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베이 스트라트 -듀비 브라더즈<사우스베이 스트라트>를 위한 BGM 대부분의 남캘리포니아 지방이 그렇듯이, 사우스베이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물론 전혀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비라는 현상이 어떤 반응을 동 반하는 기본적 관념으로서 사람들 속에 자리잡을 정도로는 내리지 않는다. 다 시 말해 보스턴이나 피츠버그에서 온 누군가가 "정말이지 장마처럼 지긋지긋하 다."고 한다 해도, 사우스베이의 사람들이 그 뉘앙스를 이해하기에는 남들보다 반 호흡 정도 쓸데없이 시간이 더 걸린다는 예기이다. 남캘리포니아라고는 해도 사우스베이에는 서프 포인트도 없고, 핫로드 코스도, 영화 스타의 저택도 없다. 그저 비가 그다지 내리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이 마 을에는 레인코트보다 깡패들 쪽이 훨씬 많고, 우산보다는 주사기 쪽이 더 많다. 만 입구 부근에서 근근히 생계를 잇고 있는 새우잡이 어부가 가슴에 45구경 세 발을 맞고 죽은 시체를 건져올렸다고 해도 그것은 그다지 드문 사건이 아니었 고, 롤스로이스를 탄 흑인이 다이아몬드 귀결이를 하고 잇다고 해도, 게다가 그 가 은으로 된 시가 케이스로 젊은 백인 여자를 냅다 때렸다 해도 그것은 그다지 진귀한 풍경이 아니다. 요컨대 사우스베이 시티는 젊은이들이 영원히 젊고 그 눈동자는 바다색 같은 블루, 그런 타입의 남캘리포니아가 아닌 것이다. 첫째로 사우스베이의 바다는 푸르지 않다. 거기에는 중유가 새까맣게 떠있어서 선원이 내 버린 담배 꽁초 덕분에 때아닌 불길을 만나게 되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영원히 젊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죽어 버린 젊은이들뿐이다. 물론 나는 관광을 목적으로 사우스베이 시티에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 럴을 구하러 온 것도 아니다. 어느 쪽이든, 사우스베이 시티보다는 오클랜드의 시립 동물원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 내가 사우스베이에 온 것은 한 젊은 여자 를 찾기 위해서이다. 내 의뢰인은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살고 있는 중년의 변호 사인데, 내가 찾는 젊은 여자는 예전에 그곳에서 비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 는 어느 날 몇 장의 서류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는데, 거기에는 극히 개인적인 한 통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잘 있는 얘기이다. 그리고 일 주일 후에 그 편지의 사본과 조심스럽다고는 하기 어려운 액수의 돈을 요구하는 편지가 온 다. 편지의 소인은 사우스베이 시티. 변호사는 그 정도의 돈이라면 줘도 괜찮다 고 생각한다. 50만 달러 정도의 돈으로 세계가 뒤집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일 편지의 원본이 돌아온다고 해도, 협박자 수중에는 몇 다스나 되는 사본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곧잘 있는 얘기이다. 그래서 사립탐정이 고용된 다. 하루에 120달러와 필요 경비, 2천달러의 성공 보수, 이만하면 싸구려다. 남 캘리포니아에서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은 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아무도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그 여자의 사진을 가지고 사우스베이 일대의 바와 클럽을 모조리 뒤지고 다녔다. 이곳에서 손쉽게 누군가를 찾아내고 싶다면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다. 비프스테이크를 한 손에 들고 상어 떼 속을 걸어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어 서, 반드시 누군가가 거기에 달려든다. 그 반응은 기관총 탄환일지도 모르고, 도움이 되는 정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반응인 것은 확실하 고, 내가 바라고 있는 것도 그것이었다. 나는 3일 동안 돌아다니며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의 이름을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나서, 방에 틀어박혀 캔 맥주를 모조리 다 비우고 45구경을 소제하면서 그 반응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괴로운 작업이다. 반드시 뭔가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직업적인 감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그래도 역시 기다리는 건 괴롭다. 이 틀, 사흘, 방 안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신경이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 작한다. 이런 곳에서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밖으로 나가 세상을 들쑤시고 다니 는 쪽이 얘기가 빠르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게 된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 들이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사립탐정의 평균 수명을 줄이게 된다. 아무튼 나는 기다렸다. 서른여섯 살인 나는 아직 죽기에는 너무 이르고, 적어 도 사우스베이 시티의 소변 냄새 나는 뒷골목에서는 죽고 싶지 않다. 사우스베 이 시티에서는 사체보다 손수레 쪽이 정중하게 취급된다. 특별히 이런 곳에서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반응은 3일째 되는 날 오후에 나타났다. 나는 테이블 밑에 45구경을 껌 테이 프로 붙여 두고, 소형 리볼버를 손에 들고는 문을 2인치 정도 열었다. "양 손을 문에 대." 하고 나는 말했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나는 일찍 죽고 싶지 않다. 비록 싸구려라 해도, 나는 나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인 것이 다. "오케이, 쏘지 말아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어 여자를 안 으로 끌어들이고는 문을 잠갔다. 사진대로의, 아니 사진 이상으로 멋진 여자였다. 근사한 금발과 로켓 같은 유 방, 중년의 사내가 엉덩이 털까지 뽑힌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녀는 몸에 꼭 끼 는 원피스에 6인치나 되는 굽이 있는 하이힐을 신고, 에나멜 핸드백을 한 손에 들고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버번밖에 없는데, 마실 텐가?" "마시겠어요." 나는 손수건으로 글라스를 닦고 나서, 거기에 손가락 세 개분의 올드 크로우 를 부어 그녀에게 건넸다. 여자는 입술을 ㅎ고는 대담하게 반 잔 정도를 마셨 다.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 "그렇다면 좋겠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우선 편지 얘기를 했으면 하는데." "좋아요. 편지 얘기 말이죠? 로맨틱하군요."하고 여자는 말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편지를 말하는 거죠?" "당신이 훔친 다음, 그걸로 누군가를 협박해서 금품을 뜯어낸 편지 말이지. 아직 생각나지 않나?"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하지만 난 편지 같은 건 훔치지 않아요." "그럼 로스앤젤레스의 변호사 밑에서 비서 일을 했던 적도 없나?" "물론이에요. 난 그저 이곳에 와서 당신과 좋은 일을 하면 100달러를 받을 수 있다기에......." 검은 덩어리가 위(胃)의 입구를 향해 치밀어 올라왔다. 나는 여자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테이블 밑에서 45구경을 뜯어내어 침대 밑에 배를 깔고 누웠다. 그 와 동시에 기관총의 탄환이 진 크루퍼의 드럼 롤 같은 소리를 내며 방으로 날아 들었다. 그것은 문을 부수고, 창을 깨고, 벽지를 찢고, 꽃병 조각을 온 방안에 흩뿌리고, 매트리스를 솜사탕으로 바꾸어 버렸다. 톰프슨 기관총풍(風) 세계의 재건이었다. 그러나 기관총이란 것은 그 시끄러움에 비해 그다지 효과가 없다. 확실히 그 것은 고기를 다지는 데는 적합하지만, 사람을 정확히 죽이는 무기는 아니다. 스 다스러운 여류 칼럼니스트와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경제 효과의 문제이다. 탄 창이 비는 철컥 하는 소리를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가 봐도 반해 버 릴 정도의 빠른 속도로 연달아 네 번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은 반응이 있었지 만, 두 발은 실패였다. 5할의 확률이라면 도저스 팀의 4번 타자감은 된다. 그 러나 캘리포니아 주의 사립탐정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꽤 잘 하시는군, 탐정 나으리."하고 문 저쪽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거 기까지야." "이제 알겠군. 협박 같은 건 애초에 없었어. 편지 얘기도 거짓말이야. 제임스 사건 때문에 내 입을 막고 싶었을 뿐이었군." "그렇소, 탐정 양반.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당신이 입을 열면 많은 사람들이 곤란해져. 그러니 당신은 사우스베이 시티의 싸구려 호텔에서 매춘부와 함께 죽는 거야. 틀림없이 좋지 않은 평편이 날 거야." 꽤 훌륭한 계획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대사가 너무 길다. 나는 문을 향해 나머 지 세 발의 45구경을 쏘았다. 한 발만이 반응이 있었다. 3할 3푼 3리, 은퇴를 할 때가 됐다. 누군가가 15달러짜기 화환 정도는 보내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납의 샤워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번 것은 길게 계속되지는 않았다. 두 개의 총성이 진 크루퍼와 바디 리치의 드럼 배틀처럼 겹쳐졌고, 10초 후에는 모든 것이 끝났다. 막상 일이 벌어지면 경관은 빠르게 일을 처리한다. 그 막상 이라는 때가 될 때까지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이젠 오지 않을 건가 하고 생각했지."하고 나는 소리쳤다. "물론 오지." 하고 어피니언 경위는 어딘지 느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 좀 그놈이 지껄이게 놔 두고 싶었던 거야. 자네 정말 멋있게 해냈네." "상대는 누구야?" "사우스베이 시티의 어지간한 깡패지. 부탁한 놈이 누군지 무슨 수를 써서라 도 기필코 입을 열게 만들겠어. 로스앤젤레스의 변호사도 붙잡을 거고. 믿어도 되네." "여어, 아주 열심이로군." "사우스베이 시티도 이제 슬슬 깨끗해져도 좋을 때지. 자네의 증언에 따라서 는, 시장(市長)자리까지 위태위태할 거네. 자네 기호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 만, 세상에는 매수되지 않는 경관도 있는 거야."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번 내 사건이 함정이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로 군?" "알고 있었지. 자네는?" "나는 의뢰인을 의심하지 않네. 그게 경관과 다른 점이야." 그는 빙긋 웃어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경관의 웃음은 언제나 똑같다. 연금 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식으로 웃는다. 그가 나간 뒤에는 나와 여자와 수백 발의 납 탄환만이 남았다. 사우스베이 시티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사체보다 손수레 쪽이 정중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강치 (남태평양에 서식하는 포유동물로 물개와 비슷하나 조금 작음) 강치는 고독했다.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몇 명인가 친구도 있고, 함께 마작을 하는 일도 있 었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기 때문에, 종합해 보면 서로 엇비슷하다. 때로 는 함께 술을 마시자는 권유를 받는 일도 있다. 걸 프렌드도 있었다. 2시간에 5번 정도 섹스를 할 수도 있었다. 1시간에 2.5 회이므로, 강치들의 평균치에 비해서도 괜찮은 편이다. 하긴, 강치에게는 전희 가 필요치 않으니까, 대단한 수고랄 순 없지만. 또한 배가 고픈 것도 아니다. 전갱이라면 닥치는 대로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치는 고독했다. 바다에 떠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강치는 자신이 강치라는 사실에 한없는 허무감을 느꼈다. "어째서 나는 강치인 걸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녀석이 요즘 좀 이상하다, 라는 소문이 강치들 사이에 금세 퍼져갔다. 본래 강치의 세계는 매우 좁기 때문에 소문은 금세 퍼지기 마련이다. "얼마 전에 마작을 하던 때도 말야, 천화(天和)를 올리고 있던 주제에 더블 리 치를 걸었다구."하고 한 마리가 말했다. "아니, 요전에도 록본기의 교차점에서 차에 치일 뻔했어."하고 다른 한 마리가 말했다. 장로 강치는 걱정이 되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쓸데없는 참견인지도 모르겠지만, 모두가, 뭐랄까, 걱정을 하고 있어서 말야." "네에."하고 강치가 말했다. "아니 뭐, 말하고 싶지 않다면 괜찮은데, 그러니까......뭔가 고민거리라도 있는 게 아닐까 해서 그러는 거야." "아, 예." "배가 고픈 건 아니겠지?" "배는 든든합니다." "마스터베이션이라든가, 그런......." "여자 친구는 있습니다." 장로 강치는 단념하고 전화를 끊었다. 잘 모르겠는걸, 하고 장로 강치는 모두에게 말했다. "하지만 뭔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아." "큰일이군요."하며 모두가 말하고서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럼, 강치 축제라도 열죠."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응, 그게 좋겠어."하고 모두가 말했다. 강치라는 동물은 뭔가 곤란한 일이 있 으면 반드시 강치 축제를 연다. 강치 축제는 사흘 낮 사흘 밤 계속되었다. 그것은 실로 성대한 축제였다. 월간 [강치 문예] 눈을 떠 보니 근사한 날씨였다. 나는 바다로 나가 아침 햇살 아래서 한바탕 헤엄을 친 후 아침을 먹고, 소화를 돕기 위해 빙산 주변을 헤엄쳐 다니며 전갱 이와 다시마를 땄다. 갈매기가 다가와 먹음직스러운 전갱이군요, 하고 탐나는 듯한 얼굴로 말을 걸어 왔지만,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려 버렸다. 한 마리의 갈 매기에게 전갱이를 주면, 그러는 동안에 온 세계의 갈매기들이 나는 전갱이를 탐내게 된다. 미안하지만, 나는 한 마리의 평범한 강치지 신도 존 레논도 아니 다, 라고 설명을 했더니 갈매기는 단념하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이럭저럭 점심 때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점심 을 먹으니 졸음이 와서 바다에 누워 낮잠을 자기로 했다. 해안에 당도해 보니 아까 보았던 갈매기가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신문지로 싼 전갱이를 한 마리 꺼내 그에게 주었다. "여어, 나리, 미안합니다."하고 갈매기는 눈을 가늘께 뜨고 말했다. "나리는 틀림없이 좋은 분이라는 걸 난 첫눈에 알았죠." 바다에 떠 누워 있자니, 따뜻한게 아주 기분이 좋았다. 내 주위에도 전부 합 해 20마리 정도의 강치가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하늘을 향해 기세 좋게 소변을 보곤 했는데, 그것이 햇빛에 반짝거리며 빛나 매우 보기 가 좋았다. 눈을 떠 보니 저녁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헤엄을 쳐 집으로 돌아 와, 맥주를 마시며 오징어 햄버거를 먹었다. 아내가 식탁에서 아들에게 "얘야, 파파에게 보여 드릴 게 있었지?" 하고 말했 다. "응"하면서 아들은 나에게 성적표를 내밀었다. 나는 성적표를 펴 보았다. <헤엄치기>와 <낮잠>이 5였고, <작문>과 <요리>가 4였고, <마작>과 <산수> 가 3이었다. 어쩐지 내가 어렸을 때의 성적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 열심히 해, 우물우물."하고 나는 말했다. 저녁식사를 마쳤을 무렵, 늘 그랫듯이 [월간 강치 문예]의 나카야마(中山)로부 터 마작을 하자는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에 나는 밖으로 나갔다. 반장(班莊)을 네 번해서 가족 선물 살 돈을 벌어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12시였고, 아내와 아 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 초밥 상자를 넣어 두고,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아내의 귀밑머리에 두세번 손가락을 대 보고는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 보니 근사한 날씨였다. 나는 바다에서 한바탕 헤엄을 치고 나서 아침을 먹고, 소화ㅡ 돕기 위해 빙산 주변에서 전갱이와 다시마를 따 는 동안 점심 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으니 졸음이 와서 바다에 누워 낮잠을 잤는데, 갈매기 울음소리 때문에 3시에 잠이 깼다. 몇 백 마리나 되는 갈매기가 나를 찾아 하늘을 빙빙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어 쩔 수 없이 잠수를 해서 집으로 돌아와, 응접실 소파에서 나머지 낮잠을 잤다. 갈매기도 보통때는 결코 나쁜 동물은 아니지만, 전갱이에 대해서만은 태도가 싹 바뀌어 버린다. 곤란한 일이다. 저녁식사를 마쳤을 무렵 [월간 강치 문예]의 나카야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원고를 받으러 가도 괜찮겠습니까?"하고 나카야마가 말했다. "원고라니, 무슨 원고?"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시면 곤란한데요. 3개월 전에 부탁드렸던 <전국 강치 미녀 누드 콩쿠 르>에 대한 선평말입니다. 어제 분명히 확인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아아, 그런가?"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및부터 뭔가 해야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긴 했었찌." "그럼 9시에 찾아뵐 테니까,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월간 강치 문예]는 이름만은 훌륭했지만, 사실은 <월간>도 아니고 <문예지> 도 아니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창간 무렵에는 <강치 르네상스>라는 고매한 이상을 가진 꽤 훌륭한 잡지였던 듯하지만, 긴 세월동안 숙명적인 강치성에 질 질 끌려들어, 어느 사이엔가 기분이 내킬 때만 나오면 패거리끼리의 마작과 음 주에 관한 잡지가 되어 버렸다. 때때로 나카야마가 "이래선 안 됩니다."하고 말 을 꺼내면 다른 사람들도 그 때는 맞장구를 치긴 하지만, 어차피 술을 먹고 하 는 얘기이기 때문에 아침이 되면 모두 잊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건 어쨋든 이렇게 되어 버린 거고, 이렇게밖에는 되지 않은 거니까 이것저것 생각 해 봐야 어쩔 수가 없다. 나카야마도 지금은 젊으니까 힘이 넘치지만 2,3년 정 도 지나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강치가 되면 수영과 낮잠과 마작으로 시간을 질질 끌며 즐겁게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강치이고, 결국 모든 강 치는 자신의 강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선평을 위한 누드 사진 몇 장을 가지고 바다로 나가 해면에 떠서 달빛으 로 사진을 보고 있던 중에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꿈속에서 나는 테이블의 다 리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오크재의 테이블이었는데, 그 위에는 꽃병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은 무슨 이유에선지 아오야마학원 대학의 정문 앞에 놓여 있었따. 아오야마 거리의 건너 편에는 특설 스테이지가 설치되 어 잇었는데, 그곳에서는 토니 베네트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고 있었다. 꿈속에 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하얀 눈빛.......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나는 토니 베네트가 나를 향해, 테이블 다리인 나를 향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찌르레기 모양을 한 저금통으로 변해 있었다. 찌르레기 저금통에 관해서 는 재미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몇 시간이나 나는 찌르레기 저금통이엇 으므로, 만일 내가 눈을 뜨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찌르레기 저금통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눈을 뜬 것은 9시였다. 강치로 돌아온 나는 사진을 입에 물고 헤엄을 쳐 집 으로 돌아왔다. 나카야마는 이미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카야마는 법정 대 학 사회학부를 막 나온 인탤리 강치인데, 브룩스 브라더스의 슈트를 세 벌이나 갖고 있다. 그러나 마작은 약하다. "원고는 다 됐겠죠?"하고 나카야마는 걱정스럽게 내게 물었다. 아내가 나와서 나카야마와 내게 커피를 주었다. "나카야마 씨도 슬슬 부인을 얻으셔야죠. 그렇잖으면 이미 좋은 분이 있으신 가요, 호호호."하고 아내가 말했다. "아뇨, 그런 사람은 없어요. 하하하."하고 나카야마가 말했다. 그 동안에 나는 술술 원고를 써 나갔다. "다음으로 상위에 오른 강치에 대해 짧게 평을 하자면, 심사 번호 141호는 훗 카이도(北海道)출신으로 균형이 좋고, 몸매가 늘씬하며, 털은 곱슬거림이 선명하 고 탄력이 풍부하며, 모속(毛束)의 상태도 명료합니다만,약간 품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118호는 야마카타 현(山形縣) 출신으로, 체형은 폭.길이. 두께의 균형이 아주 좋고, 잘 발달된 대퇴부에서 둔부와 허리로의 멋진 흐름과 폭이 있는 단단한 어깨에 이르는 부분, 또 등줄기의 피하 지방 위에 나타난 담 홍색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양쪽 다 유방 및 성기에 대해서 는 꼬집어 말할 만한 결점이 없었습니다. 193호에 대해서는......" 이런 문장을 쓰고 있자니, 쓰고 있는 나도 흥분이 된다. 그런 흥분을 아내나 나카야마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나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원고지 3장분의 강평 을 완성해, 그것을 나카야마에게 건네 주었다. "허어, 언제나 그렇지만 정말 훌륭합니다."하고 나카야마가 말했다. "아니 뭘." 하고 나는 말했다. 그 후 나는 [월간 젊은 강치]의 도츠카씨를 불러내어 함께 바다에 떠서 즐겁 게 술을 마셨다. 별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밤이었다. 내일도 좋은 날씨일 게 틀 림없다. 서재기담 처음 보는 얼굴의 하녀였다. 아마 새로 들어왔을 것이다. 수수한 무늬의 기 모노에서 희미하게 향 냄새가 나고 있었다. "선생께서는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서재?"하고 나는 무의식중에 되물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선생이 나를 서재에 들여보내 주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나는 선생 의 얼굴을 본 적도 없다. 나는 언제나 현관 참에 붙어 있는 팔각형의 거실로 가, 그곳에서 벙어리 미소녀로부터 그 달의 원고를 받는다. 그녀는 선생의 먼 친척인데, 이곳에 거두어져 비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선생은 절대로 사람들 앞에는 나서지 않는다. 출판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나는 적잖이 놀라기는 했지만, 선생이 서재로 오란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 그 다지 이의를 달 이유는 없었다. 만일 이의를 달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거기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아무튼 한 달에 한 번 원고를 받아 회사로 갖고 돌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유일한 입장인 것이다. 하녀가 앞장을 서서 긴 복도를 소리 없이 걸어갔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집이다. 만듦새는 낡았지만, 낡은 만큼 세세한 손질이 구석구석까지 스며 들어 있었다. 정원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진달래, 황매화나무, 사리수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누렇고 어슴푸레한 3/4의 달이 층층나무 잎 사이로 떠 있었다. 어딘가에서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은 아련한 4월 의 밤이다. 하녀는 복도 막다른 곳의 바로 앞에 멈춰서서 마름모 모양의 젖빛 유리가 있 는 낡은 문을 콩콩하고 작게 노크했다. 누가 들어도 귀의 착각이라고밖에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노크이다. 그러나 분명히 응답은 있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하고 작은 목소리로 하녀가 말했다. "들여보내라."하고 안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났다. 들어가시죠, 하고 하녀가 눈으로 신호했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문을 열 었다. 방안은 지독히 어둡고 뜨뜻미지근했다. 오래된 책과 노인 특유의 냄새로 가 득차 있었다. 전등은 꺼져 있었다. 입구 정면에는 빼곡히 책이 들어찬 거대한 책장이 있었고, 그 건너 편에 작은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모두가 아물아 물거리는 입자가 섞인 기묘한 어둠에 쌓여 있었다. 나는 그 어둠에 눈을 익히 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어둠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둠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늘 신세를......." "인사는 필요 없네."하고 사람의 그림자가 말했다. 작고 쉬긴 했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거기 앉게." 나는 <거기>를 찾았다. 오른쪽에 낡은 소파가 있었다. 앉는 느낌이 좋은 소 파이긴 했지만 이런 어둠 속에서는 누군가에게 뒤로부터 꼼짝 못하게 꽉 안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이 좀 안 좋아서 말야."하고 말하며, 선생은 한바탕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난 빛을 견디지 못하네. 빛을 보면 머리가 빙빙 돌아. 그래서 하루 종일 이 곳에 있지. 여긴 창문도 없네. 밤새워 일을 하고, 아침이 되면 내실에서 잠을 자네. 하지만 자네에겐 이곳이 지나치게 어둡겠지." "저는 괜찮습니다만, 선생님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내 몸은 남이 걱정해 줄 정도는 아냐. 빛을 보면 머리가 아플 뿐이지. 어둠 속에서도 원고는 쓸 수 있고, 이걸 다 쓸 때까지는 죽을 수가 없네." "그렇고 말고요."하고 나는 말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작업에 대해서는 독 자들로부터 압도적인 반향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저번<시계 풀의 엄숙한 피>에 대해서는........" "아첨은 그만두게. 시끄럽기만 할 뿐이야." "죄송합니다."하고 나는 사과했다. 한동안 깊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바깥에는 바람 한 점 없었고, 살랑대는 나뭇 잎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붙박이 책장이 빼곡히 들어찬 고서들이 나의 몸 을 조금씩 조금씩 죄어들게 했다. "자넨 아름다운 목덜미를 갖고 있군."하고 선생은 말했다. "네에?" "목덜미 말이야. 희고 매끄럽고 반들반들하군." "고맙습니다."하고 나는 영문도 잘 모른 채 말했다. 사이즈가 좀 작은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기 때문에 목 근처가 근질근질했다. "나이는?" "스물다섯입니다." "혼잔가?" "네, 독신입니다." "죽는 게 무서운가?" 나는 고개를 들어 쌓여 있는 책 사이로 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어슴 푸레한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무섭지는 않아."하고 선생은 조용히 말했다. "익숙해지면 죽음이란 건 무서운 게 아냐. 요는 상상력이지. 자기 몸 안을 도는 피를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게 바로 상상력이네." "예." "이리로 받으러 오게." "네?" "원고 말이네. 원고를 받으러 온 거 아닌가?" 이유 없이 싫은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 벽의 어두컴컴한 틈새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두려움이었다. 공기에 닿아 있는 피부가 사포에 문질러지듯이 따끔 거리며 아팠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하고 나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나는 단 지 한 사람의 노작가의 집에 원고를 받으러 온 것일 뿐이다. 그러나 몸은 뜻대로 잘 움직이지 않았다. 몸 안의 특수한 감각이 지진계의 바늘처럼 살포시 흔들리고 있었다. 몸은 이대로 방을 뛰쳐나가 쾅 하고 문을 닫아 버리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원고도 없이 회사에 돌아갈 수는 없다. "왜 그러나?"하고 선생은 비웃듯이 말했다. "이번 달 원고는 필요 없는 듯하 군." "지금 가겠습니다."하고 말하며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발밑을 확인해 가면서 어둠 속을 네 걸음 정도 걷다가 책상에 부딪혀 멈춰섰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선생이 후욱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착하군."하고 선생은 말했다. 목소리의 피치가 얼마간 높아지고, 떨리고 있었 다. "착하군. 손을 내밀게." 나는 책상 위로 가만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둠 속에서는 자기 손의 모양조 차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공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침묵만이 먼지처럼 바닥에 쌓였다. 다음 순간, 내 옆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서늘한 공기의 막이 내 뺨을 휙 하고 스쳤다. 낡은 우물 속에서 기어나온 듯한 섬뜩한 냉기였다. 나는 뭔가에 튕겨 진 것처럼 책상에서 훽 하고 물러섰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시큼한 냄새가 나 는 미끈미끈한 손이 나의 손을 꽉 잡고 책상 앞으로 끌어갔다. 대단한 힘이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상대의 몸이 있음직한 곳을 힘껏 차올렸다. 나의 발은 정확히 상대의 몸을 포착했지만, 반응은 없었다. 미끈미끈한 젤리덩어리가 나의 발을 푹 싸 안았다. 온 몸의 숨구멍이 얼어붙었다. 젤리는 발목에서 허벅지로 조금씩 조금씩 기어올라온다. 책상 저편에서 선생이 킁 하고 콧소리를 냈다. 나는 책상 위에 있는 문진을 왼손으로 들어 그 소리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유리덩어리가 두개골을 치는 둔탁한 소리와 으깨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겹쳐졌다. 그 다음 일은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구두도 신지 않고 소나무 숲을 벗어나 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오른쪽 손목에는 아 직도 그 무서운 감각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 서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 었던 것이다. 역의 벤치에는 벙어리 미소녀가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한밤중이 다 된 그 무렵, 그녀 외에는 승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안심하 는 듯했다. 뺨에는 눈물 줄기가 빛나고 있었다. 그 집에는 요즘 무서운 일만 일어나고 있어요, 하고 미소녀는 손짓으로 말했 다. 난 이제 참을 수 없어요, 그곳은 뭔가에 둘러싸여 있어요,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주세요. "그래, 그러는게 좋겠군."하고 나는 말했다. "한시 바삐 이곳을 떠나자." 멀리서 건널목의 경보음이 들렸다. 막차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플랫 폼에 서서 어둠 속에서 전차의 불빛을 찾았다. 해안을 따라 커브를 그리는 노 란 불빛이 내 눈을 언뜻 스쳤다. 나는 간신히 한숨을 돌리고 포켓 속의 담배를 찾았다. 다음 순간, 미끈거리는 덩어리가 나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리고 시큼한 냄새 가 나는 네 개의 손이 나의 목을 쇠사르처럼 조였다. "자아, 서재로 돌아가는 거예요."하고 벙어리 미소녀가 쉰 듯한 목소리로 속삭 였다. "그리고 모두 함께 녹아 버리는 거예요." 내 머릿속에서 건널목의 경보음이 조금씩 엷어져갔다. 매발톱꽃주의 밤 "역시 안 됩니까?"라고 나는 말했다. "이봐요, 무론 안 되오."라고 문지기는 이쑤시개로 이빨 사이를 쑤시면서 말했 다. "당연하지 않소? 벌써 6시 30분이나 지났단 말이오." "정말 잠시 동안만이라도 좋습니다. 잊어버린 물건을 찾으면 곧 돌아올 테니 까요." "그건 곤란하오. 들키면 내가 혼나니까."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세상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거 아닙니까? 이봐요, 얼마 전만 하더라도 당신이 어린이 애완용으로 기린이 갖고 싶다고 해서......." "하긴, 얼마 전에는 그랬었지만 말야." 라고 말하고서 문지기는 혀를 차며 고 개를 저었다. "할 수 없군. 30분, 딱 30분만이오. 늦어도 7시 까지는 여기로 돌 아와 주시오. 이런 일은 원래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나는 문지기의 손을 잡았다. 문지기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철문의 자물쇠를 열고 나를 안으 로 밀어넣었다. "이봐요, 부디 지하철은 조심하시오. 여하튼 그 녀석들은 해가 지면 배가 고 파서 신경이 곤두서니까." 메마른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해가 져 버린 탓에 안은 캄캄했다. 나는 손을 더듬어 벽의 스위치를 찾아 전 등을 켰다. 전등은 건너다 보이는 초원을 연한 블루로 떠올렸다. 초원에는 꽤 많은 기린이 뒹굴고 있었다. 정말이지 기린투성이었다. 기린은 낮 동안은 바나 나 껍질 속에 숨어 있고, 밤이 되면 이런 식으로 초원에 누워서 잔다. 바나나를 먹으려다가 잘못해서 기린을 베어 먹는 일도 종종 있다. 나는 기린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이 없다. 초원의 한가운데쯤에서 지하철을 만났다. 나는 풀 뒤에 몸을 숨기고 지하철 을 지나 보냈다. 문지기가 말했던 것처럼 녀석들은 위험하다. 내 옆을 지날 때 전압기가 타닥타닥 기분나쁜 불꽃을 날렸다. 그리고 지하철은 사라져 갔다. 10분 정도 지나 예의 오래된 우물에 도착했다. 오래된 우물 앞에는 두 마리 의 매발톱꽃이 한창 주연을 베풀고 있었다. "미안합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잠깐 밑으로 내려가고 싶은데요." "좋고 말고요."하고 나이 많은 쪽의 매발톱꽃이 말했다. "자, 얼마든지요."하고 젊은 쪽의 매발톱꽃이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한잔 하십시다."라고 젊은 쪽이 말했다. "글쎄요, 정말 바쁘긴 하지만, 뭐 한잔 마시겠습니다." 매발톱꽃이 술을 권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다. 매발톱꽃은 술자리에서의 예의 에 대해서는 매우 까다롭고, 게다가 매발톱꽃이 빚은 술은 정말 맛있다. 나는 나무 잔에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하하하하하하, 우하하하하하"하고 나는 웃었다. 매발톱꽃의 세계에서는 많이 웃는 것이 예의라고 되어 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라고 두 마리의 매발톱꽃은 칭찬해 주었다. "아니오, 정말이지 잘 마셨습니다. 하하하하." 매발톱꽃은 기뻐하며 옆에 있던 작은 병에 매발톱꽃주를 담아 나에게 가져가 라고 했다. 기분 좋은 작자들이다. 매발톱꽃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우물을 내려갔다. 마지막 다섯 단은 뛰어내렸 다. 뛰어내리는 순간 기린의 발을 하나 밟아 버렸다. "실례."하고 나는 말했다. 기린은 한동안 투덜투덜 불평을 했지만, 곧 다시 잠 들어 버렸다. 하지만 우물 속에까지 들어오다니 본래 기린쪽이 잘못한 것이다. 지하도를 500미터 정도 나아가자 해안이 나왔다. 파도 소리가 들리고 바다 냄새가 났다. 해변에 튀어나온 바위에는 나이든 갈매기가 앉아 있었다. "미안합니다."하고 나는 갈매기에게 말을 걸었다. "이 근처에 빨간 가죽 표지 의 주소록이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까?" "쯧쯧쯧, 안됐군 젊은이."라고 갈매기가 말했다. "물건은 소중히 해야지." "예, 면목 없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한 번 잃어버린 물건은 좀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아." "그 말이 맞습니다." 갈매기는 "후유."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빨간 가죽 표지의 주소록 말인가?" "그렇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아아. 그거라면 아까 거북이가 소나무 밑에 묻고 있었는데." 나는 갈매기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소나무 밑을 파 보았다. 30센티 정 도 팠더니 주소록이 나왔다. 정말이지 거북이라는 동물은 손에 닿는 대로 물건 을 묻어 버린다. 나는 주소록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우물을 올라갔다. 우물 입구에서는 아직 두 마리의 매발톱꽃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잘 자요."라고 나는 말했다. "잘 자요."라고 매발톱꽃들은 말했다. 6시 50분. 나는 서둘러서 초원을 빠져나갔다. 꽤 많은 기린을 밟아서 짓뭉개 버렸다. 미안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문지기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다. 운 좋게 지하철은 만나지 않았다. 7시 2분 전에 나는 철문을 똑똑 노크했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었다. "시간에 맞게 왔군요."라고 그는 말했다. "아슬아슬했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 뒤에 우리들은 농담을 하면서 매발톱꽃주를 마셨다. 달이 아름다운 기 분 좋은 밤이었다. 회전목마의 데드 히트 여기 수록된 문장을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내게는 약간의 저항감이 있 다. 보다 확실하게 말하면, 이것은 정확한 의미에서의 소설이 아니다. 내가 소설을 쓰려고 했을 때, 나는 모든 현실적인 제재-그런 것이 만약 있다 면 하는 말이지만-를 커다란 냄비에 한 데 집어넣고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 도로 용해한 후에, 그것을 적당한 모양으로 찢어내어 사용한다. 소설이라는 것 은 어느 정도는 그런 것이다. 리얼리티란 것도 그런 것이다. 빵 가게의 리얼리 티는 빵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소맥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 수록된 문장은 원칙적으로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나는 많은 사 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물론 나는 당 사자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세부를 여러 가지로 주물렀기 때문에 완전한 사실이 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얘기의 줄거리는 사실이다. 얘기를 재미 있게 하 기 위해 과장된 것도 없고 덧붙인 것도 없다. 나는 들은 그대로의 얘기를 되도 록 그 분위기를 깨지 않도록 하면서 문장으로 옮긴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문장을-감정적으로 스케치라고 부르기도 하자-처음에는 장편에 착수하기 위한 워밍업 삼아 쓰기 시작했다. 사실을 되도록 사실 그대로 써 두는 작업은 나중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일로 문득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처음에 나는 이 스케치들을 활자화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것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써서는 서재의 책상 속에 넣어 둔 여타의 무수한 단편적인 문 장들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될 처지였다. 그러나 하나 둘 써 나가면서, 나는 그 얘기들 하나 하나가 어떤 공통점을 갖 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들은 <얘기해 주었으면 하는>것이다. 그것은 내게 기묘한 체험이었다. 예를 들어 소설을 쓸 때, 나는 내 스타일과 소설의 전개를 따라 극히 무의식 중에 재료가 되는 단편을 고르고 있다. 그러나 나의 소설과 나의 현실생활이 구석구석까지 합치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그러고 보면, 나 자신과 나의 일상생활도 딱 맞아 떨어지게 합치되고 있지는 않다), 아무리 해도 내 안에 소설 로는 제대로 쓸 수 없는 앙금 같은 것이 쌓이게 된다. 내가 스케치로 썼던 것 은 그 앙금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앙금은 나의 의식 저 밑에서, 어떤 형태를 빌어 얘기될 기회가 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앙금을 모으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의 얘 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내 얘기 를 하기보다는 남의 얘기를 듣는 쪽을 훨씬 좋아한다. 게다가 내게는 다른 사 람의 얘기 속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재능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실, 대개의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내 자신의 얘기보다 훨씬 재미 있게 느껴진다. 그것도 특수한 사람의 특수한 얘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얘 기 쪽이 훨씬 재미 있다. 이러한 능력-남의 얘기를 재미 있게 들을 수 있는 능력-이란 구체적으로 뭔가 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근래 몇 년 동안 소설을 쓰고 있지만, 소설 가로서도 역시 이런 능력이 어떤 도움이 되었던 경험은 한 번도 없다. 아니 몇 번인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생각은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얘기를 하고, 나는 그것을 경청하고, 그 얘기가 내 속에 쌓여갔을 뿐이다. 만일 이러한 능력이 나의 소설가로서의 특질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참을성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한다. 재미라 는 것은 참을성이라는 필터를 통해야 비로소 표출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고, 소설의 문장이라는 것들 대부분은 그러한 위상 위에 성립한다. 재미라는 것은 뱀의 입을 비틀어 컵에 담아서는 자, 여기있습니다, 라고 내미는 그런 종류 의 것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기우제의 춤 같은 것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것은 이 문장의 취지와는 관계가 없다. 문맥을 원래로 되돌리자. 사람들 얘기의 대부분은 사용할 길이 없는 채로 내 안에 쌓인다. 그것은 어 디로도 가지 않는다. 밤에 내리는 눈처럼 그저 조용히 쌓여가는 것이다. 이것 은 남의 얘기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공통되는 괴로움이다. 가톨 릭의 교회사(敎誨師)는 사람들의 고백을 천상(天上)이라는 대조직에 넘겨줄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편리한 상대도 없다. 자기 자신 속에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커슨 맥글러스의 소설 속에도 조용한 벙어리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누가 무 엇을 얘기해도 친절하게 귀를 기울이며, 어떤 때는 동정하고, 어떤 때는 같이 기 뻐한다. 사람들은 끌려들 듯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여러 가지 고백이나 숨겨 두었던 얘기를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청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그에게 강요했을 뿐, 누구 하나 그의 기분을 알아 주지 못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그러나 물론 내 자신의 모습을 그 벙어리 청년에게 오버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하는 일이 있고, 게다가 문장도 쓰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금이라는 것은 몸 속에 확실하게 쌓여가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소설이라는 형태를 일시적으로 방기했을 때, 극히 자연스럽게 이러한 일련의 제재가 내 의식의 수면에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리라. 나에게는 이 스케치으 제재들이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어떤 소설 에도 어떤 문장에도 편입되는일 없이, 내 속에서 줄곧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 렇게 생각하면, 나는 왠지 모르게 거북한 느낌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러한 제재를 문장으로 만들어서 내가 조금이라도 편안한 기분이 되 느냐 하면, 그런 일은 없다. 이것만은 내 자신의 변변치 못한 명예를 위해서라 고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는 내 자신이 편해 지기 위해 이러한 스케 치를 쓰고,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도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말 해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다. 나 자신의 정신 이 해방되는지 어떤지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고, 적어도 지금 이런 문장 을 씀으로써 나의 정신이 해방될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기 표현이 정신의 해방에 기여한다는 것은 미신이며, 호의적으로 말한다고 해도 신화이다. 적어도 문장에 의한 자기 표현은 누구의 정신도 해방시키지 못 한다. 만일 그러한 목적을 위해 자기 표현을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런 생 각을 단념하는 게 좋다. 자기 표현은 정신을 세분화시킬 뿐이며, 그것은 어디에 도 도달하지 못한다. 만일 뭔가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착각 이다. 사람은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쓰는 것 자체에는 효용 도 없고, 그에 따른 구원도 없다. 그런 이유로 앙금은 변함 없이 앙금인 채로 내 안에 남아 있다. 나는 언젠가 그것을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 새로운 소설 속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넣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만일 넣지 않는다면, 그 앙금들은 내 속에 봉인된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갈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앙금을 이런 형태의 스케치로 정리할 수밖에 다른 수가 없다. 이것이 정말 올바른 작업인지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진짜 소설을 썼어야만 하지 않았나, 하는 얘기를 들으면, 나는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행위는 선(善)이다>라고 말한 어느 살인범의 얘기를 인용할 수밖 에 없다. 내게는 이러한 제재를 이러한 스타일로 정리한 것 외에, 달리 취할 방 법이 없었다. 내가 여기 수록한 문장을 <스케치>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소설도 논픽션도 아니기 때문이다. 제재는 어디까지나 사실이고, 그것을 담은 그릇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만일 각각의 얘기 속에 뭔가 기묘한 점이나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면,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다 읽는 데 그다지 인내가 필요치 않았 다면, 그것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리고 그 얘기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어떤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앙금이란 그 무력감을 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이 이 무력감의 본질이다. 우리 들은 우리들 자신을 집어넣을 수 있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운행 시스템을 소유하 고 있지만 이 시스템은 동시에 우리들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회전목마 와 흡사하다. 그것은 정해진 장소를 정해진 속도로 돌고 있을 뿐이다. 어디에 도 가지 않고, 내릴 수도 갈아탈 수도 없다. 누구를 앞지르지도 않고, 누구에게 앞지름을 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회전목마 위에서 가상의 적을 향해 치열한 데드 히트(격심한 경쟁)를 전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사실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 기묘하게,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비치는 것은 어 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어떤 종류의 내재적인 힘 의 압도적인 많은 부분은 그 발생과 동시에 없어져 버리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아울러 그 공백이 우리 인생의 다양한 위상에 기묘하고 부자연스러운 왜곡을 초래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죽은 왕녀를 위해 애지중지 자라난 탓에, 그 결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을 버린 예쁜 소 녀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녀는 남의 기분에 상처를 입히는 데 가히 천재적이었 다. 그 당시 나는 젊었기 때문에(스물하나인가 둘이었다), 그녀의 그런 성향을 상 당히 불쾌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렇게 습관적으 로 타인을 상처 입힘으로써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자신을 제어할 방법을 찾지 못했 던 것이리라. 때문에 누군가가, 그녀보다 훨씬 강한 누군가가 그녀의 몸 어딘가 를 요령 있게 절개해서 그 에고를 방출시켜 주었다면 그녀도 훨씬 편해졌을 것 이다. 그녀도 역시 구원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주변에는 그녀보다 강한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고, 나 또한 젊었을 때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냥 단순히 불쾌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어떤 이유로-이유 같은 것이 전혀 없었을 때도 가끔 있었지만-누군가 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결심하면, 어떤 왕의 군대를 가지고도 그것을 막을 수 없 었다. 그녀는 그 가엾은 희생자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솜씨 좋게 막다른 골목으로 끌어들여 벽으로 몰아넣고는, 마치 푹 삶은 감자를 주걱으로 으깨듯이 깨끗하게 상대를 때려눕혔다. 나중에는 얇은 종이 정도의 잔해밖에 남지 않았 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확실히 대단한 재능이었다. 그녀는 결코 논리적으로 달변인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의 감정적인 약점을 순 간적으로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마치 무슨 야생동물처럼 가만히 엎 드려 호기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타이밍을 포착해 상대의 연약한 숨통에 달려들 어서는 찢어 놓는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가 하는 말은 제멋대로인 억지이거나, 요령 좋은 속임수였다. 때문에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면 당한 당사자나 주위 에서 보고 있던 우리나 어째서 그 정도의 일로 승부가 나 버린 것일까 하고 고 개를 갸우뚱하게 되는데, 요켠대 그 때는 그녀에게 약점을 꽉 잡혀 있기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복싱에서 말하는 <발놀림이 멈춘>상 태이다. 그 다음에는 매트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나는 다행히 그녀에게 그런 일을 당한 적은 없었지만, 그런 광경은 몇 번이나 보아왔다. 그건 논쟁도 아니 고, 말다툼도 아니고, 싸움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피비린내나는 정신적 학살이 었다. 나는 그런 면이 몹시 싫었는데, 그녀 주위의 남자들 대부분은 그와 똑같은 이 유로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머리도 좋고 재능도 있으니까,라 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녀의 그런 경향을 조장하고 있었다. 이른 바 악순환이었다. 출구가 없다. <꼬마 검둥이 삼보>에 나오는 세 마리의 호랑 이같이, 버터처럼 될 때까지 야자나무 주위를 계속 달리게 된다. 그 그룹의 다른 여자 아이들이 그 당시의 그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 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알 수가 없다. 그 그룹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나는, 말하자면 방문객 같은 자격으로 관계하고 있던 탓으로, 여자 아이들의 본심을 끌어낼 만큼 아무하고도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스키 동아리였다. 