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Sixty Nine) 지은이 : 무라카미 류 출판사 : 예문 랭보 1969년. 이 해 도쿄 대학은 입시를 중지했다. 비틀스는 화이트 앨범, 옐로 서브마린, 아일 비 로드를 발표했고, 롤링스톤스는 최고의 싱글 홍키 통키 우먼을 히트시켰고, 히피라 불리는 머리카락이 긴 사람들이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드골이 정권에서 물러났다.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 때부터 여학생들은 생리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9년은 그런 해였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3학년으로 진급했다. 규슈 서쪽 끝, 나는 기지촌의 인문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자연계 반이었기 때문에 여자학생은 7명뿐이었다. 7명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1학년, 2학년 때는 남학생들만 모인 반에서 지냈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자연계를 지망하는 여학생들은 못난이들이 대부분이다. 애석하게도 우리 반 여학생 7명 중 5명은 못난이였다. 나머지 2명 중 하나인 모치즈키 유코는 목재상집 딸로 큐피와 닮은 여학생이었다. 우리 반의 큐피는 빨간 표지의 차트식 수학2만 사랑했다. 우리는 큐피의 보지는 필시 나무로 되어 있을 것이라고 키득거렸다. 또 한 여학생 나가다 요코는 3년 후 세상을 놀라게 한 적군파의 리더와 이름이 같은 미소녀였다. 유치원 시절, 그 나가다 요코와 같이 오르간을 배웠다는 행복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야마다 타다시. 국민학교 1학년이라도 알 수 있는 간단한 한자만으로 구성된 단순 명쾌한 이름을 가진 그 사나이는 국립대학 의학부를 지망하는 수재였다. 게다가 타학교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미남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꽉 짜인 얼굴의 미남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느낌을 주는 미남이었다. 그것은 야마다 타다시의 얼굴에 촌티가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야마다는 시외의 탄광촌 출신이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방언이라 한다면 야마다는 탄광촌 특유의 거칠고 뒤틀어진 은어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만일 야마다가 시내 중학교 출신이었다면 기타를 치고, 오토바이를 타고, 로큰롤도 흥얼거리고, 찻집에서 카레라이스와 아이스 티를 주문하고, 또 은밀히 유행하고 있던 마리화나의 힘을 빌어 불량 여학생에게 한번 대달라고 조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야마다가 잘 생겼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 그는 아다마(머리)라 불렸다. 프랑스 가수 아다모와 닮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야자키 겐스케. 반 친구들은 겐스케, 겐, 켄, 캥 따위로 부르고 있었는데, 왠지 겐이라는 어감이 좋아서 친한 애들에게는 모두 겐으로 불러 달라 하였다. 왜냐하면 늑대소년 겐이라는 만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1969년 봄이었다. 그 날, 3학년 최초의 종합시험이 끝났다. 아마도 내 평생 최악의 성적이 될 것 같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성적은 끝없이 하강해 갔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부모의 이혼, 동생의 갑작스런 자살, 나 자신이 니체에 경도했다는 것, 할머니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것, 때문이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냥 공부가 싫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당시는 시험공부를 하는 놈은 자본가의 앞잡이라는 편리한 사고방식이 만연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공투는 이미 힘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도쿄 대학의 입시를 중지시켜 버릴 정도의 힘은 발휘하고 있었다. 뭔가가 변할지도 모른다는 안이한 사고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대학입학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되고, 마리화나를 태우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나의 뒷자리에는 아다마가 앉아 있다. 선생이 '이제 그만! 답안지를 걷어!'하고 말하는 순간 아다마의 답안지를 슬쩍 훔쳐보았다. 아다마의 답안지에는 나보다 세 배나 많은 글씨가 씌어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홈룸 시간과 청소를 빼먹으려고 눈치를 사 피던 나는 갑자기 아다마를 꼬드기고 싶어졌다. "어이, 아다마. 너 크림 아니?" "크림? 아이스크림?" "짜식, 크림은 영국의 밴드 이름이야. 그것도 몰라?" "몰라." "한심하군, 넌 구제불능이야." "구제불능? 왜?" "그럼 너, 랭보는 아니?" "그 사람도 밴드?" "바보! 시인이야. 한번 읽어봐. 자, 여기 있어." 나는 아다마에게 랭보의 시를 보여 주었다. 아다마는 그 때 필요 없다고 거절했어야만 했다. 아다마는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다마의 인생은 바로 그 순간에 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 30분 후, 아다마와 나는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시립동물원의 긴팔원숭이 우리 앞에 섰다. 시험이 끝난 다음, 홈룸시간과 교실청소를 땡땡이치고 멀리까지 온 우리는 배가 고팠다. 야마다는 탄광촌에서 통학하기가 너무 멀다고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숙집에서는 매일 도시락을 싸 주었다. 나는 도시락을 싸다니지 않는다. 점심 값으로 매일 어머니에게 150엔을 받고 있었다. 150엔이라는 말에 놀라지 마시기 바란다. 그것은 과거 15년 동안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적게 보일 뿐이다. 우리 집은 극빈에 속하지 않았다. 1969년 당시, 150엔은 큰돈이었다. 어려운 집의 아들, 딸들은 50엔으로, 20엔 짜리 우유와 10엔 짜리 팥빵 하나에 20엔 짜리 카레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150엔으로는 라면을 하나 먹고, 우유를 마신 다음, 카레빵과 메론빵과 잼빵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우유도 없이 카레빵 하나로 주린 배를 채우고 나머지 돈은 저금했다. 사르트르, 주네, 셀린, 카뮈, 바타유, 아놀드 프랑스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사서 읽기 위해서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미녀율 20%를 넘는 사립 준와 여자학원의 나긋나긋한 여학생을 찻집이나 디스코 테크에서 꼬시는 데 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북고와 남고라는 두개의 현립 인문고등학교, 현립 공고, 시립 상고, 사립 여고가 세, 사립 인문고 하나가 있었다. 작은 지방도시였기 때문에 사립고는 열등생의 소굴이었다. 내가 다니는 북고는 진학률 최고를 자랑하였고, 남고가 그 뒤를 이었다. 공고는 야구로 유명하였고, 상고는 여학생이 못생긴 것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사립 준와 여고는 가톨릭계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하튼 미녀율이 높았고, 사립 야마노케 학원의 여학생들은 라디오 진공관으로 오나니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폭파사고가 빈발하여 여하튼 거기에 상처가 난 애들이 많다는 평판이 자자하였으며, 사립 코가 여학교 학생들은 거의 화제의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로 성격이 어두웠고, 사립 아사히고는 남녀 할 것 없이 머리를 흔들면 깡통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가장 바람직한 북고 학생 상은 북고 영어연극부 여학생을 걸 프렌드로 하고, 준와의 제복을 입은 여학생을 정부로, 야마노테학원 여학생의 상처 난 그것을 구경한 경험을 가지고, 코가 여학교와 아사히고의 여학생에게는 돈을 내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란 제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닌지라, 급한 대로 재빨리 옷을 벗을 상대를 찾아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던 만큼, 150엔이란 거금으로 카레빵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저축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잠깐만, 나 카레빵 하나 사 올께." 나는 긴팔원숭이 우리 앞에서 아다마의 도시락을 눈이 빠지게 내려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반씩 나눠 먹는 게 어때?" 아다마는 너무도 메이드 인 하숙집답게 반찬 없는 도시락밥을 반으로 나누어 뚜껑에 담아 주었다. 학교에서 동물원까지 버스 비까지 내준 데다, 지금쯤 교실 유리창을 닦고 있었어야 할 착실한 아다마의 도시락까지 뺏어 먹는다는 것이 도저히 양심에 걸려 단호하게 사양했다, 라고 하면 물론 거짓말이고, 사실은 세 개나 되는 생선묵을 나에게는 하나밖에 주지 않는 아다마에 대해, 이 자식 짠돌이 아냐, 장래 의사가 되는 것보다 신용금고 직원이 되는 게 더 나을지 몰라, 라고 생각하면서 3분만에 밥을 먹어치웠다.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의 소풍이 그렇듯이, 밥을 먹고 나자 할 일이 없었다. 지겹게 하품을 하면서 긴팔원숭이를 보고 있자니 괜히 화가 치밀었다. 배가 확실히 불렀다면 낮잠이라도 청하겠지만, 빈약한 하숙집 도시락을 둘이서 나눠 먹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 할 일이 없는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캥, 어느 대학 갈 생각이니?" "캥이라 하지 마. 이제부터 겐이라 불러." 나는 네 가지 이유로 학교에서 이름을 날렸다. 하나는 1학년 가을에 실시한 의과대학 진학희망자를 대상으로 한 아카데미 모의시험에서 전국 2만 명 학생 중 321등을 했기 때문이고, 둘은 비틀스, 롤링스톤스, 워커 브러더스, 프로클하름, 몽키스, 폴 리비아 앤 레이더스 등의 레퍼토리를 연주할 수 있는 록밴드의 드럼주자였기 때문이고, 셋은 신문부 활동을 하면서 고문 선생 허락 없이 세 번이나 신문을 발행하여 발행금지처분을 받았기 때문이고, 넷은 1학년 2학기 때 매국의 원자력 항공모함의 나가사키 기항을 저지하기 위해 나가사키로 집결한 삼파계 전학련의 투쟁을 연극으로 꾸며 졸업생 송별회에서 공연을 시도하다가 선생들에게 제지당했던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괴짜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의과대학에는 가지 않아. 도저히 무리야." "그럼 겐은 문학부에 갈 생각이야?" "문학부에도 안 가." "그럼, 왜 시를 읽니?" 여학생 앞에서 폼을 잡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다마는 완고한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시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랭보는 예외지만, 랭보는 하나의 상식이라 해야 할거야." "상식?" "랭보가 고다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알아?" "아, 고다르! 나도 알지. 작년 세계사 시간에 배웠어." "세계사?" "인도의 시인 아냐?" "인도의 시인은 타고르야, 고다르는 영화감독이라구." 나는 고다르에 관해 약 10분간 강의를 했다. '새로운 물결'의 기수로 혁명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 <네 멋대로 해라>의 라스트 신이 얼마나 멋졌는가를,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있는 포도>에 나타나 있는 부조리한 죽음, <위크앤드>의 파격적인 커트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물론 나는 고다르의 영화 따위는 한 편도 본 적이 없었다. 규슈의 시골 도시에 고다르의 영화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이미 문학이나 영화 따위는 고리타분해. 죽었어." "영화도?" "그래, 영화도 이미 죽었어" "그럼 뭐가 있는데?" "페스티벌! 영화, 음악, 연극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거지, 몰라?" "모르겠는데." 그렇다. 내가 하려는 것은 페스티벌이었다. 페스티벌, 그 말만 들어도 나는 흥분했다. 다양한 전시회, 연극이나 영화나 록밴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준와 여고생들도 몇 백 명은 모여들 것이다. 나는 드럼을 치고, 감독이 되어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고, 자작 극본으로 연극무대의 주연을 맡는 것이다. 준와 여고생도 올 것이다. 북고 영어연극부 학생들도 보러 올 것이다. 진공관을 좋아하는 여학생들도 올 것이다. 깡통소리를 내는 아이들도 올 것이다. 코가의 여학생들도 돈과 꽃다발을 들고 파도처럼 밀려 올 것이다. "난 말이야, 그런 페스티벌을 이 거리에서 하고 싶어"하고 나는 말했다. "아다마! 나를 도와 줘." 당시 북고 내의 반체제 파는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놀자파, 록파, 정치파. 놀자파는 술과 여학생과 담배와 싸움을 중심으로 하여, 토박이 야쿠자들과 손을 잡고 있었고, 시로쿠지 유지가 그 중심인물이었다. 록파는 다른 말로 예술파로 불리기도 했는데, <뉴 뮤직 매거진>과 <지미 핸드릭스 스매슈히트>와 <미술수첩>을 옆구리에 끼고 기를 수 있는 데까지 머리를 기르고, 손가락 두 개로 브이 사인을 만들면서 입으로는 '피스, 피스'를 중얼거리며 걸어다닌다. 정치파는 나가사키 대학의 사청동 해방파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회원의 호주머니에서 각출하여 방을 한 칸 빌려 벽에 모택동과 게바라(아르헨티나의 혁명가. 쿠바 혁명에 참가함. 후에 남미의 혁명운동에 헌신.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중에 전사)의 사진을 붙여 두었고, 교내에 삐라를 뿌리기도 하였는데 나리사마 고로와 오다키 요시, 두 사람이 중심이다. 그 외 기타잇기(대표적인 우익사상가. 일본개조론을 발표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사형당함)를 숭배하는 우익파, 포크송을 좋아하는 민청파, 오토바이파, 동인지를 내는 문예파 등이 있었지만 소수였기 때문에 인원 동원력은 거의 없었다.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주류 3파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밴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록파와 자주 어울렸고, 시로쿠지 그룹과는 가끔씩 맥주를 마셨고, 나리시마와 오다키의 아지트에서 벌어지는 토론회에도 가끔씩 참가하였다. "페스티벌이 뭔데?" "뭐라 할까? 일본말로 하면 마츠리, 축제인 셈이지." "마츠리였군." 신문부에는 이와세라는 구멍가겟집 아들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구멍가게 아들답게 행동하는 친구였다. 이와세와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머리가 나쁜데다 몸도 왜소했지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네 명의 누나에 둘러싸여 자란 가정환경 때문에 예술에 대한 갈증이 대단하여, 화가의 아들인 나는 친구로 삼고 싶어했던 것이다. 나는 늘 이와세와 페스티벌에 관한 꿈을 이야기했다. 나와 이와세는 <미술수첩>과 <뉴 뮤직 매거진>의 애독자였기 때문에, 거기에 실린 록 페스티벌이나 해프닝을 중심으로 한 페스티벌을 동경하였다. 록 페스티벌이나, 해프닝에 공통된 것은 여자의 나체였다. 우리 둘은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그것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와세가 나에게 말했다. "겐! 야마다를 우리편에 넣으면 어때. 그 친구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으니 겐과 일을 벌인다면 워든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나는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겼단 말인가? 라고 이와세에게 항의했지만, 이와세는 힘주어 아니, 아니, 아니 하고 세번 부정했다. "그런데 말이야, 겐은 뭐라 할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마, 넌 무슨 아이디어를 내는 데는 천재적이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잖아?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눈앞의 여학생과 먹을 것만 밝히잖아?" 이와세와 나는 영화 제작을 위한 8밀리 카메라를 사기 위해 2학년 때부터 저금을 하고 있었다. 용돈과 점심 값을 절약하여 열심히 모았다. 6백 엔을 모았을 때, 나는 그 돈으로 준와 여학생에게 슈크림과 치킨 프라이를 사 주고 말았다. 이와세의 비판은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와세의 말 그대로, 아다마는 탄광촌 출신으로 잘 생겼고, 성적이 뛰어나 많은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2학년까지 그 자신이 속해 있던 농구부에서, 부원들간의 뒤틀린 인간 관계, 돈 관계, 여자 관계를 깨끗이 해결해 준 실적도 가지고 있었다. 페스티벌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아다마를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와 아다마는 긴팔원숭이 우리 앞을 떠나, 전망대로 올라갔다. 해는 조금 바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지금쯤 모두들 청소를 하느라 바쁠 거야." 아다마는 바다를 보면서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나도 웃었다. 아다마는 땡땡이를 치는 재미를 처음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시집을 다시 한번 보여 줘, 하고 아다마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 아다마는 소리내어 랭보의 시를 읽었다. 태양이 빛의 띠를 만들어내며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다마는 시집을 빌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시집에 덧붙여 크림과 바닐라 펏지의 앨범까지 빌려주었다. 지금까지 32년의 인생 중에서 세 번째로 재미있었던 1969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17세였다. 아이언 버터플라이 1969년 우리는 17세였다 그리고 동정이었다. 17세에 동정이라는 것은 딱히 자랑할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지만, 중요한 일이었다. 막 16세가 되던 해 겨울, 가는 가출했다. 그 이유는 수험체제의 모순을 느꼈고, 당시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삼파계 전학련의 엔터프라이즈 투쟁의 의미를 학교와 가정의 외부에서 객관적인 시작으로 생각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역전 마라톤에 참가하기 싫어서였다. 나는 옛날부터 장거리를 싫어했다. 중학교 때부터 싫어했다. 물론 32세가 된 지금도 정말 싫다. 걷는 버릇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달리다가도 어느 샌가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옆구리가 아프다든지, 토할 것 같다든지, 현기증이 난다든지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그냥 약간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면 자동적으로 다리가 걸어갈 뿐이었다. 사실 나의 폐활량은 6000을 넘었다. 고등학교 입학 직후 나는 12, 13명의 학생과 함께 육상부에 차출되었다. 육상부 부장은 일본 체육대학 출신으로 걺은 선생이었다. 2년 후에 전국체전이 나가사키에서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젊은 체육교사가 여섯 명이나 부임해 왔다. 그들은 제각기 유도, 핸드볼, 농구, 창던지기, 수영, 육상 장거리 선수 출신들이었다. 1969년 우리가 국체분쇄를 외치며 일어섰을 때, 그들은 희생 양으로 우리들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그들 역시 우리들을 미워했다. 가와사키라는 이름의 육상부장은 5000미터 부문에서 전국 3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유명한 코미디언과 얼굴이 닮은 그 사람은 늘 육상부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15세 청소년에게는 도저히 찾아보기 힘들만큼 훌륭한 폐활량을 가지고 있다. 자네들을 중심으로 역전 마라톤 팀을 만들어 반드시 우승하고 싶다. 물론 강제로 하진 않겠지만, 장거리를 달릴 운명을 타고났다는 자각과 각오를 가지고 반드시 전국체전에서 입상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길 바란다. 이상" 나는 내가 장거리 주자에 적합한 심폐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겨울방학이 끝나자, 체육시간에는 오로지 로드 레이스 연습만 했다. 1학년 때, 나는 가와사키에게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었다. 뛰다가고 갑자기 걸어버리는 나를 보고 가와사키는 인간 쓰레기라고 말했다. "잘 들어, 달리기는 모든 스포츠의 아니,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행위의 기본이야. 마라톤을 인생에 자주 비유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야자키, 너는 폐활량이 6100이나 되는데도 늘 허우적거리기만 하고, 한번도 완주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 네 놈은 쓰레기다.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5세의 소년에게 '인간 쓰레기', '인생의 낙오자'라고 해도 좋단 말인가? 그것이 과연 교육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그렇지만 가와사키의 기분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처음 5백 미터까지만 열심히 달리는 척하다가, 뒤에 처진 허약체질들과 함께 비틀스니 여자니, 오토바이니 하는 잡담을 나누면서 걷고는, 골인 5백미터 전부터 전 속력으로 달려 골인한 다음에도 숨결하나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널 잘못 키워서 그래"하고 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서 귀국하여 고생이 심했던 어머니가 말했다. 조금이라도 피로하면 그만둬 버리고, 조그만 장애만 있어도 하던 일을 놓아 버리며, 편한 쪽으로만 하염없이 흘러가려는 것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었다. 슬픈 일이지만 사실이다. 그래도 1학년 때는 로드 레이스에 참가하였다. 북고의 로드 레이스 코스는 교문을 출발하여 에보시다케라는 산의 중턱까지 뛰어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7킬로미터의 거리였다. 나는 허약체질들과 끈기 없는 애들과 함께 쉬엄쉬엄 달렸다. 5분이나 늦게 출발한 여학생들이 우리를 추월한 다음에도 산의 중턱까지 한없이 느긋하게 걸어 올라갔다가 내리막길에 들어서는 마치 총알처럼 달렸다. 먼저 도착한 다른 대부분의 학생들은 숨을 헥헥거리며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있었고, 토하는 아이들은 양호실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나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는 학생들 틈바구니로 <어데이 인 더 라이프>를 흥얼거리면서 남자 662명 중 598위로 골인 테이프를 끊었다. 그래서 가와사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선생들로부터 인간 쓰레기라는 욕을 얻어먹었던 것이다. 상처받기 쉬운 나는 다시는 그런 욕을 먹기 싫어서 16세 겨울, 가출했다. 나는 3만 엔도 채 안되는 저금을 모두 빼내어 규슈의 대도시 하카다로 갔다. 그 때의 가출에는 로드 레이스로부터의 도피 외에도 또 다른 하나의 과제가 있었다. 동정을 버리는 것이었다. 하카다에 도착하자마자 당시 규슈에서 가장 호화로웠던 덴신의 젠니쿠 호텔에 체크인하고, 조지 해리슨 풍의 트위드 재킷으로 갈아입은 다음 거리로 나섰다. 낙엽이 떨어진 포도를 <쉬 이즈 어 레인보우>를 흥얼거리면서 걷고 있는데, 학생!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엷은 자주색 노을이 깔린 시간이었다. 나를 부른 여자는 은색 재규어 E형을 탄 마리안느 페이스풀과 무척 닮은 일본 산 누나였다. 누나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까닥거리면서 나를 불러, 재규어의 문을 열고 잠깐 부탁할 게 있으니 타지 않을래 하고 유창한 표준어로 말했다. 재규어에 오르자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강렬한 향수 내음이 풍겼다. 사실은...하고 누나는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난 말이야 좀 곤란한 사건에 휘말려 할 수 없이 낙향한 초일류 모델이야, 지금은 나카스에 있는 '사보덴'이라는 초 A급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손님이 치근덕거리는 바람에 애를 먹고 있거든, 말이지, 구마모토의 깡패 같은 목재소 사장이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자꾸 귀찮게 구는 거야. 난 돈이 아쉽지도 않고 그런 배불뚝이의 정부가 되기는 죽어도 싫어서, 불치의 심장병을 앓고 있는 동생을 돌보며 살아가는 몸이라고 거절했는데, 사실 나한테는 동생이 없거든, 그런데 그 자랑 약속한 날이 바로 오늘이란 말이야... 요컨대, 하루만 동생 흉내를 내달라는 부탁이었다. 은빛여우털 코트와 붉은 매니큐어, 짧은 미니스커트 아래로 죽 빠진 다리에 눈길을 빼앗긴 채 나는 물론 OK, 하고 대답했다. 누나와 함께 들어선 곳은 강변에 서 있는 한 건물을 7층 사무실이었다. 그것이 바로 목재소 사장 아저씨의 아지트였다. 아저씨는 목이 굵은 60대의 사나이로 부하가 7명이나 있었다. 문신을 새기고 있는 부하도 있었다. 심장병치고는 안색이 좋군, 하고 아저씨는 나를 쳐다보더니, 내가 수술비를 대지, 하고 가슴을 탁 쳤다. 우리는 돈에 궁한 것도 아니니 당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나는 말했다. 부하들이 뭐라고! 하고 화를 내면서 그중 두 사람이 품속에서 칼을 빼들었다. 죽이려면 나를 죽여라, 라고 소리치며 나는 누나를 가로막고 섰다. 일찍이 부모와 사별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그 할머니도 4년 전에 돌아가셔, 이 세상에 단 둘만 남은 누나와 나는 외로움을 견디면서 살아왔다. 우리는 둘이서 행복하게 살기만을 늘 꿈꾸어 왔다고 나는 처절한 목소리로 대사를 읊었다. 아저씨는 정이 많은 사람인지 내 말에 감동하여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내가 졌다! 하고 중얼거렸다. 누나는 기뻐하며 아저씨의 사무실을 나와서는 나에게 저녁을 사 주었다. 프랑스 요리를 풀 코스로. 미성년자라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속삭이면서 붉은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식사가 끝나자 누나는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영화에 자주 나오는 넓은 원 룸 맨션으로, 킹 사이즈 베드가 방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나 샤워 좀 하고 올께, 라며 누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침착해야 해, 침착해야 해, 하고 중얼거리면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 바지춤을 올렸다 내렸다 엉거주춤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는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하고 검은 네글리제를 입고 내 앞으로 다가와, 학생! 정말 고마와, 상으로 내 몸을 줄께, 그리고 재규어도 네가 가져, 하고 말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가출에서 돌아온 다음, 반 친구들에게 들려 준 나의 창작 드라마다. 사실은 다음과 같은 드라마였다. 하카다에 도착한 나는 바로 세 편 연속상영 포르노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라면과 만두로 배를 채운 다음, 스트립쇼를 보러 갔다. 쇼를 보고 거리로 나온 게 밤 한 시, 나는 강변 길을 무턱대고 터벅터벅 걸었다. 그 때, 학생! 한 번 하고 가, 하고 뚜쟁이 할망구가 나를 불러 세웠다. 할망구에게 3천 엔을 지불하고 지저분한 여인숙으로 들어서니, 안녕! 하면서 눈 주위가 거무튀튀한 너구리같은 아줌마가 나타났다. 너구리의 배를 보는 순간, 나는 걱정하면서 울고 있을 지도 모를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울고 싶은 심정이라 딱지를 떼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도 사라져 버렸지만, 너구리는 사정없이 나의 옷을 홀딱 벗겨버렸다. 너구리는 빨리 일을 끝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의 그것이 서 주지 않았다. 너구리를 앞에 두고 그게 설 리가 없는 것이다. 할 수 없군, 내가 다리를 벌려 보여 줄게, 학생 혼자서 어떻게 해 봐, 하고 너구리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곳을 처음 보았다. 별 볼일 없어 보였다. 나는 너구리를 쫓아버렸다. 너구리는 방을 나서면서 1만 엔을 챙겼다. 나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여인숙을 나서 다시 강둑 길을 걸었다. 이제 돈도 반이나 없어졌으니 역의 대합실에서나 잘까 하고 역으로 갔다. 나는 말끔하게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 풍의 남자에게 역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지금 시간에 역으로 가서 뭘 할 생각이냐고 남자는 물었다. 역에서 잘 생각이라고 말하지, 남자는 그럼 자기 방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기분은 엉망이었지만 남자의 친절이 고마워서 남자의 아파트로 따라갔다. 남자는 콘 비프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다. 남자는 호모였다. 두 번이나 재난을 당하다 보니 나는 정말 화가 치밀었다. 가는 가방에 든 등산용 나이프를 꺼내 테이블에 꽂았다. 남자가 갑자기 사타구니를 만지면서, 괜찮아, 좋지, 하고 속삭이면서 입술을 빼앗으려 했던 것이다. 테이블에 꽂힌 나이프를 본 순간 남자는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였다. 할머니와 너구리에게 갈취 당한 1만 3천엔 (거기 가다 여인숙비 4천엔)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쳐갔지만, 왜 그다지 일이 꼬이는 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참을 수가 없었다. 어이, 화장실은 어디야? 나이프를 빼든 사나이의 대사 치고 이만큼 어처구니없는 말도 없을 것이다. 화장실에 들어선 순간, 남자가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줌을 누면서, 잠깐! 이건 강도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틀림없이 경찰에 신고할 것이다. 빨리 도망쳐야 해!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오줌발은 왜 그리 긴지... 호모의 아파트를 나와 나는 달렸다. 로드 레이스가 싫어서 가출한 주제에 걸음에 날 살려라 하고 전 속력으로 달리는 내 자신이 너무도 서글펐다. 여느 때의 체육수업 때보다도 열심히 달렸다. 필요할 때는 빨리 오래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 정도로 달렸다. 달리는 사이에 날이 밝아왔다. 꽤 큰 공원이 보였다. 나는 공원 수돗가에서 물을 마셨다. 벤치에 누워 아침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햇빛을 받고 몸이 따뜻해지자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침해를 기다리면서 잠깐 졸았다. 볼에 닿는 부드러운 햇살과 음악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안개가 뿌옇게 깔린 공원에는 작은 스테이지가 마련되어 있었고, 장발의 젊은이가 악기를 늘어놓고 튜닝에 열심이었다. 스테이지에는 드럼이 없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마이크를 단 걸로 봐서 포크송을 연주할 모양이었다. 신주쿠에서 포크 집회가 자주 열린다는 신문보도가 나온 후로, 규슈에서도 포크 연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역시 포크 연주회였다. 아침 안개가 걷힐 무렵 연주가 시작되었다. 긴 머리에 턱수염을 기르고 더러운 점퍼를 입은 남자가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노래를 불렀다. 간판에는 '주최 :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이라 적혀 있었다. 나는 포크를 싫어했다. 베평련도 싫었다. 기지의 거리에 사는 고교생의 눈에 포크송이란 나약하고 수준 이하의 음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을 때도, 바보 자식들! 하고 멀리서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연주 중간 중간에 연설이 들어갔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물러나라! 라는 틀에 박힌 내용의 연설이었다. 중학교 동급생 중에 돼지처럼 살이 찐 마스다 초코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서도부 학생으로 자주 상을 받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중학 2학년 때 나는 마스다 초코에게 연애편지를 받았다. 나와 편지를 주고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헤세를 좋아해요, 언젠가 자치회 시간 때 야자키의 헤세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기뻤어요, 편지로 헤세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나는 다른 여학생을 좋아했기 때문에 답장은 쓰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어느 날, 마스다 초코가 머리에 물을 들이고, 흑인 병사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 집 옆에는 창녀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미군 병사와 그녀들이 섹스 하는 모습을 몇 번 훔쳐본 적이 있었다. 붓글씨와 헤세가 흑인 병사의 성기로 변해 버린 사연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베평련의 평화로운 반전 포크송을 듣는 사이에 나는 왠지 기분이 우울해져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너무 피로하기도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포크 모임에 욕을 퍼붓는 내 곁에 한 소녀가 머리를 비닐 봉지에 박고 열심히 신나 냄새를 맡으며 서 있었다. 너도 포크가 싫니? 하고 '신나 소녀'는 말했다.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나, 아이라고 해, 하고 어딘가 나사가 하나 정도 빠진 듯한 표정으로 신나 소녀는 말했다. 나는 아이와 아이언 버터플라이, 다이아몬드, 프로클하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이 반쯤 간 그 아이와 가는 손을 잡고 공원을 걸었다. 아이는 미국으로 가서 그레이트풀 데드를 보는 것이 꿈이라 했다. 걔는 미용사였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을 때마다 그걸로는 도저히 미국에는 갈 수 없을 것 같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불량소녀가 되고 말았다. 찻집에서 크린 소다를 마시고, 록 찻집에서 도어즈를 듣고, 백화점을 어슬렁거리다가 식당에서 튀김우동을 먹고, 밤을 기다렸다가 디스코테크에 갔지만, 불량배 사절이라 하여 나와 아이는 쫓겨나고 말았다. 나를 안아도 좋아, 하고 아이는 자기 집으로 나는 데리고 갔다. 조금 모자란 듯이 보이는, 록을 좋아하는 신나 소녀. 동정을 바치기에는 이상적인 상대라고 생각했다. 북고 영어연극부의 머리 좋은 아가씨에게 동정을 바쳤다가는 결혼이라는 굴레를 쓸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너구리에게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의 집은 도심지에서 벗어난 높은 곳이 자리잡고 있었다. 너무 반듯한 집이라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어머니가 문을 열어 주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등학교, 중퇴, 사회인, 불량, 아빠의 회사, 세상의 눈, 자살 따위의 말을 늘어놓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아이는 어머니를 무시하고 나를 현관 안으로 끌면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나는 주춤거렸다. 거구의 사나이가 나타나 나를 째려보았기 때문이다. 사나이는 아이의 손에 들린 비닐 봉지를 빼앗고,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나가! 하고 나에게 고함을 쳤다. 두들겨 맞을 것 같아서 나는 도망쳤다. 아이는 미안해, 하고 힘없이 속삭이면서,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는 하카다가 싫어져, 구마모토를 거쳐 가고시마로 가는 배를 타고 아와미오시마로 갔다. 딱지는 결국 떼지 못했다. 더욱 슬픈 일은, 이 주일 후에 학교로 돌아왔지만, 오랜 비 때문에 로드 레이스가 연기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사연으로 17세의 나는 아직 순결한 몸이었다. 그러나 가볍게 여자를 손에 넣는 솜씨 좋은 17세도 있었다. 내가 드럼을 맡고 있는 밴드 '시라칸스'의 베이스 기타 후쿠시마 키요시였다. 우리는 그 친구를 후쿠라고 불렀다. 후쿠는 17세 밖에 안 된 주제에 중년남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몸집도 컸다. 후쿠와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함께 반년간 럭비부에서 활동했다. 럭비부의 옆방은 육상부였다. 2학년 중에 현 기록을 보유한 유명한 선수가 있었는데, 복도에서 후쿠와 나는 그 선수와 얼굴을 마주쳤다. 그 선수, 1학년이지만 20대 중반이나 되어 보이는 후쿠를 선배로 착각하고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후쿠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어이, 너 상당히 빠르던데, 라며 어깨를 툭 쳤다. 예, 백미터 11초 4입니다. 하고 직립 부동자세로 그 선수는 대답했다. 그래, 열심히 해 봐, 하고 후쿠는 선배 같은 말투로 격려해 주었다. 나와 후쿠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육상부와 럭비부 선배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후쿠는 그런 사나이였다. 우리는 늘 그에게, 어떻게 하면 여학생을 꼬실 수 있는데? 하고 물었다. 