년 이래 줄곧 감소 추세에 있 던 병역 해당자, 즉 사회기반을 구성할 만한 재력을 가진 시민의 수가 이때를 고비로 하여 상승세로 돌아선 것이다. 공화정 로마의 인구조사는 다음과 같은 숫자를 보여주고 있다. <표> 최저치를 기록한 해 기원전 136년 317,933명 그라쿠스 개혁 2년 후 기원전 131년 318,823명 그라쿠스 개혁 8년 후 기원전 125년 394,736명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생각이 유효했음을 보여준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죽은 뒤에도 법적으로는 농지개혁이 계속되고 있었다. '3인 위원 회'도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원로원의 유력자였던 아피 우스 클라우디우스는 곧 병사했고,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 그 공석을 메운 리키니우스 크라 수스도 오리엔트에서 전사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30세부 터 공직을 맡을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공화정 로마에서는 풋내기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 는 나이다.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은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강력한 의지를 가진 견인차가 없는 이상 개점휴업상태가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가 살해된 기원전 133 년 이후의 몇 년 동안은 로마가 평화와 풍요를 누린 시기이기도 했다. 에스파냐 원주민의 반란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란군의 거점인 누만티아를 말살 한 덕분에 완전히 제압된 상태였다. 이 누만티아함락은 티베리우스의 살해와 같은 시기 에 이루어졌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 이듬해에 로마에 개선했다.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도 기원전 132년에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로마 역사상 처 음으로 일어난 본격적인 노예 반란이 이탈리아 반도가 아니라 시칠리아 섬에서 일어난 것은 시칠리아에 대규모 농장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규모의 자작농이라면 주인 과 노예가 같은 일을 하니까, 대우도 인간적이 되기 쉽다. 그런데 대규모 농장이 되면 노예 와 주인의 관계는 멀어져, 대우도 그만큼 비인간적이 되기가 쉽다. 노예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이후, 로마 정부는 노예의 처우 개선을 규정한 법률을 성립시켰다. 노예 반란이 가혹한 대우에 분노한 노예들이 주인을 죽인 것에서 비롯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에스파냐도 다시 평온해지고 시칠리아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속주에 군단을 상 주시키는 관습을 아직 갖지 않았던 로마는 편성할 필요가 있는 군단의 수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농지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열의를 둔화시켰다. 처음 얼마 동안은 원로원의 온건파 의원들이 티베리우스의 개혁에 찬성했고, 기득권을 지 키는 것밖에는 염두에 없는 보수파도 로마의 군사력이 양적, 질적으로 저하되는 것을 목격 했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병역 해당자인 시민도 그 수가 증가세로 바뀌었고, 속주가 평온해져 필요한 군단 수도 줄어들었다. 사람은 필요에 쫓기지 않으면 본질적인 문제도 잊어버리기 쉽다. 로마에 평화가 돌아온 덕분에 로마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은 뒤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절박성이 사라졌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까지 잊어버리지 않은 로마인이 티베리우 스의 동생 가이우스만은 아니었다. 로마 사회의 빈부격차 심화를 시정해야 할 필요성을 인 정하고, 그 때문에 당초부터 티베리우스를 지지했던 원로원의 온건파도 그 점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반년 동안의 활동 기간밖에 갖지 못했던 티베리우스가 부딪치 지 않은 벽에 부딪쳐 있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은 법으로 규정된 것 이상의 국유지를 임차하고 있는 자 들로부터 그 토지를 몰수하여, 농지를 잃고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된 자들에게 빌려 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권리의 공정성을 기하는 것이므로 별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개혁을 실행 에 옮길수록 또 다른 문제가 고개를 쳐들게 되었다. 국유지 임차는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동안 임차권 양도가 광범위하게 이 루어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임차권 양도가 금지된 것은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이 제 정된 이후부터다. 임차권이 로마 시민 사이에 양도된 경우에는 문제가 없었다. 불법으로 임차하고 있다면 농지법을 구실로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이니까 로마법을 지킬 의무가 있었 다. 그런데 임차권이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 즉 '로마 연합' 동맹시의 시민에게 양도된 경우 가 뜻밖에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제2권 <한니발 전쟁>에서도 말했듯이, 로마를 맹주로 하는 '로마 연합'의 각 도시국가는 군사동맹으로서의 관계 이외에 도로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공유함으로써 군사적 공동운명체 를 뛰어넘어 경제적으로도 공동운명체가 되어 있었다. 그 덕분에 포에니 전쟁이라는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로마의 패권이 지중해 세계 전역에 미치는 시대에도 군사적 경제적 측 면에서의 '로마 연합'은 건재했다. 아니, 건재한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긴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 시민과 동맹시 시민 사이의 구별도 건재했다. 이것은 로마 시민에게는 시민의 의무 로서 요구할 수 있는 일도 동맹시 시민에게는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동등한 권리를 갖 지 않은 사람에게 동등한 의무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등한 의무를 부과하고 싶으면 동등한 권리도 주어야 했다. 권리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권리에 따르는 의무를 요구하 면 내정 간섭이 된다. '로마 연합'은 동맹시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 위에 성립되 어 있었다. 따라서 내정 간섭을 하게되면 '로마 연합'은 해체되어 버린다. '로마연합'이 참으로 유효한 방위체제였다는 것은 한니발 전쟁이 실증해 주었다. 그것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로마 원로원의 양식있는 지도자들에게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었다 .그들의 처지에서 보면, '로마 연합'을 유지하는 것에 농지개혁보다 더 중요한 로마의 '방패'였다.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133년에는 누만티아를 궤멸시켜 에스파냐 를 평정하는 데 성공하고 귀국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당시 로마에서는 가장 유력하 고 영향력이 큰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대 스키피오라고 불러서 찬양했다면, 그 양손 자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소 스키피오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 스키피오가 티베리우 스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을 계속 추진하는 데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은 '로마 연합'의 여러 동맹시로부터 '청원'을 받은 직후였다. 하지만 원로원에서 반대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 던 날 아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침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티베리우스의 잔당이 암살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외상도 없고 목을 졸린 흔적도 없었다. 스키피오 아 이밀리아누스는 중년에 접어든 뒤 매우 비만했기 때문에, 심장마비에 의한 급사로 판정되었 다. 기원전 129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승장은 이렇게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처남 이기도 했던 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피살된 해로부터 4년 뒤였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가 폴리비 오스나 극작가 테렌터우스와의 교유가 보여주듯이, 남다른 재능만 갖고 있으면 패배자인 그 리스인이나 카르타고인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사고와 깊은 교양의 소유자였다. 하 지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그 지식 때문에 오히려 발상의 전환이나 비약을 방해받는 법이 다. 티베리우스가 착수한 개혁안이 폐지된 것도 아닌데 갑자기 기세를 잃고 좌절해 버린 것 은 로마 부유층의 이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 티베리우스가 30세에 원통하게 죽은 기원전 133년, 에스파냐에 파견된 군단에 종군하 느라 로마에 없었던 동생 가이우스는 아직 21세에 불과했다. 그는 이듬해에 귀국하여 형이 남긴 '3인 위원회'의 일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형의 유업인 농지개혁과 그 실무기관인 '3 인 위원회'의 일이 점점 쇠퇴한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강력한 의지와 정열의 뒷받침 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억제된 형태로 드러냈던 형과는 달리, 가이우스는 그것을 그대로 표 면에 분출해 버리는 성격이었지만 준비를 충분히 하고 기다릴 줄은 알고 있었다. 그후 10년 동안,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공화정 로마의 예비 지도자들이 거치는 평범한 경 력을 쌓는다. 정치인에게 군대 경험을 요구하는 로마에서 예비 지도자의 경력은 곧 군단 생 활을 의미했다. 가이우스는 기원전 126년부터 3년 동안 사르데냐에 파견된 군단에서 회계감 사관으로 근무했다. 그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동계 숙영중인 군단에 방한용 의류가 부족했다. 로마의 중앙 정부에 겨울옷을 보내달라고 청했지만, 로마에서 보내온 것은 의류가 아니라 현지에서 조달하라는 훈령뿐이었다. 겨울철 항해는 위험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군단 사령부는 시칠리아 섬의 유력자들한테 협력 을 요청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시간만 끌 뿐이어서 그들과의 교섭으로는 문제가 전혀 해 결되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군단에 소속된 회계감사관의 주요 임무는 군단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방면의 책임자인 가이우스에게 시칠리아의 유력자들을 설득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설득은 성공했다. 게다가 군단 사령관의 요청에도 끄떡하지 않았던 유력자들이 기분좋게 응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직접 배를 타고 운반해 오기까지 했다. 이리하여 병사들은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또 한번은 군량인 밀이 부족했다 사르데냐 섬은 전총적으로 밀 산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밀을현지 조달하려면 섬 주민들의 식량을 징발할 수밖에 없는데, 그랬다가는 민심을 거스르 기 쉽다. 그것을 피하려 해도 로마에서는 밀을 보내오지 않았다. 난감해진 가이우스는 누미디아 왕국에 사절을 급파하여 협조를 요청했다. 누미디아 왕이 보내온 대량의 밀로 젊은 회계감사관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당시 누미디아 왕국의 군 주는 마시니사의 아들로, 마시니사는 가이우스의 외소부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한니발 전쟁을 함께 치른 사이였다. 그런 인연으로 누미디아 왕국은 스키피오 가문의 '클리엔테스' 가 되어 있었다. 마시니사가 유언 집행자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지명했던 것도 이런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곤 경에 빠지면 서로 돕는, 신뢰와 의리에 바탕을 둔 관계였다. 기원전 124년 여름, 30세가 되기도 전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되 었다. 다만 1등이 아니라 최하위로 당선된 것은 평민층이 국정 개혁의 필요성을 그다지 강 하게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가이우스도 형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호민관이라는 직책을 출세 코스의 출발점으로 생각지는 않았다. 12월 10일에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가이우스는 법안을 잇따라 제출했다. 이렇게 많은 법안 을 호민관에 선출된 뒤에야 착상했을 리는 없다. 오래 전부터 숙고를 거듭한 끝에 나온 결 론임이 분명했다. 우선 형 티베리우스의 유작인 '농지법'의 재승인이다. 10년 동안 유명무실해져 있던 '농지 법'을 민회에서 다시 가결하여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농지개혁의 실행기관인 '3인 위원회'도 되살린다. 농지를 잃고 실업자로 전락한 자작농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확대되고 있는 빈부 격차를 줄이면서 로마 사회의 건전한 기반을 재건하는 데 이 법안의 목적이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위의 표에서 병역 해당 자인 시민 수의 증가가 몇 년 뒤에야 표면화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자작농 장려책만이 아니라 복지정책도 생각했다. '곡물법'이 그것이다. 국가가 일정량 의 밀을 사들여, 그것을 시가보다 싼 값으로 빈민들에게 공급하는 법안이다. 그렇다고 통제 경제는 아니다. 국가가 사들이는 양 이외의 밀은 자유시장에서 팔 수 있었고, 후세의 연구자 들에 따르면 빈민층에 공급하는 가격도 가이우스의 법안에서는 시가의 절반 정도였다고 한 다. 대상이 된 것은 수도 로마에 사는 빈민들로, 가장은 매달 5모디우스의 밀을 1모디우스 (약 10리터)당 6.3아세로 살 권리를 부여받았다. 또한 로마 사회의 빈부격차가 확대됨에 따라 병역에 종사할 수 있는 재산 하한선이 1천 500아세로 내려갔다. 그래서 실업자는 아니지만 빈부격차 확대에 희생되어 병역 의무를 짊 어지게 된 시민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을 그 부담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 가이우스는 새로운 '병역법'을 제출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아무리 긴급한 사태가 발생할 때 라도 17세 미만의 남자, 즉 미성년자를 징집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군복무중에 필요 한 장비와 무기 및 식량 등의 물자는 모두 국가에서 부담하도록 했다. 지금까지는 국가가 물자를 지급하긴 해도 그 경비는 급료에서 공제하고 있었다. 실업자들 중에는 농민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농장의 대규모화가 진행 된 시대였던 만큼, 자작농의 장래에 의문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실업자 대책이 자작농 장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 가이우스는 '공공사업법'을 제 출했다. 가도나 다리, 상하수도, 항만 공사 같은 공공사업을 진흥함으로써 실업자 구제를 꾀 한 것이다. 4층으로 이루어지는 로마 가도의 조성법은 나중에 유럽에서 오리엔트와 북아프 리카까지 망라하게 되는데, 이런 도로 조성법과 1로마마일(약 1.5킬로미터)마다 이정표를 세 워 수도 로마로부터의 거리를 대리석 원기둥에 새긴 것도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공공사업법' 에 처음 규정된 것이었다. 가이우스는 공공사업 진흥의 목적을 실업자 구제에만 두지는 않았다. 사회간접자본이 충 실해지면 경제활동도 활발해질 터였다. 가이우스는 이 활발한 경제활동의 받침접시를 만드 는 것도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식민법'이다. 이제까지 로마가 건설한 식민시는 전략적인 관점에 입각한 '요새' 건설이었다. 물론 군사 목적으로 만들어진 가도와 마찬가지로, 식민시 건설에도 파급 효과는 있었다. 현재 유럽 도 시의 대다수가 고대 로마의 식민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래 도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전에 3천 명 정도의 로마 시민을 이주시켜 건설하게 한 식민시는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 가이우스에 의해 비로소 식민시를 경제적인 관점 에서 건설하게 된 것이다. 그가 건설했거나 건설을 계획했던 식민시는 모두 바다와 가까웠다. 카르타고의 옛터에 건 설하려고 한 '유노 식민시'가 그의 의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 형 티베리우스의 자작농 장려 책을 이어받았으면서도, 가이우스가 생각하는 로마 사회는 더 이상 농업 국가가 아니었다. 식민시로 이주하는 사람으로는 자기 땅을 갖고 싶어하는 농민들, 유사시에는 병사로 탈바꿈 하는 농민뿐만이 아니라,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선발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로마 사회를 덮친 경제 구조의 변화를 이용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변화의 물결을 타려고 했다. 경제활동의 활성화로 경제력을 키움으로써 사 회 불안의 원천인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당시 부상하고 있던 '기사계급'의 활용에도 눈길을 돌리는 것이 당연 하다. 건국 이래의 명문이든, 집정관을 배출했기 때문에 평민에서 귀족이 된 평민 귀족이든, 원 로원을 근거지로 하여 국정을 담당하는 '귀족계급'이 '혈통의 엘리트'라면 전에는 귀족이 독 점하고 있던 기병까지 제공할 수 있을 만한 재산의 소유자라 하여 '기사계급'으로 불린 자들 은 '화폐의 엘리트'였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생각했다. 우선 이들 경제 '엘리트'의 자격을 40만 아세 이상의 재산을 가진 자로 규정했다. 무산자 를 포함하여 6등급으로 이루어진 로마의 세제상 분류에서는 제2계급의 재산이 30만 아세에 서 100만 아세로 되어 있으니까, 귀족과 구별하여 기사라고 불러도 실제로는 제2계급보다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기사'는 공화정 로마에서는 경제인을 의미했다. 가이우스는 이 경제 지도자들에게 정치 지도자인 원로원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1장의 '지 정석'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기는 해도 당시의 로마는 '사농공상'의 시대였다. 기사들 에게 주어진 지정석은 원로원 의원의 뒷줄이었던 모양이다. 이어서 가이우스는 형 티베리우스가 말은 꺼냈지만 미처 법제화하지 못했던 생각을 보다 급진적인 법안으로 바꾸어서 다시 제출했다. '배심원 개혁법'이 그것이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재판은 법무관이 수사와 재판을 맡고, 원고측 변호인이 검사를 맡고, 피고측 변호인이 변론을 맡고, 판결은 배심원단의 평결로 결정하는 제도로 되어 있었다. 그 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원로원 의원들이 배심원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 배심원단을 '기사계급'만으로 구성한다는 것이 가이우스의 개혁안이었다. 이 법은 경제인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더불어, 사법의 공정성을 겨냥하는 개혁이기도 했다. 원로원 의원이기도 한 집정관은 임기를 마치면 속주 총독에 취임했지만, 총독들의 전 횡과 부정부패는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속주민들에게는 그것을 고발할 권리가 주어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원로원 의원만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무죄 평결을 내리는 경우 가 많았다. 그런데 원로원 의원과 '기사'가 반반씩 배심원을 맡게 할 생각이었던 형 티베리 우스와는 달리, 가이우스는 '기사'가 배심원을 독점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보다 급진적'이 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호민관 가이우스는 '속주법' 개정안을 통해, 속주에서의 징세권을 비롯한 경제활동이 '기사계급'에 좀더 유리해지도록 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채택한 이런 경제인 우대 정책 에 따라 공화정 로마의 '사농공상'은 기반이 무너지고 있었다. 어떤 개혁이든, 개혁에는 비용이 들게 마련이다. 특히 농지개혁, 빈민층에 대한 곡물 공급, 공공사업 진흥, 새로운 식민시 건설 등은 돈이 많이 든다. 재원 확보에 성공하지 못하면 개 혁도 성공할 수 없다. 30세의 호민관은 '속주법' 개정으로 속주 가운데서도 풍족한 지방인 소아시아의 조세제도 를 개편하여, '10분의 1 세'라고 불리는 직접세를 개혁의 재원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그래 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가이우스는 항만 사용료 같은 간접세를 그 항만을 통과하는 물품마다 부과하는 관세로 바꾸었다. 젊은 호민관은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마의 선거는 거수투표가 아니라 무기명투표로 한다고 규정한 법률이 기원전 137년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1계급 부터 투표를 시작하여 과반수에 이르면 투표를 끝내는 왕정 이래의 관례인 선거방식에는 변 화가 없었다. 이런 방식에서는 중류와 하류의 시민들에게는 투표할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가이우스는 민회에서도 평민집회에서도 제1계급부터 무산자 계급까지 전원 이 동시에 투표를 시작하도록 선거제도를 개혁했다. 가이우스가 처음 호민관에 당선되었을 무렵에는 미온적으로 그를 지지했던 시민들도 이제 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가이우스도 국정 개혁의 필요성을 시민들에게 계속 열정적으로 설득했다. 형 티베리우스는 연단 위에 선 채 억제된 말투로 조용히 설명하는 방식을 채택했지만, 동 생 가이우스는 달랐다. 그의 말투는 불을 뿜는 것처럼 격렬했고, 연단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줄곧 왔다갔다 하면서 피로한 기색도 보이지 않고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너무 목 청을 높이면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단 뒤쪽에는 언제나 해방노예를 한 사람 대기시겨 두었다. 이 영리한 해방노예의 역할은 가이우스의 목청이 너 무 높아지면 가지고 있던 악기를 낮게 불어서 주인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가이우스가 일하는 태도는 그를 미워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감탄할 만큼 정력적 이었다. 수많은 법안을 제출하고, 그것들이 차례로 가결되었기 때문에 젊은 호민관이 해야 할 일 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가이우스는 뛰어난 조직력으로 그 모든 일을 실행하고 신속하게 처리해 나갔다. 그의 일 터에는 청부업자, 건축 기술자, 외국 대사, 정부관리, 장군, 문인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 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가이우스는 언제나 좋은 가문에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 철저한 교 육을 받은 사람답게 처신했다. 친밀하게 행동하면서도 품위를 떨어뜨리는 법이 없었고, 상대 의 능력을 존중하면서도 결단을 내려야 할 때에는 더없이 단호했다. 로마에는 또 한 사람의 탁월한 지도자가 등장하고 있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로마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민족인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와 동맹 관계를 맺고 한니발을 무찌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다. 또한 해방노예라 할지라 도 5세 이상의 아들이 있고 3만 아세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아들이다. 마시니사의 아들과는 '파트로네 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에 있고, 카르타고의 옛터에 로마 시민들을 이주시켜 식민시를 건 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사람이다. 원로원 의원들의 머릿속에 있던 '국경'이 가이우스 그라 쿠스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호민관 그라쿠스가 '시민권 개혁법안'을 제출했다. 이것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비롯한 원로원의 양식있는 의원들이 늘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회피하기로 작정한 문제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었다. 로마 시민권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투표권과 항소권까지 갖는 완전한 시민권이고, 또 하나는 투표권과 항소권이 없는 불완전한 시민권이다. 전자는 '로마 시민권'이라고 불렀 고, 후자는 '라틴 시민권'이라고 불렀다. 이 두 종류의 시민권 소유자 외에 '로마 연합' 동맹 시 주민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이탈리아인'이라고 불렀다. 그밖에 속주민이 있는데, 이들은 로마에 직접세를 낼 의무를 가진 자들이었고, 반대로 로마 시민과 라틴 시민과 이탈 리아인은 모두 로마 국가에 대해서는 직접세를 내지 않았다. 건국 이래, 로마인은 시민권을 개방하는 데 지극히 대범했다. 로마 영토 안에 살고 있기만 해도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을 정도다. 그래도 로마 영토로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나 위정자를 걱정시키는 사태는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도 별로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익은커녕 '로마 연합'의 군대 중에서는 로마 시민들 의 병역 의무가 가장 무거웠고, 그들은 로마 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병역에 종사하는 동안 의 식비까지 급료에서 공제되고 있었다. 반면에 라틴 시민이나 이탈리아인은 무료로 배급을 받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 게다가 불과 7, 80년 전까지는 전리품까지도 균등하게 분배되었 다. 이래서는 굳이 로마 시민권을 원할 이유가 희박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전리품 분배가 불평등해졌다. 로마의 패권이 지중해 전역에 미침에 따라, 전리품도 로마 시민병만 차지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속주에서 들어오는 조세 수입이 늘어난 기원전 168년부터는 로마 시민에게 병역 이외의 유일한 직접세로 부과되던 전시국채까지도 폐지되었다. 반대로 라틴 시민이나 이탈 리아인의 경우에는 그들이 속해있는 도시국가에 내는 세금이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서도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속주에서 들어오는 조세는 모두 로마 국고로 들어가고 있었다 는 증거다. 또한 패권과 함께 확대된 시장에서의 경제활동에서도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여 러모로 유리했다. 로마 영토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어나자,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은 로마정부가 아니라 라틴 시민들이 거주하는 행정구역이었다. 자기네 행정구역의 인구가 지나치게 줄어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로마 정부는 이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타지역 주민이 로마로 이주해도 로마 시 민권 취득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런 법률은 알려진 것만 해도 기원전 2 세기 전반에만 이미 두 번이나 제정되었으니까, 그때부터 로마시민권이 상당한 이점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런 법률을 제정한 것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들이 기득권을 남에게 나누 어주는 데 더 이상 너그럽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민권 제도를 개혁하려고 마음먹은 가이우스 그라쿠스도 원로원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반 대가 거셀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시민권에 차별이 존재하는 동안은 농지개혁뿐 만 아니라 다른 어떤 개혁도 완전히 실현되기를 바랄 수 없었다. 가이우스는 그 점을 잘 알 고 있었지만, 시민권 개혁은 공화정 로마의 체제 자체와 관련된 문제였다. 이런 근본적인 개 혁은 오히려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만 빨리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가 제출한 개혁안은 참으로 온건한 것이었다. 우선 '라틴 시민'에게는 '로마 시민권' 취득을 인정하고, '이탈리아인'에게는 '라틴 시민권' 취득을 인정했다. 그러나 라틴 시민이 로마 시민으로 격상되는 것이 가능해지면, 라틴시민으로 격상된 이탈 리아인이 언젠가는 다시 로마 시민으로 격상될 수도 있을 터였다. 기득권자인 로마의 일반 시민, 그리고 '로마 연합' 방식이 최선의 방위체제라고 확신하는 원로원이 이것을 순수히 받 아들일 턱이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로마 시민권 확대는 도시국가 로마의 붕괴이고, '로마연합'의 해체이며, 원 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에 대한 도전임을 알고 강한 위기감을 느낀 원로원 의원들은, 온건 파와 강경파를 가리지 않고 그라쿠스와 맞서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하지만 가이우스 그라 쿠스의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시민권 개혁법안'을 제외한 모든 법안이 가결되어 법률로 성 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이우스는 호민관의 연임을 인정하는 법률도 일찌감치 성립시켜 놓 았기 때문에, 기원전 123년 여름에 실시된 선거에서도 무난하게 재선되었다. 원로원의 반 그 라쿠스 운동은 가이우스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허물어뜨리는 데 집중되었다. 게다가 이번 에는 원로원의 수법도 교묘했다. 모략은 양면작전으로 이루어졌다. 어떤 작전에서도 원로원 은 표면에 나서지 않았으며, 일반 시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원로원 체제의 위기 문제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양면작전 가운데 하나는 티베리우스 때에도 사용되었고, 언제 어디서나 효과를 발휘한 작 전이다. 원로원은 호민관 가이우스의 정책이 표모으기, 인기 정책, 권력 집중, 권력의 사물화 라는 소리를 퍼뜨렸다. 현대 영국의 한 연구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지한 대중은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일도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저질러진 일로 믿기 를 좋아하는 족속이다." 그렇게 믿기를 좋아하는 것은 무지한 대중만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보다 70년 뒤 의 일이지만, 로마 역사상 최고의 지식인이자 최고의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키케로조차도 이런 종류의 것을 '좋아하는 족속'의 하나였다. 요컨대 교양의 유무나 시대의 차이나 문화의 차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목적과 수단의 분기점이 모호해지고, 수단을 목적화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이 작전은 언제든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두번째 작전은 티베리우스 때에는 사용되지 않은 방식이었다. 호민관에 재선되어 확고부 동한 시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가이우스를 실각시키려면 중상모략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다. 가이우스도 원로원이 똘똘 뭉쳐서 자신의 실각을 꾀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 지만 그는 실적을 쌓아 시민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원로원의 음모를 분쇄하려고 했다. 호 민관에 재선되어 1년 동안의 유예를 얻은 가이우스는 카르타고의 옛터에 건설할 예정인 식 민시 사업에 모든 정력을 쏟아부었다. 임기 2년째에 들어간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의 권한과 자신의 노력을 모두 쏟아부어 카르타고 옛터에 건설하려 한 식민시는 모든 점에서 로마인이 그때까지 건설한 식민시를 뛰 어넘게 될 터였다. 우선 이주자의 수가 6천 명으로, 다른 식민시들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6천 명은 호주만 헤아린 숫자다. 그리고 이주자로 선발된 시민들 중에는 도시 무산자와 퇴역병, 장인, 기술자, 상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가이우스가 생각하는 식민시는 전략 기지가 아니라 경제 기지 였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시를 건설할 때 종래에는 이주자들에게 호주 1인당 50유겔룸 이상의 경작지를 할당한 예가 없었지만, 카르타고의 옛터에 건설될 '유노 식민시'에서는 이주자에게 분배되는 토지가 200유겔룸(50헥타르)으로 늘어났다. 이것도 소규모 자작농을 장려하는 것만이 가이우 스그라쿠스의 생각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옛 카르타고 일대는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가 멸망한 이후 25년 동안 황무지로 변해 있 었다. 멸망 직후에는 그래도 경작지가 있고 수목도 무성했지만, 몇 년 뒤에 발생한 메뚜기떼 의 내습으로 허허벌판이 되었다. 이런 땅에 사람을 다시 살게 하고 푸르게 되찾으려는 것이 다. 성공하면 로마인의 시장은 더한층 넓어지게 된다. 도시가 생기면 주변농경지도 정비된 다. 그리고 그 주변에 다른 도시가 생겨난다. 북아프리카는 원래 비옥한 지방이었기 때문에 파급 효과도 엄청나게 커질 터였다. 식민이 시작되기 전에 가이우스는 농지 분배와 공공시설 건설지를 결정하기 위해 직접 아 프리카로 건너갔다. 그가 로마를 비운 기간은 70일도 채 안되었지만, 이 기간을 원로원은 헛 되이 보내지 않았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함께 기원전 122년의 호민관에 선출된 사람 가운데 리비우스 드루수 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드루수스가 반 그라쿠스 운동에 앞장섰다. 물론 원로원의 배후 조 종을 받은 소행이었다. 정책 입안권을 가진 호민관 지위에 선출되자, 드루수스는 차례로 법안을 제출했다. 우선 그라쿠스의 '농지법'에 따르면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도 기존의 국유지 임차법에 따 라 국가에 임차료를 내도록 되어 있었지만, 드루수스는 임차료 면제를 제안했다. 고정 재산 세와 비슷한 임차료조차도 물지 않게 한 것이다. '농지법'에 따라 토지를 다시 얻으려 하고 있던 도시 무산계급은 이 법안을 박수갈채로 환영했다. 이어서 드루수스가 제출한 법안은 그라쿠스의 '농지법'에서는 금지되어 있던 임차 국유지 양도를 허용했다. 농민이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도 국유지를 빌릴 권리는 있었기 때문에, 이 법안은 국유지를 빌리자마자 그것을 매각하여 돈을 벌려는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셋째,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식민법'에 따라 건설되는 식민시는 이탈리아 반도에 2개, 카르 타고 옛터에 1개, 합하여 모두 3개였지만, 드루수스는 이탈리아 안에만 12개의 식민시를 건 설한다는 법안을 제출했다. 게다가 그 12개의 식민시에는 무산자만 정착시키고, 임차료도 받 지않고 토지를 무상 분배할 뿐 아니라, 정착에 필요한 자금을 국가에서 지급한다는 조항까 지 추가했다. 그라쿠스의 법안에서는 이탈리아 안의 2개 식민시에 정착할 이주자수는 호주만 각각 3천 명씩이고, 카르타고 옛터에는 6천 명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 식민시를 건설함으 로써 구제할 수 있는 실업자는 모두 6천 명이 된다. 반면에 드루수스의 법안에 따르면, 구제 할 수 있는 실업자가 무려 3만 6천 명에 이른다. 이탈리아 반도 밖에 나가서 정착할 생각이 없는 로마인이 아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 시대에 6천 명과 3만 6천 명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 있다. 게다가 드루수스는 '라틴 시민권' 소유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려 한 가이우스의 법 안에 반대하기는커녕, 그것을 상회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할 뿐만 아 니라, 군단 안에서 군율을 어긴자에게 부과되고 있던 사실상의 사형에 해당하는 몽둥이질까 지 완전 폐지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끝으로 드루수스는 식민시 건설을 담당할 실행위원회에 자기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 다. 이것은 실행위원장인 가이우스 그라쿠스에 대한 심술이었다. 하지만 말을 먼저 꺼낸 사 람이 권력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언명하면, 무지한 대중도 교양있는 지식인도 그에게 호감 을 갖게 마련이다. 호민관 드루수스는 약자의 보호자일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이처럼 과격한 법안을 차례로 성립시키면 원로원도 나중에 곤란해지지 않을까, 하고 후세 의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법치국가의 이념을 확립한 로마인 은 법이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형편에 맞지 않으면 당연히 바꾸어야 하는 것 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바꿀 경우에도 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기존의 법을 바 꾸려면 왠지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기 때문이다.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면 법을 개정할 시 기를 놓쳐버린다. 그래서 로마인은 기존의 법을 개정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법률을 성립시 켜 종래의 법 가운데 새로운 법에 저촉되는 부분을 자연스레 해소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 다. 덕분에 로마는 법전을 전부 모으면 산더미처럼 쌓일 만큼 많은 법률을 가진 비성문법 국가가 되고 말았다. 그토록 많은 법률이 잇따라 제정되고 있던 로마에서는 법률을 농지법이나 속주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농지에 관한 법률도 한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률은 제안자의 이 름을 따서 불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컨대 그라쿠스가 제안한 법률이면 그라쿠스 가문이 속해 있는 셈프로니우스 일족의 이름을 따서 '셈프로니우스 법'(렉스 셈프로니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성립시킨 법이면 '율리우스 법'(렉스 율리아)으로 통칭된다. 많은 법률을 성립시 킨 이 두 사람의 경우에는 '국유지에 관한 셈프로니우스 법'이나 '속주에 관한 셈프로니우스 법'으로 구별하는 정도였다. 이 방식은 법률 입안자의 이름이 후세에까지 남는다는 것 외 에,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다 는 이점도 있었다. 관료가 주도하는 체제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방식이다. 아피아 가도나 플라미니아 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 가도의 이름도 그 도로를 건설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였는데, 이것도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야기를 기원전 122년으로 돌리면, 호민관 드루수스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원로원은 드루수스가 차례로 성립시킨 법안을 실행에 옮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목표는 오직 그라 쿠스의 실각에 있었다. 그라쿠스의 실각만 실현되면, 법률 따위는 나중에 새로운 법률을 제 정하여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의 옛터인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민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 라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까지 살았던 팔라티노 언덕의 고급 주택가에서 포로 로 마노 근처의 저지대에 펼쳐져 있는 서민 주택가로 거처를 옮겼다. 조금은 효과가 있었다. 하 지만 가이우스에게 3선 연임을 허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원로원은 고삐를 늦추지 않 았다. 가이우스가 1년 뒤에 다시 3선을 노릴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리고 3선이 가능할지는 남은 5개월의 임기 동안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 다. 