세 대학의 스키 동우회 같은 것에서 그 일부분씩이 모여 이루어진 기묘한 조직이었다. 그들은 겨울방학에는 장기스키 합숙을 했고, 그 외의 시즌에는 모여서 트레이닝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쇼우 낭(일본 신주쿠 현의 해안지대) 해안으로 헤엄을 치러가곤 했다. 12, 3명 정도 되었는데, 모두 말쑥한 차림새였다. 말쑥하고, 느낌이 좋고, 친절했다. 하지만 지금 그 중의 한 명을 딱히 생각해 내라고 한다면 그건 전혀 불가능하다. 열두 세 명의 그들은 내 머릿속에서 녹아내린 초콜릿처럼 서로 섞여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나누어서 생각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예외지만. 나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스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 그룹에 속해 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의 아파트에 1개월 정도 묵고 있던 것을 계기로, 나는 그 멤버들과 서로 알게 되어 그곳에 받아들여지게 되었 다. 마작의 점수를 계산할 줄 알았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아무 튼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내게 매우 친절해서 스키 여행까지도 같이 가자고 해 줄 정도였다. 나는 팔굽혀펴기밖에 흥미가 없다며 그 권유를 거절했는데, 지 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들은 정말로 순수 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스키보다 팔굽혀펴기 쪽이 훨씬 좋 았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나와 같이 살았던 친구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줄곧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나 역시 조금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첫눈에 그 녀에게 열을 올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다. 세 개의 포인트를 잡기만 하면 그 대 체적인 특징은 커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명한 듯하고, 활기에 차 있고, 요염 하다. 그녀는 작은 몸집에 마른 편이었으나, 근사하고 균형 잡힌 몸매에다 온 몸에 에너지가 넘쳐 흐르고 있는 듯이 보였다. 눈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입 술은 고집이 센 듯 일직선으로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약간 신 경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때때로 생긋 하고 미소를 지으면 그녀를 둘러 싸고 있던 공기는 마치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 나는 그녀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그런 미소 만은 좋았다. 아무튼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전 고등학교 시절 영어 교과서에서 <봄에 사로잡혀 arrested in a springtime>라는 관용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녀의 미소는 정확히 그런 느낌이었다. 대체 누가 따스한 봄의 양지를 비평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는 정해진 애인이 없었기 때문에, 그룹 중 세 명의 남자가-내 친구도 당연히 그 중의 한 명인 셈인데-그녀에게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특별히 상대를 누구라고 정하지 않고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맞게 능숙하게 그 세 명의 남자를 다루고 있었다. 그 세 명도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서로 방해하는 일 없 이 예의바르고 꽤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광경에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었지만, 결국 그건 타인의 문제지 나와는 관계가 없었다. 내가 일일이 참 견할 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가 거북했다. 나는 나름대로 버릇 나쁜 방면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권위자였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버릇 나쁘게 자라왔는지 를 손에 잡듯이 알 수 있었다. 응석을 부려가며, 칭찬만 들어가며, 보호받고, 여 러 가지를 받기만 하며, 그런 식으로 그녀는 자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 만이 아니었다. 응석을 부린다든지 용돈을 받는다든지 하는 정도의 일은 아이 의 성격을 버리는 데 결정적인 요인은 되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위 어 른들의 타협되고 굴곡된 여러 종류의 감정의 방사로부터 아이를 지킬 책임을 누 가 맡을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누구나가 그 책임으로부터 꽁무니를 빼거나, 아이에게 모두가 좋은 얼굴을 하고 싶어할 때, 그 아이는 확실하게 성격을 버리 게 된다. 마침 여름날 오후의 모래사장에서 강한 자외선에 알몸을 드러내듯이, 갓 태어난 그들의 연약한 에고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손상을 받게 된다. 그 것이 결국에는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어리광을 부리거나 돈을 듬뿍 받거나 하는 건 어디까지나 거기에 따르는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만나서 두세 마디 얘기를 나누고, 그 후 한동안 그녀의 언동을 보고 있 는 것만으로, 솔직히 말해 나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비록 그 원인이 그녀가 아 닌 다른 누군가에게 있다고 해도 그녀는 그런 식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비록 인간의 에고가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기형이 라고 정의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어떻게든 노력을 해야 했던 것 이다. 그래서 나는 그 때 이래로 그녀를 피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필요 이상으 로 그녀에게 다가가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녀는 이사카와 현인가 어딘가 그 부근에 있는 에도시대 부터 계속되고 있는 유명한 고급 여관의 딸이라고 했다. 오빠가 한 명 있긴 하 지만, 나이 차이가 상당히 나는 터여서 외동딸처럼 귀하게 자랐다고 한다. 성적 도 계속 톱 클래스인 데다가 미인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언제나 선생님에게 는 귀여움을, 동급생에게는 우러름을 받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녀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는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있을 법한 얘 기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계속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쪽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누구 집에선가 그녀가 치는 피아노를 들은 적이 있다. 나 는 음악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연주의 감동적인 깊이에 대해서 는 판단하기가 어렵지만, 그녀의 음 터치는 놀랄 만큼 예리했고, 적어도 음표를 틀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당연히 그녀가 음악 대학에 들어가 프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간단히 피아노를 버리고 미술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기모노의 디자인과 염색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전혀 새로운 미지의 분야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기 모노에 둘러싸여 자랐기 때문에 몸에 익은 경험적인 직감의 도움도 있고 해서, 그 방면에서도 남들의 이목을 끌 정도의 재능을 발휘했다. 요컨대 어느 길로 나아가도 그 나름대로 남들 이상으로 해내는 타입이었다. 스키든, 요트든, 수영 이든, 뭘 시켜도 그녀는 능숙했다.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주위의 누구도 그녀의 결점을 제대로 지적할 수가 없 게 되어 버렸다. 그녀의 비관용성은 예술가의 기질로 여겨졌고, 히스테릭한 성 향은 보통 사람과는 달리 예민한 감수성으로 파악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한 사람의 퀸이 되었다. 그녀는 부친이 세금 대책의 일환으로 네즈에 가지고 있던 2LDK의 산뜻한 맨션에 살며 마음이 내키면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옷장 에는 새 양장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녀가 손뼉을 치기만 하면(이건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대개의 일은 몇 명의 친절한 보이 프렌드가 처리해 주었 다.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장래에 그 전문 분야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둘 것이 라고 믿고 있었다. 그 당시 그녀의 행보를 막을 것이라곤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1970년인가 71년인가 그 때쯤의 일이다. 나는 이상한 상황에서 한 번인가 그녀를 안은 적이 있다. 안았다고 해서 섹 스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물리적으로 안았을 뿐이다. 요컨대 술에 취해 여럿이 함께 뒤섞여 자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마침 옆에 그녀가 있었던 것 뿐이다. 종종 있는 얘기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의 일을 지금도 기묘할 정도로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눈을 뜬 것은 새벽 3시였는데, 문득 옆을 보니 그녀는 나와 같은 이불에 싸여 기분 좋게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6월 초순인 그 때는 그렇게 뒤섞여 자 기에는 절호의 계절이긴 했지만, 요도 없이 그대로 다다미 위에 누워 있었기 때 문에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마디마디가 아팠다. 게다가 그녀는 내 왼팔을 베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독하게 목이 말라서 미칠 것 같았지만, 머리를 뿌리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살짝 머리 를 안아올려 그 사이에 팔을 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살짝 머리를 안아올려 그 사이에 팔을 뺄 수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가 잠을 깨서 내 행위를 이상하게 오해라도 하게 된다면, 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잠시 생각을 하고 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동안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도 자다가 몸을 뒤척일지도 모른다. 그러 면 나는 재빨리 팔을 빼내고, 물을 마시러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꼼 짝도 하지 않았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규칙적으로 호흡을 반복하고 있 을 뿐이었다. 내 셔츠 소매는 그녀의 숨결로 다뜻하게 젖어 있었는데, 그것이 묘하게 겸연쩍게 느껴졌다. 15분인가 20분 동안, 나는 그 자세로 계속 기다렸던 것 같다. 그래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나는 물 마시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목이 마 른 것은 참기 힘들지만, 당장에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죽거나 하진 않는다. 나는 왼팔을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고개를 돌려 머리맡에 굴러다니는 누 군가의 담배와 라이터를 찾아 오른손을 뻗어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하 면 쓸데없이 더 목이 말라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담배 한 대를 피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담배를 다 피우고 그 꽁초를 가까이에 있던 빈 맥주캔에 꺼 버리고 나니, 이상하게도 목마름의 괴로움이 담배를 피기 전보다 훨씬 덜해졌다. 그래서 나는 한숨을 돌리고,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아파 트 가까이에 고속도로가 있었는데, 그곳을 오가는 심야 트럭의 찌부러질 듯이 평평한 타이어 소리가 얇은 유리창 저쪽에서 방 안의 공기를 희미하게 흔덜었 고, 방 안에서 자고 있는 남녀의 숨소리와 가볍게 코를 고는 소리가 거기에 섞 여 들었다. 그리고 한밤중에 남의 방에서 눈을 뜬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나도 '난 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하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완전한 제로인 것이다. 여자 친구와의 관계가 묘하게 꼬여서 하숙집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되어 친구 의 아파트에 굴러다니게 되었고, 스키도 타지 않는 주제에 엉뚱한 스키 동아리 에 받아들여지더니, 끝내는 아무래도 좋아지지 않는 여자애에게 팔베개를 해 주 게 되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해 보면, 나 에게는 그것 그것대로 무엇 하나 전망이 없었다. 자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눈을 뜬 나는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을 멍하니 바라 보고 있었다. 그 때 내 왼팔 위에서 그녀가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왼팔을 해방시켜 준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녀는 마치 내 안으로 미 끄러져 들어올 듯한 모습으로 나의 몸에 바싹 몸을 붙였다. 그녀의 귀는 내 코 끝에 있었는데, 사라져가기 시작하는 어젯밤의 오드콜로뉴(향수 비슷한 화장수) 와 희미한 땀 냄새가 났다. 가볍게 구부러진 그녀의 다리가 나의 넓적다리에 걸쳐져 있었다. 여전히 숨결은 편안하고 규칙적이었다. 따뜻한 숨결이 나의 목 에 와 닿았고, 옆구리 근처에는 그녀의 부드러운 유방이 닿은 채 위아래로 움직 이고 있었다. 그녀는 몸에 딱 달라붙은 셔츠에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있었기 때 문에, 나는 그 몸의 곡선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묘한 상태였다. 그것이 다른 경우였고, 상대가 다른 여자였 다면, 나는 그런 입장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그녀였기 때문 에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상황에 대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좋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 하더라도, 내가 놓인 입장 의 바보스러움은 구제받을 길이 없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 로, 나의 페티스는 그녀의 다리에 밀착된 채로 딱딱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같은 식으로 숨을 쉬고 있었지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내 페 니스의 형태 변화를 뚜렷이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는 잠시 후에, 그것이 마치 잠 자체의 연장인 것처럼 가만히 팔을 뻗어 나의 등에 두르고는 내 품안에서 약간 몸을 틀었다. 덕분에 그녀의 유방은 바짝 나의 가 슴에 눌려져 왔고, 나의 페니스는 그녀의 부드러운 하복부에 눌리게 되었다. 상 황은 계속 좋지 않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몰리게 된 나는 그녀에 대해 나름대로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와 동시에 아름다운 여자를 안는다는 행위 속에서 어떤 종류의 인생의 온기 같은 것이 들어 있었기에, 이미 나의 몸은 그런 희미한 가스 상태의 감정에 푹 감싸 여 있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녀도 나의 그 런 정신 상태를 뚜렷이 감지하고 있었고, 나는 그 때문에 또 화가 났지만 팽창 된 페니스가 가지는 그 기묘하게 언밸런스한 우스꽝스러움 앞에서는 나의 화 같 은 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나는 단념하고 오른팔을 그녀의 등에 둘렀 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꽉 껴안은 모양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도 우리는 둘 다 아직 푹 잠들어 있는 척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유방을 가슴에 느끼고, 그녀는 나의 딱딱한 페니스의 감촉을 배꼽 바로 아래 느끼면서 우리는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녀의 자그마한 귀 와 위험스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앞머리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나의 목을 바라보 고 있었다. 우리는 잠들어 있는 척하면서도 서로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스커트 속에 손가락을 넣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는 내 바지 의 지퍼를 열어 따뜻하고 매끈매끈한 페니스에 손을 대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 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생각하고 있는 바를 손에 잡을 듯이 감지할 수 가 있었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녀는 나의 페니스에 대해 생각 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나의 페니스는 마치 나의 페니스가 아닌 누군가 다른 남자의 페니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튼 나의 페니스였다. 나 는 그녀의 스커트 속에 있는 작은 속옷과 그 안에 쌓인 따뜻한 질에 대해 생각 하고 있었다. 그녀도 내가 생각하는 질에 대해, 내가 그녀가 생각하는 페니스에 대해 느끼는 것과 똑같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자란 질에 대해, 남자가 페니스에 대해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른 느낌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쪽에 대해서는 난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상당히 망설이던 끝에 나는 그녀의 스커트 속에 손가락을 넣지 않았고 그녀는 내 바지의 지퍼를 열지 않았다. 그걸 억제한다는 것이 그 때는 아주 부 자연스럽게 느껴졌지만, 결국은 그걸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 이상으로 상황을 밀고 나갔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의 미로 속으로 밀려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던 것을 그녀도 감지했다. 우리는 그런 자세로 한 30분 동안 끌어안고 있다가, 아침 해가 방 구석구석까 지 선명하게 비추기 시작할 때쯤이 되어 몸을 떼고서 잤다. 몸을 떼었어도, 내 주위에는 아직 그녀의 피부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한 번도 그녀를 만난 적이 없다. 나는 교외에 있는 아파트를 구해 그곳으로 이사를 했고, 그 후로는 그 기묘한 그룹과도 소원해져 버렸기 때 문이다. 하긴 기묘하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 그들은 자신들 이 기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내 존 재 쪽이 훨씬 기묘하게 비춰졌을 것이다. 나를 오랫동안 자기 집에 묵게 해 주었던 절친한 친구와는 그 후 몇번인가 만 났고, 또 그럴 때는 당연히 그녀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터였지만, 어떤 얘기를 했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는 얘기 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을 나왔을 무렵, 그 친구는 간사이(關西)지방으로 돌 아갔기 때문에 만날 일도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12년인가 13년이 지 났고, 나도 그에 따라 나이를 먹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점 중 하나는 호기심을 품게 되는 대상의 범위가 한 정된다는 것인데, 나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기묘한 종류의 사람들과 관계하는 기회가 예전에 비해 훨씬 적어져 버렸다. 가끔씩 우연한 계기로 예전에 만났던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는 일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기억의 말단에 걸려 있는 단 편적인 풍경과 마찬가지일 뿐이어서 나에게는 이제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 는다. 별로 그립지도 않고, 별로 불쾌하지도 않다. 몇 년 전엔가 우연한 기회로,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눈 적 이 있다. 그는 나와 같은 나이였고 어느 레코드 회사의 디렉터 일을 하고 잇었 다. 키가 크고, 차분하고 꽤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앞머리와 이마가 닿은 부분이 마치 경기장의 잔디처럼 깨끗한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일 때문에 그와 만난 것인데, 필요한 얘기가 끝나자 그는 "아내가 전에 무라카미 씨를 알고 있었다더군요."하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옛날 성(일본에서는 결혼을 한 여자는 남편의 성을 따름)을 말했다. 그 이름과 그녀의 존재가 한동안 머릿속에 서 연결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대학 이름과 피아노 얘기를 듣고, 나는 겨우 그 것이 그녀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기억하고 있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녀의 그 후의 궤적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잡지의 그라비어인가에서 무라카미 씨를 보고 금방 알아봤다더군요. 그리워 하던데요." "나도 그립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으 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그립다기보다는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 다. 생각해 보면 나와 그녀가 만났던 시기는 정말 짧았고, 직접 얘기를 나눈 일 조차 거의 없었던 것이다. 생각도 미치지 않는 곳에 나의 옛그림자가 머물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왠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의 부드러운 유방과 머리 냄새와 나의 발기한 페니스를 생각했다. "매력적이었죠."하고 나는 말했다. "잘 있나요?" "글쎄요, 그럭저럭."하고 그는 말을 고르듯이 천천히 말했다. "어디 몸이 안 좋았나요?"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아뇨, 그다지 몸이 나빴던 건 아니지만, 뭐랄까, 그다지 건강했다고는 할 수 없는 시기가 몇 년 동안인가 있었죠." 대체 어디까지 질문을 해야 좋을지 판단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게다가 솔직히 나는 그 후의 그녀의 운명을 어떻게든 알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잘 알 수가 없으시겠죠."하고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 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잘 설명하기 어려운 데가 있어서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 면, 그녀는 꽤 건강해졌습니다. 적어도 전보다는 훨씬 건강하죠." 나는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 왠지 조금 망설이다가 눈 딱 감고 질문을 해 보 기로 했다. "이런 사적인 일을 묻는 건 실례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그녀 때문에 무슨 일 이 있었나요?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있자니 왠지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 니다만."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빨간 말보로 팩을 꺼내어 담배에 불을 붙여 피우기 시 작했다. 헤비 스모커인 듯,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손톱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 다. 그는 잠시 그런 자신의 손가락 끝을 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별로 남들에게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다지 안 좋은 일도 아닙니다. 다만 사고 같은 것입니다. 저어, 자리를 옮기죠.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우리는 찻집을 나와 저녁의 거리를 한동안 걷다가, 지하철역 가까이에 있는 작은 바에 들어갔다. 늘 들르는 곳인 듯, 그는 카운터 앞에 앉아 익숙한 어조로 대형 글라스에 든 스카치 위스키 더블 온더락과 페리에 한 병을 주문했다. 나 는 맥주를 부탁했다. 그는 온더락 위에 페리에를 아주 조금 붓고는, 글라스 안 에 있는 거품의 행방을 바라보면서 상대의 얘기를 기다렸다. 위스키가 식도를 따라 내려가 위장 속에 확실하게 자리잡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얘기를 시 작했다. "결혼한 지 10년쯤 됩니다. 처음 알게 된 것은 스키장에서였습니다. 나는 지 금 있는 회사에 들어온 지 2년째였고, 그녀는 대학을 나와 아무것도 하는 일 없 이 빈둥거리다가, 때때로 아르바이트삼아 아카사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를 치곤 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결혼을 했죠. 결혼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 습니다. 양가 모두 결혼에 찬성을 해 주셨죠.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고, 나는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습니다. 요컨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얘기죠."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고, 나는 또 맥주에 입을 댔다. "평범한 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죠. 결혼전에 그녀 에게 애인이 몇 명인가 있엇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건 나로서는 그다지 대 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현실적인 편인데, 만일 과거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것이 해를 일으키지 않는 한 신 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생이란 건 본질적으로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이든, 결혼생활이든, 가정이든, 만일 거기에 뭔가 재미가 있다고 한 다면, 그건 평범함의 재미입니다.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 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가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던 겁니다. 물론 나는 그녀의 기분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직 젊고 아름답고 에 너지로 꽉 차 있었던 거죠. 간단히 말하면 그녀는 습관적으로 여러 가지를 남 들에게 요구하며, 그것을 얻는 것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 종류도 양도 극히 한정되어 있었죠." 그는 온더락을 한 잔 더 주문했다. 내 쪽은 아직 맥주가 반쯤 남아 있었다. "결혼한 지 3년 후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여자 아이였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뭐하지만, 아주 귀여운 아이였습니다. 살아 있었다면 이제 국민학생 이죠." "죽었나요?"하고 나는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종종 있 는 사고죠. 자다가 몸을 뒤척였는데, 이불이 얼굴에 감겨 숨이 막혀서 죽은 겁니 다. 누구의 탓도 아니죠. 단순한 사고입니다. 운이 좋았다면 막았을 지도 모 릅니다. 그러나 결국 운이 나빴던 겁니다. 누구를 책망할 수도 없습니다. 몇 몇 사람들은 그녀가 아이를 혼자 놔 두고 장을 보러 나갔던 것을 나무랐고, 그 녀도 그 때문에 자신을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그건 운입니다. 나나 당신이 똑 같은 상황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고 해도 사고는 똑같은 확률로 일어났을 거라 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마 그렇겠죠."하고 나는 인정했다. "나는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어렸을 때부터 충분히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 집은 무슨 이유 에선지 사고가 많은 집안이라 그런 일이 늘 일어나곤 했었죠. 때문에 아이가 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은 특별히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기야 부모에게 있 어서 아이를 잃는 일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이것만은 경헝한 적이 없는 사람은 알 수가 없죠. 나는 쭉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문 제는 내 기분이 아니라 그녀의 기분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감정적인 훈련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던 겁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죠?" "아, 예."하고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죽음이란 것은 극히 특수한 사건입니다. 나는 때때로 사람의 인생이란 아주 커다란 부분을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에너지에 의해, 혹은 결손감 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그런 것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느끼는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에 대해 너무나 무방비 상태였죠. 요컨 대,"하고 말하며 그는 카운터 위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일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겁니다. 그 덕분에 타인의 부재가 가져오는 아픔이란 걸 그녀는 상상할수조차 없게 되어 버린 겁니다." 그는 웃으며 나의 얼굴을 보았다. "결국 그녀는 완전히 성격이 망가져 있었던 겁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어쨋든 나는 그녀를 사랑하 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녀가 그녀 자신과 나와 주변의 모든 것에 상처를 입혔 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떠나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부부라는 것은 그 런 겁니다. 결국 그 후로 1년 동안 끝없는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구제할 길 없는 1년이었습니다. 신경도 마모되었고, 장래에 대한 전망도 무엇 하나 없었습 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그 1년을 극복했습니다. 우리는 아이의 존재와 결부 되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새 맨션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는 두 잔째의 온더락을 비우고 기분 좋게 심호흡을 했다. "아마 지금의 아내와 만나셔도 잘 알아보실 수 없을 겁니다."하고 그는 정면의 벽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잠자코 맥주를 마시고 피넛을 집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아내 쪽이 좋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이제 아이는 낳지 않을 겁니까?"하고 나는 잠시 후에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안 될 겁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내 쪽이야 어찌됐든, 아내는 그런 상 태가 아닙니다. 뭐 그거야, 나로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 없습니다." 바텐더가 그에게 위스키를 한 잔 더 권했지만,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 "아내에게 전화라도 해 주십시오. 그녀에게는 그런 자극이 필요한 것 같습니 다. 인생은 아직 기니까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까?" 그는 명함 뒤에 볼펜으로 전화번호를 적어 내게 건네 주었다. 놀랍게도 국번 을 보니 그들은 나와 같은 구역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그 자리를 계산했고, 우리는 지하철역에서 헤어졌다. 그는 남은 일을 정 리하기 위해 회사로 돌아갔고, 나는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직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있다. 그녀의 숨결과 피부의 온기와 부드러운 유방의 감촉은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14년 전의 그날 밤과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구토 1979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일기를 쓸 수 있다는 흔치 않 은 능력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자신의 구역질이 언제 시작 되어 언제 끝났는지, 그 정확한 날짜를 인용할 수가 있었다. 그의 구역질은 1979년 6월 4일(맑음)에 시작되어, 같은 해 7월 14일(흐림)에 끝나 있었다. 그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인데, 언젠가 한 번 나와 한 조가 되어 잡지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는 레코드 컬렉터였고, 친구의 애인이나 부인과 자는 것을 좋아했다. 나이는 나보다 두셋 아래이다. 그는 실제로 그 때까지의 인생에서 몇 명이나 되는 친구의 애인이나 부인과 잔 적이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 가 그 친구가 근처 술집에 맥주를 사러가거나 샤워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그 부인 과 섹스를 끝낸 적도 있었다. 그는 종종 그런 얘기를 내게 해 주었다. "서둘러서 섹스를 하는 거, 그거 그다지 나쁘지 않더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옷을 거의 다 입은 채로 되도록 빨리 끝내 버리는 겁니다. 보통 요즈음의 일반 적인 섹스는 점점 오래 끄는 경향이죠? 때로는 그 반대로 가는 겁니다. 한번 시점을 바꿔 보는 것만으로도 꽤 기분이 괜찮다구요." 물론 그런 곡예적인 섹스만이 아니라, 느긋이 시간을 갖고 착실한 성행위를 즐기는 일도 있었다. 아무튼 그는 친구의 애인이나 부인과 잔다고 하는 행위 자체가 좋은 것이다. "남의 배우자나 애니과 정을 통해 그를 빼앗는다든가 하는 그런 굴절된 생각 은 없습니다. 한 번 같이 자고 나면 나는 그들과 ㅇ 친밀한 기분이 되곤 하죠. 요컨대 가정적인 기분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섹스지요. 탄로만 나지 않으면 누구를 상처 입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탄로난 적은 없었나?" "없었죠. 물론."하고 그는 다소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런 종류의 행위는 이쪽에서 드러내고 싶어하는 잠재욕망만 없으면 쉽게 드러나는 게 아니거든요. 확실하게 주의를 해서, 뭔가 의미 있는 듯한 말이나 그런 행동 따위만 하지 않 으면 말입니다. 그리고 맨 먼저 기본방침을 확실히 해 두는 게 중요합니다. 다 시 말해 이건 단순히 친밀감을 담은 게임 같은 것이지, 깊이 관계할 생각도 없 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도 없다는 걸 말입니다. 물론 빙 돌려서 말을 골라가며 설명을 하죠." 나로서는 그런 일이 그가 말하는 대로 하나에서 열까지 제대로 되라라고는 아 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가 허풍을 떨어가며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는 보 이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그건 그가 말하는 대로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 대부분은 그걸 바랍니다. 그들의 남편이나 애인-다시말해 나의 친구-들 대부분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나보다 핸섬하고, 나보다 머리가 좋고, 어쩌면 나보다 페니스가 크거나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건 그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그들은 상대가 어느 정도 성실하고, 친절 하고, 상대의 속마음을 알 수 있기만 하면, 그걸로 오케이인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애인이라든가 부부라든가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적인 틀을 넘어 깔끔하게 관계를 맺는 겁니다. 그게 기본적인 원칙이죠. 물론 표면적인 동기는 여러 가지지만 말입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남편이 바람을 피운 데 대한 앙갚음이라든가, 심심풀이라든가, 자 신이 아직 남편 이외의 남자와 관계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기만족이라든 가, 그런 겁니다. 나는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그런 걸 알 수 있습니다. 노하우 같은 건 없어요. 이것만은 타고난 능력이죠. 있는 사람은 있고,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자신은 정해진 애인이 없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레코드 컬렉터로서, 이따금씩 서로의 레코드 를 트레이드한다. 우리는 둘 다 50년대에서 60년대 전반에 걸친 재즈 레코드 컬렉션을 하고 있었는데, 서로 컬렉션하는 대상의 범위가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 에 거래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나는 웨스트 코스트의 백인 밴드의 레코드가 중 심이었고, 그는 콜먼 호킨스라든가 라이오넬 햄프턴 같은 중간파에 가까운 후기 레코드를 모으고 있다. 때문에 그가 피트 조리 트리오의 빅터 판을 갖고 있고, 내가 빅 디킨슨의 <메인 스트림 재즈>를 갖고 있거나 하면, 그 두 가지는 쌍방 의 합의하에 기분 좋게 교환된다. 둘이서 맥주를 마시면서 하루 종일 음질이나 연주를 체크하며, 그런 상거래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가 나에게 그 구역질 얘기를 해준 것은 그런 레코드 교환회가 끝나고나서였 다. 우리는 그의 아파트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음악을 이야기하고, 술을 이야기 하고, 그리고는 술에 취해 떠들어댔다. "예전에 40일 동안 매일 계속 토했던 적이 있었어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 고 말입니다. 술을 마시고 토했던 것도 아닙니다. 몸의 상태가 나빴던 것도 아 니구요. 아무 원인도 없이 그냥 토하는 겁니다. 그게 40일 동안이나 계속됐던 것입니다. 40일입니다. 어지간하죠." 맨 처음 그가 토한 것은 6월 4일이었는데, 이 구토에 관해서는 그가 뭐라 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 전날 밤, 그는 상당량의 위스키와 맥주를 위 속으로 흘 려 넣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친구의 부인과 잤다. 1979년 6월 3 일 밤이었다. 때문에 6월 4일 아침 8시에 그가 위 속에 든 것을 있는 대로 다 변기에 토해 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각별히 부자연스러운 사건도 아 니었다. 술을 마시고 토하는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서 처음 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레버를 눌러 그 불쾌한 구토물을 하수구로 밀어 넣고, 책상 앞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어느 쪽인가 하면 상쾌한 부류에 속하는 하루였다. 일 은 순조롭게 진척되었고, 점심 전에는 배도 고팠다. 점심으로 햄과 오이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맥주 한 캔을 마셨다. 그 30분 후에 두 번째 구역질이 찾아와 그는 샌드위치 전부를 또 변기 속에 토 했다. 흐물흐물해진 빵과 햄이 물 위에 떠올랐다. 그러나 몸에 불쾌감은 없었 다.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토했을 뿐인 것이다. 목 안에 뭔가가 막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험삼아 변기 위에 몸을 구부려 보았더니, 위 속에 있던 모든 것이, 마술사가 모자에서 미둘기라든가 토끼라든가 만국기 같은 것을 꺼내듯이 나왔던 것이다. 그뿐이었다. "구토라면 난 지독히 많이 마셨던 학생시절에 몇 번이나 경험을 했었죠. 차 안에서 토한 적도 있었구요. 하지만 그 때의 구토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달랐어 요. 구토 특유의 위가 죄어드는 듯한 감각조차 없었다구요. 불쾌감도 없고, 역 겨운 냄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됐었죠. 한 번에 그 치지 않고 두 번이나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아무튼 나는 걱정이 됐기 때문에 한동안 일체 알코올은 입에 대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구토가 다음 날 아침 어김 없이 찾아왔다. 전날 밤에 먹은 뱀장어와 아침으로 먹은 마멀레이드(오렌지나 레몬의 껍질로 만든 잼)를 바른 잉글리시 머핀(주로 아침에 먹는, 이스트를 넣어 만든 납작한 빵)이 거의 그대로 나왔다. 구토를 한 후 욕실에서 이를 닦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려 받아 보니, 한 남자 의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전화는 툭 하고 끊겼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같이 잤던 상대의 남편이나 애인이 일부러 그런 전화를 건 게 아닐까?"하고 나는 말해 보았다. "설마."하고 그는 말했다. "그들의 목소리라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건 절 대로 내가 그 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남자의 목소리였어요. 아주 기분 나쁜 분위기를 가진 목소리였죠. 결국 그 전화는 그 때부터 매일 걸려왔습니다. 6월 5일부터 7월 14일까지 말입니다. 어때요? 내가 구역질을 하던 기간과 거의 일 치하죠?" "하지만 장난 전화와 구역질이 어ㄸ게 관련되는 건지 난 전혀 모르겠는 걸." "나도 그런 건 모르죠."하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난 아직도 그 일로 혼란스 러운 겁니다. 아무튼 전화는 언제나 같은 식이었어요. 벨이 울리고, 내 이름을 말하고, 그리고 툭 하고 끊기는 겁니다. 매일 한 번씩은 전화가 걸려왔지요. 시간은 멋대로였습니다. 아침에 걸려왔던 적도 있고, 저녁에 걸려왔던 적도 있 고, 한밤중에 걸려왔던 적도 있었어요. 사실 전화 같은 건 받지 않으면 그만이 겠지만, 일의 성격상 그럴 수도 없고, 여자에게 걸려오는 일도 있고 하니까......." "흐음."하고 나는 말했다. "그와 병행해서 구역질 쪽도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먹은 건 거의 전부 토했을 겁니다. 토해 버리고 나면 지독하게 배가 고파져서 밥을 먹으면 그걸 또 남김 없이 토해 버리는 겁니다. 악순환이죠. 그대로 평균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토하지 않고 제대로 소화되는 일도 있었으니까, 그걸로 간신히 목숨 을 부지하고 있었던 거죠. 만일 세 번이면 세 번 다 토해 버리거나 햇다면, 그 야말로 링거 주사라도 맞지 않고선 연명할 수가 없었겠죠." "의사한테는 가보지 않았나?" "의사요? 물론 근처 병원에 갔었죠. 비교적 제대로 된 종합병원이었습니다. 뢴트겐도 찍고 소변검사도 했었지요. 암일 가능성도 있어서 그것도 조사해 보 았습니다. 하지만 나쁜 곳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건강 그 자체였죠. 결국 에는 위의 만성 피로거나, 아니면 정신적인 스트레스일 거라고 해서 약을 받아 왔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술을 멀리하고, 사소한 일로 끙끙대지 말라더군요. 자기 위가 만성 피로인데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건 정말 바보입니다. 만성 피로란 위가 무거워지거나, 명치 언저리가 쓰리고 아 프거나, 식욕이 없어지거나 하는 거죠. 만일 구토가 있다고 해도, 그건 그 증상 들 다음에 나타나는 겁니다. 구역질만 독립해서 뻔뻔스럽게 오거나 하진 않습 니다. 나는 구토만 할 뿐이지, 다른 증상은 아무것도 없었다구요. 계속 배가 고팠던 것만 제외하면, 몸은 지극히 좋았고 머릿속도 깨끗했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라고 할 경우에도, 난 전혀 그런 걸 느껴본 기억이 없었습니 다. 그야 물론 일이 꽤 빡빡하기야 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녹초가 되어 버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여자들과의 일도 더할 나위 없이 잘 되어가고 있었 구요. 3일에 한 번은 풀에 가서 실컷 헤엄을 치기도 했고......저어, 더 얘기할 필 요 있을까요?" "그렇군."하고 나는 말했다. "그냥 토했을 뿐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2주 동안 그는 계속 토했고,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15일째 되던 날, 그는 양 쪽 다 진절머리가 나서 일은 접어 두고, 구토야 어째됐든 전화로부터라도 도망 치기 위해 호텔에 방을 잡아 거기서 하루 종일 TV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하며 지내기로 했다. 처음 한동안은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점심으로 로 스트 비프 샌드와 아스파라거스 샐러드를 깨끗이 해치웠다. 환경이 바뀐 것이 좋게 작용했는지, 그것들은 그의 위 속으로 제대로 들어가서 끈내는 그대로 깨 끗하게 소화되어 갔다. 3시 반에는 호텔 티 룸에서 친구의 애인과 만나, 체리 파이를 블랙 커피와 함께 위 속에 넣었는데 이것도 잘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친구의 애인과 잤다. 섹스에 관해서도 아무 문제 없었다. 그녀를 보내고 난 후, 그는 저녁을 혼자서 먹었다. 호텔 근처의 요릿집에서 두부와 서경식 삼치 요리와 스노모노(어육이나 채소에 식초를 친 요리)와 된장국으로 배불리 먹었다. 여전히 알코올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때가 6시 반이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TV뉴스를 보았고, 그게 끝나자 에드 백베인의 <87분서 (分署)>시리즈의 신작을 읽기 시작했다. 9시가 되어서도 구토가 찾아오지 않았 기 때문에, 그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그는 2주 만에 포만감을 느긋 하게 마음껏 맛볼 수가 있었다. 아마도 그대로 일이 좋은 쪽으로 진행되어 모 든 상황이 원래대로 회복되지 않을까, 하고 그는 기대했다. 그는 책을 덮고 TV 스위치를 눌러 잠시 리모컨으로 채널을 찾다가 오래된 서부극을 보기로 했다. 영화는 11시에 끝났고 마지막 뉴스가 나왔다. 뉴스가 끝나자 그는 스위치를 껐 다. 위스키가 몹시 마시고 싶어서 눈 딱 감고 위층에 있는 바로 가 자기 전에 술이나 한잔 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역시 생각을 고쳐 먹고 그만두었다. 모처럼 의 깨끗한 날을 알코올로 더럽혀 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침대의 독서등을 끄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한밤중이었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시간은 2시 15분 이었다. 처음 한동안 그는 잠이 덜 깨어 어째서 그런 곳에서 벨이 울리는지 아 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머리를 흔들며 거의 무의식적으로 수 화기를 들어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하고 그는 말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여느 때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고, 다음 순간 전화는 끊겼 다. 그리고 뚜 하는 신호음만이 귀에 남았다. "하지만 그 호텔에 묵고 있다는 걸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잖아?"하고 나는 물었다. "네, 물론입니다.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죠. 다만 내가 같이 잤던 그 여자한테만은 가르쳐 주었죠." "그 여자가 다른 누군가에게 귀띔해 준게 아닐까?" "뭘 위해서 말입니까?" 듣고 보니 그랬다. "그 후에 나는 욕실에서 먹은 걸 남김 없이 전부 토해 버렸습니다. 생선, 쌀 전부 말입니다. 마치 전화가 문을 열어 길을 닦아 놓고, 그곳으로 구토가 들어 온 것 같았죠. 그렇게 토하고 나서 나는 욕조에 앉아 여러 가지 일을 순서대로 정리해 보았 습니다. 맨 먼저 생각난 것은, 그 전화가 누군가의 교묘하고도 계획적인 짓궂은 장난이라는 거였습니다. 내가 그 호텔에 묵고 있다는 것을 녀석이 어떻게 알았 는지는 모르지만 그 문제는 뒤로 미뤄 두고, 아무튼 그런 인위적인 짓이지요. 두 번째 가능성은 나의 환청일지도 모른다는 거였습니다. 내가 환청을 경험하 다니 생각만 해도 바보 같았지만, 냉정히 분석해 보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벨이 울릴 것 같은>기분이 들어 전화기를 들었고, <내 이름이 불린 것 같은>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거죠. 사실은 아무 일도 없었고 말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있을 수 있는 얘기죠?" "그건 그렇군."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지금 이 방에 전화가 왔는지 어떤지 체크 해 ㅈ으면 한다고 얘기를 했지만 안 됐습니다. 호텔 오퍼레이팅 시스템은 이쪽 에서 밖으로 거는 전화는 전부 체크를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전혀 기록이 남지 않는다더군요. 그래서 단서는 제로였습니다. 호텔에 묵은 그날 밤을 경계로 해서 나는 여러 가지를 비교적 진지하게 생각 하게 되었습니다. 구역질과 전화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선 그 두 가지 사건이 전면적으로인지 부분적으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쨋든 어딘가에서 연결되어 있 는 듯하다는 것, 그리고 양쪽 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가벼운 것이 아 닌 듯하다는 것이 점점 확실해졌기 때문입니다. 호텔에서 이틀을 묵고 아파트로 돌아온 후에도, 구역질과 전화는 여전히 같은 식으로 계속되었죠. 시험삼아 몇 번 친구 집에 묵기도 했지만, 전화는 어김 없 이 그곳으로 걸려왔습니다. 그것도 반드시 친구가 없고 나 혼자 있을 때만 말 이죠. 그래서 나는 점점 기분이 나빴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내 등 뒤에 서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를 골라 내게 전화를 걸거나 위 속에 손가락을 처넣거나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기 시 작했던 겁니다. 이건 명백히 분열증의 최초 징후죠. 안 그런가요?" "하지만 자신이 분열증이 아닐까하고 걱정하는 분열증 환자는 그다지 없지 않 나?"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그리고 분열증과 구토가 서로 연동하는 예 도 없죠. 그건 대학병원의 정신과에서 들은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나를 거 의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보다 확실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밖에 상대해 주지 않죠. 나 정도의 증상을 가진 사람은 만원인 야마노테선(山手線)의 차량 한 량 당 2.5명에서 3명 정도는 있다면서, 그런 사람들을 하나 하나 상대하 고 있을 여유가 병원에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구토는 내과에, 장난 전화는 경 찰에 가보라더군요. 그러나 아실지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경찰이 상대해 주지 않는 범죄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장난 전화, 또 하나는 자전거 도둑입니다. 양쪽 다 건수가 너무 많고 범죄치고는 너무 하찮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나 하나 다루고 있다 보면 경찰의 기능이 마비되어 버리죠. 때문에, 내 얘기 같은 건 제대로 들 어 주지도 않습니다. 장난 전화? 그래서 상대는 무슨 말을 하던가요? 