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감는새 지은이: 무라카미하루키 옮긴이: 윤성원 출판사: 문학사상사 봉사자: 한양대학교 윤재섭, 삼력환경 고미숙 작품해설(진형준: 문학평론가, 홍익대 교수 작지만 거대한 사랑의 노래 작은 존재의 엄청난 의미 깨닫기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상실의 시대라고 개명되어 소 개된 노르웨이의 숲》등 그의 많은 작품들이 우리 나라에서 많은 독자를 확보했 으며, 심지어는 우리 나라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 고, 언젠가 한 번 읽어 보리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현시키지는 못했 던 것이다. 그러는 차에 그의 신작 태엽 감는 새를 읽고 나는 꽤 감동했다. 그리고 그가 단순히 젊은 세대들과만 호흡을 맞추는 소위 인기 작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 인했다. 태엽 감는 새는 가벼운 터치의 읽을 거리가 결코 아니었다. 삶에 대한 진지 한 성찰, 사랑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등이 상징성을 띤 채 녹아 있었으며, 또한 독자를 깊숙이 빨아들이는 소설적 재미가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의 재미와 의미, 상직적 구조 등을 밝히려면 따로 한 편의 본격적인 평 론이 필요할 만큼 태엽 감는 새라는 작품의 구성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이 글의 성격상 우리는, 그 단순한지 않은 작품을 비교적 단순화하여 읽어 낼 수밖에 없다. 표면상으로만 본다면 태엽 감는 새의 이야기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여기 나 이 서른에 이르러 실직한 ‘오카다 도루’라는 한 사내가 있다. 그리고 그의 아 내 ‘오카다 구미코’는 건강 식품이나 자연식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잡지의 편 집 사원이다. ‘오카다 도루’라는 개인의 장래성이나 사회적 신분은 보잘것없으며, 구미 코의 아버지는 「일본이라는 사회 속에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 이라도 우수한 성적을 받아 한 사람이라도 더 밀어내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들의 결혼은 축복받은 결혼일 수 없다. 그들은 그들만의 힘으로 보금자리를 지켜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있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들만의 힘’이라는 표현 대신에 ‘그들만의 사랑’이라 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욱 적합하리라. 그리고 사실상 그들은 ‘그들만의 보금 자리’꾸미기에 어느 정도 성공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뚜렷한 이유 없이 법률 사무소를 그만두고 실직자가 된 ‘오카다 도루’에게 구미코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으며 구태여 취직 자리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여 둘만의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 풍파를 헤쳐 나가는 이야 기가 계속 전개된다면, 이 소설은 아마도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작지 만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작은 존재의 작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한없이 작아 보이는 존재, 「내 편에 내기를 걸 사 람은 이 주위에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 세상 속에 서 패배한 존재가, 그 작은 존재 자체의 엄청난 의미, 전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의미를 스스로 깨달아 그 의미 자체로 이 세계와 당당히 맞서게 되는 과정을 그 리고 있다. 그 모습은 자신이 하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반성 후에 무언가 크고 의미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깨닫는 모습이 아니라, 하찮음 자체 안에서 그 하찮음의 큰 의미를 각성하는 모습이다. 새로운 탄생의 과정에서 모색되는 삶에 대한 성찰 태엽 감는 새가 상식적으로는 얼마나 하찮은 존재들의 하찮은 삶의 모습, 언제 나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까. ‘오카 다 도루’와 ‘오카다 구미코’는 그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 것이며, 어느 날 느 닷없이 가출한 구미코를 찾는 오카다의 이야기는 실상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하찮은 이야기의 뒤안에서 작가는 이런 의미 심장한 말을 작품의 앞뒤에 던져 놓고 있다. 누군가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진지하게 노력을 거듭하면 상대의 본질 에 얼마만큼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에 관하여 그에게 정말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있는 것일까? 구미코는 그 어둠의 방에 갇혀서 구출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는 사실은 나 를 절실히 필요로 했으며, 격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형태를 바꿔서 필사적으로 무엇인가 큰 비밀 같은 것을 나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태엽 감는 새는 실은 바로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존재,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았지만 둘만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이겨 나가야 하는 존재가 진정으로 가까워 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며, 둘이 온전히 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라는 외적인 조건에 대한 자각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내부로부터의 새로운 탄생이 필수 불가결함을 보여 주는 소설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그 간단하게 말해 버린 새로운 탄생의 과정은 물론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이 소설의 진정한 재미는, 그 새로운 탄생의 과정에서 모색되는 삶에 대한 성찰, 오늘날의 삶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이 건조하고 메마른 상실의 시대에서 그 하 찮은 삶의 새로운 탄생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한 성찰 등에 있다. 우선 ‘오카다 도루’가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 ‘오카다 도루’자신이 「나의 인생은 틀림없이 기묘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고양이가 사라졌다. 이 상한 여자로부터 알 수 없는 전화가 걸려 왔다. 이상한 여자 아이와 알게 되어 골목에 있는 빈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와타야 노보루가 가노 구레타를 범했다. 가노 마루타가 넥타이의 출현을 예상했다」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오카다의 주 변에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잇달아 일어난다. 우리는 이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복접하게 말할 것도 없이 말 그대 로 비현실적인 사건들이다. 아니, 비현실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되는 사건들이 다. 왜 비현실적인 사건들일까?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소설의 앞·뒤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서사 적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공간이다. 객관적으로 변화하는 외부의 현실을 두 축 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 이전의 마음과 그 이후를 두 축으로 하고 있다. 그 두 축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현실적으로 장엄한 드라마가 아니라, 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심리 드라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심리 드라마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일 수밖 에 없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잠깐 시간을 두고, 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 어지는 심리 드라마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사실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자는 결코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없으며, 남의 마음을 읽으려면 스스로를 비현실적 상상의 공간에 두어 야만 한다. 그 말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오카다 도루’가 겪게 되는 비현실적 사건 들, 그가 헤매게 되는 비현실적 공간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헤매는, 비현실 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공간은 인간의 마음의 공간에 다름아니며, 그 공간을 통 과해야만 그는 구미코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이다. 남의 마음에 가닿는다 는 것은 현실·비현실의 벽을 자유 자재로 넘나들며, 깊은 우물 속에서도 하늘 을 나는 새 같은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방의 어둠 속으로 복도의 빛이 확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벽 속으로 미 끄러져 들어갔다. 벽은 마치 거대한 젤리처럼 차갑고 물컹물컹했다. 맙소사, 나 는 벽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벽을 통과하는 나에게는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는 태엽을 감을 수 없는, 소리 없는 태엽 감는 새로서 잠시 여름 하 늘을 날아 보기로 했다. 하늘을 나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나의 몸은 어느새 하늘을 나는 기술을 터득하여 큰 힘 들이지 않고 자유 자재로 하늘 을 날아다녔다. 자신이 바로 이 세상의 태엽 감는 새임을 자각 우리는 그 비현실적 공간에서 ‘오카다 도루’가 만나는 여인들을, 실은 현실 속의 ‘구미코’의 마음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분신들로 이해해야 한다. 그가 겪은 경험들은, 그 분신들을 통해 그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데 필요한 하 나의 통과 제의다. 그가 수영장의 풀에서, 「그 우물은 세계의 모든 우물 가운데 하나며, 나는 세계의 모든 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한 것은, 그 새로운 탄생을 통해 그가 이제는 이 우주 속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하찮은 미물이 아 니라, 이 우주의 탄생 자체를 압축시켜 놓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했음을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바로 이 세상의 ‘태엽 감는 새’임을 자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태엽 감는 새는 실존하는 새요.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도 잘 모르오. 나도 실 제로 그 새를 본 적은 없으니까. 소리만 들었을 뿐이오. 태엽 감는 새는 주변의 나뭇가지 위에 앉아 조금씩 세계의 태엽을 감는 거요. 끼이이익, 하는 소리를 내 면서 태엽을 감소. 태엽 감는 새가 태엽을 감지 않으면 세계는 움직이지 않아요.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훌륭하고 복잡하고 거 대한 장치가 빈틈없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그렇지 않소. 사실은 태엽 감는 새가 여러 장소로 가, 가는 곳곳마다에서 조금씩 조그마한 태엽을 감 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거요. 나는, 작은 것, 작게 사랑하는 것의 이렇듯 당당한 권리 선언을 읽은 적이 없 다. 그리고, 하찮은 존재인 자신이 바로 그 태엽 감는 새임을 자각하는 과정을, 현실·비현실, 삶·죽음, 비상·하강의 우주적 경험 후의 재탄생으로 이토록 웅 장하게 묘사한 작품을 본 적이 없다. 그런 후, 「여기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적인 세계입니다. 강해지지 않고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어떤 작은 소리도 흘려 보내지 않도록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라든지, 「거기에서는 누 군가가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 소리가 되지 않는 소리로. 말이 되지 않는 말로」라는 잔잔한 사랑의 속삭임으로 끝을 맺은 작품 을 본 적이 없다. 그 잔잔한 사랑의 속삭임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엄청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그 통과 제의를 이 소설과 함께 독자 여러분이 겪게 되기를... 눈부신 햇살이 모든 별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옮긴이의 말 거대한 세계 속의 나, 그 무력감과 고독감 얼핏 보면 이 작품에는 흐름이라는 게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소 극 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의 나열과 추상적인 비유들이 때로는 독자들을 곤혹 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장편 소설을 읽고 난 후에는 분명 어떤 종류의 가 슴 떨리는 감동이 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태엽 감는 새’라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창조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접근하고 있다. 태엽 감는 새를 통해 그는 우리 평범한 이웃들의 모습을 그려 주며, 그들의 활약을 이야기해 주고자 한다. 우리 현대인은 거대한 세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무력감과 고독감 따위를 나날이 절감하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커다란 조직 안에 자신이 존재하고,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건 어떠한 명령과 규율에 의하여 자신 이 움직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세계는 소수의 사람에 의해 움직여지고, 또한 그들이 이 사회를 존속시켜 나간다는 망상 아닌 망상에까지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 서 나는 더욱더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어간다. 어쩌면 나는 이 세계에 서 아무 의미도 없는 인간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진정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고 지탱해 나가는 것은 우리 같은 그저 평범한 인간들임을 이 소설은 일깨워 준다. 기본적으로 작가는 오늘날의 사회를 혼란과 어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추 상적이자만 분명히 느껴지는 상하의 움직임, 그 안에 있는 불합리성과 부조리, 그로 인한 절망 내지는 불안감, 분노,또한 인간의 거역할 수 없는 유한성. 그러 한 우리들의 고뇌까지도 대변해 주고자 한다. 한편으론, 죽음과 삶을 오가는 깊디깊은 우물 바닥, 그리고 전쟁이라는 상황 을 설정함으로써 우리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역설도 빠뜨리지 않 는다. 사랑으로 찾은, 잃어버렸던 나 이 작품에서도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인간에 대한 포용력을 엿볼 수 있다. 그다지 대단치 않은 상황들, 뚜렷한 근거조차 없어 보이는 현대인들의 삶 에 대한 망설임과 고뇌를 부드럽게 이끌어 내고, 그것들을 결코 몰아세우거나 추궁하지 않는다. 인간이므로 가질 수 있는 나약함, 자신이라는 존재의 불확실함 을 감싸 주고 위로해 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는 여러 가지를 고발하고 있다. 전후 작가인 그는 노몬한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 과거 일본이라 는 나라가 저지른 전쟁의 참상과 무의미함을 역설한다. 또한 그로 인해 인간이 멸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을 젊은 독자들에게 상기시켜 준다. 지극히 이중 구조인 오늘의 현실, 세계가 다양화될수록 더욱 근시안이 되어 가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말한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관을 상실해서는 안된다고. 그리고 그 러한 상황에 무감각해져서도 안된다고. 상실을 인정해서는 더욱 안되며,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된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우리가 혈안이 되어 추구하는 것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 거대한 세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카다 도루’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휴식을 안겨 주는 인물이었다. 남보다 뛰어나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강박 관념과 그런 현실에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현대인.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오카다 도루 같은 사람이 대다수다. 눈에 띄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저버리지 않고 지 켜 보며 이 시점에도 삶을 사랑하고자 애쓰고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고 나서 나는 살아간다는 의미를 다른 방향에서 조 명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평범한 나의 이웃들을 가슴을 열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또한 ‘나’라는 평범한 존재도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눈부신 햇살이 모든 별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1. 화요일의 태엽 감는 새 여섯 개의 손가락과 네 개의 유방에 대하여 부엌에서 스파게티를 삶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나는 FM 방송에 맞추어 로시 니의 <도둑 까치> 서곡을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그것은 스파게티를 삶는 데 안성맞춤인 음악이었다. 전화 벨 소리가 들렸을 때 무시해 버릴까 생각했다. 스파게티가 다 삶아지기 직전이었고,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지금 런던교향악단을 그 음악적 절정 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가스불을 줄이고 거실로 가서 수화 기를 들었다. 혹시 새로운 직장 관계로 아는 사람이 전화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분만 시간을 주세요."갑자기 여자가 말했다. 나는 사람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데는 꽤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낯선 목 소리였다. "실례지만 어디에 전화하셨습니까?"하고 나는 예의바르게 물어 보았 다. "당신에게 걸고 있어요.10분이면 되니까 시간을 주세요.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될 예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서로를 이해한다?" "마음을 말예요." 나는 문에서 목을 빼고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스파케티를 삶는 냄비에서는 하 얀 김이 솟아오르고, 아바도는 <도둑 까치>의 지휘를 계속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스파게티를 삶는 중입니다. 나중에 다시 걸어 주시겠습니 까?" "스파게티라고요?"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침10시 반에 스카게티 를 삶고 있어요?" "그건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소? 몇 시에 무엇을 먹건 내 마음이오."나는 약 간 발끈해지며 말했다. "그건 그렇네요."여자는 감정이 없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미세한 감정의 변화로 목소리의 톤이 변한 것이다."아아,알았어요.나중에 다시 걸게요." "잠깐 기다려요."나는 급하게 말했다. "뭔가를 팔려고 한다면 몇 번 전화해도 허사일 거요. 난 지금 실직 상태라서 뭔가를 새로 살 만한 여유 같은 건 없으니 까요."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알고 있다니 무엇을 말이오?" "당신이 실직 상태라는 것. 그러니까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파게티나 빨 리 삶는 게 어때요?" "이봐요,당신은 도대체……"하고 내가 말을 꺼냈을 때 전화는 끊겼다. 끊는 것 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감정을 추스리지 못해 손에 든 수화기를 얼마 동안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내 스파게티 생각이 나서 부엌으로 갔다. 그리곤 가스불을 끄고 스파게티를 소쿠리 에 건졌다. 스파게티는 전화 때문에 너무 퍼져 있었으나,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 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그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생각했다. 10분이면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니, 그 여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난 전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또는 새로운 상술일지 도 모르지.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런데도 거실의 소파로 돌아와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을 읽으면서 전화기를 이 따금씩 보고 있자니, 그 여자가 말한 10분 동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무 엇인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10분 동안 도대체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 여자는 애초부터 시간을 10분 으로 한정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한정된 시간 설정에 대해서 상당히 확 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9분으로는 너무 짧고, 11분으로는 너무 길 지도 모른다. 