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기의 절대적인 부족과 보이지 않은 수로, 가발에 대한 가사하라 메이의 고찰 아침에 구미코를 내보낸 후 나는 시립 수영장으로 수영하러 갔다. 오전에는 수영장이 가장 한가한 시간이다. 집에 돌아와 부엌에서 커피를 만들어 마시면서, 어중간하게 끝나 버린 가노 구레타의 기묘한 신변 이야기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 각을 돌이켜보았다. 그녀가 이야기한 것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생각해보았다. 생 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묘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머리 회전이 잘 안되었다. 잠이 왔던 것이다.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의 졸음이었다. 나 는 소파에 누워서 눈을 감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에 가노 구레타가 나왔다. 그러나 제일 먼저 나온 사람은 가노 마루타였다. 꿈속에서 가노 마루타는 등산 모자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모자에는 크고 선명 한 색깔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는데 (넓은 홀 같은 장소였다), 화려한 모자를 쓴 가노 마루타의 모습은 곧바로 눈에 띄었다. 그녀는 혼자서 바의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열대 과일로 만든 트로피컬 드링크 같은 것이 큰 유리잔에 담겨 그녀 앞에 놓여 있었는데, 가노 마루타가 실제로 그것을 마시고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정장을 입고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발견 하고 곧바로 그녀에게 가려고 했지만, 인파에 밀려서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없었 다. 겨우 카운터에 도착했을 때 가노 마루타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트로피컬 드 링크가 들어 있는 유리 잔이 외로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옆자리에 앉 아서 얼음을 넣은 스카치를 주문했다. 스카치는 뭐가 좋을까요하고 바텐더가 물 었고, 커티샥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상품 이름을 다른 것으로 하면 좋았을 텐데, 처음에 커티샥이라는 이름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런데 주문한 술이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가 뒤에서 마치 부서지기 쉬운 것 이라도 잡는 것처럼 살짝 내 팔을 잡았다. 뒤돌아보니 거기에는 얼굴 없는 남자 가 있었다. 정말 얼굴이 없는 것인지 어떤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얼굴 이 있을 만한 부분이 어두운 그림자에 완전히 덮여 있어서, 그 안에 무엇이 있 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쪽이입니다, 오키다 씨)하고 남자가 말했다. 나는 무엇인 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는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제발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그다지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그는 내 팔을 잡은 채 혼잡한 홀을 빠 른 걸음으로 빠져나가 복도로 걸어갔다. 나는 특별히 저항하지 않고 남자에게 이끌린 채로 복도로 벌어갔다. 이 남자는 적어도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누구든 상관 않고 닥치는 대로 이런 짓을 할 리는 없다. 거기에는 어떠한 이유와 목적 이 있는 것이다. 얼굴 없는 남자를 잠깐 복도를 걸어가더니, 어느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에는 208이라는 번호표가 붙어 있었다. (열쇠는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여십시 오.) 나는 시키는 대로 그 문을 열었다. 안은 넓은 방이었다. 옛 호텔의 스위트 룸처럼 보였다. 높은 천장에는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지 만 샹들리에의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창문 커튼은 전부 깔끔하게 쳐져 있었다. (위스키라면 거기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틀림없이 커티샥이 좋으시겠죠? 아무 쪼록 사양하지 말고 드십시오.) 얼굴 없는 남자는 문 바로 옆에 있는 찬장을 가 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나를 방안에 남겨 둔 채, 소리도 없이 문을 닫았다. 나는 영문을 몰라 오랫동안 방 가운데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 방의 벽에는 큰 유화가 걸려 있었다. 강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나는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잠깐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강 위에서는 달이 떠 있었다. 달 은 건너편 기슭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는데, 거기에 도대체 어떤 풍경이 있는 지 나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달빛이 너무나도 희미해서, 모든 윤곽이 막연하여 종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위스키가 매우 마시고 싶었다. 나는 얼굴 없는 남자가 일러 준 대로 찬장을 열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려고 했다. 그러나 찬장은 아 무리 해도 열리지 않았다. 문같이 보이는 것은 전부 기묘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잠깐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밀거나 당기거나 해보았지만, 역시 그것은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간단하게는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카다 씨)하고 가노 구레타가 말 했다. 문득 정신이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가노 구레타가 있 었다. 그녀는 역시 1960년대 초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열리는 데는 시간이 걸립 겁니다. 오늘은 너무 무리입니다. 단념하십시오.) 그녀는 내 앞에서, 마치 콩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스르르 옷을 벗고 나체가 되었다. 서론은 물론 설명도 없었다. (이봐요, 오카다 씨, 시간을 너무 허비할 수 없어요, 가능한 한 서둘러서 끝내세요.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오는 것만 해도 힘들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바지 지퍼를 내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내 페니스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검은 인조 속눈썹을 붙인 눈을 살짝 내리깔고, 내 페니스를 자기 입 안으로 쑥 넣었다. 그녀의 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나의 페니스는 그녀의 입 속에서 금방 단단하고 커졌다. 그녀가 혀를 움직 이자, 컬이 들어간 그녀의 머리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듯 가만히 흔들렸다. 그 머 리카락 끝이 네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나에게 보이는 것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인조 속눈썹뿐이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마루에 무릎을 끓은 채 내 하복부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안 돼요)하고 나는 말했다. (이제 곧 여기에 와타야 노보루가 올 거요.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오. 나는 이런 곳 에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괜찮아요)하고 가노 구레타는 내 페니스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아직 그 정 도의 시간은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다시 그녀는 혀 끝을 내 페니스에 대었다.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 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딘 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입술과 혀는 마치 미끈미끈한 생명체처럼 나를 꽉 붙잡고 있었다. 나는 사정했다. 그리고, 잠을 깼다. 아이구 맙소사. 나는 욕실로 가서 더러워진 속옷을 빨고, 끈적끈적한 꿈의 감 촉을 몰아내기 위하여 뜨거운 물로 정성껏 몸을 씻었다. 몽정을 한 것이 도대체 몇 년만의 일인가. 나는 마지막에 몽정한 것이 언제였던가 생각해 내려고 했다. 그렇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의 일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타월로 몸을 닦고 있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를 걸어 온 것은 구미코였다. 나는 꿈속에서 다른 여성을 상대로 막 사정한 후였으므로 구미코와 이야기하는 것에 조금 긴장했다. (목소리가 이산한데 무슨 일 있었어요?)하고 구미코가 물었다. 그녀는 그런 것 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했던 것이다. (특별한 일은 없어)하고 나는 말했다. (잠깐 꾸벅꾸벅 졸았는데, 지금 막 잠이 깼어.) (그래요?)하고 그녀는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의심스러 움이 수화기를 통해서 전해져 왔기 때문에, 그것이 더욱 나를 긴장시켰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좀 늦어질 것 같아요, 어쩌면 9시 정도가 될지도 모르겠 어요. 어쨌든 식사는 밖에서 할 거예요.) (괜찮아. 저녁은 혼자서 적당히 먹을게.) (미안해요)하고 문득 생각나서 덧붙이는 것처럼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수화기를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부엌으로 가서 사과를 먹었다. 6년 전에 구미코와 결혼한 후로, 나는 여태껏 다른 여자와 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구미코 이외의 여성에게 성욕을 전혀 느끼지 않았 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그러한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와 같은 기회를 특별히 추구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지만, 인 생에 있어서 일의 우선 순위와 같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단 한 번 우연한 기회에 어느 여자의 집에서 묵었던 적이 있다. 나는 그녀에 게 호의를 품고 있었고, 그녀는 나와 자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가 그렇 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와 자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사무소에서 몇 년간 함께 일한 여자였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인 가 세 살 아래였던 것 같다. 전화를 받거나 직원들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는데, 그러한 일에 관한 한 정말로 유능했다. 직감력이 좋은 아가 씨였으며 기억력도 뛰어났다. 누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 떠한 자료는 어느 책장에 들어가 있는지 그녀에게 물어 보면 모르는 것이 없었 다. 약속도 전부 그녀가 잡았다. 그녀는 모두에게 사랑 받았고 신뢰받았다. 나와 개인적으로 친하다고 해도 좋은 사이라고, 몇 번인가 둘이서 술을 마시러 가기 도 했다. 미인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그녀의 생김새가 좋았다. 그녀가 결혼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결혼 상대자의 일 관계로 규슈 로 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근 무 마지막 날 직장의 몇몇 동료와 함께 우 리는 술을 마시러 갔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방향이 같았고, 시간도 너무 늦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아파트까지 바래다주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그녀는 잠깐 안에 들어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가지 않겠느냐고 청했다. 마지막 지하철 시간이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이제 앞으로 얼굴 마주칠 일도 없을 지 모르고, 커피를 마시며 취기를 깨고 싶기도 했으므로, 들르기도 했다. 거기는 정말이지 여자가 혼자서 살고 있는 듯한 방이었다. 혼자서 쓰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 의 대형 냉장고와 책장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스테레오 장치가 있었다. 냉장고 는 아는 사람에게 공짜로 얻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옆 방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부엌에서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마루에 나란히 앉 아서 이야기를 했다. (저기요, 오카다 씨에게는 구체적으로 뭔가 특별히 무서운 것이 있어요?) 이야 기가 도중에서 끊겼을 때,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나에게 물었다. (특별히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소)하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무서 운 것이 몇 가지는 있겠지만, 특별히 라고 물으니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은?) (나는 보이지 않는 수로가 무서워요)하고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는 듯한 자세 로 말했다. (보이지 않는 수로를 아세요? 지하 수로 말이에요. 뚜껑이 덮인 깜깜 한 하천.) (보이지 않는 수로)하는 나는 말했다. 어떤 한자를 쓰면 좋을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나는 후쿠시마의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우리 집 바로 근처에 작은 하 천이 흐르고 있었어요. 농업 용수를 자주 흘려 보내는 작은 하천이었는데, 그것 이 도중에 지하 수로로 되어 있었죠. 나는 그때 두세 살 정도였고, 근처에 사는 나보다 나이가 좀 많은 아이들과 놀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아이들은 나를 작 은 배에 태워서 하천에 띄웠어요 늘 하던 그런 놀이였죠. 그렇지만 그때는 마 침 비가 갠 뒤라서, 물이 불어 있었던 탓으로 배는 아이들의 손을 떠나 지하 수 로 입구를 향해 곧바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어요. 만약 우연히 근처에 사는 아저 씨가 그곳을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그 지하 수로 안으로 빨려 들 어가 그대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을 거예요.) 그녀는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왼쪽 손가락으로 입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그때의 광경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하늘을 보고 누워서 흘 러가고 있었어요. 돌담처럼 생긴 하천 벽이 보이고, 그 위로 선명하고 아름다운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죠. 그리고 나는 계속 흘러갔어요.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 나는 몰랐죠. 그렇지만 그러는 사이에 바로 앞에 암흑이 있다 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렸어요.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있었어요. 이윽고 그 암흑 이 가까워지고 나를 삼키려고 했죠. 섬뜩한 그림자의 감촉이 새삼스럽게 나를 감싸려고 했죠. 섬뜩한 그림자의 감촉이 새삼스럽게 나를 감싸려고 했어요. 그것 이 내 인생의 제일 첫 기억이에요.)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무서워요, 오카다 씨)하고 그녀는 말했다. (너무나 무서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워요, 그때와 똑같이. 나는 점점 거기로 흘 러 들어가요. 나는 거기에서 도망칠 수가 없어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천 천히 연기를 뿜어냈다. 그녀가 피우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신은 지금 결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요?) 그녀는 끄덕였다. (그래요, 결혼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결혼에 대해서 뭔가 구체적인 문제가 있는 거요?)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구체적인 문제라고 할 것은 없어요. 물론 세세 한 것을 말한다면 한이 없겠지만.) 뭐라고 말하면 좋을 지 나는 잘 몰랐지만, 어쨌든 뭔가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누군가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는 많든 적든 누구나 그런 기분을 경험하 지 않을까? 자신이 어쩌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누군가 와 일생을 함께 한다는 것은 역시 대단한 결단이니까. 따라서 그렇게 무서워할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하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간단해요. 모두 그렇다고, 모두 마찬가지라고 말하 는 것은 말예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시각은 11시를 지나 있었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정리하고 돌아가야겠다고 나 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갑자기 나에게 안아 달라고 했다. (왜?)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나를 충전시켜 줬으면 좋겠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충전?) (몸에 전기가 부족해요. 얼마 전부터 난 매일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조 그만 자면 깨고, 깨고 나서는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 어요. 그런 때에는 누군가에게 충전을 받지 않으면 안돼요. 그렇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그녀가 취했다고 생각하며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눈은 평 소와 같이 총명해 보이는 냉철한 눈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전혀 취해 보이지 않 았다. (그렇지만 말이오, 당신은 다음주에 결혼하잖소. 그 사람에게 얼마든지 안아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매일 밤 안길 수 있잖소. 결혼이라는 것은 그 때문에 있는 것이지. 앞으로 전기가 부족한 일은 없을 거요.)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꼭 다물고, 그냥 자기 발끝을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양쪽 발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작고 하얀 발에는 열 개의 예쁜 발톱이 있었다. (지금이 문제예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내일이나 다음주나 다음달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부족하다구요.) 그녀는 정말로 진지하게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어하는 듯했으므로, 나는 그녀 의 몸을 껴안았다. 그것은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유 능하고 느낌이 좋은 동료였다. 우리는 한 방에서 일을 하고, 농담을 하며, 가끔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일을 따라서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몸을 안고 있으니, 우리는 단지 뜨거운 육체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직장이 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 할당받은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 다. 한번 그 무대를 내려와 버리면, 그래서 서로 교환하고 있던 불필요한 육체 덩어리에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골격과 소화기, 심장, 뇌, 생식기를 갖 춘 미지근한 육체 덩어리였다. 나는 그녀를 감싸 안아, 그녀는 내 몸에 유방을 바짝 갖다 대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의 유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부드러웠 다. 나는 마루 위에 앉아서 벽에 기대고 있었고, 그녀는 축 늘어져 나에게 의지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가만히 그 자세로 서로 껴 앉고 있었다. (이제 괜찮소?)하고 나는 물었다. 그것은 내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다른 누 군가를 나 대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스웨터에 무릎까지 오는 얇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녀가 그 아래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자 나는 거 의 자동적으로 발기했다. 그녀도 내가 발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줄곧 내 목줄기에 전해져 왔다. 나는 그녀와 자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2시경까지 그녀를 '충전'시켜 주게 되었다. 그녀는 제발 부탁이니 이대로 혼자 두고 가지 말고, 잠들 때까지 안아 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침대까지 가서 거기에 눕혔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지 않았다.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를 안고 계속 '충전'시켜 주었다. 내 팔 안 에서 그녀의 볼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어떤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기 이외에 어떻게 상황을 처리하면 좋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이외에 어떻 게 상황을 처리하면 좋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가장 어떻게든 머리에서 쫓아 버렸다. 본능이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저어, 오카다 씨, 오늘 일로 나를 싫어하거나 하지는 말아 주세요. 어쩔 수 없 을 정도로 전기가 부족했을 뿐이에요.) (괜찮소.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집에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뭐라고 구미코에게 설명 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거짓말을 하기는 싫었고, 그렇다고 이런 사정을 일일이 설명해도 제대로 이해해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나는 이 제 될 대로되라는 식이 되었다. 될 대로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2시에 그녀의 방 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온 것은 3시였다. 택시를 잡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구미코는 물론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자지 않고 부엌 식탁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동료와 술을 마신 후 마작을 했다고 했다. 어째서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았느냐고 그녀는 말했다. 전화할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고 나는 말했다. 물론 그녀는 납득하지 못했고, 거짓말은 곧 들통이 나버렸다. 마작은 벌 써 요 몇 년 동안 하지 않았으며, 나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어 쩔 수 없이 나는 발기한 부분만은 빼고-사실대로 말했다. 그녀와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나는 말했다. 구미코는 그로부터 사흘 동안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른 방에서 자고 혼자서 식사를 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결혼 생활에서 최대의 위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심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화를 내는 기분은 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입장을 바꾸어 당신이 나였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사흘 동안의 침묵을 깨고 구미코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그녀가 한 최 초의 말이었다. (만약 내가 전화한 통하지 않고 일요일 아침 3시에 집에 돌아와 서, 지금까지 남자와 함께 침대에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면, '나를 믿어 주세요. 단지 그 사람을 충전시켜 주었을 뿐이니까. 자아, 그럼 지금부터 아침을 먹고 푹 자요' 하고 말한다면, 당신은 화를 내지 않고 그것을 믿어 주겠 어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당신의 경우는 그것보다 더 나빠요)하고 구미코는 말했다. (당신은 처음에 거 짓말을 했으니까요.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마작을 했다고 했어요. 그것은 거짓 말이었죠. 어떻게 당신이 그 사람과 자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믿을 수 있겠어 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어떻게 내가 믿을 수 있느냐구요?) (처음엔 거짓말을 한 건 나빴어)하고 나는 말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 그 대로를 설명하는 것이 번거로웠기 때문이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어. 그렇지만 이것만은 믿어 주기 바래. 양심이 찔릴 일은 정말로 없었어.) 구미코는 식탁 위에 얼마 동안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왠지 주위 공기가 조금 씩 희박해져 가는 것 같았다. (뭐라고 잘 말할 수는 없지만, 믿어야겠죠)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만 이것 만은 기억하세요. 나는 아마 그것과 똑같은 일을 언젠가는 당신에게 할 거예요. 그때 내가 말하는 것을 믿어 주세요. 나에게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어요.) 