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의 여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 동쪽나라 하이네캔 맥주의 빈 깡통을 밟는 코끼리에 대한 단문 동물원이 폐쇄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돈을 내 코끼리를 손에 넣었다. 동물원은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너절한 동물원이었고, 코끼리는 늙고 진이 빠져 있었다. 너무나 도 늙고 진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동물원에서도 그 코끼리를 인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코끼리는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선택될 것 같지는 않아 보였고, 그런 관에 한쪽 다리를 처넣은 것 같은 코끼리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인수하려고 할 만큼 유별난 것을 좋아하는 동물원도 없다. 동물 거래업자도 그 코끼리를 처치 곤란해하며 거저라도 좋으니깐 코끼리를 인수해 주지 않겠 느냐고 마을에 말을 꺼냈다. "나이를 먹어서 먹이도 그렇게 많이 먹지 않습니다. 난폭하게 굴 지도 않습니다. 큰소리로 울어 주변에 폐를 끼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장소만 있으면 됩 니다. 싸게 잘 사시는 겁니다. 여하튼 거저라니까요"라고 업자는 말했다. 마을 회의에서 한 달 정도 옥신각신한 끝에 마을은 결국 코끼리를 맡게 되었다. 온 세계를 둘 러보아도, 코끼리를 갖고 있는 마을 따위는 좀처럼 없을 것이다. 물론 인도나 아프리카에는 그 런 마을도 몇 개인가 있겠지만, 적어도 북반구에는 그다지 있을 리가 없다. 산림을 소유하고 있는 농가가 코끼리가 살 곳을 제공하고, 노화되어 부수기 직전의 국민학교 체육관이 코끼리 오두막으로 이축되었다. 사료는 학교 급식의 찌꺼기로 충분했다. 퇴직한 마을 사무소의 직원이 코끼리 사육사로서 코끼리를 보살펴 주었다. 마을의 재정은 꽤 넉넉했기 때문 에 그 정도의 예산이라면 쉽게 짤 수가 있었다. 게다가 코끼리라고 해도 전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건 아니다. 마을이 코끼리에게 준 일은 빈 깡통 밟기였다. 우선 코끼리의 발 모양에 맞춰 콘크리트 파이 프가 만들어지고, 피리 소리가 나면 코끼리가 발을 그곳에 처박도록 훈련을 시켰다. 매주 금요 일에 마을의 빈 깡통이 수거되어 트럭으로 코끼리 오두막으로 운반되었다. 맥주 깡통과 수프 깡 통과 김 깡통, 그런 모든 깡통이 코끼리의 오두막 앞에 쌓여갔다. 코끼리 사육사는 콘크리트 파 이프 안에 세 양동이씩 빈깡통을 던져 놓고 피리를 분다. 피리 소리가 나며 코끼리는 그것에 한 발을 처박고 빈 깡통을 와지끈 밟아 부수어, 한 장의 평평한 금속 조각으로 변하게 했다. 마을이 왜 그런 귀찮은 빈 깡통 처리 방법을 생각해낸 것인지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컴 프레스(압축기)로 해치워 버리면, 그런 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 버린다. 굳이 코끼리를 쓸 정 도의 일도 아니다. 결국, 마을은 어떤 형태로든 코끼리의 존재 가치를 확립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 게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은 일부러 코끼리를 위해서 그런, 그다지 효과 가 있다고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깡통을 밟고 있을 때의 코끼리와 사육사는 굉장히 행복한 듯이 보였다. 코끼리 사육사 가 피리를 불면 코끼리는 즉각 파이프 안에 발을 처넣고 깡통을 납작하게 했다. 나는 종일 금요일에 빈 깡통을 잊고 버리지 않은 적이 있었고, 그런 때는 늘 스스로 빈 깡통을 코끼리의 오두막까지 가지고 갔다. 월요일이나 화요일은 코끼리도 코끼리 사육사도 한가했기 때 문에, 그들은 나 한사람의 빈 깡통 때문에라도 특별히 깡통 밟기를 해 주었다. 나는 한 번 하이 네캔 맥주의 빈 깡통을 한 다스 모아서 코끼리에게 밟게 했던 적이 있었다. 코끼리 사육사의 피 리 소리와 함께 12개의 하이네캔 깡통은 멋진 한 장의 초록빛 판이 되었다. 그 초록빛 판은 5월 의 태양 아래 하늘에서 본 아프리카 평원같이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헛간을 태우다 그녀와는 친지의 결혼식에서 만나 친해졌다. 나와 그녀는 열 살도 넘게 나이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20세, 나는 31세였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무력의 내게는 다른 고민거리가 꽤나 많았고, 솔직히 나이 따위를 일일이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애초부터 나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결혼한 상태였으나 그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연령이나 가정, 수입 따위는 발 사이즈나 목소리의 고저, 손톱의 모양처럼 순수하게 선천적인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고민해 봐야 어떻게 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 렇게 생각하고 보면 그건 그렇다. 그녀는 아무개라고 하는 유명한 선생 밑에서 팬터마임을 배우며 생활을 위해 광고모델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게을러서 매니저를 통해 들어오는 일을 자주 거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수입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수입에서 모자라는 부분은 그녀의 몇 명인가의 보이 프 랜드들의 호의에 의해 충당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녀가 은연중 에 내뱉은 말에서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돈을 위해 남자와 잔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와 비 슷한 일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본질은 아마도 훨씬 순수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개방적이고 이론적이지 않은 단순함 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그 단순함을 마주하면 자신들이 안고 있는 복잡한 감정을 문득 거기에 끼워넣고 싶어지는 것이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하자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말하자면 그런 단순함에 지탱되어 살고 있었다. 물론 그런 작용이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우주의 조 직 자체가 뒤집혀지고 만다. 그런 것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 어떤 특정한 시 기뿐이다. 그것은 <귤 껍질 벗기기>와 같은 것이다. <귤 껍질 벗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팬터마임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헤에, 하고 나는 말했다.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최근의 젊은 여자들은 다들 뭔가를 하고 있 다. 그러나 그녀가 뭔가에 진지하게 빠져들어 재능을 닦아가는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귤 껍질 벗기기>를 했다. <귤 껍질 벗기기>란 말 그대로 귤의 껍질을 벗기 는 것이다. 그녀의 왼쪽에는 귤이 가득 들어 있는 유리그릇이 있고, 오른쪽에는 껍질을 넣는 그릇 이 있다-고 하는 설정이다-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그 상상 속의 귤을 하나씩 먹고는 그 찌꺼기를 모아 껍질로 뭉쳐서 오른쪽에 있는 그릇에 넣었다. 그 동작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 이다. 말로 설명하면 이것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눈 앞에서 10분이고 20 분이고 바라보고 있으면-나와 그녀는 바의 카운터에서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있고, 그녀는 이야기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 <귤 껍질 벗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점점 내 주위에서 현실감이 흡수 되 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기분이다. 옛날 아이히만이 이 스라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밀실에 넣고 조금씩 공기를 빼는 형이 적합하다는 판결을 받 은 적이 있다. 어떤 죽음의 방식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떠올랐다. "당신에겐 아무래도 재능이 있는 것 같군." 하고 내가 말했다. "어머, 이런 것쯤 간단해요. 재능도 뭐도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귤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 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귤이 없다는 걸 잊으면 되는 거예요. 그뿐이라구요." "마치 선(禪) 같군." 나는 그래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나와 그녀는 그리 자주 만났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한 달에 한 번이나, 많아 봐야 두 번이었 다. 주로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디 놀러가지 않겠느냐고 불러냈다. 우리는 식사를 하 거나 바에 가서 술을 마시곤 했다. 그리고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된 화제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그것 은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는 말하자면, 친구 같은 사이였다. 물론 술값은 내가 다 지불했다. 그녀 쪽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대체로 돈이 없어서 배가 고풀 때였 다. 그럴 때 그녀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먹었다. 나는 그녀와 둘이 있으면 느긋하게 쉴 수가 있었다. 하기도 싫은 일이나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품는 이해할 수 없는 사상 따위는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뭔가 그러한 능력이 있었다. 그녀의 말에는 특별히 의미다운 의미는 없었다.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 그 내용을 거의 듣고 있 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멀리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 보고 있을 때처럼 몽롱하고 기분이 좋았다. 나도 그녀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개인적인 일부터 일반론까지 매우 정직하게 이야기 했다. 그녀도 어쩌면 나처럼 흘려들으며 맞장구를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 고 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원하고 있던 것은 어떤 종류의 마음가짐이었다. 적어 도 이해나 동정이 아니었다. 2년 전 봄에 그녀의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죽고 약간의 목돈이 그녀에게 생겼다. 적어도 그녀 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 그녀는 그 돈으로 한동안 북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어째서 북아프리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침 나는 도쿄의 알제리 대사관에 근무하는 여자를 알고 있 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소개했다. 그래서 그녀는 알제리에 갔다. 그 당시의 상황상 나는 공항에 배웅을 나갔다. 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넣은 보잘것 없는 보스턴백을 하나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겉보기에 북아프리카에 놀러간다기보다는 북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것처럼 소지품 체크를 받고 있었다. "일본에 꼭 다시 돌아올 거지?" 하고 나는 농담삼아 그렇게 물어 보았다. "물론 돌아올 거예요." 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3개월 후에 그녀는 일본에 돌아왔다. 출국할 때보다 3킬로그램 마르고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애인을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은 알제(알제리의 수도)의 레스토랑에서 만났다고 했다. 알제리에 있는 일본인은 숫자가 적어서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고 애인이 되었다. 내가 아는 한 그녀에게는 그 남자가 최초의 제대로 형식을 갖춘 애인이었다. 그는 20대 후반이고 키가 컸으며 탄탄한 몸집에 정중한 말씨를 썼다. 표정은 다소 풍부하지 못했지만 핸섬한 축에 속했고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손은 크고 손가락은 길었다. 어째서 그 남자를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느냐 하면 내가 공항까지 두 사람을 마중나갔기 때문 이다. 갑자기 베이루트(레바논의 수도)에서 전보가 왔는데, 거기에는 날짜와 플라이트 넘버만이 적혀 있었다. 공항에 나와 주기 바란다는 것 같았다. 비행기가 도착하자-비행기는 날씨가 나쁜 관계로 4시간이나 늦어져 그 사이 나는 커피숍에서 주간지를 3권이나 읽었다-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게이트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인상이 좋은 젊은 부부처럼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레스토 랑에 들어갔다. 그녀는 꼭 텐동(튀김덮밥)을 먹고 싶다고 하며 텐동을 먹었고, 그와 나는 생맥 주를 마셨다. 그는 무역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별로 자신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런 이야기는 나를 지루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나도 무역에 대한 이야기 를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서 베이루트의 치안 상태나 튀니스의 상수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북아프리카부터 중동에 이르기까지 그 정세에 꽤 해박한 것 같았다. 텐동을 다 먹고 나자 그녀는 크게 하품을 하고 졸리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푹 잠이 들 것 같 은 모습이었다. 말하는 것을 잊었는데,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드는 것이 그녀의 버릇이다. 그 가 택시로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전철이 더 빠르니 전철로 돌아가겠다고 말했 다. 무엇 때문에 일부러 공항까지 나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하고 그는 나를 향해 미안한 듯이 말했다. "저도요." 하고 나도 대답했다. 나는 그리고 몇 번인가 그와 얼굴을 마주치게 되었다. 내가 어딘가에서 그녀를 우연히 만나곤 하면 그 곁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나와 그녀가 데이트를 하면 약속 장소까지 그가 차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 그는 얼룩 하나 없는 독일제 스포츠카를 타고 있었다. 나는 차에 대해서 거의 모 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왠지 페데리코 페리니의 흑백영화에 나올 것 같은 느낌 의 차였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몰수 있는 차는 아니었다. "아마 굉장한 부잔가 보군?" 하고 나는 한 번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그래요." 라고 그녀는 별로 흥미가 없는 듯이 말했다. "아마 그렇겠죠." "무역 일이 그렇게 잘 벌리나?" "무역 일?" "그가 그렇게 말했어. 무역 일을 하고 있다고." "그럼, 그런 거겠죠.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특별히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자주 사람을 만나고 전화를 걸곤 하지만요." 나는 마치 피츠제럴드의 <그레이트 개츠비>같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 지만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젊은이다. 10월의 일요일 오후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는 아침부터 친척집에 갔고 나 혼자 있었다. 날씨가 맑은 기분 좋은 날이라 나는 뜰의 상록수를 바라보며 사과를 먹고 있었다. 나 는 그 날만도 벌써 사과를 7개나 먹고 있었다. 때때로 그런 적이 있다. 병적으로 사과가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어떤 예고인지도 모른다. "지금 비교적 댁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요. 둘이서 놀러가도 돼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둘?" 하고 내가 되물었다. "나와 그 사람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물론 좋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럼 30분 정도면 도착할 거예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소파 위에서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수염을 깎았다. 그리고 머 리를 말리면서 귓청소를 했다. 방 정리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했다. 전부 제대로 치우기에는 시간이 없었고, 전부 정돈할 수 없을 바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 다. 방에는 책이나 잡지, 편지, 레코드, 연필, 스웨터 등이 한껏 널려 있었지만 특별히 불결해 보이지는 않았다. 일을 한 가지 해치우고 나자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상록수를 바라보며 또 하나의 사과를 먹었다. 그들은 2시가 좀 넘어서 도착했다. 집 앞에서 스포츠카가 멈춰서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에 나가보니 눈에 익은 은색 스포츠카가 도로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창에서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차를 뒤뜰의 주차 스페이스로 안내했다. "왔어요." 하고 그녀는 싱글벙글하면서 말했다. 그녀는 유두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얇은 셔츠를 입고 올리브 그린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네이비 블루의 블레이저 코트(색, 디자인을 통일한 스포츠형 상의)를 입고 있었다. 이전 에 만났을 때와는 약간 인상이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그것은 적어도 이틀은 기른 것 같 은 수염 때문이었다. 수염이라 해도 그의 경우에는 단정하지 못한 분위기는 전혀 없고, 약간 구 레나룻이 검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 선글라스를 벗고 가슴 포켓에 집어넣 었다. "쉬시는데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아니, 뭐 괜찮습니다. 매일 휴일이나 다름 없고, 게다가 혼자서 심심하던 참입니다." 라고 내가 대답했다. "밥 가져왔어요." 라고 그녀가 말하며 뒷좌석에서 커다란 흰 종이 봉지를 꺼냈다. "밥?" "별건 아닙니다. 단지 일요일에 갑자기 찾아오는 거고, 뭔가 먹을 것을 가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것 참 고맙군요. 아침부터 사과밖에 먹지 못한 참이었는데." 우리는 집으로 들어가 테이블 위에 식료품을 늘어놓았다. 꽤 훌륭한 품목들이었다.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와 샐러드, 스모크 새먼,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으로 양도 꽤 많았다. 그녀가 요리 를 접시에 옮기고 있는 동안 나는 냉장고에서 백포도주를 꺼내 뚜껑을 땄다. 자그마한 파티 같 았다. "자, 먹자구요. 무척 배가 고파요." 하고 여느 때처럼 배가 몹시 고픈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샐러드를 먹고, 스모크 새먼을 집어먹었다. 와인을 다 마시고 나자 냉장고에서 캔맥주을 꺼내 마셨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캔맥주만 언제나 가득차 있었다. 친구 가 작은 회사를 하고 있어 남은 증정용 맥주권을 싸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마셔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나도 맥주라면 꽤 마신다. 그녀도 따라서 몇 갠가 마셨다. 결국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빈 맥주캔이 책상 위에 쭉 늘어섰다. 그것도 굉 장한 것이었다. 그녀는 레코드 선반에서 몇 장인가 골라서 오토체인지 플레이어에 세트했다. 마일즈 디빈스의 <에어진>이 들려왔다. "오ㅌ체인지의 걸러드라니 요즘에는 드문 것이 있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자신이 오토체인지의 팬임을 설명했다. 그리고 질 좋은 걸러드를 찾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그는 맞장구를 치면서 내 이야기를 예의바르게 듣고 있었다. 한동안 오디오 이야기를 한 후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서 "글라스가 있는데 괜찮 으시다면 피우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나는 약간 망설였다. 그 이유는 내가 한 달 전에 금연을 시작해 매우 미묘한 시기였고, 그런 상황에서 마리화나가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피우기로 했 다. 그는 종이 봉지 바닥에서 알루미늄 호일에 싼 검은 잎을 꺼내 종이 위에 올려놓고 둘둘 말 아 풀칠할 부분을 혀고 핥았다. 그는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몇 번인가 빨아들여 불이 제대로 붙었는지 확인한 후 내게로 돌렸다. 매우 질이 좋은 마리화나였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것 을 한 모금씩 빨고는 순번대로 돌렸다. 마일지 디빈스가 끝나고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모음이 흘렀다. 기며한 선곡이었으나, 뭐 나쁘지는 않았다. 한 개피 피우고 나자, 그녀는 졸리다고 말했다. 잠이 부족한 데다가 캔맥주를 3개 마시고 대 마초를 피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 금세 잠들려고 했다. 나는 그녀를 2층으로 데리고 가서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티셔츠를 빌려 달라고 했다. 내가 티셔츠를 건네 주자, 그녀는 훌훌 옷 을 벗고 속옷만 입은 채로 위로부터 티셔츠를 푹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리고 내가 춥지 않느냐 고 물었을 때는 이미 숨소리를 높이며 자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밑으로 내려갔다. 응접실에서는 그녀의 연인이 두 개비째 대마초를 말고 있었다. 건강한 남자다. 나는 어느 쪽 이냐 하면, 그녀 옆에 파고들어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우리는 두 개비째 마리화나를 피웠다. 아직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어째선지 국민학교 학예회에서 한 연극이 생각났다. 나는 그 연극에서 장갑 가게 아저씨 역을 했다. 새 끼 여우가 장갑을 사러오는 장갑 가게 아저씨 역이었다. 하지만 새끼 여우가 가지고 온 돈으로 는 장갑을 살 수가 없었다. "그것으론 장갑을 살 수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약간 악역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무척 추워하세요. 손이 트셨어요. 부탁이에요." 하고 새끼 여우는 말했다. "아니, 안 돼. 돈을 모아서 다시 오렴. 그러면. "때때로 헛간을 태웁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뭐라구요?" 하고 내가 말했다. 잠시 멍하니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때때로 헛간을 태웁니다." 라고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라이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마초 연기를 양껏 폐 속으로 들이마셔 10초 정도 멈추고는 천천히 뱉어냈다. 마치 엑토플라즘(심령 체)같이 연기가 그의 입에서 공중으로 감돌았다. 그는 나에게 마리화나를 돌렸다. "꽤 질이 좋죠?"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도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특히 질이 좋은 것만 골랐죠. 이걸 피우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여러 가지가 생각납니다. 그것도 빛이라거나 냄새 같은 것들이죠. 기억의 질이..." 그는 거기 까지 말하고 잠시 사이를 두고 적당한 말을 찾듯이 몇 번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전혀 달라지죠.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생각한다,고 나는 말했다. 나도 마침 학예회 무대의 소란함이라든가 배경으로 마분지 에 칠한 물감의 냄새 등이 떠올랐던 참이다. "헛간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다운 표정이 없었다. "이야기해도 됩니까?" 하고 그가 말했다. "물론이죠." 라고 내가 대답했다. "간단한 이야기죠. 가솔린을 뿌리고 불이 붙은 성냥을 뿌리는 겁니다. 번쩍, 하고는 끝이죠, 다 타는데 1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는 나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도 그 다음 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 던 것이다. "어째서 헛간을 태우죠?" "이상합니까?" "알 수 없군요. 당신은 헛간을 태우고, 나는 헛간을 태우지 않소. 그 사이에는 엄격한 차이 가 있고 나로서는 어느 쪽이 이상하냐보다는 우선 그 차이가 어떤 것인가를 확실히 하고 싶군요. 게다가 헛간 이야기는 당신이 먼저 말하지 않았소." "그렇죠." 하고 그가 말했다. "확실히 그래요. 그런데 라비 샹컬의 레코드를 가지고 계십니 까?" 없다고, 내가 대답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의 의식은 고무찰흙처럼 물컹쿨컹한 것 같았다. 어쩌면 물컹물 컹했던 건 나의 의식인지도 모른다. "2개월에 하나 정도는 헛간을 태웁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또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그 정도의 페이스가 좋은 것 같아요. 물론 나의 경우지만요."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스? "그런데 당신은 자신의 헛간을 태우는 거요?" 하고 내가 물어 보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초리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내가 내 헛간을 태웁니 까? 어째서 내가 수많은 헛간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렇다면," 하고 내가 말했다. "남의 헛간을 태우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남의 헛간이죠. 그러니까 이건 범죄행 위입니다. 당신과 내가 지금 이렇게 대마초를 피우고 있는 것처럼 확실한 범죄행위입니다." 나는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고인 채 가만히 있었다. "즉, 타인이 소유하는 헛간에 내 맘대로 불을 붙이는 거죠. 물론 큰 화재가 되지 않을 만한 것을 택합니다. 나는 화재를 일으키고 싶은 건 아니니까요. 나는 단지 헛간을 태우고 싶을 뿐 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짧아진 대마초를 비벼 껐다. "하지만 잡히면 문제가 될 거요. 어쨌든 방화니까 잘못하면 실형을 받을지도 모르죠." "잡히지 않이요." 하고 그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가솔린을 뿌리고 성냥을 긋고는 금방 도망 치죠. 그리고 먼 곳에서 쌍안경으로 느긋하게 지켜보죠. 잡히지 않아요. 조그마한 헛간 하나 태웠다고 경찰이 그리 움직이지도 않으니까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외제차를 탄 옷차림이 좋은 젊은 남자가 설마 헛간을 태우고 돌아다니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걸 알고 있나요?" 하고 나는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무도 모릅니다. 실은 이 일은 당신 외의 사람에게는 말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에게나 말 할 수 있는 성질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어째서 내게?" 그는 왼손가락을 똑바로 펴서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자라난 수염이 파삭파삭 메마른 소리를 냈다. 팽팽하게 고정시킨 얇은 종이 위를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였다. "당신은 소설을 쓰 는 사람이고, 인간의 행동 패턴에 관심이 있을 것 같아서요. 게다가 나는, 그러니까 소설가란 어떤 물건이나 일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물건이나 일을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즐긴다는 것이 좀 뭣하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고나 할까요. 그래서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로서는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스스로 그걸 어떤 식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을지 솔직 히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말은 이상할지 모릅니다만," 하고 그는 얼굴 앞에서 양 손을 펼쳐 천천히 맞붙였다. "세상에는 많은 헛간이 있고, 그것들이 모두 나에게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듭 니다. 해변에 외로이 서있는 헛간이나, 밭 한가운데 있는 헛간들... 아무튼, 여러 헛간 말입니 다. 15분이면 깨끗하게 타죠.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아무도 슬 퍼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라질 뿐이죠. 갑자기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불필요한 것인지 어떤지는 당신이 판단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판단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죠. 나는 그것을 받아 들일 뿐이죠. 비와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내린다. 강이 넘친다. 뭔가가 쓸려내려간다. 비가 무엇을 판단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내가 뭐 비도덕적인 걸 지향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나 는 나 나름대로 모럴리티라는 걸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힘이 죠. 모럴리티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모럴리티란 동시 존재의 균형 같은 거라 고 생각합니다." "동시 존재?" "그러니까, 나는 이곳에 있고, 나는 그곳에 있다. 나는 도쿄에 있고, 나는 동시에 튀니스에 있다. 추궁하는 것이 나고, 또한 용서하는 것이 나다. 예컨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균형 이 있는 겁니다. 그런 균형이 없이 우리들은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걸림쇠 같은 거죠.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풀어져서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리죠. 그것이 있어서만이 우리들의 동시 존재가 가능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당신이 헛간을 태우는 것은 모럴리티에 의한 행동이란 말인가요?" "정확히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럴리티를 유지하기 위한 행위죠. 하지만 모럴리티에 대해서는 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여기서는 본질적인 게 아니니까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에는 그런 헛간이 많다는 거죠. 내게는 나의 헛간이 있고, 당신에게는 당신의 헛 간이 있죠. 몇 번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아, 이제 그만 말하죠. 나는 평소엔 말이 없는데 글라스만 피우면 너무 말을 많이 하죠." 우리는 마치 어떤 흥분을 식히기라도 하듯 그 자세 그대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차창으로 나타났다가는 사라져가는 기묘한 풍경을 좌석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이 이완되어 세부의 움직임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 만 나는 내 몸의 존재 그 자체를 관념으로서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동시 존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생각하고 있는 내가 있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내가 있었다. 시간은 매우 정밀하고 폴리리듬(대조적 리듬의 동시 사용)을 새기고 있었다. "맥주 마시겠어요?" 하고 잠시 후 내가 물었다. "감사합니다. 마시죠." 나는 주방에서 캔맥주 4개와 카망베르 치즈(부드럽고 향기가 진한 프랑스 치즈)를 가지고 왔 다. 우리는 맥주를 2개씩 마시고 치즈를 먹었다. "최근에 헛간을 태운 것은 언제지요?" 하고 내가 물어 봤다. "글쎄요." 그는 빈 맥주캔을 가볍게 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름, 8월말입니다." "이 다음에는 언제 태울 거죠?" "모르죠. 스케줄을 세워 놓고 캘린더에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음이 내키면 태우러 가죠." "하지만 태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경우에 맞는 적당한 헛간이 있으라는 법은 없지 않 습니까?" "물론 그렇죠." 라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미리 태우기에 적당한 것을 골라 두죠." "저축해 두는 거로군요." "그렇죠." "한 가지 더 질문해도 될까요?" "예." "다음에 태울 건 이미 정했습니까?" 그는 눈과 눈 사이를 찌푸렸다. 그리고 후욱 하고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예, 정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은 맥주를 찔끔찔금 마셨다. "매우 좋은 헛간이죠. 오래간만에 태울 보람이 있는 헛간입니다. 실은 오늘도 그 사전 조사 를 온 겁니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 있겠군요." "바로 근처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것으로 헛간 이야기는 끝이 났다. 5시가 되자 그는 연인을 깨우고 불쑥 집으로 찾아온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꽤 많은 양의 맥 주를 마셨는데도 완벽하게 멀쩡한 얼굴이었다. 그는 뒤뜰에서 스포츠카를 꺼냈다. "헛간에 대해서는 주의하겠소." 헤어질 때 내가 말했다. "그러세요." 하고 그는 말했다. "어쨌든 바로 근처입니다." "헛간이 뭐죠?"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남자끼리의 이야기지." 하고 그가 대답했다. "어휴." 하고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라졌다. 나는 응접실로 돌아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테이블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더플 코트(튼튼한 올로 만든 무릎까지 오는 모자 달린 외투)를 집어 머 리로부터 뒤집어쓰고는 푹 잤다. 눈을 떴을 때, 방은 캄캄했다. 7시였다. 푸르스름한 어둠과 대마초의 코를 찌르는 냄새가 방을 뒤덮고 있었다. 묘하게 불균일한 어둠 이었다. 나는 소파에 누운 채 학예회의 연극을 계속해서 생각해내려 했으나 이미 잘 생각이 나 지 않았다. 새끼 여우는 장갑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가?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을 열고 방의 공기를 바꾸고는 주방에서 커피를 끓여 마셨다. 나는 다음 날, 서점에 가서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지도를 사왔다. 좁은 골목길까지 나와 있 는 2만분의 1의 백지도였다. 나는 그 지도를 가지고 우리 집 근처를 돌아다니며 헛간이 있는 자 점에 연필로 x표를 했다. 사흘에 걸쳐 사방 4킬로를 빠짐 없이 걸었다. 내 집은 시외에 있어 주위에는 농가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헛간의 수도 꽤 많았다. 전부 16개의 헛간이 있었다. 그가 태우려고 하는 헛간은 아마 그 중의 어느 것일 터였다. <바로 근처>라고 했을 때의 그 의 입모양으로 보아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16개 헛간의 상태 하나 하나를 세세하게 체크했다. 우선 인가에 너무 가깝 거나 비닐하우스 곁에 있거나 헛간은 제외했다. 그리고 농구나 농약이 들어 있어 꽤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도 제외했다. 그는 결코 농구나 농약 따위를 태우고 싶어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5개의 헛간이 남았다. 5개의 태울 만한 헛간이다. 떠는 5개의 태워도 상관 없는 헛간이 다. 15분 정도면 다 타 버리고, 타 버린 것에 대해 아무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 헛 간들이다. 그가 그 중 어느 것을 태울지는 나로서는 정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취향의 문 제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그 5개의 헛간 중 어느 것을 선택했는지 매우 알고 싶었다. 나는 지도를 펴고 5개의 헛간만 남기고 나머지 x표를 지웠다. 그리고 직각자와 곡선자, 디바 이더를 준비하고 집을 나와 그 5개의 헛간을 돌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최단코스를 설정했다. 길이 강이나 언덕을 따라 구불구불했기 때문에 그 작업은 꽤 시간이 걸렸다. 결국 코스의 거리 는 7.2킬로, 몇 번이나 측정해 보았으나 오차는 거의 없을 터였다. 다음 날 아침 6시, 나는 트레이닝 웨어에 조깅 슈즈를 신고 그 코스를 달려 보았다. 나는 매 일 아침 항상 6킬로는 조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1킬로를 늘리는 것은 그리 고통이 아니었다. 풍경도 나쁘지 않고 도중에 건널목이 두 개 있긴 했지만, 거기에 걸리는 일은 드물었다. 우선 우리 집을 나와 가까운 대학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고 강을 따라 인기척이 드문 비포장도 로를 3킬로 달린다. 도중에 첫 번째 헛간이 있다. 그리고 숲을 지난다. 가벼운 언덕이다. 또 헛간이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경마용 말의 마구간이 있기 때문에 말들이 불을 보고 약간 소란 을 피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실질적인 해는 없다. 세 번째 헛간과 네 번째 헛간은 나이든 보기 흉한 쌍둥이처럼 많이 닮았다. 거리도 2백 미터 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양쪽 다 낡고 더럽다. 만약 태운다면 양쪽 다 한꺼번에 태워도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 헛간은 건널목 옆에 서 있었다. 약 6킬로 지점이다. 아주 완전하게 버려진 헛간이다. 선로를 향해 펩시콜라 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은-그런 것도 건물이라고 불러도 될지 나로서는 자신이 없지만-아무튼 그 건물은 거의 쓰러져가고 있었다. 거의 확실히 그가 말하듯이 누군가에 태워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마지막 헛간 앞에 잠시 서서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하고 건널목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31분30초였다. 그리고 나는 샤워를 하고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소 파에 누워 레코드를 한 장 듣고는 일을 시작했다. 1개월간 이렇게 나는 매일 같은 코스를 달렸다. 그러나 헛간은 타지 않았다. 때때로 나는 그가 나에게 허산을 태우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 러니까 헛간을 태운다는 이미지를 나의 머릿속에 집어넣은 후 자전거 타이어 공기를 넣듯이 그것 을 점점 부풀려가는 것이다. 정말로 나는 때때로 그가 태우기를 가만히 기다릴 정도라면, 차라 리 스스로 성냥을 켜서 태워 버리는 것이 빠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단지 그것은 낡은 헛 간일 뿐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지나친 생각일 것이다. 실제로는 나는 헛간을 태우거나 하지 않는다. 