마치 적당하게 삶아진 스파게티의 알 덴테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책 읽을 기분도 사라졌다. 나는 셔츠를 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면 나는 늘 셔츠를 다린다. 옛날부터 쭉 그래 왔 다. 셔츠 다림질 공정을 나는 전부 열둘로 나누고 있다. 그 공정은 옷긱(앞)에서 시작하여 왼쪽 소매, 커프스로 끝난다. 나는 하나하나 번호를 매기면서 순서대로 다림질을 해나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 다려지지 않는다. 셔츠 세 장을 다리고 구김이 펴진 것을 확인한 후에 옷걸이에 걸었다. 다리미 의 스위치를 끄로 다리미대화 함께 옷장에 넣자, 머리 속이 어느 정도 상쾌해졌 다. 물을 마시려고 부엌으로 가려는 찰나, 또 전화 벨이 울렸다. 조금 망설였으나, 역시 수화기를 들기로 했다. 그 여자가 다시 건 것이라면 지금 다림질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고 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전화를 건 것은 아내 구미코였다. 시계 바늘은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잘 있었어요?"하고 아내가 말했다. "잘 있지."하고 나는 대답했다. "뭘 하고 있었어요?" "다림질을 하고 있었어." "무슨 일 있었어요?"아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혼란스러 울 때면 내가 다림질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셔츠에 다림질을 했을 뿐이야. 아무 일도 없어."나는 의자에 앉으며 왼손 에 들고 있던 수화기를 오른손으로 바꿔 들었다. "그런데, 무슨 특별한 용건이라 도 있어?" "당신, 시 쓸 수 있죠?" "시?"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시? 시라니 무슨 얘기야, 도대체? "아는 잡지사에서 소녀 취향의 소설 문예지를 출판하고 있는데, 잡지사에 투고 한 시를 심사하고 첨삭할 사람을 찾고 있대요. 그리고 속표지용의 짧은 시도 매 달 한 편씩 써주기를 원하고요. 간단한 일치고는 보수도 나쁘지 않아요. 물론 아 르바이트 수준이지만, 그게 잘되면 편집 일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간단하다고?"하고 나는 말했다. "잠깐 기다려 봐. 내가 찾고 있는 일은 법률 관계의 일이잖아. 도대체 어디서 시의 첨삭 같은 이야기가 나온 거야?" "당신 고등학교 때 뭔가 썼다고 했잖아요?" "신문이야. 고등학교 신문. 축구 대회에서 어느 반이 우승했다든지, 물리 선생님 이 계단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했다든지, 그런 별 볼일 없는 기사를 썼을 뿐이 야. 시가 아니란 말이야. 난 시 같은 건 쓸 줄 몰라." "하지만 말이 좋아 시지, 그래 봤자 여고생들이 읽는 시란 말예요. 문학사에 길 이 남을 시를 쓰라는 건 아니잖아요. 적당히 하면 된단 말예요." "적당히든 뭐든 난 시 같은 건 절대 못 써. 써본 적도 없고, 쓸 생각도 없다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걸 쓸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래요?"하고 아내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법률 관계 일이라고 해도 그런 일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여러 곳에 말해 놓았어. 이제 슬슬 회답이 올 거야. 그게 안되면 그때 가서 또 생각해 보지." "그래요? 그렇다면 됐어요. 그런데 오늘 무슨 요일이더라?" "화요일."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그럼 은행에 가서 가스 요금과 전기 요금을 내줄래요?" "조금 있다 저녁 시장 보러 나갈 거니까 그때 은행에 들르지." "저녁은 뭘로 할 건데요?" "아직 정하지 않았어. 시장에 가서 생각하지." "있잖아요"하고 아내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당신 급하게 일을 찾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어째서지?"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온 세상의 여자가 나를 놀래 주기 위해서 전화를 걸어 오는 것 같다. "조만간 실직 보험도 끊긴단 말야. 언제까지고 빈둥 빈둥 놀고 있을 수는 없잖아." "하지만 내 월급도 올랐고, 부업도 순조롭고, 저금해 놓은 것도 있으니까, 사치 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잖아요. 지금처럼 당신이 집에서 집안일 하는 것이 싫어요? 그런 생활이 당신에겐 더 재밌지 않아요?" "모르겠어"하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로 나는 잘 모르겠다. "천천히 생각해 봐요"하고 아내는 말했다. "그런데 고양이는 돌아왔어요?" 그 말을 듣자 오늘 아침부터 고양이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는데에 생각이 미쳤 다. "아니,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근처를 좀 찾아봐 줄래요? 사라진 지 벌써 1주일이 지났어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수화기를 다시 왼손으로 바꿔 들었다. "혹시 골목 안 빈집의 정원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 새의 석상이 있는 정원 말예 요. 거기에서 몇 번 본 적이 있거든요." "골목이라고?" 나는 말했다. "당신 언제 골목 같은 데에 갔었지? 그런 얘긴 여 태까지 단 한 번도……." "여보, 미안하지만 전화 끊을게요.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고양이 좀 부탁해요."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나는 또다시 얼마간 수화기를 바라보다 가 그것을 내려놓았다. 어째서 구미코가 골목에 갔어야 했나? 나는 생각했다. 골목에 들어가기 위해서 는 정원에서 벽돌 담장을 넘어야만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골목에 갈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부엌에 가서 물을 마시고 툇마루로 나가 고양이의 밥그릇을 살펴보았으나, 그릇 안의 멸치 조림은 어젯밤 내가 거기에 넣어 둔것에서 한 마리도 줄지 않았다. 역시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툇마루에 선 채로 초여름의 햇살이 비치는 우리 집의 좁은 정원을 바라보 았다. 바라본들 마음이 가라앉는 그런 정원은 아니다. 하루 중 햇살은 잠시 동안 만 비치기 때문에 흙은 항상 까맣게 습기 차 있고, 정원수라고 해봤자 구석에 신통치 못한 수국이 두 그루인가 세 그루 있을 뿐이다. 더구나 나는 수국이라는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근처 나무숲에서 마치 태엽을 감는 듯한 '끼이이 이익' 하는 규칙적인 새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는 그 새를 '태엽 감는 새'라고 불렀다. 구미코가 붙인 이름이다. 본래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떤 모양 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태엽 감는 새는 매일 그 근 처의 나무숲에 찾아와서 우리가 속해 있는 조용한 세계의 태엽을 감았다. 어휴, 또 고양이를 찾아 나서야 하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원래 고양이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고양이도 좋아했다. 하지만 고양이에게는 고양이가 사는 방 식이 있다. 고양이는 결코 바보스런 동물이 아니다. 고양이가 없어졌다면, 그건 고양이가 어딘가로 가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배가 고프고 녹초가 되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구미코를 위하여 고양이를 찾아 나설 것이다. 어차피 따로 할 일도 없다. 4월 초경에 나는 그동안 근무해 왔던 법률 사무소를 그만두었는데, 그건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일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마음 이 설레일 정도로 각별히 마음에드는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급료도 나쁘 지 않았고 직장 분위기도 괜찮았다. 법률 사무소에서 내가 하는 일은, 한마디로 말하면 전문적인 심부름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일을 잘해 왔다고 생각한다.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좀 뭣하지만, 일의 실제적인 업무 수행에 있어서 나는 꽤나 유능한 사람이었다. 빠 른 이해력, 민첩한 행동, 그리고 불평을 하지 않았으며, 사고 방식이 현실적이었 다. 그래서 내가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 노(老)선생님―법률 사무소의 주인인 부자(父子) 변호사 중 아버지 쪽이다―이 급료를 조금 더 올려 주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 사무소를 그만두었다. 그만두고 무엇을 하겠다는 뚜렷한 희망이나 전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집에 처박혀서 사법 시험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귀찮은 일이었으며, 더군다나 지금에 와 서 변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앞으로 그 사무소에서 그 일을 계 속할 생각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만일 그만둔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오래 있게 되면 내 인생은 아마도 거기에서 어느결에 끝나 버리게 될 것이다. 여하튼 나는 벌써 서른이 된 것이다. 저녁 식사 때 "회사를 그만두려고 생각하는데……"하고 이야기를 꺼냈는데, 구 미코의 반응은 "글쎄요"가 전부였다. 그"글쎄요"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였는지 나 로서는 잘 알 수가 없었으나, 아내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잠자코 있자"당신의 인생이잖아요. 당신 마음내키는 대로 하면 돼요."그리곤 그뿐, 아내는 생선 가시를 젓가락으로 접시 모퉁이에 발라 놓기 시 작했다. 아내는 주로 건강 식품이나 자연식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잡지의 편집 일을 하 며, 그런 대로 괜찮은 급료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잡지사에서 편집 일을 하고 있는 친구로부터 웬만큼의 삽화를 부탁받아(아내는 학생 시절 디자인 공부 를 했으며, 아내의 꿈은 프리랜서 삽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 수입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도 실직 후 얼마 동안은 실직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 가 내가 집에서 매일 집안일을 제대로 한다면 외식비나 세탁비 같은 지출을 줄 일 수 있으므로, 내가 회사에 다니거나 그렇지 않거나 생활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시장에서 돌아와 냉장고에 식료품을 넣고 있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벨은 무 척 애타게 울리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플라스틱 팩을 반쯤 벗긴 두부를 테이블 위에 놓고 거실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이제 스파게티는 끝났을까요?"아까 전화했던 여자가 말했다. "끝났소"하고 내가 대답했다."하지만 이제부터 고양이를 찾으러 가야 하오." "하지만 10분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겠죠? 고양이를 찾으러가는 건 스파게티 를 삶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왜 그런지 전화를 끊어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여자의 목소리에는 뭔가 내 주의 를 끄는 것이 있었다. "그러죠, 10분 정도라면야." "그럼 우린 서로를 알 수 있겠네요?"하고 여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가 수화기 저쪽에서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다리를 꼬고있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건 어떨런지?"하고 나는 말했다."어쨌든 10분이니까." "10분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길지도 몰라요." "댁은 정말로 나를 알고 있소?"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물론이죠. 몇 번이나 만났는걸요." "언제,어디서?" "언젠가, 어디선가"하고 여자는 말했다."그런 걸 일일이 당신에게 설명하자면 10분은 모자라요. 중요한 건 지금이에요. 안그래요?" "하지만 뭔가 증거를 보여 줄 순 없을까? 댁이 나를 알고 있다는 증거를." "이를테면?" "내 나이는?" "서른"하고 여자는 즉시 대답했다. "서른하고 2개월. 이제 됐어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분명 이 여자는 나를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 도 이 여자의 목소리는 기억에 없다. "그럼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상상해 보세요."여자는 유혹하듯이 말했다."내가 어떤 여자인지 목소리로 상상하는 거예요. 몇살 정도고, 어디서 어떤 모습을 하 고 있는지, 그런 거 말예요." "모르겠어"하고 나는 말했다. "시험해 봐요." 나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 1분 5초밖에 지나지 않았다. "모르겠어"하고 나 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럼 가르쳐 드릴게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나는 지금 침대속에 있어요. 방금 샤워를 끝내고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아요." 맙소사, 이건 순전히 포르노 테이프잖아. "뭔가 속옷을 입는 편이 좋을까요? 아니면 스타킹이 나을까요? 얘기해 보세요." "뭐든 상관없소. 댁이 좋을 대로 하시오. 무언가를 입고 싶거든 입고, 알몸이 좋 으면 그래도 상관없고. 허나, 미안하지만 내겐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취미 가 없소. 나에게는 해야 할일도 있고……." "10분이면 돼요. 나에게 10분을 쓴다고 해서 당신 인생에 치명적인 손실이 가해 지는 건 아니잖아요? 하여튼 내 질문에 대답해 줘요. 알몸인 채가 좋아요? 아니 면 뭔가 걸치는 편이 좋아요? 나, 여러 가지 가지고 있어요. 까만 레이스 속옷이 라든지." "그 상태로 좋소"하고 나는 말했다. 이제 4분이 지났다. "음모가 아직 젖어 있어요."여자는 말했다. "수건으로 제대로 닦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아직 젖어 있어요. 따뜻하고 촉촉이 젖어 있어요. 굉장히 부드러운 음모 예요. 새까맣고 부드러워요. 만져 봐요." "이봐요, 미안하지만……." "그 아래쪽도 따뜻해요. 마치 데운 버터 크림처럼 말예요. 굉장히 따뜻하단 말 예요. 정말이에요. 나,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왼쪽 다리를 옆으로 벌리고 있어요. 시계 바늘로 말하자면 10시 5분 정 도." 목소리의 상태를 보니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녀는 정말로 양다리를 10시 5분 각도로 벌려 성기를 따뜻하게 적시고 있 는 것이다. "입술을 만져 줘요. 천천히 말예요. 그리곤 열어요. 천천히요. 손가락 등으로 천 천히 만져 줘요. 그래요, 아주 천천히요. 그리고 다른 손으로 유방을 만져 줘요. 아래쪽에서부터 부드럽게 쓰다듬어 유두를 살짝 꼬집어요. 그걸 몇 번이고 되풀 이해 줘요. 내가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소파에 드러누워 시계를 바 라보면서 한숨을 크게 쉬었다. 전화로 그 여자와 이야기한 시간은 5분이나 6분 정도였다. 10분쯤 후에 또다시 전화 벨이 울렸으나, 이번에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벨은 열다섯 번 울리고 그리고 끊겼다. 벨이 멈추자 깊고 차가운 침묵이 주위를 감돌 았다. 2시가 채 안되었을 때 정원 벽돌담을 타넘어서 골목길로 내려갔다. 골목이라고 했지만 그곳은 본래적인 의미의 골목은 아니다. 솔직히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는 그곳을 나타낼 만한 정확한 명칭이 없다. 그곳은 ‘길’이라고조차 하기 힘들다. 길이란, 입구와 출구가 있고, 그곳을 따라가면 적당한 장소에 이르는 통 로인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입구도 출구도 없으며 양끝은 그 더이상 더 갈 수도 없게 되어 있다. 그곳은 막다른 골목이라고도 할 수 없다. 적어도 막다른 골목에는 입구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을 이웃 사람들이 편의상 골목이라 부르고 있을 뿐이다. 골목은 집들의 뒷마당 사이를 누비듯이 약 200미터 가량 이어져 있다. 폭은 1미터가 조금 넘지만, 울타리가 촘촘히 쳐져 있고 여러 가지 물건이 길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몸을 옆으로 하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곳 도 몇 군데나 된다. 아주 싼값에 우리에게 집을 빌려 준 삼촌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이곳에도 입구와 출구가 있어서 길과 길을 연결시키는 지름길로서의 기능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어 예전에 공터였던 장소에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 하면서부터 밀리듯 길의 폭은 훨씬 좁아졌고, 주민들도 자기 집의 처마끝이나 정원 뒤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 작은 길은 어느 틈엔 가 입구가 막혀 버렸다. 처음에는 그냥 조그마한 울타리 같은 것으로 눈가림을 한 정도였으나, 주민 한 사람이 정원을 넓히며 벽돌담으로 입구를 완전히 막아 버리자,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다른 한쪽의 입구도 탄탄한 철조망으로 개도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아 버렸다. 원래 그 길을 그다지 통로로 이용하지 않았기 에 주민들은 양쪽의 입구를 막았다고 해서 크게 불평하지 않았고, 치안을 위해 서도 그편이 더 좋았다. 그래서 그 길은 지금 버려진 운하와 같이 되어, 이용하 는 사람 없이 집과 집을 분리시키는 완충 지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땅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곳곳에 거미가 끈적끈적한 거미집을 치고 있다. 어떤 목적으로 아내가 그런 곳에 몇 번이나 드나들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 다. 나도 여태껏 두 번밖에 그 ‘골목’을 걷지 않았으며, 구미코는 그렇지 않아 도 거미를 싫어한다. 어쨌든 좋아, 하고 생각했다. 구미코가 골목에 가서 고양이 를 찾으라고 하면 나는 찾겠다. 집에서 전화 벨이 울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바깥을 돌아다니는 편이 훨씬 낫다. 묘하게 선명한 초여름 햇살이 머리 위로 내뻗은 수목 가지를 도로의 지면에 드 리우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탓인지 그 그림자는 지표에 고정된, 어찌할 수 없는 얼룩처럼 보였다. 주위는 너무나 조용하여 풀잎이 햇살을 받아 호흡하는 소리까 지 들릴 것만 같았다. 하늘에는 몇 점의 작은 구름이 떠 있었는데, 그것들은 마 치 중세의 동판화 배경처럼 선명하고 간결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한 탓에 내 육체가 왠지 망망하여 종잡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리 고 무척이나 더웠다. 티셔츠에 얇은 면바지, 그리고 테니스화 차림이었으나, 양지를 오래 걷고 있자 니 겨드랑이 밑이나 가슴 사이에는 땀이 배기 시작했다. 티셔츠와 바지는 아침 에 여름 옷을 넣어 둔 상자에서 꺼냈기 때문에 방충제 냄새가 코를 톡 쏘았다. 주변의 집들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들과 새로 지어진 것들이 명확하게 나누 어져 있었다. 새로 지어진 집들은 대개 크기가 작으며 정원도 좁았다. 빨랫대가 골목까지 나와 있어 수건이나 셔츠, 침대보의 행렬을 빠져 나가듯이 걸어 나가 야 한다. 처마끝에서 텔레비전 소리나 수세식 변소의 물 소리가 뚜렷이 들려 오 는 일도 있으며, 카레를 끓이는 냄새가 풍겨 오기도 한다. 거기에 비하면 오래 된 집에서는 생활의 냄새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울타리 에는 눈가림용으로 각양 각색의 관목이 효과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 사이 사이 손질이 잘된 정원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집의 뒤뜰 구석에는 갈색으로 시들어 버린 크리스마스 트리가 오도카니 놓여 있었다. 다른 어떤 집에는 몇 명분은 되어 보이는, 소년기의 흔적들을 모아 놓은 듯한, 온갖 어린이 놀이도구가 진열되어 있었다. 세발 자전거, 고리 던지기, 플라스틱 칼, 고무 공, 그리고 거북이 모양을 한 인형, 작은 야구 방망이 같은 것들. 농구 골대가 설치된 정원도 있었고, 훌륭한 정원 의자와 도자기로 만든 테 이블이 놓인 정원도 있었다. 그러나 하얀 정원 의자는 몇 달(혹은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또 다른 집에서는 알루미늄 새시의 유리문을 통해 거실 내부가 한눈에 들여다 보였다. 가죽 소파 세트와 대형 텔레비전 세트, 장식장과(그 위에는 열대어의 어 항과 어디서 받은 건지 알 수 없는 트로피가 두 개 얹어져 있다) 장식 조명 기 구가 놓여 있었다. 마치 텔리비전 드라마의 세트 같았다. 정원에는 큰 개집도 있 었는데, 개의 모습은 없고 문은 열려진 채였다. 철조망은 마치 누군가가 몇 달 동안 안쪽에서 기대고 있었던 것처럼 둥글게 늘어나 있었다. 구미코가 이야기한 빈집은 그 개집이 있는 집 조금 앞에 있었다. 그 집이 빈집 인 것은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두 달이나 석 달 가량 비워 둔 정도의 집이 아니었다. 비교적 신형으로 지은 이층집인데, 닫혀진 나무로 된 덧문만이 이상하게 낡았고, 이층 창문에 달린 손잡이에도 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아담한 정원에는 날개를 펼친 새를 본뜬 석상이 놓여 있었다. 석상은 사람 가슴 정도 높이의 대좌에 놓여 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키가 큰 풀은 그 새의 다리에까지 닿아 있었다. 새―그것이 어떤 종류의 새인지는 나 역시 알 수 없었으나―는 이런 불쾌한 장소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날아가기 위해 날개를 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석상 외에 정원에는 장식다운 장식이 없었다. 처마 밑에는 낡아빠진 플라스틱으로 된 정원 의자가 몇 개인가 겹쳐져 있었고, 옆에 는 진달래가 현실감이 없는 선명한 빨간 꽃을 묘하게 피우고 있었다. 나머지는 잡초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가슴까지 오는 철망에 기대어 얼마 동안 정원을 바라보았다. 고양이가 좋 아할 것 같은 정원이긴 한데, 아무리 봐도 고양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붕 위에 있는 텔레비전 안테나 끝에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단조로운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돌로 된 새의 그림자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의 잎 위에 떨 어져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주머니에서 레몬 사탕을 꺼내어 겉종이를 까서 입에 넣었다. 