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랑겔랑스 섬의 오후 저자명: 무라카미하루키 출판사명: 백암 무라카미 하루키 1949년 출생. 일본 최대 베스트 셀러 작가 1979년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발표 '군상 신인 문학상 수상 1980년 '1973년 핀볼', '중국행 슬로보트' 발표 1982년 '양을 둘러싼 모험' 발표 '야간문예'신인상 수상 1985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발표 '곡기 윤일랑'상 수상 1987년 '노르웨이의 숲' 발표 6백만 부라는 공전의 판매기록을 세우며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킴 1988년 '댄스댄스댄스'발표 1990년 'TV피플' 발표 1992년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발표 그외 에세이, 여행기 등 다수 발표 옮긴이의 말 이제 '랑겔한스 섬의 오후'를 끝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세권이 모두 완성되었다.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는 안도감과 이제야 겨우 끝냈다는 허탈감이 엇갈린다. 수필집 시리즈를 시작할 때, 이 수필집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의 작품을 올바로 해석하게 하는 자료적 역할까지 할 수 있었으면 했던 나의 바람이 얼마만큼 결실을 거두었는지 궁금하다.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 여러 사람의 도움을 입었다. 특히 영화나 재즈 음앗에 관련된 두 분, 그리고 외국 문학 관계 자료를 찾느라 애써 줏긴 경희대학교 사서과의 두 분, 고맙습니다. 또 백암 출판사의 편집부에 계신 두 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권 한 권 나올 때마다 성원해 주었던 하루키 애독자분들께 감사합니다. 오래도록 지키지 못한 딸아이들과의 약속을 이제는 실행해 야겠다. 실컷 놀아주고, 봄꽃이 핏기 전에 예쁜 치마도 만들어 주고. 1994년 3월 김난주 랑겔한스 섬의 오후 읽는 차례 랑겔한스섬의 오후 안자이 미즈마루 끼 레스토랑에서의 독서 브라암스와 프랑스 요리 쉐이빙 홈 이야기 여름날의 어둠 여고생의 지각에 대하여 지갑속의 사진 모두 함께 지도를 그리자 ONE STEP DOWN 세면기 속의 악몽 시계는 어떻게 증가하는가 트레이닝 셔츠 CASH AND CARRY UFO에 대한 성찰 고양이의 수수께끼 찰학으로서의 언더록 백화점의 사계 BUSY OFFICE 뉴스와 시보 소확행 포도 팔월의 크리스마스 워크맨을 위한 레퀴엠 '핵의 겨울'적 영화관 지하철 긴자선의 원숭이의 저주 랑겔한스 섬의 오후 후기 해뜨는 나라의 공장 서문 메타포적 인체 표본 공장으로서의 결혼식장 지우개 공장의 비밀 경제 동물들의 오후 사상으로써의 양복을 만드는 사람들 하이테크 워드 한없이 밝은 복음 제산 공장 후기 본문 일러스트 안자이 미즈마루 랑겔한스 섬의 오후 안자이 미즈마루 끼-서문을 대신하여 여기에 수록한 그림과 문장은 안자이 미즈마루씨와 제가 '클래시'라는 잡지에 이년간에 걸쳐 게재했던 것들입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미즈마루씨와 콤비로 하는 일은 상당히 즐거운 체험이었습니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늘 말짱한 정신으로 글을 쓰는데, 여기에 미즈마루씨의 그림이 곁들여 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그만 어슬렁 어슬렁 부엌으로 들어가, 칵테일을 만들어서는 그걸 마시면서 쓰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얘기, 안자이 미즈마루씨의 그림이 들어 있는 저의 글은 전부 그러니까, 당연히 '미즈마루 끼'가 스며들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즈마루 씨란 대체 무엇일까? 들어서기만 하면 기분이 느긋하게 풀어지는 단골 바의 카운터에서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주십시오. 그 분위기가, 즉 내게는 '안자이 미즈마루 끼'압나더, 바에 들어서면 카운터에 앉는다. 바텐더와 서로 눈짓으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그리고 적당하게 싸한 술이 내 앞에 놓여진다. 나직한 소리로 오래된 옛 음악이 흐른다. 그러는 사이에 문득 친구에게 편지가 쓰고 싶어져 노트에다 볼펜으로 '잘 지내고 있나...'하고 쓰기 시작한다. 바로 그런 분위기입니다. 실제로 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으로, 여기에 실린 글을 썼습니다. 언제나 문득 머리에 떠오른 것을 그대로 술술 써서는 그것을 또 그대로 봉투에 집어 넣어 미즈마루씨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미즈마루씨가 그림을 곁들여 주는 나의 글은 꽤나 행복한 글입니다. 그 까닭은 그들에게는 사람을 감탄시키거나 탄성을 지르게 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막 태어난 알몸둥이로 '미즈마루 끼'라는 옷을 걸치고, 사뭇 상쾌하다는 듯 그림 옆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 사이에도, 아직 한낮의 한 시밖에 안된 시간인데 왠지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군요. 골치 아픈 일입니다, 참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레스토랑에서의 독서 젊은이를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서 곧잘 '시티 라이프' 운운하는 특집을 꾸미곤 하는데, 정직하게 말해 그런것들이 실제로 도시에 살면서 기분좋게 생활하려고 하는 인간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데 상대방이 오후 세시반에 롯본기의 교차로에서 갑자기 '나, 화장실에 가고 싶어'라고 할 때 어디로 데려가면 좋은가, 이런 류의 기사는 결코 그런 잡지에 실리지 않는다. 그러한 사소한 생활 정보는 자신의 두다리로 타박타박 걸어다니며 찾아서 머리에 새겨 넣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말단 작업을 꼼꼼하게 하다보면, 생활이란 때로는 생각지도 않게 매끄럽고 그리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흘러가게 된다. 가령 배경음악이 흐르지 않는 분위기 좋고 널찍한 찻집을 몇 군데 확보해 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북적대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한데를 돌아다니느라 짜증이 나곤 할 때, 이런 오아시스같은 찾집에 찾아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면, 뒤엉킨 실꾸러미 같던 머리가 한 올 한 올 조용히 풀려감을 느낄 수 있다. 사람과 긴요한 얘기가 있을 때도 이런 찻집을 한 군데쯤 알고 있으면 편리하다. 스티비 원더의 '파트타임 러버'가 폭발할 듯 울려퍼지는 찻집에서처럼 '저 있잖니, 이번 일요일에 괜찮으면-'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된다. 세련된 찻집은 얼마든지 있지만, 조용한 찻집이란 불쑥 찾는다고 해서 쉽사리 찾아지는 것이 아니므로, 알아두면 의외로 쓸모가 있다. 길거리를 지나다 문득 책이 읽고 싶어졌을때는, 뭐니뭐니해도 오후의 레스토랑이 최고이다. 조용하고, 밝고, 손님이 들끓지 않고, 푹신한 의자가 있는 레스토랑을 한 군데 확보해 둔다. 포도주와 가벼운 전채만 주문해도 웨이트리스가 얼굴을 찡그리지ㅣ 않는 친절한 가게가 좋다. 거리에 나가 시간이 남으면 책방에서 책을 한 권 사가지고 그 레스토랑에 들어가 백포도주를 찔끔찔끔 마시며 페이지를 넘긴다. 그러면 아주 호사스럽고 한가로운 기분이 든다. 체홉을 읽는다ㅁ, 무척 어울리는 풍경이 될 듯하다. 이러한 류의 생활 속의 자잘한 요령은 누가 일부러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정보지에 실려 있지도 않다.스스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터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동경에 사나, 그린랜드의 설원에 사나, 대수로운 차이는 없을지 모르겠다. 브라암스와 프랑스 요리 며칠 전 FM방송으로 클래식 콘서트를 듣고 있으려니, 무슨 곡인지는 잊어버렸지만, 도중 악장이 바뀌는 곳에서 누군가가 혼자 짝짝짝 하고 대여섯번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당사자는 상당히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각 악장이 끝나는 곳에서 박수를 치면 안된다는 매너는 #1 도대체 누가 #2 언제 #3 어떤 이유로 정한 것일까? '아! 좋다'라고 생각되면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싶어지는게 자연의 섭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나 거기에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사정과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긴 어떤 책에 의하면 옛날 옛날 먼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1885년에 브라암스가 교향곡 4번을 자신의 지휘하에 초연했을 때, 후원자인 미이닌겐 공작의 희망에 따라 제 3악장을 거듭 연주하고, 나아가 전악장이 다 끝나고 나서는 덤으로 다시 한 번 전 곡을 연주하도록 지시받았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엉터리 같은 얘기다. 3악장이 끝난 즈음에, 그것도 명실상부한 콘서트 홀에서 '아, 브라암스 군, 지금 악장 꽤 좋았어. 다시 한 번 해보도록'이라니. 제아무리 후원자에다 공작이라 하더라도,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자면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그 무렵엔 그런 얘기도 무리없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롯본기에 있는 지금의 재즈클럽에서처럼, 멋진 솔로가 있으면 모두들 '오예,오예'하고 아우성을 첬는지도 모른다. 제법 신날 것 같다. 테이블 매너에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잡다한 것들이 많다. 특히 서양 요리가 그렇다. 한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격식을 갖춘 곳에서는 밥을 포크의 등에다 얹어 먹지 않으면 안된다는 매너가 있어, 상당히 곤욕스러웠다. 그리고 고기는 한조각 베어서는 입으로 나르고, 또 한조각 베어서는 입으로 날라야 한다는 매너도 성가시다. 나는 요즘에는 될 수 있는 한 식사 시작 단계에서 절단 작업을 모두 끝내고, 그 다음은 나이프를 걷어치우고 포크만을 오른 손에 쥐고 먹는다. 매너에는 어긋나지만, 그러는 편이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어여쁜 여자가 프랑스 요리집에서 포크만을 사용하여 식사하는 광경은 자못 섹시하기까지 하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쉐이빙 홈 이야기 택시를 타고 있다가 내릴 때가 다 되어 요금을 지불하려고 했더니 공교롭게도 지갑안에는 만 엔짜리 지폐밖에 들어 있지 않고, 운전수도 잔돈이 없어 허둥지둥할 때가 더러 있다. 옛날에는 그럴 때면 '담배가게 앞에 세워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담배를 사 돈을 바꿨다. 그런데 몇 년 전 담배를 끊고 난 후로는, 그렇게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나는 대개 화장품 가게 앞에다 차를 세워 달라고 하여, 쉐이빙 홈을 사서는 잔돈을 받아 택시요금을 지불한다. 어째서 쉐이빙 홈인가? 어째서 같은 화장품 중에서도 샴푸나 파우더나 애프터 쉐이빙 로숀이나 오데코롱은 안되는가? 라고 누군가 묻는다해도 난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나는 그냥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쉐이빙 홈을 좋아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쉐이빙 홈을 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택시 요금을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인데, 그 후 온종일 쉐이빙 홈 깡통을 껴안고 거리를 어물쩡거리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된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쉐이빙 홈을 한 손에 들고 거리를 걷다보면, 거리가 여느 때와는 좀 다르게 보인다. 권총을 주머니가 쑤셔 넣고 거리를 걷고 있으면 거리가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얘기를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지만 쉐이빙 홈만으로도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바에 들어가 카운터 위에다 쉐이빙 홈이 들어있는 꾸러미를 슬며시 올려놓고, 위스키를 즐기는 것도 상당히 멋스럽다. 뭐 그런다고 무슨 대단한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외국에 가면 반드시 그 지방의 수퍼마켓에 뛰어 들어가 먼저 쉐이빙 홈을 산다. 그리고 그것을 호텔 목욕탕의 선반에 면도기며 칫솔이랑 함께 나란히 늘어 놓는다. 그러면 그제서야 '아아, 외국에 왔구나'하며 실감이 나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제품은 질레트의 '트로피칼 코코넛'이란 쉐이빙 홈인데, 그것으로 면도를 하고 있노라면 창밖으로 와이키키 해변의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여름 날의 어둠 먼 옛날, 내가 아직 학생이고 틈만 생기면 침낭을 둘러메고 혼자서 여행을 하며 돌아다니던 시절, 여행지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얘기를 들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기묘한 이야기... 그런 얘기들은 하나같이 그 지방의 역사나 지형, 기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두다리로 마을이나 부락을 하나하나 돌다 보면, 그 하나하나의 장소에 사람들의 정념이 미세한 비늘처럼 달라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것들은 비행기나 신칸선이나 자동차를 이용하여 바쁘게 여행하는 여행자들의 눈에는 도저히 들어오지 않는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땀으로 뒤범벅이 되가며,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며칠이고 터벅터벅 걷고 있노라면 조금씩 보여지는 것이다. 어느 산 중에서, 한 노인이 내게 '사인의 길' 얘기를 해 주었다. '사인의 길'이란 죽은자의 혼이 명부로 향하는 길을 일컫는 것으로, 모든 물이 강줄기를 따ㄹ 바다로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성한 길이어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그 길에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어떻게 그 길이 사인의 길이란 걸 알 수 있습니까?'라고 나는 노인에게 물어 보았다. 자칫 잘못하면 그런 길에서 야숙을 했다가는 큰 일이 날 것 아닌가. '추우니까 금방 알 수 있어'라고 노인은 말했다. '한여름에도 등줄기가 얼어붙을 듯 서늘해져. 혼이 그 길을 걷고 있을 때는 말씀이야' 나는 그런 연유로 여름밤은 더워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름은 더ㄴ게 당연하고, 그런 게 또 가장 평화로운 것이다. 그런데 때때로 불가사의하게 여겨지는 일이 있다. 도시 한복판에서 숨을 거둔 사람들은 어떤 길을 더듬어 사자의 나라로 향하는 것일까? 그들은 빌딩의 그림자를 따라, 소리없이 지하철 궤도의 어둠에 뒤섞여, 혹은 빗물과 함께 하수도로 스며 들어가, 자취도 없이 도시를 질러가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 노인의 말을 되새기면서, 지하철 차량의 맨 뒤에 서서 뒤쪽으로 밀려가는 어둠을 지그시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옛 넋의 아물거림 같은 여름 날의 어둠 여고생의 지각에 대하여 나는 대충 시간에는 꼼곰한 편이라서, 여간한 일이 없는 한 약속시간에 늦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부터 쭉 그래왔던 게 아니고, 학생 시절에는 지각 상습범이었고, 사람을 기다리게 해 놓고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뻔뻔스런 인간이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장사를 시작하여 타인에게 '절대로 지각을 하지 않도록'이라고 명령하는 입장이 되고 부터는 내 자신의 지각벽도 깨끗이 나아버렸다. 지각을 하지말라고 주의를 시킨 당사자가 지각을 해서야 누가 그 인간의 말을 듣겠는가. 그래서 그런건 아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학생시절에는 지각쯤 해도 별 상관이 없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학교에 가는 시간이 좀 늦어진다고 해서, 별 재미도 없는 수업의 앞대가리 부분을 좀 못듣는다고 해서, 그런 것을 손실이라면서 안타까워 할 만한 것도 못된다.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버릇이나 습관을 교정하는 것은 사회에 나가서 시작해도 충분하다. 내가 가끔 머무는 시내의 호텔 창문 바로 아래로 여자 고등학교의 정문이 내려다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식사를 한 후 한숨 돌리고 있노라면 대개 고등학교의 등교시간이 된다. 똑같은 검은 가방을 들고 세라복을 입은 여자애들이 줄줄이 걸어와서는 교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한참 구경을 하다보면, 차츰 여자애들이 종종걸음으로 길을 달려온다. 이윽고 운명의 벨 소리가 울리고, 교문이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닫힌다. 트레이닝 웨어를 입은 심술맞게 생긴 선생이 문 옆에 서서, 지각을 한 여자들에게 일일이 훈시를 하며 이름을 적는다. 그러나 개중에는 반드시 '지각생이란 딱지를 내가 호락호락 붙일성 싶으냐'라는 발상을 하는 용감한 여고생이 있다. 그런 여자애는 교문 가까이에 있는 전신주 뒤에 숨어 사태를 관망하다가 트레이닝 웨어 차림의 선생이 잠시 한 눈을 파는 틈을 타, 날쌘 토끼처럼 길을 가로질러 인가의 담으로 뒤어 올라가서는 살살 그 담을 타고 그대로 한교 담 안으로 뒤어내리는 것이다. 그러고는 치마자락을 탁탁 털고, 시침 뚝 뗀 얼굴로 교실에 들어간다. 용기와 판단력과 체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아슬아슬한 재주이다. 그런 장면으 보고 있자면, 나는 호텔의 사층 창문가에서 나도 모르게 짝짝하고 박수를 치며, 그 하루를 즐거운 기분으로 보낸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그 여고가 내려다 보이는 호텔을 제법 좋아한다. 지갑 속의 사진 얼마 전, 오래간만에 옛 친구를 만나 세상 얘기를 하며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 그 친구가 느닷없이 지갑에서 젊은 여자의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대체 누구일까?'하고 궁금해 했더니, 새 애인이라고 한다. 제법 귀염성 있게 생겼다. 덧붙여 그는 나와 나이는 같지만 아직 독신의 몸이다. '어때, 싱싱하지?'라고 그는 말한다. '음, 그런데. 젊은걸.' '후후, 열여덟이야. 열여덟.' 하고 그는 사뭇 유쾌하다는 듯 강조한다. 꽤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같이 보여서 나로서도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암만 그래도 지갑 속에다 자기 나이의 절반 정도밖에 안되는 애인의 사진을 넣어가지고 다니다니 굉장하다. 신나 보인다. 하긴 이런 사람은 정말 특수한 예외이고-이 세상에 이런 사람만 득실거린다면 내 머리가 이상해 질 것이다-나 정도의 연령이 되면 대개는 지갑 속에다 어린애의 사진을 넣어가지고 다니는게 보통이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만나면, 내게 보여 준다. 벌써 첫아이가 국민학교 삼학년이 된 친구도 있다. '열살이야, 열살'하며 그 역시 즐거운 표정이다. 스타일이 다른 이 두가지 예를 딱 겹쳐놓고 종합하여 보면, 나도 꽤 나이를 먹었구나 싶은 실감이 난다. 독신자는 독신 나름으로, 처자를 거느린 자는 또 그 나름으로 나이를 먹어 아저씨가 되어 가는 것이다. 나처럼 회사에도 다니지 않고 어린애도 없는 처지에 있으면, 자신의 나이에 대한 정상적인 감각이 점점 사그러지고 만다. 어떤 부분은 거꾸로 어린애처럼 퇴보하고, 또 어떤 부분은 영감쟁이같이 노쇠하여 버린다. 그래서 가끔씩이나마 옛 친구들을 만나면, 새삼스레 이런저런 것들이 실감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내 지갑안에는 누구의 사진도 들어있지 않다. 어린애도 없고, 젊은 여자의 사진을 행여 넣어 다니기라도 했다간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누라의 사진을 넣어 간직하는 것도 어째 좀 떨떠름한 기분이 든다. '이 사람, 우리 마누라. 서른 **살인데-'라는 소리는 도저히 못할 것 같다. 난처한 일이다. 뭐 그럴 것 까지 없는 일인가. 모두 함께 지도를 그리자 나는 지도 그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댁으로 찾아 뵙고 싶은데요. 저에게도 비슷한 것을 좀 그려주시면...'이라는 말을 들으면 신나서 쓱쓱 그린다. 음, 그러니까 버스에서 내리면 여기에 커다란 해바라기가 피어 있거든요. 그 옆에 이런 모양의 대문이 있는 집이 있는데, 거기를 곧바로 지나서 '모리나가 호모 우유'란 간판 왼쪽으로 돌아서, 하고는 하염없이 세세한 부분까지 그려 넣는다. 원고 의뢰같은 거라면 '지금 좀 바빠서요, 죄송합니다.'라고 거절할 만한 때에라도 지도만큼은 공을 들여 꼼꼼하게 그리고 마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글씨에도 잘 쓰고 못 쓰고가 있듯, 지도를 그리는데도 역시 잘 그리고 못그리고가 있다. 서툰 사람이 그린 지도란, 그거야 말로 재액이나 다름없다. 못 그린 지도의 삼대 요소를 각 항별로 요약하면, #1 균형이 안 잡혀 있다. 즉 도로의 폭이라든가 거리의 상대적 비율이 엉터리이다. #2 기억이 선명하지 못하다. 음, 두 번째 골목이었던가, 세 번째였던가... 이런식이다. #3 포인트가 빠져 있다. 제일 눈에 뜨이기 쉬운 표적들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는 얘기가 됩니다. 이런 지도를 들고 미지의 ㄸ짱을 걷는 날에는 도무지 짜증이 나 견딜 수 없다. 혼자서 걷고 있기에망정이지, 그게 만약 콜롬부스였다면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고도 남을 것이다. 평소에 늘 생각하는 일인데, 그만큼이나 펜 습자 교실이니 서예교실이니 하는게 세상에 널려 있으니까, 그 중에 한군데 쯤 '지도 그리기 교실'이란데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런 곳에서 반듯하게 지도그리는 법을 터득한 여자가 회사에 들어가 어떤 지도를 그려야 할 때가 있을 때마다 '아, 지도라면 총무과에 있는 미스 00에게 부탁하는게 좋을거야. 미스00, 지도만큼은 딱 부러지게 잘 그리니까'라고 칭찬을 듣는 장면을 상상하면, 어쩐지 마음이 느긋해진다. 나는 비교적 편견에 치우친 사고방식을 지닌 인간이라, 그다지 일반적인 감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도를 멋지게 그리는 여자가 가까이에 있기라도 하면, 저도 모르게 사랑하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정도이다. 나는 한번은 가공의 마을을 지도로 그려,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일도 상당히 즐거운 작업이었다. 안자이 미즈마루씨도 지도나 설명도를 그리는데는 명수이다. ONE STEP DOWN 나는 무엇에든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특히 새로이 문을 여는 가게라든가, 창간되는 잡지라든다, 그런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재미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동료들끼리 '너 말이야 00가 이름으로선 최고야'라든지 '그런 이름을 어떻게 붙여? 촌스럽게'라며 신나게 주고 받는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것이지, 실제로 '무라카미씨, 우리 가게에 이름을 좀 붙여 주십시오'란 부탁을 받으면, 역시 어렵다. 나는 옛날 소설가가 되기 전까지는 술집 비슷한 것을 경영했는데, 그때에는 단순하게 기르고 있던 고양이 이름을 붙였다. 그런 가게 이름 같은건 그리 숙고 할 것 없이, 그저 주변을 한번 휘둘러보고 눈에 뜨이는 이름으로 부담없이 붙이는게 가장 좋을 것 같다. 필요이상 생각한 이름을 붙이면, 손님쪽에서 보기엔 아무래도 숨이 막힐 듯 답답할 것이다. 나는 다음 가게는 '캥거루 날씨'란 이름으로 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가게를 열 예정이 무산되어 그 이름은 단편집 제목으로 써먹었다. 적당주의라고 누가 비난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는 얘기다. 술가게 이름을 책 제목으로 한 셈이니까. 워싱턴 DC에 'ONE STEP DOWN'이란 이름의 재즈클럽이 있다. 나는 처음 그 가게 이름을 보았을 때부터 저건 대체 무슨 뜻일까하고 무척 궁금해 했는데, 어느날 밤 마크 머피라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콘서트를 거기서 한다기에 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주인이 있으면, 그 가게 이름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물어보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질문을 할 필요는 없었다. 글자 그대로 가게에 한 발짝 들여 놓으면, 그 유래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문을 열고 한걸음 내디디면, 한 계단 내려가도록 돼 있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보기좋게 나뒹굴고 말았다. 그런이름을 붙이기 보다는 문에가 '요주의'라고 써 붙여 주는 쪽이 나로서는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한편 그 'ONE STEP DOWN'은 좁고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친밀감을 주는 차분하고 분위기 있는 재즈 클럽이었다. 사뭇 성미가 까다로울 성 싶은 아저씨가 무미건조한 얼굴로 카운터 안에서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다. 마크 머피의 라이브를 무대 바로 앞에 자리한 객석에서 들을 수 있고, 맥주를 두병 마시고, 그러고도 십이달러밖에 안된다는 것도 신나는 일이었다. 세면기 속의 악몽 학생 시절, 같은 반 학생에게 '넌 말이야 늘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은데, 뭐 고민거리라도 있는거냐?'란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나는 교실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 무렵부터 나의 '멍한' 증상이 시작된 모양이다. 지금도-이전보다 더욱-나는 '멍한' 상태에 빠지곤 한다. 타인과 함께 있으면 내 쪽도 긴장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혼자 있게 되면 몇분 정도는 의식이 공백 상태에 빠지고 만다. 특히 그 증세가 심해지는 것이 목용탕의 세면기 앞에서이다. 뭔가 좀 이상하다 ㅅ어 정신을 차리고 보면 머리빗에다 치약을 묻혀 이를 닦고 있다든가하는 일은 다반사이고, 칫솔에다 샴푸를 묻히는 일까지 있다. 세 번에 한번 꼴은 린스로 머리를 감은 후 샴푸로 헹구고, 쉐이빙 홈을 턱에다 바르기는 했는데, 수염을 깍지도 않고 씻어버린 후 외출을 하는 일도 있다. 소변을 보자면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착각하여 목욕을 하려고 옷을 전부 벗어버린 일도 있다. 그것도 시간이 한참 흐르기까지, 자신이 대체 지금 무슨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빤히 응시하는 일도 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아니, 내가 이런걸 왜 이렇게 열심히 보고 있지?'하고 불가사의하게 생각하지만 보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의식도 없다. 이전 지하철 역에서 쉐이프업 팬티의 포스터를 또 몇 분 동안이나 빤히 쳐다본 일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이지 창피했다. 이런 때는 참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할 뿐이다. '하루키씨는 좀 덜렁거리기도 하는게 귀여워!'라고 젊은 여자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정도라면 몰겠는데-그런 말 들어 본 적은 없지만 -나이를 먹어서까지도 내내 이런 꼴이라면, 그랴말로 망령난 노인 아니겠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어둡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써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인간인지라 이런 일종의 비사회적 행위도 예술활동의 부산물이라고 웃어넘길 수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툭 하면 전철을 잘못 타고, 전철표와 디스코 티켓을 바꿔 내다가 역원 아저씨한테 꾸지람을 듣는 외과 의사가 있다면, 어찌 그런 의사에게 맹장 수술을 받을 수 있으랴. 시계는 어떻게 증가하는가 문득 인생이란 시계가 증가하는 과정에 불과하지 않은가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긴 이 성찰은-성찰이랄 만한 것도 못되지만-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 인생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생겨난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러니까 전혀 보편성이 있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쯤 전,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아서의 이야기인데, 우리집에는 시계란 이름이 붙어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가난했던 탓도 있지만, 시계 따위가 꼭 있었으면하고 바라지도 않았다. 그럴만한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날이 밝으면 고양이는 배고프다고 말 그대로 우리를 두들겨 깨웠고, 잠이 오면 적당한 시간에 잤다. 거리에 나가면 도처에 전광 시계가 있어, 불편을 느낄 건덕지가 없었다, 집에는 라디오도 TV도 전화도 없으니까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오백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담배가게에 가서 하이라이트를 한갑 사고, 그 길에 안쪽 방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힐끔 들여다부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시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는 별로 생각지 않았다. 지금은 손목시계니 탁상 시계니 오디오 타이머니 하고 전부 합하면, 열여섯개나 되는 시계가 집에 있다. 무려 열여섯개다. 시계 열여섯개가 내 집안에서 제각기 때를 새기고 있는 것이다. 십오년 전을 생각하면 정말 거짓말 같은 생활이다. 열여섯 개 중 반 정도는 어딘가에서 받아 온 것이다. 무슨 상을 받았을 때의 기념품이라든지, 짤막한 원고의 사례금 대신이든지, 개인적인 선물이든지, 그런 류이다. 그런 것들이 필립 K.딕크의 소설에 나온ㄴ 어떤 종류의 엔트로피의 증대처럼 차츰차츰 쌓여 가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온 집이 시계의 소굴 같이 되어 버렸다. 이따금 기분이 내키면 그 열여섯개나 되는 시계이 시간을 하나하나 점검해 볼 때가 있다. 저쪽으로 가서는 바늘을 돌려 시간을 늦추고, 이쪽에 와서는 앞당기고 하노라면, 인생이란 것이 왠지 불가사의하게 여겨진다. 시계따위 없어도, 그닥 불편할 게 없는데 말이다. 트레이닝 셔츠 60년대의 미국영화를 보면, 컷 오프 트레이닝 셔츠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긴 팔 트레이닝 셔츠를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칠부소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사랑입니다. 입는거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란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어, 나도 제법 그걸 좋아했다. 하긴 그런 차림은 미국의 웨스트 코스트처럼 계절을 따르는 온도차가 그닥 심하지 않은 곳에서니까 가능한 것이지, 일본의 기후에는 적합하지 않다, 여름철 T셔츠 대신으로 입기에는 감이 너무 두껍고, 겨울철에는 소매가 짧아 추울 뿐이다. 나도 한번은 그 흉내를 내느라 트레이닝 셔츠의 소매를 싹둑 잘랐다가 무지하게 후회를 했다. 일본에는 컷 오프 트레이너에 알맞는 기후가 아주 짧은 기간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나는 일본 대학에서 산 트레이닝 셔츠를 입고 이 원고를 쓰고 있다. 가슴에 'BEAUTIFUL CAMPUS NIHON UNIVERSITY'라고 큼직하게 씌어 있다. 어째서 하필 일본 대학의 트레이닝셔츠를 입고 있는가 하면, 별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옛날에 일본 대학의 이공학부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그 대학 생협에서 곧잘 물건을 샀기 때문이다. 나는 와세다 출신이다. 그렇다고 'WASEDA'란 로고가 들어있는 트레이닝 셔츠를 입는가 하면, 그런 일은 절대 없다. 자기가 졸업한 대학은 여러 가지로 애증이 엇갈리는 법이라, 아무래도 입고 있으면 살벌한 기분이 든다. 아무 관계도 없는 대학의 셔츠를 부담없이 입고 있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이 'BEAUTIFUL CAMPUS'라는 캐치 프레이즈는 좀 그렇지 않은다 싶다. 캠퍼스가 아름다운 일본 대학! 이건 좀 어쩐지 리조트 호텔 광고 문구 같지 않은가. 대학에는 캐치 프레이즈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프린스턴 대학이나 하버드의 생협에도 가보았지만 트레이닝셔츠에는 그냥 대학 이름밖에 씌어 있지 않았다. 그런 법이다. 뭐 남의 대학 이야기니까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 밖에도 트레이닝 셔츠에는 수많은 영어 글귀가 적혀 있다. 그 중에는 너무 엉뚱한 것도 있어, 거리에 나가 바라보고 있으면 상당히 재미있다. '저런 글귀를 과연 누가 생각해 내는 걸까?'하고 늘 신기하게 생각한다. 며칠전에는 'NICE BOX 1384'라는 글귀가 씌어 있는 트레이닝 셔츠를 입은 여자를 보았는데, 박스라 함은 사서함을 뜻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이스 박스라면 일반적으로는 '성능이 좋은 여자의 성기'를 뜻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등골이 오싹하다 CASH AND CARRY 대다수의 남자들이 그럴거라고 생각하는데, 애인이랑 데이트를 하거나 마누라와 거리를 걷곤 하다가 제일 괴로운 일은 옷을 사는데 따라가야 하는 일이다. 한 가게 두가게 정도라면 그래도 참을만 한데, 대여섯 가게를 따라다니다가 '아무래도 제일 처음에 가 본 옷집으로 다시 가야겠어'라고 하면 정말이지 맥이 풀리고 만다. 여자 쪽도 남자가 레코드 매장이나 장난감 가게 같은 곳에서 넋을 빼고 열중하고 있는데 쫓아다녀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녀들이 옷 고르기에 보이는 집념에는 남자들이 지닌 모든 취미의 가지수를 다 합쳐도 감히 따라가지 못할 만큼의 정열과 처절함이 있어 그 에너지가 때로는 우리들 남성을 압도하고 경악케 한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나는 어제 다이칸 야마에서 시부야, 아오야마 3가를 경유하여 하라주쿠까지 걸어야 하는 비운을 겪었다. 나느느 그나마 용의주도하게 조깅화를 신었기에망정이지, 힐을 신고 그만큼의 거리를 걷는 에너지를 집념이라 부르지 않고 달리 어떤 표현이 가능하랴. 그건 그렇고 세상에 널려 있는 부띠끄란데는 남자에겐 참으로 서먹서먹한 곳이다. 시간 ㄸ우기도 곤란하고, 왠지 서 있기 조차 힘겹다. 손님이 많아 복잡할 때 그냥 멍하게 서 있으면 다른 손님들한테 폐를 끼치게 되고, 그렇다고 원피스나 핸드백에 별다른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일이 상품을 구경하며 시간을 죽일 수도 없다.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외국에 가면 신기하게도 그런 일이 없다. 마누라의 부띠끄 순례에 동참하면서 심심하여 몸둘 바를 몰랐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가게 쪽에서 함께 들어오는 손님의 동반자에게까지 그 나름으로 신경을 쓰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샌프란시스코의 '로라 아슈레이'에서는 마누라가 옷을 고르고 있는 사이에 귀여운 여점원이 나를 상대하며 '동경에서 오셨나요? 좋은 곳인가요? 나도 가보고 싶군요. 난 뉴 올리안즈에서 태어났어요. 뉴 올리안즈에 가 보셨나요?' 등등의 얘기를 해 주었고, 호놀룰루의 한 구석지에 있는 어느 부띠끄에서는 소파에 앉아 쉬도록 권하며 콜라와 프리첼까지 대접해 주었다. 그런 옷가게라면 남자쪽도 또 가고 싶어진다. 동경의 부띠끄도 남자의 입장을 좀 염두에 두어 주었으면 좋겠다. 남자는 단순히 CASH AND CARRY(돈을 내고 날라다 주는 사람)가 아니니까요. 남자도 멀쩡한 육신을 지닌 인간이라구요. UFO에 대한 성찰 나는 스필버그 감독의 '미지와의 조우'라는 영화를 감탄스럽게 보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영화의 완성도가 낮아서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UFO에 대해 별 흥미를 못 느끼기 때문이었다. 영화로서는 그런대로 잘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흥미가 없는 것은 어떻게도 할 수 없다. 나는 중국식 만두를 싫어하니까 만역 중국식 만두가 주인공인 영화가 있다며느 역시 그 작품에 매기는 점수도 상당히 낮지 않을까 싶다. 이기적인 사고일지 모르겠으나 세상이란 모름지기 그런 것이다. 하긴 UFO는 중국식 만두와는 달리 싫어하는 건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단순히 흥미가 없을 뿐이다. UFO의 존재를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하면 '있나'하고 생각하고, 없다고 하면 또 '없나'하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라도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UFO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몇 명 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 그래'하고 대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대개는 '자네, 안 믿는 거지?'라며 상대방은 화를 낸다. 나는 UFO의 존재를 안 믿는게 아니고, 별다른 흥미를 못 느끼는 일에 대해 양자택일하라고 강요당하는게 귀찮을 따름인데, 그런 나의 심정은 설명을 해도 전혀 알아 주지 않는다.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다. 며칠 전 어떤 여자한테 '하루키씨는 UFO도 볼 수 없으니까 틀렸어요'라는 의미의 말을 들었다. 과연 그런 말을 듣고 보면 그런가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소설가로서 밥벌이를 해 먹으려면 UFO하나쯤 봐 둬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UFO나 유령을 한 번 쯤 봤다면, 예술가로서의 관록이 붙을 것도 같다. 술자리에서의 화제거리로도 써 먹을 수 있다. 뭐 그런 이유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봐았는데, 편의상 UFO난 유령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예술가'로 정의하고 본 경험이 없는 소설가 따위는 '예술 방면 활동가'라고 정의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누군가가 UFO에 대한 화제를 꺼냈을 때 '아, 저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만 '예술가'가 아니고 '예술방면 활동가'니까, UFO얘기는 흥미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깨끗하게 거절할 수가 있다. 상대방도 '그런가? 흠, 이 작자는 '예술방면 활동가'니까 이런 얘기 해봤자 아무 소용 없겠군'하고 단념한다. 피차 조용하게 해결되니 그야말로 축복스런 일이다. 고양이의 수수께끼 인간에게도 서로 다른 수많은 성격이 있듯, 고양이에게도 실로 다양한 성격이 있다. 