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허설 지은이:무라카미류 출판사:주변인의 길 제1장 리허설 전화가 울렸다. 겐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읽는 둥 마는 둥하던 책을 소파 에 내던지고 수화기를 들었다. "겐지?" 미와코의 목소리는 사뭇 떨렸다. 오늘밤 손님은 조금 성가신 사람이다. 아카사카에 개업 중인 변호사로 야쿠자의 홍콩 쪽 자금줄에 관여하고 있 다. 대학을 나왔고 욕망이나 폭력에 대해서 익숙하며, 물론 법률에도 밝은 사내다. 나와 비슷한 녀석이다.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응, 지금 뭐하고 있어?" 겐지는 평소처럼 물었다. 그는 결코 호통을 치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 았다. "샤워하고 있어." "그게 아니고, 말도 잘 안 하고 룸에 들어오자마자 스커트를 걷어올리지 뭐야. 다른 사람들하고는 뭔가 달라." "미와코, 항상 하는 말이지만, 그럴 땐 네가 결정하는 거야.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두면 돼." 그렇게 말한 뒤 겐지는 전화를 끊으려 했다. "겐지, 기다려." 미와코의 목소리가 방안에 잘못 날아든 벌레 울음소리처럼 수화기 속에 서 앵앵거렸다. 귀찮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전화를 발명한 게 누구였 지. 에디슨? 어나, 벨이라는 작자였지. 어쨌거나, 타인과의 통신이 늘어나 면 요컨대 쓸데없는 소리를 피할 수 없어진다. "목소리를 들었더니, 조금 나아졌어. 저, 무슨 일 있으면 또 전화해도 돼?" "음, 나 여기에 있을 거야." 전화가 끊어졌다. 변호사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여자를 부탁해 온다. 평범한 체격의 소유 자로 마약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든 뭐든 간에 상대의 자존심을 무너 뜨리는 기술을 알고 있다. 그런 작자들이 드물어진다는 건 바로 겐지가 활 개치며 살아가기가 수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이스먼스가 쓴 (고개섬)의 137페이지를 읽고 있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한 시간 반 뒤였다. 미와코는 거의 울다시피 하는 목소리였다. "겐지, 도와줘" 겐지는 전화기 저편을 가늠하며 가만히 있었다. 변호사 녀석이 미와코에 게 전화를 걸도록 시켰는지도 모른다. 뒤에서 삽입한 채 전화를 걸게 해서 남편이나 애인, 아니면 포주와 얘기하게 하는, 녀석 같은 타입의 뻔한 수 작이다. 물론 겐지 자신도 그런 적이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와줄 수 없어?" 미와코는 울먹이고 있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약을 맞았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다. "두 사람한테 당하고 있단 말이야" 울먹이는 미와코의 하소연에 겐지는 분노를 느꼈다. "손님 바꿔봐" 겐지가 미와코에게 말했다. 수화기를 손으로 막는 소리가 난 뒤 짧은 침 묵이 흐르는 사이, 읽고 있던 유이스먼스 탓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겐지의 머릿속에 영상으로 비치면서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이건?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뭔가를 확실히 빼앗겼는데, 그 빼앗 긴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 일은 지금까지 수천 수만 번도 더 있어왔 고, 줄곧 잊으려고 발버둥쳤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 그 무엇에 관한 것이 다. 가령 계절이 여름이라면 그 상실감의 상징으로 수박과 불꽃 따위가 스 쳐 지나간다. 수박과 불꽃, 모두 나쁜 기억이 있다. 육체의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나쁜 기억, 나는 지금도 그 기억에 지배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 다. 그러나 방금 전 스쳐 지나간 것은 수박과 불꽃이 아니었다. 창 밖의 야경은 채 식지 않은 지열로 이글대는 여름이 틀림없지만 조금 전의 그것 은, 반짝반짝 빛나는 종이 같은 것이었다. 알루미늄 호일 이거나 은색 종 이 같은 것, 그러나 금속은 아니다. 은박지다! 은박지는 주름투성이의 손 과 오버램된다. 그 손은 기억할 수 있다. 아버지의 손이다. 아버지! 아니, 왜 이런 게 떠오른 거지? 나는 이렇게 느닷없이 스쳐 지나가는 영상에 맥 이 빠지곤 한다.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어린애를 젖니가 빠질 지경으로 두들겨 패도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갓난애든 뭐든 간에 스쳐 지나가는 그런 영상에 나는 꼼짝못하고 사로잡히고 만다. 그 영상을, 그것 이 보여주는 어떤 상징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만약 사고를 당하거나 몹쓸 병으로 시력을 잃는다면 낭패다. 아마도 곧 바로 미쳐 버리지 싶다.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만이 머릿속에 스 쳐 지나가는 공포스러운 이미지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장님은 존경스럽다. 장님은 공포의 이미지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무 기도 없는 사람이지 않은가! 장님이 된다면 겨우 음악이나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겐지는 자신이 음악을 싫어한다는 걸 생각해 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아버지의 손과 은박지가 보인 것일까? "할 애기는 아무 것도 없대. 돈은 충분히 지불했으니까 볼일이 있으면 여기로 오라는데." 문득 미와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호사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미와코 는 알몸이 되어 울상을 지은 채 전화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생각났다. 하고 겐지는 소리내어 말할 뻔했다. 아버지는 목도를 자주 만들어 주곤 했 다. 그리고 그 목도에 담뱃갑의 은박지를 정성스럽게 붙여서 반짝반짝 빛 나게 해 주었다. "지금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겐지 는 전화를 끊고 일어나 양복으로 갈아입는다. 옷장에는 삼십 여 벌 의 체르티 양복이 빼곡이 들어차 있는데, 전부 포주 짓으로 얻은 것들이 다. 그는 밖으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여름의 막바지였지만 거리는 아직 무더웠다. 겐지의 아파트가 있는 나카사카바 시는 부동산 경기가 한창일 때 조성됐지만 그런 대로 고풍스러웠고 주변 경관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조 용했다. 겐지가 거느리고 있는 여자들은 대개 착실하고 성실했기 때문에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겐지는 기본적으로 디 스코테크나 나이트클럽에 죽치고 있는 여자들은 취급하지 않는다. 겐지는 강가 고수부지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사브에 올라탔다. 진한 감색의 사륜구동 사브는 모 신문사 사장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돈 깨나 뿌 리면서 이케부쿠로에서 화려하게 놀던 그 사장 놈에게 겐지는 가출한 어린 여자 애를 붙여준 뒤, 개망신을 주었다. 쉰 여섯이나 된 놈은 어린애처럼 울면서 차와 돈을 내놓았다. 그때는 재미있었다. 돈은 야쿠자에게 넘겨주 었고 그 어린 여자 애에게, 무릎을 끓고 울면서 빌어대는 사장 놈을 두들 겨 패도록 해 주었다.신문사 사장 놈이 용서를 빌면서 20년 전에는 얼마나 어렵게 살았다니, 마누라와 둘이서 한 집 한 집 신문을 구독해 달라고 돌 아다니면서 고생했다느니 하며 구질구질한 사정을 늘어놓아서 어린 여자 애는 깔깔대고 웃었었다. 사부에 올라타는 순간, 또 은박지로 감싼 목도가 눈앞에 떠올랐다. 아버 지는 겐지에게 크고 작은 여섯 자루의 목도를 만들어 주었고 일곱 번째를 만들다 돌아가셨다. 가장 길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네 번째 목도는 바로 얼 마 전까지도 겐지가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사브를 몰고 아카사카의 호텔로 향했다. 변호사는 도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호텔의 스위트 룸에 투숙해 있었다. 그는 욕의를 걸친 채 소파에 앉아서 룸서비스를 통해 주문 한, 종류를 알 수 없는 고급 샴페인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창가에는 키가 큰 사내가 담배를 피우며 서 있고, 미와코는 목욕 타올을 두른 채 라이팅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있다. "저 사람은 내 친구네. 방송 일을 하고 있어. 이상한 놈은 아냐." 변호사가 말했다. 그러자 키 큰 사내가 겐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녕하시오, 하고 말했다. 마흔을 조금 넘었을까, 짙은 눈썹에 얇은 입술을 하고 있어 고전적인 마피아 영화의 배신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런 생김새의 사 내는 대개 마지막에 살해되던데 이 자는 어떨까,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물론 두 사람 몫을 지불하려고 했고, 여자가 싫다면 그만두려고 했어. 저 친구가 와서 그런 애기를 하고 있는데, 자네한테 전화를 했더군." 미와코가 뭔가 마시려고 하자 겐지는 손을 내저어 그녀를 제지했다. 겐 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꽃을 크게 댕겨 자 기 손바닥에 갖다댔다. 미와코가 웃, 하는 소리를 냈고, 변호사는 입술 끝을 일그러뜨리며 웃으 려고 했지만 살이 타는 소리가 나자 웃음을 거둬들였다. " 그만하지. 그런 것은 정말 싫군" 하고 키 큰 사내가 말했다. 겐지는 10초 정도 더 손바닥을 지지고 나서야 라이터를 껐다. 머리카락 이 탈 때와 마찬가지의 냄새가 방안에 번졌다. 자네를 깔볼 생각은 없어. 하고 변호사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미와코가 겐지에게 다가가 그의 어 깨에 손을 얹었다. "애는 이제 옷을 입어도 될까요?" 겐지가 미와코를 턱으로 가리키며 묻자,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 와코가 베드룸으로 사라지자 키 큰 사내가 겐지 옆으로 와 앉았다. "아까 말한 대로야. 난 그저, 둘이서 여자 한 명이랑 하는 걸 동경해서 이 친구에게 말해 봤던 것뿐이라고. 보시다시피 난 아직 옷도 벗지 않았고 말이야." 겐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으로 손바닥을 닦았다. "자네가 다른, 가령 뭐 화류계 사무실의 매니저 따위가 아니라는 건 나 도 잘 알고 있잖나?" 변호사가 그렇게 말하며 샴페인을 권했지만 겐지는 차를 가져와서, 하고 거절했다. "그보다," 겐지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아까 저 애가 나한테 전화할 때, 당신은 뒤에서 하고 있었습니까?"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 애가 처음에 분명히, 두 사람한테 당하고 있다고 했는데, 당할 것 같다는 뜻이었나?" 겐지가 혼자 말하듯 작은 소리로 중얼대자, 변호사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뒤로 하면서 자네에게 전화 걸게 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아" 하며 손을 저었다. "해도 됩니다." 겐지는 불에 탄 손 바닥을 키 큰 사내에게 내보이며 윗입술만 웃었다. 손바닥은 조금 빨갛게 되어 있을 뿐, 타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별 문제가 안 됩니다. 전, 옛날에 개인적으로 한 적이 있는 데 재미있지요. 그렇게 하면 흥분하는 여자도 있어요. 돈을 지불한 이상, 여자가 싫어하는 거, 이를테면 때린다거나 오늘처럼 둘이서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면 무엇을 해도 괜찮습니다 저도 불만을 말하려고 온 게 아닙니 다. 그저, 저 여자는 저한테는 무척 소중하니까요. 그 뭐라고 할까요, 신 뢰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이럴 땐 우선 오고 보는 거죠." 손은 괜찮은가, 하고 키 큰 사내가 묻자 "일종의 손장난입니다" 하고 겐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야구선수들이 타구에 맞았을 때 뿌리는 스프레이 있잖습니까? 그걸 응 용한 건데, 등산에 쓰기도 한다더군요. 동상 같은 것도 막아준다는데 그걸 스프레이해 두면 방금 전의 그런 쇼가 가능하죠. 상온에서는 눅눅해지기 때문에 그 눅눅한 표면에 나무 조각을 붙여두면 찌르찌르 하는 소리도 나 고, 단백질이 타는 것 같은 냄새도 납니다. 등산하는 친구한테서 배워뒀 죠. 근성이 있어 보이죠?" 키 큰 사내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거야 안 되겠군. 저 친구가 우리보다 한 수위인걸, 하고 변호사에게 말했다. 변호사도 그렇군, 하며 고개를 끄 덕였다. "실은 우리 둘이 애기한 게 있어. 자네가 오면 말이지." 변호사가 세 번째 샴페인을 따면서 말했다. 겐지는 옷을 다 입고 이쪽을 살피고 있는 미와코를 손짓으로 불렀다. 미 와코는 젖은 머리 칼을 쓸어 올리면서 겐지의 뒤쪽으로 다가왔다. 키 큰 사내가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미와코 때문에 변호사와 사내는 하던 애기를 멈춘 상태였다. "내가 오면, 무엇을 하려고 했었습니까?" 겐지는 샴페인이 들어 있는 글래스를 미와코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미와 코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자신이 도구가 되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야마카게에 있는 대형병원 원장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녀는 부친의 밑 에서 아주 응석받이로 자랐으며, 부친의 희망에 따라 유명한 사립여대에 들어갔지만 잘 적응하지 못했다. 다른 어떤 누가 미와코 자신의 있는 그대 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어도 자신을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그녀를 지 배했다.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그녀에게는 그 비비꼬인 것이 보였다. 자네가 오면, 하고 키 큰 사내가 말을 이어나갔다. "나나 저 친구가 여자와 하고, 에 가능하다면 묶어두는 게 더 낫겠지. 마침 여자가 꽤 흥분하는 약도 있으니까." "무슨 약입니까?" 겐지가 묻는다. "아니, 말하기 좀 뭐하구먼. 그건 비밀로 해 두고 싶어서 말이야. 그게 꽤난 흥분되는 약인 건 사실이야. 내가 아는 어떤 여자는 부랑자들에게 당 하고 싶어서 실제로 약을 했다고 하더군. 굉장하지?" 미와코는 샴페인 글래스 끝을 핥으며 키 큰 사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 다. 적당한 무관심이 그녀를 안정시킨 셈이다. "그래서 저 여자와 즐기면서 다른 한쪽은 자네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 뭐 그런 거지. 젊은 친구가 제법 담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요는 여자의 표정을 보여주고 신음소리를 들려주면서 실무적인 애기를 하려고 했네." 겐지는 미와코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사내의 애기를 듣고도 무표정했 다. 나라면, 하고 겐지가 사내에게 말했다. "그럴 때 쓸 만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 여자의 포 주가 심약한 놈일 경우에 효과가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사내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밀국수를 먹이는 겁니다." 국수? 변호사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여자에겐 약을 먹이고 바닥에 엎어놓고 하면서 포주 놈에게 국수를 먹 게 하는 겁니다. 그 국물은 우오츠카하고 인스턴트 커피로 만들죠. 그러면 서 빌려준 돈은 언제 갚을 거야, 뭐 그런 애기를 하는 거죠." 키 큰 사내는 과장된 표정으로 웃어 제꼈다. 괜찮다면 다 같이 한 잔 하 러 나가자고 한다. 변호사는 거절했고, 차를 가져왔다는 핑계로 겐지도 거 절했다. "유감이군. 자네와 중요한 애기를 하고 싶었는데." 키 큰 사내가 명함을 받아들이면서, 특이한 놈이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 다. 이렇게 비싼 양 복을 입고 포주인 나에게 명함을 준 것은 이놈이 처 음일거야. "음악 듣겠어?" 사브의 카스테레오로 손을 뻗으려는 미와코에게 겐지가 물었다. 미와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미와코의 아파트로 돌아와 와인 한 잔과 헝가리제 사라미소시지를 먹었다. 미와코에게 7만 엔을 받고 겐지는 40분 동안 그녀 의 크리토리스와 발가락을 애무해 주었다. 손님을 치른 다음, 겐지를 원하 는 타입과 그렇지 않은 타입이 있는데 미와코는 전자에 속했다. 어느 쪽이 더 이상하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쪽이나 그저 허전할 뿐이다. 미와코와는 외제차 박람회에서 알게 되었다. 나레이터 모델로 일하고 있 었던 그녀는 검은 대리석 카운터가 있는 록폰기의 바에서 술을 마시고 상 당히 취했었다. 강한 남자가 좋아, 하고 미와코가 말했다. -내 머리채를 움켜잡아서 자기 허벅지에 처박고 빨아, 하고 명령해도 용 서가 되는 그런 남자 말야. -그렇다면 난 안되겠군. 난 약하거든. 그리고 미와코가 한 가지 혼동하 는 게 있는 거 같은데, 네가 경멸하고 싶은 건 남자가 아니야. 네 스스로 도 그걸 잘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섹스가 끝나면 항상 그렇지만, 미와코는 알몸으로 실크 시트에 누워 울 기 시작했다. 잠 들 때까지 길고 긴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겐 지로서는 가장 우울한 시간이었고, 또한 스스로가 가장 자신답다고 생각되 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디쯤에서 음악이 시작됐는지 알아?" 겐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악? 자긴 음악 싫어하잖아." 미와코는 울음을 멈추려 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싫어하지. 하지만 음악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뭐 그런 애기는 싫지 않 아." "하긴, 자기는 말하는걸 좋아하지." "좋아한다기보다는 뭔가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 꼭 필요한 거니까. 정확한 표현 방법 같은 걸 생각하는 게 좋아." "나, 자기가 해주는 이야기가 좋아. 동화 같은 거 말야." 옛날 어느 마을에 아주 교활하고 욕심 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있 었습니다. 두 사람은 타임터널을 파고 있었는데 자꾸 파 나가다보니 여러 가지 물건을 파내게 되었습니다. 온천이나 죽은 쥐, 그리고 신기한 과일 화석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느 날 그들은 열 여덟 송이의 포도가 그대로 형태를 지니고 있는 화석을 포도송이에서 차례차례로 어여쁜 여자 아기가 태어나는 거예요. 두 사람은 이거 괜찮군, 모두 기생으로 내다 팔아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열 여덟 송이 째는 정말 너무도 못생긴 여자아이가 나왔습니다. 그 여자아기는 집을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세어, 두 노인은 순식간에 목이 졸려 죽어 버렸습니다 겐지가 여자들에게 해 주는 것은 이런 이야기였다. "그건, 그냥 아무렇게나 지껄인 것일 뿐이야.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아버지에 관한 것, 그의 죽음, 그 후에 어머니가 한 일, 여동생이 해괴한 병에 걸린 것, 맡겨진 친척집에 관한 것, 수박과 불꽃...,겐지는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닥칠 때마다 자신을 3인칭으로 생각하곤 했다. 가령, 어머니 가 어딘 가로 가 버렸을 때에는, 엄마는 겐지가 모르는 곳으로 가 버렸습 니다. 겐지는 여동생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습니다. 라고 중 얼거렸다. 그럴 때의 기분을 옛날이야기처럼 여자들에게 애기해 주기도 한 다. "글로 쓰면 되겠다. 동화나 소설 같은 걸로 말이야." 미와코는 겐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아니, 난 쓰지 않아." 겐지도 미와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말이란 필요한 거지만, 그것 자체가 가치를 가지고 있거나 하진 않아. 바다라는 말을 생각해 봐. 바다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이지 뭐 가치가 있 는 건 아냐. 돈과 비슷한 거야. 하지만 말을 상품화해서 팔아먹는 짓은 좋 지 않아.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은행원은 죽으면 꼭 지옥에 떨어질 거야. 그보다는 음악의 기원에 대해서 말해주지." 미와코의 넓은 원룸 아파트 한 쪽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이 방에서 미와코는 두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그때 죽었더라면 경찰과 매스컴은 '아무 불편 없는 생활 어쩌구 저쩌구 ' 하고 이 방을 형용했을 것이다. 'A양은 무엇 하나 불편함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만족할 줄 모른다' 처럼 썼을 것이다. 다다미 스무 장 정도의 넓이의 원룸에는 오 디오와 비디오, 아메리칸 가구와 침대, 오픈 키친에는 이태리제 식기, 체 코제 유리잔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칵테일 셰이커와 작은 와인 셀러리 까지 있다. 이런 방은, 하고 겐지는 항상 생각한다. 뭐든지 있어 보이기 때문에 혼자 있으면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해 돌려지게 마련이다. "언젠가 바람이나 파도 소리가 자연스럽게 음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 람이 있는데, 그건 아주 멍청이야. 그림은, 알잖아, 뭔가 설명하거나 할 때 필요했지. 말도 그게 어떻게 생겨났는지 몰라도 필요했을 거라는 추측 할 수 있어. 필요하지 않은 건 생기지 않는 법이니까. 여럿이서 맘모스를 사냥할 때 호흡을 맞추기 위해 내는 소리가 노래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 람도 있어. 그것도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생각하는 시시한 녀석도 있고, 그 녀석도 아주 바보야. 그런 놈은 아마도 원시시대부터 연애가 있었다고 생 각할 테지. 연애가 탄생한 것은 19세기이고, 그 이전에는 그런 건 없었어. 욕망과 제도뿐이었지. 난, 음계를 발명한 사람이 음악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음계를 만든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야. 이런 애기, 시시해?" 미와코는 아니, 재미있어, 하면서 겐지의 몸을 더듬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충실한 시간이나 안정된 정신 상태도 아니고, 풍요롭고 원만한 인간 관계도 아니다.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남자도, 하물며 그 남자의 페니스도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지 '말' 뿐이다. "마르세이유에서는 모나코를 '코트 더 줄' 이라고 하는 모양이야. 거기, 니스와 모나코 사이에 해안, 그 중 한 곳에, 어떤 장소에 서 있으면 음악 이 들려오는 데가 있다는 군. 그 장소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옛날 러시아 황제였대. 바람 탓이었는지 아니면 파도인지 영혼인지 뭐 그런 초자연적인 힘 때문인지 모르지만, 일종의 음계와 음악이 분명 들리는 것 같았대.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그 해안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다투었다고 해. 언젠가 그곳에 가보고 싶어... " "어떤 음악이 들리는데?" 미와코는 울음을 그쳤다. 사이드 테이블에는 옛날 미술 교과서에서 본 듯 한, 외국 무용수의 모습을 한 스탠드가 희미한 불빛을 드리우고 있다. 요 즈음은 미술 교과서가 아니라 고급품을 동경하는 주부나 주부와 같은 정신 구조의 남자들이 즐겨 읽는 카탈로그 잡지에 그런 램프가 자주 실리고 있 다. 아르누보라는 양식이다. 왜 이런 모양의 그리 밝지도 않은 스탠드가 필요할까? 하고 겐지는 허벅 지 사이로 뻗어오는 미와코의 손가락과 손톱을 의식하며 생각했다. 난 이 런 스탠드 따위는 죽어도 갖고 싶지 않아. 그럼, 뭐가 갖고 싶으냐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무엇을 갖고 싶어하는지를 알게 되더라도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겠어. 어쨌거나 이런 모양의 스탠드만큼은 갖고 싶지 않다. 언젠 가, 미와코에게 가격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녀는 '5만 엔!' 이라고 했다. 이 여자는 이 스탠드를 정말 갖고 싶었던 게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갖 고 싶어하는지 전혀 모르고,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사실도 모 르는 바보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을 알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 거의 없다. 때문에, 나 같은 놈이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무용수 스탠드의 약하고 부드러 운 빛 때문에 미와코가 욕정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의 눈이 원하고 있다. 원하고 있는 자신을 허락하는, 그런 눈이 희미한 스탠드 불 빛에 비치고 있다. 겐지의 고향 마을에는 들개가 있었다.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횡단하고 있 는 녀석을 헤드라이터로 놀라게 한 다음, 그대로 치어 죽이고 지나갔다. 액셀레이터를 밟자 들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눈빛이 되었다. 겐지는 어둠 속에서 그 눈이 체념의 빛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것을 보는게 즐거웠다. 지 금 미와코와 같은 눈이다. 아무도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어, 하고 겐지 는 생각했다. 미와코는 이미 엉덩이 사이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까는 그 변호 사 놈의 노리개 감이 되었다는 굴욕감과 그것이 나를 위해서라는 딜레마 때문에 섹스를 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아무리 샤워를 해도 콘돔을 낀 놈의 페니스의 느낌을 씻어낼 수는 없겠지. 미와코는 몇 번이나 오르가슴을 느 끼고 조금 지치게 되자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일이 떠올라 흐느끼기 시작 한 거야. 울고 있는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내가 지껄여 주는 애기가 필요 했고 다시 구원받은 느낌이 들자, 왠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과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울음을 멈춘 것일 테고. 그리고 자기애에 고무되어 또다시 섹스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면 그 누구의 페니스이든 상관없다. 진정 여자를 원한다면, 하고 겐지는 생각한다. 사랑해, 라는 표현 방법을 수백 종류쯤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처럼. "있잖아, 그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것은 어떤 음악이야?" 미와코의 빨간 손톱이 겐지의 검은 음모에 감겨 있다. "그게 아냐." 겐지는 미와코의 볼을 잡아 당겼다. "잘 들어, 처음 듣는 음악에 감동하는 놈은 없어. 이건 책에서 읽은 거 지만 말이야. 음악에 반응하려면 그 음악의 코드라고 할까. 그런 뭔가가 필요한 거야. 그게 음악의 특징이야. 가령, 이 곡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하 고 있다, 같은 그런 정도의 정보면 돼. 그러면 뭔가가 우리들의 몸 속에서 열리지." "아, 거기가 젖으면 흥분하기가 쉬워지는 거하고 비슷하구나." 미와코는 그렇게 말하고, 입술 사이로 뾰족한 혀를 내밀었다. "내가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는 잘 들어. 안 그러면 앞으로 너하 곤 절대 하지 않을 거야." 미와코가 내민 혀를 갑자기 겐지가 손가락으로 쥐고 말하자 그녀의 얼굴 이 순식간에 공포로 일그러졌다. 겁먹은 표정은 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 다. 정확히 말하면, 눈 주위의 미묘한 근육으로 공포가 표현되는 것이다. 그 과정은 다르더라도 여자의 얼굴에 나타나는 공포로 가득한 그 순간의 표정을 보기 위해 수컷은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미안해요, 잘 들을게." 그렇게 말하는 미와코의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에 겐지는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미와코는 겁먹은 표정 그대로 신음을 내 지른다. 겐지는 다른 한 손으로 미와코의 머리를 잡고, 그녀가 괴로워 신 음하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얼굴을 치켜들고 말했다. "내가 들으라고 하면 이 안에 지네가 백 마리가 들어가더라도 잘 듣는 거야." 미와코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가득 고였다. 겐지는 잡고 있던 그녀의 머 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었다. "이건 유명한 무슨 무슨 작곡가가 지은 것입니다라든지 뱃속의 아기에게 매우 좋습니다, 뭐 그런 정보가 음악에 작용하는 거지. 전쟁에 패한 놈들 이 승자의 음악을 받아들이곤 하는데,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기 때문에 재즈 같은 것을 무조건 받아들인 거야. 베트남은 미국에게 이겼기 때문에 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지만 그 니스에서 모나코 사이에 있는 해안 에서 들리는 음악은 그런 것이 아냐. 정보도 지식도 코드도 필요 없어. 뭔 가가 몸 속에서 열린다고 했지? 기억해?" 미와코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끄덕인다. "그 무엇인가 하는 것, 바로 그거야. 난 그걸 책에서 읽었어. 그 무엇인 가, 눈에 보일 듯 구체적인, 일종의 물질 같은 것인데, 그 물질로서의 음 악을, 거기 모나코에 가서 듣고 싶어."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책에서 읽은 게 아니었다. 제2장 튜닝 일찍이 여러 명의 인상파 음악가들이 니스와 모나코 사이에 있는, 깎아 지른 듯한 절벽에 찾아와 귀를 맑게 하고 갖가지 영감을 얻었다는 기사를 여행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거기서 인상파들이 무엇에 귀를 기울였는지 겐지는 알 수 없었다. 미와코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욕정과 더위 때문이다. 아버지가 만 들어 준 목도로 이모의 머리를 내리쳤던 그 날도 이렇게 무더운 밤이었다. 겐지보다 다섯 살 아래인 여동생은 류머티성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는 데, 약의 부작용으로 얼굴과 몸이 부어 있었다. 의사가 목욕조차 금지 시 켰기 때문에 매일 이모가 물수건으로 닦아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도 무더운 여름밤이면 여동생에게서는 쾌쾌한 냄새가 났다. 이모는 중학생 인 겐지와 여동생을 거두어 보살펴 주고 있었고 특별히 나쁜 기억은 없다. 어느 날인가는 식사를 마치고 근처 공원에 불꽃놀이를 하러 갔다. 겐지 가 동생을 안다시피 해서 데리고 가서는 연신 이쁘다 하며, 불꽃놀이를 함 께 했다. 동생에게서는 땀과 약, 그리고 이제 여자가 되기 시작하는 냄새 가 풍겼다. 불꽃놀이를 보는 동안 내내 뭔지 모를 것이 겐지의 내부에 쌓여갔다. 옷 을 입은 채 풀장에 들어갔을 때처럼 몸이 무거워져가는 것을 겐지는 느꼈 다.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겐지는 알았다. 집에 돌아와서 겐지와 여동생, 그리고 이모네 가족들은 수박을 먹었다. 식욕도 부진했던 여동생은 언제나 한 조각밖에는 먹지 않았다. 여동생이 접시에 담겨진 수박 중에서 한중간에 있는 것을 잡았는데, 그것을 입에 넣 는 순간, 이모가 여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그렇게 한중간에 있는 걸 잡는 게 아냐! 이모가 말하자 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생이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겐지는 바로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목도로 이모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리 고 놀라서 말리려던 이모부의 눈을 찌르고 동생과 같은 학년인 외사촌에게 도 칼을 휘둘렀다. 죽은 아버지가 붙여준 은박지가 검붉게 물들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까지 몇 초 사이에 겐지는 '그것'을 들었다. 그것 은 귀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공원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동안 몸 안으로 들어와 쌓여 있던 그 무엇처럼, 이모의 깨진 머리로부터 흘러나와 마치 아 침 햇살이 비쳐 들어오듯 겐지의 내부로 들어왔다. 그 무엇인가, 겐지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입자 하나 하나가 또렷하게 질량을 가지면서 온몸을 전 율케 했다. 그것은 음악이었어,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미와코가 몸을 겹쳐왔다. 겐지는 밑에서 허리를 쳐 올린다. 이모는 삼 개월 동안 입원했고 이모부는 실명했다. 외사촌은 지금도 겐지 를 용서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여동생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자네한테 뭘 좀 의뢰하고 싶은데, 그러면 자네에게 내 모든 약점이 드 러나게 돼. 우선 자네에 대해서, 좀 물어봐도 되겠나?" 변호사를 통해, 아카사카의 호텔 방에서 만났던 키 큰 사내에게서 전화 가 걸려왔다. 겐지는 고지마치의 임대빌딩에 있는 사내의 사무실을 찾아갔 다. 사내의 이름은 시부카와라고 했다. 심부름하는 젊은 사내 녀석과 시부 카와와 동년배로 보이는 중년의 사무직 남자, 그리고 머리칼을 물들인 창 구의 여자가 직원 전부였다. 창이 넓은 방에 들어서자 시부카와는 겐지에게 가죽 소파에 앉으라고 권 했다. 그 방에는 불필요한 물건은 전혀 없었다. 시선을 끄는 것은 대형 화 면의 모니터 전용 TV와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설치된 개인용 컴퓨터 정 도였다. "내가 하는 일은, 일종의 매니지먼트입니다." 블라인드 너머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을 바라보며 겐지가 말했다, "전에 보셨던 미와코 같은 여자를 세 명 데리고 있습니다. 여자들에게 우선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고객들을 이어주고 매상은 반반으로 나눕니다. 그것과 별도로 성인용 비디오에 짧게 출연시키기도 하지요." 머리카락을 물들인 여자가 차가운 마실 것을 내왔다. 다리 몇 군데에 붉 은 반점이 있다. 고양이를 기르고 있겠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요전의 애도 예뻤는데, 다른 세 사람도 괜찮은가?" 비서가 방을 나가자 시부카와가 물었다. "못생긴 여자는 쓰지 않습니다. 게다가 못생긴 애들은 대중적인 클럽에 나 어울리죠. 내가 취급하는 건 애초부터 클럽이나 호텔, 숍 따위는 안중 에 없는 독립적인 여자들입니다." "어떤 곳에서 찾아내지? 술집 같은 곳에 많나?" "장소는 여러 가지죠. 저 여자다 싶으면 단번에 낚아 버립니다." "수입을 물어봐도 되겠나?" "세무소에 말할 건 아니시겠지요?" 시부카와는 웃지 않았다. "저는 여자를 싸게 팔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네 자리는 거뜬합니다. 비 디오 촬영이 있을 때는 더 되지만 요. 이런 일은 끝이 없으니까요. 여자들 도 모두 다른 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시부카와는 비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 딱딱한 애기를 하려니 그만 굳어지는군. 기본적으로 TV프로 그램을 만들고 있는데,TV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데, TV음악 프로 같은 것 보나?" "미안하군요. 음악을 싫어해서요." 겐지는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술에 대해서 칭찬을 늘어놓았다. 혀가 굳 을 정도로 독한 스카치였는데 목구멍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감촉이 제법 근 사했다. 마치 처음 섹스 파트너가 된 여자가 슬립을 방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는 듯한 감미로움 같은 것이었다. "무슨 술입니까?" 겐지가 물었다. 성급한 고백보다는 좋은 술을 공유한다는 유대감을 표해 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잘 모르지만 스코틀랜드의 어떤 섬에서 만들어진 놈 같애. 좋다면 한 병 드릴까?" 저녁때부터 술을 마시는 것은 겐지에게 드문 일이었지만, 부드러운 분위 기에서 시부카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흥미로웠을 뿐이야, 라고 겐지는 생각했다. "방송국은 그만뒀지만 음악 프로를 만들고는 있어. 그만두더라도 이쪽 일이란 게 인간관계나 연줄 같은 걸로 꾸려나갈 수 있는 거니까. 건강한 몸만 있으면 해 나갈 수 있어. 내가 그만둔 이유는, 사실 섹스에 관계된 거야." 섹스는 모든 사람을 단절하고 있지요. 겐지는 스코틀랜드 산 스카치를 마시며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시청률 경쟁에 지쳤다거나 뭐 그런 애기는 아니야. 난, 전쟁 직후에 태 어나 대가족 속에서 자란 탓인지, 돈이든 여자든 악착스럽게 소유하고픈 생각이 별로 없어. 단순히 털털한 건지도 모르지. 또 이쪽 세계에 언제나 예쁘고 멍청한 여자 애들이 널려 있는 탓도 있겠지만." "풋내기들이 성공하려고 몸을 내놓는다는 게, 정말입니까." 겐지가 물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 단지 이해가 일치해야 한다는 거야. 반드시 대 가가 따르게 마련인 관계는 얼마 못 가서 지겨워지게 마련이지. 우스운 건 그 밥에 그 나물이란 거지. 원숭이보다 조금 나을까 하는 여자 애들이 능 력도 없는 AD,FD녀석들과 싸구려 호텔에서 자는 거, 뭐 그런 게 다 야. 내가 30대 후반쯤이었던가? 긴자 화랑에 근무하는 늘씬한 여자를 알게 되었지. 이를테면 라틴계라고 할까, 자신의 성적 욕구를 인정하고 발산하 며 사는 여자였는데, 나하고 잘 맞았던 거 같아. 부끄럽지만, 난 충분히 즐긴 것 같은데 상대는 글세..." "여자는 몇 살이었습니까?" 하고 겐지가 물었다. "처음 만난 게 스물 여덟이었던가, 자네도 그 정도 되지?" 겐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맞는 여자는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다던데, 바로 그거라고 생각 했지. 그 여자에 빠져 있는 동안 가정은 파탄 나고 말았어, 뭐 그런 건 어 찌돼도 상관없는 거지만, 마누라하고도 삐걱댔고 일찍 낳은 아이도 어느 정도 성장한 뒤라..." 그래, 너는 가정을 버렸구나?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그 여자와 함께 살 궁리만 했었 지. 하지만 그 여자는 나와 생각이 달랐어. 함께 사는 것도 좋지만 가끔 만나기 때문에 흥분되는 거 아니야, 뭐 그런 말을 하기도 했어 나도 너무 편한 관계는 싫어서 여자 말대로 함께 사는 걸 포기했지. 어느 순간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 자신이 매우 마조히스틱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어쩐지 나사가 다섯 개 정도는 빠진 듯한 느낌이었어. 친구가 하나 있는데, 녀석은 타고난 변태야. 자기 여자를 다른 놈과 하 게 하면서 그걸 보며 좋아하는 녀석이지. 그 놈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점 점 나 자신이 마조히스트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어. 마조히스트에 대해 서도 많이 생각해 봤어. 특별히 아픈 것을 좋아하는 건 아냐. 결정을 내리 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게 싫은 것뿐이지.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 어 버렸잖아. "그 여자 이름은 아미라고 해. 내가 아까 말했지? 아미는 키가 크고, 묘 하게 정력도 센 편이지. 원래 좀 그런 편이데, 내 미묘한 변화를 지켜보더 니, 사디스트 공부를 해야겠다고 말하더군. 심지어 SM클럽에 다니는 친 구를 같이 만나기도 했으니까. 나는, 이미 갈 데까지 가보자는 상태였지. 방송국을 그만둔 것도 그 무렵이었고." 아미라는 여자 어디에 반했나요? 겐지가 위스키를 마시며 물었다. 상당 히 높은 도수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물리지 않았다. 꼭 이 위스키 같은 여 자였겠군, "아미 앞에서는, 낄낄대면서 한없이 천박해질 수 있었어. 아미도 마찬가 지였지. 어쨌거나 그녀는 키도 크고 얼굴도 반반했으니까, 적어도 난 자신 을 용서할 수 있었다고 할까, 그런 상황이었어. 그러는 동안 변태 도수도 올라가더군. 아미를 다른 남자에게 줬어. 좀 전에 말했던 그 마조히스트 친구 놈한테 말이야. 체인징 파트너를 한 거야. 친구가 보내준 여자가 별 볼일 없어서 효과는 없었지만 그날 밤은 인삼을 먹었을 때처럼 굉장했어. 밤새 빳빳했으니까. 맛을 들인 셈이지." 잠깐만요, 하고 겐지가 말했다. "왜 나 같은 놈에게 이런 애기를 하는 겁니까? 그런 비밀스런 이야기는 포주 질을 먹고사는 놈한테는 보통 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내가 무시당하 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술 마시면서 당신의 별난 취미에 대해서 듣 는 게 내 일은 아닙니다." 겐지는 시부카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가시 돋친 말을 던졌 다. 시부카와는 작은 유리잔에 절반 정도 남아 있던 위스키를 단숨에 비우 고, 케이스에서 양끝이 절단된 담배를 꺼내어 연기를 크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민감한 문제야." 민감한 문제, 하고 그가 다시 한 번 반복했다. 민감하다는 말의 뉘앙스가 마조히스트로서의 시부카와와 잘 어울렸다. "나는 자네를 나와 비슷한 타입의 인간이라고 생각했었어. 변호사 와쿠 이가, 야쿠자도 아니면서 여자들을 후려먹는 특이한 놈이 있다고 하더군. 난 처음에 내 애기를 하는 줄 알았다니까. 알콜에 절어서 간이 좋지 않은 데, 뭐 간이 안 좋으면 마조히스트가 되는 놈도 있다니까. 와쿠이는 자네 에 대해서 대충 설명하고는, 자네 여자를 자네 앞에서 건드리고 자네가 나 처럼 흥분하는지 그걸 보려고 했던 거야. 물론 난 내 여자가 다른 놈하고 하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어 나중에 듣기만 하지. 자넨 내가 상상하던 타입 이 아니었어. 얼굴도 귀엽고, 키도 크고, 늘씬한데다 우아해서, 얼마 전에 굉장히 인기를 누렸던 아이돌 같은 타입이더군. 절대 화 내지 말고 대답해 봐. 자네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안겨도 아무렇지 않나?" "설마 저에게 설교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겐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게 얼마 짜리 일을 시킬 겁니까?" "보수가 상관 있나?" "여자에 대한 저의 가치관은, 돈이 걸려 있는 정보니까요" "그런가? 자네한테는 우선 오백만 엔을 줄까 생각하고 있어. 일이 끝나 면 오백 더 주지. 성공했을 경우엔 더 주고." 설마 여자를 죽이는 건 아니겠지?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오백이면 , 불 법 입국한 외국인에게 그보다 더한 일도 두세 번 시킬 수 있는 금액이다. 경제 거품이 빠지고부터 나이프를 쓰는 이란인 이나 특수부대에 있었다는 볼리비아인, 비밀경찰이라는 동유럽 남자들이 돈을 터무니없이 적게 받는 다는 소문을 몇 번이나 들었다. "손을 더럽히는 일은 아냐." 겐지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시부카와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싫으면 거절해도 상관없어. 이야기를 들어준 대가 와 그것을 잊어준다는 조건으로 백만 엔을 낼 테니까." 영수증은 쓰지 않습니다. 하고 겐지가 말하자 시부카와가 웃음을 터뜨렸 다. "부자시군요?" 겐지가 물었다. 글세 그런가? 하고는 시부카와가 다시 양끝이 절단된 담 배를 피웠다. "주식도 부동산도 한물갔고, 이제 남은 것은 게임 소프트 같은 건가요?" "음, 그거야. 게임은 아니지만 말이야 몇 군데에서 사들인 인공지능에 관계된 두세 가지 기술 특허권이 있어." 기본적으로, 하고 겐지가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여자가 나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들도록 노력 합니다. 그리고 같이 있지 않을 때는, 상대를 구속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 다. 또 싫다고 하면 아무 것도 안해도됩니다. 이제 됐습니까?" "그럼, 자네 앞에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안길 수 있는 가능성도 있겠 군?"] "여자가 원한다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있었나?" "한 번도 없습니다." "요전과 같은 경우, 자네 손장난에 전혀 놀라지 않을 무서운 손님이었다 면 어떻게 했을까?" "손장난만이 아닙니다. 변변찮지만 무기도 가지고 있습니다." "무기?" "나이프 같은 건 아니고, 더 유효하면서도 쓰기 쉬운 것이 제법 수중에 들어옵니다. 주로 소련제가 많은데, 신경가스를 희석한 것이 있고, 그런 쪽의 물건입니다만, 플루토늄이 시장 뒷골목에 나돌아다니는 세상이니까 요. 시부야 같은 곳에선 양아치들도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어요." 시부카와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 있다는 듯 겐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자네에 대해 조금 알겠네. 보수를 묻고 나서, 빈틈없이 일을 처리해 주 는 타입이군. 역시 나라는 인간과는 전혀 달라. 다른 사내가 자네 여자를 안고 있을 때, 자네는 뭘 하나? 서너 명 있다는 다른 여자와 안고 있나?" 소설책을 읽습니다, 하고 겐지가 말했다. "소설, 어떤 소설?" "지금은 유이스먼스를 읽고 있지만, 쟝쥬네라든가 세린느라든가 퓌그 같 은 스릴있고 무거운 것입니다." 묘한 남자군, 하고 시부카와가 중얼거렸다. "자네라면, 그 놈과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 놈, 하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시부카와의 어깨가 축 처지면서 비통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겐지는 '그 놈'에 대해서 물을까 하다가, 시부카와가 기운을 내어 다시 말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시간이 지났다. 여자를 뺏겼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마조히스트라고 불리는 남자를 몇 명 알지만, 그런 놈들은 자존심이 세고 사회적인 지위에 민감해서 어떤 특권층의 모임에 초대받으면 안내 데스크의 작은 불친절에도 꼭 소동을 일 으키거나 한다. 단, 그렇다면 영 바보는 아니어서 타인의 힘을 빌어 자신 의 패배감을 해소한다는 게 창피스러운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잇다. 패배 감, 이 자는 그걸 처음으로 맛본 것일까? 그러나 누구에게 패한 것인지를 아는 놈은 구제 받을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고 겐지가 생각하고 있을 때 시부카와가 입을 열었다. "1년 반쯤 전에 아미가 그 놈을 만났는데, 그게 SM클럽에 다니던 여자 들 소개였대나? 지위도 있고 별별 소문이 있었지만 자극적이라고 하길래 만나본 거라고 아미가 사후보고를 하더군. 보고할 때 얼굴 표정이 바뀌는 걸보고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어. 뭔가 나쁜 짓을 했는데 들켰을 때 같은 그런 느낌이었지. 자기가 오래 전부터 어딘가 먼 곳에 숨겨오던 것이 발견 되어 그걸 기회로 어떻게 움치고 뛸 수 없는 증거가 눈앞에 들이밀어졌을 때의 그런 느낌이었어. 아미가 계속 묘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 에 나는 뺨을 꼬집으며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부드럽게 거기라도 쓰다듬으며 아무 말 안해도 돼, 하고 말해야 할지 몰랐 어.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 그럴 때,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아미라는 여자를 잘 알지 못하고는 최선의 대응을 할 수 없다고 겐지가 말했다. "결국, 아미는 술을 마시고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털어놓았지. 그 뭐라 고 할까, 그녀가 그때까지 놀아본 중에서 그렇게 굴욕적이고 자극적인 건 없었다는 거야. 그 놈은 SM전용 호텔 같은 데가 아닌, 인테리어가 근사 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호텔에 방을 잡았던 모양이야 .TV와 오디오가 있는 스위트 룸이었대. 로비까지 마중 나온 놈이 여자를 하나 더 부르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물어봤다는군. 어떻게 할지 망설이던 아미는 그런 일 은 전에도 있었기 때문에 오케이했고. 그 놈은 해외에서도 활약하고 있는 영화 감독인데 유럽 쪽 여배우 애기 를 샴페인을 들이키면서 늘어놓았대. 그러는 사이 다른 여자가 방에 들어 왔는데, 아미 말로는 자신보다 백 배는 더 예뻤다고 하더군. 남자는 매우 기분이 좋아서 룸서비스로 샴페인을 몇 병인가 더시키고 모두 취할 무렵, 게임 내용을 아미에게 설명했어, 아미만 알몸이 되어, 이것저것 시키는 대 로하고 그놈은 아미보다 백 배나 예쁜 다른 여자와 손을 잡고 그걸 구경했 지. 비디오로 영화도 보고 음악을 듣고 하면서 말이야. 아미는 자신이 마치 가구 같았다고 말했어. 몇 시간이나 방치된 채로 있 었고 몸을 만져 주지도 않았다고 말하더군. 그게 처음이었어. 당신이 만나 지 말라고 하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했지만 그 날부터 뭔 가 결정적으로 틀어져 버렸어. 나는 만나지 말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아미 가 굉장히 원했지만 전혀 흥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도 없었어.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미는 2주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꼴로 그 놈을 만났는데 그때마다 내게 꼭 보고를 했지. 그러면 영락없이 임포텐츠가 되어 버렸어. 몇 번 인가 아미가 심한 말로 나를 다그쳤어. 요 컨대 내가 쓸모 없는 남자라는 거야. 자기가 얼마나 지독한 일을 당했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지. 완벽한 사디스트 였어. 아미는 줄곧 개가 되어서 다른 여자들 앞에서 손발을 느슨하게 묶 이고 엉덩이에는 난꽃 같은 걸 끼운 채 엎드려서 피크닉에 따라간 예견처 럼 행동해야 했다는 거지. 그 게임에 아미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처 구니가 없지만 아미가 화를 낸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시켰어 이럴 땐 흥분 하면 안돼, 하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단단해 지더라고, 그래서 그 날밤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지. 두려웠지만, 오십 줄을 바라보는 나이면 어쨌거 나 발기한다는 사실에 그만 두 손을 두는 법이지. 발기를 최우선으로 생각 하는 게 잘못된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미는 그 놈과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애기하길 싫어하 는 눈치였어. 별다른 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 지. 물론 아미는 그 놈을 만나지 말라고 말해 달라고 내게 간청했어. 때론 울어가면서 말이야, 하지만 난 화를 내거나 안아 주거나 하면서도 결국 그 놈을 만나는 걸 막지는 않았어. 자네는 여자를 때리나? 시부카와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겐지에게 물었다. 최상급이긴 했 지만 스카치 때문에 취기가 올라 코와 눈언저리가 검붉어 졌고 주름들이 일그러져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여자를 때리나? 무슨 질문이 그래? 하긴 그런 모호한 질문만이 이렇게 훌륭한 사무실에서 수만 엔은 족히 될 위스키를 마시는 놈이 이런 언밸런 스한 상황에서 나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일 거야, 하고 겐 지는 생각했다. 언어, 말을 선택하는 작업을 대부분의 놈들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국수 를 먹거나, 생선가게에서 꽁치를 사거나, 술을 마시며 농담을 하는 것이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개가 짖는 소리와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그런 식으로 계속 멍멍멍멍 하고 기고 있어 그 동안 나는 너희들에게서 돈 이나 여자를 받아주지. 그러나 지금 앞에 있는 가련한 놈은 돈을 준다고 했으니까, 나의 말을 조금만 가르쳐 줘도 되겠지. 원래는 그럴 자격이 있 는 여자에게만 들려주는 말이지만, 이 놈은 이제부터 배우려고 해 봤자 나 이가 있으니 배우기도 전에 죽겠지만. "여자 따윈 누구든 때릴 수 있지요." 겐지는 천천히 다정하게 말했다. "저는 어린애들도 때리니까요. 단 정당방위일 때만 말입니다. " 정당방위? 무슨 말이야? 하고 시부카와가 물었다. 이런 제기랄, 하고 겐지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 놈은 디스코테크에서 허벅지를 적셔가며 춤추는 양키 여자보다도 못하군. 그 여자들도 지금 내 가 하는 말 정도는 알아듣는다. 어쩌면 이 놈은 말에 굶주려 있는 게 아닐 거야. "여자나 아는 사람이나 어린애를 때리면, 기분이 매우 불쾌해집니다. 그 리고 결국 이기는 건 때리는 쪽이 아니죠. 가령, 여자가 식칼을 들고 덤빈 다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씁니다. 정당방위란 그런 겁니다. 시부카와는 납득하지 않았다. "알기 쉽군, 하지만 그것만으로 커버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 가령 여 자가 계속 울고있고, 술을 마시고, 자신을 잃고 이상해졌을 때는 어때? 자 신의 소중한 여자가 발광 직전일 때, 식칼을 자네가 아닌 자신의 손목에 들이대려고 할 때 말이야." 겐지는 초조함을 억누르기 위해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갑자기 여동 생이 생각난 것이다. 겐지는 여동생에 관한 것이 떠오르면 곧바로 이미지 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훈련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체력이 떨어졌을 때는 곤란하다. 그것만은 아무리 애써도 말과 연결되지 않는다. 여동생의 이미 지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발기하는 것만이 사는 보람인 늙은이에게라도 집중해야 한다. "정말로 죽을 사람은, 아무리 말린다해도, 언젠가 혼자 되었을 때 죽는 겁니다. 또 사람이 발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딴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전혀 딴 사람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겐지가 그렇게 말하자 어린 주제에 네가 뭘 알아, 하고 시부카와가 코먹 은 소리로 말했다. 겐지는 시부카와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정도 정보는 당신에게 전하겠지만, 저는 정보원을 밝히지 않습니 다. 정확한 업무애기를 못하시겠다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청구서 는 나중에 와쿠이 변호사를 통해 보내겠습니다. 이야기를 반정도 들었으니 50만 엔이면 되겠습니까?" 겐지는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옆방의 불이 꺼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시부카와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간 것 같다. "기다려 주게" 하며 시부카와가 다급하게 뒤따라와서는 겐지의 팔을 잡 았다. "모든 걸 자네에게 맡기겠네." 아카사카의 좁은 골목에 있는 오래된 요리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시부카 와는 그렇게 말했다. 이 집에는 여름에도 복어가 있어, 하고 시부카와는 안내해 준 여주인의 얼굴을 보면서 겐지에게 차림표를 보여 주었다. 겐지 는 자라 냄비 요리를 시켰다. 교토에서 딱 한 번 머리가 어찔어찔할 정도로 맛있는 자라 요리를 먹은 적이 있다. 그때는 아야코와 함께였었다. 님포마니아의 편집자인 아야코는 30대 초반으로, 겐지가 데리고 있는 여자 중 한 명이다. 이카사카의 자라 는, 역시 쿄토에서 먹었던 것만큼은 못했지만, 언제나 싸고 더러운 호텔에 가고 싶어하던 아야코의 가늘고 긴 손가락과 손가락에 비해 뭉툭하게 불어 있는 손톱을 떠오르게 해 주었다. "그 놈에 대한 신상명세는 나중에 보낼게. 특별히 복수를 하겠단 건 아 니지만... 어쩌면 그 놈이 나보다 확실히 정력적이란 걸 확인하고 싶은 건 지도 모르지. 놈의 여자를 훔쳐야 할지. 어떤 식으로 매장을 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어. 가능하면 실제로 죽인다거나 어디를 잘라온다거나 하는 거 말고... 말하자면 아주 말살시켜 버렸으면 좋겠어. 아미는 지금 병원에 있 으니까 일단 만날 수 있도록 조치에 두겠네." 표적의 이름은 이시오카라고 했다. 시부카와은 영화의 스파이나 킬러가 받게 되는 그런 파일을 주지는 않았다. "놈은 유명인 이니까 누구나 그에 대해 알고 있어. 예술인 협회 수첩이 나 일본 영화 방송인 수첩 같은데 사무실과 집 주소가 나와 있을 거야." 시부카와는 착수금으로 현찰 삼배만 엔을 스키토모 은행 봉투에 넣어 겐 지에게 건네주었다. 말살, 하고 시쿠카와가 말했다. 이시오카라는 자에게 있어 말살 당한다 는 건 어떤 것일까? 우선 그걸 알아야 했다.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가족 을 해치거나 하지는 말아 달라고 시부카와가 말했지만, 겐지도 그럴 생각 은 전혀 없었다. 그런 쪽의 일은 겐지의 분야와 다른 것이다. 아야코와 상 의해 봐야겠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아야코는 너저분한 그림이 대부분 의 페이지를 차지하는 종합잡지의 편집자로 여러 분야에 친구를 가지고 있 다. 색광이지만 그녀는 비밀과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편이다. 한밤중이었지만 아야코는 전화를 끊은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겐지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겐지의 입술에 혀를 밀어놓고 오른손으로 겐지의 페니스를 우왁스럽게 주물렀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벽 에 손을 댄 자세로 엉덩이를 벌렸다. 자기 손으로 겐지를 삽입시킨 그녀는 허리를 흔들며 교성을 질러댔다. 그렇게 선 자세로 두 번 오르가슴을 느끼 고 나서야 체액으로 끈적거리는 겐지를 깨끗이 닦아주고 지퍼를 올려주었 다. "엄마가 와서 아가를 재워줘서 다행이야." 아야코는 혼자 살지만 다섯 살배기 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 군지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색골이니만큼 여러 남자와 별별 짓을 다하기 는 하지만, 업무상 만나는 소설가나 사진가, 다른 편집자와는 하지 않는다 고 단언한다. 왜? 하고 묻는 겐지에게, 전혀 다른 업종일수록 더 자극적이 거든, 하고 대답했다.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별 의미가 없어." 아야코는 마른 데 비해 엉덩이가 무척 크고, 꽤 반반한 얼굴에다 근시이 며 커트 머리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자신이 님포마니아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난 색광인데도 불구하고 머리가 좋기 때문에 이만큼 해 나갈 수 있는 거야. 아야코가 말하는 색광의 정의는, 언제나 어디서든 또 누구와든 섹스하는 여자가 아니다. 욕망과 이미지와의 관계에 대해 잘 알 고 있는 여자라는 것이다. 세 번이나 섹스를 더 한 뒤에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꼬냑을 홀짝거리며 겐지가 말을 꺼냈다. "이시오카라는 사람 알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긴 한데, 하고 아야코가 말했다. "그 사람 생각하면서 몇 번쯤 자위행위를 했었지." "뭐?" 겐지는 가슴 저 한 구석에서 뭔가가 또아리를 풀고 슬금슬금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쭉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질투심이었다. "그래, 몇 번이나 했었어." 아야코가 다시 말하며 겐지를 쳐다보았다. "겐지가 갑자기 이시오카에 대해 물어서 좀 놀랐어. 나도 모르게 그만 이상한 말을 해서 미안해. 기분 나빠?" "아야코 입에서 자위행위이니 펠라티오니 하는 말이 나오는 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좋을 것도 없어." 겐지는 아야코의 얼굴을 끌어안고 콧등과 입술, 귓볼에 차례로 키스했 다. 