회사를 그만둔 것 을 기회로 담배를 끊었으나, 그 대신 레몬 사탕을 손에서 뗄 수 없게 되어 버렸 다. ‘레몬 사탕 중독’이라고 아내는 말했다. "이제 곧 충치투성이가 될 거예 요." 하지만 나는 그것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비 둘기는 텔레비전 안테나 위에 서서, 사무원이 전표 다발에 넘버링머신으로 번호 를 매기듯 연속적이고 규칙적인 같은 리듬으로 울고 있었다. 얼마 동안 그 철망 에 기대고 있었는지 나로서도 알 수 없다. 입 안에서 녹아 반 정도로 줄어든 사 탕을 땅바닥에 버린 것을 기억할 뿐이다. 그러고서 나는 또다시 새의 석상 그림 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보자 맞은편 집 뒤뜰에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아담한 몸에 머리는 뒤로 묶어 늘어뜨린 포니테일이었다. 적갈색 테의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소매가 없는 라이트블루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셔츠로부터 내밀어진 가는 양팔은 아직 장 마도 끝나지 않았는데 햇빛에 예쁘게 그을려 있었다. 그녀는 한쪽 손은 짧은 반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고, 또 다른 한쪽 손은 허리까지 오는 대무나로 된 문 위 에 놓은 채 불안정하게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1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덥네요"하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덥군"하고 나도 말했다. 그 말만을 하고 그녀는 그 모습 그대로 얼마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선 짧 은 반바지 주머니에서 쇼트 호프 갑을 꺼내더니, 한 개비를 뽑아 내어 입에 물 었다. 입은 작고 윗입술이 아주 조금 젖혀져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 림으로 종이 성냥을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귀의 모양이 또렷이 보였다. 매끄럽고 예쁜 귀로, 방금 전에 완성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귀 의 날씬한 윤곽을 따라 짧은 솜털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성냥을 땅바닥에 버리고 입술을 오므려 연기를 내뱉곤 문득 생각이 난 듯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렌즈 색깔이 짙은데다가 빛을 반사하도록 되어 있 었으므로, 그 속에 있는 눈을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이 근처에 사는 분이세 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그래"하고 대답하곤 우리 집 쪽을 가리키려고 하였으나, 정확하게 어느 방향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충 적당한 방향을 가리켰다. "고양이를 찾고 있어."땀이 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면서 변명하듯이 말했다. "1주일 전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는데 이 근처에서 본 사람이 있단다." "어떤 고양인데요?" "덩치가 큰 수놈이야. 갈색 줄무늬에 꼬리 끝이 약간 구부러져 있어." "이름은요?" "노보루"하고 난 대답했다. "와타야 노보루." "고양이치곤 무척 멋진 이름이네요." "집사람 오빠 이름이야. 느낌이 닮았다고 농담 삼아 붙인 거지." "어떻게 닮았는데요?" "왠지 닮았어. 걷는 것도 그렇고, 흐리멍텅한 눈초리도 그렇고." 그녀는 처음으로 방끗 웃었다. 표정이 바뀌자 그녀는 처음 인상보다 훨씬 아이 스러워 보였다. 열다섯이나 열여섯 정도겠지. 조금 젖혀 올라간 윗입술이 신기한 각도로 허공으로 내밀려져 있었다.‘어루만져 워요’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건 그 전화의 여자 목소리였다. 나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갈색 줄무늬에 꼬리 끝이 약간 구부러져 있는 고양이란 말이죠"하고 그녀는 확인하듯 되풀이하였다. "목걸이라든지 그런건?" "벼룩을 잡기 위한 까만 것이 걸려 있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한 손을 덧문 위에 놓은 채 10초나 15초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짧아진 담배를 발 밑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샌들밑창으로 밟았다. "그 고양이라면 보았을지도 몰라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꼬리 끝이 구부러졌는 지는 모르겠지만 갈색의 얼룩 고양이였고, 크고 아마 목걸이를 하고 있었을 거 예요." "그 고양이를 본 게 언제쯤이지?" "글쎄 언제쯤이었더라? 어쨌든 3∼4일 정도는 된 것 같아요. 우리 집 정원은 근처의 고양이들이 다니는 길이어서 여러 고양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지나다니 거든요. 모두 다키야 씨 집에서 부터 우리 집 정원을 가로질러서 저 미야와키 씨 집의 정원으로 들어가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맞은편의 빈집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돌로 만 든 새가 날개를 펴고 있고, 풀은 초여름의 햇살을 받고 있으며, 텔레비전 안테나 위에서는 비둘기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울고 있었다. "있잖아요, 어때요? 우리 집 정원에서 기다려 보는 게. 어차피 고양이들은 우리 집을 지나 건너편으로 갈 거고, 더군다나 이 주위를 어슬렁거리면 도둑으로 오 해해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르잖아요. 이제까지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단 말예요." 나는 망설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 집에는 나밖에 없으니까 둘이서 정원에서 일광욕이라도 하면서 고양이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면 되잖아요. 난 눈이 좋으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3시 36분이었다. 오늘중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해가 지기 전에 빨래를 걷어들이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덧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뒤를 쫓아 잔디 위를 걸어 가고 있을 때 그 녀가 오른쪽 다리를 가볍게 끌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몇 걸음 걷다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오토바이 뒤에 타고 있다가 떨어졌어요"하고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이 말했다. "얼마 전의 일이죠." 잔디가 끝나는 지점에 큰 떡갈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무명천으로 된 접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한쪽의 등받이에는 파란색의 큰 타월이 걸려 있었고, 또 다른 접는 의자 위에는 뜯지 않은 쇼트 호프 갑, 재떨이, 라이터, 대형 라디 오 카세트, 잡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라디오 카세트의 스피커에서는 하드 록이 작은 소리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접는 의자 위에 어지럽혀진 것들 을 잔디 위에 내려놓고 거기에 나를 앉히고는 라디오 카세트의 음악을 껐다. 의 자에 걸터앉자 나무 사이로 골목을 사이에 둔 빈집의 눈앞에 펼쳐졌다. 새의 석 상과 잡초,철망, 그리고 담도 보였다. 그녀는 아마도 이곳에 앉아 내 모습을 관 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넓은 정원이었다. 잔디가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고 곳곳에 나무 숲이 만들어져 있었다. 접는 의자 왼쪽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꽤 큰 연못이 있었 는데, 오래 전에 물을 빼놓은 듯 옅은 녹색으로 변색된 밑바닥이 햇빛에 드러나 있었다. 등뒤의 나무숲 뒤에는 옛 서양풍의 집 건물이 보였으나, 집 자체는 그다 지 크지 않았으며 사치스럽게 지어져 있지도 않았다. 정원만이 넓고, 꼼꼼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이렇게 넓은 정원을 손질하려면 힘들겠네." 나는 주위를 둘러 보면서 말했다. "글쎄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예전에 잔디 깎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거든"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흥미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항상 너 혼자니?"나는 물었다. "네. 낮에는 는 혼자 여기에 있어요. 오전과 저녁 때는 파출부 아줌마가 오지만 나머지는 늘 나 혼자예요. 저기요, 뭐 차가운거 마시지 않겠어요? 맥주도 있는 데." "아냐, 필요 없어." "정말요? 사양할 필요 없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학교에는 안 가니?" "아저씨는 일하러 안 가요?" "가려고 해도 일이 없어." "실직했어요?" "그런 셈이지. 얼마 전에 그만두었어." "그때까지 어떤 일을 했어요?" "변호사의 심부름꾼 같은 일이지."나는 말했다. "구청이나 관청에 가서 갖가지 서류를 모으기도 하고, 자료를 정리하기도 하고, 판례를 확인하기도 하고, 법원 의 사무 수속을 하기도 하고, 뭐 그런 일들." "하지만 그만둔 거죠?" "그래." "부인은 일해요?" "일해."나는 대답했다. 맞은편 집의 지붕에서 지저귀던 비둘기는 어느 사이엔가 어딘가로 가버린 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깊은 침묵과 같은 것에 휩싸여 있었다. "고양이는 늘 저 부근을 지나가요."그녀는 잔디 저편을 가리켰다."다키야 씨 집 의 담 뒤에 있는 소각장이 보이죠? 저 옆에서 나와, 잔디를 가로질러 덧문 밑을 빠져 나가 건너편의 정원으로 가거든요. 늘 같은 코스죠. 저기, 다키야 씨라고 유명한 삽화가예요. 토니 다키야라고. 알아요?" "토니 다키야?" 그녀는 나에게 토니 다키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다키야 토니가 그의 본명이 라는 것. 상당히 세밀한 메커니즘 삽화를 전문으로 하는 인물이며, 지난번에 교 통 사고로 부인을 잃고 혼자서 그 큰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 거의 집 밖에 나 가지 않고 이웃사람들과도 사귀지 않는다는 것.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은 없지 만." 그녀는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고 나선 또다시 선글라스를 쓰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선글라스를 벗자 왼쪽 눈 끝에 길이 2센티미터 가량의 상처가 보였다. 평생 흉터가 남아 있을 것 같은 깊은 상 처였다. 아마 그 상처를 숨기기 위하여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특별히 아름다운 얼굴 생김새는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뭔가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이 있었다. 아마 활발한 눈의 움직임과 특징 있는 입술 모양 때문이겠지. "미야와키 씨를 알아요?" "몰라."나는 말했다. "그 빈집에 살고 있었던 사람. 말하자면 정상적인 사람들. 딸이 두 명 있었는데 둘 다 유명한 명문 여자 학교에 다니고 있었어요. 남편은 패밀리 레스토랑을 두 군덴가 세 군데 경영하고 있었죠." "어째서 사라졌지?" 그녀는 모른다는 듯이 입을 작게 오므렸다. "빚 같은 거 때문이 아닐까요? 야반 도주하듯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거든요. 벌 써 1년이 돼가나? 잡초는 무성하게 자라지, 고양이는 늘어나지, 방범에도 나쁘 지, 우리 엄마는 불평이에요." "고양이가 그렇게 많니?" 그녀는 담배를 문 채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의별 고양이가 다 있어요. 털이 벗겨진 것도 있고, 한쪽 눈 밖에 없는 것도 있고……눈이 빠져 거기가 살덩어리가 된 것들. 굉장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척 중에 손가락이 여섯 개 있는 사람이 있어요. 나보다 손위의 여자인데 새 끼손가락 옆에 갓난아기 손가락만한 것이 또 하나 붙어 있어요. 하지만 항상 재 주 좋게 구부리고 있어서 얼핏 보아서는 몰라요. 예쁜 아이예요." "그래?" "그런 건 유전된다고 생각해요? 뭐랄까……혈통적으로." 유전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고 나는 대답했다 . 그녀는 얼마 동안 잠자코 있었다. 나는 사탕을 빨아먹으면서 고양이가 지나다 니는 길을 꼼짝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아직껏 한 마리도 모습을 보이 지 않고 있다. "저기요, 정말로 뭐 좀 마시지 않을래요? 나는 콜라를 마실 건데"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정말로 괜찮다고 말했다. 그녀가 접는 의자에서 일어나 다리를 조금 끌면서 나무숲 그늘로 사라져 버리 자 나는 발 밑의 잡지를 집어 들고 페이지를 훌훌넘겨 보았다. 그것은 내 예측 과는 빗나간 남성 취향의 잡지였다. 한가운데 사진에는 성기의 형태와 음모가 비치는 얇은 속옷을 입은 여자가 등 없는 작은 의자에 앉아 부자유스러운 자세로 양다리를 크게 벌리고 있었다. 맙 소사, 나는 잡지를 제자리에 놓고 팔짱을 끼고 다시 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길로 눈을 돌렸다. 제법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콜라 잔을 손에 들고 그녀가 돌아왔다. 더운 오후였 다. 접는 의자 위에서 태양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자니 머리가 멍해져 무엇인 가를 생각하는 것이 점점 귀찮아졌다. "있잖아요, 만일 아저씨가 좋아하게 된 여자가 손가락이 여섯개면 아저씨는 어 쩔 거예요?"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커스단에 팔 거야"하고 나는 말했다. "진짜?" "농담이야."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마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생각해." "자식에게 유전될 가능성이 있는데도요?" 나는 잠시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 손가락이 하나 더 많다고 해서 별다른 지장은 없어." "유방이 네 개 있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모르겠어"하고 나는 대답했다. 유방이 네 개? 이야기가 끝이 없을 것 같아 화제를 바꿔 보기로 했다. "너 몇 살이니?" "열여섯."그녀는 말했다. "얼마 전에 열여섯이 되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생." "그런데 학교는 계속 휴학중이야?" "오래 걸으면 아직 다리가 아파요. 눈 옆에 상처도 생겼고, 꽤 까다로운 학교여 서 오토바이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명 여러 소리 들을 것 같고 ……그래서 병결(病缺)로 해두었어요. 뭐 1년쯤 휴학해도 상관없어요. 서둘러 고 등학교 2학년이 되고 싶지도 않고." "그렇군."나는 말했다. "그런데, 아까 하던 얘긴데, 아저씬 손가락이 여섯 개인 여자와는 결혼해도 좋 은데 유방이 네 개인 건 싫다고 그랬죠?" "싫다고는 하지 않았어. 모르겠다고 했지." "왜 몰라요?" "제대로 상상할 수 없으니까." "손가락이 여섯 개인 건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럭저럭."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여섯 개의 손가락과 네 개의 유방은?" 그것에 대해서 또다시 생각해 보았으나, 제대로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질문하는 건가요?" "그런 이야기 들어 본 적 있어?" "때때로요." 나는 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고양이 같은 건 여태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팔짱 을 낀 채 20초나 30초쯤 눈을 감았다. 햇살은 기묘한 무게를 지니고 내 몸에 내 리쬐고 있었다. 그녀가 잔을 흔들자 얼음이 소의 목에 걸어 두는 방울처럼 소리 를 냈다. "졸립거든 자도 괜찮아요. 고양이 모습이 보이거든 깨워 드릴게요"하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조차 없어서 주위는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비둘기는 이미 어디론가 멀리 가버린 듯하다. 전화를 걸어 온 여자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정말로 그 여자를 알고 있었을까? 목소리도, 말투도, 짐작 가는 데가 없다. 하지만 그 여자는 나를 제대로 알고 있다. 마치 키리코의 그림 속 정경처럼 여자의 그림자만이 길 위를 가로질러 내 쪽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실체는 내 의식의 영역으 로부터 훨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 귓가에서는 벨이 언제까지고 울리고 있었 다. "저기, 잠들었어요?"그녀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물었다. "응? 안 자는데." "더 가까이 가도 돼요?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편이 난 편해요." "좋을 대로."나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녀가 자기가 앉은 의자를 옆으로 밀어 내가 앉은 의자에 붙인 것 같았다. 나 무가 부딪치는 건조한 소리가 났다. 이상하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뜨고 들은 때의 그녀 목소리와 눈을 감고 있을 때의 그녀 목소리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 "이야기 좀 해도 돼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아주 작은 소리로 이야기할 거예 요.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도중에 그대로 잠들어도 좋아요." "알았어." "사람이 죽는 건 멋져요." 그녀는 바로 내 귓가에서 조잘대고 있었으므로 그 말은 따뜻하고 습한 숨과 더 불어 내 체내에 살며시 들어왔다. "어째서?"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마치 내 입술을 봉하듯 거기에 손가락 하나를 얹었다. "질문은 하지 마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그리고 눈도 뜨지 말아요. 알았죠?" 나는 그녀의 목소리와 비슷할 정도로 작게 끄덕였다. 그녀는 내 입술에서 손을 떼고 그 손가락을 이번에는 내 손목위에 놓았다. "그런 것을 메스로 잘라 펼쳐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시체가 아니고 죽음의 덩어리 같은 거 말예요. 그런 게 어디엔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소프트 볼처럼 느리고 부드럽고 신경이 마비되어 있는 거. 그걸 죽은 사람의 속에서 꺼 내어 잘라서 펼쳐 보고 싶어요. 늘 생각해요. 그런 것 속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고 말예요. 마치 치약이 튜브 속에서 굳어지듯 안에서 무엇인가가 딱딱해져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 안해요? 괜찮아요. 대답은 하지 말아요. 주변은 흐늘 흐늘한데, 그게 내부로 향할수록 딱딱해져 가는 거예요. 나는 우선 바깥의 껍질 을 잘라 펼쳐서 속의 흐늘흐늘한 것을 꺼내고, 메스와 주걱 같은 것을 이용해서 그 흐늘흐늘한 것을 분리해 가요.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그 흐늘흐늘한 것은 딱딱해져 마지막에는 작은 심처럼 되어 있는 거예요. 베이링의 볼처럼 작고 굉 장히 딱딱해요. 그럴 것 같지 않아요?" 그녀는 두세 번 기침을 작게 했다. "요즈음 늘 그 생각을 해요. 아마 매일 한가한 탓이겠죠. 아무것도 할 일이 없 으니 생각이 점점 멀리까지 가버려요. 생각이 지나치게 먼 곳까지 가버려 제대 로 그 다음을 더듬어 가지 못해요." 그리고 그녀는 내 손목에 놓았던 손가락을 떼고 잔을 집어 남은 콜라를 마셨 다. 투명한 얼음 소리로 잔이 빈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양이는 지켜 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와타야 노보루의 모습이 보이 거든 가르쳐 드릴 게요. 그러니까 그대로 눈을 감고 있어요. 와타야 노보루는 지 금쯤 아마 이 근처를 걷고 있을 거예요. 반드시 곧 나타날 거예요. 와타야 노보 루는 풀 사이를 지나 담 아래를 빠져 나가 어디엔가 멈춰 서서 꽃 향기를 맡기 도 하면서 조금씩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예요. 그런 모습을 떠올려 봐요." 하지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역광을 받은 사진처럼 너무나 막연한 고양이의 상(像)에 지나지 않았다. 태양빛이 눈꺼풀을 통과하여 나의 어둠을 불안정하게 확산시키고 있었고, 게다가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고양이의 모습을 정확하게 떠 올릴 수 없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고양이의 모습은 마치 망친 초상화처럼 비뚤어지고 부자연스러웠다. 특징은 닮아 있었으나 중요한 부분이 빠쪄 있는 것 이다. 그가 어떤 걸음걸이를 했는지조차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내 팔목에 손가락을 얹고 알 수 없는 모양이 기묘한 도형을 거기에 그렸다. 그러자 마치 그것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이제까지 있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어둠이 내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아마 잠들려고 하는 거겠지, 하고 난 생 각했다. 잠들과 싶지 않았으나 잠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캔버스로 만들어진 접 는 의자 위에 앉은 나의 몸은 타인의 시체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런 어둠 속에서 나는 와타야 노보루의 네 개의 다리만을 떠올렸다. 다리 뒤 가 고무와도 같이 부드럽게 부풀어져 있는 네 개의 조용한 갈색 다리다. 그런 다리가 소리도 없이 어딘가의 지면을 밟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 있는 지면일까? 10분이면 돼요, 하고 전화 속의 여자가 말했다. 아니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때로 10분은 10분이 아니다. 그것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나는 그 것을 알 수 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였다. 내 의자 옆에 딱 붙여진 접는 의자 위에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타월과 담배와 잡지는 그대로였으나 콜라와 라디오 카세트는 사 라져 버렸다. 해는 조금 서쪽으로 기울어 떡갈나무 가지의 그림자가 내 무릎에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손목 시계는 4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의자 위로 몸을 일으켜 주위 를 둘러보았다. 넓은 잔디, 메마른 연못, 담, 새의 석상, 잡초, 텔레비전 안테나. 고양이의 모습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도. 