원로원은 잔여 임기 동안 가이우스가 호민관으로서 활동하는 것도 방해하기로 작정했다. 이번에는 일반 시민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미신적인 성향을 자극했다. 카르타고의 옛터를 측량하는 도중, 측량에 사용하고 있던 기둥이 때마침 불어온 돌풍에 쓰러졌다. 식민시 건설을 앞두고 신들에게 제물로 바친 짐승을 태우고 남은 재가 바람에 날 려, 새 식민시의 경계선으로 결정되어 있던 지점 밖에까지 흩어졌다. 또한 경계선을 표시하 기 위해 세워둔 기둥을 늑대가 쓰러뜨리고, 기둥에 쳐둔 밧줄도 뜯어갔다. 그라쿠스의 정적들은 이런 변고들이 모두 불길한 조짐이고, 저주받은 카르타고 땅에 도시 를 세우면 로마인 자신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 다. 카르타고의 옛터에 식민시를 건설하려던 계획을 철회한다는 법안이 제출되었다. 게다가 민회 소집권을 가진 기원전 122년의 집정관에는 원로원에서도 강경파로 알려진 오피미우스 가 선출되어 있었다. 3선 연임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해 12월 9일로 임기가 끝나게 된 가이우스는 32세라는 나 이도 있어서 초조하게 굴었다. 아니, 가이우스보다 그의 지지자들의 초조감이 훨씬 강했다.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쉽게 과격해진다. 그리고 중심에 있는 인물보다는 주위를 둘러싸 고 있는 자들이 더욱 격렬히 대응하게 되는 법이다. 가이우스가 가는 곳에는 험악한 표정을 한 지지자들이 늘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121년, 카르타고의 옛터에 건설할 식민시의 운명이 걸린 투표가 실시되 던 날, 투표장인 카피톨리노 언덕은 이른 아침부터 찬성파와 반대파 시민들로 메워져 입추 의 여지가 없었다. 공공 행사를 거행할 때의 전통에 따라 민회도 우선 신들에게 제물을 바 치는 제사로 시작된다. 제사가 무사히 끝나고, 제사에 바쳤던 짐승의 내장을 치우는 단계가 되자, 안틸리우스라는 하급 관리가 내장을 담은 쟁반을 들고 군중 사이를 빠져나가려고 했 다. 바로 그때 변고가 일어났다. 그라쿠스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헤치고 나가던 안틸리우스가 주먹을 휘두르면서 외쳤다. "나쁜 시민들아, 좋은 시민에게 길을 열라." 하급 관리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밀랍 바른 목판에 글자를 새길 때 쓰는 송곳 철필 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는 찬성파와 반대파가 모두 긴장하여 술렁거렸다. 가이우스는 적에게 비난할 구 실을 주었다면서 지지자들을 나무랐다. 한편 집정관 오피미우스는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고 시민들을 선동했다. 그러는 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광장에서 열리고 있 던 집회는 이튿날 속개하기로 결정하고 산회했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좋았다. 집정관 오피미우스는 우선 원로원을 소집했다. 법안을 토의한다는 구실이었다. 어제 살해된 안틸리우스의 시체가 들것에 실려와 원로원 의사당 앞 에 놓여졌다. 의사당에서 나온 원로원 의원들은 시체를 둘러싸고, 이게 도대체 무슨 변고냐 고 저마다 한탄했다. 의사당 안으로 다시 돌아간 의원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직역하 면 '원로원 최종 권고'(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눔), 의역하면 '비상사태 선언'을 로마 역사상 처 음으로 공표한 것이다. 이 선언은 반역자에 대해 재판하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집 정관에게 부여했다. 원로원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원로원 최종 권고'는 공화국 로마를 폭도로부터 구하기 위 해 내린 불가피한 조치라고. 법적으로는 권고할 권한밖에 갖지 않은 원로원이 비상사태를 선언할 권한은 없을 것이다. 포에니 전쟁 때는 원로원 권고 그대로 실질적인 효력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전시가 아니 었다. 전시에도 최후 통첩을 뜻하는 울티눔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그 말이 덧붙여졌을 뿐 인데 ,단순한 권고가 계엄령으로 바뀐 것이다. 이 모순은 먼 훗날에 이르기까지 공화정 로마 에 문제를 남기게 된다. 또한 이때의 비상사태 선언은 고대 로마만이 아니라 모든 국가의 정상 상태와 비상 사태를 구분하는 선을 어디서 긋느냐 하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원로원에 의해 폭도로 몰린 그라쿠스 지지파는 태도가 강경해졌다. 이제 민회에 가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라쿠스의 동지로서 그라쿠스보다 성격이 과격한 플라쿠스 주 위에 모였다. 집정관 오피미우스가 원로원 의원과 '기사' 전원에게 이튿날 아침 일찍 무기를 가지고 집합하라고 명령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점점 더 흥분한 그들은 아벤티노 언덕에서 농성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자고 외쳤다. 그라쿠스에게는 동지들을 제어할 힘이 없었다. 그들이 플라쿠스의 저택에 모여 술을 마시며 흥청거리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33세의 가 이우스 그라쿠스는 집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절망과 원통함, 체념이 뒤섞인 기분으 로 그는 새벽을 맞이했다. 이튿날 아침, 크레타와 그리스 출신의 중무장 보병대까지 동원한 집정관과는 포로 로마노 에 집결했다. 그라쿠스파는 전통적으로 평민층의 아성이 되어온 아벤티노 언덕에 모였다. 허 리에 단검만 찬 모습으로 나타난 가이우스는 플라쿠스에게 집정관과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 다고 강조했다. 집정관과 교섭할 사절로는 플라쿠스의 막내아들을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아직 미성년인 이 소년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들에게 화해를 부탁했 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라쿠스와 화해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지 만 집정관은 강경한 태도를 풀지 않았다. 그는 사절로 온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보낼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언덕에서 내려와 혼란을 일으킨 데 대해 사죄하 고 심판에 승복해야 한다. 화해 여부는 그들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고 결정하겠다. " 언덕으로 돌아온 소년은 집정관의 말을 전했다. 가이우스는 자기가 직접 화해 사절로 가 겠다고 나섰지만 동지들이 말렸다. 결국 소년이 다시 심부름을 맡게 되었다. 그라쿠스파가 소년을 통해 무슨 말을 전하려고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집정관 오피미우스는 화해를 모색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집정관의 명령으로 소년은 체포되 어 감옥에 갇혔다. 포로 로마노를 나와 팔라티노 언덕 남쪽을 돌아서 대경기장(키르코마시모) 옆을 지나면, 거기서부터는 아벤티노 언덕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이 시작된다. 거리로 치면 1.5킬로미터도 채 안된다. 크레타 출신의 궁수와 마케도니아 출신의 중무장 보병대를 거느리고 행진하는 집정관 오피미우스의 뒤에는, 무기를 휴대한 원로원 의원들이 무장한 노예들까지 데리고 따 라갔다. 아벤티노 언덕에 틀어박혀 저항한 그라쿠스파는 폭도 진압의 일념에 불타는 집정관과 그 추종자들의 공격 앞에 어이없을 만큼 간단히 무너졌다. 집정관 오피미우스는 가이우스 그라 쿠스와 플라쿠스의 목을 가져온 자에게는 목과 같은 무게의 황금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무 자비한 인간 사냥이 시작되었다. 친지 집에 숨어 있던 플라쿠스와 그의 맏아들은 곧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잘 린 목은 집정관에게 보내졌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족끼리의 전투에 가담할 마음이 나지 않았는지, 가이우스는 아벤티노 언덕에 서 있는 디아나 신전에 들어가 거기서 자살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달려온 두 친구가 그의 단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지금은 우선 몸 을 피한 다음, 언젠가 찾아올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자고 설득했다. 아벤티노 언덕의 북쪽 길로 내려오면 테베레 강에 걸려 있는 다리가 있다. 거기까지 도망 친 그들을 추적자들이 바싹 따라왔다. 두 친구는 가이우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추적자들을 막고 있을 테니 어서 도망치라고. 가이우스는 노예 한 사람만 데리고 테베레 강 너머로 달 아났다. 하지만 그곳에도 그에게 말을 내줄 사람은 없었다. 주인과 노예는 테베레 강변에 있 는 작은 숲속으로 도망쳤다. 추적자들은 숲속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 두 구를 발견했을 뿐이다. 가이우스를 마지막까 지 따라간 노예의 이름은 필로크라테스라고 한다. 이름으로 보아 그리스인이 분명하다. 아마 노예가 주인을 찌르고, 그 칼로 자기도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집정관 오피미우스의 명령으로 가이우스와 플라쿠스의 목은 포로 로마노의 연단 위에 효 수되었다. 그리고 몸뚱이는 아벤티노 언덕에서 죽은 동지들의 시체와 함께 테베레 강에 던 져졌다. 기원전 133년에 티베리우스가 살해되었을 때와는 달리, 기원전 121년에 가이우스가 살해 되었을 때는 인간 사냥이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동조자로 간주된 이 들에 대한 추적은 그후에도 계속되었고, 붙잡힌 자들은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처형되었 다. 그 수가 무려 3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성년이었던 플라쿠스의 막내아들도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그라쿠스파로 간주된 자들의 재산은 몰수되어 경매에 부쳐졌다. 가이우스의 아 내는 결혼 지참금까지 몰수당했다고 한다. 미망인들이 상복을 입는 것조차도 반역행위라 하 여 금지되었다. 형 티베리우스와 동생 가이우스가 죽은 뒤의 차이는 또 한 가지가 있었다. 기원전 133년에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에는 평민층의 반발을 두려워한 원로원이, 비록 티 베리우스의 '농지법'에서 알맹이를 빼버리긴 했지만 그 법률을 폐지하지도 개정안을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원전 121년에 가이우스가 죽은 뒤에는 복고-그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수 복'-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우선 카르타고의 옛터에 세울 예정이었던 '유노 식민시' 건설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플라 쿠스가 마르세유 남서쪽의 나르본에 추진하고 있던 식민시 건설은 그로부터 3년 뒤인 기원 전 118년에 실현되었지만, 카르타고의 옛터와는 달리 나르본의 경우는 속주 에스파냐로 가 는 가도의 중계기지라는 군사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우스가 식민시 건설에 담은 목적은 경제 진흥에 있었지만, 이같은 구상을 원로원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한 개혁의 핵심이라고 해야 할 '농지법'도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우선 국유지 임차권의 양도가 인정되었다. 이어서 그라쿠스의 '농지법'에서 규정된 토지 소유 상한선도 철폐되어, 땅을 얼마나 가지고 있든지 간에 임차료만 내면 국가에 반환할 필 요가 없게 되었다. 또한 가이우스의 실각을 꾀한 원로원의 앞잡이였던 드루수스가 제안하여 가결시킨 법률에 따르면, 국유지를 농지로 빌린 사람이 국가에 내는 임차료는 완전히 폐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법률이 대상으로 삼은 것은 '농지법'에 규정된 한도 이내의, 다시 말 하면 '정당한' 토지 임차인뿐이다. 그런데 가이우스가 죽은 뒤, 원로원은 부당하게 토지를 임 차한 자에게도 그것이 적용되도록 바꾸었다. 이것으로 토지 집중 경향은 무제한으로 방치되었다. 자작농 장려책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뜻을 무시해서는 원로원도 존속할 수 없다. 그래서 그라쿠스의 개혁 중에 서도 일반 시민에게 호평을 받은 법률은 남겨놓았다. 도시 빈민층에 대한 곡물 공급, 군복무 중의 비용을 국가에서 지급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또한 경제 계급인 '기사'를 배심원으로 선정하여, 그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꾀한 법률도 살아남았다. 원로원도 눈에 띄게 부상하 고 있는 경제인의 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 시민 이외의 이탈리아 주민에게도 로마 시민권 취득의 길을 열어주려고 했던 그라쿠스의 '시민권 개혁법'은 기득권 자인 로마 평민한테도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원로원은 거리낌없이 폐기처분해 버렸다. 기원전 120년 당시의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에게 승리한 100년 전의 원로원과 같은 생각밖 에 하지 않았다. 100년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이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 세계 전체의 지배자여야 한다 로마는 이탈리아 전체의 지배자여야 한다. 원로원은 로마 시민 전체의 지도자여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쇄국주의다. 포에니 전쟁에서 거둔 승리가 승자인 로마인을 정신적인 쇄국 주의자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절한 요인을 대부분의 후세 연구자들은 시기상조론으로 돌린 다. 인간은 사실을 눈앞에 들이대지 않는 한 눈을 뜨지 못하는 법이다. 또한 아무리 뛰어난 예언자라도 무기가 없으면 실패를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 마키아벨리라면, 그의 사상을 입 증하는 사례의 하나로 그라쿠스 형제를 들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라쿠스 형제의 생각이 70 년 뒤에나마 실현된 것은 무기를 가진, 즉 인간에게 눈을 뜨도록 강요할 수 있을 만한 권력 을 가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아무래도 또 한 가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만약 그라쿠스 형제가 호 민관으로서가 아니라 집정관이나 재무관으로서 개혁을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외조부나 부친의 경력으로 보아도, 두 사람이 공화정 로마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이나, 또는 집정관을 역임한 자에게 주어지는 재무관에 선임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깝 다. 따라서 10년만 기다렸다가 집정관에 선임되었을 때, 또는 그후 몇 년 더 기다렸다가 재 무관에 선임되었을 때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집정관이나 재무관이 정책 입안 자가 된 경우에는 상당히 혁신적인 정책이라도 원로원의 지지를 얻기가 어렵지 않았고, 이 를 배경으로 민회에서도 별문제 없이 가결된 예가 적지 않다. 그라쿠스 형제의 좌절은 로마 시민의 지지를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로원으로 대표되 는 당시 로마 지식층과 사이가 멀어진 탓도 있었다. 왜 원로원의 양식파인 그들은 그라쿠스 형제에게 등을 돌렸는가. 나중에 다시 기술하겠지만, 술라는 그의 개혁 중에서도 호민관의 권한을 줄이는 데 이상 하리만큼 열의를 기울였다. 또한 술라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신봉자였던 키케로는 그라쿠스 형제를 엄격히 비판했다. 고대 로마에서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는 공화정 시대에는 나 빴고, 제정 시대에는 비교적 좋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평민층을 대변하는 호민관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은 원로원을 주체로 성립해 있는 로마식 공화정의 붕괴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당시 지식인들이 품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로마인들은 귀속과 평민간의 항쟁이 한창이었던 시대에도 국내에 두 개의 정부가 생기는 것 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래서 관직을 평민층에 개방하거나 호민관을 원로원에 받아들임으 로써, 국내에 서로 대립하는 세력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라쿠스 형제의 개혁에는 대부분 찬성한다 해도, 그들이 개혁을 추진하는 방식에는 찬성할 수가 없었다. 집정관이나 재무관으로서 개혁을 실행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두정 형태 의 공화정 체제, 즉 기존 질서 안에서의 개혁이 된다. 제정 시대에 이르러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 것은, 그들의 개혁이 공화정의 붕괴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제정 시대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 게는 그라쿠스 형제의 사심없는 태도가 무엇보다도 칭찬할 만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생각한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집정관이나 재무관으로서가 아니 라 호민관으로서 이루어진 것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는 얘기가 될까. 역시 의미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로마가 근본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 고 있었던 것은 체제 내에 있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로원이라는 '현체제'가 앞 장서서 그런 개혁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는 원로원이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공화정 로마의 융성은 걸출한 영웅 한두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 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룩해낸 국가 운영체제에 그 요인이 있었다. 이 점은 연구자 들 사이에서도 정설이 되어있다. 한 나라의 융성이 개인의 힘이 아니라 체제 덕분이라면, 혼 란도 개인의 역량이 쇠퇴한 탓이 아니라 체제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나이가 젊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은 분명히 의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나, 그라쿠스 형제가 로마인에게 남긴 것은 원로원이 주도하는 공화정체제 자체에 대한 의문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개혁도 원로원의 범위 밖에 있는 유일한 사회적 지위인 호민관으로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형 티베리우스는 7개월, 동생 가이우스는 2년의 활동 기간밖에 갖지 못했지만, 그리고 그 동안 실행된 개혁들은 거의 다 물거품으로 끝나버렸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줄곧 성장의 길 을 걸어왔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로마에 최초의 이정표를 세웠다. 이것이 그들의 역사적 존재이유다. 로마인들도 그후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결국에는 그 라쿠스 형제가 세운 이정표에 따라 길을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들은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했던 개혁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형제 의 죽음을 무척이나 애석하게 여겼다. 그들은 가이우스가 죽은 곳에 형제를 기리는 동상과 빗돌을 세우고, 마치 자기네 조상의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철마다 거기에 제물을 바치곤 했다. 티베리우스의 아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고, 가이우스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 라쿠스 가문은 여기서 대가 끊기고 말았다. 원로원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의 재산까 지는 몰수할 수 없었는지,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는 가이우스가 죽은 뒤 나 폴리 만 서쪽 끝에 있는 미세노에 별장을 짓고 은둔했다. 칩거했다고는 하기만 집 안에 틀 어박힌 채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바닷가 별장에는 방문객이 끊이 지 않았다. 오리엔트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왕과 제후들이 로마를 방문할 때마다 그녀를 예 방했고, 문인이나 학자들도 국적을 불문하고 환대를 받았다. 코르넬리아의 거실은 두 아들이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지적 살롱이었다. 애통하게 죽은 형제가 화제에 올라도 코르넬리아가 눈물을 짓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두 아들의 무덤조차 만들어주지 못한 어머니지만, 두 아들을 기려 세운 빗돌에 사람들이 철 마다 제물을 바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것이 그애들한테 어울리는 무덤이라고 말했다. 로마인들은 그녀의 동상도 만들어 바쳤다. 지금은 대좌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거기에는 '아 프리카누스의 딸이며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라는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 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공화정 로마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동상이든 석상이든,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를 새긴 초상은 하나도 남아 있 지 않다. 30세와 33세에 죽었으니까 생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적고, 공화정 로마 시대에 는 그들에 대한 비난과 찬사가 서로 격렬하게 공존했던 만큼 초상을 만들어 바치기도 어려 웠을 것이다. 언젠가 로마에 있는 카피톨리노 박물관을 둘러보고 있을 때, 하나의 대리석상 앞에서 나 의 발길이 멎었다.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1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젊은 이의 두상이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어쩌면 이런 얼굴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제1권 표지에 사용한 청동상은 공화정 로마의 창시자인 유니우스 브루 투스의 초상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인데, 설사 그의 모습을 새긴 것이 아니었다 해도 나는 그 얼굴을 제1권 표지에 사용했을 것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제목 이 붙은 제1권의 내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얼굴은 강인한 의지력을 보여주는 이 얼굴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니발 전쟁'이라는 제목이 붙은 제2권의 표지로는 젊은 시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옆얼굴을 사용했다. 젊음에 넘치면서도 입가에 약간의 교활한 기색을 머금고 있는 이 얼굴 에서, 나는 전술의 천재 한니발과 싸웠던 시대의 로마 사나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승자의 혼미'라는 제목이 붙은 이 제3권의 표지로는 모델이 밝혀져 있는 마리우스나 술라 나 폼페이우스의 초상보다. 카피톨리노 박물관에서 발견한 이름없는 젊은이의 초상을 사용 하기로 했다. 의지는 강해 보여도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품성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입가 에 떠도는 관능적인 느낌은 이 젊은이가 전혀 냉혈한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수 가 감돈다. 제3권의 내용을 단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표지에 이 얼굴을 사용하는 까닭은, 그라쿠스 형 제 시대부터 시작된 로마의 혼미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단정하는 것과는 달리, 로마인들의 사치나 퇴폐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고뇌였다. 적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혼미'였던 것 이다. 그는 군대를 서쪽으로 보냈다. 30만에 달하는 폰토스군은 비티니아를 유린한 다음, 그 서 쪽에 있는 옛 페르가몬 영토로 물밀듯이 쳐들어갔다. 그곳은 이제 로마의 속주다. 로마가 '동맹시 전쟁'의 종결을 서두른 이면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동맹시 전쟁'은 미트라다테스의 예상과는 달리 2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먼 오리엔트에서 일어난 위기는 역시 30만 명의 게르만족이 알프스를 넘어 쳐들어왔을 때에 비하면 위기감이 훨씬 떨어진다. 로마인의 발걸음은 15년 전에 게르만족의 침입에 대처했을 때처럼 일사불란하지 않았다. '동맹시 전쟁'이 끝난 기원전 89년 겨울, 로마로 돌아온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이 듬해인 기원전 88년의 집정관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그리고 그의 소원대로 오리엔트 전선을 담당하는 임무도 맡게 되었다. '동맹시 전쟁'의 사실상 승장인 50세의 술라는 집정관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미트라다테스와 싸우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군단 편성을 위한 지원병 모집 이 캄파냐 지방의 도시인 놀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일순을 맞이한 마리우스가 오리엔트 정벌에 야심을 품었다. 자기가 하고 싶다기보 다는 술라한테 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이름을 떨치고 있는 장군끼 리의 대립에 호민관이 관여함으로써 문제가 복잡해졌다. 기원전 88년의 호민관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였다. 루푸스가 정책화하고 싶어하 는 법안이 성립되도록 마리우스가 '클리엔테스'를 동원하여 협력하는 대신, 마리우스의 오리 엔트 정벌에 루푸스가 이끄는 평민집회가 협력한다는 공동투쟁 관계가 성립되었다. 공화정 로마에는 수도 로마의 4개 선거구를 비롯하여 전국에 35개의 선거구(트리부스)가 있다. 로마의 선거제도는 재산별로 나뉘어 백인대(켄투리아)별로 투표하고, 그것들을 모두 합계하여 선거구 전체의 뜻을 한 표로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로마의 선거제도 는 일종의 소선거구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선거제도가 원로원파와 민중파의 쟁점이 되었 다. 기존의 로마 시민과 '율리우스 시민권법'에 따라 로마 시민권을 얻은 이른바 '신시민'의 비 율은 얼추 잡아도 1 대 2였다. 이런 '신시민'을 그들 거주지역의 선거구에 분배하면, '구시 민' 은 수도 로마의 4개 선거구에 압도적으로 몰려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구시민이 소수파 가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서 종래의 선거제도를 답습하면 '신시민'이 로마 국정의 동향을 좌 지우지하게 되는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구시민'들은 하나의 전례를 들어 '순수 로마인'인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 고 자 했다. 그들은 로마 시민권을 취득한 해방노예가 35개 선거구 가운데 4개 선거구에서만 투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전례를 들어, '신시민'들도 35개 선거구 가운데 8개 선거구에서 만 투표할 수 있도록 하든가, 아니면 9개 선거구를 신설하여 '신시민'들은 그곳에서만 투표 할 수 있게 하든가를 결정하는 법안을 제출하려 하고 있었다. 그 의도는 뻔하다. '신시민' 들 의 뜻이 되도록 작게 반영되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 호민관 술피키우스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그가 제안한 '술피키우스 법'은 '신시민 ' 들이 거주지역에 따라 35개 선거구의 어디에서나 투표할 수 있도록 했다. 사회 정의라는 측 면에서 보면 시민권을 가진이상 '구시민'과 '신시민' 사이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그의 생 각 이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동맹시 전쟁'도 있었으니까 단계적으로 실현하는 것도 좋지 않았 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술피키우스 법'은 성립되었다. 동시에 오리엔트 정벌의 총사령관을 마리우스에게 맡긴다는 결의도 평민집회를 통과했다. 이 두 가지가 순조롭게 가결된 것은 아니었다. 수도 로마에 압도적으로 많은 '구시민'과 반대파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지고, 결국은 유혈소동으로 번졌다. 집회에 참석한 두 집정관도 거기에 말려들어,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에 숨어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술라는 선거제도 개혁이야 어찌되었든, 자기가 쥐고 있던 지휘봉을 빼앗긴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 다. 로마에서 피신한 술라는 놀라에서 편성중인 군단에 도착하여 병사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는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졌음을 밝힌 다음, 자기는 지금부터 로마로 돌아가 실력을 행사해 서라도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병사들은 대부분 술라를 따라 2년 동안 '동맹시 전쟁'을 함께 치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술라의 '사병'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파트 로 네스'의 위기를 못 본 체하면, 그것은 '클리엔테스'의 도리가 아니었다. 병사들은 사령관 의 명예 회복을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입을 모아 대답했다. 다만 막료 가운데 한 사람 은 로마의 정규군이 조국의 수도를 향해 행군하는 데에는 참가할 수 없다면서 군단을 떠났 다. 3만 5천 명의 병사들 가운데 이 막료를 제외하고는 단 한사람도 이탈자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도망친 또 다른 집정관 루푸스도 술라 쪽에 합류했다. 베수비오 화산 북쪽에 있는 놀라에서 로마까지는 우선 카푸아로 빠진 다음 라티나 가도를 이용하면 불과 며칠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로마에 있던 마리우스와 술피키우 스 일파가 허를 찔린 것은 행군거리가 짧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설마 로마 집정관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쳐들어올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어 준비도 갖추지 않았던 수도는 몇 시간의 작은 충돌을 거쳐 술라 군대에 제압되었다. 마리우스는 에트루리아 지방으로 달아났지만, 호민관 술피키우스는 붙잡혀 살해되었다. 그의 목은 술라의 명령으로 포로 로마노의 연단 위에 효수되었다. 이 쿠데타는 수도 로마 시민이 미처 관여하기도 전에 성공적으로 끝나버렸다. 기원전 88년의 이 사건은 로마인이 무력으로 로마를 제압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로마를 장악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포로 로마노에 시민을 모아놓고, 무력 행사 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간곡하게 설명한 것은 아니다. 술라의 언동은 인제나 '위협적'이었다. 특 히 효수된 호민관 술피키우스의 목이 옆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더한층 '위협적'이었을 것 이 다. 집정관 술라는 설령 민회나 평민집회에서 의결된 사항이라도 원로원의 승인을 얻지 못 하면 실시되지 않는다는 법안을 제출했고, 이 법안은 반대하는 소리도 없이 가결되었다. 민 회나 평민집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원로원의 승인이 없어도 정책으로 실시된다는 기원전 287 년의 '호르텐시우스 법'이 200년 만에 개정된 것이다. '구시민'과 '신시민'의 권리 평등을 꾀 한 '술피키우스 법'은 이리하여 자동적으로 폐기되었다. 이어서 술라는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 일파, 이른바 '민중파' 지도자들을 반역자로 선언하 고, 그들을 도와준 자에 대해서도 똑같은 죄로 처벌한다는 법안을 성립시켰다. 칠순의 노구 를 이끌고 에트루리아 지방으로 피신한 마리우스가 그곳에서도 쫓겨나 아프리카까지 달아나 야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법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술라는 그 이상의 일은 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기원전 87년의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옥타 비우스와 킨나였다. 옥타비우스는 법학자로 이름나 있는 만큼 법을 남발하여 무질서를 초래 할 염려는 없었지만, 혈기왕성한 40대의 킨나에게는 술라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때 동쪽에서는 불온한 정보가 잇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6세는, '동맹시 전쟁'이 해결되긴 했어도 그 뒤처리를 하느라 로마는 당분간 동방으로 군대를 보낼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소아시아 서해안 지 역의 로마 속주를 점령한 그는 그곳에 주재하고 있던 로마 시민과 이탈리아인-이제는 모두 로마시민이지만-들을 피의 제물로 바쳤다. 옛 사람의 말을 믿는다면, 이때 살해된 희생자 수는 8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트라다테스 왕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리스 민족을 해방하는 자'를 기치로 삼고 있 었 다. 영명한 미트라다테스는 그리스 민족의 해방자 임을 좀더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아테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당시 아테네가 군사적, 경제 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아테네에는 아직도 정신적인 의미에 서의 힘이 있었다. 삼류 국가로 떨어지긴 했어도, 아테네는 여전히 그리스의 상징이었다. 아 테네 시민들은, 미트라다테스를 만나 그의 생각에 심취한 한 철학자의 선동에 넘어가 로마 에 반기를 들고 궐기했다. 아니나다를까, 그리스 전역에 로마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술라가 로마 역사상 처음인 '로마 진군'까지 감행했으면서도 로마를 어정쩡한 상태에 남 겨 둔 채 오리엔트로 떠난 것은, 그가 사태 해결의 우선 순위를 명확히 하고, 일단 결정한 이상 망설이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술라는 차기 집정관 킨나를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불러, 최고 신 유피테르의 신전 안에서 술라가 성립시킨 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쿠데타까지 감행한 자가 남에게 법을 지키라는 맹세를 시킨 것은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술라의 생각으로는 쿠데타도 질서 회복을 위한 필요악이었다. 그는 상식에 어긋나 는 행동도 태연히 해치우는 사람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해 말, 5개 군단에 기병을 더한 3만 5천 명의 로마군은 술라를 따라 브린디시에서 바다 를 건너 그리스로 떠났다. 미트라다테스의 예상은 또다시 빗나간 셈이었다. 술라가 그리스로 떠나자마자, 킨나는 맹세를 깨뜨렸다. 달아난 마리우스나 살해된 술피키 우스 일파로 간주되지 않았던 그가 왜 태도를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숨은 동조 자였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87년, 집정관 킨나는 민회를 소집하여 반역자로 규정되어 있던 마리우스와 그 일파의 명예 회복을 결의한 법안을 성립시켰다. 이어서 '신시민'들이 35개 선 거구의 어디에서나 투표할 수 있도록 한 '술피키우스법'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집정관 옥타비우스가 거부권을 발동했다. 또다시 로마에서 무력 충 돌이 일어났다. 패한 킨나는 로마에서 달아났다. 바로 그때, 정세 변화를 탐지한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6천 명의 병사와 함께 귀국했다. 무력으로 로마를 장악한 것은 이번에는 마리우스와 킨나 쪽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쿠데타 는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비참하고 굴욕적인 도피행을 잊을 수 없었던 마리우스가 원한 덩어리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70세 노장의 복수전은 무시무 시했다. 옥타비우스는 피신하라는 권유를 거부하고, 원로원의 집정관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킨나가 로마에서 달아난 뒤 집정관에 선출된 메물라는 체포된 뒤 혈관이 잘려 출혈과다로 죽었다. 기원전 102년에는 마리우스의 동료 집정관이었고, 이듬해에 마리우스와 함께 게르만족을 격 퇴하는 데 성공하여 백마 네 필이 끄는 개선장군 전차도 함께 탔던 카툴루스는 밀폐된 감옥 에 갇혀 있다가 산소부족으로 질식사했다. 기원전 90년의 집정관이었기 때문에 '동맹시 전 쟁' 2년째의 총사령관이었고 '율리우스 시민권법'의 창안자이기도 했던 루키우스 율리우 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처갓집 사람인데도 살해되었다. 루키우스의 동생으로, '동맹시 전쟁 ' 에서 마리우스와 함께 군단장을 지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살해되었다. 나중에 '삼두정치'의 '두 머리'가 된 폼키이우스와 크라수스도 모두 이 해에 아버지를 잃 었 다. 아직 19세밖에 안된 폼페이우스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목숨은 건졌지만, 27 세였던 크라수스는 에스파냐까지 달아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술라의 처자는 그리스로 도망 쳐 목숨을 건졌다. 살해된 요인들의 목은 포로 로마노의 연단 위에 다 효수할 수 없을 정도 였다. 마리우스의 명령으로 살해된 사람들은 원로원 의원 50명, '기사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무 려 1천 명이었다고 한다. 그가 꼬박 닷새 만에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노예부 대를 동원했기 때문이다. 자유를 준다는 미끼에 넘어가 살인을 저지른 노예들은, 살육행위가 끝나자마자 피의 굶주림을 채운 마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살해되었다. 희생자들의 이름을 얼핏 보기만 해도, 이들이 모두 술라 일파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 다. 다만 마리우스가 보기에, 그들의 죄는 자신의 일파를 역적으로 선언한 법안이 제출되었 을 때 거기에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그 법안 성립을 도와주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결과적 으로 원로원의 우수한 인재가 이 살육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복수에 불타는 피의 제전이 진 행되는 동안, 킨나는 살인에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마리우스의 손을 잡고 말리지도 않았다. 늙은 마리우스가 원한을 풀자 로마는 일단 평온해졌다. 민회는 이듬해인 기원전 86년의 집정관으로 킨나와 마리우스를 선출했다. 마리우스에게는 일곱번째 영광이었지만, 임기가 시 작된 지 13일째인 기원전 86년 1월 13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향년 71세였다. 마리우스의 죽음으로 집정관 자리가 하나 비었다. 킨나는 이 자리에 자파인 플라쿠스를 앉히는 데 성공했고, 이때부터 킨나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우선 '신시민'이라도 거주지역의 선거구에서, 즉 종래의 35개 선거구 가운데 어디에 서나 투표할 수 있도록 한 '술피키우스 법'을 다시 민회의 표결에 부쳐 성립시켰다. 이리하 여 옛 '로마 연합' 동맹시의 주민으로 이탈리아인이라고 불리던 '신시민'들도 '구시민'들과 동 등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율리우스 시민권법'이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신 시 민'들이 킨나에게 고마움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실제로는 독재라도 형식적으로는 민 회에서 집정관이 선출되는 체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신시민'들이 킨나의 은혜를 갚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물론 킨나에게 계속 표를 던지는 것이었다. 죽은 마리우스 대신 '민중파'를 대표하게 된 킨나는 빚을 갚느라 고생할 때가 많은 하층 민 을 구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킨나는 채권자들이 빚의 4분의 3에 대한 징수권을 포기하도 록 규정한 법안을 성립시켰다. 채권자들은 이율은 그대로지만, 빌려준 돈의 4분의 1만 돌려받는 것으로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 논리를 지나치게 무시한 행위였다. 빚의 4분의 3을 탕감받은 시민은 기뻐했 지만, 금융업자들이 속해 있는 '기사계급'은 킨나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킨나는 '신시민'과 하층민들의 표를 배경으로, 해외 원정에 나가 있는 술라를 총사 령관직에서 해임하는 결의안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해임했을 뿐 아니라, 술라와 그 일 파의 재산 몰수와 국외 추방까지 결의해 버렸다. 