그녀는 아직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었을 때의 일을 가끔 상상 해 보았다, 아마 나는 그녀가 말하는 것을 믿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마 나도 역 시 복잡하고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 것이다. 어째서 일부러 그런 일을 해야만 했는지 하고, 그리고 그것은 구미코가 그때 나에게 느꼈던 기분일 것이다. (태엽 감는 새님)하며 누군가가 정원 쪽에서 불렀다. 가사하라 메이의 목소리 였다. 나는 타월로 머리를 닦으면서 툇마루에 나가 보았다. 그녀는 툇마루에 걸터앉 아서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만났을 때와 같이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크림색 면바지 위에 검은 폴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 고 클립보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저기를 뛰어 넘어 왔어요)하고 가사하라 메이는 말하며, 담을 가리켰다. 그리 고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대강 짐작만 하고 뛰어넘었는데, 아저씨 집이라 서 다행이에요. 담을 잘못 뛰어 넘어서 다른 집으로 들어갔다면 큰일이잖아요.) 그녀는 주머니에 쇼트 호프 갑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런데 태엽 감는 새님 은 건강하세요?) (그냥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저기요, 지금부터 아르바이트하러 갈 건데, 괜찮다면 태엽 감는 새님도 함께 가지 않을래요? 둘이서 팀을 짜서 하는 일이니까, 만난 사람과 한 팀이 된다면 여러 가지 일을 나에게 물어 보겠죠. 나이는 몇이냐, 어째서 학교에 가지 않았느 냐 등. 그런 것은 정말이지 귀찮아요. 어쩌면 상대방이 변태일지도 모르고요. 그 런 일이 없으란 법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태엽 감는 새님이 함께 가주신다면 나 로서도 도움이 되겠는데요.) (그건 네가 전에 말했던 가발 회사에서 조사하는 일이니?) (그래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1시부터 4시까지 긴자에서 머리가 벗겨진 사람 의 수를 세는 일이에요. 간단한 일이죠. 그리고 아저씨를 위해서도 좋을 거예요. 아저씨도 어차피 언젠가는 그렇게 머리가 벗겨질 테니까, 지금 여러 가지를 보 고 연구해 두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말이지, 학교에 가지 않고 낮부터 긴자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어도 선도 받거나 하지 않니?) (사회과목의 과외 수업으로 조사를 하고 있다든지 뭐 그렇게 대충 말하면 괜 찮아요. 언제나 그런 수법으로 속였으니까 상관없어요.) 나는 별다른 예정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가기로 했다. 가사하라 메이 는 그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지금 그쪽으로 간다고 했다. 그녀의 말투는 정중했 다. 네, 그 사람과 함께 조를 짜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네네, 그렇습니다. 괜찮 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알았습니다, 알겠습니다. 12시 좀 넘어서 찾아 뵙겠습니 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내가 빨리 집에 돌아왔을 경우를 생각해서 6시까지 돌아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나는 가사하라 메이와 함께 집을 나왔다. 가발 회사는 신바시에 있었다. 가사하라 메이는 지하철 안에서 조사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는 길모퉁이에 서서 거리를 지나가는 머리가 벗겨진(또는 머리숱이 적은)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면 된다. 그 리고 그 벗겨진 정도에 따라서 그들을 3단계로 분류한다. '매화' 머리숱이 좀 적 다고 생각되는 사람, '대나무' 머리숱이 아주 적다고 생각되는 사람, '소나무' 완 전히 벗겨진 사람의 3단계였다. 그녀는 클립보드를 열고 조사용 팜플렛을 꺼내 벗겨진 모습의 다양한 실례를 보여 주었다. 각각 벗겨진 상태의 진행 정도에 따 라 소나무, 매나무, 매화의 3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것으로 대충 요령은 알았죠? 어느 정도 벗겨진 상태의 사람은 어느 단계에 들어간다는 걸 말예요. 뭐 세세한 것을 말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대체로 어느 정 도가 어디에 들어가는지는 알 수 있겠죠? 대충하면 돼요.) (대충은 알겠는데)하고 나는 그다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옆자리에 확실히 '대나무'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뚱뚱한 샐러리 맨 풍의 남자가 앉아, 아무래도 앉아 있기 거북하다는 듯이 펨플릇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가사하라 메이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의 구별은 내가 맡을 테니까, 아저씨는 내 옆에서 내가 소나무라든지 대나무라고 말할 때마다 그것을 조사 용지에 기록하면 돼요. 어때 요, 간단하죠?) (그렇군)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그런 조사를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도 움이 될까?) (그런 것은 몰라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그런 조사 를 하고 있어요. 신주쿠, 시부야, 아오야마 등에서 말이에요. 어느 지역이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 가장 많은지 조사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소나무, 대나무, 매 화의 인구 비율을 조사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은 돈이 남아돌아요. 그러니까 이런 일에 돈을 쓰는 거죠. 가발업계는 여하튼 돈벌이가 잘돼요. 보너스도 그 정도 규모의 어느 회사보다 훨씬 많이 받고 있어요, 왜 그 런지 알아요?) (글쎄?) (가발 수명이 말이에요, 사실은 아주 짧기 때문이죠. 아저씨는 잘 모르겠지만, 대개 한 2, 3년밖에 안 돼요. 최근에 만드는 가발은 굉장히 정교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만큼 소모도 빠르죠. 2년이나 길어 봐야 3년이면 대개는 다시 사야 돼 요. 표피에 딱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가발 아예 있는 머리숱이 전보다 더 적어 지게 되니까, 그러면 다시 꼭 맞는 것으로 바꿔야만 하거든요. 구래서, 뭐 어쨌 든, 만약 아저씨가 가발을 사용하고 있다가 2년이 지나서 그것을 사용할 수 없 게 되었다고 한다면, 아저씨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겠어요? 음, 이 가발은 소모되 었군. 이젠 사용할 수 없어. 그렇지만 새로 사게 또 돈이 들고, 그러니까 나는 내일부터 가발을 쓰지 않고 회사에 가야지 하고,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어 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렇죠, 생각할 수 없겠죠? 결국은요, 한번 가발을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계속 가발을 사용해야 하는 숙명에 처해 버리는 거예요.그러니까 가발 회사가 돈을 벌게 되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 좀 뭣하지만, 약물 중개상과 똑같아요. 한 번 고객을 잡으면 그 사람은 언제까지나 고객이죠. 아마 죽을 때까지 손님일 거 예요. 그렇다고 머리가 벗겨진 사람에게 갑자기 쑥쑥 검은 머리가 생겨났다는 이야기 들어 본 적 있어요? 가발은 말이에요. 대개 50만 엔 정도, 수공을 많이 들어간 것은 100만엔 정도 하는데요, 그것을 2년마다 다시 산다는 것은, 정말이 지 대단하죠. 자동차만 해도 4년이나 5년은 타잖아요, 중고 처분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가발은 그것보다도 더 수명이 짧아요. 그리고 처분 같은 것도 없잖아요. (일리가 있군)하고 나는 말했다. (게다가, 가발 회사는 직접 미장원을 경영하고 있어요. 거기에서 모두 가발을 빨거나 자기의 머리를 자르거나 하죠. 그렇잖아요? 이발소에 가서 거울 앞에 앉 아, 어이차 하고 가발을 벗어서, 자아 잘라 주세요 하고 말하기는 좀 어렵잖아 요. 그 미장원 매상만으로도 상당하죠.) (너는 여러 가지 것을 알고 있구나)하고 나는 감탄하여 말했다. 그녀 옆에 앉 은 '대나무'인 샐러리맨을 열심히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네, 나는요, 거기 회사 사이가 좋아져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하고 가사하라 메이는 말했다. (그 사람들 돈을 많이 벌어서 어쩔 줄 모른다니 까요. 동남 아시아라든지, 임금이 싼 그런 곳에서 가발을 만드는 거예요. 머리카 락도 그쪽에서 사들이고 있어요. 타이라든지 필리핀에서. 그런 곳의 여자 아이들 이 머리를 잘라 가발 회사에 팔아요. 그것이 장소에 따라서는 그들의 결혼 자금 이 되기도 한대요. 세상은 정말 재미있죠? 이 근처 어딘가에 있는 아저씨 머리 는, 실은 인도네시아 여자 아이의 머리기도 하다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나와 그 '대나무'인 샐러리맨은 반사적으로 지하철 안을 둘러보 게 되었다. 우리는 신바시에 있는 그 회사에 들러서, 종이 봉투에 들어 있는 조사 용지와 연필을 받았다. 회사는 업계에서 매출액이 두 번째라고 했다. 회사 입구는 고객 이 마음 편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매우 조용하고 겉에는 간판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종이봉투에도 용지에도, 회사의 이름은 전혀 씌여 있지 않았다. 나는 이 름과 주소, 학력과 연령을 아르바이트 등록 용지에 기입하고 조사과에 제출했다. 그곳은 아주 조용한 직장이었다. 전화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사람도 없었고, 셔 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컴퓨터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청결한 옷을 입고, 각자 조용히 일하고 있었다. 가발 회사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만, 머리가 벗겨진 사람의 보이지 않았다. 그중 몇몇 정도는 어쩌면 그 회사의 가발을 착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누가 가발을 착용하고 있는지 그렇 지 않은지, 구별할 수는 없다. 그곳은 내가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기묘한 분 위기를 가지고 있는 회사였다. 우리는 거기에서 지하철을 타고 긴자 거리까지 갔다. 아직 좀 시간이 있었고 배도 고팠으므로, 우리는 데일리 퀸에 들어가 햄버거를 먹었다. (저어, 태엽 감는 새님)하고 가사하라 메이가 (만약 아저씨는 머리가 벗겨진다 면, 가발을 쓸 거예요?) (글쎄?)하고 나는 말했다.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니까, 머리가 벗겨지면 벗겨 진 대로 내버려두지 않을까?) (맞아요, 확실히 그러는 게 나아요,) 그녀는 입가에 묻은 케첩을 냅킨으로 닦 았다. (머리가 벗겨지는 것은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아요.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요.)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와코 양품점 앞 지하철 입구에 걸터앉아서 세 시간에 걸 쳐 머리숱이 적은 사람들의 수를 헤아렸다, 지하철역 입구에 앉아서 계단을 오 르내리는 사랍들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느니, 머리카락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 악할 수 있었다. 가사하라 메이가 '소나'라든지 '대나무'라고 말하면, 나는 그것을 용지에 써넣었다. 가사하라 메이는 그러한 작업에 매우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 다. 그녀는 한 번도 망살이거나, 말이 막히거나, 다시 정정하여 말을 하거나 하 지 않았다. 그녀는 실로 재빠르고 정확하게 머리숱의 정도를 3단계로 구분했다. 그녀는 보행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짧게 '소나무'라든지 '대나무' 하고 말했다. 머리숱이 적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여러멸 지나가는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 그녀는 '매화 매화 대나무 소나무 대나무 매화'하는 식으로 빠른 어조로 말해야만 했다. 한번은 고상한 노신사(그 사람은 멋진 백발이었다)가 한동안 우 리의 작업을 바라보고 난 다음, 나에게 (실례지만,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신 겁 니까?)하고 물었다. (조사중입니다)하고 나는 간략하게 대답했다. (무슨 조사입니까?)하고 그가 물었다. (사화과의 조사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매화 소나무 매화)라고 가사하아 메이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는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후에도 잠시 우리의 작업을 바라보다가, 이 윽고 단념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거리를 사이에 둔 미쓰코시 백화점 시게가 4시를 알리자, 우리는 조사를 끝냈 다. 그리고 또 데일리 퀸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특별하게 노동력을 쓰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깨나 목의 근육이 기묘하게 뻣뻣해져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머 리가 벗겨진 사람의 수를 몰래 헤아리는 행위에 대해서, 내가 뭔가 떳떳하지 못 한 느낌 같은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하철을 타고 신바시에 있 는 회사를 향하는 동안, 나는 머리가 벗겨진 사람을 보면 반사적으로 소나무라 든지 대나무로 구별해 버렸는데, 그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 지만 아무리 그만두려고 생각해도, 가속도가 붙어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우 리는 조사 용지를 조사과에 건네주고 보수를 받았다, 노동 시간과 노동 내용의 할당치고는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나는 수취인 난에 사인을 하고, 그 돈을 주 머니에 넣었다. 나와 가사하라 메이는 지하철을 타고 신주쿠까지 가서, 거기서부 터 오다큐선으로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슬슬 퇴근 러시 아워가 시작되고 있었다. 붐비는 지하철을 타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는데, 별다르게 그립지는 않 았다. (괜찮은 일이죠?)하고 가사하라 메이가 지하철 안에서 말했다. (편하고, 보수도 그런 대로 괜찮고.) (다음에 또 같이 할래요? 1주일에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데.) (또 해도 괜찮지.) (저기요, 태엽 감는 새님)하고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에 가사하라 메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요. 사람들이 머리가 벗겨지는 것을 두 려워하는 건, 그것이 인생이 달하아 없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요. 자 신이 죽음을 향해서, 최후의 소멸을 향해서, 크게 한 걸음 다가갔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요?)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저기요, 태엽 감는 새님. 가끔 나는 생각하는데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조금씩 죽어 가는 것은,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요?) 나는 질문의 요지를 잘 몰랐으므로, 손잡이를 잡은 채로 자세를 바꾸어 가사 하라 메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천천히 조금씩 죽어 간다는 것은 예를 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우의 일이지?) (예를 들면요...... 맞아요, 어딘가 어두운 곳에 혼자 갇혀서, 먹을 것도 마실 것 도 없이, 점점 조금씩 죽어 가는 것 같은 경우를 의미하는 거이에요.) (그것은 분명 불행하고 괴롭겠구나)하고 나는 말했다. (가능하며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안은걸.) (그렇지만요, 태엽 감는 새님,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요? 모두 어딘가 어두운 고세 갇혀서, 먹을 것이랑 마실 것을 빼앗기고, 점점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씩, 조금씩.) 나는 웃었다. (너는 네 나이치고는, 이따금씩 굉장히 염세적인 사고 방식을 가 지고 있구나.) (그 염세 어쩌구 하는 것은 어떤 뜻이에요?) (염세적, 하고 그녀는 몇 번을 입속에서 되풀이했다. (태엽 감는 새님)하고 그녀는 내 얼굴을 가만히 노려보듯이 올려다보면서 말 했다. (나는 아직 열 여섯살이고, 세상 일을 그다지 잘은 모르지만 요, 그래도 이 것만큼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어요. 만약 내가 염세적이라고 한다면, 염 세적이지 않는 세상 어른들은 모두 바보예요.) 10. 매직터치, 욕조 안의 죽음, 유품 배달자 지금 살고 있는 독채로 이사 온 것은 결혼하고 2년째 되던 해 가을이었다. 그 때까지 살던 고엔지의 아파트가 재 건축하게 되어, 그곳을 나와야만 했던 것이 다. 그래서 싸고 편리한 아파트를 찾아 다녔는데, 우리의 예산에 맞는 집은 그리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외삼촌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일단 세타가야에 있는 자기 집에서 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외삼촌이 젊었을 사서 10년 동안 혼자서 살 았던 집이다. 외삼촌은 그 오래 된 집을 부수고 좀더 편리한 집으로 새로 짓고 싶었으나, 건축규제 때문에 생각처럼 다시 지을 수가 없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규제가 완화된다는 이야기도 있고 해서 외삼촌은 지금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동안 아무도 살지 않은 빈집으로 놔두면 세금도 나오고, 그렇다고 모르는 사 람에게 빌려주면 나가라고 할 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세금 대책을 위한 명목상의 집세로 그때까지 아파트 집세(그것은 상당히 쌌다)만큼의 돈을 주면 그것으로 좋다, 그 대신 나가 달라고 하면 3개월 안으로 비워 달라고 외삼촌은 말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의가 없었다. 세금 사정에 관한 것 은 잘 몰랐지만, 잠시 동안만이라도 적은 돈으로 독채에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고마운 이야기였다. 오다큐선의 역까지는 제법 멀었지만, 집 주위는 한적 하고 조용한 주택가였고, 작지만 정원도 딸려 있었다. 남의 집이기는 했지만, 실 제로 거기로 이사해 보니 우리도 '한 가구'를 가질 수 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외삼촌은 나의 어머니 동생이었는데, 잔소리는 한마디도 안하는 타입이었다. 시원스럽고 탁 트인 성격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을 만큼 좀 헤아리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친척 중에서 그 외 삼촌에게 가장 호감이 갔다.외삼촌은 도쿄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국에 취 직하여 라디오 아나운서가 되었는데, 10년동안 그 일을 한 후에 '싫증이 났기 때 문'이라며 방송국을 그만두고 긴자에서 바를 시작했다. 그다지 유별나게 치장한 가게는 아니었지만, 그곳은 본격적인 칵테일을 파는 곳으로 상당히 유명해져, 몇 년 안에 다른 곳에도 몇 개의 음식점을 경영하게 되었다. 외삼촌에게는 장사에 필요한 재능 같은 것이 있는 듯했으며, 어느 가게나 상당히 잘되었다. 학생 시절 나는 한번 외삼촌이 하는 가게는 어째서 모두 잘되는지 외삼촌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예를 들면 긴 자와 같은 장소에 똑같은 외형의 가게를 냈을 때, 어느 가게 는 잘되고 어느 가게는 망한다. 나는 그 이유를 잘 몰랐던 것이다. 외삼촌은 양 손바닥을 펼쳐 나에게 보였다. <매직 터치야>하고 외삼촌은 진지한 얼굴로 말 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외삼촌에게는 매직 터치와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뿐만 아 니라 외삼촌에게는 어디에서라고 할 것 없이 우수한 인재를 모아 오는 재능이 있었다. 외삼촌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많은 봉급을 지불하여 후하게 대접했고, 그 들도 또한 외삼촌을 좋아하고 열심히 일했다. (이 사람이다 하고 생각되는 사람 에게는 과감히 돈을 지불하고 기회를 주는 거야)하고 외삼촌은 나에게 말했던 적이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이득이나 손해를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사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여분의 에너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위 해서 확보해 두면 돼.) 외삼촌은 만혼으로, 40대 중반이 되어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고 나서야 결혼했 다. 상대는 세 살인가 네 살 아래인 이혼 경험이 있는 여성으로, 외숙모 쪽에서 도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외숙모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알게 되었는 지 외삼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도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성장 과정이 좋아 보이는 얌전한 분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외숙모는 그전의 결혼 에서도 아이를 낳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여하튼 외삼촌은 40대 중반이 되어서, 재산가라고까지 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 이상의 돈을 위해 뼈빠지게 일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 가 되었던 것이다. 가게에서의 수입 외에도 집세나 임대 맨션으로부터의 수입이 있었고, 투자에 의한 견실한 배당이 있었다. 외삼촌은 물장사를 했던 탓으로, 견 실한 직업과 조그마한 살림살이로 알려진 우리 일가족 사이에서도 좀 냉담한 시 선으로 보였고, 본인도 원래 그다지 친척과의 만남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외삼촌은 단 한 명의 조카인 나에게는 예전부터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주셨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재혼하신 아버지와의 사이가 나빠지고 나서는 특히 그러했다. 대학 시절 내가 도쿄에서 가난하게 혼자서 생 활하던 때는, 긴자에 있는 자신의 몇몇 가게에서 공짜로 자주 밥을 먹여 주었던 것이다. 독채는 귀찮다며 외삼촌 부부는 아자부 언덕 위에 있는 맨션에서 살고 있었 다. 특별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진귀한 차를 사는 것이 유 일한 취미로, 차고에 옛날 구형 재규어와 알파로메오를 가지고 있었다. 둘 다 이 제 골동품에 가까웠지만 정람이지 손질을 잘해 두어서, 마치 갓 만들어진 차처 럼 번쩍번쩍 광이 났다. 외삼촌에게 용건이 생겨서 전화를 건 김에, 좀 마음이 걸렸으므로 가사하라 메이의 집안에 관한 것을 물어 보았다. (가사하라라고?)하며 외삼촌은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가사하라라는 이름은 기억이 없는데, 거기에 살고 있었을 무렵에는 나 혼자였고, 이웃 사람들과 만나 는 일도 좀처럼 없었으니까.) (가사하라 씨의 집과 골목을 사이에 둔 뒤쪽에 빈집이 하나 있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이전에는 미야와키라는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빈 집으로 덧문에 판자가 박혀 있어요.) (미야와키라는 사람이라면 잘 알지)하고 외삼촌이 말했다. (예전에 레스토랑을 여러 개 경영하던 사람이야. 긴자에도 가게를 하나 가지고 있었지. 일 관계도 있 고 해서 몇 번 만나 이야기한 적이 있어. 가게는 솔직히 말해, 그다지 신통한 편 은 아니었지만, 장소가 좋아서 장사는 꽤 순조로웠지. 미야와키라는 사람은 상당 히 인상이 좋은 인물이었어. 좋은 가정 환경에서 자라 전혀 고생을 모르는 듯한 사람이었지. 고생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고생이 몸에 배지 않는 건지, 어쨌든 실제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은 그런 타입이었어. 누군가의 권유로 주식에 손을 댔는데, 그게 위험한 주식에 돈을 쏟아 분 셈이 되어서, 손해난 돈을 그 사람이 전부 뒤집어쓰게 되었고, 따라서 토지와 집, 가게 등을 전부 처분하게 되었지. 마침 상황이 나쁘게도 새로운 가게를 내기 위해 집과 토지를 저당 잡혔던 때인 데, 설살가상인셈이지. 분명히 혼기에 이른 딸이 두 명 있었던 것 같은데......) (그후 그 집에는 쭉 아무도 살지 않았군요.) (그래?)하고 외삼촌은 말했다. (아무도 살지 않나? 분명히 소유권을 복잡해져 서, 재산이 압류인지 뭔가가 되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 집은 좀 싸더라도 사지 않는 것이 좋아.) (좀 싸다 해도 살 형편이 못돼요)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왜죠?) (나도 우리 집을 살 때 좀 알아봤는데, 그 집에는 여러 가지 좋은 않은 일이 있더라구.) (귀신이라든가 뭐 그런 겁니까?) (귀신까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토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없어)하 고 외삼촌은 말했다. (그 집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명한 군인이 살고 있었 대. 전쟁중 중국 북부에 있던 대령으로, 육군의 활동적인 엘리트였지. 그가 이끌 던 부대는 그쪽 편에서 상당한 훈공도 올렸지만, 그것과 동시에 여러 가지 지독 한 짓도 했던 모양이야. 전시 포로를 5백 명 가까이 한꺼번에 처형하기도 하고, 농민을 몇 만 명이나 끌어 모아서 강제 노동에 혹사시켜 절반 이상 죽게 하기도 했다나? 그저 들은 이야기니까 그 진위 여부는 모르겠지만 말야. 그는 전쟁이 끝나기 조금 전에 내지로 다시 불려 와 도쿄에서 종전을 맞았는데, 주변 상황을 보니 무슨 전범 용의로 극동 군사 재판에 걸릴 공산이 컸다나? 중국에서 활약하 고 있던 장군이며 영관급들이 점점 헌병들에게 걸려들고 있었지. 그는 재판에 걸릴 줄은 상상도 못했던 거야. 구경 거리가 되고, 마침내는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만은 싫었지. 그렇게 될 바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 렇기 때문에 미군 지프가 집 안에 멈추고 미군 병사가 거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자, 그 대령은 망설일 것도 없이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지. 정말은 할복 자살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거야. 권총이 훨 씬 빠르게 죽을 수 있잖아. 그리고 부인은 남편의 뒤를 따라 부엌에서 목을 맸 어.) (그랬어요?) (그런데 그 미군은 여자 친구의 집을 찾으러 왔다가 길을 잃은 것뿐이었어. 그 근처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지프를 잠시 세웠던 것뿐이야. 너도 알 듯이 그 근처의 길은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찾기 어려우니까. 사람이 죽을 때를 결정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렇군요.) (그후 거기는 한동안 빈집이었는데, 마침내 어느 유명한가 그 집을 샀지. 이미 옛날 사라밍고, 그렇게 유명한 여배우는 아니었기 때문에 너는 이름을 모를 거 야. 그 여배우는 거기서, 그러니까 10년 정도 살았을까? 독신으로 가정부와 둘이 살았어. 그런데 그 여배우는 그 집으로 이사 오고 몇 년 후엔가 눈 질환을 앓았 지. 눈이 침침해져서 꽤 가까이에 있는 것도 희미하게 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어. 그렇지만 여배우기 때문에 안경을 쓰고 영화를 찍을 수는 없었지. 