그러면 그의 대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마 페스티벌에서 상영할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던 나는, 아다마가 눈 깜짝할 사이에 베르하우엘 8밀리 카메라를 조달해 온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급생 중에 카메라를 가진 사람은 없는가 하나하나 면밀히 조사한 다음, 시로쿠지에게 부탁하여 반 협박으로 손에 넣은 것이다. 다음 일은 주연 여우를 찾는 것이었다. 마츠이 카즈코밖에 없다고 나는 강력히 주장했다. 아다마와 이와세는 그건 무리라고 말했다. 마츠이 카즈코는 '레이디 제인'이라는 닉네임을 가졌을 정도로 미소녀인 데다, 영어연극부 아닌가. 레이디 제인 아마추어 영화제작이 유행이었다. 도쿄의 고등학생이 필름 비엔날레에서 베테랑 전위 영화작가들을 제치고 그랑프리를 손에 넣은 이래로 영화제작은 열화처럼 번져나갔다. 모두들 영화란 간단하고 쉬울 뿐만 아니라 최첨단의 표현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들 생각했는지 이상한 일이다. 나나 이와세 할 것 없이, 자작의 언더그라운드 영화 따위는 한편도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동경하고 있었다. 나치 점령하의 대서양 연안의 프랑스인들이 한번도 본 적 없는 미국 병사들을 동경한 것과 비슷하다. "좋아. 이렇게 하지, 잘 들어 봐! 고다르 풍의 즉흥적인 촬영은 파하고,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쓰는 거야, 뭐라 할까? 아주 끈끈한 이야기를 하나 만드는 거야. 케니스 앵거풍으로 말이야. 그리고 카메라 워크는 조나스 메카스 풍으로 하고."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아다마와 이와세는 '응, 응'하고 듣고 있긴 했지만, 물론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다. 여하튼 사랑에 빠지고 싶어하는 여자처럼, 무조건 영화란 걸 만들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따스한 봄 4월 하순의 어느 날, 나와 이와세와 아다마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영어연극부의 연습을 견학하러 갔다. 규슈대회 최고상을 목표로, 북고가 자랑하는 미소녀들은 셰익스피어에 푹 빠져 있었다. 강당 입구 부근은 이미 남학생들로 꽉 들어 차 있었다. 놀자파 학생들을 중심으로 서로 밀고 당기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는데, 나팔바지에 뱀가죽 샌들을 신은 시로쿠시는 그 무리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시로쿠시 유지는 1학년 때부터 마츠이 카즈코에 푹 빠져 있었다. 왜 깡패 같은 사나이들은 한결같이 청순한 여자애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물론 마츠이 카즈코는 전혀 상대도 해 주지 않았다. "어, 겐! 뭐하러 왔니?" 시로쿠시는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영어공부 좀 해 보려고."라는 나의 말이 거짓인 줄 뻔히 아는 시로쿠시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거짓말하지마." 왜 깡패 같은 사나이는 나같이 순진한 학생의 거짓말을 단숨에 알아채는 것일까? "누굴 보러 왔는지 이실직고해 봐. 유미? 마사코? 에미코? 사키코?" 영어연극부에는 유명한 미소녀가 그렇게도 많았던 것이다. 나와 이와세와 이다마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벌써 시로쿠시 유지는 눈치를 채 버렸다. "설마 사랑스런 나의 천사 카즈코를 보러 온 건 아니겠지? 너 정말 카즈코를 보러 온 건 아니겠지?" "아니야, 아니야." 그리고 시로쿠시는 나이프를 나의 허벅지에 갖다댔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나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카즈코에 손을 대면 겐! 아무리 너라 해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시로쿠시 유지는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다마가, 유지 그만 둬! 하고 말하자 금방 멱살을 놓으면서, 농담, 농담도 못하니, 하고 웃었다. 아다마는 설명했다. "유지, 잘 들어, 겐은 사실 영화를 찍고 싶어해, 저번에 마스가키에게 8밀리 카메라 빌렸잖아. 그 카메라로 영화를 찍으려는 거야." "영화? 그게 뭔데? 카즈코와 무슨 관계가 있는데?" "마츠이 카즈코를 주연여유로 할 생각이란 말이야"하고 나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유지, 북고 학생이 영화를 만드는 것은 북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야. 그런 역사적인 영화를 찍는 데 누구를 주연으로 하겠어? 마츠이 카즈코를 주연으로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구를 주연으로 하겠니?" 하고 아다마는 멋들어지게 유지를 설득해 버렸다. 시로쿠시 유지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 "그랬구나, 그렇다면, 응, 좋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츠이 카즈코 외에는 있을 수 없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카즈코를 잘 관찰해야 어떤 영화를 찍을지 이미지 업 할 수 있지 않겠어?" 아다마가 그렇게 말하지 시로쿠시 유지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나의 손을 잡더니, 알았어, 아사오카 루리코보다 더 예쁘게 찍어야 해, 하고 말함과 동시에 , 강당 입구를 가득 메운 학생들의 엉덩이를 마구 걷어차면서 자리를 비키게 하고 맨 앞에 나를 세워 주었다. 마츠이 카즈코가 주연여우를 맡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시로쿠시는 흥분하고 말았다. 주제가는 이시하라 유지로가 좋아, 마츠이 카즈코는 고아원 출신의 버스 안내양으로 하는 게 어때, 살인자 역이 있으면 내가 나가면 좋을 텐데, 하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열에 뜬 시로쿠시의 모습을 보고 아다마는, 겐,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하고 나에게 속삭였다. 만일 마츠이 카즈코가 이런 광경을 목격이라도 한다면 절대로 영화에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시로쿠시 유지와 함께 영화, 영화, 영화, 영화라고 떠들어대는 광경을 목격 당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왜냐하면 마츠이 카즈코가 시로쿠시 유지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다마는 정말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나이다. "겐, 혼자서 갔다 와. 아직 마츠이 카즈코는 대기실에 있을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여자들만 있는 방에 내가 어떻게 가니?" "겐은 신문부잖아?" "그렇지." "취재하러 왔다면 되잖아." 그리하여 나는 혼자서 강당 한구석에 있는 미소녀의 성역, 영어연극부 방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나는 주인공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남학생들은 모두 선망의 눈길로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힘 내! 하고 모자를 벗어 흔드는 사나이도 있었다. 같이 가겠다고 성화를 부리는 시로쿠시 유지를 아다마가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었다. 방에는 꽃향기가 가득했다. 타이거즈의 '꽃 목걸이'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꽃 피는 여자애들이 꽃 피어 난 들판에서 영어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첫 말이 어려웠다. 아, 저, 안녕, 사실은, 따위의 말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좀 폼이 날 만한 말을 열심히 찾았지만, 생각나는 게 없었다. 차라리 영어로 인사를 할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영어연극부 고문 요시오카 선생이 나를 보고 걸어왔다. 늘 영국제 양복을 입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포마드를 물처럼 덮어 쓴 중년의 인상 나쁜 사나이였다. "자네는 뭐야?" 너 같은 자식이 이렇게 신성한 장소에 무슨 일로? 요시오카의 어투는 그런 느낌을 주었다. "아, 저, 저는 신문부의..." "야자키! 네 이름은 알고 있어, 네 반에서 영어문법을 가리키는 내가 너를 모를 리가 없지." "예, 야자킵니다." "넌 매일 수업을 빼먹는 주제에 여긴 뭐하러 왔어?" 이거 큰일이다. 이런 선생이 이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불리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나이지만, 성격이 온후해서 손찌검 따위는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놓고 수업을 빼먹곤 했던 것이다. 학기초의 시험도 빵점이었다. 검은 테 안경 속의 두 눈이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긴 뭘 하러 왔어. 자세 실력으로 영어연극은 무리일 텐데?" 저 안쪽에서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소녀들은 이쪽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취재하러 왔습니다." "무슨 취재?" "베트남 전쟁" "난 아직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는데. 너도 알겠지만, 우선 신문부 고문 선생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 선생이 먼저 나에게 이야기를 해서 나의 동의를 받는 절차를 밟아야 해. 제멋대로 취재하는 것은 안 돼." 도쿄와 마찬가지로 규슈의 신문부도 반항하의 소굴이었다. 다른 부서와 관계도 단절되어 있었다. 학교는 학생 조직을 가장 싫어했다. 신문부의 사소한 취재활동 조차 사전에 고문선생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었다. 집회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생회는 학교측의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을 잘 듣는 어용학생회를 내세워 모든 것을 학생 스스로 결정한 듯이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학생회는 학교측의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을 잘 듣는 어용학생회를 내세워 모든 것을 학생 스스로 결정한 듯이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건 형무소와 다름없다. 군사정권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이다. 구역질이 난다. "그럼, 취재가 아니라고 하지요." "그럼 뭐야?" "그냥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할까 해서요." "너도 보다시피 이렇게들 바빠. 그럴 여유는 없어." 모두들 프린트된 영문 대본을 묶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각사각하는 종이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서도 반은 나와 요시오카의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마츠이 카즈코는 연필을 볼에 갖다 대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기사슴 밤비 같은 눈이었다. 남자에게 전의를 갖게 하는 눈이었다. "참, 기가 차서." 혀를 차면서 내가 말했다. 놀란 듯, 요시오카의 눈이 커졌다. "기가 차다니, 뭐가?"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셰익스피어 따위를. 베트남에서 하루에 몇 사람이나 죽어 가는지 아세요? 선생님." "뭐라고?" "저 창 밖으로 보이는 항구에서 매일 사람을 죽이기 위해 미국의 군함이 출항하고 있는 걸 모르시나요?" 요시오카는 당황하고 있었다 시골 선생은 반항아를 처리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단순한 불량아는 두들겨 패주면 되지만, 이런 경우는 그렇게도 할 수 없다. "신문부 고문 선생에게 보고할 테다." "선생님은 전쟁이 좋습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요시오카의 젊은 시절은 전쟁시대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요시오카의 안색이 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쟁은 편리하다. 선생과의 토론을 벌일 때도 적절히 이용할 수 있다. 전쟁은 부도덕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선생이다 보니 자연히 입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런 대화가 시작되면 반드시 도망친다. "야자키, 돌아가, 여긴 지금 바빠." "전쟁을 싫어하시는 가요?" 요시오카는 예술파였다. 몸집도 크지 않다. 군대에도 갔을 것이다. 군대에서 많이 당할 그런 타입이다. "싫어한다면 반대해야지요. 비겁합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관계 있습니다. 미군은 지금 우리 항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말이죠." "자네가 생각할 그런 문제는 아니야." "그럼 누가 생각해야 할 문제인가요?" "야자키, 그런 일은 대학을 나와, 취직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만들고 어른이 된 다음 말하도록 해." 개새끼, 뭘 말하란 말이야. "어른이 아니면 전쟁에 반대할 수 없단 말인가요? 그런 전쟁에서 어린이는 죽지 않는가요? 고교생은 죽지 않는가요?" 요시오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마침 육상부 부장을 맡고 있는 체육선생 가와사키가 곁을 지나갔다. 유도부의 아이하라도 함께였다. 나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찬성한다는 것이에요, 전쟁에 찬성한다는 것이란 말이에요, 교육자가 사람 죽이는 일에 찬성해도 좋단 말인가요, 하고 요시오카를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 나의 머리카락을 잡은 아이하라는, 내 뺨을 세 번 치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야자키이이이이! 라고 아이하라는 외쳤다. 아이하라는 우익 학생들이 득실거리는 대학을 나온 멍청이인데, 중량급에서 전국우승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고, 귀가 뭉개진, 공포 그 자체였다. 일어서어어어어! 하고 그는 외쳤다. 사람을 자빠트려 놓고 일어서라는 것은 또 뭐야. 화가 치밀었지만 뭉개진 귀와 내려앉은 코를 보는 순간 나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섰다. 이 자식, 선생님께 무슨 말버릇이 그래애애애애, 하고 다시 내 뺨을 갈겼다. 손바닥이 두툼하고 딱딱해서 소리도 잘 난다. 야자키, 주둥이 하나는 잘 놀리는 것 같은데, 달리기도 못하는 주제에 입만 살아 가지고... 이것은 가와사키의 대사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때 로드 레이스에 대해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렇지만 울었다가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마츠이 카즈코가 보고 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아이하라는 빙긋이 웃고 있다 .아이하라는 똥통 대학을 나온 콤플렉스 때문에 우리 같은 학생들을 두들겨 패는 것을 너무너무 즐긴다. 시로쿠시 유지 패거리도 아이하라의 표적이 되고 있다. 유도 수업 중에 조르기를 당한다든지, 불알을 걷어채인다든지, 집어던져도 벽 쪽으로 던진다든지, 귀를 잡고 다리를 건다든지. 힘센 선생은 역시 강하다. 나는 머리카락이 잡힌 채 교무실 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시로쿠시 유지, 아다마, 이와세는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서, 설마 하고 유지는 외쳤다 . 서, 설마 카즈코를, 카즈코를 덮친 것은 아니겠지... 교무실 앞에서 한 시간 벌을 섰다. 벌을 설 때 가장 싫은 것은 오가는 선생들이 하나같이 무슨 짓을 했어? 하고 묻는 것이다. 그 때마다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문부 고문 선생과 담임 선생이 요시오카와 가와사키와 아이하라에게 사과했다. 나를 위해 두 선생이 창피를 무릅쓰고 사과한 것이다. 여하튼 카즈코와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말았다. 아다마에게 8밀리 카메라를 빼앗긴 2학년 학생이 찾아왔다. 마스가키 다츠오라는 학생이었다. 마스가키, 전형적인 구두쇠 이름이라고 나와 아다마는 킥킥거리고 웃었다. 마스가키는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스가키는 나리시마와 오다키 일파가 주재하는 정치 클럽에 들어 있었는데, 투쟁적인 테마가 아니면 카메라를 빌려 줄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해 온 것이다. 알았어, 알았어, 하고 아다마는 마스가키를 달랬다. 투쟁 그 자체를 테마로 하지 않더라도 이를테면 고다르처럼 상징적인 수법을 사용할 수도 있잖아? 그런 말로 하급생을 속였다. 여하튼 오다키와 나리시마를 만나 달라는 말을 남기고 마스가키는 사라졌다. "안녕"하는 시원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등교시간, 언덕 길, 뒤돌아보니 거기에 아기사슴 밤비가 서 있었다. 마츠이 카즈코였다 .몸이 떨렸다 "아, 안녕"하고 나는 웃으면서 마츠이 카즈코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너무 황홀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야자키, 버스로 오니?" 통학수단이 뭐냐는 말일 것이다. "아니, 걸어서. 마츠이는?" "난 버스." "버스, 복잡하지?" "응, 그렇지만 익숙해졌어." "그런데, '레이디 제인'이란 말은 누가 붙여 주었니?" "선배" "롤링스톤즈의 곡에서?" "응, 난, 그 곡 좋아해." "그래, 참 좋은 곡이야. 스톤즈 좋아해?" "아니, 스톤즈는 잘 몰라, 듀란이나 비틀스를 좋아해. 그렇지만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사이먼 앤 가펑클." "아, 그러니, 나도 좋아해." "야자키, 레코드 가지고 있니?" "응, '목요일 아침 오전 세시'하고 '파슬리 세이즈 로즈 메리 앤 타임'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하고." "'파겐드'는?" "물론 가지고 있지." "좀 빌려줄래?" "좋아." "와, 고마워. 난 그 레코드 가운데서 '동물원에서'가 제일 좋아. 가사도 최고이고." "그렇지, 최고야." 나는 어떻게 파겐드를 손에 넣을까 궁리해 보았다. 아다마와 이와세의 호주머니를 털어서라도 오늘 중에 '파겐드'를 사지 않으면 안 된다. 주연여우가 좋아하는 것인 만큼 어쩔 수 없다. "야자키, 늘 그렇게 사색하면서 지내니?" "뭘?" "지난번에 요사오카 선생님께 한 말." "아, 베트남?" "응." "딱히 생각하는 건 없어. 그냥 뉴스를 통해 귀에 들어오니까." "책도 많이 읽니?" "응, 읽어." "재미있는 책 있으면 빌려 줘." 학교에 이르는 이 언덕길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빌었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마츠이 카즈코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예쁜 여학생과 함께라면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텔레비전 학생들의 데모와 바리케이드가 자주 나오잖니?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지만, 왠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에?" "셰익스피어 따위 별볼일 없다고 야자키는 말했잖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에에?" "사이먼 앤 가펑클은 가슴에 와 닿지만 말이야, 셰익스피어에게는 그런 걸 느낄 수 없어." 기어이 학교에 도착하고 말았다. '파겐드'를 약속하고 바이바이,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헤어진 다음에도 마치 꽃밭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내가 '바리케이드 봉쇄를 하자'고 외치자 아다마는 깜짝 놀랐다 .바리케이드나 데모에 참가하는 사람을 좋아해, 라고 마츠이 카즈코가 말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빌려준 마스가키하고도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나리시마와 오다키의 아지트를 한번 방문하도록 하자"하고 아다마가 말했다. 다니엘 콘반디 '사세보 북고전학공투회의' 이것이 오다키와 나리시마가 주재하는 고교생 조직의 명칭이다. 북고 전공토인 셈이다. 아지트는 사세보 역 위에 있었다. 위라고 해서 역의 2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세보의 거리는 나가사키와 마찬가지로 언덕길이 많다. 배후에는 산이 바싹 다가서 있고, 둥그런 해안선을 따라 평지가 이어지고 있지만, 무척 좋아서 항구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이 거리의 손바닥만한 평지에는 백화점, 영화관, 상점가, 미군기지 따위가 자리잡고 있다. 어느 기지촌이나 마찬가지로 미군은 항상 일등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북고 전공투의 아지트는 역에서 북으로 뻗은 언덕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서 담뱃가게 이층에 있었다. "오로지 비탈길이로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다마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사세보 시민의 98퍼센트는 높은 곳에 살고 있다. 순 중턱에 집이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언덕길을 달려 내려와 번화가에서 놀다가 피로하고 배가 고프면 다시 언덕을 올라 집으로 돌아간다. 담뱃가게에는, 거의 모든 담뱃가게가 그러하듯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모를 그런 할머니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힘차게 아다마와 나는 인사를 했지만 할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은 줄 알았다. 아다마는 그 할머니를 정교하게 만든 인형으로 생각한 듯하다 .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등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앉아 양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있다. 안경 저 안쪽의 눈은 열려 있었다. 우리는 걱정이 되어 할머니가 눈을 깜빡일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할머니의 눈꺼풀은 너무 늘어져 있어서 어지간히 주의해 보지 않고는 깜빡이는 순간을 포착할 수 없었다. 처마 밑에서 코스모스인 듯한 꽃이 말라붙어 있었다. 할머니의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역시, 인형 아니면 미라임에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려는 순간 할머니의 눈의 깜빡거렸다. 아다마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현관에는 '북고경제연구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간판이라곤 하지만 빗물에 얼룩진 마분지에 지나지 않았다. 현관 곁의 계단을 올라갔다. 어둡다. 일본식 집은 왜 이렇게 한결같이 채광이 좋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아다마는 일본인 모두가 색을 너무 밝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의외로 아다마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아지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다미 12장짜리 방의 사방 벽에는 게바라와 모택동과 트로츠키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등사도구와 문고본, 싸구려 포크 기타, 핸드 스피커, 사청동 해방파의 기관지 따위가 널려 있었다. 아마도 이들이 나가사키 대학의 자치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때때로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왠지 기분이 으스스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이불과 제게, 그리고 화장지를 바라보면서 아다마가 말했다 .일본인 주택이 채광이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반체제파의 아지트는 분위기 자체가 어둡다. 이불이 있다는 것은 오다케와 나리시마가 여기서 잠도 잔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오다케 일파에는 여고생도 끼어 있었다. 북고 여학생은 아니다. 여상 학생들인 듯이 보였다. 이불과 베개와 화장지와 여상 학생. 이보다 더 음침해 보이는 조합은 없을 것이다. 10분 정도가 지난 후에 이와세가 방으로 들어섰다. 땀을 뻘뻘 흐리면서 커피 우유를 세 개 사왔다. 빵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 우리는 커피 우유를 마셨다. 벽에 걸린 싸구려 기타를 들더니 이와세가 손가락으로 퉁기기 시작했다. 곡명은 '때로는 어머니 없는 아이처럼'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지방 학생들에게 기타는 보물이었다. 기타를 살 수 없는 계급의 소년들은 우쿨렐레를 샀다. 우쿨렐레는 하와이인 밖에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때 이유도 없이 하와이안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전자기타가 유행한 것은 내가 중학교 시절이었다 .전자기타는 테스코, 앰프는 구야톤, 드럼은 펄, 깁슨, 팬더, 뮤직맨, 로랜드, 바이스테는 잡지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벤처스 붐이 지나고 비틀스가 대표하는 시대가 시작되자, 존 레논의 리켄바커를 흉내낸 세미 어쿠스틱 가타가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베평련이나 반전 포크가 유행하자 야마하가 새로운 타입의 포크 기타를 발매하였는데, 모두들 기를 쓰고 그것을 사들였다. 그러나 북고 전공투의 아지트에 있는 기타는 야마하가 아니라 야마사라는 이상한 회사의 제품이었다. 이와세는 야마사의 기타로 <때로는 어머니 없는 아이처럼>을 부르고, <다케다의 자장가>를 이어서 불렀다. 한결같이 한두 개의 코드만으로 부를 수 있는 간단한 노래였다. 슬픈 노래를 두 독이나 이어서 부르는 바람에 감상적이 되었는지 이와세는 '겐과 아다마는 졸업하고 대학으로 갈 테지?'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이 당시까지 아다마는 국립대학의 의학부를 지망하고 있었다. 의학부가 꿈속의 꿈으로 변해 버리리란 것도 모르고 생각만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자세히는 기억에 없지만, 아마도 딱히 진학 문제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당시부터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성적이 급강하하는 현실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안했고 초조했다. 탈락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1969년 당시의 탈락자들은 무척 즐겁게 보였다. 대학 거부선언을 책으로 묶어낸 고교생도 있었고, 데모대 가운데는 반드시 예쁜 누나 학생이 끼어 있었다. 문제는 여자다. 탈락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암컷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상대라든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불특정 다수의 암컷이 문제였다. 암컷에게 잘 보일 보장이 없을 때, 남자들은 살맛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와세는 어쩔 생각이니?" 하고 아다마가 물었다. 이와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만 모인 반에 있었다. "몰라." 이와세는 그렇게 대답하고, "대학에는 안 갈 것 같아."하고 덧붙여 말했다. "겐은? 어쩔 생각인데?" "나도 몰라. 미대에 갈 작정이야. 아니, 문학부에 갈지도 몰라. 그렇지만 아직 몰라. 정하지 않았어." "겐은 좋겠다." 이와세는 A 마이너를 치면서 말했다. "겐은 재능이 많아서 좋고, 아다마는 머리가 있어서 좋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어." 이와세가 그렇게 슬픈 말을 지껄이는 것은 A 마이너 때문이라 생각하여, 나는 기타를 빼앗아 G 코드를 치기 시작했다. "이와세, 그런 말하지 마." "아직은 모르는 거야,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지금 어떻게 아니? 저번에 텔레비전에서 봤잖아. 존 레논 말이야. 어릴 때는 정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아이였다더라." 그런 말로 달랬다. 이와세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알아. 내 수준은 내가 잘 알지. 겐과 아다마는 졸업 후에도 나를 친구로 생각해 주겠지?" 나는 이와세가 왜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말하는 지르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친구가 되고부터 이와세는 다치하라 미치조(시인. 음악적인 서정시를 씀)를 읽게 되었고, 콜트레인(미국의 흑인 재즈 색소폰 연주자. 테너와 소프라노 색소폰의 한계를 추구하여 재즈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을 듣기 시작하더니, 청순한 못난이 여학생과 축구를 버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와세를 변하게 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단순한 소개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세를 바꾼 것은 시인과 재즈와 팝 아트였다. 이와세는 면역이 없는 만큼, 그 세계 속에 푹 빠져들었다. 재즈, 팝 아트, 언더그라운드 연극, 시, 영화에 대해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나와는 단짝이었다. 아다마를 끌어들이자고 제안한 것은 이와세였지만, 아다마가 참가하고부터 자신과 나의 역학 관계가 미묘해졌음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커피 우유를 사는 정도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었다. '나를 친구로 생각해 주겠지?'라고 말하는 이와세의 표정이 무척 외로워 보였다. 그렇게 슬픈 얼굴을 본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1학년 때 그런 표정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고어를 가르치는 시미즈라는 얼굴이 길다란 선생이 있었다. 음험한 선생이었다. 시험 답안지를 나눠주면서 70점은 한 대, 60점은 두 대, 50점은 세 대, 40점은 네 대, 라는 식으로 막대기로 머리를 때리는 '놈'이었다. 이와세는 다른 두셋 열등생들과 함께 늘 너덧 대를 맞았다. 2학기가 끝날 무렵 시미즈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즐거워했지만 최하위 열등생인 이와세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미즈는 '이와세, 이제 많이 안 맞을 테니 기분 좋지?'하고 이와세에게 답안지를 건네주었다. 이와세가 40점 이하라는 사실을 알고 모두들 웃었다. 이와세는 눈을 아래로 깔고 겸연쩍게 웃으면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와세를 보고,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맞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이, 오다키는?" 여학생의 목소리에 이와세의 어두운 표정이 밝아졌다. 여상 제복을 입은, 마츠이 카즈코에 비하면 고릴라에 한없이 가까운 몸매였지만,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느낌을 주는 두 여학생이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은 아다마를 보고, 호옷! 하고 웃었다. 아다마는 그런 때에 편리한 친구이다. 너무 잘 생겨서 여학생들이 괜히 호옷! 하고 웃는 것이다. 그런 만큼 여학생의 방어심리가 약해진다. "어이, 안녕, 난 북고의 야자키, 이쪽은 아다마, 저기는 이와세, 너희들은 여상? 자 들어와. 어? 뭔데, 그 봉지. 비스킷? 좀 줄래? 아, 물론 우리도 동지야." 데이토, 후미요라는 <여공애사(방직공장 여공의 처참한 노동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 작가 호소이는 이 소설 간행 한 달 후 가난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에 등장하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들과 우리들은, 엘도리시 클리버와 다니엘 콘반디와 프란츤 파농에 대하 이야기를 나누고 마키아밸리의 군주론과 전후 일본의 천황제의 유사점을 지적하며, 아나키즘의 본질이 게바라에 잘 나타나 있다는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눴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나는 비스킷을 먹으면서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에이프릴 컴 쉬 윌'을 기타 반주에 맞춰 불렀고, 처녀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여고생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가를 역설하고, 오다키와 나리시마가 북고에서도 알아주는 열등생으로 선생까지 두 손을 들고만 사나이들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공애사'의 두 주인공은 오다키와 나리시마의 애인인 것 같았다. 이불과 베개와 화장지였던 것이다. 북고 전공투에 들어오면 섹스도 할 수 있다고 오다키와 나리시마가 은근히 자랑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사실이었던 것이다. 더러운 놈들, 좀 더 진솔한 태도로 투쟁을 하지 못하고, 라고 나는 분개했지만, 눈물이 나올 만큼 부러웠다. 교미하는 개에 물을 끼얹으면 떨어진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예외도 있다고 낄낄거리며 여공애사들에게 떠들고 있는데, 오다키와 나리시마 일파 총 9명이 들어섰다. 모자를 쓴 대학생 하나가 섞여 있었다. 나머지는 호모같이 생긴 웅변부의 후세와 미야치, 자전거를 훔친 죄로 퇴학 일보 직전에서 헤매고 있는 미조구치, 8밀리 카메라를 우리에게 빼앗긴 마스가키를 비롯한 2학년생 3명이 섞여 있었다. 나리시마와 오다키를 나를 보더니 당혹스럽게 웃었다. 두 사람은 2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었다. 둘 다 열등생이었다. 내가 내용도 모르는 '제국주의론'을 떠들어 대고 있었을 때 두 사람은 아직 레닌이라는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스스로 머리가 나쁘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반쯤은 포기한 그런 보통의 열등생이었다. 전공투가 두 사람의 뇌를 개조하고 말았다. 열등생이라도 스타가 될 수 있는 길을 두 사람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나가사키 대학의 사청동 해방파 발행의 삐라를 은밀히 뿌리고 다니는 재미를 만끽하고 있는 두 사람을, 나는 경멸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불과 베개와 화장지, 그리고 같은 열등생 부하를 거느린 배경도 있고 해서 이전보다 모든 행동에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웬일이야, 야자키가 이런 델 다오고." 나리시마가 말했다. "북고 전공투에 들어올 생각이니?" 그렇게 말한 것은 오다키였다. 이전에 전공투를 만들자고 제안하던 것을 나는 거절했다.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런 모임을 만들었다가 괜히 교칙 위반으로 처벌받는 것이 싫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쪽이 이불과 베개와 화장지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츠이 카즈코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기사슴 밤비는 투쟁하는 사나이를 좋아하는 것이다. "응, 가입하고 싶어."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오다키와 나리시마는 처음에는 놀랐다가, 이윽고 기뻐하며 악수를 청해 왔다. 그리고, 여기 있는 야자키는 2학년 때부터 마르쿠제와 레닌을 읽던 우수한 이론가, 라고 모자에게 소개해 주었다. 모자는 '이론만 가지고는?'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나빠 보이는 자식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아홉 명이나 된다. 단번에 주도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자, 오다키, 지금부터 투쟁방침에 대해 설명을 해 줘."하고 내가 말했다. 오다키와 나리시마는 얼굴을 마주 보고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투쟁방침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럴 머리와 용맹도 없었다. 방침이라 해봐야 우선 나가사키 대학생들과 연구회를 열고 베평련의 요코다 씨의 삐라를 뿌린다든지 부원을 늘이는 등... "내가 한 가지 제안할께. 바리케이드 봉쇄를 하면 어때?" 규슈의 고등학교에서 바리케이드 봉쇄를 하는 학생은 아직 없었다. 나가사키 대학에서도 한 적이 없다. 규슈 서쪽 귀퉁이의 시골 학교에서는 전공투, 바리케이드, 고다르, 레드 제플린 등은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내 말에 놀랄 수밖에. "알았지? 난 결정했어. 7월 19일 종업식 때 옥상을 바리게이트 봉쇄한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건 무리다. 너무 심하다 하고 모자가 말했다. "아, 당신은 입 다물어. 이건 어디까지나 북고의 문제니까. 바리케이드 봉쇄도 하지 않는 나가사키 대학하고는 관계없어." 마스가키를 비롯한 2학년들은 존경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문제는 아직 열 명도 안되는 조직이야. 바리케이드 봉쇄를 했다가는 금방 퇴학당하고 말 거야. 일을 벌이기도 전에 무너지고 말수도 있어."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어서, "인원을 늘여야 해, 동지가 늘 때까지는 비밀로 해 두자구. 지하조직을 만드는 거야. 그래서 7월 19일의 바리케이드를 봉쇄를 조직원 획득의 이벤트로 삼는 거지. 그러므로 바리케이드 봉쇄에 사람은 참가하지 않아. 게릴라 전술을 쓰는 거야."라고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전술을 쓰는 게 어때. 교사의 벽에 우리의 슬로건을 적어 놓고, 옥상에서 플래카드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거야. 카드를 철거하지 못하게 해두는 거지. 그리고 북고 전공투라는 이름도 사용하지 않고 말이야. 만일 북고 전공투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면 오다키와 나리시마는 금방 퇴학당하고 말테니까. 