아 무리 내 머릿속에서 헛간을 태운다는 이미지를 그려 보아도, 나는 헛간을 태우거나 할 타입이 아 니다. 헛간을 태우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다. 아마 그는 태워야 할 헛간을 변경한 것인지도 모 른다. 그녀로부터의 연락도 전혀 없었다. 12월이 오고 가을이 끝나 아침 공기가 피부를 찌르듯 차가워졌다. 헛간은 그대로였다. 하얀 서리가 헛간의 지붕에 내렸다. 겨울새들이 얼어붙은 숱속에서 퍼드득 커다란 날개 소리를 냈다. 세계는 변함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작년 12월 중반이었다. 크리스마스 얼마 전이었다. 어디를 가나 크리스마스송이 들렸다. 나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가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거리 로 나갔다. 다이모쿠(乃木) 언덕 근방을 걷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차를 발견했다. 틀림없이 그 의 은색 스포츠카였다. 시나가와(品川) 넘버로, 왼쪽 헤드라이트 옆에 작은 상처가 있었다. 차 는 찻집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차는 이전에 봤을 때처럼 반짝반짝 선명하게 빛나고 있지는 않았다. 그 은색은 그래서 그런지 칙칙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인지 도 모른다. 나는 자신의 기억을 좋을 대로 바꿔 버리는 경향이 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가게 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어둡고 진한 커피 냄새가 났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그다지 들리지 않고, 바로크 음 악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창가에 혼자 않아 카페오레 를 마시고 있었다. 가게 안은 안경이 하얗게 될 정도로 더웠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검은 캐시미 어 코트를 입은 채로 있었다. 머플러도 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약간 망설였지만 역시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다만, 밖으로 그의 차를 발견한 것은 말 하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나 우연히 이 가게에 들어와 우연히 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앉아도 될까요?" 하고 내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앉으세요." 하고 그가 대답했다. 그런 뒤에 우리는 가벼운 세상사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별로 활기를 띠지 못했다. 원래 그 다지 공통 화제가 없는 데다가, 그는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와 합석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튀니지의 항구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얻어지는 새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얻어지는 새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모래 속에서 스며들 듯이 도중에 갑자기 끊기고 그 다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들어 웨이터를 부르고 두 잔째 카페오레를 주문했다. "그런데 헛간은 어떻게 됐죠?" 하고 나는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그는 입술 끝으로 가볍게 웃었다. "아아, 그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태웠습 니다. 깨끗하게 태웠죠. 약속대로." "우리 집 바로 근처에서?" "예. 바로 근처죠." "언제죠?" "저번에 댁에 갔다 오고 열흘 정도 후에요." 나는 지도에 헛간의 위치를 그려넣고 하루에 한 번 그 앞을 러닝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못 봤을 리가 없는데." 하고 내가 말했다. "꽤 치밀하시군요." 하고 그는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치밀하고 이론적입니다. 하지만 틀림 없이 못 보고 빠뜨린 겁니다. 그런 경우가 있죠. 너무 가까워서 못 보고 말죠." "잘 모르겠군요." 그는 넥타이를 바로 하고 손목시계를 봤다. "너무 가까웠던 겁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이제 가봐야 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이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죠. 죄송하지만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그 이상 그를 잡을 이유는 없었다. 그는 일어서서 담배와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그 후 그녀를 만나보셨습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아뇨, 만나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은요?" "저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연락이 되지를 않아요. 아파트에도 없고 전화도 되지 않고, 팬터 마임 클래스에도 쭉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딘가 여행을 떠난 게 아닐까요. 이제까지도 몇 번인가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그는 주머니에 양 손을 찌르고 일어서서 테이블 위에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푼도 없이 한 달 반이나요? 세상사에 관해서라면 그녀에게는 그리 재능이 없습니다." 그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몇 번인가 손가락을 튕겼다.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녀는 전혀 한푼도 없습니다. 친구다운 친구도 없죠. 주소록은 가득차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이름뿐입니다. 그녀에게는 의지할 만한 친구가 없죠. 하긴 뭐, 그 렇긴 해도 당신은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녀에게 특별 한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약간 질투를 했을 정도죠. 정말입니다. 나는 이제까지 질투 라는 것을 거의 모르던 인간입니다만."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계 에 시선을 주었다. "나는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서 다시 만납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렇다. 이 남자를 마주하 면 말이 잘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전화는 요금 미납으로 회선이 끊겨 있었다. 나는 어쩐지 걱정이 되어 그녀의 아파트까지 가 보았다. 그녀의 방은 잠긴 채였다. 우편함에는 다이렉트 메일이 다발이 되어 꽂혀 있었다. 관리인은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그녀가 그곳에 아직 살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수첩의 페이지를 찢어 <연락 바람>이라 는 메모를 적고 이름을 써서 우편함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그래도 연락은 없었다. 그 다음에 내가 아파트를 찾아갔을 때에는 문에 다른 사람의 명패가 걸려 있었다. 노크해 보 았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관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포기했다. 거의 1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사라진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다섯 개의 헛간 앞을 뛰고 있다. 우리 집 주위의 헛간은 아직도 그대로이다. 어딘가에서 헛간이 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다시 12월이 오고, 겨울새가 머리 위에 가로 질러간다. 그리고 나는 나이를 먹어간다. 밤의 어둠 속에서 나는 때때로 불에 타서 무너져가는 헛간을 생각한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인 등을 꼿꼿이 펴고 눈을 감자, 바람 냄새가 났다. 마치 과실처럼 부푼 바람이다. 그 바람에는 매끈한 껍질이 있고, 과육의 부드러움과 씨앗의 도톨도톨한 감촉이 있었다. 과육이 공중에서 부 서지면 씨앗은 부드러운 산탄이 되어 내 살이 드러난 팔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약간 의 아픔이 남았다. 바람에 대해 그렇게 느낀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도쿄에서 오래 지내는 동안에 나는 5월의 바 람이 갖는 기묘한 생동감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어떤 아픔의 감각조차 사람들은 잊어버리는 것 이다. 피부로 스며든 뭔가나, 뼈를 쑤시는 차가움조차 모두 잊어버린다. 나는 그러한 바람, 이 경사지를 불어가는 그 풍만한 초여름의 바람에 대해 사촌동생에게 설명 하려고 생각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그는 아직 14살이고, 이 토지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잃어버린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 늦게까지 혼자서 위스키를 마신 탓에 머리 심지에 응어리 같은 것이 남 아 있었다. "저, 지금 몇 시야?" 사촌동생이 내게 물었다. 사촌동생과 나는 20센티나 키 차이가 나기 때 문에 그가 언제나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듯한 자세로 이야기했다. 나는 시계를 보고 "10시20분." 하고 대답했다. 사촌동생은 내 왼팔을 잡아다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당겨 직접 시계의 문자판을 확인했다. 디 지털 문자를 반대 측에서 보자니 시간이 걸렸다. 그가 팔을 놓자, 나도 걱정이 되어 다시 한 번 시계를 봤지만, 10시20분이었다. "시계, 맞아?" 하고 사촌동생이 물었다. "맞아."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또 내 손목을 끌어다가 시계를 봤다. 그의 손가락은 매끌거렸고 보기보다 훨씬 힘이 섰 다. "이거 비싸?" 하고 그는 물었다. "안 비싸. 싸구려야." 하고 나는 대답했다. 대답은 없었다. 사촌동생을 바라보니, 그는 입술을 엷게 벌리고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엿보이는 하얀 이가 퇴행된 뼈처럼 보였다. "싸구려야/" 하고 나는 사촌동생의 왼쪽 귀에 대고 반복했다. "하지만 싸구려치고는 정확해." 사촌동생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라이 터로 불을 붙였다. 사촌동생은 오른쪽 귀가 나쁘다. 소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귀에 공을 맞고는 그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게 되어 버렸다.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고 희미하게 들리는 것이 다. 또한 비교적 잘 들리는 시기와 잘 들리지 않는 시기가 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양쪽 귀 모두 전혀 안 들리는 경우도 있다.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여동생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신경증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양쪽 귀에 균등하게 신경을 나눠 놓고 있으면 때때로 오 른쪽 침묵이 왼쪽의 소리를 덮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침묵이 기름처럼 오감을 덮친다. 나는 때때로 그의 난청 자체가 외상 때문이라기보다는 신경적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물론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가 8년간 거쳤던 의사들도 모른다. "시계라는 게 값이 비싸다고 정확한 게 아니더라구."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내가 죽 가지 고 있던 것은 꽤 비싼 건데 언제나 시간이 맞지 않았어. 결국 잃어버렸지만." "그래." 하고 나는 대답했다. "벨트의 걸림쇠가 약간 느슨해져 있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떨어뜨려 버렸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없더라구." 그는 왼쪽 손목을 획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사 준 지 1년도 안 돼서 잃어버렸다고 새 걸 안 사 주셔서 시계 없이 살고 있어." "시계가 없으면 불편하지?" 하고 담배를 손에 들고 다시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별로 불편할 것도 없어. 그야 불편한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산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있잖아. 게다 가 애초에 잃어버린 내가 잘못한 거지 뭐. 그렇지?" "그렇겠지." 하고 말하고서 나는 웃었다. "지금 몇 분?" 하고 사촌동생이 물었다. "26분." 하고 나는 말했다. "버스는 몇 분에 오는 거지?" "31분."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동안 나는 남은 담배를 마저 피웠다. "시간이 맞지 않는 시계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꽤 피곤한 거야.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는 생 각이 들 때도 있을 정도더라구."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잃어버린 건 아니야."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사촌동생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좀 더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대체 무슨 말 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를 만난지 벌써 3년이 지났다. 그 3년 동안에 그는 11 살에서 14살이 되었고, 나는 22살에서 25살이 되었다. 그리고 그 3년 동안에 자신의 신변에 일 어난 일을 하나 하나 또올려 보면, 내가 이 소년에게 이야기해 줄 것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생각 되었다. 뭔가 필요한 말을 하려고 해도 순간적으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문득 말문이 막힐 때마다 소년은 슬픈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왼쪽 귀가 은연중에 나를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사촌동생의 그런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몇 분?" 하고 사촌동생이 물었다. "29분." 하고 나는 말했다. 버스가 온 것은 10시32분이었다. 내가 이 노선의 버스를 타고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버스의 모습은 꽤 새로워져 있 었다. 운전석의 창유리가 유난히 커서 마치 날개 잘린 대형 폭격기처럼 보인다. 나는 만일을 위해 버스의 노선 번호와 행선지 표시를 확인했다. 괜찮아, 틀림없군. 휘익 하는 숨을 토해내 며 버스가 서고 뒤쪽 자동문이 열렸다. 나와 사촌동생은 앞쪽 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기 때문에 당황해서 뒤로 가 승강구 계단에 올라섰다. 7년이나 지나면 정말 여러 가지가 바뀐 다. 버스 안은 생각보다 혼잡했다. 서 있는 승객은 없었지만 우리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 있기로 했다. 서 있어도 피곤할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간대의 이 노선 버스에서 이렇게 많은 손님이 타고 있는 걸 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철(私 鐵)역을 나와 높은 지대의 주택지를 한 바퀴 돌고 다시 같은 역으로 돌아가는 버스로, 지나가는 길에 특별히 색다른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아침 저녁의 러시 아워를 빼면 언제나 승객 수가 두 세 명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것도 결국은 내가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다. 아마 무슨 일이 있어서 교통사정이 바뀐 것이리라. 그래서 아침 11시에도 버스가 가득 만원이 되게 되었다. 어쨌든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나와 사촌동생은 차량의 맨 뒤쪽에 서서 각각 손잡이와 지주를 잡고 있었다. 버스의 내부는 마치 새 차처럼 깨끗했다. 금속 부분에는 뿌연데가 하나도 없고 시트도 갓 씌운 것 같았으며, 차 안에는 새 기계 특유의 짙은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차 안을 한차례 점검한 다음 벽면 에 즐비한 광고들을 바라보았다. 광고가 모두 결혼식장, 중고차 센터, 가구점 같은 지역적인 것 들뿐이었다. 결혼식장만도 5개나 광고가 붙어 있었다. 그 외에 결혼상담소와 대여 의상점 광고 도 하나씩 있었다. 사촌동생은 또 내 왼쪽 손목을 잡고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어째서 그가 그렇게 시간에 신경을 쓰는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 의 예약시간은 11시15분이니까. 이대로 가면 30분 가까이 시간이 남게 된다. 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빨리 돌리고 싶을 정도인 것이다. 그래도 나는 시계 문자판을 그에게로 향하게 해서 그가 보고 싶은 만큼 실컷 보게 했다. 그리 고 손을 제자리로 가져와서는 운전석 뒤에 있는 요금표를 보며 잔동을 준비했다. "140엔." 하고 사촌동생이 확인했다. "병원 앞에서 내리면 되는 거지?" "그래." 하고 내가 말했다. "잔돈 있어?" 하고 그가 불안한 듯이 말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잔돈을 사촌동생의 손에 쏟아 주었다. 사촌동생은 100엔짜리와 50엔짜리 를 세세하게 나누어 계산했다. 그리고 정확히 280엔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280엔 있어." 하고 그가 말했다. "가지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왼손에 돈을 움켜쥐었다. 나는 한 동안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하나가 눈에 익은 그리운 풍경이었다. 새 맨션이 나 타운 하우스, 레스토랑 같은 것도 곳곳에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거리 풍경의 변화가 생각보 다 훨씬 덜한 편이었다. 사촌동생도 나처럼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긴 했지만, 그의 시선은 마 치 서치라이트(탐조등)같이 이곳 저곳을 왔다갔다하는 탓에 들떠 있었다. 나는 버스가 정류장을 쉬지 않고 세 개 정도 지나쳤을 때쯤, 차내에 뭔가 기묘한 분위기가 감 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의식에 걸린 것은 이야깃소리였다. 이야기하는 소리의 톤이 어 쩐지 기묘하게 단조로웠다. 그다지 많은 승객이 한꺼번에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모두의 목소리가 한 곳에, 마치 공기가 막다른 곳에 모여든 것처럼 굳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가 청각의 일부를 부자연스럽게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손잡이를 왼손으로 잡은 채 몸을 비틀어서 태연한 동작으로 승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위치에서는 거의 승객들의 뒤통수밖에 볼 수가 없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그다지 특이한 점 이 없었다. 아주 평범한 만원 버스의 광경이었다. 차가 반짝반짝 새 것인 만큼 사람들의 모습 이 어딘지 모르게 획일적으로 보였으나, 그것도 아마 기분 탓이리라. 내 주위에는 7,8명의 노인이 뭉쳐 앉아 작은 소리로 저마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중 의 두 사람이 여자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들밖에 모 르는 세세한 일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은 그 조용하고 친밀한 어주에서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연령은 60대에서 70대 중반 정도로 한 사람 한 사람이 비닐 숄더백 같은 것을 다리 위에 올려놓거나 어깨에 메고 있었다. 작은 배낭을 메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제부터 산 을 오르려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각각의 가슴에 똑같은 작은 블루 리본이 안전핀으로 고정 되어 있었다. 전원이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운동화는 보기에도 발에 길이 잘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이 그런 옷차림을 하면 대체로 뒤죽박죽이라는 인상을 주는 데, 그들의 경우는 실로 몸에 꼭 맞았다. 기묘한 것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이 버스의 노선은 등산 코스 같은 곳은 전혀 거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버스는 산의 경사면을 올라 계속 이어지는 주택가를 빠져나가 나의 고등학교 앞을 지나고, 병원 앞을 지나 산 위를 삥 돌아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 밖에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하는 가장 표고가 높은 지점에는 주택 단지가 있고 그곳이 막다른 곳이었다. 그들이 대체 어디로 가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가장 타당한 추측은 노인들이 틀린 노선을 탔을 가능성이었다. 그들이 대체 어디에서 탓는지 알 수 없으니 뭐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이 근처에서 케이블역까지 올라가는 버스가 몇 대 운행 되고 있으니까 그것을 혼동해서 타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버스 노선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완전히 바뀐 경우였다. 이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7년이나 이 버스를 타지 않았고, 노인들이 그렇게 부주의하게 다른 버스를 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창 밖의 풍경도 옛날과 전혀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촌동생은 그 동안 내내 내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하고 내가 그의 왼쪽 귀를 향해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 "왜 그래?" 하고 그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괜찮아. 정류장을 살펴보고 오려는 거야." 나는 통로를 지나 운전석 뒤에 당도해 표지판에 기재된 복잡한 노선도를 살펴봤다. 나는 <28> 이라는 버스의 번호를 먼저 확인하고, 우리가 탄 사철(私鐵)역 앞의 정류장을 찾은 뒤, 노선을 따라 정류장을 하나 하나 더듬어갔다. 어느 정류장의 이름에서나 모두 그리움이 밀려왔다. 옛 날과 같은 노선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이름이 있었고 병원이 있고 주택 단지가 있었 다. 버스는 거기에서 방향을 바꿔 다른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 올 때와 같은 노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틀림없다. 틀렸다면 그들이 틀린 것이다. 나는 안심하고 돌아서서 사촌동생에게로 돌 아가려고 했다. 그 때 나는 겨우 버스 안을 지배하고 있는 기묘한 공기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사 촌동생을 빼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마치 전세 버스처럼 버스의 승객 전원이 노인이었다. 그들 은 모두 가방을 들고 가슴에 파란 리본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몇 명씩인가 뭉쳐서 저마다 뭔가 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지주를 잡은 채 한동안 망연하게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들은 전부 40명 가까이는 될 듯했다. 그들은 모두 얼굴색이 좋고 등도 꼿꼿해서 건강해 보 였다. 뭔가 특별히 이상하달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비현실적이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아마 내가 그 때까지 노인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가 없었다. 나는 통로로 해서 되돌아갔다. 자리에 앉아 있는 노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열중해서 나의 존재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사촌동생이 차내의 유일한 이 질분자라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그런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원피스 차림의 작은 몸집의 두 노파가 양 다리를 바닥에서 들어 통로를 향해 옆으로 내밀고 있었다. 두 사람다 매우 작은 사이즈의 테니스화를 신고 있었다. 그녀들은 똑바로 뻗어 때때로 마치 파도처럼 상하로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나로서는 무엇 때문 에 두 사람이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특별한 뜻도 없이 놀고 있는지만 몰랐다. 혹은 산을 오르기 위한 준비 운동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통로에 나와 있는 두 켤레의 테니스화를 피해 사촌동생이 있는 맨 뒤에까지 왔다. 내가 돌아왔을 때 사촌동생은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붙잡고 왼손 에 동전을 쥔 채 가만히 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들이 엷은 그림자처럼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으로 보면 그림자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들일지도 모 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은 자신들이고 우리가 환상 같은 것이리라. "이 버스가 틀림없어?" 하고 불안한 듯이 사촌동생이 물었다. "물론 맞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나는 대답했다. "고등학교때 매일 이걸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 뭘, 틀릴 리가 없어." 이 말을 듣고 사촌동생은 꽤 안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만 하고는 손잡이에 체중을 실은 채, 노인들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 두 햇빛에 잘 그을려 있었다. 목 뒤까지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마른 체 형이었다. 살찐 노인은 한 명도 섞여 있지 않았다. 남자들 대부분은 등산용 플란넬 셔츠를 입 고 있었고, 여자들은 대부분 쓸데없는 장식이 하나도 없는 간소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 어떤 종류의 단체에 속해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이킹이나 피크닉 클럽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치고는 노인들 저마다의 분위가가 너무 닮았다. 그들은 마 치 항목별로 나열된 어떤 샘플의 서랍을 하나 빼내 그대로 가지고 온 것처럼 보였다. 표정, 몸 놀림, 말투, 옷의 취향까지 모든 것이 닮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가 희미한 것도 아니고, 각각에게 개성이나 특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노인들은 개인별로 각각 뚜렷한 존재감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건강하고 혈색이 좋고 잘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다들 청결하고 몸놀림도 둔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만 인식되고 개성이 없는, 그런 노인들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 사 이에는 어떤 공통적인 톤 같은 것이 있었다. 사회적인 지위나 사고방식, 행동 패턴이나 성장 과 정, 그런 여러 가지가 완전히 일체가 된 톤이었다. 그 톤이 마치 희미한 귀울림처럼 버스 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불쾌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역시 기묘한 것이었다. 첫째로, 그들이 이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주 가까이에 있는 노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볼까 생각했지만, 어쩐지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것 같아서 생각을 바꿨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는 하지만, 단체를 이루고 있고, 또 틀린 버스를 탔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설사 틀린 버스를 탔다고 해도 버스는 순환 노선이니까 빙 돌아서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참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번에 치료받는 거 아플까?" 하고 사촌동생이 걱정스레 내게 물었다 "글세." 하고 나는 말했다. "귀 때문에 병원에 간 일 있어?" 하고 사촌동생이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귀 때문에 병원에 간 기억은 없었다. 여러 가지 경우로 병원에 간 적이 있었지만 귀 때문에 간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귀를 대체 어떻게 치료하는지 상상이 가지 않 았다. "이제까지는 많이 아팠었니?"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렇지도 않아."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하지만 아플 때도 있어. 여러 가지 것들을 넣어 보거나 세척을 하거나 해서. 가끔이지만." "그럼 이번에도 그 정도겠지. 네 어머니 말로도 이제까지와 다른 특별한 치료를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사촌동생은 한숨을 쉬고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제까지와 같은 치료 방법으로는 낫지 않 아. 그렇잖아?" "그건 모르지."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떤 순간에 갑자기 나올 수도 있고." "마개가 뻥 하고 빠지듯이?" 하고 사촌동생이 물었다. 나는 힐끗 사촌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 으나, 특별히 빈정거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대가 바뀌면 기분도 바뀌고, 아주 사소한 작업의 차이가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있어. 그러 니까 쉽게 포기해선 안돼." 하고 나는 말했다. "포기한 건 아닌데."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지겨워?" "약간."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그리고 무서워, 정말로. 아픈게 싫어. 아픈 것보다 아픔 을 상상하는 것이 더 쓰라려. 그런 심정 이해할 수 있겠어?" "물론 이해할 수 있어." 하고 내가 말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니까." 그는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채, 왼손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깨물었다. "내가 말하고 실은 건, 그러니까 나 외의 누군가가 아픔을 느끼고 있고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고 할 때, 나는 그 타 인의 아픔을 상상하고 쓰라려 하는 거야.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상상하는 아픔과 진짜 그 누군가 가 경험하는 아픔은 또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 말로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말야." 나는 사촌동생을 향해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픔이란 가장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니까." "이제까지 가장 아팠던 게 어떤 거야?" "나?" 하고 나는 약간 놀라서 물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이제까지 생각지도 못했다. 아픔? "육체적인 아픔?" "응." 하고 사촌동생은 대답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팠던 적 있어?" 나는 양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채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픔? 나는 한동안 생각한 다음에야 내 기억 속에 고통에 관한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혼이 났던 기억은 몇 번인가 있다. 자전거가 뒹굴어서 이를 부러뜨린 일도 있 고, 손바닥을 관통할 정도로 세게 개에게 물린 적도 있다. 그러나 아픔 그 자체인 실체의 경우 라면, 나는 어느 것 하나도 정확하게 생각해낼 수가 없다. 나는 왼손바닥을 펴고 개에게 물린 자국을 찾아 보았으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상처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조차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여러 가지가 정말 말끔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생각이 나지 않아." 하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아팠던 적은 많이 있었을 테지?" "그야 그렇지." 하고 나는 말했다. "오래 살다 보면 아픈 일도 그 나름대로 있는 법이지." 사촌동생은 약간 어깨를 들썩이는 동작을 하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나이 따위는 먹고 싶지 않아."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몇 번이나 여러 종류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그는 왼쪽 귀를 아주 약간 내 쪽으로 기 울이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눈은 비스듬히 손잡이 저편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쩐지 맹인처럼 보였다. 그해 봄, 나는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 2년 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었 다. 그리고 도쿄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용무를 마치면 곧장 도쿄로 돌아가 새 일을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집에서 한가롭게 뜰의 풀을 뽑거나 벽을 고치는 동안 갑자기 여러 가지 일이 내키 지 않아서 도쿄로 돌아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고향의 마을 자체는 이미 아무런 매 력도 없었다. 부두에 나가 배를 바라보고 바닷바람을 가슴에 들이마시고, 지난 달 다니던 가게 를 한차례 돌고 나니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옛친구들은 한 명도 남았 있지 않았고, 마을은 이미 예전만큼 매력적이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마을이 내 앞에 펼쳐 보이는 여러 스타일은 겉보기만 번듯한 종이 세공품 같아 보였다. 예컨대,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인데 물론 그것만 은 아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도쿄로 돌아가지 않고 혼자서 하루 종일 뜰의 잡 초를 뽑거나 대청 마루에 누워 오래된 책을 읽거나, 토스터 수리를 하며 나날을 멍하니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지내고 있자니, 고모가 찾아와서 사촌동생이 새 병원에 다니게 되었으니 내가 처 음 몇 번은 따라가 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병원은 내가 다니던 고교 근처에 있어서 지리도 잘 알 만한 데다, 어차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별 불만은 없었다. 고모는 내게 식사라도 하라며 생각보다 많은 용돈을 주었다. 아마 내가 실직해서 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뭐 어 쨌든 나쁠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맙게 받아 두었다. 사촌동생이 새 병원으로 옮기는 것은, 요컨대 이제까지 다닌 병원에서의 치료가 전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효과가 없었을 분만 아니라, 그의 난청 사이클의 폭이 이전보다 심해졌다. 그 일로 고모가 의사에게 불만을 표하자 의사 쪽은 댁의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투의 말을 해서 싸움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새 병원으로 바꾼다고 해서 그의 귀가 금방 나아지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주 위 사람들은 그의 구에 대해서는-물론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완전히 포기하고 있는 기색이 었 다. 사촌동생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나와 사촌동생은 옛날부터 특별히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서로의 집은 가까웠지만 나이 차이가 꽤 났기 때문에 별 왕래는 없었다. 그래도 어느 사이엔가 사람들은 나와 그 사촌동생을 일체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 그가 나를 잘 따르고 내가 그를 귀여워한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보여졌는지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와 사촌동생 사이에 그리 공통 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고개를 기울인 듯한 자세로 왼쪽 귀를 지긋이 내쪽을 향하고 있는 사촌동 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마음에 와닿는 게 있었다. 아주 옛날에 들은 빗소리처럼 그의 어줍잖게 긴장된 일거 일동이 내게는 낯설지 않은 것이다. 친척들이 어째서 나와 그를 연결시키 고 싶어했는지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 도쿄로 돌아가?" 하고 사촌동생이 물었다. 나는 근육의 걸림을 풀 듯이 가볍게 목을 흔들었다. "글쎄, 언제가 될까." 하고 나는 말했다. "서두를 건 없는 거지?" "서두를 건 없어." 하고 내가 말했다. "회사 그만뒀어?" "그만뒀어." "왜?" "재미 없으니까."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웃었다. 사촌동생도 약간 망설이다가 웃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바꿨다. "돈 때문에 곤란하지 않아, 일 안 하면?" "뭐, 언젠가는 곤란해지겠지만 당분간은 괜찮아. 저금도 있고, 회사 그만둘 때 돈도 좀 받았 고, 한동안은 괜찮아. 곤란해지면 다시 일하겠지만, 그 때까지는 느긋하게 놀거야." "좋겠어."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좋아." 하고 내가 대답했다. 술렁이는 차내의 말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버스는 어느 정류장에도 서지 않았다. 운전사는 정류장이 가까워질 때마다 정류장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도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았 다. 정류장 이름에 대해 누구 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승객도 타지 않았다. 버스 는 신호가 없는 완만한 언덕길을 어디까지나 계속 올라갔다. 길은 넓고 매끄러웠으며, 구불구불 굽어 있었으나 좌우 진동도 거의 없었다. 버스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초여름 바람이 버스 안을 뚫고 지나갔다. 노인들은 자신들 사이의 이야기에 열중해서 바깥 풍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바람이 그들의 머리나 모자의 차양이나 스카프를 흔들어도 노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 은 완전히 안심하고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버스가 7번짼가 8번째 정류장을 지나쳤을 때쯤부터 사촌동생은 불안한 듯한 얼굴을 했다. "더 가야 해?" "그래, 더 가야 해." 하고 내가 말했다. 창 밖의 풍경은 눈에 익은 것이었으므로 불안은 느끼 지 않았지만, 버스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스피드를 내고 있었다. 새로운 형의 대형 버스는 마치 교활한 동물처럼 아스팔트 도로에 딱 붙어서 흐릿한 소리를 내며 경사면을 올라갔 다. 사촌동생이 또 내 시계를 봤다. 사촌동생이 다 보고 나자, 나도 시계를 봤다. 10시 40분이었 다. 