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싱턴의 유령 지은이: 무라키미 하루키 김남주 옮김 출판사: 열림원 작가의 말 이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의 집필 시기는,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를 제외하면, 두 시기로 나뉘어져 있다. <일곱번째 남자>와 <렉싱턴의 유 령>, 이 두 작품은 <태염감는 새 연대기>이후에 썼고(1996년) 그 이외의 작품 은 <댄스 댄스 댄스> 이후에 썼다(1990, 1991년), 그 사이에 약 5년 이란 긴 공백이 있다. 그 시기에 나는 줄곧 미국에 살면서 <태엽감는 새 연대 기>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란 장편소설을 집필하였고, 단편소설은 전 혀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여유가 없었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는 `서문`에도 썼듯이 1983년에 쓴 것을 짧게 손질한 것인데, 이 작품 외에도 본서에는 늘였다 줄였다 한 작품이 있으므로, 일 단 양해를 구하고 싶다. 다소 복잡해진 듯하여 죄송한 마음이지만, 개인적으로 단편소설을 짧게 줄이거나 늘이는 일에 집착하는 탓이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토니 다키타니>는 긴 쪽이고, 짧은 것은 <문예춘추 단편 소설관>이란 앤솔로지에 수록되어 있다. <렉싱턴의 유령>도 긴 버전이고, 짧은 버전(거의 절반 정도 길이)은 <군상> 10월호에 게재되어 있다. 쓸 때에는 깊은 생각도 없이 쓰고 싶은 것을 썼을 뿐인데, 이렇게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읽어보니, 그 나름대로 스스로 납득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한 가지 느 낌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는 뜻이지만. 단행본으로 꾸미느라 가필을 하였다. 무라카미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사정이 있어 등장 인물의 이름은 바뀌었 지만 그 외에는 모두 사실이다. 메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에 2년 정도 산 일이 있다. 그때 한 건축가와 알 게 되었다. 그는 쉰 살을 막 넘긴 핸섬한 남자였다. 머리칼은 반백이고 키는 그 다지 크지 않았다. 수영을 좋아하여 매일 수영장에 다니는 덕분에 탄력 있는 몸 을 지니고 있었다. 가끔은 테니스도 쳤다. 이름은 케이시라고 해두자. 독신인 그 는 보스턴의 교외, 렉싱턴이란 곳에 오래된 저택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말 이 없고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피아노 조율사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조율사 의 이름은 제레미 - 대충 30대 중반에 버드나무처럼 홀쭉하고 큰 키에 머리가 슬슬 벗겨지고 있었다. 그는 조율은 물론이고 피아노도 무척 잘 쳤다. 내 단편이 몇 편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 잡지에 게재되었다. 케이시는 그것을 읽고 편집부를 통하여 내게 편지를 써 보냈다. 당신 작품과 당신에게 상당한 흥 미를 느꼈다. 당신만 괜찮다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평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나지는 않는데 (경험적으로 즐거웠던 기억이 별로 없다), 이 케이시만은 만나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편지가 아 주 지성적이고 유머 감각이 넘쳐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외국에 나와 있는 편 안함에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사는 곳도 아주 가까웠다. 하지만 그 런 사정은 어디까지나 주변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케이시라는 인물에 개인적인 관심을 품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오래된 재즈 레코드를 상당량 소 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아마 온 미국을 다 뒤져도 개인이 이만큼 충실하게 재즈 레코드를 수집해 놓은 경우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재즈를 좋아한다고 하니 어쩌면 흥미 를 느낄지도 모르겠군요. 그의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옳은 말씀. 나는 물론 흥미를 느꼈다. 그 편지를 읽고서 그의 컬렉션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오래된 재즈 레코드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마치 말이 어떤 특별한 나무 냄새에 이끌리듯 정신적인 저향력을 잃고 만다. 케이시의 집은 렉싱턴에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케임브리지의 집에서 자동차 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전화를 걸자 그는 자세하게 지도를 그려 팩스로 보내주었다. 나는 4월의 어느 오후에 녹색 폭스바겐을 타고 혼자 그 집 을 찾아갔다. 집은 금방 알 수 있었다. 3층짜리 웅장한 옛 저택이었다. 지은 지 적어도 백 년은 넘을 성싶었다. 보스턴 교외의 고급 주택지에서도 가장 유서 깊 은 지역에 있는 그 저택은 금새 눈에 띌 만큼 훌륭했따. 그림 엽서에 담아도 좋 을 정도였다. 정원은 마치 넓은 숲 같았다. 네 마리 파란 언치새가 화려하고 날카로운 소리 로 울면서 이 가지 저 가지로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드라이브 웨이에는 신 형 BMW 왜건이 주차되어 있었다. 내가 BMW 뒤에다 차를 세우자, 현관 매트 위에 드러누워 있던 대형 마스티프 견이 천천히 일어나 거의 의무적으로 두세 번 짖었다. `짖고 싶어서 짖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그렇게 하도록 정해져 있 어서`란 식으로. 케이시는 현관으로 나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굳은 악수 였다. 악수를 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것은 케 이시의 버릇이었다. “아아, 잘 오셨습니다. 당신은 만나게 되어 참 기쁩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케이시가 입고 있는 이태리풍의 세련된 셔츠는 제일 윗단추까지 단정하게 채 워져 있었다. 그 위로는 엷은 갈색 캐시미어 카디건을 걸쳤고 바지는 부드러운 감의 면이었다. 그리고 조르주 알마니풍의 조그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상당히 스마트했다. 케이시는 나를 안으로 안내하여 거실 소파를 권하고는 막 끓인 커피를 대접해 주었다. 케이시는 부담없는 성격의 인간이었다. 품위도 있고 교양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에는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였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말솜씨도 상당 했다. 나는 그와 친해져서 한 달에 한 번은 그의 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훌륭한 레코드 컬렉션의 은총을 마음껏 누렸다. 거기에 있으면 다른 곳에서 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귀중한 음악을 내 마음대로, 듣고 싶은 만큼 들을 수 있었다. 레코드 컬렉션에 비하면 오디오 장치는 그리 좋은 것은 못되었지만, 구 식 대형 진공관 엠프가 따스하고 정겨운 음을 재현해주었다. 케이시의 일터는 자택의 서재였다. 그곳에서 케이시는 컴퓨터를 사용하여 건 축 설계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자신의 일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 지 않았다. 그는 웃으면서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마치 변명을 하 듯 말했다. 나는 그가 어떤 건축물을 설계하는지 모른다. 또 그가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케이시는 늘 거실 소파에 앉아 포도주 잔 을 우아하게 기울이며 책을 읽거나 제레미의 피아노 연주를 듣거나, 혹은 정원 의자에 앉아 개와 장난을 하였다.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지만, 케이시는 그다지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죽은 그의 아버지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다. 책도 대여섯 권 썼 는데 지금 그 저작물들은 거의 고전이 되었다. 또 열렬한 재즈 팬이기도 하였다. 프레스티지 레코드의 창시자이며 프로듀서인 보브 와인스톡과도 절친한 사이였 다고 한다. 그런 사연에 1940년대에서 60년대에 걸친 재즈 레코드가 케이시가 편지에 썼듯이,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하게 수집되어 있었다. 양적으로도 상당하 지만 질적으로도 불평의 여지가 없었다. 레코드 대부분이 초판 오리지널이었고 상태도 양호했다. 판에는 흠집 하나 없고 재킷에도 손상이 없었다.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 장 한 장을 마치 갓난아기를 욕조에 집어넣듯 조심 조심 소중하게 보관하고 관리하였을 것이다. 케이시는 형제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후로 재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15년 전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시자 온 재 산과 함께 레코드도 고스란히 상속받게 되었다. 케이시는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때문에 레코드를 한 장도 처분하지 않고 소중하게 보존하 고 있었다. 케이시도 즐겨 재즈를 들었지만 아버지만큼 열광적인 펜은 아니었다. 오히려 클래식 음악을 더 좋아하여 오자키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의 콘서트 가 있을 경우에는 빠지지 않고 제레미와 들으러 갔다. 알고 지낸 지 반년 정도 지냈을 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집을 좀 보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로서는 흔치 않은 일인데 일 때문에 일주일 정도 런던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케이시가 여행을 떠날 때에는 항상 제레미가 빈 집을 지켰는 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웨스트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제레미의 어머니 가 건강이 좋지 않아 그가 얼마 전부터 그쪽에 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케 이시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지만, 자네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군”이라고 케이시는 말했다. “마일 스(개의 이름이다)한테 하루에 두 번 먹이만 주면 그 외에는 딱히 특별한 것은 없으니까 크게 힘들지는 않을 걸세. 레코드도 마음껏 들을 수 있고, 술도 식료품 도 충분히 준비해두었으니까. 자네 편할 대로 그냥 지내주시만 하면 되네.” 나쁘지 않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때 사정이 있어서 임시적이나마 혼자 생활하 고 있어서, 빌려 살고 있는 케임브리지의 아파트 옆집이 마침 개축 공사를 시작 하여 매일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갈아입을 옷과 매킨토시 파워 북과 책을 몇 권 가지고 금요일 오후에 케이시의 집으로 갔다. 케이시는 짐을 다 꾸리고 택시를 부르려는 참이었다. 나는, 런던을 즐기고 오라고 말했다. “아아, 물론”이라고 케이시는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도 내 집과 레코드를 즐겨 주게나. 나쁘지 않는 집이니까.” 케이시가 떠나고 난 후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를 끓여 마셨다. 그리고 거 실 옆 음악실 테이블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케이시의 아버지가 남긴 레코드를 들 으면서 한 시간 정도 일을 하였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시험해본 것이다. 책상은 양쪽에 서랍이 달린 고풍스런 마호가니 제품이었다. 묵직하고 상당히 오래돼 보였다. 하기야 그 방에 놓여 있는 것 중에서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것 이라곤 내가 들고 온 매킨토시 정도일 것이다. 눈에 띄는 사물이 하나같이 기억 도 하지 못할 만큼 먼 옛날부터 지금과 똑같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이었다. 케이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음악실에는 - 마치 신전이나 성유물 안치소처럼 - 전혀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이 정체될 듯한 집인데, 특히 이 음악실 안에서는 얼마전부터 시계가 그 움직임을 뚝 멈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손질은 잘 되어 있었다. 책꽂이에는 먼지 하나 없고 책상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마일스가 다가와 내 발치에 벌렁 누웠다. 나는 그의 머리를 몇 번인가 쓰다듬 어 주었다. 외로움을 몹시 잘 타는 개였다. 오랜 시간 혼자 있지 못한다. 잘 때 만은 부엌 옆에 있는 자기 자리에서 자도록 습관이 들어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옆에서 몸의 어느 한 부분을 상대방에서 슬며시 대고 있다. 거실과 음악실은 문이 없는 높은 문틀로 나뉘어 있다. 거실에는 벽돌로 쌓은 거대한 벽난로가 있고, 푹신한 3인용 가죽 소파가 놓여 있다. 하나하나 모양이 다른 암체어가 네 개, 역시 모양이 다른 커피 테이블이 세 개, 바닥에는 품위있 게 퇴색한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고 높은 천장에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 법 한 고풍스런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빙그르르 사방을 돌아보았다. 벽난로 위의 탁상 시계가 토닥토닥 손톱으로 창문이라도 두드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때를 새기고 있었다. 벽 쪽의 높은 책꽂이에는 미술 서적과 각종 전문 서적이 꽂혀 있었다. 나머지 세 벽에는 어딘가의 해변을 그린 크고 작은 유화가 뒤섞여 걸려 있었다. 그림은 대개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그림에는 사람의 모습은 전혀 없고 그저 쓸쓸한 해 변 풍경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귀를 갖다대면 서늘한 바람소리와 거친 파도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거기에 놓여있는 모든 것에서 그야말로 뉴 일글랜드풍의 절도 있고 그러나 지나치게 소 탈한 올드 머니의 냄새가 났다. 음악실의 넓은 벽 한 면이 온통 레코드 선반이었다. 오래된 LP 레코드가 연주 자의 이름에 따라 알파벳 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케이시도 그 정확한 숫자를 몰랐다. 그는 6천 장이나 7천 장쯤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선반에 진열 되어 있는 것에 버금가는 숫자의 레코드가 카툰 박스에 담겨 다락방에 방치되어 있었다. “머지않아 이 집도 옛날 레코드 무게 때문에 어셔가처럼 뿌지직 뿌지직 땅속 으로 가라앉을지 모르겠네.” 리 코니츠의 오래된 10인치 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책상을 향하여 문 장을 쓰고 있자니, 시간은 내 주위를 기분좋고 평화롭게 지나갔다. 마치 사이즈 가 딱 맞는 주형에 자신을 끼워맞춘 듯한 기분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껏 가꾸어진 특별한 친밀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방의 온 구석구석, 벽에 난 조그만 돌기와 커튼 주름에까지 음악의 울림이 푸근하게 배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케이시가 준비해둔 몽테플치아노 적포도주의 마개를 열었다. 그 리고 크리스털 포도주 잔에 몇 잔을 마시고 거실 소파에 앉아 오는 길에 산 신 간 소설을 읽었다. 케이시가 자신있게 권한 만큼이나 맛있는 포도주였다. 냉장고 에서 브리에 치즈를 꺼내 크래커와 함께 4분의 1쯤 먹었다. 그러는 동안 사방은 잠잠했다. 예의 토닥토닥하는 시계 소리를 제외하면 때로 집 앞을 지나가는 차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래봐야 집 앞 도로는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는 `드라이 브 웨이`였다. 오가는 차량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차로 한정되어 있다. 밤이 깊어지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동네에 학생들이 많아 시끌벅적한 케임브 리지의 아파트에 비하면 어째 바닷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키자 슬슬 잠이 왔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일어나 부엌 싱크대에 잔을 갖다놓고 마일스에게 잘 자라고 말했다. 개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낡은 모포 위에 몸을 웅크리고 끙끙 신음하더니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나는 불 을 끄고 2층에 있는 손님용 침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가 금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공백 속에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데쳐놓은 채소처럼 무감각했다. 야채 박스 속 깊은 곳에 오래토록 방치 되어 있는 채소처럼. 그리고 나는 간신히 지금 케이시의 집을 지키고 있는 자신 을 자각했다. 그렇다. 나는 렉싱턴에 있는 것이다.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두었던 손목 시계를 찾았다. 버튼을 눌러 파란 글로가 들어오게 하였다. 한 시 15분이었 다. 침대 위에서 살며시 몸을 일으키고 조그만 독서용 램프를 켰다. 스위치가 어 디에 있는지 떠올리는 데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나리꽃 모양을 한 뽀얀 우윳 빛 유리에 노란 빛이 번졌다.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게 비비고 크게 숨을 들 이쉬고는 밝아진 방안을 둘러보았다. 벽을 점검하고 커튼을 바라보고 높은 천장 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콩이라도 주워모으듯 의식을 하나하나 주워담고 몸을 현실에 적응시켰다. 그런 후에야 그것을 알았다. 소리다. 해안에 부딪치는 파도소리 같은 자글거림 - 그 소리가 나를 깊은 잠에서 끌어올린 것이 다. 밑에 누군가가 있다. 살금살금 문까지 다가가 숨을 죽였다. 귀 바로 옆에서 자신의 심장이 쿵쿵거 리는 마른 소리가 들렸다. 나 이외에 이 집 안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다. 음악소리 같은 것도 희마하게 들린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겨드랑이 밑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대체 이 집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잘 꾸며진 프래티컬 조크가 아닐까 하는 의심 이었다. 케이시는 런던에 가는 척했지만 실은 이 집 근처에 남아 있다. 나를 깜 짝 놀라게 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한밤의 파티를 준비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 무리 생각해도 케이시는 그런 시시한 장난을 꾸밀 타입이 아니었다. 그의 유머 감각은 훨씬 섬세하고 차분하다. 아니면 - 나는 문에 기댄 채 생각했다 - 거기에 있는 사람은 내가 모르는 케 이시의 친구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케이시가 여행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는 (그리 고 내가 빈 집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이때다 하고 제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어찌되었건 적어도 도둑은 아니다. 도둑은 남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 이렇게 큰소리로 음악을 듣지 않는다. 나는 잠옷을 벗고 바지를 입었다. 스 니커를 신고 T셔츠 위에다 스웨터를 껴입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라는 것도 있 다. 손이 허전했다. 방안을 돌아보았지만 적당한 것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 다. 야구 방망이도 없었고 부젓가락도 없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서랍장과 침대 와 조그만 책꽂이와 액자에 들어 있는 풍경화뿐이었다. 복도로 나오자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계단 아래서 흥겨운 옛날 음악이 증기처럼 복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귀에 익은 유명한 곡인데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다. 말소리도 들렸다.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하나로 뒤섞여 있어, 이야기의 내용까 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때로 웃는 소리도 들렸다. 기품있고 가벼운 웃음소리 였다. 아무래도 아래층에서는 파티가 진행중이고 그것도 한참 절정에 있는 듯하 였다. 흥을 돋우듯 샴페인 잔이 포도주 잔과 부딪치는 소리가 짜랑짜랑 영롱하 게 울렸다. 아마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구두창이 바닥을 이동하는 리드미컬한 소리가 찌익찌익 들렸다. 나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어두운 복도를 걸어 계단 층계참에 섰다. 그리고 난간으로 몸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쭉한 현관 창문으로 새어드는 빛 이 장엄한 분위기의 넓은 현관 홀을 희뿌옇게 비추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는 없다. 홀에서 거실로 통하는 쌍바라지 문은 반듯하게 닫혀 있었다. 그 문은 내가 자러 갈 때는 분명 열려 있었다. 틀림없다. 그러니까 내가 2층으로 올라가 잠자 리에 든 후에 누군가가 그 문을 닫았다는 얘기다. 대체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2층 방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침대에 파고들어...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계단 위에 서서, 아래층 너머에서 들려오는 흥겨 운 음악소리와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맨 처음 느꼈던 충격은 연못에 핀 파 문이 가라앉듯 점차 진정되었다. 분위기로 보아 그들이 이상한 종류의 인간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추측하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계단을 내려가 현관 홀까지 갔다. 스니커의 고무 바닥이 낡은 나무판을 한 단 한 단 조용히 밟았다. 홀에 도착하자 그대로 왼쪽 으로 돌아 부엌에 들어갔다. 불을 켜고 서랍을 열어 묵직한 육류용 칼을 손에 잡았다. 케이시가 요리가 취미라서 독일제 고급 식칼 세트를 갖고 있었다. 손질 도 잘 되어 있었다. 잘 벼려진 스테인리스 칼은 손 안에서 요염하고 리얼하게 빛났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커다란 칼을 손에 꽉 쥐고 시끌한 파티장으로 걸어 들 어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돗물을 한 컵 마시고 칼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개는 어떻게 된 거지? 그때서야 비로소 마일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마일스는 자신의 잠 자리에 있지 않았다. 대체 녀석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만약 한밤중에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면 적어도 짖든지 어떻게 해야 되는 것 아닌가. 바닥에 쭈그 리고 털투성이 모포의 움푹한 자리에 손을 대어 보았지만 온기는 남아 있지 않 았다. 개는 아무래도 한참 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가버린 모양이었 다. 나는 부엌에서 나와 현관 홀로 가서는 거기에 놓여 있는 조그만 의자에 앉았 다. 음악소리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파도처럼 높이 올랐다가 가라앉곤 하였다.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것일까. 적어도 열다섯 명 정도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스무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 그렇 다면 그 넓은 거실도 상당히 복잡할 것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볼 것인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어렵고 또 기 묘한 선택이었다. 나는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니 관리에도 그 나름의 책임 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파티에는 초대받지 않았다. 나는 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말소리의 단편이나마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하지 만 헛수고였다. 말소리는 혼연일체가 되어 단어 하나 구별할 수 없었다. 언어며 대화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것은 마치 두껍게 덧칠한 벽처럼 내 앞에 가로놓 여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파고들어갈 여지 따위는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고 동전을 하나 꺼내 이렇다 할 의미도 없이 손 안 에서 몇 번 돌려 보았다. 그 은색 동전은 나에게 솔리드한 현실 감각을 되찾아 주었다. 무언가가 마치 부드러운 나무 망치처럼 내 머리를 때렸다. - 그것은 유령이다. 거실에 모여 음악을 듣고 담소하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다. 양팔에 싸아하고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크게 흔들리는 듯한 감 촉이 있었다. 마치 주변의 위상이 어긋나는 것처럼 기압이 변화하여 귓속에서 부웅부웅 하는 이명이 가볍게 울렸다. 침을 삼키려는데 목이 카랑카랑 말라 제 대로 삼켜지지 않았다. 나는 동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심장 이 또 경직된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런 얼토당토 않은 시간에 대체 어디에 사는 누가 파티를 연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웅성웅성 현관을 통해 집으로 들어왔다면 암만 그래도 그 시점에서 나는 눈을 떴을 것이다. 개도 짖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니 까 즉, 그들은 어디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마일스라도 곁에 있었으면 싶었다. 굵직한 개의 목에 손을 두르고 그 냄새를 맡고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개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현관 홀 의자 위에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물론 무서웠다. 그러나 무서움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주 깊고 막막한 것이었다. 몇 번이나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어 폐 속의 공기를 조용히 교환하였다.조 금씩 정상적인 감각이 되돌아왔다.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카드가 몇 장 살며시 뒤집어지는 듯한, 그런 감각이 있었다. 나는 일어나 내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발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 리고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침대로 파고들었다. 그 뒤에도 음악소리와 말소리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잠이 오지 않아 새벽녘이 가깝도록 그 소리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을 켜둔채 침대의 헤드보드에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결국은 잠이 들고 말았 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늘고 차분하게 내리는 비 였다. 오로지 지면을 적실 목적으로 내리는 봄비였다. 처마 밑에서 파란 언치새 가 울었다. 시계 바늘은 아홉 시를 가리켰다. 나는 잠옷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갔 다. 현관 홀에서 거실로 통하는 문은 어젯밤 내가 자러 가기 전과 똑같이 열려 있었다. 거실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내가 읽던 책은 소파 위에 엎어져 있었다. 크래커 부스러기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널려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파티가 열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엌 바닥에서는 마일스가 둥그렇게 몸을 말고 아직 자고 있었다. 개를 깨워 도그 푸드를 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개는 귀를 쫑긋거리며 우적우적 신 나게 먹이를 먹었다. 케이시의 집 거실에서 이 불가사의한 한밤중의 파티가 열린 것은 첫날 밤뿐이 었다. 그 다음날부터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하고 은밀한 렉싱턴의 밤이 이렇다 할 특징 없이 반복되었을 뿐이다. 다만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어 찌된 영문인지 매일 밤 한밤중에 깨어났다. 사각은 언제나 한 시에서 두 시 사 이였다. 남의 집에서 혼자 자자니 잠자리가 뒤숭숭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내 마음이 저 기묘한 한밤의 파티와 다시 한번 조우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 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숨을 죽이고 암흑 속에서 귀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정원의 나무들을 소슬거려 놓을 뿐이었다. 그런 때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에서 물을 마셨다. 마일스는 항 상 똑같은 자리에서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내가 모습을 보 이면 반갑다는 듯이 깨어나 꼬리를 흔들고 머리를 내 다리에 비벼댔다. 나는 개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가 불을 켜고 방안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하 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소파와 커피 테이블이 여느 때와 똑같은 위치에서 밤의 어둠에 녹아 있을 뿐이었다. 뉴 일글랜드의 해안 풍경을 그런 멋 대가리 없는 유화도 변함없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10분이나 15 분쯤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을 죽였다. 그리고 이 방안에서 무슨 실마리 같 은 것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내 주위에는 교외의 비밀스럽고 깊은 밤이 있을 뿐이었 다. 화단에 면한 창문을 열자 봄꽃의 풍요로운 향내가 풍겼다. 커튼이 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깊은 숲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나는 일주일 후 케이시가 런던에서 돌아오더라도 그날 밤의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정했다. 왜인지는 뭐라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시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지내기가 어땠는가, 내가 없는 동안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나?” 케이시는 현관에서 내게 그렇게 물었다. “아니, 특별한 일은 없었네. 아주 조용하고, 일도 잘되었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것 정말 다행이로군.” 케이시는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값비싼 몰트 위스키를 꺼 내 선물로 주었다. 나는 그 길로 악수를 하고 헤어져, 폭스바겐을 몰고 케임브리 지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반년 가까이 케이시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전화가 몇 번 걸려와 얘기를 나누기는 하였다. 제레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과묵한 피아노 조율 사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긴 소 설의 막바지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라서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누구를 만난 다든가 외출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동안 하루에 열두 시간씩 책상 앞에서 일 을 하였고, 집 둘레 1킬로미터 범위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케이시를 만난 것은 찰스 강의 보트 하우스 근처에 있는 카페 테 라스였다. 산책을 하는데 거기서 우연히 그를 만나 함께 커피를 마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케이시는 지난번 만났을 때에 비해 깜짝 놀랄 만큼 늙어 있었다. 몰 라볼 정도였다. 열 살이나 나이먹어 보였다. 흰머리가 늘어난 머리카락은 귀 위 로 길게 자라 있고, 눈 아래는 거무죽죽한 주머니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손등의 주름까지 더 자글자글해 보였다. 외모에 꼼꼼하게 신경을 쓰는 스마트한 케이시 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무슨 병을 앓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 나 케이시가 그 점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나도 묻지 않았다. 제레미는 이제 렉싱턴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라고 케이시는 고개 를 좌우로 가볍게 저으면서 침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가끔 전화로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그와 얘기를 나누는데, 어머니가 돌아가 신 충격으로 어째 사람이 변해버린 것 같다네. 옛날의 제레미와는 달라. 거의 별 자리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네. 처음부터 끝까지 별볼일 없는 별자리 얘기뿐이 지. 오늘은 별자리의 위치가 어떻고, 그래서 오늘은 무엇을 하면 좋고 무엇을 하 면 안 된다느니, 그런 얘기들뿐이라네. 렉싱턴에 있을 때는 별자리 얘기 따위는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안됐군(I`m really sorry)"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대체 누구에게 그런 말 을 하고 잇는 것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난 겨우 열 살이었네”라고 케이시는 커피 잔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형제가 없어서, 아버지와 난 단둘이 남았지. 어머니는 어느 해 가을 초엽에, 요트 사고로 돌아가셨네. 우리는 그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정신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네. 그녀는 아직 젊고 건강하셨지. 아버지보다 열 살 이상 이나 연하셨으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언젠가는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버지나 나나 전혀 하지 못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휑하니. 연기나 뭐 그런 것처럼 말일세. 어머니는 아름답 고 총명하신 분이라,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지. 산책을 좋아하시고, 아주 품위있 게 걷는 분이셨다네. 등을 곧바로 펴고, 턱을 조금 앞으로 내민 채, 뒷짐을 지시 고, 즐겁게 걸으셨어. 걸으면서는 곧잘 노래도 부르시고. 나는 어머니와 둘이서 산책하기를 좋아했다네. 