술라가 국외 추방령을 받은 이상, 술라 휘하의 병사들도 로마의 정상군은 아니라는 이야 기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까지 지배할 기세인 미트라다테스를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다는 것은 킨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로마 국가의 안전을 생각하면,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장군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술라를 국외 추방령만으 로 처리할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킨나는 동료 집정관 플라쿠스가 이끄는 '정규군'을 파견하여 미트라다테스와 대결시키기로 했다. 플라쿠스의 정규군은 그해 말에 브린디시를 떠나 그리스를 거치지 않고 직접 소아시아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술라는 킨나의 서약을 믿은 탓으로 적지에 고립되어 버린 셈이지만, 상대가 술라인 만큼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 다. 기원전 87년에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로 건너간 이후 1년 동안, 로마에서 일어난 사정을 술라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처럼 정보가 순식간에 전해지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정보 는 그 중요성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전달되게 마련이다. 술라는 로마의 정세를 환 히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도 역시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왕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제압에는 아테네의 동향 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로 건너가자 우선 아테네 공략 전에 착수했다. 로마에서 일어난 정세 변화를 알면서도 그는 진형을 풀지 앓았다. 마치 로마 의 정세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원군도 오지 않고 군비 보급도 바랄 수 없게 된 술라는 모든 것을 현지에서 조달 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특히 해군이 없는 것은 큰 약점이었다. 아테네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외항 피레우스를 손 에 넣지 않는 한 아테네를 함락시킬 수는 없다. 피레우스를 공략하려면 해군이 있는 편이 유리할 게 뻔하다. 또한 에게해의 제해권은 킬리키아 해적을 부추겨 해군으로 이용하고 있 는 미트라다테스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되찾지 않는 한 미트라다테스의 본거지인 소 아시아로 원정을 가려 해도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원정이 끝나버릴 위험이 충분했다. 그리스로 건너간 첫해에 이미 술라는 막료 가운데 하나인 루쿨루스에게 해군 편성을 맡겼 다. 루쿨루스가 맡은 임무는 로마 동맹국인 로도스 섬과 키프로스 섬 및 이집트를 방문하여 해군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육군은 현재 휘하에 있는 병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미트라다테스에게 쫓겨난 로마 속주의 총독에게 소속된 병력이 술라에게 합류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속주에 상비군을 두는 관습이 없는 시대에는 이것도 전력 증강을 기대할 수 있을 만한 세력은 아니었다. 결국 술 라가 활용할 수 있는 전력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5개 군단 3만 명의 보병과 5천 명의 기병뿐이었다. 군비를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 술라는 그리스 각지의 유명한 신전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 에 착안했다. 그리스에는 에피다우로스, 올림피아, 델포이 등 지중해 세계에 이름이 널리 알 려지고 참배객들이 많이 모여드는 신전들이 있었다. 이런 신전에는 믿음이 깊은 자들이 바 친 수많은 헌납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금은보화도 많아서, 해적들도 맨 먼저 신전을 노릴 정 도였다. 술라는 부하들을 보내 이것을 몰수하게 했다. 하지만 헌납품이니까 주인은 신이다. 그리스의 신들은 그리스 문화자체다. 따라서 이때 술 라가 저지른 행위를 보고, 근엄한 플루타르코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플라미니누스 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같은 로마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고 개탄하게 된다. 이 로마 의 세 장군은 모두 그리스 문화에 깊이 심취하여, 그리스에 원정해도 이런 짓은 절대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술라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점에서는 그들과 같지만, 행동은 그들과 달랐 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예고도 없이 무작정 들이닥쳐 강제로 보물을 빼앗은 것은 아니다. 신관들에게 미리 서한을 보내, 나중에 돌려줄 테니 보물의 무게를 재어 놓으라고 예고하기 는 했다. 몰수하러 간 부하는 그리스인이었는데, 신전에 들어간 이 병사는 신전 안쪽에 마련된 성 소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신관들에게 묻자, 아폴로 신이 연주하는 류트 소리라는 것이었다. 신의 보물에 손을 대기가 무서워진 그는 빈손으로 돌아와 그 이유를 술 라에게 말했다. 술라는 화도 내지 않고 말했다. "신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네한테는 실망했네. 그건 불찬성이 아니라 찬성하 는 의사표시라네. 신께서 기꺼이 주겠다고 말씀하시니까, 안심하고 가서 가져오게." 그 직후에는 이런 에피소드도 전해오고 있다. 술라가 무조건 성문을 열라고 아테네에 요구하자, 아테네 쪽은 교섭사절을 보내왔다. 그 사절은 술라 앞에서 아테네 문화의 훌륭함을 장황하게 연설한 모양이다. 그러자 술라는 이 렇게 대답했다. "그대들의 훌륭한 변설은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시는 게 좋겠소. 나는 로마 시민들이 그리 스 문화를 배우라고 아테네에 파견한 학생이 아니라, 로마에 반기를 든 아테네인을 제압하 라고 보낸 장군이오." 그래도 무조건 성문을 열라는 요구를 받아들여 항복한 아테네 시민에 대해서는 "소수의 뛰어난 자들을 보아 다수를 용서하고, 뛰어난 죽은 자들을 보아 살아 있는 자들을 용서한 다."고 말하여, 패배자 아테네인을 노예로 삼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후세에 태어난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술라 덕분이기도 하 다. 묻혀 있던 철학자의 저작집을 발견하여, 그것을 로마로 가지고 돌아온 사람이 술라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은 아니었겠지만, 술라는 아테네를 공략할 때 공성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목재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창립한 리케이온 근처의 숲에서 베어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기원전 1세기의 아테네가 아무리 힘이 없었다 해도, 한 도시를 공략하는 데에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한 것이 보통이다. 아테네 공략전에서는 아테네와 외항 피레우스의 공격에 전력 을 양분해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게다가 해군 편성의 임무를 띄고 파견된 루쿨루스가 좀처 럼 돌아오지도 않는 것이다. 군선 파견을 요청받은 동맹국 중에서도 특히 이집트가 좀처럼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133년부터 5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로 마의 혼란 상태를 보고, 오랜 우방인 이집트조차도 역시 로마에 대한 협력을 재검토하지 않 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테네 공략전이 기원전 86년 3월 1일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술라가 단호히 서둘렀기 때문이다. 총병력 12만 명인 폰토스군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그리스 본토로 들어왔다는 정보 가 들어와 있었다. 52세가 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로마 편으로 돌아온 아테네에 틀어박혀 적을 기다리는 전략은 취하지 않았다. 스스로 북상하여, 테살리아를 지나 남하해올 적을 중부 그리스의 어딘가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다. 적군은 12만 명인데, 술라는 아테네 방 위에 5천 명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활용 가능한 전력은 3만 명밖에 안된다. 수적으로 훨 씬 우세한 적에 대해서는 방어보다 공격이 더 효과적이었다. 술라에게는 불리한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전쟁터로 예정되어 있는 중부 그리스의 도시국 가 테베가 미트라다테스 쪽에 붙어버린 것이다. 술라는 네 배의 전력을 가진 폰토스군과 적 지에서 싸워야 할 형편이었다. 기원전 86년 봄, 양군은 레베에서 북서쪽으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호숫가에 펼쳐져 있는 카이로네이아 평원에서 맞섰다. 보병 10만, 기병 1만, 그리고 전차 90대를 평원 가득 전개한 폰토스군은 긴 창을 꼬나쥔 그리스식 중무장 보병(팔랑크스)과 낫을 양쪽 바퀴에 매단 오리엔트식 전차의 혼합체여서, 마치 미트라다테스 왕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총지휘를 맡은 것은 카파도키아 출신의 아르케올라스 장군이다. 이에 비해 짧은 창에 짧은 양날 검으로 무장한 2만 5천 명의 중무 장 보병과 5천 명의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로마군은 한눈에 보아도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 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전쟁터는 몸소 기병대를 이끌고 재빨리 주도권을 장악한 술 라의 독무대가 되었다. 전차가 거대한 낫을 회전시키면서 돌진해 왔지만, 로마군은 자마 전 투에서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를 피했듯이 슬쩍 비켜서서 전차를 통과시킨 다음, 허둥대는 전차들을 포위했다. 이리하여 폰토스군의 전차들은 대부분 전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스인이 자랑하는 중무장 보병 팔랑크스는 네모꼴로 촘촘히 모여서서 긴 창의 끝을 일 직선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적을 향해 다가가는 전술을 쓰는데, 이것도 앞쪽에 있는 적에게 는 강하지만 양옆과 배후가 약한 것은 전차와 마찬가지다. 이 결함을 보강하는 것이 기병의 역할인데, 폰토스군의 기병대는 수를 믿고 밀어붙이기만 할 뿐이어서, 중대별로 유연한 전술 을 구사하는 술라의 함정에 빠져 폰토스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대한테서 멀리 떨어져 버렸 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에도 3열 종대에 10열 횡대의 중대를 배치하는 로마 군단의 전 통적인 진형은 바뀌지 않았다. 이 진형은 전황에 따라 임기응변의 전술을 구사할 수 있어서 전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폰토스군과 로마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 결과는 폰토스 쪽의 전사자와 포 로가 10만 명 이상, 도망친 병사가 1만 명 남짓한 반면, 로마 쪽의 전사자는 12명에 불과했 다. 전투가 끝난 뒤 점호에 대답하지 않은 병사는 14명이었지만, 해가 진 뒤에 진영으로 돌 아온 병사가 두 명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한니발의 전파를 웃도는 신기록이었다. 이 전투가 있은 뒤, 폰토스 쪽에 붙어 있던 도시국가 테베는 그 벌로 영토의 절반을 몰수 당하고, 토지는 보물을 빼앗긴 에피다우로스나 올림피아나 델포이 신전에 대가로 주어졌다. 오리엔트 군주는 전쟁터에 몸소 나가는 관습이 없기 때문에, 패전은 총사령관의 능력 부 족 탓으로 돌리는 사례가 많다. 아무리 총사령관이라 해도, 전제군주에게는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카이로네이아에서 참패를 당했지만, 미트라다테스는 아직도 총사령관만 바꾸 면 술라를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몇 달도 지나기 전에 8만 명의 폰토스군이 다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하지만 카 이로네이아 전투 이후에도 아테네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북상하고 있던 술라의 로마군과 대 결한 결과는 또다시 술라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 두번째 전투의 전사자는 1만 5천 명, 전사 자 수가 첫번째 전투보다 적었던 것은 술라의 명령을 받은 로마 병사들이 적병을 죽이기보 다는 포로로 잡으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군비를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 술라로서는 포로로 잡은 적병을 노예로 팔아서 들어오는 수입도 중요한 자금원이었다. 로마가 자유항으로 지정 하여 경제 부흥기지로 삼고 있던 델로스 섬의 노예시장은 그후 얼마 동안 그리스나 아시아 에서 노예를 사러 오는 상인들로 붐볐다고 한다. 로마군이 두 번이나 잇따라 대승을 거둔 것은, 우선 그것을 직접 목격한 그리스인들이 냉 정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그리스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이그나티아 가도를 비롯한 로마의 '사회간접자본' 정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장사 재능이 뛰어난 그 리스 민족이다.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기치로 내건 미트라다테스 왕을 따라가면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빨랐다. 그리스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미트라다테스 왕은 에게 해를 사이에 두고 그리스와 마주보 고 있는 소아시아 서해안의 로마 속주에 여전히 눌러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술라가 여 세를 몰아 헤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 쪽으로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해군이 도착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군을 기다리는 술라에게 킨나가 파견한 플라쿠스 군단이 소아시아 서부의 남쪽 끝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헤레스폰토스 해협 바로 근처에서 함대를 이끌고 돌아올 터인 루쿨루스를 기다리고 있는 술라에게 잇따라 정보가 들어왔다. 플라쿠스 군단은 소아시아에 상륙했지만, 총사령관 플라 쿠스와 부장 핌브리아 사이에 전략상의 의견 대립이 벌어지는 바람에, 사령관 플라쿠스의 무능을 경멸하고 있던 병사들까지 합세하여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 그 소동의 와중에 플라 쿠스가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핌브리아가 이끄는 로마군은 그들을 맞아 싸우러 나온 폰 토스군과 싸워서 이겼다는 것. 술라는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적이 둘이 되었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것은 미트라다테 스도 마찬가지였다. 미트라다테스는 양쪽의 적을 저울질한 끝에, 강하다고 여겨지는 적과 강화를 맺기로 했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의 패장 아르케올라스가 교섭 임무를 띠고 술라에게 파견되었다. 술라는 강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조항을 제시했다. 1. 폰토스의 왕은 침략한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폰토스 국경 안으로 철수한다. 2. 폰토스는 다시 로마의 동맹국이 된다. 3. 아르케올라스가 지휘하는 폰토스 해군의 군선은 모두 로마에 양도한다. 4. 포로가 된 폰토스군 병사들은 폰토스에 반환한다. 5. 폰토스의 왕은 배상금으로 2천 탈렌트를 지불한다. 교섭자인 아르케올라스는 전쟁터에서 접전한 경험으로 술라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은 이 조건에 이의가 없었지만, 미트라다테스 왕은 좀처럼 결심을 하지 못했다. 술라도 강화를 서둘러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시한 조건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 미트라다테스는 우선 회답을 늦추었다.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아르 케올라스는 병이 들어, 술라의 배려로 로마 진영 안에서 정성껏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런 이유도 있어서, 카파도키아 출신의 이 장군은 술라에게 감복해 버렸다. 술라도 아르케올라스 에게, 미트라다테스 휘하에서 일하기보다는 로마 편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유혹하기도 했 다. 그럭저럭하는 동안, 애타게 기다리던 루쿨루스가 드디어 그동안 모은 군선을 이끌고 도 착했다. 이집트는 지금까지의 선례를 깨고 중립을 지키기로 한 모양이다. 함대를 제공한 것 은 이번에도 로도스 섬이었다. 술라가 해군까지 수중에 넣은 것을 안 미트라다테스는 진지하게 술라와 강화를 교섭하기 로 결심했다. 하지만 술라가 제시한 조건보다 자기한테 더 유리한 조건의 강화를 아직 체념 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카드는 술라가 정통 로마 정부한테서 추방된 신세, 즉 불법적인 존재라는 사실뿐이었다. 미트라다테스는 술 라와 직접 교섭할 것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헬레스폰토스 해협 바 로 동쪽에 있는 항구도시 다르다넬스에서 회담을 갖기로 했다. 회담 시기는 기원전 85년 봄 으로 결정되었다. 수뇌회담은 중립지대에서 열리는 것이 상식이다. 회담이 계속 열릴 예정이 아닌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서쪽 끝에 있다고 해도 다르다넬스는 소아시아에 속한다. 술라에게 제 압된 그리스에서 좁은 해협 하나만 건너면 된다고는 하지만, 그해의 소아시아는 미트라다테 스 왕의 세력하에 있었다. 다르다넬스가 회담 장소로 결정되었을 때, 미트라다테스는 술라가 먼저 강화를 요구해 왔고 자기는 그런 술라를 맞이한다는 무대 장치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고 여겼다. 그래서 자기 세력을 양적으로 과시하는 경향이 강한 오리엔트 군주답게, 그도 보 병 2만 명에 기병 6천, 게다가 전차부대까지 이끌고 다르다넬스에 나타났다. 그러나 미트라다테스보다는 술라가 한 수 위였다. 보병 2천 400명에 기병 200명이라는 ' 가 벼운 차림'으로 해협을 건넌 술라는 한 발 먼저 다르다넬스에 도착하자마자, 지체하지 않 고 로마식 진영을 구축해버린 것이다. 이것으로 강화를 요구해온 로마 장군을 폰토스 왕이 맞 이한다는 구도가 역전되어 버렸다. 그래도 기병대에 둘러싸여 로마 진영에 들어간 왕은 금은보석을 아로새긴 호화찬란한 예 복으로 로마 병사들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다. 한편, 진영 한복판에 서서 왕을 맞이한 술라는 총사령관이 입는 기다란 진홍빛 망토를 걸 치고 있었지만, 그것말고는 로마 장군의 평소 군장이었고, 게다가 투구도 쓰지 않은 모습이 다. 47세의 미트라다테스 왕은 키가 크고 건장한 체구로 유명했지만, 53세의 술라는 키는 크 지만 여윈 편에 속한다. 말에서 내린 뒤, 친근하게 오른손을 내밀면서 다가온 것은 미트라다 테스 쪽이었다. 그를 맞이한 술라는 왕에게 의자를 권하기는커녕, 왕이 내민 손도 잡지 않고 다짜고짜 물 었다. "내가 제시한 조건으로 강화를 받아들이겠소?" 예의를 무시당한 미트라다테스는 화가 나기보다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낭패한 그는 입 을 다물어 버렸다. 술라는 기다리지 않았다. "질문을 받은 쪽이 대답해야 하오. 승자는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미트라다테스는 변명을 시도했다. 자기가 시작한 침략전쟁의 원인은 신들이나 로마 속주 의 통치자들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면서 변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술라는 그런 미트라다 테스의 입을 다음과 같은 말로 재빨리 막아버렸다. "폰토스의 왕 미트라다테스가 연설의 명수라는 평판을 전부터 듣고 있었소만, 그게 헛소 문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제 내가 몸소 납득할 것 같소.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 연설을 듣 고 있을 겨를이 없소. 그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 데 응할 것인지 아닌지, 그 대답만 듣고 싶 소." 계속해서 허를 찔린 미트라다테스는 저도 모르게 "좋소" 하고 대답했다. 술라는 비로소 여섯 살 아래인 미트라다테스의 오른손이 아니라 두손을 모두 잡고, 손을 잡은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어깨까지 끌어안으며 강화를 조인하는 탁자로 데려갔다. 미트라다테스는 손에 쥔 카드를 슬쩍 내보이면서 흥정할 작정이었지만, 흥정하고 말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교섭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조인을 끝낸 미트라다테스는 그 길로 폰토스로 돌아갔다. 소아시아 서해안 지역의 로마 속주에서 폰토스군이 전면 철수하라는 조건은 완벽하게 지켜졌다. 미트라다테스에게 쫓겨났 던 비티니아와 카파도키아의 왕도 각자 왕위에 복귀했다. 폰토스의 군선 70척도 술라에게 양도되어 루쿨루스가 지휘하는 로마 해군에 편입되었다. 루쿨루스가 모아온 군선은 함대라 고 부르기에는 부끄러운 규모였지만, 이제 폰토스의 군선을 합하여 훌륭한 해군이 되었다. 이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미트라다테스를 다룬 술라의 승리였다. 술라 휘하의 병사들은 이런 조건으로 강화를 맺은 데 반대했다. 미트라다테스는 옛 페르 가몬 왕국을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의 로마 속주를 침략했을 때 로마 시민을 노예들과 함께 8만 명이나 죽였다. 그런 자에게 제시한 강화 조건치고는 너무 너그럽다는 것이었다. 술라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설명했다. 자기 편한테는 이치를 따져서 차근차근 설득하는 수 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술라의 방식이었다. "우리가 미트라다테스와 강화를 맺지 않으면, 미트라다테스는 핌브리아와 강화를 맺을 것 이다. 양군이 손을 잡고 덤벼들면 우리도 당해낼 수 없다." 병사들은 비로소 납득했다. 폰토스의 왕 미트라다테스를 제압한 술라는 아시아로 갈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제 해군도 손에 넣은 그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동쪽의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폰토스군이 철수한 뒤의 소아시아를 재편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전에 우선 이 땅에 상륙하여 폰토스군을 서전 에서 이긴 핌브리아의 로마 '정규군'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킨나의 명으로 파견된 핌브리아의 로마군은 2개 군단과 기병이었으니까, 총병력은 약 1만 5천 명 정도가 된다. 술라가 지휘하는 '비정규군'은 3만 5천 명의 병력을 갖고 있다. 하지 만 술라도 이때만은 같은 로마인과 싸우지 않았다. 소아시아 서해안을 따라 남하한 술라 군대는 기다리고 있는 핌브리아 군대의 진영 바로 옆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주위에 참호와 높은 울타리를 둘러친 로마식 진지를 적진 앞에 짓는 것은 십중팔구 전투의 전조를 의미하지만, 핌브리아 군대 병사들의 눈에는 술라 군대의 병사들이 너무 한가롭게 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마음이 느긋해진 핌브리아 휘하 병사들은 무기도 갖지 않고 갑옷도 입지 않은 채 작업중인 동포에게 다가갔 다. 다가가면 작업중인 병사들이 말을 건다. 거기에 이끌린 그들은 작업까지 도와주게 되었 다. 도와주면, 식사를 함께 하러 가자고 권한다. 그 권유도 받아들이는 동안, 술라 진영에서 자고 가라는 권유까지 받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형태로 집단 탈주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총사령관 핌브리아가 알아차렸을 때, 아군 진영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바로 이때, 술라가 사람을 보내왔다. 그 전령은 핌브리아 에게 로마로 돌아가기 위한 배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핌브리아는 무슨 낯을 들고 로마로 돌아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성품이 격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존심도 그만큼 강했다. 그 는 술라가 제공하는 배를 거절하고, 페르가몬의 제우스 신전에 가서 자결하고 말았다. 결국 킨나가 술라를 꺽기 위해 보낸 로마 '정규군'은 술라의 '비정규군'에 흡수되어, 오히려 술 라 의 세력을 더욱 강화시키고 말았다. 술라는 여기서 당장에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자신을 역적으로 상정한 정부를 뒤엎는 행동 은 하지 않았다. 미트라다테스에게 침략당한 오리엔트에서는 술라 덕분에 로마의 권위가 회 복되었다. 로마의 패권은 다시금 소아시아 전역에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회복된 패권을 확 고히 하려면 5년에 걸친 미트라다테스의 통치로 붕괴된 로마의 속주 통치 체제를 재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여전히 술라는 우선순위를 확실히 하는 사나이였다. 술라는 소아시아에 대한 통치체제를 다음과 같이 재구축했다. 첫째, 소아시아에서 분쟁의 원인이 되기 쉬운 세 왕국-폰토스, 비티니아, 카파도키아-사이 에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게 했다. 그리고 세 나라는 개별적으로 패권국인 로마와 동맹 조약 을 경신했다. 이것은 이들 세 나라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한 나라를 침략하면 상호불가침 조 약에 대한 위반행위가 될 뿐 아니라, 침략당한 나라와 동맹관계에 있는 로마까지 적으로 삼 게 된다는 뜻이다. 술라는 속주에도 상주군을 두지않는 로마가 이런 방식으로 속주가 아닌 동맹국에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려고 생각했다. 둘째, 미트라다테스에게 점령당한 5년 동안 무정부상태가 된 옛 페르가몬 왕국 영토를 중 심으로 한 소아시아 서해안의 질서 회복이다. 이 일대는 이미 반세기가 넘도록 로마의 속주 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속주세를 낼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미트라다테스는 그리스인이 많은 이 지방을 자기 편으로 삼기 위해 조세를 완전히 폐지해 버렸다. 영명한 군주인 미트라다테 스는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치만으로 그리스인을 낚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 문이다. 술라는 속주세를 부활했다.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5년 동안 내지 않은 속주세 5년치 를 한꺼번에 내도록 명령했다. 이 점은 과연 술라답지만, 그에게는 군단 유지비까지도 현지 에서 조달해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속주민들은 이런 처사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술라는 부하 병사들을 일정한 장소에 숙영시키지 않고 속주민들의 집집에 할당했기 때문이다. 각 가정은 병사 한 사람의 의식주를 부담해야 했다. 장교를 할당받은 집에서는 외출용과 실내용으로 두 벌의 옷을 갖 추어 놓을 것을 요구받았다. 주민들은 주둔군이 되도록 빨리 철수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2 만 탈렌트나 되는 거액의 속주세를 한꺼번에 내라는 요구도 실현되었다. 술라는 또한 핌브리아 휘하에 있던 2개 군단을 루쿨루스의 휘하에 편입시켜, 해군과 함께 소아시아에 남겨두기로 했다. 54세가 된 술라는 막료들 중에서도 해군 편성을 맡은 32세의 장군 루쿨루스를 가장 신임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능력을 인정하고 있는 루쿨루스에 게 소아시아의 안정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긴 것이다. 이런 일들을 끝낸 술라는 소아시아를 떠나 에게 해를 건너 피레우스에 도착하여 아테네로 들어갔다. 물론 그의 뒤에는 그가 가는 곳이라면 지옥에라도 따라가겠다고 결심한 3만 5천 명의 병사가 따랐다. 술라는 또다시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거기서 당장 이탈리아로 진군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테네에서 거의 1년을 지낸다. 통풍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는 게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통풍 치료에 적합하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는 아테네에 계속 눌러앉아 있었다. 잊혀져 있 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발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고 하지만, 술라가 아테네의 문화를 배우러 온 학생으로 표변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술라의 아테네 체류는 전략상의 이 유 때문이었다 만약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에게 불온한 움직임이 있으면,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 에서 소아시아 서해안까지는 해로로 사흘 거리다. 아테네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술라는 미트 라다테스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한 것이다. 동시에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육로를 따라 그리스 서해안까지 가면, 거기서 이탈리아 반도까지는 역시 해로로 사흘 거리다. 아테네에 계속 체 류함으로써, 술라는 로마 정부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킨나에게도 무언의 압력을 가하며 그를 흔들어 보고 있었다. 아니, 킨나에게는 '유언'의 압력도 가했다. 술라는 아테네에서 로마 원로원으로 서한을 보 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내가 세운 공을 생각할 때, 나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국외 추방과 재산 몰수를 결정한 민회의 처분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또한 나한테 동조했다는 이유만 으로 살해된 사람들에 대한 조치는 너무 당치 않아서 논할 거리도 못된다. 따라서 나는 충 성스러운 부하들과 함께 이 부당한 조치를 바로잡을 결심이다." 사태는 이제 분명했다. 술라는 해외에 원정한 로마 장군이 귀국한 뒤에는 군대를 해산해 야 한다는 법을 무시할 생각임이 분명해진 것이다. 게다가 킨나가 이끄는 정통 정부를 실력 으로 뒤엎을 생각인 것도 분명해졌다. 이 서한을 원로원에 보낸 뒤, 술라는 부하 장병을 모아놓고 비로소 그들에게 이탈리아 반 도에 상륙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10명 이상의 장군과 20만 명 이상의 병사가 그들을 맞아 싸우게 될 거라고도 말했다. 그런데도 부하들은 일제히 그를 따라 싸우겠다고 맹세했 다. 뿐만 아니라, 군비가 필요하면 자기가 모은 저금을 써달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술라가 자금 조달에는 강경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푼도 착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병사들은 알고 있 었다. 술라는 그들의 충성 서약은 받았지만, 저금 공출만은 고마워하면서도 받지 않았다. 자 기는 행운아(페릭스)이기 때문에 군자금도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 말했다. 물론 병사들은 대장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 문제도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원전 84 년도 어느덧 저물어가고 있었다. 술라가 이탈리아를 떠난 것이 기원전 87년, 그때부터 3년 동안 킨나가 아무 일도 하지 않 고 지낸 것은 아니다. 술라와 같은 코르넬리우스 일족 출신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는 원한에 사로잡힌 마리우스의 복수전을 방관했지만, 마리우스가 죽은 뒤에는 뜻밖일 만큼 온당한 정치를 폈다. 그러나 원로원 수구파가 등돌릴 것을 우려하여, 그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정책의 실시 를 적당히 조절하지는 않았다. 35개 선거구에 '신시민'을 분배한다는 법은 엄정히 실시되었 다. 그렇기는 해도 '신시민'은 무려 50만 명에 이른다. 그들을 유산자 5등급과 무산자 1등 급 을 합하여 모두 6개 계급으로 분류하는 작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도 '율리우스 시민권법'이 성립된 지 5년 뒤인 기원전 85년의 인구조사(켄수스)에서 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성년 남자의 수가 그전보다 두 배 가까이나 늘어났다. 매년 5천 명 정 도의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착실히 늘어나고 있었다. 빈민층에 대한 곡물 공급도 계속되었다. 다만 킨나는 거기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 해 공공사업비를 삭감했기 때문에, 킨나 시대에는 두드러진 공공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과 채무의 4분의 3을 탕감한다는 법을 성립시킨 것은 킨나의 정치가 선거대책에 불과하 다고 비난받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민회의 표를 장악함으로써 독재를 시행한 킨나는 더 이상의 급진적인 법안은 제출 하지 않았다. 킨나가 독재한 3년 동안, 로마는 물론 다른 어디에서도 정치와 관련한 유혈소 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킨나는 온당한 정치를 통해 원로원 양식파의 지지도 확보하려고 했 던 모양이다. 실제로 술라의 이탈리아 상륙이 분명해진 시점에서도, 원로원은 킨나한테 당장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킨나는 딸을 성년식을 갓 마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시집보냈다. 훗날의 영웅 카이사르 도 당시에는 아직 16세였다. 16세의 신랑은 고모부인 마리우스의 처조카에 해당할 뿐 아니 라, '율리우스 시민권법'의 제안자이면서 마리우스의 원한에 희생된 '동맹시 전쟁' 당시의 집 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이기도 했다. 킨나가 이 젊은이를 사위로 삼은 것 은 평민 영웅 마리우스와 자신의 인연을 강화하는 동시에 원로원 양식파에 대한 화해의 제 스처이기도 했다. 당시 로마의 상류층에서 결혼은 대부분 정략결혼이었다. 무력 충돌이 예상되는 상태에서 대립하면, 양쪽 다 상당한 압박감을 견뎌내야 한다. 그 최 초의 행동은, 이때를 놓치면 두번 다시 좋은 기회는 오지 않는다고 믿고 결단을 내리거나, 더 이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행동에 나서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에 일어난다. 킨나의 경 우는 전자였을까 후자였을까, 그 자신은 전자라고 믿었겠지만, 실제로는 후자였다. 킨나는 군단 총사령관을 맡은 경험이 없었다. 킨나는 집정관의 정당한 권리인 군단 편성을 개시했다. 그해에 동료 집정관은 마리우스의 아들이었다. 이 두 명의 집정관이 '무법자' 술라를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벌어 진 일로 판단하면, 킨나는 이탈리아에 남아서 술라를 맞아 싸워야 했다. 하지만 술라가 가하는 무언의 압력과 유언의 압력에 흔들린 킨나는 몸소 그리스에 가서 술라와 맞붙기로 작정했 다. 병력 집결지는 아드리아 해에 면한 이탈리아 중부의 항구도시 안코나로 결정되었다. 안코 나에 이탈리아 각지에서 지원병이 속속 집결했지만, 그들을 당장 군단으로 편성하려면 총사 령관이 조직하는 장교급이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킨나에게는 그 런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인 지원병들이 시내에 넘쳐흐르게 되었다. 킨나는 일단 편성된 병력만 이끌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갔다. 그런데 뒤따라올 예정인 나머지 병력이 도무지 안코나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킨나는 직 접 그들을 데려오려고 다시 안코나로 돌아갔다. 돌아가 보니,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규율도 없는 군중으로 변한 병사들은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킨나는 그들을 통솔하려고 애썼지만, 킨나에게는 그 모습을 나타내기 만 해도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재능이 없었다. 지원병들 속으로 들어간 것은 좋았지만, 거기 서 살아나오지는 못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50세도 되기 전에 시시한 사고로 일생을 마감했다. 기원전 84년 말의 일이었다. 기원전 83년 이른봄, 아테네를 떠난 술라는 강행군으로 그리스를 가로지른 다음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 남쪽 끝에 있는 브린디시에 상륙했다. 브린디시 주민들은 역적으로 규 정된 술라에게 기꺼이 성문을 열어주었다. 술라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아피아 가도의 종점이 기도 한 브린디시에서 로마까지는 병력을 이끌고 행군한다 해도 보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술라는 그 거리를 가는 데 무려 2년 가까운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 를 맞아 싸울 준비를 갖춘 로마 정규군은 엄청난 수의 병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브린디시에 상륙한 술라가 맨 먼저 한 일은 군사력으로 결판을 내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 힌 사람치고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였다. 술라는 나중에 실시한 국정 개혁으로 보아도 철저하리만큼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는 로마 패권의 중심지는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 반도이어야 하고, 그 이탈리 아 주민의 선두에 서는 것은 마땅히 로마 시민이어야 하고, 그 로마 시민을 이끌어가는 것 은 원로원 계급이어야 한다는 게 술라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런 술라였던 만큼, 킨나가 확립 한 '구시민'과 '신시민'의 동등한 대우에 대해 속으로는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현 실 주의자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에 상륙한 자신을 맞아 싸울 로마 정규군 병사들이 대부분 얼 마 전에 획득한 로마 시민권을 잃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전투에 참가한 '신시민'임을 그 는 잘 알고 있었다. 술라는 브린디시에서 포고령을 발표하여 '신시민'의 기득권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 포고령이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 데에는 다음 세 가지 요인이 있었 다. 첫째, 이탈리아 전역에 정보를 전달할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보수파로 간주되고 있던 술라의 말을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 셋째, '신시민'과 빈민층이 자신들의 처우 개선에 힘써준 킨나 일파에 대해 고마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런 현실 앞에서는 술라도 여느 때의 방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피아 가도를 따라 북상하는 데에만 2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54세를 맞이한 술라는 그를 따르는 3만 5천 명의 고참병(베테랑)과 그리스에서 참가한 5 천 명을 합한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마치 주변을 권위로 제압하려는 듯 느린 속도로 아 피아 가도를 북상하기 시작했다. 킨나가 독재를 휘두르던 4년 동안 숨을 죽이고 살았던 자 들이 속속 술라에게 달려왔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 지방 주둔군 총사령관인 메텔루스 피우스가 휘하의 2개 군단을 거느리고 도착했다. 부친과 형이 마리우스에게 살해당한 뒤 에스파냐로 도망쳤던 크라수스도 돌아왔다. 역시 부친을 마리우스 일당에게 잃은 폼페이우스도 숨어 있 던 피체노에서 달려왔다. 23세의 폼페이우스는 대지주 집안의 출신답게 자비로 편성한 3개 군단을 데리고 참가했다. 여기에 술라도 크게 기뻐했다. 이리하여 술라 휘하에는 기원전 88년부터 거느리고 있던 5개 군단과 그리스에서 참가한 1 개 군단, 메텔루스 피우스의 2개 군단, 폼페이우스가 데려온 3개 군단을 합하여 모두 11개 군단이 집결했고, 병력으로는 보병 6만 5천 명에 기병 1만 명을 합하여 모두 7만 5천 명이 되었다. 한편 술라를 맞아 싸울 로마 정규군은 12만 명이다. 술라가 브린디시에서 발표한 포고령 을 알고 로마 집정관의 소집령에 응하지 않은 행정구역이 있었는데도 이만한 수가 되었다. 이 정규군을 지휘하는 것은 그해의 집정관인 노르바누스와 카르보네스, 전직 집정관 자격 으로 지휘를 맡은 스키피오 나시카와 마리우스의 아들, 그리고 마리우스의 부관이었던 세르 토리우스 등 다섯 명이다, 군대를 넷으로 나누어 북상하기 시작한 술라에 대해, 정규군은 5 명의 장군이 다섯으로 나뉜 군대를 이끌고 각각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2년에 걸친 전쟁은 격전의 연속이었다. 스키피오 나시카는 일찌감치 항복했고, 그의 군단 도 그대로 술라의 군단에 흡수되어 버렸지만, 다른 장군들은 술라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 지 필사적이었다. 로마 시민과 비시민이 둘로 나뉘어 싸운 '동맹시 전쟁'과는 달리, 이번은 적군과 아군이 모두 같은 로마 시민이었다. 또한 전쟁이란 오래 계속될수록 당초에는 품지 않았던 증오심 까지 고개를 쳐들게 되는 법이다. 전선에서 싸우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르게 된다. 오직 증오심만이 그들을 몰아세운다. 내전이 처참한 것은 목적이 보이지 않게 되기 때 문이다.