마을은 조용하고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통근 시간대의 러시 아워가 끝나고 주부들이 쇼핑을 가기 전인 주택가의 조용한 한때였다. 그 속을 거의 논스톱으로 버스는 지나쳐갔다. "저어, 그러니까 우리 아빠 회사에서 일하게 되는 건가?" 학 사촌동생이 물었다 "아니." 라고 말하고 나서 나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아냐,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런데 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야." 라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누군가에게 그런 소리 들었어?" 사촌동생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일하면 좋을 텐데. 죽 이곳에 살면서 말야. 사람도 모 자란다던데. 아마 모두 기뻐할 거야." 운전사가 정류장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버스는 스피드를 늦추지 않고 스 쳐지나갔다. 나는 손잡이에 매달린 채, 한동안 그리움이 이는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위의 안쪽에는 공기가 뭉쳐 있는 것 같은 더부룩한 감각이 있었다. "나한테는 별로 맞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던 사촌동생은 당황 해서 왼쪽 귀를 내게로 향했다. "일이 내게 맞지 않아." 하고 내가 반복해서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난 후, 그 말에 사촌동생 이 상처를 입은 것 같은 기색을 느꼈다. 어지만 어쩔 수 없다. 거짓말은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가 적당히 한 말이 고모부의 귀에 들어가거나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쓸데없이 일이 복잡해진 다. "재미 없어서?" 하고 사촌동생이 물었다. "재미 없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내게는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그렇군." 하고 그는 말했다. 그것으로 약간 납득한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도 사촌동생도 죽 입을 다물고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 었다. 산의 경사면을 올라감에 따라 집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울창한 거목의 가지가 짙은 그림자를 길 위에 드리우게 된다. 벽이 낮고 뜰이 넓은, 페인트칠된 외국인 주택도 눈에 띄기 시작한다. 바 람이 왠지 차가워진다. 돌아다보니 눈 아래에 바닷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나와 사촌동생 은 그런 풍경을 죽 눈으로 좇고 있었다. 우리가 병원 앞에서 버스를 내릴 때에도 노인들은 여전히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몇 명인가는 목소리를 높여 웃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명 재미 있는 노인이 있는 듯 그 주위에는 죽 웃음이 일고 있었다. 나는 손잡이 옆의 하차용 벨을 누르고 버스가 서자, 사촌동생에게 신호 를 하고 출구로 나갔다. 몇 명인가의 노인이 우리 쪽을 힐끗 쳐다보았으나, 대부분은 버스가 서 거나 우리가 내리거나 하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지면에 내려서자 공기 압축 기 소리와 함께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리고 노인을 가득 태운 버스는 경사면을 올라 큰 커브길 을 돌아 사라졌다. 노인들이 대체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결국 알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내가 버스가 간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사촌동생도 옆에서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왼쪽 귀는 언제 말을 걸든지 알 수 있도록 죽 나를 향해 있었다. 그런 일은 익숙하지 않으 면 어쩐지 이상하다. 언제나 뭔가를 바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 가자." 하고 말하고, 나는 사촌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약속시간이 되어 사촌동생이 진찰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내 려와 식당에 들어갔다. 쇼케이스에 들어 있는 식품 견본은 모두 맛이 없어 보였지만, 배가 고팠 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괜찮아 보이는 팬케이크와 커피 세트를 주문했다. 나온 음식을 먹어 보 니 커피 맛은 나쁘지 않았으나 팬케이크는 꽤 심한 편이었다. 나는 어떻게 반 정도는 목 안으로 밀어넣었으나, 나머지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접시를 한쪽으로 밀쳐 놓았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식당에는 나 외에는 한 가족밖에 없었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아 버지가 입원 환자고 어머니와 어린 두 딸은 문병객이었다. 여자 아이는 쌍둥이로 똑같은 원피스 를 입고, 둘 다 웅크린 자세로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친 건지 병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겉보기에 그리 심한 것은 아닌 것 같았고, 부모도 아이들도 각각 지루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창 밑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잔디는 균일하게 깍여 있었고, 그 사이로 자갈로 깐 산책길이 나 있었다. 곳곳에서 스프링클러가 빙글빙글 돌며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높은 목소리로 우는 꼬리가 긴 새 두 마리가 그 위를 똑바로 가로지르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넓은 잔디밭의 정원 저편에는 테니스 코트와 바스켓 볼 코트가 있었다. 테니스 코트에는 제대로 네트 가 걸려 있었으나 사람은 없었다. 테니스 코트와 바스켓 볼 코트를 따라 느티나무 거목이 벽처 럼 일렬로 서 있다. 그 가지 사이로 바닷가 보인다. 잎이 울창하게 우겨져 있는 탓에 수평선까 지는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반짝반짝 초여름의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창 바로 아래에는 철망으로 주위를 두른 가축 우리가 있었다. 그 우리는 다섯 부분으로 나누 어져 있었고, 원래는 여러 동물을 길렀는지 모르지만, 지금 남아 있는 건 산양과 토끼뿐이었다. 산양 한 마리와 토끼 두 마리. 토끼는 둘 다 갈색으로 쉴새 없이 풀을 뜯고 있었다. 산양은 목 뒤가 가려운 듯 철망을 두른 지주에 세차게 목을 비벼대고 있었다. 꽤 오래 전에 이와 똑같은 풍경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넓은 잔디밭이 있고 바닷가 보이고, 테니스 코트와 토끼와 산양이 있고, 쌍둥이 여자 아이가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있 는... 그런 풍경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착각이었다. 내가 이 병원에 온 건 이번이 처음 이었고, 정원이나 바다, 테니스 코트는 그렇다 치더라도, 토끼와 산양과 여자 아이까지 어딘가 다른 장소에도 똑같이 있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 양 다리를 모아 맞은 편 의자 위에 올리고 눈을 감은 후 크게 한 번 숨을 쉬었다. 눈을 감자 두터운 암흑 속에 응어리 같은 것이 보였다. 그것은 하얀 다이아몬드 형의 가스체로, 현미경으로 보는 미생물처럼 부풀었다 주러들었다 했다. 기묘한 형태였다. 얼마 후 눈을 떴을 때는 일가족 네 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식당의 손님은 이제 나 혼자뿐 이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여 지루할 때면 한 개비 피고 나서는 글라스의 물을 마시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아까 느낀 기시감(旣視感)은 머릿속에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병원에 간 건 8년 전의 일로, 그것도 이곳과는 전혀 외관 이 다른 해변가의 병원이었다. 그 병원에도 식당이 있었는데 창 밖에는 협죽도밖에 보이지 않았 다. 낡은 병원으로 언제나 비가 오고 있는 듯한 냄새가 났다. 그러니까 이곳과 혼동할 리가 없 다. 그 해 여름 나는 17세였다. 나는 그 해에 달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내려고 한동안 시도해 보았으나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선지 무엇 하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같은 클래스에 있던 몇몇 친구들의 얼굴은 금방 떠올랐지만, 생각이 나는 건 그것뿐이고 그것이 어떤 일이나 정경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다.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오히려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있다. 그것을 박으로 잘 끌 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뭐랄까, 일종의 제어 장치 같은 것이 작동해서 머리의 작은 구멍에서 겨우 나오는 기억을 마치 가위로 도마뱀의 꼬리를 잘라 버리듯 조각 조각의 단편으로 바꿔 버리 는 것이다. 어쨌든 그 해 여름 나는 17살이었고 친구와 둘이서 그 해변가의 낡은 병원에 갔다. 그 친구의 걸 프랜드가 그곳에 입원해 가슴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문병을 갔던 것이다. 수술이라고는 해도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고, 선천적으로 가슴 부위에 뼈 하나가 약간 안쪽을 향해 어긋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정상으로 돌리는 수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별로 기술을 요하는 수술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할 거라면 너무 나이가 들면 힘이 드니까 여름방학에 맞춰 수 술을 해 버리자는 것이었다. 수술 자체는 금세 끝났지만 뼈의 위치가 심장에 가까웠기 때문에 의사가 수술 후의 경과를 보고 싶다는 것도 있고, 그녀도 입원한 김에 정밀검사를 받겠다고 해서 결국 그곳에 2주일 가까이 입원하고 있었다. 우리는 125CC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병원까지 갔 다. 갈 때는 그가 운전하고 돌아올 때는 내가 운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친구 걸 프랜드의 병문안을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가 꼭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다. "혼자 병원에 가서 얼굴 마 주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야." 하고 그가 말했다. 나도 그도 그 때까지 병원 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병원이라는 것에 어떤 곳인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가 도중에 과자점에 들러 초콜릿 상자를 샀다. 나는 한 손으로는 그의 벨트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초콜릿 상자를 잡고 있었다. 매우 더운 날이라, 우리의 티셔츠는 양쪽 다 따므로 흠뻑 젖었다가 그것이 다시 바람에 마르곤 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덕분에 가축 우리 같은 냄새가 났 다. 친구는 운전을 하면서 내내 뜻을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자니 겨드 랑이 냄새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우리는 병원 문을 들어서기 전에 해변가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그 주변의 나무 그늘에 누워 쉬 었다. 바다는 그 무렵에는 이미 더러워져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15분 정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초콜릿은 이미 진흙처럼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초콜릿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둘이서 이곳에 있다는 게 말야." "이상하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이상하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고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예를 들어 어떤 점이?"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지만 장소나 시간, 아마 그런 것일거야." 8년전의 일이다. 그 친구는 이미 죽고 없다. 나는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나서 카운터를 보는 여자애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 커피 식권을 산 다음, 그것을 웨이트리스에게 주고 테이블로 돌아와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두 잔째 커피가 운반되어 왔다. 커핏잔 옆에 봉지에 든 설탕과 크림이 든 작은 플라스틱 용기가 곁들여져 있었 다. 나는 우선 설탕 봉지를 뜯어 재떨이에 붓고 그 위에 크림을 붓고는, 담배 꽁초로 진흙처럼 될 때까지 뒤섞였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건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아니, 꽤 시간 이 지나도록 자신이 그러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재떨이 안에 그래뉴당(정제 설탕)과 크림 과 담뱃잎이 엉망진창으로 섞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때때로 그렇게 될 때가 있다. 감정이 잘 억제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몸의 밸런스를 확인하기 위해 양 손으로 커핏잔을 잡고, 컵에 입을 대고는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뜨거운 커피가 입술에서 목으로, 목에서 식도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 고 나는 내 몸 속으로 나 자신이 푹 빠져드는 것을 확인한다. 테이블 위에서 양 손을 힘껏 펼쳤 다가 다시 모았다. 손목시계의 초(秒) 디지털 표시가 01에서 60까지 변화해가는 것을 한차례 바 라본다.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하나 하나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특별한 기억은 아닌 것이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 친구가 그 걸 프렌드를 문병갔고, 나는 그를 따라갔을 뿐이다. 그 외의 사건은 아 무것도 없었다. 굳이 진지하게 생각해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셋이서 식당의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콜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 녀는 매우 배가 고팠기 때문에 코코아와 도넛 2개를 추가하고도 여전히 만족스러운 것 같지 않았 다. "퇴원할 때쯤에는 돼지가 되겠다." 라고 친구가 말했다. "어머, 회복기라 괜찮아."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그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창밖에 나란히 심어 놓은 협죽도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것은 매우 큰 협죽도로, 마치 조그마한 숲처럼 보였다. 파도 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창 밖의 난간은 바닷바람 때문에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식당 안에도 확실히 병원 냄새가 났다. 먹거나 마시는 것에도 병원 냄새가 났다. 나는 병원에 온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런 냄새에 둘 러싸임으로써 망연하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파란 파자마에는 두 개의 가슴 포켓이 달려 있었다. 한쪽 포켓에는 왠지 모르지만 볼펜이 하나 꽂혀 있었다. 역 매점에서 파 는 것 같은 싸구려 볼펜이었다. V자형으로 파인 옷 속으로 햇빛에 타지 않은 하얀 가슴이 보였 다. 그 가슴 안인지 밑인지의 뼈가 하나 움직였다고 생각하니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했더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콜라를 마시고, 협죽를 바라보고, 그녀 가슴의 뼈를 생각하고, 대체 어떻게 했더라? 나는 플라스틱 의자 위에서 몸의 위치를 바꾸고 턱을 고인 채, 그다지 의미 있을 것 같지도 않 은 기억을 파헤쳐 보았다. 마치 가느다란 나이프 끝으로 코르크 마개를 헤집듯이.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기억은 거기에서 딱 끊어져 있었다.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것 은 <그녀의 하얀 가슴의 뼈>라는 것까지였다. 그리고 그 후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그녀의 뼈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시간이 거기서 멈춰 버린 것이리라. 그 당시의 나에게는 뼈의 위치를 바꾸기 위해 살을 가른다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주 약간만 살을 가르면 뼈가 있고 그곳에 손을 넣어 위치를 바꾸고 살을 봉해, 그 봉 해진 살이 한 여자의 살로서 다시 기능한다...는 것. 그녀가 몸을 구부리면 V자형의 옷깃 아래 유방 사이의 평평한 살이 보였다. 나는 금방 눈을 감았다. 그 때 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좋을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평평한 하얀 살.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뭔가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주로 내 친구가 이야기했 다. 나의 실패담을 크게 부풀린 꽤 음란한 이야기였다. 내가 여자를 꼬드겨 오토바이로 해변으 로 데리고 가서는 옷을 벗기려고 했는데 이러쿵저러쿵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은 그리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는데 그의 이야기가 재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웃었다. "너무 웃기지 마. 웃으면 아직 가슴이 아프단 말야." 하고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쯤이 아파?" 하고 친구가 물었다. 그녀는 바로 심장 위의 왼쪽 유방 안쪽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친구가 또 거기에 대해 무슨 말 인가를 해서 그녀는 다시 웃었다. 나도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시계를 봤다. 11시 45분. 사촌동생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탓도 있어 식당은 조금씩 번잡해지고 있었다. 그중의 몇 명은 파자마를 입거나 머리에 붕대를 메고 있었다. 식당은 커피 냄새와 런치용 햄버그 스테이크를 굽는 냄새로 가득차 있었다. 작은 여자 아이가 뭔가 열심히 엄마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나의 기억력은 이제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시끌시끌하는 소리가 마치 평평한 연기처럼 나의 눈 높이에서 떠돌고 있었다. 때때로 나의 머리는 매우 단순한 일 때문에 혼란해진다. 사람은 왜 아픈가, 라든지 하는 일 로, 아주 약간 뼈가 어긋나는 것, 귓속의 뭔가가 약간 삐뚤어져 버리는 것, 어떤 종류의 기억이 불규칙하게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 사람이 병드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돌이 신경 사이 로 들어가 살을 녹이고 뼈가 드러나는 것. 그리고 그녀의 파자마 포켓에 들어 있던 하나의 싸구 려 볼펜. 볼펜.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커피 스푼의 양 끝을 양 손으로 잡았다. 시끌시끌하는 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작아졌다. 그녀는 그 볼펜을 들고 종이 냅킨 뒤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녀의 유방 사이의 하얗고 평평한 살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에는 종이 냅킨이 너무 부드러워 금세 볼펜 끝에 걸려 버린다. 그래도 그녀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도중에 잘 그려지지 않으면 그녀는 잠시 쉬며 볼펜의 파란 플라스틱 캡을 물었다. 그다지 세게 문 것은 아니다. 이빨 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살짝 물었다. 그녀는 언덕을 그렸다. 복잡한 형태의 언덕이었다. 고대사의 벽화에 나올 듯한 느낌의 언덕 이었다. 언덕 위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집 안에는 여자가 자고 있었다. 집 주위에는 장님 버 드나무가 울창하다. 장님 버드나무가 여자를 잠들게 한 것이다. "장님 버드나무가 대체 뭐야?" 하고 친구가 물었다. "그런 종류의 버드나무가 있어." 라고 그녀가 말했다. "들어본 적이 없는데." 라고 친구가 말했다. "내가 만들었어." 하고 그녀가 말했다. "장님 버드나무에 꽃가루를 묻힌 작은 파리가 귀로 들 어와 여자를 잠재우는 거야." 그녀는 새로운 종이 냅킨을 뽑아 거기에 커다랗게 장님 버드나무를 그렸다. 장님 버드나무는 철쭉 정도 크기의 나무였다. 꽃은 피지만 그 꽃은 두꺼운 잎에 꼬옥 싸여 있다. 잎은 파랗고 도마뱀의 꼬리가 많이 달라붙은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잎이 가늘다는 점을 빼면 장님 버 드나무는 전혀 버드나무 같지 않았다. "담배 있어?" 하고 친구는 내게 물었다. 나는 담뱃갑과 성냥을 테이블 저편으로 밀었다. 그 는 한 개비 불을 붙여 물고는 내 쪽으로 다시 밀었다. "장님 버드나무의 겉모습은 작지만 뿌리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깊어." 하고 그녀는 설명했다. "실제로 어느 연령에 도달하면 장님 버드나무는 위로 뻗는 것을 그만두고 밑으로 밑으로 뻗어가 니까. 그래서 암흑을 양분으로 해서 자라지." "그리고 파리가 그 꽃가루를 묻혀 가지고 여자의 귀로 들어가 여자를 잠재우는 거로군." 하고 친구 말했다. "그런데, 그 파리는 어떻게 되지?" "여자의 몸 속에 들어가 살을 먹는 거지. 물론." 하고 그녀가 말했다. "냠냠 냠냠." 하고 친구가 말했다. 그렇다. 그녀는 그 여름에 장님 버드나무에 관한 긴 시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줄거리를 우 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여름방학 숙제였다. 그녀는 어느 날 밤 꾼 꿈을 근거로 해서 그 스토리를 만들고 침대 위에서 일 주일 걸려 긴 시를 써냈던 것이다. 친구는 그것을 읽고 싶다고 했지만 그녀는 아직 세세한 부분을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 했다. 그 대신 그녀는 그림을 그려 그 줄거리를 설명해 주었다. 장님 버드나무의 꽃가루 때문에 잠들어 버린 여자를 찾아 젊은 남자가 혼자서 언덕을 올라갔 다. "그건 나야, 틀림없이." 하고 친구가 끼어 들었다. 그녀는 약간 웃고는 다음 이야기를 계 속했다. 그는 길을 막듯이 울창하게 우거진 장님 버드나무를 헤치고 언덕을 올라갔다. 장님 버드나무 가 만연한 후로 이 언덕을 올라간 것은 젊은이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한 손으로 파리를 쫓으면서 경사진 길의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등등. "하지만 결국 고생해서 오두막까지 갔을 때는 이미 그 여자의 몸은 파리에게 다 먹혀 버린 후 였겠지?" 하고 친구가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어떤 의미에서 파리에게 먹혀 버린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슬픈 이야기겠지?" "뭐, 그럴 테지." 라고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그런 잔인하고 어두운 이야기가 너희 학교 수녀님에게 환영 받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미션계 여고에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무척 재미 있다고 생각해." 하고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경(情景) 으로서는 말야." 그녀는 내 쪽을 보고 생긋 웃었다. "냠냠 냠냠." 하고 친구가 말했다. 사촌동생이 돌아온 것은 12시 20분이었다. 그는 멍하니 초점이 잡히지 않는 표정을 하고서 한 손에 약이 든 하얀 종이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가 입구에 모습을 나타내고부터 내 테이블에 도 착할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어쩐지 몸의 밸런스가 잘 잡혀 있지 않은 걸음걸이였다. 그는 내 맞은 편 의자에 앉아 후유, 하고 큰 한숨을 쉬었다. "어땠어?"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응." 하고 사촌동생은 대답했다. 나는 그가 이야기를 꺼내길 한동안 기다렸으나, 이야기는 아무리 기다려도 시작되지 않았다. "배고파?"하고 내가 물어 보았다. 사촌동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먹을래, 아니면 버스로 시내에 내려가서 먹을래?" 사촌동생은 잠시 망설이더니 식당 안을 빙 돌러보고 여기서 먹겠다고 말했다. 나는 점심을 2인분 주문했다. 사촌동생이 목이 마르다고 해서 콜라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사촌동생은 창 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와, 느티나무와 테니스 코트와 스프링쿨러와 산양과 토끼 따위를 보고 있었다. 그는 오른쪽 귀를 죽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심식사가 올 때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나는 무척 맥주가 마시고 싶었지만, 병원 식당에는 물론 맥주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쑤시개를 하나 들고 그것으로 손톱 소제를 했다. 옆 테이블 에는 정장 차림의 중년 부부가 스파게티를 먹으며 폐암에 걸린 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혈담이 나왔다거나, 혈관에 튜브를 넣었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아내 쪽이 거기에 대해 질문을 하고 남편이 대답했다. 암이라는 건 이른바 그 인간의 삶의 방향성이 응축된 것이라고 그는 대답하고 있었다. 점심은 햄버그 스테이크와 흰살생선 프라이였다. 거기에 샐러드와 롤빵과 컵 수프가 딸려 있 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것을 먹었다. 수프를 마시고 빵에 버터를 바르고, 샐러드를 포크로 집고, 햄버그 스테이크에 나이프를 대고, 곁들여서 나온 스파게티를 말아서 입 에 넣었다. 그 사이에도 옆자리의 부부는 내내 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편은 어째서 최근에 급격히 암이 증가했는가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했다. "지금 몇 시?" 하고 사촌동생이 물었다. 나는 팔을 굽혀 시계를 보고 나서 빵을 삼켰다. "12 시 40." 하고 나는 대답했다. "12시 40분." 하고 사촌동생은 따라서 반복했다. "원인은 모르는 것 같아." 하고 사촌동생은 말했다. "어째서 들리지 않는가 하는 것 말이야. 특별히 눈에 띄는 이상도 없고 해서 알 수 없대." "흐음." 하고 나는 말했다. "물론 오늘이 첫날이라 한차례 기초적인 조사를 했을 뿐이니까 아직 자세한 건 모르지만... 어쨌든 장기 치료가 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들은 다 똑같아. 어느 병원이나 똑같다니까. 이유를 모르는 일이 생기면 뭐든지 타인에 게 책임을 떠넘기지. 귓속을 조사하고 뢴트겐을 찍고, 반응을 측정하고 뇌파를 조사해서 별로 특별한 점이 없으면, 결국은 뭐든지 내 책임이 뇌파를 조사해서 별로 특별한 점이 없으면, 결국 은 뭐든지 내 책임이 되어 버린다니까. 귀에 결함이 없으니까 내쪽에 결함이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하지. 어디나 다 그런 식이야. 그래서 모두들 나를 비난하게 되는 거지." "하지만 정말로 들리지 않는 거잖아?" 하고 내가 물어 보았다. "응."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물론 정말로 들리지 않아. 거짓말이 아니야." 사촌동생은 약간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보았지만, 자신이 의심받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정류장의 벤치에 앉아 귀가행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올 때까지는 아 직 15분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내리막길이니까 두 정류장 정도 걷지 않겠느냐고 제의했지만, 사촌동생은 이곳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같은 버스를 타게 되잖아, 하고 그는 말했 다. 그건 그렇다. 근처에 술을 파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촌동생에게 돈을 건네 주고 캔 맥주를 사오게 했다. 사촌동생은 다시 콜라를 마셨다. 여전히 좋은 날씨였고 여전히 5월의 바 람이 불고 있었다. 눈을 감고 짝 하고 손뼉을 치고 나서 다시 눈을 뜨면 여러 가지 상황이 확 바뀌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람이 나의 피부를 달라붙은 여러 가지 존 재감 위에 이상한 줄질 같은 것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는 꽤 자주 이런 감촉을 경험하곤 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신경적인 것에 의해 귀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한다고?" 하고 사촌동생 이 말했다. "나는 모르겠어." 하고 내가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사촌동생은 한동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약봉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500밀리 캔맥주 를 찔끔찔끔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안 들리게 되지?" 하고 내가 물어 보았다. "그러니까."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마치 라디오의 튜닝이 나빠진 듯한 느낌이야. 파장이 진동하듯이 점점 소리가 작아져서 사라지는데, 사라지고 나서 좀 있으면 다시 파장이 진동하듯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거지. 물론 정상일 경우에 비하면 그래도 꽤 작은 소리지만." "힘들겠군." 하고 내가 말했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게?" 하고 사촌동생이 물었다. "여러 가지 것들이 말야." 하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정말로 얼마나 힘든지는 모를 거야. 얼마나 힘든지 말야. 그리고 귀가 들리지 않는 다는 사실보다 깜짝 놀라게 되는 일들이 의외로 많아서 그게 더 큰일이고 힘이 들어." "그렇군." 하고 내가 말했다. "정말이지 나 같은 귀를 가지고 있으면 아마 여러 가지 일에 자주 놀라게 될 거야."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자기 자랑 같지?"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사촌동생은 종이봉지를 만지작거리며 또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나는 3분의 1만 남은 맥주를 수잿구멍에 쏟아 버렸다. "존 포드의 <리오그란데의 요새>라는 영화 본 적 있어?" 하고 사촌동생이 갑자기 물었다. "아니."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저번에 TV에서 하는 거 봤어." 하고 사촌동생은 말했다. "재미 있는 영화야." "응."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병원 문으로 녹색 외제 스포츠카가 나와서 오른쪽으로 돌아 언덕을 내려가는 것을 바라 보았다. 스포츠카에는 중년 남자가 한 명 타고 있었다. 차는 햇살을 받아 기분 좋게 빛나고 있 어, 마치 지나치게 성장한 벌레처럼 보였다. 나는 암에 대해 생각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리 고 응축된 삶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영화 말인데,"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응." 하고 나는 말했다. "첫머리에서 요새에 유명한 장군이 나오게 돼. 순찰하러 말야." <리오그란데의 요새> 이야기였다. "응." 하고 내가 말했다. "그 장군을 고참 소령이 맞이하는데 그게 존 웨인이었어. '리오그란데 요새에 오신 걸 환영합 입니다.'라고 말야. 그러자 장군이 이렇게 말해. '오는 도중에 인디언을 몇 명 봤는데 주의하 는 것이 좋겠다.'고 그 말에 존 웨인은 이렇게 대답해. '괜찮습니다. 각하가 인디언을 볼 수 있었다는 건 실제로는 인디언이 없다는 거니까요.'라고 말야. 정확한 대사는 잊었지만 대체로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뱉어냈다. "그러니까 아무의 눈에나 보이는 건 사실은 별 게 아니라는 이야긴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되나?"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의미는 자 모르겠지만 귀에 대해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영화의 그 장면을 떠올리곤 해. '인디언을 볼 수 있었다는 건 실제로 는 인디언이 없다는 겁니다'라고." 나는 웃었다. "이상해?" "이상해."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서 사촌동생도 웃었다. "영화 좋아해?"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좋아해."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하지만 귀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거의 보지 않아서 그리 많이 보진 못했어." "귀 상태가 좋아지면 영화보로 가자."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시계를 봤다. 1시 17분. 버스가 오려면 아직 4분 남았다. 나는 고개를 들고 멍하니 하 늘을 바라보았다. 사촌동생이 내 팔을 끌어다 시계를 보았다. 나는 계속 하늘을 보고 있다가 이제 4분 지났으려니 하고 시계를 봤으나 실제로는 2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저어."하고 사촌동생이 내게 말했다. "내 귀 볼래?" "어째서?" 하고 나는 말했다. "그냥."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좋아."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뒤를 향해 자세를 고치고 앉아 오른쪽 귀를 내 쪽으로 향했다. 사촌동생의 머리는 짧았 기 때문에 그대로도 귀를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모양이 좋은 귀였다. 전체적으로 작았으나 귓불의 살만은 통통하고 두껍게 솟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귀를 천천히 바라본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귀에는 어쩐지 신기한 점이 있었거나 튀어나와 있거나 했 다. 나로서는 어째서 귀가 그런 이상한 형태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집음(集音)이나 방 어 등의 기능을 추구하고 있는 사이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이 되어 버렸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구불구불한 벽에 둘러싸인 채 검은 구멍이 뺑 뚫려 있었다. 귀의 구멍 자체는 특 별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됐어." 하고 나는 한차례 관찰한 다음 말했다. 사촌동생은 빙그르르 앞으로 돌며 벤치에 고쳐 앉았다. "어때? 뭐 이상한 데 있어?" 하고 그가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건 하나도 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사소한 분위기라든가, 뭐 그런 거라도 느낀 거 없어?" "아주 평범한 귀야. 다른 사람들 것과 똑같아." 하고 나는 말했다. "흐음." 하고 그는 말했다. 사촌동생은 그렇게 간단히 소감을 들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치료는 아팠어?"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렇지도 않아. 대체로 이제까지와 비슷해."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청력검사를 새 기계 로 한 것 빼고는 별로 다른 게 없어. 이비인후과라는 곳은 어디나 하는 게 비슷비슷한가 봐. 비슷한 선생님이 있고, 비슷한 질문을 하고 말야."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같은 곳을 같은 식으로 마구 휘저어 놓으니까 이젠 어쩐지 닳을 대로 닳아 버린 것 같은 기분 이 들어. 내 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나는 손목시계에 눈을 돌렸다. 벌써 버스가 올 시간이었다. 나는 바지 포켓에서 잔돈을 한 움큼 집어 2백 80엔을 세어서 사촌동생에게 건네 주었다 사촌동생은 그 금액을 다시 한 번 계산 하고서 소중한 듯이 손에 쥐었다. 나와 사촌동생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언덕길 저편의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보면서 벤치에 나란히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사촌동생의 귀에 소굴을 만들고 있을 지도 모르는 무수하고 작은 파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6개의 다리에 잔뜩 꽃가루를 묻히고 사촌동생의 귓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서 부드러운 살을 마구 먹어대고 있는 파리에 대해서. 가만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도 그들은 사촌동생의 복숭아빛 살 속으로 들어가 즙을 마시고, 뇌 속에 알을 낳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계단을 천천히 위쪽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들의 존재는 모른 다. 그들의 몸은 너무도 작고 그들의 날갯소리는 너무도 낮다. "28번." 하고 사촌동생이 말했다. "28번 버스 맞지?" 언덕길 오른편의 커다란 커브길을 한 대의 버스가 이쪽을 향해 빙 돌아서 오고 있는 것이 보였 다. 눈에 익은 낡은 버스로, 정면에 <28>이라는 번호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왼손을 들어 버스 운전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사촌동생은 손바닥을 펴고 다시 한 번 잔돈을 샜 다. 그리고 나와 사촌동생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버스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 춤추는 난쟁이 꿈속에 난쟁이가 나타나 나에게 춤을 추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꿈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꿈 속의 나도, 현실에서와 마찬가 지로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지만, 지쳐서 춤을 출 수 없을 것 같네."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난쟁이는 그 일로 인해 그다지 기분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난쟁이는 혼자서 춤을 추었다. 난쟁이는 지면에 휴대용 전축을 놓고 레코드를 걸고서 춤을 추었다. 레코드는 전축 주위에 가 득 널려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몇 장인가를 손에 쥐고 살펴보았다. 거기 있는 음악의 종류는 실로 잡다했다. 마치 눈을 감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레코드 의 내용과 재킷은 대부분 달랐다. 난쟁이는 일단 걸었던 레코드를 재킷에 넣지 않고 그대로 내 팽겨쳤기 때문에, 나중에는 어느 레코드가 어느 재킷에 들어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결국은 적 당히 쑤셔 넣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글렌 밀러 오케스트라 재킷에 롤링 스톤즈의 레코드가 들 어 있기도 하고,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조곡(組曲)>재킷에 미치 밀러 합창단의 레코드가 들 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난쟁이는 그런 혼란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결국, 그것이 적어도 음악이고 거기에 맞추어 춤을 출 수만 있다면, 난쟁이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난쟁이는 지금 <기타 음악 명곡집>이란 재킷에 들어 있던 찰리 파커의 레코드에 맞춰 춤추고 있었다. 찰리 파커의 맹 렬하게 빠른 음표를 온 몸으로 빨아들이며, 난쟁이는 질풍과 같이 춤을 추었다. 나는 포도를 먹 으며 난쟁이의 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쟁이는 춤을 추며 몹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난쟁이가 머리를 흔들면 얼굴의 땀이 사방으로 튀었고, 손을 흔들면 손가락 끝에서도 땀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도 난쟁이는 쉬지 않고 계속 춤을 추었다. 