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 중앙M&B. 로마 로마 로마는 이번 장기 여행의 입구임과 동시에 해외 체재중의 나의 기본적인 주소지였다. 우리가 베이스 캠프를 칠 땅으로서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로마를 선택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첫째로 기후가 온화하다는 것. 모처럼 한가로이 남유럽에서 살아보기로 정했으니 겨울을 춥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로마는 일단 이상적인 도시이다. 로마를 선택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거기에 옛 친구가 한 명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에서건 비교적 뻔뻔스럽게 잘 적응하여 사는 편이지만 삼 년이란 긴 세월을 지내야 한다면 한 사람 정도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연으로 로마가 우리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때까지 로마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뭐 그렇게 살기 힘든 곳은 아니겠지, 하고 우리는 생각했던 것이다. 영화에서 본 바로는 꽤나 멋진 도시이지 않은가, 하고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는 나중에 여러 가지로 후회하게 된다. 우리는 이사라도 하는 기분으로 일본을 뒤로하였다. 몇 년이나 장기적으로 일본을 떠나 살아야 하므로 그때까지 살고 있던 집도 아는 사람에게 빌려주었다. 외국 생활에 필요한 것을 하나에서 열까지 슈트케이스에 꽉꽉 채워 넣었다. 짐을 꾸리는 일은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이나 남유럽에서 살아야 하는데 뭐가 어느 정도 필요한지 알 법이나 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필요할 것 같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필요없을 것 같았다. 진행중이던 일은 일괄하여 정리하고 연재도 그럭저럭 매듭을 지었다. 어떤 잡지를 위해서는-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여섯 달치분 에세이를 한꺼번에 써서 건네주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 작별 인사를 하였다. 우리가 일본을 비우고 있을 사이 잡무를 맡아 처리해 줄 사람도 구했다.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아 아무리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인지 뒤로 후퇴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을 정도이다. 슈트케이스에 뭐가 들어 있는가, 대체 슈트 케이스는 몇 개나 들고 왔는가,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여행길에 올라 우리가 맨 처음으로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 내려섰을 때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지칠 대로 지쳐 있기만 했다.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온몸의 틈새란 틈새에 치과 의사가 충치용으로 사용하는 시멘트가 꽉 들어차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두 다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고 머리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육체적 피로이고 어디까지가 시차탓이고 어디까지가 정신적 소모인가, 나는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부엌 바닥에 몇 종류의 조미료를 한꺼번에 쏟아부은 것처럼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어 구제할 길 없이 피폐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들 여행의 출발점이었다. 피폐, 망연자실, 소모. 우리는 열흘간 이 도시에 체재하였다. 그 동안 태세를 다시 갖추어, 우리는 아테네로 떠났다. 로마 체재중에 쓴 문장을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 무렵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가 눈앞에 삼삼하도록 느껴진다. 그 엄청난 피로는 내 일기에 의하면 두 주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소멸했다. 소리도 없이. 휑하니. 조르조와 카를로 1986년 10월 4일 이 글은 그 시기에 내가 빠져 있었던 피폐를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을 테마로 하여 쓴 것이다. 여행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타인의 피폐에는 별 흥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읽으셔도 상관없다. 아직도 내 머리 속에서는 두 마리 벌이 붕붕 날아다니고 있다. 나는 호텔 침대에 드러누워 이미 완전하게 싫증이 난 성 베드로 사원의 둥그런 지붕을 바라보면서-창문으로 성 베드로 사원이 잘 내다보인다는 것이 이 호텔의 거의 유일한 자랑거리이다-이렇게 된 바에 아예 이 두 마리 벌에게 이름을 붙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침대에 누워 벌써 십오분 동안이나 그 이름을 생각하고 있는데도 전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무엇 하난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것도 다 벌 탓이다. 두 마리 벌이 내 머리 속을 쉴 새 없이 붕붕 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린 호네트의 테마처럼. 그 짜증스런 소리 덕분에 뭘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뭐 됐어, 아무러면 어때. 벌의 이름은 '조르조'와 '카를로'라고 하지, 라고 나는 결심한다. 두 마리 벌 조르조와 카를로, 의미 따위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름에서는 이탈리아의 내음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잔에 담긴 적포도주를 홀짝 들이켜고 넉 잔째 술을 따른다. 쌈박한 향의 토스카나 와인. 호텔 근처에 있는 술가게에서 사온 그리 비싸지 않은 포도주인데 맛이 나쁘지는 않다. 라벨에는 새 그림이 그려져 있는 반 정도 줄어든 그 포도주 병을 손에 들고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병의 모양이며 라벨 그림이며를 오래도록 쳐다본다. 병 꼭지를 손에 쥐고, 병 바닥을 배에 올려놓고는 딱히 이렇다 할 감정을 품는 일도 없이 그것을 지그시 응시한다. 푹 데친 시금치처럼 지치면 나는 그런 식으로 뭔가를 줄곧 쳐다보곤 한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아무튼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빤히 보는 것이다. 나는 지금 포도주 병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꽤 오래도록 보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다. 감정? 음, 감정이라면 조금 있지. 나는 팍 늙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모든 것이 완만하고 멀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조르조와 카를로는 변함없이 머리 속을 날아다니고 있다. 붕붕붕붕 하고, 나의 피폐야말로 그들의 양분인 것이다. 붕붕붕붕 조르조와 카를로는 도쿄에서 나의 뇌수를 찔러, 그것을 퉁퉁 불어터지게 만들어 놓았다(물론 그때에 그들은, 아직 둘로 분화되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 퉁퉁 불어터진 뇌수의 주변을 쉴 새 없이 날아다녔다. 나는 몹시 지쳐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일본을 떠나기로 한다. 우리(라 함은 나와 내 아내를 말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는 짐을 꾸리고, 두 마리 고양이는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집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고, 로마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어디에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뭐 어떻게든 될 것이다. 적어도 도쿄에서 저 벌의 날개 소리를 듣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러나 로마에 도착해서도 벌은 여전히 내 머리 속에 있었고 날개 소리가 없어지기는커녕 조르조와 카를로로 분화하기까지 하여 그전보다 훨씬 더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어느 틈엔가 로마의 소리와 일체화하여버렸다. 로마를 로마답게 하는 저 소리 말이다. 저 끔찍하고, 이상 야릇하고, 벌받을 도시의 소음과! 어이휴, 내 내면적인 피폐는 한 도시의 외적인 특질로 이렇듯 커다란 전환을 꾀한 것이다. 가까이에 세계 지도가 있다면 유럽이 있는 페이지를 펼쳐 로마 시를 찾아봐 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즉 나의 피폐이다. 벌 조르조이며, 벌 카를로이며, 아무 색다를 것도 없는 적포도주 병이며, 양파 모양을 한 성 베드로 사원의 둥그런 지붕이다. 조르조와 카를로가 붕붕거리며 둔중하게 날개를 비비면 마치 인디언 봉기처럼 로마 시의 고음이 그에 호응한다. 그런저런 일들로 나는 갑자기 나이를 먹어버린 듯한 기분에 젖는다. 어제는 아내의 새일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생일날 일본을 떠난 것이다. 시차 관계고, 그녀는 아주 긴 생일을 보낼 수 있었다. 아주아주 긴 서른여덟번째 생일. 재가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우리가 둘 다 열여덟 살이었을 때다. 열여덟 살이었고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코가 삐뚤어지도록 취하던 시절. 그로부터 이십 년. 그러나 내가 나이를 먹었다고 느끼는 것은 그 이십 년이란 세월 탓이 아니다. 그것은 조르조와 카를로 탓이다. 참 죽겠군, 내 사고는 아까부터 같은 곳을 빙글빙글 제자리 걸음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옛날에 갖고 있었던 비치 보이스의 싱글판(굿 바이브레이션)처럼 한가운데쯤에서 언제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바늘을 안쪽으로 옮겨다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으ㅆ, 하고. (으ㅆ) 나는 어째서 이런 글을 쓰고 말았는가? 무슨 목적으로, 누구를 향하여? 이 세계에 나의 피폐에 대해 조금이라도 흥미를 느끼는 독자가 존재할 것인가? 그리고 만약 존재한다면 대체 어떤 타입의 사람일까? 물론 나는 그런 것은 알 수 없다. 독자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나는 나의 소설을 읽은(그리고 읽었다고 주장하는)몇십, 몇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은 독자란 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그들 중의 몇 명이 나의 피폐에 관심을 가질지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뭐 아무러면 어때, 나는 자신을 위하여 이 글을 쓰고 있다. 애당초부터 그럴 심산이었다. 무언가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뿐이다. 그저 책상 앞에 앉아, 펜을 쥐고 무언가를 쓰고 싶을 뿐이다. 여러 가지 말과, 여러 가지 표현과, 여러 가지 비유를 검증하고 싶을뿐이다. 무엇에 관해 쓸 것인가는 별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으ㅆ) 나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다. 창밖으로 재잘대는 아이들 소리가 들려온다. 호텔 건너편이 유치원인 것이다. 조붓한 뜰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수녀들이 돌보고 있다. 나는 또 한 모금 포도주를 마신다. 안개가 자욱이 낀 것처럼 뿌연 로마의 하늘. 나는 자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푹 잠들고 싶다. 하지만 제대로 날 수가 없다. 벌이 붕붕 시끄럽고 가끔은 바늘을 안쪽으로 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가끔은 바늘도-. (으ㅆ) 어이 자네들 조르조와 카를로, 언제까지 내 머리 속을 붕붕거리고 날아다닐 작정이지? 내 머리 속을 날아다녀 봐야 그다지 좋은 일도 없잖아. 나는 이제 곧 재기할 것이고, 그렇게 괴면 자네들이 있을 자리는 없다구. 뭐 좋아, 날고 싶으면 날아 보라구 마음껏. 붕붕붕붕붕붕붕붕.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이 방은 어쩌면 이리도 멋대가리가 없단 말인가. 벌은 날다 1985년 10월 6일 일요일,오후,쾌청. 죄송하지만 이 글 역시 피폐를 다룬 글의 연속 편이다. 이인조 벌, 조르조와 카를로가 계속하여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이 애당초 어떻게 생성되었는가가, 일요일 오후의 보르게제 공원 묘사와 겹쳐 기술된다. 작가 자신에 관한 미미한 고찰도 있다. 조르조와 카를로는 아직도 내 머리 속을 날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생각은 가능하면 안 하기로 한다. 다른 일을 생각하기로 노력하자. 가능한 한. 무엇보다 오늘은 일요일이고 날씨도 아주 멋지다. 나는 보르게제 공원 잔디 위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다. 야외 매점에서 오렌지 주스를 사서 마시며 혼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한다. 이미 10월인데 마치 여름이 다시 돌아온 듯한 더위이다.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쓰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벤치에 서로를 기대고 앉아 있는 커플이 있다. 셔츠를 벗어 상반신을 알알이 드러낸 채로 벌렁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청년도 있다. 목걸이를 풀어 개를 자유롭게 뛰놀게 하고 자기는 나무 그늘에서 혼자 쉬고 있는 노인도 있다. 수녀 두 명이 분수 앞에 앉아 꽤 오래도록 얘기를 나누고 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전투복 같은 제복을 입은 경찰인지 헌병인지가 소매를 걷어올린 팔로 사뭇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자동 장총을 어깨에다 받치고 내 곁을 지나간다. 19세기 인상파 화가가 제재로 선택함직한 평화롭고 친밀하고 이노센트한 일요일의 광경이다. 열넷이나 열다섯 살, 그쯤으로 보이는 빨간 승마 모자를 쓴 예쁘장한 소녀가 말을 끌고 마장으로 향하고 있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시간이란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세상에는 가끔 저런 식으로 걷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마치 시간 그 자체인 것처럼 걷는다. 지금 시각 열한시 삼십오분 사십초를 알려드립니다. 삐-지금 시각 열한시 삼십오분 오십초를-그들은 그런 식으로 걷는다. 턱을 바싹 안쪽으로 잡아당기고 등줄기를 곧바로 세우고 걷는 일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결코 몸이 굳어 있는 법은 없다. 그녀는 아주 기분좋게 시간 그 자체인 것처럼 매끈하게 공원 내의 길을 걸어 마장으로 향하고 있다. 광장에서는 일군의 사람들이 열기구를 띄워 올리려 하고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가 뜻대로 올라가지 않는 모양이다. 한 세 명쯤은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면서 기계를 조종하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따분한 표정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열기구를 보기는 처음이다. 딱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물건은 아니다. 적어도 지상에 머물러 있는 한에 있어서는 무미건조하다. 기구는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좀체로 부풀지 않는다. 잠이 와 죽겠는데 억지로 불려 일어나 옷을 꿰 입는 뚱뚱보 중년 여인 처럼, 그것은 매우 기분이 언짢다는 듯, 출 널브러져 있다. 이따금 성가시다는 듯 방정스럽게 몸을 뒤틀기도 한다. 그 옆으로 큰 개가 지나간다. 개는 멈춰 서서 기구를 잠시 바라본다. 이건 또 뭐지, 싶은 자못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개는 잠시 기구를 바라보다가 아무도 그게 뭐라는 걸 가르쳐 주지 않고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진전도 없고 하여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내가 앉아 있는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젊은 남녀가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고 있다. 아주 길고 아주 진지한 입맞춤이다. 그런 입맞춤을 눈 안에 들어오는 대로 보고 있자니 내 자신이 입맞춤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질식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될 만큼 긴 입맞춤이다. 다양한 각도로, 다양한 격정으로, 다양한 자세로, 그들은 입맞춤을 되풀이한다. 솜씨좋게 편집된 학술적 기록 영화처럼 그들은 여분이 없는 동작으로 자세를 바꿔가며 다양한 입맞춤의 바리에이션을 의욕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들은 행복할까, 하고 나는 불쑥 생각한다. 만약 행복하다면, 저 정도의 입맞춤을 사람에게 요구하는 행복이란 대체 어떤 형상과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너무 지쳐 있다는 것이다. 참 내, 어쩌다 이렇게 지쳐버렸지? 그러나 아무튼 나는 지쳐 있다. 적어도 소설을 쓰기에는 너무 지쳐 있다. 그것이 내가 껴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마흔 살이 되기 전에 두 편의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 생각하고 있다기보다는 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그 일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그 일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쓰면 좋은가, 어떻게 쓰면 되는가, 그런 것도 대충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대로 영원히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기분조차 든다. 그리고 머리 안으로는 벌이 붕붕 날아다니고 있다. 너무 시끄러워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내 머리 속에서는 아직도 전화 벨 소리가 울리고 있다. 그것도 벌이 내는 소리의 일부이다. 전화다. 전화 벨이 울리고 있다. 따르릉따르릉따르릉따르릉. 그들은 내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워드 프로세서인지 뭔지의 광고에 나가라고 한다. 어느 여자 대학에서 강연을 하라고 한다. 잡지 그래비어를 위해 요리 솜씨 자랑을 하라고 한다. 누구누구랑 대담을 하라고 한다. 성 차별이니, 환경 오염이니, 죽은 음악가니, 미니 스커트의 부활이니, 담배 끊는 법이니, 에 대해 코멘트를 해달라고 한다. 무슨무슨 콩쿠르에 심사 위원이 되라고 한다. 내달 이십일까지 '도시 소설'을 삼십 장 쓰라고 한다(그런데 '도시 소설'이 대체 뭐지?). 그렇다고 내가 뭐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주가 나쁜 것도 아니고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상황에 가담하고 있는 인간 중의 하나이다. 그 과정을 얘기하자면 상당히 복잡한 애로를 거쳐가야 하는데, 그래도 역시 나는 거기에 가담해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상황에 대해 화를 낼 만한 권리가 없다.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은 차라리 내 자신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이중성이 나를 짜증스럽게 한다. 그리고 무력감을 품게 한다. 무력감-필경 거기에서 피폐가 솟아오르는 것이리라. 거기에서는 출구가 입구이며, 입구가 출구이다. 아무도 거기서 나갈 수가 없다. 그곳은 싸늘한 어둠에 싸여 있다. 밤치고는 너무 밝고 낮치고는 너무 어둡다. 그 기묘한 어둠에 감싸일 때, 나는 정상적인 시간과 방향을 잃어 버리고 만다. 나는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그리고 여전히 전화 벨이 울린다. 따르릉따르릉따르릉따르릉. 이윽고 한 마리 벌이 내 머리 안으로 날아들어오다. 벌들은 그 어떤 달콤한 꿀보다 피폐의 냄새를 좋아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피폐가 어디에 있는 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킁킁, 여기 달짝지근하게 피로에 젖어 있는 피폐가 있잖아, 하고 말이다. 그러고는 바늘로 콕 찔러 흐물흐물 불어 터지게 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일본을 떠나 온 것인데(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 나는 새삼 확인하다), 이 로마에서도 나의 그 피폐는 호전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여덟 시간의 시차와 북극권을 넘어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벌은 둘로 분열하여 조르조와 카를로가 되었다. 피폐는 기름땀처럼 찐득하게 피부에 떠 있다. 어디에 가나 마찬가지야, 라고 그들은 내게 속삭이고 있다. 아무리 먼데로 간들 마찬가지라구. 붕붕붕붕붕. 어디까지 가든지 우리는 반드시 따라갈 테니까,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는 아무것도 못하고 마흔이 되는 거라구. 그런 식으로 나이를 먹어 가는 거야. 아무도 너를 좋아하지 않고, 앞으로는 더욱 싫어하게 될걸. 아니야 달라, 라고 나는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제대로 소설을 쓸거야. 사라지는 것은 자네들 쪽이라구. 설령 그렇더라도, 라고 조르조와 카를로가 말한다. 우리는 언젠가 또다시 돌아올거야, 너한테로,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니까. 서두를 것 없어, 천천히 긴 안목으로 할거야, 아무도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구. 모두들 너를 증오하게 될거야. 소설 따위 써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붕붕붕붕붕붕붕붕. 붕붕붕붕붕붕붕붕. 로마. 여름처럼 찬란한 햇살을 받고 있는 늦은 오후의 로마. 나는 잔디 위에 벌렁 드러누워 말과 사람과 구름의 완만한 움직임을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문득 지금부터 이천 년 후에 지금의 로마가 폼페이처럼 완전한 유적으로 남아 있다면 멋지겠지, 하고 생각한다. 여러분 저것이 토르사르디의 유저, 이쪽은 발렌티노의 유적, 그쪽 쇼케이스 안에 있는 것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골드 카드입니다, 라는 둥 말이다. 여자 아이는 아직도 말을 끌며 걸어가고 있다. 그녀는 그대로 시간의 안개 속에 녹아들 것처럼 보인다. 아까 지나간 사람들과는 다른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아이스 크림을 먹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가 지나간다. 그들은 열기구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분수대의 물이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그 정상께에서 구슬처럼 예쁜 물방울을 이루며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다. 열기구는 아직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까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세 사람은 여전히 무슨 나사를 조절하기도 하고, 미터기를 점검하기도 하면서 왔다갔다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보고 있어도 그것이 떠오르리란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인데 말이다. 오후 한시 사십오분.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시간이 남아있다. 아테네 아테네 아테네를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이다. 아테네라고 하면 인구 삼백만을 헤아리는 그리스 제일의 도시(실로 그리스 총 인구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수)지만, 관광객이 통상 돌아 다니는 면적으로 하자면 그리 큰 도시는 아니다. 역사적 유물은 대충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있고 아주 넉넉하게 잡아도 사흘만 있으면 볼 만한 곳은 다 볼 수 있다. 이 도시는 먼 옛날 폴리스 주변에 마치 자석에 철가루가 달라붙듯 근교 주택지까지 그대로 무질서하게 다닥다닥 발전한 도시라서 관광객에게 흥미가 있는 장소는 중심부에만 밀집되어 있는 것이다. 근교 주택지 같은 곳에 일부러 구경을 하러 가봐야 별 뾰족한 것이 있을 리 없으니(가령 당신이 도쿄에 온 외국인 관광객이라면, 히바리가오카나 다마 플라자, 니시고쿠분지 같은 곳에 관광하러 가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 프라카에서 레티나를 마시고 무사카를 먹고는,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다가 기념품 가게를 기웃기웃거리고, 신타그마 광장에서 차를 마시고, 리카비두스 산에서 아테네의 야경을 구겨하고, 그 후 시간과 관심이 있는 사람은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견학하고 그러면 끝이다. 요컨대, 세 번씩이나 왔다면 이미 볼 것도 없고, 가야 할 장소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테네의 그랜드 브르타뉴 호텔에 머무르면서, 거기에서 발렌티나라는 여성을 만났다. 그녀가 우리에게 집을 소개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발렌티나 발렌티나가 우리에게 섬에 있는 전셋집을 소개해 준다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말이죠, 비유우우우우우우티플한 집이에오." 라고 그녀는 감격스럽다는 듯이 내 무릎을 탁탁 치며 말한다. 우리는 둘이 나란히 그랜드 브르타뉴 호텔의 로비 소파에 앉아 있다. 그녀는 일단은 영어로 얘기하는데 뭐에 감동을 받거나 무언가를 강조하거나 할 때면, 단어의 중간에 있는 모음을 기이이이이이이이일게(길게) 늘어 뜨리는 버릇이 있다. 그 버릇은 알게 모르게 내 쪽으로도 옮아 온다. 전염성이 있는 버릇인 모양이다. 우리가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그리 곰살갑지 않은 호텔 보이가 다가와 "뭘 마시겠습니까?" 하고 분별없이 주문을 요구한다. 그런데 발렌티나는 그 자리에서 "노!" 라고 대답한다. 이런 때, 그녀의 모음은 아주 간결하고 명쾌한 발음이다. "그러고 말이죠, 그 집 근처에는 그 또한 비유우우우우티플한 비치가 있거든요. 그런데 당신 수영복은 가지고 왔겠죠." "에에, 그야 물론." "당신, 반드으으으으으시 그 집이 마음에 들 거예요." 발렌티나의 나이는 겉으로 봐서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스무 살이나 되는 아들이 있다고 하니까 제법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중년 여성치고는 드물게 야위었고, 그리고 대부분의 야윈 여성이 그러하듯, 아아아아아주 에너지에 넘쳐 있다. 화장도 옷차림도 그 에너지를 흡수했는지 상당히 화려한 편이다. 나는 그녀와는 첫 대면이다. "드미트리가 당신을, 일본에서 꽤 유명한 작가라고 하던데 그 말 정말이에요?"라고 발렌티나가 내게 질문한다. 간단한 인사말과, 날씨에 관한 의례적인 대화가 오고 간 후 얼마간 의심스럽다는 듯 그녀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 드미트리는 내게 그녀의 이름을 알려준 도쿄에 사는 그리스 사람이다. 아무래도 드미트리가 그녀에게 전한 정보에 오해 내지는 정서적인 혼란이 있었던 모양인지, 그녀는 나를 다니자키라든가 미시마 같은 타입의 반고전적인 문호라고 예상한 듯 했다. 그런 터에 내가 색바랜 티 셔츠에 낡아빠진 진 차림의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그녀로서도 조금은 훙이 깨진 듯싶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로서도-딱히 내 탓은 아니지만-죄송스러워 할 말이 없다. 가끔 생각하는 일인데, 아무래도 내게는 작가로서의(혹은 예술가로서의) 오라라고나 칭해야 할 무언가가 약간은 부족한 것 같다. 일본에서도 빵집 배달부나, 슈퍼마켓의 점원으로 오인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시장을 보고 있노라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봐요, 고춧가루 어디 있죠?" 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그리고 또 나는 어디어디에 있다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을 복장 탓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다 반듯하게 넥타이를 매고, 검정 양복을 입고 호텔 로비에 서 있으면, 낯모를 아저씨가 "어이 자네, 학실이 어디지?" 하고 묻는다. 따라서 나는 발렌티나를 책망할 수가 없다. 오라라고 하는것은-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지 도무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있어야 할 곳에는 반드시 있고 없어야 할 곳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온천이나 유전 같은 것처럼. "예, 그렇습니다. 작가예요." 라고 나는 변명을 하듯 말한다. "유명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죠, 일단은. 어찌됐든 드미트리가 내 얘기를 좀 과장되게 당신한테 전한 것 같군요. 일단 글을 쓰기는 하지만, 그리 대수로운 작가는 아닙니다." "흠" 하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내 복장을 보고는 말한다. "저, 하지만 전업작가죠. 풀 타임의?" "예, 그래요. 풀 타임 작가입니다. 뭐 그건 그렇고."라고 나는 대답한다. 뭐, 그건 그렇고. "글을 쓰기 위해서 그리스에 왔습니다."라고 나는 말한다. "실은 나도 시를 쓰거든요."라고 발렌티나가 말한다. "그런가요, 몰라봤습니다. 드미티리가 안 가르쳐 줘서." "당신, 시는 어때요, 쓰나요?" "써본 적이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흠흠 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스는 시가 아주 발달된 나라예요. 소설보다 시 쪽의 활동이 더 활발할 정도이죠. 그리스에 있어서 시는 역사적인 것이어서-참 당신, 그리스가 노벨 문학상을 두 번이나 탄 사실 알고 있어요?" "아니오, 몰랐는데요." 라고 나는 겸연쩍게 말한다. 발렌티나는 다시금 내게 "당신 정말 작가야?"라는 시선을 힐끗 보낸다. 그래봐야 난 그런 거 모른다구. 일본인 작가가 몇 명 노벨상을 탔는지조차 나는 모른다. "하지만 시의 문제점은,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이죠. 시인이란 직업이 될 수 없어요."라고 발레티나는 말한다. "그래서 나 역시 달리 일을 갖고 있는데-그런데 드미트리가 당신한테 내가 뭐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던가요?" "글쎄요, 유감스럽게도 나랑 드미티리는 길이 어긋났어요. 지난달 그가 그리스에 돌아왔을 때는 나는 아직 일본에 있었고, 이번 달에 내가 이렇게 그리스로 오고 보니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더라구요. 그래서 그와 제대로 얘기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테네에 도착하면 하여튼 당신한테 전화를 하라고, 그러면 다 알게 될 거라고 그런 말만 했습니다. 그 이상 자세한 것은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어요." "아아, 그랬어요. 흠흠. 아무튼 당신을 만나서 기뻐요. 웰 아임 해애애애애애피 투 미이이이이이이이이잇추." 그리고 그녀는 또 나의 무릎을 탁탁 친다. 이 여자, 내가 아는 누군가와 아주 닮았다, 싶은 생각이 내 머리를 가로지른다. 그것도 누구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고, 복수의 사람과 닮았다. 뭐라 설명은 잘 할 수 없지만,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경우에 취하는 특정의 행동을 서너 가지 합하여, 그것을 하나로 뭉뚱그린 후 다시 조금씩 여러 각도로 보여주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인 것이다. 기묘하게 리얼하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듯한, 그런 타입의 유사성이다. 하지만 결코 불쾌한 인상은 아니다. 그녀와 얘기하고 있으려니, 어떤 종류의 정겨움조차 느껴진다. 아하, 그러고 보면 세계는 정말 좁군, 이란 식으로. "드미트리는 헤어진 남편의 동생이에요," 라고 그녀는 말한다. "나는 이혼한 후에 줄곧 혼자라서 그래서 우린 아직 성이 같거든요. 드미트리는 요렇게 조그만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자아아아아아알 알고 있죠. 아 참 집 얘기를 해야 하나. 당신 집을 찾고 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집을 찾고 있어요." 간신히 얘기가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렇다. 우리는 그리스에 살기위해 집을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찾고 있는 집의 조건을 대충 제시한다. (1) 침실2 (2) 부엌과 목욕탕이 있을 것 (3) 가구가 딸려 있을 것 (4) 조용할 것-일을 해야 하므로 대략 그런 정도이다. "음 글쎄..."라며 발렌티나는 잠시 생각에 젖는다. 볼펜을 손안에서 빙빙 돌리고 있다. "조용하고 침실이 두 개 있고... 응 그렇지, 스페체스 섬이 어떨까? 스페체스라면 내가 아는 사람의 서머 하우스가 있는데. 스페체스 섬 알아요?" 스페체스라면 일단은 알고 있다.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이도라 바로 근처에 있는 섬이다. 이도라에는 몇 번인가 간 적이 있다. 크기로 봐서도 적당하고, 피레에프스에서 떠나는 뱃길도 편하다. 더구나 이도라처럼 한 시간마다 크루즈선이 방정맞게 왔다갔다하지도 않으니, 관광객에게 그다지 각광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아테네에 사는 그리스인이 서머 하우스를 지니고 있으면서, 여름 주말에 잠깐 놀러 왔다 가는 그런 섬이다. 분위기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어떤 집이죠?" 라고 나는 질문한다. "나도 몇 번 그 집에 머무른 일이 있는데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정말 비유우우우우우우티플한 집이에요."라고 발렌티나가 말한 것은, 바고 그때이다. "그러고 말이죠, 그 집 근처에는 그 또한 비유우우우우우우티플한..." 운운. 발렌티나는 백에서 메모 용지를 끄집어내서는 볼펜으로 지도를 그린다. 우선은 그리스의 지도. 그런데 그게 또 기묘한 지도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살이에서 몇몇 여성이 그린 지도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한 번도 지도를 정확하게 그리는 여성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발렌티나 역시도 부정확한 지도를 세상에 뿌리고 다니는 종족의 일원이었다. 라고 할까. 나로서는, 이 사람은 그 중에서도 상당히 정도가 심한 중환자라고 분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지도에 따르자면, 그리스 본토(즉 마케도니아에서 스니온 곶에 이르는 부분)는 축 늘어진 유방 같은, 아니면 구운 떡을 잡고 힘껏 잡아당긴 것 같은 원추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그 왼쪽으로 비틀린 장갑같은 꼴로 방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양자를 가르고 있는 코린트 운하는 도버 해협만한 폭이다(실제로는 백 미터나 이백 미터 정도이다). 그것이 발렌티나가 본 그리스이다. "이게 그리스예요," 라고 말하고 발렌티나가 그 죄많은 지도를 내 쪽으로 향한다. "알겠어요?" "예, 알겠습니다."라고 나는 할 수 없이 동의한다. 지금 새삼스레 저항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 "그리고, 여기가 스페체스예요."라고 그녀는 말하고, 바다 위에다 조그만 원을 그린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 섬의 지도를 그린다. 섬은-그녀의 지도에 의하면-양송이 버섯을 세로로 잘라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식을. 그러나 후일 지도를 사서 보니, 섬은 실제로는 이런 보양을 하고 있었다. 보면 아시겠지만 그 섬은 모양도 전혀 다르고, 항구의 위치도 남북이 전혀 반대이다. 어째서 이렇게 커다란 차이가 나는가 하면-내가 생각하기에-요컨대 그녀는 섬 생활에 있어서 항구의 중요성을, 지형적인 중요성에 오버랩시켰기 때문에, 그래서 항구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점점 커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동서남북이라는 절대적인 위치 관계도 전혀 인식 못하고 있었다. 즉 그녀에게 있어, 혹은 많은 여성들에게 있어, 지리적인 전체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들이 무엇보다 존중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컬러풀한 세부이며, 세부의 인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지형적인 중요성도 정비례하여 팽창해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정작 그때는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여하튼 "어째 좀 이상한 모양을 한 섬이군."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지도를 다 그리고는 거기에다 화룡점정이라도 되듯 집이 있는 위치를 그려 넣더니, 사뭇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띠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나, 이 섬 아아아아아주 좋아해요."라고 소리치고는 그 지도 위에다 쪽 하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그 종이를 내게 건네 준다. 지도 위에는 그녀의 립스틱 색깔이 확연하게 찍혀 있다. 이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편견과 몰이해로 일그러진 섬은, 립스틱으로 멋들어지게 봉인되고 만 것이다. 그녀가 그 정열적인 입맞춤에 대해 내가 어떤식으로 반응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지, 나는 그때 전혀 알 수 없었으므로(지금도 모른다), 좌우지간 "예,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지도를 받아 힐끗 보고는,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 이상 지도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항구에 도착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항구에서 이 집까지는 걸어서 한 십오분쯤 걸려요."라고 발렌티나는 말한다. "경치좋은 바다를 끼고 있는 길이니까 걸으면 기분도 상쾌하겠지만, 짐이 많을 것 같으면 택시를 타는 편이 편리할 거예요. 하지만 섬에는 택시가 한 대밖에 없으니까, 만약 그 택시가 바로 잡히지 않으면 마차를 타고 가면 돼요. 아니면 수상택시를 이용해도 되고." "한적한 곳인 것 같군요." "그야 무우우우우우우울론, 한적한 곳이죠."라고 발렌티나는 강조한다. "아무튼 자동차 같은 것이 거의 다니지 않으니, 일을 하기에는 최상 아니겠어요." 나는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발렌티나의 말을 상당히 매력적으로 받아들였다. 음, 이거야말로 이상적인 그리스 생활이겠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름다운 해변, 자동차가 없는 섬, 조용한 나날(그런데 나중에 정작 그 섬으로 건너가고 나서는 그 시끌벅적함에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과연 자동차는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오토바이가 유난히 많은데다, 그것도 소음기가 달려 있지 않은 엉터리 오토바이인 것이다. 그런 것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타타타타타타타 하고 달린다. 어린아이가 양철 지붕을 막대기로 힘껏 두들기며 장난을 치고 다니는 것 같은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온 섬을 돌아 다니는 것이다. 그 소리는 정직하게 말해, 어떤 의미 에서는 산겐자야 네거리에 서 있는 것보다 더 신경에 거슬렸다. 사방이 조용한 만큼 그 소리만이 유난스레 모오오오오오옵시 거슬리는 것이다. 하지만 발렌티나의 말에는 그런 뉘앙스는 조금도 없었다. 아하, 자동차가 없다구, 그것 잘됐군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누가 오토바이가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으랴!) 발렌티나는 이번에는 다른 종이에 집 주변의 약도를 그려 준다. "슈퍼마켓이라든가, 우체국이라든가, OTE(전화국)라든가, 생활에 필요한 것은 항구에 가면 다 있고, 레스토랑 같은 것도 즐비하니까 생활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지만, 십오분을 걸어야 하는 것이 성가시다면 집 주변에도 가게가 다앙하게 있어요. 여기에 조그만 슈퍼마켓이 있고(아나르기로스 경영), 여기에 생선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주점이 있고(파토라리스 경영), 여기에 카페니온이 있고(판델레스 경영). 생선 가게는 없지만, 카페니온에는 어부들이 늘 모여 있으니까, 직접 교섭하여 신선한 생선을 사면 되구오." "아주 좋은 곳인 것 같군요." 정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게 중요한 바로 그 집이에요." 라고 그녀는 집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다. "이런 식으로 집이 두 채 이어져 있는 집이에요. 옆에는 주인인 타키스 씨의 매제 할리스 씨가 살고 있죠. 할리스씨는 아테네에 집이 있는데, 이 섬의 전화국에 출장 근무중이라서 주말이면 아테네로 돌아가요. 그는 영어를 할 줄 아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편리할 거예요." "그렇겠군요."라고 나는 동의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그 집의 내부 배치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그 집의 외관이나 근처의 지리에 관해서는 숙지하고 있는 데 반해 집의 내부에 관한 그녀의 지식은 어쩐지 애매모호하고 믿을 수가 없다. 그 지도 역시 맥락을 잃어 내게 그다지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화단에 핀 꽃은 문보다도 크고(앞에서도 말했듯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필요 이상 크게 그리는 것이 이런 종족의 특징이다), 그런 형편이니 방과 방 크기의 비율도 결코 정확하지 않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녀가 어째서 집 주변에 관해서는 그다지도 상세하게 알고 있으면서, 집 내부에 관해서는 그다지 상세하지 못한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나로서는 좋은 장소에 좋은 집이 있어 타당한 가격에 빌릴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녀의 설명을 요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은 얘기가 된다. 일층에는 거실과 부엌과 욕실과 조그만 어린애 방이 있다. 이층은 절반이 침실. 그리고 약간의 정원이 있다. 몇 가지 문제는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재가 일을 할 수 있는 독립된 방이 없다는 것(어린애 방에는 안 쓰는 가구가 꽉 들어차 있다). 두 번째로 욕조가 없다는 것 (서머 하우스라서 그런 것은 없어요, 라고 그녀는 말한다). 세 번째로 전화가 없다는 것(전화국에 가면 된다고 발렌티나는 주장한다). 네 번째로, 그런 셈치고는 집세가 결코 싸지 않다는 것(팔만 도라크마를 그들은 요구하고 있다. 팔만 도라크마라면 그리스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다). 그러나 발렌티나와 섬에 관한 얘기를 하는 사이에 나는 점점 거기서 살고 싶은 기분이 농후해졌다. 게다가 이제부터 다시 집을 찾는다는 것도 조금은 성가시다. 그리스에서 집을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인 것이다. 일단은 여기에서 살아보기로 할까, 얘기는 그렇게 돌아간다.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 조용한 섬인 것 같으니까. 나는 그 집으로 정하겠노라고 발렌티나에게 말한다. 그러고는 한 달치 집세를 수표로 선불한다. 그것으로 얘기는 끝. 간단하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그리스에서 우리가 살 집이 정해진 것이다. 헤어지기 전에 발렌티나는 나를 근처에 있는 책방에 데려가 영역된 그리스 현대 작가의 소설을 몇 권 골라 주었다(그런데 하나같이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미안하지만 도중에 읽기를 그만두었다). 책방 앞에서, 그녀는 군밤 파는 아저씨한테서 군밤을 한 봉지 산다. 시월이 되면 아테네 거리는 군밤을 파는 아저씨들의 포장마차로 가득하다. 거리는 군밤이 풍기는 고소한 냄새로 충만해진다. 그녀는 그 아저씨와 얼굴을 아는 사이인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다. 그녀가 웃자 아저씨도 웃는다. "이걸 가지고, 아들애한테 점심을 만들어 줄 거예요."라고 발렌티나가 내게 말한다. 구운밤들 가지고 도대체 어떤 점심을 만드는지 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가 갈 길을 서두르는 것 같아 물을 수가 없었다. 점심 시간이 멀지 않은 것니다. 언뜻 느끼기에 아들애를 굶기는 것은, 그녀에게 가장 괴로운 일인 듯싶다. 우리는 거기서 헤어진다. "시이이이이이인나게 즐기고 오세요." 라고 발렌티나가 말한다. "아아아아아아아주 아름다운 곳이니까."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라고 나는 예를 표한다. 그리고 발렌티나는 원색의 나비처럼 화려한 색상의 치맛자락을 팔락거리며 아테네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후 발렌티나와는 전화로 딱 한 번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만나지는 못 했다. 스페체스섬 스페체스 섬에 도착하다 빠르기로 하자면, 피레에프스에서 스페체스까지는 날개달린 수중익선을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보통 페리보트를 타고 가는 시간의 약 반 정도에 도착하고 만다. 그러나 그 대신에 운임이 비싸, 보통 배의 두 배나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서라는 것이 빠져있다. 유별나게 소리가 요란하고, 갑판에 나가 일광욕을 할 수도 없다. 배 자체의 위용도 형편없다. 옛날에 본 영화 해저 삼 만리 에 나오는 노틸러스 호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전위적인 스타일에, 그것이 성깔있는 수생 동물의 삐죽 튀어나온 다리 같은 날개로 바다 위를 돌주하는 광경에는 어째 음산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적어도 여정이란 것을 즐기기에는 전혀 번지수가 안 맞는 배이다. 이 멋대가리 없는 수중익선이 이영차 스페체스 섬의 항구에 도착했을 때, 선착장 주변의 벽에는 하얀 현수막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집 베란다에도, 호텔 창문에도, 레스토랑 입구에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삼각형의 조그만 깃발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배가 점차 해안으로 다가감에 따라, 현수막에 쓰여 있는 그리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언뜻 보기에는 깃발을 세우고 흥청망청하는 마을의 가을 축제 같은 풍광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수막이 무엇을 뜻하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그리스의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이런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기 뭐라고 쓰여 있어요?"라고 아내가 내게 묻는다. "글쎄-음 그러니까, 파솟쿠, 니 데르타, 네아 키닌... 그 다음은 사람 이름인 것 같은데." "무슨 광고가 아닐까?"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리 그래도 광고를 저렇게 대대적으로 하지는 않겠지." 둘이서 여러 가지로 머리를 짜내어 보았지만, 그럴싸한 설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지역적인 축제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정도에서 얘기는 일단락된다. 그리고 뭐가 어찌 됐든 스페체스 섬에 도착한 것이다. 지금부터 적어도 한 달간은 여기에서 자리를 잡고 생활해야 한다. 섬의 첫인상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움푹 들어간 해안 안쪽으로 아담한 항구가 있고, 그 뒤켠으로 역시 아담한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뒤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산이 있다. 산 위에는 하얀 교회가 있다. 그리스의 섬치고는 예외적으로, 산은 소나무와 삼나무 그리고 올리브 같은 다양한 톤의 초록으로 뒤덮여 있다. 바다는 짙은 감색으로 물들어 있고, 구름은 끝없이 하얗고, 하늘은 선명한 파란색이고, 그리고 넓다. 그 하늘로 한 마리 갈매기가, 비행이란 행위를 자랑하듯 천천히 우아하게 가로지르고 있다. 수중익선의 엔진이 멈추자, 뱃머리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싸아아아아아아 하고 들릴 뿐이다. 발렌티나 식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비유우우우우우우우티플'한 경치이다. 스페체스 섬에서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내렸다. 커다란 가방 꾸러미를 짊어진 외국인 관광객의 모습도 얼핏얼핏 보이는데, 이미 시즌도 끝난 만큼,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승객 대부분이 그리스 인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 인들은 대충 두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1)어딘가에서 이 섬을 찾아온 그리스 인. (2)어딘가에서 돌아온 그리스 인. (1)의 사람들은 대개가 옷차림이 세련되고, 커플 혹은 가족과 함께이다. 틀림없이 주말을 서머 하우스에서 지내기 위해 찾아온 것이리라. 그런 사람들은 모두 손에 무슨 책을 들고 있다. 내 앞 좌석에 앉아 있던 부인은 예절바른 조그만 몸집의 개를 데리고, 그리스 어로 번역된 아서 헤일리의 호텔 을 읽고 있었다. 옆 자리의 미니 스커트를 입은 귀여운 아가씨는 뜨거운 우유를 마시면서(배 안에서 보이가 마실 것을 가져다 준다), 그리스 어 판 ELLE 같은 패션 잡지를 읽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주위로는 중상류층인 도회지 사람들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다. 몇 박을 하기 위한 간단한 가방과 선글라스, 금 목걸이, 베네통 스웨터와 소니 워크맨. 그에 비하면 (2)의 사람들은 모두들 아주 심플하고 원기왕성함 그 자체란 느낌이다. '그리스 인 조르바' 같은 아저씨들이며, 혈색좋은 아줌마들 하며, 모두들 피레에프스나 아테네에서 사들인 듯한 짐을 한가득 껴안고, 우왕좌왕 부두로 내려온다. 그들은 명실상부한 어부이다. 나는 그들을 '조르바계 그리스 인'이라 부른다. 그러고는 검고 치렁치렁한 승복('라소'라고 한다)으로 몸을 감고 수염을 길게 기른, 사뭇 근엄해 보이는 스님의 모습도 보인다. 그 스님 또한, 무얼 그리 사들였는지, 양손에 묵직한 종이 상자를 들고 있다. 아주 무거워 보인다. 마흔 살 정도의 아줌마가 배의 하강구에서, 마중나온(아마 아들이겠지) 조그만 남자애를 꼭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있다. 덕분에 다음 승객이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다. 그러자 승무원이 "아줌마, 거기 길이 막히니까 비켜 주세요!"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배 위에서 조르바계 아저씨가, 부두에 있는 또 한 사람의 조르바계 아저씨를 향하여 깜짝 놀랄 만큼 큰소리로 고함을 쳐대고 있다. "어이 코스타, 잘 있었나!" 호객 행위를 하는 남자도 있다. 호객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인텔리풍의 호객꾼이다. 호리호리한 우디 앨런 같은 인상의 중년 남자는 라코스테의 폴로 셔츠를 입고, 야피풍의 검정테 안경을 끼고 있다. 하지만 셔츠도 안경도 본인도 어째 좀 지쳐 보인다. 그는 여행자임직한 외국인을 차례차례 붙들고는 "당신, 오늘 묵을 장소는 정해져 있소?"라고 영어나 독일말로 묻고 있다. 항을 끼고 있는 광장에는 마차가 전부 여섯 대 줄지어 서있고(발렌티나가 말한 대로 마차가 분명히 존재했다), 마부가 "헬로, 예스, 플리즈."라고 사람들에게 마차를 이용하라고 소리치고 있다. 광장 주변에는 레스토랑이 즐비하고,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거나, 신문을 펼쳐 들고,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개가 있다. 의자 다리 밑에, 다갈색 개가 두 마리 납죽하게 주워 털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스페체스 섬뿐만 아니라, 전 그리스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나는 이것을 '죽은 개 현상'이라 부르는데, 아무튼 그리스에서는 뜨거운 오후만 되면 개들이 이런식으로, 축 늘어져 돌처럼 잠을 자는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털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숨조차 쉬지 않는다(것처럼 보인다). 그리스 사람에게조차도 이런 '누워 있는 개'의 생사를 분간하기가 지난한 일인 듯, 몇몇 그리스 사람이 누워 있는 개의 주위를 둘러싸고, 개가 죽은 것인지 살아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 이마에 주름을 모으고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는 광경을 몇 번인가 목격했다. 막대기나 뭐 그런 것으로 쿡쿡 쑤셔 보는 것이 겁나는지,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빤히 쳐다보면서, 이건 살아 있는 개라는 둥 죽은 개라는 둥, 말을 주고받고 있을 뿐이다. 개도 한가하지만, 인간 쪽도 몹시나 한가하다. 호객꾼 라코스테 아저씨(아마도 어느 펜션의 주인장 나리이겠지)가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당신 오늘 묵을 장소 정해져 있나요?"라고 묻는다. "정해져 있어요."라고 나는 말한다. "어느 호텔이죠?"라고 그가 묻는다. "호텔이 아니고."라고 나는 말한다. "쿠누피차의 다므디로프로스 댁에 머물기로 되어 있습니다." "쿠누피차의 다므디로프로스 집이라고요." 라며 그는 고개를 갸우뚱 한다. "당신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모르는데요."(발렌티난는 그 집의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섬에는 주소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 알게 돼요."라고 그녀는 말했었다) "그럼 누구에게 그 집이 있는 곳을 물어 봐 드리죠."라고 라코스테 아저씨는 말한다. 꽤나 친절한 사람이다. "어이,어이, 이야니! 쿠누피차의 다므디로프로스네 집이 어딘지 알아?" 이야니라고 불린, 사냥모를 쓴 조르바가 다가온다(그리스 남자의 이름은 약 절반이 이야니든지 코스타든지 이오르고스든지 그 중 하나이다). 그러더니 그 역시 고개를 갸우뚱한다. "쿠누피차의 다므디로프로스네 집이라,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딘지."라고 그는 미안하다는 듯 말한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건장한 아줌마가 얘기에 머리를 들이민다. "어디, 어디에 있는 집이라고? 쿠누피차의 다므디로프로스 집이라고?" 하나 그녀도 그 집을 모른다. 그러자 또 그 옆에 있던 조르바가... 이런식으로 얘기의 고리가 점점 부풀어간다. 그러고는 모두들 "쿠누피차의 다므디로프로스 집이라고?" "들어본 적이 없는데." "혹 그집을 말하는게 아닐까." "그 사람한테 물으면 알지 않을까." 등등 각기 한마디씩 거든다. 이 정도의 일로 모두들 꽤나 흥분을 한다. 한가롭다고나 할까, 정말 여유로운 곳에 왔구나 싶은 실감이 든다. 그러나 그렇듯 저마다 흥분하여 의견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쿠누피차의 다므디로프로스 댁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라코스테 아저씨가 내게 말한다. "쿠누피차의 다므디로프로스 댁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쿠누피차로 가서 물어보면 될 겁니다. 거기까지 가면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을 테니." 그러겠노라고 나는 말한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차를 타고 가라고 권한다. 그러고는 마차를 한 대 잡아주기까지 한다. 친절한 사나이다. "이백 도라크마 이상은 내면 안 돼요. 그게 마차의 규정 요금이니까."라고 그가 가르쳐준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마차에 오른다. 하지만 쿠누피차에 도착했을 때, 나는 사백 도라크마를 지불해야만 했다. 짐이 상당히 무거웠으니 특별 요금을 달라고 마부가 요구한 것이다. 라코스테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역정을 낼 수도 있었지만, 하긴 짐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고, 말도 언덕길에서 하아하아 하고 힘겨운 숨을 내뱉었고(연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마부가 집을 찾아주기도 했으니, 그만하면 됐지 뭐라고 생각하고 사백 도라크마를 지불한다. 그래봐야 이백 엔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으니. 우리들이 항구에 맨 처음 도착했을 때 온통 벽면을 메우고 있었던 현수막의 정체가 판명된 것은 그날 저녁 나절의 일이다. 그날은 일요일 이라서, 식료품점은 어디를 막론하고 전부 문을 닫았기에,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기 의해, 항구 근처에 있는 타베구나에 갔다. 메뉴를 펼치고, 오늘의 생선 요리와 콩죽을 고르고, 쓴 맛의 백포도주를 주문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포도주를 대접할 수가 없군요."라고 여자 주인이 정말 미안하다는 듯 말한다. 나는 그말을 듣고, 내심 깜짝 놀랐다. 어이가 없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포도주가 없다니? 그리스의 타베루나에 포도주가 없다고? 이런 경우는 일뵨에서 장어 구이 집에 들어갔더니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간장이 다 떨어져서요."라는 말을 듣는 것이나 진배없다. "포도주가 없나요?"라고 나는 마른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오늘은 저거잖아요?"라고 말하며 그녀는 현수막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래서 내드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불쑥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전후 사정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거라니, 도대체 뭐지? "저거가 뭐죠?"라고 나는 질문한다. "오늘은 전국 통일 지방 선거가 있는 날이잖아요. 그래서 전국 어느 술집에서나 알코올류를 팔아서는 안 되게끔 되어 있어요. 포도주든 맥주든 위스키든 브랜디든 우조든, 전부. 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거든요." 아하, 그러니까 그 현수막들은 모두 선거 운동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지. 그러고 보니 머잖아 선거가 있다고 신문에서 기사를 읽은 일이 생각난다, 하지만 선거가 있다고 해서 술을 마실 수 없다니 그건 어째서일까? 나는 그녀에게 그 점에 대해 물어본다. "네에, 그리스 사람들은 하나같이 선거라고 하면 아아아아아아주 흥분을 잘하거든요. 모두들 열을 올리고 흥분하고 있는데, 거기에 술까지 들어가면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거든요. 그래서 알코올류는 일절 팔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거예요. 한 방울도 팔아서는 안 돼요." 그녀는 가게가 한가한 탓도 있어, 친절하고 자상하게 설명해 준다. "하지만 말이죠."라고 나는 말한다. "우리는 외국인이고, 선거와는 아무 상관 없잖아요. 우리가 술을 마신다고 해서, 경찰도 딱히 불평은 하지 않을텐데요." "음, 뭐 하긴 그렇기도 하지만."이라고 그녀가 말한다. "애써 그리스까지 왔는데 포도주를 마실 수 없다는 건 좀 안됐기도 하군요. 좋아요, 섬의 경찰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죠. 잠깐 기다려 봐요." 그러나 결국 이날 우리는 포도주를 마실 수 없었다. 경찰의 대답은 외국인에게든 화성인에게든, 오늘 술을 파는 행위는 일절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를 가든 경찰이란 예외가 없다. 포도주가 없는 저녁 식사가 얼마나 맛없는가는, 그리스에 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이상이 우리가 스페체스에서 보낸 첫날의 일이다. 포도주가 없는 저녁. 아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비수기의 섬에서 우리가 이 섬으로 찾아온 것은 시월도 중순의 주말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관광 시즌의 마지막 주말이었던 것이다. '이즈음까지는 무리하면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한계가 대충 이 때쯤인 것이다. 바다에 들어가 헤엄을 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가 본 것도, 실제로 이 주말이 마지막이었다. 항구의 바로 곁에 있는 그리 넓지 않은 해변에 가보니, 삼십 명이나 그쯤 되는 관광객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해변에 누워 있고, 아이들이 몇 명 물 안에 들어가, 헤엄도 치고 물놀이도 하고 있었다. 햇살은 따스한데 바람은 과연 싸늘하여, 바다에 들어가고픈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 모두들 해변에 누워 조용히 일광욕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남자들은 손바닥만한 수영 팬티를 입고 있고, 여자들의 70퍼센트는 가슴을 한껏 드러내놓고, 겨울이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햇볕을 흡수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모두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일광욕 정도는 좀더 느긋한 기분으로 하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들(대개가 북유럽에서 그리스의 햇살을 찾아 일부러 온 사람들이라고 추측되다)은 태양에 관해서는 꽤나 진지하다. 마치 태양 전자식 면도기가 일제히 모여 충전을 겸한 신앙 고백 집회를 열고 있는 듯한 분위기이다. 그 옆으로 본토박이 조르바계 그리스 사람들이 삼삼오오 지나간다. 마을로 나 있는 도로가 해변 바로 곁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나가는 길에, 초가을 태양을 향해 젖꼭지를 내밀고 있는 여성의 모습을, 무례할 정도로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간다. 재미있는 것은, 여자가 해변에서 수영복의 위쪽 부분을 풀고는 유방을 발랑-날름이랄까 널름이랄까, 이 행위에 관해서는 나도 그럴 듯한 적당한 형용사나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내놓고 있어도, 관광객 서로는 그런 보습을 힐끗거리고 보거나 하지 않는다. 넌지시 곁눈질을 하는 법도 없다. 그런 짓은 대단히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공통된 인식이 관광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은 논외이다. 그래서 옆에 있는 여자가 유유히 유방을 드러내놓고 있어도, 남자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식의 표정으로 있다. 나는 이것을 개인적으로 '에게 해 현상'이라 부르고 있다. 즉 어떤 얘기인가 하면, 에게 해에 왔으니 (a) 여자는 '에게 해니까, 이런 것쯤 당연한 일이지'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유방을 노출하고, (b) 남자 쪽도 '에게 해에 왔으니 그런 것쯤 당연한 일이지'란 식으로 무심하게 대처하면서, 보면서도 안 보는 체하는 것이다. 물론 어쩌다 가끔은 곁눈질로 힐끗 그 광경을 포착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그들은, 그런 것쯤이야 흔히 보아 왔으니까라는 식의 정신적 여유를 부린다. 그것이 기본적인 룰이다. 여유가 중요한 것이다. 게다가 실제적인 문제로서, 오랜 기간 그리스에 있으면, 유방 따위 정말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것이 되고 마는데다, 그렇게 익숙해지고 나면 그게 신기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냥 그런 것이 된다. 딱히 자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들뿐만 아니라, 섬의 후미진 쪽 인기척이 드문 비치에 가면, 수영 팬티를 벗어 던지고 하반신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하고 있는 남자들도 쉬 볼 수 있다. 당당히 알몸으로 있는 여자도 있다. 나도 한 번 그래 본 적이 있는데,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더군요. 이 세상에는 '음부'라는 말이 있는데,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나오면 그것은 더 이상 '음부'가 아니지 않은가, 그냥 몸의 일부가 아닌가 하고 제법 실감나게 수긍을 하기도 한다. 그 일은 뭐 그렇고 '에게 해의 법칙'에 따라, 그리스의 섬 해변가에는 도처에 유방을 드러내 놓고 있는 여자들이 바글바글하다. 그리고 남자들은 그 곁에서 짐짓 모르는 체 책을 읽거나 한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법칙이든 불문율이든 조르바계 그리스 사람들은 전혀 알 바가 아니다. 그들이 "그리스는 아주 좋은 곳이죠. 비치에서 유방을 드러내놓고 계셔도 아무 상관 않는다고요."라고 권유를 한 것도 아니다. 또는 그들의 아내나 딸이 일상적으로 유방을 드러내놓고 생활하는것도 아니다 -아니, 그리스의 시골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고, 그런 면에서는 매우 보수적이다. 미국 사람들이나 북유럽 사람들이 왕창 몰려와, 말하자면 아무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알몸이 되기도 하고 유방을 드러내놓기도 하는 것일 뿐이다. '에게 해의 법칙'이라니, 그런 것은 조르바들이 아는 바 없는 일이다. 젖가슴을 드러내놓는 것이 마음대로라면, 드러나 있는 젖가슴을 보는 것도 마음대로다. 그런 사연으로 조르바들은 지나가면서,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젖가슴을 제법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간다. 그러나 -그 시선에 성적인 색채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별로 생각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순수한 호기심(과학적인 호기심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에서 유발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딱히 조르바들을 변호할 생각은 없지만, 도처에 알알이 드러나 있는 젖가슴을 쳐다보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에는, 그들의 호기심이 너무도 강렬한 것이다. 우리들이 길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한군데 꼬여 있으면 목을 쭉 뻗어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는것과, 원리적으로는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들도 자신의 젖가슴 위로 쏟아지는 거리낌없는 시선을 느끼고 얼굴을 들어도, 상대방이 조르바이면, "어휴 참 내 또 조르바야, 할 수 없지." 하는 선에서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지중해주의적인 광경을 목격한 것은 겨우 한 순간의 일일 뿐, 그 주말(시즌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지중해 식의 좋은 날씨였다)이 지나고, 시월도 후반에 들어서자 해변에는 인적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배에서 내리는 관광객의 모습도 한층 뜸해졌다. 타베루나의 테이블도 휑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섬은 본격적인 비수기로 돌입하였다. 요컨대 모두가 돌아가는 시기와 엇갈려 우리가 온 것이다. 유별스럽게도. 섬의 비수기는 해변에 즐비한 야외 주점의 철수로 시작된다.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에서 눈 녹는 소리와 함께 봄이 시작되는 것처럼, 섬의 가을은 야외 주점의 의자를 접는 타닥타닥하는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철수는 우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비치에서 시작되어, 1945년 베를린 포위전 째와 마찬가지로, 그 전선이 차츰차츰 중심부로 근접해간다. 그리하여, 어느 날, 모든 것이 완료되고 종식을 고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니코스 타베루나'라든지, '돌핀 타베루나'라든지 하는 간판과, 창문에 판자를 대어 못을 친 해변의 작은 집이나, 갈대를 엮어 만든 차양 지붕만이 남는다. 그러고는 풀이 죽은 개가 -그러나 그리스의 섬들 어디에 풀이 죽지 않은 개가 있단 말인가? - 여름의 기억에 매달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상상 속의 테이블 주변을 어슬렁 어슬렁 배회하며, 코를 벌름거리고 음식물 찌꺼기의 냄새를 허망하게 좇고 있을 뿐이다. 기름기가 자르르한 고깃살과 생선 대가리를 던져주던 저 친절하고 후덕한 관광객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하고. 모두들 휴가가 끝나 집으로 돌아갔다, 얘들아라고 나는 가르쳐 준다. 지금은 모두들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나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하지만 물론 개는 그런 것을 모른다. 알 턱이 없다. 개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렁저렁 좋은 계절은 다 끝난 모양이로구나, 하는 그런 정도이다. 이렇게 야외 주점이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여름 사이에 섬 안의 여러 해변으로 손님을 실어 나르던 털털이 버스(섬에 한 대밖에 없다)도, 운행을 중지한다. 한창 손님이 많을 때는 열 대나 영업을 하고 있던 마차도, 시월 말에는 두 대로 줄어들었다. 버스는 가을과 겨울 사이 섬에 두어 봐야 아무런 쓸모가 없으므로, 페리에 태워 본토로 운반한다. 비수기 동안에는 본토에서 열심히 통근 버스로 일하다가, 봄이 돌아오면 다시 섬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이 버스가 페리에 실려 본토로 운반되는 순간을 지켜보았는데, 그것은 왠지 서글픈 광경이었다. 가끔씩 마을 어귀를 산책할 때, 농가의 뜰 앞에 무료하게 서 있는 마차를 목격하였다. 그것을 끌고 다녔을 성싶은 말은, 가까운 나무에 줄로 묶인 채, 온화한 눈길로 한가로이 마른풀을 뜯고 있었다. 아휴 이제서야 당분간 쉴 수 있게 되었군, 이란 풍경이었다. 마부는 - 내게서 사백 도라크마를 탈취한 사나이 역시 - 본래의 직업인 농부로 돌아가, 산등성이 밭에서 올리브나 토마토나 가지를 기르고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던 세련된 가게(물론 비교적 세련된, 이란 의미다)가, 서서히 상황을 돌아보며 손님이 남아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서,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한다. 바와 그런대로 호사스런 레스토랑과 패스트 푸드점과 디스코테크(존 트래볼타의 살아 있는 영이 떠돌아 다니는 듯한)가, 그런 식으로 하나 둘 모습을 감춘다. 이 무렵이 되면, 사방에 "자 끝났다 끝났어, 이제 느긋하게 지내야지."란 분위기가 충만해지기 시작한다. 하기야 시즌 동안에는 주말도 낮잠도 없이, 죽도록 일만 했다. 별다른 미련도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여름이면 열심히 일을 하고, 겨울에는 한껏 노는 것이다. 호텔도 같은식으로 문을 닫는다. 한때는 열 채나 문을 열고 영업을 하던 호텔 군이, 마치 바닷물이 빠져 나가듯 차례차례 황망하게 문을 닫고, 십일월의 소리가 들릴 무렵에는 오로지 나그마한 호텔 한 군데만 문을 열고 있을뿐, 그것도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있다는 식이다. 바다를 건너오는 눅눅한 북풍이 전깃줄을 흔들며, 불길하고 어두운 구름을 멀리 크레타 방향으로 날라놓는다. 내 마음속으로 어두운 의혹이 끓어오르는 것은 이러한 때이다. 나는 혹시나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은 아닐까, 나는 어딘가 다른 장소로 갔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뭐, 그런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것은 십일월에 들어서 일이고, 시월 후반까지는 아직도 조금 생활에 여유가 있다. 시즌중에 충만해 있던 활기의 여운이랄까, 흔적이랄까, 그런 유의 분위기를 그나마 아직은 즐길 수 있다. 가게나 레스토랑도 필요한 만큼은 아직 문을 열어 놓고 있고, 바람이 없는 따스한 날이면, 비치에서 햇볕을 쪼일 수도 있다. 관광객도 거의 없고, 그야말로 한가롭다. 만약 그리스의 섬에서 딱 한 달만 생활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나로서는 구월 중순부터 시월 중순까지의 한 달을 권하고 싶다. 그보다 앞서면 하라주쿠의 다케시타 거리처럼 북적거리고, 그보다 늦어지면 관광적 견지에서 보아, 그리스를 방문하는 의미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워진다. 겨울철에 그런 곳을 일부러 찾는 사람이 있다면 퍽 유별난 사람이든지, 아니면 비수기 요금을 노리고 우는(싸기는 진짜 싸다) 소설가 정도일 것이다. 그리스의 대부분의 섬은 '낮 얼굴'의 카트린 드뇌브처럼 전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한 가지는 부활절부터 시월 중순에 걸친 시즌중에, 외국인 관광객을 향한 외출용 얼굴이고, 또 한 가지는 그 나머지 기간, 즉 비수기에 자신들만의 생활을 위한 진짜 얼굴이다. 그 두가지 얼굴은 양극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극단적으로 다르다. 너무 너무 달라서, 어느 쪽이든 한쪽만 본 사람이 나머지 한쪽을 상상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들 정도이다. 우선 첫째로 기후가 다르다. 존 바우먼이란 사람이 쓴 에게 해의 섬들 이란 가이드 북에서, 그 기후에 대한 기술을 인용한다. 나는 다음 사항을 독자에게 강조하고 싶다. 1)에게 해의 섬은 열대의 섬이 아니다. 2)왕왕 세찬 바람이 분다, 는 두 가지 점이다. 일년 중 육개월에서 팔개월 정도는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이 항상 여름만 있는 낙원과 같은 곳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품기가 쉽다. 하지만 별표(*연간 기온표)를 유념하여 보면, 섬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말만큼은 확실하게 할 수 있다. 시월에서 사월에 걸쳐 사람들은 에게 해에서는 해수욕을 하지 않고, 십일월에서 삼월에 걸쳐 섬에서 휴가를 지내고자 생각하는 사람은 보통 없다. 간결하고 요령 있는 기술이라, 섬의 기후에 관해 이 이상 덧붙여야 할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좀 집요한 듯한데, 실제로 비수기에 그리스의 섬을 찾은 일이 없는 사람은, 이 비수기의 애절함과 써늘함을 필경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납득과 이해는 별개인 것이다. 나만 해도 그리스 섬의 기후가 여름과 가을 겨울이 다르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평균 기온도 빠짐없이 조사했다. 스웨터도 코트도 물론 준비해 왔다. 그 나름의 각오는 하고 왔다. 그러나 가을의 해변에서 북풍을 처음 맞았을 때, 그리고 시월 이십오일에 달달달달 떨면서 난로에 처음으로 불을 지폈을 때, 나는 역시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이 참, 이게 뭐야, 여기는 그리스가 아니란 말이야?"라고. 나는 지금까지 늘 여름에 그리스에 왔었다. 그리고 여름의 그리스밖에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겨울의 그리스 따위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낙차를 현실적으로 체험하였을 때, 우리는 실제 이상으로 격렬하게 그 싸늘함을 뼛속 깊이 느끼는 것이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싸늘하게 식히고 만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이 우리라는 존재를 흔들흔들 동요케 한다. 해변에 높이 쌓여 있는 윈드 서핑용 보드는 거대한 해파리의 뼈를 연상케 한다. 인기척 하나 없는 언덕 위에서는 '블루베리 힐 승마 클럽' 이란 간판이 바람에 덜컹덜컹 흔들리고, 지금은 이미 아무 쓸모도 없는 버스 정거장 팻말이 가다가 쓰러진 패잔병처럼 길가에 나동그라져 있고, 초콜릿 포장지가 팔랑팔랑 메마른 소리를 내며 바람에 날려 간다. 인구도 팍 줄어들고 만다. 원래 본토박이 인구는 대충 삼천 명 정도인데, 여름이 오면 별장족과 관광객들이 밀려와, 인구가 약 두 배로 늘어난다. 그리하여 여름이 다 가고 시즌이 끝나면, 섬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한산해진다. 산책을 하다가도, 얼핏 보면 인기척조차 없는 집이 꽤 눈에 띈다. 해변에는 고스트 타운이 출현하기까지 한다. 나는 아침이면 보통 해안선을 따라 조깅을 하는데, 어쩌다 마을 밖으로 나가게 되면(금세 나가버리고 만다), 그 다음은 전혀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아무리 달려도, 소나무 숲과 저도 모르게 숨이 삼켜지는 아름다운 비치 - 그래봐야 매일 보다보면 얼마 안 있어 그저 그런 느낌밖에 들지 않지만 - 가 하염없이 이어질 뿐이다. 가끔 소나무 숲에서 사냥꾼을 만나기도 한다. 사냥꾼이라지만 딱히 전문가는 아니고, 그냥 보통 아저씨가 어깨에다 총을 둘러메고 사냥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귀를 축 늘어뜨린 개가 그 옆을 졸졸 따라다닌다. 그런 사람들은 내 얼굴을 마주하고는 우선 의아스럽다는 듯 입을 딱 벌리고 (뭐 하려고 동양인이 이런 계절에 이른 새벽부터 산속을 달리고 있을까?), 그러고는 정신을 가다듬고 우렁찬 목소리로 "카리메라!(안녕하시오)"라고 인사를 한다. 이만큼 기운차게 인사하는 국민은, 온 세계를 다 뒤져도 별로 없으리라. 힘차게 인사를 함에 있어서는 그리스가 최고다. 사냥꾼 이외에는 전기톱으로 소나무를 자르는 사람들을 드문드문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도 전문가는 아니다. 마을의 사람들이 겨울에 대비하여 땔나무를 조달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렇게 나무를 베는 것은 아마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제멋대로 산의 나무를 베어 간다면, 산은 금방 민둥산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들 산에서 나무를 베어 간다. 경 트럭에 전동톱을 실어와서는, 나무를 잘라 간다. 여기저기에서 규우우우우우우우웅하는 저 전동톱 특유의 신음소리가 메아리친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눈 아래로 자그마한 동네가 보인다. 푸른 소나무 숲과 파란 바다 사이로, 하얀 벽의 아담한 집이 몇 채 어깨동무를 하듯 나란히 서 있다. 하얀 모래톱이 있고, 간단한 선착장이 있고, 타베루나가 있고, 그 앞쪽으로는 둥그런 지붕의 교회도 보인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러나 그것은 버려진 동네이다. 집들은 서머 하우스이고, 타베루나는 바닷가에 헤엄치러 오는 관광객용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시즌 종료와 함께 문을 닫고 만다. 서머 하우스의 참문에는 튼튼한 쇠살문이 처져있다. 타베루나에는 간판조차 없다. 필시 경영자가 도난을 당하지 않도록 집으로 가지고 갔을 것이다. 입구께에 다리가 부러진 의자가 하나 버려져 있다. 에게 해처럼 파란색으로 페인트를 칠한 의자이다.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흉물스럽다. 그 버려진 의자만이, 희미하게 여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여름용 동네(리조트 콜로니)가 마을 주변에 마치 소혹성처럼 점점이 흩어져 있는데, 가을이 찾아옴과 동시에 그런 동네는 일제히 고스트 타운으로 변하고 만다. 그리고 다시 섬의 인구는 마을에 집중된다. 섬 반대쪽에 딱 한 군데 사냥꾼이 사는 조그만 동네가 있고, 산속에도 양치기가 몇 사람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수는 아주 미미하다. 마을 중심으로부터 어떤 방향으로 걸어나가도 십오분쯤 지나면, 사람이 사는 집은 뚝 없어지고 만다. 이 사는 집은 뚝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소나무 숲이나 황무지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가시투성이 키 작은 나무가 자라고 있는 바위자락에는 양이 방목되어 있다. 이런데 뭐 먹을 게 있으랴 싶어 걱정이 될 정도로 황폐한 땅이다. 그런데도 양들은 쇠방울 소리를 짤랑짤랑 울리며, 허여끄레한 보잘것없는 식물을 찾아, 이 바위 자락에서 저 바위 자락으로 차근차근 이동을 한다. 양떼 중에는 아주 멋진 뿔이 돋은 시커먼 얼굴의 수컷이 있어, 위협적인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본다. 그가 양떼를 통솔하며 지키는 것이다. 내가 걸어서 가까이 가면, 그는 얼굴을 번쩍 들고, 뿔을 두세 번 흔들고는, 내게로 돌진할 태세를 취한다. 이 이상 접근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어, 알았지라고 엄포라도 놓듯. 암컷들은 풀뜯기를 그만두고, 수컷 뒤로 몸을 숨겨버린다. 군데군데 다 쓰러져 가는 초라한 집이 보인다. 아마 양치기의 집일테지만, 생활의 냄새 같은 것은 전혀 맡을 수가 없다. 다시 조금 걸어가니 온통 바위투성이인 벌판 꼭대기에 또 하나 교회가 있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교회이다. 대체 누가 이렇게 황폐한 산꼭대기에 있는 교회에 일부러 찾아오는 것일까 하고 나는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 산을 넘어 좀더 앞으로 가면 규모가 큰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은 사방이 높고 하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삼나무 가로수 사이로 난 긴 언덕길을 올라가면, 아름다운 모자이크 그림이 그려진 문에 다다른다. 묵직하고 검은 . 문이다. 문은 닫혀 있다. 모자이크 그림에는 몇몇 성인의 모습이 비잔틴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문 주위로는 선명한 색상의 부겐빌리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소음 하나 없이 잠잠하다. 시험삼아 그 검은 나무 문을 똑똑 두드려 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런데 내가 그만 포기하고 돌아서려 하는데, 얼굴을 숄 같은 것으로 가린 수녀가 나와,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뭐라뭐라 말하더니,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그러고는 햇님처럼 평화스런 미소를 살보시 머금더니, 이내 문을 닫는다. 필경 견학은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할 수 없이 나는 문 옆에 있는 돌 위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본다. 잠잠한 정적 속에서도, 세계가 움직이는 희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들릴 듯 말 듯 미미한 소리들의 집적이다. 우선 예의 양들의 목에서 딸랑거리는 쇠방울 소리. 그리고 소 울음 소리 - 아무래도 수도원 안에서 기르는 소인 것 같다. 멀리서 모페드의 클랙슨 소리도 들린다. 어딘가 교회에서 종을 울리고 있다. 동방의 교회는 때때로 납득하기 어려운 시간에 아주 묘한 울림으로 종을 울린다. 개가 뭔가를 보고 컹컹 짖고 있다. 누군가가 엽총을 쏘았다. 한시 반 페리가 입항 기적을 울린다. 그리하여 나는 이국에 있음을 새삼 깨닫고, 자신이 이질적인 사람들이 영위하는 생활에 에워싸여 있음을 안다. 나는 외국을 방문하면, 종종 소리를 통해 가장 첨예하게 이국성을 인식하곤 한다. 시각이나 미각 또는 후각이나 피부 감각이 채 감지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소리를 통해서는 알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어서이다. 낯선 곳에서 자신의 몸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귀 안으로 주위의 소리를 빨아들인다. 그러면 그들 - 어쩌면 내 자신의 - 이국성이 부드러운 거품처럼 둥실 떠오르는 것이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뾰족한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페리의 모습이 보인다. 영롱한 가을 햇살을 받아 기와 지붕이 반짝반짝 빛나고, 폐쇄된 포시도니언 호텔의 눈에 뜨이게 높은 둥그런 지붕 위에 새하얀 비둘기가 두 마리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머물러 있다. 아주 평온한 오후이다. 오늘따라 바람 한 점 없다.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월동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무얼 어떻게 해야 겨울을 넘길 수 있는지 나는(이국인인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나 들러 맥주라도 마실까 했으나, 결국 아무데도 열려 있지 않았다. 올드 하버 눈을 뜨니, 창밖으로 정말 오래간만에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밤사이에 내린 듯한 비의 흔적이 이웃집 지붕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하늘에는, 마치 여름이 다시 찾아온 듯 하얀 구름이 뚜렷한 선을 그리며 떠 있고, 마당에 핀 수국꽃 위로는 꿀벌이 나른한 날개 소리를 내며 날고 있다. 담 너머로는 근처에 사는 아줌마들이 아침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어딘가에서 닭이 울고, 어딘가에서 개가 짖고 있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이렇게 따스한 태양을 며칠 만에 보는 것인지. 더구나 오늘은 토요일이다. 하기야 토요일이니 일요일이니 해봐야, 우리에게는 아무 관계없는 일이다. 일본에서도 별 관계가 없었는데, 하물며 그리스의 섬에 있으니, 극단적으로 관계없는 일이다. 화요일이 목요일이건, 목요일이 월요일이건, 아무 요일이건 상관없는 것이다. 주말이 우리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면, 그래 봐야 주말에는 은행이 문을 닫기 때문에 여행자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정도의 불편함에 불과하다. 그런 차에 무언가 내 주의력의 벽을 발로 찬다. 무얼까? 여행자 수표! "큰일났군."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오늘은 토요일이야. 그렇다면 월요일까지 돈을 바꿀 수 없다는 얘긴데." 우리는 정원 테이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접시를 치운 후, 지갑 속에 남아 있는 돈을 세어 본다. 내가 가진 돈이 1천 5백 도라크마, 그녀가 2천 5백 도라크마.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다 뒤집어 동전을 모아 보아도, 합계 일본 엔으로 하면 4백 엔 정도밖에 안 된다. 미국 달러니 독일 마르크니 이탈리아 리라니 하는 것들을 다 모으면 꽤 많은 금액이 되지만, 이 섬의 가게에서는 그런 돈은 받아주지도 않거니와, 신용 카드도 여기서는 그냥 플라스틱 지폐에 지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돈으로 어떻게든 토요일 일요일, 이틀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이 상황이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3천 도라크마가 있으면 이틀치 양식을 듬뿍 사들일 수도 있고, 거기에다 포도주 두병과 맥주 반 다스까지 사도 거스름돈이 남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훨씬 더 모진 상황을 몇 번이나 극복해 왔다. 나만해도 젊은 시절에는 거의 한푼도 없이 여행을 했었다. 그런 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내는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라고 그녀는 엄격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녀가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렇다, 원칙인 것이다. "알아."라고 나는 말한다. "뭘 어떻게 안다는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원칙 아니냐고? 즉..." "내가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이라고 그녀는 나의 성급한 발언을 물리치듯 말한다. "그런 당신의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에요. 금요일에는 반드시 돈을 바꾸어 둔다는 원칙을 세웠잖아요? 그런 걸 당신은 금방 잊어버리잖아요. 어째서 보통 남자들처럼, 그렇게 사소한 일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거예요?" 나는 아내의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구태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보통 어른 남자들이 모두 그렇게 꼼꼼하고 사려 깊은 인생을 보내고 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고, 게다가 주말이 올 때마다 깜빡하고 마는 책임의 절반(아니면 30%, 아니 백보 양보하여 20%)은 그녀에게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점점 길어지므로, 나는 잠자코 있는다. 내가 결혼 생활에서 배운 인생의 비밀은 이런 것이다. 아직 모르고 계신 분은 잘 기억해 두십시오. 여성은 화를 내고 싶은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고 싶어서 화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내고 싶어하는 때에 참지 않고 화를 낼 수 있도록 해주지 않으면, 미래에 더 큰 일이 생긴다.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 - 뭐 다른 사람들의 결혼 생활에도 많든 적든 간에 그런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 언쟁의 패턴은 대충 정해져 있다. 다른 스타일로 시작되었다 해도, 끝은 언제나 비슷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 싸움은 시리즈 영화하고 닮은 구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실베스터 스탤런의 록키 하고 마찬가지다. 설정도 다르고, 스토리도 다르고, 장소도 상대도 다르다. 싸우는 동기도 전술도 다르다. 그러나 라스트 신은 어제나 똑같다. 그리고 배후로는 언제나 같은 음악이 울려퍼진다. 우리의 언쟁 패턴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나는 일상 생활에 꼼꼼하지 못하여 칠칠찮고 적당주의 노선을 걷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성격으로 불편한 일이 있다 해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한다. 어떻게 되지 않는다면, 그 나름으로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 아내는 일상 생활에 있어 매우 예민한 편이라, 조금만 뭐가 흐트러져도 몹시 신경을 쓴다. 앞일을 일일이 생각하고, 무슨 가능성에 대해서든지 미리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3). (1)과 (2)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서, 그 중간에 종종 정신적인 무인지대 같은 것이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이 토요일 아침 환전을 둘러싼 우리의 언쟁도(정확하게는 언쟁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패턴을 담습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인생관, 가치관이 명백하게 서로 다른 것이다. 그 사이에는 이미 몇천대의 불도저를 동원하여도 메울 수 없는 숙명적이 생이 존재한다. 내 뒤로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합창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어, '인생이란 어차피 그런 것,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라고 노래하고, 아내 뒤에 있는 코러스는 '아니죠, 숙명에 맞서는 것이 인간 본연의 자세'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늘 그렇지만, 내 쪽의 코러스가 그녀의 코러스에 비해 얼마간 목소리가 작고, 열의도 부족하다. 하지만 점심 식사를 하기도 전에 아내의 기분은 깨끗하게 호전되어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그녀는 그의 오랫동안 얼굴을 찡그리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점심으로 토마토 소스를 뿌린 스파게티와 콜리플라워 샐러드를 먹고, 올드 하버까지 산책하러 나간다. 집에서 올드 하버까지는 걸어서 약 삼십분 정도 걸린다. 화창한 오후에 산책하기에는 마침 알맞은 거리이다. 마을 거리를 통과하고, 산을 하나 넘으면, 조용한 해변이 펼쳐진다. 시간의 흐름을 좇아가지 못한 채 끄덕끄덕 졸고 있는 듯한 후미진 해안이다. 이곳이 스페체스 섬의 올드 하버, 이름 그대로 옛날에는 이쪽이 섬의 중심 항으로 번성했었는데, 기선 시대가 도래하고부터는 수심의 깊이와 항의 크기가 모자라는 탓에, 그 지위를 새로운 항에 넘겨주고, 지금은 요트의 정박지로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올드 하버는 꽤 멋진 장소이다. 나는 여기로 산책하러 오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인기척이 없는 자그마한 항에 오십 척이나 육십 척쯤 크고 작은 요트가 정박해 있고, 그 돛대가 덜컹덜컹, 덜컹덜컹 마른 소리를 내며, 점술가의 막대기처럼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다. 햇볕에 탄 승무원이, 그 주변 가게에서 사들인 식료품 꾸러미를 배에 싣고 있다. 선창가 양지바른 곳에서는 검정 고양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쌔근쌔근 잠들어 있다. 요트 꼬리에는 각 배의 국적을 나타내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물론 파란 바탕에 하얀 십자를 그린 그리스 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이탈리아 국기도 보인다. 영국, 독일, 스위스. 항을 끼 완만하게 구부러져 있는 도로에는 레스토랑과 카페가 죽 늘어서 있다. 대부분 느낌이 고상하기는 한데, 여름이 끝나면 문을 꼭꼭 닫아버리고 만다. 요트를 타러 오는 여행객들을 상대하는 레스토랑이라, 여름이 끝남과 통시에 전부 철수하는 것이다. 저 앞 곶의 돌출부에 새하얀 등대가 보인다. 등대 바로 아래에는 좌초한 그대로 폐기된 듯한 화물선이 불안정한 꼴로 떠 있다. 대담할 정도로 듬뿍 초록색을 섞은 듯 선명한 파란 수면으로, 짙은 감색 화물선의 선체와, 하얀 구름이 비쳐 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식료품 보급을 끝낸 요트가 돛을 올리고 항을 떠나고 나자, 사방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 쭉 앞으로 걸어나가면, 등대가 있는 곶이 육지와 이어지는 부분에 조선소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소라고 해야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두세 명 직공이 손으로 콩콩 망치를 두드려가며 나무로 배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대개는 이 섬의 어부가 잠시 바다로 나가 어망을 치는 데 사용하는 조그만 보트인데, 그 중에는 십 미터가 족히 넘는 대형 배도 있고, 놀잇배처럼 지붕이 달린 이십 인승 관광용 보트 같은 것도 있다. 그들이 배를 만들어 나가는 순서를 바라보고 있어도 꽤 재미있다. 곁에서 자세히 관찰해 보면, 조그만 배를 만들 때나 큰 배를 만들 때나 순서는 매한가지다. 간단히 말하자면 색종이를 집어 종이 학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큰 종이 학이든 작은 종이 학이든, 접는 순서는 똑 같으니 말이다. 먼저 배의 척추라 할 수 있는 기지부 기둥을 튼튼한 나무로 만들고 거기에다 갈비뼈를 죽 늘어 세우고, 안팎 양쪽에서 판자를 붙여 갈비뼈를 고정시켜 나간다. 그리고 둘레에는 두툼한 테두리를 붙인다. 원리는 아주 단순한데, 단순한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어, 보고 있으면 아하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아, 그러니까 이게 본래의 배의 모습이로구나 하고 생각한다. 건조중인 배에는 모두 독특한 오렌지색이 칠해져 있고, 그 뱃머리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척추와 갈비뼈를 빗대는 과정에서 조선대 위에 올려져 있는 배는, 신기하게도 온화한 인상을 준다. 우리는 간신히 영업중인 카페를 발견하여, 옥외 의자에 앉아 맥주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그리하여 햇빛을 쪼이며, 흐르는 구름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길을 걸어가는 개를 골려 주기도 한다. 한동안 그리스에서 생활하고 있자니, 따분해 하지 않고 장시간 멍하게 무언가를 응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런 일 외에 도무지 아무 할 일이 없으므로. "이 부근에는 조선소가 많네."라고 아내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말한다. "이 섬에서는 목재를 쉬 구할 수 있어서, 옛날부터 조선업이 발달했지. 특히 17, 8세기에는 덕분에 그리스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 섬이었어."라고 나는 설명한다. 물론 이것은 가이드 북에서 주워섬긴 지식이다. 나는 어딘가로 가기 전에는 그 지방에 대한 가이드 북을 열심히 읽는다. "그 무렵에는 이 올드 하버 주변에 커다란 조선소가 즐비하게 늘어서서, 대형 배를 척척 만들어 냈었다더군." "얼마나 큰 배를 만들었을까?" "그야 상선대를 조직하여 미국과 그리스를 왕복했다고 하니까, 제법 크지 않았을까. 이 섬에는 그런 상선대의 주인이 몇 명이나 살고 있어, 그들은 서로 부와 번영을 겨루었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오나시스나 니오르코스 같은 식이겠지. 당시 이 섬은 교역의 중계 지점으로 위치상으로도 상당히 중요했고, 좋은 항도 있었고, 대항할 적도 없는 그런 곳이었나봐. 당시에는 피레에프스 따위 바닷가의 빈촌에 지나지 않았다던데." 등대 위로 돌고래 같은 모양의 구름이 지나가고 있다. 버려진 화물선은 거기에 꼼짝도 않고 웅크리고서, 온 세계의 시간과 소리를 빨아들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영락하고 만 거지?" "얘기가 길어지는데."라고 나는 일단 뜸을 들이지만, 물론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여기에서는 시간 따위는 썩어 문드러질 만큼 철철 넘쳐흐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지중해에는, 해적들이 우글우글하지. 이틀이 멀다 하고 전쟁은 일어나지. 배의 자유로운 항해를 저해하는 요인들이 많았던 거야. 예를 들어 나폴레옹 시대에는 영국이 해상을 봉쇄하기도 했고, 그해서 그에 대항하기 위해, 상선대는 배에 무기를 갖추고 스스로를 지키게 되었지. 요컨데 개인 소유의 해군 같은 거야. 그리고 그 당시 스페체스 섬의 성선대는 과감하게 봉쇄망을 뚫는 것으로 용맹을 떨치기도 했지. 그리고 또 1821년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그리스의 독립 전쟁이 발효하자, 이 함대는 대 터키 해상전에서 상당히 큰 역할을 맡게 된거야. 바로 저기 저 바다 한가운데에서." 나는 등대가 있는 곶의 돌출부 끝을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터키 함대와 섬의 함대가 일대 격전을 벌였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나프프리온의 터키 군 수비대가 그리스 군에 포위되어, 터키 군은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그쪽으로 향하려 하였지. 그러나 코린트에서 육로로 나프프리온으로 향한 군대는 아르고스 근방으로 진로를 차단당하고 말았어." "아르고스라면, 이전에 가본 적이 있는 더럽고 음침한 도시 말이죠." "아무튼 그 부근에서 터키 군은 전쟁에 패하여,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할 수 없게 되었지. 사태가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해로밖에 없거든. 그래서 터키 인들은 80척 전투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아르고스 만으로 진출시겼어. 섬의 함대는 그것을 저지하려고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었지. 그리고 1822년 9월 어느 아침에, 두 함대는 정면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어. 바로 저 해협에서 말이야." 나는 그 즈음에서 맥주를 다시 주문하고, 맥주가 나올 때까지, 좌초한 화물선을 한동안 바라본다. "그래서 어느 쪽이 이겼는데?" "실은, 거의 전투랄 만한 전투가 없었어."라고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한다. "터키 함대가 저기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내자, 혈기 충만한 섬의 함대가 와 하고 일제히 공격을 가했고, 터키 군은 놀라 도망치고 말았거든. 터키 전투함이 한 척 침몰한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거야. 사실 그리스 군의 사령관은 터키 함대를 전부 유인 한 후 단숨에 전멸시킬 작정이었는데, 그들의 손에 섬에 남겨 두고 온 가족들을 학살당한 선원들이, 시간이 되기를 채 기다리지 못하고 습격을 감행한 거지. 터키 군이 도중에 들른 인근 섬에서, 본때를 보여준다고 여자와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죄 살해했으니 그럴 만하지 않겠어." "하지만 어째서 터키 군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갔을까? 아주 큰 대 함대였을텐데?" "숫자상으로야 그렇지만, 애당초 터키라는 나라는 육군이 중심인 나라라서 해전에는 약하거든. 그에 비해, 그리스 인들은 바다에는 내노라 할만큼 강하니까. 더구나 이 섬의 수부들은 당시 용감무쌍하기로 유명했었거든. 예를 들면 당시의 전법에 '화공선'이라는 게 있는데, 어떤 것인가 하면, 재빨리 키를 돌릴 수 있는 속도 빠른 배에다 화약을 잔뜩 실어서는 그것을 적함 옆에다 바싹 갖다 대고 고정시켜. 그러고는 불을 붙인 다음에 바다로 풍덩 빠져 달아나는 거야. 배는 적함과 함께 고스란히 대폭발. 그것이 이 섬의 해군들이 가장 잘 써먹는 십팔번 전술이었지. 그렇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을, 스페체스 섬의 수부들은 누워 떡먹듯이 한 거야. 터키 사람들도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 거지. 여하튼 이 스페체스 바다에서의 승리는 온 그리스 인들에게 용기를 복돋워 주었고, 얼마 안 있어 그리스는 독립을 쟁취했어. 그 무렵까지를 이 섬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서 다시 제일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는데."라고 아내는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이렇게까지 영락한 것이지?" "섬이 급격하게 영락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지금 말한 것처럼, 섬 사람들이 지나치게 독립 전쟁에 열심이었다는 거야. 그들은 그때껏 축적한 자본이며 부를 거의 전부 전쟁에 쏟아부었고, 그 타격으로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었던 거지." "그렇다면 좀 너무한 것 아니예요? 그럼 정의고 뭐고 할 것도 없잖아?" "그런 게 세상이고, 그런 게 역사야."라고 나는 말한다. "대단한 세상이고 대단한 역사로군요."라고 그녀는 분개하며 말한다. 그녀의 취향에 맞는 얘기란 '소공녀' 같은 유인 것이다. "하지만 뭐 그게 전부는 아니야."라고 나는 말한다. "두번째 이유는, 그 후로 기선의 시대가 도래하여, 이 섬의 자랑거리였던 목조선이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거겠지. 섬의 조선소도 상선대로 그 덕분에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어. 세 번째로는, 기선은 목조선에 비해 항해 거리도 압도적으로 기니까. 교역 루트도 자연히 변해 갔고 중계지로서의 섬의 가치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는 점이야. 그래서 피레에프스나 실로스 쪽이 번영하게 된 거고." 