겐지는 아야코의 그런 부위를 좋아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커피숍에 서 커피를 마시며 "난 고호보다 세잔이 좋아요" 라고 흉물을 떨다가 훌훌 옷을 벗어 던진 뒤에야 겐지의 페니스를 잡고 " 하고 싶어, 넣어 줘" 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야코는 그렇지 않다. 성욕이란, 입거나 벗는 것이 아니라 자극 을 받으면 피가 한 곳으로 모요 유두가 단단해지듯 단순한 신체현상이라는 걸 아야코는 알고 있다. 아야코는 스스로 색광이라고 말하고 실제로 매달 수차례씩 겐지가 소개 하는 고객과 잔다. 상대의 인격이나 체형, 사회적 배경 따위는 안중에 없 다. 그녀는 마치 테니스 연습 때처럼, 플레이 스타일이 다른 상대와 결전 하면서 투지를 불태워 게임에 전력을 다하듯이, 끝난 뒤에는 녹초가 되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어서 고객들로부터 평 판이 좋다. 겐지는 서른 명 정도 되는 고객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일종의 콤플렉스를 지녔으며 매우 지친 인간들이다. 그들은 에로틱한 관계 를 동경하고 있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 이 요구 되는 지도 잘 안다. 그들은 돈도 있고 멍청이도 아니다. 항상 브로일러 상태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에게 섹스에 필요한 공격성이 부족하다는 것 을 잘 알고 있는 남자들이다. 컴퓨터나 게임 소프트로 성공한 젊은 놈들부터 오랜 해외 근무에서 돌아 온 중간 관리직,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기업의 오너, 일시적이라도 좋으니 돈의 힘을 빌어 공격본능을 되살려고픈 고객들은, 한 달 전부터 아야코와 의 밤을 예약한다. 지금 아야코에게는 한 시간에 15만 엔이라는 몸값이 붙 어있다. -나는 나 자신이 두려워, 얼마나 나를 미워했는지 몰라. 아야코는 자주 그런 말을 한다. -유치원에 다닐 때 난 이미 남자아이들과 몸이 닿거나 아이들이 내 몸을 만지거나 하는 게 기분이 좋다는 걸 깨달았어.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행동이 어른들에게 나쁘게 보인다는 건 몰랐었지. 요시히코라는 아이의 엄 마가 집으로 찾아와서, 아야코 애 좀 이상하지 않아요? 라고 말해도 난 내 자신이 이상하게 여겨지진 않았어... 집 근처 공원에는 타보라는 좀 이상 한 아저씨가 있었거든, 모르는 게 없고 재미있는 아저씨였어. 겨울이 끝나 가던 어느 날 내가 공원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다가와 서는 아랫도리에서 뭔가를 턱 꺼내놓고는 잠깐 치마 좀 올려볼래" 하고 말 하는 거야. 그게 뭔지 유치원에 다니는 애가 알 리가 없잖아. 어딘가 그림 책에서 본 듯한 열대과일의 열매 같기도 하고 할머니가 자주 애기하시던 심장이나 간 같은 것이 타보 아저씨 몸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기도 했어. 신체기관이 섹시하고 말고 할건 없잖아. 그런 신체기관이 바람이나 좀 쐐 볼까 하고 나온 것 같기도 했어. 다섯 살 짜리 여자애가 그런 걸 이해하는 건 무리였지. 다만, 타보 아저씨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건 알 수 있었 어. 본능적으로, 이건 좋은 일이구나 , 뭔가 해줘야 하는 거라면 해 줘야 지 하고 생각했어. 치마를 걷어올리는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 툭 튀어나온 것을 눈앞에 들이밀고는 빨아 줘, 하길래 그렇게 해주면 타보 아 저씨가 더 좋아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지. 치마 속으로 아저씨의 손이 들 어와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런데 시골 노인네 주제에 시조 같은 걸 지어 서 신문에 투고하는 시시한 할망구가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그 꼬장꼬장한 할망구가 타보 아저씨와 내가 하는 짓을 처음부터 다 보았던 거야. 순식간 에 나는 앞날이 염려되는 문제아 신세가 돼 버렸어. 일주일인가 열흘인가 병원에 가서 거기를 씻어야 했고,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우리 엄마는 마을 사람들에게 개망신을 당하고 시달림을 받았지. 엄마도 울고 나도 따라 울 었어. 하지만 난 타보 아저씨에게 감사하고 있어. 적어도 그 아저씨는 나 한테 무섭게 하거나 아프게 하지 않았거든, 나를 아프게 하고 무섭게 한 건 그 일이 알려진 후의 마을 사람들의 태도였지.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내가 도와주거나 나로 인해서 모든 걸 잊을 정도로 남자가 기분이 좋아진 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매우 나쁜 짓이라는 걸 알았 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해서 상대가 변하거나 위 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미워하기로 했어. 너무 괴로웠었지. 어떤 경우든 자신을 미워해서는 안돼. 다른 사람들이 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야코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 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꾼 셈이다. 그 과정에서 아야코는 언어를 획득해 갔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과 똑같다고, 겐지는 생각했다. 나와 아야코는 같은 부류의 인간이니까, 적어도 우리는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런 별종은 아니다. 아니 우리에게 돈을 지불하고 우리다움을 보여달라는, 세 상에서 성공했다는 놈들이 많이 있다. '세상' 이라는 말에 생각이 미치자 겐지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어졌고 이 윽고 분노와 초조의 감정으로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세상..., 하고 겐지 는 중얼거린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세상, 그 모든 것이 나의 적이다. 자 신의 생태계를 모두 적으로 삼는 맹수처럼, 나에게는 세상이 적이다. 그리 고 아야코 같은 여자는 동지가 되는 것이다. 결성된 지 얼마 안 된 비합법 적인 게릴라 조직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동지인 것이다. "겐지, 당신 지금 질투했지?" 아야코가 일어나서 검정 슬립을 입고 꼬냑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겐 지는 트렁크를 입으며 응, 하고 인정했다. "질투라는 감정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어떤 것인가 하고 내내 생각했었 어." "그래 어떤 것이었는데?" "아야코는 남자 누드 사진집이나 거리에서 지나친 지하철 노동자나 그런 것들로 자위행위 대상을 삼겠지?" "아니면 두 자리수 IQ의 보디빌더나 털 뽑은 오랑우탄 같은 애들이지, 맞아, 내 자위행위 대상은 그런 개념의 남자야, 하지만 겐지를 떠올리며 할 때는 달라, 이시오카란 사람은 뭐랄까, 개념 덩어리 같은 거지만, 오랑 우탄은 아냐. 당신, 처음 만났을 때, 그날 밤에 애기 많이 했잖아." 아야코는 이키라와의 해변에서 만났다. 저마다 파트너가 있었고 사교적 인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었는데도 동지애를 느끼며 아야코가 겐지에게 전화 번호를 살짝 건네주었다. 도쿄로 돌아와 처음 만난 날, 그들은 밤새 술 마시며 섹스를 하고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령 남자가 여자 에게 펠라티오를 요구할 때, 체력과 욕망 외에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였다. "이시오카를 만난 건 그 사람 사무실로 쓰고 있는 호텔 방에서였어. 카 메라맨과 조수를 데리고 만났는데 그 사람 앞에 다가서는 순간, 모든 것이 거기에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를테면 여자에게 펠라티오를 요구할 때 필요한 그런 뭔가가 다 있다고 할까... 나는 아마 그것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 같아 인터뷰는... 그 때 내 자신이 바보가 아닌가 하고 자 기 혐오에 빠질 정도로 아주 엉망이었어." 겐지는 아야코가 하는 일을 잘 모른다. 아야코가 일에 관해서 거의 말하 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편집자라는 말에서는 원고를 주무르는 느낌이 든다. 초등학교 때, 학급신문을 만드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신문에서 오린 것을 붙이기도 하고 만화를 그리기도 하고 시도 싣곤 했다. 겐지는 물론 그런 녀석들과는 달랐다. 편집자 하면 학급신문을 만들던 녀석들이 떠오른 다. 아야코는 게다가 인터뷰도 하는 모양이다. 아야코는 냉장고에서 올리브 통조림을 찾아내 접시에 담아서는 포크로 찍어 먹었다. 여전히 검정 슬립 차림이었고 그 아래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 이런 슬립이 어울리는 여자는 더 이상 없을 거야, 하고 겐지는 생 각했다. 겐지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고객들은 이런 여자를 소유하고 싶어한 다. 그러나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언제나 거지같은 여자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겐지에게 의뢰가 오는 것이다. 거 지같은 여자란 세상에 기대는 여자다. 세상 그 자체가 똥이니까 거기에 기 대는 여자도 똥 투성이다. 아야코의 피부는 팽팽하지 않다. 흰 편이지만 다리가 길지도 않고 엉덩 이의 탄력도, 가슴의 크기나 모양도 모두 보통이다. 작은 유두는 평평하 다. 그렇다고 그녀가 님포마니아라서 에로틱한 것은 아니다. 그녀 자신을 인정하고 또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녀를 에로틱하게 한다. 검정 슬립은 그 상징이다. 바로 조금 전 펠라티오로 사정했음에도 불구하 고 검정 슬립 속으로 비치는 아야코의 엉덩이는 다시금 겐지를 흥분시켰 다. "인터뷰라고 하면 어떤 테마가 있겠군?" 겐지도 테이블에 앉아 올리브를 입에 던져 넣으며 물었다. 그는 냉장고 에서 올리브만은 떨어뜨리지 않고 채워둔다. 올리브는 예전부터 흥미의 대 상이었다. 목도를 휘두르고 이모 집을 나왔을 무렵 세이부 신주쿠선이 다 니는 싸구려 단칸방에서 겐지는 처음으로 올리브를 먹었다. 올리브의 묘한 모양은, 어떤 맛이 날까 하는, 두근대는 기대감을 자아냈다. 시고 약간 비 릿한 냄새는 섹스로 땀을 흘린 여자의 질 냄새와 비슷했다. 올리브는 기대 를 저버리지 않는다. 올리브는 지중해가 본 고장인 것 같다. 음악 그 자태 가 울린다는 모나코 근방의 해안도 지중해에 접해 있을 것이다. "글세 테마라면, 특집 인터뷰랑 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시오카는 자 신이 영화에 관한 것이었어. 이시오카 영화 본 적 있어?" 없다. 이시오카라는 이름도 몰랐다. 일본에서는 별로 영화를 만들지 않 는다고 의뢰인도 말했었다. "처음엔 광고를 찍었었어. 화제가 되긴 했지만 광고 감독 같은 놈들, 전 부 쓰레기야. 난 그런 놈들 보단 분재 기술자나 공원 애들이 강해서 좋아. 이시오카는 싱가포르에서 광고를 찍고 있었어." "그건 몰랐는데, 돈이 되나?"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같은 곳엔 일본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잖 아. 일본 TV의 인기프로를 케이블 방송으로 판다거나 하는 것처럼 일본 사람을 상대로 한 돈벌이가 있대. 해외에 있는 주부들은 무척이나 따분해 있을 테고 돈이야 회사에서 나오는 거니까 계약금이 3백 달러든 5백 달러 든 전부 계약을 하거든, 그래서 약삭빠른 장사꾼들이 큰돈을 벌고 있는 거 야." "이시오카는?" "그런 케이블 방송국에서 광고를 내보내기로 해서 이시오카가 광고를 찍 기 시작했다는 거야. 방송국 직원은 아니었고." "쭉 싱가포르에 있었나?" "가끔 일이 없고 해서 싱가포르에 놀러갔을 때 대학 동창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거기서 케이블 방송국을 하고 있었대." "그게 몇 살 때 일일까?" "20대 라고 했어, 초반이나 후반이니 그런 말은 없었어. 싱가포르가 좋 아졌어요? 하고 물어도 후카히데와 북경데크는 좋았지, 하는 엉뚱한 대답 을 늘어놓더군. 엉뚱한 대답을 해도 너무 귀여운 남자였어." "계속 싱가포르에 있었을까?" "그게 아니고, 그리고 하와이에 갔다가 마지막으로 LA에서 성공했어." 싱가포르, 하와이,LA라고/ 왠지 평범한데? "하와이와 LA에서도 케이블 방송국 일을 했는데, 예전부터 8밀리로 쭉 찍어오던 어떤 비디오를 대학에서 열리는 영화제 같은 데다 냈더니 1위를 하게 됐다던가, 그게 계기가 되었다고 즐거운 듯 말했으니까." "그때가 몇 살이었을까?" "왜 이렇게 꼬치꼬치 묻지? 아직 20대였다고 했던 것 같애. 그 비디오 나도 봤는데, 굉장하다고 해야 하나 어쩌나, 으음, 정말 굉장한 것이었 어." 아야코가 왜 그렇게 꼬치꼬치 묻느냐고 해서, 겐지는 움찔했지만 쓴웃음 으로 얼버무렸다. 겐지는 목도를 내리치고 난 후의 몇 달 동안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이 모 집을 나와 처음으로 여자를 키우게 되었던 해, 아야코와 만난 해, 그해 에 읽은 책도 기억하고 있다. 그 책은, 어떤 관계를 벗어나갈 때 누구나 최악의 상황을 경험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 최악의 상황이 심각 하면 심각할수록 스트레스는 가중되므로 그 속에서 빨리 벗어날수록 좋다. 뭐 그런 애기였다. 경험과 정보량은 반비례하여 체력은 떨어져가기 때문이 다. "그 비디오를 봤다구?" "응, 인터뷰하기 전에, 호텔방 대형TV모니터와 오디오 장치, 편집기 따위를 죽 늘어놓고 이시오카가 보여주었어. 제일 오래된 내 작품을 보겠 냐고, 겸연쩍게 말하며 보여줬는데 소름이 끼친다는 말을 오랜만에 떠올렸 지 뭐야." "포르노였나?" "아니, 예술적 소품인데, 설명하기가 어려워. 우선 시커먼 쓰레기 봉투 가 클로즈업되어 있어. 장소는 한적한 창고 같은 곳인데 별로 중요한 거 같진 않아." "맞아." "안에는 쓰레기가 들어 있고?' "봉해져 있다고 할까, 입구가 묶여 있어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 뭔가가 가득 차 있다는 건 알 수 있지만 무거운지 가벼운지 짐작이 가지 않아. 그런데 그게 끈에 매달려 있었거든 처음엔 정지해 있다가 천천히 흔 들리기 시작했지." "음악은?" "없었어." "컬러인가?" "아니, 왜 여러 번 복사한 테이프 화질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 겐지는 매달린 검은 쓰레기 비닐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하는 상황을 상상하자 갑자기 올리브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뭔가가 목에 걸려 있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엄습했다. 그런 것은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교수형 당한 빨치산의 시체, 낚시에 걸려 갑판에 매달려 있 는 고래, 도살한 뒤 피를 빼기 위해 매달아 놓은 동물들, 그것들의 실루 엣... 요컨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 것, 그 부동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필름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비닐 봉지라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소품 을 이용하여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검은 비닐 봉지가 계속 흔들리고 있었나" 겐지는 불쾌한 느낌을 억누르며 아야코에게 그렇게 물었다. 꼬냑을 반 잔 정도 마시고 반 다스의 올리브를 먹은 아야코의 눈에 물기가 반질거린 다. 꼬냑은 레미 마르탕의 나폴레옹으로, 해외 여행객이 면세점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는 뻔한 것이다. 귀한 술을 고마워하며 마시는 습관이 겐지 에게는 없다. 아야코는 겐지를 애무하고 싶다는 듯 손가락을 입에 가져간다. 아직 여 유는 있다. 정말로 하고 싶어진다면 그녀는 암사자처럼 변하여 겐지의 항 문을 더듬으며 덤벼들 것이다. "그걸로 영화가 끝난 거야?" "아니." 아야코는 올리브 세 개를 마치 펠라티오를 하듯 빨아가며 입에 넣었다. "계속돼. 이상한 건, 그 단편영화를 떠올리면 남자를 원하게 되는 거야. 영화는 계속 이어지는데 등장하는 건 전부 쓰레기 뿐이야. 검은 비닐봉지 가 흔들리잖아. 그러면 그게 트럭용 낡은 타이어에 부딪혀. 타이어가 데굴 데굴 굴러가서 비탈길을 올라가. 비탈길은 이렇게 시소처럼 기울어져, 차 이어가 오르면 저쪽에 있던 망가진 공이 툭 하고 튀면서..." "망가진 뭐?" "공 말이야, 너덜너덜하고 공기가 다 빠진 농구공 같은 거. 그게 툭 하 고 튀어. 공은 녹슨 드럼통이 넘어지지 말라고 받쳐둔 쇠파이프에 부딪혀. 그 쇠파이프도 덕지덕지 녹이 슬어있지." "잘 기억하고 있는데?" "뭐야? 겐지가 이시오카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해서 애써서 기억을 떠올리 고 있는 거잖아." 아야코는 여전히 올리브를 빨고 있다. "쇠파이프가 빠지면서 드럼통이 넘어지자, 드럼통에 붙어있던 못 달린 판자가 쓰윽 올라오고, 복서가 연습할 때 때리는 거 있지?" "샌드백?" "그게 못에 찔러 구멍이 나고 모래가 주르륵 쏟아져, 그 샌드백도 이미 너덕너덕해진 것이었지. 모래는 바닥의 더러운 종이뭉치를 타고 흘러내려 미네랄워터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병을 넘어뜨리지. 안에 있던 썩은 물이 바닥에 흐르는 거야. 일부러 오랫동안 썩힌 물처럼 탁하고 기분 나쁜 거품 까지 떠 있었어. 그런 물이 든 병이 도미노처럼 차례차례 넘어지고 넘친 물이 기세 좋게 바닥을 흐르는 거야." "학생들이 작은 장소를 임대해서 상영하는 그런 영화는 잘 몰라서 말이 야." 겐지가 중지와 검지로 올리브를 쥐고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이 겐지가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니 무척 오랜만의 일이군. 지금 나는 이시오카가 만든 비디오를 머릿속에서 정리해 내기 위해, 바이올린을 켜는 여자와 올 리브 과일을 먹었던 때를 생각해 본다. 여덟 살 연상의 여자와 사귄 적이 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연하의 남자를, 이 남자와는 주로 섹스를 나누 는 관계예요, 하고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삼사십대 여자들이 증가하고 있 지만 그런 여자들의 선구자 같은 사람이 바로 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 바이올리니스트 여자친구의 애인이 빈인가 어디로 간다고 해서 겐지가 운 전사를 겸해 나리타까지 같이 가기도 했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정말 존경할 만한 여자로, 카프카나 쥬네, 바타이유 같은 소설가들의 책에서 항문섹스까지 여러 가지를 겐지에게 가르쳐 주었 다.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고 가르쳐 준 것도 그녀였다. 그녀의 친구는 성악가였고 빈인가 어딘 가로 여행을 떠난다는 그 애인은 방송국 직원이었다. 회원제 스포츠클럽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겐지는 여러 면에서 다른 세 사람과 달랐다. 패션이나 매너, 시선과 말하 는 것, 그리고 걸음걸이조차 달랐다.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 허리를 굽혀서는 안돼. 거짓이라도 좋으니까 가슴을 펴고 상대와 이야기할 때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란 말야. 바이올리니스트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 다. 성악가가 방송국에 다니는 남자를 배웅한 뒤, 셋이서 공항 옆에 있는 호 텔 바에서 드라이 마티니를 몇 잔 마셨다. 성악가는 계속 울음을 터뜨리 고, 바이올리니스트가 계속 달래고 있었다. 그때의 바이올리니스트의 말은 겐지의 머릿속에 소중하게 기록되어 있다. -만약 진심으로 상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일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바이올리니스트는 몇 번이고 성악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겐지는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 준 여자가 진실된 말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친구를 위로하는 것을 경청하며 올리브를 베어먹고 스무 잔의 드라이 마티니를 마셨다. 멋진 밤이었다. 겐지는 올리브를 중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집어먹으며 세 티멘탈한 기분을 떨치기로 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원인은 이시오 카가 만든 비디오다. 매우 불쾌하게 만드는 비디오지만, 무시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겐지도 영화라면 꽤 좋아하잖아. 어려운 영화도 잘 보고 옛날 영화도 모르는 게 없잖아? 이시오카가 만든 비디오는 학생 작품 따위완 사정이 달 라." 아야코는 생각에 골똘한 겐지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영화야 누구나 좋아하지." 겐지는 집게손가락으로 올리브를 굴리며 말했다.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영화다. 때문에 영화를 좋아한다고 떠 벌이는 놈은 멍청한 녀석이다. "그런 건 상관없어. 요컨대 이시오카는 진짜라는 사실이야. 나는 그 비 디오에 오싹해졌지만, 뭔가 강한 것을 느꼈기 때문에 , 일부러 바보 같은 질문을 해 봤어." "바보 같은 질문?" "지금 이 비디오의 테마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본 거야." "뭐라고 했는데?" "테마는 죽음이다, 하고 대답하고는 크게 입을 벌리고 웃었어. 나도 엉 겁결에 웃었지만 그런 남자였어." "그 밖에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나?" "주요 활동 무대는 LA지만 헐리우드 스타일의 영화가 아니니까 일본에 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어. 일본인들은 왜 해외에서 활동한다면 덮어놓고 좋아하잖아. 그래도 두 편인가 레이저디스크로 만들었을 거야. 작년에 한 편이 시네하우스에서 4개월 동안 롱런했을 거야. 아마, 내가 인터뷰했던 것도 그 무렵이니까." "난 모르겠는데, 어떤 영화였지?" "아주 사적인 느낌의 <크라이스>라고, 삼각관계 이야기인데, 일본 여자, 동유럽 남자, 그리고 흑인이지 아마, 출연자가 그래, 굉장한 장면이 있다 고 해서 화제가 됐잖아. 흑인하고 일본 여자의 섹스신인데. 몰라?" 겐지는 고개를 저였다. 최근 2년 동안은 통 영화를 보지 못했다. "정말 리얼했어. 그 흑인 남자 그게 너무 커서 들어가질 않는 거야. 여 자가 아파하니까 흑인도 포기하지만 말이야. 여자가 새까만 흑인의 페니스 를 만지작거리며, 이걸로 비벼도 돼? 하고 물으면서 시작해. 물론 극장에 서는 안개 처리했지만, 뭔가 시커멓고 딱딱한, 커다란 것에 여자가 올라타 몸을 뒤로 젖히며 허리를 흔들자. 처음에는 부끄러운 듯하다가 점점 대담 해져서 급기야는 소리를 지르면서 노를 젓듯 흔드는 거야. 굉장히 파워풀 한 장면이었어.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아. 잔혹하고 어두 침침했지만 뒷 부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이상하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이시오카라는 자에 대해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아야코가 여러 가지 사실을 말해 주었고, 작품까지도 자세 하게 설명해 줬다. 그러나 지금까지 뭐 하나 알 수 있는 게 없다. 어떤 이 간에게든 약점이 있다. 본인과 가족의 생명 같은, 그런 것이다. 때문에 시 시한 TV드라마라도 주인공의 어머니가 죽거나 하년 무심코 눈물을 흘리 는 것이다. 말살해 주게, 하고 시부카와는 말했다. 지금까지 별별 일을 다 해왔다. 그 대부분은 비합법적인 공갈이었다. 폭력배들과 짜고 여자를 이용하여, 부정하게 모은 돈을 어디 써야 할지 모르는 멍청한 놈들의 주머니를 털어 왔다. 그런 가련한 놈들, 돈에 의지하지 않으면 사정도 못하는 놈들은 죄 다 쓸어 버려야 할 정도로 많았으며, 일은 간단하고 쉬웠다. 시부카와도 변호사로부터 그런 겐지에 대한 평판을 듣고 이시오카 건을 의뢰했을 것이 다. 겐지의 무기는, 우선 뭐든지 시키는 대로하는, 말 잘 듣는 여자들뿐이 다. 이시오카는 주식이나 부동산, 그리고 매매에 흥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폭력배 손을 벌려도 별 의미가 없다. 말살이라는 것은, 필시 이 시오카의 프라이드를 뺏어달라는 애기일 것이다. 프라이드와 함께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모조리 잃게 된다면 더욱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시오카 의 프라이드의 질을 알아야 한다. 이시오카라는 인간을 모르면 안 되는 것 이다. 큰일이군, 하고 겐지의 무릎에 다리를 얹었다. 아야코의 발가락을 애무 해 주며 겐지는, 이시오카에 대해 좀더 애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밖에 어떤 것을 인터뷰했어? 이시오카는 부자인가?" "난, 겐지가 하는 일에 일체 간섭 안 하려고 했지만, 이시오카를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아마 어려울 거야. 말릴 생각은 없지만..." "전화로는 자세히 말을 못했지만 이시오카가 자기 여자를 완전히 망쳐놓 았다는 놈한테 부탁 받았는데, 그 망쳐놓았다는 게 결혼을 빙자해서 데리 고 놀다가 차 버리는 수준이 아니야. 이시오카라는 자는 돈이 많겠지?" "호텔 스위트 룸을 사무실로 쓸 정도니까, 가난하진 않을 거야." 갑부라도 돼? 겐지가 그렇게 묻자, 아야코는 빨간 페디큐어를 칠한 발가 락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짧게 웃었다. 이렇게 근사하게 발가락을 꼬는 여 자는 없을 거야,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돈은 필요한 거지만, 돈만 본다면 부루네이나 산유국 사람들이 제일 낫 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힘은 그런 것이 아니야. 우선, 이시오카에 겐, 다른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프라이드가 있어." "어떤 일?" "계속 외국에서 산 건 아니지만 해외에서 꽤 흥행하는데 마다 많은 영화 제에서 수상도 했고 이미지도 좋아. LA 영화계 사람들과 친분도 있고, 뉴욕 패션계라든가 브로드웨이에서, 또 일본에서 인기를 끌만한 정보원들 을 모두 손에 쥐고 있지. 이시오카가 팔려고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큰돈 을 벌 수 있을 거야. 거품 경제도 무너지고 해서 외국의 맛있는 부분을 일 본에 가져오기만 하면 뭐든지 좋아하는 분위기 는 사라졌으니까. 이시오카 가 갖고 있는 정보는 중요한 거야." "이해하기 힘들군.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 줄 수 없을까?" "일테면, 몇 년 전만 해도 이 백 억에 르느와르를 사는 것이 가능했잖 아. 멍청하단 소릴 듣지만, 돈은 있으니까 말이야. 지금은 그런 일을 못하 지. 그러니까, 지금은 무명이지만 2,3년 뒤에는 반드시 메이저가 되는 것 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중요해졌지. 미국과 유럽에서 돈고생하며 영화 를 만들었던 이시오카에겐 그런 확실한 정보가 있다는 거야. 물론 재능도 있지만, 인맥이 대단해." "그래서, 인터뷰한 날 밤, 자위행위를 했나?" 겐지가 발가락 사이를 문지르며 묻자, 아야코는 그녀답지 않게 수줍어하 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좋은 놈인가? 이해하기 어려운데?' "좋은 남자라니, 겐지답지 않은 말이네. 좋은 남자? 요즘 오랑우탄 같은 타입이나 인형 같은 타입 아니면 거의 없잖아. 이시오카는 그 어는 쪽도 아니기 때문에 내 가슴이 설렌 거야. 맞아, 참고가 될지도 모르니까 가르 쳐 주겠는데, 만나고 나면 이시오카를 굉장히 싫어하는 여자도 있어. 카메 라맨을 하고 있는 내 친구는 이시오카 사진을 찍은 모양인데,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다고 말했어. 반면에 딱 한 번 만났는데 밤중에 몇 번이고 그에 게 전화를 했다는 여자도 있었어. 그 애도 내 친구였는데, 이시오카랑 두 세 시간 같이 술을 마셨을 때. 그 애가 먼저 호텔에 가고 싶다고 유혹했었 던 것 같애. 모두들 얼마나 놀랐는지. 갠 좀 딱딱한 애였거든. 그리고 이 시오카가 거절하니까 그 후에 몇 번이나 전화를 했던 모양이야. 못생기진 않았어. 꽤 유명한 아나운서였으니까." "이시오카는 왜 거절했을까?" "이시오카가 쉽게 얻어지는 건 가치가 없다고 말했대." 쉽게 얻어지는 것은 가치가 없다. 마치 옛날 TV명화극장에 나오는 미 국영화의 대사 같다고 겐지는 생각했다. 아야코가 돌아간 것은 새벽녘인 5시였다. 아무리 늦어도 아야코는 반드 시 집으로 갔으며 자고 가는 일이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 눈을 떴을 때, 꼭 옆에 있어 주고 싶다고 했고 겐지는 그런 아야코가 좋았다. 아야코의 냄새가 남아있는 침대에 겐지는 혼자 누웠다. 시트는 아직 마 르지 않아 여기 저기 차가운 감촉이 남아 있다. 겐지는 부드러운 쿠션이 들어 있는 베개를 두 개 겹쳐 베고 잠을 청한다. 낮은 베개는 잠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베개가 낮으면, 피가 역류되어 무거운 것이 들어올려지는 느낌이 든다. 아야코는 이시오카에 대해 말하다가, 또 이시오카가 만든 영화 이야기로 묘하게 흥분이 되었는지, 클리토리스를 자극하고 싶어했었다. 당신 건, 영 화에서 본 흑인 것보다 길지 않아. 길진 않지만 너무 좋아. 아야코는 겐지 를 쉴새없이 애무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겐지는 줄곧 이시오카에 대해 생 각하고 있었다. 이시오카라는 놈은 항상 이런 짓을 하고 있을까? 가령 L A나 뉴욕에 사는 변태 놈들한테서 듣기만 한 걸까? 쉽게 얻어지는 것은 가치가 없다, 하고 겐지는 아야코의 충혈된 클리토 리스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내가 이용해 먹는 이 세상에서 그런 역겨운 대사는 배설물에 불과하다. 그건 조금만 참고 있으면 좋은 일 이 있을 거야, 뭐 그런 너저분한 충고를 할 때나 쓰는 말이다. 열심히 공 부해서 좋은 점수를 따면, 네가 갖고 싶어하던 농구공을 사 줄게, 하는 것 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시오카는 아마 아닐 것이다. 아야코의 친구라 는 그 여자 아나운서가 어떤 타입인지 모르지만 그 아나운서는 그녀 나름 대로, 단지 술기운을 빌어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유혹했을 것이다. 여자들이란 유혹을 할 때도 얼마나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가? 말을 돌려 서 한다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심 야 택시의 뒷 자석에 동승한 취한 남자의 어깨에 기대며, 오늘 들어가고 싶지 않아, 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화석이 되어 가라오케 안에나 살아 있다. 나 갖고 싶지 않아? 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건 가슴둘레가 90 정도 되고, 금발 머리에 가랑이 사이가 10센티미터 이상 되는 외국 여자의 대사다. 아나운서는 뭐라고 말했을까? 겐지는 시트에 생긴 얼룩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생각했다. 꼭 오늘밤이 아니라도 괜찮지만, 제가 당신에게 안기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화장, 옷, 구 두, 그리고 속옷 모두가 그 말을 하기 위해 준비된 것들이다. 그러자 이시 오카는 말했다. 쉽게 얻어지는 것은... 그런 상황일 때면 꼭 영화에나 나 오는 격언이 그럴듯하다. 여하튼 이 놈은 아이디어가 뛰어나다. 겐지는, 이시오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자신이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오래된 이야기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창 싸우 던 때, 결국 집을 나가 버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매일 화를 냈었다. 재미 있는 일이 없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머니를 미워하진 않지만, 재미있는 일이 없어, 라는 말은 틀렸다. 그 때 어머니는 쉬운 일이 없어, 라고 했어 야 했다. 겐지는 자기 전에, 여느 때처럼 머릿속에서 모든 음악을 내보내기로 했 다. 모든 음악을 내보내는 비결은, 자신이 자신을 위한 자장가를 흥얼거리 면 된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는 음악이 아니다. 겐지는 택시를 이용해서 시부카와가 가르쳐 준 병원에 갔다. 아사가야인 가 하는 곳 근처였기 때문에 주차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사가야였 는지 코엔지였는지 잊었지만 여자를 기르기 시작했을 무렵, 한 명이 그만 임신을 해 버려서 당시 가지고 있던 캐롤라를 타고 병원까지 간 적이 있 다. 아직 신참이었던 그 여자는, 고객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고 피 임약도 안 먹고 콘돔을 사용하지도 않아 임신을 한 것이다. 겐지의 말에 주의하지 않은 결과였다. 고객은 이따금 도쿄로 출장 오는 , 오카야마에 개업한 정신과 의사였는데, 다른 동료 의사들로부터 소개받아 이제 막 겐 지의 좋은 고객이 되어 가던 참이었다. 여자는, 처음에는 굉장히 어른스럽지만 일단 친해지고 나면 응석을 부리 는 전형적인 파더 콤플렉스 타입의 여대생이었다. 히스테릭해지면 불을 지 르거나 창문 밖으로 물건을 집어 던져서 걷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철저히 희생되거나, 상대가 희생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희생의 크기로밖에는 자신을 확인할 길이 없는 타입이었다. 그녀가 유명한 사립대학에 다니고 술버릇도 나쁘지 않고 남자라면 누구 나 끌릴 정도로 굉장한 미인이었기 때문에 겐지는 자신의 여자로 키웠지만 2년 반 동안 내낸 골탕만 먹었다. 임신 중절에 대해서 설득하자, 여자는 오카야마에 있는 그 의사 놈을 찾아가서 협박하고 돈을 받아내야 한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당신도 악당으로 살고 있다면 그 정도는 해야 된다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칼을 휘두르고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기도 했다. 아빠, 내 말 좀 들어봐, 나 지금 야쿠자한테 속아서 그 자식한테 와 있는데, 아빠 그 놈이 있잖아, 날 다른 남자한테 소개해 주고 돈을 받은 거야. 근데 나, 지금 애가 생겨 버렸어, 그런데 애를 지우라는 거야, 하고 쿠슈 사투리로 말하기 시작했 다. 정말로 자기 집에 전화를 했던 것이다. 여자가, 바꿔 달래, 하고 수화기를 건네주어 겐지는 여자 아버지의 목소 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성함은 모르겠지만, 제 딸자식이 한 말이 사실입니 까? 하는 쿠슈 사투리가 들려왔다. 겐지는 어이가 없어 즉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당장 쫓아와서 딸이든 나든 두들겨 패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그 는 생각했다.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울더니 정신을 잃고 전신 경련을 일으켰다. 겐지 는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계속해서 때려댔다. 고통과 공포 때문에 일단 울음을 그친 여자는 아픔이 어느 정도 가시자 아 빠도 날 때린 적이 없는데, 하고 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여자에 게 낙태를 결정하게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한 여자를 캐롤라에 태워 중앙선 근처 의 산부 인과까지 데리고 갔는데, 세 대밖에 댈 수 없는 주차장은 이미 차 있었고, 게다가 그곳은 교통이 복잡한 곳이었다. 차를 세워두고 올 테니 혼자 갔다와, 라고 하면 여자가 다시 폭발할 것 같아 겐지는 병원 근처를 빙빙 돌았고 그러는 사이 여자는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그 날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 여자와는 돈으로 끝났다. 돈을 받으면서 여자가, 저기 앞으로도 섹스 만은 해 줄 수 없어? 라고 말하길래 겐지는 뺨을 갈기고 이 백만 엔 짜리 돈 다발을 여자의 낯짝에 내던져 버렸다. 이게 네 몸값이야. 보수도 아니 고 법률이 정한 것도, 네 권리도 아냐. 너라는 인간의 가치야. 평생 부끄 러워하면서 살아. 그 이후로, 중앙선 근처의 병원에는 택시로 다니기로 했다. 신경증 치료 센터라고 하길래 숲에 쌓인 조용한 장소를 상상했었는데 의외로 주택가와 상점가 사이에 있는 8층 맨션에 들어 있었다. 새로 지은 듯한 빌딩이었다. 1층에는 빵집과 미용실이 있고, 2층에는 재 즈 스쿨, 3층이 세무사 사무실, 그리고 4, 5, 6층을 사이코 메디컬 연구소 가 차지하고 있다. 7층은 사진가 몇 명의 사무실이 있고, 8층에는 아마도 건물주가 살고 있을 것이다. 현관에 들어서자 관리실에서 우스꽝스러운 제복을 입은 영감이 개가 헤 엄을 치는 듯한 자세로 나와서는 예약은? 하고 물었다. 제복은 전시에 입 는 경관복 같은 것이었다. 겐지는 영감의 하는 양이 우스워서 무슨 양식을 본뜬 것인지 모를 콘크리트 현관이 울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네, 그렇습니다. 젊은 남자입니다. 그쪽 환자 분을 면회온 것 같은데, 예약은 된 거지요? 네? 아, 잠시만요. 저, 누구를 만나러 왔습니까?" "사쿠라기 아미라는 여자입니다." 영감이 인터폰으로 확인하는 동안, 겐지는 여동생을 보기 위해 병원에 갔던 때를 생각했다. 여동생이 입원해 있는 곳은 이런 건물이 아니다. 홋 카이도 아사히카와에서 뚝 떨어진 외진 곳에 자리한 낡고 오래된 단층의 목조건물이다. 홋카이도가 좋다고 한 것은 여동생이었다. 겐지가 돈을 지 불하자 8년 전에 그곳에서 데려갔다. 여동생은 비행기도, 홋카이도도 처음 이었다. 겐지는 해마다 육 백만 엔 정도 되는 돈을 그 병원에 보내고 있고 여동 생은 가끔 아스파라거스나 양파를 택배로 보내준다. 병원에 물어보니, 그 곳 사람들에게 자수를 떠주고 그 값으로 야채를 받았다고 했다. 1년에 두 번 정도 겐지는 여동생을 만나러 간다. 아미라는 여자는 5층 독실에 있었다. 사이코 메디컬 연구소는 , 4층이 접수창구, 단체 세라피실, 개인 세라피 실이라고 씌어 있고, 5층, 6층이 장기 입원자의 독실로 되어있는 것 같았 다. 그러고 보니 엘리베이터의 5층, 6층 버튼은 없고 열쇠를 꽂도록 되어 있었다. 겐지는 미국 소설에서 이런 곳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그 소설에서는 안내 데스크의 여자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깨물고 싶을 정도의 대단한 미인이었고, 티베트에서 돌아왔다는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장신의 세라피스 트가 집단살인의 범인이었다. 이곳의 안내 데스크는, 평범한 중년 여자였는데 백화점 바겐세일 때 마 련한 것 같은 한 벌 짜리 노란 색 정장을 입고 지나치게 하얀 얼굴 화장을 하고 있었다. 진주 네크리스를 한 그녀에게 겐지가 말을 걸었다. "여기 입원해 있는 사쿠라기 아미라는 여자를 만나러 왔는데요..." 겐지는 체르더의 회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이 옷을 사 준 여자는 원래 스튜어디스였는데 지금은 긴자인지 신바인지 그 쪽 근처에 있는 굉장히 호 화로운 호텔의 콘셰르제를 하고 있다. 겐지는 그다지 키가 크지 않고, 축 구선수로 말하면 발이 빠르고 공격적인 선수 타입이어서 브랜드 옷이 아니 면 어울리지 않아, 하고 말하곤 하는 여자였다.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나오는 슈트는 있잖아, 스타일은 그린 좋지 않지 만, 일 잘하는 남자의 옷이야. 그러니까 몸이 호리호리한 남자가 젊어 보 이려고 차려 입으면 꼭 외근직 영업사원처럼 돼 버리는 거야. 전직 스튜어디스에다가 지금은 콘셰르제인, 모든 면에서 희생적인 그녀 로부터 겐지는 이미 여덟 벌의 슈트를 선물 받았다. 안내 데스크의 여자는 겐지를 보고 쑥스러운 듯 저, 저희들은 입원이라 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다. 여자는 말쑥한 슈트에 눈이 날카롭 고 야간 긴 앞머리가 살짝 얼굴에 내려온 서른이 될까 말까한 남자가 취향 인지, 뚫어지게 바라보는 겐지를 외면하며 시선을 돌렸다. 얼굴을 허옇게 칠해서 붉어져 보이는 것은 목 언저리뿐이었다. "여기는 병원이 아니예요." 대학 합창부처럼 기분 나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더블 슈트를 입은 세 라피스트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빙긋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지만, 그는 소설 속의 묘사처럼 핸섬하지도, 살인마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네, 시부카와 선생님으로부터 말씀 들었습니다. 야마가미 겐지씨지요? 이쪽으로 오셔서 앉으시죠." 겐지는 응접실이나 진료실에서 보이도록 만들어진 방으로 안내 받고 푹 신한 건지 아닌지 모를 소파에 앉았다. "이곳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병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야마가미씨 도 면회를 왔다고 할 수 없겠지요? 여기서 당신 같은 분을 뭐라고 부른다 고 생각하십니까?" 팸플릿을 건네주며 세라피스트가 말했다.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은 상 태였다. 겐지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사이코 세라피, 신경치료가 아닙니다. 리플 레시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라고 씌어진 팸플릿을 보고 나서 얼굴을 들고 는 잘 모르겠군요, 하며 거짓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신처럼, 그러니까 외부에서 여기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만나러 오는 사람을, 저희들은 섬바디(sombody)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섬바디, 즉 누군가, 라는 것이지요." 누군가, 하고 중얼거리며 겐지는 다시 거짓 웃음을 지었다. "입원이 아니라, 스테이(stay), 치료가 아니라 리플레시, 면회 오 는 사람을 섬바디, 모든 것이 네이밍으로 시작됩니다. 저희들도, 부모님들 이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인생이 시작되는 거이니까요. 시부카와 선생님의 소개가 있으셨다니까, 물론 섬바디로서 사쿠라기 양을 만나시겠지만, 그 전에 이렇게 저희들의 구조를 이해해 주시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 다. 스테이하기 전, 그것을 저희들은 트레블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트 래블러는 항상 위험한 곳에 몸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한 이해도 부탁드리고 싶은 겁니다." "저, 리플레시라는 게 실제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까?" 겐지가 물었다. "그건 정말 가지각색입니다. 저는LA와 시스코에서 세라피를 공부했습 니다. 그쪽과 가장 큰 차이는 개인을 드러내지 않게 하면서 드러내게 하는 것이죠. 미국에서는 집단이나 그룹으로 철저히 자신에 대해 말하게 하고 자신을 드러내면 또 다른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죠. 결국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하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다릅니다.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신을 그저 여행자라고 생각함으로써 가만히 있어도 어딘 가로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을 주도록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 면, 사우나, 스팀, 마사지, 간단하지만 정말로 맛있는 식사, 여기는 도쿄 시내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해오고 있거든요, 그리고 비디오도 있 구요, 비디오는 자주 사용합니다." 제3장 하모니 "비디오는 매우 체험적인 내용이지만 직접적인 건 아니니까 효과가 좋습 니다. 게다가 대단히 개인적이니까요." 세라피스트는 연 노란 색 셔츠에 가디건을 걸치고 푸른색 바지와 녹색 가죽 슬리퍼 차림이었으며 왼손에 반지를 네 개나 낀 사내였다. 그의 패션 은 편하게 즐기자는 분위기를 연출한 듯했다. 이 병원은 '세상'을 인공적으로 만들고 있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이 자가 하는 말은 논리가 서 있다. 예를 든다면, 분재로서 가치가 없어진 것 을 이제는 보통 나무로 되돌려 줘야 할 판인데도 더 작은 분재로 만들려고 하는 수작과 같다. 듣다보니 생각난 것이지만 겐지는 이런 장소가 더 많이 생겼으면 싶었 다. 보다 더 모호할수록 좋다. 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고 병명은 더더욱 모 른다. 병명이나 치료법은 돈이 되는 정보이므로 그것을 독점한 소수의 인 간들은 그것을 팔아 생활해 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이 연구소에 들어와 있습니까? 물론 이름을 묻고 있는 건 아닙니다." 겐지가 물었다. "아 예, 저희로서도 그 트래블러의 프라이버시는 안전을 기하여 보호하 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일종의 복합상가 빌딩으로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입구에서 확인을 하더라도 몇 층에 가는지 모르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트래블러는 지적 노동자가 많고, 게다가..." 갑자기 세라피스트는 흰 피부의 얼굴에 내내 머금고 있던 미소를 의식적 으로 거두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저명한 분도 많이 계십니다. 이곳은 다른 맨션에 비해 한 층이 넓은 편입니다만 그래도 외국에 비하면 충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스테이하는 트래블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도할 수 있는 공간이니까요. 특급 호텔 의 트윈룸을 기준으로 한 20평방미터의 독실에는 하이비전 영상이 나오는 대형 화면의 모니터 TV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건 아주 특별한 영상이 죠. 시냇물 소리나 산새, 저녁놀처럼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 영상들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확고 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인드 컨트롤에 관한 외국의 연구나 투자 에 비할 바 아니지만 시스코에서 세라피용으로 특별히 제작 편집된 영화들 을 제가 직접 구입해 온 겁니다. 보세요, 영어학자를 위해 읽는 영어소설 이 있잖습니까? 그런 식으로 마인드 컨트롤용의 영화라고 생각하시면 되 죠. 미국이나 유럽의 꽤 유명한 감독들이 만든 겁니다. 저 자신, 옛날부터 영상에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랄까, 옛날에 영화 청년이라는 말이 있었지요. 저도 그런 쪽이었습니다. 이 비디오를, 기획 제작한 것도 실은 접니다." 겐지는 세라피스트나 그의 말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것은 아닐까 하여, 몸을 내밀고 열심히 듣는 척했다. 신경안정제와 같은 영상, 그런 것도 있겠지,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하 지만 영상의 본질은 기록하는 것이다. 이시오카의 비디오, 아야코가 말해 준 내용에 의하면 그것은 그 본질에 충실했다. 그랬기 때문에 무서웠던 것 이다. "사실은, 더글라스 트램블이 만든<레인 스톰>이나 <토탈리콜>에 나오는 그런 유사체험 기계가 갖고 싶었습니다. 제가 기술자였더라면, 꼭 만들려 고 했을 거예요. <브레인 스톰>에서도 섹스신이 있었지요?" '섹스'라고 말할 때 세라피스트의 얼굴이 쑥스러움을 연출하는 표정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 놈은 이상 성격자로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그런 첨단 기계가 있다면 제 컨셉도 좀 달라졌겠지요. 확실하게 단언하 지만 아직은 그런 기계가 없습니다. NASA 나 MIT에 줄이 닿아 있 어서 정말로 그런 기계가 만들어졌다면 바로 알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컨셉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라피스트는 지그시 겐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목적으로 아미를 만 나러 온 건지 살피는 눈치였다. 세라피스트의 속내는 한 가지 밖에 없다. 환자의 약점을 잡는 것이다. "그런데 바꾼 게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그것은 보다 더 세련되어 소프 트한 것이 되었지요. 야마가미 씨,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뛰어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겁니다. 그건 말이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항상 그렇지만 아찔한 체험이었어요. 미국이나 특히 유럽에는 가난하거나 아니면 열정이 식어서 명화 만들기를 포기한 대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당 연히 그 대부분은 노인이지요. 개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영화를 그만둔 사람도 있어요. 그들을 뉴욕에서 접촉했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지요. 그런 옛날 대가들을 썼는데, 그 안에는 파리포 엘 케르나 구스터 노 매킨 토시라는 진짜 중의 진짜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시켜 모두 똑같 은 각본으로 다른 배우를 써서 30분에서 40분 짜리 영화를, 그것도 모노크 롬으로 찍으라고 했습니다. 엘 케레는 되지도 않게 장느모로를 쓰고 싶다 고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장느모로는 거의 28년만에 엘 케르의 작품에 출 연을 한겁니다. 내 실력이 이 정도야, 하고 과시하는 듯한 어조로 세라피스트는 말했다. "실은 저도 관여한 것이지만, 그 스토리라고 하는 것도 스물 세 살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뮤지컬 파트를 써서 유명해진 폰토스라는 자가 쓴 거지요. 저는 아카폴코까지 폰토스를 만나러 가서 그의 펜트하우스 옆에 있는 호텔에 머물며 함께 아이디어를 의논했습니다. 저 같은 일개 심리학 자가 어떻게 폰토스 같은 인물을 만날 수 있었는지는 설명하기가 좀 그렇 군요." 페르나데스 디 그레고, 번역된 소설을 딱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겐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난한 멕시코 인디오의 일생을 신의 시점에서 그 린 내용이었다. 신의 눈에, 가난한 인디오는 거세당한 천사로 그려졌는데, 마지막에 그 남자는 교통사고를 당해 유리창의 파편이 전신에 꽂혀 그것을 하나하나 핀셋으로 빼내는 수술을 체험하게 된다. 파편을 하나 빼낼 때마 다 인디오의 기억이 하나씩 없어져, 마지막에는 이름도 없고 번민도 없는 늙은 갓난아기가 되고 만다. "저는, 제 스스로 만나러 간 겁니다. 그리고 엘 케르나 매킨토시, 프레 이버 영, 도시키스 같은 영화감독을 위해 스토리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 지요. 그게 기억상실에 관한 애기였기 때문에, 폰토스는 비상한 관심을 가 져 주었고, 아리안 데일이라는 가공의 마을을 설정하여 기억을 잃은 한 사 람의 귀부인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돈줄은 어디였는지 아시겠습니까?" 겐지는 열심히 이야기를 듣는 척하며, 또 고개를 저었다. "컴퓨터 회사인 애플이예요, 보통 영화 몇 편은 찍을 정도의 제작비를 대 주는 대신 비디오 끝에 상호 명을 넣는 조건으로 해 준 겁니다. 10편의 시리즈 물이니까 괜찮은 장사지요. 사쿠라기 양도 그 비디오를 매일 보고 있을 겁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되십니까? 당신은 이 순간부터 섬바디입니 다. 이제 트래블러가 있는 곳으로 혼자서 가시죠." 겐지는 일어서서 걸어나가려다 다시 멈춰야 했다. "이건 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만, 괜찮으시겠 습니까? 하고 세라피스트가 불러 세웠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자기 선전을 할 말이 남아있나? 하는 표정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겐지는 돌아보았 다. "제가, 당신에게 뭘 물었던가요?" 세라피스트가 말했다. "네? 무슨 말씀이신 지?" 겐지는 잘 못 알아듣겠다는 듯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매우 중요한 겁니다. 당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사쿠라기 양이나 시부카와 씨와는 어떤 관계인지, 아무 것도 묻지 않았지요?"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겐지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으나 속으로는 난 또 뭐라구 그런 거였어? 하고 중얼댔다 "그것이 바로 이 연구소의 가장 유니크하고 새로운 점입니다. 여기에 오 시는 트래블러는 일체 질문을 받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관계성을 추구하지 않으니까요?" 천천히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겐지는 다시금 여동생이 있는 홋 카이도의 병원을 떠올렸다. 교외에 있는 병원까지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 로 간다. 별다른 이유는 없지만 여동생 앞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평범하 게 있고 싶은 것이다. 여동생은 옛날 이야기만 되풀이할 뿐 겐지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세라피스트가 환자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건 정 반 대의 이유에서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모부 내외, 목도를 휘둘렀던 그날 밤의 일, 겐지의 가치관, 그런 일체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여동생은 병 원 옆 농가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자주 했다. 농사일하고는 전혀 관계없 이 자란 사람들인데 '검은 태양'이라는 대형 수박을 열심히 재배하고 있 고, 두 딸은 전자오르간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든지, 남편이 보리차를 좋아 하는데 바빠서 티백으로 된 보리차를 마시게 해서 안타깝다는 아이들 엄마 라든가, 뭐 그런 이야기이다. 겐지는 읽었던 소설책 이야기를 해 준다. 재 미있는 것은 한 권사다 주기도 한다. 과중한 스트레스나 나쁜 기억들이 심 장에 좋을 리 없다. 그래서 겐지는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여 동생을 만날 때면 '우리들은 이민 중' 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딘지는 모르 겠지만, 그 어딘 가로 가려고 하고 있으며 우리들은 그 도중에 있다. 여기 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정당하고 강한 위기감이 있다. 소설책에 서 읽거나 영화로 보는 진짜 이민은 자신의 뿌리에 집착한다. 몇 대를 거 슬러 올라가 조상이나 조국의 광경을 회상하게 한다. 그들은 조국을 사랑 하지만 시대를 증오한 셈이다. 우리들은 반대다. 지금을 기쁘게 받아들이 지만 이 시스템은 증오한다. 부모 대까지 완전히 증오하고 있다. 사쿠라기 아미는 트래블러들의 거실에서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체격이 큰 여자였다. "겐지 씨인가요?" 아미는 체격이 크고 성격이 강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꼼꼼한 화 장에 핑크빛 정장 차림, 프랑스나 이태리 제가 분명한 화려한 하이힐을 신 고 있었다. 입원환자보다는 신칸센 우등 칸에나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거실에는 다른 한 명의 환자, 오십대 초반의 남자가 영자신문을 읽으면 서 이따금 비디오 화면에 눈을 주고 있었다. 그 남자 역시 다림질 잘 된 셔츠에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시부카와 씨에게 의뢰 받은 일을 하고 있어서 만나 뵈러 왔습니다만." 겐지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내 방으로 갈래요? 아니면 여기서 애기할래요?" "저는 어느 쪽도 상관없습니다." 겐지는 비디오 화면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흑백영화로, 여자가 포석이 깔린 거리를 걷고 있다. 여자는 중년이지만 키가 매우 크다. 30년 전에는 모델이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럼, 방으로 가요." 겐지와 아미가 독실로 가려 할 때 영자신문을 읽고 있던, 더블 슈트 차림 의 남자가 순간적으로 눈을 치켜 뜨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 남자는 영어를 읽을 줄 알기나 하는 걸까?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앉으세요. 차라도 한 잔 하죠. 커피 괜찮으세요?" 아, 네, 하고 말한 겐지는 방을 둘러보았다. 작은 소파와 침대, 라이팅 데스크, 옷장, 전화기와 욕실, 창 밖으로는 평범한 주택가가 보인다. 봉사 료 포함해서 하룻밤에 2만 9천 엔 짜리 호텔 더블 룸이 아닌가 착각할 지 경이었다. "시부카와가 여기에 들어가라고 소개해 줬어요. 당신이 올 거라는 애긴 들었어요. 시간이 꽤 걸렸지요? 원장이 자기 자랑을 꽤나 해 댔죠? 아, 원 장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했었지. 선생님이라고 해도 안돼요. 미스터 누구 라고 불러야 해요. 미스터라니, 꼭 나가시마 같잖아요. 아, 당신은 젊어서 나가시마는 모르겠구나. 옛날에 내가 어렸을 때, 자이언츠에 그런 슈퍼스 타가 있었어요." "나가시마는 저도 압니다." 겐지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아미는 말이 약간 빨랐지만 정상적인 여자라고 겐지는 생각했다. 다리가 매력적이라는 걸 그녀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핑크 정장에 썩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검정색 망사 스타킹을 신고 있다. "저도 나가시마, 좋아했어요." "그래요? 야구 좋아해요?" 아미는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야구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나가시마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어머, 그래요? 지금 그 사람은 스포츠 해설만 하고 있어서 요즘 젊은애 들은 그 사람이 옛날의 슈퍼스타라는 걸 아무도 모른다고 무슨 잡지에 났 었거든 요." "잡지 따윈 거짓말만 쓰니까요." 겐지의 말에 당신 재미있군요, 하고 아미가 웃었다. 그때 안내 데스크에 있던 중년 여자가 커피를 가져왔다. 아미는 사인을 하고 놀랍게도 동전으 로 팁을 지불했다. "나도 야구를 그렇게 좋아한 건 아니에요. 시골에선 야간 경기 보는 거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으니까, 아버지도 자주 보러가고 해서 같이 보곤 했 었어요. 어릴 땐 아버지가 기뻐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덩달아 즐겁잖아요." "시골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 지요?" 겐지는 은으로 된 클래식한 포트에서 에스프레소를 따라 설탕을 넣고 한 모금 마셨다. 평범한 맛이었다. "간토 변두리예요. 명소나 유명한 산이라든가 명물 음식 같은 것이 없는 그런 곳이죠. 맥도날드는 있지만 TGI는 없는 그런 곳 말예요. 당신은 어디예요?" "요코하마입니다." "네에? 멋있군요. 난 그런 것에 흥미 없지만, 차도 요코하마 번호면 여 자들에게 인기가 있다거나 하는 그런 것 있잖아요. 가장 선호하는 게 고베 였다던가?" "요코하마도 나름이죠. 멋있다고 할까, 자주 화제에 오른 건 시내의 극 히 일부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겐지는 삼림공원 옆의 좁은 언덕길에 있는 작은 셋집을 떠올렸다. 언제였는지 잊었지만 아버지가 셋집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불안해졌던 기억이 있다. 자기 집이 아니니까 집세를 내지 못하면 쫓겨나 야 한다는 생각에 무서워서 그후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불안 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는 술과 노름에 빠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매달 꼬 박꼬박 가구를 만드는 공장으로부터 월급봉투를 가져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겐지는 더 불안했다.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기라도 하면 아버지는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마 어머니도 그와 같은 불안을 안고 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집을 나 간 것이겠지만, 요코하마 일을 머릿속에서 떨궈내기 위해 겐지는 "그것보 다도, 아까 지불한 동전은 팁입니까?" 하고 아미에게 물었다. "맞아요. 우습죠? 그것보다 당신, 어떻게 생각해요? 나, 밝힘증 있는 여 자로 보여요?" "..." "내 친구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지만 말예요. 몸집이 커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그래요?" 아미는 약간 부끄러워하며, 그러나 그런 화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을 좋아한다는 듯, 미소지으며 겐지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하고 겐지는 아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야하게 보인다는 지 그런 것 말고라도, 자기 스스로 그런 말을 하는 사 람은 그렇지 않은 것 아닐까요?" "그게 무슨 뜻이죠?" 