조직이 아직 약할 때는 그런 위험은 일단 피해 두는 것이 좋아. '게릴라 교본'에 그렇게 적혀 있더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다마만이 빙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츠이 카즈코를 위한 연출임을 아다마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 일이니 자금도 필요 없고 인원도 그리 많지 않아도 될 거야. 1학기 종료식을 거사일로 잡은 것은 금방 여름방학으로 방학이라고 들뜬 기분으로 학교에 왔다가 플래카드가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앗! 하고 놀라지 않겠어. 그리고 여름방학동안 교사들과의 접촉도 별로 없는 만큼 반혁명적인 언동에 세뇌도 덜 당할 것이고 말이야. 혹시 아니, 여름방학 동안 마르쿠제의 책이라도 한 권 읽을지? 베트남 전쟁에 관한 책이라도 한 권 읽을지도 모르고. 또 하나 중요한 사항은 나가사키 국체분쇄를 외치는 것이지. 국체는 일본정부의 반혁명적인 행사이다. 여학생들은 매스 게임 연습이다 뭐다 하여 시험공부를 못해서 불만이 많아. 그것을 이용하는 거야. 투쟁은 구체적인 요구가 있는 쪽이 더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거야. 인민은 구체적인 투쟁 테마에다 자신들이 품은 불만을 기대어 표현하는 거야. 물론 북고생이 한 일이라고 알리지는 않을 생각이야. 그렇다고 외부 인물이 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아. 그냥 북고생이 했을지도 모른다는 냄새만 피워 놓는 정도지." 오다키가 잠깐, 하고 손을 들었다. "북고 전공투를 내세우지 않는다면 명칭을 뭘로 할 건데." 걱정 마, 라고 나는 힘주어 말했다. "'바사라단'. 산스크리트어인데, 에로틱하면서도 분노하는 신을 가리키는 말이야. 어때, 멋있지?" 멋있어, 최고다! 하고 마스가키가 외치자 박수가 일어났다. 나는 북고 반체제 조직 '바사라단'의 리더가 되었던 것이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완전히 망친 정기시험이 끝난 어느 날, 아다마와 나와 이와세는 아지트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걷고 있었다. "겐, 작년에 하카다에 놀러 갔지 않았니?" 이와세가 말했다. "응, 영화관에서 잤을 때 말이지." 이와세는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하카다까지 영화를 보러 갔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심야 흥행으로 폴란드 영화 특별상영이 있다는 광고를 보고, 우리는 어느 여름날 토요일에 하카다로 갔던 것이다. "우리 재즈 찻집에 들어갔잖아?" "응." "그 찻집 이름이 뭐였지?" "리버사이드? 나카스의 강변에 있던 그 찻집 말이야?" "나 이번 여름방학 때, 그 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생각이야." "응, 리버사이드에서?" "응, 편지를 보냈어. 주방장 참 좋은 사람이더라." "그래?" 작년에 홈룸 시간을 빼먹고 하카다로 갔던 나와 이와세는 먼저 규슈 대학에 추락하여 건물에 걸린 채로 방치되어 있던 팬텀기를 구경하고, 라면을 하나 먹은 후에 영화관으로 갔다. 폴란드 영화를 상영하는 ATG계의 마이나 영화관의 원색 간판 앞에 섰다. 간판에는 유방을 드러낸 핑크빛 피부의 여자가 그려져 있었고, '천사의 옆구리', '태아가 밀렵을 할 때', '황야의 더치 와이프'라 적혀 있었다. 나는 뚫어져라 간판을 바라보았다. 이와세는 내가 뭘 생각하는지 알아채고 '파사제르카', '여승 요안나', '지하수도' 쪽으로 끌고 갔다. 잠깐, 잠깐, 잠깐, 이와세, 여관비까지 갖다 넣으면서 여승이나 빨치산의 고뇌를 보는 것은 말이 안 돼, 억울해서 잠도 못 잘 거야... 성실한 이와세는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자고 말했다. 내가 졌다. 그렇지만 나는 나치스가 싫다고 포르노 영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나의 작은 여행이었다. 다음 날 오후, 우리는 재즈 찻집 리버사이드에 들어섰다. 이와세는 콜트레인의 발라드를, 나는 스탄 게츠의 보사노바를 신청했다. 콜트레인과 스탄 게츠 사이에 칼러 브레인이 흘러나왔다. 그 곳을 신청한 것은 20대 중반의 누나들이었다. 누나는 모두 세 명, 백화점의 부인복 코너의 근무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1960년대 말은 백화점 아가씨가 칼러 브레인을 듣는 그런 시대였다. 세 명중에 이와세가 좋아하는 누나가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전문대를 나와 백화점에 취직했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아가씨로, 길다랗게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소박해 보였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눈이 단추구멍만한 누나였다. 그 누나와 이와세가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름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은 그 누나를 만나기 위한 구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와세는 한 번 누나에게 온 편지를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그 편지는, 히데오 잘 지내고 있니? 라고 시작되고 있었다. 이와세의 이름은 히데오이다. 난 지금 부커 리틀과 돌피의 합주를 들으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히데오의 말대로 난 너무 나약한 여자인지도 몰라요. 주위에 신경 쓰지 말고 나만 생각하면 그만인데 말예요. 나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럴 필요도 없는데, 주위의 시선에 신경을 쓰다가 그만 자신감을 잃고 말아요... 나로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이와세에게 편지 내용에 대해 물었다. 이와세는, 나도 몰라,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짐작컨대 누나는 아마도 이루어 질 수 없는 '불륜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처자식이 있는 상사거나, 야쿠자거나, 양아버지 아니면 애견 따위를 사랑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누나를 대하는 태도에 한해서 말하건대, 이와세는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누나에 관해 내가 무슨 말을, 그녀는 어른이라고 이와세는 빙긋이 웃으면서 어른스런 어투로 중얼거리곤 했다. 그렇군, 그 누나를 만나러 가는 거로군, 하고 나는 속으로 부러워했다. 이러다간 이와세에 뒤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초조해졌다. 엷은 원피스를 입은 누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이와세의 말대로 어른의 냄새가 났다. 그것은 외국인 바를 가득 채우는 싸구려 향수의 냄새가 아니라, 보통의 백화점 아가씨가 풍기는 냄새였다. 그런데 왜 이와세는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그것도 아지트로 향하는 도중에 리버사이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일까? 그 누나를 만나러 갈 생각이지? 하고 내가 묻자, 어떻게 알았어? 하고 환한 표정으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키키키키, 하고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아다마가 북고 전공투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이 점차로 엷어져 가는 데 따른 반발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냄새를 풍기는 백화점 아가씨의 알몸이 눈 안쪽에서 아릿아릿하게 비쳤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자식, 가거든 원도 한도 없이 반쯤 죽여 놓고 오라고 속으로 친구를 축복해 주었다. 아다마는 우리 둘 사이의 이런 미묘한 심리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산 끝으로 시들어 가는 수국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아다마는 우리보다 훨씬 담백한 사나이였다.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 옥상에서 아래로 늘어뜨린 플래카드의 슬로건을 정했다. 나리시마와 오다키는 '조반유리(반역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와 같은 메뉴로 정해진 듯한 문구를 적고 싶어했지만, 나와 아다마가 파리 5월 혁명의 낙서집에서 가려낸 '예정조화설을 거부하자.'라든지, '돌계단 아래는 모래사장이다.'와 같은 문구가 2학년 마스가키를 비롯한 동지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슬로건의 문구를 생각하는 일은 즐거웠다. 모두들 메모지에 그 문구를 적고는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창밖에는 가느다란 바늘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만일 창밖에 대나무 밭이라도 있었으면 7월의 단시 쓰기 모임으로 보였을 것이다. "겐, 바리케이드 봉쇄도 좋지만 페스티벌은 어떻게 되지? 그리고 영화는?" 아지트를 나서서 클래식 찻집 '길'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와세가 물었다. 어느 지방 도시건 그러하지만, 평범한 학생들은 커피를 좋아한다. "여름방학 때 하지 뭐." 아다마는 소다수를 마시고 있다. 어느 지방 도시건 그러하지만, 벽지에서 온 학생들은 소다수를 동경하였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 토마토 주스를 마시면서 내가 대답했다. 어느 지방 도시건 그러하지만, 당시 세련된 청소년은 토마토 주스를 마셨다,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당시 토마토 주스는 무척 희귀한 음료수였다. 냄새가 강렬하고 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빨간 게 기분 나쁘다고 아무도 마시려 하지 않았지만, 가능한한 다른 사람 눈에 띄기를 좋아했던 나는 일부러 토마토 주스를 마시기로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니? 알지? 쉬르리얼리즘이라고." "응, 말한 적 있어, 있어!" "음악은 뭘로 한다고 했더라?" "메시안 아냐?" "그래, 그래, 맞아." 이 당시부터 나는 타인을 속이는 기술을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할 때, 상대가 모르는 세계를 일부러 내세우는 것이 좋은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았다. 문학에 강한 녀석에게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이야기를, 록에 강한 녀석에게는 메시안 이야기를, 클래식에 강한 녀석에게는 로이 리케텐슈타인 이야기를, 팝 아트에 강한 녀석에게는 장 주네 이야기를 적당히 얼버무리면 지방도시에서는 절대로 논쟁에서 지지 않는다. "전위적인 영화가 되겠네?" 라고 말하면서 아다마는 수첩을 끄집어냈다. 볼펜도 함께. "대강이라도 좋으니, 스토리를 한번 얘기해 볼래." "왜?" "그렇지 않니, 여름방학 때 촬영에 들어가려면 미리 준비를 해둬야지, 도구라든지, 배우라든지 말이야." 아다마는 선천적인 프로덕션 매니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감동했다. 너무 감동한 나머지 지금까지 머리 속에서만 그리고 있던 스토리를 이야기했다. '안달루시아의 개'와 '스콜피오 라이징'을 적당히 섞은 듯한 스토리였다. ... 그래서 말이야. 검은 고양이 시체를 이렇게 나무에 매달고, 가솔린을 부어 나무 째로 불태우는 거야, 그 때 나무 밑에서 연기도 조금 피우고 말이야, 역광을 써야 해, 바로 그 때 오토바이 세 대가 달려오는 거야. ... 아니야, 이러면 마츠이 카즈코가 나올 데가 없는데, 하고 나는 당혹해 했다. 그러나 나는 금방, 그래도 좋잖아, 하고 마음을 정해 버렸다. 아기사슴 밤비는 어차피 쉬르리얼리즘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만두자, 그만둬." 하고 나는 말했다. 검은 고양이 시체, 가솔린, 오토바이 세 대를 적고 있던 아다마가 놀란 눈으로, "엣?" 하고 외치면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만두자. 이런 영화는 만들어 봐야 재미도 없어. 잠깐만... 좋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번 만들어 보지." 이와세와 아다마가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잘 들어, 먼저 퍼스트 신은 고원의 아침, 아침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아소산의 구사센리 분위기를 내는 게 좋겠어." "구사센리? 아침?" 하고 되뇌면서 아다마와 이와세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 때문에 검은 고양이 시체가 갑자기 고원의 아침으로 변했을까? "이미지, 이미지,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한 이미지라구!" 라고 내가 말했다. "이미지, 너희들도 그 정도는 알겠지? 좋아, 고원에서 말이야, 카메라가 줌 다운을 하면, 안개 속에서 플루트를 입에 문 소년이 나타나는 거야." "마스가키의 카메라에 줌이 붙어 있을까?" "아다마, 가만 좀 들어, 사소한 변경은 있을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말이야, 플루트를 든 소년이 멋지게 한 곡 뽑는 거지. 깨끗한 음악으로." "알았어. 타이거스의 '꽃을 목에 걸고' 말이지." "그렇지, 그렇지. 좋은 아이디어! 그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자꾸 제안해야 해. 그런 다음 한 소녀가 나타나는 거지." "레이디 제인!" "그렇지, 그렇지. 소녀는 하얀 옷을 입고, 순백색으로 말이야, 웨딩드레스보다는 네글리제 같은 느낌을 주는 안이 훤히 비치는 옷으로, 그리고 소녀를 하얀 말 위에 태우도록 하지." '플루트', '하얀 옷(그것도 웨딩드레스보다는 네글리제에 가까운)' 이라고 메모를 하단 아다마가 갑자기 '말?'하고 외치면서 고개를 들었다. "말? 하얀 말?" "그래." "안돼, 안돼. 어디서 하얀 말을 구한단 말이니?" "넌 좀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라. 아다마! 이미지, 이미지 말이야." "아무리 이미지도 좋지만 말을 준비해 두지 않으면 촬영을 할 수 없잖아? 하얀 말이 어디 있단 말이니? 그냥 말도 구하기 힘든 판에. 겐, 개는 어때? 개는 우리 옆집에 하얀 아키다견이 있어." "개?" "응, 시로라는 놈인데, 몸집이 커서 억지로 태우면 여자 하나 정도는 괜찮을 거야." "마츠이 카즈코가 아키다견을 타고 나타나면 모두들 웃을 거야. 코미디를 만들 셈이야?" 잠깐, 잠깐, 잠깐, 하고 이와세는 스톱을 걸었다. 나와 아다마는 입을 다물었다. 이와세의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준와의 제복을 입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같은 여학생이 들어와서 우리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레몬 티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으러 온 '길'의 주인에게 나는 베를리오즈의 '환상'을 신청하고, 주빈 메타 지휘로, 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와세는 또 다른 사람 눈에 띄려 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주빈 메타의 지휘, 그것밖에 모르는 주제에." "아니야, 이 무지치의 '사계'도 알아." "그만, 그만, 그만." 하고 이번에는 아다마가 스톱을 걸었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레몬 티를 기다리는 동안 백을 들고 화장실로 사라졌다. 화장실에서 나온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마치 딴 사람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은 안쪽으로 부드럽게 휘어져 있고, 아이 라인이 그려지고, 입술은 핑크 빛으로 물들고, 흰색과 감색이 조화를 이루던 준와의 제복은 어느새 크림색 원피스로 탈바꿈하고, 검은 단화는 하이힐로 변용하고, 매니큐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빛나는 손톱을 보고 우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흘끗흘끗 쳐다보는 우리들을 한 번 스윽 훑어보더니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나에게 볼일 있니?' 하고 짤막하게 묻고, '아니야.' 하는 우리의 대답에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다음, 하이라이트 디럭스 한 개피를 우아하게 입에 물고 '환상'의 제 1악장이 흐르는 찻집의 텅 빈 공간 속으로 하얀 연기를 훅 뿜어냈다. 그만, 그만, 그만, 하고 필사적으로 말리는 이와세와 아다마의 충고를 무시하고 기어코 나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에게 '영화에 나갈 마음 없니?'하고 묻고 있었다. "영화가 뭔데?" "우리는 이번에 8밀리 영화를 만들 생각이야. 어때, 출연해 보지 않을래?" 내가 그렇게 말하자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예쁜 잇몸을 드러내고 높은 소리로 웃었다. "너희들 북고생이지?" 영화 이야기는 무시해 버리고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그렇게 물었다. "아이코 중학 출신인데, ... 아니? 키가 크고 눈썹이 짙은 학생?"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말하는 사나이는 시로쿠지 일파로 유명한 불량 학생이었다.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안부 전해 줘, 하고 웃으며 말했다. 넌? 하고 나는 이름을 물었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나가야마 미에, 라고 했다. 내가 조금 더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이와세가 벌떡 일어서더니 아다마를 재촉하고 나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카운터 쪽으로 나아갔다. 카운터 가까이 에서 공고 교복을 입은 세 명의 남학생과 스쳤다. 세 명 모두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높이 세운 칼라에 나팔바지를 입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것 같아 우리는 급히 눈을 옆으로 돌렸다. 공업학교 주먹들은 나가야마 미에의 테이블에 앉았다. 나가야마 미에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공업학교 주먹이 얼굴을 돌려 우리를 째려보았다. 우리는 급히 찻값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서 백 미터를 달렸다. 숨을 헐떡거리며, 그 애가 저 유명한 준와의 나가야마 미에였어, 하고 이와세가 중얼거렸다. 유명한 여학생인 것 같았다. 딱히 공업학교 주먹의 애인인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교칙 위반의 경계선을 오가면서 화려하게 놀고 있는 여학생인 듯했다. 좋아, 저 여학생을 페스티벌의 오프닝 세레모니에 내세우자고 나는 말했다. 공업학교 주먹은 검도부 고수야, 나가야마 미에에게 홀딱 반했단 말이야, 겐! 잘못하다가는 목도로 반 죽도록 맞을지도 몰라. 그만둬, 하고 이와세는 걱정스런 어투로 말했다. 아다마는, 목도에 맞아 뒈져도 난 몰라, 하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났다. 학교 풀을 청소하던 중에 나는 이제 생리도 끝나버린 여자 체육선생을 더러운 풀 속으로 슬쩍 밀어 넣었는데, 그것을 한 학생이 밀고하는 바람에 아이하라에게 귀를 잡혀 교무실에 끌려가 뺨을 13대나 맞았다. 중간고사에서 아다마는 성적이 80등으로 급강하했다. 화학을 비롯한 과학 과목에서 전교 톱을 자랑하던 아다마는 그것조차 꼴찌 근처에서 맴돌았던 것이다. 진학담당교사는 나에게, "네 놈은 아다마의 장래를 망칠 생각이야?" 하고 노한 음성으로 나무랐다. 아다마의 성적이 내려갔는데 왜 내가 야단을 맞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와세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세 번째 실연을 맛보았다. 상대는 배구부의 공격수였다. 마츠이 카즈코와는 그 후 복도에서 한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재킷은? 하고 마츠이는 말했다. 나는 다음에 꼭 가져올께, 하고 황망하게 대답했다. 마츠이는, 응, 언제라도 괜찮아, 하고 천사처럼 상냥하게 말했다. 천사 밤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바리케이드 봉쇄는 성공시켜야 한다.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결행은 예정대로 7월 19일 종업식 전야, 플래카드와 페인트가 마련되고, 아지트는 활기에 넘쳤다. 바리케이드 봉쇄에 필요한 자금은 총액 9,255엔, 우리는 천 엔씩 각출하기로 했다. "잘 들어." 나는 표준어로 말했다. "집합은 심야 0시. 장소는 풀 곁의 벚꽃나무 아래. 실수로라도 택시를 타서는 안 돼. 오다키는? 그렇지 집에서 걸어오면 되겠군. 나리시마도 걸어올 것이고, 후세와 이야케는? 나리시마 집에서 자도록 해. 좋아, 마스가키 집은 여관이니까 미조구치와 2학년 두 명, 나카무라와 호리도 마스가키 집에 머물다가 한 사람씩 집을 나서는 거야. 절대로 같이 오지 마. 알았지.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펜치와 철사와 로프와 플래카드는 제각기 하나씩 나눠서 하루 전날 여기서 마스가키의 집과 나리시마의 집으로 옮기는 거야. 당일의 복장은 모두 검은 색으로 통일할 것. 절대로 구두 같은 것은 신지마. 페인트통과 작업 후에 남은 쓰레기 하나라도 모두 가지고 돌아가야 해. 신문사에는 나와 아다마가 전화를 할거야."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 라고 붉은 페인트로 썼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작전 결행 사흘 전 점심시간, 이와세가 그만두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나와 아다마를 찾아왔다. 규슈의 태양이 그려내는 짙은 여름의 나무 그림자 아래서 이와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와 바리케이드 봉쇄는 어울리지 않아. 미안해 겐, 아다마. 준비하는 것도 도울 것이고 페스티벌에도 참가할 생각이지만 바리케이드 봉쇄만은 그만두겠어." 하고 말했다. 이와세의 표정은 마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겐, 사실 너는 정치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오로지 남의 눈에 띄고 싶어서 바리케이드 봉쇄를 하려 하는 거지?, 라고. 이와세의 표정은 우울해 보였다. 이와세가 가고 난 다음, 나는 아다마에게 그런 느낌이 들더란 말을 해주었다. 아다마는 정말로 담백한 사나이였다. 정치 따위는 아무렴 어때, 그냥 재미있으니까 해보는 거잖아? 겐, 재미있으면 그걸로 됐잖아, 라고. 아다마는 그런 말을 했지만, 역시 나처럼 쓸쓸한 표정만은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7월 19일이 되었다.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 11시에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 집을 나서기가 무척 힘들었다. 어머니, 여동생,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미 잠들었지만 아버지는 깨어 있었다. 일레븐 PM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일레븐 PM이 지나면 아버지는 나름대로의 세계를 즐기느라 잠을 자지 않는다. 이 거리의 모든 집을 그러하듯이, 우리 집도 언덕에 서 있다. 좁은 평야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미군과, 미군을 상대로 생활을 하는 소수의 상인들뿐이다. 아버지가 깨어 있었기 때문에 현관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이 언덕에 서 있는 만큼, 돌계단이 많다. 우리 집은 현관이 평평한 도로에 면해 있고, 뒤쪽은 좁은 돌계단에 면해 있다. 내 방은 이층이다. 우선 아버지에게 밤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가인 아버지의 아틀리에 겸 서재 문을 노크한 다음 나는 말했다.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잘 알고 있겠지만 이렇게 예의 바른 인사를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나 이재 잘래,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일레븐 PM인데도 비키니 차림의 여자를 화폭에 담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짐짓 점잖을 빼면서, 뭐라고? 벌써 잔다고? 하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새벽 네시까지... 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벌거벗은 미녀가 그려지고 있는 화폭을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겸연쩍었는지 괜스레, 흠! 하고 헛기침을 한 다음, 어머니를 슬프게 하면 안 돼, 라고 일침을 주었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혹시 오늘밤의 거사를 눈치 챈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알 리가 없다. 괜히 어머니를 슬프게 하지 날라는 처절한 문구를 던져 나를 꼼짝 못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쳇... 나는 이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빨래 건조대를 타고 올랐다.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다. 소리 나지 않게 주의하면서 농구화 속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그 당시에는 스니커라는 단어도 없었다. 모두들 농구화를 신었다. 건조대에서 지붕으로 내려간다. 눈앞에 묘지가 있다. 달빛을 받으며 지붕과 같은 높이로 묘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우리 집 뒤편은 묘지였던 것이다. 묘지가 우리 집보다 한 단 정도 높았기 때문에 일층 지붕에서 묘지 쪽으로 가볍게 뛰어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묘지라고 하기보다는 묘비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신앙심 때문은 아니지만 묘지 위를 밟고 내려선다는 것이 왠지 뒤가 캥겼다. 늘 이렇게 집을 빠져 나와 재즈 찻집이나 포르노 영화관, 또는 아다마의 하숙집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친구 중에 머리가 벗겨진 해군 중좌 출신이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는 해군 소좌 출신이었는데, 그 때문에 그 대머리는 전후 십 몇 년이 지나고서는 줄 곧 할아버지에게 거드름을 피웠다. 대머리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러 왔었다. 물론 할아버지도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늘 어린 나에게 줄 그림책을 사들고 왔기 때문에 나는 대머리를 좋아했다. 대머리에게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술에 취하면 반드시 묘비 석에 오줌을 싸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런 대머리가 미웠는데, 언젠가는 천벌을 받아 죽을 것이라고 했다. 정말 대머리는 어느 날 갑자기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린 나도 그것 참 잘됐다고 고소해했다. 그 때문에 올나이트 포르노 영화를 보러 갈 때는 묘비 석에 내려 설 때 반드시 두 손을 합장하고, 미안해요, 미안해요를 주문처럼 외쳤던 것이다. 이번에도 합장을 하고 빌었지만, 예전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포르노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바리케이드 봉쇄를 감행하러 가는 것이다. 혁명이다. 필시 사자의 영도 나를 용서해 줄 것이다. 달빛이 무척 밝게 느껴졌다. 학교에 이르는 길이 무척 신선했다. 시간과 목적이 달라지면 풍경을 느끼는 감정도 달라 질 수 있음을 알았다. 풀 곁의 벚꽃나무 아래, 오전 0시. 전원이 모였다. 우리는 두 팀으로 나뉘었다. 학교 벽에다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는 팀과,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봉쇄하고 플래카드를 늘어뜨리는 팀이다. 나는 낙서를 하는 쪽이었다. 아다마도 나와 같은 팀이다. 옥상 팀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된다. 출입구를 봉쇄하기 때문에 로프를 타고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위험한 임무를 가장 혁명적인 행동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강조하면서, 나는 나리시마와 오다키와 마스가키를 비롯한 2학년들에게 그 일을 떠넘겼다. 아다마는 고소공포증이 있었고, 나는 다치고 싶지 않았다. 자, 출발, 하고 외치려는 순간, 후세라는 키가 작고 음험한 색골 같은 학생이, 잠깐, 하고 스톱을 걸었다. "뭐야? 이미 할 말은 다 했는데." 후세는 말하기가 무척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음침하게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런 찬스는 좀처럼 오지 않잖니." "찬스라니?" "아까 슬쩍 밀어보니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더라." "자물쇠라니?" "여자 풀의 탈의실 말이야. 제발 5분만 보고 가자. 응?" 그렇게 말하고 후세는 또 음침하게 웃었다. 미친 자식,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는 지금 바리케이드 봉쇄라는 신성한 목적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닌가, 여자 탈의실을 본다고? 그런 파렴치한 짓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하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세의 제안에 전원 찬성이었다. 여자 탈의실은 여기저기서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탈의실 전체에 향기가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어둠 속을 손으로 더듬어 가는 사이에 성숙해 가는 소녀들의 몸냄새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팬티를 입은 채로 수영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여학생들은 여기서 완전히 옷을 벗는 것이다. 모두들 그 광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지문이 묻으면 안 된다고 내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열심히 선반을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마스가키가 맨 아래 선반의 구석에 떨어져 있는 슈미즈를 발견해 내자 모두들 열광하여, 지문이 묻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또 다른 보물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문, 어떡하지. 이미 묻을 대로 다 묻어 버렸는데." 전원 장갑을 끼라고 분명히 내가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잊고 있었다. 나는 아다마와 지금의 사태에 대해 의논했다. "우리는 전과가 없기 때문에 경찰서에 지문이 보관되어 있지 않잖아." 여자 속을 보고서도 덤덤하기 짝이 없는 아다마는 그런 냉철한 분석력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설마 탈의실에서 지문을 채취하여 전교생의 지문과 대조해 보지는 않을 거야. 무슨 살인사건도 아니고 말이야." 그 때 2학년 나카무라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선배님, 하고 부르면서 나와 아다마 사이로 끼어 들어왔다. "미안해요. 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참을 수 없다고? 무엇을?" 아다마는 긴장했다. "지문 말입니다. 나, 장갑을 잊어 먹어서 사방에 지문을..." "괜찮아. 이런 일로 지문을 채취하러 온다는 것은 말도 안 돼. 설사 지문을 조사한다 해도 누구 지문인지 어떻게 알겠니?" "내, 내 것만은 알 수 있어요. 중학교 1학년 과학실험시간에 소금을 만들잖아요? 그 때 수산화나트륨 원액을 손가락에 떨어뜨려서, 나, 지문이 녹아 버렸단 말예요. 그래서 나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은 일본에는 없을 것이라고 형이 NHK의 '나만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에 나가 보라고 그랬단 말예요. 그리고 지문이 없는 사나이로 우리 반에서도 유명했구요. 그것 때문에 오늘 반드시 장갑을 끼리라 생각했었는데, 마스가키가 여학생 슈미즈를 발견하는 바람에 그만 정신이 몽롱해져서 잊어버렸어요. 이제 어떻하면 좋죠?" 나카무라의 손가락 지문은 녹아 내린 촛물처럼 엉켜 있었다. 아다마와 나는 굉장한 지문이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하튼 아다마는 절대고 경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카무라를 안심시켰다. 아, 여기서 저 아기사슴 밤비, 마츠이 카즈코가 옷을 갈아입는구나, 하고 감격에 젖어 있을 때, 밝힘증의 후세가 지갑을 하나 발견했다. 지갑이다! 하고 후세는 손전등을 흔들면서 기뻐했다. 나는, 바보자식! 하고 화를 냈고, 아다마는 어이없다고 혀를 끌끌 찼다. 지갑을 갈취해서는 안 된다. 잃어버린 사람은 반드시 분실신고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곳을 조사할 수도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단서가 될 만한 흔적을 남겼을 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종이 조각이나, 발자국, 머리카락 같은 것 말이다. 제자리에 놔두라고 내가 말했지만, 어두워서 처음에 지갑이 놓여 있던 선반을 잊어버렸다고 밝힘증의 후세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오다키와 나리시마는 괜찮아. 그냥 가지고 가버려, 하고 말했고, 지문이 없는 나카무라, 나중에 주인이 찾으면 그 때 살짝 가져다 두면 어떨까요, 하고 걱정스런 어투로 말했다. 이런 하잘것없는 일 때문에 바리케이드 봉쇄라는 대업을 망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갑 안을 살펴보기로 했다. 스누피가 프린트된 비닐 지갑으로, 보통 여자애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었다. 천 엔 지폐가 두 장, 오백 엔 지폐가 한 장, 버스 정기권이 있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름을 읽는 순간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주일 전에 내가 풀 속에 밀어 넣었던, 이제 막 생리가 끝나버린 그 여선생이었다. 우리가 후미 양이란 애칭을 붙여 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엉덩이가 아래로 힘껏 쳐진 그 독신 체육 여선생이었다. 동전, 단추, 낡은 명함, 영화할인 티켓, 사진이 들어 있었다. 흑백사진으로, 구해군의 군복을 입은 오이처럼 생긴 사나이와 젊은 시절의 후미 양이 사이좋게 들어 있었다. 모두 한숨을 쉬었다. 이천오백 엔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생리가 끝나고 엉덩이가 힘껏 아래로 쳐진 전쟁 미망인 여선생, 이보다 더 어두운 인간이 이 세상에 있을까? 그냥 두고 가자, 하고 아다마가 말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떡였다. <국체 분쇄> 파란 페인트로 정문 기둥에 그렇게 적었다. 표면이 거친 돌기둥에 쑤셔 넣는 듯한 기분으로 페인트로 글자를 그렸다. 한쪽 기둥에 아다마가 '조반유리'라고 적어 넣었다. 그런 구태의연한 구호는 그만두라고 말했지만, 평범한 구호를 적어 놓으면 범인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아다마는 냉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손전등은 교내에 들어서고부터 일절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손질이 잘된 꽃밭이 나온다. 'ㄴ'자로 꺾여진 본교사는 달빛을 받아 장방형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직원실 창문에 <권력의 개들아, 자아비판 하라!>라고 적었다. <개>라는 글자만 붉은 페인트로 썼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지만, 기분 때문인지 무더웠고, 검은 체육복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도서실 벽에도 <동지여, 무기를 들어라!>라고 적었다. 나카무라가 다가와서 옥상부대가 체육관의 비상구를 통하여 교사 내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고 알려 주었다. 좋아, 우리도 교사 안으로 들어간다, 하고 낙서부대도 비상구로 나아갔다. 땀방울이 콘크리트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것이 증거로 남지 않을까 두려워 땀방울이 마를 때까지 지켜보았다. 비상구로 들어서면 3학년 자연계 교실들이 복도 저 쪽으로 이어진다. 낙서부대는 나와 아다마, 나카무라 세 명이었다. 내 인생에서 이만큼 긴장하는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라고 나카무라가 입술을 핥으면서 말했다. 바보, 말하지 마, 하고 아다마가 나무랐다. 나도 입술이 바싹 타들었다. 이 게 땀을 흘리니 당연한 일이다. 교직원실, 사무실, 교장실을 지나 현관으로 나섰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것을 통하여 들어온다. 붉은 페인트로 <살>이라고 크게 썼다. 그렇게 과격한 말은 쓰지 않아도 되잖아요, 하고 나카무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입 닥쳐, 아다마가 현관 오른 쪽으로 가리켰다. 수위실이다. 수위는 두 사람. 한 사람은 노인이고, 한 사람은 젊다. 불은 꺼져 있었다. 일레븐 PM이 지나 잠들었을 것이다. 나는 현관 바닥에 <너희들은 죽었다. 대학진학을 포기하라>라고 썼다. 나카무라는 점점 더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기둥 뒤에 쭈그리고 앉은 채 작업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 녀석 큰일인데, 하고 아다마가 귓속말을 했다. 아다마도 목이 마른지 열심히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달빛만 어렴풋이 스며들고 있는 어둡고 정적에 휩싸인 교사는 마치 다른 행성에 있는 궁전 같아 보였다. 우리는 긴장했다. 평상시에 활보하던 곳인 만큼 더욱더 우리는 긴장했다. 나카무라를 억지로 일으켜 교장실 앞까지 질질 끌고 갔다. 수위실에서 조금 떨어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는지, 나카무라는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했다. 바보자식, 풀 있는 데로 가 있어, 하고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고 나카무라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세 번 부정했다. 아니라고, 뭐가 아닌데? 그렇게 물어도 나카무라는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아다마가 나카무라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말해 봐, 겐이나 나도 무섭긴 마찬가지야, 부끄러워하지 말고 왜 그러는지 말해 봐... "똥이 나올 것 같아요." 우리도 배가 아픈 것 같았다. 아다마와 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오른손으로는 입을 막고, 왼손으로는 배를 잡고 경련 하듯이 웃었다. 긴장은 웃음을 유발한다. 