콘택트렌즈도 그 무렵에는 지금처럼 좋은 것이 나오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않았거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촬영 현장의 지리를 미리 잘 조사하여, 여기에서 몇 걸음 가면 무엇이 있고, 거기에서 이쪽으로 몇 걸음 오면 무엇이 있다는 것을 머리 속에 넣고 나서 연기를 하곤 했지. 쇼치쿠 작한 홈드라마였는데, 그래서 그럭저 럭 잘해 나갈 수 있었어. 옛날에는 무슨 일이든 여유롭게 했지.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여느 때처럼 현장을 조사하고 나서, 이제 괜찮겠다 안심하고 무대 뒤 분 장실로 되돌아온 후에, 사정을 잘 모르는 젊은 카메라맨이 여러 가지 세트를 조 금씩 이동시켜 버렸어.) (그래서요?) (그래서 그녀는 발을 헛디뎌 어딘 가로 굴러 떨어져 걸을 수 없게 되어 버렸 어. 게다가, 그 사고가 계기가 되었는지 시력도 점점 잃어 갔지. 거의 장님에 가 까울 정도로 되어 버렸어. 아직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는데 말이지. 물론 이미 영화 일 같은 건할 수 없었고. 그냥 집 안에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지. 그러는 사 이에 절대적으로 믿었던 가정부마저 돈을 빼돌려 남자와 도망가 버렸던 거야. 은행 예금부터 주식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가지고 말이야. 지독한 이야기 지.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됐을 것 같니?) (이야기의 흐름으로 봐서, 하여간 좋은 결말은 아니겠죠?) (그렇지)하고 외삼촌은 말했다. (욕조에 물을 채우고, 거기에 얼굴을 담그고 자 살했어. 너도 알겠지만 여간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그렇게 죽는 것은 불가능하 지.) (좋은 결말이 아니군요.) (전혀 좋은 결말이 아니지) 하고 외삼촌이 말했다. (그후 얼마 지나고 나서 미 야와키가 그 집을 샀어. 환경도 좋고, 지대가 높아서 햇볕 잘 들고, 토지도 넓어 서, 모두 거기를 탐냈지. 그렇지만 그도 그전에 살던 사람들에 대한 어두운 이야 기를 들었기 때문에, 집을 토대부터 전부 부수고 새집을 다시 지었거든. 액막이 까지 했지. 그러나 그래도 소용없었던 모양이야. 새집에서 살아봤자 신통한 일이 없었어. 세상에는 그런 땅이 있는 거야. 공짜로 준다고 해도 나는 거절하겠어.)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한 후에, 나는 저녁 준비를 했다. 빨래를 걷 어 개어서 서랍 장에 넣었다. 부엌에 가서, 커피를 타서 마셨다. 한 번도 전화 벨이 울리지 않는 조용한 하루였다. 나는 소파에서 뒹굴며 책을 읽었다. 독서를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따금씩 정원에서 태엽 감는 새가 울었다. 그 외에는 소리다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4시경에 누군가가 현관 벨을 눌렀다. 우편 배달부였다. 그는 등기라며 나에게 두터운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수취인 종이에 도장을 찍고, 그것을 받았다. 고급스런 일본 종이로 만들어진 봉투에는 붓으로 검게 내 이름과 주소가 씌어 져 있었다. 뒤를 보니, 발신인 이름은 '마미야 도쿠타로'라고 씌어 있었다. 주소는 히로시마 현 ××군이었다. 마미야 도쿠타로라는 이름도, 그 히로시마 현의 주소 도 전혀 기억에 없었다. 게다가 붓으로 쓴 필적으로 봐도, 마미야 도쿠타로는 꽤 나이가 많을 듯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가위로 봉투 끝을 잘랐다. 편지는 고풍스러운 두루마리 일본 종이로, 역시 붓으로 줄줄 씌어져 있었다. 무척 교양이 있는 인물인 것 같 았고 상당히 멋진 필체였는데, 나에게는 그러한 교양이 없는 탓으로 읽는 데 상 당히 힘이 들었다. 문체도 퍽 고풍스럽고 딱딱했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서 해독 해 보니, 거기에 씌어져 있는 대충의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편지에 의 하면, 우리가 예전에 방문하곤 했던 점쟁이 혼다 씨가 2주쯤 전에 메구로에 있 는 자택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심장 발작이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그 다지 고통스럽지 않게 단시간 내에 숨을 거두었을 거라고 했다. 혼자서 사는 몸 이었으니, 그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고 편지에 씌어 있었다. 아침에 파출 부가 청소하러 와서, 그가 각로에 푹 엎드려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마미야 도쿠타로는 육군 중위로서, 만주에 주둔할 때 작전중 우연한 일로 혼다 하사와 생사를 함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혼다 씨가 돌아가시면서 남 긴 강한 뜻을 좇아서, 고인의 유품을 유족들에게 책임지고 배분하는 역할을 맡 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인은 유품의 배분에 대해서 상당히 세심한 지시를 남겼 다. (그것은 마치 본인이 맞게 될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상세하고 면밀 한 유서였습니다. 그리고 오카다 씨께서도 어떤 기념이 되는 물건을 받아 주시 면 좋겠다고, 그 유서에 고인은 쓰고 있었습니다.)하고 편지에 씌어 있었다. (오 카다 씨께서도 다망하실 것이라 사료되지만, 고인이 남긴 유지를 헤아려 주시고, 고인을 연모하는 자그마한 기념품으로서 이것을 받아 주신다면, 저 또한 앞날이 얼마 안 남은 한 사람의 늙은 전우로서,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겠습니다.) 그리 고 편지의 마지막에 도쿄에서의 체류지가 씌어 있었다. 분쿄구 혼고 2가××번 지 마미야 올림이라고 되어 있었다. 아마 친척 집에라도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부엌의 식탁에서 답장을 썼다. 우선은 엽서에 간단하게 용건만을 써두려 고 생각했는데, 막상 펜을 들자 좀처럼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인과는 연분이 있어 생전에 여러모로 신세를 졌습니다. 혼다 씨가 이제 살아 계시지 않 는다고 생각하니, 그분과의 몇몇 추억이 가슴에 오고갑니다. 연령도 상당히 차이 가 났고, 겨우 1년 정도의 왕래였습니다만, 고인에게는 뭐랄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혼다 씨가 저 같은 사람을 지명하여 유품을 남 기셨다는 것은 정말이지 감사하며, 저는 예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또한 저에게 그와 같은 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 나 그것이 고인이 바라는 것이라면, 삼가 그 뜻을 받들고 싶습니다. 편하실 대에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그 엽서를 근처에 있는 우체통에 넣었다. 죽어야만 헤어날 기회도 있어, 노몬한……하고 나는 혼잣말을 했다. 구미코가 돌아온 것은 밤 10시가 가까워서였다. 그녀는 6시 전에 전화를 걸어 서, 오늘도 빨리 돌아갈 것 같지 않으니 먼저 식사해요, 나는 밖에서 뭔가 적당 히 먹을 테니, 하고 말했다. 나는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혼자서 간단하게 저녁 을 만들어 먹었다. 그후에는 또 책을 읽었다. 구미코는 돌아와서 맥주를 조금 마 시고 싶다고 말했으므로, 우리는 맥주 중간 짜리 병을 반씩 마셨다. 그녀는 피곤 해 보였다. 그녀는 부엌 식탁에 턱을 괴고, 내가 말을 걸어도 그다지 얘기를 하 지 않았다.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혼다 씨가 돌아가셨 다는 말을 했다. 혼다 씨가 돌아가셨어요? 하고 그녀는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나이가 되셨으니까요, 귀도 잘 들리지 않았고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그 가 나에게 유품을 남겼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마치 하늘에서 뭔가가 갑자기 떨 어져 내린 것처럼 놀랐다. (당신에게 유품을 남겼다고요? 그분이?) (그래. 어째서 나에게 유품 같은 것을 남겼는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말이지.) 구미코는 눈썹을 찡그리며 그것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나와 그분은 제대로 이야기도 해보지 못했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적 어도 나는 거의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지. 뭔가를 이야기해 보았자 그분에게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잖아. 한 달에 한 번 당신과 둘이 가만히 앞에 앉아서 그 분의 이야기를 들었지. 그것도 거의 노몬한 전쟁 이야기였고. 화염병을 던지면 어떤 전차는 불타지만 어떤 전차는 불타지 않는다든지, 그러한 이야기뿐이었잖 아.) (모르겠네요. 하지만 당신의 무엇인가가 그의 마음에 들었겠죠. 난 그런 타입 의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또 침묵했다. 왠지 거북한 침묵이었다. 나는 벽에 걸린 달 력을 보았다. 생리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회사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이 아주 바빠?)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조금요.) 구미코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난 후에, 맥주가 아직 남아 있는 맥주 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어조에는 도전적인 느낌이 약간 섞여 있 었다. (늦은 것은 미안해요. 잡지사 일이니까, 바쁜 시기가 있어요. 그렇지만 이 렇게 늦는 일이 잦은 건 아니잖아요? 이것도 내가 사정을 얘기해서 잔업을 조금 줄여서 하는 편이에요. 결혼했다는 이유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니까, 늦어질 수도 있지. 그건 상관없어. 당신이 피 곤해 하지 않을까 해서 걱정했던 것뿐이오.) 그녀는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나는 그녀가 사가지고 온 주간지의 책장을 훌 훌 넘기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문득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거기에는 아직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은 돈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돈을 봉투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르바이트 에 관한 일을 구미코에게 말하지 않았다. 특별히 감출 생각은 없었지만, 말할 기 회를 놓쳐서 어떻게 하다 보니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이상하게도 점점 더 말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근처에 살고 있는 묘한 열 여섯 살 여자 아이와 알게 되어서, 둘이서 함께 가발 회사의 조사 아르바이 트를 갔어, 보수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어, 하고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 는 것이다. 구미코는 (어머, 그래요? 다행이네요)하고 말하고,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가사하라 메이에 대해서 알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가사하라 메이라는 애가 어떠한 여자 아이며, 언제 어 디서 어떤 식으로 그 아이와 알게 되었는지를 처음부터 일일이 설명해야만 할지 도 모른다. 나는 어떠한 일을 순서에 따라 남에게 설명하는 것에 그다지 능숙하 지 못하다. 나는 봉투에서 돈을 꺼내 지갑에 넣고, 봉투는 구겨서 휴지통에 버렸다. 이렇 게 해서 조금씩 비밀이라는 것이 생기는 거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특별히 그 것을 구미코에게 비밀로 해두어야겠다고 의식했던 것은 아니다.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말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느 미묘한 수 로를 통과하면서, 처음 생각과 관계없이, 결국 비밀이라는 불투명한 옷을 뒤집어 쓰고 만다. 가노 구레타의 일도 그렇다. 나는 가노 마루타의 동생이 우리 집에 왔던 것을 아내에게 말했다. 동생의 이름은 가노 구레타라고 한다, 1960년대초풍 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우리 집 수돗물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그 렇지만 그녀가 그후에 갑자기 까닭 모를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고, 그 이야 기를 하는 도중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쩍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 다. 가노 구레타의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았고, 그 세세한 뉘앙스를 재현하여 아내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구미코는 가노 구레 타가 용건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서 나에게 복잡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 어놓았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도 나의 조그마한 비밀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구미코도 나에게 이와 비슷한 비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책망할 수 없었다. 누구라 도 그 정도의 비밀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보다는 내가 그러 한 비밀을 가질 성향이 높다 구미코는 생각한 것은 말해 버리는 타입이다. 말하 면서 사물을 생각하는 타입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다. 나는 왠지 불안해져 세면대로 갔다. 욕실 문은 열려진 채였다. 나는 문 입구에 서서,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파란 무지 잠옷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서 타월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저기, 내 일에 관한 것인데……) 하고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도 나 나름대 로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어. 친구에게 말을 꺼내 보기도 했고, 여러 가지 알 아보기도 했어 일이 없지는 않아. 그러니까 언제라도 일하려고 생각만 하면 일 할 수 있어. 마음만 결정하면, 내일이라도 일할 수 있다구. 그렇지만 말이야, 왠 지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겠어. 그런 식으로 적당히 일을 결정하는 것이 좋은지 어떤지 나도 잘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요전번에도 말했잖아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하면 된다고 말예 요.) 그녀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오늘 내일 안으로 일을 시 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에요. 만약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라면 그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일을 하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않 는다면, 나 혼자 밖에 나가 일하고 당신이 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 게 느껴진다면, 우선 뭐든 일을 찾으면 되잖아요? 나는 아무래도 좋아요.) (물론 언젠가는 일을 찾아야만 하겠지. 그건 알고 있어. 평생 이렇게 어슬렁어 슬렁 살아서는 안되니까. 빠르든 늦든 일은 찾아야지.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떤 일을 해야 좋을지,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어. 일을 그만두고 얼마 동안은, 또 뭔가 법률관계의 일을 하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 관계의 연 줄이라면 조금 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어. 법률 일에서 멀어 져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법률이라는 것에 대해 점점 흥미를 가질 수 없게 되어간다구. 그것은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아내는 거울 안의 내 얼굴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러니까 무엇을 하고 싶냐고 하면,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는 거야. 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그렇지만 이것을 꼭하고 싶다 하는 생각은 없는 거야. 그것이 지금 나의 문제지. 생각을 가질 수 없다는 것 말이야.) (저, 도대체 당신은 왜 법률을 공부할 생각을 했죠?) (왠지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원래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 그래서 한때는 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고 싶었지. 그렇지만 대학 진 로를 결정할 때 문학이라는 것은 더 자발적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자발적이라고요?) (문학은 그것을 전공으로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보통의 인생 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지. 그래서 나는 법률을 선 택했던 거야. 물론 법률에도 흥미가 있었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지금은 법률을 선택했던 거야. 물론 법률에도 흥미가 있었지만 말이 야.) (그렇지만 지금은 법률에 흥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거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유리 잔의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상하지? 사무실에 서 일할 때는 그래도 제법 즐겁게 했는데. 법률이라는 것은 효율적으로 자료를 모은 후에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것과 같아. 거기에는 전략이 있고, 요령이 있 지. 그러니까 성실하게 하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야. 그렇지만 일단 그 세계를 떠 난 후로 나는 이제 그곳에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버렸어.) (여보.) 그녀는 타월을 아래에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법률이 싫어졌 다면, 법률 일 같은 것은 안해도 괜찮아요. 사법 시험에 관한 일은 완전히 잊어 버리세요. 허겁지겁 일을 찾지 않아도 괜찮아요. 만약 이미지를 가질 수 없다면, 이미지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러면 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당신에게 설명해 두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았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유리 잔을 씻었다. 아내는 욕실에서 나와 부엌 식탁에 앉 았다. (저기요, 실은 오늘 오후에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 (아무래도 오빠는 선거에 출마할 생각인 것 같아요. 아니, 이미 나가기로 결정 한 것 같았어요.) (선거?) 하고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나는 정말로, 잠시 동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놀랐던 것이다. (선거라면, 혹시 국회 의원에 나선다는 말인가?) (그래요. 다음 선거 때 니가타에 계신 큰아버지 선거구에서 후보로 나서지 않 겠느냐는 얘기가 있었대요.) (그렇지만 그 선거구에서는 큰아버지의 아들 중 한 명이 후계자로 나서기로 되어 있지 않았나? 덴쓰 광고회사 중역인가 뭔가를 하는 당신 사촌 오빠가 퇴직하고 니가타로 돌아가서 출마한다고……) 그녀는 면봉을 꺼내 귀를 닦기 시작했다. (뭐 일단은 그럴 예정이었는데 사촌 오 빠가 싫다고 했대요. 도쿄에서 가족과 함께 제법 즐겁게 살고 있는데, 이제 와서 니가타로 돌아가 의 원 같은 건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겠죠.) 구미코의 아버지의 큰형은 니가타 선거구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4대인 가 5대인가를 역임했다. 중진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대로 괜찮은 경력의 소유자로, 단 한 번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장관 직에 올랐다. 그러나 고령과 심 장병 탓으로 다음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어렵게 외었는데, 다라서 누군가가 그 선거구를 계승해야만 했다. 그 큰아버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처음부터 정치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차남에게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선거구에서는 오빠를 원하고 있어요. 젊고 머리가 영특하고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 앞으로 몇 대 동안 의원직을 역임하여 중앙에서 실력자가 될 수 있을 듯한 인재를 말이에요. 오빠라면 지명도도 높고, 젊은 사람들의 표도 모을 수 있으니 말할 것도 없다니 거죠. 오빠가 그 지역의 핵심 인물이 될 수는 없겠 지만 후원회의 힘이 강하니가 그것은 그쪽에서 책임진다. 도쿄에 살고 싶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단지 몸만 선거에 나와 준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그랬대요.) 와타야 노보루가 국회 의원이 되어 있는 모습을 나는 잘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오빠에 관한 일은 나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국회 의원이든 우주 비행사 든 원하는 대로하면 돼요.) (그렇지만 어째서 일부러 당신에게 그런 일을 의논한 것일까?) (설마, 의논이라뇨?) 하고 그녀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의논한 것이 아니에요. 오빠가 나에게 의논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요. 단지 이 런 이야기가 있다고 나에게 알려 온 것뿐이에요.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이혼 경험이 있고 독신이라는 것은, 국회 의원 후보자로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 (글쎄요?) 하고 구미코가 말했다. (정치나 선거에 관한 것은 난 잘 모르고 흥미 도 없어요. 그렇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오빠는 아마 두번 다시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누구하고도 원래 결혼해서는 안되었어요. 오빠가 추구하는 건 좀 달라 요. 당신이나 내가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에요. 난 알아요.)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구미코는 두개의 면봉을 화장지에 싸서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얼굴을 들고 가만히 나를 보았다. (옛날에 오빠가 자위 행위 하는 것을 우연히 본 적이 있어 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여 문을 열었는데, 거기에 오빠가 있었어요.) (누구라도 자위 행위 정도는 하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언니가 죽고 3년 정도 지났을 무렵일 거예요. 오빠는 대학생이었고, 나는 국 민학교 4학년인가, 그 무렵이었죠. 우리 어머니는 죽은 언니 옷을 처분해야 하나 어쩌나 망설이다가 결국 놔두기로 했어요. 내가 커서 입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여, 그것을 골판지 상자에 담아서 수납장에 넣어 두었죠. 오빠는 그것을 꺼내 어 냄새를 맡으면서 자위 행위를 하고 있었어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그 무렵 아직 어렸고, 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오빠가 그곳 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봐 서는 안되는 비뚤어진 행위라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죠. 그리고 그것이 보기 보다 훨씬 진한 행위라는 것도요.) 구미코는 그렇게 말하고 조용하게 고개를 저 었다. (와타야 노보루 처남은 당신이 그것을 본 것을 알고 있을까?) (오빠도 눈이 있잖아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옷은 결국 어떻게 됐어? 당신이 커서 언니 옷을 입었어?)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처남은 당신 언니를 좋아했나?) (글쎄요) 하고 구미코는 말했다. (오빠가 언니에게 성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 지 어떤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뭔가가 있었고, 아마도 오빠는 그 무엇인가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결혼해서는 안되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요.) 그리고 구미코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빠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심각한 정신적인 문제를 갖고 있어요. 물론 우 리도 많든 적든 정신적인 문제를 갖고 있죠. 그렇지만 오빠가 갖고 있는 정신적 인 문제는 당신이나 내가 갖고 있는 것과는 종류가 달라요. 그것은 훨씬 더 깊 고 단단해요. 그리고 오빠는 그러한 상처나 약점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다 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요? 이번 선거에 대해서도 나는 그게 좀 걱정이에요.) (걱정이라니, 뭐가?) (모르겠어요. 뭔가가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피곤해요.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어요. 오늘은 그만 자요.) 나는 욕실에 가서 이를 닦으면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 3개월, 나는 거의 바깥 세계에는 나가지 않았다. 근처 상점과 시립 수영장과 우 리 집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긴자의 와코 양품점 앞과 시나가와 의 퍼시픽 호텔을 제외하고, 내가 갔던 가장 먼 곳은 역 앞의 세탁소였다. 나는 그 동안 거의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았다. 3개월 동안에 내가 '만났다'고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내를 제외하곤 가노 마루타와 구레타 자매, 그리고 가사하라 메 이뿐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좁은 세계였다. 그리고 대부분 정지된 듯한 세계였 다. 그러나 내가 포함되어 있는 세계가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정지되면 정지될수 록, 그 세계는 기묘한 사건과 기묘한 사람들로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걸음 을 멈추기를, 그들이 그늘에 숨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태엽 감는 새가 정원에 와서 그 태엽을 감을 때마다 세상은 점점 혼미해 져 가기만 했다. 나는 입을 헹구고, 다시 한 번 잠깐 내 얼굴을 보았다. 이미지를 가질 수 없다고 나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나는 서른 살에 멈춰 서 서, 그대로 이미지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욕실에서 나와 침실로 갔을 때, 구미코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11. 