댁의 이름뿐이라구? 다른 말은 없고? 그럼 거기 있는 신고서에 이름을 써요. 그리고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 같으면 연락을 주세요-대개 그런 식이죠. 어떻게 상대가 내가 가는 곳을 하나 하나 달 알고 있죠, 하고 말해 봐도 제대로 상대해 주지도 않고, 너무 집요하게 예기를 하면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받아요. 그래서 결국, 의사도 경찰도,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컨대 나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밖에 달리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 생 각이 든 건 그 <구토 전화>가 시작된 지 약 20일째 되는 날이었죠. 나는 육체 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터프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때는 정말이 지 어느 정도 질리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 친구의 애인과는 잘 하고 있었겠지?" "네, 그런 대로. 마침 그 친구가 2주 동안 일 때문에 필리핀에 가 잇었기 때 문에 그 동안에 우리는 실컷 즐겼습니다." "그녀와 즐기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없었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일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없었던 게 당연하죠. 그 전화는 언제나 내가 혼자 있을 때 걸려왔습니다. 구토도 늘 내가 혼자 있을 때만 일어났구요. 그래서 난 생각했죠. 어째서 나는 이렇게 혼 자 있는 시간이 많은 것일까 하고요. 사실 평균적으로 나는 하루 24시간 중 23 시간은 혼자 있습니다. 혼자 살고 있고, 일의 성격상 교제는 거의 없고, 일에 대한 상담은 대개 전화로 끝내 버리고, 애인은 다른 사람의 애인이고, 식사는 9 할 정도가 외식이고, 스포츠를 한다고 해도 혼자서 헤엄을 칠 뿐이고, 취미라면 이렇게 혼자서 골동품 같은 레코드를 듣는 정도이고, 일도 혼자서 집중하지 않 으면 안 되는 부류고, 친구는 있지만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모두 바빠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그런 생활, 아시겠죠?" "음, 뭐."하고 나는 동의했다. 그는 얼음 위에 위스키를 따르고 손가락으로 얼음을 빙빙 돌려 휘젓고는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차분히 눌러 앉아 생각을 해 봤ㅉ. 난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말입니다. 이대로 혼자서 장난 전화와 구토로 계속 괴로워할 것인가 하고요." "제대로 된 애인을 찾으면 됐을 텐데. 자기만의 사람을 말야." "물론 그런 생각도 해 봤죠. 나는 그때 스물일곱이었고, 이제 이쯤에서 결혼 을 하고 살림을 차려도 나쁘지 않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엔 안 됐습니다. 나는 그런 타입의 인간이 아니거든요. 나는 뭐랄까, 그런 식의 패배를 참을 수 가 없었습니다. 구역질이나 장난 전화 같은 이유도 알 수 없는 불합리한 것에 항복을 하고, 내 삶을 간단히 바꿔 버린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 는 어쨌든 체력과 정신력의 마지막 한 방울을 짜낼 수 있을 때까지 싸우자고 결 심했습니다." "흐음." 하고 나는 말했다. "무라카미 씨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글쎄, 어떻게 해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짐 작이 가지 않았다. "구역질과 전화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체중도 훨씬 줄었구요. 잠깐만 요-에, 그렇군요- 6월 4일 체중은 64킬로였습니다. 6월 21일이 61킬로, 7월 10 일은 58킬로입니다. 58킬로라구요. 내키로 따져 보면 거짓말 같은 숫자죠. 덕 분에 양복이란 양복은 전부 사이즈가 안 맞게 됐구요. 바지를 부여잡고 걸여야 할 지경이었죠." "질문이 하나 있는데, 어째서 녹음전화를 장치해 둔다거나 하지는 않았지?" "물론 도망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질려한다는 것을 상대에게 가르쳐 주는 게 됩니다. 누가 이기나 해 보는 거죠. 상대가 나가떨어 지든지, 내가 뻗어 버리든지 말입니다. 구역질도 그렇습니다. 나는 그걸 이상 적인 다이어트라고 생각하기로 했던 겁니다. 다행히 체력이 극단적으로 저하되 는 일도 없었고, 일상생활도 일도 평상시처럼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맥주를 마셨고, 해가 지면 위스 키를 실컷 마셨죠. 마시든 안 마시든 어차피 토하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마찬 가지인 것입니다. 마시는 쪽이 후련하고 납득이 가는 일이죠. 그리고는 은행에서 저축한 돈을 찾아 양복점으로 가서 새 체형에 맞는 슈트 한 벌과 바지 두 벌을 구입했습니다. 양복점 거울에 비춰 보니 마른 것도 그다 지 나쁘지 않더군요. 생각해 보면 토한다는 것도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죠. 치질이나 충치에 비해 고통도 적고, 설사에 비교하면 양반입니다. 물론 이건 비 교의 문제긴 하지만요. 영양 문제가 해결되고 암일 가능성이 없어지면 구토라 는 건 본질적으로는 무해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살을 빼기 위한 인공적인 구 토제를 팔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하고 나는 말했다. 결국 그 구토와 전화는 7월 14일까지 계속된 거 로군?" "정확하게 말하면-잠깐만요-정확하게 말하면, 마지막 구토가 7월 14일 아침 9 시 반이었는데, 그건 토스트와 토마토 샐러드와 우유를 토한 거였습니다. 그리 고 마지막 전화는 그날 밤 10시 25분에 왔는데, 그 때 나는 에롤 가나의 <콘서 트 바이 더 씨>를 들으면서 시그램 VO를 마시고 있었습니다.-어때요, 일기란 게 써 두면 꽤 편리한 거죠?" "정말 그렇군."하고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그 이후로 양쪽다 뚝 끊긴 거로군?" "뚝 끊겼죠. 히치콕의 <새>처럼, 아침이 되어 창문을 열어 보니 모든 것이 이 미 사라져 버린 겁니다. 구역질도 장난 전화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 다. 그리고 나는 다시 63킬로까지 체중이 불어나, 양복장에 걸어 놓은 슈트와 바지를 입을 수가 없게 되었죠. 일종의 기념품처럼 말입니다." "전화의 상대는 마지막까지 똑같은 어조였나?"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리고 약간 멀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아닙 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마지막 전화만은 그 때까지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우 선 상대가 내 이름을 말하더군요. 이건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죠. 하지만 그 다음에 녀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습니까>하고 말이죠. 그 리고 잠시 동안 잠자코 있었습니다. 나도 잠자코 있었죠. 10초 15초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 쪽도 나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전화가 끊 겼습니다. 뚜하는 예의 발신음만이 남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말했나? <내가 누군지 알겠습니까?>라고?" "글자 한 자 틀리지 않습니다. 느긋하고 예의바른 말투였죠. <내가 누군지 알겟습니까?>, 하지만 그 목소리른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적어도 당시 5, 6년 동안 관계해 왔던 상대 중에는 그 목소리에 해당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훨씬 옛날 어렸을 때 알던 사이라든가, 그다지 말을 하지 않던 상대까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런 상대가 나를 원망할 만한 일에 대해 짐작이 갈 만한 점은 전혀 없 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뭔가 심한 짓을 했던 기억도 없고, 동업자의 원한을 살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뭐, 여자 관계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것 처럼 약간은 꺼림칙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27년이나 살았기 때문에 막 태어난 아기처럼 결백할 수는 없는 겁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상대의 목소리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들으면 당장 알 수 있죠." "하지만 말야, 정상적인 사람은 친구의 배우자와 전문적으로 자거나 하진 않는 다네." "그렇다면,"하고 그는 말했다. "무라카미 씨는 그게 내 속에 있는 어떤 죄책 감이-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죄책감이-구토라든가 환청이라든가 하는 형태로 결상(結像)된 게 아닌가 하고 말하고 있는 거로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네.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지."하고 나는 정정했다. "흐음."하고 말하며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자네가 정을 통한 상대의 남자 중 한 명이 사립탐정을 고용하여 자네를 미행케 해서 자네를 혼내 주거나 혹은 자네에 게 경고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걸게 했다. 그리고 구토 쪽은 단순한 몸의 이상이 고, 우연히 그 두가지가 시기적으로 일치했다고 말이야." "양쪽 다 일리가 있군요."하고 그는 감탄한 듯 말했다. 역시 소설가는 다르군 요. 하지만 말입니다. 두 번째 가설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그래도 그녀와 자 는 걸 그만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지 않게 됐 죠? 앞뒤가 맞지 않는데요." "아마 정나미가 떨어진 거겠지. 아니면 탐정을 계속 고용할 만큼의 돈이 떨어 진 걸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이건 가설이니까. 가설이라도 괜찮다면 백 개든 2백 개든 대줄 수 있지. 문제는 자네가 어느 가설을 취할 것인가 하는 거야. 그리고 거기에서 뭘 배우느냐 하는 거지." "배운다?"하고 그는 의외인 듯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이마에 글라스의 바닥을 대고 있었다. "배운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일이 한 번 더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거지, 물론. 다음 에는 40 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이유 없이 시작된 건 이유 없이 끝나지. 그 반대 도 또한 사실이고 말이네." "거 참 끔찍한 말씀을 하시는군요."하고 그는 킥킥대며 말했다. 그리고는 다 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하지만 묘하군요. 당신으로부터 그런 예기를 듣 기 전까지, 나는 거기에 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니까......다 시 그런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것 말입니다. 저어, 정말로 닥칠 거라고 생각 합니까?" "그런 건 알 수가 없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가끔씩 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위스키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리고 빈 글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몇 번인가 티슈 페이퍼로 코를 풀었다. "어쩌면,"하고 그는 말했다. "어쩌면, 그런 일은 이번에는 전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무라카미 씨에게라든가 말이죠. 무라카미 씨도 완전히 결백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 후로도 나는 그와 만나 전위적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종류의 레코드를 교환 하거나, 술을 함께 마시거나 하고 있다. 일 년에 두세 번 정도이다. 나는 일기 를 쓰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까지는 알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요즈음 그에게든 나에게든 구토도 전화도 찾아들지 않는다. 비 피하기 최근 어떤 소설 속에서 돈을 내고 여자와 성교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남자 의 조건 중 하나라고 하는 문장과 마주쳤다. 이러한 것을 읽으면 과연, 하고 생 각한다. 과연, 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그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 은 아니다. 그런 사고방식도 있구나, 하고 납득하는 것뿐이다. 적어도 그와 같 은 신념을 품고 살아가는 남자가 존재한다고 하는 상황은 그 나름대로 확실히 납득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도 돈을 내고는 여자와 성교하지 않는다. 그렇게 했 던 적도 없고, 앞으로 특별히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자면 취향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돈을 내고 여자와 자는 인간을 정상적이지 않다고는 나는 단언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쩌다 그런 인연이 되었을 따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도 말할 수 있겠다. 우리들은 많든 적든 모두 돈을 내고 여자를 사는 것이다.라고. 옛날 훨씬 젊었을 때는 물론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 섹스라고 하는 것은 공짜라고 생각했었다. 어떤 종류의 호의와 호의 (좀더 다른 명칭도 있겠지만)가 만나면 거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연발화와 같 이 섹스가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젊었을 때는 확실히 그렇게 잘 되 었고, 대개 돈을 내려고 해도 돈 그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내 쪽에도 없었고 상대 쪽에도 없었다. 모르는 여자 아이의 아파트에서 묵고, 아침이 되어 인스턴 트 커피를 홀짝거리며 차가운 빵을 서로 나눈다고 하는 것 같은 생활도 그래도 즐거웠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그 나름대로 성숙함에 따라서 우리는 인생 절반에 관해서 좀 더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요컨대, 우리의 존재 혹은 실재는 여러 가지 종 류의 측면을 한 데 모아 성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분리 불가능한 총체인 것이라는 관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일을 해서 수입을 얻거나 좋아 하는 책을 읽거나, 선거의 투표를 하거나 야간 경기를 보러가거나 여자와 자거 나 하는 각각의 작업은 하나하나가 독립해서 가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 은 같은 한 가지의 것이 다른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다. 그러니까 성생활의 경제적 측면이 경제생활의 성적 측면이기도 하다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요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읽었던 그 책에 나온 주인공처럼 아주 심플하게 <돈을 내고 여 자와 자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이 할 일은 아니다>라고 나는 여간해서는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밖에 나로 서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도 서술했듯이 우리는 실제로 여러 가지 것 을 일상적으로 사거나 팔거나 교환하거나 하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무엇을 팔고 무엇을 샀는지 전혀 모르게 되어 버리는 일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결국은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때 함께 술을 마셨던 여자는 몇 년인가 전에 돈을 받고 몇 명의 모르는 남 자와 잔 적이 있다고 내게 말했었다. 내가 마시고 있던 곳은 오모테산도에서 시부야근처로 들어간 곳에 있는 새로 생긴 레스토랑 바와 같은 가게였다. 캐나디안 위스키가 세 종류 갖추어져 있고, 가벼운 프랑스 요리도 있고, 대리석으로 된 카운터 위에 야채가 통째로 쌓여 있 고, 스피커에서 도리스레이의 <잇츠 매직>이 흐르고 있고, 디자이너와 일러스트 레이터라고 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감각혁명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타입의 가게이다. 이런 가게는 어느 시대에도 반드시 있다. 백 년 전 에도 있었고 백 년 후에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가게에 들어간 것은 그저 단지 그 근처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부야에서 일에 관한 협의를 마치고 어슬렁 어 슬렁 산책하면서 <파이드파이퍼>로 레코드를 보러 가는 도중에 비를 만났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이어서 가게 안에는 거의 사람의 모습은 없었고, 길에 면한 벽은 유리로 빙 둘러져 있었기 때문에 밖의 비가 내리는 상황도 알 수 있었고, 뭐 맥주라도 마시면서 비가 그치길 기다릴 작정이었다. 가방 안에는 방금 산 책이 몇 권인가 들어 있어서 시간을 때우는 데 고생할 염려는 없었다. 메뉴가 날라져와 맥주 항목을 보니, 수입물만으로 20종류나 되는 브랜드명이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적당한 맥주를 고른 뒤, 안주로는 조금 망설이다가 피스 타치오(남유럽, 소아시아산 관목의 견과)를 주문했다. 계절은 여름의 막바지였고 거리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모두 피부가 햇볕에 타 잘 그을려 있었고, <그런 것은 알고 있다니 까>하는 표정들을 하고 잇었다. 굵은 빗줄기가 아스팔트 길을 순식간에 검게 물들이면서 거리의 달아오른 열기를 식혔다. 그 떠들썩한 그룹이 우산을 탁탁 접으면서 가게로 뛰어들어선 것은, 내가 사 울 벨로의 새로운 소설을 읽고 있을 때였다. 사울 벨로의 소설은 많은 사울 벨 로의 새로운 소설을 읽고 있을 때였다. 사울 벨로의 소설은 많은 사울 벨로의 소설이 그러하듯이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좋은 기회로 책을 덮고 피스타치오의 껍질을 까면서 그 그 룹을 관찰했다. 그룹은 전부 7명으로 남자가 4명에 여자가 3명이었다. 나이는 눈짐작으로 스 물하나에서 스물아홉, 모두 유행의 최첨단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고 해도 깔끔 하게 시류에 맞춘 차림새들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세워져 있거나, 낡고 구 깃구깃한 레이온의 알로하(하와이안이 착용하는 밝은 프린트 셔츠)를 입거나, 분 홍빛의 부풀어 오른 팬츠를 입고 있거나, 검은 얼룩의 둥근 안경을 쓰고 있거나 한 부류인 것이다. 그들은 가게로 들어오자 중앙에 있는 달걀형의 큰 테이블 둘레에 앉았다. 늘 이 가게에 오고 있다는 느낌으로 보였는데, 예상대로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 은 사이에 위스키 병과 얼음 바스켓이 나왔다. 웨이터가 모두에게 메뉴를 돌렸 다. 그들이 도대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는 몰랐지만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 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상이 갔다. 아마 업무의 기획 모임이나 업무에 관한 반성회나 그 어느 쪽일 것이다. 어느 쪽이라고 해도 술취해서 빙빙 같은 말을 하고 악수하고 끝이 난다. 여자 한 사람이 뒤끝이 좋지 않아 남자 하나가 택시 로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고, 잘 되면 그 참에 침대로 들어가게 된다. 백 년 전 부터 계속되고 잇는 고전적인 회합이다. 나는 그 그룹을 관찰하는 것에도 싫증이 나자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비는 아직 계속해서 오고 있었다. 오늘은 변함 없이 덮개라도 씌운 것같이 캄 캄해서 예상했던 것보다 비가 오래 계속될 것 같은 기색이었다. 도로의 양 편 에서는 빗물이 모여 빠른 물살이 되고 있었다. 가게 맞은 편에는 낡은 반찬 가 게가 있어서 삶은 콩이라든가 썰어서 말린 무라든가 하는 그러한 것이 유리 케 이스에 늘어서 있었다. 작은 트럭 밑에서는 커다란 흰 고양이가 비가 피하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그런 풍경을 바라보고 나서 가게 안으로 시선을 돌리고 파스타치 오를 몇 개인가 먹으면서 책을 계속해 읽을까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잇는데, 여 자 한 사람이 내 테이블로 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조금 전 가게에 들어왔던 7 명의 그룹 중 한 명이었다. "맞으시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맞습니다."하고 나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저를 기억하시겠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본 기억은 있었지만 누구인가는 몰랐기 때문에 나는 정직하게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나의 건너편 의자를 끌어 당겨 거기에 앉았다. "한 번 무라카미씨를 인터뷰했었습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과 연 그랬다. 내가 맨 처음 소설을 냈을 때니까 지금부터 5년쯤 전에 그녀는 어 느 큰 출판사가 내고 있는 여성용 월간지의 편집자로 북 리뷰(서평)란을 맡고 있어서 거기에 내 인터뷰 기사를 실어 주었던 것이다. 내게는 틀림없이 작가가 되어 처음인 인터뷰였다. 그녀는 그 무렵 머리도 길고 깔끔하고 세련된 원피스 를 입고 있었다. 확실히 나보다 넷이나 다섯 연하였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분위기가 변했기 때문에 놀랐소."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요?"라고 그녀는 말하고 웃었다. 그녀는 요즘 유행에 맞춰 뒷머리를 쳐올리고, 자전거의 방수천으로 만든 것 같은 축 늘어진 카키색의 셔츠를 입고, 귀로부터 모빌 같은 금속조각을 두 개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우선 미인이라고 해도 좋을 부류였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 생김새여서 그런 차림새가 그녀에게는 꽤 잘 어울리고 있었다. 나는 웨이터를 불러 위스키 온더락을 더블로 주문했다. 웨이터는, 위스키는 어떤 것이 좋으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시험삼아 시바스 리갈은 있겠지 하고 묻자, 시바스는 어김 없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뭘 마실 건지를 물었다. 그녀는 같은 것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시바스 온더락을 더블로 두 잔 주문했다. "저쪽엔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소?"하고 나는 중앙의 테이블 쪽을 힐끗 보고서 말했다. "괜찮습니다."하고 그녀는 곧바로 말했다. "업무상의 교제로 마시고 있을 뿐 이고, 게다가 일 자체는 벌써 끝나 버린 것 같으니까요." 위스키가 날라져 오고 우리는 글라스에 입을 대었다. 예의 시바스 향이 났다. "저어, 무라카미 씨, 그 잡지 망해 버린 것 알고 계시죠?"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잡지로서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 지만, 판매 쪽이 나빴기 때문에 2년 정도 전에 회사가 스크랩(파기)해 버렸던 것 이다. "그래서 그 때 저도 인사이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만 갈 곳이 총무과 였던 겁 니다. 그런 것이란 당치도 않는 일이어서 상당히 저항했습니다만, 결국은 회사 쪽에 져 버린 데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쩐지 귀찮아져서 퇴사했습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꽤 괜찮은 잡지였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2년 전 봄으로, 그 때를 전후해서 3년간 사귀어 왔던 애인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이유를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이 두 가지 사건은 밀접하게 서로 관계가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그와 그녀는 같은 잡지의 편집부 동료였던 것이다. 남자 쪽은 그녀보다 열 살 위로 결혼한 처지 에다 아이도 둘 있었다. 남자 쪽에서는 아내와 이혼하고 그녀와 같이 살 생각 은 처음부터 없었고, 그녀에게도 그 점은 분명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도 그것 은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집이 타나시(田無)에 있었기 때문에 센다가야 가까이에 회원제인 호텔 을 빌리고 있어서 일이 바빠지면 일 주일에 2, 3일은 그곳에서 묵었다. 그녀도 일 주일에 하루는 그곳에서 묵었다. 결코 무리한 교제 방식은 쓰지 않았다. 그 러한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남자쪽이 숙달되어 있어서 주의가 깊었고, 그녀로 서도 그러는 쪽이 마음 편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3년간 누구에게도 눈 치채이지 않는 가운데 계속되었다. 편집부 내에서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쁘다고 조차 여겨지고 있었다. "대단하지요?"하고 그녀는 내게 말했다. "그렇군."하고 나는 말했지만 뭐 흔히 있는 이야기였다. 잡지의 폐간이 결정되고 인사이동인 발표되어 남자는 여성 주간지의 부편집장 으로 발탁되었다. 여자 쪽은 앞서도 말해ㄸ던 것처럼 총무과로 돌려졌다. 여자 는 편집자로서 입사했기 때문에 편집 업무로 돌려 주길 바란다고 회사에 항의했 지만, 현실적인 사정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편집자만 늘리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당했다. 그 대신 1년이나 2년 지나면 다시 한번 편집부로 돌려 주 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리라고 그녀는 생 각할 수 없었다. 한번 편집 분야에서 드롭아웃(낙오)된 사원이 다시 이전 부서 로 돌아오지 못하고 판매과나 총무과에서 서류에 둘러싸여 헛되이 썩어가는 예 를 그녀는 몇 번이나 보았다. 블랭크(공백)가 1년이 2년이 되고, 2년이 3년이 되고, 3년이 4년이 되고 그리고 점점 나이를 먹고, 제일선인 편집자로서의 감각 을 잃어가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같은 부서로 끌어 주도록 애인에게 부탁해 보았다. 물론 그렇 게 되도록 노력은 해 보겠지만 아마 무리일 것이라고 남자는 말했다. 요즘 내 발언력은 아주 제한된 것이고 게다가 너무 눈에 띄게 해서 의심받는 것도 싫으 니까 말이다. 그것보다 1년이나 2년 총무과에서 참고 있으면 그 동안에 내 쪽 도 힘을 써서 널 끌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 그러니까 그렇게 해. 그것이 제 일 나아, 하고 남자는 말했다. 거짓말이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는 사실은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다른 <그네>로 옮겨간다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차서, 그녀를 위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생각은 없는 것이다. 남자의 변명을 들으면서 그녀 의 손은 테이블 아래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모든 사람이 다 그녀를 짓밟고 있 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커피를 잔 째로 끼얹어 줄까 하고 생 각했지만 결국 바보스러워져서 그만 두었다.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하고 그녀는 남자에게 말하고 생긋 웃었다. 그 리고 그 다음 날 사표를 회사에 제출했다. "이런 얘기란 들어서 지루한 게 아닐런지요?"하고 그녀는 말하고 위스키를 한 모금 핥듯이 마시고, 그리고 나서 깔끔하게 매니큐어를 칠한 모양 좋은 엄지손 가락의 손톱으로 피스타치오의 껍질을 쪼갰다. 그녀가 쪼갠 피스타치오 쪽이 내 것보다 훨씬 좋은 소리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별로 지루하지 않아요, 하고 나는 그녀의 엄지손가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두 개로 갈랐던 껍질을 재떨이에 넣고, 알맹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시작해 버린 걸까요." 그녀는 말햇다. 아마도 조금 전 무라카미 씨의 모습을 언뜻 보고 왠지 갑자기 그리워졌던 걸 거예요." "그리워졌다?" 나는 조금 놀라서 되물었다. 나는 그 때까지 그녀와 두 번 밖 에 만난 적이 없었고 그것도 특별히 친하게 얘기를 했었던 사이도 아닌 것이다. "요컨대 뭐라고 할까요, 옛친구와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다른 세계에 있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아주 중요하게 관계했던 상대라고 할까......, 사실은 그다지 구체적으로 관계했던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말 하고 있는 의미를 알아 주실런지요?" 알 것 같은 기분은 드는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있어서 나라는 인간은 기호적인-좀 더 호의적으로 말한다면 축제적, 의식적인-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그녀가 일상적인 평면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세계에서는 진덩한 의미로는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 는 뭔지 모를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일상적 평면에 속해 있는 것일 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게다가 그녀와는 관계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 서 그 점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 것 같은 기분은 드는군 요."하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는 피스타치오를 또 하나 손에 쥐고 전과 같은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써서 껍질을 쪼갰다. "알아 주셨으면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숨김 없이 털어 놓는다 고 해서 이익이 될 리는 없다는 점입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정확히 말해서, 이런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처음인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 밖에는 아직 여름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 안에서 가지 고 놀고 있던 피스타치오 껍질을 재떨이에 버리고는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했 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바로 업무상으로 알았던 편집자 동료들이며 카메라맨 이며 프리 라이터에게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것과 새 일을 찾고 있다는 것을 두루 알렸다. 그 중의 몇 명인 가는 일을 찾아줄 수 있 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 당장에 내일 아침부터 나오라고 말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대개는 PR지나 타운지나 패션 메이커의 팜플렛과 같은 작은 일 이었지만 그래도 큰 회사에서 전표 정리를 하고 있기 보다는 훨씬 나았다. 일단 일터를 두 개 내정하고 그 둘을 겸해서 한다면 수입도 이제까지보다 못 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안심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일에 착수하 는 것을 연기하고, 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가벼운 여행을 하면서 지내고자 정했다. 그다지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어쨋 든 퇴직금은 나와 있었고 생활에 불안은 없었다. 그녀는 잡지사 시절에 알 게 된 헤어 디자이너에게 가서 머리를 지금 식으로 짧게 자르고, 그 디자이너의 단 골 부티크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헤어스타일에 맞는 옷과 구두와 백과 액세서리 를 전부 사 갖추었다. 회사를 그만둔 이틀째 저녁에 일찌기 동료였고 연인이었던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상대가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 다. 15초 후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같은 상대로부터였다. 그녀는 이번에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수화기를 숄더백 속에 처넣고 지퍼를 채 웠다. 그 뒤로 두번 다시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그 1개월의 휴가는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여행은 가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면 원래 예전부터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 것도 아니엇고, 게다가 남자 와 헤어진 28살의 여자가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도 어쩐지 진부한 것 같아서 흥 이 깨졌다. 그녀는 3일 동안에 다섯 편의 영화를 보고, 콘서트에 가고, 록본기 의 라이브 하우스에서 재즈를 들었다. 그리고 틈이 나면 읽을 작정으로 쌓아 두었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레코드도 들었다. 스포츠 용품점에 가서 조 깅 슈즈와 런닝, 팬츠를 사서 집 근처를 매일 15분 정도 뛰어 보았다. 처음 일 주일간은 그런 대로 잘 되었다. 번잡하고 신경이 소모되는 일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멋진 일이었다. 기분 이 내키면 요리를 하고 날이 저물면 혼자서 커리를 마시거나 와인을 마시거나 했다. 그러나 그 휴가가 10일째를 지날 무렵부터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변해갔다. 이제는 보고 싶은 영화는 한 편도 없게 되었고, 음악은 시끄러울 따름으로 LP한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책을 읽으면 머리가 아팠 다. 만든 요리는 어느 것도 시들한 맛이 났다. 조깅은 어느 날 불량한 학생풍 의 남자에게 뒤를 쫓겨 도망친 후부터 완전히 그만둬 버렸다. 이상하게 신경이 흥분되어 밤중에 잠이 깨고, 어둠 속에서 계속 누군가에게 주시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런 때 동이 터올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계 속 떨고 있었다. 식욕이 떨어지고 하루 종일 마음이 초조했다. 이미 무엇을 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랄 것도 없이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 중의 몇 사람인가는 잡담을 하거나 상담에 응해 주기도 했지만, 그들이라고 해도 일이 바빠서 그렇게 언제까지나 그녀의 상대를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앞으로 2, 3 일이면 지금 일이 일단락되니까 그러면 편히 마시러 가자고."라고 말하고 그들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2, 3일이 지나도 청하는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일을 일단락지었더니 갑자기 또 다른 일이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그녀 자신도 이 6 년간 줄곧 그런 생활을 되풀이해왔기 때문에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 쪽에서 전화를 걸어 상대를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날이 저물고부터 집에 있는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녀는 밤이 되면 산 지 얼마 안 되는 새 옷에 몸을 감싸고 밖으로 나가 록본기나 아오야마 주변의 깔끔한 바에서 마지막 전차 시간까지 혼자서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마셨다. 운 이 좋으면 그곳에서 옛친구를 만나 세상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떼울 수가 있었 다. 운이 나쁘면(그럴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누구와도 만나지 못했다. 조금 더 운이 나쁘면 돌아오는 마지막 전차 안에서 모르는 남자에게서 스커트에 정액을 뿌려 지거나, 택시 운전사에게 유혹을 당하거나 했다. 천백만의 인간의 서로 엎치락 뒤치락거리며 법석대는 도시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이 고독하다고 느꼈다. 제일 처음 그녀가 잔 상대는 중년의 의사였다. 그는 핸섬하고 품질 좋은 슈 트를 입고 있었고-나중에 안 일이지만-51살이었다. 그녀가 록본기의 재즈 클럽 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잇는데 그 남자가 옆으로 와서 <아무래도 당신과 만나 기로 한 분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군요. 저도 실은 그렇습니다. 혹시 괜찮으시 다면, 어느 쪽인가의 상대가 올 때까지>운운하는, 흔히 있는 틀에 박힌 말을 했 다. 아주 낡은 트릭이었지만, 그는 아주 좋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괜찮아요, 앉으세요>하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둘이서 재즈를 듣 고 (엷은 맛의 설탕물 같은 피아노 트리오), 술을 마시고(그가 보틀 키프했던), 얘기를 지껄였다(록본기의 옛날 이야기). 물론 그의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계가 11시를 좀 넘자, 그는 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식사하러 갑시다, 하고 말햇 다. 그녀는 지금부터 코엔지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요, 하고 말했다. 그럼 차로 데려다 주겠소, 하고 그는 말했다. 데려다 주시지 않아도 혼자서 갈 수 있 습니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고, 나는 이 근처에 방을 갖고 있는데 차라리 그곳에서 묵고 가면, 하고 그는 말했다. 아니 물론 당신이 싫다면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그도 잠자코 있었다. 저는 비싼 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해 버렸는지 자신으 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아무런 생각 없이 순간적으로 나와 버렸던 것이다. 일단 입에서 나온 말을 다시 물릴 수는 없다. 그녀는 그래서 입술을 꽉 깨물고 상대의 얼굴을 쏘아 보았다. 상대는 생긋 웃고 글라스에 새로 위스키를 부었다. "좋소."하고 상대는 말했 다. "금액을 말해 보시오." "7만."하고 그녀는 즉석에서 대답했다. 어째서 7만인지, 전혀 근거는 없다. 그래도 그녀는 액수가 7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7만이라고 하면 아마 남자가 거절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거기에 프랑스 요리 코스를 덧붙이지."하고 남자는 말하고 위스키 글라스를 단번에 확 비우고 일어섰다. "자, 가지."하고 남자는 말했다. "의사라고 했소?"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네 맞습니다."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무슨 의사였는데? 요컨대 전문이라는 것 말인데......." "수의사."하고 그녀는 말했다. "세타가야에서 수의사 일을 하고 있다더군요." "수의사라......."하고 나는 말했다. 내겐 수의사가 여자를 산다고 하는 것이 일 순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물론 수의사 역시 여자를 산다. 수의사는 그녀에게 프랑스 요리를 먹여 주고, 그리고 나서 가미야초의 네거리 부근에 있는 그의 원룸 맨션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다루었다. 난폭하지 않았고 변태적인 데도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성교하고 1시간 간 격을 두고 다시 한번 성교했다. 처음 한동안 그녀는 이런 상황에 빠져 버린 것 에 대해 몹시 당황했지만, 그에게 천천히 정성껏 애무받고 있는 동안에 ㅆ르데 없는 생각은 조금씩 사라져 없어졌고 섹스에 점차 빠져들어갔다. 남자가 페니 스를 빼니고 샤워를 하러간 후, 그녀는 잠시 침대 위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이 며칠인가 계속 그녀 안에 맺혀 있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초조함이 이미 깨끗이 사라져 없어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휴, 하고 그녀 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아침 10시에 그녀가 눈을 뜨자 남자는 이미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책상 위 에 1만 엔짜리 지페가 일곱 장 든 봉투가 있고 그 옆에 방 키가 놓여 있었다. 편지가 있었는데, 키는 우편함에 넣어 두어 줄 것과 냉장고에 애플파이와 밀크 와 과일이 들어 있다고도 씌어 있었다. 그리고 <만약 괜찮다면 가까운 시일 내 에 다시 한번 만나고 싶으니까, 그럴 마음이 생기면 이곳으로 전화해 주길 바란 다. 1시부터 5시까지는 꼭 있으니까>라고 씌어 있었다. 그리고 패트 클리닉(애 완동물 병원)의 명함이 틈새에 끼워져 있었다. 명함에는 전화번호가 씌어 있었 다. 2211이라는 넘버로 그 옆에 <냥냥, 왕왕>이라고 루비(한자 옆에 토용으로 다는 작은 활자)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 편지와 명함으로 넷으로 찢어 성냥 을 그어 뿌려서 태ㅇ따. 돈은 핸드백에 집어 넣었다. 냉장고 속의 것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따. "그 후에도 몇 번인가 돈을 받고 다른 사람과 잤습니다."하고 그녀는 내게 말 했다. 그리고 잠자코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괴고 입술 앞에서 손가락을 끼웠다. 그리고 웨이 터를 불러 위스키를 두 잔 더 부탁했다. 이윽고 위스키가 나왔다. "뭔가 안주를 시킬까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아뇨, 됐습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또 홀짝거리며 온더락을 마셨다. "질문해도 괜찮겠소, 좀 캐묻는 것 같지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좋아요, 물론."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조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 을 바라보았다. "하기야 솔직하게 말하고 싶으니까, 지금 이렇게 무라카미 씨께 털어 놓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마 남지 않은 피스타치오의 껍질을 쪼갰다. "그 밖의 경우에도 가격은 언제나 7만 엔이었소?" "아뇨."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그때로 문득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랐습니다. 제일 비ㅆ던 게 8만 엔, 제일 ㅆ던 게 4만 엔이었던 가. 상대의 얼굴을 보고 직감적으로 그런 숫자가 나왔습니다. 금액을 말하고 거절당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대단하군."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웃었다. 그녀는 그 <휴가중>에 전부 5명의 남자와 잤다. 상대는 모두 40대에서 50대 의 옷차림이 좋고 노는 일에 익숙한 남자였다. 그녀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 가 까이 하지 않을 듯한 가게에서 남자를 골라잡고, 한 번 남자를 골라잡은 가게에 는 두번 다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대개는 남자가 호텔방을 잡았고 거기서 잤다. 딱 한 번 이상한 모양을 하게 되었지만, 그 밖의 상대는 지극히 정상적이 었다. 돈도 확실히 지불했다. 그리고 그녀의 <휴가>는 끝났다. 다시 일에서 일로, 라는 쫓기는 나날이 돌 아왔다. PR지나 타운지나 팜플렛에는 큰 잡지가 갖는 프레스티지(명성)나 사회 적 영향력은 없었지만, 그런 대로 이것저것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있 었다. 옛날과 현재를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인가 하면, 현재 쪽이 행복했다. 그 녀에게는 두 살 연상의 카메라맨인 보이 프렌드가 있고, 이제 돈을 받고 다른 남자와 자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요즘 일이 재미 있기 때문에 금 방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앞으로 2, 3년 있으면 그럴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되면 무라카미 씨께 연락 드리겠습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수첩의 메모란에 주소를 써서 그걸 찢어내 그녀에게 건네 주엇다. 그녀 는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런데 그 당시 여러 남자들과 자고 받은 돈을 결국 어떻게 했지?"하고 나는 질문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위스키를 마시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떻게 했다고 생각 하세요?" "모르겠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전부 모조리 3년 정기적금으로 해 버렸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웃 었고, 그녀도 웃었다. "그 무렵이면 결혼이며 여러 가지 일로 아무리 돈이 있어도 부족할 테죠. 그 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렇겠군."하고 나는 말했다. 중앙 테이블의 그룹이 큰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뒤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이제 가야겠군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시간을 오래 뺏어서 대단히 죄송했습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재미 있는 이야기였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생긋 웃었다. 아주 멋진 웃음띤 얼굴이었다. "저어, "하고 나는 말햇다. "만약에 말이오, 내가 돈을 내고 당신과 자고 싶다 고 한다면 말이오. 만약이지만 말이오." "아, 네."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얼마라고 말할 거요?" 그녀는 입술을 조금 열어 숨을 들이쉬고 3초 정도 생각했다. 그리고서 다시 한번 생긋 웃고 "2만 엔."하고 말했다. 나는 바지 포켓에서 지갑을 꺼내 안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 헤아려 보았다. 모두 합해서 3만 8천 엔이 들어 있었다. "2만 엔 플러스, 호텔비 플러스, 이곳의 계산, 그리고 돌아갈 전차비, 그 정도 아니신가요?" 사실 그대로였다. "좋은 시간 보내시오."하고 나는 말했다. "좋은 밤 되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밖으로 나오자, 이미 비는 그쳐 있었다. 여름 비이기에 그다지 오래는 내리지 않는다. 위를 올려다보자, 보기 드물게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반찬 가게는 벌 써 문을 닫았고, 고양이가 비를 피하고 있던 작은 트럭도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 다. 나는 비가 그친 길을 오모테산도까지 걷고, 배가 고파져서 뱀장어 요릿집으 로 들어가 뱀장어를 먹었다. 뱀장어를 먹으면서, 나는 2만 엔을 내고 그녀와 자는 일을 상상해 보았다. 그 녀와 자는 일 자체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거기에 대해 돈을 낸다는 것은 좀 묘한 것이겠는걸,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옛날 섹스가 산불처럼 공짜엿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정말로 그것은 산불처럼 공짜였던 것이다. 야구장 "거의 5년쯤 전의 일입니다만, 저는 야구장 근처에 살고 있었습니다. 대학 3 학년 때입니다. 야구장이라고 해서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고 들판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것입니다. 어쨋든, 백네트가 있고 피처 마운드가 있고 1루 벤치 옆 에 간단한 스코어보드가 있고, 전체가 그물로 빙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외야는 잔디 바닥이 아니고, 대신에 푸석 푸석한 잡초가 돋아나 있었습니다. 화장실은 하나 작은 것이 있었습니다만, 탈의실이라든가 로커라든가 하는 것은 없었습니 다. 구장의 소유주는 그 근처에 큰 공장을 가지고 있는 제철회사로, 입구에는 외부인의 무단 입장은 금한다, 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습니다. 토요일이나 일요 일이 되면 그 제철회사의 사원과 공원이 만든 여러 팀이 와서 아마추어 야구시 합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회사 소속의 정식 연식 야구팀이 있어서 평일에는 그 팀들이 연습을 했습니다. 그 외에 여자 소프트볼부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야구를 좋아하는 회사 같았습니다. 그래도 야구장 이웃에 산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입니다. 저의 아파트는 3루 벤치의 바로 뒤에 세워져 잇어서 저는 그 2 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바로 눈앞이 철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심심해지면-뭐, 낮동안은 매일 심심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멍하지 아마추 어 야구 시합이나 야구부의 연습을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곳에 살게 된 것은 야구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전혀 다른 이 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얘기를 끊더니 상의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 피워 물었다. 나와 청년은 그 날이 첫대면이었다. 그는 아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글씨를 썼다. 내가 그와 만나 볼 생각이 든 것도 이유라고 하자면 그 차밍한 글씨가 계기였다. 차밍이라고 해도 그의 글씨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흔히 있는 펜습자 적인 유려함과는 무관해서 어느 쪽이냐 하면, 그것은 꾸밈 없고 소박하다는 면 에서 개성적이라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나 하나의 글자는 흔들흔들 좌우로 흔 들린 금정류(서툰 글씨를 한 유파처럼 불러서 조롱하는 말)로, 밸런스도 제멋대 로이고, 어딘가의 선이 너무 길거나 아니면 너무 짧거나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씨에는 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유유자적함이 있었다. 나는 태 어나서 이 정도로 아름답고 멋이 있는 펜글씨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그런 글씨로 원고지 70매 정도의 소설을 완성해서 내게 소포로 보내왔던 것이다. 나에게는 가끔 그런 원고가 우송되어 온다. 카피한 경우도 있고 육필한 경우 도 있다. 사실은 대충 훑어보고 감상평이나 무언가를 써야만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런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자신도 없고 해서-요컨대 극단적으로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간인 것이다-언제나 양해의 편지를 넣어 본인에게 돌려보내고 있다. 미안하게는 생각하지만, 잘못된 우물에서 물을 퍼올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청년이 보내온 70매의 소설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이 유 중 한 가지는 앞서도 얘기했듯이, 글씨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이 정도로 멋진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소설을 쓰는 것인지 아무래도 궁금했던 것 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 원고에 첨부된 편지의 문장이 대단히 예의 바른 데다 심플하고 정직했기 때문이다. 폐를 끼쳐 드려서 정말로 죄송하게 생 각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을 써 보기는 했지만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스스로도 결정하기 어려워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본인이 쓰려고 했던 소재와 본 인이 쓴 작품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갭이 있는데, 그것이 도대체 작가에게 무엇 을 의미하는 것인지 자신으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아주 짧은 비평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라는 편지였다. 취미가 고상한 편지지와 취미가 고상한 봉투였다. 오자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소설을 읽었 다. 소설의 무대는 싱가포르 해안이었다. 주인공인 25세 독신 샐러리 맨으로, 그 는 애인과 함께 휴가를 얻어 싱가포르에 와 있었다. 그 해안에는 게 요리 전문 의 레스토랑이 잇었다. 두 사람 모두 게 요리를 아주 좋아했고, 그 레스토랑은 그 지방 사람들 상대의 것이었기에 가격이 굉장히 쌌고, 그래서 두 사람은 매일 저녁 때가 되면 그곳으로 가서 싱가포르산 맥주를 마시고 배불리 게 요리를 먹 었다. 