웃어서는 안될 때, 더욱 더 웃음이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똥, 이라는 그 말의 울림이 가슴 깊은 곳에서 웃음을 폭발시켜, 목으로 솟구쳐 오르게 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슬픈 장면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중 2때 설날에 패튼 전차가 갖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사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어머니가 사흘간 집을 나갔다. 여동생이 천식에 걸렸다. 날려보낸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다. 시궁창에 동전을 빠뜨리고 말았다. 중학교 대항 축구시합에서 PK전에서 졌다. 이런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래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다마는 양손으로 입을 막고 몸을 구부린 채, 힛, 힛, 하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웃음을 참는 일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인 줄은 예전에 미쳐 몰랐다. 나는 마츠이 카즈코를 생각했다. 미끈한 장딴지, 아기사슴 밤비의 눈, 수평선 같은 하얀 팔, 신비로운 곡선을 그리는 발뒤꿈치... 이윽고 경련이 멈추었다. 예쁜 소녀는 웃음을 멈추게 하는 약이 되기도 한다. 남자를 신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잠시 후 아다마도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일으켰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다마는 이 때 탄광 폭발사고에 휘말려 불에 타버린 사람의 시체를 생각하면서 웃음을 참았다고 했다. 그런 비참한 장면을 떠올려야만 했던 아다마는 나카무라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였다. 나는, 바보자식, 죽는 줄 알았잖아, 하고 욕을 한 다음, 교장실 문을 열어 젖혔다. "나카무라." "예." "설사냐?" "모르겠어요." "급하니?" "항문에서 뿌, 뿌 하는 소리가 납니다." "저기 올라가서 하고 와." 나카무라는, 에? 하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내가 교장실 책상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까불지 마, 사람을 웃겨서, 들킬 뻔하게 해 놓고는, 이건 벌이다. 만일 게릴라였다면 넌 그 자리에서 죽었어." 나카무라는 울상이 되어 빌었지만 아다마와 나는 용서하지 않았다. 달빛이 내리는 교장 책상 위로 나카무라는 올라갔다. "보지 말아요." 바지를 내리고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소리가 크게 날 것 같으면 그만둬, 알았지?" 손가락으로 코를 집은 채 아다마가 말했다. "그만두라고요? 한번 나오면 그만둘 수 없어요." "그만두라니까, 퇴학당해도 좋단 말이야?" "화장실에 가면 안 될까요?" "안 돼." 나카무라의 허연 엉덩이가 달빛 아래 둥실 떠올랐다. "안 나오는데요. 너무 긴장해서 안 됩니다." 기합을 넣어, 하고 아다마가 말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앗! 하는 비명과 함께 고장난 펌프에서 물이 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소리가 커, 종이로 항문을 막아, 하고 아다마가 다가가서 귀에 대고 외쳤다. 그러나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굉장한 소리였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수위실 쪽을 살펴보러 갔다. 똥 때문에 퇴학을 당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수위실 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카무라는 나가사키현 현립 고등학교 교장회 월보를 손바닥으로 비벼 뒤를 닦고 난 다음, 시원스런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와이어로프로 책상, 의자 따위를 묶어 옥상 봉쇄는 완료되었다. 용접기로 하면 완벽할 텐데, 하고 오다키가 애석한 듯이 말했다. 옥상에 남은 사람은 나리시마와 마스가키뿐이었다. 두 사람은 밖에서 옥상의 출입구 문을 와이어로 봉쇄한 다음, 로프를 타고 3층 창까지 내려오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들의 활약상을 꽃밭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나리시마는 등산부 출신이라 걱정이 없었다. "만일 마스가키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하지 않겠어?" 하고 오다키가 말했다. "119에 전화를 하고 도망쳐 버리면 돼." 아다마가 아니면 아무도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니, 구해 줄 거라고 야단을 떨었다가는 모두 체포되고 말 테니까... 나리시마와는 달리 마스가키는 벌벌 떨고 있었다. 마스가키는 틀림없이 오줌을 쌌을 거야, 하고 후세가 주접을 떨었다. 거기에 덧붙여 내가 나카무라의 혁명적인 배설에 대해서 말하자 모두들 배를 잡고 웃었다. 마스가키는 무사히 내려 온 것 같았다. 옥상에서 아래로 플래카드가 늘어뜨려져 있었다.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저스트 라이크 어 우먼 아사히 신문, 사세보 지국, 요미우리 신문 사세보 지국, 니시니혼 신문사, 나가사키 신문사, NHK 사세보 지국, NBC 나가사키 방송국. 아다마와 나는 오전 6시에 일곱 개 매스컴에 전화를 걸었다. 범인성명을 전했던 것이다. <우리는 반권력 조직 '바사라단'이다. 오늘 새벽, 체제의 교육거점인 사세보 북고에 바리케이드 봉쇄를 감행하였다.>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지만, 익숙하지 못해서 인지 그만, 저, 사세보 북고에 바리케이드 봉쇄가 있다고 하는데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전화 덕분에 북고의 바리케이드 봉쇄와 낙서는 수위, 선생, 학생, 주민보다도 더 빨리 매스컴이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NHK와 NBC는 오전 7시 지방 뉴스 시간에, 현립 사세보 북고 바리케이드 봉쇄, 를 톱뉴스로 보도했다. 그 시간 나는 긴장과 흥분으로 잠도 자지 못하고 침대 속에서 페인트 자국이 어디 남아 있지는 않을까 하고 몇 십 번이나 점검에 점검을 거듭했다. 그 때 뉴스를 본 아버지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겐짱!" 하고 아버지는 마치 어린 시절의 나를 대하는 듯한 태도로 나를 불렀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부터 '겐짱'에서 '겐'으로 호칭이 바뀌었지만, 부자관계가 긴장 상태로 들어가면 본능적으로 자식의 말 잘 듣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는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겐짱'으로 부르고 마는 것이다. 뉴스를 들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겐짱, 아버지 얼굴을 봐." 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20년 근속의 미술선생이었다. 소년의 거짓말 정도는 안색 하나만으로도 판단할 자신이 있다는 태도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나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수면 부족과 흥분의 여운이 남은 얼굴로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무죄, 라고 아버지는 판단한 것 같았다. 아무리 베테랑 교사라 해도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는 느슨한 법이다. 이 당시부터 과격파 남학생, 여학생 중에 교사의 자식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엄격한 가정환경이 오히려 문제아를 생산한다는 견해가 분분하였는데, 그 엄격함도 자기 자식에 대한 속수무책의 이면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위관이나 경찰관도 마찬가지지만, 선생이라는 직업도 이상한 것이다. 거의가 별 볼일 없는 속물인 주제에, 지역사회에서는 성직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폼을 잡는 것이다. 전쟁 때에 파시즘을 지지해 주는 대신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존경받아야 할 직업이라는 이념이 만들어져서,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폭력교사였다. 학생들을 두드려 팰 뿐만 아니라 PTA(육성회) 회장을 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맞지 않았다. 언젠가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의 자식은 너무 귀여워서 때릴 수 없다고 하였다. 정직한 아버지였다. "알았어, 겐은 아무 관계도 없단 말이지?" 하고 아버지는 확인하듯이 말했다. "무슨 일인데?" 눈을 비비면서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북고에서 바리케이드 봉쇄가 있었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래 뜨고,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3초만에 바지를 입고, 4초에 셔츠를 2초에 양말을 신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더욱더 나의 결백을 믿는 것 같았다. 아버지를 뒤로 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와, 밥 안 먹어. 다녀올께요, 라는 말을 던지면서 100미터를 전력으로 질주했다. 북고가 보이는 언덕 아래로 내려오니 저 멀리 플래카드가 보였다.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 감동했다. 우리의 힘으로 너무 낯익어 지겨운 풍경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학교 앞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데, 물리선생과 학생 열 몇 명이 교문의 낙서를 지우고 있었다. 신나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풍경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놈들의 모습이 너무도 보기 싫었다. 라디오 기자가 그 추한 학생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밀고 있었다. "누가 했을까요?" "북고생이 아닙니다. 북고생은 이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손톱 끝에 파란 페인트가 잔뜩 묻은 추한 여학생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다마는 즐거운 표정으로 나에게 윙크를 보냈다.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게 은밀히 악수를 나누었다. 8시 반이 넘어도 홈룸 시간은 시작되지 않았다. 교직원회의가 계속되고 있었고, 학생들은 교실에서 자습을 하라는 방송이 몇 번이나 울려 나왔다. 그러나 북고 전체는 당혹과 혼란에 가득 차 있었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떠돌고 있었다. 체육선생이 중심이 되어 일부 추악한 학생들과 함께 옥상의 바리케이드 철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플래카드와 낙서를 없애는 것이 급선무라고 선생들은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체제는 풍경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다. 매스컴의 배려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교사의 풍경을 한순간이라도 빨리 원래대로 회복시키려 하였다. 예상외로 많은 학생들이 걸레를 들고 낙서를 지우려 애를 쓰고 있었다. 현관 앞의 <살>이라는 빨간 페인트를 지우려는 학생회장이 나를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눈이 빨개져 있었다. 빨간 페인트를 지우면서 울고 있던 그 녀석이 갑자기 걸레는 든 손으로 나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야자키, 설마 네 놈은 아니겠지, 응? 네가 한 짓은 아니겠지. 북고생이 북고를 더럽히는 짓은 하지 않겠지, 야자키, 대답해, 대답해! 아니라고 대답하란 말이야." 차가운 걸레가 목에 닿아서 기분이 나빴다.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만 소동을 일으키면 남의 이목을 끌 것 같아 참으면서, 이 손 놔! 하고 노한 음성을 외치며 학생회장을 노려보았다. 왜 내가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경을 끼고, 키가 작고, 뻐드렁니가 나온 17세의 고등학생 주제에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는 학생회장, 네 놈은 모교 현관에 빨간 페인트로 글이 적혀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울먹인단 말이냐? 이 학교 건물이 너의 신전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러나 이런 유의 인간이 정말 무서운 것이다. 무엇이든 한번 믿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학살과 고문과 강간을 일삼은 것도 이런 유의 인간들이다. 이런 유의 인간은 낙서 따위 때문에 울지만, 중학교 동창생 여학생이 졸업과 동시에 흑인병사와 놀아나는 일에 대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겐, 지고 말았군." 아다마가 나와 학생회장의 승강이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지지 않았어. 그렇지만 저 바보새끼, 꽤 박력 있더군." "응, 저렇게 열심히 일을 할 기분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 "그래, 저만큼 열성을 보이면 지지 않고는 뱃길 수 없지. 저 열성에 기가 죽고 말아." "그랬구나, 겐은 뭐가 켕기는지 기가 죽었더라고." "왜 그랬을까?" "그건 말이야. 역시, 우리가 불순했기 때문일 것이야." "불순?" "우리의 동기가 불순하지 않았니?" "동기라니? 바리케이드 봉쇄의 동기 말이냐?" "바리케이드 봉쇄를 했다고 죽지는 않잖아?" "아다마, 바보. 베트남 인민이 매일 몇 명이나 죽는지 아니?"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왠지 표준어를 쓰고 만다. 베평련이 연설을 할 때 사투리를 쓰면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왜 그럴까? "베트남이라..." "대체로 저런 학생회장 같은 놈들이 남경이나 상하이에서 사람들을 마구 죽였던 거라구." "남경이라... 그런데 말이야. 저놈들이 저리도 열심히 청소를 하는 걸 보면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니?" "당연하지. 저놈들은 체제파니까. 체제파가 저렇게 많은 줄은 정말 몰랐어."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무슨 뜻인데?" "저놈들이 정신없이 빠져 들어갈 무엇을 우리가 제공해 주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니?" 아다마는 쓸쓸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아다마는 늘 이렇다. 허무감이 뒤섞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직원실 창에도, 교장실 앞 복도에도, 도서실 벽에도 많은 학생들이 모여 규슈의 7월의 무더운 햇빛 아래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낙서를 지우고 있었다. 아다마가 말한 그대로 일지도 모른다 우등생뿐만이 아니다. 언제든 이 학교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열등생들마저 걸레를 들고 열심히 페인트를 닦아내고 있었다 교장실 앞 복도에서 나카무라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손에 걸레를 들고 있었다. 아다마와 나를 보더니 겸연쩍은 미소를 띄었다. "네가 왜 걸레를 들고 있니?" 아다마가 그렇게 말하자 나카무라는 혀를 쏙 내밀었다.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 있으면 의심받지 않아요? 잊지는 않았겠지요. 난 지문이 없는 사나이라구요. 그보단 겐 선배, 좀 이상해요." "뭐가?" 그렇게 물으면서 나는 아다마의 소매를 잡아끌어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았다. 복도의 낙서를 지우고 잇는 듯이 보이기 위해서이다. 등뒤에서 생활주임과 수위 둘, 거기에다 교감과 제복경관, 사복형사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다마와 나와 나카무라는 놈들이 지나칠 때까지 복도를 닦는 시늉을 했다. 경관을 보고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경관들은 걸을 때 왜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내는 것일까. 게다가 투박한 그물 구두를 신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구두보다 소리가 더 컸다.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선두를 걸어가는 생활주임의 슬리퍼가 내 눈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사각사각하는 경관의 발걸음 소리도 멈추었다. "자네들." 생활주임이 불렀다. 우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자네들 기분은 잘 알겠지만, 페인트는 그렇게 한다고 없어지지 않아. 전문가들을 부를 생각이니 그냥 교실로 들어가. 곧 홈룸이 시작될 것이고, 종업식도 예정대로 할거야. 그만 들어가." 생활주임은 그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체포되어 두들겨 맞지나 않을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던 나는 화가 치밀었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생활주임의 얼굴을 대하고 보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규슈제국대학 법학과 졸업생인 생활주임은 재즈 찻집에서 A.C.조빈을 듣고 있던 나의 콜라 잔을 탈취하고 그 자리에서 뺨을 열 대나 때린 다음, 나흘간 정학처분을 내린 놈이다. 조례나 종업식 때마다 논어를 인용하면서 비행의 우를 범한 학생의 예를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개하면서 즐거워하는 나쁜 놈이다. 키가 크고 은발에도 고대 형법에 관한 책을 몇 권이나 출간하였고, 가장 더러운 방식으로 설교를 한다. 결코 흥분하는 법이 없는 냉정한 시선으로, 네 놈은 쓰레기다. 네 놈을 선도할 만큼 우리 학교는 여유가 없다. 학교가 싫으면 빨리 퇴학해서 다른 학교로 가면 되잖아, 라는 식으로 나무라는 놈이다. 그런 놈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직원실 쪽으로 멀어져 가는 생활주임. 교감의, 창립이래 처음 있는 불상사입니다, 라는 말이 들려왔다. 창립이래... 아다마와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다시 한번 악수를 나누었다. 옥상에 가 보자, 하고 아다마가 말했다. 나카무라도 따라왔다. "나카무라, 아까 뭔가 이상하다고 말했었지?" 계단을 오르면서 아다마가 물었다. 난간 기둥의 낙서에도 많은 학생들이 달라붙어서 걸에로 문지르고 있었다. "예, 나, 마음에 걸려 죽겠어요. 등교해서 맨 먼저 교장실을 들여다보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 냄새도 나지 않은 거예요." "그거야, 똥을 맨 먼저 치울 것은 뻔한 일이니까." 하고 아다마가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소독약 냄새가 조금 난 것도 같군요." "아마도 수위가 치웠을 거야. 수위는 6시에 일어나니까. 낙서를 보고는 깜짝 놀라 제일 먼저 교장실과 교직원 실을 둘러봤을 거야. 그때 똥을 발견하고 청소를 했을 거야. 똥이란 말이야, 뭐라고 할까, 농담이 되기 어려운 것이니까." 아다마의 분석은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농담이 되기 어렵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나카무라, 똥에 사상이 있다고 생각하니?" 하고 내가 물었다. "사상? 똥에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옛날부터 사상범은 일단 헌병이나 특고에서도 특별취급을 받았어. 사상이 없는 범죄는 그냥 감옥에 처넣어 버리지. 거기에 똥이 아니냐? 더럽기도 하고, 사상과는 도저히 인연이 없잖아.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아." 잠시만요, 하고 나카무라는 계단 도중에 멈추어 섰다. "똥을 싸라고 강요한 사람은 겐 선배입니다."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카무라는 그렇게 말했다. "똥을 싸라 한다고 똥을 싸는 고등학생이 세상에 어디 있니. 농담을 정말로 들으면 어떡해." 나카무라는 정말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다마는 나카무라의 어깨를 감싸주면서 달랬다. "나카무라, 농담, 농담. 겐의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지마." 똥에 관해서는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 경찰의 발표, 교장의 이야기에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수위만이 가슴에 품고 감추어 버린 것 같았다. "겐 선배, 도서실 벽에 <무기를 들어라.> 하고 적게 한 것도 선배님이죠.?" 똥의 복수를 하고 싶었는지 나카무라는 도서실 낙서를 들고 나왔다. "그래, 내가 그랬지." "한자 하나가 틀렸더라구요." "응?" "무기의 '무'를 시험의 '시'로 썼지요? 학생들 사이에서 말이 많아요. 이런 멍청이 북고생은 한자 시험만 치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에요." 그 말을 듣고 아다마가 배를 잡고 웃었다. 나카무라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옥상 입구의 바리케이드 철거작업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하라와 가와사키가 땀에 젖은 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아이하라는 펜치로 철사를 자르고, 가와사키는 쌓아올린 책상과 의자를 옆으로 치우고 있었다. 아이하라가 작업을 중단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이하라는 빙긋이 웃었다. "어이, 야자키. 무엇 하러 왔어?" 이 놈에게만은 비굴하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놈에게 철거를 도우러 왔습니다, 하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런 말을 해봐야 경멸과 미움이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에 금방 탄로 나고 만다. "예, 바리케이드 봉쇄가 어떤 것인지 구경하러 왔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이하라는 웃음을 지우고 나를 째려보았다. "네 놈이 한 짓은 아니겠지?" 땀에 젖은 셔츠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가와사키가 그렇게 내게 물었다. 웃으면서 속이려 했지만 표정이 얼어붙은 채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교사들이 외부 소행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를 향해, 흥, 하고 코웃음을 친 아이하라는 만일 네가 범인이라면, "목을 졸라 죽이겠다."라고 말했다. 인문계 진학반들이 모여 있는 복도에서 마츠이 카즈코를 만났다. 레이디 제인은 양손을 뒤로 돌리고, <저스트 라이크 어 우먼>을 허밍하면서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땀도 흘리지 않고, 손에 걸레도 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낙서 청소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안녕, 야자키, 하고 시원스런 알토로 나에게 인사를 한 레이디 제인은 달콤한 향기를 남긴 채 내 앞을 지나갔다. 용기가 솟아올랐다.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케이드 봉쇄를 해서 정말 좋았다고 생각했다. 꽃밭 앞으로 나와서 철거되는 플래카드를 올려다보았다. 아이하라와 가와사키가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 종이상자 안에 쑤셔 박고 있었다.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는 문자도 마구 구겨져서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헬리콥터가 춤을 추는 그 하늘 위로 7월의 기분 좋은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바리케이드는 반나절도 분명하지 못했지만, 밝디밝은 여름의 하늘과 구름이 우리들을 지지해 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사흘째, 아이스캔디를 빨면서 텔레비전 멜로드라마의 재방송을 보고 있을 때였다. 네 명의 형사가 우리 집 문을 두들겼다. 알랭 드롱 형사는 언제나 갑자기 나타난다. "나는 형사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을 체포하러 갈 생각이니 꼭 집에 있어 주세요. 그럼 안녕."하고 절대로 미리 알리지 않는다. 형사의 방문을 받아 본 사람은 인생의 한 중요한 가르침을 배우게 될 것이다. 즉, 불행이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모르는 곳으로부터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는 중요한 사실을 말이다. 행복은 그 반대이다. 행복은 베란다에 있는 작고 예쁜 꽃이다. 또는 한 쌍의 카나리아이다. 눈앞에서 조금씩 성장해 간다. 그 날은 아침부터 활짝 개었다. 풍경도 어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평상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장기알 같이 생긴 싸구려 아이스캔디의 맛도 그대로였다. 네 명의 남자들은 현관에서 차임 벨을 눌러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집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새파랗게 질려 아버지를 불렀다. 무슨 일일까, 하고 나는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네 명인 걸로 봐서 가스 수금원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나쁜 예감은 안개 같은 것이다. 그것은 차갑고 축축하게 허공을 떠돌다가 갑자기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들 가운데 하나가 현관문 너머로 고개를 뽑아서 나를 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얼굴을 돌려 나를 보았다.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어머니는 쭈그리고 앉았다. "저 놈들은 형사다." 아버지가 나에게 와서 그렇게 말했다. "북고의 바리케이드 사건의 중요 참고인으로 너를 데리러 온 것이야." 그 순간 아이스캔디의 맛이 사라졌다. 풍경도 바뀌었다. 예감의 안개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나는 멍해졌다. 들킨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의문과 불안이 목을 바싹 마르게 했다. "뭐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하긴 했는데, 어때? 네가 했니?" 장기알 같은 아이스캔디가 녹아서 바닥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내렸다. 했어,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랬군." 아버지는 아이스캔디가 녹아 떨어진 마루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괴로운 표정으로 형사들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경찰서는 다른 어떤 곳과도 닮지 않았다. 마치 엉성하게 짜여진 고등학교 교무실 같은 인상을 준다고나 할까, 묵비, 묵비, 묵비하고 중얼거리면서, 나는 취조실로 들어갔다. 조잡한 책상 앞에서 나를 상대해 준 사람은 사사키라는 이름의 초로의 형사였다. 눈이 마주치자, 우후후후, 하고 그는 웃었다. 철창이 보였다. 사사키는 셔츠 단추를 열더니 공작이 그려진 부채를 흔들어 댔다. 더웠다. 나는 이마에서 뺨을 타고 목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열심히 닦아냈다. "덥지?" 사사키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더워, 야마다와 오다키, 나리시마, 너희 동료 모두가 불었어." 사사키는 하이라이트를 한 개비 빼들고 불을 붙였다. "야자키군, 모두 네가 리더라고 하던데, 사실이냐?" 뭔가를 마시고 싶었다. 끈끈하면서도 달콤한 아이스캔디의 찌꺼기가 목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다른 형사 하나가 보리차를 들고 와서 나와 사사키 앞에 놓았다. 나는 손을 댈 수 없었다. 보리차를 마시는 순간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겠단 말이지. 그럼 시간이 걸리겠군. 야마다와 오다키는 이미 전부 불었기 때문에 점심때가 지나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야자키 군은 불지 않겠단 말이지. 잘 들어. 자네는 아직 17세, 그러니까 이번의 취조도 임의출동에 지나지 않아. 말하지 않는다고 밤까지 잡아두지는 않아. 내일 다시 만날 테니까. 오늘 다른 동료들 이야기를 모두 정리한 다음 자네를 체포할지도 몰라." 집을 나설 때 아버지는 말했다. 겐짱, 경찰은 모두 알 수 있다. 친구를 파는 일 이외에는 모두 말해 버리도록 해.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니까 괜찮아. 아들이 형사에게 잡혀가는데 아버지로서 그렇게 냉정해질 수 있다니,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들어. 야자키 군. 경찰은 이런 일에는 말이야... 넌 모르겠니? 이런 무덥고 좁은 방에서 자네처럼 동경대 지망을 학생뿐만 아니라... 아, 마츠나가 선생은 자네가 대단히 우수한 학생이라 하더군." 경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을 조사해 버린다. 불행은 항상 모르는 사이에 착착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마치 충치처럼. "난 자네 같은 학생들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야. 야쿠자도 있고, 부랑자, 머리가 가버린 창녀, 아무 뜻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샤부 중독자도 있어. 그래서 늘 피곤하지. 여름은 덥지, 겨울은 무릎이 시리지. 나같이 신경통이 있는 사람은 더 그래. 이게 직업이니 어떡하겠나. 아무리 귀찮아도 일이 생기면 밤 한시고 두시고 사람들을 취조하지 않으면 안 돼. 그렇지만 자네들은 달라. 수험생 아니냐? 어때 힘들지? 정말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면 체포할 수밖에 없어." 이 때 내가 과연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약했다. 동기가 그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친형제가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니다 형사가 말한 그대로다. 이런 귀찮고 별 볼일 없는 심문에서 일 초라도 빨리 해방되고 싶었다. 버틸만한 근거 따위는 아무 데도 없다. 한 가지 있다면 오기뿐이다. 그러나 이런 불쾌한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기분은 점점 더 강해졌다. "왜 탄로가 났는지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보리차가 담긴 싸구려 플라스틱 컵의 표면에서 물방울일 떨어져 내렸다. 취조실의 그런 서글픈 분위기가 참고인이나 피의자의 반항심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고교생인 내가 알 리가 없었다. 자존심이 점점 무너져 내려 자백에 이른다는 공식을 소시민 출신의 17세 고등학생이 이해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집으로 가고 싶어. 달콤한 아이스캔디를 빨고 싶어. 나는 오로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몰라? 누가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알 리가 없잖겠어? 응? 틀려?" 나는 점점 수치심을 잃어갔다. 자신을 떠받쳐 줄 무엇을 찾고 있었다. <알제리아의 투쟁>을 본 게 언제였더라? 아버지와 함께 보러 갔었다. 알제리아의 테러리스트들은 가스버너의 불길이 등에 닿아도 자백하지 않았다. 그렇다. 동료들 파는 것은 죽음보다 더 수치스럽다... 그러나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스캔디를 빨고 싶은 내가 속삭였다. 여기가 무슨 알제리아냐?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무슨 프랑스의 비밀경찰이라도 되는 줄 아니? 네가 지금 독립전쟁이라도 하는 줄 알아? 자백한다고 누가 죽니? "잘 봐." 형사는 책상 모서리에 쌓여 있는 조서를 가리켰다. "네 동료들은 모두 자백했다." 모두 자백했다는 말에 가슴일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카무라는 똥 이야기도 했을까? 야자키 선배의 지시로 교장실 책상 위에 똥을 쌌습니다, 라고 말했을까? 두려웠다. 아다마가 말한 그대로, 똥은 농담이 되지 못한다. 똥에는 사상이 없다. 여러 대학의 전공투의 투쟁 기록을 읽어보았지만, 똥을 투쟁 수단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기억에 없다. 죄가 무거워진다기보다는, 변태취급 당하지는 않을까? 마츠이 카즈코의 미움을 사지는 않을까?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네가 자백하지 않아도 이미 전부 알고 있어. 네 동료들이 모두 말했어. 왜 자백하지 않는지. 누구를 감쌀 생각이냐? 네 이름을 대면서 모두가 야자키의 지시에 의해서라고, 네 탓으로 돌리는 그 동료들을 감쌀 생각이냐? 그래서 기분이 좋아?" 형사가 한 말은 아이스캔디를 빨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의 독백과 똑같은 것이었다. 아다마의 이름도 나왔다. 신용할 수 있는 놈은 아다마 뿐이야. 다른 아이들과는 사상적으로 하나가 된 것은 아냐, 그 놈들과는 달라, 그 놈들은 열등생들이다, 그런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바리케이드 봉쇄를 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놈들하고 한 무리로 취급당하다니 말이 안 된다... 일단 프라이드만 버리고 나면 인간은 어디까지고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열등생이 콤플렉스 극복을 위해 바리케이드 봉쇄를 한다. 그 자체로 멋진 일이 아닌가, 이런 당연한 판단조차 나는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알제리아도 베트남도 나에게는 너무도 멀었다. 여기는 평화로운 일본이다. 확실히 팬텀기의 폭음이 들리기는 한다. 동급생이었던 여학생이 흑인 병사의 좆대가리를 빨고 있다. 그러나 피는 흐르지 않는다. 폭탄도 떨어지지 않는다. 네이팜 폭탄으로 등줄기가 타버린 어린이도 없다. 그런 나라의 서쪽 한 구석의, 작은 거리의, 경찰서의, 무덥고 좁은 취조실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는 입을 다문다고 세상을 변할까? 동경대와 일본대의 전공투는 이미 패배하지 않았는가... 나는 뭔가를 바랐다. 눈앞의, 주름 투성이의, 탁한 눈을 하고 있는 초로의, 이 사나이에 대항 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를 발견하고 싶었다. 난 너를 싫어해, 하고 혀를 날름 내미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스캔디를 빨고 싶은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었을까? 알제리아의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베트콩도 아니고,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도 아닌 내가 왜 이런 장소에 있단 말인가? 마츠이 카즈코의 눈길을 끌고 싶어서라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멋진 동기라고 가슴을 활짝 펼 수가 없다. "거지가 되고 싶니?" 사사키 형사는 자세를 고치고 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난 많이 알고 있어. 거지가 된 인간 말이야. 거리를 걸어 봐, 여기저기서 어슬렁거리고 있잖아? 응, 야자키는 거지 기질이 있는지도 몰라, 넌 불량배를 좋아할 것 같구만, 거지가 된 인간을 난 많이 알고 있는데 말이야. 가만 보면 야자키와 닮은 사람이 많아 거지 중에 바보는 거의 없어. 물론 거지가 되고 나면 반쯤 머리가 가서 멍청이가 되어 버리지만, 그 이전에는 말이야. 그들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었어. 동경대고 교토대고 모두 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야. 그런데 박자가 조금 안 맞아서, 생각을 조금 잘못해서 간단히 거지가 되어 버리는 거야. 거지는 냄새가 심해." 나는 보리차를 마셨다. 그리고 패배를 선언했다.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아이스캔디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동생이 일어나서, 아, 오빠 돌아왔네, 왜 이리 늦었어, 하고 예쁜 돼지 잠옷 차림으로 말했다. 오빠, 알랭 드롱 나오는 영화 보여 줘, 하고 말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지, 알면서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응, 알았어, 데려고 가 줄께, 웃는 얼굴로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와, 신난다! 하고 나에게 안기며 볼에 입을 맞추었다. 여동생이 잠들고 난 다음, 아버지는 알랭 드롱이라, 하고 중얼거렸다. 팔짱을 끼고 천장을 바라본 채였다. "알랭 드롱과 장 가방이 나오는 영화 제목이 뭐였지? 어머니와 함께 봤잖아, 몇 년 전에." 눈물 자국이 아직도 볼에 선명한 어머니가 <지하실의 멜로디>였잖아요, 하고 말했다. "아, 맞아." 아버지는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시계바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은 왜 일까, 이럴 때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는구나, 하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너는,"하고 아버지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퇴학을 당하면 어쩔 생각이냐?" 내가 돌아올 때까지 부모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 "그러면 검정고시를 쳐서 대학에 가면 되잖아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알았어, 이제 자자." 아버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어제 경찰에서 연락이 있었다. 이것은 꾸지람을 한다든지, 화를 낸다든지 할 문제가 아니다. 처분은 학교측에서 결정하여 교장선생이 발표를 할 것이야. 여하튼 그 때까지는 자숙하고 조용히 지내도록 해." 보충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담임 마츠나가는 아다마와 나를 교무실에 불러 그렇게 말했다. 교무실은 묘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이를테면 모의고사를 빼먹거나 재즈 찻집을 출입하다 들켰거나,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잡혀 온 경우와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어색했다. 또 야자키로군, 가끔은 칭찬 받으러 와 봐라, 라는 농담도 하지 않았다. 