늘 떠오르는 것은, 여름날 아침의 상쾌한 빛을 받으며 뉴포트 해변길을 걷는 어머니의 모습이라네. 그녀의 긴 섬머 원피스 자락이 바 람에 시원스럽게 팔락이곤 했지. 자잘한 꽃무늬 면 원피스였네. 그 광경이 마치 사진처럼 내 머리에 각이되어 있다네.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하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셨어. 아마 아들인 나보다 어머 니를 훨씬 더 사랑하셨을 거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 손으로 획득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그에게 나란 존재는, 결과적으로 얻어진 것이었어. 그는 물론 나도 사랑해주셨어. 딱 하나뿐인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사 랑하는 만큼은 아니었지. 그렇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네. 아버지는 어머 니를 사랑한 것처럼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으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혼도 하지 않으셨으니까.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3주일 동안 아버지는 내내 잠만 자셨어. 과장이 아니라네. 말 그대로 내내 주무셨지. 어쩌다 생각났다는 듯 침대에서 훌쩍 일어 나 아무 말도 없이 물을 마시고, 무슨 징표처럼 음식을 드셨어. 몽유병자나 유령 처럼 말일세. 덧문까지 완전히 꼭꼭 닫은 캄캄한 방안에서 마치 주술에 걸린 잠자는 미녀처럼, 끝없이 주무셨다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으셨 어. 몸을 뒤척이지도, 표정을 바꾸지도 않으셨어. 나는 불안해서 아버지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확인했었지. 혹 자는 게 아니라 죽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일세. 나는 머리맡에 서서, 빨려들어갈 듯 아버지의 얼굴을 지켜보곤 했다네. 하지만 돌아가신 것은 아니었어. 그는 땅 속에 묻힌 돌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지. 아마 꿈도 꾸지 않으셨을 거네. 어둡고 조용한 방안으로 규칙적 인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 그렇게 깊고, 그렇게 긴 잠을 나는 그때껏 한 번 도 본 적이 없었다네. 그는 마치 다른 세계로 가버린 사람처럼 보였어. 정말 무 섭고 두려웠다네. 나는 그 넓은 저택 안에서, 그야말로 외톨이였지. 세상으로부 터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었다네. 1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물론 슬프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깊이 잠들어 있는 아버지 모 습하고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지. 그때의 아버지 모습하고 너무 비슷했어. 그건 데자뷰였다네. 온몸의 심지가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력한 데자뷰 였지. 나는 30년이란 세월을 사이에 두고, 과거를 고스란히 더듬고 있었던 걸세. 다만 이번에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다네. 온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했어. 존경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우린 단단히 결속되어 있었어. 그 래서 이상한 얘기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침대에 들어가 끝없는 잠에 빠졌다네. 마치 특 별한 혈통의 의식이라도 계승하는 것처럼 말이네. 아마 한 3주일은 잤을 걸세. 나는 그동안 자고 자고 또 자고, 시간이 썩어 문 드러져 없어질 때까지 잤다네. 한없이 한없이 잘 수 있었어. 아무리 자도 잠이 모자라는 거야. 그때의 나한테는 잠의 세계가 진정한 세계고, 현실 세계는 허망 하고 덧없는 세계에 지나지 않았어. 그것은 색채를 잃은 천박한 세계였어. 그런 세계에서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느꼈을 무상함을, 나는 그때서야 비로서 이해할 수 있었던 셈이지, 내가 하는 말을 이해 할 수 있겠나? 요컨대 그런 종류의 일들은, 다른 형태를 취해. 다른 형태를 취하 지 않을 수 없지.” 케이시는 거기서 말을 끊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모밀잣밤나무 열매가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는 마른 소리가 이따금 탁, 하고 들 렸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케이시는 얼굴을 들고 여느 때의 온화하고 세련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말했 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세상 어느 누구 하나,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네.” 가끔 렉싱턴의 유령을 떠올린다. 케이시의 고풍스런 저택 거실에서, 한밤중에 시끌시끌한 파티를 열었던 정체 모를 유령들을. 그리고 덧문까지 꼭꼭 닫은 2층 침실에서 예비적인 사자처럼 끝없는 잠에 빠져 있는 케이시의 모습과, 그의 아 버지를. 붙임성 좋은 개 마일스와, 숨이 삼켜질 만큼 완벽한 레코드 컬렉션을. 제레미가 연주하는 슈베르트와, 현관 앞에 세워져 있는 파란 BMW 왜건을. 하지 만 그런 것들 모두가 아주 먼 옛날, 아주 먼 장소에서 있었던 일들처럼 아득하 게 느껴진다. 바로 얼마 전에 경험한 일인데도. 나는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기묘 한 이야기인데도, 필경은 그 아득함 때문에, 내게는 조금도 기묘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녹색짐승 남편이 평소처럼 일터로 나가자 뒤에 남은 나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나 는 혼자 창가 의자에 앉아 커튼 틈으로 물끄러미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 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멍하니 정원 을 보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다보면 문득 할 일이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 에. 정원에 있는 많은 것들 중에 나는 특히 모밀잣밤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옛날부터 이 모밀잣밤나무를 마치 친구처럼 여기고 있었다. 나는 모밀잣밤나무와 몇 번이나 대화도 나누었다. 그때도 아마 나는 마음속으로 나무와 대화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원을 바 라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정처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사방이 완전히 어두웠던 것 으로 보아 상당히 오랜 시간 거기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자 어딘가 먼 곳에서 스적스적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그 소리는 나 자신의 몸속에서 들려오는 듯하였다. 무슨 환청처럼. 몸이 자아내는 암흑의 전조처럼. 나는 호흡을 멈추고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불길한 울림을 지니고 있 었다. 마침내 모밀잣밤나무 뿌리 언저리 땅이, 마치 무거운 물이 지표로 뿜어 올라 오듯 뭉글뭉글 부풀어올랐다. 나는 숨을 삼켰다. 땅이 갈라지고 부풀어오른 흙이 흘러내리면서 그 안에서 끝이 뾰족한 손톱 같은 것이 모습을 내밀었다. 나는 주 먹을 꼭 쥐고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쏘아보았다. 나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손톱을 기운차게 흙을 파냈고 구멍은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스멀스멀 녹색 짐승이 기어나왔다. 짐승은 번들번들 빛나는 녹색 비늘로 온몸이 덮여 있었다. 짐승은 흙 속에서 나오자 몸을 흔들어 비늘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코는 유난히 길고 끝으로 가면 갈수록 녹색이 짙었다. 코끝은 채찍처럼 가늘고 뾰족했다. 그러나 눈은 보통 사 람 같은 눈이었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 눈에 감정 같은 것이 깃들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나 당신의 눈처럼. 짐승은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와 가느다란 코 끝으로 문을 두드렸다. 톡톡톡톡, 마른 소리가 온 집 안으로 울려퍼졌다. 나는 짐승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만가 만 안 쪽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이 근처에는 집 한 채 없는 데다 일하러 나간 남편은 한밤중이 되어야 돌아온다. 뒷문으로 도망 칠 수도 없다. 내가 사는 집에는 문이 딱 하나밖에 없는데 그 문을 저 소름끼치 는 짐승이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숨소리를 죽이고 집에 아무도 없는 척하 였다. 짐승이 단념하고 어디론가 가버리기를 바라며. 하지만 짐승은 포기하지 않 았다. 짐승은 코 끝을 더욱 가늘게 모으고 그것을 열쇠 구멍에 넣어 달그락달그 락 더듬더니 마침내 간단히 문을 열고 말았다. 찰칵 하고 소리가 나더니 잠금쇠 가 풀리면서 문이 삐죽 열렸다. 열린 문 틈으로 코가 주륵주륵 안으로 들어왔다. 코는 한참이나, 마치 뱀이 대가리를 처박고 상황을 살피듯 문 틈으로 집 안을 살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면 칼을 가지고 문 옆으로 가서 그 코 끝을 싹둑 잘라 버리는 건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부엌에는 잘드는 칼이 여러 개나 있다. 그런데 짐승은 나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싱긋이 웃었다. 당신, 그래 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라고 녹색 짐승은 말했다. 짐승의 말투는 어딘가 아 주 기묘했다. 언어를 잘못 기억한 것처럼. 내 꼬리는 도마뱀의 꼬리 같아서 말이 죠. 몇만 번을 잘라도 또 자라나아안답니다. 게다가 잘릴 때마다 더 길고 튼튼해 지는거어얼요. 애쓰면 애쓰는 만큼 허허헛수고예요. 그리고 짐승은 그 띠룩띠룩 한 눈을 팽이처럼 빙빙 굴렸다. 저 놈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단 말이야. 그렇다면 일이 아주 성가시게 되었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자기 멋대로 읽는다는 것은 참기 어 려운 일이다. 특히 상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징그러운 짐승일 경우에는 더욱이.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대체 저 놈은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일까. 나를 먹어치울 작정인가. 아니면 나를 땅 속으로 데리고 갈 작정인가. 그러나 어찌되었든 저 놈 이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하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녹색 비늘 사이로 툭 튀어나와 있는 분홍색 손발에는 길쭉한 손톱 이 나 있고, 그것은 그저 보고만 있기에는 오히려 귀엽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암 만 보아도 그 짐승은 나에게 악의나 적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요, 라고 그 놈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짐승이 고개를 갸윳 하자 녹색 비늘이 달그락달그락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마치 커피 잔이 가 득 놓인 테이블을 살며시 흔든 것처럼. 내가 당신을 먹을 리가 있겠어요, 참 너 무하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악의도 적의도 없어요, 그런 것을 품고 있을 터어억이 없지 않아요, 라고 짐승은 말했 다. 그래, 틀림없어, 저 놈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어. 저 부인, 부인, 나는 당신한테 프로포즈를 하러 왔어요. 알겠어요? 저 깊고 깊 은 곳에서 일부러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단 말이에요. 아주 힘들었어요. 흙도 엄 청 많이 팠어요. 손톱이 이렇게 다 갈라졌잖아요. 만약 나한테 악의가 있었다면 악의가 있었다면 악의가 있었다면 그렇게 힘들고 성가신 일을 할 리가 없죠. 나 는 당신이 너무 좋아서 좋아서 차아암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여기가지 온 겁니 다. 나는 저 깊고 깊은 곳에서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기어 올라온 겁니다. 모두들 그런 나를 말렸어요. 하지만 나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용기도 필요했어요. 너같은 짐승이 나한테 프로포즈를 하다니 뻔 뻔스럽스럽다고 여겨지지 않을까해서 말이에요. 나는 마음속으로 그야 당연하잖느냐고 생각하였다. 나한테 구애를 하다니, 참 으로 어처구니없고 뻔뻔스러운 짐승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짐승의 얼굴에 애틋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애틋함을 뒤따르듯 비늘의 색이 녹색에서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다 몸집마저 폭삭 쪼그라든 듯 작게 보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 조그마해진 짐승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 다. 어쩌면 이 짐승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변신할지도 모른다. 그 리고 저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몰골에 비하면 그 마음은 막 만든 매쉬맬로처럼 부드럽고 상처 입기 쉬운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내게도 승산은 있다. 나는 다시 한번 시험해 보자고 생각하였다. 참 내 너는 흉측한 짐승에 불과하잖아, 라 고 나는 다시 한번 큰소리로 생각해보았다. 내 마음에 윙윙 울릴 정도로 크게. 참 내 너는 흉측한 짐승에 불과하잖아. 그러자 짐승의 비늘은 점점 보라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눈은 나의 악의를 빨아들이기라도 한 듯 점차 부풀어 올라 마치 무화과처럼 얼굴 표면에서 튀어나왔고 거기에서 빨간 즙 같은 눈물이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이제 짐승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시험삼아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잔혹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육중한 의자에다 짐승을 철사줄로 꽁꽁 묶어 뾰족한 핀셋으로 녹색 비늘을 하나하나 뽑아보기도 하고, 잘 드는 칼 끝을 불에 빨갛게 달구어서, 그것으로 오동통하고 야들야들한 분홍색 허벅지를 몇 번 이나 그어대 보기도 하고, 짤짤 끓는 인두로 그 무화과처럼 툭 튀어나온 눈을 힘껏 푹 찔러보기도 하였다. 내가 그런 장면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상상할 때 마다, 짐승은 실제로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몸을 뒤틀고 뒹굴며 비명 을 짜내고 괴로워했다. 색깔있는 눈물을 흘리고 찐득한 체액 같은 것을 뚝뚝 바 닥으로 떨어뜨리고, 귀로는 장미향이 나는 회색 가스를 품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다는 듯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인, 부탁 입니다. 제발 부탁해요, 그런 끔찍한 생각은 거두어 주세요, 라고 짐승은 말했다. 설사 생각할 뿐이라 하하하더라도 생각지 말아 주세요, 라고 그 짐승은 애닯게 말했다. 나는 나쁜 마음은 어없어요. 나는 나쁜 짓은 하지 않아요. 나는 그저 당 신을 줄곧 사모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런 짐승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참 내 기가 막혀서, 느닷없이 우리 집 정원을 기어 올라온 것은 너잖아, 게다가 허락도 없이 문까지 열고 들어오지 않았냐구,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내 가 와 달라고 언제 너를 부르기라도 했니. 나는 내가 생각하고 싶은 만큼 무엇 이든 생각할 권리가 있어. 그래서 나는 훨씬 더 잔혹하고 끔찍한 생각을 하였다. 나는 온갖 기계와 기구를 동원하여 짐승의 몸을 학대하고 갈가리 짓찢었다. 생 명이 있는 존재를 괴롭히고 몸부림치게 하는 갖가지 방법을 나는 다 생각하였 다. 이봐 짐승. 너는 여자라는 것을 잘 몰라. 이런 종류의 일이라면 나는 얼마든 지,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다구. 그런데 그러는 동안 짐승의 윤곽이 부옇게 번 지더니 그 멋들어진 녹색 코까지 지렁이처럼 쪼그라들고 말았다. 짐승은 바닥 위에서 몸을 꿈틀거리면서 입을 움직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 하 였다. 깜빡 잊고 있었던 아주 오래고 소중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처럼. 엄숙하 게. 그러나 그 입은 고통에 움직임을 멈추고, 애처롭게 부풀어 오른 눈만이 안타 깝다는 듯 공중에 남았다.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어,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네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너에게는 도움이 안 돼. 너는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네 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어. 너란 존재는 이제 완전히 끝나버린거야. 그러자 눈도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밤의 어둠이 소리도 없이 방안으로 밀려 들 어왔다. 침묵 나는 오사와 씨에게, 지금까지 싸우다 누군가를 친 일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 오사와 씨는 눈부신 무엇이라도 보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보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죠?”라고 그는 말했다. 그 눈초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거기에는 번뜩 빛을 발 하는 어떤 섬짓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순간적이었다. 그는 그 빛을 금방 안으로 숨기고 예전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딱히 깊은 의미는 없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이렇다 할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 나에게 그런 질문을 - 어쩌면 불필요할 질문 을 - 하게 한 것이다. 그 후 나는 곧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나 오사와 씨는 내 이야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빠져 있는 듯하였다.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헤매고 있는 듯하기도 하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창 밖에 나란한 은색 제트 여객기를 바라보았다. 애당초 내가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한 동기는, 그가 중학교 때부터 줄곧 체욱관 에 다니면서 복싱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이런저런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쩌다 그런 얘기가 나온 것이다. 그는 서른한 살인데 지금도 여전히 한 주에 한 번은 체육 관에 가서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 시절에는 몇 번이나 대표 선수로 시합에 나갔다. 전국체전 선수로 발탁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 며 좀 의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몇 번인가 일을 함께 하였지만 오사 와 씨가 20년 가까이나 복싱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 기 때문이다. 그는 차분하고 주제넘게 나서거나 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성실하고 참을성있게 일했고,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 한 번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바쁠 때라 도 언성을 높이거나 눈썹을 치켜뜨지 않았다. 타인의 험담을 늘어놓거나 투덜투 덜 불평을 해대는 일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를 표현하자면, 호감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인간형이었다. 풍모도 온화하고 느긋하여 공격적인 성품과는 거리가 먼 인 간이었다. 그런 인물과 복싱이 어떤 지점에서 연결될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하 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하고 만 것이다. 우리 공항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사와 씨와 나는 함께 니가 타로 떠날 예정이었다. 계절은 12월 초순, 공항은 뚜껑이라도 덮은 것처럼 어둠 침침하게 구름져 있었다. 니가타에는 아침부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모양이 었다. 비행기는 출발 예정 시간보다 꽤 늦어질 듯하였다.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 거렸다. 라우드 스피커에서는 각 항공편의 지연을 알리는 아나운스가 흐르고 있 었고, 발이 묶인 사람들은 지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레스토랑은 난방이 지나쳐 나는 줄곧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야만 했다. “기본적으로는 한 번도 없습니다.” 오사와 씨는 한참이나 침묵한 후 불쑥 그렇게 말을 뱉었다. “나는 복싱을 시작한 이래 한 번도 사람을 때린 적이 없습니다. 복싱을 시작 할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요. 글러브를 끼지 않고 링 밖에서 사람을 때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보통 사람이라도 잘못 때리면 장소에 따라 자칫 위 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싱을 하는 인간이 주먹을 휘두른다면 그건 흉 기를 사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가 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딱 한 번 사람을 때린 적이 있습니다.” 라고 오사와 씨는 말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입니다.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때 나는 본격적인 기술 같은 것은 아직 하나도 배우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내가 체육관에서 연습한 것은 기초 체력을 다 지기 위한 기본 메뉴뿐이었어요. 줄넘기나 스트레칭, 런닝, 온통 그런 것들뿐이 었죠. 더구나 때리려고 마음먹고 때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때 너무 화가 나서, 생각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뻗었습니다, 자제할 길이 없었 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상대방에게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화가 사그라들지 않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오소와 씨는 숙부가 복싱 체육관을 경영하는 관계로 복싱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도 동네 어귀에 적당히 자리잡고 있는 엉터리 체육관이 아니라, 동양 챔피 언도 배출한 적이 있는 체계적인 일류 체육관이었다. 오사와 씨의 부모님은 아 들에게 그 체육관에 다니면서 체력을 좀 단련해보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들은 아들이 항상 방에 처박혀 책만 읽고 있는 것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오사와 씨 는 복싱을 배운다는 것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숙부는 인간적으로 좋아 했고, 뭐 좀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정 싫으면 그때 가서 그만두어도 될 테고 싶 은 가벼운 기분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전철을 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숙부 의 체육관으로 몇 달 다니는 사이에 그는 그 경기에 뜻밖일 정도로 매력을 느끼 게 되었다. 그가 복싱에 매력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복싱이 기본적으로 과묵한 스포츠고 또 아주 개인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본 적도 접한 적도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그 세계는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자 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 냄새와 가죽 글러브가 서 로 스치는 팽팽한 소리와 근육을 효율적이고 민첩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몰두하 는 과묵한 모습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사로잡아갔다. 매주 토 요일과 일요일 체육관에 다니는 일이 그에게 많지 않은 즐거움의 하나가 되었 다. “복싱이 마음에 든 까닭은, 그 운동에 깊이가 있어서였습니다. 그 깊이가 나 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때리고 맞고 하는 따위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런 것은 단순한 결과에 지나지 않아요. 사람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이해하고 있다면 설사 졌다 해도 상처 입 지 않아요. 사람은 모든 것에 이길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집 니다. 중요한 것은 그 깊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복싱이란 -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는 말인데 - 그런 행위였습니다. 글러브를 끼고 링에 서 있다 보면, 때로 자신이 깊은 구멍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주아주 깊은 구멍이에요. 아 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깊죠. 그 속에서 나는 어둠을 상대로 싸우는 것입니다. 고독하죠. 그렇지만 슬프지는 않아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고독이라지만 실은 여러 종류의 고독이 있습니다. 신경을 갉는 것 처럼 괴롭고 슬픈 고독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고독도 있어요. 그러한 고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살을 깎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그 만한 것이 되돌아옵니다. 그것이 내가 복싱에서 배운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오사와 씨는 한 20초 정도 침묵하였다. “나는 정말 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가능하다면 그런 일은 깨끗하게 잊고 싶습니다. 그러나 물론 잊을 수는 없 지요. 잊고 싶은 것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법입니다.” 오사와 씨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리고는 자기 손목 시계를 보았다. 시간 은 아직도 충분히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때 오사와 씨가 때린 남자는 같은 반 학생이었다. 아오키라는 이름이었다. 오사와 씨는 원래부터 그 남자를 싫어했다. 왜 그렇게 싫어하게 되었는지 그 자 신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 남자가 견딜 수 없이 싫었 다. 누군가를 그렇게 명료한 형태로 싫어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런 일이 있잖습니까?”라고 그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든 일생에 한 번은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는 그런 일이 있지 않 나 생각합니다. 아무 까닭없이 그냥 싫은 것이죠. 나 자신은 아무 이유없이 타인 을 싫어하는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역시 그런 상대가 있더군요. 앞뒤를 따져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 역시 비슷한 감정을 나에게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오키는 공부도 아주 잘하는 남자였죠. 거의 늘 일등을 차지했습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남자들만 다니는 사립고등학교였는데, 그는 인기도 꽤 좋았습니 다. 반에서도 눈에 띄었고 선생님들도 귀여워했어요. 성적이 좋은데도 절대로 우 쭐거리지 않고 성품도 시원스럽고 부담없이 농담도 하는 그런 남자였습니다. 그 런 데다 조금은 정의파 같은 구석도 있어서... 하지만 나는 그 배후로 언뜻언뜻 비치는 잔꾀와 본능적인 계산벽이 못마땅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체적으 로 어떤 것이냐고 물어도 대답하기가 곤란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 수 없으니 까요. 다만 나만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그 남자의 몸에서 발산되는 에고와 자존심의 냄새를 생리적으로 견딜 수 없었습니 다. 어떤 사람의 체취를 생리적으로 견디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아오키는 머리가 좋은 남자라서 그런 냄새를 아주 교묘하게 감추고 있었죠. 그래서 대부 분의 반 친구들은 그를 머리가 상당히 좋은 친구라고만 여기고 있었습니다. 나 는 그런 의견을 들을 때마다 - 물론 불필요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 어쩐지 몹시 기분이 불쾌해졌습니다. 아오키와 나는 모든 의미에서 대조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나는 오히려 말이 없 고 반에서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인간이었죠. 애당초 눈에 띄기를 그다지 좋아 하지도 않았고, 혼자 있어도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물론 친구도 몇 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어요.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조 숙한 인간이었습니다. 같은 반 아이들과 사귀기보다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아버 지의 클래식 음반을 듣거나 체육관에 다니면서 손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편 이 좋았습니다. 나는 보시다시피 용모도 별로 특별한 구석이 없는 편입니다. 성 적은 뭐 그런대로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고, 선생님 들은 곧잘 내 이름을 잊었습니다. 그런 타입이었던 거죠. 그래서 나 역시 자기자 신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애를 썼습니다. 체육관에 다닌다는 이야기는 물론 이고 읽은 책이나 음악 이야기도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죠. 그런 나에 비하면 아오키라는 남자는 무슨 일을 하든 뻘구덩이 속의 백조처럼 눈에 띄었습니다. 아무튼 머리가 좋았어요. 그 점은 나도 인정합니다. 회전이 빨 라요. 상대방이 무얼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마치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아무 어려움없이 순식간에 알아차려요. 그리고는 그에 따 라 자신의 태도를 바꿉니다. 그래서 모두들 아오키한테 감탄하고 말죠. 저 놈은 머리도 좋고 굉장한 놈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어요. 내가 보기에 아오키라는 인간은 너무 천박했습니다. 저런 녀석의 머리를 좋다고 한다면 나는 머리 따위 좋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그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어쨌 든 그 남자의 머리는 칼처럼 정확하고 날카롭게 돌아가죠. 그러나 그 남자에게 는 자기자신이란 것이 없었어요. 타인에게 이것만큼은 주장하고 싶다, 뭐 그런 게 없었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자기를 인정해 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이었죠. 그런 자신의 재능에 도취되어 있었어요. 바람 부는 대로 그저 빙글빙글 돌기만 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의 그런 이면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습니다. 아오키 쪽도 그런 나의 심리를 암암리에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눈치가 빠른 남자였으니까요. 아니 그는 나를 불길한 존재로 느끼지 않았나 싶은 기분 마저 듭니다. 나도 바보는 아닙니다. 별 대수로운 인간은 아니지만, 나는 그때부 터 내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반에서 나만큼 책을 많이 읽은 인간은 없었을 겁니다. 나 자신은 표시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아직 철이 덜 든 때였기도 하니 어쩌면 그런 것을 은연중에 내세우며 타인을 깔보는 구석이 있었을지도 모 르겠군요. 그리고 그런 무언의 자부심 같은 것이 아오키를 자극하지 않았나 싶 습니다. 어느 날 나는 학기말 영어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시험에서 일등 을 하다니 나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그런 점수를 받은 것은 아니었죠. 그때 아주 갖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지만 - 만약 시험에서 한 과목이라도 일등을 하면 사 주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영어에서 일등을 하자 마음먹고 철저하게 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시험 범위를 샅샅이 훑었습니다. 틈만 나면 동사 활용을 외웠습 니다. 교과서 한 권을 통째로 암기할 만큼 수도 없이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로 서는 백 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일등이 됐다 해서 신기할 것도 이상할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선생도 놀란 눈치였습니다. 그리고 아 오키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오키는 영어 시험에 서는 줄곧 일등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죠. 선생님은 답안지를 돌려주면서 농담 비슷하게 아오키를 놀렸습니다. 아오키의 얼굴이 뻘개졌죠. 자기가 웃음거리가 된 기분이었겠죠.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며칠 후 누 군가 나에게 아오키가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가르쳐주었 습니다. 내가 커닝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고는 내가 일등을 할 턱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 비슷한 이야기를 몇몇 친구들한테도 들었 습니다. 나는 그 소문을 듣고 상당히 화가 났습니다. 그런 소문 따위 웃음으로 묵살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러나 겨우 중학생입니다. 그렇게까지 냉정해지기 는 어려웠죠.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점심 시간에 아오키를 한적한 곳으로 불러내 어,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추궁했습니다. 아오키는 시치미 를 떼더군요. 야 너, 생트집 잡지 마, 라고 하더군요. 너한테 이러니저러니 말 들 을 이유 없다구, 어쩌다 일등 한 번 했다고 까불기는, 그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필경 나보다 자기가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힘도 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겠 죠. 