싱가포르에는 몇 십 종류의 게가 있고, 백 종류도 넘는 게 요리가 있었 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레스토랑을 나와 호텔방으로 돌아오자, 그는 지독하게 기 분이 나빠져 화장실에서 토했다. 위 속은 게의 흰 살로 가득차 있었다. 그가 변기 물에 뜬 그런 게살덩어리를 가만히 보고 잇자니, 그것은 아주 조금씩 움직 이는 듯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눈의 착각이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 러나 게살덩어리는 확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주름이 뒤틀어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살의 표층이 실룩실룩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흰 벌레였다. 게살과 같은 색을 한 희고 아주 작은 벌레 몇 십 마리가 게살의 표면에 떠 있었던 것이 다. 그는 다시 한번 위 속의 것을 몽땅 토했다. 위가 주먹 정도의 크기로 까지 수축했고, 쓴 녹색의 위액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는 토했다. 그래도 부족해서 그는 양치액을 꿀꺽꿀꺽 마시고 그것을 다시 전부 토했다. 그러나 벌레에 대한 일은 애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는 애인에게 구역질 기미는 없느냐고 물었 다. 없어요, 하고 애인은 말했다. 당신, 아마도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럴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맞아, 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 날 저녁 때 두 사람은 같은 접시에 담긴 같은 요리를 먹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남자는 푹 잠든 여자의 몸을 달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 서 꿈틀거리고 있을 수많은 작은 벌레를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였다. 제재도 흥미롭고 문장도 견실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소설치고는 대단히 잘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씨가 멋졌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글씨의 매력에 비교한다면, 그 작품의 소설로서의 매력의 정도는 훨씬 낮은 것 이었다. 확실히 잘 마무리되어 있긴 하지만, 소설로서의 강약 장단이라는 것이 거의 없이 모두 균등해서 단조로운 것이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의 소설 작법에 대해서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입장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품고 있는 결점이 상당히 숙명적인 종류의 결점이라는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요컨대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단 한 군데라도 좋으니까 두드러지게 뛰어난 부분이 있으면, 그곳 을 포인트로 해서 소설의 레벨을 끌어 올리는 일은 (원리적으로는)가능하다. 그 러나 그의 소설에는 그런 데가 없었다. 어디를 취해도 평균적이고 굴곡 없이 밋밋해서 사람의 감정으로 파고드는 데가 없었다. 그러나 나로선 만난 적도 없 는 타인을 향해서 정직하게 그런 감상을 써 보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상당히 흥미로우니 군더더기 설명 부분을 삭제하고, 주의 깊게 브러시업(수리, 손질)하고 나서 어딘가의 잡지 신인상에 응모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한다. 그 이상의 세밀한 비평은 내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짧은 편지를 써서 원고에 첨부해 그에게 보냈다. 일 주일 후,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폐를 끼치는 게 되겠지만 한번 만나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다. 자신은 25세로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 직장 근처에 꽤 맛있는 게 요릿집이 있는데 비평을 받은 사례로 간단하지만 한자리 마련하고 싶 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미 내친 걸음이었고, 원고를 읽은 사례로 게를 대접받 는다고 하는 것도 어쩐지 흥미로운 일이었기에 나는 나가는 것으로 했다. 나는 글씨체와 문체의 분위기에서 무의식적으로 마른 청년을 예상하고 있었는 데, 실제로 만나 보니, 그는 표준보다는 통통했다. 그렇다고 해서, 비만하다는 뜻은 아니고 살이 찐 편으로 여유가 있다는 정도이다. 볼이 통통하고, 이마가 넓고, 살짝 머리를 한가운데에서 양쪽으로 나누고, 선이 가는 둥근 형의 안경을 쓰고 잇었다. 전체적으로 청결하고, 성장 배경이 좋은 것 같고, 복장의 취향도 견실했다. 그러한 점은 예상대로였다. 우리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나서, 작은 객실에서 마주보고 앉아 맥주를 마시 고 게를 먹었다. 식사하는 동안 소설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의 끌씨를 칭찬했다. 글씨를 칭찬받자, 그는 아주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 뒤 에, 그는 은행 업무의 내막적인 얘기를 화제로 꺼냈다. 그의 이야기는 꽤 재미 있었다. 적어도 그의 소설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 있었다. "소설에 대해선 이제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고 얘기가 일단락된 곳에서 그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실은 원고를 돌려받고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 보았습니다. 스스로도 좋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손질하면 조금 더 부분적으로 나아질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그렇더라도 제가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 입니다. 진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건 진짜로 있었던 일인가?"하고 나는 깜짝 놀라서 물어 보았다. "네 물론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작년 여름의 일입니다."하고 그는 정말이지 당연하다 는 얼굴로 말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 이외에는 저는 잘 쓸 수가 없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진짜 있었던 일밖에 쓰지 않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현실 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문제는 그 점입니다." 나는 애매하게 대답을 했다. "저는 아무래도 이대로 은행원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하고 그는 웃으 면서 말했다. "그래도 스토리로서는 상당히 유티크해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나는 아주 당연히 이매지네이션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젓가락을 놓고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종종 이상한 체험을 합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이상하다고 해서 그렇게 당치도 않은 듯한 일은 아니고,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면 특별히 이 상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제게 그것은 어쩐지 좀 기묘한 사건인 겁니다. 현실감이 조금쯤 결여된 듯한 종류의 것입니다. 즉, 싱가포르 해안의 레스토랑 에서 게를 먹고 토하고 벌레가 나왔는데도, 여자 쪽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고 있 다는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상하다고 하면 이상하고, 이상하지 않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지요. 그렇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제 안에 가득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써 보자고 생각했던 겁니 다. 제재엔 불편한 점이 없으니까 얼마든지 쓸 수 있으리라고요. 하지만 실제 로 써 보고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라 고 말입니다. 흥미로운 제재를 아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좋은 소설을 많이 쓸 수 있다고 한다면 소설가와 은행가의 차이는 없어져 버리겠지요." 나는 웃었다. "그래도 만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덕분에 여러 가지 일이 후련해졌습니다." "특별히 인사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 대신에 자네가 말한 그 이상한 체험 이라는 것을 어느 것도 좋으니까 하나 들려 줄 수 있겠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약간 놀란 것 같았다. 그는 글라스에 남아 있던 맥주를 한 입에 털어넣고, 그런 뒤에 물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제 이야기를 말입니 까?" "음. 물론 자네가 자신의 소설을 위해서 남겨 두고 싶다고 한다면 다르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아닙니다. 이제 소설은 어찌됐든 괜찮습니다."라고 그는 말하며 손을 내저었 다. "말씀 드리는 것은 전혀 상관 없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단지 제 얘기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죄송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 쪽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런 점은 걱정하지 않 아도 된다,라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되어 그는 야구장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야구장 외야의 뒤편은 모래밭으로 되어 있고, 강 건너 편에는 잡목 숲에 섞여 아파트가 몇 동인가 듬성듬성 지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심에서 꽤나 떨어 진 교외로, 주위에는 밭 따위가 꽤 남아 있었습니다. 봄이 되면 종달새가 빙글 빙글 돌면서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곳에서 살았던 이유는 그다지 목가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아주 세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어떤 여자애에게 빠져 있었습니다만, 그녀는 저 따위는 개의치도 않 는 듯했습니다. 그녀는 상당한 미인으로, 머리가 좋고 어딘지 모르게 가까이하 기 힘든 분위기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와 저와는 같은 학년이고 대학의 같은 클럽에 있었습니다만, 그녀의 입버릇으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정해진 애인이 있 는 듯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에게 애인이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 습니다. 클럽의 다른 동료들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의 생활을 철저하게 체크해 보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녀 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을 알게 되면 뭔가 단서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만약 그것이 안 되더라도 적어도 저의 호기심은 충족될 것이기 때문이었죠." "저는 클럽 명부에 실려 있는 주소를 단서로 중앙선의 아주 구석진 역에서 내 려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그녀의 아파트를 찾아 냈습니다. 아파트는 3층 건 물로 꽤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베란다는 남향이고 강가를 향해 있어서 아주 전 망이 좋았습니다. 강 건너 편에는 넓은 야구장이 있어서 야구를 하고 있는 사 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배트가 볼을 치는 소리며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 따 위로 들렸습니다. 야구장의 맞은 편에는 인가가 모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녀의 방이 3층 왼쪽 끝에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아파트를 떠나 다리를 건너서 강 맞은 편으로 나왔습니다. 다리는 훨씬 하류 쪽에밖에 없었기 때문에 강을 건너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강 건너 언덕을 다시 상류 쪽으로 걸어 그녀의 아파트 맞은 편에 서서는, 그녀의 방 베란다를 바라보았습 니다. 베란다에는 화분에 심어 놓은 화초가 몇 개인가 나란히 있었고, 구석에는 세탁기가 놓여 있었습니다. 창에는 레이스로 된 커튼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나는 야구장을 외야펜스를 따라 레프트에서 서드(3루) 쪽으로 돌았습니 다. 그리고 서드 베이스 옆의 마침 좋은 장소에 세워진 몹시 낡은 아파트를 발 견했던 겁니다." "저는 그 아파트의 관리인을 찾아 이층에 빈 방이 있는지 어떤지를 물었습니 다. 때마침 계절은 3월의 시작이어서 방은 몇 개인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방을 하나하나 차례로 돌아 제 목적에 딱 맞는 방을 고르고, 그곳에서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그녀의 방이 훤히 보이는 곳입니다. 그 한 주일 동 안에 저는 짐을 정리해서 그 방으로 이사해 왔습니다. 건물은 낡고 창이 북동 향이었기 때문에 방값은 놀랄 만큼 쌌습니다. 그런 뒤, 저는 본가로 돌아가-본 가는 오다와라(小田原)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언제나 주말에 집에 돌아가고 있 었습니다만-아버지께 부탁해서 특출나게 큰 카메라의 망원 렌즈를 빌려 왔습니 다. 그리고 그것을 삼각 받침대에 장치해서 창가에 놓고 그녀의 방이 보이도록 세트했습니다. 처음부터 들여다보겠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험삼아 망원렌즈로 봐 보자는 생각이 들어 실제로 해 보니, 방 안이 거짓말처럼 똑똑히 보였습니다. 마치 손바닥을 들여 다 보듯이 말입니다. 서가에 있는 책의 타이 틀까지도 읽어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뒤, 그는 한숨을 쉬며 담배를 재떨이에 넣고 부벼 껐다. "어떻게 할까 요? 끝까지 이야기할까요?" "물론."하고 나는 말했다. "신학기가 시작되자, 그녀는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의 생 활을 마음대로 바라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아파트 앞은 강가이고, 그 건너 편은 야구장이고, 게다가 방이 3층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생활이 누군가 에게 들여다보이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완전히 제 목적 대로였습니다. 밤이 되면 그녀는 일단 레이스로 된 커튼을 쳤습니다만, 그런 건 방에 불빛만 켜져 있으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껏 그녀의 생활상이며, 몸 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은 찍었나?" "아닙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사진은 찍지 않았습니다. 그렇게까지 한다면 스스로가 굉장히 비열하게 여겨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긴, 그저 엿보 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비열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역시 선은 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은 찍지 않았습니다. 단지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자애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은 정 말로 묘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여자 형제가 없었고 특정한 여자애와 특별히 깊 은 관계가 있었던 적도 없었기에, 여자애가 평상시의 생활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따위는 전혀 아무것도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일이 제게 있 어서는 놀라웠고 적잖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말씀 드리기가 거북합 니다만, 아무튼 대단히 묘한 것이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나는 말햇다. "그러한 것은 함께 얼굴을 맞대고 살면서 차차 익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 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돌하게 확대된 프레임 안으로 날아들어오면 그것은 상 당히 그로테스크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 그로테스크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적잖이 있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타입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보고 있으면 슬프고 숨이 막힙니다. 그래서 저는 일 주일 정도 엿보는 것을 계속한 뒤에 이제 이런 짓은 그만두자고 결심했던 겁니다. 저는 망원 렌즈를 카메라에서 떼고 삼각 받침대와 함께 벽장에 처넣었습니다. 그리고 창가에 서서 그녀의 아파트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외야 펜스 조금 위인 라이트와 센터의 중간 정도에 그녀 아파트의 등불이 보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고 있자니, 저는 수많은 타인들의 일상에 대해서 다소 따뜻한 느낌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됐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 정해진 애인이 없는 듯한 것은 일 주일의 관찰 결과로 거의 알 수 있었고, 그리고 아직 지금이라면 여러 가지 일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내일이라도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해서 잘 되면 그 뒤부터 연인 사이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그렇게 간단하게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그녀의 생활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구장 건너 편으로 보이는 어렴풋한 아파트 불빛을 보고 있자니, 제 몸 안에서는 그것을 확대해서 잘라 버리고 싶다 는 욕구가 자꾸 커져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억제하기란 제 의지력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마치 입 안에서 혀가 점점 부풀어올라 마지 막에는 질식해 버릴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뭐랄까, 섹슈얼한 느 낌인 동시에 비섹슈얼한 느낌입니다. 마치 액체와도 같이 제 속의 폭력성이 모 공을 여는 듯한 그런 느낌인 것입니다. 그런 것을 멈추게 하기는 아마 누구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폭력성이 제 몸 안에 잠재해 있었다고는 그 때까지 제 자신도 인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벽장 안에서 다시 카메라와 망원 렌즈와 삼각 받침대를 꺼 내어 전과 마찬가지로 세트하고 그녀의 아파트를 계속해서 바라보았습니다. 그 러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생활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이미 제 신체 기능의 일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눈이 나쁜 사람이 안 경을 벗을 수 없게 되듯이, 영화에 나오는 살인 청부업자가 손에서 총을 놓을 수 없듯이, 저는 카메라의 파인더에 잡힌 그녀의 공간 없이는 생활해 나갈 수가 없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는 세상의 그 외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한 흥미를 조금씩 잃어갔습니다. 학교에도, 클럽에도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테니 스라든가, 오토바이라든가, 음악이라든가, 이제까지 그런 대로 열중했던 것도 점 점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식이 되었고 친구들과의 교제도 완전히 줄어 버렸습니 다. 클럽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게 된 것은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는 것이 점점 괴로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저를 향해서 갑자기 손가락을 들이대며 모두의 앞에서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을 전부 알고 있어요>하고 말하는 것은 아 닐까, 라는 공포심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그녀가 제 행위를 눈치채고 있었 다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전에 창을 두터운 커튼으로 가렸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모두의 앞에서 저의 배덕행위가-배덕행위죠, 확실히-완전히 폭 로되어 모두에게 규탄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그대로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악몽에서 저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ㅂ 번이나 그런 꿈을 꾸고 땀에 흠뻑 젖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학교에도 거의 가지 않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복장에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원래 깔끔한 옷차림을 좋 아하는 성격이었습니다만, 그것이 싹 변해 버려서 같은 옷을 계속 누더기가 될 때까지 입고 있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머리를 깎아야 하는데도 이발소에 도 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방은 썩은 시궁창 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맥주캔 이나, 인스턴트 식품의 빈 상자나, 함부로 버린 담배 꽁초 따위가 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그런 속에서 저는 그녀의 모습을 계속해서 뒤좇고 있었습니다. 그 런 상태로 3개월 가량 지나자, 여름방학이 찾아왔습니다. 여름방학이 찾아오자, 그녀는 기다리고 잇었다는 듯이 훗카이도의 본가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녀가 귀성용 슈트케이스에 책이며 노트며 옷가지 등을 채워 넣고 있는 작업을 망원 렌즈로 죽 좇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냉장고의 콘센트를 빼고, 가스의 개폐 장치 를 잠그고, 창의 문단속을 확인하고, 전화를 몇 통 걸고, 그런 뒤에 아파트를 나 갔습니다. 그녀가 나가 버리자, 온 세상이 휑하니 빈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녀가 나간 후로는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죄다 몸에 지니고 나가 버린 듯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태어나서 그토록 공허한 느낌을 받았던 적은 없습니다. 마치 마음 속으로부터 나온 몇 줄기의 코드를 인정사정 없이 뽑혀 버리고 만 것 같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위가 메슥거려서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고독하 고, 매순간 더 비참한 곳을 향해서 밀려 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는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 가 없어져 버린 일로, 저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던 수렁에서 빠져나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두 가지의 생각이-요컨대 언제까지나 그녀의 생활을 확대해서 보고 싶다는 생각과 이제 해방되었다는 생각입니다-제 몸을 두 개의 전혀 다른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고 있어서, 저는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며칠 동안 몹시 혼란스러워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며칠인가가 지나자, 저는 조금 정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목욕을 하고, 이발소에 가고, 방을 정리하고, 세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차츰 본래의 저로 돌아왔습니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본 래의 저로 돌아와 버렸기 때문에, 저도 제 자신을 신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릴 정 도였습니다. 진짜인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요." 그는 웃으며 무릎 위에서 양 손의 손가락을 깍지끼었다. "한 여름 동안 저는 공부했습니다. 학교에 그다지 가지 않았던 탓에, 저의 학 점은 풍전등화였습니다. 당면한 문제는 방학 직후에 실시될 전기시험이었습니 다. 저는 출석 부족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히 좋은 점수를 얻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본가로 돌아가서 거의 아무 데도 나가지 않은 채 시 험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는 차츰 그녀를 잊어갔습니다. 그리 고 여름방학도 거의 막바지가 되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이미 이전만큼은 그녀에게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엿보는 일에 의해서 사람은 분열적인 경향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혹은 확대하는 것에 의해서, 라 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즉, 이런 것입니다. 저의 망원 렌즈 안에서 그녀는 두 개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녀의 몸과 행위로 말입니다. 물론 일상세계에서는 몸이 움직이는 것에 의해 행위가 일어납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확대된 세계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녀의 몸은 그녀의 몸이고, 그 녀의 행위는 그녀의 행위입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녀의 몸은 그저 단지 그곳에 있고, 그녀의 행위는 그 프레임 바깥 쪽에서 다가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 게 됩니다. 행위가 그녀인가, 아니면 몸이 그녀인가? 그리고 그 한가운데가 쑥 결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서 몸으로부터 보아도, 행위로부터 보아도, 그런 식으로 ㄷㄴ편적으로 보고 있는 한, 인간 존재라는 것은 결코 매력 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거기서 일단 얘기를 멈추고 맥주를 더 주문했다. 그리고 내 글라스와 자신의 글라스에 부었다. 그는 맥주를 한 모금인가 두 모금인가 마시고,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얘기가 계속되길 기다 렸다. "9월이 되어 저는 학교 도서관에서 그녀와 마주쳤습니다. 그녀는 햇살에 그을 려서 굉장히 건강해 보였습니다. 그녀 쪽에서 제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도대 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저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유방이며, 음모며, 그녀가 매일 밤 자기 전에 하는 체조며, 양복장에 늘어선 그녀의 양복이며, 그런 갖가지 단편이 하나가 되어 제 머릿속으로 밀어닥쳐 왔습니다. 마치 진흙투성 이의 지면에 우격다짐으로 쓰러뜨려져서 얼굴이 세차게 진흙 속으로 눌려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겨드랑이 밑으로 땀이 배어 왔습니다. 지 독하게 불쾌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런 기분이 공평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 다만, 저는 그것을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만이야."하고 그녀는 말 했습니다. "모두 걱정했었다구, 줄곧 네가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말야." 그래서 저는 "몸이 좀 안 좋았거든. 하지만 이젠 괸찮아."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 니, 좀 마른 것 같네."하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만져 보았습니다. 저는 확실히 그 때 평상시보다 3킬로인가 4킬로 여위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 채로 조금 얘기를 나눴습니다. 누가 어떻게 했다든가 하는 따위의 실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그녀의 오른 쪽 옆구리에 있는 <반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뒤엔, 꽉 끼는 옷 을 입을 때에 커다른 거들로 배와 엉덩이를 죄어대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 었습니다. 그녀는 제게 점심을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실은 먹지 않았습니 다만, 벌써 때웠다고 저는 대답했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식욕 따위도 없었습니 다. 그럼 차라도 마실까?하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시계를 보고 나서, 아 쉽지만 친구에게 노트 카피를 빌릴 약속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 리는 헤어졌스빈다. 저는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쥐어 짜면 물웅덩이가 될 정도로 옷이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몹시 끈적끈적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체육관에서 샤워를 하고, 대학 매점에서 산 새 속옷 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클럽을 그만두고, 그 이후 그녀와는 거의 얼굴도 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맛있게 연기를 내뿜엇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다지 드러내 놓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그 아파트에는 그 후에도 살았었나?"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렇습니다, 그 해 연말까지 그곳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엿보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망원 렌즈도 아버지께 돌려 드렸습니다. 마치 씌었던 귀신이 떨어져 나간 것같이 그런 욕구가 없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때로 밤이 되 면 창가에 앉아서 야구장 건너 편으로 보이는 그녀 아파트의 작은 불빛을 바라 보고 멍하니 시간을 보냈습니다. 작은 불빛이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저는 비행기의 창으로 지상의 야경을 내려다볼 적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작은 불 빛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한 것인가라고 말이지요."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눈을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 지금도 그녀와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눴던 때의 그 땀의 끈적끈적 했던 감촉과 이상한 냄새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땀만큼은 앞으로 두번 다시 흘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 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헌팅 나이프 앞바다에는 평평한 신기루와 같은 커다란 부표가 두 개 옆으로 나란히 떠 있 었다. 물가에서 부표까지 클로로 50스트로크(수영에서 손발로 한 번 젓기), 부 표에서 부표까지 30스트로크였다. 수영하기에는 적당한 거리이다. 하나의 부표 너비는 방으로 말하면 6조(다다미 6장) 정도로 그것이 쌍둥이 빙 산같이 두둥실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다. 물은 어느 쪽이냐 하면, 부자연스러 울 만큼 투명해서 위에서부터 들여다보면 부표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은 굵 은 쇠사슬이랑 그 앞의 콘크리트 방추석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수심은 대강 5 미터에서 6미터 정도일 것이다. 파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물살은 일지 않았기 때문에 부표는 거의 흔들리지도 않고, 마치 긴 못으로 단단히 해저 에 고정된 것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부표 위에 서서 해안 쪽으로 눈을 돌리면, 길게 옆으로 뻗은 흰 모래 사장이 랑 붉게 칠해진 라이프 가드(감시원, 구조원)의 감시대랑 일렬로 늘어선 야자나 무의 녹색 잎사귀를 바라다볼 수 있었다. 멋들어진 경치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림엽서풍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니까 뭐 트집잡자는 것은 아니다. 해 안선을 오른쪽으로 죽 눈으로 더듬어, 모래사장이 끝나고 울퉁불퉁한 검은 바위 밭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주변에 내가 묵고 잇는 코티지(별장)식 호텔이 보 였다. 호텔은 흰 벽으로 된 2층 건물로 지붕 색은 야자수 잎보다 조금 더 짙은 녹색이었다. 계절은 6월말로, 아직 시즌이 되려면 멀었으므로 해안에는 셀 수 있을 만큼의 사람밖에 없었다. 부표 위의 하늘은 미군기지로 향하는 군용 헬리콥터가 지나는 항로가 되고 있 었다. 그 헬리콥터들은 앞바다에서 똑바로 다가와서 두 개의 부표 정중간께를 지나서 야자나무의 열을 넘어 내륙 쪽으로 사라져갔다. 자세히 바라보면 파일 럿의 얼굴까지 보일 정도의 저공비행이었다. 기체는 무거운 색조의 올리브 그 린이고, 눈 앞에는 곤충의 촉수처럼 곧은 레이더 안테나가 앞 쪽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군용 헬리콥터가 날아오는 걸 제외한다면, 그곳은 잠이라도 깊이 들어 버린 것 같은 조용하고 평화스런 해안이었다. 우리의 방은 2층 건물인 코티지의 1층에 있고 창은 해안에 면해 있었다. 창 의 바로 아래에는 철쭉과 아주 닮은 붉은 꽃이 어우러져 피어 있었고, 그 건너 편으로 야자나무가 보였다. 정원의 잔디는 깨끗하게 잘 손질되어 있었고, 부채 꼴로 머리를 흔드는 스프링클러가 달그락달그락하는 졸린 듯한 소리를 내면서 하루 종일 주위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창틀은 볕에 잘 그을린 녹색이고, 베네 치안 블라인드는 아주 조금 녹색이 가미된 흰색이었다. 방 벽에는 고갱의 타이 티 그림이 2장 걸려 있었다. 코티지의 한 동은 네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층에 두방, 2층에 두 방 이다. 우리 옆 방에는 모자 간인 두 사람의 일행이 묵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 은 우리가 찾아오기 전부터 계속 그곳에 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맨 처음에 이 호텔에 도착해서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열쇠를 받거나 짐을 옮 기게 하거나 하고 있는 동안 그 조용한 두 사람은 로비의 깊숙한 소파에 마주앉 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모친도 아들도 각자의 신문을 손에 들고서, 마치 정해 진 시간을 인위적으로 지연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신문의 구석구석까지 훑어보고 있었다. 모친은 60세에 가까운 50대, 아들 쪽은 우리와 비슷한 정도의 나이인 28살이나 29살 정도였다. 두 사람 모두 얼굴 생김새가 훌쭉하고 이마가 넓고 언제나 내리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이 정도로 아주 닮은 모자(母子)를 나는 이 제까지 본 적이 없었다. 모친은 그 나이의 여성으로서는 놀랄 만큼 키가 크고, 등뼈가 곧고, 손발의 움직임도 빠릿빠릿했다. 두 사람 모두가 어쩐지 바느질이 잘 된 테일러드 슈트 같은 분위기였다. 아들 쪽도 몸매로부터 추측하면 모친과 마찬가지로 키가 상당히 클 것 같았지 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키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내내 휠체어에 앉은 채 한 번도 일어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상 모친이 뒤에 서서 그 휠체어를 밀 어 주었다. 밤이 되면, 그는 휠체어에서 소파로 옮겨 거기서 룸 서비스로 제공받은 저녁 을 먹었고, 그런 다음에는 책을 읽는 따위로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방에는 물론 쿨러가 켜져 있었지만, 모자는 그 스위치를 끈 채로 두고 언제나 입구의 도어를 열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들게 하고 있었다. 아마 쿨러의 바람이 그의 몸에 좋지 않은 것이겠거니, 하고 우리는 추측했다. 그들의 문 앞을 통하 지 않고는 방의 출입을 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그 때마다 그들의 모습을 보게 끔 되었다. 입구에는 발 같은 스크린이 쳐져 있어서 일단 눈가리개 역할을 하 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대강의 실루엣은 어쨋든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항상 소파 세트에 마주 앉아 책이나 신문이나 잡지 따위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말이 없었다. 그들의 방은 언제나 박물관같이 조용했고, TV소 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냉장고의 모터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두 번 가량 라디오 소리가 들렸던 적이 있었다. 한 번은 클라리넷이 포함된 모 차르트의 실내악이고, 또 한 번은 내가 모르는 관현악곡이었다. 아마 리히알트 슈트라우스나 그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 나 그런 것을 제외한다면, 그 밖에는 실로 고요했다. 이를테면, 모자라기 보다 는 노부부가 묵고 있는 방 같았다. 식당이나 로비나 복도나 정원 산책로에서 우리와 그 모자는 자주 얼굴을 마주 쳤다. 원래가 자그마하고 아담한 규모의 호텔인 데다, 시즌전으로 손님의 수도 아직 적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서로의 얼굴이 눈에 잘 띄게 된다. 얼굴을 마주 치면, 우리는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를 했다. 모친과 아들은 인사 방 식이 약간 달랐다. 아들 쪽은 턱과 눈을 흘끗 움직일 정도의 희미한 인사이고, 모친 쪽은 상당히 예절바른 인사였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들의 인사에서 받 는 인상은 비슷한 정도의 것이었다. 그것은 인사로 시작해서 인사로 끝날 뿐, 그 다음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호텔 다이닝룸에서 그 모자와 이웃하게 되었어도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했고, 그 모자는 모자간 이야기 를 했다. 우리는 아이를 낳을까 말까며 이사와 빚이며 일의 장래 등을 의논했 다. 그것은 우리 두 사람에게는 20대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그 모자가 어떤 이 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대체로 말이 없 었고, 입을 열어도 대단히 목소리가 작았기 때문에-마치 독순술(讀脣術)이라도 쓰고 있는 것 같았다-나로서는 도저히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조용하게, 마치 깨질 것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 게 식사를 했다. 나이프나 포크나 스푼 소리조차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끔 그들 모두는 환영이어서 뒤 테이블을 돌아보면 사라지고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매일 아이스박스를 가지고 해변으로 나갔다. 우리 는 몸을 태울 때 바르는 오일을 바르고, 비치매트에 누워서 몸을 태ㅇ다. 그리 고, 그러는 동안에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에서 롤링 스 톤즈나 마빈 게이를 듣고,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문고판을 다시 읽 고 있었다. 태양은 내륙으로부터 얼굴을 내밀어 헬리콥터와는 반대 진로를 취 해서 수평선으로 가라앉았다. 늘 2시 무렵이 되면 휄체어의 모자가 해변에 찾아왔다. 모친은 깔끔한 모양 의 수수한 색조로 된 반소매 원피스에 가죽 샌들을 신었고, 아들 쪽은 알로하 셔츠나 폴로 셔츠와 면으로 된 슬랙스와 같은 차림이었다. 모친은 챙이 넓은 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고, 아들 쪽은 모자 없이 짙은 녹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야자나무 그늘에 앉아서 딱히 무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 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늘이 이동하면 그들도 거기에 맞춰 조금 이동했 다. 두 사람은 휴대용 은색 포트를 지참하고 있어서 때때로 그 포트로부터 종 이컵에 음료수를 부어 마셨다. 무엇을 마시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뒤 에 두 사람이 크래커 같은 것을 먹고 있을 때도 있었다. 두 사람은 30분 정도 잇다가 어딘가로 떠나 버리는 일도 잇었고, 3시간이나 그곳에 꼼짝 않고 있는 적도 있었다. 수영을 하다 보면, 몸위로 그들의 시선을 느낀 적도 있었다. 수영을 하다 보면, 몸위로 그들의 시선을 느낀 적도 있었다. 부표 근처에서 야자나무의 행렬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사 실 내 눈의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부표에 올라서서 야자나무 그늘 쪽으로 눈을 돌리면 그들이 확실히 내 쪽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엇다. 종종 그들의 은 색 포트가 나이프 같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이 보였다. 부표 위에 엎드려 멍하 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점차 거리의 밸런스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 이 들 때도 있었다. 그들이 아주 조금만 손을 뻗어도 그들의 손이 내 몸에 닿 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50스트로크 정도의 차가운 물 따위는 전혀 의미 없 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어째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 자신으로서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런 나날이, 높은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하루와 하루 사이에 확실히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은 두드러진 특징은 없었다. 해가 뜨고 해 가 지고, 헬리콥터가 하늘을 날고, 나는 맥주를 마시고 헤엄쳤다. 호텔을 떠나기 전날 오후,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수영을 했다. 아내는 낮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헤엄쳤다. 토용일인 탓에 해안의 인파는 평소 보다 약간 많았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해변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몇 쌍인가의 남녀가 모래 위에 엎드려 살갗을 태우고, 가족 동반인 일행이 물가에서 물놀이 를 하고, 몇 사람인가는 언덕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수영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해안 기지로부터 온 것 같은 한 무리의 미국인들이 야자나무에 로프를 치고 비치 발리볼을 하며 놀고 잇었다. 모두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고, 키가 컸 고, 머리는 짧았다. 군인이란 어느 시대에도 비슷한 얼굴 생김새를 하고 있다. 내다보았더니 두 개의 부표 위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태양은 높고 하늘엔 한 조각의 구름도 없었다. 시계 바늘은 2시를 지나고 있었지만, 휠체어 의 모자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발을 물에 담그고 가슴 근처의 깊이가 될 때까지 바다를 향해 걸었고, 그런 다음에 왼쪽의 부표로 방향을 돌려서 클롤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어깨의 힘을 빼고 물을 몸에 감듯이 천천히 헤엄쳤다. 서둘러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른손을 빼서 똑바로 앞쪽으로 뻗고, 그 다음엔 왼손을 빼서 뻗는다. 왼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물에서 얼굴을 들어 신선한 공기를 폐 속으로 보낸다. 물을 튀기면 그것이 태양빛으로 하얗게 빛났다. 모든 것이 내 주위에서 반짝반 짝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스트로크의 수를 세면서 헤엄쳤다. 40까지 세고 나서 앞쪽을 바라보니, 부표는 이미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확히 10스트로크로 내 왼손 끝이 부표의 측판에 닿았다. 정확하게 언제나대로였다. 나는 그 상태 로 잠시 바다 위에 떠서 호흡을 조절한 뒤, 부착된 사다리를 붙잡고 부표 위로 올라갔다. 부표 위에는 뜻밖에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블론드 머리의 볼 만하게 살찐 미국 여인이었다. 해변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부표 위에 사람의 모습이 없는 것 처럼 생각되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부표의 가장 안쪽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어서 눈에 띄기 어려웠던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보았을 때 그녀 는 때마침 부표의 그늘진 부근을 헤엄치고 잇엇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튼 그녀는 부표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흔히 밭에 세워져 잇는 <농약살포 주 의> 깃발 같은 빨갛고 작은 비키니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토실 토실하게 살이 쪄 있었기 때문에 비키니는 실제 이상으로 작아 보였다. 이제 마악 수영하러 온 듯이 피부는 레터 페이퍼(편지지)와 같이 희었다. 내가 물을 떨어뜨리면서 부표에 오르자, 그녀는 아주 조금 눈을 뜨고 내 모습 을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가 자고 있는 것과는 반대 쪽 끝에 앉아 양 다리 끝을 물에 담그고 해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야자나무 밑에는 아직 모자의 모습은 없었다. 야자나무 밑에도 그 밖의 어느 곳에도 그들의 모습은 없었다. 해안 어느 곳에 있더라도, 그들의 티 한점 없는 은색 휠체어는 반드시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못 보고 놓칠 리도 없다. 그들 은 2시가 되면 언제나 도장을 찍듯이 해안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서 나는 어쩐지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은 기 분이 되어 버렸다. 습관이란 것은 묘한 것이다. 그저 대수롭지 않은 요소가 빠 진 것만으로 자신이 세계의 한 부분에서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혹은 두 사람은 이미 호텔을 떠나서 어딘가-어디라도 좋다. 그들이 원래 존 재하고 있던 장소-로 돌아가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과 조금 전 런치 타임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얼굴을 마주쳤을 때, 그들에게서 그런 느낌은 조금도 받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시간을 들여 <오늘의 런치>를 먹고 식후에 아들은 아이스티를 마시고 모친은 푸딩을 먹고 있었다. 그런 뒤에 바로 짐꾸리기에 매 달릴 것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여자와 같은 모양으로 엎드려서 작은 파도가 부표의 측판을 때리는 소리 에 귀를 기울이면서 10분쯤 몸을 태웠다. 흰 바다새가 마치 자를 이용해서 하 늘에 선을 긋는 것처럼 똑바로 뭍을 향해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귓속으로 들어간 물방울이 태양빛으로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강한 오후 햇 살이 수많은 침이 되어서 땅이랑 바다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몸을 적시고 있던 바닷물이 증발해 버리자, 곧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몸을 적시고 있던 바닷물이 증발해 버리자, 곧 바로 땀이 나기 시작해 온 몸을 적셨다. 더위로 참을 수 없 게 되어 얼굴을 들자, 그녀 쪽은 이미 몸을 일으키고 양 손을 무릎에 대고 하늘 을 보고 있었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작고 빨 간 비키니가 부풀어 오른 흰 살에 확실하게 죄어 있고, 둥근 땀방울이 먹이 주 변에 떼지어 모인 아주 작은 벌레같이 그 주위를 덮고 있었다. 배 둘레에는 마 치 토성의 테두리같이 지방이 달라붙어 있었고, 손목이며 발목의 잘록한 부분조 차도 조금 있으면 사라져 없어질 것 같았다. 그녀의 나이는 나보다 얼마인가 위로 보였다. 그렇긴 하지만, 그다지 차이가 날 리는 없다. 둘이나 기껏해야 셋 정도일 것이다. 여자의 살찐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얼굴 생김새 도 흉하지 않았다. 단지 살이 과하게 붙어 있을 뿐이다. 자석이 철분을 빨아당 기는 것처럼 지방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에 달라 붙은 것이다. 그녀의 지방은 귀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어 완만한 슬로프(경사)를 그리며 어깨로 내 려가, 그대로 팔의 부푼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미쉐린 타이어 간판의 타이어 사내 같았다. 그녀의 그런 비만은 내게 무언가 숙명적인 것을 상기시켰 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향은 전부 숙명적인 병인 것이다. "굉장한 더위 아니에요?" 하고 건너 편 끝에서 여자가 영어로 내게 말을 걸었 다. 대개의 살찐 여자가 그러한 것처럼 조금 달콤한 느낌이 드는 높은 목소리 였다. 낮은 목소리를 내는 살찐 여자는 그다지 만났던 적이 없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정말이군요."하고 나는 대답해 주었다. "저어, 지금 몇 시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특별한 의미도 없이 해변으로 눈길을 돌리고 나서 "2시 30분이나 40분이나, 아마 그쯤이 겠지요."하고 말했다. "흐음."하고 그녀는 그다지 신경쓸 것 없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손을 주걱 처럼 사용해서 콧등과 부풀어오른 양쪽 뺨에 붙었던 땀을 닦아냈다. 시간이 몇 시이든, 그런 것이 그녀에게는 그다지 상관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저 무언 가를 물어 보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독립적인 존 재이고, 그와 같이 독립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슬슬 차가운 물속에 뛰어들어서 또 다른 부표까지 헤엄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와의 대화를 피하고 있다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것은 조금 후에 하기로 했다. 나는 부표의 끝에 걸터앉은 채로 여자가 뭔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묵묵히 있자니, 땀이 눈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소금기 로 인해 안구가 따끔거렸다. 살갗이 긴장되어 군데군데 갈라져 버릴 듯한 정도 의 햇살이었다. "매일 언제나 이렇게 더운가요?" 하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줄곧 이 정도였지요. 오늘은 구름이 전혀 없어서 그만큼 더 덥 기는 덥지만요."하고 나는 말했다. "오래 이곳에 계셨지요, 당신? 아주 새까맣게 그을렸군요." "9일쯤 있었죠." "정말 잘 태웠군요." 하고 그녀는 감탄하듯이 말했다. "나는 어제 저녁에 막 도착했어요. 도착했을 때는 마침 소나기가 와서 서늘했는데, 이렇게 더워질 줄 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너무 갑자기 몸을 태워 버리면 나중에 괴롭습니다. 이따금 그늘로 돌아가야 해요."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군인 가족 전용의 코티지에 묵고 있어요."