체육선생도, 학생지도주임도, 멀리 책상에 앉아서 우리 담임 선생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얼굴을 숙이고 마는 선생도 있었다. 필시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를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학교 창립이래 처음 있는 불상사이기에. 보충수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 친구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쿠라쇼시(일본 중세의 고전)'를 읽었다. 나와 아다마는 규슈 서쪽의 시골 고교생의 상식을 초월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반 친구들도 어떻게 우리를 대해야 할지를 몰라 했다. 쉬는 시간, 가까운 몇몇 친구들이 나와 아다마 주위에 모여들었다. 나는 큰 소리로, 야! 참 재밌더라,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계획, 실행, 경찰에서의 취조를 재미있게 과장해서 떠벌렸다. 나카무라의 똥에 이르러서는 폭소에 폭소가 터졌고, 반 친구들 대부분이 아다마와 내 주위를 둘러쌌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나는 스타가 되었다. 한 가지를 배웠다. 기가 죽어 반성해 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고교에서 바리케이드 봉쇄를 사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학생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즐기는 자가 이긴다. 힘차게 웃으면서 바리케이드 봉쇄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를 떠들어대면 오히려 일반 학생들은 마음을 놓는다. 사실은 누구라도 그런 행동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학생도 반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적의를 품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울면서 용서를 빌기를 바라는 놈들이다. 그 놈들의 증오심 가득한 눈길을 의식하면서, 나는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퇴학을 당해도 좋다고 그 놈들을 향하여 중얼거렸다. 비록 퇴학당하는 일이 있어도 나는 네 놈들에게 지지 않아, 나의 즐거운 목소리를 더 세차게 들려 줄 테다... 보충수업이 끝난 후, 아다마와 이와세와 나는 도서실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새나갔지?"하고 이와세가 물었다. "후세 바보자식!"하고 아다마가 설명해 주었다. "후세 집은 여기서 멀잖아? 그 바보자식, 페인트가 묻은 옷을 입은 채로 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간 거야. 길을 가다가 경찰이 불러 세웠다는 군. 그 애 집은 시골이잖아. 말만 잘했으면 됐을 텐데. 시골 순사가 뭘 안다고. 속이려면 간단히 속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말도 못하고 머뭇머뭇했다는 군. 그 때만 해도 순사는 아무 의심도 없이 그냥 학교와 이름만 묻고 보내 주었대. 아무리 바보 경찰이라고 하지만 뉴스를 본 다음에는 후세를 수상쩍게 생각 않겠어? 바로 잡혔지 뭐. 형사 앞에 앉자마자 겁을 먹고 하나도 남김없이 불어버린 거야." 뒤에서 야자키, 하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츠이 카즈코가 서 있었다. 엄숙한 표정이었다. 레이디 제인의 곁에는 북고 영어연극부의 앤 마가렛으로 불리는 사토 유미도 서 있었다. "유미하고 이야기했는데, 서명운동을 할 생각이야... 야자키 군이 퇴학당하지 않게 하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만일 내가 개였다면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었을 것이고, 오줌을 싸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이며, 땅에 엎드려 뒹굴었을 것이다. 린든 존슨 3학년 여학생 전원이 종합운동장에 모여 전국체전 단체 매스게임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매스게임 지도는 전쟁미망인 후미 선생. 자동차 교습소의 교관이 가장 좋은 예인데, 모든 선생은 자신의 입장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공갈을 치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 생활의 결손감을 메우려 한다. 어둡고 외로운 인간관계가 수치를 모르는 선생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저기 저기, 3반 학생. 남학생은 아무도 보지 않아. 왜 그렇게 다리를 올리지 못해. 아무도 네 다리를 보지 않잖니. 힘껏 올려." 후미 양은 핸드 마이크를 잡고 고함을 쳐댔다. 3백 명이나 되는 소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나와 아다마는 흥이 나지 않았다. 교장은 내일 우리들에 대한 처분을 발표할 것이다. 레이디 제인과 앤 마가렛이 기획한 서명운동은 하나의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학교 당국의 탄압 때문에. 어제 오후였다. 보충수업이 끝난 다음. 동지들은 한 자리에 모여 지미 페이지와 제프 백 둘중 누가 더 손가락이 빠른지, 누가 더 빨리 달리는지, 누가 더 빨리 밥을 먹을까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니스 조플린은 필시 방귀소리도 갈리 터져 나올 것이라고 내가 말하자, 모두들 배를 잡고 웃었다. 한 사람이 웃음을 멈추고 교실 입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갑자기 정적이 감돌았다. 거기에는 천사가 서 있었다. 마츠이 카즈코가 이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소녀는 남자들의 폭소를 멈추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못난이는 정반대이다. 폭소의 원인을 제공한다. "야자키, 잠깐..." 그렇게 말하고 마츠이 카즈코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는 춤을 추는 듯한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천사는 교실을 나서 힘없이 복도의 벽에 기대어 서서, 뒤로 손을 돌린 채, 눈을 위로 치켜 뜨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눈이 바라보면 나는... 하고 생각했다. "야자키, 나 말이야." 천사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알아듣기 위해서는 더욱 가까이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마츠이 카즈코의 샴푸 냄새가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했다. 약간 땀이 배인 이마와 핑크 빛 입술의 가느다란 주름과 가늘게 떨리는 길다란 눈썹을 보고, 이렇게 아름다운 타원형의 얼굴을 꽉 끌어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멍하니 공상의 날개만 피고 있었다. 아다마는 교실에서 얼굴을 내밀고 빙긋빙긋 웃고 있었다.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을 인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흔들어 대는 놈도 있었다. "도서실에 가는 게 좋을까?"라고 내가 말했다. "아니, 여기서 얘기할래." 천사는 두 사람만의 공간을 원하지 않았다. "저, 유미와 다른 학생들과 서명운동을 벌이려 했는데, 선생님이 불러서 말이야, 나 너무 부끄러워서 야자키에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역시 말해 버리는 게 시원할 것 같아서, 저, 사과해야 할 일은 음, 음..." 나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마츠이 카즈코는 선생에게 협박당한 것이다. 저 수치를 모르는 선생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어떤 식으로 겁을 주었는지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법은 마찬가지다. 경찰관이나 헌병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법제도 측에 서 있다. 뭐가 불만이니? 말해 봐. 이렇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라에서, 게다가 현에서 가장 동경대 입학율이 높은 학교에서. 그대들은 장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야? 하고 공략했을 것이다. "미안해." 마츠이 카즈코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선생과의 굴욕적인 대화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정말 화가 치민다. 놈들이 주장하는 유일한 이상은 '안정'이다. 즉, '진학', '취직', '결혼'이다. 놈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행복의 전제조건이다. 구역질 나는 전제조건이지만, 그것이 의외로 효과를 발휘한다. 아직 아무 것도 되지 않는 진흙상태와도 같은 고교생들에게 그것은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마츠이는 3번이지?"하고 내가 묻자, 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임은? 시미즈?" "응, 시미즈 선생님이야." 시미즈는 옆에서 보면 초승달처럼 턱이 튀어나온 음험한 놈이다. 나는 시미즈 흉내를 냈다. 어이, 마츠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야자키 같은 불량학생과 네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래? 좀 신중하게 생각할 수 없을까? 시미즈는 사가대학 국문과 출신이다. 일본에서도 가장 평범한 대학의, 그것도, 국문과이다. 사가에는 현청 앞의 일곱 색 분수와 옛날 성과 밭밖에 없다. 라면도 맛없고, 젊은 여자도 별로 없다. 후쿠오카와 나가사키에 쌀을 공급하는 농업 중심의 현이다. 그런 시골에서 국문학 따위를 전공한 인간이 마츠이 카즈코와 같은 아름답고 용기 있는 여고생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나의 시미즈 흉내는 그리 잘된 것은 아니었지만, 마츠이 카즈코는 한 손을 입에 대고 웃었다. "아, 그렇지, 그렇지. 잠깐만 기다려 줘." 나는 그렇게 말하고 교실로 되돌아와서 미용실 체인 경영자의 아들인 에자키라는 놈에게, 아까 그 레코드 좀 빌려 줘, 하고 귓속말을 했다. 에? 그렇지만... 라고 에자키는 싫은 표정을 지었다. 이 멍청이, 잠깐 빌려 달라니까 그러네, 하고 째려보면서 가방을 열게 하고 아직 포장지도 뜯지 않은 신품 <치프 스릴>을 빼앗았다. 아, 아직 나 한 번도 듣지 못했는데... 에자키의 슬픈 목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레코드를 들고 천사 쪽으로 달려갔다. 포기해, 포기해, 포기해, 한 번 마음먹었다 하면 겐은 비록 상대가 경찰이건 선생이건 손에 넣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 생각하고 포기해, 하고 아다마는 에자키를 달랬다. "마츠이, 제니스 조플린 좋아하니?" "아, 그 레코드는 알고 있어. 쉰 목소리를 내는 여자 가수잖니?" "응, 들어 봐. 최고야." "나, 듀란이나 도노반이나 바에즈 같은 포크계 밖에 잘 모르지만, 이 레코드만은 알고 있어. <서머 타임>도 들어 있잖니?" 마츠이 카즈코는 상냥하다. 내가 스스로 약속한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이름은 결코 입밖에 내지 않았다. "이것 빌려줄께. 그 일은 잊어버려. 서명운동 따위는 잊어버리면 돼. 퇴학은 안 될 거야." "그렇지만 금방 산 것 같은데. 야자키, 아직 한 번도 듣지 않은 레코드 아니니?" "아니, 괜찮아. 난 지금부터 정학 아니면 근신일 테니 시간은 많아. 나중에 천천히 듣도록 하지 뭐." 나는 북고의 교실 창으로 먼 산을 바라보며 가능한 외로운 듯이 보이도록 신경을 쓰면서, 쓸쓸히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마츠이 카즈코가 눈을 올려 뜨고 뚫어져라 나를 바라본다는 것을 느끼며, 이제 됐다, 결정했다, 하고 쾌재를 불렀다. 지금이라도 당장 교실과 복도를 춤추며 뛰어다니고 싶은 기분이었다. 천사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사라진 다음, 교실로 들어서자, 저만 좋으면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좋다는 말인가... 라고 에자키는 흰 눈을 번득이며 중얼거렸고, 아다마는 백점 만점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교내 서명운동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이제 판결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운동장에 하얀 선을 그어 놓고 달리기도 하고 뛰어오르기도 하는 여고생 집단을 내려다보면서, 아다마는 화가 치민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표정을 짓는 아다마는 처음 보았다. 아다마는 온화하고 냉정한 사나이였다. 슬픔과 증오와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다. 벽지의 탄광촌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아버지는 관리직이었고, 어머니는 고등사범을 나온 양갓집 규수였기 때문에 애정과 장난감에 둘러싸여 자랐다. 무엇보다도 5세 때까지 오르간을 배웠다는 것만 보아도 탄광촌 출신으로서는 얼마나 특권계급에 속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아다마가 풀이 죽어 있다. 처분 발표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아까부터 몇 번이나 말했잖아."하고 여고생들을 나무라는 후미 양의 화난 음성이 신경에 거슬렸다. 깡마른 목에 불거져 나온 푸른 혈관에다, 아래로 축 늘어진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후미 양. 그녀에게 그렇게 거만을 떨 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다마가 말하지 않아도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17세의 소녀들의 몸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본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에. 이런 8월의 염천하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체육복을 입고 강제로 움직이기 위해 17세의 육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개중에는 당연히 하마 같은 몸을 한 소녀도 있긴 하다. 그러나 미끈하고 탄력 있는 피부는 해변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환성을 지르며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렇게 맥이 빠져 있는 것은 내일로 다가온 처분 발표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학생 매스게임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진 탓도 있는 것이다. 뭔가 강제를 당하고 있는 개인과 집단을 보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녁 식사 중에 처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잠옷을 입은 여동생과 불꽃놀이를 했다. 여동생은 오빠! 내일 도리가이를 데리고 와서 놀 거야. 하고 말했다. 도리가이는 여동생의 초등학교 6학년 동급생으로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난 튀기였다. 내가 여동생에게 소개해 달라고 말해 둔 참이었다. 여동생은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해 두었다가, 겉으로는 불꽃놀이를 하면서도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나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마루 끝에 서 있다가, 나도 해 보자, 하고 맨발로 마당에 내려서더니, 불꽃 세 개를 한꺼번에 붙여 빙글빙글 돌렸다. 와, 예뻐, 하고 여동생은 재잘대면서 손뼉을 쳤다. "겐짱, 내일 말이야."하고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도리가이의 푸른 눈동자와 봉긋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가슴을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분 발표 따위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일, 난 가지 않을 것이야. 어머니가 같이 갈 것이다. 만일 내가 가면 싸움을 하게 될지 모르잖아." 아버지는 늘 그랬다. 학교에서 호출하면 반드시 어머니를 보냈다. 나도 그런 쪽이 마음이 편했다.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눈을 돌리면 안 돼." 아버지는 다짐을 주듯이 말했다. "교장이 말을 할 때, 눈을 돌리거나 아래를 보거나 해선 안 돼. 절대로 비굴한 태도를 보여선 안 돼. 딱히 허세를 부릴 필요는 없지만, 비굴하게 머리를 숙이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강간을 한 것도 아니야. 당당하게 처분을 받도록 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바리케이드 봉쇄가 끝난 다음, 우리들은 어른들로부터 일방적으로 공격만 받아왔다. 용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은 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혁명이 일어나면 너희들은 영웅이 될지 몰라. 교수형을 당할 사람은 교장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렇게 당당하게 마음먹도록 해."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고 다시 불꽃을 빙글빙글 돌렸다. 준비한 불꽃은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날 밤의 불꽃놀이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어머니와 함께 학교 정문을 통과하기는 처음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식은 할아버지와 함께였다. 부모님 두 분 다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다마의 어머니와 만났다. 키가 크고 아다마처럼 얼굴 윤곽이 선명하고 굵은 선을 가진 분이셨다. 이번에 우리 아들 때문에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어머니는 아다마의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엄마! 아다마의 어머니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 하고 나는 어머니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릴 적부터 너는 늘 주모자였잖아, 그게 아주 버릇이 되었어. 그런 주제에 무슨 말할이 있니, 하고 어머니는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다마의 어머니는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학생이 우리 아이를 타락하게 만든... 그런 말을 하는 듯한 눈길이었지만, 나는 웃는 얼굴로, 안녕하세요, 야자키입니다, 하고 힘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나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기자택근신, 이라고 교장은 선언했다. 무기라고는 하지만 반성하는 태도에 따라서는 빨리 해금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졸업과 진학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만큼, 차후 절대로 불량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부모와 학생 모두 반성해 주길 바랍니다... 라는 설교를 덧붙였다. "퇴학은 면했어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무기라는 말은 무기징역을 연상시키는 우울한 용어이긴 하였지만, 자택근신은 정정당당하게 학교를 빼먹을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교장실을 나와 교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는데, 보충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놀자파 대표 시로쿠시 유지가 창으로 목을 빼내어, 겐! 아다마! 어떻게 되었어?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겐, 가만있어, 겐, 가만있어, 하고 애타게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어이! 퇴학은 아니야, 무기근신 먹었어, 하고 학교가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나는 외쳤다. 밴드의 멤버들, 반 친구들, 마스가키 일파의 하급생들, 시로쿠시가 이끄는 놀자파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마츠이 카즈코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어 주었다. 모두들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마츠이 카즈코에게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자택근신이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 모른다고 해서, 너그럽게도 '동네 산책'이라는 약간의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나는 완벽하게 자유로웠다. 영화관이나 재즈 찻집에 가는 것은 무리였지만, 우리 집은 시내 중심가에 가까웠기 때문에 공원이나 기지 부근을 개와 함께 아이스캔디를 빨면서 거닐 수도 있었고, 책방이나 레코드 가게도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었고, 흑인병사와 엉겨 붙은 창녀집도 구경할 수 있었다. 또 귀여운 여동생은 도리가이를 데리고 와서 소개까지 해 주었다. 아다마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아다마는 하숙집을 떠나 탄광촌으로 돌아갔다. 경기가 좋지 않아 폐광직전의 탄광촌이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신발가게, 건어물상, 문방구, 옷가게 정도가 다였다. 그것도 작업용 양말밖에 없는 옷가게, 작업화밖에 없는 신발가게였다. 폐광이 된다는 소문이 작년부터 탄광촌 주변을 떠돌자,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만이 득실대는 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 거리에서 레드 제플린과 장 주네와 말타기 체위를 알아 버린 17세가 어떻게 가만히 앉아 근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너는 어째서 그렇게 요령이 좋으냐, 하고 아버지가 놀라워할 정도로 나는 감시를 위해 가끔씩 집에 찾아오는 선생 앞에 웃는 얼굴로 보리차를 내밀고, 담소를 나누며 진심으로 반성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아다마는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다마는 전화를 할 때마다 울화통이 터져 못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래서 나와는 반대로 감시하러 찾아오는 선생과 말싸움만 벌였다. "울화통이 터져 죽을 것 같아." "그러지 말고 조금만 참아라." "겐, 겐은 정말로 반성하고 있다고 선생이 그러더라. 정말이냐?" "포즈!" "포즈?" "그래." "잘도 그런 포즈를 취하는 군. 겐, 넌 부끄럽지도 않니?" "극단적이 되어선 안 돼. 극단은 금물이야." "겐, 페스티벌은 어떻게 되어 가니?" "해야지." "시나리오는 만들어졌어?" "이제 곧." "바로 보내 줘, 알았지. 나, 여기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준비해 갈 테니까." "준비라고 해봐야. 거기는 양말하고 석탄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근신중의 아다마는 그런 농담도 받아넘길 여유가 없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탁! 하고 전화를 끊고 만다. 미안, 미안하고 나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안, 미안. 화내지 마. 화내지 마. 이제 곧 시나리오가 완성될 거야. 금방 보내 줄께. 그리고 말이야. 오프닝은, 생각 안 나니, 저번에 <길>에서 만난 애 있잖니? 나가야마 미에라고 준와의, 그 애에게 네글리제 같은 옷을 입히고 말이야. 촛불을 들게 하는 거야. 음악은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 3번'이 좋겠어. 그리고 한 손에는 도끼를 들게 하고 말씀이야. 무대 위에는 우리 북고의 선생이나 사토 총리나 존슨의 이름을 베니어판에 적어 두었다가, 그 도끼로 마구 난도질하는 거야. 어때? 재밌겠지?"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아다마는 기분 좋아했다. 울화통이 치밀어 견딜 수 없는 아다마를 북돋아 준 유일한 언어는 페스티벌이었다. 바리케이드 봉쇄가 끝난 후, 아다마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치프 스릴 담임 마츠나가는 학생 시절 오랫동안 결핵을 앓았기 때문에 무척 몸이 여읜 사람이었다.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큰 소리를 질러본 적이 없다는 온화한 신사였다. 여름방학 동안 이틀에 한 번, 때로는 매일 우리 집을 방문했다. 방문을 하긴 했지만 거의 말이 없었다. 잘 지내니, 너무 초조해하지 마, 하고 두세 마디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다마의 집에도 거의 매일 얼굴을 내밀고 있다고 했다. 모든 선생들은 자본가의 앞잡이라고 날카롭게 아다마가 외쳐대면 그냥 빙긋이 웃을 뿐,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마당에 핀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중얼거리고는 그냥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마츠나가는 매일 보충수업을 한 다음, 높은 언덕에 있는 우리 집과 아다마가 사는 탄광촌을 버스를 타고 오갔던 것이다. 내 방에서는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좁다란 언덕길과 계단을 영원처럼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늘 마츠나가는 그 언덕길을 걸어 우리 집으로 왔다. 도중에 몇 번이나 멈추어 서서 휴식을 취하면서. 폐병 경력을 가진 선생이, 그것도 설교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통 땀으로 젖은 얼굴로 들어서서는, 잘 지내고 있니? 라는 단 한마디를 하기 위해 이렇게 높은 우리 집까지 찾아온다... 내 마음속에서 마츠나가에 대한 경멸감이 사라져 갔다. "야자키는 아직 이런 말을 이해 못할지 모르겠지만, 난 사범학교 시절에 큰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았지. 내 가슴은 상처투성이라 보기도 싫을 정도야. 의식불명이 되기도 하였어.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인간은 무슨 일에든 익숙해지기 마련이야. 수술에도, 마취에도, 의식불명에도 익숙해 진 거야. 그래서 나는 무슨 일에든 '괜찮아'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 이를테면 여름에는 해바라기와 칸나가 아름답게 피지 않니. 난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괜찮아'하고 모든 것을 체념할 수 있게 되었어." 마츠나가는 가끔 그런 말을 했다. 내 마음속에서 경멸감은 사라지고 마츠나가에 대한 존경심이 싹 트기 시작했지만, 나나 아다마는 '괜찮아'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아다마의 초조감은 절정에 달해 있었고, 2학기가 시작되자 나도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주말, 지방도시의 오전, 아이들은 모두 학교로 가고, 어른들도 없고, 여자와 노인과 젖을 먹는 아이와 개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조퇴를 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올 때, 거리가 무엇 때문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보였다. 셔터가 반쯤 열린 꽃집에서는 향기로운 꽃내음이 퍼져 나오고, 금방 문을 연 구둣가게의 주인은 작업복을 걸치면서 길게 하품을 하고, 처음 듣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소리가 창을 통해 퍼져 나오고, 유치원 원아들은 철조망 안에서 놀고 있고, 나무 그늘 아래서 노인들이 웃고 있는 거리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그런 거리에서 근신해야만 했던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각 과목의 출석일수도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난 이전에도 학교를 빼먹은 날이 많았다. 유급, 이라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런 고등학교에 일 년 더 다닐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비오는 날, 늘 개와 함께 있던 산책도 포기하고, 나는 드럼을 두드리고 있었다. 차임 벨이 오래오래 울렸다. 현관문을 열어보니 아다마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아다마입니다. 겐에게 좀 할 얘기가 있어 찾아왔어요." 힘없는 목소리였다. "내가 왔다는 말은 우리 타다시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그 애가 화를 내면 곤란해요." 정확하고 예쁜 표준어였다. "겐을 만나서 딱히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달리 이야기해 볼 사람이 없어서 말이에요. 알고 있겠지요? 우리 동네는 지금 폐광이 가까워져서 주인은 너무 바빠서 타다시 일에 신경 쓸 틈이 없어요." 아다마의 어머니는 등을 곧게 펴고, 하얀 손수건으로 목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된통 걸렸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울기라도 하면 어쩔까... "이삼일 동안 전화도 없었는데, 타다시는 잘 지내는 가요?" 그렇게 묻자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였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설마 발광을 한 것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한편 겁이 덜컥 났다. 아다마처럼 냉정하고 온화한 놈일수록 의외로 역경에 약한 법이다. 설마 머리에 리본을 달고 꽃무늬 잠옷 차림에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지랄 춤을 추는 것은 아니겠지. "난 우리 타다시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봐요." 틀림없이... 산에 걸린 보름달을 쳐다보며 우, 우, 하고 곡을 하고 있을 것이다... "타다시는 형제 중에서도 가장 나를 닮아서 착했지요. 온화하고, 그랬어요. 어린아이치고는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고 침착했지요. 무슨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내일의 조>를 보고 울먹이고 하고, <헤이본 펀치>를 보고는 침을 꿀꺽 삼키기도 했다구요,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아이가 난폭한 말을 하면서 선생님께 대들기도 해요. 왠지 요즘 들어 타다시를 보면 나에게서 너무 멀어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요." 고 3이나 되어 어머니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쪽이 이상하지요,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다마의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신하기 전에도 자주 겐에 대해 말을 하더군요. 겐이라는 친구가 있다고. 겐은, 저, 나는 그래서 겐과 좀 이야기를 나눠 볼까 생각했어요. 겐은 어떻게 생각해요?" "뭘 말씀하시는 건지?" "우선 대학 시험을." "별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일본의 교육은 모두 하나의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본과 국가를 위해서 사람을 뽑는 제도라고 보는 것이..." 나는 꽤 길게 내 생각을 말했다. 전공투운동, 마르크스주의, 60년대 안보투쟁의 교훈, 카뮈의 부조리 소설, 자살과 프리섹스, 나치즘, 스탈린, 천황제와 종교, 학도출진, 비틀스, 니힐리즘에서 이웃 이발소 주인의 권태와 퇴폐에 이르기까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나에겐 이해하기 힘든 말뿐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사실은 나도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라고 나 스스로 말을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나는 세대차는 수치가 아닙니다, 라는 말했다. 오랫만에 떠든 덕분에 목이 말랐다. 마츠나가에게는 이야기해 봐야 웃을 뿐이므로 재미없고, 부모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겸연쩍다. 나를 입혀 주고 먹여 주는 관계도 있고, 나의 언어에도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카뮈의 '페스트'를 사투리로 떠들어대면 거의 농담에 가까워지고 만다. '페스트'는 말이야, 단순한 질병 이야기가 아니야, 메타포라고, 파시즘이나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것이야... 사투리는 귀동냥으로 얻은 지식임을 금방 드러나게 한다. 친구의 어머니라면 정말 편하다. 내 기저귀를 갈아 준 사람도 아니고, 여동생과 엄마 젖을 놓고 싸우다가 매를 맞고 운 것도 모를 것이고, 다리뼈를 부러뜨려 업혀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제멋대로 지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겐이 말하는 내용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나도 전쟁 중에는 산 위의 고사포 부대에서 사무를 보았고, 공습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도 보았어요. 겐과 타다시는 그런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일을 벌인 것이겠죠?" 아뇨, 그냥 여학생 시선을 끌고 싶어서 했을 뿐이에요,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사실은 타다시도 요즘 들어 조금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아요. 친구도 찾아와 주어서, 어머, 사실은 금지되어 있다고 하던데... 마츠나가 선생님이 눈을 감아 주셔서, 어제도 예쁜 여학생 두 사람이 해수욕장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우리 집을 찾아와 주었지요." 엇? 하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예쁜 여학생? 고교생이었습니까?" "그래요, 반은 다르지만, 누구 라더라, 마츠이라던가? 아주 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사토라고, 키가 훤칠한..." 머리에 피가 올라 그 이후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이디 제인과 앤 마가렛이 아다마의 집에 놀러 간 것이다. 그 정도로 도회적이고 지적이고 용기 있고 아름다운 두 여인이 왜 사투리도 아닌 은어를 쓰는 아다마를 찾아갈 필요가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호기심 강한 공주님이기로서니, <치프 스릴>을 빌려준 프린스를 내팽개치고 그런 불륜을 저지르다니, 해수욕장에서 돌아가는 길? 설마 수영복 차림으로 찾아간 것은 아닐 테지, 필시 어깨에 하얀 수영복 끈 자국이 선명한 몸으로 선 오일 내음을 풍기면서, 그 지방에서밖에 나지 않는 수박을 밭에서 금방 따내어 개울물에 식힌 다음, 같이 베어먹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뭔가, 아다마의 어머니를 상대로? 고사포 부대의 사무일이 어쨌단 말인가,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람을 쏘아 죽이고 뫼르소는 모든 것이 태양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나도 카뮈가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조리다. 울화통이 치밀어 아다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겐이구나, 오늘 어머니가 좀 귀찮게 했겠군?" 어, 이 자식 이미 알고 있잖아. "미안하지만, 아직, 있니?" "아니, 지금 막 돌아갔어." "겐, 네 부모님은?" "둘 다 선생이야." "그러니, 그럼 그 방에서 단 둘이, 사이가 좋았겠군?" "내가 보리차와 아이스크림을 대접했어." "설마, 네 놈이?" "뭘?" "키스 따위는 안 했겠지?" "짜식이!" "미안, 농담, 농담. 오늘 말이야, 어머니가 겐의 주소를 묻더라구. 아하, 겐의 집에 갈 생각이로구나 하고 눈치를 챘지. 그랬군, 역시 갔었군, 무슨 말하데?"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 위에 피로 치솟았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싫었다. 레이디 제인에 대해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까. 상대에게 속마음을 들켜 버린 사람은 절대로 불리하다. "무슨 말했니? 어머니와 설마 내 욕을 하지는 않았겠지." "아니야, 사실은, 아다마, 실망하지 마." "에?" "놀라지 마라." "뭘?" "아니야, 역시 그만두는 게 좋겠어." "뭔지 말해 봐." "이것만은 도저히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어." "나에게 관한 일?" "그거야 당연하지." "제발 말해 줘." "아다마, 이 말을 듣고도 냉정해질 수 있을까? 약속해!" "빨리 말해라." "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의논하여 너에게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일을 시킬 생각이랴. 오카야마에 친척이 있다면서?" "응, 있어." "그 곳의 머슴으로 보내겠대. 넌 다음주부터 복숭아에 묻혀 살게 될 거야." "너 왜 그래? 전혀 그럴듯하지가 못해. 거짓말로써는 빵점." "그래?" "거짓말이 유일한 특기인 겐답지 못하게." "젠장!" "농담이야. 농담." 아다마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침착한 사나이의 의미심장한 미소는 기분 나쁘다. "마츠이와 사토가 어제 놀러 와서 말이야." "뭐라고?" 하고 나는 놀라는 척했다. "해수욕장에 갔다 돌아가는 길이라면서 들렀더라." 그 해수욕장은 아다마가 사는 바로 그 지역에 있는 것이었다. "호오, 그랬어?" 나는 냉정을 가장했다. "난 말이야, 그런 일에는 익숙치가 못해서, 정말 어쩔 줄 모르겠어." "무엇을?" "편지를 주더라. 참 곤란했어." "편지, 러브레터?"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러브레터?" "아마, 그런 것 같아. 문체가 너무 고풍스러웠어. 말씀드린다는 둥, 뵙겠다는 둥, 난 그런 말 안 좋아해, 랭보가 좋아." 눈앞이 깜깜해 졌다. "아, 마츠이가 겐의 주소를 묻기에 가르쳐 주었어. 괜찮지?" "마츠이가 뭔데, 그런 여자, 지성도 교양도 없고, 의리도 없어." "그럴까?" "그렇지, 그런 여자는 세상에 없을 거야, 남이 애써 마음먹고 <치프 스릴>을 선물했는데도 인사 한마디 없고 말이야. 우리 아버지는 연하장을 보내 준 사람에게 모두 답장을 보내는데." "선물이라고? 그건 에자키 것이잖아." "난 몰라!" "난 마츠이가 우아해서 다 좋더라. 마츠이라면 사토처럼 그런 고문체로 편지는 쓰지 않을 거야." "어?" "사토는 글래머이간 하지만, 머리는 마츠이가 더 좋은 것 같아." "아다마, 그럼 너는 글래머 사토에게 편지를 받았단 말이지?" "그럼." 