내가 반사적으로 아오키를 때린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아오키의 왼쪽 뺨에 힘껏 스트레이트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아오키가 옆으 로 픽 쓰러지고, 쓰러지는 바람에 벽에 머리가 부딪쳤습니다. 쿵 하는 소리가 날 정도였습니다. 코피가 터져 하얀 셔츠 앞으로 끈적끈적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은채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내 주먹이 그의 턱뼈를 스치는 순간부터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런 짓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나 는 여전히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지만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오키에게 사과할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과하지 않았습 니다. 상대가 아오키만 아니었어도 나는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사과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오키라는 녀석한테만은 도무지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습니 다. 나는 아오키를 때린 일은 후회하고 있었지만, 아오키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는 털끝만큼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런 녀석은 얻어맞아도 싸다고 생각했습니 다. 이런 놈은 해충같은 인간이다. 이런 놈은 누군가 발로 짓뭉개버려도 아무 상 관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때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직관적인 진리였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나는 이미 상대방을 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 는 아오키를 남겨둔 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아오키는 오후 수업에 빠졌습니다. 아마 그 길로 집에 돌아갔나 보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찜찜한 기분이 내 안에서 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위 속에 묵직한 것이 똬리를 틀고 있어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벌레를 삼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주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 참으로 고 독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나를 이렇게 암담한 기분에 빠지게 한 아오 키라는 남자를 한층 더 격렬하게 증오하였습니다. “아오키는 이튿날부터 나를 무시하려 애썼습니다. 마치 나 같은 인간은 존재 하지조차 않는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보면 변함없이 일등을 하였습 니다. 나는 그 이후 시험 공부에 두번 다시 정열을 쏟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험 점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래서 낙제를 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 히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였습니다. 숙부의 체육관에도 죽 다녔습니다. 열심히 훈련에 정진했습니다. 덕분에 내 복싱 솜씨는 중학생치고 는 꽤 상당한 수준에 올랐습니다. 몸이 점점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깨가 넓어지고 팔이 탄탄해지고 얼굴 살에도 탄력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어른이 돼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멋진 기분이었습니 다. 나는 매일 밤 알몸으로 목욕탕 커다란 거울 앞에 섰습니다. 그 무렵에는 자 신의 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것입니다. 신학기가 되자 아오키와 나는 다른 반으로 갈라졌습니다. 나는 안도하였죠. 매 일 교실에서 그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나는 참 다행스러웠 습니다. 아오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리고 이대로 저 찜찜한 기억도 영 원히 멀어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만사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죠. 아오 키는 내게 복수의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존심 센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 아오키는 복수심이 강한 남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모욕을 그렇게 쉽사리 잊어버리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는 내 발목을 잡을 수 있 는 결정적인 기회를 줄곧 노리고 있었던 겁니다. 나와 아오키는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우리들이 다니던 학교는 중고 등학교가 같이 있는 사립학교였습니다. 해마다 반이 바뀌었는데 다행히 아오키 와는 내내 다른 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끝내 마지막 3학년 때 그와 같은 반이 되 고 말았습니다. 교실에서 그와 얼굴이 마주쳤을 때 아주 느낌이 불쾌했습니다. 또 그의 눈초리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 위 속에 무겁에 똬리를 틀고 있던 묵직한 느낌이 되살아났습니다. 불기한 예감 말이죠.” 오사와 씨는 거기서 입을 다물고 눈앞에 있는 커피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그러다 얼굴을 들고 희미한 미소를 띠고는 내 얼굴을 보았다. 창 밖으로 제 트기의 굉음이 들렸다. 보잉 737이 쐐기처럼 구름 속을 일직선으로 파고들어갔 다.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사와 씨가 말을 이었다. “1학기는 별탈없이 평온무사하게 지나갔습니다. 아오키 쪽도 별다른 움직임 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 니다. 어떤 종류의 인간은 성장도 퇴보도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똑같은 일을 똑 같은 방식으로 반복할 따름이죠. 아오키의 성적은 여전히 톱 클래스였습니다. 인 기도 여전히 좋았습니다. 그 남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 같은 것이 이미 10 대에 터득했죠. 아마 지금도 똑같은 식으로 살고 있을 겁니다. 아무튼 우리는 가 능한 한 눈길이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한 교실 안에 관계가 어색한 사 람이 있다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죠. 나에 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으니. 드디어 여름 방학이 왔습니다. 고교 시절의 마지막 여름 방학이었습니다. 나는 그런대로 성적도 괜찮았고 이리저리 고르지만 않는다면 어디 적당한 대학에 들 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시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수업을 매일 혼자서 예습 복습하는 정도였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죠. 부모님도 잔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체육관에 가서 연습을 하고 나 머지 시간에는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레코드를 듣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눈에 불을 켜고 입시에 매달렸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중고 일 관 교육을 하는 소위 명문교였습니다. 어느 대학에 몇 명이 들어갔다느니, 어느 대학의 입학자 수가 몇 위였다느니 하는 것들에 선생들이 울고 웃는 그런 학교 말입니다. 학생들도 3학년이 되면 온통 입시밖에 염두에 없어, 교실 분위기도 팽 팽하게 긴장되었습니다. 나는 그 학교의 그런 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 다. 들어갈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고 6년을 다녔는데도 끝내 좋아지지 않았습니 다.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학교 친구는 끝내 한 명도 생기지 않았습 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그나마 사귀었다고 하는 상대는 체육관에서 만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고 또 이미 직장 생활을 하고 있 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과는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연습이 끝나면 함께 맥주를 마시기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반 남자들과 는 전혀 종류가 달랐고, 하는 얘기들도 내가 보통 교실에서 하는 내용들과는 전 혀 달랐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있는 편이 훨씬 편했습니다. 그리고 그 들로부터 여러가지 중요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만약 내가 복싱을 하지 않았다면, 그 숙부의 체육관에 다니지 않았다면 난 참 고독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상을 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칩니다. 여름 방학이 한참인데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같은 반 학생 한 명이 자살을 했어요. 마쓰모토라는 이름의 남자였습니다. 마쓰모토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학 생이었죠. 솔직하게 말하면 눈에 띄지 않는다기보다 차라리 존재감이 없었다는 표현이 적절한 남자였습니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같은 반인데도 나는 그와 아마 두세 번밖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을 겁니다. 홀쭉하고 안색도 별로 좋 지 않은 친구였다는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8월 10 며 칠경이었습니다. 종전 기념일과 장례식이 같은 날이어서 기억하고 있죠. 무지무 지하게 더운 날이었어요. 집으로 전화가 걸려와 그 친구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 죠. 전원 장례식에 참가하니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반 전원이 장례식에 참 석했습니다. 지하철에 뛰어들어 죽었어요.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유서 비 슷한 것을 남기기는 했는데, 거기에는 딱 한마디, 이제 더이상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밖에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지, 자세한 이유 는 하나도 쓰여 있지 않았죠. 적어도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학 교측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전교생이 학교에 집합한 가운데, 교장이 설교를 했습니다. 마쓰모토 군의 죽음을 애도해 마지않는다는 등, 그의 죽음의 무게를 우리들 전원이 마음에 깊이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둥, 이 슬픔을 극복하고 전원이 한층 학업에 정진해야 한다는 둥... 그런 유의 이 야기였습니다. 그런 후 우리 반만 교실에 모였습니다. 교무 주임과 담임 선생이 앞에 서서, 만약 마쓰모토 군의 죽음에 어떤 특별한 원인이 있다면 우리들이 그것을 분명하 게 밝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이 반에서 그가 자살한 원인에 짐 작가는 바가 있는 학생은 정직하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우리 모두는 잠자 코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일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죽은 친구는 정말 안됐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처참하게 죽을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학교가 싫으면 다니지 않으면 될 일이고, 더구나 앞으로 반년이면 억지로라도 학교를 졸업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런데 왜 애써 죽음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나는 잘 이해 가 안 갔습니다. 무슨 노이로제 증상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앉 으나 서나 입시 이야기밖에 하지 않으니, 머리가 이상해지는 인간이 하나쯤 생 긴다 해도 무리는 아니죠. 그런데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우리 반 분위기가 기묘하 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들 나를 소원하게 대 하는 것이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 주변에 있는 친구들에게 말을 걸어도 왠지 어 색하고 무성의한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여겼습니다. 아니면 전반적으로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라고만 여기고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학기가 시작되고 한 닷새쯤 지났을 때 담임 선생이 갑자기 나를 불렀습니다. 방과 후에 교무실로 오라는 것이었어요. 담임 선생은 나에게, 체육관에 다니면서 복싱을 한다고 들었 는데 정말이냐, 고 물었습니다. 나는 정말이라고 대답했지요. 내가 교칙을 어기 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언제부터 다니고 있느냐고 담임 선생이 또 물었 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입니다. 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네가 중학교 2학 년 때 아오키를 때린 일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사 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오키를 때린 것이 복싱 을 시작하기 전의 일이냐 나중의 일이냐, 라고 담임이 물었습니다. 시작한 다음 의 일이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상 태였습니다.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 첫 석 달 동안은 그러브를 껴보지도 못했습 니다. 라고 나는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담임은 그런 나의 설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네가 마쓰모토를 때린 일이 있느냐고 담임이 물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마쓰모토라는 남 자와는 거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때리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 는 마쓰모토를 때릴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쓰모토는 학교에서 누구한텐가 줄곧 얻어맞은 모양이야, 라고 담임이 난처 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얼굴과 몸에 멍이 들어가지고 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어머니가 그러시더군. 학교에서, 이 학교에서 누군가가 마쓰모토를 때리면서 용 돈을 울거낸 거지. 그런데 마쓰모토는 상대방의 이름을 어머님한테 말하지 않았 어. 그랬다가는 더 얻어맞고 못된 짓을 당할 것 같아서였겠지. 그래서 녀석이 쫓 기다 못한 나머지 자실을 한 거지. 가엾게도 아무와도 의논할 수가 없었던 거야. 꽤나 지독하게 얻어맞은 모양이야. 우리들은 지금 누가 마쓰모토를 때렸는지, 조 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혹시 마음에 짚이는 학생이 있으면 정직하게 말해주었 으면 한다. 그러면 일이 원만하게 수습될 거야. 그렇지 않으면 경찰이 개입하게 되어 있어. 너, 그 점은 잘 알고 있겠지. 순간 아오키가 관계되어 있을 것이란 짐작이 들었습니다. 아오키가 그 마쓰모 토라는 남자의 죽음을 실로 멋들어지게 이용한 것이죠.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오키는 내가 체육관에 다니면서 복싱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어 디선가 알게 된 것이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 습니다. 하지만 아무튼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마쓰모토가 죽기 전에 누군가가 그를 때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 다음은 간단한 일이 죠. 1에다 1을 더하면 되니까요. 담임 선생님한테 내가 복싱을 배우고 있다는 것 과 과거에 자신이 나한테 맞은 일이 있다는 것을 고하면 그만이니까요. 물론 적 당한 과장도 덧붙이겠죠. 내가 으름장을 놓아서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 했다느니, 코피가 엄청 나왔다느니, 그런 정도의 말은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나중에 교묘하게 덧칠을 하여 최종적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공기 같 은 것을 거기에 형성해 놓았던 것입니다. 나는 그의 그런 수법을 눈으로 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담임 선생은 나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들이 체육관에 다니고 복싱을 배우는 인간은 많든 적든 불량기가 있다고 단정짓습니다. 게다가 나는 원래가 선생들한테 귀여움을 받는 타입의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사흘 후에 경찰의 소환을 받았습니다. 말한 필요도 없지만 상당한 충격이었습니 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증거도 전혀 없는, 단순한 소문이었습 니다. 정말 슬프고 분했어요.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으니까요. 공정하지 않으면 안 될 선생마저 나를 두둔해 주지 않았습니다. 경찰에서는 간단한 조사 를 받았습니다. 나는 마쓰모토와 거의 말도 한적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분명 나는 4년 전 아오키라는 학생을 때렸다. 하지만 그것을 흔히 있을 수 있는 싸움 이었지. 그 다음에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고 그뿐입니다. 자네가 마쓰 모토군을 때렸다는 소문이 있던데, 라고 담당 경관은 말했습니다. 나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고의로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습 니다. 라고. 경찰도 그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증거가 없었으니까요. 그저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경찰에 불려갔다는 사실은 온 학교에 퍼졌습니다. 비밀리에 진행 된 일이었는데, 누설된 것이죠. 그리고 그 일로 나를 보는 모두의 시선이 결정적 으로 일그러져버린 듯하였습니다. 경찰에 불려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모두들 믿어버린 것이지요. 모두들 내가 마쓰모토를 때린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것같았습니다. 아오키가 어떤 그럴싸한 말을 퍼뜨렸는지, 반에 어떤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는 지,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나로서는 알고 싶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혹독한 내용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어찌되었든 우리 반 아 이들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마치 서로 입을 맞춘 듯 - 실제 로 의논을 했겠죠 -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묻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말을 걸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내가 전염병 환자 라도 되는 것처럼 피하였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를 깨끗이 무시하려 한 것이죠. 학생뿐만이 아닙니다. 선생도 나와는 가능하면 얼굴을 마주하지 않으려 하였 습니다. 물론 출석을 부를 때는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그들은 절대로 나를 지명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지독한 것을 체육 시간이었습니 다. 어떤 경기를 해도, 나는 사실상 어느 팀에도 낄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나와 한편이 되어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선생은 그런 나를 한 번도 도와주지 않 았습니다. 나는 학교에 가서 잠자코 수업을 받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날들 이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정말 고통스런 나날이었습니다.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 습니다. 잠자리에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눈은 뜨고 있는데 머리는 왠지 멍했습니다. 자신이 지금 자고 있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그런 구별조 차 점점 불분명해졌습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자 복싱 연습에 빠지는 날도 더러 생겼습니다. 부모님은 걱정을 하며 무슨 일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부모님한테 털어 놓는다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결국 부모님은 내가 학교에서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건 지 알지 못했습니다. 두 분다 일을 갖고 계셔서 아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 었던 것이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그저 내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습 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뿐입니다. 나는 많은 상상을 하였습니다. 제일 즐겨 상상한 것은 아오 키를 때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아오키가 혼자 있는 틈을 노려 몇 번이고 몇 번이 고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너 같은 놈은 쓰레기라고 소리치면서 힘껏 때립니다. 상대가 비명을 질러도, 울면서 용서해달라고 매달려도, 때리고 또 때리고 얼굴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인정사정없이 때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때리다보면 왠지 기분이 점점 나빠졌습니다. 처음에는 괜찮아요. 어디 맛 좀 봐라 싶은 생각에 기 분이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점점 기분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자 신이 아오키를 때리는 광경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아오키의 얼굴이 떠오르고 정신을 차리면 나는 어느 틈엔가 아 오키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때리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상을 하다가 실제로 속이 울렁거려 토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좋을 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앞에 나가 의심받을 짓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고 해명을 해볼까 하고도 생각했습니다. 내가 무슨 벌받아야 할 짓을 했다면 그 증거를 제시해 주었으면 좋겠다. 증거가 없다면 나를 이런식으로 벌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어떤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 게 말하면 나는 아오키의 말을 고스란히 믿어버린 반 친구들을 상대로 해명 따 윈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런 해명을 하면 결과적으로 내가 갈팡질팡 하고 있다는 것을 아오키에게 알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나는 아오키 같은 인간 과 같은 씨름판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데 되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아오키를 때릴 수도 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두들 설득시킬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 는 일이라고는 그저 잠자코 견디는 것뿐입니다. 이제 반년밖에 남지 않았으니, 반년만 지나면 졸업이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아무와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반년 동안, 어떻게든 그 침묵을 견디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나는 반 년 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불과 한 달을 견딜 자신도 없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매직펜으로 달력을 하루하루 까맣게 지워 나갔 습니다. 겨우 오늘 하루가 끝났다. 겨우 또 하루가 지나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나는 그 침묵에 짓눌려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아침 내가 아오키 와 같은 전철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정말 짓눌려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잘 알 수 있는데, 그만큼 나의 신경은 위험한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간신히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일이 있고 약 한 달이 지난 무렵이었습니다. 학교로 가는 전철속에서 우연히 아오키와 마주친 것입니다. 아침 전철은 그날도 만원이어서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내 가 서 있는 자리 조금 앞에 아오키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두세 사람 건너, 누군 가의 어깨 너머로 아오키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나는 그와 꼭 마주보는 꼴로 얼 굴을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그도 나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나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시선을 마주하 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 나는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잠도 잘 못 자고 노이로제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으니까요. 처음에 아오키는 냉소적인 눈 길로 나를 보았습니다. 어때, 식겁했지란 식으로 말입니다. 나는 이 모든 사건이 전부 아오키가 꾸민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오키도 내가 알고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 자의 눈을 보고 있는 사이에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기분은 지금까 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아오키에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때로는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만원 전철 안에서 내가 느낀 것은 분노나 증오라기보다는, 오히려 슬픔이나 연 민에 가까운 감정이었습니다. `정말 이 정도의 일로 인간은 의기양양하게 승리감 에 젖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정도의 일로 저 남자는 진심으로 만족하고 기뻐하 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한없는 애처로움 같은 것이 느껴졌 던 것입니다. 저 남자는 진정한 기쁨이나 진정한 자부심 같은 것을 영원히 이 해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저 소리 없는 떨림을, 저 남자는 죽을 때까지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어떤 유의 인간에게 는 깊이라는 것이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뭐 나한테 깊이가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깊이란 것의 존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아 주 공허하고 평탄한 인생을 보냅니다. 아무리 타인의 눈길을 끈다 한들, 표면적 인 승리를 쟁취한다 한들, 실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았습니다. 더이상 아오키 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것입니다. 정말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담담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머지 다섯 달 동안 침 묵을 견디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충분히 견딜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 다. 나한테는 아직 자부심이란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대로 아오키 같은 인간 한테 질질 끌려다닐 수는 없다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나는 그런 눈으로 아오키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아오키 역시 눈길을 돌리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 고 있었겠죠. 전철이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어느 쪽도 얼굴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아오키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주 미미한 떨림이었지만, 나는 분명하게 포착할 수 있었죠. 복싱을 하다 보면 상대방의 눈 의 움직임에 민감해지거든요. 다리가 꼼짝하지 않는 복서의 눈 말입니다. 스스로 는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죠. 자기자신은 움 직이고 있다고 여기고 있어요. 그런데 다리는 멈추어 있습니다. 다리의 움직임이 멈추면 어깨도 자연히 매끄러운 움직임을 잃습니다. 그렇게 되면 펀치에 힘이 없어지죠. 그런 눈이었습니다. 왠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원인을 본 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순간을 경계로 재기하였습니다. 밤에도 푹 잘 수 있었고, 식사도 거르지 않 고 체육관에도 빠지지 않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질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단순히 아오키에게 이긴다든가,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인생 그 자체에 질 수 없 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이 경멸하고 모욕스럽게 느끼는 것에 간단히 짓뭉개 질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나머지 다섯 달을 견뎠습니다.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 았습니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다. 라고 스스로를 자위하였습니다. 매일 가슴을 쫙 펴고 학교에 가서 가슴을 쫙 펴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큐슈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큐슈 로 가면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과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사와 씨는 거기까지 얘기하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내게 커피를 한 잔 더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양하였다. 벌써 세 잔이나 커피를 마셨 던 것이다. `그렇게 강렬한 경험을 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변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죠. 좋은 방향이 라면, 나는 그 일로 굉장히 참을성이 강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 반년 동안 내 가 당한 고난에 비하면 그 후에 경험한 고난 따윈 고난 축에도 끼지 않는 것이 었습니다. 그 시절에 비하면, 하고 생각하면 대개의 어려움은 참고 견딜 수 있었 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상처나 고통 같은 것에 대해서도. 보통 사 람 이상으로 민감해졌습니다. 이런 것들은 플러스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플러스적 특질을 얻음으로 해서 나는 그 후 진짜 좋은 친구를 몇 명 사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이너스적인 요소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인간이 란 것을 전혀 신용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을 불신하는 그런게 아닙니 다. 나는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신뢰감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합 니다. 지금은 이렇게 평온무사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만 약 무언가 지독한 악의를 품은 것이 찾아와 그 평화를 뿌리째 뽑아버린다면, 설 사 자신이 행복한 가정과 좋은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다 해도 앞날이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하는 말을 혹은 당신이 하는 말을, 누구 하나 믿어주지 않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을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법이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죠.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일은 여섯 달 만에 그럭저럭 끝났습니다만 이 다음에 그런 일이 다시 생긴다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신이 그것에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을지,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때로 정말 두려워집니 다. 밤중에 그런 꿈을 꾸고 놀라 벌떡 일어나는 일도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때 나는 아내를 깨웁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매달려 웁니다. 한 시간 정도 운 적도 있습니다.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멈추고 창 밖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름은 아까부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관제탑도 비행기도 운송차량도 트랩도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도, 그런 깊은 구름의 그림자에 모든 색을 잃고 있었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아오키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아오키 같은 인간은 어 디에나 흔히 있고,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하였습니다. 