하고 그녀는 나의 충고를 무시 하고 말했다. "오빠가 해군 장교여서 초대해 주었어요. 해군도 나쁘지 않더군요. 생계나 실직의 염려도 없고 서비스는 확실하고. 내가 학생 때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 어서 집안에 직업군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는데, 세상이란 변하는 건가 봐요."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해군이라면 내 전 남편도 해군 출신이었지요. 해군 항공대, 제트기 파 일럿. 저어, 당신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이라고 아세요?"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해군을 제대하고 그곳의 파일럿이 되었죠. 나는 당시에 스튜어디스였는 데, 그래서 사이가 좋아져서 결혼했구요, 나인틴 세븐티..... 몇 년이었더라, 아무 튼 6년 정도 전의 일이죠. 뭐, 흔히 있는 이야기지만요." "그렇습니까?" "그래요. 에어라인의 기내 스태프는 근무시간이 아무튼 되는 대로여서 아무래 도 동료 중에서 짝을 찾게 되는 거죠. 일반인들과는 사고방식이 조금 다른 일 이니까 말예요. 그래서 내가 결혼해서 일을 그만두어 버리자, 그는 다시 다른 스튜어디스를 찾아내 버렸던 셈이죠. 그런 일도 흔히 있죠. 스튜어디스에서 스 튜어디스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거지요." "지금은 어디 살고 계십니까?" 하고 나는 화제를 바꿨다. "로스앤젤레스."하고 여자는 말했다. "당신 로스에 가본 적 있어요?" "노."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로스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아버지 일 관계로 솔트레이크 시티로 옮 겨 갔어요. 솔트레이크 시티에 간 적은?" "노."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곳 갈 데가 못돼요. 하이스쿨을 나와서 플로리다의 대학으로 갔고, 대 학을 나와서 뉴욕 시티로 갔고, 결혼해서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이혼하고 다시 로스앤젤레스.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버린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처럼 아주 살찐 스튜어디스를 난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쩐지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체격 좋은 레슬러 같은 스튜어디스나 팔이 굵고 엷 게 콧수염이 난 스튜어디스라면 몇 번인가 본 일이 있지만, 뒤룩뒤룩 살찐 스튜 어디스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그래도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은 그런 일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살이 빠져 있 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명히 살이 빠진다면 나름대로 매력적인 여성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추측했다. 아마 그녀는 결혼해서 지상에 내려와서부터 급격히 비행선처럼 살이 찌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녀의 팔과 다리는 마치 과장된 이노 센트 아트의 인물상같이 두리뭉실 하얗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렇게 살이 찐다면 어떤 느낌이 드는 걸까, 하고 나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더위 탓에 난 거의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상상력에 적합한 기후와 적합하지 않은 기후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서 묵고 있나요?"하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는 내가 묵고 있는 코티지 호텔을 가리키며 알려 주었다. "혼자 왔나요?" "아뇨."하고 말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내와 함께입니다." 여자는 생긋 미소짓더니 머리를 약간 갸우뚱했다. "신혼여행?" "결혼해서 6년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흐음." 하고 여자는 말했다. "그런 나이로는 보이지 않아요, 당신." 나는 어쩐지 어색해져서 자세를 바꾸고, 다시 해변으로 눈을 돌렸다. 붉게 칠 해진 감시대 위에는 여전히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수형하고 있는 사람의 수도 적었기 때문에 라이프 가드(구조원)인 청년은 따분해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가 없어지면 그 후에는 <라이프 가드 부재, 각자의 책임으로 수영해 주십시오>라는 팻말이 걸리게 된다. 라이프 가드는 새까맣게 탄 과묵한 청년이 었다. 맨 처음 해변에 나왔을 때 나는 그에게 "이 주변에 상어는 있소?"하고 물 어 보았다. 그는 잠시 가만히 내 얼굴을 보고 나서 양 손을 80센티 정도 벌려 보였다. <있어서 이 정도>라는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혼자서 헤엄 쳤다. 휠체어 모자의 모습도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늘 앉아 있는 벤치에는 흰 반소매 셔츠를 입은 노인이 혼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아 직 발리볼을 계속하고 있었다. 물가에서는 작은 어린애들이 모래성을 만들거나, 서로에게 물을 끼얹거나 하며 놀고 잇었다. 그 주위에서 파도가 미세한 거품이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이윽고 앞바다로부터 2대의 올리브 그린의 헬리콥터가 모습을 나타냈고, 마치 중대한 보고를 전하는 그리스 비극 속의 특사처럼 엄숙하게 우리 머리 위를 굉 음과 함께 지나가더니 내륙 쪽으로 사라져갔다. 그동안 우리는 말없이 그 거대 한 비행체를 가만히 눈으로 좇고 있었다. "저어, 저런 식으로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우리들 모습이 굉장 히 행복하게 보이지 않을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주 평화스럽고, 즐거운 것 같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요. 흡사, 그래요......가족사진처럼 요. 그렇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적당한 기회를 잡아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물가까지 헤엄쳤다. 나는 헤엄치고 있는 동안 줄곧 아이스박스안의 차가운 맥 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도중에 헤엄을 멈추고 부표 쪽을 돌아보니,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가볍게 손을 들어 주었다. 멀리서 보니, 그녀는 진짜로 돌고래 같아 보였다. 그대로 아가미가 생겨서 바다 밑으로 돌아가 버리지는 않 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으로 돌아와 짧은 낮잠을 자고 6시가 되자, 식당에서 언제나처럼 저녁을 먹 었지만, 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식당에서 돌아올 때도 언제나와는 달리 그들의 방 문은 꽉 잠겨진 채였다. 젖빛 유리로 작게 끼워 넣은 창에서 방의 불빛은 흘러나오고 있엇지만 모자가 아직 거기에 체류하고 있는지 어떤지,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 두사람은 벌써 떠나 버린 걸까?"하고 나는 아내에게 물어 보았다. "글쎄요, 어떻게 된 걸까요? 알아채지 못했어요. 원래가 조용한 사람들이고, 특 별히 주의도 하지 않았으니 모르겠어요."하고 원피스를 개어 슈트케이스에 채워 넣으면서 흥미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러죠?" "아니, 그냥. 신기하게 두 사람 모두 해안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그 래서 조금 마음에 걸렸을 뿐이야." "그럼 아마 이미 떠난 거겠죠. 그 사람들도 꽤 오래 여기에 묵고 있었던 것 같 으니까요." "그렇겠군."하고 나는 말했다. "모두 언젠가는 어딘가로 떠나가는 거예요. 언제까지나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것도 아닐 테고요." "그거야 그렇겠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슈트케이스의 뚜껑을 닫고 그것을 도어 옆에 놓았다. 슈트케이스는 어떤 그림자처럼 그곳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의 휴가는 이윽고 끝나 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눈을 떴을 때, 바로 베개 옆의 트래블 워치(여행용 시계)로 눈을 돌렸다. 녹색의 야광 페인트를 칠한 바늘은 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뜬 것은 이상하게 격한 심장의 노동 탓이었다. 마치 무언가에게 몸 전체가 흔들리 고 있는 것 같은 상태였다. 심장 부근으로 눈을 돌리니 가슴살이 실룩실룩하고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이 밤눈으로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심장이 월등하게 건강해서 맥박수도 다른 사람 들보다 훨씬 적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편이고, 한 번도 병을 앓은 적이 없었 다. 그러므로, 이렇듯 어떤 발작처럼 가슴이 흥분된다는 것은 어쨋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침대에서 카펫 위로 내려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등뼈를 꼿꼿하게 세 우고, 깊은 숨을 들이쉬고 그리고 내뱉었다. 어깨의 힘을 빼고 배꼽 주위로 신 경을 집중했다. 몸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근육 스트레칭 같은 것인데, 몇 번인 가 그것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조금씩 심장의 고동은 약해지고, 이윽고는 여 느 때처럼 어지간히 주의하지 않으면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렴풋한 작은 넘 실거림으로 후퇴해갔다. 아마 수영을 너무 많이 한 때문이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강한 햇 살, 피로의 축적-그러한 것이 얼마간 쌓여 내 몸을 한순간 뒤흔들어 놓았던 것 이리라. 나는 벽에 기대어 다리를 곧게 뻗고 손발을 다양한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어디에도 이상은 없다. 심장의 움직임도 완전히 평정을 되찾았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코티지의 방의 카펫 위에서 나는 스스로가 이미 청 년기를 지나 버렸고, 이미 체력적인 퇴조기의 프로세스(과정)에 발을 들여 놓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확실히 아직 젊긴 했지만, 그것은 그늘 하나 없는 젊음은 아니었다. 그 사실은 불과 몇 주일 전에 단골 치과의사로부터 지적받은 터였다. 치아에 관해서라면 앞으로 이제 닳아 없어지거나 흔들리거나 빠져갈 뿐인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그 의사는 말 했다. 그 점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당신에게 가능한 일은 그것을 조금이라도 늦추게 하는 것뿐입니다. 막을 수는 없습니다. 늦추게 하는 것뿐입니다.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흰 달빛 아래 아내는 푹 자고 잇었다. 마치 죽은 것 처럼 숨소리 조차 내지 않았다. 언제나 대개 그녀는 그렇게 잔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파자마를 벗고 새 쇼트 팬츠롸 T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일드 터키 포켓병을 포켓에 쑤셔넣고, 아내가 깨지 않게 살짝 도어 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밤의 대기는 선뜩하고 지표에는 젖은 풀입 냄새가 아 지랑이처럼 떠돌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공동의 바닥에 서 있는 것 같은 생각 이 들었다. 달빛이 꽃잎이랑 커다란 잎사귀랑 잔디 정원을 낮과는 전혀 다른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필터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처럼 어떤 것은 실제 이상으로 선명하게 빛났고, 또 어떤 것은 생기를 읽은 회색 속으로 가라앉 아 있었다. 졸립지는 않았다. 도대체 애초부터 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 의 식은 차가워진 도자기처럼 깨어 있었다. 나는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코티지의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다. 부근은 고요해서 파도 소리 외에는 귀에 닿는 소리가 없었다. 그 파도 소리도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멈춰서서 포켓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그대로 입에 대 고 마셨다. 코티지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나는 달빛 아래에서는 얼음이 갈린 둥근 연못같 아 보이는 잔디 정원의 한가운데를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보았다. 그리고 허리 높이만큼의 길이인 정원수 숲을 따라서 걸었고, 작은 계단을 올라가서 트로피컬 (열대지방)스타일의 가든 바로 나아갔다. 나는 매일 밤 이곳에서 보드카 토닉을 두 잔씩 마셨는데, 물론 바는 이미 닫혀 있었다. 정자풍의 칵테일 스탠드에는 셔터가 내려져 잇었고, 정원에 한 다스가량의 둥근 테이블이 흩어져 있을 따름 이었다. 곧게 접혀진 테이블의 파라솔은 마치 날개를 접은 거대한 밤의 새처럼 보였다. 휠체어에 앉은 청년이 그런 테이블 위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서, 혼자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휠체어의 금속이 흠뻑 달빛을 빨아들여 얼음같은 흰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마치 밤을 위해 설치된 특수한 목적을 지 닌 정밀한 금속기계처럼 보였다. 차 바퀴의 스포크(바퀴의 살)는 이상하게 진화 한 야수의 이빨처럼 어둠 속에서 불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가 외톨이로 있는 것을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극히 자연스럽게 그의 모습과 그의 어머니의 모습을 일체화해서 생각하게끔 되었으므로, 그가 혼 자서만 있는 것을 보니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광명을 목격한 것 자체 가 예의를 잃은 행위인 것 같은 느낌 조차 들었을 정도였다. 그는 언제나와 같 이 오렌지색의 알로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언제나와 같이 면바지를 입고 있었 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 그대로의 자세로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 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망설이다가 결심을 하고서, 가능한 한 그가 놀라 지 않도록, 그의 시야에 들어갈 듯한 방향에서부터 천천히 그 쪽 방향으로 걸어 갔다. 내가 2, 3미터 거리까지 다가가자, 그는 이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언제나 처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나는 밤의 고요함에 걸맞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하고 그도 작은 소리로 인사를 되돌렸다. 나는 그의 옆 테이블의 가든 체어를 빼내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바라 보고 있는 곳과 대체로 비슷한 방향으로 눈을 주었다. 해안에는 낮고 들쭉날쭉 한 바위들이 죽 펼쳐져 있고, 거기에 그다지 크지 않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파도는 바위 사이에서 나풀거리는 프릴(여성복 따위의 주름 장식)같이 하얗게 튀면서 빠져나갔다. 가끔 그 프릴의 형태가 미묘하게 변화했지만, 파도의 크기 그 자체는 자로 잰 듯 항상 똑같았다. 시계의 진자같이 단조롭고 나른하게 이 렇다 할 특징도 없는 파도였다. "오늘은 해안에서 만나지 못했습니다만."하고 나는 테이블 너머로 말을 걸어 보았다. 그는 가슴 위에서 손을 깍지 끼고 내 쪽을 향했다. "예 그렇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 뒤에 한동안 그는 말없이 조용하게 숨을 쉬었다. 마치 자고 있는 듯한 숨결이었다. "오늘은 죽 방에서 쉬었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실은, 어머니의 상태가 별 로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태라고 해도, 몸의 상태가 구체적으로 나 쁘다는 건 아닙니다. 요컨대, 정신적인 것입니다. 신경적이라고나 할까요, 신경 이 곤두선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의 불룩한 부분으로 몇 번인가 뺨을 비볐다.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뺨에는 수염이 돋은 흔적이 없이 도 자기 처럼 매끄럽고 반들반들했다. "하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어머니는 지금은 이미 푹 자고 있습니다. 어머니 의 경우는 제 다리와는 달라서 하룻밤 자면 낫습니다. 물론 완치할 수는 없습 니다만, 일단은 현상적으로는 낫습니다. 아침이 되면 건강해집니다." 나는 20초인가 30초인가 1분인가,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 밑에서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서 떠날 때를 적당히 가늠했다. 나는 늘 떠날 때 를 적당히 가늠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 성격적인 문 제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려고 하기 전에 그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 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따분하시겠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건강한 사람에 게 병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일일 테죠." 그렇지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이것저것 모두 한 치의 틈도 없이 건강한 사람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죠,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병이 나타내는 방식이라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원인은 하나이고, 결과 는 무수합니다. 마치 지진과도 같습니다. 방출된 에네르기의 성질은 같습니다 만, 그것이 나오는 장소에 따라 돌연 그 지상 레벨에서의 현상은 바뀝니다. 섬 이 하나 생기기도 하거니와, 섬이 하나 가라앉아 버리는 일도 있지요." 그는 하품을 했다. 그리고 하품을 다 하고 나서 "실례했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매우 피곤해서 지금이라도 깊이 잠들어 버릴 것같아 보였기 때문에, 나 는 그에게 슬슬 방으로 돌아가서 쉬는 편이 낫지 않냐고 말해 보았다.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졸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전혀 졸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루에 4시간 정도 자면 충분하고, 그 것도 새벽녘밖에 자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에는 대개 항상 이곳에서 멍 하니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 위의 재떨이를 손에 쥐고 그것을 뭔가 아주 소 중한 듯이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경우는 뭐랄까-신경이 곤두서게 되면 얼굴의 왼쪽 절반이 점점 굳 어지는 것입니다. 차가워져서-입이라든지, 눈이라든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묘하다고 하면 기묘한 증상이지요. 그러나, 그런 것을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아닙니다. 그것이 특별히 뭔가 치명적인 것으 로 연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뿐인 증상입니다. 자고 나면 낫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가 이런 얘기를 한 걸 어머니에게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어머니 는 자신의 몸에 관해 얘기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물론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게다가 우리는 내일 아침에는 이곳을 떠나니 까 말씀 드릴 기회도 이제는 없을 겁니다." 그는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고, 그 손수건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 니고는 무언가에 생각을 집중시키려는 듯이 한동안 눈을 감았다. 마치 어딘가 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 같은 침묵이 잠시 동안 계속되었다. 아마 그의 기 분이 상승하거나 하강하고 있는 걸 거라고 나는 상상했다. "그것 참 아쉽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유감이지만, 일이 기다리고 있는 처지라서 말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돌아갈 장소에 따라서겠지요."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 쪽은 이곳에 체재한 지가 오래되셨습니까?" "2주일-가량 됩니다. 정확히 며칠째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그 정도 쯤 됩니다." 앞으로 더 오래 있을 것인가를 나는 물어 보았다. "글쎄요."하고 그는 말하고 나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1개월이 될지, 2개 월이 될지, 뭐 되어가는 형편에 따라서겠지요. 저는 모른다는 것은, 제가 결정 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님의 남편이 이곳 호텔의 주식을 많이 갖고 있 는 사람이라서 우리는 아주 싸게 묵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제 부친은 타일 회 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누님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사실상 그 뒤를 잇고 있습니 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그 매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 제 마음대로 취사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게다가 제가 싫어한다고 해 서, 그 매형이 정말로 기분 나쁜 사람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요. 건강하지 않 은 사람이란, 때때로 아주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다. "어쨋든, 그는 많은 타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맨션 현관에 사용하는 것 같은 고급스런 타일입니다. 그리고 여러 회사의 주식도 가득 갖고 있습니다. 한 마 디로 말하자면, 수완가입니다. 제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제 가 족 말입니다-건강한 인간과 건강하지 않은 인간, 효율적인 인간과 비효율적인 인간으로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결과로 그 밖의 기준 이라는 것이 어쩐지 불명료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쪽 인간이 타 일을 만들거나 재산을 솜씨 좋게 운용한다거나 탈세한다거나 해서, 건강하지 않 은 쪽의 인간을 부양한다는 것입니다. 시스템으로서는, 그 기능성 나름으로서는 상당히 잘 되고는 있습니다만." 그는 웃고 나서, 재떨이를 테이블 위로 돌려 놓았다. "모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기에 1개월 있어라, 여기에 2개월 있어라, 하고 요. 그런 사정으로, 저는 비가 내리는 것처럼 저쪽에 가기도 하고 이쪽에 가기 도 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와 어머니 말입니다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하품을 하고 해안으로 눈을 돌렸다. 변함없이 파도 가 기계적으로 바위에 부딪히고 있었다. 하얀 달은 바다의 훨씬 위쪽에 떠 있 었다. 나는 시간을 보려고 손목으로 눈을 돌렸지만, 손목시계는 없었다. 방의 나이트 테이블 위에 놔 두고 잊고 온 것이다. "가정이라는 것은 어쩐지 기묘한 것입니다. 그것이 잘 되어가든, 그렇지 않든 말이지요."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당신도 가정이 분명히 있으시겠지요?" 있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라고 나는 말했다. 아이가 없는 부부를 가정이라고 불러도 좋은지 어떤지 나는 잘 알 수 없다. 그것은 끝 까지 따져 본다면, 어떤 전제를 지닌 계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맞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가정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것이 전 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하나의 기치 같은 존재입니다. 많은 일들이 저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중심으로 작동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 말의 의미 아시겠 습니까?" 알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결핍은 보다 고도의 결핍으로 향하고, 과잉은 보다 고도의 과잉으로 향한다는 것이, 그 시스템에 대한 저의 테제입니다. 드뷔시가 자신의 가극 작곡이 지지부 진한 것을 표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창조해 낸 무를 뒤좇느 라 세월을 보냈다>라고 말이지요. 제일은 이른바, 그 무를 창조해 내는 데에 있 는 것입니다." 그는 그 후로는 말을 하지 않고, 다시 그의 불면증적인 침묵 속으로 잠겼다. 시간만큼은 충분히 있었다. 그의 의식은 아주 먼 변경(邊境)을 헤맨 후에 다시 돌아왔지만, 돌아온 지점은 출발점과는 조금 빗나가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포켓에서 위스키 병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괜찮다면 조금 마시지 않겠습니까? 글라스는 없지만." 하고 나는 말해 보았 다. "아닙니다."하고 그는 아주 조금 미소를 지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수분이라고는 거의 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관 마시고 혼자 드십시오. 다른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을 보는 것은 싫어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병으로부터 입 안으로 위스키를 흘려 넣었다. 위 속이 따뜻해지고,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온기를 맛보았다. 그는 그런 내 모습을 옆테이블에서 가만 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어, 이상한 것을 여쭤 보는 것 같습니다만, 당신은 나이프에 관해 잘 아십 니까?"하고 갑자기 그는 말했다. "나이프?"하고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예. 나이프 입니다. 물건을 자르는 나이프. 헌팅 나이프(사냥용 칼) 말입니 다." 헌팅 나이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다지 크지 않은 캠핑용 나이프나 스 위스제 군용 나이프라면 써본 적이 있다,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물론 그 렇다고 해서, 특별히 나이프에 관해 상세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손으로 휠체어의 바퀴를 돌리면서 나의 테이블로 다가와 테이블 너머로 나와 마주했다. "실은, 당신에게 좀 보여 드리고 싶은 나이프가 있습니다. 저는 2개월쯤 전에 이것을 손에 넣었습니다만, 저는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서,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물건인지, 대충이라도 좋으니까 알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폐가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폐가 되진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포켓에서 길이가 10센티 정도의 나뭇조각을 꺼내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 았다. 활과 같이 굽은 형상으로 대단히 아름다운 커브를 가진 엷은 갈색의 나 뭇조각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자, 탁 하는 단단하고 무게감 있는 소리가 났다. 접는 식의 소형 헌팅 나이프였다. 소형이라고 해도 상당한 폭과 두께가 있는 꽤 훌륭한 것이었다. 헌팅 나이프라고 하면, 일단 곰의 가죽을 벗길 정도로는 만드는 것이다.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고 청년은 말했다. "저는 이것을 사 용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거나, 혹은 자신에게 상처 입히거나 할 의 도는 전혀 없습니다. 단지, 저는 어느 날 갑자기 몹시 나이프라는 것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TV나 소설에서 나이프를 보거나 읽 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자기 소유의 나이프 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갖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이것을 사오게 했습니다. 스포츠용품점에서 사오게 했습니다. 모친에게는 물론 비밀이며, 그 사람 외의 누구도 내가 나이프를 포켓에 넣어가지고 다닌다는 것 은 모릅니다. 저만의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테이블 위에서 나이프를 집어들어 마치 미묘한 무게를 가늠하는 것처럼 잠시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다가, 이윽고 테이블 너머로 내게 건넸다. 나 이프는 아주 묵직한 무게감이 있었다. 나뭇조각이라고 보였던 것은 놋쇠를 도 려낸 표면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나무를 끼워 넣은 것일 뿐으로, 본체의 대부분 은 놋쇠와 강철로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무게가 있 었다. "날을 내어 보십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칼자루 윗부분에 사이가 벌어진 우묵한 곳을 누르고 무거운 날을 손가락 으로 잡아당겼다. 탁, 하는 건조한 소리가 나고 날이 똑바로 고정되었다. 날의 전체 길이는 8센티에서 9센티 정도일 것이다. 날이 고정된 나이프로서 손에 쥐 어 보자, 나는 그 묵직한 무게에 새삼스레 놀랬다. 단지 그저 무겁다는 것이 아 니다. 그것은 마치 손바닥에 착 들러붙는 것 같은 기묘한 무게감인 것이다. 조 금 힘좋게 손을 상하좌우로 흔들어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자체의 무 게 탓으로 손잡이는 거의 흔들리지도 않고 손의 움직임에 실로 잘 따라왔다. 손잡이의 커브도 이상적이랄 만큼 손에 잘 익었다. 힘껏 쥐어도 부자연스런 감 촉은 전혀 없고, 손가락을 떼었다가도 그것은 정확히 손 안에 수습되었다. 날의 형태도 볼 만한 것이었다. 두터운 강철이 시원스레 깎여 들어가 가운데 볼록한 부분에서 흐느끼는 듯한 매끄러운 라인을 그리고 있었고, 등 부분에서는 <찌르기>를 위한 거친 톱니형으로 되어 있었다. 생생한 블러드 커터(홈)도 확 실히 나 있었다. 나는 달빛 아래에서 주의 깊게 그것을 점검하고 시험삼아 몇 번인가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디자인과 사용시의 기분이 일치하는 고급스런 나이프였다. 아 마 칼이 드는 정도도 대단할 것이 분명했다. "좋은 나이프인데요."하고 나는 말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손에 잘 일 고 날도 본 바로는 확실하고 밸런스도 좋고 훌륭한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기름 을 쳐 주면 평생 쓸 수 있는 물건입니다." "헌팅 나이프로 하기에는 너무 작지 않습니까?" "이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너무 크면 의외로 쓰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날을 시원스런 소리와 함께 접어서 그에게 돌려 주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 날을 꺼 내 손 안에서 뱅그르르 솜씨 좋게 한 번 회전시켰다. 마치 곡예 같았지만 손잡 이가 무거우니까 그런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마치 총을 조준하듯 한쪽 눈을 감고 달을 향해 똑바로 나이프를 비추어 보았다. 달빛이 그의 나이프와 휠체어를 마치 부드러운 살을 찢고 나온 흰 뼈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게 했다. "무언가를 잘라 보아 주시겠습니까?"하고 그는 말했다.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 나이프를 손에 쥐고 근처에 있는 야자나무의 줄기에 몇 번인가 찌르고, 나무 껍질을 비스듬하게 베어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에 풀장 옆에 있던 발포(發泡)스티롤의 싸구려 비트판(발장구 연습용 널)을 멋지게 두 개로 갈랐다. 굉장히 날이 잘 드는 칼이었다. 나는 눈에 띄는 주위의 것을 한쪽 끝부터 베어 자르면서, 문득, 점심때 부표 위에서 만났던 살찐 백인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의 희고 부풀어오른 육체가, 지 진 구름처럼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부표며, 바다며, 하늘이며, 헬리콥터가 원근감을 잃고 하나의 카오스로서 나의 주위를 애워싸고 있었다. 나는 몸의 밸런스를 잃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조용하고도 천천히 나이프로 허공 을 베었다. 밤의 대기는 기름처럼 매끄러웠다. 내 움직임을 가로막는 것은 아 무것도 없었다. 밤은 깊었고, 시간은 부드러운 물기가 있는 육체 같았다. "이따금, 저는 꿈을 꿉니다."하고 청년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깊은 굴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마치 제 머리의 안쪽에 서 기억의 부드러운 살덩어리를 향해 나이프가 비스듬히 꽂히는 꿈입니다. 그 다지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저 꽂힐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것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나중에는 나이프만이 하얀 뼈처럼 남습니다. 그런 꿈입니다. 풀 사이드 35세가 되던 봄, 그는 자신이 이미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버린 것을 확인했다. 아니,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35세의 봄을 계기로 그는 인생의 반환점을 돌기로 결심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하리라. 물론 자신의 인생이 몇 년간이나 계속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만약 78 세까지 산다고 한다면 그의 인생의 반환점은 39세가 되는 셈이고 39세가 되려면 아직 4년의 여유가 있다. 게다가 일본 남성의 평균 수명과 그 자신의 건강 상 태를 함께 생각한다면 78년의 수명은 그다지 낙천적인 가설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35세의 생일을 자기 인생의 반환점으로 정하는 것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면 죽음은 조금씩 멀리 물릴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계속하다 보면 나는 아마 명확한 인생의 반환점을 놓쳐 버릴 것임에 틀림없다.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수명이 78세에서 80으로 되 고, 80에서 82로 되고, 82에서 84로 된다. 그런 식으로 인생은 조금씩 조금씩 연기되어 간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람은 자신이 벌써 50세가 되었다는 것을 알 아 차린다. 50이라는 나이는 반환점으로는 너무 늦다. 100세까지 산 인간이 도 대체 몇 명이나 있단 말인가?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의 반환점을 잃어가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무 살을 넘었을 때부터, 그는 계속 그<반환점>이라는 사고방식이 자신의 인생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인 것처럼 느껴왔다.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는 자 기자신이 서 있는 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우선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사고방 식의 기본이었다. 혹은 그런 사고방식에는 그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십 년 가까이를 톱 클래스의 수영선수로서 보냈다는 사실도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수영이라는 스포츠에는 확실히 단락이 필요했다. 손가락이 풀의 벽에 닿는다. 그것과 동시에 그는 돌고래같이 수중에서 몸을 놀려 순간적 으로 몸의 방향을 바꾸고 발바닥으로 힘껏 벽을 찬다. 그리고 후반 200미터로 돌입한다. 그것이 턴이다. 만약 수영경기에 턴이 없고 거리 표시도 없다면, 400미터를 끝까지 전력으로 헤엄치는 작업은 어떻게 할 길이 없는 암흑의 지옥임에 틀림없다. 턴이 있어야 만 그는 400미터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적어도 반은 끝났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다음에 그 200미터를 또 반으로 나눈다. <이것 으로 4분의 3은 끝났다.>그리고 또 반......이라는 식으로 긴 거리는 점점 세분화 되어 간다. 거리의 세분화에 맞추어 의지도 또 세분화된다. 즉<아무튼 이 다 음 5미터를 헤엄쳐 버리자.>라는 식이다. 5미터를 헤엄치면 400미터의 거리는 80분의 1이 줄어드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그는 물속에서 때로는 구토하 고 살을 경련시키면서도 마지막 50미터를 전력으로 헤엄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선수들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품고 풀을 왕복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 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그 분할 방식이 가장 성미에 맞았고, 또 가장 진지 한 사고방식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사물이 아무리 거대하게 보이고 그것에 마 주서는 자신의 의지가 아무리 미소하게 보여도, 그것을 <5미터만큼>씩 정리해 나가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50미터 풀속에서 배웠다. 인 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형식을 가진 인식이다. 그래서 35회째의 생일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그는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반환 점으로 삼는 것에 전혀 망설임을 느끼지 않았다. 겁낼 것은 무엇 하나 없다. 70년의 반인 35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에 70년 을 넘게 살 수 있다면 그건 그대로 고맙게 살면 된다. 그러나 공식으로는 그의 인생은 70년인 것이다. 70년을 풀 스피드로 헤엄친다- 그렇게 정해 버리는 것 이다. 그렇게 하면 나는 인생을 그럭저럭 잘 헤쳐 나갈 수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것으로 반이 끝난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한다. 1983년 3월 26일은 그의 35번째 생일이었다. 아내는 그에게 초록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선물했다. 날이 저물자 두 사람은 아오야마에 있는 자주 가는 레스토 랑에 가서 와인을 따고 생선요리를 먹었다. 그리고 그후 조용한 바에서 진토닉 을 세 잔인가 네 잔씩 마셨다. 그는 <반환점>의 결심에 대해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한 종류의 사고방식은 타인의 눈에는 종종 바 보처럼 비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섹스를 했다. 그가 샤워를 끝내고 부엌으로 가서 캔맥주를 갖고 침실로 돌아오자 아내는 벌써 잠에 푹 빠져 있었 다. 그는 자신의 넥타이와 양복을 옷장에 걸고 아내의 실크 원피스를 살짝 접 어서 책상 위에 놓았다. 셔츠와 스타킹은 둥글게 말아서 욕실의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고 한동안 아내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1월에 갓 서른이 되었다. 그녀는 아직 분수령의 저쪽 편에 있 다. 그는 이미 분수령의 이쪽 편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나머지 맥주를 다 마신 후, 머리 뒤로 팔짱을 끼고 소리내지 않고 웃었다. 물론 정정은 가능했다. 인생은 80년이라고 새삼스레 결정해 버리면 된다. 그 렇게 하면 터닝 포인트는 40세가 되고 나머지 5년간 그는 저쪽편에 머물 수 있 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답은 노였다. 그는 35세를 계기로 이미 터닝 포인트를 돌아 버린 것이다. 그것을 됐잖은가? 그는 부엌에 가서 맥주를 또 한 병 마셨다. 그리고 거실의 스테레오 장치 앞 에 옆드려 헤드폰을 끼고 심야 2시까지 브루크너의 심포니를 들었다. 밤중에 혼자서 브루크너의 장대한 심포니를 들을 때마다 그는 언제나 어떤 종류의 얄궂 은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음악 속에서밖에 느낄 수 없는 기묘한 기쁨이었다. 시간과 에너지와 재능의 장대한 소모...... 미리 말해 두고 싶은 건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나에게 이야기한 대로 여기에 적고 있다. 물론 어떤 종류의 문장적 각색은 있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 는 부분은 독단적으로 생략했다. 내 쪽에서 질문을 해서 자세한 부분을 보충한 곳도 있다. 아주 조금이지만 내 상상력을 구사한 곳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 로 이 문장은 그가 이야기한 대로라고 생각해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야기 태도는 정확하고 요령이 있었고, 그렇게 해야 할 부분에서는 상황을 극 명하게 묘사할 줄도 알았다. 그는 그런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는 어느 회원제 스포츠 클럽의 풀 사이드에 있는 카페 테라스에서 나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생일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는 7시에 깨어나서는 물을 끓이고 뜨거운 커피를 타고 서양 상추와 오이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드물게도 아내는 아 직 푹 자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음악을 들으며 수영부 시절에 단련된 꽤 힘든 체조를 15분 동안 열심히 했다.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 고 수염을 깍는다. 그리고 긴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이를 닦는다. 치약은 조금 짜서 이빨 하나 하나의 앞과 뒤에 천천히 칫솔질을 한다. 이빨 사이의 더러운 것은 덴탈 플러스를 사용한다. 세면장에는 그의 것만 세 종류의 칫솔이 놓여 있다. 특정한 자국이 안 생기도록 로테이션을 하면서 한 번씩 나누어 쓰는 것 이다. 그런 아침 의식을 대강 마치고 나서 그는 언제나처럼 근처에 산책을 가지 않 고 탈의실 벽에 붙은 키 만한 거울 앞에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서 자신의 몸을 가만히 점검해 보았다. 어쨌든 그것은 후반의 인생에 있어 첫번째 아침인 것이다. 그는 마치 의사가 신생아의 몸을 조사하듯 이상한 감동을 가지고 자신 의 몸 구석구석까지 바라보았다. 우선 머리카락 그리고 얼굴 피부, 이빨, 턱, 손, 배, 옆구리, 페니스, 고환, 허벅 지, 발. 그는 긴 시간을 들여 그 하나 하나를 체크하고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머 릿속 리스트에 메모했다. 머리카락은 이십대에 비해서 어느 정도 엷어졌지만 아직 특별히 신경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50까지는 아마 이대로 계속되겠지. 그 뒤는 그 후에 다시 생각하면 된다. 가발도 좋은 것이 많이 있고, 나 같은 경우 는 머리 형태가 나쁘지 않으니까 벗겨진다 해도 그 정도로 보기 싫은 모습은 안 될 것이다. 이빨은 젊었을 때부터의 숙명적인 충치 때문에 상당수의 의치가 들 어 있다. 그러나 3년 전부터 정성스레 칫솔질을 계속하고 있는 덕택으로 진행 은 딱 멈추었다. "20년 전부터 이렇게 했으면 충치 따위는 하나도 없는 건데 말 입니다."라고 치과의사는 말한다. 과연 옳은 말이지만, 끝난 일은 한탄해 봐도 소용 없다. 현상을 유지하는 것,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전부다. 그는 치과의사 에게 도대체 몇 살까지 자신의 이빨로 음식을 씹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60 까지는 괜찮겠죠."라고 의사는 말했다. "이렇듯 제대로 손질을 하신다면야."그것 으로 충분하다. 얼굴 피부의 거친 상태는 역시 나이에 걸맞는 것이었다. 혈색은 좋아서 언뜻 보기에는 젊게 보이지만 거울에 가만히 다가가 보면 피부에는 미세하게 오돌오 돌한 것이 나 있었다. 매년 여름이 되면 꽤 무리하게 살을 태웠고 담배도 오랫 동안 너무 많이 피워왔다. 앞으로는 질 좋은 로숀이나 스킨이 필요했다. 턱살 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붙어 있었다. 이것은 유전적인 것이다. 아무리 운동 을 해도 턱살을 깍아도 얇게 눈이 쌓인 것처럼 보이는 이 연한 살껍질만은 절대 로 떼낼 수가 없다. 나이가 듦에 따라 이것은 결정적이 된다. 그리고 나도 아 버지와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이중턱이 되겠지.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 이다. 배에 대해서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6대 4정도였다. 운동과 계획적인 식사 덕택에 3년 전에 비해 배는 유난히 단단히 죄어져 잇었다. 35세치고는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옆구리에서 등에 걸친 군살은 어중간한 운동으로는 떼어낼 수 없다. 옆을 보면 학생시절 마치 칼로 깍은 듯한 허리 뒤의 날카로운 선은 사라 져 있었다. 성기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다. 옛날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생생함이 약간 감소한 것 같지만, 그것도 그렇게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섹스 횟수는 물론 옛날만큼 많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임포텐츠의 경험은 없다. 아내와의 사 이에서도 성적인 불만은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장 173센티미터, 체중 64킬로의 그의 몸은 주위에 있는 같 은 나이 또래의 남자들의 몸과 비교해 보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젊음을 유 지하고 있었다. 28세라고 해도 충분히 믿을 정도이다. 육체적인 순발력은 쇠퇴 하긴 했지만, 지구력에 한해서 말하면, 그의 육체는 훈련 덕택에 20대 당시보다 진보되어 있기 까지하다. 그러나 그의 주의 깊은 눈은 자신의 몸을 천천히 감싸가는 숙명적인 늙음의 그림자를 놓치지는 않았다. 머릿속의 체크리스트에 확실히 새겨진 플러스와 마 이너스 밸런스 시트가 무엇보다도 그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아무리 타 인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나는 늙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사람은 늙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충치와 마찬가지이다. 노력을 하면 그 진행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아무리 진행을 늦추어 봤자 늙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들 만큼은 들어간 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쓰여진 노력의 양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의 양은 적어지고 그리 고 이윽고 제로가 된다. 그는 욕실을 나와서 타월로 몸을 닦고 소파에 누워서 오랫동안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잇었다. 옆방에서는 아내가 다림질 을 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리 조엘의 노래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고 있 었다. 폐쇄된 철공소에 대한 노래다. 전형적인 일요일 아침이었다. 다리미 냄 새와 빌리 조엘과 아침 샤워. "나이가 드는 것 자체는,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그다지 공포라고 할 것도 아니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말이오. 그에 맞서기 어려운 것에 대해서 계속 맞선다고 하는 것은 내 성질에 맞소. 따라서 그런 것은 괴롭지도 않고 고통스 럽지도 않소. "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나아게 가장 큰 문제는 더 막연한 거 요.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있어도 제대로 직면해서 싸울 수 없는 것, 그런 것 말이오." "왠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건가요?"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는 끄덕였다. "아마 그런 거라고 생각하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테이블 위에서 거북한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물론 나도 35살이나 된 남자가 다른 사람 앞에서 새삼스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어리석다는 정도는 알고 있소. 그런 종류의 파악 불능한 요소는 누구의 인생에나 있소, 그렇지 않소? "그렇겠죠."라고 나는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말이오, 솔직히 말해, 실제로 이런 식으로 확실히 느낀 것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이오. 즉 자기자신 속에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파악 불능의 뭔가 가 잠재하고 있다는 걸 느낀 건 말이오. 그래서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 을지 도무지 모르겠소."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는 확실히 혼란에 빠진 듯이 보였지 만 그래도 그 혼란된 모습은 혼란된 나름대로 시원스레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로 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도쿄 교외였다. 쇼와 23년 봄, 아직 종전 후 얼마되지 않아 서였다. 형이 한 명에다, 나중에 5살 아래 여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래 중견 클래스의 부동산업자였지만 후에 중앙선연선을 중심으로 한 빌딩 임대업에 진출해서 60년대의 고도성장기에 꽤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14살 때 양친이 이 혼했는데 복잡한 사정이 있어 아이들은 세 명 다 아버지 집에 머물렀다. 그는 일류 사립 중학교에서 같은 계열의 고등학교에 그리고 대학에 에스컬레 이터 식으로 올라갔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 그는 미타에 있 는 부친의 맨션으로 옮겼다. 그리고 일 주일에 5일은 수영장에서 헤엄치고 나 머지 2일은 여자와 데이트하는 날로 삼았다. 그다지 화려하게 놀아나지도 않았 을 뿐더러, 노는 상대에게 얽매이지도 않았다. 결혼 약속을 당하게 될 정도로 한 여자와 깊이 사귀는 일도 없었다. 대마초도 피웠고, 친구가 권해서 데모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공부라고 할 만한 공부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강의에 만은 출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 정도의 성적을 거둘 수는 있었다. 노트 필기 할 시간이 있으면, 그만큼 수업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면 되는 것이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그의 성격을 잘 파악할 수 없었다. 그의 가족도 그의 친구들과 사귀던 여자들도 그랬다. 그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 는지 아무도 잘 알 수 없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다지 머리가 좋아 보 이지도 않는데, 항상 톱 클래스에 가까운 성적을 받고 있는 것도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그렇게 파악할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성적인 순수한 친절함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극히 자연스럽게 그의 주위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로서 그 자신도 실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연장자에게도 잘 받아들여졌다. 그 러나 대학을 나오자 그는 주위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던 일류 기업에는 들어가지 않고 아무도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작은 교재판매회사를 취직처로 골랐다. 대 개의 사람들은 그 일로 놀랐지만, 그에게는 물론 그 나름대로의 심산이 있었다. 그는 3년 동안 세일즈맨으로서 일본 전체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현 장의 교사나 학생들이 하드, 소프트 양면에서 어떤 교재를 구하고 있는지를 자 세히 관찰했다. 