마미야 중위의 등장, 따뜻한 진흙 속에서 온 것, 오데코롱 사흘 후에 마미야 도쿠타로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아침 7시 30분, 나는 아내와 함께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아침 일찍 전화를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주무시는 중에 깨운 게 아니었 으면 좋겠는데요)하고 마미야 씨는 아주 미안한듯이 말했다. (아침에는 언제나 6시 좀 지나서 일어나니까 괜찮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내가 보낸 엽서에 대한 인사말을 하고, 내가 일을 나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연락을 취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오늘 점심 시간에 잠깐 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대단히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사정인즉, 그는 가능하다면 오늘 저녁 신칸센을 타고 히로시마로 돌아갔으면 오늘 저녁 신칸센게 예정을 잡 았으나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지금 난 직장에 다니지 않아 하루 종일 한가하니까, 아침이든 점 심이든 오후든 언제라도 그쪽에서 편한 시간에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뭔가 약속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는 예의바르게 물었다. 아무 약속이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오늘 아침 10시에 댁으로 찾아뵈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 그렇게 말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뒤에, 역에서 집까지 오는 길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 았다. 뭐, 괜찮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주소를 알고 있으니까 맘만 먹으면 어 떻게든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겠지. (누구예요?)하고 구미코가 물었다. (혼다씨의 유품을 가져다 줄 사람이야. 오늘 오전 중에 일부러 그것을 가져다 주겠다고.) (그래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토스트에 버터를 발랐다. (아주 친절한 사람이군요.) (정말이야.) (저기요, 혼다 씨에게 분향이라도 하러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적어도 당신만 이라도.) (그래. 그것도 좀 물어 봐야겠네)하고 나는 말했다. 외출하기 전에 구미코는 나에게 원피스 뒤의 지퍼를 올려 달라고 했다. 몸에 꼭 맞는 원피스여서 지퍼를 올리는 게 좀 힘들었다. 그녀의 귀 뒤에서 아주 좋 은 향기가 났다. 여름날 아침에 잘 어울리는 향기였다. (새로운 오데콜롱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재빨리 손목시계에 눈을 돌 리고 손을 올려 머리를 정리했다. (자, 이제 가지 않으면 안돼요)하고 그녀는 말 하고, 테이블 위에 있는 핸드백을 들었다. 구미코가 작업실로 사용하는 방을 치우고 쓰레기를 정리하다가, 나는 휴지통 안에 노란 리본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눈을 멈췄다. 잘못 쓴 220자 원 고지라든지, 다이렉트 메일 같은 것들 밑으로 그 리본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 었다. 내가 그 리본을 찾아낸 것은, 그것이 매우 선명하며 광택이 있는 노란섹이 었기 때문이다. 선물 포장용으로 사용되는 종류의 리본이었는데, 꽃잎처럼 만들 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휴지통에서 꺼냈다. 리본과 함께 마쓰야 백화점 포장 지도 버려져 있었다. 포장지 아래에는 크리스찬 디오르의 마크가 붙은 상자가 있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병 모양으로 움푹 패어 있었다, 상자만 봐도 그 내용 물이 상당히 비싼 물건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들고 욕 실로 가서 구미코의 화장품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거의 사용하 지 않은 크리스찬 디오르의 오데코롱 병을 발견했다. 그 병은 상자의 움푹 패인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나는 병의 금색 뚜껑을 열어 보았다. 방금 전 구미코의 귀 뒤에서 맡은 것과 똑같은 향기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아침에 마시다 남은 커피를 마시면서 머리 속을 정리해 보 았다. 누군가가 구미코에게 오데코롱을 선물했다 그것도 상당히 비싼 것이다. 마 쓰야 백화점에서 사서 선물용 리본을 맨 것이다. 만약 그것이 남자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면 그는 구미코와 상당히 친한 사이일 것이다. 그다지 가깝지 않은 사 이의 남자는 여성에게(특히 기혼 여성에게) 오데코롱을 같은 걸 주지 않은다. 만 약 그것이 여자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면...... 그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구미코가 이 시기에 다 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을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생일은 5 월이었다. 우리의 결혼 기념일도 5월이었다. 아니면 그녀 자신이 오데코롱을 사 서, 예쁜 포장용 리본을 달아 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나는 한숨을 지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구미코에게 직접 물어 보아야 할까? 그 오데코롱을 누구에게 받았느냐고? 그 러면 이런 식으로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아, 그거요, 같이 일하는 동료 여직원의 개인적인 일을 좀 해주었어요. 사정을 이야기하면 길어지는데, 그녀가 굉장히 곤 란해해서, 호의로 해주었죠. 그랬더니 그 답례로 그녀가 선물해 준거예요. 굉장 히 향기가 좋죠? 상당히 비싸요, 이거. 그렇지, 말이 된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나 버린다. 그럼 어째서 나는 일부러 그런 질문을 해야만 하는가. 어째서 나는 그런 일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가. 그렇지만 무엇인가가 내 머리에 걸렸다. 그녀는 그 오데코롱에 대해서 나에게 뭔가 한마디해도 좋았을 것이다.집에 돌아와, 자기 방에 가서, 혼자 리본을 풀고, 포장지를 벗기고, 상자를 열어, 그것들을 전부 휴지통에 버리고, 병을 욕실 화장 품 상자에 벗길 여유가 있었다면, (오늘 말이에요, 동료 여직원들에게 이런 선물 을 받았어요)하고 나에게 말해도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잠자코 있었 다. 일부러 말할 정도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만약 그 렇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 그것은 역시 '비밀'이라는 이름의 얇은 못을 뒤집어쓰 고 말았다. 나에게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오랫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하려고 했지만, 무엇을 생각해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원피스의 지퍼를 올 릴 때 구미코의 반들반들한 하얀 등과 귀 뒤의 향기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담배 를 피우고 싶었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고 연기를 폐 안으로 한껏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좀 안정되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담배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레몬 사탕을 가지고 와서 빨았다. 9시 50분에 전화 벨이 울렸다. 아마도 마미야 중위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상당히 찾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여기에 몇 번 온 적이 있는 사람조차도 헤맬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미야 중위가 아니었다. 수화 기에서 들려 온 것은, 요전에 까닭 모를 전화를 걸어 온 정체 불명의 여자의 목 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오래만 이네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어땠어요? 요전에는 좋았어 요? 조금은 쾌감을 느끼셨어요? 그런데 왜 도중에 전화를 끊어 버렸어요? 드디 어 시작되려는 참이었는데). 나는 순간 그녀가 말하는 것이 가노 구레타가 등장했던 지난번 몽정 때의 꿈 이라고 착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물론 다른 이야기였다. 그녀는 요전번 스파게 티 전화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저기, 미안하지만 지금은 좀 바쁜데요)하고 나는 말했다. (10분 후에 손님이 오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실직 상태인데도 매일 상당히 바쁘군요)하고 그녀는 빈정대는 목소리로 말했 다. 지난번과 똑같았다. 목소리의 톤이 싹 바뀌었다. (스파게티를 삶는다거나, 손 님을 기다린다거나, 그렇지만 괜찮아요, 10분이면 충분해요. 둘이서 10분동안만 이야기해요. 손님이 오면 그때 끊어도 되잖아요. ) 나는 그대로 잠자코 전화를 끊어 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 었다. 나는 아내의 오데코롱에 관한 일 때문에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웠다. 누구 라도 좋으니까,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겠소.) 나는 전화기 옆에 있던 연필을 손에 들고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나는 당신을 정말 알고 있는 건 가요?) (물론이에요. 나는 당신을 알고 있고, 당신은 나를 알고 있어요. 거짓말이 아니 에요.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구요. 당신 기억에는 분명 뭔가 사각 지대 같은 곳이 있어요.) (나는 잘 모르겠군. 그러니까…….) (그래요, 좋아요)하고 여자는 내 말을 딱 자르듯이 말했다.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세요. 당신은 나를 알고 있고, 나는 당신을 알 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이봐요, 난 당신에게 매우 부드럽게 해줄 거예요. 그렇 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요. 멋지지 않아요? 당신은 아무것도 하 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좋고, 내가 전부 해드릴 거예요. 전 부요. 어때요? 굉장하지 않아요? 어려운 것을 생각하는 건 그만두고, 텅 비우면 돼요. 따뜻한 봄날 오후의 부드러운 진흙 속에서 데구루루 뒹구는 것처럼.) 나는 잠자코 있었다. (잠을 자듯이, 꿈을 꾸듯이, 따뜻한 진흙 속에서 뒹굴듯이……. 부인 일도 잊어 버리세요. 실직에 대한 것도, 장래에 관한 것도 잊어버리세요. 전부 잊어버리세 요. 우리는 모두 따뜻한 진흙 속에서 나와, 언젠가 다시 따뜻한 진흙 속으로 되 돌아가요. 요컨대 오카다 씨, 당신은 요 근래에 언제 부인과 섹스 했는지 기억하 고 있어요? 그건 어쩌면 아주 오래 전의 일이 아닐까요? 그렇죠, 2주일 정도 전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이제 곧 손님이 오시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사실은 좀더 전이군요? 목소리의 느낌으로 알 수 있어요. 그렇죠? 3 주일 정도 되었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것은 마치, 창 블라인드에 쌓인 먼지를 작은 빗자루로 싹 털어내는 듯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당신 과 부인 사이의 문제니까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드 리겠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아요. 오카 다 씨, 모퉁이를 하나 돌면요, 그런 장소가 분명 있어요. 거기에는 당신이 본 적 도 없는 세계가 펼쳐져 있어요. 당신에게는 사각지대가 있다고 말했죠? 당신은 그것을 아직 모르고 있어요.) 나는 수화기를 쥔 채로 가만히 잠자코 있었다. (당신의 주위를 돌아보세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가르쳐 주세 요. 거기에 무엇이 있나요? 거기에 무엇이 보이나요?) 그대 현관 벨이 울렸다. 나는 한숨을 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 다. 마미야 중위는 머리가 보기 좋게 벗겨진 키가 큰 노인으로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육체 노동도 적당히 하는 사람인 듯 피부는 약간 검고 혈색이 아주 좋 았다. 군살도 없었다. 양쪽 눈 옆에는 깊은 주름이 정확하게 세 개씩 져 있어서, 지금도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나이는 잘 판단 할 수 없었지만, 일흔이 넘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젊었을 때는 아마도 상당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자세가 좋은 것이나 적당한 몸놀림으로 보아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말씨나 태도는 아주 주의 깊고 신중했는데, 거기에는 꾸밈없는 확실 함 같은 것이 있었다. 마미야 중위는 자신의 힘으로 사건을 판단하고 스스로 책 임을 맡는 것에 익숙한 인물처럼 보였다. 그는 특징 없는 연한 회색 양복에 하 얀 셔츠를 입고, 회색과 검은 색 줄무늬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 튼튼해 보이 는 양복은 7월의 무더운 아침에 입기에는 옷감이 약간 두꺼운 것 같았지만, 그 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왼손이 의수였다. 그는 그 의수 위에, 양 복 색과 같은 연한 회색의 얇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털이 많은 오른쪽 손등에 비하면, 그 회색 장갑에 싸여있는 손은 필요 이상으로 차갑고 무 기력하게 보였다. 나는 그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하고 차를 내왔다. 그는 명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미안해했다. (히로시마의 시골에 있는 현립 고교에서 사회 선생을 하다가 정년 퇴직한 뒤, 그후로는 아무것도 하고 있 지 않소. 밭을 조금 가지고 있어서 그저 취미 정도로 간단한 농작을 할뿐이오. 그런 이유로 명함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소. 죄송하오.) 나도 역시 명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실례지만, 오카다 씨는 몇 살이오?) (서른입니다)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를 마셨다. 내가 서른이라는 것이 그에게 어 떠한 느낌을 전해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주 한적하고 조용한 집에 살고 계시는구려)하고 그는 화제를 바꾸듯이 말했다. 나는 그 집을 싼 집세로 외삼촌에게 빌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 수입으로는 이 반만한 크기의 집에서도 살 수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끄덕이면서 잠시 집 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나도 똑같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신의 주위를 둘러보세요'하던 여자의 목소 리가 떠올랐다. 새삼스럽게 둘러보니, 왠지 서먹서먹한 공기가 감돌고 있는 것처 럼 느껴졌다. (도쿄에는 오늘로 2주일 정도 머문 셈이오) 하고 마미야 중위가 말했다. (오카 다 씨가 유품을 받게 되는 마지막 사람이어서, 이것으로 나도 안심하고 히로시 마로 돌아갈 수 있구려.) (혼다 씨의 집을 방문하여 분향이라도 올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그 뜻은 정말 고맙지만, 혼다 씨의 고향은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여서, 묘소도 그쪽에 있소. 이번에 갖고이 아사히카와에서 상경하여 메구로의 집에 있던 짐을 전부 정리하고, 이미 그쪽으로 가셨소.) (그렇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혼다 씨는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도쿄에서 계셨던 것이군요.) (네, 아사히카와에 살고 있는 장남이, 노인 혼자 도쿄에 살게 하는 것은 걱정 도 되고 다른 사람 보기에도 안 좋으니까 이쪽으로 와서 함께 살자고 말했던 모 양인데, 본인이 한사코 마다해서요.) (자제 분이 계십니까?) 하고 나는 좀 놀라서 물었다. 왠지 혼다 씨는 아주 고 독해 보였었다. (그럼 부인은 벌써 돌아가셨던 겁니까?) (거기에는 좀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혼다 씨의 부인은 실은, 전후 얼마 안되어 다른 남자와 동반 자살했소. 1950년인가 1951년의 일이오. 그때의 상세한 경위는 나도 모르오. 혼다씨도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았고, 나도 일일이 물어 볼 수 없었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다 씨는 그후 혼자서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키웠고, 자제 분들이 각자 독 립한 후 혼자 도쿄로 나와, 당신도 아는 대로 점치는 일을 시작했소.) (아사히카와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형님과 함께 인쇄소를 경영했소.) 나는 작업복을 입은 혼다 씨가 인쇄 기계 앞에 서서 인쇄물을 점검하는 모습 을 상상해 보았다.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서 혼다 씨의 모습은 더러워진 옷을 입 고, 허리에 잠옷 끈과 같은 것을 두르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각로 앞에 앉아서 점괘를 만지는 꾀죄죄한 노인일 뿐이었다. 마미야 중위는 손에 들고 있던 보자기에 싼 것을 한 손으로 재주 좋게 풀고 는, 작은 선물용 과자 상자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은 소포 포장용 누런 종이에 싸여 끈으로 여러 번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고 나 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오카다 씨 앞으로 내게 맡겨진 혼다 시의 유품이오) 하고 마미야 중위는 말했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손에 들어보았다. 거의 무게가 나가지 않았다. 그 안에 무 엇이 들어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열어봐도 괜찮습니까?) 마미야 중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미안하지만, 부디 혼자 계실 때에 열어 달라는 고인의 지시가 있었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꾸러미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사실을 말씀드리면)하고 마미야 중위가 말을 꺼냈다. (내가 혼다 씨의 편지를 받은 것은, 그가 세상을 뜨기 하루 전의 일이었소. 그 편지에는 이제 곧 자신이 죽을 거라고 씌어 있었소. 죽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다. 이것이 나의 천명이다. 천명에 따를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내 집의 벽 장에는 이러이러한 물건이 들어 있다. 그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 줘서 남기 려고 늘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 므로 당신의 손을 빌려서 별지에 씌어져 있는 대로 유품을 나눠줬으면 한다. 뻔 뻔스러운 부탁인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하고, 어떻 게 수고 좀 해줄 수 없겠나? 그렇게 씌어 있었소. 나는 놀라서-왜냐하면 혼다 씨와 벌써 몇 년이나, 6-7년 됩니다만, 소식이 두절되었던 참에 갑자기 이런 편 지를 받았기 때문이오-바로 혼다 씨 앞으로 편지를 썼소. 그리고 엇갈리듯이 혼 다 씨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담은 편지가 그의 아들로부터 왔다오.) 그는 찻잔 을 손에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알고 있었던 거요. 분명히 나 같은 사람은 도달하 지는 못할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죠. 당신이 엽서에 썼듯이, 그에게는 분명히 사 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있었소. 나는 1938년 봄에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부터 그것을 느꼈다오.) (마미야 씨는 노몬한 전쟁에서 혼다씨와 같은 부대에 계셨나요?) (아뇨) 마미야 중위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는 않소. 나와 그는 다른 부대, 다른 사단에 소속되어 있었소. 우리가 행동을 함께 한 것은, 노몬한 전쟁에 앞서 일어난 어느 소규모 작전 때였소. 혼다 하사는 그 후 노몬한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송환되었소. 나는 노몬한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소. 내가......)하고 마미야 중위는 장갑 낀 왼손을 위로 올렸다. (이 왼손을 잃어버린 것은, 1945년 8월 소련군 침공 때였소. 전차전이 한창일 때 어 깨에 중기관총 탄환을 맞고 일시적으로 실신해 있다가 소련군 포로가 되오 치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져, 결국 1949년까지 거기에 억류되어 있었소. 1937년 만주로 보내진 이래, 모두 합하여 12년 동안 대륙에 있 었던 거요. 그 동안 단 한번도 본국 땅을 밟은 적이 없었소. 친척들은 내가 소련 군과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소. 고향의 묘지에는 내 묘가 있었 소. 일본을 나오기 전에, 막연하기는 했지만 정혼을 약속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 도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다오. 어쩔 수 없었소. 12년은 긴 세월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카다 씨처럼 젊은 사람에게는 이런 옛날 이야기는 재미없겠죠?)하고 그는 말했다. (꼭하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도, 당신처럼 지극히 평범한 청년 이었다는 거요. 나는 군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소. 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오. 그러나 대학을 나와 바로 소집당해, 반강제적으로 간부 후보생이 되어, 그대로 본국으로는 돌아올 수 없이 끝나 버렸소. 내 인생은 덧없 는 꿈과 같은 것이오.) 마미야 중위는 그대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선생님과 혼다 씨가 알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 겠습니까?)하고 나는 말해 보았다. 나는 정말로 알고 싶었다. 혼다 씨라는 사람 이 예전에는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마미야 주위는 양손을 단정하게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잠시 뭔가를 생각했 다. 어떻게 할까 하고 망설였던 것은 아니다. 단지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겠소.) (괜찮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소)하고 그가 말했다. (혼다 씨 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을 거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러다 혼다 씨도 세상을 떴소. 남은 것은 나 혼자요. 이야기해도 이제는 누구에게도 폐가 되지는 않겠죠.) 그리고 마미야 중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12. 마미야 중위의 긴 이야기 1 (내가 만주에 건너간 것은 1937년 초였소)하고 마미야 중위는 말을 시작했다. (나는 소위로서 신징의 관동군 참모 본부에 부임했다오. 나는 대학에서 지리를 전공했으므로, 지도를 전문으로 하는 병요지지반이라는 부서에 소속되었소. 나로 서는 정말로 고마운 일이었소.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임명받은 일은 군 근무로서는 상당히 편한 편에 속했으니까. 게다가 당시 만주국 내의 사정은 비교적 평온하다고 할까? 그럭저럭 안정된 편이었소. 중일 전쟁의 발발에 의해, 전쟁 무대는 이미 만주에서 중국 국내로 옮 겨졌고, 전투에 관련된 부대도 관도군에서 지방 파견군으로 바뀌었소. 반일 게릴 라 소탕전이 아직 계속되었고 있었지만 그것도 비교적 오지에서의 일이었고, 전 체적으로는 일단 고비는 넘긴 상황이었다오. 관동군은 그 강력한 군대를 만주국 에 두고 북방에 위엄을 세우면서, 독립한 지 얼마 안되는 만주국의 안정과 치안 유지에 힘쓰고 있었소. 그러나 평온하다고 해도 전시였기 때문에 훈련은 끊임없이 하고 있었소. 그러 나 나는 염습에도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오. 그것도 고마운 일이었소. 영하 40-50 도나 되는 겨울의 혹한 속에서 행해지는 훈련은,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정도로 혹독했으니까. 연습이 있을 때마다, 몇 백 명의 병사가 동상 을 입어 입원하나 치료하러 온천으로 보내지거나 했소. 신징 거리는 물론 대도 시라고 부를 만큼 대단한 곳은 아닙니다. 신징 거리는 물론 대도시라고 부를 만 큼 대단한 곳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국 정서가 있는 재미있는 장소였으며, 놀 려고 생각하면 충분히 놀 수도 있었소. 우리 신임 독신 장교들은 병영이 아니라 하숙집과 같은 곳에서 함께 모여 생활했다오. 그것은 마치 학창 생활의 연장처 럼 느껴져 오히려 편안했소, 이대로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어, 아무 일도 없이 병역이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나는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소. 물론 그것은 외형상의 평화에 지나지 않았다오. 그날 집합소 바로 밖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소. 중국 전쟁이 빼도 박도 못하는 수렁으로 변하 리라는 것은 일본인이라면 대개는 알고 있었을 거요. 정상적인 머리를 가진 일 본이라면 말이오. 가령 몇몇 국지적인 전투에서 이겼다 해도, 그런 커다란 나라 를 일본이 장기간에 걸쳐 점령 통치할 수는 없는 거요. 그것은 냉정하게 생각하 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오, 아니나다를까 전쟁이라고 지연됨에 따라서 전 사자나 부상자의 수는 점점 늘어갔소. 그게 악화되어 갔소. 본국에서도 전쟁의 그림자가 하루하루 더 어두워져 간다는 것을 알았소. 1937-1938년이라는 때는 그런 어두운 시대였소. 그러나 신징에서 무사 태평한 장교 생활을 보내고 있자 니, 솔직히 말해서, 전쟁이라는 것을 어디서하고 있는지 느끼지도 못했던 것이 오. 우리들은 매일같이 밤마다 술을 마시고, 모두 시시한 이야기를 하며, 백인계 러시아 아가씨가 있는 카페에 가서 놀기도 했소. 그러던 어느 날, 1938년 4월 말경이었는데, 나는 참모 본부의 상관에게 불려가 야마모토라는 평상복 차림의 남자를 만났소. 머리가 짧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였 다오. 키는 별로 크지 않았소. 연령은 30대중반 정도였던 것 같소. 목줄기에는 칼로 베인 듯한 상처가 있었소. 상관은 이렇게 말했다오. 야마모토 씨는 민간인 으로서 군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만주 국내에 사는 몽고인의 생활과 풍속을 조사 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번엔 호롱바일 초원의 외몽고와의 국경 지대를 조사하게 되었다. 군은 그 조사에 몇 명의 경호원을 동행시킨다. 귀관도 그 일원으로서 역 할을 담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소. 야마모토라는 남자는, 평상복을 입고 있을 뿐 아무리 봐도 직업 군인이었기 때문이오. 눈매와 말투와 자세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소. 고급 장교, 그것도 아마 정보 관계일 거라 고 나는 추측했다. 아마 그는 임무 성격상 군인이라는 것을 밝힐 수 없었을 거 요. 거기에는 뭔가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소. 