나는 대체로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처라, 우리 집 고양이의 움직임을 종종 관찰하곤 하는데, 아무리 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고양이가 열마리 있다면 거기에는 열가지 개성이 있고, 열가지 버릇이 있으며, 열가지 삶의 모습이 있다. 그야 살아 있는 생물이니까 당연하잖느냐고 하면 그뿐인 얘기지만, 그래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로 신통한 일이 많아, 줄곧 '거 참 신기하다, 신통하다'하고 생각하면서 고양이를 구경하다 하루 해를 보내기도 한다. 우리 집에는 열한 살짜리 샴 종 암코양이와 네 살짜리 애비시니언 종 수코양이가 있는데, 성격의 복잡함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나이를 먹은 샴 고양이 쪽이 역시 연륜이 깊다. 그녀는 먹이를 주어도 곧장 입을 대는 법이 없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흥, 밥이야'하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휑하니 저쪽으로 가, 한동안 꼬리를 날름날름 핥는다. 그러고는 한참이 지나 열기가 사그라졌을 즈음에 다가가서는 '이제 먹을까'하는 식으로 식사를 시작한다. 어째서 그렇게 일일이 거드름을 피우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리고 또 그녀는 추운 계절에 이불 속으로 들어 올때면, 반드시 세 번은 이불 속을 들락날락하는 습관이 있다. 우선 이불 안에 들어가 길게 누웠다가는 잠시 생각한 후, '아무래도 안되겠다' 는 듯 슬며시 밖으로 나간다. 이런 동작이 세 번 거듭되다가, 네 번째에서야 간신히 안심하고 잠드는 것이다. 이 의식에 대충 십분에서 십오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어떤 식으로 생각해봐도 이건 단순한 시간 낭비다. 고양이 쪽도 성가실 테고, 내 쪽도 이제 잠이 들락말락하는데 고양이가 들락날락거리니까 울컥 화가 치민다. 세상에는 '삼고의 예'라는게 있는데 고양이가 한밤 중에 그런 의식을 치러야 할 필연성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때때로 어째서, 어떤 이유로, 어떤 경과를 통하여 그런 버릇이 일개 고양이의 머리 속에 생겨나게 되었을까 하고 진지라게 생각해본다. 고양이에게는 고양이 나름의 유아체험이 있고, 사춘기의 뜨거운 고뇌가 있고, 좌절이 있고, 갈등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 개체로서 고양이의 주체성이 성립되어, 그녀는 겨울 밤에 정확하게 세 번 이불 속을 들락날락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일까? 고양이는 그런 많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다. 철학으로서의 언더록 나는 학생시절부터 공부를 싫어하여 당연히 성적도 시원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영문 일역'참고서를 읽는 것만큼은 예외적으로 좋아했다. '영문 일역' 참고서의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는가, 그것은 거기에 예문이 잔뜩 실려 있는 점이다. 나는 그 예문을 하나하나 읽거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싫증을 내지 않고 제법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주 자연스럽게 영어 원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학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영어 교육에 무슨 불만을 토로한 생각은 없지만, 전치사니, 동사변화니 아무리 정확하게 머리에 쳐 넣는다 해도 책은 읽을 수 없다. 그 무렵에 외운 예문을 지금도 몇가지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서머셋 모옴의 '그 어떤 면도기에도 철학이 있다'란 구정도 그 하나이다. 그 앞뒤로 꽤 긴 문장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다 이ㅉ어버렸다. 요컨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매일 계속하다 보면, 거기에서 저절로 철학이 생겨난다는 요지의 문장이다. 여자에 적합하게 고치자면'립스틱에도 철학이 있다'는 얘기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서머셋 모옴의 이 문장을 읽고 '으음,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하고 꽤나 순진하게 감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카페의 카운터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어떤 언더록에도 철학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팔년간 언더록을 만들었다. 한데, 정말 언더록엔 철학이 있을까. 그야 틀림없이 있다. 물론 세상에는 맛있는 언더록과 맛없는 언더록이 있겠지만, 맛있는 언더록 쪽엔 확실히 철학이 있다. 그까짓 언더록, 얼음에다 위스키를 갖다 붓기만 하면 되잖는가라고 생각 될지도 모르겠지만 얼음을 깨는 각도 하나에 따라서도 언더록의 품위나 맛이 영 달라진다. 큰 얼음이냐 조그만 얼음이냐에 따라서도 그 녹는 양태가 다르다. 큰 얼음만 사용하면 투박하여 멋이 없고, 그렇다고 작은 얼음이 너무 많으면 금방 녹아 물처럼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대중소의 얼음을 조화롭게 섞어, 거기에다 위스키를 따른다. 그러면 위스키가 잔 속에서 호박색의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근,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세원이 소요된다. 그런 식으로 터득된 사소한 철학이란 나름대로 언젠가는 제법 쓸모 있는 것이 된다. 백화점의 사계 여자들은 대개 백화점에서 쇼핑하기를 좋아하는 모양인데, 어찌 감출 수 있으랴. 나도 백화점을 꽤 좋아한다. 동물원을 예외로 하면 백화점만큼 신나게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장소를 쉽게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입장료도 필요없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백화점이 무려 다섯군데나 있다. 물론 교외에 있는 주택 도시니까 도심처럼 규모가 크거나 물건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집에서 걸으면 한 십분쯤 되는 곳에 백화점이 다섯군데나 있다는 것은 제법 신나는 일이라, 틈만 생기면-대체로 매일 틈이 있다-역 앞까지 걸어나가 백화점 산책을 즐긴다. 백화점 산책에 가장 적합한 시간대는 뭐니뭐니해도 평일의 오전 중이다. 덜 붐비기도 하고, 공기도 깨끗하고, 모든 것이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란 분위기로 말끔하게 정렬하고 있다. 개점 직후면 종업원들의 깍듯한 인사를 받을 수도 있다. 한산한 백화점은 어딘가 모르게 식물원과 비슷하다. 어슬렁 어슬렁 걸으면서 상품을 보고 있노라면, '오, 슬슬 수국에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는걸'이라든가 '목련꽃도 이제 싹 지고 말았는데'하고 미묘한 계절 감각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여름철이 다가오면 매장 내의 장식물들도 시원스러워지고, 섬머 드레스나 수영복, 서프보드, 끈없는 브래지어(그런걸 보고 있으면 좀 곤란하지만)가 눈에 띄어 '드디어 여름이구나'싶은 실감이난다. 에어컨이 내뿜는 서늘한 공기를 처음으로 만끽하는 것도 여름 시즌이 시작된 백화점에서이다. 가을 낙엽색으로 물든 백화점도 털 스웨터 냄새가 물씬 풍겨 정취가 있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려고 북적대는 고양감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그리고 백화점의 옥상도 꽤 재미있다. 청명한 날에 벤치에 앉아, 어린아이들과 함께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하고, '제비우스'게임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비가 내리는 날에 옥상 위를 산책하는 것도 그 나름으로 분위기가 있다. 최근에는 그럴 기회가 없어 별로 못하지만, 옛날에는 비가 내리면 곧잘 여자와 둘이서 백화점 옥상엘 갔다. 옥외 테이블과 목마는 비에 젖어 있도, 주변의 풍경은 비안개가 서려 뽀얗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은 전혀 없다. 고작해야 애완동물 매장에서 열대어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수족관 속을 휘젓고 다닐 뿐이다. 백화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발굴하야할 가능성이 무수하게 남겨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BUSY OFFICE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회사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곳엘 한번도 다녀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뭐 회사 근무를 거부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고,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을 뿐이다. 때때로 생각하기를 만약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색연필이나 무슨 그런 것으로 하나하나 색칠하여 구분한다면, 그 '어떻게 하다 보니'를 칠하기 위해선 상당한 양의 색연핑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차치하고, 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는 탓에 나의 인식 영역에는 회사라든가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주변적 사항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예를 드렴ㄴ 넥타이를 매고 회사에 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일인가? 상사와 부하는 어떠한 정신적 위치관계에 있는가? 오피스 러브란 어떤 것인다? 특정한 일이 없으면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겉도는 사람들은 도대체 매일 무얼 하고 있을까? 그런 것들은 전부 나의 상상력의 테두리밖에 있다. 회사에서 일로 바쁘다는 것도 잘 모르겠다. '국수 장사가 바쁘다'라든가 '채소가게 아저씨가 바쁘다'는 경우는 나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회사에서 바쁘다;란 것은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내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광고 대리점 비슷한 것을 경영하고 있어, 가끔씩 그 사무실에 놀려고 들르는 일이 있는데, 가보면 늘 스무명 쯤 되는 사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도 있고, 종이에 뭐라고 써넣고 있는 사람도 있고, 서류 종투를 들고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참 힘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쁜지는 알수 없어 동정심도 일지 않는다. 사무실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이란 참 복잡라게 생겨먹었구나 하고 절실하게 느낀다. 세상이 국수집이나 채소가게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틀림없이 훨씬 더 심플했을 것이다. '아줌마, 잠깐 기다려요. 이사람 먼저 토마토 싸주고 아줌마것 싸 줄테니까'라든가 '미안합니다. 지금 가게가 좀 바쁘니까 배달은 한 삼십분쯤 걸립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으로 얘기가 다 통하니까 말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 '바쁜 모양이군'이라고 말하면 그는 '당연하잖나, 보면 알 수 있잖아'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바쁜지에 대해서까지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런것까지 설명하기에는 그는 너무 바쁜 것이다. 뉴스와 시보 택시를 타고 멍하니 라디오 뉴스 ㄱ은걸 듣고 있으면 가끔씩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을 만큼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내용에 대해서 깜짝 놀라는게 아니라, 아나운서의 대수롭지도 않은 말에 질겁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속도로 1호선의 무슨무슨 인터체인지 부근 하행 차선에 트럭에서 떨어진 니쿠즈레(살이 닳거나 살점이 떨어져 나감) 때문에 3킬로미터 정체 현상을 빚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는 순간 '어떻게 트럭의 살점이 떨어져 나갈 수 있을까'하고 생각에 잠기고 만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분명 그것은 니쿠즈레(쌓은 물건이 쏟아지거나 무너져 내림)이다. 트럭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거나, 오토바이가 무좀에 걸리거나 한다면 세상은 일대 혼란의 일으키고 말 것이다. '어제 일본과 소비에트의 시산급협의가 행해...'한 뉴스도 있었다. 그때도 '어째서 일본과 소비에트가 시간당 급여에 대해 협의를 하는 것일까'하고 골몰히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설명을 잘 듣고 보니 그것은 '차관급'이란 말이었다. 세상에는 참 동음 이의어도 많다. 잘못 알아듣기 십상이다. 어쩐지 우스워서 택시 뒷자리에서 혼자 피식거리고 있었더니 '손님, 무슨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하고 운전수가 묻는다. '예? 아뇨, 그냥'하고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이런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해학은 사람을 제법 즐겁게 해준다. 한참 옛날 일인데, 시보를 두 번이나 틀리게 말한 아나운서가 있었다. '일곱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여덟시입니다. 아닛, 실례했습니다. 아홉시입니다. 아홉시를 알려 드리겠습니다.'란 식으로. 난 그 방송을 들으며 혼자서 폭소를 터뜨렸는데, 그 아나운서는 분명 나중에 상사한테 지독하게 질책을 당했을 것이다. 어쩌면 동료들이 '일곱시, 여덟시,아홉시의 ( )란 별명을 지어주고는, 그 후로 몇 년 간을 놀려대며 짓궂게 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안된 일이다. 그러나 안된일이기는 하지만 우습다. 이런 류의 사건이 하루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있다면 꽤 즐거운 인생을 보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드는데 말이다. 소확행 최근 바지를 일컬어 미국식으로 '팬티'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팬티'밑에 입는 종래의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팬티는 뭐라 불러야 좋을지 알쏭달쏭할 때가 있다. 영어라면 언더 팬티가 되겠지만, 그런 명칭이 확실하게 정착되어 있지 않은 일본에서는 바깥 팬티와 속 팬티의 혼란 생황이 점점 더 그 혼미함의 도를 더해 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언더 팬티'쪽을 모으는게-물론 남성용입니다.-일종의 취미이다. 가끔씩 백화점에 가서는 '저걸로 할까, 이걸로 할까'하고 혼자서 망설여가며, 대여섯장을 한꺼번에 사들인다. 덕분에 서랍장안에는 상당한 양의 팬티가 쌓여 있다.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서 돌돌 말은 까끗한 팬티가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작기는(소)하지만 확고한(확) 행복(행)의 하나(줄여서 소확행)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이건 어쩌면 나만의 특수한 사고 체계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혼자서 생활하는 독신자를 제외하면 자기의 팬티를 자기가 사는 남자는, 적어도 내 주변에는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또 런닝 셔츠도 상당히 좋아한다. 막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퐁퐁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때의 그 기분이란 역시 소확행의 하나이다. 하기야 런닝 셔츠 쪽은 늘 같은 상표의 물건을 일괄하여 사니까, 팬티의 경우와 달리 골라서 사는 즐거움은 없다. 그런데 남자의 경우 속옷이라는 장르는 기껏해야 팬티와 런닝셔츠에서 그만이다. 여성의 속옷이 점령하고 있는 광대한 영역에 비하면, 마치 집장사가 지어 판 집의 앞뜰퍼럼 좁고 간결하다. 오로지 팬티와 런닝 뿐이니 말이다. 속옷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가끔은 남자로 태어나길 다행이다 싶은 감화에 젖는다. 만약 내가 지금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여자로 태어났다면, 속옷을 넣는 서랍이 하나나 둘정도로는 도저히 모자랄테니까 말이다. 포도 점보기의 추락에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하찮은 사고일지 모르겠으나 몇 년 전에 태풍 때문에 중앙선 열차 안에 하룻밤 내내 갇혀 있었던 적이 있다. 저녁 나절에 마쓰모토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오오쯔키를 지나쳤을 무렵에, 선로변의 절벽이 무너져 내려 열차가 완전히 멈추고 만 것이다. 날이 밝고 나서 보니 태풍은 이미 물러가고 날씨는 안정을 되찾았는데, 선로의 복구 작업에는 별다른 진척이 없어 우리들은 결국 그 날 오후 까지 열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나란 인간은 워낙 한가한 족속이라 동경에 하루 이틀 늦게 돌아간들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나는 열차가 멈춰선 시골의 조그만 마을을 산책하다가 포도 한 봉지와 필립 K.딕크의 문고본을 세 권 사가지고 자리로 돌아와, 포도를 먹으며 느긋하게 독서를 했다. 스케줄이 빡빡한 여행을 하고 계셨던 분께는 상당히 미안하지만,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체험이었다. 장시간 책을 읽을 수 있지, 도시락도 제공해 주지, 특급 요금은 되돌려 주지, 그런데도 불평을 한다면 벌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통 상황 같으면 절대로 내릴 리가 없는 조그만 역에 내려서, 거기에 있는 조그만 마을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걷는다는 것도 아주 신나는 일이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한 십오분쯤 걸으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구경할 수 있을 만큼 조그만 동네였다. 우체국이 있고, 책방이 있고, 약국이 있고, 소방서의 출장소가 있고, 운동장이 유난히 넓은 국민학교가 있고, 강아지가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다. 태풍이 훑고 지나간 다음의 하늘은 한없이 푸르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웅덩이에는 하얀 구름의 그림자가 또렷이 비쳐 있다. 포도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도매상 비슷한 가게 앞을 지나가려니, 싱싱하고 시큼한 포도향내가 코를 찌른다. 그 가게에서 나는 포도를 한 봉지 샀다. 그리고 필립 K. 딕크를 읽으며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웠다. 덕분에 내가 소장하고 있는 '화성의 타임 슬립'에는 도처에 포도물이 얼룩져 있다. 팔월의 크리스마스 행위 그 자체를 행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하기 쑥스러운-그런 타입의 작업이 세상에는 몇가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여름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크리스마스 캐롤집을 구매하는 행위도 그 중 하나이다. 레코드 한 장 사는 일이 그럴 만큼 중대한 결의를 요하는 행위가 아님에도, 나는 그 레코드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담고 있고, 계절이 팔 월이라는 것만으로 늘 '망설임의 바다'-라는게 달 표면에 있다고 한다-의 깊고 어두운 심연을 헤메이게 된다. 과연 올 크리스마스에 나는 정말 캐롤이 듣고 싶어질까? 그리고 크리스마스란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하고. 팔월의 한복판에서 크리스마스 및 크리스마스의 주변적 사물에 대한 가치판단에 쫓기는 것도 꽤 괴로운 것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희귀 앨범-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집이다-을 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에러 피츠제럴드의 오래된 크리스마스 레코드도 못샀고, 케니 바렐 것도 못샀다. 어찌된 셈인지. 나는 줄곧 여름이 한창일 때 중고 레코드가게에서 조금은 희귀한 크리스마스 레코드와 해후하곤 한다. 그러고는 늘 십이월이 돼서는 '그 때 사두었으면 좋았을 것'하고 후회하는 어리석음을 겪는다. 그러나 올 겨울에 한해서는 나는 결코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나는 지난 유월에 '이번 여름이야말로 크리스마스 레코드를 잔뜩 사들여야지'하고 결의를 한 후, 그것을 대담하게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팔월의 호놀룰루에서 열장이나 크리스마스 캐롤집을 사 모은 것이다. 어떤 레코드 가게에서는 점원이 내게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응원을 해 주었을 정도이다. 이제 슬슬 거리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여름에 뿌려둔 씨앗이 착실히 성장하여 우리 집 레코드 선반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패티 패이지와 체트 아트킨즈가 그 차례를 지긋이 기다리고 있다. 워크맨을 위한 레퀴엠 사년 동안 한시도 쉴 새 없이 사용하던 워크맨이 요즘들어 상태가 안 좋아져 큰 마음 먹고 새 것을 사기로 결심했다. 한마디로 사년간이라지만, 내 경우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할 때도 서포터로 팔에다 꽉 동여매고 달릴 정도니까 그 소모도는 보통 사람들의 배 이상일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워크맨'이라기보다 '런닝 맨'인 셈이지만, 암만 그래도 사년 동안 한마디 불평없이 땀에 젖어, 비를 맞고 흔들리며, 어떤 때는 콘크리트 길 위로 곤두박질을 해가면서도 열심히 뛰어 주었다. 기계를 전문으로 하는 절이 있다면 워크 맨을 모셔두고 공양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다. '무라카미 주행 음악 동사'라고 계명이라고 하고 말이다. 오디오 가게에서 사 온 두 번째 워크맨은 첫 번째에 비해 훨씬 작고, 무게도 반에 가깝고, 오토리버스 장치까지 붙어 있는데다 충전도 할 수 있다. 값만 해도 첫 번째 것보다 엄청 싸다. 한 기계가사 년 사이에 이렇게 까지 진보 할 수 있을까 하는 감개무량함-이라고 하기는 좀 과장스럽지만-정말 감탄스럽다. 적어도 인간(가령 나)이 진보하는 스피드에 비하면, 그 진보의 신속함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탄할 뿐이다. 하지만 그 속도에 경탄함과 동시에 '워크맨'이 과연 거기까지 진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겨난다. 그야 물론 하나의 기계가 싸지고 경량화되고 편리해진다는 자체에는 전혀 반론을 펼 마음이 없다. 그래도 은퇴한 초대 워크 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면 '딱히 이대로 진보 따위 안 하더라도 그닥 불편한 일은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든느 것이다. 그러나 한번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보의 구십오퍼센트가 그닥 불필요한게 하닌가 하고 생각되니까, 이런 사고방식은 올바르지 못한 것일 게다. 좌우지간 뭐가 어찌됐든 소니 워크 맨 WMII여 편안히 잠들라. '핵의 겨울'적 영화관 얼마 전 좀 볼일이 있어 쿄토로 여행을 하였는데, 일을 다 끝내고 나서 시간이 좀 남길래, 늘 하던 버릇대로 눈에 띄는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았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나는 이렇게 여행지에서 영화를 보는게 무척 좋다. 동경에서는 그렇게 열심히 영화관 문턱을 오르내리는 것도 아닌데, 여행지의 낯선 동네에서는 영화관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오면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안으로 뒤어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 그 모양인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교토에서는 '언더 파이어'라는 전쟁물 영화를 보았는데, 조조 상영을 본 덕분에 영화가 시작될 때는 객석에 손님이라곤 나 혼자밖에 없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십분정도 지나 두 번째 손님이 들어오길래 나도 얼마간 안심을 하였다. 사방에 사람 그림자도 없는 영화관에서 오로지 홀로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마음이 불안하고 또 몹시 허전한 일이다. 핵 전쟁 끝에 홀로 살아 남았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는 지금의 나와 같은 인생이 남아 있지 않을까하고 턱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베를린의 동물원 역 근처에서 '크레스티네 F'를 보려고 영화관에 들어갔을때에도 손님이 나 혼자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영화관은 유별나게 넓고 오래되기도 한 거대한 분위기의 어두컴컴한 곳이라서, 그런 휑뎅그렁한 공간 속에 혼자 동그마니 앉아 있자니, 정말 육신이 오그라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외국의 영화관은 일본과는 달리 영화가 시작되면 순간 장내가 일시에 캄캄해지기 때문에,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다음에 손님이 새로 들어왔는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혹시 이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나 혼자만 있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크리스티네 F'를 보고 있자니, 그 어둠과 적막함이 한층 더 몸을 저민다. 영화가 끝나 불이 들어오고 사방을 둘러보니, 손님은 나를 포함하여 전부 네명이었다. 그렇게 우리들 네 사람은 '핵의 겨울'적으로 휑한 베를린의 영화관 안에서 서로들 얼굴을 마주했던 것이다. 지하철 긴자 선의 원숭이의 저주 며칠 전 지하철을 탔는데 바로 맞은 편 자리에 모녀지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여자 둘이 앉아 있었다. 양쪽 다 무릎 위에다 같은 백화점의 쇼핑백을 올려 놓았고, 얼굴도 쌍둥이 처럼 똑같았다. 심심한 차에 '모녀지간인 만큼 과연 얼굴이 많이 닮았군. 분명 저 딸도 나이가 들면 자기 엄마처럼 아줌마가 되겠지.'하고 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끄덕거려가며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지하철이 아카사카 미쯔케 역에 멈추자 나이가 많은 여자 쪽이 아무말 없이 혼자 싹 내리고 만 것이다. 요컨대 그 두 사람은 모녀지간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같이 앉아 있었을 뿐인 남남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교적 이런 착각을 잘 한다, 판단 기능에 결함이 있는데다-아마 결함이 있을 것이다.-상상력이 점점 앞질러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번 모녀지간이라고 믿고 나면, 그 두 여성의 연관성의 사실이야 어찌됐든 혼자서 줄달음치는 것이다. 한심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그 두 여자는 진짜 모녀지간이었을 거라는 가능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무슨 사연이 있어 드 두사람만이 자신들이 실은 모녀지간이란 것 모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가령 그 젊은 딸은 갓난 아기였을 때-예를 들면 동경 올림픽이 있던 해에-숲속에서 어미 원숭이에게 유괴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딸기를 사 가지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간난 아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조그만 털 모자와 원숭이 털만 한 오라기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십이년이 지났다. 딸은 여덟 살까지는 원숭이의 손에서 자랐지만, 그 후에는 마을로 나와 촌장의 집에서 살며,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하였다. 오늘은 긴자의 마쓰야 백화점에 후추를 담을 용기를 사러 나온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쪽은 자기 딸이 죽었다고 믿고 있으므로,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안ㅅ아 있는데도, 그 사람이 자기 딸인 줄을 알아채지 못한다. 어미 원숭이가 그녀들의 머리 위로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랑겔한스 섬의 오후 옛날 이야기. 중학교에 들어가던 봄, 생물 첫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잊고 안가져와 집에까지 가지러 돌아간 일이 있다. 우리집은 그때 학교에서 걸으면 십오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냅다 뛰어서 왕벅을 하면, 수업에는 거의 지장 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는 아주 순진한 학생이어서-옛날 중학생들은 모두 순진했던 것 같은데-선생님이 하신 말씀대로 열심히 뛰어 집으로 가서는 교과서를 들고 물을 한컵 꿀꺽꿀꺽 마시고서는, 다시 학교를 행해서 뛰었다. 그리 깊지도 않고, 깨끗한 물이 졸졸졸 흐르는, 그리고 거기에 낡은 다리가 걸려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도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은 다리였다. 그 주변은 공원이고, 협죽도가 눈가리개처럼 줄지어 피어 있었다. 다리 한 가운데 서서 난간에 기대어 남쪽 방향을 바라보았더니, 바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하도 눈이 부셔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따끈따끈한'이란 형용사가 딱 어울린다. 마치 마음이 느긋하게 풀어져 버릴 것 같이 기분 좋은 봄날 오후였다. 사방을 돌아보니ㅡ 모든 것이 지표에서 이삼센티미터 쯤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한숨을 돌리며 땀을 닦은 다음, 강변의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다 보았다. 힘껏 달렸잖아, 잠시 쉬어도 괜찮겠지 하면서 말이다. 머리 위로는 흰구름이 꼼짝않고 한 군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눈 앞에 손가락을 세워 재어 보니, 조금씩 조금씩 동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리 밑에 밴 생물 교과서에서도 역시 봄냄새가 났다. 개구리의 시신경과 저 신비스런 랑겔한스 섬(췌장에 있는 내분비 세포. 췌장 전체에 섬 모양으로 산재)에서도 봄 내음이 풍겼다. 눈을 감으니 부드러운 모래톱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강물 소리가 들렸다. 봄의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질 듯 무르익은 사 월의 오후에, 또 다시 생물 수업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61년 봄의 따스한 어둠 속에서, 나는 살며시 손을 뻗어 랑겔한스 섬의 물가를 더듬었다. 후기 이 책은 1984년 6월, 즉 'CLASSY'가 창간 된 이래 이년동안 '무라카미 아사히당화보'란 제목하에 무라카미 하루키 씨와 제가 둘이서 연재한 페이지를 모은 것입니다. 책 제목은 '무라카미 아사히당화보'에서 무라카미씨가 이 책을 위하여 새로이 써 주신 글의 제목인 '랑겔한스 섬의 오후'로 바꾸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와는 지금껏 여러번 일을 함께 하였지만 이번처럼 커다란 삽화를 매달 그렸던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년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습니다. 안자이 미즈마루 해뜨는 나라의 공장 서문 내가 국민학생이었던 무렵-즉 1950년대 후반이 되는 셈인데-사회 과목 수업에서 몇 번인가 공장에 견학을 하러 간 적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아 있는 것은 롯데 오렌지 껌이라는 골프공 정도 크기의 동그란 츄잉 껌을 만드는 공장으로, 벌써 거의 삼십여년 전 일인데도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오렌지색 동그란 껌이 기계에서 몇 천 몇 만개고 굴러 나와, 벨트 컨베이어를 타고 운반되어 하나하나 셀로판지에 싸여, 상자 속으로, 차곡차곡 쌓여 가는 광경은 일곱, 여덟 살 난 어린아이의 눈에는 상당히 환타스틱한 것이었다. 도무지 그렇게나 많은 양의 오렌지 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몹시 경이로웠다. 나는 다른 모든 이에게도 그런 경험이 아마 한두 가지는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시험삼아 주변에 있느느 몇몇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역시 모두들 그런 공장에 다녀온 기억을 제각각 지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메이지 사이코로 캬라멜'공장을 기억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모리나가 밀크 캬라멜'공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과자 공장에 대해선 모두들 제법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양으로, 얘기를 듣고 있다 보면 어린 시절의 공장 견학은 거의 '통과 제의'라고 표현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1950년대 후반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일본 경제의 부흥을 외치는 망치 소리가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던 시대라거, 당연한 일이지만 '공장'이라는 말 속에도 오로지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전진한다는 뉘앙스가 있었다. '큐포라가 있는 거리'는 아니지만 '우리들은 열심히 하고 있다!'란 순수하게 포지티브한 자세가 있었다. 물론 그런 경향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그 당시에는 전국민적 의식으로서 그런 뉘앙스와 자세가 있었던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공해라든다 소음같은 것도, 지금만큼 문제시 되지 않았고, 무럭무럭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은 경제 부흥의 강력한 상징이었다. 그렇기 ㄸ문에 우리들은 일부러 공장으로 견학을 가, 그 자동화-정겨운 말이군요, 어쩐지-된 생산 라인을 눈 앞에 두고 '와, 굉장하다'하고 단순히 감탄 했던 것이다. 그 이후랄까-공장 견학과는 관계없이 그저 개인적 성향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나는 마음 속 어느 부분에 공장에 매료되는 은밀한 감정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이미지는 어떤 경우에는 확실한 형태를 지닌 개체'예를 들면 코끼리'를 만들어 내는 구체적인 공장'코끼리 공장'이기도 하며, 또 다른 경우에는 형이상학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형이상 공장이기도 하다. 그런 여러 공장에 대해, 나는 가끔 아주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성욕-이것은 형이상학적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을 만들어 내는 공장은 어떤 공장일까 하고 생각한다. 성욕 공장이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느림뱅이 두 청년과 말수가 적은 중년 사원과 처세술에 능란하고 사려깊은 예순살 정도의 소장과 케이코라는 이름의 얌전하기는 하지만 성미는 급한 아름다운 여직원 (25세. 독신. 도쿠시마 출신)으로 운영되고 있는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평상시 성욕 공장은 아주 한가롭고 별로 할 일도 없는 곳이다. 두 청년은 하잘 것 없는 농담을 늘어놓으며 킬킬거리고 있고, 중년 사원은ㄴ 사무실 한 구석에서 뒹굴며 '읽을 거리'에 실린 후지사와 슈헤이(야마카타현 태생 소설가)의 글인지 뭔지를 읽고 있고, 소장은 워크맨으로 만듬을 들으며 혼자 쿡쿡 웃고 있다. 기계도 모두 움직임을 멈추어 쉬고 있고, 사방에는 소음하나 일지 않는다. 케이코가 혼자 주판알을 튕기거나, 전화를 걸거나, 고무줄로 전표를 묶거나 하며 꼼지락꼼지락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느닷없이 케이코가 화를 벌컥 낸다. 벌떡 일어나 '당신들, 도대체 뭐하고 있는거야! 나는 혼자서 일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있잖아! 부끄럽지도 않아?'하고 소리친다. 케이코가 그렇게 큰 소리로 꽥꽥거리자 모두들 깜짝 놀랐고, 소장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했다. '그렇군! 자네들 뭣들 하는거야!'하며 소장도 일어나 소리친다. '케이코 씨한테 그런 소리까지 들으며 부끄럽지도 않나? 일들 하자구, 모두,' '합시다'하고 중년 사원도 '읽을 거리'를 내던지고 일어난다. '어이, 미야타, 나카지마 일하자구' '케이코씨, 나 일할게' '성실하게 일할테니까 좀 봐줘. 케이코씨, 응?' 하고 미야타도 나카지마도 제각각 주절거린다. 그리하여 기계는 다시금 윙윙거리며 기세좋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런 풍경이 내가 생각하는 성욕 공장의 이미지인데, 이런 이미지에는 개인차가 크니까, 정확도로 말하자면 뭐라 딱 잘라 얘기하기 어렵다. 그저 이런 식으로 무수한 것들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가령 소설을 만들어내는 공장은 어떤 공장일까, 슬픔을 만들어내는 공장은 어떤 공장일까-시적인 표현이군요-대형 간접세나 실존주의나 무사안일주의나 아오야마 학원 대학의 학장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떤 공장일까, 그리고 그런 공장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일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하고 있고, ㄸ로는 제법 세세하게 그런 것들을 검증해 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책에서 다룬 일련의 공장을 선택하는 데는 순전한 호기심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 )는 대체 어떤 공장이고, 거기에서 물건은 대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하고 문득 생각한 곳을 차례로 방문하여 보았더니, 결국 이런 리스트가 작성되었다. #1 인체 표본 공장 #2 결혼식장(애당초 결혼식장의 부엌을 취재할 작정이었는데, 정작 가 보았더니 식장 그 자체가 지니는 공장성에 그만 매료 당하고 말아, 목표를 변경하였다.) #3 지우개 공장 #4 낙농 공장(이것도 사실은 우유 처리 공장이 관심사였는데 '경제 동물'소의 생산에 이끌리고 말았다.) #5 꼼므 데 갸르손 공장 #6 콤팩트 디스크 공장 #7 가발 공장 이렇게 기묘하다고 하면 기묘하고, 기묘하지 않다고 하면 전혀 기묘하지 않은 리스트입니다. 나로서는 여기에다 #8 병기 공장 #9 시스템으로서의 터어키 탕이란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었는데, 이런 저런 사정이 있어 단념했다. 