나는 접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길을 바라보며 그녀가 돌 아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10분이 지나도 고양이도 그녀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 위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잠들어 있는 사이에 한참 나이를 먹어 버 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 집 건물 쪽을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의 기척은 없다. 유리 창이 서쪽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할 수 없이 잔디를 가로 질러 골목으로 나가 집으로 돌아왔다. 고양이는 찾지 못했으나 여하튼 찾을 만 큼 찾아본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빨래를 걷어들이고 간단한 식사 준비를 했다. 5시 30분 에 전화 벨이 열두 번 울렸지만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벨이 그친 후에도 그 여 운은 방의 옅은 땅거미 속에 냄비요리처럼 감돌고 있었다. 탁상 시계가 그 딱딱 한 손톱 끝으로 공간에 떠 있는 투명한 판을 딱딱 치고 있었다. 태엽 감는 새들에 대해서 시를 써보면 어떨까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 나 아무래도 그 첫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여고생들이 태 엽 감는 새에 관한 시를 읽고 기뻐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구미코가 돌아온 것은 7시 30분이었다. 요근래 한 달 동안 그녀의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8시를 넘기는 때도 다반사였고, 때로는 10시를 넘기는 경 우도 있었다. 내가 집에 있으면 식사 준비를 하니까 서둘러 귀가할 필요가 없어 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모자란데다가 동료 한 명이 요즘 몸이 안 좋아 곧잘 쉰다고 그녀는 설명했다. "미안해요. 좀처럼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하고 아내는 말했다. "아르바이트하는 여자 아이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나는 부엌에 서서 생선 버터 구이와 샐러드와 된장국을 만들었다. 그사이 그녀 는 부엌의 테이블 앞에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당신 5시 30분쯤 어디 갔었어요?"하고 그녀가 물었다."조금 늦어진다고 말하려 고 집에 전화했었는데." "버터가 없어서 사러 갔었어"하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은행에는 들렀어요?" "그럼."나는 대답했다. "고양이는?" "못 찾았어.당신이 말한 대로 골목의 빈집에도 갔었는데, 그림자조차 없었어. 더 멀리 가버린 게 아닐까?" 구미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 후에 내가 목욕을 하고 나오자 구미코는 전등을 끈 거실의 어둠 속에 혼 자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회색 셔츠를 입고 어둠 속에 가만히 파묻혀 있는 그녀는 마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잘못 좋여 있는 짐짝같이 보였다. 나는 목욕 타월로 머리를 닦고 구미코의 맞은편 소파에 얹았다. "아마 고양이는 이미 죽어 버렸을 거예요."구미코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나는 말했다. "어딘가에서 마음대도 놀고 있을 거야. 이제 곧 배가 고파 돌아올 거고. 전에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잖아? 고엔지에 살고 있을 때도." "이번에는 아니에요.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알 수 있단 말예요. 고양 이는 이미 죽어 풀숲 속에서 썩고 있단 말예요. 빈집 정원의 풀숲은 찾아보았어 요?" "이봐, 아무리 빈집이라고 하지만 남의 집이야. 멋대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 "그럼 당신은 도대체 어디를 찾아본 거예요?"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고양이를 찾으려고조차도 하지 않는단 말예요. 그러니까 고양이를 찾지 못하는 거라구요."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한 번 목욕 타월로 머리를 닦았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 려 했지만 구미코가 울고 있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노보루는 결혼 직후부터 기르기 시작하여 그녀가 계속 귀여워했던 고양이다. 나 는 목욕탕의 바구니에 목욕 타월을 던져 넣고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엉망진창인 하루였다. 엉망진창인 해에, 엉망진창인 달에, 엉망진창 인 날이었다. 와타야 노보루, 너는 어디에 있는냐? 태엽 감는 새는 너의 태엽을 감지 않았느 냐? 마치 시의 문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타야 노보루   너는 의디에 있느냐?   태엽 감는 새는 너의 태엽을    감지 않았느냐? 맥주를 반쯤 마셨을 때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받아 봐"하고 나는 거실의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싫어요. 당신이 받아요"하고 구미코가 말했다. "받고 싶지 않아."나는 말했다. 대답하는 사람이 없는 채 전화 벨은 계속 울렸다. 벨은 어둠속에 뜬 냄비 요리 를 둔하게 휘저었다. 나도 구미코도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맥주를 마셨고, 구미코는 소리를 내지 않고 계속 울고 있었다. 나는 스무 번까지 벨 소 리를 세었으나 그러고선 포기하고 내버려두었다. 언제까지나 그런 것을 세고 있 을 수는 없는 것이다. 2 보름달과 일식, 헛간에서 죽어 가는 말들에 대하여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 까? 즉, 누군가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진지하게 노력을 거듭하면 상대의 본 질에 얼마만큼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에 관하여 그에게 정말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법률 사무소의 일을 그만두고 1주 일쯤 지났을 무렵부터였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그런 종류의 의문을 정말 로 절실하게 가져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째서일까? 아마도 자신의 생활을 확립하는 작업으로 벅찼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너무 바빴기 때문이리라. 세상의 중요한 것의 시작이 대개 그러하듯이, 내가 그와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된 계기는 상당히 하찮은 일이었다. 구미코가 서둘러 아침 식사를 끝내고 집을 나간 후에 빨래를 세탁기에 집어넣고 그동안에 침대를 만지고, 그릇을 씻고, 바 닥에 청소기를 돌렸다. 그리고 고양이와 함께 툇마루에 앉아 신문의 구인 안내, 바겐 세일 광고 등을 눈으로 훑었다. 점심 때가 되자 간단히 한 사람분의 점심 을 만들어 먹고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갔다. 저녁 식사 거리를 산 후, 바겐 세일 상품 코너에서 세제와 티슈, 두루마리 휴지를 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저녁 식 사 준비를 하고, 소파에 누워 책을 읽으면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일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그런 생활은 나에게 오히려 신선했 다. 이제 만원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을 만날 필요도 없다. 누군가에게 명령받을 필요도 없으며, 누군가에게 명령할 필요도 없다. 동료와 함께 근처의 붐비는 레스토랑에서 런치 정식을 먹지 않아 도 되며, 어젯밤의 야구 시합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요미우리 자이 언트의 4번 타자가 이사(二死) 만루 상태에서 홈런을 치든 삼진을 당하든, 그런 건 이제 내가 알 바 아니다. 그건 멋진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멋진 점은 아무때나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 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1주일 동안 계속된 이 한가로운 생활이 적어도 지금은 마음에 들고, 나중 일은 가능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건 아마 내 인생의 휴가 같은 것일 게다. 언젠가는 끝난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는 즐기자. 하여튼 나의 순수한 즐거움을 위하여 책을, 특히 소설을 읽는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요 몇 년 동안 읽은 책이라고는 법률관계의 책이나 혹은 통근 지하철 안에서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뿐이었다. 누군가가 정한 것도 아닌데,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는 인간이 많건 적건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것은, 품행이 좋지 못하다고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그다지 바람직한 행위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 와 같은 책이 내 가방 안에, 혹은 서랍 안에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한다면 아 마 피부병에 걸린 개를 보듯이 나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곤 아마도 이렇게 말했 겠지, "그렇구나, 너는 소설을 좋아하는구나. 나도 소설을 좋아해. 젊었을 때는 곧잘 읽었지"하고. 그들에게 있어서 소설이란 젊을 때 읽는 것이다. 마치 봄에는 딸기를 따고 가을엔 포도를 수확하듯이. 그러나 그날 저녁, 나는 여느 때처럼 독서의 기쁨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구미 코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개 늦어도 6시 30분까지는 집에 돌아 왔고 그보다 10분이라도 늦을 것 같으면 반드시 연락을 했다. 그런 점에서는 지 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밀했다. 하지만 그날 구미코는 7시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 았고 전화도 없었다. 나는 구미코가 돌아오는 즉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단한 요리는 아니다. 얇게 썬 소고기, 양파, 피망, 그리고 콩나물을 중화 냄비에 넣고 센 불로 함께 볶아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간 장을 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맥주를 살짝 뿌린다. 자취 생활을 할 때 곧잘 만 들었다. 밥도 되어 있고 된장국도 데워져 있으며 언제라도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야채도 큰 접시에 썰어 놓었다. 그러나 구미코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배가 고 팠으므로 내 것만 먼저 만들어 먹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 다. 뚜렷한 근거는 없었지만 그것은 적당치 목한 행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부엌 테이블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찬장 구석에 남아 있던 눅눅해진 크래커 를 몇 개쯤 씹었다. 그리고 시계의 짧은 바늘이 슬슬 7시 30분을 가리키더니, 이 내 그대로 지나쳐 가는 것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구미코가 돌아온 것은 9시가 넘어서였다. 그녀는 녹초가 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것은 나쁜징조였다. 그녀의 눈이 빨개져 있 을 때는 반드시 뭔가 좋지 않은일이 일어난다. 나는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냉 정해지자.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용히, 자연스럽게, 자극하지 않도록.’ "미안해요. 일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어떻게든 전화를 하려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연락도 못하고." "괜찮아. 마음쓰지 마" 하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사실 나는 기분이 나빴던 것도 아니었다. 나 또한 그건 경험은 몇 번인가 있었다. 밖 에 나가서 일은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정원에 피어 있는 가장 예쁜 장미꽃 을 한 송이 꺾어 그것을 두 골목쯤 떨어진 곳에서 감기를 앓고 계시는 할머니의 머리맡에 가져다 주면, 그것으로 하루가 끝나는 것과 같이 평화롭고 깨끗하지는 않다. 때로는 말도 안되는 녀석들과 함께 말도 안되는 일을 해야만 할 때도 있 다. 애썼지만 집에 전화할 기회를 잡을 수 없을 때도 있다. "오늘 밤은 늦어질 것 같아"하고 집에 전화를 거는 건 30초면 충분하다. 전화 같은 건 어디에라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가스불을 켜고 냄비에 기름을 둘렀다. 구미코는 냉장고 에서 맥주를 꺼내고 찬장에서 잔을 꺼냈다. 그리고 내가 이제부터 만들려고 하 는 요리를 점검했다. 그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맥주는 그다지 맛이 없는 모양이었다. "먼저 식사하지 그랬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 그다지 배가 고팠던 것도 아니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고기와 야채를 볶고 있을 동안 구미코는 일어나 목욕탕으로 갔다. 세면대 에서 세수를 하고 이을 닦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다가 목욕탕에서 나왔을 때 그녀는 양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낮에 슈퍼에서 사온 티슈와 두루마리 휴지였다. "어째서 이런 걸 사왔죠?"하고 그녀는 지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중화 냄비를 손에 든 채 구미코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손에 들 고 있는 티슈 상자와 휴지 꾸러미를 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 작이 가지 않았다. "잘 모르겠는데."나는 말했다. "티슈와 두루마리 휴지에 지나지 않잖아? 없으면 곤란하잖아. 아직 여분은 있지만 남는다고 썩는 것도 아니고." "티슈와 휴지를 사는 건 전혀 상관없어요. 당연하잖아요. 내가 묻고 있는 것은 어째서 ‘파란’ 티슈와 ‘꽃무늬’ 휴지를 사왔냐는 거예요?" "무슨 얘기인지 아직 잘 모르겠는데."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분명 파란 티슈 와 꽃무늬가 그려진 휴지를 산 건 나야. 둘다 세일해서 싸게 팔고 있었어. 파란 티슈로 코를 푼다고 해서 코가 파랗게 되는 것도 아니고, 별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빠요. 나는 파란 티슈와 꽃무늬 휴지가 싫단 말예요. 몰랐어요?" "몰랐어."나는 말했다. "그것이 싫은 무슨 이유가 있어?" "어째서 싫은지 따위는 설명할 수 없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도 전화기 의 커버나 꽃무늬가 그려진 보온병, 통바지 모양의 청바지를 싫어하잖아요. 내가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도 싫어하고. 그런 이유를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잖아요? 그냥 싫은 건 싫은 거예요." 나는 그것들의 이유를 전부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물론 설명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건 그냥 기호의 문제야. 잘 알았어. 하지만 당신, 결혼하고 6년 동안 파란 티슈와 꽃무늬 휴지를 단 한 번도 사지 않았나?" "사지 않았어요."구미코는 잘라 말했다. "정말?" "정말이에요. 내가 사는 티슈의 색깔은 하양이나 노랑이나 분홍이에요. 그리고 내가 사는 휴지는 반드시 늘 무늬가 없는 것이죠. 당신이 이제까지 나와 함께 살면서 그걸 깨닫지 못했다니 놀랍네요." 나에게 그건 놀라움이었다. 나는 6년 동안 파란 티슈와 무늬가 있는 화장실용 휴지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한 가지 더 이야기할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소고 기와 피망을 함께 볶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그건 알고 있었나요?" "몰랐어." "하여튼 싫어해요. 이유는 묻지 말아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두 가 지를 냄비에 넣고 함께 볶을 때의 냄새를 못 견디겠어요." "당신은 6년 동안 한 번도 소기와 피망을 함께 볶지 않았단 말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망이 들어 있는 샐러드는 먹어요. 소고기와 양파는 같이 볶아요. 하지만 소고기와 피망을 함께 볶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어휴." "하지만 그런 걸 의아하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죠?" "그래, 그런 것엔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어."나는 말했다. 나는 결혼하고 여태껏 소고기와 피망을 함께 볶은 것을 먹어 본 적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 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신은 나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 사실은 나 같은 건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거 아니에요 ? 당신은 자기만 생각하며 살았던 거예요, 아마도." 나는 가스불을 끄고 냄비를 레인지 위에 놓았다. "이봐, 잠깐 기다려 봐.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를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분명 나는 티슈와 화장실용 휴 지, 그리고 소고기와 피망의 관계에 대해서 부주의했는지도 몰라. 그건 인정하 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에게 무관심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사실 티슈의 색깔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물론 새까만 티슈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면야 깜짝 놀라겠지. 하지만 그게 하얗든 파랗든 나에게는 흥미 없는 일이야. 소고기와 피망도 마찬가지야. 나는 소고기와 피망을 함께 볶는 행 위가 이 세상에서 반영구적으로 없어진다 해도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그건 당신이라는 인간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그렇잖아?" 구미코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 안에 남아 있던 맥주를 두 모금에 다 마셔 버리곤 잠자코 테이블 위의 빈병을 보고 있었다. 나는 냄비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휴지통에 버렸다. 소고기와 피망과 양파와 콩 나물이 그 안에 들어갔다. 신기한 일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 그 것은 식품이었다. 지금은 그냥 쓰레기일 따름이다. 나는 맥주 마개를 따서 병째 로 마셨다. "왜 버렸어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당신이 그것을 싫어하니까." "당신이 먹으면 되잖아요." "먹고 싶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소고기와 피망을 함께 볶은 것은 이제 먹 고 싶지 않아졌어." 아내는 고개를 움츠렸다. "좋으실 대로"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서 그녀는 테이블에 양팔을 올리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그대 로 가만히 있었다. 울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자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레인 지 위의 텅 비어 버린 냄비를 바라보고, 아내를 바라보고, 그리곤 남아 있는 맥 주를 한 모금 마셨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겨우 티슈와 휴지와 피망이 잖아. 하지만 나는 아내에게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알았어. 이제 다시는 파란 티슈와 무늬가 있는 휴지는 사지 않을게. 약속하지. 오늘 산 건 내일 슈퍼 에 가서 다른 것으로 바꾸면 돼. 바꿔 주지 않으면 정원에서 태워 버릴게. 재는 바다로 가져가서 버리고 오지. 피망과 소고기에 대해서는 이제 결말이 났어. 냄 새는 조금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곧 없어질 거야. 그러니 이제 그만 잊어 버리자."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집을 나가 한 시간쯤 산 책하고 집에 돌아오니 그녀의 기분이 완전히 좋아져 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좋 을텐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내가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당신은 지쳐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조금 쉬고 나서 오랜만에 근처의 가게 에 가서 피자라도 먹자. 안초비와 양파가 든 피자를 반씩 먹자구. 가끔 외식한다 고 해서 천벌받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구미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가만히 얼굴을 파묻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테이블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녀의 머 리를 바라보았다. 짧은 까만 머리 사이로 귀가 보였다. 귓불에는 내가 본 적이 없는 귀걸이가 달려 있었다. 물고기 모양의 작은 금귀걸이였다. 구미코는 언제 어디에서 그런 귀걸이를 샀을까?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담배를 끊은 지 아직 한달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나는 내가 주머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필 터가 붙은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고 나 는 가슴으로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소고기와 야채를 볶은 기름진 냄새가 섞 인 공기가 콧구멍을 자극했다. 사실 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보았다. 