야마모토와 동행하는 병사의 수는 나를 포함하여 전부 세 명이었소. 경호역치 고는 너무 적었지만, 병사의 수가 많아지면 그만큼 국경 부근에 주둔하는 외몽 고 병사의 주의를 끌게 되나까. 소수 정예라고 말하고 싶소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소. 전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마노라고 하는 중사뿐이었소. 이른바 온갖 풍상을 다 겪은 하사관이었다오. 중국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훈공도 세웠소. 남자 답고 대담하고, 비상시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소. 그러나 또 한 사람인 혼 다라는 하사는 어떠한 이유에서 거기에 가담되었는지 나는 알 구사 없었소. 혼 다는 나와 마찬가지로 본국에서 온지 얼마 안되었으며, 물론 실전 경험도 없었 소. 언뜻 보아 말수가 적은 얌전한 사람이었으며, 전투를 하게 되었을 때 특별히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소. 그는 제7사단에 소속되어 있었소. 그러니 까 일부러, 이번 임무를 위하여 참모 본부가 제7사단에서 그를 발탁하여 불러들 인 것이오. 그만큼 가치가 있는 병사라는 뜻이오. 그 이유가 판명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이었소. 내가 그 경비중의 지휘 장교로 뽑힌 것은, 내가 주로 만주부 국경, 하르하 강 유역 방면의 지리적인 특색을 파악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 바 염의 지도에 충실을 기하는 것이 나의 주된 일이었소. 몇 번인가 비행기로 그 주위의 상공을 난 적이 있었소.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함께 가면 뭔가 편리하리라 는 것이었소. 그리고 또 한 가지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경호와 동시에 해당 지 역의 지리적인 정보를 보다 상세하게 수집하여 지도의 정밀화에 기여하는 것이 었소. 이른바 일거양득 말이오. 우리들이 그때 가지고 있던 호롱바일 초원의 외 몽고와의 국경지대 지도는, 솔직히 말해서 매우 엉성한 것이었소. 청나라 시대의 지도에 약간 손을 본 정도의 것에 불과했소. 관동군은 만주건국 이래 몇 번이나 조사 측량을 하고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고 했소 만, 유감스럽게도 국토가 너무 넓었소. 더구나 만주 서부는 사막 같은 황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곳이기 때문에, 국경선은 끝이 없는 것과 같았다오. 게다가 원래 거기에 살던 이들은 몽 고인 유목민이었소. 몇 천년 동안 그들에겐 국경성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으 므로, 그러한 개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거요. 그리고 정치적인 사정도 정확한 지도의 제작을 늦추고 있었소. 이유인즉, 이쪽 이 마음대오 국경선을 긋고 정식 지도를 만들어 버리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대 대적인 분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오. 만주국과 국경을 접하는 소련과 외몽 고는 국경선 침범에 대해서 상당히 신경질적이었고, 실제로 그때까지 몇 번인가 국경선을 둘러싸고 격렬한 전투가 있었소. 그 시점에서 우리 육군은 중국에서의 전쟁에 주력하고 있었으므로, 대대적인 대소련으로 나눌 병력의 여유가 전혀 없 었기 때문이오. 사단의 숫자도 부족하려니와 전차, 대포, 항공기의 수도 부족했 소. 그리고 건국된 지 얼마 안되는 만주국 체제를 일단 안정시키는 것이 선결 문제였소. 북부, 북서부의 국경선을 명확하게 정하는 것은 그후에 해도 괜찮다는 것이 군의 생각이었소. 일단은 불명확한 채로 놔두고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오. 강력하게 나가는 관동군도 그 점에 있어서는 그 견해를 존중하여 조용히 관 찰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소. 그런 이유로 모든 것은 모호한 채로 내버려져 있 었소. 그러나 의도야 어찌되었든, 만약 어떤 계기로 전쟁이 일어난다면(실제로 노몬 한에서 그 다음해에 일어나 버렸습니다만) 우리들은 지도 없이는 싸울 수 없었 소. 그것도 보통 민간 지도가 아닌 전투용 전문 지도가 필요한 거요. 어디에 어 떠한 진지를 구축하면 좋은지, 대포는 어디에 설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 보병 부대가 도보로 그곳에 도달하는 데에 며칠이 걸리는지, 물은 어디에서 구 하면 좋은지, 말의 식량은 어느 정도 필요한지 등 세세한 정보를 실은 지도가 전쟁에는 필요하오. 그와 같은 지도 없이 전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오. 따라 서 우리들의 일은 정보부의 일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 관동군 정보부나 하이 랄에 있는 특수 기관과 빈번하게 정보 교환을 하고 있었소. 서로의 얼굴도 알고 있었소. 그러나 혼다라는 사람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오. 닷새 동안의 준비 후에 우리들은 기차를 타고 신징에서 하이랄로 향했소. 그 리고 거기에서 트럭을 타고 칸주르먀오라는 라마교의 절이 있는 장소를 걸쳐, 하르하 강 근처에 있는 만주 국군의 국경 감시소에 도착했소. 정확한 숫자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거리로 따지면 300-350킬로미터 정도는 되었던 같소. 눈에 보 이는 것이라고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휑한 황야였소. 임무 성격상 나는 트 럭 위에서 지도와 지형을 맞춰 보고 있었다오. 그러나 지도와 지형을 맞춰 보려 해도 거기에는 표적이라 부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소. 단지 풀이 무성한 낮은 구릉이 이어지고,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으며,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을 뿐이었소. 지도상으로 우리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도 없었다 오. 전진한 시간을 계산하여 대개 이 부근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소. 그와 같은 황량한 풍경 속을 묵묵히 전진해 가자니, 가끔 나라는 인간이 주체 를 잃고 점점 멍해져 가는 듯한 착각에 휩싸일 때가 있었소. 주위의 공간이 너 무나도 넓으므로, 나라는 존재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소. 이해하실 수 있겠소? 풍경과 함께 의식은 점점 부풀어 확산되는데, 그것을 자신의 육체에 붙잡아 놓 을 수 없게 되는 것 말이오. 그것이 몽고 평원의 한가운데에서 내가 느꼈던 것 이오. 이다지도 광활할 수 있나 하고 나는 생각했소. 그것은 황야기라기보다 바 다에 가까웠소. 태양이 동쪽 지평선에서부터 떠올라, 천천히 하늘 중앙을 가로질 러 서쪽 지평선으로 저물어 갔소. 우리들 주변에서 눈에 보이게 변화하는 것이 라고는 단지 그것뿐이었다오. 그 움직임 속에는 뭔가 거대한, 우주적인 자애라고 할 만한 것이 느껴졌소. 만주군 국경 감시소에서, 우리들은 트럭에서 내려 말로 갈아탔소. 그곳에는 우 리들이 탈 네 마리의 말 외에, 식량과 물과 장비를 실은 두 마리의 말이 준비되 어 있었다오. 우리들의 장비는 비교적 가볍고 편리한 것이었소. 나와 야마모토는 권총만을 가지고 있었다오. 하마노와 혼다는 권총 외에 38식 보병총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자 두 개의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소. 우리들을 지휘하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야마모토였소. 그가 모든 것을 결정하 고 우리들에게 지시를 내렸소. 그는 공식상 민간이었으므로, 군의 규칙으로 따지 면 내가 지휘관으로서 지휘해야 했지만, 야마모토의 지휘하에 들어가는 것에 대 해서 아무도 이의를 갖지 않았소. 왜냐하면 그는 누가 봐도 지휘를 담당하는 데 적합했으며, 나는 계급은 소위였지만 실제로는 실전 경험이 없는 사무쟁이에 지 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병사란 그러한 힘을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으며, 힘있는 자를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오. 게다가 출발 전에 나는 상관으로부터 야마모토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요컨대 초법규적으로 야마모토의 명령에 따르라는 뜻이었소. 우리들은 하르하 강으로 나와 하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소. 눈이 녹아서 강의 수량은 불어나 있었소. 강에는 커다란 고기의 모습도 보였다오. 가끔, 멀리 서 늑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었소. 순수한 늑대가 아니라 들개와의 혼혈종 일지도 모르오. 그러나 어쨌든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소. 밤이 되면 우리들은 늑대로부터 말들을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서야만 했소. 새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 었다오. 그 대다수는 시베리아로 되돌아가는 철새 같았소. 나와 야마모토는 지형 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소. 우리들이 가고 있는 대강의 코스를 지도로 확인하면서, 눈에 띄는 세세한 정보를 하나하나 노트에 적어 넣었다오. 그러나 나와의 그러한 전문적인 정보 교환을 제외하면, 야마모토는 거의 입을 열지 않 았소. 그는 묵묵히 말을 앞으로 전진시켰고, 혼자 떨어져서 식사를 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을 잤소.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그가 그 근처에 온 것은 처음 이 아닌 것 같았다오. 그는 주변의 지형이나 방향에 대해서 놀랄 만큼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소. 이틀 동안 아무 일도 없이 남쪽을 향해서 전진해 가다가, 갑자기 야마모토는 나를 불러 내일 날이 샐 무렵 하르하 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고 말했소. 나는 몹 시 놀랐소. 왜냐하면 하르하 강의 건너편은 외몽고의 영토였기 때문이오. 우리들 이 지금 가고 있는 하르하 강 오른쪽 강변도 분명히 위험한 국경 분쟁 지역이었 소. 외몽고는 그곳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했고, 만주국은 만주국대로 자국의 영 토라고 주장하여, 빈번하게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소. 그러나 우리들이 만약 그곳에서 외몽고군에게 붙잡힌다고 해도, 오른쪽 강변에 있는 한 이것은 이른바 양국의 견해 차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변명은 되오. 또한 지금같이 눈이 녹을 시기에 이쪽으로 넘어오는 외몽고군 부대는 그다지 없기 때문에, 그들과 우연히 만나게 될 위험은 현실적으로 적소. 그러나 하르하 강 왼쪽 강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오. 그곳에는 현실적으로 외몽고군의 순시대가 있소. 우리들이 그곳에서 잡히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오. 명확하게 국경 침범이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하면 정치 문제가 되오. 그곳에서 총을 맞아 죽더라도 불만을 터뜨 릴 수 없소. 게다가 나는 국경을 넘어도 된다는 상사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오. 야마모토의 지시에 따르라는 지시는 받았소. 그러나 그 지시에 국경 침범과 같 은 중대한 행위가 포함되는지 어떤지 나는 즉각 판단할 수 없었소. 두 번째로, 그 시기의 하르하 강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상당히 물이 불어나 있 었고, 강을 건너기에는 물살도 너무 셌소. 게다가 눈이 녹은 물이기 때문에 지독 히 차가울 테고. 유목민들조차 이 시기에는 그다지 강을 건너고 싶어하지 않았 소. 그들이 강을 건너는 것은 대개 결빙기나 혹은 좀더 흐름이 안정되고 수온이 올라가는 여름이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야마모토는 한동안 지그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소. 그리고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였소. '국경 침범에 대해서 당신이 걱정하는 것은 잘 안 다'고 그는 나에게 타이르듯이 말했소. '병사를 맡고 있는 지휘 장교로서 책임 소재 운운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부하의 목숨을 의미도 없이 위험에 드러 내는 것은 당신의 본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쪼록 나에게 맡겨 줬 으면 좋겠다. 본 건에 대해서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 내 입장에서 당신에 게 그다지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는 없지만, 군의 가장 위에까지 이 이야기는 전달되어 있다. 강을 건너는 방법에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강을 건널 수 있 는 숨겨진 지점이 분명히 있다. 외몽고는 그러한 지점을 몇 군데 만들어서 확보 하고 있다. 그것은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전에도 몇 번 그곳을 넘었다. 작년에도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외몽고로 들어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확실히 그 주변 지리에 정통한 외몽고는, 눈이 녹는 이 시기에도 그다지 많지 는 않지만 몇 번인가 하르하 강 오른쪽 강변으로 전투 부대를 보내고 있었소. 하르하 강에는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부대 단위로 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이 분 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그들이 강을 건널 수 있다면, 야마모토라는 남자도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고, 우리들이 강을 건너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는 말이 되오. 그곳은 외몽고군이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강을 건너는 비밀 지점이었소. 교묘 하게 위장되어 언뜻 보아서는 강을 건너는 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없게 되어 있 었다오. 얕은 여울과 여울 사이에 판자 다리가 물 속에 놓여, 급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밧줄로 묶여 있었소. 좀더 수량이 줄어들면, 병사 수송차나 장갑차, 전차 가 그곳을 쉽게 건너갈 수 있으리라는 것은 명확했소. 수중 다리기 때문에, 항공 기의 정찰에서도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다오. 우리들은 그 밧줄을 잡고 물살을 가로질러 갔소. 먼저 야마모토가 단독으로 강을 건너 외몽고군의 순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우리들이 건너갔소. 다리의 감각이 없어져 버릴 정도로 차 가운 물이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우리들은 말과 함께 하르하 강의 왼쪽 강변 에 설 수 있었다오. 왼쪽 강변은 오른쪽 강변보다 지대가 훨씬 높았고, 오른쪽 강변에 펼쳐지는 사막이 아득히 먼 저쪽까지 내다보였소. 그것도 노몬한 전투에 서 소련군이 시종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소. 땅의 고도 차는 대 포의 착탄 정밀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오. 그건 그렇다 치고, 강의 이쪽과 저쪽 에서는 상당히 전망이 달라진다고 생각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나오. 얼음 같은 강물에 젖은 몸은 오랫동안 신경이 마비되었소. 잠깐 동안은 목소리를 낼 수조 차 없을 정도였다오. 그러나 우리들이 진짜 적지에 있다고 생각하자, 솔직히 말 해 긴장돼서 추위도 잊어버릴 정도였소. 아무튼 우리들은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소. 하르하 강은 우리들의 왼쪽 눈 아래에서 뱀처럼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다오. 좀 지난 후에 야마모토는 우리 들에게 모두 계급장을 떼는 것이 좋겠다고 했소. 우리들은 그의 지시대로 했다 오. 적에게 붙잡혔을 때 계급이 드러나면 안 좋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소. 같은 이유로 나는 장교용 장화도 벗고 각반으로 바꾸었소. 하르하 강을 건넌 날 저녁, 우리들이 야영 준비를 하고 있는 곳에 한 명의 남 자가 왔소. 몽고인이었소. 몽고인들은 보통 것보다 높은 안장을 놓고 말을 타기 때문에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가 있었다오. 하마노 중사가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소총으로 쏠 태세를 취하자, 야마모토는 하마노에게 '쏘지마!' 하고 말했소. 하마 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소총을 내렸소. 우리 네명은 꿈쩍도 않고 그 곳에 선 채로 그 남자가 말을 타고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소. 남자는 등에 소련 제 소총을 메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모젤 권총을 차고 있었소. 얼굴은 수염투성 이고, 귀막이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오. 남자는 유목민처럼 더러운 옷을 입 고 있었지만, 직업 군인이라는 것을 그의 태도로 금방 알 수 있었소. 남자는 말에서 내려 야마모토에게 말을 걸었소. 그것은 몽고어였던 것 같소. 나는 러시아어도 중국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의 말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오. 그러므로 틀림없이 몽고어였을 거요. 야마모토는 남자에게 역 시 몽고어로 이야기했소. 그래서 나는 그가 역시 정보부의 장교라는 확신을 가 졌다오. '마미야 소위, 나는 이 남자와 함께 간다'고 야마모토는 말했소. '어느 정도 시 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대기하기 바란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보 초는 항상 서도록. 서른 여섯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 상황을 사령부 에 보고하기 바란다. 누구 한 사람 강을 건너게 하여 만주군의 감시소로 보내 라.' 알았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소. 야마모토는 말을 타고, 몽고인과 둘이 서쪽 을 향해 달려갔소. 우리들은 셋이 야영 준비를 하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소. 밥을 지을 수도, 장작불을 피울 수도 없었소. 낮은 모래 구릉 이외에 가림막 하나 없는 황야였기 때문에, 연기를 내면 순식간에 적에게 붙잡혀 버리니까. 우리들은 숨듯이 모래 언덕 그늘에 낮게 텐트를 치고, 건빵을 씹으며 차가운 고기 통조림을 먹었소. 해 가 지평선으로 넘어가자 순식간에 어둠이 주위를 덮었고, 하늘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이 반짝였소. 하르하 강의 졸졸 흐르는 물 소리에 섞여서, 어딘가에서 늑대 우는 소리가 들렸다오 우리들은 모래 위에 누워서 낮의 피로를 풀고 있었소. '소위님'하고 하마노 중사가 나에게 말했소.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습니다.' '그래' 하고 나는 대답했소. 그 무렵에 나와 하마노 중사, 그리고 혼다 하사는 서로의 속마음을 알 수 있 었소. 나는 군 경력이 거의 없는 신임 장교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마노처럼 전 투 경력이 많은 하사관을 거북스러워하거나 그에게 놀림을 받는 게 보통이지만, 그와 나 사이에 그런 일은 없었다오. 나는 대학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장교였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일종의 존경심 같은 것을 갖고 있었고, 나도 계급에 상관하 지 않고 그의 실전 경험과 현실적인 판단력을 인정하여 양보하려고 신경 썼소. 게다가 그는 야마구치 현 출신이고, 나는 야마구치와 가까운 히로시마 현 출신 이었으므로, 자연히 이야기도 잘 통하여 친밀감도 생겼다오. 그는 나에게 중국에 서의 전쟁 이야기를 해주었소. 그는 국민학교를 나왔을 뿐인 타고난 병사였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중국 대륙에서의 지겨운 전쟁에는 그 나름대로 의문을 가 지고 있었으며, 그 기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소. 저는 병사기 때문에 전쟁을 하 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소. 나라를 위해서 죽는 것도 상관없습니 다. 그것이 제 직업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전쟁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된 전쟁이 아닙니다, 소위님. 이 전쟁은 전선이 있고, 적에게 정면으로 결전을 청하는 것과 같은 깨끗한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전진합니다. 적은 대부분 싸우지 않고 도망갑니다. 패주하는 중국병은 군복을 벗 고 민중 속으로 잠입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적인지 우리들은 그것조차 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적과 패잔병을 잡는다는 미명 아래 죄 없는 많은 민간일들을 죽이고 식량을 약탈합니다. 전선은 점점 앞으로 나아 가는데 보급은 따라오지 못하는 형편이니, 우리들은 약탈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포로를 수용할 장소도 그들을 위한 식량도 없기 때문에, 죽일 수밖에 없 는 겁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난징 부근에서는 너무 지독한 짓을 했습니 다. 우리 부대에서도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몇 십 명이나 되는 사람을 우물에 집어넣고, 위에서 수류탄을 몇 발 던져 넣었습니다. 그 외에 입으로는 말할 수도 없는 그러한 짓을 했습니다. 소위님, 이 전쟁에는 대의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건 단지 서로 죽이는 살육입니다. 그 가운데 짓밟히는 것은 결국 가난한 농민들 입니다. 그들에게는 사상도 무엇도 없습니다. 국민당도 장쉐랑도 일본군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먹을 것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난한 백성의 마음을 잘 이해합니다. 서민은 그저 아침부터 밤까지 뼈빠지게 일해서 먹고 살아가는 것이 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 의님. 그러한 사람들을 의미도 없이 닥치는 대로 죽이는 것이 일본을 위하는 것 은 절대 아닙니다. 그것에 비하면, 혼다 하사는 자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 하려고 하지 않 았소. 대체로 말이 없었고, 언제나 먼저 입을 열지 않고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오. 그러나 말이 없다고 해서 음흉했다는 뜻은 아니오. 나서서 먼저 말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오. 따라서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 고 느낀 적은 있지만, 그것도 불쾌한 것은 아니었소. 그의 조용함 속에는, 오히 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있었다오. 태연 자약하고 느긋하다고나 할까, 무슨 일이 있어도 얼굴색이 변하는 일은 거의 없었소. 그는 아사히카와 출 신으로, 아버지는 거기에서 작은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다고 했소. 나이는 나보다 두살 아래로, 중학교를 나오고 나서 형과 함께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소. 남자뿐인 3형제 중 막내였는데, 맏형은 중국에서 전사했소. 책 읽는 것을 좋아해 서, 잠시라도 틈만 있으면 그 부근에 드러누워서 불교 관계 서적을 읽었다오. 얘기했듯이, 혼다는 실전 경험이 없고 본국에서 1년 교육받았을 뿐이지만, 그 래도 병사로서는 뛰어났소. 어느 소대안에나 반드시 그런 병사가 한두 사람은 있소. 그들은 참을성이 많고, 불평 한마디 없이 의무를 하나하나 정확하게 수행 하오. 체력도 강하고 직감력도 뛰어나오. 배운 바를 잘 이해하며, 그것을 정확하 게 응용할 줄 안다오. 그는 그러한 병사 중의 한 사람이었소. 또 기병으로 훈련 을 받아 우리들 중에서는 말에 대해 가장 상세히 알고 있었으며, 우리들의 여섯 마리의 말을 잘 보살펴 주었소. 그것도 대충 보살피는 정도가 아니었다오. 우리 들은 그가 말의 기분을 샅샅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소. 하마노 중사도 혼다 하사의 능력을 곧 인정하여 안심하고 여러 가지 일을 맡기 게 되었소. 그러니까, 급한 대로 소집한 부대치고는, 우리들의 의사 소통은 상당히 원활해 다고 생각하오. 정규 분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만큼 틀에 얽매이는 답답함도 없었소. 말하자면 소매만 스쳐도 인연인데 하는 느낌의 편안함이었다오. 그렇기 때문에 하마노 중사와 나는 하사관과 장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격의 없이 이야 기를 할 수 있었소. '소위님은 야마모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하마노는 물었다. '아마 특수 기관원이겠지'하고 나는 말했소. '몽고어를 하는 것으로 봐서 대단 한 전문가야. 이 주변의 세세한 정보도 잘 알고 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일본군의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는 마적단 출신의 거병꾼이거나 만주 벌판에 떠는 낭인도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 았어요. 그런 무리라면 저도 잘 압니다. 그들은 하는 일없이 다 말하고, 권총을 쏘거나 무슨 짓인가를 하고 싶어하죠. 그러나 저 야마모토라는 자에게는 그러한 경박한 점이 없습니다. 배포가 상당히 큰 것 같습니다. 고급 장교 분위기가 풍깁 니다. 언뜻 들었습니다만, 군은 이번에 홍안군 출신의 몽고인들을 모아서 적에게 비방 선전을 하는 선전 공작 부대를 만들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 에 선전술에 능한 일본계 군관을 몇 명인가 부른 것 같습니다. 혹은 그것과 관 계가 있을지도 모르죠.' 혼다 하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총을 가지고 감시하고 있었소. 나는 언제 라도 집을 수 있도록 자동 소총을 가까운 곳에 놓아두고 있었다오. 하마노 중사 는 각반을 풀고 발을 주무르고 있었소.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만'하고 하마노는 이야기를 계속했소. '어쩌면 저 몽 고인은 일본군과 내통을 도모하고 있는 반소련파 외몽고군 장교가 아닐까요?' '저도 그 정도의 바보는 아닙니다. 우리끼리니까 이야기하는 것이죠.' 히죽히죽 웃으면서 하마노는 그렇게 말했소. 그리고 나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소. '그러나 소위님, 만약 그 점에서는 일본군에게 실권을 잡힌 만주국과 비슷비슷하오. 그러 나 그 안에서 반소련군파의 암약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소. 그때까지도 반소련군파는 만주국에 있는 일본군과 내통하여 몇 번인가 반란을 일으켰다오. 반란 분자의 중핵은 소련 군인의 횡포에 반감을 품은 몽고인 군인과, 강제적인 농업 집중화에 반항하는 지주 계급과 10만이 넘는 라마교의 승려들이었소. 반소 련군파가 의지할 수 있었던 외부 세력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뿐이었다 오. 그들은 러시아인보다는 같은 아시아인인 일본인 쪽에 더 친근감을 가질 수 있었던 모양이오. 1937년에는 수도 올란바토르에서 대규모의 반란 계획이 발각 되어 대숙청이 행해졌소. 몇 천 명의나 되는 군인과 라마교의 승려가 일본군과 내통한 반혁명 분자로서 대량 처형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반소련 감정은 사라지 지 않고 곳곳에 남아 있었소. 따라서 일본 정보 장교가 연락을 취했다고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었소. 외몽고군도 그것을 경계하여 빈번히 경비대를 순찰 시키고, 만주국과 국경선에서 10킬로미터 내지는 20킬로미터 지역을 출입 금지 지역으로 감시의 눈이 세세한 곳까지 미칠 수는 없었소. 또 만약 그들의 반란이 성공했다고 해도, 소련군이 즉시 개입하여 그 반혁명 을 압살하려고 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소. 그리고 소련이 개입하면 반란군은 일 본군에게 원조를 요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관동군으로서는 군사를 개입시킬 대의명분이 생기오. 