가능하면 언젠가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 물론 이 일곱가지 공장을 취재한다고 해서, 현제 경제 대국을 자랑하는 일본의 평균적 공장의 실태가 알알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이 개인적 흥미로 고른 것이라서 상당히 편협된 경향이 있고, 규모로 봐서도 중소기업, 경공업 공장이 많고, 중공업 대공장은 선택에서 밀려났다. 거꾸로 말하자면 '현재 일본의 평균적 공장상을 살펴보자'고 의도하는 사람같으면 선택하지 않을 종류의 공장만 (마쯔시타 공장은 예외지만) 고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이다. 이런 점은 비전문가(논픽션 작가)의 변신쯤으로 해석해 주셨으면 한다. 나 자신은 이 일곱 공장을 선택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았던가 하고 내심-이라고 써버렸으니까 조금도 내밀하지 않지만-자부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는 이 책의 제목을 좀더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취재와 집필을 계속하는 사이에 자신 속에서 '일본'이라든가 '일본인'이라는 것-개념의 존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서 '해뜨는 나라의 공장'이라고 제목을 변경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쓰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그 얘기를 쓰기 시작했다가는 '서문'이라는 한정된 영역으로는 도저히 다 수용을 못할 것 같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일단 통과시키겠다. 그러나 내가 새삼스럽게 얘기하기는 좀 뭣하지만, 일본 사람들이란 정말 애처러울 정도로 일을 열심히 하는 인종이더군요. 일도 잘 할뿐더러, 일 그 자체 속에서 즐거움과 철학과 긍지와 위로를 찾아내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물론 나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 갈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차치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원고를 쓰고 있는 중에도 일본의 무수한 공장에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몸을 움직여, 무수한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은 웬지 푸근해지고,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취재는 전부 1986년에 실시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메타포적 인체 표본 교토 과학 표본 내가 책의 기사 취재차 쿄토에 있는 인체 모형 제작 공장에서 견학을 간다고 했더니, 몇몇 친구는 그럴 수 있다느 것에 대해 심각하게 부러워 했다. '그 저, 인체 모형이라고 하면 말이지. 그, 그 국민학교의 과학실에 걸려 있던 그거지? 두 개골 뚜껑을 덜컥 떼어낼 수도 있고,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빨간 근육이 피끗피끗 움직이는 그거' '그래' '심장이 빨갛고, 간장은 갈색이고... 부러운 걸. 난 말이야 국민학교란 말만 들어도 반사적으로 그걸 떠올린다구. 어둡고, 괴괴한 복도가 있고 과학실이 있고, 슬라이드 영사용의 검고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고 말이야. 알콜 냄새가 사방에 꽉 차 있고... 그리고 인체 표본이 있단 말이야. 웬지 전체적으로는 곰팡이 냄새가 날 듯 쾌쾌한데, 내장의 색만큼은 생생한 게 박력이 있고 말이야. 아. 그립군. 운동회나 소풍 같은 것은 조금도 생각이 안 나는데, 불가사의하게도 그 인체표본의 창자에 그어진 주름의 형태만은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잇단 말씀이야' 그건 그렇고 전국에 계신 수백만-수십만의 인체 표본 팬 여러분, 드디어 인체 표본 공장의 등장입니다. 정직하게 말해ㅡ 나도 이런 걸 결코 싫어 하는 편이 아니다. 좋아하는 여자의 십이지장을 화장지에 둘둘 말아가지고 다니고 싶어하는 등의 도착적인 취미는 물론 없지만, 그래도 아까 등장했던 친구와 마찬가지로, 소년 시절에는 저 과학실에 죽 늘어서 있던 두 개골이니 분해할 수 있는 인체 표본이니 포르말린에 담겨 있는 정체 모를 희멀건 동물들에게 묘하게도 마음이 끌려, 잡아먹을 듯 구경했던 것이다. 이건 순전히 나의 상상에 불과하겠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계시는 건 아닐까? 어째서 두 개골이나 인체 표본이 그렇게나 강렬하게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것일까? 나는 아마도 그것이 어린이들이 처음으로 해후하게 되는 '생과 사의 메타포'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어린이들은 그 표본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란 존재를 대상화 시키게 된다. 자기 피부의, 매끈매끈하고 아무런 얼룩도 없는 피부 밑에는 색깔도 촌스럽고 기묘한 꼴을 한 내장이 구불구불 서로 겹쌓이듯 존재하고, 그 밑에는 표백한 것처럼 새하얀 그리고 저 불길하고 께름직한 뼈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게 되는 것이다. 내장은 불확실한 생을 표상하고, 뼈는 죽음을 표상한다. 물론 그들이 그 자리에서 그런 사실 전부를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은 언제나 훨씬 세월이 지나야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두컴컴한 과학실의 한 구석에서 막연하게나마 시스템의 존재양식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랜드마크로써 그들의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이것은 저 유명한 이집트의 만찬 얘기와 비슷하다. 이집트인들은 그 성대한 만찬을, 시종이 관 속에 들어 있는 해골을 들고 회장을 걷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이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죽음이란 존재를 되새기게 했던 것이다. '생의 중심에서 죽음을 생각하라'하고 그러나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철학적 성찰을 환기하기 위하여 해골의 표본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의 메타포로써 내장에 꼼꼼하게 색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표본'을 만드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공장은-회사의 정식 명칭은 '교토 과학 표본 주식회사'라고 한다-교토 역에서 1호선을 타고 자동차로 이십 분정도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있다. 그 주변은 인가가 드문 곳이라서 고속도로 변에는 군데군데 넓은 공터와 밭들이 남아 있고, 주조장 근처이기도 한 탓에 오래된 술 창고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전신주에는 천박스런 콜 걸들의 광고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시골길을 걷던 남자가 그런 포스터를 보고 불현 듯 성욕응 일어킬 가능성이 있을 것인가 하고 남의 일인데도 염려스러워진다. 어떤 의미에서건 거기의 풍경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대단한 것이 못되었다. '교토 과학 표본 주식회사'의 건물 역시,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파문을 던지는 타입의 건물이 아니다. 아주 오래된 낡은 건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짝반짝 빛나는 새 건물도 아닌 그냥 그런 즉물적인 삼층 짜리 건물에,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인체 표본을 만드는 회사라고 해서, 건물이 로쟈.코만 풍내지는 앤디워 홀 풍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회사 건물 뒤편에는 공장이 두 동 있다. 큰 쪽은 불상이나 미술 공예의 모조품이나 정원석 또는 실물 크기의 폭포-이런 것까지 만들다니!-를 만드는 공장이고, 나머지 작은 쪽은 교육 기자재 부-즉 이번 취재의 대상인 인체 표본을 제작하는-공장이다. 미술공예 부는 최근 들어 발전한 부문이고, 또 만드는 것도 그런대로 예술적인 것이라서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미술 대학의 제작실 같은 정취가 있고, 젊은 여성 스탭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인체 표본 쪽은 애써 견학을 시켜 주었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좀 뒤가 켕기지만, 건물도 낡았고 일하고 있는 사람도 대개는 늙수그레한 사람이 많아 썩 밝은 풍경은 아니었다. '열심히 하고 있나?'하고 말을 걸면 '피스피스'하는 대답이 돌아오는 듯한 그런 활달한 색깔의 공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장 얘기는 나중에 하가로 하고, 우선 본사의 삼 층에 자리한 쇼 룸을 찾아가, 이 회사가 과연 어떤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정말 여러 가지가 있군요. 실물을 그대로 하나하나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섭섭할 따름이지만, 글로는 다하지 못할 정도-이 표현도 너무 단순하다-로 기묘한 표본이 제법 넓은 방이 꽉찰 만큼 죽 늘어서 있다. 이 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예의 골격모형과 인체 표본이다. 이 두 가지 물체의 여러 변형체가 유리케이스 안에 죽 진열돼 있다. 인체 해부 모형의 최고급품은 부분별 분해수 수백 개. 길이 약 백오십 센티미터로, 장기는 물론이고 근육 하나하나까지 분해할 수 있고, 그것도 남녀 따로따로 가능하다니 실로 박력이 있다. 게다가 그 세밀함과 정밀함에는 보고만 있어도 넋이 빠질 지경이다. 인체 모형을 백 개로 조각조각 나누어 놓았다가 몇 분 안에 다시 껴맞출 수 있을까 하는 게임을 만약 한밤중에 혼자 한다면 그만 버릇이 되고 말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정밀한 것은 의과 대학이나 전문 기관용이고, 보통은 열다섯에서 서른 부분, 신장도 약 일 미터에서 일 미터 이십 센티미터 정도가 이용된다. 우리들이 국민학교 과학실에서 본 것은 대개 열다섯 부품으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그런 건 백 부품에 비교하자면 정말 어린애 장난감 같다. 양자 사이에는 F15 이글 전투기와 세스나 기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백 부품 짜리에는 피부를 덧입히지 않아, 대부분 근육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탓에 즉물적이랄까 실전적이랄까 상당히 압도적이다. 그러니까 남녀용 따로따로 나위어 있어도, 이게 남자용인지 여자용인지 외견만 봐서는 금방 알 수 없다. 즉 유방이나 생식기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데 유방이란 한 껍질 벗기고 보면 꽤 징그러운 것이더군요. 옛날에 The Impression이 'Beauty is Only skin deep'이란 노래를 히트시킨 적이 씨는데, 진짜 말 그대로입니다. 한 껍질 벗기면 미녀도 추녀도 다 마찬가지인겁니다. 골격 모형 쪽에도 여러 가지 단계가 있는데 표준은 전장 백욱십 센티미터, 합성수지제. 더러워지면 비누로 씻을 수도 있으니까 상당히 편리하다. 해골 모델에도 물론 여러 종류가 있어, 새하얀 보통 모델도 있지만 그 중에는 색채 골격 모형이라든가, 부위에 따라 색깔을 달리 하는 칼라풀한 두 개골 모형도 있다. 그런 것들은 약간은 LSD같기도 하고 사이키델릭합니다. 좌우지간 뭐 이런 것들이 자리가 좁다는 양 죽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꽤 긴장이 된다. 그 어떤식으로 생각해도 그다지 범상한 풍경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멍하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영업부의 요코야마 씨에게 얘기를 들어 보기로 하였다. 하루키-이런 표본을 제작하는 회사는, 일본에서 이곳밖에 없다면서요? 요코야마-없습니다. 전쟁 전에 저희 회사에 있다가 그만 두고 가내 수공업 형태로 하고 계시는 분은 몇 명 있습니다만, 메이커로서 회사가 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곳은 여기 뿐입니다. 어째서 교토에서 사업을 시작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면 마네킹 같은 것도 주로 교토에서 생산하죠. 그 생산 루트는 결국 시마쓰(제작소 이름)에서 만드는 것입니다. 교토에는 일곱색 마네킹이라든가 교토 명산이 있는데, 우리 회사와는 형제인 셈이죠. 수공업 부문은 교토가 좀 유명하잖습니까? 하루키-이런 제품들의 수요는 어떻습니까? 가령 해골이라면 그렇게 간단하게 모델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요코야마-그 점이 회사로서는 상당히 골치 아픈 부분입니다. 저, 물론 학교의 교육교재로 쓰이거나 의학교육에 쓰이는 경우는 새로 바꾸는데 몇십년은 걸리니까 말씁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학교의 주체성에 의한 수요니까, 우리들로서도 새 상품은...시뮬레이터적인 것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요즘은 행정 개혁 운운하는 문제로 예산이 매년 줄고 있거든요. 특히 학교의 문교부 관계에서 줄고 있는데다, 게다가 한편에서는 한때 의과 대학 신설 붐이 일었지만 그것도 일단락되었고, 하물며 간호관계에까지 예산 절감의 영향이 해가 다르게 미치고 있어, 최근에는 어떻게 팔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 하루키-예를 들어 간장을 만든다고 하면 간장의 실물을 보고 연구를 하시겠죠? 요코야마-그렇죠, 당연한 일입니다. 단, 색을 입히는 일에 한해서는 여러 가지로 난관이 많습니다. 인체의 진짜 색깔은 아주 칙칙하고 강렬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어려운 것은, 우리들인 보고 연구하는 것은 사체예요, 어디까지나. 생체와 사체는 또 색이 다르거든요. 일단은 사체를 참고로 하여 색깔을 칠하는데, 그 색이 너무 강렬하면 너무 생생하다는 이유로, 좀 밝게 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미국엘 가 보면 한결 더 밝은, 아주 환한 색이에요. 옛날, 옛날이라고 해도 제가... 그러니까, 십년 전쯤일까요. 그 무렵에는 국내용과 해외 수출용이 서로 색이 달랐습니다. 미국용은 좀 가볍기도 했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밝은 색이었어요, 다만 거기까지 세밀함을 기하려면 거의 수제품이라서 인건비의 균형문제도 있고 해서, 지금은 일체화하여 국내의 요구와 미국의 요구 중간쯤 되는 색으로, 하하하, 완선품은 그런 색입니다. 그렇다고 기술자 중에 딱히 이공 계통의 사람이 많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이런 걸 만드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원리상으로는 식품 견본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자면, 모양틀이라든가 색칠을 하는 문제라든가, 그런게 다르기는 하지만요.단, 저희들의 입장에서 보면-식품견본은-상당히 참고가 됩니다. 색칠 문제만 해도, 결국 우리들의 현안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정확하게 칠하느냐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식품 관계는 동일 품목이 상당히 많이 나와 있으니까, 그런 무슨 노하우가 있을 것이란 추측 하에 다양하게 자료를 입수하여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키-개인적으로 이런 걸 수집하는 사람은 없을까요? 요커야마-글쎄요... 음, 저 이따금... 가령 이 두개골이 필요하다든다(웃음), 모형이 갖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있지만, 수집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군요. 이 소의 2분의 1해부 모형 말입니까? 이래봬도 구십만엔 가까이나 하거든요. 인체 모형 같으면, 일미터 짜리가 제일 싼데, 그게 약 이십만엔 쯤 하죠. 그건 열다섯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백 부품 정도가 되면, 음, 남자가 백십만에 여자가 백이십만. 여자쪽이 비쌉니다.(웃음) 비싼 이유는...음... 특히 생식기 같은 경우 여자 쪽이... 복잡하거든요. 그래서, 십만엔 차이가 납니다. 좀 희한한 생각이 들더군요. 여자쪽이 생식기 하나 차이로 십만엔이 더 비싸다니. 하긴 그런 소리를 듣고 보니 그렇겠다 싶은 생각이 안드는 건 아니지만. 얘기를 꺼낸 김에 이 '교토 과학표본'의 방대한 양에 달하는 제품군 중에서 그 휘황찬란한 래디컬리즘의 증거가 될만한 예를 몇가지 소개해 보겠습니다.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일반 시민에게는 전혀 관계 없는 일이겠지만, 세상에는 이런 제품이 존재하고, 그 제품을 사용하여 연구 내지는 실전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또 그것을 일일이 만들어 내는 사람이 좀재한다는 것을, 가능하면 이 글을 통해 인식해 주셨으면 합니다. #1 아이를 밴 부인 골반 모형 골반이 있고, 그위에 스프링이 붙어 있는데, 그 스프링 끝에 아기의 머리가 붙어 있는 꽤 기묘한 모형이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모형인가 하면, 아기의 머리르 골반 속에 쏙 집어 넣어 질을 통하여 적출해내는 연습용이다. 하지만 골반 위쪽에 아기의 머리가 붕 떠 있다는 것은 좀 해괴하다. #2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태아 IC형 권장품목이라고 하면 좀 어색하겠지만, 이 회사에서 제작하는 태아 모델은 무척 리얼하게 생겨서,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란다. 약 36주에 접어든 태아는 심장박동 소리가 발생하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는데, 음량이나 스피드도 조절할 수 있다. 방석으로 둘둘 말아 옷 속에다 집어 넣고 '봐요, 당신 애기예요.'하고 남자를 위협하는 일도 가능할 것 같다. 제발 그런 장난은 삼가 주세요. 겁나니까. 가격은 십일만엔. #3관장 시약 시뮬레이터 이런 모형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으나, 우리들 외부에서 온 사람이 처음 보기에는 역시 '굉장하다'싶은 분위기다. 엎드린 형태의 엉덩이가 있고-항문이 있고, 물론 실물 크기입니다-관장약을 삽입하기 쉽도록 엉덩이를 바싹 손으로 밀어 올린 듯 생긴 이 모형은 실로 잘 만들어져 있다. 값은 이십오만엔. 제법 비싸죠. 값도 그럭저럭 싸니까 한번 사볼까 라고 생각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지만. #4 관절 종류 모형 관장 시뮬레이터와는 달리 이쪽은 꽤 앙증맞다. 인간의 관절이 아홉종류, 일렬로 나란히 매달려 있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써 먹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격은 불명. #5 귀의 구조 모형. 특대형 이야, 이거야 말로 굉장하군요. 높이 육십센티미터의 귀가 있는데, 그게 아홉 개로 분해될 수 있다고 하니까, 살바토르 달리 선생이 살아 있었다면 기뻐서 날뛰었을 것 같습니다. 카탈로그에 있는 이 귀에 관한 설면을 발췌해 보면, '바깥 귀를 떼어 낼 수 있도록 하여 상추체 부를 해보하여 속 귀를 들어내면, 달팽이관, 전정기관, 상반규관을 해부할 수 있고, 막 미로의 구형농 밑 난형농 등 상반규관과 연결되어 있는 기관을 떼어내어 골미로와의 관계를 볼 수 있고, 청골 및 고막도 해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경 및 혈관의 분포 상태도 상세하게 볼 수 있도록 짜여 있습니다.' 과연 설명문 그대로 전부 떼어 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셈인데, 다시 끼어 ㅁ추면 달리 품, 분해하면 토킹헤즈 풍의 분위기, 한참을 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특히 달팽이 관이 그 앙증스럽고 단아함이란! 아니 이 귀 모형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좀저 깊이 좀더 세세하게 추구하고 싶다는 분이 혹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안심하십시오. 그런 분들을 위하여 빈틈없이 실물 이십배 크기(!)의 귀 소골 모형이 있으니까. 이 추골, 침골, 등골이 절묘하게 뒤엉켜 있는 것을 보면서, 아직도 납득이 안간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6 실습모델 케이코 이 실습용 여자 인형에만 이름이 붙어 있는 셈인데, 아마도 이 이름은 '실습=프랙티스'와 '케이코(학문이나 예술을 배우고 익힌다는 뜻)'에 관련 된 것이리라. 블랙 유모어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환타스틱한 이름인데다, 뭐랄까 좌우지간 굉장합니다. 신장은 백육십 센티미터, 특수 배합에 의한 염화 비닐 수지, 약 삼십킬로그램. 실습 항목은 #1 주사(피하,근육) #2세정(위, 장) #3 관장 #4 도뇨로 가격은 삼십일만엔. 얼굴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모 풍속 평론가를 닮았다. 얼굴에 관해 쓰자면 값이 비싸고 정밀한 모델일수록 얼굴 표정이 리얼하고, 값이 싼 모델은 이류 백화점 모델같다. '케이코'보다 한 단계 위인 바이 섹슈얼-즉 페니스와 바기나를 바꿔 달 수 있는 -실습 모델은 육십팔만엔으로 값이 비싸기는 하지만 제법 얼굴도 잘 생겼고, 미용 실습용으로 여자 가발까지 딸려 있다. #7 나이팅게일 상 어째서 그런 곳에서, 관장 시뮬레이터나 귀 소골 모형과 나란히 나이팅게일 상이 서 있는지 의아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간호학교에 있어 나이팅게일 상은 맥주홀의 넓은 변소와 마찬가지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간호부들의 일이란 정말 힘들기도 하니까, 그녀들이 데친 시금치처럼 지쳐 모든 것에 염증이 났을 때 문득 나이팅게일상을 올려다보며 '그렇지, 나이팅게일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하고 생각하며, 기운을 내어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운내세요... 지금 막 생각났는데 대학 2학년 때 성 누가 병원의 간호부랑 데이트를 하다가 천엔을 빌린 후 아직 갚지 못했다. 이것 참. 이렇게 그 쇼룸에는 실로 많은 제품이 있어 그걸 다 일일이 쓰려고 ㅎ다간 끝이 없을테지만, 앞에서도 말한것처럼 '교코 과학표본'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뭐 그렇다고 유별난 것을 좋아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라서 이런걸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들 제품은 전부 교육용 교재이고, 전문적인 기자재이다. 그러니까 안자이 미즈마루씨처럼 흥미본위로 '유방 맛사지 모델'(십일만엔)의 젖꼭지를 슬쩍 만져보거나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 나도 무척 만져 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으니까. 실습모델 '케이코'만 해도, 간호학교의 여학생들은 그걸 사용하여 매일 열심히 실습을 하고 있으므로, '아하하, 이거, ( )하고 닮았는데'라고 농담을 지껄이며 웃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을 머리 속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제품 하나하나를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이건 정말이지, 보고만 있어도 압도당하리만큼 재미있고, 정밀하고, 아름답고, 조악하고, 완벽하며 전위적이다. 아마 무리하게 웃기려고 애쓰지 않는 구석이 오히려 신선하고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값이 약간 비싸서, 우리들 일반 시민 개인이 부담없는 마음으로 사들일 수 있는 종류는 아니지만, 정반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거꾸로 이런 특수한 물체를 일반 시민이 거리낌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는 좀 무서울 것 같다. 하루키-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모델의 얼굴 표정도 가지가지로군요. 요코야마-예, 예를 들면 나이팅게일 상의 얼굴을 만들때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옛날 사진이 있어, 그걸 참고로 만들었더니 얼굴이 무섭다고 간호학교 선생님들한테 전부 외면을 당했어요. 하하하. 그래서 아주 상냥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만들었죠. 초상화였는데 아주 옛날 것인 모양이에요, 아주 딱딱한 얼굴이었죠. 모두들 인상을 찌푸리더군요. 까다롭습니다. 간호학교 선생님들은 인형이라도 눈매가 좀 매섭다거나 하면 그래요, 네.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얼굴은 특히 고생을 많이 합니다. 신제품일 경우에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브레이크가 걸려 다시 만들곤 하지요. 결국 호감이 가는 얼굴이란 우선 부드럽고 귀여워야 하는 법이죠. 그러니까 스타일이 거의 정해져 버려, 어떤 형의 얼굴 모양이 일단 마음에 들면, 그 다음에도 역시 그 얼굴 모양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런건 '이런건 어떻습니까?'하고 견본을 들고 가면 간호학교의 선생 판단에 좌지우지되기 십상이죠. 그러니까 A란 선생님은 '됐습니다'라고 얘기해도, 다른 학교에 갔더니 '대체 뭐예요. 이 얼굴, 좀 더 부드러운 얼굴로 만들 수 없습니까?'하고. 그런 일이 흔히 있어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교육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요코야마씨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그래도 역시 얼굴은 중요하죠, 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 아무리 맹장이니, 항문이 멋드러지게 만들어졌다 해도, 얼굴이 무성의하게 만들어졌으면 간호학교의 여학생들 역시 감정 이입이 덜 이루어져 그만큼 흥도 덜 나리라고 생각한다. 세이부 백화점에 서 있는 마네킹처럼, 어떤 아줌마가 사람으로 착각하고 매장을 물어보는 선까지 리얼하게 육박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쯤에서 드디어 이들 제품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공장 쪽으로 옮겨가 보겠습니다. 공장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수지 성형을 만드는 공정이 있다. 이 부분에는 특별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수지 단계에서 바탕색-인체를 만드는 과정이라면 피부색이라든가-을 칠하거나 그것을 틀에 넣어 오븐으로 열을 가한다. 즉 간장을 만든다면 간장 모양 틀에 수지를 부어 넣고 도미구이처럼 오븐에다 굽는 것이다. 그 주변에는 간장 형태의 틀이 있고, 태아의 목이니 골반이니 하는 것들이 죽 늘어서 있어 좀 괴상한 풍경이라면 괴상하기도 하지만, 공정 그 자체는 세면기를 만드는 작업과 다를바 없어, 특필할 만한 기술은 없다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가 둘이서 묵묵히 간장을 도미구이처럼 구워낸다. 연일 간장이니 심장이니 방광이니 하는 걸 만들고 있노라면 아무리 보아도 이렇다하게 느껴지는게 없을 것 같다. 그 곳을 지나 모든 공정 단계를 차례차례 통과하면 거기가 바로 이 공장의 중심부라고 할까, 자랑이라고 할까, 좌우지간 채색부이다. 그 전 공정에서 제 꼴을 이룬 것들이 여기로 운반되어, 장인들의 손에 의해 하나하나 채색된다. 학교의 직원실 같은 곳에 작업 책상이 죽 있고, 장인들이 장기 하나하나에 붓으로 색칠을 하고 있다. 이곳 역시 묵묵히 매사가 진행되고 있다. BGM도 없거니와, 농담을 지껄이는 잡음도 없다. 철제 선반에서는 아직 색이 칠해지지 않는 손이니 다리니 몸체가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고, '아오모리 사과'라든가 '아와지 배추'라고 인쇄된 종이 박스 안에는 구개골과 심장이 빼곡히 쌓여, 채색될 순서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 색을 칠하고 있는 아저씨 쪽도 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여기 소장의 주름 그림자 부분은 이 색으로 칠하면 안되지, 붓을 바꿔서...'는 식으로, 어째 전통 공예물이라도 만드는 듯 유유한 손길이다. 그러나 그런 광경을 보고 있는 쪽은,야 이거 대단한 적업인데하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손이 많이 가고 공정도 세밀하다. 색도 복잡하고, 이것저것 때지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이런 세밀한 작업을 기계로 처리하기는 전혀 불가능 할 것이다. 요코야마-그렇죠, 단순하게 평면적인 것에 일률적으로 색을 칠하는 거라면 기계도 할 수 있을테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세세하게 색을 구별하여 칠한다든가, 질감을 드러내기 위해 독특하게 채색-우리들은 보통 다지기라고 말하는데요-하는 것은 기계로는 불가능하죠. 숙련된 사람의 손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까닭에 지금은 이 작업장에는 아르바이트 생이나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부인네들의 모습은 볼 수 없고, 숙달된 아저씨, 아줌마가 자리에 꼼짝않고 앉아 꼼꼼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코야마씨의 얘기에 의하면, 비교적 느긋하게 일하는 것처럼 보여도, 모두들 시간과 씨름을 하며 절실하게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겉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겠죠, 역시. 물감은 색이 쉽게 바래지 않고 물기에 강한 보통 비닐 칼라로, 붓은 일본화용이 중심.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 붓들이 수십종 진열돼 있고, 그 각각에 잔손질이 가해져 있다. 예를 들면 머리 뿌리 부분의 미묘한 선을 그리기 위해서 솔을 솎아냈다거나 하는 건데, 영업을 하는 사람 쪽에서 보면 '그까짓 머리카락 뿌리 따위에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뭐 있나?' 싶다. 영업을 하는 사람은 교육 표본으로서의 용도를 충족시킬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셈이니까, 인형을 만드는 것처럼 세밀하게 채색하기 보다는, 인체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 주길 바란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장인 아저씨에겐 현장의 긍지하는게 있어서 '아니지,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돼'라고 한다. 애당초 교토의 사람들이란 이런 부류의 일에 한해선 상당히 고집스런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어이, 다카하시. 얼굴에 그만 신경쓰라구'라는 말을 들으면 반대로 더욱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런 성이. 이 작압장의 일은 장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독립성이 강하여, 분업이란건 거의 없다. 어떤 한 사람이 시작한 일은 그 사람이 끝내는 게 원칙인 모양이다. 그러므로 대형 인체 모형 같은 것도 한사람이 한 사람을 전부 칠한다. 간장은 사이토씨, 생식기는 니시다 씨, 대장은 몬자키 씨 하는 식의 분담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신의 기술을 발휘하여 채색을 하니까, 당연히 완성된 한 구 한 구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사용된 색들이 좀 밝은가 싶은 인체가 있는가 하면, 수수하고 차분한 배색도 있다. 세부에 몰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마간 융통성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시험삼아 안자이 미즈마루 씨에게도 한 번 칠하게 해 보고 싶군요. 그건 그렇고, 이 장기 채색에는 여러 가지 요령이랄까, 기술에 있어 예를 들어 너무 신선한 색을 칠하고 싶지 않다. 간장 같은 것은 약간 '중년기에 있는 매스컴 관계자'의 간장처럼 칙칙하게 칠하고 싶은 경우에는, 붓에다 물감을 칠한 다음, 신문지에 한번 쓱 문지른다. 그러면 붓이 어느 정도 말라, 이른바 좀 어둑어둑한 색이 나온다. 요컨대 플라스틱 모델을 채색할 때와 같은 요령인데, 그런 기술을 한 사람 한 사람이 제각기 터득하여 슈퍼 마리오처럼 특유의 필치를 쓱쓱 발휘하는 것이다. 그 옆자리에서는 아줌마가 가늘게 꼰 종이를 사용하여 가느다란 신경계의 모델을 만들고 있다. 이 작업은 역작이라고나 할까, 보고만 있어도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될 듯 삼엄한 것으로, 종이끈으로 만들어진 몇 십줄기의 신경이 색색으로 구별되어 저쪽으로 구부러지기도 하고, 이 쪽으로 빙그르르 돌아가기도 하고, 아무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하나하나 정확하게 재현되지 않으면 안되니까, 정말 힘든 작업이다. 나같은 인간에겐 도저히 불가능하다. 외국인들은 종이끈을 만들지 못해 견학을 하러 오면 이걸 보고는 질겁을 한다고 하는데, 나 역시 질겁했다. 이 신경계 모델은 삼년에 걸쳐 만드는데, 아직 미완성으로 어느 정도 완성되면 큐슈의 어느 대학 교수에게 보여드려 '여기가 좀 이상한데'하고 지적을 받아가며 수정을 거듭한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무려 삼년입니다, 삼년. 하루키-그야말로 장인이랑까 개별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인상이로군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요코야마- 예, 그렇습니다. 그게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도 있어요. 결국은 말이죠, 횡적 연계에 능숙하지 못한거죠. 예를 들어 채색을 하는 방법 같은 걸, 미술 공예부문의 관계자는 어떻게 하면 빠르고 정확하게 채색할 수 있는가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있는 셈이니까, 좀 가서 그 기술을 배워오면 좋을텐데, 아무도 안 갑니다. 장인들의 관례라고 할까요, 이건 옛날부터하고 있는 나의 기술이야라는 생각이 투철하여, 타인에게 가르쳐 주기도 꺼려하며 배우려 들지도 않아요.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만도 않은데, 그만저만한 연배의 사람들은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원만 지금 백십명 정도입니다만, 대충 이런 일을 좋아하여 들어온 사람들이랄까, 여하튼 관심을 갖고 들어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개중에는 인체모형 만들기를 좋아해서 라는 사람도 있겠죠. 어떻게든 젊은 후계자를 양성하고 싶다는게 지금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요코야마 씨의 얘기를 들어 알수 있듯 '교토 과학 표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생산의 주요 부분을 수작업이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르바이트 생을 채용하면 할 수 있는 단순한 수작업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수작업이다. 그러니까 일하는 쪽으로서는 아무래도 장인 기질의 전문직이 될 수밖에 없고, 기술 혁신이라든가 생산성 향상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서로 상반되는 현상이 출현하여, 그래서 영업부는 골머리를 썩는 것이다. 이런 인체 모형 제조가 발달한 나라는 독일과 일본 두 나라인데, 그런 만큼 수출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엔고 탓도 있어 수출도 그렇게 원만하지 못하고, 교육예선의 절감으로 국내 시장 사정도 썩 좋지는 않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일본의 평균적인 중소기업이 껴안고 있는 고민과 거의 비슷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금후에는 전문적인 시뮬레이션을 중심으로 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겠죠'라고 영업부의 요코야마는 말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인체모형에 대한 수요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머지않아 '이건 내 기술이야'하고 고집하는 장인 아저씨도 불가피하게 체질 개선을 강요당하게 될지 모른다. 나 개인적으로는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루키-너무 당연한 질문 같아 죄송한데요, 일단은 회사니까 망년회라든가 사원 여행 같은 것도 하시겠죠. 요코야마- 물론입니다. 사원 여행을 작년에 어디로 갔다왔더라. 별로 좋은데가 못되놔서 기억도 희미한데, 시즈오카 현의 도로 유적(시즈오카시 남부에 있는 야요이 시대의 유적. 야요이 시대의 생활상을 재현한 가옥, 창고 등이 복원되어 있다.)을 보고 왔든가요. 하루키-도로 유적이라고 하면, 사원여행이라기 보단 무슨 연수같군요. 요코야마-그런게 코스에 있으면 반드시 보러 갑니다. 저 같은 경우는 직업상 해외 출장이 잦은데, 어디에 가느냐 하면 과학 박물관을 구경하러 갑니다. 관광버스도 안 타요. 역시 직업상 할 수 없나 봅니다. 하루키-그런 망년회 같은걸 할 때에도 줄곧 그런 얘기를 하나요? '저 표본 직장 색이 좀 안 좋아'하고 말입니다. 요코야마-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지극히 일반적인 얘기를 하고, 노래방에 가기도 하고,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뭐, 하긴 공통의 화제는 누구나 다 직업 얘기니까, 영업부만 모이게 되면 다른 부의 험담을 늘어 놓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흐음, 흐음... 그런가. 이 '교토 과학 표본'이 요코야마 씨의 말씀대로 '일반적인 다른 회사와 똑같은' 회사인지 아닌지는 나도 아직 판단이 안 선다. 사원 여행으로 도로 유적을 보러 가다니, 아무래도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듯한 기분도 들고, '정맥 주사용 시뮬레이터'를 만드는 회사와, 예컨대 '나라 김치'를 만드는 회사를 동일 선상에 두고 '일반적으로 같은 것입니다.'라고 얘기라는 것도 좀 설득력이 없다. 그야 물론 효율적으로 생산하여 효율적으로 판매하는 걸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과학 표본회사나 나라 김치회사난 기능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역시 두 회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한마디로 '모두들 비교적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과연 장기에 색을 칠하는 일은 그다지 산뜻한 작업이라고 할 수 없고, 손도 많이 간다. 그래도 옆에서 보고 있으니, 나도 좀 해보고 싶은 걸 하고 끌리는 구석이 있어 상당히 흥미로웠다. 필시 그것을 만드는 동기가 지나치리만큼 진지하고, 수공업이면서도 전통공예는 아니라는 점 때문에 ㅂ교적 부담없이 집중할 수 있는 장점 덕을 누리고 있는게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 한다. 좀더 쌌더라면 소의 이분의 일 모형을 사고 싶었는데, 유감이다. 공장으로서의 결혼식장 마쓰도 다마히메 전 이 책은 몇몇 '공장'을 선택하여 취재하고, 그곳을 탐방한 기사-혹은 탐방기사에 속하는 글-를 쓴다는 취지 내지는 방침하에 성립된 것인데, 그 중에는 세상의 일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공장'이라 부를 수 없는 곳도 몇가지 섞여 있다. 예를 들면 이 결혼식장 '마쓰도 다마히메 전'도 좋은 예이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결혼식장은 정확한 의미로는 '공장'이 아니다. 요리를 제외하면 결혼식장은 무언가 형태가 있는 물건을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벨트 컨베이어나 콤플레셔가 웅웅거리는 신음소리를 내며 가동되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결혼식장-딱히 '마쓰도 다마히메 전'일 필요는 없다. '호텔 오쿠라'에 있는 결혼식장도 구조적인 본질은 똑같다.-에서 쌍쌍의 부부가 차례차례로 쏟아져 나오는 과정을 유심히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고 하면, 그것을 '공장'의 범주 안에 집어넣는데 결코 반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공장으로서의 결혼식장, 혹은 '결혼ㄴ식장'이란 이름의 공장에서 사용하는 원료는 다름아닌 신란, 신부라 일컬어지는 한 쌍의 남녀이며, 그 기계적 추진력은 전문적 노하우와 숙달된 서비스이고, 중심적 부가가치는 감동-또는 좀 겸손하게 정서의 고양이라고 할까-이고, 그 수요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세상 일반의 '관례,상식, 습관'이다. 