시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 나절에, 올드 하버의, 손님 하나 없는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덜컹덜컹 흔들리는 돛대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니, 옛날 여기가 그리스 상선대의 본거지였고, 바로 저 등대 앞에 터키 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역사적 사실 따위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카페 구석에 있는 의자에 드러누워 졸린 듯한 눈으로 파리를 쫓으며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읽고 있는 웨이터도, 역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티타니아 극장의 밤은 깊고 올드 하버에서 마을로 돌아와, 채소 가게와 슈퍼마켓에 들러 오늘과 내일 이틀치 시장을 보았다. 그리고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참에, 아내가 티타니아 극장의 포스터에 눈길을 고정시키고, "여보, 브루스 리가 나오는 영화를 하고 있는데."라고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브루스 리의 열성적인 팬인 것이다. "당신은 또 브루스 리야."라고 나는 말한다. "뭐 어때요, 가끔쯤은, 그밖에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까. 우리 영화라도 보러 가요." 분명 아내의 말대로이다. 그밖에 특별히 할 일도 없다. 더구나 브루스 리가 나오는 영화라면 줄거리를 몰라도 그다지 불편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지어 먹고, 여섯시 반에 시작되는 상영 분을 보러 가기로 한다. 마을 에는 극장이 둘 있는데, 한쪽은 가을이 되면 폐)관을 하고, 한쪽은 일년 내내 열려 있다. 폐관하는 쪽 이름은 '시네 마리나', 열려 있는 쪽 이름은 '티타니아'이다. 양쪽 다 마을 외곽에 있고, 양쪽 다 극장다운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 어떤 모양새를 잦추고 있지, 라고 물어도 별 할 말이 없다. 딱 잘라 말해, 아무런 모양새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구태여 형용하자면, 어떤 상점가에나 하나쯤은 꼭 있는 '뭘 팔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가게' 같은 분위기다. 극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내림이 좁고, 문도 아주 평범한 잡화점 같은 꼴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이 극장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단서는, 입구 옆에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것이다. 포스터는 두 장에 붙어 있는데, 한 장에는 '(시메라. 오늘)', 또 한 장에는 '(아브리오. 내일)'란 종이 딱지가 딱 달라붙어 있다. 이쪽은 오늘 상영하는 영화이고, 이쪽은 내일 상영하는 영화입니다, 는 뜻일텐데, 그리스에 있어 대부분의 내일이 그러하듯 상대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막상 가서 보니 어제와 똑같은 영화를 상영하는 일도 있고, 예고와는 전혀 무관한 작품을 상영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니까 이런 예고는 '어떤 종류의 대략적인 가설'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야 어찌되었든,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문이다. 이런 멋대가리 없음은, 일본의 소도시에 있는 극장의 존재 양식과는 좀 내용이 다르다. 일본의 극장은 제아무리 보잘것없고 지저분하고 다쓰러져 가고 오줌 냄새가 나는 곳이라도, 일단은 여기는 극장입니다, 란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건물의 분위기도 주위 건물과는 약간 다르고, 거기에는 정도 차는 있을지언정 가위 축제적이라고 할 만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런데 이 섬의 극장에는 그런 꾸밈새가 하나도 없다. 포스터가 두 장 붙어 있다, 한 장은 오늘, 한 장은 내일, 그것으로 끝이다. 어차피 조그만 섬의 조그만 마을이니, 일일이 여기가 극장입니다 하고 간판까지 내걸어 가며 떠들어댈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시네 마리아' 쪽은 문을 닫았으므로, 마지막 날 상영한 프로그램의 포스터가 그대로 붙어 있다. 마지막 날의 프로그램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마카로니 웨스턴이다. 일본말로 번역된 제목이 무엇이었던가는 기억나지 않는다.(황야의 무법자, 속 황야의 무법자, 신 황야의 무법자, 뭐 이 비슷한 제목이다, 그 누가 구별할 수 있으랴?). 그 옆에는 '여러분의 사랑을 받아 왔던 본 극장도 예년대로, 오늘로서 봄까지 휴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멋진 겨울을 보내십시오. 이러쿵저러쿵'이라 씌어 있는 종이가 붙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여전히 잎담배를 비틀린 입술로 꾹 물고는, 양 미간에 냉소적인 주름을 모으고, 어깨에다는 모포를 걸치고, 피스톨을 허공으로 향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불쌍하게도, HMEPA란 딱지를 붙인 채 한겨울을 지내야 하는 것이다. 끝나버린 그런 영화 포스터 정도는 뜯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것은 마치 여기가 극장이라는 존재증명서 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거기에 남겨져 있다. '타타니아' 쪽은 열려 있고, 매일매일 프로그램이 바뀌니까, 포스터도 매일 바뀐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틀을 연달아 같은 프로그램을 상영하는 일이 있음에도, 원칙적으로는 매일 바뀌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상영 개시 시간은 저녁 여섯시나 여섯시 반, 한 가지 영화를 하룻밤에 세 번 상영하는 것이 표준이다. 요금은 상영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구십분짜리 영화가 1백50도라크마라고 하면, 백이십분짜리 영화는 1밸80도라크마 하는 식으로, 합리적이라고 하면 과연 합리적인 듯한 기분도 든다. 일본 엔으로 환산하면 1백50엔에서 2백 엔 사이 정도다. 싸기는 싸다. 극장의 문을 여니, 안으로 네 평 정도 넓이의 홀이 있다. 별로 신통치 않은 분위기의 홀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홀이라기보다는 토방에 가깝다. 그 토방 오른쪽에 카운터 같은 구조의 매표소가 있고, 검은 미망인 복을 입은 할머니가 앉아 있다. 그녀의 모습은 내게 불행만을 예고하는 점쟁이를 연상시킨다. 턱을 바싹 잡아당기고 어지간히 고집스러워 보이는 할머니이다. 그 안쪽으로 음료수 보관용 아이스박스가 있고, 그 옆에는 코카콜라 케이스가 몇 개 쌓여 있다. 바닥은 꺼끌꺼끌한 콘크리트이고, 천장 형광등은 지르르르... 파딱, 지르르르... 파딱 하고 불길한 소리를 내고 있다. 벽에는 색바랜 영화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암만 휘둘러보아도 내가 모르는 삼류 영화뿐이다. "애가톤 에크사코시스!"라고 우리를 향하여 검정옷 할머니가 선고한다. "160(에카톤 에크사코시스)도라크마입니까?"라고 나는 확인한다. "네!(그ㅎ다)"라고 할머니가 말한다. 어째 목구멍 저 깊은 곳에 줄 곧 갇혀 있느라 수분이 죄 없어진 공기를 혀로 무리하게 끄집어내는 듯한 "네!"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두 사람분 입장료 3백20도라크마를 주섬주섬 끄집어내다가, 불현듯 걱정이 되어, "오늘 밤은 브루스 리죠?"라고 확인해 본다. "오히(아니야)!"라고 할머니는 통렬하게 부정한다. 그리고 오개년 계획을 손가락으로 진두지휘하는 스탈린처럼 공중으로 손가락을 쳐든다. "오늘 밤은 저거다!" 어휴 어떻게 된거야 싶어 그녀가 가리키는 입구의 포스터로 눈을 돌리니 거기에는 틀림없는 '브루스 리의 전설'이라는 타이틀이 인쇄되어 있고, 브루스 리의 얼굴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참 내 할머니, 저건 브루스 리잖아요." "오히! 브루스 리, 아니야, 저거!" 빠져나갈 수 없이 막판에 이른 장기 같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자니, 안쪽 문이 삐걱 열리며,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가 나와 우리에게 손짓한다. 그리고는 영어로 "오케이, 이츠 올 라이트, 브루스 리 투나이트." 라고 말한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뒤에 서 있는 아내를 돌아다보니,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려면 상관없잖아."란 표정을 하고 있기에, 나도 뭐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생각하고, 카운터의 할머니에게 3백20도라크마를 지불하였다. 아직도 할머니는 고집스럽게 '오히!'란 얼굴을 하고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극장이다 조끼를 입은 토끼가 우리 곁을 자나갔다고 해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들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이츠 올 라이트 아저씨가 묻는다. "이마스테 아포 틴 야포니아(우리는 일본에서 왔다)."라고 나는 준비해간 익스프레스 현대 그리스 어 아라카 히데요가 쓴 22페이지에 있는 용례대로 대답한다. 그러자 아저씨는 "요크하마, 무로란, 센다이, 고베."라고 무표정하게 열거하다가, '그럼 다음은?'이란 식으로 내 얼굴을 빤히 본다. "하하하, 잘 알고 계시는군요."라는 등 나는 대답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인이 일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항구 이름이거나 회사 이름 뿐이다. 그러므로 아저씨의 대사에 다음 구를 잇는다면, '소니에 가시오, 야마하, 세이코, 댓 선'이 될 것이다. "음, 자네 그리스 말을 할 줄 아는가?" "예, 조금뿐이지만." "브라보, 브라보."라고 말하며 아저씨는 안쪽 문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이이구 골치야. 매표소 옆에 문이 하나 있다. 그 안이 아무래도 영화관인 듯하다. 그래봐야 후지사와 미유키좌 정도의 협소한 영화관이겠지 하고 얕잡아 보고 문을 열어 보니, 우아 뜻밖이다. 황량할 정도로 넓다. 좌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천장은 높고, 통로도 널찍하다. 그렇다고 아름답다거나 호화스럽다거나, 혹은 느낌이 좋다거나 분위기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실내 광경은 결코 아니지만, 아무튼 넓기는 무지하게 넓다. 일일이 세어본 것이 아니라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좌석 수가 한 육 백 석쯤은 되지 않을까 싶다. 섬 인구가 삼천인 데 비하면, 파격적인 숫자다. 그런데 불평을 털어놓을 처지는 아닐지 모르겠으나, 출입구와 홀의 협소함과 이 드넓음은 너무도 균형이 맞지 않는다. 어쩐지 속은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당신, 위를 좀 봐요. 천장이 열려 있어."라고 아내가 말한다. 올려다보니, 과연 천장의 사분의 일 정도가 자동차의 선 루프처럼 빠끔히 열려 있고, 그 열린 사이로 틀림없는 오리온좌가 보인다. "비가 오면 저거 닫겠죠." "그렇겠지. 그냥 열어둔 채 닫지 않는다면 좌석이 물바다가 될 테니까(실제로 두 번째로 갔을 때에는 닫혀 있었다)." "어떻게 닫을까." "글세, 어떻게 닫을까?" 그런 얘기를 두서없이 나누는 사이에 하나 둘 손님이 들어온다. 어느 밤 프로그램이 쿵푸물이란 이유와, 시간이 이르다는 이유 때문에 손님의 절반이 아이들이다. 국민학교 삼학년에서 육학년 정도의 기가 질릴 만큼 버릇없는 아이들이 전부 해서 스물다섯 명쯤, 제일 앞 좌석에 몰려 앉아, 에콰도르의 거미원숭이 떼처럼 꺅꺅 소란을 피우고 있다. 도무지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쿵푸 흉내를 내며 서로 발로 치고 받는 놈들이며, 시트 위에서 펑펑 뛰는 놈들이며, 휘익휘익 휘파람을 불어대는 놈들이며, '불룩 튀어나온 니네 엄마 배꼽'을 스무 번은 되풀이하며 친구를 골려대는 놈이며, 아수라장이다. 이런 놈들은 모두들 붙잡아 한 이틀 정도 아무것도 먹이지 않고 창고 대들보에다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한다. 한동안 그런 아수라장이 계속된 후, 아까의 무로란 센다이 아저씨가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씩씩거리며 등장하여, "야, 이 놈들,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귓밥을 비틀어 잡아 내던져 버린 테니까, 알겠어, 아혼다라!"라고 큰소리로 고함을 친다. 그리고 두세 명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며 간다. 아저씨가 돌아가버리자 아이들은 잡시 조용히 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경과하자 언제 꾸중을 들었냐는 듯 새까맣게 잊어버리고(그런 점도 원숭이와 똑같다), 다시 우당탕탕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한다. "시작해 빨리 시작하라고!"라고 절규하는 놈, 덩치가 작은 애들을 돌아가면서 걷어차고 다니며 울려놓는 녀석, 아까보다 더 큰소리로 휘익휘익 휘파람을 부는 녀석(어린애인 주제에 폐활량은 엄청 크다), 벗겨진 시트를 들어올려 장외 난투극에 갖고 가는 놈, 난장판이다. 브리겔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이 자리에서 곧장 대작을 그려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무로란 센다이가 다시 나타나, 휘파람과 걷어차기의 목덜미를 양손으로 덥석 잡더니, 다짜고짜로 뒤쪽으로 데리고 간다. 아무튼 이것으로-희생자의 피를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덕분에-원숭이들은 간신히 얌전해진다. 아이구 골치야다. 결국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들어온 손님은 약 사십 명 정도였다. 어찌된 셈인지 아이들은 앞줄에 몰려 있었고, 어른들은 뒷줄에 몰려 있었다. 나와 아내만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 어째 이상한 기분이 든다. 마치 꿈속의 광경 같다. "아무튼 이상한 꿈입니다. 나와 아내는 널따란 극장 안에 있는데, 앞쪽 좌석에는 어린애들뿐이고, 뒤쪽 좌석에는 어른들뿐입니다. 그리고 천장이 열려 있어, 별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영화관 자체가 넓으니, 손님은 드문드문 앉아 있다 해도 휑한 인상에는 거의 변함이 없다. 그 휑한 느낌은, 일본의 학교에 흔히 있는 체육관 겸 강당을 연상하게 한다. 앞쪽에 넓은 무대가 있고(아마 이곳은, 동네의 다목적 홀로서의 기능도 겸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스크린이 있고, 그 앞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중형 스피커가 한 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유난히 그것만 초췌해 보이는 궁핍한 조화가 장식되어 있다. 참 한심한 영화관이다. 중학교의 보건 시간에 심심하면 일학년 여학생들을 강당에 모아 놓고 슬라이드를 보여줘 가면서 생리에 관하여란 강연을 하곤 했는데, 혹여 그런 것이 시작되지는 않나 싶은 분위기가 이 영화관에는 있는 것이다. 어쩐지 으스스하다. 그리하여 여섯시 반이 되자 조명이 꺼지고, 생리에 관하여가 아니고(당연하다) 브루스 리의 전설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게 또 지독한 엉터리 영화이다. 브루스 리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브루스 리를 무척 닮은 배우가 나와, 브루스 리의 생애를 연기하는데, 분명히 말해 도저히 봐줄 수가 없는 영화이다. 하나 일단은 들어왔으니 마지막까지 보기도 한다. 도중에 스크린 앞으로 고양이가 유유자적 지나간다. 거대한 검정 고양이다. 그 검정 고양이가 브루스 리의 이른 죽음을 암시라도 하듯, 천천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무대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십 초 후에는, 다시 같은 속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질러 갔다. "저 고양이는 대체 뭐야?"라고 나는 아연실색하여 말했다. "고양이잖아요"라고 아내가 말한다. "참 내 고양이가 왜 영화관 안에 있냐고?" 그러나 고양이가 영화관 안으로 들어와 스크린 앞을 유유히 지나가는 것이, 이 섬에서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닌 듯,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소란을 피우는 것이 자랑거리인 이이들조차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말이나 당나귀 정도가 아니면 놀라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영화가 시작되니 아이들은 모두 영화에 집중하여 조용해졌는데, 아이들이 조용해지자 이번에는 뒷좌석에 앉아 있는 어른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도중에 들어온 손님이 관내에서 아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아니, 자네." 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그 인사가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렇게 어두운 데서 용케도 상대방의 얼굴을 구별한다 싶어 나는 그저 감탄할 뿐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시력이 유달리 좋은 모양인지(과연 노인을 제외하면 그리스 사람들 중에는 안경을 쓴 사람이 극단적으로 적다), 여기저기서 "어이, 어이." 하는 소리가 나면, 금방 "자네 어쩌고저쩌고." 하는 광경이 벌어지는 것이다. "어이, 자네 코스타 아닌가." "어이구, 이거 이야니스 아닌가, 이쪽으로 오라구. 앉아, 앉아서 얘기 하자구. 그런데 자네, 잘 지냈는가." "그야 물론, 두말할 것 있나. 자네는 어때?" "나도 잘 있었지만, 실은 어머니가 말이야...." "왜 어머니가 건강이 안 좋으신가?" "아니 그게 아니고,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 있잖나 코린토스의 말이야, 그 미망인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엊그제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어." "그거 안됐군. 그래서 어머니가 코린토스에 가 있다는 얘기로군." 이런 얘기를(내용은 나의 일방적인 상상이다) 뒤에서 연신 하고 있다. 그것도 제법 큰 목소리로, 마음 같아서는 뒤를 향해 "시끄러워, 그런 얘기는 밖에 나가서 하라고."라고 고함이라도 쳐대고 싶지만, 여기는 남의 나라이고, 행인지 불행인지 영화도 시시하고, 그래서 그냥 참는다. 그런데 다른 손님들은 그런 일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모두들 조용히 영화를 보고 있다.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도 없다. 쿵푸 영화라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에 로베르 앙리코(아, 그리운 이름이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란 영화(제법 잘 만들어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를 보러 갔을 때에도 분위기는 대충 비슷하였으므로 이 현상은 단순한 지역성이란 것이리라. 시내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무참한 봉변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도중에 한 번이나 두 번은 반드시 뚝하고 필름이 끊어진다. 그러고는 한 십분쯤 장내가 밝아진다. 첫 번째 필름이 끝나 두 번째(혹은 두 번째가 끝나고 세 번째) 필름을 세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뭐 휴식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그러나 휴식 시간의 시작치고는 너무 당돌하여 흥이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사기를 두 대 사면 해결될 일인데, 이쪽 사람들은 이런 일을 그다지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 모두들 그 사이에 화장실에 간다든가, 초콜릿을 먹기도 하고, 전반부의 줄거리를 총괄하기도 하면서, 즐겁게 후반부에 대비하고 있다. 코스타와 이애니스는 아직도 코런토스의 어머니 얘기를 하고 있다. 통로 한구석에서는 고양이가 고환을 핥고 있다. 아이들은 좌석의 등받이를 상대로 "아초, 아초." 하고 쿵푸 연습에 열심이다. 누군가가 또 커다란 음량으로 휘파람을 불어댄다. 무로란 센다이가, 또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날아온다. 티타니아 극장의 밤은 이렇듯 와일드하게 깊어만 갔다. 네덜란드 인에게서 온 편지, 섬고양이 스페체스 섬에 도착했을 때, 청소하는 아줌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집 열쇠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하도록 발렌티나가 조처를 취해준 것이다. 그 아줌마가 우리를 위하여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고, 거기서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세세한 사항을 설명해 줄 것이라고 발렌티나는 말했었다. 그렇게까지 배려를 해준 것은 상당히 고마운데, 정작 그 아줌마는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그녀의 아들이 곁에 있기는 했지만, 그도 아직 국민학생이라 거의 영어를 몰랐다. 할 수 없어 나는 서툰 그리스 어로 얘기를 해보지만, 나의 어학 실력으로 "이 온수 히터는 스위치를 켠 후에 따뜻한 물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라든지 "달걀 프라이를 만든 후 기름은 어디다 버려야 하나요?"같은 사소한 일을 질문하기는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손짓 발짓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손짓 발짓으로 해결하지만, 그 나머지는 어떻게 되겠지 하고 적당히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뭐, 어떻게 되겠지."라고 나는 말한다. "하지만, 당신 그리스 어 배운다고 내내 공부하더니 도대체 뭘 한거예요?"라고 아내가 기가 차다는 듯 말한다. 나는 그리스에 살고 싶어서, 일년간 일주에 한 번 메이지 학원 대학의 그리스 어 강좌에 다녔던 것이다. "저 말이지, 온수 히터니 도마니 표백제니 하는 특수한 단어들이 교과서에 나올 리가 없잖아. 당신은 애당초 어학에 실제적인 것을 너무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당신은 지나치게 기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프랑스 어를 배웠을 때도 그랬잖아요. 이방인은 읽는데, 길도 제대로 못 물어보고." "어쩔 수 없잖아, 원래 그런 성격인걸. 말솜씨가 없으니. 그게 싫으면 나한테 의지하지 말고 자기가 공부해서 말하면 되잖아."라고 말다툼을 하고 있으려니, 아줌마와 아들이,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란 표정으로 싱글싱글 웃으며 지켜보고 있다. "그만, 이제 됐으니까, 쓰레기를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그것만 물어봐요. 무슨 요일에 어디에다 내놓으면 되는지.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라고 아내가 말한다. 나는 쓰레기통을 가리킨다. "무슨 요일에, 이것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아줌마가 방긋 웃는다. 말이 통한 것이다. "월, 수, 금요일 아침, 그러니까 그 전날 밤에 내놓으면 돼요." "알겠습니다." "브라보, 브라보." "어디에, 가지고 가면, 좋습니까?" "지금 함께 가 봐요." 그녀는 나를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안내해 준다. 쓰레기 버리는 곳은 집에서 약 삼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고, 거기에는 높이 약 백 이십 센티미터 정도의 갈색 플라스틱 통이 두 개 놓여 있다. 그 쓰레기통에는 독일어로 커다랗게 '쓰레기통'이라고 씌어 있었다. 어째서 그리스의 쓰레기통에 독일어로 쓰레기통이라 씌어 있는가 하면, 그 쓰레기통이 독일제이기 때문이다. 쓰레기통 정도는 자기 나라에서 만들어도 좋지 않은가, 그다지 복잡한 구조의 물건도 아닌데, 하고 나 같은 사람은 생각하지만, 아무튼 독일제이다. "이 안에 퐁 던지면 돼요, 알았죠?" "알았습니다." "브라보, 브라보." 이렇게 하여 우리는-실질적으로는 내가 혼자 버렸지만-맨 처음 아줌마가 말한 대로, 일요일, 화요일, 목요일 밤에 줄곧 쓰레기를 내다 버렸는데, 얼마 안 있어 이 섬의 쓰레기 수거 시스템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미스터리어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누군가가 쓰레기를 수거하러 오는 것은 확실하고, 내다 버린 쓰레기는 어느 틈엔가 깨끗하게 처리돼 있는데, 언제, 누가, 어떤 식으로 수거해 가는가 하는 것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도무지 나는 쓰레기 수거차나 청소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자동차라곤 거의 존재하지 않는 작은 섬, 작은 마을에서 한 달이나 살았는데도 말이다. 이것이 수수께끼의 하나.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수거해 가는 요일. 언제 수거해 가는가가 확실하지 않다. 월요일 이른 아침에 버린 쓰레기가 수요일 낮에는 없었다고 치자. 그럼 수요일 아침이면 늘 수거하러 오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 다음주 화요일 밤에 내다 버린 쓰레기는 목요일 아침까지도 그냥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아침에 없어지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오후에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영문을 알 수 없다. 그래서 근처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시간에 맞추어 내다 버릴까하는 생각도 했는데(가나가와현에 있는 우리 집 주변은 쓰레기 버리는 시간이나 날짜에 대해 아주 신경질적이라, 쓰레기를 버리는 데 신경을 쓰는 습관이 붙어버린 것이다), 그것 또한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어느 날에는 아침 여덟시에 왕창 버려져 있는가 하면, 어떤 날에는 오후 네시에 왕창 버려져 있다. 어쩌면 거기에는 무슨 굉장히 복잡한 규칙성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보다는, 여러 가지 주변 사정을 종합하여 추측건대, 버리는 사람은 자기가 버리고 싶은 시간에 마음대로 버리고, 수거해 가는 사람 또한 자기가 수거해 가고 싶은 시간에 마음대로 수거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는 결국 포기를 하고, 버리고 싶은 때에 버리고 싶은 만큼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조르바화의 제일보이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제멋대로 버렸다가는 동네의 미관을 해칠 것이고, 당연히 냄새도 날 것이고, 개나 고양이가 쓰레기 봉투를 찢고 내용물을 마구 흩뜨려 놓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파리가 발생할 것이고, 엉망진창 아니겠느냐, 라고. 그렇다. 실제로 그렇다. 두 개의 독일제 쓰레기통에 다 들어가지 못한 쓰레기 봉투가(제대로 들어가는 적이 드물다) 그 주변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고, 개 고양이가 내용물을 사방에 흩뜨려 놓고, 파리는 붕붕 날아다니고, 냄새는 지독하다. 정말 구제불능이다. 관광객이 이렇게나 많이 찾는 나라이니만큼, 좀더 위생에 신경을 써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쓰레기 때문에 기가 차 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지 아세니안이란 영자 월간지 칼럼에 이런 편지가 실린 적이 있다. 네덜란드 사람이 그리스 관광국에 보낸 감사의 편지란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뭐 그건 조크일 것이다. 만약 조크라고 하면 상당히 멋진 조크라, 이하 인용해 본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 그리스에게 두 주일간의 휴가를 보낸 네덜란드 쓰레기 수거부가 보낸 편지였다. "우선 제일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소생이 일하고 있는 네덜란드는 아주 조그만 나라라는 것입니다. 소생의 나라는 모든 것이 아담하고 예쁘장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파멸적인 상황이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쓰레기 수거에 대한 규칙도 지극히 엄격하여, 따라서 쓰레기 수거부로 봉직한 이 이십오 년간, 소생은 그 규율을 준수하며 직무를 충실히 이행해 왔습니다. 그것이 소생에게 부과된 책무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소생이 아름다운 귀국을 방문하여, 음식 쓰레기가 마구잡이로 여기저기 산적해 있는 광경을 보았을 때, 그 얼마나 놀라고 또 기뻤는지 한 번 짐작해 주십시오. 길가에, 협곡에, 해변에, 혹은 비를 맞고 있는 쓰레기 하치장에 음식 쓰레기가 흩어져 있고, 내용물은 밖으로 튀어나와, 알알이 그 모습을 드러낸 채 귀국의 강렬한 햇살을 받고 있고, 때로는 그 인상적인 정경에 화룡점정을 찍기라도 하듯, 까마귀나 갈매기 떼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밀폐식 쓰레기통이니, 쓰레기 봉투를 봉한 채 처리할 수 있는 설비니 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이 소생에게 있어, 몇 시간이나 거기에 앉아 당당하게 흐트러져 있는 폐기물-이것이야말로 소생의 사반 세기에 걸친 생활의 양식이었습니다-을 바라보는 것은, 실로 가슴 뛰는 체험이었습니다. 이렇듯 아름답고 영광에 찬 방식으로 마구 흐트러져 있는 쓰레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멋진 경험을 하게 해주셔서, 소생으로서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카오스적인 상황에 감사의 마음을 바치는 것은 비단 네덜란드에서 온 수거부뿐이 아니다. 그렇다. 이 진개 카오스야말로 섬에 사는 대부분의 고양이들에게는 귀중한 영양 보급원이며, 생명을 부지하게 하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만약, 그리스의 쓰레기 수거부가 시간에 정확하고, 그리스의 주부가 쓰레기 버리기에 신경을 쓰게 된다면, 섬의 고양이 숫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삼분의 일로 격감하고 말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리스는 고양이로 충만해 있다. 그 어떤 동네의 길을 거닐어도, 어떤 골목길을 지나가도, 어떤 계단을 올려다보아도, 그 어디에 있는 주점에 들어가도, 어느 모퉁이를 돌아도, 고양이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한마디로 말해 온통 고양이투성이다. 옛날 학교에서 "예, 그러면 이 그림을 이십초 동안 잘 보세요. 자 덮어주세요, 그림 속에 고양이가 몇 마리 있었을까요?"란 테스트를 받은 일이 있는데, 그 테스트와 똑같다. 실로 다양한 장소에,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고양이가 있다. 그리스의 섬에 고양이가 많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첫째로 맨 처음에도 썼듯이 집 밖이 지저분하다는 것, 두 번째로 겨울을 제외하면 기후가 그리 혹독하지 않다는 것, 세 번째로 사람들이 일년의 절반은 옥외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남은 음식 찌꺼기를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 대충 이 세 가지다. 하긴 고양이에게는 비교적 살기 좋은 나라이다. 그러나 그것도 기후가 좋은 시기의 일이고, 가을이 오고 관광객이 격감하고 나면, 타베루나도 문을 닫고, 고양이들이 구할 수 있는 양식도 그에 비례하여 줄어들고 만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고양이들의 격렬한 전쟁이 시작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삼색 얼룩 고양이 일가의 영역으로, 나도 그들의 모습을 보면 심심찮게 남은 음식을 줘 왔는데, 가을이 깊어짐에 따라, 일가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 갔다. 엄마 삼색 얼룩 고양이, 아빠 갈색 얼룩 고양이, 하양 새끼 고양이, 하양검정 새끼 고양이, 이렇게 네 식구이던 것이, 제일 먼저 눈치코치 없어 보이는 대식가 아빠가 "당신, 어디 가서 당신 혼자 살다가 와요, 난 아이까지 있어 정말 힘드니까." 이런 식으로 매정하게 삼색 엄마한테 내쫓겨, 영역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 두 주일 정도 지나, 한동안 비가 계속 오고 꽤 추워졌다 싶을 무렵에 하양 새끼 고양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틀림없이 처분된 것이리라. 비수기의 이 섬 사정으로는, 엄마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고작해야 한 마리밖에 기를 수 없다. 그러니까 가장 힘세고 가장 비전이 있을 성싶은 놈을 고르고, 그 나머지는 버린다. 인간들은 시즌이 끝나면 가게문을 닫고, 어디 다른 곳으로 일하러 갈 수도 있다. 또는 운이 좋은 사람은 한여름 돈벌이로 느긋하게 겨울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그럴 수가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파이 조각을 힘으로 쟁탈하는 것뿐이다. 어디까지나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인데, 그리스 사람들은 고양이에게 관대하며, 때로는 친절하기까지 하다. 우리 집 앞에는 조붓한 공터가 있어 근처 고양이들의 집회장 같은 장소로 쓰이고 있는데, 거기에 종종 인간이 먹다 남은 음식물이 놓여 있다. 그러면 고양이들은 모여들어 사뭇 귀중한 음식물이라는 듯 그것을 오물오물 먹는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들 일부러 거기까지 음식 찌꺼기를 들고 와 신문 위에다 펼쳐 놓고 가는 것이다. 생선이니 고기니 스튜니 게다가 뭐가 뭔지 알 수 없이 뒤섞인 음식들이, 마치 연말의 구세군 냄비처럼 그곳으로 운반되어 온다. 처음에 그 광경은 내게 아주 기묘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일본이라면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짓을 행여 했다가는 "저 집 부인은 들고양이한테 먹이를 주고 있어요. 이루 말할 수 없는 폐라고요. 그런 짓을 하니까 동네에 들고양이가 점점 늘어나지." 운운, 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든가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그 대신에 자기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목욕을 시킨다. 화장품을 발라 준다. 손톱을 잘라 준다, 하며 분별없이 귀여워한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 사람은 특수한 고양이를 제외하면, 애완 동물로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보는 한, 딱히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귀여워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고양이를 그저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는, 거기에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새나 꽃이나 풀이나 벌과 마찬가지로, 고양이 또한 '세계'를 형성하는 한 존재인 것이다. 그들의 '세계'는 그런 식으로 상당히 너그럽게 성립되어 있는 것으로 내게는 느껴지고, 그리스의 시골에 고양이가 많은 진짜 이유는 그러한 그들의 세계관에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한마디로 그리스의 섬에 있는 고양이라고 하지만, 섬에 따라 거기에 사는 고양이의 도민성(도민성, 이란 용어를 쓰기도 하겠습니다)은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미코노스와 로도스, 파로스의 고양이는, 제각기 다 다르다.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보라고 하면 대답하기가 곤란하지만, 역시 '어딘가 모르게' 다른 것이다. 눈초리도 다르다. 털 모양도 다르고, 생활 양식도 다르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고, 행동거지도 다르다. 인간이 서로 조금씩 다른 도민성을 갖고 있듯, 고양이도 각기 다른 도민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의견인데-인간의 도민성과 고양이의 도민성이 어떤 부분에서는 중첩되는 것이다. 적어도 부분적, 경향적으로 공통된 것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살고 있는 스페체스 섬 근처에 이도라라는 섬이 있다. 이도라는 원 데이 크루즈선이 매일 몇 척이나 방문하여 관광객을 우르르 내려놓고 가는 초인기 섬이다. 이 섬에도 역시 고양이가 많다. 그런데 이 이도라의 고양이들과 스페체스의 고양이를 비교해 보면, 그 양자의 성격이라든가 생활상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이것은 한눈에 알 수 있는 사항인데, 이도라의 고양이는 아름답다. 털도 매끈매끈 윤기가 흐르고, 헐미가 있는 고양이도 거의 볼 수가 없다. 사람을 잘 따라 겁을 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다지 뻔뻔스럽지도 않다. 항구 근처의 타베루나에서 식사를 하고 있으면 테이블 주위로 고양이가 대여섯 마리 모여드는데, '저, 만약 음식이 남으면 나중에 조금만 주세요, 조금이면 되니까.'란 분위기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부르면 꼬랑지를 세우고 다가오고, 쓰다듬어 주면 야옹야옹거린다. 이런 차분함은 아마도 관광객이 많은 탓에, 그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고양이가 진화한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나 스페체스 섬의 고양이는 불러도 우선 다가오지 않고, 쓰다듬어 주려 하면 점점 도망갈 뿐이다. 화를 내며 땅을 박박 긁는 놈도 있다. 의심이 많다기보다는, 필경 인간과의 그런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리라. 게다가 이곳의 고양이는, 헐미가 없는 고양이를 찾아보기가 고생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헐미투성이이다. 그리고 십중팔구는 코에 상처가 나 있다. 아무래도 이 섬의 고양이는 싸움을 하게 되면, 먼저 손톱으로 상대방의 콧대를 노리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숯으로 싹싹 칠을 한 것처럼 코 주위가 새까맣고, 볼품없기 짝이 없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도 스페체스 섬의 고양이에게는 두손들었다. 좌우지간 사방 전치에 오오미야 덴스케(고리타분하군) 같은 얼굴을 한 고양이가 빈둥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리스의 섬이나 도시, 시골을 여러 군데 돌아다녀봤지만, 모든 고양이란 고양이가 상처로 얼룩진 장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째서 이 섬의 고양이만 이렇듯 집요하게 코를 공격하는 전술을 고집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서로 아옹다옹 싸워보았자, 서로가 점점 비참해져서 '오오미야 덴스케'화 한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데 말이다. 고양이도 인간이 생화학 무기나 독가스 사용을 금지한 것처럼, 코 공격을 금지하는 협정을 맺어야 할 시기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물론 고양이에게는 그런 재능이나 인식이 없으므로, 코를 공격하는 전술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고, 다윈이 말하는 일정 방향 진화처럼, 앞으로 점점 더 가속화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일만 칠천 년 후에 스페체스 섬의 고양이들은 모두 철강처럼 딱딱한 코를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코 주위에 한해 사처가 나 있는 것은 아니다. 눈에 공격을 받은 놈도 있고, 귀를 씹힌 놈도 있다.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놈도 있다. 나는 한 번은 두 귀가 거의 짓씹혀 없어진 거대한 검정 고양이를 해변에서 본 일이 있는데, 정직하게 말해 그 놈은 이미 고양이로 보이지 않았다. 바다 펄 속에 있다가 썩은 고기를 주우러 뭍으로 걸어나온 불길한 다리 달린 물고기처럼 보였다. 이건 좀 극단적인 비유지만, 아무튼 스페체스 섬의 고양이들은 대게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고양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물론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다지 살기 좋은 곳은 아닌 듯하다. 만약 고양이로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이도라 섬의 고양이 쪽을 선택하고 싶다. 스페체스 섬에서의 소설가의 하루 시즌이 지난 그리스의 섬에서 소설가는 어떤 생활을 하는지, 하루 분을 간추려 써보기로 한다. 아침 일곱시경에 일어난다. 그 시간이 되면 사방이 환하므로, 자연히 눈이 떠진다.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을 늦잠이라 한다 해도, 일곱시 반경에는 근처에 있는 교회에서 종을 광광 울려대므로, 싫어도 눈을 뜰 수밖에 없다. 아내는 아침잠이 많아, 아침밥은 늘 내가 짓는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아내는 언제나 꿈 얘기를 한다. 누구누구가 나와 이랬다는 둥 저랬다는 둥, 그런 얘기이다. 가끔은 나도 등장하여 얼빠진 짓을 하든가, 옥상에서 떨어지든가 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결국은 남의 꿈 얘기이다.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우아... 흐음... 정말 그랬어?" 하고 건성 대꾸를 하는 사이에 그럭저럭 식사가 끝난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달린다. 짧으면 사십, 길면 백분 정도. 돌아와 샤워를 하고, 일을 시작한다. 이번 여행중에 완성할 예정에 잇는 작품은 번역 두편과 여행스케치(지금 쓰고 있는 것 같은 글), 그리고 새 장편소설, 그러니까 결코 한가하지 않다. 소설 원고를 쓰다가 싫증이 나면 번역을 한다. 번역 작업에 싫증이 나면 다시 소설 원고를 쓴다. 비오는 날의 노천 목욕탕과 마찬가지다. 너무 뜨거워지면 온탕에서 나오고, 서늘해지면 다시 들어간다. 그런 반복이 줄기차게 계속된다. 열한시경까지 일을 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산책을 겸하여 둘이서 마을로 시장을 보러 간다. 마을 중심까지는 해안을 따라 어슬렁어슬렁 걸어 십오분 정도 거리이다. 길 왼편은 바다이고, 오른편에는 19세기 세워진 오래된 집들이 죽 늘어서 있다. 바람만 세지 않으면, 산책하기에는 꽤 상쾌한 길이다. 하늘에서는 갈매기가 우아하게 날고, 잔잔한 파도가 해안에 떠 있는 보트를 살랑살랑 흔들고, 고양이가 제방에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다. 어떤 책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 해안을 따라 나 있는 길이 존재하지 않아, 오른편에 죽 늘어서 있는 집들은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직접 바다에 면해 있어, 각 집은 전용 선착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도로가 생긴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의 일이다. 길을 따라 스낵 바와 스브라키 집과 기념품 판매점과 카페가 드문드문 있지만, 이 계절에는 모두 가게문을 꼭꼭 닫은 채이다. 격자창문으로 기념품 가게의 어두컴컴한 안을 들여다보니, 인형이니 벽걸이니 복제접시니 하는 어느 기념품 가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에 섞여 기묘한 모양을 한 길쭉한 병이 몇 개 보인다. 그 병 안에는 꼭 살무사처럼 큼직한 뱀이 담겨 있다. 뱀은 입을 짝 벌린 채 죽어 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셔터를 내린 기념품 가게의 어두운 점내에 진열되어 있는 독사의 사체는 마치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정경처럼 요염하고 고딕적이다. 이 길에서 열려 있는 가게는 오로지 매점분으로, 검정테 안경을 쓴 아저씨가 온종일 그 가게를 지키고 있다. 이 사람은 박보당의 다카하시 씨하고 얼굴 생김이 비슷하여, 우리는 일단 그를 다카하시씨라고 부르기로 한다. 다카하시 씨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람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첫째로 이 사람의 얼굴에는 표정이라는 일절 없다. 웃지도 않거니와, 이것 참 곤란하군, 그런 표정을 짓는 일도 없고... 좌우지간 언제 보아도 항상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아직 충분히 일할 수 있는 패기가 있었는데 부하가 실수를 저지른 탓에 실각하고 만 총리 대신처럼, 불만을 풀 길이 없다는 식의 찌뿌둥한 얼굴로, 지그시 바다만 보고 있다. 그러고 있으면 머잖아 누군가가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라도 하고 있는 듯, 언제나 바다 쪽을 쏘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매점의 다카하시 씨다. 이 사람과는 하루에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하므로, 나는 눈길이 마주치면 "카리 메라(안녕하세요)."라고 말해 보지만 다카하시 씨는 맹한 목소리로 "메라(물론 카리 메라의 약어)."라고 대꾸하든가, 아니면 그저 "으음."이라고 눈인사를 할뿐이다. 그 어떤 것을 가지고서도 이 사람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러시아 민화에 나오는 겨울의 정령인 노인 역을 맡기면 분위기가 딱 들어맞을 것 같다. 다카하시 씨의 매점에는 담배니 껌이니 그림 엽서니 하는 것들이 진열돼 있는데, 나는 이 가게에서 누가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다. 언제나 언제나 다카하시 씨는 혼자서 거기에 앉아 무연한 얼굴로 바다를 쏘아보고 있다. 자리도 너무 나쁘다. 그리고 너무 퉁명스럽다. 나는 한번쯤은 뭐라도 사야겠다 싶어 물건을 한 차례 살펴보았는데, 그림 엽서는 햇볕을 받아 새하얗게 바래고 뒤로 젖혀져 있어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담배를 사려고 해도 나는 줄곧 금연중이고, 껌은 치과 의사한테 씹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고, 사줄 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런 가게가 다카하시 씨의 매점. 이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빵 가게가 있어, 여기서 늘 빵을 산다. 빵집을 지나고, 동사무소를 지나 조금 더 가면 과거에 면직 공장이 있었던 자리가 있다. 이니 뭐뭐가 있던 자리라고 쉬 말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이곳은 이미 완전한 폐허이다. 이 공장이 조업을 하고 있었던 당시에는 필시 멋들어진 위용을 갖추고 있었으리라고 추측되는 당당한 공장-이랄까, 공장이라고 하기에는 좀 지나치게 당당한 건축물-그러나, 지금은 그런 만큼 한층 더 쓸쓸하고 공허하다. 세상에는 가끔 그런 것이 있다. 동기가 훌륭하고, 겉모양이 훌륭한 만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도저히 구제할 길 없이 비참해 보이는 것이. 유리창이 다 날아간 창틀은 페인트마저 죄 떨어져 변색해 있고, 벽은 도처가 부슬부슬 허물어졌고, 철문은 빨갛게 녹슬어 있고, 돌벽에는 낙서가 여기저기. 우리는 이 공장 앞을 지날 때마다, 건물 전체가 와르르르르 무너져내려 우리를 묻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이 결코 허풍스런 노파심이 아니란 게 나중에 판명되었다. 푹풍우가 몰아친 다음날 공장에 가 보니, 실제로 그 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려,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폭풍우로 이런 지경이니, 큰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속수무책이지 않을까 싶다. 이 면직 공장은 금세기 초엽의 만성적인 조선 불황이래 지속적인 하강세를 면치 못했던 스페체스 섬의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어떤 자산가가 1920년에 세운 것인데, 결국은 뜻한 바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전후에 폐쇄되었고, 그 이후에는 생선을 출하하기 위한 보관용 얼음 생산과 소규모 발전에 사용되었지만, 십몇 년 전에 그 임무도 종언을 고하고, 그 다음은 그냥 방치된 채로 지금까지 그 흉물스런 몰골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에는 발대한 수의 폐허가 존재하는데, 내가 본 것 중에서 이 공장 폐허는 가장 허망한 장소의 하나였다. 담 한구석에 '매물'이라고 하얀 페인트로 씌어 있지만, 살 사람은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야 그렇겠지. 이런 땅을 살 사람이 그렇게 쉽사리 있을 리가 있겠는가. 공장을 지나 좀더 앞으로 가면, 이번에는 포시도니언이라는 멋진 호텔이 있다. 이 호텔은 1914년에 세워졌다. 그리스의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임기응변 식으로 만들어진 품격 있는 호텔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든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적이지 않다. 실용성이란 개념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천장은 쓸데없이 높고, 삼층짜리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프린스 호텔로 하자면 족히 육층 정도는 됨직한 높이이다. 홀도 너무 넓어 오히려 휑뎅그렁하다. 널찍하고 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덩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크다. 이렇게 넓어서야 청소하기도 힘들겠군, 하고 걱정스러워진다. 어떤 책에 의하면, 이 호텔은 양 세계대전 사이에는 유럽 각국의 사교계 인사와 그리스의 상류 계급들로 왁자지껄했던 모양이다. 항구의 바깥쪽에는 영국의 함대가 정박해 있고, 정장을 한 사관들이 상륙하여, 이 호텔의 연회실에서 열리는 호화로운 리셉션에 참석했다고 하는데, 그 모두 옛날 얘기이다. 호텔은 지금도 옛날처럼 영업은 하고 있지만, 여기저기서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어색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옛날 것은 과연 훌륭하지만, 훌륭한 나름으로 어김없는 풍화를 겪고 있다. 그런 데 비해 새롭게 첨가한 것은 과연 새롭기는 하지만, 옛날 것에 비하면 분명 질이 떨어진다. 그 밸런스의 엉성함이 어쩐지 서글프다. 휑한 홀 한켠의 프런트에는, 따분한 표정의 여성이 한 사람, 정말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내가 방값을 물어보자 그녀는 얼굴을 들고, "네? 방값이라구요? 음, 그러니까... 사천 도라크마."라고 성가시다는 듯 대답하고는 다시 얼굴을 숙였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손님 같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삼층 베란다에는 목욕실 매트가 널려 있다. 한번쯤은 이 호텔에서 자고 싶었지만, 시월 이십 팔일 내셔널 데이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휴관을 하고 말았다. 이 호텔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항구가 있고, 마을의 중심으로 들어서게 된다. 날씨가 따뜻한 날에는 항구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헤럴드 트리뷴을 읽는다. 이 섬에서는 제대로 된 영자 잡지라고는 헤럴드 트리뷴 정도밖에 팔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정세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일본에 있는 때보다는 외국에 나와 있는 경우가 더욱 민감하게 세계정세가 파급된다), 달러와 엔의 환율을 파악해 두기 위해서라도, 이 신문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내가 이 섬에 있는 동안에, 트리뷴지는 예의 나카소네 수상의 "미국 지식 수준 발언'을 아주 크게 다루었다. 대충 구정물을 갖다 붓는 식의 논조였는데, 어느 날 투서란에 일본통인 한 사람의 미국 사람이 보낸 투서가 실려 있었다. 그의 의견은, 일본어의 '지식 수준'과 '지능 수준'은 서로 다른 말이다. 일본어의 '지식'은 '지능'보다 훨씬 폭넓은 것으로, 미스터 나카소네의 발언이 지극히 경솔하고 실리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엄밀하게 따지자면, '지식 수준이 낮다'는 말은 니그로나 이스파노가 바보라는 뜻은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어째 알 듯하기도 하고 모를 듯 하기도 한 논리이다. 그런 하찮은 용어의 정의에 급급하기보다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씨의 정치가로서의 '지능 수준'의 무신경함에 대해 고찰하는 편이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직하게 말해서.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만들어 먹는다. 마이다노라고 하는 그리스에서밖에 나지 않는 향초를 사용하여, '스파게티 마이다노 그리스풍'이란 것을 만든다. 점심 식사가 끝나면 대개는 일을 한다. 낚시를 하러 가는 경우도 있다. 낚시라고 해봐야 실로 간단한 것으로, 오래된 페더 치즈와 빵을 소량의 우유에 적셔 반죽을 하여 경단을 만들고, 그것을 미끼로 하여 둑에 앉아 낚싯줄을 늘어뜨리고 있으면, 십 센티미터 정도 되는 물고기가 한 시간에 너덧 마리는 걸린다. 낚싯줄에 걸리는 것은 대개가 크라우스 킨스키 같은 불길한 생김새에, 별로 느낌이 좋지 않은 검은 물고기뿐이라, 도무지 요리를 해먹고 싶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삼색 얼룩 고양이 일가에게 던져 주는데, 고양이들은 이 검정 물고기를 아주 좋아하여 흥분한 채 와작와작 씹어 먹는다. 그러니까 어쩌면 의외로 맛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라는 나라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데 반해 낚시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어서, 웬만큼 솜씨 있는 낚시꾼이 아니고서는 그럴싸한 물고기를 잡아 올릴 수가 없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바닷물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맑고 투명하여, 낚싯바늘 근처에서 왔다갔다하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위에서 눈으로 또렷하게 볼 수 았다는 것이다. 위에서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물고기는 의외로 머리가 좋은 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다수의 물고기는 미끼를 곁눈으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흘긋 보고서는 '흥'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낚싯바늘에 물고기가 걸리는 것은 정말 예외적인 일임을 알 수 있다. 워크맨으로 닐 영이라든가 제시 윈체스터(제시 윈체스터!)의 음악을 들으며 그런 물고기을의 영악함을 지그시 들여다보고 있다보면, 시간은 구름의 흐름에 맞춰 실로 느긋하게 지나간다. 저녁 식사는 보통 여섯시쯤 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만큼은 거의 아내가 만든다. 비프 스테이크를 먹는 날도 있고, 튀긴 정어리인 날도 있고, 도미 밥인 날도 있고, 야채 스튜인 날도 있고, 아지 마리네인 날도 있고... 아무튼 그때그때 집에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요리를 한다. 겨울, 그리스의 시골에서 입수할 수 있는 식료품의 종류는 매일매일 격변한다. 한편 거의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날도 적지 않다. 물고기가 잡히는가 안 잡히는가는 바다의 상태에 따라 다르고, ㄱ은 날씨가 계속되면 한 일주일 정도 전혀 생선 구경을 할 수 없는 날도 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파는 날은 일주일에 한 번뿐이라 그날을 놓치면 신선한 고기도 구하기가 힘들다. 파도가 높아지면 본토에서 야채를 운반해 오는 배도 운항하지 않는다(섬에서 나는 야채는 맛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종류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에서 자취 생활을 하려면 임기응변이 아주 소중한 역할을 한다. 지나치게 요리의 기본원칙에 집착하면, 아무것도 만들어 먹지 못하는 사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좀처럼 쓸 만한 재료가 없거나, 아니면 음식을 만들기가 귀찮은 밤에는 근처 파토라리스의 가게에 가서 식사를 한다. 파토라리스의 가게는 마을 중심에서 좀 벗어난 탓도 있어, 비수기에는 완전히 본토박이 사람(로코) 중심의 가게가 된다. 창가 자리에는 늘 대여섯 명 아저씨가 모여 앉아, 우조나 포도주를 마시며 왁자지껄 얘기를 하거나, 아니면 모두 함께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거나 하는데, 이 사람들은 안주라든가 요리 같은 것을 주문하는 법이 없다. 우리처럼 식사를 하는 손님은, 시간이 이른 이유도 있지만(평균적인 그리스 사람들의 저녁 식사 시간은 밤 아홉시경이다) 거의 없다. 우리가 테에블에 앉으면 모두와 함께 와와 떠들고 있던 파토라리스 (1)이, 손님이야, 에이 성가시게 이렇게 이른 시간에, 란 식으로 메뉴를 들고 온다. 파토라리스의 가게에서는 두 아저씨와 아줌마 한 사람이(이 여성은 비수기에는 거의 일하지 않는다) 일하는데, 나로서는 어느 쪽 아저씨가 그 파토라리스인지 마지막가지 판명할 수 없어, 편의상 불성실한 쪽을 파토라리스 (1), 성실한 쪽을 파토라리스 (2)라 부르기로 한다. 파토라리스 (1)은 좋게 말하면 사교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적당주의자 타입으로, 그리스 인의 한 전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얘기에 열중하면 내가 테이블에서 손을 들고 불러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저 미안하지만, 와인 좀 주세요." 라고 소리쳐도, "예-이." 하고 대답할 뿐 가지고 오지 않는다. 도대체 뭘 하는가 싶어 살펴보면, 저쪽에서 두 영국인 여자의 테이블에 턱 앉아, 열심히 그리스 어 강의를 하고 있는, 그런 참을 수 없는 타입의 사나이다. 나는 비수기니까 뭐 어쩔 수 없겠지 하고 관대하게 생각하지만, 일하겠다는 의욕이 도무지 엿보이지 않는다. 그 작자에 비해 파토라리스 (2)는 언제나 혼자 주방에서 조용히 요리할 재료를 다듬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하고 있다. 내가 주방으로 생선을 보러 가자, 오늘은 이게 맛있어요, 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파토 (1)이 없을 때에는 점내로 나와 주문을 받기도 하는데, 한가할 때에는 안쪽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 사람도 그리스 인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참 여러 가지 타입의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아줌마는 언제나 구석 테이블에 앉아, 뭔가를 쓰거나, 힐끗힐끗 가게 안을 휘둘러보거나 한다. 어쩌면 파토라리스 (1)의 태만함이 신경에 거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동통한 사뭇 그리스의 어머니다운 타입으로, 나도 몇 번인가 길에서 인사를 하기도 하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상당히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단, 마지막까지 이 아줌마가 두 파토라리스 중 어느 쪽의 아내인지 판명하지 못한 채 섬을 떠나게 되었다. 구석 테이블에 파토 (2)와 둘이 앉아 소곤소곤 얘기를 하고 있으면, 파토 (2)의 부인인가 싶고, 암만 기다려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아, 기다리다 못한 손님이 돌아간 일로, 파토 (1)을 향하여 "뭐하고 있는 거야, 당신. 일 좀 제대로 하지 못해요!" 하고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면 파토 (1)의 부인인가 싶기도 하고, 모르겠다. "어느 쪽 부인일 것 같애?" 하고 아내가 묻는다. "글세." 혹 나는 마리자 튀김을 안주삼아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상상력을 발휘한다. "불성실한 파토라리스 (1)쪽이 진짜 파토라리스이고, 저 아줌마의 남편이겠지. 파토 (1)은 원래가 선원이라, 젊은 시절부터 온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자들과 놀기도 잘하여 제법 신나는 인생을 보내 오다가, 해운 불황으로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할 수 없이 처가가 있는 이 섬으로 돌아와, 타베루나를 시작하였다. 부인이 비교적 꼼꼼한 사람이라서, 가게를 시작하려고 돈을 조금 모으기도 하고, 친정에서 돈을 좀 보태주기도 했을 거야, 틀림없이. 그런데 파토 (1)은 애당초 건들건들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좀처럼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가게가 바빠서 한 사람이라도 더 일손이 필요한 때에도 어디론가 훌쩍 놀러 나간다. 그래서 부인이 앞날이 걱정스러워, 친정에 가서는 오빠한테, "오빠, 좀 뭐라고 해, 내가 뭐라고 하면 들은 체도 안하니까."라고 부탁한다. 오빠 쪽도 "알았다, 그럼 내가 한마디 하지." 하고 가게를 찾아가지만, 이 사람도 비교적 마음씨가 좋아, 파토 (1)이 "처남, 설교 같은 건 그만두고, 좀 거들어 줘요. 지금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으니까."라고 선수를 치자, "어, 그런가."하고 그만 거들어 주었다가, 그대로 이럭저럭 육년이나 눌어붙어 있게 되었다-이런 사연이라면 어떨까?" "글쎄요."라고 아내는 의심스럽다는 듯 말한다. 나의 상상력에 그다지 감명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이날은 포도주 한 병과 마리자 튀김을 큰 접시로 곱빼기, 그리크 샐러드와 카라마리(오징어)튀김, 소형 도미 네 마리에 찐 콩을 주문하고, 약 천오백 엔. 그들 세 사람이 어떤 관계이든, 일단은 싸고 맛있는 타베루나이다. 이 가게 뒤켠에는 밭에 면한 정원이 있어, 따뜻한 계절에는 옥외에서 바다 내음을 맡으며 신선한 생선 요리를 즐길 수도 있다. 쓰는 김에 주변 이야기를 좀 쓰자. '파토라리스의 가게' 옆에는 아나르기로스의 미니 슈퍼마켓이 있다. 미니 슈퍼마켓이라 해봐야 일본의 뒷골목에 있는 구멍가게 정도의 규모로, 거기에 캐비지니 오렌지나 햄이니 치즈니, 맥주, 봉투, 생리대 등등, 자질구레한 것들이 자리가 좁다 하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상표가 어쩌고저쩌고하며 고르는 일은 물론 불가능하지만, 기본적인 생필품은 이곳에 오면 대충 다 구할 수 있다. 하긴 개중에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재직하고 있던 시절부터 팔리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아닐까 싶은 재고도 있으므로, 이 점만큼은 주의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미네랄 워터를 두 병 샀더니, 양쪽 바닥에 파란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나는 식물학에 정통하지 못하므로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밀봉된 미네랄 워터 안에 이끼가 번식하자면 상당한 세월을 요할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가게 안이 어둡다고 해도, 이끼가 낀 줄도 모르고 파는 사람도 파는 사람이다. 내가 항의를 하러 가니 아나르기로스느느 과연 당황하여 바로 새것으로 바꿔주며,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미안합니다. 몰랐어요, 용서하십시오.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아주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별 상관없어요."라고 내가 말하자, "손님 발렌티나를 알고 있죠. 그 여자 내 친구입니다."라고 아나르기로스는 말한다. 그러고는 반갑다는 듯 싱긋 웃는다. 발렌티나는 아무래도 아무나하고도 금방 친구가 되는 모양이다. 파란 이끼 사건 이후, 아나르기로스와 나는 제법 친하게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페더 치즈로 낚시 미끼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도 그이고, 정전이나 날씨에 관한 정보도 대게는 그가 가르쳐 주었다. 그는 상당히 한심한 영어를 구사하고, 나는 상당히 한심한 그리스 어를 구사한다. 따라서 우리의 대화는 장거리 전화 같은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나르기로스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그도 역시 나에게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정직히 말해 한 달 남짓 이 섬에 사는 동안 개인적인 친교에 가까운 교제를 한 상대라고는 이 아나르기로스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렇다고 섬 사람들이 내게 냉담했다는 것은 아니다. 길에서 만나면 생긋 인사도 해주고, 기회가 있으면 그 나름으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다만 이 섬은 쉴 새 없이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인기 관광지가 아니므로, 섬사람들이 외국인을 접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고 영어도 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연히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도 비즈니스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어는 구사하지만, 그 영역에서 조금만이라도 화제가 벗어나면, 더 이상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다물어버리고만다. 내가 좀더 그리스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정이 그렇지 못하니 개인적인 친교를 맺는 선까지는 진전되지 않는다. 게다가-마누라한테도 곧잘 지적당하는 일인데-내게는 끈끈한 개인적 친교를 본능적으로 슬쩍 피하는 경향이 있어, 그것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아나르기로스에 대해서만은, 나는 비교적 순수하게 접할 수가 있었다. 아나르기로스는 마흔 살 전후의 몸집이 작은 남자다. 늘 무언가를 몽상하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고, 얘기를 할 때에는 싱거운 미소를 띤다. 그리스 사람치고는 드물게 목소리가 작고, 느리고 정중한 말투이다. 부지런하기도 하여 아침 여덟시에서 오후 두시까지 가게문을 열어 두고, 저녁에도 세 시간 정도 가게를 연다. 언제나 혼자서 일을 한다. 아마 독신이리라. 가게 안이 어두워, 한가한 때면 아나르기로스는 가게 맞은편 돌담에 걸터앉아, 파토라리스 (2)나 근처 아줌마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가 손님이 오면 예의 미소를 띠며, 도로를 가로질러 가게로 돌아온다. 가게 안에서 이따금 고양이가 잠을 잔다. 이 고양이는 아나르기로스를 파토론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늘 종이 상자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푸푸 코를 골고 있다. 내가 사들일 물건의 목록을 읊으면 아나르기로스는 조용히 복창을 한다. "계란 열 개"-"데카 아브가" "맥주 여섯 병"-"에크시 비레스" "물 한 병"-"에나 네로" "마늘"-"스코르돈"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는 물품을 비닐 주머니에 담아, 메모 용지에 값을 적고는, "사십이, 이십육의 육, 이가 올라가고...." 하고 계산을 한 후, "전부 오백칠십이 도라크마로군요. 펜타코시에스 에브조민다 디오. 이게 계란이고, 이게 맥주고...." 하고 일일이 가격을 내게 가르쳐 준다. 친절하여 알기 쉽다. 섬을 떠날 때에 기념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카메라에 흥미가 있는지, "그 카메라 좋군요. 으음, 미놀타로군. 신제품인가요?" 등등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일본에서 사면 얼마나 하냐고 묻기에 가격을 가르쳐 주니, "그리스에선 이런 물건, 세금이 워낙 비싸서, 여기서 사면 두 배나 줘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사고 싶어도 못 사겠는 걸."이라고 한다. 카메라가 몹시 탐나는 모양이지만, 나도 직무상 사용하고 있는 것이니 넘겨줄 수도 없다. 더구나 외국인이 그리스 내에 반입한 기기류를 팔거나 선물하는 것은 위법인 것이다. 아나르기로스의 가게를 지나 조금 걸어가면 해안이다. 해안에는 자그마한 무인 교회와 서핑 대여점 건물의 잔해가 있을 뿐이다. 해안 앞에는 기숙사제 학교가 있다. 제법 규모가 큰 이 학교는 학교 건물보다 약간 키가 큰 긴긴 벽으로 빙 둘러싸여 있고, 안은 잠잠하다.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가 보았지만 그 벽 너머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입구에는 무시무시한 수위실이 있고, 수위의 모습도 보이고 하니까, 폐쇄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벽 안에는 학생이 있고, 수업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이 학교는 영국의 퍼블릭 수쿨 제도에 갚은 감명을 받은 그리스의 어떤 부호가, 그 제도를 그리스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전전에 창설한 학교로, 그리스의 엘리트 자제가 도시를 떠나 여기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는다, 고 섬의 가이드 북에 설명되어 있다. 교사도 외국인이 많고, 젊은 날의 존 파울수(컬렉터의 저자)도 여기에서 영어 선생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마술사란 소설 속에서 이 그리스제 퍼블릭 스쿨의 억지로 갖다 맞춘 듯한 스노브함을 상당히 시니컬하고 비난하고 있으므로 관심이 있는 분은 읽어보십시오. 스페체스 섬이 무대를 이루고 있고, 이 섬의 연혁도 중요한 배경으로 묘사되고 있다. 소설의 한 주인공인, 섬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는 수수께끼의 부호는 실재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소설 자체도 꽤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고, 허와 실이 반전 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 텔링의 절묘함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단 파울스의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이, 약간은 전체적인 밸런스가 안 좋고, 군데군데 소설적 도구의 엄격함에는 그만 기가 질리고 만다. 그 파울스의 소설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섬으로 관광 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영국인이다. 저녁 식사를 끝내면 밖은 새까만 어둠이다. 나는 거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아내는 일기를 쓰거나 친구에게 편지를 쓰건, 가계부 정리를 하건, "아-아, 나이 먹고 싶지 않아."라는 등 영문을 알 수 없는 불평을 내ㅂ기도 한다. 추운 밤에는 난로에 불을 지핀다. 난로의 불을 바라보며 멍하고 있으면, 시간은 조용히 그리고 기분 좋게 지나간다. 전화도 걸려 오지 않고, 마감날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눈앞에서 타닥타닥하고 불꽃이 될 뿐이다. 기분 좋은 침묵이 사방에 가득하다. 포도주를 한 병 비우고, 위스키를 한 잔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슬슬 잠이 온다. 시계를 보니 이제 열시다. 그러고는 그대로 푸근하게 잠으로 미끄러진다. 뭔가를 열심히 한 듯한 하루 같기도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듯한 하루 같기도 하다. 폭풍우 가이드 북에 의하면, 스페체스 섬의 연평균 강우량은 약 사백 밀리, 일년 삼백육십오 일 중 삼백 일은 비가 오지 않고, 비가 오는 것은 십일월에서 사월에 걸친 기간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물론 이 수치는, 가이드 북에도 부연 설명되어 있듯, approximation(기산)이며, statistics(평균 통계치)이며, it depends(때와 경우에 따름)이다. 그러나 아무리 it depends라 해도, 스페체스 섬의 시월 후반 날씨는 너무 혹독했다. 아직 그렇게 많은 비가 내릴 때가 아닌 시월 후반의 십육 일중 팔일간이 비, 그 중 사일이 실로 폭풍우에 가까운 날씨였다. 우량이 어림잡아 이백 밀리는 족히 됐을 것이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우리의 거짓 없는 실감이다. 대체 누가 폭풍우가 몰아치리라는 걸 예상하면서 그리스의 섬에 온단 말인가. 에게 해에 폭풍우가 잦다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나는 이 섬으로 오는 수중익선 속에서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자를 막 읽은 참이었다. 아테네 "...우선 제우스가, 하늘에 구름을 몰아오는 돌풍을 일으키고, 비와 싸라기눈을 차축도 떠내려보낼 수 있을 만큼 뿌리겠죠. 제우스의 번개의 불을 빌려, 그리스 배를 불태워버린다는 약속도 이미 하여 두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은 포세이돈, 당신이 아이가이오스(에게) 바다로 하여금, 노도로 용솟음치게 하고, 소용돌이로 미치게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거예요...." 포세이돈 "알았다. 내가 힘을 빌려주기로 약속을 했으니,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없어. 아이가이오스, 바다를 들끓게 하여, 미코노스의 해변, 데로스의 바위, 그리고 또 스큐로스, 렘노스의 섬들, 카페레우스 곶 주변을 죽은 자의 잔해로 덮게 해주지...." -치쿠마문고 '에우리피데스' 상 이렇게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영화 '나바론 요새'에도 폭풍우는 등장한다. 영화 '그리스 인 조르바'의 첫 장면도 아마 비가 쏟아지는 피레에프스였다고 기억한다. 그렇다, 물론 그리스에도 폭퐁우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설마 내 자신이 에게 해에서 폭풍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도구라고는, 일본을 떠날 때, 혹 비가 오는 날도 있을 테니 하고 가지고온 부서져가는 소형 우산 하나뿐이었고, 그나마 어디에다 잊어먹고 왔다. 그런데 거기에다-우산 하나 없는 인간의 머리 위에다-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모진 폭퐁우가 몰아닥친 것이다. 폭풍우가 닥쳐 오리란 것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알고 있었다면 아무리 맹한 우리라지만 그 나름의 준비는 했을 것이다. 비상용 식료품을 사들이고, 초를 마련해 두고, 우산을 점검하여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집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신문도 보지 않으니, 아무 정보도 들어오지 않는다. 단 그 전날 옆집에 사는 하리스 씨가 찾아와 영어로 "미스터 무라카미, 내일 비가 온답니다."라고 전해준 일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내내 비가 내렸으므로 "흐응, 또 비야."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다음 친철하고 붙임성 좋은 미망인 아줌마를 길에서 만난 때에도, 그녀가 한껏 양손을 들어올려 "사 브레쿠사 아비리오, 사 브레쿠사(내일 비가 온대요, 비)." 하고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은 어째 날씨 얘기가 많은 날이군."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가르쳐 주었는데, 그야 물론 내가 부주의했던 건지도 모른다. 분위기상 좀 이상하군 하고 눈치를 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한마디 '폭우'라고 말해주었으면 좋지 않았는가 하고, 내일 비가 온다는 말을 들은 정도로, 설마 폭풍우가 몰아닥치리란 상상을 할 리가 있겠는가. 비는 그 총구를 들은 날(시월 이십칠일)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폭풍우의 전야제 같은 간결하고 세찬 비였다. 불운이란 반드시 그 전조를 보이는 법인데, 지금 생각하면 이 비가 실은 전조였던 것이다. 낮잠을 자고 있으려니 갑자기 비가 무지하게 쏟아지기 시작하여,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온 집안 바닥이 물 천지였다. 어째서 세찬 비가 쏟아지면 집안이 물바다가 되는가? 집의 바닥과 바깥의 발코니가 똑같은 높이이고, 게다가 그 사이에 문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큰비가 내리면 집안이 온통 물바다가 된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문턱을 만들지 않는가?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무튼 우리는 투덜투덜 불만을 터뜨리며 걸레니 낡은 헤럴드 트리뷴이니 하는 것으로 바닥의 물을 닦아냈다. 그러자 한 시간 정도 지나 비가 싹 걷히고, 하늘이 갰다. 따라서 설마 이 비가 폭우의 전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도 불운의 전조가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나중에서야 "아아, 그게 그거였었구나." 하고 깨닫지만, 이미 그때는 한 발 늦은 것이다. 우리는 저녁 나절 마을로 나가 패스트 푸드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그러고 나서 티타니아 극장으로 로베르 앙리코의 영화를 보러 갔다. 한 유대인이 온갖 종류의 불운을 다 겪는다는 극단적으로 음울한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는 집으로 돌아가, 백포도주를 마시고 잤다. 그 이튿날 본격적인 폭우가 우리를 정복하였다. 이 시월 이십팔일은 '오히 데이(거부의 날)'라 하여 그리스 인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축일이다. 아마도 그리스가 나치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날이던가 뭐 그 비슷한 날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다. 좌우지간 축일이고, 여러 가지 행사와 퍼레이드가 행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북적대는 사람들과 행사의 사진을 찍으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런 가슴 부푼 기대감은 이른 아침 천둥 소리와 함께 깡그리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럴 만큼 굉장한 천둥 번개였다. 나는 그리스가 혹시 제3차 대전에 참전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우르르 콰-앙 쾅하는 굉음이 마치 함포사격처럼 계속되었고, 그것이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찌직찌직 하고 공기를 찢으며, 세계의 종말을 고하는 불기둥처럼 번개가 사방에 직립하였다. 이렇게 격렬한 번개를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머리맡에 있는 시계의 바늘은 여섯시에 못 미쳐 있었다. 밖은 아직 어둡고, 천둥번개 소리에 섞여 세찬 빗소리가 들린다. 할 수 없이 일어나 문과 창틀에 헤럴드 트리뷴을 끼워 넣어, 물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나자 커피를 끓여 아내와 함께 마셨다. 이삼 초 간격으로 광광하는 소리가 들리고, 섬광이 방안을 창백하게 물들인다. 때로는 땅거죽을 거대한 손이 짓뜯어내는 것 같은 빠지직빠지직하는 소리도 들린다. 섬광이 번쩍이면 우리는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이건 마치 폭풍이로군."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고는 커피를 홀짝이며 일기에 이렇게 메모를 한다. '오전 여섯시 전에 기상, 뇌우, 거의 폭풍우 같은 날씨'라고 한심하긴, 나는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게 진짜 태풍이라는 걸 몰랐다. 그 뇌우가 어느 정도 오해 지속되었는지, 일기를 훑어보아도 정확한 기술은 없다. 도무지가 대충대충인 일기이다. 다만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수의 번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그러니까 상당 기간 지속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옛날옛날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사대 드라마-세기의 대결'이란 게 있었는데, 소란함과 집요함에 있어서는 그에 필적할 정도의 천둥번개였다. 천둥번개가 그치고 나서도 비는 쉴 새 없이 내렸다. 우산이 없는 신세라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식료품도 웬만큼 있고 뭐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단념한 후 하루종일 책상 머리에 앉아 일을 하였다. 아직 어두워지기 전인 저녁 나절에 뒤켠에서 뭐가 무너져 내리는 듯 콰르르르하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덧문을 열어 보니, 뒷집의 과수원 돌담이 송두리째 도려낸 것처럼 무너져 있고, 그 주위로 노란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간단하게 돌담이 무너진다 싶었다. 이윽고 이틀째 날이 저물고, 또 천둥이 쾅쾅 울리기 시작한다.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이 눅눅하고 차갑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여전히 천둥 번개는 끊이지 않았다. 그것도 전날보다 훨씬 더 굉장하다. 단순히 천둥이 울리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굉장하다. 단순히 울리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확실하게 우리들이 사는 대지에 꽂혀, 산을 요동시키고, 거목을 뽑아 내던지고, 천공을 짓찢고 있는 것이다. 과연 제우스 자신이 출전하여 두꺼운 번개 화살을 대지에 씽씽 쏘고 있는 듯한 박력이다. 아하, 그리스극이란 실제로 그리스에 와 보지 않으면 실감할 수 없는 부분이 있구나 하고 감탄을 하였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게제가 아니다. 물이 또다시 바닥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문 아래 끼워 두었던 신문은 이미 더 이상 물을 빨아들일 수 없는 수준까지 푹 젖어 있지만, 그 이상은 남아 돌아가는 신문도 없다. 그런데도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월 이십구일 오전 다섯시,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나도 이것이 진짜 태풍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나 어째서 이런 시기에 태풍이 몰아닥친단 말인가? 게다가 우산도 먹을 것도 변변히 없는데. 집에 남아 있는 식품은 쌀 조금, 스파게티 한 끼분, 토마토, 오이, 양파, 양송이 버섯 통조림, 커피 정도이다. 오늘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지만 내일이 되면 좀 불안하다. 그런데다 정전이 되거나 단수가 된다면 절망적이다. 쌀도 스파게티도 날 것을 씹어먹을 수는 없을 테고, 미네랄 워터도 한 병밖에 없다. "괜찮을까, 먹을 게 이 정도밖에 없어서." 하고 아내는 걱정스러운 듯 말한다. "걱정마, 괜찮을 테니."라고 나는 말한다. "아무리 심한 폭풍우라도, 도중에 반짝 비가 그치는 순간이 반드시 있으니까. 휴식 시간처럼 말이야. 그때 잽싸게 아나르기로스의 가게에 뛰어가서 식료품을 사 올테니까. 그한테서 폭풍우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테고." "정말 그런 식으로 비가 그칠까?" "틀림없이 그친다니까. 나는 간사이에서 자란 몸이라 태풍의 구조에는 제법 정통해 있거든." "만약 일본의 태풍과 그리스의 태풍이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면 당신 말이 맞겠죠."라고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녀는 세속적인 영역에 대한 나의 능력을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예언한 대로, 점심 전에 돌연 비가 그쳤다. 지금까지의 폭우가 거짓말처럼, 바람도 자고, 구름도 싹 걷혔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쪽에서 이따금 나직한 천둥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태풍의 눈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웅덩이투성이 길을 달려 아나르기로스의 가게로 갔다. 여느 때 걷던 지름길은 강으로 변해 있었다. 아나르기로스의 가게에서 나는 크래커 두 봉지와 캐비지와 감자와 미네랄 워터 두 병과 포도주를 샀다. 아나르기로스는 태풍 따위도 아무 상관없다는 양 평소와 같은 얼굴로 숫자를 종이에 적어 여전히 느긋하게 계산을 한다. "태풍이로군요."라고 나는 말한다. "음, 비가 많이 내렸죠."라고 아나르기로스는 말한다. "내일도 비가 올까요."라고 나는 물어본다. "글세... 올지도 모르고, 안 올지도 모르고...."라고 아나르기로스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때때로 아주 철학적인 발언을 하는데, 그렇다고 일일이 감탄하고 있을 수는 없다. 다시 비가 내리기 전에 집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름의 모양을 보니, 빵집까지 갈 여유는 없을 성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변을 휘돌아보니, 여기저기 돌담이 우수수 무너져 있다. 칠팔 미터 정도에 걸쳐 모조리 없어진 곳도 있다. 너무 심하다 싶다. 과연 상당량의 비가 내렸다. 그렇다고 이 정도의 비로 온 마을의 담이 무너져 내리면 어쩌나 싶은 의혹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거야 무너져 내리는 것이 당연하겠다 싶게 납득이 갔다. 왜 그런가 하면 벽을 쌓은 방식이 심플하다고 할까, 실로 조잡한 것이다. 우선은 돌을 콩콩콩콩 쌓아올리고, 거기에다 진흙 같은 것을 집어 넣어 연결시키고, 그 위에다 두껍게 회를 칠한다. 그러고는 끝이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예쁘지만, 빗물이 대량 스며들면 돌 사이의 결합력이 약해져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나는 건축 공학에는 지극히 무식한 인간이지만, 이 정도는 알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 그런 돌담 얘기를 했더니, 그녀는 "비가 그치면 모두들 힘을 합해 또 똑같은 담을 만들 거예요."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보통은 좀 연구를 하는 법 아니야, 비에 약하다는 걸 알았으니." "당신은 그리스라는 나라를 아직도 모르는 것 아니에요?"라고 아내는 말한다. "그냥 그런 나라라고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흐음, 그런가." "비가 그치면 알게 될 거예요." 십분쯤 후에 다시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포도주를 홀짝거리며 일을 한다. 세시에 한바탕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다섯시에도 한 번, 나는 걸레란 걸레, 신문이란 신문을 다 꺼내서는 문 아래에 끼워 놓았다. 그 덕분에 침수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을 하면서, 어째서 인간은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태풍이니 홍수니 지진이니 분화니 해일이니 기근이니 암이니 치질이니 누진과세니 신경통이니 하는 아무리 헤아려도 끝이 없는 재난이 인생에 충만해 있는데, 거기에다 어째서 전쟁까지 일으켜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그 다음날인 시월 삼십일 정오를 지나서야 간신히 비가 그쳤다. 비가 "아, 이제 지쳤어, 이것으로 끝내야지." 하는 식으로 시원하게 싹 그치고, 하늘을 덮고 있던 검은 구름이 세포 분열이라도 하듯 탁탁 갈라지더니,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구름들을 힘차게 날려보내고, 그 틈으로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 쪽에는 여전히 묵직한 비구름이 저장되어 있어, 아직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양 위엄을 부리고 있었다. 아무튼 마을에 가서 하늘이 개 있는 틈에 우산을 사오도록 해야겠어, 라고 말하고 나는 혼자서 밖으로 나와, 해안을 따라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산에서 흘러내린 토사 탓에, 면직 공장 앞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온 길을 조금 되돌아 산길 쪽으로 걷기로 했다. 태풍은 생각했던 것보다 섬에 큰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군데군데 도로가 푹 패에 있었고, 수목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물론 돌담도 온통 허물어져 있었다. 길에는 인형이니 쓰레기통이니 망가진 의자니 하는 것들이 마치 바자의 뒤끝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리고 뿌리째 떠내려온 분꽃이 강줄기를 따라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이 분꽃이 다리 밑에 걸려 강을 막고, 마을로 탁류를 역류시킨 장본인인 듯했다. 분꽃은 비가 오기 전 바싹 마른 강바닥의 모래 터를 뒤덮을 듯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던 것이다. 강가에 있는 집들에서는 바가지로 집안에 고인 물을 밖으로 퍼내고 빗자루로 남은 물을 쓸어내느라 일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아담한 체구의 아줌마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양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그 재해의 양상을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설명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말이야 글세, 물이 갑자기 밀려들어와서는 참,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라고. 한창 자고 있는 차에 습격을 당했는지, 가구며 카펫이며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그런 집기들을 밖으로 꺼내놓고 호스를 대놓고 씻는 사람도 있다. 아줌마는 아무리 얘기해도 모자라는 모양인지, 다른 동행인을 붙들고는 또 손으로 하늘을 휘젓고 있다. 참 안 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과는 관계없이 하구에 수북이 쌓여 있는 무수한 분꽃의 사체가 묘하게도 생생하고 아름답다. 이렇게 많은 분꽃을 보는 것은 아마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두시가 지나, 태양이 기세등등하게 퉁겨나갈 듯 환한 그 모습을 드러내자, 세상의 온갖 것들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길가의 물 고인 웅덩이에는 구름이 또렷하게 비쳐 있고, 수많은 종류의 새들도 아직도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는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며 재재거리고, 갈매기 두 마리가 포시도니언 호텔의 첨탑에 좌우로 갈라져 머물러 있다. 비를 피해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던 고양이들도, 주린 배를 못 견디겠다는 듯 노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낡은 우산을 몇 개 옆구리에 끼고 우산 고치는 아저씨가 "엄브렐라, 엄브렐라!" 하고 노래하듯 외치며 거리를 지나고 있다. 태풍은 지나간 것이다. 이틀 후에 사람들은 무너져내린 마을의 돌담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물론-아내가 예언한 대로-공법은 이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우리는 인부들이 적당히 돌을 쌓아올리고, 그 사이로 진흙 같은 것을(어쩌면 진흙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시멘트는 아니다) 척척 메워나가는 광경을 길가에서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주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돌담을 쌓고 있었고, 나름으로 정성을 들여 꼼꼼히 일했다. 돌을 쌓는 솜씨는 실로 예술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 작업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루 종일 보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 더구나 마무리를 다 하고 나면 아름답기도 하다. 블록담과 비교하면 구름과 진창 같은 차이다. 큰비만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로 멋들어진 벽이다. "몇 년 후에 또 큰비가 오면."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럼, 또 무너지겠지." "무너지면, 또다시 쌓겠지."라고 아내가 말한다. 그렇다. 그들은 벌써 몇천 년이나 그 일을 계속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도무지 그리스 인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미코노스 미코노스 섬에서 살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미코노스에는 이전에 두 번 간 적이 있다. 아름다운 섬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 미코노스는 지나치게 여 행지적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은 생활할 장소는 아니다. 일을 하기에 는 좀 더 조용하고 차분한 섬이 필요하다. 그곳은 즐기는 장소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미코노스에 한달 반이나 체재하게 되었다. 그 다음 시칠리아에 가기로 결 정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오래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코노스의 레지던스에 나를 소개해 준 사람은, 아테네의 여행 대리점에 근무 하는 잉게라는 이름의 미국 여자이다.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비해서는 꽤 깜찍 하다. 나는 그녀가 일하고 있는 오피스에 가서, 어디 조용한 섬에 가구가 딸려 있는 셋집을 빌리고 싶다고 상담을 하였다. 스페체스 섬의 집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서머 하우스용으로 지은 집이라서 겨울을 지내기에는 너무 추웠다. 매 일 떨면서 지냈다. 장작을 지피는 난로 외에는 난방 설비가 없는 것이다. 땔감을 모으는 일도 힘들었고, 게다가 비가 내리면 나무에 곰팡이까지 슬어 불붙이기도 어렵다. 좀 따뜻한 집에서 살고 집었다. 그런 곳에 계속 있다가는 추워서 너무 추워서 일은 뒷전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만족할 만한 좋은 물건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비수기라서 아파트 같은 것도 찾으면 금방 있으리라고 예상했는데 생각이 좁았다. 관광객을 상대로 단기간 대용하는 주택은 비수기가 되면 거의 문을 닫아버리고 마는 것이 다. 손님이 없는데 문을 열어두어 보았자, 집주인으로서는 일거리만 늘 뿐이다.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없는 셈이다. 나는 난감하여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잉게도 가련히 여겨 적당하다 싶은 장소를 몇 군데 조사해 주었지만, 집주인을 찾을 수조차 없었다. 모두들 일년치 일을 끝내고 한숨을 돌린 후, 어디론가 놀러 간 것이다. 그런데 막판에 잉게가 "그렇지, 거기라면 어떨까? 거기에는 관리인이 일년 내내 있으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저, 미코노스는 어때요? 거기는 틀 림없이 열려 있을 거예요." 미코노스? 뭐 할 수 없지, 이런 상황이니 집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국이다. 잉게가 곧장 전화를 걸어 문의를 해주었다. 오-케이, 침실이 둘에 거실과 부엌 과 목욕탕, 그리고 넓은 베란다도 딸려 있고 전망이 아주 좋다. 집세는 칠만 도 라크마. 나쁜 조건은 아니다. 그곳으로 결정한다. 좌우지간 한 달은 살아보기로 한다. "틀림없이 마음에 들 거예요."라고 잉게가 말했다. "나도 거기에 일주일 정도 머무른 적이 있는데, 조용하고 아주 좋더라구요." 미코노스 섬도 역시 비수기였다. 가게의 삼분의 이는 닫혀 있었다. 그러나 반 대로 말하면 삼분의 일은 열려 있는 것이다. 그 점이 스페체스와 다르다. 제아무 리 비수기라도 미코노스에는 관광객이 조금은 오는 것이다. 그래서 기념품 가게 도 레스토랑도 호텔도 그에 맞추어 몇몇은 영업을 한다. 여름에는 하루에 여섯 척이나 오던 크루즈선도 이틀에 한 척꼴로 줄어든다. 하지만 어찌 됐든 조금은 오니까, 그들을 상대로 장사가 성립하는 것이다. 가을과 겨울에 미코노스에 오는 사람들은 비수기의 싼 요금을 이용하여 여행 하는 북유럽의 연금 생활자이든가(이들은 느긋하고 조용하고 싸게 여행하고 싶 다는 대전제가 있어, 일부러 이 계절에 온다) 아니면 일본인 단체 관광객(신혼이 많다)이다. 그러나 비수기의 미코노스에 와서 과연 즐거운가 하면, 나로서는 역 시 머리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 후의 여행도 합하여 나는 춘하추동 전 시즌에 걸쳐 미코노스를 찾은 적이 있는데, 애써 돈을 지불해 가며 겨울의 미코노스를 찾는다 해도 별 뾰족한 재미는 없지 않은가 싶은 기분이 든다. 물론 이것은 나 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다른 법이니 단정적으로 말할 것 은 못 된다. 아니오, 나는 겨울에 미코노스를 방문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라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미코노스에 사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어째서 일본 사람들은 모두들 십일월, 십이월, 일월의 추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미코노스에 온답니까, 그런 때에 와봐야 별 수없는데, 라고 말이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가을은 일본 사람들에게는 가 장 사랑받는 결혼 시즌이다. 그래서 신혼 부부들이 여기에 오는 것이다. 신혼이 니까 약간은 추워도 상관없지 않겠느냐, 그만하면 마침 적당한 온도다, 라고 말 이다. 그렇게 설명하면 모두들 대개는 수긍을 한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정월 여행이라는 것을 즐긴다. 정초 유럽과 에게 해 무슨무슨 팩 하면, 어감상 아주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분명히 말해 대단한 착각이다. 에게 해는 앞에서도 썼듯 이 괌이나 하와이 같은 봄 여름밖에 없는 섬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 은 에게 해의 섬들은 적도 부근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지리적으로 미코 노스 섬과 도쿄는 거의 비슷한 위도상에 존재한다. 요컨대 누가 뭐라고 하든, 어 떻게 생각하든 겨울에는 역시 춥다. 그리고 미코노스는 바람이 몹시 센 곳이다. 지표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쓰러뜨려 몰아갈 듯 세찬 바람이 분다. 차갑고 습한 바람이다. 한번 불기 시작하면, 최소한 사흘은 강풍이 계속된다. 아침부터 밤까 지, 한시도 쉬지 않고 바람이 불어댄다. 그러고는 온밤 내내 미친 듯한 소리를 내고 요동을 치며,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창문을 덜컹덜컹 울려댄다. 날씨도 나 빠 심심하면 비가 온다. 때로는 눈도 온다. 거리는 비어 휑하다. 물론 해수욕도 즐길 수 없다. 맛있는 요리를 제공하는 레스토랑도 모두 문을 닫는다. 호텔의 종 업원은 일할 의욕이 없어 빈둥거린다. 일부러 그런 곳에 와봐야 추위에 떨 뿐이 다. 실망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놀러 가는 것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여름이 최고이다. 관광객이 너무 많다든지 너무 여행지적이라든가, 호텔은 만원 이고 물가는 비싸고 주민들이 불친절하다 해도, 동네 디스코가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다 해도, 역시 여름의 미코노스는 아주 신나고 즐겁다. 그것은 이미 하 나의 축제인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말해, 그렇듯 지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날씨이기 에 더욱이, 비수기의 미코노스는 내가 조용히 일하기에는 실로 최적의 환경이었 다. 집의 분위기도 좋았고, 달리 할 일도 없고, 집중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C.D.B 브라이언의 '그레이트 데스리프'란 소설의 번역을 빨리 끝 내고 내 일을 하고자 생각했으므로, 매일매일 꾸준히 일했다. 이 무렵에는 아직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 노트에 빼곡하게 글자를 써 내 려갔다. '그레이트 데스리프'를 마지막까지 다 정리하고 나서, 스페체스 섬에서의 생활 에 관한 스케치 비슷한 문장을 쓰고(이 책에 수록된 글의 원형이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설에 착수했다. 그 무렵에는 소설을 쓰고 싶어서 내 몸은 근 질근질 나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 몸이 바싹 메말라 언어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 런 극한적인 상황까지 몸을 '유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장편소설은 그 만큼 절실한 지점에 도달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마라톤 경주와 비슷하여, 그 런 지점까지의 조정에 실패하면 막판에 숨이 막혀 글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소설은 나중에 '노르웨이의 숲'이 되는데, 이 무렵에는 아직 제목도 정해지 지 않았었다. 사백 자 원고지로 삼백 장이나 삼백오십 장 정도의 상큼한 소설로 완성시키려고 가벼운 기분으로 쓰기 시작하였는데, 백 장 정도를 쓴 시점에서 '이래 가지고선 안 되겠어, 도저히 삼사 백 장으로는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 이듬해(1987년) 사월까지 시칠리아, 로마로 옮겨 다니며 소설에 푹 빠진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결국 소설은 구백 장으로 완성되었다. 미코노스의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밤의 바 라이프다. 우리는 날 이 저물면 곧잘 마을로 마시러 갔다. 미코노스의 거리에는 바가 수없이 많았다. 나는 낮에는 혼자 방에 처박혀 일을 하였다. 아내는 그 동안 책을 읽든가, 이탈 리아 어를 공부하든가 양지 바른 곳에서 고양이랑 장난을 치든가 하였다. 대화 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가 기울면 둘이 바에 가서는 술을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나도 술을 마시며 낮 동안에 쌓인 긴장을 풀어둘 필요가 있었 다. 미코노스의 바는 꽤 느낌이 좋다. 그렇게 시골 냄새를 풍기지도 않고 그렇다 고 새침스러운 것도 아니다. 술값도 그런대로 싸다. 시즌중에는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몫 보려고 비싼 가격을 매기는 모양이지만, 시즌이 끝나면 손님은 그 동네 사람들뿐이니까 가격은 평상시대로가 된다. 둘이서 그런대로 마실 만한 칵 테일을 석 잔씩 마시고, 가벼운 안주를 주문하여(약 천 원 남짓이었다고 기억한 다)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가게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세 상 얘기를 하며 지역 정보를 얻는 것도 우리에게는 많지 않은 오락 중의 하나였 다. 내가 즐겨 간 곳은 '모니카 바'와, '미노타우로스 바'와, '소마스 바'였다. 미코노 스의 바는 과당 경쟁으로 심심하면 모양이 바뀌므로, 이 바들도 어쩌면 지금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모니카 바'에서 일하던 프랑스 여인(이름은 잊어버렸다)과 도 곧잘 얘기를 나누었다. 몸집이 작고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아마 나와 비 슷한 세대에 속하는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벌써 미코노스에 산 지가 십몇 년이에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젊은 시절에 훌쩍 프랑스를 떠나 이곳을 방문한 후, 이 섬에 매혹당하여, 그대로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있어요, 라고 그녀는 말 했다. 미코노스에는 이 세대의 유럽 인이 많다. 소위 단카이 세대(제2차 세계대 전 직후 몇 년 간의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세대-역주)인 것이다. 그들은 히피의 후예처럼 서구 사회에서 탈락하여 섬에 그대로 정착해 버린 것 이다. 그리스의 섬에서는 당시 코뮌의 영락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가 당시의 히피들은 섬을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미코노스의 주술에 걸린 것이다. 