레코드가 끝나면 나는 포도 그릇을 지면에 놓고 새로운 레코드를 걸었다. 그리고 또 난쟁이는 춤을 추었다. "자네는 정말 춤을 잘 추는군." 하고 나는 말을 걸었다. "마치 음악 그 자체야." "고마워." 라고 난쟁이는 뽐내며 말했다. "늘 그런 식으로 춤을 추나?" 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런 셈이지." 라고 난쟁이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난쟁이는 발끝으로 서서 빙글, 하고 능숙하게 한 바퀴 돌았다. 더부룩하고 부드 러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박수를 쳤다. 그런 멋진 춤을 나는 그 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난쟁이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거기서 곡이 끝났다. 난쟁이는 춤을 멈추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레코드 바늘이 칙칙거리며 같은 곳을 돌고 있기에 나는 바늘을 들고 전 축을 껐다. 그리고 적당한 레코드 재킷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얘기하자면 긴데." 라고 난쟁이는 말하고 힐끗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아마 시간이 별로 없겠지." 나는 포도를 집어먹으며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였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지만 난쟁이의 긴 신 상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도 좀 지겹고, 게다가 이것은 꿈이다. 꿈이란 그렇게 긴 시간 꾸는 것 이 아니다. 언제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것이다. "북쪽 지방에서 왔네." 하고 난쟁이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지껄이기 시작하며 손 가락을 탁, 하고 튕겼다. "북쪽의 인간들은 아무도 춤추지 않아. 아무도 춤추는 법을 몰라. 누구도 춤이란 게 있다는 것 자체를 몰라. 그렇지만 나는 춤을 추고 싶었네. 발을 밟고 손을 돌리고 목을 흔들며 빙글 돌고 싶었네. 이런 식으로." 난쟁이는 발을 밟고 손을 돌리고 목을 흔들며 빙글 돌았다. 자세히 보니, 스텝을 밟는 것과 손을 돌리는 것과 목을 흔드는 것과 빙글 도는 것이, 마치 전등이 터질 때처럼 일제히 몸에서 분 출되고 있는 듯했다. 하나 하나의 동작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네 동작이 하나가 되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아한 움직임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추고 싶었네. 그래서 나는 남쪽으로 왔네. 남쪽에 와서 무용수가 되어 술집에 서 춤을 추었네. 내 춤은 호평을 얻어 황제 앞에서도 추게 되었네. 그래, 그건 물론 혁명 전의 이야기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돌아가시고 나도 마을에서 쫓겨났네. 그래 서 숲속에서 지내게 되었네." 난쟁이는 다시 광장 한복판으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레코드를 걸었다. 프랭크 시 나트라의 낡은 레코드였다. 난쟁이는 시나트라의 목소리에 맞추어 <나이트 앤드 데이>를 부르 며 춤을 추었다. 나는 황제의 옥좌 앞에서 춤추는 난쟁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휘황찬란한 샹 들리에와 아름다운 궁녀들, 진귀한 과일과 근위병의 창, 뚱뚱한 환관, 보석이 수놓인 가운으로 몸을 감싼 젊은 황제, 땀을 흘리며 곁눈질도 하고 않고 춤추는 난쟁이... 그런 광경을 상상하고 있으면, 어딘가 먼 곳에서 지금이라도 혁명의 포성이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난쟁이는 계속 춤을 추고 나는 포도를 먹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숲 그림자가 대지를 덮 었다. 새만한 크기의 거대한 검은 나비가 광장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공기가 선뜩 했다. 슬슬 사라질 때라는 느낌이 들었다. "슬슬 가야할 때인 것 같네." 라고 나는 난쟁이에게 말했다. 난쟁이는 춤을 멈추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춤 구경을 시켜 줘서 고맙네. 매우 즐거웠네." 라고 나는 말했다. "뭘." 하고 난쟁이는 말했다. "이제 더는 못 만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건강하게." 라고 나는 말했다. "아닐세." 라고 난쟁이는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뭐가?" 하고 나는 물었다. "자네는 다시 여기에 오게 될 거네. 여기에 와 숲에 살면서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내내 춤을 추게 될 걸세. 그러는 사이에 자네도 춤을 대단히 잘 추게 될 걸세." 난쟁이는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어째서 내가 여기 살면서 자네와 함께 춤추게 된다는 건가?" 라고 나는 좀 놀라서 물어 보았 다. "그건 정해져 있는 걸세." 라고 난쟁이는 말했다. "이제 누구도 그걸 바꿀 수는 없네. 그렇 기 때문에 자네와 난 언젠가 다시 얼굴을 맞대게 될 걸세." 난쟁이는 그렇게 말하고 지그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어둠이 밤의 물처럼 난쟁이의 몸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럼." 하고 난쟁이는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혼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잠이 깨자 나는 혼자였다. 혼자서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다. 창밖에 새의 모습이 보였다. 새가 늘 보던 새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정성들여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고, 빵을 굽고, 커피를 끓였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 고 변소의 모래를 갈고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공장에 갔다. 공장 에서는 코끼리를 만들고 있었다. 물론 코끼리를 만드는 건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만드는 물건이 크고 구조도 복잡하다. 머리 핀이나 색연필 따위를 만드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공장은 광대한 부지에 세워져 몇 개의 동 (棟)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의 동은 매우 넓고 섹션마다 분명하게 색으로 구분되어 있다. 내 경우는 그 달에는 귀 부분의 섹션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천장과 기둥이 노란 건물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헬멧과 바지도 노란색이었다. 나는 거기서 죽 코끼리의 귀를 만들었다. 그 전 달에는 녹색 건물 속에서 녹색 헬멧을 쓰고 녹색 바지를 입고 코끼리의 머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1개월마다 집시처럼 섹션을 이동해 가는 것이다. 그것이 공장의 운영 방식이었다. 그렇게 하면 코끼리가 어떤 건가 하는 전체상이 모두에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평생 귀만 만든다거나 평생 발 끝만 만드는 건, 여기서는 허락되지 않는다. 높은 사람들이 이동표를 만들고, 우리는 그대로 이 동한다. 코끼리 머리를 만든다는 건 매우 보람 있는 작업이다. 대단히 세밀한 일이며 하루가 끝나면 말하기도 싫어질 정도로 녹초가 된다. 한 달 동안 그 일을 했더니, 내 체중은 3킬로나 줄어 버 렸다. 그렇지만 분명히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에 비해 코끼리의 귀를 만드는 일은 정말로 쉬운 일이다. 흐늘흐늘하게 얇은 걸 만들고, 거기에 주름을 잡으면 하나가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귀 만드는 섹션에 가는 걸 <귀 휴가를 얻는다>라고 말한다. 한 달 귀 휴가를 얻은 뒤에 나는 코 만드는 섹션으로 보내진다. 코를 만드는 일, 이것 또한 세심한 신경 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코가 구불구불 잘 움직이고 게다가 정확하게 콧구멍이 뚫리지 않으면 완성된 코끼리가 화를 내 난폭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코를 만드는 동안은 굉장히 긴장한다. 만약을 위해 설명을 보태자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코끼리를 완성시키는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코끼리를 불리고 있는 셈이다. 즉, 한 마리의 코끼리를 잡아 톱으로 귀 와 코와 머리와 몸통과 다리와 꼬리로 분단해, 그걸 잘 조합해서 다섯 마리의 코끼리를 만드는 셈이다. 따라서 완성된 각각의 코끼리의 5분의 1만이 진짜고 나머지 5분의 4는 가짜라는게 된 다. 그러나 그런 건 잠깐 보는 것만으론 알 수 없고, 코끼리 자신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 정도로 코끼리를 잘 만든다. 왜 그런 식으로 인공적으로 코끼리를 만들지 않으면-혹은 불리지 않으면-안 되는가 하면, 우리 는 코끼리에 비해 매우 성급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맡겨 두면, 코끼리란 녀석은 4,5년에 한 마 리밖에 새끼를 낳지 않는다. 우리는 물론 코끼리를 매우 좋아하니까. 코끼리의 그런 습관이나 습성을 보고 있노라면 몹시 안달이 난다. 그래서 우리 손으로 코끼리를 불리기로 한 것이다. 늘어난 코끼리는 악용되지 않도록 일단 코끼리 공급 공사에 팔리며, 그곳에 반 달 동안 유치되 어 엄중한 기능 체크를 받는다. 그런 다음 발바닥에 공사 마크를 찍어 정글에 풀어 놓는다. 우 리는 보통 일 주일에 15마리의 코끼리를 만든다. 크리스마스 바로 전 시즌에는 기계를 모두 가 동시켜 최고 25마리까지 만들 수 있지만, 15마리가 그럭저럭 정당한 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귀 만드는 섹션은 코끼리 공장의 일련 공정 중 제일 편한 곳이다. 힘도 들지 않고, 세심한 신경도 필요치 않으며, 복잡한 기계도 쓰지 않는다. 작업량 자체도 적다. 하루 종일 여유 있게 일해도 되고, 혹은 오전 중에 열심히 해서 목표량을 달성해 놓고 오후엔 아 무것도 안 하고 보내도 상관 없다. 나는 내 동료는 모두 일을 질질 끄는 성미에 맞지 않으므로, 아침에 몰아서 일을 끝내고 오후 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책을 읽는 등,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내기로 했다. 그 날 오후도 우리는 주름 잡는 일까지 끝마친 귀를 10장 벽에 죽 놓고 나서 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나는 꿈에 나타난 춤추는 난쟁이에 대해 동료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 꿈 속의 정경을 하나 도 빠짐 없이 기억하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세세한 부분까지 극명하게 설명했다. 말만 으로 부족한 부분은 실제로 머리를 흔들거나 손을 돌리거나 스텝을 밟아 보았다. 동료는 차를 마시며 "응, 응."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동료는 나보다 5살 위로 체격 이 단단하고 수염이 짙고 말수가 적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얼굴 생김 새 탓도 있어 언뜻 보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니 고 대개의 경우 잠시 그러고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어렵군."하고 툭 한 마디 던질 뿐이다. 이번에도 동료는 내 꿈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혼자 죽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동료가 매우 오 래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동안 심심풀이로 전기 풀무의 배전반을 걸레로 닦고 있었 다. 조금 뒤에 그는 늘 그렇듯이 벌떡 일으키더니, "어렵군."하고 말했다. "난쟁이, 춤추는 난 쟁이라... 어렵군." 내 쪽도 늘 그렇듯이 확실한 형태의 해답을 원했던 게 아니라서, 그걸로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 았다. 단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전기 풀무를 원래대로 해 놓고 나서 식어 버린 차를 마셨다. 그러나 동료는, 그로서는 희귀하게도 그 뒤에도 오랫동안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그러시죠?" 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어디선가 전에도 한 번 난쟁이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라고 그는 말했다. "허." 하고 나는 좀 놀라서 말했다. "들은 기억은 있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생각해 보시죠." "그러지." 하고 동료는 말하고 다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가 간신히 난쟁이에 관해 생각해낸 것은 3시간 정도 지난 다음의 일로, 퇴근 시간이 다 되었 을 무렵이었다. "그렇지!" 하고 그는 말했다. "그래, 겨우 생각났어." "잘됐군요." 라고 나는 말했다. "제6공정에 식모공(植毛工)인 노인 있지. 거 왜, 새하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이가 별로 없는 노인 말야. 혁명 전부터 이 공장에서 일했다는..." "예." 하고 나는 말했다. 그 노인이라면 술집에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 노인이 꽤 오래 전에 내게 그 난쟁이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 춤을 잘 추는 난쟁이 이 야기야. 그 때는 노인의 하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별로 상대하지 않았지만, 자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완전히 허풍도 아니었던 것 같군." "어떤 이야기였나요?" 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글세, 어쨌든 옛날 일이 돼 놔서..." 라고 말하고 동료는 팔짱을 낀 채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해 내지 못 했다. 마침내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아니, 생각 이 안 나."라고 했다. "역시 자네가 노인을 만나 자네 귀로 이야기를 들어 보는게 좋을 것 같 네."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일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나는 제6공정소에 가 보았자만, 이미 노인의 모습은 없었다. 작 은 여자 아이 둘이 마루를 쓰레질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른 여자 아이가 "할아버지는 아마 저쪽 오래된 술집에 있을 거예요." 라고 가르쳐 주었다. 술집에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노인은 그곳 에 있었다. 그는 카운터 의자에 앉아 도시락통 꾸러미를 옆에 놓고 등을 죽 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곳은 대단히 오래된 술집이었다. 너무 너무 오래됐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러니까 혁 명 전부터 술집은 여기에 있었다. 몇 대에 걸쳐 코끼리 기술자들이 여기서 술을 마시고, 트럼프 놀이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벽에는 코끼리 공장의 옛날 사진이 죽 걸려 있었다. 초대 사장이 상아 점검을 하는 사진이라든가, 공장을 방문한 옛날 옛적의 여배우 사진이라든가, 여름 밤의 연 회 사진이라든가, 그런 것들이었다. 단, 황제나 그 밖의 황족이 찍힌 사진, 혹은 <제정적(帝政 的)>이라고 간주된 사진은 전부 혁명군의 손에 불타 버렸다. 그리고 물론 혁명 당시의 사진도 있었다. 코끼리 공장을 점검한 혁명군의 사진, 공장장을 매단 혁명군의 사진... 노인은 <상아를 닦는 3인의 소년공>이란 제목이 붙은 변색한 낡은 사진 밑에 앉아 메카톨주 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고 옆에 앉자 노인은 사진을 손으로 가르키며, "이게 날세." 라고 말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그 사진을 쳐다보았다. 셋이 나란히 상아를 닦고 있는 제일 오른쪽에 12,3세 가량 돼 보이는 소년이 아무래도 노인의 젊었을 때 모습인 듯했다. 이야기를 듣기 전에 는 절대로 알 수 없을 터이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면 뾰족한 코와 빈큼없는 입술에 특징이 있었 다. 아무래도 노인은 늘 이 사진 아랫자리에 앉아 낯선 손님이 가게에 들어올 때마다 "이게 날 세." 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상당히 오래된 사진이군요." 하고 나는 의중을 떠보았다. "혁명 전의 것이지." 하고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혁명 전엔 나도 이런 어린 아이 였지. 모두가 나이를 먹는다네. 자네도 곧 나처럼 되네. 기대해 보게."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반 가까이나 이가 빠진 입을 크게 벌리고 침을 튀기며 웃었다. 노인은 그런 뒤에 한바탕 혁명 때 이야기를 했다. 노인은 황제나 혁명군, 그 어느 쪽도 싫어 했다. 나는 그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대로 내버려 둔 뒤에 틈을 봐서 메카톨주를 한턱 내고, 혹시 춤추는 난쟁이에 대해 뭔가 알고 있지 않느냐고 말을 꺼내 보았다. "춤추는 난쟁이라." 하고 노인은 말했다. "춤추는 난쟁이 이야길 듣고 싶은가?" "듣고 싶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힐끗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왜?" "소문을 듣고 흥미를 느꼈습니다. 재미 있을 것 같아서요."라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노인은 꼼짝 않고 계속 내 눈을 들여다보았지만, 마침내 술취한 사람 특유의 풀어진 눈으로 돌 아갔다. "좋아."하고 그는 말했다. "술을 사기도 했으니 얘기해 주지. 그렇지만,"하고 말하고 노인은 내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말게. 혁명으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춤추는 난쟁이 이야기만큼은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 안 되게 되어 있네.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말게. 내 이름도 들먹여선 안 되네. 알겠지?" "알겠습니다." "술을 주문해 주게. 그리고 칸막이 자리로 가세." 나는 메카톨주를 두 잔 주문하고, 바텐더에게 이야기가 들리지 않게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 위에는 코끼리 모양을 한 녹색 라이트 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혁명 전의 일인데, 북쪽에서 난쟁이가 왔네."하고 노인은 말했다. "난쟁이는 춤을 잘 추었네. 아니, 잘 추는 정도가 아닐세. 그건 이미 춤 그 자체일세. 누구 도 그걸 흉내낼 수가 없네. 바람이나 빛이나 향기나 그림자 등, 모든 게 모여서 난쟁이 속에서 터져나오는 거라네. 난쟁이는 그런 걸 할 수 있었네. 그건... 정말이지, 대단한 거였네." 노인은 몇 개 남은 앞니로 잔을 달그락거렸다. "어르신은 실제로 그 춤을 보셨나요?"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보았냐구? 노인은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나서 테이블 위에서 두 손을 쪽 폈다. "물 론 보았고 말고. 나는 매일처럼 보았다네. 매일 여기서 말일세." "여기서요?" "그렇네." 라고 노인은 말했다. "여기서네. 여기서 매일 난쟁이가 춤을 추었네. 혁명 전 에." 노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무일푼으로 이곳에 흘러든 난쟁이는 코끼리 공장의 직공들이 모이는 이 술집에 들어와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가 나중에 춤 솜씨를 인정받아 무용수로서 대접받게 되었 다고 한다. 직공들은 젊은 여자의 춤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난쟁이의 춤에 대해 툴툴거 렸지만, 마침내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게 되었고 술잔을 손에 들고 난쟁이의 춤을 넋을 잃고 바 라보게 되었었다. 난쟁이의 춤은 다른 어떤 사람의 춤과도 달랐다. 한 마디로 말해 난쟁이의 춤은 평소에는 쓰지 않아서 그런 게 있는지 본인조차 모르고 있던 관객들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백일하에-마치 생선의 내장을 빼내 보이듯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난쟁이는 이 술집에서 약 반 년간 춤을 추었다. 술집에는 늘 손님이 넘쳐났다. 모두 난쟁이 의 춤을 보러 온 손님이었다. 손님들은 난쟁이의 춤을 보고 한없는 행복감에 빠지거나 한없는 비탄에 잠겼다. 난쟁이는 그 무렵부터 춤 하나로 사람들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마침내 이 춤추는 난쟁이에 대한 이야기는 근처에 영지를 가지고 있고, 코끼리 공장과도 밀접 한 인연이 있는 귀족 단장(貴族團長)-그는 후에 혁명군에 붙잡혀 산 채로 아교통에 던져지게 된 다- 의 귀에 들어갔고, 이어서 귀족 단장을 통해 젊은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음악 애호가인 황제는 그 난쟁이의 춤을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황실의 문장이 박힌 수직유도선(垂直誘導船) 이 술집으로 보내져 근위병이 정중하게 난쟁이를 궁정으로 날랐다. 술집 주인에게는 지나칠 정 도로 충분한 액수의 돈이 하사되었다. 술집 손님들은 투덜거렸지만 황제에게 불평을 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체념하고 맥주나 메카톨주를 마시며 다시 예전처럼 젊은 여자의 춤을 보 았다. 한편 난쟁이에게는 궁정의 방 하나가 배당되었고, 거기서 궁녀들이 몸을 씻어 주며 비단옷을 입히고 황제 앞에서 취할 예절을 가르쳤다. 다음 날 밤, 난쟁이는 궁정의 넓은 방으로 안내되었 다. 그 방에는 황제의 직속 관현악단이 대기해서 황제가 작곡한 폴카를 연주했다. 난쟁이는 폴 카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는 처음에는 음악에 몸이 익도록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스피드를 올 려 마침내 회오리 바람처럼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난쟁이를 응시했다. 아무도 입 을 열 수가 없었다. 몇 명의 귀부인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황제가 금분주(金粉酒)가 든 크 리스탈 잔을 엉겁결에 마루에 떨어뜨렸는데도 그 깨지는 소리가 누구 하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 였다. 노인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손등으로 입을 닦았 다. 그리고 코끼리 모양의 라이트 스탠드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나는 잠시 노인이 다시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렸으나, 노인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바텐더를 불러 맥주와 메카톨주를 더 주문했다. 가게는 조금씩 붐비기 시작했고 무대에서는 젊은 여가수가 기타의 현 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제 되었습니까?"라고 나는 물었다. "아," 하고 노인은 생각난 듯이 말했다. "혁명이 일어났고, 황제는 살해되었고 난쟁이는 도망 쳤다. 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펴고 양 손으로 잔을 감싸듯이 대해 맥주를 마신 대로 다음 노인의 얼 굴을 보았다. "난쟁이가 궁정에 들어가고 나서 곧바로 혁명이 일어났나요?" "그러니까, 1년 정도 지나서였지."라고 말하고 노인은 크게 트림을 했다. "잘 모르겠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아까 어르신께서 난쟁이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 히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왜 그렇죠? 난쟁이와 혁명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글세, 그건 나도 잘 모르네. 단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혁명군이 계속 혈안이 되어 난쟁이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걸세. 그로부터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러 혁명이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 지만, 그래도 놈들은 아직 그 춤추는 난쟁이를 찾고 있네. 그러나 난쟁이와 혁명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네. 소문만 있을 뿐이야." "어떤 소문입니까?" 노인은 망설이는 표정을 얼굴에 비췄다. "소문은 결국 소문일 뿐일세. 진실은 알 수 없네.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난쟁이는 궁정에서 좋지 않은 힘을 사용했다고 하네. 그리고 그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네. 내가 난쟁이에 관해 알고 있는 건 그것뿐일세. 더 이상은 모르네." 노인은 후유 하고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고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분홍색의 액체가 입술 가 로 흘러 후줄근한 셔츠를 타고 내렸다. 난쟁이에 대한 꿈은 그 이후 꾸지 않았다. 나는 변함 없이 매일 코끼리 만드는 공장에 다니며 귀를 계속 만들었다. 증기를 사용해 귀를 부드럽게 하고 프레스 해머로 늘리고, 재단하고, 혼합 물을 넣어 5배로 증량해서 말린 다음 주름을 넣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나와 동료는 도시락을 먹 고 제8공정에 들어온 젊은 여자 이야기를 했다. 코끼리 공장에는 꽤 많은 여자가 일하고 있다. 그녀들은 주로 신경 계통의 접속이나 봉제, 그 리고 청소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나면 여자 이야기를 한다. 여자들도 시간이 나 면 우리 이야기를 한다. "그 아가씬 아주 예뻐." 하고 동료는 말했다. "모두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어. 그렇지만 아무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지." "정말 그렇게 예쁜가요?" 라고 나는 의심하듯이 말했다. 소문을 듣고 일부러 가보면 실제로는 대단치 않은 경우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소문만큼 믿을 수 없는 것도 없다. "거짓말이 아니네. 뭣 하면 지금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오라구. 그녀가 미인이 아니라고 한 다면 자넨 제6공정의 눈 만드는 곳에 가서 새눈과 바꿔 다는게 나을 걸세. 나도 마누라만 없으 면 목숨 걸고 덤벼들었을 거네." 라고 동료는 말했다. 점심시간은 이미 끝났지만, 우리 섹션은 여느 때처럼 한가하고 오후에는 할 일이 거의 없었으 므로, 나는 적당히 핑계거리를 만들어 제8공정소에 가보기로 했다. 제8공정소에 가기 위해서는 긴 지하 터널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터널 입구에는 수위가 있었지만, 나하고는 아는 사이 였기 때문에 아무 말없이 보내 주었다. 터널을 나오면 강이 흐르고 있고, 그곳을 조금 내려가면 제8공정소 건물이 있었다. 지붕도 굴 뚝도 핑크색이었다. 제8공정소에서는 코끼리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4개월 전 여기서 일 했기 때문에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구에 서 있는 젊은 수위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오?" 하고 그 새 얼굴의 수위는 말했다. 아직 미끈한 신품의 제복을 입고, 융통성 이라곤 없을 것 같은 녀석이었다. "신경 케이블이 모자라서 빌리러 왔소."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마른 기침을 했다. "이상한데." 하고 그는 내 제복을 힐끔힐끔 보면서 말했다. "당신 귀부분의 사람이지요. 귀 와 다리의 신경 케이블은 호환성이 없을 텐데요?" "얘기하자면 길어요." 라고 나는 말했다. "원래는 코 부분에 가서 케이블을 빌리려 했는데 거 기엔 여분이 없었소. 그리고 그 쪽은 다리용 케이블이 모자라 곤란해하고 있었는데, 그걸 하나 조달해 주면 가는 케이블을 줄 수 있다고 했소. 여기 연락을 했더니 여분이 있다며 가져가라고 해서. 그래서 왔어요." 그는 서류를 훌훌 넘겼다. "그렇지만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그런 이동에 관해서는 사전 연락이 있을 텐데." "이상하네, 그거. 착오가 있었나 보군. 연락을 확실히 하도록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 두 는 게 좋겠소." 수위는 한동안 투덜거렸지만, 내가 일이 늦어져 위로부터 호통이 떨어지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협박하자 툴툴거리며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제8공정소-즉 다리 부분 작업장-은 휑뎅그렁하고 납작한 건물이다. 반지하로 안은 좁고 길었 으며, 바닥은 습기 없는 모래땅이었다. 눈 높이 부분이 딱 지면에 해당되었고 채광을 위해 좁은 유리창이 붙어 있었다. 천장에는 온통 가동 레일이 둘러쳐져 있었고 거기에 수십개나 되는 코끼 리 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마치 코끼리 대군이 하늘에서 춤추며 내려오 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업장에는 모두 30명 정도의 남녀가 일하고 있었다. 건물 안은 어두컴컴했고 모두 모자를 쓰 거나 마스크를 하거나 방진여(防塵用) 안경을 쓰고 있었기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그 중 한 사람, 옛날 동료가 있기에 나는 그에게 새로 들어온 여자가 누구냐고 물어 보았다. "15번대에서 발톱 붙이고 있는 여자." 라고 그는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꼬실 생각은 안 하는게 좋아. 아무튼 귀갑석(龜甲石)같이 단단하니까. 어쩔 도리가 없네."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저어." 하고 내가 말을 걸자,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 제복을 보고, 발 밑을 보더니, 다시 얼 굴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모자를 벗고 방진용 안경을 벗었다. 그녀는 확실히 미인이었다. 머 리카락은 오글오글하게 길었고 눈동자는 바다처럼 깊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시간 있으면 내일 토요일 밤에 함께 춤추러 가지 않겠어요?" 라고 나는 눈 딱감고 유혹 해 보았다. "내일 밤은 한가해서 춤추러 갈 생각이지만, 당신하곤 안 가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달리 누구하고 약속이 있나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약속 따윈 없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다시 모자를 쓰고 방진용 안경을 쓴 다음, 책상 위에 코끼리 발톱을 집어서 발 끝에 대고 치수를 쟀다. 발톱이 조금 컸기 때문에 그녀는 끌을 쥐고 재빨리 발톱을 깍았다. "약속이 없으면 나랑 같이 가시죠." 라고 나는 말했다. "혼자 가는 것보다 일행이 있는게 즐 겁잖아요. 저녁을 맛있게 하는 집도 알고 있어요." "괜찮아요. 나는 혼자서 춤추러 가고 싶어요. 만약 당신도 춤추고 싶으면 오면 되잖아요." "그러죠." 라고 나는 말했다. "좋으실 대로."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나를 무시하고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끌로 깍 은 발톱을 발끝의 홈에 맞추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맞았다. "신참치곤 잘 하네요." 라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그 말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안 했다. 그 날 밤 꿈속에 다시 난쟁이가 나타났다. 그것이 꿈이란 걸 이번에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난쟁이는 숲 광장 한가운데 있는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번엔 전축도 레코드도 없었다. 난쟁이는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처음에 봤을 때보다 조금 늙어 보였지 만, 그래도 혁명 전에 태어난 노인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았다. 느낌으로는 나보다 기껏해야 2,3 살 종도 연상 같았으나,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난쟁이의 나이란 대체로 잘 알 수 없는 법이 다. 나는 특별히 할 일도 없었으므로 난쟁이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서 난쟁이 옆에 앉았다. 하늘은 어둠침침하게 흐려 있었고 검은색 구름이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었 다. 언제 비가 내리기 시작해도 이상할 것 없는 날씨다. 난쟁이는 아마 그 때문에 전축과 레코 드를 어디 비에 젖지 않을 곳에 잘 넣어 두었을 것이다. "어이." 하고 나는 난쟁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하고 난쟁이는 대답했다. "오늘은 춤 안 추나?" 라고 나는 물었다. "오늘은 안 추네."라고 난쟁이는 대답했다. 춤을 추지 않을 때의 난쟁이는 매우 허약하고 불쌍해 보였다. 일찍이 궁정에서 권세를 휘둘렀 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불편한가?"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응." 하고 난쟁이는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아. 숲은 몹시 기온이 내려가기 때문에. 죽 혼자서 살면 여러 가지로 몸을 해치게 되네." "그거 큰일이로군." 하고 나는 말했다. "활력이 필요하다네. 온 몸에 넘치는 새로운 활력 말이네. 언제까지라도 계속 춤출 수 있고, 비에 젖어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수 있고, 들과 산을 뛰어다닐 수 있는 새로운 활력 말일세. 그 게 필요하다네." "흐음." 하고 나는 말했다. 나와 난쟁이는 잠시 말없이 통나무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머리 위 높은 곳에서 나뭇가지 가 바람에 울고 있었다. 때때로 가지 사이로 커다란 나비가 보였다 말았다 했다. "그런데," 하고 난쟁이는 말했다. "자네 뭔가 나에게 부탁할 일이 있지 않은가?" "부탁?"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뭔가 부탁이라니?" 난쟁이는 나뭇가지를 주워 그 끝으로 지면에 별을 그렸다. "여자에 관한 일이네. 그녀가 탐 나지 않는가?" 제8공정에 들어온 예쁜 여자 이야기였다. 난쟁이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데에 나는 놀랐다. 그렇지만 꿈속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야 탐나기야 하지. 그렇지만 자네에게 부탁한다고 될 일도 아니잖는가.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밖에 없지." "자네 힘으로는 아무것도 안 되네." "그럴까?" 하고 나는 좀 발끈해서 말했다. "그렇고 말고. 아무것도 안 되네. 자네가 아무리 화를 내도 안 되는건 안 되는 걸세." 하고 난쟁이는 말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난쟁이가 말하는 대로였다. 나는 어디를 봐도 지 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없고, 잘 생기지도 못했고, 말도 잘 하지 못한다. 장점이라곤 없다. 그렇긴 해도 성격은 뭐 나브지 않다 고 생각하며 일도 열심히 한다. 동료에게도 비교적 호감을 사고 있다. 몸도 튼튼하다. 그러나 젊은 여자가 한눈에 반할 타입은 아니다. 이런 내가 그런 미인을 간단히 유혹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힘을 좀 빌려 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네." 하고 난쟁이는 살그머니 속삭였다. "어떤 힘?" 하고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물어 보았다. "춤이지. 그녀는 춤을 좋아하네. 그러니까 그녀 앞에서 춤을 멋지게 추기만 하면 그녀는 이미 자네 거나 마찬가지네. 그런 다음 자네는 나무 아래에서 열매가 저절로 떨어지길 가만히 기다리 기만 하면 된단 말이네." "자네가 춤추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건가?" "가르쳐 줄 수도 있지." 하고 난쟁이는 말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배워 봐야 소용 없네. 매 일 착실히 연습하더라도 최소한 반 년은 필요하네. 그 정도로 연습하지 않고서는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춤을 출 수가 없다네." 나는 실망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이 안 되네. 반 년이나 기다린다면 누군가가 그녀를 먼저 유혹해 버릴 걸." "언제 추는 건가?" "내일." 하고 나는 말했다. "내일, 토요일 밤에 그녀는 무도장에 춤추러 가네. 나도 가지. 거기서 그녀에게 춤을 신청할 거네." 난쟁이는 나뭇가지로 지면에 똑바른 선 몇 개인가를 긋고, 다시 그 사이에 횡선을 그어 기며한 도형을 그렸다. 나는 말없이 난쟁이의 손 움직임을 꼼짝 않고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난쟁이는 짧아진 담배를 입에서 지면으로 퇘 하고 뱉고 발로 밟아 껐다.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닐세. 만약 그녀를 정말로 원한다면." 하고 난쟁이는 말했다. "탐나지?" "물론 탐나지." 하고 나는 말했다. "어떤 수단인지 듣고 싶은가?" 라고 난쟁이는 말했다. "들려 주게." 하고 나는 말했다. "어려운 게 아냐. 내가 자네 속에 들어가는 걸세. 그리고 자네 몸을 빌려 내가 춤추는 거네. 자네라면 몸도 튼튼해 보이고 힘도 있어 보이니까, 어떻게 출 수 있겠지." "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런 게 가능한 가? 내 몸 속에 들어와 춤춘다는 게." "가능하게. 그렇게 되면 그녀는 이제 확실하게 자네 것이 되네. 보증하겠네. 그녀만이 아닐 세. 그 어떤 여자라도 자네 것일세." 나는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왠지 이야기가 너무 달콤하다. 일단, 난쟁이가 몸 속에 들어 가 버린 뒤에 그 길로 두 번 다시 박으로 나오지 않아 결국 내 몸이 난쟁이에게 탈취당하게 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여자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지만, 그런 경우를 당하는 건 딱 질색 이다. "걱정이 되는 모양이군, 자네." 하고 난쟁이는 내 마음을 꿰뚫어보듯이 말했다. "몸을 빼앗기 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야." "이런저런 자네의 소문을 들었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좋지 않은 소문일 테지." 하고 난쟁이는 말했다. "응, 그렇다네." 하고 나는 말했다. 난쟁이는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네. 아무리 나라고 해 도, 그렇게 간단히 영겁으로 타인의 몸을 탈취할 수는 없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약이란 게 필요하네. 즉 서로 납득한 상태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네. 자네, 영원히 몸을 빼앗기고 싶 지는 않겠지?" "물론." 하고 나는 몸서리를 치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나로서도 아주 무상으로 자네의 연애에 힘을 빌려 주는 건 재미가 없네. 그래서 말 인데," 라고 난쟁이는 손가락을 하나 폈다. "조건이 하나 있네. 그다지 어려운 조건은 아니지 만, 어쨌든 조건일세." "어떤?" "내가 자네 몸 속에 들어가네. 그리고 무도장에 들어가 춤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걸세. 그렇 게 해서 자네는 여자를 자네 것으로 하게. 하지만 그 동안 자네는 단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되네. 여자를 완전히 자네 것으로 하기 전까지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되네, 그게 조건일세." "그러나 말을 하지 않으면 여자를 설득시킬 수 없잖아." 라고 나는 항의했다. "아닐세." 라고 말하고 난쟁이는 머리를 저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네. 내가 춤추기만 하면 어떤 여자든 가만히 있어도 자네 것이 되네. 걱정 말게. 그러니까 무도장에 발을 들여 놓는 순 간 부터 여자를 자네 것으로 만들 때까지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되네. 알겠나? "혹시 말을 한다면?"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 때는 자네 몸을 갖겠네." 라고 난쟁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만약 말을 하지 않고 일이 잘 된다면?" "여자는 자네 것이 되지. 그리고 나는 자네 몸에서 빠져나와 숲으로 돌아가겠네." 나는 깊은 한숨을 쉬고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궁리했다. 난쟁이는 그러는 동안 다시 나 뭇가지를 쥐고 이상한 도형을 지면에 그리고 있었다. 나비가 한 마리 날아와 그 도형 한가운데 앉았다. 나는 솔직히 말해 무서웠다. 줄곧 말을 안 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 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를 안을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제8공정에서 코끼리 발톱 을 각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어쨌든 그녀를 손에 넣고 싶었다. "응하겠네."