그런 식으로 결혼식장에서는 오늘도 흉한 날만 아니라면 한쌍 또 한쌍의 '의식'이록 하는 휘황찬란한 상품이 생산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결혼식 공장'적 결혼식장의 존재 양식을 비판하려는 것은 결토 아니다. 또 그에 대해 비난조의 생각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하게 말해 나는 '마쓰도 다마히메 전'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소위 중립적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중립적 입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쓰자면 #1 나자신은 이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을테지만 #2 이 결혼식장의 존재의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란 입장을 말한다. 내가 '마쓰도 다마히메 전'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요컨대 나는 집회라는 것을 생리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마쓰도 다마히메 전'에는 전혀 책임이 없다. 나는 비교적 고집이 센 인간이아,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타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일부러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자신은 처음-지금의 마누라랑-결혼을 할 때에도 식을 올리지 않았고, 다시 한번 결혼을 한다 해도-아니!-'마쓰도 다마히메 전'이 되없든 뭐가 되었든 결혼식을 올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런 나도-편협한 성격의 산양좌 소설가도-결혼식 산업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결혼식 산업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고, 필요로 하기 때문이겠죠 뭐.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을 핑요로 하고, 그에 동반되는 어떤 종류의 감동을 희구한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짜 감동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그리고 마지막이 있어 적당히 그 기능을 수행해 주는 파악 가능한 감동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의식인 것이다. 세상에는 입구는 있으면서 출구가 없는 감동도 있고, 출구는 있으면서 입구가 없는 감동도 있다. 사람들을 압도하고 마는 격렬한 감동이 있는다 하면, 사람들에게 오줌을 찔끔찔끔 싸게하는 감동도-아마- 있다. 그러나-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나- 사람들은 결혼식장에서 그런 파악 불가능한 종류의 감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결혼식장에서 심심찮게 압도적인 감동이 발생하여, 그럴 때마다 참석자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 흐느껴 울거나, 신부가 실신을 하거나, 친정 아버지가 너무 감동한 나머지 로스트 비프 용 나이프로 신랑의 목을 찌르거나 한다면,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종류의 감동은 결혼식장에는 불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결혼식이라는 의식에 참가하여 감동도 하고 눈물도 머금기도 한다. 그러나 설사 눈물이 글썽해진다 해도, 그 눈물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수습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감동은 야구에 럭키 세븐이 있고, 샌드위치에 피클이 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한 과정에 부수되는 것이라서, 결코 과정 자체를 능가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기 ㄸ문이다. 그것이 바로 '적당하게 파악 가능'한 감동이며, 파악이 가능하기에 매매도 가능한 셈이 된다. 이런 발언은 필시 시니컬한 울림을 지니리라. 그러나 나는 애당초에도 말했듯 결코 시니컬한 시작으로 '다마히메 전'-멋진 이름이다-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신문의 엘리트 칼럼니스트가 약삭빠른 문장으로 '화려하고 연출이 과다한'결혼식장을 조롱하듯 냉소적인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만약 이런 표현을 용납해 주신다면 선민-은 스스로가 원하는 것으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손에 넣는다-그것이 어디가 잘못됐다는 것인가? 좀더 깊이 파고 들어가자면 결혼식의 어디까지가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정당하지 않은가? 결혼식의 어디까지가 필요한 과정이고 어디서부터가 불필요한가? 어디까지가 결혼식의 핵이고, 어디서부터가 부수적인 것인가? 어디까지가 세련된 것이고 어디까지가 촌스런 것인다? 나는 모르겠다. 모르니까 판단을 회피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독자 여러분께 판단을 맡기기로 하겠다. '케이스 스터디' 신랑 스즈키 지카라, 26세. 신부 누마쓰 미도리, 23세. 스즈키는 치바 현 마쓰도 시 출신, 아버지는 마쓰도 역 근처에서 동물 병원을 하고 있다. 친척 대부분도 치바 현에 살고 있고, 아버지 쪽 숙부는 마쓰도 시 시의원이다. 호세대학 법학부 졸업후, 모 석유회사에 취직, 영업부에 적을 두고 있다. 월급은 약 이십팔만엔. 현재는 집 근처에 1DK맨션-집세 칠만 팔천엔-을 빌려 살고 있고, 마루오 우찌까지 치요다 선을 타고 출퇴근하고 있다. 취미는 음악감상과 드라이브-자동차는 이스즈 제미니-로 주말에는 대개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긴다. 음악은 아리스와 배리 매니로우, 책은 추리물, 여배우로는 이시하라 마리코를 좋아한다. 대학시절에는 서클 후배인 여자와 셔귀었지만 졸업후에는 헤어지고, 이후 월 한두 번의 간격을 두고 치바 시내에 있는 터어키 탕에 다녔다. 유행하는 운동은 안정감이 없다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저축액은 백팔십만엔. 누마쓰 미도리. 시즈오카 현 아이즈시 출신. 집은 편의점을 경영하고 있다. 오빠 둘이 있는 세 형제로, 큰 오빠가 가업을 이었고, 둘째 오빠는 후지 텔레비전에 근무. 쇼와 여자 단기 대학 영문과 졸업 후, 중견 광고 프로덕션에 일단 취직하지만, 상사와의 의견 충돌로 반 년만에 그만 두고, 지금은 긴자에 있는 화랑에서 일하고 있다. 월급은 이십일만엔. 저축액 이백삼십만엔-그중 백오십만엔은 부모님이 대신하는 적립예금이다-요요기 우에하라에 있는 1DK맨션-집세 칠천 팔백엔-에 산다. 구독하고 있는 잡지는 '클래시''앙앙''다카포'. 처녀성의 상실은 열아홉살 때 스키장에서 알게된 게이오 대학생에게. 스물한살 가을에 화랑에서 알게 된 서른 아홉 살의 유뷰남과 깊은 관계에 빠졌지만, 옥신각신하던 끝에 결국 반년만에 헤어졌다. 이런 두사람이 이 드넓은 세상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져서는 결혼을 약속하고, 마쓰도의 다마히메 전에서 결혼식을 올리게까지 되니 세상은 참 재미있... 지도 않은가? 요커대 흔히 있는 얘기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이 두사람은 어떻게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가? 하고 질문을 하고 싶으신 분도 있을 것 같아, 얘기ㄹ 본 줄거리와는 관계 없지만, 사태의 추이를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스즈키 지카라가 누마쓰 미도리를 처음으로 만ㄴ 것은 1985년 9월이었다. 지카라의 상사가 미도리가 일하고 있는 화랑에서 유화 그룹전을 열었는데, 지카라는 그때 접수에 동원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도리를 본 지카라는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미도리는 키도 늘씬한데다 스타일도 좋고, 옷차림도 세련되었다. 굉장한 미인은 아니지만, 눈이 아름답고 치열도 가지런하다. 미도리도 지카라가 싫지는 않았다. 전체적인 느낌이 좀 땅딸막한게 넥타이 색도 핸섬했지만, 친절하고 성실해 보였고,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농담을 하는 구석도 귀여웠다. 이렇게 하여 두사람은 몇번인가 데이트를 하며, 영화를 보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고는 요요기 우에하라의 미도리 방에서 첫 섹스를 하였다. 12월 4일의 일이다.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미도리는 '음, 어떻게 하지?'하고 잠시 망설였다. 지카라를 좋아하기도 하고 나무랄데 없는 결혼 상대자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좀더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싶은 기분도 들었고, 그리고 지카라는 외모로 봐서는 결코 미도리가 선망하는 타입의 남성도 아니었다. 석유회사에 다닌다는 것도 어째 너무 수수한 것 같아서 흡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미도리는 지카라와 결혼하기로 정했다. 지금까지 사귀어온 남자들 중에서 지카라만큼 자신을 안심시켜준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남자를 놓치면 두 번 다시 이런 상대를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좋아요'라고 미도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지카라의 가슴에 살며시 몸을 기대었다-이런 광경을 쓰기는 제법 힘들군요. 그리하여 해가 바뀌고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쪼이는 일요일 오후, 3월31일 지카라와 미도리는 마쓰도의 역으로부터 걸어서 오분 정도 거리에 있는 '마쓰도 다마히메 전'으로 향했다. 식장을 예약하기 위해서이다. 걸으면서 둘은, '( )가 아주 좋았어. 어젯밤 그 ( )였기도 하고...' '아이 참, 후후후, 지카라 씨는 ( )인걸 뭐.' 하고 하찮은 얘기를 주고 받는다. 길바닥에 있는 소들도 이 젊은 두 사람의 모습을 진기한 듯...이라는 건 거짓말이고, 마쓰도에는 소 같은 건 없다. 아마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마쓰도 다마히메 전'을 결혼식장으로 택한 것은, 거기가 지카라의 본가에 가까워서 편리했기 ㄸ문이다. 시티 걸 취향인 미도리로서는 '음, 도심에 있는 호텔 쪽이 좋은데'싶은 생각이 있어, 그런 자신의 심중을 털어 놓기는 했지만 결국은 타협했다. 대부분의 현명한 여자들의 예에 따라 그녀도 역시 위대한 현실주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지카라가 '도심에 있는 호텔 따위는 순전히 이름값이야. 그런 허영 부려보았자 아무 의미도 없다구. 우리들은 연예인이 아니잖아'라고 했을 때, '그것도 그렇지'하고 순순히 수긍을 한 것이다. 그리고 '앙앙'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친한 친구에게 '지금 '다마히메 전'의 악취미적인 경향이 진보적 인간들 사이에 유행이야'란 얘기를 들은 것도, 그 재빠른 타협이 가능했던 원인 중의 하나이다. 둘은 결혼식에 드는 비용을 총 이백오십만엔으로 책정했다. 신혼여행(하와이)비까지 넣어 삼백만엔 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다. 비용은 두 사람의 저금에서 인출하게 되겠지만, 그 중 반쯤은 축의금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초대 손님은 약 팔십명. 10월의 토요일이나 일요일, 둘리 희망하는 날자인데 글쎄요, 어떻게 될까요? 결혼식에 대한 예약 및 상담 코너는 '미쓰도 다마히메 전'의 지하층에 있다. 넓은 로비에는 의상이니 선물이니 요리 등의 견본이 죽 진열되어 있어 어딘가 '결혼 견본 시장'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식장을 예약한 손님은 여기에서 '의상은 이것, 요리는 저것'하는 식으로 눈으로 보고 선택할 수 있다. 무척 편리한 시스템이기도 하고, 상담을 하러 온 손님의 기분을 고양시키는 효과도 있다. 상담 카운터에서 지카라와 미도리를 상대해 준 사람은 아라키라는 성의 젊은 담당자였다. 네이비 블루의 블레이저 코트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태도도 깍듯하고 친절하다. '햐, 결혼하고 싶다구? 그래서 예산은 어느 정도로?'라는 투로는 절대로 장사를 해 먹을 수 없다. 아라키-음, 그러니까 10월 12일 일요일이 신청일자죠. 손님 수는 팔십명이고... 잠깐 기다려 주세요.(팔락팔락하고 예정표를 체크한다)예, 괜찮겠군요. 가장 넓은 경운실이 비어 있습니다. 지카라-아, 다행이다. 10월의 일요일이 대길일이라서 벌써 예약이 다 됐는 줄 알았는데. 아라키-단, 시간이 오전밖에 비어 있지 않아서 열시 반 결혼식, 열한시 반부터 피로연을 시작하여, 두시간 반 동안에 끝나도록 돼 있습니다만... 지카라-뭐, 상관없잖아. 미도리-할 수 없지. 야이즈에서 오는 친척들이 좀 힘들겠지만. 지카라-할 수 없지 뭐, 그럼 그렇게 결정하죠. 아라키-감사합니다. 10월 12일 스즈키가, 누마쓰가 양가의 결혼식을 '경운실'로 접수하겠습니다. 이런식으로 얘기는 시스테마틱하게 진척된다. 우선 먼저 결정해야 하는 것이 결혼식 날짜이다. 날짜와 피로연에 초대할 손님 수. 이 두가지 사항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으면 장소도 예약할 수 없고 얘기에 전혀 진전이 없다. 하긴 당연한 얘기죠. 그러니까 최초의 상담은 길흉일 조견표를 한 손에 들고 참고해 가며 진행된다. 결혼식을 거행할 구체적인 장소가 정해지면, 다음은 결혼식의 종류를 정한다. '마쓰도 다마히메 전'은 신전식(일본의 전통 신앙인 신도식으로 하는 결혼식)의 식장은 실내에 있지만, 교회식, 불교식을 희망하는 사람은 실외에서 식을 치른 다음 실내로 들어와 피로연을 치른다. 미도리-신전식으로 하면 어때? 지카라-골치 아프니까 그냥 신전식으로 해 버리죠. 조로아스터교 식은 없겠죠? 아라키-예? 지카라-아니, 농담입니다. 이렇게 하여 결혼식 종류도 결정. 이 시점에서 아라키씨는 두 사람에게 일정표를 건네 준다. 드디어 얘기가 세부적인 데로 진전되는 것이다. 지카라-초대장은 다른 사람들도 대개 여기에서 만듭니까? 아라키-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희들에게 맡깁니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 중에 인쇄 관계자가 계시는 경우는 다르지만요.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 저희에게 맡기실지 아닐지에 대한 언질을 해 주신다든가, 그런 순서가 있습니다... 지카라-아는 사람 중에 인쇄 관계자 있어? 미도리-난 없는데, 지카라 씨는? 지칼-없어. 이리하여 초대장 제작은 '마쓰도 다마히메 전'에 의뢰. 초대장을 만드는 것은 예식으로부터 이 개월 전이니까 상세한 사항은 그때 협의하면 된다. 그러고는 드디어 견적을 뽑는다. 아라키-음, 우선 요리인데요(팔랑팔랑하고 견본을 뒤적인다)이게 일본식 육천엔 짜리입니다. 미도리-좀 초라한가? 지카라-도미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미도리-조금 비싼 걸로... 아라키-그럼, 이쪽이 팔천엔 짜리입니다. 지카라-그래도 도미는 없는데. 미도리-아, 여기 있어요. 도미가. 지카라-정말, 도미가 있군. 아라키-그건 만엔 코스입니다. 지카라-그럼, 뭐 그 정도 선에서 부탁... 미도리-우와, 이쪽 봐요. 굉장해. 아라키-그것은 최고급 요리입니다. 만칠천엔인데요. 미도리-게, 새우, 도미, 생선회... 지카라-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도미 정도만 있으면. 아라키-그럼, 만엔짜리로 하시겠습니까? 지카라-진짜 도미가 나오는거죠? 아라키-틀림없이 딸려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요리도 결정, 내용은 도미 통구이, 이세새우, 생선회, 튀김, 생선구이,조림, 무침, 계란찜, 국물, 메론입니다. 그러나 식사만 나온다고 손님이 즐거워 할 리가 없다. 피로연과 꽃놀이에는 술이 없으면 아무런 흥도 나지 않는 것이다. 아라키-샴페인, 맥주, 정종, 주스 등을 마시고 싶은대로 마음껏 마시고 일인당 천육백엔입니다. 지카라-그러면 천육백엔에 팔십명이니까... 아라키-(탁탁탁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수리)십이만 팔천엔이군요. 지카라-그럼, 그렇게 하죠. 아라키-단, 그메뉴에는 위스기가 들어 있지 않으니까 위스키를 희망하시는 경우에는 별도로 주문을 받고 있습니다. 미도리-위스키 없어도 상관 없지 않을까? 지카라-하지만 말이야, 치쿠라에 사는 아저씨는 위스키가 없으면 신경질을 낸단 말씀이야. 그 아저씨 거의 술독에 절어 사니까. 미도리-그럼 할 수 없지,뭐. 지카라-위스키 세병 정도 첨가시켜 주세요. 아라키-알겠습니다. 요리와 술은 이렇게 정하기로 하겠습니다. 손님이 팔십명이니까 원형테이블 열 개 정도로 충분할 것 같은데요. 지카라-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아라키-그리고 촛불은 하트 형으로 하시겠습니까? 지카라-(미도리에게)어떻게 할까? 미도리-어느 족이라도 다 괜찮아... 지카라-(아라키씨에게)다른 사람도 모두 합니까? 아라키-보통은 다 사용하십니다. 어쩌다 안 쓰시는 분도 계시지만요. 지카라-그럼, 하기로 하죠. 다른 사람들 하는 것처럼. 아라키-예, 그러면 메모리얼 캔들 팔천엔과,(쓱쓱하고 견적서에 볼펜으로 금액을 기입한다) 그리고 사회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들 쪽에서 맡든가, 아니면 손님 쪽에서 준비를 하시든가. 지카라-글쎄요, 사회자료는 얼마입니까? 아라키-사만엔입니다. 지카라-(미도리에게)어떻게 하지? 미도리-우리 쪽에서 누군가에게 부탁하려면 성가시기도 하고... 지카라-와타나베가 잘 할 것 같기도 한데. 미도리-하지만 그 사람 입이 험악하니까, 무슨 얘기 할 지 모르잖아. 지카라-그러면 그것도 부탁합니다. 아라키-프로 사회자니까 아주 잘 진행합니다. 그러면 사만엔 추가...(쓱쓱)엘렉트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카라-엘렉트론은 필요없겠지? 미도리-음, 딱히 필요없죠. 아라키-그리고 연출효과료란 것을 받는데요, 그게 오만오천엔입니다. 미도리-연출 효과료? 아라키-연출 효과료란 환타지아라고 해서 드라이 아이스의 연기를 내 뿜는다거ㄴㅏ, 음악 믹서라든가, 혹은 가라오케, 미러볼, 메르헨 등 그런 것을 다 포함하여 세트로 오만오천엔입니다. 물론 개별적으로 골라서 쓸 수도 있지만, 세트로 하시면 할인이 된까요. 미도리-메르헨이 뭔데요? 아라키-음, 그러니까 두분의 어렸을 때 사진을 슬라이드로 비추면서 나레이션을 곁들이는 겁니다. 지카라-하는 김에 전부 하지. 오만오천엔으로 해 주십시오. 세세한 건 잘 모르겠으니까. 아라키-그리고 곤도라 사용료에 관해서는 객실의 좌석료에서 부담하게끔 돼 있습니다만. 한사람당 백 엔씩 가산합니다. 지카라-곤도라? 아라키-예, 일단 식을 마친 두분께서 옷을 갈아입고, 곤도라를 타고 천장에서 스르륵 내려려오시는 겁니다. 모두들 깜짝 놀라시죠. 지카라-그야 물론 깜짝 놀라겠죠. '미지와의 조우'에 가까우니까. 아라키-그만큼 멋있지는 않습니다만. 지카라-당연하잖아... 아라키-그리고 꽃인데요, 싼것부터 진주, 루비,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등 모두 세트로 되어 있습니다. 지카라-웬지 점점 머리가 아파 오는 걸. 그건 어디가 어떻게 다릅니까? 아라키-예, 꽃의 양이 다릅니다. 미도리-꽃의 종류는? 아라키-대개 카네이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카네이션이 아니면 볼륨을 주기가 힘들거든요. 장미나 그 외에 꽃도 주문은 받습니다만, 같은 송이 수로 하면 카네이션만한 볼륨이 안 생기거든요. 그렇다고 활짝 핀 장미를 사용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봉오리 상태의 장미가 보기도 좋으니까. 그러자면... 지카라-제일 비싼 다이아몬드는 어떤 식입니까? 알키-그 경우에는 가네이션 중에서도 필 듯 말듯한 것을 쓰고, 그 외에도 큼직한 카트레아로 사방을 장식하여 테이블이 이렇게 있으면 메인 테이블에 두고, 그리고 양 사이드에도 놓습니다. 제일 싼 세트는 드문드문한 느낌이 들지만, 그게 줄 연결돼 있는 셈이니까 가격이 비싸지면 훨씬 보기가 좋습니다. 특히 손님의 경우 제일 넓은 방을 사용하시니까 싼 세트로 하면 오히려 초라해 보이지요. 지카라-그러면 이 에머랄드 세트 오만엔짜리로 할까? 미도리-그러지 뭐. 초라한 건 싫으니까. 아라키-잘 알겠습니다.(쓱쓱) 그리고 초대장은 몇 부 정도 만들면 좋겠습니ㄲ? 미도리-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참조하여 넉넉하게 만들어야 하나요? 아라키-아니요,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의례적으로 보내는 것을 별도로 하면 결혼식에 나오실지 안 나오실지는 사전에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확인을 하기 위해 보내는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저 부부 동반일 경우에는 한 토만 보내도 되구요. 대충 열명 정도 줄여서 계산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칠십장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초대장에도 몇가지 종류가 있습니다만, 평균적으로 한 장당 삼백육십엔입니다. 지카라-잘 모르겠군요. 적당히 알아서 해 주십시오. 아라키-좌석표 인쇄도 있습니다. 이건 초대장 수와 마찬가지로 한 장당 오백엔입니다. 지카라-해 주십시오. 아라키-예.(쓱쓱,쓱쓱하고)그 다음은 의상 차례인데요. 어떻게 하실까요? 미도리-역시 우찌가케(여자의 긴 예복)가 좋겠죠,네? 지카라-흐음. 아라키-예식 후에는 어떤 것으로 갈아 입으시겠습니까? 미도리-지금 뭐가 유행하는데요? 아라키-유행이라기보다 보통 후리소데(겨드랑이 밑을 꿰매지 않은 긴 소매의 겉옷)를 먼저 입고 그 다음에 드레스를 입는 분들이 많죠. 미도리-그런 나도 그런 식으로 하죠. 지카라-나는 몬쯔키(가문의 문양을 넣은 검은 남자 예복) 후에 턱시도를 입으면 되겠죠. 아라키-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의상의 가격은 나중에 정합시다. 미도리-왜요? 아라키-저, 가격차가 심하니까 다른 것들을 먼저 정하신 후에 결정하시는 편이... 지카라-알겠습니다. 아라키-그리고 우찌가케, 후리소데, 드레스를 입히고 매무새를 가다듬는데 드는 비용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음, 오만오천엔. 남성은 두벌에 팔천엔입니다. 지카라-꽤나 차이가 나는군. 아라키-이번에는 선물인데요. 케이크는 어떻게 할까요? 웨딩케이크라고 해서 저, 보통 삼각형의 요정도로 조그만... 아니면 밤 구헨 같은 것으로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지카라-밤 구헨은 어째 팔다 남은 것 같은 맛이 나잖아? 아라키-그럼 삼각 케이크로... 이건 사람 수만큼 준비할까요? 미도리-그렇게 하죠. 아라키-그리고 다음은 밥, 혹은 도시락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카라-그건 없어도 괜찮잖아? 미도리-요즘에는 별로 안 하잖아요. 아라키-지방에 따라서는 반드시 곁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찹살떡이나 아니면 이쪽에 있는 찐 팥빵이 어떻습ㄴ? 미도리-아, 그 찐 팥빵이 좋을 것 같은데. 지카라-이건 얼마죠? 아라키-육백엔입니다. 지카라-그럼 됐습니다. 그걸로 팔십개 준비해 주세요. 그런데 이쪽에 있는 것은 '축'이란 글자가 안 들어 있네요. 아라키-안 들어 있는 쪽은 사백엔입니다. 크기도 좀 다르궁요. 미도리-아이 참 헷갈리네. 지카라-그렇지만 일생에 단 한번 뿐이잖아. 아라키-그럼 육백엔 짜리를 팔십개(쓱쓱)...로군요. 그리고 그럿 종류는 어떻게 할까요? 지카라-그건 나중에 보고 결정 할건데, 우선 예산을 세워 봅시다. 아라키-이천오백, 삼천, 삼천오백 세종류가 있습니다. 대충 그 중에서... 미도리-그럼 중간으로... 됐죠? 지카라-음, 그게 부부는 한세트면 되니까, 전부 칠십세트죠? 아라키-삼천엔이 (쓱쓱) 칠십세트, 그리고 보자기는 보통수준으로 해도 되겠습ㄴ? 지카라-아, 예 그렇게... 아라키-보자기는 칠십장 정도 있으면 될겁니다, 선물 수만큼. 그밖에 케이크나 팥빵은 쇼핑백을 준비하니까요. 그럼 다음은 사진입니다. 미도리-휴우. 지카라- 얘기하는 것 만으로도 지치는 걸. 아라키-사진입니다. 미도리-예, 말씀하세요. 아라키-전체 사진은 식이 끝난 후 전체가 모여 찍는 사진입니다. 이건 필요하시죠. 이넉ㄴ 갈라입니다. 그리고 두분 사진, 결혼식 진행 중에 우ㅉ가케와 몬쯔키를 입으신 모습. 이것도 칼라로 하실거죠. 그리고는 신부 혼자허... 지카라-신랑 혼자서 찍는 건 없습니까? 아라키-없지는 않습니ㄷ, 남자분들은 개인차가 심해서... 그 다음은 옷을 갈아 입으신 후에 후리소데와 몬쯔키 모습의 두분 사진 찍으시겠습ㄴ? 지카라-찍죠. 아라키-신부의 후리소데 모습은? 미도리-그건 없어도 좋아요. 아라키-그러면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지카라-그것도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미도리-나도. 아라키-예, 그러면... 전체 사진이 만팔천엔에, 그 이외에는 각각 만오천엔, 전부 육만 삼천엔이로군요. 자, 그리고 양친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는 순서도 있는뎅요. 지카라-그거 안하면 안되는 겁니까? 아라키-글쎄요, 안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다들 하십니다. 저희들도 권하고 있죠. 값이 문제가 아니고 역시 양가 부모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지카라-흐음, 그럼 하죠. 남들처럼. 아라키-꽃다발이 두 개, 그리고 들러리용 꽃다발은 어떻습니까? 들러리가 신랑, 신부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는 것입니다만. 지카라-필요 없지 않을까? 미도리-필요 없어요. 아라키-다음은 신부의 부케인데요. 부케는 생화와 조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생화로 하시면 식이 끝난 후 친구분에게 드릴 수 있고요, 조화로 하시면 그대로 간직하실 수도 있고, 신방에다 장식을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미도리- 생화로 해 주세요. 아라키-생화로 하려면 가격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대충 만엔에서 삼만에 사이죠. 둥그런 모양의 부케와 밑으로 축 늘어지는 부케와... 미도리-중간쯤으로 해서, 이만엔 정도로... 아라키-예.(쓱쓱) 이만엔 하고, 그리고 비디오는 어떻게 할까요? 예식와 피로연의 비디오입니다만... 지카라-글쎄...뭐 일생에 단 한번이니까 그것도 부탁드릴까요? 아라키-피로연은 몇시간 정도짜리 비디오로 하시겠습니까? 미도리-적당하게 콤팩트로 하면 좋을 것 같잖아? 지카라-그렇겠지. 아라키-네, 그럼 요소요소를 찍어서 구십분 정도는 필요하겠군요. 축사도 찍어야 하겠고, 입장 캔들 서비스도... 지카라-그렇게 하죠. 그러면 얼마? 아라키-육만엔입니다. 그리고 테이블에 이름표를 세워 놓습니다만. 이건 사람 수대로 필요하니까, 한 장에 백엔씩 팔십명 분이 되겠군요. 거기다 방명록이 세트로 되어 싸게는 이천 팔백엔짜리부터 있습니다. 축전첩과 회장에서 돌리는 축하 메시지판이 세트로 되어 있어요. 지카라-음, 그러면 삼천삼백엔짜리로 부탁합니다. 아라키-얘,(쓱쓱)나머지는 신부의 시중비가 팔천엔하고. 뭐 이런 정도로군요, 의상을 별도로 하면. 지카라-지금까지 전부 합하면 얼마나 됩니까? 아라키-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탁탁 탁탁(계산기 소리) 아라키-지금까지 합계가 이백오만 삼천사백육십엔입니다. 이런 식으로 아직도 하염없이 계속되는데, 도무지 끝이 없다. 결국 별표와 같이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두사람은 10월 12일, 길일에 무사히 결혼에 골인, 어이휴. '별표' 스즈키.누마쓰 양가의 혼례 견적서 (요리 10,000엔. 손님수*2) 항목 단가(엔) 수량 금액(엔) 1피로연 요리 10,000 80 800,000 어린이 요리 2,500 2 5,000 음료(A세트) 1,600 80 128,000 음료(위스키) 6,600 3 19,800 피로연 좌석표 500 80 40,000 대기실료 6,000 프로 사회자료 40,000 장식꽃(메인) 50,000 장식꽃(테이블) 3,000 10 30,000 메모리얼 캔들 8,000 연출효과료 55,000 웨딩 케이크 400 82 32,800 증정용 꽃다발 3,000 2 6,000 방명록 세트 3,300 이름표 100 80 서비스 초대장 360 70 25,200 좌석표 500 70 35,000 세금 합계*10% 118,180 서비스료 합계*10% 118,180 소계 1,520,460 2예식,사진, VTR 예식료 35,000 시중비 8,000 결혼반지 사진 전체 18,000 예복2인 15,000 예복 신부1인 15,000 옷갈아입고 2인 15,000 옷갈아입고 신부1인 15,000 예식 비디오 피로연비디오 60,000 소계 166,000 3. 선물 선물 3,000 70 210,000 과자(홍백 찐 팥빵) 600 80 48,000 디저트 보자기 400 70 28,000 소계 286,000 4. 의상, 화장, 장치 우찌가케 웨딩드레스 400,000 후리소데 70,000 드레스 100,000 몬쯔키 턱시도 80,000 신부치장 53,000 신랑 치장 8,000 머리장식, 부케 20,000 소계 731,000 합계 2,703,460 표안에 있는 숫자와 그밖의 내용은 현앵되는 요금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지우개 공장의 비밀 래비트 직업상, 나는 빈번하게 지우개를 사용한다. 내가 사용하는 문구용품을 각 공정별로 작성해보면, #1 집필(만년필, 잉크) #2 원고수정(포스카 톰보, MONO BALL) #3 교정쇄 교정(연필, 지우개) 이렇다. 이렇게 둘씩 나란히 세워 놓고 보니, 무슨 콤비 개그맨 같군요. 연필-어이! 이봐 자네, 여긴 이렇게 해야지. 지우개-글세, 아닌 것 같은데. 연필-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해야 맞나? 사각사각. 지우개-아니라니까, 쓱싹쓱싹. 연필-자네도 참 끈질기군. 이봐! 이러면 어때. 사각사각. 지우개-대충 거기는 됐는데, 여기가 틀렸어. 쓱싹쓱싹. 연필-아하, 그런 실수를. 사각사각. 하고 말이죠. 이런 생각을 하며 교정쇄에 손질을 가하고 있노라면 별로 싫증이 나지 않는다. 흥미가 돋는 분께선 한번 실험해 보시길. 음, 이제 농담은 그만 하고, 대개 어느 회사의 책상 위에나, 어느 공부방의 책상 위에도 한 개쯤은 굴러 다니는-있어도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없으면 상당히 불편하다-지우개는 어디서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걸까, 이것이 바로 이 항목의 테마이다. 아마도 이 책에서 다루는 상품 중에서 가장 가격이 싼 품목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값싼 일상 용품을 만드는 공장이야말로 공장 견학의 꽃, 표준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심플한 공정-대량 생산,이라는 가식기가 없는 공장이 원래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를 이쯤에서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인체 표본이니 다마히메 전이니, 꼼므 데 개르손이니 하는 재미있는 것, 눈에 띄는 것에만 눈길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지우개-그러니까, 그게 틀렸다는 거야. 쓱싹쓱싹. 연필-알고 있어, 틀림없이 고친다니까. 사각사각. 이렇게 진지한 지우개 공장입니다. 우리들이 방문한 '래비트 지우개'의 공장은 나라현 야마토 고리야마 시에 조성돼 있는 광활한 공업단지의 일획에 있다. '래비트'이 부지만 해도 삼천 칠백평이니까 언뜻 보기에도 널찍한 곳이다. '래비트'는 1965년에 오사카에 있던 공장을 이쪽으로 옮겨 조업하고 있다. 나라 현에는 산업이라 할만한게 거의 없으므로-정직히 말해 그 점이 바로 나라의 좋은 점이지만-현 당국이 나서서 대도시 근교에 있으면서 자리가 좁아 곤란을 겪는 회사나 공장을 유치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래비트'의 옆이 '하우스 식품'이고, 뒷편이 '마쓰시타 전기', 이런 식이라 흥미롭다고 하면 제법 흥미로운 곳이다. 이런 곳을 자동차로 빙 돌아 보면, 세상에는 참 별별 공장이 다 있구나 ㅅ어 묘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하긴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물건이 철철 넘쳐 흐르니, 그것들을 만드는 공장이 많은게 당연한 일이지만, 최근에는 대도시-특히 동경-에서 큰 공장을 거의 볼 수 없으니까, 도시 한가운데 살다보면, 세상이 오로지 소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과거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에 걸쳐 도시 근교에서 전답이 그 모습을 감추게 된 과정과 유사하다. 머잖아 동경의 어린이는 공장에 견학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몰릴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래비트'는 지우개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인데, 이런식으로 자사의 브랜드로 지우개를 만들어 출하하는 대규모 회사가 전국에 네 곳 정도 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몇몇 완구류 메이커의 하청을 받아 제조하는 회사가 있기는 하지만, 소위 '메이커'는 이 네 회사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네 회사란 숫자가 많은 것인지 적은 것인지는 모르시겠죠? 나도 잘 모른다. 일억 일천만 일본 국민의 연간 지우개 소모량이 대체 어느 정도이고, 어느 정도의 지우개가 공급되고 있는가는 짐작도 할 수 없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니까 지우개 회가 네 개가 병립하여 각기 조업을 하고, 각각 그에 타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면, '그건 그런건가 보다'하고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 '래비트'이 공장에서는 하루에 대충 삼십오만에서 사십만개의 지우개를 만든다고 하니까, 그다음은 여러분께서 적당히 계산하여 상상해 주세요. '지우개 공장의 비밀' 과연 지우개 공장에 비밀이 있는가? 물론 있다. 원료를 혼합하는 비밀도 중요한 비밀이고, 기술 혁신은 각 회사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이 취재를 하는 동안에도 '이 제품 이름은 쓰지 말아 주십시오'라든가, '이건 좀 대외적으로는 알릴 수 없는 일이라서'라는 말을 간간히 들었다. '지오개 공장'이라고 하면 우리들은 그저 고무를 적당한 크기로 싹둑 썰어 '한개 완성!'하는 아주 단순하고 전후 민주주의 풍으로 낙천적인 공장을 떠올리기가 쉬운데,매사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세상은 몹시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우리들의 첫 번째 오산이었다. 요컨대 '실제로 가서 보고, 설명을 들으면 지우개 공장의 구조쯤 쉽게 알 수 있겠지'하고 얕잡아 본 것이, 보기 좋게 뒤통수를 얻어 맞은 꼴이 된 것이다. 게다가 나도 미즈마루씨도 편집 담당 미도리씨도 물리, 화학 방면에는 압도적으로 무식하니까,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무슨 소리야, 대체?'하고 어두운 늪 속으로 빠져 들고 만다. 미즈마루 씨는 그래도 '나는 그림만 그리면 그걸로 끝인걸, 그 나머지는 몰라도 돼'하고 나 몰라라는 얼굴로 대처할 수 있지만, 나와 미도리씨는 거의 창백한 표정이다. '나 이런거 모르는데' '정말 어떻게 하죠, 흑흑' 애당초 '고무 지우개 공장'이라는 인식 그 자체가 잘못 돼 있다. 왜냐하면 이 공장에서 제조해 내는 지우개의 팔십오퍼센트는 플라스틱 제품이니까, 이미 고무 지우개라고 부를 수 없기 ㄸ문이다. 정확하게는 영어로 하면 eraser이고, 일본어로는 '글자 지우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참 난감하군요, 고무가 아니라니' 더구나 십오퍼센트로 대폭 감소된 고무 지우개라고 해봤자, 천연 고무는 눈곱만큼밖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거의 전부가 합성 고무인 것이다. '이거 큰일인데, 합성 고무라니.' 그러니까 고무지우개에 포함되어 있는 고무의 양이란 불과 전체의 십퍼센트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구십퍼센트는 고무를 밀착시키고 굳히는 약품이란다. 미도리-흑흑. 하루키-자, 울지 말고 설명을 듣자구요. 래비트-우선 채종유를 말이죠, 이겁니다. 채종유에 염화황이라는 액체를 넣어, 연쇄반응을 일으켜 굳힌 후, 그것을 분쇄합니다. 그게 오십퍼센트 정도 들어가 있지요. 하루키-흐음. 래비트-염화황 속의 황과 채종유의 분자를 연결시켜서, 분자를 쭉, 이렇게 해서 고체로 만드는 셈이죠.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분쇄한 것이 2차 재료인 거죠. 하루키-비지같군요. 래비트-그 다음은... 이게 ( )(대외 비밀), 광물유의 일종입니다. 아무튼 여기에 있는 것만 해도 재료가 액 삼십 종류나 되는데요, 이것들을 갈아서 전부 뒤섞는 겁니다. 하루키-흐음. 미도리-흑흑. 래비트-고무란 바로 이런 것이죠. 즉 섬유상으로 되어 있어서, 그것을 물리적으로 끊어 주는 것입니다. 섬유를, 그리고 그 섬유를 황으로 이렇게 연결시키는 것이죠. 이쪽도 이렇게 연결시켜 주고, 이런 식으로 죽 연결시켜서, 가령 온도를 백도 정도로 올려주면, 그게 물컹하고 부드럽게 되어, 원래 상태대로 돌아갈 수 없는 형태를 지니게 되는 겁니다만, 황으로는 간단히 연결시킬 수 있어요. 하루키-... 래비트-제일 처음에는 황만으로 고무의 분자를 연결시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황을 생고무가 백이라면 십 정도 넣고도, 두시간 정도 지나지 않으면 굳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촉진제, 즉 연결시키는 작용을 빠르게 하는 약을 넣는 것이죠. 그 약품이 일 펴센트 정도의 비율로 들어가 잇습니다. 그리고 그밖에 탄산 칼슘이라는게 있어요. 그건 알기 쉽게 말하면 분필입니다. 그리고 그 누르스름한 색은 황입니다. 그밖에 아연화라든가 석탄이 들어갑니다만, 이것들은 아까 말씀드린 촉진 작용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죠. 그러니까 이 세가지가 안들어가면 가황이 되질 않아요. 이십분, 삼십분이란 단시간 내에 가황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루키-네에. 라고 고개를 끄덕여 본들, 그런 설명을 이해할리 없다. 자랑할 건 못되지만, 나는 고등학교의 화학시간에는 줄곡 가와데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 문학 전집을 독파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설마 소설가가 된 후에 지우개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간단하게 총괄하여 보자. 이해를 단순화하기 위하여 '플라스틱 글자 지우개'ㅇ[ 관해서는 일체 생각하지 않기로하고, 합성 고무를 사용한 '고무 글자 지우개=지우개'에 관해서만 고찰해 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그 윤곽이 드러난 것은, #1 합성고무, 천연 고무, 그밖에 여러 가지 약품을 뒤죽박죽 섞는다(섞는 세세한 내역은 비밀) #2 그것을 황으로 연결한다. #3 지우개가 탄생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게, 플라스틱 지우개는 이것과는 전혀 제조 원리가 달라, 공장 건물도 떨어져 있고, 기계도 전혀 별개이므로 복잡해서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난 아무래도 플라스틱 지우개에 관해 알고 싶어'라고 완강하게 주장하시는 분께선 상당히 죄송하지만 직접 야마토 고리야마 시에 가셔서 견학을 하십시오. '멍청이라서 한가지 일밖에 모르는군, 사각사각' '뭐,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란 말일세, 쓱싹쓱싹' 하고 혼자 개그를 즐기며, 드디어 실제 공장 견학으로 들어 갑니다. 사전에 금속 탐지기로 무기류를 소지하고 있는 건 아닌지 검색을 하고, 방사능 방지복을 입은 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느긋한 기분으로 공장 안으로 발을 내디딘다. 만들어지는 물건이 평화로운 것이라, 보는 사람도 보여 주는 사람도 그다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 국민하교 시절 이따금 줄지어 가던 공장 견학이 떠올라, 제법 신이 나기도 했다. 실제로 이 '래비트 공장'에 국민학생들이 견학하러 오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보다 국민학교 아이들이 원리를 더 잘 이해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어, 흑흑. 실내가 환하다. 널찍하고 천장도 높고, 창문도 큼직하다. 넓은 데 비해서는 일하고 있는 사람이 적어, 꽤 썰렁하다 ㅅ은 인상마저 풍긴다. 만약 그대가 '플래시 댄스'의 첫 장면 같은 광경을 이 지우개 공장에서 바란다고 하면 그것은 큰 실수이다. 지우개 공장에서는 숨이 칵칵 막힐 듯한 열기도 없고, 귀가 멍해지도록 웽웽거리는 기계소리도 없고, '야,야, 저리 비켜, 못가잖아'하는 거친 고함 소리도 없다. 저쪽에서는 카당카당하는 어설픈 소리가 나고, 이쪽에서는 누군가가 수심에 찬 듯한 표정으로 고무를 자르고, 벨트 컨베이어가 꾸물꾸물 돌아가고, 하는 식으로 일견 '불경기 탓에 조업을 삼분의 일로 단축한건 아닌가'하고 염려스러워질 정도이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지우개 공장이란 성실하게 조업을 하고 있어도 이렇게 한산한 풍경인 것이다. 