그런 인간을 보면 어 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관계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피하는 거죠. 피하는 도리 밖에 없어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런 인간은 금방 알아볼 수가 있어 요. 나는 아오키에 대해서는 그 나름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기회가 올 때까지 잠자코 끈질기게 기다리는 능력, 기회를 확실하게 포착하는 능력, 사람의 마음을 실로 교묘하게 장악하고 선동하는 능력 - 모든 사람들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토악질이 올라올 만큼 싫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능력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아오키 같은 인간이 하는 말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 산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말주변이 좋고, 받아들이기 쉬 운 타인의 의견에 좌지우지되면서 집단으로 행동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런 사람 들은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손톱만큼도 품지 않습니 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의미하게 또 결정적으로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 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그런 족속들입 니다. 나는 한밤중에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꿈꿉니다. 꿈 속에는 침묵밖에 없습 니다. 그리고 꿈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에게는 얼굴이 없습니다. 차가운 물처럼 침묵이 모든것에 푹 배어들어 있을 뿐입니다. 침묵 속에 모든 것이 흐물흐물 녹 아들어 있습니다. 내가 그런 상황에 녹아들면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오사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지만, 얘기는 거기서 끝났다. 오사와는 마주 잡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시간은 이르지만, 맥주라도 한 잔 하지 않으렵니까?` 잠시 후에 그가 그 렇게 말했다. 그러죠, 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맥주라도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얼음 사나이 나는 얼음 사나이와 결혼하였다. 나는 어느 스키장의 호텔에서 얼음 사나이를 만났다. 얼음 사나이와 서로 알 게 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사람들로 붐비는 떠들썩한 호텔 로비에서 얼음 사나이는 난로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구석자리 의자에 홀로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이미 정오에 가까운 시간인데, 겨울날의 싸늘하 고 선명한 햇살이 아직 그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있지, 저 사람이 얼음 사나이야`라고 내 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나 는 그때 얼음 사나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친구 들도 잘 몰랐다. 다만 그가 `틀림없이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을거야. 그러니까 얼 음사나이라고 불리겠지`라고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마치 유령이나 전염병 환자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음 사나이는 키가 크고, 언뜻 보기에도 머리결이 뻣뻣했다. 얼굴 생김은 아 직 젊은 것 같은데, 그 철사처럼 뻣뻣한 머리칼에는 흰머리가 마치 녹다 남은 눈처럼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광대뼈는 얼어붙은 바위처럼 팽팽하게 불거져 있 고, 손가락에는 결코 녹는 일이 없는 서리가 껴 있었지만, 그런점은 제외하면 얼 음사나이의 외모는 보통 남자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핸섬하다고는 할 수 없겠 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풍모였다. 그에게는 무언가 사람의 마음 을 날카롭게 찌르는 것이 있었다. 특히 그의 눈이 그랬다. 겨울 아침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과묵하고 투명한 눈길이었다. 그것은 임시 로 만들어진 육체 안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생명의 광채를 담고 있는 듯이 보였 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얼음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얼음 사나 이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줄곧 책을 읽 고 있었다. 마치 자기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고 스스로에게 들려주기라도 하듯. 그 다음날 오후에도 얼음 사나이는 같은 장소에서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책 을 읽고 있었다. 내가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에도. 해거름이 되어 친구들 과 함께 스키장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그는 어제와 똑같은 의자에 앉아 어제와 똑같은 책에 어제와 똑같은 눈길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 였다. 날이 저물어도 밤이 깊어도 그는 창 밖의 겨울 그 자체인 것처럼 조용히 의자에 앉아 홀로 책을 읽었다. 나흘째 되는 날 오후, 나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고 스키장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혼자 호텔에 남아, 로비에서 잠시 어슬렁거렸다. 사람들이 모두 스키장으로 나가, 로비는 버려진 마을처럼 휑뎅그렁했다. 로비의 공기는 필요이상으로 따뜻 하고 눅눅하고 우울하게 굴절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신발 바 닥에 묻어 호텔 안으로 옮겨진,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난로 앞에서 구질구질 녹 아버린 눈의 냄새였다. 나는 이 창문 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신문을 팔락팔락 들쳐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얼음 사나이 곁으로 다가가 용감하게 말 을 걸어보았다. 나는 비교적 낯을 가리는 편이라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나는 어떻게든 얼음 사나이와 얘기를 나누어보고 싶었다. 그날은 내가 그 호텔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고, 이때를 놓 치면 앞으로 얼음 사나이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두번 다시 오지 않으리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스키를 타지 않나요. 라고 나는 가능한 한 별다른 뜻은 없다는 목소리 로 얼음 사나이에게 물었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저 멀리서 바람소리라 도 들린 것 같은데. 란 표정으로 그는 그런 눈으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소 리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스키는 타지 않습니다. 이렇게 눈을 보면서 책을 읽 는 것으로 족해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말은 공중에서 몽실몽실한 하얀 구름 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내 눈으로 그의 말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는 손가 락에 껴 있는 서리를 가볍게 비벼 털어냈다. 나는 그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얼음 사나이는 내 눈을 보았다. 그가 살며시 미소지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얼음 사나이가 정말 미소지은 것일까? 어 쩌면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얼음 사나이는 괜찮으시면 거기에 좀 앉으시죠, 라고 말했다. 잠시 얘기를 나누죠. 당신은 내게 관심이 있는 모양 이로군요. 얼음 사나이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는 희 미하게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전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나랑 얘기한다고 해 서 감기에 걸리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나는 얼음 사나이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는 로비 구석에 있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창 밖으로 휘날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나는 따뜻한 코코아를 주문하여 마셨다. 얼음 사나이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얼음 사나이 역시 나 못지않게 말솜씨가 어눌한 듯하였다. 게다가 우리한테는 공통된 화제라는 것이 없었다. 우리는 맨 처음 날씨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이 호텔이 어느 정도 안락한지에 대해서 얘기했다. 당신은 혼자 여기에 왔나요. 라 고 내가 얼음 사나이에게 물었다. 그래요, 라고 얼음 사나이가 대답했다. 얼음 사나이는 나에게 스키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대 답하였다. 여자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하도 닥달을 해서 따라왔을 뿐이다. 사실 은 거의 탈 줄도 모른다. 나는 얼음 사나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 몹시 알고 싶 었다. 정말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평소에 어떤 음식을 먹는지, 여름철에는 어디에서 사는지, 가족은 있는지 없는지 - 그런 유의 의문이다. 하지만 얼음 사 나이 스스로는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얼음 사나이는 그런 것들에 대해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대신 얼음 사나이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얘기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일 인데, 얼음 사나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나에 관해 숙지하고 있었다. 나의 가족 구 성이며, 내 취미며, 내 건강 상태며,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며, 내가 사귀고 있는 친구들에 대하여 그는 하나에서 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내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먼 옛날 일까지 그는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부끄럽군요, 라고 나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자신이 타인 앞에서 알몸 을 드러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나에 관해 그렇게 잘 알 고 있는 거지요. 라고 나는 물었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나요? 아니오, 내가 사람의 마음을 읽다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어요. 그냥 아는 겁니다, 라고 얼음 사나이는 말했다. 마치 얼음 속을 지그시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렇게 지그시 당신을 보고 있노라면, 당신에 관한 모든 것 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내 미래도 보여요? 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미래는 보이지 않아요. 라고 얼음 사나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미래라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나한테는 미래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죠. 얼음에는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 다. 얼음에는 그저 과거가 단단하게 봉해져 있을 따름입니다. 모든 것은 마치 살 아 있는 것처럼 얼음 속에 봉인되어 있습니다. 얼음이란 그런 식으로 많은 것을 보존 할 수 있죠. 아주 청결하고, 아주 선명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입니다. 그것 이 얼음이란 것의 역할이며 본질입니다. 다행이로군요, 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그 말을 듣고 안심했어 요. 나는 나의 미래 따위 알고 싶지 않거든요. 우리 도쿄에 돌아와서도 몇 번 만났다. 마침내 우리는 주말이면 데이트를 하 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가지도 않았고 찻집에도 들 어가지 않았다. 식사조차 하지 않았다. 얼음 사나이가 식사를 거의 하지 않기 때 문이다. 우리는 만나면 늘 공원 벤치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정말이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얼음 사나이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자신에 관해서는 얘기하려 하지 않았다. 왜인가요, 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어째 서 당신은 자신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은 것이죠? 나는 당신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요. 당신은 어디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경 위로 얼음 사나이가 되었나요? 얼음 사나이는 잠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잘 몰라요. 라고 얼음 사나이는 조용하게 그러나 단 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딱딱하고 하얀 숨을 공중으로 토했다. 나에게는 과거라는 것이 없어요. 나는 모든 과거를 알고는 있죠. 모든 과거를 보존하고 있 어요. 하지만 나 자신한테는 과거란 것이 없어요. 나는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 지 몰라요. 내 자신에게 나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얼음 사나이는 암흑 속에 떠 있는 빙산처럼 고독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런 얼음 나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얼음 사나이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오로지 이 지금의 나를 사랑해 주었다. 그리고 나 역 시 과거도 미래도 없는 다만 이 지금의 얼음 사나이를 사랑하였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막 스무 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얼음 사나이는 내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남자였다. 얼음 사나이를 사랑하는 것이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그때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설사 상대가 얼음 사나이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역 시 아무것도 몰랐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나 언니는 나와 얼음 사나이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였다. 너는 결혼하기 에는 아직 너무 어려, 라고 그녀들은 말했다. 그런 데다 상대방의 정체조차 제대 로 모르고 있지 않니.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잖아. 친척들한테 그런 남 자랑 결혼한다는 말을 어떻게 꺼낼 수 있단 말이냐. 더구나 너, 상대는 얼음 사 나이야. 자칫 무슨 일이 생겨 녹아버리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냐구, 라고 그녀들 은 말했다. 넌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결혼이란 책임이 따르는 일이야. 얼음 사나이가 과연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얼음 사나이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존 재가 아니었다. 얼음 사나이는 그저 얼음처럼 차가울 뿐이다. 그러니까 주위가 따뜻해졌다고 해서 녹아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 차가움은 분명 얼음을 닮았다. 그러나 그 육체는 얼음과는 다르다. 물론 얼음처럼 차갑기는 하지만, 그것은 타 인의 체온을 빼앗는 그런 차가움은 아니었다. 우리는 결혼하였다. 누구 하나 축복해주는 이 없는 결혼이었다. 친구들도 부모 님들도 가족들도, 한결같이 우리의 결혼을 기뻐해 주지 않았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리려 해도, 얼음 사나이는 호적조차 갖고 있지 않았 다. 우리는 둘이서, 우리가 결혼했다고 정했을 뿐이다. 우리는 조그만 케이크를 사서 그것을 둘이서 먹었다. 그것이 우리의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우리는 조그만 방을 빌렸고 얼음 사나이는 생계를 위하여 쇠고기를 보관하는 냉동창고에서 일 했다. 그는 뭐니뭐니 해도 추위에 강했고, 아무리 일해도 피로라는 것을 느끼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그래서 고용주는 얼음 사나이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남들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지급해 주었다. 우리는 어느 누구의 방 해도 받지 않고, 그 누구를 방해하는 일도 없이 둘이서만 차분하고 행복하게 살 았다. 얼음 사나이에게 안기면, 나는 어딘가에 쓸쓸하고 조용하게 존재하고 있을 얼 음 덩어리를 떠올렸다. 얼음 사나이는 그 얼음 덩어리가 존재하는 장소를 알고 있을 것이다. 딱딱한, 그 이상 딱딱한 것이 없을 만큼 딱딱하게 얼어붙은 얼음이 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얼음 덩어리다.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 아주 먼 장소에 있다. 그는 그 얼음의 기억을 이 세상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한동 안 나는 얼음 사나이에게 안기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익숙해졌다. 그 리하여 나는 얼음 사나이에게 안기는 일까지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변함없이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그가 얼음 사나이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나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안고 말없이 그 거대한 얼음을 공유하였다. 그 얼음 안에는 몇억 년에 걸친 세계의 온갖 과거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청결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에 이렇다 할 문제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그 사랑을 방해할 요인은 전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얼음 사나이란 존 재에 좀처럼 친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자 그들 역시 조금씩 얼음 사나이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그들은, 얼음 사나이라고는 하지만, 보통 사람들하고 별로 다르지 않군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얼 음 사나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와 결혼한 나 역시 받아들 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간극은 메워질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왠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과 얼음 사나이와는 유전자의 결합이라든가 아무튼 뭔가가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이 가 없는 탓에 남아도는 시간을 미처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아침 나절에 집안 일을 후딱 해치우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할 일이 없었다. 나에게는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외출할 친구도 없었고, 이웃 사람들과의 접촉도 없었다. 나의 어머니와 언니는 얼음 사나이와 결혼한 일로 화가 나서 내개 입도 뻥긋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나를 가문의 수치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전화를 걸 상대도 없었 다. 얼음 사나이가 창고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내내 혼자 집을 지키면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집 안에 있기를 좋아하는 편 이고, 혼자 있음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느끼는 성격도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아직 젊었고, 그런 아무 변화도 없는 나날의 반복을 끝내는 고통스러워하 게 되었다. 나를 괴롭힌 것은 따분함이 아니었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 반복성이었다. 그런 반복 속에서는 어쩐지 자기자신이 반복되는 그림자처럼 느 껴지고 만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제안하였다. 기분 전환 삼아 둘이서 어디 여행 이라도 하고 싶어요. 라고 여행? 하고 얼음 사나이가 말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대체 뭣 하러 여행 같은 것을 한단 말이오? 당신은 나와 함 께 여기에 있는 것이 행복한지 않소? 그런 뜻이 아니예요. 라고 나는 말했다. 나는 행복해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하지만 말이죠. 나는 따분해요. 어딘가 멀리에 가서, 지금까지 보 지 못한 것을 보고 싶어요. 마셔본 적이 없는 공기를 마셔보고 싶어요. 알겠어 요. 내 기분? 더구나 우리는 신혼 여행도 가지 않았잖아요. 느긋하게 여행을 즐 겨도 좋을 때라구요. 얼음 사나이는 얼어붙은 듯 깊은 한 숨을 쉬었다. 한숨은 공중에서 카랑카랑 소리나는 얼음 결정이 되었다. 그는 서리가 낀 긴 손가락을 깍지껴 무릎 위에 놓았다. 당신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군, 만약 당신이 그토록 여행이 하고 싶다면, 나는 그다지 반대할 마음은 없소. 그렇다고 여행이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서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일이라도 할 것이고, 어디 라도 갈것이오. 냉동창고 일도 내가 쉬겠다고 하면 쉴 수 있을 것이고, 지금까지 꽤나 열심히 일해 왔으니 말이오. 아무 문제 없을 거요. 그런데 당신은 어디로 여행하고 싶은 거지? 남극은 어떨까요. 라고 나는 말했다. 내가 남극을 고른 것은, 추운 곳이라면 틀림없이 얼음 사나이가 관심을 가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직하 게 말하면. 나는 훨씬 이전부터 남극을 한 번 여행하고 싶었다. 나는 오로라도 보고 싶었고, 펭귄도 보고 싶었다. 나는 모자가 달린 털코트를 입고 오로라 아래 서 펭귄떼와 노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남편인 얼음 사나이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도 깜 박이지 않고. 그 눈길은 뾰족한 고드름처럼 내 눈을 질러 머리 뒤쪽까지 관통하 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골몰하다가, 마침 내 찌직찌직 하는 목소리로 좋아요 라 고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그러기를 바란다면 남극을 여행합시다. 이제 그럼 됐 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주일 후면 장기 휴가를 얻을 수 있을 거요. 그동안에 여행 준비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정말 남극으로 가면 족한 거요? 그런데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얼음 사나이가 고드름 같은 시선으 로 너무도 빤히 쳐다보기에 머릿속이 차가워져 경련을 일으키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리 나는 남편에게 남극 여행을 조른 자신을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왜인지는 모른다. 내가 `남극`이란 말을 입에 담은 이후로 남편 안 에서 무언가가 변한 듯이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남편의 고드름 같은 눈은 이전 보다 한층 날카로움을 더했고, 남편의 숨은 이전보다 훨씬 하얘졌고, 남편의 손 가락에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서리가 끼었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말이 없어졌 고, 훨씬 더 고급스러워진 듯했다. 그는 지금은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 런 일들이 모두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닷새 전, 나는 단호하게 남편에게 제안해 보았다. 역시 남극에 가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죠, 라고 나는 말 했다. 생각해보니까 남극은 아무래도 너무 추울 것 같고, 몸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좀더 평범한 곳으로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들어요. 유럽이 어떨까 싶은데, 스페인쯤에서 한가롭게 지내요. 포도주도 마시고, 파에리야도 먹 고, 투우도 구경하고, 하지만 남편은 그런 나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보았다.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도 깊어, 자신의 육체가 그대로 사라져버릴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니, 난 스페인 같은 곳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소. 라고 남편인 얼음 사나이는 딱 잘라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한테 스페인은 너무 덥고, 먼지도 심해. 음식도 너무 맵고, 그런 데다 남극행 티켓도 벌써 두 장 구입했는 걸. 당신을 위해서 털코트도 샀고, 털 달린 부츠도 샀단 말이오. 그런 걸 전부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어. 지금에 와서 안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돼오. 솔직히 나는 무서웠다. 남극에 가면 내 신변에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일이 생 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불길한 꿈을 꾸었다. 항상 똑같은 꿈이었다. 산책을 하다가 지면에 뚫린 깊은 구멍으로 떨어져, 아무 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는 꿈이었다. 나는 얼음 속에 갇 힌 채 물끄러미 하늘을 보고 있다. 내게는 의식이 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 딱할 수 없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시시각각 과거화되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 내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다. 오로지 과거를 쌓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런 나를 모두가 응시하고 있다. 나는 뒷방향으로 스쳐 지나가는 광경인 것이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옆에서 얼음 사나이가 자고 있다. 그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잠들어 있다. 마치 죽어 얼어붙은 무엇이듯. 하지만 나는 얼음 사나이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운다. 내 눈물이 그의 뺨에 떨어진다. 그러자 그 는 눈을 뜨고 내 몸을 안는다. 끔찍한 꿈을 꾸었어요, 라고 나는 말한다. 그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건 그저 꿈일 뿐이오, 라고 그가 말한다. 꿈은 고거에서 오는 것이오. 미래에서 오는 것이 아니지, 꿈은 당신을 속박하지 않소. 당신이 꿈을 속박하고 있는 거요. 알겠소? 네, 라고 나는 말한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나와 남편은 결국 남극행 비행기를 탔다. 여행을 중지할 만한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극행 비행기의 파일럿과 스튜어디스는 다들 말수가 적었다. 나는 창 밖 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구름이 너무 두꺼워서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얼마 있자 창문에 얼음이 좍 끼고 말았다. 남편은 그 동안 내내 말없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내 안에는 이제사 겨우 여행을 떠난다는 그 흔한 흥분이 나 기쁨도 없었다. 하기로 정해져 있는 일을 그저 어김없이 실행할 뿐이었다. 트랩에서 내려 남극의 대지에 발을 내디뎠을 때, 남편의 몸이 흔들, 하고 크게 요동하는 것을 느꼈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짧은, 한순간의 절반쯤 사이에 일 어난 일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남편의 얼굴에는 실오라기만한 변화도 일 지 않았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남편의 몸안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그러나 아주 은밀하게 흔들린 것이다. 나는 가만히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그 자리 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그리고 크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는 내 얼굴을 보고 싱긋 웃었다. 여기가 당신이 오고 싶어하던 땅인가, 라고 그 는 말했다. 그래요, 라고 나는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남극은 그 모든 예상을 넘어설 만큼 쓸쓸한 땅이었다. 거기에는 거의 사람도 살지 않았다. 거기에는 아무 특징도 없 는 마을이 하나 덩그렇게 있을 뿐이었다. 마을에는 역시 아무 특징 없는 조그만 호텔이 하나 있었다. 남극은 관광지가 아닌 것이다. 거기에는 펭귄의 모습조차 없었다. 오로라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 면 펭귄을 볼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 대꾸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종이에 펭귄의 모 습을 그렸다. 그래도 역시 그들은 잠자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는 고독했다. 마을에서 한 걸음 벗어나면 거기에는 얼음밖에 없었다. 나무도 없고, 꽃도 없고, 강도 연못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디를 가도, 거기에 있는 것은 얼음뿐이었다. 내다보이는 것은 그저 하염없이 이어지는 얼음 벌판뿐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하얀 숨을 토하며 고드름 같은 눈길로 먼 곳을 쏘아보면서, 이 곳저곳을 싫증도 내지 않고 정력적으로 걸어다녔다. 그의 손가락에는 하얀 서리 가 끼어 있었다. 그리고는 금방 남극의 언어를 배워 얼음처럼 딱딱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몇 시간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대체 무엇에 대해 그리도 열심히 얘기하 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은 그 장소에 푹 빠져 있었다. 거기에는 남편을 매혹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한동안 나는 그 일로 매우 초조해 했다. 나는 나 혼자만 홀로 남겨진 듯이 느꼈다. 남편이 나를 배신 하고 등한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두꺼운 얼음으로 둘러싸인 과묵한 세계 속에서 모든 힘 을 잃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끝내는 초조해 할 기운조차 잃고 말았다. 나는 어 딘가에서 감각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듯하였다. 나는 방향을 잃고, 시간을 잃고, 자신이란 존재의 무게를 잃어갔다. 그것이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났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얼음의 세계 속에, 색깔을 잃어버 린 영원한 겨울속에, 홀로 무감각하게 갇혀 있었다. 거의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후에도 나는 이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남극에 있는 이 나의 남편은 과거의 내 남편이 아니다. 어디가 어떻게 다르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지금도 예전처 럼 나에게 마음을 쓰고, 상냥하게 말을 걸어준다. 그리고 그 말이 그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역시 나는 알 수 있었다. 얼음 사나이 는, 저 스키장이 있는 호텔에서 만난 얼음 사나이와는 다른 얼음 사나이라는 것 을. 그러나 나는 아무한테도 그 사실을 호소할 수 없었다. 남극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지만, 반대로 내가 하는 말을 그들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이다. 남극 사람들은 모두 하얀 숨을 토하고, 서리가 낀 얼굴에 카랑카랑 울리는 남극의 언어로 농담을 주고받고, 토론을 벌이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혼 자 호텔 방에 틀어박혀, 앞으로 몇 달이고 개는 날이 없을 남극의 회색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지독하게 복잡한(그리고 나로서는 기억할 재간이 없는) 남극 어의 문법을 공부하였다. 비행장에도 이미 비행기는 없었다. 우리를 싣고 온 비행기가 황망히 날아간 후, 그 비행장에 착륙한 비행기는 한 대도 없었다. 그리하여 활주로는 마침내 딱 딱한 얼음 아래 묻히고 말았다. 내 마음처럼. 겨울이 왔소, 라고 남편이 말했다. 아주 긴 겨울이오. 비행기도 오지 않고, 배 도 오지 않아요. 모든것이 얼어붙었어. 아무래도 우리는 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하군. 이라고 그는 말했다. 내가 임신을 자각한 것은, 남극에 온 지 석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낳을 아이가 조그만 얼음 사나이라는 것을. 내 자궁은 얼어 붙었고, 양수에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나는 그 차가움을 뱃속으로 느낄 수 있 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처럼 고드름 같은 눈길을 지녔고, 손 가락에는 서리가 끼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들이 새로 이 꾸밀 가정이 남극을 떠나는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것임을. 영원한 과거가, 그 한없는 무게가, 우리의 다리를 꼼짝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것을 뿌리칠 수 없다. 