하고 나는 말했다. "해 보기로 하지." "그럼 결정된 거네." 하고 난쟁이는 말했다. 무도장은 코끼리 공장의 정문 옆에 있어 토요일 밤이 되면 플로어가 코끼리 공장의 젊은 직공 이나 여자들로 터질 듯이 붐빈다. 공장에서 일하는 독신 남녀는 거의 모두가 여기로 온다. 우 리는 여기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친구끼리 모여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가 연인들은 마침내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서로 끌어안는다. "그리웠네." 하고 난쟁이는 내 몸 속에서 감격한 듯이 말했다. "춤이란 이런 걸세. 군중, 술, 조명, 땀 냄새, 여자의 화장품 냄새, 그리웠네." 나는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그녀를 찾았다. 몇 명인가 아는 사람이 내 모습을 보고 어깨 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나도 싱긋 웃으며 인사를 했지만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 는 동안에 관현악단이 연주를 시작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당황할 거 없네. 아직 초저녁이야. 이제부터가 재미 있을 걸세." 라고 난쟁이가 말했다. 원형인 플로어는 동력 장치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플로어를 빙 둘러싸듯이 의자가 죽 놓 여 있었다. 높은 천장으로부터 커다란 샹들리에가 내려와 잘 손질된 댄스 플로어는 마치 빙판처 럼 반짝반짝 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플로어 위쪽은 스포츠 경기장의 관객석처럼 높이 솟아올 라 있고 밴드 스탠드가 있었다. 밴드 스탠드에는 두 팀의 풀 오케스트라가 있어 30분마다 교대 로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호화로운 댄스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오른쪽 밴드는 화려하게 드럼 이 둘이고 악단원은 모두 가슴에 빨간 코끼리 마크를 달고 있었다. 왼쪽 밴드의 자랑거리는 10 개나 늘어선 트롬본으로, 이쪽은 녹색 코끼리 마크를 달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맥주를 주문하고 넥타이를 조금 풀고 담배를 피웠다. 요금제의 댄스걸이 번 갈아가며 내 테이블로 다가와서 "저어, 잘 생긴 아저씨, 저랑 춤춰요." 하며 유혹했지만 나는 상 대하지 않았다. 나는 턱을 괴고 맥주로 목을 축이며 그녀가 모습을 나타내길 기다렸다. 그러나 1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왈츠나 폭스트롯, 드럼 배틀, 트럼펫의 하이 노트가 무도장의 플로어를 헛되이 통과하고 있었다. 혹시 그녀는 처음부터 여기에 춤추러 올 생각도 없 이 단지 나를 놀리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 하고 난쟁이는 속삭였다. "틀림없이 올 테니까, 침착하게 있으라구." 그녀가 무도장 입구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시계바늘이 어느덧 9시를 자난 때였다. 그녀는 몸 에 찰싹 달라붙은 번쩍번쩍 빛나는 원피스 차림에, 검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 바람에 무도 장 전체가 희미해져서 마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같이, 그녀는 빛이 났고 섹시했다. 젊은 남 자 몇 명이 재빨리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에스코트를 신청했지만, 그녀는 손을 한 번 내저으며 가볍게 뿌리쳤다. 나는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그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녀는 플 로어를 사이에 두고 내 맞은 편 테이블에 앉아 붉은 색을 띤 칵테일을 주문하고, 가늘고 긴 담배 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칵테일에는 거의 입도 대지 않았다. 그녀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그걸 비벼 끈 다음, 일어나서 마치 다이빙대라도 향하는 것처럼 댄스 플로어로 나아갔다. 그녀는 아무하고도 짝짓지 않고 혼자서 추었다. 오케스트라는 탱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 는 멋지게 탱고를 추었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넋을 잃을 것 같은 춤이었다. 그녀가 몸을 숙이 면 길고 주름진 검은 머리가 바람처럼 플로어에서 춤추고, 가늘고 흰 손가락이 공기의 현(弦)을 가볍게 튕겼다.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혼자서 자신만을 위해 춤을 추고 있었다. 가만히 보 고 있자니, 그것은 마치 꿈이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 머리는 조금 혼란스러웠 다. 만약 내가 하나의 꿈을 위해 다른 꿈을 이용하고 있다면,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저 아가씨는 정말 잘 추는군." 하고 난쟁이는 말했다. "저 아가씨가 상대라면 춤출 보람도 있겠군. 그럼 슬슬 나가 볼까." 나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테이블에서 일어나 댄스 플로어로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남자들 몇 명을 밀어젖히며 앞으로 나아가 그녀 옆에 서서 딱 하고 구두 뒷굽을 맞부딪쳐 이제부 터 춤추겠다는 걸 모두에게 알렸다. 그녀가 춤을 추며 힐끗 내 얼굴을 봤다. 나는 싱긋 웃어 주었다. 그녀는 거기에 답하지 않고 혼자서 계속 춤을 추었다. 나는 처음에는 천천히 춤을 추었다. 그리고 조금씩 속도를 높여, 마침내는 회오리 바람처럼 춤을 추었다. 내 몸은 이미 내 몸이 아니었다. 내 손과 발, 머리는 내 생각과는 관계없이 자유 분방하게 댄스 플로어 위에서 춤추었다. 그런 춤에 몸을 맡기면서 나는 별의 운행이나 바닷물의 흐름, 바람의 움직임을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춤이란 그런 거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스 텝을 밟고, 손을 돌리며, 머리를 흔들고, 빙그르르 돌았다. 빙그르르 돌자, 머릿속에서 흰 빛의 전구가 터졌다. 여자는 힐끔 나를 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맞추어 빙글 돌고 스텝을 힘있게 내 딛었다. 그녀 속에서도 빛이 터지는 걸 나는 느꼈다. 나는 몹시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 기분이 들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어떤가, 코끼리 공장 따위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즐겁지?" 라고 난쟁이가 말했다. 나는 아 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바싹 말라 말을 하려고 해도 안 나왔다. 우리는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춤을 추었다. 내가 춤을 리드했고 그녀가 거기에 응했다. 그 것은 영원이라고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춤을 멈추고 내 팔 을 잡았다. 나도-혹은 난쟁이도라고 말해야 하겠지만-춤을 멈췄다. 그리고 플로어 한가운데에 서, 우리는 우뚝 선 채로 멍하니 서로의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을 구부려 검정 하이힐을 벗고, 그걸 손에 든 채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보았다. 우리는 무도장을 나와 강을 따라 걸었다. 나는 차가 없었기 때문에 단지 그냥 걸을 수밖에 없 었다. 마침내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이 되고 주변은 밤에 피는 하얀 꽃 향기로 그득했다. 뒤를 돌아보니, 공장 건물이 검게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무도장에서는 노란 불빛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점프 넘버>가 꽃가루처럼 주위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바람은 부드럽고 달빛이 그녀 의 머리카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나 나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춤춘 다음에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길 안내를 받는 맹인처럼 줄곧 내 팔을 잡고 있었다. 언덕을 다 올라간 곳에 넓은 초원이 있었다. 초원은 주변이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마치 종용 한 호수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풀이 허리 높이까지 균등하게 자라나, 밤바람에 날려 춤추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군데 군데에서 빛나는 꽃잎을 가진 꽃들이 머리를 내밀고 벌레를 부르고 있었 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초원의 한가운데까지 걸어가, 아무 말없이 거기에 그녀를 넘어뜨 렸다. "정말로 무뚝뚝한 사람이네요." 라고 말하며 그녀는 웃었고, 하이힐을 그 근방에 던져 버 리고 내 목에 두 팔을 감았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나서 몸을 떼고, 다시 한 번 그녀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꿈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를 이렇게 안을 수 있다니, 스스로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내 키스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였다. 처음엔 콧구멍에서 말랑말랑하고 하얀 뭔가가 기어나오는 게 보였다. 구더기였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커다란 구더기였다. 양쪽 콧구멍에서 구더기가 계속 기어나왔고, 메슥메슥한 송장 썩는 냄새가 돌연 주변을 덮었다. 구더 기는 입속에서 목으로 굴러떨어졌고, 어떤 것은 눈을 타고 머리카락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코의 피부가 스르르 말려 올라갔고, 속에서 녹은 살이 주르륵 옆으로 퍼져 나중에는 두 개의 검은 구 멍만 남았다. 구더기 무리는 아직도 거기서 기어나와 썩은 살에 파묻히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고름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안구가 고름에 눌려 두세 번 실룩실룩하고 부자연스럽 게 경련을 일으킨 후에, 얼굴 양 옆으로 축 처졌다. 동공 속에는 마치 흰 실타래처럼 구더기가 몰려 있었다. 썩은 뇌수에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혀는 거대한 괄태충처럼 스르륵 입술에 처 지더니, 곧바로 문드러져 떨어졌다. 이윽고 입 그 자체도 녹아서 떨어졌다. 털 구멍에서는 피 가 솟아나오고 털이 후루룩 빠졌다. 번드르르한 머리 가죽의 여기 저기를 뚫고 구더기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도 여자는 내 등에 두른 팔의 힘을 빼지 않았다. 나는 여자의 팔을 풀지도 못했 고 얼굴을 돌릴 수도 없었다. 온 몸의 피가 전부 뒤집혀 버릴 것 같았다. 귓가에서 난쟁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얼굴은 한없이 계속 녹고 있었다. 근육이 어느 순간엔가 뒤틀려 버렸는지 턱 뼈가 빠 지며 딱 벌어졌고, 그 바람에 풀 같은 상태의 살고 고름과 구더기덩어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나 는 비명을 지르기 위해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누구라고 좋으니, 누군가가 이 지옥에서 나를 꺼 내 줬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결국 나는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거의 직관적으로 이런 일 이 정말로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건 난쟁이에 의해 이루어진 단순한 속임수인 것이다. 난쟁이는 내가 소리를 지르게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일단 소리를 질러 버리면 내 몸은 영원히 난쟁이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거야말로, 난쟁이가 바라고 있는 것 이다. 나는 각오를 하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쓱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눈을 감자 초원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여자의 손가락이 단단히 박혀 있는 것이 느껴졌 다. 나는 큰 맘 먹고 여자 몸에 손을 둘러 이쪽으로 당긴 다음 그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의, 일 찍이 입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부분에 입술을 댔다. 미끈미끈한 살덩이, 꼬물꼬물하는 구더기 뭉 치가 내 얼굴에 닿았고, 지독하게 역겨운 냄새가 내 콧구멍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일 순간의 일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원래의 아름다운 여자와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부드 러운 달빛이 그녀의 분홍빛 뺨 위에 비추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난쟁이에게 완전히 이긴 것을 깨 달았다. 나는 드디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모든 걸 달성한 것이다. "자네가 이겼네." 라고 난 쟁이는 녹초가 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자네 걸세. 나는 나가겠네." 그리고 난쟁이는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걸로 끝난 게 아니야." 라고 난쟁이는 계속했다. "자네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 길 수 있네. 그러나 지는 건 단 한 번이네. 자네가 한 번 지면, 모든 게 끝나게 되네. 그리고 자네는 언젠가 반드시 지게 될 거네. 그렇게 되면 그걸로 끝이네. 알겠나? 나는 그걸 계속 기 다리고 있을 거네." "어째서 내가 아니면 안 되나?" 라고 나는 난쟁이를 향해 소리질렀다. "왜 상대가 다른 사람 이면 안 되느냐니까?" 그러나 난쟁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웃을 뿐이었다. 난쟁이의 웃음소리는 잠시 주변을 맴돌았 지만, 이윽고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결국, 난쟁이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나라 안의 관헌들에게 쫓기고 있다. 무도 장에서 내 춤을 본 누군가가 -그 노인일지도 모른다-당국에 출두해서 내 몸에 춤추는 난쟁이 가 들어가 춤춘 사실을 고발한 것이다. 경관들은 내 생활상을 감시하는 한편, 내 주변의 여러 사람 들을 불러 세심하게 심문했다. 내 동료가, 내가 언젠가 난쟁이 이야기를 했다고 증언했다. 나 에게 체포 영장이 떨어졌다. 경관들이 와서 공장을 에워쌌다. 제8공정의 미녀가 내 작업장에 와서 나에게 살짝 알려 주었다. 나는 작업장을 뛰쳐나와 완성된 코끼리를 정장해 두는 풀에 띄 어들어, 그 중 한 마리의 등에 올라타고는 숲으로 도망쳤다. 그 때 경관을 몇 명인가 밟아 죽였 다. 그렇게 해서 나는 벌써 한 달 가까이 숲에서 숲으로, 산에서 산으로 도망 다니게 되었다. 나 무 열매를 먹고, 냇물을 마시며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관의 수는 많다. 그들 은 어젠가 날 잡을 것이다. 그들은 날 잡으면 혁명이란 이름 아래 윈치에 칭칭 감아서 갈갈이 찍을 것이다. 얘기인즉은 그렇다. 난쟁이는 매일 밤 내 꿈에 나타나 자신을 내 몸에다 넣으라고 말한다. "적어도 경관에게 잡혀 갈갈이 찢기지는 않을 테니까." 라고 난쟁이는 말한다. "그 대신 영원히 숲속에서 춤춰야 하겠지?" 하고 나는 묻는다. "물론." 하고 난쟁이는 말한다. "선택은 자네가 하는 거네." 그렇게 말하고 난쟁이는 킥킥거리며 웃는다. 그러나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할 수가 없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몇 마리나 되는 개들이 함께 짖고 있는 소리다. 그들은 바로 여기 까지 와 있는 것이다. 세 개의 독일 환상 1. 겨울 박물관으로서는 포르노그라피 섹스, 성행위, 성교, 교합, 그 외의 어떤 거라도 상관 없지만, 그러한 말이나 행동, 현상에서 내가 상상하는 건 언제나 겨울의 박물관이다. -겨울의 박물관- 물론 섹스에서 겨울의 박물관에 이르기까지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몇 번이나 지하철을 갈 아타고, 빌딩 지하를 빠져나가 어딘가에서 계적을 보내야 하는 품이 든다. 그러나 그런 귀찮은 일은 처음 몇 번뿐이고, 그러한 의식 회로의 도정에 일단 익숙해지면 누구나 눈 깜짝할 사이에 겨울의 박물관에 도달하게 된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섹스가 거리의 화제가 되고 교접의 물결이 어둠을 메울 때면, 나는 늘 겨울의 박물관 현관에 서 있다. 나는 모자를 모자걸이에 걸고, 코트를 코트걸이에 걸고, 장갑을 책상 구석에 포개 놓 고 나서,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는 걸 생각해 내고 그걸 풀어 코트 위에 건다. 겨울의 박물관은 결코 커다란 박물관은 아니다. 수집품이나 분류나 운영 요령도 처음부터 끝 까지, 정말이지 개인 레벨의 박물관이다. 우선 여기에는 일관된 개념이란 게 없다. 이집트 개 의 신을 조각한 조상이 있는가 하면, 나폴레옹 3세가 쓰던 분도기가 있고, 사해의 동굴에서 발견 한 고대의 방울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뿐인 것이다. 그것들 하나 하나는 어떤 곳으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마치 굶주림과 추위에 단단히 목을 잡힌 고아처럼, 그것들은 케이스 속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않고 눈을 감고 있다. 박물관 관내는 매우 조용하다. 개관 시각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다. 나는 나비 모양의 태엽 감는 쇠붙이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 그 걸로 현관 옆에 놓은 기둥시계의 태엽을 감는다. 그리고 바늘을 정확한 시각에 맞춘다. 나는-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이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의 고요한 햇살과 조용한 성행위의 예감이, 늘 그렇듯이 아몬드처럼 박물관의 분위기를 지 배하고 있다. 나는 관내를 빙 돈 다음, 창의 커튼을 열고 히터 꼭지를 활짝 연다. 그리고 나서 유료 팜플렛 을 가지런히 정돈해 입구에 있는 책상 위에 쌓아 놓는다. 필요한 전등의 콘센트를 조절한다. 즉, 베유사유 궁전 모형에서 A4 스위치를 누르면 왕의 거실의 불이 켜지는 따위의 일이다. 워터 쿨러의 상태도 시험해 본다. 유럽산 늑대의 박제를 아이들 손이 닿지 않도록 조금 안 쪽으로 밀 어놓는다. 세면장의 물비누를 보충한다. 이런 정도의 작업은 미리 하나 하나 순서를 떠올리거 나 생각해 보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움직여 일을 마칠 수 있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요컨대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나 자신인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작은 부엌에 들어가 이를 닦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소스팬(긴 자루가 달린 움푹한 냄비)에 붓고 그걸 전기 풍로에 데운다. 전기 풍로나 냉장고, 칫솔 따위는 물론 유서 깊 은 것이 아니고 근처에 있는 가전제품 가게나 잡화상에서 사온 것이지만, 박물관 안에 놓여 있으 면 그런 것까지도 어쩐지 박물관적으로 보인다. 우유조차도 고대의 소에서 짠 고대 우유처럼 보 인다. 나로서도 종종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것은 박물관이 일상을 침식한다고 해야 하는 것 일까, 아니면 일상이 박물관을 침식하는 거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우유가 따뜻해지면,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우유를 마시며 편지함에 쌓여 있는 편지를 뜯어 읽는 다. 편지는 세 범주로 분류된다. 하나는 수도 요금 청구서나 고고학 서클의 회보, 그리고 영사 관의 전화번호 변경 통지 같은 사무적인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박물관에 들러본 사람들이 써 보 내는 여러 종류의 감상이나 불평, 격려, 제안의 편지이다. 사람들은 실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낸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껏해야 태고적 일이 아닌가.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관 옆에 후한 시대의 주기(酒器)가 있다고 해서, 그게 그들에게 어떤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인가? 박물관 이 곤혹스럽고 혼란스러워지지 않게 되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구하면 좋겠다 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그러한 두 종류의 편지를 각각의 서류함에 무감동하게 던져 넣고, 책상 서랍에서 쿠키 깡 통을 꺼내 세 개를 먹고 남은 우유를 마신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남은 편지를 개봉한다. 마 지막 편지는 박물관 주인으로부터 온 것으로 내용은 매우 간결하다. 계란색 아트지에 검은 잉크 로 씌어 있다. 1) 36번의 항아리를 포장해 창고에 넣을 것. 2) 그 대신에 A52의 조상대좌(조각한 상 없음)를 자리 Q21에 전시할 것. 3) 스페이스 76의 전구를 신품과 교환할 것. 4) 다음 달의 휴관일을 입구에 명시할 것. 나는 물론 지시에 따른다. 36번 항아리를 유화의 화포로 써서 창고 안에 넣고, 그 대신에 A52 의 목시 무거운 대좌를 필사적으로 끌어낸다. 의자에 올라가 스페이스 76의 전구를 신품으로 바 꾼다. 대좌는 무게에 비해 별로 눈에 띄지 않고, 36번 항아리는 관객에게 호평이었으며, 전구는 아직 신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건 내가 일일이 의견을 말할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우유컵과 쿠키 깡통을 치웠다. 개관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세면장의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넥타이 매듭을 고치며 페니스가 딱딱하게 발기해 있는 걸 확인했다.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 36번의 항아리 @ A52의 대좌 @ 전구 @ 발기 섹스가 바닷물처럼 박물관 문을 친다. 기둥시계 바늘이 오전 11시의 예각을 새긴다. 겨울 햇 살은 마루를 핥듯이 낮게 방 가운데까지 뻗어 있다. 나는 천천히 플로어를 가로질러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연다. 문을 연 순간에 모든 게 변한다. 루이 14세의 거실 전등이 켜지고 우유가 든 소스팬은 온기 잃는 걸 멈추고, 36번 항아리는 고요한 젤리 모양의 잠속으로 잠겨간다. 내 머리 위에서는 몇 사람의 성급한 사내들이 둥근 모양으로 구둣소리를 울리고 있다. 나는 누구를 이해하는 것도 그만둔다. 누군가 입구에 서 있는 게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고, 입구 따위는 어 찌되어도 상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섹스에 관해서 생각하면 언제나 겨울의 박물관에 있 고, 우리는 모두 거기에서 고아처럼 웅크리고 앉아 온기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소스팬은 부엌 에, 쿠키 깡통은 서랍에, 그리고 나는 겨울 박물관에 있다. 2. 헤르만 게링 요새 1083 헤르만 게링은 베를린 언덕을 파내 거대한 요새를 구축하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 까? 그는 문자 그대로 언덕을 통째로 파내어, 그 내부를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발라 버렸던 것이 다. 그건 흡사 불길한 흰개미의 탑처럼 황혼의 엷은 어둠 속에 선명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급 한 사면을 기어올라가 요새의 정상에 서면, 우리는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동베를린 시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팔방으로 구축된 포대(포대)는 수도를 향해 다가오는 적군의 모습 을 포착해 그걸 격파할 수 있을 터였다. 어떤 폭격기도 그 요새의 두꺼운 장갑(裝甲)을 파괴할 수 없고 어떤 전차도 그곳에 올라올 수 없을 터였다. 요새 안에는 2,000명의 SS 전투부대가 몇 달이라도 굳게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식료품과 음료수 와 탄약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비밀 지하 도로가 미로처럼 뚫려 있고 거대한 에어컨디셔너가 신선한 공기를 요새 안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비록 러시아군 영미군이 수도를 포위해도 우리는 질 리 없다고, 헤르만 게링은 호언했다. 우리는 난공불락의 요새 안에서 산다고. 그러나 1945년 봄, 러시아군이 계절의 마지막 눈보라 같은 모습으로 베를린 시가에 돌입했을 때, 헤르만 게링 요새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지하도로를 화염방사기로 태 우고 고성능 폭약을 설치해 요새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요새는 소멸되 지 않았다. 콘크리트 벽에 금이 갔을 뿐이다. "러시아인의 폭탄으로 헤르만 게링 요새를 무너뜨릴 수는 없지요."라고 그 동독 청년은 웃으면 서 말했다. "러시안인이 부술 수 있는 건 스탈린의 동상 정도죠." 그는 동베를린 시가를 몇 시간이나 들여 빙빙 돌면서 1945년 베를린 전투의 흔적을 하나 하나 나에게 보여 주었다. 어떤 이유에서 내가 베를린 전적지에 흥미를 갖고 있을 거라고 그가 생각했 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열심이었고 새삼스레 내 희망을 설명하기도 이상한 상황이라, 그가 끄는 대로 나는 오후 내내 시가를 돌았다. 그는 나와 그 날 점심 때 텔레 비젼 탑 근처의 카페테리아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안내는 실로 솜씨 있고 요령이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동베를린의 전적지 를 찾아 걸으니 점점, 마치 불과 수개월 전에 전쟁이 막 끝났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온 시가에 탄흔이 잔뜩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 "자, 보세요."라고 그는 말하며 그러한 탄흔 하나를 내게 보여 준다. "러시아군과 독일군의 탄 환은 금방 구별할 수 있어요. 마치 벽을 깨부술 듯이 도려낸 것이 독일군 탄환이고, 쑥 박혀 있 는게 러시아군거예요, 정말이지 질이 달라요." 그는 요 며칠 사이에 내가 만난 동베를린 시민 중 가장 알기 쉬운 영어를 구사한다. "매우 완벽한 영어를 쓰는 군요."라고 나는 칭찬했다. "잠시 선원 생활을 했기 때문이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쿠바에도 갔었고, 아프리카에도 갔었 죠. 흑해에도 오래 있었고요. 그래서 영어를 익히게 되었어요. 지금은 건축기사 일을 하고 있지 만요." 헤르만 게링 요새의 언덕을 내려와, 다시 잠시 밤 거리를 걷고 나서 우리는 운터덴린덴 거리에 있는 낡은 맥주홀로 들어간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맥주홀은 몹시 붐비고 있다. "여긴 닭이 명물이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나는 쌀을 묻힌 닭 요리와 맥주를 주문한 다. 확실히 닭은 나쁘지 않고 맥주도 맛이 좋다. 실내는 따뜻했고, 기분 좋을 정도로 들뜬 분위 기였다. 우리 테이블의 웨이트리스는 킴 칸즈를 매우 닮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밝은 금발에 파란 눈이 고 몸이 꽉 짜여 있으며, 웃는 얼굴이 귀엽다. 그녀는 마치 거대한 페니스를 찬양하는 따스한 모 습으로 맥주 조끼를 끌어안아 우리 테이블로 가져온다. 그녀는 나에게 도쿄에서 내가 알았던 한 여성을 생각나게 한다. 얼굴이 별로 닮은 것도 아니고 어디가 닮은 것도 아닌데, 그 둘은 어딘가 에서 은밀히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헤르만 게링 요새의 잔상이 그녀들을 미궁의 어둠 속에서 맞 스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상당한 양의 맥주를 마시고 있다. 시계는 10시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다. 나는 밤 12 기까지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의 S번 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나의 동베를린 체재 비자는 12시 로 끝나 버리는데, 그걸 1분이라도 어기면 굉장히 귀찮은 꼴을 당하게 된다. "시 교외에 대단히 심한 전투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멍하니 웨이트리스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청년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익스큐즈 미?" 그는 반복한다. "SS와 러시아군 전차가 정면으로 맞닥뜨렸는데 말이죠. 이게 사실상 베를린 전투의 고비가 되 었지요. 철도 조차장 터인데요. 그게 지금도 그냥 그대로 남아 있어요. 전차의 부서진 부품들 따 위를 볼 수 있죠. 친구 차를 빌려서 지금이라도 갈 수 있는데요." 나는 청년의 얼굴을 본다. 그는 홀쭉한 얼굴로 회색 코르덴 윗도리를 입고 양 손을 테이블 위 해 평평하게 올려놓고 있다. 그의 손가락은 길고 반들반들해서 선원의 손가락으로는 보이지 않는 다. 나는 머리를 젓는다. "12시까지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역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돼요. 비자 는 끝나기 때문에." "내일은 어때요?" "내일 점심 전에 뉘른베르크로 출발해요."라고 나는 거짓말을 한다. 청년은 조금 실망한 모습 이었다. 지쳤다는 빛이 그의 표정에서 슬쩍 지나간다. "내일이면 내 여자 친구와 그녀의 여자 친구가 같이 갈 수 있을 텐데요."라고 그는 변명하듯이 말한다. "유감스럽지만."하고 나는 말한다. 미적지근한 손이 내 몸 속의 신경 다발을 쥐고 있는 것 같 은 기분이 든다. 도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기묘한 탄흔투성이의 시 가 한복판에서 완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래도 마침내 그 미적지근한 손은 썰물이 빠지 듯 천천히 내 체내에서 사라져간다. "그렇지만 헤르만 게링 요새는 굉장했지요?"라고 청년은 말하고 조용히 미소짓는다. "40년이나 걸렸어도 아무도 그걸 부술 수 없었던 거죠." 운터덴린덴과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의 교차점에 서면 여러 가지를 시원히 볼 수 있다. 북쪽에 S번 역. 남쪽에 체크포인트 찰리, 서쪽에 브란덴부르크 문, 동쪽에 텔레비젼 탑. "괜찮아요."라고 청년은 나를 향해 말한다. "여기서부터라면 천천히 걸어도 15분만 있으면 S번 역에 도착할 수 있어요. 괜찮겠죠?" 내 팔목시계는 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괜찮아요."라고 나는 내 자신에게 들려 주듯이 말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악수한다. "조차장에 안내하지 못해 유감이군요. 그리고 여자 건두요." "그래요."라고 나도 말한다. 그런데 도대체 그에게 있어 뭐가 유감이란 말인가. 나는 혼자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의 북쪽을 향해 걸으며, 1945년 봄에 헤르만 게링이 뭘 생 각하고 있었을까를 상상해 본다. 그렇지만 1945년 봄에 천년 왕국의 제국 원수가 뭘 생각하고 있 었나 하는 따위는, 결국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사랑한 아름다운 하인켈 117폭격기 편 대는 마치 전재 그 자체의 사체처럼 우크라이나의 황야에 몇백이나 되는 백골을 드러내 놓고 있 는 것이다. 3. 헬W의 공중 정원 내가 처음으로 헬W의 공중 정원에 안내된 것은 안개가 심한 11월의 아침이었다. "아무것도 없 어요."라고 헬W는 말했다. 확실히 아무것도 없었다. 안개 바닷속에 공중 정원이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었다. 공중 정원의 크기는 대략 세로 8미터, 가로 5미터 정도이다. 그것은 공중 정원이란 점을 별개 로 하면, 전혀 보통의 정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뭐랄까, 그것은 지상의 기준으로 친다면, 분명 히 삼류 정원이었다. 잔디는 너절하고, 화초 종류도 갖춰져 있지 않았으며, 토마토 줄기는 바싹 말랐고, 주위에 울타리조차 없었다. 게다가 하얀 정원 의자는 전당포 물건 같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 드린 거예요."라고 헬W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헬W는 줄곧 내 시 선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별로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특별히 훌륭한 정자나 분수, 동물 모양을 한 정원수나 큐피드 조각을 기대하고 여기에 온 건 아니엇다. 나는 단지 헬W 의 공중 정원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어떤 호화스런 정원보다 멋있어요."라고 내가 말하자, 헬W는 조금 안심하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높이 띄우면, 훨씬 공중 정원답게 보이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요. 좀처럼 그 렇게 안 돼요."라고 헬W는 말했다. "차라도 하시겠어요" "좋지요."라고 나는 말했다. 헬W는 차 상자 같기도 하고 바구니 같기도 한, 요령부득의 모양을 한 캔버스 천으로 된 용기 에 서 콜맨 버너와 노란 법랑 포트, 물이 담긴 합성수지 물통을 꺼내더니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주위의 공기는 몹시 찼다. 나는 아주 두터운 오리털 점퍼를 입고 목에 머플러를 빙 둘렀지만 그래도 거의 소용없었다. 나는 덜덜 떨면서 하얀 안개가 발밑에서 천천히 몸을 꼬며 남쪽으로 흘 러가는 걸 바라 보고 있었다. 안개 위에 둥실 떠 있으면 마치 지면(地面)인 채로 어딘가 알 수 없는 토지로 흘러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재스민차를 홀짝거리며 내가 그렇게 말하자, 헬W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누구든지 여기 오면 반드시 그렇게 말해요. 특히 안개가 짙은 날은요. 특히 말예요. 북해 상 공까지 흘러가 버리는 건 아니냐구요." 나는 헛기침을 하고, 아까부터 신경이 쓰이던 다른 가능성을 지적했다. "혹은 동베를린까지 말 이죠." "그래, 그거예요."라고 헬W는 말라 비틀어진 토마토 줄기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내가 공중 정원을 훨씬 더 공중 정원답게 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너무 높이면 동독 측의 경 비병이 몹시 신경질적이 돼요. 밤새도록 서치라이트를 비추거나, 기관총의 총구를 줄곧 이쪽으로 겨누든가 하는 거죠. 물론 쏘지는 않지만 별로 기분이 좋은건 아니죠." "그렇겠군요."하고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것처럼, 너무 높이 올린 탓에 풍압이 높아져 정말로 공중 정원이 통째로 동베를린으로 날아가 버리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어요. 그렇게 되면 일이 몹 시 곤란하게 되요. 아마도 스파이 죄를 적용받을 테니까. 우선 살아서는 서베를린에 돌아올 수 없을 거예요" "흐음."하고 나는 말했다. 헬W의 공중 정원은 동서베를린을 가르는 벽 바로 옆의 낡은 4층짜리 건물 옥상에 연결되어 있 었다. 헬W는 정원을 옥상에서 15센티 정도 밖에 띄우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히 옥상 정원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훌륭한 공중 정원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걸 겨우 15센티밖에 띄우지 않았다는 건, 보통사람으로서는 좀처럼 흉내내기 어려운 일이다. "헬 W는 매우 조용하고 앞에 나서지 않는 사람이니까."라고 모두들 말한다. 분명히 그럴 거라고 나도 생각한다. "왜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정원을 옮기지 않았나요?" 라고 나는 물어 본다. "예컨대, 쾰른이나 프란크푸르트, 혹은 서베를린이라도 훨씬 안쪽이라든가...., 그렇게 하면 아무것에도 신경 쓸 것 없이 훨씬 높이 정원을 띄울 수 있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하며 헬W는 머리를 젓는다. "쾰른이나 프랑크푸르트라....." 헬W는 다시 머 리를 젓는다. "나는 여기가 좋아요. 친구들도 모두 이 크로이츠베르크에 살고 있어요. 여기가 제 일 좋아요." 그는 차를 다 마시자 이번엔 캔버스 천 용기에서 필립스사의 자그마한 휴대용 전축을 꺼내 레 코드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스위치를 켠다. 이윽고 헨델의 <수상음악>을 제2조곡이 흘러나온다. 낭랑한 트럼펫이 뿌옇게 흐린 크로이츠베르크 하늘에 눈부시게 울려퍼진다.헬W의 공중정원에 이 만큼 어울리는 음악이 또 어디 있겠는가? "다음 번엔 여름에 오세요."라고 헬W는 말했다."여름의 공중 정원은 한없이 즐거우니까요. 이 번 여름엔 매일 여기서 파티를 했어요. 가장 많을 때는, 사람 25명과 개 3마리가 여기에 올라탔 어요." "용케도 아무도 떨어지지 않았네요?"라고 나는 놀라며 말했다. 라고 나는 놀라며 말했다. "실은 두사람정도가 취해서 떨어졌어요."라고 말하고 헬W는 쿡쿡 웃었다."그래도 죽진 않았어 요.3층의 차양이 매우 튼튼해서죠." 나는 웃었다. "수형을 피아노를 끌어올린 적도 있어요. 그 때는 폴리니가 와서 슈만을 연주했어요. 대단히 재미 있었지요. 폴리니는 아시다시피 대단한 공중 정원광이니까요. 그 밖에 로린 마젤도 오고 싶 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빈 필 하모니를 여기에 모두 태울 순 없으니까요." "그렇지요."라고 나는 동의했다. "여름에 또 오세요."라고 헬W는 말하며 내 손을 잡았다."여름의 베를린은 멋져요. 여름이 되 면, 이 부근은 터키 요리 냄새와 아이들의 소란과 음악과 맥주로 넘쳐나죠. 어쨌든 베를린이니까 요." "꼭 와보고 싶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쾰른! 프랑크푸르트!!"라고 나는 말했다. 라고 말하고 헬W는 다시 머리를 저었다 그런 이유로, 헬W의 공중 정원은 베를린의 6월을 기다리며 지금도 크로이츠베르크 상공에 15센 티 만 떠 있는 것이다. 비오는 날의 여인 #241 #242 검정 플라스틱 손가방을 든 중년 여인의 우리 집 현관에 서서 벨을 누르고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찐 여자로 시각은 오후 4시 전이었다.그녀가 벨을 누르자, 휑뎅그렁한 집 안에 벨 소리가 울려퍼졌다.마치 거대하고 텅 빈 위장 바닥에 앉아 누군가의 커다란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 았다. 중년 여성이 검은 손가방을 들고 있다는 그 조합도 왠지 이상하고, 사실 그 가방은 그녀에게 전혀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블라인드 사이로 살그머니 여인을 관찰했다. 연령은 40세에서 45세 사이이며 어디에나 있는, 아무데서고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중년 여성 이었다. 키는 크지 않다. 핑크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고, 엷은 갈색 장화를 신고 있었다. 우산은 녹색 비닐 우산이다. 지나치게 색이 짙은 드롭스같이 천한 녹색이었다. 이상한 색 배합이었다. 빗속에 서 있는 핑크색의 여인은 마치 물을 머금어 부풀어오른 심장처럼 보였다. 팽창한 심장 이 잃어버린 보금자리를 찾아 4월의 비내리는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는 것이다. 여보세요. 눈이 잘 안 보이는데, 혹시 여기가 제 집인가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여긴 제 집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중년 여인은 부풀어오른 심장 따위가 아니고, 또 보금자리를 찾아 걷고 있 는 것도 아니었다. 여인은 단지 화장품 판매원이었다. 나는 그걸 그녀가 두 번째 벨을 누를 때 알아 차렸다. 여인은 현관 차양 속으로 들어오더니, 그 때까지 들고 있던 손가방을 오른손으로 바꿔 들고, 그 때까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접어 벽에 세우고 왼손으로 벨을 눌렀다. 그래 서 손가방 측면에 불어 있는 화장품 회사의 마크가 보였던 것이다. 마크 밑에는 #241이란 번호가 테이프로 부착되어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214호 여인인 것이다. 블라인드를 완전히 내린 어둠침침한 방 안에 두 번째 벨 소리가 천천히 울려퍼지는 동안 여인 은 주변 풍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지 재미 있는 풍경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주택지의 풍경이다. 집과 도로와 가로수밖에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여인은 매일 매일 질릴 정 도로 그런 풍경을 보아 왔을 터였다. 그런 표정이었다. 문을 계속 쳐다보는 데 지쳐서 할 수 없이 주변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뭔가에 흥미가 끌려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았고 문 쪽으로 가지도 않았다. 물론 나가서 거절할 수도 있었다. 집사람 은 집에 없으며, 나는 화장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그렇지만 나는 그 때 누군가와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어두운 방의 의자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그 녀는 화장품 샘플을 담은 손가방을 손에 들고 현관문 앞에 서서 벨을 계속 누르고 있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쉴 새 없이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친 듯 이 보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 두 다리를 작은 테이블 위에 얹은 채 물 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 다. 