그녀는 근처의 섬조차 찾은 적이 없 다고 한다. 그녀는 로도스에도 산토리니에도 가본 적이 없다. "나한테는 미코노 스가 있어요, 왜 다른 섬에 가야 한단 말이에요?" '모니카 바'는 모니카라는 독일인 여성이 경영하는 바로, 밤이 되면 이곳은 미 코노스에 사는 외국인 커뮤니티의 집회장 같은 분위기로 변하는 일이 않았다. 모두들 사람이 그리우니까, 밤이 되면 저도 모르게 이곳에 모여 외로움을 달래 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때로는 너무 떠들썩한 것이 이 바의 결점이다(그리고 화장실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것도). 하지만 독일인이 직접 경영하는 만큼, 독 일풍 가정 요리가 아주 맛있다. 추운 날에는 종종 여기에 와서 독일풍의 따뜻한 수프를 마시고, 콩찜을 먹고, 삶은 소시지를 먹었다. '미노타우로스 바' 주인은 영국인 여성과 결혼한 그리스 사람이었다. 이 사람 은 재즈를 좋아하여, 와타나베 사다오의 레코드를 몇 장인가 갖고 있었다. 내가 가면, 그 레코드를 틀어주었다. 시즌이 끝나면 늘 런던에 가서 지낸다고 그는 말 했다. 그런데 올 여름에는 장사가 잘 안되어, 겨울에도 문을 열고 있다고 한다. 그 테러 소동으로 미국인이 별로 오지 않아서 말이야, 라고. 그는 내게 매일 조금씩 그리스 어를 가르쳐 주었다. 아주 차분하고 말수가 적 은 남자였다. 맛으로 하자면 이 바의 칵테일이 가장 맛있었다. 그는 신선한 과일 을 사용하여, 정성스레 칵테일을 만들었다. 안주는 간단한 것밖에 없었지만, 맛 이 나쁘지는 않았다. 실내도 그의 성격처럼, 비교적 조용했다. 그리고 언제나 적 당한 음량으로 소프트한 재즈를 틀어놓았다. '여름에는 확실히 돈을 벌기는 하지 만."이라고 그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여름이 싫어, 미코노스의 여름 이 말이야." 여름에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려. 칠월과 팔월에는 죽고 싶 은 심정이지, 매일 이제 며칠만 지나면 시즌이 끝난다, 하고 손을 꼽으면서 일한 다고, 모두들 그렇지. 모두들 싫어서 죽겠다고들 말이야. 하지만 달리 살 길이 없으니까 일을 하는 거야. 이런 계절이 훨씬 더 좋아요. 이게 진짜 생활이라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고개를 젖는다. 관광업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잇기가 어려운 그리스 사람들의 고뇌가 그의 말에 스며 있다. '소마스 바'는 상당히 끼가 있는 바였다. 소마스는 터키 출신이지만 키프로스 분쟁 때 이스탄불에서 쫓겨나(터키 정부가 그리스 주민을 강제 이송한 것이다), 거의 무일푼으로 그리스에 이주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왕왕 그렇듯, 그는 정부에 대해서는 몹시 시니컬하고, 개인주의적이었다. 키는 크지 않지만, 사뭇 공격적인 얼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6개 국어를 마스터했다. 여러 군데의 바와 호텔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그리하여 작년 미코노스에서 바를 사들였다. '제트 세트 바'가 그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소마스 바'라 고 이름을 바꿀 겁니다. 일월에 아테네에 가서 잔금을 지불하면 완전히 내 바가 되니까 말입니다. 새 간판도 벌써 주문해 놓았죠."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그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시즌이 끝난 지금에도 가게 문을 열어놓고 있 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일본어 공부도 하고 있었다. 아마 요즘 들어 부쩍 늘어 난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물론 스페체스 섬에서는 일본인 관광객이라곤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그가 공부하는 일본어 교과서를 들여다보 니, 그게 또 조잡스럽기 짝이 없는 엉터리였다. 내가 히라가나와 가다카나를 구 별하여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브랜디를 공짜로 대접해 주었다. 소마스는 어딘가 모르게 인상이 어두운 사나이였다. 성격적으로 비뚤어진 구 석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신용하지 않으니까 그렇게들 알아,란 분위기가 있었 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바를 방문하여 술을 마셨다. 소마스란 사나이에게는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일면이 있었고, 말솜씨도 제법이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선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선거 때에는 술을 팔면 안 된다면서요, 라고 내가 물어보았다. 그래 가지고서야 장사가 안 되지 않겠느냐고, 아니죠, 홍차라고 하 고서는, 홍차 잔에 브랜디를 넣어 팔죠, 라고 그는 말했다. 이 근처에 있는 바는 그런 수법으로 브랜디를 두 박스나 팔아먹었다고요. 경 찰관도 그걸 마시러 오는데요, 홍차를 달라고 말이에요, 물론 돈을 내는 법은 없 죠, 라고 말하고 그는 웃었다. 슬쩍 눈감아 주는 대신으로요. "그리스 사람들은 정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그저 흥분할 따름이죠. 아무것도 모 르는 주제에 말이에요."라며 그는 아주 시니컬하게 웃었다. "경관으로 하자면 말이죠, 이 미코노스에서 이런 가게를 하려면 면허가 필요하 거든요. 그렇지만 면허증을 보여 달라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경관이 란 작자들이 그저 가게에 불쑥 나타나서는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에요, 술만 먹여 놓으면, 아무 잔소리도 하지 않거든요. 모두들 그런 줄 알고 있 지만, 어쩔 도리가 없죠." 그러나 그의 고향인 이스탄불 얘기를 할 때만은, 그는 아주 순수한 얼굴을 하 였다. 이스탄불의 생선이 얼마나 맛있는지, 거기서 보낸 어린 시절이 얼마나 좋 았는지, 그곳에서 쫓겨날 때 얼마나 슬펐는지. 소마스의 가게에서 한 번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아저씨를 만났다. 그 는 카운터에서 술을 마시며 소마스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키가 크고, 허리는 약간 구부정하고,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남자였다. 그는 나를 향하여 일본인이 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아저씨는 술잔을 손에 쥐고 긴 이야기 를 시작했다. 그는 옛날에 선박 회사의 사원으로 일본에 주재했었다. 1960년대 전반의 일이 다. 그는 가마쿠라의 대불상을 보러 가는 도중에, 어떤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 다. 한눈에 반한다는 그거였어, 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참을 수 없어서 그녀에 게 말을 걸었다. 대불상을 보러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면 좋겠습니까, 하고. 그녀 는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그것을 인연으로 사이가 좋아졌다. 그들은 몇 번 데이트를 하였다. 그리고 진심으로 결혼을 생각하는 단 계에까지 갔다. 고 그는 말한다. 지금 그는 오십대 후반쯤일 것이다. 얼굴도 못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결혼하지 않았어, 라고 그는 말한다. 상대방 부모님도 만나, 서 로 얘기를 했지. 좋은 사람들이었어. 그러나 현실적으로 막상 결혼을 하려고 하 니까,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가 생기더군.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말이야. 하지만 물론 그 당시에는 괴롭더군. 나도 젊었으니까 말이지, 그 시절에 는 그런 마음의 상처를 안은 채 일본을 떠나게 된거야. 지금은 이미 회사를 그만두었어. 해운업이 불황을 겪고 있으니 말이지. 그래서 이 고향 미코노스로 돌아와 일을 하고 있지. 뭐니뭐니 해도 자기가 태어난 고향 이 제일 좋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여름은 좀 너무해, 응, 여름은 최악이야. 무엇보다 여름이 되면, 섬의 인구가 겨울의 다섯 배 정도로 늘어나는데다, 다섯 배라고, 그만큼 인구가 늘어 나면, 모든 것이 모자라. 전기며 식료품이며, 물까지 모자라지. 할 수 없이 근처 섬에서 물을 사오지. 탱크에 물을 저장하여 운반해 온다고. 그러니까 당연히 물가가 올라가. 여름이 되면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모두 값이 비싸져서, 관광업으로 밥을 먹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주민들 은 모두 화를 낸다고. 외국인 관광객들은 이제 넌덜머리가 나. 당연하지. 겨울이 좋아, 조용하고, 여름 한철에 돈을 번 사람들 대부분이 그 돈으로 미코노스의 교 외에 큰 집을 세우지. 그리고 겨울 동안을 거기서 비디오를 보거나 하면서 한가 롭게 지낸다고. 모두들 부자니까 말이야. 미코노스에서 나는 일본에 있었다는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났다. 대개는 화물선 의 선원이었다. 그리고 한국 동란 때 일본에 있었다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그리 스는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군사를 파병했었다). 그 선원들은 일본의 소형 항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나이는 상당히 먹었지만, 아직도 단단한 체격이었고, 지금도 햇볕에 탄 거뭇거뭇한 얼굴 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붙잡고는 종종 일본 얘기를 하였다. 해운 불황과 함께 배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버스 차장을 하거나, 레스토랑을 경영하 거나, 조그만 잡화점을 열거나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옛날 배에서 지냈던 나날 들을, 마치 잃어버린 청춘을 아쉬워하듯 소중하게 얘기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보면 내게도 그때가 아주 좋은 시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배를 타면 어 떤 곳이든 갈 수 있었던 시대. 원하기만 하면 그런 일들을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었던 시대. 하지만 이미 그런 시대는 가고 없는 것이다. 저 스페체스 섬의 상선대가 기선 시대의 도래와 함께 몰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항구와 방겔리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우리는 제일 먼저 창문을 열고 바다를 보았다. 운 좋게 도 침실 창문으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다가 잔잔하고, 하얀 파도가 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항구까지 생선을 사러 갔다. 바다가 거칠면, 거의 대 부분의 배가 바다로 나가지 않는다. 따라서 물고기도 잡히지 않는다. 날씨가 좋 은 날에만 생선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식생활은 자연히 날씨에 좌지우지되었다. 그만큼 날씨가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이른 아침에 출어한 배들이 아홉시 전에는 거의 돌아와 항구 앞에서 막 잡아들인 물고기를 늘어놓고 판다. 항구 일각에 대리석으로 만든(이 주변에는 대리석이 많아서, 사소한 것이라도 대리석으로 만든다) 생선을 늘어놓 는 평상 같은 것이 있어, 거기에 색깔도 알록달록, 크기도 저마다 다른 생선이 즐비하게 진열된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며 관광객들이며 고양이며 개들이 그 주변으로 일시에 몰려든다. 물론 신선하니까 맛은 있지만, 가격은 결코 싸지 않 다. 지중해 연안 어느 곳이든 대부분이 그렇지만 육류에 비하면 생선이 월등하 게 고급품이다. 언뜻 보기에도 멋들어진 생선은 레스토랑의 주인임직한 사람이 영업용으로 일괄하여 사간다. 마을의 보통 아줌마들은 반찬용으로 별 신통치 않 은 작은 것을 골라 사간다. 그렇게 항구에 진열된 생선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 팔리고 만다. 팔 거리도 못되는 잡어는, 어부들이 항구에 어슬렁거리는 펠리컨이 나 고양이에게 던져 준다. 펠리컨이 소리를 지르며 고양이를 위협한다. 마을에는 생선가게라는 것이 한 채도 존재하지 않는다. 냉동 생선을 파는 가 게가 한 채 있기는 한데, 그 집은 정확하게는 냉동 가게지 생선 가게라 할 수 없다. 항구에서 어부 자신이 잡아들인 생선을 스스로 팔고, 그것이 다 팔리면 그 것으로 끝이다. 그러니까 이삼십분 정도의 '생선 파는 시간'을 놓치면, 생선을 먹 을 수 없다. 처음에는 생선 사는 요령을 터득하지 못해, 제대로 생선을 사지 못 했다. 우리는 이 난전에서 곧잘 오징어(카라마리라고 한다. 몽고 오징어는 스피아)를 샀다. 이곳의 오징어는 부드럽고, 살살 녹을 듯 맛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오징 어를 대개 구워서 먹지만, 우리는 도무지 아까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회를 친다. 때로는 생선초밥을 만들어서 먹기도 했다. 날에 따라 다르지만 오징어는 대략 칠백 엔 정도 하였다. 그리스의 물가에 비하면 꽤 비싼 가격이다. 그리고 아지를 닮은 생선(사브리지라고 한다)을 사서 식초에 절여 먹거나 구워먹었다. 이 생선은 생긴 모습은 대형 아지 같지만, 맛은 고등어의 풍미가 가미되어 있는 신기한 생선이다. 이 생선은 그리 쉽사리 걸려들지 않는다. 송형 도미(시나그리 자, 또는 리스리니)는 찌든가, 아니면 양파와 함께 소티로 만들어 먹었다. 그밖에 아나고에 갈치에 넙치에 꼬치 고기에, 실로 다양한 생선이 있었다. 어찌된 셈인 지 꼬치 고기는 아오야마의 기노쿠니에 뒤지지 않을 만큼 비쌌다. 그 외에 본 적도 없는 생선도 있거니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생선도 있었다. 스콜피오라는 가시가 잔뜩 돋은 생선을 잡턍식으로 끓이면 맛있다는 말을 듣고 시도를 해보았 는데, 과연 상당히 맛있었다. 그러나 복과 비슷하게 혀 끝에 약간 따끔한 감촉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배탈이 났다. 일주일에 나흘 정도는 바다가 거칠었다. 창문으로 보면, 큼직한 파도가 영화관 의 스크린처럼 곶의 돌출부에 있는 바위에 부딪혀, 십 미터 정도 위에까지 물방 울을 튀겼다. 끝없이 하얀 파도로 바다가 뒤덮여 있다. 그리고 J. G. 발라드적으 로 폴력적인 바람이 휘몰아친다. 물론 어선은 출항하지 않는다. 창문에서 보면 배는 항구 안에 계류된 채, 흔들흔들 파도에 범주가 흔들리고 있다. 갈매기들만 상쾌하다는 듯 바람을 가르며 날아다니고 있다. 그런 날이 사나흘 계속되고 나면(때로는 일주일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그 다 음은 날씨가 싹 바뀌어 잠잠한 아침이 찾아왔다. 해면은 거울처럼 평평하고, 파 도 하나 일지 않는다. 그런 아침에는 서둘러 우리는 세수를 하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는, 시장 바구니를 들고 항구로 달력갔다. 그러고는 며칠치 생선을 사들였 다. 아줌마들과 레스토랑의 주인들에 섞여, 이건 얼마요, 저건 얼마요, 이건 비싸 다는 둥 싸게 하라는 둥, 와와 소리를 지르며 흥정을 하였다. 항구에 진열된 생 선 중에 좋은 것이 없으면, 항구로 새로이 들어오는 배를 기다려, 제일 먼저 어 부와 교섭을 하여 사들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나의 그리스 어 실력 은 여행중에 그다지 진보하지 않았지만, 생선을 사기 위한 그리스 어만큼은 아 주 실질적으로 훈련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육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반드시 생선이 필요 했다. 그리스 요리는 꽤 맛있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 일본 사람이 장기적으로 먹기에는 아무래도 체질적인 한계가 있었다. 기름 기가 많고 향료를 많이 쓰기 때문에 자극적이기도 하고 오래도록 먹이 있으면 알게 모르게 몸에 기름이 낀다. 몸에 기름이 낀다는 것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잘 모를지 모르겠으나 상당히 거북한 일이다. 내 경험으로(경험뿐이지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일본인의 몸은 상당량의 지방을 섭취하고 분해할 수 있도록 만들 어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 분해시키지 못한 기름이 체내에 쌓이는 것이다. 기름이 끼면, 몸이 어쩐지 무거워지고, 근육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식욕도 감퇴한다. 피부가 거칠어진다. 머리카락이 진득해진다. 땀 냄새도 변한다. 사태가 이런 지경에 이르면, 사나흘 '기름기 빼기' 작전을 실행한다. 기름기가 있는 음식을 일절 먹지 않는 것이다. 외식을 금하고, 하루 두끼로 식사량을 줄 인다. 밥을 지어, 된장국을 끓이고, 식초에 절인 음식을 듬뿍 먹는다. 단백질원으 로는 생선을 먹는다. 그것도 기름을 사용하지 않고 구운 생선이 좋다. 살짝 레몬 을 뿌리고, 간장에 찍어 먹는다. 생선을 구울 때에는 레지던스의 관리인인 방겔 리스에게서 빌린 풍로와 석쇠로 구웠다. 나는 그때까지 유럽인들이 풍로를 사용 하여 생선을 구워 먹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방겔리스가 그 풍로와 석쇠를 사용하여 관리인실 앞에서 오래된 빵을 굽는 것을 보고, "그걸로 생선을 구울 수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물론 구울 순 았죠."라고 그는 말해. 그 래서 나는 그에게 그 풍로(그리스 어로는 스카라라고 한다)를 빌려, 케라스에서 아지를 구워보았다. 부엌 레인지는 전열식이라서, 이것이 없으면 생선을 구울 수 가 없다. 연료는 유감스럽게도 숯이 아니라 조각 나무이지만, 그래도 오래간만에 먹는 아지 소금구이는 감동적일 만큼 맛있었다. 무엇보다 냄새가 좋다. 연기가 콧구멍에서 뇌 속으로 찡하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포가 점점 요동을 한다. 생선을 굽고 있자니 방게리스가 다가와, "생선은 이렇게 굽는 게 가장 맛이죠, 독일 사람이나 프랑스 사람은 생선 먹을 줄을 몰라."라고 우쭐하며 말했다. 근처 의 고양이들도 냄새를 맡고는 슬렁슬렁 모여들었다. 온 세계의 생선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 와세다의 아나하치만 언덕길 아래에 반찬으로 구운 생선만을 파는 정식집이 있었어, 앞을 지나가다 보면 늘 이런 냄새가 났지, 하고 문득 오핸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마리자라는 것을 먹었다. 이 생선은 생선 중에서도 가장 싼 부류에 속한다. 크기는 대개 사 센티미터에서 육 센티미터 정도의 조그만 물 고기인데, 사발 한가득에 밸 엔이면 살 수 있다. 이것을 사와서는 깨끗하게 씻어 기름에 튀긴다. 그러고는 머리까지 아삭아삭 씹어먹는다. 잔뼈가 걸려 많이 먹으 면 제법 피곤해지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칼슘도 풍부하고(유럽에 있으면 의 외로 칼슘이 부족하기 쉽다) 그런대로 소박한 맛이 나는 요리다. 우리는 이걸 레 티나 와인의 안주로 곧잘 먹었다. 진짜 서민 요리라서, 레스토랑에서도 이 요리 를 테이블에 올려놓는 경우는, 손님이 그 지방 사람일 때뿐이다. 그러니까 관광 객을 상대하는 레스토랑의 메뉴에서는 볼 수 없는 요리이다. 생선 얘기만 해서 죄송스럽지만, 문어도 자주 먹었다. 지중해의 문어는 제법 맛이 있다. 문어는 막 사오면 딱딱하므로 처마 밑에 매달아 말린다. 그렇게 말리 면 다음 날에는 심이 빠져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모두 문어를 이런 식으로 해서 먹는다. 어부는 문어를 잡으면, 산채로 다리를 잡고 콘크리트 에 탁탁 내쳐서는 부드럽게 해둔다. 문어의 몸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 이겠지만, 뭐 다 그런 게 세상의 이치이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러고는 문어를 베 란다나 그런 곳에 걸어 하루 온종일 말리는 것이다. 이 두 단계를 거쳐야 문어 는 비로소 식용으로 적합한 상태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말린 것을 풍로에 구워 간장과 레몬을 뿌려 먹었다. 아주 맛있다. 단 문어를 말리고 있으면 동네 고양이 들이 몇 마리나 모여들어, 그 문어를 원망스럽다는 듯 지그시 올려다본다. 그리 고 닿을 리가 만무한데 폴짝폴짝 뛰어올라 보기도 한다. 고양이들도 배가 고픈 것이다.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꽤나 안됐다 싶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파리가 꼬인다. 처음에는 그 파리들이 몹시 신경에 거슬렸지만, 얼마 지나자 파리야, 꼬 여들고 싶으면 얼마든지 꼬여들어봐라 하고 무심해졌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 지는 것이다. 어차피 구워 먹을 것이고, 파리가 꼬인다고 맛이 달라질 리도 없으 니 말이다. 항구에서 방겔리스와 우연히 마주치곤 했다. 방겔리스는 아침 나절 항구를 어 슬렁거리는 것이 취미인 것이다. 무슨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슬렁거리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그와 마찬가지로 어슬렁거리고 있는 친구에게 인사 를 하거나, 생선전이 열리고 있으면 그곳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아니면 펠리컨을 놀려 주거나 할 뿐이다. 항구는 섬 사람들의 사교장 같은 곳이다. 우리가 생선을 사면, 그는 "어디 좀 보여줘 봐요, 하루키."라며 그 자리에서 내장을 빼주기도 했 다. 바다에 들어가 군용 나이프를 사용하여 솜씨 좋게 생선의 아가미를 잘라내고, 배를 가르고, 껍질을 벗겨 바닷물에 씻는다. 비늘도 벗겨 주었다. 그러고는 이 생선은 이렇게 요리하는 게 맛있어요, 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방겔리스는 요리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가끔은 나와 아내에게 카페에서 커리를 사주기 도 했다. 방겔리스는 벌써 육십에 가까운 조르바계 그리스 인이다. 영어는 전혀 할 줄 모른다. 덩치가 크고, 턱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있다. 붙임성이 좋고 친절한 사나이라, 우리는 곧장 방겔리스와 사이가 좋아졌다. 우리 외에 머무르는 사람이 라고는 하나 없어, 방겔리스도 상당히 따분했던 것이다. 우리가 생활한 곳은 담으로 둘러싸인 이른바 연립 주택이다. 넓은 부지에 이 층짜리 아름다운 순백색의 건물이 이십에서 삼십 동 정도 배치되어 있다. 한 동 에는 메조네트 타입의 아파트가 둘 들어 있다. 그 건물을 사들인 사람이 각기 자기가 쓰든지 빌려주든지 하는 것이다. 부지 내에는 칸이 좁은 계단이 많고, 도 처에 원색의 아름다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전체의 구성은 미코노스의 거리를 모방하여 미로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통로도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다. 설 계가 실로 꼼꼼하게 이루어져 있고, 그리스에 있는 이런 유의 건축물치고는 예 외적일 만큼 세세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만들어져 있다. 지붕에는 미코노스 특유 의 조그만 비둘기 집을 모방한 것이 붙어 있다. 바람이 세서 조깅을 할 수 없는 날에는(바람에 앞이 막혀 제대로 달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로), 나는 이 연립 주택 내 부지를 달렸다. 그만큼 넓다. 계단이 많아, 오르내르기 연습에 많은 도 움이 되었다. 현관 옆에는 관리인실이 있다. 방겔리스는 대개 이 관리인실에 두 마리 카나 리아와 함께 있다. 여기에 없을 때에는, 풀장 청소를 하든가, 꽃을 손질하든가, 쓰레기를 모으거나 한다. 관리인실에는 조그만 부엌이 딸려 있어, 내 모습을 발 견하면 "어이, 하루키, 커피 마시고 가요."라고 소리치며, 손잡이가 달린 작은 냄 비에다 물을 끓여 예의 끈적하고 달착지근한 그리스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그 러고는 커피를 마시며 사전을 들춰가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한다. 방겔리스는 전쟁 전에는 피레에프스에서 빵집을 경영했다고 한다. 선원으로 여러 것을 돌아 다니기도 했다. 배를 떠나서는 여러 가지 일을 하였지만, 여기에 온 것은 T씨의 권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T씨는 이 연립 주택을 설계한 건축가이다. 그 리고 또 이 연립주택의 총괄적인 오너이기도 하다. 그가 방겔리스에게 여기에 와서 관리인을 하지 않겠느냐, 고 제안한 것이다. 방겔리스는 가족을 데리고 이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칠 년 전 일이다. 여름에는 물론 방겔리스도 바쁘다. 바쁜 정가가 아니지, 라고 본인은 말한다. 말뿐만 아니라,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아아 여름은 싫어, 란 표정을 짓는다. 여 름에는 내 딸이 거들어주러 와요, 딸내미는 영어를 할 줄 아니까 말이야, 외국인 손님을 상대하지. 방겔리스는 바보, 영어도 못하고, 독일어도 못하고, 안 되겠지? 하지만 방겔리스는 결코 바보스런 인간이 아니다. 물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일개 조르바에 불과하지만, 감도 좋고, 감정도 풍부하다. 방겔리스에게는 자식이 둘 있다. 장남은 미코노스 발전소에서 기사로 근무하고 있다(이 발전소가 또 심심하면 정전 사고를 일으킨다). 또 한 명은 딸인데, 미용사로 일하고 있다. 손자는 둘 있다. 손자 중 한 명은 그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즉 같은 방겔리스가 둘 있는 셈인데, 손자 쪽은 미크로 방겔리스라 불리고 있다. 영어로 하면 리틀 방겔리스다. 그의 책상 위에는 손자의 사진이 놓여 있다. 자식도 손자도 모두 미 코노스에서 살고 있다. "방겔리스는 가난하지, 그러나 모두 건강해."라고 그는 말 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아주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족의 행복이 자신의 행 복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하더라도 모두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면,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그는 처음에 내게 "하루키, 아이는 있나요?"라고 물었다. 없다, 고 내가 대답하 자, 상당히 안됐다는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인 것이다. 방겔리스는 내년 봄에 육십이 된다. 육십이란 이미 일하는 나이가 아니지. 방 겔리스도 나이를 많이 먹었어. 기운이 없어, 하고 그는 고개를 푹 떨구는 흉내를 낸다. 지칠 대로 지쳤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방겔리스는 아주 건강하다. 한가할 때면 관리인실에서 손일을 한다. 오징어잡이 도구를 손질하는 일도 있고, 그물을 꿰매는 일도 있다. 요리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손쉬운 목공일을 하는 때도 있다. 그러고는 연금 타 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방겔리스는 일을 할 때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에는 단벌 신사복을 쫙 빼입고, 관리인실에서 꽤 취해 있었다. 크리스마스로 하면 일본의 정월 같은 날이다. 방겔리스는 술에 취하면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는, 평소보다 쾌활하고, 목소리가 커진다. 그러고는 내게 위스키를 권한다. 술잔에 철철 넘치 게 부어 준다. 위스키는 조니워커의 레드 라벨이다. 그는 자기가 조니 워커를 마 시고 있음이 몹시 자랑스러운 듯했다. 틀림없이 크리스마스용으로 소중하게 간 직한 술이리라. 여느 때는 늘 싸구려 포도주를 마신다. 우조는 마시지 않는다. 옛날 우조를 마시고 취했다가 무슨 일을 일으켜, 그 일로 넌덜머리가 났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우조를 권해도 방겔리스는 절대로 우조에는 입을 대지 않 았다. "우조, 나쁜 술. 머리 나빠져요. 하루키도 조심하는 게 좋아요, 포도주를 마 셔요."라며 우울한 얼굴을 하였다. 때때로 그는 그 지역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니온(그리스식 카페)에 우리를 데 려가 주었다. 그 일은 그가 베풀 수 있는 최대의 호의였다. 왜냐하면 그 지역 사 람들이 모이는 카페니온은 외국 관광객의 출입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곳이 그들 에게는 성역이었다. 더구나 내 쪽은 아내까지 대동하고 있다. 여자가 카페니온에 들어온다는 것도 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카페니온이란, 서로 마음이 맞는 사나 이들끼리 모여 애프트 아워즈를 즐기기 위한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모두는 나 와 방겔리스를 차가운 눈길로 빤히 본다. 그런 때, 방겔리스가 우리를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 두 사람은 내 친구야. 외국인(쿠세니)이지만, 그리스 말도 조 금은 할 줄 알고, 공부를 하고 있다고. 여기 봐. 단어장까지 이렇게 갖고 다니잖 아.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포도주를 권하며, 맛있는 요리를 추천해 주었다. 비교적 싼 요리이기는 하지만, 방겔리스의 급료로 하자면, 약간은 부담스런 대접이다. 우정의 발로인 것이다. 고맙게 대접을 받는다. 그러는 사이 주변에 있는 조르바 들도 차차 우리에게 친숙함을 보여 온다. 뭐 방겔리스가 그렇게 말하니까 할 수 없잖아, 란 식으로, 이렇게 따스한 인간의 마음은 그리스 인에게서만 맛볼 수 있 는 특별한 것이다. 12월 3일, 설계사인 T씨가 찾아왔다. 방겔리스가 내일 T씨가 온다고 하기에 만나 얘기를 하고 싶다고 미리 말해 두었다. T씨는 물론 인텔리라서 정확하고 깨끗한 영어를 구사한다. 런던이니 뉴욕이니 하는 곳을 오가는 국제인이다. 같은 그리스 인이라도 방겔리스와는 한참 다르다. 비조르바계 그리스 인디다. 내가 이 연립주택은 아주 잘 지은 것 같다고 칭찬하자, 그는 매우 기븐 듯 전체를 안내 해 주었다. "난, 이 건물들을 짓는 데, 십이 년 세월 바쳤습니다. 십이 년이오."라 고 그가 말했다. "하루키 씨는 그리스의 고나공서라는 데를 잘 모를 테지만, 이 관공서 일이라는 게 또 굉장히 힘들거든요. 교섭에 교섭을 거듭해야 하고 끝이 없어요, 계획서를 제출하고, 설계도를 갖다 바치고, 무슨무슨 도면을 갖다 내고... 그런 일들에 지겨울 만큼 시간이 걸립니다. 규제도 많고, 일 처리는 느리고, 도 무지 한심하기 짝이 없어요. 지독한 나라죠. 다 완성이 외었을 때는 지쳐서 쓰러 질 지경이었죠.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벌이지 못할 겁니다. 두 번 다시 하고 싶 지도 않고요. 하지만 나 자신도 참 잘 지었다 싶습니다. 회심의 역작입니다. 나 는 그 십이 년 동안 온통 이 일에만 매달렸어요. 나는 매일 감독하러 나와서, 돌 하나하나 쌓는 법까지 인부들에게 지시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일하는 사람들이 게으름을 부려 적당히 해놓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사소한 부분까지 내가 직접 지시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연립 주택은 나에게는 어린 자식과 마찬가지 예요. 쉰셋 호를 지었는데, 그 중 마흔 아홉 호가 팔렸습니다. 매해 몇 호 정도 팔 것인가를 정해놓고 팔고 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리에 신경을 제대로 슬 수 없어 건물이 망가지거든요. 천천히 만들고, 상대를 봐가며 천천히 파는 거 죠. 어때요 미스터 무라카미, 당신도 하나 사지 않겠어요. 이런 건물은 두 번 다 시 미코노스에서는 세워지지 않을 겁니다. 전망도 좋고, 여름에도 이 주택만큼은 조용하니까. 렌틀용으로 돌려도 만독할 만한 가격을 받을 수 있고, 결코 손해는 안 볼 겁니다. 사두고 볼 일이죠. 매매 가격은 미국 달러로 십오만. 내년이면 십 퍼센트 오르기로 되어 있어요. 수수료 및 제 경비가 팔 퍼센트, 연간 관리비 및 경비가 팔만 도라크마(약 팔만엔)정도입니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사지 않았다. 꽤 잘 만들어진 리조트 하우스이고, 가격도 비싸기는 하지만 타당한 선이었고, 관리인 방겔리스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 때 우리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고(우리는 경제적으로는 그 나름의 불안감을 품 고 일본을 떠난 온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는 일본과는 너무 거리가 먹다. 한가로 운 시간이 생겨도, 자 그럼 괌에라도 다녀올까. 하는 가벼운 기분으로 쉬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 곳에 리조트 하우스를 갖고 있어봐야 시간과 노력이 들 뿐이다. 그래서 T씨에게는 "얘기는 잘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죠."라고 그냥 대답해 두 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라며 그는 내 어깨를 톡톡 쳤다. 미코노스는 좋 은 곳이죠, 일본 사람들이 좀도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T씨는 아침에 찾아왔다 가, 저녁녘 비행기 편으로 아테네로 돌아갔다. 그는 아주 바쁜 것이다. 남미에서 건축가 회의가 있거든요, 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방겔리스와 둘이서 아침 거리를 걸은 적이 있다. 그때 새삼스럽게 그리스 사 람들은 실로 인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인이 예를 갖추기를 좋아하고 애매한 미소를 즐기는 것처럼, 그리스 사람들은 인사를 좋아하는 것이다. 아침 시장을 보는 시간이건, 저녁 커피, 스낵 시간이건 길을 걷다 보면 이것은 일목요 연하게 알 수 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인사의 홍수이다. 예를 들어보자. 시장을 보러 가는 두 주부(카테리나와 마리나)가 길에서 마주 쳤다고 하자. 그러면 두 사람은 아마도 이 정도의 대화를 나눈 후에야 헤어질 것이다. "카리 메라, 카테리나, 티 카니스(어머, 카테리나 잘 지냈어)?" "미아 하라, 마리나, 에프하리스트, 에시(잘 지냈어, 고마워, 마리나, 자기는 어 때)?" "미아 하라, 키 에고, 야 스(나도 물론 잘 있었지, 그럼 또 만나)." "야 스(그럼)." 마치 회화 사례집 같지만, 정말 이런 정도로 반듯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 것도 잽싸게 서로 스치면서 말이다. 이런 장면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드르도 포스(신의 솜씨)'라고 할 도리밖에 없다. 우선 두 사람은 서로의 앞 방향 에서 걸어오는 상대방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고는 '이쯤이면 됐을까' 싶은 거 리를 가늠하여,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카리 메라'가 시작되면, 이 일련의 회화를 좍 풀어놓은 후에, 가볍게 상대방을 살짝 뒤돌아보는 즈음에 마지막 '야 스'로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내 어찌 이렇게 기민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는 솜씨 를 흉내낼 수 있으랴. 이 경지에 이르면 인사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사의 달인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든다. 조그만 마을에 사는 보통 그리스 사람들이 마주치는 사람의 몇 퍼센트와 서로 인사를 나누는가, 그리고 하루에 몇 차례나 인사를 하는가, 이건 그리스에 있으 면서 내가 줄곧 품고 있었던 의문이다. 그래서 방겔리스와 길을 걸을 때 주의 깊게 세어보았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수를 세야 했으므로 정확한 숫자는 아니 나, 대충 방겔리스는 만나는 사람의 삼분의 일 정도와 인사를 했다고 생각한다. 상당한 숫자이다. 방겔리스는 예순 살이니까, 인사를 나누는 상대는 중년에서 그 이상이 대부분이다. 남녀 비율은 대략 사 대 일 정도이다. 먼저 항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남자 일고여덟 명과 연달아 인사를 나눈다. "어이 방겔리.""잘 있는가 방겔리.""안녕하쇼.""여-어, 방겔리." 하고 인사를 나누 기는 하지만 발길을 멈추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인사를 할 때 발길을 멈추지 않 는 것이 그리스 사람들의 일반적인 습관인 모양이다. 인사를 할 때마다 멈추어 섰다가는 필시 어디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과연 한 번 멈춰 섰다 하면 끝없이 긴 얘기에 휩쓸릴 위험이 있다. 그래서 모두들 나비처럼 걸으면서 벌처럼 인사 를 나눈다. 마을의 골목길로 접어들자, 가게 입구에 멍하게 서 있던 이발소 아저 씨가, "여-어 방겔리." 하고 말을 건다. 채소 가게 아저씨와 "여-어."슈퍼마켓 아 저씨와 "안녕하쇼."아채 장수와 "여-어, 여-어."검은 옷을 입은 아줌마와 스쳐지 나며 "잘 지내요, 방겔리?" 서서 얘기를 하고 있든 세 사람이 "여, 자네.""잘 있 었나?""어떤가?" 전파사 아저씨가 "여-이 방겔리, 어쩌고저쩌고." 보는 것만으로 도 바빠서 도무지 숫자를 세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이거야 완전히 텔레비전 게 임이다. 눈앞으로 휙휙 나타나는 인간들을 순간적으로 (1) '인사를 할 상대"와 (2) '인사를 하지 않아도 좋은 상대'로 식별한다. 그리고 같은 (1)에 속하는 사람 이라도 상대에 따라 인사의 급을 정하고(보고 있으면 꽤 세세하게 급이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면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는 기 본적인 룰을 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방겔리스는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거리를 미끄러져 갔다. 인사를 나눈 상대가 오분간 약 마흔 명쯤 될까. 대단하다. 달인이다. 나는 도저히 그리스 사람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미코노스 철퇴(撤退) 이 문장은 미코노스를 떠난 직후에, 어떤 문예지를 위해 쓴 글을 원형으로 하 고 있다. 다른 항목과 중복을 피하기 위해 다소 손질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오리지널 그대로를 남겨두었다. 이 문장을 지금 새삼 읽어보니,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이 적지않이 얼어붙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쓸 때에는 그런 것을 전혀 깨 닫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문장이란 것에는 많든 적든 그런 것이 내포되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쓸 당시 에는 그렇게 쓰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왜냐하면 원칙적으로 우리는 그때그때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에 바싹 기대어 문장을 쓰므로) 자신이 쓴 문장 의 온도나 색깔이나 톤을 그 자리에서는 객관적으로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 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마음이란 어떤 때는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을 만큼 얼어붙어버리는 그런 것이다. 특히 소설을 쓸 때에는. 1986년 12월 28일. 일요일. 비. 나는 오늘 이 섬을 떠나려고 한다. 여섯시 반에 일어나, 책상을 향하여 한 시간 정도 소설을 쓰고, 일단락이 지어 지면, 그 편지지 다발을 대형 봉투에 넣는다. 그러고는 구겨지지 않도록, 튼튼한 슈트 케이스 제일 밑바닥에 집어넣는다. 오늘로 미코노스의 생활도 마지막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 지낸 한 달 반 남짓, 거의 빠짐없이 날씨가 나빴 다. 지독할 정도로, 한 주에 겨우 하루나 이틀, 맑게 갠 아름다운 날이 찾아온다. 그러나 나머지는 정말 너무하다 싶은 날씨였다. 비가 오든가, 바람이 불든가, 아 니면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불든가 그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하늘은 언제나 찌뿌 둥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해안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실제로 바다에 들어가 해 수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결국 마지막 날도 비다. 소리없이 내리는 가랑비, 바람도 불고 있다. 우리가 빌린 집의 바로 뒤켠에, 조촐한 방목지쯤 되는(라기보단 그냥 벌판 같 은 곳이지만) 곳이 있는데, 거기에는 대충 삼십 마리에서 사십 마리의 양들이 방 목되어 있다. 때로 심술맞아 보이는 양치기 부부가 들러서는(디킨스의 소설에 나 올 성싶은 풍모의 부부이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양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지팡 이로 끌어당기곤 했다. 책상앞에 있는 창문으로, 이 방목지를 내다볼 수 있었다. 나는 일을 하는 도중 문득 얼굴을 들어, 어미 양과 새끼 양을 바라보기를 은밀 한 낙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겨울이 깊어감에 따라 뜯을 풀이 점점 찾기 힘들어 지자, 양들은 한 열흘쯤 전에 더딘가 다른 방목지로 한 마리 남김없이 이송되고 말았다. 지금은 궁핍한 갈색 지면이 창 아래로 휑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어미 양의 발목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새끼 양들의 모습도 이제는 볼 수 없고, 저 자로 잰 듯 한결같은 억양이 없는 울음 소리도 이미 들리지 않는다. 텅 빈 방목 지를 보고 있다보면, 계절이 자기 몫을 철저하게 챙겨 가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목지 건너편에는 산으로 향하는 언덕길이 있어, 낡은 트럭이 건자재 같은 것을 싣고, 힘겹게 산을 올라가고 있다. 아침, 가랑비가 지표에 있는 모든 것을 차갑게 적시고 있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방금 전에 막 끝낸 소설의 한 장을 생각하고 있다. 비내리는 아침에 문장을 쓰면, 무슨 영문에선지 그것은 비내리는 아침 같은 문장이 되고 만다. 나중에 아무리 손질을 하여도, 그 문장에 서 비 내음을 지울 수가 없다. 양들이 한 마리도 남김없이 사라진 방목지에 소 리없이 내리는 비의 냄새. 산을 넘어가는 낡은 트럭을 적시는 비의 냄새. 나의 문장은 그런 비내리는 아침 냄새에 감싸여 있다. 숙명적으로.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에서 물을 끓여서는, 커피를 만든다. 그러는 중에 아내가 잠에서 깨어나 다가와서는, 프라이 팬에 팬케이크를 굽는다. 오늘이 마지 막 날이라 냉장고 안에 남아 있는 음식물을 하나하나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냉장고 안에는 팬케이크 가루 약간과 우유와 계란이 남아 있다. 그러니 까 오늘 아침은 누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더라도 팬테이크를 먹을 수밖에 없다. 가루와 계란과 우유의 비율이 잘 안 맞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남은 것을 처 리한다함은 그런 언밸런스를 의미하므로. 남은 것-나는 그런 팬케이크를 잘게 잘라먹으면서, 불현 듯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에서 철퇴할 때의 일을 떠올린 다. 가장 힘겹고, 가장 이득이 없었던 철퇴전. 설원을 날뛰며 설치는 코사크 병 사들. 몰아치는 눈바람. 포성. 토마토 먹을래요?라고 아내가 묻는다. 토마토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먹지, 라고 나는 대답한다. 토마토를 잘라 소금과 레몬을 뿌리고, 향초를 잘게 썰어 뿌린다. 커피와 팬케이크와 토마토 샐 러드. 병사들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 곱은 손으로 다리를 폭파시킨다. 그들은 고 향을 너무도 멀리 떠나온 것이다. 냉장고에 아직 뭐 남아 있나, 라고 내가 묻는다. 스파게티랑 토마토 통조림이랑 마늘이랑, 그리고 올리브 오일이랑 계란. 쌀이 조금 있고, 참치 통조림하고, 그런 정도. 그렇다면 점심은 의심할 여지 없이, 참치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가 된다. 결국 철퇴전이란 그런 것이다. 뭐 아무러면 어때, 점심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점심 식사로 무얼 먹든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로라 니로의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팬케이크를 다 먹고, 그러고 나서는 짐을 꾸리 기 시작한다. 짐을 꾸리며 문득 생각한다. 이 한 달 반이란 세월은 대체 무엇이 었던가, 하고. 이 시즌이 지난 에게 해의 섬에서, 나는 대체 무얼 하였던가. 잠 시, 그 점에 대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머리 에는 알갱이 같은 공백이 생겨 있다. 어어 참 대체 무엇을 한 거지? 어떤 의미에서 나는 상실되어 있다. 끝없는 러시아의 설원을 터벅터벅 하염없 이 걷는 피폐한 병사들처럼. 하지만 물론 나는 잠시 후에 기억을 떠올린다. 자신이 지금 이 장소에서 한 일을. 나는 여행 스케치를 몇 편 썼다. 번역도 완성했다. 장편소설의 첫 부분 몇 장을 썼다. 썩 나쁘지는 않은 성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나는 상실되어 있다. 자신이 심하게 상실되어 있다고 느낄 때, 나는 힘껏 돌벽을 발로 걷어차 보기도 한다. 말하자면 어쩔 줄을 몰라. 그리고 걷어차고 나서는, 그런 짓을 해봐야 얻은 것이란 다리의 아픔뿐임을 안다. 백스물다섯번째 정도에. 그렇다, 내 소설에는 암울한 비 내음과, 격렬한 한밤중의 바람 소리가 스며 있 다. 러시아 전선만큼은 아니더라도, 그것은 그 나름으로 전투였던 것이다. 아니 자네 그건 좀 얘기가 다르잖아. 자네가 파내고 있는 것은 나의 사체가 아니라고, 나랑 닮기는 했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야. 자네는 나를 좀 오해하고 있어. 얼어 붙은 사체는 모두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상실되어 있는 것은, 내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내 가 상실되어 있는 것은, 내가 내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장소에서, 다시 또 조금 이동하려 한다. 무한 마이너스 약간, 아니면 무한 플러스 약간. 어느 쪽 이라도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두시 삼십오분에 아테네행 비행기가 떠난다. 나는 격심한 중력에 휘둘린다. 그 렇게 안 보일지 몰라도, 정말 그렇다 나는 간신히 손잡이 같은 것에 매달려 있 을 뿐이다. 그래서 난 아까부터 나폴레옹의 러시아 철퇴를 줄곧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미지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비는 왜 또 이렇게 질기게 내 리는 것일까? 열한시 십오분에 존이 왔다. 존은 벨기에 사람이다. 이 남자의 본명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흔히 들어보지 못한 까다로운 이름이다. 이 남자도 먼먼 옛날에 그리스에 왔다가, 그대로 눌러 살고 있다. 아주 유창한 영어와 그리스 어와 독일어와 프랑스 어를 구사한다. 나 이는 아마도 마흔 전후일 것이다. 머리는 저 뒤편까지 훌쩍 벗겨져 있고, 늘 낡 아빠진 스웨터를 입고 있다. 아마 결혼한 남자일 것이다. 그리스 인 여성과, 그 녀의 엄마임직한 부인과 함께 있는 것을 한 번 본적이 있으므로. 하지만 에게 해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는 얼굴색이 창백하다. 그리고 입술은 언제나 육 밀리 미터 정도 비틀어져 있다. 앤트워프 쪽을 향하여 비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부 분의 그리스 인을 증오하고 있고, 한편 대부분의 그리스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 든가 바보 취급한다. 내가 작가라고 말하자, 그는 내게 무척 흥미를 보였다. "저 말이지, 미스터 무라카미, 자네하고 난 인텔리야. 여기 사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보 얼간이지. 야만인들이고."라고 존은 말한다. 그는 미코노스에 살고 있 는 다른 유럽 사람들의 두뇌 수준을 깔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행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는데, 우리가 빌린 짐의 현지 에이전시를 맡 고 있다. 나는 그에게 집세를 지불하고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몇 가지 있다) 얘 기한다. 존은 오늘 전기요금을 정산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는 미터기의 숫자를 수첩에 적어 넣고, 금액을 계산한다. 나는 그에게 오천 엔 정도의 전기 요금을 지불한다. 그는 들어가도 좋으냐는 말 한마디 없이 레인코트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그러고는 까다로운 얼굴을 하고 소파에 앉아, 나와 삼십분 정도 얘기 를 나눈다. "미스터 무라카미, 난 옛날에는 편집자가 될 작정이었어."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결국은 못 됐지. 어째서라고 생각하는가?" 모르겠다고 나는 대답한다. 알 리가 없다. "실망했기 때문이지."라고 그는 팔 밀리미터 정도 입술을 앤트워프 쪽을 향하 고 비틀며 말한다. "출판계의 존재 양식에 말이야. 알아?" 잘 모르겠다고 나는 또 대답한다.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저 대량 생산 시스템이었어. 이언 플레밍 저, 007 이 어쩌고저쩌고, 시리즈 제 18작, 36작. 그래서야 마치 햄버거 가게의 체인점이 나 다를 바가 없잖나. 자본이 있는 출판사는 그런식으로 별볼일 없는 책을 만들 어서는 더욱 돈을 벌어들여 비대해지지. 그리고 한편 뜻이 있는 인간은 마지막 까지 짓밟히는 거야. 이것이 현재 출판 상황이라고. 나는 그런 것을 참을 수가 없었어. 지금도 참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고. 아는가, 내 기분?" 흐음, 글쎄요. "그래서 나는 벨기에를 떠난 거야. 미련없이 말이지. 그러곤 그리스로 왔어. 왜 그리스를 택했느냐고? 그것은 그리스가 유럽의 끄트머리이기 때문이지. 유럽을 떠나서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거지. 그래서 이 끄트머리까지 온 거야. 좋은 곳 이야. 그리스 사람들을 별개로 하면. 정직하게 말해 그리스 사람들은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를 들면 방겔리스 같은 작자 말이야. 그 사람은 영어 한마디 못한다 고, 눈치도 없고 쓰레기 같은 게으름뱅이야. 구제의 여지가 없어. 그런 사람을 보면 때론 넌덜머리가 나서 다시 벨기에로 돌아가고 싶어져. 설사 그것이 가짜 문화라고 해도, 적어도 그곳에는 문화라는 것이 있으니까 말이지." 벨기에판 단카이 세대다. 아이휴,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들 세대는 건재하고 있다. 어느 정도 지치고 색이 바래기는 했지만.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 는다. 실은 나는 존보다는 쓰레기인 방겔리스를 훨씬 좋아하는 것이다. 스무 배 정도는.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나는 미시마와 오에를 좋아하지."라고 벨기에 사람인 존은 말한다. "자네 그 두 작가를 만난 적이 있는가?" 없다, 고 나는 대답한다. 존은 몇 번인가 고개를 젖는다. 그것 참 유감이로군, 하는 식으로. "그런데 자 네는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가, 미스터 무라카미?" 그걸 설명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라고 나는 말한다. "전위적인 것인가?" 약간은 전위적일지도 모르겠다. 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가? 그는 또 고개를 젓는다. 고개를 젓는 행위가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이듯이. 나 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비비기 시작한다. 나에게도 역시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 이 있다고 말하려는 듯. 그러고서 한참 동안 우리는 소설 이야기를 한다. 이윽고 그가 소파에서 일어 나, 레인코트를 입고서는, 내게 손을 내민다. "자네를 만나서 기뻤네, 미스터 무 라카미. 하여튼 이 섬에는 문화라고 하는 것이 거의 없으니까 말이지." 존, 나도 당신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죠. "와, 비가 그친 모양이야."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한다. "이 정도면 안심이야. 비행기는 제시간에 뜰거야. 좋은 여행이 되기를." 고맙습니다, 라고 나는 말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악수를 하고 헤어진다. 그리고 나의 생각은 다시 한 번 나 폴레옹의 철퇴전을 향해 달린다. 머리가 벗겨진 복잡한 이름의 벨기에 사람 존 이, 어딘가 모르게 너저분한 하얀 숨을 내쉬며 손도끼로 다리를 부수고 있는 광 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이곳에는 문화라는 것이 없어, 라고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 오고 말았는지. 이런 생활이라면 벨기에가 그런 대로 나았어. 자네, 벨기에 일은 잊어버리라고,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나버린 일 아니겠어. 자네 기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60년대 따위, 저 먼 옛 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라고, 알았나. 저 먼먼 옛날 일이라고. 존이 돌아간 뒤 한동안 방안에 그의 분노가 남아 있다. 마치 미세한 먼지처럼. 그의 문학적 자아가 떠돌아다니고 있다. 육, 칠 밀리미터 입술의 비틀림이 남아 있다. 사자의 유품처럼. 존은 나에게 역사상의 채워지지 않은 죽음을 생각나게 한다. 누군가가 존의 전기를 써야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가, 피폐와 후퇴한 머 리칼과 낡아빠진 스웨터와 그리스 인 장모와 미시마와 오에에 이르는 그의 인생 을, 정밀하게 그려야만 한다. 그것도 세실 b. ep 밀의 십계처럼 아주 거대한 규 모로. 나는 소파에 앉아, 방안을 떠도는 존의 분노를 감지하며, 그런 생각을 한 다. 그러고 나서 나는 방겔리스에게 간다. 방겔리스는 어둔 방안에서 돋보기를 끼 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서 있을 때에는, 방안에 거의 전등을 켜지 않는다. 아마도 전기요금을 절약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어둠 속에 혼자 있으 면, 방겔리스는 평소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 내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방겔리스는 전등을 켜고, 그물을 아래에 내려놓고는, 의자를 권한다. 천천히 돋보기를 벗고, 성냥을 그어 지독한 냄새가 나는 그리스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러고는 가벼운 기침을 한다. 커피 마시려는가, 라고 그가 묻는다. 고맙 다고 나는 말한다. "있지 하루키, 이제 여섯 달이야."라고 그는 윙크를 하며 말한다. "이제 여섯 달만 있으면 연금이 나온다고."그는 정말 연금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는 오늘 이 섬을 떠나지? 자네가 없어지면 쓸쓸할 거야."라고 그는 말 한다. "자네가 없어지면 또 방겔리스 혼자가 되고 마니까 말이야." "하지만 저 독일인 영화 감독은 아직 있지 않습니까?"라고 나는 말한다. "아니지, 그도 오늘 돌아가거든. 뒤에 남는 것은 방겔리스와 카나리아뿐." "또 오죠, 방겔리스. 여기 일을 그만두더라도 어차피 항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 아닙니까?" 우리는 방겔리스의 비장한 브랜디를 두 잔씩 마시고(때가 때이니만큼 좀 마셔 도 상관없을 것이다) 악수를 하고 그리스식으로 포옹을 하고 헤어진다. 그러고는 슈트 케이스를 들고 올림픽 항공의 오피스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공항으로 가는 마이크로 버스를 기다린다. 한달 반 동안, 저 드넓은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던 사람은, 거의 우리뿐이었다. 우리와 방겔리스와 방겔리스의 카나리아들뿐. 우리가 나오기 일주일 전에, 수줍 음을 많이 타고 말이 없는 독일인 영화 감독(이름은 잊어버렸다)이 런던에서 왔 다. 저 사람은 항상 방에 처박혀 시나리오를 쓴다, 고 방겔리스가 말했다. 과연 독일인은 혼자서 조용히 시나리오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의 모습을 거의 본 적 이 없으므로, 그리고 나는 다른 한 방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 존은 그의 벨기에 산 짜증을 온 섬에 흩뿌리고 다녔다. 방겔리스는 그물을 손질하고, 오징어잡이 바늘 다발을 풀어내었다. 항구 근처에 있는 신문 판매대의 소녀는, 내가 '아테네 뉴스'를 사러 갈 때마다, 나를 향하여 밉살맞게 신문을 내던졌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호의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열넷이나 다섯쯤일 그녀 의 코 아래로는 벌써 희미하게 수염이 자라 있었지만, 언뜻 보기에 그다지 질 나쁜 아이는 아닌 듯했다. 그녀는 단지 조금 짜증을 부리고 있을 뿐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바람이 줄곧 불어댔고, 비도 종종 내렸다. 겨울이 단단하게 섬을 단속하고 있 었다. 우리가 빨랫감을 가지고 갈 때마다, 세탁소의 여주인은 고개를 잘잘 흔들 었다. 당신들 아직도 여기 있어요, 라고 한숨이라도 내뱉듯. 십이월 중순경에, 그 녀가 내게 물었다. "혹, 당신들 여기서 겨울을 날 생각이에요?"라고. 아니오, 연 말에는 이 섬을 떠나 로마로 갈겁니다, 라고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그래도 좀 안심이 된다는 눈치였다. 그렇다, 이 섬은 관광객이 겨울을 나는 장소가 아닌 것 이다. 나도 옛날, 일본에 간 적이 있습니다, 라고 다리미질을 하고 있던 주인이 나직이 말했다. 옛날에는 배를 탔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미코노스의 세탁소에 서 거의 입도 열지 않고 다리미질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1986년이란 해의 끄트머리에, 나는 이 섬을 떠나려 한다. 나는 공기가 탁한 올림픽 항공의 오피스 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바깥에서는 다시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비행기는 과연 뜰 수 있을까? 나사가 풀려 느슨해진 문 손잡이가 달 그락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다. 몹시 피폐한 손잡이다. 마치 영락할대로 영 락한 리어 왕처럼. 그럼 안녕, 미코노스. 나는 소설 원고가 들어 있는 슈트 케이스에 힐끗 눈길을 준다. 그러고는 창문 너머의, 하얀 파도가 이는 항구를 멍하니 내다본다. 갈매기가 어두컴컴한 하늘을 둘로 가르듯 똑바로 날아간다. 누군가가 티켓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담당 직원 에게 불평을 터뜨리고 있다. 쉴 새 없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타닥타닥타 닥하는 소리가 들린다. 젊은 군인이 따분하다는 듯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다. 그 리고 캐나다 국기를 꿰매 붙인 배낭을 메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캐나다 사람 들이 그러하듯, 무료한 표정이다. 마치 우리는 무료함에 있어서는 제법 권위가 있답니다, 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듯. 나는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한다. 시간과 장소, 때로 그것이 내 안에서 무 게를 더해 간다. 내 자신과 시간과 장소라는 세 가지 존재의 밸런스가 무너진다. 어이, 벨기에 사람, 자네 어김없이 자신의 다리를 무너뜨렸는가? 만약 못 무너 뜨리면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두시 삼십오분 아테네행 00편에 탑승하실 분은...하고 직원이 고함을 지른다. 어이휴. 비행기가 떠나는 것이다. 나는 다리에 석유를 뿌리고, 바람에 꺼지지 않 도록 주의하며 성냥을 긋는다. 달그락달그락달그락 문손잡이가 잘게 떤다. 깊은 어둠 속에서, 또 한가지 색이 덧칠해진다. 나는 눈 속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외친 다. 어이 자네가 아니라니까, 그것은 나의 사체가 아니야. 닮기는 했지만 내가 아니라구. 시칠리아에서 로마로 시칠리아 섣달 그믐날 아침에 아테네를 출발하여, 로마에 도착하니 카포단노(신년 축하) 가 한창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섣달 그믐날에서 정원 초하루 이틀 사이에 제법 상당한 사람이 죽는다. 술을 너무 마셔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리석을 정도 로 무모한 축하 소동을 벌이느라 촛농을 뒤집어쓰고 불이 나 타죽는 사람도 있 다. 또 총탄에 맞아 죽는 사람도 있다. 술에 취해서는 기운을 북돋우려 폭죽 대 신에 창문에서 총을 쏘는 작자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섣달 그믐날의 행사로서, 열두시가 되면 불필요해진 물건을 창문 밖으로 휙휙 내버린 다. 이렇게 내던져지는 물건에 맞아 죽는 불운한 사람도 가끔은 있다. 정월초 신 문의 지면은 이런 웃으려야 웃을 수 없는 사망 사고 뉴스로 가득하다. 참 어처 구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흥청거리느야 아니야란 관점에서 말하면 단연 흥청거 린다. 그 점은 백 퍼센트 보장할 수 있다. 우리도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그믐날 밤에 재수가 좋다는 렌즈콩을 먹고, 샴페 인을 터뜨리며 일단 신년을 축하한다. FM 바티칸은 밤새 빈 왈츠를 내보내고 있다. 1987년이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우리는 로마를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인 시칠리아로 향한다. 팔레르모에서 한 달간 집을 빌려 생활할 것이다. 어째서 팔레르모인가 하면, 어떤 항공회사의 기내지를 위하여 시칠리아 기사를 쓰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사만 다 쓰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내 마음대 로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다지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한번은 시칠리아에 가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나 팔레르모 거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팔레르모는 한 달이나 관광객이 끈질기게 눌어붙어 있을 장소가 아니라 는 사실을. 우선은 거리가 무지하게 더럽다. 모든 것이 초라하고, 색이 바래고, 때가 끼어 있는 것이다. 거리를 구성하고 있는 건물의 대부분은 한마디로 추악 하다. 그리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어딘가 모르게 어둡다. 자동차는 너무 많고, 따라서 소음이 굉장하다. 도시 기능은 언뜻 보기에도 빈약 했다. 또 한 가지, 이것은 나중에 안 일인데, 거리에는 폭력 범죄가 범람하고 있 고, 사람들은 의심이 강하여, 외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쌀쌀맞기 짝이 없었다. 만약 약속한 일거리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한 달치 집세를 선불하지 않았더라 면, 도착한 다음날 미련없이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튼 그런 사 정이 있어 예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한편 살면서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다고 생 각하게 된 일도 몇 가지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나는 이 팔레르모라는 도시의 양상에 거의 진력이 나고 말았다. 팔레르모에 관한 가이드 북을 몇 권 읽어보았지만, 이 거리의 좋지 않은 부분 에 대한 기술은 찾아볼 수가 없다. 분명히 말해, 좋은 부분만 적당히 쓰여 있었 다. 하긴 여행 가이드 북이란 원래 사람들의 여행하고픈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인 만큼,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중 에서는 영어판 『블루 가이드』가 그나마 정확하게 기술해 놓았다. 인용한다. "팔레르모. 인구 67만. 시칠리아 주의 주도이며, 가장 흥미로운 도시. 북쪽 해 안은 아름다운 만에 면해 있으며, 콩가 도로(황금의 분지)의 선단에 위치한다. 아담한 분지는 석회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오렌지와 레몬과 메뚜기콩(이게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른다)밭으로 가득하다. 항만의 궤멸적 쇠퇴나, 어떻게 손을 쓸 여 지가 없는 슬럼가의 존재나, 가두에서의 살상 사건이나, 끔찍한 교통 정체에도 불구하고, 팔레르모는 방문할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기후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팔레르모의 어디가 "방문할 가치가 있는'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흥미 로운'이란 지적은 인정해도 좋다), 뭐 세상에는 여러 가지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이다. 간결하고 요령 있는 기술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나로서는 거리의 추악함 에 대한 기술도 있었으면 싶었다. 택시를 타고 푼타 라이지 공항에서 팔레르모로 향하는 도중에 우선 우리 눈에 띈 것은, 놀랄 만큼 많은 숫자의 자동차 수리 공장과, 그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도저히 시적이라 하기 어려운 교외 아파트군의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지나 시 내 중심부로 들어서니, 이번에는 팔레르모 명물 교통 체증에 휘말린다. 배기 가 스 덕분에 건물은 온통 거무튀튀하게 때가 끼어 있다. 때가 끼어 있을 뿐만 아 니라, 건물 자체도 싸구려에다 추악하다. 그런 거리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 이 자꾸 가라앉는다. 유럽의 거리는 대개가 통일감이 있고, 보고만 있어도 즐거 운데,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이미 유럽이 아니다. 그나마 어떤 통일감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추악함과 빈곤함이다. 인구가 늘어나, 할 수 없이 싸구려 연립 주택 을 그때그때 수급에 맞추어 적당히 그리고 손쉽게 만들었겠구나 싶은 인상의 거 리 풍경이다. 모양도 한심하고 색채도 한심하다. 하나같이 그런 건물들이 거무튀 튀하게 때가 끼고 영락하여, 슬럼가 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건물만 보아도 도시 자체가 건강한 활기를 잃고 몰락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도처에 경찰의 모습이 보인다. 모두들 방탄 조끼를 입고, 자동 소총을 메고 있다. 로마에 비하면 경찰의 눈초리도 한결 매섭다. 우리가 팔레르모에 갔 을 때가, 마침 마피아의 보스에 대한 재판이 행해진 후, 그 보복으로 대량 살인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와중이었던 것이다. 팔레르모 거리 어디를 가든, 마피아의 그림자가 얼씬거렸다. 우리에게 아파트를 소개해준 산드라라는 여자는 그 얼마 전에 남자 친구가 마피아의 손에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한 것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가 마피아의 간부였던 것이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 청년은 팔레르모 거리를 거닐다가 자동 소총에 벌집이 되고만 것이다.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에요, 그런 일. 여기에서는."이라고 산드라는 어깨를 으쓱 하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거리는 막연하고 어두운 공기로 짓눌릴 듯하다. 딱히 어디가 어떻게 어둡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디를 가든 어슴푸레한 막이 가려져 있는 것 같은 답답 함을 느낀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도, 반드시 어딘가에 그런 암울함이 스며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다 외국인이며 국외자인 우리마저도 오래 있는 사이 에 그런 암울한 톤에 완전히 휘말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팔레르모에 살며 가 장 싫었던 것은, 그 구제의 여지가 없는 암울함이었다. 그 암울함이란 말하자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절망의 그림자인 것이다. 통계 숫자 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일인데, 시칠리아의 경제는 이미 궤멸적이라해도 무 관할 만큼 난관에 빠져 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급료는 잦고, 실업률은 높다. 호황에 들썩이는 이탈리아 경제의 은총이, 이 남쪽의 섬에는 미치지 않는 것이 다 북이탈리아에서 쉬 볼 수 있는 풍요로움과 활력은, 시칠리아 어디에서도 찾 아볼 수가 없다. 중부 이탈리아의 느긋한 밝음도 이곳에는 없다. 시칠리아에서 활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는 지하 경제뿐이다. 몇십 명이나 되는 시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람이 사살된다. 하지만 경찰은 한 명도 목격자를 확보할 수가 없다. 불가사의하게도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들 총성이 들릴 때는 다른 방향을 보는 것이다. 신문에는 하루도 빠 짐없이 그런 기사가 실린다. 많은 경찰이 마피아에 매수되어 있다는 것은 주지 의 사실이고, 매수에 응하지 않은 경찰관이나 판사는 왕왕 살해당한다. 동료를 배반하고 경찰에 증언을 한 후, 그대로 미국으로 도망간 마피아 간부는, 시칠리 아에 남아 있는 가족 전원이 몰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불 필요한 입놀림을 하지 않는다. 입을 꾹 다물고, 눈도 감는다. 사태가 이런데 거 리가 암울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마피아 이상으로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자동차다. 팔 레르모는 거리는 좁고, 차는 많다. 그리고 운전은 극히 거칠다. 덕분에 자동차의 90퍼센트가 상처투성이다. 팔레르모에서 상처가 없는 차를 찾아내기란, 일본에서 부딪쳐 움푹 들어간 메르세대스 벤츠를 찾는 것보다 어려운 작업일지도 모르겠 다. 도처에서 차들이 카당카당하고 부딪친다. 신호등도 별로 없는데다, 보행자가 거의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보도는 주차된 차량으로 봉쇄되어 있다. 이런 사정은 이탈리아 전토에 걸친 교통 상황이지만, 팔레르모는 그 중에서도 최악의 부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산책하기를 아주 즐기는 인간인데, 이 팔 레르모에서는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거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지 않았 다. 저 자동차의 홍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도무지 온 의욕이 사라지는 것이 다. 그리고 끊임없는 소음.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는 그런대로 넓기도 하고, 팔레르모치고는 살기가 괜찮 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온종일 자동차의 소음이 지독하여, 머리가 아팠다. 특히 밤중이 심하다. 경찰차인지 구급차인지가 파오파오파오파오하고 소리를 내며 거 리를 질주한다. 운전자는 심심하면 끼이이이익하고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차에 부착된 도난 방지용 얼람이 끄떡하면 삐웅, 삐웅, 삐웅, 삐웅하고 짜증스런 음량 으로 울려 퍼진다. 이중으로 주차되어 앞으로 빠져나갈 수 없어진 자동차의 오 너가 뿌우우우우, 뿌우우우우하고 이백 번 정도는 클랙슨을 울린다. 이런 상황이 대개 한밤중의 세시쯤부터 하염없이 계속된다. 조용하던 비수기의 미코노스에서 이런 곳으로 왔으니, 지옥이 따로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훨씬 다른 종류의 내 성적 지옥을 시사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이런 정도의 지옥으로는 충분하다. 그 거리에서 한 달을 살았다. 그리고 그 동안 줄곧 『노르웨이의 숲』을 썼다. 그 소설의 대략 60퍼센트 선까지를 거기서 썼다. 미코노스와는 달리, 해가 기울 어도 잠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답답했다. 그렇다고 기분전환 을 할 뾰족한 방법도 없다. 그래서 두 번 정도 팔레르모를 떠나 간단한 여행을 하였다. 한 번은 타오르미나로, 또 한 번은 마르타 섬으로 갔다. 그리고 팔레르 모로 돌아오면, 다시 방에 쳐박혀 일을 하였다. 매일 소설을 쓴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때로는 자신의 뼈를 깎고, 근육을 짓 씹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그럴 만큼 대단한 소설이냐, 라고 반문하는 분 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쓰는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실감하는 것이다). 그 렇지만 쓰지 않으면 더욱 괴로웠다. 글을 쓰기는 간단하지가 않다. 하지만, 문장 도 쓰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그 세 계로 자신을 내던지기 위한 집중력이다. 그리고 그 집중력을 가능한 오래 지속 시키는 힘이다. 그런 조건이 갖추어져 있으면, 어느 순간 그 괴로움이 돌연 극복 된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 일, 자신에게는 이 작품을 어김없이 완성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 일. 매일, 머리가 만성적으로 멍해 있었다. 뇌수가 스팀에 노출되어 있는 것처럼 불어터져 있었다. 물론 소설 쓰기에 머리를 집중하고 있는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팔레르모의 겨울이 너무 따뜻했던 것이다. 일월인데도 팔레르 모의 거리는 눅눅하고 뜨뜻미지근했다. 낮에는 반팔로 외출을 해도 좋을 정도였 다. 반팔은 아니더라도 스웨터를 입는 날이 드물었다. 사방에는 아름다운 아몬 드 꽃이 피어 있고, 공원의 야자나무 잎은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남풍 에 흔들리고 있었다. 길거리의 꽃가게에서는 갯버들가지가 팔았다. 한풍이 몰아 치는 미코노스에서 왔으니, 마치 천국 같은 날씨이다. 그래서 머리가 멍해지는 것이다. 따뜻한 봄은 상관없다. 무더운 여름도 상관없다. 서늘한 가을도 상관없 다. 그런 날씨에는 날씨 나름의 필연성이 있고, 어지간한 이유가 없는 한 나는 어떤 계절에도 반듯하게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팔레르모의 따뜻한 겨울만큼 은 좀 참아 주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것은 고장난 자동차 에어컨에서 당치도 않게 온풍이 휘익휘익 불어나오는데, 어떻게 해야 그 온풍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지 모르는 때 같은, 좀 견디기 힘든 따뜻함이다. 온기를 찾아 이곳으로 왔으니, 뭐라 투정을 부릴 계제는 아니지만, 겨울은 추운 법이니까 추워도 견뎌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때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나는 꿈을 별로 꾸지 않는 편인데, 팔레르모에서는 이상한 꿈을 많이 꾸었다. 포도주 병에 새끼 고양이 시체가 들어 있는 꿈을 꾸었다. 새끼 고양이가 눈을 부릅뜨고 좁은 병 안에 빠져 죽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병안에다 새끼 고양이를 집어넣을 수 있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판다 카레 꿈도 꾸었다. 보통 카레 위에 조그만 판다가 한 마리 고스란히 올려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포크로 찍어 먹었다. 오도독 뼈를 씹는 것처럼 약간은 딱딱한 고기이다. 한입 먹은 참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이 꿈은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안 좋 다. 옆방에서는 여자 오페라 가수가 숙박을 하면서, 아리아 연습을 했다. 발성 연 습이나 음계 연습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음성도 음정도 아주 정확했다. 아마도 팔레르모 오페라좌에 출연하고 있는 가수가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리라. 그 옆방 사람은 예쁘장한 샴 고양이를 기르고 잇는데, 그 고양이가 가끔 우리 방으로 놀 러 왔다. 호기심은 많은 주제에 겁도 많은 고양이였다. 하루에 한 번 메이드가 청소를 하러 왔다. 메이드가 오면, 우리는 방에서 나와 근처로 시장을 보러 갔다. 메이드는 늘 둘이서 왔다. 올 때마다 멤버가 바뀌는 데, 그 중에는 깜짝 놀랄 만큼 미인 아가씨도 있었다. 청소를 해주는 것은 좋은 데, 냉장고에 넣어둔 초콜릿이 절반이나 없어지거나, 내 위스키가 조금씩 줄어드 는 일도 있었다. 변기 안에 담배 꽁초가 그대로 버려져 있는 일도 있었다. 그 대 신 중요한 물건이 없어지는 일은 없다. 책상 위에 놓아둔 돈도 그대로 있다. 식 량이 가끔 줄어드는 것뿐이다. 어떤 유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먹을 것을 앞에 하 면 자제심이란 것이 제 기능을 상실하지 않나,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날이 저물어 일을 끝내고, 식사를 하고 나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우리는 포 도주를 마시며 텔레비젼을 보았다. 덕분에 꽤 많은 영화를 보았다. 전부 이탈리 아어로 더빙된 영화다. 아라비아 로렌스의 피터 오툴도 이탈리아 어로 말을 했 다. 나의 개인적인 감상으로 하자면 피터 오툴만큼 이탈리아 어가 어울리지 않 는 사람도 없다. 폴 뉴먼 같은 경우는 제법 잘 어울린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 언까지 이탈리아 어 더빙판으로 보았다. 코미디 프로그램도 보았고, 노래 프로그 램도 보았고, 뉴스도 드라마도 보았다. 이만큼 텔레비전을 열심히 본 것은 난생 처음이다. 달리 할 일이 없으니 별 도리가 없다. 끝내는 텔레비전 보기에도 지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쳤으면서도 보았다.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며, 화면의 움직이는 것을 보기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되었다. 밤에 몇 번은 오페라를 들으러 갔다. 팔레르모에는 오페라 극장이 두 군데 있 다. 마시모와 폴리테아마에서 오페라 공연을 한다. 밖에서 보면 다른 건물과 다 를 바 없이 거무튀튀한데, 안으로 들어가니, 그런대로 괜찮다. 오래된 건물인 만 큼, 그 나름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꽤 멋진 극장이다. 천장은 저만큼 높고, 박스 석이 빙 둘러싸여 있고, 금색과 적색으로 통일되어 있어, 19세기에서 금세기 초 에 이르는 지방 문화의 화려함을 가늠케 한다. 입구에는 고풍스런 제복을 입은 안내원이 열 명 정도 죽 서 있다. 나는 여기에서 레스피기의 세미라마라는 흔히 보기 어려운 오페라와, 로시니의 탱크 레디를 보았다. 세미라마는 앞에서 두 번 째 줄에 앉아 이만 도라크마(대략 이천엔 하고 알마)였다. 객석은 거의 만원이었 다. 팔레르모는 놀 거리가 적은 도시라서, 오페라 공연이 있는 날이면 사람들을 옷을 쫙 빼 입고 테아트르에 와서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나눈다. 물론 모 두에게 자랑을 하기 위해서이다. 요컨대 오페라 극장은 화려한 거리의 사교장인 것이다. 세미라마는 음악적으로 좀 장황한 오페라였다. 나는 줄거리도 잘 파악할 수가 없어(팸플릿은 전부 이탈리아 어로 되어 있다), 무척난감 했다. 줄거리가 상당히 복잡한데다, 등장 인물들이, 모두들 비슷비슷한 흰 옷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 어, 구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팸플릿을 그럭저럭 해독하니 이 세미라마는, 1910 년에 딱 한 번 공연된 수수께끼의 오페라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오케스트라가 레스피기의 음색을 정확히 구현하고 있음에는 감탄하였다. 그렇게 딱 들어맞는 음색을 연주하는 점, 역시 이탈리아답다(후일 시칠리아의 오 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를 들었는데, 그때는 전혀 라흐마니노프로 들 리지 않았다). 탱크 레디는 마리린 혼이 나온다 하여 초만원이었다. 평판도 좋았다. 우리는 한 번쯤은 이런 사치를 부려도 좋지 않은가 하고 분발하여 박스석 티켓을 샀다. 박스석에 앉아, 지참해 온 포도주를 찔끔찔끔 마시며 오페라를 보는 것도 퍽 기 분좋은 일이엇다. 요금은 둘이서 만 엔 정도였다. 탱크 레디는 상당히 재미있기 도 하였고, 객석도 꽤 흥분하였지만, 나의 정직한 감상으로는, 오페라에 위할 수 있는 선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혼 씨의 그날 상태가 별로 좋 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카타니아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에도 갔다. 테아트르 베르 니니라고 하는 이곳도 상당히 훌륭한 극장이다(베르니니는 카타니아 출신이다). 나는 여기에서는 베르디의 에르나니를 보았다. 요금은 무료. 어떻게 무료로 들어 갔는가 하면, 우리가 이 오페라를 보기 위해 일부러 카타니아까지 왔노라고 말 하자, 티켓 판매소에 있는 아저씨가 아무 말 없이 무료 초대권을 주었던 것이다. 이 일은 시칠리아에서 생긴 많지 않은 좋은 일 중의 하나였다. 시칠리아에는 일 본인이란 존재가 상당히 희귀한 것이다. 공짜 티켓을 얻었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에르나니는 아주 활력에 넘쳐 있어, 시칠리아에서 본 세 편의 오페라 중에서는 가장 즐길 수 있었다. 시골 연 극 같은 투박함이 있는 베르디로, 정색한 구석이 별로 없이 "모두들 오늘밤은 신 나게 즐기지 않으렵니까."란 식의 민중적인 활력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런 미 래 지향적이며 현세적인 활기는 필시 이탈리아 지방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흥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케스트라도 배역도 밀라노 같은 곳에 비하면 얼마간 뒤질지 모르겠으나(그러나 이날밤 에르나니 역은 하야시 케이코 씨였다), 그런만 큼 객석에 "내가 이 동네에서 공연되는 오페라의 흥을 좀 돋우어야지."하는 친밀 한 공기가 흘러, 상당히 재미있었다. 옆에 앉은 아줌마는 귤을 먹으면서, 가수와 하나가 되어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다. 시칠리아에서 지내며 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음식이다. 그렇다고 미슐 란에 실려 있는 별 표시 유명점에 특히 맛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그런 유 명한 음식점에 몇 군데 가본 일이 있는데, 고개를 갸웃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 았다(미슐란은 일반적으로 소홀함이 없는 요리를 맛보게 해주는 가게가 높이 평 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는 이탈리아 요리의 미적 질이나 기세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시칠리아에서는 소홀함이 없는 요 리보다는 '소홀함이 있는 요리'쪽이 맛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페라와 마찬가지 로, 다소 투박하더라도 활기가 있는 편이 이 시칠리아라는 풍토에 어울리지 않 을까. 그런 의미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훌쩍 들어간 동네 음식점에서 제법 감탄 할 만한 요리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든다. 물론 지독하게 한심한 요리를, 억지로 먹어야 했던 일도 있지만. 우리는 파렐르모에서 외식을 할 때는 대개 점심을 택했다. 밤에 밖으로 나가 는 것이 귀찮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음식의 양이 너무 많아서, 밤중에 (죽 이탈리아의 저녁 시간) 외식을 하면 배가 꽉차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이다. 팔레르모의 주요 레스토랑을 전부 다녀본 것도 아니고, 좀 비싸다 싶은 음식 점은 경원하여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여기가 팔레르모에서 가장 요리가 맛있는 곳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그라나테리 거리에 있는 '아 쿠 카니아'의 요리를 가장 좋아한다. 나는 여기에 세 번 갔다. 이탈리아에 있으면서 두 번 간 레스토랑은 많지만, 세 번 간 레스토랑은 적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음 식이 맛있는 곳일 것이다. 하기야 이탈리아의 레스토랑은 요리사의 이동이 빈번 하여, 일년 후에 가보면 음식 맛이 아주 다른 경우도 있으므로, 지금도 여전히 이 레스토랑의 음식이 맛있을지는 자신이 없지만. 이곳 요리 중에서는 우선 뷔페식 안티 파스타가 앗있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안티 파스타는 겉보기에는 맛있어 보이지만 막상 먹어보면 기름기가 많아 싫증 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레스토랑은 실로 산뜻하고, 집에서 만든 요리 같은 맛이 나서 좋다. 그걸 먹으며 감칠맛이 나는 시칠리아의 백포도주를 마신다. 그 리고 주방장의 추천품은 시칠리아 명물인 파스타 콘 사르데(정어리 파스타)와 숯불구이 오징어 링구이네. 이 두 요리는 우열를 가리기가 힘들 만큼 맛있다. 정 어리 파스타란 파스타에 잣과 정어리와 펜네르와 건포도를 섞은 아주 향긋한 요 리이다. 그것이 담긴 접시가 나올 때의 냄새가 참으로 좋다. 어떻게 그런 재료를 뒤섞어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기묘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 먹어보 면 상당히 부드러운 맛이다. 시칠리아 아니면 쉬 맛볼 수 없는 요리이므로, 만약 독자 여러분께서 시칠리아에 갈 일이 있다면 꼭 맛을 봐주셨으면 한다. 한편 숯불구이 오징어 파스타도 놓칠 수 없다. 숯불구이 오징어 파스타 같은 것은 아무데나 잇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어중간한 숯불 구이 오징어 파스타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듬뿍담은 링구이네에 이래도 투정 을 부릴 테냐란 식으로 숯불구이 오징어가 얹혀져 있는 것이다. 이 요리를 처음 보았을 때는,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오징어를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질리고 말 았지만, 남김없이 싹 먹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단 먹어보면 부담없이 위 가 수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다 먹을 즈음에는 냅킨이 숯검정으로 새까 맣게 돼버리는 것이 좀 흠이지만, 이 박력도 한 번 음미해 봐주셨으면 한다. 나 는 아카사카 '그라나다'의 숯불구이 오징어 파스타도 좋아하지만, 하지만 '아 쿠 카니아'의 그것에 비하면 숯검정의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 레스토랑의 요리는 대개 한 가지 요리의 양이 많아서 파스타와 안티 파스 타를 먹고 나면 배가 부르다. 그래서 우리는 둘이 가벼운 세컨드 피아트(메인 디 시)를 한 가지 주문하고, 그것을 나누어 먹는다. 사실은 파스타와 안티 파스타로 충분하지만, 세컨드를 주문하지 않으면 웨이터가 "오늘 저녁 여섯시로 세계가 종 말을 고합니다."란 말을 들었을 때 같은 얼굴을 한다. 그런 얼굴은 가능하면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단을 세컨드를 주문하는 것 이다. 이곳의 세컨드는 생선이 맛있다. 신선한 생선을 상큼하게 그릴에 구워 준 다. 느루먼 카포티를 닮은 헤드 웨이터가 생선을 날라와서는,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여 날랜 솜씨로 뼈와 살을 발라 준다. 그리고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신다. 아내는 케이크를 먹는다. 내 생각에 여자는 디저트용으로 여분의 소형 위를 지 니고 태어나지 않았나싶다. 이렇게 먹고 가격은 오만 도라크마(오천 엔 정도). 그러나 이만큼 먹으면 이튿 날 아침이 되어도 배가 꺼지지 않으니, 싸다 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한다. 생선 이 꽤 비씨니까, 세컨드로 고기요리를 시키면, 가격은 훨씬 싸진다. 그리고 또 시칠리아는 아이스크림이 맛있다. 재료인 과일의 맛이 살아 있어, 아주 상큼하다. 대기가 뜨뜻한 탓에 거리로 나가면 매점에서 곧잘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면, "콘으로 할거냐, 빵으로 할거냐."고 묻는다. 처음 에는 무슨 뜻의 질문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빵이라니? 하고 주변을 돌아 보니, 햄버거 빵에 아이스크림을 끼워서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 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세상이 넓다지만, 아이스크림을 이런 식으로 먹는 곳은 시칠리아뿐이다. 하나 이런 것은 취향에 따른 문제이니, 일일이 트집을 잡을 생 각은 없다. 그렇다고 시칠리아의 맛있는 요리를 맛보기 위해서 레스토랑을 전전할 필요는 없다. 자취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시칠리아는 더없이 행복한 곳이다. 시장에 가 면 생선 가게가 유난히 많다. 그리고 막 잡아들인 가다랭이며 고등어며 참치며 오징어며 새우며 조개며, 신선한 해산물이 즐비하게 제 색을 자랑하고 있다. 생선만이 아니다. 채소나 과일도 불평의 여지가 없을 만큼 풍부하다. 포도주도 아주 맛있고, 더구나 싸다. 팔레르모라는 도시에 넌덜머리가 나고 만 나조차도, 이 땅이 산출하는 먹을거리만큼은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든 다 갖추고 있는 땅이란 그렇게 쉽사리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남유럽 조깅 사정 남유럽에 장기간 체재하면서 가정 불편한 일은, 매일 조깅을 하기가 수월치 않다는 점이다. 남유럽에는 조깅을 하는 습관이 거의 없고,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본 적도 거의 없다. 동네를 달리고 있는 사람은 도망중인 서리꾼이든가(진짜 있 다. 이런 사람이), 아니면 하루에 두 번밖에 오지 않는 버스를 놓칠세라 허둥대 는 배낭족 정도이다. 따라서 내가 천천히 거리를 달리고 있으면, 길 가던 사람들 이 모두 이상한 눈초리로 본다. 저 작자 대체 뭐야 하는 눈으로 빤히 본다. 멈춰 서서 입을 헤 벌리고 열심히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시골로 가 면 갈수록 심해진다. 조깅이나 체력을 단련하는 습관 내지는 개념은, 원래 도시 형 문명의 산물이므로, 난 그런 거 몰라라고 하는 사람은 정말 모르는 것이다. 미코노스에서 지낼 때에는, 대개 호라 항구에서 산을 하나 넘어(이 산을 넘기 는 꽤 임이 든다) 섬의 반대편 해변까지 달렸었다. 시즌이 지난 겨울철이라, 사 람은 좀체로 볼 수가 없다.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당나귀를 타고 채소 를 팔러 가는 아줌마거나 농부 정도였다. 겨울의 미코노스는 바람이 몹시 세서,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되밀려 갈 것만 같은 때도 있었다. 이 섬에서 조깅을 하고 있으면 더러 불러 세우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왜 일부러 산을 달려 넘는지 전 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보세요, 왜 그렇게 힘들게 뛰어서 넘는 거죠?"라고 질문을 한다. 그리스 인들은 한가할 때는 참으로 호기심이 왕성하다. 그날 나를 불러세운 사람은 검은 복장의 할머니 두 사람과 쉰 전후의 모자를 쓴 남자 한 명이었다. 세 명 다 농가 사람인 듯, 얼굴은 햇볕에 타 거뭇거뭇하고 손 발이 두텁다. 세 사람은 농가의 현관에 서서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지나가자 하 던 얘기를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을 헤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서 '이거 참'하고 생각했더니 아니나다를까, 부르는 것이다. 그것도 오십 미터쯤 앞으로 전진한 차에 "어이 젊은이, 이쪽으로 와봐요."라고 불러대는 것이다. 한심 한 영어이지만 일단은 영어이다. 참 내 뭐가 젊은이야, 라고 투덜투덜 혼자 중얼 거리면서 되돌아간다. "안녕하십니까."라고 내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쇼."라고 남자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라고 두 할머니가 인사를 한다. 한 사람은 도수가 높은 안경을 끼고 있고, 한 사람은 코끼리처럼 뚱뚱하다. 양쪽 다 어딘가 모르게 조심스럽게, 내가 신고 있는 조깅화며, 입고 잇는 티셔츠를 빤히 보고 있다. 간 단히 마음을 놓을쏘냐 싶은 분위기다. "어째서 자네는 이길을 달리고 있는 게 지?"라고 남자가 묻는다. 이 남자가 아무래도 대변인 역할을 맞고 있는 듯하다. "달리기를 좋아해서요."라고 내가 대답한다. 아무튼 똑같은 질문을 해대므로, 이런 경우의 그리스 문장은 전부 암기하고 있을 정도이다.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은."이라고 남자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이어 질문 한다. "무슨 용무가 있어 달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로군?" "용무는 없습니다." 그러자 세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내가 한 말에 대해 한 차례 토의를 한다. 나는 그 동안 땀을 닦든가, 주변의 경치를 바라보든가, 대충 그런 일을 한다. 바 람도 세고, 땀이 식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고 하여, 빨리 달리고 싶은데, 얘기 가 아직 안 끝났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 달릴 셈이지?"라고 남자가 다시 질문한다. "슈퍼 파라다이스 비치."라고 나는 대답한다. "거기라면 제법 먼데."라고 남자가 말한다. "예, 그렇죠."라고 나. "내내 달려가는가?" "예, 그러니까 달리기를 좋아해서요." "어째서 비치까지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지?"라고 뚱뚱한 쪽 할머니가 옆에서 질문한다. 이거 골치 아프군, 내 그리스 어가 치졸한 탓인 지도 모르겠으나 전혀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요, 달리기를 좋아한다니까요, 할머니."라고 나는 똑같은 말을 집요하 게 되풀이한다. "달리면 몸에 안 좋아요."라고 안경을 낀 할머니 쪽이 말한다. "암, 그럼 그럼."하고 뚱뚱한 쪽이 동의한다. 달리기가 몸에 안 좋다니 처음 듣는 학설이지만, 두 할머니는 꽤 진지하게 그 렇게 믿고 있는 듯, 양쪽 다 양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다. "괜찮습니다. 이것 보세요. 이렇게 힘이 세다니까요." 하고 나는 거의 체념하여 알통을 만들어 보이기도 하며, 어이휴 참 내 난 도대체 이런 데서 뭘하고 있는 거야, 하고 허망하게 생각한다. 잠시 우리는 서로의 뜻을 전달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끝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람센 날, 계곡을 끼고 마주하고 있는 듯한 대화이다 접점이란 게 없 다. 남자는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는 양, 양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한다. 두 할머니는 자리가 비좁아 못 견디겠다는 기린처럼 목을 좌우로 흔들어대고 있다. 침묵이 내린다. 당나귀가 부르르르 몸을 떤다. "저, 우리 집에 들러 우조라도 마시고 가요."라고 뚱뚱한 쪽 할머니가 말한다. 정말 농담하고 계시는군요. 아무리 그래도 조깅을 하는 중에 그렇게 독한 술을 어떻게 마십니까. 정말 몰라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서두르는 길이라서요."라고 생글거리며 거절한다. "우조는 몸에 좋아요."라고 안경쓴 할머니 쪽이 말한다. 상대를 하자면 끝이 없어, 적당히 매듭을 짓고 다시 달린다. 한동안을 달리다 가 뒤를 돌아다보니, 아직도 세 사람은 내 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남유럽에서 달리기를 함에 있어 두 번째 문제점, 그것은 개다. 참으로 길에는 풀어 키우는 개가 많다. 게다가 개도 사람처럼 조깅하는 사람을 흔히 보지 못했 으므로, 내가 달리고 있으면, 야 이상한 놈이다 하고 뒤쫓아오는 것이다. 인간인 경우는 좀 귀찮기는 해도, 일단 얘기를 하면 통하는 면도 있지만, 개인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개라는 동물은 통상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즉 도리가 통 하지 않는 것이다. 이건 자칫하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문제이다. 한번은 동네 외곽에서 커다란 검정개한테 심각하게 물린 적이 있다. 주위에는 사람 한 명 없고, 이거 이제 끝장인가 생각하고 있는 차에 마침 택시가 지나가 다, 나와 개 사이에 파고들어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었다. 그런 덕분에 무사히 목숨을 연명하였다.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살았을 때에도 개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고생이 많았다. 팔레르모 경마장 옆에 상당히 근사한 조깅용 코스가 있어, 있는 것까지는 고마 운데, 거기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살고 있던 데서 달려 십오분 거리에 있는 그 사이에 개가 몇 마리나 있는 것이다. 다른 조거들은 어떻게 하나 살펴 보았더니, 아무 문제가 없다. 다들 차를 타고 코스까지 왔다가, 달리고 나면 차 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차가 없으므로 도무지 거기까지 달려서 가는 외 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특히 주유소 옆에 진을 치고 있는 커다란 백구가 악질 이었다. 내가 달려 지나가면, 다른 일은 제쳐 두고라도 왕왕거리며 내 뒤를 쫓아 오는 것이다. 언제나 같은 장소에 대기하고 있다가, 언제나 어김없이 뒤쫓아온 다. 개 주인도 대개는 그 주변에 있는데, 개가 내 뒤를 쫓아가도, 딱히 주의를 주는 법도 없이,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서툰 그리스 말로 몇 마디 불평을 해도, 그는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그런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불친절하고 고집스럽다. 다른 데서 온 놈들은 모두 개한테 물려버려라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 경향마저 있다. 할 수 없이 처음 몇 주간은 호신용 방망이를 들고 다녔는데, 이게 또 문제였 다. 왜냐하면 그 당시 마피아의 간부에 대해 꽤 큰 규모의 재판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 마피아 쪽도 그 보복으로 몇 명인가 기관원을 가두에서 사살하는 등, 아무튼 온 동네가 엄중한 경계 태세였고, 도처에 경찰이 깔려 있었다. 모두 방탄 조끼에 자동 소총을 메고, 팽팽하게 긴장이 감도는 얼굴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 을 방망이를 들로 달렸으니, 이건 좀 무사하기가 쉽지 않다. 개도 무섭지만, 경 찰도 무섭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은 달리기를 포기하든가, 개와 정면 대결을 하든가 둘 중 의 하나이다. 물론 나는 후자를 택했다. 개나 문예평론가들을 무서워한다면 소설 을 쓸 법한가, 라면 좀 과장스럽지만, 개 같은 족속에게 지고 견디랴 싶은 생각 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내 쪽에서 먼저 개한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하여 개와 나는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내가 몸을 구부리고, '요놈자 식' 하는 눈초리로 쏘아보자, 개 쪽도 '어쭈, 싸울래'란 식으로 우우우우하고 낮은 신음을 ㅂ으며 나를 맞쏘아 보았다. 나도 이렇듯 심각하게 개와 정면으로 싸움 을 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라, 결과가 어찌될지 걱정스러웠지만, 그러다 이 싸움 은 나의 승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개의 눈 속에서 당황한 기미를 발견했기 때 문이다. 내 쪽에서 개를 향하여 도전을 하였으므로 개는 개 나름으로 혼란을 일으켜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간단하다. 아니나다를까, 서로 오륙분 정도 쏘아본 후에 개가 순간적으로 먼저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을 포착하여, 나는 십 센티미터 정도까지 근접한 거리에서 있는 힘을 다해 개를 향 하여(물론 일본말로), "이 바보 같은 자식, 까불고 있어! 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 이후 그 백구는 일 절 나를 쫓아오지 않게 되었다. 때로 내가 농담삼아 뒤쫓아가면 오히려 꼬리를 감추고 달아나는 꼴이 되었다. 필경 겁을 집어먹은 것이리라, 그렇게 하고 보니, 개 뒤를 쫓는 것도 재미가 삼삼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도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지만 역시 조깅을 하는 사람은 있 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조거는 미국이나 독일의 조거와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 다. 일본의 조거와도 상당히 다르다. 나는 여러 나라의 여러 동네를 달려보았지 만, 이탈리아의 조거는 선진국치고는 역시 특수한 부류에 속하는 인간이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든다. 우선 첫째로 멋을 많이 부린다. 나 같은 사람은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됐지 하 는 기분으로 시작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그들은 먼저 옷차림부터 반듯하게 갖춘다. 이런 형상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 까지 동일하다. 각기 어떻게 하면 멋지게 보일지 연구도 하고, 돈도 들인다. 그 리고 또 그렇게 차린 모습이 번듯하게 보이기도 한다. 감탄하고 만다. 거기에다 실력이 있으면 가타부타 할 말이 없을텐데, 그 선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발 렌티노 상하의에 밋소니의 타월을 걸치고 뛰고 있으니, 뭐 상당하기는 하다. 이탈리아 조거의 두번째 특징은 혼자서 달리는 사람이 극단적으로 드물다는 것이다. 대개 몇 명이 어울려 함께 달린다. 혼자 뭘 하는 데 서투른 것인지, 국 민성이 특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인지, 아니면 혼자서는 떠들 수가 없으니 그 게 고통스러운 건지, 나로서는 판단할 수가 없다. 처음 한동안은 이런 현상이 도 무지 불가사의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러닝은 고독한 스포츠다-라고 허세를 부 릴 마음도 없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달린다 해서 문제될 것도 딱히 없지만, 그 러나 유감스럽게도 혼자 달리는 사람은 그 수가 지극히 적다. 다른 나라에서는 대충 팔할 정도가 단신 러너이고 나머지 이할이 단체, 혹은 복수 러너이다. 그런 데 이탈리아는 이 비율이 완전히 역전되어 있다. 모두 함께 생글생글, 재잘재잘 수다를 떨어가며 제법 재밌게 달린다. 한 사람이 근처 수풀 속으로 들어가 서서 소변을 보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며 그가 돌아 오기를 기다린다. 남의 일이니까 이러쿵저러쿵할 수도 없고, 재미있으면 족하지 않으냐고 말한다면 그뿐이자만, 소변보는 사람까지 기다릴 일은 없지 않은가. 말 은 다 같은 러닝, 조깅이지만 나라에 따라, 상당히 모양새가 다르다. 이탈리아 사람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보면, 전쟁이 나도 이 나라 사람들은 절대로 이 기고 돌아오지 못하리란 생각이 절로 든다. 제2차 대전의 격전지 마르타를 방문했을 때도, 현지 사람한테서 비슷한 이야 기를 들었다. 마르타는 대전중에 이탈리아로부터 수차례 폭격을 당했는데, 마르 타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나쁜 감정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품지 않고 있다.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말이죠, 이탈리아 사람들은, 먹는 일, 떠드는 일, 여자를 꼬시는 일을 제외하면, 열심히 뭔가를 하는 법이 별 로 없거든요." 하고 어떤 마르타 사람이 가르쳐 주었다. "마르타를 폭격했을 때 도 말이죠, 고도를 낮추면 고사포가 무서우니까, 아주 높은 데다 대고 폭탄을 우 수수 떨어뜨리고는 그냥 돌아가 버리고 말았어요. 그래 가지고서야 어디 공격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요. 바다에 떨어지든가, 벌판에 떨어지든가 하겠죠. 하지만 그들은 그걸로 족한 거예요. 폭탄을 떨어뜨리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떨어뜨린 것 뿐. 그러니까 마르타는 무솔리니가 제아무리 큰소리를 쳐대도 함락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 다음 독일 공군이 공격해 왔는데, 정말 굉장하더군요. 폭격기가 급강 하하여 지면에 아슬아슬한 선까지 내려와서는, 전부 날아갔어요. 온 동네가 깡그 리 파괴되고 말았죠. 이탈리아는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나라입니다." 