아마 열심히 일을 해도 그닥 눈에 뜨이지 않는 그런 류의 공장인 모양이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도 이런 타입의 학생이 몇 명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입구 ㄱ처에 재료 창고가 있는데 거기에는 각종 고무와 약품이 쌓여 있어 특유의 강한 냄새가난다. 그러니까 거기에 쌓여 있는 걸 한꺼번에 뒤섞는 것이 제 1단계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재료를 배급표에 준하여 정확하게 양을 측정하고, 이 뱀버리 믹서라는 기계에 넣고 짜내는 거죠. 재료는 차례대로 넣습니다. 차례를 잘못해서 뒤바꾸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뱀버리 믹서하는 기계가 어떤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소각로같기도 하고 증기기관 같기도 한 멋대가리 없는 기계인데, 나는 그런대로 비교적 좋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뱀버리야요'라는 꾸밈새가 없는 순박함이 느껴진자. 내쪽도 '열심히 하게나'하고 말을 걸어 보고 싶다... 아무튼 이 뱀버리 믹서로 갈아서, 짜낸다는 것까지는 아시겠죠? 그 다음 짜낸 것을 '두줄 롤'이란 기계에 돌립니다. '두줄롤'이란, 요컨대 고무를 두 롤 사이에 넣고 납작하게 만들어 내는 기계입니다. 먼 옛날, 탈수 장치가 없을 시절의 전기 세탁기에, 바로 이렇게 손으로 돌려 물을 짜내는 장치가 붙어 있었죠. 그것과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뱀버리 믹서에서 반죽된 고무는 잘 섞인 부분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그 덩어리를 이 롤에 넣고 균일하게 펴서, 그 다음 공정이 수월해 지도록 시트 상태로 만들어 적당한 크기로 둘둘 말아 두는 것입니다.' 고무가 편평하게 눌려 나오는 곳에는 한 손에 칼을 쥔 아저씨가 서서, 롤에서 빠져 나온 시트를 적당한 길이로 싹둑 잘ㄹ 카폐트 처럼 둘둘 만다. 솜씨가 노련하여, 곁에서 보고 있으려니 자못 흥미롭다. 이렇게 눈으로 보면서 알 수 있는 작업이 있으면 나로서도 안심이 되는 것이다. '칠십도 정도의 열기를 지니고 있어요. 여름철엔 제법 뜨겁죠, 저거.' 이렇게 하여 롤을 빠져나온 고무가 시트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도 아시겠죠? 그 시트는 여기서 한숨을 돌리며, 하루동안 그대로 방치된다. 울퉁불퉁한 것을 없애기 위한 자연 방치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섞는 일이 끝나는게 아니다. 다시 한번 믹서 롤이라는 기계로 짜낸다. 하지만 고무도 힘들겠군요, 뒤죽박죽 섞인데다 죽 눌려 펴졌다가, 이제 겨우 한숨 돌리는가 싶으면, 다시 또 뒤섞여야 하니까. 그리하여 분출기라는 기계에 들어가, 지우개로서의 두꼐를 지닌 납작한 떡 같은 시트로 다시 환생하는 것이다. 좀더 세세한 설명을 들은 것 같은데 나도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으니까 생략한다. 좌우지간 이것으로 '원료를 뒤섞고 짜내는 '제 1단계가 무사히 종료돼었다. 좀 이상한 예지만 여기까지 무사히 끝남으로써, '여자에게 술을 먹여 호텔로 데리ㅏ고 가서는 침대에 누이고 불을 끄는'단계까지 온 셈이다. 화학에 약한 분께서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복습' #a. 뱀버리 믹서-섞는다. #b. 둘 줄 롤-편다 #c. 믹서롤-다시 섞는다. #d. 분출기-형태를 잡는다. 여기까지는 정리가 됐죠? 그렇지만 몹시 힘겨운 일이군요, 이런 것도. 그 다음은 제 2단계 '가황'이란 공정으로 들어갑니다. 분출기에서 나온 납작한 떡같은 시트는, 꼭 양과자를 만들ㄸ와 비슷한 널찍한 틀 속에 들어가 얌전히 때를 기다린다. 막 찧어낸 찹쌀떡처럼 몰랑몰랑하고 부드럽다. 무즙이나 뭐 그런 것에다 찍어 먹으며 맛일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들 정도지만, 물론 실제로 맛일을 리도 없고, 지우개로서도 너무 물컹거려 사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걸 적당히 딱딱하게 만드는게 이 가황 공정을 역할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하면 늘 비속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마는 저의 문장입니다만-딱딱해지면 이쪽의 승리라 할 수 있는 단계죠.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굳히는가 하면, 가황 솥이란 기계 속에 고무 시트를 던져 넣고, 뚜껑을 닫은 후, 솥에다 증기를 쏘여 간접적으로 열을 가한다. 그 과정을 프레스 가황이라 부른다. 하루키-증기를 쏘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까? 래비트-예, 그렇습니다. 황은 배합 단계에서 이미 들어가 있으니까, 열을 가하면 3차원 구조를 취하며 굳는 겁니다. 온도는 재료에 따라 조금씨 차이가 납니다만, 대충 백삼십도에서 백오십도 사이죠. 그러면 보세요, 이런 식으로 딱딱해지는거죠. 그렇게 물컹물컹하던 것이. 하루키-예에. 한가지 설명을 덧붙이자면 #1 분출-프레스 가황의 공정과 평행하여, #2 압출-직접가황이란 공정도 있는데, 아까도 얘기했듯이 복잡함을 피하기 위하여 생략하겠습니다. 대략 #1 오소독스한 지우개를 #2 특수한 형태의 무엇을 만드는 공정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가황 솥이라고 하면 무슨 거창한 장치를 상상할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5단 프레스기라는, 그것도 비교적 소박한, 구운 두부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이렇다 할 것도 없는 기계가 슈크슈크하고 소리를 낼 따름이다. 그러나 이 기계가 60cm*60cm의 지우개 시트를 하루에만도 이천에서 삼천 상자의 제품으로 생산한다고 하니, 겉보기 보다는 굉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부적인 것은 회사의 비밀사항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정말 겉보기에는 구운 두부를 만들어 내는 기계같은데 말이다. 가황 후의 고무시트는 벨트 컨베이어로 운반되어 물속을 통과하며 냉각된다. 하루키-다진 다랑어를 만드는 것과 똑같은 순서로 만들어 지는군요. 이렇게 해서 일단 지우개가 완성된 셈이죠? 래비트-아닙니다. 이제부터 양생이라는 단계로 들어갑니다. 하루키-양생? 래비트-양생, 즉 휴양입니다. 요컨대 하룻밤이면 하룻밤, 푹 쉬게 하지 않으면 형태가 잡히지 않아요. 고무를 차분하게 식혀서 일정하 크기로 자리를 잡게 하는 것이죠. 비과학적인 두뇌를 지닌 나 같은 인간도 그런 과정은 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우개에게 있어서도 오늘 하루는 힘겨월던 것이다. 휘휘 뒤섞이기도 하고, 펼쳐지기도 하고, 백오십도나 되는 증기를 쏘이기도 하고, 물속을 헤엄치기도 했으니 푹 삶아 놓은 시금치처럼 지쳤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우린 이제 잘테니까, 나머지 일은 알아서들 하시라고'하고 이불을 덮어 쓰고 잠에 빠진다 하여 누가 비난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장 한 구석에서는 '우린 이제 잘테니까'고무시트들이 겹겹히 쌓여 최후의 잠을 만끽하고 있다. 그 중에는 '나, 아직 몸속에 열기가 남아 있어서 잠이 잘 안와'라고 섹시한 말을 하는 지우개가 한 필 쯤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우개의 심정까지는 나도 잘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지우개가 산적되어 있군요. 잠자고 싶어하는 지우개들을 편히 잠들게 하고, 우리들은 벌써 휴양을 끝낸, 즉 '아, 잘 잤다'고무시트가 거치게 되는 마지막 공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하루키-시트를 자잔하게 자르겠군요? 래비트-그렇습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것은 잉크용과 연필용을 겸하고 있는 2색 지우개입니다만, 저런 식으로 우선 기계로 비스듬하게 자르죠. 그러고 나서 두께를 일정하게 하기 위해 양쪽을 그라인더로 갑니다. 그렇게 해서 두께가 고르게 되면, 이 기계 자동 재단기로 조그맣게 자르죠. 그리고 이쪽에서는 크기가 작은 것이나, 비틀어진 것들을 추려냅니다. 하루키-상품가치가 없는 것도 꽤 많군요. 래비트-연결부분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저런 것들은 회수하여 처음부터 다시 재활용하여 만들지 않으면 한 개달의 값으로는 어림도 없죠. 그리고, 그 다음은 각진 부분을 둥글리는 과정이 남아 있다. 말 그대로, 막 재단 되어 나온 지우개는 모퉁이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예각을 이루고 있어, 그 각진 부분을 약간 둥글리는 것이다. 나는 이 기계에게 개인적으로 '하긴 뭐 아저씨'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긴 뭐, 자네들의 기분을 모르는건 아니지만, 이 자리에선 이렇게 좀 원만하게 수습을 하는게 좋지 않겠어? 어때'하고 류 치슈(수필집 2. 세라복을 입은 연필 72P참고)식으로 다독거리는 것이다. 아직 젊어서 혈기왕성한 지우개도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뭐 할 수 없지'하고 용납을 하고 마니, 광ㄴ 인덕이란 무시할 수 없다. '하긴 뭐 아저씨'기계는 지극히 단순한 기계로, 지우개를 그 안에 집어넣고 빙글빙글 돌리기만 하면 끝이다. 빙글빙글 도는 사이에 지우개가 사방 벽에 콩콩 부딪치며, 자연히 각이 없거지는 것이다. 하루키-그것 참 신기하군요. 래비트-네, 상류에 있던 돌이 하류로 가면 둥그스름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루키-몇 분 정도 돌립니까? 래비트-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다섯시간 정도 돌리는 것도 있습니다. 이 기계는 사방이 이렇게 철망으로 돼 있잖습니까. 저쪽 기계는 나무로 되어 있어요. 각기 각을 깍아내는 방식이 달라요. 잉크를 지우는 지우개는 철망같은 단단한 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고무가 딱딱해서 쉬 깍이지 않으니까요. 연필용처럼 부드러운 것은 나무기계로 돌립니다. 아마 나 같은 사람은 철망쪽에 처 넣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섯시간 정도 빙빙 돌다가 나와서는 성격이 싹 바뀌어서 '하하 웃어서 남주나요'하고 농담을 해댄다거나 말이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하여 '하긴 뭐 아저씨'를 거쳐 공정을 다 마친 지우개는 완성품으로 다른 건물에 옮겨진다. 마크를 찍어 셀로판지로 포장하여 상자에 차곡차곡 쌓는 겁니다. 하루키-이런 체품은 일일이 셀로판지로 포장을 해야만 합니까? 래비트-글쎄요, 포장이 좀 과장스럽다고는 생각하지만, 어린이들이 문방구에서 이리저리 만저대니까요. 그러면 소매점 쪽에서는 산 번 더러워진 것은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 고 해서요. 그 방지책이기도 합니다. 하루키-그런데 이렇게 다 알고 보니 실제로 고무는 조금밖에 안 들어가고, 거의가 플라스틱 제품인 셈이군요. 래비트-맞습니다. 국내에서는 이미 고무가 생산되지 않아요. 잉크용 정도 뿐이지요. 이쪽에 죽 늘어서 있는게 바로 고무용 인쇄기인데, 잘 움직여야 한 대, 날에 따라서는 거의 가동을 안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에 반해 플라스틱용은 매일 풀가동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인간사 영락성쇠는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잠잠하게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 고무 지우개용 인쇄기가 웬지 쓸쓸해 보였다. 우리들이 보고 온 고무 지우개 공장만 해도, 다른 건물의 플라스틱 지우개 공장에 비해 역시 어딘가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고무 지우개 기운 내세요...라고 위로를 해본들, 나도 결국 집에서는 플라스틱 지우개를 쓰고 있다. 그런데 영락성쇠로 말하자면, 한때 유행했던 변형 지우개의 불길도 지금은 가라앉아, 전통적인 모양의 지우개가 다시금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래비트'는 회사의 방침으로써, 변형류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오로지 정통파 노선을 밟아 왔기 때문에, 유행에 따른 피해는 전혀 없었단다. 정통파 노선이란, #1 지우개로서 부자연스런 모양으로 만들지 않는다. #2과도한 향기를 풍기지 않도록 한다. #3 음식물을 모방한 냄새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정말 일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바나나 모양을 한데다 바나나 향을 풍기는 지우개가 있다면 어린아이들은 반드시 깨물게 될 것이다. 어린이는 물론이고 하물며 나도 깨물지 모르겠다. 다진 다랑어 모양에 그 냄새를 풍기는 지우개가 있다면 나는 혹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래비트'의 카탈로그에는 아주 평범한 상품밖에 실려 있지 않은데,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국내용 보다는 수출용 카탈로그에 있는 지우개 쪽이 훨씬 심플하고 매력적이다. 외국에서는 옛부터 사용하던 심플한 지우개가 아직도 환영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나이 탓인가 '아 그리워, 이런게 진짜 지우개지'하고 문득 옛 추억에 잠진다. 특히 미국 같은 경우 문구류는 교과서와 함께 무상으로 학생들에게 지급되므로, 가능한 한 심플하고 튼튼한 것이 요구되는 듯하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동남 아시아로 수출하는 품종으로 생산된 '알파벳 지우개'로, 그건 플라스틱 지우개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옛날풍이어서 아주 귀여웠다,. 예를 들어 A에는 비행기 그림이 그려져 있고 Z에는 얼룩말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런 그림이 알파벳 수만큼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런 상품은 국내에서도 제법 팔리지 않을까 싶은데. 이렇게 지우개가 생산되기까지의 과정을 필사적으로 추적해 보았는데, 이 공장을 견학하고 나서 우선 떠오른 느낌은 애당초에도 말했듯, 세계는 점점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우개처럼 사용자 측에서 보면 그 구조적 특성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단순한 제품 조차도, 이 몇 년 사이에 제조 공적이 드라마틱하게 변환되었고, 기계 역시 세대 교체를 거듭하여, '고무 지우개'란 명칭마저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아닌가. 만성적 엔고는 수출용 지우개에도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고, 공장에도 합리화의 일환으로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한 전향을 꾀하고 있다. 그리하여 머잖아 지우개 공장도 내가 그 구조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블랙 박스처럼 돼 갈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는 '공장 견학'이란 말 그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985년 5월 현 단계에서는 그럭저럭 지우개의 생산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국내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춘 시대에 뒤떨어진 고무 지우개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이해하셨는지요? 경제동물들의 오후 코이와이 농장 음, 이제 슬슬 날씨도 좋아졌고-지금은 6월 초순입니다-어디 목장에라도 가서 우유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취재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좋죠하고 비교적 상쾌한 기분으로 우리들은 이와테 현 모리오카 시 교외에 있는 코이와이 농장을 찾았는데, 우리들과 비슷한 발상을 지닌 사람들이 세상에 없지 않아,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농장 쪽도 견학자를 다루는 솜씨가 능란하다. '코이와이 농장'의 동경 본사에 취재를 하고 싶노라고 신청을 하였더니, '우선 농장을 방문하기 전에 이런걸 보시고 개괄적인 사항을 파악해 주십시오'라며 비디오 테이프 두 개와 책을 두권 성큼 내어 준다. 비디오는 NHK에서 방영된 취재 프로그램을 녹화한 것이도, 책은 '초록 목장의 노래-코이와이 농장이야기'(소학관 넌픽션 동화, 국민학교 저학년용)과 '국민학교 사회과 견학 시리즈#6 목장에서 하는 일'(포프라사)이었다, 프프라사의 책은 권말 부록으로 '학년별 견학의 포인트'리스트까지 딸려 있어, 제법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논이나 밭에서 하는 일(2학년) # 목장은 어떤 지형과 기후를 이용하여 운영되고 있을까? # 목장에서 생산 된 것은 어디로, 어떤 방법으로 운반될까? 이런 식이다. 그밖에 어떤 질문을 하면 좋을까 하는 내용도 친절하고 자세하게 씌어져 있다. '소에게 과자를 줘서는 안됩니다.'란 주의 사항도 씌어져 있다. 으음, 그러고 보니 그런데하고 고개를 끄덕거려가며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는다. 몇몇 공장을 돌아 보았지만, 사전에 이렇게나 많은 자료를 제공하는 회사는 드물었다. 나는 대개의 경우, 그런 사전 자료는 무시하고 직접 현장에 가서, 애시당초부터 '아, 이건 뭡니까?'하고 시작하는걸 원칙으로 삼고 있었는데, 이번만은 특별히 견학에 임하기 전에 '코이와이 농장의 연혁'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총괄해 보기로 한다. 가끔은 이런 일이 있어도 괜찮겠지요. '코이와이 농장의 연혁' 코이와이 농장은 1891년 당시의 일본 철도 회사 부사장 오노 요시마사, 미쓰비시회사의 사장 이와사키 야노스케, 철도 국장 이노우에 카쓰 세사람이 설립하였다. 그래서 세사람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떼어 코이와이 농장이라고 명명된 것이다. 코코이와 농장이라도, 이와코이농장이라도 상관없는데, 어째서 코이와이 농장이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이 순서였는지도 모르고, 혹은 단순히 코이와이가 어감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일이 성립된 순서로 봐서는, 이노우에씨가 철도를 부설하기 위하여 모리오카에 갔을 때, 광대한 평원을 보고서 '여기에다 본격적인 서양식 목장을 만들자'는 착상을 하여, 오노씨에게 의논을 한 결과, '그러면 미쯔비시의 이와사키씨에게도 좀 출자를 하라고 합시다'라고 얘기가 돌아와, 이와사키씨가 그 얘기를 정원 연못의 잉어에게 먹이를 주며 듣다가, '좋습니다, 자금에 관해서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하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여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에서는 첫 시도였던 만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줄곧 적자를 내대가, 끝내 농장은 이와사키가에서 단독으로 경영하게 되었다. 1989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소의 숫자도 증가하고, 경영도 궤도에 올라서 1928년에는 '코이와이 농장 주식회사'가 되었고, '이래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회사조직에 의해 운영되는 종합농장으로써, 세인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며 현재에 이르렀습니다.'(회사자료) 우선은 축하한다. 총 면적은 이천육백 헥타르-라고 해도 전혀 그 넓이가 상상이 안되시겠지만 야마노테선의 안쪽 넓이만 하답니다-그 중 칠백 헥타르가 농장지이고, 그 나머지는 산림이다. 현재 회사는 '코이와이 농목'과 '코이와이 유업' 둘로 나누어져 있으며, 농목쪽의 사원은 약 백칠십명. 목장 안에 호텔도 있어, 가족을 동반하여 녹음이 우거진 목장의 풍광을 즐길 수도 있다. 꽤 멋진 곳일 듯하죠.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호쿠 신칸 선을 타고, 모리오카에서 내린다. 도호쿠 신칸선의 좋은 점은 역 매점의 도시락이 아주 맛있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경치가 아무런 재미가 없다는 점이다. ( )버섯 도시락이 제법 맛있었다. 미즈마루 씨, 이것 봐요. 도시락이라구요. 그렇게 잠만 자지 말고 먹읍시다.음-야, 음-야, 졸리다구. 어젯밤 한숨도 못잤어. 그래도 도시락이라니까, 하고 왈가왈부하는 사이에 어느 틈엔가 모리오카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시즈쿠이시강을 거슬러 올라가, 삼십분쯤이면 농장에 닿는다. 농장 안으로 현의 도로가 질주하고 있다는 것도 굉장합니다. 도로 양쪽으로 드넓은 초목지가 펼쳐져 있고, 양이나 소들의 무리가 드문드문 눈에 뜨인다. 옛날 치바현의 후나바시에 살았던 시절, 근처에 오백평 정도의 목장이 있어-목장이라기보다 그건 소 울타리죠-그 안에서 늘 열마리 정도의 소가 부루퉁한 얼굴로 어슬렁 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목장에 비하면 과연 넓다. 일본에서 최고라 할만하다. 공기도 깨끗하고, 사방도 조용한게, 나무숲 속으로 이따금 새 울음 소리가 들릴 뿐이다. 목장 안에 있는 커티지 풍의 호텔 방에 짐을 내려 놓고 한숨을 돌린 후, 코이와이 농장 낙농부에 있는 기쿠찌씨에게 목장 안내를 받기로 했다. 목장은 아까도 말했듯 광활해서, 시설과 시설 사이를 자동차로 이동하는데, 그 도로가 또 굉장히 멋지다. 하루키-목장 안에 이렇게 넓은 도로가 있다니 굉장하군요. 기쿠찌-예, 그렇긴 합니다만, 폭주족들의 모임터예요. 이 도로는 현의 도로라서, 누구라도 들어오려고 하면 들어올 수 있죠. 유료도로이니까, 올 때 요금을 내는 곳이 있었죠? 수익금은 전부 현에서 가져가고, 저희 목장은 아무 관계 없는데 말입니다. 밤중에는 그 곳을 아무도 지키지 않아요. 골치 아픈 일입니다. 하루키-소들한테도 폐를 끼치겠군요. 기쿠찌-하긴 여기끼지는 못 들어오지만요. 몇 년 전에는 유원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자가 있어서 철조망을 쳤는데, 철조망에 걸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루키-'매드맥스'의 세계로군요. 그거야 수소를 두세마리 순찰을 시키면 어떻겠습니까? 기쿠찌-...(도대체, 이사람은 뭘 취재하겠다는거야란 식으로 힘없이 웃는다) 최근에는 자동판매기에 손을 대는 자도 많아요. 시끄러운 일이 끊이지 않는 세이죠. 하루키-한밤중에 소를 훔쳐가거나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기쿠찌-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있을 리가 없잖아, 요즘 세상에) 독우사에서 프랑스 요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메뉴에서 흔히 보는 글자라고 생각하는데, 독우한 송아지를 말한다. 막 태어난 송아지는 곧바로 어미 곁을 떠나,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모두 함께 독우사에 수용되어 자라게 된다. 이곳에 있는 소는 모두 홀스타인이고, 홀스타인이란 소는 젖을 짜내기 위한 소니까, 암소 외에는 필요가 없는 셈이다. 그래도 생후 두달 동안은 수송아지도 여기에서 우유를 먹여 보육한다. 그리고 그 수소 중에서 일년에 두세마리만 종족 보존 후보생으로 선별되고, 나머지는 오륙개월이 지나면 거세, 이십개월이 되면 쇠고기 신세가 된다. 이 시점에서 처분된 소는 스테이크라든가 그런 종류의 비교적 고급스런 고기로써 먹을 수 있다. 냉정한 세계죠. 건물은 오래된 목조 건물로, 천장도 보통 건물의 삼층 정도는 될만큼 높다. 꼭 비행기의 격납고처럼 옆으로 길죽하고, 빨간 슬레이트 지붕위에는 들창이 나 있고, 환기창도 달려 있다. 그 옆에는 꽤 분위기가 그럴듯한 벽돌로 된 저장고가 두채 서있다. 하루키-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어미 소에게서 떼어 놓습니까? 기쿠찌-예, 이전에는 한 일주일 정도는 어미 곁에 놔 두었습니다만, 그 이유는 성분 관계 상, 산후 일주일 정도까지의 소의 초유는 판매를 할 수 없어서였죠. 덕분에 그 기간만큼은 함께 놓아 둘 수 있었는데, 여러 가지로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고, 그리고 작업상의 사정도 있어서, 지금은 태어나면 곧장 격리시킵니다. 그러니까 우유는 인공적으로 공급합니다. 짜내 온 것을 이런식으로 먹이는거죠. 우사에 들어서면 통로 양쪽에 어린 송아지들이 죽 늘어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풀을 먹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저런게 정말 맛있을까'싶은 의문이 이는데, 송아지들은 '아, 맛있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먹고 있다. 송아지라고는 하지만 풀을 먹을 정도가 되면 몸집도 제법 커서, 딱히 어리다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중고들학생 정도로 '남이 식사를 하는데 뭐 그리 봅니까'하는 눈길로 이쪽을 주의깊게 살핀다. 이렇게 '풀을 먹는' 송아지들은 나무 기둥에 일렬로 죽 묶여 있는데, 더 어린 송아지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조그만 우리 안에 가두어져 있어, 양동이에 든 모유와 특수 사료를 먹는다. 태어난지 얼마 안됐는지, 풀더미 위에 동그마니 누워 있는 송아지도 있다. 그 각각의 송아지 머리 위에는 명패가 걸려 있다. 하루키-이건 호적 비슷한건가요? 기쿠찌-예, 그렇습니다. 계통, 즉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이 소의 경우엔 분명하죠. 그러니까 송아지가 태어나면 등록을 합니다. 소를 등록하는 협회가 있어, 이름을 신청하면 등록번호를 내줍니다. 하루키-한마리 한 마리에 일일이 이름을 붙이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일텐데요. 음, '코이와이 킹 파퓰러, 훌로라...' 긴 이름인걸. 좀더 간단히 안됩니까, 나카소네 야스히로라든가? 기쿠찌-뭐, ㄱ,런 이름이라도 상관없습니다만, 엇비슷한 것들이 많이 낭ㅎ니까 말입니다. 우리 목장에서도 연간 수소만 해도 대략 이백마리 이상 태어나죠. 하루키-결국, 양친의 이름을 꿰맞춘 즉물적인 이름이 되겠군요. 이 '코이와이 바브 팬지 핀랜드'는 아버지가 '퍼시픽 바브'이고 어머니가 '코이와이 팬지 핀랜드 벨'이로군요. 이 86-23이라는 번호는? 기쿠찌-그것은 우리 목장에서 임의로 붙인 고드입니다. 정리상 붙인 번호이죠. 하루키-생일이 1986년 2월 10일, 그러니까 아직 4개월 정도로군요. 기쿠찌-예, 소의 경우 성인이 되는 월령이 대략 십육개월에서 십칠팔개월이니까, 아직 한참 어리죠? 하루키-명찰 아래쪽에 '능력지수'란 항이 있는데요. 숫자는 씌어 있지 않은데 이건 뭡니까? 기쿠찌-유량이란게 있어요. 소의 경우는 삼백오일이 공식적인 기록을 책정하는 기준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소에서 연간 팔천킬로그램을 짯다던가, 구천 킬로그램을 짯다든가하는 숫자가 나오죠. 그 다음은 유지율이란게 있는데, 그건 지방이 많이 섞여 있는가 적게 섞여 있는가를 뜻하죠. 그 숫자가 3.5니 4.5니 하고 나옵니다. 예를 들어 구천 킬로그램에 3.0이면 채취할 수 있는 우지량은 이백칠십 킬로그램이 되는 셈이죠. 그것을 어떤 계수로 나누면 능력지수가 산출되는 겁니다. 이 숫자를 소끼리 비교합니다. 하루키-인간의 편사치와 비슷한 것이로군요. 소는 모두 죽을 때까지 이 명찰과 능력지수를 달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기쿠찌-그렇습니다. 설령 우사를 옮긴다 하더라도, 이 명찰 만은 줄곧 달고 다니죠. 요컨대 이 곳에 있는 소의 운명이란 연간 몇 킬로그램이나 농밀한 우유를 생산하는가에만 집약되어 있다. 그리하여 소 한 마리 한 마리는 그 한 가지 관건에 의하여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다. 성격이 어떠어떠하다든가, 외견이 어떻다든가, 예술적 재능이 어떻다든가 하는건 전혀 평가의 대상이 안된다. 가령 어떤 소 한 마리가 자신의 능력 지수에 불만을 품고 소지기 아저씨한테 가서 '저 있잖아요, 아저씨. 난 유량도 별로 많지 않지만, 친구들 사이에선 상당히 인기가 좋다구요. 신뢰도도 아주 높고'라고 투정해 본들, 아저씨는 '허, 그러냐'하고 흘려 들을 뿐 전혀 상대를 안해 줄 것이다. 그 소의 능력 지수가 백구십이라면, 그 소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백구십이라는 가치밖에 없는 소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명찰은 대충 아래의 그림처럼 생겼고, 오른 쪽 아래에는 소의 반점 모양까지 그려져 있다. 이 반점이 인간의 지문과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소를 식별하기 위한 아이덴티티 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새까만 재래종 소의 경우는 이런 분별이 불가능하지만, 홀스타인 소의 경우는 모두 제각기 반점의 모양이 다르므로, 관리하는 쪽으로서는 대단히 편리한 모양이다. 웬지 소가 가엾다는 느씸이다. 나라면 물감이나 뭐 그런 것을 사용하여 반점을 싹싹 바꿔 그려가면 변장하여 도망칠 텐데, 하고 별쓰잘데 없는 생각을 해보지만, 소에게는 물론 그런 지혜가 없다. 어린 송아지는 사나흘 동안은 초유를 먹지만, 그 다음 사십일 정도는 인공우유를 먹는다, 그 후에는 마른 숲이나 배합 사료를 먹는다. 그리하여 약 십육개월 정도가 되면 송아지들은 송아지 시대를 마감하고 교미를 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의 어린 것이 그러하듯, 꼬마 소도 무척 귀엽다. 우유를 먹은 다음 나무 기둥을 입으로 물고 쩝쩝 빨고 있는 송아지도 있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어린애가 손가락을 빠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손을 내밀면 다섯 손가락 세마디째까지 입속에 전부 집어넣고 쩝쩝 빤다. 제법 신기하고 기분도 좋았다. 미즈마루씨, 한번 해봐요, 재미있으니까. 아니, 난 사양하겠어, 동물은 질색이거든, 그건 그렇고 무라카미씨는 겁도 없군. 의빈대 의빈대라니 뭘 하는건지 전혀 모르시겠죠? 간단하게 말해서 소를 위란 죽부인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이용하여 소에게 사정을 하게 한 후 정액을 채취하는 것이죠. 가짜 암소인셈입니다. 쟝 피에르 메르빌의 영화에 나올 법한 음침한 색조의, 천장이 높아 휑한 건물 한가운데에 의빈대가 놓여 있다. 언뜻 보아 체조기구이거나 고문대 같기도 한 그 기묘한 장치 위에는, 소의 진짜 가죽인듯한 것이 걸쳐져 있다. 핸들을 움직여 높이와 각도를 바꿀수 있도록 되어 있다. 튼튼한 유압식의 스프링도 붙어 있다. 그 기구 주변에는 거무죽죽하고 기분 나쁜 얼룩이 점점 묻어 있다. 이것이 '가짜 암소기'의 전모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는 사암이 이 방으로 와 이 기구를 보며, '자, 이건 뭘까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보통 사람같으면 뭐가 뭔지 전혀 짐작도 못할 것이다.'아, 이거 가짜 암소기죠!'라고 한 눈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특수한 상상력의 고유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최소한 앞쪽에 방긋이 웃고 있는 암소의 머리가 붙어 있다든가, 정면 벽에 전나ㄹ 암소 핀업이 붙어 있다든가(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소는 전부 전나이군요)한다면, 나도 '이거, 혹...'하고 생각이 거기에 미칠 지 모르겠지만. 수소는 정말 이런 상황에서도 그러고 싶은 기분이 생기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소란 동물은 상상력이 꽤 발달되어 있다든가, 결여되어 있든가 그 어느 쪽일 것이다. 하루키-이런 장치로 소가 그럴 기분이 생간단 말입니까? 기쿠찌-뭐, 일단은 그렇게 되도록 훈련을 시키는거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진짜 암소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땐 육식용 소를 이용하고, 거기에서 채취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 의빈대를 사용하죠. 소를 올려 태우고, 옆에서 칼집을 끼우는 것처럼 인공질을 갖다 댑니다. 예, 바로 이게 인공질입니다. 여기에 정액을 채취하는 관을 넣어 두었다가, 채취하는 것이죠. 그리고는 희석하여 동결시킵니다. 인공질에는 따뜻한 물을 넣어 온도를 조절합니다. 하루키-소 체질이랄까, 절차가 복잡하군요. 한번에 몇 cc정도 나옵니까? 기쿠찌-글쎄요... 많은 경우는 10cc정도입니다. 그것을 희석하여, 한번에 사용하는 양이 0.5cc쯤이죠. 그러니까 한번 사정에 백에서 이백번 정도는 써 먹을 수 있는 셈입니다. 그 의빈대=가짜 암소기가 놓여 있는 채정실 벽에는 이 기구의 사용법을 그림으로 풀어 놓은 종이가 붙어 있다. 그 그림을 보면, 과연 눈을 가늘게 뜬 수소가 뒷다리도 서서 기구위에 영차 하고 올라와서는, 앞다리로 양 허리를 껴안 듯 하고 학학 가쁜 숨을 내몰고 있다. 소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런 교미라고 훈련을 받았으므로 이렇다할 불만도 없이, 그 나름대로 즐기고 있을테지만, 곁에서 보고 있자니ㅡ 이거야 좀 잔인한 인생살이가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든다. 나는 종우라고 하면 매일매일 다른 암소와 정력적으로 사랑을 나누며 저녁이 되면 '오늘은 정말 열심히 일했군'하고 땀을 닦으며 우사로 돌아오는 비교적 우아한 모습을 상상했는데, 현실이란 역시 헤쳐 나가기 힘든 것이로군요. 종모우사 채정실에서 나와 잠시 걸어가면, 어딘가 모르게 침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낡은 목조 건물이 있다. 이것이 바로 종우를 모아두는 종모우사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튼튼한 철제 우리 안에 한 마리씩 모두 네 마리의 수소가, 묵묵히 예리한 눈을 번쩍이고 있다. 우리 앞에는 아저씨가 한 사람, 마치 자민당의 간사장 같은 분위기로 대기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타누마씨라는 종모우사의 관리인으로, 혼자서 수소들을 보살피고 있다. 종우는 성미도 고약하고, 체중도 천오백킬로그램정도는 되니까-암소는 대개 육백에서 칠백킬로그램-동물원의 맹수 사육 담당자처럼, 익숙한 사람이 보살피지 않으면 위험 부담이 큰 것이다. 과연 종우들은 그냥 보기에도 박력이 있다. 눈은 번쩍거리지, 몸집도 거대하지, 뿔도 나 있지, 이런 소가 돌진해 오면 도망치기도 전에 다리가 오그라들고 말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전부터 '카르멘'에 나오는 투우사 에스카릴로를 기분나쁜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렇게 굉장한 놈을 눈앞에 두고 보니, 일상적으로 이런 놈과 결투를 하는 에스카밀로씨가 존경스러워진다. 하루키-저, 이렇게 보고 있으려니 수소들은 인간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타누마-그야 물론 있습니ㄷ. 소를 다루다가도 내 쪽에 빈틈이 보이면 반드시 돌격해 옵니다. 언젠가는 이렇게 툭 쳤더니, 인간에게 질소냐 하고. 좌우지간 그런 집념 같은 걸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빈틈이 있으면, 눈과 눈을 마주하고 있지 않으면, 반드시 와-하고 돌격합니다. 눈과 눈이 마주쳐 있을땐 못하죠, 고삐에 묶여 있으니까. 코란 소의 약점이죠. 쳐들어 오겠구나 싶을 땐 이렇게 고삐를 바싹 잡아당기면, 몸이 저려서 돌진을 못합니다. 그렇다는 걸 소도 잘 알고 있으니까, 논과 눈이 마주쳐 있을땐 절대로 공격을 안하죠. 그렇게 훈련을 시켜 두니까. 하루키-그것 참, 상당한 신경전이로군요. 잠시 한눈을 팔아도 돌격해 온다니. 타누마-맞아요. 흰 눈이 붉게 충혈돼 있으면, 화가 났다는 증거입니다. 흥분하면 흰 눈이 충혈되는데, 그게 기분이 안 좋다는 증거죠. 그런데 지금처럼 눈이 이렇게 맑으면 상관없어요. 하지만 행여 툭 치기라도 하면 울컥 화를 냅니다. 성급하다고 할까, 성을 잘 내죠. 그러나 그 정도 성깔이 있지 않은 얌전한 소는 씨를 받아도 별로 안 좋아요. 그 정도 성깔이 있어야 좋은 종자입니다. 수소들끼리 같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어느 한쪽이 울 때까지 격투를 벌입니다. 어느 한쪽 소가 울면, 격투가 끝났다는 뜻이죠. 우는 쪽이 지는 겁니다. 하루키-그럼 무언의 격투를 벌이는 셈이로군요. 상당한데요. 타누마-씩씩거리며 싸우죠. 뿔로 상대의 옆구리니 고환이니하고 부드러운 곳을 찌릅니다. 집단으로 수용되어 있을 때는 어떻게 하면 암놈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하고 라이벌 의식이 생기니까요. 결국 센 놈이 리더가 됩니다. 그러니까 수소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격투 훈련을 하는 셈입니다. 하루키-타누마씨한테는 어떤 식으로 덮칩니까? 타누마-그런 경우엔 말이쿄, 코로 한번 탁 칩니다. 그래서 인간이 쓰러지면, 그러면 앞다리를 구부리고 덮칩니다. 그게 그들의 격투술인거죠. 쓰러진 상대를 뿔로 들어 올립니다. 내 경우에도 뿔에 걸려 딸려 갔었는데, 다행히 기둥 뒤로 가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전, 벌써 이십년이나 이 일을 하고 있는데, 두 번 당했죠. 늑골이 네 대 정도 부러졌습니다. 그래도 역시 이런 경험이 없으면, 이 일도 해 먹을 수가 없어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 대개가 당한 적이 있죠. 저는 이렇게 관리를 하며 소들을 보살피고 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언젠가는 인간을 이긴다라는 집념을 갖고 있어요, 놈들은. 하루키-어째서 뿔을 자르지 않는 겁니까? 뿔이 있으면 위험할텐데요. 타누마- 뿔이 위험한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뿔이 있어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뿔을 제거하지 않더라도 머리로 돌격하기는 똑같습니다. 쓰러뜨리고 난 다음에도 뿔이 있으면 뿔로 들어 올리지만, 뿔이 없으면 그대로 펑하고 밀어 닥치니까, 내장이 모조리 손상되지요. 몽땅 짓뭉개져 버립니다. 뿔이 있는 편이, 그 사이에 끼어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도 있고. 그리고 주사같은 걸 놓을 때도 뿔이 있는 편이 편리합니다. 뿔을 고정시킬 수 있으니까. 하루키-어떤 경우가 제일 위험합니까? 타누마-하루에 한번 밖으로 데리고 나가 운동을 시키는데요, 끌고 나갈 때 사고가 생기죠. 그리고 아침, 우리에 묶을 때도 사고가 생깁니다. 단, 소가 갑작스레 공격을 하는 건 아니예요. 분명하게 말해 인간이-그 징후를-눈치채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한 번이나 두 번 앞다리를 비비며 조용히 서 있다가 일시에 덤비니까요. 그런 걸 인간이 모르고 있으면 당하는 겁니다. 갑자기 덤비는 일은 절대로 없어요. 반드시 뒤로 물러납니다, 두세걸음. 하루키-그럴 땐 어떻게 피해야 하나요? 타누마-피한다고는 하지만 소의 동작이 빠르니까 아무리 빠른 사람이라도 오십미터 정도 안에 있으면 인간이 집니다. 백 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인간이 이기죠.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소의 비위를 잘 맞추어야죠. 하루키-흐음. 종우는 종우로서의 수명이 어느 정도입니까? 기쿠찌-뭐, 한 열 살 정도까지입니다. 몸이 점점 커지니까, 다리가 말이죠. 몸체에 비해서는 다리가 왜소하니까, 아무래도 다리에 고장이 생깁니다. 아까 보신 바대로 정액을 채취할ㄸ도 두 다리로 서 있지 않으면 안되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무리가 가죠. 열살이 넘으면 도저히 무립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에 저장할 수 있을 만큼 정액을 동결해 두죠. 도결 정액의 경우는 약체 질소를 사용합니다만, 그걸 쓰면 반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어요. 따라서 지금은 열 쌀까지도 살려둘 필요가 없습니다. 채취할 수 있을 때 양껏 채취해 둡니다. 피크가 다섯 살에서 일곱여덟살까지. 체형적으로 보면 장년이죠. 다섯 살이면 마침 몸이 다 큽니다. 종우의 경우엔 암소를 산출하는 성적이 좋지 못하면 안 되죠. 그 달의 우량에 따라 앞으로 사용할 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하루키-성적이 좋지 않으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겁니까? 타누마-성적이 좋지 못한 소 같으면, 다섯 살이건 여섯 살이건 처분해버립니다. 오래 살아도 대개 열살을 전후로 해서...(이 단계에서 처분된 소는 스테이크는 못되고, 햄버거나 아니면 고양이 먹이 등의 가공육이란 말로를 걷게 됩니다.) 하루키-주에 몇번 정도 사정하는데요? 기쿠찌-일주에 두 번 정도의 페이스로 합니다. 하긴 각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성장한 수소에게 주당 두 번이란 사정횟수가 어느 정도 부담이 되는지는 나는 전혀 짐작이 안 가지만-짐작이 갈 리가 없다.-애기를 듣고 있자니 종우의 세계도 꽤나 험난하다. 대부분의 수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쇠고기로 처분되는데, 그 경쟁에서 살아남은 엘리트 종우 후보도 조금만 성적이 나쁘면 담박에 처분되어 고양이 먹이나 된다고 하니. 그리하여 곤란한 운명을 극복한 초 엘리트에게마저, 열살이 되면 처분이라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T.S가프는 '인생이란 불치의 병이다'라고 단언하였는데, 그 말은 소의 인생에 해당되는 셈이다. 