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이 전쟁도 기원전 82년 11월 1일에 벌어진 로마 성벽 바 로 옆에서의 전투를 끝으로 드디어 막을 내렸다. 노르바누스는 아프리카로 도망쳤고, 세르토리우스는 에스파냐로 도망쳤고, 마리우스의 아 들은 전사하여 로마 정규군의 지회관들은 모두 패배했다. 술라는 당장 젊은 퐁페이우스에게 아프리카로 가서 노르바누스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에스파냐로 달아난 세르토리우스는 어 디로 도망쳤는지 몰라서 방치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나중에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이번만은 후환의 우려가 없는 상태에서 로마의 지배자가 되었다. 56세의 술라는 반대파 소탕작전을 시작했다. 마리우스의 살육은 원한 때문에 저지른 행위였지만, 술라의 살육은 반대파를 물리적으로 없애버리려는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점이 다르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로마 성벽 바로 옆까지 쫓겨와서도 저항을 계속했던 정규군 소속의 삼니움족 병사 4 천 명이 경기장에서 집단으로 살해되었다. 단말마의 비명은 원로원 회의가 열리고 있는 신 전에까지 들렸다. 얼굴이 창백해져서 토의도 건성인 의원들에게 술라는 차갑게 말했다. "정당한 벌을 받고 있는 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소." 술라는 1만 명의 건장한 노예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일족 이름인 코르넬리우스를 주어, 반대파 소탕의 행동대로 이용했다. 이들 '코르넬리우스 일당'(코르넬리)은 마리우스 의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테베레 강에 던지고, 마리우스가 유구르타 및 게르만족과 싸워서 이 긴 것을 기념하는 전승 기념비를 파괴하고, 마리우스의 양손자를 살해했다. 마리우스나 킨나와 연루된 이른바 '민중파' 인사들은 술라가 직접 작성한 '살생부'에 이 름 이 오르면 어디에 숨어도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술라가 현상금을 붙인 밀고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을 죽인 자에게는 살해된 자의 재산에서 빼앗은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 이 주어졌다. 술라의 '살생부'에는 80명 가까운 원로원 의원과 1천 600명의 '기사'(경제인) 를 포함하여 모두 4천 700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고 한다. 이들에게 남은 길은 재판도 없이 살해되고 재산을 몰수당하든가, 살해되지는 않더라도 재산을 모조리 몰수당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자손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몰수한 재산은 경매에 부쳐졌다. 이 재물을 헐값으로 사들여 떼돈을 번 것이 나중에 '삼두정치'의 '한 머리'가 된 크라수스였다. '민중파'에 대한 소탕작전은 로마의 저명인사들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각 지방에도 미 쳤 다. 로마 정규군에 가담하여 술라에게 저항한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인, 이탈리아 남부 의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은 '율리우스 시민권법'으로 보장된 로마 시민권을 박탈당했을 뿐 만 아니라, 유력자들은 처형당하거나 소유지를 몰수당하거나 엄벌에 처해졌다. 술라는 '민중 파'의 기반도 철저히 파괴할 생각이었다. 술라가 작성한 '살생부'에는 한 젊은이의 이름도 실려 있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 르, 그도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라는 점에서 마땅히 처단해야 할 '민중파'의 일 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라의 측근들이 그를 살려줄 것을 부탁했다. 아버지도 없는 율리우스 가문의 후 계자가 아직 18세에 불과하고, 정치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면서, 술라는 처음엔 고개 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살려주라는 탄원이 거듭되었고, 결국에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살생부'에서 젊은이의 이름을 지우면서 술라는 말했다. "자네들은 모르겠나? 그 젊은이의 마음속에는 마리우스가 백 명이나 들어 있다는 것을..." 비범한 인물이었기에 비범한 인물을 꿰뚫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그 대신 술라는 젊은이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킨나의 딸과 이혼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요구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3개 군단을 자비로 편성하여 술라와 함 께 싸웠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민중파' 잔당 사냥에도 성공하고 귀국한 폼페이우스조 차도 술라의 명령에 복종하여 '민중파'로 살해된 사람의 딸과 이혼하고, 술라가 권하는 대로 술라의 처갓집 아가씨와 재혼했다. 하지만 율리우스 가문의 젊은이한테서 돌아온 대답은 "싫소"였다. 술라는 격분했다. 18세 의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달아났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을 도망쳐 다니는 신세가 되었 다. 얼마 후에는 이탈리아 안에서 도망쳐 다니는 것도 위험해져서, 먼 소아시아까지 도망쳐 술라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게 된다. 57세의 술라는 마리우스와는 달리 반대파를 소탕한 뒤에도 죽지 않았다. 술라에게는 국정 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국정을 개혁하려면 법적으로 정당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집정관이 둘다 전사하여 공석으로 남아 있는 자리를 술라가 욕심내고 있다 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로든 국가 최고위직인 집정관 자리가 둘 다 비어버린 경우에는 원로원의 '제일 인자'(프린키페스)가 선거관리 내각의 수반을 맡도록 정해져 있었다. 내가 '선거관리 내각 의 수반'이라고 의역한 말의 원어는 '인테렉스'인데, 그해의 '인테렉스'는 기원전 100년에 마리 우 스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고 기원전 97년에는 재무관까지 지낸 명문 귀족 발레리우스였다. 집정관 선출을 위해 민회를 소집하려는 발레리우스에게 술라의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현재 상황이 국가에 대단히 위험한 상태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 이상, 이런 사 태를 타개하려면 비상 대책만이 유효하다고 생각하오. 평상시의 집정관으로는 불충분하고, 비상시의 독재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그것도 지난날처럼 임기가 6개월인 독재관이 아니 라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무기한 재임이 허용되는 독재관이 필요할 것이오. 시민이 원한다 면, 나는 그 중책을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소."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공화정 로마의 위기관리 체제인 독재관(딕타토르)은 공화정 로마의 3대 기둥인 민회와 원로원과 집정관 제도에만 손을 대지 않는 한, 그밖의 모든 결정권을 부 여받을 만큼 막강한 대권을 가진 직책이었다. 그래서 임기를 6개월로 짧게 정했던 것이다. 또한 집정관을 비롯한 모든 관직이 민회에서 선출되는 반면에 독재관만은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이 임명하면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81년에는 독재관 임명권을 가진 집정관이 둘 다 전사해 버렸다. 따라서 법 적으로 따지면 이해에는 어느 누구도 독재관에 취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술라는 그것을 알면서도 독재관에 취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것도 전례가 없는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이 되겠다는 것이다. 편지는 명령이 아니라 암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10만 명 의 병력을 배경으로 한 '암시'다. 발레리우스도 원로원도 술라의 '암시'를 받아들일 수밖 에 없었다. 민회에 '발레리우스 법안'이 제출되었다. 임기가 무기한인 독재관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 스 술라를 선출한다는 법안이다. 민회는 이 법안을 가결하고, 술라를 독재관에 선출했다. 이 리하여 술라는 국법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독재관 지위를 탈취한 것이 아니라, 법에 따라 민 주적으로 로마 역사상 최초인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에 취임한 셈이다. 민회는 이어서 기원 전 81년의 집정관 두 명을 선출했다. 물론 둘 다 술라 지지파였다. 이런 일들을 끝낸 뒤, 술라는 비로소 미트라다테스 앞에 대한 두 차례의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축제행사는 이틀에 걸쳐 대규모로 화려하게 벌어졌다. 마침 그해는 그리 스에서 165회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지만, 선수들이 모두 로마에 초대되는 바람에 올림픽 경 기대회는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81년 1월 27일과 28일에 거행된 개선 행사가 끝나자마자 술라의 국정 개혁이 시작 되었다. 독재관이 제출하는 법안은 집정관이나 재무관이나 호민관의 경우와는 달리 민회에서 의결 할 필요가 없다. 술라의 발의는 당장 정책이 되었다. 그것들을 항목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 다. * 시민권 및 선거제도 관계 술라는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전역의 주민에게 개방한 '율리우스 시민권법'을 인정하 겠 다는 약속을 지켰다. 또한 호민관 술피키우스가 성립시키고 킨나가 확립한 '술피키우스 법 ', 즉 '신시민'은 35개 선거구의 어디에서나 투표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도 확인했다. 이것은 술라가 단순한 수구파는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술라는 해방노예도 '신시민'과 마찬가지로 35개 선거구의 어디에서나 투표권을 갖 도록 한 법은 폐기했다. 해방노예들은 다시 전처럼 35개 선거구 가운데 4개 선거구에서만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술라는 '율리우스 시민권법'에 명시되어 있던 조건, 즉 '로마에 적대하지 않는 자' 라 는 조건에 주목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주민에게 로마 시민권 취득을 인정하되, 로마에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자에 한한다는 조항이다. 술라는 이 항목을 내세워, 로마 정규군에 가 담하여 자신과 싸운 에트루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의 여러 부족들이 이미 취득한 로마 시민권 을 박탈해 버렸다. * 복지 문제 40년 전에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작한 이후 빈민층에 대한 곡물 공급 가격이 꾸준히 하 락했기 때문에, '곡물법'은 이제 일종의 사회복지제도로 정착해 있었다. 술라는 이 '곡물법' 을 완전히 폐지해 버렸다. 보수파인 술라는 시민 복지보다 국가 재정의 건전화를 우선한 것이 다. 동시에 그는 이 법으로 이익을 얻는 도시 무산자 계급의 표가 계속 '민중파'의 기반으로 작용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실업자 문제의 효율적인 해결책은 군대에서 실 업자를 흡수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실업자 대책 술라의 집권을 계기로 식민시 건설 사업이 오랜만에 활발해졌다. 다만 술라는 이 사업을 실업자 문제의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자기 휘하에서 종군했던 고참병들에 대한 '퇴직' 대책 으 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11개나 되는 신도시에 이주한 사람은 대부분 술라의 퇴역병들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오늘날의 피렌체는 술라가 건설한 식민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 * 원로원 개혁 원로원의 정원은 기원전 509년에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했을 때부터 줄곧 300 명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도쿄보다 좁은 지역밖에 다스리지 않았던 그 시대와 달리 이제 로 마는 직할 통치지역인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지중해 전역에 패권을 행사하는 대국 으로 변모했다. 민회에서 투표권을 갖는 시민의 수도 10배 가까이 늘어났다. 술라는 원로원 도 이 현상에 적합한 규모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5년 동안 두 번이나 살육을 저지른 결과, 300명이어야 할 원로원 의원 가운데 100명 가까운 결원이 생겼다. 술라는 우선 이 빈 자리를 채운 다음, 300명 정원인 원 로원을 600명 규모로 확대했다. 술라 덕분에 새로 원로원 의석을 얻은 사람들은 대부분 건 국 이래의 명문 귀족도 아니고, 집정관을 배출했기 때문에 새로 귀족 반열에 올라선 평민 귀족도 아니고, 처음으로 국정에 관여하는 '기사계급'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술라는 로마 국 가의 패권 확대에 따른 시장 확대로 힘을 비축한 경제인들을 정계로 끌어들임으로써, 그들 에게도 로마 사회의 책임을 분담시키기로 한 것이다. 술라가 생각하기에, 호민관을 앞세운 평민 세력의 독주를 막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원로원을 강화하는 길밖에 없었다. * 사법 개혁 법무관이 수사의 책임자와 재판관을 겸하고, 법률가도 원고측에 서면 검사 역할을 맡고 피고측에 서면 변호인 역할을 맡는 공화정 로마의 재판제도에서는, 배심원이 판결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만이 배심원을 맡느냐, 아니면 '기사'나 평민도 배심원단 에 참가시키느냐가 그때까지 정쟁의 초점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었다. 술라는 그것을 그라쿠스 형제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원로원 의원이 배심원을 독점하게 했다. 원로원에 '기사계급'이 대거 들어왔으니까, 실질적으로는 배심원도 귀족 2분의 1과 기 사 2분의 1로 구성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가 가장 중요시한 원로원 강화문제 도 고려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 행정 개혁 술라는 통치력도 강대국이 된 로마의 실정에 맞게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 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정, 즉 로마 특유의 소수 지도 체제인 공화 정에는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 술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의 행정 개혁은 연공서열을 재정비하는 형태가 되 었다. 소수 지도 체제는 그 '소수'가 균등하게 '지도'할 기회를 부여받아야만 비로소 기능 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실력을 중시하는 특례는 결코 인정되어서는 안되었다. 따라서 술라의 개혁에서는 서열 순위가 엄격하게 정해졌다. 회계감사관은 8명을 20명으로 증원한다. 자격 연령은 30세 이상, 회계감사관을 지낸 자에 게는 원로원에 들어갈 자격을 준다. 법무관은 6명을 8명으로 증원한다. 자격 연령은 39세 이상, 법무관 경력자만이 집정관에 출마할 자격을 갖는다. 집정관은 종래대로 2명이다. 자격 연령은 42세 이상. 여기에 따르면, 30세에 회계감사관으로 선출되어 1년 임기를 마치면 원로원 의원에 취임 한다. 물론 원로원에 궐석이 생겨야 하지만, 사망으로 말미암은 결원은 늘 있으니까 거의 자 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원로원에서 이런저런 국정에 관여하며 8년을 보낸 뒤 법무관에 선출된다. 그후에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 통치 경험을 쌓은 다음, 집정관 에 출마할 권리를 얻는다. 집정관 임기가 끝나면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속주를 통치하러 나 간다. 귀임한 뒤에는 역시 원로원에 복귀한다. 이리하여 원로원은 경륜이 풍부한 사람들이 집결한 기구로 확립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집정관에 재선되려면 10년 동안 기다려야 한다 고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에는 전직 고위관리들이 우글거리게 되는 셈이다. 술라는 또한 속주 통치를 엄격히 체계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법무관을 8명으로 증원한 것도 당시 10개였던 속주에 각각 1년 임기로 파견할 총독의 수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 함이었다. 8명의 전직 법무관과 2명의 전직 집정관을 합하면 10명이 되기 때문이다. 10개의 속주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시칠리아 섬. 2. 사르데냐 섬. 3,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가까운 에스파냐)라고 불린 동부 에스파냐. 4.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먼 에스파냐)라고 불린 서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5.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라고 불린 현재의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 6.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지방. 7. '속주 아시아'라고 불린 소아시아 서부. 8. 소아시아 남동부의 킬리키아 지방. 9. '속주 아프리카'라고 불린 카르타고의 옛터. 10. 로마와는 가장 가까울 뿐더러,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이남의 갈리아)라는 이름으 로 불린 루비콘 강 이북의 이탈리아 북부. 이 10개의 속주에 로마는 각각 총독을 파견할 필요가 있었다. * 군사 개혁 술라는 로마 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력과 군사력의 분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력을 사용하여 독재관이 된 술라가 이렇게 믿었다면 자기모순이 아니냐고 생각하겠지 만, 두 번이나 군대를 거느리고 '로마 진군'을 강행한 술라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이 것의 폐해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국내에서는 2명의 집정관만 군단을 거느릴 자격을 갖고, 국내에는 4개 군단 이상의 상비군을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규모를 넘는 병력의 지휘권은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는 전직 집정관이나 전직 법무관 한테만 인정되었다. 다만 그들도 군단을 움직일 경우에는 반 드시 원로원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하고, 로마 직할령인 루비존 강에서 메시나해협에 이르 는 이탈리아 반도에는 절대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면 안된다고 못박았다. 무력을 남용하는 자들로부터 수도 로마와 원로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총사령관에게는 군무가 끝나자마자 군단을 해산해야 할 의무가 부과되었다. 물론 군대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속주 총독의 임기는 1년으로 제한되었다. 임기가 길어짐으로써 생길 수 있는 군단의 '사병화'를 막기 위 한 조치였다. 집정관이나 법무관은 민회에서 선출되지만,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는 전직 집정관이나 전 직 법무관의 임지를 결정하는 것은 원로원이다. 이 관례를 술라는 법제화했다. 요컨대 술라 는 모든 면에서 '문관 지배'를 충실히 함으로써, 앞으로 또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로마 진군 ' 을 저지하려 했고, 그것을 차근차근 정책화한 것이다. * 지방 개혁 '로마 연합'이 일종의 연방제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시대와는 달리, 모든 이탈리아인이 로마인이 된 지금은 동맹시들의 독립적 지위를 존중할 의무가 없어졌다. 과거의 동맹시들은 그대로 로마 국가의 지방자치 단체가 되었다. 술라의 개혁 후에는 로마 중앙정부가 지방자 치단체(무니키피아)에 '프라이펙투스'를 파견하게 된다. 의역하면 '관선 지사'가 될까. 관 선 지사는 그 지방 주민이 선출하는 10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지방의회와 함께 5년의 임기 동 안 지방 행정을 담당한다. 지방자치단체의 주민들도 로마 시민권을 갖는 이상 직접세는 면 제되고 간접세만 낼 의무가 있었지만, 이 시기에 지방 행정의 재정이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 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알아낼 수 없었다. 어쨌든 '로마 연합' 시절보다는 훨씬 중앙집권화가 진행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도 로마 국가의 공용어로는 그리스어가 여전히 라틴어와 함께 건재했으니까, 지방의 특색도 건재했 을 것이다. 나폴리 같은 곳은 그리스인의 도시로 자타가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 호민관 제도 문제 호민관 제도의 개혁만큼 술라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은 없다. 술라는 그라쿠스 형 제가 노출시킨 로마의 혼미가 통치력이 쇠퇴한 원로원과 지나치게 강대해진 호민관 권력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호민관 권력의 강대화가 로마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평등 현상 의 분화구에 불과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원로원의 질적 양적 강화를 위해서 만반의 대책을 강구한 이상, 술라에게는 이제 호민관 을 약체화하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뛰어난 정치감각을 가지고 있는 술라는 호민 관 제도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호민관 폐지는 현재 상황에서는 국가의 분열로 이어지는 폭 거다. 술라는 호민관 제도는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실질적인 무력화를 꾀했다. 기원전 4세기 중엽 이후, 호민관은 평민 귀족이나 평민 출신자에게는 로마의 중앙 정계로 들어가는 등용문으로 여겨졌다. 명문 귀족 출신자에게는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자 동으로 열려 있었다. 로마의 유력자들이 모여서 왕에게 조언하는 자문기관이 원로원의 모태 였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조상 중에서 집정관이 나왔든 안 나왔든, 원래 출신 계급이 평민인 사람들이 원로원에 들어가는 데에는 다소의 불리함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원전 4세기 중엽에 개혁을 단행하여 호민관 경력자가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 게 한 것은 그들의 불리함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어쨌든 원로원 의석만 손에 넣으면 된다. 집정관 법무관 재무관 같은 공화정 로마의 주요 관직에 앉으려면 원로원 의원 이어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민 귀족이나 평민 출신 집정 관은 거의 모두 호민관 경력자였다. 원로원에 들어가는 것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그라쿠스 형제는 예외 중의 예외였다. 호민관의 약체화를 노리는 술라는 호민관 제도도 그대로 두고, 호민관 경력자가 원로원에 들어갈 권리도 그대로 인정하면서, 호민관 경력자는 다른 관직에 선출될 수 없다고 규정한 법안을 성립시켰다. 이래서는 다소의 불리함을 감수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예를 들면 회계 감사관이 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원로원에 들어가는 편이 정계 진출을 노리는 젊은이에게 는 유리할 게 뻔하다. 그리고 이 법률 때문에 야심만만하고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호민관 자 리에 흥미를 보이지 않으면 호민관의 질은 당연히 낮아질 것이고, 따라서 호민관이 평민층 을 등에 업고 원로원에 대항하는 세력은 될 수 없을 거라고 술라는 생각했다. 또한 술라는 그라쿠스 형제처럼 호민관직을 정계 진출의 등용문으로 생각지 않는 자에 대 한 대책도 잊지 않았다. 독재관 술라는 집정관과 마찬가지로 호민관도 재선되려면 10년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술라가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임기가 무기한인 독재관이 되면서까지 실행하 려고 결심한 국정 개혁의 중요 사항이다. 술라는 이것을 기원전 81년부터 이듬해 말까지 해 냈다. 위에서 열거한 국정 개혁 내용을 한번 읽어 보기만 해도 분명할 것이다. 루키우스 코르넬 리우스 술라는 '원로원 체제'라 해도 좋은 로마 특유의 공화정이라는 '가죽부대'를 열심히 수 선하려고 애썼다. 여기저기에 뚫린 구멍은 단지 '가죽부대'가 낡았기 때문이고, 따라서 튼 튼 한 가죽조각을 덧대어 보강한 가죽부대에 새 술을 담으면 아직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믿어 의심치 않은 사람은 술라만이 아니었다. 당시 로마에서 대표적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키케로 역시 '가죽부대' 수선파에 속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 로마인들 은 그들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낡은 '가죽부대'는 이제 내버려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가죽부대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들의 이해 를 넘어서 있었다. 단 한 사람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기원전 80년 말, 로마의 중심인 포로 로 마노에서는 관례에 따라 이듬해의 집정관을 선출하는 민회가 열리고 있었다. 집정관 두 사 람이 선출된 뒤, 독재관 술라가 연단에 올라섰다. 58세의 술라는 다짜고짜 연단 위에서 독재 관 자리를 사임하겠다고 시민들에게 통고했다. 시민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술라를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술라는 연단을 둘러싸고 있 는 시민들을 둘러본 다음, 독재관의 권위를 상징하며 하루 24시간 내내 잠시도 그 곁을 떠 나지 않는 호위병(릭토르) 24명을 해임한다고 발표했다. 이리하여 술라는 일개 시민으로 돌 아갔다. 독재관에게 보장되어 있는 절대권력도 없고, 신변안전에 대한 보장도 일반인과 다를 게 없는 단순한 일개 시민으로 돌아간 것이다. 키가 큰 술라는 토가 하나만 걸친 채,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틈으로 내려갔 다. 그리고는 친구 몇 명만 데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포로 로마노의 길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그런 술라를 향해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독재관 시절의 그를 큰 소리로 비난했다. 술라는 소리가 난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를 비난했던 사람은 입을 다물 어버렸다. 로마 국가의 최고 결정기관인 민회가 공식으로 인정했으니까, 술라는 개혁이 끝난 뒤에도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 자리에 계속 앉아 있으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 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진해서 사임했다. 그가 이룩한 개혁을 보수 반동이었다고 비판하 는 연구자들조차도 독재관을 자발적으로 사임한 것은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깨끗한 행위' 였 다고 칭찬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보다 술라를 높이 평가하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술라의 국정 개혁은 소수 지도 체제에 입각한 로마 고유의 공화정 체제를 재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원로원으로 상징되는 소수 지도 체제는 독재관 같은 존재를 인정해서는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술라가 독재관이 된 것은 질서를 잃은 로마 사회에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 서였다. 그 질서가 비록 그가 좋게 생각한 질서, 즉 원로원 주도의 질서였다고 해도. 따라서 그가 독재관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은 특출한 개인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성 립되는 소수 지도 체제에 어긋나는 행위가 된다. 자신이 이룩한 국정 개혁을 완전하게 하고 싶다면, 술라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깨끗한 행위라고 대중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은 대중의 마음이고, 그에 따른 이익도 적지 않다. 도리를 아는 사람이 항상 소수인 인간 세계에서 개혁을 정착시키려면 수단 방법을 가릴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58세때 독재관을 사임한 술라는 정계에서도 은퇴했다. 원로원 의원이기는 했지만, 원로원 이 열리는 로마를 떠나 나폴리 서쪽 바닷가에 있는 쿠마이에 은거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는 처음으로 그리스인의 식민시가 세워진 곳이 바로 쿠마이다. 그리스인의 취향을 반영하여, 바다와 숲과 강과 서늘한 서풍이 갖추어져 있는 곳이었다. 술라는 재물을 모으는 일에는 평생 무관심했다. 쿠마이에 세운 별장도 지나치게 검소하지 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화롭지도 않았다. 이 별장에서 그는 낚시와 산책을 즐기고, 특히 회고록을 쓰면서 나날을 보냈다. 술라의 회고록은 중세에 소실되어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이 회고록에서 자기가 '행운아'(펠릭스)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거듭 말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펠릭스'를 성 뒤에 붙이는 존칭으로까지 삼고 있다. 루키우스 코 르 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라고. 이 별장에서 술라는 35세나 연하인 다섯번째 아내 발레리아와 함께 지냈다. 세번째 결혼 까지는 이름도 없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지만, 네번째 아내는 로마 정계의 유력 가문인 메텔 루스 집안에서 맞아들였다. 그런데 메텔라라는 이름의 네번째 아내는 술라가 독재관을 지내 고 있을 때 쌍둥이 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홀아비가 된 최고 권력자와 젊은 이혼녀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어느날 술라는 검투사 경기장에서 시합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술라의 뒤를 지나 자기 자리로 가던 젊은 여자가 그의 어깨를 만지고 토가에서 실밥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그 실밥 을 들고 그대로 자기 자리로 가 버렸다. 이 행동에는 술라도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여자 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술라를 마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지 마세요. 당신이 누리고 있는 행운을 저도 조금이나마 얻고 싶어서 그랬 을 뿐이니까요." 명문 귀족 발레리우스 가문 출신의 이 여자를 술라는 다섯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지나는 길에 덧붙이는 여담이지만, "뉴욕 이야기"라는 제목의 옴니버스 영화를 보고 있을 때의 일이다. 마틴 스코세지가 감독한 첫 번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성공한 유명 화가의 전시회에서 접수를 맡고 있는 아가씨가 그 화가에게 건넨 행동과 말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위의 에피소드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영 화감독 마틴 스코세지도 플루타르코스를 읽은 모양이다. 어쨌든 젊음말고는 가진 게 없는 여자가 거물을 '낚는' 데에는 발레리아의 언행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으니까. 물론 근엄하고 고지식한 도덕주의자인 플루타르코스 선생이 위의 에피소드를 칭찬하는 뜻 으로 소개한 것은 아니다. 칭찬하기는커녕, 에피소드를 소개한 뒤에는 술라의 나이와 지위에 걸맞지 않는 경거망동이라는 비판을 덧붙였다. 플루타르코스라는 사람은 공적인 생활에서는 금욕주의적이고 사생활에서는 쾌락주의적인 생활방식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아닐까 싶지만, 그런 플루타르코스가 술라의 사생활을 규탄한 것도 당연할 것이다. 독재관이 되기 전뿐만 아니라 독재관이 된 뒤에도, 술라는 공적인 생활과 사생활을 확실 히 구분하는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공적인 생활에서는 엄정한 태도를 허물어뜨리지 않 았지만, 일단 집에 돌아가면 농담을 좋아하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도 사양치 않는 로마인으 로 표변했다. 그의 식탁에 단골로 초대받는 손님들이 그리스인 역사가나 철학자들이었다면 플루타르코스 선생의 칭찬이라도 받았을 텐데, 술라와 식사를 같이하는 단골 손님들은 희극 배우나 희극작가나 희극시인이었다. 이 냉혹하고 엄격한 정치가의 식탁은 떠들썩한 웃음으 로 뒤덮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희극의 요체는 위선을 비웃는 정신이지만, 바로 그 점이 술 라와 어울렸는지도 모른다. 이런 은둔생활을 1년 남짓 보낸 뒤, 술라는 세상을 떠났다. 죽기 이틀 전에 많은 피를 토 하고, 집필을 계속하고 있던 회고록도 22장까지 쓴 단계에서 붓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죽음 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깨달은 술라가 급히 쓴 유서에는 메텔라(네번째 아내)가 낳은 미성 년 쌍둥이와 임신중인 발레리아한테서 태어날 자식의 장래를 루쿨루스에게 맡긴다는 것 외 에는 아무 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후계자에 관한 유언도, 장례식에 관한 유언도 전혀 없었 다. 술라는 끝까지 공화정 로마의 시민으로 일관한 것이다. 술라의 죽음이 알려지자, 장례식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를 놓고 로마정계가 양분되었다. 기 원전 78년인 그해의 집정관은 레피두스와 카툴루스였는데, 카툴루스와 폼페이우스 같은 술 라파는 수도 로마에서 국장으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레피두스는 술라가 현직 고관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장례식은 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동안, 술 라 휘하에서 종군했던 퇴역병들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쿠마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개선식에라도 참가하는 것처럼 모두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무인의 압력에 로마 원로원 은 술라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술라의 유해는 황금을 입힌 침대에 안치되고, 여덟 마리의 소가 침대를 올려놓은 수레를 끌고 천천히 나아갔다. 쿠마이에서 해안을 따라 테라치나까지 북상한 다음, 거기서 로마까지 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간다. 나팔수들이 수레 앞에서 선도대 역할을 맡고, 수레 뒤에는 퇴역 병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말없이 따라갔다. 퇴역병들은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행렬에 끼여들기도 했기 때문에, 로마에 가까워질수록 행렬은 계속 길어졌다. 그들은 단순히 줄을 지어 걷는 게 아니라, 술라 휘하에서 싸우던 당시와 같은 대형을 지어 부대별로 참석했기 때문에 군단의 행군과 다를 게 없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단 하나, 앞장서서 나아가는 사람이 살아 있는 술라가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수도 로마의 성문을 통과한 뒤에는 엄숙하기만 했던 장례 행렬에 화려함이 더해졌다. 군 단기 대대기 중대기가 줄지어 늘어서고, 로마 장례식의 관습에 따라 고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나 지방자치단체나 속주에서 보내 2천 개의 금관이 장례 행렬에 색채를 더했기 때문 이다. 장례 행렬은 최고제사장을 비롯한 사제들과 여사제들의 선도를 받아 포로 로마노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원로원 의원 전원이 두 집정관을 앞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조사를 누가 읽었는지는 역사가 아피아누스도 플루타르코스도 전해 주지 않는다. 고인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육친이 읽는 것이 보통이지만, 술라의 아들은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읽었을 것이다. 조사 낭독도 끝나고, 포로 로마노를 나온 장례 행렬은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을 뒤로하고 마르스 광장으로 갔다. 포로 로마노에서 마르스광장까지는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도 체격이 건장한 사람들이 술라의 유해를 어깨에 메고 행진했다. 그동안 줄곧 주악대는 애조 띤 장송 곡을 연주했다. 전쟁의 신 마르스에게 바쳐진 광장에서 거행된 국장에는 모든 시민이 참석했다. 어떤 사 람은 고인에 대한 애석함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유해는 로마의 역대 왕들이 잠들어 있는 마르스 광장 중앙의 묘지에 묻혔다. 술라는 장례식에 관해서는 어떤 주문도 하지 않았지만, 매장 방식에 대해서는 주문을 했 다. 화장이 일반적이었던 로마에서는 드물게도 코르넬리우스 일족만은 유해를 그대로 매장 하는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술라도 코르넬리우스 일족 출신으로셔, 유해를 그대로 매장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리우스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유골마 저 테베레 강에 던져진 일을 잊지 않은 원로원 의원들이 술라의 유해도 언제 어떤 모독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유해를 그대로 매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라의 시신을 태우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그를 존경했던 사람도 그를 증오했던 사람도 이때만은 똑같은 생각을 품었으리라. 살아 생전에도 그랬듯이, 죽어서도 술라는 역시 행운의 사나이였 다고. 묘비에는 술라가 생전에 생각해 두었다는 비문이 새겨졌다.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제3장 폼페이우스 시대(기원전 78년부터 기원전 63년) 자신의 야망을 실현한 뒤 침대에서 편안하게 죽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면, 루키우스 코 르넬리우스 술라는 그 자신의 말마따나 '행운아'(펠릭스)였다. 그러나 생전에 야망을 실현하 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죽기는커녕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비명횡사했다 해도, 그 사람이 속 해 있는 공동체(레스 푸블리카)가 나아갈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인간, 특히 공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행복이라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불운아' 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근대와 현대의 저명한 역사서들이 거의 다 술라의 죽음을 기술한 뒤에는 이어 다음 장의 제복을 '술라 체제의 붕괴'라고 붙인 것이 이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술라의 죽음과 함 께, 그가 그토록 열심히 수선한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로마라는 '가죽부대'에는 구멍이 다시 뚫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가죽부대에 구멍을 뚫은 것은 술라의 독재치하에서도 살아남은 반술라파(민중파)가 아니라, 친술라파(보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왜 '술라 체제'는 술라파 사람들로 인해 붕괴되었는가, 연구자들 대다수가 지적하고 있듯 이 술라 휘하 장군들의 개인적인 야망에 희생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술라 체제'는 술라파 조차도 계속 지킬 수 없었을 만큼 기원전 1세기에 로마가 직면해 있던 현실을 타개하는 데 에는 부적합했던 것일까. 술라가 죽은 기원전 78년 당시 술라파와 반술라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어떤 인물들이었 을까. 우선 반술라파의 면면을 살펴보면, 술라의 소탕작전 때문에 특기할만한 인물은 거의 없지 만, 그래도 기원전 78년의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를 들 수 있다. 이 사람이 술라의 독재치하 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친술라를 간판으로 내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술라에 게 숙청당한 이들의 몰수 재산을 경매할 때, 그것을 헐값에 사들여 떼돈을 벌었다. 이런 인 물이 술라가 독재관을 사임하자마자 그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는 점에서, 후세 연구자라면 용감한 행위라고 칭찬할지 모르지만, 당시 로마 시민들한테는 가소롭게 받아들여졌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이 레피두스가 반술라파를 결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세르토리우스가 있다. 