나도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탈리아란 나라는 좋은 나라 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는 사람이 별 이득도 없이 달리지 않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창부까지도 매일 아침 조깅을 한다. 어째 무라카미류의 "뉴욕 시티 마라톤' 같은 이야기지만, 나는 실제로 함부르크에서 그런 창부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매일 올스타 호 주변을 한 바퀴 돈다고 말했다. 나도 같은 코 스를 달리고 있던 터라 시험삼아 시간을 물어 보았더니, 꽤 빠른 속도였다. 굉장 하군요, 라고 내가 칭찬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몸이 자본이잖아요, 라고 말했다. 그렇다 창부도 소설가도 몸이 자본이다. "당신 혼자서 달리고 있나요?"라고 내가 물어보았다. "당연하잖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어이, 이탈리아 인, 들었나? 독일에서는 창부도 매일 달리고 있다고, 그것도 혼자서 말이야. 가끔은 혼자 달리는 사람을 보기도 한다. 묵묵히 달리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혼자서 달리는 것이 묵묵히 달리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내가 달리고 있으면 옆으로 다가와, "저, 얼마나 달립니까?"라든지, "같이 뜁시다."라고 말을 거는 성가신 놈이 있다.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이탈리아 말을 하나도 모른다고 하는데도, 그런데도 옆에서 나란히 달리며, 뭐라뭐라 조잘조잘 떠들어 댄다. 처음에는 이 자식 혹시 호모 아니야란 생각도 했는데, 그런 인상은 풍기지 않는다. 단지 입을 놀리고 있지 않으면 심심한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남유럽에서도 가장 달리기 힘든 도시, 그곳은 뭐니뭐니 해도 로마이다. 달릴 장소가 없는 게 아니다. 달릴 장소는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보르게제 공원 같 은 곳은 달리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널찍하고, 경치도 좋다. 테베레 강가의 길 도 무척 좋다. 문제는 거기까지 도착하는 일이다. 거기까지 가는 길이 웬만한 지 옥 버금간다. 무엇보다 길이란 길은 모두 주차중인 자동차로 꽉 막혀 있고, 온 거리가 개똥투성이, 자동차는 핑핑 속도를 내고 있고, 공기는 나쁘고, 인간들이 많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공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온몸이 후들후들 지 쳐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센트럴 파크에 도착하기까지의 뉴욕 거리도 상당 하다고 생각하지만, 로마의 카오스에 비하면 우아할 정도다. 또 한 가지 로마에서 달리며 진저리를 친 일은, 길거리에 우글우글한 틴에이 저들의 버릇없음이다. 버릇이 없다고 하여 브롱크스의 아이들처럼 헤로인을 마 시고 튀어나와 나이프를 휘두르는 본격적인 버릇없음이 아니다. 다만 유별나게 경박하고 시끄러운 것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 성적으로도 조숙하 여, 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애송이가 열다섯에 첫 경험을 치른다고 한 다. 그런 일에만은 열심인 것이다. 이탈리아의 학교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냅 색을 어깨에 맨 중고등학생들이 대낮부터 길거리에서 한가롭게 어슬렁거리고, 담배를 피우고, 애인과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 아무튼 시간과 기운은 얼마든지 있는데 돈은 없는 패거리들이니, 그 앞을 내가 혹 지나 가거나 하면, 시간 죽이기에 좋은 밥이 왔다는 식으로 캬캬 소리를 질러댄다. 그 소란스러움, 집요함으로 하자면, 다른 어느 나라를 가도 좀 경험하기가 힘들 것 이다. "어-이, 일본 사람, 더 빨리 달려!" "어-이, 일본 사람, 달리기는 그만두고 쿵푸나 하라고, 쿵푸." "하나, 둘, 셋, 넷." 이런 버릇없는 소리를 저마다 한마디씩 ㅂ어낸다. 같이 달리는 흉내를 내는 놈이 있는가 하면, 집요하게 쿵푸 흉내를 내는 놈도 있고, 그저 퐁퐁 제자리뛰기 를 하는 놈도 있다. 저 옛날 타잔 영화에 나온 버릇없는 원숭이하고 다름이 없 다.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나마 화는 안 나지만, 그래도 시끄럽고 성가시 다. 록키의 테미를 합창하는 놈들도 있다. 일본의 고등학생은 우선 이렇게 바보 스러운 짓은 안 한다. 나는 일본의 중고등 학생을 볼 때마다, 입시 전쟁이니 규 칙이니 서클 활동이니 신경질적인 선생이니 하는 것들로 일일이 단속을 당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런 소모적인 상황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다고까지 생각하는 인간이지만, 그런 나조차 이탈리아의 애송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목덜미를 낚아채고는 "이 놈들 그런 별볼일 없는 짓거리 만 하지 말고, 학교에 가서 공부 좀 해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 배 우라고."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런 놈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도 바보스럽고 한심하여, 안들리는 체 하며 그 자리를 빨리 지나간다. 로마는 딱 잘라 말해 거대한 시골 동네 같은 곳이다. 도시로서의 정보량을 보 아도, 뉴욕이나 도쿄에 비해(아니 밀라노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적고, 뒤져 있 다. 하지만 그런 만큼 로마의 어린애들은 생명력에 넘쳐 있고, 활기에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버릇나쁜 애송이들 때문에 때로 짜증스럽기는 하지만(한 두세 놈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때도 있다), 그래도 그들의 눈은, 다케시타 거리를 걷 고 있는 일본의 아이들의 평균적인 눈빛에 비하면 움직임이 민첩하고 반짝임이 있다고 나는 느낀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장면 전환이 잽싸고 정확한 것이다. 무 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도쿄의 평균적 아이 들의 눈빛은 '그러니까, 그래에서'식으로 느릿느릿하거나 한층 신경질적으로-리 모컨으로 채널을 파닥파닥 돌리는 것처럼-분주하거나 그 둘 중 하나이다. 그들 은 도시의 정보량에 미처 쫓아가지 못하거나, 아니면 쫓아가려고 필사적인 노력 을 한다. 그 중간을 쉬 볼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 점, 로마의 피라미들은 아주 편하다. 쫓아가야만 할 것이 거의 없는데다, 재미있는 일은 꽤 많은 편이기 때문이다. 근처에 있는 공원에 누워 뒹굴거리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향하여, "거 아저씨, 요즘 어때요?"라고 놀리고만 있어도 재미있으니까. 여행지에서, 그 동네의 길을 달리는 일은 즐겁다. 시속 십 킬로미터 전후가 풍 경을 보며 달리기에는 이상적인 속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차는 너무 빨라서 사 소한 것을 놓치기 쉽고, 마냥 걷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각 거리에는 각기 다른 공기가 있고, 각기 다른 달리는 기분이란 게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한다. 돌아가는 길 모퉁이의 모습, 서로 다른 울림의 발소리, 보도의 폭, 쓰레기를 버리는 시민들의 양식, 각기 저마다 모두 다르다. 정말 흥미로울 정도 로 다르다. 나는 그런 동네의 정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달리는 것이 좋다. 풀 마라톤을 달리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런 달리기도 나쁘지 않다. 나도 살아 있고, 모두도 살아 있다는 실감이난다. 그런 실감은 왕왕 상실되기 쉬운 것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낯모르는 도시에 가면 반드시 대중 술집에 가듯, 또 어 떤 부류의 사람들이 낯모르는 도시에 가면 반드시 여자와 자듯, 나는 낯모르는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린다. 달림으로 해서 나밖에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고자 한다. 그런 시도가 뜻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달린다. 뭐가 어찌되었든 달리는 것을 좋아하고, 낯선 땅을 달린다는 것은 아주 유쾌한 일이다. 마치 방금 산 노트의 첫 페이지를 여는 것 처럼. 로마 빌라 토레코리 간신히 로마로 돌아온다. 시칠리아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은, 로마조차 비교적 온화하고 평화로는 도시로 보이니 신기하다. 우리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로마 교외에 '빌라 토레코리'라는 연립 셔틀 호텔을 찾았다. 교외라고는 해도 도심에 서 버스로 십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집이 그렇게 넓지는 않다. 거실과 침실 과 조그만 부엌과 목욕탕. 일단은 여기에 정착하여, 당분간은 특별한 일 없이 멍 하게 나날을 보낸다 여행의 피로가 슬슬 밖으로 드러날 시기이다. 생각해 보니 이곳저곳 허둥지둥 옮겨 다니는 사이에 일본을 떠난 지 어언 넉 달이 지났다. 기후나 음식의 급격한 변화 탓에, 몸의 느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머리칼은 가슬가슬하고, 몸이 전체적으로 나른하다. 눈은 움푹 들어가고, 얼굴은 약간 부어 있다. '빌라 토레코리'는 이름 뜻하는 바대로, 오래된 빌라(저택)를 호텔로 개조한 것 으로, 꽤 멋지고 훌륭한 정원이 있다. 그리고 또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토레코 리란 '세 개의 언덕'이란 뜻이다) 전망도 아주 좋다. 로마 거리가 한눈에 내다보 인다. 방의 창문에서는, 외무성과 테베레 강과 축구장이 있는 포로 올림피코가 보인다.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에는, 워오오오오하는 함성이 들끓는다. 그리고 그 위편 하늘로는 담배의 보라색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처음 그 연기를 보 았을 때에는 이 세계에 무슨 대이변이 일어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겨울이 끝날 무렵에서 초봄에 걸친 로마의 풍경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로마 거리는 마치 어린애가 칭얼거리며 보채듯,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겨울을 떨쳐내려 하 고 있었다. 그런 로마의 풍경은 다른 어떤 계절의 로마와도 달랐다. 야릇한 모양 의 구름이 하늘을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가 하면, 산기슭을 구불구불 뱀이 기어 가듯 흘러가는 테베레 강이 갑자기 기묘한 색으로 빛나기도 했다. 나는 창을 향 하여 책상을 놓아두고서는, 일을 하다가 피곤해지면, 그런 풍경을 명하니 바라보 았다. 내 자신의 몸도, 문장을 자아내기 위하여, 로마 거리와 마찬가지로 보채고 있는 것이다. 그 계절에는 종종 비가 내렸다. 때로는 우박까지 내렸다(덕분에 베 란다에 내다 놓았던 바지리코 화분이 전멸하고 말았다). 비가 그치면, 옛날 스펙 터클 영화 같은 느낌으로 구름이 다이내믹하게 갈라지며, 그 사이로 그야말로 로마다운 강렬한 태양이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내밀고, 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 였다. 봄이 바로 저기까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은 그런 때였다. 그러나 그런 멋들어진 전망과 정취 있는 정원에 비해, 건물은 그다지 훌륭하 다 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 여기저기 덜컹거리고 있었고, 설비도 조잡스러웠 다. 벽지도 색이 바랜 데다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폐병 환자처 럼 헉헉거리고, 부엌의 환기장치는 고장이 나 아예작동조차 하지 않았다. 창문의 문짝이 맞지 않았고, 온수가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했다. 심지어 바닥이 삐걱삐 걱 흔들리기도 했다. 원래는 제대로 된 건물이었을 것이라고(품위도 있었을지 모 른다) 쉬 상상이 가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영락하여 황폐해 있다. 요컨대, 이런 오래된 저택을 원래 모습대로 보존하기 위하여 필요한 보수를 하지 않는 것이 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이 건물은 심심하면 매니지먼트가 바뀌는 탓에 관리 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뭐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면 보통 사람다원 생활을 할 수는 있다. 이 빌라의 미덕은, 뭐니뭐니 해도 조용하다는 것 이다. 나로서는 상당히 고마운 일이었다. 어찌됐건 이제야 간신히 조용한 환경에서 자리를 잡고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 제1고는 삼월 칠일에 완성했다. 삼월 칠일은 무척 추운 토요일이었다. 로 마 사람들은 삼월을 미치광이 달이라고 한다. 날씨나 기온의 변화가 제멋대로이 고 급격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따끈따끈하여 봄날 같더니, 하룻밤 자고 나면 다 시 한겨울로 돌아가는 식이다. 이날은 아침 다섯시 반에 일어나 정원에서 가볍 게 조깅을 하고, 그리고 쉬지 않고 열일곱 시간을 써 내려갔다. 한밤중에 소설이 완성되었다. 일기를 보니 사뭇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딱 한마디 '아주 좋다'하고 만 쓰여있다. 고단샤의 기노시타 요코 씨에게 전화를 걸어 소설이 일단 완성되었음을 알리 니, 사월 초순에 볼로냐에서 그림책 견본 전시회가 있는데, 국제부 사람이 참가 하기도 되어 있으니, 거기서 직접 원고를 전해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한다. 상당 히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고 내가 말하자, "그래요? 구백 장이나 된다 구요? 정말 재미있나요?"라고 의심스럽다는 듯 말한다. 대단히 의심이 많은 사 람이다. 바로 이튿날부터 제2고에 착수한다. 노트니 편지지에 쓴 원고를, 처음부터 다 시 전부 고쳐 쓰는 것이다. 사백 자 원고지에 구백 장분의 원고를 볼펜으로 다 시 고쳐 쓴다는 것은, 자랑할 속셈은 없지만 체력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 이다. 제2고가 완성된 것은 삼월 이십육일 이었다. 볼로냐 북페어 때까지 완성해 야지 하고 무척 서둘렀으므로, 완성될 무렵에는 오른손이 저려 거의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다. 나는 고맙게도 어깨가 결리지 않는 체질이라서, 어깨는 아무렇지 도 않은데, 팔은 영 쓸수가 없었다. 그래서 틈이 생기면 방바닥에서 열심히 팔 굽혀 펴기를 하였다. 장편소설 쓰기란 세상의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격렬한 육체 노동이다. 지금은 워드프로세서를 도입한 덕분에 꽤 편해 졌지만 말이다. 그러고는 다시 쉴 틈도 없이 제2고를 빨간 볼펜으로 수정하는 작업에 들어간 다. 결국 완전하게 완성되어, 『노르웨이의 숲』이란 제목이 붙은 것은, 볼로냐 에 가기 이틀 전이었다. 이 '빌라 토레코리'에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기간, 나는 소설 이외에는 문장이 란 것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편지를 쓸 기력도 없었고, 일기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그 다음에 쓴 문장은,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 어떤 잡지에 싣기 위해 이 시기의 일을 쓴 글이었다. 그 글은 에세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독백에 가 까울지도 모르겠다. 오전 세시 오십분의 일시적인 죽음 긴 소설을 쓰는 작업은, 내게 있어서는 아주 특수한 행위라 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든 그것을 일상적인 행위하고는 할 수 없다. 그 작업은, 홀로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 이, 먹을 거리도 없이. 수목은 벽처럼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겹겹이 거대한 가 지가 하늘을 가린다. 그 숲 속에 어떤 동물이 생식하고 있는지도 나는 모른다. 따라서, 긴 소설을 쓸 때면, 나는 머리 한켠으로 늘 죽음을 생각한다. 보통 때는 그런 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절박한 가능성으로 일상 속에서 생각한다는 것은-삼십대 후반의 건강한 남성 대부분이 그러하듯-극히 드 문 일이다. 그러나 일단 장편소설에 착수하면, 내 머리 속에는 어쩔 수 없이 죽 음이 자리를 트는 것이다. 나는 그 근질근질하고, 꺼끌꺼끌한 갈고리의 감촉을 늘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감촉은 소설의 마지막 한 줄을 다 쓸 때까지 절대로 내게서 떨어져 나가 주지 않는다. 늘 그렇다. 언제나 똑같다. 소설을 쓰면서,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 다. 죽고 싶지 않다, 라고 줄곧 생각한다. 적어도 이 소설을 무사히 완성시킬 때 까지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을 끝까지 완성시키지 못한 채 내동댕이 치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분했다. 어쩌면 이 소설은 문학사에 남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은 나 자신인 것이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이 소설을 완성시키지 못 한다면, 나의 인생은 엄밀하게는 나의 인생이 아닌 것이다-소설을 쓸 때마다 나 는 많든 적든 그렇게 생각하며, 그런 생각은 내가 나이를 먹고 소설가로서의 커 리어를 쌓아감에 따라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때때로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숨을 멈추고, 자신이 죽어 가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한다. 죽어 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상상해 본다 그러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안 돼, 이런 상황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라고.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부엌에 가서 주전자에 물을 넣어, 전기 히터의 스위치 를 켠다. 그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기도한다. "부탁입니다. 나를 좀더 오래 살게 해주세요. 나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지만-그렇다-대 체 나는 누구를 향하여 기도를 하면 좋은가? 신을 향하여 기도하기에는, 나느 지금까지의 인생을 너무도 내 마음대로 보내왔다. 운명을 향해 기도하기에는, 나 는 너무도 자신을 믿어왔다. 뭐 아무려면 어때. 누구를 향하여 기도를 하든 줄곧 기도를 하고 있으면 그러는 사이, 그 어느 누군가에게 제대로 전해질 지 모른다. 언젠가 어디엔가 있는 우주인이 신호를 캐치하기를 기대하며, 산상에서 여러 방 향으로 닥치는 대로 메시지가 담긴 전파를 하염없이 보내고 있는 과학자처럼. 어차피 나에게는 기도하는 방법밖에 달리 길이 없는 것이다. 이 불확실하고 폭 력적이며 불완전한 세계에 생식하는 우리들 주변에는, 실로 여러 가지 형상의 죽음이 넘쳐 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무사히 목숨을 부지 하고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닥치는 대로 기도를 한다. 한눈을 팔며 운전을 하던 파이터 의 차가 나를 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경찰이 길 모퉁이에서 얘기를 하다가 기 분 좋게 빙글빙글 돌리는 자동 소총이 나를 향하여 폭발하지 않도록 해주십시 오. 아파트 오층 베란다의 난간에 위태위태하게 놓여 있는 화분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정신 이상자나 마약 복용자가 갑자기 착란을 일으 켜, 내 등을 나이프로 쿡 지르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피아차 카브르에 면한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주위의 풍경을 바라 보면서,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에 빠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이곳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백년이 지나면 이미 그 누구하나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라고. 창문 앞으로 걸어 지나가는 젊은이도, 버스에 올라타려는 국민학생도, 극 장의 간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사나이도, 그리고 나도, 필경 백년 후에는 거저 흙먼지에 불과할 것이다. 백년 후에도 지금처럼 햇살이 이 거리를 비추고, 지금처럼 바람이 이 도로를 질러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그 누구 도, 이미 이 지표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백년 후에 내가 이 지표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건 별 상관없다, 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백년 후에 내 소설이 죽은 지렁이처럼 바싹 말라 먼지 처럼 사라진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생이 아니며, 불멸의 걸작도 아니다.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은 이 현재의 일이다. 이 소설을 다 쓸 때까지만은 어떻게든 살아 있게 해달라는, 단지 그것뿐인 것이다. 1987년 3월 18일 수요일. 시간은 새벽 3시 50분. 물론 밖은 아직 어둡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시간하고도 조금 여유가 있다. 영어로 하면 '스몰 아워즈', 스콧 피츠제럴드가 '혼의 어둠'이라고 부른 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스콧 피츠제럴드도 소설에 손을 댄 채 그대로 죽었지. 하지만 그는 그래도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발작을 일으켜 쓰러진 채 눈 깜짝할 사이에 숨을 거두었으니 말이다. 필경 쓰기 시작한 소설 따위 생각할 틈도 없었을 것이다. 아 니,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쓰러지는 그 순간에 채 완성하지 못한 라스트 타이쿤이 그의 뇌리를 섬광처럼 가로질렀을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그렇게 쉽사리 순간적으로 죽을 수 있는 존재 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런 경우에는 정말 분할 것이다, 라고 나는 상상한다. 그 의 머리 속에서 그 소설은 이미 완성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소설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바꾸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도 전에 그가 죽어버린다면,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 소멸하여 무로 화하고 만다. 그리고 아 무도 그것을 복원할 수는 없다. 나는 창 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한동안 스콧 피츠제럴드를 생각한다. 언덕 기 슭으로 가지런히 켜져 있는 가로등 불빛이 보인다. 가로등 불빛은 테베레 강을 따라 완만하게 구부러지며, 저 앞쪽까지 이어져 있다. 이따금 자동차의 헤드라이 트가 호를 그리며 어딘가로 사라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하고, 그 리고 한없이 어둡다. 마치 깊은 구덩이 속에 있는 것처럼. 하늘에는 별도 없고, 달도 없다. 하늘은 뚜껑이라도 덮은 것처럼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나는 소 파에 몸을 묻고, 브랜디를 한 모금 핥듯이 마신다. 술을 마시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커피를 마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하지만 브랜디 한 모금 정도 는 괜찮을 것이다. 음악을 듣고 싶지만 아내가 잠에서 깨어날 것 같아 그만둔다. 더구나 이렇게 깊은 정적에 빠져 있는 새벽녘에 무슨 음악을 들어야 좋단 말인 가. 나는 침묵 속에 꼼짝 않고 몸을 가라앉히고 있다. 내가 새벽 세시 반에 눈을 뜬 것은 기묘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기 묘해서 그만 잠을 깨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무슨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나다니 참 드문 일이다. 나는 꿈이란 걸 거의 꾸지 않고, 설령 꾸었다 해도 금방 잊어버 리는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잊어버리기 전에 그 꿈을 써두기로 한다. 이렇게 명확하고 선명 한 꿈을 꾸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므로.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꿈은 현실보다 훨씬 명확하고 선명했다. 커다란 건물 안이 휑뎅그렁했다. 천장은 높고, 마치 비행기 격납고 같은 건물 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내 주위로 피 냄새가 떠돌고 있다. 무겁고 끈적끈 적한 냄새가, 확실한 비중을 지니고 단층처럼 묵직하게 공중을 부유하고 있다. 공기가 천천히 소용돌이를 일으키자, 그 냄새도 움직이는 혈장처럼 꿈틀거린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내 입안까지 흘러들어 온다. 그 냄새를 피할 수는 없다. 아무 리 싫어도 호흡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나는 혀끝으로 그 냄새의 움직임 을 감지할 수 있다. 그 냄새는 내 목구멍으로 파고들어와,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 든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그 피의 끈끈함 속으로 싫든 좋든 상관없이 동화되어 간다. 방의 오른켠에는 목이 잘린 소의 몸뚱이가, 왼켠에는 그 잘린 머리가 나란히 놓여 있다. 서로 분리된 지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 머리도 몸뚱이도, 아직 피를 줄줄 흘리고 있다. 양쪽 다 아주 날랜 솜씨로 잘리어,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다. 그 덕분에 양분된 소는 상당히 고요하게 보인다. 마치 푹 잠들어 있는 사이에, 고통을 느낄 여지도 없이, 보리라도 자르듯 싹둑 재빨리 잘려나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적어도 머리 쪽도 몸뚱이 쪽도 자신이 잘려 분리되고 말았다는 것은 알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그들의 눈을 보면 알 수 있 다. 그러나 알고 있다 한들 손을 쓸 여지가 없다. 거기에 나란히 진열된 채 피를 흘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백 개 정도나 되는 소의 머리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진열되어 있다. 어째서 일부러 그렇게 성가신 일을 한 것인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누가 했건, 무척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바닥으로는 마치 잎맥처럼 무수한 가느다란 도랑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도랑은 소의 피를 모아, 방 중앙을 흐르는 한 줄기 굵은 도랑으로 흘 러 들어간다. 그 긁직한 도랑은 다시 모인 피를 바다로 흘려보낸다. 건물 밖은 바로 벼랑이고, 아래는 바다인 것이다. 바다는 이미 소의 핏빛으로 물들고 있다. 창 밖으로 갈매기가 날고 있다. 무지하게 많은 수의 갈매기다. 날벌레들처럼 한가득이다. 그들은 소의 피를 구하기 위해 거기까지 날아 온 것이다. 그들은 도 랑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홀짝거리고, 핏속에 섞여 있는 고기조각을 아작아작 먹 는다. 그러나 물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므로, 갈매기들은 공중을 선회하며, 창안 을 뚫어지라 살핀다. 그들은 좀더 큰 고기조각을 원하는 것이다. 머리와 몸뚱이 둘로 잘린 소들을. 그리고 이 나를. 끈질기게 공중을 날며, 그들은 기회를 호시 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소들도 빤히 나를 보고 있다. 바닥 위에 예의 바르게 정렬한 소의 목은 품종 을 개량한 신기한 채소처럼 보인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 다. 그들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직 죽지 않았어, 라고. 갈매기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미 죽었어, 이미 죽었어, 라고. 눈을 뜨자마자 나는 곧바로 시계를 보았다.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기분 탓 인가, 손바닥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다. 마치 피로 만든 풀이 눌어붙은 것처럼. 나는 옷도 안 입은 채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 미네랄 워터를 꺼내 잔 에 따라 마신다. 석 잔 넉 잔 연거푸 마신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소파에 앉아, 창 밖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시계 는 세시 오십분을 가리키고 있다. 죽고 싶지 않다, 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눈을 감고 자신이 죽어 가는 상상을 한다. 육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하고, 마지막 숨이 후우욱 폐에서 빠져나간다. 마지막 숨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딱딱 하다. 마치 연식 정구볼을 목구멍에서 뱉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그것 은 무리없이 빠져나간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죽음이 다가온다. 시 계가 무게를 더하고, 색이 흔들린다. 마치 수영장 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 같은 기분이로군, 하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는지, 물결이 퍼지 고, 물결은 빛을 흔든다. 그러나, 끝내 그 빛도 사라진다. 로마는 무수한 죽음을 빨아들인 도시이다. 로마는 모든 시대의, 모든 스타일의 죽음이 녹아 있다. 카이사르의 죽음에서, 검투사의 죽음까지, 영웅의 죽음에서, 순교자의 죽음까지, 로마사는 죽음에 대한 묘사로 넘친다. 원로원 의원은 명예로 운 죽음을 선고받으면, 일단 먼저 자택에서 호화로운 주연을 열었다. 그러고는 친구들과 함께 배불리 먹고, 술을 마신 후에, 태연하게 혈관을 갈라, 철학을 논 하며 유유하게 죽어갔다. 가난하고 이름도 없는 민중은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칼리굴라는 철학자란 철학자는 남김없이 처형하였고, 네로는 기독교인을 사자밥 으로 하였다. 아침이 찾아오기 전 이 짧은 시간에, 나는 그런 죽음 덩어리를 느낀다. 죽음 덩어리가 먼 해명처럼, 나의 전신을 부들부들 떨리게 한다. 긴 소설을 쓰다 보 면,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난다. 나는 소설을 씀으로 하여, 조금씩 생의 깊은 곳으 로 내려간다. 조그만 사다리를 타고, 나는 한 발 한 발 아래도 내려간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의 중심으로 가까이 내려가면 갈수록, 나는 명료하게 느끼게 된 다. 그 바로 앞 어둠속에서, 죽음 또한 동시에 격렬하게 고조되어 가고 있음을. 메타 마을에 이르는 길 1987년 4월 볼로냐에서 『노르웨이의 숲』의 원고도 전해주었고 하니, 당분간은 느긋하게 몸과 마음을 쉬기로 한다. 아주 상쾌한 기분이다. 등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 을 한꺼번에 전부 내려놓은 둣한 기분이다. 사월 십이일, 일요일. 괌 선데이, 우사코 우비 씨 부부와 나와 나의 아내 네 명이서 메타 마을로 놀러 간다. 메타 마을은 로마에서 자동차로 북서쪽을 향해 달려 두세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아주 조그만 마을이다. 꽤 상세한 지도에도 실려 있지 않다. 가도에서 멀리 떨어진 산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 는 여행자는 전혀 없다. 인구는 천 명 정도. 마을 한가운데에 바르가 있어, 여기 에서 간단한 식료품 같은 것을 팔고 있다. 그 외에 마을레 가게라고는 한 군데 도 없다. 촌민의 직업은 전부 농부. 필요한 것은 모두 스스로 만드니까, 뭔가를 살 필요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 마을이다. 왜 일부러 그런 마을을 찾아가는가 하면, 거기가 우비 씨가 태어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열여섯 살까지 여기에 서 자랐다. 양친은 건재하고 아직도 이곳에서 살고 있다. "무엇보다 집 값이 엄 청나게 싸니까 말이지."라고 우비 씨가 말한다. "일년 집세가 삼천칠백 리라인걸, 말해 무 해." 3천 7백 리라라면, 약 4백 엔이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다시 확인해 본다. 그래도 역시 4백 엔이다. "아버지가 내내 촌 사무소에 근무했었거든, 벌써 옛날에 퇴직했지만, 그 후에 도 줄곧 공무원용 사택에서 살고 있지. 죽을 때까지 살아도 되거든. 그런 의미에 서 이 나라는 꽤 풍요로워. 그렇게 생각 안 하나?" "과연."이라고 나는 말한다. "참 내, 아버지 연금이 나의 기본급보다 많은 걸. 지독한 나라지. 그런 짓을 하 고 있는 걸 뭐. 재정 적자로 파산하는 셈이야. 국민이 나라돈을 강탈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 "일본과는 정반대로군, 그런 점은." "그래 맞아, 정반대야."라며 우비 씨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런 점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불쌍해. 일본은 나라 자체는 부자지만, 국민 생 활은 그에 비하면 그다지 풍요롭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야. 휴가 기간도 적고, 땅값은 비싸고, 세금도 역시 비싸고, 자랑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세금 따위 거의 내지 않으니까. 어김없이 세금을 내는 사람은 우리들 공무원 정도지 (그는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다). 그 나머지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야. 이탈리아 경 제의 반 이상은 지하경제야. 나라가 관리하고 있는 돈의 움직임은 아마 전체의 절반에도 못 미칠 걸. 따라서, 통계상의 수치 이상으로 이탈리아 인 한 사람 한 사람은 돈을 갖고 있지. 세금을 안 내는 걸. 말 다 했지. 지난번에 내 누이인 마 리아 루치아를 만났었잖아? 그녀는 밀라노에서 세무서에 근무하고 있는데, 정말 한심하다더군. 미납 고지서를 보내도 누구 하나 밀린 세금을 안 낸다는 거야. 낼 생각이 아예 없는 거지.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얼마나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 데, 세금까지 어떻게 낼 수 있겠느냐고 울면서 호소를 한다니까. 이탈리아 사람 들은 그런 일에는 실로 재주가 좋으니 말이야. 마리아 루치아도 같이 심각해져 세금을 대신 물어주기도 한다던데. 세무서 직원이 세금을 대신 내서 어쩌겠다는 건지. 내 동생이긴 하지만, 좀 남달라."(일년 후에 마리아 루치아는 노이로제로 입원하였다) "남다르군." 하고 나도 동의한다. "그 지하 경제라는 것은, 예를 들면 어떤 것이지?" "뭐, 규모가 큰 것은 마피아지, 물론."이라고 우비 씨는 설명한다. "그런 크고 작은 조직이 온 이탈리아 안에 좍 깔려 있어. 그리고, 이 나라 사람들은 한 사람 이 여러 가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거든. 낮에는 외무성에 근무하는 사람 이 밤에는 테베레 강가의 재즈 클럽에서 색소폰을 분다든가 하는 사람이. 실질 적으로 낮에는 외무성에서 잠만 자지만. 하하하. 그런 사람들은 부업으로 버는 돈은 일절 신고하지 않으니까. 사회가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런 식의 사 회 구조를 올바르게 고치려고 하는 정치가가 나온다면, 그 내각은 다음날로 당 장 내려앉고 말거야. 그러니'까 아무도 손을 못 쓰지. 국민들이 저 하고 싶은 대 로 멋대로 하고 있어. 보라고, 모두들 여름이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때에는 삼 주씩이나 휴가를 다녀오는 둥, 매일 비싼 레스토랑에서 온 가족이 식사를 하는 둥... 일본의 샐러리맨에 비하면 부자라고 생각지 않아? 그런 생활, 월급만 가지 고는 불가능하다고." "좋은 나라로군."이라고 나도 탄복하며 말한다. "나라란 파산할 듯하면서도 좀처럼 파산하지 않는 법인가봐."라고 우비 씨는 남 얘기처럼 말했다. 그런 차에 유료 도로로 진압하려 하는데, 요금 징수소에 사람의 모습이 보이 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요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요금 징수원들이 스트라이크를 벌이고 있어."라고 우비 씨는 말한다. "종종 이런 일이 있지." 이런 유의 스트라이크라면 고맙게 생각한다. 일본이라면, 관리직에 있는 인간 이 나와 요금을 징수할 것이다. "무솔리니는 나라의 구조를 대담하게 바꾸는 데 성공한 유일한 정치가였어."라 고 우비 씨는 말한다. "그는 국민을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었지. 그 정도가 아니 면 이탈리아 사람을 상대로 정치를 한다는 건 거의 꿈 같은 얘기지. 무솔리니는 마피아까지 뭉개버렸으니까. 그의 유일한 실책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전쟁 능력 을 과대 평가했다는 점이야. 이탈리아 사람에게 전쟁을 시켰다가는 끝장이야." 그 후 한참이나 이탈리아 사람의 사무 처리 능력과 근로 의욕에 관한 이야기 를 한다. "하루키 씨. 이탈리아 지옥하고 독일 지옥 얘기 알아요?" "모르는데."라고 나는 말한다. "저, 말이죠, 지옥 입구에 있는 접수원이, 망자한테 묻는 거야. 이탈리아 지옥 이 좋으냐, 독일 지옥이 좋으냐, 하고. 어떻게 다르냐 하면, 내용은 꼭 같은데, 꼭 꼭 묶여서는 공중에 매달려 있다가 하루에 세 번씩 똥통에 푹 잠기는 거야, 머 리 꼭대기까지. 이탈리아 지옥에서는 이탈리아 사람이 로프를 조작하고 있고, 독 일 지옥에서는 독일 사람이 로프 조작을 하지. 하루키 씨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 겠어?" 생각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절대로 이탈리아 지옥 쪽이 낫죠. 하루에 두 번은 담그는 걸 잊어 버릴 테니, 하하하."라며 우비 씨는 웃는다. 이 사람은 이탈리아 험담을 할 때가 제일 신나 는 것 같다. 누이동생만 남다른 사람이라 할 수 없을 듯한 기분이 든다. "저 하루키 씨, 폴크스바겐 한 대에 독일 사람 네 명과 유대인 여덟 명을 태우 는 법 알아요?" "모르는데." "앞좌석에 독일 사람 두 명을 태우고, 뒷좌석에 독일 사람 두 명을 태우고 그 리고 재떨이에 유대인 여덟 명을 태운다. 하하하." "하하하." 이런 식으로 피아트 우노는 공짜로 통과한 유료 도로를 북서쪽으로 전진한다. 아내와 우사코는 뒷좌석에서 열심히 여자끼리만의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몇 년 동안 도쿄에 주재원으로 있다가 오랜만에 로마로 돌아온 우비 씨는 역 컬처 쇼크 식으로 로마를 증오하고 있다. "만약 노이로제에 걸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로마에 오면 즉효일 거야. 나는 이 도시에서 목숨을 갉아먹으며 살고 있는 셈이지. 여긴 지옥이야. 인간이 살 곳 이 못 된다고. 나는 로마가 아닌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잘 해낼 수 있어. 수단이 든 아프가니스탄이든 온두라스든 이르쿠츠크든 어떤 나라라도 상관없어. 하루빨 리 로마에서 도망치고 싶어. 일본은 참으로 좋았지.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았고." (힐끗 뒤쪽을 본다) "음식도 맛있었고, 롯폰기(六本木)의 '시골집'이 그립군. 값은 비쌌지만." "'북쪽 나라 가족'으로 하면." "으응, 맞아 거기는 쌌지. 거기도 괜찮지."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탈리 아 대사가 말이지, 한번은 아자부(꽤 유명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러 간 적이 있는데, 일단은 먼저 포도주를 주문했어. 그랬더니 웨이터가 이렇게 말 한 거야. 손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프랑스산 포도주가 마침 떨어져서요. 이탈리 아산은 있습니다만, 이탈리아 포도주로 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하고 말이야. 대사는 벌컥 화를 냈지. 하하하. 그야 물론 안 그렇겠어. 그러고는 명함을 내주 며 나는 실은 이런 사람이요, 라고 한거야. 웨이터는 놀라 자빠질 뻔했지. 매니 저가 나와 머리 숙여 사과를 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지. 한동안 대사관에 서 웃음거리였어." 이탈리아 공무원은 하루종일 농담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 다. "그렇게 재미있는 것도 아니지만, 모두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아니 거의 일을 안 해. 믿을 수가 없어. 휴가하고 먹을 것밖에 생각하는 게 없다 니까. 그리고 무신경하고."라고 우비 씨는 불쾌하다는 듯 말한다. "얼마 전 내가 감기에 걸려 하루 쉰 일이 있는데, 그 다음날 오피스에 가서 컴 퓨터로 자료를 호출해 보았더니 글세, 전부 사라지고 없는거야. 정말 한심해서. 누가 멋대로 사용하다가 키를 잘못 눌러 싹 사라지고 만 거지. 그런 무책임한 일이 있을 수 있어. 적어도 대사관이란데서 말이야." 점점 감정적이 되어 간다. "우비 씨, 진정하라고요."라고 뒤에서 우사코가 말을 건다. "우비 씨는 일을 너 무 하고 있어요. 일본 사람 같아." "그뿐만 아니야. 그 치들 모두 도둑놈이라고." "도둑놈?"이라고 내가 되묻는다. "그래요. 외무성에서 직원들끼리 파티를 하면,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없 어지는 줄 알아. 은식기니, 꽃병이니, 재떨이니 하는 것들이, 정말 믿을 수 없어 (여기는 일본어). 하기야 로마라는 도시는 이천 년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부패해 온 곳이니까. 부패에도 경력이 쌓인 거지." "우비 씨는 때로 이런 식으로 흥분을 하거든요. 로마와 직장 일로."라고 우사 코가 말한다. "나는 그렇다고 로마가 싫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라고 격분하여, 우비 씨가 핸들에서 손을 떼고 공중에다 흔들어대며(이탈리아 사람들은 심심하 면 이렇게 하니까 간담이 서늘하다), 그렇게 말한다. "거리 그 자체는 좋아해, 아 름답기도 하고, 싫은 것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야. 무례하고, 저질이고, 지 성도 없고, 그래 가지고서야 짐승하고 다를 게 없잖아." "좀 참으시게나." 하고 나도 그를 달랜다. "바보야."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로마에 있으면서 기분 좋았던 일이 단 한 번도 없어. 옛날에 한 몇 년 경찰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경찰 차를 타고 매춘 부 단속을 하기도 했지. 경찰은 반액으로 해주더군." 힐끗 뒤를 돌아다본다(기분 좋았던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그 무렵 나는 고독했 어." "경찰 생활을 했었어?"라고 내가 되묻는다. 이 사람의 반생은 참으로 파란만장 하다. 얘기를 하다 보면 끝없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 남다를 사람이다. "그 전에는 로마의 부호 집에서 하우스 보이 같은 것을 했었지." "... 그리고 지금은 외무성의 직원이라." "음, 여러 가지로 사연이 많았지. 좌우지간 나는 로마에 있을 때는 늘 고독했 어. 로마에 있으면 나는 안정이 안 돼. 어차피 나는 컨트리 보이야, 결국은. 보르 자노에 육 년간 카라비니엘리(군대에 속한 경찰)로 주둔하고 있을 때에는 행복 했어. 사람들은 인정이 많았고, 여자들은 상냥하고(얘기만 했다 하면 곧장 여자 얘기로 옮아가는 점 역시 이탈리아 사람이다). 당신, 알아? 보르자노의 여자들이 랑 데이트 하면, 모두들 사양하느라 싼 것밖에 주문을 하지 않는데, 로마 여자들 이랑 데이트를 하면 단박에 시버스 리걸을 주문하거든." "응, 알지. 일본에서는 그런 여자들을 '주제를 모르는 여자'라고 해." "주제를 모르는 여자라." 하고 우비 씨는 복창을 한다. "아무튼 보르자노에서 로마로 돌아와야 했을 때는 나, 울었어. 괴로워서. 도쿄에서 로마로 돌아왔을 때 도 괴로웠지만." (*후일 나는 보르자노에 가보았는데,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포도주와 케이크가 맛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로마를 떠나는 게 좋겠군."이라고 나는 말한다. 메타 마을 이야기 메타 마을은 십일 세기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마을이다. 처음에 는 진짜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1915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가옥이 거의 파괴되 어, 백 미터 정도 아래쪽으로 마을을 고스란히 옮겨졌다. 그래서 산꼭대기에는 그 붕괴한 마을의 흔적이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변경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마을이다. "이곳은 극단적으로 고립된 마을이라서, 옛날, 마을 사람들은 마을 밖으로 나 가지를 않았어."라고 우비 씨가 말한다. "우리 어머니는 전쟁 중에 소금을 구하 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로마까지 갔다 왔는데, 그 이 후로 사십년 동안 내내 그 이야기를 하셨지. 사십 년이야, 사십 년." "난, 여섯 번 들었어."라고 우사코가 말한다. "제2차 대전 때 얘기를 바로 일주일 전 얘기처럼 한다니까."라고 우비 씨가 말 한다. "전쟁중에 나치 군사가 마을로 들어와서는, 레지스탕스 협의로 마을 청년 을 두 사람 끌고 간 일이 있는데, 그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불쌍하 지. 하지만 말이야, 지금도 그 이야기를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거든. 믿 을 수가 없어. 그리고, 난 말이지,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이탈리아에 스파게티 라는 음식이 존재한다는 걸 몰랐어. 왜냐하면 메타 마을에는 스파게티가 존재하 지 않았으니까. 모두들 집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파스타만 먹었으니, 그래서 몰랐던 거야. 덕분에 그렇게 살은 찌지 않았지만, 믿을 수가 없어." 흥미로운 마을이다. 점점 기대감이 부푼다. 메타 마을 공짜 유료 도로에서 빠져나와 한동안 앞으로 더 나아가다가, 철로를 넘어, 산 길로 접어든다. 몇몇 마을을 지나간다. 마을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모두 손에 올 리브 가지를 들고 있다. 팜 선데이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팜 선데이에 올리브 가 지를 들고 있는지, 그건 나도 모른다. 산 위쪽으로 조그만 마을이 보인다. 저게 메타 마을이야? 라고 우비 씨에게 물어본다. "노-, 저건 페스키에라라는 조그만 마을. 메타 사람들은 저곳을 중국(키노)이 라 부르지. 문명이 전혀 발달되어 있지 않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걷거든." "문명? 이상하게 걷는다고?" "으음. 페스키에라에 비하면 메타는 빅 시티야. 그리고 걷는 모양 말인데, 정말 달라. 그러니까, 세계 어디를 가도 페스키에라 출신 사람들은 금방 구별을 할 수 가 있어. 걷는 모양을 보면 알 수 있거든. 이렇게 아장아장 이상하게 걸어. 다리 가 휘어 있거든." "왜 그렇게 걷는 방법이 다를 수 있지? 조금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맞아, 일 킬로미터도 채 안 떨어져 있지."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고도가 약간 다르고, 지형도 아주 달라. 그러니까 오랜 세월 그 지형에 적응하느라 다리 가 휘어서는, 걷는 모양도 전혀 다르게 된거야. 아무튼 전혀 달라, 보면 금방 알 수 있으니까." 정말 그럴까 하고 나는 생각하지만, 우비 씨는 진지하게 그렇게 주장한다. 그 러니까 아마도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럼 페스키에라 마을 위가 메타 마을인가?" "아니지, 그 위에 조그만 마을이 하나 또 있어. 산 사비노라는 마을인데, 거기 도 메타에 비하면 비문명적이지. 인구는 삼백 명 정도. 메타와 산 사비노는 한 이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말이야." "그렇다면, 물론 걷는 모양도 다르겠지?" "물론 다르지."당연하지 않은가란 얼굴로 그는 말한다. "메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산 사비노 사람들의 걷는 모양을 흉내내며 웃지. 복장도 다르고, 말투도 다 르고, 사고 방식도 세계관도 전혀 달라." 정직하게 말해 점점 머리가 아파온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라고 우비 씨는 말한다. "마리아 루치아한테 물어봐, 틀림없이 그렇다는 걸 증명해 줄 테니. 정말 그렇다니까." 그런데 우비 씨의 아버지는 이 산 사비노 출신이다. 어머니는 메타 출신. 서로 이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산 사비노 출신과 메타 출신이 결혼을 한다 는 것은 드문 예인 모양이다. 그리고 결혼하여 사십 년 이상이나 되는데도, 양가 친척들의 교류는 거의 없고, 양가 부모도 상대방의 마을을 지독하게 ㅅ어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라는 나라는 실로 복잡한 나라이다. "글세 아버지는, 아직도 산 사비노에 자기 몫의 밭과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오 두막을 갖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어 그 집에 가서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니 까." "그런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한 거지?" "그건 잘 모르겠어."라고 우비 씨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결혼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싫어했다는데. 하기야 메타와 산 사비노니까 말이야. 그런데 무슨 바람인지 그 증오가 사랑으로 변한 거야."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야기로군." "그래, 그게 1939년 일이야.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움텄지. 그런데 전쟁이 일 어났어. 아버지는 그 당시 파시스트 당원이라-그 무렵에는 공무원이면 대개는 파시스트 당원이었지만-곧장 전선으로 전출되었어. 그 다음은 유고로 갔고, 줄곧 전선을 이리저리로 옮겨 다니며 전쟁을 한거야. 1943년까지. 1943년에 바드리오 내각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이번에는 독일군에 붙잡혔지. 그러고는 에센 수 용소로 이송되어, 거기서 반년 있었어. 그 다음은 강제 노동으로 어디 탄광으로 보내졌고, 결국 연합군 덕분에 해방되어 이탈리아로 돌아온 것은 1946년이었어." "참 고생이 많으셨겠군." "그런데 그게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야."라고 우비 씨는 말한다. "아버지 말 로는, 아버지는 수용소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는 거야. 먹을 것은 조금밖에 배급 되지 않았지만, 그는 원래부터 소식가라 그다지 고통스럽지도 않았고, 독일 사람 들은 매사에 꼼꼼한 사람들이라서, 제법 재미있게 지낸 모양이더라구. 메타 마을 보다 훨씬 더 나았다고 늘 얘기하는 걸. 하하하. 지금도 이따금 그 당시 수용소 일을 그리워하고 있어." 포로 수용소가 마음에 드는 사람은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조금 유별난 분인 것처럼 들리는데."라고 나는 슬쩍 질문해 본다. "맞아, 분명 좀 유별난 데가 있지. 산 사비노 사람들은 모두가 어딘가 좀 이상 해." 으음, 수긍이 간다. "결국, 칠 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으니까, 마을 사람들은 모두 파트스타는 죽 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는데, 어머니는 줄곧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사랑하고 계셨군."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지금도 그 일로 화를 내고 있어. 안 기다려도 되었는데 하고 말이야. 내가 전쟁에서 모처럼 재미있게 지내고 왔는데, 성가시게 기다리고 있어서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사십 년 내내 그 일을 가지고 투덜투덜 불만이야. 아마 그 성격 탓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화 를 내고 있고. 애써 기다리고 있었더니 전쟁터에 나가기 전보다 더 이상하게 되 어 가지고 돌아왔다고. 저 말이지, 메타 출신 사람들은 비교적 성실하고 신앙심 도 깊고, 정직하고 예의도 바른데, 그에 비하면 산 사비노 출신 사람들은 얼마간 시니컬하고, 회의적이고, 입이 거칠어." "우비 씨는 그런 면이 꼭 아버지 닮았어요."라고 우사코가 말한다. 어째 기묘한 일가족이다. 먼저 산 사비노에 내린다. 마을이라고 하기보다는 취락에 가깝다. 밭과 집이 있을 뿐.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 파티스타의 '오두막'도 본다. 포도주 창고에 간이 침대를 펴놓은 간단한 오두막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안 계시다. 사 람도 먹고 자고 한 흔적이 있기는 하다. 집에서 빚은 포도주 통이 잔득 쌓여 있 다. 커다란 백구가 전속력으로 달려와서는 우비 씨에게 달라 붙는다. 내가 손을 내밀자 어리광을 피운다. "그 개, 사람을 보면 무조건 물어대는데."라고 우비 씨가 말한다. "산 사비노의 개니까, 성격이 아버지를 닮았지만 상대방을 분별할 줄 아니까 걱정할 것은 없 어." 오두막 주변에는 조그만 포도 선반과 밭과 가축 우리가 있다. 개 토피아는 아 버지가 없을 때, 그것들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개집 앞에는 밥 접시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리가트리(마카로니 중 좀 굵은 것) 토마토 소스가 들어 있 다. 이탈리아의 개는 리가트니를 먹는 것이다. 가축 우리 안에는 토끼와 닭과 거위가 들어 있다. 돌로 만든 윌라, 창문이 없 어 안이 캄캄했다. 모두 어둠 속에서 잠잠하다. 토끼가 새끼를 보듬으며 주의 깊 게 우리 쪽을 살피고 있다. 거위가 꽤액꽤액 소리를 내며 날개를 파닥인다. 닭은 졸린지 꼼짝 않고 웅크리고 있다. 물론 전부 식용이다. "가끔씩 토끼를 죽여서는 먹죠."라고 우사코가 말한다. "어머니가 목을 꽉 졸 라 죽여요. 그러고는 껍질을 벗겨서, 요리를 하죠. 부엌 조리대에 눈알이 빠져 있는 일도 있어요. 난 그런 걸 보면 못 참겠더라. 어제까지 함께 놀던 토끼가 어 머니 손에 죽어 식탁에 올라 있는 걸요. 그러면 어머니는 토끼랑 놀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이고요. 이탈리아 사람들은 토끼랑 놀지 않아요, 전혀." 산 사비노에서 이백 미터 정도 비탈길을 올라 메타로 간다. 정말 이백 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세계관과 복장과 걸음걸이와 사고 방식이 다르다 고? 아무튼 그 세계관이 다르다는 이백 미터를 걸어 올라간다. 메타 마을은 과연 산 사비노나 페스키에라에 비하면 규모도 크고 번듯한 마을 이다. 적어도 여기에는 거리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다. 교회도 있고, 게시판도 있 고, 광장도 있고, 앞에 쓴 것처럼 바르도 있다. "빅 시티죠."라고 싱긋 웃으며 우비 씨가 말한다. 우비 씨의 집 앞에서 우비 씨의 어머니가 서서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는 아마 저기에 저렇게 줄곧 서서는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라고 우사코가 말한다. "줄곧?" "네, 이탈리아의 어머니들은 전부 그래요." 우비 씨의 어머니가 우사코와 키스를 한다. 우비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난 저렇게 아무 의미도 없이 껴안거나 키스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탈 리아 사람들은 저런 짓거리만 만날 하니까, 나날이 비문명화하는 거라고. 난 포 옹이라든가, 키스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란다. 아무래도 약간 남다르다. 우비 씨의 어머니는 몸집은 작지만, 언뜻 보기에도 강직한, 자못 이탈리아의 어머니다운 풍모의 여자이다. 우리들을 집안으로 안내하더니, 금방 점심 식사를 만들어준다. 메뉴는 토르테리니 토마토 소스와 야채 샐러드와 브로크레티와 아 티초크와 찐 감자요리와, 고기요리가 두 종류. 아주 맛있다. 전부 이곳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하여 손수 만든 음식이다. 요리가 다 만들어진 참에 아버지 파티스 타가 돌아온다. 이 사람은 완전히 술주정뱅이로, 아침부터 밤까지 포도주를 마셔 댄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다. 코가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 같다. "저기 있는 저 포도주통 말이야, 이 사람이 혼자 다 마셔, 엉망진창이지 허구 한 날. 얼마 안 있어 죽을 거야." "자네들 내 흉을 보고 있는 거지."라고 파티스타가 말한다. 영어는 모르지만, 자기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는 정도는 아는 것이다. "아니오, 토피아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라고 우비 씨가 얼버무린다. "토피아, 이 사람들이랑 사이가 좋아졌어요." "지난주에 일본 사람 두 명을 먹여 주었으니까, 당분간 일본 사람은 안 먹을 거야." 아들도 아들이지만, 그 아버지 또한 그 아버지이다. 파티스타는 꿀꺽꿀꺽 포도주를 연신 마셔대고 있다. 정말 잘 마신다. 내가 술 을 따라주면, 그때만 신이 난다는 듯 싱긋 웃는다. 그 다음은 뾰루통한 얼굴이 다. 스스로는 술을 따르지 않는다. 지난번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원래는 못 마시 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맛있는 포도주였다. 감칠맛은 없지만, 실로 상큼하고 향기롭다. 금방 저기서 빚어서는 식탁에 내놓은 듯한 타입의 맛이다. 나도 제법 마셨다. 난 로에서는 장작불이 파닥파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다. 사월이라지만, 산 위라 꽤 춥다. 식사가 끝나자 우미 씨가 바르에 가자고 한다. 이탈리아 시골에 있는 바르는 대충 카페니온과 파브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메타의 바르에는 온 마을의 남자들이 모여 있다. 일요일 오후, 마을의 남자가 집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다. 일요일 오후에는 여자들에게 바느질일이나 하라고 하고, 남자는 바르에 모여 맥주를 마시거나, 카드 놀이를 하거나, 이러니저러니 남자들끼리의 얘기를 나눈 다. 오랜 옛날부터 그런 습관이 굳어져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참 여러 가지 습 관이 있다. 나처럼 일요일 오후에는 집에서 느긋하게 업다이크의 새로 나온 소 설을 읽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초(馬草)적인 이탈리아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물론 바르에는 여자 손님이라곤 한 명도 없다. 완전한 남자들만의 세 계다. 바 카운터가 있고, 텔레비전 게임이 있고, 안쪽으로 테이블석이 있다. 이따 금 아이들이 동전을 들고 과자 같은 것을 사러 온다. 아버지에게 무슨 볼일이 생겼는가 아버지를 부르러 오는 아이들도 있다. 여기에서 우비 씨의 두 형님을 소개받았다. 큰형님이 빌립보. 몸집이 크고 박 력이 있어 그야말로 장남다운 느낌이 드는 사람이다. 단, 눈매가 약간 신경질적 이었다. 그는 무역상으로 성공하여, 굉장한 부자라고 한다. 큼직한 메르세데스를 타고 다닌다. 입신 출세다. 차남 로베르토는 바짝 마른 스타일. 빌립보와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이 사람은 지방 의회의 의원이라고 한다. 얼마 전 메타 마을의 광장에 멋진 분수를 만들었다. "믿을 수가 없죠."라고 우비 씨가 말한다. "이런 데다 분수를 만들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런데도 그 일로 마을 사람들은 꽤 나 즐거워했으니,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난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어." 아무튼, 그 두 사람이 우비 씨의 형님들. 두 사람 다 메타 마을 근처에 살고 있다. 도저히 메타 마을에서 멀리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 다 메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면 그럴수록 기운이 없어진대. 전형적 인 이탈리아 인이지. 태어나고 자라난 마을이 최고고,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파스 타가 최고라는."이라고 우비 씨가 말한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마침 일이 있어 빌립보가 일본에 왔는데, 그는 일본에 머무르는 사흘 동안 맥주와 샌드위치 이외에는 일절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어. 일본에 와서 맥주와 샌드위치라니, 그것도 사흘 동안이나 말이야. 믿을 수가 없 어." 우비 씨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참으로 많은 모양이다. 바르에서 나와 우비 씨의 어머니 생가로 가본다. 돌로 만든 웅장한 집이다. 현 관을 들어서니, 천장 대들보에 거대한 햄이 몇 개나 매달려 있다. 여기에는 독신 인 백모가 두 분 살고 있다. 넓어서 휑하고 낡은 시골집이다. 이 집에는 비밀 방 이 있다. 가려진 문을 열면 커다란 벽장 같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여기에다 전쟁중에, 불시착한 영국군 파일럿을 숨겨 두었더랬어."라고 우비 씨는 말한다. "어머니 가족들이 보살폈는데, 나치가 수색하러 왔을 때도 발견되 지 않았어. 그래서 그 놈들이 마을 청년을 두 명 연행해 간 것이지." "그 파일럿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영국으로 돌아갔지. 그리고 그 후로는 편지 한 통도 없 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파일럿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걱정을 해서, 내가 몇 년 전에 런던에 가는 길에 부탁을 받아가지고는, 고생고생하여 그가 있는 곳 주소를 알아내서 결국은 만났지. 그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눈물을 뚝뚝 흘 렸어. 메타 마을에서의 일을 생각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그 사람은 또다시 메타 마을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한 모양이 지?." "그랬던 모양이야.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에게는 역시 여러 가지 아픈 기억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해가 기울어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메타 마을은 점점 더 추워졌다. 우비 씨와 어머니와 우사코와 아내와 나는, 산꼭대기에 있는 옛 마을을 찾아보기로 한다(파 티스타는 술에 취해 예의 산 사비노의 은신처로 가버리고 말았다). 시계에 들어 오는 사방 전체가 산이다. 마치 사운드 오브 뮤직같은 풍경이다. 산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산 이쪽 저쪽에 메타 마을 같은(그러나 세계관과 걸음걸이가 다른) 조그만 마을이 산맥에 착 달라붙어 산재해 있다. 싸늘한 바람이 휘이이이 익 하고 폐옥들 사이로 불고 지나간다. 이런 곳까지 독일군은 잘도 찾아왔다 싶 은 생각이 든다. 정말 감탄스럽다. 독일인이란 진짜 꼼꼼하고 성실한 인종인 모 양이다. "저기 저기에 산이 보이죠."라고 우비 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내 가 어렸을 적, 저기가 세계의 끝이라고 생각했어. 사실 아무도 저 산 너머 일을 몰랐으니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러니까 나한테는저기가 세계의 끝이 었던 거지. 그리고 이 메타 마을이 시계의 중심이었고." 그가 바람 속에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믿을 수가 없어."라고 그가 말한다. 그리고 웃는다. 봄의 그리스로 파트라스에서의 부활절이 낀 주말과 벽장 학살 1987년 4월 부활절이 낀 주말에 그리스로 여행을 간다. 한동안 이탈리아에 있다보니 그리 스가 몹시 그리워진 것이다. 그리스에는 실로 다양한 국적의 배낭족이 있다. 특히 많은 나라부터 정리해 보면, 독일인(세계에서 가장 여행을 좋아하는 독일인), 캐나다 인(세계에서 가장 한가한 캐나다 인), 오스트레일리아 니(캐나다 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한 가한 오스트레일리아 인), 미국인(최근 상당히 줄어들었다), 영국인(대개는 얼굴 색이 나쁘다), 북유럽 섬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일본인, 이 정도이 다. 일일이 상세하게 조사를 하거나 통계를 내본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말 해 그런 순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독일 사람은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는데다 가 장 터프한 장비를 갖추고 있다. 캐나다 사람과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배낭에 국기를 붙이고 있으므로 금방 알 수 있다. 북유럽 사람들은 독일 사람한테서 터 프함을 제거한 더딘가 공상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는 얼굴이다. 잽싸 보이고, 어 딘지 모르게 냉소적인 얼굴 생김은 프랑스 사람이고, 그런 한편 약간 붙임성이 있겠다 싶으면 네덜란드나 벨기에 부근. 그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얼마간 불쾌하 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본인은 즐기고 있을 테지만)은 영국 사람. 물론 이 것은 일반적인 인상이지, 예외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유럽 여행을 하다보면 상대방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하는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이탈리아 배낭족들은 거의 볼 수 가 없다. 한 번도 만 난 적이 없는 것이다. 기묘한 일이다. 나는 폴란드 배낭족도 보았고, 한국인 배 낭족과도 만났고, 탄자니아 배낭족도 보았다. 그런데도 이탈리아의 배낭족은 전 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운이 안 좋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탈리아 사람들도 배 낭 여행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들과 조우하지 못한 것은 우연의 장난일 것이다. 무슨 묘한 인연으로 이탈리아 사람과 나는 서로 다른 길 을 늘 여행한 것이리라. 내가 그쪽으로 가면 그들은 그쪽에 있다가 이쪽으로 오 는 식으로. 그러나, 그런 우연을 충분히 고려한다 해도, 이탈리아 사람이 그다지 배낭 여 행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형태의 여행을 그들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모양이다. 혼자서 무 거운 배낭을 메고 터벅터벅 길을 걷는다. 어떤 때에는 빵과 사과와 치즈만으로 일주일을 버티고, 온수가 나오지 않는 호텔에서 덜거덕거리는 문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는 그런 여행은, 이탈리아 사람들보다는 북유럽 사람들에게 훨씬 어울린 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유럽 사람들-그들은 실로 곤경과 빈곤과 고행을 추구하며 여행을 계속한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들은 진짜로 여행에서 그런 것들을 바란다. 마치 중세에 전 국을 돌아다니며 고행을 행한 행려들처럼. 그들은 그런 여행을 통하여 경험하는 일들이 인격 형성에 지극히 유효하고 동시에 유익하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 들은 거의 돈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레스토랑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 은 이백 엔 싼 호텔을 찾아 두 시간이나 거리를 온통 돌아다닌다. 그들의 긍지 는 경제적인 효율성에 있다. 자동차 연료비와 마찬가지다. 얼마만큼 싼 연료비로 얼마만큼 먼 거리를 뛰었는가. 그들은 그러한 고행의 여행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다. 그리고-예를 들면-주식 중개자로 성 공을 한다. 결혼을 하여 아이들도 기른다. 차고에는 메르세데스와 볼보와 스테이 션 왜건이 들어 있다. 그러면 그들은 이번에는 전혀 반대의 경제적인 효율성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얼마만큼 풍족한 비용을 들여 얼마만큼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는가,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경제적 효율성이다. 그러한 것이 그들의 목표로 하는 인생이며, 삶의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특히 그런 식으로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삶의 방식은 그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오후의 파 스타나 미소니의 셔츠나, 검정 타이트 스커트를 입고 계단을 올라가는 여자나, 신형 알파 로메오의 기어 시프트를 생각하느라 너무 바빠서, 일일이 고행을 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서두가 몹시 길어졌는데, 내가 처음으로 이탈리아니 배낭족을 발견한 것은, 이 탈리아 남해안의 항구 브린디시에서 그리스의 파트라스로 향하는 페리 선상에서 였다. 때는 마침 부활절이 끼여 있는 주말이라서, 배는 그리스로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로 꽉차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각양각색의 배낭족들이 갑판 위에 모여 있었다. 그 중에서 제법 많은 이탈리아인이 있었다. 선상에 있는 이탈리아 니 배낭족들은 막 일을 끝낸 광부의 줄에 잘못 끼여 들어간 발레리나처럼 한눈 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다음의 네 가지 점으로, (1) 우선 목소리가 크다. (2) 버릇이 없다. (3) 복장이 화려하다. (4) 잘 먹고 잘 마신다. 아무튼 눈에 잘 띈다. 다를 나라의 배낭족들은 지쳐서, 아니면 반드시 다가올 피로에 대비해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축적해 두려고 얌전히 있는 데 반해(총괄하 여 말하자면 배낭족만큼 조용한 여행자들은 없다), 이탈리아 사람들만은 소란스 럽게 야단들을 한다. 하지만 그런대로 그들은 배낭족이었다. 배낭을 둘러메고, 조깅화를 신고 있었다. 이탈리아에도 어김없이 배낭족은 있군, 하고 나는 생각했 다. 하지만 파트라스 항에 도착하여 판명된 일인데, 그들은 단순히 배낭을 둘러메 고 있었을 뿐, 전혀 배낭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배에서 내리자 모두들 시끄럽게 환호를 하며 단체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배낭족들은 물 론 단체 버스에 타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파트라스에 도착한 것은 사월 십팔일 토요일이었다. 부활 제가 있는 주말이다. 항구 근처에 있는 아도니스라는 호텔에 머무른다. 딱히 파 트라스 거리에 머물고 싶어 파트라스에 숙박지를 정한 것은 아니다. 시간 관계 상 그날 안으로 아테네까지 이동하기가 촉박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파트리스 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한 것이다. 파트라스는 서글플 정도로 재미가 없는 도시 로, 그저 항구와 역이 있고, 그 옆으로 볼품없는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을 따 름이다. 개도 암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레스토랑은 우에노 역 주변과 비슷할 만 큼 서비스가 나쁘고 음식은 맛이 없다. 거리를 걷고 있으면 기분이 점점 가라않 는다. 조국에서 추방당한 삼류 솔제니친 같은 타입의 작가가 이러니저러니 불평 을 터뜨리며 살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도시이다. 마침 이 도시에서는 영화제 가 열리고 있었는데, 프로그램 중에 오시마 미나토 감독이 영화 특집이 들어 있 고, 그를 둘러싸고 심포지엄이 개최된다고 포스터에 쓰여 있었다. 좀 놀랍기는 했지만 이런 데까지 와서 오시마 감독의 영화를 볼 것은 없지 않나 싶어 영화 관람은 그만두기로 한다. 파트라스에서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 벽장 열쇠가 부러졌다. 호텔 방을 나설 때 카메라 등등을 넣 고 벽장문을 잠갔는데(이탈리아 생활의 후유증으로 열쇠를 잠그는 버릇이 생겼 다), 돌아와 열려고 하다 부러진 것이다. 내가 특별히 힘을 주어 열쇠를 돌린 것 도 아니다. 방으로 들어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서는, 하나, 둘, 하는 식으로 무심코 돌렸다. 그러자 열쇠가 똑 부러졌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이 묻어 있는 빼빼로 과자처럼, 실로 깨끗하게, 똑 하고 부러진 것이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리하여 내 손안에 그 검고 빈궁한 열쇠의 반 조각 이, 그리고 열쇠 구멍 안에 나머지 반쪽이 남았다. 호텔 프런트에 가서, 이러저렇게 되었다고 고한다. 프런트에는 이십대 후반으 로 보이는 여성이 앉아 있다. 친절하지만 불행한 얼굴을 하고 불행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내가 열쇠가 부러졌다고 하자 그녀의 불행 리스트에 새로운 한 페이 지가 덧붙여진다. 정말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몹시 꺼림칙한 기분이 된 다. "내 탓이 아니야."라고 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중얼중얼 자신에게 말한다. 내 탓이 아니야. 열쇠가 제멋대로 부러진 것이라고. "잠깐 기다려 주세요. 곧바로 담당 직원을 보낼 테니까요."라고 불행하게 들리 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한다. 그리고 담당 직원이란 사람을 부른다. 그런데 담당 이 누구냐 하면 메이드 아줌마이다. 그녀가 우리방의 문을 노크한다. 힘찬 노크 다. 문을 여니 키가 작고 터프해 보이는 아줌마가 복도에 우뚝 서 있다. 그녀는 예외없이 그리스 말밖에 할 줄 모른다. 나는 부러진 열쇠를 그녀에게 보여 준다. "열쇠, 안 돼, 안 열려."라고 나는 말한다. 그녀는 힘껏 벽장문을 잡아당겨 보기 도 하고, 발로 걷어차기고 하고, 몸으로 쾅쾅 부딪쳐 보기도 한다. 벽장문이 덜 그럭덜그럭 흔들린다. 저 안에 있는 카메라는 무사할까, 하고 나는 걱정을 한다.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도구를 가져와야겠군요."라고 그녀가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안심을 한다. 그래, 애초부터 도구를 가져 왔으면 좋았지. 그런데 그녀가 가지고 온 도구라는 것이 실을 자갈이다. 그레이프 프루츠 크기의 자갈돌. 그것으로 열쇠 구멍을 때 려부수려는 것이다. 좌우지간 굉장한 소리가 쾅쾅난다. 나는 그때까지 잘 몰랐는 데, 자갈로 벽장 열쇠구멍을 두드려 부수는 일은 몹시 시끄러운 작업이다. 호텔 의 다른 방에 있던 투숙객들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하고 모두들 기웃거릴 만큼 시끄럽다. "에익."이라든가 "씨팔."이라든지 그런 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돌 로 벽장을 열심히 치고 있다. 그러다가 돌이 둘로 팍 하고 깨진다. 벽장 쪽도 쇠 장식과 열쇠 구명이 엉망진창으로 찌그러져 있다. 그래도 문은 아직 열리지 않 는다. 그것은 책에서밖에 읽은 적이 없는 고대 문명의 학살 장면을 상기시킨다. 카르타고의 말살과 잉카 인들의 학살과 자카르만두의 함락을. "사태가 점점 악화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라고 아내가 말한다. "그런 것 같기도 한데."라고 내가 말한다. "전문가를 부르도록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부활절 주말에 그런 사람이 올 리가 없지."라고 나는 말한다. 부활절 주말에, 열쇠 전문가가 전화 한 통으로 달려올 턱이 없지 않은가, 아무 일도 없는 날에 도 올지 안 올지 의문스러운데. 뭐라뭐라 혼자 중얼거리던 아줌마가 새로운 돌을 가지고 온다. 이번에는 단단 한 대리석 조각이다. 언뜻 보기에도 꽤 강력할 듯싶다. 아줌마는 그것을 우리에 게 보이며 이번에는 문제 없을 것이라는 양 생긋 웃는다. 우리도 별 도리 없이 생긋 웃는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러고는 아줌마는 기세등등하게 벽장 문 학살에 착수한다. 텔레비전에 나오 는 배트맨의 클라이맥스 장면처럼 CRASH! BOOB! BLITZ! 하며 돌로 쾅쾅 두 드린다. 돌 조각이 튄다. 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우리는 간신히 카메라를 되찾는다. 아주 심플하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이 방에 머무르는 사람 들은 이 벽장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보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하고. 또 이런 생각도 한다. 그러고 보니 이런 구멍을 다른 호텔에서도 본 듯한 기억이 있다, 고. 그 아줌마는 밤중 열두시에 또 우리의 방문을 탕탕탕탕하고 커다란 소리로 두 드려렸다. 나는 잠들어 있다가 놀라 일어나 비틀비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이번 에는 대리석 대신에 부활절 달걀이 들어 있는 빵을 들고 있었다. "부활절, 축하 해요."라고 그녀가 말하며, 그녀가 내게 빵을 건네주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 들이 그때 일제히 보오오오오오하고 기적을 울렸다. "부활절, 축하합니다."라고. 부활절에는 전 그리스에서 몇만 마리나 되는 양이 처형당한다. 양 한 마리를 송두리째 꼬치를 끼워 불 위에다 걸어놓고 빙글빙글 돌려 가며 굽는 것이다. 사 람들은 정원에 모여, 모두 함께 가련한 양을 굽는다. 기름이 죽죽 방울져 떨어진 다. 그리고 그리스의 봄이 찾아온다. 우리는 거의 모든 집에서 굽고 있는 양을 바라보면서, 버스를 타고 아테네로 향했다. 일요일 아침이다. 날씨가 아주 좋다. 양을 굽기에는 더없이 좋은. 코린트 운하 언저리에서 버스가 멈춘다. 승객들이 버스에서 내려 십오분간 휴 식을 위한다. 우리는 운하를 바라보면서 전날밤 호텔 아줌마가 준 빵을 먹었다. 빵 한가운데 빨간 색칠을 한 삶은 계란이 들어 있었다. 오물오물 빵을 먹고 계 란은 껍질을 발라먹는다. 햇살이 따스하여, 마치 피크닉에 와서 밥을 먹고 있는 기분이다. 버스의 승객은 전부 그리스 사람들로, 외국인이라고는 우리 외에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자그마한 몸집의 영국인 여자 한 명뿐이다. 독일에 있는 아는 사람 집에 갔다가, 거기에서 기차로 내려왔어요, 라고 그녀는 말한다. 양지바른 곳을 찾아서 말이에요. 하지만 이제 휴가도 끝났고, 오늘 오후 비행기 편으로 런 던으로 돌아가요. 대학 수업, 어이휴(라며 그녀가 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탄다. 양지바른 나라, 그리스. 그리고 심심하면 무언가가 고장나는 나라, 그리스. 우리가 탄 버스는 아테네를 십오 킬로미터 남겨둔 지점에서 죽었다. 말 그대 로 죽은 것이다, 꽥, 하고, 운전사와 차장은 갑자기 길바닥에 쓰러지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만 늙은 말을 쳐다보는 마부처럼,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그 침묵 하고 있는 엔진을 응시하고 있다.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는다. 그저 물끄러미 보 고만 있다.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고 나는 차장한테 물어본다. "모르겠습니다."라고 차장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말한다. 천천히 고개를 두 번 흔든다. 영국 여자와 우리는 버스에 미련을 버리고 택시를 잡는다. 우리에게는 한가하게 엔진의 죽음을 슬퍼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영국인 여자는 오 후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 우리가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질 때까지도 운전사와 차장은 엔진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1987년 부활절 주말에는 여러 가지가 죽었다. 수만 마리의 양과, 아도니스 호텔의 벽장 문과, 아테네행 버스의 엔진, 내 탓 이 아니다. 미코노스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다·욕조를 둘러싼 공방·술잔치 버스 101호의 빛과 그림자 부활절을 맞은 아테네는 짧은 바지와 티 셔츠 차림이 알맞을 정도로 따뜻했 다. 느긋하게 공원을 산책하고, 달리 할 일이 없어, 오모니아 광장 근처에 있는 극장에서 플래툰을 본다(뒷자리에 앉은 덩치 큰 흑인 망나니가 '팍, 시트, 팍' 하 고 연신 소리를 질러대, 시끄러워서 영화 감상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신문을 보니, 부자만을 상대로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한 전문 살인단이 아테네에서 체포 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벌써 일곱 명이나 부자를 죽였 다고 한다. 그 중 한 사람은 실은 오모니아 광장으로 동냥을 하고 있는 맹인 거 지였다. 몇 십년 동안 거지 노릇을 했는데, 동냥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 대단한 일이다. 도시에스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같은 신문에 나카소네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과의 회견을 위하여 도미했다는 기사도 있다. 1 달러는 1백 37엔, 이다. 부활절인 탓에 아테네 거리는 텅 비어 있다.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 가든가, 여 행을 떠났거나 한 것이다. 가게들 대부분은 셔터를 내렸고, 거리는 활기를 잃고, 웨이터들은 웬지 애절한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늘 가던 싸구려 레스토랑 에서 식사를 하였다. 제법 맛은 있었는데, 계산서를 보니 '도론'이란 항목이 따로 붙어 있고, 요금이 가산되어 있다. 그런 항목을 지금까지 본 일이 없는지라, 웨 이터에게 물어본즉, 그것은 부활절 기간의 공인 특별 요금입니다, 라고 한다. 일 본으로 하자면 정월 요금 같은 것이다. 그게 칠 퍼센트 붙는다. 레스토랑뿐만이 아니고, 택시에도 '도론'이 붙는다. 뭐 공정 요금으로 정해져 있으니 이의의 여지 가 없는 계산서이기는 하지만. 이삼 일 아테네에서 유가를 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양철 깡통 같은 비행기를 타고 미코노스로 향한다. 오래간만에 방겔리스를 만나고 싶었고, 따뜻해진 미코 노스가 보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방겔리스는 여전히 한가롭게 일하고 있었다. 관리인실의 카나리아는 새끼를 낳았다. 우리 집에 곧잘 놀러 오던 암코양이도 새끼를 네 마리나 낳았다고 한다. 나는 방겔리스의 손자에게 선물할 심산으로 이탈리아에서 어린애용 구두를 샀었다. 그것을 건네주자 방겔리스는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아주 기쁘다는 듯 말했다. "이제 겨우 연금을 받게 되었어. 그 연금으 로 이제는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이번 여름까지는 일하지만, 가을 이 되면 그만둘 거야. 그리고 그 다음은 여유있게 사는 거지." 그것 참 잘 됐군요, 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방겔리스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짙은 그리스풍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점심 식사용으로 아내인 마리아가 준비해 준 도시락까지 나누어주었다. 아주 맛있는 도시락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우리가 도착한 그 다음날부터 미코노스는 겨울로 다 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해수욕을 할 작정으로 수영복까지 준비해 왔는데, 바 람은 춥고, 도저히 해수욕 운운할 때가 아니다. 일광욕조차도 불가능하다. 따뜻 했던 아테네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추위이다. 미코노스 사람들도 "어제까지 이 상하게 따뜻하더라니."라며 모두들 부들부들 떨고 있다. 할 수 없이 방에서 책을 읽거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리치 보이를 번역했다. 그렇게 미코노스에는 한 열흘 정도 있었다. 오래간만에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인 조르바를 읽다보니, 몹시 크레타 섬에 가 고 싶어졌다. 그리스 인 조르바는 아시는 바대로 크레타 섬이 무대이다. 카잔차 키스도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따라서 이 섬의 풍토나 섬사람들에 대 한 깊은 애정(때로 그것은 굴절된 증오심으로 변하기도 하지만)을 담아 묘사하 고 있다. 미코노스에서 크레타까지는 비행가를 타면 금방이니까, 그럼 크레타 섬 에나 다녀올까, 하고 얘기는 그렇게 돌아간다. 이렇게 결정하기까지는 늘 그렇듯 얘기가 빨리 진행된다. 그런데 그 다음이 생각한 만큼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다. 저 악명 높은 미코노 스의 강풍(J.G. 발라드적, 종말적, 암유적, 신경질적-강풍)이 거의 한시도 쉴 틈 없이 불어댄 까닭이다. 좌우지간 아침부터 밤까지 일초도 쉬지 않고 바람이 불 어대는 것이다. 비행기는커녕 배도 운휴하고 만다. 섬으로 들어오는 편도 없고, 섬 밖으로 나가는 편도 없다. 요컨대 섬 전체가 고립되고 마는 것이다. 바람만이 아무 거리낌없이 휘이익휘이익 매정하게 불어댄다. 어느 일정선 이 상의 무게를 지니지 않는 것은 모두 땅 끝까지 날려 가고, 초목을 뭉크의 그림 처럼 뒤틀린다. 하늘은 음울한 색으로 물들어 있고, 회색 구름이 불길한 소식을 알리는 사자처럼 스산한 속도로 몰려왔다가는 사라져 간다. 눈에 보이는 온 바 다는 하얀 거품으로 덮여 있고, 어선은 항구에 억류당한 채 따분하다는 듯 돛대 를 덜컹덜컹 흔들고 있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 다. 사람들은 저 미스터리어스한 하얀 케이크 같은 집안에 틀어박혀, 문을 꼭꼭 닫고 있다. 그들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뜨개질을 하든지, 책을 읽든지, 대여 비디오를 보고 있든지, 아마 그러고 있을 것이다. 아 무튼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개와 갈매기만이 바람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지표와 상공이 온통 제 것인 양 휘젓고 다닌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휘익휘익 한풍이 몰아치는 미코노스에서 다시 사흘을 기다리기로 한다. 아무 할 일이 없고, 아무것도 할 기분이 일지 않는다. 호텔 방 에 쳐박혀 창 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좌우지간 춥다 너무 추워서 호텔 주인에게 파라볼라 안테나 같은 모양을 한 초구식 전기 히 터를 빌려(다른 사람한테는 아무 말 마세요. 모두들 추워 떨고 있으니까. 당신들 한테만 살짝 빌려주는 거예요), 그 앞에서 바들바들 떨며 밤을 지낸다. 생선 시 장처럼 스산하고 눅눅한 바람이 창 틈으로 쉭쉭 불어 들어온다. 우리처럼 호텔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네덜란드 배낭족 여자 두 사람(두 사 람 다 아널드 슈우제네거의 상대역이라도 맡을 수 있을 만한 건강한 체형)과, 기 품 있고 조용한 프랑스 노부부, 그리고 국적 불명의 젊은 남자(이 사나이는 이틀 을 계속하여 새벽 네시에 호텔로 돌아와 잠긴 문을 탕탕탕탕 두드리며 호텔 주 인을 불렀으나, 그들이 일어나지 않아, 손님 중 누군가가 일어나 투덜거리며 문 을 열어주었다. 참으로 이렇게 바람 부는 날 밤에 어디에서 무얼 하다가 돌아오 는 것일까?), 그리고 칠레 여권을 가진 수수께끼의 중년 사내, 그 사람은 말도 별로 하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스튜를 홀짝거린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에 등 장하는 타입. 그런 사람들이 강풍이 몰아치는 미코노스에 발이 묶여 있다. 야트 막한 언덕 위의 호텔에. 뭐 날씨가 고르지 않으니 비행기가 뜨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 각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체념한다. 문제는 비행기가 뜨는가 안 뜨는가 하는 상 태가 하염없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항구 근처에 있는 올림픽 에어의 오피스에 가서 오늘은 비행기가 뜨느냐고 물어봐도,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다들 "그런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란 식이다. 할 수 없이 짐을 껴안고 이십분 정도 떨어진 거 리에 있는 공항에 가본다. 그러고는 공항 로비에 낮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비행기가 뜨는지 발표를 기다린다. 역시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는 걸 알고 다시 짐을 껴안고 마을로 돌아온다. 이런 짓을 사흘간 계속한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 상당히 심신이 소모된다. 공항에서 항공 회사의 담당 직 원을 붙들고 물어보아도, 성실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그들 역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다, 여러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받아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내 가 듣고 본 바에 의하면, 그리스 사람들은 쉬 혼란을 일으키는 인종이다. 어떻 게든 사태를 수습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조금이라도 사태가 복잡해지면 혼란을 일으켜 수습도 제대로 못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화를 낸다. 또 어떤 경 우에는 낙담을 하고 만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정반대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사태를 제대로 처리하려는 의지가 희박하기 때문에, 뜻한 대 로 잘 안 되더라도 전혀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어느 쪽 방법을 좋아하는가는 완전히 취향 문제이다. 아무튼 그런 사연으로 사흘간 공항 로비를 어슬렁거리며 지낸다. 몇 사람 일 본인을 만나,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한 사람은 잡지 회사의 촬영반을 마중해 야 하는 코디네이터로, 그 남자는 아테네에서 올지 안올지 모르는 비행기를 기 다리기 위해 마냥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불쌍한 생각이 들어, 손에 들고 있던 포커스최신호를 준다.(어째서 내가 그런 잡지를 들고 있는가를 설명하자면 얘기 가 길어지므로 하지 않는다). 나머지 두 사람은 간사이 지방 사투리를 쓰는 여자 이다. 아테네에서 탈 비행기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여기서는 비행기기 뜨지 않으니, 어째야 좋을지를 모르겠어요, 라는데, 그야 물론 나 역시 어째야 좋은지 모른다. 2인조 여자 여행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한 사람이 대변인식으로 조잘 거리고, 나머지 한 명은 그저 생글거리고만 있다. 한 명은 약간 야위었고, 한 명 은 오동통하다. 나흘째 날 아침, 겨우 바람이 사그라들었다. 5월 2일 토요일. 산들바람조차 불 지 않고,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하다. 한번 바람이 없어졌다하면 극단적으로 없어 지는 것이다. 중간이란 것이 없다. 우리는 다시 짐을 껴안고 공항으로 가서 비행 기라기보다는 불하받은 초구식 잠수함 같은 쌍발기를 탄다. 승객은 전부해서 여 ㅇ 명. 그리스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처음 본 분들께서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이, 이 고철 덩어리가 정말 사람을 태우고 하늘을 날 수 있단 말이야, 하고.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어김없이 날아갑니다. 그런데 그리스 국내선을 독 점하고 있는 올림픽 에어는 사고가 적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의 견을 말하자면, 이 사실이 올림픽 항공의 기술적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 지 않은가 싶은 기분이 든다. 정확하게 말해 이 항공 회사는 날씨가 조금만 나 빠도 금방 비행을 취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툭하면 스트라이크를 일 으킨다. 따라서 비행기가 뜨기보다는 뜨지 않기로 유명하다. 사정이야 어찌되었 든 사고가 없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크레타 섬에 도착. 이라크리온 마을은 그냥 지나치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남 해안으로 향한다. 나는 이전에 한 번 크레타 섬을 방문한 일이있어 그때 크노소 스 궁전을 본 데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을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므로(애당초 나 는 유적이란 것에 흥미가 없다), 전부 그대로 통과, 곧바로 남으로 향한다. 크레 타 섬의 남해안은 바로 맞은편이 아프리카이고, 계절은 이미 오월이므로, 신나게 해수욕을 하는 것이 우리의 내심 목표로 한 일인데, 이번 여행에서 대개의 목표 가 그러했듯, 이 목표도 사산의 운명을 더듬게 되었다. 오월의 크레타는 오월의 에노시마 섬과 기온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대체 뭘하 러 이 시골 변두리 크레타까지 왔단 말인가? 대체 뭘 하러 이 시골 변두리 크레 타까지 왔단 말인가? 뭐 아무튼 좋다. 이미 와 버렸으니. 이라크리온에서 탄 버스는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 포도밭과 올리브 밭밖에 없는 평원을 가로질러 해질녘이 가까워져서야 아기야 가리니라는 조그만 항구 마을에 도착한다. 가이드 북에 의하면 이 아기야 가리니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항구 마을이라는데, 그 표현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간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 다. 우리들 눈에 아기야 가리니는 궁핍한 이류 관광지로밖에 비치지 않았기 때 문이다. 아니, 이런 말투는 좀 심술궂을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얘 기하자면, 크레타 섬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이 궁핍한 이류 관광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 동안 크레타 섬의 마을을 이리저리로 돌아다니다 보면, 그런 '궁핍한 이류성'에 점점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에 따라 기분도 한층 홀가분 해지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크레타 섬이 지니는 미덕이다. 이 섬은 아직은 적 어도 패셔너블한 수익 기계적 관광 섬이 아닌 것이다. 여하튼 아기야 가리니에 도착했다. 저녁 나절에나 도착하리란 걸 알고 있었으 므로, 호텔은 미리 예약해 두었다. 그것도 셔틀 버스가 있는 번듯한 호텔을 2박. 무엇보다 우리는 벌서 삼 주간 정도나 정상적인 욕조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그 래서 여행 대리점의 존에게 부탁하여 정상적인 욕조가 딸린 호텔을 빈틈없이 예 약해둔 것이다. 그러나 항구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오분 정도 올라간 곳에 있는 그 호텔에 도 착해 보니, 로비는 어두컴컴하고, 사람은 그림자도 없고, 해머로 뭔가를 부수고 있는 듯한 소리가 꽝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든다. 몇 번인 가 벨을 눌렀더니, 예순 살 정도의 머리가 벗겨지고 몸집이 작은 아저씨가 나와, "구텐 아벤트."라고 말한다. 이 아저씨, 그리스 말하고 독일 말밖에 할 줄 모르잖 아. 나의 그리스 어 수준은 정말 기본적인 것이고, 독일어는 대학에서 잠깐 배운 이래로 궤멸적으로 녹슬어 있다. 할 수 없이 대충 이 나라 말 저 나라 말로 의 사 소통을 한다. 이 아저씨가 한 말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미안하지만 지금은 공사중이라서 온수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2)원래는 이미 끝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아직 끝나 지 않았다. 이것은 내 책임이 아니고, 어디가지나 공사하는 사람들 책임이다(그 러니까 불평을 하면 좀 곤란하다). (3)그러나 앞으로 세 시간이면 끝난다고 하니까 괜찮다. 아이휴, 정말 잘 안 풀릴 때는 무엇 하나 풀리는 것이 없다. "정말 앞으로 세 시간 후면 공사가 끝나는 것이죠?"라고 나는 확인을 한다. "염려 없어요, 인부들 이 그렇게 말하니까."라고 아저씨는 생글거리며 말한다. "그러니까, 어디 타베루 나 같은 데 가서 식사라도 하고 와요. 돌아와 잠시 쉬고 있으면 틀림없이 온수 가 나올 테니까." "글세 과연 그럴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내도 "글세 어떨까."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숙박비를 선불하였으니 호텔을 바꿀 수도 없다. 평 소에는 안 하던 짓을 하고서는 신나 했더니 이런 꼴이다. 이런 경우에 대부분의 부부가 그러하듯, 우리는 불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려고 하나, 마침내 그 러기에도 지쳐서 가까운 타베루나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이 섬에서 딴 포도로 빚은 포도주를 카시고, 유채 비슷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와 죽 비슷한 것과 오이 와 조그만 도미와 스타푸드 토마토를 먹는다. 이 요리들은 상당히 맛도 있었거 니와, 무척 쌌다. 식사를 한 후에는 항구를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하다가, 아홉시 가 되기 전에 호텔로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가 직감적으로(경험적으로) 예측했던 것처럼, 아홉시가 되어도 온수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로비에 가보니, 젊고 솔직해 보이는, 그러나 약간은 마음이 약해 보이기도 하 는 독일인이 이미 아저씨에게 항의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이 독일인은 역시 솔 직해 보이는 부인과 어린 아기를 데리고 여행하고 있었으며, 이 호텔에 투숙객 은 그들과 우리뿐이란 것이 나중에 판명되었다.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냐고 내 가 독일인에게 묻자, 그는 영어로 내게 설명해 주었다. 공사가 전혀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아저씨를 따라 지하실에 있는 보일러실에 가보니, 인부 세 사람 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영문을 잘 알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라고 아저씨는 설명한다. 그러나 암만 설명을 한들 무 슨 소용이 있으랴. 우리는 온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아홉시까지는 다 끝난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나도 항의를 한다. "그랬죠?"라고 독일인도 말한다. 아저씨는 공사를 하는 인부들에게 "아홉시까지는 끝난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항의한다. 인부는 알 수 없는 말로 뭐라뭐라 되레 고함을 친다. 도무지 얘기에 진척이 없다. "자 그럼 몇시가 되면 확실하게 온수가 나옵니까?" "열두시."라고 아저씨가 말한다. "열두시에는 반드시 나온다고 하니까." 과연 그럴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하고 독일인도 생각하는 모양 이다. 그리스 사람이 한밤중에 열두시까지 일을 할 법이나 하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아도 역시 예상했던 대로 온수는 나오지 않았다. 온 수가 나온 것은 그 다음 날,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나는 찬물로 수염을 깎다가,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아내는 목욕도 못한다고 투덜투덜거리고, 물론 나도 불쾌하다. 그러나 그리스에 있으면 사람들은 체념이란 것을 배우게 된다. 전혀 해수욕을 할 수 없어도, 목욕탕에 온수가 나오지 않아도, 호텔 주인 이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아도. 달리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아, 버스를 타고 가까운 해변에 놀러 갔다. 프라키아 스라는 이름의 아기야 가리니의 세 배쯤 궁핍한 촌락이다. 해안이 있는 것은 분 명하나, 추워서 들어갈 수도 없으니, 해변은 있으나 마나이다. 언뜻 보기에도 가 진 돈이 하나도 없을 듯한, 다이하드한 배낭족들이 한 삼십 명, 별 하는 일도 없 이 해변에서 어슬렁대고 있다 실제적인 문제로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여기에 온 이유는 단지 크레타라고 하는 섬에 프라키아스란 마을이 있다는데, 그럼 거기나 가볼까, 하는 순간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그런 일은 한가한 인간밖 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나 역시 남 얘기만 할 처지는 아니지만. 여기에서 다시 아기야 가리니에 있는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 버스가 또 대단히 멋진 물건이다. 운전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에 맞춰 신나게 흥 얼거리며 구불구불한 단애 절벽 위를 핑핑 달린다. 참 골치 아프군, 괜찮을까, 하고 걱정을 하였더니 아니나다를까, 왼쪽으로 도는 커브 길에서 바퀴 한쪽이 절벽을 헛디디고 만 것이다. 버스의 차체가 기우뚱하고 기울어졌다. 나는 이제 이것으로 끝장이로구나, 하고 체념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렷차차차 하는 식 으로 바퀴가 제자리로 돌아와 무사히 목숨을 부지했다. 차장이 "어이 운전사 양 반 이러면 어떡해."하는 얼굴로 운전사를 보았다. 운전사도 그 후 한 십분 동안 은 노래를 중단하고 있었으니, 제법 위험한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고맙게도 도중에 다른 버스로 갈아타게 된다. 삼십분 정도 고갯마루 꼭대기에 서 기다리고 있자니, 넘버 101이란 표시가 붙은 아기야 가리니행 버스가 올라왔 다. 타고 있는 사람은 우리 두 사람과, 온화해 보이는 영국인 노부부, 서른 살 전후의 나 홀로 여행자 독일인과, 그리스인 이인조 틴에이저, 그리고 섬 아줌마 한 사람이다. 이 버스는 처음 한동안은 열심히 달리더니, 도중부터 어째 사태가 수상쩍어진다. 점심 시간이 되자 차장과 운전사가 버스 안에서 술잔치를 벌인 것이다. 물론 운전을 하면서다. 운전사가 어느 조그만 마을에서 아는 사람한테 포도주 한 병을 받은 것이 소 동의 발단이다. 운전사는 그 마을에서 차를 세우더니 차장과 함께 어떤 집으로 들어가, 한 십분 정도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 동안 버스 안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지그시 기다리고 있었다.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아니나다를 까 그들이 손에 들고 온 것은 그 마을에서 난 포도주 한 병이었다. 그 다음 마 을에서 운전사는 또 버스를 세웠다. 이번에는 차장이 내려 치즈를 만드는 집으 로 들어가더니, 배구 공만한 크기의 치즈 덩어리를 사가지고 왔다. 그런 식으로 버스 속에서의 술잔치가 시작된 것이다. 제일 앞줄에 앉은 그리스 아줌마가 "당신, 당신이 마시고 있는 것, 포도주지?" 하고 운전사를 향하여 나무라듯 말했다. "물이야요, 물." 하고 운전사는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그러다 "아줌마도 좀 마셔 봐요."라며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치즈 를 잘라 아줌마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어느 틈엔가 우리를 비롯한 승객 모두 가 앞으로 모여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치즈를 오물거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 다. 차장은 불그레 취한 얼굴로, 사슴 껍질이라도 벗길 수 있을 듯한 나이프로 치즈를 잘라 모두에게 나누는데,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그 날 끝이 제일 앞에 앉아 있는 영국인 노부부의 코앞을 왔다갔다한다. 그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는, 걷는 미소를 얼굴에 띠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운전사는 이미 노면 따위는 전 혀 보고 있지 않다. 