망사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다시 꼬고, 미소를 거두면서 아미가 물었다. "정말로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자기 스스로가 난 머리가 이상해, 그러지 않잖아요." "하지만 난 정말 나 자신이 색골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사람들도 종종 좀 그렇게 보인다고 하거든요." "그건 정확하지 않군요. 때때로 흥분 고조기 같은 게 있다는 것 아닐까 요?" "그게 아니고, 난 항상 그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침대에 들어 가 눈을 감아도 생각하는 건 섹스뿐이고, 아침에 일어나면 흠뻑 젖어 있 고, 눈을 뜨고 있어도 틈만 나면 섹스를 생각해요. 연애 상대가 자신과 사 이즈가 꼭 맞고 아직 신선한 관계라면, 그렇잖아요. 그것밖에 생각하지 않 잖아요? 그런데 난 다른 것 같아요. 내가 비정상인지 정직하게 말해 봐 요." "남자라면 누구든 상관없습니까?" "그게 좀 까다로워요. 만족시켜 준다면 물론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그렇 다고 무조건 크면 좋다는 건 아니고, 또 멍청한 놈이나 징그러운 놈은 안 되겠죠. 좋아하는 남자라면 어떤 부끄러운 일을 시켜도 좋고, 맞아, 부끄 러우면 부끄러울수록 좋아요. 더욱이 상대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전부 해 주고 싶어지잖아요.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좋아요. 요컨대 뭐라고 할까, 굉장히 기분이 좋고 즐거운 것을 좋아해요. 당신, 포주라고 했죠? 그렇다면 여자에 대해 잘 알겠네요? 당신 같은 사람, 많이 있어요? 포주라 는 게 기본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거예요? 여자한테 돈을 바치게 하는 거 죠? 다른 남자한테 여자를 안게 하고 그러나요? 나 같은 여자도 있어요? 아니면 전부 나 같은 여자들인가? 저기, 내가 좀 물어봐도 돼요? 왜 그런 장사를 시작했어요?" "저는 시부카와 씨로부터 어떤 일을 의뢰 받았을 뿐, 당신에게 제 애기 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어머, 난 그냥 너무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싫다면 말하지 않아 도 돼요. 신경 쓰지 말아요." 아미는 꼬고 있는 다리를 흔들면서 턱을 괴고 커피 잔에 루즈를 묻혔다. 항상 섹스만 생각한다고 했지만, 이 여자는 색골이 아니다, 라고 겐지는 생각했다. 마음과 몸, 모두 건강할 뿐이다. 건강한 여자는 겐지의 어획 망 에서 벗어나다. 대부분의 경우, 건강이란 머리가 나쁘다는 것과 동의어이 기 때문이다. "싫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애긴, 시간이 아깝단 생각이 들었습 니다." "나는 요,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와 하고 있는 걸 보면 흥분이 돼 요. 시부카와가 만취되어 SM클럽에서 여자를 불렀는데 여자가 제법 괜찮 았는지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여자애도 제법 냉정하고 밝히는 애 여서 시부카와가 따로 5만 엔을 준다고 하니까 의외로 간단하게 좋아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하고 하고 나서 그 애와 시작했던 거예요. 그게 정말 비정상적인 행위의 시작이었는데, 끝나고 나서 내가 울어 버리자, 시 부카와도 걱정이 되었는지 그만 둘까 하고 말했죠. 그래도 나 좋아하는 남 자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참자고 마음먹었어요. 그게 생각만큼 그렇게 괴로 운 것은 아니더군요 뭔가 머릿속의 회선을 약간 변경하기만 하면 되는 거 예요. 그보다는 요즈음 예뻐하던 고양이가 죽었는데 그 생각을 잊는 것이 더 힘들었어요. 그런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워드프로 세서 같은 걸 배운 적이 있는데 잘 안되면 ERROR, ERROR 하고 모니터에 나오고, 키를 좀 바꿔서 치면 툭하고 기분 좋게 화면에 글이 쳐 지잖아요? 그것과 똑같아요. 그후로는 익숙해져서 시부카와가 SM클럽의 다른 여자이이들을 불러서 애무하는 걸 봐도, 정말 귀여운 남자야 하는 정 도로 생각하게 되었어요. 사랑하는 남자가 가령 다른 여자와 즐기는 걸 보 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죠. 당신도 그런가요? 다른 남자에게 여자를 안 기게 하고서 돈을 버는 거잖아요? 아니면 전적으로 돈을 위해 하는 일이라 고 선을 그어놓았나요?" "저는 싫어하는 여자에게 사정하거나 위협해서 매춘을 시키는 게 아닙니 다." 그렇게 말하며 겐지는 불현듯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아미라는 여자가 이 시오카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미는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고 부끄러움과 흥분이 뒤섞인 묘한 웃음을 흘리면서 계 속 조잘댔다. "그럼 여자들이 자청해서 한단 말인가요? 나도 시부카와의 부탁으로 S M을 하러 마조히스트 남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 사람은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당하는 걸보고 흥분하는 거예요. 당신은 그런 것 같지 않군요. 맞나요?" "음, 그런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현실적으로 돈이 필요하고, 여자들은 그걸 도와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쓸모 없는 곳에 있는 돈을 그런 여자들이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저는 감사하고 있고, 감사하고 있다는 걸 반드시 여자들에게 표현하고 이해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 품에 있는 것을 본 적 있어요?" "있습니다." "어땠어요?" "꽤 옛날 일이죠. 저도 아직 풋내기였고 여자도 우에노 역 근처에서 굴 러먹는 애들이라 그다지 쇼크는 없었습니다. 여대생이었는데 두 놈이 데리 고 놀았습니다. 여자한테 연락이 없어서 가보니 까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별다른 느낌은 없었습니다. 여자는 울고 있었지만." "어떻게 됐어요?" "여자를 때렸습니다. 저는 여자와 폭력에 익숙해 있으니까요." "사디스트예요?" "그렇게 확대 해석할 것 없습니다. 폭력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 다. 지금은 유행하지 않아서 처음에 다들 놀라는 것뿐이죠. 그런 경우, 즉 자기가 기르고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요구를 거절하고 울고 있는 경우 에 여자를 때릴 것인가 남자 쪽을 위협할 것인가 하는 것은 수학적인 판단 입니다. 그때는 상대가 공수도 같은 걸 하는 힘깨나 쓰는 대학생 두 명이 었고 여차하면 덤빌 기세였고 여자는 안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어떻게 되 든 별 상관없는 그런 애였죠. 그래서 여자 애를 때리기로 한 것입니다. 이 여자와는 이걸로 끝장이 나도 좋다고 생각되면 원한을 사더라도 상관없으 니까요." "그래도 좋아하는 여자였다면, 그렇게 못했겠죠? 아니면, 당신은 좋아하 는 여자는 손님을 못 받게 하나요?" "좋아하는 여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건,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에 따라 다른 것 아닐까요?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애기만 해 도 죽여 버리는 남자도 있으니까요. 고작 여자 거기에 남자 그것을 넣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만 하자는 겁니까? 그렇다면 인공수정은 좋을지, 입으 로 하면 좋을지, 항문이면 좋은지, 손으로 하는 게 좋은지, 그런 애기는 아무도 모르잖습니까? 그보다는 시부카와 씨로부터 들으셨겠지만, 이시오 카라는 남자에 대해 물어봐야겠는데요, 괜찮습니까?" 그렇게 말하자 아미는 꼬고 앉아서 흔들어 대던 다리를 잠시 멈추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시부카오가 당신에게 무엇을 의뢰했죠?" 아미는 갑갑하다는 듯 슈트 아래 블라우스의 앞단추를 열었다. '슬픈 경 계' 라고 겐지가 이름 붙인, 여자의 가슴이 살짝 노출되었다. 얼굴의 파운 데이션과 목에서 가슴까지 속살의 경계...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온다길래,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죠." 당신은 병이야, 하고 겐지는 말했다. "병이라고 해도 색광이나 그런 건 아닙니다. 신경증도 아니지만, 병입니 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시오카라는 자한테 무슨 일을 당했나요?" "시부카와도 그렇게 물었는데 이시오카는 별 다른 일 한 것 없어요. 나 는 아무 것도 당하지 않았고요." "그럴까요? 이시오카나, 이시오카와 관련되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저는 그런 여자를 한 사람 본 적이 있지요. 강간당한 경험이 있는 여자였는데 상당히 비정상적인 상태였어요. 매우 실례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비슷합니다."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고 아미는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아미는 조금 전에 겐지 와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 당신이 겐지 씨? 하고 "이시오카를 살해 한다거나 그런 거예요? 아니죠? 그렇다면 내 애기 들어봤자 소용없는 것 아녜요? 아니면, 뭐예요? 시부카와는 여성적인 인물이니까 무슨 스캔들 같 은 걸로 어떻게 해 보려는 생각인가? 미리 말해 두겠지만, 난 이시오카에 대해 당신에게 다 말하라는애기는 들은 적 없어요. 시부카와는 말이에요. 나더러 당신과 하랬어요. 여기는 그런 건 자유니까요. 해도 된다고 하지 는 않지만 트래블러인데다가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어떤 할머니는 출장 클럽에서 남자를 불러들여 하기도 해요. 나도, 여기 원장한테, 원장이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만 그렇게 말해 버리게 되네, 자폐증 치료와 같은 것을 받아서 한 적이 있었어요. 시부카와랑도 했고 다른 옛날 남자, 그리고 그 냥 조금 사귄 사람과도요. 다섯 명하고 하루에 다 했으니까, 젊은 포주가 말하며 무방비하게 웃었었다. 마찬가지로 무방비로 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여자는 아무 때나 웃고 아무 때나 쉽게 우는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그래 더 울어, 하고 귀에 대고 소리를 치며 머리채를 붙잡아 방바닥에 처박으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 같군. 이런 여자를 한 사람 기르던 때가 있었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미처럼 큰 키에 아마 조금 더 예뻤을 것이다. 카타이케 부쿠로에서 동생인지 아빠인지 하는 사람하고 스낵코너 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전에는 스타일리스트였다고 했다. 아무 것도 아 닌 일에도 잘 웃었고 TV드라마를 보면서도 잘 우는 여자였다. 당시 겐지는 스물 다섯 살이었고 여러 여자들을 타겟으로 삼고 있던 무 렵이었다. 그 큰 체격의 여자와는 유행하던 카페 바에서 만났다. 여자는 자신의 가게에 온 손님과 놀러와 있었는데, 가슴이 엄청나게 큰 주제에 기 모노를 입고 있어 눈에 잘 띄었다. 그때 카페에는 꽤 유명한 록 가수와 그 패거리들이 와 있었는데 그루피와 화장실에서 섹스 했던 경험담을 큰 소리 로 떠벌리고 있었다. 겐지는 고객인 건축가와 자리하고 있었다. 그 건축가는 지금도 가끔 전 화를 주고 있지만 심장발작으로 한 번 쓰러진 다음으로는 예전처럼 건강하 지 못하다. 어린 여자를 좋아해서 겐지에게 밥을 사주기도 하고 용돈을 쥐 어주기도 하면서 뒤탈이 없는 열 네 살 정도의 여자애나 반항적인 열 다섯 살 짜리를 구해 달라고 했다. 눈매는 날카로울수록 좋고, 당장 밀쳐 내거 나 깨물거나 난폭하게 날 뛰는 겁 많은 고양이 같은 여자애가 좋다고 항상 말했었다. -저는, 저런 녀석을 한 번 갈겨주고 싶어요. 겐지는 록 가수를 쳐다보며 건축가에게 말했다. -저건 나라의 수치야. 내가 국제선을 자주 타는 편인데 저런 것들이 꼭 퍼스트클래스 앉아서 되먹잖은 영어로 스튜어디스하고 떠들어댄단 말이야. 건축가는 겐지에게 동조하고 나섰다. -이 가게에도 이젠 지겹군. 맥주병이나 뭐 단단한 걸로 두 번 다시 노래 를 못하게 얼굴을 갈아주는 게 좋겠어. 가수녀석이 패거리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며 일어서서, 좋아 여기서도 한 번 해볼까, 하고 지껄이면서 기모노 차림의 가슴 큰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동석했던 중년의 남자는 상대가 유명인 데다 패거리들도 많았기 때문에 묘한 얼굴을 한체 겸연쩍게 웃고만 있었다. 카 페 바에서 와보고 싶어서 지방에서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작자니 어쩔 수 없었다. "저기요" 하고 그 유명한 록 가수가 기모노 차림의 여자 어깨에 손을 얹 었다. -당신, 혹시 오른손을 꼭 쥐고 엔카를 부르는 사람 아녜요? 겐지는 그 때 록 가수의 집게손가락과 중지 손톱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 는 것을 보고 필시 선반공이나 인쇄공 출신일 거라 생각하며 캠퍼리엘모트 라고 씌어진, 유리로 된 재떨이를 쥐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이모와 이모 부를 목도로 내리쳤던 밤을 생각하며 록 가수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사인 해 줘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돌아보는 녀석의 앞이빨을 재떨이로 마구 내리쳤다. 질퍽거리는 곳에 돈을 던질 때와 비슷한 축축한 소리가 났고, 손바닥 크기 만한 유리 재떨이가 록 가수의 입 속에 반정도 박혔다. 겐지 가 일어섰을 때, 건축가는 이미 가게 밖으로 도망치고 없었다. 겐지는 기모노 차림의 여자를 데리고 도망치기 전에 놈의 입에 손을 넣 고 그 겁먹은 표정을 2초간 즐기고 나서 빠진 이빨을 그의 피투성이가 된 혀 위에 얹어놓았다. -네 놈은 어차피 이빨이 고르지 못하니까 이번 기회에 틀니를 해 넣는 게 좋겠어. 건축가는 운전사가 딸린 짙은 녹색의 벤츠 500에 올라 시동을 걸어둔 채 기다리고 있다가 겐지와 여자가 타자 서둘러 차를 출발 시켰다. -난 알다시피 심장이 나빠서 빨리 뛰지 못하잖아. 그 여자와 그날 밤을 함께 지내고 나서 사이판과 괌에 여행을 갔다. 여 자는 후원자 없이 융자로 스낵코너를 꾸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겐지 에게 길들여졌다. 큐슈인가 시코쿠인가 아마 그 쪽 지방의 여자였을 게다. 가슴이 엄청나게 큰 데 비해 유두는 작았으며 탄력도 있어 벤츠 500을 모 는 건축가와는 취향이 정반대인 라디오 방송국 중역이 자주 그녀를 찾곤 했다. 그 여자는 뭐랄까 단순한 성격으로, 얼굴 반반한 것과 가슴 큰 것 말고 는 내세울 게 없었다. 참을성이 있는 편이어서 잠깐 기다려, 하고 말하면 잘 훈련된 세퍼드처럼 세 시간 정도는 군말 없이 기다리는 타입이었다. 몸 도 별 재미가 없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희고 부드러운 살결에 군살이 조 금 붙어 있을 뿐이었다. 섹스할 때는 눈을 꼭 감고 거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으며 엉덩이를 때려도, 허벅지를 꼬집어도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잘 웃고 잘 울었다. 하지만 얼굴이 예뻤기 때문에 쓸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삼 개월 정도 데리고 있었는데, 라디오 방송국 의 중역조차 그 애는 됐어, 가슴으로 애무해 주긴 하지만, 그렇게 말이 없 고 반응이 없으니 이쪽이 황당해지잖아, 하고는 다른 여자를 찾았다. 겐지 로서도 손을 끊을 때가 되었다. 그녀와는 손을 끊을 때도 아무런 트러블이 없었다. 그래서 기억력에는 자신이 있는 겐지지만 이름조차 기억하고 있지 않다. 가슴만은 머릿속의 영상으로 지금 같은 때에 떠오른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을 떠올리며 겐지 는 아미가 스스로 울음을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동안 방안을 관찰 했다. 겐지는 방이나 창 밖의 경치, 아니면 그림엽서나 사진처럼 한정된 공간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아미의 방은 아메리칸 스타일의 특급호텔을 의식하고 만들어서인지 상당 히 낮은 천장에 네 개의 함몰식 라이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보스의 스피커 도 라이트 옆에 장착되어 은은하게 무드뮤직이 흐르고 있다. 벽지는 광택 이 없는 연녹색이었다. 가끔 데리고 있는 여자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들여 다보는 인테리어 잡지에 이런 벽지 가 나온다. 누가 왜 이렇게 지저분한 색의 벽지를 만들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입원환자를 트래블러라고 부르는 신경증 치료시설에는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창문이 있긴 하지만 접이 식이고 불투명 유리여서 바깥을 볼 수도 없다. 창 그 자체도 방의 배치로 볼 때 일종의 야바위 눈속임이다. 빌딩 지하에 있는 일식집 다다미방에서 장지문을 열면 콘크리트 벽일 때가 종종 있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다. 불투명 유리에는 녹색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다. 창밖 에 넓은 공원이나 커다란 가로수가 늘어선 산책로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고안한 것으로, 사실은 안쪽에 소독용 알코올과 여자 냄새가 나 는 산부인과 진료 실이 있거나 할 것이다. 침대는 스프링이 딱딱해 보이는 싱글 사이즈로 베개가 두 개 겹쳐져 있 고, 커버는 개나리색 계통이었다. 사이드 테이블에는 조그만 스탠드와TV 리모콘, 먹다 만 다이어트 콜라와 육각형 도기 모양의 재떨이와 주간지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다. 보통 이런 장소에는 다른 환자나 의 사들이 그린 아주 서툰 유화 같은 것이 어울리게 마련인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시부카와한테 들었는데..." 아미가 울음을 그치고 말하다가 코를 풀었다. 겐지는 양해를 구하지 않 고 면전에서 코를 푸는 여자는 싫어했다. "당신이 특이하다고." "그렇지 않습니다." "음악을 싫어하죠." "네, 싫어합니다, 음악을 싫어하는 것이 특이한 건가요?" "왜 싫어해요?" "간단히 말하면, 센티멘탈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방에도 좀 작지만 음악이 흐르고 있어요. 괜찮아요?" "아, 이런 건 음악이 아닙니다." 하고 겐지가 대답했다. "그냥 잡음입니다." "어디든 음악 나오지 않는 데가 없잖아요. 슈퍼마켓이나 구멍가게도 나 오고 또 사우나나 스포츠 센터 같은 데도 그렇고요. 한 번은 친구랑 함께 스포츠 센터에 간 적이 있는데 풀 안에까지 음악이 나와서 깜짝 놀랐어 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잡음이니까, 자동차 클렉션 소리와 마찬가지죠. 그런 건 몸으로 들어오지 않아요.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구요?" "그렇습니다." "여자와 똑같군요." 그렇게 말하고 아미는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울고 난 뒤에 그처럼 억지 웃음을 짓는 여자도 겐지는 싫어했다. "당신, 이시오카 씨한테 어떻게 할 거예요?" "그걸 생각하려고 오늘 여기에 찾아온 겁니다만." "시부카와가 복수해 달라고 했죠?" "비슷합니다." "그런 짓을 할거라면, 나하고 잘 지내기만 하면 될 것을, 주제에 마음이 약해 가지고..." "아미 씨는 이시오카라는 남자에게 뭔가 앙갚음을 해 주고 싶지 않습니 까?" 겐지가 그렇게 묻자 아미의 귓볼이 붉게 물들었다. "시부카와가 뭐라고 떠들었죠? 이것저것, 전부 다 말했어요? 전부는 아 니겠죠/" "당신이 심한 일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도 그 회복차 들어와 있는 것 아닙니까?" "시부카와가 강제로 입원시킨 거예요.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아까 바 보처럼 울었잖아요. 그런 게 쭉 계속됐어요. 한심하지만 이시오카 씨와 사 귀면서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인간인지를 알게 됐어요. 정말 보잘것 없는 인간이란 걸, 나만 그런 건 아니지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래 요. 이시오카 씨와 같이 있으면 알게 돼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건 전부 입에 발린 위로로밖에 들리지 않아요. 그리고 실제로 그래요. 전부 위로의 말, 거짓말, 그것밖에 없어요." "이시오카라는 사람이 무슨 심한 말을 했습니까?" "천만예요." 아미는 눈물이 마른 눈으로 겐지를 노려보았다. "당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다정다감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 을 거예요." 잘 모르겠군요, 하고 중얼거리면서 겐지는 아야코가 나중에 보내준 이시 오카의 사진을 떠올렸다. 이시오카는, 누구도 닮지 않았다. 단지 눈만은 특징적이었는데 그것은 크다, 작다, 날카롭다, 부드럽다,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겐지가 싫어하는 그런 눈이었다. 음악을 느끼는 눈이었기 때문 이다. "시부카와가, 나와 이시오카에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군요/" "당신이 개 흉내를 내야 했었다는 애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SM이라든가 집단 섹스라든가 하는 차원이 아니었어요. SM클럽 이나 데이트클럽에서 여자들을 불러보면 그녀들은 모두 이시오카 씨와 안 면이 있는 관계였어요. 뭐랄까, 나도 그 축에 낄지는 모르겠지만 미련한 얼굴을 한 여자는 없었으니까요." "미련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둔하다는 말예요 모두들 뭐라고 할까, 자신이 누구보다도 에로틱하지만 그렇다고 포르노나 밝히는 여자들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요. 이시오카 씨 는 비디오를 찍고 있었구요. 당신, 혹시 미국영화 중에 여장 남자가 묘기 를 부리거나 패션을 다투는 기록 영화 본 적 있어요? <패리스 이즈 버닝> 이라는 영화?" 겐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시오카 씨는 그런 걸 만들고 싶댔어요. 우리들한테 보여줬는데 영어 를 몰라서 좀 그랬지만, 미국의 비애라고 할까, 슬픔 같은 것이 나처럼 교 양 없는 사람들에게도 느껴지더라고요." "이시오카 씨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여자를 부른 게 아닙니까?" "늘상 비디오를 본 건 아니예요. 본다고 해도 다른 스태프는 아무도 없 었고 그런 장비들은 방송국에서 쓰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렇다고 일반적 인 캠코더로 아니고 마이크나 선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죠. 꽤 비싸 보이 는, 흔하지 않은 것이었어요. 이시오카 씨는 일본 화류계 여자를 담은 작 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돈도 바로 지급했는데 나도 이것저것 해서 백 정도 받았는걸요." "어떤 일을 하는 겁니까?" "우선 술을 마시고 기분을 풀라고 해요. 섹스 이야기라든지 뭐든 다 같 이 애기를 나눠요." "여자는 몇 명 정도 있습니까?" "둘일 때도 있고 일곱, 여덟 명일 때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뒤가 너무 강렬해서 확실하게 헤아린 적은 없지만..." "둘이라면 이시오카와 단둘이었단 말입니까?" "아뇨, 이시오카한테는 조수인지 비서인지 애인인지 모를 여자가 있었어 요. 키는 보통인데 얼굴이 굉장히 작은 요정 같은 여자. 그 여자가 제법 여기저기 발이 넓어서 나 같은 여자를 모았던 모양이에요." "그 여자도 이시오카와 함께 LA인지 어딘지 있는 건가요?" "그건 몰라요. 그것보다 이시오카 씨는 결혼해서 애도 있어요. 알고 있 었어요?" "아-네, 알고 있습니다." 이시오카 가족에 대해서는 아야코가 가르쳐 주었다. "가족을 어떻게 하면 될 것 아녜요? 괴롭히는 거라면?" "그것도 생각해 봤습니다만..." "정말 그랬어요?" 힘을 주어 그렇게 말하며 아미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재미있어하는 건 지 경멸하려고 하고 있는 건지 겐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양쪽 다인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군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미는 이번에는 분명하게 경멸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에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너 따위는 인간 쓰레기야, 그거 아니? 하는 듯한 조 소를 머금고 아미는 슈트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남자에게서 어떤 것이든 경멸할 만한 빌미를 찾아서 그것으로 방편을 삼 아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타입, 이라고 겐지는 생각했다. 체격이 크거나 파더 콤플렉스인 여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경향이다. 부모가 마흔을 넘어서 늦둥이로 태어난 여자에게도 흔하다. 또 남자에 대한 의존성도 강한데 그 것을 프라이드로 착각한다. 아미의 슈트 안에는 블라우스가 없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까만 브래지어 뿐이었다. 옛날에 샤넬 브랜드의 슈트 안에 팬티와 브래지어만 착용한 외 국 모델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모델은 지금의 아미처럼 상의의 단추를 풀 고 스커트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 사진에서 겐지는 성적 욕구를 느꼈지 만 아미의 거무스름한 살결에서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왜 피부가 하얀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벌써 2년반 전의 일이지만 아야코가 겐지에게 물은 적이 있다. 흑인이 좋다는 사람은 이해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햇볕에 그을린 둥이나 거무스 름한 엉덩이는 끌리지 않아, 하고 아야코는 웃으며 말하고 했다. -새 하얀 살결, 저 밑바닥에 들어가는 상상을 해봐, 자긴 흥분되지 않 아? 브래지어만 남은 아미의 상반신은 거무스름할 뿐만 아니라 갈비뼈 몇 개 가 튀어나와 보였으며 종기도 몇 개나 있었다. "봐요, 이 정도 애기하면 됐죠?" 아미는 허리를 들어 스커트의 후크를 풀려고 했다 그녀의 눈은 계속 겐 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당신 마음대로 생각해요. 이시오카 집으로 찾아가서 다 뒤집 어엎으면 되겠네?" 아미는 지퍼를 내리고 스커트를 벗었다. 스타킹과 팬티도 벗었다. 그녀 의 다리는 살이 쳐지진 않았지만 탄력이 없었다. "이봐요, 잠깐 당신 그거 좀 보여줘요. 진주나 뭐 그런 거 넣었어요? 당 신 같은 사람, 그거 한 번 보고 싶어요. 내가 맘에 들면 기분 좋게 해 줄 수도 있어요." 아미는 겐지의 벨트와 지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미가 겐지 앞에 무릎 을 끓고 앉으려고 할 때 겐지는 양복 안주머니에 숨겨두었던 만년필 모양 의 긴 침을 꺼냈다. 몽블랑 만년필을 개조한 것으로 펜촉은 없고 손잡이 쪽에 장침을 붙여놓은 것이다. 기분이 안정되지 않을 때마다 항상 날카롭 게 갈아두었기 때문에 끝이 서늘할 정도로 예리했다. 겐지는 침이나 칼이 나 나이프 끝을 매우 좋아했다. 장침의 끝을 눈앞에 들이대자 아미의 얼굴 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얼굴을 피하려고 했지만 겐지가 뒷머리 채를 움 켜쥐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겐지는 장침의 끝을 아미의 눈에서 목언저리까지 이동시키며 말했다. "당신 눈을 찔러봤자 소용없으니까요. 이 침은 시코쿠의 한 장인(匠人) 한테서 통신판매로 산 건데 아주 훌륭한 물건입니다. 나이프 같은 건 싸울 때 별로 소용이 없어요. 하지만 누군가 내 일에 개입할 땐 이거면 충분하 지요. 이건 공항 금속탐지기도 문제없어요. 직원에게 넘겨주고 그 직사각 형 틀을 지나가면 되니까요. 길이가 심장에 닿을까 말까 하는데, 싸울 때 상대의 손바닥이나 다리를 찌르면 너무 아파서 기가 질려 버리고 마는 그 런 물건입니다. 눈을 찌르면 치명적인데 목도 까딱하다간 큰일 나지요. 하 지만 당신을 찌를 생각은 없어요." 겐지는 침 끝을 아미의 가슴에 나 있는 종기에 갖다 댔다. 종기를 살짝 찌르자 하얀 분비물이 비어져 나왔다. 순간 아미는 헉, 하고 목을 올리며 숨을 삼켰다. "난 당신에게 그걸 보여주려고 온 게 아닙니다. 이시오카에 대해서 자세 하게 말해 주면 됩니다. 이시오카 가족에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아미는 지방이 흘러나온 종기를 손가락으로 주무르며 소파 맞은편으로 물러났다. "어차피 가족은 뉴욕에 있는 모양이니까, 손을 쓰기도 번거롭거든요." "당신, 시부카와한체 고용된 거 아녜요? 이러고도 괜찮을 것 같아? 시부 카와한테 말 할거예요." 아미는 벗어 던졌던 스커트를 주워 허벅지 위에 걸치며 겐지의 반응을 살폈다. 시부카와를 들먹여 가능하다면 겐지를 굴복시키고 마음껏 경멸하 면서 농락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장침이 그녀의 욕정을 더욱 자극했는 지도 몰랐다. "시부카와는 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니까." 겐지는 침의 뚜껑을 닫아 끼우며, 그러시죠, 하고 말했다. "그따위 놈한테 빚진 건 없습니다. 돈이 궁해서 떠맡은 일도 아니고, 난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소." 하드보일드 영화나 소설에서는 수사 종결이후에 혼자서 사건을 파헤치고 적들과 맞서는 주인공이 자주 등장한다. 사건이나 범인에게 매료되고 마는 것이다. 시부카와가 그만해, 이시오카에게서 손을 떼, 하고 말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아야코가 말한 이시오카의 그 비디오만큼은 마음 에 걸린다. 검은 쓰레기 비닐이 원을 그리며 흔들리는 것, 그 비디오는 어 쩐지 이시오카가 음악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미 씨, 당신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보통 때라면 침을 꺼내 위 협하지는 않는데 그만 그렇게 되어 버렸군요. 무섭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 다." "그럼, 왜 그랬죠?" "내게도 정조는 있으니까요." 겐지는 일어서서 아미 앞에 한쪽 무릎을 끓고 스타킹을 지나 스커트를 걷어 검은 팬티 한 가운데에 키스했다. '정조'하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 지 아미는 부드러운 허벅지를 흔들면서 쿡쿡, 소리 내여 웃었다. 아미의 팬티에서는 향신료 냄새가 났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스튜나 카레에 넣는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난 처음 만나는 여자와는 하지 않는 철칙이 있습니다. 다음 기 회로 미루면 더 좋다는 걸 알거든요. 오늘, 이시오카에 대해서 애기 해 준 다면 다음 기회에 보여드릴 수 있지요. 진주도 들어있지 않고 그렇다고 크 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데리고 있는 여자들 말에 의하면 단단하기는 합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난 심장에서 혈액을 집중시켜 이 해면체 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요가의 달인도 그게 가능하다더군요." "알았어요." 아미는 토라진 어투로 말했다. "당신 건 포기할 테니까, 저기, 자위행위 한 번 해도 돼요?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하는 걸 봐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어때 요?" 겐지는 시부카와가 이시오카에게 복수하려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아미는 건강하고 섹시한 여자이지만 선천성 님포마니아는 아 니다. 색광이라면 과잉 이미지 때문에 견딜 수 없어 병으로 도망쳐 가는 것이다. 아미는 필시, 이시오카라는 남자에 의해 과잉 이미지를 키웠을 것 이다. "무슨 일이 있었지요?" 하고 겐지는 아미의 허벅지를 살짝 쓰다듬으며 물었다. "옛날에 꼭 당신 같은 여자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그 여자는 서른 후반 의 패션 디자이너로 멋진 여자였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말입니다. 남자가 언제나 발기해 있는 게 아니듯이 여자도 항상 젖어 있는 건 아니란 거죠. 당신을 자위행위를 하고 싶다고 하지만 지금 젖어 있지 않다는 것쯤은 나 도 압니다. 몸 어딘가가 근질근질하지도 않아요. 대체 이시오카가 무슨 짓 을 했나요?" 겐지의 말에 아미는 눈물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시부카와는 내가 개처럼 기었다거나 혼자서만 옷을 벗었다거나 하 는 그런 것만 애기했을거예요. 하긴, 내가 그런 애기만 했으니까요. 다른 애긴 시부카와에게 해 봤자 이해하지도 못할 거고, 나 자신이 그런 걸 애 기할 줄 몰랐던 거예요. 가령, 무지막지하게 큰 남자에게 돈을 받고 하룻 밤에 몇 번이나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말하는 여자가 있잖아요? 실제로 그 런 여자가 있을까? 있다고 치고 나라면 그런 겨우, 돈까지 받고 그 큰 놈 에게 봉사하게 했어, 하고 말할 수 도 있어요. 그런 건 교통사고와 마찬가 지니까요. 프라이드도 뭣도 아니라구요. 프라이드라니, 그런 것 가지고 사 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어요. 아무나 떠들어대는 프라이드는 체면이나 허 영심, 자의식 같은 거예요. 이시오카 씨는 아마 그런 것들을 적절히 이용 했을 거예요. 이시오카 씨는 그 요정 같은 여자를 통해 다른 여자들을 호텔에 부르죠. 졸부들이 선호하는 멍청하게 큰방이 아니라 세련된 느낌의 스위트 룸 이에 요. 라이트 스탠드도 심플하고 크림색 소파도 아주 산뜻하구요. 거기에 서 로 모르는 여자가 몇 명 모이는 거예요. 그리고 알몸이 될 때까지 두세 시 간, 길면 다섯 시간 정도 술을 마시며 애기를 나누죠. 뭐, 이런 저런 애기 를 요." "그럴 때 비디오가 돌아가고 있나요?" "돌고 있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비디오를 쓸 때는 이 시오카 씨가 그 요정 같은 여자에게 가볍게 신호를 보내요. 그 여자 이름 이 뭐랬더라? 외국인 같은 이름이었는데, 소피였나 소피아였나?" "어떤 애기를 합니까?" "여러 가지요. 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까지 화류계 여자들이 모이니 까요. 우선 자기 소개부터 시작해서 각자 일에 대해 애기하는데 SM이 좋 아졌다는 둥 그런 게 많았어요. 사귀는 남자가 있는 애는 그런 걸 애기하 구요." "십대라면 미성년도 있었단 말입니까?" "그런 모임에 한 열 번 정도 참여했었는데 여자들이 매번 달랐지만 한 명인가 두 명쯤은 그렇게 보였어요. 아 몰라요, 나중엔 거의 없었어요." "그런 건 여자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렇지요. 아니, 그냥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리고 호텔 말인데, 대개 특급호텔에서 업무용으로 비디오를 촬영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이시오카가 호텔 안에서 포르노를 찍고 있었다고 호텔이 고소하면 어떨 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건 몰라요. 하지만 그 정도로 이시오카를 어떻게 할 수 있었다면 시부카와가 직접 하지 않았을까요? 시부카와도 그 쪽 일은 훤하거든요." "그냥 해 본 말이예요. 이시오카라는 놈은 꽤 유명한데도 불구하고 아무 도 거취를 모르는 묘한 놈이라 잡을 길이 좀 묘연합니다." "고향이 어딘지 모른다고 본인이 말했어요. 그래도 여자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았어요. 최종적으로 네다섯 명의 여자가 모여서 각각 랭크를 매 겼지요." "랭크를 매기다니?" "트럼프 패처럼 계급이 정해지는 거죠. 이시오카 씨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서 각자의 경험담을 들어요. 상당히 디테일한 부분까지 접근하지요. 그런 테스트 같은 것을 거쳐 랭크를 결정하는 거예요." "당신 랭크는요?" "난, 밑에서 두 번째인데,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홀딱 벗고 언제나 개처 럼 기어다녔어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줌도 눠야 하구요. 말하자면 인격 이 전혀 없는 거죠." "개 흉내를 냈었다는 게 그거로군요. 제일 하위로 랭크되는 여자는, 그 럼, 어떻게 합니까?' "나는 랭크 포였기 때문에 인격이 없었고, 랭크 쓰리인 애는 자유가 없 었어요. 항상 비참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었어요. 의자에 다리를 크게 벌 리고 앉아 있거나 하는 거 말예요. 랭크 투는 옷과 이름이 없었구요. 그런 말을 붙이는 건 모두 이시오카 씨 권한이었어요. 제일 위의 랭크는 자기가 원할 때, 가령 이시오카 씨한테서 명령을 받았 을 때나 요정 같은 소피와 동성애를 하고 싶을 때 옷을 벗어도 돼요. 이름 도 불러지구요. 가장 하위 랭크는 존재 자체가 없어요. 고역을 치르죠. 항 상 무슨 고통을 참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장미꽃을 엉덩이 사이에 꽂아 넣은 다음 허리를 구부리고 그걸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주고 있 거나 다른 사람의 의자가 되어 있거나 하는 거죠. 몸 여기저기에 클립이 꽂히기도 하구요. 이시오카 씨는 10세기의 이태리인가 어디의 신분제도와 같은 거라고 했 는데 상당히 자극적이었어요. 그 게임이 끝나면 랭크는 없어지고 다시 술 을 마시고 운 좋은 여자는 이시오카와 섹스를 할 수도 있었죠. 우리들은 모두 이시오카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 주고 싶어했어요." "종교 같군요. 소피라는 여자는 뭘 했습니까?" "소피는 특별한 존재예요.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도 이시오카와 둘만 남 지요. 두 사람이 섹스를 할 때 애무하도록 허락 받은 여자들도 있었어요. 나 역시 그랬죠.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랭크가 낮았다고 해서 내가 상 처를 받거나 하진 않았어요. 난, 기꺼이 개 흉내를 냈으니까요." 이상하게도 겐지는 이시오카가 어떤 비디오를 만들려고 했는지 알 것 같 았다. 본질적으로, 아야코가 말했던 그 까만 비닐봉지가 매달려 흔들리는 것과 같은 컨셉이다. 겐지는 일을 잠시 잊고 그 비디오를 보고 싶다고 생 각했다. "당신, 내가 왜 이런 곳에 들어오게 됐는지 알아요?" 겐지는 고개를 저었다. 알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 했다. 당신은 기꺼이 개 흉내를 내고 있는 자신이 자신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은 거야. 더 욱이, 이시오카 앞이라면 기꺼이 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어디에서 도 자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개 흉내를 내고 있을 수도 없을 것이지만. "이시오카는 왜 내가 인격이 없는 개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아주 알기 쉽게, 마치 머리 나쁜 학생에게 열심히 설명해 주는 선생님처럼 말해줬어 요. 나 자신에 대한 그런 논리 정연한 평가를 듣고 나는 키위나 사과를 바 닥에 굴리면 그걸 입에 물고 뛰거나 기었어요. 그러는 동안 점점 뭔가가 온몸에 문신처럼 새기고 싶어 안달이 났어요. 시부카와는 질색을 했지만 엉덩이 한 중간에 조그마한 문신을 새겼어요. 이시오카나 다른 여자들이 뽀치나 코로하고 부르면서 애완견 훈련용 회초리로 때리곤 하는 거기에 말 예요. 지금도 이런 애기를 하면서 몸이 떨리는 건 땀 때문이에요. 땀." "땀?" "나도 처음 안 것이지만, 여자가 정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우면 서도 그 부끄러움을 즐기고 있을 때는 땀을 흥건하게 흘려요. 알고 있었어 요?" 겐지는 몰랐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땀은 몸의 구석구석에 고일 정도로 흘러 나와요. 그리고 그 땀에서는 때때로 개 냄새가 났어요. 뭐랄까, 생간 같은 냄새... 그 냄새가 무서워 소름이 끼쳤지만, 사실은 또 다시 그 땀을 흘리 고 싶어서, 그 땀을 낼 수만 있다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 고, 그래서 여기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 땀에 대해서 다른 여자들이나 이 시오카가 말하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자기 한테 일어나는 일이라도 모를 수 있는 거잖아요. 시부카와하고 그전에 자주 골프장에 갔었는데, 자세가 어떻고 스윙이 어떻고 해도 자신은 잘 모르는 것처럼 알이죠. 당신은 골 프하나요?" "아뇨. 미국 어디의 것이라는 꽤 유명한 회원권은 가지고 있긴 합니다 만." 겐지는 그 회원권을 누가 사 주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록폰기의 바 마담인지, 긴자에 있는 여자인지, 신바 시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경영 하는 여자인지, 어쨌든 그 중 한 명인 것만은 분명한데, 기억이 나지 않았 다. "스윙 자세나 마찬가지로 땀에 대해서 나 자신도 몰랐던 거죠. 랭크 투 였던가, 시코쿠의 어부 집안 출신인 재미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뭐 였더라? 물론 본명은 아니었겠지만, 남자 같은 이름이었을 거야. 아마, 토 시키인가 후미아키인가 하는 그런 이름이었을 텐데, 그 여자애가 어머, 뽀 치야, 너 기기에 땀이 굉장히 많이 났어 하면서 엉덩이를 톡톡 쳐서 거울 앞까지 기어가도록 했지요. 난생 처음 그 땀을 내 눈으로 보게 된 거예요. 그 때 일은 정말 못잊을 거야, 절대로." 말을 마치고 나서 아미는 처음으로 괴로운 얼굴 표정을 지었다. 겐지는 이전에 그런 얼굴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겐지는 이것저것 약 을 해 봤지만, 빠지는 일은 없었다. 왜 빠지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왠지 무서웠던 것일 게다. 포르노 영화의 여배우와 1개월 정도 사귄 적이 있는데 그 여자는 각성제를 좋아했다. 마침 흡입식 각성제가 나돌기 시작 했던 무렵이었는데 누가 권하기에 겐지도 꽤 들이마셨다. 시계가 이상해질 때까지 들이마시자 둘 다 자위행위를 배운 원숭이처럼 되었다. 하지만, 약 기운이 다해 가자 모든 것이 나에게 나쁘게 돌아가는 것 같은 견딜 수 없 는 불쾌감이 엄습했고 목도를 휘둘러 이모내외를 다치게 했던 그 밤의 기 억이 떠올랐다. "내 엉덩이에 땀방울이 맺힌 걸 처음 봤던 거예요. 내가 내 엉덩이를 가 까이서 보니까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고, 토시키인지 미아키인지 하는 랭크 투가 그 땀을 손가락으로 찍어 핥아먹도록 했죠. 그때 난 완전히 절정에 달했어요. 아무 데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말예요. 다리나 어깨가 아니라 내 장이 경련되는 느낌으로 절정을 느낀 거예요. 그러고 나서 이시오카가 드 땀에 대해 이야기해 줬죠. 당신, 여자가 그런 땀 흘리는 것 봤어요?" 겐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야코도 미와코도 요리코도 온몸에 땀을 흘림 몸을 떨었지만 아미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렇죠? 당신은 여자를 팔고 있는 사람이죠? 그런 땀은 내가 생각하기 엔, 매춘부가 흘리기 쉬운지도 몰라요. 이시오카는 우리들이 그런 담을 많 이 흘릴 때까지 여러 가지 일을 했죠. 왜 그 땀에서 생간 냄새가 나느냐고 내가 무렀을 때, 그는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추운 곳 에서 보았다는 순록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당신 그런 이야기 알아요? 노 르웨이나 스웨덴이 있는 곳을 뭐라고 했었죠?" "스칸디나비아 반도 말입니까?" "맞아요, 거기 훨씬 북쪽에 순록을 기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대요." "랩족이겠죠?" "그래요, 잘 아는군요. 어떻게 알죠?" "체르노빌이라는 덴데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났던 곳입니다. 방사능에 오 염된 풀을 순록에게 먹였고 그 순록을 먹은 랩족들은 큰일이라고 했던 걸 어디에서 읽은 거 같아요." "이시오카는 여러 곳을 다녀요. 지구의 북쪽 끝이라 겨울이되면 밤만 계 속되는 기간이 있대요. 그럴 때 먹을 식량으로 죽여야 할 순록을 선택하는 작업을 하는 날이 잇는데, 몇 천 마리나 되는 순록을 한 자리에 모아, 이 리저리 몰면서 다리나 배에 난 상처를 보고 어느 놈을 잡아서 고기로 할 건지를 결정하는 모양이에요. 주로 죽는 놈은 몸이 별로 크지 않은 수컷인 데, 죽을 운명의 수컷은 정해진 우리로 들어가게 되나봐요. 순록은 훌륭한 뿔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로 인간을 공격하거나 하지 않는대요. 그 뿔로 힘 껏 찌르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대도 찌르지 않는대요. 아 주 옛날부터 인간이 길러왔기 때문에 그런 뭔가가 배어 있는 거라고 이시 오카가 말했어요. 그래서 이시노카가 우리에 들어 있는 백여 마리의 수컷 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대요. 죽게 될 것을 알지만 원래 온순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저 애처로운 눈을 하고 있을 뿐이래요. 그래 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져 곧바로 배가 갈라지면 간을 꺼내 그 자리에서 모두 나눠먹는다는데 그 간 냄새가 굉장히 자극적이었던 모양이 에요. 정말 살 냄새가 약간 났었대요. 내 땀처럼 말이에요. 아, 안 되겠 어, 이런 애기를 하니까 못 참겠어." 아미의 표정이 바뀌며 우선 손가락 끝이, 다음엔 손과 발이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아미의 아랫배는 스타킹 고무줄에 눌려 주름이 세 군데 잡혀 있 다. 살이 쪄서 겹친 게 아니라 근육에 가볍게 붙어 있는 피부가 중력에 버 틸 수가 없어 단순히 늘어져 있는 것이다. 손끝의 가녀린 떨림이 손과 발 에 전해졌고 그 아랫배에 생긴 주름도 잘 관찰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가 늘게 위 아래로 떨고 있다. 그 떨림은 추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에 의한 것도 아니다. 아미의 엄지 발가락이 떨리며, 도로에 잘못 기어나온 송충이처럼 갈피를 잃고 움직이고 있었다. 겐지의 고객 중에 여자 발가락을 이상하게 좋아하 는 노인이 있는데, 그에게 지금 아미의 발가락을 보여주면 얼굴이 환희로 가득찰 것 같다. 아미는 수치스러움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미 를 지켜보던 겐지는 발기했다. 스트리퍼를 보고 남자가 흥분하는 것은 그 녀들이 옷과 함께 벗어던지는 수치를 보고 흥분하기 때문이다. 아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양쪽 뺨에 이따금 경련을 일으키며, 조금씩 얼 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그녀는 엉덩이에 찬 땀과 함께 자신의 수치를 내 뿜고 있었다. 아미는, 이시오카 앞에서 모든 부끄러움을 버리는 자신을 잊 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겐지에게 불현 듯 펠라티오를 하는 것 따위는 지금의 아미에게는 부끄러움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시오카 앞에서 개가 되어 기어다니던 자신을 조금이라도 떠올리며 그 때의 기분에 젖어들고 싶을 뿐이다. 시부카와는 알몸이 되어 뒹굴어도 전혀 아무런 감흥이 없다. 지금의 아 미에게 시부카와의 몸은 전혀 성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자위 기구나 개나 원숭이의 성기, 마치 모래를 채워놓은 살색의 양말 같은 물건에 지나 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시부카와는 아미를 이곳에 감금해 두고 이시오카를 '말살' 하기 위해 겐지를 고용한 것이다. 자신의 육체가 모래 로 채운 살색 양말과 같이 취급받는다면 어떤 마조히스트라고 해도 분노를 느낄 것이다. "저기 있잖아요." 떨리는 목소리를 참아가며 아미가 말했다. "이시오카에 대한 건데, 우리들에게 약을 썼어요." "약?" "나도 어지간한 건 다 알고 있는 편인데 마약은 아니었어요. 샤브나 코 카인, 엑스 같은 건 아니었어요. 이시오카가 새로운 우울병 치료제라고 했 는데 코카인과 엑스를 섞은 것 같다고 할까. 어퍼계인것만은 틀림없구요. 그걸로 아주 이상해지는 애들도 있어서, 그런 여자에게는 다우너계도 썼어 요." "항상 그런 약을 썼나요?" "항상 그런 건 아니고, 아무한테난 하는 것도 아녜요. 멍청하거나 돈만 밝히는 여자에겐 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정확하게 무슨 약인지 모르니까 불안감도 잇잖아요. 다우너계는 한때 문제가 되었던 앱손 사에서 나온 할 시온하고 비슷했어요. 더 소프트하고 루즈했으니까 아마 일본에서 흔치 않 은 걸 거야." 이 정보는 귀중해 ,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겐지는 일어섰다. "아미 씨는 이시오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 습니까?" 그렇게 묻자 아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예요, 혹시 이시오카를 만나면, 내가 죽고 싶도록 보고 싶어한 다고 전해 줘요. 정말 보고 싶으니까. 여긴 전화도 연결해 주고 외출도 자 유니까 전화해 주면 어디든 달려 가겠다고 해 줄래요? 여기 비용이야 시부 카와가 대주고 있으니까, 나한테 여유 돈이 좀 있어요. 백 정도는 잇으니 까,저기, 백 정도면 미국 같은 데 갈 수 있죠? 난, 외국에는 별로 간 적이 없어서 잘 모르는데 백만 엔이면 미국에 갈 수 있지요?" 겐지는 "갈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병원에서 밖으로 나서자 햇볕이 따가웠다. 겐지는 선글라스를 끼고 역 근처의 택시 승차장까지 걸었다. 걸으면서 그는 엉덩이에 맺힌 땀을 떠올 렸다. 그리고 등을 구부리고 소파에 앉아 잇던 아미를 떠올리자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자주 꾸는 꿈이 있다. 겐지는 그 꿈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꿈속에 서 겐지는 영화에서 본, 외국의 카페 같은 곳에 있었다. 대형 유리창에 흰 색 블라인드가 드리워 있건만 실내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겐지는 혼자서 밀크티를 마시고 있다. 실내는 사람들로 붐볐고 다른 손님들은 이국의 언 어로 이야기했다. 겐지는 그곳이 어딘지도 모른다. 겐지는 누군가와 만날 약속도 없고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거도 아니지만 누군가 아는 사람이 갑자 기 가게에 들어와 '어이, 겐지' 하고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가 게의 웨이터와 웨이트리스, 다른 손님들은 당연히 겐지를 무시하고 있다. 불안이나 공포는 없지만 어째서 자신이 여기서 차를 마시고 있는 지 전혀 알 수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이 카페가 어디에 존재 하는 것 인지도 알 수 없어서 그는 카페에 꼼짝없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꿈을 떠올리며 겐지는 택시에 올라탔다. 그제서야 비로소 겐지에게 이시오카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제 4장 댄스 겐지의 방은 다다미 열두 장 넓이의 거실이 있는 두 칸 짜리였고, 집세 는 칠만 엔 남짓했다. TV나 오디오세트는 물론 워크맨도 없다. 거실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책장이 있을 뿐이다. 다 읽은 책은 특별한 게 아니면 곧 바로 버리기 때문이다. 소파는 스페인제라는 푹신한 검은색 가죽제품으로 3년 전에 마흔이 넘은 여자가 사 준 것이다. 여자의 남편은 패션 디자이너였는데 디자이너 브랜 드라는 것이 유행할 무렵, 그녀의 남편은 안티숍 체인점과 제휴해서 대규 모 납품으로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다. 여자는 그 돈으로 겐지에게 소파나 시계, 양복을 사 주었다. 작은 키에 아담한 얼굴과 체구였던 그녀의 요구에 겐지는 순순히 응해 주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뒤탈없는 연하의 남자 와 오랫동안 섹스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디자이너 브랜드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안티숍 체인점들과의 계약문제로 송사에 시달리는 남편을 돕기 위해, 그녀는 겐지와 헤어졌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당신의 뜨거운 입술이 주는 쾌감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야. 거실 옆, 두 평 남짓한 방에 침대가 놓여져 있다. 침대는 가구점 바겐세 일 때 겐지가 직접 산 것이다. 더블 침대지만 딱딱한 스프링과 심플한 디 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은 야전침대 같은 걸 갖고 싶었지만. 시부카와한테 일을 의뢰받은 지 일주일이 되었고, 그 일의 계기가 된 아 미를 만난 지도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고객들로부터 열 네 건 정도의 전 화가 걸려왔고 그 중 선별하여 미와코에게 세 명, 아야코에게 세 명, 나츠 미에게 두 명, 요리코에게 한 명을 소개해 주었다. 어젯밤에는 나츠미가 찾아와서 유부를 만들어 주었다. 겐지는 나츠미와 는 절대 함께 자지 않는다. 미술학원의 강사인 나츠미는 아야코보다는 오 래 되지 않았고 미와코보다는 오래 되었는데 두 달 정도 데리고 있던 다른 여자의 소개로 일을 시작했다. 20대 후반으로, 안경을 쓰고 있어도 매력 적인 얼굴의 혼혈이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 며 아야코와도 사이가 좋다. 그녀는 유부를 먹으면서 그림 이야기를 했는 데, 미술 강사이면서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 다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도 미술이 전공이잖아." "우리가 피아노를 친다고 해서 전부 피아니스트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릴 게 없나?" "난 주로 데생을 해요. 작은 딸기에서 큰 교회까지 뭐든지 그릴 수 있어 요." "그림을 안 그려도 가르칠 수는 있겠군." "맞아요,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가르치는 건 달라요. 겐지가 싫어하는 음 악 애긴데, 재미있는 애기를 들었어요. 꽤 옛날 이야기인데, 쇼팽 콩쿠르 인가 있잖아요, 거기서 열 다섯 살에 우승한 애가 있었대요."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흑인과 백인 혼혈이었대요. 그런데 유명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자취를 감춰 버렸대요. 그리고 60년이 흐른 뒤에야 사람들 눈에 띄게 되었는데, 글세 매춘부가 득실거리는 바에서 꽃노래 같 은 걸 연주하고 있었다지 뭐예요." "꽃노래 뭐야?" "재즈 같은 건데, 재즈처럼 시끄럽지 않은 것 있잖아요. 왜, 흑인 말고 백인 여자가수가 가볍게 흥얼거리며 부르는 거. 재즈 알잖아요?" "음악은 다 듣기 싫지만 재즈는 특히 더 싫어." "왜요?" "애기하려면 길어." "그렇겠네. 그래도 그 60년 동안이나 몸을 숨겼던 사람의 피아노라면 들 어보고 싶은 생각 없어요?" "전혀." "나도 60년 정도 지나면 그림을 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몸을 파는 거나 그림을 그리는 거나 다 수요가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 지 않는 건 공급의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야. 겐지는 그렇게 말하려다 가 그만두었다. 나츠미가 아야코한테서 받아온 쪽지를 내밀었던 것이다. -이게 그 사람 연락처예요. 자동응답기가 받을 때가 많지만 젊은 여자가 받을 때도 있어요. 알아서 하겠지만, 내 애긴 아지 말아요. 겐지는 나츠미가 돌아가고 두 시간 뒤, 오전 11시 정각에 아야코가 가르 텨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역시 자동응답기가 받았다. " <페리스 이즈 버닝> 같은 영상 작품에 협력하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제 직업은 변호사나 의사, 그 외 여러 사람들에게 여자를 소개 해 주는 것 입니다." 겐지가 메시지를 녹음하고 있을 때, 여보세요, 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 가 끼여들었다. 금속적인 목소리였다. "누구십니까?" 낮고 금속적인, 낡은 라디오의 FM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같았다. 경 계와 흥미를 나타내는 느릿느릿한 어조-. "야마가미라고 합니다. 특별히 영화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만, <페리스 이즈 버닝> 같은 영화라면 꼭 협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서..." 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미가 말했던, 비서와 애인을 겸한, 요정 같 은, 소피라는 여자일까? 음, 요정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낮게 깔렸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실례지만, 어디에 전화하신 거죠?" "이시오카 씨의 사무실이라고 친구에게 들었습니다만..." "누구죠? 그 친구분 이름 말예요." 겐지는 상대가 외국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악센트와 경 어가 약간 이상하다. 아미가 말한 요정 같은 여자란 이 여자를 말하는 것 일까? 작고 날렵한 몸매? "전화번호를 멋대로 가르쳐 주는 걸 불쾌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니까 그 친구의 이름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영화관계자는 아닙니다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시오카 씨의 작품에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잠깐만요." 그녀의 말투는 직업적인 이유로 느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일본 어에 자신이 없어서일 것이다. 마지막에, 잠깐만요, 하고 말할 때는 전혀 공손함을 느낄 수 없었다. 대단히 사무적인 느낌이었다. "여보세요, 이시오카입니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약간 쉰 목소리에 빠른 말투 였다. 라디오난 TV에 출연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고 겐지는 생각했 다. "야마가미 겐지라고 합니다." "편지를 보냈던 사람인가? 그 뭐야, <내가 조사실> 인가 하는 그 노란 봉투의 편지 말이야." "편지를 보낸 적은 없습니다." "아아, 그래요? 강연은 안 합니다. 특히 대학 축제 같은 건 사절이에요. 미안하지만 대학생을 싫어해 놔서." "저, 매니저께서 아무 말씀 안 하시던가요?" "매니저라뇨?" "그 여자분 말입니다." "소피는 우리말을 잘 못해요. 그런데 당신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혹시 싱가포르의 훼아몬트에 있던 사카 씨 아닌가?" "아닙니다. 저는, 여자를 돈 있는 사람들에게 연결해 주는 일을 하는 사 람입니다." 겐지가 그렇게 말하자, 이시오카는 잠시 쉰 목소리를 삼켰다가, "뭐?" 하고 말했다. "저는 포주난 대충 똘마니라고 불리는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 다." "농담이겠지. 날 놀리는 건가, 지금?" "사실입니다. 지금 여자를 네 명, 키우고 있습니다." "키우고 있다고?" "네. 흔히 개를 키운다거나 말을 키운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 다." 이시오카가 다시 숨을 삼키고 침묵했다. 여자를 키운다. 라는 표현에 반 응한 것일 거라고 겐지는 생각했다. 선천적인 사디스트는 그런 표현에 바로 반응한다. 아미의 말에 의하면 이시오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디스트이다. 몽둥이나 양초로 여자에게 고통 주기를 즐기는 남자가 사디스트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자를 완전 히 지배한 다음, 고통을 주고, 그 고통을 참아내는 사람을 칭찬하며 더욱 더 강하게 지배하는 자가 진정한 사디스티이다. 고통이라고 해서 몸에 바 늘을 꽂거나 하는 그런 게 아니다. 개에 비유하자면 먹이를 앞에 두고 '먹어' 하고 할 때까지 먹지 못하게 조련하는 그런 것이다. 사디스트에게 필요한 것은 잔인함이 아니야, 하고 겐지에게 가르쳐 준 여자가 있었다. 니스인지 로마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남유럽에 살면서 제과나 아르누보 의 타피스트리를 공부하고 일본인 여행객과 일본 상사원을 상대로 가라오 케 장사를 하면서 6개월에 한 번씩 신경증에 걸리는 그런 여자였다. 스물 여섯이라고 했지만 마흔을 넘은 것처럼 늙어보였고 정도가 심한 변태였다. 시부야에 있는 미니바에서 겐지에게 말을 걸어와 장쥬네 이야기를 하고 하급 호텔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후 일주일 정도 만났는데, 불결한 것에 흥분하는 그런 여자였다. -사디스트에게 필요한 것은 잔인함이 아냐. 정신적이고 확실한 정보라 구. "자네, 그럼 야쿠자인가?" 그럼, 당신은 은행원인가? 하고 묻듯이 이시오카가 말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대개 그런 일은 야쿠자가 하지 않나?" "면허가 필요한 건 아니죠." "그러니까 말일세." "네?" "아니,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말이야. 나는 야쿠자에 친구가 없어. 뉴욕에 마피아 친구가 있긴 하지만, 그 친구는 시 실리안이 아니고 유태게야. 그래서 나더러 여자를 사란 말인가? 자네 같은 사람이 키우고 있다는 그 여자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지금은 됐어. 물 론 비싸기도 할 테고." "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시간에 얼마인가?" "여자에 따라 다릅니다." "재미있군. 기준이 있다는 거로군. 제일 비싼 게 얼마지?" "십 오만 엔입니다." 