오랫동안 마리우스 휘하에서 장군이었던 인물로, 술라가 병력 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상륙했기 때문에 일어난 내전에서 술라에게 패한 뒤 에스파냐까지 달 아나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이다. 하지만 마리우스처럼 두 개의 이름밖에 갖지 않은 평민 출신인 세르토리우스는 '작은 마리우스' 이상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밖에 이혼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절대 권력자 술라의 비위를 건드려 오리엔트까지 달 아나야 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는데, 반술라파의 중심인물이 될 자격은 충분하지만 그 는 아직 22세의 젊은이였다. 술라가 죽은 뒤 로마로 돌아오긴 했지만, 지위도 없고 돈도 없 고 권력도 없는 젊은이가 반술라파를 결집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당분간은 기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 호의적으로 평가하면 대기만성형인 카이사르가 할 수 있 는 유일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플레이보이라는 명성밖에 얻지 못한 이 젊은이를 주목 한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아무도 없었다. 반술라파가 이럴진대, 이 파에서 '술라 체제'에 대한 반격이 일어날 리는 만무했다. 그러면 친술라파는 어떤가, 술라파의 리더는 뭐니뭐니 해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 스일 것이다. 술라는 이탈리아로 돌아갈 때 그에게 소아시아의 뒷일을 부탁했고, 자신이 쓴 "회고록"을 헌정했을 뿐 아니라, 유언 집행인으로 지명하기까지 했다. 태어난 해는 분명치 않지만, 그가 취임한 관직으로 미루어 보면 술라가 죽은 해에는 38세 전후가 아니었을까 여 겨진다. 루쿨루스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당시 36세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다. 킨나의 독재 시절에는 에스파냐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지만, 술라가 이탈리아에 상륙한 것을 알고는 그에게 달려가 함께 내전을 치른, 말하자면 술라의 오른팔 같은 부하 가운데 하나다. 다만 그는 군사나 정치보다 돈벌이에 능한 사나이였다. 술라의 오른팔이라면, 크라수스보다 8세 아래인 폼이우스를 먼저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본은 술라가 죽은 해에 28세에 불과했지만, '무대'에는 크라수 스보다 일찍 등장했다. 23세 때 이탈리아에 상륙한 술라에게 달려가, 그의 휘하에서 싸운 것 이 시작이었다. 그때 자비로 조직한 3개 군단을 이끌고 참전하여 술라를 기쁘게 한 것은 앞 에서 말한 바와 같다. 3개 군단이라면 보병 1만 8천명과 기병 2천 명 정도니까, 모두 합하면 2만 명이나 된다. 이만한 규모의 군대를 자비로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폼페이우스 일족이 이탈리아 중부의 아드리아 해에 면해 있는 피체노 지방에 넓은 영지를 가진 집안이라서, 풍 부한 자금과 풍부한 '클리엔테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우스파와 싸우다가 죽은 그 의 아버지는 집정관까지 지냈다. 루쿨루스나 크라수스와 마찬가지로, 폼페이우스 역시 원로 원 계급에 '신참자'가 아니라는 점도 보수주의자 술라를 안심시켰다. 군사에서 천재였던 술라는 역시 군사에서 천재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재능을 일찌감치 꿰 뚫어보았다. 내전이 일단락되자, 술라는 아프리카로 달아난 반대파 잔당을 소탕하는 임무를 젊은 폼페이우스에게 맡겼다. 그 임무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폼페이우스는 아직 25세도 안 된 나이였지만, 술라는 폼페이우스의 간절한 요청을 수락하여 개선식 거행을 허가했다. 25세 에 개선식을 거행한 것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조차도 하지 못했던 로마 역사상 초유의 일 이었다. 그 기회에 술라는 농담으로 젊은 개선장군에게 '마그누스'(magnus)라는 존칭을 붙여주었 다. '마그누스'를 영어로 번역하면 'the Great'가 되는데, 그때까지 '마그누스'라는 존칭으로 불린 것은 알덱산드로스 대왕뿐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후세 사람들이 '대왕'으로 의역한 말 은 원래 라틴어의 '마그누스'다. 폼페이우스도 술라가 살아 있을 때에는 이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술라가 죽은 뒤에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고 서명하기 시작했다. 비록 농담에서 나온 말이라 해도, 젊은 폼페이우스에게는 강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반술라파에 인재가 없었던 반면, 친술라파에는 이만한 인재가 모여 있었다. 그렇다면 '술 라 체제'는 탄탄한 반석 위에 올라섰다고 생각하는 편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로마는 '술라 체제'의 붕괴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붕괴의 장본인들은 바로 술라 휘하의 인 재들이었다. 반술라파에 인재가 없었던 것을 반영하듯, 술라가 죽은 뒤 1년도 지나기 전에 일어난 '술 라 체제'에 대한 반격은 작은 불꽃처럼 타오르자마자 꺼져버렸다. 그래도 이것은 '술라 체제' 를 붕괴시키는 전초전이었다. 기원전 77년,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알프스 서쪽의 갈리아, 즉 남프랑스 속주에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레피두스는 집정관이었던 지난해에 제출했다가 부결된 법안을 군사력으로 실현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제출한 법안은 다음 네 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술라에게 숙청된 희생자의 소유로서, 국가에 몰수된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반환한다. 2. 술라에 의해 국위 추방령을 받은 자들을 불러들인다. 3. 빈민층에 대한 복지정책인 '곡물법'을 부활한다. 4. 호민관의 권위와 권한을 부활한다. 술라가 죽은 직후인데다 그해의 또 다른 집정관이 강경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레피두스가 제출한 법안은 민회에서 부결되었다. 레피두스는 이것을 무력으로 역전시키자고 생각했다. 임지인 남프랑스 속주에 가기는커녕, 이탈리아 중부에서 총독의 권한을 뛰어넘는 규모의 군 대를 멋대로 편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반술라파에 서서-물론 그 당시에는 로마의 정 규군 이었지만-술라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죄로 술라에게 토지와 시민권을 박탈당한 자들이 레피두스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또다시 이탈리아 안에서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당장 '공 화국 방위를 위한 원로원 권고'(세나투스 콘술툼데 레 푸블리카 데펜덴다)를 가결했다. 이 비상사태 선언이 공포되면, 집정관에게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진압할 의무가 있었다.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 지방(오늘날의 토스카나 지방)에서 벌어진 양군의 충돌은 어 이없을 만큼 간단히 끝났다. 집정관 카툴루스한테서 실권을 위임받은 폼페이우스의 속공전 법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패배한 레피두스는 사르데냐 섬으로 도망쳤지만, 얼마 후 그곳에 서 병사했다. 레피두스의 부장이었던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리하 여 훗날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로 유명해지는 브루투스는 7세에 아버지를 여의게 된다. 레 피두스의 잔당은 에스파냐로 도망쳐, 에스파냐 땅에서 '술라 체제'에 반대하여 궐기한 세르 토리우스와 합류했다. 레피두스가 일으킨 군대는 이렇게 간단히 진압되었지만, 거기에는 부산물이 있었다. 일단 지휘봉을 맡긴 이상 전쟁터에서의 행동은 사령관에게 일임하는 것이 관례인 공화정 로마에서는, 군단 사령관한테는 황제(emperor)의 어원인 '절대 지휘권'(임페리움)을 주는 것 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절대 지휘권'은 법무관과 집정관, 전직 법무관과 전직 집정관한테만 줄 수 있다. 술라의 개혁에서는 법무관은 39세, 집정관은 42세를 자격 연령으로 규정하고 있 었다. 내전이라는 비상시에 두각을 나타낸 폼페이우스는 20대의 젊은 나이여서, 공화정 로마의 관직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상태였다. 로마의 양갓집 자제의 출세 코스인 회계감사관도 안 찰관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실질적인 '절대 지휘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군사적인 면에서 폼페이우스를 능가할 만한 인재가 원로원 계급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레피두스를 제압할 당시에는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았다. '절대 지휘권'을 부여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집정관인 카툴루스였고, 비록 실질적인 권한은 폼페이우스가 행사했지만, 29세밖에 안된 폼페이우스의 지위는 총사령관 카툴루스의 막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 만 레피두스를 제압한 데 이어 시급히 대책을 강구해야 했던 문제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하 는 이런 방식을 쓸 수도 없게 되었다. 레피두스의 잔당과 합류하여 에스파냐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세르토리우스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된 원로원은 술라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메텔루스 피우스를 파견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메텔루스 피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세 르토리우스가 구사하는 게릴라 전법에 휘둘려, 에스파냐에서의 전황은 방심할 수 없는 상태 가 되어 있었다. 원로원도 본격적으로 증원군을 보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자격 연령이 39세인 법무관 이상의 관직 경험자들 중에서 '절대 지휘권'을 주어 내보낼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장군을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때 29세인 폼페이우스가 자진해서 나섰다. 자격 연령이 30세인 회계감사관조차 경험하 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원로원 의원도 아니다. 군단 지휘권인 '임페리움'을 가질 수 있는 법 무관의 자격 연령 39세에는 열 살이나 모자란다. 그런데도 제 발로 나선 폼이우스는 스키피 오 아프리카누스의 전례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경우는 제2차 포에니전쟁으로 로마 가 유래없는 비상시국을 맞이했기 때문에 특별히 예외를 허락한 것이었다. 게다가 25세에 '절대 지휘권'을 부여받은 스키피오에게는 잇따라 전사한 아버지와 숙부의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이것은 조상과 가족을 중시하는 로마인의 심금을 울리는 대의명분이었 다. 폼페이우스에게는 이런 종류의 명분이 전혀 없었다. 원로원은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술라 체제'를 계속 지킬 것인가, 아니면 상례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특례를 인정할 것인가. 연공서열이냐 실력주의냐의 선택이기도 했다. 2년 전부터 에스파냐에 파견되어 있는 메텔루스 피우스도 결코 용렬한 장군은 아니었다. 세르토리우스와 대치해 있는 에스파냐 전선을 그대로 그에게 맡겨놓아도 언젠가는 결말을 내주리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언젠가는'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결말을 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을 로마가 견뎌낼 수 있을까, 원로원 의원들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을 내놓아야 할 시간은 촉박했다. 술라가 살아 있을 때는 얌전했던 폰토스 왕국의 미 트라다테스 왕이 다시금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원 로원으로서는 메텔루스가 결말을 내주기를 바라면서 언제까지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 래서 원로원은 29세의 폼페이우스에게 집정관 대리라는 임시 직책과 함께 '절대 지휘권'을 주어 세르토리우스 토벌의 임무를 맡겼다. '술라 체제' 붕괴의 첫걸음인 셈이다. 술라는 정원 을 두 배로 늘리면서까지 원로원 강화책을 모색했지만, 원로원은 그런 술라의 뜻에 부응할 수 없는 현실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속주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반란은 '세르토리우스 전쟁'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전쟁은 에스피냐인이 민족자결을 요구하여 일으킨 전쟁이 아니다. 기원전 133년 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누만티아를 궤멸시킨 이후, 에스파냐는 로마의 속주로서 평 온한 반세기를 보냈다. 따라서 기원전 80년부터 기원전 72년까지 8년 동안 에스파냐 땅에 로마군을 붙잡아둔 이 전쟁은, 말하자면 마리우스파와 술라파 사이의 항쟁이 장소를 에스파 냐로 옮겨 벌어진 연장전이었다. 개인이름 일족이름 가문이름의 세가지 이름을 갖는 것이 보통인 로마 사회에서 마리우스 와 마찬가지로 개인 이름과 가문 이름밖에 갖지 않은 원투스 세르토리우스는 갖은 고초를 겪으며 출세한 평민 출신이다. 출생지는 이탈리아 중부의 움브리아 지방이다. 마리우스와 마 찬가지로 지방 출신이다. 마리우스 휘하에 들어가 게르만족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0세에 600명의 병사로 구성된 중대를 지휘했으니까, 군단에서의 출세는 빠른 편 이었다. 기원전 83년부터 시작된 내전에서는 당연히 '민중파'를 기치로 내건 반술라파 쪽에 서 싸웠다. 하지만 술라의 승리와 함께 '살생부'에 이름이 오른 세르토리우스는 이탈리아에 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처음 도망친 곳은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 왕국이었던 모양이다. 그곳에 잠시 몸을 숨 긴 뒤,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오늘날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에스파냐로 갔다. 그리고는 당장에 4천 700명이나 되는 병력을 조직했다. 이 병력을 이끌고 '먼 에스파냐'(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라고 불린 에스파냐 서부의 속주 총독과 싸워서 이겼다. 이 승리 덕분에, 그해 말에는 그를 따르는 병사가 8천 명으로 늘어났다. 세르토리우스가 43세 되던 해 가을이다. 온몸에 무수한 상처를 입고 한쪽 눈마저 잃어버린 세르토리우스를 에스파냐인들은 '제2의 한니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술라는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메텔루스 피우스를 파견했다. 기원전 79년, 반란군 과 토벌군 사이에 벌어진 첫 전투는 세르토리우스의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세 르토리우스는 전술을 바꾸었다. 그후로는 철저한 게릴라 전법이 그의 전술이 되었다. 지형이 복잡하고 수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있는 에스파냐에서는 게릴라 전법이 효과를 발 휘하기 쉽다. 정규군은 이기지 못하면 패배지만, 게릴라는 지지만 않으면 승리다. 게다가 이 곳말고는 갈 곳이 따로 없는 세르토리우스는 에스파냐에 원로원을 만들고 원주민 자제들을 위한 '사관학교'까지 세워 독립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그 때문에 원주민들도 마음이 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가 채택한 게릴라 전법이 효과를 발휘 할 수 있는 조건은 두루 갖추어 져 있었던 셈이다. 세르토리우스의 건투는 상대가 로마 정규군인 만큼 지중해 전역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술라가 죽었다. 지중해 전역에 위엄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술라 의 죽음은 잔잔했던 지중해 세계에 파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로마의 안마당인 이탈리아에서 '술라 체제'에 반대하여 일어선 것은 전직 집정관인 레피두스였지만, 그가 일으킨 반란이 간단히 진압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하지 만 사르데냐 섬으로 달아난 레피두스 잔당은 그곳에서 레피두스가 죽은 뒤 에스파냐로 도망 쳤다. 세르토리우스와 합류한 레피두스 잔당의 병력은 보병 2만 명에 기병 1천 500명. 레피 두스의 막료였던 페르페르나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훈련된 병사 2만 1천 500명이 합류하자, 세르토리우스 휘하의 전력은 양적인 면에서는 물 론이고 질적인 면에서도 훨씬 강력해졌다. 그래도 게릴라 전법을 버리지 않은 세르토리우스 의 전략은 옳았다. 폼페이우스를 맞기 전의 에스파냐 전선은 세르토리우스가 게릴라전으로 에스파냐의 거의 전역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상태였고, 로마군은 상대를 회전에 끌어내 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고 있어서 전황은 수렁에 빠져드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 다. 기세가 오른 세르토리우스는 술라에게 짓밟힌 이후 호시탐탐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왕으로부터 공동전선을 결성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미트라다테 스는 동쪽에서, 세르토리우스는 서쪽에서 로마로 쳐들어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폰 토스군을 질적으로 향상시킬 필요가 있었다. 요컨대 폰토스군의 질적 향상을 위해 세르토리 우스 휘하에 있는 로마인 장교의 도움을 빌리는 대신, 세르토리우스에게 부족한 군선을 제 공하겠다는 것이 미트라다테스의 제안이었다. 설령 지방 출신이라 해도 로마 시민인 세르토리우스는 '술라 체제'가 지배하는 로마에 대 해서는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타민족과 손잡고 조국에 칼을 겨눌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그 는 미트라다테스 왕의 제의를 거부했다. 다만 폰토스군을 훈련시킬 교관으로 부하 장교 몇 명을 파견하는 것은 승낙한 모양이다. 로마인은 동족끼리 싸울 때에도 타민족과 호응하면서 까지 조국을 위협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다른 민족과는 달랐다. 폼페이우스는 세르토리우스의 위세가 피레네 산맥까지 넘으려 하던 시기에 그를 제압하도 록 파견되었지만, 전공을 서두르지 않는 것은 과연 폼페이우스다운 처사였다. 30세의 총사령 관은 만사 제쳐놓고 전선으로 달려가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 보급 로를 확보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오늘날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남프랑스로 빠지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터널을 지나야 한다. 터널에서 나왔다 싶으면 다시 들어가고, 들어갔다 싶으면 다시 나 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고대의 고속도로인 로마 가도도 제정 시대에 접어들면 터널을 많이 이용하게 되지만, 터널을 파지 않고는 반대쪽으로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경우에만 터널을 팠다.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로마 가도의 차이는 터널의 활용과 나선형 도로의 개발과 통행 료 징수, 이 세 가지 점이 아닐까싶다. 이탈리아에서 남프랑스를 거쳐 에스파냐에 이르는 가도는 기원전 188년에 도미티아 가도 의 건설로 그 전체가 이미 개통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길은 거의 내내 바다를 내려다보면 서 산을 넘어가는 길이다. 제노바에서 오늘날의 칸까지는 줄곧 벼랑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 이다.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따르면, 그는 '한니발이 넘은 지점이 아니라 그보 다 로마 쪽에 유리한' 새 가도를 건설했다. 오늘날의 토리노에서 수사 골짜기를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으로 알프스를 넘고, 갈리아에 들어간 뒤에도 계속해서 서쪽으로 나아 가다가 오늘날의 리옹에서 남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론 강과 만나는 길이다. 론 강을 따라 남하하여 마르세유 만에 이르면 도미티아 가도와 만난다. 이 가도를 따라 서 쪽으로 나르본까지 가면, 거기서 피레네 산맥까지는 10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만 남게 된다. 폼페이우스가 말하는 '로마 쪽에 유리한 길'이란 군단 이동에 유리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보통이라면 두 달 만에 돌파할 수 있는 이 거리를 1년이나 걸려서 돌파했 다. 길을 뚫고, 그것을 포장하고, 알프스 산중에도 경비를 위한 기지를 건설하고, 피레네 산 맥 남쪽에서 세르토리우스가 기세를 올리는 것을 보고 동요하기 시작한 남프랑스의 갈리아 인을 로마의 속주민으로 재편성하면서 갔기 때문이다. 그는 세르토리우스의 게릴라 전법이 성공하고 있는 에스파냐 현지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현 지 조달을 강행하면, 에스파냐의 민심을 완전히 세르토리우스 쪽으로 내몰게 된다. 이를 피 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로부터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중간에 있는 갈리아 지방을 완전히 평 정하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이런 이유로 폼페이우스가 에스파냐 전선에 참가한 것은 실질적으로는 기원전 75년 봄이 었다. 이때까지 에스파냐 전선을 맡고 있던 메텔루스 피우스는 '피우스'(자비로운 사람)라는 존칭이 붙을 만큼 인격자였기 때문에, 새로 투입된 젊은 장군과의 사이에 이런 경우 흔히 일어나기 쉬운 갈등은 생기지 않았다. 로마 쪽에서 보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노장과 젊은 장군은 양쪽으로 나뉘어 세르토리우스를 포위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그래도 게릴라 전 법을 구사하는 세르토리우스는 끈질겼다. 양쪽 병력이 정면으로 격돌하는 회전 방식의 전투에서는, 좋든 나쁘든 결과가 당장 분명 하게 나타난다. 반면에 정면으로 격돌하지 않는 게릴라전에서는 승패가 분명치 않은 상태로 싸움이 계속되기 때문에, 전쟁터가 된 지방 전체가 초토로 변하기 쉽다. 초토가 되면 먹고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 가운데 남자들은 어느 쪽이든 군대에 가담하여 하다 못해 굶주림만이라도 면하려고 한다. 에스파냐 전선에서 패권국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 는 것은 세르토리우스였다. 세르토리우스는 '술라 체제'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로마에 대항 하고 있었지만, 이런 적개심은 사실상 에스파냐 원주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하 지만 세르토리우스가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난민들은 그에게 모여들었 다. 덕분에 폼페이우스가 에스파냐에 도착한 첫 해는 로마 쪽이 과감하게 공세를 폈는데도 불구하고 조기 해결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그해 겨울, 폼페이우스는 로마 원로원에 증원군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 편지 의 마지막 4분의 1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아군과 적군의 상태는 똑같습니다. 로마군이 병사의 급료를 지불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세르토리우스도 부하들에게 급료를 지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에스파 냐를 포기하고 귀국하든, 세르토리우스가 에스파냐를 버리고 이탈리아로 가든, 이탈리아는 급료를 받지 못한 병사들의 공격을 받게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에게 간곡히 요청하고자 합니다. 내가 부득이 에스파냐 전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로마군과 적군의 전투가 계속되는 바람에, '가까운 에스파냐'(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는 전역이 황폐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까 지 적에게 유린당하지 않은 것은 해안의 몇몇 도시뿐이지만, 로마에 우호적인 이 도시들도 더 이상은 전쟁 비용은 부담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남프랑스의 갈리아 속주도 작년까지는 메텔루스의 전쟁 비용과 군량을 부담해 주었지만, 올해는 흉년이 들어서 자기네가 먹고 사 는 것만도 힘겨운 상태에 있습니다. 나 자신도 저금을 다 써버렸을 뿐 아니라, 군단을 유지하기 위해 빚까지 져야 했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간청하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원로원이 에스파냐의 로마군에 대한 지원을 결정하지 않으면,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더라도 전쟁터는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로 옮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편지는 이듬해(기원전 74년) 초에 개원한 원로원에서 낭독되었다. 점점 노골적으로 나 오기 시작한 미트라다테스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했기 때문에, 원로원 안에서는 폼페이우스 에 대한 지원 여부를 놓고 찬반 양론이 일어났다. 하지만 술라가 죽은 뒤 보수파의 영수가 된 루쿨루스의 강력한 지지 덕분에 폼페이우스의 요청은 받아들여져, 1만 2천 명의 보병과 2천 명의 기병으로 편성된 2개 군단과 군자금이 에스파냐로 보내졌다. 그런데도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이것은 복잡한 지형을 이용한 세르토리우스의 뛰어난 전술의 유효성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전쟁은 궁지에 몰린 세르토리우스 군대가 내분을 일으켜 주색에 빠진 총사령관 세르토리우스를 부장인 페 르페르나가 암살함으로써 마침내 종결되었다. 반술라파라는 것말고는 로마에 계속 충성을 바쳤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르토리우스가 없는 반란군은 로마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기원전 72년 겨울이 오기 전에, 로마군의 두 장군인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는 '세르토리우스 전쟁'이 끝났다는 승전보를 로마 원로원에 보낼 수 있었다. 원로원은 그 소식을 받고 기억했다기보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 할 것이다. 1년 전인 기원전 73년부터 로마의 안마당인 이탈리아에서 대규모 노예반란이 일 어났기 때문이다. 역사상 '스파르타쿠스 반란'으로 유명한 검투사들의 봉기가 바로 그것이다.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는 화려한 유적이나 미술관을 가득 메운 조각들, 교양으로 배우는 철학이나 역사나 문학 등을 통해서 옛날의 그리스 로마 문명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 지혜의 결정체인 이런 것들을 접하면 누구나 감탄하게 된 다. 고대인들은 얼마나 훌륭한 것을 창조했는가 하고. 하지만 감탄하는 동시에 의문도 품게 된다. 이만큼 세련된 문화와 문명을 창조한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어떻 게 의심조차 품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했다.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만 여기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예수는 그 자신과 '신'을 믿지 않는 인간도 평등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종래의 역사관에 따르면 고대보다 당연히 진보했을 터인 중세부터 시작된 기독교 문 명도 노예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다. 단지 기독교도의 노예화를 금지했을 뿐이다. 따 라서 유대교도를 강제수용소에 가두는 것은 인도적으로는 '옳지 않을'지라도, 기독교적으로 는 완전히 '옳지 않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우수비츠 수용소의 출입문 위에 걸려 있었듯 이, 기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은 정신을 노동으로 단련함으로써 자유롭게 한 다는 논리도 성립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든 안 믿든 인간에게는 '인권'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것은 18세기의 계몽사 상이다. 따라서 노예제도 폐지를 명시한 법률은 1772년에 영국에서 처음 제정된 이후 1888 년에 브라질에서 제정될 때 까지 1세기 동안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법률은 생겼어도, 남 의 예속화에 무신경한 정신까지 인간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고대로 돌려서, 우선 전성기를 누리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를 예로 들어 학자 들의 추정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시민권 소유자 - 4만 명(이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 태생인 자유민으로 투표권을 갖는 자 의 수이고, 아테네에 살더라도 외국인이나 여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 가게나 농장에서 일하는 성인 남자 노예 - 3만 5천 명 *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남녀 노예 - 2만 5천 명 * 노예한테서 태어났거나 팔려서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미성년 남녀 노예 - 1만 명 *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 - 2만 명 아테네에서는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해방노예가 되는 것은 인정되었지만, 아테네에서 태어났더라도 부모 가운데 한쪽이 스파르타나 그밖의 외국 태생이면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해방노예나 그 자식한테도 투표권이 팔린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 은 헛된 꿈에 불과했다. 아테네의 노예 가격을 비싼 쪽부터 차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숙련 기술자: 의사, 엔지니어, 고급품을 제작하는 장인(예를 들면 항아리에 그림을 그리 는 화가). 2. 일반 기능자: 가게 지배인, 장인, 예능인. 3. 춤이나 음악 연주 기능을 가진 여자 노예. 4.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남녀 노예. 5. 비숙련 노동자: 농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 6. 아동 노예. 1과 5의 가격 차는 40 대 1 정도가 된다. 또한 숙련기술을 가진 남자 노예의 가격은 아테 네의 최하층 시민이 1년 동안 버는 수입의 2배 내지 3배였다. 아테네와는 달리, 기원전 1세기의 로마는 도시국가에서 벗어나 영토 국가로 가는 길을 확 실히 걷기 시작했지만, 학자들은 기원전 1세기 전반의 로마 인구를 다음과 같이 추산하고 있다. *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성인 남자 - 90만 명 * 로마 국가가 된 이탈리아 반도에 사는 60세 이상의 노인과 여자를 포함한 자유민 - 600만 내지 700만 명 * 노예 - 200만 내지 300만 명 이것은 속주민과 유난히 노예가 많았던 시칠리아 인구는 포함하지 않은 수다. 적어도 200 만 명을 헤아렸던 노예들의 분야별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노예 가격은 알려져 있 다. 그것을 비싼 쪽부터 차례로 열거하며, 다음과 같다. 1. 교사: 그리스어나 웅변술을 로마의 양갓집 자제에게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그리스인의 독점시장이기도 했다. 비싼 경우에는 로마 시내의 단독주택이나 나폴리 근교 해변의 별장을 사는 것과 맞먹는 값이었다. 이만한 투자를 했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노예라고는 해도 병이 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대단히 정중하게 대우했다. 그리스어 문장을 잘못 썼다는 이유로 교 사가 학생에게 체벌을 가해도 부모는 항의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만큼 교사 노예가 강 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2. 숙련 기술자: 의사, 건축가, 조각가, 화가, 엔지니어는 동족 중에서 배출한 로마인이지 만, 건축가나 예술가를 동족 중에서 배출한 아테네인과는 달리 건축이나 조각, 회화, 모자이 크 같은 조형예술은 노예에게 맡겼다. 3. 상급 기술자: 고역에 종사하거나, 농장 경영을 담당하거나, 주인의 비서 노릇도 할 수 있을 만한 머리를 가진 노예를 가리킨다. 로마 국정을 담당하는 정치가의 출세에는 돈이 들 었다. 모든 고위직은 민회에서 선거로 뽑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를 산다기보다는 유권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화려한 경기대회를 개최하거나 도로 복구 같은 공공사업을 하는데 돈이 들었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은 농장 경영 이외의 다른 일로 수입을 얻는 것이 금지되어 있 다. 그래서 신뢰하는 노예나 해방노예의 명의를 이용하여, 원로원 의원에게 금지되어 있는 통상이나 그밖의 경제활동으로 '뒷돈'을 버는 의원이 많았다. 노예들은 명의만 빌려주는 것 이 아니라 실무도 맡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기능을 가진 자라면 설령 노예라 해도 로마 사회에서 환영을 받았다. 또한 경제활동만이 아니라 다른 일에서도 주인의 오른팔 구실을 할 수 있는 노예는 비싼 값으로 거래되었다. 덧붙여 말하면, 로마 제일의 지식인으로 알려진 키케로의 저작집을 편집한 것은 그의 비서로 일한 노예였다. 4. 일반 기술자: 가게 지배인, 장인, 예능인, 검투사. 5. 춤이나 음악 연주 기능을 가진 여자 노예. 6.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남녀 노예: 다만 요리사의 경우는 유명해지면 숙련 기술자로 간주 되어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또한 같은 가사노동이라도 집사나 주인집 아이들의 양육을 맡 는 유모나 하인은 지위도 높고 값도 비쌌다. 7. 비숙련 노동자: 농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 가족 규모의 농장에서는 노예도 한식 구처럼 가정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대규모 농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는 그리스의 아테 네와 마찬가지로 로마 사회에서도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대농장이 많 은 시칠리아에서 노예반란이 두 번이나 일어난 것은 가혹한 대우에 대한 절망과 함께, 양치 기 등으로 산과 들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유를 만끽하면, 자유 를 제한받을 때의 고통도 그만큼 강하게 느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8. 아동 노예. 아테네와는 달리, 로마에서는 가장 비싼 노예와 가장 값싼 노예의 가격차가 100 대 1이나 되었다. 그리스인 가정교사의 값이 워낙 비쌌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기원전 1세기의 로마 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가였고, 따라서 노예공급도 많고 구입하기도 쉬웠을 뿐 아니라, 노 예라는 형태의 투자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할 여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자유민의 2분의 1 내지 3분의 1이나 되는 노예가 존재했던 로마 사회에서 노예반 란이 적었던 데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군대를 투입할 필요가 있을 정도의 대규모 반란은 기원전 135년과 기원전 104년, 그리고 기원전 73년의 '스파르타쿠스 반란'뿐이다. 처음 두 번 은 모두 대규모 농장이 많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났고, '스파르타쿠스 반란'만이 이탈리아 안 에서 일어났다. 로마 사회에서 노예반란이 적었던 이유로는, 우선 노예라도 한식구처럼 대우받았다는 점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노예들 사이의 계층화도 이유가 될 것이다. 정중한 대우를 받 는 교사 노예나 숙련 기술자 노예가 양치기 노예와 공동전선을 펴는 것도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다. 세번째 이유로는 계급간의 유동성을 들 수 있다. 로마 사회에서 해방 노예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노예가 되기만 하면 약간의 재산과 아들이 있는 경우에는 투표권도 취득할 수 있고, 재산이 없는 자라도 자식 대가 되면 완전한 로마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그리스인과는 달리, 로마의 성인 남자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수염도 깨끗이 깎는 것이 단 정한 차림새였다. 아침마다 주인의 수염을 깎는 것은 하인 노릇을 하는 노예의 임무였다. 그 리고 그라쿠스 형제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충성스런 노예는 마지 막까지 주인과 운명을 같이했다.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 사회에서의 적극적인 역할, 노예들 사이의 다층화, 시민권을 취 득할 가능성, 주인과 노예 사이에서도 의리를 중시한 정신 등이 로마 사회에서의 노예의 성 격을 특징짓는다 해도 좋을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로마인들은 노예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자라고 정 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속주민도 절반은 노예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 때문인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 자유민에게는 병역의무가 있어도, 노예나 속주민은 로마군에 지 원조차 할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속주민은 속주세를 냄으로써 자금 면에서는 국방 의무를 부담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노예한테는 병역도 세금도 면제되어 있었다. 자신의 운 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지 못한 자에게는 의무도 부과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의무가 부과되더라도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노 예들 중에도 역시 존재했다. 아피아 가도와 라티나 가도가 교차하는 도시 카푸아는 검투사 양성소가 집중해 있는 곳으 로도 유명했다. 이런 양성소는 민영이었는데, 노예시장에서 체구가 건장한 노예를 사들여 투 사로 양성한 다음, 로마나 그밖의 도시에서 검투시합이 열릴 때마다 빌려주었다. 시합에 졌 다고해서 검투사가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었지만, 싸우는 태도가 시원치 않은 검투사의 경 우 관중이 그의 숨통을 끊으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다. 검투사가 모두 노예였던 것도 아 니다. 자유민 중에도 검투사를 직업으로 택하는 자들이 있었다. 검투사 대여료가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고액이었던 모양이다. 키케로 의 친구이며 역시 당대에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던 아티쿠스도 카푸아에서 검투사 양성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티쿠스는 문화활동은 어찌되었든 간에, 경제활동에서는 경제성이 있는 사업에만 손을 댄 사람이다. 검투사 양성소 운영도 훌륭한 영리사업이었던 게 분명하다. 에 스파냐인이 투우를 좋아하고 미국인이 권투에 열광하듯, 로마인들도 에트루리아인한테서 물 려받은 검투시합에 열중했다. 카푸아에 있던 한 양성소에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가진 검투사가 있었다. 그는 남쪽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에 접해 있고 동쪽은 흑해와 면해 있는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였다. 이 시대에는 트라키아 지방에 아직 로마의 패권이 미치지 않았다.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삼은 뒤에는 마케도니아의 북쪽 국경을 방어할 의무도 로마가 떠맡게 되었기 때문에,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려는 것이 상례인 미개인들과 그들의 이주를 막으 려는 로마군 사이에는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스파르타쿠스가 붙잡힌 것도 이런 전투에 패 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가 트라키아의 왕자였다는 전설은 아마 조작일 것이다. 트라키아 지방은 통 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난립해 있는 여러 부족의 족장 아들 정도는 되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지도자의 소질은 타고난 사나이였다. 이 사나이를, 지도자로 한 74명의 검투사가 양성소에서 집단 탈주한 것이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시작이다. 죽음을 옆에 끼고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노예들의 봉기라는 점에서 이 역 사적인 사건은 현대인의 흥미를 자극할 수밖에 없는지, 소설로도 다루어졌고 영화도 만들어 졌다. 