갑자기 머리에 전깃불이 들어왔다. 백만 룩스의 전깃불이. "그렇지, 마츠이는 사실 인간이 아니야. 천사지, 천사. 인간의 형태를 하긴 했지만, 그 애는 신이 나를 위해 내려 준 천사라구." 네 놈의 성격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빨리 시나리오나 완성해라. 그렇게 말하고 아다마는 전화를 끊었다. 그 날 저녁, 꽃다발이 배달되어 왔다. 와! 정말 예뻐, 오빠가 받은 거야? 영화 같애, 하고 여동생이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나는 여동생과 손에 손을 마주잡고 노래를 부르며 방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장미꽃 다발 속에는 편지가 꽂혀 있었다. "이 일곱 송이 장미꽃이 당신의 고뇌를 조금이라도 녹여 줄 수 있기를..." 여동생이 그 꽃을 꽃병에 꽂아 주었다. 나는 장미를 책상 위에 두고, 밤이 새도록 바라보았다. 카뮈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부조리가 아니다. 장밋빛이다. 이틀만에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타이틀은 <인형과 남고생을 위한 에튀드>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길다란 제목이 유행했다. 밤을 세워 원고를 썼다. 그것은 세 살 적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다. 아버지는 나를 수영장에 데리고 갔다. 그 전에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이 있었던 나는 물을 무서워해서 풀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화를 내기도 하고, 걸레 자루로 때리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으로 꼬드기기도 했지만 나는 울면서 절대로 풀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 때 같은 또래의 예쁘장한 여자애가 하나 나타났다. 그 애가 풀 안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 애를 위해 풀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한 다음, 거의 잠도 자지 않고 나는 연극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사흘 걸렸다. 타이틀은 <거부와 반항의 저편>. 등장인물은 두 사람. 이혼한 누나와 대학시험에 떨어진 남동생. "연극? 누가 하는데?" 아다마가 물었다. "나, 나와 마츠이." "마츠이는 그렇다 치고, 겐, 너 연기할 줄 아니?" "초등학교 때, 세 마리 아기돼지의 둘째 오빠 역을 해 봤어. 연출도 물론 내가 하지." "설마 <헤어>가 나오는 누드 신은 없겠지?" "바보, 누가 그런 걸 한대." "겐, 너라면 갑자기 키스 신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야. 그런 신을 넣었다가는 마츠이의 미움을 살걸." 나는 서둘어 키스 신을 대본에서 지워 버렸다. 레이디 제인의 장미가 시들고, 그 시든 꽃잎을 소중히 책상 서랍에 갈무리했을 때, 활짝 웃는 얼굴로 마츠나가가 나타났다. 근신이 풀렸다. 119일째였다. 꿈꾸는 마음 119일 만에 책상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교문도, 교정도, 교실도 그리운 그 무엇이 아니었다. 처분 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서먹서먹한 곳이었다. 담임 마츠나가만은 달랐지만, 다른 선생들은 단 한 번의 잘못을 마음에 깊이 새겨두고, 아다마와 나를 마치 불의의 자식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들은 영웅도 악한도 아닌, 그냥 귀찮은 떨거지였을 뿐이었다. 영문법 수업이었다. 잇몸을 드러낸 키 작은 영어선생이 예문을 읽어 주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발음이다. 도저히 영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발음. 이런 발음은 지방 도시의 고등학교 교실에서만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런던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동양의 특별한 주문인 줄 알 것이다. 아다마는 하릴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겨운 것이다. 아다마가 시선을 옮기는 데로 따라가 보니, 창밖에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가을 소풍일 것이다. 북고 건너편에는 가파른 언덕길을 사이에 두고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공원과 아동문화센터가 서있다. 손수건을 떨어뜨리거나 보물찾기를 하면서 도시락을 까먹을 것이다. 정말 부럽다. 초등학교 때 감기에 걸려 사흘간 쉰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친구들이 교실이 그리웠다. 119일 동안이나 결석을 했음에도 이 교실에 대해 아무런 감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 곳이 선별과 경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개나 소 돼지도 어릴 때는 그냥 놀면서 지낸다. 북경요리의 돼지새끼 통구이용의 돼지새끼만 빼고, 동물이건 사람이건, 어른이 되기 일보 직전에 선별이 행해지고, 등급으로 분류된다. 고교생도 마찬가지이다. 고등학교는 가축이 되는 첫걸음인 것이다. "겐, 나리시마와 오다키가 함께 모이자고 하더라." 쉬는 시간, 아다마가 내 책상으로 와서 그렇게 말했다. "모여서 뭘 하는데?" 몰라, 하고 아다마는 고개를 저었다. "모여서 이야기를 해봐야 별볼일 없잖아." 나는 그렇게 쏘듯이 말했다. "겐은 이제 손을 뺄 생각인 모양이군." "손, 을 뺀다고, 어디에서?" "응, 정치활동." "너, 우리들이 한 일이 정치활동이라 생각하니?" 아다마는, 흐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바리케이드 봉쇄는 정치활동이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하나의 축제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엔터프라이즈 호가 사세보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그것은 하나의 축제였다. 물론 피가 흐르긴 했지만, 축제에서도 피가 흐르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슈프레흐코르(합창극, 무대에서 대사를 노래처럼 낭독하는 표현방식임)에 비해 팬텀기의 폭음은 너무도 컸다. 데모, 그것이 의사표시였을까. 정말로 사세보 다리를 돌파할 생각이라면, 깃발 따위는 던져버리고 총과 폭탄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말을 아다마에게 늘어놓을 때였다. 갑자기 귀를 간질이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자키!" 교실 입구에 마츠이 카즈코가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잠깐만, 잠깐만." 천사는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천사는 세상을 밝게 해준다. 천사가 나타났을 때, 우리 교실을 정적에 감싸였다. 우리 반 7명의 여학생들은 수학 참고서에서 질투 섞인 눈길을 들어 올렸고, 서서히 가축이 되어 가는 남학생들은 뭔가 고귀한 것을 보았다는 듯이 한 번 눈길을 주었다가는 아래로 내려 깔았다. 개중에는 손에 든 수학공식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들어올리며, 이것을 천사에게 바치나이다, 하고 외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여하튼 나는 너무도 자랑스러워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자, 여기를 봐.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에게 나는 장미꽃을 받았어,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천사 쪽으로 달려갔다. "제니스 조플린을 돌려주려고." 천사 레이디 제인의 곁에 선 요부 앤 마가렛은 아다마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근신이 풀려서 정말 다행이야." 라는 천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감옥에서 출소한 다음, 정부를 맞이하는 알랭 드롱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응, 레코드는 언제 줘도 괜찮은데." 교실의 한 구석에서 <치프 스릴>의 소유주 에자키가, 아, 내 레코드, 하고 작지만 높은 톤으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천사 레이디 제인은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나중에 에자키를 한 대 때려 주리라 생각했다. "저 에자키라는 미용실 집 아들은 공부를 너무 해서 바보가 되어 버렸어. 곧 정신병원에 간다고 해"하고 내가 말하자, 레이디 제인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다음, 사라센 제국의 보물전에 있는 순금과 비취로 만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울 같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저... 꽃, 정말 고마워." 장미꽃 다발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 일, 나 처음이야." "에?" "장미를 내 손으로 사기는 처음이라구." "나도 부끄럽지만, 그런 것을 받기는 처음." 처음... 버진이구나, 하고 나는 기뻐했다. 나는 페스티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영화와 연극 출연을 의뢰했다. 종이 울렸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해 줘, 하고 천사는 방과 찻집 이름을 말한 다음 떠났다. 그녀가 떠난 다음, 나는 지리오라 친쿠에티의 옛날 명곡 <꿈꾸는 마음>을 노래하면서 아다마의 어깨를 탁 쳤다. "왜 그렇게 흥분하니 나리시마와 오다키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무슨 말?" "아까 말한 거. 이제 정치에는 테러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테러? 테러가 문제냐. 마츠이가 버진이란 것이 더 중요해. 장미꽃을 보내기는 처음이래." "바보!" 아다마는 늘 그렇듯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점심시간, 나리시마파가 모여 있는 웅변부실로 가는 도중에 다시 천사와 만났다. 천사는 나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야자키, 미안. 오늘 수업 끝나면 매스게임 연습이 있대. 그래서 섭섭하지만 만날 수 없게 되었어." 매스게임, 이 말만큼 듣기 싫은 말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남학생들도 방과후에 대청소를 한대, 종합운동장 청소..." 청소와 매스게임 연습 때문에 천사와의 데이트 약속을 포기하라니, 도대체 누구에게 그런 권리가 있단 말인가. 분노에 떨면서 나는 웅변부실로 향했다. "야자키는 어떻게 생각하니? 바리케이드 봉쇄를 하는 바람에 우리도 각계에서 주목받는 입장이 되어서 말이야, 나가사키 대학의 반제학평은 우리와 함께 다음 졸업식 분쇄투쟁을 전개하자고 정식으로 요청해 왔어." 듣기도 싫었다. 그런 일은 이제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나리시마와 오다키와 2학년 마스가키는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나리시마와 오다키의 얼굴도 보기 싫었다. 바보자식들! 하고 일갈한 다음 웅변부실을 나가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바리케이드 봉쇄를 주도했던 내가 아닌가. 동료들을 끌어들인 책임감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라고 말하면 온통 거짓말이 될 것이고, 사실은 천사에게 장미 꽃다발을 받은 것도 바리케이드 봉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냉정한 얼굴을 하고 표준어로 말했다. "나는 이제 그만 두겠어. 솔직하게 말할 테니 잘 들어 줘. 각목과 헬멧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가사키 대학이건 규슈 대학이건, 어디와 손을 잡아도 마찬가지야. 나는 지금 바리케이드 봉쇄를 반성하는 것은 결코 아니야. 그건 그것대로 좋았어. 잘 들어,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이런 시골 고등학교에서 게릴라 적인 방법이 아니면 금방 실패하고 만다고. 더 이상 같은 수법을 써먹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졸업식 분쇄라고는 하지만, 우리처럼 오래 근신을 먹은 학생이 졸업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아." 나리시마가 졸업식이란 것이 얼마나 제국주의 국가의 권위적인 행사인가를 길게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체육선생과 생활주임선생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이, 너희들 지금 뭘 하니?" 나리시마와 오다키는 당황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라는 표정이었다. 발각되는 게 당연하지, 근신이 풀린 첫날이 아닌가, 선생들도 우리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집회는 금지되어 있다는 것 몰라?" 생활주임의 착 가라앉은 허스키 보이스가 실내에 울렸다. "아닙니다. 집회가 아닙니다. 저, 오늘부터 학교에 오게 되어 우리는 근신을 먹은 학생들끼리 반성회를 가질 생각으로... 지금부터 학교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연 반성회입니다. 그렇지, 여러분" 하고 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학생 일기>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웃었지만, 다른 학생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가만 앉아 있었다. 아다마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해산 당하였고, 나는 교무실로 불려갔다. 생활주임 앞에 꿇어앉았고, 내 주위를 열 명이 넘는 선생들이 둘러쌌다. 나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고, 죽도로 얼굴을 맞고, 등에 인두질을 당하고, 가스버너 불에 허벅지에 화상을 입혔다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 되겠지만, 슬리퍼로 발바닥을 두들겨 맞으면서 오랜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넌 쓰레기야. 네 자신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다른 학생들을 끌어들이지 마. 잘 들어, 우리 학교에 불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전학을 가. 열흘 전에 난 너희들의 대선배들을 만났어. 선배들은 북고의 얼굴에 황칠을 하는 놈들을 모두 잡아죽이겠다고 야단이었어."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교실로 보내 주세요, 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수업료를 납부했습니다. 수업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교실로 보내 주세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상대방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즉시에 효과가 나타났다. 뺨에서 번갯불이 번쩍 일었다. 체육선생 가와사키였다. 아파서가 아니라, 왜 내가 이런 놈한테 맞아야만 한단 말인가, 라는 억울한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울면 진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눈물을 보이면 그것으로 막은 내린 것이다. 나의 그런 기분과는 정반대로 나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투가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벨이 울리더니 교내방송이 시작되었다. "3학년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지금부터 오늘의 매스게임 연습과 종합운동장 청소에 대한 토론을 위한 학생집회가 있겠습니다. 전원 중간 운동장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지금부터..." 아이하라와 가와사키가 방송을 그만두게 하려고 번개처럼 달려나갔다. 그러나 교무실 입구에는 아다마와 이와세를 선두로 하여 열 명이 넘는 학생들이 두 사람을 가로막소 섰던 것이다. 너희들 뭐야, 비키지 못해? 가와사키는 이마에 새파란 핏줄을 세우고서 분노하여 외쳤다. "야자키를 보내 주세요." 아다마가 말했다. "야자키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아다마의 배후에는 이와세와 밴드 멤버와 시로쿠시와 그 부하들, 게다가 럭비부, 신문부, 육상부, 농구부 학생들, 또 게다가 우리 반 친구 칠팔명이 서 있었다. 그 모든 학생들이 모두 아다마의 인맥들이다. 교내방송은 그들 중 누군가가 했을 것이다. 중간 운동장에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론 3학년 전부는 아니었다. 바리케이드 봉쇄 이후 우리가 쓴 낙서를 있는 힘을 다하여 지우려 애쓰던 학생들은 나오지 않았다. 아다마는 냉정 침착하고 머리가 좋다. 교무실 입구를 가로막고 선 학생들 가운데는 나리시마와 오다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은 열등생인 데다. 스포츠도 잘 못해서 인기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선두에 서면 오히려 일반 학생의 지지가 떨어질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시로쿠시는 물론이고, 럭비부의 나가세나 농구부의 안토니오 퍼킨스로 불리는 타바라나 밴드부의 베이스 기타맨 후쿠는 폭넓은 지지도를 가진 인기 있는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인기 있는 스타들은 한결같이 종합운동장 청소 같은 불쾌한 행사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간 운동장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교실로 들어가, 라는 선생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3학년의 약 삼분의 일, 3백 명 정도의 학생들 가운데 레이디 제인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일어섰다. 오랜 시간 꿇어앉아 있었기 때문에 잠시 비틀거렸지만, 기어이 일어서서 아다마를 비롯한 학생들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생활주임이 무슨 말을 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다마가 악수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좋아, 집회다, 집회. 모두들 함께 그렇게 외치면서 중간 운동장으로 걸어 내려갔다. "겐, 기다려!" 아다마가 나를 잡고 귓속말을 했다. "지금부터 어쩔 생각이야?" 아다마는 이제부터의 일을 생각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우수한 실무파이긴 하지만, 상상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정해 두지 않았단 말이지?" "응, 여하튼 학생들만 모이게 하면 될 것 같아서." "내가 연설을 하면 어떨까?" "영웅이 되겠지!" 바보, 퇴학당하고 싶니. 나 잠시 교장실에 갔다 올께. 내가 교장과 교섭을 벌이고 있다고 모두에게 전해 둬." "어쩔 셈이야?" "가만 보고만 있어. 아, 그리고 말이야, 학생회장 히사우라를 좀 불러 줘." 나는 혼자서 교장실로 향했다. "교장 선생님, 야자키입니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혼자 왔습니다." 집회라곤 하지만 모두들 재미로 모여 있을 뿐이다. 오래 끌면 지겨워서 선생 말을 고분고분 듣고 말 것이다. 지겨움을 느끼기 전에 결론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고등학교 따위는 그냥 불이라도 질러 버리면 속이 후련하겠지만, 그런 과격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또 근신이니, 퇴학이니 말을 듣는 것도 질색이다. 나는 교장에게 말했다. "매스게임 연습과 청소는 중지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집회를 바로 해산시키겠습니다. 내가 책임을 지고 해산시키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 이 일에는 난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누가 리더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스로 모여든 것뿐입니다." 다른 선생들과 의논을 해 볼 테니 당장 교실로 돌아가, 하고 교장은 말했다. 교장실을 나선 후 나는 학생회장 히사우라를 잡고 이야기를 했다. "잘 들어. 지금 교장 선생과 이야기를 하고 나오는 길이야. 오늘의 매스게임 연습과 종합운동장 청소는 중지한다고 말해. 네가 학생들에게 말하는 거다. 너도 빨리 집회가 해산되기를 바라지?" 진학이 목표인 인문계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에 입후보하는 놈들은 모두 남의 눈에 띄기를 좋아하는 얼간이들뿐이다. 히사우라도 그 중 하나였다. 해안가의 벽지 과수원집 아들로 태어나, 오로지 남의 시선을 끌고 싶어 학생회장이 된 히사우라 같은 추남을 속이기는 너무도 쉬운 일이다. 판단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추남은 나의 지시대로 핸드 마이크로 중간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전했다. 학생들은 환성을 지르면서, 역시 집회는 좋아, 하고 교실로 돌아갔다. 천사와의 데이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종합운동장 청소는 중지되었지만, 타학교와 공동으로 연습하던 매스게임은 그대로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승리였다. 그로부터 나는 선생에게 야단 맞는 일은 없었다. 수업을 빼먹든, 지각을 하든, 조퇴를 하든,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아다마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들은 여하튼 우리들이 다른 학생들을 유혹하지 않는 한, 끝없이 우리를 무시하면서 빨리 졸업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담임 마츠나가만은 달랐다. "야자키, 너는 어쩔 수 없는 놈이야, 네 놈은 어떤 사회생활에도 견딜 수 있을 거야, 네가 어떻게 살아갈지 참 한심해." 그런 말을 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너는 목을 졸라도 죽지 않을 놈 같아." <이야야>. 이것은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우리 그룹의 이름이었다. 이와세의 이, 야자키와 야마다의 야를 따서 내가 지은 것이다. 페스티벌의 명칭도 정해졌다. <모닝 이렉션 페스티벌>, 풀어쓰면, 아침에 서는 축제, 라는 뜻이 된다. 천사 레이디 제인과 요부 앤 마가렛도 기꺼이 협력해 주기로 했다. 우리들의 장밋빛 날들이 시작되었다. 웨스 몽고메리 레이디 제인과 앤 마가렛을 협력자로 하여 영화를 만들고, 연극 연습을 한다. 준와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나가야마 미에는 네글리제를 입고 오프닝 세레모니의 꽃이 될 것이다. 진공관을 좋아하는 야마노테 학원이나 코가여고와 아사히 고등학교 여학생들에게는 <사세보를 위한 록 페스티벌>이라고 과장 선전을 하여 티켓을 사게 하는 것이다. 선생들은 우리의 행동을 완전히 무시했지만, 매일 우리의 책상에는 꽃다발과 곰인형과 초콜릿과 사진 동봉의 이력서와 '당신에게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고 싶어요. 진공관으로 상처 난 이 몸이라도 괜찮다면'이라는 내용의 편지와 현금과 수표와 예금통장이 산처럼 쌓였다고 하면 완전히 거짓말이지만, 미소만은 내 얼굴에서 결코 떠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아다마는 천성적으로 고생을 사서하는 실무파였기에, 허공에 붕 떠오른 내 가슴을 현실이라는 대지로 끌어내려 주었다. 찻집 <길>에서 나와 아다마와 이와세는 카페오레를 마시면서 천사와 요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이것은. 그냥 커피하고 우유잖아." 아다마는 카페오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랭보가 카페오레를 마시면서 저 유명한 <지옥의 계절>을 썼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이런 맛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은 예술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랭보? 거짓말. 랭보는 아브상떼(알코올 70%의 강렬한 녹색의 증류수)를 마시면서 시를 썼어." "아니, 어떻게 알았어?" "고바야시 히데오라는 사람이 그렇게 써 놓았더라." 아다마는 많은 책을 읽고 있었다. 원래 근면한 천성이라 마음만 먹으면 착실하게 공부를 하는 사나이였다. 이전에는 간단히 혹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거짓말도 힘들어졌다. 며칠 전에도 카뮈의 '페스트'와 바타유의 '유죄인'과 위스망스의 '어긋남'을 읽었다고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이제야 그걸 읽었어, 자식 시대에 뒤떨어졌어, 하고 말하긴 했지만 속마음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나는 '사르트르 전집', 프루스트의 '일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조이스의 '율리시즈', '세계문학전집', '동유럽문학전집', '세계의 대사상', '밀교전집', '카마수트라', '자본론', '전쟁과 평화', '신곡', '죽음에 이르는 병', '케인즈전집', '루카치전집', '다니자키전집'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제목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들어 밑줄을 그은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내일의 조>이고 <용의 길>이며, <쓸모 없는 개>, <천재 방랑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초조감조차 지금의 내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천사와 요부와 함께 영화와 연극에 대해 의논을 한 다음, 준와의 나가야마 미에와 재즈 찻집에서 출연 교섭을 하기로 되어 있다. 그런 나의 미소를 과연 누가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겐, 공연장은 어쩔 생각이니?" 무엇 때문에 아다마는 항상 현실적인 것만 생각할까? 이 녀석에게는 꿈이라든지, 공상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불쌍한 자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유아 체험이 나와는 다를 것이다. 나는 밝은 햇살이 가득한 오렌지 밭과 송사리가 헤엄치는 맑은 개울이 흐르고, 미군 장교와 그 가족들이 왈츠를 추는 서양식 건물에 둘러싸여 자랐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네 그루 밀감나무와 금붕어가 헤엄치는 방화용수와 GI와 창녀들이 온갖 욕설을 주고받는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분명히 보타산 기슭의 탄광촌은 아니었다. 보타산은 낭만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경제부흥의 길을 달리는 전후 일본의 상징이었다. 보타산은 꿈을 키워 주지 않는다. "공연장은 아마 있을 거야." "당연하지. 커피에 우유 타서 마시면서 뭐가 좋다고 싱글벙글하니. 싱글벙글하고만 있으면 페스티벌이 저절로 되는 거야? 설마 북고의 체육관을 빌릴 생각은 아니겠지?" "빌려 줄 거야." "너 퇴학당하고 싶니?" "공민관, 시민 홀은 전부 예약제야. 허가를 받아야 한다구. 공연 내용은 문서로 제출하고, 주최자의 인감도장을 찍어야 해. 겐은 아직 인감 없잖아?" "그렇군, 정말 큰 일인데." "티켓은? 어쩔 생각이야?" "나눠주고 팔지 뭐." "멍청이, 어디서 인쇄할 거야? 시내 인쇄소에 부탁하러 갔다가는 당장 학교로 연락이 들어갈 텐데." 말 그대로였다. 보타산 출신의 현실감 있는 설득은 너의 얼굴에서 미소를 빼앗아가 버렸다. "그럼 손으로 쓰면 어때? 티켓." "손으로 천장을?" "아니, 안돼, 손으로 쓰면 안돼." 필사와 등사만은 안된다. 그런 것이 통용되는 것은 생일 안내장이나 양로원의 학예회 정도일 것이다. "어떡하면 좋지? 페스티벌 그만둘까?" 그렇게 말하면서 아다마는 나를 보았다.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다마는 말을 이었다. "인쇄소는 걱정하지 마. 우리 형이 히로시마 대학에 다니고 있어. 대학 내에 인쇄소가 있으니 거기 부탁하지 뭐. 괜찮지? 타이프 인쇄도 아니고 옵셋 인쇄도 아니야. 정식으로 사진식자로 하는 거야. 대학인쇄소인 만큼 비용도 반밖에 들지 않아. 그리고 공연장은 말이야, 거기 있잖니? 기지 입구의 노동회관 말이야. 그곳은 노동자의 집회 때나 사용하는 거라서 규제도 없고, 대표자 한 사람의 인감만 있으면 빌려 줄 수 있대. 고정된 의자도 없이 그냥 바닥에 앉게 되어 있어서 천 명은 무리지만, 내 계산으로는 8백 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어. 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은 사세보에는 없어. 시민회관도 이층까지 합해서 6백 정도에 지나지 않아. 무대 깊이가 5미터나 되니까. 드럼이나 앰프를 놓기에는 너무 넓어서 걱정스러울 정도지. 조명은 좌우에 여섯개가 있고, 영사실도 있어. 물론 8밀리 영화에 영사실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말씀이야. 암막도 있을 거야. 너무 밝으면 기분이 나지 않잖아? 암막은 이미 세트되어 있어. 3분만 주어지면 겐이 정말로 좋아하는 어둠이 펼쳐지는 거지. 아, 그리고 주최 대표자는 농구부 선배로 머리가 약간 이상한 사람 있잖아. 그 사람에게 이미 부탁해 두었어. 인감은 적당히 파서 주소와 이름만 빌리면 되지 않겠어? 나와 겐이 주최자라는 사실을 남에게 들킬 염려 없이 일을 벌일 수 있게 되었어. 어때?" 아다마는 수첩을 훑어보면서 단숨에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주었다. "너는 천재다! 카페오레는 커피 우유이고, 보타산은 일본의 자랑이다."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아다마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만 하고 있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티켓 디자인을 해 와, 하고 아다마는 침착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데 연극의 등장인물이 두 사람뿐이잖아?" 천사 레이디 제인은 귀족들이나 마시는 밀크 티를 소리도 없이 빨아들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내 곁에 앉아서. 앤 마가렛은 아다마 곁에 앉아있다. 이와세를 밀쳐내는 듯이 하면서까지 아다마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이와세는 할 수 없이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스커트 사이로 천사의 허벅지가 나의 허벅지에 닿았다. 그 때마다 찻집 <길>의 소파는 전기의자로 바뀌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전기가 통하면, 머리카락이 쭈빗 섰고, 가슴이 무거워지고, 사타구니가 가려워지고, 목은 마르고,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이 젖고, 외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와세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지. 하나는 누나, 하나는 동생." 아다마는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둘만 연습을 하면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찬스를 무한대로 가질 것이란 나의 노림수를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내 생각은 유미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아서..." 나는 입으로 가져가던 찻잔을 그만 떨어뜨릴 뻔했다. "아니야, 마츠이가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 할 수 없어." "유미, 우리 오는 길에 정했지 그지? 야자키, 유미는 작년 연극제에서 2학년인데도 심사위원상을 탔어." 요부 앤 마가렛은, 아이, 부끄럽게 왜 그런 말을, 하고 손을 입에 갖다대고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포즈를 취했다. 그 때문에 아다마에게 몸을 기대는 꼴이 되었고, 블라우스의 아래의 크고 부드러운 유방이 흔들렸다. "아, 나도 보았어. PTA 신문에도 났었지? 아, 겐. 우리 그 때 사토를 취재하지 않았니?" 이와세의 그 말이 떨어지자 나의 전기의자는 축축한 화장실 의자로 바뀌려 하였다. 넌 입 닥쳐, 하고 이와세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마츠이에게 잘못 보일 것 같아 찻잔을 이빨로 깨물면서 참았다. 아다마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통쾌하게 웃고 있었다. 방은 사용할 수 없어, 연습은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하기로 해, 하고 가슴이 큰 크리스천 사토가 즐겁게 재잘대는 말에 건성으로 맞장구를 치면서, 나는 섹시한 누나를 욕실에 넣을 수 있도록 어떻게든 각본을 다시 구성할 수 없을까를 필사적으로 생각하였고, 또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또 한 사람을 등장시킬 가능성을 없을까, 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지만, 나는 금방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고,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등장인물이 단 두사람이고, 게다가 가족으로 설정한 그 각본이 얼마나 혁명적일 정도로 참신하고 청결한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역설한 것이 바로 5분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잘 부탁해, 라고 사토는 말했다. 나도, 하고 나는 풀죽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세보 다리는 엔터프라이즈 투쟁이 주전장이었다. 다리 건너편에는 미군기지가 있다. 다리로 이어지는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가에는 재즈 클럽 <포 비트>가 있다. 고교 1학년 여름부터 나와 이와세는 이 기지 곁에 있는 재즈 클럽을 자주 찾았다. 가게 안은 흑인 냄새가 가득했다. 우리는 블루스의 냄새라고 말했다. 그 냄새는 카운터와 소파와 테이블과 재떨이 속에 가득 배어 있었다. 왼쪽 어깨에 인어 문신을 새긴 해병대원이 쳇 베이커와 흡사한 트럼펫을 부는 밤도 있었고, 흑인 MP가 순찰을 나왔다가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센트 제임스 병원>을 노래한 적도 있었고, 금색, 적색, 갈색으로 물들인 외국인 바의 호스티스들이 싸구려 향수 내음을 풍기면서 싸움을 벌이는 날도 있었다. 우리가 콜라 한 잔으로 다섯 시간이나 죽치고 있어도 아무 말도 않는 아다치라는 이름의 마스터는 술과 약과 마약 중 하나에 늘 취해 있었다. 그리고 심하게 취했을 때는 반드시 울었다. 씨팔, 나는 왜 흑인으로 태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며 울었던 것이다. 나가야마 미에와 만나는 장소로는 가장 좋은 곳이라 생각했다. 천사와 요부에게는 주최자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금방 돌려보냈다. 딱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지만, 나는 다른 하교교의 미인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레이디 제인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아름다운 소녀가 세 명이나 앞에 앉아 있으면 내가 이성을 잃고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일 것이 뻔하다는 아다마의 판단에 의해서 였다. "누굴 만나니?" 카운터 건너편에서 마스터 아다치가 말을 걸었다. "겐이 안절부절 못하는 걸 보니, 여자로군?" 아다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다치 아저씨, 준와 넘버 원 미녀예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마스터는, 흥, 하고 흥미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 술과 약과 마약 때문에 누렇게 변색된 풀어진 눈동자를 벽에 걸린 찰스 밍거스의 포스트 쪽으로 돌렸다. 아다치는 여자에게 별로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언젠가 술과 약과 마약 때문에 그게 서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참, 아다치 아저씨, 모자를 눌러 쓴 여자가 들어오면 뭐가 좋을까요. BGM이 좋을까요, 아니면 스탄 게츠나 허비 만 같은 가벼운 것이 좋을까요?" 내 말에 아다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좋은 게 있어. 웨스 몽고메리의 신곡이 들어왔지. 스트링스가 들어가서 무드 있지." 왓, 그것 최고, 하고 나는 좋아라 외쳤지만, 그러나 아다치는 그렇게 단순히 사람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흑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탄식하며 울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신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나는 그 때서야 알았다. 빨간 새틴 셔츠와 검은 진과 은색 샌들과 18금 귀걸이와 분홍빛 매니큐어를 칠한 도전적인 스타일의 나가야마 미에가 나타났을 때, 아다치는 빙긋이 웃으면서 콜트레인의 <어센션>을 틀었던 것이다. 존 치카이와 마리온 브라운이 부는 도살장의 돼지 멱따는 소리 같은 알토 색소폰이 울려 퍼지자 나가야마 미에는 그 길다란 눈꼬리를 바짝 치켜올렸다. 찻집 <길>로 돌아와서, 아다치 같은 악당은 금단 증상으로 도로에서 발작을 일으켜 깔려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가야마 미에에게 출연을 의뢰했다. "페스티벌이 뭔데?" 나가야마 미에는 핑크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에 하이라이트 디럭스 한 개비를 끼우고, 오렌지색 입술로 물고는 한 모금 연기를 뿜어냈다. 그 때 나는 여자의 입술이란 이를테면 랭보의 시, 지미 핸드릭스의 기타, 고다르의 커트 워크 따위로 따를 수 없는 뭔가를 가지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런 입술을 내 것으로 삼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먹어! 라고 말만 해 준다면 나는 석탄이라도 먹어 치울 것이다. 보타산이라도 먹겠다고 약속하고 결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보타산이라도 먹어 치울 것 같은 기세로, 열을 올려 페스티벌에 대해 설명했다. "나, 연기는 해 본적도 없고, 할 줄도 몰라." 나가야마 미에는 잔 속의 얼음을, 아지직! 깨물며 말했다. "연기력 따위는 필요 없어." 나는 표준어로 말했다. "말하자면 나가야마가 대표가 되는 거지." "대표?" "응, 아까 말했잖니? 사세보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생들이, 천 명이나 모여들 축제인데 말이야, 선생들의 힘을 비리지 않고 우리만의 힘으로 하는 거야, 동경이나 오사카, 교토에서도 하고는 있지만, 우리처럼 고교생의 힘만으로 하는 데는 없을 꺼야. 뉴욕이나 파리에도 아마 없을 걸? 