달력에는 달의 참과 이지러짐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달은 점점 보름달이 되어 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생리가 다가오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결혼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자신이 이 지구라는 태양계의 제3혹성에 사는 인류의 일원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지구 에 살고 있고,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회전하며, 그 지구의 둘레를 달이 회전하고 있다. 그것은 좋든 싫든 영원히(나의 생명의 길이와 비교한다면 영원이라는 단어 를 써도 괜찮을 것이다) 계속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나의 아내가 거의 정확하게 29일 주기로 생리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리고 그것은 달의 참·이지러짐과 완전하게 호응하고 있었다. 그녀는 생리통이 심해서 그것이 시작되기 전 며칠 동안은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해지며, 종종 상당히 저기압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나에게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꽤 중요한 주 기였다. 나는 그것에 대비하여 불필요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능숙하게 처리 해야 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달의 참과 이지러짐 같은 건 거의 마음에 두지 않 았다. 이따금 문득 하늘을 쳐다보는 일은 있었지만 달이 지금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따위는 나와 전혀 무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결혼한 후부터 나는 대개 늘 달의 모양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결혼 전 나는 몇 명의 여자와 사귄 적이 있었으며, 물론 그녀들도 제각기 생리 를 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심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며, 3일밖에 계속되지 않기 도 하고 만 1주일 동안 계속되기도 하며, 규칙적으로 찾아오는가 하면 열흘씩이 나 늦어져 나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하곤 했다. 그때가 되면 몹시 기분이 나빠 진다는 여자도 있었고, 거의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구미코와 결혼하기 전에 여자와 함께 생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에게 있어 서 자연의 주기라는 것은 계절의 순환뿐이었다. 겨울이 오면 코트를 꺼내고 여 름이 오면 샌들을 꺼냈다.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결혼으로 인하여 나는 동거인과 더불어 달의 참과 이지러짐이라는 새로운 주기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녀가 그 주기를 거른 것은 몇 달뿐이었다. 그사이에 그녀는 임신했던 것이다. "미안해요" 하고 구미코는 얼굴을 들고 말했다. "당신에게 화풀이할 생각은 없 었어요. 좀 지쳐서 짜증이 났던 것뿐이에요." "괜찮아" 하고 나는 말했다. "마음쓰지 않아도 돼. 지쳐 있을때는 누군가에게 화풀이하는 편이 나아. 그러면 좀 시원해지지." 구미코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얼마 동안 그것을 폐 속에 머물게 한 후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내가 어쨌는데?" "당신은 지쳐 있을 때도 남에게 화풀이하지 않잖아요. 화풀이 하는 건 나뿐인 듯한 기분이 드는데, 그건 어째서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몰랐는걸." "당신 속에는 깊은 우물 같은 것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닐까요? 거기를 행해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외치면 여러 가지 것들이 그냥 해소되는 것이 아 닐까요?" 나는 그녀가 말한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난 대답 했다. 구미코는 다시 한 번 빈 맥주병을 보았다. 병의 상표를 보고 병 구멍을 보고서 는 병의 목을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나, 이제 곧 생리가 시작될 거예요. 그래서 초조해져 있는 모양이에요." "알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신경 쓸 건 없어. 그런 것에 영향을 받 는 건 당신만이 아냐. 말도 보름달 때마다 많이 죽지." 구미코는 맥주병에서 손을 떼고 입을 벌리고 내 얼굴을 보았다. "뭐예요, 그건? 어째서 갑자기 말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요전에 신문에서 읽었거든. 당신에게 이야기해 주려고 생각했는데 잊고 있었 어. 어떤 수의사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길, 말이 라는 동물은 육체적으로도 정신 적으로도 달의 참과 이지러짐에 아주 크게 영향받느 동물이래. 보름달이 되어가 면 말의 정신은 극도로 혼미해지고 육체적으로도 여러 문제가 생겨난다는 거야. 보름달인 밤에는 많은 말들이 병이 나고, 죽는 말의 수도 압도적으로 늘어난대. 한데 그 정확하 원인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거야. 하지만 통계를 봐도 그렇다 는 거지. 말을 전문으로 하는 수의사는 보름달인 밤에는 바빠서 잠 틈도 없을 지경이래." "그래요?" 하고 아내는 말했다. "하지만 보름달보다도 더 나쁜 건 일식이래. 일식에 말들의 상황은 더욱 비극적 이 된다구. 개기 일식 날에 말이 어느 정도나 죽어 가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야. 여하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고 있는 지금도 세계의 어딘가에선 말 이 픽픽 죽고 있다는 거지. 그것에 비하면 당신이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는 정 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죽어 가는 말들을 상상 해 봐. 보름달 밤에 헛간의 짚 위에 쓰러져 입에서 하얀 거품을 뿜으면서 고통 에 허덕이고 있을 말을 생각해 보라구." 그녀는 헛간에서 죽어 가는 말들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당신한테는 분명 신기한 설득력이 있어요" 하고 그녀는 체념한 듯 말했다. "그 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그럼 옷을 갈아입고 피자라도 먹으러 가자구." 그날 밤 나는 불을 끈 침실에서 구미코 옆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나는 이 여 자에 대하여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이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시계는 오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구미코는 푹 잠들어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파 란 티슈와 무늬가 있는 휴지와 소고기와 피망 볶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그 녀가 그러한 것들을 못 참아 한다는 사실을 여태껏 모르고 살아왔다. 그 자체는 분명 하찮은 일이었다. 굳이 따져서 말한다면 웃고 끝날 정도의 일이다. 야단법 석을 떨 만한 문제는 아니다. 우리들은 곧 그런 하찮은 언쟁을 한 것조차 잊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일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마치 목에 걸린 작은 생선 가시처럼 그것은 나를 불쾌하게 했다. ‘그건 더 치명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 내가 생각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건 치명적인 일이었을 수 있다.’혹은 그건 실제로 뭔가 더 큰 치명적인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단지 입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내가 이직 모르는 구미코마의 세계 가 펼쳐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에게 칠흑 같은 거대한 방을 연상시켰다. 나는 작은 라이터를 들고 그 방안에 있었다. 작은 라이터로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은 그 방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그 전모를 알 수 있게 될까? 아니면 나는 그녀를 마지막까지 모르 는 채로 늙어 가고, 그리고 죽게 되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결혼 생활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와 같은 미지의 상대와 함께 생활하며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 가? 그것이 그때 내가 생각했던 일이며, 그후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생각해 온 것이 었다. 그리고 더 나중이 되어서 안 일이지만, 그때 나는 실로 문제의 핵심에 발 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3 가노 마루타의 모자, 샤베트 톤과 앨런 긴즈버그와 십자군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또 전화 벨이 울렸다. 나는 부엌에 서서 빵을 잘라 버터와 겨자를 바르고, 얇게 썬 토마토와 치즈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도마 위에 얹고, 칼로 반을 자르려 하고 있었다. 때 마침 그때 전화가 왔다. 전화 벨이 세 번 울리게 내버려두고 나는 칼로 빵을 반으로 잘랐다. 그리고 빵 을 접시 위에 놓고 칼을 닦아 서랍 속에 넣었다. 그리고선 데워 둔 커피를 컵에 따랐다. 그래도 아직 전화 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아마 열다섯 번정도 울렸던 것 같 다. 나는 할 수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가능하다면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 지만 그건 구미코가 한 전화일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 본 기억이 없는 목소리였다. 구 미코의 목소리도 아니었고, 일전에 스파게티를 삶고 있을 때 기묘한 전화를 걸 어 온 여자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였다. "오카다 도루 씨 댁인가요?"하고 여자는 말했다. 종이에 씌어진 문장을 읽어 내 리는 듯한 느낌의 어투였다. "그렇습니다." "오카다 구미코 씨의 부군 되시는지요?" "그렇습니다. 오카다 구미코는 제 아내입니다." "와타야 노보루 씨는 부인의 오라버니신가요?" "그렇습니다"하고 나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분명히 와타야 노보루는 제 아내 의 오빠입니다." "저는 가노라 합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상대가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아내의 오 빠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 나로 하여금 적잖게 경계심을 갖게 했다. 나는 전화기 옆에 있던 연필 뒤꼭지로 목뒤를 긁었다. 5초나 6초, 상대는 잠자코 있었다. 수 화기에서는 목소리나 어떤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 여자는 수화 기를 손으로 막고 가까이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보세요."나는 걱정이 되어 말을 걸어 보았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그러면 다음 기회에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하고 여 자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저기요, 잠깐 기다려 주세요. 이건……."하지만 그때는 이미 전화가 끊겨 있었 다. 나는 얼마 동안 수화기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수화기를 귀에 대보았다. 그러나 틀림없이 전화는 끊겨 있었다. 좀 석연찮은 기분으로 부엌의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샌드위치를 먹었 다. 그 전화가 걸려 오기 전에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칼을 오른손에 들고 빵을 자르려고 했을 때, 나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뭔가 중요한 것이었다. 떠올리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떠올리지 못 했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빵을 두 쪽으로 자르려고 했을때, 그것이 문득 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리려 애썼다. 하 지만 불가능했다. 그 기억은 그것이 이전에 서식하고 있었던 의식의 깜깜한 벽 지(僻地)로 돌아가 버렸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냈을 때, 또 전화 벨이 울렸다. 나는 이번에는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구미코의 목소리였다. "여보세요"하고 나는 말했다. "잘 있어요? 점심을 먹었어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먹었어. 당신은 무얼 먹었지?"하고 나는 물었다. "아무것도"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아침부터 쭉 바빠서 뭔가를 먹을 틈이 없었 어요. 조금 있다가 근처에서 샌드위치라도 사와서 먹어야죠. 당신은 뭘 먹었어 요?" 나는 내가 먹은 것을 설명했다. "그래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다지 부러워하 지 않는 것 같았다. "아침에 당신에게 이야기해 두려는 걸 깜빡 잊었어요. 가노 씨라는 사람이 오늘 당신에게 전화할 거예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벌써 왔어. 방금 전에. 당신과 나, 그리고 당신의 오빠 이름을 말하고는 용건도 말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 버렸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끊었어요?" "응, 나중에 다시 건다고 하면서." "그럼 다시 가노 씨가 전화하거든 시키는 대로 하세요. 중요한 일이니까. 아마 그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할지도 몰라요." "만나러 가다니, 오늘 당장?" "오늘 무슨 약속이나 예정이 있어요?" "없어"하고 나는 말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나에게는 예정이나 약속 같은 건 무엇 하나 없다. "하지만 도대체 가노 씨는 누구야? 그리고 나에게 대관절 어떤 용건이 있는 건지 말해 주지 않겠어? 나도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조 금은 알아 두고 싶어. 만일 내 취직과 관계가 있다면 나는 그런 일로 당신 오빠 와 그다지 연관되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그건 전에도 말해 두었을 텐데." "당신 취직 일 같은 건 아니에요"하고 그녀는 귀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고양이 일이에요." "고양이?" "저기, 미안하지만, 지금 일에서 손을 뗄 수가 없어요. 누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전화도 겨우 걸었어요. 점심도 여태 못 먹었다고 했잖아요. 전화 끊어도 되겠죠? 한가해지면 다시 전화할게요." "바쁜 건 알겠는데, 그런 까닭도 모를 일을 갑자기 밀어붙이면 나도 곤란하단 말이야. 도대체 고양이가 어쨌다는 거야? 그 가노라는 사람은……." "하여튼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해줘요. 알았죠? 이건 심각한 일이에요. 꼭 집 에서 그 사람 전화를 기다려요. 그럼 끊을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곤 끊었 다. 2시 30분에 전화 벨이 울렸을 때, 나는 소파에서 선잠을 자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을 자명종 시계의 벨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을 뻗어 누름 단추 를 눌러 벨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시계가 없었다. 내가 자고 있었던 곳은 침대가 아닌 소파 위였다. 그리고 그때는 아침이 아니라 오후였다. 나는 일 어나서 전화 있는 데까지 갔다. "여보세요"하고 나는 말했다. "여보세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점심 전에 전화를 걸었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오카다 도루 씨죠?" "그렇습니다. 오카다 도루입니다." "저는 가노라고 합니다." "아까 전화하신 분이죠?" "그렇습니다. 아까는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그런데 오카다 씨께서는 오늘 무슨 계획이 있으신지요?" "특별히 이렇다 할 계획이랄 것까진 없습니다만"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줄은 압니다만, 지금 뵐 수 있을는지요?" 고 여자가 말했 다. "오늘 지금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막 20초 전에 보았으니까 구태여 볼 필요도 없었지만,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보았다. 시간은 역시 오후 2시 30분이었다. "오래 걸리는 일입니까?"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다지 오래 걸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생각보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저도 정확한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죄 송합니다"하고 여자는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해도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 다. 나는 구미코가 전화로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나에게 상대방이 말하 는 대로 해주라고 했다. 그것은 심각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니 나로서는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것을 심각한 일이라고 하면 그것은 심각한 일이다. "알았습니다. 그럼 어디로 찾아뵈면 될까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1층에 커피숍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4시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괜찮으신지 요?" "좋습니다." "저는 서른한 살이며 빨간 비닐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하고 그녀가 말했다. 맙소사, 이 여자의 이야기에는 어딘가 기묘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기묘함 이 한순간 나를 혼란시켰다. 그러나 그 여자가 이야기한 무엇이 기묘한지 나로 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서른한 살의 여자가 빨간 비닐 모자를 써서는 안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알았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아마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만일을 위하여 오카다 씨의 외모상 특징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는지 요?"하고 여자는 말했다. 나는 자신의 외모상의 특징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는 도 대체 어떤 외모상의 특징이 있는 것일까? "서른 살입니다. 신장은 172센티미터, 체중은 63킬로그램, 머리는 짧습니다. 안 경은 쓰지 않았습니다."아냐, 이건 도무지 특징이랄 수 없어. 나는 설명하면서 생 각했다. 그런 모습을 한 사람은 시나가와 퍼시픽 호텔 커피숍에 어쩌면 50명쯤 될는지도 몰라. 나는 전에 한 번 거기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무척이나 넓은 커피숍이었다. 뭔가 더 사람의 눈을 끌 만한 특별한 특징이 필요할텐데. 그러나 나는 그러한 특징을 무엇 하나 떠올릴 수 없었다. 물론 나에게 특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사인이 들어 있는 〈스케치 오브 스페인 〉을 가지고 있다. 맥박은 꽤 느려 통상 1분 동안에 47로, 38.5도의 고열이 났을 때도 70밖에 되지 않았다. 실직한 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형제 이름 을 전부 외우고 있다. 하지만 그런 건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다. "어떤 옷을 입고 오실 건가요?"하고 여자가 물었다. "글쎄요"하고 나는 말했다.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갑작스런 일이어서." "그러면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나와 주세요"하고 여자는 딱 잘라 말했 다. "오카다 씨께서는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를 가지고 계신지요?"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감색 바탕에 크림색의 작은 물방울이 그려진 넥타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2년인가 3년 전 내 생일날 구미코가 선 물한 것이었다. "그걸 매고 나와 주십시오. 그러면 4시에 뵙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여자는 말했 다. 그리곤 전화를 끊었다. 나는 옷장을 열고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이를 찾았다. 그러나 넥타이 걸이에는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가 없었다. 서랍을 모두 열어 보았다. 옷장 속의 옷 상자도 모두 열어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는 없었다. 만일 그 넥 타이가 적어도 집 안에 있다면 나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구미코는 의복 정리는 항상 완벽하게 해놓았다. 내 넥타이가 걸려 있어야 할 장소 이외의 다른 곳에 나의 넥타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옷은, 내 것이나 그녀 의 것이나 여느 때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셔츠는 주름 하나 없이 서랍 에 정리되어 있었으며, 스웨터를 넣어 둔 상자에는 방충제가 듬뿍 깔려 있었다. 뚜껑을 열기만 했을 뿐인데도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어떤 상자에는 그녀가 학 생 시절에 입던 옷이 들어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라든지 고등학교 때 입던 감색 교복 같은 것들이 오래 된 앨범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어째서 그런 것들을 일부 러 보존해 두는 건지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버릴 기회가 없어서 이제까 지 가지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혹은 방글라데시에라도 보내려고 하는 건지도 모 른다. 아니면 언젠가는 문화 자료로 쓸 작정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찌됐 건 내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장롱에 손을 얹은 채, 마지막으로 그 넥타이를 맨 것이 언제였나를 생각해 보 았다. 