대답을 하면서 겐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값은 아야코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마치 이시오카에게 아야코를 소개하는 듯한 기분이 들 었던 것이다. 아미가 참가하던 그런 게임에 참가하면 아야코의 랭크는 어떻게 될까? 겐지는, 아미가 개처럼 기어다니면서 항문에 꽃을 꽂고 엉덩이를 흔들고 웃음거리가 되어 마룻바닥에 뒹굴고 있는 파파야를 입에 무는 것을 상상했 다. 그 상상은 음악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 겐지는 이시오카와의 전화에 집 중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한 시간이 제한은 아니고, 두 시간이 미니멈으로 되어 있습니 다." "뭐? 한 시간으로 금액을 정해놓고 미니멈이 두 시간이라? 뉴욕의 리무 진하고 같군. 롱스트레치에 소형전구가 붙어 있는 리무진이 한 시간에 70 달러인데, 미니멈이 두 시간이거든." "저는 당신의 영화에 협력하고 싶습니다. 협력해 드릴 수 있을 거라 생 각합니다." "영화는 안 찍는데." "네? <페리스 이즈 버닝> 같은 영화를 만드신다고 들었는데요. 아닙니 까?" "그건 비디오야. 비디오하고 영화는 달라." 이시오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겐지는 순간 숨을 삼켰다.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냉정한 어조가 분명했다. 전화가 상상 력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비디오야. 하는 이시오카의 목소리와 어조에는 오싹하는 뭔가가 있었다. -사디스트에게 필요한 것은 잔인함이 아냐. 정신적이고 확실한 정보지. 할말을 찾다가, 그렇습니까? 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비디오보다 영화쪽을 좋아하세요. 제가 잘못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이시오카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이시오카가 잠자코 있는 동안, 겐지는 만년필의 장침으로 이시오카의 눈과 목을 찌르는 것, 그리고 그와 함께 다른 누군가의 눈과 목을 찌르는 것을 동시에 상상했다. 이시오 카와 함께 누군가를 그렇게 위협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하고 생각하고 있 는 자신을 깨닫고 겐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영화는 누구나 좋아하지." 당연하다는 듯 이시오카가 말했다. "그렇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은 저녁 시간이 비어 있어." 이시오카의 목소리에서 냉혹함이 사라졌다. "여기는 편집 스튜디오고, 나는 신주쿠에 있는 호텔에 살고 있네. 호텔 로 올 수 있겠나?" "오늘 저녁에 이시오카와 만나기로 했어" 하고 겐지는 아야코에게 전화 했다. "그보다... 자기, 나츠미하고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냐? 나츠미 하고 잤 지? 하고 아야코가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잡지사 편집실에서 큰 소리 로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나츠미가 얼마나 자기하고 하고 싶어하는데. 그거 몰라?" "난,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 몰라. 내 타입, 알잖아." "다음에 셋이서 어때?" "상관없어." "이런 애기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한 걸, 화장실에 가서 그거라도 하 고 와야지." "오늘 이시오카를 만난다니까." "아까 말했잖아." "뭘 입고 가는 게 좋을까? 터프한 차림이 좋을까?" "아무거나 상관 없을 거야. 어차피 이시오카는 만난 지 10분도 안돼서 겐지에 대해 다 알게 될 테니까." 겐지는 정장을 입고 가기로 했다. 저녁 때까지 아직 시간이 있었기 때문 에 근처 식당에서 당면을 먹으면서 TV에서 중계되는 유명한 텔런트의 이 혼 기자회견을 보았다. -결국, 서로가 생각한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꿈이 큰 차이를 보였습니 다. 여자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이상적인 가정이라는 둥 뻔한 이야 기를 태연하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은 이 나라와 미국밖에 없을 거야. 겐 지는 열심히 당면을 씹으면서 생각했다. -잘 씹어 삼키지 않으면 나중에 커서 암에 걸려요. 밥 먹을 때마다 어머니는 그 말밖에 하지 않았다. 이모네 집은 장사를 했기 때문에 빨리 먹으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밥을 먹었다. 그렇지만 겐지 는 언제나 천천히 잘 씹어 먹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츠미와 미와코, 요리코에게 전화를 했다. 미와코는 방에서 비디오를 보고 있었고, 나츠미는 로마 황제의 흉상을 데 생하는 중이었다. 또 요리코는 입냄새가 지독한 오샙대 남자에게 넥타이를 팔고 있는 참이었다. 요리코는 백화점에 근무하는데 시즈오카의 지방 철도 역 역장인 아버지를 둔 천사와 같은 눈을 가진 여자다. 미와코는 오른팔을 모기에 물렸다며 엄살을 부렸고 나츠미는 다음에 파에리아를 만들 거라고 또 요리코는 사랑한다고 말했다. 늦지 않기 위해 겐지는 신주쿠까지 전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신주쿠의 고층빌딩,vip전용층에 이시오카의 방이 있었다. 그 층에는 엘리베이터조차 전용키를 꽂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다. 이시오카가 가르쳐 준 대로 로비에서 방으로 전화를 하자 소피라는 여자가 마중을 나왔다. 아미가 요정 같다고 한 그 여자는, 남성용 티셔츠와 가죽 벨트가 달린 검정색 인조 가죽 바지를 입고 빨간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키는 겐지보다 약간 작아서 백 칠십 센티미터가 될까말까 했다. 그녀는 빨갛게 물들인 머 리를 넓직한 검정 고무 밴드로 아무렇게나 묶고 있었다. 겐지가, 안녕하세요, 하고 말했지만 소피는 이쪽이에요, 하고는 겐지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는 미국 영 화 같은 데서 자주 볼 수 있는, 붙임성 없는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 같아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자 엘리베이터걸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 서, 몇 층을 이용하겠느냐고 물었다. 소피는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고 주머 니에서 키를 꺼내 조작판의 구멍에 끼워 넣었다. "아, VIP클럽의 손님이십니까? 항상 이용해 주셔서 감사랍니다" 하는 엘리베이터 걸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소피는 닫힘 버튼을 눌러 버렸 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피는 두 번쯤 정면으로 겐지를 훑어보았다. 종업원 을 고상하게 무시하는 태도는 완벽하게 외국물을 먹은 아이들의 그것이었 지만 얼굴은 과거 일본 영화에 나오는 조연 여배우를 연상시켰다. 그 때의 기분에 따라 부드럽게도, 냉혹하게도 보이는 그런 얼굴이었다. VIP 층에는 담당 직원이 자리한 자그마한 바 라운지가 마련되어 있 었다. 두툼한 나무판의 책상에 낮아 있던 진한 감색 제복을 입은 여직원 이, 어서 오십시오, 하고 소피에게 인사했다. "안 되는 줄 압니다만 중요한 이야기라서 직접 방으로 안내해 드리고 싶 어서요." 소피는 직원에게 정중하게 말하고 허가를 받았다. 이시오카는 신주쿠의 야경과 하이힐을 신은 여자의 다리를 오버랩 시킨 비디오를 보면서 이상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겐지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 는 비디오오 오디오의 전원을 그고 소파를 권했다. 수십 장의 쇠판이 바람 에 흔들리면서 웅웅대는 듯한 음악은 서서히 사라졌다. "맥주라도 드시겠어요?" 소피가 말하자 겐지는 콜라를 달라고 했다. 소피는 겐지 앞에 콜라를 . 이시오카 앞에는 밀러를 내놓고, 자신은 블러드매리를 만들어 마셨다. 겐 지는 그녀의 얇은 입술과 가는 목 사이로 흘러드는 빨간 액체를 보고 있었 다. 소피는 이윽고 긴 유리잔에 담긴 액체의 반 정도를 단숨에 마셨다. 나 이프라도 손에 쥐고 있으면 어울릴 것 같은 여자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 다. 얼굴색을 바꾸지 않고 냉정하게 급소를 찌를 것 같았다. "소피는 나보다 술을 잘한다네." 이시오카가 말했다. 근ㄴ 아야코가 보여준 사진보다 약간 비만해 보였 다. 짧은 머리칼 때문에 비만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겐지는 잡지 같은 데 서 나온 사람을 이렇게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주간지에 화보로 나오는 포 르노 배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미안하네. 자네가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잊어버렸어." 이시오카는 적당한 실내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스위트룸에서 폴라에 진 을 받쳐입고 이태리제로 보이는 멋진 로퍼를 신고 있었다. 소피가 블러드매리를 다 마셨다. "저는 여자를 다른 남자엑게 주고 돈을 받아먹고 사는 놈입니다. 선생님 께서 만드시는 비디오에 협력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 그랬었지." 이시오카와 소피가 마주 보았다. 방은 전체적으로 크림색이었거 베를린 과 토론토 영화제의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었다. "누구한테 들었지?" "네, 무슨...?" "내가 비디오를 찍고 있다는 거." 소피가 일어서서 수화기를 들고, 교환수에게 전화를 연결하지 말라고 지 시했다. 지금, 이 두 사람을 장침으로 찌르면 어떻게 될까? 하고 겐지는 생각했 다. 두 사람의 눈을 찌른다. 이시오카라는 남자는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앞을 못보게 된다면 그는 필경 상상력에 못 이겨 미쳐서 발광하고 말 것이다. 시부카와는 기뻐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체포되고 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게임의 승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검은 비닐 봉지가 매달려 천천히 흔들리는 걸 보았습니다. 구체적이 지는 않스비니다만 다음에 <페리스 이즈 버닝> 같은 걸 만드시려고 한다는 애기를 친구에게 들었지요." "친구라면?" "제 절친한 걸 프랜드인데, SM클럽에 다니는 여자입니다." "클럽과 여자 이름은 ?" "아피시우스라는 클럽의 레이카라는 여자입니다." "알아?" 하고 이시오카가 소피에게 묻자,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워낙 한 두 명이 아니니까." "아, 그렇지." 이시오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나한테 어떻게 협력하ㅇ다는 건가?" "아마, 비디오는 다큐멘터리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큐가 아니라면 제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거구요." "야쿠자 수업이라도 받고 있는 건가? 아, 그렇지 않다고 했지." "네, 아닙니다." "검은 비닐 봉지가 나오는 그 단편 말인데, 어떻게 생각해? 재미 있었 나? 어디서 본거지? 일본에서는 안 팔 텐데?" 겐지는 수입 비디오 전문 판매점을 둘러댔다. "그런 매장이 있어? 하고 이시오카가 소피에게 묻자, 소피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호도로프스키, 카우리스마키 같은 초기 단편들을 멕시코나 핀란드보다 많이 ㅋㄴ열해 뒀어요." "저는 존경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모택동인가?" "아뇨. 처크 트레이너입니다. 미국 남자입니다. 본명이 아닐지도 모르지 요. 린다 라브레이스의 기둥서방이엇던 놈입니다. 해병대 출신인데 총으로 위협사고 두들겨패서 린다에게 매춘을 강요하고 포르노 필름에도 출연시켰 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짠돌이에다가 치사한 놈이죠." "알아?" 하고 이시오카가 아가와 마찬가지로 소피를 향해 묻자 소피는 <디프 슬로트> 로 유명해진 여배우예요, 하고 가르쳐 줬다. "그러면 그게 무슨 말인가? 같은 기둥서방으로서, 내 말은 그러니까, 포 주로서 말이야, 그 놈이 천재라든가, 혹은 이상적이라든가 뭐 그런 애기인 가?" "잘 말씀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자에게 고객을 받게 할 때 때리거나 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스스로가 매춘을 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편입니다. 몸을 파는 건, 사실 그걸 말리는 남자가 없는 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거죠. 글허게 때문에 애초에 소프랜드 같은 데서 일하는 머리 나쁘고 설득할 필요가 없는 여자애들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 "그러니까, 소프랜드라는 곳은 이 나라에서 공인된 거 아닙니까? 뭐, 포 르노 테이프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루트가 확보되어 있으니까 죄책감이 덜 하고, 사실 좀 뻔뻔하지요." "지금, 사회성을 말하는 건가?" 겐지가 끄덕이자 이시오카와 소피가 다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니가 뭐야, 자네가 데리고 있는 여자를 소중히 여긴다는 거로군."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겐지가 그렇게 대답하자 소피가 미소를 지었다. 소피가 보여준 첫 미소 였다. "하지만 때로는 아주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소피는 블러드매리를 다시 만들고 있다. 우선 정밀하게 양을 재어 우오 츠카를 유리잔에 따르고 손으로 얼음을 집어 넣은 뒤 토마토 믹스를 따랐 다. 우오츠카 2에 토마토 믹스 1으 비율이다. 소금과 후츠를 잔뜩 넣은 다 음 우스타 소스를 떨어뜨리고 집게 손가락으로 휘저은 뒤 그 손가락을 빨 았다. 그러는 중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줄 담배를 피워댔다. 타락한 요정이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처크 트레이너는 비천하고 야만적이며 잔혹하지만 확실합니다. 온두라 스 인디언한체 최면술을 배웠는데 그 기술을 동원해 린다를 정말 노예처럼 만들었죠. 린다는 수십 명의 남자들에게 돌려졌어요. 백 오십 킬로그램이 나 되는 뚱보라든가, 휠체어 신세를 지는 여든 살 노인, 서로 오줌을 갈기 지 않으면 흥분되지 않는 변태 놈들에게 말입니다. 처크는 린다에게 최면 술을 걸어 갖은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일삼고 총을 들이대면서 가족이나 어린 동생을 죽이겠다고 위협해서 고분고분 말을 듣게 했던 겁니다." "정말로 그런 놈을 존경하고 있나?" "네"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이유만으로?" "처크는 최소한 화해를 하지 않으니까요." "화해?"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 말입니다." "뭐하고 화해 안 했다는 건가?" "휴머니즘입니다." 겐지가 그렇게 말하자 이시오카는 소피를 보았고, 소피는 겐지에게서 시 선을 떼지 않았다. "처크는 뭔가를 증오햇을 겁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잖아요. 복잡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저 역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 애 기 따위야 해 봤자 소용이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시오카는 맥주를 그만두고 우오츠카 스트레이트로 바꾸었다. 겐지가 본 적이 없는 우오츠카였다. 투명하고 묵직한 액체에 풀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당신은 증오를 포기했나요?" 이번에는 소피가 물었다. "화해했어요?" "정말 화해했다면..." 겐지는 소피를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눈이 죽어 버리지요. 만원 전철을 참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겁 니다. 실제로는 아무도 화해할 수 없어요." 겐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처크 트레이너에 대 한 이야기는 미리 준비된 것이었다. 하지만 왜 집안 이야기까지 나와 버렸 을까?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기분이 좋지않군. 이시오카는 흥미있다는 듯 겐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 신이 흥미를 느끼고 있음을 굳이 감추지도 않았다. 이 정도로 정직하게 말 하지 않으면 의심을 살 거라고 아야코가 충고했고 겐지도 그렇게 생각했 다. 하지만 이런 묘한 감정은 난생 처음이었다. 너무 직접적이고 지금까지 없던 일이어서 정확하게 이것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 겐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미를 비롯하여 여자들이 기꺼이 옷을 벗어던지고, 무슨 일이든 받아들였음직하다는 생각 이 들었다. 바로 '긴장을 푼다는 것', 그것이었다. 방금 전, 자신은 긴장 을 풀고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그게, 내 비디오에 협력하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이시오카 씨의, 그 검은 비닐 봉지가 흔들리는 작품에서, 화해하지 않 겠다는 의지를 느꼈습니다." "그래요? 그냥 재미로 만든 것 뿐인데. 뉴욕 5번가에 항상 머무는 호텔 이 있는데, 그 맞은 편에 아주 큰 완구점이 있어. 거기에 철공이 동화의 나라를 여행하는 컨셉의 영구 운동 기계가 진열되어 있는데, 그걸 폐품으 로 패러디한 것 뿐이야. 작품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건물론 보는 사람 마음 이겠지." 빗나갔다,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이시오카는 슬쩍 화제를 바꿔 정보를 더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봐, 엉덩이를 더 흔들어. 잘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 야. 네가 갖고 싶은 것을 받을 수 없어. 너는 지배받고 있다는 게 어떤 건 지 모르는군. 너는 내 앞에서만 존재 가치가 있는 거야. 그걸 잊지마. 왜 그래? 뭐가 갖고 싶어? 말해 봐.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이시오카는 무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시오카 씨는 명란젖이 썩는 냄새를 아십니까?" 겐지는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뭐?" 이시오카는 엉뚱하다는 듯, 몰라,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모 집에서 자랐는데, 그건 어머니가 집을 나가 버렸기 때문입니 다. 아, 이런 애기 따분하십니까?" "따분하지 않아요" 하고 소피가 말하자, 이시오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애기가 끝나고 나서도 비닐 봉지 비디오에 대해서도 시치미를 떼 면 장침으로 년놈 다 눈깔을 파 주겠다.' 그렇게 결심하면서 겐지는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모가 친구한테서 고급 명란젖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건 정 말 평소 먹어보지 못하는 귀한 거니까 맛을 잘 보면서 먹어야해, 하고 이 모가 말했죠. 저는 특별히 그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공연히 이모말이 고까워서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명란젖에는 방부제가 들어 있지 않아서 그건 곧 상해 버리고 말았지요." "냉장고에 넣어두지 그랬어?" 이시오카가 물었다. "이모가 깜빡하고 넣지 않았던 겁니다. 그냥 단순히 랩에 씌워놓았는데 다음날 저녁에 명란젖이 썩어 버린 걸 알게 된 이모가 히스테리를 일으켯 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비싼 명란젖을 먹지 않고 썩혔냐고, 네가 그렇게 대단하냐고, 그런 말을 하면서 명란젖 통을 내 앞에 내 앞에 내밀었습니 다. 그 때의 냄새를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아주 기분이 나쁠 때는 지금 도 콧속에서 그 냄새가 납니다. 그 냄새는 저한테 어떤 상징처럼 작용합니 다." "상징이라고?" "심볼 같은 거죠." "상징? 심볼이라고 하니까 이상하게 배 나온 우리 부친, 물건이 떠오르 는구먼." 그렇다. 일부러 저속한 느낌으로 말하는 이시오카의 미묘한 변화를 겐지 는 놓치지 않았다. 이시오카의 알굴 어딘가에 음악을 증오하는 '징후' 같 은 것이 느껴졌다. 알고 지내는 야쿠자 중에는 그런 '징후'를 분명하게 표 정으로 드러내는 놈이 몇 명 있다. 그러나 야쿠자들의 경우, ㅈ신의 그런 '징후'를 지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간부들 중에는 그런 '몰락의 징 후'를 자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겐지는 간부와 만나본 적 이 없다. 야쿠자들은 정확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활용해야하며, 이용당하게 되면 반드시 지옥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간부의 경우, 이용하는 것은 대 단히 위험한 것이다. "무슨 상징이지?" 하고 이시오카가 물었다. "정당성입니다." 겐지가 대답했다. "정당방위의 정당성 말입니다." "사람을 때리거나 괴롭히거나 할 때의?" 미소를 지으며, 재미있다는 듯 다시 이시오카가 물었고, 겐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이 잔혹하게 한 만큼 자신도 타인에게 잔인해질 수 있다고 누가 그 랬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하네. 자네가 말하는 것도 그런것이겠지?" "비슷합니다." "썩은 냄새는, 기본적으로 죽음에 이어지는 거니까, 우리들이 피하고 싫 어해야 한는 것으로 여기잖나. 나는 어촌에서 자라서 생선이나 조개 썩은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잘 알고 있어. 곧잘 냄새나는 것을 비유해서 코를 찌른다고 하지만 해산물에는 그런 표현이 어울이지 않아. 해산물 주에서도 특히 지독한 건 생선 내장하고 알이야. 조개 내장도 지독하지. 명란젖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네. 그 강렬함은 바다의 맛 그 자체이기 때문에, 생명을 이미지할 수도 있는 거야." 이시오카가 묘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소피는 "왜 그런 애기를 지금 해 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 들어봐." 이시오카가 소피에게 말했다. 겐지는 물끄러미 이시오카를 보고 있었다. 명란젖 이야기는 그럭저럭 성공한 셈이다. 장침으로 이시오카의 눈을 찌를 필요는 없어졌군. "내가 들은 애기 중에서 가장 잔혹한 건, 구소련의 에피소드야. 그렇다 고 관을 세로로 세운 것 같은 좁은 상자 안에 며칠씩 가두거나 소금을 뿌 려둔 눈 위를 걷게 하는 그런 솔제니친 시대 애기는 아니야. 그건 라게리까지 가는 죄수 수송차에서 일어난 일이야. 죄수들은 화물차 로 옮겨지는데 먹을 게 변변할 리가 없지. 이틀 정도 지나면 아주 배가 고 파지는데, 천성적으로 사디스트인 간수들이 카스피 해에서 잡은 말린 생선 을 던져주는군.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죄수들은 화물차 바닥에 내던져진 생선을 먹기 위해 한바탕 쟁탈전을 벌이지 뭐, 충분한 양을 던져주니까 결 국 한 마리씩 먹게 된다네. 그런데 그걸 다 먹고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죄수들은 죽고 싶을 정도로 갈증을 느끼게 되는 거야. 그런 꼴을 즐기려고 간수가 되는 놈들이니 물은 한 방울도 주지 않아. 그럴 때의 물은 여기가 아니라..." 이시오카는 '여기' 하고 말할 때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장에서 요구하는 거니까. 목이 타 버릴 정도로 괴롭다고 하더군. 침 이 말라 버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면 물을 달라고 애원하거나 화물차 바닥을 치거나 할 힘도 남지 않게 돼. 자신의 오줌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다른 죄수를 죽여서 피를 마시려는 놈도 생기게 되지. 마침내 모든 죄수가 패배를 인정하고 그저 웅크리고 앉아 울기 시작하고 그 눈물을 핥아먹기까지 하면, 간수는 화물차의 작은 창을 열고 낄낄대면 서 '좋아, 잘 참았으니 물을 주겠다'고 말하는 거야. 죄수들은 기어와서 신이시여, 신이시여 하고 십자를 그리지. 거기에 꼭물이 들어 있을 것 같 은 나무통이 턱하고 놓여지는데, 그 안에는 물이 아니라 생선 내장과 알 썩은 것이 들어 있어. 썩다 만 것이 아니라 아주 완전히 썩은 것, 이미 반 정도는 정신이 나가 있지만 절대로 그 썩은 내장과 알을 마시는 놈은 없다는 거야. 러시아 간수들은 수십 년 동안의 경험을 거쳐서, 그 생선의 내장과 알을, 그것도 부패한 것을 메뉴로 택한거지, 자네가 말한 대로네. 상징. 무슨 상징이라고 했죠? 하고 소피가 묻자, 정당성이랬던가? 하고 이시오 카가 받았다. 무슨 정당성이냐구요? 하고 소피가 또 묻자, 이시오카가 말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얼마만큼 잔혹해질 수 있나 하는 건데, 그 허용 한도가 되는 정당성이야." 이시오카가 겐지를 쳐다보았다. 겐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겐지가 뭔가 말하려 하자 이시오카가 오른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음 줄곧 자넨ㄴ 일관하고 있어. 뭐라고 했지? 그 포르노 배우 기둥서방 말이야?" "처크 트레이너입니다." "그 자 쪽이 이해하기 쉽다는 거지? 아니면 자연스럽다든가. 약도 없고 거짓도 없는, 그런 거?" "알기 쉽고 자연스럽고 거짓도 없고 말을 적게 해도 되니까요." "말하는 거라면 자신 있습니다만..." "과연." "떠들고 있는 자신이..." "싫다는거군. 그럴 테지. 입만 가지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거지. 그래서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겐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가 키우고 있는 여자 중에"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리코라는 여자가 있는데 30대 초반의, 백화점 직원입니다. 태어나서 이제껏 한 번도 어떤 사람에게든 악의를 품은 적이 없는 그런 여자입니 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소피가 물었다. "비가 오는 날, 제비꽃이 강한 빗줄기를 맞고 부러지거나 하지 않게 제 비꽃에 우산을 받쳐주는 원예가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겐지가 대답했다. 그럴듯하군, 하고 이시오카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시기한 적도 없고, 다른 사람 욕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 습니다." "그 여자를 린다 라브레이스처럼 만들자는 건가?" "아닙니다. 이전부터 생각하던 것입니다만, 요리코에게 반한 녀석이 있 습니다. 그런 여자인 반한 놈팽이들이 한 둘은 아니지만요... 그 놈은 재 산깨나 잇는 집 자식으로 성악을   여행을 기획하기도 합니다. 이케부쿠 로 쪽이니까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은데 엄청나게 넓은 아파트에 살죠. 요 리코 말로는 운동장만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 지독한 마조히 스트라는군요." "아직 잘 모르겠군, 그 자 이야기를 힌트로 해서 TV 드라마 같은 영화 를 만들자는 건가?" 'TV드라마 같은 영화' 라고 말할 때 이시오카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TV 드라마 같은 영화' 라는 표현 속에 뭔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고 겐지는 생각했다. 겐지는 그 표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그 놈은 우메야마토라오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애기를 짧은 소설로 써서 자비 출판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필명이군, 어떤 소설인가?" "스토리는 간단합니다. 우에야마라는 핸섬한 성악가가 주인공인데 그 자 는 외국에도 자주 나가고 보통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도 드나들면서 색다른 패키지 여행 상품을 기획합니다. 유명세를 타서 잡지나 TV에 나 오기도 하구요." "본인 애기를 쓰는 거로군." "필명의 인물과 소설 속 인물을 동일하게 마든 거죠. 시시한 수법이지 만..." "자네는 책을 자주 읽나?" 이시오카는 소피가 만들어 준 석 잔째의 블러드매리를 마시면서 그렇게 물었다. 소피는 이시오카를 위한 블러드매리를 만들 때는 손가락이 아닌 스틱을 사용했다. 겐지는 소피가 손가락으로 빨간 손톱이 삘간 액체를 젓는 모습 을 보고 싶었다. 소피의 가늘고 빨간 손촙이 빨간 액체에 담겼다가 다시 빼올려진다. 그때마다 겐지는 야전 병원이나, 화산의 재양, 닥쳐올 바이러 스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냥 보통으로 읽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누군가?" "세린느라는 프랑스 작가입니다. 물론 번역본으로 읽었지요." "일본 작가는?" "일본에서는 불쌍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미주우에 쓰토무 같은." "그래, 그 히로자와는 자주 외국에 간다고 한 것 같은데, 어떤 곳에 가 지?" "우에야마입니다. 부탄이나 페루, 튀니지나 시리아라고 씌어진 곳입니 다. 석양이 아름다운 곳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웃기는 거죠. 물론 성악가 니까 이태리에도 갑니다. 그 놈은 부업으로 중동 쪽 갑부들한테 일본 여자 를 파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이젠 석유 벼락부자는 없을 텐데?" "몇년 전에 씌어진 거라서요. 매춘 조직이 있는데 거기서는 그냥 팔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양손과 양발을 절단하는 역할을 우에야마가 하지요. 어느 고등학생이 그 놈한테 반해 버리죠. 정말 순진무구한 여고생인데 우에야마 가 언젠가는 그 소녀의 손과 발도 절단할 거라는 걸 암시하고 소설은 끝이 납니다." "재미있는 소설이군, 그런데 그 놈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우에야마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그 소설을 바탕으로 각본을 쓰고 극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를 기록하는 겁니다." 이시오카는 그 자의 무엇을, 하고 말을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그는 블러 드매리가 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서서 몇 걸음 움직이다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소피는 그런 이시오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지난주였지, 그렇지?" 하고 이시오카가 소피 쪽을 향해 말하자, 소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카고의 루돌프라는 회사에 친구가 있는데 신제품 샘플이 나왔다더군, 그건 자동차 레이스할 때 차체에 장착하는 카메라 같은 거야. 썸네일이라 는 극소 카메라보다 렌즈직경이 6분의 1이나 작은 거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나?" 이시오카가 겐지를 쳐다보았다. "그 우에야마라는 자에 대해 좀더 애기해 주지 않겠나?" 이시오카를 만난 다음 날, 겐지는 시부야에서 교외로 향하는 전철을 타 고 요리코를 만나러 갔다. 요리코는 다마가와 바로 앞에 있는 큰 교외형 백화점에 근무하고 있다. 전날 밤에 겐지가 전화를 했을 때, 요리코는 샤워를 끝내고 알몸으로 맥주 를 마시고 있다고 했다. 요리코가 항상 쓰는,시코쿠의 어떤 섬에서만 생산 된다는 특별한 비누향이 수화기를 통해 풍겨나오는 것 같았다. -내일 백화점으로 갈 테니까, 점심 지나서 잠깐 시간좀 내줘. -뭐야. 이름도 말하지 않고 이상하네. 나 겐지야, 정도는 해야지. -중요한 애기야. -나, 지금 샤워 막 끝내고 맥주 마시고 있어. 알아? 기분이 아주 떠 있 어. 지금, 여기 와주면 뭐든지 해 줄 텐데. 백화점 내부를 걷고 있으면 백화점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옛날, 어머니는 자주 백화점에 데리고 다녔다. 아마, 지금 가보면 너무 작 아서 아무것도 없겠지만, 어머니와 갔던 요코하마 역 서쪽 입구의 백화점 에는 이 세상 모든 물건이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딱히 뭔가를 사겠다 는 게 아니라, 옷이나 식기, 가구들을 둘러보고 식당에서 뭔가를 먹을 뿐 이었다. 여동생은 공룡이 그려진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어린이용 런치를 잘 먹었다. 어머니는 백화점에서 종종 한 남자를 만곤 했다. 겐지가 초등 하교 5학년인가 6학년이고 여동생이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다. 봄에서 여 름으로 바뀌어가는 3개월 동안, 그 남자는 거의 매번 식당에 나타나, 겐지 와 여동생ㅆ 밀크 셰이크 사 줄까, 하고 물었다. -밀크 셰이크는 말이야, 달걀하고 우유로 만드니까 천천히 먹으면 배탈 도 안나고 영양에도 좋단다. 하지만 겐지도 여동생도 밀크 셰이크를 먹지 않았다. 남자는 백화점 옥 상의 작은 놀이동산에도 함께 가서 전기자동차나 말, 코끼리, 기린 모양의 탈것에 동전을 넣어주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갔을 때, 그 남자와 함께였으리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겐지는 증오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리 해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밀크 셰이크라는 말의 억양과 쥐처럼 생겼어, 하는 여동생의 말 밖에 떠오른 게 없었다. 아주 인상이 약하다. 왜 내 주위에는 인상이 약한 남자들만 있었을까, 하고 겐지는 자주 생각한다. 아버지도, 어머니의 남자도, 이모부도 모두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키가 비정상적으로 작다거나 아주 뚱뚱하다거나 얼굴이 괴물처럼 흉하다거나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식구들한테나 잘난 척 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며 항상 푸념을 늘어놓고 자기자신을 증오했 다. 이모와 그 가족들에게 목도를 휘둘렀을 때, 집을 나간 어머니가 만신창 이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얼 굴을 내밀지 않았다. 화해와 구제를 거부한 것이야. 하고 겐지는 생각한 다. "점심 먹었어?" 베이지색 니트 정장을 입은 요리코는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그게 제복이야? 하고 겐지가 묻자, 그래요. 촌스럽지? 하고 스커트를 팔 랑거려 보였다. "겐지가 만나러 오다니, 하두 오랜만이라서 점심도 안 먹고 기다리고 있 었어." 요리코는 겐지를 지하에 있는 이태리식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문을 열자, 콧수염을 기른 뚱뚱한 남자가, 뭐라고 이태리말로 지껄이면서 그들 을 맞이했다. "지금 저 친구 뭐라고 하는 거야?"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이 어떻습니까 라고 했어." "왜 일본 사람이 일본 사람한테 이태리 말로 인사하는 거야?" "저 사람, 여기 주인인데, 아마 이태리에 오래 살았을 거야." "그런 거야 상관없잖아. 모처럼 오랜만에 백화점 둘러보고 기분이 좋았 었는데 말이야." "왜 기분이 좋았어?" "화장품 매장 있잖아. 그거, 뭐라고 하지. 화장품 상담 같은 걸 하면서 화장품 파는 여자 말이야." "아, 데몬스트레이터? 좋아해?" 좋아해. 하고 말하자, 옛날에 했던 여자 있었지? 하며 요리코가 웃었다. "그렇지 않아, 왠지 옛날의, 보통 여자들의 직업이라는 느낌이 들잖아, 백화점 매장 아가씨들도 그렇지만, 버스 안내양이나 학교 선생님, 그 정도 밖에 여자들 일이 없었으니까." "그건 여자를 멸시하는 말 같은데?" 아냐, 하는 겐지의 대답에 맞춰 애피타이저와 맥주가 나왔다. 대낮부터 맥주 마셔도 되나? 하고 겐지가 말하자, 상관없어,하고 요리코 가 웃었다. "평화로운 직장이니까 괜찮아." 애피타이저는 토마토와 샐러드이다. 겐지는 칼보나르를, 요리코는 해물 스파게티를 시켰다. "그래서 난 원래 직장에 다니는 여자를 좋아해. 돈이 있으면 남자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겠지" 하고 요리코는 의미있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요리코에게는 특별히 좋아하는 물건이 있다. 보석이나 모피가 그것이다. 그녀는 다른 사 람을 시기하거나 미워하거나 하지 못한다. 그렇게 사람 좋은 여자지만, 유 치원때부터 쇼윈도에 진열된 모피와 보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었단다." 겐지 밑에서 일하면서, 크고 늘씬한 요리코는 애호가 사이에 S의 여왕 으로 유명해졌다. 겐지의 고객 리스트에 올라 있는 마조히스트들은 대기업 의 2세, 유명인사, 가끔 이름이 신문에도 오르내리는 관료 텔런트 등 다양 한데, SM클럽에서 여자 부르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정도가 심한 마조히스트일수록 여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까다롭다. 신장과 용모, 정신과 의사를 닮은 임상적 지성이 필요하며, 본질적으로 모성을 느끼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리코는, 겐지가 아는 SM 쪽의 여자들 중에서도 최상으로, 돈 있는 사람들이 몇 사람씩이나 예약을 하고 있어서 2개월 동안의 스케줄이 꽉 차 있을 정도였다. 몇 개월 정도 집중적으로 일을 하고 모은 돈으로 요리코는 팔 백만 엔 짜리 루비 반지나, 러시아산 모피 코트를 산다.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해 모피나 보석을 사는 것은 아니라고 언젠가 요리코가 말했다. -아름다운 것과 항상 같이 있고 싶어서... 내 경우엔 그것에 르느와르 나 모차르트나 페라리가 아니고 모피와 보석이라는 것 뿐이야. "그런데 방금, 남자에게 기댄다는 표현은 구식 아냐?" "그건 그렇지만, 남자한테 기대는 여자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 정신적 으로 기댄다고들 하지만 그건 경제적으로 기대는 거야." "그것하고 버스 안내양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아니, 버스 안내양이라고 한 건 그냥 이해하기 쉬운 직업을 댄 것뿐이 야." "겐지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어젯밤 꿈 애기 해도 되지? 오랜만에 무 서운 꿈을 꾸었어. 내가 택시를 탔는데 그 운전사가 운전을 너무 무섭게 하는 거야.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장소는 일본이 아니었던 것 같애. 납 작한 돌로 된 좁은 길이었던 걸로 봐서 아마 유럽인 것 같기도 하고, 가본 적은 없지만 남프랑스나 그 근처의 풍경이었던 것 같기도 해. 간 적이 없 는 곳인데, 꿈을 꿀 수 있는 건가?" "글세. 꿀 수도 있겠지." 겐지는 에피타이저로 나온 모아렐라의 부드러운 감촉을 씹으며 요리코와 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미와코는 특히 그렇지만, 아야코도 만나면 피곤해질 때가 있다. 피곤해 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섹스를 하기도 한다. 반면에 요리코는 말하는 것도 목소리도 듣는 쪽을 편안하게 해 준다. 겐지는 그녀에게서 모성애를 느낀 다. -무서워할 것 없어. 도망가지 말아, 여기에 나하고 있으면 돼. 요리코는 항상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무언가, 자신도 알 수 없는 지독하게 꺼림칙하고 무서운 것이 있어. 거 기에서 도망가기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뱀이나 타인의 배설물이나, 썩은 알이나, 시체나, 그런 것을 모은 결정 같은 것. 그런 썩은 냄새와 기분 나쁜 것으로만 되어 있는 것, 그것이 내 안에 있는 거야. 그녀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겐지는 그런 말을 요리코에게 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외면하는 그런 것을 나는 보게 돼. 왜 그런지 모 르겠어. 어쩌면 아버지 때문일지도 몰라. 아버지도 나와 비슷했어. 친구 가 많고 모두가 즐겁게 웃으며 지내는 걸 좋아했지. 나는 굉장히 귀여움을 받았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축복 받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아무리 해도 축복 받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건 죽음이나 부패 같은 것들이야. 하지 만, 그것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게 페르시다데하지. 내가 좋아하는 보 사노바 곡인데, 축복이란 뜻이야. 언제인지 잊어버렸지만, 아버지로부터 그런 축복이란 감정의 대전제로서 죽음이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았고 그 꺼 림칙하고 무서운 것을 깨닫자 '그게' 눈에 눈에 띄기 시작한 거지, 그러니 까 보석이나 모피는 모두 살아 있는 게 아니면서도 아름답잖아. 그래서 죽 음이나 부패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니스나 칸느나, 그 근방인 것 같은데, 택시 운전사가 마주 오는 차선에 들어가 버렸어. 그것도 몇 번이나. 커브를 돌 때 어디로 쑥 들어가 버리는 데, 깜짝 놀라 주의를 주려고 했지만, 차는 여전히 질주하는 거야. 행선지 는 물론 모르지. 그리고 예상대로 맞은 편에서 달려오던 오토바이에 충돌 해 버렸어. 충돌 상황은 기억이 생생한데, 유럽이니까 차는 오른쪽으로 가 고 있잖아. 오른쪽이 바다고 왼쪽이 벼랑이야. 나는 마르세유에서 모나코 까지 가던 중이었던 거지, 만약 남 프랑스였다면 말이야." -니스에서 모나코에 이르는 해안선 어딘가에 있는 해안에는, 음악이 물 질로, 아니면 입자로 들려온다고 한다. 요리코에게는 그 애기를 하지 않았다,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남 프랑스에 대해 잘 아는군." "키노쿠니야 서점 매장이 여기 있어서 지도로 찾아봤어. 택시는 오른쪽 커브에서 왼쪽으로 튕겨져 맞은편에서 오던 오토바이와 충돌했는데 꾸불꾸 불하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왼쪽 옆으로 비키듯 충돌하는 거야. 오토바 이는 타고 있던 사람과 함께 그대로 튀어 올라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 어. 젖은 목욕 타월을 벽에 있는 힘을 다해 내리칠 때처럼 이상한 소리가 나고, 오토바이와 타고 있던 사람은 어디가 기계이고 어디가 사람인지 모 를 정도로 망가져 버린 거야. 큰일이다, 하고 생각했는데, 택시 운전사가 그대로 계속 달리려고 해서 어깨를 흔들어 택시를 세웠지. 저녁 무렵인데 도 근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나는 작은 남자아이의 눈을 손바 닥으로 가렸어. 보여주기 싫었으니까. 피와 기름이 뒤범벅이 되고 피부와 금속이 녹아 붙여있는 게 마치 수학 여행 때 나가사키에서 본 원자폭탄 자 료관을 연상시켰어. 사람과 기계가 같이 녹아 있는 것 같은 느낌 말이야. 주위는 뿌옇게 연기가 나고 있고 구경꾼들이 술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운전사가 튀었어, 하는 소리가 나고 경관 두 사람이 쫓아가서 잡는 게 보 였어. 나는 현장의 증인으로 불려갔는데, 이 운전사에게 잘못이 없나, 하 고 바로 눈앞에서 묻는데 대답을 하지 못했어. 정말로 경관에게 수갑이 채 워진 채 잡혀 있는 중년의 남자가 택시 운전사였는지 몰라서 가슴이 두근 두근 거리는 거야. 그랬더니 그 운전사라는 남자가, 택시 손님이 운전사 얼굴을 어떻게 알아? 우리야 백미러로 보니까 알지만. 안 그래? 하고 말하 면서 히죽 웃는데 너무 무서워서 잠이 깼어." "꿈은 의미가 없는 거야." "알아, 몸이 안 좋거나, 환절기 때면 어떤 꿈이나 다 무섭게 느껴진다는 거. 그래도 그 택시 운전사 얼굴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어서 더 무서웠어." 정말 무서웠다고 말하면서 요리코는 해물 스파게티를 마지막 한 가락까 지 깨끗하게 먹고 웨이터를 불러 검은 소스가 남은 접시를 바로 치워달라 고 한 뒤에 냅킨으로 정성스럽게 입 주위를 닦았다. "겐지 애기 들려줘. 기분이 좀 개운해졌으니까. 사실 와인이라도 잔뜩 마시고 나서 애기하고 안아줬으면 했는데." 겐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5장 싱커페이션 겐지는 오랜만에 시부야에 와 있다. 서너 개쯤 되는 백화점이 북적거리 고, 간이주점에서는 얼얼할 정도로 찬 데킬라를 팔고, 당구대가 있는 이태 리식 레스토랑과 MTV를 틀어주는 나가사키 짬뽕집들이 거리에 널려 있 었다. 주위가 투명한 유리벽으로 된 조립식 건물의 간이 바에서 겐지는 천 천히 버드와이저를 마시고 있었다. 아침에 이시오카로부터 이 백만 엔이 입금되었다. 이시오카로부터 돈을 받고 함께 어떤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면, 시부카와가 뭐라고 할까, 하고 생각하며 겐지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는 나쁘지 않다. 겐지의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이시오카는 사 회적으로 '말살' 될 것이다. 아무리 이시오카가 반사화적인 이미지로 알려 져 있고 스캔들에 강하다 할지라도, 이 시나리오의 끝에는 아무런 탈출구 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이시오카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 에 휘말리는 것도 아니고, 갑작스런 사고로 죽는 것도 아니며, 억울한 죄 를 묻는 것도 아니다. 상대는 어떨까? 겐지는 어제 요리코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요리코는 곧바로 공범자가 되었다. -그거, 어쩌면 모피나 보석보다 더 흥분될지도 모르겠는데? -일이 끝나면 모피도 사 줄게. 흑담비는 무리겠지만, 밍크라면 사 줄 수 있을 거야. -그래, 그 머더 콤플렉스한테 말이야. -그런데 거 놈 이름이 뭐였지? -사이토 노보루던가 키요시던가, 잊어버렸는데, 그냥 사이토라고 해. -그 놈의 소설이 이번 계획의 핵심이야. -사이토에 대해서는 인정 같은 거 필요 없어. 지금도 그 놈은 구제불능 이니까. 테스타롯사를 타고 있어도 구제될 수 없는 놈은 죽어도 구제 될 수 없을 거야. 겐지의 계획은 어쩌면 사이토를 구제할지도 몰라. 사이토가 회개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잖아? 항상 그랬잖아. 보기 싫은 놈, 약한 놈, 멍청한 놈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분명 그렇긴 하지만, 이번만은 그렇게 터무니없이 하고 싶지 않아. 모 든 게 사람들의 욕망대로 되어가다가 결말만 뒤바뀌게 하고 싶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겐지는 이시오카에 대한 묘한 감정만은 접어 두었 다. -그 여고생이 중요한데, 후보는 있어? 겐지는 지금, 그 여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고생과는 두 달 전에 이케부쿠로 호텔 안에 있는 꽃집에서 알게 되 었다. 겐지는 고객의 한 사람으로부터 미 지불된 돈을 받기 위해 호텔에 머물 고 있었는데 그날이 미와코의 생일이어서 장미라도 보낼까 하고 꽃집에 들 어갔다. 교복을 입은 그 여고생은 양손 양팔에 다 안을 수도 없을 정도의 꽃다발을 주문해 놓고 있었다. 마른 몸매에 머리는 짧고 눈매가 강렬했다. -좀 들어줄까? 괜찮습니다, 하고 여고생은 겐지 쪽을 보며 대답했다. 꽃에 파묻히다시피 하여 가게를 나가려던 여고생에게 겐지는 다시 말을 걸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미와코에게 꽃을 보내도록 주소를 써주고 호텔을 나서려는데 여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 타는 곳까지만 좀 들어주시겠어요? 겐지가 점심을 먹자고 하자 여고생은 쉽게 응했다. 꽃다발을 프런트에 맡기고 두 사람은 호텔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들어갔다. 여고생은 야채 가 들어간 일식 스파게티를 주문하고, 겐지는 인도네시아 풍의 피라프로 했다. 카페테리아에 들어서는 모습이나 웨이터에게 주문하는 방법을 보고 부잣 집 딸이구나,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십만 엔에 날 사지 않을래요? 햇살이 레이스 커튼 사이로 비치는 창가의 테이블에서 여고생이 문득 그 렇게 말했다. -아니, 유감스럽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왜요? 자신은 여자를 사는 쪽이 아니라 파는 쪽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여고생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안 되는 거죠? 그렇게 묻기에, 십만 엔은 너무 비싼데, 하고 겐지가 대답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 얼마 받아요? 2,3만 엔 정도 아닐까? 겐지가 그렇게 말하자 여고생은 아래를 쳐다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스파게티가 나왔지만 그 여고생은 전혀 손을 대지 않는 다. 먼저 먹을 게, 하고 겐지는 피라프를 먹었다. 여고생은 미간을 찌푸 리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처녀인데... 이럴 때 처녀는 비싸지 않나요? -그건 기생이나, 시스템이 좀더 확실히 되어 있는 경우지, 너는 프리잖 아. -프리? 재미있는 말이네요. 하지만 나, 진짜 처녀란 말예요. 열 일곱 살 이나 먹었지만 아직 키스도 한 적 없어요. 진짜 매춘부는 키스를 못하게 한다는데 나는 입술도 허락할 수 있어요. 나는 처녀를 싫어해, 하고 겐지가 말했다. 여자아이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포크에 스파게티를 둘둘 말았다. -어떤 책에서 봤는데, 남자들은 처녀를 좋아한다던데요? 강한 눈빛이 겐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빛이 강하다는 것은, 의지를 가 지고 있다는 것이다. -안 그런 사람도 있어, 나는 처녀를 싫어하는 편이지. -왜냐구 물어봐도 돼요? 여자아이는 그제서야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했다. 겐지는 대답을 하지 않 고, 여자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계속 피라프를 먹었다. -왜 말이 없어요? 물어봐도 돼요? 하는 표현은 좋지 않아, 하고 겐지는 말했다. -누가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물어봐도 돼요? 하고 말할 때는 벌써 묻고 있는 거니까. 당신 이런 말 듣지 않아요? 하는 것도 똑같 애.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어떤 잔인한 말도 할 수 있어. 당신 정말 죽상 이라고 남들이 그러지 않아요? 주위 사람들한테 사생아라든가, 돼지라든가 얼간이라든가, 수상하다든가, 그런 말 자주 듣지 않아요? 뭐든지 물을 수 잇지. 사실은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면서 다른 사람 핑계를 대면서 실례되는 말을 하려고 하는 거야. 잔인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게 아냐. 다만 다른 사람 핑계를 대면서 말하는 건 비겁하다는 거지. 당신 이 멍청한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는 것도 실례잖아? 게다가, 이미 묻 고 있는 것이고, 나는 그런 게 싫은 거야. 언뜻 보기엔 부드러운 느낌이 들지만, 그건 비겁하고 잔인한 거야. 겐지는 단숨에 말했다. 그러자, 여자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안하다, 울지 마. 화가 난 게 아니란다. 겐지는 테이블에 있던 종이 냅킨을 건네주었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흔 들었다. -그게 아니구요, 아저씨가 하는 말은 잘 알겠어요. 그런데, 왜 다들 그 런 이상한 표현을 쓰는 거죠?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동아리에서도, 우연히 만난 사람들끼 리도, 무조건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감 때문이야. 그건 아 주 지독한 스트레스지.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는 거예요? 여자아이는 종이 냅킨으로 눈가를 닦았다. -그게 아니라, 사이좋게 될 수 없을 때도 있다는 거야. 아주 보기 싫은 놈도 있을 테고, 이유 없이 미운 경우도 있어. 무조건 사이좋게 지내라고 강요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자, 여자아이는 가만히 겐지를 노려보았다. -아저씨 같은 사람은 처음 봐요. 처녀가 왜 싫은 거예요? -처녀에는 아무 가치도 없기 대문이야. 초란이 아직 자기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밖에는. -초란이 뭐예요? -암탉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낳은 알을 말하는 건데, 특별한 거라고 감사 히 여기는 사람도 있어. 맛은 보통 달걀하고 같은데 말이야. -자기 신고는 요? -자기 신고, 처음 나온 달걀이니까, 닭을 키우고 잇는 사람은 알 거란 말이야. 처녀는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피 같은 거 안 나와요? -안 나오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 나도 한 사람 알고 있어. 처녀랑 한 건 그 여자 뿐이야. -아파하죠. 처녀는? -아파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잘 하면 아프지 않아. 애가 다섯 잇는 여 자라도. 난폭하게 다루면 아파하지. 그런데 말이야. 특별히 자기 신고라고 해서 처녀를 싫어하는 건 아니야. 처녀성을 버린다는 정도지. 별 대단한 것도 아니고. 뭐랄까, 개운치가 않아서야. 요즈음은 뒤탈이 없고, 아무래 도 상관없는 애들이 처녀성을 버리려고 안달하는 세상이거든. -지금 제 애기하는 거예요? -아니,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야. 그건 그렇고 내가 처녀를 싫어하는 건 좀더 다른 이유에서야. 처음이라는 어드밴티지가 싫어. 몇 사람인가, 한 명이라도 열 명이라도 백 명이라도 관계없지만, 남자를 경험한 다음, 마지막으로 나를 선택해 줬으면 해. -아저씨는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거예요? 아니면, 정말로 지금 말한 것처 럼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거예요? -아니, 인기 없어. 키가 크지도 않고 잘 생긴 얼굴도 아니야. 그렇지만 말야.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전력을 다해서 소중하게 여기지. 영원 히 소중히 여기겠다는 약속은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소중하 게 여기겠다고 마음을 둔 여자가, 당연히 나도 좋아해 주기를 바라지. 그 럴 때, 단지 처음으로 섹스를 한 상대이기 때문이라고 여자가 생각하는 게 싫다는 거야. 이해가 잘 안 되니?" -잘 돼요. 그럼 나는 돈으로 사기 싫다는 거군요. 십만 엔도 비싸고, 2 만 엔이라도 싫은 거죠? -글세, 그래도 이렇게 너랑 이야기하는 건 재미있어. 나한테 몸을 팔려 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니? 여자아이는 끄덕였다. 피라프를 다 먹고 나서, 이거야 원, 하고 겐지가 중얼거렸다. -내가 여고생이나 돈으로 안고 싶어하는 타입으로 보이니? -그렇지 않아요. 아저씨한테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에요. 있잖아요, 왜 저한테 말을 걸었어요? 여자라면 누구한테나 그렇게 말을 걸어요? 웨이터가 피라프 접시를 치우기를 기다렸다가 그렇지 않아, 하고 겐지 가 말했다. 여자아이는 스파게티를 반정도 남기고는 익숙하게 웨이터를 불러, 남겨 서 미안해요, 이거 치워주시고 코코아 주시겠어요? 하고 발했다. 어려서부 터 부모와 함께 호텔 레스토랑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자연스러 운 태도였다. 겐지도 코코아를 마셨다. -그럼, 저한테 왜 말을 걸었어요? -우선, 그 꽃집은 좁고, 꽃냄새가 나서 왠지 말을 걸기 쉬었어 슈퍼마켓 정육점이나 백화점 식기매장보다는 말을 걸기 쉽지. 게다가 꽃이라는 건 고기나 식기보다 특별한 거니까. 기분이 약간 들떠 있었다는 건 좀 거짓말 이고, 진짜 이유는 네 눈이었어. -눈? -응, 강렬한 눈빛이었어.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강렬한 눈빛이라는 게, 어떤 거예요? 시력하고 관계가 있어요? 나 1.5 인데. -시력하고는 관계없어. 눈 크기와는 조금 관계가 잇지. 쌍꺼풀 없는 두 툼한 눈꺼풀에 박혀 있는 눈은 강하지만 그냥 음험하게 비치기도 하니까. 강렬한 빛을 띤 눈은, 의지를 가진 눈이라고 생각해. -난, 의지 따윈 갖고 있지 않아요. -본인이 잘 모를 때도 있는 거야. 젊을 때는 특히 그렇지만, 의지라는 게 뭔가를 해 내겠다는 것만은 아니야. 뭔가를 증오하는 경우도 있고, 그 뭔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는 거야. 여자아이는 겐지의 이야기에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 좋은 일이 있었냐고 물었잖아요? 그건요? -질문의 근거가 뭐냐 이거지? -그래요. -누가 수필에 그렇게 썼더구나. 그 사람은 이혼하고 딸과 떨어져 살고 있는데, 딸 생일에, 그날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을 몽땅 털어 꽃을 사서 보낸다는 거야, 왜 이런 어두운 애기를 썼을까, 하고 생각했지. 꽃을 보내 는 행위가 아름다운 거라고 무조건 믿고 있는 것도 어둡고, 그런 어두운 것을 공공연하게 수필로 쓴다는 것도, 나는 믿을 수 없어. 아이는 약하니 까, 부모를 다 따랐어. 어떻게든 좋아하게 하려고, 꽃 따위를 보내면 분명 기뻐할 거라고, 그런 것도 계산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많은 꽃다발을 고 등학생이 들고 있다는 것도 이상했고, 갑자기 그 수필이 떠올라서 왠지 어 둡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 거야. 틀렸어? -그런 것을, 그때 바로 생각한 거예요? -생각했다고 할까, 머릿속에 떠올랐던 거야. 어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 아니니? -난, 열 여덟 번째 생일까지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몸을 팔아, 그 남자한테 받은 십만 엔으로 몽땅 꽃을 사려고 생각했어요. 생일은 일주일 뒤지만, 마음이 바뀔 것 같아서 우선 꽃이라도 사서 기분만이라도 매춘을 경험해 볼까 했었어요. 그러니까 나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특별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랬었구나, 하고 겐지는 중얼거렸다. 코코아를 다 마시기까지 두 사람 은 말이 없었다. 좋은 아이라고 겐지는 생각했지만, 그 여자아이에게는 손을 대기가 망설 여지는 뭔가가 있었다. 몸을 팔고 싶다고 얼굴 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하 는데도 묘한 위엄이 있고, 말하는 것이나 태도에도 빈틈이 없었다. 그럼, 이제 일어날까? 아주 즐거웠어, 하고 일어서려고 하자, 여자아이는 손을 내밀어 겐지를 제지했다. -아저씨는 왜 저한테 이것저것 묻지 않아요? 양손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여자아이가 말했다. -지금까지 말은 많이 했지만, 서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첫째, 이름도 모르잖아요. 아저씨는 이렇게 제 교복을 보면 어느 학교 학 생인지 벌써 알 것 아녜요/ -교복 따위는 관심 없어. -음, 그럴 줄 알았어요. 혹시 <시벨르의 일요일> 이라는 영화 아세요? -하디 쿠르거가 나온 거 말이니?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아. -거기서, 소녀가 진짜 이름을 마지막에 선물하잖아요? 그걸 좀 흉내내도 돼요 겐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왕이면 전화번호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 데, 하고 말했다. 여자아이는 찢어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냅킨 위에 이름과 숫자를 썼다. 유리. -너는 왜 몸을 팔려고 하느냐는 둥, 아버지는 뭐하냐는 둥, 묻지도 않았 고 이름도 말하지 않았어요. 아저씨처럼 공정한 사람은 처음 봐요.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겐지에게 냅킨을 건네주었다. -제가 혹시 필요해지면 전화하세요. 난 혼자 살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밤이나 아침이나 상관없어요. 겐지가 전화로 알려준 시간에 맞춰 유리는 지시대로 사복을 입고 나타났 다. 타이트란 진홍색 원피스 위에, 검은 밍크 재킷 차림이었다. 재킷은 요 리코가 봤더라면 갖고 싶어할 만큼 훌륭한 밍크 블루존이었다. 유리는 짧 은 머리에 여전히 강렬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화장기라고는 입술에 연하 게 바른 립스틱이 전부였다. 겐지가 손을 내밀자 유리는 볼을 가까이 가져 왔다. 겐지는 간이바의 맨 구석 자리에서 유리의 양쪽 뺨에 키스했다. "전화가 통 없길래, 나 같은 건 잊어버리신 줄 알았어요." 겐지와 유리는 버드와이저로 건배했다. 이전에도 이런 차림이었다면, 하 고 겐지가 말했다. "십만 엔 지불했을지도 모르겠는걸." "오늘밤은 어때요?" 겐지를 흘겨보면서 유리가 말했다. 이 여자아이는 아마도 외국에서 살다왔을 것이라고 겐지는 생각했다. 인 사 대신 나누는 키스에 익숙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장소를 바꿔서 이야기할까?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겐지가 버드와이저를 더 마시고 나서 말하자, 유리는 강한 눈을 반짝이 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아카사카의 한 초고층빌딩의 지하 2층에 있는 회원제 바로 자리 를 옮겼다. 겐지의 젊은 친구 중에 해커가 있는데, 그 친구가 DM회사의 시스템에 침투해서, 연간 4천만 엔 이상 되는 고액 소득자 리스트를 입수했다. 그 친구가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상의를 해 와 겐지는 고객의 한 사람인 부동산업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해커 친구는 중 고 국산 스포츠카를, 겐지 자신은 바의 회원권을 받았다. 