지금의 나에게는 거의 마음이란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나의 온기는 저 먼 곳 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하나 아직은 울 수 있다. 나는 정말이지 외톨이다. 온 세계의 그 누구보다 고독한 차가운 땅에 있는 것이다. 내가 울면 얼음 사나이는 내 뺨에 키스를 한다. 그러면 내 눈물은 얼음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 눈 물의 얼음을 살며시 들어 혀 위에 올려 놓는다. 당신을 사랑하오. 라고 그는 말 한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나도 그것만큼은 분명이 안다. 얼음 사나이는 나를 사 랑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그의 하얗게 언 말을 과거로 과거 로 휘날려 보낸다. 나는 운다. 얼음 눈물이 똑똑 떨어진다. 저 먼 남극의 차디찬 얼음집 안에서. 토니 다키타니 토니 다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 토니 다키타니였다. 사람들은 그의 그 이름(호적상의 이름은 물론 다키타니 토니로 되어 있지만) 과 윤곽이 뚜렷한 얼굴 생김과 꼬불꼬불한 머리카락 때문에, 어렸을 때는 곧잘 혼혈아로 착각하였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의 일이니. 세상에는 미군의 피가 절반 섞인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는 명 실상부한 일본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다키타니 쇼자부로라고, 전쟁 전부터 아 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재즈 트롬본 주자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기 약 4년 전쯤에, 여자가 얽힌 성가신 일이 생겨 일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어차피 떠나는 거니까, 라면서 악기 하나만 달랑 들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 당시에는 나가사키에서 배를 타고 하루면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도쿄에도 일본에도 잃어서는 안 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미련이란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그 당시의 상해란 도시가 제공하는 기교 적 문화는 그의 성격에 오히려 잘 맞는 듯하였다.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 의 갑판에 서서 아침 햇살에 빛나는 상해의 우아한 거리를 보는 순간,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상해가 마음에 쏙 들고 말았다. 그 빛은 그의 앞날에 아주 밝은 무 언가를 약속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그런 덕분에, 그는 중일전쟁에서 진주만 공격 그리고 원폭 투하로 이어지는 전란 격동의 시대를 상해의 나이트 클럽에서 한가로이 트롬본을 불면서 지낼 수 있었다. 전쟁은 그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요컨대, 다기타니 쇼자부로는 역사에 대한 의지라든가 성찰 같은 것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마음껏 트롬본을 불 수 있고, 하루 세 끼 그 럭저럭 때울 수 있고, 여자가 몇 명 주위에 맴돌고 있기만 하면 그 이상은 딱히 바라지도 않았다. 사람들도 대부분 그를 좋아하였다. 젊고 남자답고, 게다가 악기를 연주하는 솜 씨도 좋으니 어디를 가든 눈 온 날에 까마귀처럼 눈에 띄었다.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틈 많은 여자들과 잤다. 일본 여자에서 중국여자, 백인 러시아 여자, 창부와 유부녀, 아름다운 여자와 별로 아름답지 않은 여자까지, 그는 거의 닥치 는 대로 여자와 섹스를 하였다.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그 달콤한 트롬본 소리와 거대하고 활동적인 페니스로 당시 상해에서는 명물적인 존재로 추앙받기까지 하 였다. 그는 또 - 본인은 딱히 의식하지 않았지만 - `쓸모 있는` 친구를 만드는 재능 도 탁월했다. 그는 육군 고관이며 중국인 부자들, 그밖에도 전쟁을 통하여 다양 한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 위세등등한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그들 대부분은 항상 윗도리 속에 권총을 숨기고 있고, 건물은 나설때는 우선 거리를 좌우로 죽 살피는 그런 타입의 인간이었지만,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어쩐 일인지 그런 사람들과 마음이 잘 맞았다. 그들 또한 그를 각별히 귀여워하였다. 무슨 문 제라도 생기면 그들은 기꺼이 다키타니 쇼자부로의 편의를 보아주었다. 그 시대 의 다키타니 쇼자부로에게 인생이란 실로 손쉬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런 편리한 능력도 때로는 짐이 될 때가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 는 수상한 패거리들과의 교유로 중국군에게 점찍혀, 오랜 세월 형무소에 처박히 게 되었다. 같은 식으로 투옥된 사람들 대부분이 제대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잇 달아 처형되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형무소 뜰로 끌려나가, 자동 권총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처형은 항상 오후 두 시에 거행되었다. 피융 하는 딱딱하게 압축된 자동 권총의 총성이 형무소 뜰을 울렸다. 그때가 다키타니 쇼자부로의 인생에서 최대의 위기였다. 그곳에서는 삶과 죽 음이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었다. 죽는 것 자체는 그다지 두렵지 않 았다.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고통은 아주 짧은 순간에 끝나고 만다. 지금까지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고, 무수한 여자들과 자 기도 하였다. 맛있는 것도 먹었고, 좋은 일도 많이 있었다. 인생에 아쉬울 것은 별로 없다. 이 전쟁에서 수백 만에 달하는 일본 사람들이 죽었다. 훨씬 더 참혹 하게 죽은 사람들도 많다. 그는 그렇게 각오하고, 독방 안에서 느긋하게 휘파람 을 불며 지냈다. 하루하루 창살이 껴 있는 조그만 창문 밖으로 흐르는 구름의 모습을 바라보고, 얼룩투성이 벽 위에 그때껏 잔 여자들의 얼굴과 몸을 하나하 나 그렸다. 그러나 용케도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그 형무소에서 살아 일본으로 귀국한 딱 두 명의 일본인 중의 한 명이 되었다. 다키타니 쇼자부로가 훌쭉하게 야윈 몸 하나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1946년 봄이었다. 돌아와 보니 도쿄의 집은 한 해 전 3월 도쿄 공습 때 불타버리고 없 었다. 부모님도 그때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딱 한 명뿐인 형은 버마 전선에서 행방불명된 채였다. 결국 다키타니 쇼자부로 는 고아의 몸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별로 슬퍼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 았고, 그다지 충격도 받지 않았다. 물론 상실감 비슷한 것은 느꼈다. 그러나 어 차피 인간은 언젠가는 혼자가 되는 법이다. 그는 그때 서른 살이었다. 외톨이가 되었다고 아무나 붙들고 하소연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단번에 몇 살을 먹 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감정은 그다지 일지 않았다. 그렇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살아 남았고, 일단 살아남으 니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달리 할 일도 없어서 그는 옛날에 알고 지내던 이와 함께 재즈 밴드를 결성하 여 미군 기지를 전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재능인 싹싹함을 발휘 하여 재즈를 좋아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소위와 친구가 되었다. 소위는 뉴저지 출신의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다. 그도 클라이넷에 상당한 솜씨를 갖고 있었다. 보급부에 관계하는 덕분에 필요한 레코드가 있으면 얼마든지 본국에 주문할 수 도 있었다. 두 사람은 틈만 나면 함께 연주를 하였다. 소위의 숙사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보비 허킷이니 잭 티가든이니 베니 굿맨이니 하는 연주가들의 재즈 레 코드를 듣고는 열심히 곡을 흉내내었다. 소위는 그를 위하여 당시 입수하기 어 려웠던 식품과 우유, 술 등을 얼마든지 조달해주었다. 뭐, 그런대로 견딜 만한 시대로군. 이라고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생각하였다. 그가 결혼한 것은 1947년이었다. 상대는 어머니 쪽의 먼 친척 아가씨였다. 어 느 날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나, 차를 만시면서 친척 소식도 듣고 옛날 이야기 도 하였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오고가고 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별 거리낌없이 - 아마도 그녀가 임신한 탓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데 -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토니 다키타니가 아버지의 입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토니 다키 타니는 아버지 다키타니 쇼자부로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 다. 예쁘고 차분한 아가씨였지만, 몸은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고 아버지는 말 했다. 결혼한 이듬해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난 시 사흘 만에 어머니가 죽었다. 갑자기 죽은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불에 타 재가 되었다. 아주 조용 한 죽음이었다. 아무런 갈등도 없이, 고통이랄 만한 고통도 없이, 스르륵 사라지 듯 죽어버렸다. 누군가가 뒤로 돌아가 살며시 스위치를 끈 것처럼.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느껴야 좋을지 자기자신도 잘 몰랐다. 그는 그런 감정에는 서툴렀던 것이다. 무슨 평평한 원반 같은 것이 가슴속에 쏙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물체이 고, 어떻게 거기에 있는지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물체는 내내 거 기에 있으면서 그가 그 이상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도록 저지하였다. 그 덕 분에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한 일주일 정도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병원에 맡겨둔 아이마저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소위는 그런 그를 육친처럼 위로해주었다. 매일 두 사람은 기지의 바에서 술 을 마셨다. 자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되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만 은 훌륭하게 키워야 한다구, 라고 소위는 그에게 강력하게 말했다. 그는 소위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몰랐지만, 아무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도 상대방 의 호의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위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는 듯,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고 말했다. 그렇지, 생각해보니까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아직 아이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소위는 자기의 퍼스트 네임인 토니를 아이에게 붙여주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토니라는 이름은 일본인 아이의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지 만, 소위의 머리에 그것이 적합한 이름인지 아닌지 하는 의문은 미처 떠오르지 도 않는 모양이었다.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집으로 돌아오자 종이에 `다키타니 토 니`란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 놓고는 며칠 동안 바라보았다. 다키타니 토니, 다 키타니 쇼자부로는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앞으로 당분간은 미국의 시 대가 계속될 것이고, 아들에게 미국식 이름을 붙여두면 무슨 편리한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름 탓에 다키타니 토니는 학교에서 혼혈아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가 자기 이름을 말하면 상대방은 이상하다는 묘한 표정을 짓든가 아니면 얼굴 을 찡그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무슨 짓궂은 농담처럼 받아들였고 그 중 에는 화를 내는 인간도 있었다. 토니 다키타니는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완전히 외곬으로 자라고 말았다. 친 구다운 친구 한 명 생기지 않았지만, 그는 별로 괴로워하지 않았다. 혼자라는 것 은 그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인생의 어떤 전 제 조건이기까지 하였다.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아버지는 툭하면 악단을 데리고 연주 여행을 떠났다. 어렸을 때는 파출부가 그를 보살펴주었지만, 초등학교 고학 년인 되자 그는 무슨 일이든 혼자 해낼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 반찬을 만들고 혼자서 문단속을 하고 혼자서 잠들었다.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 았다. 누구한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듣기보다 스스로 하는 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아내가 죽은 후, 무슨 속셈인지 두번 다시 결혼하 지 않았다. 물론 변함없이 무수한 여자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 중 한 명도 집 으로 데리고 오는 일은 없었다. 그도 아들처럼 혼자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진 모 양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그런 생활로부터 흔히 상상하는 만큼 소원하 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엇비슷할 정도로 습관적인 고독에 깊이 물들 어 있는 인간이라서, 어느 쪽이든 먼저 마음을 열려고는 하지 않았다. 딱히 그래 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아버지 구실을 하기 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었고, 토니 또한 아들 구실을 하기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토니 다키타니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매일 방에 틀어박혀 혼자 그림만 그 렸다. 특히 기계 그리기를 좋아하였다. 연필심을 바늘처럼 뾰족하게 깎아 자전거 니 라디오니 엔진이니 하는 것들의 세부를 정교하게 그리는 것이 특기였다. 꽃 그림을 그릴 때도 잎맥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렸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는 그렇게 밖에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과목의 성적은 별로 우수하지 않았지 만, 미술 성적만큼은 항상 탁월했다. 미술 대회가 있으면 대개 최우수상을 받았 다. 그런 연유로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 대학에 들어가(대학에 입학한 해 부터 아버지와 아들은 누가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닌데 당연한 일처럼 따로 살 게 되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 외의 가능성은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청년들이 고민하고 모색하고 괴로워하 는 동안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정밀하고 메커니컬한 그림을 그렸다. 당시는 청년들이 권위나 체계에 대해 절실하고도 폭력적으로 반항하던 시대였으므로, 그가 그리는 극도로 실제적인 그림을 평가하는 인간은 거의 한 명도 없었다. 미술 대학의 교수들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같 은 과 친구들은 그의 그림에 사상성이 없음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토니 다키타 니는 친구들이 그리는 `사상성이 있는` 그림의 어디에 가치가 있는지 전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의 그림은 그저 미숙하고 추악하고 부정 확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일단 대학을 졸업하자 사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극도로 실전적인 기술과 현실적인 유용성 덕분에 토니 다키타니는 시작부터 일거리가 없어 고통 받는 일은 없었다. 복잡한 기계와 건축물을 그만큼 정교하게 그릴수 있는 인간 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물보다 리얼하다`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사진보다 정확하고, 장황한 설명보다 알기 쉬웠다. 그는 순식간에 인기 일러스트까지가 되었다. 자동차 잡지의 표지 그림에서부터 광고 일러스트 까지, 그는 메커니즘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맡았다. 일은 즐거웠고 수입도 상당했다. 아들이 그런 생활은 하는 동안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유유하게 트롬본만 불었 다. 무던 재즈 시대가 도래하고 프리 재즈가 시대를 풍미하고 일렉트릭 재즈 시 대가 되어도, 그는 변함없이 옛날식 재즈만 연주하였다. 일류 연주가는 아니었지 만 이름도 제법 알려졌고, 어떤 일이든 항상 일거리가 있었다.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었고, 여자에 굶주리는 일도 없었다. 불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관점에서 인생을 보자면, 그의 인생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토니 다키타니는 틈만 나면 일을 했고 이렇다 하게 돈이 들어가는 취미도 없 었기 때문에, 서른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웬만한 자산가가 되어 있었다. 그 는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세타가야에 있는 거대한 집을 사들였고, 임대용 아파트도 몇 채 소유하게 되었다. 재산 관리는 일체 세무사가 맡아 하였다. 토니 다키타니는 그 사이 몇 명의 여자를 사귀었다. 젊었을 때는 잠깐이기는 하지만, 동거를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을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 혼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리도 청소도 세탁도 전부 스스 로 했고, 일이 바쁠 때에는 계약제 가정부를 불러 해결했다. 아이가 있었으면 하 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에게는 의논을 하거나 자기 기분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한 친구 한 명 없었다. 함께 술을 마실 상대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비뚤 어진 성격의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만큼 넉살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으로는 원만하게 주변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그는 권위적이지도 않았고, 우쭐거리지도 않았다. 자기 변호도 하지 않았고, 타인의 험담을 늘어놓지도 않았 다. 자신에 대해서 뭐라 말하기보다는 타인의 얘기 듣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는 현실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인간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다. 아버 지와도 1년에 두세 번 용건이 있을 때만 만날 뿐이었다. 얼굴을 마주해도 용건 이 끝나면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이상 할 얘기가 없었다. 토니 다키타니의 인생 은 이렇듯 차분하고 온화하게 흘러갔다. 그는, 아마 앞으로 결혼하는 일도 없겠 지, 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가 토니 다키타니는 사랑에 빠졌다. 상대방은 그의 사무 실로 일러스트레이션 원고를 가지러 온 출판사의 아르바이트 사원이었다. 나이 는 스물둘이었다. 그의 사무실에 있는 동안 그녀는 내내 조용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귀염성 있는 이목구비에 인상도 좋았지만, 특별히 미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무언가 그의 마음을 세차게 흔드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가슴이 조여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 였다. 그녀 안의 무엇이 그토록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 다. 설사 알았다 해도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그리고 그는 그녀의 차림새에 눈길이 끌렸다. 그는 딱히 옷에는 별 관심도 없 었고 더구나 여자가 입고 있는 옷에 일일이 신경을 쓰는 타입의 인간도 아니었 지만, 그녀의 맵시있게 차려입은 스타일에는 완전히 감탄하고 말았다. 감동했다 고 해도 좋은 정도였다. 그냥 단순히 잘 차려입은 여자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보 란 듯이 주렁주렁 치장을 한 여자들은 그 이상으로 많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여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마치 먼 세계로 긴 여행을 떠나는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두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옷을 걸치고 있었다. 옷 쪽도 그녀의 몸에 걸쳐짐으로 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고맙습니다`라면서 원고를 받아들고 돌아간 다음, 그는 한참이나 벌어 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가 기울고 방이 캄캄해졌을 때까지 아무것도 손에 잡 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 다음날 그녀가 다시한번 사무실로 오지 않으면 안 될 구실을 만들어 출판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일이 끝난 다음에 그녀에게 점심 식사를 함께 하자고 말했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이가 열 다섯 살이나 차이 나는데도 두 사람은 신기하게도 말이 통했다. 무슨 말을 해도 서로 의견이 잘 맞았다. 그런 경험은 그에게나 그녀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녀도 처음에는 긴장하고 있더니, 점차 편안해져 웃기도 잘하고 말도 잘하게 되 었다. 당신 옷차림은 항상 멋있군. 이라고 토니 다키타니는 그녀와 헤어질 때 칭 찬했다. 옷을 좋아해요. 라고 그녀는 수줍다는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월 급을 받으면 거의가 옷값으로 날아가버려요.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데이트를 하였다. 어디 특별한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조용한 곳에 앉아 내내 얘기만 했다. 서로에 대해서 얘 기하고 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세상 일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얘기했다. 그들은 질리지도 않고 하염없이 얘기하였다. 그리고 다섯번째 만났을 때 그는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는 애인이 있 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두 사람의 관계는 왠지 소원해져, 지금은 만나기만 하 면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토니 다키타니와 같이 있는 편이 훨씬 즐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애인과의 관계를 하루 아침에 끊어버 릴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녀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더구나 토니 다키타니 와 그녀는 나이도 열다섯 살이나 차이가 난다. 그녀는 아직 젊고 인생 경험도 부족하였다. 그 열다섯 살이란 나이차가 앞날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는 가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 토니 다키타니는 매일 혼자 술을 마셨다. 일이 손 에 잡히지 않았다. 느닷없는 고독이란 중압이 그를 짓눌렀고 고뇌케 하였다. 고 옥이란 감옥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그것을 몰랐을 뿐이 야. 그는 자신을 둘러싼 벽의 두께와 싸늘함을 절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그녀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나는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를 만나 자신의 심정을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 이 얼마나 고독했고,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왔는지,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그 러한 것을 깨닫게 해주었음을. 그녀는 머리가 좋은 아가씨였다. 그녀는 토니 다키타니란 인간을 좋아하게 되 었다. 처음부터 호감을 갖고 있었고, 만나면 만날수록 좋아졌다. 그런 기분을 사 랑이라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 무언가 아주 멋진 것 이 있음을 느꼈다. 이 사람과 생을 같이 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그 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토니 다키타니의 인생에서 고독한 시기는 종언을 고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는 우선 그녀의 모습을 찾았다. 옆에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 했다. 모습이 없을 때에는 불안감에 온 집을 찾아다녔다. 그에게 고독하지 않다 는 것은 조금은 기묘한 상황이었다. 고옥에서 벗어남으로써 다시 한번 고독해지 면 어쩌나 하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 그런 생각을 하면 그는 식은 땀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그런 공포감은 결혼하여 석 달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리고 그녀가 갑자기 사라져버 릴 가능성이 적어짐에 따라 공포감도 점차 엷어져갔다. 그는 간신히 안정을 찾 아 평온한 행복 속에 잠기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키타니 쇼자부로의 연주를 한 번 들으러 갔다. 그녀가 시아버지 가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당신 아버님, 우리가 연주 들으러 가면 안 좋아하실까, 라고 그녀가 물었다. 안 좋아하실 일이 뭐 있겠어, 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키타니 쇼자부로가 연주하는 긴자의 클럽에 갔다.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토니 다키타니가 아버지의 연주를 들으러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음악 을 연주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레코드로 종종 들었던 곡들뿐이었다. 아버지의 연주는 아주 매끄럽고 기품있고, 그리고 달콤했다. 그것은 예술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급 프로의 손에 의해 교묘하게 조작되어 듣 는 이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음악이었다. 토니 다키타니는 술잔을 거푸 기울이며 그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한참 연주를 듣고 있는 동안에, 마치 가느다란 파이프에 소리없이 그 러나 확실하게 먼지가 쌓여가는 것처럼, 그 음악에 담겨 있는 무언가가 그를 답 답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자리가 거북해졌다. 그 연주는 토니 다키타니가 기억 하고 있는 아버지의 옛날 분위기와 어딘가 조금 다른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억은 오랜 옛날 일이고, 어차피 어린아이의 귀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 만 그는 그 차이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아주 미미한 차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는 무대로 올라가 아버지의 팔을 잡고, 아버지, 대관절 뭐가 다른 거죠, 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일은 하지 않 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석시킨 위스키를 마시면서 아버지의 연주를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는 아내와 함께 박수를 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 다. 그의 일은 여전히 순조로웠고, 두 사람은 말다툼 한번 하지 않았다. 둘이서 종종 산책을 하고, 영화도 보러 가고,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그녀는 그 나이의 여자치고는 제법 유능한 주부였고, 무슨 일에든 절도가 있었다. 집안일도 척척 잘해냈고, 남편에게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 토니 다키타니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아내가 지나치게 옷을 많이 사는 것이 었다. 마음에 드는 옷을 보면, 그녀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제하지 못했 다. 순간에 표정이 바뀌고 목소리까지 바뀌었다. 처음에는 갑자기 몸이라도 불편 해진 것인가 하고 걱정했을 정도였다. 결혼 전부터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기는 하였지만,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났을 때부터는 특히 심해졌다. 그녀는 신혼 여 행에서 어처구니없을 만큼 많은 옷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밀라노와 파리에서 그녀는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아침부터 밤까지 부티크를 순례하였다. 두 사람은 구경이라고는 한 군데도 하지 않았다. 두오모에도 루브르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신혼 여행이라면 옷가게에 대한 기억밖에 없다. 발렌티노, 밋소니, 입센 로랑, 지방시, 페르가모, 알마니, 세루티, 장 프랑코 페레... 그녀는 오로지 빠져들어 갈 듯한 눈길로 옷만 사들이고, 그는 그녀 뒤를 쫓아다니면서 옷값을 지불하였다. 크레디트 카드의 각인이 닳아빠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을 정도였다. 일본에 돌아와서도 그 열기를 식지 않았다. 그녀는 연일 옷을 사러 돌아다녔 다. 옷의 가짓수가 갑자기 늘어났다. 거대한 옷장을 몇개 주문해야만 했다. 구두 를 수납하기 위한 선반도 특별 주문하였다. 그래도 모자라, 방 한 칸을 고스란히 의상실로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은 컸고, 방도 어차피 남아돌았다. 금전 적으로 부족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아내는 아주 세련되게 옷을 입을 줄도 알았다. 새옷만 있으면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불평은 하지 않겠노 라고 생각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이란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아내의 옷을 방 하나로도 다 수납할 수 없게 되자, 그도 과연 불안해 졌다. 한 번은 아내가 없을 때, 그 옷의 수를 세어 보았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매일 두 번 옷을 갈아입는다 해도 있는 옷을 다 입으려면 2년이나 걸릴 듯하였 다. 암만 그래도 너무 많은 숫자다. 그는 이쯤에서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한 다음 그는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옷 사는 거, 이제 조금 삼가면 어떻겠어, 라고. 나는 비단 돈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아니야. 필요 한 옷을 사는 거라면 아무 상관하지 않아. 당신이 아름다워지는 것도 기쁜 일이 고, 하지만 이렇게 많은 값비싼 옷들이 과연 필요한 것일까.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 이렇게 많은 옷이 필요한 것은 아니야.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필요하다든지 불필요하다든지, 너무 많다든지 적다든지,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그냥 단순히 사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가 없는 거야. 무슨 중독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렇지만 어떻게든 사지 않도록 애를 써보겠노라고 그녀는 약속하였다. 이런 짓을 계속했다가는 온 집이 옷으로 묻히게 될 테니까. 일주일 정도 그녀는 새옷 이 눈에 띄지 않도록,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 있자니 왠지 자신 이 텅 비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기가 적은 혹성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 이었다. 매일 의상실에 들어가 옷을 한 벌 한 벌 손에 들고 바라보며 지냈다. 옷 감을 쓰다듬고 냄새를 맡고, 한쪽 팔에 걸치고 거울 앞에 서 보았다. 아무리 보 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새옷이 갖고 싶어졌다. 그리 고 일단 갖고 싶어지면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냥 단순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기도 했다. 남편의 말은 옳았다. 이렇게 많은 옷은 불필요하다. 몸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단골 부티크 에 전화를 걸어, 열흘 전에 샀지만 아직 한번도 입지 않은 코트와 원피스를 반 품하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점장에게 물어보았다. 상관없습니다. 갖고 오시면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상대방은 말했다. 그녀는 단골 중에서도 단골 고객이 었으니 그런 정도의 편의는 보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코트와 원피스 를 차에 싣고 아오야마로 갔다. 그리고 부티크에 돌려주고는 크레디트 카드의 인출을 취소하였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부티크를 나와서는 가능한 한 주위를 보지 않도록 서둘러 차에 타고 246호선을 따라 그대로 집을 향했다. 그 녀는 옷을 돌려주어 다소나마 몸이 가벼워진 듯한 기분을 들었다. 그래, 그 옷들 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어. 라고 그녀는 스스로 에게 말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코트와 원피스를 갖고 있는 걸 뭐, 라고. 그러나 네거리 제일 앞에 멈추어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내내 그 코트와 원피스를 생각 했다. 그 옷이 어떤 색에 어떤 디자인이었는지. 어떤 감촉이었는지 그녀는 또렷 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그 세부까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솟았다. 핸들 위에 양 팔꿈치를 댄 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파랑으로 바뀌는 신호가 보였다. 그녀는 튕겨나갈 듯 힘껏 악셀을 밟았다. 