영화에서는 커크 더글러스가 주인공 스파르타쿠스 역을 맡았고, 토벌군 사령관 크라수 스 역은 로렌스 올리비에가 맡았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현대식으 로 각색되어 인도적인 입장에서 묘사한 이 영화에서 미움받는 악역은 물론 올리비에가 연기 하는 크라수스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당시 27세였으니까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없는데도, 이 젊은 카이사르가 원로원 의석에 버젓이 앉아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작품이 갖는 유쾌한 점이지만, 그보다 훨씬 유쾌한 것은 찰스로턴이 연기하는 원로원 노장파 영수로서 크라수스 와 사사건건 대립할 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쿠스에 대해서도 동정을 아끼지 않는 인물의 이름 이 그라쿠스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라쿠스 형제는 자식을 남기지 않고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형제가 죽은 뒤 그라쿠 스 집안은 대가 끊겼다. 하지만 현대 서구인이 핍박받는 자들에게 동정적인 로마인을 묘사 하고 싶을 때 결국 그라쿠스라는 이름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크라쿠스 형제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었지만, 이름만은 후세에 남겼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집단 탈주한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74명의 노 예들은 양성소에 있던 무기를 가지고 나와, 폼페이 배후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으 로 도망쳤다. 베수비오 화산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150년 뒤에는 대분화를 일으켜 폼페이를 분진으로 뒤덮게 되지만, 아직은 민둥산이 아니었다. 산꼭대기까지 수목이 뒤덮여 있어서 농성 장소로 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베수비오 산중에 틀어박힌 검투사들의 우두머리는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였지만 부두목은 갈리아 출신의 크릭수스였다. 탈주에 가담한 검투사들 중에는 게르만족 출신이 많 았다. 출신지는 각각 달라도, 검투 훈련을 쌓으며 고락을 함께 나눈 사나이들이다. 이들은 일당 백의 검술과 체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런 사나이들이 떼지어 산을 내려와 부근의 농장을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 정부는 이들의 반란을 처음에는 가볍게 보았다. 3천 명도 안되는 토벌대를 보냈지만,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검투사들은 이들을 간단히 무찔러버렸다. 노예 검투사가 로마 정규군 을 이겼다는 소식은 원로원에 도착하기 전에 주변 일대에 퍼졌다. 베수비오 산 남쪽의 캄파 냐 지방에는 대농장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이 농장들에서 일하던 노예들이 가래나 괭이 를 버리고 베수비오 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로마 정부도 이번에는 신중하게 대처하여 법무관 휘하의 2개 군단을 토벌대로 보냈으나, 그런데 이 토벌대도 스파르타쿠스 일당에게 패하고 말았다. 2개 군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가져온 것은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던 몇몇 병사였다. 스파르타쿠스는 포로로 붙잡은 로마 병사들에게 자기네가 로마인들한테서 강요당했던 검투시합을 강요하여 복수했다고 한다. 로마군에 대한 두 차례의 승리로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이탈리아 남부 전역에 퍼지게 되 었다. 그에게 가세한 자들 중에는 농장에서 탈주한 노예들만이 아니라, 노예나 다름없는 중 노동에 시달리면서 나날의 양식을 얻을 수밖에 없는 빈민들도 많았다. 이리하여 반란 노예 군 세력은 날로 불어나, 이듬해인 기원전 72년 봄에는 스파르타쿠스와 크릭수스가 양분하여 지휘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어 있었다. 총병력은 무려 7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력이 증강되면 유리할 게 뻔하지만, 지회에 계통이 서 있지 않으면 오히려 불리하게 작 용하는 경우도 많다. 스파르타쿠스의 생각은 로마와 싸워서 이탈리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 라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있었지만, 크릭수스는 물산이 풍부한 이탈리 아 남부를 약탈하는 데 만족하고 있었던 점이 문제였다.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잦아졌다. 한편 로마 정부는 기원전 72년으로 바뀐 그해 안으로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할 결심 을 굳히고 있었다. 기원전 72년의 집정관이 둘 다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 두 집정관은 각각 2개 군단 1만 5천 명씩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 및 크릭수스와 개별적으로 맞서게 되었다. 크릭수스에 대해서는 가르가노 산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고, 막다른 곳에서 벌어진 전투 에서도 승리했다. 이 싸움에서 크릭수스는 전사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의 추격을 교묘 히 따돌리면서, 4만 명의 동지를 이끌고 아드리아 해를 따라 이탈리아 반도를 북상했다. 집 정관 두 명이 이끄는 4개 군단은 이들을 추격하여 피체노 근처에서 스파르타쿠스를 따라잡 았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군사적 재능은 평범한 로마 장군보다 한 수 위였던 모양이다. 그 는 4개 군단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대신, 우선 집정관 한 명이 이끄는 2개 군단과 맞붙어 격 파한 다음, 다른 집정관이 이끄는 2개 군단을 급습했다. 그후에도 북상을 계속하여, 루비콘 강 근처에서 갈리아 총독의 지휘로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하하고 있는 군대와 만나자 이것도 격파해 버렸다. 로마로서는 망신을 당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스파르타쿠스 로서는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열린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갑자기 스파르타쿠스의 마음이 변했다. 얼마든지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 달아날 수 있었는데, 느닷없이 발길을 남쪽으로 돌린 것이다. 알프스 너머의 미개하고 가난한 땅으 로 돌아가는 것보다 물산이 풍부한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그곳에 정착하는 게 낫다는 부하들 의 요청을 무시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4만 명에 달하는 노예군은 이탈리아 남쪽 끝에 도착했다. 도중에 만나는 도시나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면서 행군했다. 노예들과 빈민들은 스파르타쿠스 휘하에 모여들었지만, 이탈 리아의 도시나 마을 가운데 스파르타쿠스 쪽으로 돌아선 곳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지 못했다. 법무관 크라수스가 이끄는 8개 군 단 5만 명의 병력이 배수진을 치고 노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특기할 만한 군사적 재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8개 군단이나 맡은 책임감 은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여덟 살 아래인 폼페이우스에게 강한 경쟁심을 갖고 있던 그는 초조감도 느끼고 있었다. 에스파냐에서는 이미 '세르토리우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어 와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개선하는 것도 이제 시간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원로원은 노예반 란 진압에도 크라수스 대신 폼페이우스를 투입할 공산이 컸다. 첫번째 전투에서는 비록 큰 희생은 없었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메시나 해협을 등지고 싸 우게 될 다음 전투가 크라수스에게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될 중요한 결전이었다. 크라수스는 첫번째 전투 때 적에게 등을 돌리고 달아난 1개 중대를 처벌하도록 했다. 전 군에 대한 본보기였다. '10분의 1 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로마군의 가장 엄한 형벌을 명 령한 것이다. 이것은 600명의 중대원 가운데 추첨으로 60명을 뽑고, 재수좋게 추첨에 뽑히지 않은 540명의 동료가 몽둥이를 휘둘러 60명을 죽이는 끔찍한 형벌인데, 로마 군단에서는 총 사령관에게 반기를 든 경우에만 부과되는 엄벌이다. 어쨌든 이것으로 병사들이 정신을 바짝 차렸는지, 메시나 해협을 건너려 하고 있던 노예 군을 산속으로 몰아넣는 데에는 성공했다.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이 산악지대는 아스프로몬테(험한 산)라고 불릴 만큼 험한 곳이어 서, 오늘날에도 유괴범들이 피해자를 데리고 도망쳐 들어가면 군대를 동원해도 찾아내기 어 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2천 년 전의 크라수스도 거기로 도망쳐 들어간 스파르타쿠스 일 당을 찾아내려면 무척 애를 먹었겠지만, 행운은 크라수스 편이었다. 스파르타쿠스가 4만 명 에 달하는 병력에 자신감을 가졌는지, 아니면 지금까지 거둔 승리로 로마군을 얕잡아보았는 지, 제발로 산을 내려왔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킬리키아 해적파 협정을 맺고, 그들이 브린디시에 보내주기로 약속된 선단을 이용하여 소아시아로 달아날 작정이었 다고 한다. 산악지대에서 내려온 노예군과 기다리고 있던 로마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은 스 파르타쿠스의 완패로 끝났다. 대부분이 전사했고, 산을 이룬 시체들 속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는 끝내 찾아낼 수 없었다. 이때 포로로 잡힌 6천여 명은 십자가에 매달려 오랜 고통을 겪은 끝에 죽었는데, 십자가형은 노예가 주인에게 반항했을 때 가해지는 가장 엄한 처벌이 었다. 크라수스의 명령에 따라 아피아 가도 연변에 줄지어 세워진 십자가는 수십 리 에 이 르렀다고 한다. 크라수스가 8개 군단을 맡은 뒤 6개월 만에 이룩한 전과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에스파 냐에서 폼페이우스가 개선했다. 체제가 갖는 장점은 누가 실행자가 되더라도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가 보장된다는 데 있 다. 반대로 체제가 갖는 단점은,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의 성과밖에 거둘 수 없는 현실이 패 배로 이어지게 되는 경우, 공동체가 입을 수밖에 없는 실질적인 피해가 너무 크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체제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평상시뿐이고, 비상시에는 아무리 체제에 충실하고 싶어도 현실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유연성을 갖는 체제 확립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이것처럼 어려운 일도 드물다. 예외는 또 다른 예외를 부르 는 숙명을 갖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술라가 회복하려고 애쓴 '원로원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면, 한 개인의 힘을 돌출시키지 않 기 위해서라도 전선에 나가 있는 총사령관을 1년마다 교체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메시나 해협만 건너면 갈 수 있는 시칠리아 섬을 전쟁터로 한 제1차 포에 니 전쟁 시대는 아니다. 또한 이탈리아가 전쟁터가 된 제2차 포에니 전쟁 시대도 아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때는 총사령관도 병사들도 1년마다 교대할 수 있었다. 제2차 포에니 전 쟁이 벌어진 17년 동안은 명장 한니발을 상대로 매년 평균 10명의 장군을 투입해야 했고, 따라서 지난해의 총사령관도 전직 집정관이나 전직 법무관자격으로 '절대 지휘권'을 가지고 전선에 못박혀 있긴 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한 개인의 힘이 돌출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 다. 이것은 소수 지도 체제가 기능을 발휘하는 데에는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 후반에 등장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눈부신 전과를 올림으로써 너 무 돌출해 버렸기 때문에, 평상시로 돌아오자마자 실각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니발 전쟁' 이라는 비상사태를 이겨낸 뒤에는 집정관도 10년의 간격을 두어야 재선될 수 있도록 규정한 종래의 방식으로 돌아갔다. 그게 벌써 1세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후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유구르타 전쟁'은 대권을 마리우스에게 일임한 뒤에도 3년 세월이 걸렸다. 또한 게르만족이 대거 침입했을 때는 5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마리우스를 집정관에서 선출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토리우스 전쟁' 때문에 에스파냐에 파견된 메텔루스 피우스는 8년 동안이나 에스파냐 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지원군으로 파견된 폼페이우스도 5년 동안이나 귀국하지 못했다. 술 라가 죽자 다시금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6세를 제압 하도록 파견된 루쿨루스는 기원전 71년이 된 지금에 와서도 귀환할 예정조차 없었다. 결국 그도 7년 동안이나 오리엔트에 계속 머물게 된다. 어쨌든 유능한 지휘관이 이끌지 않는 한 전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전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당 장 실질적인 피해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로마의 패권은 지중해 전역을 뒤덮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원로원이 주도하 는 로마 고유의 공화정 체제를 지켜내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술라 체제'는 지배층에서만 현실에 맞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피지배층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사령관들이 외지에 발목이 잡히게 된다는 것은 휘하 병사들도 거기에 발목이 잡히게 된다 는 뜻이다. 육로로 두 달은 걸리는 군단 이동을 1년에 두 번씩 거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장병이 한 덩어리가 되지 않으면 전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없는 군대에서는 지휘 관의 한마디에 병사들이 수족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려면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지원제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조국을 지키는 임무에 종사하고 있 으면 당연히 발언권이 강해지게 마련이다.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를 강화하고 싶은 나 머지, 그 반대제력이 되기 쉬운 민회와 그 민회의 권력을 상징하는 호민관의 약체화를 강행 한 '술라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평민들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술라가 호민관의 질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마련한 법률, 즉 호민관 경력자는 다른 관직에 출마할 수 없다고 규정한 법률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시민들의 불만을 결집할 만한 힘이 있는 유능한 호민관이 이 시기에는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현 실을 직시하고, 이것을 타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은 원로원의 양식파라 해도 좋은 사 람들이었다. 에스파냐에서 '세르토리우스 전쟁'의 향방이 여전히 불투명한 기원전 75년, 이해의 집정관 에는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선출되었다. 아우렐리우스 일족은 여자들까지도 그리스 어를 해독할 줄 아는 학자 집안으로 유명했다. 철학이나 수학 연구는 그리스인에게 맡기고 있던 로마 사회에서 학자라면 곧 법률가를 의미한다. 코타 자신도 유식한 법학자였다. 덧붙 여 말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도 아우렐리우스 일족 출신이다. 아우렐리우스 일족도 그라쿠스 형제가 속해 있던 셈프로니우스 일족과 마찬가지로 평민 귀족이다. 그런 탓도 있어서, 원로원 계급에 속해있기는 했지만 개명파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래도 술라의 숙청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학자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 학자 출신의 집정관은 우선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한 뒤, 민회에 다음과 같은 법안을 제출했다. 첫째, 호민관 경력자한테도 다른 관직에 출마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법안이다. 물론 민회는 이것을 가결했다. 바로 뒤이어 코타는 술라가 폐기한 '곡물법'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집정관 코타는 좋은 의미에서도 온건파였다. '곡물법'으로 이익을 얻는 자의 수는 4만 명을 넘을 수 없다는 테두리를 설정했다. 게다가 한 달 배급량은 호주 일인당 5모디우 스(약 45리터)로 정해졌다. 이 양은 당시 로마의 죄수에게 주는 양과 별차이가 없었다. 코타 가 성립시킨 법에서는 빈민에 대한 공급 가격이 1모디우스당 6과 3분의 1아세로 정해졌다. 이 가격은 술라가 '곡물법'을 폐기하기 전의 거의 무료 배급이나 다를 게 없었던 상태로 돌 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이우스 그라쿠스 시대의 가격으로 돌아간 것이다. 시가의 3분의 2보 다는 조금 낮고 2분의 1보다는 조금 높은 정도였다고 한다. 코타는 또한 학자 출신 집정관답게, 어디까지나 온건한 방식이긴 하지만, 술라의 숙청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에 팽배해 있는 원한을 해소하기로 마음먹고 그 정책화를 실현했다. 술라는 직접 작성한 추방자 명단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한테서 몰수한 재산을 경매에 부쳤 다. 그리고 그것을 구입한 사람은 대금을 국고에 넣는 것이 당연한데도, 술라는 그 의무를 면제하는 법을 성립시켰다. 구입자의 대다수가 그의 해방노예나 크라수스 같은 술라파 사람 들이었기 때문이다. 보너스로 준 셈이었겠지만, 이런 짓을 태연히 하는 것이 술라의 나쁜 버 릇이었다. 집정관 코타는 이 법을 폐기하는 법안을 제출했고, 민회는 이것을 가결했다. 경매로 떼돈 을 번 크라수스를 비롯한 술라파 사람들은 구입대금을 국가에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코타 는 법안을 제출할 때 공약했듯이, 이 수입을 에스파냐에서 진행중인 '세르토리우스 전쟁'의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술라의 숙청에 희생된 사람들의 원한을 풀고 로마 사회의 분열을 해소하려는 아우렐리우 스 코타의 생각은 다음에 제출한 법안으로 완성되었다. 그것은 술라가 역적으로 규정한 자 들의 명예 회복을 결정한 법안이다. 이미 죽은 사람은 명예 회복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 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명예 회복은 그들이 공직에 취임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뜻이 다. 이들은 실제로는 술라가 죽은 것을 알자마자 귀국했지만, '아우렐리우스 법'의 성립으로 사회에도 복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법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당시 25세였던 율 리우스 카이사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이 정도의 업적만 남기고 집정관 임기를 마쳤다. 이듬해인 기원전 74년에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총독에 부임했다. 하지만 유식 한 학자라도 전쟁터는 문제가 달랐던 모양이다. 미트라다테스 왕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인인 루쿨루스의 활약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술라 체제'는 이리하여 술라가 죽은 지 3년도 지나기 전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 너지고 있는 '술라 체제'에 마지막 철퇴를 가한 것은 바로 술라파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술라의 막료들 가운데 가장 젊고 가장 재능 있는 폼페이우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기원전 72년에 끝난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담당한 로마의 두 장군 가운데 성품이 온후한 메틸루스 피우스는 술라가 정한 법에 충실히 따라, 로마의 국경인 루비콘 강까지 왔을때 군 단을 해산했다. 그러나 메텔루스 피우스와 마찬가지로 군단을 이끌고 귀국길에 오른 폼페이 우스는 에스파냐에서 '알프스 서쪽의 갈리아'(갈리아 트란스알피나, 오늘날의 프랑스)로 들어 가, 그곳을 가로질러 알프스를 넘은 다음, 기원전 71년 여름에는 '알프스 남쪽의 갈리아'(갈 리아 키살피나, 오늘날의 이탈리아 북부)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빠져나가 루비콘 강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군단을 해산하는 대신, 휘하 병력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수도 로마 의 교외까지 와서 숙영하면서, 원로원에 다음과 같은 통첩을 보냈다. 1. 내 휘하에서 싸운 병사들에게 토지를 줄 것. 2. 나에게 개선식 거행을 허가할 것. 3. 내가 내년도(기원전 70년) 집정관에 출마하는 것을 인정할 것.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81년에 이미 개선식을 거행한 적이 있었다. 로마 역사상 가장 젊은 25세의 개선장군이었지만, 그것은 술라의 독재 시대에 절대 권력자인 술라가 인정한 특례였 다. 구국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조차도 로마의 남아에게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을 자마에서 한니발을 무찌르고 귀국한 34세에야 처음으로 치렀다. 라틴어에는 젊은이 또는 사 춘기를 뜻하는 '아돌레스켄스'라는 낱말이 있는데, 16세에 성년식을 치른 뒤에도 30세까지는 이 시기에 속했다. 다시 말해서 아직은 제구실을 하는 어엿한 사나이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원전 71년 당시 폼페이우스의 나이는 35세였다. 문제가 나이뿐이라면 그에게는 개선식 을 거행할 자격이 충분했다. 문제는 술라의 개혁에 있었다. 거기에 따르면, 30세에 회계감사관에 출마할 자격을 얻고, 여기에 선출되어 1년 임기를 마 치면 31세에 원로원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 그후 원로원 의원으로 8년 동안 경험을 쌓으 면 39세에 법무관에 출마 할 자격을 얻는 동시에, 전략 단위인 2개 군단 1만 5천 명 이상의 병력을 지휘하는 '절대 지위권'도 얻는다. 그리고 법무관 임기 1년을 마치면 자동적으로 10 개의 속주 가운데 하나의 총독으로 배속되어 속주 통치와 속주 방위를 1, 2년 경험하고, 이 '절대 지휘권'을 2년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42세에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에 출마할 자 격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원로원 체제' 복구에 집념을 불태운 술라가 추진한 개혁의 알맹 이였다. 공화정 시대 로마의 정치체제는 과두정이라고 불리는 소수 지도 체제였고, 아테네 같은 민주정은 아니다. 관직은 민회의 선거를 거치지만, 그 관직에 출마하는 사람은 선거라는 통 과의례를 거치지 않는 원로원이라는 기관에서 나온다. 인간의 몸으로 말하면 심장에 비유해 도 좋은 이 원로원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술라는 원로원 의원의 수를 두 배로 늘려 600명으로 정했다. 600명이나 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연공서열 제도를 지키지 않으면 조 직으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에 취임하는 것은 기원전 70년이니까 그의 나이도 36세가 되지만, 집정관의 자격 연령인 42세에는 6세나 모자랐다. 모자란 것은 연령만이 아니었다. 폼페이우스는 회계감사관 경험도 없었고, 원로원 의원도 아니었다. 물론 법무관 경험도 없었다. 에스파냐에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절대 지휘권'을 부여받고 파견되었지만 그때는 달리 적당한 지휘관이 없어서 임시 특례로 인정되었을 뿐이 다. 하지만 이번에는 폼페이우스가 자신에게 특례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자 신은 개선식을 거행할 만한 전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집정관이 될 자격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력으로 따지면 자격은 충분했다. 하지만 실력주의를 인정하면, 연공서열을 지켜야만 기 능을 발휘할 수 있는 '원로원 체제'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원로원은 군대를 등에 업은 폼페 이우스의 요구에 대해 처음 얼마 동안은 저항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술라파 의 유력자로 간주되고 있던 크라수스가 폼페이우스를 설득하여 요구를 철회하도록 노력해 주기를 기대했다.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평정한 직후라서, 이탈리아 안에서 유일 하게 통합된 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부터 폼페이우스의 화려한 활동을 시기하고 있던 크라수스가 폼페이우스를 설득 하기는커녕, 자기도 집정관이 되고 싶다고 나섰다. 게다가 그 역시 해산해야 마땅한 8개 군 단을 해산하기는커녕,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수도 근처까지 진군시켰다. 폼페이우스와 크 라수스는 이 점만은 술라를 흉내낸 것이다. 크라수스는 원로원 의원이기도 하고 법무관 경험도 있고 나이도 43세였으니까, 이듬해 집 정관에 출마할 자격이 충분했다. 다만, 그에게는 인망이 없었다. 이른바 평민 귀족에 속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크라수스는 원로원 계급에 속한다. 하지만 농장 경영 이외에 원로원 계급에는 금지되어 있던 경제활동에도 해방노예나 노예의 명의를 빌려 폭넓게 관여하고 있었다. 아버지 때부터 이미 로마 제일의 부자로 꼽혔던 크라수스 집 안의 막대한 재산은 아들인 그의 시대에는 더 많이 늘어나, 수도 로마에도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독재자 술라의 추방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기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한 사 람들의 집과 토지를 경매에서 헐값에 사들여 이익을 본 것이 시작이었다. 로마에서 불이 나면 소방관보다 크라수스의 부하가 먼저 달려간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달려간 크라수스의 부하는 뒤늦게 달려온 소방관에게 돈을 찔러주어 소방 활동을 늦추고, 그동안 불타는 집 앞에서 집주인과 매매교섭을 벌이는 것이다. 헐값에 거래가 성립 되면 비로소 소방 활동이 시작되곤 했다. 그래도 자기 소유가 된 집을 크라수스가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으로 개축했다면 수도의 주 택 문제에도 공헌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잇속이 빠른 크라수스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 다. 패권국가 로마인 만큼 수도 로마에는 늘 주택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으로 개조하려면 돈이 드니까, 임대료도 비싸게 받지 않으면 채산이 맞지 않는다. 그런데 비싼 집세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가장 수요가 많은 것은 집세가 싼 집 일 게 뻔하다. 그래서 로마 제일의 갑부인 크라수스가 수도에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은 대부분 위층에서 큰 소동이라도 벌어지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집들이었다. 이런 자에게 민심이 모일 리가 없다. 그런데도 크라수스 자신은 자기가 가진 로마 제일의 재력이 곧 로마 제일의 정치력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8명이나 되는 법무관에는 당선될 수 있어도, 정원이 2명밖에 안되는 집정관에 당선되는 것은 '클리엔테스'를 총동원해도 어렵 지 않을까 하고 걱정할 만큼은 현실적이었다. 그래도 크라수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정 관이 되고 싶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폼페이우스에 대한 경쟁심도 이때만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집정관 취임에 약점을 갖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한 협정이 맺어졌다. 원로원 의원이 기도 한 크라수스는 원로원에 대한 물밑 교섭을 펴서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 도록 해주는 대신, 병사들로부터 신망이 높은 폼페이우스는 병사들의 표를 크라수스에게도 나누어주기로 한 것이다.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아니면 로마 군단에 지원할 수도 없었던 시 대에 병사는 곧 유권자였다. 협정이 성립되자마자 두 사람은 군대를 해산했다. 군대의 압력이 사라졌는데도 원로원은 여전히 무력했다. 폼페이우스에 대한 원로원 청문 회도 서투른 연극에 불과했다. 원로원의 원로 의원이 소환된 폼페이우스에게 묻는다. "참전 경험은 있는가?" 35세의 폼페이우스는 업신여기듯이 대답한다. "참전 경험이라고요? 나한테는 지휘 경험밖에 없는데요."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된다. 기원전 71년 말에 열린 민회에서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다른 후보자들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이듬해인 기원전 70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술라 체제'는 또다시 그 한 모퉁이가 허물어진 것이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원로원 계급의 유일한 소망은 두 집정관이 원로원 계급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이들 두 사람은 원래 부유한데다 이제는 정치적 권력까지도 가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지지층은 좀더 부유해지기를 원했고 정치적인 발언권도 좀더 늘리고 싶어했다. 폼페이우스 도 크라수스도 집정관을 1년 경험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앞으로 권력을 유 지하기 위해서는 지지층을 계속 붙잡아두어야 했다. 기원전 70년에 이들 두 사람이 제안하 여 성립시킨 법의 내용은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들을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것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호민관의 권위와 권력의 완전한 부활. 귀족이든, 무산자(프롤레타리아)든, 중산층 정도의 재산과 5세 이상의 아들을 둔 해방노예 든 간에 투표권을 가진 로마 시민이면 누구나 민회에 참석할 권리가 있었지만, 민회 소집권 은 집정관에게 있었다. 집정관이 군무 등으로 수도를 비운 경우에는 법무관이 대리를 맡았 다. 하지만 집정관 이하의 관직을 선출할 때는 호민관이 민회 의장을 맡았다. 또한 예로부터 의 명문 귀족이 아닌 평민 귀족 이하의 모든 사람이 참석하는 평민집회도 호민관이 의장을 맡았다. 기원전 287년에 '호르텐시우스 법'이 제정된 이후, 평민집회가 의결한 사항은 원로원 의 승인이 없어도 정책화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술라는 이것을 고쳐서, 원로원이 승인 하지 않는 경우에는 평민집회의 의결이 있어도 정책화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이 법을 폐기하자고 제안했고, 개정법은 가결되었다. '호르텐시 우스 법'이 부활한 것이다. 2. 배심원 제도의 개혁. 이 문제는 로마 시민의 이해와 직접 관련되는 배심원 구성에 관한 것인 만큼, 맨 처음 이 것을 다룬 그라쿠스 시대부터 여러 번 역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공화정으로 바뀐 이후, 로마에서는 재판의 향방을 결정하는 배심원단을 원로원 의원이 독 점하는 상태가 오래 계속되었다. 기원전 133년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배심원을 원로원 의원과 '기사계급'에 각각 반씩 할당하는 제도로 바꾸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이 생각의 법제화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122년에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제 출한 법안, 즉 '기사계급'이 배심원을 독점하도록 규정한 법안이 민회에서 가결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술라는 이것을 다시 원로원 의원의 독점으로 바꾸었다. 기원전 70년,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동생이 다듬은 법안이 두 집정관인 폼페이우스와 크라 수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법률로 성립되었다. 이 법률은 배심원을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 및 평민의 세 계급에 각각 3분의 1씩 배분하도록 규정했다. 이런 것을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기원전 70년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각자 자 기 지지층의 이익 대표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군인으로 대표되는 일반 시민의 이익 대표이고, 크라수스는 눈부시게 부상하고 있는 경제계의 이익 대표라는 형태였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확고한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역사가들 사이에 서도 끊임없이 논의되는 점이지만, 이 두 사람의 나중 행동으로 보더라도 도저히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특히 폼페이우스는 나중에 '원로원 체제'의 수호신처럼 보이기 때문에, 나 는 이 시기에 그가 편 시책이 민중 보호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폼페이우스를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로서는 필요하다고 여겨 지는 일을 했을 뿐이고, 그의 성격으로 보면 시민들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선의가 그것을 뒷 받침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다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결국에는 표를 모으기 위한 선거대책이 되어버리기 쉬운 이유는, 공화정 체제를 채택한 로마에서는 무슨 일이든 '표'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술라는 좋은 면에서든 나쁜 면에서든 분명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때문에 미움은 받았지 만 경멸은 받지 않았다. 그에게는 '원로원 체제'의 재활성화라는 확고한 정치적 목표가 있었 다. '표'에 신경을 쓰면 그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로원 체제'를 재확 립하면 로마 국가가 직면해 있는 여러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는 복고적 향수에 젖은 낭만주의자였지만, 그런 노력을 게을리하면, 다시 말해서 민중의 뜻대로 국가를 방치하면 군주정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고 예측했다는 점에서는 보기 드문 현실주의자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를 '겉모습은 민주정이지만 실제 로는 한 사람이 지배하는 나라'라고 평했다. 후세의 우리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인들도 '독재 자'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에는 아테네가 중우정치라는 말을 낳았을 정도의 참상에 빠져 몸 부림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아테네에 절망한 것은 비단 철학자 플라톤만은 아니다. 투 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저술에서 '대국의 통치에는 민주정 체제가 적합하 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민주정만이 절대선은 아니다. 민주정도 다른 정치 체제와 마찬가지 로 장점과 단점을 동전의 양면처럼 지니고 있으며, 운용 방식에 따라서는 항상 위험한 정치 체제다. 술라는 직접 독재를 함으로써 장래의 독재에 대한 위험을 없애는 체제를 확립하려고 했 다. 공화정 체제를 택한 로마에서는 독재관만이 '표'의 향방에 좌우되지 않고 정책을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이 위정자들에게 확고한 정치적 목표를 요구하는 것은 나름대로 일 리가 있다. 확고한 정치적 목표가 없이 정치를 하면 정책은 전후좌우로 흔들리기 쉽고, 그 결과는 국력의 낭비로 이어진다. 통치를 받는 쪽으로 관점을 옮겨보면 어떨까. 통치자 쪽에 확고한 정치적 목표가 있든 없 든, 결과가 좋으면 그것으로 만족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원전 83년에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킨나가 지배하고 있던 로마 정부를 무력으로 뒤엎기 로 결심한 술라는, 비록 킨나가 추진한 정책일망정 이탈리아에 사는 자유민이라면 누구나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한 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 법을 좋게 생각 해서 이런 약속을 한 것은 아니다. 무력으로 이탈리아를 제압할 생각이었던 그에게는 섣불 리 이탈리아인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하지만 결과는 좋았다. 술라에게 좋 았다기보다 이탈리아 반도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었다. 로마라는 국가에도 좋았 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편 시책도, 비록 그들에게는 표를 모으기 위한 인기 전략이었다 해도, 그 결과는 좋게 나타났다. 호민관의 권위와 권한을 부활시킨 것은 술라 체제하에서 소 외감을 느끼고 있던 민중에게 긍지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배심원 제도의 개혁은 속 주민에게 로마 법이 공정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속주민들에게는 그들을 다스리기 위해 로마에서 파견되는 총독의 통치에 불만이 있으면 고발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총독을 고발해도 원로원 의원이 독점하고 있는 배심원단의 평결에서 패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와 크라수 스가 집정관이 된 기원전 70년에는 재판도 여느 때와는 달랐다. 그해 봄, 총독 임기를 마친 가이우스 베레스가 임지인 시칠리아에서 귀국했다. 총독 시절 에 그의 악정은 수도 로마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시칠리아 속주민들은 베레스를 고발했다. 원로원 의원이기도 한 베레스는 유력한 의원들을 친구로 가지고 있었다. 피고측 변호인은 이듬해인 기원전 69년의 집정관에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던 호르텐시우스가 맡았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는 당시 로마에서는 최고의 변호사로 평판이 높았다. 호르텐시우스 외에 코르 넬리우스와 메텔루스 같은 유력한 명문 귀족들도 피고측 변호인으로 참여했다. 원고측 변호인을 맡은 사람은 그해 36세인 키케로였다. 그의 변론은 재판이 끝난 직후에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던 친구 아티쿠스가 책으로 펴냈고, 다행히 중세에도 소실되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도 읽을 수 있다. 36세의 소장 변호사다운 힘차고 훌륭한 변론이지만,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키케로야말로 뛰어난 저널리스트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 었다. 미국 법정에서 변호사의 변론을 듣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기원전 1세기 당시의 시칠리 아가 눈앞에 선히 보이는 것 같다. 아마 포로 로마노의 회당(바실리카)에서 열렸을 재판을 방청한 로마의 일반 서민들도 키케로가 묘사하는 시칠리아의 실정이 눈에 보이는 듯한 기분 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재판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방청객이 아니라 배심원단이다. 만약 '술라 체제'가 기 능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원로원 의원인 배심원들은 자기와 같은 동아리에 속하는 피고에게 유리한 평결을 내리고 싶은 마음을 떨쳐버리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70년의 법정 배심원석은 원로원 의원과 '기사계급'과 평민층이 각각 3분의 1씩 차지하고 있 었다. 결과는 속주민의 승리로 끝났고, 이 소식은 로마의 모든 속주에 긴급뉴스로 전해졌다. 피 고 베레스는 총독 시절에 모은 재산을 모두 반환했을 뿐 아니라, 자진 망명함으로써 겨우 감옥생활만은 면할 수 있었다. 귀족 출신도 아니고 집정관을 지낸 조상도 갖지 못한 '신참자' 키케로의 명성을 단번에 높 여준 재판이기도 했다. 이 재판은 또한 야심가인 그에게 정계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준 발판 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기원전 70년은 '술라 제제'의 막이 닫히는 해가 되었다. 