각 학교가 얼마만큼의 예산을 교재에 맞추고 있는지도 조사했 다. 리베이트(수수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젊은 교사들과 술을 마시며 불평 도 들었다. 수업도 열심히 참관했다. 그 동안 영업 성적도 물론 톱을 지켰다. 입사한 지 3년째의 가을, 그는 새로운 교재에 대해 두꺼운 기획서를 써서 사 장실에 제출했다. 비디오 테이프와 컴퓨터를 직결하고 교사와 학생이 공동으로 소프트 제작에 참가한다고 하는 획기적인 방식의 교육 시스템이었다. 기술적인 몇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원리적으로는 가능할 터였다. 사장이 독단적으로 승낙을 해서 그가 중심이 된 프로젝트팀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그 3년 뒤에 그는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가 만들어낸 교재 시스템은 값이 비싸기는 했지만 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한번 팔아 버리면 소프트웨어 관련의 애프터케어로 내버려 두어도 그의 회사가 혜택을 받도록 되 어 있었다. 모든 것은 그의 계산대로였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이상적인 규모의 회 사였던 것이다. 새로운 시도가 하찮은 관료적인 회의의 연속에서 짓뭉개져 버 릴 만큼 큰 회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자본에 얽매일 정도로 작은 회사도 아니었다. 경영진도 젊고 충분히 의욕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실질적으로는 중역의 권한을 가지게 되 엇다. 연 수입은 같은 나이 또래의 누구보다도 많았다. 스물아홉의 가을에 그는 2년 전부터 사귀어 온 다섯 살 아래의 여성과 결혼했 다. 그녀는 깜짝 놀란 정도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눈을 끌 정도로는 아 름답고 매력적이었다. 집안 환경도 좋고 성실하고 무뚝뚝한 데가 없었다. 성격 은 솔직하고 매우 근사한 치아를 가지고 있었다. 첫인상보다도 횟루를 거듭해 서 만날 때마다 느낌이 좋아지는 그런 타입의 여성이었다. 그는 결혼을 계기로 아버지 회사에서 요토키자카에 있는 3LDK의 맨셔늘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샀다. 결혼생활에도 무엇 하나 문제는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공동생활은 극히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는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는 가사를 돌보는 것을 좋아했고, 둘 다 노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몇 쌍의 친구 부부를 골라 함께 테니스를 치기도 하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 친구 부부 가 손떼고 싶어하던 중고 MG를 아주 싼 가격으로 손에 넣기도 했다. 신형의 일본차에 비해 차를 검사할 때마다 쓸데없는 돈은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싸게 산 것이었다. 친구 붑 쪽은 아이가 태어나서 두 사람 좌석빡에 없는 MG 가 필요없게 된 것이지만 그들 두 사람 쪽은 당분간 아이는 낳지 않기로 정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 인생은 이제 막 시작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제 그다지 젊지는 않다, 라고 그가 처음으로 인식한 것은 결혼하고 두번째 봄이었다. 그는 역시 알몸으로 욕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의 선이 옛날과 는 아주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모습이었다. 요컨대, 22세까지 수영으로 단련시킨 육체의 유산을 그는 10년 동안에 전부 갉아 먹은 것이다. 술, 미식, 도회생활, 스포츠카, 평온한 섹스, 그리고 운동 부족이 군살이 라는 추악한 형태로 그의 육체에 달라붙어 있었다. 앞으로 3년만 있으면, 나는 분명히 추한 중년 남자가 되어 버릴 것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우선 치과의사에게 가서 철저한 이빨 치료를 받았고, 그리고 나서 다이 어트 컨설던트와 계약해서 종합적인 다이어트 메뉴를 작성했다. 우선 당분이 삭감되고 백미가 제한되고 지방이 선별되었다. 술은 지나치게만 마시지 않으면 제한은 없었지만, 담배는 열 개비까지로 제한되었다. 육식은 일 주일에 한 번이 라고 정해졌다. 원래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광신적이 될 필요은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식사할 때는 좋아하는 것을 조금 양에 덜 차게 먹기로 했다. 운동에 관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될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살을 빼기 위해서라면 테니스라든가 골프라든가 볼품 있는 스포츠는 무의미했다. 하루 20 분에서 30분 제대로 된 체조, 그리고 적당한 러닝과 수영, 그것으로 충분했다. 70킬로였던 그의 체중은 8개월 후에는 64킬로까지 줄었다. 듬뿍 처져 있던 뱃살이 빠져서 배꼽 모양이 뚜렷이 보이게 되었다. 볼이 훌쭉해지고 어깨 폭이 넓어지고 고환의 위치가 이전보다 조금 낮아졌다. 다리가 굵어지고 입 냄새가 줄었다. 그리고 그는 애인을 만들었다. 상대는 어느 클래식 콘서트에서 옆좌석에 앉아 알게 된 9살 연하의 여성이었 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콘서트 후에 술을 마시고 그리고 잤다. 그녀는 독신으로 여행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고 그 외에도 남자 친구가 몇 명 있었다. 그 쪽도 그녀 쪽도 서로 이 이상 깊게 사귈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은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콘서트 에서 만났고, 그리고 잤다. 아내 쪽은 클래식 음악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기 때 문에 그의 온화한 바람 피우기는 발각되지 않고 2년간 계속되었다. 그는 그 정사를 통해 어떤 한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노게도 그는 이미 성적으로 무르익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33살치고는 24살의 여자가 원하고 있 는 것을 전혀 부족하지 않게 제대로 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는 그것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군살을 빼 더라도, 그는 두번 다시 젊어질 수는 없다. 그는 소파 위에 엎드린 채 그 날의 첫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전반의 인생, 즉 35년분의 저쪽 인생이었다. 그는 원 하고 원했던 것의 많은 부분을 손에 넣었다. 노력도 했지만 운도 좋았다. 그는 보람 있는 일과 높은 연수입과 행복한 가정과 젊은 연인과 건장한 몸과 초록색 MG와 클래식 레코드의 컬렉션을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대로 소파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생각을 잘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빌리 조엘은 이번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노랙하고 있다. 아내는 아직 다 림질을 계속하고 있다. 무엇 하나 모자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울고 잇었다. 양쪽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차례차례 흘러내렸다. 눈물 은 그의 볼을 타고 밑으로 떨어져서 소파의 쿠션에 얼룩을 만들었다. 어째서 자신이 울고 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울 이유 따위는 하나도 없을 터였 다. 혹은 그것은 빌리 조엘의 노래 때문인지도 몰랐고, 다리미 냄새 때문일지도 몰랐다. 10분 후 아내가 다림질을 끝내고 그의 옆에 다가왔을 때, 그는 울음을 그치고 있었다. 그리고 쿠션은 뒤로 돌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옆에 앉아서 손님용 이불을 새로 사고 싶은데,라고 말했다. 그로서는 손님용 이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기 때문에 당신 좋을 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했 다. 그런 뒤에 두 사람은 긴자로 나가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새 영화를 보았다. 두 사람은 결혼 전에 <야성의 소년>을 같이 본 적이 있었다. 신작은 <야성의 소년>만큼 재미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영화관을 나온 두 사람은 찻집에 들어가 그는 맥주를 마시고 그녀는 멜론 아 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레코드점에 가서 빌리 조엘의 LP를 샀 다. 폐쇄된 철공소와 베트남의 노래가 들어 있는 LP이다. 그다지 감탄할 정도 의 음악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한 번 더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지 그는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째서 빌리 조엘의 LP를 살 기분이 되었어요?"라고 아내가 놀라서 물었다. 그는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카페 테라스의 한쪽 벽은 유리로 되어 있고, 눈 아래로는 풀의 전경이 내려다 보였다. 풀 천장에는 가늘고 긴 천장(天窓)이 붙어 있고 그곳에서 내리쬐는 햇 살이 수면에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빛들 중 어떤 것은 수저까지 닿고, 어떤 것 은 반사해서 무기적인 흰색 벽에 의미 없는 기묘한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자니, 나에게는 그 풀이 조금씩 풀로서의 현실 감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풀의 물이 너무 맑은 탓이라고 나 는 생각했다. 풀의 물이 필요 이상으로 맑은 탓에, 수면과 수저 사이에 공백 부 분이 생긴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풀에서는 두 명의 젊은 여자와 한 명의 중년 남자가 헤엄치고 있었는데, 그들은 헤엄을 치고 있다기보다는 마치 그 공백 위 를 조용히 미끄러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풀 사이드에는 하얗게 칠해진 감시대 가 있고, 체격 좋은 젊은 감시원이 심심한 듯 풀의 수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 었다. 그는 대강 이야기를 끝내고 손을 들어 웨이트리스를 불러서 맥주를 더 주문했 다. 나도 내 몫을 주문했다. 그런 뒤에 맥주가 올 때까지 둘이서 다시 하릴없 이 풀의 수면을 바라보고 잇었다. 수저에는 코스 로프와 헤엄치는 사람의 그림 자가 비치고 있었다. 그와 나는 만난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이 스포츠 클럽 회 원으로 말하자면, 수영 동지인 셈이다. 내가 크롤할 때의 오른팔 움직임을 교정 해 준 것도 그였다. 우리는 수영 후, 역시 이 카페 테라스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면서 몇 번인가 세상사를 이야기했다. 어느 땐가 서로의 직업에 관한 이야 기를 하게 되어, 내가 소설가라고 말하자 그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잠시 이야 기를 들어 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 자신의 이야기요."라고 그는 말했다. "어느 쪽인가 하면, 평범한 이야기라 고 생각되고, 당신은 재미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아무래도 누군가에 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소. 나 혼자 품고 있자니, 언제까지나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오." 상관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재미 없는 이야기를 지루하게 해서 상대에게 폐를 끼치는 타입의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뭔가를 이 야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 이야기를 했다. "이봐요, 당신은 소설가로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오? 재미 있다고 생각 하오? 아니면 지루하다고 생각하오?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재미 잇는 요소를 포함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만."이라고 나는 주의 깊고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미소를 짓고 머리를 몇 번인가 가로저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나로서는 도대체 이 이야기의 어디가 재미 있는지 전혀 모르겠소. 나는 이 이 야기의 중심에 있는 어떤 종류의 우스꽝스러움이라고 할 만한 것을 파악할 수가 없소. 그리고 그것이 만약 잘 파악된다면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보 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당신은 말대로겠죠, 아마도."라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이 이야기의 우스꽝스러움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소?"라고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모르겠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난 당신 이야기에는 매우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가의 눈을 통해서라고 말해도 좋다고 말이죠. 하지만 도대체 이 이야기의 어디가 재미 있느냐 하는 것은 실제로 손을 움직여 원고지에 써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죠. 내 경우는 문장으로 보지 않으면 여러 가지 사물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거죠." "당신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알겠소."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그리고 나서 한동안 잠자코 각자의 맥주를 마셨다. 그는 베이지색의 버튼 다운 셔츠 위에 엷은 초록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었다. 길쭉하게 잘 빠진 약지에는 은색의 결혼 반지가 빛나고 잇었다. 나는 그 손가락이 매력적인 아내와 젊은 연인을 애무하고 있는 모습을 잠깐 상상해 보았다. "그 이야기를 써 봐도 좋을 것 같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어쩌면 어딘가에 그것을 발표해 버릴지도 모르겠어요." "상관 없소, 그래도."라고 그는 말했다. "게다가 발표해 주는 게 좋을것 같기 도 하오." "여자 일이 들켜 버리는데도 말입니까? 그래도 괜찮겠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내 경험에서 말하자면 실재의 인물을 모델로 한 문장은 우선 100퍼센트의 확률 로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마련이다. "괜찮소.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소."라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들켜도 괜찮다구요?"라고 나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는 끄덕였다.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좋아하지 않소."라고 그는 헤어질 때 말했다. " 그 거짓말이 가령 누구 한 사람 상처 입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 더라도,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소.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속이거나, 이용하거나 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소." 나는 거기에 대해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말 하고 있는 게 옳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풀에서 그와 얼굴을 마주한다. 이제 복잡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다. 풀 사이드에서 날씨 이야기를 하거나 최근의 콘서트 이야기를 하거나 할 뿐이다. 그가 나의 이 문장을 읽고 어떤 식으로 느낄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다. 쌍둥이와 가라앉은 대륙 1 쌍둥이와 헤어져 반 년 정도 흘렀을 때, 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사진잡지에서 발견했다. 그 사진 속의 쌍둥이는 예의-나와 함께 지낼 때 늘상 입고 있던-<208>과 <209>라는 번호가 붙은 같은 모양의 싸구려 트레이닝 셔츠가 아니라, 한결 말 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니트 원피스를 입었고, 또 한 명은 성글게 짠 코트 재킷 같은 걸 입고 있었다. 머리는 이전보다 부쩍 길게 자라 있었고, 눈 주위에는 엷게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 쌍둥이라는 걸 곧바로 알았다. 한 사람은 뒤를 돌아 보고 있었고 또 한 사람도 옆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 페이지를 펼친 순간 이미 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몇 백 번이나 듣고 철저하게 주입된 레코드의 처음 한 음을 들었을 때처럼 나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여기에 있는 것임을. 그것은 록본기변두리에 최근 막 개점한 디스코테크의 실내 사진이었다. 잡지 에는 여섯 페이지에 걸쳐서 <도쿄 풍속 최전선>이란 특집 기사가 짜여져 있었 는데, 그 가장 첫페이지에 쌍둥이 사진이 실려 잇었다. 카메라는 어느 정도 위쪽에서 넓은 실내를 광각 렌즈로 포착하고 잇엇지만, 그 장소는 설명이 없으면 디스코테크라기 보다는 교묘히 만들어진 온실이나 수 족관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전체가 유리로 만들어진 탓이었다. 마루와 천장을 빼면 테이블도 벽도 장식품도 모두 유리 제품이었다. 그리고 도처에 거 대한 관엽 식물이 높여 있었다. 유리 칸막이로 구분된 블록 안에서 사람들은 칵테일잔을 기울였고, 어떤 블록 안에서는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정밀하고도 투명한 인체 모형 같은 걸 연상시켰다. 하나 하나의 부분이 각각의 원칙에 따라 정확하게 기능하고 있 었다. 그 사진의 오른쪽에 원형의 큰 유리 테이블이 있는데, 쌍둥이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트로피컬 드링크으ㅢ 좀 과장되게 큰 컵이 두 개, 간단한 스낵을 담은 접시가 몇 개인가 놓여 있었다. 쌍둥이 중 하나는 의자 뒤에 양 손을 걸친 것처럼 해서 홱 뒤를 향해 유리벽 건너편의 댄스 플로어를 열심히 바 라보고 있었고, 또 한쪽은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 었다. 만약 거기에 찍혀 있는 것이 그 쌍둥이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것 자체 는 어디에라도 있는 평범한 광경임에 틀림없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디스코 테크의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디스코테크의 이름은 <더 글라스 게이지>였다. 내가 그 잡지를 손에 넣은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일 관계로 사람을 만 나기 위해 들어간 다방에서 때마침 시간이 남아 버렸다. 그래서 가게의 잡지꽂 이에 있던 잡지를 집어 훌훌 책장을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1개 월 지난 사진 잡지를 일부러 읽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쌍둥이가 찍힌 컬러 사진 밑에는 꽤나 흔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더글라스 게이지>는 지금 도쿄에서 가장 새로운 음악을 유행시키고, 가장 첨예한 사람들 이 모이는 디스코테크라고 그 기사는 말하고 있었다. 그 이름대로 가게 안은 온통 유리벽이 둘러쳐져 있었고 그것은 투명한 미로를 생각나게끔 했다. 거기 에서는 온갖 종류의 칵테일이 제고되고 음향 효과에도 세심한 주의가 기울여지 고 있었다. 입구에서는 입장객이 체크되어 <말끔한 복장>을 하지 않은 손님이 나, 남자들만의 그룹은 입장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웨이트리스에게 두 잔째의 커피를 주문하고 잡지의 이 페이지를 잘라서 갖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지금 책임자가 없어서 잘은 모 르겠지만 그런 걸 잘라내더라도 아무도 그다지 기분 나빠하진 않을 거라고 말했 다. 그래서 난 플라스틱 메뉴대를 사용해서 그 페이지를 깨끗하게 자르고 네 번 접어서 상의 포켓에 넣어 두었다. 사무실에 돌아오자 문은 열린 채이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상 위에는 서 류가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고, 설거지통에는 컵이나 접시가 오믈이 달라붙은 채 쌓여 있었다. 또 재떨이는 담배 꽁초로 가득했는데, 사무실 여직원이 감기로 3일째 쉬고 있는 탓이었다. 이거 참, 하고 나는 생각했다. 3일 전까지는 먼지 하나 없는 청결한 오피스였 는데, 이건 마치 고교 시절의 농구부 로커룸(탈의실) 같군. 나는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컵을 한 개만 씻어서 인스턴트 커피를 넣고, 스푼 이 보이지 않아 비교적 깨끗한 볼펜으로 휘저어 마셨다. 결코 맛이 있는 건 아 니었지만, 단지 뜨거운 물만을 마시고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았다. 내가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혼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옆방인 치과 의원에서 접수부 아르바이트 일을 하고 있는 여자 아이가 출입구로부터 얼굴을 들이밀었다. 머리가 긴 작은 체구의 여자로 꽤나 미인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자메이카인이나 어떤 다른 피가 섞여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로 피 부색이 검었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훗카이도의 낙농 농가 출신이었다. 그녀는 내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여자 아이와 같은 나이여서 한가할 땐 가끔 이곳에 놀러와 둘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또 우리 방 여직원이 쉴 때는 부 재중의 전화를 받아 용건을 듣고 메모도 해 주었다. 벨이 울리면 옆방에서 듣 고 달려와서 수화기를 받아 용건을 적어 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무실을 비울 때는 언제나 문을 열어 둔 채로 놔둔다. 도둑이 들어와도 훔쳐갈 것이라 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와타나베 씨는 약을 사러간다고 하고 나갔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와타나 베는 내 동업자의 이름이다. 나와 그는 그 때 둘이서 작은 번역 사무실을 경영 하고 있었다. "약?" 하고 나는 조금 놀라서 반문했다. "무슨 약?" "부인의 약이래요. 위 상태가 안 좋아서 뭐라던가 특별한 한방약이 있대요. 그래서 고한다의 한방 약국까지 갔어요. 조금 늦을지도 모르니까 먼저 귀가하 시라던데요." "흠,"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 걸려온 전화는 거기에 메모해 놨어요."라고 말하고 그 녀는 전화기 아래 끼워 놓은 하얀 편지지를 가리켰다. "고마워."하고 나는 말했다. "네가 있어 줘서 도움이 돼." "부재중 응답 장치를 사면 어떨까, 하고 우리 선생님이 말씀하시던데요." "그런 건 싫어."하고 나는 말했다. "인간적인 따뜻함이란 게 없거든." "그래요. 나도 복도를 뛰어오다 보면 몸이 따뜻해지는 걸요." 그녀가 고양이처럼 웃는 얼굴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자, 난 그 메모를 들고 필요한 전화를 몇 통인가 걸었다. 인쇄소의 배송 일시를 지정했고, 하청을 준 번역 아르바이트와 내용을 상의하기도 했다. 또 리스회사에 복사기의 수리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 전화를 대충 끝마치자, 나에게는 이제 할 만한 일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설거지통 속에 쌓여 올라간 식기를 씻어 정돈했다. 재떨이의 담뱃재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멈춰진 시계의 추를 맞추고, 일력식의 캘 린더도 말끔하게 뜯어냈다. 책상 위의 연필은 필통에 넣고, 서류는 항목별로 정 리하고, 손톱깍이는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그 덕분에 방 안은 겨우 사람 사는 곳처럼 되었다. 나는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방 안을 한 번 빙 둘러보고 "나쁘지 않군." 하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했다. 창 밖에는 1974년 4월의 어렴풋이 흐린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은 평평 하니 이음새 하나 없어서 마치 하늘에 회색의 덮개를 푹 씌운 듯이 보였다. 해 질 무렵의 엷은 빛이 물속의 먼지처럼 유유히 공중을 떠돌며 콘크리트와 철근과 유리로 만든 해저의 골짜기에 소리도 없이 쌓이고 있었다. 하늘도 거리도, 그리고 방 안도 모두 똑같은 색조의 눅눅한 잿빛에 물들어 있 었다. 어디에도 이음새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물을 끓여서 다시 커피를 넣고 이번엔 진짜 스푼으로 저어 마셨다. 카 세트 덱의 스위치를 넣자, 천장에 달려 있던 작은 스피커에서 바흐의 류트곡이 흘러나왔다. 스피커도 덱도 테이프도 모두 와타나베가 집에서 가지고 온 것이 었다. 나쁘지 않군, 하고 이번엔 속으로 중얼거렸다. 4월의 덮지도 춥지도 않은 흐 린 저녁 무렵에 바흐의 류트곡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런 뒤에 나는 똑바로 의자에 앉아 상의 포켓에서 쌍둥이가 찍혀 있는 사진 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그리고 밝은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오랫동안 멍하 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책상 서랍 속에 사진을 확대해서 보기 위 한 돋보기가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대고 부분 부분을 하나 하 나 확대해서 세심하게 점검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뭔가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달리 할 만한 것도 생각나지 않았 다. 젊은 남자의 귀에 대고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쪽의 한 명-누가 누구인지 나로 서는 영원히 분간할 수 없다-은 입 가장자리에 무심코 지나치면 못 보고 넘어가 버릴 것 같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왼팔은 유리 테이블 위에 놓 여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 쌍둥이의 팔이었다. 매끄럽게 가늘었고 손목시 계도 반지도 끼고 있지 않았다. 그것과 대조적으로 상대인 남자 쪽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 다. 늘씬하게 키가 큰 핸섬한 남자로, 깔끔하고 센스 있는 다크 블루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오른쪽 손목에 가는 은색 팔찌를 끼고 잇었다. 그는 양 손을 테이 블 위에 얹고 앞에 놓인 가늘고 긴 글라스를 꼼짝 않고 응시하고 잇었다. 마치 그 음료가 그의 인생을 바꿔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존재이고, 또한 거기 에 관해 뭔가의 결정을 지금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글라 스 옆에 놓여진 재떨이에서는 뭔가 주술을 부린 것 같은 모양의 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쌍둥이는 나의 아파트에 있을 때보다 조금 마른 것 같아 보였지만 정확한 것 은 나도 알 수 없었다. 사진의 각도나 조명 탓으로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른 다. 나는 남은 커피를 한 모금에 죽 들이켜고 서랍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성냥 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도대체 왜 쌍둥이가 록본기의 디스코테크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쌍둥이는 속물 냄새 나는 디스코테 크에 출입하거나, 눈 주위에 화장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 금 어디에 살며, 무엇을 하고 지내는 것일까? 그리고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 까? 그러나 손으로 볼펜 자루를 350회 정도 빙빙 돌리며 가만히 그 사진을 주시한 후에, 나는 어쩌면 이 남자가 쌍둥이의 현재의 숙주일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쌍둥이는 전에 나에 대해 그러했듯이 뭔가를 계기로 이 남자의 생활 속에 눌러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에게 말하고 있는 쪽의 쌍둥이의 입에 떠오른 미소를 가만히 보고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미소는 넓은 초원에 내린 부드러운 비처럼 너무도 잘 그녀 자신에게 길들여져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장소를 발견 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 세 명의 공동 생활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쌍둥이는 가는 곳곳마다 흐르는 구름같이 그 모양을 변화시키는지 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내부에서 그 존재를 특징짓고 있는 것 몇 개인가는 결코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잇었다. 그녀들은 지금도 역시 커 피 크림 비스킷을 베어먹고, 지금도 역시 긴 산책을 계속하고, 욕실 바닥에서 바 지런히 세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쌍둥이인 것이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있어도 이상하게 그 남자에 대해 질투를 느낄 수 없었 다. 질투뿐만이 아니라 나는 어떤 종류의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거기에 상황으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다른 시대 의 다른 세계로부터 잘라내어져 온 단편적인 정경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쌍둥이를 잃었고, 어떻게 애를 써 보더라도 그것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은 남자가 몹시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 다. 그에게는 어두운 얼굴을 할 이유라는 게 아무것도 없을게 분명하지 않은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에게는 쌍둥이가 있고 내게는 없다. 나는 그들을 잃었 지만 그는 아직 잃지 않았다. 언젠가 그도 역시 쌍둥이를 잃게 되겠지만, 그것 은 좀 더 나중의 일이고,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그녀들을 잃을지 모른다고는 생각지도 않고 잇을 것이다. 아니, 그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것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구라도 항상 혼란스러워한다. 그렇지만 그가 지금 맛보고 있는 혼란은 치명적인 종류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자 신도 그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생각해 본댔자, 그 남자에게 뭔가를 전하는 따위는 할 수 없다. 그들은 먼 시대의 먼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부유하는 대 륙과 같이 내가 알 수 없는 어두운 우주를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5시가 되어도 와타나베가 돌아오지 않자, 연락 사항을 몇 개 메모해 두었다. 그리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옆방 아가씨가 다시 들어와서 화장실을 써도 좋으냐고 물었다. "얼마든지."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 화장실의 형광등이 나가서요."라고 그녀는 말하고 화장 백을 움켜쥐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헤어브러시로 머리를 빗고 나서 입 술 연지를 발랐다. 그녀가 화장실 문을 계속 열어 둔 채로 있었기 때문에, 나는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 뒷모습을 별로 볼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흰 가운을 벗은 그녀는 꽤 예쁜 다리를 하고 있었다. 짧고 푸른 울 스커트 아 래 무릎 뒤쪽에 조금 움푹 패인 것이 보였다. "뭘 보고 계셔요?"하고 입술 연지를 티슈 페이퍼로 정리하면서, 그녀는 거울을 향해 물었다. "다리."하고 나는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 "나쁘지 않은데."라고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입술 연지를 백에 넣고 화장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그 리고 하얀 블라우스 위에 엷은 블루 카디건을 걸쳐 입었다. 카디건은 마치 구 름의 한자락인 양 나풀거려서 가벼운 것 같았다. 나는 트위드 상의 포켓에 양 손을 찔러넣고 또 잠시 그 카디건을 바라보았다. "저어, 나를 보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건가요?" 라고 그녀는 물었다. "좋은 카디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랬군요. 비싼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만큼 비싸진 않아요. 왜냐하면 여기에 근무하기 전엔 부티 크에서 점원을 했었기에 뭐든지 점원 할인으로 싸게 살 수 있었거든요." "왜 부티크를 그만두고 치과 의원에서 근무하는 거지?" "월급이 적은 데다가 양복만 팔았기 때문이에요. 그것보다는 치과 의사 선생님 과 근무하는 쪽이 좋아요. 무료나 다름 없이 충치도 고치구요." "과연."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당신의 복장 취미도 그리 나쁘지는 않군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하고 말하고, 나는 입고 있는 옷에 눈을 주었다. 나는 자신이 아침에 어떤 옷을 입고 나왔나조차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대학생 때 구입한 베이지색 의 코튼 팬츠에 3개월이나 빨지 않은 감색 스니커, 하얀 폴로 셔츠에 회색 트위 드 상의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폴로 셔츠는 새것이었지만 상의는 항상 포켓에 손을 찔러넣고 다니는 통에 치명적으로 모양이 망가져 있었다. "심한 모양이지." "그래도 당신에게 잘 어울려요." "하지만 어울린다는 것만으로 그걸 좋은 복장 취미라고 할 순 없지." "새로운 슈트를 사 입고, 상의 포켓에 손을 찔러 넣는 버릇을 고친다면? 그 버 릇 말예요. 모처럼의 좋은 상의인데 모양이 망가져 버리잖아요." "이미 망가져 버렸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일이 끝난 거라면 역까지 함께 가지 않을래?" "좋아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카세트 덱과 앰프의 스위치를 내리고 전등을 껐다. 그리고 문에 열쇠를 채우고 긴 비탈길을 걸어 역을 향해 내려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물건을 들지 않기 때문에 양 손을 여전히 상의 포켓에 찔러넣고 있었다. 몇 번인가 그녀의 충고에 따라 양 손을 바지 포켓으로 옮기려고 시도는 해 보았지만, 결국은 잘 되지 않았다. 바지 포켓에 양 손을 넣고 있으면 아무래도 안정감이 없었던 것 이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숄더백의 가죽끈을 쥐고 마치 리듬을 타는 것처럼 내 옆에 서 왼손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등줄기를 곧게 펴고 걷는 탓으로, 그녀는 실 제 이상으로 키가 커 보였고 걷는 템포도 나보다 훨씬 빨랐다. 바람이 없기 때문일까, 거리는 잠잠했다. 옆을 지나쳐 가는 트럭의 배기음이 나 공사중인 빌딩의 소음도 마치 몇 겹이나 겹쳐진 베일을 거쳐서 당도하는 소 리처럼 선명하지 않게 들려왔다. 그녀의 하이힐 소리만이 아련한 봄날 저녁 무 렵의 대기에 규칙적으로 거침 없이 쐐기를 박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소리에 주의를 집중시켜 걷고 있었는데, 조 금 후 모퉁이를 뛰쳐나온 국민학생이 탄 자전거에 부딪힐 뻔했다. 그녀가 왼손 으로 내 팔꿈치를 잡아 힘껏 끌어당겨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정면으로 부딪혔 을 것이다. "똑바로 앞을 보고 걸으세요."라고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뭘 생각하며 걷고 있어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아."하고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했다. "단지 멍하니 걸었을 뿐이지." "곤란한 사람이군요. 도대체 몇 살이시죠?" "스물 다섯." 하고 나는 말했다. 연말엔 스물여섯이 된다. 그녀가 겨우 내 팔꿈치에서 손을 떼었고, 우리는 다시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 작했다. 이번엔 나도 정확히 걷도록 신경을 집중했다. "그런데 나는 네 이름을 아직 모르고 잇는데."라고 나는 말했다. "말하지 않았나요?" "듣지 못했어." "메이."하고 그녀는 말했다. "가사하라 메이." "메이?"하고 나는 조금 놀라서 되물었다. "5월의 메이(May)예요." "5월생인가?" "아뇨."하며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8월 21일생이에요." "그럼 어째서 메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지?" "알고 싶으세요?"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웃지 않을 거죠?" "웃지 않을게." "집에서 산양을 기르고 있어요."라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산양?" 하고 나는 좀 놀라서 반문했다. "산양, 아시죠?" "알고 있지." "그게 무척 머리가 좋은 산양이라서, 식구들은 그 산양을 한가족처럼 귀여워 했어요." "산양인 메이."라고 나는 복창하듯이 말했다. "더욱이 농가의 딸로만 여섯 중의 막내라, 이름 따윈 아마 아무래도 좋았었나 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기억하기 쉽죠? 산양인 메이." "과연."하고 나는 말했다. 역에 도착해서 나는 전화를 받아 준 답례로 가사하라 메이에게 저녁을 함께 들자고 권했지만, 그녀는 이제부터 약혼자와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럼 요 다음에 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즐겁게 지내세요."하고 가사하라 메이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의 엷은 블루 카디건이 귀가하는 사람들 틈 속에 빨려들 듯이 사라져 버 려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나는 상의 포켓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적당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사하라 메이가 사라지자, 내 몸은 다시 저 이음새 하나 없는 밋밋한 회색 구름의 그림자에 가려져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자, 구름 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어렴풋한 잿빛에 밤의 푸름이 섞여서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거기에 구름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것은 여전히 꼼짝 않고 몸을 숨긴 눈먼 거대한 짐승같이 하늘을 덮고 있었고 달이나 별의 모습을 배후에 감추고 있었다. 마치 해저를 걷고 있는 것 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앞도 뒤도 좌우도 모두 똑같아 보였다. 기압도 호흡법도 아직 몸에 잘 맞지 않는다. 혼자 남겨지자 식욕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아파트에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따로 갈 만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도리 없이 뭔가가 문득 떠오를 때까지 나는 거리를 걸어 보기로 했다. 때로는 멈춰서서 쿵푸 영화의 간판을 보기도 하고 악기점의 쇼윈도를 들여다 보기도 했지만,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 라보며 걸었다. 몇 천이란 수의 사람들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져갔다. 그들은 한쪽 의식의 변경에서 다른 쪽 의식의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거리는 변함 없는 여느 때의 거리였다. 섞여 있어서 그 하나 하나의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나, 어디로부터랄 것도 없이 점차로 나 타나서 귀를 빠져나가는 짤막한 음악이나, 끊임없이 점멸을 반복하는 신호와 그 것을 부추기는 자동차의 배기음,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하늘로부터 넘쳐 흘러떨어 지는 한없는 잉크와 같이 밤거리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밤거리를 걷고 있으면 그와 같은 웅성거림이나 빛이나 냄새, 흥분의 몇 분의 일인가는 사실 현실에 존 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제나 저번 주나 저 번 달로 부터의 먼 메아리인 것이라고. 그러나 나에게는 그 메아리 속에서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그 어떤 것을 알아 차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것은 그다지도 멀고, 그다지도 막연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얼마 만큼의 거리를 걸었던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몇 천의 사람들을 스쳐지났다고 하는 것뿐 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훗날 70년 내지는 80년이 경과하면 그런 몇 천이라고 하는 수의 사람들은 우선 틀림없이 모두가 이 세계로부터 소 멸한 상태일 거라는 점이었다. 70년이나, 80년이라는 것은 그렇게 긴 세월은 아 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데도 지치자-아마도 나는 그 중에 쌍둥이의 얼굴을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 밖에는 내가 사람 들의 얼굴을 바라볼 이유 따윈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기척 없는 좁은 골목길로 꺽어 들어가서 가끔 혼자서 술을 마시러 갔던 작은 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카운터에 앉아서 언제나와 똑같이 버번 위스키 온더락 을 주문하고 치즈 샌드위치를 몇 조각인가 먹었다. 가게 안엔 손님의 모습은 거의 없었고 잠잠한 공기가 오랜 시간을 경과한 목재나 회반죽칠에 잘 융합되어 잇었다. 몇 십년인가 전에 유행했던 것 같은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음악이 천 장의 스피커에서 작게 흐르고, 글라스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나 얼음을 자르는 소리가 이따금 거기에 섞였다. 모든 것은 상실되어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려 나는 애썼다. 모든 것은 상실된 것이고, 계속해서 상실될 만한 처지인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원래대로 돌려 놓 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지구는 그 때문에 태양의 둘레를 계속해서 돌고 있는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결국은 리얼리티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구가 태양 의 둘레를 돌고 달이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타입의 리얼리티 말이다. 만약에-라고 나는 가정했다-내가 어딘가에서 쌍둥이와 딱 마주쳤다고 하자. 하지만 그런 뒤에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다시 한번 함께 살지 않겠느냐고 그들에게 말을 꺼내 보면 좋을까? 그러나 그런 제안이 무의미한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 그 들은 이미 나를 통과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에-라고 나는 제2의 가정을 했다-쌍둥이가 내게로 돌아오기로 동의를 했다고 하자.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가정해 보자. 그 런 뒤엔 어떻게 하나? 나는 샌드위치 옆에 붙은 피클을 베어먹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무의미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몇 주 몇 개월 혹은 몇 년을 그들이 내 아파트 에 머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날 그들은 또 모습을 감춰 버릴 것이다. 이전 처럼 어떤 언질도 없이, 어떤 설명도 없이. 바람에 날려 버리는 봉화처럼 어딘 가로 사라져갈 것이다. 똑같은 일이 똑같이 반복될 뿐이다. 무의미하다. 그것이 리얼리티라는 것이다. 나는 쌍둥이가 없는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종이 냅킨으로 카운터 위의 물방울을 훔쳐내고, 상의 안 포켓에서 쌍둥 이의 사진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두 잔째의 위스키를 마시면서 쌍둥이 중 한 사람은 옆의 이 남자를 향해서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계속해서 사진을 주시하고 있자니, 그녀는 마치 남자의 귀에 공기 혹은 눈엔 뵈 지 않는 가느다란 안개 상태의 것을 들여다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진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마 이 남자는 아무것도 알아차리고 있지 못할 거라고 나는 추측했다. 마치 내가 그 무렵에 무엇 하나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처럼. 조금은 어긋나 버린 기억의 단편을 머릿속에서 빙빙 돌려대고 있는 사이에-그 런 행위가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로써-나는 양쪽 관자놀이의 내부에 어렴풋한 나른함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내 머릿속에 감금당해 있는 한 쌍의 뭔가가 거 기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아마도 이런 사진은 불태워 없애 버려야 할 만한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러나 나는 그것을 불태울 수는 없었다. 만약 내게 그것을 불태워 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처음부터 이런 막다른 골목으로 빠져들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두 잔째의 위스키를 마저 마셔 버리고 수첩과 잔돈을 가지고 핑크색 전 화기 앞으로 갔다. 그리고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신호음이 네 번 울렸을 때, 생각을 고치고 수화기를 내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수첩을 손에 쥐고 잠 시 전화기를 노려보았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카운터로 돌아 가 세 잔째의 위스키를 주문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뭔가를 생각해 본다고 하더라도, 어딘가에 다다를 리는 없는 것이다. 나는 잠시 동안 머리를 텅비우고서, 그 공 간 속에 몇 잔인지 모를 위스키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 있는 스피커 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귀를 씻었다. 그 때 견딜 수 없이 여자를 안고 싶다 는 기분이 들었지만, 누구를 안으면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누구라도 좋 지만, 그 중의 누군가 한 사람을 섹스 상대로서 구체적으로 상정할 순 없었다. 누구라도 좋지만 누군가는 곤란한 것이다.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잇는 여자가 전부 모여서 하나로 섞여진 육체라면 관계할 수 있을 것 같았 는데, 아무리 수첩을 넘기더라도 그런 상대의 전화번호가 발견될 리는 만무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몇 잔째인지 알 수 업슨 온더락의 남은 분량을 한입에 비워 내고, 돈을 지불한 뒤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거리의 신호등 앞에 서서<이번에 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하고 생각했다. 그저 이번에인 것이다. 5분 후에, 10 분 후에, 15분 후에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면 좋을까? 어디에 가면 좋을까?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어디에 가고 싶은 걸까? 무엇을 하게 될까? 어디에 가 게 될까? 그러나 나는 단번에 그 답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2 "언제나 같은 꿈을 꾸게 되는 거야." 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여자에게 말했 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자니, 마치 자신이 미묘한 밸런스를 취하면서 불안정한 공간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부드러운 침대 위에 알 몸으로 드러누워 있는 탓일 게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나는 오드콜로뉴(향수 비 슷한 화장수)의 강한 냄새 탓도 있을지 모른다. 그 냄새는 마치 미묘한 벌레와 같이 나의 어둠 속으로 잠입해 들어와서 나의 세포를 확장시키거나 축소시키고 있었다. "그 꿈을 꾸는 시간은 언제나 대체로 정해져 있어. 새벽 4시나 5시-동이 트 기 좀 전이지. 흠뻑 땀을 적시고 벌떡 일어나면 아직 주변은 어두워. 그렇다고 아주 어둡다고는 할 수 없지. 그런 시간이야. 물론 어느 꿈이나 아주 똑같다는 건 아니야. 세부적인 것은 그 때 그때의 따라서 하나 하나 달라. 상황도 다르 고 역할도 달라. 하지만 기본적인 패턴은 똑같은 거야. 등장인물도 똑같고 결 말도 똑같아. 시리즈물의 싸구려 영화처럼 마리야." "나도 가끔은 기분 나쁜 꿈을 꿔요." 하고 여자는 말하고 라이터로 담배에 불 을 붙였다. 라이터 돌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담배 연기의 냄새가 났 다. 그리고 나서 손바닥으로 뭔가를 가볍게 두세 번 털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아침에 꾼 꿈에는 죽 유리를 끼운 빌딩이 나왔어."하고 나는 여자의 얘 기엔 상대하지 않고 계속했다. "굉장히 큰 빌딩이었어. 신주쿠의 니시구치에 세워질 법한 높이였어. 벽이 전부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지. 꿈속에서 길을 걷 다가 나는 때마침 그 빌딩을 발견했지. 그런데 그것은 완벽하게 완성한 빌딩이 라곤 할 수 없었어. 대체적인 건 만들어져 있었지만, 아직 공사중이었거든. 유 리벽 속에서는 사람이 바쁜 듯이 움직이고 있었지. 빌딩 내부는 칸막이만 되어 있을 뿐, 아직 거의 텅 비어 있었어." 여자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연기를 뱉어내고 나서 기침을 했다. "저어, 내가 뭔가 질문 같은 걸 하는 게 좋을까요?" "무리하게 질문할 거 없어. 그냥 듣고 있어 주면 그걸로도 좋아."하고 나는 말했다. "좋아요."라고 여자는 말했다. "나는 한가했기 때문에 그 큰 유리 앞에 멈춰서서 가만히 안의 작업을 보기로 했지. 내가 엿보고 있는 방 안에서는 헬멧을 쓴 작업원이 장식용 벽돌을 쌓고 있는 중이었어. 그는 내내 등을 보이고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몸매나 몸동작을 보아서는 젊은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마 르고 키가 컸지. 거기에 있는 건 그 남자 한 사람뿐이었어. 그 밖에는 아무도 없었지." "꿈속에선 공기가 몹시도 흐릿해 있었어. 마치 어딘가로부터 화톳불의 연기가 뒤섞여 들어오고 있는 것같이 뿌옇게 흐려 있었어. 때문에 먼 쪽은 잘 볼 수가 없었어. 그런데 계속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자니, 공기는 조금씩 투명하게 되어 갔어. 정말로 투명하게 되었는지, 혹은 내 눈이 거기에 길들여졌는지, 그 중 어 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어. 그렇지만,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방의 구석구석을 전보다 확실히 둘러볼 수 있게 되었어. 젊은 남자는 마치 로봇처럼 아주 똑같 은 동작으로 벽돌을 하나 하나 쌓아올리고 있었어. 그것은 꽤 넓은 방이었지만, 남자가 굉장히 손이 빠르고 요령 있게 벽돌을 쌓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 은 한두 시간 후면 완성될 것 같았어." 나는 거기서 잠깐 멈추고 눈을 뜬 뒤, 침대 머리맡에 놓여진 글라스에 맥주를 따라 마셨다. 여자는 나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지 그시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쌓고 있는 벽돌 뒤에는 본래의 빌딩 벽이 있었어. 예의 흔해 빠진 콘 크리트 벽이지. 결국 남자는 그 본래의 벽 앞에 새로운 장식용 벽을 만들고 있 었던 거야.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겠어?" "알겠어요. 이중의 벽을 만들고 있더란 거죠?"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이중의 벽을 만들고 있었던 거야. 잘 보니, 그 본 래의 벽과 새로운 벽 사이에는 약 40센티 정도의 공간이 벌어져 있었지. 왜 그 런 공간을 일부러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어. 그렇 게 하면 방이 훨씬 좁게 될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상해서 더욱 눈을 똑 바로 뜨고 그 작업을 지켜보았지. 그러자, 그러는 동안에 점점 사람의 모습 같 은 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마치 현상액 속에 넣은 사진에 사람의 모습이 떠 올라 오는 것처럼 말이야. 그 인영은 새로운 벽과 옛벽 사이에 끼워 넣어지고 있었던 거야." "그것은 쌍둥이였어."