그때, 황색 신호에서 무리하게 네거리를 건너려는 대형 트럭이 옆에서 전속력 으로 달려와 그녀가 운전하는 파란색 르노 생크의 차머리를 받았다. 그녀는 무 언가를 느낄 틈도 없었다. 토니 다키타니에게 남겨진 것은 방 하나 가득한 사이즈 7짜리 옷더미뿐이었 다. 구두만 해도 2백 켤레나 되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그는 암 담하기만 했다. 아내가 몸에 걸치던 것들을 언제까지 품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장신구류는 업자를 불러 헐값에 가져가게 하였다. 스타킹과 속옷류는 한꺼번에 정원 소각로에 집어 넣고 태웠다. 옷과 구두는 너무 양이 많아 그대로 놔두었다. 아내의 장례식이 끝난 후 그는 의상실에 혼자 틀어박혀, 거기에 자리가 비어 좁 다는 듯 걸려 있는 옷을 하루 종일 바라보았다. 장례식을 치른 열흘 후, 토니 다키타니는 신문에 비서를 모집한다는 구인 광 고를 냈다. 사이즈 7, 신장 161센티미터 전후, 신발 사이즈 22의 여성을 구함. 월 급 최우대. 그가 제시한 월급은 파격적이라고 해도 좋을 액수였다. 전부 열세 명 의 여성이 남아오야마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면접을 받으러 왔다. 그 중 다섯 명이 사이즈를 속이고 왔다. 남은 여덟명 중에서 그는 아내의 체형에 가장 가까 운 여성을 선발하였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얼굴에 나이는 20대 중반쯤인 여 자였다. 그녀는 검소한 하얀색 블라우스에 파란색 타이트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옷도 구두도 청결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닳아 있었다. 토니 다키타니는 그 여자에게 말했다. 일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다. 매일 아침 아홉 시에 사무실로 출근하여 전화를 받고 내 대신 원고를 전달하고 자료를 받 아오고, 커피를 끓이는 정도다. 퇴근은 다섯 시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실 은 아내가 얼마 전에 죽었는데, 그녀가 남긴 옷이 산더미처럼 많다. 그 대부분이 새옷이거나 새옷이나 다름없는 것들이다.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그 옷들을 제복 대신에 입어주었으면 한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기묘하게 들리리라고 생각 한다. 당신은 틀림없이 좀 수상하다 생각할 것이다. 그 점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뜻은 없다. 다만 아내가 죽고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즉 나는 나를 둘러싼 공기의 압력과도 같은 것을 조금씩 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에게는 그런 기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당신이 아내의 옷을 입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주면 나도 아내가 죽고 없다는 사실을 실 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입술을 깨물면서 그 기묘한 조건에 관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것 은 물론 기괴한 이야기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는 토니 다키타니가 하는 말 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도 없었다. 최근에 부인이 죽었다는 것은 알겠다. 그녀가 많은 옷을 남겼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왜 자기가 그 앞에서 그 옷을 입고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그 점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일 같 으면 무슨 속셈이 있다고 생각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라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그것은 상대방의 말투 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인이 갑자기 죽어 어디가 좀 이상해진 것인지도 모르겠 지만, 그 일로 남에게 해를 끼칠 타입의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 는 지금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 몇 달 동안 열심히 일을 찾았 다. 내달이면 실업보험도 끊긴다. 그렇게 되면 아파트 세를 물기도 어려워진다. 이렇게 후한 대접을 해주는 직장은 앞으로 두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알겠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말씀하시는 대로 하죠. 하지만 그전에 그 옷들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정말 사이즈가 맞는지 입 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물론, 이라고 토니 다키타니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방안 가득한 옷을 보여주었다. 백화점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많은 옷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을 그녀는 그때껏 한 번도 보지 못했 다. 그리고 옷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값비싸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취향도 나 무랄 데가 없었다. 너무도 황홀한 광경이었다.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 다. 이유도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느낌은 어딘가 성적 고양감과도 비슷하 였다. 토니 다키타니는 사이즈가 맞는지 한번 입어보라고 말하면서 그녀만 남겨두고 방에서 나왔다. 여자는 정신을 차리고 옷을 몇 벌 입어보았다. 구두도 신어 보았 다. 옷도 구두도,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사이즈가 딱 맞았다. 그녀 는 그런 옷을 한 벌 한 벌 손에 들고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몇 백 벌이나 되는 아름다운 옷이 거기에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그 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죽은 여자가 남긴 옷을 몸에 걸친 채, 소리 죽여 흐느껴 울었다. 한참 후에 토니 다키타니가 결과를 살피러 들어와, 왜 우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라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예쁜 옷이, 이렇게 많이 있는 것은 처음 봐요, 그래서 머리가 좀 어떻게 된 모양이에요, 죄송합니다, 라고 여자는 말했다. 그리고는 손수건으 로 눈물을 닦았다. 별 문제가 없으면 내일부터 사무실에 나와주었으면 하는데, 라고 토니 다키타 니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중에서 우선 일주일분의 옷과 구두를 골라 돌아가도록 해요. 여자는 시간을 들여 엿새분의 옷을 골랐다. 또 그 옷에 어울리는 구두도 골랐 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슈트 케이스에 담았다. 날씨가 추워지면 곤란하니까 코트 도 들고 가라고 토니 다키타니는 말했다. 그녀는 따뜻해 보이는 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골랐다. 코트는 새털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가벼운 코트를 만져보기는 난 생 처음이었다. 여자가 돌아간 다음 토니 다키타니는 아내의 의상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아 내가 남기고 간 옷들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어째서 이 옷들 을 보고 울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그 옷들은 아내가 남기고 간 그림자처럼 보였다. 사이즈 7짜리 그녀의 그림자가 겹치고 겹치듯 몇 줄로 줄을 서서 옷걸이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무한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의 표본을 몇 가지 모아 매달아 놓은 것처 럼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그림자들은 아내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따스한 숨 결을 부여받아 아내와 함께 움직이던 그림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 는 것은, 생명의 뿌리를 잃고 시시각각 메말라가는 볼품없는 그림자 떼에 지나 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낡아빠진 옷에 불과했다. 그는 그 옷 들을 보고 있는 사이 점점 숨이 갑갑해져왔다. 무수한 색이 마치 꽃가루처럼 공 중을 날며 그의 눈과 귀와 콧구멍으로 날아 들어왔다. 탐욕스런 프릴과 단추와 어깨 장식과 주머니와 레이스와 벨트가 방 공기를 희박하게 만들고 있었다. 듬 뿍 집어넣은 방충제 냄새가 수많은 미소한 날벌레처럼 소리없는 소리를 내고 있 었다. 그는 문득 지금 자신이 이 옷들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고독이 뜨뜻미지근한 어둠의 즙처럼 다 시금 그를 에워쌌다. 모두가 이미 끝나버린 일이다, 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더 이상 무슨 짓을 해도, 모든 것은 이미 끝난 것이다. 그는 여자 집에 전화를 걸어, 오늘 일에 대해서는 잊어 달라고 말했다. 미안하 지만 일거리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대관절 무슨 영문이죠, 라고 그녀는 깜짝 놀 라 물었다. 미안하지만, 사정이 바뀌었다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가지고 간 옷과 구두는 전부 당신한테 주겠소, 슈트 케이스도, 그러니까 이 일은 잊어 주시오, 아무한테도 말하지말고, 라고 토니 다키타니는 말했다. 여자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 이상 억지 설명을 듣기도 성가셔졌다. 알겠어 요, 라고 말하고 여자는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그녀는 토니 다키타니의 태도에 화를 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결국 이렇게 되길 다행이다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애초부터 왠지 좀 부 자연스러웠다. 일거리가 없어진 것은 아타까운 일이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그녀는 토니 다키타니의 집에서 가지고 온 옷들을 한 벌 한 벌 펼쳐 옷장에 걸고, 구두는 신발장에 넣었다. 그 새로운 것들에 비하면 원래부터 거기에 있던 그녀 자신의 옷이나 구두는 모두 기가 찰 정도로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것은 전 혀 다른 차원의 소재로 만든 다른 종류의 물질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면접 때 입고 갔던 자기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청바지와 트레이너 셔츠로 갈아입 었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방바닥에 앉아 마셨다. 그녀는 토니 다키타니의 집 의상실에 있던 옷더미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예쁜 옷이 그렇게나 많다니, 라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그 의상실은 지금 내가 살고 있 는 이 아파트 방보다 훨씬 넓다. 그만큼 많은 옷을 사들이느라 엄청난 돈과 시 간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다, 방 하나분의 사이즈 7짜 리 옷을 뒤에 남기고, 그렇게 멋진 옷을 잔뜩 남기고 죽다니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의 궁핍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다른 새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모두가 세련되고 고급스런 브랜드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옷을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한 거야, 라고 친 구들을 물었다. 설명할 수 없어, 그렇게 약속했거든, 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 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설명해봐야 어차피 너희들은 믿지 않을 거야, 라고 그녀는 말했다. 결국 토니 다키타니는 헌옷 장수를 불러 아내가 남기고 간 옷을 전부 팔아넘 겼다. 장사꾼은 값도 제대로 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 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그냥이라도 좋으니까 한 벌도 남기지 말고 가져가 주는 걸로 충분했다. 앞으로 두번 다시 자기 눈에 띄지 않을 먼 장소로. 그는 텅 비어버린 그 과거의 의상실을 오래도록 그대로 방치했다. 이따금 그는 그 방에 들어가 딱히 하는 일도 없이 그저 멍하니 있었다. 한 시 간이고 두 시간이고 바닥에 앉아 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죽은 자 의 그림자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과 동시에, 그는 과거에 거기 에 있었던 것을 점차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 색과 냄새의 기억도 어느 결 엔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과거에 품었던 그 선연했던 감정마저, 기억의 영 역 밖으로 뒷걸음질치듯 물러났다. 기억은 바람에 흔들리는 안개처럼 천천히 그 형태를 바꾸었고, 형태를 바꿀 때마다 희미해져갔다. 그것은 그림자의 그림자의, 또 그 그림자가 되었다. 거기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이 뒤에 남기고 간 결락감뿐이었다. 때로는 아내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끔, 과거 그 방 안에서 아내가 남기고 간 옷을 보고 눈물 을 흘린 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 여자의 특징없는 얼굴과, 낡아빠진 에나멜 구두 를 떠올렸다. 그러면 그녀의 조용한 오열이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그런 것을 기 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되살아 나는 것이었다. 많은 것을 완 전히 잊어버린 다음에도,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 여자만은 이상하게도 잊 혀지지 않았다. 아내가 죽은 지 2년 후에 다키타니 쇼자부로가 간암으로 죽었다. 암치고는 별 고통도 없었고, 입원 기간도 짧았다. 거의 잠자듯 죽어갔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 는 마지막 한순간까지 행운아였다. 다소의 현금과 주식을 제외하면 다키타니 쇼 자부로는 재산이랄 만한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유품인 악기와 방대한 옛 재즈레코드 정도였다. 토니 다키타니는 그 레코드를 택배 회사의 종 이상자에 담아, 텅 빈 의상실 바닥에 쌓아두었다. 레코드에서는 곰팡내가 났다. 그래서 환기를 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창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때를 제외하면 그가 그 방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다. 토니 다키타니는 그런 레코드 상자를 집안에 방치해 두는 일조차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때로 숨 이 콱콱 막혔다. 한밤중에 눈을 뜬 채 그대로 잠들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기억 은 선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확실한 중량을 지니고 존재하고 있 었다. 그는 중고 레코드 장수를 불러 값을 매기도록 하였다. 오랜 옛날에 절판이 되 고 만 귀중한 레코드가 많은 덕분에 꽤 값이 나갔다. 소형 자동차를 살 만한 금 액이었지만 그 또한 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레코드 상자를 싹 치우고 나자, 토니 다키타니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외톨이가 되었다. 일곱번째 남자 “그 파도가 나를 집어삼키려 한 것은 내가 열 살이던 해의 9월, 어느 오후의 일이었습니다.” 일곱번째 남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는 그날 얘기하기로 되어 있는 마지막 인물이었다. 시계 바늘은 벌써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안에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창 밖 깊은 어둠 속에서 서쪽으로 부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람은 정원수들 의 잎을 살랑살랑 흔들고 유리창을 달그락달그락 흔들고, 그리고 조그만 호루라 기를 불듯 뾰족한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불어갔다. "그것은 특수한 종류의, 예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파도였습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 파도는, 간발의 차로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 내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삼키고는 다른 세계로 가버렸습니다. 내가 그것을 다시 발견 하고 회복하기까지는, 긴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되돌이킬 수 없는 길고도 귀중 한 세월입니다." 일곱번째 남자는 5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야윈 남자였다. 키가 크고 턱수염을 길렀고, 오른쪽 눈 옆에 마치 날카로운 나이프로 찔린 듯 조그만, 그러나 깊은 흉터가 있었다. 머리칼은 짧고, 드문드문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 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꺼내기가 좀처럼 어려울 때 흔히 짓는 표정이 어려 있 었지만, 그것은 마치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 얼굴에 잘 녹아 있었다. 그는 회색 트위드 상의 아래로 소박한 파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가끔 셔츠 깃에 손을 대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리고서 일곱번째 남자는 소리 낮춰 컹컹 헛기침을 하였다. 그리고 잠시 침 묵 속에 자신의 말을 묻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가 이 어지기를 기다렸다. “내 경우, 그것은 파도였습니다. 물론 여러분의 경우에 그것이 무엇일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 그것은 우연찮게도 파도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산더미 같은 파도로 그 치명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나는 S현의 바닷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조그만 마을이라, 이 자리에서 그 이 름을 밝힌다 해도 여러분은 들어본 기억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계셨습니다. 덕분에 나는 별 부족함이 없는 어린 시 절을 보냈죠. 내게는 철이 들 무렵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이름은 K라고 하지요. 그는 바로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었고,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습니다. 우리는 학교에도 늘 같이 다니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항상 함께 놀았습니다. 거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지요. 사귄 지도 오랜데, 그동안 싸움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친형이 한 명 있지만 나이가 여섯 살이나 차이 나서 좀처럼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인간 적으로 성격이 잘 맞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나는 친형보다 그 친구 쪽에 따 뜻한 형제의 정 같은 것을 품고 있었습니다. K는 몸도 가냘프고 피부도 하얗고 마치 여자처럼 예쁘장한 생김의 아이였습 니다. 그런데다 언어 장애가 있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모르는 사람 들은 혹 지능 장애아로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몸도 약해서 학교에서 돌아와 놀 때에는 내가 향상 보호자처럼 그를 보살폈습니다. 나는 비교적 몸집도 크고 운동도 잘했고, 그래서 다들 나에게는 꼼짝 못했으니까요. 내가 그런 식으로 K 와 함께 있기를 좋아한 것은 무엇보다 그의 자상하고 고운 마음 때문이었습니 다. 절대로 지능에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어 장애 때문에 학교 성적도 별로 좋지 못했고, 수업을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만은 탁월 한 솜씨를 발휘하여 연필과 물감만 쥐어주면 선생님도 혀를 내두를 만큼 멋지고 생명력 넘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미술 대회에서도 몇 번이나 입상을 하였고 표창을 받은 일도 있습니다. 만약 그대로 성장하였다면 훌륭한 화가로서 이름을 날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가 즐겨 그린 그림은 풍경화였습니다. 그는 가까운 해변에 가서는 진종일 지치지도 않고 바다 풍경을 그렸습니다. 나는 곧 잘 옆에 앉아 붓을 놀리는 그의 날렵하고 정확한 손길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새하얀 공백 위에 저렇게 생생한 모양과 색채를 순식간에 탄생시킬 수 있는지 나는 감탄스럽고 놀라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순수한 재능이 었다고 여겨집니다. 어느 해 9월의 일입니다만, 내가 살고 있는 지방에 엄청난 태풍이 몰아닥쳤습 니다. 라디오의 일기 예보에서는, 그 태풍이 10년 만에 오는 최대의 태풍이라고 보도하였습니다. 학교는 일찌감치 휴교하여 문을 닫았고, 온 동네의 가게들도 굳 게 셔터를 내리고 태풍에 대비하였습니다. 아버지와 형은 망치와 못 상자를 들 고 아침부터 온집의 덧문에 못질을 하셨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비상식 이 될 주먹밥을 만드셨습니다. 병과 물통에 물을 담고, 만에 하나 피난해야 할 때를 위하여 우리들은 각자 소중한 물건을 챙겨 배낭을 꾸렸습니다. 어른들에게 는 해마다 닥쳐오는 태풍이 그저 위험하고 성가신 존재일 뿐이지만,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그것은 가슴 설레는 행사 같은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한낮이 지나자 하늘의 색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색에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비현실적인 색상도 섞여 있었습니다. 바람이 신음 소리를 지르고, 마치 모래를 갖다 뿌리는 것처럼 타닥타닥 마른 소리를 내며 비가 세차게 집을 때리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툇마루에 앉아 그런 하늘의 모양을 올려다보고 있 었습니다. 덧문을 닫아 캄캄해진 집 안에서, 우리 가족은 한방에 모여 라디오 뉴 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강우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강풍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였습니다. 많은 집의 지붕이 날아갔고, 배는 몇 척이나 전복되었다고 합니 다. 바람에 날리는 무거운 것에 맞아 죽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도 몇 명 있었습 니다. 절대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이라고 아나운서는 몇 번이나 경고하였 습니다. 강풍 때문에 집이 가끔, 마치 커다란 손이 붙잡고 뒤흔드는 것처럼 삐걱 삐걱 소리를 냈습니다. 무거운 것이 덧문에 부딪치면 쾅 하고 큰소리가 들리기 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집 기와가 날아온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머니가 준비하신 주먹밥과 계란말이를 점심으로 먹고,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 울이고, 태풍이 이 근방을 지나 어딘가로 빠져나가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렸습니 다. 그런데 태풍은 좀체로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뉴스에서는 태풍은 S현의 동부에 상륙한 시점부터 급격하게 풍속이 떨어져 현재는 인간이 뜀박질을 하는 정도의 느릿한 속도로 동북쪽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쉴새없이 흉 포한 소리를 내며 지표에 있는 모든 것을 땅끝까지 날려보내려 하였습니다. 그런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 약 한 시간쯤 경과했을 때입니다. 문득 사방이 잠잠해진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죠. 어디선가 새 우는 소 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는 덧문을 살며시 열고 그 틈으로 바깥 상황을 살폈 습니다. 바람은 잔잔하고 비도 개어 있었습니다. 두꺼운 회색 구름이 천천히 상 공을 흐르고 있었습니다. 구름이 갈라진 틈으로는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원 나무들은 비에 푹 젖어, 축 늘어진 가지 끝으로 물 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태풍의 눈 속에 있는 거다”라고 아버지가 가르쳐 주었습니 다. “잠시 동안, 15분이나 한 20분 정도, 휴식 시간처럼 이 고요함이 지속될 거 다. 그 다음에는 다시 아까 같은 바람이 몰아칠거야.” 나는 밖에 나가보아도 되느냐고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멀리만 가 지 말고 잠시 걷다 오는 정도면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곧바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밖으로 나가 사방을 돌아보았습니다. 바로 몇 분 전까지 그렇게 모진 바 람이 불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하늘에 거대한 태풍의 `눈`이 둥실 떠 있고, 우리를 싸늘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눈이 있을 리가 없죠. 우리들은 기압 의 중심이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고요함 속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무슨 피해가 있지는 않나 하고 집 안팎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혼자 바닷가 쪽으로 걸어가 보았습니다. 꺾이고 잘려 나간 나뭇가지들이 길가 여기저 기에 널려 있었습니다. 어른도 혼자서는 들어올리지 못할 만큼 굵직한 소나무 가지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조각조각 부서진 기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기도 했 습니다. 돌을 맞은 자동차 유리에는 산산이 금이 가 있었습니다. 개집도 길 위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손바닥이 하늘에서 뻗어나와 지상을 힘껏 쓸 어간 듯한 광경이었습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K가 내 모습을 보고는 밖으로 달 려 나왔습니다. 어디 가느냐고 K가 물었습니다. 내가 잠시 바다를 보러 간다고 대답하자, K는 아무 대꾸도 없이 내 뒤를 따라왔습니다. K의 집에는 하얀 복슬 강아지가 있는데, 그 강아지도 우리 뒤를 쫄랑쫄랑 따라왔습니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돼.” 내가 그렇게 말하자 K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집에서 2백 미터 정도를 걸으면 바다입니다. 당시 내 키 정도 되는 방파제가 있었는데, 그 계단을 올라 우리는 해변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 해변으로 놀러 왔고, 그 부근 바다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었습니 다. 하지만 태풍의 눈 속에서는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게 보였습니다. 하늘의 색, 바다의 색, 파도 소리, 바다 냄새,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 그런 바다에 관 한 모든 것이 달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방파제 위에 앉아 그런 광경을 아 무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태풍의 한가운데 있다는데도, 파도는 소름이 끼칠 정 도로 잠잠했습니다. 해변가에서 철썩이는 파도도 저 멀리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우리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만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썰물 때도 바닷물 이 그렇게 빠지지는 않습니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가구를 죄 들어낸 커다란 방처럼 유난히 휑하게 느껴졌습니다. 해변에는 여러 가지 표류물이 밀려 올라와 띠처럼 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파제에서 내려가 주변의 모습을 살피면서 드러난 개펄 위를 걸어 거기 에 널려 있는 것들을 일일이 조사해 보았습니다. 플라스틱 문구며 샌들이며 가 구의 일부인 듯한 나무 조각이며 옷가지며, 진귀한 병이며 외국어가 적혀 있는 나무 상자며, 그밖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마치 구멍가게의 진열대처럼 무수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태풍으로 인한 높은 파도가 그것들을 저 먼 곳에 서 이리로 날라온 것이겠죠. 나는 무슨 신기한 것이 눈에 뜨이면 그것을 집어들 고 꼼꼼하게 쳐다보았습니다. K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킁킁거리며 하나하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렇게 거기에 있었던 시간은 불과 5분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득 얼굴을 들어보니 파도가 모래사장 바로 코 앞까지 밀려와 있었습니다. 파도는 소리도 없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우리들 발치께까지 다가와 그 매끄러운 혓바 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파도가 바로 옆까지 밀려 오다니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나는 바닷가에서 자란 인간 이라 어린 나름으로 바다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다가 때로는 미처 예 측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흉포함을 지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조심 주의를 기울이면서 바닷물이 일렁이고 있는 곳에서 멀 리 떨어진, `이쯤이면 안전하겠다`싶은 지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파도는 어느 사인가 내가 서 있는 장소에서 불과 10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밀려왔다가는 또 소리도 없이 밀려갔습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파도는 다시 밀 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다가온 파도는 절대로 불온한 종류의 파도가 아니었습니다. 살며시 모래를 훑고 밀려간 온화한 파도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 아주 불길한 것이 마치 파충류의 살갗에 닿은 감촉처럼 순 식간에 내 등줄기를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까닭없는 공포였습니다. 그 러나 그것은 진정한 공포였습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살아 있음을 깨달았 습니다. 틀림없었습니다. 그 파도는 틀림없이 생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파도는 그 자리에 있는 나의 모습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제 나를 그 수중에 넣으려 하 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육중한 육식동물이 나를 그 날카로운 이빨로 짓찢어먹는 상상을 하면서 초원 어딘가에서 숨소리마저 죽이고 숨어 나를 노리고 있는 것처 럼 말입니다. 도망가야 돼, 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K에게 `그만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와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나에게 등을 보인 자세로 몸을 구부리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쾌 크 게 소리를 질렀는데 K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정신이 팔려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K 에게는 그런 구석이 있었으니까요. 금방 무언가에 열중하고 그러면 주변에 있는 것들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혹은 내 목소리가 내가 생각한 만큼 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내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더랬습니다. 그때 나는 웅웅거리는 신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면을 뒤흔드는 소름 끼치는 소리였습니다. 아니 그 소리 전에 다른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구멍에서 엄청 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오듯 쿨럭쿨럭 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 쿨럭쿨럭 하는 소리가 한 차례 계속되다가 이번에는 우우우웅 하는 굉음 같은 불길한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K는 아직 얼굴을 들지 않습니다. 몸을 구부리고 꼼짝하지 않은 채 발치에 있는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일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K한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죠. 어째서 땅울림처럼 그렇게 엄청남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는지, 그것은 나도 모 릅니다. 어쩌면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나 혼자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그 소리는 나한테만 들리는 특수한 형태의 소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 다. 왜냐하면 그의 옆에 있는 강아지도 역시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 문입니다. 개들이란 아시다시피 소리에는 매우 민감한 동물이니까요. 나는 당황하여 K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 그를 붙잡아 그곳에서 도망치려고 생 각했습니다. 그런 방법밖에 없었으니까요. 파도가 다시 밀려오리란 것을 나는 알 고 있었고, K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두 발은, 내 생 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파제를 향하여 혼자 도망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마도 그 끔찍스럽기까지 한 공 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공포가 나의 목소리를 빼앗고, 내 다리를 제멋대로 조 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부드러운 개펄을 구르듯 달려 방파제에 도착하자, 거기서 K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위험해, 파도가 오고 있어.” 이번에는 내 입에서 소리가 나왔습니다. 우우우웅 하던 굉음은 어느 사인가 잦아 있었습니다. K가 간신히 내 외침 소리를 듣고 얼굴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때는 벌써 산더미 같은 파도가 뱀처럼 높이 고개를 쳐 들고 해안을 덮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파도를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 니다. 