술라가 죽은 지 불과 8년 만에 그가 쌓아올린 체제는 송두리째 무너진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코타 외에는, 그 체제를 무너뜨리겠다고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게 분명하다. 단지 현실의 요 구에 응하려다가, 무의식적으로 '술라 체제'의 붕괴를 도와주고 만 것이 아닐까. 술라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선견지명만은 가지고 있지 않 았다. 폼이우스는 '술라 체제'를 붕괴시키면서까지 집정관이 되었지만, 1년의 임기가 끝난 뒤에 도 그 자리에 계속 눌러앉을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술라의 결정에 충실 했다. 그러나 집정관 임기를 마치면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속주 총독에 전출하는 것이 또한 술라가 확립한 체제였음에도, 거기에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술라의 결정에 충실한 실행 자는 아니었다. 이 문제에서 그가 취한 행동이, 그가 확고한 정치적 목표를 갖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의 처지에 서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장군으로서는 당시 로마 의 제일인자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폼페이우스였다. 그런 인물에게 걸맞는 속주는 기원전 69 년의 시점에서는 소아시아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69년 당시의 로마가 군대를 보 내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지방은 오리엔트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다른 속주들은 당대 제일의 장군인 폼페이우스를 파견할 필요도 없을 만큼 평정되어 있었다는 뜻 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리엔트에는 폼페이우스의 선배격인 루쿨루스가 이미 기원전 73년부 터 파견되어 있었다. 총사령관에는 다음 세 가지 유형이 있을 것이다. 첫째, 자신이 총지휘를 맡아서 시작한 전쟁을 스스로 끝낼 수 있는 사람. 둘째, 자신이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끝낼 수는 있는 사람. 셋째, 자신이 총지휘를 맡아 시작했지만, 그리고 상당히 잘 싸웠지만, 전쟁을 끝내는 것은 다른 장군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사람. 술라도, 폼페이우스도, 그리고 카이사르도 완전히 첫번째 유형에 속한다. 한편 마리우스는 두번째 유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구르타 전쟁' 당시의 메텔루스, '세르토리우스 전쟁' 때의 메텔루스 피우스는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장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원전 73년부터 시작하여 결국 기원전 66 년까지 7년 동안을 소아시아 전선에서 미트라다테스와 싸우데 전념한 루쿨루스 역시, 전투 에는 이겨도 전쟁에는 이길 수 없는 세번째 유형에 속했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유력한 평민 귀족인 리키니우스 일족 출신이었다. 하지 만 같은 리키니우스 일족 출신인 크라수스처럼 재산을 늘리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 는 짓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단히 귀족적인 인물이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완벽하게 쓰고 말하며, 예술에 대한 안목을 가졌고, 교양도 깊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술라의 총애를 받았다. 루쿨루스의 경력은 '동맹시 전쟁' 당시 술 라의 참모로 시작되었다. 그후 술라가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왕을 제압하기 위해 그 리스로 건너가자, 루쿨루스도 함께 이탈리아를 떠났다. 이때 술라는 아직 20대인 루쿨루스에 게 해군 편성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루쿨루스는 그 임무를 훌 륭히 해냈다. 애써 모은 함대를 이끌고 술라에게 돌아가는 도중에, 루쿨루스는 에페수스에서 핌브리아를 만났다. 핌브리아는 킨나의 명령으로 술라를 쳐부수기 위해 로마 정규군을 이끌 고 파견되어 있었다. 핌브리아는 루쿨루스에게 함대와 함께 자기 쪽에 붙으라고 권했다. 당 시 술라는 킨나가 지배하는 로마 정부에서 반역자로 규정되어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처지였 다. 로마 시민인 루쿨루스가 설령 술라를 배신했다 해도, 거기엔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30세도 안된 루쿨루스는 핌브리아의 유혹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함대가 도착하기 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술라에게 돌아가기 위해 에페수스를 떠났다. 만약에 이때 루쿨루 스가 핌브리아 쪽에 붙었다면, 술라의 미트라다테스 정벌도 그렇게 빨리 그토록 훌륭하게 결말이 날수는 없었을 것이다. 루쿨루스는 22세 연상인 술라에게 심취해 있었다. 루쿨루스에 대한 술라의 신뢰도 흔들림이 없었다. 미트라다테스 문제가 해결된 뒤, 이번에 야말로 킨나와 대결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갈 때 술라는 소아시아 지방에 대한 감시자로 루쿨루스를 남겨두었다. 이탈리아로 돌아가면 킨나 일파와 내전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술라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 렇다면 전투에 강한 루쿨루스를 데려가는 편이 유리할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제압할 때 술라가 꺼낼 수 있는 최상의 카드는 미트라다테스 전쟁의 승자라는 점이다. 그 카드의 유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가 떠난 뒤의 소아시아가 계속 평온을 유지해야 했 다. 루쿨루스에게는 막중한 임무가 맡겨진 셈이다. 그 임무를 수행한 루쿨루스가 로마로 귀국한 것은 기원전 80년이었다. 술라의 독재가 한 창일 때였다. 그해 말, '술라 체제'를 구축한 술라는 독재관을 스스로 사임한다. 그리고 이듬 해에 죽었다. 루쿨루스가 38세 되던 해였다. 원로원의 유력자였던 루쿨루스는 집정관에 출마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지만, 술라에게 심취해 있던 그는 술라가 정 한 법을 충실히 지켜서 집정관의 자격 연령인 42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정관에 출마 했다. 기원전 74년에야 비로소 루쿨루스는 집정관에 취임했다. 집정관 시절의 루쿨루스는 정치적인 움직임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집정관이었던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술라 체제'를 상당히 무너뜨렸지만, 그것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움직임 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래 루쿨루스에게는 정치적인 성향이 별로 없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73년, 그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속주 킬리키아(소아시아 남동부) 총독 에 취임한다. 그리고 그대로 7년 동안이나 로마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술라가 담당한 것 이 '제1차 미트라다테스 전쟁'이었다면, 루쿨루스는 '제2차 미트라다테스 전쟁'의 최전선에 서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6세는 로마가 다른 문제에 골몰하느라 이쪽에 힘을 할애하기 어려을 때는 당장 침략행위를 재개하곤 했는데, 기원전 73년이라는 해도 로마에는 힘든 해 였다. 에스파냐에서는 메텔루스 피우스만으로는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아서 폼페이우스까지 파 견했지만, '세르토리우스 전쟁'의 향방조차 알 수 없는 상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안마당인 이탈리아에서는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일어났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미트라다테스가 아니었다. 12만 명의 보병과 1만 6천 명의 기병, 네 필의 말이 끌고 두 바퀴에 커다란 낫을 장착한 전차 100대를 이끌고 이웃나라 비티니아 로 쳐들어갔다. 폰토스와 마찬가지로 흑해에 면해 있는 소아시아 북부의 비티니아 왕국은 니코메데스 왕 의 유언에 따라 로마의 속주가 되어 있었다. 미트라나테스는 또다시 로마의 패권에 정면으 로 도전한 것이다. 게다가 비티니아 총독으로 나와 있던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지휘한 첫 전 투는 폰토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처음에는 고전하는 것이 로마군의 전통처럼 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루쿨루스가 도 착한 뒤에는 전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루쿨루스는 폰토스군을 혼자 떠맡게 되었지만, 그가 활용할 수 있는 전력은 3만 명의 보병과 2천 500명의 기병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로마군이 이겼으니까, 장군으로서 루쿨루스의 뛰어난 능력이 증명된 셈이다. 게다가 군대를 재편성하 여 다시금 공세로 나온 미트라다테스에게 또다시 이겼다. 로마군은 게릴라한테는 고전했지 만, 아무리 대군이라도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적한테는 강했다. 전략과 전술 양면에서 로마인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루쿨루스는 전투에 능했지만, 두 번 승리한 뒤에는 미트라다테 스를 뒤쫓지 않고, 유능한 행정관의 면모를 보여주는 쪽을 택하여, 미트라다테스가 유린한 소아시아 속주의 내정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로마가 속주세 징수 업무를 맡긴 '푸블리카누스'는 직역하면 '공무 대행업자'라고 하겠는 데, 이들은 공무원이 아니라 민간업자다. 이들 중에도 성공하여 원로원 의원과 맞먹거나 그 이상의 재산을 모은 사람들을 로마 사회는 원로원 계급과 평민층의 중간에 위치하는 '기사 계급'이라고 불렀다. 기사를 제공할 의무를 가질 만큼 재산가라는 뜻이다. 내가 종종 경제인 이라고 의역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업무 가운데 하나가 속주세 징수를 도급맡는 것인데, 그 도급에서 얻는 이익은 소득의 1할인 속주세의 1할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속주세 도급업은 소득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수료로 재미를 본 것이 아니다. 날 씨가 좋지 않았거나 전쟁터가 되어 수확이 격감한 해라도 속주세액은 지난해의 수확을 토대 로 계산되기 때문에, 수확이 없는 해라도 속주세는 내야 한다. 따라서 세금을 낼 수 없는 자 들은 빚을 질 수밖에 없다. '푸블리카누스'들에게 가장 이문이 많이 남는 사업은 이런 경우 에 돈을 빌려주는 대금업이었다. 어쨌든 이율에 일정한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양심적인 총독이 감시하지 않는 한 제멋대로 고율의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상태였다. 제1차 미트라다테스 전쟁이 끝난 뒤 술라가 소아시아 속주민에게 일시불로 부과한 조세는 2만 탈렌트였는데, 루쿨루스가 속주 정비에 나선 10년 뒤에는 높은 이자 때문에 그것이 무 려 12만 탈렌트로 늘어나 있었다고 한다. 루쿨루스의 소아시아 통치는 우선 속주민을 고리 대금의 질곡에서 구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루쿨루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통치권을 방패삼아 금융 개혁을 단행했다. 1. '푸블리카누스'들에게 주는 이자는 한 달에 1퍼센트로 한다. 그러면 연이율로는 12퍼센 트가 된다. 2. 대금업자는 받아야 할 돈이 아무리 많아지더라도, 채무자의 1년 수입의 4분의 1 이상은 지불을 요구할 수 없다. 루쿨루스의 이런 방식 덕분에, 4년 뒤에는 소아시아 지방의 속주민 가운데 빚더미에 짓눌 려 신음하는 사람은 사라졌다고 한다. 담보도 대부분 원래 주인한테로 돌아갔다. 속주민의 민심도 로마 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루쿨루스는 속주에서 떼돈을 벌고 있던 금융업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그들은 은밀히 원로원에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인 지, 아니면 당시 로마에는 더 이상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제2차 미트라다테 스 전쟁을 담당하는 루쿨루스에게는 모국의 지원이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은 상태가 되었다. 루쿨루스가 활용할 수 있는 전력은 5개 군단에 상당하는 보병 3만명과 기병 2천 500명뿐 이었다. 그 내역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1개 군단, 소아시아 총독 휘하에 있는 병사들 을 긁어모은 2개 군단, 그리고 원래는 킨나가 술라를 제압하기 위해 파견했지만 총사령관 핌브리아가 자결한 뒤 술라가 소아시아를 수비하도록 남겨놓은 2개 군단이다. 핌브리아를 따라온 이 2개 군단은 벌써 15년이 넘도록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이 어떤 심경일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명백한 불행은, 뛰어난 장군인데다 행정관의 능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는 루쿨루스 가 여자운과 부하운만은 타고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의 가정생활은 평생 불행의 연속이었다. 기독교 이전의 로마 사회에서 이혼은 되도록 피하는 편이 좋긴 하지만 나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특히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략 결혼이 보통이라서, 술라도 폼페이우스도 카이사프르도 몇 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불행한 가정생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생활 동안 행복했을 수도 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낸 뒤라면 이혼도 쓴맛을 남기지는 않는다. 어쨌든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은 정치 싸움의 동맹관계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혼당한 여자도 당당히 재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쿨루스의 경우는 불행했다. 아내가 된 여자들 가운데 그와 마음이 맞은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아내와 헤어져 오리엔트에 오래 머무는 것도 그 개인으로서는 그리 불편하 지 않았을 거라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여자운과 부하운은 결국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이었다. 인간의 행복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신적인 측면에만 한정하면, '커뮤니케이션'이 있다는 것은 사람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준다. 그렇기는 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커뮤니케 이션'의 정도도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커뮤니케이션'이 충분하다고 느끼게 하면 된다. 루쿨루스는 애써 병사들과 어울리고, 행군할 때나 전투할 때나 항상 선두에 서고, 야영을 해야 할 경우에는 총사령관인 그도 병사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한뎃잠을 잤다. 그런데도 병 사들은 그에게 불만이었다. 싸우면 이기니까, 마지못해 따라갔을 뿐이다.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다 하면 반드시 이겼다. 게다가 멋지게 이겼다. 이것은 항상 적의 10 분의 1 정도밖에 안되는 전력으로 완승을 거두었다는 뜻이다. 두 번이나 루쿨루스에게 패한 미트라다테스는 기원전 70년이 되자 전략을 바꾸었다. 아르 메니아 왕 티그라네스와의 공동전선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의 왕비가 미트라다 테스의 딸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한 나라의 군주가 고작 그런 이유로 로마와 맞서지는 않는 다. 두사람 사이에는 로마의 세력을 몰아낸 뒤에 오리엔트 지방을 양분한다는 밀약이 성립 되었다. 미트라다테스는 그리스를 차지하고, 티그라네스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영유한다 는 약속이다. 티그라네스는 그에게 도망쳐온 미트라다테스의 신병을 인도하라는 루쿨루스의 요구에 거부하는 회신을 보냈다. 루쿨루스에게는 새로운 적이 나타난 셈이다. 그는 이제 그 나마 적은 병력을 양분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이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쳐들어가자, 티그라네스 왕은 눈 아래 펼쳐진 평원에 진을 친 로마군을 보고 이렇게 말하며 비웃었다. "강화를 청하러 온 사절단치고는 너무 많군. 그렇다고 해서 싸움을 청하러 온 군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고..." 하지만 총병력 12만 5천 명인 아르메니아군에게 1만 2천 명의 보병과 3천 명의 기병밖에 없는 로마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적은 병력이라도 충분히 활용하고, 적의 주력을 고립시킨 다음 그것을 쳐부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이래 로마 장군들이 늘 쓰는 전술이 이번에 도 효과를 거둔 것이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 쪽 전사자는 10만 명이 넘은 반면, 루쿨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희생자는 100명도 채 안되는 부상자와 5명의 전사자뿐이었다. 스승인 술 라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은 훌륭한 전과였다. 게다가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 았으니까 참으로 대단하다. 싸웠다 하면 이기는 상승 장군 루쿨루스는 소아시아에서 더욱 동쪽으로 진군하여 카스피 해까지 이르렀다. 군대를 이끌고 이곳까지 온 유럽인은 알렉산드 로스 대왕 이후 그가 처음이었다. 로마의 공인으로서는 물론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루쿨루스는 미트라다테스의 숨통을 끊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더 이상의 종군 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루쿨루스는 티그리스 강 상류에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 티그 리노케르타(오늘날 터키의 시르트)까지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루쿨루스에게는 불운 의 시작이었다. 루쿨루스는 자신의 재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는 자신이 참 고 있으니까 병사들도 똑같이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이 여름의 사막이나 겨 울의 산악을 행군하는 것을 참게 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하 지만 루쿨루스는 이런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전략이나 전술을 병 사들에게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병사들이 소외감을 느껴서는 좋은 결과를 얻 기 힘들다. 루쿨루스는 자신감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병사들을 적극적인 참여자로 바꾸는 데 필요한 마음의 교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총사령관과 부하들 사이에 정신적 상호관계가 결여되어 있는 것은 전리품 분배에도 나타 났다. 당시에 오리엔트는 서구보다 훨씬 풍요로운 지방이었다. 에스파냐나 갈리아와는 비교 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만큼 전리품도 질적, 양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헬레니즘 문명 의 영향으로 오리엔트 전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 공예품이나 오리엔트 전제군주들의 소유 인 호화찬란한 보물들이 금화나 은화와 함께 전리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루쿨루스는 부하 병사들에게 은화는 충분히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공예품은 자기 것으로 삼았다. 서민 출신의 일반 병사들은 예술품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루쿨루스의 판단은 옳았을 것이다. 또한 그 예술품들이 인류의 재산으로 후세에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심미안을 가진 루쿨루스가 그 물건들을 로마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 병사들이 불만을 느끼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 놓았어야 했다. 예를 들면, 로마 군단의 규칙에 따라 전리품을 분배하는 고지식한 방식이 아니라, 때로는 큰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이 진수성찬을 먹고 마시며 마음껏 놀게 해준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루쿨루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국고에 납입하는 것 이외의 금화는 제 주머 니에 넣어버렸다. 총사령관에게는 당연한 보수라는 것이다. 물론 한 번만이 아니라 몇 번씩 이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적을 이기는 것은 지휘관의 재능 덕분이다. 하지만 이 치만 따져서 밀어붙이면 공동체는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공예품을 잔뜩 싣고 로마로 떠나는 짐마차 행렬을 병사들이 습격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그래도 루쿨루스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고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이야기하면 이해해줄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는 병사들을 모 아놓고, 미트라다테스의 숨통을 끊으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설득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총사령관은 자기 배를 채우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 믿어버린 병사들은 더 이상 그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결국 카스피해까지 진격해 놓고도, 루쿨루스는 병사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퇴각에 퇴각을 거듭하게 된다. 패하지 않았음에도 퇴각한 로마군은 루쿨루스 군대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반역을 일으킨 아들 때문에 미트라다테스가 공세로 나올 수 없었던 것이 루쿨루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7년이나 걸린 제2차 미트 라다테스 전쟁도 결말이 나지 않은 채 끝나려 하고 있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39세가 된 폼페이우스가 편안하고 화려한 수도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다 시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지중해는 넓기는 하지만 내해다. 바람의 방향은 자꾸 바뀌지만, 지형이 복잡하고 후미가 많아서 순풍을 기다리기에도 편리하게 되어 있다. 지중해에서는 바다가 인간의 통행을 방해 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통행을 쉽게 해주는 존재였다. 화물선이 항해하기에 편리하다는 것은 그런 배를 습격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해적들이 횡행하기에도 편리하다는 뜻이 다. 이 지중해에서는 해적이 바닷물과 함께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오랜 옛날부터 근절 되지 않은 현상이었다. 로마인은 해양 민족이 아니다. 그런 만큼 그들에게 해적 문제는 오랫동안 그리 심각한 문 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해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로마인이 바다로 나갈 기회가 적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뒤로는 로마인들도 바다로 나가는 일이 많아 졌다. 이런 일이 빈번해짐에 따라, 적어도 자국 근해에서는 위엄을 펼칠 수 있을만한 힘을 가진 나라들도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현상이 교차한 시기가 바로 기원전 1세기 전반이었다. 해적들의 본거지가 소아시아 동남부의 킬리키아에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 일대가 권력의 공백지대였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 일대를 세력하에 두고 있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제 완전히 쇠락하 여, 옛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이 지방을 속주로 삼은 로마는 해마다 총독을 파견했지 만, 루쿨루스의 경우처럼 그들은 미트라다테스한테 힘을 할애하고 있어서 해적을 공격할 여 유가 없었다. 더구나 해적들이 틀어박혀 있는 소굴은 바닷가 벼랑에 달라붙듯이 만들어져 있어서, 육지 쪽에서는 다가갈 수도 없는 요새였다. 또한 소아시아로부터 시리아와 팔레스티 나에 이르는 오리엔트 일대에서 연례 행사처럼 일어나는 분쟁에서 패한 사람들이 해적과 합 류했기 때문에 해적이라고는 해도 인재가 풍부했다. 당연한 귀결로 조직화가 진행되고, 정보 수집을 통해 지중해 세계의 사정도 파악할 수 있 게 되었다. 그 변화를 이용하게도 되었다. 해적들이 에스파냐 땅에서 로마와 맞서 싸운 세르 토리우스나 이탈리아에서 봉기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와 공동투쟁을 획책한 일은 그 중에서 도 두드러진 움직임에 속한다. 해적들은 화물선을 습격하여 물품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선원이나 노잡이나 승객들을 인 질로 잡은 다음, 몸값을 낼 만한 사람은 몸값이 도착하면 풀어주었지만, 도저히 몸값을 낼 수 없거나 몸값이 좀처럼 도착하지 않는 사람은 가차없이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런 정도의 '순수한' 해적질로 벌어들이는 수입만 가지고는, 로마가 일대 소탕작전을 결 심할 만큼 대규모 집단으로 변모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기름을 붓듯 자금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미트라다테스 왕이었다. 로마가 오리엔트로 보내는 병력이나 무기를 실은 배가 잇따라 해적선의 습격을 받으면, 거기에 넌더리가 나서 로마의 움직임이 둔해질테고, 그렇게 되면 오리엔트에서 자신의 행동도 좀더 자유로워질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풍부한 자금이 들어오자 해적의 면모는 단번에 달라졌다. 배들도 쾌속선으로 바꾸고 항해 술에 뛰어난 선원들을 고용했기 때문에 겨울철에도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해안지방 주민 들은 이제 겨울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었다. 해적들은 총본거지인 킬리키아 외에도, 지 중해 전역에 수많은 기지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조직을 갖춘 대규모 군사집단과 다를 게 없었다. 로마 선박만이 아니라 우방국 선박도 습격당하는 비율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해적들은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해안을 따라 달리는 아피아 가도에서 짐마차 대열이 습격당한 적도 있었다. 수도로마에서 불과 2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외항 오스티아 항구에 정박중인 배가 습격당하여, 부두에 있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승객과 짐을 몽땅 빼 앗긴 일까지 일어났다. 로마의 상류층 사람들이 타고 있던 배가 습격을 받아, 몸값을 내고 겨우 석방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젊은 카이사르도 그런 일을 당했다. 속주에 사람이나 무기를 보내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 되었다. 지중해의 물자 유통은 정체되고, 해외 속주로부터 로마로 수입되는 곡물수송도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국가의 곡물 배급에 의존해 살고 있던 빈민층이 소요를 일으키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로마 정부는 골머리를 앓았다. 이것은 그냥 방치해도 될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 폼페이우스가 배후에서 조종한 일이겠지만, 기원전 67년에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민회에서 그해의 호민관 가비니우스가 해적 소탕작전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제출했 다. 호민관 가비니우스가 제안한 해적 소탕작전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1. 12만 명의 중무장 보병과 5천 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20개 군단을 오로지 이 작전에만 투입한다. 2. 군선 500척을 투입한다. 3. 총사령관 밑에는 총사령관이 임명하는 14명의 원로원 의원 자격자가 막료로 배속된다. 4. 총사령관은 지중해 전역과 해안에서 80킬로미터 들어간 내륙까지 '절대 지휘권'을 가진 다. 5. 이 작전에 필요한 자금으로 1억 4천 400만 세르텔티아를 지출한다. 6. 총사령관에는 폼페이우스를 선임한다. 7. 총사령관에게는 임무 수행 기간으로 3년을 준다. 전대미문의 일만 저지르는 폼페이우스에게 또다시 그 표현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도 역시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연구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로마의 국가 예산은 2억 세르텔티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절반이 넘는 막대한 돈을 해적 소탕에 투입하자는 것이다. 로마인은 일단 결정하면 단호히 실행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대단한 결심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막 강한 권력을 3년 동안이나 단 한 사람에게 주자는 것이다. 공화정을 상징하는 원로원에서 당연히 반대가 일어났다. 한 사람에게 이런 대권을 부여하는 것은 독재를 배척하는 ''원로원 체제'에 어긋날 뿐더 러, 술라가 정한 법도 그것을 금하고 있다. 이런 대권은 독재관에게만 주어져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3년의 임기는 너무 길다. 설령 폼페이우스가 독재관이 되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독재관이 로마의 국경 밖(다시 말 하면 이탈리아 반도 밖)에까지 실권을 행사한 전례는 없다. 39세인 폼페이우스는 몇 년 전에도 법률을 어기고 예외적으로 집정관이 되었지만, 이번에 도 예외를 만들려 하고 있다. 로마의 공화정 체제에서 예외는 얼마든지 인정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집정관에 재선되려면 아직 7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폼페이우스가 개인적 야심을 채우고 싶 어서 궁리해낸 일이니까, 절대로 예외를 인정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들 중에는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다. 베레스 재판에 이겨서 사회의 부 정에 대한 도전자로 명성을 날린 당시 39세의 키케로가 여기에 찬성했다. 또한 정계에 갓 등장한 33세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찬성했다. 그리고 '표'를 가진 일반 시민들은 로마 정부 가 해적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호민관 가비니우스의 제안은 압도적인 다수로 민회에서 가결되었다. 그러자 로마의 식량 시장에서는 급등하고 있던 곡물 가격이 폭락했다. 술라 체제는 이것으로 마지막 숨통이 끊 기고 말았다. 폼페이우스의 해적 소탕작전은 후세의 전략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전략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걸작이었다. 그는 우선 지중해 전역의 13개의 작전 해역으로 나누고, 각 해역마다 군단장(레가투스)과 부군단장이 지휘하는 실전부대를 배치했다. 폼페이우스 자신은 군선 6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전선에 상주해 있으면서, 지원이 필요한 해역으로 달려가는 유격부대를 지휘할 터였다. 13개의 작전 해역은 물론 해적들의 기지와 그 주변 바다다. 작전 기간을 전후로 나누어, 전기에는 지중해 서부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약한 쪽부터 무너뜨리는 것은 전술의 기본이 기도 하다. 해상에서 만나는 해적선을 뒤쫓는 해상전에 이어, 해적들이 도망쳐 들어간 기지를 궤멸시 키는 육상전의 순서로 철저한 소탕작전이 진행되었다. 지중해 서부 해역에서도 특히 해적들 이 자주 출몰한 에스파냐 근해, 리비아 근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근해, 엘바 섬이 있는 티 레니아 해는 완전히 제압되었다. 여기에 걸린 기간은 불과 40일이었다. 지중해 서부에서 해적을 소탕한 로마 함대는, 마치 그물을 끌어당기는 어부처럼 달아난 해적선을 몰아넣으면서 지중해 동부로 밀려들어갔다. 그리고 북쪽은 에게 해, 남쪽은 이집 트, 동쪽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있는 해적 기지를 차례로 공략하면서, 소아시아 남동부의 킬리키아를 향해 그물을 좁혀갔다. 전선을 지중해 동부로 옮기고 나서 해적들의 본거지인 킬리키아를 함락할 때까지 49일이 걸렸다.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전역에 '팍스 로마나'를 확립하는 데 불과 89일밖에 걸리지 않 은 셈이다. 그동안 나포한 해적선은 400척. 불타서 침몰한 배는 1천 300척. 해적들의 기지에 있던 조 선소와 요새는 모두 파괴되고 불탔으며, 1만 명이 넘는 해적이 죽고, 2만 명이 넘는 해적이 포로로 잡혔다. 해적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들은 물론 자유를 되찾았다. 기원전 67년인 그해 여름에는 벌써 지중해 항해가 완전히 안전해졌고, 이탈리아로 수입되는 곡물도 종래의 양으 로 되돌아갔다.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의 명성이 크게 높아진 것은 당연하지만, 해적에게 신전을 습격당하 고 도시까지 약탈당해 절망해 있던 그리스인들은 폼페이우스를 신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찬양 했다. 폼페이우스는 '절대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주어진 3년이라는 기간 가운데 고작 3개 월밖에 사용하지 않은 셈이 된다. 하지만 목표는 완벽하게 달성했다. 그가 '원로원 체제'에 충실하려면 마땅히 로마에 개선하여 '절대 지휘권'을 반납해야 했다. 기원전 5세기 사람인 킨킨나투스는 6개월 임기의 독재관에 임명되어 보름만에 적을 쫓아낸 뒤, 당장 독재관의 '절 대 지휘권'을 반납하고 원래의 주경야독 생활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원로원 주 도의 소수 지도 체제인 로마 공화정은 지킬 수 없다. 39세의 폼페이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대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직 킬리키아에 있던 폼페이우스의 뜻을 받았겠지만, 로마에서는 호민관 가비니우스가 또다시 민회에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오리엔트 전선의 최고 책임자인 루쿨루스를 해임하고, 그 대신 폼페이우스를 그 자리에 선출한다. 선출될 경우, 폼페이우스에게는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절대 지휘권'을 필요한 시 기까지 연장하고, 오리엔트 분쟁의 원인인 미트라다테스에 대한 토벌을 그에게 일임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또다시 원로원 의원의 대다수가 반대했다. 반대 이유도 해적을 퇴치할 때와 같았다. 찬성한 것은 이번에도 역시 키케로와 카이사르였다. 그리고 민회는 35개 선거 구가 모두 찬성표를 던지는 형태로 가비니우스의 제안을 가결했다. 루쿨루스가 소아시아에 서 단행한 금융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기사계급'이 이번에는 완전히 시민 편에 붙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로원은 이제 고립되었고 무력했다. 킬리키아에서 지중해를 벗어나 흑해를 향해 소아시아를 북상하는 길에 있는 내륙지방이 카파도키아인데, 그 카파도키아 서쪽에 갈라티아라는 지방이 있다.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는 거기서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 지휘봉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었 다. 열 살 위인 루쿨루스는 폼페이우스에게는 술라 문하의 선배가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외교적인 인사를 교환하는 형태이긴 했지만, 참으로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루 쿨루스가 폼페이우스의 멋진 해적 소탕을 칭찬하자,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공인으로서는 처 음으로 카스피 해까지 진출한 루쿨루스의 공적을 찬양했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두 사람 다 자신을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루쿨루스의 인색함과 탐욕을 비난했고, 그러자 루쿨루스도 폼페이우스를 남이 쓰러뜨린 사냥감을 가로채는 새에 비유했다. 하지만 아무리 비난을 주고받아도, 공적인 힘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은 폼페이우스다. 승부는 처음부터 뻔했 다. 폼페이우스는 해임되어 귀국길에 오르는 루쿨루스에게, 귀국한 뒤의 개선식에 필요할 거 라면서 자기가 물려받은 루쿨루스 휘하의 병력 가운데 1천 600명의 병사를 데려가도록 허락 했다. 그러나 루쿨루스가 항구에 도착해서 본 것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노병이나 중상을 입은 병사, 또는 해적보다 악질적이고 지휘관에 불복하기로 이름난 병사 1천 600명이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하여 실패도 좌절도 모르는 폼페이우스는 이런 경우에도 태연히 냉혹한 짓 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기원전 66년, 7년 만에 로마로 돌아온 루쿨루스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가 이룩한 업적으 로 보아도 개선식은 당연한 것이었다. 개선식날, 마르스 광장에는 그동안의 전투에서 노획한 오리엔트의 화려한 갑옷과 무기 따위가 .전시되어 그것만으로도 큰 구경거리였다. 개선식,은 역시 오리엔트 군주들한테서 탈취한, 두 바퀴에 커다란 낫을 장착한 전차 10대 의 선도로 시작되었다. 그 뒤를 포로로 잡힌 폰토스왕 아르메니아의 고관 60명이 따랐다. 이 어서 110척이나 되는 적의 군선이 수레에 실려 나타났다. 그 뒤를 미트라다테스의 등신대 동상이 따랐다. 사로잡지 못한 미트라다테스를 대신한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수많 은 전리품이었다. 보석을 아로새긴 방패와 수많은 은제 항아리, 33개의 금잔을 실은 20대의 들것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여덟 필의 당나귀가 끄는 황금 가마가 그 뒤를 따랐다. 가마 위 에는 56개의 은괴와 270만 드라크마의 금화가 쌓여 있어서 개선식을 구경하는 시민들의 눈 을 휘둥그렇게 했다. 전리품을 뒤따르는 병사들이 받쳐든 플래카드에는 루쿨루스가 지휘권을 인계할 때 폼페이 우스에게 남기고 온 군자금 액수가 적혀 있었다. 또 다른 플래카드에는 원정을 끝낸 루쿨루 스가 로마 국고에 납입한 전리금 액수도 적혀 있었다. 또 다른 플래카드에는 루쿨루스 휘하 병사들에게 일인당 95드라크마씩 지급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전 차를 타고 개선식을 마친 루쿨루스는 그날 밤 모든 시민을 자비로 마련한 잔치에 초대했다. 폼페이우스에게 계속 당하기만 하던 원로원은 루쿨루스의 귀국을 기꺼이 환영했다. 술라 문하의 우두머리인 루쿨루스라면, '원로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폼페이우스에 대한 권력 집중을 걱정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원로 원파'라고 불러도 좋은 당파가 결성되고 있었다. 그해 40세였던 키케로와 29세인 카토가 이 당파의 적극적인 일원이었다. 카토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정적이었던 마르쿠스 포르키 우스 카토의 일족으로, 역사에서는 두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기원전 2세기의 카토를 대 카토, 기원전 1세기의 카토를 소 카토라고 부르고 있다. '소'도 '대'도 똑같이 광신적일 정도의 공 화정주의자였다. 50세가 된 루쿨루스도 처음 얼마 동안은 '원로원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작정이었던 모 양이다. 하지만 현실 인식 능력을 가진 루쿨루스인 만큼, 키레로나 카토에게는 사상이나 말 은 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조금씩 정계에서 멀어져갔다. 카토의 누나를 아내로 맞은 그는 친구의 누나라서 꾹 참고 살 았지만, 결국 그 아내와 이혼한 뒤로는 원로원에 의석은 있어도 정치활동은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국정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수록, 그와 반비례하여 사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오리엔트에 서 가지고 돌아온 그리스의 공예품을 진열하기 위해 각지에 호화저택을 세웠다. 로마에, 나 폴리 근교의 바닷가에, 이탈리아 내륙의 숲으로 둘러싸인 산야에도. 뒷날의 제정 시대에 비하면 공화정 시대에 로마인의 집은 검소했다. 제정 시대 사람인 세 네카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별장을 찾아가서 유복한 귀족이며 위대한 영웅이었던 사람 의 별장이 이 정도였나 하고 놀란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그 제정 시대의 호화저택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은 루쿨루스의 저택뿐이라는 말이 있었으니까, 루쿨루스의 호사스러움 도 짐작이 간다. 