흥얼흥얼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농담을 하고는 하하하하하 하고 웃고 있다. 길은 여전히 험악하고, 구불구불 휘어 있다. 그러나 이 여행 전체를 통해 이렇듯 맛있는 포도주를 마셔보기는 처음이고, 이렇듯 맛있는 치즈를 먹어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정 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이 있었다. 물론 포도주도 고급스런 것은 아니다. 어디 농가의 뜰 한쪽에서 만든 그런 포도주다. 하지만 그 포도주가 눈에 반짝 뜨일 만큼 맛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그리스에서 도대체 뭘 먹고, 뭘 마셨던 가, 하고 어처구니없어질 만한 맛이었다. 심플하고, 신선하고, 게다가 깊은 온기 가 있고, 대지에 그대로 뿌리내리고 있는 듯한 정겨운 맛이다. 이런 맛의 포도주 는 유감스럽게도 레스토랑에서는 맛볼 수 없다. 아무튼 우리는 잔뜩 배가 불러 아기야 가리니에 무사히 도착했다. 승객들은 후-하고 안심스럽기도 하고, 만족스 럽기도 하고, 두 번 다시 이런 버스는 타고 싶지 않기도 하고, 다시 한 번 이런 버스를 타고 싶은, 복잡한 기분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모두들 차장과 운전사와 악수를 하고, 어깨를 얼싸 안으며 안녕을 고했다. 크레타라는 섬은 결국은 이런 타입의 섬인 것이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섬이다. 사소한 일로 일일이 심각하게 신경을 써서는 도저히 살아 남을 수가 없다. 정말 그렇다. 그런데 이 술잔치 버스 101호를, 우리는 이틀 후에 우연히 다시 타게 되었다. 차장은 다른 차장이었지만, 운전사는 같은 인물이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 다. 그리스나 이탈리아를 오래 여행하다 보면 우리는 싫건 좋건 상관없이 이 '불 길한 예감' 능력을 터득하게 된다. 저 트로이의 카산드라처럼, 우리는 예감의 불 길한 면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런 예감은 대개 맞는다. 올림픽 항공이 혹 스트라이크로 뜨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하면, 역 시 뜨지 않는다. 이탈리아 열차가 두 시간 도착이 늦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하면, 역시 두 시간 늦게 도착한다(하기야 이 두 예는 확률적으로 말해 거의 예감이랄 수도 없지만). 그건 그렇고 술잔치 버스 101호에 대한 그때의 불길한 예감도 보아란 듯이 적 중하였다. 버스가 달리는 도중에 짐칸 뚜껑이 열려-차장이 제대로 닫지 않은 것 이다-안에 들어 있던 손님의 짐이 두 개 도로로 굴러 떨어졌다. 버스는 백 킬로 미터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던 터라 운전사도 차장도 짐이 떨어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요행히 제일 뒷자리에 앉아 있는 배낭족이 알고는 큰소리를 질러, 간신히 버스가 멈췄다. 그러곤 후진을 하여 짐을 회수하였다. 아아, 다행이다...라고 말해야 할텐데, 실 은 별로 다행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짐 두 개는 모두 우리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내가 짊어지고 있던 밀레의 대형 배낭, 도 하나는 아내가 들고 있던 나 일론 가방, 버스에서 내려 살펴보니 밀레의 배낭 쪽은 노면에 부딪혀 멋들어지 게 구멍이 뚫려 있다. 물론 나는 차장에게 불만을 터뜨리지만, 불만을 호소한들 무슨 결론에 도달할 것인가? 전혀 결론이란 없다. 언어가 허망하게 공중을 오갈 뿐이다.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다른 방법이 없어 나는 차장에게 배낭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보여준다. 그리 고 보디 랭귀지로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할거야, 이렇게 군 구명이 뚫렸다고. 차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양팔을 크게 벌린다. 그리고는 문을 가리킨다. 여기가 열려 있었어. 어이, 잠깐, 그런 말은 안해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거 자네 탓 이잖아. 알아 그건 자네 탓이라구. 나는 영어와 프랑스 어와 일보어로 소리친다 (화가 나 있을 때는 일본어가 제법 통한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한들 시간만 버릴 뿐이다. 길에서 만난 사슴에게 스페인 어로 길을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죄송하 지만, 숲의 입구는 어느 쪽입니까?" 무슨 짓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결국은 소용 이 없는 일이다. 사슴에게 길을 묻는 내 쪽이 잘못이다.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들어쉰 숨을 그대로 내뱉는다. 그리곤 허무하게 고개를 젓는다. 차장도 똑같이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내 어깨를 톡톡 다독인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군. 이란 식으로. 그런 곳이 크테타 섬이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사소한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 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 알렉시스 조르바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이 이 양반, 그 배낭의 구멍은 말일세 하느님이 잠깐 장난을 한 걸세, 하느님이란 때로 이상한 짓을 하지만, 전부 합해서 보면, 좋은 일 쪽이 많거든, 그러니까 잊 어버리라고, 그런 사연으로 나도 엘렌 베이츠 같은 얼굴을 하고 배낭에 뚫린 구 멍 일은 잊기로 한다. 이것이 101호의 빛과 그림자. 술잔치와 배낭에 뚫린 구멍. 크레타 섬의 자그마한 마을과 자그마한 호텔 크레타의 산골짜기에 자리한 자그마한 마을과 자그마한 호텔. 이곳에 호텔은 한 군데밖에 없다. '그린 호텔'이 그 호텔의 이름이다. 영어로 GREEN HOTEL, 하지만 아무도 영어를 할 줄 모른다. 구경할 만한 것도 하나 없는 마을이지만, 그래도 싼 물가에 매력을 느껴 '여행을 계속하는 배낭족들이(마치 설탕 냄새를 맡고 꼬여 드는 개미들처럼 그들은 정처없이 물가가 싼 곳을 찾아 방황을 계속 한다) 이 마을을 거치고 지나갔는지, 호텔 식당의 책꽂이에는 그들이 읽다 버리 고 간 페이퍼백이 청춘의 묘비처럼 즐비하게 놓여 있다. 모두들 여기에다 다 읽 은 책을 놔두고, 그 대신 읽고 싶은 책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여러 나라의 언어로 쓰인, 여러 타입의 책들. 그리스 인 조르바가 무려 세 권이나 있다. 영어판이 두 권, 독일어판이 한 권. 그리고 시드니 셜던, 윈스턴 그레이엄, J.G. 발라드, 잭 히긴스, 해럴드 로빈스, 독일어 판 윌버 스미스의 서부 소설(하하하), 프랑스 판 허들리 체이스 등등. 스 웨덴 어, 네덜란드 어, 이탈리아 어, 수많은 언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 리고 그 어느 것이나 초라하고 낡았다. 좀 유별난 책으로는, 빈티지 서버 코래트 선집 버나드 쇼, 차일즈 바이런 프로페션 이란 책도 있다. 더욱 유별난 책으로는 FBI백서 (상당히 전문적인 자료이다)라든가 미국의 노동 조합(사진 첨부)이란 책까지 있다. 대체 주가 이런 책을 크레타 섬까지 들고 왔을까, 나는 짐작도 못 하겠다. FBI 백서 와 미국의 노동 조합(사진 첨부)은 같은 사람이 들고 왔을까? 모든 것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나의 흥미를 끌 만한 책은 거의 없다. 배낭족들은 제대로 된 책을 그다지 읽지 않는 인종일까? 아니면 이 '그린 호텔'의 선반에는 인수해 갈 사람이 없는 책이 운하의 밑바닥을 메우고 있는 진흙탕처럼 그저 조용히 쌓 여만 간 것일까? 후자 쪽이 확률로서는 높을 듯하다(대체 누가 크레타 섬에서 코래트를 읽을 것인가?). 어찌 되었건 나는 그 별다른 흥미를 유발하지 않는 먼 지 쌓인 라이브러리에서 스티븐 브룩스라는 영국 작가가 텍사스에 관해 쓴 홍키 텅크 제라드 란 르포르타주를 골라(제목만 재미있고 내용은 별볼일 없는 채이라 는 것이 나중에 판명되었다), 방금 전에 다 읽은 미션 (로버트 볼트가 쓴 예의 영화의 원작, 미코노스의 매점에서 샀다)과 교환한다. 그리고 신 조사에서 보내 준 신조 문고의 신판 코끼리 공장의 해피 엔딩 안자이 미즈마루, 무라카미 하루 키 저, 도 여기에 놓아둔다. 이만큼 많은 책이 있으니, 일본어로 쓰인 책이 한 권쯤 있어도 상관없으리라. 크레타 섬의 산골짜기에 있는 조그만 마을, 조그만 호텔 식당의 종말적으로 잠잠하고 더러운 책꽂이에도. 호텔 방에는 열쇠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시험삼아 열쇠는 없느냐고 물어보자, 아줌마는 잠깐 기다리라며 어디에선가, 한 다스 정도 더러운 열쇠를 가져온다. 이 중에 어느 하나일 거예요, 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열쇠는 하나같이 조잡 하다. 한 번 잠그면 두 번 다시 열리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은, 예의 '불길한' 예 감이 나의 뇌리를 스친다. 그런 예감이 모리스 라벨의 밤의 고스펠에 등장하는 해질녘의 종소리처럼 데에에뎅, 데에에뎅 하고 먼 곳으로 스산하게 울려온다. 그 래서, 나는 필요없다, 고 사양한다. 아마 아무도 열쇠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마을에서 열쇠를 요구하는 인간은 구제의 여지가 없는 변질자일 것이다. 틀 림없이. 한 줄기 도로를 끼고 존재하고 있는 조그만 마을. 은행이 하나, 크레타 은행. 카페니온이 둘, 타베루나가 둘. 버스는 하루에 세 번 운행. 교회가 하나, 공동 묘 지가 하나. 무얼 만드는지 모르지만, 분명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듯한 소규모 공 장 같은 건물. 빵집과 정육점과 채소 가게. 구멍 가게와 전파사. ROOM TOLET(대여하는 방)이란 명패가 걸려 있는, 그러나 인기척이 전혀 없는 집. 좁 다란 광장이 있고, 여기에는 물 마시는 곳이 있다. 스무 마리 정도 되는 사자목 이 죽 늘어서 있고, 그 한 마리 한 마리 사자의 입이 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뿐인 마을. 오분만 걸으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볼 수 있다. 관광객 이라고는 우리와, 그다지 폼이 없는 중년 부부뿐. 그들과는 몇 번인가 길에서 얼 굴을 마주친다. 얼굴이 마주치면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끄러운 듯 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로서도, 그들로서도, 왜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마을에 일 부러 와서 하룻밤을 지내지 않으면 안되는지, 그 이유를 상대방에게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당히 조용한 곳이다. 그 점만은 보장 할 수 있다. 아침, 마을 사람들 은 당나귀니 말이니 양이니 뭐니뭐니 하는 것들을 데리고, 밭과 들판으로 나가 고, 해질녘이 되면 같은 동물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아침 저녁으로, 길은 그런 동물들의 울음 소리와 발걸음 소리로 그득하다. 산양의 목에 걸린 방울이 딸랑 딸랑 소리를 낸다. 심플한 인생. 문학의 내적 필연성도, 내적 필연성으로서의 문학도, 문학이란 형태를 지닌 내 적 필연성도, 내적 필연성이란 형태를 지닌 문학도, 문학적인 내적 필연성도, 내 적인 문학적 필연성도, 일절 없다. 산양과 당나귀가 있을 뿐이다. 산양과 당나귀가 지나가고 나면, 해가 진다. 달리 할 일이 없어, 한 타베루나 에 간다. 다른 타베루나(이야니스의 타베루나)에서 점심을 먹었으므로, 저녁은 필연적으로(반내적 필연성, 하하하) 이쪽이 된다. 어느 쪽이든 비슷비슷하다. 어 차피 비슷비슷한 음식밖에 나오지 않으므로, 손님은 우리뿐이다. 오랜만에 외국 인 손님이 왔네, 란 식으로 아저씨가 손을 비비며 나온다. 이 마을에서 나는 포 도주를 마시고 싶은데요, 라고 내가 말하자, "그렇다면 손님, 맛있는 마블로스 (흑)가 있습죠." 라고 한다. 적이라든가 백이라든가 로제라든가 하는 말은 알고 있지만, 흑이라니 처음 듣는 말이다. 살짝 맛을 보았더니 과연 맛있다. 마치 약 처럼 쌉쌀한데, 탄력이 있는 반듯한 맛이다. 직접 포도주를 빚는지, 포도주를 가 득가득 담은 한 되짜리 병이 부엌 바닥에 좍 놓여있다. 이 포도주를 반 리를 주 문한다. 그리고 그리크 샐러드 한 접시와 감자 튀김 두 접시, 감자 튀김은 겨울 잠에서 깨어난 곰에게 나누어주고 싶을 만큼 접시 한가득이다. 그 다음에 레티 나 포도주를 한 병 마신다. 이렇게 먹고도 칠백 엔. 여러분 싸다고 생각지 않습 니까? 식사를 마친 후, 옥외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느긋한 기분으로 저녁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을 아이들 일곱 명 정도가 우리를 빙 둘러싼다. 대충 일곱 살에서 열네 살 정도 난 아이들로, 제일 나이가 많은 리더격 여자 아이는 꽤 예 쁘고 영리해 보인다. 모두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생글거리기도 하고 수 줍어하기도 하면서, 포도주를 마시는 우리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춤을 추는 아이도 있다. 아마도 일본 사람을 본 일이 없어 신기한 모양이라고 추측했더니, 추측대로였다. 리더격 여자 아이가 내 옆에 와서(마을을 굳히고 가까이 오기까지 십분이 걸렸다), 쿵푸를 좀 해보라고 한다. 쿵푸 할 줄 알죠? 물론, 이라고 나는 거짓말을 한다. 여자를 실망시키는 것은 내 신념에 위반되는 것이다, 자. 그럼 조금만 해볼게, 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고는 아주 조금만, 아이샤-하는 것을 흉 내내 보여 준다. 나도 브루스 리를 보고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우 우우, 역시'란 얼굴로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마도 내일은 학교에 가서 모 두에게 자랑을 늘어놓을 것이다. "있지, 우리들 어제 진짜 일본 사람이 하는 쿵 푸 봤다."라고 말이다. 나도 가끔은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있다. 가끔은. 호텔 방문에 열쇠가 없다는 얘기는 앞에서 썼다. 그런데 이 문에는 열쇠뿐만 아니라, 손잡이조차 없었다. 덕분에 밤새도록 그 문은 바람에 나부끼며, 내 귀밑 에다 카당카당카당카당하는 화려한 소리를 보내주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왜인지는 모르지만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을 떠올렸다. 어쩌면 중학교 음악실 벽에 걸려 있던 베토벤의 초상화가 그런 단절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도 모른다. 열쇠도 손잡이도 없는 싸구려 호텔에 머무르며, 밤새도록 문이 카당 카당카당카당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얼굴을. 이튿날 이야니스의 타베루나에서 점심을 먹으며 레시무농으로 가는 버스를 기 다린다. 옆자리에는 나이를 먹은 데이비드 보이가 지쳐 있는 모습(요컨대 최근의 데이비드 보이 같은) 같은 얼굴 생김의 나 홀로 여행자 영국인이, 기름기가 끈적 하게 떠 있는 소고기 찜 요리를 아무 맛도 없다는 양 먹고 있다. 우리는 포도주 와 샐러드만 먹는다. 버스가 와, 우리는 음식값을 지불하고, 일주일 전부터 버리 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버리지 못한 너덜너덜한 나이키 슈즈(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그걸 버릴때마다 누군가가 다시 주워와 주었다)를 종이 봉투로 둘둘 말아, 살짝 테이블 밑에 놓고,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가 발차한다. 어이휴 간신히 버렸 다. 그런데 이번에도 틀렸다. 이야니스가 버스를 불러 세우고 있다. "키리오스(당 신), 이거 두고 갔어요."나의 너덜너덜 다 떨어진 나이키 조깅 슈즈, 그것은 아무 도 잊어 주지 않는 과거의 사소한 실수처럼,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고맙습 니다,"라고 말하고, 나는 그 종이 꾸러미를 받아 든다. 달리 뭐라 얘기하면 좋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우리는 크레타 섬 산골짜기의 조그만 마을을 뒤로 하였다. 앞으 로는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그 마을을. 레시무농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물론 버스의 좌석 밑에다 그 종이 꾸러미를 처 박아 두고 내렸다. 하지만 밤이 지나고 날이 밝도록 나는 내 걱정이었다. 누군가 가 호텔 방문을 노크하며, 그 신발을 갖다 주면 어쩌나 하고, "키리오스, 분실물 이야." 하고, 하지만 물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이휴 다행이다. 1987년, 여름에 서 가을 헬싱키 1987년 초여름, 거의 일년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노르웨이의 숲]의 교정지 를 손질하기 위해서이다. 의심 많은 고단샤의 기노시타 요코씨(본인은 전혀 그렇 지 않다고 주장하지만)도 "아주 재미있다."고 말해 주었다. 아아, 다행이다. 혹여 "뭐예요 이 소설, 그저 길기만 할뿐이잖아요."라는 말이나 하지 않을까 하고 걱 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에 체재하는 동안(이라 하는 것도 좀 구태의연한 말 이지만) 완성한 폴 세로의 [월즈 엔드]와 브라이언의 [위대한 데스리프]의 교정 지도 체크한다. 일년지 출판물의 마지막 손질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셈이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큰일이다. 여름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만다. 세 권, 책의 장정을 정하고, 편집자와 이런저런 사소한 부분까지 협의를 한 후 에, 이제 나머지는 인쇄를 하면 되는 시점까지 반듯하게 매사를 정리한 후에, 다 시 일본을 떠난다. 어째 일주 일치 음식을 한꺼번에 만들어 냉동고에 집어넣는 주부 같은 기분이다. 일본을 떠난 것은 구월초 짧은 귀국 기간이었지만, 상당히 지치는 일이 많았다. 사람들과의 교재며, 고구마 딩굴처럼 끝없이 생겨나는 사무 적인 잡일이며, 여러 가지로 머리 속이 뒤엉켜 있다. 맛있는 일본 요리를 당분간 먹을 수 없는 것은 괴롭지만, 뭐 어쩔 수 없다. 이번에는 핀 에어를 타고, 헬싱키를 경유하여 로마로 남하한다. 헬싱키는 처음 이니까 한 5박 정도는 하고 싶다. 북유럽 항공은 대충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 도 핀 에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항공 회사 중의 하나이다. 스튜어디스가 미인 인 것도 아니고, 스타일이 좋다고는 인사치레로라도 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대대적인 태세로 까다롭게 굴지 않는 점이 좋다. 모두들 여유 있는 얼 굴 표정에, 생긋생긋 웃으며 일하고 있다. 아마도 건강한 사람들만을 골라 입사 시킨 것이리라. 일본 항공 회사의 서비스는 일반적으로 좋다고 생각하지만, 회사 에 따라서는 너무 형식적이라 때로는 노이로제적으로(이거야 마치 하늘을 나는 맥도널드로군) 느껴지는 일이 없지 않다. 핀 에어는 대략 그 반대 지점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헬싱키 거리는 도쿄에서 온 사람에게는 어쩐지 텅 빈 것처럼 보인다. 도로의 폭은 넓고, 오토바이의 숫자가 극단적으로 적다. 그리고 공원이 유난스레 많다. 거리에는 자동 판매기가 한 대도 없다. 경제 효율이라는 것을 그다지 깊이 생각 하지 않는 도시인 듯하다. 그렇게 큰 규모의 도시는 아니지만, 도로가 드넓은 탓 인가, 걸어서 다니면 상당히 피곤하다. 삿포로를 걷는 것과 비슷한 피로감이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여성 노동자 수가 많다. 도시 어디를 가도 일하는 여성들 의 모습이 눈에 띈다. 노동 인구가 적은 까닭인지도 모르겠으나, 버스나 도시 전 철의 운전사가 거의 여성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젊은 여성에서 아줌마에 이 르기까지, 모두들 한결같이 얼굴을 빨갛게 상기시키고 기운차고 활달하게 일하 고 있다. 인류는 모두 실질적으로 근면하게 일하여 건간을 유지할 수 있다, 라는 사상이 보편화되어 있는 나라인 듯하다. 그런 점에서는 로마와 상당히 다르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로마의 인간은 모두들 어떻게 해서든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후도 로마에 비하면 그야말로 비참할 정도 다. 매일 구름이 묵직하게 끼어 있고, 차가운 비가 후드득후드득 내린다. 구월인 데도 아침에 교외를 달리고 있으라면 손이 딱딱하게 꼽는다. 추위 이상의 애로 사항은 식사이다. 레스토랑에 들어가니 계절별 요리 메뉴가 있었다. 그 리스트를 보니, 여름에는 제법 요리의 종류가 풍부하다. 예를 들면 구월에는 '바르티크 헤링, 대구, 넙치, 백숭어, 연어, 화이트 피시, 토끼, 들새, 와일드 덕, 버섯, 딸기, 월귤 프럼, 크란베 리, 마톤' 같은 것들을 먹을 수 있다. 상당히 호화롭다. 그러나 여름이 끝나고 겨 울이 찾아오면,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요리로 하자면, 순록 고기와 명란젓과 헤 라지카 고기뿐인 형편이다. 헤라지카 고기! 아니 구월인 이 시점에서도, 헬싱키 거리에 있는 레스토랑의 요리는 결단코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저 로마 시장에 즐비하던 터져날 듯 신선하고 싱싱한 채소를 생각하면, 미안하기는 하지만, 나는 도저히 핀란드에서는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곳에서 맥빠 진 캐비지와 식초에 절인 청어를 먹으며 겨울을 나고 싶지 않다. 무척 아름답고 인상이 좋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추위와 식사를 별개로 하면, 헬싱키라는 도시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 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얌전하다. 그리고 사람 수 그 자체가 적다. 행렬이란 것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영어도 제법 통하고, 말을 걸면 모두 생긋하고 웃어 준다. 도둑도 없을 듯하고, 경찰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길모퉁이에서 어쩌다 보는 경찰관의 수는 로마의 오분의 일 정도가 아닐까 싶은 느낌이다. 헬싱키 공항에 도착했을 당시, 기온은 8도였고, 꽤 추웠다. 일본을 떠날 때는 티 셔츠 한 장 차림이었으니 상당한 차이이다. 일본의 기후로 하자면 대충 십일 월 말 기후로, 트레이너 셔츠 위에다 가죽 점퍼를 입으면 알맞다. 지금이 이런데 한겨울이 되면 어찌하랴 하고 생각하면,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써늘해진다. 나는 추위에는 정말 옴쭉을 못하는 인간이다. 이런 사연으로 보브 딜런의 콘서트를 포기하였다. 마침 보브 딜런과 톰 패티 밴드가 헬싱키에 와 있어서 들으러 갈까 했는데, 콘서트를 여는 장소가 '아이스 홀'이란, 이름만 들어도 써늘한 홀이라서(이런 이름을 잘도 갖다 붙였다고 생각 한다), 주눅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하긴 뭐 딜런은 작년 무도관에서 들었고 하니, '아이스 홀'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여 한마디, '아이스 홀'은 아이스 하키 같은 게임을 하는 핀란드의 무도관 같은 시설이라고 한다. 보브 딜런이 냉증에 걸리지 않으면 좋겠는데 하고 걱정을 한다. 그 사람도 이미 꽤 나이를 먹었고 하니. 딜런 대신에 핀란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들으러 간다. 핀란디아홀이라는 아름다운 홀이다. 일본으로 하자면 중간 크기 정도의 홀이지만, 상당히 친밀한 분위기가 있어, 차분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입장료는 42마르카(천이백 엔 정 도), 로비에는 바가 있고, 여기에서 셰리를 먹는다. 세리가 8마르카(이백사십 엔), 로비의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는 아름다운 호수(어쩌면 바다의 일부분인지도 모 른다)가 펼쳐져 있다. 백조가 수면을 가로지르고, 빨갛게 물든 숲에 가랑비가 소 리도 없이 내리고 있다. 시벨리우스의 멜로디가 들려 올 듯한, 자못 북유럽다운, 정서적인 풍경이다. 첫 곡은 모모 핀란드 작곡가가 작곡한 현대 음악. 대개의 현대 음악이 그러하 듯, 공포 영화의 사운드 트랙처럼 들린다. 곡이 좋고 나쁘고 까지는 모르겠으나, 저런 음악은 좀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한다. 좀더 신나는 현대 음악이 있어도 좋을 텐데 말이다. 두 번째 곡은, 모차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트로, 피아니스트는, TAWASTST JERUNA라는 핀란드 남성과, HUIYINGLIU라는 중국인 여성 듀 오 팀이다. 이 연주는 뭐랄까, 몹시 끔찍한 모차르트로, 듣고 있으려니 상당히 피곤해졌다. 한 세대 전 중고 볼보를 타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긴 채 언덕길을 올라가는 듯한 모차르트로, 유별나게 무겁다. 어깨가 결려 온다. 음악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고, 모두가 한결같이 빈 풍으로 몰캉몰캉하게 모차르트 를 연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칙은 없지만, 그래도 이 연주는 좀 지나쳤다. 이런 정도라면 해석 이전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관객은 성대한 박수로 환호했으므로, 어쩌면 핀란드에서는 이런 식의 모차르트가 일반적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 번째 곡인 차이코프스키의 3번 교향곡에 이르자, 이 오케스트라는 분위기를 싹 바꾸어 멋진 음을 들려주었다. 이 오케스트라가 저 지독한 모차르 트를 연주한 오케스트라와 같은 오케스트라인가 하고 귀를 의심할 정도로 좋은 소리였다. 소리에 퍼짐이 있고, 두께가 있고, 표정이 있고, 생활이 있고, 마음이 있다. 나는 정직하게 말해 차이코프스키의 곡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하지만 이런 연주로 들으면 과연 차이코프스키로군 하고 수긍이 간다. 음악에는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밖에 없다는 말을 흔히 듣는데, 그것과는 관계없이, 음악에는 그 토지에 맞는 음악과 맞지 않는 음악이 있구나 하고 절실하게 생각한다. 토지 성이라는 것이다. 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시벨리우스를 한 번 지긋하게 시간 을 들여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이만큼 잘 연주할 수 있는 음악과 잘 연주하지 못하는 음악의 구분이 확실한 오케스트라도 드물 테지만, 어쩐지 시원 시원한 느낌이 든다. 아무 곡이든 웬만큼은 연주하지만, 모두 평균점인 오케스트 라보다는 훨씬 더 호감이 간다. 이렇게 헬싱키에서의 며칠이 흘러갔다. 춥다는 점을 제외하면, 핀란드는 아주 느낌이 좋은 내 취향에 맞는 나라이다. 여름에 간다면 다시 가도 좋다고 생각한 다. 마로네씨네 집 로마에서 이번에는 전셋집에 살기로 한다. 불완전하나마 어엿한 집 한 채이다. 친절한 우비 씨가 개인적인 연줄로 이 집을 구해 준 것이다. 우리 힘만으로는 그럴싸한 전셋집을 도저히 못 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아라는 나라는 그 저 사소한 일에도 연줄이 힘을 쓰는 곳인데, 특히 연줄 없이 전셋집을 찾는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쩌다 재수 없게 모르는 사람에게 집을 빌려주 었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비워 주지 않는 경우가 꽤 많은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나도 곧잘 들었다. 외국에 나가 있는 사이에 일년간 집을 빌려주었더니 그만 눌 러앉고 말아, 할 수 없이 집주인 쪽이 불편한 아파트 사리를 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이탈리아에서는 위법이기는 하나 상식 적으로는 용서받을 수 있는 범위 내의 행위인 모양이다. 이 나라에서는 계약이 라는 것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소송을 걸어 재판을 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해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법원의 절차며 형식이 상상을 불허할 만큼 성가시고 복잡하여, 법률적인 결론이 나올 때까지 무지막지한 시간 이 걸린다. 따라서 다 쓰러져 가는 헌 아파트라면 몰라도, 번듯한 집이면, 집주 인은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인간에게 집을 빌려주지 않 는다. 참으로 골치 아픈 나라이다. 우리가 빌린 집은 로마 교외의 높은 대지에, 그런 대로 고급스런 주택가에 있 다. 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부지 안에 있는 집으로, 전자동 문이 달린 삼엄한 수 위실이 입구에 있어, 입장할 때면 얼굴을 체크한다.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따라서 치안 차원에서는 일단 안심할 수 있다. 사는 사 람들 중에는 외교관이니 고급 비즈니스맨이니 하는 사람들이 많아, 자동차도 BMW라든가 메르세데스, 아우디라든가 볼보, 사브라든가 레인지 로버 등등 외국 산 차가 많다. 그리고 대개는 집에다 필리핀 가정부를 고용하고 있다. 우리가 빌린 집주인은 마로네라는 나폴리 출신의 이탈리아 인이다. 이탈리아 외무성 상급직에 근무하는 사람으로, 이 연립 주택에 집을 세 채나 소유하고 있 다. 그 중의 한 채를 우리에게 빌려 준 셈이다. 마로네는 파리에도 별장을 갖고 있다. 요컨대 부자인 것이다. 우리가 로마에 도착한 밤에, 마로네 씨 일가가 우리를 바비큐 가든 디너에 초 대해 주었다. 마로네 씨의 부인은 영국인이다. 옛날에는 꽤나 미인이었겠다 싶은 데, 지금은 신체의 각 부위에 군살이 많이 붙어 있다. 마로네 부부에게는 십대 전반의 딸이 둘 있는데, 이름은 데보라와 파아리나라고 한다. 둘 다 상당히 예쁜 소녀다. 이탈리아 인의 명랑하고 활달한 피와, 영국인의 내성적이고 침착한 피가 적절하게 블렌드되어 있는 그런 느낌이다(그 반대라면 손 쓸 여지가 없지만). 이 나이의 여자 애들답게 상당히 수줍어하는데, 한편 호기심도 왕성하여 옆집에 일 본인 부부가 이사를 왔다는 사실에 꽤 흥미를 갖고 있다. 자매는 사이도 아주 좋아, 언제나 둘이서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마로네 씨 집에는 암캐 마드와 수코양이 진이 있다. 한마디로 하면, 마 드는 얼마간 낙천적인 개고, 진은 약간 까다로운 고양이이다. 품격으로 봐서는 진이 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끼 시절부터 함께 자란 덕분에 마드와 진은 개 와 고양이치고는 상당히 사이가 좋다. 우리도 얼마 안 있어 마드와 진과 사이가 좋아졌다. 마드와 진은 둘 다 우리 집에 놀러 오게 되었다. 우리는 결국 이 집에 약 열 달을 살았다. 전망은 그다지 나쁘지 않지만, 습기 가 차서 늘 눅눅한 집이었다. 언덕 사면에 서 있는 북향집이라서, 겨울에는 햇빛 이 한 점도 들어오지 않았다. 비가 조금만 와도 벽에 곰팡이가 슬었다. 침대도 이불도 항상 싸늘하게 식어 있다. 비가 새기도 했다. 집 앞에 있는 도로는 늘 검 게 습기가 차 있었다. 난방 설비도 불충분하여, 겨울에는 몸의 심지까지 얼어붙 는 듯했다. 아내는 이런 음습한 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이사를 하고 싶다고 했지 만, 앞에서도 얘기했듯 적당한 집을 찾기가 실로 어려운 것이다. 나도 틈을 봐서 는 여기저기 부동산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주택 정보]같은 책을 찾아보기도 했 지만, 유감스럽게도 쓸 만한 집은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이 마로네 씨의 집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이런 집에 있어 봐야 신통한 일이 없 다고요."라고 아내는 예언했지만, 그 예언은 어떤 의미에서는 적확했다. 나는 이 집에 있는 동안 책을 몇 권 번역하였다. [댄스 댄스 댄스]라는 장편 소설을 완성하기도 했다. 일 쪽에서 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흔 살을 앞두고, 그런 대로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일은 했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그 이외의 면에서는 여러 가지로 힘겨운 일이 많았다. 아테네 마라톤과 티켓을 요행히 환불할 수 있었던 일 1987년 10월 11일 시월 팔 일에 로마에서 아케네로 갔다. 내가 아테네로 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 가지는 시월 십일 일에 개최되는 아테네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올봄 아테네 에이 전트의 실수로 타지 못한 올림픽 에어 라인의 항공권(아테네-로마간, 이 인분 4 만 7천엔 정도)을 환불하는 일, 공항 카운터에 티켓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기에 가 보았더니,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덕분에 정규 항공권을 다시 사는 수난 을 겪었다. 전화로 항의를 하여도 결론이 나지 않아, 마라톤에 참가하는 김에 직 접 담판을 하러 간다. 먼저 마라톤 얘기부터. 아테네 마라톤은 마라톤 촌에서 아테네 시내까지의 42.195킬로미터, 즉 오리지 널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경주로, 올해가 5회째이다. 대회로서의 전통은 그다지 깊지 않지만, 하기야 이천 몇백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아테네 마라톤의 기원에 대해서 이전부터 의문스럽게 생각해 오는 일이 있다. 그 첫 번째는 마라톤 촌에서 아테네까지 승리를 알리기 위해 전령이 달렸다고 하는데, 그 무렵에는 말이 없었던 것일까?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말이 있는데 전 령을 보낼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는 이미 말이 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옛날 역사책에서 말을 탄 알렉산더 그림을 본 적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리스 역사의 어느 시점에선가 말이 유입되었을 것이 다. 그것이 언제인지 한 번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루하루 잡일에 쫓기다 보니 실제로는 아직도 조사를 하지 못했다. 그런 유의 '그리고 보니...'적 인 의문은 대부분 미해결인 채 사장되기가 십상이다. 어째서 일본의 파발꾼은 말을 타지 않았는가? 또 왜 일본에서는 마차가 발달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도 내게는 오래된 수수께끼이다. 세상에는 제법 모르는 일이 많다. 마라톤 전설에 대한 의문의 두 번째. 장거리 전령으로서 달리기를 직업으로 하고 있는 전문 주자가 어째서 42킬로미터를 달린 정도로 간단히 죽어 버렸는 가? 지금에는 아마추어 러너도 42킬로미터를 가볍게 뛰지 않는가? 풀 마라톤 경 주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근년에 간신히 판명되었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 린 그리스 인은 그 전날 아테네-스파르타간을 달려서 왕복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 페르시아 전에서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그리스 측의 친서를 지참 하고 스파르타로 향했는데, 고집스런 스파르타 인에게 매정하게 거절당하고는, 그 답변을 손에 쥐고 다시 서둘러 아테네로 돌아갔다고, 그 길로 또 마라톤 전 장으로 달려가, 승패의 귀추를 살펴본 후, 다시 또 아테네까지 전속력으로 달려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이틀간 장거리를 뛰었으니 죽을 만도 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테네에서 스파르타까지 버스를 타고 지나간 일이 있는데, 그 길이 산너 머 또 산의 연속으로, 넌덜머리를 낸 기억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들어서 면 평지라는 것은 거의 없고, 산세도 험악하다. 버스를 타고 갔는데도 그만큼 지 쳤으니, 그런 길을 달려 왕복을 했다면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잘은 모르겠지 만 편도 2백 50킬로미터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년 이 편도를 달리는 레이 스도 개최되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나는 그 레이스에 참가할 만큼 건강 하지 못하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내가 출전한 마라톤 대회의 정식 명칭은 '국제 아테네 마 라톤'이라고 한다. 이 레이스는 그리고로스 라브라스키라는 유명한 육상 선수를 기념하여 개최되는 국제 경기이다. 이 라브라스키씨는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국회의원이 되어, 평화주의자로 당시의 군사 정권에 저항, 1963년에는 평화를 위 한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달리는 도중에 체포되어, 폭행을 당하고는, 이 튿날 테살로티케에서 살해당했다. 대회의 팸플렛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인 용되어 있다. "평화를 위한 삶은 아름답다. 평화를 위한 죽음은 고위하다." 현재의 일본인은 이런 대사를 절대로 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 다는 것 자체가 평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튼 이 런 대사는 절대로 말 못한다. 나조차도 그렇다. 그렇게 훌륭한 명분 하에 개최되는 대회이다. 평화와 마라톤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사람은 장거 리를 뛰고 있으면 제법 평화로운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뛰 고 나면, 그 이상은 뭐 아무래도 좋아, 좌우지간 끝까지 열심히 달리면 그만이 지, 싶은 멍한 기분이 든다. 자신의 육체에 존경심을 품을 수 있게 된다면, 타인 의 육체에 대해서도 역시 경외심을 품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평화란 아마도 그런 원칙 위에 성립할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42킬로미터를 뛴 것은 바로 이 코스였다. 벌써 6년 전 일인데, 그때는 거꾸로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 나 혼자서 달렸다. 교통이 혼 잡해지기 전에 아테네를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아침 다섯 시에 아테네를 떠 나, 한여름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더위 속을 죽고 싶은 심정으로 마라톤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6년, 이번에는 가을 햇살 아래에서 거꾸로 마라톤에서 아테 네까지 달린다. 아테네에서 마라톤에 비하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는 오르막길 이 많다. 스타트 지점에서 일본인 단체 참가자들을 만났다. 저 멀고 먼 일본에서 아테 네 마라톤까지, 단체로 오는 정도니, 일본도 상당히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과연 멀기는 먼 모양인지, 아니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인지, 단체라 해도 고작해 야 일곱 명뿐이다. 여성이 두 명, 칠십대 정도의 고령자가 네 명, 젊은 남자가 한 명. 엊그제 그리스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차로 아직 힘들지 않습니까?"라고 내가 고령자들에게 물어 보니 그들은 "우린, 종종 외국에서 달리고 있으니 시차 같은 것 아무 상관 안 해요." "자고 싶으면 자고, 자고 싶지 않으면 깨어 있으니."라고 한다. 정말 건강하고 밝 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앞으로 한 사십 년 정도는 달릴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막상 달리는 동안에는 한 명도 일본인을 만나지 못했다. 내 주위로는 온통 유럽 사람들투성이였다. 나는 장기간 외국 여행을 하여도 고독이란 것을 별로 느끼지 않는데, 이때만큼은 그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아아, 나는 지금 이방 인이다. 나는 몸이 저리도록 고독했다. 내 주위로는 각양각색의 국기를 단 러너 가 달리고 있었다. 물론 그리스인이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인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한가한 캐나다인도 있다. 그리고 독일인(이 지구상에서 독일인을 볼 수 없 는 곳이 과연 있을까?), 똑같은 유니폼을 차려 입고 즐겁게 달리는 프랑스 인, 유난히 우호적인 북유럽 인, 까다로운 표정을 짓고는 묵묵히 달리고 있는 영국 인, 동양인이라고는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나 혼자뿐이다. 물론 여행을 하다 보면 난생 처음으로 일본 사람을 본다는 마을을 지나치기도 하는데, 그런 곳에 혼자 있다 해도 별다른 고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사방이 온통 외국인인 마라톤 코스를 세 시간 십분이나 달리다 보 면, 때로 가슴이 콱 막혀 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왜 그럴까. 어찌됐건, 완주하여 아테네의 올림픽 스타디움에 골인. 타임은 예전이나 다름 없이 별로 신통치 않고(세 시간 사십 몇 분), 달리는 도중에 젖꼭지가 셔츠에 쓸 려 피가 나왔지만(창피하기도 하지만 제법 아프다), 뭐 아무튼 열심히 잘 뛰었 어, 라고 자신에게 말한 후 캔 맥주를 따서 축배를 든다. 일본에서 가지고 온 나 이키 에어도 분투해 주었다. 이 아테네 마라톤은 그다지 대대적이 아닌 가정적인 대회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가해 보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코스가 코스이고, 골인 지점 이 올림픽 스타디움이란 점도 본격적으로 기쁜 일이다. 단, 일본에서 출전하면 오는 길이 너무 멀어, 몸의 컨디션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 과, 그리스의 기름기 많은 음식물 탓에 레이스 전에 탄수화물 섭취 법으로 고생 을 해야 하는 것이 난점이다. 그리고 아테네 시내로 들어서면 공기가 지독하게 나쁘다는 점도. 자 이제 마라톤도 끝났고, 남은 일은 항공권을 환불하는 것인데, 예상했던 이 상으로 난항이다. 어느 나라든 다 그렇지만, 한 번 지불한 돈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GNTO(그리스 정부 관광국)의 스태프가 열심히 거들어 주 었고, 나도 거의 오기로 두 주일이나 시간을 허비해 가며 간신히 여행 대리점으 로부터 돈을 돌려 받았다. 그리곤 아내와 또 축배를 들었다. GNTO라는 곳은 내 가 아는 한 세계에서 가장 친절한 기관이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일을 신속하게 처리해 준다. 만약 그리스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무조건 GNTO로 달려갈 일이다. 만약 이탈리아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깨끗하게 단념하는 것이 현 명하다. 이탈리아에서는, 한 번 내 손을 떠나간 돈은 이 백년이 지나도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설령 오백 년이 지난다 해도 이탈리아의 기관은 효율적으로 기능 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두 가지 일을 다 처리하고서, 우리는 가을의 북그리스를 느긋한 기분으로 여행한다. 비 내리는 카발라 태살로니케에서 버스를 타고 세 시간 달리면 카발라에 닿는다. 연륜이 쌓이고 쌓인 버스가 이영차 하고 마지막 산등성이를 넘으면, 거기에 바다와 항구와 카 발라 마을이 보인다. 카발라는 정확하게는 카바알라라고 발음한다. 사바아이 산 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항구 마을로, 그리스에 있는 이런 유의 항구 마을이 대부 분 그러하듯, 항구의 입구를 이루는 야트막한 언덕에는 오래되어 낡은 비잔틴 시대의 성이 솟아 있다. 성벽의 포 안에서 녹이 슨 대포가 항구 입구로 포문을 향하고 있다. 망루 가장 높은 곳에는 흰색과 바다 색의 그리스 국기가 바람을 받아 펄럭이고 있다. 항구에는 화물선이 몇 척 정박해 있고, 어선이 하얀 물 꼬 리를 늘어뜨리고 외양으로 나가려 하고 있다. 나는 고베에서 자란 탓에, 지형이 이런 장소에 오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 다. 항구가 있고, 그것을 빙 둘러싸듯 다운타운이 형성되어 있고, 그리고 바로 뒤로는 산비탈이 시작되는, 집들은 항구를 내려다보듯 산 저 위까지 들어서 있 다-그런 장소다. 바다와 산 사이의 거리는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다. 카발라는 네오폴리스라는 이름으로 고대로부터 항만 도시로 번성했다. 카발라 에서 북서쪽으로 십오 킬로미터 정도 지점에 과거에 존재한 빌립보라는 고대 도 시(알랙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보 2세가 이 도시를 만들었다)의 현관 노릇을 한 셈이다. 또한 카발라는 성 바울이 처음으로 유럽에서 기독교를 포교한 장소 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성 바울이 트로이의 마을에 있을 때, 한 마케도니아 남자가 꿈에 나타나, 그를 위하여 기도를 한 후, 이렇게 말했다. "마케도니아로 이사를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요."라고. 성 바울은 눈을 뜨자 바 로 짐을 정리하여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트레블러즈 체크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농담), 두 제자를 데리고는 배를 타고, 우선 사모트 라키 섬에 들렀다가, 카발라에 상륙하였다. 그렇게 하여 기독교가 유럽에 전파된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와 유럽의 접점이라는 지역적인 유리함 때문에, 카발라 마을은 역사적으로는 마치 현관 매트 같은 취급을 당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당하고, 더불어 노르만 인에게는 온 시가지가 불타 버리는 수난을 당하는 등, 그 다음은 비잔틴 제국에 편입되었고, 터키와 기독교 군 사이 의 전쟁에서는 최전선이 되었는가 하면, 결국은 터키에 정복당했다. 그리하여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간신히 독립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길고도 터프한 역사 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한 시월 십팔일은 카발라에 있어서는 중요한 축일이었다. 1919년 이날 마을이 터키로부터 해방을 맞은 것이다. 그리스의 마을은 이처럼 마을 하나 하나가 독자적인 독립 기념일을 갖고 있 다. 그리스 군은 피가 피를 부르는 격렬한 전투 끝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례차 례 마을을 터키 군 속에서 탈환하였기 때문이다. 이날, 사람들은 아침부터 반듯 하게 정장을 하고 교회에 가서 예수님에게 기도를 드리고 해방과 독립을 감사하 는 것이다. 그리고 화려한 퍼레이드도 있다. 우리가 저녁녘 극장에 들어가[크라임 오브 더 하트]를 보고 있으려니, 극장 앞으로 브라스 밴드가 용맹한 행진곡을 연주하면서 천천히 지나갔다. 덕분에 한동안 대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내가 숙박한 호텔 근처에 망치와 낫 그림이 새겨진 깃발을 내건 공산당 본부 가 있는데, 그 일층에 조그만 카페가 있었다. 나는 늘 거기에 가서 이침을 먹었 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쌌기 때문이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 오백 엔이 들지만, 그곳에서 먹으면 백 엔이면 충분하다. 막 구워낸 티로 피타(치즈 파이)와 달착지근한 그리스퐁 커피가 백 엔인 것이다. 그리고 아침 여 섯 시부터 문이 열려 있다. 아버지 어머니와 삼십대 전후의 자식, 그렇게 세 명 이서 그 카페를 경영하고 있다. 손님은 어부들과 공산당 당원들(인상 착의가 그 렇다는 것이지 확인해 본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포크너를 읽으면서-그런데 포 크너의 소설은 부르주아적인가 비부르주아 적인가?-아침을 먹는다. 가끔 손님끼 리 싸움을 한다. 어부 대 어부, 아니면 공산 당원 대 공산 당원, 아니면 어부 대 공산 당원... who knows? 아무튼 나는 이 카페에서 싼 아침 식사를 한다. 그리고 카발라는 무슨 이유에선지 빵이 맛있는 마을이다. 다른 마을과는 빵의 종류도 꽤 다르다. 공산당 카페를 나서면 나는 비잔티 시대의 구시가지인 언덕 길을 산책한다. 언덕길 여기저기에 빵집이 있다. 창문에서 들여다보니, 빵 굽는 아저씨가 아침 빵을 굽고 있는 참이다. 향긋한 빵 냄새가 난다. 안으로 들어가 자, 초등 학생인 아이가 쪼르르 나와, 조금만 있으면 새 빵이 다 구워지니 잠깐 만 기다려 주세요, 라고 한다. 아빠 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땀을 흘리며 빵을 굽 고 있고, 할아버지와 그 아이가 빵을 파는 것이다. 아이는 책가방을 입구에 놓아 두고 학교에 갈 시간이 될 때까지 가게 일을 거든다(늘 감탄스러워하는 일인데, 그리스의 아이들은 정말 일을 잘한다. 이탈리아의 아이들은 일본의 아이들과 마 찬가지로 전혀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 중에서 다소나마 영어를 할 줄 아 는 유일한 인물이라, 그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굿 모닝, 왓 캔 아이 헬프 유?"라며 사뭇 신난다는 듯 나에게 말을 건다. 나는 할아버지가 정성스레 종이에 싸 준 따끈따끈한 빵을 오물거리며 언덕길 을 걸어 성까지 올라가서는, 아무도 없는 성벽 위에 서서 바다와 마을을 바라다 본다. 그러고는 시끌벅적한 어시장을 거쳐 호텔로 돌아온다. 나흘간 우리는 이 항구 마을에 체재했다. 이 마을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다. 나흘간, 우리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있다가, 극장에 가 서 영화를 보고([미래 세기 브라질]도 여기에서 보았다. 재미있었다), 산책을 하 고, 호텔 베란다에서 바다를 구경하고, 어시장을 힐끗거리고, 시장 근처에 있는 프사리 타베루나(어패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또 산책을 하였다. 비가 내 리면 근처 마켓에서 포도주와 파파 드롭스 크래커를 잔뜩 사들여 놓고, 방에 틀 어박혀 책을 읽었다. 때로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날, 타베루나의 테라스에서 비를 바라보며 생선 요리를 먹고 있으면, 아아 멀리까지 왔구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소리가 잠잠 히 숨을 죽이고, 너무 차가워진 백포도주 병은 땀을 흘리고, 어부들은 노란 색 비옷을 입고 모두 일렬로 나란히 앉아, 마구 엉킨 선명한 색상의 어망을 풀고 있다. 검정개가 장례식 때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 같은 꼴로 어디론가 종종 걸음 으로 달려가고 있다. 웨이터는 따분하다는 듯 신문에 눈길을 떨구고 있다. 야위 고, 마술사처럼 묘한 모양으로 수염을 기른 웨이터이다. 나는 그릴에서 구워 낸 아지를 먹으며 두 테이블 건너에 앉아 있는, 나일론 잠바를 입은 아저씨의 모습 을 스케치하고 있다. 그는 아주 무료하다는 표정으로 포도주를 반리틀 마시고, 오징어를 먹고, 빵을 입에 쑤셔 넣는다. 고양이 한 마리가 그런 모습을 빤히 올 려다보고 있다. 나는 그 아저씨를 별다른 의미도 없이 스케치하고 있다. 비 내리 는 오후에는 정말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불쾌한 기분은 아니다. 앞에는 항구가 있다. 뒤에는 산이 있다. 호텔 방으로 돌아가면, 포도주와 파파 드롭스 크래커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일도 없는 것이다. 마라톤을 무사히 완주했고, 항공권은 환 불하였다. 소설도 이미 다 썼고 다음 소설을 쓰기까지는 아직 약간의 여유가 있 다. 카발라에서 페리 보트를 타고 그리스에서 페리 보트를 타면 종종 군인을 만난다.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페리 보트에 타고 있는지는 모른다. 임지를 향하여 이 동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혹은 휴가를 받아 고향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들은 언제나 세 명에서 여섯 명 정도의 그룹 단위로 이동한다. 하지만 아무튼 배에 타고 있는 그들은 무척 즐거워 보인다. 마치 친구들끼리 하룻밤 자고 오는 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들처럼 그들은 떠들어대고, 약간은 흥 분해 있기까지 하다. 젊은 군인들이다. 젊다기보다는, 거의 소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어떤 군인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지만, 그 탓에 오히려 앳돼 보이기도 한다. 군인이나 경찰들이 아이처럼 보이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들은 정말 소년 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것이라도 입히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할 수 없이 군인 옷을 만들 어 그들에게 준 것 같은, 아주 소박하고, 까끌까끌한 낡은 모포 같은 카키색 군 복을 입고, 그 무게가 몹시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검정 군화를 신고 있다. 모자는 착착 접어 어깨 견장에 끼고, 군본과 같은 색의 더플 백을 메고 있다. 가슴께 주 머니에는 담뱃갑이 꽂혀 있다. 그러나 참으로 안됐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들에게 는 그 군복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몸과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 명이서 페리 보트의 갑판 난간에 기대어, 카발라 항을 바라보고 있 다. 항구에는 저녁 어둠이 밀려오고 있다. 어선이 배 꼬리에 유어 등을 켜기 시 작한다. 페리 보트는 이제 몇 분만 있으면 출항할 것이다. 한 군인은 키가 아주 작고, 한 군인은 키가 아주 크고, 나머지 한 군인은 그 중간 정도고 오동통하다. 그런 세 사람이 서 있으니, 그들은 전혀는 아니지만, 군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균형이 안 잡혀 뒤죽박죽인 느낌이고, 무방비이다. 중간키의 군인이 가슴 주머 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서 한 개비 입에 물고는, 나머지 두명에게도 권한다. 그리 고 각자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저녁 어둠 속에서 어렌지색 세 개의 불꽃이 제각 기 도형을 그린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마냥 줄거운 듯 한없이 대화하고 있 다. 아하하하 하고 소리 높여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손을 휘두 르기도 하고, 상대방의 배에 가벼운 펀치를 먹이기도 한다. 말보로 답뱃갑이 비 자, 이번에는 작은 키가 캐멀 담배를 꺼낸다. 그러곤 모두 함께 캐멀을 피운다. 바람은 없다. 담배 연기는 조용히 하늘로 올라가, 천천히 윤곽을 잃으며 사라져 간다. 그러다 이윽고 선내 방송이 울린다. 검문이 있으므로 모두들 각자의 선실로 돌아가 달라는 방송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간신히 갑판에서 물러간다. 그들 세 명은 웃으며, 또 가벼운 펀치를 먹이기도 하며, 이등 선실 안으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보지 못했다. 세상에는 어째서 이렇게 많은 군인이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얼마 전에,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에서 작은 분쟁이 생겨, 그리스 군인 한 명과 터키 군인 두 명이 죽었다. 나는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었다. 사소한 이유로 인 한 발포 사건이었다. 누군가가 경계선 이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둥, 무슨 말 을 하며 신경을 건드렸다는 둥, 그런 정도의 일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총을 쏘 았고, 상대방은 그에 응시하였다. 자동 소총의 탄환이 핑핑 오갔다. 그리고 세 명의 군인이 죽었다. 그리스측은 터키측이 먼저 총을 쏘았다고 주장하고, 터키측 은 그리스측이 먼저 총을 쏘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쪽 국민이나 자 국의 발표를 신용하고 있다. 신문에는 죽은 그리스 군인의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터키 신문에는 터 키 군인의 사진이 실렸을 것이다. 당연히). 열여덞이나 열 아홉 살 정도의 핸섬 한 젊은이였다. 사진 속의 그는 군복을 입고 싱긋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이 내게 페리 보트를 타면 흔히 보는 젊은 군인들을 환기시켰다. 그들은 대체 무슨 이유 로, 무엇을 위하여 죽은 것일까? 죽는 것은 늘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식 으로 죽어 가는 것이다. 나는 이미 젊지 않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여러 마을을 여행하였다. 다양한 사 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갖가지 즐거운 경험도 하였고, 갖가지 불쾌한 일도 당했 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생각한다. 설사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해도, 사람과 사람 이 서로를 죽이는 것은 역시 바보스러운 일이라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중년의 그리스 인이 나를 향하여, 저거, 텔레비전을 좀 봐요, 일본이에요, 라고 한다. 일등 선실 로비의 텔레비전 뉴스가 도쿄 가부토 마치의 증권 거래소 광경을 방영하고 있다. 굳은 표정의 사람들이 뭐라고 소리 치고 있다. 손을 들고 있다. 팔 소매를 걷어붙이고, 전화통에다 대고 뭐라 고함 을 치고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money예요, money."라고 그리스 인이 불완전한 영어로 말한다. 그러고는 돈을 세는 흉내를 낸다. 아무래도 주식이 폭락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자세한 상황은 그의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내게 설명할 수가 없다(*나 중에 알게 된 일인데, 그것이 예의 블랙 먼데이였다. 나는 이때 일을 떠올릴 적 마다, 스콧 프츠제럴드를 생각한다. 스콧 프츠제럴드는 튀니지를 여행하며 1929 년의 대폭락을 알았다. '마치 먼 천둥소리처럼'이라고 그는 묘사하고 있다. 물론 블랙 먼데이는 규모로 봐서는 1929년에 치할 바가 못 되었지만, 그 당시의 뭐랄 까, 불안정한 공기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마침 그때 전쟁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주식의 폭락과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사람들의 긴장된 얼굴이, 나에게는 한층 어둡고 불길하게 여겨졌던 것이리라). 뉴스는 일본 수상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로 바뀐다. 바로 나카소네 수상 이 퇴진하고, 후계자 선정 문제로 정국이 관례적으로 복잡하게 혼란을 일으켰던 시기이다. 이윽고 다케시타 노보루의 얼굴이 화면에 등장한다. 아마도 다케시타 노보루가 수상으로 선정된 모양이다. 나는 다케시타 노보루라는 사람을 잘 모른 다. 하지만 다케시타 노보루라는 사람이 화면을 통하여 내게 안겨다 준 인상은 한마디로 펴현할 수 있다. 이런 때, 영어에는 실로 간편한 단어가 있다. unimpressive. 뉴스가 저녁 식사 대신에 군용 나이프로 배를 깎아 먹고, 파파 드롭스 크래커 를 오물거리고, 물통에 담겨 있는 브랜디를 몇 모금 마신다. 그러고는 다시 포크 너를 읽기 시작한다. 배가 조용히 흔들린다. 텔레비전에서 자동 소총 소리가 들 린다. 미국 소년들이 고향 마을을 침공한 쿠바 군사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 고 있는 것이다. 나는 책을 덮고, 방으로 돌아가 잠든다. 이른 아침잠에서 깨어났을 때, 배는 이미 레스보스 섬의 미칠리니 항구에 들 어와 있었다. 레스보스 레스보스 섬은 예의 '레스비언'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는 섬이다. 옛날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레스보스 섬 은, 그런 유래로부터 상상하는 만큼 흥미로운 섬은 아니다. 특별히 다른 점도 없 는 그저 평범한 섬이다. 면적으로 하자면, 그리스에서 세 번째로 넓은 섬이다. 터키와 근접해 있는 까닭에, 국경 수역을 경비하는 해군이나 연안 경비대의 배 가 온 바다에 깔려 있다. 타타타, 하는 엔진 소리를 울리며 경비정이 조용한 항 구로 들어온다. 배의 갑판에는 기관포가 둔중한 빛을 발하고 있다 하얀 세일러 복을 입은 수병이 항구 주변의 카페니온에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다. 파도가 가 을의 밝은 햇살을 반짝반짝 반사하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특별하게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시즌이 끝난 시기에 관광객이 이 섬에서 시간을 죽이기는 지난한 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정말 아무 것도 재미있는 일이 없다. 섬의 도처에 아름다운 해변이 있지만, 시월도 막바지가 되 어서 아름다운 해변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노인들은 항구의 카페에 앉아, 하루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노인이 아니니까, 그렇게 질 긴 인내심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택시를 타고, 교외에 있는 미술관을 보러 가기로 한다. 가이드북에, 제법 볼거 리가 있는 미술관을 보러 가기로 한다. 가이드북에, 제법 볼거리가 있는 미술관 이 교외에 있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별 보잘 것 없는 시골 미술관이 겠지 싶은 생각은 하였지만, 달리 할 일도 없고, 가끔은 여유 있는 기분으로 그 림을 보는 것도 좋은 일이리라. 날씨는 더 말할 나위 없이 화창하고, 조금 먼 곳 까지 나가보는것도 나쁘지는 않다. 택시 운전사는 우리를 아무것도 없는 숲 한가운데에다 내려놓는다. "저 말이 죠, 미술관(무시오)이라구요.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은". 여기가 무시오다, 라고 운전사는 말한다. 그러고 보니 숲 안쪽으로 돌로 만든 조그만 오두막 같은 건물 이 보인다. 저거, 라고 그는 말한다. 오두막 앞에 할아버지가 한 분 의자에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다. 우리는 좌우지간 그 할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 본다. 여기가 무시오입니까? 라고 물어 본다. 그렇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고는 입장권을 판다. 한 명당 오 십 엔. 물론 손님은 우리뿐이다. 그는 우리에게 영어로 된 팜플렛을 준다. 이 미 술관에는 세오필로스라는 화가의 그림이 수집되어 있다. 세오필로스는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나, 독특한 터치로 그리스의 풍경을 그렸다, 고 팸플릿에 설명되어 있다. 단순한 선과 밝은 색채, 일종의 이노센트 아트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 면 포크 아트. 세오필로스는 그림을 그리며, 온 생애를 통해 그리스 각지를 방랑하였다. 좀 남다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차림을 하고 방랑하기를 무 엇보다 즐겼다. 돈에도 명예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방랑하는 인생을 사랑하였 다.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여도, 이이들이 돌을 던져도, 그는 거의 개의치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말년에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얼 마 안 있어 죽었다. 그런 타입의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그림을 본 첫 순간부터 그의 그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은, 그런 그림이다. 오두막 안에는 전부 백 점에 가까운 그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조그만 오두막이라, 온 벽이 그의 그림으로 꽉차 있다. 공백이니 여백이니 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야말로 겹칠 듯 이 그림이 결려 있다. 과장스런 구석이 전혀 없어, 마음 느긋하게 그림에 공감할 수 있다. 숲 속은 잠잠한 고요다. 때로 새소리가 들려 온다. 고급스런 유리를 부 드러운 헝겊으로 닦고 있는 듯한 매끈한 소리를 내는 작은 새이다. 장식기가 없 는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한 장 또 한 장 순서대로 그림을 본다. 관람객은 우리뿐이고, 시간은 남아돌아 간다. 이따 금 관리인 할아버지가 들여다보러 온다. 경계를 위한 살핌이 아니고, 잠시 무얼 하고 있나 하고 궁금증을 푸러 오는 것이다. 마음에 들었는가, 하는 식으로. 참 멋지군요, 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자못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그리스 어로 말을 하므로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해도 열심히 설명을 한다. 그러곤 다시 햇볕을 쪼이러 간다. 축제 그림. 신나는 그림이다. 가로로 긴 그림. 그림 속에는 전부 열한 명이 있 다. 우선 왼쪽 끝에 시장 부처가 자리하고 있다. 수염을 기르고, 허리에 칼을 찬 남성다운 시장과, 어딘가 모르게 조심성이 많아 보이는 부인. 남편의 어깨에 손 을 얹고, 곁눈으로 그를 힐끗 보고 있다. 실제로 그림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만, 세오필로스의 그림은 기술적으로는 치졸하다. 하지만 그림에 그려져 있는 사 람들의 시선은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점이 그의 그림에 불가사의 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맛있는 음식이 즐비한 테이블을 사이로 하고, 여섯 명의 남녀가 춤추고 있다. 아가씨 세 명과 젊은이 세 명. 어찌된 셈인지 모두들 그다지 흥겨운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어째 기념 사진이라도 찍을 때처럼, 얼마 간 긴장하고 있다. 그 점이 아무래도 미스터리어스하다. 축제고, 맛있는 음식도 잔뜩 있고, 젊은 남녀가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으니 좀더 신나는 표정을 지 어도 좋을텐데 말이다. 그 뒤에서 두 명의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한 사 람은 피리를, 또 한 사람은 양의 장으로 만든 것인 듯한 백파이프 같은 악기를. 그들은 우리는 프로, 라는 표정으로 연주에 신경을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 막으로 소년이 한 명, 꼬치를 찌른 양을 불 위에다 굽고 있다. 이 소년의 얼굴에 는 어딘가 모르게 충족감 같은 것(어떤 종류의 충족감일까? 양을 솜씨 좋게 굽 는 일에 대한, 혹은 축제에 참가하고 있다는 일에 대한)이 엿보인다. 그런 그림 이다. 대단한 그림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무언가 진정한, 실생활 같은 생활 의 내음과 숨결이 느껴진다. 이런 사람들이 과거에 실제로 존재하였고, 노래하 고, 마시고, 사랑을 하고, 괴로워하고, 싸우고, 그리하여 죽어 갔다는 실감이 짜릿 짜릿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미칠리니의 교외, 돌로 만든 조그만 오두막에서 그의 그림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미술관이 잠잠한 숲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쿄의 미술관에서 같은 그림을 보았다면, 나는 이 그림들에 대해 훨씬 더 다른 감흥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세오필로스의 그림은 실로 그 장 소의 그 공기와 그 고요함에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기분 좋은 멋진 오후였다. 세오필로스 미술관 옆에는, 피카소와 마티스와 레제 와 브랑크의 소품을 모아 놓은 이 또한 조그만 이층 짜리 미술관이 있어, 우리 는 거기에서도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 미술관에도 관람객은 우리밖에 없었다. 이 미술관은 개인 미술관이다. 설립한 사람은 레스보스 출신으로, 1920년대에 파 리에 진출하여 그래픽 출판사를 경영, 성공하였다. 그리고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후에는 고향 레스보스로 돌아와, 자신이 모은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는 모 양이다. 당시의 화가들과 친교를 맺어, 그들의 작품을 모은 것이다. 아주 취향이 고급스런 컬렉션이다. 대작은 없지만, 반짝 빛나는 훌륭한 소품이 많다. 이 미술 관에는 망을 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입구 안쪽에 있는 방에 여인이 한 명 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생긋 웃으며 나와, 티켓 을 판다. 그러고는 다시 안쪽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만다. 밖으로 나와 언덕을 조금 걸어 올라가 제일 처음 눈에 띈 카페니온에 들어가 차가운 맥주를 주문한다. 눈 저 속까지 아파질 만큼 차가운 맥주이다. 조용한 오 후. 따스한 햇살. "레스보스 섬은 그리스의 섬 중에서 가장 갠 날이 많은 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라고 관광 팸플릿에 쓰여 있다. 항구로 들어오는 해양 경비정 의 모습이 보인다. 파랑과 하양의 그리스 깃발이 바람에 흔들린다. 마치 인생의 양지바른 쪽 같은 하루. 누군가 우리를 그림으로 그려 주지 않으려나, 하고 생각한다. 고향에서 멀리멀 리 떨어져 있는 서른여덟 살의 작가와 그의 아내. 테이블 위에는 맥주. 그저 그 런 인생. 그리고 때로는 오후의 양지바른 쪽. 페트라(레스보스 섬) 1987년 10월 미칠리니에서 페트라까지 가서 하룻밤을 잔 것은 순전히 일시적인 기분에서였 지, 딱히 무슨 필연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밖에 이렇다 하게 할 일이 없으 니, 뭐 적당히 다른 곳을 한 번 기웃거려 볼까 하는 단순히 그런 이유뿐이었다. 미칠리니라는 마을은 그렇게 볼거리가 많은 동네가 아니다. 미술관도 구경했다. 항구도 이제는 싫증이 나도록 보았다. 섬의 유일한 극장에서는 리타 헤이워스와 글렌 포드의 [기르다]라는 오래된 영화를 상영하고 있으나, 이 영화는 작년 아테 네의 극장에서 본 작품이다. 따라서 미칠리니에서 하룻밤을 더 잔다 해도 아무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페트라에 간 것이다. 아무 할 일이 없다, 는 한심한 상황은 우리처럼 비수기 여행자에게는 숙명적 으로 따라 다니는 요건이다. 가을이나 겨울의 그리스는 무척 아름답고 멋진 장 소다. 여행자는 극단적으로 적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물가는 싸다. 호텔은 텅 비 어 있고, 어디를 가도 조용하다. 그러나 할 일이 없다. 여름이라면 할 일이 실로 많다.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고, 여자 구경을 할 수도 있고, 일광욕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그리크 샐러드를 먹으며 흥청거리는 동안, 그야말로 한 달 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여유가 없다. 여름의 그리스는 시끌시끌하고, 복잡하고, 아무래도 여행지답다. 그 대신에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하지 않아도 된다. 비수기의 여행자들은 지혜를 짜내어 연구해야만 한다. 요다음 갈 장소, 요다음에 할 일을. 지도를 보고, 가이드북을 읽고, 이 페트라라는 곳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데, 라고 얘기가 돌아간다. "거기에 가면 뭐가 있어요?" "글세", 하지만 여기 있 어봐야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미칠리니에서 페트라까지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밖에 다니지 않는 데다, 편도 두 시간이나 걸린다. 특별히 재미있는 길도 아니다. 그건 그렇고 페트라라고 하는 해변 마을에 뭐가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다. 해변 마을이니까 물론 바다는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 시월의 해변에 가 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밖에는 성 처녀 교회라는 것이 마을이 내려다보이 는 바위산 위에 있다. 이 교회는 상당히 정취가 있는 교회이기는 하지만, 딱히 그것을 보고 이러니저러니할 만한 건물도 못 된다. 아아, 교회가 바위산 위에 있 구나, 제법 정취가 있군. 하는 데서 끝나 버린다. 그 외에 꼭 봐야 할 아무것도 없다. 좁다란 마을 거리가 있고, 그 곁으로는 하 염없는 밭이다. 그저 그것뿐인 마을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저 그것뿐인 것은 아니다. 이 마을은 농업 부인회의 활동 이 활발하기로 유명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눈앞에 농업 부인회의 사무소가 있다. 그녀들은 몇 년 전에 농가 여성의 경제적인 자립을 목적으로 모임을 발족 시켜, 모두 함께 집을 제공하여 민박을 운영하기도 하고, 자연 식품을 만들기도 하고, 조그만 타베루나를 경영하기도 하여, 착착 발판을 굳혀 나가고 있는 것이 다. 이런 일은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의 그리스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다. 레스보 스 섬의 페미니즘 운동이, 꽤 흥미롭지 않은가. 버스에서 내리니 매점 아저씨가 우리에게로 성큼 다가온다. "구텐모르겐."이라 고 그는 말한다. 반듯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정중한 아저씨이다. 이런 사람은 대 개 독일 말을 한다. "당신은, 묵을 집을 구하고 있습니까?"라고 그가 묻는다. 하 지만 우리는 농업 부인회를 통해 묵을 방을 구하기로 애당초 결정한 터라, 아저 씨는 아쉽다는 듯 사라진다. 저 아저씨는 틀림없이 농업 부인회 덕분에 피해를 보고 있을 테지, 하고 은밀하게 동정을 한다. 우리는 농업 부인회 사무소를 찾았다. 이십대 중반 정도의 젊은 부인 둘이, 의 자에 앉아 있다.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친절해 보이는 여성들이다. "헬로."라고 한 여성이 말한다. 그녀는 그런대로 알아 들을 만한 영어로 말한 다. "오늘 밤 묵을 방을 찾고 있는데요."라고 내가 말한다. 그녀는 방긋 웃는다. "네에, 염려 없어요, 좋은 방이 있죠, 거기에 앉아서 잠깐 기다리세요. 금방 데리러 올 사람이 올 테니까요." 우리는 의자에 앉아, [레스보스 섬의 역사]라는 사진 집과 [세오필로스 화집]을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기며 구경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책은-즉 레스보스 섬 의 역사는-전쟁 사진으로 꾸며져 있다. 우선 터키 점령 시대의 사진. 모두들 터 키풍의 옷을 입고 있고, 터키 군인은 폼을 잡고 위세 등등하게 서 있다. 어떤 해 에는, 터키 군이 반란을 일으킨 민간인을 압살한다. 대포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 는 낙관적인 표정의 영웅들. 팽팽하게 위쪽으로 치솟은 수염과, 19세기, 민족주 의적 윤리의 광휘가 그들을 감싸고 있다. 패하여 후퇴하는 터키 군. 독립. 만세. 축제. 평화. 민족의 존엄. 폭력. 그리고 또 전쟁. 발칸 전쟁. 제1차 세계대전. 또다시 발칸 전쟁. 진흙탕 속에서 썩어 가는 무수한 사자들. 지쳐 너덜거리는 전쟁터의 깃발. 허망한 승리. 왕과 군인과 정치가와 혁명. 진흙탕 속에서 썩어 가는 민중들. 총을 제거하는 젊은 병 사. 병사를 배웅하는 여인네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 나치의 가혹한 탄압. 용감 한 레지스탕스. 공산 게릴라. 터프한 전쟁. 승리. 한없는 환회. 축제(그런 사진은 몹시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영국의 개입이 시작된다. 북그리스는 공산주 의자들이 주도하는 레지스탕스가 많으므로, 그들은 처칠에게 반항한다. 어째 에 이젠슈타인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사진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전차에 깃발을 꽂고, 모두들 한결같이 앞으로 몸을 당당하게 내밀고 있다. 아주 적극적이고, 낙 관적이다. 무언가를 확실하게 믿고 있다. 어떤 사진을 보아도, 사진 속의 인물들 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나쁘지 않다. '처칠은 물러가라'라고 쓰인 깃발을 그들은 들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결국은 처칠의 힘에 굴복했다는 것을. 복잡한 내전 시대로 돌입하는 참에, 한 여자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를 데 리러 온다. 열 살이나 그쯤 되었을 조그만 여자아이다. 딱히 예쁜 것은 아니지 만, 오동통하고, 야무지게 생겼다. 그리고 애교도 있다. 어째 나보다 야무진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 정도이다. "안녕하세요. 페트라에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어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그녀가 말한다. 아주 정확한 영어로 말한다. 농업 부인의 보물 이다. "좋은 곳이로군. 조용하고."라고 나는 말한다. "네, 좋은 곳이죠. 정말."이라고 그녀가 말한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 요?" "일본."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어머, 정말 먼데서 오셨군요. 그리스는 어떠세요?" "상당히 마음에 들어요."라고 나는 예의 바르게 대답한다. "그것 다행이로군요. 우리는, 외국 분들이 우리 나라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기 를 바라고 있어요." "고맙군요. 덕분에 아주 즐겁게 여행하고 있어요." 열 살짜리 여자아이와 얘기하고 있다는 기분이 안 든다. "자 그럼, 우리 집으로 안내하겠어요."라고 그녀는 말하고 자전거에 올라탄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걸어간다. 앞쪽에서 양이 다가온다. "어머, 양이로군요."라고 그녀가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양을 지나친다. 그녀의 집은 마을 거리를 벗어나, 한참을 간 곳 에 있다. 십오분 정도는 걷는다. 수많은 양과 염소와 소와 당나귀와 개가 스쳐 지나간다. 인간보다는 동물이 훨씬 많은 땅이다. 그녀는 우리들 앞을 으싸으싸 자전거를 저어 간다. 그러곤 이따금 우리를 돌아보면서, 생긋 웃는다. 너무 많이 걷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란 식으로. 두 명의 군인과 스친다. 당나귀를 탄 농부와 스친다. 키 작은 여자아이 둘과 스친다. 그녀들은 신기하다는 듯 우리를 빤히 본다. 우리가 생긋 미소를 지어 보 이자, 그녀들도 생긋 웃음으로 답한다. 간신히 우리는 그녀의 집에 도착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사방으로는 끄으으으읕없이 밭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양이며 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올 뿐. 여자 아이가 방긋 웃으며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그녀 대신 앞치마를 두른 모습의 어머니가 나온다. 얼굴 생김이 어딘가 모르게 구슬픈, 그러나 다부진 그리스인 부인. "잘 오셨어요."라고 그녀도 영어로 인사를 한다. 그다지 유창하지는 않지만, 그 렇다고 서툴지도 않다. 우리는 방 값을 확인하고, 내일 아침 식사를 부탁한다. 방 값이 1천 8백 엔, 아침 식사는 2인분에 5백 엔. 방은 나쁘지 않다. 그리스의 민박으로서는 상위급에 속한다. 포근한 침대, 온수가 좍좍 나오는 샤워. 방에 놓 여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모두 새것이다. 그리고서 우리는 다시 마을로 돌아가 해변에 있는 타베루나에 들어간다. 일요 일 오후라 그런지, 타베루나는 마을 사람들로 가득하다. 파리가 웽웽 날아다니는 그리 청결한 타베루나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분위는 따뜻하다. 거의 대부분의 손 님이 이 동네 사람인데, 배척하는 느낌은 전혀 없다. 눈이 마주치면 모두 싱긋 웃어 준다. 바람이 불어오면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이 "클리요(춥군요)."라 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꽤 큼직한 가다랭이를 반으로 갈라 그릴에 구워 서는 향초를 뿌린 생선 요리와, 샐러드와 콩 요리와 소고기 스튜와 포도주와 빵 을 주문한다. 생선은 올리브 오일을 뿌리지 말고 구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 생선 올리브 오일을 뿌리지 말고 구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 생선 요 리가 아주 맛있다. 전부 1천3백 엔. 상당히 행복한 기분을 만끽한다. 카페에는 세 명 정도 독일인 관광객이 있어, 제법 싸늘한 바람에 머리칼을 날 리며 어스름한 해를 향하고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그런 것을 일광욕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독일인은 여러 가지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 한 가지는 무엇이든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이게 먹는 능력이고, 또 한 가지는 그 어떤 계절에도 일광욕을 할 수 있다는 능력이다. 우리는 비수기의 기특한 여 행자 동지로서 그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다. 불가사의하게도, 그들은 전혀 심심 해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하고, 우조 공장을 기웃거려 보고, 바위산 위에 있는 교회로 올라가 미사를 구경하고, 그림 엽서를 몇 장 사 고,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바다로 떨어지는 저녁 해를 바라본다. 마치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납작하게 밀어 넓혀 나가듯, 우리는 여러 가지 동작, 작업을 가능한 한 길게 늘여, 시간을 그럭저럭 보낸다. 어이휴, 겨우 해가 졌다. 겨우 하루가 끝났다. 해가 저물자 동시에 사람들은 동물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별이 선명하게 하늘에 점을 찍듯 반짝이기 시작한다. 소가 어딘가에서 서글프게 운다. 그리고 우리도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간다. 나는 물통에 담긴 브랜드를 마시며, 포크너의 [분노의 포도]를 읽는다. 그 소설이 비수기의 그리스에서 읽기에 적합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밖에 읽을 책이 없는 것이다. 아침, 딸랑딸랑하는 양의 목에 걸린 방울 소리에 눈을 뜬다. 부인이 미칠리니 행 버스 시간에 맞춰 아침 식사를 지어 준다. 베란다 테이블에서 우리는 아침을 먹는다. 빵과 파운드 케이크(북유럽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아침 식사에 대개 파 운드 케이크가 나온다)와, 삶은 달걀과 커피. 달걀은 막 닭장에서 가져온 것이라, 실로 신선하다. 고양이 두 마리가 밥을 달라고 다가온다. 식사가 끝나자 부인이 우리에게로 와서, 대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오래도록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었어요."라고 그녀가 말한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 내내 오 스트레일리아에서 일을 했죠. 그리고 그 돈으로 이 집을 개축하여, 민박을 경영 할 수 있도록 채비를 했어요. 그리고 그리스로 돌아왔죠. 온 가족이 모두 함께. 아이들한테는 그리스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고. 그런데 큰아들이 어제 오스 트레일리아로 가고 말았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죠. 일이 필요해요. 어 제 가버렸어요." 아하, 그래서 어제는 그렇게 수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군, 하고 나는 납득한 다. "일본 사람이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본사람을 많이 봤어요. 영민한 사람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구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는 밭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저 너머로 오스트레일리아가 보이지나 않을까, 란 식으로. "또 와 주세 요."라고 그녀가 말한다. "여기는 아주 조용하고 좋은 곳이에요. 이 다음 번에는 천천히 지내다 가세요." 그러겠노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번에는 여름에 오고 싶군요. "아이는 없나요?"라고 그녀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묻는다. 없다, 고 우리는 대답한다. 그녀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는, 싱긋 웃는다. "하지만 아직 젊은 걸요, 뭘."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방 값을 치른다. 돈을 받아 들며 그녀는 몹시 부끄러운 표정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 아직 손님을 상대로 하는 이런 장사에 익숙해 지지 않은 것일까. 나는 우리를 안내해 준 여자 아이에게 기념으로 주라고 일본 에서 가지고 온 동전을 준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손바닥에 놓인 그 동전을 지그시 본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우리는 말했다. 그리고 그 잔잔한 웅 덩이 같은 슬픔 속에 그녀를 혼자 남겨 두고 길을 떠났다. 이게 페트라 마을에서 생긴 일의 전부이다. 로마의 겨울 텔레비전, 뇨키, 프레돌 로마에서 텔레비전을 산다. 텔레비전 같은 것 하나도 사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샀다. 텔레비전이 없으면 현실적으로 상당히 불편하다는 것을 점점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우 선 날씨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일단은 가구가 붙어 있는 집인데, 그 가구 안에 텔레비전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도쿄에 살고 있을 때에는, 신문도 구독 하지 않았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았지만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 로 마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정보가 넘치는 일본에서는 정보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정도가 알맞지만(그래도 정보는 어김없이 침투해 온다), 로마에서 그같은 일을 했다간 정말 깨끗하게 아무 정보도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우 리는 완전한 이국인이고, 정보가 들어오지 않으면, 어쩐지 발가벗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일본과 이탈리아는 세상 돌아가는 방식 이 상당히 달라서, 적당히 무언가를 예측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건 이 러니까, 뭐 이렇게 되겠지, 하고 짐작을 하여도, 짐작 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정보 수집에 적극성을 띠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일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선 올 가을 로마는 허파가 뒤집힐 정도로 날씨가 불순하여, 일주일 꼬박 좍 좍 드센 비가 내렸는가 하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우박이 내렸다. 비가 너무 와 서 케베레 강물이 넘쳤을 정도이다. 뜰에 심은 스파게티용 바지리코가 봄에도 그랬던 것처럼 완벽하게 전멸하고 말았다. 시장을 보러 갈 수조차 없다. 이런 계 절에는 일기예보를 듣지 않으면 불편을 면할 수가 없다. 일본에 있을 때는, 필요 하면 전화로 일기 예보를 들을 수 있었으므로, 텔레비전이 없어도 아무 불편 없 이 살 수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그렇게 살 수 없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뉴스. 이것도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스트라이크 정보 를 정확하게 파악해 두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는 정말 심심하 면 스트라이크가 일어난다. 버스니 기차니 비행기니 하는 것들이 종종 운휴하는 가 하면 쓰레기도 전혀 수거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전면 운행을 중지하지 않 더라도 운행 간격을 늘린다든지, 이런저런 일들이 툭하면 일어난다(얼마 전에는 외무성까지 스트라이크를 하였다). 그것도 일본처럼 버스 정거장에 "오늘은 스트 라이크를 하는..."이라 쓰인 종이 쪽지라도 붙어 있으면 "으음, 또 스트라이크야." 하고 알기라도 하겠지만, 그런 친절이 이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뭇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그러면서도 어김없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고 있으니 애를 먹는다. 한 번은 스트라이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오지도 않을 버스 를 정처없이 삼십분 이상이나 기다린 적이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오늘 스트라 이크예요."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기다렸을 것이다. 그 일로 넌덜 머리가 나서, 에익 텔레비전을 꼭 사야겠군, 하고 결심을 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비싼 새 텔레비전을 사는 것은 바보스런 일이니, 먼저 근처 에 있는 중고 전기 제품 가게에 가 본다. 일본의 양판점 같은 곳이면 조그만 텔 레비전을 2만 엔쯤에 살 수 있으니 대충 그러려니 하고 갔더니, 예상외로 무척 비쌌다. 유난스레 커다랗고 고색 창연한 제품이 3만 엔이나 한다. 화상도 몇 겹 으로 겹쳐 보인다. 일본이라면 틀림없이 폐품처리당할 엉터리 물건이다. 나는 옛 날에, 이것보다 훨씬 더 선명한 텔레비전을 고쿠분지 역 근처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 온 일이 있다. 할 수 없어 제일 싼 흑백 신품을 사기로 한다. 뉴스와 일기 예보만 들으면 되니까 색은 있으나마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텔레비전을 사들인 직후부터 스트라이크가 갑자기 활발해져, 텔레비전 뉴스는 연일 스트라이크 보도만 해대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텔레비 전을 산 보람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탈리아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유쾌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일기예보다. 일기예보만큼은 몇 번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이탈리아에 갈 기회가 있는 분은 반드시 일기예보를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우선 가장 재미있 는 점은, 일기예보를 하는 사람의 제스처가 굉장하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기예보 아나운서는 RAI 1채널의 아저씨로 이 사람의 제스처는 무척 설득력이 있다. 날씨가 좋으면 입이 찢어져라 벙긋벙긋 웃으며 신나 하는 표정인데 비가 오거나 춥거나 하면 마치 자신의 실책으로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식의 어두운 얼굴로 아나운서를 한다. 목소리도 착 가라앉아 있다. 이 가을 꼬박 일주 일 동안 비가 내렸을 때는 목이라도 매달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심각하게 낙 담하고 있었다. 한 손을 천장을 향하여 들고, 눈을 감고 고개를 지으며 "여러분, 이 비구름은 말입니다..."하고 예보를 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 봐야 겨 우 날씨 가지고 뭘, 이라고 태평하게 있을 수 없을 듯한 기분이 든다. 아무튼 팔 을 좍 벌리기도 하고, 어깨를 으쓱하기도 하고, 공중에다 손을 휘휘 돌리기도 하 고,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짝 하고 손뼉을 치기도 하고, 양손을 꼭 맞잡기도 하고(이 포즈는 거의 수화에 가깝다), 화면 가득 날뛰는 이 사람의 제스처 일기 예보를 나 같은 사람이 보고 있으면 포복절도할 지경인데, 이탈리아 사람에게 물어 보니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냐, 보통 아니냐?" 라고 하니 이런 경우는 좀 무섭다. 또 한 사람 드라이한 금발의 머리칼을 옆으로 경이적일 만큼 풍성하게 부풀린 (흔히 소녀 만화에 나오는 그 머리 스타일이다) 일기예보 미인 언니가 있는데, 이 사람도 꽤 재미있다. 이 사람은 제스처는 거의 쓰지 않고, 텔레비전 카메라를 향해 방긋 웃은 채 앉아 있는데, 그 대신 머리 스타일 탓에 기상도가 완전히 가 려져, 시청자에게는 상당한 폐를 끼치고 있다. 하지만 뭐 미인이기도 하고, 본인 도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일기예보를 전하고 있으니, 아무러면 어때 뭐 상관없 지, 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뉴스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가령 대화재가 일어나 현장을 카메라가 비추고 있다고 하자. 소방대원들이 모두 진화 작업에 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소방대원 들이 포즈를 취하고 카메라 쪽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몇 명 싱긋 웃 고 있는 사람까지 있다. 처음에 나는 이런 장면을 보고 틀림없이 방송국 측에 무슨 실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느 화재 현장에서나, 아무리 긴급한 장소에서나 카메라가 있으면 모두들 대개는 그 쪽을 본다. 그리고 그 중 몇 명은 반사적으로 싱긋 웃고 마는 모양이다. 이런 일이 일본에서 있었다면, 가 당찮은 일이 벌어질텐데, 하고 생각한다. 소방대원이 화재 진압 현장에서 물을 뿌리며 싱글거리고 있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기라도 했다간, 계고 처분 은 맡아 놓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뉴스의 리포터 아나운서가 유별나게 화려하 다. 빨간 와이셔츠에 노란 넥타이를 매고, 파란 테 안경을 끼고(흑백 텔레비전이 니 물론 색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머 리를 바싹 깎아 올린 고깔콘 리포터가 어떤 아저씨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고는 "저, 미국의 스트라이크에 대해서 한 말씀, 네, 아저씨."하는 식으로 리포트를 하 고 있다. 나는 여러 나라에서 텔레비전을 보았지만, 이탈리아 텔레비전이 가장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탈리아 텔레비전에서 내가 빼놓기 아깝게 생각하는 것은 '시계 비추 기'이다. 이건 요컨대 시간이 남았을 경우에, 그저 움직이는 시계의 바늘을 마냥 비쳐 주는 것이다. 기술도 아무것도 필요 없다. 길때는 이 '시계 비추기'가 오분 정도 계속된다. 초침이 다섯 번 시계 판을 돈다. 분침이 삼십도 이동한다. 나도 한가한 참이라 팔짱을 끼고 바늘을 지이이이이그시 보고 있는다. 초침이 소리없 이 때를 새긴다. 소리는 전혀 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뭣하고 있는 거야, 하고 어 처구니없어 했지만, 이게 의외로 재미있어지는 것이다. 이 시계 바늘이 비치면 신기하게도 안심이 된다. 가끔 비치지 않거나 하면 쓸쓸해지기조차 한다. 한참을 보고 있으면 제행무상이란 정취까지 느껴진다. 일본의 텔레비전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일대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이탈이아 텔레비전에는 RAI 1에서 RAI 3까지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이 셋 있 다. 국영이라지만 물론 어김없이 CM을 내보낸다. 왜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이 셋 이나 있는가 하면, 각 방송국에 정당색이 있기 때문이다. 세세한 것은 잘 모르겠 지만, RAI 1은 보수당파, RAI 2는 사회당파, RAI 3은 그 밖의 정당계인 듯하다. 따라서 방송국에 따라 뉴스의 내용도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와는 관계없이, 외국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RAI 1에 나오는 여자들이 가장 화려하여 눈요기 감으로 즐길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유난히 커다랗고 번쩍번쩍 빛나 금방 헐레이션을 일으키는 거추장스런 귀고리를 달고 있거나, 모피 원피스를 입 고 있거나, 보석투성이인 안경을 발렌티노 케이스에서 일부러 꺼내거나, 하여 그 런 세밀한 부분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질력이 나지 않는다. 어떤 기준으로 그 녀들이 선정되었는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그녀들을 내세움으로 해서 방송 국에 어떤 메리트가 생기는지도 의문이다. 그녀들은 딱히 미인인 것도 아니고, 특별히 젊은것도 아니다. 그러나 화려하다는 점에서는,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화 려하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향수 냄새가 풍풍 풍길 정도로 그녀들은 화려하다. 일본으로 하자면, 미나토 구의 어떤 맨션에나 한 사람쯤은 반드시 있는 '아마도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정체 불명의 부인'같은 분위기이다. 그래서, 그녀들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무얼 하는가 하면, 실질적으로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다만 번쩍번쩍 빛나는 차림으로 움직이는 인형처럼 카메라를 향해, 생긋 미소를 짓고는 "다음 프로그램은... 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구 태여 구실을 붙이자면 '알림 캐스터'란 정도이다. 이런 여자들이 매일 의상과 장 신구를 바꿔 가며 잇달아 화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아아 신기하고 재미있다. 맛있는 뇨키가 먹고 싶어져, 기차를 타고 멀리 북쪽 나라 볼로냐까지 간다. 나 는 불로냐라는 도시가 어쩐지 좋아, 딱히 이렇다 할 일이 없는데도, 훌쩍 거기에 가서는 사나흘 느긋하게 지내고 오는 일이 있다. 이 마을에는 관광 명소라는 것 이 거의 없어, 관광객도 별로 오지 않는다. 마을의 규모도 아담하고, 어슬렁어슬 렁 산책을 하기에도 좋다. 북 페어라든가 그런 행사가 없는 한, 호텔도 비어 있 다. 대개는 피렌체에 내려서 하룻밤을 묵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볼로냐까지 간다. 피렌체에서 볼로냐에 가려면 상당히 험준한 산을 넘게 된다. 피렌체-볼로냐 간 고속도로는 커브와 터널이 마구잡이로 널려 있으므로,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 이라면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피렌체 팬이 많은 모양 인데, 나는 정직하게 말해서 피렌체가 그렇게 매력 있는 도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 깊은 아름다운 도시이기는 하지만, 호텔은 비싸고, 미술관은 늘 복 잡하고, 레스토랑도 세평만큼은 맛있는 것 같지 않다. 특별히 무슨 언짢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하게 좋은 인상을 받은 적도 없다. 레스 토랑만 해도 나쓰지는 않지만,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없다. 적어도 피렌체 시내에 는 없다. 그런 사연으로 피렌체에서는 일찌감치 퇴장하고, 볼로냐로 간다. 볼로냐에서는 쇼핑을 곧잘 했다. 로마에 비하면 격차가 날 만큼 물건 사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점원들의 친절함이 전혀 다르고, 가게도 그렇게 붐비지 않는 다. 천천히 물건을 고를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어서 아무 것도 사지 않고 그냥 나가도, 짜증스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로마에서 그런 일을 하면, 점 원의 그 험상궂은 얼굴에 등을 떠밀리지 않으면 안 된다. 피렌체는 로마만큼 비 인간적이지는 않지만, 역시 관광객을 상대하느라 닳고닳은 구석이 있다. 밀라노 에는 과연 가게는 많지만, 너무 비싸서, 살 엄두는 못 내고 보고 다니는 것만으 로도 지치고 만다. 나로서는 구두니 양복을 사는 정도의 일로, 그렇게 파김치가 되도록 지치고 싶지 않다. 인생에는 좀더 소중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좁혀 나가다 보면 볼로냐는 아주 '정상적인' 이탈리아의 도시이다. 음식도 맛있다. 그것도 별 유명하지도 않은 보통 요리가 맛있는 것이다. 볼로 냐에는 내 단골 레스토랑이 제법 많다. 모두 가이드 북이나 미술란에는 실리지 않는 레스토랑이다. 전부 우연히 뛰어 들어갔다가 그 맛을 발견한 곳이다. 싸고, 맛있고, 몇 번을 가도, 맛에 변함이 없다. 일류 레스토랑과는 달리, 주방장이 스 카우트 당하여 다른 레스토랑으로 적을 옮기는, 그래서 하룻밤 사이에 맛이 변 하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안쪽 주방에서 부부 싸움을 하면서 조몰락조몰락 요리를 만드는 그런 조그만 레스토랑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몇 번을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이다. 나는 특히 이 속에 오면 종종 뇨키를 먹는다. 뇨키가 볼로냐의 명물 요리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추운 계절에 안개 깊은 볼로 냐의 거리에서 따끈따끈한 뇨키를 하아하아 입으로 불어 가며 먹는 감촉이란, 다른 그 어떤 요리와도 좀 바꾸기가 어렵다. 뇨키란 신기한 음식으로, 이만큼 간 단한 요리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요리인 만큼, 신기하게도 정성을 들인 정도가 맛에 배어 나오는 것이다. 먹을 것 하나만 예로 들어도, 좋은 도시입니 다. 이 볼로냐에서 저녁나절 불현듯 마음이 동해 대학 근처에 있는 극장에 들어가 [시칠리안(이르 시칠리아노)]을 보았다. 영화는 그저 그렇고, 관람객의 숫자도 그 저 그런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극장에서 나와 밤안개 속을 이 골목 저 골목 어 슬렁거리고 있으려니 어쩐지 초라하고, 그러나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을 성싶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입구에는 '오늘, 리 코니츠 출연'이라고 쓰여 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곳에 또 리 코니츠가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일층은 아주 평범한 서민적인 레스토랑이고, 그 지하가 재즈 클럽인 듯싶었다. 나는 리 코니츠의 라이브 콘서트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터라 꼭 듣고 싶었지만, 입구에서 점원에게 물어 보니 당일권은 다 팔렸다는 것이다. 볼로냐는 학생 도 시라서(분위기가 교토와 비슷하다), 재즈 팬이 제법 많은 것이다. 유감스럽다. 12월 26일, 일요일. 조르주 프레돌이 지휘하는 성 체칠리아 오케스트라를 들으 러 로마로 간다. 연주 곡목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6번이다. 끔찍하다고 할까, 상당한 프로그램이지만, 연말이기도 하니 베토벤을 일괄하여 들어보는 것도 괜 찮겠다 싶은 생각에 전날 바티칸 앞에 있는 성 체칠리아 홀까지 티켓을 사러 갔 다. 관람료는 5천 5백 엔, 3천 9백 엔, 2천 2백 엔 등인데, 유감스럽게도 제일 비 싼 티켓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것도 전열의 가장 구석 자리이다. 그래서 아내와 둘이서 꽤나 망설였는데, 연말이니까 뭐 할 수 없지, 하고 티켓을 산다. 왜인지 는 잘 모르겠지만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생활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검소해진다. 도쿄에 있을 때는 만 엔짜리 티켓도 냉큼 사고 마는데. 우선 6번[전원], 이 곡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일요일은 평소보다 개연 시간 이 빨라, 저녁 다섯시 반에 연주가 시작되므로, 성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단원도 점심 식사의 여운이 남아 있는지(농담이 아니고 그런 일이 정말 있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프레돌의 지휘가 단원에게 기민하게 전달되지 않는 답답함이 사방 에 먼지처럼 떠다닌다. 휴식 시간에 단원들은 늦게 먹은 점심을 소화시키고, 포도주의 취기를 내몰고, 나는 자리에 앉아 폴 보르즈의 [SHEL TERING SKY]를 읽는다. 그러고는 모로 코에 가고 싶은 걸, 하고 생각한다. 그 다음 5번, 이 곡은 6번과는 달리 정말 멋있었다. 나는 이 5번 교향곡은 옛 날부터 꽤 음침한 음악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프레돌의 지휘로 들으니, 이렇게 자유롭고 시원스럽고, 기품 있는 음악이었나 하고, 새삼스레 감동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까다롭고 딱딱하고, 드라마틱하고 정념적인 베토벤이 아니고, 부드럽고 나이브하고, 고상한 슬픔이 배어 있기까지 한 신선한 베토벤이다. 하지만 프레돌은 결코 지금까지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고질적인 [5번]상을 깨뜨리고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니고(예를 들면 지난번 역시 로 마에서 들은 틸슨 토모스의 베토벤처럼), 다만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어떤 내재적 인 음악을 자연스런 형태로 성실하게 밖으로 표출한 것뿐이다. 