그만큼 굉장한 일을 벌이는 거지." "파리?" "응, 이런 일은 파리의 고등학생이라도 하지 못할 거야." "나, 파리 좋아해." "그래서 말인데, 그런 굉장한 페스티벌의 오프닝에는 반드시, 꼭, 사세보에서 가장, 예쁜, 여고생을 내보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렇게 말하자 나가야마 미에는 담배연기를 뿜는 것도 잊어버리고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보았다. "내가?" "응." "내가 제일 예쁘다고?" "응." "누가 그러는데?" "북고 학생회에서 전원 일치로 결정된 사항이다." 나가야마 미에는 나와 아다마와 이와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이윽고 그 때 찻집 <길>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흐르던 <미완성교향곡>보다 더 큰 목소리로 웃어 젖혔다. 나가야마 미에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얘 혹시 바보 아니니, 하면서. 아다마도 같이 웃으며, 그래 이 친구 바보, 라고 세 번이나 반복했다. 이와세도 웃었다. 나는 화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 웃었다. 웃음은 <미완성>의 제 1악장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너희들 정말 재미있어." 웃음을 멈추고, 아직 눈꼬리에 눈물을 남긴 채 나가야마 미에는 말했다. "나, 출연할래." 주역이 교체되긴 했지만, 재능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북고 영어연극부의 미스와 준미스를 스태프로 하고, 열광적인 놀자파 팬 층을 대량 확보하고 있는 사립 미션 여자고교의 포크 시큐인이 오프닝 세레모니의 출연을 쾌히 승낙하였고, 머리가 약간 간 재수생 선배가 티켓 두 장을 공짜로 제공받는다는 가벼운 조건으로 공연장인 노동회관을 빌리는 보증인 역을 맡아 주었고, 그 티켓은 히로시마 대학 교양부 내의 사진식자와 인쇄기의 노력으로 멋지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 티켓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지겹지 않았다. 기일 : 11월 13일 (노동 감사의 날), 오후 2시에서 9시까지 장소 : 사세보 시 노동회관 주최 : 이야야 록 뮤직, 자작영화, 연극, 이벤트, 시낭송, 해프닝, 뭐가 일어날지 모를 흥분과 전율의... <모닝 이렉션 페스티벌, 아침에 서는 축제> 굵은 글씨체로 씌어지고, 립스틱을 바른 여자애와 발기한 남근이 폭발하는 화산을 감싸고 있는 그림도 그려 놓았다. 입장료는 2백 엔, 구북고 전공투의 <바사라단>과 신문부, 영어연극부, 거의 모든 운동부, 시로쿠시 유지가 이끄는 불량서클, 록 밴드, 그리고 선배들을 통하여 북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고교로, 티켓은 흘러가기 시작했다. 매일 현금이 <이야야>의 품속으로 들어왔다. 마치 세계의 중심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록펠러나 카네기가 가난한 자들의 미움을 받은 것처럼, 나는 다른 학교의 불량 서클 보스들의 표적이 되었다. 레드 제플린 외국인 바 거리를 걸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누구라도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블랙 로즈>는 저녁이 되면 호모가 출현하는 곳으로 유명한 공원의,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입구에 검은 빌로드천을 이중으로 늘어뜨려, 가게 안에 항상 방을 마련해 두고, 오후 일찍부터 문을 열어 둔다. 오전부터 교성이 들리는 때도 있었다. 해군 아저씨들이 갑자기 상륙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다마를 데리고 <블랙 로즈>의 뒷문으로 들어섰다. 윗통을 벗어 젖힌 점장과 나비 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친치로린(주사위를 그릇 안에 넣고 흔들어 던진 후, 홀짝을 맞추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 "밴드입니다. 실례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악단실로 걸어갔다. "너희들 북고냐?": 점장이 얼굴을 들었다. 한쪽 어깨에 벚꽃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흑백 문신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아다마는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사사야마 선생, 아직 있어?" 사사야마는 전쟁 중에 헌병대에 속해 있었다는 체육선생이다. 나이 50을 넘어선 지금도 조금 철이 덜 든 사람인데, 옛날에는 목도로 학생의 머리를 때려 피를 냈다는 유명한 사람이다. 패전 직후의 혼란기에 선생 부족 현상 때문에 수많은 불량배들이 교육자로 변신했다는 아버지의 말 그대로, 사사야마도 그런 타입의 인간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점장은 그래, 아직 건강하군, 안부나 전해 줘, 하고는 왕방울 같은 눈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흥, 줏대가 없군, 하고 나는 흑백 문신을 새긴 사나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문신에 색깔도 넣지 않은 별볼일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필시 사사야마와 옛날에 무슨 해프닝이 있었을 것이다. 목도에 맞아 머리가 찢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장 같은 인간을 볼 때마다, 일본은 과연 전쟁에 지긴 졌군, 하는 생각이 든다. 품성이 나쁜 인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프라이드가 없는 것이다. 가게로 들어선다. 아다마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가게에는 미국 내음이 충만되어 있다. 아다마는 그게 싫었던 것이다. 미국 냄새라 해도 실제로 미국에는 그런 냄새가 없다. 그러나 그 냄새는 기지촌의 단독주택에도 혼혈아의 머리카락에도, 기지의 PX에도 있다. 인간의 지방 냄새이다. 나는 그 냄새가 싫지는 않았다. 영양이 가득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밴드가 드럼 없이 스펜서 데이비스의 <기브 미 섬 러빙>을 연주하고 있다. 베이스의 후쿠가 보컬을 맡고, 기타의 겐지와 오르간의 시라이가 마이크 블룸필드와 알 쿠퍼가 된 기분으로 눈을 감고, 머리카락을 흔들고, 혀를 내밀면서 연주를 하고 있다. 시라이는 코드를 세 개밖에 모른다. 이 시대에는 코드를 세 개밖에 몰라도 록 연주가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아다마는 얼굴을 찌푸린 채, 슬립 한 장만 걸친 호스티스들이 라면을 먹고 있는 카운터에 앉았다. 후쿠는 드럼을 치라고 턱으로 신호를 보냈다. 후쿠의 영어 가사는 엉터리였다. 가사를 잊어 버리면, 돈츄노(Don't you know)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이 시대는 돈츄노만 외쳐대면 누구라도 록 가수가 될 수 있었다. 손님은 한 명밖에 없었다. 개를 끌면서 <달러!>하고 외치면 그냥 그대로 겁쟁이가 되어 버릴 듯한 10대 해군이었다. 큰 맥주를 병째로 마시면서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웨이트리스의 허벅지에 손을 넣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었다. 프루츠 OK? 프루츠 OK? 하고 환갑이나 됨직한 호스티스가 말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겁쟁이는 "슈어"하고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늘 보는 그런 풍경이 펼쳐졌다. 알루미늄 접시에 파인애플 통조림과 귤과 백도와 오래된 파셀리를 갖춘 과일 안주가 놓여지고, 겁쟁이는 잠깐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맥주병을 바닥에 던져 박살을 내고, 점장은 즉시 MP를 부르고, 불쌍한 겁쟁이는 헌병에게 잡혀 지프에 실려 갔다. 그러는 중에도 밴드는 돈츄노, 돈츄노를 외쳐댔다. "이야기 잘 되었니?" 손님도 없는데 마이크로 댕큐, 댕큐를 연발하는 후쿠에게 물었다. <아침에 서는 축제>에 사용할 앰프와 마이크를 이 가게에서 빌릴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밴드는 오후 내내, 라면과 만두 제공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이 가게의 무대에 서고 있는 것이다. "아직 점장에게 말하지 않았어." 하고 후쿠는 머리를 흔들었다. 카운터의 호스티스들이 아다마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너, 북고생이니?" "미남인데." "내가 한 잔 살께, 맥주 마셔." "애인 있니?" "있겠지, 이렇게 미남인데." "키스는 해 보았겠지?" "콘돔하지 않으면 아기가 생겨." "배고프지 않니?" "라면, 반 줄께." "오뎅 먹을래?" 전국에서 흘러 들어온, 컬러 염색을 하고 미국 냄새를 풍기는 50이나 60을 눈앞에 둔 그녀들의 눈에, 필시 아다마는 후광을 방사하는 신선하고 청결한 성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다마가 신흥종교를 만들었다면 틀림없이 모두 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보타산을 감싸고 도는 맑은 강가에서 송사리를 잡으며 놀았던 아다마는 전후 일본경제를 이면에서 떠받쳤던 호스티스들의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인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름진 여자 손이 무릎에 닿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11월 23일의 노동감사일에 앰프를 좀 빌리고 싶은데, 점장에게 말 좀 해 주지 않을래요?" 나는 세 명의 호스티스에게 머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여기 있는 아다마는 북고의 알랭 드롱이라 불리는 사나인데, 만일 점장에게 말만 잘해 준다면, 사나흘 빌려 줄 수도 있어요." 그렇게 말하자 아다마가 화를 냈다. "알랭 드롱보다는 게리 쿠퍼와 닮았어." "빌려준다는 게 무슨 뜻이야?" "데이트해도 좋다는 말이야?" "나, 우리 딸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런 미남 북고생이라면 흑인 GI와 헤어질 수도 있어, 다섯 번이나 아기를 지웠어. 몸이 성할지 걱정이야." 아다마는 <블랙 로즈>를 뛰쳐나갔고, 나는 후쿠에게, 앰프 부탁해, 라고 외치고는 따라 나섰다. "네 놈은 도무지 신용할 수 없어, 자기밖에 모르는 에고이스트. 저 창녀들에게 나를 빌려준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말, 다시 했단 봐라, 나 정말로 화낼 거야." 열세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아다마는 용서해 주지 않았다. "화내지 마, 농담이니까." "아냐, 농담이 아냐. 겐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그렇지만 아다마, 나 같은 인간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진화할 수 없었을 지도 몰라." "말 돌리지 마." 아다마는 나를 속속들이 알아 버렸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를 속이기 힘들게 되었다. :"잘 들어 봐, 그 호스티스들은 패전 직후의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해 몸을 팔았어. 우리들을 위해, 즉, 21세기를 위해 자신의 희생한 거야."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 그렇다. 아무 관계도 없었다. "이와세가 우리 교실로 와서, 이 편지를 야자키와 야마다에게 전해 달라고 하더라." 성모 마리아 상이 미소 짓고 있는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보다 아름다운 마츠이 카즈코가 그렇게 말했다. 요부 앤 마가렛, 사토 유미가 추천한 연극 연습장이었다. 앤 마가렛은 매주 일요일, 그림엽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역 주변의 언덕에 서 있는 이 교회에서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했다. 가슴이 저렇게 큰 것도 그 기도 덕분인지 모른다. 앤 마가렛의 유방은 진짜 앤 마가렛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멋진 가슴이었다. 아마도 거짓말이겠지만, 목축업을 하는 집안의 이시야마라는 학생이 신체검사장에서 우연히 엿보았는데, 사토의 유방이 젖소의 그것보다 크더라고 말했다. 하느님, 유방을 크게 해 주세요, 하고 어릴 적부터 매일 기도를 드렸는지도 모른다. 엄숙한 분위기의 교회였지만, 사부로라는 목사가 연극을 좋아하여 연습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재미가 없었다. 동지사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반 년 정도 문학좌에서 연극을 했다는 사부로 목사가 연출에 간섭을 했기 때문이다. 동생아, 우리는 거부의 저편으로 가지 않으면 안 돼, 동생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거부에 의미가 있는 거야, 거부의 내용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야, 나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어, 그 남자의 아이를 눈 위에 버렸을 때, 그것을 알았어, 중요한 것은 죽음도 두려워 않는 거부라는 것을, 죽음을 건 거부만이, 죽음을 건 언어를 낳을 수 있음을... 앤 마가렛은 마치 셰익스피어 극의 배우처럼 양손을 벌리고, 목소리를 울리면서 연기를 했다. 너무 과장스러워서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부로 씨는 그것을 칭찬했다. '아이를 눈 위에 버렸을 때'라는 대목이 너무 부도덕하다고 대본에도 손을 대려 했다. "이 대사에 무슨 의미가 있어? 너무 강해. 다른 표현을 쓰면 어떨까?" 멍청이 목사 주제에, 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의미란 애초부터 없었다. 여기저기 소설과 연극대본에서 짜집기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레이디 제인을 보면 내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만다. 평상시는 경건한 크리스천이 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드리는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이 날 따라 젠은 제단 가까이 까지 와서 연기를 하는 나와 앤 마가렛을 심각한 표정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레이디 제인은 성서를 놓아두는 곳에 팔꿈치를 모으고 턱을 받치고 있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비쳐 드는 햇빛을 받고 있었다. 마치 인상파의 그림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초등학교 시절, <소년 매거진>의 최신호를 사서 아이스캔디를 빨며 <필승의 마구>를 양지 바른 곳에 앉아 보던 때의 행복감과 비슷했다. 사부로만 없으면 더 좋을 텐데, 하고 아다마 쪽을 바라보니 이와세에게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우울한 표정이었다. 겐, 아다마, 난 이야야를 탈퇴할께. 미안. 셋이서 <아침에 서는 축제>를 준비할 때 무척 즐거웠고, 하루 하루가 꿈만 같았어. 그렇지만 나는 내 일을 하고 싶어. 겐과 함께 있으면 나를 발견할 수가 없어. 겐은 아다마와 함께라면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거야. 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겠어. 이와세의 편지는 그런 내용이었다. 이와세의 집은 러브 여관이 늘어 선 사세보 강 상류에 있었다. 실, 단추, 문방구, 양말, 작업화, 화장품 따위까지 갖추어 놓은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이와세의 어머니 같아 보이는 사람이 선반을 정리하고 있었다. 안온한 시골가게의 풍경이었다. 정말로 평범한 시골가게였다. 문화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가게 뒤를 돌아갔다. "아다마, 문화란 정말 무서운 것이란 생각이 들어." "왜?" "이와세가 말이야, 만일 일본에 이만큼 외래문화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제플린도 베를렌도 토마토 주스도 모르고 한 평생을 구멍가게 주인으로 보냈을 게 아니겠니?" "그렇게 말하면 겐이나 나도 마찬가지야. 겐도 그냥 보통 선생 아들이었겠지." "바보, 나는 예술가의 아들이라구. 너처럼 연탄..." 탄광 출신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아다마는 아직 호스티스 건의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좁은 뒤뜰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다. 빨래가 널려 있었다. 스타킹, 팬티, 슈미즈가 가득했고, 남자 속옷은 거의 없었다. 이와세에게는 네 명의 누나가 있었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네... 이와세의 방에서 기타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연못에 비치네, 파란하늘, 그 곁을 지나가는 그대와 나, 계절은 언제나 겨울... 이와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이, 그것도 노래라고 부르냐? 차라리 염불을 외워라. 이와세 소카갓카이(법화경을 신봉하는 일련정종계의 신자집단)에 들어가는 게 어때?" 제발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라, 하고 아다마가 나무랐다. 우리는 지금 이와세와 셋이서 축제를 만들자고 설득하러 왔잖아... 탄광촌 출신은 사고 소식을 너무 자주 들어서인지 모든 일에 신중하기 짝이 없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아다마는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와세가 겸연쩍게 웃으면서 얼굴을 내밀었다. "협력은 할께." 이와세는 의외로 밝은 표정이었다. 영화에도 나갈 것이고, 티켓도 팔 것이고, 공연장 정리도 하겠지만, 주최자로 이름만은 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겐과 아다마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어." 아다마는 이와세의 편지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끼여들어서 나와 이와세 사이가 갈라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짙고 달콤한 시간을 보낸 다음, 우리는 찻집 <길>에 앉아 이와세를 찾아가서 이야야에 참가하도록 설득키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와세, 영화에도 나가잖아? 겐이나 나에게 딱히 불만도 없잖아? 그만두겠다는 게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어." 아다마는 탄광촌 출신답게 착 가라앉은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아다마, 그건 아니야. 나 자신이 싫어졌을 뿐이야." 나와 아다마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자신이 싫어졌다. 그것은 17세의 소년이 여고생에게 사랑을 구걸할 때 이외에는 결코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될 대사이다. 누구든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다. 경제력도 없고 아내도 없는 지방도시의 이름 없는 17세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선별되어 가축이 되느냐 마느냐는 귀로에 선 순간이므로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면, 그 이후의 인생이 어두워질 뿐이다. "겐이나 아다마와 함께 있으면, 왠지, 내 머리가 좋아진 듯한 느낌이 들어. 확실히 기분은 좋아, 하지만 무슨 일을 하건 나와는 관계가 없잖아? 괜히 나까지 위대해진 듯한 기분이 들어, 그러나 그런 나 자신이 너무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을 뿐이야." 알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와세의 말이 옳았고,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이 반드시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리고 겐, 공고에 다니는 내 친구에게 들은 이야긴데, 그 있잖아, 나가야마 미에, 오프닝 세레모니에 출연하잖아? 그래서 말이야, 나가야마에게 푹 빠진 그 공고의 두목이, 겐을 반쯤 죽여 놓겠다고, 매일, 찾아다닌다고 하더라. 그만 두는 게 어때? 나가야마 미에." 헤어질 때쯤 이와세는 그런 말을 했다. 공고의 두목은 검도부의 주장이라고 했다. 나와 아다마는 말없이 강변 길을 걸었다. 이와세는 마음이 어두운 사람이었다. 어두운 인간은 타인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힘들다. 농담도 통하지 않는다. "겐, 마음에 두지 마." "언젠가, 아다마, 내가 이 가방 마음에 안든다는 말 했잖니?"하고 나는 크게 이라고 적힌 오렌지색 가방을 가리켰다. "어때, 아다마의 가방하고 이것하고 바꾸는 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다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 가방을 들게 하여 공고의 두목이 습격했을 때, 나를 대신하여 맞아 달라는 의도를 꿰뚫어 본 것이다. 찻집 <길>까지 왔을 때였다. 목도를 든 여섯 명의 고등학생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나와 아다마를 에워쌌다. 사월이 오면 그녀는 목도를 든 여섯 명의 사나이가 나와 아다마를 포위했다. 걸레보다 더 너덜너덜 떨어진 모자에는 공업학교의 마크가 달려 있었다. 거무스름하게 빛을 발하는 목도는 너무도 단단해 보였다. 아다마는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네가 북고의 야자키냐?" 머리가 나빠 보이는 여드름 투성이의 거한이 나에게 말했다. 그 말에 긍정하는 순간 목도가 날아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떨림을 멈추게 하기 위해 은밀히 심호흡을 했다. 겁먹은 것을 알면, 상대는 점점 힘을 낼 것이므로 반격의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일본에서도 거칠기로 손을 꼽는 광부들에 둘러싸여 자란데 비해서 아다마는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우리들은 흥행사의 신분이다. 그런 만큼 싸움을 잘하는 측근을 거느리고 다녔어야 했다고 나는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도 중학교 때까지는 가끔 싸움질도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어린아이들의 싸움이었을 뿐이다. 목도나 체인이나 나이프를 들고 휘두르는 싸움은 '소년 매거진' 속에 밖에 없었다. "야자키 맞지?" 여드름은 다시 한 번 음침하게 힘주어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 공고 친구들? 야, 나도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우리도 좀 할 이야기가 있던 참이었어요. 저기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때요?" 통행인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하고, 나는 찻집 <길>쪽으로 걸어갔다. 여드름은 나의 어깨를 잡고 멈추게 했다. "기다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길. 스윽 턱을 내밀고, 눈을 약간 아래로 내린 듯이 노려보는 모습은 이전에 유행하던 액션영화 주인공을 흉내낸 것임에 틀림없다. 지방 도시에는 그런 폼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할 이야기가 있잖아요?" 다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네 놈 따위에 떨 내가 아니다, 하고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 침착하고 정중하고.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야쿠자를 만나거든 일단 정중하게, 그리고 위엄을 잃지 않고 대해야 한다고 아버지는 말한 적이 있다. 옛날, 아버지는 20대였을 때, 그 거리의 보스이기도 한 PTA회장을 몽둥이로 두들겨 팼고, 그 때문에 아버지는 그 부하들에게 포위 당하고 비수로 위협받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비수에 맞으면 죽게 돼, 겐짱도 아직 어렸고, 어머니와 단둘이만 사는 결손가정을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사과를 했지, 그렇지만 비굴하게 머리를 숙이면 저쪽에서도 마음놓고 두들겨 팰 것이라 생각하고, 사과를 하면서도 담임인 나를 패면 보스의 아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느냐고 당당하게 협박을 했지, 그랬더니 놈들도 나에게 손을 대지 않았어. 운이 좋았어. 우리들은 찻집 <길>의 어두컴컴한 가게 안, 가장 구석자리로 갔다. 목도와 교복은 찻집 안을 흐르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여드름 일행은 벽을 뒤로 하고 제일 구석자리에 앉은 나와 아다마를 포위하듯이 4인 테이블 두 개를 차지하고 앉았다. 목도를 벽 한군데 나란히 세워 두고서. 적어도 지금 당장 머리가 깨질 염려는 없었다. "여러분, 커피가 좋겠죠?"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드름 일행의 얼굴을 휙 둘러보았다. 정말 미미하기는 하지만, 힘의 역학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땀에 절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여기저기 찢어진 교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여드름 일행은 고풍스런 강경파 불량배였다. 게임센터나 찻집에는 안 가고, 또 돈도 없다. 그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한지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단골 웨이트리스에게 카페로얄을 여덟 잔 주문했다. "저, 여러 가지로 오해가 많은 것 같은데, 우리들 입장도 나가야마 씨의 일로, 공고의 보스와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말하자 여드름 일행은 저희들끼리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가야마 일로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고?" 여드름이 덕지덕지난 덩치가 내 눈앞에 앉아 있다. "나가야마 씨를 우리 페스티벌에 참가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공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거라고 생각했지요." "이 자식이, 사람 놀리고 있어. 가게 안이라고 안심하고 있는 모양인데, 밖에 나가면 두고 봐, 어깨뼈 하나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다시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여드름의 말투는 강경파답게 사실적이었다. "너희들, 파티권 팔고 있다면서?" 파티권이란 아마도 아침에 서는 축제의 티켓을 말하는 것이리라. "예." "고교생이 그런 사업을 해도 좋단 말이야?" "딱히 돈을 벌 생각은 없어요. 공연장을 빌리는 비용, 앰프와 영사기 빌리는 비용, 여러 가지로 돈이 들어가니까요." 카페로얄이 나왔다. 스푼 속에 담긴 브랜디 속에서 각설탕이 청백색 불꽃을 내고 있었다. 아마 여드름들은 이런 커피를 구경도 못 해봤을 것이다. 처음으로 코끼리를 본 옛날 동경 사람들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아다마까지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역시 탄광촌 출신자에게 이런 고급스런 연출은 어울리지 않는다. 두 사람이 함께 유유히 카페로얄을 마시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것 말예요, 카페로얄이란 건데, 불이 붙어 있잖아요? 이 불을 입으로 싹 핥으면서, 그 아래 담긴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면 돼요."하고 농담을 했는데, 여드름 가운데서도 가장 머리가 나빠 보이는 한 녀석이 정말로 스푼의 불을 입으로 핥아 버렸다. 그리고는 앗 뜨거,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스푼을 내동댕이치더니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이 자식이, 우리를 놀릴 생각이야?" 덩치가 목도에 손을 댔다. 카페로얄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역효과만 났다. "나가야마에게 네글리제를 사 주었지! 무슨 수작이야?" 이미 8만 엔 정도의 티켓 값이 우리 수중에 들어왔으므로, 나가야마 미에의 무대의상 겸 영화 속의 레이디 제인의 의상으로, 7,200엔이나 하는 순백색 네글리제를 산 것이다. 그리고 바로 어제, 그것을 나가야마 미에에게 보여 주자, 와, 고마워, 한번 입고 자 볼게, 이삼 일 빌려주지 않을래, 하면서 들고 가버린 것이다. "아, 그것은 단순한 무대의상에 지나지 않아요." "사람 놀리지 마, 속이 환히 비치던데." "아니, 봤어요? 설마 화가 난다고 찢어버린 것은 아니겠지요. 그 네글리제 7,200엔이나 투자한 거라구요." 그렇게 말하고는 아차, 싶어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다마가 이 바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덩치가 단춧구멍 같은 눈을 치켜 뜨고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목도를 잡고 휘두를 것처럼, 화를 냈다. "아니, 아니, 그 네글리제는 벌거벗고 입는 것이 아니라, 준와의 제복을 입은 다음 그 위에 걸치는 것인데, 즉 순진한 소녀의 아름다운 마음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섹스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기 위한 의상일 뿐이라구요." 아다마는 이제 틀렸다고 고개를 저었다. 7,200엔 짜리 네글리제를 쫙쫙 찢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치졸한 계산이 상대의 울화통을 건드린 것이다. 나도 이제는 틀렸다 여기고 그만 침착성을 잃어버렸다. 여드름 일행은 일어섰다. "그 커피 잘 음미하면서 마셔. 당분간 그 입 속이 까칠까칠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커피 맛이나 즐기다 나와. 각오하고." 그런 말을 남기고 여드름 일행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우리는 도무지 카페로얄을 음미할 기분이 아니었다. 새파랗게 질려 말없이 앉아 있는 우리 쪽으로 웨이트리스가 다가와서, 경찰에 전화를 걸어 줄까? 하고 말했다. 저도 모르게 응, 하고 대답하려다, 경찰이나 학교에서 알게 되면 아침에 서는 축제는 물거품이 될 게 뻔하니,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어디다 연락이라도 하여 응원군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여드름 일행은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아다마의 제안으로 나는 시로쿠시 유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겐, 그렇게 화려하게 파티권 팔 때 내가 알아봤지. 내가 듣기로도 아사히고, 남고, 상고 애들까지 겐을 잡아서 반쯤 죽여 놓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해."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몇이나?" "처음에는 여섯이었는데, 지금은 15, 16명은 될 것 같애." "모두 검도부야?" "목도를 들고 있어." "겐, 공고의 검도부는 전국 6위의 실력이야. 그 보스라는 놈은 2학년 때 규슈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도 있어." "그래서?" "우리가 열 명, 아니 스무 명 데리고 가봐야 상대가 왼 대." "그렇다고 경찰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돈 가진 것 있니, 돈?" "돈?" "이만 엔 정도 있어?" "티켓 판 돈이 있는데." "잠깐, 내가 아는 야쿠자에게 전화를 걸어볼 테니, 거기서 그냥 기다려 봐." "아, 잠깐 시로쿠시." "뭔데?" "가능하면 싸게 해 줘." "머리가 깨지면 공부도 못해. 불알이 깨지면 그게 서지도 않을 거고." 시로쿠시 유지로부터 OK 전화가 오고 난 다음, 보무 당당하게 야쿠자 하나가 나타났다. 우연히도 그는 아버지의 제자였다. 흑인 혼혈아인 그 야쿠자는 여드름들을 거느리고 <길>로 들어왔다. 여드름은 갈증이 났는지 소다수를 단숨에 들이킨 다음, 이런 깡패하고도 알고 지내느냐는 듯이 놀란 눈길을 한 번 던진 후, 조용히 물러났다. 야쿠자는 새끼손가락이 없는 오른손으로 이만 엔을 받아 든 다음, 아버지는 건강하셔? 라고 물었다. "많이 맞긴 했지만, 정말 좋은 선생님이셨지. 한 번은 교회 그림을 그렸더니 칭찬을 해주시더라구. 아버지는 아직도 파친코 좋아하시니?" "예, 가끔씩 하는 모양이던데요." "교초의 중앙회관으로 오시라고 전해 줘. 중앙회관에 오기만 하면 앉자마자 터지는 기계를 가르쳐 드리겠다고 말이야." 놈들이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겠지만, 만일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연락해, 라고 말한 다음, 검은 양복 자락이 펄럭이도록 기세 등등하게 슬리퍼를 끌며, 야쿠자는 떠나갔다. 영화 <인형과 남고생을 위한 에튀드>가 크랭크 인 되었다. 8밀리 스탠더드 파트 컬러 초 대작이다. 크랭크 인 첫날, 이와세 키의 반쯤 되는 앰프와 네글리제를 입고 길다란 복도를 걸어가는 레이디 제인의 실루엣을 찍었다. 스토리는 없다. 밀크를 마시는 인형에게만 사랑을 느끼는 남고생의 일상을 쉬르리얼리즘 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세가 연기하는 타락한 남고생 하나가 할아버지 묘 앞에서 밀크를 마시는 인형을 줍는다. 사랑이 움튼다. 그 인형은 남고생에게 꿈을 보여 준다. 그 꿈의 부분에 천사 레이디 제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마스가키에게 빌린 베르하우엘은 달달달달, 하고 기분 좋게 잘 돌아가 주었다. 첫 필름과 두 번째 필름은 노출을 잘못 맞추어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지만, 영화제작은 정말 즐거웠다. 레이디 제인이 하얀 말을 타고 아침의 고원에 등장하는 장면은, 야쿠자에게 이만 엔이나 지불한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흰말을 구할 수 없어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다마는 흰 털 아키다견을 강력하게 추천했지만, 그것만은 허락할 수 없었다. 결국, 아다마의 이웃에서 기르는 하얀 염소로 대체하기로 하고, 전원 버스를 타고 로케이션을 위해 탄광촌으로 갔다. "나, 도시락 싸 왔어."하고 천사는 달걀 내음이 나는 스파게티를 보여 주었다. 도시락은 둘이서만 먹고 싶은데, 하고 생각하면서 못생긴 차장이 지켜보는 찻간에서 '고릴라의 코딱지'를 하면서 놀았다. 그대의 이름은? 그대가 좋아하는 것은? 그대의 취미는? 라는 질문이 주어지면, 반드시 '고릴라의 코딱지'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고, 먼저 웃는 쪽이 진다는 어처구니없는 놀이였다. 레이디 제인과 앤 마가렛은 첫 질문부터 몸을 비틀면서 웃었고, 냉정침착한 아다마는 늘 이겼다. 이런 놀이가 뭐 재미있다고, 라는 표정으로 아다마는 열심히 '고릴라의 코딱지"라고 대답했다. 시가지를 벗어나, 버스는 강변을 달려 산길로 접어들었다. 가을 햇빛을 받으며 레이디 제인의 머리카락은 반짝였고, 블라우스에 감싸인 앤 마가렛의 부드러운 유방은 살랑살랑 흔들렸다. 즐겁게 재잘거리는 우리를, 우둔하고 못생긴 차장이 증오에 찬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옛날 영화에서 본 미국이나 유럽의 고교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이 천천히 흐르고 억새풀이 바람에 나부끼는 들판에서, 그 염소는 풀을 뜯고 있었다. 언덕 위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네글리제를 입은 레이디 제인이 하얀 염소를 따라 걸어가는 모습을 찍을 참이었는데, 염소는 카메라에 똥구멍을 보인 채 퐁퐁하고 똥을 싸는가 하면, 갑자기 달려서 레이디 제인을 넘어지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곤 줄을 풀고 도망쳐서 당황한 아다마가 5백 미터를 추격하여 포획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강변에서 레이디 제인이 싸 온 도시락을 먹었다. 주먹밥과 계란 부침과 프라이드 치킨과 칼리플라워와 단무지, 거기에 배까지 들어 있는 도시락이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이와세가 기타를 치고, 우리들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에이프릴 컴 쉬 윌>을 노래했다. <아침에 서는 축제>가 일 주일 앞으로 다가 온 어느 날, 나는 드디어 레이디 제인과 둘만의 시간을 가질 기회를 잡았다. '시라칸스'로부터 연주 중에 투사하는 슬라이드 제작의 의뢰받아, 레이디 제인의 사진을 찍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길>에서 만나, 애수의 밀크 티를 마신 다음, 미군기지로 향했다. 기지 내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부근에는 멋진 건물이 많기 때문에 레이디 제인의 배경으로서 더없이 좋았다. 성당처럼 보이는 크림색 영화관, 벽에 넝쿨이 뒤엉킨 장교숙사, 미키마우스 시계탑, 핑크와 블루로 채색된 첨탑이 달린 교회, 잘 손질된 잔디 야구장, 개가 산책하는 돌길, 바람에 낙엽이 흩날리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벽돌로 지은 창고들... "영화 다 만들었다면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면서 렌즈 저편에서 레이디 제인은 미소지었다. "응, 편집만 하면 돼." "나, 이상하지 않았니?" "아니, 잘 나왔어." "염소가 나오는 장면도 살리니?" "염소는 그만 뒀어. 전혀 이미지가 맞지 않아서." 겨울이 오면 우리 바닷가로 가지 않을래, 하고 젠은 말했다. "겨울? 추울텐데." "응, 그렇지만 겨울 바다, 아직, 나, 본 적이 없거든." 나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바닷가에서 천사를 안는 장면을 상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시간 감각을 잃어 버렸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공기는 저녁나절의 엷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 이런 시간을 좋아해." 도로의 선을 따라 걸으며, 레이디 제인은 양손을 뒤로 잡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뒤를 따랐다. "금방 낮이 끝나네. 또 밤이 찾아오고. 그렇지만 그게 아름다운 것인지도 몰라. 우리들 기분도 그런 것일까? 금방 변해 버릴지도 모르는?" "기분이라니?" "야자키, 너무해. 내가 장미꽃을 보낼 때 분명히 말했잖아." 나는 우뚝 멈추어 서서, 카메라를 눈에다 대고, '좋아', 라고 말하고 셔터를 누른 다음, '해', 를 덧붙이면서 다시 셔터를 눌렀다. 부끄럽다는 듯이 레이디 제인은 미소지었지만, 그 완벽한 미소는 석양에 지워져, 필름에는 남지 않았다. 언더그라운드 "닭?" 하고 아다마는 외쳤다. <모닝 일렉션 페스티벌, 아침에 서는 축제>를 나흘 앞둔 점심시간의 일이다.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 목사 사부로의 부당한 간섭과 앤 마가렛 유미 사토의 눈물 짜는 신파극 적인 연기에 의해, 내가 의도한 이미지는 크게 손상되긴 했지만, 연극 <거부와 반항의 저편>은 막이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 편집이 끝나고, 프로젝트도, 악기나 앰프와 스피커도, 모두 마련되어 있었다. "닭?" 아다마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래, 스무 마리면 제일 좋겠는데, 여덟 마리라도 괜찮아. 여하튼 어디 닭 파는 데 모르니?" 나는 공연장에 닭을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닭고기라면 시장에 가면 있겠지만, 여덟 마리나 어떻게 먹으려고?" 