어째 '스팔타커스'같은 세계로군요. 착유우사 이제, 드디어 이 농장의 메인인 착유우사로 자리를 옮깁니다. 글자 그대로 이곳에는 암소가 죽 늘어서서 젖을 짜내고 있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사람들이 젖을 쥐고 쭉쭉 짜내는 것이 아니고, 착유작업은 일체 기계에 의해 진행된다. 소의 젖꼭지에 밀커라고 불리는, 꼭 청진기의 튜브같은 줄이 붙어 있어, 그것이 소의 젖을 빨아내듯 짜는 것이다. 짜내어진 우유는 머리위에 있는 파이프를 통해 냉장고로 운반되고, 거기에서 섭씨 사도로 냉각된다. 그 전과정이 시스템화 되어 있다. 한 마리 소에서 밀커가 일 회분의 젖을 짜내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오분 정도이다. 착유작업은 하루에 두 번, 오전 다섯시와 오후 다섯시에 행해진다. 씨받이 소의 우사를 떠나, 이곳 착유우사에 있는 암소들을 보니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온화하고 순종적으로 보인다. 암소들은 통로를 가운데에 두고, 서로 엉덩이를 마주하고 잠자코서서 젖을 짜낼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 중에는 젖을 다 짜내고, 아이구 힘들었다는 식으로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소도 있다. 우사안은 몹시 조용하다. 밀커가 작동되고 있는 소리가 나지막히 울려퍼지고 있을 ㅏㄸ름이다. 암소들은 이미 모든 걸 다 체념했다라는 양 온순하게 숨쉬고 있다. 발효된 농축 배합사료의 냄새가 싸하게 코를 찌른다. 하루키-한마리에서 대략 몇 cc정도 짜냅니까? 기쿠찌-지금은 평균 일회에 십이에서 십오킬로그램정도입니다. 하루에 대략 이십칠킬로그램을 짜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 마리당 평균해서 말이죠. 젖소의 경우엔 젊은 소보다는 몇번 출산ㄴ경험이 있는 소가 젖의 양이 많아요. 대충 네다섯번 출산을 한 소가 제일 양이 많지요. 간혹가다가 일곱여덟번 출산을 하고서야 젖의 양이 한층 불어나는 소도 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네다섯번이 최고로 많이 나옵니다. 하루키-젖소가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수명은 어느 정도입니까? 기쿠찌-젖소도-씨받이 소와 마찬가지로-열살정도입니다. 우리 목장에서 최고로 추산 경험이 많은 소가 열네다섯번 정도입니다. 일년에 한번씩 낳았다해도 열일곱여덟살은 된 셈이죠. 다만 평균적으로 하면, 경제 동물이니까 지금은 대여섯번 출산을 하여 절정기가 지나간 소는 도태시키고 있습니다. 경제동물이라고 해서 하늘이 내린 수명을 다 하는 일은 없지요.(여기에서 탈락된 암소도 역시 가공육 신세가 됩니다.) 하루키-알만 하군요. 경제 동물이란 아주 설득력 있는 말같습니다. 그런데 저, 암소는 젖꼭지가 네 개 있잖습니까? 새끼를 한 마리밖에 못낳는데 어째서이죠. 기쿠찌-그것도 역시 인간이 그렇게 개량한게 아닐까요? 더욱 많았으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네 개가 효율적이라든가, 그런 이유로 개량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도태를 거듭 반복하여 품종을 개량하는 것이죠. 하루키-그렇지만 젖이 많이 나오도록 도태시키다 보니 몸집만 커지고, 다리는 약해진 것 아닐까요? 기쿠찌-예, 그 문제가 가장 결점이라고 할까요, 제일 중요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부분입니다. 동물은 야생인 경우에는 자기발로 먹이를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묶어놓고 실내에서 사육하는 경우에도, 가령 발이나 발톱에 상처가 나면 식욕이 떨어지고 맙니다. 식욕이 없어지면 자연히 젖도 안 나오게 되죠. 이건 본능입니다. 밖에서 걸어다니다가 다리에 상처가 나면, 이미 먹이를 먹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약해지죠. 아무리 우리 안에서 먹이를 주어 사육을 해도, 다리를 다치면 유량이 적어집니다. 반대로 젖이 안 나와 이상하다 싶어 살펴보면, 다리에 상처가 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루키-암수는, 그 젖을 지금 짜내고 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기쿠찌-역시 인간이 말입니다. 필요에 따라 젖을 불게하는 것이니까, 소로서는 새끼를 기르는 것도 아니고 고통스럽죠. 젖이 불은 상태가. 그러니까 젖을 짜내고 나면 홀가분해지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서 짜주었으면하고 바라고 있지 않을까요. 이곳의 우사는 소를 이렇게 묶어 기르고 있습니다만, 방목을 하는 시스템 같으면 젖을 짤 시간이 되면 소들이 자진해서 다가옵니다. 젖을 짜내고 싶어서. 하루키-암소에게도 잘생긴 얼굴, 못생긴 얼굴이 있나요? 기쿠찌-있지요, 물론. 소다운 생김이란게 있어서 말입니다. 가령 이 암소는(가까이에 있는 모 여 배루 비슷한 암소를 가리키며), 별로 못생겼죠, 얼굴만 봐도. 애교는 있지만. 그리고 꼬리 같은 것도 이렇게 둥그스름하게 생겨 있으면... 육용이라면 몰라도, 젖소의 경우는 예각적인 편이 훨씬 좋습니다. 착유우사에 있는 젖소들은 철저한 관리체제하에 놓여 있다. 소들은 스탄천이라고 하는 위아래로 길죽한 목걸이에 ㅁ여 있다. 그 위에는 '카우 트레이너'라 불리는 톱날형의 금속이 매달려 있는데, 이 금속에는 백볼트의 전류가 흐르고 있어, 소가 등을 구부릴때마다 파팟하고 전류가 소의 몸체로 흐르게끔 되어 있다. 왜 그런 장치를 해 놓았는가 하면, 소라는 동물은 태어날 때부터 똥이나 오줌을 눌 때 등을 구부리는 버릇이 있어, 그렇게 되면 배설물이 도랑 속으로 제대로 떨어지지 않아 청솔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카우 트레이너로 등을 구부리지 않도록 소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오줌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누게 해달라고 위협하는 소는 물론 없다. 그리고 착유 도중에 있는 소들은, 뒷발에 '서브테일'이라는 고무고리 같은 것을 끼고 있는데, 이건 잘못해서 자기 발로 자기 젖꼭지를 밟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기구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 기구가 있다. 이런걸 보고 있으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소를 일컬어 '경제 동물'이라 부르는 감각을 정말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그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게=홀스타인이란 소는 유효하게 젖을 짜내는 목적(경제행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만약 그 목적 수행이 수월치 않게 되면, 처분되어 마땅한 동물이다. 그 점이 인간 샐러리맨과 약간 다른 점이다. 인간인 경우는 경제적 유효성이 다하여 정년을 맞아도, 퇴직금이라든가 연금을 받아, 그럭저럭 여생을 보낼 수 있다. 그렇지만 소에게는 여생이란 것이 도무지 없다. 약간 기운이 없다 싶으면잽싸게 콘비프든 고양이 먹이 신세다. 도회지에 사는 사람은 '녹음이 푸르른 목장'이란 목가적인 이미지를 품기 십상인데, 결국 목장도 역시 자본 투자=회수라는 경제원리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하나의 경제체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소들이란 그저 원료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그걸 '원료'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면, 원리 그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목장이라고 하는 '푸르른 경제적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 소들뿐만은 아니다. 그곳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곳은 역시 치열한 전쟁터인 것이다. 처분되고 있는 소를 보면서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역시 공평치 못한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낙농산업자체가 현재 몹시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기 ㄸ문이다. 요컨대 우유가 흘러넘쳐 이렇게 열심히 생산을 해내는데도 팔리지 않는 것이다. 현재 일본인이 소비하는 유제품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우유로 전부 충당할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소비의 역할을 수입제품이 점하고 있다니, 국산 유제품이 남아 돈다는 것은 쉽사리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식생활 개선이니 뭐니 하여 유제품 소비량은 극한에 달해 있는데, 무역 불균형에 관련하여 원가가 싼 외국제품은 물밀 듯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니, 낙농업계는 지금 형편으로는 그다지 낙관적인 화제가 없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쌀 농사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주도하에 생산의 조정이 이루어져, 중소 낙농기업은 자연히 도태되고 말 것이다. 일본에 있어서 낙농이란 이름의 경제 동물도 서서히 그 유효성을 잃어가고 있다해고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쌀 놀사를 능가하며 나라가 추진하던 낙농업을, 같은 나라가 막을 내리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양을 둘러싼 모험'이라는 소설을 쓸때에도 양을 기르는 현장을 취재했는데, 그때에도 일본의 농업정책이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약자를 도태시킴으로서 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라의 정책이 일관성 없이 우왕좌왕하니까, 그 흔들림에 쫓아갈 수 없는 약소농가가 여기저기에 있어, 그런 약자들의 자동탈락에 의해 결과적으로 농업의 합리화가 추진된다. 코이와이 농장의 경우는 낙농부가 적자를 내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양계업이나 산림과 관광 등의 다른 분야에서의 수입을 합쳐 결손을 메꿀 수 있지만, 쉰마리, 예순 마리의 소로 소규모 낙농업을 운영하고 있는 목장은 사태가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가벼운 기분으로 갔다온 셈치고는 여러 가지로 생각되는 점이 많았던 취재였다. 사상으로써의 양복을 만드는 사람들 꼼므 데 갸르손 하느님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마누라도,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일인데, 나는 복장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인간이다. 여름에는 티셔츠에 짧은 바지, 봄 가을에는 리바이스의 블루진에 스웨터나 트레이너, 겨울이 되면 그 위에다 가죽점퍼-샌프란시스코에서 무지 싼 가격에 샀다-나 J 프레스의 더플코트를 입는다. 신발은 나이키의 조깅화,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는 가뭄에 콩나듯밖에 착용하지 않으므로, 유행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브룩스 브라더스나 폴 스튜어트에서 산다. 구두는 갈색 리갈과 검정색 윙칩을 한 켤레씩 갖고 있는데, 이것들은 폐기처분된 원자력선처럼, 신발장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의복 및 신발류의 전모이다. '혹시'하고 당신은 생각하실지도 모르겠군요. 그 기본적 스타일은 1970년 이후 전혀 변화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정답! 바로 맞추셨습니다. 한 가지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약간의 변화는 있다. 콤버스 스니커는 나이키의 조깅화로 바뀌었고, VAN 재킷은 폴 스튜어트로 바뀌었고...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요즘 십오년 남짓, 영화관에서 보는 액션 영화의 예고편 같은 속도로 여러 패션 스타일이 생겨났다가는 사라져 갔지만, 나는 그 사이에 북쪽 나라의 설원에서 사는 순록처럼 진화와는 인연없이 살아온 것이다. 나의 1970년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차림새와 1986년의 그것 사이에는 라이처스 브라더스와 홀 앤 오츠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다. '어때서 그렇게 보수적인가?'하고 물으신다면 퍽 난감합니다. 나로서는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고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코 없기 ㄸ문이다. 정확한 상황 설명을 하자면 '뭐, 이 정도면 되겠지'하고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있는 것 뿐이지, 딱히 유행에 거스르며 살고 있는 건 아니다.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멋지게 차려 입으려면 꽤 신경도 써야 하니까-물론 돈도 든다-나는 그러기 보다는 운동을 하거나 식생활에 대한 궁리를 하거나 하는, 이른바 육체적인 면을 관리하는 쪽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성향문제이므로, 어느 쪽이 정당하다, 우월하다는 평가는 할 수 없다. 철학을 통하여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도 있거니와, 양복을 통하여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도 있고, 결국 그런건 남의 일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최첨단을 달리는 옷을 입지 않게 된 이유는, 해외 여행을 종종하게 된데 있다. 하긴 대도시의 하이 소사이어티에라도 간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외국의 평범한 동네에서 평범하게 다니는 사람들의 복장을 보면 일본에 비해 상당히 적당주의이다. 낡은 옷이거나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이라도 '그런 거에다 신경쓰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어'라는 식으로 모두가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는 광경을 보면, 그런 차림 또한 나름대로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신기한 일이지만-나는 외국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평소보다 더 형편 없는 차림을 하는 인간인데, 그래도 현지에 도착해보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꽤 멀쩡한 것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당황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과는 반대로 일본에 돌아오면 사방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반듯한 복장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또 한동안 안절부절 못한다. 그런 일을 몇 번 거듭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아무려면 어때'적 숲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만감은 없어진다. 그러나 그런 것 역시 개인적 성향의 문제이다. 천성이 멋부리기를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이치야 어찌 됐든 자연히 멋을 무리는 방향으로 몸이 기울어 질것이고, 나같은 인간은 유행이야 어찌 됐든 밤낮 '아무러면 어때'적 숲속에 기거하며, 비 진화란 달짝지근한 나무열매를 따 먹으며 나이를 먹어가게 될 것이다. 흐음. 장황하게 '비진화'측면을 얘기했으니까, 이쯤에서 '진화'의 측면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양복에 있어서 진화란 과연 무엇인가? 예증 '파리에 우리(꼼므 데 갸르손)회사가 있는데, 거기 사장은 프랑스 여성입니다. 그 나라는 프랑스 인이 아니면 회사의 사장이 될 수 없거든요. 그런데 그녀는 그때까지 전혀 다른 타입의 고급의상 계통으로 다녔던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반듯하게 구김살 하나 없는 정장을 하고, 매일 미용실에 드나드는 생활을 했죠. 그런데 그게 우리 회사 옷만 입게 되고부터는 역시 여러 가지로 감화를 받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지금까지 입었던 옷을 전부 버리고 말았답니다. 생활도 여러 면에서 그 스타일이 싹 바뀌고 말았죠. 우리 회사의 옷은 내츄럴합니다. 좀더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삶의 방식이 내츄럴하면, 자연히 짙은 화장도 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고, 괜스레 허세를 부리는 복장이나 집과도 인연이 멀어질테고, 그렇지 않습니까.' (꼼므 데 갸르손 홍보부 다케다씨) 딱히 꼼므 데 갸르손의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 다케다씨의 말씀은 나도 수긍이 간다. 1960년대 말기에 청춘기를 보내신 분이라면, '이야, 그렇다면 그거야 말로 녹색혁명 아니야, 피스'라고 흥분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피스. 그 옛날 '자연이 최고'라며 마하트마 간디가 쓰던 안경같은 안경을 끼고, 다 떨어진 탱크 톱에 실밥이 너덜너덜한 청바지 차림으로 철사줄이 들어가 있는 브래지어를 불태워 버렸던 여자들-물론 실제로 그런 광경을 목격한 것은 아니다-이 사라지고 난 지 벌써 십오년. 그녀들이 외치던 정신은 멋드러지게 승화되어 미나미 아오야마의 세련된 부띠끄에 장식되게 된 것이다. 뭐 그렇다고 내가 그런 현상을 비꼬거나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런 것이다'가 나의 기본적인 방침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크리에이터, 메뉴 팩튜어러)이 존재하고, 그것을 원하는 소비자층이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며, 나는 원칙적으로 모든 현상은 선이라고 믿고 있다. 선이란 표현이 지나치게 강렬하다면, 거기다 '내츄럴'이란 색채를 부가시키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즉 모든 현상을 긍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현상을 긍정 혹은 부정을 초월하여, 나 자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다. 꼼므 데 개르손을 나 자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무엇으로 파악해 보자. 그런 사연으로 나는 실제로 시부야의 세이부 백화점에 있는 꼼므 데 갸르손 옴므-남성용-부띠끄에서 여름용 재킷과 티셔츠를 사왔다. 티셔츠는 차치하고, 재킷 쪽은 내가 흔히 입는 종래의 복장과는 스타일이 몹시 다르다. 어깨에는 커다란 패드가 들어가 옆으로 비쭉 튀어나와 있고, 라벨에는 파이핑이 들어 있다. '이거야 무슨 곡마단의 원숭이 같잖은가'하고 생각했지만, 함꼐 간 마누라가 '자기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이상하진 않아요'라기에, 하긴 뭐 매사 경험이니까 사기로 한다. 상품 두가지에 육만엔하고... 싸지는 않다. 이런 취재에도 제법 경비가 든다. 부띠끄의 점원(남자)도 상당히 인상이 좋은 사나이로, 나처럼 명백하게 수준이 다른 인간이 매장안으로 들어와도 전혀 꺼리는 기색이 없이-사실은 꺼림직했을지도 모르겠으나-친절하게 상담에 응해주었다. 억지로 강요도 하지 않고, 차분하게 정직한 의견을 얘기해 주고... 요컨대 내츄럴하다. 아마 종업원 교육이 면밀하게 행해지고 있는 덕분이리라.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거짓없이 감탄했다. 다케다씨가 처음 취재-라기 보다는 면접, 초보적 수업-중에, '매장의 점선에 서 있는 사람이 상당히 중요하다. 매장의 종업원을 보고 옷을 입은 센스나 스타일을 판단라는 손님도 있으니까'란 의미의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보는 한 그 점에 대한 배려가 꽤 세심한 듯 하다. 그건 그렇고, 예의 재킷인데, '생활수첩'식으로 몇 번인가 착용해 가며 세세한 부분까지 테스트 해 보았더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겉보기에 디자인이 상당히 참신한 셈 치고는-뭐 대단히 참신한 것도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참신하다-실제로 입어보니까 몸에 착 달라붙는게 전혀 피곤하지가 않다. 그리고 이건 더 중요한 사한인지도 모르겠는데, 오래 입으면 입을수록 디자인의 신기함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다케다씨에게서 받은 수업 때문에 세뇌당한 탓도 아닌데, 과연 내츄럴한 경향을 인정하고 싶어진다. 소매에 팔을 꿰기까지는 꼼므 데의 옷은 꽤 멋을 부려 무리하게 입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입어보니 의외로 부담이 없는 옷이구나하고 감탄을 한다. 겨우 재킷 한벌가지고 모든 것을 추측한다는 건 무리겠지만, 이 재킷에 관한 한 어떤 류의 일관된 사상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상. 좀 전에 한 '녹색 혁명'얘기로 되돌아가자. 나는 1980년대 후반을 움직이고 있는 새로운 이념의 대부분은 1960년대 후반에 보여졌던 래디칼리즘, 카운터 칼추어에 그 뿌리를두고 있지 않은가하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연식을 지향하는 경향, 피지컬 피트네스, 환경음악, 좌익체제파의 해체, '순문학 중의'의 형해화, 사회 구조의 수직성과 수평성의 분화 등등. 그것들 모두의 원형은 1960년대 후반에 절실한 형태로 제출되었던 것이며, 1970년대에는 동결되거나, 수면 아래에서 암암리에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에 들어서자 얼마 안되어, 야들야들한 현실이란 진흙이 되어 의연히 표면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리고 그와 ㄸ를 같이하여, 우리들 60년대 세대가 그것을 상품화할 권한을 지닌 지위로 상승한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세상은 그런 '부드러운 래디칼리즘'적 상품이 충만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꼼므 데 갸르손의 옷 역시, 그 '부드러운 래디칼리즘'의 영역에 포함시켜도 무방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예의 꼼므 데 갸르손을 둘러싼 요시모터=하니야논쟁에도 그 나름의 필연성이 느껴진다. 즉 반핵과 꼼므 데 갸르손을 동일선상에 두고 논하는 일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논리로 하자면, 꼼므 데 갸르손이 우리들 자신의 연장이라면, 핵무기 역시 우리들 자신이 연장이다. 그러나 얘기를 조금 현실적인 수준으로 되돌리자. 꼼므 데 갸르손이라는 회사는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취재에 대단히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기로 유명하다. 따라서 내가 꼼므 데 갸르손 공장을 견학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매스컴 관계에 있는 분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야'라며 이구동성으로 발언했고, 사실 꼼므 데 갸르손 측도 '그건 촘 곤란합니다'라고 일단은 거절했던 것이다. 교섭은 '어째서 곤란한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추진되었다. '어째서 공장을 보여주면 안되는가?'하고 말이다. 홍보부에 있는 다케다씨가 창구의 상대역이었다. 다케다씨도 의문이 있었다. '왜 하필이면 꼼므 데 갸르손인가? 그것도 왜 공장인가? 꼼므 데 갸르손의 공장을 견학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상품이 모든 걸 말해 주지 않는가?' '어째서 의미가 없으면 안되는가? 꼼므 데 갸르손은 어떤 의미에선 유행의 최첨단에 있으며, 종교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상품의 공장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 외에 어떤 의미가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들에게 가장 행운이었던 것은, 이 다케다씨란 분이 상당히 인내심이 많고, 동시에 논리적인 여성이었단 점이었다. 우리들은 몇번이나 절충에 절충을 거듭하여, 우리들의 시각이 갖는 기본적인 스타일을 설명하고, 결코 뒤를 후벼파내거나, 우스꽝스러운 기사를 써서 조롱을 하려는 목적이 아님을 누누이 강조했다. 우리들은 무언가를 긍정하거나 혹은 부정하기 위하여 공장을 순례하고 있는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싶을 따름이다. 그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일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또는 독자가-해야 할 작업이다 라고. 그녀는 참을성 있게 그런 얘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러고는 마침내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우리들은 꼼므 데 갸르손의 봉제공장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도록 최종적인 허가를 받았던 것이다.(하긴 이 얘기는 꼼므 데 갸르손과 나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덧붙이고 싶은 얘긴데, 기사에 관한 제약은 두세가지 사소한 것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고, 체크도 없다. 나는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꼼므 데 갸르손이 최재를 극단적으로 꺼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케다씨의 설명을 빌리면, 그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에 대해 쓴 기사를 읽고 '상처를 입었디' 때문이다. 나는 패션에 관계된 잡지는 거의 읽지 않는 인간이니까, 어찌된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주위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꼼므 데 갸르손은 일부 인사들로부터 꽤나 반발을 사고 있는 모양이다. 과연 내가 보기에도 어쩐지 좀 건방진 듯 하고,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자신의 일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는 듯 하니까-나의 인간적 특성과 흡사하다-주변에는 몹시 화가 치미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상처를 입었다는 표현은 꽤 흥미롭다. 개인이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개인들의 집합체인 회사라는 시스템이 과연 정신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면에서 가와쿠보 레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훌륭한 디자이너를 정점으로 하여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꼼므 데 갸르손이란 집합체의 '부드러우면서도 내츄럴한 자폐성'의 그림자를 보는데, 이런 식의 발언도 어쩌면 그들=그녀들에게 상처를 줄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용서하세요. 우선 간단한 수업. 꼼므 데 갸르손이란 기업의 구조를 설명하겠습니다. #1 디자인 이것은 가와쿠보 레이씨가 혼자서 전부 담당한다. 벌집으로 하자면 여왕봉. 원 앤드 온니부문이다. #2 치프 이 사람이 가와쿠보씨의 직속으로 생산부를 통괄하고 있다. 이 사람의 역할은 간단하게 말해 가와쿠보씨가 그린 디자인을 현실적 상품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매니지먼트의 심장부라 하겠다. 치프 밑에 패터너와 생산 관리 부문이 있다. #3 패터너 가와쿠보씨의 그림을 보고, 실제로 그 옷을 만들어 보는 사람이다. 전부 스물 다섯명 정도. 상상으로 그린 그림으로 실물을 만드는 셈이니까, 상당한 능력이 요구된다. 물론 만들어 놓은 실물은 가와쿠보씨가 체크한다. 그 작업을 거쳐 패턴(부품)수를 결정하고, 본을 만든다. #4 생산 관리 패터너가 쓴 봉제 지시에 따라, 감의 길이와 부품을 어떻게 잘라낼 것인가를 결정하고, 자크의 수, 단추 수, 심이 양 등을 검토하고, 이 정도 재료가 마련되면 확실하게 그 옷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까지 세팅을 한다. 그 세트를 공장으로 가지고 간다. 그리고 바느질이 끝난 제품을 검색한다. #5 공장 드디어 이 취재의 본령인 공장으로 들어갈 텐데, 먼저 양해를 구해 두어야 할 것은, '꼼므 데 갸르손 공장'이라는 특정의 공장이 '마쯔시타 공장'이나 '하우스 식품 공장'같은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신예의 하이테크테크놀로지컬한 공장에서, 삼백오십명쯤 되는 여공들이 가와쿠보 레이씨가 디자인한 유니폼을 입고... 상황이 그렇다면 무척 재미있을텐데, 그런 일은 없다. 꼼므 데 갸르손은 디자인 제작과 영업만을 하는 회사이고, 실제로 봉제는 외부의 봉제 공장으로 '발주'된다. 공장의 규모는 저마다 각각 달라, 대규모 공장인 경우에는 전부 기계화 되어 있는 반면, 소규모인 곳은 아버지, 어머니와 아르바이트 아줌마로 구성된 가내 공업적인 데까지 있다. 공장에 따라서는 꼼므 데 갸르손 이외 메이커의 제품도 동시에 만들고 있는 곳도 있고-대규모 공장 중에 특히 많다-꼼므 데 갸르손의 상품밖에 만들지 않는 곳도 있다(소규모 공장중에 많다) 꼼므 데 갸르손에 관련된 공장 수는 약 이십여군데라고 하는데, 이 숫자는 시즌에 따라 변화한다. 예를 들면 올(1986년)추동 시즌에 꼼므 데 갸르손은 재킷에 주력하고 있으므로, 재킷 계통이 능숙한 공장에 발주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한국이나 대만 등 외국 공장으로 발주되는 일은 없다. 그 이유는, #1 한 디자인 당 상품 수가 극히 적어 외국으로 발주하면 메리트가 없다. #2봉제 지시와 체크가 꼼꼼하므로 공장이 가까이에 없으면 곤란하다. 는 것이다. 그 업계에서 맴도는 매스컴 관계자는 '꼼므 데 갸르손의 옷은 대부분 한국제죠'라고 말한 일이 있는데, 그건 잘못이다. 그 밖의 '꼼므 데 갸르손 정보'에는 이런 것도 있다. #1 '꼼므 데 갸르손의 옷은 어쩌구 저쩌구 말이 많은데 사실은 코토구에 있는 영세 공장에서 만든다구.' #2'그런 아무 특징도 없는 옷에다 '꼼므 데 갸르손'이라는 브랜드를 갖다 붙이는 것만으로도 비싼 가격을 매긴다니까.' 꼼므 데 갸르손의 다케다씨가 우리들에 대해 처음에는 상당히 경계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도, 어쩌면 그런 비난을 염두에 둔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말 없는 말, 있는 소문, 없는 소문을 가지가지로 들어야 하는 것이 유명인, 아니 '유명 집합체'의 숙명이다. 그래서 결론부터 얘기하면, 소문 #1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안내된 공장이 바로 코토구의 모처에 있는 자그마한 공장이었다. 소문 #2에 대해서는 실제로 현장에서 원가를 계산해 본건 아니니까 그 소문이 타당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뭐라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대충 느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겠다. 그 문제는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여러분들께서 확실히 판단해 주세요. 미야시타(가명)씨의 공장은 코토구 모처에 있다. 가명이나 모처라고 쓰는 것은 곰므 데 갸르손 측으로부터 정확하게 쓰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업계도 상당히 경쟁이 치열해서'라고 한다. 요컨대 봉제공을 스카웃해가거나,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일케지. 공장이라고는 하지만, 분명하게 말해서 변두리에 있는 보통 집이다. 입구도 비좁고,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 바로 옆에 경사가 가파른 계단이 있다. 문에는 그저 '미야시타'라고 씌어 있는 문패가 걸려 있을 뿐이라서, 여기가 그 유명한 꼼므 데 갸르손의 옷을 만드는 공장이라고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마치 '나폴레온 솔로'에 등장하는 UNCLE의 비밀 본부 같은 느낌이다. 본서를 엮기 위해 취재한 공장 중에서 제일 작은 공장이다. 일층은 미야시타 씨가 사는 집이고, 이층이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8조 방 한칸과 6조방이 L자형으로 이어져 있는 정도의 넓이에, 그 나머지는 베란다이다. 베란다에는 토마토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베란다 너머로는 옆집 창문이 보인다. 어딘가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지만, 내가 옛날에 한동안 기식했건 분쿄구의 처가집 분위기와 조금은 닮은 구석이 있다. 방 한쪽 구석에는 미야시타씨가 감을 본대로 잘라내는 재단용 작업대가 있고, 그 옆에 미야시타씨의 부인과 아르바이트 아줌마 A씨가 감에 스팀 다리미질을 하는 작업대가 있다. 베란다에 면해 있는 두 대의 미싱 앞에는 미야시타씨의 며느리와 아르바이트 아줌마 B씨가 앉아 열심히 재단된 감을 가지고 재봉질을 하고 있다. 차그르르하는 미싱소리와, 슛슛하는 스팀 다리미의 소리가 뒤섞여, 제법 화목한 분위기이다. 어쩐지 1950년대로 '백 투더 퓨처'한 기분이 든다. 이런 공장은 정말 정겹고 좋군요. 누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공장이란, 지금 같은 시대에는 흔치 않는 것이다. 하루키-여기에 있는 사람이 종업원의 전부입니까? 마야시타-아니오, 마무리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죠. 여기에서는 하지 않습니다만. 그리고 단추구멍, 그 작업은 기계로 하니까 전문 단추구멍집에 가서... 그러니까 여기에서 만든 옷에는 단추가 아직 붙어 있지 않아요. 그러고는 프레스 다리미질. 이렇게 커다란 기계에 끼워 놓고 합니다. 프레스도 꼼므 데 갸르손의 경우는 아주 매끈하게 누르는 경우도 있고, 일부어 주름을 만드는 프레스도 있고, 여러 가지로 다양합니다. 하루키-지금, 이 상품은 여성용 재킷인데, 미야시타씨는 줄곧 이런 옷을 만드셨습ㄴ? 미야시타-아닙니다. 전 이전에는 신사복을 만들었죠. 신사복으로는 도저히 경영이 부진하여, 부인복으로 바꾼겁ㄴ. 전후에는 한때 신사복 경기가 무척 좋았거든요. 단ㄴㄴ, 신사복은 그다지 회전이 빠르지 않잖습니까. 게다가 경쟁은 심하고-요컨대 누구라도 바느질은 할 수 있거든요. 재봉사라면. 그러니까 재봉사가 모두들 신사복에 집중되어서, 이윤이 적어지는 겁니다. 대만이나 한국으로 발주를 한다고 하니 우리들로서는 경영이 곤란하게 되고 그래서 부인복으로 전환한 것이죠. 하루키-어떻습니까, 꼼므 데 갸르손이 일은 재미있습니까? 미야시타-후후후. 나는 말이죠, 재미있다고나 할까, 매일 매일 이렇게, 요컨대 일종의 발견이죠. 그야 물론 나는 디자이너가 발견한 것을 나중에 뒤따라 갈 뿐이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거기까지 도달하는 그 자체가 발견이니까 말입니다. 거기에 일의 즐거움이 있는 거 아니겠습ㄴ. 하루키- 옷의 본을 받아들고 죽 훑어 본 다음, '도대체 이런 기묘한 것을 만들어서 팔릴까?'하는 생각을 하시는 일도 있습니까? 미야시카-하긴, 우리들도 재봉질을 하면서 이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하나, 기발한데 하고 감탄하는 일이 있습니다만, 모델이 입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터무니 없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웃음) 그러니까 사전에 한번 쇼를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으음 그럴 듯 하군 하고 수긍이 하교. 디자이너는 역시 그 나름대로 머리가 잘 돌아간다 싶기도 하고(웃음). 하루키-기발하다고 하면 꽤 기발한 상품이 있었죠, 지금까지? 미야시타-음, 최근에는 그렇지만도 않습니다만, 한때는 참 엉뚱한 상품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가령 등에 분마기를 업은 것 같은 제품도 있었지요. 다케다-(옆에서 설명) 그 무렵에는 가와쿠보씨가 마침, 입체감이 있는 옷을 만들고 싶다고 하여, 즉 옷을 입었을 때 울퉁 불퉁하게 튀어나오고 들어가고 한 것이 눈에 보이도록 만들었던 시기입니다. 그것도 그렇고, 옷의 속면 일부에 감을 덧대어, 언뜻 보기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런 제품들이 있었으니까, 그 시절에는 정말 굉장했을 겁니다. 미야시타-그런데 그런 옷들은 처음 만들기 시작할 때는 신경을 써서 작업을 하니까 일이 그러대로 잘 진행되지만, 그러다가 차례를 대략 파악한 후, 대충 이렇게 하면 되겠지 싶어 만든 것이 반쯤 엉망이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할 거시 반대로 밖으로 튀어나온다든가 말이죠. 괴수의 그 있잖아요, 산을 등에 업고 있는거. 그런 식으로 되고 말아... 하루키-전혀 일한 보람이 없었겠군요. 다케다-아, 그런 얘기는 쓰지 말아요(웃음).(쓰고 말았습니다, 죄송.) 미야시타씨는 전후 줄기차게 양복을 만드는 양복장이로 일관해온 사람답게 사뭇 싹싹한 아저씨로, 하는 얘기도 꽤 재미있다. 꼼므 데 갸르손이 말쑥한 분위기와는 전혀 이미지가 맞지 않는 분이긴 하지만, 일하는게 더없이 즐겁단다. 그것도 새로운 것이나 복잡한 제품을 만들면 신이 나서 견딜 수 없다는 타입의 사람이다. 그래서 곁에서 보고 있자니, '으음, 이런 삶이 꼼므 데 갸르손을 뒷받침하고 있구나'하고 수긍이 가는 구성이 있다. 거꾸로 말하면, 이런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디자이너의 브랜드에 있어서는 중요한 일의 하나일 것이다. 공장은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쉬게끔 되어 있지만, 미야시타씨는 노는 날에는 혼자서 다음주 일주일 분의 일을 챙기며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준비해 둔다고 한다. 이 구석에서 저 구석까지 치밀하게 해 두지 않으면 안심이 안되는 성격의 사람인 듯, 과연 공장 일의 흐름을 보아도 스므스하고, 적은 인원으로 유효하게 일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전해져 온다. 하루키-지금 만들고 있는 이 재킷은 몇 조각 정도로 본이 나우어져 있나요? 미야시타-이건 스물 세장. 하루키-상당히 많군요. 미야시타-보통 제품의 배 정도 됩니다. 보통 옷 같으면... 대개 열장 이하죠.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들어보면, 전신이 있어야겠죠. 그 다음은 등판, 소매가 둘, 소맷부리, 그리고 깃, 나머지는 주머니 본 정도이니까요. 일곱여덟장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재단을 할 때도, 이렇게 겹쳐놓고 한번에 좌우를 뜰 수 있죠, 보통은. 하지만 꼼므 데 갸르손은 전부 늘어 놓고, 한 장씩 뜨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간이 무척 걸리죠. 하지만 뭐 자잔한거.. 익숙하니까요, 대개. 하루키-저는 잘 몰라서 그럽니다만, 재단은 가위로 합니까, 싹둑싹둑하고? 미야시타-아닙니다. 지금은 재단기라는 기계를 사용하고 있죠. 이겁니다.-라며 꺼내온다. 대형 주서 정도 크기의 기계이다-이걸로 감을 사이에 끼워 자릅니다. 안감 같은건 말입니다, 이런 나이프로. 우리들은 나이프라 불러요. 이것으로 자릅니다. 바로 이거예요-라고 말하며 녹색 천으로 둘둘 만 소도 세트를 꺼낸다-옛날에는 모두 이걸로 잘랐죠. 음 그러니까, 1950년대까지는 이걸로 잘랐습니다. 1960년대 경부터 기계로 자르게 되었어요. 하루키-그럼, 기계화 된 부분도 있다는 얘기군요. 1960년이라면 동경 올림픽이 있던 이듬해... 미야시타-그리고 옷깃을 뒤집어 놓고 심과 뒷길을 잇거나 할 때도, 지금은 접착제를 사용하니까 이런 식입니다만, 옛날에는 전부 손으로 누볐습니다. 그것도 기계가 들어온 건 역시 1960년대 무렵부터죠. 하루키-다리미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있는 겁니까? 미야시타-다리미는 이렇게 재봉한 것을, 그 감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재봉을 한 후 다림질을 하죠. 미싱질을 한번 하면 그 자리에 바로 다림질을 하여, 감이 제자리를 잡도록 하는 겁니다. 곧바로 다림질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다림질하기 어려워지니까요. 필요한 부분까지 재봉을 하고, 그리고 필요한 자리가 되면 다림질하고, 그런 작업이 거듭 반복되며 일이 진행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큰 공장 같으면, 일이 흘러가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만약 주머니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주머니를 만들고, 그 일이 끝나면 그 다음 단계로 흐르고, 그 다음 단계에 가면 또 다른 일만 하고, 그러니까 결국 하루 종일 똑같은 일만 하는 셈입니다. 