바닷가 별장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물고기를 키우는 양어장도 있었다. 정치를 떠난 루쿨루스는 이제 정략결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우아한 독신 귀족은 계절이 바뀌면 그에 적당한 집으로 옮겨 살면서, 수집한 예술품이나 서적을 즐기고 남에게도 그 즐 거움을 개방했다. 루쿨루스 저택 안에 있는 도서관은 거기에 관심을 가진 로마인이나 로마 에 사는 그리스인들이 모여드는 살롱이 되었다. 그러나 루쿨루스의 이름이 후세에도 쓰이는 대명사가 된 것은 그가 실천한 미식 때문이 다. 오늘날에도 서구에서는 호화로운 미식을 '루쿨루스식'이라고 부른다. 근엄한 플루타르코스는 '졸부 근성'이라고 혹평하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루 쿨루스가 실천한 미식은 요즘의 미식가 따위는 발치에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철저했기 때문 이다. 루쿨루스는 요리에 필요한 비용에 따라 미식의 등급을 분류했다. 이것만은 군단을 통솔한 사람답다는 생각이 든다. 비용에 따른 미식의 등급은 식사를 하는 방의 이름으로 구별된다. 게다가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물고기나 새를 키우고, 야채와 과일과 치즈도 자영농장에서 재배하거나 만들었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단순히 먹는 행위만을 의 미하지는 않았다. 식사하는 방의 장식, 식사중에 연주되는 음악, 낭독되는 시, 식탁에서 오가 는 대화, 거기에 적합한 손님 선정, 이 모든 것의 조화로운 총합이 루쿨루스식 '식사'였다. 어느날 그는 혼자서 식사를 했다. 주인 혼자 먹을 거니까, 하인은 간단한 식사를 준비했 다. 그런데 여기에 발끈한 루쿨루스는 하인을 불러 꾸짖었다. "이런 걸 모르다니 곤란하군. 오늘밤에는 루쿨루스가 루쿨루스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 는 거야." 어느날, 포로 로마노를 걷고 있는 루쿨루스를 키케로와 폼페이우스가 알아보았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들은 원로원에서는 아무리 게거품을 물며 논쟁을 벌여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것이 좋은 점이었다. 키케로는 어쨌든 간에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를 보고도 못 본 체하지는 않았다.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귀엣말을 나누었다. 루쿨루스가 손님을 초대하여 마련하는 식사는 미리 손님용으로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향응이기 때문에 그렇게 호화로운 것이고, 루 쿨루스의 평소 식사는 틀림없이 소박할 거라고. 의견이 일치한 두 사람은 루쿨루스에게 다 가가서 인사한 다음, 이렇게 물었다. "오늘밤 댁에 찾아가도 될까요?" 이어서 키케로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특별히 준비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 준비 된 음식을 함께 먹으면 충분하니까요." 루쿨루스는 다른 날로 하자고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막무가내로 초대 를 받아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초대한 루쿨루스는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노예에게 말 했다 "오늘밤에는 아폴로실에서 저녁을 먹겠다." 키케로도 폼페이우스도 몰랐지만, 아폴로 신의 이름을 딴 그 방에서의 식사는 등급별로 나뉜 미식 중에서도 최고급이었다. '아폴로실'에서 한 번 식사하는 데 드는 비용이 5만 드라 크마였다고 한다. 평민의 연수입이 5천 드라크마 안팎이었던 시대다. 폼페이우스와 키케로가 그날 밤 내내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 다. 루쿨루스는 이런 종류의 지출을 경멸하는 것처럼 굴었다.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다시 빌 리면, '거기에 필요한 비용이 마치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야만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아무리 치열한 정치투쟁에 몰두해 있어도,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은 질박강건함을 찬양하고 호화로운 사생활을 경멸하는 경향이 강했다. 루쿨루스의 호사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긴 했지만, 존경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정계에 미련이 없는 루쿨루스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일이었다. 철저히 사생 활을 즐기면서 10년을 보낸 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로 마는 이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시대가 되어 있었다. 루쿨루스의 장례식은 시민들에게 별다른 감정도 불러 일으키지 않은 채 시작되어 끝났다. 루쿨루스에게 단 하나의 진지한 소망은 마르스 광장에 잠든 술라 옆에 묻히는 것이었겠지 만,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소망도 실현되지 않았다. 루쿨루스한테서 오리엔트 전선의 총지휘권을 넘겨받았을 당시, 폼페이우스가 갖고 있던 전력은 10개 군단 6만여 명의 육상 병력과 270척의 함대로 이루어진 해군이었다. 루쿨루스 가 활용할 수 있었던 전력과 비교하면 두 배가 된다. 하지만 이 두 배의 의미는 컸다. 루쿨루스는 열 배의 전력을 가진 폰토스 왕 미트라다테스나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에 대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조차 무색할 만큼 멋진 승리를 거둠으로써 오리엔트 군주들을 압도 할 수밖에 없었다. 3만 6천의 병력으로 동방 원정을 결행한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2만 6천의 병력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한 한니발도 이와 똑같은 전략을 구사했다. 대군을 끌어모을 수 있는 상대를 적은 병력으로 압도하려면, 전투에서 압승을 거두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적의 대군 징집 능력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전략 전술의 천재가 이끈다 해도, 적은 병력의 군대에는 결점도 있게 마련 이다. 전투를 우선하는 나머지 외교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싸우 지 않고 이기는 방법에 할애할 여력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은 뭐 니뭐니해도 '양'이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도 해적 소탕작전을 벌일 때처럼 20개 군단을 거느렸다면, 재정적으로나 전제 군주라는 위치에서나 언제든지 10만 대군을 규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오리엔트 군주들에 게 무언의 압력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병력은 그 절반인 10개 군 단뿐이었다. 그래도 그 절반의 병력밖에 갖지 못했던 루쿨루스에 비하면 폼페이우스가 구사 할 수 있는 전략의 폭은 훨씬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비록 압도적이 지는 않지만 전보다 넓어진 이 '폭'의 활용에 재능을 쏟아부었다.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사람은 흔히 전 단계에서 이룩한 일을 정착시켜, 그것을 현안 문제 를 타개하는 출발점으로 삼는다. 폼페이우스에게는 해적 소탕작전에서 사로잡은 2만여 명의 포로가 있었다. 원래는 노예시 장에 내놓아야 마땅한 자들이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들이 대부분 오리엔트 분쟁에 말려 들어 집도 재산도 모두 잃고,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된 자들임을 알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이들을 풀어주고 땅까지 주었다. 당시 소아시아는 에스파냐나 갈리아 같은 미개척지가 아니었다. 도시며 마을들도 오래 전부터 있었다. 다만 군주들의 패권 다툼에 휘 말려들어 불에 타거나 주민들이 피난해 버린 탓에 폐허가 된 도시와 마을이 많았다. 폼페이 우스는 해적 포로들을 이런 도시와 마을들에 이주시켰다. 이때 폼페이우스가 배려한 것은 단 하나, 되도록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에 있는 도시와 마을을 고른 것뿐이었다. 해 안 도시에는 그리스계 주민들이 오래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그런 곳으로 포로들을 이주시키면 원주민의 반발을 사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해적 포로들의 정착으로 부 흥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는 도시 이름을 '폼페이오폴리'(폼페이우스의 도시)로 바꾸기도 했 다. 해적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직후인 기원전 66년 여름, 40세를 맞이한 폼페이우스의 오리엔트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역사에서는 이것을 '제3차 미트라다테스 전쟁'이라 고 부른다. 이 무렵 폰토스 왕국에는 루쿨루스에게 쫓겨나 아르메니아에 망명해있던 미트라다테스 왕 이 다시 돌아와 있었는데,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를 공격하기 위해, 소아시아를 북상하 여 흑해 연안의 폰토스 왕국으로 진군했다. 폼페이우스가 이렇게 빨리 공세로 나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미트라다테스가 3만 3천 명의 병력을 급히 편성하여 맞섰지만, 폼페이 우스는 폰토스군을 간단히 격파하고 말았다. 노회한 미트라다테스는 폼페이우스에 대해서도 루쿨루스에게 성공했던 전략을 사용했다. 그가 동쪽으로 달아나면 그를 뒤쫓는 로마군은 험 준한 산악지대를 빠져나가야 하는데, 험준한 지형에 시달린 병사들의 압력을 받은 사령관은 서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재현되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 수법에 넘어가지 않았다. 추격은 끈덕지지 않을 정도로 계속했지만, 한편으로는 외교전을 개 시했다. 미트라다테스가 로마군에 연패를 당하고도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 자신의 능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가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와 공동전선을 확립했기 때문이었다. 폰토스 왕국과 아르메니아 왕국 사이를 갈라놓을 필요성은 루쿨루스도 느끼고 있었다. 또 한 그것을 실현하려면 아르메니아 왕국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든가, 아니면 아르메니아와 동 쪽 국경을 접하고 있는 파르티아 왕국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공동전선을 무 너뜨릴 수 있는 요인은 이 두 가지밖에 없었다. 실제로 루쿨루스는 카스피 해까지 진격했을 때, 파르티아 왕 아르사케스에게 동맹을 제의 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승리를 되풀이해도, 루쿨루스가 가지고 있는 3만 명 정도의 병력 으로는 아르사케스를 움직일 수 없었다. 오늘날이라면 적의 전사자가 10만 명인데 아군 전 사자는 5명 뿐이라는 전대미문의 전과는 당장에 영상 뉴스가 되어 파르티아 왕궁에도 알려 졌을 것이다. 자기 눈으로 보지 않으면 충격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루쿨루스 보다 두 배나 많은 폼페이우스의 전력이 효과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미트라 다테스도 파르티아에 동맹을 제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가 아르사케스에게 동맹을 제의하면서 내놓은 조건도 전에 루쿨루스가 제시한 것과 같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영유에 대한 파르티아 왕의 정통성을 인정 하고, 로마의 불가침 지역으로 한다. 2. 파르티아와 로마의 패권 경계선을 유프라테스 강으로 한다. 페르시아라고 불릴 때도 있는 동방의 대국 파르티아 왕국은 폰토스왕국의 미트라다테스가 서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로마에 싸움을 걸어도, 거기에는 무관심했다. 그 미트라다테스 가 파르티아의 바로 서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과 공동 전선을 확립한 뒤로는 모른 체할 수가 없게 되었고, 미트라다테스의 움직임을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어쨌든 미트라 다테스는 이제 파르티아도 로마에 대한 공동전선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파르티아 아르메니아 폰토스라는 오리엔트의 3대 강국이 단결하면, 로마도 지중해를 우리 바다'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리엔트 지방이 일치단결하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다. 옥시덴트(서방)에서의 동맹은 약자를 편들어 강대국에 대항하는 것이지만, 오리엔트(동방)에서의 동맹은 강자 편에 빌붙어 약소국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파르티아는 이제 방어에만 전념할 수 밖에 없는 미트라다테스를 버리고, 공세로 나오기 시작한 로마와 동맹을 맺는 쪽을 택했다. 양국의 경계선을 유프라테스 강으로 한 것은 나중 에 재앙을 부르게 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시지 않았다. 파르티아가 로마 쪽에 붙은 것은 이웃 나라인 아르메니아를 동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왕자 가운데 하나가 국왕 티그라네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반기를 들었을 뿐 만 아니라, 이 왕자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미트라다테스와 맺은 동맹을 파기하고 로마와 동맹을 맺고 싶다고 제의했다. 궁지에 몰린 것은 티그라네스였다. 미트라다테스가 로마에 반항하는 이유는 로마의 패권 에 맞서서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세력 확장에 있었다. 그것은 티그라네스도 알고 있다. 폰달토스와 아르메니아는 동맹을 맺을 때 폰토스가 서쪽으로. 아토 에니아가 남쪽의 시리아로 세력을 확장한다는데 동의했다. 티그라네스 왕에게는 국내가 소 란해졌는데도 동맹을 지킬 이유는 없었고, 대의명분도 없었다. 티그라네스는 강화 및 동맹 체결을 위해 자신이 직접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폼페이우스에 게 전해왔다. 그리고 왕은 폼페이우스의 대답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미트라다테스 를 사로잡거나 죽인 자에게는 막대한 현상금을 주겠다는 포고령을 온 나라에 공포했다. 폼페이우스와 대결한 두 차례 전투에서 패한 미트라다테스는 이번에도 티그라네스 왕을 믿고 아르메니아 영토로 달아날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전에 망명했 을 때는 미트라다테스의 신병 인도를 요구한 루쿨루스에게 티그라네스는 거부하는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르메니아에도 파르티아에도 망명할 수 없게 된 미트라다 테스는 66세의 몸으로 얼마 안 남은 신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카프카스 산맥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 혹해 연안 어디에도 모습을 나타낼 수 없는 신세였다. 폼페이우스가 보낸 로마 함대가 흑해 전역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의 군사 외교 양면작전이 거둔 완벽한 승리였다. 파르티아 왕국은 게임의 카드 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티그라네스 왕의 방문이 이 승리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했다.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생전에는 아무리 그가 붙여준 것이라 해도 사양하여 사용치 않았던 '마그누스'라는 존칭을 이제는 거리낌없이 서명하게 되었고, 언행에서도 이 존칭으로 불린 유일한 인물인 알렉산드로스대왕을 흉내내게 되었다. 티그라네스 왕파 접견할 때는 패배한 왕을 맞이할 때의 알렉산드로스와 똑같았다. 오리엔트 군주 특유의 높은 모자 위 에 왕관까지 없어 쓰고 로마군 진영에 나타난 티그라 네스는 진영 입구에서 호위병 (릭토르)들이 요구하는 대로 말에서 내렸고, 지니고 있던 황금 제 칼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군복인 진홍빛 망토 차림으로 진영 한복판에 서서 기다리는 폼페이우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폼페이우스 앞에 왔을 때, 티그라네스 왕은 로마 장군 앞 에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오리엔트에서는 패자가 승자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관습이었 다. 그리고 완전히 복종한다는 증표로, 왕관을 벗어서 폼페이우스에게 바쳤다. 40세의 승장은 무릎을 꿇고 있는 왕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왕을 일으켜 세웠다. 그 리고는 왕관을 그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 "그대가 제의한 강화를 받아들이겠소." 티그라네스는 물론 폼페이우스가 요구한 강화 조건을 모두 수락했다. 1. 배상금으로 6천 탈렌트를 로마에 지불한다. 2. 폼페이우스 휘하 병사들에게 일인당 50데나리우스를 지불한다. 3. 지금까지 아르메니아군이 정복한 지방인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페니키아, 시리아의 일 부와 유프라테스 강 동쪽 연안의 소페네 지방을 원래의 소유자에게 반환하고, 그 영유권을 정식으로 포기한다. 4. 앞으로 아르메니아 왕국은 로마와 우호 동맹 관계를 부활한다. 티그라네스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왕자를 폼페이우스에게 전리품으로 넘겨주었다.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와 티그라네스의 연합군에게 쫓겨난 카파도키아 왕을 왕위에 복귀시킨 뒤에도, 북쪽의 카프카스 산맥으로 도망친 미트라다테스는 추적하지 않았다. 그 대 신, 이제 미트라다테스 따위는 문제삼지 않는다는 듯 휘하 병력을 동쪽과 남쪽의 두 방향으 로 출동시켰다. 폼페이우스 자신은 병력의 3분의 2를 이끌고, 우선 유프라테스 강 서안까지 진출했다. 여 기까지는 로마의 패권이 미친다는 사실을 파르티아에 시위한 것이다. 하지만 파르티아 왕국 과의 협정을 지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지는 않았다. 강을 건너지는 않았지만, 도도하게 흐 르는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진영을 짓고, 거기서 기원전 66년에서 기원전 65년으로 넘어가 는 겨울을 보냈다. 한편, 남쪽으로 출동한 폼페이우스의 별동대는 아르메니아군의 침략을 받아 황폐해진 시 리아로 들어갔다. 거기서 파르티아에 대한 시위를 끝내고 합류할 예정인 폼페이우스를 기다 렸다. 물론 그냥 기다린 것은 아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도 이제는 이름뿐, 무정부 상 태가 되어 버린 시리아를 군사적으로 제패하면서 기다린 것이다. 미트라다테스는 술라가 죽은 뒤로는 줄곧 로마 장군들을 마음대로 농락했지만, 이번에는 그 자신이 농락당할 차례였다. 67세의 미트라다테스는 41세의 폼페이우스가 구상한 심리전 에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미트라다테스는 각지에 숨겨둔 재물을 팔고 노예까지 동원하여 3만6천 명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재편성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북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미트라다테스는 폼페이 우스에게 강화를 제의했다. 조건은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동맹국의 지위에 만족하겠다는 것과 배상금 지불이다. 폼페이우스한테서 돌아온 대답은 미트라다테스 자신의 항복을 요구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반세기 동안 로마에 반항해 왔고 헬레니즘 군주를 자처하는 미트 라다테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그는 회답을 기다리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조차 보내 지 않았다. 미트라다테스는 파르티아 왕 아르사케스에게 공동전선을 수립하자고 다시 한번 호소했지 만, 그것도 허사로 끝났다. 절망한 미트라다테스는 흑해 연안 일대의 부족들에게 서방 원정 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3만 6천 명의 병력을 주력으로 삼아, 트라 키아와 마케도니아와 판노니아를 지나 서쪽으로 진출하여, 다뉴브 강 근처에 사는 켈트족까 지 고용하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자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고립 무원에 빠진 늙은이의 부질없는 환상으로 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미트라 다테스의 아들인 파르나케스 왕자가 반기를 들었다. 미트라다테스는 자기한테 해를 끼칠 거 라고 의심하여 지금까지 아들을 넷이나 죽여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카프카스 산중에서 움직 이는 것조차 뜻대로 못하는 그가 흑해 연안의 폰토스 왕국에까지 사람을 보내 아들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파르나케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폰토스 왕국은 로마에 복 종한다는 뜻을 밝히고 그것을 로마가 받아들여주기를 간청했다. 여기까지 지켜본 폼페이우스는 비로소 전체 병력을 이끌고 시리아로 갔다. 안티오키아를 지나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그는 이제 이름뿐인 셀레우코스 왕조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역사에서 지워버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산을 물려받은 나라는 이제 이집트의 프톨레 마이오스 왕조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시리아는 그후 로마의 속주가 되어, 다마스쿠스에 주 재하는 로마인 총독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군주한테는 퇴위를 강요해도, 그 우두머리를 떠받치고 있던 지배층 자체는 없애지 않는 것이 로마의 속주 지배 방식이다. 하지만 사람은 바꾼다. 폼페이우스도 젊은이들이 시리아 상류층의 주축을 이루도록 배려했다. 250년 동안이나 존속한 왕국이 멸망했는데도 피 한방 울 흐르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오리엔트는 결코 미개지가 아니라, 도시 문명이 꽃핀 지방이다. 폼페이우스도 이 일대의 질서 회복을 도시 단위로 실시했다. 시리아 왕국의 주요 도시는 북쪽에서 남쪽에 걸쳐 안티 오키아, 셀레우키아, 바이블의 어원이 된 비블로스, 베이루트, 다마스부스 등 다섯 곳이다. 이 도시마다 반쯤 독립된 자치 체제가 만들어지고, 그 위에 로마에서 파견되는 시리아 총독 의 지배 체제가 얹히는 것이 폼페이우스가 만든 통치 구조였다. 내분이야말로 외세의 침략 을 초래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폼페이우스는 이런 지방과 유프라테스 강의 중간지대에 사는 베드윈족을 공격하여 쳐부순 뒤, 그들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파르티아왕국과의 사이에 완충지대를 둘 필요가 있었 기 때문이다. 다마스쿠스에 머물면서 오리엔트의 재편과 질서 회복에 힘쓰고 있던 폼페이우스를 유대의 유력자들이 찾아왔다. 유대에서도 내분은 연례행사가 되어 있었는데, 그 조정 역할을 로마에 요청해온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그들에게 정교일치의 통치 체제를 재고하라고 명령 했다. 하 지만 유대교에 충실한 사랍들은 여기에 반발했다. 로마군의 다음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되었 다. 예루살렘은 곧 성문을 열었지만, 신전 지역에 틀어박혀 저항하는 자들을 제압하는 데에는 석 달의 공방전이 필요했다. 그곳도 함락한 뒤, 폼페이우스는 혼자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에 들어갈 때는 무기를 휴대할 수 없다는 규정은 그리스와 로마의 다신교에도 있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도 그 규정을 지켰다.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에서는 참배자가 성소로 들어 가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는 성소로 들어갔지만,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과는 달리 유대교 신전에는 신을 나타내는 초상도 없었다. 그는 두리번거리기만 하다가 그냥 돌아나왔다. 유대교 신전의 성소에는 1년에 딱 한 번밖에 들어갈 수 없고, 게다가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최고제사장 한 사람뿐이다. 폼페이우스의 순진한 행동들은 유대인들의 눈에는 신 에 대한 모독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과 일신교를 믿는 유대인 사이 에 일어난 최초의 문화적 충돌이다. 그리고 그후 유대는 시리아 총독의 통치를 받는 로마의 반속주가 되었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 남쪽의 페트라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는 나바테아인 의 영토까지는 진격할 필요조차 없었다. 인도와의 교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는 나바테아인 쪽에서 먼저 로마와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싶다고 제의해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지중해의 파도가 밀려오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방은 키프로스 섬을 포함하여 로마의 패권하에 통 합되었다. 이 무렵, 고립무원의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선택한 미트라다테스의 유해가 폼페 이우스에게 보내져 왔다. 그것을 보낸 사람은 미트라다테스의 아들인 파르나레스였다. 폼페이우스는 파르나케스와 강화를 맺고, 그를 지금까지의 폰토스왕국보다 동쪽으로 치우 친 흑해 연안 땅의 왕위에 앉혔다. 옛 폰토스왕국의 영토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미트라다 테스를 중심으로 반세기 동안이나 로마인을 괴롭혀온 소아시아 지방은 이것으로 완전히 평 정되었다. 폼페이우스는 파르나케스가 보내온 미트라다테스의 유해를 폰토스왕국의 역대 왕들이 매 장되어 있는 시노프의 왕묘에 장사지내라고 명령했다. 집요하게 로마에 반항한 사나이의 일 생도 68세로 막을 내렸다. 분한 마음에 스스로 독을 마셨을 미트라다테스 6세의 편지가 남아있다. 미트라다테스가 자결한 해로부터 20년쯤 뒤에 집필활동을 시작한 로마인 역사가 살루스티우스의 <역사>에 는 저명인사들의 연설문이나 서한들이 실려 있는데, 이 편지도 그 중 하나로 실려 있다. 조 금 길지만, 그 전문을 소개하고 싶다. 로마의 '제국주의 노선'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하나의 증거로서. 그리고 그다음에는 로마의 '제국주의'를 로마인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소개하고 싶다. 증인은 원고와 피고 양쪽에서 모두 나 와야 하니까. "미트라다테스가 파르티아 왕 아르사케스에게 인사를 보내오. 무릇 위정자는, 특히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더더욱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소. 그리고 그 동맹이 공정하고 확고한 것인 지 어떤지에 따라, 자랑스러운 결과가 될 것인지 불명예스러운 결과로 끝날 것인지가 결정 되오. 만약 그대가 영원한 평화를 누리는 상태에 있거나, 사악한 적에게 둘러싸여 있지 않거나, 또는 사악해도 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적에게만 둘러싸여 있다면, 로마인을 쓰러뜨려도 그 대의 명예는 되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나도 그대에게 나와 동맹을 맺고 그들과 싸우자고 제의하지도 않을 테고, 내 악운을 그대의 행운으로 만회할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소. 그리고 지금 상황은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의 예를 보아 도 알 수 있듯이, 또한 나의 비참한 처지가 증언하고 있듯이, 우리가 동맹을 맺는 것이 우리 에게는 필수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소. 티그라네스는 그대가 원하는 어떤 조건으로도 동맹을 수락할 것이오. 그리고 나는 비록 많은 재물을 잃었지만, 로마인을 상대한 경험이라면 풍부하게 가지고 있소. 따라서 그대에게 유용한 조인을 해줄 자신이 있소. 나는 이제 전처럼 강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대가 그대의 나라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유용한 예증과 조언을 줄 수는 있다 고 믿고 있소. 실제로 로마인들은 예로부터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외국과 전쟁을 해온 민족이었소. 부와 영토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바로 그것이오. 그들은 우선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를 노렸소. 카르타고의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처음 얼마 동안은 필리포스와 동맹관계에 있었는데도 말이오. 그리고 필리포스에 대한 공격을 시 작했을 때, 필리포스에게 지원을 제공할 생각이었던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에게는 소아시아 에 있는 그의 영토에 대한 불가침을 약속하여, 시리아와 마케도니아 사이를 갈라놓는 데 성 공했소. 그런데 필리포스가 패하자, 이번에는 안티오코스를 노렸소. 안티오코스도 패하여, 타우루 스 산맥 이북의 소아시아 영토와 1만 탈렌트의 돈을 빼앗겼소. 그리고 다음은 필리포스의 아들 페르세오스였소. 전투는 마케도니아에 유리하게 시작되었 지만, 결국에는 패배로 끝났고, 사모트라케 섬에서 강화가 맺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페르세오 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죽음뿐이었소. 교활하고 속임수에 능한 것이 저 로마인들이오. 강화 조항에는 페르세오스의 목숨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 지막 왕을 불면증으로 죽여버렸소. 로마인들은 오랫동안 페르가몬 왕과의 우호관계를 선전하곤 했소. 하지만 실제는 어떠했 소. 처음에는 페르가몬 왕을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에게 빵조각이라도 주는 것처럼 던져주었 고, 다음에는 안티오코스한테서 얻은 영토의 감시인으로 이용했소. 덕분에 페르가몬 왕의 처 지는 노예보다도 비참해져버렸소. 그리고 마지막에는 있지도 않은 유언서를 날조하는 따위의 천인공노할 행동을 저질러, 페 르가몬 왕국을 속주로 만들어버렸소. 죽은 왕의 아들은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만으 로 로마에 끌려갔소. 로마인들은 이렇게 하여 아시아에도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오. 최근에는 비티니아 왕국의 예가 있소. 니코메데스 왕이 죽은 뒤, 로마인들은 비티니아도 역시 왕의 유언으로 로마에 양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비티니아를 속주로 만들었소. 니코메 데스에게는 비록 첩의 소생이긴 하지만 친자식으로 인지한 왕자가 건재했는데도 말이오. 그러면 이제 나 자신으로 이야기를 옮기겠소. 내 왕국은 그들의 패권이 미치는 영역과는 직접 경계를 접하지 않았소. 그런데도 내가 많은 부를 갖고 있으며 누구한테도 복종할 마음 이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들은 니코메데스를 이용하여 나에게 싸움을 걸어왔소. 나는 그들의 교활함을 알고 있었소. 그래서 선수를 쳤던 것이오. 니코메데스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소아시아를 해방하고, 이어서 그리스까지 해방시켰소. 하지만 내 신하인 아르케올 라스와 군대의 배신이 내 생각의 실현을 저지했소. 그렇기는 하지만, 로마인들은 내전 때문에 나와 강화를 맺었소. 물론 그들이 진정으로 원 해서 나와 우호관계를 맺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소. 그래서 준비가 갖추어지 자마자 그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오. 육지에서는 총독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격파하고, 바 다에서는 로마 해군을 쫓아버리는 데 성공했소. 하지만 우리 군대는 식량 지원을 얻지 못했 고, 흑해에서 운반하려 해도 악천후 때문에 불가능했소.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군대도 태풍을 만나 선단이 침몰하는 바람에 좋은 병사를 많 이 잃었소. 그후에도 나는 체념하지 않고 군대를 재편성하여 나와 싸우러 온 루쿨루스와 몇 번 전투 를 치렀소. 그는 카파도키아 왕한테서 군량을 보급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영토가 황폐해져 서 군량을 보급할 길도 없었소. 그래서 나는 아르메니아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로마인들은 그런 나를 뒤쫓지 않고, 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공략해 왔소. 즉 주변 일대 를 모두 침탈하여, 병력 징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수법이오. 이제 그들은 아르메니아 왕의 경솔한 행동(폼페이우스와 강화를 맺은 것)조차도 자기네 승리라고 자만하고 있소. 그대에게 강력히 바라건대, 우리가 패배자가 된 경우를 충분히 생각해 주시오. 왜냐하면 지금 현재로는 그대만이 로마군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갖고 있고, 그들과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오. 그대에게는 많은 병사와 무기와 자금이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대에게 접근하고 있지만, 로마인들이 그대에게 접근한다면 그 이유는 그대가 가진 것을 빼앗고 싶어서일 뿐이오. 그대는 모르겠소? 로마인들이 우리 지방으로 눈을 돌린 것은 서쪽에는 큰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그들의 진격을 방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집이든 아내든 땅이든 간에 로마 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주변 주민들한테서 강탈한 결과라는 것을 그들도 옛날 에는 난민이었소. 나라도 없고 가족도 없는, 낙오자 무리에 불과했었소. 그런데 주변 사람들 의 희생 위에 국가를 세웠소. 어떤 법률도, 어떤 인간의 윤리도, 어떤 신도, 친구나 동맹자가 가진 것을 강탈하고 그들을 파멸시키는 행위를 용납할 리는 없소. 악의에 찬 눈으로 다른 민족을 노려보고 그들을 노예화하는 것을 용납할 리는 없소. 그렇기는 하지만, 자유를 바라는 자는 적고, 공정한 주인을 바라는 자는 많은 것이 바로 인간이오. 우리 오리엔트 군주들은 이 점에서는 늘 신하들한테서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고 있소. 우리는 백성들의 이익을 배반하거나 복수하는 존재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오. 그대는 아시아 제일의 대도시를 가지고 있소. 그리고 부가 끝없이 많기로 유명한 페르시 아를 수중에 넣고 있소. 이것들의 주인인 그대가 로마인한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소. 지금 은 속임수, 다음에는 전쟁, 그밖에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오. 로마인들은 모든 민족에게 칼을 들이대지만, 약탈품이 가장 많으리라고 기대되는 민족과 는 가장 용맹하게 싸우는 자들이오. 그들은 전투와 속임수를 거듭하면서 제국을 건설했소. 그들의 이같은 정신이 다른 민족을 전멸시킬 것인가, 아니면 자기들 자신을 파멸시킬 것인 가...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을 막는 것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오. 그대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내가 아르메니아에서 로마군을 포위하면 될 것이오. 그들을 군량도 없고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 태로 몰아넣으면 되오. 이것을 지금까지 실현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운이 좋았던데다 우리 가 계속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오. 만약 그대가 내 청을 받아들여 오리엔트 군주들을 도와준다면, 모든 인류의 도움을 궤멸 시킨 인물로서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칠 것이오. 간절히 청하건대, 내 권고를 부디 받아주시오. 나나 다른 왕들의 파멸은 그대의 파멸을 얼 마 동안 지연시키겠지만, 나는 그대가 그쪽을 선택하지 않기를 바라오. 우리 모두가 손을 잡 으면, 그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오." 미트라다테스의 이 간절한 소망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어서 로마 쪽의 견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이것은 미트라다테스에 대한 반론은 아니다. 철학 자이자 변호사이고 정치가이기도 한 키케로가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킬리키아에서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사견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당시 키케로가 차지 하고 있던 지위와 가지고 있던 영향력으로 보아도, 훌륭한 로마측 의견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키케로가 킬리키아에 부임한 것은 기원전 62년이다. 폼페이우스가 오리엔트를 평정한 것 은 그보다 불과 1년 전인 기원전 63년이다. 키케로는 갓 평정된 오리엔트에 부임한 셈이다. "아시아(로마인에게 아시아라면 소아시아와 오리엔트를 의미했다)는 우리 로마 덕분에 끝 없는 전쟁과 내분에서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아시아인들이 가진 부의 일부가 로마의 패권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바쳐진다 해도 그것을 불평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희생은 이 지방에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오기 위 해 필요한 비용이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61년에 로마에서 거행한 개선식에서 내건 플래카드에 따르면 그가 기원전 66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3년 동안 이룩한 업적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 흑해에서 카스피 해 및 홍해까지 이르는 모든 지역에 로마의 패권을 확립한것. 2. 1천 200만 명의 인구를 로마의 패권하에 거둔 것. 3. 1천 538개의 도시를 로마의 패권하에 편입한 것. 4. 로마의 국고 수입이 전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났고, 폼페이우스 자신도 전리금 2억 세르 텔티아를 국고에 납입한 것. 5. 폼페이우스 휘하 병사들 전원에게 보상금으로 합계 2천 900만 세르텔티아를 분배한 것. 6. 이집트와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왕국을 비롯한 나라들과 강화를 체결함으로써 로마 속주의 국경을 안전하게 한 공적.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43세에 폼페이우스는 이번에야말로 '마그누스'라는 존칭이 빈 정거림으로 들리지 않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로마인은, 아니 여타 민족을 포항해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기원전 60년대 당시에는 분명 폼페이우스였을 것이다. 폼페이우스 자신도 점점 '마그누스'를 의식하게 된다. 오리엔트 평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 아오는 길에 들른 로도스 섬에서는 병으로 누워 있던 고명한 철학자 포세이도니오스를 일부 러 집에까지 찾아가서 문병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예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흉내낸 것이다. 기원전 1세기의 '위대한 인물'(the Great)은 지중해의 물결이 밀려드는 모든 지방을 로마 의 속주나 동맹국으로 메우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지중해는 실질적으로도 로마의 '내해'(마레 인테르눔)가 되었다. 그리스에서 르네상스까지의 역사에 정통한 예술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 네상스 문화"가 대표작이지만, "세계사에 관한 고찰"이라는 책도 썼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따금 역사는 갑자기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세계는 그후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런 위대한 개인에 있어서는 보편과 특수, 멈추는 것과 움직이는 것이 한 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나 종교나 문화나 사회 위기를 구현하는 존재다... 위기에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하나가 되고, 위대한 개인 속에서 정점에 이른 다. 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다." 기원전 63년에 오리엔트를 평정했을 당시의 폼페이우스는 아직 43세에 불과했다. 나이로 보아도 충분히 그 다음의 위업을 기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가 갖고 있었던 것은 장년의 체력만이 아니다. 그는 뭐든지 다 갖추고 있었다. 정치력도, 군사력도, 대중의 지지도 갖추고 있었다. 당시의 로마인들 가운데 야로프 부르크하르트가 말한 의미에서의 '하나의 인물', '위대한 개인'이 될 가능성을 폼페이우스만 큼 갖추고 있었던 사람은 없다. 아니, 적어도 다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 인물은 폼페이우 스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마는 아직도 한니발이 예언한 '내장 질환'을 극복하고, 그것을 성장 한 육체에 어울리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혼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위대한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부르크하르트가 말한 '하나의 인물'은 되지 못했다. 로마 역사상 '위대한 개인'이 된 인물은 폼페이우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