외몽고를 차지하는 것은 소련의 시베리아 경영의 옆구리에 칼을 꽂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오. 본국의 대본영이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고 는 해도, 이런 좋은 기회를 야심에 가득 찬 관동군 참모들이 잠자코 보아 넘길 리는 없소. 그렇게 되면 이것은 국경 분쟁이 아니라 일.소의 본격적인 전쟁이 되 오, 만소 국경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면, 히틀러도 그것에 호응하여 폴란 드나 체코스로바키아를 공격해 들어갈지도 모르오. 하마노 중사가 말하고 싶었 던 것은 바로 그런 것이오. 밤이 새도 야마모토는 돌아오지 않았소. 마지막 보초를 선 것은 나였다오. 나 는 하마노 중사의 소총을 빌려서, 조금 높은 모래 언덕 위에 앉아 동쪽 하늘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소. 몽고의 새벽은 정말 멋있었소. 어느 순간에 지평선이 하나의 어렴풋한 선이 되어 어둠 속에 떠오르고, 그것이 쓱 위쪽으로 올라갔다 오. 마치 하늘 위에서 커다란 손이 내려와, 밤의 장막을 지표면에서 천천히 걷어 내는 것 같았소. 그것은 웅장한 풍경이었소. 그 웅장함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나 와 같은 인간 의 의식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종류의 웅장함이었소. 그것을 보는 동안 나는 내 생명이 그대로 점점 엷어져서 사라져 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오. 거기에는 사람의 행위와 같은 하찮은 일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소. 생 명이라고 부르 수 있는 것은 무엇하나 존재하지 않았던 태고적부터 이와 똑같은 일이 몇 억 번 혹은 몇 십억 번이나 계속돼 왔던 것이오. 나는 망을 보고 있다 는 것도 잊고, 그 새벽의 광경을 단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소. 태양이 지평선 위로 완전히 올라 버리자,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수통의 물 을 마시고 소변을 보았소. 그리고 일본을 생각했소. 나는 5월초 고향의 풍경을 떠올렸다오. 꽃 향기와 하천의 시냇물, 하늘의 구름을 생각했소. 오랜 친구와 가 족을 생각했다오. 그리고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팥소가 든 찰떡을 생각했소. 나는 그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때만큼은 먹고 싶어 죽을 지겨이었다오. 만 약 여기에서 찰떡을 먹을 수 있다면 반년분의 급료를 지불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소. 일본을 생각하자 내가 왠지 세상의 끝에 내버려진 것 같았소. 어째서 이렇게 무성히 자란 더러운 풀과 빈대밖에 없는 이러한 거의 가치가 없는 불모 의 토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소. 고향의 토지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싸우겠소. 그러나 곡물 하나 자라지 않는 그런 황폐한 토지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야 하다 니 정말로 바보스러운 일이었소. 야마모토가 돌아온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소. 그날 아침 역시 내가 마지막으 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오. 나는 그때 멍하니 강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등뒤에서 말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와 당황하여 뒤를 돌아봤소.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오. 나는 그 울음 소리가 들렸던 방향을 향해 가만히 소총을 겨누 었소. 침을 삼키자 꿀꺽하고 큰소리가 났다오. 그것은 스스로도 움찔할 정도로 큰소리였소.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오. 나는 그때까지 누군가를 향해 총을 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오. 그러나 몇 초 후에, 비틀비틀 모래 언덕을 뛰어넘듯 나타난 것은 말을 타고 있는 야마모토의 모습이었소. 나는 총의 망아쇠에 손가락을 걸친 채 주위를 돌 아보았지만, 야먀모토 외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소. 그를 데리러 왔던 몽고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적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소. 하얗고 커다란 달이 기분 나쁜 큰 돌처럼 동쪽 하늘에 떠 있을 뿐이었다오. 그는 왼팔에 상처 를 입은 듯했소. 팔을 묶은 손수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소. 나는 혼다 하사를 깨워서 야마모토가 타고 온 말을 보살피게 했소. 먼 거리를 달려왔는지 말은 숨 을 크게 들이쉬며 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다오. 하마노가 나를 대신하여 보초를 서고, 나는 의약품 상자를 꺼내서 야마모토의 팔에 난 상처를 치료했소. '탄약은 빼냈고, 출혈도 멎었다'하고 야먀모토는 말했소. 분명히 탄화은 아주 깨끗하게 관통했소. 그 부분의 살을 도려냈을 뿐이오. 나는 붕대 대용으로 감고 있던 손수건을 풀고 상처를 알코올로 소독한 후 붕대를 감았소. 그 동안 그는 얼굴 하난 찡그리지 않았다오. 윗입술 위쪽으로 약간 땀이 맺혀 있을 뿐이었소. 그는 수통의 물로 목을 축이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여 그 연기를 폐 깊은 곳까 지 맛있게 들이마셨소. 그러고 나서 자동 소총을 꺼내 겨드랑이에 끼우고 탄창 을 빼내서는 한 손으로 재주 좋게 탄환을 세 발 장전했소. '마미야 소위, 우리들 은 즉시 여기를 철수한다. 하르하 강을 건너서 만주군의 감시소로 향한다.' 우리들은 거의 입도 열지 못하고 서둘러 야영지를 철수하여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지점으로 향했소. 도대체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에게 총을 맞았는지 나는 야마모토에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소. 나는 그러한 것을 그 에게 질문할 입장이 아니었으며, 가령 질문할 자격이 나에게 있었다 해도 그는 아마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때 내 머리 속엔, 하여튼 한시라도 빨리 이 적 지를 빠져나가 하르하 강을 건너서 비교적 안전한 오른쪽 강변에 도착하자는 생 각뿐이었소. 우리들은 묵묵히 초원으로 말을 달렸소. 여전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똑같은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오. '과연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을까?' 그것뿐이었소. 만약 외몽고군의 순시대가 우리들보다 먼저 그 다리에 도착해 있다면, 만사 끝이오. 우리들에게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소. 겨드 랑이 밑에 흠뻑 땀이 흘리고 있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오. 언제까지고 그 땀은 마르지 않았소. '마미야 소위, 자네는 지금까지 총에 맞아 본 적이 있 나?' 하고 야먀모토는 긴 침묵 끝에 말 위에서 나에게 물었소. 없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소. '누군가를 쏜 적은 있는가?' 없습니다, 하고 나는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했소. 나의 대답이 그에게 어떠한 느낌을 주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소. 또 그가 어 떤 목적으로 그런 것을 나에게 물었는지 그것도 알 수 없었소. '실은 군사령부에 가져가야 할 서류를 여기에 가지고 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안장에 붙은 주머니 위에 손을 얹었소. '만약 가져가는 것이 불가능한 경 우에는 이것을 결단코 처분해야 한다. 태워도 좋고 파묻어도 좋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적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다. 그것이 최 우선 사항이다. 그것 하나만은 귀관이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것을 매우 매우 중 요한 것이다.' '알겠습니다'하고 나는 말했소. 야마모토는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소. '만약 좋지 않은 사태에 빠질 것 같 으면,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쏴라. 망설이지 말고 쏴라'하고 그는 말했소. '내가 쏠 수 있으면 내가 쏜다. 그러나 나는 팔에 상처를 입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제대로 자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쏴버려라. 그리고 쏠 경우에는 반 드시 죽여라.'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저물기 전 우리들이 강을 건널 지점에 도착했을 때, 내가 도중에 품고 있던 두려움이 근거 없는 아니었음이 명확해졌소. 그곳에는 이미 외몽고군의 소 부대가 흩어져 있었다오. 나와 야마모토는 약간 높은 모래 언덕 위에 올라가, 교 대로 쌍안경으로 살펴보았소. 병사 수는 모두 여덟 명으로 그다지 많지는 않았 지만, 국경 순시대치고는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소. 경기관총을 가진 병사가 한 명 있었소. 그리고 좀 높은 곳에 중기관총 한 정이 설치되어 있었다오. 중관 총 둘레에는 모래 방벽이 쌓여 있었소. 기관총이 강을 겨냥하여 설치되어 있음 이 명백했소. 우리들은 건너편 강가로 건너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거기에는 전 방을 경계하며 앉아 있었던 모양이오. 그들은 강변에 천막을 치고, 말뚝을 박아 열 필 정도 되는 말을 묶어 놓았소. 우리들을 붙잡을 때까지 그들은 그곳을 움 직이지 않을 심산인 것 같았소. '강을 건널 지점은 여기밖에 없습니까?'하고 나는 물어 보았소. 야마모토는 쌍안경에서 눈을 떼고 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소. '있기는 있지만, 너무 멀어. 여기서 말을 타고 꼬박 이틀이 걸리는데, 그럴 시간적 여유 는 우리에게 없다. 무리를 해서라도 이곳을 건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밤에 몰래 강을 건너야겠군요?' '그렇다. 그것 외에 방법이 없다. 말은 여기에 남겨 두고 간다. 보초명만 처리 하면 나머지 병사들은 아마 푹 잠들어 있을 것이다. 강의 물 소리 때문에 거의 모든 소리는 들리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보초병은 내가 처치하겠다. 그때까지는 특별히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지금 푹 자두어 몸을 쉬도록 하 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들은 강 건너기 작전 시각을 새벽 3시로 결정했소. 혼다 하사는 말에 쌓 여 있던 짐을 전부 내리고, 말을 멀리까지 데리고 가서 풀어 주고 왔소. 여분의 탄약과 식량은 깊은 우물을 파고 거기에 묻었소. 우리들이 몸에 지닌 것도 수통 과 하루분의 식량, 총 소량의 탄약뿐이었다오. 만약 압도적으로 화력이 우수한 외몽고군에게 붙잡힌다면, 아무리 탄약이 있다고 해도 도저히 우리 쪽에는 승산 이 없었소. 그러고 나서 우리들은 작전 시간이 될 때까지 수면을 취하기로 했소. 강을 건널 수 있다면, 그후로 얼마동안은 잘 여유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오. 잘 시간은 그때밖에 없었소. 먼저 혼다 하사가 부초를 서고, 다음으로 하마노 중사 가 교대하기로 했소. 텐트 안에 눕자 야먀모토는 바로 잠들었소. 그는 그때까지 거의 수면을 취하 지 못했던 것 같소. 그는 그 중요한 서류를 넣은 가죽 가방을 베개 맡에 놓았다 오. 이윽고 하마노도 자기 시작했소. 우리들은 모두 지쳐 있었던 것이오. 그러나 나는 긴장 탓으로 한참 동안 잠을 이룰수가 없었소. 졸려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아무리 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소. 외몽고군의 보초를 죽이거나, 강을 건너고 있는 우리에게 중기관총이 불을 뿜어내는 것을 상상하자니, 신경이 점점 흥분되 었다오. 손바닥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관자놀이가 쑤셨소. 임무를 수행함에 있 어서 장교로서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할 수 있을지 나는 자신 없었소. 나는 텐 트에서 나와 보초를 서고 있는 혼다 하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옆에 앉았다. '이봐, 혼다, 우리들은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다'하고 나는 말했소. '글쎄요?'하고 혼다가 말했다. 잠시 우리들은 잠자코 있었소. 그러나 나는 그의 '글쎄요?'라는 대답에 포함된 무엇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소. 그러나 그가 무엇인가를 숨긴 채 애매한 대답 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소. 나는 다시 물어 보았다오. 무엇인가 말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망설일 것 없다고, 이것이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마 음속에 있는 말을 솔직하게 해버리면 어떻겠냐고. 혼다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얼마 동안 발 밑의 모래땅을 손가락으로 더듬 고 있었소. 그는 마음속으로 무언인가 갈등하고 있는 듯이 보였소. '소위님'하고 조금 지나서 그는 말했다오. 그는 가만히 내 얼굴을 보고 있었소. '소위님은 우 리 네 명중에서 가장 오래 사시고, 본 땅에서 돌아가실 겁니다. 소위님이 예상하 는 것보다 훨씬 오래 사실 겁니다.' 이번에는 내가 감히 그의 얼굴을 볼 차례였소. '어째서 그런 것을 알 수 있는가 하고 소위님은 미심쩍게 생각하시겠죠? 그러 나 그것은 저로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단지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어떤 영감 같은 것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영감이라는 말은 제 마음에 딱 들어맞지 는 않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단 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자네에게는 그러한 성향이 있었나? 옛날부터?' '예"하고 그는 확실한 목소리로 대답했소. '그러나 철이 들고부터는 다른 사람 에게 그것을 쭉 감춰 왔습니다. 이번에는 생사와 관련되고, 그리고 소위님이 그 상대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나? 그것도 알 수 있는가?' 그는 고개를 저었소.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님은 모르고 계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대학을 나오신 소위님께서 저 같은 인간이 이렇게 잘난 듯이 말씀드린다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지나가 버린 후에 뒤돌아보는 것입니다. 앞질러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님은 익 숙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여기에서는 죽지 않는단 말이지?' 그는 발 밑의 모래를 손으로 떠서 손가락 사이로 부슬부슬 떨어뜨렸소. '이것 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중국 대륙에서 소위님이 돌아가시는 일은 없습니다.' 나는 좀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혼다 하사는 그렇게만 이야기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소. 자신의 생각이나 명상 속으로 들어가 버린 듯했다오. 그는 소총 을 든 채 광야를 노려보고 있었소. 그 이상 내가 무슨 말을 그의 귀에는 들어가 지 않을 듯 했소. 나는 모래 언덕 그늘에 낮게 쳐진 텐트에 돌아와서 하마노 옆에 누워 눈을 감 았소. 이번에는 잠이 왔소. 그것은 마치 발목을 잡혀 깊은 바다 밑으로 끌려들어 가는 듯한 깊은 잠이었소.) 13. 마미야 중위의 긴이야기 2 (나를 깨운 것은 소총의 안전 장치를 푸는 찰칵하는 금속성 소리였소. 전장에 있는 병사는 설사 아무리 깊이 잠들더라도 그 소리를 놓치는 일은 없다오. 그것 은 뭐랄까, 특별한 소리인 것이오. 죽음 그 자체와 같이 무겁고 차가운 소리 말 이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베개맡에 둔 자동 소총으로 손을 뻗으려고 하다가 누군가에게 관자놀이 부근을 발로 걷어차여, 그 충격으로 잠시 걷어찬 듯한 사 람이 허리를 굽혀 내 자동 소총을 주워 올리는 것이 보였소. 얼굴을 천천히 들 자 두 개의 소총 총구가 내 머리를 향하고 있었소. 그 총구 너머로 몽고병의 모 습이 보였소. 잠들었을 때는 텐트 안이었는데, 어느 새 텐트는 걷어져 머리 위에는 만주 하 늘의 별이 빛나고 있었소. 다른 몽고병이 옆 자리의 야마모토 머리에 경기관총 을 겨누고 있었다오. 야마모토는 저항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마치 에너지 를 절약하는 듯한 모습으로 거기에 누워 있었소. 몽고병은 모두 긴 외투를 입고 전투용 헬멧을 쓰고 있었다오. 두 명의 병사가 대형 회중전등을 손에 들고 나와 야마모토의 모습을 비추었소. 처음에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오.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고, 그리고 그들에게 받은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오. 그러나 몽고병의 모습과 야마모토의 얼굴을 보는 동안 나 는 사태를 겨우 파악할 수 있었소. 우리들이 강을 건너기 전에 그들이 우리의 텐트를 발견해 냈던 것이오. 그 다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혼다와 하마노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었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 도 보이지 않았소. 이미 몽고병의 손에 죽어 버렸는지 아니면 용케 도망칠 수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오. 그들은 아마도 강을 건너는 지점에서 발견한 순시대의 병사인 것 같았소. 그 다지 많은 인원은 아니었다오. 장비는 경기관총 두 자루와 나머지는 소총이었소. 지휘를 맡고 있는 사람은 몸집이 큰 하사관으로, 그 사람 혼자만 제대로 된 장 화를 신고 있었소. 처음에 내 머리를 걷어찼던 남자 말이오. 그는 몸을 굽혀 야 마모토의 베개맡에 있던 가죽 가방을 집어들어 그것을 열고는 안을 들여다보았 소. 그리곤 거꾸로 들고 흔들었소. 그러나 땅에 떨어진 것은 한 갑의 담배뿐이었 소. 나는 놀랐다오. 왜냐하면 야마모토가 그 가방 안에 서류를 넣는 것을 확실히 봤기 때문이오. 그는 말 안장에 붙은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그것을 손가방에 넣고 베개맡에 놓았던 거요. 야마모토는 여느 때처럼 아무 일도 아닌 듯한 표정 을 지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 표정이 순간적으로 확 무너지는 것을 나는 놓 치지 않았소. 그 서류가 언제 어떻게 사라져 버렸는지 그도 도저히 짐작하지 못 한 는 것 같았소.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그에게 고마운 일이었을 거요. 왜냐하면 그가 나에게 말했듯이, 그 서류를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 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병사들은 우리의 짐을 전부 뒤집어엎고는 샅샅이 뒤졌소. 그러나 거기에 중요 한 것은 무엇하나 들어 있지 않았소. 다음에 그들은 우리가 입고 있던 옷을 전 부 벗기고 주머니를 하나하나 조사했소. 그들은 칼로 옷과 배낭을 찢었소. 우리 들이 가지고 있던 담배와 펜, 지갑과 노트와 시계를 빼앗아 자기들의 주머니에 넣었소. 우리의 신발을 교대로 신어보고는 사이즈가 맞는 것이 있으면 자기네들 이 가졌소. 누가 무엇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서 병사들은 아주 심하게 말다툼을 했지만 하사관은 모르는 척했소. 아마 몽고에서는 포로나 적의 소유물을 빼앗아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오. 하사관은 야마모토의 시계를 빼앗아 자기 가 갖고 나머지는 병사들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소. 그 이외의 군장품, 즉 권총과 탄약과 지도, 자석과 쌍안경 같은 것들은 한꺼번에 포대 안에 넣었소. 그것들은 아마 울란바토르의 사령부로 보내질 모양이었소. 그리고 그들은 나체가 된 우리를 가늘고 튼튼한 끈으로 단단히 묶었소. 가까 이 다가서자, 몽고병들의 몸에서는 마치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은 가측 우리 같 은 냄새가 났소. 군복은 매우 허술했고, 진흙과 먼지, 음식물 얼룩 같은 것으로 아주 더럽혀져 있었소. 그것이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조차 거의 알 수 없을 정도 였다오. 구두는 너덜너덜하고 군데군데 구멍이나,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져 버릴 듯이 보였소. 우리의 구두를 탐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오. 그들 대다수는 상당히 얼굴이 거칠었고, 치아는 더러웠으며, 수염은 제멋대로 나 있었소. 언뜻 보면 병사라기보다는 마적이나 도적 무리 같았는데, 가지고 있는 소련제 무기나 별이 붙은 계급장은 그들이 정규 몽고인민공화국의 군대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 었소. 그렇지만 내가 볼 때, 전투 집단으로서의 통일성이나 사기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았다오. 몽고인은 참을성 강하고 거친 병사들이오. 그러나 집단으로 싸우는 근대전에는 그다지 맞지 않소. 밤은 얼어붙을 듯이 추웠고, 어둠에 하얗게 떠올랐다가 사라져가는 그들의 입 김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뭔가의 잘못으로 악몽의 풍경 일부분 속에 들어가 버린 듯했소.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소. 분명히 그것은 악몽 이었소. 그렇지만 그것은 물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거대한 악몽의 아주 작 은 시작에 불과했던 거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의 병사가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질질 끌고 왔소. 그는 히죽 웃고 나서, 그것을 우리 옆에 털썩 내던졌소. 그것은 하마노의 시체였 다오. 하마노의 구두는 이미 누군가의 손에 넘어간 듯 맨발이었소. 그들은 하마 노의 시체도 발가벗겨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을 전부 점검했소. 손목시계와 지갑 과 담배를 빼앗았소. 그들은 담배를 나누어 가진 후 그것을 피우면서 지갑 속을 조사했소, 지갑 속에는 만주국 지폐가 몇 장 들어 있었고, 그의 어머니인 듯한 여성의 사진이 들어 있었소. 지휘를 맡고 있는 하사관이 뭐라고 말하고는 지폐 를 빼앗았소. 어머니의 사진은 땅바닥에 버려졌소. 하마노는 보초를 서고 있다가, 몰래 뒤에서 다가온 몽고병의 칼에 목이 찔린 것 같았소. 우리들이 하려고 했던 일을 그들이 먼저 했던 것이오. 칼에 찔려 짝 벌어진 자리에서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소. 그러나 이미 많은 양의 출혈이 있 었던 듯, 찔린 자리의 커다란 틈에서 나오는 피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오. 병사한 명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칼날 길이가 15센티미터 정도 구부러진 나이프를 꺼내어 나에게 보여 주었소. 그런 기묘한 형태의 나이프를 본 것은 처 음 이었다오. 뭔가 특별한 용도로 사용하는 나이프인 듯했소. 그 병사는 그것으 로 목을 자르는 흉내와 함께 '헉!' 하는 소리를 냈소. 그러자 병사 몇 명이 웃었 소. 그 나이프는 군의 지급 품이 아니라 그의 사유물인 듯했소. 왜냐하면 모두 허리에 긴 총검을 차고 있었고, 구부러진 나이프를 차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 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그가 그 나이프로 하마노의 목을 찌른 것 같았소. 그는 손 안에서 나이프를 빙글빙글 재주 좋게 돌리고 나서, 칼집에 넣었소. 야마모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움직여 나를 흘끗 쳐다보았소. 그것은 아주 한순간의 일이었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금방 이해할 수 있었소. 혼다는 잘 도망칠 수 있었을까, 하고 그의 눈은 나를 향하여 말했던 거요. 그 혼란과 공포 속에서, 사실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오. '혼다 하사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하고. 만약 그가 외몽고군의 급습으로부터 무 사히 도망쳤다면 우리에게도 아직 기회는 있을 지 모르오. 하지만 그것은 덧없 는 기회일지도 모르오. 혼다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암담하 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러나 그래도 기회는 기회요.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 소. 우리는 묶인 채로 날이 샐 때까지 그 모래 위에 엎어져 있었소. 경기관총을 가진 병사와 소총을 가진 병사가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남겨졌고, 나머지 병사 는 우리를 붙잡았다는 것에 일단 안심했는지 약간 떨어진 곳에 모여서 함께 담 배를 피우며 떠들거나 웃고 있었소. 나와 야마모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5월 이라고는 하지만 새벽녘의 기온은 영하까지 떨어졌다오. 우리는 발가벗겨진 상 태였으므로 이대로 얼어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오. 그러나 그 추위 도 그때 내가 느꼈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소. 이제부터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나는 짐작도 가지 않았소. 그렇기 때문에 한동안은 우리는 죽 이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러나 그 앞일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소. 야마모토는 스파이임이 분명하고, 나도 그와 함께 붙잡힌 것이므로 당연히 그의 협력자가 되는 것이오. 어쨌든 일이 간단히 끝날 것 같지는 않았소. 날이 새고 얼마 있자 상공으로부터 비행기의 폭음 같은 것이 들려 왔소. 이윽 고 은색 기체가 시야에 들어왔소. 외몽고군의 마크가 붙은 소련제 정찰기였다오. 정찰기는 우리의 머리 위를 몇 번인가 선회했소. 병사들은 모두 손을 흔들었소. 비행기는 날개를 몇 번인가 상하로 움직이며 우리 쪽으로 신호를 보내더니, 근 처에 있는 넓은 장소에 모래 먼지를 일으키면서 착륙했소. 그 부근은 지반도 단 단하고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호라주로가 없어도 비교적 쉽게 이착륙할 수 있 었다오. 아니면 그들은 같은 장소를 지금까지 몇 번이나 비행장 대신 사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오. 병사한 명이 말에 올라타, 두 마리의 예비 말을 데리고 그쪽 으로 달려갔소. 병사는 두 명의 고급 장교인 듯한 남자를 말에 태우고 되돌아 왔소. 한 명은 러시아인이고, 다른 한 명은 몽고인이었소. 순시대의 하사관이 우리를 붙잡았다 는 것을 무선으로 사령부에 전달하고, 장교 두 명이 우리를 심문하기 위하여 울 란바토르에서 일부러 오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추측했소. 아마 정보 장교일 것 이오. 작년 반정부파의 대량 체포, 대숙청을 배후에서 조작한 것은 GPU라는 이 야기를 들었다오. 장교 둘 다 청결한 군복을 입었고, 수염은 깔끔하게 면도되어 있었소. 러시아 인은 허리에 벨트가 달린 트렌치 코트 같은 것을 입고 있었소. 코트 아래로 보 이는 장화는 번쩍번쩍 빛났고, 얼룩하나 없었소. 러시아인치고는 그다지 큰 키는 아니었으며 마른 체형이었소. 나이는 30대 초반쯤 될까? 이마는 넓고, 코는 가늘 며, 피부는 옅은 분홍색에 가깝고,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소. 전체적으로 특별하 다고 할 만한 인상이 아니었소. 외몽고의 장교는 러시아인과는 반대로 단단해 보이는 몸집에 거무스름한 피부를 지닌, 덩치가 작은 남자로, 러시아인 옆에 서 있으니 마치 작은 곰처럼 보였소. 몽고인 장교가 하사관을 불러 그들 셋은 좀 떨어진 곳에 서서 무엇인가를 이 야기했소. 아마도 상세한 보고를 받고 있으리라 나는 추측했소. 하사관은 우리에 게서 빼앗은 물건을 넣은 포대를 가지고 가서 그 내용물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 다오. 러시아인은 그것을 하나하나 꼼꼼히 조사하고는 다시 포대 안에 넣었소. 