높이는 족히 3층짜리 빌딩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파도가 거의 아 무런 소리도 없이 (적어도 나는 소리가 들렸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그것은 내 기 억 속에서는 소리없이 다가왔습니다), K의 등뒤에 있는 하늘을 제압하듯 솟구치 고 있었던 것입니다. K는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 습니다. 그리고는 퍼뜩 정신을 차린듯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도망치려 하였 습니다. 그러나 이미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다음 순간 그는 파도에 삼켜지고 말 았습니다. 마치 전속력으로 질주해 오는 무자비한 기관차에 정면으로 충돌한 꼴 이었습니다. 파도는 굉음을 일으키고 부서지면서 모래사장을 격렬하게 매질하고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어올라, 공중을 날듯 내가 있는 방파제를 덮쳤습니다. 하지 만 나는 방파제 뒤에 숨어 그 난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방파제를 넘어온 물방 울 끝이 옷을 적셨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후 나는 서둘러 방파제 위로 올라가 해안을 살폈습니다. 파도는 방향을 바꾸어 거친 아우성을 남기고 전속력으로 다 시 저 먼 바다로 밀려나가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마치 땅 끝에서 누군가 거대 한 카펫을 힘껏 잡아당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뚫어져라 바다를 살펴보았지만 K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강아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닷 물이 다 말라 해저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파도는 단숨에 저 먼 곳까지 물러갔습니다. 나는 방파제 위에 혼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정적이 돌아왔습니다. 억지로 소리를 쥐어 뜯어낸 듯한 절망적인 정적이었습 니다. 파도는 K를 삼킨 채 어딘가 멀리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 면 좋을지,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해변으로 내려가볼까 하고도 생각 했습니다. 어쩌면 K는 해변 어느 모래 속에 파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바꾸어 방파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큰 파도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밀려오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 죠. 얼마나 시간이 경과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 다고 생각합니다. 10초나 20초, 고작 그 정도였겠죠. 아무튼 그 불길한 공백 뒤 에, 내가 예측했던 대로 파도는 해안으로 다시 밀려왔습니다. 굉음이 또 지면을 격렬하게 뒤흔들고, 그 소리가 사라지자 마침내 파도는 고개를 높이 쳐들고 몸 을 일으켰습니다. 아까와 똑같이. 파도는 하늘을 제압하고 치명적인 암벽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마치 넋을 잃 은 사람처럼 파도가 덮쳐오는 광경을 꼼짝 않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K를 잃은 지금 도망쳐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 그저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 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두번째 파도는 맨 처음 파도에 버금가는 큰 파도였습니다. 아니 한층 더 큰 파도였습니다. 천천히 몸을 뒤틀면서 파도는 마치 벽돌로 쌓은 성벽이 무너져내 리듯 내 머리 위를 덮쳤습니다. 너무도 어마어마하여 현실 속의 파도로 여겨지 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파도 모양을 한 다른 무엇으로 보였습니다. 저 먼 또 하 나의 세계에서 찾아온, 파도 모양을 한 무언가 다른 것처럼.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암흑이 자신을 사로잡는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눈을 감지도 않았습니다. 나 는 그때 나의 심장이 뛰는 고동 소리를 바로 귓전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런데 파도는 바로 내 코앞에 와서는 힘이 다했다는 듯 갑자기 기운을 잃고는 공 중에 뜬 채 뚝 정지하였습니다. 비록 한순간의 일이었지만 파도는 무너져 내리 던 모습 그대로 거기에 뚝 정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파도의 머릿속에 서, 그 투명하고 잔인한 혓바닥 속에서, K의 모습을 또렷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내 말을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 는 일이겠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내 자신도 지금까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물론 설명할 수도 없지요. 그러나 그것은 환 상도 착각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거짓없는 사실입니다. 그 파도의 끝부 분에 마치 투명한 캡슐에 갇혀 있는 것처럼, K의 몸이 둥실 옆으로 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K는 나를 향하여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눈앞에 서, 방금 전 파도에 삼켜진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나를 향해 웃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예사로운 웃음이 아닙니다. K의 입은 말 그대로 귀까지 찢어질 만큼, 크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싸늘하게 얼어 붙은 한 쌍의 눈길이 빤히 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습니다. 마치 내손을 잡고 그쪽 세계로 끌고 가려는 듯. 그러나 아주 근소 한 차이로 그의 손은 나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한번 K가 입을 크 게 벌리고 웃었습니다. 그쯤에서 나는 정신을 잃은 모양입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아버지의 병 원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내가 눈을 뜨자, 간호사는 아버지를 부르러 갔고, 아버지는 곧장 달려 왔습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맥을 짚어보고 동공을 들 여다보고,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었습니다. 나는 손을 움직이려 하였지만 도 무지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며칠이나 고열에 시달렸던 모양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저더러, 네가 사흘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고 말했습 니다.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시종일관 지켜보던 동네 사람이, 쓰러져 있는 나를 안고 집으로 데리고 와준 것입니다. K는 파도에 쓸려간 채 아직 행방이 묘연하 다고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였습니다. 무 슨 말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혀는 붓고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다른 생물이 내 입 안에 눌러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나는 자신의 이름 을 떠올리려 하였지만 미처 기억나기도 전에 다시 의식을 잃고 어둠 속으로 가 라앉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는 일주일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유동식으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토하고 가위에 눌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동안 나의 의식이 심한 충격 과 고열 때문에 영원히 손상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몹시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는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입 니다. 그렇지만 나는 육체적으로는 그럭저럭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몇 주일 후 나는 원래대로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평소와 같은 식사를 하고 학교 에도 다녔습니다. 그러나 물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K의 주검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파도에 삼켜진 강아지의 시 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주변 해안에서 빠져 죽은 사람은 대개 조류를 타 고 동쪽에 있는 조그만 만으로 옮겨져 며칠 후면 해변으로 밀려 올라오는 법인 데, K의 시체는 끝까지 행방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태풍의 파도가 너무도 엄청나 저 먼 바다까지 옮겨져 해변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 르겠습니다. 어느 바다 깊이 가라앉아 물고기 밥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죠. K 의 시체를 수색하는 작업은 동네 어부들의 도움을 받아 꽤 오래도록 계속되었지 만, 그 일도 마지막에는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일 중요한 시체 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장례식도 치를 수 없었습니다. K의 부모님은 거의 반 미 친 상태에서 연일 해변을 헤매다니거나 아니면 집에 틀어박혀 불경을 외웠습니 다. 그렇게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K의 부모님은 내가 그 태풍의 한 가운데로 K를 데리고 나간 일에 대해서 한번도 나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K를 친형제처럼 귀여워하고 소중히 여겼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나의 부모님들 역시 그 사건에 관해서는 가능하면 언급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하지 만 나는 알고 있었어요. 만약 내가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K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K한테로 뛰어가서 그를 끌어 잡아당겨 파도가 미치지 않는 곳으 로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적으로 따지면 거의 아슬아슬했을지도 모르지만, 기억 속의 시간을 더듬어보면 그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나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압도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K를 버리고 혼자 도망쳤던 것입니다. K의 부모님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도 종기 라도 다루듯 조심조심 사건에 대한 말을 일체 하지 않는 탓에 나는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긴 세월 그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 에도 가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누워서 매일 천장만 물끄러미 올려다보 았습니다. 그 파도 머리끝에 옆으로 누워, 히죽 웃던 K의 얼굴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듯 앞으로 내민 손을, 그 손가락 하나하나를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꿈속에 그 얼굴과 손이 나타났습니다. 꿈속에서 K는, 파도 머리끝의 캡슐 속에서 폴짝 튀 어나와 거기에 있는 내 손목을 잡고 그대로 파도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 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꿈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바다를 헤엄치고 있습니다. 때는 아주 맑게 갠 여름날 오후, 나는 천천히 바닷물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태양 이 내 등을 반짝반짝 비추고, 바닷물은 기분좋게 나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물 속에서 누군가가 내 오른쪽 다리를 잡습니다. 발목으로 얼음처럼 차가 운 손의 감촉을 느낍니다. 그 힘이 세서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대로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맙니다. 나는 K의 얼굴을 봅니다. K는 그때처럼 얼굴이 찢어져라 입을 히죽 벌리고 웃으면서 나를 빤히 보고 있습니다. 나는 비명을 지 르려 합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어푸어푸 물을 마실 뿐입니다. 물이 나의 폐로 차오릅니다. 나는 큰소리를 지르고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어둠 속에서 눈을 뜹니다. 그해 막바지에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동네를 떠나고 싶다고 부모님께 애원했 습니다. 내 눈앞에서 K를 삼켜버린 파도와 해안을 보면서 이대로 살 수는 없다 고, 아시는 대로 나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고, 그러니까 이 동네를 떠 나 어디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가능하면 멀리로 떠나고 싶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미쳐버릴 것 같다. 내 말을 듣고 아버지는 나를 위하여 전학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습니다. 나는 1월에 나가노 현으로 떠나 그 고장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습 니다. 코모로 근처에 있는 친가에 살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중학교에 진 학했고 고등학교도 마쳤습니다. 방학 때도 집에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 이 가끔 나를 만나러 올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나가노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가노 시에 있는 공과대학을 졸업하 고, 현지의 정밀기계 회사에 취직하여 지금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나는 아주 평 범한 인간으로 일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특별히 보통 사람들과 다 른 점도 없습니다. 사람들과 잘 사귀는 편은 못되지만, 등산을 좋아하여 그 관계 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몇 명 있습니다. 그 동네를 떠난 지 얼마 후부터는 이전처럼 자주 악몽을 꾸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생활에서 아 주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수금원이 현관문을 두드리듯 불쑥 나를 찾아왔습니다. 잊어버릴 만하면 반드시 찾아옵니다. 언제나 같은 꿈입 니다. 꿈의 세부까지 똑같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뜹니다. 이 불이 땀으로 푹 젖어 있곤 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한밤중 두세 시에 큰 소리를 지르면서 옆에서 자고있는 누군가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지금까 지 좋아한 여자도 몇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와도 밤을 함께 지낸 적이 없습 니다. 공포가 내 골수까지 파고들어와 있었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결국 나는 40년 이상이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 해안에도 근접하지 않 았습니다. 그 해안뿐만 아니라, 바다라는 것도 일체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혹 바다에 가면 꿈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또 나는 원래 수영을 좋아했지만, 그 이후로는 수영장에도 전혀 가지 않았습니다. 깊은 강에도 심지어 호수에도 발길을 하지 않았습니다. 배도 가급적 타지 않았 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간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자신이 어 딘가에서 익사하여 죽는 이미지를 뇌리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두 운 예감은, 꿈속의 싸늘한 K의 손처럼 내 의식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 입니다. 내가 K를 휩쓸어 간 해안을 다시 찾은 것은 작년 봄의 일이었습니다. 지난해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형이 재산을 처분하기 위하여 고 향집을 매각하였는데, 광을 정리하면서 나의 어릴 적 물건이 들어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을 내게 보내주었습니다. 대부분 쓸모없는 잡 동사니였는데, 그중에 K가 내게 그려준 그림이 한 묶음 있었고 그것이 우연히 내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위하여 기념으로 남겨둔 것이겠죠. 나 는 두려움에 숨이 막힐 듯하였습니다. K의 혼이 그림 속에서 내 눈앞으로 되살 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장 처분할 생각으로 나는 그것을 다시 원래 대로 얇은 종이에 싸서 상자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K의 그림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 고민한 끝에 종이를 풀고 K가 그린 수채 화를 굳은 마음으로 꺼내 보았습니다. 풍경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눈에 익은 바다와 모래사장과 소나무 숲과 동네 가, K다운 특징이 있는 선명한 색상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신기하게 색도 바 래지 않아 옛날에 보았던 인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손에 들고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나는 아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그림들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또 예술적으로도 우수하였습니다. 나는 마치 내 자신의 일처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림을 바라보면서 K와 함께 놀았던 기억이며 함께 찾았던 장소들을 하나하나 또렷하 게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소년 시절 내 자신의 눈길이기도 하 였습니다. 그 시절 나는 K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똑같이 맑고 깨끗한 눈으로 세계를 보았던 것이죠. 나는 회사에서 돌아오면 매일 책상 앞에 앉아 K의 그림을 손에 들고 들여다 보았습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내 의식이 오래도록 강경하게 거부해온 소년 시절의 아련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K의 그림을 보고 있 으면 내 몸 속으로 무언가가 살며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한 일주일쯤 지났을 때일까요. 나는 퍼뜩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 다. 혹시 내가 지금까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저 파도 끝에 누워 있던 K가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 한 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닐까. 그의 진심은 혹 다르지 않았을까. 히죽 웃은 것처럼 보인 것은, 단순히 그렇게 보인 것일 뿐, 그는 그때 의식도 아무것 도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K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영원한 작별을 고한 것은 아닐까. 내가 K의 표정에서 읽었던 처절한 증오의 색은, 그 순간 나를 사로잡고 지배한 깊은 공포의 투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K가 그린 옛 수채화들을 꼼꼼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 같은 나의 생각은 점점 굳어져갔습 니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나는 K의 그림 속에서 티없이 맑고 온화한 영혼밖에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엉덩이를 들 수가 없 었습니다. 해가 기울고, 해거름의 엷은 어둠이 천천히 방을 에워쌌습니다. 마침 내 깊은 침묵의 밤이 찾아왔습니다. 밤이 끝없이 계속되고, 어둠이란 분동이 견 디기 어려울 만큼 무겁게 쌓였을 때 드디어 날이 밝았습니다. 새로운 태양이 하 늘을 연분홍으로 물들이고 새들이 새 아침을 노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지금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보스턴 백에 간단히 짐을 꾸리고, 회사에는 급한 일로 결근한다고 전화 를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고향 동네는 이미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 근교에 공업 도시가 들어서는 바람에 주변 풍경이 크 게 변모되어 있었습니다. 기념품 가게 정도밖에 없었던 역 앞에는 상점이 즐비 하고, 마을에 딱 하나뿐이었던 영화관 자리에는 대형 슈퍼마켓이 들어서 있었습 니다. 우리 집도 이미 없었습니다. 집은 몇 달 전에 철거되어 아무것도 없는 휑 한 공터였습니다. 정원의 나무들도 모두 잘려나가고, 거무튀튀한 지면 여기저기 에 잡초가 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K가 살았던 옛집 역시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 주변은 콘크리트를 깐 주차장이었고 승용차와 밴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 나 그런 변화에도 나는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곳은 오랜 옛날부 터 이미 나의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해안으로 가서 계단을 걸어 방파제 위로 올라갔습니다. 방파제 너머는 이전과 다름없는,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드넓은 바다였습니다. 멀리로 한 줄 기 수평선이 보였습니다. 해변 풍경도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거기에는 예전과 똑 같은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똑같은 파도가 밀려오고, 똑같은 사람들이 파도가 찰싹이는 해변길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오후 네 시가 지나자 저녁으로 기우는 부드러운 햇살이 사방을 감쌌고, 태양은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서편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모래 위에 주저앉아 가방을 옆에 놓고, 그런 풍경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참으로 온화하고 평온한 풍경이 었습니다. 먼 옛날 거기에 그렇게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쳤고, 그 높은 파도가 나 의 둘도 없는 친구를 삼키고 말았다는 일 따윈 마치 거짓말 같았습니다. 그 풍 경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또 40년 전에 발생한 그 사고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머릿속에서 조 작해낸 정밀한 환상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안의 깊은 어둠은 이미 소멸하고 없었습니다. 그것 은 찾아왔을 때처럼 불시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나는 천천히 자리 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바지를 걷어올리지도 않고 바닷물 속으로 조용히 발 을 내디뎠습니다. 구두를 신은채 밀려오는 파도에 두 다리를 맡겨 보았습니다. 어릴 적 밀려왔던 파도와 똑같은 파도가 마치 화해라도 하듯 정겹게 내 다리를 때리고 내 옷과 구두를 검게 적셨습니다. 완만한 파도가 틈을 두고 몇 차례 밀 려왔다가는 다시 밀려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나의 모습을 이상하다 는 듯 힐긋힐긋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이곳으로 돌아온 것 입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솜을 뜯어놓은 듯 자그만한 회색 구름이 하늘 에 듬성듬성 떠 있었습니다. 바람도 잔잔하여, 그 구름들은 한자리에 가만히 머 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뭐라고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그 구름들은 나 하 나만을 위하여 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소년 시절 태풍의 커다란 눈을 찾느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시간의 축이 삐걱삐걱 커다란 소리를 내었습니다. 40년이란 세월이, 내 안에서 썩어빠진 집처 럼 무너져 내리고, 낡은 시간과 새로운 시간이 소용돌이 속에 뒤섞였습니다. 사 방에서 소리가 사라지고, 빛이 휘청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몸의 균형을 잃 고 밀려오는 파도 속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나의 목구멍 속에서 쿵 쿵 울리고, 손발의 감각이 몽롱해졌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그 꼴로 거기에 엎드 려 있었습니다.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나는 더이상 무섭지 않았습 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지난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무서운 꿈을 꾸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밤중에 눈 을 뜨는 일도 없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습니 다. 아니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설사 너무 늦었다 해도, 나는 자신이 마침내 구원받고 회복되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 다. 구원받지 못하고, 공포의 심연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인생을 끝마칠 가능성 도 충분히 있었으니까요. 일곱번째 남자는 잠시, 아무 말없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누 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몸을 뒤트는 사람도 없었 다. 사람들은 일곱번째 남자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 도 완전히 멎었는지,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말을 찾듯, 셔츠 깃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나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포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 다.” 남자는 잠시 짬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공포는 물론 존재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고, 때 로는 우리 존재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 공포에 등을 돌 리고, 외면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중요 한 것을,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내 경우에 - 그것은 파도였 습니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를 위한 서문 이 작품은 1983년 12월호 <문학계>에 게재된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 자>를 거의 10년 만에 손질한 것입니다. 오리지널은 4백자 원고지 약 80매 정도 였는데, 너무 길다 싶어 이전부터 좀더 짧게 줄이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런데 1995년 코베와 아시아에서 낭독회를 할 기회가 있어, 그때 가급적이면 이 작품을 읽고 싶은 마음에 (이 작품은 그 지역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기 때문입 니다.), 대폭 수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리지널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와 구별하기 위해서 편의상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로 제목에 쉼표를 넣었습니다. 원고량은 약 4할 정도를 줄여서 45매 정도로 다이어트를 하였는데, 그에 따라 내용도 부분적으로 바뀌어 오리지널과는 약간 다른 흐름과 의미를 지 닌 작품이 되었기에, 또 하나의 버전으로 혹은 다른 형태의 작품으로 이 단편집 에 수록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구가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같은 작품집에 수록된 <반딧불>이란 단편과 쌍을 이루는 것으로 나중에 <노르웨이의 숲>이란 장편소설로 발전하는 계통에 포함되나, <반딧불> 의 경우와는 달리, 이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와 <노르웨이의 숲> 사이 에는 스토리상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습니다. 눈을 감자, 바람 내음이 났다. 과실처럼 풍요로움을 지닌 5월의 바람이다. 그 바람에는 까끌까끌한 껍질이 있고, 과육의 끈적함이 있고, 씨앗 알갱이가 있었 다. 과육이 공중에서 터지자 씨앗이 부드러운 총알이 되어 내 드러난 팔에 박혔 다. 아릿한 아픔만 뒤에 남았다. "지금 몇 시야?" 사촌 동생이 내게 물었다. 키가 근 20센티미터나 차이가 나 사촌 동생은 항상 나를 올려다보듯 하며 말했다. 나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열 시 20분." "그 시계 맞는 거야?" 사촌 동생이 또 물었다. "맞을 거야." 사촌 동생은 내 손목을 잡아당겨 시계를 보았다. 가늘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보기보다는 힘이 셌다. "이거, 비싼 시계야?" "아니, 싸구려야." 시각표를 다시 살피며 나는 말했다. 반응이 없다. 사촌 동생 쪽을 보니, 그는 난감함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술 사 이로 보이는 하얀 이가, 퇴행한 뼈처럼 보인다. "싸구려야." 나는 사촌 동생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정확하게 끊어 다시 말했다. "싸구려이기는 하지만, 제법 정확해." 사촌 동생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 동생은 오른쪽 귀가 안 좋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야구공에 귀를 맞았다. 그 뒤로 청력에 장애가 생겼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 도는 아니다. 그래서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보통생활을 하고 있다. 교실에서는 왼 쪽 귀가 선생 쪽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항상 제일 앞자리 오른쪽에 앉는다. 성적 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는, 외부의 소리가 비교적 잘 들리는 시기와 그렇 지 않은 시기가 있다. 그 시기는 밀물과 썰물처럼 번갈아 찾아온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반년에 한 번 정도로 거의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마치 오른쪽 귀의 침묵이 깊어져, 그 침묵이 왼쪽에서 들리는 소리까지 지워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물론 평범하게 생활할 수 없다. 학교도 쉬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이유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의사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예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치 료도 불가능하다. "시계란 말이지, 비싸다고 다 정확한 것은 아닌가 봐." 사촌 동생은 마치 자기자신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전에 갖고 있던 시계는, 제법 비싼 거였는데도 툭하면 고장 났었거든.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 엄마가 사준 거였는데, 1년 만에 잃어버려서, 그 다음부터 는 시계 없이 지내고 있어. 다시 안 사주셨거든." "시계가 없으니까 불편하지?" "응?" 사촌 동생이 되물었다. "불편하지 않느냐구, 시계가 없어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다시 말했다. "아니, 별로." 사촌 동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산속에 혼자 사는 것도 아니니까, 시간 정도는 아무한테나 물을 수 있잖아." "하긴 그렇군." 그리고 우리는 또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사촌 동생이 느끼고 있는 긴장을,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이라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5년 만에 만났다. 5년 동안에, 사촌 동생은 아홉 살에서 열네 살이 되었고, 나는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그 시간의 공백은 우리 사이에 제대로 통과할 수 없는 반투명한 칸막이 같은 것 을 만들어 놓았다. 필요한 사항을 말하려 해도 적당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말을 더듬거나 혹은 말을 삼키거나 할 때마다 사촌 동생은 항상 난 감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왼쪽 귀가 내 쪽으로 향해 있었다. “지금 몇 분이야?” 사촌 동생이 물었다. “열 시 25분.” 나는 대답했다. 버스가 온 것은, 열시 32분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비하면 버스 모양이 한결 새로웠다. 운전석 앞 의 커다란 유리창이 날개가 뜯어져 나간 대형 폭격기처럼 보였다. 그리고 생각 했던 것보다 훨씬 붐볐다. 통로에 서 있는 손님은 없었지만 우리 두 사람이 나 란히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좌석에 앉지 않고 맨 뒤 문 앞에 서 있기로 하였다. 그렇게 먼 길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시간대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타고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전철 역 앞에서 출발하여 구릉지에 있는 주택가를 돌아 다시 역으로 돌아가는 노선 순환 버스다. 노변에 무슨 특별한 명소나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교가 몇 군데 있어 통학 시간대에는 상당히 붐비지만, 점심 시간쯤이면 버스는 항상 텅텅 비 어 있기가 예사다. 나와 사촌 동생은 각자 한 손으로 가죽 손잡이와 기둥을 잡고 있었다. 버스는 반짝반짝하여, 방금 전에 완성되어 공장에서 거리로 나온 것처럼 보였다. 금속 부분에는 얼룩 한 점 없어 그 표면에 얼굴이 또렷하게 비칠 정도다. 좌석 깔개 도 말끔하고, 새 기계 특유의 자랑스럽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나사 하나하나에까 지 어려 있었다. 버스가 새로워졌다는 점과, 승객의 수가 뜻밖에 많다는 점이 나를 다소 혼란 에 빠뜨렸다. 어쩌면 이 노선 주변의 환경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버스 안을 주의깊게 돌아보고나서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 나 거기에 있는 것은 옛날과 다름없는 한적한 교외 주택지의 풍경이었다. “이 버스 타면 되는 거지?” 