그렇다는 것이 듣고 있으면 실로 알알이 전해져 온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5 번]이라는 틀-이랄까, 제도-을 넘어선,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음악을 탄생시키 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프레돌의 지휘가 또 상당히 재미있다. 때로 몸의 움 직임을 전부 정지하고, 오케스트라를 지그시 쳐다보고, 목에서 ㅇ 부분만을 사용 하여 지휘를 한다. 눈을 움직이기도 하고, 눈썹을 치켜올리기도 하고, 고개를 흔 들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동작만으로 청중에게 이 모션이 전해지니 참 대단한 일이다. 오랜만에 수긍이 가고 감동할 수 있었던 훌륭한 콘서트였다. 로마의 연말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를 맞기 전 로마의 거리 모습은 일본의 연말과 흡사하다. 아니, 너 무 흡사하여, 겁이 날 정도로 흡사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과는 달리 거리 에 징글 벨의 멜로디는 흐르지 않지만(음악은 고맙게도 일절 내보내지 않는다), 사람이 바글거린다든가, 가게란 가게는 온통 북새통이라든가, 자동차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든지, 뭔가 모르게 흥분한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라든가, 상점가의 장 식이라든가, 산타 클로스로 변장을 하고 호객 행위를 하는 점원의 모습이라든가,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금색 리본이라든가, 그런 화려하고 복잡한 점은 거의 똑같 다. 세밑 선물 같은 것도 물론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절반은 새해 선물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처럼 친한 친구라든가, 가족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 이 아니라, 주 거래처라든가, 회사의 상사, 신세를 진 사람, 그런 사람에게 보내 는 의리 선물이라는 것도 있다. 백화점에 들어가면 과자라든가 여러 가지 식품 을 섞어 꾸민 선물용 상자가 가격별로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 "저기 에 있는 오천 엔짜리."하고 적당한 것을 고르는 셈이다. 상자 속의 내용보다는 가격으로 정하는 점도 일본의 세밑 선물과 비슷하다. 뜻하지 않는 점에서 일본 과 사뭇 요란스럽게 포장되어 있다. 가격은 오천 엔에서 삼만 엔 정도이다. 사람 들은 그런 상자를 몇 개나 사 들고 자동차 뒷자리에 빼곡하게 밀어 넣고는 집으 로 돌아간다. 나도 지금 살고 있는 연립 주택의 수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포 도주를 주었다. 수위가 네 명이나 있어, 전부 포도주가 네 병 필요하다. 나 같은 경우는, 일시적으로 체재하는 외국인이고 하니 특별히 비싼 물건을 줄 필요까지 는 없다. 문제는 마음이다. 오백 엔짜리 포도주를 근처 식품점에서 사니 "선물용 으로 포장을 할까요?"라고 묻는다. 그렇게 해 달라고 하자, 한 병 한 병 예쁜 포 장지로 싸고 리본을 달아 준다. 싸구려 포도주라고 해서 차별은 하지 않는다. 세 밑 가게에는 보통 선물 포장 담당 특별 아르바이트 아가씨가 있어 손님이 산 물 건을 차례차례 포장을 하여 리본을 달아 준다. 복잡하기도 하고, 이 사람들은 일본인처럼 손재주가 훌륭하지 않아 포장을 하 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린다. 그러나 이런 때는 이럴 수밖에 없다고 단념하고, 얌전히 기다리는게 상책이다. 요런 정도의 선물을 하여 효과가 있는가 하면, 그야 물론 있다. 그후 일주일쯤 은 우리에게 무척 상냥하게 대한다. 이런 즉효성이 있다는 점도 이탈리아 인의 귀여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바뀌자 원래대로 싹 돌아가고 말았지만. 우리가 올 크리스마스에 타인에게 준 의리 선물은 이것뿐이었으므로, 이렇다 하게 수고를 한 것도 없지만, 보통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일만으로도 무척 지치는 모양이다. 일본의 연말 풍경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거지, 거리의 악사, 동냥아치, 이 런 유의 사람들이 거리에 득실거린다는 점이다. 하기야 일본에 비하면 이런 종 류의 사람이 애당초 많은 편이지만, 연말이 되면 아무튼 경이적으로 불어난다.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누군가가 접시를 들고 대기하고 있다, 는 표현이 전혀 과 장이 아닐 정도이다. 유럽 사람들은 일본에 오면 거리에 서 있는 자동 판매기의 숫자가 많음에 놀라는 모양인데, 그런 유럽에는 그와 비슷할 정도로 거리에 거 지가 서 있다. 종류로 하자면 가장 많은 부류가, 일가를 거느리고 있는 엄마 동냥아치이다. 이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길바닥에 앉아 있다. 그러고는 앞에다 접시를 놓고 길 가는 사람의 무릎께에 손을 내밀어, "시뇨라, 시뇨레, 이 아이가 우유를 못 먹어 배고파하고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신세입니다."는 유 의 대사를 읊는다. 얼굴 생김새를 보면 대개는 집시 같다. 그리고 과연 아이들은 모두 배고파하는 표정이다. 신기한 것은, 어떤 모자나 대충 비슷한 얼굴 생김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의 연령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이외의 점에 있어서는 어떤 유의 전형적인 모자를 만들어 그것을 잔뜩 복사하여 온 거리에 흩뿌려 놓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 집시 모자에게는 여러 가지로 수수께끼가 많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삼 년 전에 본 모자를 같은 길모퉁이에서 보았는데, 그 삼 년동안 아이들이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뭐 그건 단순히 잘못 본 것이고 그녀는 다른 아이를 데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진짜 모자는 아니고, 조직적으로 '렌틀 아이'를 돌아가며 데리고 다니는 예가 많은 듯하다. '듯하다'고 느낄 뿐, 진상은 잘 알 수 없다. 어린아이가 없는(혹은 조달할 수 없는) 아줌마가 아주 드물게 있어, 이런 사람 들은 텅 빈 우유 병을 사람들의 코앞에다 들이밀고는 "우유값, 없어"라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친다. 고함친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 혁명 시대 의 파리 같은 풍경이다. 그 다음으로 많은 종류가, 신체가 부자유한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 그리고 이런저런 부분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그 없는 부분을 사람들에게 강조하 여 드러내 보이고 있다. 부재의 존재감. 오래 관찰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부재하 는 부분이 많은 사람이, 역시 그에 비례하여 받는 돈도 많은 것처럼 보인다. 세 상은 의외로 공정하게 돌아가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탄복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는, 정말 몸이 불편한 것이 아니고, 돈 때문에 연기로 불편함을 가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비아 콩드티 거리에, 팔과 다리가 뒤틀리 고, 고개도 비뚤어져, 언제나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비렁뱅이 소년이 있어, 나 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 소년이 돈을 세면서, 빠른 걸음으로 잽싸게 걸어가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게 연기였다고 하면, 기꺼이 돈을 던지고 싶을 정도의 완벽한 연기였 다. 그리고 손풍금을 울리며 다니는 유가 있다. 때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소 리를 내는 손풍금도 있다. 포도에 종교화를 그리고 돈을 받는 사람. 며칠이나 걸 려 색 분필로 종교화를 그린다. 밤에는 행인이 밟고 다니지 않도록 비닐 커버를 씌워 둔다. 닐 영의[하트 오브 골드]를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발의 청년(이 청 년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워 나는 백 엔을 주었다). 백파이프 같은 것을 파오파 오 불면서 동냥을 하고 다니는 산에서 내려온 양치기. 원숭이 몰이꾼(돌리지 않 는다. 그저 데리고만 다닌다). "배가 고픕니다."라고 이탈리아 말로 쓰인 팻말을 들고 길에 앉아 있는 지친 얼굴의 외국인. 아무 말 없이 그냥 맨손을 슬며시 내 미는 재주 없는 "아무거나 줘요."남자. 그런 별별 사람들이 온 동네에 수두룩하 다. 하지만 이건 불가사의하다면 상당히 불가사의한 이야기다. 어째서 크리스마스 때만 이렇듯 비약적으로 거지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인지, 이런 파트 타임 거지 는 보통 때는 무슨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수수께끼를 불러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정말 여느 때는 무슨 일을 하며 지내는 것일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게 많은 거지가, 모두들 돈을 제대로 동냥하고 있는 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길 법한데, 보고 있으면 제법 많은 사람들이 멈춰 서 서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접시에 담아 주는 것 같다. 유럽 사람들은 아마도 종 교적인 이유에서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런 사소한 보시를 잘한다. 특히 크리스 마스 때는 감정적으로 그런 경향이 강해지는지, 그런 경향을 간파하고 거지의 숫자도 늘어난다. 아니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거지의 증가가 세상의 자선적 상황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수요와 공급이 꽤 고도의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대충 차림새가 번듯한 부인네는 천 리라(백 엔), 보통 사람들은 오백 리라(오십 엔) 정도를 준다. 나도 시험삼아 조그만 여자아이에게 십오 엔을 줘 봤는데, "고맙다."란 말은 듣지 못했다. 보고 있으면-시간이 남아 돌아가므로 비교적 꼼꼼하게 관찰한다-그들은 어느 정도 돈 이 쌓이면 그 돈을 어딘가에다 재빨리 집어넣는다. 접시에는 늘 오백 엔에서 육 백 엔 정도 남겨두는 것이 동냥질을 하는 요령인 듯하다. 그보다 많으면 길가는 사람이 "제법 돈을 많이 받은 모양이니, 딱히 내가 줄 필요는 없을 듯하군"하고 생각하고, 그보다 적으면 "다들 그냥 지나가는 모양이니 나라고 딱히 줄 이유는 없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세상에는 참 여러 가지 실제적인 철학이 있다. 길에서 그런 일들을 열심히 보고 있으면 배우는 점이 많다. 도쿄의 거리에서 한 참을 그렇게 뭔가를 보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다 보겠군, 이 란 식으로 쳐다보고 가기가 일쑤지만, 이곳 로마에서는 그런 일은 없다. 모두들 길을 가다 멈춰서서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아내가 막스 말러나 폴리니의 쇼 원도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나는 거리를 향하고 열심히 거지의 모습 을 관찰한다. 인간에게는 각기 다른 방향성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튼 그런 사연으로, 길은 복잡복잡하다. 교통 체증도 심하다. 택시를 타도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버스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일단 밖으로 나가면 돌아올 때는 삶아 놓은 시금치처럼 지쳐 있다. 그런 점은 일본과 똑같다. 집주인인 런 부인은, 로마의 그 혼잡함에 진저리를 친다. 그녀는 영국인이라, 그런 시끄럽고 복잡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크리스마스에는 절대 로 밖에 안 나가요, 라고 그녀가 말한다. 정말이에요, 미스터 무라카미, 그건 누 가 뭐라 하든 카오스의 소용돌이 속이니까요. 그녀는 일본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고 할까, 정확하게 말해, 좌우지간 비로 마적인 것이라면 무엇에든 호감을 품고 있다. 우리를 만나자 그녀는 아무래도 같은 북방 국민으로서의 연대감을 느낀 듯, 언제나 언제나 깊은 한숨을 쉬면서, 이 disorganized country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렇지만 그녀의 남편은 나 폴리 출신이니, 그녀가 이탈리아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좀 이치에 어 긋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폴리 출신과 결혼한 주제에 이 세상 이 혼란스럽다고 한탄하는 것은, 곰과 결혼하고서는 털이 많다고 불평하는 것이 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린 부인은 세상의 부정적인 부분을 전부 stupidity라는 표현으로 처 리한다. 집안 설비 어딘가에 고장이 나서 내가 수리해 달라고 부탁하러 가면, 그 녀는 늘 슬픈 듯한 얼굴을 하고는, 이탈리아 제품의 stupidity에 관해 불평을 한 다. 수리공의 stupidity에 대해서 화를 낸다. 이 사람에게 평을 하라 하면 피아트 는 stupidity car이고, 우체국은 stupidity office이며(이 점은 실로 동감이다), 길 걷는 개는 stupidity dog이라 할 것이다. 하나 영국인은 아무래도 좀 유별난 인 종인 듯싶다. 폰테 미르비오 시장 오늘은 12월 22일이니까, 슬슬 시장을 보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25일과 26일 은 크리스마스 휴일로 모든 가게들이 죄다 문을 닫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년 연 휴와 마찬가지다. 지금 그 기간의 식품을 사들이지 않으면 아사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보통 때는 근처 슈퍼마켓에서 시장을 다 보지만, 지금처럼 일괄하여 생선 및 식료품을 사들이고 싶을 때는, 대개 미르비오 다리(폰테 미르비오)에 있 는 노천 시장으로 간다. 미르비오 다리는 황제가 무릎을 끓고 법왕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하는, 테베레 강에 걸려 있는 유명하고 오래된 다리인데, 늘 보다보면 황제이든 법왕이든 그런 것은 상관없어지고 만다. 미르비오 다리에서 무솔리니 시대의 잔영이 남아 있는 플라미니오 다리까지 강을 끼고, 꼭 우에노의 골목 시장 같은 식으로 식료품이나 의류를 파는 가게들 이 죽 늘어서 있다. 채소는 신선하고, 종류도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근처에 사는 아줌마들 무리가 시장 바구니를 끼고 이곳으로 총집결한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인종의 아줌마들이 있다. 모피 옷을 입고 하이 힐을 신은 부자풍 의 부인도 있고, 잡다한 쓰레기 같은 느낌의 아줌마도 있다. 필리핀 인 아줌마도 있고, 아프리카 외교관 부인 같은 분위기의 아줌마도 있다. 일본인 아줌마도 몇 명 본 적이 있다. 시장에 가면 나는 늘 감탄하고 마는데, 세상에는 참으로 여러 타입의 아줌마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시장 근처에는 맛있는 음식 가게들이 많다. 1백50엔(1천5백 리라)을 내면 제법 커다랗고 따끈따끈한 피자를 먹을 수 있는 입식 피자집도 있다. "미레 첸퀘(1천5백)!"하고 소리를 치면, 어김없이 1천5백 리라 어치 피자를 잘라, 오븐 에다 따끈하게 데워 준다. 2백 엔을 내면 꽤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그 옆에는, 항상 노동자니 군인이니 하는 사람들로 복작복작하는 싼 레스토랑이 있다. 웨이 터의 눈초리와 매너가 극단적으로 나쁘고, 가끔 가게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 기는 하짐나, 맛은 나쁘지 않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에는 드문 정통적인 피레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세련된 레스토랑도 있다. 이곳은 조용하고 웨이터도 붙임성이 있고, 난로에서는 파닥파닥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시장 입구에 있는 바르의 서서 마시는 커피도 향기롭고 맛이 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활 기에 찬 시장 근처에는 반드시 맛있는 음식 가게가 즐비하다. 니시키코지도 그 렇고, 지쿠지도 그렇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폰테 미르비오까지 간다. 우선 생선 가게에 들러 연어를 산다. 연어는 수입품이라(물론 지중해에서는 연어가 잡히지 않는다) 절대 싸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상당히 이용가치가 큰 생선이다. 연어 한 마리만 있으면 연 어 생선 초밥을 만들 수도 있고, 소금을 약간 뿌려 구워 먹을 수도 있고, 머리를 사용하여 국을 끓일 수도 있다. 고맙게도 몸통을 사면 머리는 거저 준다. 왜냐하 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연어 머리를 요리에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 맛있는 가슴 지느러미 부분도 버린다. 일 킬로그램에 삼천 엔하고 얼마 정도이다. 손님 이 원하는 만큼 잘라서 판다. 비늘을 떨어내고, 내장을 꺼내고, 머리를 자르고, 그러고는 가로로 토막을 내서 무게를 달아 판다. 우리는 언제나 상반신 쪽을 택 한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상반신만 남아 있는 연어가 늘 많다. 이탈리아 사람들 은 연어의 하반신을 즐겨 먹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천오백 엔 어치 연어를 산 다. 생선 가게의 분위기는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하다. 고무 장화를 신은 편 벽스러운 아버지와, 건강 그 자체인 듯한 느낌의 어머니 두 사람이 꾸려나가고 있다. 배를 가른 뱀장어가 그런데도 꿈틀꿈틀 미끄러져 도망가면, 그것을 어머니 가 쫓아간다. "어어어어어서 오십시오, 시뇨라, 물 좋은 도미가 들어와 있어요." 란 위세등등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무한다. 옆 가게에서 큼지막한 정어리를 일곱 마리, 그리고 오징어를 다섯 마리 산다. 정어리는 아주 싸고 오징어는 약간 비싸다. 전부 해서 천 사백 엔. 그리고 채소. 무 세 개와 무청. 버섯을 이 킬로그램. 토마토, 오이, 감자, 비에 다, 시금치, 콩, 바지리코 등등. 둘이서 양손 가득 장본 물건을 들고는 커피를 서 서 마시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한꺼번에 식료품을 사들 이는 일은 힘은 들어도, 신선한 식품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점에서는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행복이다. 미코노스에서 지낸 저 두 달 동안 형편없었던 식품 리 스트에 비하면, 한겨울인데도 이렇듯 풍요로운 이탈리아는 낙원, 별천지이다. 아 무튼 채소가 모두 파릇파릇 생기에 차 있다. 지금쯤 헬싱키 사람들은 뭘 먹고 있을까?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식료품을 정리하여 저장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한다. 나는 콩 껍질을 까서 삶는다. 아내는 생선칼(이것은 일본에서 지참해 온 것이 다)로 연어를 다듬는다. 아주 질 좋은 살이 나와, 와사비를 푼 간장에 찍어 부엌 에서 선 채로 먹는다. 이런 것을 우물우물 먹다보면 밥이 먹고 싶어진다. 마침 어제 먹다 남은 찬밥이 있어, 이 연어 살에 우메보시를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 그럼 오징어도 한 번 맛을 볼까, 하고 오징어를 회를 쳐서 먹는다. 이 오징어는 실로 야들야들하고 맛이 있었다. 다 삶아진 콩도 반찬 대신에 먹는다. 인스턴트 된장국을 끊여... 이런 식으로 부엌에 선 채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끝낸다. 이렇게 먹는 음식이 때로는 꽤 맛있는 법이다. 쓰는 김에 이날 저녁 밥의 내용을 보면, 연어와 정어리 초밥에 우메보시 김밥, 무청 소금 절이, 콩에 우메보시를 버무린 것, 정어리 구이 등등이었다. 하기야 이런 날은 극히 예외적이고, 보통 때는 파스타를 먹으며 살고 있다. 로마 시장은 먹을 거리가 전부 싱싱하다. 특히 토마토와 시금치와 콩은, 한입 입에 물면 "나는 채소예요."하고 향긋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그 세 가지 채소는 도쿄레 돌아간 후에는 맛이 없어 당분간 안 먹었을 정도다. 도쿄에 있는 이탈리 아 음식집은 요즘 들어 맛이 무척 좋아지기는 했지만, 채소의 신선함만큼은 도 저히 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깊어가는 겨울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27일부터 [댄스 댄스 댄스]라는 장편소설에 착수하 였다. 장편소설을 쓸 때는 늘 같은 패턴이다. "쓰고 싶다"는 어슴푸레한 욕망이 자신 속에서 조금씩 고조되어, 그리하여 어느 날 "자, 그럼 오늘부터 쓸까." 하고 단호하게 생각한다. 내 경우, 세세한 구성이라든가 줄거리보다는, 자신의 기분이 소설에 임할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한계점을 분별하는 일을 소중히 여긴다. [노르웨이의 숲]과는 달리 [댄스 댄스 댄스]의 경우는 쓰기 시작하기 전에 먼 저 타이틀이 정해졌다. 이 제목은 비치 보이스의 곡에서 따왔다고 여겨지고 있 는 모양인데, 진짜 출처는(어느 쪽이든 별 상관없는 일이지만) 더 데르즈라고 하 는 흑인 밴드의 오래된 곡명이다. 일본을 떠나기 전에, 집에 있는 레코드를 다 그러모아 자선 올드 이즈 벗 굿 테이프를 만들었는데, 그 테이프 속에 이 곡이 우연히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자못 고풍스런 리듬 앤드 블루스 타입의 곡이다. 느 릿느릿하고, 까끌하고 거친 감촉의, 그 부분이 불가사의하게 흑인 곡답다. 그 곡을 매일 로마에서 듣는 둥 마는 둥 멍하게 듣고 있는 사이에, 타이틀에 불현듯 유도되어 쓰기 시작했다. 물론 비치 보이스에게도 같은 곡목의 노래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고등학생 시절에 곧잘 들었다), 직접적인 실마리는 이 데르즈의 곡 쪽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리없이 기분 좋게 썼다고 생각한다. [노르웨이 숲]은 나로서는 그때까지 써본 적이 없는 타입의 소설이였고, "이 소설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까."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썼는데, 이 [댄스 댄스 댄스]에 관해서는, 전혀 그런 생각없이,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쑥쑥 마음대로 써나갔다. 이 구석에서 저 구석까지 내 스타일의 문장이고, 등장하는 인물도 [바 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둘러싼 모험]과 공통이다. 그래서 오 래간만에 자신만의 뜰에 돌아온 듯한 기분으로, 아주 즐겁게 써 나갔다. 쓰는 행 위를 그렇듯 순수하게 즐긴 일은, 나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에, 로마의 겨울은 급속하게 깊어갔다. 이 해 로마의 겨울은, 왠지 추운 날이 많았다. 집안도 써늘했다. 집에 설치되어 있는 난방기만으로는 추위를 이길 수가 없어, 석유 난로를 사왔는데, 따뜻해지는 부위는 난로 앞뿐, 방안 전체는 늘 써늘했다. 눅눅한 습기를 가득 품은 기분 나쁜 추위였다. 빨래도 이틀을 말려도 전혀 마르지 않았다. 더구나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콘서트 티켓을 사기 위해 네 시간이나 줄을 선 탓에, 둘 다 몸 상태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몸 의 심지까지 얼어 버린 것이다. 콘서트 티켓을 파는 로마의 방식은, 실로 복잡하 고 괴이하고 또 불합리하다. 폴리니나 번스타인처럼 초일류 연주가의 콘서트정 도 되면, 티켓을 사기 위한 정리권을 발행하고, 그 정리권을 받기 위한 정리권을 또 발행한다. 그것을 입수하기 위해 일일이 줄을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정리권을 나누어주는 사이에 주최자 측도 뭐가 뭔지 모르도록 혼란에 빠진다. 257번이란 정리권을 발행했으면서도, 티켓이 1백10장밖에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일관성도 없거니와, 친절함도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너도나도 새치 기를 해대고는 대충 얼버무리려 한다. 연줄이 있는 사람은 잽싸게 뒷구멍으로 티켓을 손에 넣는다. 유감스럽게도 그날 폴리니는 그런 필사적인 노력에 어울릴 만큼 멋진 연주를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초점이 딱 맞아떨어지기도 전에 전반부가 끝나, 이게 폴리 니아? 하고 의아해 하고 있었더니, 과연 마지막 프로그램인 소나타만큼은 안개 가 걷힌 것처럼 초점이 딱 맞았다. 그건 그런대로 좋았는데, 하지만 폴리니의 원 래 실력으로 하자면 훨씬 훨씬 더 좋은 연주를 들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한 곡 한 곡 들으면서 '이런 게 아닌데, 훨씬 더 잘할 수 있을텐데' 싶은 느낌을 절 실하게 받는데, 그러나 그 감각은 결국 확실한 상을 맺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따 라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욕구 불만이 뒤에 남았다. 어느 해인지는 잊어버렸지만, 옛날 도쿄에서 리히터의 연주를 들은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걷기조차 힘들 정도 로 너덜너덜 지쳐 있었는데, 음악을 듣는 사이 너무 너무 감동해서, 콘서트가 끝 나고 보니 피로고 뭐고 싹 가시고 없었다. 몸이 신품처럼 훨훨 날아갈 것 같았 다. 뭐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라 해도, 그만큼 추운 데서 한없이 기다리다가 간신히 티켓을 사서는, 자 이제 음악이나 들을까, 하고 기대를 한 터에 이 정도 라니 싶은 생각이 든다. 줄을 선 것이 뭐 폴리니 탓은 아니지만. 나는 너무 추워서 오버코트를 입고 책상을 향하고는 타닥타닥 워드프로세서의 키를 두드렸다. 시칠리아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쓸 때는 정반대였다. 그때는 겨 울인데도 너무 따뜻해서, 책상을 향하고 있으면서도 머리 속은 멍했다. 이번에는 너무 추워 키를 잘못 두드리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따뜻한 것보다는 추운 쪽이 머리를 쓰는 작업에는 적합하다. 그러나 이 집에서 보내는 로마의 겨울은 좀 심했다. 밤에는 몸을 데우기 위해서 브랜디를 찔금찔금 마셨다. 그러고는 추위를 이기려 아내와 매일 온천 얘기니 하와이 얘 기를 했다. 일본에 돌아가면 느긋하게 온천에 가서,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온천 물에 몸을 담그고, 그 다음에는 한 달 정도 하와이에 가겠노라고 아내는 선언하 였다. 멋지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렌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좋지만 나는 우선 은 이 소설을 완성해야만 한다. 소설을 일단 쓰기 시작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듯하게 완성시킬 때까지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일본으로 돌아가면 제 페으시를 잃고 만다. 어떻게든 여기에 머물면서, 일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다. [댄스 댄스 댄스]안에 하와이 장면이 나오는 것은 그 탓이다. 나는 소설을 쓰 면서 하와이에 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하와이를 상상하 며 썼다. 어땠더라, 이랬었나, 이런 느낌이었나, 하고 기억을 떠올리며, 떠올리며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식으로 하와이 장면을 쓰다보면 아주 조금은 따뜻 해진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열대의 태양 아래에서 뒹굴며 콜라를 마시고 있 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문장에도 그런 실질적인 효용이 있는 것이다. 뭐, 짧은 한순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일기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달러가 1백23엔 대까지 하락하였다. 우리는 현금 을 거의 달러로 갖고 왔으므로, 정직하게 말해 상당한 쇼크였다. 그리고 저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이 있었다. 이월에는 또 둘이 나란히 심한 감 기에 걸렸다. 기침과 콧물이 몇 주일이고 멈추지 않았고, 머리는 멍해지고, 미열 이 언제까지고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일은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우 리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지독한 겨울이었다. 우리의 약 삼 년간에 걸친 유럽 체재 기간중에서, 이 겨울은 최악이었다. 이 해의 겨울에 생긴 일 중에서 좋은 일이라고는 소설이 완성된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댄스 댄스 댄스]라는 소설을 떠올릴 때마다, 로마의 마로네 씨네 추운 집을 생각한다. 그러고는, 그렇지 그렇지 그 집에서 오버코트를 입고 이 소 설을 썼었지 하고 새삼 생각한다. 고양이 진과 개 마드와 폰테 미르비오의 시장 과 폴리니를 생각해 낸다. 런던 런던에서 체재한 당시에 대해서는 별로 쓸 만한 것이 없다. 거기에 있는 동안 나는 줄곧 소설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되돌이켜 보면 그 한 달은 어쩐 지 불가사의하다. 나는 그 한 달 동안 거의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런던에 간 것은 말하자면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아 내에게 좀 사정이 생겨 런던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잠시 돌아가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내를 배웅하는 길에 가본 것이다. 런던에는 삼월 한 달을 꼬박 있었는 데, 나는 그 동안 거의 아무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줄곧 소설을 써 내려갔다. 장편소설을 쓸 때는 대개가 늘 그런데, 딱히 누구랑 얘기라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지 않았다. 따라서 내게 있어 런던은 어디까지나 고독한 침묵 의 도시이다. 그런 인상이 뼛속까지 스며 있다. 처음 며칠은 호텔에 있다가, 그 다음에는 단기로 빌려주는 공동주택으로 옮겼다. 실은 영국에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런던에 도착하여 가장 놀란 것은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 나는 미 국식 영어에 길들어 있는 인간이라, 처음 한동안은 영국식 영어를 도무지 좇아 갈 수가 없었다. 이게 같은 영어인가 하고 아연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발음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 "파든미(실례)?"라는 말만 연발했다(하기야 이 말을 하면 영국인들은 모두가 "소리?"라고 말했지만). 예를 들어 내가 동네 슈퍼마켓 에서 "로스트 비프를 주십시오."라고 주문을 하면, 고기를 파는 여자가 그 말에 응하여 뭐라고 말을 한다.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인가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지독한 사투리를 쓰는데다가, 말도 빠르다. 아, 이거 참, 싶어 "파든 미?"라고 하면, 그녀는 다시 한 번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해 준다. 그러나 말을 하는 속도는 마찬가지라서, 알아듣지 못하기는 매한가지 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내가 말한다. 그러면 그 이상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 는다. 맙소사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 뿐이다. 그러고는 적당히 고기를 싸준 다. 그런 일이 몇 번인가 있어, 그 슈퍼마켓에서 로스트 비프를 사는 일은 단념 하고 말았다. 그 슈퍼뿐만 아니고, 다른 장소에서도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을 당했 다. 그런 점은 미국과 상당히 다르다. 미국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자기가 표현을 바꾸어 가며 몇 번이나 비슷한 말을 반복해 준다. 이런 사연으로, 뜻밖에도 말 때문에 고생을 하였다. 방은 부동산을 돌아나녀 찾았다. 몇몇 소개받은 방을 돌아다녀 보고, 세 번째 본 방으로 정했다. 첫 번째는 월즈 엔드(세계의 끝)라는 끔찍한 이름이 붙어 있 는 동네의 공공주택이었다(얘기하는 김에 덧붙여 말하면, 내가 번역한 폴 세로의 [월즈 엔드]는 이 동네를 무대로 하고 있다. 재미있는 소설이니 읽어보세요), 이 집은 넓기는 넓었지만, 내부 장식이 좀 가슴 답답하여 사양하기로 했다. 그 다음 은 파딩턴 역 근처에 있는 공동주택, 여기는 방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지하실이 라 분위기가 어둡고, 습기도 차고 서늘하여 통과. 세 번째는 세인트 존스 우드에 있는 스튜디오 타입의 방. 좁고 침대는 접어서 벽에 수납하는 형식이지만, 장소 가 좋고, 밝다. 지하철 역에서도 가깝고, 리젠트 공원도 가깝다. 어차피 홀아비 생활이니까 좁아도 상관없지 뭐, 하고 이곳으로 정한다. 4층 65호실이다. 창 밖 은 예의 아피 로드. 나는 이 방에서 [댄스 댄스 댄스]란 장편소설을 다 완성하였다. 라디오 카세트 로 음악을 듣고, 창 밖으로 아피 로드를 바라보면서, 오늘 또 내일 워드 프로세 서의 키를 두드렸다. 이곳은 아주 난방 설비가 잘 되어 있는 아파트라서, 밖에서 는 아직도 모두들 코트를 입고 다니는데, 방안은 티 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도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 때로 창문을 열고 아피 로드의 상공에다 머리를 내밀 어 식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을 하다가 지치면 근처 책방에서 사온 잭 런던의 [마틴 이든]을 읽었다. 잔혹할 정도로 힘이 있는 책이다. 파워풀한 절망. 미래 지 향적인 자멸. 날씨는 대충 언제나 좋지 않았다. 사흘에 이틀은 흐려 있었고, 툭 하면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렸다. 악한 세계의 도래를 예고하는 듯한 차갑고 마 음이 움츠러드는 비였다. 언제 내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고, 언제 그쳤는지도 모 른다. 아니, 밖을 걷고 있어도 지금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분명히 알 수 없다. 그것이 런던의 비다. 비가 내리지 않는 때를 가늠하여, 매일 리젠트 공원을 한 시간 정도 뛰었다. 그 정도 몸을 움직여 두지 않으면 머리가 어딘가로 가버리고 만다. 머리가 달아 나지 않도록, 몸을 보내는 것이다. 리젠트 공원은 비만 내리지 않으면 멋진 공원 이다. 공원 안에 있는 연못을 따라 난 길을 한 바퀴 돌고, 그리고 공원 주변을 한 바퀴 빙 돈다. 동물원 가까이로 접어들면 동물들 우리에서 풍기는 냄새가 울 컥 밀려온다. 하지만 그런것도 멋지다. 저 울타리 안에 동물들이 잔뜩 있다는 실 감이 든다. 생물이 살아 있는 냄새다. 사자니 임팔라니 낙타니 하는 동물들이, 고향을 멀리 떠나와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동물인지 우는 소리 가 들려 온다. 저녁 나절에 일을 끝내면, 근처 시장에 다녀와서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먹는 다. 나는 런던에서 생활하는 동안 외식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무얼 먹어도 별로 맛있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어딘가에 맛있는 요리를 먹여 주는 레스토랑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오 고 보니 돈을 내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 것이다. 죄송스럽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만들어 먹는 편이 훨씬 맛있다. 식빵은 맛있었다. 요리라 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슈퍼마켓에서 로스트 비프와 빵을 사와서는, 매일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카레를 만들기도 하고, 토마토 소스를 만든 적도 있다. 밤이 오면 기분 전환삼아 영화를 보든가 콘서트에 갔다. 지금은 런던 생활에 서 기억나는 것은 콘서트와 영화 정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외에는 소설을 쓰고 공원을 달렸을 뿐이니까. 이영화는 꽤 많이 보았다. 브루스 로빈슨이라는 비교적 젊은 감독이 만든 [위즈네일과 나]라는 영국 영화는 인상에 뚜렷이 남아 있다. 일본에 공개되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즈네일이라는 뻔뻔스럽기 는 하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생활 파탄자인 청년 예술가와 주인공인 약간은 마 음이 약한 '나'와, 위즈네일의 호모 아저씨가 뒤얽혀 사건을 일으키는 코미디 영 화다. 이 영화는 꽤 재미있었다. 그리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각본을 쓴 라틴 아 메리카 서부극 [A TIME FOR DYING]이란 콜롬비아 영화를 보았다. 거칠거칠 하게 메마른 영화였다. [머메이드의 노래를 들었다]라는 소품 같은 분위기의 영 화도 보았다. 이 영화는 아마 일본에도 공개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딱히 미인 이랄 수도 없는 사전가 지망생 보통 여자가, 근무처의 상사인 아리따운 레스비 언 언니에게 어렴풋한 동경심을 품는 이야기. 그러나 역시 마지막에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 언니가 일본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주었는데, 산 문어가 그대로 꿈틀 꿈틀 테이블에 나오자, 질겁을 하는 여자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렇게 살아 있는 문어는 아무리 일본 사람이라도 안 먹는다. 내가 런던에서 본 영화 중에서 그 중 압권이었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POUSSIERE D'ANGE(천사의 가루)]라는 프랑스 영화였다. 이 영화는 연출자 의 솜씨도 좋고 배우도 적역이었고, 오래간만에 마음 푹 놓고 즐길 수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대로, 지하철 역 세 정거장을 걷고 말았다. 그리고 디킨 스의 [리틀 드리트]도 보았다. 앨릭 기니스가 나오는 사뭇 디킨스다운 품격 있는 영화이다. 아주 긴 영화라서 요일에 따라 일부만 상영하기도 하고 이부만 상영 하기도 한다. 앨릭 기니스의, 털구멍까지 디킨스가 스며 있는 듯한 유유하고 서 둘지 않는 연기가 굉장하다. 이 영화의 관객 중에는 유난히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이 많았다. 영국인들은 성장에 필요한 의식으로서 조그만 어린애들에게 디 킨스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리고 영화를 보여 준 다음에는 원작을 손에 쥐여 준 후 읽게 할 것이다. 영국인과 디틴스 문학 사이에는, 이렇듯 끈끈하고 장기적 인 관계가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이런 작품에 대응할 수 있는 초당파적인 국민 작품이 있나 하고 잠깐 생각해 보았는데, 디킨스의 문 학 세계 같은 다면적인 광대함과 깊이를 지니고 있는 작품은 쉬 생각나지 않았 다. 그건 그렇고, 어쨌거나 디킨스는 재미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으면서 실 은 부모 쪽이 열심히 즐기고 있는 것이리라. 콘서트에도 꽤 갔다. 아슈케나지가 지휘하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들 으러 갔다. 아들인 보프카 아슈케나지 군과의 공연이다. 나는 실은 아테네에서 이 보프카 군의 연주를 한 번 들은 일이 있는데, 그때는 별로 감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좋아진 듯하기도 하다. 곡목은 우선 아버지가 지휘하는 코 리오란 서곡, 그리고 보프카 군이 나와 모차르트의 론도와 프랑크의 [교향적 변 주곡]부자가 공연, 마지막으로는 역시 아버지가 지휘하는 말러의 4번 교향곡, 보 프카 군의 피아노 연주는 여전히 미진했다. 잘한다든가 서투르다든가를 논하기 전에, 매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호소하는 바가 없다. 그에 딸려간 것은 아 닐텐데, 아버지 쪽의 지휘도 그다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말러의 교향곡도 앙상블의 처리가 치졸하고 산만했다. 그 얼마 전에 로마에서 들은 귀가 번뜩이 는 임바르의 [대지의 노래] 대열연과 비교하자면, 압도적으로 격이 떨어진다. 감 칠맛이 없는 끈끈한 말러이다. 이튿날 타임지의 콘서트 평 난에는 이런 글이 실 려 있었다. "내가 만일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아들이었다면, 뭘 하고 있을까? 헤어 드 레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트던지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말 은 할 수 있다. 결코 피아니스만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잔혹하지만 재미있는 평이다. 2세란 그런 면에서 상당히 힘들다. 퀸 엘리자베스 홀에서 고와세비치의 피아노 콘서트도 들었다. 프로그램은 베 토벤과 슈베르트였는데, 슈베르트의 B플랫 장조 소나타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몸 에서 살며시 피로가 몰려나가는 듯한, 작금에는 듣기 어려운 아련한 슈베르트였 다. 그러나 베토벤 쪽은 얼마간 지루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마리나와 ASMF의 콘서트에도 갔다. 바흐의 [매니피가트]는 특히 훌륭했다. 손톱도 깎고, 귀청소도 하고, 머리도 감은 듯한 산뜻한 느낌. 뭐 개인적인 취향이 물론 있을 테지만, 하지만 아무튼 멋있는 연주였다. 그런데 이렇게 충실한 연주를 매일 싼 가격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부러운 일이다. 오페라는 차이코프스키의 [에프게니 오네긴](프레니가 타이틀 롤을 노래했다) 과 브리튼의 [빌리 배드]를 보았다. 양쪽 다 훌륭했지만, 이 두 오페라에 대해서 는 다른 자리에 썼으므로 통과하겠다. 런던 체재 중에 딱 한 번 재즈를 들으러 갔다. 브로섬 디어리가 재즈 클럽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 그리운 'PIZZA ON THE PARK'란 불가사의한 이름의 클럽이다. 하지만 이름으로 상상하기보다는 훨씬 세련된 클럽이었다. 전 석이 예약석이고, 전화로 크레디트 카드의 번호를 대면 테이블을 지정해 준다. 가격은 8파운드 50페니 손님은 모두 반듯하게 정장을 하고 나이트 라이브 를 즐기러 온 중년 부부로, 혼자서 온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런 덕분에, 웨 이트리스가 신경을 써주어 틈만 나면 내 자리로 와서는 "즐기고 있느냐?"고 물 었다. "네에, 즐기고 있습니다."라고 싱긋 웃으며 대답을 하고 나면 또 금방 다시 다가와 "어때요, 들을 만해요"라고 묻는다. 청바지 차림의 일본인 남자가 혼자 브로섬 디어리를 들으러 오다니, 역시 좀 이상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브로섬 디어리의 무대는 아주 차밍했다. 상당한 연령일텐데, 예의 귀여운 목소 리를 내기는 좀 어렵지 않겠는가 하고 걱정했더니, 그것은 기우였다. 물론 옛날 에 비하면 목소리의 매끄러움이 다소 뒤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 대신에 무대 매 너가 한층 세련되어,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그 세련된 매너를 지그시 즐길 수 있었다. 레퍼토리는 거의 오리지널이고(이 오리지널이 감동적이다), 소위 스 탠더드 넘버라는 게 거의 없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데, 그 피아노가 또 무척 좋다. 가볍고 가벼워 당장에라도 어디론가 날아가버릴 듯한, 이런 맛이 있는 음 이란 그렇게 내려고 해도 좀처럼 나지 않는 법이다. 이런 음악을 어떻게 할 수 있냐고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브로섬 디어리의 음악은 원래 눈꼬리를 치켜 뜨고 듣는 그런 음악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초고품질 나이트 클럽 뮤직이다. 세상의 산산을 다 겪은 어른들의 음악인 것이다(최근에는 그런 어른이 줄어들었지만). 피자와 포도주도 맛있었다. 나는 시칠리아풍의 피자를 먹었는데, 그 피자는 이 탈리아의 피자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상당한 맛이었다. 식사대는 10파운드. 런던에 있는 동안 짧은 여행을 한 번 하였다. 소설이 간신히 완성되었기에, 기 뻐서 여행을 떠난 것이다. 파딩턴 역에서 두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배스 (BATH)라는 온천 마을에 갔다. 배스는 그 이름이 말하듯, 로마 인이 영국에 진 주해 있던 시대에 발견했다는 오래된 온천 마을이다. 로마 인이란 신기하게도 온천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세계 각지에다 장대하고 화려한 온천 시설을 만들어 두었다. 배스에는 지금도 그 시대의 낡은 온천 시설이 남아 있다. 배스의 자전거 대여 점에서 자전거를 빌려, 캐슬 쿰이라는 조그만 마을까지 사이클링을 하기로 하였 다. 영국에 가면 캐슬 쿰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거라고, 누가 가르쳐 주었기 때 문이다. 무척 아름다운 곳이라고, 배스에서 캐슬 쿰까지는 과연 아름다운 길(저 먼 옛날 로마 인이 만들었다는 곧바른 길)이 이어지는데, 산과 구릉을 몇 번이고 넘어야 하므로 상당히 터프한 행정이다. 게다가 내가 빌린 자전거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어, 한 시간마다 기어가 휘르륵 풀리고 만다. 이런저런 이유로 '유유하게 영국의 시골길을 자전거로 가는'멋을 즐길 수는 없 었다. 더구나 해질녘이 되어서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캐슬 쿰에 도착하고 보니, 호텔은 이미 만원이라, 그 다음 마을까지 가야만 했다. 그래도 이 여행은 꽤 흥겨운 여행이었다. 그 무엇보다 소설을 겨우 완성했다 는 해방감이 있었고, 날씨도 내내 좋았다. 영국에서 이렇게 날씨가 하루 온종일 좋기는 드문 일이다. 그리고, 때는 바야흐로 봄이었다. 열심히 패달을 밟아 땀도 흠뻑 흘렸고, 배도 고팠다. 캐슬 쿰의 옆 마을에서, 여관 '화이트 하트'에 묵기로 했다. 여관 종업원들이 무뚝뚝하기는 했지만, 기분 좋은 여관이었다. 큰 방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혼자 머무를 것이라고 하자 싼 가격에 방을 내주었다. 홀텔 퍼브 에서 맥주를 마시고 식당에서 송어 요리를 먹었다. 호텔 바로 앞으로 아름답고 조그만 강이 흐르고 있는데, 거기서 막 낚아 올린 신선하기 그지없는 송어이다. 그런 송어를 얇게 저며 아몬드와 함께 찐 요리였다. 이 요리는 눈이 반짝 뜨일 만큼 맛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알맹이가 있는 맛이다. 팜 선데이 전날이라서, 외출복 차 림으로 가족과 함께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로 식당은 꽉차 있었다. 덕분에 나는 자칫 시간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저녘을 못 먹을 뻔했다. 이 마을에는 레스토랑 이라고는 이곳 한 군데밖에 없으므로. 돌아가는 길, 배스를 눈앞에 두고, 드디어 자전거 기어가 완전히 분해되고 말 았다. 말 그대로 너덜너덜 다 빠져나가고 만 것이다. 왕과 그 신하라 할지라도, 그 상태를 회복시키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마지막 오 킬로미터를 터벅터벅 걸어갈 수밖에 없 는 신세가 되었다. 어이휴, 어이휴. 하지만, 그 여행은 내게는 행복한 여행이었다. 나는 소설 원고를 인쇄하여, 우체국에 가서 도쿄에 송구하였다(원고를 부치는 데, 이탈리아 우편 시스템을 피한 것도, 런던까지 온 이유 중 하나이다). 삼월 말 에 나는 혼자 로마로 돌아왔다. 1988년, 공백의 해 1988년, 공백의 해 맨 처음에 썼듯이, 나는 이 책(소위 '여행기'다)을 쓰기 위해 스케치 비슷한 문 장을 조금씩 써서 모아 두었는데, 1988년에는 그런 문장을 단 한 줄도 쓰지 않 았다. 쓰고 싶은 기분이 일지 않았던 것이다. 이해 초엽에는 [댄스 댄스 댄스]를 쓰느라 눈코 뜰새없이 바빴고, 다 쓰고 난 다음에는 허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오고 나서, 그 허탈감은 이윽고 혼란스런 무력감으로 이행해 갔다. 그리고 그 해가 다 저물 무렵까지 나는 아무 글도 쓰지 못했다. 말하자면 공백의 해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나라는 인간의 행동의 추이에 따라 일단은 연대기적으로 진행 되고 있으므로, 1988년 4월부터 10월까지 생긴 일을 간단하게나마 언급해 두는 편이 좋으리라. 사월에 나는 일본으로 돌아와, 이미 인쇄소에서 우리 집으로 부친 [댄스 댄스 댄스]의 교정지를 체크하였다. 그러고는 TBS 브리태니커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북]이란 피츠제럴드에 관한 글과 번역을 모은 책을 출판하였고, 운전면허를 땄 다. 그때까지는 운전면허 따위 없어도 아무 불편을 느끼지 못했지만, 가을에 자 동차로 터키를 일주할 계획이 있어,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분발한 것이다. 더구 나 유럽 생활은 자동차가 없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상당히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 았기 때문이다. 매일 야마노테 선을 타고 운전교습소를 통학하여 간신히 한 달 만에 면허를 땄다. 그런 일들을 해치우고서야, 간신히 바라마지 않았던 하와이에 가서, 한 달쯤 멍하고 지냈다. 편안히 휴식을 취했고, 말 그대로 '심신이 따스해 지는' 느낌의 여행이었다. 그 정도로 뼛속 깊이까지 로마의 추위가 눌어붙어 있 었던 것이다. 나는 하와이에 있는 동안 내내 혼다 이코드 랜터카를 빌려 운전 연습을 하였다. 후진을 하다가 주차장 기둥을 들이받아 오른쪽 깜박이가 산산조 각이 난 적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몸을 데워도, 어떤 유의 냉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되돌아보니, 그 해는 우리들 두 사람에게 그다지 좋은 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일본에 돌아와 보니 [노르웨이의 숲]은 대 베스트 셀러가 되어 있었다. 줄 곧 외국에 있느라 사정에 어두웠던 탓도 있지만, 오랜만에 일본으로 돌아와 자 신이 유명 인사가 되어 있는 실태를 알고는, 나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신문 의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보면, 어떤 서점이나 [노르웨이의 숲]의 판매고가 1위를 점하고 있었다. 고단샤의 사옥에는 빨강과 초록의 화려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나는 볼일이 있어 가끔 에도가와바시에서 호고쿠지까지의 길을 지나가야만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현수막이 부끄러워, 늘 못본 체하고 지나갔다. 그 가 을에 출판된 [댄스 댄스 댄스]도 순조롭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이런 말은 나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나는 어떤 종류의 애절함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뭐가 애절한지는 모르지만, 하 지만 그 애틋한 기분은 나를 깊은 심연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 어디를 가도 자신의 장소를 발견할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많은 것을 잃어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이 오십만 부 팔렸을 때, 나는 물론 기뻤다. 자신이 쓴 책이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작가에게 기쁘지 않 을 리가 없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 나는 기쁜 이상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오십만이란 수의 사람들을 쉽사리 상상할 수가 없었다. 독자로서도 상상할 수 없었고, 단순한 '사람의 수'로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십만의 인간이라면 그럭 저럭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오십만이라고 하면, 그건 이미 무리다. 그 다음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백만과 백오십만과 이백만, 그런 숫자들은 내게는 실체를 지니지 않는 그저 '거대한 숫자'에 불과했다. 매스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마 도 그런 수의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 다반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게 는 그렇지가 않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생각 하지 않고자 시도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십년 동안 소설가로서 일단 밥은 먹고 살아 왔다. 지금 새삼스레 숫자 같은 것은 상관이 없다. 팔리고 안 팔리고는 운 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간단히 무사할 수 없는 공 기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었다. 상당히 불가사의한 일인데, 소설이 십만부 팔렸을 때,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지지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이 몇백만 부나 팔린 일로 내 자신은 오리려 고독해진 듯했다. 그리고 모두들 자신 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그랬을까.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시기는 내게 정신적으로 가장 힘 겨운 시기였다. 정직하게 말하면 불쾌한 일도 몇 가지 있었다. 그러곤 무척 실망 하여, 기분도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에 와 뒤돌이켜 보니 납득이 가는 일이지만, 결국 나는 그런 입장에 설 체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성격도 아니고, 필경은 그런 그릇도 못되었던 것이다. 그 시기, 나는 혼란스러웠고,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고, 아내는 몸이 불편했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전혀 일지 않았다. 그 어떤 종류의 글도 말이다. 하와이 에서 돌아온 후, 여름 동안은 줄곧 번역일을 하였다. 자신의 글을 쓸 수 없는 때 에도, 번역 일은 할 수 있다. 타인의 작품을 꼼꼼하게 번역하는 일은 나에게는 일종의 치료 행위이다. 번역을 하고 있으면, 나는 자기자신의 체내에 숨어 있는 비교적 냉정하게 응시할 수 있고, 또 진정시킬 수 있다. 팔월에 아내를 일본에 남겨 두고 나는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로마에 서 발칸 반도, 소아시아로 향한다. 신초샤의 잡지를 위하여, 아토스 산과 터키 취재 기사를 쓰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부 한달 반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나와 카메라 담당 마쓰무라군과, 편집자 O군과 아토스 반도의 험준한 산 사이 를 비를 맞으며 엉금엉금 기다시피 돌고, 그 다음은 마쓰무라 군과 둘이서 미쓰 비시 파젤로를 타고 한 달을 터키의 깊은 산골까지 돌아다녔다. 실로 많은 일을 경험하였고, 육체적으로는 몹시 터프한 여행이었지만, 덕분에 몸을 한계점까지 소모할 수 있어서 기분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군살도 빠지고, 얼굴도 새까맣게 탔다. 그리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그 이튿날 공항에서 아내를 마중하였다. 시월 의 일이다. 그런 식으로하여 다시금 로마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가 회복된 것은, 소설을 쓰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정말 완전히 회복된 것은, 필시 팀 오브 라이언의 [뉴클리어 에이지]란 소설의 번역을 끝낸 다음부터이리라. 번역은 내게 일종의 치료 행위라고 앞서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이 [뉴클리어 에이지]의 번역 작업은 내게 있어 정신적인 사회복귀 요법 이외의 아 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이 훌륭하고 매력적인 작품을 번역하였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감동을 하였고, 용기를 얻기도 했다. 혹은 그 멋들어짐에 때로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 소설에 담긴 열은 내 몸 저 깊은 곳까지 데워주었다. 그 덕분에 내 뼛 속의 냉기가 빠져 나간 듯했다. 만약 이 작품을 번역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는 다른 방향으로 점점 흘러가 버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오브라이언의 소설은 유감스럽게도 생각한 만큼 팔리지 않았다. 이 렇게 멋진 소설인데, 이렇듯 열성을 다해 번역했는데,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내 주위에 있는 몇몇 사람은, 정말 이 소설을 사랑하고, 지지해 주었지만. 이 작품을 번역한 후에, 나는 다시 한 번 소설을 쓰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나 라고 하는 인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은 분명 오래 살아 남아, 그리고 살 아 있는 동안은 계속 써나가는 행위 그 안에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것이 비록 무언가를 줄곧 잃어버리고, 세계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역시 그런 식으로밖에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고 하는 인간이며, 그것이 나의 장소인 것이다. 대충 지금까지 쓴 것이 1988년 4월에서 10월 사이에 생긴 일이다. 1988년 10 월에, 나는 마흔 살 생일을 석 달 앞두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태세를 가다 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하여 나는 다시 스케치를 드문드문 쓰기 시작했다. 1989년, 회복의 해 카나리 씨의 아파트 카나리 씨의 아파트는 로마의 스테파노 포르칼리라는 길에 있다. 바티칸에서 도 걸어서 금방 갈 수 있는 곳이다. 리소르지멘트에서 성천사성으로 향하는 길 에 면해 있다. 지하철 역에도 가깝고, 두 블록을 걸어 콜라 디 리엔초로 나가면, 필요한 대개의 물건을 살 수도 있다. 청과물 시장도 가깝고, 바티칸에 가면 바티 칸 우체국이 있다(바티칸 우체국은 이탈리아 우체국이 아니라, 바티칸 교국의 우 체국이다. 우표도 다르다. 이탈리아 우체국보다는 한결 사무를 정확하게 처리한 다). 콜라디 리엔초에서 곧바로 십오분을 걸어가면 포포로 광장에 이른다. 성천 사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보나 광장이다. 우리는 그때까지 지낸 교외 주택가의 불편한 교통 사정에 넌덜머리가 난 터 라, 조금 집세가 비싸더라도 이번에는 어떻게든 로마 중심지에 살자고 결정하였 다. 편리함이란 점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 아파트는 불평의 여지가 없는 장소이 다. 어디를 가든 걸어서 갈 수 있고, 어디에서든 걸어서 돌아올 수 있다. 우리가 이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한 우연이다. 포르칼리 길을 걸 으며, 이 주변에서 살 일은 없을 테지만,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우연 히 단기간 빌려주는 가구 딸린 아파트가 눈에 띈 것이다. 오래된 파라초풍의, 제 법 분위기가 있는 건물로, 큼지막한 대문과 앞뜰이 있다. 조용하고, 햇볕도 잘 들 것 같아, 전화를 걸어 문의를 해보니, 마침 빈방이 딱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이 었다. 하기야 이때 비어 있었던 방이라는 것은 빈말로라도 좋은 방이라고는 할 수 없는 지하실 방이었다. 실질적으로는 반지하지만, 정직하게 말해 정상적인 시민 이 사는 공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벽 저 위쪽에 창문이 있고, 그곳으로 안제 이 와이다의 흑백 영화 같은 빛이 어슴푸레하게 새어들어온다. 올려다보니 길가 는 사람들의 다리가 로 앵글로 언뜻언뜻 보인다. 꼭 소니 클라크의 '쿨 스트래 틴'의 재킷 사진 같은 광경이다. 이따금 매력적인 시뇨리나의, 하이 힐을 신은 뒤꿈치가 보이기도 한다. 그런 뒤꿈치가 따각따각따각 하는 상큼한 소리를 내며, 우리의 머리 위계를 통과해 간다. 이런 광경은 그림으로서는 그다지 나쁘지 않 지만 매일 보고 있노라면 피곤해진다. 전체적으로 말해 이 지하실 생활은 별볼 일이 없었다. 아니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비참한 일이 더 많았다. 낮에도 어두 컴컴하고, 방은 좁고, 부엌 시설은 열악했다. 전기 레인지의 화력이 약해서, 파스 타를 삶기도 하고, 밥을 짓기도 하였다.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요리를 한다 는 것이 왠지 난민 같은 기분이 들어 허망했다. 대체 나는 이런 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종종 후회를 하였다. 비가 내리면, 뜰에 면한 창문으로 물이 스며들어와, 방이 몹시 습해졌다. 전기 는 용량이 적어, 다리미질을 하거나 하면 금방 차단기가 탁하고 내려와, 방이 캄 캄해졌다. 게다가 이 차단기의 상태가 궤멸적이라, 한 번 내려오면 다시 되돌리 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정은 우리 옆방도 대동소이하여(지하에는 방이 둘 있었다), 거기에 사는 미국인 부부는 툭하면 캄캄해진 방에서 촛불을 켜놓고 있었다. 그쪽 차단기의 상태가 우리 것보다도 한층 한심했던 것이다. 옆방에 사 는 미국인은 보스턴에서 온 품위 있는 중년 부부로, 남편은 비즈니스맨인 듯 싶 었다. 아마도 업무상 로마에 체재하고 있는 것이리라.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은 로마라는 도시의 모든 것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분은 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방은 미국으로 치면 두말할 것 없는 슬럼이다. 우리가 인내심을 발휘하여 이 방에 살고 있었던 것은, 전망이 좋다는 까닭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주인인 카나리 씨의 인간성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카나리 씨는 상당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나이는 칠십대 중반쯤이라고 생각한다.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옷차림은 약간 칠칠치 못했지만 아직 건강 상태는 양 호한 듯, 매일 사랑스런 차 웨스퍼를 타고 아파트 근처에 있는 사무실로 나온다. 초록색 펑키한 윗도리를 입고, 야구 모자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다. 카나리 씨의 직업은 사진가이다. 난 옛날에 일본의 출판사로부터 의뢰를 받아 이탈리아의 건 축물을 찍는 일을 했노라고, 그는 그 사진집을 보여주었다. 꽤 오래전에 찍은 가 진인지, 색이 약간 바래기는 했지만, 느낌이 좋은 사진이었다. 찍혀 사진인지, 색 이 약간 바래기는 했지만, 느낌이 좋은 사진이었다. 찍혀 있는 사람들의 차림새 를 보니, 60년대에 촬영한 사진인 듯싶다. 아들이 둘 있는데, 한 명은 리소르지 멘트 광장에서 가까운 은행에 근무한다. 그리고 그 아들이 아파트 관리를 거들 고 있다. 카나리 씨는 이탈리아 말과 프랑스 말밖에 할 줄을 몰라, 무슨 일이 있 으면 아들이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이 카나리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는 입으로는 붙 임성 있게 대하지만 내실이 동반되지 않는 타입의 인간이 비교적 많은데, 카나 리 씨는 사소한 부분까지 성의를 갖고 우리를 대해 주었다. 무엇이든 상태가 안 좋은 곳이 있으면 일일이 고쳐주고,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사다 갖춰주었다. 물 론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 사람에게는 친절 한 마음이 있었다. 내가 만난 이탈리아 사람 중에서는 상당히 훌륭한 부류에 속 하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한 세대 전의 교양인 같은 타입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카나리 씨가 한눈에 마음에 들어, 그래서 이렇듯 한심한 지하실이 라도 뭐 할 수 없지 하고 인내하며 줄곧 산 것이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그 상황에 상대편 인간의 모습이 틀림없이 보이기만 하면, 대개의 경우는 인내할 수가 있다. 반대로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상황에 있으면서도, 상대편의 모습이 거 기에 보이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불안해진다. 그런데 카나리 씨는 이 방 이외에도 다른 아파트에 또 한 방을 소유하고 있 고, 그 방은 지상에 있다. 지하보다는 시설도 번듯하다. 내가 상상하기에, 아무래 도 이 지하실 방은 애당초 사람이 살도록 지은 것이 아닌 듯하다. 원래는 창고 나 뭐 그런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것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람이 사는 방으로 개조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저런 시설들이 어중간하고, 대충 임기 웅변 식으로 갖춘 듯 느껴지는 것이다. 문제도 많다. 지상에 있는 방과는 상당히 다르다. 만약 지상의 방이 비면, 당신들을 우선적으로 그쪽으로 옮기도록 하겠노 라고 그는 약속해 주었다. 지금 거기에는 단신으로 부임해 있는 자동차 회사의 높으신 양반이 살고 있는데, 로마에서의 업무가 끝나면 머지않아 토리노의 집으 로 돌아갈 테니까, 앞으로 두세 달 사이에 반드시 방을 빼게 될 것이다, 라고 카 나리 씨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두컴컴한 지하실 방에서 생활하며, 그 피아트 회사의 중역이 토리노로 돌아가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그도 딱히 로마에 머물고 싶어서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 역시 하루라도 빨리 토리노 의 자택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도 회사측이 그 절차를 질질 끌고 있 는 것이다. 어떤 이탈리아 사람에게 듣자 하니, 그런 일이 이탈리아에서는 종종 있는 모양이었다. 일본의 회사처럼 '며칠부로 어떻게든 어느어느 지점으로 전근 을 명한다'라는 식의 명확한 사령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상사가 "자네 내달경 토리노에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게나."라는 말을 하기에, 그런가보다 하고 짐까 지 정리하고 있는데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얘기에 진전이 없다. 어찌된 일인 가하여 상사에게 들어본즉 "아아, 그러고 보니 내가 그런 말을 했었지."라든가, "으음, 그 얘기, 실은 무산되고 말았네."라는 등의 대답을 듣고는 김이 새는 일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탈리아 사람이 미래에 대해서 하는 얘기는 믿 을 게 못 된다. 세 번 정도 집요하게 같은 말을 듣고 나서 서서히 준비를 시작 하면 대충 들어맞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그 지하실 방에서 계속 생활하게 되었다. 마침내 겨울이 오고 그리고 깊어갔다. 옆방에 살던 미국인은 "하느님 감사합니 다. 간신히 이 거지 같은 도시를 떠날 수 있게 되었어요." 라는 대사를 남기고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너무너무 추워서, 우리는 북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터키를 돌 때 밀라노의 미쓰비시 대리점에서 빌린 대형 미쓰비시 파젤 로를 돌려주지 못하고 그대로 쓰고 있었던 터라, 그 차를 사용하였다. 이탈리아 인의 적당함도 그런 대로 이점은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파젤로라고 하면, 거의 야피한 차이다. 우리는 조그만 마을에 숙박을 하면서 천천히 아우트 스트라다를 북상하여, 베 네치아에서 몇 박을 하고, 그러고는 크레모나, 제노바를 경유하여, 리비에라 해 안까지 갔다. 리비에라라면 그나마 따뜻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간 것이다. 그 러나 겨울의 리비에라도 와서 보니 어쩐지 허망한 곳이다. 따뜻하기는 물론 따 뜻한데, 아무래도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칠리아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몸이 왠지 근질근질하다. 이건 좀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싶은 기분이 내내 들 어붙어 있다. 결국은 리비에라에서 불만족스러운 기분을 해소하지 못한 채, 파르마와 만토 바와 페라라와 아시시를 거쳐,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 로마에 돌아와서도 또 이전과 같은 지하실 생활이다. 할 수 없이 또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는 밀라노까지 간다. 이래 가지고서야 방안보다 파젤로 안에서 지 내는 시간이 더 길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든다. 마침 볼일이 생겨 일본으로 돌 아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일본에 일시 귀국하였다. 그 얼마 전에 천황이 죽었다. 나는 드디어 마흔 살이 되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마흔 살 이 되었다고하여 뭐가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을 경계로 돌연 늙는 것 도 아니고, 갑자기 머리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좀 이상한 기분이로군, 하는 느낌이 아주 조금 있을 뿐이다. 일본에 돌아와 보니, 온 매스컴이 천황의 죽음을 보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상의 예'라는 것을 한다고 하여, 온 일본의 경찰이 도쿄로 집결하여, 맨홀의 뚜껑을 하나하나 열고는 거기에 봉인을 붙이고 있었다. 아마도 과격파의 테러를 봉쇄하기 위한 사전 작업일 테지만,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바로 그런 것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신경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우리는 일본에 돌아오면 시부야 구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데, 도쿄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런 유의 미치광이짓 같 은 소동에 넌덜머리가 나기도 하고, 심심하면 찾아오는 경찰관이 귀찮기도 하여, 신간센을 타고 규슈에 가서, 이 소동이 잠잠해질 때까지, 유후인 온천에서 지내 기로 하였다. 이런 말을 하면 어패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규슈의 보통 사람들 은 대상의 예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도쿄에 있으면 온통 세계가 대상의 예 일색인 것처럼 보인다. 누구를 만나도 그 얘기를 하고, 모두들 저마다 이러니저러니 의견을 말한다. 다양한 의견이니 감상들이 자잘한 먼지처 럼 공중을 떠다니며, 파들파들 떨고 있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 쩐지 진절머리가 나고 만다. 하지만 고맙게도 규슈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천황 의 '장례식'도, 일상 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먼 나라 이야기'란 식이었다. 그럭저럭 지내고 있는데, 카나리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토리노 사나이가 겨우 토리노로 돌아가, 지상의 방이 비었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내용이었 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로마로 향하게 되었다. 이거야 집도 절도 없이 떠 다니 는 부처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쪽에 가서는 넌덜머리가 나 서 다시 이쪽으로 오고, 이쪽으로 왔다가는 다시 넌덜머리를 내고 그쪽으로 가 는, 하지만 뭐 아무러면 어때,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쪽저쪽 왔다갔다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아리타리아 항공의 회수권을 사고 싶은 심정이다. 카나리 씨가 마련해준 새 방은 일층에 있다. 그런데 실은 일층 반정도 높이에 방이 있다. 지하가 반 지하인 만큼, 일층이 반쯤 위로 올라와 있는 셈이다. 지하 방보다는 물론 훨씬 밝고, 방도 넓고 청결하고, 부엌과 목욕탕 기능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시설도 충실하다. 세탁기도 있다. 그때까지 살았던 지하 방에는 세탁기 가 없어, 우리는 반년이란 세월 동안 연일 빨래를 손으로 쓱싹쓱싹 빨았던 것이 다. 덕분에 손이 물집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카나리 씨의 새 방에 관 해서 우리는 대부분 만족하였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테이블 위에 '고명한 닥터 무라카미 씨에게'란 카드가 붙은 과일 바구니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이탈리아 사람들은 직함에 이렇게 터무니없는 형용사를 갖다 붙인다. 어째서 내가 닥터인 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나는 거실 구석에다 책상을 놓고, 그 위에다 워드 프로세서를 올려 놓았다. 그 옆에 히타치 라디오 카세트를 놓고, 소형 CD 플레이어를 접속한다. 이렇게 하여 일단은 일할 자리가 마련되었다. 일본의 집으로 돌아가면 대구경 JBL이 있는데, 하고 아쉬워하지만, 아쉬워해 본들 소용없는 일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견디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지하실에서 한동안을 살다가, 지상 방으로 이사를 하고 처 음으로 느낀 것은, 바깥 풍경이 제대로 보이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는 것이었다. 두 번 다시 지하에 살고 싶지 않다. 내 책상 옆에 있는 창문으로는 건 너편 칠층짜리 클래식한 아파트가 보인다. 그 아파트에는 무솔리니가 연설이라 도 할 만큼 허풍스런 발코니가 붙어 있다. 그 옆에는 프로흐메리아(화장품 가게) 가 있다. 로마에는 프로흐메리아가 썩어 문드러질만큼 많다. 프로흐메리아에서 일하는 시뇨라 시뇨리나는 물론 화장을 떡칠하듯 하고 있다. 그녀들은 심심해지 면 밖으로 나와, 동네 여인네들과 하염없는 수다를 떤다. 용케도 그렇게 오랜 시 간 할 얘기가 있구나 싶어 감탄을 한다. 그러나 이 창문으로 보이는 최고의 구경거리는 뭐니뭐니 해도 노상 주차이다. 이 노상 주차만큼은 아무리 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아무렴 이 주변에 서 주차 공간을 발견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집 근 처에 차를 주차시키고 나면 다시는 차를 꺼내고 싶지 않다. 아무튼 그럴 만큼 주차난이 심각하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앞에도 언제나 자동차가 꽉 들어차 있 다. 자동차를 주차시킬 공간을 찾아 스물네 시간 내내 차들이 동네를 배회하고 있다. 따라서 우연히 차를 꺼내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발견한 행운의 드라 이버가,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그 자리로 쓰윽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광경을 보 고 있노라면, 조금도 지루하지가 않다. 그리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믿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데, 신기하게도 이탈리 아의 자동차에는 표정이 있다. 좌우지간 타고 있는 드라이버 만큼 풍부한 표정 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주차 공간이 비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드라이버와 함께, 자동차 자체가 싱긋 미소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을 간발의 차로 다른 차에게 빼앗기거나 하면, 자동차 전체가 고개를 푹 떨구고 낙담을 한다. 눈을 내 리깔고, 이것 참 낭패로군, 이란 얼굴을 한다. 그런 표정 하나하나가 아주 생생 하다. 그러니까 그냥 보고만 있어도 아주 재미있다. 그런 점은 일본의 차와 무척 다르다. 일본의 차에는 이상하게도 표정이란 게 없다. 기쁘건 슬프건, 대개는 일 부 상장 기업적인 비슷한 얼굴을 하고 한결같이 달리고 있다. 나는 도요타 마크 투니, 닛산 글로리아니 마쓰다 카페라니 하는 차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달리는지 짐작이 안 간다. 그야 물론 자동차에 표정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냐 고 한다면 말 그대로이지만, 하지만 일본에서 노상 주차 광경을 아무리 열심히 들여다보아도 재미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구나 무의미하게 힐끗힐끗 보 고 있으면 S클라스 벤츠에서 나온 사람에게 얻어맞을지도 모르니 겁이 나기도 한다. 벤츠로 하자면, 과연 벤츠에는 어떤 유의 표정이 있다. 그러나 한 종류밖에 표 정이 없다는 점이 벤츠의 무서움이다. 마치 고르고 13처럼 말이다. BMW도 절대 로 웃지 않고, 오페르로 하자면 무지막지한 철가면이다. 오페르 같은 차는 하이 웨이를 달리면서 중국의 판다를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은 기분까지 든다. 나는 여성에 관해서는 그다지 싫고 좋고를 따지는 인간이 아니지만, 아무튼 오페르 같은 여자하고는 자고 싶지 않다. 그런 점에 한해 말하자면 이탈리아의 자동차 는 과연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표정이 있다고나 할까, 까딱하다 길바닥에 서서 그대로 다리 한쪽을 들고 똥을 누는 것은 아닐까 싶은 자동차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 자동차의 그런 점을 나는 좋아한다. 성능은 차치 하고, 창문이 있으면 그런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시간을 죽일 수가 있다. 일을 하다 피곤해지면, 창가에 앉아, 비발디의 목관 시중주 같은 곡을 들으며, 다양한 거리의 풍경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감상할 수 있다. 역시 지상은 좋군, 하고 생 각한다. 특히 로마의 봄, 밝은 태양빛은 다른 어떤 장소의 빛과도 다르다. 투명 하고, 찬란하고, 거리낌이 없다. 사월이 되면, 바깥으로 나갈 때면 벌써 선글라스 가 필요하다. 밖에서 식사도 할 수 있다. 꽃들은 새롭게 만발하고, 새로운 새들 이 날아온다. 고양이들도 여기저기서 한가로이 몸을 쭉 뻗고 늘어져 있고, 성급 한 시뇨리나는 소매 없는 블라우스를 입고 나오기도 한다. 이런 계절의 로마에 서 어찌 지하에서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아파트에는 카메리엘(가정부, 잡일 담당)이 있다. 한 명은 리나라는 뚱뚱한 아줌마이고, 한 명은 키가 큰 흑인 청년이다(그의 이름은 모른다). 그들 은 대개는 아침 아홉시에 와서, 오후 두시면 돌아간다. 리나가 커튼을 교환하거 나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흑인 청년 쪽은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을 한다. 두 사람 다 인상이 좋고, 일도 열심히 한다. 특히 리나는 이탈리아의 마음씨 좋은 아줌마 타입의 친절한 사람으로, 이 아줌마는 한 번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철저하게 부 모 같은 마음으로 보살펴 준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이 두사람 에게 간단한 기념품이나마 선물을 하였다. 그러면 리나 아줌마는 늘 기뻐하며 아내를 꼭 껴안고는 쪽쪽 키스를 한다. 약간은 감정이 과다한 게 아닐까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사소한 선물로 기뻐해 주니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다. 일 본과 마찬가지로, 이 나라에서는 성의라는 것이 요컨대 선물을 뜻하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말해, 이탈리아의 아파트는 시설도 그렇지만 카메리엘의 질 하나 로 살기에 좋으나 나쁘냐가 갈라진다. 카메리엘이 불친절하고 일할 의욕이 없으 면, 아무리 훌륭한 아파트라도 건물 전체의 분위기가 몹시 나빠진다. 집을 비우 고 있는 사이 그들이 우편물을 제대로 관리해 주지 않거나 하면, 일일이 우편물 을 가지러 우체국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고-이 일은 나중에 상술하겠다-그야말 로 지옥인 것이다.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최후의 승자는 인재를 제대로 확보하고 있는 사람이며, 올바른 인간 관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 우리 가 살았던 포르칼리 거리에 있는 아파트는 관리가 철저하여, 그런 점에서 무척 생활하기 편했다. 무엇이든 고장이 나면 곧바로 교체해 주었고, 우편물도 잘 보 관해 주었다. 이런 경우는 로마에는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곳은 우리가 로마에서 발견한 최후의, 그리고 유일하게 정상적인 집이었다. 로마의 주차 사정 로마의 교통에 관한 얘기를 한 김에, 로마의 주차 현황에 대해 좀 더 상세하 게 기술하기로 하자. 앞에서도 썼듯이 로마에서 차를 주차할 공간을 발견하기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조금 더 정확한 문장적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은 '상 당히 곤란한'과 '지극히 어려운'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런 상 황은 도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주차난은 해마다 점점 더 심각해지 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처음 로마에 온 이후 삼 년 동안 이런 상황은 현저하게 심해졌다. 즉 '심도 측량기'의 바늘이 '상당히 곤란한'에서 '지극히 어려운' 방향으 로 기우뚱 기울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애당초 이 거리의 중심부에는 주차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째서 존 재하지 않는가 하면, 우선은 도시 그 자체가 좁기 때문이다. 좁은데다가 건축물 의 규제가 업격하여, 현대적인 주차장용 건물 같은 것을 지을 수가 없다. 온 거 리의 건물 대부분이 역사적인 건축물이나 다름없으니,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만, 역사적 건축물에는 주차장이라는 것이 딸려 있을 턱이 없다. 내가 로마에서 아파트를 찾고 있을 때 한 번은 신축 아파트라고 하기에 가서 보니, 1930년대에 세워진 빌딩이라 깜짝 놀란 일이 있다. 그 정도가 신축 건물이니, 그 다음은 알 만하다. 그런 오래된 건물은 분위기도 있고, 그냥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유감스 럽게도 도저히 기능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땅을 파고 내려가 주차장을 만들려고 해도, 좀처럼 만들 수가 없다. 조 금만 땅을 파고 내려가면 단박에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유적이 튀어나오 기 때문이다. 덕분에 로마의 거리에는 노상 주차장이 흘러 넘치게 된다. 자동차 를 끌고 어딜 가려고 해도, 도무지 차를 주차시킬 장소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정체에 관해서는 도쿄에 비해 그다지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주차 사정 은 거의 파멸적이다. 일단 집 근처에 주차 공간을 발견하면, 다시는 차를 빼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은 진짜 과장이 아니다. 좌우지간 주차할 공간을 찾느라 집 주위를 빙빙 삼십분 정도는 헤매 다녀야 하므로, 그럼 로마에서는 차를 타고 다니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 지만 로마에서 자동차 없이 생활하기는 또 그 나름으로 성가신 일이다. 우선 첫 째로 이 도시는 도쿄처럼 대중 교통 수단이 발달해 있지 않다. 아니 딱히 도쿄 에 비교할 것까지도 없다. 온 세계의 어떤 주요 도시와 비교해도 발달해 있지 않다. 지하철도 버스도 있기는 하지만, 지하철은 짧은 노선이 둘 있을 뿐이고, 버스는 언제 올지 모르는 형편인 것이다. 게다가 버스나 전철이나 캬캬 떠들어 대는 라가티(젊은이들)로 언제나 만원이다. 이 패거리들은 예의도 없거니와, 설 쳐대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 점은 일본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인데, 이 로마의 버스는 때때로 길을 잘못 들어선다. 깜빡 길모퉁이를 도는 것을 잊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도무지 로마의 도로는 일방 통행 지옥이라서, 한 번 길 을 잘못 들어서면 원래의 길로 복귀하기까지 무지막지하게 시간이 걸린다. 손님 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소동을 피워대고, 운전사는 와와 변명을 하고(사과 하지 않는다. 변명을 할 뿐), 시간은 많이 걸리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폐해 가 크다. 정거장에 서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일도 수두룩하다. 아무리 정확하게 정차 버튼을 눌러도 운전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김없이 그것을 무시 하고는 정거장을 그냥 쓱 지나가 버리고 만다. 따라서 큰소리로 "내립니다! 내려 요!" 하고 소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실수는 특히 점심 식사 후에 많다. 내 가 기다리고 있던 버스가 운전사와 함께 고스란히 행방불명이 된 적도 있다. 어 딘가로 홀연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때는 과연 교통국의 아저씨도 얼굴이 새 파랗게 질려서는 버스를 찾아다니느라 동분서주하였다. 아마 버스와 함께 어딘 가로 놀러 간 모양이다. 버스를 얻어 타기도 참으로 힘든 노릇이다. 지하철은 일단은 제시간에 오고, 정거장에서 서지 않고 지나가는 일은 없다. 그런데 로마의 콘서트는 대게 밤 아홉시경에 시작하니까, 끝나는 시간은 열한시 를 넘기기 일쑤이다. 오페라 같은 경우는 이럭저럭 하다 보면 열두시가 가까워 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근처에 호텔을 예약 해 두든가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장기간 이 도시에 체재하려면 자동차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도쿄에서 이십 년 가까이 생활하면서,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고, 그래서 운전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마 음먹고 지낼 수 있었지만, 로마에 온 후로는 자동차 없이는 도무지 꼼짝을 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로마 시민도 이런 한심한 상황에는 진저리를 치고 있 고, 신문에서도 어떻게든 수를 쓰라고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자동차라는 것은 제각기 그 나라의 문화와 사정을 실 로 잘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즉 이탈리아의 자동차는 실로 이탈리아적 이라는 얘기다. 이탈리아의 소형차는, 좁은 길모퉁이에서 주차하기 쉽도록 만들 어져 있다. 우선 이탈리아의 차는 콤팩트형이다. 그리고 핸들의 작동이 아주 매 끄럽다. 좁은 장소라도 쉽사리 들어갈 수 있다. 최근에는 로마 시내에도 대형 메 르세데스나 볼로를 흔히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차들은 역시 로마의 주차 사정에는 적합하지 않다. 미국 차들은 말할 것도 없다(실제로 전혀 다니지 않는 다). 시내에 주차하기 쉽기로는 피아트 500이나 126, 또는 우노라든가 아우트 비 안키 천국이다. 그런 차들은 쫄래쫄래 다니며 틈있는 구석구석을 파고들어가, 금 방 주차할 공간을 찾아낸다. 아무튼 피아트 500은 전장이 3미터 정도밖에 안 되 니, 4미터짜리 골프와 비교해도 1미터가 짧고, 메르세데스 560에 비하면 무려 2.1미터나 짧다. 그야말로 로마를 위한 차이다. 더구나 다소 부딪치는 일이 있더 라도 무슨 상관이냐는 듯 태연자약하니,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다. 피아트 500의 이점, 그것은 궁극적으로 보도 주차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엇 보다 차도가 주차된 차로 가득하면, 횡단보도에서 보도로 올라와, 영차 하고 거 기에 주차하는 것이다. 그런 행위가 불법인지 합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틀림없이 합법적인 행위는 아니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위반 딱지를 떼고 있는 장면 을 목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뭐 자체가 작기도 하고 그다지 방해가 되지도 않 으니, 관대하게 봐주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 차는 곁에서 보기만 해도 참으로 편리해 보이는 차이다. 고속도로를 달리기에는 좀 위험하지만, 로마 시내를 이동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차라고 생각한다. 메르세데스 560이나 볼보 760(이 차는 전장 4백 85센티미터이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소위 로마 야피들 인데, 이런 사람들이 리스트란테 앞에서 주차할 공간을 찾느라 급급하고 있는 꼴을 곁눈질하며, 피아트 500의 오너가 보도에 살짝 차를 주차시키고 있는 장면 을 보면 마음이 다 후련해진다. 하기야 이런 일은 보도가 엎은 로마니까 가능한 일이지, 일본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은 종렬 주차에 특히 솜씨가 좋다. 나는 아내가 시장을 보 는 사이에, 내내 길에 서서 종렬로 주차를 하는 차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 광경 역시 로마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오락중의 하나이다. 만약 로마에 가시는 분이 계시다면 나는 콜로세움이나 바티칸 미술관보다는 이 종렬 주차 광 경을 구경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 광경은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미있다. 이 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이 주차 광경은 상당히 재미있는 구경거리인 듯, 내가 서 서 구경을 하고 있다보면, 몇 사람인가 걸음을 멈추고 열심히 구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슬아슬하게 자동차 한 대가 들어갈까말까 한 공간이 있으면, 구경거리로서 는 이 이상이 없다. 얼마 안 있어 차 한 대가 다가온다. 운전자가 속도를 점차 늦춘다.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가늠을 한다. '한번 해 보지 뭐.' 하고 생각한 다. 그 자리 조금 앞에서 차를 세우고는, 하자드 램프를 켜고, 서서히 후진을 한 다. 그 즈음에 사방에서 구경꾼들이 스멀스멀 나온다. 대개는 한가로워 보이는 아저씨들이다. 나처럼 아내가 시장을 보는 사이에, 멍하니 시간을 보내느라 구경 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에서는 흔히 팔짱을 끼고 공사 현장 같은 곳을 물끄 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가한 아저씨들이 있는데, 어쩐지 그 분위기와 비슷하다. 드라이버는 대부분 아우트 비안키 Y10을 타고 상점가에 물건을 사러 나온 보통 시뇨라(아줌마)들인데, 이 사람들이 또 운전 솜씨가 기막히다. 익숙한 손놀림으 로 매끄럽게 차를 후진시켰다가, 끼익끼익하고 몇 번 잽싸게 방향을 튼다. 그러 고는 아슬아슬하게 제자리로 쏘옥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브라보!'이다. 솜씨가 기막히게 좋을 때면, 짝짝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 이기도 하고, "페르헤트(최고)!"라고 말을 걸기도 한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아라 아를 들을 때와 똑같다. 시뇨라도 생긋 웃으며, 칭찬에 기꺼이 대답한다. 재미있 는 나라이다. 반대로 솜씨가 없어 제대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거나 하면, 노골적으로 바보 취급을 당한다. 하지만 물론 솜씨가 없는 사람도 많다. 서투른 사람은 철저하게 서투르다(서투른 시뇨라는, '어이 시뇨라, 집에 가서 파스타나 삶아!' 하고 조롱을 당한다). 나는 한 번은 그리 좁지도 않은 곳에 주차를 하려다, 앞에 서 있는 메 르세데스의 범퍼와, 뒤에 있는 시트로앵의 범퍼를 쾅쾅쾅 세 번씩이나 박는 사 람을 본 일이 있다. 일본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몸 성히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도 그냥 순순히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사자는 아주 성격이 느긋한 사람인 듯, 콧노래까지 부르며, 나 몰라란 얼굴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개 범퍼라는 것은 부딪치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퍼를 박는 일쯤은 일본에 비해 훨씬 관대하 짐나, 그래도 결코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고, 범퍼를 박고서 용서를 받 을 수 있는 한도는 한 번이나 두 번 정도이다. 앞 뒤 모두 세 번씩이라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았나 싶다. 한 번은 시칠리아에서 상대방의 범퍼를 들이받아 노면에 툭 떨어지게하고 만 사람이 있었다. 주위에는 나와 아내밖에 목격자가 없었다. 그도 남의 차의 범퍼를 부숴 놓았으니 조금은 난감했는지, 우리 쪽을 보고는 "할 수 없지. 한심한 범퍼야, 하하.하" 하는 뜻의 말을 하고, 그대로 재빨리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중 주차도 구경거리의 하나이다. 로마의 도로는 주차된 차들로 빽빽하므로, 당연히 거기에다 이중으로 주차를 하는 사람이 있다. 가끔은 삼중 주차도 있다. 원칙으로 하자면, 잠시 차를 세워 두고 일을 보고 온다든가, 그 앞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다가, 신호를 하면 바로 튀어 나와 차를 비켜준다든가, 그런 사람들이 이중주차를 하는 것으로 되 어 있다. 따라서 그런 뜻으로 이중주차를 하는 한 이중 주차를 당한 사람도 딱 히 불평은 하지 않는다. 피차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이탈리아 사람이니 일이 그렇게 수월스레 진행되지 않는다(진행될 리가 없다). 이중 주차 를 해 놓은 채 어디론가 훌쩍 가버려서,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치들이 제법 많다. 그렇게 되면 이중 주차를 당한 차는 빼내려야 빼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하염없이 클랙슨을 눌러댄다. 이 소리가 시끄 러워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식사를 하고 있는 곁에 서 이소리가 빵빵거리고 울리면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 이중 주차를 한 작자가 홀연히 돌아온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사과를 하는 사람도 있고, 한마디 말이 없 는 경우도 허다하다(대개는 사과하지 않는다. 사죄는 로마의 트렌드가 아닌 것이 다). 그래서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을라치면 한바탕 언쟁이 벌어진다. 일본 같으 면 멱살을 부여잡을 장면이다. 하지만 이 언쟁은 제스처로 끝나는 말뿐인 싸움 이라, 딱히 음습한 구석은 없다. 가끔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본 한에는 없었다. 그래서 곁에서 보고 있기에는 꽤 재미있다. "왜 이런 데다 차를 그냥 세 워 두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 폐가 된다는 것쯤은 생각해야 할 것 아니야."라고 피해자가 반박을 하면, "그래도 아무튼 돌아왔으니까, 그렇게 화를 낼 것까지는 없잖소."라고 가해자가 말한다. 전혀 기가 죽지 않는다. 이래 가지고서야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다음번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뒤바뀔지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싸움은 전혀 심각해지지 않는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린다. 딱 한 번 콜라 디 리엔초 거리에서, 이중 주차로 앞길이 막혀 차를 빼내지 못 하고 이십분 정도 기다린 젊은 여자가, 휘파람을 불며 나타난 상대편 남자에게 심각하게 달려드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러자 남자는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 다. "저 말이지, 그야 물론 내가 잘못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점은 인정하기로 하지. 하지만, 당신의 그 버르장 머리없는 말투, 역시 나와 다를 바가 없잖아." 흥미로운 나라이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중 주차한 피아트를 남자 네 명이서 달랑 들어서는, 다른 자리에 내 려놓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이런 경우도 볼보라면 좀 힘들 것이다. 란치아 이번에는 아무튼 이탈리아에서 차를 한 대 사고자 생각했다. 그리 대단한 차 가 아니라도 좋으니까, 그 차를 타고 유럽을 홀가분한 기분으로 어슬렁어슬렁 여행할 수 있는 정도의 차가 필요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이탈리아 차가 좋다. 나로서는 구형 아우트 비안키 112가 귀엽기도하여 마음에 들었지만, 아내는 피아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 어느 쪽으나 타운 카로서는 무리가 없지만, 아우 트 스트라다를 달려 긴 여행을 할 때를 고려하면 좀 힘겹겠다 싶고, 더구나 양 쪽 다 새 차는 제조가 중지되고 말았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나는 개인적 인 취향으로 란치아의 데르타 1600GTIE라는 차를 사기로 하였다. 이 차는 사이 즈도 작고, 엔진이 제법 강력한 반면 외견은 눈에 띄지 않아, 나의 희망 사항을 만족시켜 주는 차였다. 디자인도 깔끔하여 거부감이 없다. 데르타 시리즈의 라인 냅 중에서는 중급 정도의 차이다. 가격은 일본 엔으로 2백만 정도, 내 경우 세금 이 없는 외국인 넘버로 살 수 있으므로, 이탈리아에서 지불하는 가격은 1백50만 엔 정도이다. 이 차를 사는 데 상당히 품이 많이 들었다. 여러 가지 서류가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피아트 본사에 있는 란치아 딜러에게 직접 간 터라, 영어가 통하지 않는 다. 그래서 결국은 우비 씨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우선 란치아 딜러 아저씨에게 란치아 1600GT를 사고 싶다고 말한다. 머리는 벗겨졌지만 혈색은 좋은 아저씨이다. 사뭇 파스타를 좋아하는 이탈리아인다운 얼굴이다. 지금 1600은 재고가 없으니, 토리노의 본사에 주문하여, 순서를 기다 리면 한 두 달은 걸릴 것이라고, 아저씨는 말한다. 이탈리아는 지금 경기가 좋 아, 자동차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어서, 대개는 물건이 부족합니다. 더구나 1600GT는 일단은 스포츠카 타입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만들지도 않고 말이 죠, 주문한 물건이 여기에 도착하려면 그 정도 시간은 걸립니다, 라고 아저씨는 말한다. 그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쪽은 두 달이나 길다릴 수가 없다. 현 금으로 차값은 한 번에 지불하는 만큼, 어떻게든 차를 조달해 주지 않으면 곤란 하다. 이 점은 아주 명료하다. 지금 당장 차를 사든지, 아니면 안 사든지 둘 중 의 하나이다. 딱 잘라 그렇게 말한다. 그 나라에서는 이 정도로 자기 주장을 하 지 않으면, 아무리 기다려도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가 없다. 그럼 아는 딜러한테 전화를 걸어서 재고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죠, 그런데 색은 어떤 색이 좋겠습니까?라고 그는 말한다. 특별히 좋아하는 색은 없다. 흰색 만 아니면 아무 색이라도 상관없다. 꽤나 여기저기로 전화를 건 후에, 간신히 1600GT를 한 대 찾아낼 수 있었다. 색은 그리초 쿼르츠 메타르(미탤릭 다크 그레이)이다. 페르헤토, 만족스럽다. 무슨 일이든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딜러는 벤토리 씨라는 아저씨인데, 일본차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일본에서 이탈리아 차가 안 팔리는 것은, 보호주의 탓이라고 한다. 나도 일본 시장에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독일 차가 날개 돋친 듯 잘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면 보호주의고 뭐고 할 것도 없을텐 데, 라고 생각한다. 다소 가격이 비싸도, 품질이 좋고 서비스를 잘해 주면, 제품 은 반드시 팔리는 것이다. 그렇게 말을 할까 하다가 이탈리아 말을 할 줄도 모 르고, 일단 그런 말을 꺼내면 얘기가 길어지므로 적당히 흥흥 하고 듣고 흘려 버렸다. 하지만 아무튼 우리는 이번에 란치아에서 나오는 데드라라는 새차로 일 본을 타도할 테니까 말이지, 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나중에 이 데드라라는 차를 쇼 룸에서 보았는데, 실로 추악한 차였다. 하기야 사람에 따라 취향도 가지가지 일 테지만 말이다. 차가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일주일이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러쿵저러쿵하 다 결국, 차가 로마에 도착하는 데 이주일 하고도 며칠이 걸렸다. 그러나 여기는 이탈리아이므로 이런 정도의 지연을 가지고는 지연이랄 수도 없다. 일본에서 이 런 차라면 대개의 부품은 표준 장비로 갖추고 있을 테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사 정이 그렇지 않다. 우선 파워 스티어링이 없다. 카스테레오도 없다. 에어컨도 물 론 없다. 우측 백 미러가 없다. 바닥 매트도 없다. 없는 것투성이다. 고작해야 앞 좌석 창문이 파워 윈도로 되어 있을 뿐이다(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곳에, 조 그만 개폐 스위치가 거의 장난감처럼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집중 로크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시험을 해보니 집중 로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엔지니어에게 보이니, "아 참 퓨즈 넣는 것을 깜빡했군."이란다. 괜찮을까, 이 차, 하고 점점 걱 정스러워진다.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우측 백 미러와 도난 경보기를 부착한다. 양쪽을 합하 여 가격이 2만4천 엔. 경보기는 일본에서도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절대적인 필수품이다. 이런 차를 누가 훔쳐갈까 싶은 다 낡아빠진 피아트에도 이 얼람이 붙어 있다. 이게 없으면, 이탈리아에서는 자동차라고 부를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카 스테레오. 이것은 위험 부담이 아주 커서 장착하지 않기로 한다. 거 리에서 차를 세워둔 채 잠시 자리를 비우면, 그 동안 카 스테레오는 반드시 도 난당하고 만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드라이버들은 차에서 내릴 때에는 잊지 않고 카 스테레오를 쏙 빼내어 들고 다닌다. 나 자신은 일일이 그런 귀찮은 일을 하 고 싶지 않으므로, 카 스테레오는 부착하지 않았다. 추호도 카 스테레오를 들고 거리를 걷고 싶지 않다. 얼람을 장착하는 방법. 이 계기는 물론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우선 차의 엔진을 끄고, 밖으로 나오기 전에, 얼람 수위치를 켠다. 그리고 삼십초 내에 차밖으로 나와 문을 로크 한다. 그렇게 하면 얼람은 울리지 않는다. 차 안으로 들어갈 때는 훨씬 복잡하 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지 6초 안에 얼람을 해제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얼람 스위치가 터무니 없이 알기 어려운 곳에 붙어 있다. 하기야 알 기 쉬운 곳에 붙어 있으면 도둑도 금방 해제해 버리고 말 테니, 그 또한 그 나 름대로 곤란한 일이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 농담이 아니고 찾기 어려운 데 있다. 꼭 냉장고의 뒷부분 좁은 공간으로 손을 들이밀어 더듬더듬 플러그를 뽑 는 식이다. 이 짓을 문을 연 후 6초 안에 잽싸게 해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거 야 원 '스파이 대작전'같다. 땀이 다 난다. 실패를 하면 거짓말처럼 브왕브왕브왕 하는 요란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는 꼴을 당한다. 이탈리아에서 차를 운전 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그 다음은, 차의 인테리어 디자인. 