러시아인은 몽고인 장교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장교는 하사관에게 무엇인가를 말했소. 러시아인은 가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외몽고군의 장교와 하사관 에게 권했소. 그리고 세 명은 담배를 피우면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했소. 러시아인 은 오른쪽 주먹으로 왼쪽 손바닥을 몇 번이나 치면서 두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소. 그는 좀 초조해 보였소. 몽고인 장교는 곤란한 얼굴로 팔짱을 끼 고, 하사관은 몇 번인가 고개를 저었소. 이윽고 장교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소. 그리고 나와 야마모토 앞에 섰소. '담배를 피우나?' 하고 그는 우리에게 러시아어로 물었소. 나는 대학 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으므로,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대충은 이해할 수 있었소. 그 러나 귀찮게 말려들고 싶지 않아 전혀 모르는 척했소. '고맙다. 그러나 필요없다' 하고 야마모토는 러시아어로 대답했소. 상당히 능숙한 러시아어였소. '좋아' 하고 소련군 장교가 말했소. '러시아러를 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 다.' 그는 장갑을 벗어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오. 왼쪽 약손가락에 작은 금반지를 끼고 있었소.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어떤 물건을 찾고 있다. 그것도 필 사적으로 찾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네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어 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말기 바란다. 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너는 지금 그것을 몸에 지니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붙잡히기 전 에 네가 그것을 어딘가에 숨겼다는 뜻이다. 아직 저쪽으로는……' 하고 그는 하 르하 강 쪽을 가리켰소. '……가져가지 않았다. 아무도 아직 하르하 강을 건너지 않았다. 편지는 강 이쪽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나?' 야마모토는 고개를 끄덕였소. '당신의 말은 이해했다. 그러나 그 편지에 대해 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좋아' 하고 러시아인은 무표정하게 말했소. '그럼 한 가지 사소한 질문을 하겠 는데, 너희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너희도 잘 알고 있듯이, 여 기는 몽고인민공화국의 영토다. 너희는 남의 영토에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 온 것이다. 그 이유를 듣고 싶다.' 우리는 지도를 작성하고 있었다, 하고 야마모토는 설명했소. 나는 지도 회사에 근무하는 민간인이며, 여기에 있는 남자와 죽은 남자는, 내 호위역으로서 같이 와주었다. 강 이쪽이 당신들의 영토라는 것은 알고 있으며, 국경을 넘은 것에 대 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토 침범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우 리는 이쪽 해안의 높은 지대에서 지형을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하고 말했소. 러시아인 장교는 그다지 흥미 없다는 듯이 얇은 입술을 찡그리며 웃었소. '미 안하게 생각한다?'하고 그는 야마모토의 말을 천천히 반복했소. '그래? 높은 부 대에서 지형을 보고 싶었나? 그렇군. 높은 곳에 올라가면 전망이 좋지. 이치가 맞는 얘기군.' 얼마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소. 그런 후 야마모토에게 시선을 돌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오. '네가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너의 어깨를 두드리며 잘 알겠다, 자, 강을 건너 저쪽으로 돌아가라, 다음부터는 주의해라, 하 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네가 누군 지 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잘 안다. 우리 들은 하이랄에 몇 명의 친구가 있다. 너희가 울란바토르에 몇 명의 친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인은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그것을 잘 접은 다음, 다시 주머니에 넣 었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희를 괴롭히거나 죽이거나 하는 것에 특별히 개인 적인 흥미는 없다. 편지만 이쪽으로 넘겨준다면 너희에게 더 이상의 용무는 없 다. 내 재량으로 너희를 이 장소에서 바로 석방하겠다. 그대로 강을 건너 저쪽으 로 돌아가도 좋다. 그것은 내가 명예를 걸고 보증한다. 그 다음 일은, 우리 국내 의 문제다. 너희와는 관계없다.' 동쪽에서 비쳐 오는 햇빛이 내 피부를 얼마동안 따뜻하게 해 주었소. 바람은 잠잠했고, 하늘에는 하얗고 단단한 구름 몇 점이 떠 있었다오. 그리고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소. 아무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러시아인 장교 도, 몽고인 장교도, 순시대의 병사들도, 야마모토도, 모두 제각기 잠자코 있었다 오. 야마모토는 붙잡혔을 때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듯,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소. '아니면 너희 두 사람 모두 여기에서 죽게 된다' 하고 러시아인은 한마디 한마 디를 끊으면서, 어린아이에게 타이르듯이 천천히 말했소. '그것도 아주 끔찍한 방법으로 죽인다. 그들은……,' 러시아인은 그렇게 말하고 몽고 병사가 있는 쪽을 보았소. 경기관총을 들고 있는 덩치 큰 병사는 내 얼굴을 보고 더러운 이를 내보이며 히죽 웃었소. '그들 은 몹시 복잡한 살인 방법으로 죽이는 것을 대단히 좋아한다. 말하자면 그러한 살인을 하는 전문가지. 칭기즈칸 시대부터 몽고인은 아주 잔혹한 살인을 즐겨 왔고, 그 방법에 대해서도 정통해 있다. 우리 러시아인은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배우지. 몽고인들이 러시아에서 일찍이 무엇을 했는 가 하는 것을 말이야. 그들은 러시아에 침입했을 때 수백만의 사람을 죽였다. 거의 의미도 없이 죽였지. 키예프에서 포로인 러시아인 귀족들을 몇 백 명이나 한꺼번에 죽인 이야기를 알고 있나? 몽고인들은 크고 두꺼운 판자를 만들어서, 그 아래 귀족들을 나란히 눕히고 그 판자 위에서 다 함께 축하연을 벌여 그 무 게로 깔아뭉개 죽였다. 그런 것은 보통 사람은 좀처럼 생각해 낼 수도 없다. 그 렇게 생각하지 않나? 시간이 걸리고 준비도 상당하다. 단지 귀찮을 뿐이잖아? 그렇지만 그들은 일부러 그런 짓을 해.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즐거 움이기 때문이야. 그들은 지금도 그른 방법을 쓰고 있다. 나는 전에 한 번 그런 것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까지도 상당히 난폭한 것을 보아 왔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날 밤은 정말 식욕이 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내 말을 이해하나? 내 말이 너무 빠르지 않나?' 야마모토는 고개를 저었소. '좋아'하고 그는 말했소. 그리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잠깐 사이를 두었소. '이 번에는 두 번째니까 잘하면 그럭저럭 식욕이 생길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가 능하다면, 쓸데없는 살생은 피하고 싶다.' 러시아인은 손을 뒷짐지고 얼만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소. 그리고 장갑을 벗 고 비행기 쪽을 보았다오. '좋은 날씨야'하고 그는 말했다. '봄이다. 아직 좀 춥지 만, 이 정도가 좋아. 더 더워지면 그때는 모기가 나온다. 지독하지. 여름보다는 봄이 훨씬 좋다' 그는 다시 담배갑을 꺼내 한 개비를 빨아들이고 천천히 그것을 내뱉었소. '다시 한 번 묻겠는데, 정말로 편지에 관한 것은 모른다고 말할 건가?' '그렇다'하고 야마모토는 간단히 대답했소. 그러자 '좋아'하고 러시아인은 말했소. 좋아, 그러고 나서 그는 몽고인 장교를 향해서 몽고어로 뭐라고 말했다오. 장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사들에게 명령 을 내렸소. 병사들은 어딘가에서 통나무를 가지고 와 대검을 사용하여 그 끝을 재주 좋게 날카롭게 네 개의 말뚝 것을 만들었소.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필요한 거리를 보폭으로 재어 그 네 개의 말뚝을 거의 정사각형으로, 돌로 쳐서 땅에 박아 넣었소. 그것만을 준비하는 데에 거의 2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소. 이제부터 무엇이 시작될 건지 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소. '몽고인에게 뛰어난 살육은 맛있는 요리와 같은 것이다'하고 러시아인은 말했 소. '준비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기쁨도 크다. 죽이는 것만이라면 총으로 땅 쏴버리면 된다. 한순간에 끝나 버리지. 그러나 그것은......,' 그는 손가 락 끝으로 매끄러운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소. '......재미없다.' 그들은 야마모토를 묶었던 끈을 풀고 말뚝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소. 그리고 발가벗긴 채로 그 말뚝에 손발을 묶었소. 대자로 하늘을 향해 누운 그의 몸에는 여러 군데에 상처가 있었소. 어느 것이나 생생한 상처였다오. '너희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유목민이다'하고 러시아인이 말했다. '유목민 은 양을 길러서 그 고기를 먹고, 양털을 뽑고 가죽을 벗긴다. 결국 그들에게 양 은 모든 것을 제공하는 동물인 것이다. 그들은 양과 함께 생활하고 양과 함께 삶을 영위한다. 그들은 아주 능숙하게 양의 가죽을 벗긴다. 그 가죽으로 텐트를 만들고 옷을 만드는 것이다. 너는 그들이 양가죽을 벗기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가?' '죽이려면 빨리 죽이시오'하고 야먀모토는 말했소. 러시아인은 손바닥을 모아 천천히 문지르면서 고개를 끄덕였소. '반드시 죽일 거다.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금 시간은 걸리지만, 확실 히 죽으니까 염려할 것은 없다. 급할 것도 없다. 여기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황야다. 시간이라면 잔뜩 있다. 게다가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하 고 싶은 것이 있다. 자, 그러면 다시 가죽 벗기는 작업의 이야기인데, 어느 집단 이든 가죽을 벗기는 전문가와 같은 사람이 한 명은 있다. 전문적이다. 그들은 정 말로 가죽을 잘 벗긴다. 기적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지. 예술품이다. 정말로 순식간에 벗겨 버린다. 살아 있는 채로 가죽을 벗겨도, 벗겨지는 것을 모르고 있 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여겨질 정도로 재빨리 벗겨 버린다. 그러나......'하고 그는 말하고 가슴 주머니에서 다시 담배갑을 꺼내 왼손에 들고, 오른쪽 손가락 끝으 로 톡톡 쳤소. '......물론 모를 리 없지. 살아 있는 채로 가죽을 벗기면, 벗겨지는 쪽은 굉장히 고통스럽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말이야. 그리고 죽는 데, 아주 오 래 걸려, 출혈 과다로 죽는 것이지만 여하튼 그것은 무척 시간이 걸린다구.' 그는 '탁'하고 손가락으로 소리를 냈소. 그러자 그와 비행기로 함께 왔던 몽고 인 장교가 앞으로 나왔소.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칼집에 들어 있는 나이프를 꺼냈소. 그것은 아까 목을 자르는 흉내를 냈던 병사가 가지고 있었던 것과 똑같 은 형태의 나이프였다오. 그는 나이프를 칼집에서 빼어 공주에 비추었소. 아침 태양에 그 강철의 희미하고 하얗게 빛났소. '이 사람은 그런 전문가 증 한 사람이다'하고 러시아인 장교는 말했소. '알았 나? 나이프를 발 보기 바란다. 이것은 가죽을 벗기기 위한 전문 나이프다. 정말 로 잘 만들어져 있지. 칼은 면도날처럼 얇고 날카롭다. 그리고 그들의 기술 수준 도 상당히 높다. 어쨌든 몇 천 년동안 동물의 가죽을 계속 벗겨 온 무리들이니 까. 그들은 정말로 복숭아 껍질을 벗기듯이 사람 가죽을 벗긴다. 기가 막히게 깨 끗이, 그리고 상처하나 내지 않고, 내 말이 너무 빠른가?' 야마모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조금씩 벗긴다'하고 러시아인 장교는 말했소. '가죽에 상처를 내지 않고 깨끗 하게 벗기려면 천천히 하는 것이 가장 좋지. 도중에라도 뭔가 말하고 싶으면, 바 로 중지할 테니까 말해 주기 바란다. 그렇게 하면 죽이지 않겠다. 그는 지금까지 몇 번인가 이 일을 해왔는데,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사람은 한 명도 없 었어. 그것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중지하려면 가능한 한 빠른 게 좋아. 그러는 게 서로 편하니까.' 나이프를 가진 곰 같은 장교는 야먀모토를 보고 히죽 웃었소. 나는 그 웃음을 지금도 그대로 기억하오. 지금도 꿈에서 본 다오. 그 웃음은 잊을 수 없소. 그러 고 나서 그는 작업에 착수했소. 병사들은 손과 무릎으로 야먀모토의 몸을 눌렸 고, 장고가 나이프를 사용하여 가죽을 정성껏 벗겼소. 정말로 그는 복숭아 껍질 이라도 벗기듯이 야마모토의 가죽을 벗겼소. 나는 그것을 똑 바로 볼 수가 없었 다오. 나는 눈을 감았소. 내가 눈을 감으면, 몽고인 병사는 총 개머리판으로 나 를 때렸소. 내가 눈을 뜰 때까지 그는 나를 때렸소. 그는 처음 얼마 동안은 참을 성 있게 잘 견뎠소. 그러나 도중부터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소. 그것은 이 세상 의 것이라는 생각할 수 없는 비명이었소. 남자는 먼저 야먀모토의 오른쪽 어깨 에 나이프를 쑥 금을 그었다오. 그리고 위쪽에서부터 오른쪽 가죽을 벗겨 갔소. 그는 마치 자비를 베풀 듯이 천천히 정성껏 팔 가죽을 벗겨 갔소. 러시아인 장 교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정말 예술이 알고 해도 좋을 것 같은 솜씨였소. 만 약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고통 같은 것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 지 들었다오. 그러나 그 비명 소리로 미루어 보아 엄청난 고통이 따름을 알 수 있었소. 이윽고 오른팔을 완전히 가죽이 벗겨져 한 장의 얇은 시트처럼 되었소. 가죽 벗기는 사람은 그것을 옆에 있는 병사에게 건네주었소. 병사는 그것을 손가락으 로 잡고 펼쳐서 모두에게 보여 주었소. 가죽에서는 아직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 었다오. 가죽 벗기는 장교는 작업을 왼팔로 옮겼소. 같은 작업이 반복되었다오. 양쪽 다리 벗기고, 성기와 고환을 잘라 내고, 귀를 베어냈소. 머리 가죽을 벗기 고, 얼굴을 벗기고, 드디어 전부 벗겨 버렸소. 야먀모토는 실신하고, 또 의식을 되찾고, 또 실신했소. 실신하면 소리가 멎고, 의식이 되돌아오면 비명이 계속되 었소. 그러나 그 목소리도 점점 약해져서 결국에는 사라져 버렸다오. 러시아인 장교는 그 동안 쭉 군화의 발꿈치로 땅바닥에 의미 없는 도형을 그리고 있었소. 몽고인 병사들은 한결같이 잠자코 꿈쩍도 않고 그 작업을 바라보고 있었소. 그 들은 모두 무표정했소. 거기에는 혐오의 기미도 없었고, 감동도 경악도 찾아볼 수 없었소. 그들은 마치 산보를 나온 김에 뭔가 공사 현장을 구경할 때와 같은 표정으로, 야먀모토의 가죽이 한 장 한 장 벗겨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소. 나는 그사이에 몇 번이나 토했소. 마지막에는 더 이상 토할 것도 없어져 버렸 지만, 나는 그래도 여전히 토하고 있었소. 곰 같은 몽고인 장교는 마지막에 완전 히 깨끗하게 벗겨진 야마모토의 몸뚱이 가죽을 펼쳤소. 거기에는 유두까지 달려 있었소. 나는 그렇게 기분 나쁜 것을 그전에도 그후에도 본 적이 없다오, 누군가 가 그것을 손에 들고, 시트라도 말리는 것처럼 말렸소. 그곳에는 가죽이 완전히 벗겨져 빨간 피투성이의 살덩어리가 되어 버린 야마모토의 사체가 나뒹굴고 있 을 뿐이었소. 가장 참혹한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오. 빨간 살 안에 하얗고 커다란 안구가 크게 뜨여진 듯이 들어 있었소. 치아가 벗겨져 나간 입은 뭔가를 외치듯 이 커다랗게 벌려져 있었소. 코를 베어낸 자리에는 작은 우물이 남아 있을 뿐 이었소. 땅바닥은 그야말로 피바다였소. 러시아인 장교는 땅바닥에 침을 뱉고 내 얼굴을 보았소.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임가를 닦았소. '저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군'하고 그는 말했소. 그리고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소.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약 간 더 메말라 있었소. '알고 있었다면 반드시 말했을 것이다. 가엾게 됐군. 그러 나 그는 뭐라 해도 전문가고, 어차피 언젠가는 변변찮게 죽게 된다. 어쩔 수 없 었다. 어쨌든, 그가 모른다면 네가 뭔가를 알고 있을 리는 없겠지?' 러시아인 장교는 담배를 물고 성냥불을 켰다. '그렇다면 결국 너는 이제 이용 가치가 없다는 뜻이지. 고문하여 입을 열게 할 가치도 없고, 포로로 살려 둘 가치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들은 극비리에 이 번 사건을 처리하고 싶었다. 떠들썩하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를 울 란바토르에 데리고 돌아가면, 이야기가 좀 귀찮게 된다. 가장 좋은 것은 지금 바 로 너의 머리에 총탄을 쏴서 어딘가에 묻어 버리든지 태워서 하르강으로 흘려 보내는 것이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간단히 끝난다. 그렇지?' 그는 그렇게 말하 고,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소. 그러나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을 하나도 이해 하지 못하는 척했소. '아무래도 너는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이런 말을 해보았자 시간 낭비겠지만, 그래, 좋다. 이것은 나 혼잣말 같은 것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듣기 바란다. 그런데 너에게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나는 너를 죽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네 친구를 본의 아니게 헛되이죽여버린 것에 대한 나의 조그마한 사죄의 마음이라고 해석해도 좋다. 오늘은 아침부터 죽이는 것을 실컷 감상했다. 이런 일은 하루에 한 번으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너 는 죽이지 않겠다. 죽이는 대신 너에게는 좀더 살 기회를 주겠다. 잘하면......구조 될 거야.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거의 없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지. 그러나 기회 는 기회다. 적어도 가죽이 벗겨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그렇지?'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몽고인 장교를 불렀소. 그는 가죽 벗기는 데 사용했던 나이프를 수통의 물로 소중하게 씻어 작은 돌에 다 막 갈고 난 후였소. 몽고인 병사들은 야먀모토의 몸에서 벗긴 가죽을 펼치고, 그 앞에서 뭔가를 서로 이야 기하고 있었소. 아마도 가죽 벗기는 기술의 세부 사항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 같았소. 몽고인 장교는 나이프를 칼집에 넣고 그것을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 고 나서, 이쪽으로 왔소. 그는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그러고 나서는 러시아 인을 보았소. 러시아인이 그에게 몽고어로 짧게 뭐라고 말하자, 몽고인은 무표정 하게 고개를 끄덕였소. 병사가 그들을 위해 말을 두 마리 데리고 왔소.' '우리는 이제 비행기로 울란바토르로 돌아간다'하고 러시아인은 나에게 말했 소.'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은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다. 잘되는 일이 있으면, 안되 는 일도 있지. 저녁 식사 때까지 식욕이 돌아오면 좋겠는데, 그다지 자신이 없 군.' 그리고 그들은 말을 타고 가버렸소. 비행기가 이륙하여 작은 은색 점이 되어 서쪽 하늘로 사라져 버리자, 그 자리에는 나와 몽고 병사들, 그리고 말만이 남겨 졌소. 몽고 병사들은 나를 말 안장에 꽉 묶어 놓고 대열을 짠 뒤 북쪽을 향해 출발 했소. 내 바로 앞에 있던 몽고 병사는 작고 낮은 목소리로 단조로운 멜로디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소. 그 이외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말굽이 모래를 삭삭 걷어 차는 마른 소리뿐이었다오. 그들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지, 그리고 내가 이제부터 도대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나는 짐작도 가지 않았소.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나라는 인간은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존재라는 사 실뿐이었소. 나는 그 러시아인 장교가 말했던 것을 머리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 이해 보았소. 그는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했소. 죽이지는 않는다......그러나 삶을 연장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고 말했던 것이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 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소. 그가 말했던 것은 너무나도 막연했소. 아니면 그것은 , 뭔가 교활한 취향을 담은 게임 같은 것에 나를 이용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오. 깨끗하게 죽여 버리지 않고, 천천히 그 게임을 즐기려고 하는 속셈 말이 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내가 거기에서 죽지 않았던 것에, 특히 야먀모토처럼 살아 있는 채로 가죽이 벗겨지지 않았던 것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소. 그렇게 된 이상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었든 적어도 나는 아직 살아서 호흡하고 있었던 거 요. 그리고 러시아인 장교가 말했던 것을 그대로 믿는다면, 나는 바로 죽지는 않 을 거요. 죽을 때까지 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삶을 연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오.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가능성이라고 해도 나는 그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혼다 하사의 말이 언뜻 내 뇌리를 스쳐 갔소. 내가 중국 대륙에서 죽 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그 기묘한 예언 말이오. 나는 말 안장에 묶여서, 발가벗 겨진 등을 사막의 햇빛에 서서히 태우면서, 혼다 하사가 말한 것을 하나하나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소. 그때 그의 표정, 억양, 말의 느낌 등을 시간을 두고 떠올 렸소. 그리고 그 예언을 진정으로 믿으려고 했소. 그렇다, 나는 이런 곳에서 순 순히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가 살아서 고향의 땅을 밟아야 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강하게 타일었소. 두 시간인가 세 시간인가 그들은 북쪽으로 나아갔소. 그리고 라마교의 석탑이 있는 곳에서 멈췄다오. 그와 같은 석탑을 오브라고 불렀소. 그것은 길을 지키는 신과 같은 것이기도 하며, 사막 안의 귀중한 표지의 역할도 하고 있었소. 오보 앞에서 그들은 말에서 내려 나를 묶었던 끈을 풀었다오. 그리고 두 명의 병사가 내 몸의 양쪽 겨드랑이를 잡고 부축하듯이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갔소. 거 기에서 아마 죽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소. 그런데 그들이나를 데리고 간 곳은 땅바닥에 파여진 우물이었소. 우물 주위에는 높이 1미터 정도의 돌벽이 둘러쳐 져 있었소. 그들은 나를 그 우물가에 무릎 꿇게 하고 목뒤를 잡고는 그 안을 들 여다보게 했소. 우물은 깊어 보였으며, 안은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 장화를 신은 하사관이 주먹만한 돌을 가지고 와서 우물 안으로 던져 넣었소. 조금 후에 턱 하는 마른 소리가 들렸다오. 그것은 아무래도 물이 없는 우물인 것 같았다오, 옛날에는 사막의 우물 역할을 하던 것이 지하 수맥의 이동에 오래 전에 말라 버렸을 거요. 돌이 바닥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으로 보니 상당히 깊 을 것 같았소. 하사관은 내 얼굴을 보고 히죽 웃었소. 그리고 그는 벨트에 붙은 가죽 주머니 에서 커다란 자동 권총을 꺼냈소. 그는 안전 장치를 풀고 찰칵 하는 소리를 내 며 탄환을 집어넣었소. 그리고 총구를 내 머리에 들이댔다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소. 그는 총을 천천히 아래로 내 렸소. 그리고 왼손을 올려 내 등뒤의 우물로 가르켰다오.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면서 가만히 그 권총을 보고 있었소. 요컨대 이러한 것이었소. 나는 두 가지 중 한 가지 운명을 선택할 수 있었소. 우선 하나는 지금 바로 그의 총에 맞는 것이오. 깨끗이 죽어 버리는 거요. 또 하나는 스스로 우물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오. 깊은 우물이기 때문에 잘못 떨어지면 죽어 버릴지도 모르오. 그렇지 않 으면 그 어두운 우물 바닥에서 서서히 죽어 가게 되는 거요. 나는 겨우 이해할 수 있었소. 그것이 그 러시아인이 말했던 기회라는 것이었소. 하사관은 이제 그 의 것이 되어 버린 야먀모토의 손목시계를 보이면 손가락을 다섯개 폈소. 생각 할 시간을 5초 주겠다는 뜻이었소. 나는 그가 셋을 헤아렸을 때 벽에 다리를 걸 치고 과감히 우물 안으로 뛰어들었소. 그것밖에 나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갈이 없었던 것이오. 나는 우물 벽에 매달려 그것을 타고 아래로 떨어지려고 생각했 지만, 실제로 그런 여유는 없었소. 내 손은 벽을 쥐기는커녕 그대로 밑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오. 그것은 깊은 우물이었소. 내 몸이 땅바닥에 닿기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린 것 같았소. 물론 실제로는 겨우 몇 초 동안의 일이었고, 도저히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만한 것은 아니었다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으로 낙하하는 동안 실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오. 나는 먼 고향을 생각했소. 내가 출정하기 전에 단 한 번 안아 본 여성을 생각했다오. 부모님을 생각했소. 나는 나에게 남동생이 아니고 여동생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소. 내가 여기에서 죽더라 도, 적얻ㅎ 그 아이만은 병사로 뽑히는 일없이 부모님 곁에 남겨질 테니까. 나는 찰떡을 생각했소. 그리고 내 몸이 마른 땅박을 쳤고, 나는 그 충격으로 한순간 정신을 잃었소. 마치 몸 안의 공기가 터져 버린 듯했다오. 내 몸은 모래 주머니 처럼 털썩하고 우물 바닥을 때렸소. 그러나 내가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던 것은 아주 잠깐이었던 것 같소. 기억을 되찾았을 때, 뭔가 물보라와 같은 것이 내 몸에 닿았소. 처음에는, 비가 내리나 하고 생각했다오.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소. 그것은 소변이었소. 몽고 병사들이 모두 우물 바닥에 있는 나를 향해서 소변을 보고 있었던 것이오. 훨씬 위를 올 려다보았더니 둥근 우물 둘레에 그들이 서서 교대로 소변을 보는 모습이 실루엣 처럼 작게 떠올라 있었소. 그것은 내 눈에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소. 마치 마약을 마셨을 때 일어나는 환각처럼 나는 느꼈소. 그렇지만 그것은 현실 이었다오. 나는 우물 바닥에 있었고, 그들은 진짜 소변을 나에게 뿌리고 있었소. 모두 소변을 보고 나자 누군가가 회중 전등으로 내 모습을 비추었소. 웃는 소리 가 들렸소. 그리고 그들은 우물 둘레로부터 모습을 감추었소. 그들이 가버리자. 모든 것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소. 나는 한동안 얼굴을 숙인 채 꿈쩍도 않고, 그들이 되돌아올지 어떨지 지켜보 기로 했소. 