연간 회비가 백 만 엔 이상이지만, 카드지불을 포함해서 모두 그 부동산업자가 처리해 준 다. 지금 부동산 경기가 최악이지만 그 회사는 최근 2,3년의 지가 상승 이 익을 주식이나 땅에 투자하지 않고 홍콩에 모아두었기 때문에 도산이나 사 업 축소를 면 할 수 있었다. 겐지는 오더블에 캐비어와 신선한 포아그라를 각각 두 개씩 주문했다. 유리도 마시고 싶다고 해서 79년 된 샴페인을 주문했다. "너무 취하면 안 돼.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나 술 잘 마셔요. 그런데 오늘 뭘 하는 거죠? 이 호텔에 방 이 잡혀있고 난, 아무리 저항해도 순결을 빼앗기는 건가요? "천천히 말해줄게." "이 바는 손님 층은 별로 지만 인테리어는 그런 대로 괜찮네요. 왜 처음 부터 여기서 만나지 않았어요?" "여기는 부동산업자, 주식꾼, 대기업 2세나 탤런트, 의사 등등 이 나라 에서 제일 몹쓸 놈들이 모이는 바야. 유리가 어떤 차림을 하고 나올지 몰 라서. 그 시부야 간이바에서 우선 만나자고 한 거야. 스누피트레이닝 점퍼 에 체크무늬 치마로 올지도 몰라서 말이야." "스누피는 좋아하지만, 체크무늬 치마는 없어요." "우선 나에 대해서 정직하게 말해 두는 게 좋겠군. 그 전에 캐비어와 포 아크라을 조금 먹자." "왜 조금이에요? 전부 먹으면 안 돼요?" "소금기와 지방을 목구멍에 엷게 바르면 말이 부드럽게 나오기 때문이 지."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내내 생각해 봤어요. 시청의 토목과 직원에서 카바레 보이까지 별걸 다 생각해 봤지만, 아저씨한테 딱 맞는 직업이 떠오 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의 가정을 세워봤죠. 추측이라고 해도 좋지만, 지금 이 사외의 모든 경계에서 벗어난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일 거라고 말예 요. 맞아요?" "맞아." "그럼, 야쿠자예요?" "비슷하지만, 달라. 우선, 나는 조직에 속해 있지 않아." 겐지는 검은 판에 캐비어를 얹고 조금씩 베어먹으며, 아미나 이시오카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리에게 자신의 일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이 야기를 마친 뒤 겐지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자리를 차고 일어설지 빙긋 웃 을지, 유리의 태도는 그 둘 중의 하나일 거리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리 는 그냥 고개를 흔들기만 했다. "아깝다. 조금만 더 상상력을 자극했더라면 생각했을 텐데, 나더러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들어와달라는 거죠? 캐비어와 포아그라와 샴페인으로." "그게 아냐" 하고 겐지는 천천히 말했다. "그런 건 싫어요. 이십대 후반이 되면 체력도 떨어질 거고, 그리고, 참 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 거... 더군다나 이렇게 젊은데... 질투 같 은 복잡하고 더러운 감정과 같이 지내는 건 정말 싫거든요." "애기 좀 들어봐" 하고 겐지가 더욱 느릿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정직하게 애기하고 있어. 정말로 유리를 매춘부로 고용하려 고 했다면 폭력을 포함해서 방법은 많아.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아."' "폭력이라뇨? 옛날에 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하는 거예요?" "주로 가출한 멍청한 애들인데, 시부야나 신주쿠를 이리저리 방황하지. 아무런 목적도 없는 못생긴 여자애들 말이야. 자기 나름대로는 인기가 있 고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애들. 자신의 의지가 뭔지도 모르는 애들. 그 런 것들은 옛날부터 죽 있어왔어. 유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타입의 여 자란 존재하는 법이야." "그런 여자를 어떻게 하는데요?" "아직 약사법에 저촉되지 않는, 일종의 항 우울제가 있어. 야쿠자라면 크리스털을 쓰기도 하지만." "크리스털?" "각성제의 결정이야. 주사바늘을 쓰지 않는 흡입식이라서 여자도 약인지 눈치채지 못해, 나는 절대 쓰지 않지만 말이야" 하고 겐지는 한 가지 거짓 말을 했다. 겐지는 크리스털을 보통 섹스 때 사용한 적이 있다. "어떻게 돼요? 마약 같은 거예요?" "마리화나는 감각이 예민해지는 정도지만 크리스탈은 신경에 흥분불질을 분사하기 때문에 더 직접적으로 효과가 있지. 인격적으로 무너지는 거야, 정말로 뇌 저 깊숙한 곳부터 근질근질해지는 거야. 그걸 이용해서 기분 좋 게 한 다음, 계약서에 사인하게 하고 그날 밤 집에 태워다 준다고 속여 팔 아 넘기는 거지. 온천지에 여자들을 관리하는 조직이 있어서. 여자들은 최 저 반 년 동안은 아무 데도 못 가게 되어 있어." "도망치면?" 유리가 양손으로 쥐고 잇는 샴페인 잔 테두리에 핑크색 루즈가 살짝 묻 어있다. "그런 타입의 여자는, 도망갈 수 없다기보다는 거의 도망가려고 하지 않 아. 그런 종류의 여자가 정말 있어. 아까 말했잖아. 목적이나 의지가 없는 거야. 머리통을 열어보면 바퀴벌레하고 쥐똥밖에 없을 것 같은 그런 타입 이야. 목적이나 의지라고 했지만, 그렇게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게 아냐. 영 어회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거나, 싫은 남자는 잘 해 줘도 기쁘지 않 다거나, 그 정도면 돼, 그런 것이 있으면, 나나 야쿠자라도 손을 뻗칠 수 가 없더군." 유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겐지는 웨이터를 불러 샴페인을 따르게 하고, 눈을 내리깔고 잇는 우리를 쳐다보며 마셨다. 이윽고 유리는 얼굴을 들고, 그래서요? 하고 물었다. "지금 계획을 하나 짜고 있어. 거기에 협력해 줬으면 해." "어떤 계획?" "응, 내분이 계속되고 있는 그루지아에, 그레고리오 성악 전문 합창단이 있는데, 그걸 기성 프로모터나 에이전시를 거치지 않고 직접 불러오려고 그 콘서트 진행을 맡아줬으면 하는 거야. 문화대강당에서 할 거야." "거짓말을 잘 하시네요." 유리가 눈을 흘기며 그렇게 말했다. "허약한 체질이었기 때문에, 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 어." 겐지가 대답했다. "괜찮아요" 하며 유리가 살짝 웃었다. "진짜 애기를 들어볼까요? 그리고 아저씨가 그 일을 하는 진짜 이유도 알고 싶어요." "007영화 같은 거 알지?" 겐지가 우선 그렇게 묻자, 유리는 몇 편이나 보았다고 대답했다. "그럼, 잘 됐다. 사이토라는 지독한 머더 콤플렉스인 놈이 있어. 직업은 의사나, 약사, 변호사 같은 그런 개인사업이라 꽤 돈이 들어오는 놈이야." "왜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거죠? 아저씨는 알잖아요?" "지금 단계에서는 우리는 자세한 건 몰라도 돼. 받아들일 것인가 어떤가 하는 판단의 자료가 될 만한 건 전부 말해 줄 테니까." "알겠어요. 겐지 아저씨는 모든 내용을 듣고, 내가 거절할 수 없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죠?" "그것도 그렇고 이건 범죄는 아니지만 교내축제 콘서트 기획도 아니거 든. 나 이외의 사람에게는 계획 전체를 알리고 싶지 않은 거야. 사이토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어해. 악한 것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고 어느 정 도의 광기와 성욕이 복잡하게 꼬여 있는 놈이지. 나는 일단 그걸 모두 이 루어주고 싶어. 사이토의 구체적인 소망중 한 가지는 지적이고 귀엽고 천 진난만한 젊은 여자한테 존경을 받는 거야. 섹스는 하지 않고 오로지 여자 쪽에서만 사이토와의 섹스를 꿈꾸는 그런 상태야. 섹스 상대쯤이야 얼마든 지 있고 입에 올리기 좀 뭣한 몹쓸 짓도 많이 하는 놈이거든. 그러니까 그 젊은 여자만은 천사처럼 곱게 대하고 싶은 거지." "그 천사라는 게 나예요?" 그래, 라는 겐지의 대답에 유리는, 웃긴다,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이토라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예요?" "그냥 머더 콤플렉스라고 했잖니." "머더 콤플렉스라고 했잖니." "머더 콤플렉스라고 하는 게 뭔지, 확실히는 몰라요." "엄마에게 의존하는 거야. 인간도 동물이니까 일정한 시기가 되면 무리 와 엄마한테서 떠나야 하는 건데, 어떤 사정 때문에 떠나지 못 하는 놈도 있지 "그런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잖아요." "그렇게 따지자면 자살도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지금 도쿄의 부동산 사 정으로 볼 때 사이토는 엄청나게 큰집에서 살고 있다는 군. 아라카와가 내 려다보이는 무슨 타워라는, 고급 빌라야. 뉴욕 같은 곳의 팬트하우스를 흉 내낸 것일 거야. 물론 나는, 뉴욕의 팬트하우스 따위는 본 적도 없지만 말 야. 사이토의 엄마가 땅을 가지고 있는데 큰 부동산 회사와 손을 잡고 그 빌라를 지었어. 토지 대금의 일부로 최상층의 반을 받은 거야. 오 백 평이 라고 했으니까 아마 십 억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거야." "그런데 산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잖아요?" "물론이지. 유리는 어때? 더 굉장한 데서 살아?" "아뇨, 에코다라는 지저분한 동네의 조그마한 집에 살아요." "외국에서 살다왔지? 아니니?" "그래요. 아빠가 통신회사에 다니셨는데 나중에는 방송국으로 옮기고, 지금은 무지 어려운 책을 번역하고 있어요. 수수해요." "어디 어디 살았었는데?" "브뤼셀에 5년, 암스테르담에 2년, 런던에 1년 조금 넘게 잇다가 나중에 귀국할 때까지 제네바에 있었어요." 밍크를 입고 나왔기에 겐지는 좀더 내로란 하는 부잣집 딸인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하자 유리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밍크는 어머니 의 유품을 고쳐서 입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들어 겐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을 위해서 차려 입고 나온 게 아니야, 하고 그 눈은 호소하고 있었다. "사이토는 어마어마한 팬트하우스에 살면서 테스타롯사를 모니까 그걸로 자신이 대단한 줄 알고 있어. 나보다 한 살이나 두 살 밀이니까, 아직 스 물 일곱이나 여덟이야. 팬트하우스는 엄마 거라고 치고 테스타롯사는 사이 토 자신이 벌어서 산 거야. 요즘 사람들은 모두 사이토 같은 놈을 부러워 하게 마련이지. 팬트하우스와 테스타롯사, 그것만으로도 사이토와 자고 싶 어하는 여자가 백 명은 족히 될 거야. 사이토 같은 생활을 부러워하는 남 자는 수도 없이 많지. 그건 물론 테스타롯사나, 5백 평 짜리 팬트하우스를 대신할 게 없기 때문이야. 또, 재미있는 건 사이토 자신도 그걸 알고 있다 는 거야. 머더 콤플렉스에 걸린 남자 둥에는 마조히스트가 많아. 애기가 이상하게 되어 버리지만, 사이토에게 채찍을 휘둘러 쾌감을 주는 여자 즉 여왕님은 사이토의 엄마를 대신하는 거야. 여왕이라는 존재를 설정함으로 써 본능적으로 엄마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거지. 사이토가 열 한 살 때 부모가 이혼했는데, 그의 엄마는 아버지를 일 년 내내 욕했다더군."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조사한 거예요?" "사이토가 한 번에 이 십 만 엔을 지불하는 여왕이라는 여자가 내가 데 리고 있는 사람이거든." 겐지의 말에 유리는 싫은 내색을 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 했다. "사이토는 지정된 호텔까지, 그 여왕님을 테스타롯사로 모시러 가는 거 야. 여왕은 채찍이나 인조가죽으로 된 의상, 아이마스크, 망사 스타킹 등 을 넣은 가방을 들고, 말끔한 정장차림으로, 도어맨이 정중하게 머리를 숙 이는 가운데 차에 올라타고는 아라카와 옆에 자리한 팬트하우스로 향하는 거지. 사이토는 오직 그 순간을 위해 항상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셈이야. 어떤 긴박한 일이라도, 아무리 중요한 회의라도 관계없어. 사이토는 그 테 스타롯사에 여왕을 태우고 팬트하우스까지 달릴 때가 최고인 거야. 소풍가 기 전날 밤의 초등학생하고 똑같지. 워낙 테스타롯이다 보니 신호를 받아 서기라도 하면 모두들 쳐다보고 하니까 말이야. 그래서 팬트하우스에 도착 하면 사이토는 지하 2층에 잇는 전용 주차장에 테스타롯사를 세우고, 전용 엘리베이터로 자신의 집으로 올라가지. 이때쯤 외면 최고의 순간이라는 게 미묘하게 바뀌고 있는 거야. 뭐랄까, 조금 굴절이 된다고 할까. 목표가 바 뀌어 버리는 거지. 여왕님과 단 둘만 있게 되는 거니까." "성욕이 전면으로 나온다는 뜻이에요?" 유리는 겐지가 생각한 대로, 흥미가 있는 것과 동시에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타입의 여자 였다. 겐지는 그런 여자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다.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는 부류들이 많이 있다. 그런 부류의 경우, 맞장구도 반응도 침대 안에서의 외침조차 타성에 찌든 것이어서 겐지는 순식간에 질려 버리고 만다. 개한 테 안고 서는 것을 훈련시키는 게 차라리 재미있다. 여하튼 유리가 철저히 사이토를 혐오하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 사이토의 머릿속에는 이미 플레이에 대한 것밖에 없지. 여왕님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괴롭혀 줄까 하는 기댈 진땀을 흘리는 거야. 그런데 전용 엘리베이터로 집에 도착하면 반드시 사이토의 엄마가 있는 거야. 어 서 와요, 하고 말하는데 여왕님에게도 항상 수고가 많으시네요, 하고 말을 걸지. 홍차나 카스테라 같은 것을 내와서는, 아 참, 시간도 늦었고 하니 브랜디 같은 게 낫겠구나, 편물 선생님이 그리스에서 사다 주신 게 있는 데, 우조라는 술이 있어요. 그걸 내올게요, 하고 말하는 거야. 이번에는 사이토가 그런 거 안내와도 되니까 엄마는 방에 가 있어요, 하고는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거야. 그리고 나서, 사이토는 옷을 벗고 여왕님에게 괴롭힘을 당하는데, 내 여자 말로는 사이토의 엄마가 분명 어딘가 에서 몰 래 훔쳐보고 있을 거라는 군," "그거, 아저씨가 지어낸 이야기 아녜요?"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겐지를 흘겨보았다. "계획이라는 게 도대체 뭐죠? 그 사이토라는 사람의 새로운 여왕이 되라 는 말이예요? 그런 일은 아저씨 애인 중에서 불결하고 형편없는 여자한테 나 부탁하면 될 거 아녜요? 그보다, 그 사이토라는 사람, 혹시 아저씨 본 인 아니에요? 항상 그런 역겨운 짓을 하는 거 아니냐구요." 유리는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가게 전체에 들 릴 정도로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다. 겐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분노로 폭발할 것 같은 유리의 얼굴을 바라 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정말로 화가 나 있구나,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그러나 분노 로 인해 어떤 관계성을 파괴해 버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아무리 불쾌하더라도 참으라고 교육받은 탓이겠지. 외국물을 먹었다고 해 도 그건 변함없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 나라에 익숙해 지기 위해,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좋은 친구는 좀처럼 가지 기 힘드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원망한다. 부모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는 부모를 미워할 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책망하거나 어정쩡 하게 부모에게 반항하여 밤거리의 패거리에 가담하기도 한다. 아니면 관계 성을 형성하는 대성 그 자체를 없애면 된다고 착각하여 부모를 쇠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하기도 한다. 나도 옛날에는 그랬지만, 이 아이들은 화가 치 밀어 오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관계성을 파괴하기 위한 말을 가 지고 있지 않아서, '죽어'라든가 '얼간이'라든가 '못생겼다'거나 '돼지'같 다는 말밖에 하지 못한다. 정말로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까 판에 박은 폭력을 선호하는 것이다.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가족이나 학교, 회 사, 불량배나 정치 파벌, 야쿠자나 모든 단체와 동아리를 지배하고 있고 이것을 견디지 못하는 패거리들은 반드시 허약한 부분을 지니고 있다. 그 리고 결국은 눈물이 눈가에 가득 고인 채 잠자코 참아내는 것이다. 겐지는 , 나도 별 다를 게 없지만 말이야, 하고 생각하며 유리를 바라보고 샴페인 을 마셨다. '나는 아이들과는 다르다.' 아마 이시오카도 그럴 것이다. 최면술과 총과 폭력으로 린다 라브레이스 를 완전히 노예로 지배했던 처크 트레이너와는 크게 다르다. 나는 처크를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크 트레이너야말로 이 세상의 성인이다. 어느 인간들에게는 쓰레기 같은 남자이겠지만, 나에게 있어 그는 성인이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냐. 계획이란 건, 사이토를 파멸시키는 거야. 그 파멸의 모습을 비디오로 찍고 싶다는 멋진 유명인 이 있는데, 실은 그 유 명인도 파멸시키지 않으면 안 돼." "아니, 왜 그런 일을 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는 돈 때문이야." "아저씬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인간일 지도 몰라요." "왜 형편없는 사람인지 말해 보렴." "됐어요. 난, 아저씨에 대해서 전혀 엉뚱하게 생각했어요. 뭐랄까, 더 로맨틱한 것 말예요." "그래서?" "됐어요. 정말 됐어요." "유리야, 너 자존심 상했니?" "유리라뇨? 함부로 부르지 마세요." "내가 지금까지 한 애기 중에, 어느 부분이 가장 화가 났니? 잘 생각해 봐. 부탁하는 거다. 냉정하게 생각해 봐." 겐지가 그렇게 말하자, 치켜 올라갈 때까지 올라갔던 유리의 눈 꼬리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유리는 거품이 이제 막 가라앉은 샴페인을 조 금 홀짝였다. 잔에 입술을 갖다 대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맺혀 있던 눈물 이 3센티미터쯤 볼을 타고 내려왔고 유리는 그것을 바로 닦아냈다. "나는 심한 애기를 들려줬어. 모두 정직하게 한 말이고, 작정하고 널 불 쾌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니까." "왜요?" 유리가 코멘 소리로 물었다. "그건, 테크닉도 아니고, 너를 바보 취급한 것도 아니고, 나를 혐오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아니야. 계획의 내용을 정확히 알게 하고 나에 대해서 분 명히 알아두란 거지." "그 기분 나쁜 사이토라는 사람을 어떻게 할거라는 거죠? 그런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요. 그것 말고도 돈을 버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 아요/ 나도 KFC에서 아르바이트 한 적 있어요." "KFC가 뭐니?"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요." "그렇게 줄여서 말하니 알아들을 수가 없지. 돈은, 내 누이동생이 심장 병으로 홋카이도에 입원해 있기 때문에 필요해. 게다가 머더 콤플렉스인 사이토가 여왕님 엉덩이에 얼굴이 깔리고, 자위행위 하는 걸 지켜보고 있 다구. 그러고는 다음날 아우 일 없었다는 듯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어 주고 잘 다녀오너라, 하면서 출근시키는 거야. 나는 밤중에 아들을 덮치는 어미 보다, 사이토의 엄마가 더 역겨워." "그런데, 어떻게 파멸시켜요? 그리고 비디오로 찍는 다는 유명인은 또 뭐예요?" "돈으로 아가씨들을 네 다섯 명사서, 그 여자들에게 등급을 매기지. 노 예나 인신매매 같은 게임을 하고, 그런 것을 비디오로 찍는 유명인 이 있 어." "그 사람도 메슥거려요?' "그 놈은 쓰레기인 주제에, 자신이 쓰레기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 나는 적어도 내 자신은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있어. 아니 지금 말은 정확하지 않 아. 우리들은 누구나 자신이 쓰레기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어. 그 사실 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이야." "우리들이라는 게 누구예요?" 모든 남자들, 이라고 말하자 유리는 아주 살짝 웃었다. "비디오를 찍는, 그 유명인은 누구예요? 영화감독이에요? "이시오카라는 비디오 작가야. 영상작가라고 하나? 알아?"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난, 영화, 비디오 잘 안보요. 아저씨는 모두를 파멸시킬 작정이에요? 계획에 관계하는 사람 전부?" "이시오카라는 사람은, 굉장한 영상을 찍고 싶어해. 네이팜탄 때문에 작 은 여자아이의 등이 타서 짓물러 터진 거나, 페루의 인디오 유적에 머리가 세 개로 나뉘어진 큰 뱀이 있다거나 그런 시시한 게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 여자 같은 남자의 눈물이나, 매춘부위 한이라거나, 그런 거야." "화류계 쪽이에요?" "똘마니나 호모, 매춘부 등을 소개해서, 그 거리의 부패한 곳에서 인간 의 진실을 찾아낸다고 할까, 아니 파헤친다고 하는 게 낫겠군. 인간이 살 아가는 진실. 오, 이게 무슨 말이야, 토할 것 같군." "그래서, 그 사람이 사이토를 비디오로 찍는 거에요?" "그래. 이시오카는 사이토의 욕망과 섹스와 파멸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어해." "아저씨는 이시오카라는 사람도 싫어해요?" "이시오카에게 여자를 빼앗긴 남자가 있는데, 지독하게 증오하고 있는 건 그 남자야. 나는 그 남자한테서 돈을 받았어. 그리고 사이토는 이시오 카를 잡기 위해 희생되는 셈이지만, 이번 계획에 관여하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폭력으로 위협하거나, 사람을 인질로 붙잡거나 하면서, 억지로 하 는 게 아냐. 모두들 소풍가는 어린아이처럼, 두근두근하며 좋아라고 참가 하는 거란다. 결과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말이야." "아저씨는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되었어요?" 유리는 포아그라를 입속에 넣고, 샴페인을 흘려 넘기며 물었다. "그렇게 말하다니?" "난, 아직 잘 모르는 주제지만 아저씨에게 협력해 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고방식에 공감이 가요. 아마, 엄밀하게 말하면, 속은 거지만 속 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아무 것도 잘 모르는 주제에, 난 이상하게 납 득하고 있어요. 이상하죠?" "난 잘 모르겠는데... 하고 겐지는 말했지만, 그것이 여자이기 때문이라 는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히스테리 상태에서 가스통과 성냥을 쥐고 울부짖는 임산부에게 낙태를 권유하고 설득시키는 것과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에게 종교적인 평안을 설교하는 것이, 어느 쪽이 어려울까? 겐지는 히스테릭한 여자를 설득하는 비결을 습득하고 있다. 그런 때 사용하는 말과 어조를 알고 있는 것이다. "난,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는 거예요?" 유리의 말에, 겐지는 내장 전체가 곤두서는 것 같았다. 즐거운 긴장과 흥분으로, 내장 전체가 싱글싱글 웃으며 일어섰다. "일단 교복을 마련해 줘야 돼." "두 벌이나 있는데." "아니, 다른 학교 교복 말이야. 학생증인가? 아, 학생수첩이지. 그건 재 가 위조해서 줄 테니까 괜찮고." 말을 마치고 나서 겐지는 유리의 양쪽 뺨에 키스했다. "볼에만 해 주면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크게 잘못 생각한 거예요." 유리가 뾰족하게 내민 입술을 겐지에게 가져왔다.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제 6장 애드립 겐지의 방은 요 일주일 사이 가구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는 이사를 준비 하고 있었다. 아야코가 싱가포르에 간 친구에게서 받았다는 강장주를 가지고 새벽 두 시에 겐지를 찾아왔다. 그런 일 하고도 들키지 않을까, 하고 아야코가 걱정했다. -이시오카란 삶, 병적으로 조심스러운 사람이야. 스파이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군, 하고 겐지가 대답했다. -망보는 사람이나 감시꾼을 고용하려면 얼마가 드는지 알아? 인건비가 너무 비싸다구. 경찰이 대단한 건, 그런 놈들을 세금을 써서 공짜로 부려 먹을 수 잇다는 것뿐이야. 그런 걱정하지 말고 거기나 좀 닦지, 시트가 젖 으면 차가워서 기분이 좋지 않아. 그녀가 열 세 번 오르가슴을 느끼고 돌아간 후, 새벽 다섯 시에 이시오 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겐지 씨, 소피예요. 이런 시간에 미안해요. 지금, 그 분 바꿔 드릴께 요." 소피의 목소리에서 정액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이 시간까지 이시오카와 어떤 섹스를 했을까? 오르가슴을 열 세 번 보다 많았을까? "이시오카일세. 아직 안 자고 있었나?" "물론입니다." 겐지는 아야코가 가져온 강장주 병을 보며 말했다. 연녹색 유리병에는, 갖은 약초와 함께 개구리나 애벌레, 도마뱀, 거북이 머리 등이 들어 있다. 둘이서 4분의 1정도를 마셨는데, 아야코는 호랑이 페니스로 보이는 살덩어리를 먹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이런 시간에 전화를 했다고 해서 자네의 성실성을 의심하는 건 아니네. 그런 건 이해해 주겠지?" "이해합니다. 저도 지배하거나 당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음, 지배와 의존은 같은 거지. 아침부터 로맨틱하군. 자네에 대해 긴장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잘 돼가나?" "그럭저럭 돼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초조해하는 게 가장 좋지 않으니 까요/" "자네여자, 그 사이토와 친하다는 아가씨 말이야, 한 번 만나봐야겠어. 사이토 방의 대략적인 구조와 가구 배치를 알고 싶어서 말이야." "그렇게 하시죠. 다만 그런 준비는, 제가 사이토를 만나고 여고생을 접 근 시틴 다음에야 가능합니다. 카메라는 준비되셨습니까?" "바로 주문했는데 재고가 없다는 군. 소피가 같이 영화를 만들었던 젊은 친구 중에 가지고 있는 녀석이 있어서, 빌리기로 했네. 조금 미심쩍은 메 이커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영상이 아무래도 불안 할 텐데 하이웨이 스트로 할려고 하면 코드도 문제고 무선으로는 녹화장치가 두꺼운 책만 해 지니... 그 카메라는 아주 작아. 내시경 정도가 아니야. 연필 정도 될까, 약간 큰 바는 같은 거야. 2밀리미터니까, 렌지가." "2밀리미터, 정말입니까?" 겐지는 강장주 병을 흔들어 안에 가라앉은 개구리를 표면 위로 올리기도 하고, 거꾸로 뒤집기도 하면서 놀라는 척했다. 렌즈구경 2밀리미터 짜리 비디오 카메라. 이 개구리의 물갈퀴가 달린 손만 해도 2센티미터는 되겠는 걸. 크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에로틱하다,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그렇게 작은 카메라는 뭣에 쓰려고 개발된 걸까요?" "용도를 생각하고 만든 건 아니라고 생각하네.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도 CCD를 세 장이나 쓰는 게 있을 정도니까 말이야, 어쩌면 인류가 모든 것을 영상화하자고 결정했는지도 모르지." "역시, 어디 야한 비디오라도 만드는 회사 제품입니까?" "아냐. 미심쩍다고 했던 건, 목적이 아니라 고지식하다는 뜻이지. 어엿 한 벤처기업이야. 그래도 녹화장치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어. 소리는 핀 마이크로 잡아서 무선으로 어느 정도 음질을 얻을 수 있지만, 영상으로 남 긴다고 하면 전파로 해서 보낼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자네여자도 기본적 인 조작을 배워둬야 할거고. 아, 그렇지, 자네도 알아둬야 돼." "어쨌든 가까운 시일 내에 사이토를 만나기로 되어 있으니까 그 결과를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리고 소피가 도울 일이 없는지, 물어보는데?" 그렇게 말하는 이시오카의 뒤에서 "그런 말은 왜 해요?" 하는 소피의 애 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피는 배우이기도 해." "알고 있습니다. 혹시 필요하면 출연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전해주십시 오." 겐지가 그렇게 말하자, 이시오카가 목소리를 바꾸었다. "왠지, 자네가 감독 같군." 사이토를 만났을 때 겐지는 오랜만에 질투심이라는 감정에 자극을 받았 다. 겐지는 사이토가 하얀 피부에 약간 살이 찐 땅딸보, 안경을 쓰고 땀 이나 비질비질 흘리는 놈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요리코와 함께 아카사카 호텔 라운지에 나타난 사이토는 겐지보 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콧수염을 기르고 촉촉이 젖은 눈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말한 그는 거무스름한 피 부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겐지는 진한 감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사이토 는 검정 터틀스웨터와 부드러워 보이는 재질의 회색 바지, 그리고 부츠를 신고 있었다. 사이토가 등장했을 때, 다른 테이블에 있던 중년 여자들이 돌아볼 정도였다. "사이토입니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고 하셨다 길래 기대를 하고 왔습니다." 사이토는 테이블에 키홀더를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온 웨이트리스에게 밀크티를 주문했다. 키홀더는 유니크한 무늬가 들어 있는 커다란 고리로 날카로운 은색이 감돌았다. 열 개가 넘는 열쇠들 중에서 얼핏 페라리, 자 가, 메르세데스, 그리고 혼다의 로고가 보였다. 사이토의 엄마는 무슨 차를 탈까,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저는 나카하리라고 합니다. 요리코 씨와는 옛날부터 친구 사이죠. 사이 토 씨 말씀을 듣고 애기를 나누면 즐거울 것 같아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 습니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요란하게 로비를 지나갔다. "특별히 저와 취미가 같은 건 아니시죠. 나카하라 씨는?" 사이토는 그렇게 말하고, 힐끔 요리코를 보았다. 요리코는 웨이트리스가 가져온 드리아셰리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비슷한 점이 있긴 해요." 그녀는 겐지를 보면서 덧붙였다. 겐지는 사이토가 경계하지 않도록 소파에 가볍게 걸터앉아, 등을 구부린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한 채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 히 모으고 있었다. 그는 요리코와의 작전을 항상 잊지 않도록 했다. 요리 코는 사이토에 대해, 알기 쉽게 대응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하게 날카롭고 제 멋대로 인 인간이야. 머리가 좋 은 건 아냐. 추상적인 생각은 죽어도 못하는데, 자신의 이해가 걸린 건 깜 짝 놀랄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해. 도덕성은 제로라서, 눈앞에서 모르는 사 람이 피를 토하고 죽어도 인도적인 반응은 없을 거야, 조금 불쾌해하긴 하 겠지만 말야. 요컨대 뭐라고 하면 좋을까, 부잣집에서 기르는 토끼나 실험 용 쥐, 뭐 그런 것과 같아. 그 집에서 나오는 건 꿈에도 생각 못해. 나가 면 물론 살 수 없을 테지. 우선은, 바깥이라는 개념조차 없어. 그 대신 주 인한테 애교 부리는 건 직접적이고 다채로워. 뛰어올라서 귀를 팔랑거리고 손가락 같은 걸 넣어주면 핥으면서 먹을 걸 달라고 하는 거야. 조르는 방 법도 아주 가지가지야. 알겠어요? 먹이를 위해서라면 발도 핥고, 어떤 부 끄러운 짓이라도 태연하게 해. 돈은 아주 감질나게 쓰면서 그 먹이에는 너 무너무 까다롭지. 그렇게 까다롭게 굴면 호되게 야단 맞을 거라는 걸 모르 고, 그런 말을 들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해. 그게 사이토의 기본적인 캐릭터예요. 이 정도로 평화로운 나라에서 그렇게 고급스러운 먹 이를 계속 먹어왔다는 게 좀 묘하죠? 비행기는 퍼스트클래스 외에는 타본 적이 없고, 옷이나 차도 이태리제 이고, 지독한 마조히스트인 주제에 못생 긴 여자는 취급도 하지 않지. 콤플렉스 위에 겹겹이 화장하느라 엄청난 돈 을 들여. 나에 대해서는 , 이건 웃기는 애기지만, 그 자가 결혼하고 싶대. 나보고, 모든 의미에서 여왕님이 될 수 있대나? 일 안 해도 되고 뭐든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고, 어디든지 여행도 갈 수 있다는 거지. 실제로 마 우이의 최고급 별장 지에 엄청나게 큰집을 가지고 있고, 스페인하고 호주 에도 콘도가 있대. 아직 그 인간한테 보석하고 모피를 좋아한다는 걸 말하 지는 않았어요. 말하고 나면 그 놈한테 복종하게 될지도 몰라서, 좀 무서 워, 결혼이 무리라면 옆에 있게 해달라고 조르고, 나한테서 다른 남자 냄 새가 나면 금방 알아채는데, 킬러를 고용해서 죽일 수도 있지만 내가 싫어 할까 봐 그러지 않는다는 거야. 사이토에 대한 요리코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겐지에 대해서는 친구라고 해 뒀지만, 그 놈은 다 알 거야. 라이벌이라 고 생각하겠지 사이좋게 될 수는 없겠지만 굉장히 흥미가 있대나? 그래서, 겐지가 그 놈이 '소망' 하는 것에 대해 잘 이해한다고 말해 뒀어. 그랬더 니 이상한 라이벌이라며 눈이 빛나는 거야. 어쨌든 엄마는 절대적인 존재 이기 때문에 그건 흔들림이 없어. 내가 마조히스트 몇 명이랑 사귀어봐서 아는데 엄마가 없어져 버리는 게 차라리 구제가 될 수도 있어. 자식들은 모두 엄마를 사랑하니까 언젠가는, 대개 체력이 쇠퇴하는 것과 함께 깨닫 게 되는데. 엄마를 용서하거나 엄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걸 용서받기 원하는 게 아니라 엄마에 대한 굶주림과 친해지는 거야. 엄마가 살아 있으 면 그게 불가능한 거지. 특히 사이토 엄마의 경우는, 원래가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여자라서 사이토를 떼어놓지 않기 위한 테크닉과 집착이 굉장해. 그 기본은, 철저한 관용과 이해야. 어느 정도냐 하면, 플레이 중에 차와 케이크를 내오기도 하는 거야. 사이토는 내 노예지만 그 엄마는 좀 다르잖 아. 알몸으로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아들에게 케이크를 가져오는 사람한 테 어떻게 해야 할지 황당하더라구. 겐지가 항상 말하듯이, 난 스스로가 섹시한 여왕님이 아니라 세라피스트나 특별한 아동만을 전문으로 봐주는 선생님 같다는 생각이 들어. 머더 콤플렉스에다 변태인 사이트는 전대미문 의 강자이지만 유일한 위안은 그 '소망'인 거야. 거지같은 여자, 즉 결코 여왕님이 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여자. 그 놈은 남미에서 매춘을 위해 일 본에 와 있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것 같은, 눈이 작고 거무튀튀하고 살찐 타입의, 걸핏하면 징징 울어대는 여자가 좋대. 얼마나 자세하게 설명하는 지 몰라. 그 비틀린 소망이 사이토로서는 엄마로부터 도망칠 수 잇는 유일 한 길이야. 아무리 엄마라도 그런 것을 이해해 줄 순 없겠지. 자신은 그렇 게 돼야 비로소 남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그런 그림자 가 있는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숫처녀가 나타날 거라고 기대하는 거지. 그러 면 비로소 엄마와 내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거야. 믿고 있다고 해도, 물론 우리 안의 토끼니까 현실이 될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둥 모순된 말을 늘어놓는 거지만. 아마, 그 놈은 모순이란 의미도 잘 모를걸. 보석과 모피를 가지고 싶은 대로 사 주겠다고 하면 결혼할 거냐구? 천만에. 안 해, 절대로 존경할 수 없을 테 니까. 사이토는 복잡한 눈으로 겐지를 보고 있다. 묘한 눈이다,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마음이 약하다거나 콤플렉스가 강 하다거나, 내향적이라거나 대인 공포라거나 이상할 정도로 수줍어한다거 나, 말주변이 없다거나, 경계심의 덩어리라거나, 여러 가지 단어를 떠올려 보았지만 맞아떨어지는 게 없다. 지금까지 비굴하고 외적인 콤플렉스에 시 달리는 남자들을 몇 명 만난 적이 있다. 겐지의 고객 중에도 그런 타입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상재의 눈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따금 상대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사이 토는 다르다. 자신이 말할 때도, 겐지가 말하는 것을 들을 때도 시선을 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마주치면 이쪽이 아주 불안한 기분에 휩싸인다. 사이토의 눈 뒤에는 공포가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 공포는 물결이 되어, 눈을 마주친 사람에게도 전염된다. 사이토의 눈길은 히틀러 시대에 나온 사진 집에 수록된 유태인의 눈과 같다. 아우슈비츠에 있던 유태인은 아니다. 강제수용소는 공포를 느낄 에 너지조차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구속되어 총으로 위협받으며 화물차에 태 워진 유태인의 눈, 어딘가 아무런 구제도 없는 장소로 사라져갈 인간의 눈, 그것이 사이토의 눈에 있었다. 이런 인간은,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뭔가에 대해, 무릎을 끓는 관계성밖 에 없을 거야. 특별히 이 놈이 마조히스트가 된 이유 따위는 없다. 마조히 즘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무릎을 끓고 싶다는, 어쩔 수 없는 욕망에, 마조히즘이라는 구실을 붙인 것뿐이다. 아마 나에 대한 질투는 없 을 것이다. 거꾸로, 내가 동류의 인간이라면 죽고 싶을 만큼 나를 증오할 것이다. "저는 어느 쪽인가 하면 사디스트에 가깝습니다." 겐지의 말에, 사이토는 불안한 듯 눈을 두 번 껌뻑거렸다. 자신과는 다 른 타입의 변태라는 것을 알고 조금 안도했지만 요리코에게 채찍을 휘두르 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강하게 불안해진 것이다. 그럴 때의 사이토의 눈을 보고 있자니, 겐지는 문득 이 세상의 인간은 모두 공포에 얽매여 살고 있 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요리코는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저는 확실하게, 여자를 괴롭혀서 기뻐하는 타입입니다. 항상 억눌려 살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요." 겐지는 요리코 덕에 작은 이벤트 회사를 가지고 있는 남자, 하는 식으로 사이토에게 소개되어 있다. "항상 대리점이나 스폰서에게 굽실거려야 되니까요." 겐지의 말에, 사이토는 크게 안도한 듯 입술을 핥았다. "그렇습니까? 저는 태어나서 한번도 굽실거린 적이 없는데. 그러고 보니 정말로 행운아였던 것 같군요. 굽실거린 적이 없는 인간이란 그다지 없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러시군요. 부럽습니다. 저는 사이토 씨 같은 분께는 왠지 모를 콤플 렉스를 느끼게 됩니다." "콤플렉스라고요?" "네." 사이토는 겐지에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요리코 양 한 테서 많이 들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며 의자 깊숙히 고쳐 앉더니, 애기 많이 했 어? 하고 목소리를 바꾸어 요리코 쪽을 보았다. 응석과 겁이 뒤섞인 목소 리였다. 별로, 하고 요리코는 핸드백에서 가느다란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 뿜은 다음 짧은 순간 사이토 쪽을 노려보았다. 까불지마, 하는 업무용 시선이었다. 사이토는 당황하여 시선을 피했지만 그때의 표정은 겐 지를 아주 불쾌하게 했다. 사이토의 얼굴이 일순간 강렬한 수치로 가득했 던 것이다. 어떠한 수치라도 모두 받아들일 때의 얼굴, 단념하고 용서를 비는 얼굴, 포기하는 얼굴, 자신의 피부가 쳐져 흉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깨달은 얼굴, 힘이 떨어진 얼굴, 더 이상 울음을 참지 못하는 얼굴. 그런 얼굴은 겐지에게는 불쾌함이나 혐오를 넘어 두려움을 던져주었다. 이 세상 에서 겐지가 가장 싫어하는 얼굴이었다. 요리코가 화난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사이토는 눈에 힘을 잃고 불안에 떨면서 입술은 혼란을 숨기려고 웃는 기묘하게 뒤틀린 표정이 되었다. "이봐요, 겐지는 당신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를 가지고 온 거니까, 잘 듣 지 않으면 실례가 되는 거라구요." 요리코가 웃으며 말하자 어떤 용액 한 방울이 촉매가 되어 색이나 향기 를 바꾸는 것처럼 사이토의 얼굴에 생기가 되돌아왔다.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왜 저에게 콤플렉스를 느끼십니까?" "뭐라고 할까요... 어떤 안정이라고 할까, 그 가느다란 턱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턱?"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턱은 형편없는 음식이나 딱딱한 것을 먹어보지 않은 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드이지요. 소리를 지르거 나 화를 내지 않아도 언제나 좋은 것에 둘러싸여 있는 그런 무드 말입니 다. 사이토 씨 같은 분 앞에 있으면 제 자신이, 뭐랄까 아둥바둥 사는 인 간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렇겠구나. 저는 철분이나 칼슘 같은 것은 어릴 때부터, 알약으로 먹 는 습관이 붙어 있었으니까요. 알약이라는 게 잘 잊어버리고 안 먹게 되기 도 한다는데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정해진 알약을 거른 적이 없습니다. 좀 이상한 애기지만, 자랑할 수 있어요. 나는 내과 전무의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전부들 한방요법을 따르잖아요? 그 이유는 , 부작용이 없다. 글 뿐이에요. 한방요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대사물질을 내 는 스피드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디다는 거죠. 예를 들자면 아날로그라 는 뜻이지요. 아편도 그래요. 흔히 시대물 드라마에서, 아편 한 모금에 중독이 되어 버리는 시시한 장면이 나오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모르핀이나 헤 로인도, 정말 중독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죠. 물론 아편 을 화학적으로 추출해 주면, 즉 디지털화 하면 대사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중독이 빨리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싶은 애기는, 한방치료약이라는 게 계속 복용해야 효 과가 있는 건데 잊어버리고 안 먹는 사람이 많아요. 중국에서는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식사에 넣어서 매일 밤 먹기도 하는 거구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만리장성이나 북경의 자금성을 한 번 보 세요. 그 시간적 감각이 다르다구요.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데 당대에서 가 능하다고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달라요. 근본부터가. 쌀도 1년에 두 번 경작을 하고, 어떤 때는 세 번씩 할 때도 있죠. 부작용 따위 는 안중에도 없구요. 디지털로 변환을 잘 시키고 디지털이라는 것을 신뢰 하고 있는 거예요. 디지털화해서 전해주는 것에 모두가 익숙해져 있죠. 한 방은 그렇게 안 돼요. 하지만 나는 디지털을 싫어하지는 않아요. CD 와 LP중 어느 것이 좋냐고 물으면, 당연히 CD란 말예요. CD는 뇌를 굉 장히 피곤하게 합니다. 겐지 씨, 그 이유를 알아요?" 사이토는 입가에 거품을 내며 맹렬한 기세로 떠들기 시작했다. 요리코는 이미 차분하게 듣기를 포기한 상태였다. 태어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성실하 게 들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듯, 다른 테이블 사람들이 두세 번 이 쪽을 돌아볼 정도로 사이토는 큰 목소리와 빠른 어조로 떠들어댔다. 옛날 겐지의 친구 중에도 비슷한 놈이 몇 명 있었다. 항상 의기소침에 있다거나 어딘가 장애가 있거나, 사투리가 심하다거나 그런 놈들이었는데, 술이나 약을 하기라도 하면 지금의 사이토처럼 거품을 물고 지껄이곤 했 다. 그런 놈을 겐지는 '게'라고 불렀다. 아니 저은 음악이라는 걸 본래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하고 겐지가 말하 려고 했지만, "아니, 저... " 하고 말하는 순간 사이토가 말을 끊었다. 사 이토의 눈은 전혀 깜빡이지 않아서 눈물이 맺혔고 호텔의 간접 조명을 받 아 한층 더 기분 나쁘게 빛나기 시작했다. "물론 아시겠죠? 겐지 씨는 워낙에 겸손한 타입인 것 같습니다만. 바로 알 수 있어요. 겐지 씨가 지적인 사람이고 인텔리라는 걸. 게다가, 모든 면에서 확실한 사람이라는 것도 바로 알 수 있죠. CD는, 음을 디지털로 분해해서 귀로 보내기 때문에 뇌의 각 파트, 즉 청각 파트가 각각의 노이즈, 아니 톤에 대해 '저건 어디서 들어야지? 아, 여기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듣게 되지요. 그래서 뇌가 녹초가 되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 아날로그는, 단순히 음의, 즉 공기의 물결이기 때문 에 뇌가 피곤해지지 않아요. 정말로 피곤해지는 일 따위는, 이 호텔도 마 찬가지지만, 따라서 기본적으로 일본인에게는 한약 같은 것은 맞지가 않아 요. 정말로 피곤해지는 일도 없고, 정말로 뭔가를 찾고 있는 것도 아니에 요. 피곤해지는 일도 없고, 정말로 뭔가를 찾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피곤 해지는 거 말인데 웨이트 트레이닝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니까요. 피곤해 진다는 건 종군 카메라맨이 몇 개월간 전선에서 우여곡절을 겪는 그런 것 입니다. 지금 이 호텔에 몇 명이 있는지 모르지만, 몇 명이나 있다고 생각 하세요? 내가 말한 의미의 피곤한 사람 말이에요. 겐지 씨는 어떻게 생각 해요? 있는 것 같아요?" 사이토가 일단 이야기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저 홍차 더 어떠십니까? 하고 체구가 작은 웨이트리스가 물었다. 거의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계속 말하던 사이토의 눈꼬리에 맺혀 잇던 눈물이 웨이트리스의 목소리에 얼굴을 들자 유리창을 타고 내리는 빗방울 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본 웨이트리스가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섰고, 동시에 사이토가 벌컥 화를 냈다. 처음에는 사이토가 너무 화를 내며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 너, 너, 뭐야, 너 뭐야 하고는 '너'와 '뭐야' 하는 단어만을 늘어놓 았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물을 계속 흘려대며, 왜 고작 홍차 때문에 내 애기를 중단시키는 거야. 응? 왜? 홍차 따위가 뭐가 그리 대수라고, 믿을 수가 없구만, 하고 정색을 하고 나무라기 시작했다. 웨이트리스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지만, 사이토의 항의는 그치지 않았다. 못생긴 주제에 라는 둥, 멍청이라는 둥,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는 둥, 갖 은 욕설을 퍼부어 댔다. 매니저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적당히 해요, 하 고 요리코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여 겨우 끝났다. 저 웨이트리스도 심했어, 하고 겐지는 요리코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요리코도 끄덕였다.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요즘엔 저런 애들이 많아서 말이죠. 저런 애들을 실제로 보니까 사이토 씨의 소설이 생각나는군요." "소설?" 하고, 코멘 소리로 중얼거리며 사이토가 요리코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 사람이 내 소설을 알고 잇지? 하는 표정이다. 내 소설을 읽어주셨다니 기쁩니다만, 그건 매우 미묘하고 색다른 소설인 데, 괜찮을까? 요리코가 가르쳐 줬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르쳐 준 거야? 요리코가 좋아서 그랬다면 이의가 없어. 정말 괜찮다면 괜찮다고 말 해 주지 않겠나, 하는 표정이었다. 사이토의 표정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타인을 불쾌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웃거나 화가 났을 때도, 경계하는 얼 굴마저도 모두 그렇다. "겐지는 원래 출판사에 있었잖아, 그것도 소설 잡지. 그래서 내가 자기 소설을 보여 준 거예요." 여왕의 미소를 띄우며 요리코가 말했다. "아, 그랬었지. 그건 별로 상관없어. 여하튼 그건 색다른 소설이니까 말 이야. 그런데, 어땠을까, 감상이?" 사이토는 요리코 쪽으로 몸을 향한 재 물었다. "직접 물어봐요." 요리코가 그렇게 말하자, 사이토는 눈물 자욱이 번질거리는 얼굴을 겐지 쪽으로 향했다. "무슨 잡지였죠?" 겐지는 중견 출판사의 서평 잡지 이름을 댔다. 꽤 수준 높은 잡지였다. "그랬었군요. 역시 지적인 분이시구나. 잡지라고 해서 난 SM 잡지인 줄 알았어요. 요리코의 친구분이시고 하니까 그럴 리가 없는 데 말이에요. 그런데 어쩌다가 그렇게 좋은 잡지사를 그만 두셨습니까?" "그런 것 보다, 제가 우선 가장 감동한 것은, 그 필명입니다. 우메야마 토라오였지요? 아마 유명한 예능인의 이름이었지요?" "네, 맞습니다." "거기가 멋졌습니다. 그렇게 타이트한 소설인데도, 필명이 반전된 느낌 이었거든요. 저는 비평가로서의 자질이 작가에게 내재해 있다는 것을 평가 한 것입니다." 사이토는 겐지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 자욱이 남아 있는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분 좋은데요." "게다가 그 주인공은 성악가로 되어 있는데, 사이토 씨도 성악을 하시 죠?" "그래요. 엄마가 줄곧 피아노를 하셔서 나도 상악을 한 거죠." "그 소설 속의 주인공과 겹치는군요. 그것도 아주 비평가 적이어서 저는 재미있다고 생각했죠. 비평가 적이면서도 독설 적이었어요. 거기가 중요한 포인트지요. 물론 내용도 좋구요. 사실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그 내용입 니다. 절대 비밀로 해 준다고 약속해 줄 수 있어요? 나는, 사실은 사디스 트라고 처음에 말씀드렸지요? 이크, 심장이 두근거리네, 이런 말해도 될지 어떨지?" 그 대목에서 겐지는 긴장한 듯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요리코를 잠깐 보니, 당신 정말 연기 너무 잘한다,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겐지는 요리 코에게 담배 한 개비를 청했다.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데는 담배 연기를 연신 삐끔대는 게 효과가 만점이었다. "아니, 문학적인 애기만 하죠. 이런 애기를 하면 경멸 당하고 말거야." 겐지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떤 애긴데 그래요?" 뼈다귀를 눈앞에 둔 개처럼 사이토는 몸을 내밀었다. "아니, 이런 애기를 하면 경멸 당할 게 뻔해요. 실제로 요리코에게 잠깐 애기했더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난, 화장 좀 고치고 올게요... 그 동안 변태끼리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 면 되겠네." 요리코는 일어나서 작은 금색 핸드백을 빙빙 돌리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 갔다. 겐지와 사이토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몇 사람의 눈이 요리코의 뒷모습을 좇는 것을 확인했다. 예쁜 다리야, 하고 겐지가 중얼거리자, 정말, 하고 사이토가 말해,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사이토의 경계심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겐지는 감지했다. 겐지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거죠? 하고 언밸런스란 사이토의 눈과 입술을 흉내내어 물었다. "물론이죠." 사이토는 입술을 몇 번이나 훔쳤다. "나한테도 비밀이 많습니다. 당신을 보고 있으니 요리코도 있고 해서, 뭐라고 할까, 그렇지, 조금 쑥스럽지만, 처음 만난 것 같지가 않아요. 무 슨 말이든 해 보시죠." "그렇게 말해 주는 건 기쁘지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겐지는 조심성 있게 고백을 미뤘다. 결단이 너무 빠르면 사이토가 수상 하게 여길 것이다. 사이토는 결단이나 결정을 싫어하는 타입이니까. "그렇게 흔한 애기가 아닙니다." 겐지는 요리코의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더 꺼내 피웠다. "어쨌든, 대단한 애기긴 해요. 범죄의 요소도 있고 말이죠." '범죄'라는 말을 듣자, 사이토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제 눈물 자욱 은 지워졌다.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 입술은 그가 분명 흥분하고 있다는 증 거였다. "그럼, 나도 비밀을 몇 개 털어놓기로 하죠. 그러면 되죠? 당신만 애기 하게 하는 건 공평하지 않으니까, 나도 말하겠어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요리코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엄마한테 자위행위 하는 걸 들킨 적 있 어요?" 자위행위를 하기 시작했을 무렵 엄마가 없었어, 하고 말하려다가 겐지는 그만두었다. "나는 어머니라는 것을 몰라요" 하고 겐지가 입술을 깨물며 사이토에게 말했다. 그러자 사이토는 만화에 나오는 소녀처럼 젖은 눈을 크게 떴다. 바람 부는 날 강변의 갈대처럼 속눈썹이 흔들리며, 새로운 눈물 한 줄기 가 뺨을 타고 내려왔다. "아니,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사이토는 테이블에 눈물을 한 방울 떨어 뜨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몰랐어요. 엄마를 모르는 사람에게 자위행위 이야기를 하다 니 내가 너무했어. 나는 말이예요, 옛날에 자위 행위 하는 것을 들켰을 대, 야단맞고 몰래 할거면 엄마 보는 앞에서 한 번 해 봐 그러길래, 그때 엄마가, 이 세상에는 부끄러워할 게 없단다, 하고 말해주길래, 한 거예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그래도 이건 당신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믿어줘 요. 요리코도 모르니까. 요리코가 항상 잘 하는 플레이인데 알몸으로 무릎 을 끓고 앉아 눈을 감고 부끄러웠던 기억을 애기하는 게 있는데 ... 그래 서 고백한 적이 잇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니까요. 수치스러우면서 그렇게 좋았던 건 처음이었어요. 엄마가 이제 너도 어른이 다 됐구나, 하고 말해 주는 거예요. 그걸 말하려고 한 거지, 당신의 그런 슬픈 애기를 듣자고 한 게 아니에요. 정말 뭐라고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군 요." 겐지는 눈을 내리깔고, 됐어요, 잊어버려요, 하고 말했다. 이 놈의 엄마를 생각하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어릴 때 돌아가셨어요?" 사이토가 종이 냅킨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겐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남자하고 도망갔어요. 그래서 나는 이모 집에 얹혀 살게 되었죠. 누이동생과 같이 말이예요." "아니, 어떻게..." 사이토는 새 장째의 냅킨을 집어들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니... 엄마가 내 응석을 꾸짖을 때 그랬는 데 정말이었구나. 그런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니, 믿을 수가 없어. 아니, 우린 지금 친구가 되었잖아요. 당신은 엄청난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 겠군요." 또다시 겐지는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지 말아줘요. 나는 어머니를 증오하지 않으니까. 나를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으니까." "뭐라구요?" 사이토는 네 장의 냅킨을 눈물로 꾸깃꾸깃 적셔가며 오른손으로 겐지의 왼손을 꼭 쥔 채, 다른 사람은 개의치 않고 울었다. 그리고 다 울고 나서 는 허밍으로 무슨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들어본 곡이었다. 옛날, 아직 음악을 증오하지 않았던 시절, 자주 듣던 이태리 가곡이었다. 눈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사이토가 부르는 이태리 가곡은 겐지를 소름 끼치게 했다. 노랫소리는 카페라운지 전체에 울렸고, 요리코가 계산대 쪽 에서 매니저로 보이는 검정 양복의 남자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났을 때, 겐지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지금 사이토를 벌레 잡듯이 밟아 죽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생선 알이 썩어 가는 냄새가 감도는 듯한 노래를 부르다니. "모르겠어." 사이토는 겐지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맹렬히 감동하고 있어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는 노래밖에 없었어요. 나는 말이예요. 다섯 살 때부터 엄마에게 성악을 배웠지만, 이런 곳에서, 다른 사람 앞에서, 비상식적으로 부르지는 않아 요. 그런데 지금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뱃길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감 동이 될 때 나처럼 소심한 남자에게는 노래밖에 없으니까." "고마워요. 등이 오싹해지는 노래였어요." 겐지는 쑥스러움을 연출했다. 식은땀이 미끈거리는 사이토의 싸늘한 손 을 그 순간 살짝 밀어냈다. 모든 것이 예상했던 거 이상으로 순조롭게 가 고 잇지만 손을 잡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동작마저도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사이토는 겐지를, 아주 부끄러움을 타는 남자로,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방금 그 노래는 스카르랏티인데, 사우세계에서 어 머니와 자식이 재회하는 유명한 아리아지요. 처음이에요. 뭐가 처음이냐 하면 말예요. 성악을 하길 잘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게 처음이에요. 누군 가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노래보다 부드러운 것은 없다고 엄마가 말했지 만, 정말 그래요. 오늘 엄마에게 그 말을 해야겠어요. 엄마는 아마 굉장히 기뻐하실 거예요." 요리코는 겐지에게 신호를 보낸 다음, 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호텔 지하 로 내려갔다. 동석하기 싫어서 담배라도 사러 간 것이겠지,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봐요, 나카하라 씨, 이제 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충분히 친구가 되었다 고 생각하는데, 이런 건 처음이에요. 정말 처음이에요." 초등학교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면, 이 놈도 조금은 달라졌을 텐 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그러나 내심,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면 서 사이토와 그 엄마에게 침을 내뱉었다 "말해봐요." 겐지가 말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SM클럽의 여자나 그런 마니아에게 자주 들었던 겁니다. 70년 대 말인가? 미국에서 아직 에이즈가 잠복해 있을 때, 굉장한 쇼가 있었다 는 애기, 들은 적 없어요?" "있어요." 사이토가 다시 묘한 눈이 되었다. SM, 마니아, 굉장한 쇼, 그 세 마디 말만으로도 사이토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뭔가에 무릎을 끓지 않으 면 불안하여, 10초도 못 버티는 자신으로. "비디오도 꽤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심한 것은 없어요. 독일 게 좀 심하 지만 그래도 피부에 바늘을 꽂는 정도니까. 뉴욕에 있었던 헬 파이어라는 클럽 알지요?" 겐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헬파이어는 에이즈 시대 이전을 대표하는 뉴욕 의 정통 포르노 클럽으로 사디스트, 마조히스트들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잡지에서 본 적이 있지요." "마치네라는 출판사의 <죠지>라는 잡지잖아요?" "그렇죠." "초변태 잡지라는 카피가 붙어 있었지요? 그 잡지는 좋았어요. 사체 사 진이 있었던 것 기억나요?" 겐지는 그 잡지를 한 번 밖에 본 적이 없었다. 서로의 배설물을 바르고 있는 부부, 할복 흉내를 내지 않으면 발기가 되 지 않는 남자, 질 속에 사과를 여섯 개나 넣는 여자 이야기가 실려 있어 배꼽을 잡고 웃다가도 돌연 갖가지 자살한 사체 사진이 있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쁜 친구들과 술안주 삼아 돌려보았는데, 사체를 보고 나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겐지는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누가, 누구 를 위해 그런 사진을 잡지에 실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체는 그 형상과 색, 냄새까지 불쾌와 공포를 느끼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 어떤 생물이 자신의 종의 사체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 종은 조만간 멸종할 것이다. 