오후 4시는 술 마시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다. 나는 평소에는 이렇게 이른 시각부터 술을 마 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날, 내게는 술을 마실 만한 이유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요 며칠 동안 나는 혼란스러어져 있었다. 곤혹스러웠다고 해도 좋다. 솔직히 말해 나는 내 기 분을 잘 몰랐다. 모퉁이를 잘못 돌아 같은 곳을 언제까지나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의 접속이 어딘가에서 어긋나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 가 아침부터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암실에 들어가 사진을 현상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 안에, 마누라가 직장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화로 그녀와 이야기한 다음,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되어 그대로 창가의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관해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히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내가 죽고 싶어할 이유란 아무 데도 없는 것이다. 단지 나는 죽음이란 것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한 번 부엌 바닥에 누워 죽은 시늉을 해 보았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계속 죽어 있는 훈련을 한 것이다. 나는 위를 보고 누워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가만히 숨을 멈췄다. 물론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숨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숨을 멈추었다가 숨을 한 번 들이킨 다음 다시 숨을 멈췄다. 한 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외면적으로는 누가 보더라 도 나는 죽어 있는 듯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머리를 텅 비워 보았다. 이것이 죽음이라 고, 생각하려고 했다. 이것이 죽음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죽음이 아니었다. 단지 어둠이었다. 나는 단념하고 일어나 다시 위스키를 마셨다. 모든 건 꿈 탓이었다. 내가 꿈을 꾸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두운 오후였다. 뭘 생각해도, 뭘 해도 거기엔 어두운 그림자가 배어 있었다. 나는 라디오를 켜고 음악을 들었다. 책도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을 시도해도 안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단 념하고 그냥 위스키만 홀짝홀짝 마셨다. 그 때 벨이 울린 것이다. 나는 가만히 여인을 보고 있었다. 저 여인은 도대체 무얼 기다리는 것일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두 번째 벨 소리를 듣고 나서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기분이 드나. 30초나 40초, 대략 그 정도였다. 그래도 여인은 움직 이지 않았다. 가지도 않고, 세 번째 벨도 누르지 않았다. 변함 없이 무표정하게 층층나무 가지 언저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층층나무 가지엔 달팽이가 기어가고 있었지만, 여인은 특별히 달팽이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특별히 뭔가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 다. 그녀는 귀를 귀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건 죽은 시 늉을 연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여인은 단념했다. 그녀는 #214의 손가방을 오른손에 든 채, 왼손으로 녹색 비닐 우산을 들고 자루에 달린 스위치를 눌러 활짝 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문을 힐끗 쳐 다보고 나서 현관을 떠나 빗속으로 사라져갔다. 올 때는 왼손에 손가방을 들고 오른손에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돌아갈 때는 그것이 반대가 되었다. 즉, 오른손에 손가방을 들고 왼손에 우산을 든 것이다. 그런 사실은 아마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우산과 가방의 위치가 어쩌다 바뀌었 을 뿐이다. 그 일로 인해 나는 매우 괴로운 기분이 되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거기에 확실한 이유 는 없다. 그래도 그 일로 나는 대단히 우울해졌다. 그렇게 된 것이 내 책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우산과 가방의 위치를 전환시킨 일로, 나는 내가 그 여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 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던 거야."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나는 단 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귀찮았을 뿐이다. 나는 다시 꿈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3일 전에 흰 뱀 꿈을 꾼 것이다. 커다랗고 흰 뱀인데, 눈 은 녹색이었다(그 여인의 우산과 닮은 색이었다). 뱀은 큰 나무 위에 살고 있었다. 매우 큰 나무 였다. 나무 이름은 모른다. 그렇지만 그 나무는 내 존재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뿌리와 내 뿌리 가 이어져 있는 것이다. 뱀이 움직이면 내 뿌리도 움직였다. 나는 그게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무 밑에 석유를 뿌리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뱀은 타면서 아주 격렬한 소리 를 냈다. 그 연기에서 매우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 고약한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 공기를 좀먹었 다. 공기가 전부 뱀이 되어 그게 내 입을 통해 몸에 들어오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죽자고 뛰어 지하철로 도망쳤다. 지하철 열차 안에는 대형 냉동고가 여러 개 늘어서 있었는데, 그 속에 다람 쥐 시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모두 꽁꽁 얼어 있었다. 뱀이 나를 쫓아오자, 나는 뱀을 향해 그 다람쥐 시체를 던졌다. 내가 다람쥐를 던지면 그게 뱀에게 도달하지 않고, 도중에서 곰팡이 같은 포자로 분해되어 공중에 둥둥 떴다. 그런 꿈이었다. 나는 그다지 꿈을 꾸지 않는 편이며, 어쩌다 꾸었다 해도 곧 잊어버린다. 그래서 꿈에 거의 흥 미를 갖지 않는다. 자신이 꾼 꿈만이 아니고 타인이 꾼 꿈에 대해서도, 또는 꿈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흥미가 없다. 그러나 이 꿈만은 잠이 깨고 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매우 극명하게 기억 되고 있었으며 또한 신경이 쓰였다. 나는 내가 얼어붙은 다람쥐를 잡았을 때, 손에 느낀 감촉을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구체적인 근거는 없지만, 내게는 그게 죽음과 관 련된 꿈처럼 생각되었다. 나와는 달리 집사람은 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 꿈의 분석이나 점 같은 것에도 통달해 있었으므로, 어쩌면 그 꿈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 쩌면 그 꿈이 지닌 의미 같은 것을 가르쳐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그 꿈 이야기 를 했다면, 그녀는 아마도 거기에 신경이 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처남이 뼈 계통의 까다로운 병에 걸려 입원했을 때라서, 나로서는 그런 때 굳이 그녀의 기분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 았다. 그래서 나는 꿈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동생 병의 유전성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꿈에 대한 응어리는 나쁜 예언처럼 내 속에 줄곧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빨리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3일이 지나도 그 중압감은 내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자고 있는 동안에 입 안에 벌레를 잘못해서 그대로 삼킨 것처럼 거북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했다. 그것도 쉽게는 생각나지 않을 것뿐이었다. 예를 들자면, 나는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에 대해 생각해 냈다. 그는 물리 교사로 오른쪽 손목에 청자 색(靑紫色)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가 칠판에 분필로 수식을 쓸 때마다 우리는 그 화상 자국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색조를 명확히 생각해낼 수 있다. 칠판의 흑색과 분필의 백색, 청 자색의 화상 자국이다. 내가 그에 대해 특별히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따분했고 옷 차림새 도 볼품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물리란 과목이 딱 질색이었다. 그렇지만 공평하게 보면 그는 결 코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느 날, 학교 뒤쪽의 산림 속에서 목을 매달고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노조 분규 때문에 줄곧 고민했었다고 모두들 말했다. 그런 냄새를 풍 기는 짤막한 유서도 있었다. 확실히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 그런 정 도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노조 때문에 일부러 목을 매달고 죽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 은 내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었다. 어째서 노조 따위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 것일 까? 나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그 물리 교사에 대해 잠시 동안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살아 있었을 때의 그에 관해,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의 손목에 있는 화상 자국과 장례식에 대한 것 뿐이었다 그에겐 부인과 국 민학생인 자식이 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건 열므의 일로 몹시 더웠었 다. 모두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밖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일사병으로 쓰러진 여자 아이도 몇 명인가 있었다. 나는 얼음이 녹아 버린 물 탄 위스키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신 다음, 그걸 손에 쥔 채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택시 한 대가 집 앞에 멈추었고, 거기서 감색 레인코트를 입은 중 년 남성 한 명이 내렸다. 남자는 차에서 내리더니 우산을 펴고 그리고 내 집을 물끄러미 쳐다보 았다. 눈초리가 날카롭고 체구가 큰 사내였다. 그러나 그 사내는 길을 건너 그대로 우리 집 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다음에 내가 생각해낸 건,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썩은 사과에 관한 것이다. 사과는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껍질이 화상으로 생긴 물집처럼 군데군데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 사과는 내가 알던 한 젊은 여성이 흔적으로 남기고 간 것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없이. 그녀가 살던 아파트에는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가구나 생활 도구가 그냥 그대로 있었다 .내가 아파트를 찾아가자, 관리인이 내게 대신 하소연을 해댔다. 벌써 3개월이나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집세도 체납되어 있다. 그러니 아는 사이라면 어떻게 좀 해 달라는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방랑 벽이 있었다. 가끔 훌쩍 사라져 버리는 일이 있었다. 그래도 3개월이라면 아무래도 좀 길다. 나 와 관리인은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이 조금 열려 있었던 덕분에 공기는 그다지 썩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엌의 음식 쓰레기 썩은 냄새는 확실히 느껴졌다. 설거지통에는 접시와 커핏 잔이 쌓인 채로 있었다. 식기에 붙은 음식물은 말라붙어 있었다. 전기는 이미 끊겨 있었고, 냉장 고 속에 든 우유와 야채도 얼마간 썩어 있었다. 부엌 테이블 위에는 사과가 둘 놓인 채 썩어 있 었다. 그 옆에는 읽다 만 문고본이 놓여 있었다. 턴테이블에는 LP레코드가 얹혀진 채였다. 방 안 은 특별히 달라진 모습이 아니었다. 어디 근처로 물건 사러 나갔다가 그대로 사라진 것 같은 모 습이었다. 관리인은 밀린 집세를 내 주지 않으면 소유물을 모두 처분할 건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고 물어왔다. 그런 말을 들어도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방 공기를 바꾸고, 썩은 음 식물을 처분하고, 부엌의 쓰레기 봉지를 밖에다 내놓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 길로 경찰서에 가서 행방불명 신고서를 냈다. 만일 아무도 신고서를 내지 않으 면 그녀의 존재는 그대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경찰서에서 그녀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나는 친구라고 말했다. 그들은 먼저 내 이름과 주소와 직업을 물었 다. 그런 뒤에 그녀에 관해 질문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나는 그녀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것 이 없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그녀의 육친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녀가 뭘로 생활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경찰에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단 수색원을 내 둡시다,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렇지만 뭐 상대가 어른이니까 머지 않아 불쑥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런 일이 종종 있어요. 서류가 작성되었고, 도장이 찍혔고, 서명이 되었다. 만들어진 사본은 서류함에 넣어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2주일 후, 내가 그녀의 아파트를 찾아갔을 때는 그녀가 살던 방에 벌써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 다. 그녀의 가구는 틀림없이 집세 대신에 적당히 처분되었을 것이다. 2개월 정도 지났을 때, 나는 한 번 경찰에 가서 그 뒤의 수색 경위를 물어 보았다. 그러나 1시 간 가까이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겨우 알아낸 사실은, 결국 아무것도 판명된 것이 없다는 것뿐이 었다. 그들은 아무래도 아파트에 가서 관리인에게 질문을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관리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그녀의 정확한 신원조차도 여전히 모르고 있 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행방불명자가 있는지 당신은 분명 상상도 못할거요,라고 담당 경찰관 은 내게 말했다. 매일같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사라져 버려요. 터무니없이 많은 수의 인간이 사 라지는 거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많은 인간이 특별히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사라지는 거요. 그런 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화장품 판매원이 우리 집을 떠난 뒤에도 비는 같은 상태로 계속 내리고 있었다. 창 밖을 바라 보니 형형색색의 우산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소리 없는 가랑비 가 지표로 곧게 떨어지고, 우산은 평평한 토지에 난 가동식(可動式) 버섯처럼 수평으로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 핑크색 여인이 되돌아오면 집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현 관문을 열어 놓았다. 그걸 보면-같은 길을 되돌아오면 틀림없이 볼 것이다-그녀는 틀림없이 다시 한 번 우리 집 문으로 찾아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역으로 가려면 아무래도 이 집 앞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잠시도 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놓칠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녹색 우산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검정이나 남색, 파랑, 빨강, 노랑 우산은 계속해서 몇 개나 지나가는데, 웬일인지 녹색 우산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 이다. 마치 그 241호 여인이 우리 집 앞을 떠날 때, 어떤 이유에선가 녹색 우산을 세상에 하나도 남김 없이 없애 버린 것 같았다. 근처에 있는 여자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여느 때처럼 집 앞을 지나 역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들 은 몇 명씩 그룹을 지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해 갔는데, 그 속에도 녹색 우산은 하나도 없 다. 그녀들은 모두 검정 가죽 구두에 흰 양말을 신고 있었다. 젊은 여자들은 아무도 장화 따위는 신지 않는다. 그래서 여학생들은 구두를 적시지 않으려고, 마치 고기의 비계를 골라내듯이 조심 스럽게 보도의 물구덩이를 피해가며 걷고 있었다. 그녀들의 그런 걸음걸이가 대단히 아름다워서 나는 오랫동안 그런 발의 움직임을 창문으로 줄곧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들 뒤쪽의 담장 안에는 개나리와 목련이 선명한 색을 봄비 속에 드러내고 있었다. 봄꽃에는 소리라는 게 없다. 층층나무의 가느다란 가지에는 빗방울이 갓 죽은 물고기 이빨처럼 가지런히 매달려 있었다. 그 이빨들은 하나, 또 하나 하며 뭔가를 생각해낸 듯이 갑자기 가지를 떠나 밑으로 떨어져서 검고 부드러운 지면으로 소리도 없이 빨려들어갔다. 아스팔트를 이따금 지나는 차 바퀴 소리만이 내 귀에 들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그것은 마치 올이 가늘고 광택이 있는 천을 손가락 안쪽으로 슬 그머니 문지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저녁의 엷은 어둠이 점점 푸른 빛을 더해가고, 도로를 따라 늘어선 자동 점등식 가로등이 소리 도 없이 커지는 그 시각까지, 나는 빈 잔을 손에 들고 꼼짝도 하지 않고 밖을 내다보며, 못 보아 넘길 리가 없는 녹색 우산과 241호 여인이 집 앞으로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고 현관 문을 닫고 방의 불을 켰다. 그리고 나서 세삼스레 천천 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대단히 이상한 방으로 보였다. 특별히 어딘가가 이상한 것도 아니다. 방은 평소와 다름 없는 방이었다. 매우 평범한 거실이다. 소파가 있고 테이블이 있으 며, 스테레오 전축 세트가 있고 레코드와 책이 있다. 나는 일하지 않을 때는 늘 여기서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만 내게 그것은 몹시 이상한 방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지구가 파멸된 뒤에 남 아 있는 유일한 장소처럼 생각되었다. 비오는 날의 여인 탓이다. 부풀어오른 심장과 주변의 소 리를 삼켜 버리는 아주 짙은 봄꽃 탓이다. 이 세상에서 아마도 영원히 살져 버린 그 녹색 우산 탓이다. 나는 잠시 그 자세로 그대로 거기에 서 있었다. 그런 뒤에 빈 잔을 부엌까지 가지고 가 설거지통에 놓았다. 그리고 아침에 남은 커피를 데워 마셨다. 마침내 조용히 밤이 왔다. 그렇지만 비오는 날의 여인 #241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영원 히 말이다. 택시를 탄 흡혈귀 나쁜 일이란 종종 겹치는 법이다. 이 말은 물론 일반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쁜 일이 몇 번인가 겹치게 되면, 이 말은 더 이상 일반론이 아니게 된다. 만나기로 한 여자와는 길이 엇갈리고, 윗도리의 단추가 떨어져 버리거, 전철 안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충치가 아프기 시작하는 데다가, 비까지 내리 고, 택시를 타니 교통사고로 도로가 막혀 버리는 형편이다. 이럴 때 만약, 나쁜 일이란 겹치는 법이라고 말하는 녀석이 있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 놈을 때려눕힐 것이다. 일반론 따위란 결국은 그런 것이다. 일반론이나 격언이란 것은 때때로 나를 몹시 초조하게 만든다. 현관 깔개나 그 비슷한 것이 되어서까지 그런 것으로 괴로움을 받는다면 비극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뭐 그런 건 아무래 도 좋아. 그리고 나는 현관 깔개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밀리는 도로 위에서 택시 안에 갇혀 있었다. 가을 비가 차 지붕 위에서 뚝, 뚝, 뚝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미터기 요금이 올라갈 때의 찰칵 하는 소리가 나팔총에서 발사된 산탄처럼 내 머리에 꽂힌다. 맙소사. 게다가 나는 금연한 지 3일째가 된다. 뭔가 즐거운 일을 생각하려고 해도 무엇 하나 생각해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죽 여자 옷을 벗기는 순서를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안경, 그리고 손목시계, 덜거덕거리는 팔지, 그런 뒤에... "저어, 손님." 하고 돌연 운전사가 말했다. 내가 블라우스의 첫 번째 단추에 겨우 도달했을 때였다. "흡렬귀란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하세요?" "흡혈귀?" 나는 어리둥절해서 백미러 속에 있는 운전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운전사도 백미 러 속에 비친 내 얼글을 바라보고 있었다. "흡혈귀라니, 그 피를 빠는...?" "맞아요. 실재한다고 생각하세요?" "흡혈귀 같은 존재하든가. 메타포(은유)로서의 흡혈귀, 흡혈박쥐, SF뱀파이어, 이런 것이 아니 고 진짜 흡혈귀?" "물론." 이라고 운전사는 말하고 나서 50센티 정도 차를 전진시켰다. "글세." 하고 나는 말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라고 하면 곤란해요. 믿는지 안 믿는지, 둘 중에서 골라 주세요." "안 믿어요."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지 않은 채로 입술 위에서 굴렸다. "유령은 어때요? 믿으세요?" "유령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생각이 드는데가 아니고, 예스나 노로 대답해 주시지 않겠어요?" "예스." 라고 할 수 없이 나는 말했다. "믿어요." "유령의 존재는 믿으시는 거지요?' "예스." "그러나 흡혈귀의 존재는 믿지 않구요?" "안 믿어요." "그럼 유령과 흡혈귀의 차이는 도대체 뭔가요?" "유령이란, 즉 육체적 존재에 대한 안티 테제지요." 라고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이런 것은 매우 자신 있는 일이다. "흐음." "그러나 흡혈귀는 육체를 축으로 한 가지전환이지요." "결국 안티 티제는 인정하지만, 가치전환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렇게 까다로운 걸 인정하면 한이 없으니까요." "손님 인텔리시군요." "대학을 7년이나 다녔으니까" 라고 말하고 나는 웃었다. 윤전사는 전방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차의 행렬을 바라보며 가느다란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 로 불을 붙였다. 박하 냄새가 차 안에 감돌았다. "그렇지만, 정말로 흡혈귀가 있다면 어떻게 하실래요?" "질려 버리겠ㅈ;여." "겨우 그 정도예요?" "안 되나요?" "안 되지요. 신념이란 훨씬 숭고한 것이에요. 산이 있다고 생각하면 산이 있고, 산이 없다고 생각하면 산이 없지요." 웬지 도노반의 오래된 노래 같다.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문 채 한숨을 쉬었다. "그럼, 당신은 흡혈귀의 존재를 믿고 있나 요?" "믿고 있습니다." "왜요?" "왜라니요?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실증할 수 있나요?" "신념과 실증은 관계가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 그렇군요." 라고 나는 말했다. 운전사는 그리고 나서 한동안 침묵하고 있었 다. 나는 귓볼을 긁었다. 그리고 운전사와의 대화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흡혈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왜 이런 곳에서 흡혈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까? 혹은 이 이야기에는 무 언가 빠뜨린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운전사는 입을 다문 채였다. 나는 포기하고 여자 블라우스의 단추로 돌아갔다. 한 개, 두 개, 세 개... "그러지만 실증할 수 있어요." 라고 한참, 후에 운전사가 말했다.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어떤 식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흡혈귀니까요." 우리는 또 다시 한동안 침묵에 빠졌다. 차는 아까부터 5미터밖에 나아기지 못하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뚝 뚝 뚝 하고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요금 미터기는 벌써 1,500엔을 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라이터 좀 빌려 주세요." "예." 나는 운전사가 내민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여 3일 만에 니코틴을 폐속으로 들이켰다. "굉장히 막히는데요."라고 운전사가 말했다. "정말 그러네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그 흡혈귀 말이지요..." "아, 네." "정말로 흡혈귀인가요?" "그래요. 거짓말해도 소용 없잖아요." "저어, 그러니까, 언제부터 흡혈귀인가요?" "벌써 이럭저럭 9년쯤 되었나. 그게 바로 뮌헨올림픽이 열렸던 해였으니까." "시간이여 멈춰라. 그대는 아름다워." "예. 바로 그겁니다." "하나만 더 물어 봐도 괜찮겠어요?"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세요." "왜 택시 운전사가 되었나요?" "우선 이렇게 밤중에 일할 수 있다는 게 큰 이유지요. 낮은 아무래도 거북하니까요. 그리고 직업상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택시 운전사가 된 이유의 하나지요.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흡혈귀라는 기성의 개념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아서지요. 외투를 입고 마차를 타며 성에 산다는 거, 그런 건 좋지 않아요. 게다가 의미가 없어요. 도대체 말이죠, 요즈음 어디에 성 따 위가 있습니까? 어디서 마차를 구하나요? 나는 착실하게 세금도 내고, 인감등록마저도 했어요. 디스코장도 가고, 파칭코도 합니다. 이상한가요?" 그는 백미러 속의 내 얼굴을 보았다. "아니, 별로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말이죠, 그 뭐랄까? 바로 머리에 와 닿지 않아요." "손님, 안 믿고 있지요?" 나는 얼굴을 들어 백미러 속의 운전사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백미러는 묘하게도 어두워서 그 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나는 눈에 힘을 주었지만, 거기에는 얼굴 윤곽 같은 것이 뿌옇게 비칠 뿐이었다. 아까까지는 확실하게 보였었는데. "내가 흡혈귀라는 거... 믿지 않는 거지요?" "물론 믿고 있어요." 라고 당황해서 나는 말했다. "산이 있다고 생각하면 산이 있는 거지요." "그럼 좋지만." "그런데, 종종 피를 빠나요? "그야 뭐 흡혈귀니까 피는 빨지요." "그런데 말이오, 피에도 틀림없이 맛있는 피와 맛없는 피가 있겠지요?" "물론 있지요. 그러나 손님 피는 안 돼요. 담배를 너무 피워서, 술도 꽤 마시는 것 같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몰라, 확실히 나는 요 몇 년간 담배를 너무 피웠다. 술도 지금까지 상당히 마셨다. 술이건 담배건 몇 번이나 줄이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피를 빨려면 누가 뭐래도 여자 피예요. 그 뭐랄까, 와 닿는 느낌이 있어요. 그렇지, 나는 흡혈귀구나 하는 실감이 나요. 충실해져요." "알 것 같은데요. 그런데, 여배우로 말하자면 어떤 느낌의 배우가 맞을까요?" "기시모토 가요코, 그녀는 맛있을 것 같은데, 신교지 기미에도 좋지요, 기분이 내키지 않는 것이 모모이 가오리. 그런 정도지요. 이건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죠. 일반화될 수는 없겠지요. 모두가 피를 빠는 것도 아니니까." "잘 빨 수 있게 되면 좋을 텐데." "그럼요." 라고 운전사는 말했다. "언젠가 정말로 빨 수 있게 된다면 좋을 테구요." 15분 후에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방문을 열고 전등을 켠 다음,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 다. 그리고 나서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했던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길 이 엇갈린 데에는 나름대로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세상 일이란 그런 것이다. "저어, 그런데 네리마 번호판을 단 까만 택시는 당분간 안 타는 게 좋겠어." "왜죠?" 하고 그녀는 물었다. "그리요?" "응." "걱정해 주는 거예요?" "물론." "네리마 번호판의 검은색, 거기에 흡혈귀인 운전사가 타고 있다고요?" "응,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말이다. 그 택시에 는 운전사 복장을 한 흡혈귀가 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그걸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산이 있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산이 있는 것이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고마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천만에."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 그녀의 마을과 그녀의 면양 삿포로에는 올해의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눈으로 변하고, 눈이 다시 비로 변했다. 삿 포로에서 눈은 그다지 낭만적인 것이 못 된다. 어느 쪽인가 하면, 그것은 평판 나쁜 친척 처럼 보인다. 10월 23일. 금요일. 도쿄를 출발할 때는 티셔츠 하나만 걸쳤었다. 하네타에서 747을 타고 워크맨으로 90분자리 테 이프를 하나 다 들었을까 말까 하는 사이에, 나는 이미 눈 속에 있다. 나는 아무래도 그것이 믿 어지지 않는다. "원래 이런 거야." 내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늘 이맘 때쯤에 첫눈이 내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겨울이 와." "굉장히 추운데."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홋카이도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짜 겨울은 이 정도가 아냐. 진짜 겨울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추워." 우리는 고베 근처의 작고 평온한 마을에서 자랐다. 우리들의 집은 5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있 었고, 중고등학교가 쭉 같았다. 함께 여행도 하고, 더블 데이트도 했다. 둘이서 몹시 취해 택시 문에서 굴러떨어진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도쿄에 있는 대학에 가고, 그는 홋카 이도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나는 도쿄 태생의 동급생과 결혼하고, 그는 오타루(小樽) 출신의 동급생과 결혼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식물의 종자가 변덕스러운 바람에 운반되듯이 우리들도 또한 우연의 대지를 정처 없이 방황한다. 만약 그가 도쿄의 대학에 가고, 내가 홋카이도의 대학에 들어갔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 들의 인생도 싹 바뀌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홋카이도의 여행 대리점에 근무하면서 온 세계를 누비고 돌아다니고, 그는 도쿄에서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물의 어머니인 우연이 이끄는 것에 의해, 내가 소설을 쓰고 그는 여행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오리온좌는 오 늘도 빛나고 있다. 그에게는 여섯 살 난 아들이 있고, 전철 정기권을 넣는 지갑에는 항상 3장의 사진이 들어 있 다. 마루야마 동물원에서 양과 놀고 있는 홋토(北斗)군. 시치고상(七五三: 아이들 성장을 축하하 는 행사)의 의상을 입은 홋토 군. 유원지의 로켓을 탄 홋토 군. 나는 그 3장의 사진을 3번씩 보 고 나서, 그것을 그에게 돌려 준다. 그리고 생맥주를 마시고 얼음 같은 루이베를 집어먹는다. "그런데 P는 어떻게 지낼까?" 하고 그는 묻는다. "매우 잘 지내고 있어." 라고 나는 대답한다. "일전에 길에서 딱 마주쳤어. 마누라와 이혼하고 젊은 여자와 함께 산다고 하던데." "Q는 어때?" "광고 대리점에 근무하는데, 지독하게 엉터리 카피를 쓰고 있어." "상상할 수 있어." 등등. 우리는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다. 밖에는 아직 눈이 계속 내리고 있다. "어때. 최근에 고베에 간 적 있어?" 하고 내가 묻는다. "아니." 하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너무 멀어서. 자네는?" "간 적 없어. 게다가 별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어서." "응, 그래." "거리도 많이 변했겠구나." "응." 10분 정도 어슬렁어슬렁 삿포로의 거리를 걷는 동안에 우리들의 화제는 동이나 버린다. 그리고 나는 호텔로 돌아가고 그는 3DK의 맨션으로 돌아간다. "자, 잘 있어." "응, 자네야말로." 스위치가 덜컥 하고 소리를 낸다. 그리고 며칠 후에 우리들은 다시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한 다. 내일이면 우리는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각자의 동네에서, 각자의 무료함과 목표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호텔의 텔레비전은 지방 방송국의 홍보 프로그램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구두를 신은 채로 침 대 커버 위에 누워, 룸 서비스로 부탁한 스모크 새먼 샌드위치(훈제한 연어로 만든 샌드위치)를 찬 맥주로 목 안에 흘려 넣으면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한가운데에는 감색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한 명, 오도카니 서 있었다. 텔레비전 카 메라는 정지한 채로 그녀의 허리 윗부분을 참을성 있는 육식동물 같은 시선으로 잡고 있었다. 앵 글의 이동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진, 후퇴도 없다. 그것은 마치 10년 전의 누벨 바그(전위영화 운동의 하나) 영화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저는 R마을 읍사무소의 홍보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말투에는 가벼운 사투리가 있고, 목소리는 긴장한 탓인지 바르르 떨고 있었다. "R읍은 인구 7,500의 작은 마을입니다.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으니까, 어쩌면 여러분들은 모르실지도 모르겠군요." 유감스럽게도, 하고 나는 말했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농업과 낙농입니다. 그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벼농사입니다만, 최근 쌀 경지면적 축소정책에 의해 보리나 근교농업으로의 이행도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 마을 의 변두리에는 마을에서 경영하는 목장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약 200마리의 소와 100마리의 말, 게다가 100마리의 면양이 사육되고 있습니다. 마을에서는 현재 축산의 확대를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3년 안에 이 수는 대폭 늘 것입니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다. 스무 살 전후로 도수가 높은 금속테 안경을 쓰고, 고장난 냉장고 같 은 경직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녀는 멋있었다. 누벨 바그 식의 텔레 비전 카메라는 그녀의 제일 멋있는 부분을, 제일 멋있는 상태로 비추고 있었다. 우리들 모두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10분씩 이야기를 할 수만 있다면, 세계는 훨씬 더 멋진 것이 될지도 모 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지(明治) 시대 중엽에는 이 R마을 근처를 흐르는 R강에서 사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일 대에 사금 붐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금을 다 캐 버리자 붐도 사라져, 오두막집 자리 몇 개와 산을 넘어가는 작은 길만이 당시의 모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스모크 새먼 샌드위치의 마지막 부분을 뜯고, 맥주를 단숨에 비워 버렸다. "마을은... 에헴... 마을의 인구는 수년 전까지는 만 명을 넘었습니다만, 최근에는 이농에 의 한 감소가 심해, 젊은이들의 도회 유출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제 동급생들도 벌써 반 이상이 이 마을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물론 한편으로는 마을에 남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 습니다." 그녀는 마치 미래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라도 들여다보듯이, 카메라 렌즈의 한 가운데를 응시한 채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을 통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두 개째의 캔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 마개를 따서 한 입 마셨다. 그녀의 마을. 나는 그녀의 마을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하루에 여덟 번밖에 열차가 멈추지 않는 역, 스토 브가 있는 대합실, 한산한 조그마한 로터리, 글씨가 지워져 반쯤은 읽을 수 없게 되어 버린 마을 안내도, 마리골드(국화과 금잔화과의 화훼식물)의 화단돠 마가목의 가로수, 생에 지쳐버린 흰 개, 쓸데없이 넓은 길, 자위대원 모집 포스터, 3층짜리 백화점, 학생복과 두통약 간판, 작은 여 관이 한 채, 농업협동조합과 임업센터와 축산진흥회 건물, 목욕탕 굴뚝이 하나 달랑 회색 하늘을 향해서 있다. 큰길 끝을 왼쪽으로 꺾어 두 블록 지난 곳에 읍사무소가 있고, 홍보과에는 그녀가 앉아 있다. 작고 따분한 마을이다. 1년의 반 이상이 눈에 덮여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마을을 위해 홍보용 원고를 쓰고 있다. <오는 모월 모일, 면양 소독을 위한 약제를 배포합니다. 희망하 시는 분을 모월 모일까지 소정의 신청용지에 기입한 후에...> 삿포로에 있는 호텔의 자그마한 밀실에서, 나와 그녀의 인생은 우연히 만나고 있다. 그러나 거 기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 호텔 침대에서는, 계절이 마치 빌린 양복처럼 몸에 딱 와 닿지 않는 다. 무딘 손도끼의 날이 내 발밑의 로프를 계속해서 치고 있다. 로프가 끊어져 버리면, 나는 이 제 어디에도 되돌아갈 수 없다.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아니, 물론 로프는 끊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맥주를 조금 많이 마셨기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들 뿐이다. 게다가 아마 창 밖에 춤추고 있는 눈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발밑의 로프를 더듬어, 리얼리티의 어두운 날개 밑으로 되돌아간다. 나의 거리, 그리고 그녀의 면양. 그녀의 면양들이 소독을 위해 멋진 약제를 입수했을 무렵, 나는 우리 동네에서 내 면양들을 위 해 겨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건초를 모으며 탱크에 등유를 넣고, 눈보라에 대비해 창틀 수 리를 한다. 