그러나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물론 시계가 없었으므로, 아마 대간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할 뿐이지만), 그들은 되돌아오지 않았다오. 그들은 아무래도 철수해 바린 것 같았소. 나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바닥에 홀로 남겨져 있었소. 그들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나는 우선 내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 점검하기로 했소. 어둠 속에서 내 몸의 상태를 점검한다는 것은 상당 히 어려운 일이었소. 나는 내 몸을 볼 수 없었소. 어디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눈 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소. 내가 느끼는 감각만으로 상태를 판단해야만 했다오. 그런데 깊은 어둠 속에 있으니 내가 지금 느끼는 감각이 정말로 맞는 것인지 어 떤지 그것을 잘 알 수 없었소. 뭔가에 속아서 착각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소. 그것은 매우 기묘한 느낌이었소. 그러나 나는 조금씩, 그리고 주의 깊게 내가 놓여 있는 상태를 하나하나 장악 해 갔소. 우선 첫 번째로 내가 이해한 것은,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정말로 행운 이었던 것이오. 우물 바닥이 비교적 부드러운 모래 바닥이었다는 것이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물의 깊이로 봐서 내 뼈의 대부분은 거기에 충돌했을 때 깨 지거나 부러지거나 했을 것이오. 나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몸을 움 직여 보려고 했을 것이오. 나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몸을 움직여 보 려고 시도했소. 먼저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소. 손가락은 약간 불안했지만 그런대로 움직였다오. 그러고 나서 나는 일어나 보려고 했소. 그러나 나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소. 내 몸은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오. 내가 뭔가를 하 려고 생각해도, 내 생각을 근육의 움직임으로 전환할 수 없었소. 그러나 그 의식 과 육체가 잘 연결되지 않았다오. 내가 뭔가를 하려고 생각해도, 내 생각을 근육 의 움직임으로 전환할 수 없었소. 나는 단념하고 어둠 속에 한참 동안 조용히 누워 있었소. 어느 정도 거기에서 꿈쩍도 않고 있었는지 모르겠소. 그렇지만 드디어 감각이 조금씩 되돌아왔소. 그러나 감각의 회복에 호응하여, 당연한 일이지만 통증도 왔 소. 그것은 상당히 심한 통증이었다오. 아마 다리뼈가 부러졌을 거라고 나는 생 각했소. 어깨뼈도 탈구되었을지도 모르오. 혹은 운이 더 나쁘면 부러졌을지도 모 르오. 나는 그 자세로 아픔을 참고 있었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소. 그것은 아픔에서 오는 것이었소. 세계의 끔에 있는 사막 한가운데의 깊은 우물 바닥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고,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삼한 통증이 엄습한다 는 것이 어느 정도 고독한 것인지, 어느 정도 절망적인 것인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거요. 나는 내가 그 하사관에게 깨끗이 사살되어 버리지 않았던 것을 후회 하기조차 했소.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총을 맞아 죽었다면, 적어도 내 죽음은 그 들과 관련된 것이오. 그러나 여기에서 내가 죽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혼 자만의 죽음이오. 그것은 정말로 혼자만의 죽음이오. 그것은 아무도 관련되지 않 은 소리 없는 죽음인 거요. 때때로 바람 소리가 들렸소. 바람이 지표면에 불어올 때마다 우물 입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오. 그것은 어딘가 먼 세계에서 여자가 우는 듯한 소리였소. 그 어딘가 먼 세계와 이 세계가 가느다란 우물로 연결되어 있어 그 소리가 이쪽 으로 들려 오는 것이었소. 그러나 그런 소리가 들려 오는 것도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소. 나는 깊은 어둠 속에 혼자 남겨져 있었소. 나는 아픔을 참으면서, 주위의 지면을 슬쩍 손으로 더듬어 보았소. 우물 바닥 은 평지였소. 그다지 넓지는 않았다오. 직경이 160이나 170센티미터 정도 돼보였 소. 손으로 지표면을 더듬어 때, 내 손은 갑자기 단단하고 뾰족한 것에 닿았소. 나는 놀라서 반사적으로 얼른 손을 뺐다가, 천천히 주의 깊게 거기에 있는 뭔가 에 손을 뻗어 보았다오. 그리고 내 손가락은 다시 뾰족한 것에 닿았소. 처음에 나는 그것을 나뭇가지라 그런 것으로 생각했소. 그러나 마침내 그것이 뼈라는 것을 알았다오. 인간의 뼈는 아니었소. 좀더 작은 동물의 뼈였소.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탓인지, 아니면 내가 떨어질 때 깔린 탓인지 산산조각이 나 있었소. 그 작은 동물의 뼈 외에는 우물 바닥에 아무것도 없었다오. 보슬보슬한 가는 모 래가 있을 뿐이었소. 그리고 나는 손바닥으로 벽을 쓰다듬어 보았소. 벽은 얇고 평평한 돌을 쌓아 만든 듯했소. 대낮에 지표는 상당히 더워지지만 그 더위도 그 지하 세계까지는 미치지 못하여 벽은 마치 얼음처럼 오싹했소. 나는 벽에 손을 대고 돌과 돌의 틈으로 하나하나 조사해 보았소. 잘하면 그것을 발판 삼아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요. 그러나 그 틈은 기어올라갈 발판으로 삼기에 는 너무나 좁았고, 내가 입은 상처를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 소. 나는 몸을 질질 끌듯이 하여 지면에서 일어나 겨우 벽에 기대었소. 몸을 움직 이자, 어깨와 다리가 마치 여러 개의 굵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쑤셨소. 한동안은 숨을 쉴 때마다 몸이 갈라져 산산조각이 나 버릴 듯이 느껴질 정도였다오. 어깨 에 손을 대자 그 부분이 뜨거웠고 부어 올라 있었소.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소.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소. 태양이 마치 무슨 계시처럼 우물 안을 비추었던 것이오. 그 순간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소. 우물은 신선한 빛으로 넘쳤 소. 그것은 빛의 홍수와 같았다오. 나는 숨이 막힐 듯한 밝음에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였다오. 어둠과 차가움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달아나고 따뜻한 햇빛이 내 나 체를 부드럽게 감싸주었소. 아픔조차도 태양에 축복 받은 것처럼 생각되었다오. 내 옆에는 뭔가 작은 동물의 뼈가 있었소. 태양은 그 하얀 뼈도 따뜻하게 비추 고 있었소. 빛 속에서 그 불길한 뼈조차도 나의 따사로운 동료와 같이 느껴졌던 것이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돌 벽을 볼 수 있었소. 그 빛 가운데 있는 동 안 나는 공포와 아픔의 절망까지도 잊어버렸소.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 눈부 심 속에 앉아 있었다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았소. 이윽고 빛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싹 사라져 버렸소. 깊은 어둠이 다시 주위를 덮었소. 그것은 오래 가지는 않았소. 이윽고 빛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싹 사 라져 버렸소. 깊은 어둠이 다시 주위를 덮었소. 그것은 정말 짧은 시간에 일어나 것이었다오. 시간으로 따지면 겨우 10초나 15초의 정도의 일이었다오. 깊은 우물 바닥에까지 태양의 똑바로 비치는 것은 아마 가도 관계로 하루 중에 단지 그 정 도인 것이오. 빛의 홍수는 내가 그 의미를 이해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동안에 사 라져 버렸소. 태양이 사라져 버리자, 나는 전보다도 더 깊은 어둠 속에 있었소. 나는 내 몸 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소. 물도 식량도 무엇하나 없었소. 그리고 단 한 조 각의 천도 몸에 걸치고 있지 않았다오. 긴 오후가 지나고 밤이 찾아왔소. 밤이 되자 기온은 점점 더 떨어졌소. 나는 거의 잠들 수조차 없었다오. 내 몸은 잠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추위는 무수한 가시처럼 내 몸에 박혔소. 내 생명의 심지가 굳어져서 조금씩 죽어 가는 듯했소. 위를 보니 얼어붙은 듯한 별이 보였소. 무서 울 정도로 많은 별이었다오. 나는 그 별이 천천히 이동해 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소. 그 이동으로 시간이 아직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오.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추위와 고통에 눈을 뜨고, 다시 잠이 들고 또 눈을 떴소. 이윽고 아침이 왔소. 원형으로 열린 우물 입구에서 선명하던 별의 모습이 조 금씩 옅어져 갔소. 옅은 아침 빛이 둥글게 떠 있었소. 그러나 날이 새도 별은 사 라지지 않았소. 별은 희미하기는 했지만 언제까지고 그곳에 남아 있었소. 나는 벽돌에 붙은 아침이슬을 핥아서 목마름을 풀었소. 물론 적은 양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하늘의 은혜와 같이 생각되었소. 생각해 보면 나는 꼬박 하루 이상을 물도 마시지 않았고, 식사도 하지 않았소. 그러나 나는 식욕이라는 것을 전혀 느 끼지 못했다오. 나는 우물 바닥에 꿈쩍도 않고 있었소.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 도 없었소. 나는 사물을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오. 그때 나의 절망과 고독 은 그만큼 깊은 것이었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단 지 그곳에 앉아 있었소. 그러나 나는 무의식중에 한 가닥의 빛을 기다리고 있었 다오. 하루 가운데 아주 짧은 시간 이 깊은 우물 바닥에 똑바로 비쳐 들어오는, 눈부신 그 태양 말이오. 원리적으로 말해서, 빛이 직각으로 지표에 비치는 것은 태양이 가장 높은 하늘 한가운데에 있을 때므로, 그것은 아마 정오에 가까운 시 간이었던 것 같소. 나는 단지 그 빛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왜냐하면 그 것 외에 내가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오. 그리고 상당히 긴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되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꾸벅 꾸벅 졸았소. 무엇인가의 기척을 느껴 눈을 떴을 때, 빛은 이미 거기에 있었소. 나는 내가 다시 그 압도적인 빛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소. 나는 거의 무 의식적으로 양손의 손바닥을 크게 벌려 거기에 태양을 받았다오. 그것은 처음보 다 훨씬 강한 빛이었소. 그리고 처음보다 오래 이어졌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 게 느껴졌다오. 나는 그 빛 속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소. 몸 안의 체액이 눈물이 되어 내 눈에서 떨어져 버리는 것 같았소. 내 몸이 액체가 되어 그대로 여기에 흐르는 것 같았다오. 이 멋진 빛의 행복 안에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소. 아 니, 죽고 싶다고까지 생각했소. 그때의 느낌은 지금 무엇인가가 여기에서 멋지게 하나가 되었다는 감각이었소. 압도적이기까지 한 일체감이었다오. 그렇다, 인생 의 진짜 의의라는 것은 이 몇 십초 동안에만 이어지는 빛 안에 존재하는 것이 다, 여기에서 나는 이대로 죽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소. 그러나 그 빛은 역시 싱겁게 사라져 버렸소. 정신이 들었을 때는 나 혼자 그 비참한 우물 바닥에 전과 마찬가지로 남겨져 있었다오. 어둠과 냉기가 마치 그 런 빛 같은 건 처음부터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나를 꽉 사로잡고 있 었소. 내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오. 마치 거대한 힘에게 얻어맞은 듯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소. 나는 내 몸의 존재를 느낄 수조차 없었소. 내가 바 짝 말라 버린 잔해나 빈 껍질 같았다오. 그리고 텅 빈 방 같은 내 머리 속으로 다시 한 번 혼다 하사의 예언이 되돌아왔소. 내가 중국 대륙에서 죽는 일은 없 다는 그 예언 말이오. 저 빛이 와서 사라져 간 지금, 나는 그의 예언을 확실히 믿을 수 있게 되었소. 왜냐하면 나는 죽어야 할 장소에서 죽어야 할 시간에 죽 지 못했기 때문이오. 나는 거기에서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죽을 수 없었던 거요. 알겠소? 그렇게 하여 나는 은총을 잃어버린 것이오.) 마미야 중위는 거기가지 이야기하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지금 이렇게 여기에 있소.)하고 그는 조용히 말 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의 실을 풀듯이 고개를 약간 저었다. (나는 혼다 씨가 말한 대로 중국 대륙에서는 죽지 않았소. 그리고 또한 네 명 중에서 가장 오래 살게 되었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오. 이야기가 길어졌구려. 죽지 못한 노인의 옛날 이야기로, 지루했겠 소.)하고 마미야 중위가 말했다. 그리고 소파에서 앉음새를 고쳤다. (이 이상 오 래 있다가는 신칸센 출발 시간에 늦을 것 같소.) (잠깐 기다려 주세요)하고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마 세요. 그리고서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습니다.) 마미야 중위는 잠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어떻소? 나도 시간이 너무 없으므로, 버스 정류장가지 함께 걸어가지 않겠소? 그 동안에 나머지 이야기를 간단히 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소만.) 나는 마미야 중위와 함께 집을 나와 버스 정류장가지 걸었다. (셋째날 아침에 나는 혼다 하사에게 구출되었소. 우리가 붙잡혔던 밤, 그는 몽 고 병사들이 오는 것을 알고 혼자서 텐트를 빠져나가 줄곧 숨어 있었던 거요. 그때 그는 야마모토가 가지고 있던 서류를 살며시 가방에서 꺼내 갔소. 왜냐하 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서류를 적의 손에 넘겨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 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이오. 몽고 병사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면 왜 그는 우리를 깨워 다 같이 도망가지 않았는가, 왜 그 혼자만 도망쳤는가 하고 당신은 의문스럽게 생각할 거요. 그러나 그렇게 해보았자 우리에게 이길 승산은 전혀 없었소. 그들은 우리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 그곳은 그들의 영토니 사람 수도 장비도 그들이 위겠죠? 그들은 우리를 쉽게 찾아내어 모두 죽 이고 서류를 손에 넣었을 거요. 결국 그 상황에서는 그가 혼자서 도망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오. 혼다 하사의 행위는 전장에서는 명백히 적전 도망이오. 그러나 그와 같은 특수 임무에서는 임기응변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 그는 러시아인들이 와서 야마모토의 가죽을 완전히 벗겨 버리는 것을 보고 있 었소. 그리고 몽고 병사들이 나를 데리고 가는 것도 보고 있었소. 그러나 그는 말이 없었으므로 내 뒤를 바로 뒤쫓아올 수 없었던 거요. 혼다 하사는 걸어서 올 수밖에 없었소. 그는 땅에 묻어 둔 장비를 파내고 거기에 서류를 묻었소. 그 리고 우리의 뒤를 쫓았소. 그렇다고 해도, 그가 우물에 도착한 것은 대단한 일이 었소.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쪽 방향으로 갔는지조차 그는 몰랐기 때문이오.) (어떻게 혼다 씨는 그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겁니까?)하고 나는 물어 보았 다. (그것은 나도 모르오. 그도 그것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소. 그러나 그는 그냥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그는 나를 발견하자 옷을 찢어서 긴 밧줄을 만들어 거의 의식을 잃었던 나를 힘겹게 우물에서 끌어 올렸소. 그리고 그는 어디에선가 말을 가지고 와서 나를 태우고 모래 언덕을 넘 고 강을 건너 만주군의 감시소로 데리고 갔소. 그곳에서 나는 상처를 치료받았 고, 사령부의 트럭에 태워져서 하이랄 병원으로 옮겨졌소.) (그 서류인지 편지인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마 하르하 강 근처의 땅속에 아직 그대로 잠자고 있을 것이오. 나와 혼다 하사에게는 그것을 파내러 갈 여유가 없었고, 그것을 억지로 파내야만 할 이유 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편이 좋다 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했소. 군이 조사를 할 때 우리는 입을 맞춰서 서류 이야 기 같은 것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소. 그렇게 말해 두지 않으면 그 서 류를 가지고 돌아오지 않은 책임을 추궁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오. 우리는 치료 라는 명목으로 엄격한 감시하에 각자의 병실에 격리되어 매일같이 조사를 받았 소. 여러 명의 고급장교가 와서 몇 번이고 같은 이야기를 했소. 그들의 질문은 면밀하고 교활했소.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믿었던 모양이오. 나는 내 가 경험했던 것을 남기지 않고 상세하게 이야기했소. 서류에 관한 것만 주의 깊 게 피했던 것이오. 그들은 내가 말한 것을 기록하고 나에게 이번 일은 김리 사 항이며, 군의 정식 기록에도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일에 대한 모든 것은 일 절 입밖에 내서는 안된다고 말했소. 만약 입밖에 낸 사실이 밝혀지면 무거운 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소. 그리고 2주일 후에 나는 원대 복귀했소. 아마 혼다 씨도 원대 복귀했을 것이오.) (잘 모르겠는데요, 어째서 그 부대에서는 일부러 혼다 씨를 불러들였던 겁니 까?)하고 나는 질문했다. (혼다 씨는 그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소. 아마도 그 는 그것을 타인에게 말하는 것을 금지 당하고 있으며,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편 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그저 그와의 이야기에서 상상한것이오 만, 야마모토라는 남자와 혼다 씨 사이에는 뭔가 개인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 같 소. 그것은 아마도 그의 특수 능력에 관한 것이었을 거요. 육군에는 그와 같은 종류의 특수 능력을 전문으로 하는 부서가 있으며, 전국에서 신비한 힘과 초능 력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소. 혼 다 씨도 그러한 관계로 야마모토와 알고 지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추측하 오. 그리고 실제로 그에게 그와 같은 능력이 없었다면, 내가 있는 곳을 발견해서 나를 정확하게 만주군의 감시소까지 데리고 가는 일은 있을 수 없었을 거요. 지 도나 자석도 없이 그는 헤매지도 않고 곧바로 그곳에 도착했소. 그런 일은 상식 적으로 생각해서 있을 수 없소. 나는 지도의 전문가였소. 그 주변의 지리도 대체 로 알고 있었소. 그러나 그런 나로서도 그런 일은 도저히 못했소. 아마도 야마모 토는 혼다 씨의 그러한 능력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로서 지금도 남아 있소.)하고 마미야 중위는 말했 다. (나는 지금도 여러 가지를 잘 이해할 수 없소. 거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 었던 몽고인 장교는 도대체 누구였는가? 만약 우리가 그 서류를 사령부로 가지 고 돌아왔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우리가 그 서류를 사령부로 가지 고 돌아왔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왜 야마모토는 우리를 하르하 오른쪽 강변에 남겨 두고 혼자서 강을 넘지 않았을까? 그러는 편이 훨씬 쉽게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오. 아니면 혹시 그는 우리를 몽고군의 미끼로 두고 혼자서 도망 갈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어쩌면 혼다 하사는 그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오. 그렇게 때문에 그는 야마모토를 죽게 내버려둔 것일지도 모르오. 어쨌든 그후로 오랫동안 나와 혼다 하사는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 소. 우리는 하이랄에 도착하자 곧바로 따로따로 격리되어, 만나는 것도 말하는 것도 금지되었소.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오. 그리고 그대로 그는 노몬한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본국으로 송환 되었고, 나는 종전까지 만주에 남아 시베리아로 보내졌소. 그가 있는 곳을 알아 낸 것은 내가 시베리아 억류에서 귀국한 몇 년 후였다오. 그리고 그후로 우리는 몇 번인가 만나고 가끔 편지도 주고받았소. 그러나 혼다 씨는 하르하 강 사건을 환제로 삼는 것은 피하는 듯했고, 나 또한 그것에 대해서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았소. 그것은 우리 두 사람에게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오. 우리는 그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오. 아 시겠소?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소만, 내가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내 인생은 아 마도 그 외몽고 사막에 있는 깊은 우물 안에서 끝나 버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오. 나는 하루 중에 10초나 15초동안만 우물 바닥에 비쳐 들어오는 강렬한 빛 속에서 생명의 핵 같은 것을 완전히 태워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소. 그 빛은 나에게 있어서 그 정도로 신비한 것이었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해서, 그후 나는 무엇을 봐도, 무엇을 경험해도, 마음 저변에서는 아 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오. 소련군의 대전차 부대를 앞에 두었을 때 도, 왼팔을 잃었을 때도, 지옥과 같은 시베리아 수용소에 있었을 때도, 나는 어 떤 종류의 무감각 속에 있었소. 이상한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은 이미 아 무래도 좋았소.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는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오. 그리고 아마 나는, 그때 느꼈듯이, 그 빛 속에서 숨이 끊어져 죽어 버렸어야 했소. 그때가 내 가 죽을 때였소. 그러나 혼다 씨의 예언대로 나는 거기에서 죽지 않았소. 아니면 죽을 수 없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오. 나는 한쪽 팔과 12년이라는 귀중한 세월을 잃고 일본으로 돌아왔소. 히로시마 에 돌아왔을 때, 부모님과 여동생은 없었소. 여동생은 징용으로 끌려가 히로시마 공장에서 일하다가 원폭 투하로 죽었소. 아버지도 그때 마침 동생을 만나러 가 셨다가 역시 숨을 거두셨소.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몸져누워서 1947년에 돌아가 셨소. 좀전에 이야기했듯이, 내가 혼약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여성은 다른 남 자와 결혼하여,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오. 묘지에는 내 묘가 있었소. 나에게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오. 나는 내가 정말 텅 빈듯이 느껴졌 소. 여기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소. 그후 지금까지, 나는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오. 나는 사회 과목 선생이 되어 고등학교 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소. 그러나 살아 있었다고는 할 수 없소. 나는 나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역할을 하나 또 하나 해왔던 것뿐이오. 나에게는 친구라고 부 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학생들과의 사이에서도 인간적인 인연 같은 것은 없었소.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 떠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던 것이오. 눈을 감으면 살아 있는 채로 가죽이 벗 겨져 간 야마모토는 내 꿈속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죽이 벗겨지고 빨간 살 덩어리로 변해 갔소. 그의 비통한 비명을 또렷이 들을 수 있었소. 그리고 나는 몇 면이고 내가 우물 바닥에서 살아 있는 채로 완전히 썩어 버리는 꿈을 꾸었 소. 때로는 그것이 현실이고, 이러고 있는 내 인생의 꿈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 소. 혼다 씨가 하르하 강에서 내가 중국 대륙에서 죽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듣고 나는 기뻤소. 믿고 믿지 않고는 들째치고 그때의 나는 어떤 것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오. 아마 혼다 씨는 그것을 알고 내 마음을 안심시키 기 위해서 가르쳐 주었을 거요. 그러나 실제로 거기에는 기쁨 같은 것은 아무것 도 없었소. 일본에 돌아온 후 나는 계속 빈 껍질을 살았소. 그리고 빈 껍질처럼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것은 정말로 산 것이 아니고 빈 껍질의 인생에 불과하오. 내가 오카다 씨에게 이해 받고 싶은 것은 실은 그것뿐이오.) (그럼 마미야 선생님의 귀국하고 나서 한 번도 결혼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하고 마미야 중위는 말했다. (아내도 없고, 친형제도 없소. 정말이 지 나 혼자입니다.) 나는 조금 망설이지 나서 이렇게 질문해 보았다. (선생님은 혼다 씨의 예언 같 은 것을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마미야 중위는 잠깐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오. 혼다 씨는 그것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르오. 나는 그 것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르오. 혼다 씨가 그때 말했듯이, 운명이라는 것 은 나중에 뒤돌아보는 것이지 미리 아는 것은 아닐 것이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금에 와서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요. 지금 나는 단지 살아간다는 책무를 수 행하고 있을 뿐이오.) 버스가 오자 마미야 중위는 나에게 깊숙히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내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소)하고 마미야 중위는 말했다. (여 러 가지로 고맙소. 어찌되었든 당신에게 그것을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이오. 이 것으로 겨우 일단락된 듯하오.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겠소.) 그는 왼팔의 의수 와 오른손을 이용하여 재주 좋게 잔돈을 꺼내 버스 요금 함에 넣었다. 나는 그곳에 서서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버스가 보이지 않자 나는 기묘하리만큼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모르는 동네 에 혼자 내버려진 어린아이 같은 처량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거실 소파에 앉아 혼다 씨가 유품으로 나에게 남 긴 보자기를 열어 보았다. 여러 겹으로 단단하게 싸여진 종이를 힘들게 벗기자 탄탄한 판지상자가 나왔다. 커티샥 증정용 상자였다. 그러나 그 내용물이 위스키 가 아니라는 것은 무게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텅 빈 상자였다. 혼 다 씨가 나에게 남겨 준 것은, 단지 빈 상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