사촌 동생이 불안스럽다는 듯 물었다. 내가 버스를 탄 뒤부터 어쩔 바를 모르 는 표정을 짓고 있기에, 아마 걱정이 된 모양이다. “음, 맞아.” 나는 거의 자신에게 말하듯 대답하였다. “잘못 탈 수가 없어. 여기에는 이 노선 버스밖에 다니지 않거든.” “옛날에 이 버스 타고 고등학교 다녔더랬어?” 사촌 동생이 물었다. “응.” “학교, 좋아했어?”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학교에 가면 친구도 만날 수 있고, 다니는 것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어.” 사촌 동생은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그 사람들 지금도 만나?” “아니, 벌써 안 만난 지 오래됐어.” 나는 말을 골라서 대답하였다. “왜? 왜 안 만나는데?” “줄곧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은 아니었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 자리 가까이에 노인들이 단체로 모여 앉아 있었다. 전부 열다섯 명 정도는 되었으리라. 버스가 복잡한 것은 그 노인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노인들은 모두 보기좋게 타 있었다. 목덜미 뒤까지 고르게 까맸다. 그리고 한 명도 예외없이 홀 쭉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등산용 두꺼운 셔츠를 입고 있었고 여자들은 검소하고 간결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전원이 가벼운 등산 때 사용하는 조그만 배낭 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노인네들의 외견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했다. 마치 항목별로 정리된 무슨 샘플 서랍을 하나 빼내, 그대로 가지고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좀 이상하다. 이 버스의 노선 주변에는 등산을 위한 코스 따위란 한 군데도 없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나는 손잡이에 매달려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럴듯한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치료, 아플까?” 사촌 동생이 내게 물었다. “글쎄, 어떨까. 나는 자세한 얘기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거든.” “지금까지 귀 때문에 병원에 간 일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돌이켜 보면, 귀 때문에 병원에 간 일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없다. “지금까지 치료하면서 상당히 아팠니?” 나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런 건 아니야.” 사촌 동생은 대답하기 애매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아플 때도 있어. 하지만 굉장히 아픈 것은 아니야.” “그럼 이번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어머니 말씀으로는, 지금까지와 특별히 다 른 치료를 하는 것도 아닌 모양이던데.” “그렇지만, 지금까지 받은 치료와 별 다름없는 치료를 한다면, 역시 같은 식 으로 잘 낫지 않는 거 아닐까.” “그건 알 수 없지. 혹시 무슨 좋은 수가 생길 수도 있는 거잖아.” “뚜껑이 퐁 열리는 것처럼?” 사촌 동생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힐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의식적으로 뒤틀 린 표현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말했다. “의사가 바뀌면 기분도 바뀔 것이고, 사소한 절차상의 변화가 큰 의미를 지 니는 일도 있는 법이야. 그렇게 쉽사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뭐, 포기한 것은 아니야.” 사촌 동생이 말했다. “그럼, 넌더리가 나니?” “음, 조금은.” 사촌 동생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제일 괴로운 것은 무서움이야. 실제의 통증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통증 을 상상하는 쪽이 훨씬 무섭고, 싫어. 그런 기분 알겠어?” “알 것 같애.”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해 봄에는 여러 가지 많은 일이 생겼다. 사정이 있어 그때까지 2년 동안 다 니던 도쿄의 조그만 광고대리점을 그만두었다. 그 일을 전후로 하여, 대학 시절 부터 사귀던 여자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 다음달 할머니가 장암으로 돌아가셨 다.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조그만 가방 하나만 가지고 5년 만에 이 도시 로 돌아왔다. 집에는 내가 사용하던 방이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책꽂이 에는 내가 읽었던 책이 꽂혀 있었고, 내가 잠잤던 침대, 내가 사용했던 책상, 내 가 들었던 옛날 레코드가 남아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오래 전에 색과 향 을 잃고, 바짝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시간만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2,3일 쉬고 곧바로 도쿄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새 직장을 구할 연줄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한번 말을 꺼내볼 생각이었다. 기분 전 환을 위해 이사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몸을 움직이기가 점 점 귀찮아졌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러고 싶어도 나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혼자 방안에 틀여박혀 옛날 레코드를 듣고, 옛날에 읽은 책을 다시 읽고, 가끔은 정원의 잡초를 뽑기도 하였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가족 이외의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큰어머니가 찾아와, 네 사촌 동생이 새 병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좀 데리고 가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사실은 내가 따라가야 하는데 그날은 중 요한 볼일이 있어서 그렇다고 큰어머니는 말했다. 그 병원은 내가 다니던 고등 학교 근처에 있어서 장소는 알고 있었다. 시간도 충분하였고, 거절할 이유도 없 었다. 큰어머니는 나한테, 이것으로 둘이서 식사라도 하라며 봉투에 든 돈을 건 네주었다. 사촌 동생이 다른 병원에 다니게 된 것은 그때까지 다닌 병원에서 받은 치료 가 거의 효과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효과는커녕, 그의 난청 사이클은 이 전보다 훨씬 주기가 짧아졌다. 그 때문에 큰어머니가 병원측에 불만을 털어놓자, 병의 원인이 외과적인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네 가정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되려 면박을 주어 싸움이 벌어졌다. 하기야 병원을 바꾼다고 해도 사 촌 동생의 청각 장애가 당장 쾌유하리라고는 솔직히 말해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 다. 물론 그런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의 귀에 대해 거의 포기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와 사촌 동생은 집은 가까웠지만 나이가 열 살 이상이나 차이 나는 탓에 그 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면, 잠시 어디로 데리 고 가거나 함께 놀아주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알게 모르게 친척들은 나와 그 사 촌 동생을 `한 쌍`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즉 그가 나를 잘 따르고, 나 또한 그 를 각별히 귀여워하고 있다는 식으로 여겼던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지금,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왼쪽 귀를 가만히 내 쪽으로 향하고 있는 사촌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절절해졌다. 오랜 옛날에 들은 빗소리처럼, 그의 어딘가 모르게 거북한 일거일동이 내 마음 에 파고들었다. 친척들이 왜 나와 그를 하나로 묶으려 했는지 조금은 알듯한 기 분이었다. 버스가 일고여덟번째 정거장을 지나는 즈음에 사촌 동생이 또 불안한 눈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더 가야 돼?” “그래, 아직 멀었어. 큰 병원이라서 금방 눈에 띄니까 걱정 마.” 차창으로 불어들어오는 바람이 노인들이 쓴 모자챙과 목에 두른 스카프를 살 랑살랑 건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대관절 어디로 가고 있 는 것일까? “형, 우리 아빠 회사에서 일하게 되는 거야?” 사촌 동생이 내게 물었다. 나는 놀라 사촌 동생의 얼굴을 보았다. 사촌 동생의 아버지는, 즉 나의 큰아버 지는 코베에서 꽤 큰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은 생각 해보지도 않았고, 누군가 넌지시 운을 띄운 적도 없었다.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없는데,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사촌 동생은 얼굴을 붉혔다.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좋잖아. 앞으로 죽 여 기에 있을 수 있고. 다들 기뻐할 텐데.” 그는 말했다. 녹음 테이프에서 정거장 이름이 흘러나왔지만 정차 버튼을 누르는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정거장에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그렇지만, 도쿄로 돌아가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나는 말했다. 사촌 동생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따위, 그 어디에도 한 가지도 없다. 그렇지만 다른 데라 면 몰라도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버스가 산비탈을 올라가기 시작하자 집들은 드문드문해지고 울창한 나뭇가지 가 길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담장이 낮고, 외벽에 페인트를 칠한 외국인 주택도 눈에 띄었다. 바람이 약간 싸늘해졌다. 버스가 커브길을 돌 때마다 눈 아 래로 바다가 보였다가 가려지곤 했다. 나와 사촌 동생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런 바깥 풍경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사촌동생은, 진료 시간도 길고,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까 어디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담당 의사에게 인사를 한 뒤 나는 진료실에서 나와 식당으로 갔다. 그날 아침, 밥을 거의 먹지 않아 배고 고팠지만 메뉴에 적힌 음 식들은 전혀 내 식욕을 자극하지 못했다. 결국 커피만 주문했다. 평일 오전이라 식당에는 나 외에 일가족이 한 무리 있을 뿐이었다. 40대 중반 으로 보이는 아버지인 듯한 남자가 감색 줄무늬 잠옷을 입고 비닐 슬리퍼를 신 고 있었다. 어머니와 조그만 쌍둥이 여자애들이 문병객이었다. 쌍둥이는 똑같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테이블에 엎드린 자세로 오렌지 주 스를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는 병인지 어디를 다쳤는지, 증상이 그렇게 심한 것 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인지 부모들이나 아이들 모두 조금씩은 따분하다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어려 있었다. 창 밖으론 죽 잔디밭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스프링쿨러가 소리를 내면서 회전 하고, 초록색 잔디 위로 하얀 빛의 물방울을 뿌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소리로 우 는 꼬리 긴 새가 두 마리, 잔디밭 위를 똑바로 가로질러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 져갔다. 잔디밭 건너에는 테니스 코트가 몇 개 있었다. 그러나 네트는 제거되어 있었고,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코트 너머로는 느티나무가 죽 서 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잔잔한 파도가 초여름의 태양을 눈부시게 반사 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느티나무의 새 잎을 어루만지고, 스프링쿨러의 규 칙적인 물줄기를 조금씩 흔들었다. 오랜 옛날, 같은 풍경을 어디에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넓은 잔디밭이 있 고, 쌍둥이 여자애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꼬리 긴 새가 어디론가 날아가고, 네트가 없는 테니스 코트 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 리얼리티는 너무도 생생하고 강렬하였지만, 그러나 착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 었다. 나는 이 병원에 오늘 처음 온 것이다. 두 다리를 건너편 의자에 올려놓고,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으로 하얀 덩어리가 보였다. 현미경으로 보는 미생물처럼, 그것은 소리도 없이 늘어났 다 줄어들었다 하였다. 형태를 바꾸며 확산하여 산산히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하나가 되었다. 그 병원에 간 것은 8년 전 일이었다. 해안 근처에 있는 조그만 병원이었다. 식 당 창문으로 협죽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낡은 병원이라, 항상 비가 내리는 듯한 냄새가 났다. 친구의 걸 프랜드가 거기서 가슴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친구와 함 께 문병 간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일이다. 대단한 수술은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뼈 하나가 약간 안쪽으로 어긋나 있어서 그것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수술이었다. 긴급을 요하는 처치는 아니었지 만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하는 수술이라면 지금 해두자는 셈이었다. 수술 자체는 깜짝할 사이에 끝났지만, 수술 후의 안정이 중요하여 그녀는 열흘 정도 입원에 있었다. 우리는 야마하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병원에 갔다. 갈 때는 그가 운전 하고 돌아올 때는 내가 운전하였다. 함께 가자는 부탁을 받았던 것이다. “나 혼자서 병원 같은 데 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는 그렇게 말했다. 친구는 역 앞 과자점에 들러 초콜릿을 샀다. 나는 한 손으로는 그의 벨트를 잡고 한 손으로는 초콜릿 상자를 꽉 쥐고 있었다. 무더운 날이라 우리의 셔츠는 땀으로 푹 젖었다가 다시 바람에 마르기를 반복하였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알 지도 못할 노래를 한심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는 그때의 그의 땀 냄새를 기억하 고 있다. 그 친구는 그 얼마 후에 죽었다. 그녀는 파란 잠옷을 입고 무릎까지 오는 얇은 가운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우리는 셋이서 식당 테이블에 앉아 쇼트 호프를 피우고 콜라를 마시고 아이스크 림을 먹었다. 그녀는 배고 몹시 고파 있었다. 설탕을 뿌린 도넛을 두 개 먹고, 크림이 듬뿍 들어 있는 코코아를 마셨다. 그런데도 배가 덜 찬 모양이었다. “퇴원활 때쯤이면 돼지가 돼 있겠군.” 친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상관없어, 회복기니까.” 그녀는 도넛의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종이 냅킨으로 닦으며 말했다. 둘이 얘기하는 동안 나는 창 밖의 협죽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지가 무성 하여 조그만 숲처럼 보였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창문 난간은 소금기 섞인 바람 으로 덕지덕지 녹이 슬어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골동품 같은 선풍기가 실내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휘젓고 있었다. 식당 안에서는 병원 냄새가 났다. 먹은 음식 에서도 마시는 물에서도,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병원 냄새가 났다. 그녀의 잠옷에는 가슴에 주머니가 두 개 달려 있었다. 한쪽 주머니에 조그만 금색 볼펜 이 들어 있었다. 몸을 앞으로 숙이면 V자형으로 파인 목선으로 햇볕에 타지 않 은 하얗고 편평한 가슴이 보였다. 거기서 내 사고는 갑자기 멈춘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하고 나는 생각한 다. 콜라를 마시고, 협죽도를 바라보고, 그녀의 가슴을 보고, 그리고 그 다음은? 플라스틱 의자의 위에서 몸의 위치를 바꾸고, 턱을 괸 채 기억의 층을 파헤쳐 본다. 뾰족한 나이프 끝으로 코르크 마개를 파내는 것처럼. ...나는 눈길을 돌리고, 의사들이 그녀의 가슴살을 헤집고 그 안으로 고무장갑 을 낀 손가락을 쑤셔 넣어, 뼈의 위치를 바로잡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일처럼 여겨졌다. 무슨 비유담처럼 생각되었다. 그래, 그 다음 우리는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다. 얘기를 떠낸 것은 내 친 구다. 어떤 얘기를 했더라? 아마 내가 한 어떤 일에 관해서이리라. 내가 여자애 를 꼬시려 했는데 잘 안 풀렸다는 둥, 아마 그런 얘기일 것이다. 실제로는 대수 로운 사건도 아니었는데, 거기에 살을 붙이고 재미있게 얘기해 그녀는 폭소를 터트렸다. 나도 덩달아 웃었을 정도다. 그는 얘기 솜씨가 좋다. “그만 웃겨.” 그녀가 고통스럽게 말했다. “웃으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단 말이야.” “어디, 어디가 아픈데?” 친구가 물었다. 그녀는 심장 언저리, 왼쪽 유방의 조금 안쪽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친구가 그 걸 가지고 농담을 하여, 그녀는 또 웃고 말았다. 손목 시계를 본다. 열한 시 15분, 사촌 동생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점심 시간 이 가까운 탓인가, 식당이 붐비기 시작하였다. 갖가지 소리와 말소리들이 뒤섞여 연기처럼 실내를 감싸고 있다. 다시 기억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가슴 주 머니 속 조그만 금색 볼펜에 관해서 생각한다. ...그렇지, 그녀는 그 금색 볼펜으로 종이 냅킨 위에 무슨 그림을 그렸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에 종이 냅킨은 너무 부드러워, 볼펜 끝이 걸리고 만다. 그래도 그녀는 언덕을 그렸다. 언덕 위에는 조그만 집이 있다. 그 집에는 여자가 한 명 잠들어 있다. 집 주변에는 장님 버드나무가 무성 하다. 장님 버드나무가 여자를 잠에 빠뜨렸다. “장님 버드라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들이 물었다. “으응, 그런 식물이 있어.” “들어본 적 없는데?” “내가 만든 거니까.” 그녀는 미소지었다. “장님 버드나무한테는 아주 독한 꽃가루가 있는데, 그 꽃가루를 묻힌 조그만 파리가 귀로 파고들어가 여자를 잠들게 하는 거야.” 그녀는 새 종이 냅킨을 한 장 꺼내, 장님 버드나무를 그렸다. 장님 버드나무는 철쭉 정도 크기의 나무였다. 꽃도 피지만, 그 꽃은 두꺼운 녹색 잎으로 폭 싸여 있다. 잎은, 도마뱀 꼬리가 잔뜩 모여 있는 것 같은 모양이다. 장님 버드나무는 조금도 버드나무처럼 보이지 않았다. “담배 있어?” 친구가 내게 물었다. 나는 땀으로 젖은 쇼트 호프 곽과 성냥을 테이블 건너 그에게 던졌다. “장님 버드나무는 겉보기는 작지만, 뿌리는 아주 깊은 데까지 뻗어 있어.” 그녀가 설명하였다. “실제로, 어느 연령에 도달하면 장님 버드나무의 키는 더이상 자라지 않고 밑으로 밑으로만 뻗어. 마치 어둠을 양분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파리가 그 꽃가루를 묻히고 귀로 들어가, 여자를 잠재운다는 말이지. ” 친구가 눅눅한 성냥으로 고생스럽게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그래서... 그 파리는 뭘 하는데?” “물론, 여자의 몸 안에서 그 살을 먹지.” 그녀가 말했다. “우적우적.” 친구가 말했다. 그렇다. 그녀는 그 여름, 장님 버드나무에 관한 긴 시를 써서, 그 줄거리를 우 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시는 그녀에게 부과된 유일한 방학 숙제였다. 어느 날 밤에 꾼 꿈에서 착상을 얻어 침대 위에서 일주일이나 들여 긴 시를 완성하였다. 친구가 읽어보고 싶다고 했지만, 아직 손질이 덜되었다면서 그녀는 거절하였다. 대신 그림으로 시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장님 버드나무의 꽃가루 때문에 잠에 빠진 그 여자를 구하기 위하여 젊은 남 자가 한 명 언덕을 올라갔다. “그건 나를 뜻하는 거지, 안 그래?” 친구가 끼여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남자는 네가 아니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어?” 친구가 물었다. “난 알 수 있어.”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알 수 있는지는 몰라. 하지만 알아. 속상하니?” “물론이지.” 친구는 절반은 농담조로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젊은이는 앞을 가로막듯 빽빽하게 자라 있는 장님 버드나무를 헤치고, 천천히 언덕을 올라갔다. 실은 장님 버드나무가 무성해지기 시작한 이래 그 언덕을 올 라간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써 눈을 가리고, 한 손으로 몰 려드는 파리를 쫓으면서 젊은이는 걸음을 옮겼다. 잠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하여, 그녀를 길고 깊은 잠에서 깨우기 위하여. “하지만 결국 여자의 몸 전체가 언덕 꼭대기에서 파리에게 다 먹혀버렸다는 말이지?” 친구가 물었다.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가 대답했다. “어떤 의미에서 파리에게 완전히 먹혀버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슬픈 이야기겠구나.” 친구가 말했다. “그렇지 뭐.” 그녀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녀가 나에게 질문하였다. “나도 슬픈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내가 말했다. 사촌 동생이 돌아온 것은 열두 시 20분이었다. 왠지 초점이 맞지 않는 표정을 짓고, 약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다. 식당 입구에 모습을 보이고,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찾아오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다. 몸의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듯 어색한 걸음걸이였다. 나와 마주한 자리에 앉자, 너무 바빠서 잠시 숨쉬는 것도 잊어버 렸던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땠어?” 내가 물어보았다. “음.” 그가 대답하기를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다. “배 고프니?” 내가 물었다. 사촌 동생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서 먹을까, 아니면 버스 타고 시내로 나가서 먹을까. 어느 쪽이 좋겠어? ” 사촌 동생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식당 안을 휘 둘러보고는, 여기라도 좋아, 라 고 말했다. 나는 식권을 사 런치 2인분을 주문하였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사촌 동생은 창 밖 풍경을 - 바다며, 느티나무 가로수며, 스프링클러며, 아까까지 내 가 보았던 똑같은 풍경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옆 테이블에서는 말끔한 차림의 중년 부부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폐암으로 입원해 있는 아는 사람 이야기를 하였다. 5년 전에 금연을 했는데, 너무 늦게 담 배를 끊었다는 둥, 아침에 일어나서 심하게 객혈을 했다는 둥, 그런 얘기였다. 부인이 질문하고, 남편이 그에 대답하였다. 암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인간의 삶의 경향이 응축된 것이기도 하다고 남편은 설명하였다. 런치는 햄버거 스테이크와 흰살 생선 튀김에 샐러드와 롤빵이 곁들여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하고 묵묵히 그것을 먹었다. 그동안 옆에 앉은 부부는, 암이란 것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해 열심히 말을 주고받았다. 최근에 왜 암환자 수 가 늘어났는지, 왜 특효약이 없는지, 그런 내용들이었다. “어디든 대개 비슷해.” 사촌 동생이 자기 두 손을 바라보면서, 어딘가 모르게 두께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비슷한 질문을 하고, 비슷한 검사를 할 뿐이야.” 우리는 병원문 앞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이따금 머리 위의 나뭇잎들을 흔들었다. “전혀 들리지 않는 일이 종종 있니?” 나는 사촌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음, 아무것도 안 들려.” 사촌 동생이 대답했다. “어떤 느낌이 들까?” 사촌 동생은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에 잠겼다.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있어. 문득 알게 되는데. 하지만 스스로 자각 하게 되기까지 좀 시간이 걸려. 자각했을 때는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귀마개를 하고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말이야. 한참 동안이나 그 상태 가 계속돼. 그동안 분명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하지만 소리뿐만이 아니야, 들리 지 않는 것은 그 상태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아주 기분이 나쁘니, 그럴 때는?” 사촌 동생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싫지는 않아. 다만 여러 가지고 불편할 뿐이지.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말이야.” 나는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이미지가 절 전해지지 않았다. “존 포드 감독의 <아파치 요새>란 영화 본 적 있어?” 사촌 동생이 물었다. “오래 전에 본 적 있지.” 나는 말했다. “지난번에 텔레비전에서 하는 것을 보았어.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였어.” “그래.” 나는 맞장구를 쳤다. “영화 시작할 때, 서부의 요새에 새 장군이 부임해 오잖아. 그 장군을 고참 대위가 맞이하는데, 배우는 존 웨인이었어. 장군은 자기 서부에 대해서 잘 모르 고. 요새 주변에는 인디언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어.” 사촌 동생이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요새에 도착하자 장군은 존 웨인에게 이렇게 말해. `여기까지 오는 데 인디 언을 몇 명이나 보았다.` 그랬더니 존 웨인이 시침뗀 얼굴로 이렇게 대답해. `괜 찮습니다. 각하가 인디언을 보았다는 것은, 즉 인디언이 거기에 없다는 뜻입니다 `라고 말이야. 정확한 대사는 잊어버렸지만, 대충 그런 말이었을 거야. 무슨 뜻인 지 알겠어. 형?” <아파치 요새>에 그런 대사가 있었는지 나는 기억나지 않았다. 존 포드의 영 화 대사치고는 좀 난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기야 그 영화를 본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모두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일까... 잘 모르겠지 만.” 사촌 동생은 눈썹을 찡그렸다. “나도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일로 누군가 나를 동 정할 때마다, 왠지 그 대사가 떠올라. `인디언을 보았다는 것은, 즉 인디언이 거 기에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웃었다. “이상해?” 사촌 동생이 물었다. “음, 좀 이상하구나.” 내가 말했다. 사촌 동생도 웃었다. 그가 웃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잠시 짬을 두고, 사촌 동생이 고백하듯 말했다. “형, 내 귀 좀 들여다 봐주지 않을래?” “귀를 들여다보라구?” 나는 놀라 물었다. “그냥 바깥에서 보기만 하면 돼.” “할 수는 있지만, 왜?” “그냥.” 사촌 동생은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 생겼는지, 그냥 좀 봐주었으면 해서.” “그래, 좋아. 한번 보지 뭐.” 나는 말했다. 사촌 동생은 등을 보이고 앉아 오른쪽 귀를 내게로 향했다. 새삼스럽게 보니, 제법 잘생긴 귀였다. 크기는 작았지만 귓밥이 막 구워낸 마드레느처럼 도톰하였 다. 다른 사람의 귀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리저리 관찰해 보니, 귀란 인간의 다른 기관에 비해 형태상 아주 불가해한 구석이 있었다. 여기 저기가 불합리하게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고, 쑥 들어갔다가 툭 튀어나와 있기도 하였다. 진화의 과정에서 소리를 모으거나 방어하는 기능을 추구하는 사이에 자 연스럽게 그렇듯 불가사의한 외관을 취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뒤틀어 진 벽에 둘러싸여 귓구멍이 하나, 비밀스런 동굴로 통하는 입구처럼 어둡게 뚫 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구에 소굴을 친 작은 파리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여섯 개 다리에 달콤한 꽃가루를 잔뜩 묻히고, 그녀의 눅눅한 암흑 속으로 파고들어 가, 그 엷은 분홍빛 부드러운 살을 파먹고, 즙을 빨고, 뇌 속에 조그만 알을 낳 는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날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제 됐어.” 나는 말했다. 사촌 동생은 빙글 몸을 돌려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때? 어디 이상한 데 있었어?” “밖에서 보기에는 별 이상 없는 것 같은데.” “좀 이상한 분위기라든가, 그런 정도라도 괜찮은데.” “그냥 보통 귀야.” 사촌 동생은 실망한 듯이 보였다. 내가 말을 잘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치료할 때 아팠니?” 내가 질문해 보았다. “아니 별로. 지금까지 받았던 치료랑 똑같았어. 비슷한 데를 비슷하게 휘저으 니까. 지금은 그 부분이 닳아빠진 듯한 기분이야. 가끔은, 내 귀란 느낌조차 들 지 않아.” “28번.” 잠시 후에 사촌 동생이 내 쪽을 보고 말했다. “28번 버스 타면 되지?” 나는 줄곧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말에 얼굴을 들자, 버스가 속도를 떨 구고 오르막길을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아까 탔던 신형 버스가 아니라 낯익은 구형 버스다. 정면에 `28`이란 번호판이 걸려 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려 하 였다. 그런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마치 거센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손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그때, 그 여름 오후 문병 때 들고 갔던 초콜릿 상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신나는 표정으로 상자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열두 개의 조그만 초콜릿은 모양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녹아, 포장지와 뚜껑에 찐득찐득 들러붙어 있었다. 나와 친구는 병원에 가는 도중, 해안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모래사장에 뒹굴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우리는 초콜릿 상자를 강렬한 8월의 햇살 아래 그냥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초콜릿은 우리의 부주의와 오만함 때문에 손상되고 형태를 잃고, 상실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해 무언가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쪽이라도 좋았다. 누구든 조름이라도 의미가 있는 말을 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 오후, 우리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쓰잘데없는 농담만 주고받다 그대로 헤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언덕을, 장님 버드나무가 무성한 채로 그냥 방치하고 만 것이다. 사촌 동생이 내 오른팔을 세게 잡았다. “괜찮아, 형?” 사촌 동생이 물었다. 나는 의식을 현실로 되돌리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제대로 일어날 수 있었다. 불어오는 5월의 포근한 바람은 다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로 부터 아주 짧은 시간, 몇 초 동안, 어둠이 희미하게 깔린 기묘한 장소에 서 있었 다. 눈에 보이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장소에. 그러나 마침내 눈앞에 현실인 28번 버스가 멈추고, 그 현실의 문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올라타, 어딘가 다른 장소로 향하게 된다. 나는 사촌 동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내가 그렇게 말했다. 옮긴이의 말 며칠 전 늦은 밤이다. 둘째 딸아이가 잠이 안 온다면서 얘기를 해 달라고 칭 얼거렸다. 내가 예의 “옛날에 어떤 소설가가 있었는데...”라고 서두를 꺼내자, 아이는 “또 소설가야”라며 시큰둥해 했다.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야. 들어 봐”라 고 달래자, 샐쭉한 표정으로 내 가슴에 기대는 딸. 밤마다 얘기를 해달라고 보채는 아이에게 늘 새로운 얘기를 들려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작업하고 있는 작품의 내용을 대충 각색하여 들 려주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그날은, <렉싱턴의 유령>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소설가가 미국에 살았 는데 미국 친구네 집을 봐주러 갔었대. 그런데 그 소설가는 너 같지 않아서 열 한 시만 되면 잠을 잤다는 거야...” 얘기가, 혼자 잠자던 소설가가 느닷없이 한밤중에 깨어나 무슨 소리를 듣는 장면에 이르자, 아이의 표정은 반짝반짝 오히려 잠이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린가 싶어서, 소설가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 대. 그랬더니...” “엄마, 유령이야?”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무섭다고 더욱 안겨드는 딸. 나는 순간적으로 극적인 각색을 감행하여야 했다. 한밤에 유령 이야기를 들려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으응, 그게 아니고, 그 소설가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거야. 잠에서 깨어나 무 슨 소리를 듣는 꿈 말이야. 그 집은 아주 오래된 집이었거든. 소설가 아저씨 혼 자 자니까 아주 심심하겠지. 그래서 그 집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의 꿈 속에 나타나서 소설가가 혼자 자도 외롭고 심심하지 않게 파티를 열어준 거야.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면서 말이야.” “음, 그럼 그 소설가 아저씨, 아침까지 안 일어났어?” “그럼, 아침까지 푹 자고 일어나서, 또 소설 썼지.” 딸아이는 그제서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고나서 잠시 생각했다. 적막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케이시.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깊은 잠을 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란 외로움과 두려움에 마음이 늙 어가고 있는 그. 그를 위해 이미 죽은 많은 자들이 파티를 열어준다면, 그는 길 고 긴 잠 같은 죽음에 편안히 빠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죽은 자들이 내미는 따스한 손길을 마주 잡을 수 있다면 말이다. 1997년 깊어가는 가을 김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