하지만 암만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멋진 넥타이였지만, 법률 사 무소에 매고 가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만일 그 넥타이를 매고 사무소에 갔 다면 반드시 점심 시간에 누군가가 나에게로 와서"멋진 넥타이로군. 색깔도 좋 고, 느낌도 밝고……"그런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일 종의 경고인 것이다. 내가 근무하던 사모소에서 넥타이에 대해 칭찬받는 것은 결코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회사에 갈 때는 그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그 넥타이를 매는 것은 콘서트에 간다든지 격식을 차린 저녁을 먹 으러 가는 등의 사적인 경우나, 비교적 공식적인 경우에만 국한 되었다. 말하자 면, 아내가 나에게"오늘은 좀 차려 입고 나가요"하고 말하는 경우였다. 그다지 많은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그럴 때 나는 그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를 맸 다. 감색 양복에 잘 어울렸으며, 아내도 그 넥타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그 넥타이를 마지막에 맨 때가 언제였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생각이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옷장 속을 훑어보고선 찾기를 포기했다. 물방울 무늬의 넥타 이는 어떠한 이유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는 감색 양복 을 입고 하늘색 셔츠에 줄무늬 넥타이를 맸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녀는 나를 찾 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빨간 모자를 쓴 서른할 살의 여자를 이쪽에서 발 견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양복을 입은 채로 쇼파에 앉아 얼마 동안 가만히 벽을 바라보고 있었 다. 양복을 입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3계절용인 감색 양복은 이 계절에 입기 에 조금 덥기는 하나, 고맙게도 비가 내리고 있었던 탓으로 6월치고는 조금 서 늘했다. 사무소에서의 마지막 날에도(4월이었다)나는 이 양복을 입고 갔다. 문득 무언가가 마음에 걸려 양복 주머니를 하나하나 뒤져 보다가 가슴 쪽 안주머니 바닥에서 작년 날짜로 된 영수증을 한 장 발견했다. 어딘가에서 탄 택시 요금 영수증이었다. 사무소에 청구했으면 받을 수 있었을텐데 이젠 너무 늦었다. 나는 그 영수증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회사를 그만둔 후 약 두 달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이 양복에 팔을 끼워 본 적 이 없었다. 오랜만에 양복을 입으니 나의 몸이 뭔가 다른 물질에 단단하게 휩싸 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무겁게 굳어져 있어서 아무리 봐도 몸에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서 얼마 동안 방안을 걸어 다니고, 거울 앞에 가서 소매나 양복 끝을 잡아당기며 그것이 몸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팔을 한껏 뻗어 크게 숨 을 쉬고 몸을 구부려 두 달 사이에 체형이 바뀌지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서 다시 한 번 쇼파에 앉았다. 하지만 역시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그해 봄까지는 매일 양복을 입고 출근했는데, 그것으로 별다른 위화감 같은 것 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일했던 법률 사무소는 복장이 꽤 까다로운 편이 어서 나 같은 말단 직원에게조차도 양복을 입고 다닐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나 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양복을 입고 회사에 나갔다. 그러나 이렇게 지금 양복을 입고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자니 왠지 자신이 옳지 못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뭔가 야비한 목적으로 경력 을 속인다든지, 남몰래 여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뒤가 켕기는 느낌과 흡사했다. 나는 점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현관으로 가서 신발장에서 갈색 가죽 구두를 꺼내 구둣주걱을 이용해 그 것을 신었다. 구두에는 하얀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다. 여자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여자 쪽에서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커피숍에 도착하자 그곳을 한바퀴 돌며 빨간 모자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빨간 모자를 쓴 여자는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보니 4시가 되려면 아직 10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웨이트리스가 가져다 준 물을 마시며 커피를 주문했다. 그때 등뒤에서 여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오카다 도루 씨죠?"나는 깜 짝 놀라 돌아보았다. 실내를 둘러보고 자리에 앉은 지 아직 3분도 채 되지 않았 었다. 여자는 하얀 상의에 노란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빨간 비닐 모자를 쓰고 있었 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여자와 마주보았다. 비교적 아름다운 여자였다. 적 어도 내가 전화 목소리를 통해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아름다웠다. 날 씬한 몸매에 화장도 고상했다. 옷차림도 좋았다. 그녀가 입고 있던 재킷이나 블 라우스도 바느질이 훌륭한 고급품이었으며, 재킷의 깃에는 금브로치가 빛나고 있었다. 일류 회사의 비서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빨간 모자만은 어울리지 않 았다. 그 정도로 센스 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일부러 빨간 비닐 모 자를 썼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를 만날 때의 표시로 그 빨 간 모자를 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눈에 띈 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건 분명 눈에 띄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녀가 맞은편 자리에 앉고 나는 다시 내 자리에 앉았다. "저를 금방 알아보셨네요."나는 의아하게 여기며 물어 보았다.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를 못 찾았습니다.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텐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어쩔 수 없이 줄무늬 넥타이를 매고 왔습니다. 제 쪽에서 댁을 찾으려고 했죠. 그런데 어떻게 저를 알아보셨습니까?" "물론 알아봅니다"하고 여자는 말했다. 그리곤 손에 들고 있던 하얀 에나멜 핸 드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빨간 비닐 모자를 벗어 그 위에 얹었다. 핸드백은 모자 밑에 푹 숨어 버렸다. 이제부터 뭔가 마술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모자를 집으면 그 속의 핸드백이 사라져 버렸다든지 하는. "하지만 넥타이 무늬가 다르니까요"하고 나는 말했다. "넥타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한 눈으로 내 넥타이를 보았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느낌으로. 그 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신기한 눈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상하게 깊이가 없다. 아름다운 눈임에도 불 구하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만들어 박은 눈같이 평 면적이다. 하지만 물론 의안은 아니다. 그것은 제대로 움직이며 깜빡거리기도 한 다. 어째서 이런 복잡한 커피숍에서 초면인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넓디넓은 커피숍은 거의 꽉 차 있었으며, 내 나이 또래의 남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나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를 그녀에 게 물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바쁜 듯이 돌아다니고 있는 웨이터를 불러 페리에를 주문했다. 페리에 는 없다고 웨이터가 말했다. 토닉 워터는 있습니다만. 여자는 그것에 대하여 잠 시 생각하고선 그걸 줘요. 하고 말했다. 토닉 워터가 나올 때까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나도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여자는 테이블 위의 빨간 모자를 집어 들고 그 밑에 놓여 있던 핸드백 의 물림쇠를 열어 거기에서 카세트 테이프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의 광택이 있는 까만 가죽 케이스를 꺼냈다. 명함 케이스였다. 명함 케이스에도 물림쇠가 달려 있었다. 물림쇠가 달려 있는 명함 케이스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거기에 서 소중한 듯이 명함을 한 장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도 명함을 꺼내려 하였으나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서야 이젠 내게 명함미 없다는 것을 떠올 렸다. 명함은 얇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옅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코에 가까이 대보니 냄새가 더욱 선명해졌다. 틀림없이 향기였다. 그리고 거기 엔, 단 한 줄, 까맣고 작은 글씨로 이름이 씌어 있었다. 가노 마루타 마루타? 난 생각했다. 그리고 뒤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내가 그 명함의 의미에 대하여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에 웨이터가 와서 그녀 앞에 얼음이 넣어진 글라스를 놓고 토닉 워터를 반쯤 따랐다. 글라스 안에는 쐐 기 모양으로 자른 레몬이 들어 있었다. 그후에 은색 커피포트와 쟁반을 든 웨이 트리스가 와서 내 앞에 커피잔을 놓고 거기에 커피를 따르곤, 마치 나쁜 점괘가 나온 제비를 남에게 밀어붙이듯이 살며시 계산서를 놓고 갔다.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습니다"하고 가노 마루타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것 도 씌어 있지 않은 뒷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뿐입니다. 전화 번호도 주소도 저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아무도 저에게는 전화를 걸지 않기 때문이죠. 제 쪽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렇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 의미 없는 맞장구는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 는 하늘에 떠 있는 섬처럼, 테이블의 상공에서 얼마 동안 허무하게 감돌고 있었 다. 여자는 양손으로 글라스를 떠받치듯 들고 빨대로 아주 조금 마셨다. 그리고 얼 굴을 조금 찌푸리고는 이젠 흥미을 잃었다는 듯이 글라스를 옆으로 밀어냈다. "마루타는 제 본명이 아닙니다"하고 가노 마루타가 말했다. "가노는 제 성입니 다. 하지만 마루타는 직업상의 이름이에요. 몰타(Malta)섬에서 딴 것이죠. 오카다 씨는 몰타 섬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다고 나는 말했다. 나는 몰타 섬에 가본 적이 없다. 가까운 시일에 갈 계획도 없다. 가보려고 생각한 적조차 없다. 내가 몰타 섬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허브 알버트가 연주한〈몰타 섬의 모래〉뿐이었으나, 그것은 참으로 신통치 못한 곡 이었다. "저는 몰타 섬에서 3년 살았습니다. 몰타는 물이 맛없는 곳이죠. 도저히 먹지 못할 정도입니다. 마치 바닷물을 희석시킨 것 같은 맛이에요. 빵도 짭짤합니다 만, 그건 소금을 넣어서가 아니라 원래 물이 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빵은 그런 대로 맛이 괜찮습니다. 전 몰타의 빵을 좋아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셨다. "몰타는 물이 상당히 맛없는 곳입니다만, 섬의 어떤 특정 지역에서 솟아나는 물 은 신체에 굉장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건 신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특수한 물이에요. 그 물은 몰타의 그 장소에서밖에 솟아나지 않습니다. 그 샘은 산속에 있어서, 산기슭에 있는 마을에서 그곳까지 올라가는 데는 몇 시간이나 걸리죠. 그리고 그 물은 가지고 내려올 수가 없습니다. 그 물은 다른 장소로 가져 가면 효력을 잃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본인이 그곳까지 가 야만 해요. 그 물에 관한 기록은 십자군 시대의 문헌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성스러운 물이라고 불렀죠. 앨런 긴즈버그도 그 물을 마시러 왔었습니다. 키스 리처드도 왔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3년 동안 살았어요. 그 산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말입니다. 그곳에서 야채를 재배하기도 하고, 옷감 짜는 법을 배 우기도 하며 살았죠. 그리고 그 샘에 다니며 그 물을 마셨습니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였습니다. 1주일 동안 그 물만을 마시며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적도 있었어요. 1주일 동안 그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에요. 그 와 같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수행이라 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여 몸을 정화하는 것이죠. 그것은 실로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연으로 저는 일본 에 돌아와서 몰타라는 지명을 직업상의 이름으로 선택했어요"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요?"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가노 마루타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직업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돈 을 받고 있지 않으니까요. 상담을 해드리고 신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저의 역할입니다. 신체에 유효한 물의 연구도 하고 있죠. 돈은 문제없습니다. 저에게는 얼마만큼의 재산이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병원을 경영하셨는데, 재산 상속이라는 형태로 저와 여동생에게 주식과 부동산을 물려 주셨어요. 세무사가 그것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매년 정기적인 수입도 있습니다. 저는 몇 권의 책도 썼으므로 적지만 그 수입도 있습니다. 제가 하는 신체에 관한 일은 어디까지나 무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화 번호도 주소도 기입하지 않았죠. 제 쪽에서 전 화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냥 끄덕였을 뿐이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의 하나하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로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로 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체? 앨런 긴즈버그? 나는 점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나는 결코 직감에 뛰어난 타입의 인간 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뭔가 새로운 문제의 냄새가 났다. "죄송합니다만 조금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아까 아내는 고양 이 문제로 댁을 만나뵙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를 듣 고 있어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로서는 전후 사정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우리 집 고양이와 관계가 있는 일입니까?" "그렇습니다"하고 여자는 말했다. "그러나 그전에 오카다 씨가 한 가지 알아 두 실 것이 있습니다." 가노 마루타는 또다시 핸드백의 물림쇠를 열고 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봉 투 속에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여동생 사 진이에요"하고 가노 마루타는 말했다. 그 컬러 사진에는 두 명의 여자가 찍혀 있 었다. 한 사람은 가노 마루타인데 그녀는 그 사진 속에서도 모자를 쓰고 있었다. 노란 모자였다. 그 모자 역시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여동생 쪽은, 이야기의 흐름으로 그것은 아마도 여동생이라고 추측되는데, 1960년대 초에 유행했던 듯 한 파스텔 톤의 양장을 하고, 그것에 어울리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당시 그런 색깔을 ‘샤베트 톤’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모자를 쓰는 것을 좋아 하는 자매일 거라고 나는 상상했다. 머리 모양은 대통령 부인시절의 재클린 케 네디와 흡사했다. 제법 많은 양의 헤어 스프레이를 사용했으리라고 느껴졌다. 화 장은 좀 짙은 편이었으나 얼굴 생김새 자체는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 며, 나이는 20대 초반에서 중반쯤으로 보였다. 나는 잠시 들여다보다가 그 사진 을 가노 마루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사진을 다시 봉투에 집어 넣고 그 봉투 를 핸드백에 넣은 후 물림쇠를 잠갔다. "여동생은 저보다 다섯 살 아래예요"하고 가노 마루타는 말했다. "그런데 여동 생을 와타야 노보루 씨가 폭력으로 욕보였습니다." 맙소사. 나는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 버리고 싶 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양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입가를 닦은 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기침을 했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 일로 여동생 분께서 상처받으셨다면 저로서 는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하고 나는 서두를 꺼냈다. "하지만 알아주셨 으면 합니다만, 저와 처남과는 개인적으로 각별히 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그러니 까 혹시 그 일에 관하여 무엇인가……." "그 일로 오카다 씨를 비난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하고 가노 마루타는 딱 잘 라 말했다. 「만일 누군가가 그 일로 비난받아야 한다면 먼저 제가 비난받아야 하겠죠. 제 주의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구태여 따져 말한다면 제가 동생을 지켜 주어야만 했어요. 오카다 씨,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카다 씨도 잘 아시듯이 이 땅에는 폭력이 범람해 있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는 더 폭력적이며 더 혼란스러운 곳도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일어나 버린 일 은 일어나 버린 일입니다. 동생은 그 상처로부터, 그 능욕으로부터 회복될 것이 며, 또한 회복되어야만 해요. 그것은 고맙게도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이건 동생에게 한 말입니다만 ‘더 심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거야’라는 겁니 다. 제가 가장 문제시하는 것은 동생의 신체입니다.」 "신체"하고 나는 되풀이하여 말했다. 아무래도 그녀 이야기의 테마는 신체에 관 한 것으로 일관되어 있는 듯했다. "그 전후 상황에 대해서 여기에서 상세한 설명은 할 수 없습니다. 길고 복잡한 이야기며, 이렇게 말하면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아마도 오카다 씨가 그 이야기 의 내막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지금 단계로서는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그 건 저희들이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세계의 이야기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저는 그 일로 오카다 씨에게 불만을 말씀드리려고 오카다 씨를 뵙자고 한 것은 아닙 니다. 말한 것도 없이 오카다 씨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저는 다만 동생 이 와타야 노보루 씨로 인하여 일시적이기는 하나 그 신체가 더럽혀졌다는 사실 을 오카다씨가 알아 두셨으면 한 것뿐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오카다 씨와 제 동 생은 어떠한 형태로 관련되는 일이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동생은 저의 조수 비슷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럴 경우에 와타야 씨와 동생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오카다 씨도 일단 알아 두시는 편이 좋지 않 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셨으면 합 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침묵이 흘렀다. 가노 마루타는 당신도 조금더 그 일을 생각 해 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꾹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도 그것에 대하여 조금 생 각해 보았다. 오타야 노보루가 가노 마루타의 동생을 범한 사실에 관하여, 그리 고 그것과 신체와의 관계에 관하여, 또 그것들과 행방불명이 된 우리 집 고양이 와의 관계에 관하여. "그렇다면"나는 주뼛주뼛 말을 꺼냈다. "댁도 댁의 동생 분도 그 일을 세상에 공공연하게 알린다든지, 또는 경찰에 호소한다든지 하는 일은 하시지 않겠다는 겁니까?" "물론입니다"하고 가노 마루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저희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희는 무엇이 그 일을 일어나게 했 는가를 더 정확히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것을 알고 해결하지 않으면 더 나쁜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죠." 