이것이 의외로 빈약하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뭣하지만, 내장에 관해서는 소니니 카로라 급의 일본차 쪽이 훨씬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다. 란치아는 플라스틱 이음매 같은 부분도 까끌까끌하고, 고급스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뭐 마세라티 같은 차를 보면 내장이 무척 훌륭하지만, 이탈리아 차도 대중적인 차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적당히 만들어 놓고는 보호 주의가 어쩌고저쩌고 할 처지인가, 하고 생각한다. 일본 소비자의 대다수는 상당 히 취향이 고상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싼 돈을 들여 이런 차를 일부러 사지 않 을 것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싼 가격으로 일본차를 살 수 있는데 무엇 하 러 이런 엉터리 외제 차를 사겠는가. 내장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불평을 늘어놓은 후에, 불쑥 연료계를 들여다보 니, 연료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바늘이 영에 가까울 만치 널브러져 있다. "연료 가 얼마 들어 있지 않으니까 조금 가다가 바로 넣으세요. 너무 많이 달리면 금 방 없어질 테니."라고 공장 사람이 가볍게 말한다. 농담도 유분수지, 참 내. 시계 바늘이 벌써 한시가 넘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주유소가 문을 닫을 시간이다. 자 동식 셀프 서비스 주유소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되었건 지금부터 그런 주유소를 찾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정말 너무하다. 친절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나 휘발유가 떨어지기 전에 그럭저럭 셀프 서비스 주유소를 발견하여, 일 단 만 리라(천 엔) 어치 휘발유를 넣었다. 이제 이것으로 오케이다. 비아레 만초 니 거리에서, 담을 따라 나 있는 지하도로 들어가, 포포로 문 옆을 지나 테베레 강을 건너서, 콜라 디 리엔초를 지나 리소르지맨트 광장으로 간 다음, 집으로 돌 아온다. 한참 러시 아원인 점심 시간이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기 전부터 로마에 는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다. 덕분에 막 새로 산 차가 흙투성이가 되었다. 차의 상태 그 자체는 아주 좋다. 이제 막 뽑아낸 따끈따끈한 새 차답다. 액셀 러레이터를 밟으면, 엔진이 트위이이이이하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핸들은 명 료하게 꺾인다. 브레이크도 오차없이 말을 잘 듣는다. 서스펜션이 좀 딱딱하기는 하지만, 느낌은 좋다. 란치아 데르타 1600GTIE, 이 차가 내가 처음으로 산 기념해야 할 차이다. 그 런데 앞으로 잘 굴러가 줄까요. 로도스 5월 말에, 그리스 정부 관광국의 초정으로 로도스 섬에 갔다. 소위 '어르신, 어서 오십시오.' 하는 덤이 붙은 여행이다. 조건은 그리스의 사진 을 찍어, 가을에 도쿄에서 열리는 사진전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리스 국내라면 어디를 가든 어떤 사진을 찍든 상관이 없다. 솜씨가 없어도 상관없고, 기념 사진 이든 무슨 사진이든 상관없다. 나 외에도 열 명쯤이 의뢰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성가신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자진하여 사진을 찍지는 않지만, 부인 이 찍어도 좋다고 하기에 그렇다면 뭐 괜찮겠지 하고 의뢰를 받아들였다(단 우 리 마누라는 앵글이니 광선이니 그림자니 하고 카메라의 기능에 대해서는 까다 롭게 구는 주제에 정작 카메라 필름은 교환할 줄을 모른다). 참가자에게는 항공 권과 일주일분 경비가 지불되는데, 우리는 이미 유럽에 와 있으므로, 그 대신 로 도스 섬에서 부엌이 딸린 호텔을 반 달 정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겠다고 한다. 우리로서는 아주 고마운 제안이다. 로도스에 가서 느긋하게 에게 해의 초 여름을 즐기자고 생각한다. 우리가 로도스에 가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나는 세 번째), 지난번에는 12 월에 갔었다. 시즌이 다 지나간 시기라서 늘 그런 것처럼 호텔도 레스토랑도 가 게도 대충 9할 정도가 문을 닫은 상태, 관광객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날씨도 별로 좋지 않았다. 매일처럼 지가 추적추적 내렸다. 로도스의 겨울비는 정말 추 적추적 내린다. 그리고 그 직전에 여기에서 유럽공통체(EC) 서밋이 개최되어, 콜 총리니 대처 총리니 미테랑 대통령이니 하는 사람들이 체재한 까닭에, 온 섬에 경관 투성이였다. 경비를 위하여 온 그리스의 경찰이 로도스 섬으로 집결한 것 이다. 하지만 그들도 그 일을 끝내고는 우리와 들고나고 하는 식으로 섬을 떠나 갔다. 로도스는 축제의 뒤끝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가 머무른 호텔은 요인을 대 접하느라 지친 탓인가, 종업원들이 모두들 상당히 피곤해 하고 있었다. 겨울에도 로도스 섬은 바람이 그다지 세게 불지 않고, 미코노스보다는 훨씬 온난하여 지내기가 수월하다. 결코 따뜻한 것은 아니지만, 매서운 추위는 없다. 숲이 많아 풍경에도 그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 비유하잠녀 여성적이고 온화한 섬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이 섬이 꽤 마음에 들었지만, 그러나 계절적으 로는 너무 쓸쓸했다. 그래서 다음번에는 여름에 다시 한 번 가보기로 계획하고 있다. 로도스 공항의 바제트 렌터카 카운터에서 검정색 피아트 우노를 빌린다. 우노 는 심플하고 차를 모는 보람이 느껴지는 차로, 나도 비교적 좋아하는데, 내가 빌 린 우노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문제가 있는 엉터리였다. 스몰 라이트가 켜지지 않고, 점화 플러그가 노쇠하여 엔진이 쉽사리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사이드 브 레이크가 거의 작동을 하지 않는 형편이다. 언덕길에 차를 세워두고 볼일을 보 고 왔더니 세워둔 자리에 차가 없었다. 어어 이상하다 하고 생각했더니 언덕 아 래 철망에 코를 처박고 있었다. 이런 차를 잘도 손님에게 빌려주었다 싶은 생각 이 든다. 너무 한심스러워 따지러 갔더니, "아 이거 죄송합니다."라며 별일 아니 라는 듯 다른 우노로 교환해 주었다. 차를 교환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새 로 바꾼 차도 앞의 차나 대동소이한 상태였다. 점화 플러그의 상태도 한참 뜸을 들이는가 하면, 여러 가지 경고 램프가 차등을 하였지만, 그 대신에 풋 브레이크 를 밟을 때마다 삼계탕용 닭을 목졸라 죽이는 듯 비통한 소리가 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소리는 몹시 신경에 거슬린다. 어느 길모퉁이 바로 코앞에서 브레 이크 배드나 뭐 그런 것이 탁 풀리거나 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이 늘 따라다닌 다. 이렇게 마음을 졸여야 한다면 사이드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 차가 그나 마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어 이 털털거리는 낡은 피아 트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기로 하였다. 한 번은 닛산 체리를 탄 아저씨가 우리 를 길에서 불러세운 일이 있다.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 "당신은 일본인인 주제에 어째서 그런 피아트 같은 별볼일 없는 차를 타고 다니나. 나는 줄곧 닛산을 타 고 있는데, 세상에 이만큼 좋은 차는 없을 것일세. 잘 달리고, 고장도 안 나고, 연료비도 적게 먹고."라는 의견이었다. 하하하, 이다. 그런데 로도스는 차로 일주하기에는 마침 맞은 크기의 섬이다. 섬을 한 바퀴 빙 도는 도로는 해변을 따라 나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도 하고, 텅 비어 있다. 적 당한 해변이 있으면 거기에서 해수욕도 할 수 있고, 느낌이 그럴 듯한 타베루나 가 있으면 거기에서 카라마리 프라이와 셀러드를 먹을 수도 있다. 맥주를 마시 고 운전을 해도 뭐라 따지고 드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한가하다는 핑계로 제법 섬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녔다. 나는 에프타피게스(일곱 폭포)라는 레스토랑이 마음에 들었다. 이 레스토랑은 린도스로 가는 도로 도중에 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 산속에 있다. 이곳은 실로 신기한 레스토랑으로, 아 름다운 계곡을 따라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다. 웨이터는 이 바위 저 자위로 퐁퐁 뛰어 다니며 요리를 나른다. 그릴 요리가 이 레스토랑의 자랑거리로, 조리장의 굴뚝에서는 고기와 생선을 굽는 연기가 기세등등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상당히 좋은 냄새도 난다. 그리고 이곳에는 공작이 많이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 공작이 존재하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 다스 정도의 공작떼가 숲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바의 [날개]라는 단편 소설에, 절반은 야생화한 공작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곳에 와서야 나는 그 이야기의 분위기를 제대로 이 해할 수 있었다. 공작들이 나뭇가지에 머물러, 손님들을 내려다보면서, 그 소설 장면 그대로 "메이오! 메이오!"하고 우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카바 씨도 로도스 를 방문한 일이 있다. 그는 이 섬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로도스를 제재로하여 쓴 시도 몇 편 있다. 어쩌면 그도 이 에프타 피게스에 와서 공작을 보고, 그 이 야기를 착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골몰하느라 요리의 맛이 어땠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뭐 나쁘지는 않았다고 기억하 는데. 겨울에 로도스에 왔을 때에도 우리는 이 에프타 피게스에 들렀었는데, 그때는 레스토랑은 문을 닫은 상태였고, 공작들만이 내 집이라도 지키는 양 삼엄한 표 정을 지으며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공작들은 모두 날개를 퍼덕거리며 "메이오! 메이오!" 하고 우리를 위협하였다. 그때도 이상한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여름에도 역시 상당히 이상한 곳이다. 만약 로도스에 갈 일이 계시다면 꼭 '에프타 피게스'에 들르십시오. 꽤 흥미로운 곳입니다. 이곳을 기점으로하여 아름다운 계곡 물을 따라 산속을 하이킹할 수도 있다. 로도스에는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어, 그리스의 섬 중에서는 예외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물 과 녹음이 풍요로운 곳이다. 구 시(올드 시티)에는 타베루나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항구에 가까운 만큼, 신선한 생선과 조개류를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 많다. 비싸고 세련된 레스토 랑이 있는가 하면, 싸고 서민적인 레스토랑도 있다. 나는 세련된 레스토랑을 그 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싸고 맛좋은 레스토랑을 찾아 돌아다녔다. 올드 시티는 그렇게 성실하게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장소이다.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중심지에 가까운 골목길을 하나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서, 아주 좋은 냄새가 나는 생선구이 집을 발견하였다. 일본으로 하자면 뒷골목 드 림을 내건 꼬치구이 집이나 오뎅 집 같은 느낌의 레스토랑이다. 입구를 들어가 자 바로 커다란 숯불 그릴이 있다. 그 그릴에는 언제나 빨갛게 타오르는 숯이 들어 있다. 그 앞에는 러닝셔츠 차림의 생선구이 아저씨가 대기하고 있어 포도 주를 찔끔찔끔 마시며 얼마만큼 구워졌는지를 살피며 꼬치를 뒤집고 있다. 그 옆에는 신선한 생선이 들어 있는 쇼 케이스가 있다. 그 쇼 케이스에서 손님이 "이걸로 구워 구워주세요."라고 생선을 골라 지적하면, 아저씨가 구워 주는 것이 다. 레스토랑은 세 명이서 경영하고 있다. 영어를 모르는 숯불구이 담당 아저씨 와, 영어를 할 줄 아는 웨이터 없이 두 명이서 꾸려 나가고 있었는데, 관광 시즌 이라 한 명 늘어난 모양이다. 늘 그렇듯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잘 알 수 없지만 숯불로 구워낸 생선만큼은 참 맛있다. 생선은 뭐니뭐니 해도 잘 달구어진 숯불 에 기세 좋게 구워내는 것이 가장 맛있다. 그리고 값도 싸다. 막 잡아들인 문어 한 마리와 조그만 몽고 오징어를 세 마리 주문하고 샐러드와 프라이드 포테이토 를 먹고 레티나 포도주를 한 병 마시고 빵까지 곁들여 먹고 배가 잔뜩 부른 후 에 계산을 하니 전부 천오백 엔 정도였다. 게다가 몇번을 다녔더니 디저트로 수 밀까지 덧붙여 주었다. 이 생선구이 집에는 휴대용 간장을 지참해 가면 아주 좋 다. 막 구워낸 생선이나 오징어에 레몬을 짜 듬뿍 뿌리고, 몰래 가지고 간 간장 을 살짝 끼얹으면(당당하게 해도 무방하지만), 그야말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 도 모를 맛이다. 이 생선구이 집에는 동네 사람들이 자기 생선을 들고 오기도 한다. 숯불에 구 워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이다. 숯불에 구워주는 값을 지불하는지 않는지는 나 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도 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아마도 서비스로 해주는 것 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생선이 맛있게 다 구워지면(정말 맛있어 보인다) "자 그럼."하고 그냥 돌아간다. 그러고는 집에 가 서 온 가족이 모여 숯불에 구운 생선을 맛있게 먹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본 에서도 옛날에는 선물로 들어온 생선이 있으면 동네 생선가게 아저씨가 서비스 로 다듬어 주기도 했다. "아저씨 미안하지만."하고 들고 가면, "아아, 해드리죠." 하고,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내고 비늘을 싹 벗겨 깨끗하게 다듬어 주었던 것이 다. 그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스에서는 이외에도 동네 사람이 오븐이 필요한 경우에는 빵가게 아궁이를 빌리는 일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빵에 다른 음 식물의 냄새가 배면 곤란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 나라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일 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다. 유유자적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유유 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나 이런 일에 유유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머무른 호텔 지배인이, 나와 아내를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초대해 주었다. 일본인 작가가 그 호텔에 가니 잘 부탁한다고 정부 관광국이 요청한 모양이었다. 지배인은 스파누디스라고 하는 삼십대 전반 정도 의 사람이다. 제법 큰 호텔이니만큼, 그 나이에 지배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례적 인 활약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아버지 사업관계로 이집트에서 태어나, 파 리 대학에서 수학하고, 4개 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아는 국제적인 인텔리이다. 그리스풍 야피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우리를 위해 마련해 준 요리도 순수한 그리스 요리에서부터, 특별히 만들게 한 일본풍 새우 튀김요리까지, 상당히 정성 을 들인 호화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이 스파느디스 씨는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아무래도 호텔의 경영 상태가 뜻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로도스 에 찾아오는 단골 손님들은 우선 영국인, 그리고 북구인, 세 번째로 독일인, 이 런 순서였습니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요즘 영국의 세제가 싹 바뀌어 연금 에 세금이 붙게 되었죠. 그래서 영국인들의 발길이 뜸해졌어요. 로도스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관광객은 오는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기업의 육성 을 위한 노력을 얼마간 게을리 하였죠. 그래서 리피트 수가 점점 감소하고 있습 니다. 유감스럽게도 한 번 온 손님에게 다시 또 오고 싶은 기분이 들도록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어중간하게 개발을하여, 소박한 멋도 사라지고 말았고, 그렇다고 세련되지도 못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로도스는 한 번 가서 구경하면 그 다음에는 다시 갈 필요가 뭐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런데다 다른 여러 나라들이 관광에 본격적으로 투자를 하기 시작했죠. 관광 산업에도 제대로 자본을 투자하면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죠. 더구나 외화가 캐시 카드로 들어오 니. 예를 들면 터키라든가 튀니지, 스페인, 유고슬라비아, 그런 나라들이 말이죠. 그런 나라들은 무엇보다 물가가 싸거든요. 옛날에는 그리스도 물가가 싸다는 명 목으로 관광객을 유치하였죠. 하지만 최근에는 그렇지가 않아요. 물가가 싸다는 점에 관해서는 그런 관광 후진국을 우리가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독일인들은 그쪽으로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딱히 그리스까지 가지 않아 도, 유고에도 아름다운 비치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 래서 로도스에 오는 관광객들의 총수는 이제 한계점에 도달했다고나 할까, 점점 약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한때 경기를 타고 호텔을 무턱대고 지 어 놓았으니, 당연히 방이 남아 돌아가죠. 6할 정도밖에 가동하고 있지 않아요. 엄밀하게 계산하면 이 정도 가지고는 종업원들 월급 주기도 힘듭니다.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지요. 관광업이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경쟁도 심해졌지만, 경쟁과는 상관없이 관광 산업은 사소한 일로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거든요. 가령 어떤 관광지에서 미국인을 노린 테러가 발생하면, 미국인들은 한동안은 전혀 그곳을 찾지 않죠. 전염병이 유행을 하여도, 바닷가 오염되면 아무도 해수욕을 하러 오지 않죠. 체 르노빌만 해도 영향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위험 부담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어요. 어렵습니다. 정말 어려워요. 위경련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당신네들은 그리스는 관광 자원이 풍부하니까, 관광산업을 살려 나라를 세우 면 좋지 않으냐고 말하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나라를 만드는 것은 아주 위험 한 일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사소하고 우발적인 동향의 변화로 국가 재정이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방법보다는 우리는 역시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안정된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번 통합 구주 시장에 참 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으리라고 생각해요.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에 비하면 우리 나라의 경제는 비교 가 안 될 만큼 빈약하니까요. 일시적으로는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파도에 떠밀 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인플레가 도래할지도 모르죠. 그런 의미에서 통합 시장 참 가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지 않아요. 장기적 인 안목으로 보면, 이것은 바람직한 선택입니다. 우리들은 구주 공동체의 일원으 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평탄한 길은 아닐 것임이 분 명하지만. 우리는 흐음흐음 고개를 끄덕거리며 스파누디스의 얘기를 듣고, 새우 튀김요 리를 먹었다. 섬 생활이 남 보기에는 편안해 조여도 실은 여러 가지로 힘겨운 모양이다. 우리로서는 수많은 문제들이 깨끗하게 해결되어 스파누디스 씨가 싱 글싱글 웃으며 명랑한 얘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뭐가 힘드니 어쩌니 해도, 역시 가장 힘든 것은 사람을 쓰는 일입니다, 라고 스파누디스 씨가 말한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가, 또는 확보할 수 있는가, 호텔 사업은 거기에 달려 있어요. 하지만 좀처럼 내 마음 같 은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죠. 제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스파누디스 씨는 우리에게 무척 신경을 써주었다. 과일이니 포도주니 캔이니 하는 것들을 종종 방에다 들여보내 주었다. 늘 생각하는데, 그리스 인들은 정말 성실하다. 특히 인텔리 계층은 늘 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생각을 너무 한 나머지 어두운 세계로 점차 빠져들어가는 경향도 없지 않다. 영광스런 역사 를 구축한 그리스 인이란 점에 긍지를 느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국가가 껴안고 있는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그들은 분열적으로 음울해지는 것 같다.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이러니저러니 생각하지 않고 형편 닿는 대로 아니면 형편 좋은 것 만을 취하며 재미있게 살면 되지, 하고 태평스럽게 마음을 고쳐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부분은 참 안됐다 싶다. 그러고 보면 조르바도 언뜻 보기에는 편안 하게 사는 듯하지만 제법 철학을 하고 있다. 하루키 섬으로 하루키 섬에 가기로 한다. 만약 당신의 이름과 똑같은 이름의 섬이 에게 해에 있다고 하면, 당신 역시 한 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겠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루키 섬은 HARUKI 섬이 아니다. 영어로 기술하면 KHALKI가 된다. KHA는 대충 카와 하의 중간음(창기즈 KHAN의 KHA), 루는 R가 아니고 L이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이 발음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거의 보통으로 발음하는 일본어의 '하루키'에 아주 가깝게 들리고, 내가 일본말을 하 듯 하루키라고 발음해도 아무 문제 없이 통한다. 따라서 내 이름과 동명의 섬이 라고 해도 뭐 상관은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하루키 섬은 에게 해 중에서 터키 연안을 따라 전개되는 드데카니스 제도 열 세 섬 중의 한 섬이다. 드데카니스란 그리스 말로는 '열두섬'이란 뜻인데, 이 제 도에는 사람이 사는 섬이 전부 열세 개 있다. 영어권에서는 열셋이란 숫자를 꺼 려 열세번째는 '빵가게의 덤(BAKER'S DOZEN)'이라고 하는데, 이 드데카니스 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열세번째 섬은 카스테르리초라는 섬인데, 이 섬은 다른 열두 섬이 동맹을 맺어 대 터키 독립 전쟁에 맞선 얼마 후에 동맹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빵가게의 덤이 되고 만 셈이다. 그건 그렇고 하루키 섬은 드데카니스 제도 중에서도 로도스 섬에 가장 가깝고 따라서 로도스에서 가는 편이 가장 가깝다. 섬에는 공항이 없으므로(공항은커녕 버스 정거장 조차 없다), 배를 타고 가는 수밖에 없다. 가는 길은 두 종류가 있다. 우선은 로도스의 항구에서 크레타로 가 는 커다란 배를 타고 가는 길. 이 배는 도중에 하루키 섬을 들러가므로 거기에 서 내리면 된다. 단 이 배는 일주일에 두 번밖에 다니지 않으므로 좀 불편하 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로도스 시내에서 서쪽으로 연안을 따라 45킬로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간 스타라 카미로스라는 조그만 항구에서, 소형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길이다. 스카라 카미로스까지 가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이쪽에서는 배가 매일 떠난다. 우리는 이 스카라 카미로스까지 가서 배를 타는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지도 를 보면 이 스카라 카미로스는 마을처럼 보이는데, 막상 가서 보니 전혀 마을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항구에 선착장이 하나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선착장 이외 에는 들판 같은 주차장이 있고(여기에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배를 타는 것이다), 생선 요리를 파는 티베루나가 세 군데 있기는 하지만, 인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배를 기다리는 손님은 타베루나에 앉아서, 포도주나 맥주를 마시며, 햇 볕을 쪼인다. 이곳에서는 햇볕을 쪼이는 일 정도밖에 할 일이 없다. 관광객의 모 습도 거의 없다. 로도스로 물건을 사러 갔다 오는 하루키 섬의 서민이 비감동적 인 얼굴로 자기 집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일요일을 제외하면, 하루키 섬으로 가는 배는 이 스카라 카미로스 항구에서 오후 세시에 출발, 이튿날 아침 일곱시에 돌아온다. 배는 두척이 있다. 한 척은 '하루키 호', 또 한 척은 '아프로디테 호'이다. 이 두배는 경영자가 전혀 다른데, 어찌된 셈인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떠난다. 양쪽 다 오후 세시에 항 구를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 일곱시에 돌아온다. 다른 시간대를 이용하면 손님도 편리할 것이고, 무익한 손님 따내기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텐데, 이 두 배는 똑 같은 타임 테이블로 운영되고 있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루키 호는 아프로디테 호보다 조금 더 예쁘장하여, 일단은 관광적 노력을 기울인 듯 보인다. 객실도 청결하다. .일광욕을 하는 갑판도 넓다. 편도 6백50도 라크마. 아프로디테 호는 승객 외에도, 채소니 일용잡화니 하는 화물도 실어 나 른다. 자동차도 싣는다. 이쪽은 5백 도라크마. 하지만 우리는 하루키 호에 타기 로 하였다. 배의 이름에 이끌린 까닭도 있지만, 그 가장 큰 이유는 선장이 스가 하라씨를 닮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스가하라 씨는, 독자는 물론 아시는 바가 없을 테지만, 이전에 우리가 살았던 치바의 집 담을 만들어 준 사람이다. 아주 정성스럽게 일을 하는 친절한 아저씨라 우리는 꽤 친해졌다. 이 집 뜰에는 라일 락이 어울린다면서 일부러 라일락 나무를 가지고 와서는 심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집을 비울 때면 물을 주러 오기도 했다. 이 그리스의 스가하라 씨도 상당히 친절한 사람으로 우리가 시간이 도기도 전 에 배 가까이 갔더니 아아, 사양하지 말고 올라와요, 라면서 배의 부엌에서 커피 를 끓여주었다. 섬에서 머물 장소가 없거들랑 배의 벤치에서 자도 좋아요, 라고 말한다. 아주 순박한 섬인 모양이다. 손님은 전부 열 명. 승무원이 세 명. 이래 가지고서 연료비나 나올까, 하고 남 의 일이지만 걱정스러운데 배는 정확하게 세시에 항구를 떠났다. 아프로디테 호 도 바로 뒤이어 출항한다. 양쪽 배는 서로 협의라도 한 듯 항로도 속도도 똑같 다. 배는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무인도를 가르듯 앞으로 나아간다. 스가하라 씨는 조종실에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키를 잡고 있다. 6월 초순의 바람은 아 직 싸늘하여 소름이 쫙 끼칠 정도인데, 태양은 따스하고, 기분은 상쾌하다. 밀가 루를 뒤집어쓴 듯 하얀 바위에 포도주 빛으로 밀려간 파도가 소리도 없이 하얗 게 부서진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일광욕용 갑판에서 엔진 소리를 들으며 시간의 흐름이란 현상에 대해 이리저리 궁리를 하고 있는 사이에(그런 걸 생각해 봐야 딱 부러지는 수도 없건만, 이내 생각하고 만다), 끄덕끄덕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뜨니 벌써 눈앞에 하루키 섬이 보인다. 하루키라는 섬은 아주 작은 섬이었다. 거기에는 마을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오로지 한 군데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전부 산과 황무지이다. 길도 제대로 나 있 지 않다. 길이 없으니 당연히 차도 거의 없다. 배와 당나귀가 이 섬의 주요 교통 기관이다. 포포포, 하는 어선의 엔진 소리가 이 섬의 유일한 소음이다. 마을은 항구를 둘러싸듯 펼쳐져 있다. 항구는 언덕으로 동그랗게 둘러싸여 있 고, 그 완만한 분마기 같은 경사면을 따라 집들이 어깨를 포개듯 모여 있는데, 그 광경이 무척 아름답다. 네모난 집들은 모두 새하얗게 칠해져 있고 빨간 지붕 은 비스듬한 삼각형이다. 하얀 벽에는 세로로 긴 창문이 규칙적으로 나 있다. 대 개의 건물이 비슷비슷한 스타일이다. 일본의 집들처럼 각자 좋아하는 색과 모양 으로 짓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하얀 벽, 빨간 지붕, 네모난 모양, 세로로 긴 창 문. 창틀과 덧문과 문만 집에 따라 각기 다른 색이다. 코발트 블루이거나 선명한 초록색이거나, 토마토 같은 빨간색이거나, 새먼 핑크로 칠해져 있다. 멀리서 보 면, 빵집 상자가 줄줄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교회가 있고 돌로 만 든 아주 근사한 시계탑이 서 있다(시계는 십오분 늦다). 집들 위로는 새파란 하 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감색의 선명한 바다 위로 집 그림자가 또렷하게 새겨 져 있다. 그것이 하루키 섬이다. 나는 이 섬이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하루키 섬에는 민박을 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고, 호텔은 딱 하나 있다. 민박은 선착장 바로 앞에 있고, 호텔은 거기에서 항구를 따라 십분 정도 걸어간 곳에 있다. 배에서 내리면, 조그만 여자 아이들이 쪼르르 쫓아와 "ROOM?" 하고 수줍은 듯 묻는다. "YES"라고 대답하면 방긋 웃으며 자기 집으로 데릭 간다. 가 격은 대충 두 사람이서 천 엔 정도이다. 불결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청 결하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다. 그저 평범한 그리스의 민박이다. 항구 앞에는 타베루나가 세 채쯤 나란히 서 있다. 간이 매점이 하나 있어, 꼽 추 청년이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각종 잡화를 파는 조그만 가게가 있 다. 빵집 같은 분위기의 가게도 있다(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확신은 못하겠 다). 그 외에는 가게란 이름이 붙어 있는 데는 한 군데도 없다. 우리가 길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스가하라 씨가 다가와 어이, 뭐라도 마십시다, 라고 한다. 그래서 나와 아내와 스가하라 씨는 타베루나에 들어가 맥주를 마셨다. 스가하라 씨는 하루키 섬에 사는 사람이다. 이 섬에 집이 있고 부인과 아이가 있다. 배는 자기 재산이라고 한다(이 사람은 틈만 나면 배를 닦고 있기에, 나도 그렇지 않나 하고 상상하고 있었다). 이 섬의 인구가 3백 명이라고 가르쳐 준 것도 스가하라 씨다. "하지만 옛날에 는 이 섬에도 이만 명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모두들 스퐁고 잡이였죠." "스퐁고?" "음, 스퐁고." 귀기울여 들어보니 스퐁고란 해면을 말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스헌지이다. 이 주변 섬 사람들은 대부분이 해면을 채취하는 데는 전문가이고, 이 해면이 옛날 에는 상당한 돈벌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공스펀지가 생기고, 옛날만큼 스펀 지 채취량이 많지 않아지자, 그런 탓에 생활이 궁핍해져 모두들 미국으로 이민 을 갔다고 한다(바위투성이인 이 좁은 섬은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다). 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미국으로 간 사람들은 거의가 플 로리다에서 해면 채취업을 하고 있죠."라고 스가하라 씨는 말한다. 플로리다에 타폰 스프링이란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는 하루키 섬에서 이민간 사람들이 모여 커뮤니티 비슷한 것을 조직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섬 사람들은 자랑스런 해 면 채취 전문가인 것이다. 스가학라 씨는 우리에게 맥주를 사 준다. 우리가 마신 맥주 값을 치르려고 하자 웨이터가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요, 그 냥 놔 두세요. 이 선장님은 머리가 좀 이상하니까."라고 말하며 히죽 웃는다. 고 맙게 맥주를 얻어 마셨다. 우리고 우리는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 있는 해변까지 걸었다. 언덕의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자, 양쪽으로는 돌로 만든 집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빈집 이다. 어떤 집은 문이 꼭 잠긴 채 방치되어 있다. 아마도 그 집 사람들은 플로리 다에서 정기적으로 고향에 돌아오곤 하는 모양이다. 집을 비우고 있는 동안은 장기적으로 문을 잠가 두는 것이리라. 또 어떤 집은 절반쯤 허물어져 있고 뜰에 는 잡초가 무성하게 피어 있다. 그런 집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전혀 느껴지 지 않는다. 완전히 버려진 것이다. 마을 어귀에는 그렇게 죽은(혹은 가사 상태 의) 집들이 처마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해변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계탑 근처의 언덕길에서 한 할머니와 스쳐 지나갔 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그녀는 아주 반갑다는 듯 생긋 웃고는 앞치 마 주머니에서 무화과 열매를 꺼내 아내와 나에게 두 개씩 주었다. 걸쭉하고 싱 싱한 무화과였다. 하루키 섬은 이렇듯 평화스러운 섬이고 외지에서 온 손님이 있으면 모두 친절하게 이런저런 것들을 준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은 그리스의 진짜 시골이 아니면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하루키 섬에서 있었던 일 중에 기억나는 것은, 이른 새벽 닭들이 울어 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일. 이렇게 굉장한 닭 소리는 난생 처음으로 들어본 다. 그도 그럴 것이 온 섬의 닭이란 닭이 아직 날이 채 밝지도 않았는데(시계를 보니 네시 사십오분이었지만, 그리스는 그때 서머 타임중이었으므로, 실제로는 네시도 안 된 시간이다. 당연히 밖은 캄캄하다), 일제히 '꼬끼오 꼭꼬꼬!' '꼬끼오 꼭꼬꼬꼬!' 하고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어 외치는 것이다. 어지간히 폐활량이 큰 닭인가 보다. 거의 파리 코뮌 같은 일대 소동이었다. 우리는 그 아침 배로 로도스로 돌아왔다. 스가하라 씨는 다시 배를 운전하고 우리는 갑판에서 잠을 잤다. 승객은 모두 열 명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키 섬 에 딱 하룻밤을 묵었다. 무척 느낌이 좋은 섬이었고 좀더 오래 머물러도 좋았지 만 그와 동시에 이 정도로 퇴장하는 게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루키 섬 은 아주 얌전하고 조용한 섬이었다. 거기에는 친절한 스가하라 씨가 살고 있고 자동차 대신에 당나귀가 활약을 하고 스퐁고 잡이들이 사라진 빈 집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우연히 지나친 할머니가 생긋 웃으며 무화과 열매를 주었다. 나쁘 지 않다.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섬이 그런 장소였다는데 만족하였고, 안심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이튿날 아침 다시 로도스로 돌아왔다. 카르파토스 로도스 섬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전혀라고 해도 무방하리만큼 신문을 읽지 않 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해변으로 나가 일광욕을 하고 구 시가지를 산책하거나 아니면 베란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감정교육]이니 [장미의 이름]이 니 가지고 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런 생활을 하고 있으면, 신문을 읽 고 싶다는 마음이 일지 않는다. 세계는 세계 제멋대로 돌아가게 내버려두면 되 지 싶은 기분에 젖는 것이다. 오랜만에 신문을 사 읽은 것은, 6월 6일의 일이었다. 우리는 기분 전환삼아 카 르파토스 섬으로 짧은 여행을 하려는 생각에 로도스 공항으로 갔다. 그러고는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는 사이에 매점에서 헤럴드 트리뷴을 사 읽은 것이다. 그런데 이 6월 6일자 신문은, 거의 숙명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무거운 기사로 메워져 있었다. 우선 첫째로, 베이징에서 인민 해방군에 의해 2천으로 추정되는 학생, 시민이 사살당했다는 기사. 장갑차가 천안문 광장에 친 텐트를 짓뭉개 버 리고 여학생은 그 가슴에 총검이 찔렸다. 각지에서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고 그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란에서는 며칠 전에 호메이니 옹이 죽었 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테헤란 거리를 메우고, 몇몇 사람은 짓밟혀 죽기까지 하였다. 소비에트에서는 가스 송유관이 폭발, 그 근처를 지나고 있던 열차가 화염에 싸여, 5백 명 이상의 승객이 죽었다. 사체는 흐물흐물 녹아 내려, 신원을 확인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고 기사에 쓰여 있다. 세계는 피투성이 고 죽은 자로 그득했다. 그리고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매일 로도스 해변에서 뒹굴며 버찌를 먹고 있는 사이에. 베이징에 관한 기사는 읽으면 읽을수록 기분이 침울해졌다. 그것은 도저히 구 제의 여지가 없는 이야기였다. 만약 내가 스무 살이고 학생이며 베이징에 있었 다면 나 역시 그 장소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내 쪽을 향하여 날아오는 탄환을 상상한다. 그 탄환이 내 살을 뚫고 들어와 뼈 를 부수는 감촉을 상상한다. 그 공기를 짓찢는 핑-하는 소리를 상상한다. 그러고 는 천천히 찾아오는 어둠을 상상한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있지 않다. 나는 로도스 섬에 있다. 여러 가지 사정이 나 를 이 장소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해변 의자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면서, 버찌 를 먹고, 플로베르를 읽는 내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기정 사실로 서. 그리스의 섬 이야기를 하자. 카르파토스 섬은 아무리 편을 들려고 해도, 귀염성 있는 가련한 섬이라고는 할 수 없다. 로도스가 숲과 아름다운 해변이란 은총을 받은 밝은 양성의 섬이라 고 하며, 카르파토스는 까끌까끌한 감촉만 느껴지는 거친 섬이다. 거기에는 붙임 성이라는 것이 없다. 산은 험준하고 그위로는 손님용의 두꺼운 방석 같은 회색 구름이 언제나 걸려 있다. 바람은 세게 불고 파도는 거칠다. 땅은 바위투성이이 고 숲이라 부를 만한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바위투성이 산에 매달리듯 자란 궁상스런 수목은, 바람 탓에 가지가 모두 같은 방향으로 휘어져 있다. 또 평지라 곤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온 데가 울퉁불퉁하다.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 는 것만으로도 어이휴, 이런 섬에 내가 왜 왔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정직하게 말해 이대로 우향우를하여 로도스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럴 수는 없다. 카르파토스의 인구는 7천이라고 택시 운전사가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말이죠, 여름이 되면 만오천 명 정도가 미국에서 돌아온답니다. 돌아온다고? 모두들 미국에 일을 하러 가 있거든요. 여기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으니. 그러니까 여름에는 휴가를 받아 고향을 찾는 것이죠. 7월과 8월에 돈을 듬뿍 벌 어 가지고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섬 사람들은 제법 유복합니다. 미국에 있는 가 족들이 부쳐주는 돈이 있으니까 관광업에 아득바득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 죠. 여름에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성객들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바쁘 니까, 관광객이 온다 해도 그다지 달갑지가 않아요. 과연 카르파토스는 관광업에 열심인 섬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호텔도 그리 많지 않고, 관광 시설도 별로 충실하지 않다. 적당히 꾸려 나가고 있는 듯한 분 위기이다. 로도스 같은 섬에 비하면 사람들의 인상도 안 좋다. 뾰루통한 느낌의 사람들이 많다.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란 느낌이 별로 없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싱긋 웃지조차 않는다. 도로 사정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터무니없이 엉망이다. 그런데 비하면 차는 고급차가 많다. 메르세데 스라든가 BMW라든가, 아우디 같은 차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것도 번쩍번쩍하 는 새 차이다. 돈이 많은 건지, 가난한 건지 알쏭달쏭한 섬이다. 그러나 아무튼 이민이 많은 덕분에 영어 하나는 잘 통한다. 그것도 유창한 미 국식 영어가 여기저기서 떠들썩하게 들린다. 도로 공사장의 인부 아저씨가 동료 를 향해 "헤이 퍽 유, 맨!"이라 소리치며 하는 얘기를 들으면 "도대체 여기는 어 디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알 수 없는 섬이다. 영어만이 아니고, 이탈리아 어도 통한다. 이 섬도 로도스와 마찬가지로 무솔리 니 시대에 약 삼십년간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이.터 전쟁 당시 트리폴리와 터키를 연결하는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하여 드데카니스 제도를 점령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대로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렌터카 사무소의 가트리스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혼혈이다. 이 사람 역시 웃는 낯을 볼 수 없는 무뚝뚝한 남자인데, 이탈리아의 한 거리에 서 있는 가트리스의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사진은 렌터카 사무소의 벽에 걸려 있었다), 느릿느릿하고 붙임성 없는 목소리로 자신이 출생한 경위를 이야기해 주었다. 가트리스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군의 군인으로 이 카르파토스 섬에 주둔하고 있었다. 원래는 밀라노에서 과자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사람이 이런 촌 구석에서 여자 냄새조차 맡지 못하고 견딜 리가 없다. 어느 틈엔가 이 섬 아가 씨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탈리아 군이 연합군에 항복 하여 이탈리아군은 귀국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트리스의 아버지는 아가씨와 헤 어지기가 괴로워 탈영을 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군은 온 섬을 수색하였지만 아 가씨가 가트리스의 아버지를 어디에다 감쪽같이 숨겨두고 있어 찾아내지 못했 다. 그러고는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모두들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말았 다. 그리하여 가트리스의 아버지는 아가씨와 축하 속에 결혼을 하였다. 그로부터 머잖아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사랑의 결실로서 가트리스가 태어난 것이다. 가트 리스는 성장하여 땀 냄새 물씬 나는 러닝셔츠를 입고 수염을 짙게 기른 아버지 가 되어 다 낡아빠진 렌터카를 관광객에게 빌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 역사란 대 체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카르파토스에는 '에이비스'라든지 '하츠' 같은 대형 렌터카 사무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트리스 같은 시골 렌터카 사무소가 두세 곳 어찌어찌 영업을 하고 있 는데, 자동차 수는 놀랄 만큼 적다. 질도 좋지 않다. 도로가 너무 형편없는 탓이 다. 공항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는 번듯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외의 도로 (즉 섬의 대부분의 도로)는, 거의 최악의 길이다. 당나귀조차도 눈썹을 찡그릴 것이다. 번쩍번쩍하는 새 차를 끌고 와, 섬을 한 바퀴 돌았다가는 그대로 온통 덜컹거리는 헌 차가 돼 버릴 만큼 엉망이다. 따라서 자동차는 모두 너덜너덜한 헌차이다. 우리는 할 수 없이, 1만 도라크마를 내고 똥차 같은 구형 오페르 코르 사를 빌렸다(다른 섬에 비하면 대여금이 상당히 비싼 편이다). 그런데 운 좋게도 이 오페르는 겉보기에는 참신한데, 비교적 정상적으로 달렸다. 아마도 가트리스 가 매일 정성스레 정비를 하는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오페르를 타고 바위투성이 산을 넘어 키라 파나기아라는 해변으로 갔다. 길은 엉망진창으로 울퉁불퉁했지만, 이 키라 파나기아는 아주 매력적인 해변 이었다. 교통편이 나쁘니까 찾아오는 사람도 적다. 해변까지는 배로도 갈 수 있 지만, 그 배란 것이 일주일에 두 번밖에 뜨지 않으므로, 울퉁불퉁한 길을 렌터카 나 오토바이를 타고 제 힘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드넓은 해안에, 해 수욕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열 명 정도에 불과했다. 여자들은 모두 윗도리 를 벗고 있었고, 몇몇은 알몸이었다. 태양은 한없이 뜨겁고 바다는 파랗고 차갑 고 투명하다. 삼십분 정도 한껏 해수욕을 즐기고 그러고는 비치에 누워 잔다. 아 주 좋은 기분이다. 잠이 들 때 다시 한 번 천안문 사건을 생각한다. 그러고 자신 이 세계의 저 끄트머리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된다. 아니, 어 쩌면 나는 이미 세계의 끄트머리에서 굴러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카르파토스에서 관광객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날씨가 좋으면 해변에서 뒹굴뒹굴 지내면 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섬의 날씨는 상당히 불안정 하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배를 타고 올림포스 마을에 가는 길밖에 없다. 올 림포스는 남북으로 길쭉한 이 섬의 북단 가까이에 있는 고립된 마을이다. 이 마 을은 오랜 세월 고립되어 있는 탓에 몇 세기 전이나 옛날의 습관이며 언어며 생 활 양식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고 가이드 북에 쓰여 있다. 여자들은 아직도 민족 의상을 걸치고 풍차를 사용하여 보리를 찧으며, 남자들은 카페니온에 모여 민족 악기를 연주하는 모양이다. 이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섬의 북단에 있는 디 아파니라는 마을까지 배를 타고 거기서부터는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 한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배편과는 시간대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렌터카 를 이용하여 가볼 생각을 하였는데 차를 빌릴 때 가트리스는 힐끗 눈총을 주며 다짐하였다. "당신 이 차로 올림포스까지 가는 건 무리예요."라고, 그는 카르파토 스의 지도를 가지고 나와 굵은 손가락으로 그 한가운데께를 꾹 눌렀다. "여기까 지는 그런대로 길이 괜찮지만, 그 다음은 극단적으로 나빠지니까 가면 안 돼요."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는 "체, 무슨 상관이야, 올림포스까지 반드시 가 보이 고 말겠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를 소중히 다루고 싶으니까 과장스럽게 말 을하여 겁을 주는 거겠지 하고 넘겨짚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도 중에서 올림포스행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가트리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고 만 것이다. 해안을 따라 나 있는 길은 좁고 바위와 구멍투성이로 까딱 잘못하다가는 벼랑으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르는 아찔 아찔한 길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커다란 돌을 하나만 까딱 잘못 피해 도 그 돌이 차의 동체에 부딪혀 몇 번인가 엔진이 꺼지고 말았다. 딱딱하고 마 른 노면에 흩어져 있는 자잘한 자갈돌 덕분에 커브 길에서는 덜컹덜컹 차꼬리가 흔들렸다. 해안가 길을 벗어나 산속으로 접어드니 이번에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3미터 앞에 있는 것조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의 길을 '그런대로'라고 한다면, 앞에 있는 길은 '극단적으로 나쁜'길이라 는 말이 어느 정도를 뜻하는 것인지 대충 상상이 갔다. 그런 사연으로 우리는 끝내 올림포스 마을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훗일 우리는 올림포스 마을에 택시를 타고 갔다는 그리스 사람을 만났다. 그 가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나는 올림포스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눈을 감고, 하 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죠."란다. 꽤나 잔혹한 길이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탓에 카르파토스에서는 정말 할 일이 없었다. 타베루나의 요리도 몇 가 지 맛을 보았지만, 그다지 맛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호텔 근처에 있는 '세븐 일레븐'이란 카페에서(안 믿을지도 모르겠으나 정말 그런 이름이다), 한가로이 일광욕을 하고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이 카페는 이름은 한심한 반면 요리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스브라키도 맛있었고 프라이드 포테이토는 상 당한 수준이었고 본격적인 햄버거도 먹을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 햄버거를 주문 하면 대개는 햄버거라는 말은 이름뿐이고 보기에도 끔찍하여 가슴이 컥컥 막히 는 엉터리가 나오는데, 이 카페의 햄버거는 확실하게 미국화한 멋들어진 것이었 다. 고기는 쫄깃하고 양파와 토마토까지 틀림없이 들어 있다. 빵도 틀림없는 햄 버거용 빵이고 마스타드도 제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이것도 어쩌면 미국으 로 이민간 사람들의 공적인지 모르겠다. 가격도 그런대로 쌌다. 맥주 세 병과 스 브라키와 햄버거와 프라이드 포테이토에 천 엔 하고 조금이다. 우리는 하루에 두 번씩 이 카페에 갔다. 카르파토스에서의 생활이 이런 식이어서, 내가 카르파토스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무뚝뚝한 그리스=이탈리아 혼혈인, 렌터카 사무소를 경영하는 가트리스와, '세븐 일레븐'의 맛있는 햄버거 정도이다. 그리고 유난히 핀란드 인 관광객이 많았던 것. 무슨 이유에선지 이 섬은 핀란드 인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 는 것이다. 보잉 727이 핀란드 인을 잔뜩 태우고 헬싱키에서 쉴 새 없이 날아온 다. 레스토랑에 들어가도 호텔에 들어가도 반드시 핀란드 어 설명서가 있다. 어 째서 핀란드 인이 이 섬을 특별히 좋아하는지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 섬이 카르파토스. 다시 또 이 섬을 찾고 싶은가, 란 질문을 받는다면 "지 금으로서는 별로 그러고 싶은 기분이 안 든다."라고 대답할 도리밖에 없다. 카르 파토스 섬에 사는 여러분들께는 미안하지만. 선거 그리스에서는 선거 때 투표를 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이다. 헌법에 그렇게 정해져 있다. 따라서 정당한 이유 없이 투표를 하지 않은 자는, 위법 행위를 한 자로 취급하여 법률에 따라 벌을 받는다. 이 점이 일본의 선거 와 그리스 선거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강제적인 투표 제도가 선거의 존재 양식으로서 정당한가 아닌가는 나로 서는 쉬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특히 선거에 관한 한은 그리스가 일본보다 훨씬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으므로, 내가 뭐라 가타부 타할 처지가 아니라는 기분도 든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선거권이 있는 국민은 누구든지 반드시 선거장에 나가 투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이건 좀 골치 아픈 부분이다-투표권은 반드시 자신의 출생지에서 행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데살로니카에서 태어나 아테네에 살고 있는 사람 은,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데살로니카의 자신이 태어난 촌이든 읍으로 돌아가, 그곳 투표장에서 투표를 해야만 하는 셈이다. 나는 이 법률의 취지와 목적을 아무래도 잘 납득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아테네에서 투표를 하든 데살로니카에서 투표를 하든, 한표는 어디에서나 똑같 은 한 표이지 않은가. 어째서 애써 고향까지 돌아가 투표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필시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인한 표의 낙차가 생기는 것을 막으 려는 법일텐데, 그건 그렇더라도 좀더 다른 제도를 만들어 표의 낙차를 시정해 가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나는 몇몇 그리스 사람에게 이 점에 대해 질문해 보 았짐나, 별로 납득할 만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이 귀성 투표제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무엇인가 하면, 말 할 필요도 없이 교통 혼잡이다. 안 그렇겠는가. 온 나라 사람들이 일제히 고향으 로 돌아가는 셈이니, 그 전후로는 버스도 전철도 비행기도 도로도, 모든 교통 기 관이 꽉꽉 만원이 되고 만다. 지정석은 한 달 전에 이미 다 팔린다. 프리 여행자 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교통 혼잡을 당하면, 비극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곳으로도 이동을 할 수가 없다. 있던 자리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도리 밖에 없는 것이다. 1989년 6월 18일, 그리스에서 총선거가 있었다. 전에도(1987년) 선거와 맞닥뜨 렸다고 쓴 일이 있는데, 그때는 통일 지방 선거, 이번은 국회의원 총선거이다. 이번 선거 쪽이 훨씬 열기가 더하다. 별 뾰족한 수가 없어 우리는 이 기간에 시 골에 가 있기로 하였다. 도시에 있어보았자 선거 기간에는 가게도 전부 문을 닫 고,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우리는 공공 운송 기관을 피해, 아테네 공항 데스트 에서 렌터카를 빌렸다. 그러고는 선거 기간 내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아니 아니 그렇지가 않다. 느긋하게 돌아다녔다기보다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느긋하게 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표현 사이에는 상당 히 큰 차이가 있다. 펠로폰네소스는 산이 험악한 곳이기도 하고, 로도스에서 피아트를 타고 다니 다 혼쭐난 경험도 있고 하여, 이번에는 안심할 수 있는 일본차를 빌려야겠다 싶 어 '인터 렌트'에 가서 닛산 체리(아마도 일본에서는 닛산 파르사라고 하는 차일 것이다)를 빌렸는데, 이 차가 또 순 엉터리 물건이었다. 겉보기에는 반짝반짝 그 럴싸한데, 실은 정비 불량으로 그림의 떡 같은 차였던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1백 킬로미터 정도 속도를 냈더니 부들부들 차체가 흔들려 핸들에 꼭 매달려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험준한 산길로 접어들면 상황은 훨씬 더 비참했다. 아무튼 오 르막길에서 기어를 1단으로 내리고 액셀러레이터를 아무리 꽉 밟아도 부릉부릉 떨기만 할 뿐 전혀 힘을 못 낸다. 죽죽 속도가 떨어져서는 버스니 대형 트럭이 니 하는 차들에게 앞길을 내주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정나미 떨어지는 체리를 몰고, 선거전으로 뜨거워진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일주일 정도 어슬렁어 슬렁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번 총선거는 그리스의 정치 체제가 싹 바뀔지도 모르는 중요한 선거 였다. 우선 그리스의 리크루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큰 사건으로 전 그리스 사 회주의당의 파판드레우 정권이 궁지에 몰려 있었고, 덧붙여 이미 팔순에 가까운 파판드레우 정권이 총리가 긴 세월 고락을 함께 한 부인을 버리고 전 스튜어디 스인 젊은 애인과 동거를 하고 있다는, 그리스 사람들이 윤리 의식으로는 거의 용납할 수 없는 스캔들이 뒤엉켜 그리스는 두 진영으로 딱 갈라져 있었다. 만약 PASOK가 정권을 잃는다면 파판드레우가 체포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난무하 고 있다. 그렇게 되면 정치 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 정책, 외교 정책도 깡그 리 바뀌고 만다. 여론 조사에 의하면 야당인 신민주주의당(ND)이 승리를 거둘 것 같은데, PASOK도 운명의 갈림길에서 기세를 되찾아 가고 있어 사태가 어떻 게 진전될지 알 수가 없다. 요컨대 모두가 뜨겁게 달구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정세가 어떤 식으로 바뀌든 여행자에게는 별 관계없는 일이 므로 우리는 한가로이 여행을 계속한다. 귀성 투표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온 국민이 전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 론 아니다. 고향을 아주 멀리 떠나 있으면서 일손을 쉴 수가 없는 사람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경관이니 호텔 종업원이니 그런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을 방기한다면 사회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 람들도 구청에 가서 이런저런 사유로 고향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는 사유서 를 제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선거에 임해 고향으로 가지 못한다는 증명 서를 발행해 준다. 단 그 증명서를 받기 위해서는 본인이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서 2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으며 지금 현재 무슨 일이든 일에 종사하고 있 음을 증명하는 서류가 반드시 필요하다. 참으로 복잡한 얘기다. 한마디로 선거라 해도 나라에 따라 여러 가지 상이한 점이 있다. 우리들은 지극히 당연한 개념으 로 '의회 민주주의'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여러 가지를 한데 묶어 한 장르로 처리해도 좋은 것인가 하는 기분마저 든다. 일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성가신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온 국민이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면, 그 사태는 추석과 신년 연휴를 합한 것 같은 혼란 을 야기할 것이다. 우선은 교통 기관이 완벽하게 펑크를 내고 말 것이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꽤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비단 일본뿐만이 아니고 그리스에도 그런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부모와 절연을 하여 두 번 다시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며, 옛날에 이웃집 아가씨에게 임신을 시켜 놓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면 상대방 친척에 게 얻어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는 그냥 단순히 고향이란 멀리 있어 그리운 것'이라고 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니 선거 때면 몹시 우 울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고 남의 일이지만 걱정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친척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오면, 부모쪽은 숙박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식사는 물론이고 이부 자리도 준비해야만 한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궁금한 점이 많았 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까지 자세하게 질문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 인은 일반적으로 정치 마니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선거라 하면 금세 열을 올리는 국민이라서, 그 정도의 불편함은 별 문제가 안 되는지도 모른 다. 하여튼 선거 때마다 몇 명이나 사람이 죽는다는 그런 성격의 나라이다. 그 열기란 우리가 옆에서 보고 있어도 경탄스럽다고 할까, 기가 찰 정도로 굉장하 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그리스 사람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 각한 정치적 갈등을 겪어 온 국민인 것이다. 몇 세기에 걸쳐 터키의 지배하에서 몸부림치다 간신히 독립을 했는가 싶었더니 발칸 재편성으로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그 분쟁이 일단락되자 이번에는 파시스트 국가의 침략을 받아, 레지스 탕스 운동을 하고 그 전쟁이 끝나자 동족끼리 피로 피를 씻는 비참한 내전을 겪 었고, 그 후에는 암울한 군사 정권 시대가 계속 되었고, 키프로스 분쟁에 휘말렸 고, 그럭저럭 평화를 만끽할 수 있게 된 시기래야 고작 요 이십 년 정도인 것이 다. 그 탓에 그리스의 선거는 일본인이 선거라는 단어를 통하여 상상하는 것과 는 상당히 그 양상이 다르다. 예를 들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는 투표를 하기 위하여 자기 차를 몰고 귀성하 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이 타고 있는 차에는 오너가 지지하는 정당의 포 스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리고 모두들 차창으로 각 정당의 깃발을 내밀고 는 팔랑팔랑 흔들어 댄다. 말 그대로 기치 선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길에 서서 각기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차의 수를 세어 보면, 어느 정당이 어느 정도 지지 를 받고 있는가 하는 비율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부동표는 일본에 비하면 한결 적은 듯하다. 나도 십오분 정도 세어 보고서는, 아아 이번에는 야당인 ND가 승 리하겠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대충 6대 4의 비율로 ND가 PASOK 를 앞지르고 있었다. 선거의 결과도 대충 그와 비슷했다. 차뿐만이 아니고, 집마다(물론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붙어 있는 포스 터를 보면, 이 집은 ND 지지파, 이 집은 PASOK 지지파 하는 식으로 알 수 있 게끔 되어 있다. 카페에도 이 카페는 ND지지, 이 카페는 PASOK 지지, 하는 식 으로 어김없이 색이 나뉘어 있다. 일본이 이런 식이 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프겠 다 싶은 생각이 든다. 깃발의 색을 확인한 후가 아니면 마음대로 찻집에도 들어 갈 수 없다고 하면 대단히 불편한 얘기다. 그리고 정당 버스라는 것이 있다. 이 버스는 일본에서 추석이나 연말에 임시 로 운행하는 귀성 버스와 비슷한데 다른 점은 요금이 무료라는 것이다. 무료인 이유는 정당이 버스를 전세 내어 각기 자기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고향으로(즉 투표장으로) 날라다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PASOK 버 스에는 PASOK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미어져라 타고 있고, ND 버스에는 ND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미어져라 타고 있다. 당연한 일이나 접대용 우조도 나올 것 이고 모두들 한껏 흥이 올라 있다. 일대 소동이다. 모두들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 고는 와아와아 소리를 질러대고 클랙슨은 빵빵 끊임없이 울어댄다. 연도에도 사 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가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 버스나 차들이 지나가면 환성을 내지른다. 하기야 어떤 그리스 사람의 말로는 PASOK 버스를 타고 와서는 ND 에 투표를 하는(또는 그 반대)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거기까지는 조사를 하지 않으니까."라고 그 사람은 말한다. 그야 물론 그럴 것이다. 6월 17일자 신문에 의하면, PASOK 집행부의 코스타스 라리오티스 씨는 에레 프세로스 티포스라고 하는 아테네의 보수계 일간지가 내건 선거 도박에 응했다 고 한다. 신문 제 1면에다 "이번 선거에서는 ND가 확실하게 과반수(즉 1백51석) 를 따낼 것이다. 분하다고 생각하면, 따낼것인지 아닌지, 이천만 도라크마를 걸 고 내기를 하지 않겠는가."라고 PASOK를 향하여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라리오 티스 씨는 "에레프세로스 티포스 지는 긴 세월에 걸친 PASOK의 불구대천의 숙 적이며, 이렇듯 오만 불손하기 그지없는 도전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가슴을 펴 고 들고일어난 것이다. 이런 일이 법률적으로 허용이 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 으나 신문에 당당히 기사가 실리는 것을 보면 딱히 금지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으로 하자면 신문이나 정당이 선 거의 결과에 대해 당당하게 거금을 걸어 도박을 하는(이천만 도라크마는 약 천 칠백오십만 엔)것은 언어도단인 얘기다. 뭐 재미있다고 하면 재미있는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도박에서는 PASOK측이 승리했다. 선거에는 ND가 승리하 였지만, 과반수인 1백51의석을 차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 선거가 있은 바로 후에 그리스를 떠났기 때문에, 선거 후에 라리오티스 씨에게 이천만 도라 크마가 전달되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확인하지도 못했다. 아무튼 이렇게 세상에서는 후끈후끈 열기 가득한 선거전이 전개되고 있는 것 이다. 우리는 투표 당일인 일요일에는 나프프리온 언덕 위에 있는 호텔에 머물고 있 었다. 우리가 이 도시에 오는 것은 이번으로 세 번째이다. 침착한 분위기의 도시 로, 그리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 중의 하나다. 낮에는 근처에 있는 토로 라는 해수욕장에 가서, 두 시간 정도 해수욕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인기척이 없는 곶의 돌출부에 있는 조그만 교회까지, 벼랑가 좁을 길을 걸어 산책을 하였 다. 교회는 곶을 오고가는 어선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밤새도록 내내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건장한 체구의 할아버지가 혼자 서 그 무인 교회를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할아버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 었다. 이야기를 했다고는 하나, 서투른 이탈리아 말과 그리스 말과 손짓 발짓을 섞어 그럭저럭 의사 소통을 하였다는 정도의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는 내내 전쟁터에 나가 있었어, 라고 할아버지는 말한다. 알바니아와 불가리아에서 이탈 리아 군과 싸웠지. 그때 다리에 총을 두 방 맞았어. 그 다음에는 독일군이 오고 그때는 가슴에 한방 바로 여기야. 독일군은 전쟁중에 그리스 사람을 이만 팔천 명이나 죽였어. 그 놈들은 이탈리아 놈들보다 한층 잔악했어. 그래서 우리는 빨 치산이 되어 싸웠지. 그 다음에는 미군이 오고 내전이 있었고 온통 전쟁뿐이. 게 라, 게라(전쟁). 도대체 미국 놈이 나빠. 그 놈들은 돼먹지 않은 짓만 하거든. 히 로시마를 보라고, 나가사키는 또 어떻고. 전쟁 이야기가 나오자 할아버지는 열변 을 토했다. 마치 전쟁이 지금까지 줄곧 끊이지 않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우리는 백 도라크마를 헌금하고 교회를 뒤로하였다. 해질녘이 되어 베란다에 나와서는, 어제 사다놓은 포도주를 열어, 해 저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셨다(앞에서도 썼듯이 선거 당일에는 레스토랑에서도 알코 올류를 팔지 않으므로). 선거 전날까지는 클랙슨 소리며 말다툼이며 싸움질이며 라우드 스피커며 하는 것들로 시끌버쩍하던 도시도 투표 당일이 되자 언제 그랬 냐는 듯 잠잠해졌다. 여느 때보다 한층 잠잠하다. 이제 투표도 끝나고 개표 결과 를 기다리는 일 뿐이다. 이제 이 이상 소동을 피울 만한 거리가 없다. 광장에서 축구 흉내를 내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환성이 들릴 뿐이다. 이윽고 하늘에는 하 나 또 하나 별이 반짝이기 시작하고 바다 위로는 뱃전의 불빛이 깜빡거리게 된 다. 시계 바늘은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올 무렵, 그제 야 사람들이 항구 어귀로 나와 공연히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의 몇 가지 얼굴 토스카나 실제로 살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이탈리아는 그리 큰 나라는 아니다. 로마는 장화형 반도의 대충 한가운데께에 위치하는데 거기서부터 북쪽 끝인 오 스트리아 국경까지 혹은 남쪽 끝인 레지오 디 칼라브리아까지도, 대략 7백 킬로 미터가 조금 넘는 정도이다. 아우트 스트라다(고속도로)로 달리면, 당일에 끝에 서 끝까지 달릴 수 있다. 그러니까 이탈리아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다닌 셈이다. 물론 구석에서 구 석까지라고는 할 수 없고, 들르지 않은 중요 도시(예를 들면 나폴리, 토리노)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방을 둘러봤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역시 토 스카나 지방, 좀더 한정적으로 말하면 캔티 지방이다. 캔티 지방이라면 집을 사 두고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뿐 사지 않는다. 오래간 만에 들렀더니 가구가 몽땅 없어졌다는 둥 그런 일은 추호도 싫으니까. 진짜다. 농담이 아니다. 반대로 별로 살고 싶지 않은 곳은, 시칠리아. 끈기를 가지고 뼈를 그땅에 묻을 생각이 아니라면 몰라도, 정직하게 말해 외지에서 온 사람을 쉽사리 받아들이는 곳은 아니다. 같은 이유로 칼라브리아(구두 모양의 발톱 끝 부분)도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거꾸로 북부에는 아름답고 좋은 도시가 많이 있지만, 도시로서 너무 빈틈이 없는 경향이 있어, 장기적으로 살면 일본인의 감각으로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부분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든다. 기후상으로도 겨울은 견디기 힘들다. 기후가 좋기로는 로마가 으뜸이지만, 이 도시에는 상당히 문제가 많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문제점이 있는 도시를 제거해 나가다 보면, 캔티가 남 는다. 이곳은 우선 뭐니뭐니 해도 경치가 아름답다. 초록색의 비스듬한 언덕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이어지고, 그 비탈면으로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교 통량도 적고 구불구불 아름다운 길이 끝간데 없이 계속된다. 로마에서 출발하여, A1 고속도로를 통하여 이곳까지 오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안심이 된다. 풍경에도 푸근함이 있고 공기도 맛있다. 타향 사람을 대하는 토박이 사람들의 태도도 어딘가 모르게 부드럽다. 도회지가 그리워지면 잠시 발길을 뻗어 피렌체 나 시에나로 나갈 수 있다. 포도주도 요리도 불평의 여지가 없을 만큼 맛있다. 포도주를 이 종류 저 종류 다양하게 그리고 일괄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도 내 가 토스카나에 잘 가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곳저곳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산지에서 직판하는 포도주를 몇 박스나 사들 고 돌아온다. 로마에서 포도주를 일괄 구매하기는 로마의 남쪽에 있는 프라스카 티가 가장 가깝지만, 캔티 포도주의 저 감칠맛에 한 번 맛을 들이고 나면 프라 스카티 언저리의 포도주는 아무래도 시골맛이란 느낌이 든다. 물론 프라스카티 에는 프라스카티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애써 가는 길이라면 역시 캔티로 가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포도주에 정통한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전혀 정통하지 못한 편이다. 어느 지역에서 어느 사면에서 어느 해에 딴 포도를 어떤 식으로 저장하 여, 등 등을 따지는 일은 나에게는 차라리 성가신 일이다. 하지만 토스카나에 가 서 양조장을 돌며 이 맛 저 맛 테스팅을 하는 사이에, 적어도 포도주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폭넓은가 하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 양조장의 아저씨가, 이 포도 주는 저쪽 밭에서 딴 포도로 담근 것이고, 이 포도주는 이쪽 포도밭에서 딴 포 도로 빚은 포도주라며 따로따로 맛을 보여주면, 그것이 바로 옆에 있는 밭에서 딴 포도로 빚은 포도주라 해도 역시 맛은 다르다. 그리고 어느 쪽이 맛있냐고 물으면-한심한 이야기지만-어느 쪽이나 한결같이 맛있다. 내 취향에 맞는 포도주는, 기본적으로는 약간 하드한 느낌의 쌉쌀한 맛이 나 는 적포도주이다. 입에 한 모금 담고 좀 떫은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방순한 맛 이 혀끝에서 알알하게 끊어오르는 듯한, 힘이 있는 포도주. 말로 표현하자면 어 렵지만, 실제로 마셔보면 간단한 이야기다. "으음, 이 맛이야 이 맛." 그 한마디 로 족한 것이다. 그런 수준으로 얘기를 한정하면, 광고 문구 따위는 전혀 무용지 물이다. 캔티의 포도주 양조장을 도는 보람은 실로 이런 데 있다. 실체야말로 모 든 것(하지만 이런 짓을 레스토랑에서 하기에는, 지나치게 스노브하기도 하고, 돈도 많이 든다). 캔티 지방이란 피렌체의 남쪽 시에나의 북쪽에 펼쳐져 있는 지역이다. 막연하 게 어떤 지역을 일컫는 총칭이 아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선이 딱 그어 져 있다. 그 옛날 캔티라고 하면 라다, 가이오레, 카스테리나란 세 마을을 연결 하는 군사 동맹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이름은 특정한 포도를 생산하는 지역의 호칭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를 일반적으로는 캔티 클라시코라고 부르는데 그렇다고 여기에서 빚어진 포도주가 전부 캔티 클라시코 인 것은 아니다. 그 성분이나 만드는 법이 법률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어, 그 법 률에서 조금이라도 일탈하면 캔티 클라시코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가 없다(먹고 마시는 일에 한해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실로 열심이며 동시에 진지하다). 면적 은 약 4백 30평방 마일이다. 이 지방에는 좋은 여관이 많다. 규모가 큰 호텔급은 아니지만, 일본식으로 말 하자면, '정취가 있는 지방 여관'적인 여관이 많은 것이다.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다. 이탈리아의 호텔은 내용에 비해서는 가격이 비싼 곳이 많아 낙담하는 일 이 허다한데 이 지방에서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분위기도 좋고 시설도 반듯하다. 이 지방 여관의 특색은 포도주 양조장(이탈리아 식으로는 팩토리아)을 개조하 거나, 농가를 개조한 건물이 많다는 것이다. 또는 팩토리아가 포도주를 사러 오 는 상인을 숙박시키기 위해 시작한 여관도 있다. 그곳은 그 팩토리아에서 생산 하는 포도주 맛에 알맞은 요리를 대접하는 식당도 더불어 있다. 그리고 말할 필 요도 없는 일이지만, 이런 요리는 상당히 맛있다. 포도주의 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자기 주장을 하지않는 품위 있는 맛의 요리가 나온다. 이 점은 어떤 나라 를 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술을 잘 드시는 분은 이해하시리라 생각한다), 술맛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신선한 재료와 그 신선함을 죽이지 않는 조심스런 양념이다. 토스카나에는 그런 맛이 살아 있다. 이 지방의 요리에 비하면 로마의 요리는 그 맛이 내게는 지나치게 강렬하다. 이 책은 여행 가이드가 아니므로 일일이 이름을 예로 들지는 않지만 내가 묵 은 여관만 해도 인상에 남는 멋진 여관이 몇 군데나 있었다. 대부분이 객실은 몇 개 안 되는 작은 여관이다. 미술란 가이드에도 실려 있지 않은 곳이 많다. 그 리고 그런 여관 주인한테 "어디 이 근방에서 맛있는 포도주를 사고 싶은데, 가르 쳐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것도 좋다. 때로 남들은 모르는 훌륭한 양조장 을 운 좋게 만나는 경우가 있다. 한 번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작 은 마을 어귀에 있는 여관에 머물렀는데(이곳은 요리도 최상이었다. 세 종류의 포도주와, 두 종류의 파스타와, 두 종류의 메인 디시와, 두 종류의 디저트로 구 성된 정식 코스가 고스란히 뱃속으로 들어갔을 정도니까), 어디 맛있는 포도주를 파는 팩토리아가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상대방은 나에게 "어느 정도의 양을 사고 싶으냐."고 묻는다. 한 다스 정도라고 대답하자 주인은 그 정도라면 상관없겠지, 라면서 어떤 조그만 포도주 가게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여기는 사실은 소매를 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정도 양이라면 아마도 팔 겁니 다. 인노첸티라는 집인데, 프랑코한테 소개를 받아 왔노라고 말하세요. 실은 우 리 고향집이 그의 바로 옆집이거든요. 그는 낮에는 내내 포도원을 살피고 다니 니까, 아마 저녁 때가 아니면 돌아와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한 일곱시경에 가 보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인노첸티 씨네 집 약도를 그려 주었다. "아주 좋은 사람이예요. 벌써 몇 대째나 포도주를 계속 만들어 온 집안이죠. 아무튼 열심입니다. 매일매일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온통 포도밖에 생각하지 않 아요. 거의 집에는 없죠. 몇 군데 포도원을 갖고 있어서 몹시 바쁩니다." 7시에 인노첸티 씨의 집에 가 보니 아니나다를까 그는 포도원을 돌고 이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아주 평범한 집이라서 포도주를 빚는 집이라는 말을 안 들었 더라면, 보통 집으로 간과할 정도다. 인노첸티 씨는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온 화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지방 사립대학의 교수 같은 느낌이다. 프랑코에게 소개 를 받아 포도주를 사러 왔노라고 말하자 그는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 는 포도주를 팔기 싫어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얘기를 들어본즉, 그가 긍지를 갖고 만들고 있는 회심의 역작 포도주가 마침 다 팔리고 없어 그 제품을 제공할 없 음이 슬펐던 것이다. "제일 좋은 밭에서 딴 제일 좋은 해에 빚은 포도주였거든요."라고 인노첸티 씨 는 설명한다. "그런데 이제 다 팔렸어요." 그는 마치 바로 한 달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사람처럼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했다. 그것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 두 번째 것이라도 좋으니 좀 파십시오 하고, 인노첸티 씨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우리를 지하 술 창고로 안내 해 주었다. 외견은 보통 집인데 지하실은 넓다. 집으로 돌아와 거기서 잠시 일을 한 듯 카세트에서 오페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베르디의 아리아를 들으며 인 노첸티 씨는 매일 포도주 빚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양이었다. 지하실은 습기가 차 있고 약간은 곰팡이 냄새가 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알지 못할 기계가 있고 술통이 죽 세워져 있다. "그러면 우선 테스팅을 해보세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지하실을 한 바퀴 둘러보게 한 후, 뒤뜰로 안내해 주었다. 뒤뜰에서는 해 저무는 토스카나 들판이 한눈에 내다보인다. 멋진 풍경이다. 언덕이 보이고 여기저기에 호수가 점 점이 산재해 있다. 구름이 길게 뻗쳐 있고, 저 먼 언덕 위로는 중세의 성벽이 보 인다. 그리고 한없이 펼쳐지는 밭과 포도원. 저게 우리 포도원입니다, 라고 인노 첸티 씨가 가르쳐 준다. 저기 저것도 우리 포도원. 자신의 포도원을 가리키고 있 을 때 그의 얼굴에는 지복감이 넘쳐흐른다. 보기에 상당히 예술가적인 포도주 장인인 듯하다. 테스팅이라고하여 찔끔찔끔 입에 물고 맛을 보는 그러고는 커다 란 포도주 잔에 찰랑찰랑하게 포도주를 따라 준다. 맛도 있거니와 모처럼 내준 포도주를 남기기도 아까워 결국 세 병을 전부 비우고 말았다. 그가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그가 빚은 포도주는 이탈리아 국내에서는 시판하 지 않는다고 한다. 대개가 캘리포니아나 오스트리아로 수출되는 것이다. 외국 회 사와 계약을 해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국내에서 시판하기 위해서는, 등급 검사를 받아야만 하고 세금도 물지 않으면 안 되고 판매 루트도 확보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인노첸티 씨처럼 개인적으로 포도주를 만들고 있는 사람 에게 그런 절차들은 꽤 성가신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을 계약제로 외국에 수출 하고 그 다음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파는 식인 모양이 다. 우리가 시음한 인노첸티 씨의 포도주는, 포도주를 빚은 당사자가 마니아인 만 큼 상당히 깐깐한 맛이 나는 포도주였다. 확실하게 말해, 캔티 지방에서는 흔히 살 수 있는 이런저런 캔티 클라시코 따위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맛이었다. 맛이 서서히 고조된다. 뒷맛이 아주 좋고 혀 끝에 남은 맛이 자연스레 살며시 빠져나간다. 이런 맛이 두 번째라면 첫 번째는 과연 얼마나 굉장한 맛일까 하고 생각한다. 그 다음 다른 한 종류의 적포도주를 맛보여 준다. 이 포도주는 아까것보다 훨 씬 포도의 맛이 살아 있고 부드럽다. 모차르트의 음악에 비유하자면-비유에 무 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전자가 부다페스트 현악 사중주단이 연주하는 콰르테 트라면, 후자는 피에르 랑팔과 아이작 스턴이 연주하는 플루트 콰르테트 같은 느낌이다. 이거냐 취향과 그때의 기분 나름이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 병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전자의 치밀한 공세는, 어 중간한 것이 아니므로. 그리고 또 한가지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 인노첸티 씨의 빈 상트. 보통 빈 상트는 디저트용 포도주로 마시는데, 감칠맛 나는 빈 상트는 그냥 포도주로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인노첸티 씨의 빈 상트 역시 훌륭한 맛이었다. 쓴맛과 단 맛 두 종류가 있는데, 나는 전자 쪽을 맛있게 마셨다(인노첸티 씨의 품평에 의하 면, 후자가 올소독스한 맛이라고 하는데). 내가 이 빈 상트도 맛이 훌륭하다고 하자 인노첸티 씨는 또 슬픈 얼굴을 하였 다. 팔고 싶지 않은 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실은 이 빈 상트는 가격이 좀 세거든요."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 하느냐고 쭈삣쭈삣 물어보았더니, "한 병에 천 엔 정도가 됩니다."라고 한다. 두 시간 정도 이러니저러니 잔을 기울이며 토론을 하다가, 결국은 포도주를 전부해서 18병 샀다. 18병에 가격은 약 만 엔이었다. 아무리 세급이 나 붙는다 해도 싸다. 그 자리에서 술통에 저장되어 있는 포도주를 병에 담아, 코르크 마개를 하고 라벨을 붙여 박스에 넣어 준다. 그는 그러는 동안 내내 싱글거리고 있었다. 이방 인이 자기가 만든 포도주 맛을 인정해 주어 사뭇 기쁜 모양이었다. 내 생각에 이렇듯 '한 줄기 인생'을 걷는 장인 기질의 사람을 우연찮게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미덕인 듯하다. 이 나라에는 적당주의자 도 많지만(실로 많다), 일부 사람들은 정말 성실하게 빈틈없이 일을 한다. 그들 은 혼자서 묵묵히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물건에서는 생활의 산미 같은 것이 배어 있다. 그런 부분 이, 이러니저러니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이탈리아의 매력, 저 력이다. 일본의 획일적인 사회와는 다른 진정한 혼이 있는 것이다. 결국은 일부 러 토스카나까지 포도주를 사러 간 보람이 있었다는 얘기다. 치구정 여러 여관을 전전하며 돌아다닌 캔티 지방의 숙박 시설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아 있는 곳을 대라면, 역시 '치구정'(가명)이 최고이다. 뭐 이름을 대기가 아까 워서 여관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여관에는 애당초 이름이란 것이 붙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름이 없으면 글을 쓰기가 불편하므로 급한 대로 '치구 정'이라 부르기로 한다. '치구정'의 객실은 전부 해봐야 셋이나 넷밖에 없다. 정말 조그만 여관이다. 따 라서 묵을 수 있는 사람 수는 고작해야 일고여덟 명 선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시즌중에는 미리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묵을 수가 없고 시즌이 아닌 때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이른바 취미삼아 부인 한 명이 숙박객의 시중을 들으며 경영 하는 여관이다. 힘을 써야 하는 일은 동네 사람을 잡역부로 고용하지만, 집안의 자잘한 일은 전부 그녀 혼자서 처리하고 있다. 청결하고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손질이 잘되어 있는 여관이다. 아무리 결벽증이 심한 사람이라도 전혀 흠을 찾 아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방안의 가구도 오래된 농가에 농가에 어울리는 클래식한 것들이다. 침대도 큼지막하고 포근한 새털 이불이 깔려 있다. 게다가 실로 아기자기하고 맛있는 아침 식사를 제공해 준다. 숙박비는 둘이서 만 엔 하 고 조금 더한다.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해서 타산이 맞을까 하고, 남의 일이기는 하지만 고개가 갸우뚱해질 만큼 양심적인 여관이다. '치구정'은 캔티 지방의 구석진 포도원 한가운데에 있다. 꽤나 찾기 어려운 장 소인데다가, 간판도 없다. 전화로 예약을 하자 주인인 부인이 가는 길을 설명해 주었지만, 무엇보다 포도원 한가운데 있고, 눈에 띄는 표지가 될 만한 것도 없는 곳이라 거기까지 가는 데만도 힘들었다. 적당한 교통 기관도 없고, 자동차로 가 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포장된 대로에서 벗어나 좁디좁은 비포장 도로 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길이 울퉁불퉁 모래 먼지는 폴폴 피어오르고 차는 멋들 어지게 새하얀 차로 변신을 하고 만다. 이런 길을 1킬로미터 정도 달린다. 그러 고는 다시 더욱 좁은 농로로 들어간다. 이 길을 얼마 달리면, 포도원 한가운데가 나온다. 거기에 있는 농가를 개조한 것이 이 '치구정'이다. 오래된 석조 농가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 있다. 사망은 하염없는 포도밭이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 면 여름 포도 잎사귀의 싱그런 내음이 솔솔 코로 들어온다. 아주 조용하다. 숲 쪽에서 이따금 세소리가 들린다. 먼 포도원에서 희미하게 트랙터 소리가 들려 온다. 차를 세우자 두 마리 개가 왕왕 짖으며 달려 나왔다. 한 마리는 신경질적으로 털이 부숭부숭한 발바리, 또 한 마리는 맹렬하게 사람한테 재롱을 피우는 새끼 사미. 그러고서 여관 주인이 나온다. 사십대 중반 혹은 후반의 인상이 좋은 부인 으로 이탈리아 인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다. 나중에 안 일인데 그녀 는 스위스 인이었다. 그리고 그 여관에 머물고 있다는 미국에서 온 일본인 여자 와 그녀의 남편인 미국인 청년이 나왔다. 그는 일본말을 유창하게 잘해 우리는 이곳에 있는 동안 그들과 줄곧 일본말로 얘기를 나누었다. 입구 앞 대들보에는 제비가 둥지를 틀고 있어 어미 제비가 열심히 모이를 나르고 있었다. 실은 이 스위스 부인은 여기에서 여관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 다. 바깥 어른이 스위스 인 변호사이고 십대 후반의 딸이 한 명 있다. 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녀는 이 집에 한눈에 반하여 별장용으로 샀는데, 그때까 지도 이 집이 여관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파는 사람도 그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관이 '토스카나의 매력적인 작은 여관'으로, 어 떤 미국의 가이드 북에 소개되어 있는지라(나도 그 책을 읽고 이런 데 이런 여 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쩔 수 가 없었다. 휴가를 보내려고 여기에 왔더니, 도착하자마자 방을 예약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라 고 부인은 말한다. 그야 물론 놀랄 것이다. 휴가를 받아 토스카나의 별장에 와서 느긋하게 한잠 자고 있는데, 한밤중에 뉴욕에서 전화가 걸려와, "8월 7일에 2인 용 방을 예약하고 싶다."는 등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그런데 이 부인은 대단하게도 전화를 건 상대방에게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오시고 싶다면 사양 말고 오세요."라고 대답한 것이다. 친절하다고 해야 할지, 태 평스럽다고 해야 할지, 사람이 좋다고 해야 할지, 이런 일은 보통 사람 같으면 예사롭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뭐 아무튼 이런 식으로,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녀는 취미삼아 여관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치구정'은 간판도 내걸 지 않고 이름도 없는 것이다. 하물며 선전이나 광고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이곳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별장인 것이다. 거기에 부인의 후의로 머 무를 따름이다. 이런 숙박 업소는 그리 흔치 않다. 다만, 이 점은 그 국제 결혼 부부도 지적한 일인데 그녀가 혼자서 고군분투하 고 있는 만큼 지금은 그럭저럭 잘되어 나가고 있지만 이런 태세가 언제까지 지 속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스위스 인이란 인종은 이탈리아 사람들 과는 달리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므로 보고 있기가 딱할 정도이다. 청소도 구석 구석 깔끔하게 되어 있고, 언제나 손님의 입장을 생각하느라 초긴장 상태다. 그 렇게 사소한 데까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은데,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상당 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서 그런 만큼 당사자는 피곤할 것이다. 이탈리아 인이 라면 60퍼센트 정도는 해이한 기분으로 건성건성 일을 해치울텐데 이 사람은 80 퍼센트 긴장하고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사뭇 아마추어 장사꾼이 란 느낌이 들어 기분은 상쾌하였다. 이 여관에 함께 투숙하고 있는 그 부부는 이탈리아의 여러 군데를 더 돌아다 닐 예정이었는데, 이 여관이 마음에 들어 캔티에 눌러 앉아, "더 이상 아무데도 가지 않고 여기에만 있어요."라고 한다. 우리도 여기가 마음에 쏙 들어, 좀더 여 유롭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 당시에는 앞길이 예정되어 있어(그 다음날에 우리는 우디네라는 북부 도시에 도착해야만 했다), 유감스럽게도 하룻밤만 묵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주일 후에 하룻밤 더 묵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으나 예 약이 꽉찼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묵으로 옵니까라고 물어보니 그 대부분이 스 위스 관광객들이라고 한다. 그녀 자신이 스위스인 인 까닭인가, 이 여관에는 스 위스에서 오는 손님이 많다. 우리가 묵었을 때에도 여관 앞에 스위스 넘버인 메 르세데스가 두 대 서 있었다. 애당초 토스카나란 지방이 스위스 사람이라든가 영국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지역인 것이다. 여름 바캉스 시즌에도, 이 지역에서 이탈리아 관광객을 보기란 쉽지 않다. 달리는 자동차의 국적 스티커를 보아도, 거의가 CH(스위스)이든가, D(독일)이든가, GB(영국)이든가, A(오스트리아)이다. 이 여관에는 식당이 없다. 그녀 혼자서 거기까지 커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대신 그녀는 근처에 있는 맛있는 레스토랑을 소개해 준다. 자동차로 십분 정도 달리면, 가장 가까운 마을에 닿고, 거기에는 맛있고 싼 레스토랑이 몇 군데 있 다. 점심은 라 비스콘도라라는 숲 속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세 종류의 파스타 모 음과 버섯 소고기 요리. 저녁은 라 사로트 디 캔티라는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베 케 테레 데 몬테필리 86년산을 마시고 포모도로 스투츠키 여름 채소에 마카로 니, 가지를 섞은 그라탱 아 라 멘투추란 요리를 먹었다(아내는 여름 채소 무스 와, 리조트 아르 도라치노와 초콜릿 무스를 먹었다). 어느 레스토랑이나 불평의 여지가 없는 맛이었고, 가격도 타당했다. 무엇보다 붐비지 않아 아둥바둥하지 않 아도 되는 점이 좋았다. 특히 후자는 젊은이 두 사람이 새로이 시작한 레스토랑 이어서, 여러 가지로 신선한 아이디어를 짜내 조리한 듯한 요리였다. 해질녘 여관 근처를 산책하려니 사미가 신나하며 내내 뒤를 쫓아 왔다. 좁다 란 농로를 죽 걸어가자 길은 깊은 숲 속으로 뻗어 있다. 숲속은 아무 소음 없이 잠잠하여, 낙엽을 밟는 바삭바삭하는 소리가 울릴 뿐이다. 부드러운 햇살이 녹음 에 물들어 발밑으로 어른어른 흔들렸다. 바구니를 메고 버섯을 따러 다니는 아 저씨를 만났다. "안녕하세요!"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여관 부인의 얘 기로는, 이 숲속에는 토끼니 멧돼지니 하는 동물들이 잔뜩 살고 있어, 밤이 되면 포도나 아프리커트를 먹으러 나온다고 한다. 그만큼이나 깊숙한 숲이다. 사미는 저 앞으로 훌쩍 달아났나 싶으면 다시 돌아와 우리가 거기에 있는 것을 확인하 고는 다시 앞쪽으로 뛰어간다. 아주 평화롭고 무척 조용하여 사람의 마음을 어 지럽히는 요소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런곳에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고 절 실하게 생각한다. 일만 해도 기분좋게 진척될 것이다. 아침이 되면 부인이 졸린 듯한 눈을 비비고 운전을 하여 마을까지 가서는 아 침 식사에 쓸 재료를 사 온다. 그리고 신선하기 그지없고 양도 그득한 아침을 지어 준다. 빵집 아궁이에서 막 구워낸 크라상과, 롤빵. 커다란 접시에 가지런히 담긴 몇 종류나 되는 치즈와 햄. 막 낳은 달걀로 만든 스크램블 에그. 싱그런 맛 이 혀 끝에 감도는 생주스 커피, 과일 칵테일. 뜰에서 수확한 과일 바구니. 애플 파이.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미 배가 고파 있는 인간이라 아침은 듬뿍 먹는 체질인데 그럼에도 이 아침 식사는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맛이 있어서 부인에게 서양 배와 애플 파이를 도시락으로 싸 달라고 부탁하였 다. 여관을 나설 때,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아주 즐거웠어요, 라고 말하자 부 인은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다음에 왔을 때 그 부인이 여전 히 여관을 경영하고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렇게 굉장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상당한 중노동이라고 생각하니까. 우리도 옛날에 한 7년쯤 손님을 상대로 하는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어 그 일이 얼마나 힘든가 하 는 것을 잘 안다. 손님이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보람있는 일이지만, 손님이 기뻐 하도록 하기위해 접대하는 측이 치러야 하는 노력이란 옆에서 보기보다는 훨씬 힘겨운 것이다. 이렇게 멋진 여관을 만나면 여행을 하길 잘했다 싶은 기분이 든다. 하기사 맥 이 풀리도록 실망을 하여 여행의 피로가 한꺼번에 분출하는 지독한 호텔, 여관 도 세상에는 흔해 빠졌지만. 이탈리아의 우편 사정 만약 이탈리아란 나라의 특징을 40자 이내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나는 "총리가 매년 바뀌고, 사람들이 큰소리로 떠들며 식사를 하고, 우편제도가 극단적으로 뒤 진 나라."라고 답할 것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는 나라는, 적어도 북반구에서는 이탈리아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탈리아의 우편 제도에는 문제가 있다. 아니, 그저 문제가 있다는 정도의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분명하게 말해 한심하다. 어느 정도 한심한가는, 아마도 일반적인 일본인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이탈리아로 편지 를 보내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이 닳도록 충고를 한다. 이탈리아 우편 기관은 최악에 가까우니까 급한 용무가 있으면(이랄까, 있어도라 고 할까), 편지로는 절대로 써보내지 마십시오. 써서 보내 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시간이 무진장 걸리고 아예 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사정이 그러하니 만 약 편지를 써 보냈다 해도 그것이 무사히 도착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 주십 시오. 도착하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그냥 시간이 남아 돌아가서 써본 편지에 한 해서만 보내십시오. 그리고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이 오지 않더라도, 나를 가지고 예의도 모르는 파렴치한이라고 치부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보 낸 편지가 내게 도착하지 않았든가 아니면 내가 보낸 편지가 그 쪽에 도착하지 않았든가 그 둘 중에 하나일 터이므로. 내가 그렇게 입이 닳도록 강조하면 상대방은 그 자리에서는 잘 알겠다는 듯, "여어, 그래요. 그렇게 한심한가요."라고 한다. 하지만 모두들 나의 말 따위는 금 세 잊어버린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편제도란 물이나 공기와 다름없는 것이다. 우 편물이 단시간에 어김없이 정확한 주소지에 도착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는, 그렇지 않은 상황이란 좀체 실감도 안 가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까 그런 충고를 금방 잊어버린다. 그러고는 어느 날 불현 듯 전화를 걸어, "지난 번 편지에다 부탁 말씀을 드렸는데, 아직 답장을 못 받았습니다."란 기가 막히는 소리를 한다. 내가 그런 편지 오지 않았는데요, 라고 말을 하면, "하지만 벌써 삼 주 전에 보낸 편지인데요."라고 아주 의외라는 듯 말한다. 그러니까, 이탈리아까 지 우편물이 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이전에 말했잖습니까, 라고 나는 말 한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방은 납득을 하지 못한다. "정말입니까?"란 따위의 말 을 한다. 이런 경우는 정말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정도는 아직 약과다. 상대방이 불만을 털어놓으니 까, "아아, 편지가 오지 않았구나."하고 알 수 있지만 세상에는 입도 벙긋하지 않 고 화를 내는 인종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침울해진 다. 내 탓이 아닌데 말이다. 내가 갖고 있는 미국 가이드 북을 보면, 제2차 대전중에 미국군 GI가 로마에 서 고향으로 보낸 편지가 196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도착했다는 에피소드가 실 려 있었다. 지리멸렬한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만 이런 일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적어도 이런 에피소드를 말해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착했 으니 운이 좋은 편."이란 것이 그들의 일치된 냉정한 감상이었다. 우편도 한심하지만 전화 역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날에 따라 소리가 커졌 다가 작아졌다가 하기도 하고 걸리기도 했다가 안 걸리기도 했다가, 운 좋게 걸 렸다 싶으면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 뚝하고 끊어지기도 한다. 어떤 회사의 이탈리아 지점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 도쿄 본 사와 전화로 얘기를 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전화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그들 은 이런 경우 떨어졌다고 표현한다. 이런 일은 이탈리아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당황하여 급히 전화를 다시 걸었지만, 상대방은 버럭 화를 내며 상대조 차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사과를 하여도 일본 사람은 그런 일이 일상적 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네, 정말 배짱 이 두둑하군."이라고 퇴박만 잔뜩 들었다고 한다. 정말 이런 경우는 안됐다. 전화도 한심하지만 소포도 한심하다. 일본 음식이 부족할 것이라고 일부러 보 내 주는 친절한 분이 계시는데 이게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도착하는 경우가 드물 다. 