뭐야, 그랬었니? 하고 겐지는 사이토를 보면서 생각했다. -너 같은 놈이 그런 사진을 좋아했단 말이지. "네, 기억하고 말고요." "어떤 나라의 사형은, 손발이 잘린 채 있는 것 말이에요. 몸을 절단하거 나 도려내다가 결국 과다출혈로 죽는 형(刑) 인데, 나는 그 사진을 오려서 보관함에 넣어뒀어요. 멋진 잡지였는데... 헬 파이어도 <죠>에 실렸었어 요. 난, <죠> 만은 매달,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읽었으니까요. 어렸을 적 에, <꽃과꿈>이나 <리본>의 발매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것과 똑같죠. 그런 데, 헬 파이어 비디오가 있는 거 알아요?" 겐지는 고개를 저었다. 사이토는 겐지에게 아주 빠져 버렸다. "있었어요. 내가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통신판매로 사서 봤어요. 별 로 좋진 않았지만, 피가 나오는 것뿐이더라구. 피라는 건 특별히 뭐라 할 만한 게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 미안해요. 당신이 애기하 고 있었는데, 나만 떠들어서, 사실은 정상적인 사람과 이런 애기를 하는 게 처음이라서, 특별히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말예요. 반 친구들과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요. 엽서는 몇 번 보낸 적이 있지만." "엽서?" "잡지 독자투고란 말예요. 최근에는 PC로 통신도 하지만, 그런 걸로 알게 되면 상대방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고들 하잖아요? 볼 것도 없어요. 어디서 이런 인간이 나왔나 할 정도니까. 소처럼 누르 면 움푹 들어갈 것 같은 피부에, 얼굴은 굴곡이 전혀 없어요. 눈, 코, 입, 무엇 하나 걸릴 게 없다고 할까, 높낮이가 없다고 할까, 경사가 없는 거 요. 그저, 구멍이 나 있을 뿐인데다 반드시 뒤룩뒤룩 살이 쪘고, 콧물이나 뭔가를 흘리고 있어요. 귀 같은 데서 말예요. 그런 놈들은 모두 가난뱅이 에다가 입고 있는 옷에서도 냄새가 나고 호흡도 이상해요. 스으하거나, 하 하는, 보통의 숨소리가 아니라, 부바바라든가 그가가가 같은 로봇이 걸을 때 내는 소리 같죠. 그건 호흡에 필요한 관이 막혀 있는 건데, 병이에요. 아, 또 나 혼자 말하고 있었네." 입술 양쪽에 조그맣고 하얀 거품을 가득 묻히며 사이토는 지껄여댔다 "하나만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것도 겐지 씨라면 이해해 주리라 생각되지만... 그런 소 같은, 관이 막힌 호흡을 하는 뚱뚱한 마조히스트를 만났을 때였는데, 그 돼지가 더 뚱뚱한 여동생을 데리고 나온 거예요. 아 마 여동생이 아니겠지만. 얼핏보니까, 양손과 양발이 없는 거 아니가 하고 착각할 정도로, 살찐 뚱땡이였어요. 그 여자도 어처구니없는 마니아였는 데,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플레이하지 않겠냐고 소 같은 오빠가 말하는 거 예요. 글세. 이해가 돼요? 손발이 없다고 착각할 정도로 살이 쪘다구요. 내 소설 말인데, 그게 힌트가 되었어요." 여동생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겐지의 몸 오른쪽이 짜릿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오른쪽 관자놀이에서부터 목덜미, 등골, 허리에서 손톱 끝까지 얼음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자극이 전해졌다. 빨리 그 애기를 해야겠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그래요, 그 소설 굉장했어요. 내가 있던 편집부에서도, 화제가 되었으 니까요. 알지요? 나는 다른 의미에서, 문학으로서도 문학외적인 것에서도 굉장히 흥분했어요." 알지요? 그렇죠? 알겠지요, 하고 겐지는 사이토 흉내를 내며 반복했다. 알지요? 하고 동의를 구하자, 사이토의 눈 꼬리에서 무언가, 눈물보다 묵 직한 액체가 고였다. 사이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요? 하는 질문과 끄덕임만으로도 대화가 되는구나, 하고 겐지는 생 각했다. "알고 말고요. 그런 테마를 가지고 내가 그 책을 썼으니까." "헬 파이어라든가 그런게 아니라, 좀더 범죄적인 비디오가 옛날 미국에 서 팔렸던 것 알아요?" "소문은 들었지만 본 적은 없어요." 하고 사이토가 대답했다. 눈 꼬리의 액체는 곧 흘러내릴 듯 했고 호흡이 조금 빨라지자 입술을 혀로 적시는 회 수가 늘었다. "아동 포르노라든가, 수간이 대부분인데 그보다 더 굉장한 게 있어요. 어떤 건 진자인데도 너무 지나쳐서 특수효과 같다고 느껴졌으니까..." 겐지는 차츰 흥분하고 있는 것처럼 연기했다. 물을 자꾸 마시고, 혀로 입술을 수도 없이 핥았다. 3차원의 그림을 바라보며 입체적인 상을 떠올릴 때처럼 초점이 흐릿한 시선을 만들었다. "애기는 들은 적이 있어요." 사이토의 목소리가 효과음을 넣은 것처럼 날카롭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지만, 그런 케이블 텔레비전인지, 개인 방송국이 있다고 들 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그런 걸 나한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꽤 오래 전부터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인데, 그쪽 방면에 아주 빠 삭해요. 표면적으로 상당히 유명한 아티스트이지만 사실은 지금도 비밀리 에 작업을 하는 헬 파이어류의 전문가예요.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죠?" 겐지가 입술을 이 초에 한 번 핥으면서 그렇게 묻자, 사이토는 들썩들썩 어깨까지 흔들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말로는, 지금은 일본이 제일 심하다더군요. 거품 경제가 붕괴 되어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었잖아요? 그들 중에는 의지를 가 지고 범죄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죠. 어느 나라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아시아의 어떤 놈들은 인도차이나 전쟁 때 마약을 맞고 부상당한 팔을 스스로 자르고 다시 싸우고, 중동 쪽에서는 눈알을 태연하게 도려내 기도 했답니다. 위조 전화카드를 파는 놈들은 아직 귀여운 축이고, 여자 장사를 하는 놈들도 있죠. 판다고 해서 안게 하는 건 아녜요. 알겠어요? 네? 알지요?" 사이토의 눈 꼬리에 줄곧 고여 있던 것이 흘러나왔지만, 역시 그것은 눈 물이 아니었다. 눈물처럼 볼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엔진 오일처럼 쪼르륵 하고, 광대뼈 위에 멈추었다. 그런 분비물을 본 것은 처음이어서, 겐지는 잠시 말을 잊고 그 액체를 보고 있었다. 사이토는 흥분하여 입술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 탓이었다. 위 아래 입술 이 마치 애벌레처럼 따로따로 움직이면서 식후나 취침 전에 반드시 닦았을 이가 이따금 드러났다. 그 이와 젖히거나 오므리는 입술은 비디오에서 빨 리 감기를 보는 것 같았다. 사이토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을 하지 못하 고 있었다. "사이토 씨가 소설에서 표현한 세계가 현실에 존재하는 거예요. 믿을 수 없겠지만...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처음에 만나자마자 말했지만, 나는 사디스트거든요. 그것도 뭐랄까, 채찍으로 때리거나 촛농 을 흘리거나 뭐, 그런 흔한 건 싫어하는 편이거든요. 사이토 씨라면, 이해 해 줄거라 생각했어요. 정말 싫은 여자는 아무리 울고불고 매달려도 철저 히 경멸해서 기쁨을 얻어요. 이해하죠? 이해해 주는 거죠?" 사이토는 비디오의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고개를 연달아 몇 번이나 끄 덕였다. "엔젤 더스트라는 마약이 있는데, 그걸 하면 몸 어디를 절단해도 모르고 그저 거기에 화상 입은 정도의 감각을 느끼면서 살아간대요. 손발을 잘리 고도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는 여자, 어때요, 굉장하죠? 사이토 씨에게 이 걸 꼭 물어보려고 했던 거예요." 사이토는 얼굴을 위로 쑥 내밀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목이 마른 모양이었다. 사이토는 유리잔을 깨물 듯한 기세로 물을 들이켜고는, 이윽 고 입을 열었다. "그거 비쌀까?" "이 백 정도라더군요. 다리는 좀 자르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어떤 놈들 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고 하니까요. 단, 장소의 확보나 의사를 대기 시키는 정도의 준비 같은 게 필요하죠." 요리코가 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사이토가 화장실로 갔다. 요리코는 사 이토의 얼굴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했다. "저렇게 흥분한 거 처음 보겠는걸." "저 놈은 지금쯤 아마 자신이 초능력자라도 된 줄 알 거야." 겐지가 그렇게 말하자, 요리코가 웃었다. "이제, 그 여자아이의 연기에 달렸군." 요리코, 사이토와 헤어진 후, 겐지는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이 시오카가 있는 호텔로 향했다. 아카사카에서 신주쿠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운전사가 묘한 말을 했다. "요즘엔 손님처럼 이 호텔에서 저 호텔로 움직이는 분이 많아요. 제국 호텔에서 오쿠라 호텔로 간다든지 말예요. 게이오플라자에서 우라야스에 있는 힐튼 같은 곳으로 가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같은 시내에서 움직이는 건, 무슨 일이지?" 겐지의 아버지뻘 되는 운전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50대 후반일 텐 데, 얼굴에 주름이 거의 없다. 요즈음, 주름 투성이의 노인이 안 보이는 거 같애, 하고 아야코인가 나츠미가 말했었다. 차가운 바람이나 강한 햇빛 에 얼굴을 내놓지 않아서일 거야, 하고 말했다. 운전사는 이 호텔에서 저 호텔로, 뭐 하러들 그렇게 가는 거지.,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호텔이라는 곳은 자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식사를 하거나, 파티에 나가거나, 약속을 할 때도 이용하는 것이라고 가르 쳐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또, 비밀 회의를 하거나 할 때도 자주 이용된다. 로비에서 전화를 하자, 소피는 직접 방으로 올라오라고 말했다. '직접' 이라는 말을 '다이렉트'라는 영어로 표현했다. "오늘은 이시오카가 없어요." 신축성 있는 소재의 검정 미니스커트를 입은 소피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 녀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맥주 마실래요?" 겐지는 블러드매리를 부탁했다. "지난번 만났을 때, 당신과 이시오카가 마시는 걸 봤는데 아주 맛있어 보였어요." "옛날에 아빠한테 자주 만들어 줬어요." 소피는 유쾌하게 말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행복의 상징 같은 거 있잖아요? 대개 할머니가 만들어 주는 스프라든가, 엄마가 만들어 주는 케이크 같은 거... 겐지 씨는 뭐가 없어요/" "난 없는데" 하고 겐지가 대답하자, "미국 사람 같군요" 하고 소피가 말 했다. "이시오카는 가끔 없어져요. 모든 게 싫어질 때가 있나봐요. 내가 싫어 진 건 아니고, 잘 모르겠어요. 난, 이시오카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해서 따분하지 않고 좋은데, 이시오카는 내가 지겨울 때가 있나봐요. 사실, 난 이시오카에게 가르쳐 주고 할 것도 없으니까." 겐지의 시선이 무심결에 소피의 다리 쪽으로 갔다. 가늘게 쭉 뻗은 다리 였는데, 무용이나 육상 경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로 강인한 다리 였다. 소피가 삼각대에 설치한 비디오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겐지는 사이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고, 하고 겐지는 소피를 봐 야 할지, 비디오 카메라를 봐야 할지 망설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겐지는 한 번 이야기를 중단하고 블러드매리를 마셨다. "카메라가 보고 있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군요" 하고 겐지는 거짓말을 했다. 전에 미와코가 8밀리 캠코더를 사온 적이 있다. 처음에는 침대에서 이것 저것 찍는 게 재미있지만 곧바로 싫증이 났다. 그래서 인터뷰 놀이를 했었 다. 어디 출신입니까? 나이는요? 어디에 사십니까? 같은 질문부터 시작해서, 이혼에 이른 원인은? 지금 새 부인과의 결혼생활은? 노후를 어떻게 보내실 겁니까? 같은 질문을 하고 유명인의 흉내를 내며 답을 맞추는 게임이었는 데 미와코는 금새 이상해, 하고 웃어 버렸고, 겐지는 몇 십분 이나 거짓 답을 꾸며대곤 했다. -저는 심경의 변화라기보다는 인생을 한 발짝씩 내딛는 것의 연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부끄러운 애기입니다만, 이혼이라는 걸 동경했 었지요. 경 자동차로 시작해서 차츰차츰 차를 바꾸 듯 점차 수준이 높은 여성을 원하게 된 것입니다. 수준이 높다는 건 사실 있을 수 없는 것이지 만... 그건, 그러니까, 여성 뉴스캐스터가 좋다고 생각되면 손에 넣지 않 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죠. 나중에는 위자료를 지불하기 위해 일하는 게 보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식으로 쉴새없이, 그것도 전혀 수줍어하지 않으면서 겐지는 줄줄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징그러우니까 그만해, 하고 미와코가 말할 정도였 다. 어쩜, 겐지처럼 책을 많이 읽으면 그렇게 딴 사람처럼 끊임없이 말할 수 잇는 거야? 하고 미와코가 묻자, 아니, 하고 겐지가 고개를 저었다. -책에 있는 애기와는 전혀 상관없어.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듣 고, 말하는 사람을 잘 관찰하는 거야. "이시오카는, 사람을 카메라 앞에 세우는 걸 좋아해요." 소피가 말했다. 사이토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테스트할 생각이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유감스럽지만, 누구도 날 테스트할 순 없어. "그렇게 안 봤는데 부끄러움을 아주 많이 타는군요. 그럼, 내가 질문하 는 형식으로 해 볼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하고 겐지는 고개를 저었다. "질문 받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 고, 그다지 말할 것도 없어요. 사이토는, 내가 얻은 정보 그대로였어요. 말을 해 보니까, 뭐랄까, 내가 아는 정보와 너무 일치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였죠. 어쨌든 이번 계획을 진행시키는 데 사이토는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이 정도로 말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이시오카가 있었다면 좀더 디테일한 질문을 할지도 몰라요." "물론 그러시겠지요." "좀 다른 이야기 해도 돼요?" 소피가 냉장고까지 걸어가며 그렇게 물었다. 냉장고는 호텔 방에서 자주 보는 미니바가 아니라 가정용 보통 사이즈이다. 소피는 미니스커트가 들춰 지지 않게 능숙하게 허리를 구부려 맥주를 꺼내 걸어오면서 마셨다. "어떤 애기라도 할 수 있지만 그서도 이걸로 찍는 겁니까?" 겐지는 비디오 카메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카메라가 있으면 안 돼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다지 개운치는 않군요." "난, 이제 익숙해서 괜찮아요. 이 방에는 항상 카메라가 돌고 있으니까 요." "항상 그래요?" "네." "이시오카 씨가 혼자 있을 때도?" "그건 나도 잘 몰라요. 그런데, 있잖아요, 다른 애기해도 돼요?" "비디오가 돌고 있어서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일이나, 날씨 애기, 프로 야구 같은 그런 거라면 모를까. 그런 애기는 아니잖아요?" "네, 그런 애기 아녜요." 소피는 리모콘을 들고 방구석을 향해, 버튼을 눌렀다. 너무 작은 비디오카메라여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겐지는 벌레 같 은 것이 짓눌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제 됐어요?" "그렇긴 하지만 왠지 긴장이 되는군요." "요전에, 음악이 싫다고 하셨죠?" "그랬죠." "그 이유를 물어봐도 돼요?" "그건 좀..." "말할 수 없다구요?" "말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 길어질 테고, 그 애기를 하고 나면 아주 피곤 해지거든요." "심각한 애기예요?" "기본적으로, 저는 진지한 애기가 아니면 잘 하지 않습니다. 단, 음악 이야기는 정말 피곤해집니다." 어디선가 또다른 비디오카메라가 돌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겐지는 말 했다. "음, 그럼 됐어요. 그만해요. 그냥 나도 음악을 싫어해서 말했을 뿐이에 요." "당신은 이유를 바로 말할 수 있어요?" "그럼요. 나는, 약 때문이에요. 옛날에 약을 너무 많이 해서 공포를 느 꼈는데 그때 이상한 음악이 들렸어요. 아주 기분 나빴죠." "약을 했어요?" 겐지는 블러드매리를 목에 흘려놓고는 그렇게 물었다. 코마코 주스가 다른 건가? 하고 생각했다. 묵직하고, 카바스코나 후추, 우스타 소스도 아닌, 다른 맛이 났다. "그거, 맥시고의 블러드매리 믹스를 이용한 거예요. 레몬에다가 오렌지 주스도 조금 들어 있는 모양인데. 진짜 토마토가 거의 한 개 통째로 들어 있는 것도 있어요. 얼음으로 연해지면 딱 좋아요. 얼음을 넣지 않으면 음 료수라기보다는 음식에 가까우니까요." 소피가 그렇게 설명하는 동안에 겐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잔을 비웠 다. 유리잔에 마시고 남은 얼음 표면에 토마토의 입자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 다. 콩가루를 묻힌 떡이랑 비슷하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콩가루를 묻힌 떡에는 부패한 명란젓 같은 불쾌한 기억이 있다. 이 토마 토 투성이의 얼음은,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불쾌한 기억이 아니라,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미국 서해안에는 화학적인 약을 시험해 보지 않는 대학생이 거의 없잖 아요? 가난하고 성실한 유학생은 하지 않았지만 보통으로 가난한 사람, 보 통으로 돈 있는 사람, 보통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모두 했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며 소피는 겐지에게 다가와서 빈 유리잔을 받아 블러드 매리를 한 잔 더 만들었다. 토마토 주스 캔은 본 적이 없는 것이었는데, 라벨에는 선글라스를 쓴 거 북이와 야자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LSD라든가 그런 겁니까?" 새로운 블러드매리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겐지가 물었다. LSD 라고 할 때, 그는 일부러 촌스러운 악센트를 붙였다. 도호쿠나 큐슈 출신 같은 말투였다. "그래요, 지금은 좀 다르지만... 화학적인 약은 대개 무서운 기억이 남 는 법이니까요." "나는 잘 모릅니다." "당신은 ED 같은 것 한 적 없어요?" "ET?" "ED 말예요. 엔젤 더스트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E D 라고 하고, LA의 학생들 사이에서는 케미컬 포그라고 불렸죠." "그 약은 들어본 적 있어요." "놀랐어요. 당신은 약을 많이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왜죠?" "나는 사람들과 별로 이야기하지 않아요, 사교적이지도 않고. 미시오카 와 같이 여기 돌아와서는 특히 더 그래요. 여기 사람들은, 뭐랄까, 잘 모 르지만, 무섭다는 것과는 다르지만 싫어요. 모두들 잘 웃는데... 난, 웃는 얼굴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말을 잘 못하겠어요. 낭패네." "줄곧 미국에 있었어요?" "그래요.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서부의 시애틀이라는 곳이에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말을 잘하시는군요." "부모님이 모두 여기 분이고, 어머니가 항상 모국어를 잘 써야 한다고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웃는 얼굴을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이 나라에서 는 다른 걸까요?"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 아닐까요? 내 친구도 그 것 때문에 대인 공포증에 걸렸지요." "그런 애기를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여러 명 있어요." "이시오카를 제외하고 이렇게 애기를 많이 하는 건 드물어요," 겐지는 소피가 단 한 번 미소지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시오카를 만나러 왔을 때, 키우고 있는 여자 애기가 나와서 그녀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말했을 때, 소피는 미소 지었다. 웃는 얼굴을 보여준 것은 그때뿐이다. 소피는 미니스커트의 옷매무새를 고친 다음, 맥주를 조금씩 마셨다. 겐 지는, 지금 앞에 앉아 있는 목과 코와 얼굴, 어깨와 허리와 다리가 모두 가느다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앞으로 죽을 때가지 절대 웃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다지 불쾌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이렇게 많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으니까요. 당신에 대 해서도, 약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뭐라고 할까, 어떤 일로 굉장히 무서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 대해 모르잖아요?" "나는, 항상 무서운 생각을 희미하게 움직였다. 소피는 미소를 지으려다 참은 것이었다. "악몽을 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악몽 그 자체는 의미가 없지만, 자 신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으니까 항상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건,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포기하고 있는 게 아니 란 말이에요." "받아들인단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이시오카도 같은 말을 했어요. 무서워서,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을 어떻게 보내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게 어디였더라, 어디 든 상관없는 장소였어요. 장소는 어떤 때,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지도 몰라 요. 인공 강물이 커다란 볼륨 같은 장소를 흐르고 있는 묘한 레스토랑이었 는데, 그런 곳에는 별로 간 적이 없기 때문에 기억이 나요. 도중에 스펙터 클한 쇼가 있었는데, 물론 기둥도 붙어 있는 실내에서였죠. 그 강을 보트 가 가로지르는 거예요. 동양인 같은 선장이 타고 말이죠." 선장, 하고 겐지가 말을 꺼내자 소피가 말을 중단했다. "왜요?" 소피는, 당신도 옛날에 선장이었어요? 아니면 선장을 하는 친구가 있는 거예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선장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정겹게 들려서요." 겐지의 말에, 소피는 다시 미소를 머금으려다 도중에 멈추었다. "난, 옛날 말을 많이 알아요. 꼬방동네, 시어른, 가내공장, 추남 같은 말 말이에요. 지금 내가 늘어놓은 말은, 요즘 그다지 많이 안 쓴다지요?" "분명, 추남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죠." 겐지는 블러드매리가 천천히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음미하며 자 신이 소피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재미있는 화제라거나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한다고 해서 그 여자와의 대화를 즐긴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우는, 그 여자가 쓰는 말의 조합, 긴장의 높고 낮음이 흥미를 좌우하는 것이다. 그것은 섹스도 마찬가지이다. "선장이 있었어요. 베트남인이 잘 쓰는, 짚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정면 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이는 모자와 중국 옷을 입고, 아마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 가수가 같이 타고 있고, 거쉰의 곡을 노래 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음악을 싫어하니까, 거쉰은 모르죠?" "압니다. <랩소디 인 블루> 하는 곡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참, 모를 리 없지, 알아야 싫어하니까. 다른 것도 많이 알아요?" "들은 적이 있는 정도라면 요. 바하는 대개 전곡, 헨델은 주로 오래된 목관곡, 하이든, 모차르트, 낭만파는 잘 듣지 않고, 피아노 곡으로는 슈만 이나 쇼팽을 주로 들었습니다. 슈만의 전기도 읽었고, 클라라와 같은 여성 을 동경한 적도 있습니다. 드뷔시도 자주 들었지만, 사실은, 음악을 싫어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드뷔시여서 좀... 오페라는 이태리 것만 듣는 데, 베르디, 그리고 스칼라치를 조금 들었어요. 러시아 사람들은 거의 몰 라서 특이했는데, 바그너나 베를리오즈 정도. 그리고 성가곡 몇 곡, 쉔베 르크도 한 곡 정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클래식만 들었어요?" "주로 클래식입니다. 그 밖에 재즈는 특정 그룹을 조금, 록 그룹도 찔끔 찔끔 듣는 정도지요." "특정 그룹이라면?" "루 리드, 단제린 드림,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 노이마운틴, 그런 거 죠." "모르는 게 없네요. 싫어하면서도 그렇게 많이 들었어요?" "처음부터 싫어한 것은 아닙니다." "듣다가 갑자기 싫어졌나요?" 이거, 안 되겠군.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말하게 될 것 같다. 이시오카는 정직한 고백을 좋아하는 모양이니까 이 빌어먹을 생각을 털어놓으면 신용해 주겠지. "사실은,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만." 하고 겐지는 서두를 꺼내고 유리잔에 남아 있던 블러드매리를 전부 비웠다. "아름다운 멜로디나 빠른 바이올린 곡을 들을 때면, 참 좋다, 하고 생각 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아주 불쾌한 기분이 엄습해 와서... 그건 두껍고 무거운 이불을 몇 겹이나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참을 수가 없었 어요." "뭐라구요? 잘 모르겠어요." "아름다운 멜로디를 듣고 잇다가 묘한 의문이 생겼는데, 그건 인류는 왜, 이런 아름다운 멜로디를 필요로 했을까 하는 의문이었어요. 그 답을 확실하게는 찾지 못했지만 아마, 기본 적으로 패배자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요?" "우리들이죠." "우리들?" "인류 말입니다." "아직 잘 모르겠는걸 요. 인류가 원래 패배자로서 스타트했다는 건가 요?" "네. 음악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구한다거나 그런게 아 니라, 제 생각이니까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 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겠군요. 지금 애기를 이시오카에게 해도 될까요?" "상관없습니다" 하고 겐지가 말했다. 어차피 어디선가 비디오카메라를 돌리고 있는 주제에. 겐지는 "이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하고 일어서다가, 아- 참, 하고 생 각이 난 듯 소피에게 물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어떻게 하면 좋다고 이시오카 씨가 말하던가 요?" "잠이 올 때까지 안 자면 된다고 했어요." 소피는 결국 한 번도 미소를 머금지 않았다. 소피를 만난 다음, 아파트에 돌아갈 마음이 생기질 않아서, 겐지는 다른 호텔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바에 들어간 그는 블러드매리를 주문했다. 나 비 넥타이를 한, 쥐새끼처럼 생긴 웨이터가 가져온 블러드매리는 소피가 만들어 준 것보다 맛이 연했다. 단순히 토마토 주스와 우오츠카를 섞었습 니다. 하는 마른 느낌의 블러드매리를 마시며, 음악에 대해 이야기한 건 아주 오랜만이군, 하고 생각했다. 미와코와 아야코 들과, 베토벤이나 비틀즈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겐지 는 싫어하면서 어쩜 그렇게 잘 알아? 하는 식이다. 목도를 휘둘렀던 그날 밤 이후, 겐지는 소년과의 형사나 보호사, 그리고 소년원위 패거리들과 적당히 어울려야 한다는 게 싫었다. 그래서 택한 것 이 책을 읽는 일이었다. 그런 방편으로 공수도를 배우는 녀석도 있을 거라 고 생각하면서 가능한 어려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라틴아메리카나 동유럽의 소설도 몇 권쯤 고생하며 읽고 나면, 표지디자 인이 아리송하고 두텁고 어려워 보이는 소설도 사실은 특별히 잘난 척하는 인간만을 위해 쓰여진 게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겐지는 토머스만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그 당시 어디선가 들어본 적 이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때까지의 선입견이 잘 못됐음을 알고 매우 놀랐다. 나쁜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다,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전 세 계의 악당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행동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그는 그 당시 동경의 대상이던 콜롬비아 마약 조직의 두목이 나 코르시카 갱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어떨까, 하고 상상하며 재미 있게 읽었다. 그리고 모든 악당들이 원하는 것은 '말' 이라는 사실을 깨달 았다. 체인이나 나이프는 '말'의 수단일 뿐이다. 하루에 한 권 정도 소설을 읽었고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들을 듣기 시작 했다. 그것이 음악과의 첫만남이었고, 2년 후에 실망하고 말았다. 슈만의 <크라이스레리아나> 라는 피아노 곡을 호로비츠 것으로 듣다가 겐지는 선 율의 어느 부분인가가 자신을 취하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절대적 인 불안감을 일시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뇌속의 대사물질을 생성시키는 작용과 같았다. 그 메커니즘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는 인류의 부자연함이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불쾌하고 불안하 게 했던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건들과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겐지는 잊 지 않고 있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필요한 민족이나 인종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 에 없다. 그러나 겐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음악이란 겐지의 일을 방해하는 역할밖에 아무런 소용에도 닿지 않는 것이다. 아파트로 돌아온 겐지는 브랜디를 세 잔 마시고 일찌감치 침대에 기어들 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사이토나 소피와 나누었던 대화가 긴장을 가져온 것인지, 음악 이야기를 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다. 때문에 불안 상태가 엄습해 오는 것이다. 왜, 잠이 오지 않는지, 악몽의 원인은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는 잠이 올 때까지 안 자면 된다. 이시오카의 대답은 흔한 것이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문제는 자지 않고 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시오카는 답을 열, 아니 스무 개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나는, 하고 겐지는 자신이 가진 구체적인 방법을 헤아려 보았다. 일곱 개밖에 없었다. 그러는 도중에 졸음이 쏟아졌으므로 이걸로 답이 한가지 더 늘었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소피가 약을 하면서 들었다는 이상한 음악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걸 묻 는다는 걸 잊었군. 겐지는 잠들면서 중얼거렸다. 이틀 후, 유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전 11시. 겨우 눈을 뜬 시각이었 다. 잊고 안 가져갔구나, 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야코의 팬티를 주웠 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유리는 전날, 사이토를 만났을 것이다. 야야코의 팬티는 빨간 색으로, 앞이 비치는 것이었다. 아이가 기다리는 집에는 앞이 비치지 않는 보통 팬티를 입고 돌아갔을 것이다. "겐지 아저씨한테 전화하는 건 처음이네요." "지금 막 일어났어" 하고 겐지가 말했다. "일어나자마자, 유리 목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좋다고 지금 생각하는 참이었지." "혼자예요? 여자는 없어요?" "혼자야." 여자는 없지만 앞이 비치는 팬티가 있다. 아야코라는 아이 딸린 색광이 두고 간 것인데, 어젯밤에 아야코는 일곱 번 오르가슴을 느꼈고 펠라티오 를 한 시간씩이나 해 주었다. 그런 사실을 유리는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 을까? "어제 사이토를 만났어요." "어땠어?" "커다랗고 빨간 옛날 차로 요코하마까지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었어요." "페라리라는 차야. 차에는 흥미가 없어?" "없어요. 만나 가지고, 요코하마에 있는 이상한 호텔의 최고 높은 층에 있는 후르츠파라에 도착할 때까지, 사이토는 막히지 않으면 이 차는 꽤 빨 리 달리는데 말야, 그 말만 지껄였어요." "그런 놈이야. 만나서 자세한 애기를 듣고 싶은데, 저녁 때 나올 수 있 어?" "지금 당장이라도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니까." 수화기에 대고 웃음 짓는 듯한 목소리로 유리가 말했다. 진한 밤색 정장을 입고 연갈색의 스트라이프 무늬 셔츠에 맞는 넥타이를 찾고 있을 때, 이시오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저번에 내가 없어서 미안했네." 감기에 걸린 건지, 아니면 목에 뭔가 걸려 있는 건지 아무튼 기분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시오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소피라는 여자는 왜 그렇게 미소짓기를 꺼리는 거죠? 하는 물음이 나오려 했다. 뭔가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상담 을 하고 싶어지는 목소리로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저 옛날의 목회자와 같다. 가르침이나 설법내용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목소리에 의존 하는 것이다. "소피한테서 대충 들었는데, 사이토라는 놈은 정말 재미있군." "무슨 뜻이죠?" "단순히 흥미가 있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야. 그런 인간도 간 혹 있겠지. 자네 친구 중에는 사이토 같은 놈이 몇 명이나 있나?" "사이토는 친구가 아닙니다." "알아. 표현을 달리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자네의 여자친 구는 사이토 같은 놈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애기지." "같은 타입은, 분명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정도로 딱 맞는 사람은 그 놈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 그런데, 오늘은 왠지 목소리가 이상하군." "제 목소리 말입니까?" 겐지는, 당신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애기 하는 걸 그만두고 싶어서 초조 할 뿐이야,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쩐지 주저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겐지는, 이시오카 씨도 참 별말씀을 다 하시는 군 요 하는 느낌이 들도 록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서 말이야. 나는 아주 극단적인 편이어서, 몸이 좋으면 나 자신을 신처럼 여기고, 조금이라도 나쁘면 온 세상에서 소 외된 듯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그런 개인차야 있겠지만,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난 좀 극단적이야." 이 놈은 틀림없이 뭔가를 묻거나 의논하고 싶은 거야, 하고 겐지는 생각 했다. 당신을 만나면, 항상 뭔가를 애기하고 싶어져, 하고 몇 명의 여자가 한 말이 기억난다. 참 잘 들어준다, 하고 나츠미가 말해 준 적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말을 적절하게 조합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게 상 대에게 정확히 전달될 뿐이다. "나쁜 버릇이야. 어렸을 때,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버리시죠?" "맞아.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다른 것에다 원인을 떠넘기면 사이토처럼 되어 버리니까요." "그렇지, 치사해져 버려. 그런데 이상한 건 말이야, 이럴 때 항상 묘한 기분이 드는데...." "뭐가요?" "사이토말일세." "사이토에 대해 무슨 이상한 것이라도?" "아니, 그런 게 아냐. 내가 뭔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목적이랄까, 대상이 내게로 다가오는 거 말이야. <패리스 이즈 버닝> 같은 다큐맨터리를 비디 오에서 시도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기가 막힌 거야. 스폰서가 저절로 나 타났고 여기 와서 매춘부들을 접촉해 봤지만 영 아니 참에 사이토가 나타 났거든, 이만큼 딱 맞는 대상은 어디를 찾아봐도 아마 없을 거야. 그저 시 간이 지나가는 대로 기록하는 게 아니라 드라마를 절취한다고 할까, 그런 거지. 사이토의 병리는 바로 질려 버릴 정도로 너무 딱 들어맞는 심볼이란 말이야. 이건 분명 누군가가 계획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겐지는 긴장했다. "계획을 하다니, 누가 말입니까?" "자네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신이 계획했다는 뜻이야." "애기가 되돌아갑니다만, 자신이나 타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컨디션을 회복하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가르쳐 주게." "영양이 듬뿍 담긴 음식을 약간 먹고 주금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겁니다." "섹스는?" "좋지 않겠지요." "운동부족이라 몸을 좀 움직이고 싶은데?" "그럼 팔굽혀펴기가 좋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상의를 좀 드려도 될까 요?" "아, 말해봐요." "진한 밤색 양복과 연 갈색 계 셔츠를 입고 있는데, 넥타이는 무슨 색 이 좋을 까요?" "세련되게 입는다면 셔츠와 같은 계통으로, 조금 포멀하게 입는다면 진 갈색이겠지. 누구와 시간을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도 다르겠지만. 상대는?" "말씀드린 그 여자아이, 여고생입니다." "그럼 세련된 쪽으로 하면 되겠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카메라가 내일쯤 들어오기로 되어있네. 이란 사람도 자네가 구할 텐 가?" "이란 사람이 아니라, 남미 쪽 사람을 쓰려고 합니다. 악당 중에 페루 사람이 하나 있는데, 재미있는 놈이지요." "아무쪼록 잘 부탁하겠네. 그럼, 난 이제부터 팔굽혀펴기 운동이나 해야 겠어." "소피 양에게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고 나서 겐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껏 연갈색 셔츠에 같은 색의 넥타이를 맞춘 적은 없었지만 이시오카 가 말한 대로 "세련된 느낌이야. 우아해요" 하고 유리가 반응을 보였다. 유리는 약속 장소가 잇는 아오야마의 한 회원제 헬스클럽 바에, 시간 맞 춰 연한 보라색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겐지는 맥주를, 유리는 다이키리를 주문했다. 안쵸비 피자와 작은 새우칵테일, 그리고 오븐에 살짝 구운 굴을 시켰다. "뭐야, 또 바에서 안주를 먹는 거예요? 좋은 옷에 돈도 있으면서 왜 제 대로 된 디너를 사 주지 않는 거죠?" 말을 하기 전에, 겐지는 피자 한 조각을 무고, 맥주를 반 정 도 마셨다. "옛날에는, 꽤 그런 것을 찾아다니곤 했었지." "그런 것이라는 건, 디너를 말하는 건가요?" "음 프랑스요리나 이태리 요리, 시끄러운 요리사가 있는 일식 집이라든 가, 좀처럼 구할 수 없는 지방 특산 주를 겸비한 초밥 집이라든가, 그런 곳 말이야. "설마,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건 아니겠죠?" "물론 아냐. 그런 곳에 가기가 싫어진 것 뿐이야." "아저씨한테 맞지 않은 것 같아서요?" "아니, 그저, 식사를 즐긴다는 게 싫어졌어. 식사하는 거 그것 자체가 즐거움이 된다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거야." "왜요? 세상에 토라진 거예요? 하지만 유리가 그런 디너를 좋아한다면 언제라도 데리고 가지. 난, 와인도 꽤 잘 알아." "뭐 특별히 그런 고급 레스토랑에 가고 싶어서 아저씨를 만나는 건 아녜 요. 그러니까, 그 애긴 이제 그만해요. 어린애 취급하는 거 같아서 그게 싫었어요." "조금 마음에 걸려서 말인데. " 겐지는 맥주를 다 마시고 나서 말했다. "아까 같은 애기를 할 때. 내 표정이 이상해지는 것 같니?" "뭐가요?" 유리는 테이블을 끼고 겐지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 진지한 얼굴을 보고 겐지는 소피에게 음악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후유 증 같은 것이 아직 남아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 번, 어떤 심 각한 것을 고백해 버리면 버릇이 되어 한동안 낫지 않는다. 이시오카와의 전화에서도 뭔가 고백할 것 같았지만, 이시오카쪽에서 고백을 해 왔기 때 문에 넥타이 이야기로 겨우 자신을 제어 할 수 있었다. 유리는 겐지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고백 따위가 너절한 것은, 고백을 듣는 쪽에게 일시적인 안도감을 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음악과 닮 은 데가 있다. "누구한테서 들었는데, 자신이 싫어하는 걸 말하면 자기도 모르게 정말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는 거야. 아까 프랑스 요리 애기를 하면서 그런 표정 을 지었나 하고." "표정은 별로 바뀌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뭔가 무거운 웨이브가 내 가슴을 에워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내가 말하는 게 바로 그런 뜻이야." "하지만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기분이 가라앉거나 침 울해지지도 않았어요. 그냥, 뭐랄까." "유리는 다이키리의 조각 얼음을 빨대 끝으로 자잘하게 부수면서 말했 다. "뭔가 느꼈어요. 아주 무거운 건데, 이제껏 살아오면서 나도 몇 번인가 그런 걸 느낀 적이 있어요. 난, 허약해서 잔병치레를 많이 했거든요. 병이 몇 가지 겹치게 되면 먹는 약도 제한돼요. 약이란 게 반드시 부작용이 있 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병에는 잘 들어도 다른 병에는 좋지 않을 수가 있 어요.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기가 너무 힘들어서 난 항상 울곤 했죠. 부모님이 약을 먹이느라 굉장히 고생했던 기억이 나요. 여섯 살 때인가 어 느 날, 아빠가 내게 약을 먹이려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어요. 유리야, 부탁이니까 제발 이 약 좀 먹어다오. 이 약을 안 먹으면 죽게 된대. 그러 면서 말이죠. 난, 아빠가 우는 걸 처음 봤고 너무 놀랐어요. 그때, 상상할 수 없는 무거운 웨이브를 느꼈던 거예요. 기분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고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조금 전 그거와 똑같은 그런 거예요. 아 시죠? 아빠가 울었다는 게 포인트가 아니에요." "알아." 겐지는 맥주를 다시 주문했다. 위스키를 마시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취하면 안 돼, 하고 생각했다. 고백은 일단 감염되고 나면 멈출 줄을 모른 다.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무거운 사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건데, 하필 레 스토랑이니 디너니 하는 대화에 그 느낌이 끼여들어서 조금 이상했어요." 피자가 식어 버렸다. 겐지는 타바스코를 듬뿍 뿌려 한 조각을 입에 넣었 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그 뒤로는 그 쓴 약을 잘 먹었니?" "아뇨. 계속 울면서 떼를 쓰고 해서 꽤 고생한 것 같아요." "하지만, 아빠는 두 번 다시 울지 않았구나, 그렇지?" "맞아요." "그럼 잠깐 식은 피자를 먹으면서 사이토 이야기를 할까?" "그래요." 사이토와 유리는 기자의 티켓 매장에서 만났다. 요리코는 가끔 사이토와 클래식 콘서트에 가기도 하는데, 유명한 스페인 테너 가수의 예매권을 사 오라고 사이토를 보낸 것이다. 사이토가 직접 티켓을 사러 가는 이유는 그 백화점에 자기의 엄마가 좋아하는 위너 케이크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클레 식 음악은 요리코의 취미이지만, 요리코가 기뻐하는 것은 바로 사이토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요리코에 의하면, 티켓을 사고 위너 케이크를 사서 엄마와 함께 먹는 날이 사이토에게는 거의 유일한 해방의 시간이라 고 한다. 사이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태리 패션으로 치장하고 테스타롯사를 몰 고 백화점으로 가서 요리코의 기뻐하는 얼굴을 떠올리며 티켓을 산다. 스 페인 테너 가수의 콘서트는 인기가 높아 티켓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지 만, 4만 5천 엔인 S석은 너무 고가여서 오히려 남아돌았다. 사이토는 요 리코의 기쁨에 찬 얼굴과 엄마와 둘이서 위너 케이크를 먹을 오후의 일정, 그리고 겐지에게서 들은 비밀 계획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리는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머리를 일부러 촌스럽게 바꾼 다음, 티켓 매장에서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사진을 굳이 대조할 필요는 없었다. 사이토는 삼류 잡지의 이태리 패션 특집에서 바로 걸어나온 것 같다, 는 겐지의 설명 그대로였다. 사이토가 창구 앞에 짧게 이어지는 줄을 따라 섰을 때, 유리가 말을 걸 었다. 겐지가 가르쳐 준 대로, 아주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자아이가 있는 용기를 다 내여 말을 걸었다는 느낌으로, "저어, 실례지만, 안도 선생님이 세요?" 하고 유리가 물었다. 사이토는 네? 하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 죄송합니다. 일본에 와 계신지 몰랐어요. 저, 정말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하지만 악수해 주실 수 있어요?" 유리는 파르르 떨고 있는 하얗고 가녀린 손을 다소곳이 내밀었다. 사이 토는 조금 어리둥절하여 잠깐만, 하고 말했다. 하지만 유리는 눈을 내리깔 고 사이토의 손을 잡은 채 잠시 놓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사람 잘못 봤어요." 사이토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유리가 너무나도 긴장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사이토에게 여유가 생긴 것이다. SM클럽의 여자나 엄마 외에 호감 가는 아가씨에게 미소 담긴 얼굴로 천천히 말한다는 건, 사이토 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 잘못 봤다는 사이토의 말을 듣고, 유리는 정말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겐지가 가르쳐 준대로, 울음 섞인 표정으로 "저, 저는... " 하며 어 쩔 줄 몰라했다. 사이토가 "미안해요" 하고 말했다.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내 동료 의사 중에 안도라는 사람이 있어서, 순간적으로 그 사람으로 잘못 본 줄 알았어. 나는 사이토라고 하는데, 안 도하고 그다지 닮지 않았거든. 그런데 간호사들도 가끔 틀리곤 해요." "의사 선생님이세요?" 하고 유리는 얼굴을 들어 사이토를 바라보았다. "저 여기 위층에 맛있는 케이크 집이 있는데, 같이 케이크라도 먹을까?" 사이트의 목소리는 덜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고 유리는 대답을 미뤘다. "정말 맛있는 집인데." 조금 전보다 작은 목소리로 사이토가 말했다. 유리는 겨우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늘 사람들로 북적대는 가게였지만 문을 연 지 얼마 지나 지 않은 시간이어서 두 사람은 바로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맛있으니까 한 번 먹어봐." 그 말에 유리는 사이토와 같은 애플티를 주문했다. 사이토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창 밖으로 보이는 긴자의 경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침착한 모습 이 없어졌다. 사이토가 조금이라도 불안해하면, 하고 겐지는 유리에게 알 려 주었다. -절대로, 왜 그래요? 하고 물으면 안 되고, 첫째로, 말을 걸어서도 안 대. 사이토와 같이 있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사이토가 말을 꺼내기를 기 다려야 해. 유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사이토를 정면으로 보지 않고 양손을 무릎 위에 다소곳이 얹고 시선을 내리깐 채 자신의 손가락을 보거나, 창 밖의 경치를 보거나 했다. 가끔 사이토가 자신을 힐끔힐끔 살핀다는 것을 유리 는 알아차렸다. 사이토는 유리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없어하지는 않는지, 예의를 모르는 아이는 아닌지, 건방지지는 않는지, 경박한 여자는 아닌지 관찰하고 있었다. 요리코와 엄마 이외의 여자와 케이트 집에 들어온 것은 아마도 처음 있 는 일일 것이다. 유리가 엷은 미소를 계속 띠고 있었기 때문에 애플 티 가 나왔을 즈음엔 사이토의 얼굴에서 불안해하는 표정이 사라졌다. "야아, 맛있다." 유리는 사이토를 보지 않고 애플티를 칭찬했다. 그 다음에 나온 초코 케 이크는 더욱 과장되게 칭찬했다. 둘 다 사이토의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것 이었다. "여기 명물이야. 유명한 것이 하나 더 있긴 한데, 그건 썩 맛있질 않 아." "그거 저도 알아요. 별로 맛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 초코 케이크 먹다 가 다른 건 못 먹겠는데요." 유리는 감사를 담은 눈길로 사이토를 보면서 말했다. 유리는 거울을 앞 에 두고 감사가 담긴 눈길을 며칠이나 연습했었다. 아주 힘들고 어려운 표 정이었다. 더구나 사이토를 보면서 절대 웃는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더 어려웠다. 우선 테이블 위를 보고, 0.2초 정도 시선을 사이토에 게 살짝 옮긴 다음, 다시 테이블을 보다가 생각난 듯 극히 짧은 순간 미소 를 짓는 것이다. 그것이 유리가 생각해 낸 거리낌없는 감사의 시선이라는 것이었다. 사이토는 유리의 교복이나 신발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는 싸구 려 교복과 구두와 양말을 샀다. 사이토의 엄마와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것 이 중요하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엄마보다 더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 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사이토는 유리의 강한 눈에, 기가 질려 버릴 것이다. 그러니 항 상 시선은 아래를 보고 있고, 사이토를 볼 때는,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봐 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강한 눈을 전혀 숨길 필요는 없다. 사이토는 기 가 질리긴 하겠지만 반드시 그 눈을 동경하게 될 테니까, 하고 겐지는 유 리에게 일러주었다. 유리가 그다지 유복하지 않다고 판단한 사이토는 이윽고, 평상시의 말투 로 말하기 시작했다. "너, 고등학생이지?" 사이토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을 것이다. 젊은 아가씨와 데이트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게 그로서는 워낙 처음 일이기 때문이다. 놈은 대화를 풀어가지 못하므로 사이 토에게만 말을 하게 해서는 안 된 다. 필시 사이토는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패닉 상태가 되어 버릴 것이다. 때문에, 유리가 주도권을 쥐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데, 그때 조심할 것은, 활발하고 적극적이라는 인상을 주어서 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신중해서도 안 된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여 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사이토에 의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게끔 하면 최고지만, 하고 겐지가 유리에게 설명하자, 어려운 것 같애,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라는 말을 덧붙였다. "네, 그런데 저, 지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기어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유리가 물었다. "아니, 별로 이상한 것 같지 않은데?" 사이토는 젊은 아가씨의 입에서 나온 '이상하다는 것' 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유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그 는 떨림이 한층 진정된 목소리였다. "저는, 이런 일은, 경험이 별로 없어요. 남자에게 제가 말을 거는 것도 이제까지 없었어요." 유리가 사이토의 흉내를 내며, 성의 있고 불안정하게 긴 고백을 할 차례 였다. "잡지 같은 걸 봐도, 저 같은 여자는 드물다고 그러고... 저는 줄곧 제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자기 자신이 이상한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는 문구를 꼭 넣으라는 겐지 의 지시를 유리는 잘 지켰다. 사이토는 스스로에 대한 불안신경증을 극복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 불안감에 지쳐서 포기했을 뿐이다. 때문에, 자기 자신이 이상한 건 아닐까 하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는 젊은 아가씨에게 동정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겐지는 생각했다. 유리의 그러한 고백을 통해 놈은 우월감을 갖게 될 것이 다. "이렇게 아저씨한테 말하고 있으면서도 굉장히 이상하다는 생각은 바뀌 지 않고 점점 더 강해지기만 해요. 그런데 그 이상하다는 게, 제가 지금까 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달라서, 잘 설명 할 수 있을지 모르 겠지만... 여태까지는, 내 모습은 이게 아냐, 이런 자신이 싫어, 하는 그 런 거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 내가 어떻게 모르는 남자와 이렇게 거 침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 죠? 바보같이, 저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잇는지 모르겠어요." 유리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하자 사이토는 미소를 지었다. 유리 말로는,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소름끼치는 웃음이었다지만, 사이 토로서는 어떻게 이런 꿈 같은 멋진 일이 연이어 일어나는 걸까, 하고 마 치 기적을 만난 것 같은 웃음이었을 것이다. "이상하군." 사이토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정말 이상해." 웃음을 지우고,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해요?" 유리는, 마치 필사적으로 노트에 받아 적은 수험생처럼 물었다. "그것보다 말이야. 날, 누구로 착각한 거지?" "첼리스트 안도 히로시인데요." "안도 히로시? 모르겠는걸 걸. 유명한 사람이니?" "줄곧 부다페스트에서 활동하던 사람인데, 작년에 CD가 한 장 나왔어 요. 한정판매여서 별로 화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나와 닮았어?" 똑같았어요, 하고 유리가 대답한다면, 사이토는 어떻게든 안도 히로시의 첼로 CD를 구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첼리스트도 CD도 실제로 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별로 닮지 않았어요. 얼굴은 아주 다른 것 같아 요. 그렇지만, 뭐랄까, 분위기라고 하나요? 그건 똑같았어요." "복장도?" "안도 히로시가 어떤 옷을 입는지는 몰라요. 턱시도 입고 있는 것밖에 못 봤으니까요. 하지만, 아저씨가, 저어, 성함을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아, 저는 요시다 카나에예요. 구식 이름 같아서 싫지만 요." "난 사이토라고 해. 잘 부탁한다." "아뇨,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그런데 사이토 아저씨, 그거 전부 이태 리 거에요?" "어떻게 알았니?" "전 옷에 관심도 없고 잘 입지도 못하지만, 잡지 같은 건 잘 보거든요. 멋 부리는 취미는 없어요. 그저, 다른 사람이 멋지게 입은 것을 보는 건 좋아해요. 그래서, 안도 선생님은, 아, 사이토 아저씨도 의사 선생님이시 니까, 사이토 선생님이라고 불러야겠지요? 안도 히로시는 부다페스트에 살 고 있으니까, 헝가리나 이태리도 가깝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하면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안도 히로시는 젊고 성공한 사람이니까, 그런 것과도 관 계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난, 보통의사인데." "죄송해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젊고 성공한 사람으로 봤다니 썩 기분 이 나쁘진 않은데, 게다가 나도 클래식을 아주 좋아하거든." "그러세요?" "음악을 좋아해, 너는 첼로를 좋아하는구나." "어둡다고들 하지만 첼로가 좋아요. 카잘스탄은 꽤 갖고 있어요. 요즘은 CD가 비싸서 항상 살수는 없지만요." "그렇구나. 아까, 내가 이상하다고 한 건 말이야, 데자뷰라는 말 아니?" "몰라요." -난, 그때 사이토와 이야기하는데 빠져 있었어요. 뭐랄까, 흐름이 보였 던 거죠. 유리는 사이토에 대한 보고를 계속했다. -사이토는 겐지 아저씨 말 그대로 반응했으니까요. 그게 얼마나 재미있 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갑자기 데자뷰를 아냐고 거드름을 피우며 묻는 거 예요. 뭐야, 이건? 하고 화가 치밀었지만, 참았어요. 몰라요, 하고 약간 모자라는 애처럼 대답하는 게 너무 재미 있었구요.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 겐지 아저씨 말대로 골탕을 먹여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니까요. "지금까지 있을 수 없는 것이어서 마음속으로나 그리던 게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는 뜻인데, 조금 전에 말이야, 그런 느낌이 들었어. 요시다가 자 기자신을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을 때." 그렇게 말하길래,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하는 표정을 지었어요. 겐지 아저씨가 가르쳐 준 대로 하고 있으니까, 사이토가 어떻게 사고하는지 심리를 알 것 같더라구요. 나도 거기에 맞추어, 전혀 다른 캐릭터로 맞대응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말하자면, 리듬을 타게 되었 다는 거죠. "그건 말이야. 요시다뿐만 아냐." 그리고 나서, 사이토 그 자가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이름이 카나에라고 했지? 요시다라고 하지 않고 카나에라고 불러도 될까? 하는 거예요. 나는, 리듬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이에요 하고 밝게 말했지만, 막상 그 자 가 카나에야 하고 부르니까, 무릎 뒤쪽에 닭살이 돋아서, 그거 숨기느라 애먹었어요. 