겨울은 벌써 그 정도로 가까이 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저희 마을입니다." 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렇다 할 특색도 없는 조그마한 마을이지 만, 어쨌든 저희 마을입니다. 혹시 기회가 있으면 마을에 들러 주십시오. 당신을 위해서 우리들 이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나서 그녀의 모습은 화면에서 사라진다. 나는 머리맡의 스위치를 눌러 텔레비전을 끄고 남은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그녀의 마을을 방 문할까 생각해 본다. 그녀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녀의 마을을 방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것을 버려 버렸던 것이다. 밖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다. 그리고 100마리의 면양은 어둠 속에서 꼼짝 않고 눈을 감고 있 다. 강치 축제 강치가 온 것은 오후 1시였다. 나는 마침 간단히 점심을 끝내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 우고 있던 참이었다. 집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현관의 벨이 딩동댕 해서 내가 문을 열자 거기에 강치가 서 있었다. 별로 특징이 있는 강치는 아니다. 아주 보통의,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강치다. 알마니의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 고, 브룩스 브라더스의 스리피스를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아주 평밤한 옷을 입고 극히 평 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대개의 강치는 보통의 얼굴을 하고 보통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강치라고 하는 동물은 10여 년 전의 인민복을 입은 중국인처럼 보 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그 강치는 말했다. "혹시 바쁘신 걸 방해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 다." "아, 아니 그다지 특별히 바쁜 건 아니지만." 하고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별로 당황해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나는 강치에 대해 어떤 부채도 없다. 그러나 강치란 동물을 앞에 하면, 나는 이유도 없이, 어쨌든 당황해 버리는 것이다. 혹시 거기에는 뭔가 잠재적인 정신적 요인이 있을지 도 모른다. 유아기에 뭔가 커다란 트라우마(후유증을 남길 만한 혹독한 정신적 외상) 같은 것을, 나는 강치에 대해서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강치란 종족에 대해 아무리 해 도 아주 예사스럽고, 당연하게 대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건방진 부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저 10분 정도 시간을 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만." 하고 그 강치는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이러한 부탁이 뻔뻔스럽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점을 부디 이해하시고 온정을 베풀어 주신다면, 저희들로서 는 기쁘기 그지없겠습니다." 라고 강치는 조용하게 덧붙였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말투도 질색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강치를 요령 있 게 문간에서 쫓아 버릴 수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제 곧 손님이 올거니까 다음 번에 다시 오라 든가, 지금 마침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이라든가 해서, 강치를 그럴 듯하게 쫓을 수도 있었다. 그 래도 나는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강치가 상대가 되면 나는 웬일인지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 게 된다.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나는 강치를 방에 안내해서 컵에 찬 보리차를 따라 대접했다. "아니, 조금도 신경쓰지 마십시오." 라고 강치는 말했다. "정말로 황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치는 맛있게 보리차를 반 정도 마시고, 주머니에서 하이라이트(담배의 이 름)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런데 더운 날이 계속되는군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뭐 아침 저녁은 약간 지내기 편한 것 같아요." "예, 역시 9월이니까요." "그런데 그 뭐랄까요, 고교야구도 끝나 버렸지, 프로야구도 거인팀의 우승이 결정된 거나 마찬 가지지, 뭔가 분위기가 고조되지 않네요. 한신(阪神)팀이 조금 더 잘 해 주면 센트럴 리그도 재 미 있게 될 텐데요. 역시 무라야마(村山), 에나츠(江夏) 둘이서 투수를 했을 때가 재미 있었어 요. 야구도 뭐랄까, 좀 스케일이 작아져 버렸어요." "예, 확실히 그래요."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야구 따위에는 전혀 흥 미가 없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말할 수는 없다. 웬일인지 강치란 놈은 모두 야구를 대단히 좋아한 다. 그리고 야구는 그들에게서 매우 중요한 화제의하나이다. 야구 없이 강치의 대화란 성립할 수 없다. 그들은 야구에 대해 정말로 자세히 알고 있다. 누구의 타율이 얼마고, 어느 피처의 연봉이 얼마인지, 그런 것에 쓸데없이 정통하다. 만일 내가 야구에 흥미가 없다고 말하면, 강치는 몹시 혼란해질 것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몹시 상처받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강치는 다 알겠다는 얼굴로 응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방을 빙둘러 보았다. "실례지만, 혼자 사시는지요?" "아뇨, 집사람이 잠시 혼자서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쓸데없는 말 을 했구나 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강치는 역시라는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 였다. "허어, 부부가 따로 따로 휴가라, 그거 상당히 좋은데요. 뭐, 부부라고 해도 하나 하나의 인간 이니까, 그 뭐랄까,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정말로 그렇습니다. 자유와 신뢰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관계란 것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강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의미 있는 듯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끄덕였다. 그래, 요컨대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설령 아무리 취했어도 신주쿠(新宿)의 바에서 옆자리에 앉은 강치에게 명함 따위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단순히 말하면, 해 서 는 안 되 는 일 이었다. 누구든지 그런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눈치 빠른 인간이라면―강치 에게 명함을 주지는 않는다. 오해하면 매우 곤란하지만, 나는 결코 강치란 동물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 기는커녕 강치에게는 뭐랄까,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물론 나에게 여동생이 있어서, 어느 날 갑자기 강치하고 결혼하겠다고 말을 꺼내면 그건 조금 당황할 것이고,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고 충고 정도는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맹렬히 반대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뭐,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괸찮지 않아, 결국은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정도이다. 그러나 강치의 손에 건네진 명함이라면, 이건 도 다른 문제이다. 나는 강치에게 명함을 건네 준 탓에 대단히 귀찮은 일을 당한 사람을 몇 명인가 알고 있고, 나 자신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도 있다. 잘 아다시피, 강치에게 있어 명함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새가 유리 구슬을 모으듯이, 열심히 명함을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서 뭐랄까 종교적이라 말해도 좋을 만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가치이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 그런 것은 나는 알 수 가 없다. 누구도 모른다. 강치밖에 모른다. 그럴지라도 강치는 명함이라는 한 장의 종이 쪽지 속 에서 실로 여러 의미를 추출하는 것이다. 당신이 한 장의 명함을 그들에게 건넸다고 하자. 그러 면 그들은 그것에서 당신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아낸다―고 그들은 믿고, 또 주장한다. 그건 말 같지도 않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본래 한 장의 종이 쪽지에서 인격이란 것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강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명함 교환이란 것은, 강치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식인 것이다. "제 친구가 얼마 전에 명함을 받았다고 하던데." 라고 강치는 말했다. "아, 그러세요." 라고 나는 시치미를 뗐다. "몹시 취했기 때문에 잘 기억이 안 나는 데요." "그래도 그 친구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고 보리차를 마셨다. "그런데, 저어, 이처럼 갑자기 찾아 뵙고 부탁 드리는 것이 정말 마음 괴롭습니다만, 이것도 명함이 준 인연이라고..." "부탁?" "예,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 말하자면, 강치란 존재에 대한 선생님의 상징적 원조를 받을 수 있다면, 하는 정도입니다." 강치란 동물은 대개 상대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강치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릴 때마다 몹 시 기분이 나빠진다. 그렇지만 선생님이라 부리지 말라고는 아무래도 말할 수 없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강치 앞에 서면,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잘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상징적 원조?" 라고 나는 되물었다. "말씀 드리는 게 좀 늦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강치는 가방에서 바스락거리며 명함을 꺼내, 몹 시 소중한 듯이 나에게 내밀었다. "이런 사람입니다." "강치 축제 실행위원장." 하고 나는 직함을 소리내어 읽었다. "강치 축제에 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예, 그건 뭐." 라고 나는 말했다. "이야기는 전부터." "강치 축제란 글자 그대로 강치의 축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단지 강치들이 모여 떠 들썩하게 축제를 하면 된다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대는 그런 독선적이고도 자기 충족적인 동호회의 귀결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범위를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축제란 사람과 사람이 휴먼하게 접촉하는 것입니다. 안으로가 아니고 밖으로 밖으로 확대해 가야만 합니다. 즉, 이 전통 있는 이벤트를 단지 강치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훨씬 보편 적인, 훨씬 유니버설한 것으로 부연하고 싶다는 것이 우리들의 기본적인 취지입니다." "허어." "축제란 어디까지나 축제에 불과합니다. 그렇지요? 화려하기는 하지만, 그건 말하자면 연속된 행위의 표상적 귀결의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는, 즉 우리들의 아이덴티티로서의 강치성(性)을 확인하는 작업은, 이 행위의 연속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축제란 어디까지 나 그 추인 행위에 불과한 셈입니다." "추인 행위?" "요컨대 말이죠, 즉 세상에서 강치란 존재는, 오늘날에는 혹시 미미한 의미밖에 가지지 않을지 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강치란 것이 지금 이 현실 세계에서 명확한 뭔가를 의미하고 있을까 요? 결국 강치입니다. 결국 강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강치는 거기서 효과적 으로 말을 끊고 재떨이 속에서 타고 있는 하이라이트를 힘주어 비벼 껐다. "그러나 세계란 것은 현실로서 강치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확실히 강치에겐 지난 날의 기세는 없을지 도 모릅니다. 젊으신 분들은 그 영광의 날들이 잘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그 러나 강치에겐, 강치밖에 짊어질 수 없는 것을 짊어지고 있다는 자부가 있습니다. 그건 선생님도 이해하실 거라고..." "아니, 그런 이야기는..." "아, 죄송합니다. 그만 조급해지는 바람에 쓸데없는 걸 말씀 드려서." 라고 강치는 말했다. "즉 제가 정말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말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렇지요. 사랑 없이 이해는 없 습니다. 이해 없이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런 글로벌한 사랑을 키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 렇습니다.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랑에 의해 지탱되는 광휘 있는 강치 르네상스입니다. 강 치가 강치다라는 그 사실에 의해, 그걸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에 의해, 우리들은 진실로 재생되 는 것입니다. 강치란 것은 선도 아닙니다. 악도 아닙니다. 영광도 아닙니다. 치욕도 아닙니다. 강치는 강치다라는 사실에 입각함으로써 진정한 강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 은 강치의 르네상스인 동시에 세계의 르네상스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은, 지금까지는 극도로 폐쇄적이었던 강치 축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해, 세계를 향한 메시지, 혹은 그 발판으로서의 강치 축제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럼 구체적으로..." "장대한 데쟈뷰입니다." 라고 강치는 천장을 올려다보듯이 하고 말했다. "말씀 드리자면, 언젠 가 본 꿈입니다. 그렇습니다. 꿈이란 것은 언젠가 본 적이 있어야만 비로소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강치 레토릭(수사법)이다. 강치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어쨌든 강치에겐 말하고 싶을 만큼 말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특 별히 그들이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말하고 싶을 뿐인 것이다. 결국 강치가 이야기를 끝낸 것은 2시 반을 조금 지났을 때로, 나는이미 완전히 지쳐 버렸다. "간단히 말씀 드리면, 이런 정도입니다." 고 말하고 강치는 태연히 미적지근해진 보리차를 다 마셨다. "매우 간편한 설명이라 정말 마음이 아프지만, 대강은 아셨겠지요?" "요컨대 기부금을 모집하고 있으신 건가요?" 라고 나는 눈 딱 감고 물어 보았다. "아니, 당치도 않아요. 그런 걸 말씀 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라고 강치는 상냥하게 말했 다. "그렇지만 말이지요, 물론 선생님께서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발로로 찬동하시고, 또 얼 마간이나마 물질적인 원조를 해 주신다면, 전국의 강치에게 격려가 될 것은 틀림없다고 주제넘게 도 생각해 봅니다만 " 나는 지갑에서 천 엔짜리를 두 장 꺼내 강치 앞에 놓았다. "적어서 미안하지만, 지금 이것밖에 없습니다. 아침에 보험료와 신문 대금을 지불해서." "아니, 아니에요." 라고 강치는 얼굴 앞에서 부자연스럽게 손을 휘휘 저었다. "그렇게 말씀하 지 마세요.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 같은 건 어딘가 구멍이 있으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입니다. 정말입니다. 저희들로서는, 좋아. 강치를 좀 응원해 주자, 라는 선생 님의 따뜻한 마음만으로 벌써 비할 데 없이 기쁩니다. 아니, 아니, 이건 금액의 문제 따위가 아 닙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강치가 돌아간 뒤에는 <강치회보>란 얄팍한 기관지와 강치 스티커가 남겨져 있었다. 스티커 에 는 강치 그림과 <메타포로서의 강치>란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그 스티커를 처치하기 가 곤란해 마침 근처에 주차 위반한 빨간 세리카의 프런트 글라스 한가운데에 붙여 두었다. 매우 강 력한 스티커라 떼어내는 데 고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1963/1982년의 이파네마 처녀 날씬하게, 볕에 그을린 젊고 아름다운 이파네마 처녀가 걸어간다. 걸음걸이는 삼바의 리듬 시원하게 흔들리고 부드럽게 흔들린다. 좋아한다 말하고 싶어도 내 마음을 주고 싶어도 그녀는 나를 눈치채지도 못한다. 다만, 바다를 보고 있을 뿐. 1963년, 이파네마 처녀는 그런 상태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1982년의 이파네 마 처녀도 역시 마찬가지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그녀는 그 때로부터 나이를 먹지 않았던 것이 다. 그녀는 이미지 속에 가두어진 채로 시간의 바닷속을 고요히 떠돌고 있다. 만약 나이를 먹었 다고 하면, 그녀는 벌써 이럭저럭 사십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이젠 날씬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다지 볕에 그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겐 벌써 세 명이나 아이가 있고, 볕에 그을리는 건 피부를 상하게 할 것이다. 아직 어느 정도는 아름다울지 몰라도, 20년 전만큼 젊지는 않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레코드 속에서는 그녀는 물론 나이를 먹지 않는다. 스탠 게츠의 벨벳과 같은 테너 색소 폰 위에서는, 그녀는 늘 열여덟 살이고, 시원하고 부드러운 이파네마 처녀이다. 내가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걸고, 바늘을 올리면 그녀는 곧 모습을 나타낸다. 좋아한다 말하고 싶어도, 내 마음을 주고 싶어도...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등학교의 복도가 떠오른다. 어둡고 조금 습기찬 고등학교의 복도 다. 천장은 높고 콘크리트 바닥을 걸어가면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울린다. 북쪽에는 몇 개인가 창이 있지만, 바로 옆까지 산이 다가와 있어 복도는 항상 어둡다. 그리고 대체로 늘 괴괴하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 복도는 대개 항상 괴괴하다. 왜 <이파네마 처녀>를 들을 때마다 고등학교의 복도를 떠올리는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맥 락 따위는 전혀 없는 것이다. 도대체 1963년의 이파네마 처녀는, 내 의식의 우물에 어떤 조약돌 을 던졌던 것일까? 고등학교의 복도라고 하면, 나는 콤비네이션 샐러드를 떠올린다. 양상추와 토마토와 오이와 피 망과 아스파라거스, 둥글게 썬 양파, 그리고 핑크색의 시즌 아일랜드 드레싱. 물론 고등학교 복 도의 맨 끝에 샐러드 전문점이 있는 건 아니다. 고등학교 복도의 맨 끝에는 문이 있고, 문 밖에 는 별로 눈을 끌지 못하는 25미터 풀이 있을 뿐이다. 왜 고등학교의 복도가 나에게 콤비네이션 샐러드를 떠오르게 하는 것일까? 여기에도 역시 맥락 따위는 없다. 그 둘은 우연히 뭔가의 영향으로 연결된 것이다. 막 페인트를 바른 벤치에 모르고 앉아 버린 불운한 부인처럼. 콤비네이션 샐러드가 나에게 떠오르게 하는 것은 옛날에 잠깐 알았던 여자이다. 이 연상은 매 우 조리에 맞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늘 야채 샐러드만 먹었기 때문이다. "이제, 아작아작, 영어 리포트, 아작아작, 끝냈어?" "아작아작, 아니, 아직, 아작아작, 조금, 아작아작아작, 남아 있어." 나도 야채는 제법 좋아하는 편이라, 그녀와 얼굴을 맞대면 그런 식으로 야채만 이었다. 그녀는 소위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야채를 균형 있게 먹기만 하면 모든 게 잘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 다. 사람들이 야채를 계속 먹는 한 세계는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건강하고 사랑이 흘러넘칠 것이 라고. 어쩐지 <15세 백서> 같은 이야기다. <옛날 옛날에>라고 어떤 철학자가 썼다. <물질과 기억이 형이상학적 심연에 의해 구분되었 던 시대가 있었다.> 1963/1982년의 이파네마 처녀는 형이상학적인 뜨거운 모래사장을 소리도 없이 계속 걷고 있다. 매우 긴 모래사장으로, 그곳에는 잔잔한 흰 파도가 밀려들고 있다. 바람은 전혀 없다. 수평선 위 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 냄새가 난다. 태양은 매우 뜨겁다. 나는 비치 파라솔 밑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아이스박스에서 캔맥주를 꺼내 뚜껑을 연다. 그녀 는 아직 계속해서 걷고 있다. 그녀의 볕에 그을린 장신에는 원색의 비키니가 찰싹 붙어 있다. "여어." 하고 나는 결단을 내려 말을 걸어 본다. "안녕하세요?" 라고 그녀는 말한다. "맥주라도 마실까?" 라고 나는 권해 본다. 그녀는 좀 망설인다. 그렇지만 그녀도 걸어서 피곤해 있다. 목도 말라 있다. "좋아요."라고 그 녀는 말한다. 그러고 우리는 비치 파라솔 아래에서 함께 맥주를 마신다. "그런데." 하고 나는 말한다. "확실히 1963년에도 너를 보았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매우 오래된 이야기 아녜요?" 라고 그녀는 조금 머리를 갸웃했다. "그렇군." 하고 나는 말한다. "확실히 매우 오래된 이야기야." 그녀는 단숨에 맥주를 반쯤 마시고, 캔에 뻥 뚫린 구멍을 바라본다. 그것은 아주 평범한 캔맥 주의 구멍이다. 그래도 그녀가 꼼짝 않고 보고 있으니, 그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 된다. 온 세계가 몽땅 그 속에 들어가 버릴 것같이 생각된다. "그렇지만 만났을지도 모르겠네요. 1963년이랬죠? 저어, 1963... 응, 만났을지도 몰라." "너는 나이를 먹지 않지?" "그럴 것이, 나는 형이상학적인 여자인 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무렵의 너는 내 존재 따윈 알아차리지 못했지. 너는 언제나 바다만 보고 있었다." "그랬을 거예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웃었다. 웃는 얼굴이 멋있었다. 그렇지만 그녀 는 확실히 조금 슬프게 보였다. "분명히 바다만 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 밖엔 아무것도 보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나는 내 몫의 맥주를 따고, 그녀에게도 권해 봤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맥주는 그다 지 많이 마시질 못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고마워요. 그렇지만 이제부터 죽 걷지 않으면 안 되니 까."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계속 걸으면 발바닥이 뜨거워지지 않아?" 하고 나는 물었다. "괜찮아요. 내 발바닥은 대단히 형이상학적으로 되어 있으니까. 볼래요?" "응." 그녀는 늘씬한 다리를 뻗어 발바닥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확실히 멋진 형이상학적인 발 바닥이었다. 나는 그곳에 살짝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았다. 그녀의 발바닥에 손가락을 대자 희미한 파도 소리가 났다. 파도 소리까지도 매우 형이상학적이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눈을 뜨고 찬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태양은 조금 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조차도 멈춰 있었다. 마치 거울 속에 빨려들어가 버린 것 같다.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고등학교의 복도를 떠올린다." 라고 나는 과감히 말한다. "왜일까?" "인간의 본질은 복합성에 있는 거예요." 라고 그녀는 말한다. "인간 과학의 대상은 객체가 아 니라 신체에 깃든 주체에 있는 거예요." "흐음." 하고 나는 말한다. "어쨌든 사세요. 산다, 산다, 산다. 그것뿐. 계속해서 산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나는 그것밖 에 말할 수 없어요. 나는 단지―형이상학적인 발바닥을 가진 여자예요." 그리고 1963/1982년의 이파네마 처녀는 넓적다리에 붙은 모래를 털고 일어선다. "맥주, 고마웠 어요." "천만에." 가끔, 정말로 어쩌다가이지만, 지하철 차량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나는 그 녀를 알고 있고, 그녀는 나를 알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 때 맥주, 고마웠어요>라는 식 의 미소를 나에게 보내 준다. 그 일 이후 우리는 이제 말은 나누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의 마음 은 어딘가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이어져 있을지 나는 모른다. 틀림없이 어딘 가 먼 세계에 있는 기묘한 장소에 그 매듭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매듭을 상상해 본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어두운 복도에 노용히 누워 있는 내 의식의 매듭.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여러 가지 일들이, 여러 가지 것들이 조금씩 그리워진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나와 내 자신을 잇는 매듭도 있을 것이다. 반드시 언젠가, 나는 먼 세계에 있 는 기묘한 장소에서 내 자신을 만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하다면 따뜻한 장소 가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일 거기에 찬 맥주가 몇 병인가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다. 그곳에선 나는 내 자신이고, 내 자신은 나다. 주체는 객체이고, 객체는 주체이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종 류의 틈도 없다. 빈틈 없이 찰싹 붙어 있다. 그런 기묘한 장소가 반드시 세계 어딘가에 있을 것 이다. 1963/1982년의 이파네마 처녀는 지금도 뜨거운 백사장을 걷고 있다. 레코드의 마지막 한 장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녀는 수지 않고 걸을 것이다. 5월의 해안선 옛친구가 보낸 한 통의 편지, 결혼 청첩장이 나를 오래된 거리로 되돌아가게 한다. 나는 이틀간의 휴가를 얻어 호텔방을 예약한다. 나는 그 거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뭔가 이상 한 기분이다. 몸 반쪽이 투명해진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내가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활짝 갠 5월 아침, 나는 소형 여행 가방에 소지품을 넣고 신칸센을 탄다. 창가 자리에 앉아 책 을 펴고, 그리고 덮고, 캔맥주를 마셔 버리고, 아주 조금 자고, 그리고 나서 체념하고 밖의 풍경 을 바라본다. 신칸센의 창에 비치는 풍경은 늘 마찬가지다. 그것은 맥락이 없는, 억지로 갖다 붙인 것 같은 메마른 풍경이다. 때때로 그것은 풍경이기조차도 거부할 것같이 느껴진다. 그것은 단지 공간 이 동에 필요한 일종의 시각적 효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되어 버리는 것이다. 12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강화 유리 너머 5월의 태양빛도, 말라 버린 햄 샌드위치의 맛도, 무료한 듯이 경제지를 훑어보고 있는 옆 자리의 젊은 비즈니스맨의 옆 얼굴도. EC는 아마도 몇 개월 내에 강경한 대일 수입 제한을 시작할 것이다, 라고 신문 표제는 알리고 있다. 12년 전, 나는 <거리>에 애인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이 방학을 하면 나는 슈트케이스에 짐을 넣어 신칸센의 새벽 첫차를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일고 풍경 같지도 않은 풍경을 바라보 며 햄 샌드위치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그런 아침 시각에 맥주를 마시는 것은 나에게는 하나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거리>에 도착하는 것은 언제나 정오 전이었다. 태양은 아직 중천에 뜨지 않았고, <거리> 구석 구석에는 아직 아침의 술렁거림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나는 슈트케 이스를 끌어안은 채로 커피숍에 들어가 모닝 서비스의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 나서 그녀에게 전 화를 걸었다. 그런 시각의 <거리>의 모습이 나는 좋았다. 아침 햇살, 커피 향기, 사람들의 졸린 눈, 아직 손 상되지 않은 하루, 내 손가락이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소리. 바다 냄새가 난다. 희미한 바다 냄새다. 물론 정말로 바다 냄새가 날 리는 없다.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나는 넥타이를 고쳐 매고, 선반에서 가방을 꺼내 열차를 내린다. 그리고 진짜 바다 냄새를 가 슴에 들이마신다. 반사적으로 몇 개인가의 전화번호가 내 머리에 떠오른다. 1968년의 소녀들‥ ‥, 그런 번호의 숫자를 다시 한 번 늘어 놓으면, 그녀들을 다시 한 번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든 다. 우리들은 옛날에 자주 다녔던 레스토랑의 작은 테이블을 둘러싸고, 다시 한 번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될지도 모른다. 옛날 정리로. 테이블에는 십자수를 놓은 깅엄(격자 무늬가 있는 평직 무명 천으로 된 테이블보)이 깔려 있고,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을 것이다. 창으로는 화창한, 종교적인 빛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 틀림없다. 만일 그 가게가 옛날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면. "그래, 벌써 십 년이나 되는구나.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란 흘러가 버리는군." 하고 나 는 말할지도 모른다. 아냐,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 그런 게 아냐. "마지막으로 너를 만나고 나서, 아직 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구나. 왠지 백 년이나 지난 것 같 은 느낌이 들지만." 하고 나는 고쳐 말한다. 아냐, 어느 쪽도 틀렸어. 아마도 시간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 간 이야기란, 매우 매우 미묘해서 때로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손상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 라고 나는 말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여러 가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그런 말투도 역시 틀리다. 정확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일이란, 결 코 여러 가지 일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나밖에 모른다. 우리는 잡담을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5년이나 전에 결혼해서 아이도 있고, 남편은 상사회사에 라도 근무하면서 주택 융자나 뭔가를 걸머지고 있을지고 모른다. "지금, 몇 시나 됐지요?" 라고 그녀는 문득 얼굴을 들고 묻는다. "3시 20분." 하고 나는 대답한다. 3시 20분. 시간은 마치 낡은 뉴스 영화의 릴처럼 달그락거리며 돌아간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렇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아직 시간이 소리를 내고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마침내 신칸센의 나 른한 진동과 하나로 섞여간다. 그 거리에 돌아가도, 내게는 이제 만나야 할 상대도 없는 것이다. 전화를 할 상대도 없는 것이다. 나는 호텔의 훨씬 앞에서 택시를 내려, 휑한 아침 대로를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이렇게 생각한 다. 내게는 이제 만나야 할 상대도 없으며, 저화를 걸 상대도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제 나의 거리가 아닌 것이다. 우리들이 했던 일은 매우 오래 전에 끝나 버렸고, 지금은 룰이나 여러 가지 가 전부 변해 버렸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은 이제, 여러 가지 일은 아니다. 게다가 나는 그 차 이를 누구에게도 잘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거리에는 버터 타는 냄새가 차 향기나 보도에 뿌려 진 물 냄새가 떠돌고, 막 문을 연 레코드 가게 앞에는 새로운 히트 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 냄새나 소리가 의식의 엷은 그림자를 빠져나가듯이 몸 속에 조금씩 젖어들어간다. 누군가 등 위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봐, 여기야, 여기. 이봐, 나야, 모르겠어? 자네에게 꼭 맞는 좋은 곳이 있어. 같이 가. 틀림 없이 마음에 들 거야. 그렇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귀의 착각인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나는 그런 장소가 마음에 들지도 않을 것이다. 이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일이지만, 거리에는 뭔가 균일치 못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십 미 터 걸을 때마다 공기의 농도가 달라진다. 중력이, 빛이, 온도가 달라진다. 반들반들한 보도의 발 소리도 달라진다. 시간조차도 균일하지 않다. 저쪽에서는 빨리 가기도 하고, 이쪽에서는 천천히 가기도 한다. 나는 어느 남성복 가게에 들어가 운동화하고 스포츠 셔츠를 사서 종이봉투에 넣어 달라고 한 다. 어쨌든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모든 것은 그 다음이다. 결혼식 때문에 입고 왔던 검은 양복과 넥타이 탓에, 왠지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았다. 호텔방에 들어가 뜨거운 샤워를 한다. 그리고 알몸으로 침대에서 뒹굴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셀로판 포장을 뜯고 새 스포츠 셔츠를 입는다. 작은 가방에 억지로 넣어 가지고 온 블루진을 꺼 내, 새 운동화의 끈을 맨다. 그로 인해 조금은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새 신발에 발을 길들이기 위해, 방에 깔린 카펫 위를 몇 번인가 왕복하는 사이에 내 몸도 조금 씩 거리에 친숙해지기 시작한다. 삼십 분 전에 느낀 뒤죽박죽된 기분도, 일종의 답답함도, 지금 은 얼마간 엷어져 있었다. 적어도 나는 있다, 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 있고, 이곳의 공기를 마시 고 있는 것이다. 새 신발을 신은 채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 다시 한 번 바다 냄새가 났다. 이전 보다 훨씬 확실한 냄새였다. 해상을 건너온 바닷바람, 바위 틈에 남겨진 해초, 습기찬 모래‥‥ ‥ 그런 것들 전부가 하나로 된 해안의 냄새였다. 한 시간 후 택시를 해안에 세웠을 때, 바다는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바다는 몇 킬로나 저쪽으로 밀려가 있었다. 오래된 방파제의 흔적만이, 예전 해안 도로를 따라 무슨 기념품처럼 남겨져 있었다. 그것은 이 제 아무런 쓸모도 없다. 단순히 낡고 낮은 벽에 불과하다. 그 저편에 있는 것은 파도가 밀려드는 해안이 아니라, 콘크리트를 전면에 깐 광대한 황야였다. 그리고 그 황야에는 몇 십 채나 되는 고 층 아파트가, 마치 거대한 묘표(墓標)처럼 눈이 미치는 한 늘어서 있었다. 초여름을 느끼게 하는 햇살이 대지에 내리쬐고 있었다. "벌써 이게 생긴 지 삼 년이나 되지요." 하고 나이든 택시 운전사가 가르쳐 주었다. "메우기 시작해서 칠 년 정도 걸렸지만. 산을 깎아내려 벨트 컨베이어로 운반한 그 흙으로 바다를 메웠지 요. 그리고 산을 택지로 하고, 바다에 아파트를 지었던 것이지요. 모르셨나요?" "벌써 그럭저럭 십 년 만이니까요." 라고 나는 말했다.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완전히 변했지요. 조금 더 가면 새로운 해안이 나오는데, 가 보실까요?" "아뇨, 여기로 됐어요, 고마워요." 그는 미터기를 꺾고 내가 내미는 잔돈을 받아든다. 해안 도로를 걷자, 얼굴에 조금 땀이 솟는다. 오 분 정도 도로를 걸은 다음 방파제에 올라 폭 오십 센티 정도의 콘크리트 벽 위를 걷기 시작한다. 새 운동화의 고무 바닥에서 소리가 난다. 버 려진 방파제 위에서 나는 몇 명인가의 아이들과 맞스쳤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다. 저어, 벌써 이십 년이나 옛날이 되었지만, 여름이 되면 나는 매일 이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었 어. 수영 팬티를 입은 채, 집 뜰에서 해안까지 맨발로 걸어다녔지. 태양에 달구어진 아스팔트 길 은 무섭게 뜨거워서 깡충깡충 뛰면서 걸었지. 소나기도 내렸어. 달구어진 아스팔트 노면에 빨려 들어가는 소나기 냄새가 견딜 수 없게 좋았지. 집에 돌아오면, 우물 속에 수박이 차갑게 되어 있었지. 물론 냉장고도 있었지만, 우물에서 차 갑게 한 수박만큼 맛있는 건 없었어. 목욕탕에서 몸에 묻은 소금물을 씻어내고 나서, 툇마루에 앉아 수박을 베어먹지. 딱 한 번 수박을 매단 끈이 벗겨진 적이 있었는데, 건져놀리지 못한 채 몇 달이나 우물 속에 떠 있었지. 물을 떠올릴 때마다 두레박 속에 수박 조각이 들어 있었단 말 야. 그게 틀림없이 왕정치가 고시엔(甲子園)에서 우승 투수가 된 여름이었을 걸. 그건 그렇다 해 도 무서울 정도로 깊은 우물이라, 아무리 들여다봐도 둥근 어둠밖에 안 보였지. 훨씬 자란 다음에는(벌써 그 무렵에는 바다도 완전히 더럽혀져 우리는 산 위 풀장에서 헤엄치 게 되었지만), 저녁이면 개를 데리고(개를 길렀어, 희고 큰 개야) 해안 도로를 산보했지. 백사장 에서 개를 풀어 놓고 멍하니 있으면 몇 명인가 같은 반 여학생을 만날 수 있었어. 운이 좋으면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한 시간 정도는 그 애들과 얘기 할 수 있었지. 기장이 긴 스커트 를 입고, 머리카락에서 샴푸 향기를 풍기고, 눈에 띄기 시작한 가슴을 작고 단단한 브래지어 속 에 감싼 1963년의 여자애들. 드애들은 내 옆에 앉아 자그마한 수수께끼에 가득찬 말을 끊임없이 하기 시작했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학급에 관한 일, 거리에 관한일, 세계에 관한 일..., 앤소니 퍼킨즈, 그레고리 팩, 엘비스 프레슬리의 새로운 영화, 그리고 닐 세다카의 <이별은 괴로 워>. 해안에는 일 년에 몇 번인가 익사체도 떠올랐다. 대개는 자살자들이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바 다에 뛰어들었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양복을 입고, 주머니에 아무 소지품 도 없는(혹은 파도에 휩쓸려 버린) 자살자들이었다. 신문 지방판에 자그마한 기사가 실릴 뿐이 다. 신원 불명, 여성, 스무 살 전후(추정), 라고. 폐 속에 바닷물을 가득히 들이키고, 물거품같 이 팽창된 피부를 드러낸 젊은 여자... 시간의 흐름에 잘못 끼어든 유실물처럼, 죽음은 천천히 파도에 실려, 어느 날 조용한 주택지 해안에 떠밀려온다. 그 중에 한 명은 내 친구였다. 훨씬 전, 여섯 살 때쯤의 일이다. 그 아이는 집중호우로 물이 불어난 강에 휩쓸려 죽었다. 봄날 오후, 그 아이의 시체는 탁류와 함께 단숨에 앞바다로 떠내려 가 삼 일 후에 유수(流水)와 함께 해안에 떠올랐다. 죽음의 냄새. 여섯 살 난 소년의 시체가 고열의 가마에서 타는 냄새. 사월의 흐린 하늘에 우뚝 솟은 화장터의 굴뚝, 그리고 회색 연기. 존재의 소멸.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나는 운동화를 벗고 양말을 벗은 다음 맨발이 되어 방파제 위를 계속해서 걷는다. 쥐죽은 듯이 조용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 근처 중학교의 차임벨 소리가 울린다. 고층 주택의 집단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화장터 같다. 사람 모습은 없다. 생 활의 냄새도 없다. 널찍한 도로에 이따금 자동차가 지나갈 뿐이다. 나는 예언한다. 오월의 태양 아래, 양 손에 운동화를 들고, 낡은 방파제 위를 걸으며 나는 예언한다. 당신들은 무너져 버릴 거라고.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무너져 버리고, 모든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전방에 강물이 보이고, 제방도 고층 주택도 거기서 끝나고 있었다. 나는 강바닥에 내려가 맑은 물에 발을 담근다. 그리운 차가움이다. 바다가 오염되기 시작했던 시대에도 강물은 늘 맑았다. 산에서부터 모래땅인 강바닥을 일직선으로 흘러온 물이다. 유사(流砂)를 막기 위해 폭포를 몇 개 나 가진 이 강에는 고기도 거의 살지 않는다. 나는 얕은 강줄기를 더듬어 겨우 보이기 시작한 해변가로 향한다. 파도 소리, 바다 냄새, 해 조, 앞바다에 닻을 내린 화물선 그림자... 