아다마는 페스티벌이 끝나고, 파티 때 닭고기를 먹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 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산 닭." "산 닭으로 뭘 하려고? 설마 목을 비틀어서 그 피를 마시려는 것은 아니겠지?" 아다마에게 한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미술수첩>의 1페이지, 뉴욕에서 행해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콘서트 풍경. 공연장에는 소와 돼지, 유리상자에 가득 찬 쥐, 앵무새, 사실에 묶인 침팬치, 우리에 갇힌 호랑이까지 있었다. "어때, 멋있잖아?" 그 사진을 가리키면서 나는 말했다. "호랑이나 앵무새, 침팬지 같은 것은 멋있을지 모르겠지만, 닭을 풀어놓았다가는 양계장으로 오해받기 십상이야." "넌 잘못 생각하고 있어." 논리적으로 말을 할 때는 반드시 표준어를 쓰고 마는 이 습관은 무엇 때문일까? "중요한 것은 그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야. 루 리드는 이 세상의 혼돈을 표현하기 위해 콘서트에서 새와 동물을 사용하였다. 그 정신만이라도 배울 필요가 있어." 아다마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어르는 나의 버릇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흥, 하고 코웃음쳤다. "닭이라고? 세계의 혼돈을 표현한다고?" 그러나 아다마는 친절한 사나이였다. 보타산 기슭에 잘 아는 사람이 양계장을 하고 있는데 전화를 걸어 볼께, 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다마는 충실한 사나이다. 물론 나에게 충실한 것은 아니다. 아다마는 믿고 있다. 그러나 나를 믿는 것은 아니다. 아다마는 1960년대 말에 충만하였던 그 무엇인가를 믿고 있었기에, 그 무엇인가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 무엇인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무엇인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단일한 가치관에 목매어 있는 우리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그 날 밤, 우리는 양계장을 찾아갔다. 그 양계장은 보타산 기슭, 감자밭 한가운데 있었다. 닭똥 냄새가 나고, 몇 백 마리의 닭들이 한꺼번에 울어 젖히자 그 소리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라디오의 잡음 같았다. "어디 쓰려고?" 어디를 보나 양계업자처럼 생긴, 작은 키에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가 우리에게 물었다. "연극에요." 내가 대답했다. "연극이라고? 그럼 닭 장사 이야기니?" 계사 안을 걸으면서 이상한 학생들이라는 표정으로 중년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오. 셰익스피어 연극인데, 무대 장치에 꼭 필요해서요." 중년 남자는 셰익스피어를 모른다. 계사의 구석에 어두컴컴한 곳이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스무 마리 정도의 닭이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졸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그 닭들의 다리를 잡고 사료 포대에 두 마리씩 밀어 넣기 시작했다. 닭들은 두세 번 날갯짓을 했을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냥 늘어진 채 가만 있었다. "아주 얌전한 닭이네요." 아다마가 말했다. "병들어서 그래." 중년 남자가 말했다. "병?" "그래, 힘이 없잖니." "저, 사람에게 옮는 전염병은 아니겠지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중년 남자는 웃었다. "그럴 염려는 없어. 연극이 끝나면 잡아먹어도 괜찮아. 병이래야 인간으로 치자면, 뭐랄까, 노이로제라고나 할까."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갑자기 모이를 먹지 않는 닭이 있다고 중년 남자는 가르쳐 주었다. 해 저무는 버스 정류장. 나와 아다마의 그림자가 도로에 길게 뻗어 있었다. 좌우에 놓은 네 개의 사료 포대에서 가끔씩 푸드득 하고 닭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다마, 싸다고 하더니만, 이렇게 힘없는 닭일 줄이야." 노이로제에 걸린 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들도 힘이 쭉 빠져 있었다. 밝게 빛나지 않는 것은 닭이건, 돼지건, 개건, 함께 있는 존재를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겐, 너 구두쇠 다 되었구나. 돈을 쓰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다니. 페스티벌 끝나고 마츠이와 스테이크 먹으러 가자는 약속을 한 다음부터 그렇게 된 것 같은데." "아니, 누가 그랬어?" "사토." "아, 난 아다마와 사토도 꼭 데리고 갈 생각이었어." "거짓말. 티켓으로 번 돈을 마츠이와 단 둘이서 스테이크 먹으러 갈 꿈만 꾸어 놓고." "아, 그건 오해야." "그런 변명 안 해도 돼. 모두 함께 가면 되니까." "모두 함께 라고? 스테이크가 얼마나 비싼데." "월금 식당에 가면 돼. 나, 벌써 예약해 두었어." 월금 식당이란 특제 고기만두로 유명한 중국음식점이다. 나의 꿈은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동경하는 연인과 스테이크와 와인을 앞에 두고 앉는 꿈을 꾸었다. 사진을 찍던 그 아름다웠던 저녁에, 페스티벌이 끝나면 사세보에서 가장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자고 천사를 유혹했던 것이다. 천사는 미소지으며 얼굴을 숙였기 때문에 나는 승낙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것을 앤 마가렛에게 말해 버리다니, 너무했다. "겐!" "왜?" "넌 정말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 같애." "고마워. 사실은 아다마와 사토도 데리고 넷이서 갈 생각이었어." "이와세는?" "아, 그렇지, 이와세도 우리 일에 협력해 주었지." "후쿠는? 후쿠 덕분에 앰프도 스피커도 빌렸잖아." "그렇지, 그렇지." "시로쿠시는? 시로쿠시는 티켓을 구십 매나 팔아 주었어. 공고 애들에게 잡혔을 때도 도와주었고, 마스가키도 8밀리 영사기를 빌려주지 않았니? 나리시마와 오다키와 나카무라도 티켓을 팔고, 공연장 일을 도와 주겠다고 까지 했잖아." "모두들 정말 고마운 친구들이야." "모두들 정말 고마운 친구들이야." "일이 끝나면, 도와 준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게 예의 아니니? 안 그래? 늘 그랬지만, 이번에도 사토에게 그 말을 듣고 나 섭섭했어. 물론 이 일은 모두 겐의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시작도 못했을 거야." 아아, 나는 정말 어처구니 없을 만큼 이기주의자로구나 싶은 생각에 갑자기 내 자신이 싫어져 눈물이 나왔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나의 뇌리에는 아직도 새하얀 테이블크로스와 빨간 장미 한 송이가 꽂힌 꽃병과 은식기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스테이크, 화려하고 우아한 와인 글라스, 그리고 빨갛게 볼이 상기된 레이디 제인의 얼굴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가끔씩 숨어서 마시는 싸구려 적포도주가 아니라, 핏빛의 적포도주는 여자의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어느 소설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이성을 마비시킨다! 이성이 마비된 레이디 제인은... "너 이 자식, 싱글거리면서 뭘 생각하는 거야. 너 지금 마츠이에게 포도주 마시게 하고 키스하는 상상하는 거지?" 가슴이 뜨끔했다. 아다마는 독자적인 사고 패턴을 창조하는 재능은 없지만, 타인의 사고 패턴을 읽어내는 데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나이였다. "아냐. 난 지금 반성하고 있어." 표준어로 약간 당황한 듯이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아다마는 웃지 않았다. 스테이크와 와인의 꿈이 깨진 탓인지, 나는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상에 젖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꾸몄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폐광이 임박한 탄광촌의 버스 정류장이 풍기는 분위기 탓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아다마에게 속마음을 들켜 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있었다. "쳇, 할 수 없군." 맥이 빠진 나를 보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듯이 아다마는 중얼거렸다. "겐은 O형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O형은 다른 사람 입장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대. 아, 그리고 물고기좌 맞지? 물고기좌의 사람은 어리광을 잘 부리고 제멋대로래. 아, 그리고 장남이지? 아래로 터울이 많은 여동생 하나뿐인 외동아들이고. 그런 것들을 모두 한 몸에 지녔으니 어쩔 수 없지." 아다마는 한 가지는 모르고 있었다. 물고기좌, O형, 외동아들에다 나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아들이었다. "너 같은 인간은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면 오히려 타락하고 말 거야." 아다마는 그런 말을 하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사료 포대를 내려다 보았다. "나 정말 아다마와 사토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려 했어." "이제 그건 됐어. 그런데, 저 닭들 외롭지 않았을까?" 아다마는 계사 한 구석에 격리되어 있던 스무 마리의 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좁은 계사에서 강제적으로 먹이를 먹어야만 하는 브로일러들, 닭이건 인간이건 조금이라도 거부의 자세를 보이면 격리되고 만다. "페스티벌이 끝나면 닭집에 팔지 말고 어디 산에라도 풀어 주자." 쾌청하게 갠 노동감사절 날, 오백 명 가까운 고교생들이 노동회관에 모여들었다. 오다키와 나리시마, 마스가키, 구북고 전공투는 회장 입구에서 '졸업식 분쇄'라 적힌 전단을 나누어 주었고, 때때로 헬멧을 쓴 채 연설도 했다. 시로쿠시 유지 일파는 포머드로 머리카락을 착 붙이고 양복을 입었고, 준와와 야마노테와 여상과 아사히고교 여학생들을 거느리고 포켓 사이즈 위스키를 돌려가며 마셨다. 여고생들의 패션은 다양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많았지만, 머리카락을 물들이거나 매니큐어, 립스틱, 타이트 스커트, 프리 스커트, 핑크색 카디건, 꽃무늬 원피스, 청바지 등 여러가지였다. 이와세는 우리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등사판으로 민 시집을 10엔에 판매하고 있었다. 오프닝 세레모니에 참가하는 나가야마 미에를 감시할 목적이겠지만, 공고의 보스가 부하들을 이끌고, 목도도 들지 않고 나타났다.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에 담배를 낀 야마노테학원 여학생들이 말을 걸자, 그들은 얼굴을 붉혔다. 흑인 GI 네 명이 들어가고 싶다고 하여 나는 허락해 주었다. 페스티벌에는 살인 이외는 모든 것이 허락되어야 한다. <포 비트>의 마스터, <길>의 웨이트리스도 왔다. 웨이트리스는 아다마에게 줄 꽃다발을 들고 왔다. 북고 영어연극부의 여학생들은 풍선을 가득 사들고 와서 공연장 안에 풀어놓았다. 공고의 보스를 물리쳐 주었던 야쿠자는 동료 둘과 포장마차를 끌고 와서 삶은 오징어와 사과 과자를 팔았다. 수영복 위에 네글리제를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과 함께 등장한 나가야마 미에는 베니어판과 두터운 종이로 만든 사토 에이사쿠(당시 일본 수상, 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음.)와 린든 존슨과 도쿄대학 정문의 모형을 도끼로 갈가리 찢어 놓았다. 시라칸스는 레드 제플린의 <가슴 가득히 사랑을>을 첫 곡으로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후쿠는 여전히, 돈츄노, 돈츄노를 외쳐댔다. 맨 먼저 춤을 춘 사람은 앤 마가렛이었다. 연극 공연 전에 몸을 풀기 위해서라고, 앤 마가렛은 파란 운동복 차림으로 유방을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흑인 병사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것을 신호로 나가야마 미에가 늘 입고 다니는 검은 새틴의 착 달라붙는 슬랙스 차림으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조명을 비추었다. 나가야마 미에의 은빛 블라우스가 라이트를 받고 번쩍였다. 그 빛에 이끌린 듯 천천히 춤의 파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극과 영화 사이에 시라칸스는 세번 연주를 했다. 자신의 머리가 화면에 가득히 나타나자 이와세는 겸연쩍어 웃었다. 혼혈아 야쿠자는 내 곁에 다가와서, 이런 영화는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혼혈아 야쿠자는 나가지 않았다.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천사는 줄곧 내 곁에 있어 주었다. 시라칸스는 두 번째 쇼를 <에즈 티어스 고 바이>로 시작하였다. 그 때 나와 천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즐겁지 않은 것은 놀라서 공연장 바닥을 뒤뚱뒤뚱 도망 다니는 닭들뿐이었다. 우리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페스티벌의 성공을 자축했다. 특제 고기만두와 맥주를 곁들인 연회가 끝난 다음, 나와 천사는 단 둘이서 강변의 오솔길을 걸었다.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준 것도 아다마였다. 아다마는 스테이크와 와인 대신에 두 사람만의 가을밤을 선물해 준 것이다. 강에 달이 비치고 있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말았어." 천사는 그렇게 말했다. "나, 이상하지 않았니?" "영화에서?" "응, 이상했지?" "아니..." 정말 예뻤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강변 오솔길에는 시소와 그네가 설치된 작은 공원이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그네를 탔다. 그네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에게는 지미 페이지의 기타 솔로보다 더 관능적으로 들렸다. "야자키가 누구랑 닮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어." "누구?" "나카하라 주야(근대 일본의 시인)."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나카하라 주야가 누구인지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 배우가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배우와 닮았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요절한 시인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가슴을 억누르며, 나는 벼르던 말을 기어이 끄집어내고 말았다. "키스해 본 적 있니?" 천사는 웃었다. 나는 수치심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천사는 천천히 웃음을 멈추고, 똑바로 나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 질문이 이상하니?"하고 말했다. "모두들 키스해 보았을까?" 잘 모르겠어, 나는 그런 바보 같은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난 키스 못 해봤어, 키스도 못해 본 주제에 딜런이나 도노반의 사랑 노래만 좋아해." 그리고 천사는 눈을 감았다.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하고 심장이 고동쳤다. 나는 그네에서 내려 천사 앞에 섰다. 떨리는 것은 무릎뿐만이 아니었다. 온 몸이 강에 비친 달빛의 흔들림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숨이 가빠서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천사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불가사의한 형태의 생물처럼 보였다. 그 아름다운 생물은 달과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핑크 빛으로 숨쉬며 가늘게 떨고 있었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츠이"하고 부르자 천사가 눈을 떴다. "겨울이 되면 우리 바다로 가자." 나는 겨우 그 말만 할 수 있었다. 천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츠 어 뷰티풀 데이 축제가 끝난 후, 나는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라했다. 이것은 아버지가 들려 준 이야기인데, 내가 세살 적 여름, 처음으로 마음 축제를 보러 갔을 때였다. 세 살배기였던 나는 단상 위의 북에 마음을 빼앗겼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춤추는 사람들 틈을 뚫고 곧장 큰북을 향하여 걸어간 것이다. 나는 나무 막대기로 팽팽한 가죽을 두른 큰북을 두드렸고, 규칙적이며, 직접 몸을 뒤흔드는 소리에 내 눈은 반짝였다. 그런 나를 보고 아버지는, 아, 이 녀석은 축제광이 되는 건 아닐까, 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1969년, 17세의 나이로 <아침에 서는 축제>를 벌인 때는 물론이고, 32세의 소설가인 지금도 나는 내내 축제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세 살배기 아이를 사로잡은 큰북의 울림은 50년대의 재즈와 60년대의 록으로 이어지고, 지구의 반대편까지 카니발 견학을 다니게 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영원한 즐거움이 아닐까? 규슈 서쪽 끝, 파도 잔잔한 만에 면한 미군기지의 거리, 사세보의 겨울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풀린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축제를 무사히 마친 나는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겨울바다를 보러 가자, 라는 천사 레이디 제인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우리는 시영버스의 출발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날을 위해서 어머니의 어깨를 두 시간이나 안마하고, '대학? 꼭 들어갈께. 나, 어머니 아버지 피를 이어받아 의외로 선생이 될 자질이 있을지 몰라. 그런데 어머니는 저학년만 가르쳐서 그런지 너무 젊어 보여, 있잖아, 야마다 말이야, 걔가 그러던데, 어머니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나오는 잉그리드 버그만과 닮았대.' '너 참 바보 같은 말만 하는구나.' '아, 엄마, 아들한테 바보가 뭐야?' '버그만은 정말 예뻐, 옛날에 아버지와 함께 보았지, 있잖아, 험프리 보가트와 마지막에 비행장에서 안녕하는 영화?' '아, 그 영화, <카사블랑카>.' '그래, 그래.' '있잖아, 앨범에 내가 유치원 다닐 때 소풍가서 찍은 사진? 사진 속의 엄마는 정말로 버그만을 쏙 빼 닮았더라.' '그런 모습 어디가 버그만을 닮았다는 거니?'라는 따위의 대화를 나누어, 맥그리거 코드를 얻어 입었던 것이다. 크림색으로 안에는 오렌지색 보아가 붙어 있고, 앞은 더블 지퍼가 달려있었다. VAN 구두, 양말, 바지, 스웨터 위에 그 코트를 걸쳐 입었다. 이런 차림으로 해변가의 작은 마을로 가서 표준어로, 이 고기는 가자미인가요? 아니면 날치? 라고 물으면, 어부들은 내가 도쿄에서 온 줄 알 것이다. 나는 득의에 찬 웃음을 지으며 아버지가 쓰는 바이탈리스를 얼굴에 발랐다. 천사는 짙은 감색 코트와 끈이 달린 부츠를 신고, 바구니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혼잡한 버스 출발지에서 디즈니의 아기사슴 밤비 같은 눈동자를 보았을 때, 나는 마치 영화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카메라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곁을, 징글벨, 징글벨 하고 노래 부르며 지나치는 어린아이의 머리를 나는 어른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VAN 스웨터와 맥그리거 코트, 그리고 아기사슴 같은 눈동자를 가진 걸 프랜드와의 작은 여행, 모든 사람들이 이 때의 내 기분을 공유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모순이라는 모순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전쟁조차 사라질 것이다. 부드러운 미소만이 유일한 질서가 될 것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가라즈였다. 버스는 텅 비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바닷가로 가는 사람은 사이먼 앤 가펑클을 좋아하는 서정적이고 지적인 고교생 커플이거나, 설쇠기가 힘들다고 동반 자살을 결심한 가난한 가족들 정도일 것이다. 가라즈에는 멋진 소나무 숲이 있고, 파도가 높은 해수욕장과 가라즈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다. "마츠이는 대학에 갈 생각이지?" "응, 갈 생각이야." "벌써 정했니?" "츠다주쿠와 도쿄여대하고, 도단." 나는 <고3시대>나 <형설시대>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도단이라는 학교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다. 그 말의 울림으로 보아 굉장히 재미있는 학교일 것 같았다. 나도 한 번 시험을 쳐볼까, 라고 말하자, 천사는, 얘는! 도단은 도쿄여대에 속한 전문대학이야, 라며 웃었다. 나는, 농담이야, 하고 얼굴을 붉혔다. "야자키는? 야자키 반 친구들은 모두 의과대학 지망이지?" "응, 구십 퍼센트는 의학부, 그렇지만, 난 글렀어." "그러니, 나, 야자키가 의사가 되면 진찰을 받고 싶었는데"하고 말했다. 나는 무슨 뜻인지를 몰라 약간 긴장했다. 설마 블라우스를 열고 몸을 만지거나 드러누워 다리를 벌리는... 그런 망상을 떨치기 위해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버스 속에서 이런 생각만 하다가는 심장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아다마를 상상 속에 등장시켜,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게 하면서, 달아오르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버스 종점은 가라즈의 시내였다. 차장은 시즌이 아니라서 해안가까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둘을 보고 질투심 때문에 심술을 부리는 듯한 어투였다. 해변까지는 꽤 멀었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이 오전 11시, 30분 걸어서 해변가에 도착하면 11시 30분, 겨울 바닷가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천사의 바구니에는 틀림없이 도시락이 들어 있을 것이다. 눈물이 날 만큼 맛있는 음식이 들어 있겠지만, 정오에 그것을 먹어치우면 할 일이 없어지고 말 테니, 차가운 바람과 추위를 견디다 못해 얼마 안가서, 그만 돌아가자, 라는 말이 나올 것이 뻔하다. 우리가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낭만적인 겨울 바다의 '저녁 노을'이다. 모든 것이 부드럽게 녹아드는 듯한 엷은 보라색 공기이다. 그 공기는 인류에게 아무런 소용없는 이성이라는 것을 빼앗아 버리고 말 것이다. "마츠이는 영화 좋아하니?" 가라즈 시내의 아케이드 입구에 영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냉혈>, 망할 그 제목이 나의 꿈을 송두리째 날려 버렸다. "응, 좋아해."하고 천사가 대답했다. "저기 봐, <냉혈>, 아는 영화니?" 치명적인 아는 체 병이 도졌다. "저 영화 말이야, 트루먼 캐포티라는 사람의 원작인데, 명작 중의 명작이라 할 수 있어." 그렇게 하여 바닷가의 저녁 노을을 즐기기 위해 우리는 <냉혈>을 보기로 했지만, 그 캐포티 원작의 사회파 영화는 달콤한 키스의 시간을 맞이할지도 모를 17세의 커플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불행한 과거를 가진 두 남자가 어느 가족을 모두 참살하고, 전기의자에 앉기까지를 다큐멘트 풍으로 극명하게 그린 영화였다. 범인 역의 배우는 이가 빠져 있었고, 화면은 흑백이었고, 교살 장면은 불필요할 정도로 리얼하여 나조차 눈을 감고 싶을 정도였고, 영화관은 오줌 냄새로 가득하였고, 시트 등받이는 넝마 같았다. <냉혈>은 천사를 피로하게 만들고 말았다. 더없이 리얼한 범죄 다큐멘트로, 상영시간은 무려 2시간하고도 40분이나 되었다. 천사는 몇 번이나 눈을 감으며, 무서워! 싫어! 하고 작은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피로와 반성과 후회로 나는 천사에게 말도 걸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바닷가까지 걸었다. "야자키, 도시락 먹을래?" 바람이 드센 해변가에 도착하자 천사는 그렇게 말하고, 바구니 속에서 알루미늄 호일로 감싼 샌드위치를 끄집어냈다. 치즈와 햄과 달걀과 야채가 든 샌드위치, 물수건과 파셀리도 있었고, 프라이드 치킨까지 곁들어져 있었다. 프라이드 치킨은 손으로 잡기 쉽도록 알루미늄 호일로 감쌌고, 핑크빛 리본으로 치장까지 하고 있었다. "와! 정말 맛있겠다."하고 나는 호들갑스럽게 말했지만, <냉혈>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아, 입 속도 식도도 위장도 바싹 마른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샌드위치를 볼 가득 밀어 넣었다. 세찬 바람이 불고, 현해탄 저 멀리 하얀 파도가 일고 있었다. 때때로 모래바람이 불어와 우리는 얼굴과 바구니를 가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영화 굉장하더라." 포트에서 홍차를 따르면서 천사는 말했다. "피곤했지?" "응, 조금." "미안해." "왜?" "모처럼 데이트에서 그런 영화를 보게 해서." "그렇지만 명작이잖아?" "응, 어떤 잡지에 소개되어 있더라." "역시 필요한 것인가?" "어, 뭐라구?" "그런 명작이 필요 있을까 말이야." "무슨 의미?" "그 사건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며?" "응,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왜 그런 이야기를 일부러 영화로 만들지? 난 알고 있는데." "알고 있다고?" "이 세상에는 잔혹한 일이 있다는 것을 난 알아. 베트남이나 유대인 수용소라든지, 그렇지만 난 일부러 그런 영화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왜, 그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만 할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천사의 말 뜻은 잘 알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보기 싫은 것, 더러운 것을 일부러 보여 주는 것일까?' 아기사슴 같은 눈동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대답을 잊게 된다. 마츠이 카즈코는 상냥하고, 예쁘고, 머리가 좋고, 사랑 받으며 자란 사람이다. <냉혈>에서 묘사된 세계가 평화로운 생활과 무척 가까운 곳에 잠복되어 있다고 해도, 또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도,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천사가 한 말, '난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싶어'라는 것이다. 샌드위치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우리는 겨울바다를 뒤로 했다. 키스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여 1969년은 지나갔다. 아다마는 현재 후쿠오카에서 프로모터를 하고 있다. 시골 탄광촌 출신이라서 그런지 영어를 쓰는 직업에 집착하년 경향이 강했다. 내가 9년 전에 소설가로 데뷔하고, 그 데뷔작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때, 그는 아카사카의 호텔에 있는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 때는 아다마의 방문은 나에게 무척 고통스런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유명해져서 무척 긴장해 있었고, 아다마와 놀던 시절로 회귀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었다. 거의 대화도 없이, 미지근한 커피를 한 잔 마신 다음 아다마는 돌아갔다. 나중에 그 커피를 마셔 보고, 17세를 함께 보낸 그 친구에게 그런 커피를 마시게 한 나 자신을 야박한 사나이라고 생각했다. '시라칸스'의 베이스와 보컬을 맡았던 후쿠는 지금도 후쿠오카에 살면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재즈 레코드 가게를, 때때로 콘서트를 기획하기도 한다. 살사와 레게의 좋은 레코드가 들어오면 나에게 보내주곤 한다. 우린 만나면 제니스 조플린을 노래한다. 가사를 잊어 먹으면, 여전히 돈츄노, 돈츄노이다. 북고 전공투의 오다키와 나리시마와는 지금은 서로 연락이 없지만, 상경했을 때, 한 번 하숙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둘은 검정시험을 거쳐 도립대학에 진학했다. 하숙방에는 헬멧과 각목과 전단이 있었고,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에 블라우스와 청바지 차림의 여자도 있었다. 우리는 요시다 다쿠로를 들으면서 삿뽀로 소금 라면을 먹었다. 시로쿠시 유지는 의사가 되었다. 의학부 학생일 때 한 번 만났다. 의학부 학생증을 보여 주고 하룻밤 즐기자고 말해서, 거절한 술집 여자는 아직 둘밖에 없었다고 시로쿠시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요부 앤 마가렛, 사토 유미는 행복한 결혼을 하여 사세보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이와세와는 상경 당시는 자주 만났지만, 요 몇 년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케부쿠로의 카바레에서 음유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화가 지망생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이미 헤어졌다고 말했다. 나가야마 미에는 미용사가 되었다. 재즈 클럽 <포 비트>의 마스터 아다치는 자살하고 말았다. 나를 취조한 사사키 형사는 전근하여 지금 가고시마에 있다. 매년 연하장을 보내온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요즘의 불량 학생들은 정이 안 가요...' 공고의 보스는 사세보 중공업에 근무하다가 프레스에 끼어 오른 손가락 네 개를 잃고 검도를 포기했다. 혼혈아 야쿠자는 그 세계에서 발을 씻고, 사세보에서 지금 찻집을 경영하고 있다. 그 찻집에는 내 사인이 그려진 두터운 종이가 걸려 있다. 가와사키와 아이하라, 두 체육선생은 전근하여 지금 사세보에 없다. 담음 마츠나가는 북고를 퇴직하고, 어느 여고에서 강사를 하고 있다 한다. 소설가가 된 후 나는 그에게 고교 시절과 다름없는 말투로 딱 한 번 설교를 들었다. "야자키, 보기 흉하니까 그 머리 좀 잘라라." 바리케이드 봉쇄 다음날, 나의 멱살을 잡고 울먹였던 학생회장은 교토대학 재학중에 적군파에 가담하였다가 싱가포르에서 체포되었다. 교장실 책상에 똥을 싼 나카무라는 나가사키에서 이벤트 기획회사를 하고 있다. 한 번 강연을 하러 갔을 때, '언젠가 똥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닌가 하고 겁을 먹고 있었는데, 기어이 쓰고 말았군요.'하고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천사 레이디 제인, 마츠이 카즈코와의 사랑은 1970년 2월, 비가 내리던 일요일에, 그녀의 일방적인 '변심'으로 끝나고 말았다. 천사에게 연상의 보이 프랜드가 생긴 것이다. 그 보이 프랜드는 규슈대 의학부에 입학한 사람이었다. 천사는 도단에 입학하였다. 우리는 기치조지를 중심으로, '싸늘한 관계'가 되고 나서도, 몇 번 데이트를 했다. 이노가시라 공원에 벚꽃이 질 무렵, 천사는 보이 프랜드와 결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 날 밤 나는 산토리 위스키 한 병과 백포도주 반 병과 적포도주 한 병을 마시고, 카레라이스와 소고기 덮밥을 두 그릇씩 비운 다음, 밤중에 플루트를 마구 불다가 같은 연립주택에 사는 야쿠자에게 뺨을 왕복으로 네 대나 맞았다. 내가 소설가가 되고 나서 몇 번 편지가 있었고, 전화도 한 통 있었다.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보즈 스캑스의 <위 아 올 얼론>을 듣고 있었다. "아, 보즈 스캑스로구나?" "응, 그래." "아직도 폴 사이먼 좋아하니?" "아니, 이젠 듣지 않아." "그렇니, 나는 아직도 듣고 있는데." "잘 지내?" 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전화 이후, 편지가 왔다. 보즈 스캑스가 흐르고, 야자키 씨의 목소리를 들으니, 문득 고교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나도 보즈 스캑스를 좋아하지만 듣지 않아요.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났어요. 그래서 지금은 자주 톰 웨이츠를 들어요. 괴로운 일들을 잊어버리고 싶지만, 정말로 괴로운 일을 잊기 위해서라면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의 편지 마지막에는 폴 사이먼의 노래가사가 타이핑 되어 있었다. Still crazy after all these years... 레이디 제인은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갈 것이다. <아침에 서는 축제>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닭들은 아다마의 손에 의해 폐광 후의 탄광촌 산에 방사되었고, 한번은 지방 신문에 기사로 실린 적이 있다. <건강합니다. 야성화한 닭, 10미터 점프!> 후기 이 책은 1969년 내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일부 기록한 것이다. 1969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지금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마치고 사회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런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어 주길 바란다. 이 책은 정말 즐거운 소설이다. 이렇게 즐거운 소설은 다시는 쓸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거의 다 실제 인물뿐이지만, 당시 즐겁게 살았던 사람은 좋게, 즐겁게 살지 않았던 사람들(선생, 형사, 그 외의 어른들, 그리도 말 잘 듣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나쁘게 썼다. 즐겁지 않은 것은 죄이다. 나는 고교 시절에 나에게 상처를 준 선생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소수의 예외적인 선생을 제외하고,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나에게서 빼앗아가 버렸다. 그들은 인간을 가축으로 개조하는 일을 질리지도 않게 열심히 수행하는 <지겨움>의 상징이었다. 그런 상황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오히려 옛날보다 더 심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 건, 선생이나 형사라는 권력의 앞잡이는 힘이 세다. 그들을 두들겨 패보아야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쪽이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도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결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작가연보 1952년 2월 19일 나가시키 현 사세보 시에서 출생. 본명은 류노스케. 아버지는 미술 선생이었다. 1968년 16세. 이 해에 사세보에 미해군의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입항하자 전학련에 의한 입항저지 투쟁이 일어난다. 그는 여기에 깊이 감동한다. 1969년 고등학교 3학년, 학교 옥상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데모에 참가, 무기정학을 맞는다. 정학 기간 중에 히피 문화와 접한다. 1970년 고등학교 졸업, 그 즈음에 록밴드를 결성하고, 8밀리 영화를 제작한다. 한편 극단을 만들어 문화회관에서 세 번에 걸쳐 록 공연을 한다. 이 해부터 도쿄에 거주한다. 1972년 20세,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 이때부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초고를 쓴다. 처음의 제목은 <크리토리스에 버터를>이었다. 1975년 23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군조 신인문학상에 응모. 1976년 24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제 19회 군조 신인문학상을 수상한다(5월). 7월에 같은 작품으로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하고, 9월에 엘렉톤(전자 오르간) 연주자인 다카하시 다츠코와 결혼한다. 1977년 일본판 <플레이보이>지에 단편 <뉴욕시티 마라톤>을 발표. <바다 건너편에 전쟁이 시작된다.>를 발표. 이때부터 시나리오를 쓴다. NHK 라디오의 디스크 자키를 맡는다. 리처드 버트의 <환상>을 번역 출판. 사진작가로서 사진을 발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영문판이 출판됨. 1978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영화화. 스스로 감독을 맡는다. 이 해에 장편소설 <코인로커 베이비스> 집필을 위한 취재 여행을 한다. <코인로커 베이비스> 출간. 1981년 대담집, 에세이집, 영화시나리오 제작, 소설 구상으로 한 해를 보낸다. 1982년 30세, 1월부터 장편 <테니스 보이의 우울>을 <부루터스>에 연재 시작. 영화촬영 준비, 배우 선정 등으로 필리핀과 뉴욕 등지를 여행한다. 1983년 <괜찮아 내 친구> 간행. 이 소설의 영화도 완성. 상영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연재. <달려라 다카하시> 연재.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 집필을 위한 취재 여행. 동 소설의 연재 시작. 1984년 <69> 연재 시작. <쾌락의 테니스> 연재 시작. 1985년 <테니스 보이의 우울> 출간. 1986년 <초전도 나이트 클럽> 연재 시작. <무라카미 류 요리 소설집> 연재 시작. <테니스 보이 어라운드 더 월드>를 연재 시작. 세계 각지를 취재 여행하고 스쿠버다이빙을 위한 여행도 한다. 1987년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 출간. <모든 남자는 소모품이다.> 출간. <69> 출간. <테니스 보이 어라운드 더 월드> 출간. <류의 바> 마이니치 방송에서 방송 시작. <클레오파트라 드림> 연재 시작. 1988년 <빅 이벤트> 연재 시작. <리사, 지금 어디에 있니> 연재 시작. <서머 인 더 시티> 출간. <토파즈> 출간. <무라카미 류 요리 소설집> 출간. <쾌락의 테니스 강좌> 출간. <류즈 바, 마음대로> 출간. 1989년 <친구의 에이비시디> 출간. <빅 이벤트> 출간. <이비사> 연재 시작. 1990년 <사랑은 언제나 미지의 것> 연재 시작. <엑스터시> 연재 시작. 1991년 <무라카미 류 전 에세이> 출간. <초전도 나이트 클럽> 출간. 1992년 <교코> 연재 시작. 자작영화 <토파즈>를 베를린 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출품. <토파즈의 유혹> 출간. <용언비어> 출간. <음악의 해안> 연재 시작. <친구여 다시 만나자> 출간. 자작영화 <토파즈>가 이탈리아에서 상영됨. 1993년 41세, <엑스터시> 출간. 영화 <토파즈> 미국 상영 결정됨. 1994년 자작소설 <교코> 영화 제작. 현재 <교코>는 일본에서 상영중이다. 또 <교코>는 한국에서 곧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