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안심했다. 와타야 노보루가 강간죄로 체포되어 유죄를 선고받고 교도소에 들어간들 나와는 그다지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내의 오빠는 세상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 므로 그것은 어지간한 뉴스 거리가 될 것이며, 구미코가 그 일로 충격을 받을것 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나로서는 나 자신의 정신 위생을 위해서라도 그런 일 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오늘 만나 뵌 용건은 순전히 고양이 일입니다"하고 가노 마루타는 말했다. "고 양이 일로 와타야 노보루 씨로부터 상담을 받았습니다. 부인 되시는 오카다 구 미코 씨가 오라버니인 와타야씨에게 행방 불명이 된 고양이 일을 상담하시고, 다시 와타야 씨가 저에게 상담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렇군, 이제 알 것 같군. 그녀는 초감각을 지닌 사람쯤으로 우리 집 고양이의 행방에 관한 상담을 받은 것이다. 와타야 집안은 예전부터 점이나 풍수 지리에 열중했다. 물론 그런 것은 개인의 자유다. 믿고 싶은 것은 믿으면 된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상대의 여동생을 범해야 하나? 어째서 그런 불필요하고 귀찮은 일 을 일으켜야 하나? "당신께서는 그런 것들을 찾는 일을 전문으로 하고 계신지요?"하고 나는 그녀 에게 물어 보았다. 가노 마루타는 그 깊이 없는 눈으로 나의 얼굴을 가만히 보 았다. 그녀의 눈은 왠지 빈집의 창문으로부터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눈빛으로 보아 그녀는 내 질문의 취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신기한 장소에 사시는군요."그녀는 나의 질문을 묵살하고 말했다. "그렇습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신기하단 말입니까?" 가노 마루타는 그것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거의 손을 안댄 토닉 워터를 또 다시 10센티미터 가량 저편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고양이라는 동물은 감수성이 예민한 동물입니다." 나와 가노 마루타 사이에는 얼마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이 신기한 장소며 고양이가 감수성이 예민한 동물이라는 것 은 알았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그 곳에서 살아왔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그런데 어째서 지금에 와서 갑자기 집을 나간 것일까요? 어째서 더 이전에 나가지 않았을까요?" "분명하게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만 아마 흐름이 바뀐 탓이겠죠. 뭔가의 관계로 흐름을 방해받은 것입니다." "흐름이라고요?" "고양이가 살아 있을지 저로서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고 양이가 집 근처에 있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 근처를 아 무리 찾아도 고양이는 발견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손에 잔을 들고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유리창 밖으로 가는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에는 어두운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우울한 듯이 우산을 쓰고 육교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손을 꺼내 주세요"하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오른쪽 손바닥을 위로 하여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나는 손금을 보리라 생 각했다. 그러나 가노 마루타는 손금에는 전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똑바로 손을 뻗어 나의 손바닥에 그녀의 손바닥을 겹쳤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성실하지 못한 연인을 조용히 비난하 듯이, 웨이트리스가 와서, 나와 가노 마루타가 테이블 위에서 아무 말도 없이 손 을 마주잡고 있는 것을 못 본 척하면서 나의 잔에 커피를 따라 주었다. 주위 사 람들은 슬쩍슬쩍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누구든 아는 사람이 이곳에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오늘 여기에 오기 전에 본 것을 한 가지만 떠올려 주세요"하고 가노 마루타가 말했다. "한 가지만 말입니까?"하고 나는 물었다. "한 가지만입니다." 나는 아내의 옷 상자 안에 있었던 꽃무늬 원피스를 떠올렸다. 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로부터 5분 가량 우리는 그대로 손을 맞대고 있었다. 그건 상당히 길게 여겨 졌다. 주위 사람들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손에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정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녀의 손은 무척 작았다. 그리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연인의 손처럼 친밀하지도 않았 고 의사의 손처럼 기능적이지도 않았다. 그 손의 감촉은 그녀의 눈과 매우 흡사 했다. 그녀와 손을 맞대고 있자니 그녀가 가만히 나를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텅 빈 집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에는 가구도 없으며 커튼도 카펫 도 없다. 다만 텅 빈 공간일 뿐이다. 이윽고 가노 마루타는 나의 손에서 손을 떼 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카다 씨"하고 가노 마루타가 말했다. "당신에게는 앞으로 한동안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거예요. 고양이는 그 시작에 불과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이라고요?"나는 말했다. "그건 좋은 일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나 쁜 일일까요?" 가노 마루타는 생각하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습니 다. 언뜻 보기엔 좋은데 나쁜 일도 있으며, 언뜻 보기엔 나쁜데 좋은 일도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런 것은 뭐랄까 일반론으로 들리는데요. 좀더 구체적인 정보는 없을는지요?" "말씀하신 대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분명 일반론처럼 들리겠지요」"하고 가 노 마루타는 말했다. "그러나 오카다 씨, 사물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론으 로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이해해 주세요. 저희들은 점쟁 이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닙니다. 저희들이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어디까지나 막 연한 것뿐이예요.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며, 때로는 진부하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들은 그렇게 밖에는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것은 분명 사람의 눈을 끌겠지요. 그 러나 그것들의 대부분은 조잡한 사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불필요한 곳 에 들러 돌아가는 것과 같은 거예요. 멀리 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사물은 점점 일반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말한 것은 무엇 하나 이해 할 수 없었다. "또 전화드려도 괜찮겠습니까?"하고 가노 마루타는 물었다. "예"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솔직히 그 누구도 전화 같은건 하지 않았으면 싶 었다. 하지만 나는 ‘예’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빨간 모자를 재빠르게 손에 들고 그 밑에 숨겨진 핸드백을 들고 일어났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른 채 거기에 꿈쩍도 않고 앉아 있었다. "한 가지만 사소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만"하고 가노 마루타는 빨간 모자를 쓰고 나서 나를 내려다보듯 하며 말했다. "당신의 물방울 무늬 넥타이는 집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될 거예요." 4 높은 탑과 깊은 우물, 또는 노몬한을 멀리 떠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 구미코는 기분이 좋았다. 굉장히 기분이 좋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내가 가노 마루타를 만나고 집에 돌아온 것은 6시 조금 전이었으므로 구미코가 돌아오기 전에 멋진 저녁 식사 준비를 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냉동 식품으로 간단한 저녁을 준비했다. 그리고 둘이서 맥주를 마시면서 그것을 먹었 다. 그녀는 기분이 좋을 때는 늘 그렇듯이 회사 이야기를 했다. 그날 사무실에서 누구를 만났다든지, 어떠한 일을 했다든지, 동료 중 누가 유능하며 누가 그렇지 못하다든지, 그런 이야기를 말이다. 나는 그것을 들으면서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거의 이야기의 반 정도밖에 듣고 있지 않았으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는 별로 싫지 않았다. 이야기의 내용은 어 떻든, 그녀가 식탁에서 열심히 회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았 다. 가정에 온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제각기 맡겨진 책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회사 이야기를 하고, 나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하며 그 이야 기를 듣는다. 그것은 내가 결혼하기 이전에 막연하게 그렸던 가정의 모습과는 꽤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건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물론 나는 어렸을 때에도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자신의 손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말하자면 좋든 싫든 부여받은 것이었다. 그 러나 나는 지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후천적인 세계에 속해 있다. 나의 가정이 다. 그것은 물론 완벽한 가정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해도 기본적으로 나는 나의 가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으며, 만일 거기에 무슨 문제가 존재한다면 그것 은 내 속에 본질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문제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어요?"하고 그녀는 물었다. 나는 간단하게 시나가와 퍼시픽 호텔에서 가노 마루타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 이야기도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를 옷장에서 찾을 수 없었던 일, 하지만 가노 마루타가 복잡한 커피숍에서 나를 금 방 알아보았던 일,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했 는지, 그런 것을 나는 이야기했다. 구미코는 가노 마루타의 빨간 모자 이야기를 듣고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우리의 고양이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에 대 하여 명확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은 그녀를 적잖게 실망시킨 듯했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 사람도 잘 모르는 건가요?"하고 그 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고양이가 이 근 처에는 이미 없다는 것뿐이란 말이죠?" "뭐, 그런 모양이야"하고 나는 대답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흐름이 방해 받은’장소여서 고양이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가노 마루타의 지적에 관해서 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구미코는 아마도 그것을 마음에 담아 놓을 거라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더 이상 성가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 가 나쁜 장소라고 하면 그녀가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사가자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곤란해진다. 우선 현재 우리의 경제력으로는 어디 다른 곳 으로 이사하기란 불가능하다. "고양이는 이 근처에 이미 없다……그것이 그 사람이 말했던 이야기야." "그렇다면 그 고양이는 이제 우리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건 알 수 없지"하고 나는 말했다. "말하는 게 아주 모호하단 말야. 모든 것 이 암시적이고. 상세한 것을 알게 되면 또 연락한다고 했지만."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을."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이 방면으로는 전혀 문외한이잖아." 나는 내 잔에 맥주를 따르고 그 거품이 가라앉는 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이 구미코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었다. "그 사람, 돈도 아무것도, 사례라는 것은 일절 받지 않는대요." "그건 다행이네"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아무것도 문제는 없는 셈이군. 돈도 받지 않는다, 영혼도 가져 가지 않는다, 공주님도 데려가지 않는다. 잃을 건 하 나도 없네."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나에게 그 고양이는 정말로 중요한 존재란 말예요" 하고 아내는 말했다. "뭐랄까, 그 고양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우리가 결혼한 다음주에 둘이서 발견한 고양이잖아요. 기억하죠? 그 고 양이를 발견했을 때를." "기억하지, 물론."나는 말했다. "아직 새끼 고양이인데 비에 흠뻑 젖어 있었잖아요. 그날, 많은 비가 내렸었죠. 나는 당신을 역까지 마중 나갔어요. 우산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술집 옆의 맥주 상자 안에 그 고양이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죠. 그리고 그 고양이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른 고양이예요. 그 고양이는 나에게는 중요한 상징과 같은 거죠. 그러니 나는 그 고양이를 잃을 수 없어요." "그건 잘 알아"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아무리 당신이 찾아봐 주어도 발견되지 않고, 사라진 지 벌써 열흘이 지났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오빠에게 전화를 한 거예요. 고양이 를 찾아 줄 것 같은 점쟁이라든지 영능자라든지 그런 사람을 알고 있지 않냐고 요……. 당신은 오빠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것이 싫을지도 모르지만 오빠는 아버 지를 닮아서 그런 일에 관한 한 잘 안단 말예요." "집안의 전통"이라고 나는 후미진 강을 건너는 석양의 바람과 같은 차가운 목 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와타야 노보루와 그녀는 도대체 어떤 관계로 아는 것일 까?" 아내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어딘가에서 우연히 알았겠죠. 최근에는 무척이 나 발이 넓은 모양이니까요." "그렇겠지." "그 사람, 무척이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꽤 색다른 사람이래 요" 하고 아내는 포크로 마카로니 그라탕을 기계적으로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뭐라 그랬죠, 그 사람 이름이?" "가노 마루타" 하고 나는 말했다. "몰타 섬에서 수행한 가노 마루타." "그래요, 가노 마루타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어요, 그녀를?" "글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얹은 양손을 쳐다보았다. "그녀 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았어. 지루하지 않다는 건 나쁘지 않지. 어차피 알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가득하잖아. 그리고 누군가가 그 공백 을 메워야 한다고. 누군가가 메워야 한다면 지루한 사람보다야 지루하지 않은 사람 편이 훨씬 좋겠지. 안 그래? 이르테면 혼다 씨처럼 말야." 아내는 그 말을 듣고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여보,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 각 안해요? 난, 그 사람 좋았는데." "나도 마찬가지야"하고 나는 말했다. 결혼하고서 1년 정도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혼다 씨라는 노인의 집을 방문했 다. 그는 와타야 집안이 높이 평가하는 ‘신 내린’한 사람이었으나 심하게 귀 가 멀어 우리가 말하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보청기를 달고 있었으나 그래 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덕분에 우리는 창호지가 드르르 울릴정도의 큰소리로 그에게 말해야 했다. 저렇게 귀가 나빠서야 신이 말하는 것도 제대로 못 듣지 않을까, 하고 우리는 생각했다. 하긴 귀가 어두워서 오히려 신의 말을 듣기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의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것은 전쟁에 서 입은 부상 때문이라고 한다그는 1939년에 발발한 노몬한(Nomonhan)에서의 전쟁에 관동군의 하사관으로 종군하여 만주, 외몽고 국경 지대에서 소련과 외몽 고의 연합 부대와 싸우던 중, 포격인지 수류탄인지에 의해 고막이 찢어진 것이 다. 우리가 혼다 씨를 만나러 간 것은 특별히 영적 능력을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 다.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엇으며, 구미코도 그녀의 부모나 오빠에 비한다 면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신앙심은 현저히 희박했다. 그녀도 어느 정도는 길 흉의 조짐을 들먹여 마음을 졸이기도 했고, 불길한 예언을 들을 때마다 걱정을 하곤 했다. 그러나 스스로 나서서 그런 일에 적극적으로 관계하려 하지는 않았 다. 우리가 혼다 씨를 만나러 간 것은 그녀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우리의 결혼을 승낙하는 그의 조건이었다. 결혼의 조건치고는 좀 기묘한 것이었으나, 우리는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따르기로 했다. 솔 직히 말하면 나도 구미코도 우리의 결혼을 그녀의 부모가 쉽게 승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급 공무원이었다. 니가타현의 그다지 유복 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농가의 차남이었으나, 장학금을 받아 도쿄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운수성(運輸省)의 엘리트 관료가 되었다. 그것뿐이라면 나도 장인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심할 정도로 프라이드가 높고 독선적이었다. 명령하는 것에 익숙하며, 자신이 속한 세계의 가 치관에 대해서는 조금도 미심쩍어 하지않았다. 그에게는 신분 제도가 전부였다.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복종했고, 아랫사람을 짓밟는 일에 있어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지위도 없을 뿐더러 돈도 없고, 집안도 별 볼일 없고, 학력도 뛰어나지 못할 뿐더러 미래의 전망도 거의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일푼인 스물네 살의 청년을 딸의 결혼 상대로서 반갑게 맞 아 주리라고는, 나도 구미코도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부모가 강하게 반대할 경우 우리끼리 결혼을 강행하여 부모와 관계없이 살아갈 작정이었다. 우리는 서 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으며 젊었다. 부모와 인연을 끊더라도, 무일푼이어도, 둘 이서 행복하게 살아갈 확신이 있었다. 사실 내가 그녀의 집에 청혼하러 갔을 때, 그녀 부모의 반응은 무척이나 냉담 했다. 마치 전세계의 냉장고 문을 한꺼번에 열어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집안 배경에 대해서 철저하게 알아보았다. 나의 집에는 좋게든 나쁘게든 특기할 만한 집안 배경은 없었다. 그러니 그런 것은 시간과 비용의 낭비였다. 나 의 선조가 에도 시대에 무엇을 했는지 그때까지 나는 전혀 몰랐다. 그들의 조사 에 의하면 나의 선조 중에는 승려나 학자가 많았다고 한다. 교육 수준은 전체적 으로 높았으나 현실적 유용성은(말하자면 돈을 만드는 재능은) 그다지 타고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천재라 불릴 만한 인물도 없었고 범죄자도 없었다. 훈장을 받 은 사람도 없었으며 여배우와 동반 자살한 사람도 없었다. 그중의 한 사람만이 막부 말기에 결성된 무력 조직인 신선조(新選祖)의 일원으로, 이름은 전혀 알려 져 있지 않지만, 메이지 유신 때 일본의 앞날을 염려하여 어딘가에 있는 절의 현관에서 할복 자살했다. 그가 나의 선조 중에서 가장 이채로운 인물이었다. 그 러나 그들은 나의 선조들로부터도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그 당시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범 시험을 볼것이냐는 그들의 질문에 나는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사실 그 당시 물론 망설임은 있었으나 좀더 열심히 공부하여 사법 시험에 도전해 볼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 대학 시절의 성적을 알아본다면 내가 그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은 분 명했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그들의 딸과 결혼하기에는 마땅치 못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승낙한것―그것은 정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는데―은 혼다 씨 덕분이었다. 혼다 씨는 우리의 여러 사 정 이야기를 듣고, 댁의 따님의 결혼 상대자로서 이만큼 훌륭한 상대는 앞으로 없다, 따님이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한다면 결코 반대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대단히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단언했다. 