하루키-그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주머니에 뚜껑을 씌우는 일 뿐이라면, 여기에서는 한사람이 몇가지 공정을 담당하고 있습니까? 미야시카-글쎄요. 일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가는 다시 돌아오곤 하죠.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큰 공장 같으면, 그건 솔직하게 말씀드려 바보라도 할 수 있어요. 한가지 일만 하면 되니까. 주머니 뚜껑이면 주머니 뚜껑하고, 그만큼 한가지 일에만 숙달되면 그만이죠. 그렇지만 우리 공장의 경우에는 주머니만 잔뜩 만들어가지고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거든요(웃음). 그러니까 이런 얘기입니다. 본이 스물 몇 조각이면, 스물 몇번 왔다가는 되돌아 가는 셈이죠. 하루의 생산량 말씀입니까? 음 어려운 질문이군요. 간단한 제품이면 상당량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니까, 두벌 정도 만들면 우량한 편이 아닐까요. 이런 일에는 손이 많이 가니까 말입니다. 한 사람당 두벌에 다섯명이 열벌... 그 정도면 좋겠습니다만, 그렇게까지 못만들어요. 가능한 한 두버러정도는 만들고 싶은데... 하루키-저, 이렇게 '이런 제ㅜ을 만들어 주십사'하고 본과 봉제 지시서가 내려오면, 그걸 보고 이 상품은 팔리겠다 혹은 안 팔리겠다 하는 걸 알 수 있습니까? 미야시타-그건 상상을 해 봅니다, 나는. 그러나 실제로 어떻게 팔리는 지는 회사의 관건이니까 몰라요. 다만, 우리들이 일을 하면서 이 상품은 괜찮겠다 싶은게 영업면에서 벌수가 저희들에게로 떨어지면 아아 다행이다, 하고... 하루키-벌수가 떨어지다니, 무슨 뜻이죠? 다케다-(옆에서 설명) 한 공장에 아마 그 공장에 주문을 하겠지 하고 생각되는 본을 가지고 부탁을 드립니다. 전시회나 쇼를 열기 전에. 그래서 전시회나 그런 행사에서 손님으로부터 주문이 들어와, 그 주문에 따라 생산량을 결정하는데, 그 숫자가 미야시타씨에게도 전달되거든요. 그때 '아, 이 형은 스무벌 떨어졌다. 이건 서른 벌이 떨어졌다'하고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미야시타-뭐, 매사가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지만 말예요. 회사의 사장님 자신도 어느 정도 팔릴지는 모를겁니다. 게다가 팔리지는 않더라도 만들고 싶은 것도 있고, 우리들도 '아, 좀 유별난 상품이군, 기대가 돼'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있고 말이죠. 그러니까 꼼므 데 갸르손도 지금의 그 체제로 좋잖습니까? 나같은 경우도, 아니 우리 공장이 종업원 모두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식으로 완성될까 하는 흥미, 그런 호기심이 작업의 추진력 아니겠습니까? 하루키-가족분들은 꼼므 데 갸르손이 옷을 입습니까? 미야시타-우리 집에는 딸이 하나 있는데 꼼므 데 갸르손을 입을 수 있을 만큼 스타일이 좋지 않아서(웃음). 우리 집 바로 옆에 꼼므 데 갸르손의 열렬한 팬이라는 아가씨가 한사람 있긴 하지만. 그리고 여행을 가잖습니까, 무슨 무슨 투어 여행하고. 그러면 거기서 자기 소개를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해요. 그래서 나는 꼼므 데 갸르손의 옷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얘기하면, 역시 젊은 여자들이... 왁자지껄 소란을 피우며 좋아들 하죠. 그러면 나도 그만 기분이 좋아져서, 같이 술을 마시기도 하고.(이 부분은 꼼므 데 갸르손의 내츄럴한 사상으로부터 얼마간 일탈되어 있는 것 같은데, 미야시타씨도 매일매일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여행을 할 때만이라도 눈감아 주십시오) 하루키-마음에 드는 옷이 완성되면, 옷 아랫단 어딘가에 이름을 슬쩍 새겨둔다거나 하는 일 없습니까? 미야시타-하하하. 사장이 화를 냅니다, 그랬다가는. 그러니까 그 신사복 같은 경우는 심에다 말이죠, 이름을 쓰는 사삼이 있어요. 심에다 쓰면 제품이 다 완성되서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무도 눈치를 못채죠. 옛날에는 말이죠. 그런 은밀한 자기만족을 즐기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졌어요. 이전에는 장인 근성이랄까, 그런게 있었죠. 하루키-이 핀치는 어디에 씁니까? 무엇을 말리는데? 미야시타-그건 관계없습니다. 우리집 빨래로 비가 내려서 빨래를 집안에 거두어 들인 것 뿐.(미야시타씨의 부인을 비롯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아줌마들 모두 킥킥 웃음) 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주제 넘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는 도매상이 요컨대 디자이너를 고용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무슨 요일에 우리 회사에서라든가 하고 고문으로서 고용했죠. 그렇게 하면 그 디자이너가 돌아다니면서... 디자이너라고 해봤자, 그저 본을 상대할 뿐, 별다른 일은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그저 돌아다니기만 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가령 꼼므 데 갸르손 말이죠. 가와쿠보 레이씨란 디자이너가, 디자이너 자신이 스스로 해 나가는 시대란 것입니다. 디자이너는 지금까지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있었는데, 지금은그게 아니고 스스로 모든 걸 해치우는,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죠. 그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그 사람 주변에 모여 드는 겁니다. 이렇게 하여 꼼므 데 갸르손이 재킷에 미야시타씨의 서명은 들어가 있지 않지만, 그런 일에는 하등 관계 없이, 미야시타씨는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꼼므 데 갸르손의 옷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런 것을 보고 있자니, 나도 '소중하게 이 재킷을 입어야지'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꼼므 데 갸르손'이란 브랜드의 부가가치가 가격에 반영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서입니다만, 다케다씨에게 물어보았더니 '우리 회사 같은 생산량으로,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공정을 거치자면 도저히 단가를 높이 책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원단도 오리지날이고 코스트도 높아요. 그러니까 자연히 그정도 가격이 됩니다'라고 한다. 적어도 재킷에 관하여 말한다면, 필시 말씀 그대로라고 나도 생각한다. 다른 품목에 대해서는 내 눈으로 못 보았으니 뭐라 얘기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꼼므 데 갸르손'이 레스토랑을 겸하여 경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꼼므 데 갸르손이 경영 자세는 전체적으로 성실하지 않은가 싶은 기분이 든다. 양복집에서 경영하는 레스토랑 따위는 바보같이 멋만 잔뜩 부리고, 대개의 가게가 맛도 없는 것을 팔고 있다. 그런 무의미한 다양화를 꾀하지 않는 것은, 뭐가 어찌 됐든 하나의 식견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업계에 이중 구조란 존재합니다'라고 다케다씨는 말한다. 요컨대 독자적으로 디자인한 것을 한벌 한벌 완성시키는, 소위 '디자이너 브랜드'제품과는 별도로, 평범한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제품에 브랜드를 붙여 팔면서 그 쪽에서 돈을 버는 수법이다. 결국 어느 선까지 그런 행위를 용납할까, 아니면 전혀 용납하지 않고 브랜드를 고집할까하는 갤랫길이 경영자의 자세와 프라이드에 의해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상품을 보고 그걸 분별한다는 건 몹시 힘든 작업이다. 하이테크 워드 테크닉스 CD공장 이 앞장에 쓴 꼼므 데 갸르손의 공장도 취재하기에 팍 힘든 생대였는데, 이번의 CD(콤팩트 디스크) 공장의 취재에 대한 규제는 그보다 두세배는 엄격했다. 설마 그렇게 엄격하리라고는 예성치 못했으므로, 가벼운 기분으로 '자, 이번에는 하이테크 관계 공장에 가 볼까?'하고, 아는 사람을 통하여 소니와 빅터의 공장에 취재를 신청하였더니, 양 쪽으로부터 모두 깨끗하게 거절을 당했다. 두 말할 여지도 없는 문전박대다. 견학? 농담이겠죠, 우리들은 기업의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곳엘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가 어영부영 기어들어 오다니 될 말입니까란 험상궂은 분위기가 내 쪽에까지 전해져 온다. 하긴 듣고 보니 그말에도 일리는 있다. 내 쪽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음... 공장을 한번 보고 싶은걸'하고 문득 생각이 떠올라, 훌쩍 부담없는 기분으로 견학을 하러 가기가 예사이지만, 공장에 계시는 분들 쪽에서 보면 목구멍을 걸고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괴상한 외부인사가 들어와 얼쩡얼쩡거린다면 심히 불쾌할 것이다. 정말 오기라도 했다가는 바쁜 중에도 안내를 하며 서명까지 해야하고, 게다가 망측한 기사는 쓰지 않을까 하고 신경도 써야만 한다(특히 나처럼 비업계, 비저널리스트는 무슨 소리를 쓸지 알 수 없으니까 경원시한다.) 실제로 견학을 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이것 참 미안하게 됐는 걸'하고 생각하는 일도 종종 있고, 본의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상대방이 썩 달가와 하지 않을 질문을 일부러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변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취재라고 하는 것은 모름지기 그런 것이라서, 상대방에게 훼방을 놓거나 폐를 끼치거나 하지 않으면, 상황의 진면목은 좀체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네, 이번에는 저쩍으로 가주세요, 이건 이런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까, 다음은 이쪽... 처럼 국민학교의 공장 견학 같은 견학으로선 기사 따위 도저히 쓸 수 없다. 그러니까 잘 모르는 곳은 속속들이 몇번이고 묻고, 보고 싶은 곳은 시간을 할애하여 충분하고도 세세하게 본다. 상대방이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까지도 유도하여 말하게 한다. 바닥에 묻어 있는 먼지까지 손으로 쓱 만져본다. 정말이지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따라서 CD공장으로부터 잇따라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한들, 불평을 털어놓을 처지는 못된다. 그러나 그런 사정은 잘 알겠지만 그래도 CD공장이 보고 싶다. '안됩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보고 싶은 마음이 들끓는게 바로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만큼이나 공장 견학을 계속하면서도, 취재 그 자체에 대해 전적으로 '노'라는 의사를 표명한 기업은 CD공장이 처음이다. 그런 사실 한가지 만으로도 CD공장을 견학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CD공장은 왜 그렇게 견학이나 취재를 꺼려할까? 우선 첫째 이유는 쓰레기와 먼지가 CD생산의 천적이기 ㄸ문이다. CD는 극단적인 정밀함으로 미세하게 만들어지니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먼지나 이물이 혼합되더라도 불량품이 생기고, 그 탓에 생산 라인이 24시간 동안 올스톱 되는 일도 있다. 따라서 생산 공정의 중핵에는 절대 사람을 들여 보내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두 번ㅉ 이유는, CD생산이 현재 수요를 따라가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바쁜 것이다. 하긴 하루 24시간 풀 가동을 하는데, 그래도 아직 모자란다고 하니, 견학하는 사람에게 신경을 쓸 틈이 없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기업 비밀 유지. 말 할 필요도 없이 각 기업은 자사의 최첨단 기술을 CD생산에 결집시키고 있는 터라, 그 정보가 타사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나 같은 엉터리가 보았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가령 내가 어떤 기계를 보고는 '이런 기계가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하는것만으로, 타사의 엔지니어는 그것이 어떤 구조의 기계이고, 어느 정도의 효율성을 지니고 있는지 순간에 이해할 수 있고, 단시간에 동일한 성능을 지닌 기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사가 독자적으로 반년이란 시간에 걸쳐 개발한 기계를 흘끗 보기만 해도, B사는 두 주일만에 그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그렇게 되면 A사가 반년 동안에 쏟아 넣은 연구비는 공수레가 되고 말 것이며, 그래가지고서야 A사가 화가 치밀게 뻔한 노릇이다. 뭐 그만큼 각사의 기술력이 엇비슷하고 경쟁원리가 제 기능을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겠으나, 나 같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이다. 우리들 일반 시민이 모르는 장소에서, 밤새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거야 말로 전쟁이다. 지금껏 착실하게 쌓아온 전자 메이커도, 이 하이테크워드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실수를 하면 그 존재가 위태롭게 될 정도의 냉정한 전환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그런 곳에 아무런 이득도 없는 견학자를 받아들일 여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들이 마쯔시타 전기=테크닉스CD공장을 견학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마쯔시타만 오케이를 하였는가, 솔직히 말해 그 이유를 나도 모른다. 타이밍에 좋았던 것일게다. 이번에 중개 역할을 맡아주신 오디오 평론가 F씨도 '어떻게 허가가 떨어졌는지 전혀 모르겠다. 불가사의하다'고 하니까, 이거야말로 행운이랄밖에. 그렇다고 하나에서 열까지 얘기가 순조롭게 풀려나간 것은 아니다. 일단 허가는 났지만, 계속해서 두 번이나 약속이 취소되었고, 이러쿵 저러쿵하여 간신히 공장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마쯔시타가 우리들의 견학을 허가해 준 이유를 타이밍이 좋았다는 것 외에 구태여 찾아 본다면, 그것은 CD소프트 생산경쟁에서 한 발 물러선 지점에 서 있는 자의 여유인지도 모르겠다. 즉 빅터, 손;, 도시바, 콜롬비아 등의 회사가 독자적인 음악소스를 가지고 풀가동하고 있는데 비해, 마쯔시타는 자사의 음악 소스 없이 해외이 중규모 레코드회사-예를 들면 테크라-로부터의 수주 생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은 매월 생산량의 차이에도 현격하게 드러난다. 1986년 봄 자료에 의하면, #1 CBS 소니-백육십만 #2 일본 콜롬비아-백오십만 #3일본 빅터-백십만 이라는 월 생산량에 비해 마쯔시타는 이십만매에 불과하다. 물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계니까 지금은 그 숫자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쯔시타 소프트의 생산 라인 개발이 타사에 비해 비교적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내가 보기에는, 마쯔시타는 CD는 일단 과도적 산물로 취급하여, '연구'를 위하여 싹 정복해둔 뒤, 당장 치러야 하는 생산 경쟁에는 참가하지 않는 대신, 힘을 축적하여 다음 단계를 노리며 숙적 소니를 쳐부셔야겠다는 자세가 확실하게 엿보인다. 핵심을 건드리는 듯한데, 그런 CD소프트를 응용한 하이 테크놀로지(예를 들면 광학식 컴퓨터 메모리, 인풋이 가능한 CD)를 지향하기 때문에, 오히려 CD의 규격 통일 문제에 미련없이 필립스=소니의 진영하에 조용히 들어가, 손실이 큰 정면 전쟁을 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째 거대한 오셀로 게임같군요. 지금까지의 내용을 읽으신 독자께선 '여러가지로 골치아픈 얘기는 대충 그만해 두고, CD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얘기하지 않으려나'하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테죠. 그래서 일단 CD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둡니다만, 이건 완전히 들은 풍월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세부적인 것까지는 잘 몰라요. 얘기가 제대로 맞는지 어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문외한의 눈으로 본 전문적 지식'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CD라는 것은, 이런 모양을 한 것으로, 여기에 약 칠십분 정도 길이의 음악이 녹음되어 있으며, 그 정보를 CD플레이어의 레이저 빔이 읽어 나가며 음성화 하는 것이다. 종래의 레코드(블랙 디스크)와 가장 다른 점은 BD가 레코드의 홈이라는 눈을 조아리고 보면 실제로 보이는 물리적 신호를 바늘로 더듬으며 일거나가던 것에 반해, CD는 2진법의 디지털 신호를 기호로써 일거나간다는데 있다. 간단히 말해서 '01101110...'이라는 숫자의 나열을 조합하면, 그것이 음악이 되어 흘러나오는 셈이다. 그런 것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사람은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안 믿어도 CD를 CD플레이어에 집어 넣고 스위치를 누르면 아무런 불편도 없이 어김없이 소리가 나온다. 느닷없이 하늘에서 우주인이 내려와 '그거 아주 듣기 좋은 소린데, 어떤 원리로 만든 것인다?'라고 혹 질문이라도 하면-음, 그러니까, 이것은 그...-하고 우물쭈물 해야 하는게 좀 부끄러울 뿐, 이렇다하게 난처한 일은 하나도 없다. 요컨대 토스터 류와는 달리 제품의 원리를 백퍼센트 알고 있어 고장이 났을 때 제손으로 수리를 할 수 있는 종류의 물건이 결단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CD가 BD에 비해 어떤 장점을 갖고 있는가? 먼저 소리가 좋다. 정보가 정확하고 게다가 그 수집에 실수가 없으니까, 지금까지 들을 수 없었던 소리까지 확실하게 들린다. 바늘 때문에 생기는 잡음도 없다. 상처가 안 생긴다. 작아서 취급하기도 간편하다. 몇 번 사용해도 음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AB면을 바꿔야 할 필요도 없다 곡의 시작부분이 단번에 나온다. 조작이 간편하다... 장점만 그득하다. 나도 작업실에서는 철두철미하게 CD로 음악을 듣고, 미즈마루씨도 애용하고 계십니다. 단 CD가 음악 소프트로써 완벽한가 하면, 지금 시점에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없을 듯한 기분이 든다. CD의 기능적인 수용 능력에 음악 소스 공급측이 아직 충분하게 대응하고 있지 못하다는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 문제는 본 기사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얘기이다. 좌우지간 CD의 판매는 현 시점(1986년 가을)에 BD의 판매량을 훨씬 추월하고 말았고, 앞으로 그 차가 점점 더 심해질건 뻔한 일이다. 그리하여 끝내 BD는 SP나 모노LD가 걸었던 것 처럼 폐우와도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한 얘기가 CD에 대한 대략의 설명. 이해가 되셨는지요? 잘 모르시겠다는 분도, 그런 거 우스개 소리 아니야 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겠으나, 아무튼 CD공장 견학을 시작하겠습니다. 늘 하던 버릇대로 CD선행 개발 실장인 아베씨에게 최초로 난처한 질문 하나. 애써 견학을 허가해 주셨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이것이 제 직업이니까 그런대로 봐 주십시오. 하루키-저 말씀입니다, CD가 이렇게 까지 급속하게 보급된 원인의 하나로 규격의 통일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필립스와 소니가 손을 맞자고 규격을 통일했고, 비디오나 비디오 디스크부문에서 정면 전쟁이 있었는데, 어째서 CD에 한해서는 마쯔시타 그룹이 거기에 추종하는 식이 된 겁니까? 아베-그러니까, 뭐 필립스라고 하는 상당히 훌륭한 메이커가 굉장한 기술을 가지고 일을 추진했다는 것 한가지와... 나머지 한가지는 그 일을 뒷바딤했던 패밀리라고 할까, 포노그람이란 회사인데요, 이 회사는 독일에 그라마폰을 가지고 있고, 필립스 레벨을 가지고 있고, 알히프를 갖고 있고, 런던의 오와조릴을 갖고 있어요. 클래식 레코드의 반이죠. 그만큼 막강했던 겁니다. 가령 빅터사에서 이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손댔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필립스 측에서 갖고 있는-소프트의 양과 그 질적 우수함, 그것이 모두가 찬동한 원인이겠죠. 즉, 필립스=소니의 주도로 일이 진행된 것은 기술력의 차이때문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소프트가 원인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독자적으로 연구를 계속해왔던 마쯔시타=아베씨로서는 꽤 분한 모양이다. 정말 졸렬한 예를 들어 죄송합니다만, 나란히 신장개업한 터어키 탕이, 설비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는데 모아다 놓은 여자의 질에서 차이가 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가게 문을 닫았다는 식이다. 이런 정보 산업에서는앞으로도 정보 소프트의 가치가 점점 상승될테지만, 그런 것은 고차의 전력적 정치 판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서, 기술직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여러 가지 속상한 일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아베씨는 열렬한 클래식 팬인데도, CBS 소니 계통의 CD는 소리가 싫어서 절대로 안듣는다고 한다. 마쯔시타 전기의 테크닉스 하이파이 오디오 사업부는, 오사카의 교외 카도마 시에 있다. 세ㄱ 다툼으로 마모리구찌씨와이 경계선이 있는 유난스레 들쑥날쑥한 기묘한 지역인데, 이 주변은 끝없이 마쯔시타 공장이 펼쳐져 있는 마쯔시타 타운이다. 마쯔시타에 다니는 사람에게 '여기, 도대체 얼만큼 넓습니까?'라고 질문한들, '글쎄요, 어느 정도일까요? 좌우지간 무지무지하게 넓습니다.'란 대답밖에 안 돌아올 정도로 넓다. 내가 견학한 공장은 CD소프트와 카트리지, 픽업을 만드는 건물인데, 총 면적이 삼천칠백 칠십 평방미터라고 한다. 우리들-나와 미즈마루씨와 편집부의 미도리씨-은 먼저 CD소프트 공장의 입구로 안내되었다. 이 입구가 또 엄청나게 무시무시하다. 자동 소총을 맨 경비원은 없지만 전제 통제 장치로 외부인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게끔 되어 있다. 글쎄요, '닥터 노'에 나오는 비밀 기지를 얼마간 일상적인 모습으로 바꾸고, 등장인물의 대사를 관서 지방 사투리로 바꾸면, 공장이 주는 이미지를 대략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삐삐삐삐하고 통제를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가, 특수한 무진복을 덧입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털끝만한 먼지가 있어도 생산 라인이 스톱해버리니까, 옷위에다 푹 뒤집어쓰듯 무진 복을 빈틈없이 덮어 써 먼지가 일지 않도록 한다. 머리에는 착 달라붙는 모자를 쓰고, 코와 입에는 수술용 마스크 비슷한 마스크를 하고 신발은 전용 주크 구두로 갈아 신는다. 이런 외양에 귀까지 갖다 붙인다면, 그건 '카스테라는 한번, 전화는 두 번'이라고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지껄여 대는 인형이다. 무진북은 한번 착용하면 특별히 지정된 세탁소로 보내지는데, 거기에서 먼지가 달라붙지 않도록 특수한 방법으로 세탁된 후, 비닐 팩으로 포장되어 공장으로 돌아온다. 사실은 여설의 화장도 가루가 날리니까 금지되어 있지만, '그 정도 엷은 화장이면, 뭐 괜찮겠죠.'라고 요행, 미도리씨도 무사 통과. 공장 관계자이 말씀에 의하면 '지난번에 오신 F씨-나를 소개해준 오디오 평론가-는 이 무진복이 마음에 드셨는지, 한벌 갖고 가셨습니다.'라고 하는데, 참 세상에는 별난 사람도 다 있다. 이런 걸 대체 어디에 쓸 작정일까?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과연 이 푸른색의 나이론 양복으로 몸을 감싸고 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이상한 노릇이다. 이런걸 입고 롯본기에 가면 세기말적 복장이라고 의외로 환대 받을지도 모르겠다. 무진복으로 입은 다음은 에어 샤워실로 들어간다. 에워 샤워실이란 문과 문 사이에 끼어 있는 협소한 공간인데, 우리들은 공장에 들어가기전에 말하자면 통과 제의로써 한사람 한사람 이곳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먼지를 ㄸ어내게 된다. 철두철미하다. 입구 문을 닫고 방 중앙부에 서면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 온다. 양손을 들고 빙글 돈 다음, 마지막으로 몸을 탁탁하고 턴다. 약 십초후 바람이 멈춘다. 그러면 출구를 열고 밖으로 나간다. 밖으로 나가면 거기가 바로 CD공장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둘것이 있다. 우리들 비전문가에게 실재하는 CD공장이란 솔직히 그다지 재미있는 곳이 아니다. 물론 전문가가 보면, 여기야 말로 첨단 기술의 원더랜드인 셈이니 침을 질질 흘릴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들 같은 문외한들에게는 설명을 듣고서는 '음, 그런가'하고 감탄을 하기가 고작이라 구체적인 부분까지 들여다 볼 여유가 없다. 이런 현상은 소위 광적인 분재 수집가가 분재의 부자도 모르는 사람에게 매니어들이 저마다 구팀을 삼키는 수집품을 보여주며 '어떻습니까? 굉장하죠? 요건 사사카와 로이찌씨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며 욕심을 냈던 최고의 작품으로...'하고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으로, 보고 있는 사람은 그저 '예, 그렇게 굉장한겁니까?'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CD공장은 지우개 공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지우개 공장의 공정에는 이해 불가능한 부분이 제법 있었지만, 거기에는 그래도 아직 일상의 연장이라는 감각이 있어, 노력하면 그럭저럭 알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얘기가 CD공장으로 돌아가면, 그건 이미 우리들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완전하게 넘어선 곳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더 세세하게 말하자면, CD라고 하는 물건의 원리는 대충 나도 안다. 그러나 그 원리를 실제로 제품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내가 보통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 언어로는 도저히 다 설명할수 없고, 설명을 들어도 실감되지 않은채 왼쪽 귀로 들어왔다가는 오른쪽 귀로 새어 가는 형편이다. 절세 미인을 만난 사람이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타인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좌우지간, 그냥 부기만 해도 넋이 빠질 정도의 여자'라는 등의 무의미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다. 필자로서 이런 일을 당하면 몹시 곤란해진다. '야, 아무튼 굉장하군요, 이거'라는 말만 계속 주절거려야 하니,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굉장한 것에 비해 경치상으로는 그렇게 흥미로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설명을 늘어 놓았다간, 이 책은 전문서가 아니니까, 독자들께서 그리 열심히 읽어주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무수한 난문을 거쳐 견학한 공장인 만큼 한가지만, CD의 생산이 얼마만큼 굉장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예를 들겠다. CD디스크의 표면에는 올록볼록한 줄이 나 있어, 레이저 빔의 빛을 거기에 비추어 신호를 읽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그 올록볼록의 폭이 대략 0.5마이크론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수히 줄지어 있는데 그 줄 사이의 폭이 1.6마이크론이다. 요컨대, 이 그림처럼 말이다. 그러나 마이크론이란 단이는 상상하기가 힘드니까, 알기 쉽게 천배를 해보자. 그러면 올록볼록의 폭은 0.5밀리미터가 된다. 디스크의 폭이 십이센티미터니까 이것도 천배를 하면 백이십미터가 된다. 백이십미터라는 길이는 거의 야구장에서 홈베이스에서 외야 펜스 정도까지의 거이이다. 0.5밀리미터란 조그만 모래알 크기다. 그러니까, 즉 비율로 하자면 레이저 빔은 빙빙 돌면서 고속으로 회전하는 야구장에 깔려 있는 무수한 모래 알갱이가 지니고 있는 신호를 일일이 읽어 나간다는 얘기다. 어때요, 굉장하죠? 그것을 또 제품으로 만들어내니 하나님이다. 굉장하죠? 굉장하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죠? 정말 믿기 어렵습니다. 제품 설계를 하고 있는 아베씨조차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고 할 정도이니, 내가 어떻게 믿겠습ㄴ? 이런 사연으로 나와 미즈마루씨와 미도리씨 세사람의 취재반은 '하염없이 고개만 끄덕거리는 트리오'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 지우개 공장이 그립다. 인체 표본 공장도 그립다. 하지만 멍청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 정신을 차리고 공정을 체크해 보자. #1 원반제작. 원반의 재료는 유리이다. 놀랍다. 어째서 유리를 사용하는가 하면, 모든 재료 중에서 유리가 제일 편평하기 때문이다. 아베-왜 편평하게 하는가 하면, 신호의 크기가 몇 콤마 마이크론이잖아요. 그러니까 재료 자체의 굴곡이 신호의 백분의 일정도를 넘어서면 신호의 굴곡인지 재료의 그것인지 판단할 수 없거든요. 유리를 매입해다가 우리 공장에서 갈아요. 포리싱을 하여 그 다음 솔 같은 것으로 광을 낸 후, 그것을 초음파로 세정합니다. 그기로 거기에다 포트 레지스트라는 빛에 감광하는 재료를 바르고, 레이져를 비추어 기록해 나가는 것입니다. 전기회사에서 유리를 솔로 문지른다는 것도 좀 이상한 얘기지만, 천분의 일 마이크론이라는 수치도 경이적이다. 백분의 일 밀리미터라니 그런일이 가능합니까? 좌우지간 그런 처리를 하여 원반 레이저 컷팅을 하여 현상을 하면 원반의 완성. #2 그 다음 마스터링. 요컨대 원바느이 아들, 손자를 만드는 셈이다. 만드는 법은 얼굴에 팩을 하는 것처럼 금속 도금을 하여, 잡아 떼내고, 네거-포지-네거의 요령으로 아버지, 엄마, 할아버지를 만든다. #3 마지막으로 테프리케이션. 요컨대 디스크 양산 고정입니다. 할아버지로부터 디스크에 신호를 전사하여, 거기에다 알루미늄 코팅을 하고, 그 위에다 보호막을 덧씌운다. 알루미늄 코팅은 레이저를 반사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디스크에 상표를 인쇄하면 한 장이 완성된다. 이른다 콤팩트 디스크의 완성이다. 그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쓰고, 또 성역 취급을 하는 부문이 #1,#2 공정을 처리하는 마스터링 룸으로, 거기에 들어가려면 한 번 더 에어 샤워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일반 견학자는 전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므로 불평은 소용없다. 양손을 높이 들고, 빙그르르 돌아 탁탁... 금방 익숙해졌습니다. 하나, 둘, 셋 체조처럼 꽤 재미있다. 어째서 또 다시 에어 샤워를 해야만 하냐 하면, 이 마스터링 룸은 청결도가 백이기 때문이다. 청결도 백이란 일평방피트안에 직경 0.5마이크론이하의 먼지가 백개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는 수치인데, 그런걸 어떻게 알수 있느냐고 궁금해 하시겠죠? 하지만 알 수 있다는군요. 청결도를 탐색하는 기계가 있어 청결도가 백을 넘어서면ㄴ, '삐-삐'하고 청결도가 백을 넘어섰다는 걸 알려준다. 그러므로 빠짐없이 에어샤워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을 꺼낸 김에 마스터링 룸 이외이 공장 내 청결도를 참고삼아 들어 본다. 공장 내의 청결도는 마스터링 룸을 제외하면 청결도 천-먼지의 양이 열배가 되는 셈이죠-이고, 공장에서 한 발짝 밖으로 나오면 일거에, 이삼백만으로 뛰어 오른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우리들은 그렇게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단 말인다?' 하고 아연해지니, 이상한 노릇이다. 하루키-우리들이 그렇게 더러운 세상에 살고 있었군요, 미즈마루씨. 미즈마루-아니, 난 벌써 그럴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후후후(이 대화는 창착입니다.) 참 겁나는 군요. 그러나 청결도 백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웬지 건너편에 있는 지붕을 향해 '야호'하고 외치고 싶어진다. 마스트링 룸이란 그런 곳이다. 그리고 마스터링 룸의 또 한가지 특징은 실내의 기압이 공장의 다른 장소보다 약간 높게 설정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어요. 애써서 공기를 청결하게 만들어 두었는데 다른 곳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테니까. 그래서 항상 마스터링 룸에서 바람이 외계로 불어나가도록 기압이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야 말씀 그대로이겠으나, 그 꼼꼼함에는 외부인으로서 그저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마스터링 룸 견학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작업은 유리로 된 우리 안에서 진행되므로, 우리들은 팬더를 구경하는 것처럼 유리벽 너머로 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 뿐이다. 실제 작업에는 청결도가 백이라도 아직 부족하다고 한다. 예날에 존 트라볼타가 나오는 영화 중에, 세균에 감염되지않기 위해 평생을 유리장 속에 갇혀 지내는 청년 얘기가 있었는데, 정말 그것하고 똑같다. 유리장 안에서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무진복을 입은 남자가 혼자서 묵묵히 원반을 다루고 있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어쩐지 쓸쓸한 광경이다. 나는 말러의 제 4번 교향곡을 들으며 이 원고를 쓰고 있는데, CD를 만들기 위하여 마스터링 룸의 저 유리장 속에 처박혀 있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면, 웬지 가슴이 콱 막히는 듯하다. 천분의 일 마이크론이란 정밀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우리들의 상상이 거의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그런 것에 비해 내가 구두점에 기울이는 노력따위는 끔찍하리만큼 엉성한 것이다. 반성해야만 한다. 하루키-이 유리로 된 작업실에는 한 사람밖에 들어갈 수 없는거죠? 히가시-(디스크 개발실 실장)예, 그렇습니다. 나도 이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엉ㅅ. 여기서 컷팅 과정이 끝난 원반을 현상하죠. 여기는 청결도가 몹시 높은 곳이라서, 사람은 한 사람밖에 못들어갑니다. 안이 붉게 보이는 빛을 거르기, 즉 자외선을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포토 레지스트는 자외선에 감광을 하는데, 형광등은 자체 내에서 자외선을 소량 방출하므로, 유리에 필터 장치를 하는 것이죠. 하루키-저 말씀입니다. 좀 망측한 질문 한가지.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 잠깐 밖으로 나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일은 불가능하겠죠? 무진복을 입고 있는데다, 에어 샤워실에도 또 들어갔다 나와야 하니까. 히가시-하하하,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한다. 훨씬 더 굉장한 일이 많은데, 대충 이 정도로 해 두지 않으면 굉장하다, 굉장하다란 한마디로 원고가 다 끝이 날 것 같다. 단 하나 이상했던 것은 나가 상표를 붙이는 기계를 빤히들여다 보고 있지니까, 기계가 어찌된 영문에선가 주눅이 들었는지, 상표를 붙이지 않은 디스크가 한 장 튀어나왔다. 나는 타인의 실수를 금방 가려내는 편이라 히가시씨에게 '한장, 상표가 안 붚어 있ㄴ느게 있는데요'라고 말했더니, 히가시씨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 그렇습니까. 그런일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는데'하며 실망스러워 했다. 하지만 이런 실수가 한 가지쯤 없으면, 내 쪽은 숨이 꽉 막힐 듯 답답하다. '하하하, 실패로군요'하고 웃어 넘길 수 있다면 이 세상이 그 얼마나 밝겠는가. 천분의 일 마이크론이란 수치로 서로 아웅다웅하다가 사요 붙이는 기계로 일을 매듭짓는다는 것도 뭐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제품의 최종 검사는 살마의 눈으로 행해진다는것도 꽤 흐뭇한 일이다. '저 말이죠, 사람의 눈이란 제법 쓸모가 있어요'란 히가시씨의 말에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하이테크, 하이테크하고 야단을 쳐도 결국 인간적인 부분이 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로서는 그런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온기를 소중하게 여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음악 소리란 기계적 장치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그 무엇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정작 내가 느지막한 시간에 홀로 숭을 마시며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는 아직까지도 블랙 디스크를 고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디오 팬 여러분께 한마디. 디지털 오디오 테이프라든가 녹음도 할 수 있는 CD를 마쯔시타 전기회사에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제품화 할 수 있는데, 복사한 음이 너무 좋은 탓에 저작권 문제가 얽혀, 곧장은 발매할 수 없다는 군요. 뭐 그런 사정은 잘 알겠지만, 이용자로서 그런 상품은 하루라도 빨리 발매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무튼 오디오 제품의 미래란 앞으로도 그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어질 듯합니다. 섣불리 옛날이 그립다란 말을 해서는 안되겠죠. 한없이 밝은 복음 제산 공장 아데랑스 공장에 가기 전에 예비지식을 얻기위해 신주크에 있는 아데랑스 봉사를취재하며 여러 사람의 얘기를 들었는데,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뭐하고 비슷하다'란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엇하고 비슷한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하고 줄곧 생각하다가 한참 후에 간신히 생각이 났다. 좀 이상한 얘기이나, 한국전쟁의 세뇌물 영화 시츄에이션과 실로 꼭 닮았다. 그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한국의 전선에서 중국군의 포로가 된 미국 병사가 집단 탈주를 하여 돌아와서는 다시금 새로운 부대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그 중 몇 명은 이미 세뇌를 당하고 말아, 적군에게 정보를 빼돌려 후방을 교란시키고,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기부대 병사를 한명 한명 사해한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미국 병사 꼴을 하고 있으니까 대체 누가 범인인지 알 수가 없다... 꽤 오래 전에 본 별로 대수로울게 없는 영화라서, 전혀 되새겨 보는 일조차 없이 지내 왔는데, 아데랑스 본부에 찾아간 일을 계기로 불쑥 그 기억이 되살아난 채 그대로 머리 속에 자리잡고 말았다. 그 원인은 -한국 전쟁에서의 세뇌전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죄송하지만-가발이다. 그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저희 회사의 기분 방침으로써...'라고 얘기하고 있던 아데랑스의 사원이 돌연 눈 앞에서, '저 실은 나도...'