라며 나는 계속했다. "쌍둥이 여자애들이었지. 열아홉이 든가, 스물이든가, 스물하나든가, 그 정도의 나이였지. 두 사람은 내 옷을 입고 있었지. 한 사람은 트위드 상의를 입었고, 한 사람은 감색 윈드 브레이커를 입 고 있었어. 모두 내 옷이었지. 그들은 그 40센티 정도의 틈새에 부자유스런 모 습으로 감금당해 있었지만, 자신들이 벽 사이에 넣어져 메워지려고 한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듯 둘이서 언제나처럼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었어. 작업원도 자신이 그 쌍둥이르르 메워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어. 다만 묵묵히 벽돌을 쌓고 있을 뿐이었지. 거기에서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어." "어째서 그 작업원이 쌍둥이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나요?"라고 여 자가 물었다. "그냥 알 수 있는 거지."라고 나는 말했다. "꿈속에서는 여러 가지의 것을 그 냥 알 수가 있는 거라구.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작업을 중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나는 양 주먹으로 그 유리 벽을 있는 힘껏 꽝꽝 두드렸지. 팔이 저릴 정도로 강하게 두드렸어. 그런데 강하게 두드려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 거야. 왠지는 알 수 없지만 소리가 죽어 버리고 마는 거였어. 그래서 작업원도 알아차리지 못했지. 그는 똑같은 스피드로 한 개 한 개 기계 적으로 벽돌을 쌓아 올리고 있었지. 왼손으로 맞춤새를 칠하고 오른손으로 그 위에 벽돌을 쌓아가는 것이었지. 벽돌은 쌍둥이의 무릎 주변까지 쌓아 올려져 있었어." "그래서 나는 유리벽을 두드리는 것을 단념하고, 빌딩 안으로 들어가서 그 작 업을 중지시키기로 했지. 그렇지만 입구를 발견할 수가 없었어. 굉장히 큰 빌 딩이었는데, 거기에는 입구라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었어. 나는 있는 힘껏 뛰어 서 몇 번이나 그 빌딩 둘레를 둘러보았지. 하지만 결국은 마찬가지였어. 거기 에는 역시 입구라고 할 만한 게 없었어. 마치 거대한 어항처럼 말이야." 나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였다. 여자는 아직도 지그시 내 눈을 바라보고 잇었다. 그녀가 몸의 방향을 바꾸자, 내 팔에 유방을 꽉 눌린 듯한 상 태가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하고 여자는 물었다.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어."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거야. 아무리 찾아도 입구는 없고, 소리는 죽고 마는 거였지. 나는 유리에 양 손을 대고 계속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벽은 점점 높아져 갔지. 그것은 쌍둥이의 허리 높이까지 올라가고, 가슴까지 올 라가고, 머리까지 올라가더니 드디어는 전부를 덮어 버리며 천장에까지 다다랐 어. 그것은 앗 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지. 나는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어. 작업원은 마지막 한 개의 벽돌을 끼워넣어 버리고는 짐을 정리해서 어딘가로 사 라져 버렸어. 그 뒤에는 나와 유리벽만이 남겨졌지. 나는 정말이지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던 거야." 여자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항상 똑같아."하고 나는 마치 좋은 말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세부는 변하고, 설정도 변하고, 역할도 변하지-하지만 결말은 항상 똑같은 거야. 거기에는 유리 벽이 있고,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하는 것이 불가능해. 항상 똑같다구. 눈 을 뜨면, 내 손바닥에는 항상 섬뜩한 유리의 감촉이 남게 돼. 그것은 몇 날이고 몇 날이고 손바닥에 남게 되는 거야." 그녀는 내가 얘기를 끝마친 후에도 계속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피곤해서 그럴 거예요."라고 여자는 말했다. "나도 그래요. 피곤하 면 늘 기분 나쁜 꿈을 꾸게 되죠. 그래도 그것은 실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거예 요. 단지 몸이나 머리가 피곤해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여자는 내 손을 잡고는 그녀의 음부로 가져갔다. 그녀의 그곳은 따뜻하게 젖어 있었지만, 그래도 내 기분을 돋구어 줄 수는 없었다. 다만 그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꿈 이야기를 들어 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며 돈을 조금 건넸다. "얘기를 들어 드른 것쯤이야 무료인데."하고 여자는 말했다. "주고 싶어서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수긍하고서 돈을 받아 검은 백에 넣은 뒤, 탁 하고 기분 좋은 쇠붙이 소리를 내며 백을 닫았다. 마치 나의 꿈 그 자체가 그 안으로 끌려들어가 마무 리지어져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침대를 빠져나가 속옷을 입고, 스타킹을 신고, 스커트와 블라우스와 스 웨터를 껴입고 나서,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었다. 거울앞에 서서 머리를 빗 고 있을 때의 여자는 누구나 모두 똑같아 보인다. 나는 알몸인 채로 침대 위에 서 몸을 일으키고,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건 반드시 그냥 꿈일 뿐이에요."라고 여자는 나가려다가 말했다. 그리고 문 손잡이에 손을 댄 채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이 마음을 써야 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녀는 나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찰카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고 나서도, 나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서 오랫동안 방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에라도 있는 싸구려 호텔, 어디에 라도 있는 싸구려 천장이었다. 창문 커튼 틈새로부터 축축한 색조의 가로등이 보였다. 이따금 강한 바람이 11월의 차가운 빗방울을 아무렇게나 유리창에 내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머리맡의 손목시계를 잡으려고 하다가, 결국은 귀찮아져 그만두었다. 지금이 몇 시인가는 큰 문제가 아니고, 생각해 보니 나는 우산조차 갖고 잇지 않았던 것이 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바다에 가라앉아 버린 고대의 전설적인 대륙을 생각 했다. 왜 그런 걸 생각해 냈는지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아마 11월의 차가 운 비가 내리는 밤에 우산을 갖고 잇지 않은 탓이리라. 혹은, 새벽녘 꿈의 섬뜩 함이 묻어 있는 손으로 이름도 모르는 여자의 몸을-어떤 몸이었는지도 생각해 낼 수 없는-안았던 탓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먼 옛날에 바다 깊이 가라앉은 전설적인 대륙을 상상했을 것이다. 빛은 엷게 스미고, 소리는 흐려 분 명치 않고, 공기는 무겁게 젖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상실된 후 도대체 몇 년이 흐른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것이 상실된 햇수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것은 필시 쌍둥이 가 나를 떠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상실되었을 것이다. 쌍둥이는 나에게 그것을 알게 해 주엇을 뿐인 것이다. 상실 한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상실한 일시(日時)가 아니고, 상실한 것을 우리들이 깨닫게 된 일시일 뿐이다. 그래 좋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3년이다. 3년이라는 세월이 나를 이 11월의 비오는 밤으로 옮겨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이 새로운 세계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갈 것이다. 시간은 걸릴지도 모르지만, 조금씩 나는 살과 뼈를 이 무겁고 습한 우주의 단층 속에 잠입시켜 갈 것이다. 결국 사람은 어느 상황 속으로도 자신을 동화시켜 가는 것이다. 어느 선명한 꿈도 결국은 선명치 않은 현실 속에 삼켜지고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꿈이 존재했던 것조차 나는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나는 머리맡의 라이트를 끄고, 눈을 감고 침대 위에서 천천히 몸을 뻗었다. 그리고 꿈이 없는 잠 속으로 의식을 침전시켜 갔다. 비가 창문을 때렸고 어두 운 해류가 잊혀진 산맥을 씻어내렸다. 태엽 감은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그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 나는 부엌에 서서 스파게티를 삶고 있는 중이었다. 스파게티는 삶아지기 직전이었고, 나는 FM라디오에 맞춰 로시니의 <도둑까치>의 서곡을 휘파람으로 불고 잇었다. 스파게티를 삶기에는 아마 최 적의 음악이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그대로 못 들은 척하고 스파게티를 계속 삶으려고 까지 생각했다. 스파게티는 거의 삶아졌고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런던 ㄱ양악단 을 그 음악적 피크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스불을 약하게 하고 젓가락을 오른손에 낀 채 거실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새 업무로 친구 에게서 전화가 걸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십 분간 시간을 갖고 싶어요."하고 당돌하게 여자가 말했다. "실례지만."나는 놀라서 재차 물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십 분만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했어요."라고 여자는 반복했다. 그 여자의 목소리를 나는 전혀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나는 사람의 음색을 기억하는데 관해선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자신을 갖고 잇엇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우선 실수할 리가 없는 터였다.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여자의 목소 리였다. 낮고 부드럽고 그리고 막연한 목소리였다. "실례지만 어디에 거셨습니가?"하고 나는 어디까지나 예의바르게 물어 보았다. "그런 건 상관 없어요. 아무튼 십 분만 시간을 갖고 싶어요. 그러면 서로 더 잘 알 수 있게 될 거예요."라고 여자는 빠른 어조로 말했다. "서로 알 수 있게 된다구요?" "기분 말이에요."라고 여자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열려진 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스파게티 냄비에서 는 기분좋은 흰 김이 솟아오르고, 아바도는 <도둑 까치>의 지휘를 계속하고 있 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마침 스파게티를 삶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제 슬슬 삶아 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제 슬슬 삶아지고 있는 중이어서 당신과 십 분이나 얘기하다간 스파게티가 쓸모없게 되어 버리거든요. 끊어도 되겠습니까?" "스파게티?"하고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오전 10 시 반이에요. 어째서 오전 10시 반에 스파게티 같은 걸 삶나요? 그건 이상하 지 않나요?" "이상하건, 이상하지 않건 당신과는 관계 없잖소."라고 나는 말했다. "아침식 사를 하나도 하지 않아서 지금 배가 몹시 고파요. 내가 직접 만들어 먹는데 몇 시에 뭘 먹든 그건 나 좋을 대로지 않습니까?' "아 알겠어요. 그럼, 끊을게요."하고 여자는 기름이 흐르는 것 같은 밋밋한 목 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목소리였다. 대수롭잖은 감정의 변화로, 마치 스위치로 주파수를 바꾼 것같이 목소리의 톤이 싹 바뀐 것이다. "나중에 다시 한번 걸 죠." "잠깐 기다려요."하고 나는 서둘러 말했다. "만약 이것이 무슨 세일즈 수단이 라고 한다면, 아무리 전화를 걸어온다 해도 소용 없어요. 나는 지금 실직중이어 서 뭘 사들일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없으니까요." "그런 건 알고 있으니 괜찮아요."라고 여자는 말했다. "알고 있다구요? 알고 있다니 뭘 말인가요?" "그러니까 당신 실직중인 거죠.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빨리 스파게티를 삶 으시면?" "아니, 당신은 도대체-"하고 내가 말하자,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너무나도 당돌한 방법이었다. 수화기를 놓으면서 놓은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스위치 버 튼을 눌러서 전화를 끊은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손에 들고 있던 수화기를 잠시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었지 만, 곧 스파게티를 생각해내곤 그것을 제자리에 놓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가 스불을 끄고 스파게티를 소쿠리에 쏟고 작은 냄비에 데워 둔 토마토 소스를 얹 어서 먹었다. 스파게티는 원인 모를 전화 탓으로 지나치게 부들부들해져 잇었 지만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었고, 게다가 나는 스파게티의 삶아진 상태를 운운하 기 에는 너무나도 배가 고팠다. 나는 라디오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 250그램 분의 면을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천천히 위 속에 집어 넣었다. 접시와 냄비를 설거지통에서 씻고, 그 동안 주전자에 물을 끓여 티백으로 포 장된 홍차를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시면서 좀 전의 전화에 대해 생각했다. 서로 잘 알 수 있게 된다? 도대체 그 여자는 무엇을 원해서 내게 전화를 겅어온 걸까? 그리고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모든 것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었다. 알 수 없는 여자로부터 익명의 전화 가 걸려온 기억도 없었고,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에 관해서도 전혀 짐 작할 수 없었다. 어쨋든-하고 나는 생각했다-어디 사는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여인과 서로 기 분을 나누고 싶진 않다. 그렇게 한다 해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선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일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의 새로 운 생활 사이클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거실 소파로 돌아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렌 데이튼 소설을 읽으면서 전화기를 이따금씩 바라보게 되자, 나는 점점 그 여자가 말한 <십 분간으로 서 로 잘 알 수 있게 되는 뭔가>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십 분이면 뭔가 서로 알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보니 여자는 애초부터 정확히 십 분이라고 시간을 정해 놓았다. 그리 고 그녀가 그 한정된 시간 설정에 대해서 꽤 확신을 갖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느껴졌다. 그것은 9분은 너무 짧고 11분은 너무 긴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스 파게티처럼....... 그런 걸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더니 소설 줄거리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돼서, 나는 가벼운 체조를 하고 나서 셔츠에 다림질을 하기로 했다. 나는 머리가 혼 란스러워지면 셔츠에 다림질을 하곤 했다. 옛날부터 죽 그래왔던 것이다. 내가 셔츠에 다림질을 하는 고정은 전부 12단계이다. 그것은 (1)옷깃(바깥)으 로 시작해서 (12)왼쪽 소매 커프스로 끝이 난다. 그 순서가 뒤바뀐 적은 거의 없다. 나는 하나 하나 번호를 매기면서 순서대로 다림질을 해간다. 그렇게 하 지 않으면 다림질이 잘 되지 않는다. 나는 스팀 다리미의 증기 소리와 코튼에 열이 가해지는 독특한 냄새를 즐기면 서 석 장의 셔츠에 다림질을 하고, 주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옷장 옷걸 이에 걸어 놓았다. 다리미의 스위치를 끄고 다림판과 함께 벽장 속에 넣어 두 자, 내 머리는 어느 정도 상쾌해진 것 같았다. 물이 마시고 싶어 부엌에 가려고 했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맙소서, 하 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대로 부엌에 갈까, 거실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이 다가 역시 거실로 돌아가서 수화기를 들기로 했다. 그 여자가 다시 걸어온 것 이라면 지금 다림질을 하고 있기 때문에, 라고 둘러대고 끊어 버리면 되는 것이 다. 그러나 전화를 걸어온 것은 아내였다. TV 위의 탁상시계를 보니, 바늘은 11 시 반을 가르키고 있었다. "잘 있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잘 있었어." 나는 후유 하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하고 있었어요?" "다림질 했어." "무슨 일 있었어요?"하고 아내는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뭔가 긴장하는 빛이 섞여 있었다. 내가 혼란스러워질 때면, 다림질을 한다는 것을 그녀는 분명 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어. 단지 셔츠에 다림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별 일 아니야."라고 나는 말하고 의자에 앉아 왼손에 들고 있던 수화기를 오른손으 로 옮겼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저어, 일 관계예요. 괜찮은 일이 하나 있는 것 같아서요." "음."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 시 쓸 줄 알죠?" "시?"하고 나는 놀라서 반문했다. 시? 시라니 무슨 말이야, 도대체? "아는 잡지사에서 젊은 여성 취향의 소설지를 내고 있는데, 거기에서 시의 투 고 선택과 첨삭할 사람을 찾고 있어요. 그리고 권두시를 매월 한 편씩 써 주었 으면 하는 거예요. 간단한 일인 데 비해 개런티는 나쁘지 않아요. 물론 아르바 이트 정도지만, 그것이 잘 되면 편집 일을 맡게 될 수도 있고-." "간단하다구?"하고 나는 말했다. "이것 보라구, 내가 찾고 있는 건 법률사무 소의 일 같은 거라구. 대체 어째서 시의 첨삭 따위의 말이 나오는 거지?" "그래도 당신 고교 시절에 뭔가 썼다고 하지 않았나요." "신문이야. 고교신문. 축구대회에서 어느 학급이 우승했다든가, 물리 교사가 계 단에서 굴러 입원했다든가 그런 시시한 기사를 썼던 것뿐이야. 시는 아냐, 시 같은 건 못 쓴다구." "하지만, 시라고는 해도 여고생들이 읽을 만한 시예요. 대단한 건 아니어도 좋아요. 그러니까, 알렌 긴즈버그 같은 시를 쓸 필요는 없어요. 적당히 쓰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적당히고 뭐고, 시 같은 건 쓸 수 없어."하고 나는 잘라 말했다.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흐음."하고 유감스러운 듯이 아내는 말했다. "하지만, 법률 관계 일이라면 찾 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지금 몇 군데 얘기를 해 놓았어. 이번 주쯤에는 반응이 올 거야. 만약 그게 잘 안 된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는 거지 뭐." "그래요? 뭐, 그건 그것으로 됐어요. 그런데 오늘 무슨 요일이죠?" "화요일." 하고 나는 조금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그럼 은행에 가서 가스요금과 전화요금을 내 주시겠어요?" "좋아. 슬슬 저녁거리 때문에 시장에도 가볼 참이었으니 그 참에 들르지." "저녁은 뭘로 할 거죠?" "글쎄, 모르겠군."하고 나는 말했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 시장에 가서 생각 해 봐야겠어." "저어."하고 바뀐 어조로 아내는 말했다. "나 생각해 봤는데 말예요, 당신 그 다지 일을 찾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요." "어째서?"하고 나는 다시 놀라며 말했다. 온 세상 여자가 나를 놀라게 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오는 것 같았다. "어째서 일을 찾지 않아도 좋다는 거야? 3 개월 후에 실업보험도 끊어져 버릴 텐데. 빈둥빈둥대고 있을 순 없잖아." "내 월급도 올랐고, 부업 쪽도 순조롭고, 저축한 것도 어느 정도 있고, 사치스 럽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충분히 먹고 살아갈 정도는 되잖아요?" "그리고 내가 집안 일을 하는 건?" "싫으세요?" "모르겠어."하고 나는 솔직히 말했다. 알 수가 없다. "생각해 보지." "생각해 봐요."하고 아내는 말했다. "그런데 고양이는 돌아왔나요?" "고양이?"라고 반문하고 나서, 나는 아침부터 고양이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니, 돌아오지 않은 것 같은데." "근처에서 좀 찾아봐 주지 않을래요? 없어진 지 벌써 나흘째예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나서 수화기를 또 왼손으로 옮겼다. "아마 <골목>안의 빈 집 정원에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 새의 석상이 있는 정원 말예요. 거기에서 몇 번 발견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거기 알고 있 나요?" "몰라."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언제 혼자서 <골목>따위엘 갔던 거야. 그 런 얘기는 이제까지 한 번도-" "저어, 죄송하지만, 이제 전화 끊어야겠어요. 슬슬 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고양이 문제 부탁해요."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나는 또 잠시 수화기를 바라보고 나서, 그것을 내려놓았다. 어째서 마누라가 <골목>같은 데를 알고 있는 거지, 하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 했다. <골목>에 들어가려면 정원에서 꽤 높은 벽돌담을 뛰어 넘지 않으면 안 되고, 게다가 그렇게까지 해서 일부러 <골목>에 들어갈 이유 따윈 아무 데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FM라디오의 스위치를 넣고 손톱을 잘랐다. 라디오는 로버트 플랜트의 새로운 LP를 특집으로 꾸미고 있었지만, 두 곡쯤 들 었을 때 귀가 아파 스위치를 껐다. 그리고 툇마루로 나가 고양이 밥그릇을 조 사해 봤지만, 접시 안의 찐 멸치는 어젯밤 내가 넣어둔 채로 한 마디도 줄어들 지 않았다. 역시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나는 툇마루에 선 채로 밝은 초여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좁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바라본다고 해서, 마음이 온화해질 것 같은 정원은 아니다. 하루 종일 거의 조금밖에 해가 비치지 않기 때문에 흙은 항상 검게 습기차 있고, 나 무라고 해도 구석에 두세 그루의 자양화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나 는 자양화라는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근처 나무숲에서 마치 태엽이라도 감는 듯한 끼이이잇하는 규칙적인 새소리가 들렸다. 우리들은 그 새를 <태엽 감는 새>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내가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본래의 이름은 모른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런 것에 상관없이 태엽 감는 새는 매일 그 근처의 숲으로 날아와 서 우리가 속한 조용한 세계의 태엽을 감았다. 도대체 왜 내가 일부러 고양이를 찾으러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태엽 감은 새의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게다가 만약 고양이가 발견된다 면, 그리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집으로 돌아 오도록 고양이 설득해야 되는 건가? 이봐, 모두가 걱정하고 있으니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래, 하고 부탁해 야 되는 걸까?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맙소사이다. 고양이 따윈 저 좋아하는 곳 에 가서 잘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도대체 난 서른이나 되어서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세탁을 하고, 저녁 식단을 생각하고, 그리고 고양이를 찾는다. 예전엔-하고 나는 생각했다-나도 희망에 불타는 성실한 인간이었다. 고교시 절에는 클라렌스 달로우의 전기를 읽고 변호사가 되려고 생각했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고교 3학년 때는 <가장 큰 인물이 될 것 같은 사람>투표에서 반에서 2위로 오른 일도 있다. 그리고 비교적 괜찮은 대학 법학부에도 들어갔 다. 그것이 어딘가에서부터 빗나가 버린 것이다. 나는 부엌의 테이블에 턱을 괴고 거기에 관해서-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내 인 생의 지침이 어긋나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난 알 수 없었다. 특별히 뭔가 짚이는 데가 있는건 아니다. 정치운동으로 좌절한 것 도 아니고, 대학에 실망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여자에 빠졌던 것도 아니다. 나 는 나로서 극히 보통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 되어서, 나는 어느날 돌연 자신이 이전의 내가 아닌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분명 그 어긋남은 처음에는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이었을터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어긋남은 점점 커져서, 드디어는 애초에 있었 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는 지경에까지 나를 이끌고가 버린 것이다. 태양계를 예로 들면 아마 나는 지금 토성과 천왕성의 중간 지점에 있을 것이다. 좀 더 나가면 명왕성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하고 나는 생각했다-그 앞에는 도대체 뭐가 있는 걸까? 2월초에 나는 줄곧 근무하고 있던 법률사무소를 그만두었지만,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의 내용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특별히 마음 설레게 하는 내용의 일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급료도 나 쁘지 않았고 직장의 분위기도 우호적이었다. 그 법률사무소에 대한 나의 역할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전문 심부름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름대로 잘 했다고 생각한다. 내 입으로 말하는 게 우스울진 몰라도 나는 그러한 실제적인 직무 수행에 관한 한 꽤 유능한 사람이다. 이해 가 빠르고, 행동은 알아서 척척 해내는 편이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현실적 인 사고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내가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얘기를 꺼냈을 때, 노(老)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무소의 소유자인 부자(父子)변호사 중 아버지 쪽이다-은 급료를 올려도 좋으니까 어떻게든 남아 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정 도였다. 그런데 나는 결국 그 사무실을 그만두었다. 어째서 그만두었는지, 그 이유는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그만두고 무엇을 하겠다는 확실한 희망도 전망도 없었 던 것이다. 다시 한번 집에 틀어박혀서 사법시험 공부를 할까 하는 것은 아무 리 생각해도 내키지 않았고, 게다가 무엇보다도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 니다. 내가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내에게 "일을 그만두려고 하는데."하고 말을 꺼냈을 때, 그녀는 "그래요."하고 말했다. 그 "그래요."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리고 나서 그녀는 한동안 묵묵히 있었다. 나도 묵묵히 있자니,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면 되잖아요."하고 그녀는 말했 다. "당신의 인생인데 자신이 좋을 대로 하면 되는 거죠 뭐."그리고 그 말만 하 고선, 생선뼈를 젓가락으로 접시 한쪽에 발라 내기 시작했다. 아내는 디자인 스쿨에서 사무 일을 보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급료를 받고 있었고, 친구인 편집자로부터 괜찮은 일러스트레이션의 일을 의뢰받고 있어서, 그 수입도 무시할 만한 건 아니었다. 내 쪽도 반 년간은 실업보험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집에 있어서 매일 깔끔하게 집안 일을 돌보면, 외식비나 세탁비라는 여분의 지출을 절약할 수 도 있어서 살림살이는 내가 일해서 급료를 받을 때와 큰 차이는 없는 터였다. 그런 식으로 해서 나는 일을 그만두었던 것이다. 12시 반에 나는 언제나와 같이 큰 캔버스 천의 백을 어깨에 늘어뜨리고 물건 을 사러 나갔다. 우선 은행에 들러 가스요금과 전화요금을 내고, 슈퍼마켓에서 저녁 찬거리르 사고, 맥도널드에서 치즈 버거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에 식료품을 넣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 벨은 내게는 굉장히 초조하게 울리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플라스틱팩을 반 정도 떼 낸 두부를 테이블 위에 놓고 거실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스파게티는 이제 끝난 건가요?"하고 예의 그 여자가 말했다. "끝났소."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고양이를 찾으러 가지 않으 면 안 돼요." "그럼 십 분 정도는 괜찮겠네요? 고양이를 찾으러 가는 거니까." "글쎄, 십 분 정도라면야."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도대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누군지 알 지도 못하는 여자와 10분 동안 지껄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그렇게 하면 우린 서로를 알 수 있게 되겠죠?"하고 여자는 조용히 말했다. 여자가-어떤 여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전화 저편에서 의자에 느긋하게 고쳐 앉 아 다리를 꼬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글쎄, 그럴까요?"하고 나는 말했다. "십 년을 같이 살아도 서로 모르는 게 있는 건데." "시험해 보면 어때요?"하고 여자는 말했다. 나는 손목시계를 벗어 스톱 워치 형식으로 바꾸고 스위치를 눌렀다. 디지털 숫자가 1부터 10까지를 새겼다. 이것으로 10초이다. "어째서 나인 거요?"하고 나는 물었다. "어째서 다른 누군가가 아니고, 하필 이면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거요?" "이유는 있어요."라고 여자는 음식을 천천히 씹을 때와 같이 정중하게 잘라서 말했다. "당신을 알고 있으니까요." "언젠가, 어딘가에서요."하고 여자는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 아요. 중요한 건 지금이에요. 그렇죠? 게다가 그런 걸 얘기하다 보면 금방 시 간이 없어져 버리잖아요. 나라고 서두르지 않을 리는 없는 거예요." "증거를 보여 줘요. 당신이 나를 알고 있다는 증거를." "예를 들면?" "내 나이는?" "삼십 세."하고 여자는 곧바로 답했다. "삼십 하고도 2개월, 그 걸로 됐나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확실히 이 여자는 나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리 생각해 봐도 나는 이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내가 사람의 목 소리를 잊는다거나, 잘못 듣는 따위의 일은 우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가 령 얼굴이나 이름은 잊어도 목소리만은 확실히 기억해 낸다. "자, 이번엔 당신이 날 상상해 봐요."하고 여자는 유혹하듯이 말했다. "목소리 로 상상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 여자인가 말예요. 할 수 있겠죠? 당신은 그런 데는 자신 있을 텐데요?" "모르겠소."하고 나는 말했다. "시험해 보세요."하고 여자는 말했다. 나는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아직 1분 5초밖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체념하 고 한숨을 내쉬었다. 응대해 버렸던 것이다. 한 번 응대해 버리면 끝까지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옛날에 자주 했던 것같이-확실히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것 은 예전 나의 특기였던 것이다-신경을 상대의 목소리에 집중시켰다. "20대 후반, 대학졸, 도쿄 태생, 어릴 적 가정환경은 중상."하고 나는 말했다. "놀랍네요."하고 여자는 말하고 수화기 옆에서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 였다. "계속 해 봐요." "상당한 미인.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그런데 콤플렉스는 있어 요. 키가 작다든가 가슴이 작다든가, 하는 그런정도." "상당히 접근했어요." 하고 여자는 킥킥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결혼했소. 그런데 원만하지는 않아요. 문제가 있소. 문제가 없는 여자라면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고 남자에게 전화를 걸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이오. 그 렇지만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해요. 적어도 함께 얘기를 나눴던 적은 없어요. 이 만큼 상상했는데도 당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니까 말이오." "그럴까요."하고 여자는 내 머리에 부드러운 쐐기를 박듯이 조용한 어조로 말 했다. "당신은 그만큼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이 있는가 보죠? 당신의 머릿속 어딘가에 치명적인 사각(死角)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다면 당 신은 지금쯤 좀 더 성실한 인간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나요? 당신만큼 머리가 좋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예요." "당신은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소."라고 나는 말했다. "당신이 누구인지 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런 훌륭한 인간이 못 되오. 나에게는 뭔가를 끝까지 해내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어요. 그래서 자꾸 옆길로 빠져 버리는 거요." "그렇지만 난, 당신을 좋아했어요. 옛날 얘기지만." "그래요, 그건 옛날 얘기일 테죠."하고 나는 말했다. 2분 53초. "그다지 옛날 얘기는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역사 얘기를 하고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역사 이야기라."하고 나는 말했다. 사각(死角), 하고 나는 생각했다. 확실히 이 여자가 말하는 대로인 지도 모른 다. 내 머리의, 몸의 그리고 존재 그 자체의 어딘가에는 잃어버린 지하세계와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이 내 생활방식을 미묘하게 어긋나게 하고 있는지도 모 른다. 아니, 미묘하게가 아니다. 대폭적으로다.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나는 지금 침대 속에 있어요."하고 여자는 말했다. "좀 전에 바로 샤워를 했 기 때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어요."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포르노 테이프가 아닌가. "뭔가 속옷을 입는 쪽이 좋아요? 아니면 스타킹이 좋아요? 그러는 쪽이 낫겠 어요?" "뭐라도 상관 없어요. 좋을 대로 하면 되잖소."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전화로 그런 얘길 하는 취미는 없소만." "십 분이면 돼요. 딱 십 분이에요. 십 분간 얘기한다고 해서 그다지 치명적 인 손실을 입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인연이 라느 게 있죠? 아무튼 질문에 답하세요. 벌거벗은 채가 좋아요? 아니면 뭔가 걸치는 쪽이 좋아요? 나, 여러가지를 갖고 있어요. 가터벨트라든가......." 가터벨트? 하고 나는 생각했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요즘 세상에 카 터벨트를 하는 여자라면 <펜트하우스>의 모델쯤은 아닐까. "벌거벗은 채가 좋겠소."하고 나는 말했다. 이것으로 4분이다. "음모가 아직 젖어 있어요."하고 여자는 말했다. "타월로 닦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아직 젖어 있어요. 따뜻하고 촉촉히 젖어 있어요. 굉장히 부드러운 음 묘예요. 새까맣고 부드러워요. 어루만져 줘요." "저어, 미안하지만-" "그 아래쪽도 몹시 따뜻해요. 마치 녹은 버터크림 같아요. 굉장히 따뜻해요. 정말이에요. 나 지금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오른쪽 무릎을 세 우고 왼쪽 다리를 옆으로 벌리고 있어요. 시계 바늘로 말하면 10시 5분 정도." 목소리의 상태로 봐서,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양 다리를 10시 5분의 각도로 벌리고, 그곳을 따뜻하게 적시고 있는 것 이다. "입술을 어루만져 줘요. 그리고 열어요. 천천히 가운뎃손가락으로 천천히 어 루만져요. 그래요, 아주 천천히요. 그리고 또 한쪽 손으로 왼쪽 유방을 만져줘 요. 아래에서 부드럽게 어루만져 올리고 유두를 살짝 잡아당겨 줘요.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 줘요. 내가 절정에 달할 때까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 보면서 담배를 한 개비 피웠다. 스톱 워치는 5분 23초에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자 갖가지 색조의 그림물감을 엉터리로 겹쳐 칠한 것 같은 어둠이 내 위에 떨어져 내렸다. 어째서일까?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나를 모두 가만 놔 두지 않는 걸까? 10분쯤 후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지만, 이번에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전화 벨은 15회 울렸고, 그리고 끊겼다. 벨이 멈춰 버리자, 마치 중력이 균형을 잃어 버린 것 같은 깊은 침묵이 주위에 가득찼다. 빙하에 감금당해 버린 5만 년 전 의 돌과 같은 깊고 차가운 침묵이었다. 15회의 전화벨이 내 주위 공기의 질을 완전히 바꿔 버린 것이다. 2시 조금 전에 나는 뜰의 벽돌담을 타고넘어 <골목>으로 내려갔다. <골목> 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본래 의미로의 골목이란 뜻이 아니다. 솔직히 그것은 뭐 라고도 부를 수 없는 곳이다. 정확히 말하면 길조차도 아니다. 길이라는 것은 입구와 출구가 있어서 그곳을 걸어가면 마땅한 장소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든 통로인 것이다. 그러나 <골목>에는 입구도 출구도 없고, 더듬어 가보면 벽돌담이나 철조망에 부닥치게 될 뿐이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조차도 아니다. 적어도 막다른 골목에 는 입구라는 것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근처 사람들은 그 좁은 길을 단지 편의 적으로 <골목>이라고 부르고 있을 따름이다. <골목>은 집집의 뒤뜰 사이를 봉한 것같이 약 2백 미터쯤 계속되고 있었다. 길 폭은 1미터보다 조금 더 되길 했지만, 울타리가 밀려나와 있거나 여러 가지 것들이 길 위에 놓여 있는 탓으로, 몸을 비틀지 않고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곳 이 몇 군데 있었다. 이야기에 의하면-그 이야기를 해 준 이는 우리에게 몹시 싼 집세로 그 집을 빌려 주고 있는 내 친절한 숙부였다-<골목>에도 예전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었 고, 거리와 거리를 연결하는 지름길 같은 기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고도 성 장기가 되어 예전의 공터였던 곳에 집이 새롭게 죽 들어선 후엔, 거기에 밀려진 모양으로 길 폭도 한층 좁아지게 되었고, 집주인들도 자기 집의 처마끝이나 뒤 뜰에 사람이 왕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서 그 좁은 길에 슬며시 입구를 막게 되었다. 처음에 그것은 차분한 울타리 같은 것으로 안을 들여다볼 수 없 게 한 것뿐이었지만, 한 주민이 정원을 확장시켜 벽돌담으로 한쪽 입구를 완전 히 막아 버리자, 거기에 호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또 한쪽 입구도 개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철조망으로 막게 되었다. 주민들은 본래 그 길을 거의 통로로 이용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 입구를 막은 것에 대해 아무도 불평 을 하지 않았고, 방범을 위해서도 그러는 쪽이 나았다. 따라서 지금 그 길은 마 치 방치된 운하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내버려졌고, 이용되는 일도 없이 집과 집을 구분하는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지면에 는 잡초가 무성하고, 도처에 거미가 끈적끈적한 거미줄을 쳐놓고 벌레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왜 그런 곳에 몇 번이나 출입했는지, 나로서는 집작도 할 수 없었다. 나로서도 이제까지 그 <골목>을 걸었던 적이 한 번 밖에 없었고, 그녀는 그렇 지 않아도 거미를 싫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뭔가 생각하려고 하자, 나의 머리는 굳게 긴장된 가스 상태로 가득차 게 되었다. 그리고 양쪽 관자놀이가 굉장히 나른하게 느껴졌다. 어젯밤 숙면을 취하지 못했던 것과 5월초로는 너무 더운 날씨, 그리고 그 기묘한 전화 탓이다. 뭐 아무려면 어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튼 고양이를 찾자. 그 뒤의 일은 또 그 뒤에 생각하면 된다. 게다가 집에 가만히 앉아 전화벨을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바깥에서 걷는 쪽이 훨씬 낫다. 적어도 뭔가 목적이 있는 일 을 하는 거니까. 지독히도 선명한 초여름의 햇살이 머리 위로 내뻗은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골 목의 지면에 얼룩지게 흩뿌리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탓으로 그 그림자는 영원 히 지표와 떨어지지 않고 고착된 숙명적인 얼룩처럼 보였다. 지구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얼룩을 품에 안은 채 서력(西曆)이 다섯 자리 숫자로 될 때까지 태양 둘레를 계속해서 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뭇가지 밑을 빠져나가자, 그 아물아물한 그림자는 나의 회색 티셔츠 위를 재빠르게 지나가고, 그리고 나서 또 원래의 지표로 돌아갔다. 주위는 너무나 조용해서 풀잎이 햇살을 받아 호흡하는 소리까지 들려올 것 같 았다. 하늘에는 몇 개의 작은 구름이 떠 있었는데, 그것들은 마치 중세 동판화 의 배경에 묘사된 구름처럼 선명하고 간결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한 탓에 나 자신은 아무래도 종잡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굉장히 덥다. 나는 티셔츠와 얇은 면바지에 테니스 슈즈를 신은 차림이었지만, 그래도 양지 를 오래 걷고 있자니, 겨드랑이 밑이나 가슴 언저리에 흥건히 땀이 배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티셔츠도 바지도 그 날 아침에 여름옷을 넣어 두었던 상자에서 바로 꺼내온 것인지라 크게 숨을 쉬니, 방충제의 톡 쏘는 냄새가 마치 뾰족한 모양을 한 미세한 곤충처럼 내 콧속에 들어왔다. 나는 양쪽으로 주의깊게 두루 살펴보면서 천천히 일정한 보조로 골목을 걸었 다. 그리고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작은 소리로 고양이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골목을 끼고 서 있는 집들은 마치 비중이 다른 액체를 섞어 놓은 것처럼 확실 한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나는 넉넉한 넓은 뒤뜰을 가진 옛 날 집들이고, 또 하나는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아담한 집들이었다. 새로운 쪽의 집에는 대체로 뒤뜰이라고 부를 정도의 넓은 공간은 없었고, 개중에는 정원이라 는 것을 전혀 갖지 않은 집도 있었다. 그런 집에서는 처마끝과 골목 사이에 빨 랫대가 겨우 두 대 들어갈 정도의 공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때로는 빨랫대 가 골목 위에까지 튀어나와 있는 집도 있어서, 나는 아직도 물방울을 떨어뜨리 고 있는 타월이나 셔츠와 시트의 행렬을 빠져나가듯이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처마끝에서 TV소리나, 수세식 화장실의 물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는 일도 있고 카레를 끓이는 냄새가 풍겨오는 일도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옛날 집 쪽에서는 생활의 냄새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느껴지 지 않았다. 울타리에는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갖가지 종류의 관목 따위가 효과 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 틈새로 손질이 구석구석까지 미친 정원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안채의 건축 스타일은 다양했다. 긴 복도가 있는 일본풍의 집이 있고, 낡은 구리 지붕의 양옥집이 있고, 바로 최근 개축된 것 같은 모던한 방식의 것도 있었지만, 그 어느 것에나 공통된 것은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 다. 세탁물조차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렇게 천천히 주변을 관찰하면서 골목을 걷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나 의 눈에는 주변 풍경이 매우 신선하게 비쳐졌다. 한 집의 뒤뜰 모퉁이에는 갈 색의 시들어 버린 크리스마스 트리가 뚝 떨어져서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어떤 집 뜰에는 마치 몇 사람의 소년기의 흔적을 털어 모은 것 같은 아이들의 온갖 놀이기구가 가득했다. 세발자전거, 고리 던지기, 플라스틱 칼, 고무공, 거북이 모 양의 인형, 작은 야구방망이, 목재 트럭 따위였다. 농구 골대가 설치된 정원도 있었고 훌륭한 정원 의자와 도제테이블이 놓여 있는 정원도 있었다. 하얀 정원 의자는 벌써 몇 개월이나(혹은 몇 년이나)사용하지 않은 듯 흙먼지를 잔뜩 뒤집 어 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보라색의 목련꽃잎이 비에 떨어져 달라붙어 있 었다. 어떤 집은 알루미늄 새시를 한 큰 유리문을 통해 거실의 내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간장색 같은 가죽을 씌운 소파 세트가 있고, 대형 TV세트가 있고, 장식장이 있고(그 위에는 열대어 어항과 무슨 트로피인지 두 개가 올려져 있다), 장식용 플로어스탠드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TV 드라마의 세트같이 비현 실적으로 보였다. 둘레에 철망을 두르고 큰 개를 위한 개집이 있는 정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개의 모습은 없었고, 문은 열려진 채였다. 철망은 마치 누군가가 몇 개월 이나 안쪽에서 기댄 채 있었던 것처럼 불룩하니 밖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아내가 가르쳐준 빈 집은 그 개집이 있는 집의 조금 앞에 있었다. 그것이 빈 집이라는 것은 나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도 2개월이나 3개월 비어 있었다 고 말할 만한 것도 아닌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비교적 새로운 모양 새의 이층집이었지만, 굳게 닫혀 있는 나무 덧문이 몹시도 낡았고, 이층 창에 붙 은 난간에는 지금이라도 막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아담 한 정원에는 날개를 펼친 새를 본뜬, 사람의 가슴 정도 높이의 대좌가 붙은 석 상이 놓여 있었지만, 그 주변에는 무정하게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새는-그것이 어떤 종류의 새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지만-그런 상황에 애가 타서 날개를 펼치 고 지금이라도 날아오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석상 외에는, 정원에는 장식다운 장식은 없었다. 낡아서 더러워진 플라스 틱 정원 의자 두 개가 처마밑에 가지런히 놓여 잇었고, 그 옆에는 철쭉이 묘하 게 현실감 없는 선명한 색조의 빨간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밖에 내 눈에 띄 는 것이라곤 잡초뿐이었다. 나는 가슴 높이의 철조망 가에 서서 한동안 그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무래도 고양이가 좋아할 것 같은 정원이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거기에는 고양 이 모습 같은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지부 위에 세워진 TV안테나 앞에 비둘기 가 한 마리 멈춰서서 그 단조로운 소리를 주변에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석상 의 새 그림자는 무성한 잡초 위에 떨어져서 뿔뿔이 분산되고 있었다. 나는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철망에 기대선 채 그것을 한 개비 피웠다. 그러는 동안 비둘기는 TV안테나 위로 올라가서 줄곧 같은 모 양으로 울고 있었다. 담배를 다 피우고 땅바닥에 밟아 끄고 난 후에도, 나는 몹시 오랫동안 거기에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된다. 얼마만큼 그 철망에 기대서서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지독히 졸려서 머리가 멍해져 있었고 거의 아무 생각없이 석상의 새 그림자 주취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은 나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치더라도 그 작업은 내 의식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상 적으로 나는 풀잎 위에 떨어진 새의 그림자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새 그림자 속에 누군가의 소리 같은 것이 잠입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것이 누구의 소리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여자의 소리 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맞은 편 집 뒤뜰에 15세나 16세가량의 소녀가 서 있는게 보였 다. 작은 체구로 머리카락은 곧고 짧다. 적갈색 테의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어 깨에서 가위로 양 소매를 잘라낸 엷고 푸른 아디다스 티셔츠를 입고 있다. 거 기에서 뻗어내린 가는 양 팔은 아직 5월인데 비해 잘 그을려 있었다. 그녀는 한쪽 손은 쇼트 팬츠의 포켓에 찔러 넣고 다른 한쪽 손은 허리 높이의 대나무로 만든 문 위에 놓은 채 불안정하게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덥죠?"하고 소녀가 내게 말했다. "덥군."하고 나도 말했다. 맙소사, 하고 또 나는 생각했다. 오늘 하루 종일 나에게 말을 걸어 오는 것은 여자들뿐이구나. "저어, 담배 갖고 있으세요?"하고 여자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쇼트호프 담뱃갑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쇼트 팬츠의 포켓에서 손을 빼고 담배를 한 개비 꺼내더니 잠시 신기하다는 듯 이 바라보고 나서 입에 물었다. 입은 작고 윗입술이 아주 조금 위로 말려 올라 가 있었다. 나는 종이 성냥을 켜서 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소녀가 머리를 숙 이자 귀의 모양이 또렷이 보였다. 이제 갓 만들어낸 느낌이 드는 매끈매끈하고 예쁜 귀였다. 그 가는 윤곽을 따라 짧은 솜털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한 모양으로 입술 가운데로부터 만족스러운 듯이 연기를 내뿜고, 그리고 나서 마치 불쑥 생각이 났다는 듯이 내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선글라 스의 두 개의 랜즈 위로 나의 얼굴이 둘로 나누어져 비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렌즈의 색이 굉장히 짙고, 게다가 빛을 반사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나는 그 안에 있는 그녀의 눈을 볼 수 없었다. "근처 분이세요?"하고 소녀는 물었다. "그래."하고 나는 답하고, 우리 집에 있는 방향을 가리키려고 했지만, 도대체 그것이 정확히 어느 방향에 위치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기묘한 각도로 구부러진 길모퉁이를 몇 개나 빠져나온 탓이었다. 그래서 나는 적당한 방향을 가리키며 얼버무려 버리고 말았다. 어느 쪽이라 해도 큰 차이는 없는 것이다. "줄곧 거기서 뭐하고 계셨어요?" "고양이를 찾고 있었어. 삼사 일 전부터 없어져 버렸거든."하고 나는 땀이 밴 손바닥을 바지에 비비면서 답했다. "이 주변에서 우리 고양이를 발견한 사람이 있을 테지." "어떤 고양인데요?" "몸집이 큰 수코양이야. 갈색 줄무늬에 꼬리 끝이 조금 구부러져 있어." "이름은요?" "이름이라고?" "고양이 이름 말예요. 