옛날에 고립된 일본군 부대에 식료품을 보급해 주기 위해 카달카나르를 향 하는 수송선단이 차례차례 미국 잠수함의 공격에 의해 침몰하고 마는 기록 영화 를 본 적이 있다. 뭐 그 정도로 비참 심각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상황은 매우 한 심하다. 대체 소포들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어디로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에 잠겨 보기도 하는데 실제로 사라져 버린다. 경험적으로 말하건대, 이탈리아의 우체국 직원이 의도적으로 물건을 훔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우체국 직원이, '아니 이거 일본에서 온 냉국수 아니야. 옳지 잘됐군. 오늘은 요걸 가지고 토마토 소스를 끼얹어 맛있게 냠냠' 따위의 생각을 하리라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우체국 직원이 일본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어, 도쿄에서 날아 온 문예지를 창구에서 착복하고는 나 카가미 겐지의 연재 소설을 열심히 읽을지도 모른다는 상정을(전혀 불가능한 일 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기도 좀 어렵다. 물론 개중에는 의도적인 착복도 있을 지 모르겠으나, 그것보다는 이탈리아의 우편 제도라는 기구 안에 치명적으로 꼼 꼼하지 못한 블랙 홀 같은 것이 있어, 여러 가지 물건들이 그 구멍으로 자연스 럽게 꿀꺽꿀꺽 삼켜진다고 생각하는 편이 현실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든 다. 아무튼 이 나라의 공공 기관은 치명적으로 번잡하고 비능률적이고 불친절하고 관료적이다. 그런데다 자잘한 규제가 많고 그런 규제가 또 반년마다 제멋대로 바뀌니 거의 아무도 규제 따위 기억하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런 연유로 도처에 제도적 블랙 홀이 생긴다(예를 들어 이탈리아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는 해마다 바뀌기가 일쑤라, 아무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올해는 요일에 따 라 제한 속도에 변화를 주었지만, 교통 경찰조차 채 기억하지 못하여 곧장 폐지 되고 말았다. 엉망진창이다). 가령 소포니 서류 우편이니 하는 것을 우편 집배원이 배달하러 온다고 하자. 수취인이 부재시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부재 통지서를 두고 간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제법 많다. 일 일이 벨을 누르고 계단을 올라가 현관까지 가서 상대방에게 건네주기가 귀찮아 서, 우편함에다 부재 통지서만 휙 던져 넣고 가는 작자도 있다. 좀더 한심한 경 우는 부재 통지서조차 두고 가지 않는다. 이런 경우 물건은 그냥 침묵 속으로 소멸하고 만다. 그리고 무거운 물건, 커다란 물건을 성실하게 배달하지 않는 것 도 사실이다. [문예춘추]는 두꺼워서 우편함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대부분 받아 보지 못했다. 그런 말단적인 서비스는 집배원 개인개인의 질 나름인 경우도 많 다. 따라서 가끔씩 팁을 주어 기분을 맞춰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나마 부재 통지서가 있으면 그것을 들고 우체국으로 직접 가지러 간다. 갈 때마다 창구가 다르다. 일을 취급하는 직원에 따라 서류도 다르다. 이쪽으로 가 면 저쪽으로 가라 하고 저쪽으로 가면 이쪽으로 가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우체 국은 실로 늘 혼잡하다. 그래서 한 번 갔다하면 반나절을 허송 세월하고 만다. 그러곤 막판에는, 이 물건은 여기에는 없습니다, 란 소리를 쌀쌀맞게 한다.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가 어디 있느냐. 우편함에 부재 통지서가 들어 있었고, 이 우체 국으로 오라고 쓰여 있었다. 여기에 없다니 말도 안 된다. 반드시 어딘가에는 있 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여 보기도 하였다. 상대방은 없다고 하면 없는 겁니다, 그 부재 통지서 뭐가 잘못된 걸 겁니다, 라고 하더니, 할 수 없군이라며 잠시 이 리 뒤적 저리 뒤적 하더니 바로 코앞에서 찾아내고는 아아, 있군요 여기 이거죠, 라며 건네준다. 죄송하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아아, 있군요, 한마디로 그만이다. 하나 그런 일로 화를 냈다가는 이탈리아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 매일이 이 런 일의 반복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그런 관료적인 블랙홀 안으로 우편물은 차례차례 삼켜져, 두 번 다시는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레이더스]의 마지막 장면처럼, 창고 안에 수취인이 없는 우편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그러다가 썩어 가리라고 상상한다(아아! 내 냉국수!). 이탈리아와 인접한 나라들은 어떤가 하면, 어느 나라건 우편 제도가 아주 착실 하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부친 우편물은 나흘 후에는 어김없이 일본에 도착한 다. 그리스만 해도 나흘에 정확하게 도착한다고는 할 수 없어도, 대충 이주일 정 도면 반드시 도착한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도 동맹파업 기간중이 아니면 한심 하지 않다. 영국도 경험적으로 말해 빈틈없다. 일본까지 대개는 사흘이면 도착한 다. 이탈리아만 한심하다. 내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감탄하는 것은, 그들이 이런 비참하기 이 를 데 없는 상황을 조금도 개선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그런 일을 해봐야 시간을 버릴 뿐인 소용없는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둘 째로는 변혁을 지향하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취하는 것이 그들의 성격에 맞기 때 문이다. 그런 점은 가령 독일이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일본과는 전혀 사고방식의 방향이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이탈리아 인은 아주 현실적인 사고 방식으로 살 아가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이탈리아 사람들은 공공 서비스라는 것에 대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 큼 환상을 품고 있지 않다. 그런 것을 상대할 정도라면, 좀더 다른 방책을 강구 한다. 개인적인 연줄이나 가족을 소중히 한다. 맹렬하게 탈세를 한다. 탈세와 축 구는 이탈리아 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액티비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연간 재정 적자는 약 천억 달러에 달한다. 이 액수는 이탈리아 GNP의 약 11퍼센트에 상당하는 치수인데, 정부의 추정에 의하면, 만약 이탈리아 국민이 탈세를 하지 않고 정직하게 수입을 신고한다면, 적자의 75퍼센트는 메울 수 있다고 한다(헤럴드 트리뷴 지). 그 정도로 모두들 맹렬하게 탈세를 하고 있 는 셈이다. 그들은 탈세를 한 덕분에 현금을 듬뿍 갖고 있어 그 돈으로 값비싼 수입품을 산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수입은 증가하고 국가의 재정 적자는 점점 더 늘어난다. 경기가 좋으면 좋은 만큼 나라의 재정은 적자 일변도를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탈세가 죄악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다. 탈세는 그들에게 있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경제 행위인 것이다. 한치의 오 차도 없이 성실하게 세금을 내는 사람은 그저 단순히 얼간이이거나 바보 취급을 당한다. 어떤 이탈리아 경제 평론가는 탈세야말로 건전한 경제 활동의 기본이라 는 극언까지 하였다. 즉 탈세를 하여 개인이 돈을 지니게 되면, 그 돈으로 불충 실한 공공 서비스를 대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공립학교의 질이 나쁘면 사립학 교에 보내고, 우편 제도가 엉망이면(엉망인 정도가 아니다) 택배를 이용하고, 팩 시밀리를 사들인다. 기차가 제시간대에 운행하지 않으면(운행되지 않는다), 자동 차를 산다. 그러는 편이 비능률적으고 부패한 정부 기관이나 공공 기관에 돈을 주어 무용지물이 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이치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그 런가 싶은 기분도 든다. 아무튼 하나의 세계관이다. 그러나 그런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 나라의 우편 제도의 불성실함에는 넌덜 머리가 난다. 예를 들면 한 달 전에 일본에서 부친 우편물이 일주일 전에 부친 우편물과 함께 도착하기도 한다.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상상을 못 하겠다. 일일이 배달하기가 귀찮아, 어느 정도 모아둔 다음에 한꺼번에 가지고 오는 것일까. 그리고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통관세를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편을 이용하지 말고 팩스를 이용하면 될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되 는데, 그것도 내 마음 같지 않다. 얼마 전 로마의 중앙 우체국 팩시밀리 창구에 가서 일본까지 팩시밀리 송신을 부탁한다고 했더니, 일본과 이탈리아는 팩시밀 리의 기준이 달라 보낼 수 없다고 한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각 나라마다 팩시밀리의 기준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나라에 서는 몇 번이나 아무런 문제 없이 일본으로 팩스를 보냈다. 그냥 단순히 귀찮고 하기 싫으니까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창구에서 그런 말을 아무리 해본 들 결론이 나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는 창구 직원이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그 일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 일을 처리하고 싶다면 담당 직원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우체국 직원의 계산 능력이 얼 마나 한심한지도 특필할 만하다. 가령 일본으로 보내는 엽서 여섯 장과 편지 세 통 그리고 미국 친구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낸다고 하면 창구의 여자 직원이 카시 오 전자 계산기로 타닥타닥 계산을 한다. 숫자가 나온다. 어째 요금이 좀 비싸다 싶다. 그래서 확인을 요구한다. 그녀는 마지못해 다시 계산을 한다. 이번에는 다 른 숫자가 나온다. 아까보다 훨씬 싸다. 그녀는 혼란에 빠진다. 그러고는 화를 내기 시작한다. 다시 계산을 한다. 그러자-아아, 우째 이런 일이-또 다른 숫자가 나온다. 그녀는 완전히 화가 북받쳐 있다. 왜 일본 사람이 로마까지 와서는 하필 이면 동양의 저 구석에다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그녀는 네 종류의 숫자를 내 앞에 내던진다. 그러고는 골라잡아 요금을 지불 하라고 한다. 물론 나는 가장 싼 요금을 선택한다. 이건 실제로 내가 경험한 일 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일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사실을 과장하여 말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건 진짜 틀림없는 사실이다. 과장이라 곤 손톱만큼도 덧붙이지 않았다. 막 태어난 벌거숭이 사실이다. 이 이야기에는 훗일담이 있다. 내가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그 요금을 계 산해 보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녀가 제시한 네 종류 숫자는 하나도 맞는게 없었다. 내가 선택한 가장 싼 요금보다도 실은 더 쌌던 것이다. 그리고 엽서 한 장을 보내는 데도 창구 직원에 따라 요금이 다르다. 똑같은 엽서를 똑같은 상대 방에게 보내는데도 때에 따라 요금이 20엔에서 60엔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어이휴 골치야. 나의 관찰에 의하면, 이탈리아 우체국 직원의 근로 의욕은(만약 그런 것이 있 다면 말이다) 민망할 정도로 낮다. 거의 대부분의 직원이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 로 일을 하고 있고, 군것질 하기와 동료와 쓰잘데 없는 잡담을 하는 데 온 정열 을 기울이고 있다. 치통과 생리통과 위경련에 한꺼번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뾰 로통한 얼굴로 손님을 향해 우표를 내던지는 여자 직원이 "봉조르노.""..."하고 손님이 뭐라 얘기할 때는 묵묵부답이다가, 간식 시간이 되면, "난 포테이토 피자 야!"하고 외칠 때에는 전혀 딴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희희낙락하는 귀여운 얼굴로 변모하고 마는 것이다. 정말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우체국의 명예를 위하여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체국 직원 전부가 한결같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한 직장에 한 명쯤은 성실하게 df을 척척 처 리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이나마 없다면 아무리 이탈리아가 태평스런 나라라 하더라도 역시 나라라고 하는 것이 존속하기 어렵다. 이런 사람이 창구 에 앉아 있으면 절망적으로 여겨졌던 긴 줄이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소멸해 버린 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지극히 적은 숫자에 불과하고 또 이런 사람이 반드시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저 사람은 자 기가 좋아서 저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모양이니 저 사람한테 맡겨 두면 되겠지, 란 표정으로 눈총을 받는 듯하다. 그리고 바캉스 시즌이 다가오면 이탈리아의 우편 시스템은 심각한 마비 상태 에 빠지고 만다. 크리스마스 전이나 부활절 전 그리고 페라고스타(여름 휴가철) 전에는 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휴가를 받으면 어디로 갈까, 무얼 할까, 하는 생각으로 온통 머리가 꽉차 있다. 물론 바캉스가 한창인 기간에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회적 기능이 정지한다. 모든 기능이 꼴깍 숨을 거두는 것이 다)예를 들면 나는 8월 5일에서 25일까지 편지를 단 한 통도 받지 못했다). 바캉 스 시즌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은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바캉스 후유증' 이란 이름의 파스텔색 구름이 직장의 상공에 둥실 떠 있다. 그 어떤 가게에서나 공공 기관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바캉스를 어떻게 보냈다는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고, 얼마나 멋지게 태웠는가를 서로 자랑하느라 시간가는 줄을 모르는 것이다. 또는 직장에서 느긋하게 신문이나 읽으면서 바캉스로 쌓인 피로를 풀고 있다. 그나마 이탈리아의 우체국이 그런대로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일년 중 극히 한정된 기간뿐이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이런 일을 써본들, 어차피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도둑 사정 우편 제도의 한심함, 기차의 연착과 더불어 이탈리아를 얘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3대 토픽 중의 하나, 도둑에 관하여. 이탈리아의 도둑에 관해서는 이미 실상이 많이 알려져 있어 "또 그 얘기야."라 고 시시하게 여기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 토픽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미국에서 발간된 이탈리아 여행 가이드 북에 'SECURITY(안전)'란 항목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탈리아 인은 훌륭한 호스트이다. 그들은 친절하며, 사교성이 풍부하고, 명랑 하고 붙임성이 많다. 대부분의 이탈리아 인은 그렇게 멋진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개중에 무분별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일군의 인간이 불행하 게도 여행자들에게 이탈리아에는 도둑이 활보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 다. 하지만 그런 것은 세계 어디를 가나 엇비슷한 상황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거 리에 도둑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고 또 이탈리아에서 무엇을 도난당한 경험도 없다. 그러나 뭐가 어찌됐든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다. 핸드백을 조심하라. 바지 뒷주머니에 지갑을 보아란 듯 집어넣지 말 것. 귀중품은 호텔의 세이프티 박스에 넣을 것. 여행자 수표를 가지고 다니지 말 것. 자동차 안에다 귀중품을 보이도록 놔두지 말 것. 말하자면 상식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일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만 않는다면, 당신은 모처럼의 여행에서 기분 나쁜 기억을 하나 줄일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정확한가? 정확하지 않다. 나는 책임지고 단언한다. 정확하지 않다. 지방 도시나 소도시에 관한 한 이 사 람이 하는 말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예를 들어 시에나나 모데나나 파르마 나 트리에스테 같은 소도시에 가면, 이 사람이 말하듯 상식을 잊지 않고 있으면, 그다지 기분 나쁜 일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나도 그런 도시에서는 한 번도 불쾌한 일을 당한 적이 없다. 그러나 로마는 다르다. 로마라는 도시는 이탈리아 중에서도 유독 특수한 곳이 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조심을 하여도, 아무리 상식에 만전을 기해도, 그것을 넘 어선 재난이 어김없이 닥쳐온다. 나는 삼 년 가까이 로마를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이 도시에서 참으로 수많은 종류의 범죄를 목격하였고, 실제로 자신에게 닥친 재난으로 경험을 하기도 하였 다. 그리고 그것은 '상식만 잊지 않으면' 피할 수 있는 간단한 종류의 것이 아니 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로마에 오래도록 살면서도 한 번도 범죄(그 대부분이 절 도이다.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폭력 범죄는 상당히 적다)의 피해자가 되지 않은, 혹은 될 뻔한 일도 없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지간히 운이 좋거나 아니 면 노이로제에 가깝도록 조심성이 많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내가 아는 사람은 어느 날 콜라 디 리엔초라는 번화가에 다 차를 세워놓고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사고 있었다. 5~6분 후에 물건을 다 사고 나와 보니, 차의 유리는 깨져 있고 카 스테레오가 없어졌다. 그는(이탈리아 인인데) 올바른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차에서 나올 때는 언제나 도난을 당하지 않 도록 습관적으로 카스테레오를 떼내어 들고 다닌다. 하지만 그때는 물건을 산다 고 해봐야 5~6분이면 끝날 일이었고, 차를 세워둔 곳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 는 번잡한 거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차비를 지불하는 유료 주차 공간이기도 하고 담당자도 있었다. 그래서 설마 괜찮겠지 하고 방심한 채 그냥 내리고 만 것이다. 그랬더니 보아란 듯 도난을 당한 셈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범인이 백주대낮에 망치나 뭐 그런 것을 가지고 차 유리창을 부수고 문을 열어 카 스테 레오를 훔쳐 가는 장면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뭐라 말하는 사 람이 없다. 불필요한 일에는 입도 방긋하지 않는다. 물론 이탈리아 사람들은 명 랑하고 친절하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 득이 될 만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 에서 그들은 터프하고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그들도 물론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물건을 도난당했다 고 하면 당하는 쪽이 얼간이이고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조심하지 않는 쪽이 나쁜 것이다. 그러니까 알게 모르게 타인을 위해서 무슨 도움이 될 만한(가 족은 예외다) 일을 한다는 발상은 하기 어렵다. 내 아내가 핸드백을 날치기당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때 나보나 광장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 여느 때는 그렇게 관광객이 많은 곳에는 별로 가 지 않는데, 그날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이라, 나보나 광장 정도는 봐두어야지 싶어 산책을 나간 것이다. 나는 아내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혼자 쇼 윈도를 들 여다보고 있었던 탓에-그게 잘못이었다-그녀가 날치기에게 습격당하는 것을 전 혀 눈치채지 못했다. 웨스퍼를 타고 온 젊은이가 뒤에서 다가와 그녀의 숄더백 끈을 힘껏 잡아당긴 것이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끈을 잡고 저항하였다. 그 실랑 이가 30초 정도 지속되었다. 그런데 주변에는 몇십 명이나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른 방향을 쳐다보며 못본 척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당기고 미는 실랑이가 있은 후에 결국은 끈이 끊어지고 젊은이가 가방을 갖고 사라진 후에, 모두들 겨우 사건을 알아차렸다는 듯 그녀 쪽으로 다가와서는, "큰일을 당 했군요." "아무튼 여기에 앉아요." "경찰에 전화를 해드리죠." "그 사람은 이탈리 아 인이 아니예요. 유고 사람이지."라며 저마다 위로를 한다. 이런 때의 이탈리아 인은 상당히 친절하다. 입으로 말하기는 거저라도 할 수 있고, 손쉬운 일이기 때 문이다(그 얼마 후에 핸드백 끈이 끊어지지 않아 질질 끌려가다가 죽은 불쌍한 일본여성이 있었다. 로마의 트라스테베르에서 생긴일이다). 정직하게 말해 그 일은 우리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실망도 컸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약 도쿄에서 날치기를 만나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여자를 봤 다면 그 사람이 특히 외국인이거나 하면 반드시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딱히 정의감에 불타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그런 정도의 일은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운이 몹시 나빴다. 앞서도 썼듯히 우리는 그 다음날 도쿄로 일시 귀국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백 안에는 로마-파리, 파리 -도쿄 간 항공권이 내일 아침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도 두 사람분 항공 권이다. 그리고 여권. 트레디트 카드 두 장과 여행자 수표(이건 뭐 대단한 금액 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길로 곧장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는 크아토로 폰타네 근처에 있다. 이 경찰서에는 도난을 당한 외국인이 도난 신고서를 제출하는 전용창구가 있다. 거기에 가 보니 아직 정오도 안 된 시간인데 벌써 사람이 벌떼처럼 우글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전원이 물건을 도난당한 외국인 여행자들로 당연한 일이지만 모두들 낙담하고 흥분하여 화를 내고 있었다. 대부분이 유럽 인과 미국인들이고, 일본인은 우리밖에 없었다. 그런 인파 속을 헤치고 우리는 도난 신고서 용지를 받아 거기에다 범행 장소라든가 도난당한 물건 등 등을 써 넣는다. 그런데 이게 또 골치 아픈 작업이다. 내가 잃어버린 현금의 액수를 써넣 자, 무뚝뚝한 여자 경관이 "여보세요, 금액 같은 것은 쓸 필요 없어요. 그래봤자 돌아올 턱이 없으니."라고 내뱉듯 말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화가 치민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신네 나라에 여행하러 왔다가 도난을 당해서 곤경에 처 해 있는데 그런 말투가 어디있느냐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소리쳐 보았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공 기관에서 화가 날 때마다 소리를 쳐댔다 가는 성대가 몇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잠자코 용지에 필요한 사항을 기입하고 승인 도장을 받는다. 이 도장이 없으면 항공권도 여권도 다시 발행 받을 수 없 다. 보험금도 받을 수 없다. 그러고서 또 일본 영사관으로 간다. 무엇보다 내일이 출발일이니, 서두르지 않 으면 비행기를 탈 수조차 없다. 영사관에 가니 바로 증명 사진을 찍어오라고 한 다. 로마의 일본 대사관은 이런 유의 도난 사고에는 길이 들어 있어(네, 하루에 이런 일이 몇 건은 반드시 있으니까요, 란다), 일을 지체하지 않고 처리해 준다. 근처에는 속성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진점도 있다. 거기에 가면 단시간에 여 권용 사진을 현상해 준다. 그 다음은 항공권. 이게 문제다. 로마-파리간 에어라 인은 아리타리 아이므로, 아리타리아 오피스에 가서 사정을 설명한다. 도난당한 티켓을 무효로 하고 새 항공권을 발행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아리타리아의 직원은 모두 친절하여, 봉변을 당하셨군요, 라며 동정해 준다. "쿵푸라도 배워 두 지 그랬어요."라고 별볼일 없는 농담까지 한다. "하지만 훔쳐 간 사람은 이탈리 아 인이 아니에요, 유고 사람이지."라고도 말한다(이건 거짓말이다. 어떤 식으로 보아도 날치기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도난 사건이 생기면 전 부 유고 사람에게 그 탓을 돌린다). 그러나 티켓을 재발행해 주지는 않는다. 우 리가 산 티켓은 정규 요금을 지불한 티켓이고, 컴퓨터에는 이름까지 분명히 등 록되어 있고 경찰이 승인한 도난 신고서까지 있는데도 말이다. 바로 며칠 전에 산 티켓이니 상식적으로는 재발행이 안 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해주지 않는다. 어째서 안 된다는 설명도 없다. 안 돼요. 재발행은 불가능합니다. 미안해 요, 라는 말뿐이다. 어째서 하고 싶지 않은가? 나중에 책임이 자기에게로 돌아올 까봐 싫은 것이다. 입으로는 얼마든지 동정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정심을 발휘 하여 무슨 도움을 베풀어주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아무리 말싸움을 하여도 결 론이 나지 않아, 결국은 파리행 티켓을 새로 산다. 다시 발행해 주지 않으면 새 로 사는 도리밖에 없다. "아무튼 일단 새로 사고 나서, 나중에 환불받으세요."라 고 한결같이 주장한다. 훗일 아리타리아 본사에 사정을 설명하고, 불만을 털어놓 았더니, "알겠습니다. 환불해 드리죠."라고 한다. 그러나 그 항공권 값을 되돌려 받기 위해, 2년 반이란 세월과 뼈빠지는 노력과 강력한 인맥을 필요로 하였다. 20세기가 다 가기 전에 되돌려 받은 것을 행운으로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어 크레디트 카드 분실 신고서를 낸다(휴우, 벌써 지칠 대로 지쳤다). 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또 한 장 메이저 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선전을 할 셈은 없지만 이런 때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대응은 매우 신속하다. 세 시간 후에 오 피스로 와 주십시오. 새 카드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라고 한다. 설마, 로마에서 그렇게 빨리 일이 처리될 리가 없지, 라고 얕잡아 보았는데 세 시간 후에 가 보 니 어김없이 새 카드가 만들어져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암웨이는 역시 대단하 다. 그에 비하면 모 메이저 카드 쪽은 전혀 신속성이 결여되어 있다. 카드의 재 발행을 질질 끌다가, 한 달 후에나 간신히 발행하였다. "아하, 도난을 당했다고 요? 로마에서요, 로마는 좀 곤란하거든요."라는 요령부득의 반응이다. 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곤란한 것은 오히려 우리 쪽이다. 외국에 와서 카드를 도난당 하여, 그 재발행에 한 달이나 시간이 걸린다면 어쩌란 말인가. 여행자 수표의 재 발행에 있어서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쪽은 처리가 빨랐지만 모 회사는 영 신통 치 않았다. 그리고, 여행 도난 보험을 들어 두어도 이탈리아에서 당한 도난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케이스가 있다. 사진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커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탈리아 경찰의 도난 신고서 수리증도, 전혀 재몫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많 다. 적당히 수리하기 때문이다(정말 적당히 처리한다. 용지를 내면, 내용을 제대 로 살펴보지도 않고 쾅하고 도장을 찍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산적 해 있는 도난 신고서를 도저히 다 처리할 수 없으므로). 이런 상황을 이 가이드 북의 저자처럼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마찬가지.'라는 따위의 표현으로 무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상식만 잊지 않으면 된다.'는 간결한 어드바이스로 해결되리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단호하게 '그런 엉터리 같 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인 관광객은 우선 집시를 주의하라는 주의를 받는다. 하지만 집시는 익숙 해지고 나면 무섭지도 아무렇지도 않다. 적어도 집시는 외견을 보면 알 수 있다. 다가오면(그리고 수상쩍다 싶으면), 잽싸게 따돌리고 도망치면 된다. 이쪽이 도 망치면 쫓아오거나 하지는 않는다. 겁나는 것은 외견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전 문 혹은 세미 전문 범죄자이다. 로마에는 이런 범죄자들이 우글우글거린다. 지하철에서도 몇 번이나 서리꾼을 보았다. 내 자신 번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가방의 잠금쇠가 반쯤은 열려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탈 때 는, 언제나 가방의 열리는 쪽이 옆구리에 오도록 메지 않으면 안 된다. 귀중한 물건은 상의의 속주머니에 넣고 단단히 단추를 잠근다.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반 드시 가방은 무릎 위에 올려놓아야만 한다. 매일매일이 이런 생활이다. 뒤에서 수상한 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혹 날치기가 아닐까 싶어 뒤를 돌아다보고(수상한 자를 보면 도둑이라고 생각하라, 이것이 우 리의 생활 신조였다), 지하철을 타면 가방을 꾹 누르고 있다. 차내에서 신문을 펼치고 있는 아저씨를 보면 서리꾼이 아닐까 하고 태세를 갖춘다. 지하철에서 내리려고 할 때, 홈 쪽에서 억지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서리꾼이다. 레스토랑에서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늘 힐끗힐끗 가 방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자동차 바깥쪽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데다가 는 절대로 물건을 놔두지 않는다. 오분에 한 번은 지갑이 있는 위치를 점검한다. 집에서 잠시라도 외출을 할 때에는 덧문을 잠그고 나간다. 거동이 수상한 자가 앞에 있으면 길 반대편으로 이동한다. 하기야 로마에 오래도록 살다 보면,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이런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고 만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역시 피곤하고 건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에 일년 가까이 살았지만 도둑에 신경을 써본 일이 없다. 이런저 런 잡동사니를 마구 널어놓고 다녀도, 도난을 당한 적이 없고 도난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미코노스에서 아파트를 빌려 살 때에는 문조차 제대로 잠그지 않았다. 가방을 그대로 놓아둔 채 어딘가 갔다 와도 가방 은 놓인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다 물건을 깜빡 잊고 오면 누군가가 찾아다 준다. 이게 정상적인 사회다. 로마에서는 레스토랑 테이블에 팁 을 두고 갈수도 없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쓱싹 갖고 가버리는 것이다. 그런 도시 는 아마 다른 나라에서는 쉬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팁 좀도둑을 목 격한 후에는 정말이지 이 도시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말았다. 나와 아내가 파리에서 온 니시야마 씨와 함께, 저녁나절 집근처에 있는 옥외 피첼리아에서 식사를 할 때에도, 하마터면 가방을 도둑맞을 뻔했다. 뒤 테이블에 앉아 있는 2인조 특수한 기구(신축성이 있는 지팡이 모양의 걸림봉 같은 것이 다)를 사용하여, 발밑에 놓아둔 내 숄더 백을 질질 끌어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다행히 이 가방에는 책이니 카메라니 하는 것들이 들어 있어 겉보기보다는 훨씬 무거웠기 때문에, 그 걸림봉으로는 채 끌어당기지 못해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솜씨가 아주 교묘하여, 나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아내가 뒤 테 이블에 있는 2인조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주의를 주어 그나마 무사할 수 있었 다. 발밑에 있는 가방에 눈길을 주었을 때는 이미 그 기구는 그림자도 없고 가 방의 위치가 뒤쪽으로 옮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그들은 자리에서 머쓱하게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 다. 그런데 그들은 사라지기 전에 다시 근처에 앉아 있던 미국인 커플을 노렸던 모양이다. 삼십 분쯤 후에, 그 미국인 커플이 계산을 하려고 할 때, 여자 쪽이 자기 핸드백이 없어졌음을 그제야 알아챘다. 그래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그 들은 자기네 옆 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이탈리아 인 커플이 훔쳤다고 생각 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 얌전해 보이는 이탈리아 인 커플을 향하여, 당신네들 가 방을 열어보라고 윽박질을 하였다. 미국인 남자는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화를 내 고 있었고, 이탈리아 인 커플은 영어를 잘 모르는 듯 두 사람 다 뭐가 뭔지 영 문을 모르는 채 어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된 생각이 들어 내가 그 미국인 남자에게로 다가가 사정을 설명하였다. 만 약 당신네들이 가방을 도난당했다면 그 범인은 이 사람들이 아니고 방금 전에 여기에 앉아 있었던 가무잡잡한 2인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동이 수상하기도 했고, 내 가방도 약간 자리가 옮겨져 있었다, 고. 이탈리아 인으로 하자면, 어쩌 면 이런 말도 불필요한 참견인지 모른다. 미국인은 잠시 나를 의심스럽다는 듯 노려보았다. 아마도 나를 이 도시에 교 묘하게 조직되어 있는 함정의 일부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리랴. 하지만 끈질기게 설명을 하자 마지막에는 수긍이 가는 모양이었다. 얼마 후 깊은 한숨 을 내쉬며 그는 이탈리아 인 커플에게 사과하였다. 의심을 해서 미안하다. 뭐라 할 말이 없다. 용서해 달라, 고. 이탈리아 인 커플도 무슨 사정인지를 이해한 듯, "상관없어요, 신경 안쓰니까."라고 말한다. 핸드백을 도난당한 여자는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훌쩍훌쩍 울고 있다. 남자 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물이라도 토해내듯 "퍽 퍽."를 연발하고 있다(그래서 미 국인인 줄 알았지만). 우리들 뉴욕에서 왔는데, 라고 그는 말한다. 내일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그녀 핸드백 안에는 여권이며 비행기표도 들어 있단 말이야, 퍽, 씨팔, 어이 믿을 수 있겠어? 오늘 밤이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고,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이야, 퍽! 그는 무지무지하게 화가 나 있다. 그리고 흥분 해 있다. 웨이터를 붙들고는 화풀이를 하고 있다. 어이, 알아, 자네. 이건 이 레 스토랑에도 책임이 있다고, 레스토랑의 보안이 철저하지 못하니까 이런 일이 생 기는 거 아니냐고, 헤드 웨이터를 불러 와, 라고 소리치고 있다. 미국인이란 점 을 고려하더라도(만약 이와 똑같은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다면, 가게가 고소를 당 할 수도 있다), 상당히 성미가 급한 사람인 듯하다. 그러나 그의 기분만큼은 나 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얼마 후에 헤드 웨이터가 나타난다. 그러고는 동정한다. 그는 아주 괴로운 듯 한 표정이다. 그리고 슬프게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물론 동정을 할 뿐이다. 정 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 기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시뇨 레, 하지만 훔친 사람은 이탈리아 인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유고인일 겁니다... 요컨대 이 레스토랑에는 책임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 현상을 이탈리아식 양동 이 릴레이라고 부른다. 모두가 요령만 부리고 휘익 몸을 날려 '책임'이란 이름의 양동이를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화제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성급한 뉴욕 사내는 마구 소리를 질러대고, 이탈리아 인은 양손을 들어 올리고 마냥 고개만 내젓는다. 하나 그런 일을 언제까지 해봐야 결론은 나지 않 는다. 나도 작년 봄에 당신과 똑같은 일을 당했다, 라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역시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 깡그리 도난당하고 말았다고. 이 빌어먹을 도시 탓이야, 퍽! 여자는 아직도 훌쩍훌쩍 울고 있다. 자기가 핸드백을 도난당하다니, 도무지 믿 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충격이 커서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트러블이란 그런 것 이다. 자신에게 직접 일어난 일이 아니면 모두들 무슨 말이든 듣기 좋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로마에서 만난 일본인에게 아내가 핸드백을 날치기당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 상대방은 사뭇 바보같은 일을 당했다는 표정으로, 그런 건 도난을 당 하는 쪽이 나쁜 겁니다. 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나는 약간 기분이 나빴지만 말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이탈리아 인은 여러 가지 결점을 지니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오만한 말투를 쓰지 않을 만 큼의 배려는 한다). 요컨대 모두들 타인에게 일어난 일이면 무슨 말이든 멋대로 지껄일 수 있는 것이다. 상식을 잊지 마십시오,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괜찮 습니다. 하지만 누가 자신의 핸드백을 도난당한 그 미국인 여자를 나무랄 수 있 단 말인가? 그 밤은 그녀에게는 로마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던 것이다. 그것 도 아름다운 분수 앞에 있는 멋진 피첼리아에서 생긴 일이다. 바로 옆 테이블에 자기 핸드백을 잠시 놓아두었을 뿐인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방지책이 없지 않을 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이런 일이 관광지에서 일어났다면, 나도 어느 정 도는 주의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관광객이라고는 거의 없는 한적한 주택지이다. 그래서 우리만 해도 제법 느긋하 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그들이 당장 해야 할 일을 설명한다. 우선 경찰서에 가서 도난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 그 도난 신고서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영사관에 가서 여권을 다시 발행받아야 한다는 것. 경험자는 말한다, 는 게 바로 이런 경우이다. 퍽! 어이 내일 비행기라구. 나는 고개를 젓는다. 화를 내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런 도시니까, 라고 나는 그에게 말한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느냐, 고 그가 묻는다. 도쿄, 라고 나는 대답한다. 도쿄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있는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렴, 그렇겠지, 그게 정상적인 도시지. 글세 그럴까. 과연 도쿄는 정상적인 도시일까? 하지만 뭐 그것은 별개의 얘기 다. 로마를 찾는 사람들을 넌덜머리나게 하고 짓뭉개기 위해 도시가 준비하고 있 는 것은 도둑이나 날치기꾼이나 집시나 서리꾼이나 치기배나 사기꾼이나 폭력을 휘두르는 바의 웨이터나 잔돈을 얼렁뚱땅 얼버무리는 장사치뿐이 아니다. 그 수 탈을 목적으로 하는 카오스 안에는, 택시도 꽤 상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내가 로마에 있는 사이에 일본에서 아는 사람이 몇 명 다녀갔는데,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바가지를 쓰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공항에서 시내 중심지까 지는 팁을 포함하여 많아야 오천 엔이다. 그런데 모두들 최저 만 엔은 지불했다. 심한 경우는 삼만 엔을 지불한 사람도 있다. 나는 모두에게 "공항에서 중심지까 지의 택시 요금은 많아야 오천 엔이면 족하니까, 그 이상을 요구하면 호텔 프런 트에 가서 교섭을 해 달라고 부탁하라."고 미리 얘기를 해두었다. 하지만 운전사 도 바보는 아니니까 절대로 호텔 입구까지는 가지 않는다. 이러쿵저러쿵 이유를 붙여, 훨씬 못미처에 차를 세우고는, 돈만 냉큼 받아 챙긴다. 삼만엔을 요구당한 사람은 무슨 헛소리냐고 불평을 했더니, "나는 피스톨을 갖고 있으니까."라고 협 박까지 당했다고 한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나는 그 이후로는 누군가 올 때에는 반드시 차를 몰고 마중을 하러 나가기로 하였다. 거리에 있는 일반 택시는 그 정도로 심하지 않다. 가끔은 의심이 가는 운전사 도 있지만 대부분의 택시 운전사는 친절하고 정직하다. 붙임성도 있다. 자못 서 민이란 느낌이 드는 아저씨가 많다. 그들 또한 악덕 운전사 덕분에 피해를 보고 있는 희생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공항과 테르미니 역에 몰려 있는 택시 운전사들의 질은 상당히 안 좋다. 영업용 택시는 말할 것도 없고, 정규 택시도 규정 외의 바가지 요금을 탈취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나도 몇 번 경험했는데, 제대로 돼먹은 운전사가 적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공항과 테르미니 에서는 가능하면 택시를 타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책일 것이다. 경험적으로 말 해서, 행선지가 이름이 알려져 있는 호텔일 경우에는 완전히 바가지 요금의 포 로다. 만약 테르미니 공항에서 당신이 정직하고 인상 좋은 아저씨가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다고 하면 그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뿐이 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말해 이런 행운은 몇 번씩 계속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째서 로마의 경찰이 이런 악질 패거리들을 철저하게 단속하지 않는지, 나로 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먼저 경고를 하기 위하여(여러분, 이 도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도시가 아닙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 그냥 서곡에 불과합니다. 주의해 주십 시오),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충격요법으로서, 친절하게 배려를하여 일부러 악질 운전사들을 공항과 공항역에 배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론 내가 로마에서 그런 혹독한 경험만 한 것은 아니다. 그점은 분명 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즐거운 추억도 있고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사람도 (그 수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있었다. 어쩌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놓였다. 예를 들면, 내 아내가 숄더 백을 날치기 당한 날 밤, 우리가 로마에서 상주하고 있던 아파트의 오너가 찾아와(그날, 우리는 마지막 날이었기에 아파트 를 비우고 호텔에 묵었다), 호텔 바에서 칵테일을 대접해 주며 이 도시에서 그런 일을 당하다니 정말 죄송스럽군요. 유감천만입니다. 만약 현금을 잃어버려 곤경 에 처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필요한 만큼 호텔에서 빌려 드리도록 하겠습 니다. 사양은 하지 마시고, 일본에 돌아가셔서 부쳐 주시면 됩니다, 라고 위로해 주었다. 우리는 다행히도 현금은 거의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호의에 대 해서 감사말로 예의를 갖추었다. 이런 배려를 받으면 이 도시도 그렇게 빌어먹 을 곳은 아닌가 보다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시 또 로마에서 살 마음이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역시 노라고 대답 할 수밖에 없다. 여행삼아 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는 것은 이제 사양하겠 다. 바스타 그라체. 이 글을 쓴 열흘 후에 나는 로마의 아파트를 비우고 도쿄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로마에서 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일년 내내 도둑 걱정만 하고 지낸 것 같다. 어딘가 잠시 여행이라도 떠났다 집에 돌아오면 온 집안의 물건이 고스란히 없어 진 것은 아닐까 하고 내내 걱정을 해야 했다. 그런 걱정을 하며 여행을 해본들 즐거울 리가 없다. 물론 도쿄라고 도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방범대원도 어느 정도는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로마만큼 심하지는 않다. 도쿄에 사는 사람 들은 매일매일 도둑 생각만 하며 살지는 않는다. 나는 도쿄로 돌아와 사람들이 뒷주머니에 커다란 지갑을 보이란 듯 당당하게 집어넣고 다니고 핸드백을 아무 데나 핑핑 내던지는 것을 보고는 한동안 아연해졌다. 하지만 머잖아 익숙해졌다. 음, 그렇지, 여기는 도쿄지. 이제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지, 하고. 이런 부분은 과연 도쿄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도둑 생각으로 허구한날 안달복달하지 않 아도 된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없다. 하지만 역시 거기에는 거기에만 있는 문 제들로 가득하다. 도쿄는 도쿄 나름의 문제로 가득하고, 로마는 로마 나름의 문 제로 가득하다. 그리고 도쿄의 문제는 도쿄의 문제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 를 괴롭히고, 지긋지긋하게 하고, 넌덜머리가 나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오랜 외국 생활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 대충 이런 정도다. 세계는 원칙적으로 그 문제의 질로 아이덴티티를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곳에 있든, 그 문제와 함께 길을 걷고 그 문제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연주가 끝났는데도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고, 청중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바닥 을 쿵쾅쿵쾅 밟는 소리가 격렬하게 온 회장에 울려 퍼지고 있다. 그 소리가 또 굉장하다. 바이킹의 축제 같은 분위기이다. 세 곡정도 앙코르에 응했는데도 청중 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른다. 이 콘서트는-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뜻밖의 횡재였다. 그 후에는 비어 홀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소시지를 먹고 호텔 로 돌아왔다. 다음날을 프란티스카나 교회에서 오르간과 플루트와 오보에 콘서트를 들었다. 이 연주회도 상당히 분위기도 있고 좋았다(딱딱한 나무 의자라, 엉덩이가 좀 아 팠지만). 잘츠부르크에서는 이 음악제 기간에 대여섯 개의 콘서트가 있다. 따라 서 아침에 일어나면 플레이 가이드에 가서 오늘의 연주회 일람표를 본다. 그리 고 그 중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콘서트를 고르면 된다. 유명한 인형극 오페라도 있거니와, 성의 대응접실에서 연주되는 실내악도 있고, 일주일에 한 번은 교회에 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된다. 이만큼 여러 가지 콘서트가 여기저기에서 열 리니, 한 일주일쯤 머물러도 심심할 일은 없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든다. 운이 좋으면 오페라의 캔슬 티켓을 정규 요금으로 입수하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어디까지나 불가능하지 않다는 정도의 가능성이지만). 단 이 도시는 비가 많이 내린다. 내가 이 도시에 있는 동안에도 줄곧 비였다. 그리고 8월 초순인데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추웠다. 모직 스웨터를 입고(너 무 추워서 오스트리아에 온 후에 산 것이다), 그 위에 재킷을 입어도 추웠다. 할 수 없이 몸을 데우려고 레스토랑에 들어가 누들이 들어 있는 따뜻한 수프를 먹 었다. 그럼 엽서를 샀더니, 비내리는 잘츠부르크 그림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비가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잘츠부르크'라 쓰여 있었다. 그림 엽서의 소재가 될 정도이니 어지간히 많이 내리는 모양이다. 잠에서 눈을 뜨면 비, 잠에서 눈을 뜨 면 또 비가 내리고 있다. 잘츠부르크만 아니라, 오스트리아는 어디를 가든 정말 비가 많이 내렸다. 매일 비만 보며 산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잘츠부르크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 독일과의 국경을 넘으면, 거기서부터는 말짱 하게 개어 있다. 하지만 또 남하하여 오스트리아로 발을 들여놓으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신 분은 오스트리아는 언제나 맑게 개어 있는 줄 아실 테지만, 그것은 순전히 20세기 폭스적인 거짓말이다. 우 연히 우리가 방문한 계절이 특히 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 잘츠부르크에 내리 던 비는 일본의 장마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쏟아지는 비로 내내 호텔 방에 처박혀 있었던 탓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책만 읽고 지낸 것 같다. 가지고 간 이와나미 문고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전 7권을 전부 읽어버렸기에, 슈라도밍크라는 조그만 호텔에 머물며 맥주를 마시고 창 밖 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소목에 걸린 방울이 짤랑짤랑 울리는 소 리를 들으며, 톰 울프의 재미는 있지만 약간은 허풍스러운 소설을 읽는다(왜 그 렇게 허풍스럽게 느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재미있다). 그런 나날 들의 반복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놀라고 또 감탄한 일은 비가 유별나게 좍좍 내려도 우산도 쓰지 않고 비옷도 입지 않고 태평한 얼굴로 유유하게 길을 걸어 가는 사람이 많은 것. 이 현상은 어쩌면 기후에 맞춰 인간이 진화를 한 것인지 도 모른다. 그리고 눈에 띄게 마쓰다 자동차가 많은 것. 도요타보다도 닛산보다 도, 훨씬 더 마쓰다가 많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역시 매일매일 여러 가지 음식을 먹었지만, 요리의 이름이 지방마다 다른데다 유난스레 스펠이 길어 무얼 먹었는지 잊어 버렸다. 그야 물 론 주문을 할 때마다 음식 명이 적혀 있는 메뉴를 보고 메모를 해두면 좋겠지 만, 일일이 그러기도 귀찮아 도중에 그만두고 말았다. 대충, PRINZREGENTENTORTE QRTISCHOCKENHERZEN GESCHNETZEL HAHNCHENBRUST SCHASCHLIKSOIESSCHEN 이런 요리의 이름을 하나 하나 메모하면서 밥이 맛있게 목으로 넘어가겠습니 까?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 대학교 일학년 때 독일어 강좌 시간이 떠올라 가슴 이 무거워진다. 내가, "으음 이건 맛있군."이라 느끼고 애써 이름을 메모한 음식은, 잘츠부르크 에서 먹은 VOLLKORNROLLE란 요리이다. 이 요리는 채소를 크로켓의 알맹이 처럼 동그랗게 만들어, 라비오리 같은 것으로 둘둘 말아 기름에 튀긴 것이다. 아 련한 맛에, 상큼하고,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고 싶어질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 한 명품이다. 다른 장소에서는 본 적이 없으니 이 지방 특유의 요리인지도 모르 겠다. 다시 반 번 그걸 먹기 위해서, 또 잘츠부르크에 가고 싶다. 알프스에서 생긴 일 여행에는 반드시 이런저런 문제가 따르는 법이다. 생각해 보면, 사정도 제대로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만족스럽게 통하지 않는 생면부지의 땅을 휘적 휘적 이동하는 셈이니, 문제가 안 생기는 편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게 싫으면 여 행 따위는 하지 않고 집에서 비디오 테이프나 빌려다 보는 편이 좋다-이건 이치 이다. 이치이며 정론이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신상에 문제가 일어나고 보면, 그렇게 간단하게 단념을 할 수가 없다. 이치니 정론이니 하는 것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먼 배후의 풍경으로 변하고 만다. 그런 것은 아무 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뒤로는 부조리한 현실에 위협당하는 한편,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하여 상처입기 쉬운 자아가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인데(혹은 전혀 신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존재는 타인의 신상에 일어난 재난에 관해서는 비교적 간단하게 상상력을 구사할 수 있 음에도(뭐, 그런 거지 뭐, 그런 일이 있다니까, 글세, 그 정도는 예상을 했어야지, 운운), 정작 자신의 신상에 적용시켜야 할 일이 생기면 그 정신적 추구력은 여름 날 오후의 늙은 개처럼 활력이 뚝 떨어지고 마는 경향이 있다. 가령 당신은 내 일 자신이 암 선고를 받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아내가 내일 어디 말뼈다귀 같은 사내와 줄행랑을 치고 은행에서는 전화가 걸려와 크레 디트 카드 현금 대출액이 오백만 엔에 달한다는 사실을 고한다고 하면 당신은 그런 일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런 때의 충격과 심적 고통을 당신은 당신 자 신의 일로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리얼한 현실로서 그 문제가 자신의 눈앞에 모 습을 드러내면, 사람은 그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또는 화를 내기까지 한다. 그런 법이다. 나만 해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가 생긴 것은 8월 6일 오전 10시 전이였다. 우리는 독일 남단에 있는 오 바아메르가우란 마을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하여, 숲 속의 조촐한 국경선을 넘어 (경비원이 한 사람의, 자동차 서류를 체크할 뿐이다), 오스트리아로 들어갔다. 오 스트리아로 들어가자, 늘 그런 것처럼 구름 모양이 수상쩍었다. 언제 비가 갑자 기 쏟아질지 모르는 하늘색이었다. 오바아메르가우에서 로이테트라는 오스트리 아 마을까지는 전장 35킬로미터에 이르는 아주 아름다운 산길이다. 별명은 티롤 가도, 지나가는 자동차도 흔치 않고, 조용하고 공기까지도 아주 아름다운 곳이 다. 소떼들이 도처에 있고 호수가 언뜻언뜻 그 모습을 보인다. 쓰레기 하나 떠있 지 않는 깨끗한 호수이다. 도로변에도 간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우스 쿠쿠레 카레 광고판도 없거니와 산토리 순 생맥주 광고판도 없다. 가는 마을마다 끝이 뾰족하게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이 달린 양파 모양의 교회가 서 있다. 일요일 아침이라, 티롤 복으로 몸을 치장한 아저씨들이 그런 교회로 모여든다. 여행자들 은 등산복 차림으로 산을 향한다. 이 사람들은 비가 내리든 뭐가 내리든, 전혀 관계없다는 듯 철저하게 하드한 휴일을 즐기고 있다. 두터운 구름층이 알프스의 능선을 타고 이동하며 골짜기에 비를 뿌리고 있었다. 이런 한가로운 풍경 어디 에서 문제의 그림자를 상상할 수 있으랴. 비록 흐리기는 하지만, 고요하고 평온 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폴 사이면의 노래말은 아니나, 거기에서 우리는 그 어떤 부정적인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마지막 산을 넘어, 로이테 마을을 눈 아래로 바라보며 기어 체 인지를 하려는 참에 갑자기 엔진이 멈췄다. 어어, 기어가 안들어갔나 하고 다시 기어를 넣고는, 새로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보았지만 전혀 반응이 없었다. 히힝 히힝하는 어설픈 소리가 날 뿐이다. 자동차 내부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난 건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여느 때 같은 불길한 예감만은 충만하게 우리들 주위를 떠돌고 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도중이었고, 그래도 일단 브레 이크는 말을 들으니, 내리막길이나마 마저 내려가자 싶어 천천히 길을 내려가 인가가 보이는 지점에서 차를 도로 옆으로 세웠다. 그러고는 다시 천천히 키를 돌려보았다. 셀 모터는 작동을 한다. 그러나 엔진이 점화되지 않는다. 엔진을 끄 고 오분 정도 사이를 둔 후 다시 키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헛고생이었다. 몇 번 을 해보아도 사태는 변함이 없었다. 차에서 내려 보닛을 열어 본다. 그리고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셀모터를 작동 하는데 엔진이 점화되지 않는 경우의 원인을 생각해 본다. 어어, 뭐였더라? 이그 니션 코일로 높은 전압을 발생시켜 디스트리뷰터로 점화 플러그에 그 전압을 분 배하고, 점화 플러그로 방전 불꽃을 튀겨 혼합기에 점화가 되는 것이다. 세세한 이론은 잘 모르겠지만, 순서는 대충 그렇다. 따라서 점화가 되지 않는 원인으로 서는 우선 플러그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플러그는 아무리 보아도 정확 하게 접속되어 있다. 새 차니까 플러그가 낡았을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다. 그밖 에도 여기저기 다 살펴보았지만,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는 문제점은 하나도 없다. 내가 손댈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그 정도이다. 속수무책이다. 애당초 나는 메 커니즘에는 아주 약하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전에 란치아 지정 공장에서 애써 정기 점검을 받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정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된 거야?"라고 아내가 말한다. "모르겠어. 엔진에 점화가 안 되는데." "왜 느닷없이 그런 일이 생기는 거지?" "글세. 왜 그렇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을텐데 말이야. 지금까지 아주 쾌적하 게 움직여 주었고, 이상한 점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늘 하던 대로 기어를 2단 에서 3단으로 올렸더니 갑자기 움직이지를 않아. 참 못 믿겠군. 새 차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이탈리아 차는 안 사는 편이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일본차 나 독일 차를 사면 좋았을 것을. 그랬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안 당해도 되잖아요." 하기사 아내의 말대로다. 견실한 폴크스바겐 골프를 사는 편이 좋았을는지도 모른다. 내가 란치아를 살 때, 이탈리아인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 차는 안 사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하지만 나는 반은 호기심으로 아 득바득 이탈리아제 차를 샀다. 대체 어떤 물건일까 하고. "그러니까 이런 물건이라고요."라고 아내가 말한다. "일요일 아침에 오스트리 아의 산길에서 갑자기 엔진이 서 버리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녀는 몹시 화가 나 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 기 시작하였다. 어이휴, 어쩌다 내가 또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고 불만을 터뜨리고 싶어진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이치고 정론이고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만다. 이런 심한 일이 내 신상에 일어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 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말싸움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내는 그저 화나 씩 씩 내고 있으면 되지만, 남편은 잠자코 방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게 세 상의 이치랄까 숙명이다.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참으로 불공평한 숙명이다. 우선 차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그리고 사정을 설명하였다. 친절 하게도 차를 세워준 사람들이 탄 차는 볼로냐 넘버 아우트반키 Y10이었다. 젊은 남자 두 명과 여자가 차에서 내려 보닛을 열고는 안을 들여다보며 뭐라뭐라 서 로 의견을 나누었으나, 그들 역시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이 근처 수리 공 장까지 데려다 주겠노라고 하였지만, 아우트반키에는 어른이 네 명이고, 그 틈으 로 고무 보트니 슈트 케이스니 배낭이니 그밖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물건들 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탈리아인의 전형적인 바캉스 용품이다. 그런 데에 어른 이 두 사람 또 올라탈 수가 있겠는가. 친절은 상당히 고맙지만 사양하기로 하였 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는 집의 벨을 눌러 그 집의 부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오 스트리아의 JAF같은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좀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일요일 아 침이라 부인은 아직 가운 차림으로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이제 곧 수리차가 올 거니까 잠시 기다리라고 그녀가 말한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 고 차로 돌아갔다. 이십분 남짓하여 차가 왔다. 노란색 미쓰비시 파젤로 안에서 마음씨좋아 보이 는 아저씨가 나와 "그리슈 구트(안녕하세요)."라고 오스트리아 식으로 인사를 한 다. '그리슈 구트.'는 어쩐지 예의 오스트리아의 '궂 다니.'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어떻게 된 일이지요?" 이 사람은 독일말밖에 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사전 을 한 손에 들고 서투른 독일말로 설명을 한다. 저기 내리막 길에서 엔진이 갑 자기 섰다. 흐음흐음 하고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고는 테스터로 이것저것 점검을 한다. 한 십오분 정도 시간이 소요된 후 "전기적인 문제로군, 이건."이라고 한다. "여기가 완전히 작동을 안하니. 이런 경 우는 나도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는데, 아무튼 로이테에 있는 수리 공장까지 끌어다 주기는 하겠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문이 열려 있을지 의심스럽군. 하 지만 뭐 일단 가봅시다. 걱정말아요. 가면 어떻게든 수가 날 테니." 그러고는 파젤로에 견인되어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로이테 마을로 간다. 견 인을 다 경험해 보다니 난생 처음 있는 일이지만 무척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스케일은 전혀 다르지만, 노르웨이의 바다에서 고장을 일으킨 소비에트의 원자 력 잠수함이 불련 듯 떠오르기도 한다. 로이테에 도착하고 보니, 수리 공장은 아니나 다를까 문이 닫혀 있었다. 여름 휴가 철에다 일요일인 것이다. 열려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할 거예요, 이제?"라고 아내가 말한다. "애당초 당신이 란치아 같은 차를 사고 싶어한 게..." "아아 그만들 해요."라고 아저씨가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달랜다. "이 수 리 공장의 주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니까. 특별히 문을 열라고 교섭을 해볼 테니 그렇게들 아옹다옹하지 말고 안심해요." 오스트리아 JAF아저씨는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몸소 그 공장의 경영 자가 사는 집까지 가서 현관 벨을 누른다. 그러나 아무도 내다보는 이가 없다. "어차피 모두들 어딘가 여행을 떠나고 없을 거라고요. 한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요."라고 아내는 말한다. 그녀는 무슨 일에든 비관적인 성격이다. 반면 나 는 무슨 일에든 비교적 낙관적인 편이다.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면 이탈리아 차 같은 것은 사지 않는다. 내가 아는 사람이 들은 얘기에 의하면, 일본에서 이탈리아제 새 차를 산 사람 이 그 차를 타고 도쿄에서 교토까지 갔다. 돌아와서 그 차를 판 딜러에게 그런 얘기를 하니 "당신 참 용기가 있군요. 그 차로 그 먼길을 무사히 다녀오셨으니 말입니다."라며 진지하게 감탄을 하더란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아 무래도 도시 전설적인 냄새가 난다), 있을 법한 얘기다. 낙관적인 성격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다. 그리고 용기.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뭐."라고 나는 말한다." "어떻게 되면 좋겠지만."이라고 아내가 말한다. 되면 좋겠는데, 라고 나도 생각한다. JAF아저씨도 꽤나 낙관적인 사람인 모양이다. "저 말이지 지금은 없지만, 얼 마 안 있으면 꼭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돌아오면 내가 공장 문을 열도록 교 섭을 해볼 테니까, 저기 있는 카페에 가서 좀 기다리고 있어요. 데리러 갈 테니 까."라고 그가 말한다. 참 친절한 사람이다. 이탈리아 같으면 이렇게 친절하게 대 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이탈리아 사람들은 친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은 아니다. 그러나 이점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탈리아 사람 같으면 이런 식으로 친절하게 대해 주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들의 친절심은(만약 있다 해도) 일요일에는 발휘되지 않는다. "매사 좋은 면을 보기로 하자고."라고 나는 말한다. "여기가 이탈리아가 아니 라서 다행이지. 안 그래? 여기가 이탈리아라면 한 사흘은 꼼짝 못하고 있어야 할거야." "물론 그렇겠죠."라고 아내도 그 말에는 시큰둥하게 동의를 한다. 한참이나 로이테 마을을 어슬렁거려 보지만 아무 재미도 없는 밋밋한 곳이다. 독일의 휘센에서 인스브루크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는 하나, 덕분에 자동차 만 많아 시끄럽다. 이런 곳에 일부러 머무르는 관광객도 없을 테니 호텔도 많지 않다. 삼십분 정도 산책을 하다가, 아저씨가 말한 카페에 들어가 아저씨가 오기를 기다린다. 커피를 석 잔이나 마시며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나는 맥주와 소시지를 먹었다. 그리고 또 한 시간을 기다렸다. 그래도 아저 씨는 오지 않았다. 쌍둥이 노파가 들어와 우리 옆 자리에 앉아서는 맥주를 마시고 그리고 나갔 다. 쌍둥이 노파가 나란히 맥주를 마시는 광경은 꽤 볼 만했다. 그러고서 이 마 을 젊은이가 둘 들어와, 맥주를 마시며 당구를 한 게임 하였다. 그래도 아저씨는 오지 않았다. 달리 이렇다 하게 할 일도 없는지라 또 맛없는 거피를 마셨다. 덕 분에 오줌만 자꾸 나온다. 결국 아저씨가 나타난 것은 오후 세시가 넘어서였다. 우리는 그 어두컴컴한 카페에서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세 시간이나 기다렸던 것이다. 그 동안 아내는 내내 철저하게 뾰로퉁한 표정이었다. 저런 차는 어디다 버리 고 가는 편이 좋겠어, 라고 아내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자동차란 그렇게 간단 히 아무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하는 말에 이미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금 공장 문을 연다고 하니까."라고 아저씨가 말한다. 어이휴 이제 안심이다. 아저씨는 우리를 공장까지 데려다 준다. 거기에서 우리 는 오스트리아 JAF아저씨에게 견인 요금을 지불하였다. 약 육천 엔이었다. 회원 이면 무료인데 회원증 없죠, 라고 아저씨가 안됐다는 듯 말한다. 물론 유감스럽 게도 우리는 오스트리아 자동차 클럽의 회원이 아니다. 그는 미쓰비시 파젤로 차체를 퉁퉁 두드린다. 역시 일본차가 좋단말이야, 라고 그가 말한다. 이탈리아 차는 못 써. 일본차로 바꿔요. 아, 예 여러 가지로 고맙습 니다, 라고 나는 말한다. 아, 예. 공장의 경영자는 예순 살 정도의 할아버지였다. 마을 수리 공장에서 사십 년 쯤은 한결같이 일해 왔을 성싶은 다이하드한 느낌의 할아버지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마이클 듀카키스를 지지하거나 하지 않는다. 브라이언 켈리를 듣거나 하 지도 않는다. 시네 세종 같은 데도 안 간다. 미소니의 스웨터를 사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하게 자동차를 수리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보닛을 열고 시시껍 절하다는 표정으로 안을 휘 돌아보고는, 내 아들이 영어를 할 줄 아니까 그 놈 을 불러오겠고, 라고 말한다. 한참 있자, 작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듯한 분위 기의 아들이 다 낡아빠진 빨간 피아트를 타고 왔다. 키도 훤칠하고 머리칼은 금 발이고, 의외로 핸섬한 청년이었다. 작업복을 입고 있다. 이거 참 일요일인데, 무 슨 일로 호출이야, 란 표정이지만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듯 불평은 하지 않는다. 한창 놀 시절인데 안됐다 싶은 생각이 들지만, 내 쪽도 타인을 동정하고 있을 처지는 아닌 것이다. 대충 설명을 하자 그는 응응 고개를 끄덕으며 수리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아무리 주물럭거려도 원인을 알 수 없다. 이런저런 것들을 풀어내서 태스터로 체크를 하고, 부품을 교환하고, 아무튼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 성을 점검하였지만 도무지 진척이 없다. 엔진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친 구인 듯한 청년이 상황을 보러 다가온다. "너, 뭐하고 있는 거야?" "으응, 아버지 가 수리를 하라고 해서 말이지." "어디가 안 좋은데?" "글세 잘 모르겠어, 이것 참."이란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다 점차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런데도 아 버지는 꽤나 고집스런 사람인 듯, 절대로 아들에게 구조선을 보내지 않는다. 혼 자 해결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내가 "어디가 잘 못 된거지?"라고 물어도, 아들 은 "글쎄요, 너무 어려워서."라고 말할 뿐이다. 두 시간이나 이짓을 하고 있는데 도 전혀 소용이 없다. 마침내 그는 항복을 한 듯 아버지에게로 가서, "아버지, 난 이 이상은 모르겠어요."라고 투덜투덜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알았어, 이제 됐으 니까, 나머지는 내가 하지."라고 지극히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한다. 뭐 너한테는 아직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라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거면 애 초부터 자기가 할 것이지 시간이 급한데, 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다. 각각의 가정에는 그 가정 나름의 존재 양식이 있을 것이다. 아들은 친구와 함께 다시 피아트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암울한 일요일 저녁 나 절에, 이 언뜻 보기에도 따분하기 그지없는 로잇테거리에서 젊은 사람들은 대체 무얼 하며 노는 것일까? 하지만 뭔가 반드시 하고 놀거리가 있을 것이다. 젊을 때에는 무슨 짓을 하여도 그 나름으로 재미있는 법이다. 아무리 시시한 동네라 도, 적어도 마그넷을 뜯었다 붙였다 하는 것보다는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좀 살펴 볼 텐데,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요, 오늘밤 일곱시쯤 이나 내일 아침 정도가 될 것 같은데, 라고 할아버지는 말한다. 그래서 결국 우 리는 오늘 중에 차가 수리되리란 희망을 버리고 로이테 거리에 호텔을 잡았다. 정말 따분하기 짝이 없는 동네라, 가능하면 이런 곳에 묵고 싶지 않고, 원래 예 정대로라면 오늘 중에 스위스로 가야 마땅하지만, 이렇게 되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일요일에 문을 열어준 수리 공장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 이다. 우리가 묵은 것은 그 거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호텔이었다. 여하튼 오래된 건물이라, 복도를 걸으면 삐걱거리는 소리는 요란하고(닌자 저택인가, 여기는), 문턱은 기울어 있고, 목욕탕의 슬라이드 문은 그냥 놓아두면 스르륵 열려버린다. 그러나 방은 넓었고, 분위기도 그런 대로 나쁘지는 않았다. 이 호텔은 그 오래된 역사가 자랑거리인 듯(아마 그외에는 자랑할 거리가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로비에는 19세기 말경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친 이 호텔의 사진이 죽 걸려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동차도 거의 없었으므로 동네의 인상도 지금보다는 훨씬 목가적이다.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아저씨들은 모두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아주 건장하게 느껴졌다. 합스부르크가가 OLD BUT GOOD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통 치하던 시대의 일이다. 마을 광장에서 소방 훈련을 하는 소방대원 아저씨들의 모습도 보인다. 높은 건물 창문에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도 있다. 긴 사 닥다리를 걸어놓고, 지붕에 오르려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들 포즈를 취하고, 꽤 즐거운 표정이다. 연대를 보니, 이들 사진이 찍힌 얼마 후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 사람중 몇 명은 분명 전쟁에서 죽었을 것이다. 배가 맹렬하게 고파 호텔에 짐을 부려 놓고 근처 레스토랑에 밥을 먹으러 갔 다. 맥주를 마시고, 간 수프를 마시고, 칠면조 코르동 부르를 먹었다. 나는 원래 간도 칠면조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지친 탓에 잘못 주문한 것이다), 요리는 제법 맛이 있었다. 좌우지간 의자에 앉아 따스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공장이 문을 열어서 참 다행이었어."라고 나는 포도주를 마시며 말한다. "수리가 되면 좋겠군요."라고 저녁 밥을 먹으며 아내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튿날 아침(이 날도 또 비) 공장에 가 보니 고맙게도 차는 반듯하게 수리되 어 있었다. 이거예요, 바로 이거라며 아들이 무표정하게 절단된 코드를 보여준다. 직경이 1센티미터나 되는 굵은 비닐 코드다. 그 코드는 도끼로 절단한 것처럼 비스듬하 게 싹둑 잘려져 있었다. "이그니션 코일에서 디스트리뷰터로 가는 코드예요. 여 기에서 여기로 말입니다. 이게 끊어졌으니 점화가 될 리가 없죠. 팬 벨트에 빨려 들어가 잘라진 모양이에요." 나는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간다. 이렇게 굵고 튼튼한 코드가 팬 벨트에 빨려 들어간 정도로 그렇게 간단하게 절단될 수 있는 것인가, 좀 심하지 않은가? 도 무지 점검을 받은 지가 언젠데, 어떻게 이런 사고가 일어나야만 한단 말인가. "이런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사고냐?"라고 나는 젊은이에게 물어본다. 하지 만 그는 아무 대답없이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말이 없는 청년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서야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라고 스스로 대답한다. 배 선이 이리 저리로 뒤엉켜 있어 단선된 코드를 찾아내기가 힘들었던 듯하나, 엔 진이 점화되지 않으니 디스트리뷰터로 가는 코드를 체크해 보는 따위는 자동차 정비의 초보 중에서도 초보 단계이고, 두 시간이나 보닛을 열고 조사해 보았으 면 알 만도 한데 싶은 기분도 든다. 아버지에 비하자면 아직도 앞길이 먼 애송 이 아들이다. 하지만 자동차는 일단 수리되었고, 남의 가정 일은 남에게 맡기면 될 일이니,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수리 대금은 지불한다. 대금은 약 이만 엔이다. 모처럼의 일요일에 일을 한 아들에게도 불쌍한 마음에 팁을 조금 주었다. "그러니까,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벤츠를 살 걸 그랬어요."라고 아내는 아직도 투덜거리고 있다. "좀 참아 줘, 벤츠 같은 차는 부동산 투기꾼이나 야구 선수들이 타는 차라고." 라고 나는 말한다(부동산 투기업자와 야구 선수와 야나세 여러분들 죄송합니다. 이건 그저 단순한 농담입니다. 내가 이런 농담을 하는 것은 벤츠를 사지 못하여 약이 올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도 아무튼 고장은 잘 나지 않잖아요."라고 아내는 말한다. "이제 이 차도 고장 안날 거야. 이번 일은 아주 특수한 사고였다고,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으니까, 이제 괜찮아. 차의 상태 자체는 별로 나쁘지 않은 걸 뭐."라고 나는 설명한다. 설명을 한다기 보다는 아내가 싫어하는 질 나 쁜 친구를 변호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글세 그럴까."라고 아내는 냉철하게 말한다. 마치 가벼운 저주를 걸기라도 하 듯. 그렇다-처자를 거느린 대부분의 분들은 잘 아실 테지만-아내가 대화의 마지 막에 중얼거리는 한 마디는 대개의 경우 가벼운 저주이다. 그 날 오후, 흐르츠가우라는 그림 엽서처럼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마을 근처를 지나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패널에 브레이크 경고 표시가 켜졌다. 반짝 오렌 지 빛으로 아주 불길하게. 저주 탓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주유소에 들어가 살펴봐 달라고 부탁하니, 손님 이건 란치아 지정 공장에 가서 브레이크를 꼼꼼 하게 점검받아야 합니다, 라고 한다. 으으으으윽, 공장은 스위스의 국경에 가까 운 아르베르슈베르데라는 곳에 있다. 거기까지 가서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거기 까지 가는 데는 무리가 없겠지만, 아무튼 오늘 중으로 반드시 점검을 받는 편이 좋을 겁니다. 브레이크 고장은 겁나니까요." "오스트리아 자동차 수리 공장 순례."라고 아내는 쌀쌀맞게 중얼거린다. "매사 좋은 면을 보자."라고 나는 말하고, "이런 경험은 독일 차를 타고서는 좀체 하기 힘든 거라고. 고장이 안 나는 차로 안전하게 여행을 했다고 해봐야, 그저 그냥 이 호텔에서 저 호텔로 효율적으로 이동하는 것뿐이잖아. 이탈리아 차를 타고 다니면서 사회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좀 샅샅이 보자고."그렇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낙관적인 사람이다. 그렇게하여 우리는 다시 비에 젖은 소들과 양파 모양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아 르베르슈레르데까지 갔다. 아주아주 묵묵하게. 아르베르슈베르데의 수리 공장에 대해서 특필할 만한 일은 없다. 이왕 쓴 김 에 덧붙이자면, 그 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계기가 6천 5백 킬로미터를 가리키고 있는 시점에서, 어느 나사인가가 돌연 빠져나가, 기어가 너덜너덜한 신 세가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여행의 끝 간신히 원상복구된 란치아 데르타를 타고 다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 어간다. 제대로 움직여만 주면 이 란치아는 상당히 신나는 차이다. 다들 하는 말 을 종합해 보면 이탈리아의 차에는 적든 많든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제대 로 움직여만 주면 아주 신나는 차이다. 이 란치아 데르타만 해도 성능이 특별히 좋은 것은 아니다. 저속으로 달리면 덜거덕덜거덕, 고속으로 달리면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 그러 나 2단 3단으로 팽팽하게 엔진의 회전을 올려갈 때의 마약적 쾌감은, 뭐라 형용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다지 속도를 즐기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쾌 감은 굉장하다. 엔진의 반응이 리얼 타임으로, 실물 크기로 몸에 퉁겨 오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렇지 그렇지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구석이 있다. 그렇지만 일단 움 직임을 멈추고 나면 그저 대형 쓰레기다. 사실은 슈바르츠발트에서 슈트라스블 쪽으로 빠질 계획이었으나, 란치아를 신뢰할 수가 없어서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 가기로 한 것이다. 국경 검문소를 지나, 적.백.녹의 삼색기가 펄럭이는 이탈리아로 진입하고 나니, 저도 모르게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고국으로 돌 아온 듯한 기분마저 든다. 진종일 내리는 비에도 약간은 진절머리가 났고, 음식 물에서 풍풍 풍기는 버터 냄새도 싫증이 났다. 풍경은 과연 아름답지만,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허구한 날 알프스와 교회와 호수만 보고 있다보면 나름대로 싫증 이 나는 법이다. 국경선이 있는 고갯마루를 넘자 햇살의 질이 확연히 달라진다. 하나부터 열까지가 모두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괴테가 [이탈리아 기행]에 서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갔을 때 느낀 밝음을 흥분된 필치로 써놓았 는데, 과연 그 기분 이해가 간다. 이탈리아는 실로 신의 선택을 받은 나라이다. 따뜻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풍요롭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알프스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로 돌아오니, 순간적으로 주변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행보가 거칠다. 좌우지간 유별나게 난폭하다. 그러나 이 거친 운전에도, 그 나름의 룰이나 경향이 있어, 길이 들고나면 당연한 일인 듯 여겨진다. 적어도 처음에 느꼈던 만큼 난폭하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 같은 경우는 운전 면허를 따자마자 유럽으로 가서, 초보자 운전 딱지를 붙인 채 로마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으니, 애당초 운전이란 그런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생각해 보면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일본으로 돌아 와 경험한 도쿄 거리에서의 운전이나, 도메이 고속도로의 교통사정 쪽이 훨씬 더 적응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탈리아 드라이버들의 운전이 난폭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지만, 드라이버들의 얼굴이나 자동차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표정이 있다. 따라서 움직임을 파악하기 쉬운 것이다. 10퍼센트, 20퍼센트의 차이로 길을 비키거나 길 을 비켜 주거나 한다. 그런데 일본으로 돌아오니 그런 표정을 파악할 수가 없다. 따라서 호흡을 맞추기가 어렵다. 당분간은 그런 상황이 오히려 겁이 났다. 한편 독일 사람들의 운전은 대개의 경우 계급 사회적으로 지극히 질서 정연하다. 그 래서 국경을 넘어 남하하여 알파나 피아트가 핑핑 앞 대가리를 밀고 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하면, 아아 드디어 이탈리아로 돌아왔구나 하고 절실하게 실감한다. 바캉스 시즌이면 텅 비는 로마로 돌아와, 한동안은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한 여름의 로마에는 다른 계절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풍취가 있다. 거리에 드문드 문 지나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달리는 차도 놀랄만큼 적다. 이 시즌에는 그렇게 고생스런 노상 주차도 손쉽다. 아무데나 세우고 싶은 만큼 차를 세워 둘 수 있 다. 사람이나 자동차나 이 정도로만 한산하다면 로마도 상당히 좋은 도시일텐데, 하고 생각한다. 우리 집 앞에 다 낡아빠진 피아트가 몇 대 벌써 몇 주일째나 방치되어 있다. 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 꼼짝 않고 웅크리고 있는 차들은, 비와 먼지로 무참하게 일그러진 모습이다. 아이들 낙서장이 되어 있는 차도 있고, 타이어의 공기가 죄 빠진 차도 있다. 와이퍼에는 광고 전단이 몇 장이나 꽂힌 채 누렇게 색이 바래 있다. 아마도 저것들은 아줌마들이 시장 보기용으로 사용하던 차일 것이다. 그러 나 그 차들의 주인은 온 가족이 함께, 더 큰 차를 타고 길디 긴 바캉스를 떠난 것이다. 그리하여 내버려진 친크첸트들은 불평 한 마디 하지 못하고(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만), 홀로 외로이 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오후의 햇볕은 어질어질할 정도로 뜨겁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서늘한 것이 기 분이 상쾌하다. 때때로 열기가 후욱 끼쳐 오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일본의 여름 보다도 훨씬 지내기 수월하다. 점심 식사 후에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한 시간 정 도 낮잠을 잔다. 그 시간에는 온 거리가 조용하다. 해가 지기 전에 밖으로 나가, 길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레몬 그라니타(셔벗)를 먹는다. 이탈리아로 하자면 셰라 드(아이스크림)가 유명하지만, 나는 그라니타를 좋아한다. 차갑고, 달콤하고, 그 리고 시큼하다. 진짜 레몬으로 만들기 때문에 코가 찡하도록 시큼한 것이다. 그 리고 레몬 알멩이가 여기저기 섞여 있다. 로마의 여름을 생각하면 나는 우선적 으로 이 그라니타를 떠올린다. 햇빛이 너무도 눈부셔 길가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짙은색 선글라 스를 끼고 있다. 이윽고 해가 저물면 사람들은 테베레 강가를 산책하기 시작한 다. 강에 떠 있는 장삿배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산탄젤 로 광장에 설치된 야외 무대에서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라틴 재즈 밴드가 악기 를 조율하기 시작한다. 낮 동안 축 늘어져 있던 개들도 간신히 숨이 되살아나 이리 저리로 종종거리며 내달린다. 이 시즌에는 시장이든 식료품 가게든 전부 문을 닫기 때문에 먹을거리를 구하기가 고생스럽다. 슈퍼마켓에 가도 냉동식품 이나 건조 식품 그리고 캔 식품 정도밖에 구입할 수가 없다. 머리가 길어 이발 소에 가려고 온 로마 거리를 헤매고 다녔지만 영업을 하고 있는 이발소는 한 군 데도 찾을 수 없었다. 이 나라에서는 이용사도 한 삼주쯤은 휴가를 간다. 훗일 이용사가 몹시 심상해 하며, "나 같은 사람은 신정 연휴에 사흘 휴가를 받는 것 도 어쩐지 미안한 마음인데."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이용사가 이런 발언을 들 으면 자신의 귀를 의심할 것이다. 마침내 그런 여름도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돌아 왔다. 자동차도 늘 어나기 시작하여 눈 깜빡할 사이에 도로가 차들로 꽉 메워졌다. 이중주차를 고 발하는 클랙슨 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진다. 다시 여느때의 로마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창문으로 그런 로마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몇 편인가 단편 소설을 썼다. 겨 우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돌아온 것이다. 단숨에 단편을 끝내고는 몇 권인가 번역을 하였다.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우리가 로마를 떠나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드디어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1980년 가을에 나의 해외 생활은 일단 종언을 고했다. 지금까지 도쿄 를 들락거린 것은 일시 귀국이었기에 가재 도구를 남겨 두고 왔지만 이번에는 전부 처분하였다. 일단은 여기까지, 란 기분으로, 일본을 떠난 것이 1986년 가을이었으므로, 꼭 삼 년 동안 유럽을 전전한 셈이다. 사실은 한자리에 지긋하게 머물러 있고 싶었 지만, 이 책에서도 말했듯, 좀처럼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할 수가 없어 결국은 워 드 프로세서와 라디오 카세트를 짊어지고 남유럽을 이리저리 방황하게 된 것이 다. 여러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하였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감동도 했다. 배울 것도 많았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 우리는 이런 유 동적인 생활에 얼마간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인맥도 없고 아무런 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단둘이 이국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겨운 일이었다. 아직 젊은 시절이라면 어떻게든 헤쳐 나가겠지만, 우리는 이미 그렇게 젊지 않다. 나는 서른일곱 살에 일본을 뒤로하였고 지금은 마흔 살이다. 슬슬 돌아가 야 할 때이다. 나리타로 향하는 아리타리아 기내에서 오랜만에 일본 잡지를 몇 권 읽어보았 다. 하지만 어느 잡지를 불문하고, 거기에는 딱 한 가지 기사밖에 실려 있지 않 았다. 미야자키 쓰토무의 기사다. 그 기사는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어떤 잡지를 펼쳐도, 어떤 페이지를 들추어도, 미야자키 쓰토무의 범죄에 관한 기사밖에 없는 것이다. 한결같이 그 기사 일색인 것이다. 내가 일본을 떠날 때, 잡지는 미우라 가즈요시와 다나카 가쿠에이의 기사로 메워져 있었다. 온 일본이 미우라와 다나카가 일으키는 스캔들에 열중이었다. 온 갖 잡지가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미우라는 어디에 가서 무얼 먹었는가, 미우 라는 어떤 여자들과 잤는가. 미우라는 어떤 소년이었는가. 다나카는 어느 쪽 손 을 어떤 식으로 들었는가. 다나카는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하였는가. 그런 말초 적인(그리고 명백하게 무의미한)정보가 매스컴의 손에 의해 무심코 오줌처럼 방 뇨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 대한 기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그 점이 도무지 불가사의했다. 그런 식으로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그러나 아무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글쎄요, 미우라 는 재판을 받고 있지 않을까요, 잘 모르겠군요, 다나카? 그 사람 아직 살아 있나 요. 이 삼 년 동안 많은 것이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나와, 혹은 나를 둘러싼 환경 도 꽤나 많이 변했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도 몹시 변했다. 그 결과 삼 년 동안 에 나와 일본이라는 나라 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괴리가 생겨났고, 어떤 종류의 친근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런 점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결론 비슷한 말을 하기에는 아직 시기상 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렇게 서둘러 결론을 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삼 년 동안에 일본 사회 에 있어서의 소비 속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속되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일본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느낀 것이 이 점이었다. 나는 그 무지막 지한 속도를 실감하고는 정말로, 아무 과장 없이 그저 아연해졌을 뿐이다.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만 것이다. 그런 소비 양상은 나에게 거대한 수탈 기계를 상 기시켰다. 생명이 있는 것, 생명이 없는 것. 이름이 있는 것, 이름이 없는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그런 모든 사물이며 사상을 깡그리 삼켜, 무 차별하게 씹어서는, 배설물로써 뱉어내는 거대한 흡수 장치,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빅 브러더로서의 매스 미디어다. 사방을 둘러보면 눈에 뜨이는 것은, 다 씹고 난 비참한 잔해이며, 앞으로 그야 말로 삼켜서 씹힐 운명에 놓인 것들의 교성이었다. 그것이 내 나라였다. 싫든 좋 든 관계없이. 나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미국으로 가서, 또 한 달 반 정도 거기에 체 재하였다. 출판 프로모터 일 때문이었다. 뉴욕에 가는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지 만 딱히 위화감은 느끼지 못했다. 뭐 대충 이런 곳이겠지 하고 예측한 대로의 도시였다. 물론 뉴욕 같은 도시에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반응이 직설적인 만큼 오히려 도쿄보다는 위화감을 덜 느끼지 않았나 싶은 부분도 있었 다.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어떤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일본에 갔다 가 막 돌아온 참이었다. "말이지 일본 사람들은 모두 야피더라구."라고 그가 동 료들을 향하여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 체 일본 사회의 어디가 야피 사회 같은 것일까? 어디가 야피하다는 거야? 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JAL의 좌석은 이코노미보다 비즈니스 클라스가 더 많다고, 그런 비행기가 다 있다니 믿을 수가 있겠어? 나는 못 믿겠어. 그런 바보스러운 짓이 어딨어. 알맹이라는 게 없잖아. 너무도 깊이가 없는 사회였어." 어쩌면 그가 지나치게 모럴리스틱한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금박으로 치장한 이 일그러진 유사 계급 사회를 야피 사회라고 한다면, 일본 의 사회는 지금 과연 그런 방향을 갈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잡지에 실린 젊은 여자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BMW 중에서라면 700시리즈를 모는 남자와만 데이트하고 싶다. 500이 면 또 몰라도, 300시리즈는 가난해서 싫다." 나는 처음에는 이 말이 재치를 부린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면 뭔가 이중 의 의미를 담은 복잡한 메시지일 것이라고, 그런데 그것은 농담도 메시지도 아 니었다. 그것은 명실상부한 본 마음이었다. 그녀들은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봐 처자, 그래봐야 기껏 자동차 아니야, 라고 나는 생각한다. 핸들이 조금만 삐끗하면 전주에 부딪혀 납 작해지고 마는 그냥 물건에 불과하잖아. 하지만 그녀들에게 그것은 그냥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들의 존재 위치를 명확하게 어필시켜 주는 데 필요한 중요한 공동 환상인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그녀들을 조롱할 수 없다. 나는 앞으로도 이 나라에서 한 사 람의 작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책임 있게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 이 우선적인 선결 문제다. 그리고 나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어떤 발언 자격을 갖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비웃어야 할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일본에 돌아와 한동안 나는 거의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머리가 멍했다. 중력이 바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쯤을 나는 아무일도 하지 않고 그 저 멍하고만 있었다. 나는 이 장소에 있어서의 자신의 자격에 관해 여러 가지로 사고해 보았다. 매일 집 주변을 달리고 책을 읽고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농담을 나누고, 온천에도 갔다. 그러나 책상 머리에 앉아도,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쓰다 만 단편소설이 그 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워드 프로세서를 켜고, 화면을 지그시 쏘아보지만 전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 삼 년간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저런 일이 많 았지만 결국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뿐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 는 말하자면 상실된 상태에서 이 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마흔 살이 되어 돌아온 지금에도 역시 그때나 다름없이 상실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력감음 무력감, 피례는 피폐로 남아 있다. 조르조와 카를로는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 그들이 예언했듯이, 나는 그저 나이를 먹었을 뿐, 무엇하나 해결되지 않은 것 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도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출발점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더욱 혹독한 지경에 빠질 가능성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고. 그렇다, 나는 낙관적인 인간인 편이다. 나는 자신의 중력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이 책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써온 스케치에 손질을 가하고 새로운 문장을 덧붙여 한 권의 책으로 꾸몄다. 완성하기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두꺼운 책이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좋은 일이 다. 맨 처음 존재했던 자신의 사고에서 무언가를 '제거'하고, 또 거기에 무언가를 '삽입'하고, '복사'하고, '이동'시켜, '새롭게 보존할' 수가 있다. 그런 작업을 몇 번 이고 거듭하는 사이에, 자신이란 인간의 사고나 혹은 존재 그 자체가 그 얼마나 일시적인 것이며 과도기적인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완성된 책조차 역시 과도기적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불완 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불완전할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과도기적이며 일 시적이라 함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지금도 저 먼먼 북소리가 들린다. 고즈넉한 오후에 귀를 기울이면, 그 울림을 귀로 느낄 수 있다. 까닭없이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일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런 식으로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기적이며 일시적인 나 그 자체가, 내 존재의 영위 그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란 행위가 아닌가, 하고 그리하여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아무데도 갈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모두에 써 밝힌 것처럼 터키의 오래된 노래에서 따왔다. 스케 치를 한 장면 한 장면 써 모을 때부터, 책으로 만들게 되면 이 제목으로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우연이기는 하지만, 사카이 다다야스 씨의 저서인 [먼북 일본 근대 사고]와 똑 같은 제목이 되고 말았다. 다른 제목을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는지도 모른는 경우이나, 나도 이 타이틀에 는 깊은 애착을 갖고 있어, 양해를 구하여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기본적으로는 전작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몇몇 장은 잡지에 발표되었던 것을 손질하여 개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