양 옆구리가 매립지에 끼어 버린 해안선이 거기에 작 게 숨쉬고 있었다. 미끌미끌한 오래된 제방 벽에는, 돌로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뿜거나 해서 쓴 무수한 낙서가 늘어서 있었다. 그 대부분은 누군가의 이름이다. 남자 이름, 여자 이름, 남자와 여자 이름, 그리고 날짜. 1971년 8월 14일. (1971년 8월 14일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1976년 6월 2일. (1976년, 올림픽과 대통령 선거의 해다. 몬트리올? 포드?) 3월 12일. (연호가 없는 3월 12일. 여봐, 나는 벌써 서른한 번이나 3월 12일을 지내왔단 말이 야. 어느 3월 12일이야?) 혹은 메시지. (코발트 블루의 스프레이 페인트이다.) 나는 강바닥에 앉아 제방에 등을 기대고, 조용히 남겨진 오십 미터 정도의 폭이 좁은 해안선을 몇 시간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기묘할 정도로 평온한 5월의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태양이 중천을 지나, 제방의 그림자가 강의 수면을 가로지르는 걸 바라보며 나는 자려고 했다. 그리고 엷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문득 생각한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라 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치즈케ㅇ 같은 모양을 한 내 가난 우리는 그 토지를 <삼각지대>라고 불렀다. 그 밖에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나에겐 짐작도 가 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정말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삼각형의 토지였던 것이다. 나와 그녀는 그런 토지 위에 살고 있었다. 1973년인가 4년인가의 이야기다. <삼각지대>라 해도, 소위 델타 모양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우리가 살고 있던 <삼각지대>는 훨 씬 길고 가늘어 쐐기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우선 온전한 모양의 둥 근 치즈 케ㅇ을 떠올리기 바란다. 그리고 나서 그걸 칼로 십이등분 하기 바란다. 즉 시계의 문 자판 같은 모양으로 잘라가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당연히, 첨단의 각도가 30인 케ㅇ 조각이 열 두 개 생긴다. 그 하나를 접시에 놓고, 홍차라도 마시며 찬찬히 바라다보세요. 이것이 - 이 끝 이 뾰죽한 가늘고 긴 케ㅇ 조각이 - 우리 <삼각지대>의 정확한 모양이다. 어떻게 그런 부자연스런 모양의 토지가 생겨났는가, 라고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혹은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라도 괜찮다. 어느 쪽이라 해도, 왜 그렇게 됐을까는 나도 잘 모르 는 것이다. 그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 봐도 잘 몰랐다. 그것은 멀고 먼 옛날부터 삼각형이고, 지금도 삼각형이며, 앞으로도 쭉 삼각형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정도밖에 알 수 없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어느 쪽이냐 하면, 그 <삼각지대>에 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도 않다는 느낌이었다. 왜 <삼각지대>가 그런 식으로 -귀 뒷부분에 난 사마귀같이- 냉대받아야 하 는가, 그 이유는 잘 몰랐다. 아마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삼각지대>의 양 옆에는 두 종류의 철도 노선이 달리고 있다. 하나는 국철선이고, 또 하나는 사철(私鐵)선이다. 그 두 철도선은 잠시 평행으로 달리다가, 이 쐐기의 첨단을 분기점으로 해서 마치 잡아 찢은 것처럼 부자연스런 각도로 북과 남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광경이 다. <삼각지대>의 첨단에서 전차가 오가는 걸 보고 있으면, 마치 파도를 헤치고 해상을 돌진해 가는 구축함이 함교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러나 생활할 때의 기분, 거주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삼각지대>는 실로 형편없는 물건이다. 우선 소음이 지독했다. 그건 그렇다. 어쨌든 두 개의 철도로 꽉 끼어 있는 셈이니까 시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현관문을 열면 눈 앞에서 전차가 지나가고, 뒤쪽 창을 열면 그곳은 그곳대로 또 다른 전차가 눈 앞을 달리고 있다. 눈 앞이란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승객과 눈이 마주쳐 인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전차가 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 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막차가 지나가 버리면 그 다음은 조용하지 않느냐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뭐, 보통은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실제로 이사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 기에는 막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객열차가 오전 한 시 반에 운행을 전부 마치면 이번엔 심야 편인 화차의 행렬이 그 뒤를 잇는다. 그리고 새벽녘까지 화차가 대충 지나가 버리면, 다음 날의 여객 수송이 시작된다. 그런 반복이 다음 날도 다음 날도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아이구 맙소사. 우리가 일부러 그런 장소를 골라 살았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집세가 쌌기 때문이다. 독채 집에 방이 셋 있고, 목욕탕이 딸려 있고, 자그마한 정원까지 있었다. 그러고도 다다미 여섯 장 짜리 방 한 칸인 아파트와 비슷한 집세인 것이다. 독채니까 고양이도 기를 수 있다. 마치 우리 를 위해 준비한 것 같은 집이다. 우리는 막 결혼해서,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기네스북에 실려 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다. 우리는 역 앞에 있는 복덕방의 벽보에서 그 셋집을 발견했 다. 조건과 집세와 방 배치를 보는 한, 이건 경이적으로 싼 물건이었다. "싸기는 싼 집이오."라고 머리가 벗겨진 복덕방 사람이 말했다. "뭐, 제법 시끄럽겐 하지만, 그것만 참을 수 있다면 싼 물건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 "어쨌든 볼 수 있습니까?"라고 나는 물었다. "좋아요, 그렇지만 말이오. 당신들끼리 가보지 않겠소? 난, 거기에 가면 모리가 아파져서." 그는 열쇠를 빌려 주고, 집까지의 약도도 그려 주었다. 무사 태평한 복덕방 사람이다. 역에서 보면 <삼각지대>는 아주 가깝게 보였다. 그렇지만 실제 걸어보니, 그곳에 도착하기까 지에는 지독할 정도로 시간이 걸렸다. 철로를 빙 우회해서 육교를 건너고, 구중중한 언덕길을 내려가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해서 겨우 뒤편으로부터 <삼각지대>에 돌아 들어갈 수 있다. 주 변 에는 상점 같은 건 일체 없다. 완전할 정도로 영락해 있다. 나와 그녀는 <삼각지대>의 첨단에 오도카니 서 있는 집 안에 들어가, 한 시간 정도 거기서 멍 하니 있었다. 그 동안에 상당히 많은 전차가 집 양쪽으로 지나갔다. 특급이 통과하면, 창 유리 가 덜컹덜컹하고 소리를 냈다. 전차가 지나가는 동안에는 서로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뭔 가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전차가 지나가면, 우리는 입을 다물고 전차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기다 렸다. 조용해져서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또 금방 다음 전차가 왔다. 그런 게 커뮤니케이 션의 분단이랄까, 분열이랄까, 대단히 쟝 루크 고달풍이다. 그렇지만 소음을 별도로 한다면, 집 분위기 자체는 별로 나쁘지 않았다. 구조는 확실히 예스 럽고 전체적으로 파손되어 있었지만, 도코노마(일본식 방의 윗목에 장식물을 놓을 수 있게 꾸며 놓은 곳)나 툇마루가 있어 느낌은 좋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봄빛이 다다미 위에 작고 네모난 양 지를 만들었다. 그것은 내가 훨씬 전, 아주 작은 아이였을 때 산 적이 있는 집과 닮아 있었다. "빌리기로 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확실히 시끄럽기는 해도 그럭저럭 익숙해질 거야."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좋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여기서 이런 식으로 가만히 있으니, 마치 내가 결혼해 가정을 갖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럴 것이 정말로 결혼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서도."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복덕방에 돌아가 집을 빌리고 싶다고 말했다. "시끄럽지 않았소?"하고 머리가 벗겨진 복덕방 사람이 물었다. "시끄럽긴 해도, 그럭저럭 익숙해질 거예요."라고 나는 말했다. 복덕방 사람은 안경을 벗어 거즈로 렌즈를 닦고, 찻잔의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리고 나서 안 경을 쓰고 내 얼굴을 보았다. "뭐, 젊으니까."하고 그는 말했다. "예."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임대 계약을 맺었다. 이사는 친구의 라이트 밴 한 대로 충분했다. 이불과 의류와 식기와 전기 스탠드와 책 몇 권과 한 마리의 고양이, 그게 우리의 전 재산이었다. 라디오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었다. 세탁기도 냉장고도 식탁도 가스 스토브도 전화도 유와카시키(부엌에서 뜨거운 물을 끓이는 데 쓰는 기기) 도 전기 청소기도 토스터도, 그 무엇 하나 없었다. 우린 그렇게 가난했다. 그러무로 이사라 해 도 대략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인생은 대단히 간단하다. 이사를 도와 준 친구는 두 개의 철로에 낀 우리의 새 주거를 보고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그 는 이사를 끝내고 나서 내 쪽을 보고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마침 특급열차가 지나가기 시작했던 탓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했어?" "정말로 이런 곳에 사람이 사는군."하고 감탄한 듯이 그는 말했다. 결국 우리는 그 집에서 2년을 살았다. 대단히 아구가 안 맞는 집이라, 틈새기 바람이 도처에 서 들어왔다. 덕분에 여름은 쾌적했지만, 그 대신 겨울은 지옥이었다. 스토브를 살 돈도 없었 기에 해가 지면 나와 그녀와 고양이는 이불 속에 파고들어, 글자 그대로 서로 끌어안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부엌의 설거지통이 얼어붙는 일 같은 것도 늘상 있었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왔다. 봄은 멋진 계절이었다. 봄이 오면 나도 그녀도 고양이도 안심했 다. 4월에는 철도 스트라이크가 며칠인가 있었다. 스트라이크가 있으면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전차는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선로위를 달리지 않았다. 나와 그녀는 고양이를 안고 선로에 내려 가 양지 쪽에서 햇살을 쬐었다. 마치 호숫바닥에 앉아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우리는 젊었고, 막 결혼했었고, 햇살은 공짜였다. 나는 지금도 <가난>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삼각형의 가늘고 긴 토지를 떠올린다. 지금 그 집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스파게티의 해에 1971년, 그해는 스파게티의 해였다. 1971년, 나는 살기 위해 스파게티를 계속 삶았고, 스파게티를 삶기 위해 살아 있었다. 알루미 늄 냄비에서 솟아오르는 증기야말로 내 자랑이었고, 소스팬 속에서 부글부글 소리를 내는 토마토 소스야말로 내 희망이었다. 나는 주방용품 전문점에 가 독일 셰퍼드의 목욕통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알루 미늄 냄비를 구입하고, 쿠킹 타이머를 사고, 외국인 상대의 슈퍼마켓을 돌아 기묘한 이름의 조미 료를 갖추고, 양서를 취급하는 서점에서 스파게티 전문서를 찾아내고, 한 다스 단위로 토마토를 샀다. 나는 모든 종류의 파스타를 사재고, 온갖 종류의 소스를 만들었다. 마늘이나 양파나 올리 브 기름이나 이런저런 것들의 냄새는, 미세한 입자가 되어 내가 살고 있던 좁은 단칸방의 구석구 석에 배었다. 마루에도 천장에도 벽에도 양복에도 책에도 레코드 재킷에도 테니스 라켓에도, 오 래도니 편지 뭉치에도, 그것은 달라붙었다. 왠지 마치 고대 로마의 하수도 같은 냄새였다. 기원 1971년, 스파게티 해의 사건이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혼자서 스파게티를 삶아,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어떤 땐 누군가와 둘이 서 먹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혼자 먹는게 훨씬 좋았다. 그 무렵의 내게는 스파게티란 원래 혼 자서 먹어야 되는 요리인 것같이 생각되었다. 왜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이유는 잘 모르 겠다. 스파게티를 먹을 때는 늘 홍차를 마셨다. 샐러드도 만들었다. 대개는 양상추와 오이를 섞었을 뿐인 간단한 샐러드였다. 어느 쪽도 양만큼은 충분했다. 그것들을 테이블에 가지런히 늘어 놓고, 신문을 곁눈질로 보면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나는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일요일부터 토요일 까지 스파게티의 나날이 계속되고, 그것이 끝나면 새로운 일요일부터 새로운 스파게티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고 있으면, 자주, 지금이라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고 누군가가 방아느 올 들어오는 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비 내리는 오후는 특히 그랬다. 내 방을 찾아오려는 인물은 그 때마다 바뀌었다. 어떤 때는 낯선 인물이고, 어떤 때는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 때는 고교시절에 딱 한 번 데이트한 적이 있는 다리가 가는 여자 아이였 고, 어떤 때는 몇 년 전인가의 내 자신이었고, 어떤 때는 제니퍼 존스를 데리고 온 윌리엄 홀덴 이기도 했다. 윌리엄 홀덴? 그러나, 그들은 어느 누구도 방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들은 과연 기억의 자투리답게 방 앞을 어슬렁거릴 뿐, 결국은 노크를 하는 일도 없이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밖은 비다. 봄, 여름, 가을, 하고 나는 스파게티를 삶았다. 그건 마치 뭔가에 대한 복수 같기도 했다. 배 신한 애인한테 온 오래된 연애 편지 뭉치를 난롯속에 살며시 집어넣는 고독한 여인처럼, 나는 스 파게티를 언제까지나 묵묵히 삶았다. 나는 짓밟혔을 때의 그림자를 볼(운두가 높은 금속제 그릇) 속에서 독일 셰퍼드와 같은 모양으 로 반죽해서 끓는 물 속에 집어놓고, 소금을 뿌렸다. 그리고 긴 젓가락을 잡고 알루미늄 냄비 앞 에 서서, 키친 타이머가 찡 하는 비통한 소리를 낼 때까지 한 발자국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스파게티를 몹시 교활해서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냄비의 가장자리를 슬쩍 넘어 밤의 어둠 속으로 섞여 들어갈 것만 같다. 열대의 정글이 원색의 나비를 영겁의 시간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삼켜 버리듯이, 밤도 또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파게티 알라 파르미쟈나(Spagtti alla Parmigiana) 스파게티 알라 나포레타나(Spagtti alla napoletana) 스파게티 알라 프레마트라(Spagtti alla Prematura) 스파게티 알 가르토치오(Spagtti al cartoccio) 스파게티 알라 아리오 에 오리오(Spagtti alla aglio e olio) 스파게티 알라 카르보나라(Spagtti alla carbonara) 스파게티 델라 피나(Spagtti della Pina) 그리고 냉장고에 남은 것을 적당히 집어넣은 이름도 없는 가엾은 스파게티들. 스파게티들은 증기 속에서 태어나, 강줄기처럼 1971년이란 시간의 사면을 내려가, 그리고 사라 져갔다. 나는 그들을 애도한다. 1971년의 스파게티들. 3시 20분에 전화가 울렸을 때, 나는 다다미 바닥에 드러누워 꼼짝않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 다. 겨울 햇살이, 정확히 내가 누워 있는 부분에만 빛으로 된 수영장을 만들고 있었다. 나느 마 치 죽은 파리처럼 1971년 12월의 햇빛 속에 몇 시간이나 멍하니 드러누워 있었다. 처음에, 그건 전화벨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공기층 사이로 조심스럽게 미끄러져 들어본 적이 없는 기억의 단편, 그런 정도였다. 몇 번인가 회를 거듭하는 사이에, 겨우 그것은 전화벨로서의 체재를 띠기 시작해, 마지막에는 백 퍼센트의 전화벨이 되었다. 백 퍼센트 현실의 공기를 진동시 키는 백 퍼센트의 전화벨이었다. 나는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의 상대는 한 명의 여자, 매우 인상이 옅어 오후 네 시 반에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여자였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의 옛날 애인이었다. 그 남자와, 그 인상이 옅은 여자는 어떤 일로 해서 같이 살다가 또 어떤 일로 해서 헤어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두 사람이 알게 된 데에는 분명히 내가(기분이 내키지 않더라도)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저어, 미안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수화기를 쳐다보고 전화코드를 쭉 눈으로 더듬었다. 코드는 정확히 전화기에 접속되어 있 었다. 나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뭔가 불길한 울림이 있었고, 나는 가능하면 그런 트러블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안 가르쳐 주는 거예요." 라고 그녀는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모르는 척해요. 그렇지만 중요한 용건이 있어요. 저, 부탁이에요, 가르쳐 줘요. 당신에겐 폐가 안 되게 할 테니 까요.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정말 몰라. 벌써 상당히 오랫동안 만나지도 않았고 말야." 라고 나는 말했다. 말하긴 했어요, 그것은 마치 내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정말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면 매우 이상한 목소리가 되어 버리는 것 이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수화기는 얼음 기둥처럼 차가워졌다. 그런 뒤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얼음 기둥으로 변해갔다. 마치 J. G. 발라드의 사이언스 픽션 장 면처럼. "정말 몰라." 하고 나는 반복했다. "오래 전에 아무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 전화 저쪽에서 그녀가 웃었다. "웃기지 말아요. 그 정도 멋을 아는 남자가 아녜요. 그 정돈 나도 알 수 있어요. 온갖 곳에 마 구 떠들어댄 다음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인 걸요." 확실히 그녀가 말하는 대로였다. 그 정도 멋을 아는 남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줄 수는 없었다. 내가 가르쳐 준 것을 알면 이번엔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올 것이 다. 하찮은 소란에 말려드는 것이 이젠 싫었다. 나는 언젠가 결심을 하고 뒤뜰에 깊은 구멍을 파 서, 모든 걸 거기에 묻어 버렸던 것이다. 이젠 누구라도 그걸 파낼 수 없다. "미안하지마." 하고 나는 말했다. "저어, 당신, 날 싫어하죠?" 라고 돌연 그녀는 말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특별히 그녀를 싫어하진 않았다. 원래 그녀에 게는 인상이란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인상이 없는 인간에겐 나쁜 인상도 가질 수 없다. "미안하지만."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지금 스파게티를 삶고 있는 중이야." "네?" "스파게티를 삶고 있어." 하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해 버렸는지 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거짓말은 내 마음에 썩 들었다. 그것은 그 때의 내게 있어선 전혀 거 짓말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냄비 속에 공상의 물을 넣고 공상의 성냥으로 공상의 불을 붙였다. "그래서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끓는 물에 공상의 소금을 치고 공상의 스파게티 다발 묶음을 살며시 밀어넣고 공상의 키 친 타이머를 십이 분으로 맞추었다. "그래서 지금 좀, 일손을 뗄 수가 없어. 스파게티가 엉켜 버려서."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말야, 스파게티를 삶는 일이란 대단히 미묘한 거야." 그녀는 침묵했다. 수화기는 내 손 안에서 다시 빙점 아래의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한 번 전화해 주지 않겠어?" "한창 스파게티를 삶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에요?" "응, 그래." "그 스파게티는 누군가를 위해 만드는 거예요, 아니면 당신 혼자서 먹을 거예요?" "혼자서 먹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당신은 분명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전, 정말 곤란해요. 지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곤 생각해." 라고 나는 말했다. "돈 문제도 있고요." "응." "받았으면 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사람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빌려 줬어요. 빌려 주는 게 아니었는데 말예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스파게티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맛있으면 좋겠네요." "안녕." 하고 나도 말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 빛으로 된 마루 위의 수영장은 몇 센티인가 이동해 있었다. 나는 그 빛 속 에 다시 한 번 드러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생각건대, 영원히 삶아지는 일 없이 끝난 한 다발의 스파게티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슬프 다. 그 때, 그녀에게도 전부 가르쳐 주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어치피 상 대는 그리 대단한 남자도 아니었으므로. 자기는 예술가입네 하는, 내용 없는 텅 빈 사내였다. 말 솜씨만 뛰어나서, 거의 모두에게 신뢰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돈 때문에 시달렸을 것 이다. 게다가, 빌린 돈이란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빌려 준 인간에게 확실히 돌려 줘야 하는 것이 다. 그녀는 그 위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대개는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그녀 는 전화를 끊은 다음, 그대로 오후 네 시 반의 그림자에 삼켜져 사라져 버린 것일까? 만약 그렇 다고 하면, 내게도 그 책임의 일단은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알아 주기 바란다. 나는 누구하고도 관련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쭉 혼자서 스파게티를 삶고 있었던 것이 다. 그 독인 셰퍼드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의 큰 냄비로. 듀람 세모리나. 이탈리아의 평야에 자란 황금색의 보리. 1971년에 자기들이 수출한 것이 <고독>이었다는 걸 안다면, 이탈리아인들은 아마도 놀랄 것 이 다. 농병아리 콘크리트로 된 좁은 계단을 내려가니, 그 앞에는 길 복도가 어디까지나 죽 계속되고 있었다. 아주 긴 복도였다. 천장이 너무나 높았기 때문에, 그것은 복도라기보다는 바싹 마른 배수구처럼 보였다. 그곳에는 장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건 무엇 하나 없었다. 극히 즉물적인 복도였다.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형광등은 먼지를 듬뿍 뒤집어쓰고 거무스름해져 있었는데, 그 빛은 여거 가지 지독한 일을 당한 끝에 간신히 여기까지 당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르지 못하고 피폐해져 있었다. 게다가 셋 중 하나는 전구가 나가 있었다. 자기 손바닥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주위 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운동화의 고무 바닥이 콘크리트를 밟는 기묘하게 단조로운 소리만이 어둠침침한 복도에 울리고 있었다. 2백 미터나 3백 미터, 아니 1킬로를 걸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마냥 걷기 만 했다. 그곳에는 거리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걷고 있는 동안에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 조차 없어져 버린다. 하지만 뭐, 어쨌든 앞으로는 나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느 돌연 T자로 한 가운데에 서 있다. T자로? 나는 윗도리 포켓에서 꾸깃꾸깃해진 엽서를 꺼내 천천히 되풀이해서 읽어 보았다. <복도를 따라 똑바로 걸어가세요. 막다른 곳에 문이 있습니다.> 옆에는 그렇게 씌어 있었다. 나는 막다른 곳의 벽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그곳에는 문의 그림자도 형태도 없었다. 예전에 문이 있었던 흔적도 없었고, 앞으로 문이 생길 것 같은 가능성도 없었다. 그것은 실로 깨끗한 콘 크리트 벽으로, 콘크리트 벽이 본래 갖고 있는 특질 외에는 무엇 하나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나 는 손바닥으로 벽을 쓱 훑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반들반들한 벽이었다. 이건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나는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앞으로 나 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되돌아갈 것인가.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 그다지 심각하게 망설이고 있었던 건 아니다. 사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내게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가난한 생활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월부 지불, 헤어진 아 내에게 주는 이혼 수당, 좁은 아파트, 욕실의 바퀴벌레, 러시아워의 지하철, 그런 모든 것에 진 절머리가 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간신히 찾은 괜찮은 일이었다. 일은 편하고, 급료는 눈이 튀 어나올 정도로 좋다. 일 년에 두 번의 보너스, 여름의 장기 휴가. 문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 서, 아, 그렇습니까 하고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이 보이지 않는다면; 보일 때까지 어디까지고 전진할 따름이다. 나는 포켓에서 10엔짜리 동전을 꺼내 가볍게 공중으로 던졌다가 손등으로 받았다. 겉면, 그리 고 나는 우측의 복도를 따라갔다. 복도는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한 번 꺾여 있었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다시 오른쪽으 로 꺾여 있었다. 공기에는 커피 젤리처럼 섬뜩하고 기묘한 밀도가 있었다. 나는 급료를 생각하 고, 에어컨이 들어오는 쾌적한 사무실을 생각했다. 일이 있다는 건 좋은 것이다. 나는 발걸음을 서둘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앞쪽에 문이 보였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낡은 우표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감에 따 라 조금씩 문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해, 결국에는 하나의 문이 되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한 발짝 물러나 대답을 기다렸다. 15초 가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조금 세게 노크를 하고 다시 한 발 물러섰다. 대답이 없다. 내 주위의 공기가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불안에 쫓기며 세 번째 노크를 하려고 발을 내딛으려 할 때,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마치 어 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밀려 열리는 듯한 아주 자연스러운 열림이었는데, 물론 문이 아주 자연 스럽게 열린 건 아니었다. 전등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들리며 한 남자가 내 앞에 모습을 나타냈 다. 남자는 20대 중반 정도였고, 키는 나보다 5센티 정도 작았다. 막 감은 머리에서는 물방울이 떨 어지고 있었고, 벌거벗은 그의 몸은 거무스름한 적갈색의 바스 로브로 싸여 있었다. 발은 부자연 스러울 정도로 희었다. 구두 사이즈는 22정도일 것이다. 펜습자 노트 같은 넓적한 얼굴이긴 했지 만, 입가에는 미안해하는 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마침 목욕을 하고 있던 터라." 하고 남자는 말했다. "목욕?" 하고 말하며 나는 반사적으로 손목시계를 보았다. "규칙입니다. 우리는 점심식사 후에는 반드시 목욕을 해야 합니다." "과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죠?" 나는 윗도리 포켓에서 예의 엽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그 엽서가 젖지 않도록 손가락 끝으로 집어 몇 번인가 되풀이해서 읽었다. "5분 정도 지각한 것 같습니다만." 하고 나는 변명했다. "흐음, 흐음" 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엽서를 돌려 주었다. "그렇군요, 이곳에서 일 하기로 되어 있는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전 신규 채용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만, 어쨌든 윗분에게 연락해 드리죠. 제가 하는 일은 문을 열고, 윗분에게 연락해 드리는 일 뿐이니까."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암호는?" "암호?" 하고 나는 말했다. "암호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나요?" 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들은 기억이 없는데요." "그거 곤란하군요. 실은 말입니다, 암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윗 분의 엄한 지시가 있어놔서요." 나는 암호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것이 없었다. 다시 한번 포켓에서 엽서를 꺼내 보았지만, 역 시 암호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틀림없이 암호에 관해 써 주시는 걸 잊어벼렸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이곳까지 오는 길도 약간 틀려 있었구요. 아무튼 윗분에게 연락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러면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나는 이곳에 채용되어 오늘부터 일을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윗분에게 물어보시 면 그런 지시가 있었다는 걸 틀림없이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러기 위해선 암호가 필요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포켓에서 담배를 찾으려고 했 지만, 마침 입고 있던 바스 로브에는 포켓이 없었다. 나는 내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라이터로 불 을 붙여 주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어... 암호 같은 건 생각나지 않습니까?" 무리였다.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암호 같은 것이 그렇게 갑자기 생각날 리가 만무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런 번거로운 일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윗분에게는 윗분의 생각이 있겠죠. 아시겠 어요? 윗분이 어떤 사람인지 난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그 런 사람들이란 여러 가지 일을 즉흥적으로 하곤 하죠. 그런 걸 개인적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 시오." "네에, 그건 뭐." "나 이전에 이 일을 하고 있던 녀석도 암호를 깜빡 잊어버렸다는 손님을 딱하게 생각해서 윗분 에게 연락했다가 해고를 당했습니다. 즉각 해고입니다. 내일부터 출근할 필요 없다는 거였습니 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요즘 일자리를 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 말입니다.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조금만 힌트를 줄 수 없겠습니 까?" 남자는 문에 몸을 기댄 채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뿜었다. "그건 규칙상 금지된 일입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습니다만." "만일 일이 잘못되어 들키기라도 하면 야단나는데." "나도 입을 다물고 당신도 입을 다물면 누가 알겠습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나도 이 일에 관 해서만큼은 퍽 진지했다. 간단히 물러날 수는 없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귀엣말을 해 주었다. "아주 간단한 말인데, 물과 관계 가 있습니다. 손바닥에 넣을 수는 있지만, 먹을 수는 없죠." 이번에는 내가 골똘히 생각할 차례였다. "맨 처음 글자는?" "가." 하고 그는 말했다. "가이가라(조개 껍질)." 하고 나는 말해 보았다. "아닙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앞으로 두 번." "두 번?" "앞으로 두 번 틀리면 그걸로 끝입니다. 미안하긴 하지만, 나도 위험을 무릅쓰고 규칙을 깨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좀 더 힌트를 준다면 고맙겠습니다. 예를 들어, 그게 몇 글자로 된 말이라든가..." 남자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건, 이미 살짝 가르쳐 달라는 말아닙니까?" "설마요." 하고 나는 시치미를 뗐다. "그냥 몇 글자인지 가르쳐 주기만 하면 됩니다." "다섯 글자." 하고 그는 단념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맞군요. 남 의 구두를 한 번 닦아 주면 그 다음에는 구두끈까지 ㅁ어 주게 된다고 하셨죠." "미안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어쨌든 다섯 글자입니다." "물과 관계가 있고, 손바닥에 넣을 수는 있지만 먹을 수는 없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 로 시작되는 다섯 글자의 단어." "그렇죠."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가이츠부리(농병아리)."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가이츠부리는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정말입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맛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하고 그는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게다가 손바닥 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본 적이 있나요?" "아뇨." 하고 그는 말했다. "난 새에 대해선 아는 게 없습니다. 도쿄에서 자랐거든요. 야마노 테선의 역이라면 전부 순서대로 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이츠부리 같은 건 본 적도 없어요. 그 게 어떤 모양을 한 새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나 역시 가이츠부리 같은 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가로 시작 되는 다섯 글자의 동물은 가이츠부리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가이츠부리>라는 단어가 순 간 반사적으로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가이츠부리." 하고 나는 우겨댔다. 나는 단호하게 그렇게 말했다. "데노리 가이츠부리는 지독 하게 맛이 없기 때문에 개도 안 먹습니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뭐라 하던, 우선 암호는 가이츠부리가 아니 란 말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틀린 건 틀린 겁니다." "하지만 가이츠부리는 물과 관계가 있고, 손바닥에 들어오지만 먹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다 섯 글자구요. 딱 들어맞지 않습니까." "하지만 당신의 논리는 틀립니다." "어디가 말입니까?" "어찌됐든 암호는 가이츠부리가 아닙니다." "그럼, 뭐요?" 그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하고 나는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로 냉담하게 단언했 다. "가이츠부리 외에 물과 관계가 있고, 손바닥에 들어오지만 먹을 수 없는, 다섯 글자의 단어 같은 건 없습니다." "하지만 있단 말입니다, 확실히."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없습니다." "있어요." "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게다가 가이츠부리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데노리 가이츠부리를 먹기 좋아하는 개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게 어디 있는 어떤 개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주었으면 하는데요." "흐음." 하고 그는 생각을 짜냈다. "난 개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지만, 데노리 가이츠부리를 좋아하는 개는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맛이 없습니까?" 하고 그는 힘없이 물었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맛이 없습니다." "먹어본 적이 있나요?" "없어요. 그렇게 맛없는 걸 내가 어째서 일부러 먹어야 합니까?" "그건 그렇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아무튼 윗분에게 연락을 해 주지 않겠습니까?" 하고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이츠부 리." "하는 수 없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타월로 머리를 닦았따. "연락해 보죠. 무 리라는 생각은 듭니다만." "고맙습니다. 신세를 졌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데노리 가이츠부리가 정말 있긴 있는 겁니까?"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가이츠부리 같은 게 갑자기 생각난 걸까? 데노리 가이츠부리는 벨벳으로 안경 렌즈를 닦고,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따. 오른쪽 아래 어금 니가 콕콕 쑤시며 아픈 것이다. 또 치과 의사에게 보여야 하는 건가, 하고 그는 생각한다. 이제 지긋지긋하다. 세계는 변변치도 않은 것으로 꽈 들어차 있다. 치과 의사, 확정신고, 자동차 월 부, 에어컨 고장.... 그는 가죽을 입힌 안락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죽음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다. 죽음은 바닷속같이 조용하고, 5월의 장미처럼 감미로웠다. 가이츠 부리는 요즘들어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목숨을 잃고 영원히 잠들어 있는 광경을 머 릿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데노리 가이츠부리 여기 잠들다. 묘비에는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그 때 인터폰의 벨이 울렸다. "뭐야?" 하고 데노리 가이츠부리는 기계에 대고 불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손님입니다." 하는 문지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부터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암호도 말했습니다." 데노리 가이츠부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15분 지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