이름은 있을 테죠?" 그녀는 선글라스 안에서 지그시 나 의 눈을 들여다보면서-아마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말했다. "노보루."하고 나는 대답했다. "와타나베 노보루." "고양이치곤 꽤 멋진 이름이네요." "마누라의 선배 이름이야. 느낌이 닮아서 농담으로 붙인 거지." "어떤 점이 닮았나요?" "동작이 닮았어. 걸음걸이라든가, 졸릴 때의 눈매라든가, 그건 게말야." 소녀는 처음으로 생긋 웃었다. 표정이 흐트러지자, 그녀는 처음 보았을 때보 다 훨씬 어리게 보였다. 조금 말려 올라간 윗입술이 이상한 각도로 밖으로 내 밀어져 있었다. 어루만져 줘요, 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것 은 그 전화의 여자 목소리였다. 이 소녀의 목소리는 아니다. 나는 손등으로 이 마의 땀을 닦았다. "갈색 줄무늬의 고양이로 꼬리 끝이 조금 구부러져 있는 것."하고 그녀는 확인 하듯이 되풀이했다. "목걸이라든가, 그런 것은요?" "벼룩잡이용 검은 게 달려있어."하고 나는 말했다. 소녀는 한쪽 손을 나무 문 위에 올려 놓은 채 10초나 15초 정도 가만히 생각 에 잠겼다. 그리고 짧아진 담배를 내 발밑으로 살짝 떨어뜨렸다. "그것 좀 밟아서 꺼 주실래요? 난 맨발이라서요." 나는 테니스 슈즈 바닥으로 담배를 조심스레 밟아 껐다. "그 고양이라면 이미 제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하고 그녀는 천천히 문절 을 구분하듯이 말했다. "꼬리 끝은 주의해서 보지 못했지만, 갈색의 얼룩고양이 고, 크고, 아마 목걸이를 달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 녀석을 본 게 언제쯤이지?" "글쎄 언제쯤이더라? 하지만 몇 번인가는 봤어요. 저는 이곳 정원에서 줄곧 일광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가 언제인지 잘 구별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요 삼사 일간이었어요. 우리 정원은 근처 고양이들이 드나드는 통로라서 여러 고양이가 지나다녀요. 모두 스즈키씨 집 울타리에서 빠져나와서 우리 집 정원 을 가로질러 미야와키씨 정원으로 들어가죠."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맞은 편의 빈 집을 가리켰다. 빈 집 정원에서는 여전 히 돌로 된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었고, 널빤지 같은 것이 거품이 일 듯 초여름 햇살을 받고 있었고, TV안테나 위에서는 비둘기가 단조로운 울음을 계속 반복 하고 있었다. "가르쳐 줘서 고마워."하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우리 정원에서 기다려 보면 말예요? 아무튼 고 양이는 모두 여길 통해 저쪽으로 갈 거고, 게다가 이 주변을 어정거리다간 도둑 으로 몰려 경찰에 신고를 당해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죠."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정원에 들어가 고양이를 기다릴 수는 없어." "괜찮아요, 그런 건 염려하지 마세요. 집에는 나밖에 없고, 게다가 난 얘기 상 대가 없어서 굉장히 심심했거든요. 둘이서 정원에서 일광욕을 하면서 고양이가 지나가길 기다리면 좋잖아요. 난 눈이 좋기 때문에 쓸모 있을 거예요." "그럼 3시까지 그렇게 해 보지."하고 나는 상황을 아직 잘 파악하지 못한 채 말했다. 나무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서 소녀의 뒤를 따라 잔디 위를 걸어가면서 보니, 그녀는 오른쪽 다리를 가볍게 절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어깨는 기계의 크랭크 처럼 오른쪽으로 기울며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몇 걸음인가 걷 다가 멈워서서 내게 자기와 나란히 걷도록 지시했다. "지난 달에 사고가 났었어요."하고 그녀는 간단히 말했다. "오토바이 뒤에 타 고 있었는데 내팽개쳐져 버렸어요. 재수가 없었죠." 잔디가 있는 정원 한가운데 캔버스 천의 덱 체어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한쪽 등받이에는 푸른색의 커다란 타월이 걸려 있고, 또 하나의 덱체어 위에는 말보 로의 붉은 담뱃갑과 재떨이와 라이터와 대형 라디오 겸용 카세트와 잡지가 어수 선하게 놓여 있었다. 라디오 겸용 카세트는 켜진 채 놓여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하드록이 작은 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녀는 덱 체어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을 잔디에 내리고 거기에 나를 앉히고, 라디오 겸용 카세트의 스위치를 꺼서 음악을 멈췄다. 의자에 앉자 수목들 사이 로 골목과 골목을 사이에 둔 빈 집을 건너다 볼 수 있다. 하얀 새의 석상도 철 망의 울타리도 보였다. 아마 그녀는 여기에 앉아 나의 모습을 줄곧 관찰하고 있었을 거라고 나는 상상했다. 넓고 심플한 정원이었다. 잔디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져 있었고, 곳곳 에 나무숲이 배치되어 있었다. 덱 체어 왼편에는 콘크리트로 된 큰 연못이 있 었는데, 최근에는 사용되고 있지 않은 듯, 물이 빠져서 마치 뒤집어진 수생동물 같이 엷은 녹색으로 변색된 바닥을 태양에 드러내고 있었다. 배후의 나무숲 뒤 편에 우아하게 모서리를 깍은 옛서양풍의 안채가 보였지만, 집 자체가 그리 큰 것은 아니었고 사치스런 모양새도 볼 수 없었다. 단지 정원만이 넓고, 그것도 실로 조심스럽게 손질되어 있었던 것이다. "옛날, 잔디 깎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말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하고 그다지 흥미 없는 투로 소녀는 말했다. "이 정도로 넓은 정원을 손질하는 것은 대단한 거야."하고 나는 둘레를 둘러보 며 말했다. "댁에는 정원이 없나요?" "작은 정원밖에 없어. 자양화가 두세 그루가 있을 뿐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언제나 너 혼자 있니?" "네, 그래요. 낮에는 늘 나 혼자 여기 있어요. 오전과 저녁 무렵엔 파출부 아 줌마가 오지만, 그 외에는 언제나 나 혼자예요. 저어, 뭔가 차가운 거라도 마시 지 않을래요? 맥주도 있어요." "아니, 필요 없어." "정말요? 어려워할 것 없어요." "목이 마르지 않아서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넌 학교에는 안 가 니?" "당신은 일하러 안 가나요?" "가려 해도 일이 없어."하고 나는 말했다. "실직?" "그래, 자의로 그만두었지." "지금까지 어떤 일을 했었나요?" "변호사의 심부름꾼 같은 일이야."하고 나는 말하고, 이야기의 재빠른 흐름을 끊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관공서 등에 가서 여러가지 서류를 모으기도 하고, 자료를 정리하기도 하고, 판례를 체크하기도 하고, 재판소의 사무 절차를 밟기도 하고, 뭐 그런 일이야." "그런데, 그만뒀다구요?" "그래." "부인은 직장에 다니시나요?" "다니고 있어."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고 성냥을 켜서 불을 붙였다. 근처 나무위에서 태엽 감는 새가 울고 있었다. 태엽 감는 새는 12회나 13회 태엽을 감고 나서 어딘가 다른 나무로 옮겨갔다. "고양이는 언제나 이 주변을 지나가요."하고 여자는 말하고, 앞쪽의 잔디가 깍 인 곳 주변을 가리켰다. "저 스즈키 씨 집 울타리 뒤에 소각로가 보이죠? 그 옆으로 나와서 잔디밭을 가로질러 나무 문 밑을 빠져나가 맞은 편 집 정원으로 가죠. 언제나 똑같은 코스예요.-아, 스즈키 씨 남편 말인데요, 대학 교수이고 자 주 TV에 나와요. 알고 계세요?" "스즈키씨?" 그녀는 내게 스즈키 씨에 관해 설명을 해 주었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 했다. "TV라고는 거의 보지 않아서 말야."하고 나는 말했다. "기분 나쁜 사람들이에요."하고 소녀는 말했다. "유명인인 체하는 거죠. TV 에 나오는 사람들이란 모두 협잡꾼들이에요." "그런가?" 그녀는 말보로 담뱃갑을 집어 한 개비 빼내고선 불을 켜지 않은 채, 잠시 손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뭐, 그 중엔 훌륭한 사람도 몇 명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미야와키 씨는 착실한 사람이었어요. 부인도 좋은 사람이었고, 남편은 패밀리 레스토랑을 두 갠가 세 개 경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빈 집이지?" "모르겠어요."하고 그녀는 담배 끝을 손톱으로 튕기면서 말했다. "빚을 졌든가 뭐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덜커덕 사라져 버렸어요. 사라진 지 벌써 2년쯤 된 것 같군요. 집은 내버려진 채고, 고양이는 불어나고, 주위는 어수선하고, 어머닌 언제나 불평을 늘어놓고 있죠." "그렇게 많은 고양이가 있나?" 그녀는 그제서야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 덕였다. "여러 가지 고양이가 있어요. 털이 벗겨진 것도 있고, 외눈박이 고양이도 있 는데......눈이 빠지고, 거기가 살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거죠. 지독하죠." "지독하군."하고 나는 말했다. "내 친척 중에 육손인 사람이 있어요.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여자애지만, 새끼 손가락 옆에 또 하나 아기 손가락 같은 작은 것이 붙어 있어요. 하지만 언제나 재주껏 감추고 있으니까 얼핏 봐선 알 수 없어요. 예쁜 애죠." "흠."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것은 유전한다고 생각하세요? 뭐랄까......혈통적으로 말예요." "모르겠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그리고 나서 잠시 동안 가만히 있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고양이 의 통로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고양이는 한 마리도 모습을 나타내 지 않았다. "저어, 정말로 뭔가 마시고 싶지 않으세요? 나는 콜라를 마실 건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필요 없어, 하고 나는 답했다. 그녀가 덱 체어에서 일어나 한쪽 다리를 절며 나무숲 그늘로 사라져 버리자, 나는 발밑의 잡지를 집어 훌훌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그것은 내가 예상한 것 과는 달리 남성용 월간 잡지였다. 그것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달리 남성용 월 간 잡지였다. 가운데의 그라비어에는 성기의 모양과 음모가 비쳐 보이는 얇은 속옷을 입은 여자가 작은 의자 위에 앉아서 부자유스런 자세로 양 다리를 크게 벌리고 있었다.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잡지를 원래의 위치에 돌려놓고 가 슴 위로 팔짱을 낀 채 다시 고양이의 통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당히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 콜라잔을 들고 소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아디 다스 티쳐스를 벗고 쇼트 팬츠와 비키니 수영복의 브래지어를 한 차림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유방의 모양을 확실히 알 수 있을것 같은 작은 브라이고, 뒤는 끈으로 묶어 고정시킨 것같이 되어 있었다. 확실히 더운 오후였다. 덱 체어 위에서 태양에 몸을 맡기고 계속 그대로 있 으니, 회색 티셔츠의 곳곳에 땀이 검게 배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어, 만약 당신이 좋아하게 된 여자에게 손가락이 여섯 개 있다는걸 알았다 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죠?" 하고 여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커스단에 팔지."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농담이야." 하고 나는 놀라서 말했다. "아마 마음에 두지 않을 것 같아." "아이에게 유전될 가능성이 있는데도요?" 나는 거기에 관해서 조금 생각해 보았다. "걱정할 것 없다고 생각해. 손가락이 한 개 더 있다고 해서 큰 지장은 없잖 아." "유방이 네 개 있다면?" 나는 거기에 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모르겠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유방이 네 개? 이야기에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화제를 돌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너는 몇 살이지?" "열여섯."하고 소녀는 말했다. "이제 막 열여섯이 되었어요. 고교 1년생이 죠." "학교는 쉬고 있는 건가?" "오래 걸으면 아직도 다리가 아파요. 눈 옆에 상처도 생겼고요. 제법 시끄러 운 학교예요. 오토바이에서 떨어져 부상당한 것을 알면 어떤 눈으로 볼런지도 알 수 없고요......그래서 병결한 것으로 해 놨어요. 1년 휴학하는 것도 나쁘진 않죠. 서둘러 고교 2년생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요." "흠."하고 나는 끄덕였다. "그런데, 아까 했던 얘기지만, 당신은 손가락이 여섯 개인 여자라면 결혼해도 괜찮은데, 유방이 네 개인 여자는 싫다고 했어요." "싫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모르겠다고 말했지." "어째서 모른다는 거죠?" "잘 상상이 가지 않으니까." "손가락이 여섯 개인 것은 상상할 수 있구요?" "글쎄." "어디에 차이가 있을까요? 여섯 개의 손가락과 네 개의 유방에?" 나는 거기에 관해서 또 잠시 생각해 봤지만, 적당한 설명은 이끌어낼 수 없었 다. "저어, 내가 너무 지나친 질문을 했나요?"하고 그녀는 말하며 선글라스를 통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니?"하고 나는 물었다. "때때로요." "질문하는 게 나쁜 것은 아냐. 질문을 받게 되면 상대도 뭔가를 생각하게 되 고 말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안항요."하고 그녀는 발끝을 보 면서 말했따. "모두 적당히 반응할 뿐이에요." 나는 애매하게 머리를 흔들고 나서 고양이의 통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 는 도대체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고양이 따윈 아직 한 마리도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잖은가. 나는 가슴 위에서 손을 깍지낀 채로 20초인가 30초 가량 눈을 감았다. 지그 시 눈을 감고 있자니, 몸의 여러 부분에 땀이 배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나 코 밑, 목 언저리에 마치 젖은 깃털이나 뭔가를 올려 놓은 것 같은 미미한 위화 감이 느껴졌고, 티셔츠는 바람 없는 날의 깃발과 같이 축 쳐져 나의 가슴에 늘 어붙어 있었다. 햇살은 기묘한 무게감으로 나의 몸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가 콜라잔을 흔들자, 얼음이 마치 카우 벨(암소 목에 다는 방울)같은 소리를 냈다. "졸리면 자도 괜찮아요. 고양이가 나타나면 깨워 드릴 테니까요." 하고 그녀 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끄덕였다. 잠시 동안 주위에는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되었다. 비둘기도 태엽 감 는 새도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바람도 없고 차의 배기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동안 나는 줄곧 전화 속의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 여자를 알고 있을까? 그런데 나는 그 여자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마치 키리코의 그림 속 정경같 이 여자으ㅢ 그림자만이 길 위를 가로질러 길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실체 는 내 의식의 영역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의 귓전에서는 언 제까지나 벨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저어, 자요?"하고 여자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를 시험하는 듯한 목소리로 내 게 물었다. "안 자."하고 나는 대답했다. "조금 가까이로 다가가도 괜찮아요? 작은 소리로 얘기하는 편이 좋아서 그래 요." "상관 없어."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소녀는 자신의 덱 체어를 옆으로 밀어서 내가 앉은 덱 체어에 꼭 붙이는 모양 이었다. 나무 테두리들이 서로 부딪히는 덜그덕 하는 건조한 소리가 났다. 이상하다, 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뜨고 듣고 있을 때의 그녀의 목소리와 눈 을 감고 있을 때의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좀 얘기해도 괜찮아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주 작은 소리로 얘기하겠어 요. 대답은 없어도 좋고, 도중에 그대로 잠들어 버려도 괜찮아요." "좋아."하고 나는 말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근사해요."하고 그녀는 말해싸. "어째서지?"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마치 입을 봉하듯이 나의 입술 위에 손가락 하나를 갖다댔다. "질문은 하지 마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지금은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눈도 뜨지 말구요. 알았죠?" 나는 그녀의 목소리처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의 입술에서 손가락을 떼고, 그 손가락을 이번엔 나의 손목 위에 놓 았다. "그런 것을 메스로 잘라서 열어 보고 싶은 기분이 들어요. 사체가 아니구요. 그 죽음의 덩어리 같은 것을 말예요. 그런 게 어딘가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소프트볼같이 둔하고, 부드럽고, 신경이 마비되어 있는 것. 그것을 죽은 사람 속에서 꺼내 잘라서 열어 보고 싶어요. 언제나 그렇게 생각 해요. 속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마치 치약의 튜브 속에서 굳어진 것처럼, 안에서 뭔가가 굳어진 모양으로 되어 있진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아니, 괜찮아요, 대답하지 않아도요. 둘레가 탄력이 없어져가고, 그것이 내부로 향하는 동안 점점 딱딱해져 가는 거죠. 따라서 나는 우선 외피를 잘라서 열고 그 안의 흐늘흐늘한 것을 꺼내, 메스와 주걱 같은 것을 사용해서 그걸 가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에서 점점 그 흐늘흐늘한 것이 굳어져가고 작은 심(芯) 처럼 되는 거예요. 볼 베어링의 볼처럼 작고 굉장히 딱딱해지게 되는 거죠. 그 렇게 생각되지 않나요?" 그녀는 두세 번 작은 기침을 했다. "최근 들어 언제나 그걸 생각해요. 아마도 매일 한가한 탓일 거예요. 정말로 그럴 거예요. 한가하니까, 생각이 점점 점점 멀리까지 뻗어가 버려요. 생각이 너무 멀리까지 가게 되니까, 제대로 그 뒤를 더듬을 수 없게 되고 말아요." 그리고 그녀는 내 손목에 놓았던 손가락을 떼고, 글라스를 집어들어 남은 콜 라를 마셨다. 얼음 소리로 글라스가 비게 된 걸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빈틈없이 고양이는 지키고 있으니까요. 염려 마세요. 와타나베 노 보루의 모습이 보이면 그 즉시 가르쳐 드릴게요. 그러니 그대로 지그시 눈을 감고 계세요. 와타나베 노보루는 지금쯤 반드시 이 근처를 걷고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고양이란 모두 똑같은 곳을 걸어다니거든요. 반드시 나타나요. 상상 하면서 기다리세요. 와타나베 노보루는 지금 이리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이에요. 잡초 사이를 통해서 울타리 밑을 빠져나와 어딘가에 멈춰서서 꽃 냄 새를 맡기도 하면서, 그는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떠올리세요." 나는 들은 대로 고양이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려고 했지만, 실제로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역광을 받은 사진처럼 굉장히 막연한 고양이의 상에 지 나지 않았다. 강한 햇살이 눈꺼풀을 빠져나가 나의 어둠을 불안정하게 확산시 키고 있었고, 게다가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고양이의 모습을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와타나베 노보루의 모습은 마치 실패한 초상화처럼, 어디랄 것도 없이, 비뚤어지고 부자연스러웠다. 특징만은 닮아 있 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쏙 빠져 있었다. 그가 어떤 방식의 걸음걸이를 취 했던가조차, 나는 이미 떠오릴 수 없었다. 그녀는 나의 손목에 다시 한번 손가락을 놓더니, 이번에는 그 위에 모양 같은 것을 그렸다.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은 기묘한 도형이었다. 그녀가 나의 손목 에 그 도형을 그리자, 마치 거기에 호응이나 하듯이 이제까지 있었던 것과는 다 른 종류의 어둠이 나의 의식 속에 잠입하려 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나 는 잠이 들려고 하는걸 거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잠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미 무엇으로도 그것을 억누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난 알았다. 원만한 커브 를 그리는 캔버스천의 덱 체어 위에서 나의 몸은 기묘할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 다. 그런 어둠 속에서 나는 와타나베 노보루의 네 개의 다리만을 떠올렸다. 발바 닥에 고무 같은 부드러운 부풀림이 있는 그런 발이 소리도 없이 어딘가의 지면 (地面)을 내딛고 있었다. 어디의 지면? 하지만 그것을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당신의 머릿속 어딘가에 치명적인 사각(死角)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나요?하고 여자는 조용히 말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였다. 옆에 바싹 들이댄 덱 체어 위에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타월과 담배와 잡지는 그대로였지만 콜라잔과 라디오 겸용 카세트는 없어졌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소나무 기지의 그림자가 복사뼈 근처까지 나의 몸을 푹 싸안고 있었다. 시계 바늘은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빈 깡통을 흔 드는 것 같은 느낌으로 몇 번인가 머리를 흔들고, 의자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 보았다. 주위의 풍경은 처음에 봤을 때와 아주 똑같았다. 넓은 잔디밭, 바싹 마른 연못, 울타리, 석상의 새, TV안테나. 고양이의 모습은 없다. 그리고 소녀 의 모습도. 나는 잔디밭의 응달진 부분에 앉아 손바닥으로 녹색의 잔디를 어루만지면서, 고양이의 통로에 시선을 주고서, 소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십 분이 지나도록, 고양이도 소녀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변에는 움직이는 것조차 없었 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는 잘 판단할 수가 없었다. 자고 있는 사이 에 뭔가 엄청난 세월을 보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일어서서 안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의 기 척은 없었다. 밖으로 내밀어진 창의 유리가 서쪽에서 뻗치는 햇살을 받고서 눈 부시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잔디밭을 가로질러서 골목으로 나와, 집으로 되돌아갔다. 결국 고양이는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는 할 만큼은 한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마른 세탁물을 걷고 간단한 식사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나서 거실의 마루에 앉아 벽에 기댄 채, 석간을 읽었다. 5시 반에 전화벨이 12 회 울렸지만, 나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벨이 멈춘 후에도 그 여음은 방 안의 엷은 어스름 속에서 먼지처럼 떠돌고 있었다. 탁상시계가 그 딱딱한 손톱 끝으 로 공간에 떠 있는 투명한 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기계장치의 세계인 것 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루에 한 번 태엽 감는 새가 날아와서 세상의 태엽 을 감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서 그런 세상에서 나이를 먹고 하얀 소프 트볼 같은 죽음을 부풀려가는 것이다. 토성과 천왕성 사이에서 내가 푹 자고 있는 동안에도 태엽 감는 새들은 어김 없이 그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태엽 감는 새에 관해서 시를 써 보면 어떨까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 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첫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우선 여고생들이 태엽 감는 새에 관한 시를 읽고 즐거워해 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 은 아직 태엽 감는 새 그 자체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내가 돌아온 것은 7시 반이었다. "미안해요. 잔업이 있어서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무리 찾아도 학생 한 명 의 수업료 납입 서류가 발견되지 않아서요. 아르바이트 여자애가 제멋대로였던 탓이지만 어쨌든 내 담당이었으니까요." "괜찮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부엌에 서서 생선 버터구이와 샐러드와 된장국을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부엌의 테이블에서 석간을 읽고 있었 다. "저어, 5시 반쯤 당신 집에 없었어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조금 늦는다고 말하려고 집에 전화를 했었는데." "버터가 떨어져서 사러 나갔었어."하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은행엔 갔다 왔어요?" "물론."하고 나는 대답했다. "고양이는요?" "못 찾았어." "그렇군요."하고 아내는 말했다. 식사 후에 목욕탕에서 나오니, 아내는 전등을 끈 거실의 어둠 속에 혼자서 오 도카니 앉아 있었다. 회색의 셔츠를 입고 어둠 속에 꼼짝 않고 웅크리고 있는, 그녀는 마치 방치된 무슨 짐짝 같아 보였다. 나는 그녀가 몹시도 안쓰럽게 여 겨졌다. 그녀는 잘못된 장소에 내버려진 것이다. 좀 더 다른 장소에 있었으면, 어쩌면 더욱 행복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바스 타월로 머리를 닦고 그녀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왜 그러지?"하고 나는 물었다. "아마 고양이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하고 아내는 말했다. "설마."하고 나는 말했다. "어딘가에서 놀고 있겠지.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돌아올 거야. 전에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잖아. 코우엔지(高圓寺)에 살았을 쯤에도 역시-" "이번에는 달라요. 나는 알 수 있어요. 고양이는 죽어 버렸고, 어딘가의 풀숲 에서 썩고 있을 거예요. 빈 집 정원의 풀숲을 좀 찾아봐 주겠어요?" "이봐, 그만둬. 아무리 빈 집이라도 남의 집이야. 그렇게 맘대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 "당신이 죽인 거예요."하고 아내는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한번 바스 타월로 머리를 닦았다. "당신이 고양이를 죽게 내버려 둔 거예요."하고 어둠 속에서 그녀는 반복해서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하고 나는 말했다. "고양이는 스스로 없어진 거야. 내 탓이 아니야. 그 정도는 당신도 알 수 있잖아?" "당신, 고양이 따윈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그건 그러지도 모르지."하고 나는 시인했다. "적어도 당신만큼은 그 고양이 를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나는 그 고양이를 구박한 적도 없고, 매일 정확히 밥을 줘 왔어. 내가 밥을 줘 왔다구. 특별히 좋아한 게 아니라고 해서, 내가 고양이를 죽였다는 건 말도 안돼.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면 세상 사 람 대부분을 내가 죽인 게 된다구."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하고 아내는 말했따. "언제나 늘 그래요. 스스로는 손을 대지 않고 여러 가지 것들을 죽여가는 거죠." 나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두었다. 그리고 목욕탕의 세탁 바구니에 바스 타월을 던져 넣고,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어처구니 없는 하루였다. 어처구니 없는 하루였다. 와타나베 노보루, 너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나는 생각했다. 태엽 감는 새는 너의 태엽을 감지 않았던가? 마치 싯구절이다. 와타나베 노보루 너는 어디에 있는가? 태엽 감는 새는 너의 태엽을 감지 않았던가? 맥주를 반쯤 마셨을 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받아 봐."하고 나는 거실의 어둠을 향해 고함쳤다. "싫어요, 당신이 받아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 "받고 싶지 않아."하고 나는 말했다. 반응되지 않은 채로 전화벨은 계속 울어댔다. 벨은 어둠 속에 떠다니는 먼지 를 둔하게 휘젓고 있었다. 나도 아내도, 그러는 동안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 다. 나는 맥주를 마셨고, 아내는 소리르 죽이고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나는 20회까지 벨소리를 헤아렸지만, 그런 뒤에는 단념하고 그냥 울리도록 내 버려 두었다. 언제까지나 그런 것을 계속해서 헤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 해설 / 무라카미 하루키, 脫일본적 일본어의 기수 박해현 (문학평론가) 왜 무라카미 하루키인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90년대 들어 한국의 젊은 작가와 독자들 사이에 그 특유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 란 쿤데라, <장미의 이름>의 움베르토 에코 등과 함게 하루키는 가장 인기 있 는 외국 작가로 손꼽힌다. 서구 소설가들이 한국에서 고정 독자를 확보하는 일은 그렇게 낯설지 않지만, 일본의 현역 작가로서 하루키처럼 주목받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패션에서부 터 언론과 출판에 이르기까지 일본이란 존재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다. 공식적으로 일본 가요와 영화 등 대중문화의 유포는 금지되어 있지만, 우리의 대중문화에서 애색은 지울 수 없는 기본 색조로 자리잡고 있다. 신문.잡지.방송 등 언론의 외형적 틀 또한 일본 것들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거나, 모방 단 ㄱ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독자들은 묘하게도, <대망> 등 대중적 역사소설들은 즉기지만, 동시대 일본의 일급 작가들은 드러내 놓고 환영하지 않았다. 가와바타 야스나 리,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등등 일본의 기라성 같은 현대 작가들이 국내 에 활발하게 소개됐지만, 그 수요는 제한되어 있었고, 그들의 작품은 부분적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한국의 현대 문학이 일본 독자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듯이 일본의 현대 문학은 서구에서와는 달리 한국에 들어와 맥을 못췄다. 그래도 70년대초까지만 해도 아쿠다가오마상 수상작은 노벨문학상이나 콩쿠르 문학상 수상작처럼 발표와 거의 동시에 한글로 번역되었다. 그 같은 관심은 외 국의 유명 문학상에 대한 호기심에 불과한 것이지, 일본 문학을 정당하게 외국 문학의 하나로 대접하는 자세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일본 문학은 영미 문학이나 프랑스 문학처럼 거리낌없이 짝사랑을 던질 대상은 못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한일간의 역사적 감정의 골이 깊은 탓이다. 또한 일 본인들의 병적인 백인 지향성처럼, 해방 이후 미국 문화의 세례 속에 자란 한국 인들도 일본이라는 황색인종에 대해서 멸시감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하루키의 경우는 색다르다. 그의 한국 상륙은 [하루키 현상]이랄 수 있는 행적을 남기고 있다.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 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뒤 지난 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던 최신작 <국 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이르기까지 주요 장편소설과 단편들이 속속 번역되 었다. 일본의 동시대 작가로서, 노벨문학상 수상의 후광을 등에 업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후, 이처럼 빠른 속도로 거의 전작품이 한글로 번역된 선례는 찾기 힘들다. 이 같은 하루키 현상은 그의 작품이 단순히 인기 상품이 됐다는 것만 을 의미하지 않는다. 90년대 들어 신세대 작가로 불리는 국내의 젊은 작가들이 하루키 소설을 모방 했거나, 분위기의 유사성을 지적받았을 뿐만 아니라 표절시비까지 거쳐야 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그 파장은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시인 유하의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나는 하루 키의 소설이 좋다'면서 캔맥주를 처넣는 오렌지족의 모습은 [하루키]가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자유분방한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기호]로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 을 보여 준다. 젊은 작가의 작품에서 [하루키적 요소]가 보인다는 지적이 우후 죽순 격으로 제기된 것은 하루키의 소설을 탐독하는 독자층이 광범위하게 형성 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하루키의 소설이 줄기차게 번역되면서 그의 문학적 특성에 대한 일본 문학 전 공자들의 설명도 있었고, 시인 김정란, 장정일 등의 하루키론 등 일본 문학 비전 공자들의 날카로운 분석도 눈길을 끌었다. 그들의 지적을 종합해 보면, 하루키 의 소설은 고도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내면에 각인된 영상시대 와 정보화사회의 특성을 추출하면서, 그 외형적 물질의 풍요 속에 더욱 심화되 어 가는 개인의 상실감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감각적 이미지로 충만된 간 결체의 문체들은 버드와이저와 나이키라는 기호들의 그물망에 걸려 있는 젊은 세대의 소비 풍속도(그들에게는 섹스도 삶을 소비하는 행위에 포함된다)를 거침 없이 스쳐가는가 하면, 소비사회의 기호들로 포장된 체제를 벗어나 개인의 자기 확인을 향한 치열한 열정을 포착하고 있다. 하루키의 국내 수용은 밝음과 어둠을 나눠 갖고 있다. 그의 소설을 옹호하는 입장은, 사물화된 도시적 풍경의 내부에 들어 있는 인간의 삶을 시적 환상의 영 역으로 끌어올리면서 상상력의 새로운 모험을 펼친다고 보지만, 그의 소설을 혐 오하는 입장은, 감각적이고 물질화된 도시적 삶의 퇴폐적 분위기를 교묘하게 미 화함으로써 현실 도피의 유희에 탐닉해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도 하루키는 일본 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종전 후 미국 문화의 세례를 받아 [미국화된 일본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불리는데, 정작 미국에서는 하루키를 가리켜서 [무국적 작가]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서로 상반된 주장의 승부를 가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몫이다. 이 글 은 일단 하루키가 자신의 문학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보여 주고자 한다. 하루키는 그의 대표작 <세계의 종말과 하드 보일드 원더랜드>가 영역된 뒤 미 국의 언론으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뉴욕 타임즈 북리뷰> 92년 9월 27일자는 하루키와 미국의 젊은 소설가 제이 매키너니의 문학 대담을 실음으로써, 경제 대국 일본의 최고 인기 작가 하루키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매키너니는 국내 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지만, 일본을 무대로 한 소설을 발표하는 등 일본 문화에 조예가 깊은 미국의 30대 작가이다. 프린스턴 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으로 미국에 체류중인 하루키는 이 대담을 통해 자신의 개인사와 문 학 세계를 소상하게 밝혔다. 그 대담을 축약해서 소개한다. 매키너니 : 내 생각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회의주의적 리얼리스트]의 감수성 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의 소설의 화자는 예외 없이 현대 도쿄 시민의 전형에 속하는 [남자]이자, 광고회사 등의 하위직에 근무하는 30대 화이트 칼라로, 인생 으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수동적 성격의 소유자이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은 [큰 판은 피한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중간지대 의 존재로 여긴다. 그러나 이처럼 반영웅주의적인 하루키의 주인공들에게 범상 치 않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여자 친구는 자살을 하고, 남자 친구는 양의 몸 속 으로 들어가며, 가장 아끼는 코끼리는 과감하게 덤벼들어 [큰 일]을 해낼 엄두 를 내지 못한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하루키는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들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사회적 성공의 욕구도 없고, 대부분의 일본인들과는 달리 가정이나 회사, 공동체 등에 얽매어 있지 않다. 아 마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하루키의 소설이 일본인들에게 인기를 끌지 않나 생각한 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모든 구성원들의 일치단결된 동참을 강요하는 사회로 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과격파 학생들처럼 사회제도의 파괴 나 전복을 원하지 않으며, 사회의 주변부에서 단지 표류하고자 할 뿐이다. 집단 에 대한 거부는 현대의 일본인들에게 커다란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은 그의 선배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니자키 준이치로, 미시마 유키오 들과 단절되어 있다. 하루키 당신은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부터 의도적으 로 앞시대의 작가들에게 반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하루키 : 일본 문학에서 내 앞의 3대 작가로는 미시마 유키오, 아베고보, 오오 에 겐사부로를 꼽을 수 있다. 그들 중 나는 아베 고보를 제일 좋아하고, 미시마 유키오는 맨 꼴찌다. 나는 미시마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았고,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가와바타, 다니자키 등 앞세대 작가들을 향해 반란을 일으켜야겠다고 의 식한 적은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의식을 가졌더라도, 내가 그 동안 해온 작업은 그 작가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나는 작 가로 데뷔한 29살이 될 때까지 일본 소설을 주의 깊게 읽은 적이 없다. 지난 60년대 고베에서 보낸 10대 시절에 나는 일본 소설에 매력을 느끼지 못 했고, 그것들을 읽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의 부모님이 모두 일본 문학을 가르 치는 교사였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나는 일본 문학에 반기를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미국 문화는 일본에서 큰 반향을 얻고 있었으므로, 나 역시 미국의 음악, 텔레비전 쇼, 자동차, 옷, 그 밖의 모든 것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 말은 일본 인들이 미국을 숭배했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 문화를 단지 사랑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너무나 빛나고 밝아서 때때로 환상의 세계처럼 보였다. 일본인 들은 그 환상의 세계를 사랑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만이 그런 환상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13살에서 14살의 어린이였다. 내 방에서 혼자 재즈 와 로큰롤을 듣거나, 미국의 텔레비전 쇼를 보고, 미국 소설을 읽었다. 고베는 큰 항구도시였고, 헌 책방들이 많았다. 나는 싼 값에 미국 소설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마치 보석 상자를 여는 기분이었다. 나는 웬만한 하드 보일드의 탐정소설과 과학소설을 읽었다. 레이몬드 카버 혹은 에드 맥베인, 미 키.스필레인 등이 내가 탐독하던 작가들이었다. 나중에 나는 피츠제럴드와 투루 만 카로트를 만났다. 그들은 모두 일본 작가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환상 세계 의 낯선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창을 내 방에 달아 주었다. 나는 아르 헨티나의 작가 마누엘 후이크와 유사한 체험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사 춘기 시절 헐리우드 영화에 흠뻑 빠져 있었고, 그로 인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체험의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키너니 : 내가 보기에 당신은 앞세대의 일본 작가들과 달리 서양의 문화에 대해서는 그것이 고급문화거나 대중문화이든 간에 자의식을 갖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면 다니자키의 소설에서 누군가 서양옷을 입을 때마다 배경음악처럼 큰 북소리가 나는 대목을 읽을 수 있다. 다니자키의 소설은 문화적 오염과 다른 종 족간의 혼합에 대한 불길한 암시를 짙게 풍긴다. 그러나 당신과 당신 세대의 일본 작가들, 예를 들면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류 등의 소설에서 로시니와 비틀즈는 자연스럽게 배경 속에 자리잡는다. 당신들 세대의 작가들은 유럽의 고급문화와 지구촌의 팝문화를 혼성하는 다종족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가는 것 같다. 아마도 당신들은 미국의 작가들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할 것이다. 내가 볼 때 미국의 작가들은 스스로를 고급문화의 수호자로 여기고 있으며, 영 화.텔레비전.로큰롤 등 문화 전체를 장악하고 있지만, 여전히 경계해야 할 대중 문화의 영향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가라는 문제를 놓고 고뇌하고 있다. 나 는 서구 문화에 대한 언급이 산재되어 있는 일본 젊은 세대의 소설에서 이 같은 자의식을 ㅊ아볼 수 없다. 이 같은 현상이 부분적으로는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고립과 차별의 섬나라 의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면 <노르웨이의 숲>에서-그 제목도 물론 비틀즈의 노래에서 따왔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 샐린저, 챈들러 그리고 6명의 다른 서구 작가들이 언급 된다. 그러나 책 전체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언급은 다자이 오사무에 관한 것 이 유일하고, 그나마 그도 일본 문화에서 어느 정도 이단자이기 때문에 거론된 다. 단편소설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에서 당신의 주인공은 아침식 사용으로 스파게티를 만들고, 점심에는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는다. 그는 잠이 깨면 로시니의 음악을 듣고 조금 있다가는 로버트 플랜트의 음악을 듣고, 렌 데 이튼을 읽는다. 등장인물의 일본인 이름을 바꾸면 그 소설은 뉴욕이나 샌프란 시스코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 하루키 : 당신 말이 맞다. 그런 의미에서 내 소설은 아마도 무국적성을 지니 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국적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랬 다면 나는 아마 내 소설의 무대를 미국으로 삼았을 것이다. 뉴욕이나 샌프란시 스코를 무대로 삼는 것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처음으로 노린 것은,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속에 서 일본 사회를 그려보겠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일본적인 것들을 하나씩 버 리고 난 뒤에야 살아남은 일본의 특성. 이것이 바로 내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 이다. 그래서 나는 미시마 유키오와는 다른 의미에서 일본적인 그 무엇을 찾으 려고 한다. 왜 그러느냐고? 결국 나는 일본어로 글을 쓰는 일본 작가이기 때 문이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 나는 종종 일본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쓸것인지 자 문해 왔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당분간 미국에 머물겠지만, 그 동안 나는 밖에서 본 일본사회를 다룬 소설을 쓰고 싶다. 그 작업을 통해 나는 끊임없이 작가로서 나의 아이덴태티를 확인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에는 아이덴티티라 는 영어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그래서 일본인들은 아이덴티티를 이야기할 때 항상 영어를 써야 한다. 10대 시절 나는 영어로 소설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격이었다. 일본어로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내 감정을 똑바로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 나 소설을 쓸 만큼 영어를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능력의 한계 때문에 그 꿈은 무산됐다. 일본어로 어느 정도 소설을 쓰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9살 이 되어서야 소설가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내 소설을 위해 새로운 일본 어를 창조해야 했으므로, 기존의 일본어에 신세를 질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의미 에서 나는 나 자신을 독창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레이몬드 챈들러는 60년대 내 우상이었다. 나는 <오랜 이별>을 12번 읽었다. 나는 그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꾸려가는 방식에 크게 감 명받았다. 그들은 고독하지만, 근사한 삶을 찾고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일본은 집단의식의 사회이므로, 독립적 삶이란 매우 힘들다. 예를 들면 도쿄에서 아파트를 구할 때 부동산업자들은 내가 어느 회사에도 소속 되지 않은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 은 보다 독립적이고 자족적이길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렵고, 실제로 행 동에 옮긴다면 그들은 고립감에 시달려야 한다. 아마 젊은 독자들이 내 소설에 호응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나 한다. 매키너니 : 일본인들의 대다수는 일본적 특성이란 것이 외국어로 번역될 수 없다고 여기는데, 이 같은 현상은 일본이 특별하고 타민족에 비해 우월하다는 문화적 제국주의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당신의 소설은 이 같은 일본관을 거부 하고 있다. 하루키 : 많은 일본인들이 일본어란 매우 특이해서 외국인들이 그 본질과 아 름다움, 숭고함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외국인이 그렇지 않다고 외치더라도 일본인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 이유 중의 하 나를 꼽는다면, 일본은 동족성이 매우 강한 국가이고, 제 2차세계대전 직후의 짧 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외국에 점령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 문화는 타문화 에 의해 위협당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일본어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왔다. 아 마 약 2천년 정도 그랬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일본인은 일본 문화의 독창성과 본질, 구조, 기능 등을 확신하고 있다. 일본의 젊은 작가들은 그런 확신을 깨부수고 뒤집어 엎으려고 한다. 나는 2,3 년 동안 그리스의 섬에서 산 적이 있다. 그 섬은 매우 작은 낙도 였지만, 그 섬 의 사람들은 누구나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닛산 자동차를 갖고 있다. 그 차는 아주 좋다.' 일 주일이 지나자 나는 그런 말들에 질려 버렸다. 내가 그 곳에서 들을 수 있는 일본어란 닛산.카시오.세이코.혼다.소니 등에 불과했다. 그 섬의 주민들은 일본의 문화와 문학.음악 등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때부터 일본의 오랜 고립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본의 젊은 작가들은 일본어를 재구축하려고 한다. 우리는 미시마의 언어가 지닌 미학과 우아함에 감탄한다. 그러나 그런 일본어의 시대는 지났다. 우리는 뭔가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 이 시대의 작가로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고립 의 울타리를 헐어 버리고, 우리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향해 말을 던지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물질적 성공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 본 문화를 타민족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 일본인들이 오늘날 그들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지 못하는 현상은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다. 어딘가 잘못이 있었다 고 느끼고는 있다. 이제 일본인들은 그들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여러 민간 단체들은 가부키와 노를 외국에 소개하는 등의 적극적 인 문화교류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가부키와 노는 뛰어난 전통예술이 지만, 과거의 산물이고, 현대의 일본인들에게도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 자신도 가부키와 노에 대해서는 가끔 지루함을 느끼는데, 일본의 보통 사람들은 무척이나 지루해한다. 서구인이 지루함을 느껴도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매키너니 : 일본 문단에서는 당신의 대중적 인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 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의 윗세대이자 전통지향적인 비평가들은 당신의 작 품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루키 :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나를 싫어한다. 일본 문학에서는 일종의 세 대론적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늙은 문지기들이 있다. 그들은 동구 공산 당의 지도부와 같다. 일본 문단은 위계질서가 매우 강하고, 젊은 작가는 맨 밑 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일단 원로가 되면, 다른 모든 작가들 의 심판관이 된다. 원로들은 서로의 작품을 읽고, 돌아가면서 상을 준다. 그러 나 원로들은 젊고 떠오르는 세대의 작가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 는다. 내가 등단했을 때 그들은 이제 일본 문학은 몰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러나 일본 문학은 몰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변화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 다. 그 변화를 바라지 않는 원로 작가들은 밀폐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들은 진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있다. 이 대담에서 잘 드러난 대로 하루키는 일본의 현대문학에서 개혁의 기수를 자 처하고 있다. 일본 고유의 미학을 인정하면서도, 그 자신의 문학은 일본적 전통 에서 분리시키려고 한다. 경제 대국 일본의 국제화 시대에 맞게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 그의 소설은 일본 사회의 조직, 의식의 풍속, 세계관 등에서 기성 품을 몰아내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적이면서도 덜 일본적인 하루키 소설의 분위기가 국내의 젊은 독자들에게 식민지 압제자로서의 일본 문화와는 다른, 색다른 이국적 문화의 형 태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버드와이저만 찾으면서 카페에 앉아 가족 과 사회라는 제도적 조직으로부터 일탈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려는 하루키의 인물들이 한국의 도시적 삶에도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일까. 80년대 한국 소설을 주도했던 리얼리즘 미학의 무거움에 식상한 독자들이 개인의 미세 한 일상 묘사에 탐닉하는 하루키의 가벼움 뒤에 깔려 있는 상실감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