기분이 얼마나 나빴던지. 리듬을 잃어 버릴 뻔했다니까요. 너 무 달아서 느끼한 그 초코 케이크를 한 조각 집어먹으며 어떻게든 요시다 카나에의 캐릭터를 지키려고 했어요. "누구나 그런 고민은 하지 않을까? 고등학생쯤 되어서 자신은 이상하지 않다거나, 어디를 보든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이상한 거라고 난 생각하는데." 카나에라는 애가 사실은 우리 반에 진짜 있어요. 그 애도 전학 왔는데 같은 전학생이어서 나랑 친하게 지내려고 했어요. 내가 줄곧 외국에서 살 았다는 것을 알고 외국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하고요. 하와이에 딱 한 번 간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살던 뒤쉘도르프하고 하와이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며 바보 같은 걸 묻지 뭐예요. 어머, 뒤쉘도르프 사람들도 매운 것 을 잘 못 먹는구나. 하와이도 그렇잖아, 하는 식이요. 내가 조금 비싸 보 이는 학용품을 가지고 가는 날이면, 이것 어디어디제지? 하고 그런 말밖에 하지 않아요. 아니, 이것 요앞 문방구에서 산 거야, 하고 말해 줬더니 요 즘은 별로 말을 걸어오지 않지만요. 카나에라고 그 남자가 부르니까, 닭살 이 돋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런 데 신경 쓸 거 없다고 말하는 건 무리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 람이 오히려 이상한 거니까. 그런 생각은 나이가 들면 없어지는 것도 아니 고 죽을 때까지 평생 가는 거야. 어느 선에서 타협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 한 거지. 내가 항상 생각하는 건,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사는 게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하냐면 말이야. 아름다운 것과 함께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는 거야. 기분 좋은 시간을 최우선으로 하고 나머지는 찌꺼기 같은 것이라고 강하게 의식하는 거야." 나는 사이토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나는 카나에다, 나는 카나에다 하고 몇 번이고 되새겼어요. 감동의 눈길을 보내는 연기를 하느라 너무너무 애 를 먹었구요. 감동의 눈길이라는 게,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요? "모르겠는데." 겐지가 대답했다. 유리는 사이토 애기를 하면서 안초비 피자를 세 조각 먹었다. "꼭 필요할 것 같아서 필수 아이템으로 거울 앞에서 매일 같이 연습했어 요. 꽤 어려웠어요. 수줍어하는 표정이나 카나에 흉내는 직접적인 것이지 만, 연습을 하면서 알게 됐는데, 감동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거라는 거예 요, 그래서,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 봤어요.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든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든지, 아래를 향해 눈을 깜빡인다든지 해 봤지만, 전부 아니어서 혼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죠. 그러다가 마지막 으로 생각난 것이 뒤통수였어요. 왜, 굉장히 나쁜 일이 생겼을 때, 머리 뒤쪽 피부가 쭈뼛해지잖아요. 거기에다 감동이라는 말을 붙이는 거예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크게 한 번 외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감동적인 표 정이 돼요. 사이토는 자신의 설교와 나의 감동 어린 표정에 취해 있었어 요." 겐지는 유리의 보고를 들으며 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리는 일을 거의 완벽하게 해 내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만나서 확인 할 작정이지만 사이토는 유리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의심의 필 요성을 가질 수가 없다. 요리코나 나츠미, 미와코나 아야코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젠지 자신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유리 또한 이렇게 개관적으로 털어놓지 않으면 사이토 앞에서의 행동이 연기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 하기 위해 한동안 어려움을 겪을 테니까. 유리가 사이토에게 하는 행동은 극단적인 예이기 때문에 연기라고 이해 하기 쉽지만, 맞선보는 자리 같은 데서 그다지 호감은 가지 않는데도 의사 나 관료 같은 상재에게 감동을 연기하는 여자들은 많다. 그런 사람들도 아 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다시 나이가 들어 연애 소설을 읽거나 자위행위를 배우고 이윽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거나 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이토는 그 런 반복된 관계에 염증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서 드라이브했니?" "그래요. 수도고속도로가 꽉 막혀서, 사이토는 카오디오로 베이스를 마 구 넣은 오페라를 틀었어요. 이건 <돈 카를로> 야. 베르디 곡이지, 하고 말했는데 차를 타서 그런지 백화점에 있을 때보다 안정 돼 보였어요. 아, 선글라스를 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유리를 인정했기 때문이야. 진짜 카나에라고 생각한 거지. 사이토는 그 런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나 성냥팔이 소녀를 합친 것 같은 여자를 테스타 롯사에 태우는 것이 꿈이었으니까. 이렇게 이상적으로 일이 잘 돼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겠지? 페라리라는 스포츠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했 지?" "가르쳐 주셨잖아요. 너무 굉장해서 잘 모르겠다는 태도 말예요. 머리가 멍해져서 테스타롯사도, 카은타크도, 포르셰도, 전부 똑같아 보이는 카나 에랍니다 하는 표정으로요. 사이토는 그런 태도에 만족한 것 같았어요. 하 지만 사실, 그 스포츠카에 시동이 걸렸을 때는 왠지 섬뜩했어요." 유리는 남은 피자를 다 먹어치우더니 메뉴를 보고는 스페인풍 생선 죽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 자와, 그 빨간 차를 생각하면 왠지 이런 알지도 못하는 요리가 먹고 싶어져요" 하고 말했다. "베르디를 듣고 나서 무슨 말을 했니?" 겐지는 조금 시끄러워진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스포츠클럽에서 땀을 흘린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떠들어대며 바에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이 클럽 의 회원권은, 수천만 엔이나 한다. 겐지는 회원은 아니지만, 고객 중에 회 원이 세 명이나 있어서 그들로부터 바와 레스토랑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 를 받은 것이다. 스쿼시 코트가 두 개, 최신 헬스 기구, 15미터 풀, 에어 로빅 클래스, 그리고 샐러드 바가 있지만, 회원권이 수천만 엔이나 하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어쨌거나 수천만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거야. 그걸로, 회원을 균일하게 선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직까 지 부자 치고 나쁜 놈은 없다고 믿고 있는 거라구웃는 얼굴로 칵테일을 마 시며, 하와이나 호주의 별장을 화제 삼아 이야기를 나누는 회원들은, 겐지 의 눈에 모두 유령처럼 보인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한 번은 유리를 쳐다 보았다. 유리만큼, 강렬한 눈빛의 유령은 그곳에 없었다. "밀라노에서, 베르디가 죽었다는 호텔에 묵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밀 라노의 쇼핑 명소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호텔이었는데, 프런트에 베르디 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이 호텔에서 배르디가 죽었다는 프런트맨의 말을 듣고, 사이토는 로비 같은 곳에서 배르디가 걸려 넘어 죽었나? 하고 생각 했대요. 물론, 죽기 전까지 그 호텔의 어는 한 방에서 작곡을 했다는 의미 지만 말예요. 그 이야기를 막혀 있는 수도고속도로에서 해 줬는데, 그건 꽤 재미있었어요. 카나에가 아닌, 유리로 돌아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조 금 긴장도 했죠." "요코하마까지 많이 걸렸니?" "도중에 정체가 풀리긴 했지만, 사이토는 그다지 속도를 내지 않았어요. 그게 좀 의외였어요. 훨씬 난폭하게 운전할 줄 알았거든요. 많이 있잖아 요? 몇 초 차이도 안 나는데 앞차에 부딪힐 정도로 딱 붙어서 라이트를 깜 박거린다거나, 좁은 골목에 비집고 들어가는 사람들 말예요. 차가 막혀 <돈 카를로>를 듣기 전이었는데, 이 차에서는 음악이 필요 없어, 라구요." "엔진 소리가 멋지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말하며, 겐지는 페라리를 타보지 못했군 하고 생각했다. 소피의 웃음기 없는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 이시오카가 동석하 지 않고 비디오로 감시하면서 기록할 때, 음악을 싫어하는 이유를 소피에 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음악이 싫어졌다는 표현은 사실 정확하지 않다.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적의 정부에게 정확한 표현을 할 필요는 없다. 소피의 얼굴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얼굴로 오르가슴을 맞이할지 상상해 보았다. 지금 바로 앞에서, 새우 를 먹고 있는 유리의 경우에는 그 순간의 얼굴을 상상하기가 쉽다. 지금 주위에서 제각각 외국에 소유하고 있는 별장을 화제로 떠들어대는 중년 여 자들도,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그쯤 상상하기란 쉽다. 소피, 그 여자의 오 르가슴 순간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은 끌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가 소피에게 끌리고 있군,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소피와 자고, 그것을 알린다면, 이시오카가 뭐라고 할까? 별일 아냐. 같 이 있지 않는 시간은 그 여자의 자유야, 그렇게 말할 것이다. "겐지 아저씨는 차에 대해서 잘 알아요?" 유리는 새우칵테일을 전부 먹어치웠다. "전혀, 하지만 페라리는 유명한 스포츠카니까 알지. 나는 잘 아는 게 하 나도 없어. 요리도 패션도. 요코하마에는 뭘 먹으러 간 거지?" "사이토가 하자는 대로 카레라이스를 먹기로 했어요." "카레라이스?" "항구가 보이는 곳에 호텔인데, 제일 높은 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카레 라이스를 먹었어요. 아직 어둡지도 않았고 해서 그런 분위기는 처음이었어 요. 카레라이스는 그 레스토랑의 명물인가 봐요. 왜 카레라이스에 따라 나 오는 양념 같은 걸 뭐라고 하죠?" "향신료?"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게 스물 여덟 가지나 나오는 거예요. 삶은 달걀을 잘게 썬 것이랑, 식초에 절인 양파, 바삭바삭하게 구운 마늘 같은 거랑... 특이한 것은 요, 대머리 웨이터가 설명해 준 건데, 생선 내장을 간장하고 술로 절인 것도 있었어요. 사이토는 시계를 자주 봤는데 그래도 카레라이스는 전부 먹었어요. 나도 전부 먹었구요. 늦은 오후에 카나에가 되어, 모든 것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중년의 남자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카레라이스를 먹고 있으니까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구요." "사이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니?" "식후에 사이토는 에스페소를 시켰어요. 그랬더니 웨이터가 없습니다 하 고 대답했는데, 그 말투가 아무래도 사이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느낌이 었어요. 아시죠? 무례하지도 실례가 되지도 않았지만, 특별하지도 않은, 고급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웨이터가 잘 쓰는 말투였어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진 사이토가 호통을 칠 줄 알았는데 그냥 참더군요. 그리고 요 구르트 셰이크를 먹으면서 은행강도와 인질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은행강도? 그게 도대체 뭐지?" "은행강도가 여자 인질을 잡는 애기예요. 그래서 며칠 동안 같이 지내게 되는데, 여자 인질은 강도 말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어느 때는 강도의 눈 치를 살피기도 해요. 두 사람은 서로 긴장이 되었고 그 긴장을 견딜 수 없 어서 섹스를 해 버리는데, 둘 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거죠. 그런 게 과연 연애라고 생각하니? 하고 나한테 물었어요." 유리는 와인이 마시고 싶다고 했다. 입안에 머금었다가 목으로 흘려보내 면, 포도 맛이 기분 좋은 술, 겐지는 로와르의 백포도주 반병을 주문했다. 사이토는 유리에 대해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화제도 쉽지가 않다. 사이토는 유리를 인정했다. 게다가, 유리로부터 뭔가를 얻으려는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며, 유리가 카나에가 되었듯, 사이토도 자신의 소설 속의 성 악가가 되기로 했다. 소설을 섰으니, 그 속의 인물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 능하다. "나는, 카나에가 되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것도 연애라 고 생각한다고 말했어요. 사이토는, 너는 보기보다 머리가 좋구나, 하고 칭찬했어요. 그 후 줄곧 창밖에 커다란 화물선만 보고 있었어요. 나는, 뭔 가 사이토가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아닐까 조금 무서웠어요. 일테면, 난 사 실은 지독한 악당이야, 너 같은 어린애를 상대하는 놈팽이가 아니라구, 하 는 뭐 그런 말 말예요. 사이토는 유리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고 자신의 연구실 팩스번호를 적어 주었고, 유리는 우리 집 옆에 있는 문구점에서 부지런히 팩스 보낼게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 <초전도 > 라는 이상한 이름의 문구점이에요. 팩시에는 보내는 사람 이름이 나오잖아요. <초전도> 라는 이름, 왠지 멋있지 않아요?" 제 7장 코 드 유리는 백포도주로 취해 있었다. 사이토에 대한 보고가 끝난 뒤, 겐지는 호텔 바에서 한 잔 더 하자고 했 다. "방 안 잡았어요?" 하고 유리가 물었다. 스포츠클럽에서 호텔까지 가려는데 택시 잡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초 가을치고는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이 바람을 맞고 유리가 술에서 깨 어, 오늘은 그냥 집으로 갈게요, 하고 말해 주기를 겐지는 바랐다. 호텔은 모든 객실이 스위트 룸이다. 내장이 포스트 모던해서 잡지에 자 주 실리는 유명한 호텔이었다. 스포츠클럽을 나오면서부터 유리는 내내 겐 지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프런트에서 겐지는 예약 번호를 말하고 아메리 칸 익스프레스 골드 카드를 냈다. "아저씨 같은 사람이 카드를 써요?" 유리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증인이 많아." 겐지는 평상시 목소리로 대답했다. 프런트 직원이 재빨리 겐지 와 유리를 훑어보았다. 참새 같이 생긴 여자 였다. 객실의 커튼은 닫혀있고 날카롭게 튀어나온 원추형 조명 기구가 노랗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겐지는 미니바에서 맥주를 꺼내 소파에 앉아서 마셨다. 옆에 앉은 유리 가 겐지의 손에서 하이네킨을 빼앗아 마셨다.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언제 옷을 벗어야 하는지 가르쳐 줘야 하잖아 요." 유리는 일어섰다가 겐지의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아직 나는 스물 아홉이다,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뭔가로 성공하여 여자 가 항상 들끓는 타입도 아니다. 지금부터 예쁘고 젊은 여자를 품고 살을 맞대고 소리를 지르게 할 때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는 걸까. "나, 샤워하고 올게요." 유리는 잠시 후 욕실로 들어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자를 번쩍 안아 올려 침대로 데려가는 놈들의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하고 겐지 는 생각했다. 그는 팬티까지 벗어 던지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유리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타월을 몸에 감고 나타날까? 아니면 속 옷만 입고? 아니면 오늘을 위해 준비해 둔 야한 슬립을 입고? 그것도 아니 면 알몸으로 침대에 들어와 가만히 눈을 감을까? 그리고 바로 애무를 할지 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라도 겐지가 대응할 수 있는 건, 유리가 스스로 모 든 것을 포기하는 걸 지켜보면서 흥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리는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나타나 침대 가에 서서는 가슴을 양손으로 가렸다. "이리 와." 겐지가 조용히 말했다. 유리는 젖가슴이 자그마했고 등에는 까만 솜털이 나 있었다. "어젯밤에 오른쪽 다리를 모기가 물었어요." 하고 말하면서 유리는 침대 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겐지는 손을 내밀어 살짝 당겨 주었다. 젖어 있는 머리칼을 젖히고 이 마, 볼, 입술로 내려가며 키스했다. 입술을 얹을 때, 아, 하고 유리가 소 리를 냈다. "나, 키스도 처음이에요." 겐지는 몇 번이나 키스를 했다. "있잖아요, 아저씨는 나하고 이렇게 있는 거, 생각한 적 있어요?" 겐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피, 난 매일매일 생각했는 데..." 유리는 약간 토라진 음성으로 말하면서 겐지를 꼭 끌어안았다. 겐지는 자신이 사이토나 이시오카 같은 놈들과 다를 게 없는 인간이 라고 생각했 다. 유리를 택시에 태워 가까운 역까지 배웅해 주러 갔다. 헤어질 때, 다시 유리가 키스를 퍼부었다. 택시 운전사는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렷다. 표를 산 유리가 개찰구 저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겐지는 택시를 대기시킨 채 지켜보았다. 겐지가 택시에 오르자 운전사는 차를 난폭하게 출발시켰다. 방향지시등 도 작동시키지 않고 차선을 변경해 뒤쪽에서 달려오던 차가 요란하게 경적 을 울리며 급제동 했다. 겐지는 입을 다문 채, 백미러만 보고 있었다. 운전사와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겐지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운전사는 차츰 얌전해지더니 이윽 고 난폭한 운전을 그만 두었다. "다음은 요요기지요?" 혀만은 계속 차고 있던 운전사가 물었다. "그래요. 서참도 출구쯤에서 내려주면 됩니다." 겐지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백미러에 비치는 눈 주위만으로는 운전사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목덜미의 주름으로 대충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겠지만 차안은 어두웠고 운전 사는 터틀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거세를 하면 나이를 몰라보게 된다, 고 어느 소설에서 읽은 적이 있다. 미국의 탐정 소설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섹스와 사정에 의해 남자 의 생체시계가 작동된다고 씌어 있었다. 자손을 남기기 위한 장치가 활발 하게 일하고 있는 것을 몸이 감지하여 죽음으로 향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잇는 시계를 작동시킨다. 즉, 노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세를 하 면 생체시계가 멈춰 치사유전자는 언제까지나 봉인된 채로 남아 있게 된 다. 노화의 징후를 알아보기 어려워진다는 내용이었다. 택시요금은 천 구백 사십 엔이었다. 겐지는 이천 엔을 내고 잔돈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운전사는 60엔의 칩에 대해 인사를 하고는 다시 혀를 끌끌 차며 문을 닫았다. 요요기에 있는 스넥 바 <푸에르타> 는 라틴 음악이 나오는 가게로 중남 미 사람들의 아지트였다. 겐지가 안으로 들어서자, 안색이 좋지 않은 중년 의 일본 여자가 부에노스 디아스, 하고 스페인어로 인사를 했다. "헤스를 만나러 왔는데요." 겐지가 말했다. "테이블에서 기다려도 괜찮을까요?" 여자가 구석 자리의 테이블로 직접 안내해 주고는 주문한 데킬라를 가져 와 겐지 옆에 앉았다. "이봐요, 우리 집에 몇 번 왔었죠?" 여자는 X마크가 두 개 그려진 멕시코 맥주를 마셨다. 가게는 아직 한산 했다. 심야가 되어야 북적거릴 것이다. 스넥바 치고는 제법 규모가 크다.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기다란 카운터에 스무 개의 테이블, 중앙에는 좁 지만 댄스 플로어도 있다. 주말에는 아마 라이브 공연도 하는 모양이다. 여기에는 대사관 직원서부터 매춘부까지 다양한 손님이 모여든다. 일본 인은 라틴음악의 팬이 대부분이지만 왠지 그들 대부분은 입성이 남루하다. 당연히 양복을 빼 입은 겐지가 두드러져 보였다. "음, 오늘로 다섯 번째인데요." 겐지가 대답했다. 한 번은 요리코에게 이끌려 왔었다. 딱히 라틴음악을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작은 디스코테크나 클럽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요 리코는 레게나 살사, 펑키록을 전문으로 하는 바들을 뚜루루 꿰고 있다. 아카사카나 긴자에 있는, 직장인들이 셔츠 소맷자락을 걷어붙이고 흔들어 대는 곳이 아닌, 야릇한 향기를 풍기는 외국 선원들이 모여드는 장소에 겐 지를 끌고 가곤 했다. 음악은 분명 울리고 있지만 볼륨이 너무 커서 오히려 아무런 감각도 느 낄 수 없었다. "헤스는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이 아닌데, 당신도 그런 일 하는 사람 은 아니겠죠? 이상한 걸 물어봐서 미안하지만." 안색이 좋지 못한 중년 여자는 집게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면서 말했다. "이거 참, 난 야쿠자 따위가 아녜요." 겐지는 데킬라를 반쯤 비우고 나서 여자에게 명함을 건넸다. 편집 프로 덕션의 대표자로 되어 있는 명함이었다. 전화번호와 주소는, 코지마치에 있는 전화수신 서비스 회사의 것이다. 전화만 받아주는 여직원이 사장님 이하 전직원이 회의중입니다. 용건을 남겨주시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응답해 주는 서비스다. 간단한 속임수로 이따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어머, 책을 만드세요? 우리 가게에도 출판사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여자는 명함을 소중하게 받아들고는 자신의 명함을 겐지에게 건네주었 다. -라네스넥 <푸에르타> 여주인, 이라고 씌어있다. "책은 별로 안 만들어요. 지금 보세요. 여자 누드 책 말고 팔리는 책 있 어요? 주고 사보를 만들고 있죠. 그 밖에 일반 잡지 특집을 돕기도 하구 요." 겐지는 여자에 대해, 남미에 오래 살다 와서 공기가 맞지 않아 이렇게 피부가 더럽나? 하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헤스는 마약은 안 하니까 일단 안심은 하고 있지만... 중남미는 지금 상태가 아주 안 좋아서 각별히 조심하고 있어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여주인이 자리를 뜨고 십 분 후에야 헤스가 긴 머리를 날리며 나타났다. 여자를 동반하고 있었다. 헤스는 볼리비아 태생의 30대 초반으로 일본에 귀화해서 15년을 살았기 때문에 말은 막힘이 없었다. 그는 대기업 상사에 서 재고 처분에 골머리를 앓는, 중파나 단파만 나오는 라디오, 녹슨 안테 나, 소형 흑백 TV 따위를 중남미에 콘테이너 떼기로 팔아 넘기는 대리점 을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선원들과 손자고 민예품이나 악기, 수상쩍은 보 석, 박제 따위의 밀수 루트를 트고 있고 겐지보다 더 조직적으로 스패니시 여자들의 일을 봐 주고 있다. 오늘밤 그와 동행한 여자는 약간 통통한 혼 혈인데 얼굴은 작지만 블라우스 단초가 뜯어질 지경으로 가슴이 풍만했다. "잘 있었나, 겐지?" 헤스가 왕왕대는 음악소리에 묻히지 않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겐지와 헤스가 알게 된 것은, 2년 전이다. 이 가게에서 만나, 헤스가 안 고 있던 문제를 겐지가 해결해 주었다. 당시 헤스는 멕시코에 파친코 기계 를 수출하려고 오카야마의 업자와 계약을 맺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자금 줄이 도중하차하는 바람에 헤스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오카야마 업자의 대리인인 야쿠자들이 헤스의 목을 따려고 쫓아다니고 있었다. 겐지 는 그에게 고객 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남자는 아야코를 좋아하 는, 무역회사 중역이었는데 특이한 물건을 외국에 팔아먹는 재능이 뛰어난 자였다. 트랜지스터를 서 아프리카에 수출하기도 하고, 건조시킨 매실장아 찌를 불가리아에 수출하기도 했다. 큰 건으로는 이란, 이라크 전쟁 때, 양 진영에 태양전지로 된 비디오 일체형 소형 액정 TV를 팔아먹으려던 시도 도 했다. 장기간 사막전에 투입된 병사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유행하여 장 관과 정부가 골치를 썩고 있다는 신문 기사에서 힌트를 얻었던 것이다. 그 러나 태양전지 개발비가 십 억을 넘어서자, 그 프로젝트는 캔슬되었다. 그 고객은 파친코 기계를 멕시코에 수출한다는 아이디어에 솔깃해서 헤스에게 자금을 대 주었고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여자들도 잘 있지?" 헤스는 어디로 보나 백인이지만, 인디오와 흑인의 피도 섞여 있다고 언 젠가 말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은 인종차별을 할 수가 없어. 새끼 중에 흑인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밑의 동생도 까맣고... 헤스는 십만 엔 이상을 줘야 하는 페라가모 부츠를 신고 롤렉스 시계도 차고 있었지만, 맨살에 걸친 빨간 실크셔츠와 가죽 불루존 바지, 걸을 때 마다 소리가 나는 금체인 따위의 치렁치렁한 장신구, 긴 머리와 수염 탓에 결코 무역회사에 다니는 성실한 사내로는 보이지 않았다. 볼리비아 출신이지만 그는 미약의 유혹을 단호히 떨친다. 친척 중에 누 군가가 코카인으로 사망했다는 것 같다. 복용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제조 에 관계하다가 살해당했을 것이다. 일본인 여자와 결혼해서 일찌감치 귀화 한 몸이지만 부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나는 힘없는 똘마니야, 하고 헤스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일본에 와서 처음 배운 말이 '고맙습니다' 와 '똘마니'였다고 한다. -똘마니라는 말은 참 좋은 말이야. 나는 항상 똘마니로 있고 싶어. 남자 는 사실 전부 똘마니야. 난, 라파스에서도 똘마니였고, 늙어 고꾸라져도 똘마니야. "부탁이 있어!" 겐지는 양손을 메가폰처럼 만들어서는 헤스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형제여, 그대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수고라도 내 마다 않겠네." 헤스는 겐지 흉내를 내며 양손을 메가폰처럼 만들고 그 사이로 혀를 내 밀어 낼름거렸다. 콧수염을 이용한 헤스의 천박한 행동에 블라우스 단추가 뜯어질 것 갖은 혼혈여자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정도로 박장대소했다. 겐지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새벽 두 시가 지나서였다. 술을 거나하게 마 셨지만, 아직도 시끄러운 살사 음악이 귓전에서 왕왕대는 듯 했다. 겐지는 뜨거운 물로 샤워하면서 음모에 말라붙어 있는 유리의 붉은 체액을 깨끗하 게 씻어 내렸다. 그는 작년 생일에 나츠미가 선물해준 목욕 가운을 걸치고 위스키를 한 잔 만들어 마시면서 자동응답기의 메시지를 점검했다. 고객으로부터 세 건, 고객에게 소개받았다는 남자한테서 두 건... -저는 여자 색광에 대해서 대단히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상한 사람 은 절대 아니구요. 돈도 충분히 있다고 자부합니다. 해외에서 오래 근무해 서 이쪽 시스템을 잘... 그리고 사이토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요리코의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겐 지는 곧장 요리코에게 전화를 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유리라는 애 만난 거야?" 요리코가 약간 코 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유리 애긴 의외로 빨리 끝났어. 헤스를 만났다가 늦어진 거야." 요리코가, 아 그랬구나, 하고 모호한 말투로 말했다. "난 또, 숫처녀 여자아이를 울려가며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줄 알았네." 누구에게나 질투심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겐지의 여자 들은 질투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긴다. 지난주에 읽었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라는 책은 카리브해 지역 여자들의 질투에 대해 다루고 있었는데, 남자가 바람을 피우다 발각되면 지금도 석유를 들이붓고 태워 죽인다든지 남자의 성기를 잘라낸다고 한다. 그것은 교양이나, 야성, 추진 성이나 정열의 차이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투는 감정의 물결로 봐 서는 나쁜 것에 속한다. 나쁜 감정의 물결을 중화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시 간을 이 나라 여자들은 갖고 있으며, 게다가 이민족에게 당한 기억도 이 나라 여자들에게는 없다. 겐지는 여자의 질투를 유발시키고 기뻐하는 따위의 비열한 짓은 싫어한 다. 그리고 일단 질투를 느끼기 시작한 여자의 눈치를 살피는 따위는 시간 낭비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일의 성격상, 질투가 히스테리로 직결하는 여 자는, 곧바로 관계를 청산해 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겐지 스스로 여러 명의 여자와 관계하는 게 그다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여 자의 기관에 자신의 기관을 넣고 침대에서 뒹굴었다고 해서, 이렇게 '평화 로운 나라'에서 배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이토가 만나고 싶어해요." 요리코는 유리 애기를 꺼냈던 것을 의식한 듯, 어색하게 말했다. "헤스와 같이 만날 건데, 빨리 만나는 게 좋겠어.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까 아침에라도 연락해서 내일 밤에 만나면 안 될까? "지금 만나고 싶다고 해도, 그 자는 꼬리를 흔들며 뛰어올걸요." "준비가 필요해. 요전에 만났던 그 호텔에서 만나자고 전해 줘. 약간 넓은 방을 잡아 둘 테니까." 요리코는 "알았어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잠시 침묵했다. "겐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데 말해도 돼?" "좋아" 겐지는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리라는 애, 어땠어요?" "뭐랄까, 테니스로 치면, 라켓을 처음 쥐어본 주제에 폼께나 나는 그런 느낌이었어." 겐지가 그렇게 말하자, 요리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됐어요." 요리코는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겐지가 다른 여자한테 지극하게 서비스를 해 줘서 여자가 기뻐하는 게 싫어요. 게다가 숫처녀를 올려놓고 좋아하는 것도 싫고, 하지만 지금 대답 이라면 괜찮아요. 이상한 거 물었다고, 나 싫어하면 안 돼요." "절대 싫어하지 않을 거야. 약속하지." 겐지는 전화를 끊었다. "렌즈 구경 1.5밀리 짜리 비디오카메라야. 사용설명서에,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가 잇는 사용은 피해 주십시오. 하고 씌어있네. 하지만 바로 다음에, 핀 마이크도 있고, 자연스러운 장소가 마땅치 않으면 스위치 내 부, 아니면 화재 경보기 내부 등이 가장 의심받지 않는 장소라고 일러주고 있지 뭔가. 플라스틱 판을 떼어내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면서 말 이야. 웃기는 수작이지." 이시오카는 신주쿠 호텔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세 종류의 극소 무선 카 메라를 테스트했다. 카메라는 어느 것 할 것 없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선단 부분은 볼펜 끝 정도도 되지 않았다. "녹화장치는 상자 모양의 테이블 안에 숨겨주게, 녹화 스위치를 켜고 바 로 사이토를 데려오는 거야. 녹화모드는 최장 일곱 시간이지만 SP테이프 가 백 오십 분밖에 안 되니까, 그 전에 애기를 끝내야 해. 어때, 괜찮아? 볼리비아 사람 말인데, 자네 스페인 말도 할 줄 아나? 이시오카는 모든 작업을 겐지에게 맡길 작정이다. 그 편이 겐지로서도 다행스럽다. "아뇨. 헤스가 일본말을 아주 잘합니다." "그래? 통역을 하게 되면 애기가 배로 길어지니까. 카메라는 물론 녹화 기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지만 켜지고 꺼질 때 미세한 소리가 날 거야. 그 게 좀 걸리는데, 아무래도 지금 녹음중입니다. 하고 들린단 말이야." 이시오카가 테이프를 돌리고 다시 멈추었다. 작은 곤충이 짓눌려 죽을 때 나는 소리가 났다. "컴퓨터의 에러 경고음이 '바보'라는 소리로 들리는 것처럼, 이것도 이 상하게 사람 목소리처럼 들린다구. 어쨌든 이놈은 터미네이터 눈에 박혀 있는 카메라보다 작을 걸." 이시오카는 전화통화를 할 때보다 긴장된 목소리였고, 소피는 겐지에게 거의 시선을 주지 않았다. 겐지는 녹화장치를 테이블 아래가 아닌 가죽 서류가방 안에 넣기로 했 다. 호텔방의 테이블이 투명한 유리로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녹화장치라 고 하지만, 옛날 여동생이 유치원에서 쓰던 도시락 만한 크기여서 서류가 방 안에 가볍게 숨길 수가 있었다. 사마귀 발처럼 들쭉날쭉하게 붙은 수신 안테나 끝이 살짝 보였지만 사이토가 아무리 예민하더라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신문과 서류, 책과 이동전화, 잡지에 묻혀 있는 그 안테나 끝을 식별하려면 시력이 적어도 5.0이상은 되어야 하리라, 고 겐지는 판단했다. 게다가, 사이토는 평상심을 유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이토는 이 방에서 '데자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시오카가 가르쳐 준 대로, 겐지는 화재경보기의 플라스틱 판을 조심스 럽게 띄어냈다. 핀처럼 생긴 비디오 카메라를 핀셋을 사용하여 양면 테이 프로 고정시켰다. 무선 마이크로폰은 테이블 위에 설치한 이동전화에 부착 했다. 마이크는 카메라보다 더 적어서 와이셔츠 단추의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모든 장치가 끝난 뒤, 겐지는 카메라와 비디오 스위치를 켜고 테이프가 돌아가는 지 확인했다. 방은 하룻밤에 칠만 이천 엔인 이젝티브 스위트 룸 으로 다다미 열 장 정도의 넓이에 거실과 작은 침실이 딸려 있다. 거실의 넓은 창 밖으로 아카사카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쿄타워에 불이 켜진 지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때 벨이 울렸다. 헤스였 다. 겐지의 지시대로 헤스는 노타이 차림으로 어두운 색의 양복을 입고 서 류가방을 들고 왔다. 양복 안은 광택 있는 핑크 셔츠이고, 서류가방은 쿠 로코의 모조품이었다. 구두는 뱀가죽 부츠, 양손 합쳐 여섯 개의 반지와 검정 가죽에 튀어나온 정을 박은 벨트를 하고 있었다. "내 패션 어때? 말한 분위기에서 조금 응용해 봤는데." 헤스는 앉아 있는 겐지 앞에서 오른쪽으로 빙그르 돌며 말했다. "페르펙트 (훌륭해)." 겐지가 대답했다. "겐지 스페인말도 하나?" 헤스가 냄새가 지독한 양쪽이 절단된 담배를 피우며 웃었다. "여자는 어때? 쓸만한애 있어?" "물론, 아주 많지." 헤스는, 이 호수에는 플랑크톤이 아주 많아요, 하는 투로 말하고는 냉장 고에서 맥주를 꺼내 유리잔에 따라 마셨다. 그는 결코 캔 맥주를 캔 째로 마시는 법이 없다. 빵도 구운 것 외에는 먹으려 하지 않고, 고기도 바짝 구운 것을 좋아한다. 생야채는 물론 안 먹는다. 언젠가 그 이유를 물었더 니, 라틴아메리카에서 자란 사람은 다 그래. 하고 가르쳐 주었다. -아주 큰 부자거나 코스타리카나 알제니친 사람은 다르지만 엄청나게 강 한 병원균이 있는데, 거기에 감염되면 절대 살아날 수가 없어. 일본이 깨 끗하다는 건 알지만 아무래도 습관이 굳어 있어서 잘 바뀌질 않아.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줬는데도 많다는 건가? 실제로 팔다리를 자르진 않겠지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잖아." 겐지는 헤스가 권하는 맥주를 거절하고, 애플주스를 마셨다. "겐지, 인간이 정말로 쪼들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헤스는 도쿄의 야경이 펼쳐져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아름답군." 창가에서 헤스는 잠시 밖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멋져?" 하고 겐지가 말했다. "거리가 가지고 있는 색이나 자동차 색, 그리고 공중전화 색 따위가 아 름다울 게 뭐야. 지금은 밤이니까 조명으로 번쩍거리지만, 기본적으로는 전부 회색인데다 칙칙하다구, 칙칙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아나?" "알고 말고. 난, 어떤 말도 다 알아들어. 오사카 사투리나 큐슈 사투리 도 조금은 떠들 수 있다니 깐. 겐지. 아름답다는 건, 색이 아름답다는 것 과는 다른 거야. 과자 같다는 뜻이야." "과자?" "그래. 잘 부서지고 개미나 벌레가 꼬이는 거. 과자로 집이나 마을을 만 들 순 없겠지만, 이 도시는 그래도 과자 같아.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좀 다른가? 일본말은 뭐든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 잘 안나오는군. 정말 로 쓰레기 같은 세상을 겪었던 사람들이 이런 도시를 만들 수 있을까? 뭐, 그런 건 상관없어. 비즈니스가 중요하니까 말이야. 볼리비아만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로 오고 있어. 모두들 가난하지, 하지만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오지 않아. 비행기표 살 돈도 없을 테니까. 콜롬비아 친구들만이 아니라 돈 버는 데는 코카인이 사실 최고지. 내가 코 카인을 싫어하는 건 그게 나쁜 마약이기 때문이라거나 나라를 망친다는 이 유에서가 아니야. 나쁜 건 코카인이 아니라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지. 이런 말 겐지한테 할 필요는 없지만 마약이란 건 우리가 원숭이였던 시절 부터 있었다구, 만약 코카인으로 나라가 망한다면 그건 마약이 아니라 나 라의 책임 아니겠어? 당연하잖아. 코카인 잎과 코카인은 조금 다르지만 인 디오들은 정말 약으로 썼으니까 말이야. 뭐, 그런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 어. 코카인은 나쁘지 않지만, 난, 그것을 만들어 파는 시스템이 마음에 들 지 않는다는 거야. 뭐랄까,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 인을 하는 그런 시스템이 좋을 리가 없지. 그래서 떠나온 것이기도 해." 헤스는 창 밖을 보다가 가끔 겐지를 돌아보았다. 긴 머리사이로 마른 얼 굴이 있고, 그 얼굴 한 중간에 <푸에르타>에서 술을 마시던 때와는 다른 눈이 있었다. 그 차이를 겐지는 형언할 수 없었다. 흔히 눈이 웃는다거나 웃지 않는다 고들 하지만, 눈 그 자체가 감정에 따라 바뀌는 것은 아니다. 헤스는 뭔가 를 완전하게 받아들인 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 눈을 형용할 말이 생 각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국에 남아 있는 녀석들은 정말 처참하게 살고 있어. 먹을 게 없다거나 입을 게 없는 그런 단계가 아냐. 지독하게 못산다는 건, 선택 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야. 쓰레기통을 뒤적여 썩은 빵을 발견하거나, 카바 레 보이가 되어 여동생이나 애인이 갱들의 정부로 놀고 있는 걸 보거나, 갱이 되거나, 그런 거지. 오늘은 사업상 왔지 이런 애기를 하러 온 건 아 니지만, 야경을 보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나와 버렸구만, 그래도 겐지라 면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어떤가?" "상상은 가능하지만, 이해는 좀 어렵군." 겐지의 대답에 헤스는 만족한 것 같았다. "돈으로만 보면야 코카인만한 게 없지. 페소화는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 야. 암시장에서 달러로 바꾸면 십 달러쯤 되나. 한 달에 고작 십 달러라 구. 놈들이 협조하라고 하는데 거절하면 식구 중에 누군가의 손가락을 자 르거나 팔을 부러뜨리는 거야. 협조를 하면 백 달러를 지, 그런 식이야. 운반책은 끝에 0이 몇 개 더 붙고, 이천 달러라든가 말이야. 다섯 번만 하 면 시골에 집도 살 수 있는 돈이야. 이 방은 하룻밤에 얼마지?" "칠만 이천." "육백 달러군, 하루에. 운반책은 사흘치 방값을 위해 자신의 몸을 쓰는 거야. 개가 무서우니까 말이야. 옛날엔 자기 몸을 가르고 그 속에 넣은 다 음 다시 원래대로 꿰매서 가건 콘돔에 채워 삼키는 게 일반적이었어. 여자 는 그런 방법을 잘 못쓰니까 말이야. 알잖아? 여자한테는 그다지 적당한 방법이 아니잖아. 그래서 아기를 대동하게 된 거야. 아기 몸 속에다 감추 는 거지. 그래도 자기 자식을 이용하는 건 꺼림칙하니까 라파스의 슬럼가 에서 갓난아기를 사는데, 50달러면 살 수 있대나봐. 그래서 아기를 훔치는 놈들이 많은 거지. 아기를 싫어하는 여자가 어딨겠어. 하지만 가난하고 인 간적인 기회가 박탈된 채 여러 세대를 살다보면 제정신이 아닌 거야. 미치 고 마는 거지. 일본에 있는 라틴계 중남미 여자들은 거의 미쳐있는거라구. 이번에 겐지가 하는 일에 몇 사람이라도 소개할 수 있어. 왼쪽 팔만이라면 정말로 잃어도 좋다는 여자도 있었고, 에스타도스 우니도스, 이거 일본말 로 뭐라고 하지?" "미합중국" 하고 겐지가 말했다. 헤스는 절대로 미국을 아메리카라고 하 지 않는다. "아메리카라고 하면 전체를 말하는 거야, 나도 남아메리카 사람이고, 아 메리카가 미국만 뜻하는 게 아니잖아. 미합중국, 발음하기 어렵군. 항상 그렇지만 발음하기 어려워. 미합중국에서 포르노가 유행할 때, 라틴아메리 카 남자와 여자들이 돈에 눈이 멀어 별짓 다 했다고 하던데, 이제 일본도 그렇게 된 건가?" "미합중국 사정은 잘 몰라. 간 적도 없고" 하고 겐지가 말했다. "그래도 평범한 섹스는 인기가 없는 것 같더군. 비디오 같은 걸 보면." 헤스는 유리잔에 남아있던 맥주를 비우고 창가를 떠나 소파에 앉았다. "체력이 떨어진 탓도 있을 거야." 겐지는 두 병째 맥주를 따라주었다. 헤스도 그렇지만, <푸에르타>에 모이는 라틴 아메리카인들은 잘 마시고 떠들썩하게 춤추며 논다. 전날 헤스와 같이 있던, 블라우스 앞단추가 뜯어 질 것 같은 여자는 아침 열 시부터 밤 열두시 까지 커피숍과 스넥 코너에 서 일한다고 했다. "그래도 일본 사람들은 아주 오래 살잖아." 헤스의 말에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겐지가 시계를 보았다. 사이토와의 약속 시간까지는 앞으로 15분.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지 않고 로비에서 방 으로 전화를 하라고 해 두었다. 이렇게 맥주나 담배로 어질러 놓아도 될까? 하고 헤스가 묻기에, 가능한 불량스럽게 보이는 편이 좋아, 하고 겐지가 말했다. "그럼 여자를 데려올 걸 잘못했군" 하고 헤스가 웃었다. 약속시간에 정확하게 전화가 울렸고, "요리코도 같이 왔는데요." 라고 떨리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사이토가 말했다. 겐지는 잠시 생각 하는 척하다가 애기가 금방 끝날 테니 로비에서 기다리게 하는 게 어떠냐 고 대답했다. "그녀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나도 잘 알지만, 콜롬비아인은 안 만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겐지가 카메라 스위치를 켜고 나서 2분 후에 벨이 울렷다. 아무 것도 그 려져 있지 않은 백지장 같은 얼굴을 한 사이토가 나타나자 헤스는 맥주 냄 새를 풍기며 화려한 악수를 청했다. 양손으로 사이토의 오른손을 감싸듯 꽉 쥐고 사이토의 백지장 같은 얼굴이 흔들거릴 정도로 위 아래로 흔들었 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고 헤스가 몇 번이고 말했다. 사이토는 측은할 지경으로 긴장하여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겐지를 쳐다 보았다. 헤스는 철저히 건달처럼 행동했고 겐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 다. 본론에 들어가자 헤스는 웃음을 거두고 "여자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데 요" 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교활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여자 고르는 거야 문제없지만 가장 문제는 뒤처리하고, 일본인의 조직 이란 건데..." "조직이란 게 뭐죠?" 겐지가 헤스와의 친밀함을 감추고 물었다. 물론 사이토에 대해서도 겐 지는 긴장하고 있는 척했다. 입술을 몇 번이나 적시고 립스틱도 두 번이나 발라두었다. 헤스쪽은 가능한 보지 않고 사이토와 얼굴을 마주하려고 했 다. "남미에서 돈벌러 와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조직이 있어요. 그래서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하고 말하고 겐지는 다시 사이토쪽을 보았다. "팔다리를 자른다고 했던가요?" 헤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 사이토는 눈을 번쩍이며 "그렇습니다" 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정말로 가능한 겁니까?" 하고 묘한 느낌으로 몸을 앞으로 내 밀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수영을 좋아하는 심장병 환자가 차가운 물에 들 어갈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 부분부터 자를 겁니까?" 헤스는 그렇게 묻고, 여기? 아니면 여기부터? 하고 자기 다리의 허벅지 와 무릎, 발목을 각각 가리켰다. "잠깐, 잠깐만요" 하고 사이토가 오른손을 내밀려 헤스를 저지했다. 이 제 그는 겐지 쪽은 보지 않았다. 사이토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당신은, 실제로 이런 일은 한 적이 없습니까?" 헤스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 얼굴은 자신에 차 있었다. "잘 들어요. 난, 콜롬비아 사림이요. 긍지도 높고 신을 믿으며 절대 마 약은 하지 않아요. 바로 얼마 전에 터키 놈들이, 그것도 산악 민족 놈들이 필리핀 여자를 유괴해서, 똑같은 짓을 했어요. 그걸 이란 놈한테 들었는데 산악 놈들 정말 못하는 짓이 없다고 하더군요. 물론 여자는 죽었고." 헤스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목안에 쑤셔 넣는 시늉을 했다. 중남미인의 그런 행동에는 리얼리티가 있어 사이토는 진지한 표정으로 귀담아 듣고 있 었다. "어디 내다 버렸는데 아마 바다였을 겁니다. 우리들은 그런 일은 못해 요. 그래서 자르는 건 발목이나 손목으로 했으면 해요. 가능하면 한쪽만 해주면 아주 좋겠는데. 우리는 우리 나라 여자를 쓸 거요. 얼마를 줄 건지 미리 애기도 해 주고, 정확하게 지불할 거요. 자를 땐 그 뭐야 모르핀을 쓸 건가?" 마취를 말하는 거요? 하고 사이토가 묻자, 맞아요, 하고 헤스가 대답했 다. "그건..." 사이토는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반 죽은 상태로는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팔다리만 국소마취 하면 어떨 까요? 그렇다면 제가 마취약을..." 사이토가 자신의 직업을 밝히는 듯한 말을 꺼내서, 겐지가 멈추게 했다. 안돼, 하는 식으로 겐지가 고개를 흔들고, 헤스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 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이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뢰에 가득찬 눈으로 겐 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여자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겁니다." 겐지가 대신 말하자, 헤스는 문제없어요. 문제없어요, 하며 양손을 들었 다. "손과 발만이요. 여자도 잠드는 건 싫어하니까. 일이 끝나면 집도사고, TV나 약, 먹을 것을 잔뜩 살 수 있는 돈을 쥐어주고 고향으로 안전하게 보내주고 싶소.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려면 왕복 여행티켓을 사와야겠는 데, 그 몫으로 이만 달러는 있어야겠소. 그리고 자를 사람에게 만 달러, 전문가가 자르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모르거든요." "누가 자를 겁니까?" 하고 사이토가 물었다. "친구 녀석 중에 볼리비아 놈이 있는데, 정글에서 수십 번이나 잘라본 적이 있는 놈이오. 자격중이야 없지만, 상처가 곪아 자를 수밖에 없는 팔 다리를 자르는 일은 가히 프로하고 할 수 있지. 그 놈에게 부탁하려고 하 는데..." 사이토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사이토 는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소독이나 절단 후 적당한 조치에 대해서도 그 놈은 줄줄 꿰고 있소. 일 본 건 비싸니까 약은 베트남 전문상 걸 쓸 거요. 약은 아주 중요합니다. 짐 꾸릴 때나 출하 때 조금 얻으면 돼요. 짐 꾸리는 일이야 거의 백 퍼센 트 우리 외국인들 일이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오해하지 마시오. 괴상한 약 을 훔쳐서 돈을 버는 건 아니고, 그저 남는 걸 병에 걸린 녀석들을 위해 쓰는 것뿐이니까. 그런데 부위 말인데, 손목이나 발목부터 자르면 되겠 소?" "물론입니다." 사이토가 말했다. 중요한 상담에 임한 은행원 같은 말투였다. "그런데 제 기분을 말한다면... 팔다리를 자르는 것이 주된 테마가 아닙 니다. 그러니까 한 쪽만 잘라도 상관없어요. 다리는 한쪽만 잘라도 되고, 손은 손가락만 해도 됩니다." 사이토는 은행원이 연 이자나 자금 운용에 대해 설명하듯 거침없고 담담 하게 말했다. "그럼, 주된 테마는 뭔가요?" 오른손으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던 헤스가 사이토와 겐지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해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고 겐지가 대답했다. "테마는 공포입니다. 전화로도 잠깐 말씀드린 것 같은데, 우리는 문학이 랄까 소설 세계의 사람들로, 인간의 공포라는 테마를 취할겁니다. 여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수술대 같은 것에, 아니, 철제로 된 침대라도 상관없지만 거기에 묶어놓고, 흰 가운을 입은 몇 명의 남자가 둘러서 있게 되면, 아마 그것만으로도 여자는 공포에 질리겠지요? 그 기막힌 공포의 표정을 보고 싶은 겁니다." 겐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몇 번이나 사이토를 쳐다보았다. 사이토는 겐지의 입에서 나오는 '여자', '움직일 수 없다' . '묶여있다' 는 말에 하나하나 반응했다. 이미지가 뇌에서 하반신으로 타고 내려가 잔 뜩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남자는 사 타구니가 아니라 눈빛과 안절부절못하는 손놀림을 통해 표가 나게 마련이 다. "잘은 모르지만 알 것 같군요." 헤스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단지, 당신네들이 좀더 뭐랄까, 레벨이 높은 거 같군요. 그럼 여자는 어떤 타입이 좋겠소?" "나이든 여자는 안 돼요. 30대 초반 아니, 20대라면 좋겠는데..." 사이토는 눈물을 조금 흘린 탓도 있고 해서,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안구 가 풀려서 그대로 흘러내릴 것 같다. "이 나라에서 일하러 온 여자는." 헤스가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젊은 여자들이지." 헤스는, 장소 제공과 약값이 포함된 삼만 달러를 확인하고 방을 나갔다. 사이토의 입술은 줄곧 가늘게 떨고 있었다. "요리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할건가요?" 겐지의 말에, 사이토는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깜짝 놀랐다. "오늘은 중요한 일이 생겨서 만날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돌아가 달라고 겐지씨가 전해 줄 수 없을까요?" 잔뜩 기어 들어가는 괴로운 음성이었다. 겐지는 서류가방과 화재경보기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사이토를 혼자 남겨두고 방을 나와 로비로 향했다. "처음으로 비밀을 갖게 된 거예요. 그것도 한꺼번에 두 갰기이나. 아마 가슴이 미어터질걸." 요리코는 라운지에서 셰리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 플레이하기로 했었어?" "그렇게 말했어요. 나한테 고백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자극이 너무 심해 마음이 바뀐 거겠지." "플레이할 때 고백이 항상 포함 되나?" "그래요. 처음에는 무릎을 끓고 별 시시콜콜한 고백부터 시작하는 거예 요. 대부분 엄마에 관한 거예요. 엄마에 대한 사랑을 울부짖으면서 절규하 는 거예요. 어머, 내 일에 대해 묻지 말아요. 부끄럽잖아요." "사랑을 울부짖는다? 잘 모르겠군." "보통 마조히스트들하고는 달라요. 엄마에 대한 악감정을 분출시키지 못 해서 사이토는 더욱 비뚤어지는 거 같아. 누구도 상상 못할 정도로 난 엄 마를 사랑해, 하면서 울부짖으면 그걸 그 엄마가 보고 즐기는 거예요. 나 까지 정신 이상이 될 것 같다니까. 둘이서 울고불고..." 요리코는 겐지에게 가볍게 키스를 하고 돌아갔다. 돈으로 산 여자 앞에서 알몸이 되어 무릎을 끓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외 치는 이 사이코와 자신이 얼마나 다른 걸까,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겐지 는 '엄마...'하고 외치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확연하게 정리되지는 않지만 사이토, 이 마조히스트에게는 뭔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마조히스트는 결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상황에 대해, 혹은 타인에 대 해 어떤 식으로든 적극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없어진 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걸로는 부족해,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마조히스트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 줄 더욱 심플한 표현이 있을 것이다. 방으로 돌아와 벨을 누르자 사이토가 상기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요리코가 화내지 않던가요?" 사이토가 불안한 듯 물었다. "아뇨. 조금 유감스러워하는 눈치더군요." 겐지는 그렇게 대답하고, 미니바에서 코냑을 꺼내 유리잔에 따라 마셨 다. "좀 마시겠어요?" 겐지가 유리잔을 내밀자 사이토는 차를 핑계 대며 손을 내젓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는 잔을 받아들였다. 술을 조금 들이켠 손간 그는 욱, 하고 신 음을 내지르며 목과 가슴을 쥐고 기침을 했다. 겐지는 등을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술은 세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사이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범자에게 의지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 다. 겐지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거 큰일이군." 겐지는 소파에 앉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사이토도 그렇게 말하고 두 사람은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어색하게 웃었 다. "실제로 그 콜롬비아 사람을 만나기까지는 나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 요." 겐지는 어색한 웃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구체저긴 애기를 들으니까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어요." "네? 정말입니까? 당신도 그래요?" 사이토가 기쁘다는 듯 소리쳤다. "마니아라면 그런 애기를 듣고 누구나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나는 마니아하고는 좀 달라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뭐랄 까,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념했던 게 실현될 수도 있는 거구나, 하 는 거죠. 그 때문에 너무 흥분이 된 거고." "젊은 여자가 역시 좋겠지?" "그건 나도 생각했는데, 스토리야 무한한 거니까, 좀 나이가 들어도 되 지 않을까. 삼만 달러라니 믿을 수가 없어. 테스타롯사를 살짝 긁기만 해 도 얼만지 알아요? 구십 만 달러라구. 그날 여자한테 우선 옷을 사 줘야겠 어. 드레스나 정장 같은 거 말고, 외국 여자들은 이십 대 후반이 되면 살 이 꽤 붙으니까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니트 원피스하고 검정 스타킹이 좋을 거 같아요. 고급 가죽 힐에, 레이스 장갑을 끼게 하고 미장원에도 보내서 아주 정성스럽게 화장을 시키는 거야. 단, 매니큐어는 빼고, 손이나 발도 열흘 정도 맛사지를 보내는 게 좋겠군. 전신을 곱게 단장하는 거요. 그날 이 되면 그냥 매춘이라고 말하고 눈을 감기고 묶는 거지. 처음에는 화를 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처음에는 화를 많이 낼 거야. 고무 테이프로 입을 막은 뒤에 난 눈을 들여다볼 거야. 결박된 채 분노가 공포 로 바뀌고 이윽고 점차 포기해 가는 과정을 실제로 볼 수 있을 거야. 이 봐, 당신!" 겐지도 흥분하고 있는 척했다. 끊임없이 입술을 핥았다. 아무래도 흥분 한 사람처럼 연기하는 게 힘들어서 겐지는 코냑을 한 잔 더 마시고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었다. 겐지가 무반응해지자 사이토는 일어서서, "걱정할 것 없어요" 하고 말했 다. "그 남미인은 믿어도 될 거 같아." 사이토는 겐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좀 마시다가 여기 계산을 하고 가겠습니다" 하고 겐지가 말했다. 정말, 잘하자, 이것 봐요, 잘 해 줘요,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잖아, 하고 다시 사이토가 겐지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잘 해 보자구." 사이토는 다짐하듯 말하고 나서 방을 나갔다. 겐지는 비디오를 TV에 연결하여 화상을 체크했다. 입자가 조금 흔들렸 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선명하고 소리는 당황할 정도로 깨끗했다. 겐지가 요리코를 만나러 로비에 간 사이, 예상대로 사이토는 자위행위를 하고 있 었다. 겐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자넨 여자한테 아주 인기가 많은 것 같더군." 비디오를 전달하기 위해 갔더니 이시오카는 지친 얼굴로 방에 혼자 앉아 버번을 마시고 있었다. "잘 찍혔습니다. 보시겠습니까?" 이시오카는 고개를 저었다. "음 그렇지? 그 여고생만 해도 돈 때문이 아니라 자네 때문에 일을 하는 거니까 말이야." 이시오카는 약간 취해 있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바지벨트도 없었으며 구두며 양말도 신고 있지 않았다. 눈가에 주름이 잡혀 있고 옷을 입을 때는 몰랐는데 아랫배에 살이 뒤룩뒤룩 쪄 있었다. 이봐, 이거 왜 이래. 보기 흉하게,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인기가 있다는 말의 어원이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하고 겐지가 말 했다. "인기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뭔가? 나-도 조금은 아네만, 그 뭐야 신비롭다는 거 아냐?" "그렇게 대단하게 추어주실 건 없습니다." 겐지는 이시오카에게 양해를 구하고 블러드매리를 직접 만들었다. 똑같 은 원액 우오츠카에 맥시코 산 토마토 주스로 만들었는데도 소피가 만든 것과 전혀 맛이 달랐다. "여자들은 결국 저에 대해 잘 모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만 하고 있 으니까요. 회사원이라면 바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회사에 몸을 판 놈이 니까요. 내가 무엇에 몸을 팔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걸 알려고 하는 겁니다." "왜 알려고 하지?" "남자에 대해 잘 모르면 강한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겁니다. 여자의 유전 자 신호 중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세팅되어 있는 게 아이가 죽는 거잖아요." 