하면서 스물스물 가발을 벗겨내기 시작하는 일이 몇번 있은 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영화이 기억-매커시적 악몽-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아데랑스의 사원은, 구태여 얘기할 필요도 없겠지만, 모두 머리칼이 거뭇거뭇하다. 공장에서 딱 한사람 머리 숱이 적은 사람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기뻐하였는데, 그 사람 말고는 전원 북실북실하다. 물론 그 중 몇 사람인가는-사분의 일? 삼분의 일?-가발을 사용하고 있을텐데, 도무지 알 수 없다. 이 사람이 혹, 하고 의심을 품으면 진짜 머리칼이고, 이 사람은 설마 아니겠지 하고 안심하고 있으면 '아니, 실은 저도..."라며 스물스물 가발을 벗겨내는 형편이라,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는 사이에 그만 바싹 긴장하고 말았다.-실은 아데랑스 사원 백팔십명 중에 가발 사용자는 육십삼명이라고 한다. 사원의 평균 연령이 낮은 탓도 있겠지만 의외로 적다. 하긴 몇번 당하고 나니까 나중에는 '이 사람은 가발일 것 같은데' 하고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는 되었는데, 그것은 가발 회사의 사내에 있으면서 몹시 주의 깊게 관찰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보통 장소에서 만나 그저 보통으로 얘기를 나누었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결코 회사를 선전하려는 뜻은 없지만, 정말 잘 만들었더군요. 가발이란 상당히 특이한 상품입니다 라고 아데랑스의 홍보 담당자는 설명한다. 뭐가 그리 특이한가 하면 '입 선전이 전혀 없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 이 머리, 가발인데 말이야, 이것봐, 스물스물... 그렇지, 정말 잘 만들었지? 몰랐을거야.'라고 친구들에게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우선 없다. 잘 만들어진 가발을 쓰고 있는 사람은 대개 그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있어, 주변에 머리 숱이 적어져 고민하는 사람이 있어도 '( )해봐. ( )의 가발은 아주 진짜 같으니까'라고 권유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다. '이처럼 사용자에 의한 선전 효과가 전혀 없는 상품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라고 담당자는 말한다. 듣고 보니 과연 그렇다 싶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지극히 섬세한 시장을 대상으로 하기 ㄸ문에, 사원들도 고객관리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 아데랑스의 사원은 제아무리 심각한 대머리에게도 '대머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머리 숱이 적은 손님'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상담실에 계시는 분 중에는 '대머리'라는 말을 당당하게 구사하는 카운셀러도 있다. 그래서 내가 '저, 대머리라는 말, 사내에서는 못쓰게 돼 있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천만의 말씀'이라고 펄쩍 뛴다. '대머리는 그 어떤 말로 부른다고 해도 역시 대머리입니다. 하긴 상대에 따라 반응도 여러 가지이지만, 그런 말에 일일이 신경을 쓰며 전전긍긍하니까 안되는 겁니다. 그런 말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가발을 써도, 가발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신경을 쓰고 말죠.' 아하, 옳으신 말씀, 굉장하십니다, 하고 삼탄하고 있는데 그 카운셀러도 '아니, 실은 저도...' 스물스물 가발을 벗겨내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 '대모리는 대모리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단언하니, 웬지 설득력이 있어 나도 모르게, 으음, 그렇습니까 하고 신음소리를 내지른다. 옛날에 미국에서 택시를 탄 적이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차 앞으로 튀어 나온 흑인 틴에이저를 향해, 역시 흑인 운전수가 '야, 이 검둥이 자식, 씨발놈아!'하고 고함을 지르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차별 용어란, 나도 직업상 상당히 신경을 써 사용하지만, 정말 그 속을 알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아데랑스의 신주쿠 본사는 중심가에 있는 십층짜리 멋드러진 건물인데, 그게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나도 지금껏 그 건물 앞을 몇번이고 지나다녔는데, 설마 아데랑스 회사의 건물이리라곤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간판도 조그만데다, 입구도 좁고, 또 제일 눈에 잘 띄는 건물 일층은 임대를 하여 타기업이 들어와 있다. 그야말로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자사 빌딩의 일층을 타사에게 빌려주는 회사도 드물겠지만, 생각해보면 그 나름으로 경제적일 것 같다. 가발을 좀 써 볼까 하고 어렵사리 마음먹은 '머리 숱이 적은 손님'은, 이 좁고 조용한 현관으로 들어가-요즘같은 세월에 러브 호텔 입구도 조금은 더 위풍당당한 법입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층에 있는 상담실로 간다. 직접 고객의 댁을 방문하여 카운셀링을 하는 출장 서비스도 있다. 카운셀링은 물론 독방에서 일대일로 이루어진다. 상담실은 육조 방 정도의 넓이에, 한가운데 큰직한 철제 책상이 있고, 그 너머에 흰 가운을 입은 카운셀러가 앉아있다. 오른 쪽 벽에는 커다란 거울이 붙어있고, 그 위에 '상크 증모법'이란 사진 설명 패널이 걸려 있다. 아데랑스 달력의 이번 달 사진은 켄로쿠엔인지 어딘지의 폭신폭신하게 자란 잔디 사진이다. 왼쪽에 있는 우유빛 창문은 옆 건물 벽에 닿을랑 말랑 밀착되어 있어 전혀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카운셀러의 뒤쪽으로는 철제 캐비닛이 서 있다.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아도 인상적인 방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방 분위기가 요츠야 경찰서의 취조실과 히라츠카 역 역장실의 꼭 중간쯤이다. 하루키-저,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을 드립니다만, 좀더 호화스런 상담실로 꾸몄어도 좋지 않았을까요? 소파가 있고 BGM이 흐르고, 크리스탈 재떨이 세트가 있고... 일부러 이렇게 사무실 같은 인테리어를 쓰고 계신 겁니까? 카운셀러 나가이씨-아니, 절대로 그런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고급스럽게 꾸며 놓으면 오히려 얘기하기가 쑥스러운 경우도 있지 않으까요? 하루키-흐음, 그런대 연대로 봐서 몇살 정도의 손님이 제일 많습니까, 여기에 오시는 분은? 나가이-삼십대가 역시 제일 많습니다. 젊은 순으로 하면 우선 이십대 전반, 통상 젊은 층의 대머리는 스물 두셋에서 시작되니까요. 이 시기에는 대부분이 자기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죠. 머리 수이 적은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 혼자서 우울하게 고민을 합니다. 왜 나만 이렇게 머리 숱이 적을까 하고요. 그리하여 누가 자기 머리를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을까 하고 쭈뼛쭈뼛하기도 하고, 끝내는 집에 처박혀 밖에도 안 나가게 되는거죠. 하루키- 그 기분 알겠어요. 우울하겠죠. 나가이-그야 물론, 그런 현상을 보이는 것이 제1단계. 제2단계는 적령기입니다. 이십대 후반에서부터 삼십대 전반이 되어, 집안 사람들이 결혼을 하라고 성화를 부리죠. 그래서 선을 봅니다. 사진을 교환하는 단계에서 이미 거절당해요. 그렇잖습니까? 누가 일부러 대머리가 돼가는 남자랑 결혼을 하겠습니까? 첫인상이란 역시 인물이 중요하니까요. 그러니까, 아무튼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가발을 만듭니다. 하루키-어째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 같군요. 홍보부의 스즈키씨-하지만 좌우지간 만나 보기라도 하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있잖습니까.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정이 붙고, 사실은 대머리라는 걸 알게 되어도 뭐 이 사람이라면 대머리쯤... 할 수도 있잖아요. 실제로 어떤 분은 자기가 가발을 쓰고 있다는 걸 털어 놓지 못한 채 결혼을 했는데, 그러고도 오년이 지날 때까지도 비밀로 한 분도 계십니다. 하루키-오년!? 스즈키-우리들도 믿을 수가 없어요. 함께 생활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텐데 말입니다. 부인께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약 그렇다면 상당히 훌륭한 부인이다) 나가이-그래서 무사히 결혼하여, 다음은 서른 다섯에서 마흔이 되어 가발을 만드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어떤 경우인가 하면, 아이들을 위해서입니다. 이미 그 정도 나이가 되면 일에 대한 자신감도 있고, 딱히 남부러울 것이 없다고 당사자는 생각하죠. 그런데 아이들이 그 사이에 성장하여, 학교에 다니면 학부모 참관일이라는게 있어요. 아이가 '아버지는 학교에 안오면 좋겠어요'라고 하는 겁니다. 글세, 대머리라고. 마누라에게는 대머리라는 소리를 암만 들어도 상관이 없는데, 아이한테 그런 얘기를 들으면 몹시 서글퍼지거든요. 부모로서. 그래서 그럼 아이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라도 가발을 쓸까하고 결심한 아버지들께서 오시는거죠. 하루키-으음, 가발을 쓰게 되는 계기가 학부모 참관일이라니 예상 밖이군요. 세상사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군요. 나가이-마지막으로는 제2의 인생을 위한 가발입니다. 쉰다섯에서 육십대의 아버님들이죠. 아이들도 다 어른이 되어 결혼까지 시켰다.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전력을 쏟아왔으니까, 이제는 자신을 위해 좀 멋을 부려 볼까하고. 이런 분들은 평상시에는 안 사용하십니다. 여행을 떠난다거나, 그런 무슨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위크엔드 가발. 하루키-위크엔드 가발이라... 나가이-손님의 패턴은 대충 이럿습니다. 간단히 말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대머리에 대한 고민은 그 절실함이 희미해지죠,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제일 안스러운 경우는 화상을 입었던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세 살때 프라이팬의 기름을 덮어 쓴 탓에, 머리가 벅겨져 민둥민둥해지고 말았어요. 스물세살 된 여자분이었는데, 이런 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발 운운 이전에 정신적 카운셀링입니다. 피해자 의식을 버리십시오, 당신은 비극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하고 어드바이스를 하죠. 자신이 만약 반대로 엄마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는 등등의 말을 말이죠. 나가이씨의 얘기에 의하면 상담하러 온 손님의 팔십퍼센트까지는 '상담'이 성립되어 가발을 만들게 된다고 한다. 나가이씨는 이 계통에 칠년 동안이나 종사한 베테랑으로 '삼천명 정도는 될겁니다. 나와 얘기를 나눈 손님이'라고 한다. 카운셀링의 최대 목적은 가발을 쓰는 것에 대해 죄의식, 저항감을 없애는 일이다. 가발을 쓰는 것이 타인을 속이는 일일 수 없어며,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라고. '대머리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와진 고객'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손님의 심리적 상태까지 고려하는 세심한 대응이 아데랑스 회사가 성공한 한가지 원인일 것이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꾸짖기도 하며 끝내는 설득한다. 세심하고 꼼꼼한 점에서는 특기할 만한 것이 또 한가지 있다. 아데랑스 본사의 지하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이발관이 열 좌석 마련되어 있다. 가발 이용자는 혼자서 편안한 마음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 이발관에서 가발을 벗고, 길게 자란 원래 머리를 대머리 전용 이용사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렇찮겠습니까? 그냥 보통 이발관에 가서 으ㅆ하고 가발을 벗고 머리를 자른다는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니까요.' 그런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겠다 싶다. 원래 머리를 자르는 동안, 별실에서 이것 또한 전문가가 가발을 씻고 손질한다. 옆 자리에서는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BGM의 볼륨이 좀 크다 싶게 흐른다. 흡사 옛날 개인용 찻집같다. 요금은 보통 이발소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전문 이발소가 전국 각지에 있어, 이용자 컨설턴트 기능도 겸하고 있다. 요컨대 아데랑스라고 하는 회사는 가발을 단순히 팔고마는 게 아니라, 가발을 판 순간부터 장사를 시작하는 셈으로, 이런 상업적 전략도 만만찮다-고 하면 표현이 딱딱한다-좌우지간 면밀하다. 가발의 수명은 사오년이고, 머리가 벗겨지는 정도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심해지니까, 그러면 스페어 가발도 필요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용자를 빈틈없이 포섭하고 있기만 하면, 몇 년 후에는 확실하게 또 상품을 팔 수 있는 것이다. 본사의 컴퓨터에는 전국 몇십만 고객의 카르테가 한명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전도양양한 시장인 셈이죠.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증가함에 따라 머리가 벗겨지는 사람 수도 점점 유럽이나 미국처럼 늘어나고 있고, 한 번 벗겨진 사람이 다시금 검은 머리로 부활되는 가능성도 결코 없고, 남자가 그 용모로 선별되는 사회적 경향도 점점 강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내수확대란 공헌으로 하자면 정부로부터 표창장을 받아도 좋을 만한 회사이다. 뭐 그건 그렇고, 상담실에서 카운셀러와 이것저것 얘기를 하며 '알겠습니다, 그럼 하나 만들기로 하죠'라고 결심한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원형을 뜨게 됩니다. 원형을 뜨는 기구는 피터라고 하여 테니스 라켓처럼 생긴 모양의 나무틀에 클래프랜 HM95라는 플라스틱 같은 막이 쳐져 있는데, 그림에 있ㄴ느것처럼 그것을 머리위에서부터 꽉 눌러서, 머리형이 떠지면 거기에다 싸인펜으로 가마라는가 머리털이 난 모양 등을 세세하게 그려넣고, 그 위에다 냉각 스프레이를 뿌려 굳힌 후 살짝 들어낸다. 이른바 머리의 데드 마스크같은 것으로, 제법 리얼한 느낌이 든다. 나는 이 두형을 뜨지 않았지만, 실제로 자기 머리의 복제품을 이렇게 정밀하게 만든다면 묘한 기분이 들거라고 생각한다. 젊은 여자에게 클로로포름 냄새를 들이키게 하여 기절시킨 후 이 피터를 사용하여 두형을 뜬 후, 가마 모형을 그러 넣고 냉각 스프레이를 슛슛하고 뿌려 가지고 도망사거는 몇백개나 되는 두형을 자기 방에다 장식해 놓는 변태적 성범죄지가 있다면 꽤 흥미로울거라는 생각을 문득 하였지만, 그런 인간에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죠. 이 두형과 카르테와 원래 머리칼의 견본이 가발을 만드는 기본 자료이다. 이것을 공장으로 보내 가발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다. 원형을 떠서 제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약 한달이 걸린다. 고객은 한달 동안 '대체 어떤 가발이 만들어질까'하고 두근두근하는 심정으로 기다려야 하는데, 그 중에는 가발을 주문란 일로 정신적 안정을 얻어 머리가 나기 시작했다는 원형 탈모증 환자도 있어, 이런 사람은 그야말로 행운이다. 우리들도 이쯤에서 회사를 물러 나와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대머리에 관한 잡학을 몇가지 피력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아데랑스란 회사는 대머리에 대한 잡다한 자료나 통계가 엄청나게 많은 곳이라서, 이번 취재로 대머리에 관한 책을 한 권 쯤 쓸 수 있을 정도이다. #1 일본 내의 대머리 추정 인구는 약 칠백오십만-삼년전 조사에서는 육백 오십만이었다-가발 사용자 수는 약 오십만. 그중 아데랑스 사용자는 이십팔만. #2 가발을 씌우고 싶은 유명인사 베스트 원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씨. 덧붙여 재직 중에 가발을 썼던 수상도 있다고 한다. #3 대학생 사용자 중에는 일본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와세다-하지만 이 수치는 학생 수가 워낙 많기 때문일 것이다. 직업별로는 매스컴 관계자가 눈에 띄는데, 이 점은 주지하시는대로 생활이 무질서 하고 쓰잘데 없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스포츠 관계자로는 씨름 선수로부터의 문의가 가장 많다. #5 오부머리, 쿨 컷 모양의 가발은 만들기가 무척 까다롭다. #6 아데랑스에서는 음모 가발도 만드는데, 이건 주로 수학여행용이다. 형은 뜨지 않는다. 수염, 가슴털 가발은 없다. 공장 정확하게 말하지면, 회사 쪽은 '주식회사 아데랑스', 공장 쪽은 '아데랑스 공예 주식회사'로 서로 다른 조직이다. 공장은 니가타 현 주조에 있는데, 부지는 십삼만 평방미터, 건물은 사만평이라는 어마어마한 넓이로, 안에는 체육관, 문화 시설, 노래방 시설까지 있다. 종업원 수는 사백명 남짓. 지금까지 취재한 중에서 제일 호화롭고 널찍하고 청결한 공장이다. 분명 장사가 잘 되기 때문일 거라고 남의 주머니 속사정을 생각하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 주조 읍이 기업을 유치하기 위하여 토지를 싼값에 제공한 이유도 있다. 주조 읍으로 공장이 들어서면 세금도 많이 거두어 들일 수 있고, 다른 지방으로 새나가는 유효 인력도 잡아 둘 수 있고, 종업원은 젊은 여자가 대부분이니까 농사를 짓는 남자의 결혼에 대한 고민도 해소될 수 있어 일거 양득인 것이다. 공장으로서는 지역과 밀착할 수 있어 양질의 노동력을 조달할 수 있고-니가타의 여자는 일반적으로 섬세한 수공예를 끈기있게 꼼꼼하게 해내는 것이 특기이다. 쇼난 쪽에서라면 이런 공장은 좀 무리가 아닐까-만사 형통이다. 물론 단 하루 견학한 걸 가지고 세부적인 내부 상황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언뜻 보기에 종업원 교육이나 복지 시설도 충분하고, 상당히 일하기 편한 공장일듯하다. 좌우지간 아데랑스라고 하는 회사는 하나에서 열까지 밝고 명랑한 이미지를 유별나게 강조하는 회사다. 공장도 구석구석까지 환하가. 벽도 새하얗고, 조명은 밝고, 창문까지 큼직하다. 복도는 벽과 천장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여름철엔 냉방을 하여도 더워 견딜 수 없다. 그야 물론 밝은 쪽이 어두운 것보다는 한결 낫겠지만,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틀림없이 천성이 밝은 걸 좋아하는 사장이 '저 말이야, 자네 음, 자네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까 아무튼 공장을 환하게 만들라구. 이렇게 탁 트인 밝은 공장으로 말이야'라고 명령하여 지은 건물일 것이다. 이런 밝은 이미지를 지향하는 태도는 아데랑스의 tv이미지 광고를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원들의 불만이 적혀 있는 게시판을 보아도 '지난번 점심 식사 메뉴 중 닭 튀김에 닭살이 너무 적었습니다.'라는게 붙어 있어, 이런 열린 분위기도 시원스럽고 좋군요. 젊은 여자가 사원 식당에서 캬캬 재잘대며 점심-무료랍니다, 글쎄-을 먹는 광경이 리얼하게 상상된다. '어머, 이 닭튀김 좀 봐. 살이 하나도 없잖아' '정말, 뭐 이래' '케이코, 투서해. 너 글씨 잘 쓰잖아' '뭐, 너더러 쓰라구? 농담마' 아, 나도 한자리 끼고 싶군요. 원모 처리실 원모 처리실에는 다발로 묶여진 검은 머리칼이 죽 놓여 있다. 긴 것은 일미터가 넘는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전부 중국에서 들여 온 수입품이다. 일본 여성들의 머리칼은 퍼머니 드라이니 샴푸로 거칠어져서 가발의 재료로는 써 먹을 수가 없다. 그 반며느 중국 여성들의 머리칼은 부드러운데다, 중국의 일부지역에서는 결혼할 때 머리를 잘라 파는 관습도 있어, 물품을 입수하기가 쉬운 이점이 있다. 가격은 비밀인데, 긴 경우에는 십만엔 정도 하는 모양이다. 원모는 이곳에서 머리컬의 비늘을 제거하고, 탈색한 후 위생 처리를 한다. 젊은 남자 공원 둘이서 주머니에 머리칼을 넣고, 약품에 푹 담궈서는 푹푹 주물거리며 탈색을 하고 있다. 탈색한 머리칼은 색상이 불규칙하므로, 이번에는 그것을 몇단계에 걸쳐 검은 색으로 염색을 한다. 염색과정을 끝낸 머리칼은, 그 다음 선별 공정으로 돌려진다. 선반에 진열돼 있는원모에는 무수한 여성들의 상념과 생활이 얼룩져 있는 셈인데, 처리를 하과 난 머리칼은 그저 가발의 원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인의 잘린 머리칼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웬지 무서운 생각 안듭니까? 나도 옛날에는 막 자른 머리ㅏ을 어떤 여자한테 받은 적이 있는데... 뭐, 그만 두죠. 그 얘기는. 인공 피부 제작실 이곳에는 피터로 만든 두형이 죽 진열돼 있다. 요컨대 앞에서 설명한 하얀 두형이 전국의 아데랑스 지사로부터 이곳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베트콩 군의 헬멧 같은 것에다 사인펜으로 머리가 벗겨진 부분과 가마, 머리칼이 난 자리, 가리마의 위치와 인공 피부가 커버해야 할 영역과, 그것을 원모에 갖다 붙이는 스토퍼-여자의 머리핀과 같은 원리-의 위치가 씌어져 있고, 그 옆에 비닐 주머니에 들어 있는 원모의 견본이 셀로판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다. 시부야 지점, 와타나베 노보루(가명)란 이름도 씌어져 있다. C컬러라는 색을 지정하는 글귀도 있는데, 이건 피부의 농도를 ABCD 네단계로 나누어, 그 중 C색으로 인공 피부를 만들어 주십사 하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두형을 보고 있자니 세상에는 실로 무수한 형태와 크기의 머리가 있군요. 그리하여 이 베트콩 군의 헬멧 같은 두형 속에다 고객의 두형을 재현하기 위하여 석고를 부어 넣는데, 석고를 건조시키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하루 동안 말린 것을 쏙 빼내, 거기에다 취사용 비닐 랩 같은 것을 덮어 씌우고, 그 위에다 폴리우레탄 용액을 바른다. 그리고 또 그 위에다 나일론 네트를 덮고, 또 그 위에다 우레탄을 바른다. 이런 순서로 말입니다. 이 우레탄을 바르는 과정은 벨트 컨베이어 방식의 콘팅 머신으로 여섯 번 반복되는데, 건조-바르기-건조-바르기... 이런게 여섯 번이나 거듭되니까, 이것도 꽤 시간이 걸린다. 바르는 공정이 약 한시간 반에, 최종 건조에 약 여덟시간쯤이다. 여덟 시간이란, 즉 오늘 만든 것을 밤 사이에 느긋하게 말린다는 뜻이 되겠다. 완성된 막의 두께는 약 0.2밀리미터. 하루키-한데 이렇게 하나하나 들여다 보니 머리란 꽤 울퉁불퉁한 것이로군요. 공장의 스가이씨-네, 잘 보셨습니다. 좌우 대칭인 머리는 드물어요. 심한 사람은 납작한데다 삐뚤어져 있기도 하고. 하루키-평소에는 머리칼이 있어서 잘 느끼지 못했는데, 머리칼을 없애고 나니 인간의 머리란 굉장히 약한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그런데 이 인공 피부는 통기성이 있습니까? 스가이-통기성은 없지만, 투습성은 있습니다. 즉 짓무르지는 않죠. 그리고 이 뒷면에다 품번과 수주 연월일과 지점 번호, 손님으 이니셜 등을 인쇄합니다. 손님에게 잘못 전달되면 곤란하니까요. 하루키-그야 곤란하겠죠. 그런데 여기 녹색 인공 피부가 있는데, 이건 뭡니까, 인어공주라든가...? 스가이-아뇨, 이건 백발을 심을 때 보기 흉하니까. 일단 녹색으로 해두는 겁니다. 녹색쪽이 일하기 쉽다는 사람은 녹색으로 일하는 것이죠. 하긴, 당연한 일이다. 인어 공주가 가발을 만들려고 올 리가 없으니까. 여기까지의 공정은 모두 이곳 주조 공장에서 진행되지만, 그 다음 공정인 식모 과정은 수작업이라서 일본 내에서만은 도저히 손이 모자라니까, 한국이나 중국에 있는 공장에도 보낸다. 비율은 일본, 한국, 중국 순, 각각 삼분의 일 정도를 담당한다. 이 공장에는 연구실도 있는데, 거기에서는 여러 가지 제품을 개발하기도 하고, 테스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인공 피부를 기계에 끼우고 양 쪽에서 잡아당겨, 몇 킬로그램 쯤에서 찢어지는가 하는, 마치 스페인에서의 종교재판 같은 새디스틱한 테스트도 행해지고 있다. 인공 피부가 잡아당기는 힘이 세짐에 따라, '아... 부탁이야, 그만해'라고 몸부림치며 신음하고 있다. 하루키-미즈마루씨는 이런거 꽤 좋아하죠? 미즈마루-징그러운 소리를 다 하는 군. 무라카미 군도 요즘은, 후후후. 창밖에서는 태양빛에 반짝이며 인공 피부가 내구성 실험을 받고 있다. 마치 카스터 장군 학살 뒤의 광경 같다. 연구자는 이 실험을 '폭로 테스트'라고 부른다는데, 정말 대담한 명명이다. 머리칼을 정돈하는방 원모 처리실에서 탈색, 살균, 염색 과정을 마친 머리칼은 이 곳으로 운반되어, 뒤섞인후 거대한 칼 같은 빗으로 빗겨진다. 젊은 남자 공원이 머리 뿌리 부분을 쥐고, 마치 탈곡이라도 하는 것처럼 싹싹하고 몇 번이나 칼 빗으로 빗는 것이다. 건조를 시키느라 파삭파삭하게 된 머리칼도 이렇게 빗으면 다시금 부드럽고 차분해진다. 요컨대 백번 빗질의 이치이다. 칼빗질을 하면 상당량의 머리칼이 빠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그러 보고 있자니 나같은 사람은 '빈곤증'탓인가 '아, 아깝다'란 생각이 드는데, 공장 사람은 전혀 신경을 안 쓴다. '이렇게 빗질을 하다 보면 빠지는 건 빠지는 법이고, 그걸 일일이 주워가며 선별하는 쪽이 더 힘든 일입니다.'라는데, 머리 숱이 적어 고민하는 사람이 이런걸 보면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쉴 것 같다. 여기에서 색깔이나 굵기를 고려하여 섞인 머리칼이 인공 피부와 함께 식모실로 운반되면, 드디어 가발을 만드는 공정으로 들어간다. 식모실 드디어 오늘의 메인 이벤트, 식모실이다. 식모실이란 방은 마치 비행기의 격납고처럼 널찍한 방으로, 거기에 이백명 정도의 여공이 죽 책상을 나란히 하고선, 인공 피부에 머리칼을 심고 있다. 이런 방이 이곳 외에도 몇 군데나 있다. 일반 여공은 엷은 푸른 색이 감도는 하얀 가운에 삼각 수건을 쓰고 있는데, 반장은 핑크빛이 감도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다. 한 반이 스무명으로 편성돼 있고, 그 중에 베테랑이 반장이며, 상좌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작업 관리를 한다. 문예지의 편집장 같은 느낌이 든다. 좌주지간 넓은 방안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여자만 꽉 들어차 있다. 하루키-미즈마루씨, 이런 풍경 좋아하지 않습니까? 미즈마루-참 끈질기군, 무라카미 군도. 후후후. 실내는 조용하고, BGM으로는 엔카가 울려퍼지고 있는데, 늘 이렇게 조용한 것인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젊은 여자들이 이백명이나 모여 앉아 꼼꼼한 수작업을 하루종일 하고 있는데, 조용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하는 기분도 든다, 보통 때는. '얼마 전에 그이랑 드라이브하러 갔더니 말야, 그 사람이 나를 모텔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잖아. 글서 스패너로 쇄골을 부서뜨려 주었지, 후후." '잘했어, 나 같으면 집에서 소를 데리고 와 걷어차게 했을거야, 후후.' 하고 조잘대며 일을 할텐데, 오늘은 동경에서 소설가와 일러스트레이터가 견학을 하러 왔으니까 조용하게 일하도록 반장한테 언질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미안하다. '흥,뭐야. 반장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치' '그러게 말이야, 꼴갑이야' 하지만 미즈마루씨와 내게 식모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반장은 아주 예쁜 여성이고, 가르치는 방식도 친절했다. 다만 내 솜씨가 바보처럼 엉성했을 뿐. 반장-아시겠어요, 바늘이 이렇게 뻬쪽하죠. 이걸로 식모를 합니다만, 이렇게 바늘을 쥐고, 머리칼을 자기의 왼손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으로 잡고, 이렇게 동그랗게 해서는, 여기에 이렇게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머리칼 방향에 직각으로 바늘을 넣습니다. 바늘의 0.4밀리 정도 떠서, 그리고 한줄 위를 이렇게 원 안에 넣고 회전시킵니다... 하루키-...난 못하겠으니까미즈마루씨에게 가르쳐 줘보세요. 미즈마루-그러죠. 미즈마루씨는 옛날에 원피스를 만들어 여자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는 걸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인 만큼 솜씨가 제법이다. 몇번 되풀이 하는 사이에 요령을 터득하였다. 미즈마루-재밌는데, 좀더 하고싶어지는걸. 하루키-여기에 남아서 계속 하는게 어때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바늘로 한올한올 머리칼을 인공피부에 심어나가는 것으로, 그런 작업을 삼만번, 오만번 반복하지 않으면 상품이 완성되지 않으니까, 나 같은 사람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진다. 더구나 머리의 부위에 따라 서로 다른 여섯가지 종류의 방식을 섞어가며 심어야 하니, 이거야 말로 골치 아픈 작업이다. 난 이것만으로도 니가타의 여성들이 존경스러워진다. 하루키-이 작업은 어느 정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되ㄱ죠? 반장-그렇죠. 석달 정도의 연습기간을 거치고 이곳으로 옵니다. 하루키-하루에 어느 정도 작업이 진척됩니까? 반장-육십에서 팔십 평방미터 정도 될까요. 미즈마루-정말 재미있는데. 하루키-정말 미즈마루씨는 끈기있게 하시는군요. 그런데 지금껏 이 기술을 전혀 습득할 수 없었던 사람도 있나요, 연습생 중에. 반장-아니오,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들 연습 기간안에 숙달되었죠. 손놀림이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은 있지만, 그에 맞는 제품을 할당하여, 납품 기일에 맞도록 조절하고 있습니다. 반장은 이곳으로 온 카르테를 기초로 하여 머리칼을 심는 방식을 그림으로 그려, 그걸 반원에게 적당하게 할당하여 작업의 진행을 관할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반장은 작업상의 일 뿐만 아니라, 반원들의 개인적인 상담에도 응한다고 하니까, 여러 가지로 힘들다. '도모코 씨, 스패너로 애인의 쇄골을 부러뜨리다니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았어'라든가, '아니, 케이코 씨 소로 끌고 와 걷어 차게 하는 것도 안돼요'라고 말이다. 하루키-BGM으로 엔카가 흐르고 있는데, 이건 계속 틀어 놓습니까? 스가이-아니오, 오전 중에는 팝, 열한 시가 되면 외국의록 뮤직, 세 시 부터는 엔카, 이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취향이 다양하니까요. 내가 반장에게 이런저런 별볼일 없는 질문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여공들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재채기 소리 하나 안 들린다. 나는 정말 소와 가죽 구두 세일즈 맨이 다리 위에서 만나...라는 우스운 농담을 커다란 목소리로 말항여 모두들 와하하하 하고 웃길 작정이었는데,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래도 정말 너무 조용하군요. 어째 교육 위원장이 시찰을 하러 나온 국민학교 교실 같습니다. 그래도 여공들의 책상 위에는 사소한 액세서리 같은 것도 장식되어 있어, 과연 젊은 여자들이구나 싶은 느낌이 든다. 방석이 제법 아기자기한 것도 귀염성이 있다. 하루키-미즈마루 씨,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까요? 미즈마루-그렇군, 이거 계속하고 있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 가세나, 슬슬 완성실 여기에서는 식모를 끝낸 인공 피부를 뒤집어 다시 한번 코팅을 하여, 심겨진 머리칼을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마지막으로 통기를 위하여 직경 0.5밀리미터의 구멍을 이천 내지 삼천 개 기계로 뚫는다. 그리고 샴푸로 씻어 린스로 머릿결을 고른 후, 건조기에 넣어 말린다. 그리고 카르테와 대조하며 검품.해외에서 제작된 제품도 모두 여기에서 검품을 한다. 검품이 끝난 제품은 또다시 살짝 드라이를 하는데, 이 단계에 있는 가발은 전부 풀어 헤친 머리이다. 그리하여 제품은 공장을 떠나 발주된 지점으로 보내진다. 각 지점에서 고객의 주문에 따라 아데랑스 전문 이발사가 가발을 손질하면 그것으로 모든 과정은 종결된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니까, 발주일로부터 한 달이라는 대기 시간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가격은 간단한 제품이면 이십만 엔, 다섯단계 증모법에 의한 섬세한 가발은 육십만 엔(1986년 현재)로, 이 가격을 비싸다고 생각하든 싸다고 생각하든 그건 당사자 마음이다. 가격은 머리캉의 양과 면적에 따라서도 다르고, 흰 머리가 섞인 가발은 섞는 과정이 복잡하므로 백발 요금이 추가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가발의 수명은 사오 년, 관계없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들릴 지 모르겠으나, 정말 머리 숱이 적은 사람은 여러 가지로 돈이 많이 든다. 아데랑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대머리가 되는 원인의 칠십 퍼센트까지는 유전이라서, 이런 경우에는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노력한 만큼 헛수고가 된다고 한다. 즉 대머리가 될 운명으로 태어난 것이다. 전혀 당사자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러니까 눈이 나빠지면 안경을 쓰듯, 이가 빠지면 틀니를 끼우듯, 가발을 쓰면 됩니다라고 아데랑스의 홍보부 사람은 말한다. 머잖아 그런 세상이 될지도 모르고, 그에 따라 아데랑스란 회사도 점점 발전할지도 모르겠으나, 과연 그렇게 하여 세상의 가발 이용자들이 모두들 사람 앞에서 '아니, 실은 저...'하고 스물스물 저항감없이 가발을 벗어 던질 수 있게 될는지, 그렇게 되기에는 역시 좀 어렵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아데랑스의 성공 비결은 '머리 숱이 적어 신경이 날카로와진 고객'의 그 복잡한 심경을 정중하게 다룬 점에 있으므로, 아데랑스란 회사가 제아무리 밝고 명랑하게 처신하더라도. 그러한 기업과 고객의 본질적인 관계는 영원 불멸할 것이다. 따라서 아데랑스 공장에는 기업 비밀이란게 일절 없다. 그들은 '아무거나 봐도, 어떤 기사를 써도 상관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저희들의 기업 비밀은 요컨대 이용자에 대한 섬세한 서비스 동원력인데, 이 점은 다른 회사가 휴내낼 수 없죠' 돌아오는 신칸 선 열차 안에서, 나는 이 기업은 뭐하고 상당히 닮았다라고 생각을 줄곧 하였다. 그렇다, 신흥 종교 단체와 닮았다. 청결하고 강력하고, 강건한 정치성을 지니고, 그리고 밝고, 사람들의 고뇌를 양식으로 하여 발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에하라 켄이나 와카하라 이치로나 후지마키쥰이나 폴 앵카처럼 개종항 자들이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처럼 TV로 아데랑스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불행하게도 되고, 또 이런저런 이유로 행복하게도 되는 모양이다. 후기 안자이 미즈마루 1983년 12월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씨와 둘이서 '코끼리 공장의 해패 엔드'라는 책을 출간 하였다. '공장이란 참 흥미로워요' '공장에 대한 책을 만들어 보고 싶군' 언제부터인가 우리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6년 1월, 드디어 우리들의 공장 견학이 시작되었다. 잠시 얘기를 나의 과거로 되돌려 버겠다. 나는 지금같은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전, 광고 대리점과 출판사에서 디자인 일을 한 적이 있다. 광고 대리점 시절에는 전기 회사난 주조 회사 등의 광고를 담당했다. 광고 제작을 위하여 나는 그런 공장을 종종 견학했다. 그 후 출판사 시절에는 광고 대리전보다 더 많은 공장을 견학했다. 그 까닭은 내가 어린이용 도감의 레이 아웃을 맡았기 때문이다. 캬라멜 공장, 통조림 공장, 설탕 공장, 극장, 조선 공장,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캬라멜 공장에서는 낙타색을 한 다다미 크기의 캬라멜이 벨트 컨베이어를 타고 운반되었고, 통조림 공장에서는 수천 조각으로 나누어진 고래가 역시 벌트 컨베이어를 타고 운반되었다. 나는 그런 광경을 늘 조그만 노트에 메모해 두기도 하고, 스케치를 하기도 하며 돌아다녔다. 즉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공장 견학의 프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씨와 동행을 했으니, 이건 굉장한 사건이다. 첫 견학은 교토에 있는 인체 모형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1월도 다 끝나가던 어느날, 하늘은 무겁게 가라앉아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한 날씨였다. 견학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차가운 비가 택시의 창문을 적셨다. 그날 본 것이 인체 모형이었던 탓인가, 어쩐지 침울한 하루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만큼 인체 모형에 칠해진 선명한 색채가 지금도 내 머리 속에 선연하게 남아 있다. 두 번째 견학은 기타마쓰도에 있는 결혼식장인 다미히메 전. 만우절을 하루 앞 둔 날이었다. 만우절 전 날에 견학 허가가 떨어진 이유를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만우절은 결혼식장이 덜 붐비는 날이라서인지도 모른다. 세 번째 견학은 야마토 고리야마시에 있는 래비트 지우개 공장이었다. 사월이 거의 다 가려 하던 때라, 벚꽃 나무 잎이 부드러운 녹색을 띠고 바람에 살랑거렸다. 공장으로 향하는 차창으로 고이 노보리(어린이들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나라는 소원을 담아 단오절에 종이나 헝겊으로 만들어 깃대에 다는 도미 모양의 드림)가 보이기도 하고, 주변 풍경이 아주 평온했다. 공장 안에는 납작하게 눌러 놓은 찹쌀떡 같은 지우개가 산더미 처럼 쌓여 있어, 지금까지 견학한 공장 중에서 제일 공장 다웠다. 계절은 장마철. 6월 22일, 우리들의 공장 견학도 네 번째를 맞이했다. 이번에는 모리오카에 있는 코이와이 농장으로, 우리들은 아침 일찍 우에노 역에서 도호쿠 신칸선을 탔다. 비가 오지 않아야 할텐데 하고 바랬는데, 평소에 선행만 한 덕분에 하늘이 우리편이 돼 주었다. 마치 5월로 되돌아 간 것처럼 상쾌하고 푸르른 하늘 덕분에, 코이와이 농장 견학은 무척 즐거웠다. 7월이 되었다. 이번에 견학한 공장은 저 유명한 꼼므 데 갸르손의 봉제 공장이다. 장소는 도내 코토 구에 있는 모처. 주인인 미야시타씨는 매우 온화한 성품의 아저씨였다. 베란다에서 재배되고 있는 토마토도 먹음직스런 색이었다. 나는 이 공장이 어린 시절 몰래 기어들어가곤 했던 누나의 방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7월 30일은 무척 더운 날씨였다. 어쩌면, 그날이 그 해에서 가장 무더운 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신 오사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씨와 만나, 이번에는 마쯔시타 전기의 CD공장으로 향했다. 나는 기계에 대해선 아무튼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무라카미씨가 고개를 끄덕이면 따라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는 사이 견학이 끝났다. 마지막 견학은 아데랑스 가발 공장으로, 우리들은 니가타 현 주조에 있는 공장으로 갔다. 주조는 아주 깨끗한 동네였고, 공장도 아름다운 풍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팔월말이었다. 견학을 끝내고 공장 내의 육층에 있는 티룸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창 밖으로 새빨간 저녁놀이 보였다. 하늘은 봄에서 가을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공장 견학도 모두 끝났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번 공장 견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동시에 많은 것들이 혼란스러워진듯한 기분도 느낀다. 완성된 이 책을 다시금 읽어보며, 그 엉클어진 부분을 반듯하게 수정해 놓고 싶다. 좌우지간, 그 모든 공장을 흥미롭게 견학했다. 각 공장에 종사하시는 여러분, 무척 고마웠습니다. 공장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출처 http://forum6.thrunet.com/share/mmb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