겐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강하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강한 남자 따윈 어디에도 없어요. 약하다는 걸 감추고 있는 거죠. 능숙하게 말입니다." 겐지는 미소를 잊지 않았다. 사이토의 자위행위 장면을 되돌리던 것이 생각나자 얼마든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걸 소피에게 보여주면 그녀 도 웃을까. "소피가 만드는 걸보고 만들었는데, 전혀 맛이 다르군요. 우오츠카르 잘 못 넣었나?" "설명서대로 칵테일을 만들어도 전혀 맛이 없는 경우가 있어. 중요한 게 뭔지 알겠나?" "설마 집중력이라는 건 아니겠죠?" 겐지의 말에. 이시오카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렇게 웃는 얼굴을 보여줘. 사형직전이라도 나는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내가 열등감을 느낄 수 없잖아. "경험과 일종의 체념이야. 그게 결정적인 맛을 내는 거지. 소피가 나가 버려서 내가 힘이 좀 없어." "다투기라도 한 겁니까?" "우리는 싸움 따윈 하지 않아. 그 여자를 서해안에서 처음 만났을 때, 불신감의 결정이었지. 불신감이 인간으로 변한다면 이렇게 되겠구나 한고 느꼈을 정도니까. 그래서 나와 맞은 거지. 그런데 함께 있게 되다 보니 친 근감이 생기더군. 그 여자는 그런 친근감을 참을 수가 없는 거야. 기본적 으로 그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어.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함께 테이프를 보면 좋을 겁니다. 사이토는 방에 혼자 남겨지자 황급히 자위행위를 했습니다. 7,8초 동안 기세 좋게 사정을 했는데, 그걸 뒤감기 로 보는 겁니다. 정액이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죠. 마치 잉어가 튀어 오를 때처럼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어쨌든 내일로 하지. 지금은 사이토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장미꽃을 한아름 사서 그 꽃과 꽃 사이로 상대를 쳐다보며 부끄러운 듯 사랑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겐지는 블러드매리를 마신 뒤 재킷을 걸치고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대답 했다. 이시오카와 사이토에게 깊이 관여하는 동안에도, 여자들은 고객과 만나 고 수익금의 25퍼센트을 겐지의 은행계좌를 입금하고 있었다. 요리코와의 통화중에 아야코가 찾아와 겐지의 옷을 벗긴 적도 있었고 나츠미가 비프스 튜와 파에리야를 만들어 오기도 했으며, 사흘에 한 번은 꼭 와준다고 했잖 아, 하고 미와코가 수화기에 대고 울기도 했다. 헤스에게서는 애가 딸린 스물 아홉 살 짜리 여자가 한쪽 팔만이라면 이 만 달러에 잘라도 된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자동응답기에는 열 명 가까운 새로운 고객으로부터 메시지가 남아 있었 다. 초보인데 십대 소녀를 묶어두고 할 수 있다면 한 시간에 십만 엔이라 도 내겠다는 사람, 자신은 의사인데 규정 요금 외에 서비스로 치과 치료를 무료로 해 주겠다는 사람, TV 여배우 같은 상대라면 월 오십만 엔을 낼 테니 전속 애인으로 할 수 없냐는 사람... 여자한테서도 두 건이 들어와 있었는데, 한 사람은 고객한테서 전화번호를 들었다는 긴자의 호스테스로 꼭 일하게 해 달라며 자기 선전을 장황하게 녹음해 두었고, 또 한 사람은 보석상이라는 레즈비언으로. 남편과 함께 셋이서 하고 싶으니 우아한 아가 씨를 부탁한다는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남겨두고 있었다. 사이토한테서 한 번, 유리한데서도 전화가 왔었다. 만나고 싶어 죽겠다 고 유리는 말했다. 헤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유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사이토는 자신에 차 있을 게 틀림없어. 그런 그에게 감동하는 척 해 줘. 사이토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계획하고 있어. 그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반사회적인 일이야. 그런 어두운 면을 가진 자신 에게 순진하고 예민한 여고생이 강하게 끌리고 있는 줄 알고 있으니까 그 렇게 생각하게 해 주면 돼. 중요한 건, 좀더 같이 있고 싶다고 사이토가 생각할 때 집에 가는 거야. 부끄러운 듯 뺨에 살짝 키스를 해 주고 얼른 사라지면 완벽하겠지만 말이야." "아저씨는 내가 그 변태랑 키스해도 괜찮은 거죠?" "본심이 아니잖아." "본심이 아니래두 피부와 피부가 부딪치는 거잖아요." "그럼 배우들 애인은 어떻게 해야 되겠니? 나랑 같이 있을 때, 나를 좋 아한다고 많이 표현해 주면 좋겠어. 나도 같이 있을 때를 소중하게 여길 테니까. 내가 제일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라니까 말이야." 겐지의 말에 유리는 전화기에 대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눈 을 감고 돌을 맞아도, 쓰러질 정도로 취하더라도, 아마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더라도 겐지가 말할 수 있는 대사였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힘을 가지는 것은 '언어' 그 자체여서, 그 '언어'를 발 하는 인간의 기분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유리는 울면서 전화를 끊었다. 제 8장 비트 "낮에 병원에 전활 했어요, 볼일이 있어서 근처에 왔다가 전화한거라고 뻔한 거짓말을 했죠. 그 사람 병원 근처에 있는 스파게티 집에서 카르보나 리를 먹었어요. 가운을 입고 나올 줄 알았는데 변함없이 그 이태리옷을 입 고 나왔어요." 유리는 만나자마자 방으로 가자고 했고, 방에 들어가서는 채 문이 닫히 기도 전에 겐지에게 힘껏 안겼다. "나, 야릇한 냄새 나는 침대에서 룸서비스로 새우칵테일이나 생햄메론이 나 생선샐러드 같은 영양과는 별 상관없는 걸 불량스러운 남자와 함께 먹 는 걸 상상해 왔어요. 겐지 아저씨는 내 꿈을 실현시켜 줬어요." -한창 섹스하고 있을 때, 보이를 부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여자가 몇 명 있었다. 이시오카는 아마 그런 상황을 영상으 로 남기고 싶어할 것이다. 이미지가 아닌 활자 정보에 대해 그는 혐오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유리의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침대에 야릇한 냄새를 남기고 있는 동안에 도 겐지는 몇 번이나 이시오카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과 이시오카는 무엇 이 다른가 하고. 이시오카는 지쳐 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지독하게 외로워보인다. 사이토는 전혀 다르다. 그저 측은할 뿐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는 처음이 었다. 유리는 겐지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침대에 야릇한 냄 새가 충분히 배어든 후에 새우칵테일을 입에 넣으며 "전혀 맛있지 않아...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사이토" 하고 겐지가 대답했다. "나를 앞에 두고 그런 인간 따위는 생각하지 말아요." 유리는 아직 땀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유리는 알몸으로 소파에 앉아 있고, 겐지는 아직 침대 안에 있다. 유리 는 룸서비스를 가져온 종업원 앞에서는 목욕 가운을 걸쳤지만 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벗어던졌다. "몸에 걸치는 것 중에 목욕가운이 제일 싫어. 당신, 생각하고 있는 모습 좋아요. 그래도 사이토는 생각하지 말아요. 모든 문제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그런 타입은 인간 말종 같은 놈이야." "사이토 일을 마음에 둔다거나 그런 게 아냐." 겐지는 자신과 여자의 분비액에 젖은 음모가 시트 안에서 서서히 말라갈 때의 뭔가 절미한 것으로부터 떨어지는 것 같은 모호하고 야릇한 감촉을 느끼고 있는 참이었다. 일부는 축축하고, 일부는 마르기 시작하여 마치 무 력한 태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보다, 하고 겐지가 말했다. "어째서 목욕가운이 싫은 거지?" "나는 편하게 있는 걸 좋아해요. 옛날에 그러니까 2, 3년 전에 하루 동 안에 일어나는 많은 일 중에서 어떤 걸 제일 좋아하는 걸까 곰곰히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이를테면 잠에서 막 깨어나기 전에 꾸는 꿈부터 해서 잠 들 때까지 하는, 산책이라든가, 낮잠, 화분에 물주기라든지, 양치질이라든 가 하는 거 말예요. 결론은 뭐냐면, 목욕도 좋지만 목욕 그 자체보단 목욕 후에 차가운 음료수 같은 걸 마시면서 편하게 쉬는 걸 좋아한다는 거예 요." "누구든지 좋아해." 겐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유리는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스키를 타러 가서도 그 뒤에 사우나하는 게 좋고, 겐지 아저씨와 섹스 하는 건 생각보다 백 배나 기분이 좋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탕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것도 내가 지금 제일 마음에 들어하는 리디아민트라는 허브향 바 스젤을 넣고 푹 몸을 담그는 거야.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쉬는 거야. 그렇 게 하면, 몸도 마음도 천국에 있는 것처럼 들떠요. 그런 게 있어요. 내가 들은 것 중에도 일과가 끝나고 침대에 들어갈 때까지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산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가지러 가는 그 짧은 시간 이 좋다는 사람도 있었고,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왜 목욕 가운이 싫은 거야?" "정말 아주 어렸을 적에 받은 것을 포함해서 열 벌 넘게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목욕가운이 싫다는 건 내 향상심의 표시예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 목욕만 좋아하게 돼도 안 될 것 같아, 철저하게 목욕가운을 싫어하기로 한 거예요. 정말 노력했더니, 성공했어요." 이야기를 하면서 유리는 겐지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내가 이렇게 어리광을 피울 줄은 몰랐어요." 유리는 사이토에게 키스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사이토는 지난번 만났을 때와 전혀 딴 사람 같았다, 고 유리가 말했다. "만난 순간, 어, 카나에야, 하고 부르는 거예요. 엄청나게 말도 많이 하 고, 엄마랑 교토에 여행갔을 때 얘기를 갑자기 꺼내서는, 대여섯 살 때 일 인 것 같은데, 너무너무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이혼할 줄 알았 더니 아버지는 중학교 때인가 죽었대요. 그 아버지는 아주 힘들게 의사 자 격증을 딴 사람이라는 정도 말고는 사이토 안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 람이었어요. 주문한 카푸치노도 마시지 않고 교토 여행 얘기를 했어요. 침이 테이블 까지 튀어 너무 싫었지만, 신경쓰지 않는 척하느라 애먹었어요. 너무 침을 튀겨서 카푸치노 양이 조금 불지 않았을까 할 정도였다니까요. 교토의 절 이랑, 유부, 무슨 구이 요리 얘기를 하는 동안, 눈물을 글썽이더라구요. 그 뒤에는 아버지 얘기를 조금 하고, 지금 내가 얼마나 진지하지 알겠니? 하고 수도 없이 물어보곤 했어요. 사이토의 그런 얘기에 감동하라고 겐지 아저씨가 말해서 어떻게 하면 감동한 것처럼 보일까, 생각을 집중하며 카 나에가 되려고 했더니, 나도 눈물이 글썽거리는 거 있죠. 한 사람은 눈물 을 글썽이며 낭낭한 목소리로 계속 떠들고, 그걸 턱을 괴고 필사적으로 듣 는 나도 눈물을 글썽였으니까... 옆에 있던 사람들은 종교관계 같은 거라 고 생각했을 거예요. 아마. 사이토는 그저 나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는데, 초점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근시라는 게 아니고요. 하여튼 두 시간을 떠들더니 나중에는 목 이 말라 숨을 헉헉 몰아쉬기까지 했어요. 사이토가 좀더 같이 있고 싶어할 때, 먼저 가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사이토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얘기를 낭낭한 오페라가수 같은 목소리로 열심히 떠들어대고 나서 마지막에 침이 잔뜩 튀어 있는 내 손을 잡았어요.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요. 팔 안쪽이나 등뿐만이 아니라 내장까지 도 두드러기가 돋는 게 느껴질 정도였어다니까요. 그리고는 사이토가 말했어요. 이런 말을 여자한테 한 적은 없어. 믿어주 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정말이야. 난 너를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아, 하고 요. 겐지 아저씨가 사이토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내장에 닭살이 돋았지만, 사이토가 했던 대사를 기억한 거예요. 결국 그 사람은 카푸치노를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카푸치노 한 잔만큼의 침을 튀 기다가, 마지막에 내 얼굴을 십 초 정도 바라보고 나서 병원으로 들어갔어 요... ...얘기 좀 해 봐요, 난 겐지 아저씨가 얘기해 주는 것 좋아하는 데." 유리가 겐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커튼을 닫은 창 저쪽에서 희미하 게 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겐지는 졸라대는 여자에게 말해 주는 레퍼토리 중의 하나인, 요코스가 방공호의 린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린치 같은 것 당한 적 있어?" 겐지가 우선 그렇게 묻자,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린치라는 말에는 낭만 과 향수가 어려 있다. "이제는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이 먼저인지, 아버지가 죽은 것이 먼저인 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난 요코스 가에 있는 이모집에 맡겨졌지." 겐지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유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주위에서 전학온 학생을 많이 괴롭힌다고 하는데 그건 전학한 학교에 따라서 다르고 그 전학생에 따라서도 달라. 내가 전학간 곳은 요코스 가 기지에서 꽤 떨어진 시골이었는데, 그런 곳은 괴롭힐 가능성이 많아. 마을 전체가 위축되어 있어서 누군가를 못살게 굴어도 아무렇지도 않거든. 게다 가 난 부모가 없는 애였잖아. 아이들이란 사실 간사해서 부잣집 애나, 시 장집 애는 절대로 괴롭히질 않아. 난 부모가 없었으니까 무척 당했지, 요 코스 가에는 방공호가 많았는데 거기서 린치를 많이 당했어. 어른들한테 보이지 않으니까. 열 살 정도의 아이라도 매일 린치가 계속되면, 여러 가 지를 배우게 되지."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린치라는 건 어떻게 당하는 거예요?" 하고 유리 가 물었다. "지금 조무래기들은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 괴롭히다가 죽이기도 하지 만, 내가 어렸을 때는 피에도 익숙했고 그렇게 음습하진 않았어. 주로 맞 는 건데 압정을 발다닥에 찌르기도 했어, 그건 아주 잘 들었어. 엄청나게 아프고 걸을 때마다 고통이 되살아나거든. 나중에 어른들한테 들켜도 변명 이 먹히는 방법이야. 압정이야 누구든 밟을 수 있는 거니까. 사실 린치를 당해 괴로운 건, 고통보다는 집단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이유 때문이지. 나는 학습을 통해 공포라는 게 상상으로 일어나는 거라는 걸 알았어. 린 치를 생각하면 그밖의 시간도 하루 종일 겁먹으며 지내지 않으면 안 돼. 맞는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냐. 큰 상처를 내면 린치한 쪽도 난처해지니 까. 발바닥의 압정은 그것으로도 무서웠지만 주사와 다를 게 없다고 필사 적으로 자기자신에게 들려주었어. 린치 없이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는 날 도 있었지. 그걸로 이제 끝났구나 하고 기대하면 다음 날 또다시 녀석들이 에워싸는 거야. 그러면 오늘도 또 당하겠지만 그렇다고 죽는 일은 없을 테 니 그렇게 겁먹을 것 없다,고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거야." "도망을 치거나, 선생님한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압정 수가 다음날 더 늘어나지. 압정만은 정말 아팠으니까." "그런 건 어떻게 하면 그만두게 할 수 있어요?" "보스 밑으로 들어가면 그걸로 끝나. 요코스 가는 군인들이 많아서 전학 생도 많았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했었지, 나도 무 릎 정도는 꿇었어, 그래도 난 안 됐어, 언제까지 계속할 거냐고 물어본 적 이 있었지. 그랬더니 네가 죽은 사람처럼 될 때까지, 하고 말하더군," "무슨 뜻이에요?" "무슨 뜻이냐고 나도 물었어. 그랬더니 식물인간처럼 될 때까지 하겠다 는 뜻이야, 하고 말했어. 요컨대, 있든 없든 상관없는 멍청한 놈이 되면 된다는 거야. 린치에 가담하는 놈들은 반 전체의 4분의 1 정도인데 보스가 있고 측근이 있고 행동대원이 있고 정보원 같은 것도 있어. 그런 구성은 대개 이 세상 어느 곳이나 비슷하지. 어디서 듣고 다니는지 몰라도, 정보 원은 모르는 게 없었어. 나한테 부모가 없는 것, 그리고 동생이 아픈 것 도." "동생은 그때부터 아팠어요?" "류머티성 심장병으로 학교에 갈 수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어. 여동 생이 당하서나 내가 당하는 꼴을 여동생이 보기라도 하면, 정말 식물인간 처럼 되어 버릴지도 몰랐으니까." "결국 어떻게 됐어요?" "응, 아직까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공포란 상상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어느날 아침 이모부의 배트를 갖고 학교에 가서 보스 녀석의 무릎 을 갈겨줬지. 그 놈은 방위대학에 다니는 잘난 집 자식이었는데, 그 아버 지는 자기 자식이 괴롭히는 아이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문 제로 번지진 않았어. 그 놈은 반 년 정도 걸을 수가 없었지. 나는 압정을 열 개 정도는 꼽힐 각오를 하고 있었고 그런 뒤에 또 무릎을 작살낼 생각 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린치가 멈추었어. 정말 조금씩이었지만 친구도 생기 기 시작했고." "그 무릎 다친 녀석은 그 후에 어떤 태도였어요?" "그 자식 아버지가, 나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한 모양인데, 별로 사 이좋게 되질 않았어," 겐지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 먼저 해도 될까?" 하고 유리에게 물었다. 유리는 다시 한 번 품에 안기면서, 좋아요, 하고 속삭였다. 유리같은 타 입은 린치 이야기를 해 주면 얌전해진다. 진지한 고백은 묘하게 다른 사람을 안심시킨다. 그것을 깨달은 게 언제 였을까? 아마 소년원에서 이 녀석 저 녀석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부터였는지 모른다. 물론, 이야기의 내용으로 안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도 진실한 이야기를 해 주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안심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유리뿐만 아니라 그 어 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는 요령만 있다면, 말할 수 없는 과거란 없다. 요령이라는 건, 물론 절대로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다 른사람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다. 나쁜 일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고 확 신하면 되는 것이다. 유리는 내일모레 다시 한 번 사이토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디오카메라가 있는 장소에서. 겐지는 욱천공항 행 비행기의 시트에 깊숙이 몸을 밀어넣었다. 스튜어디 스가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겐지의 표정까지 읽 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어째서 갑작스럽게 여동생을 면회하러 가자고 생각했는지 그는 알 수 없 었다. 여동생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여동생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자들에게는 홋카이 도에 있는 병에 걸린 동생을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자주 변명하지만, 사 실 여동생에게 송금하는 돈은 전체 수입의 3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수입?' 겐지는 머릿속으로 되풀이했다. 사이토와 엄마, 그리고 이시오카, 세 사 람은 겐지가 당초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한 타격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겐 지의 계좌에 천만 엔 가까운 돈이 입금되었다. 계산기를 두드리고, 그 돈 을 무엇에 쓸까 궁리하고 있을 때,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징후'가 엄습해 온 듯하다. 지금까지도 그런 일은 헤아릴 수도 없이 있어왔지만 전혀 개의 치 않았다. 가령, 요리코나 아야코가 고객과 안고 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그런 '징후'는 얼마든지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너무 빈번하게, 그리고 조금씩 더 강렬해졌기 때문에 겐지는 근본적인 원 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에는 그 '징후'가 불안이나 긴장, 또는 특정한 꿈 으로 나타났다. 항상 반드시 똑같은 꿈을 꾸었다. 철로 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따위에 특별히 의미를 두지는 않았었 다. 이시오카가 항상 소피에게 대답했듯이,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는 줄 곧 깨어 있기로 했다. 깨어 있는 동안 할 일을 여러 가지 시험해 본 결과, 평범하긴 하지만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이십대 후반이 되고부터 그 징후는 불안이나 긴장, 불면뿐만 아니라 서 서히 육체적 증상으로 나타났다. 사이토 건이 모두 끝난 직후니까, 벌써 한 달도 넘은 일이다. 예금통장 을 들여다보며 총액이 천만 엔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하고 무엇에다 쓸까 생각하는 순간, 마치 안테나가 빠져 TV 영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몇 초 동안 계속되었다. 입때껏처럼 아스피린이나 두 알 삼키면 깨끗하게 가라앉는 두통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이나 구역질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바쁜 샐 러리맨에게는 그보다 더한 증상이 있다고 주간지나 신문에 씌어 있었다. 싫어하는 일을 계속하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과로 사의 우려가 있다는 기사도 읽은 적이 있었다. 어쨌든 그런 모든 것이 자 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겐지는 생각해왔다. 스트레스가 될 만한 일은 무엇 하나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비행기는 전일본항공 867편 욱천공항 행입니다. 출발시각을 8분 정 도 지났습니다만, 앞으로 몇 분 더 탑승객을 기다리겠습니다. 바쁘신데 대 단히 죄송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내 방송이 들렸을 때, 겐지는 동시에 두 개의 의식이 관자놀이의 양 끝에서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지독하게 나쁜 기분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이대로 영원히 비행기가 날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과 '뭐하는 거야, 빨리 이륙시켜!' 하는 생각이 동시에 충돌하면서 머릿 속, 몸 전체 가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불안해져,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아보니 양손 의 체온마저 심한 격차를 보였다. 몸이 세로로 절단된 것 같은 느낌이었 다. 혈류나 신경신호도 나뉘어져 있는 것 같았다. 마술쇼 무대에 불려나가 상자에 들어가 절단판으로 몸이 갈라지면 이런 기분이겠지,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다급한 나머지 과거에 읽은 정신분열증 책을 열심히 기억해 내 어, 지금의 자신과 같은 증상이 없었는지를 체크했다. '이건 도대체 뭐지?' 겐지는 최근 한 달 동안, 수백 번도 더 중얼거리던 대사를 다시 되씹었 다. 오른쪽 시계가 안테나 빠진 TV화면처럼 되어 버리는 회수가 증가해 왔 을 때도, 겐지는 불안을 느끼지 않았고, 휘파람을 불며 안과로 갔다. 의사 로부터 신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도, 그 증 상이 심리적인 게 아니라 이미 호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틀 정도 눈은 정상이었다. 그 무렵의 경위는 수십 번도 더 검증했기 때문에 틀림없다. 오전 중에 요리코한테서 전화가 와서, 잘 지냈어요? 하는 그녀의 목소리 를 듣는 순간이었다. 사이토의 엄마 얼굴이 떠올라, 오른쪽뿐만 아니라 왼 쪽도 망가진 TV 같은 영상으로 바뀌었다. 사이토의 엄마 얼굴은 망가진 영 상 속에서 커다랗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다카다노바 역 위에 있는 좁은 창 고 한켠에 들어서며, 로사 마리아 도밍게스라는 볼리비아 여자가 묶인 팔 다리를 바둥거리고 절규하는 소리를 듣고 아랫도리를 벌거벗은 아들을 목 겨했을 때의 얼굴이었다. 사이토의 엄마는 유리의 안내로 그곳에 들어섰었 다. 어떻게 해도 눈 뒤쪽으로 사라지지 않는 사이토 엄마의 얼굴에 맞서가 며 요리코와 오팔이라는 보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이렇게 괴로운데 요리코 따위한테 신경을 쓰다니' 하고 그는 생각했다. 겐지는 자신의 생각 이 소화시킬 수 없는 지방 덩어리처럼 몸 속에서 부유하는 것을 느끼고, 만약 내가 한꺼번에 세 가지 말을 내뱉는다면 어떻게 하지, 하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오팔 이야기를 끝내고 요리코가 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겐지는 기다 려 줘,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것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진땀을 흘려 야 했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겐지는 자신의 어딘가에서 '기다려 줘'라 는 목소리가 나왔는지를 알아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바로 턱끝 언 저리에 그것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포심은 턱, 그것도 뼈에 존재하 면서, 거기서 전신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그날부터 겐지는 자신에게 스트레스가 있는 건지, 있다면 무엇이 원인인 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는 물리적인 것으로 오랫동안 축적된다 는 가설을 세워보았다. 그것이 이번 일을 계기로 한계에 이른 셈인데 그 가설은 사이토와 그 엄마, 그리고 이시오카에 대한 죄책감이 없으면 성립 되지 않는다. 뼈에도 사고 중추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두개골부터 발뒤꿈치까 지 모든 뼈를 조사했지만 어떤 각도에서 생각해 봐도 그 세 사람에게 죄책 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물론, 증오한다거나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 었다. 그 세 사람에 대한 아무런 느낌도 남아있지 않단 것일 뿐, 지루한 영화처럼, 감정이나 의식에 전혀 걸리는 것이 없었다. 죄책감의 대상을 넓 혀, 유리나 소피, 요리코나 헤스, 왼손이 2센티미터 정도 절단된 로사 마 리아 도밍게스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로사는 흰 피부의 뚱뚱한 스물아 홉 짜리 혼혈이었는데 돈을 받아들고는 겐지를 포옹하고 열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소피는 어땠을까? 사이토의 엄마가 변호사와 같이 이시오카를 방문했다. 변호사 입회하에 이시오카는, 사이토 것뿐만 아니라 모든 비디오를 지우고 자신의 영상적인 방법론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고 주요 월간지에 발표했 다. 억에 가까운 합의금을 사이토에게 지불하고, 마지막에는 거의 상관없 는 SM클럽의 젊은 아가씨들로부터도 소송을 당했고 주간지의 먹이가 된 이 시오카는, 이코노미클래스로 LA로 돌아갔다. 그 모든 순간에 나리타 공항 까지 소피는 이시오카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소피와는 만나지 않았지만 그녀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편지 는 "당신은 이시오카의 마지막 성격까지 파악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모든 걸 꾸몄다고 하면 이시오카가 너무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아서 그건 말하지 않았다는 거 알아요. 정말 대단해요" 라는 짧은 내용이었다. 마지막에는 "부탁이니까 앞으로 절대 나에 대해서 떠올리지 말아줘요"라고 적혀 있었 다. 그런 여자에게 부채감을 느낄 리가 없다. 아야코나 미와코를 손님에게 보낼 때가 차라리 안타깝다.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며 그때마다 스트레스 외에는 원인을 생각할 수 없 다는 말을 듣고 겐지는 결국 죄책감은 증상과 관계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 다. 누군가에게 상담을 하면 호전될까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그럴 수 도 없었다. 여자들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고통스러웠다. 그 무엇에도 동하 지 않는 터프한 남자로서 그녀들 앞에 있고 싶은 걸까? 그렇지는 않다. 여 자들에게 자신은 약하고 거짓말쟁이이며 항상 불안에 떨고 있고, 일신을 위해 태연하게 타인을 배신한다고 언제나 고백했었다. 너무 힘들어, 부탁 이니까 와서 도와줘 하고 어째서 말할 수 없는 걸까? 겐지는 아카사카의 호텔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맥주와 땅콩만으로 지냈다. 잘 때는 소파에 누워 모포로 얼굴을 감싸고 눈꺼풀이 자연스럽게 무거워지기를 기다렸다. 침대에 들어가면 자야 된다는 강박감이 심장 고동 을 불규칙하게 만들었으며, 생각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게 되어 집중이 중 단되면 다양한 타입의 이명이 여지없이 엄습해 왔다. 호텔로 옮기기 전에는 코냑을 줄기차게 마셔댔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포도냄새가 나는 떫은 액체가 먹고 싶어졌고 취해서 토하고 나면 다시 내 장이 근질근질했다. 왼쪽 등 전체가 호흡 리듬에 맞춰 쑤시는 것을 깨닫고 코냑을 중단한 그 는 호텔방으로 옮겨 맥주를 마셨다. 코냑을 그만두니까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목이 타올라 계속 맥주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에 수백 번도 더 화장실에 가고, 수십 번도 더 샤워를 했다. 어쩌다 감기에 걸렸을 때, 아야코가 와서 사과를 갈아주거나 나츠미가 죽을 쑤어준 적이 있다. 그럴 때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기력 이 없어도 그녀들과 얼굴을 마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달랐다. 감기 때와는 어떻게 다를까. 겐지는 겨우 결론을 내렸다. 이미 겐지라는 지금의 인간은 평소의 자신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겁을 먹고 있지만 무엇에 겁을 먹고 있는지 모른다.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지만 자신 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건 이미 자신이 아니다. 여자들은 아마 다정하게 대해 줄 것이다. 그녀들이 다정하게 대해 주는 대상은 이미 겐지가 아닌 다른 무엇일 것이다. 호텔에 들어간 지 일주일째 되던 날, 겐지는 요리코에게 전화를 걸어 와 달라고 했다. 자신이 정말 타인이 되어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요리코는 밤 열 시가 넘어서야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겐지는 하우스 키퍼에게 방을 청소하게 하고 면도를 한 뒤 룸서비스로 샴페인을 주문해 두었다. "쉽게 말하자면 내 몸 어느 부분이 내 것이 아닌 거 같아. 그게 너무 불 쾌해." 겐지는 그렇게 말하고 갖가지 증상을 설명했다. 요리코는 겐지 옆에 앉아 머리칼을 쓰다듬고 뺨을 부벼댔다. "당신만 그런 게 아녜요. 우리 백화점 간부 중에 원래 요트를 타던 사람 이 있었는데 미스 고베를 부인으로 둔 인기가 아주 많은 사람이었어. 그런 데 한 달 전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소문으로는 밤중에 이상한 소리가 나서 미스 고베 부인이 눈을 떠보니까 그 남자가 자신의 팔을 깨물고 피를 빨아 먹고 있었다지 뭐야. 입원한 모양인데 원인은 모른대요. 겐지는 자신이 이 상하다고 자각하고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그 남자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는 아무런 증세도 없었다. "제일 쉬운 방법은 사이토처럼 사는 거예요" 하고 요리코가 사이토의 이 름을 꺼냈을 때, 겐지는 오른쪽 눈과 왼쪽 어깨, 아랫배와 왼쪽 다리 장딴 지가 시뻘겋게 뜨거워지면서 요리코의 말을 듣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졌다. 겐지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지 말아줘. 난 그놈에게도, 그 엄마에게도 나쁜 짓을 했다거나 그런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요리코는 그럼요, 알아요, 나도 똑같아요, 하고 또다시 겐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이토는 아마 누구보다도 빨리 일어설 거예요. 엄마가 이미 일어서 있 으니까 말예요. 그 여자는 바로 일어섰어요. 난 그 후 바로 상담을 받았기 때문에 잘 알아요. 사이토 엄마가 겐지나 헤스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문제 삼으면 사이토에 대해 전부 폭로할 각오였어요. 그렇게 위협해서라도 막을 생각이었는데 이미 그 여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이시오카만 공격하 겠다고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죠. 나랑 만났을 때는 변호사와 이시오카 사이에 얘기가 진행되고 있었더라구요. 그 여자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누 구인지, 누구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면 될 것인지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어 요. 그건 당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죠. 겐지는 이시오카와 같이 고소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사이토는 지금 엄마와 함께 하와이에 가 있는 거 같아요. 머리에 난 상처도 낫고, 골프를 하고 있다고 그림엽서가 날아왔어요. 그 놈은 그때 벽에 머리를 계속 부딪쳐 죽는 게 나았는데 그대로 죽었으면 겐지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사이 토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잃을게 없으니까. 원래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고." 겐지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스타킹에 감싸여 있는 요리코의 허벅지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검정색 나일론 스타킹을 통해 미묘한 탄력과 부드러 움, 그리고 따스함이 전해 왔다. 아, 정말 할 말이 없군, 하고 겐지는 깨달았다. 이 느낌을 나타낼 말이 없다. 지금 잃어버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다. 그 이야기를 요리코에게 했다. "느껴준다면 난 그걸로 좋아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돼요." 요리코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요리코가 그렇게 말했을 때 최 근 한 달 동안 줄곧 맴돌고 있던 불쾌한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겐지는 확연 히 깨달았다. "말을 하고 있는 존재가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것을 인정 하기가 두려웠던 거야. 이전에는 말할 필요가 없었어. 이전이라고 해도 바 로 얼마 전 일이지만, 핥거나 가볍게 물거나 애무하거나 쥐거나 하면 그걸 로 됐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자신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발기할 힘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냐. 이럴때는 말이 필요한데 진정한 말이란 지금 이렇게 내가 떠들고 있는 쓰레기가 아냐. 사실은 이렇게 지껄 이고 있는 때도, 왠지 내가 말하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또다른 누군가가 말 하고 있는 것 같아 사실 난..." 겐지는 입술을 깨물고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 이상 말하면 울면서 요리 코에게 안겨붙을 것 같았다. -사실 난, 그저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 단 한 마디, 누군가를 붙들고 외치고 싶을 뿐이야. 그것 외에는 전부 거짓말이야. 털을 전부 깎 인 병아리처럼, 무력해. 내 말 따위는 그때그때 여자를 속이는 것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오 년이나 십 년이 아니라 일주일만 지나면 모든 것 이 거짓이었다는 걸 바로 알아 버리지 고작해야 그런 것이었어. 요리코는 두 시간 동안 겐지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뺨에 키스를 하기도 하고 등도 다독여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겐지는 심장 표면이 따끔따끔 아플 정도로 괴로웠지만 요리코가 돌아가 버리면 죽고 싶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불안했다. 나는 그 사람한테 키스해 줄 수 없어요. 하고 요리코가 생각하게 하는 것도 고통이었다. 분명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상처를 입을 것인데도 요리 코는 겐지에 대해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요리코가 옆에 있는 동안 내내 겐지는 입장이 거꾸로 되었을 때의 자신 을 생각하고 있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외로우니까 이대로 계속 이렇게 옆 에 있어줘. 하고 미와코가 몇 번이나 말한 적이 있었다. 알았어, 나는 아군이야. 전세계가 너의 적이라도 나만은 아군이니까... 하고 말하면서, 외로워서 죽을 지경이면 빨리 죽어 버려. 너 따위 죽어도 누구 하나 슬퍼할 사람 없어.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다. 요리코도 필시 그럴지 모른다. "돌아갈 때 화내지 말아요" 하고 요리코는 겐지에게 말했다. "사이토를 어떤 의미에서든 부럽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유리와는 만나지도 않았고 전화도 없었다. 사흘 전, 홋카이도에 가기로 결심했던 밤에 유리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와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 다. 커피숍도 레스토랑도 사람이 가득 차서 둘은 벽에 붙어선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겐지는 세면도구와 간단하게 갈아입을 옷을 넣은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여동생한테 가는 거죠?" 유리는 자신의 발끝을 쳐다보며 말했고, 겐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 다. "나 그 후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왠지 할 수가 없었어요. 딱히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예요. ...거긴 너무 더웠어요 그 건물은 들어서자마자 캄캄해지고 너무 무더운 무슨 괴물의 아가리 같았어요. 라틴 아메리카 사람도 무서웠어요. 난 겐지 아저씨가 데리러 와주리라 생각했어 요.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불빛이 보이고 그 아줌마가 있었죠. 그 아줌마는 심상치 않았어요. 작았지만 엄청난 소리가 들렸는데 아줌마는 그 목소리가 사이토의 목소리라는 걸 알았어요. 또 한 사람 있던 라틴 남자에 게 머니, 머니 하고 말했어요. 아마 돈을 줄 테니까 아들을 풀어달라고 말 하고 싶었던가봐요. 나는 안중에도 없었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방에 들어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신호가 와서 우선 아줌마가 들어갔는데 그때 겐지 아저씨의 얼굴도 좀 이상했어요. 전구가 노란색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사이토도 아줌마를 보고 그런 비슷한 얼굴이 됐어요. 그 얼굴로 나를 한번 보고, 그리고 바지 와 팬티를 내린 채 머리를 벽에 박았죠. 그 외국인 여자의 다리에서 흘러 나오는 피나 사이토 이마가 깨지면서 벽에 튄 피보다는 그 아줌마와 마주 친 사이토의 얼굴이 더 끔찍했어요. 요리코 언니한테서 겐지 아저씨가 아 프다는 말을 듣고 조금 안심했어요. 다른 사람에게 그런 얼굴을 하게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겁이 났거든요." 벽에 다가서 있는 두 사람이 레스토랑 유리창에 비치고 있다. 짧은 출장 을 떠나는 남자와 배웅 나온 여자처럼 보일까,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안좋지만 그 놈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 하는 건 아냐." 겐지는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사이토와 전혀 관계 없는건 아니잖아요." 유리도 창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창에 비친 두 사람의 영상은 통 행인이 지나갈 때마다 일그러지며 끊어졌다. "그 누구도 그때의 사이토 얼굴을 잊을 수는 없을 거예요. 거기에 있던 라틴계 남자는 아마 다르겠지만요. 그 사람들은 사이토를 떠올리며 웃을 수 있겠지만 우리들은 그럴 수가 없으니까. 옛날에 유태인 조각가가 이야 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바르샤바에서 게슈타포가 땅 속 구덩이에 숨 겨져 있던 대여섯 살짜리 꼬마들을 발견하고, 머리채를 붙잡아 끌어냈대 요. 그 남자 아이가 발버둥치면서 소리를 질렀는데 그 조각가는 그때 그 아이의 얼굴이 눈에 각인되어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고 TV에서 말했어요. 그 사이토 얼굴을 보았을 때 바로 그 조각가 얘기가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아무도 나쁜 짓한 사람은 없어요. 그냥 사이토가 그런 얼굴을 한거예요. 그런 얼굴은 누구든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런 얼굴을 보면 구역질이 나도록 아마 우리 유전자가 프로그램되어 있을 거예요. 그렇죠? 만약, 그런 얼굴 을 좋아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면 우리들은 원숭이도 되질 못했을 거예 요. 게다가 사이토는 이마만 깨졌지 죽지도 않았잖아요. 이마를 벽에 부딪 친 것도 그 아줌마 보라고 한 행동이 틀림없어요. 더 나쁜 건 그런 인간들 이 아직도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 인간은 곧 다시 일어설 거예요. 지금쯤 아마 그 아줌마랑 초코케이크를 같이 먹고 있을걸요. 겐지 아저씨는 그런 사실을 전부 알고 한 거잖아요?" 겐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이 끄덕이는 것도 보았다. 방금 유리가 말한것들은 겐지 자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것들이 다. 문득, 어머니는 나와 여동생이 아직 어렸을 때 어디론가 가 버렸어. 하 고 말할 뻔했다. 요리코는 사이토를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사이토의 엄마가 그 창고방으로 들어왔을 때의 얼굴은 어쩌면 겐 지가 그리워했던 얼굴인지도 모른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자애, 거기에 다른 몇 가지가 한데 섞인 얼굴, 물감을 너무 많이 섞으면 이 세상에서 가 장 더러운 색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정도로 보기 흉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하고 겐지는 생각했다. 내가 몸을 이렇게 망친 것은 그 엄마의 얼굴탓이 아니며, 물론 사이토의 얼굴탓도 아니다. 보다 더 추상적인 것이 다. 겐지가 탈 비행기의 탑승이 시작된다는 공항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언제 오실 거예요?" 하고 유리가 물었다. "바로 올 거야." 겐지가 대답했다. 안전 점검 게이트로 들어설 때 유리가 입술을 뾰족히 내밀었다. 키스하 는 순간 사랑해요, 하고 유리가 말했다. 겐지는 있는 힘을 다해 웃는 얼굴 을 지어보였다. 제 9장 희망의 노래 비행기가 이륙하자, 겐지는 여동생에게 줄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 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불황 탓인지 슈퍼 시트는 텅텅 비어 있고, 다른 탑승객은 한 사람뿐이었 다. 그 남자는 화려한 무늬인 가죽 블루존을 입고, 주간지를 읽으며 담배 를 피우고 있다. 몸이 보이지 않는 판에 의해 두동강난 것 같은 느낌은 이 륙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여동생을 만나러 가는 것은 거의 1년만이었다. 따뜻한 날과 추운날이 교 대로 있는 듯한 꼭 지금과 비슷한 계절이었다. 그때는 여동생의 몸 상태가 좋아서 외출허가를 받아 초밥을 먹으러 갔었다. 요양소에 전화해서 면회 허락을 얻었지만 간호사가 이번에는 외출이 무리 일거라고 했다. 증상이 악화된 것은 아니지만, 지난 번은 특별한 것이었다고 한다. 겐지는 왼쪽 몸으로 여동생과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를 오른쪽으로 유 리의 차갑고 부드러운 입술을 생각했다. 그러나 턱끝과 어깨 주위의 뼈가 사이토 엄마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혼란스러웠다. 그 얼굴을 지우기 위해서는 추상적이고 정확한 말이 필요하다고 겐지는 생각했다. 구름이 걷히자 잔설이 희뜩희뜩 욱천 시가와 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택시를 요양소 바로 앞에 세우고, 겐지는 약 백 미터쯤 되는 진입로를 걸어가기로 했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자 몸이 양분되었다는 느낌이 다소 진정되었다. 여동생과 처음에는 무슨말을 해야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빙판인 보도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신경을 집중시킨 때문이기 도 했다. 욱천 교외의 일차선 도로 양쪽으로는 비닐하우스들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고 산기슭에는 초등학교가 보인다. 보도는 희뿌옇게 얼어 있고 도로자락의 눈은 물기가 비치면서 이제 막 녹으려 하고 있었다. 대형 차고 처마에 매달린 길다란 고드름 끝에는 불규칙한 간격으로 물방울이 매달려 반짝거리고 있었다. 요양소는 오래된 목조 건물과 새로 지은 흰 콘크리트 건물이 복도로 이 어져 있다. 현관을 지나 접수창구에 다다르자 낯익은 간호사와 함께 여동 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동생은 한쪽 면에 기구가 그려진 파자마를 입고 겐지, 하고 손을 흔들었다. 옛날부터 그랬다. 오빠라든가, 겐지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미안해, 선물을 살 시간이 없었어. 그래서 여기 비행기 안에서 과일을 주문했거든. 열대과일이야..." 병실까지 함께 걸어가면서 겐지가 말했다. "어떤 거지?" 하고 동생이 물었다. "파파야하고 망고, 람프탄, 망고스틴일 거야." "망고스틴은 언젠가 먹고 싶었어." 여동생은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들어가면서 살며시 웃었다. 약물 치료의 부작용 때문에 여전히 부기 있는 얼굴이었다. 1인병실은 다다미 여 섯 장 넓이로 창가에는 관엽식물 화분이 놓여 있고 벽에는 슬라이드식 책 꽂이가 있었다. 21인치 TV와 가정용 비디오가 갖춰져 있고, 침대 머리맡의 오디오에는 코드가 3미터나 되는 헤드폰이 연결되어 있다. 그 긴 코드의 헤드폰은 병실에서 TV를 볼때 필요할 것 같아서 겐지가 일부러 네덜란드에 서 들여온 것이다. "망고스틴이 과일의 여왕이래잖아. 왕은 뭔지 알아?" "드리안이지.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겐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동생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발병했다. 겐지는 그때부터 '혈침촉 진값' 이니 '백혈구 증가도' 니 하는 두 가지 의학 용어를 기억했다. 둘 다 여동생의 생명에 관련된 용어였다. 절대안정이 계속 되었다. 어렸을 때 걸린 류머티스는 성인이 되면 낫는다고 의사가 부모님에게 말하는 것도 들 었고, 부모님이 주문처럼 뇌까리는 것도 들었다. 지금보다도 강한 스테로이드제를 먹고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을 무렵, 어 머니가 없어졌다. 이모 집에 맡겨지고 얼마 후 시립 병원에 병실이 나서 입원하여 의무 교육도 거기서 받았다. 열일곱 살때는 비활동기라고 불리는 소강 상태가 반 년 정도 계속되었다. 의사가 재발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한 덕분에 여동생은 우체국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그 2년동안 겐지는 우표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성인식이 있던 해에 동생의 병은 악화되었고 재발했 다. 그 후 3년간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 심한 상태가 진정되던 해에 겐지는 여동생을 이 요양소로 옮긴 것이다. 여동생은 아주 약해져서 엄마가 없어진 것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후 수십 번도 더 심장이 멎을 뻔했 다. 그녀는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겐지는 아직도 음악 안 들어? 난 한 달에 한 장씩 CD를 사는데."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더 사지 왜?" "음악 안 들어?" "응, 전혀 안 들어." "언젠가 음악이 물보라처럼 눈에 보이는 입자처럼 존재하는 해안이 남프 랑스에 있다고 한 거 기억나?" "아 기억해. 좋은 이야기라서 친구들한테도 이야기해 줬어." "어머 큰일났네." "왜 그러니?" "그건 거짓말이었어. 내가 만든 거짓말." 여동생은 그렇게 말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그건, 겐지가 음악을 안 듣는게 너무 어울리지 않고 마음이 쓰여서였 어. 그런 거짓말을 하면 시험삼아 드뷔시라도 듣지 않을까 해서." "정직하게 말하면 조금쯤은 생각했어." "나 그런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어. 잘하지? 글로 쓰면 좋은데, 쓰는 건 너무 힘드니까." "아주 조금씩 쓰면 되잖아." "역시 나한테는 안 맞는 것 같아. 하지만 그밖에도 이야깃거리라고 할 까, 좋은 생각이 있어. 간호사가 듣고 재미있댔어. 겐지도 들을래? 겐지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얘기해 봐. 싫으면 싫다고 말할 테니까." "의외로 따분한 이야긴데... 서론도 있고, 꽤 길어." "좋아" 하고 겐지는 말했다. 라디에이터의 '턱-턱' 하는 작은 소리와 두 사람의 말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건 내가 아프고 나서 계속 생각한 건데... 몇 번이나 확신했으니까 확실할 거야. 몸의 메커니즘은 여하튼 죽는 것을 피해서 오래 살려고 하는 거잖아? 다른 사람도 대개 다 그럴 것이고 내 몸도 그랬어. 죽는 편이 낫 지 않을까 하고 물에 뛰어들어도 산소가 없어질 때까지 심장은 끝내 고동 을 쳐." "정말 따분한 이야긴데." 겐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미소를 잊지 않았다. "몸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니까. 나는 머리로 그 이유를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언제 생각했니?" "막연하게 생각한 건 10년 정도 전이고, 이렇게 말로 할 수 있게 된 건 최근이야. 몇 번이나 가사 상태에 빠졌었잖아. 보통 그럴 때 임사체험이라 고 죽음의 세계라든가, 저 세상이라든가 요단강 같은 것을 보게 된다고 하 는데 난 달랐어. 그건 성격적인 거라고 생각해. 몸은 둥둥 떠 있는데, 심 장이 나를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지는 거야. 이미지로는 교육방 송의 요리 프로그램 같은 느낌이었지 이상하지? 그래서 안 죽었는지도 몰 라." 여동생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심장에게 나라는 개체가 살아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겐지는 무심결에 그럴 리가 있어? 하고 말할 뻔했다. 여동생은 겐지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겐지가 생각하는 대로 그런 근거는 어디에도 없어. 찾는다고 해 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쯤에서 얘기가 겨우 시작되는 거야. 들 어봐. 어떤 에이즈 환자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요즘 에이즈 책이 많이 나오잖아. 이상하게도 대부분이 재미없는 책이지만 신이니 사랑이니 바로 그런 분위기거든. 아무튼 그 환자는 배우였어. 록 허드슨처럼 대단한 배우가 아니라 언더그라운드의 단편 영화에 잠깐 출연한 적이 있는 무명 배우인데 그 사람은 망상에 빠진 채 에이즈 말기를 보내고 있어. 자신은 세계적인 스타이고 온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한다는 망상이지. 그래서 대우가 나쁘나고 투덜대고 간호사한테 심하게 저항하다가 폭력을 휘두르고 정신병원에 들어가기도 하지. 그 후에 아파트로 돌아오는데 그 사람은 몽 롱한 의식으로 여전히 자신이 대스타인 줄 알고 있어." "그거 누가 쓴 거야? 어디까지가 그 책 이야기지?" "지금 한 얘기 중에서 중간까지는 본인이 쓴 거고, 뒷부분은 내 생각이 야. 에이즈 말기 때 중요한 건 약보다도 살아갈 희망이라고 흔히 그러잖 아. 살아갈 희망, 살아갈 희망!" "그게 망상이라는 건가?" "맞아, 그건 망상에 지나지 않아. 내가 보증해. 그런 망상에 가장 평범 한 형태를 부여하면 뭐가 되는 줄 알아? 가장 평범한 거. 망상곡이 되는 거야." "음악?" "맞았어." "지금까지의 얘긴 알겠는데 그런 걸로 날 설득하려면 무리겠다." "겐지는 멜로디를 만들어야 했던 사람이 슬프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언젠가 그렇게 말했어. 곰 얘기까지 하면서 말이야." "슬프다고 할까, 멜로디라는 것으로 어떤 수준을 맞추려고 한 거야. 곰 은 그럴 필요가 없거든. 곰은 적어도 감상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얘기였어." "그게 다르다는 걸 난 깨달은 거야. 바로 얼마 전에." 여동생이 언제 이런 것을 생각했을까, 하고 겐지는 신기해했다. 그저 TV 가요 프로그램을 묵묵히 보고 있던 기억밖에 없는데. "우리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완벽한 멜로디란 만들 어지는 게 아니라 잘라낸 거라고 생각해. 무슨 말인지 알아? 우주의 흐름 을, 정확하게 어느 길이만큼 잘라낸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슬플건 없 어." "언제 그런 걸 생각했어?" 겐지는 침대 위에서 머리를 빗기 시작한 여동생에게 물었다. "생각한 건 오래됐지만 얘기할 수 있게 된 건 최근이야.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란 게 한정되어 있으니까. 여기 오고부터는 방해가 되는 건 무조 건 멀리하려고 다짐했어." "방해가 되는 거?" "시끄러운 TV나, 그런 거 말이야. 내 심장에 대해 생각하는 데 방해가 될 만한 거 전부. 아까 망상이란 말을 했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한 건 아 냐. 누가 뭐라 해도 살아갈 희망이라는 건 내가 타인에게 작용하는 것과 그 반응으로 생겨나는 거야.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일으키는 작용과 나의 반응으로는 희망이 생겨나지 않아. 그래서 대부분 망상을 하게 되지. 겐 지, 오해하지는 마. 난 겐지에게 너무너무 감사하고 있어. 뭔가 해 주고 싶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잖아?" 그런 말 하지마, 라고 겐지는 말하려고 했지만, 머리를 빗고 있는 동생 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어릴 때부터 심장이 멎을 뻔한 회수와 실제로 짧은 시간 멈췄던 회 수를 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각각 스무 번 정도였는데 그럴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 겐지가 도쿄에서 하고 있는 일도 알고 있어. 난 겐지가 세상 모든 사람을 죽인다 해도 겐지에게 감사할 거야... 당연한 말 이지만 겐지는 내 오빠니까 무슨 일이 있어서 오늘 찾아왔는지 모르지 만... 물론 난 너무 기뻐." "정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니?" 겐지가 숨을 죽이며 물었다. 여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염려해 주고 있다는 건 살아갈 희망이 되지 못해. 하 지만, 하지만 말야, 희망이라는 건, 희망의 음악은 그렇지가 않아. 그 음 악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메아리가 되어 퍼지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 모르겠어, 하고 겐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음악은 아주 아주 드문 거야. 이 나라에는 물론 없어. 지금 없다 는 게 아니라, 사실 어느 시대에도 없었어. 무슨 말이냐 하면, 겐지, 나도 믿어지지 않지만 이 세상은 살아갈 희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 대신에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진 않았어.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 어. 겐지는 아무것도 신경 쓸 거 없어. 살아갈 희망이 없다는 건, 다른 사 람의 희망을 뺏을 수 없다는 얘기니까. 내가 말하는 건, 아이를 죽인다거 나 엄마가 죽는다거나 하는 그런 TV 드라마 같은 얘기가 아냐. 그 사람이 가지는 육체와 정신을 말하는 것이지. 무슨 짓을 해도 신과 자신의 심장으 로부터는 절대 벌 받는 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고마워, 하고 겐지가 말했다. 여동생은 플라스틱으로 된 핑크빛 브러쉬로 하염없이 머리를 빗고 있었 다. 역자후기 번역이 끝났다. 필자는 번역하는 동안 내내 갈증을 느껴야 했다. 결말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성애묘사와 아직 한국에서는 생소한 SM(사디스트, 마조히스트 의 약자)클럽의 이야기 등, 섣불리 다루기 힘든 소재였기만, 그 탄탄한 구 성과 빠른 문체는 마치 영상을 책으로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무라카미의 이 책은 언뜻 보기에 마치 불량한 사람들에게 나쁜 길을 안 내해 주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결말을 읽고 나면 제자리도 돌아오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의 하나가 간접경험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그 간접경 험을 통해서 겐지와 함께 호흡하고 고뇌하면서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책에서는 주인공 겐지가 의뢰인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을 진행해 나가면 서 음악이야기를 자주 언급한다. 인간이 음악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가까 이 두려는 것은 자신의 추악성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추악성 을 잊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살아갈 희망이 없는 이 삭막한 현대에 위안을 얻기 위함일까? 음악의 존재, 아름다움의 존재, 살아갈 희망,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끝도 없이 독자에게 던지고 있 다. 아마, 누구나 책을 읽어나가며 스스로 그 답을 곱씹어볼 수밖에 없을 것 이다. 자신이 살아갈 의미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