그 당시 구미코의 부모는 혼다 씨가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에 대하여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를 딸의 남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장소를 잘못 찾아온 이방인이었으며 초대받 지 않은 손님이었다. 나와 구미코는 한 달에 두번 가량 의무적으로 장인의 집을 방문하여 함께 식사를 하곤 했는데, 그것은 정말로 진절머리나는 경험이었다. 그 것은 무의미한 고행과 잔인한 고문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행위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나에게는 그들이 신주쿠 역 정도의 길이가 되는 식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쪽에서 그들은 뭔가를 먹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존재는 너무도 멀어 그들의 눈에는 작게만 비친다. 결혼하고 1년쯤 되었을 무렵, 나는 장인과 심하게 다투었고, 그 이후로는 전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래 서 나는 겨우 마음속에서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노력만큼 인간을 소모시키는 것은 없다. 하지만 결혼하고 얼마 동안은 아내의 집안과 조금이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고 나 나름대로 노력했다. 혼다 씨와 한 달에 한번 만나는 것은 그러한 노력 중 에서는 분명히 가장 고통이 적은 일이었다. 혼다 씨에게 가는 사례는 전부 장인이 대주었다. 우리는 술을 한 병 들고 메구 로에 있는 그의 집을 한 달에 한 번 찾아가면 되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면 된다. 간단한 일이었다. 우리는 금방 혼다 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혼다 씨는 귀가 어두워 늘 텔레비전 을 크게 켜놓고 있는 것을(그것은 정말로 시끄러웠다) 제외하곤 매우 느낌이 좋 은 할아버지였다. 그는 술을 좋아해서 우리들이 한 병 가져 가면 아주 기쁜 얼 굴을 했다. 우리가 혼다 씨 집에 가는 것은 언제나 오전중이었다. 혼다 씨는 여름이건 겨 울이건 다다미방의 묻어 놓은 각로(脚爐)에 앉아 있었다. 겨울에는 거기에 이불 이 덮여 불이 넣어져 있었고, 여름에는 이불도 없으며 불도 넣지 않았다. 그는 꽤 유명한 점쟁이인 듯했지만, 생활은 아주 소박했다. 소박하다기보다는 거의 속 세를 떠난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집은 작았고, 현관은 겨우 한 사람 이 구두를 벗었다 신었다 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다다미는 낡아빠졌고 깨 진 유지창에는 접착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다. 집의 맞은편은 자동차 수리 공장 이어서 언제나 누군가가 큰소리로 뭔가를 외치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잠옷과 작업복의 중간쯤 되는 것으로 최근에 세탁된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 었다. 그는 혼자 살았는데, 매일 가정부가 와서 청소르 하고 식사를 만들어 주었 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아마도 자신의 의복 세탁을 강하게 거부 하고 있는 듯했다. 홀쭉해진 볼에는 짧고 하얀 수염이 늘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그의 집에 있는 물건 중에서 조금이라도 훌륭한 것이 있다면 그건 압도적으로 큰 컬러 텔레비전이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은 늘 NHK 방송을 내보내고 있 었다. 혼다 씨가 NHK 방송을 특별히 좋아했는지, 채널을 바꾸는 것이 귀찮았는 지, 그렇지 않으면 NHK밖에 수신이 되지 않는 특수 텔레비전이었는지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우리가 가면 그는 마루에 놓여진 텔레비전을 향해 앉아 점을 치는 데 쓰는 막 대인 점대를 각로 위에서 휘젓곤 했다. 그사이에도 NHK 방송은 요리 프로그램 이라든지 분재를 돌보는 방법이라든지 정시 뉴스라든지 정치 좌담회 같은 것들 을 잠시도 중단하지 않고 큰 음량으로 방송하고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NHK의 아나운서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히지 않았으므로 혼다 씨 집에 가면 매우 불안 정해졌다. NHK의 아나운서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가 사 람들의 정당한 감각을 인위적으로 마모시켜 사회의 불완전함이 주은 다양한 종 류의 아픔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범률에는 맞지 않을지도 몰라"하고 어느 날 혼다 씨는 나에게 말했다. 아니면 그는 나의 20미터쯤 뒤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말했는지도 모른 다. "그렇습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법률이라는 것은 요컨대 지구상의 사상을 지배하는 것이야. 음은 음이며, 양은 양이라는 세계지. 나는 나며, 그는 그라는 세계. ‘나는 나, 그는 그며, 늦가을.’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속해 있지 않아. 당신이 속해 있는 곳은 그 위 아니면 그 아래야." "그 위와 아래 중 어느 쪽이 좋은 겁니까?"하고 나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물어 보았다. "어느 쪽이 좋다는 문제가 아니야"하고 혼다 씨는 말했다. 그리고 잠시 콜록거 리다 휴지 위에칵하고 가래를 뱉었다. 그는 자신의 가래를 한동안 쳐다보고 나 서 휴지를 뭉쳐 휴지통에 넣었다.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쁘다는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야. 흐름에 역행 하지 말고 위로 올라가야 할 때는 위로 가고, 아래로 내려가야 할 때는 아래로 가는 거야. 위로 가야 할 때는 가장 높은 탑을 찾아내어 그 정상에 오르면 되지. 아래로 내려가야 할 때는 가장 깊은 우물을 찾아내어 그 밑으로 내려가면 돼. 흐름이 없을 때는 가만히 있으면 되고. 흐름에 역행하면 모든 것은 망가지는 법 이지. 모든 것이 망가지면 이 세상은 어둠이야. ‘나는 그, 그는 내가 되어, 봄날 밤.’ 나를 버릴 때 나는 존재한다구." "지금은 흐름이 없는 때인가요?"하고 구미코는 물었다. "뭐라고?" "지금은 흐름이 없는 때인가요?"하고 구미코는 외쳤다. "지금은 없지"하고 혼다 씨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가만 히 있으면 돼.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단지 물을 조심하는 게 좋아. 이 사람은 앞 으로 물에 관련된 문제로 고생할지도 몰라. 있어야 되는 곳에 없는 물. 있어서는 안되는 곳에 있는 물. 어쨌든 물을 조심하는 편이 좋아." 옆에서는 구미코가 너무나도 심가한 얼굴로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녀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물입니까?"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모르겠지만 물이야"하고 혼다 씨는 말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어떤 대학 교수가 일본어 문법의 흐트러짐은 생활 양식의 흐트 러짐과 정확히 호응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그것은 흐트러 짐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문법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가 위에서 이렇게 하자고 정해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재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였으나 혼다 씨는 물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도 솔직히 물 때문에 고생했지" 하고 혼다 씨가 말했다. "노몬한에는 전혀 물이 없었어. 전선이 혼란 상태에 빠져 보급도 끊겨 버린 거야. 물도 식량도 붕 대도 탄약도 없었지. 그건 지독한 전쟁이었어. 뒤에 있는 잘난 양반들은 얼마만 큼 빨리 어느 곳을 점령해야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거야. 보급 같은 건 아무 도 생각하지 않는다구. 나는 사흘 동안 거의 물을 마시지 못한적이 있었어. 아침 에 수건을 꺼내 놓으면 거기에 아침 이슬이 아주 조금 맺히는데, 그것을 짜서 몇 방울 물을 마실 수가 있었지. 그것뿐이었어. 그외에 물이라는 것은 전혀 없었 다구. 그땐 정말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세상에 목이 마른 것처럼 괴로운것 은 없다구. 이렇게 목이 마를 바에야 차라리 총을 맞아 죽는편이 낮다고 생각했 을 정도였지. 배에 총을 맞은 전우들이 물을 달라고 외치고 있었어. 미쳐 버린 사람도 있었지. 그건 정말로 생지옥이었다구. 눈앞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어. 거기에 가면 물은 얼마든지 있었다구. 그렇지만 거기에는 갈 수 없었어. 우리들 과 강 사이에는 화염 방사기를 실은 소련의 대형 전차가 쭉 줄지어 서 있었지. 기관총의 진지가 바늘꽂이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구. 언덕 위에는 솜씨가 좋은 저격병도 있었지. 한밤중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조명탄을 쏘아 올렸지.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38식 보병총과 한 사람 앞에 25발의 탄환뿐이었다구. 많은 전우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뜨러 갔지. 참을 수 없었던 거야. 하지만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구. 모두 죽었지. 이봐, 가만히 있어야 할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좋아." 그는 휴지를 집어 큰소리를 내어 코를 풀곤 자신의 콧물을 잠시 점검하고 나서 야 그것을 구겨서 버렸다. "흐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 하지만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려야 한다구. 그동안은 죽은 셈치면 돼." "그러니까 저는 얼마 동안 죽은 셈치고 있는 게 좋다는 말씀입니까?"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뭐라고?" "그러니까 저는 얼마 동안 죽은 셈치고 있는 게 좋다는 말씀이냐구요?" "그렇지"하고 그는 말했다. "죽어야만 헤어날 길도 있다. 노몬한." 그리고 그는 한 시간 정도 계속 노몬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그냥 그것을 듣 고 있었다. 1년 동안 혼다 씨 집에 한 달에 한 번씩 다니면서 우리가 그의 ‘지 시를 받은’적은 거의 없었다. 그는 점 같은 건 거의 보지도 않았다. 그가 우리 에게 들려주는 것은 대부분 노몬한 전투 이야기였다. 옆에 있던 중위의 머리가 포탄을 맞아 반이 날아갔다든지, 소련군 전차에 달려들어 화염병을 태웠다든지, 사막에 불시착한 소련군 파일럿을 다 같이 추격하여 사살했다든지, 그런 이야기 만 했다. 나름대로 꽤 재미도 있고 스릴 있는 이야기였으나, 보통 어떤 이야기라 도 일곱 번이고 여덟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으면 그 재미가 약간 덜해지는 경향 이 있다. 더군다나 그것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음량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람이 강한 날에 벼랑 저편을 향해 외쳐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는 변두리에 있는 영화관의 맨 앞줄에서 오래 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두 사람은 혼다 씨 집을 나와서 한동안은 귀가 잘 안들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나는, 혼다 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혼다 씨 의 이야기는 내 상상력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대부분은 피비린내 나는 이 야기였으나, 더러워진 옷을 입은 이제 곧 죽을 것 같은 노인으로부터 전투의 전 말을 듣고 있으면 왠지 옛날 이야기처럼 현실감을 잃은 듯이 들렸다. 그들은 반 세기쯤 전에 몽고와 외몽고의 국경 지대에서 풀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 황야를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나는 혼다 씨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노몬한 전쟁 같은 것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 장렬한 전투였다. 거의 맨주먹이다시피 한 보병이 전투력이 뛰어난 소련 의 기계화 부대에 덤벼들어 비참하게 패한 이야기였다. 많은 부대가 파괴되고 전멸되었다. 전멸을 피하기 위하여 독단으로 후방으로 이동한 지휘관은 상관으 로부터 자살할 것을 강요받고 허무하게 죽어 갔다. 소련군의 포로가 된 병사들 의 대부분은 적전도망죄로 문초당할 것을 우려하여 전후의 포로 교환에도 응하 지 않고 몽고 땅에 뼈를 묻었다. 그리고 혼다 씨는 청각을 잃은 채 제대한 후 이렇게 점쟁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게 다행이었는지도 몰라"하고 혼다 씨는 말했다. "만일 내가 귀에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남쪽의 섬으로 보내져 죽었겠 지. 사실 노몬한에서 살아 남은 병사의 대부분은 남쪽으로 보내져 죽었어. 노몬 한은 제국의 육군에게 있어서는 치욕적이며 부끄러운 전쟁이었고, 거기에서 살 아 남은 병사는 모두 가장 격렬한 전장으로 보내졌으니, 그건 마치 거기에 가서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 노몬한에서 형편없는 지휘를 한 참모들은 후에 중앙에서 출세했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전후에 정치가가 되기도 했지. 그 러나 그 아래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자들은 거의 모두가 압살당해 버렸다구." "어째서 노몬한 전쟁이 육군에게 그 정도로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나요?"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병사들은 모두 장렬하고 용감하게 싸웠잖습니까? 많은 병 사가 죽어 갔다죠? 그런데 어째서 살아 남은 자들이 그렇게 냉대당해야 했나 요?" 하지만 내 질문은 그의 귀에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점괘를 다시 한 번 짤랑거리며 섞었다. "물을 조심하는 편이 좋아"하고 그는 말했다. 그것이 그날 이야기의 끝이었다. 내가 장인과 싸운 후로 우리는 혼다 씨에게 갈 수 없게 되었다. 장인이 사례금 을 내고 있었으니까 예전처럼 다닐 수 없었고, 우리에게는 그 사례를(도대체 어 느 정도의 금액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지불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다. 결혼했을 즈음 우리의 경제 상태는 수면에 겨우 목을 내밀고 있는 정도 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혼다 씨를 잊게 되었다. 대개의 젊고 바쁜 사람이 대개의 노인을 어느새 잊듯이 말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는 혼다 씨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혼다 씨가 말했던 이야기와 가노 마루타의 이야기를 연관시켜 보았다. 혼다 씨는 나에게 물을 조 심하라고 했다. 가노 마루타는 물을 연구하기 위해 몰타 섬에서 수행을 거듭했 다. 우연의 일치 일지는 모르나 드들은 둘 다 매우 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나서 나는 노몬한 전쟁터의 광경을 떠올려 보았다. 소련군의 전차와 기관총 진지, 그 저편에 흐르는 강. 그리고 참기 어려운 심한 갈증. 나는 그 강의 물 소리를 어둠 속에서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여보"하고 아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자요?" "안 자"하고 나는 대답했다. "넥타이 말인데요, 이제 겨우 생각났어요. 그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연말에 세 탁소에 맡겼어요.구김이 가 있어서 다림질을 해달라고요. 그리곤 찾으러 가는 것 을 잊고 있었네요." "연말?"하고 나는 말했다. "벌써 반년이 지났잖아?" "네,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데 말예요. 당신, 내 성격 알잖아요? 그런 건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데. 어떡하나? 그것, 멋진 넥타이였는데."그녀는 손을 뻗어 나의 팔을 만졌다. "역 앞에 있는 세탁소인데 아직 있을까요?" "내일 가보지. 아마 있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벌써 반년이나 지났잖아요. 보통 세탁소 같으면 찾 으러 오지 않는 세탁물은 3개월 단위로 처분한단 말예요. 그렇게 해도 괜찮게 돼 있거든요. 어째서 아직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노 마루타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넥타이는 어딘가 집 밖 에서 찾을 거라고 했거든." 어둠 속에서 아내가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 그 사람 말 을 믿어요?" "왠지 믿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네." "그러다가 언젠간 당신도 오빠와 말이 통하게 되는 거 아녜요?"하고 아내는 즐 거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나는 말했다. 아내가 잠든 후에도 나는 노몬한 전쟁터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는 많은 병사들이 잠들어 있었다. 하늘에 가득한 별이 머리 위에 있고 수많은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 강이 흐르 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들었다. 5 레몬 사탕 중독 날 수 없는 새와 말라 버린 우물 아침 설거지를 끝낸 후 자전거를 타고 역 앞에 있는 세탁소로 갔다. 세탁소 주 인은 이마에 깊은 주름이 진 40대 후반의 마른 남자로, 선반 위에 놓인 라디오 카세트로 퍼시 페이스 오케스트라의 테이프를 듣고 있었다. 저음 전용 스피커 같은 것이 부착되어 있는 JVC사(社)의 대형 라디오 카세트 옆에는 카세트 테이 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화려한 현을 구사하며 〈타라의 테 마〉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는 구석에서 음악에 맞춰 휘파람을 불면서 시원스러 운 동작으로 셔츠에 스팀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카운터 앞에 서서, 죄송하 지만 실은 넥타이를 작년 연말에 맡긴 채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침 9시 30분, 그의 평온한 작은 세계에서의 나의 출현은, 그리스 비극에서 불행한 소식을 가 져다 주는 사자의 도래와 비슷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교환증도 없겠죠?"하고 세탁소 주인은 아주 천박한 소리로 말했다. 그는 내 쪽을 향해 말하고 있지도 않았다. 카운터 옆의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달력의 6월 사진은 알프스 풍경이었다. 거기에는 초록의 산 골짜기가 있고 한 무리의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저편에 있는 마터호 른이지 몽블랑인지에는 하얗고 뚜렷한 구름이 떠 있었다. 그는 ‘어차피 잊어버 리려거든 끝까지 잊어버려 주었으면 좋았을텐데’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의 얼굴 을 보았다. 그것은 꽤 직선적인 표정이었다. "작년 말이라, 그건 좀 힘들군. 반년이나 전인데. 일단 찾아보기는 하겠소만." 그는 다리미의 스위치를 끄고 다리미를 다리미대 위에 세워 놓은 후, 테이프에 맞춰〈여름날의 사랑〉을 휘파람으로 불면서 구석방의 선반을 바스락거리며 넥 타이를 찾고 있었다. 나는 그 영화를 고등학교 시절 여자 친구와 둘이서 보았다. 트로이 도나휴와 샌드라 디가 나오는 영화다. 리바이벌 작품으로 코니 프랜시스의 〈보이 헌트〉 와 동시 상영이었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 내 기억으로는 그건 그다지 신통 치 못한 영화였다. 하지만 13년 후에 세탁소에서 그 테마 음악을 듣고 있자니 그 시절의 좋았던 일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영화를 본 후에 우리는 공원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며 케이크를 먹었다. 〈피서지에서 생 긴 일〉과 〈보이 헌트〉가 리바이벌되어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었으니까 그것 은 여름 방학 때였던 것 같다. 카페테리아 안에는 벌이 있었다. 작은 벌 두 마리 가 그녀의 케이크에 앉았다. 나는 그 작은 날갯짓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봐요, 파란 물방울 무늬 넥타이라고 했던가요?"하고 세탁소 주인이 물었다. "이름은 오카다 씨였나요?" "그래요"하고 나는 말했다. "댁이 운이 좋군요"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내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넥타이는 있었어"하 고 나는 말했다. "굉장하네요"하고 아내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어딘지 좋은 성적을 받은 아이를 칭찬할 때와 같은 인위적인 느 낌이 있었다. 그것은 나를 조금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점심 시간이 되기를 기다 렸다가 전화를 거는 편이 나았을 뻔했다. "찾아서 안심했어요. 저기요, 지금 일에서 손을 뗄 수가 없어요. 이것도 통화중 에 받은 전화거든요. 이따 점심 시간에라도 다시 걸어 줄래요? 미안하지만." "낮에 걸게"하고 나는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신문을 들고 툇마루로 가서 여는 때처럼 배를 깔고 누워 구 인 광고 페이지를 펴고, 불가해한 암호와 암시로 꽉 찬 광고란을 처음부터 끝까 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읽어 갔다. 세상에는 실로 온갖 종류의 직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새 묘지의 분양도처럼 신문의 지면에 깨끗한 칸으로 정 확히 나누어 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하나 찾 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 칸 안에는 비록 단 편적이기는 하지만 정보 또는 사실이 존재해 있었으나, 그 정보나 사실은 이미 지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거기에 죽 진열되어 있는 이름이나 기호나 숫자는 너무나도 세세하게 흩어져 있어서 나에게 복원 불가능한 동물의 뼈를 연상시켰 다. 구인 광고 페이지를 오랜 시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내게 일종의 가벼운 마비 증상이 느껴졌다. 지금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이제부터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지, 혹은 어디로 가지 않으려 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 점점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태엽 감는 새가 어느 나무 위에선가 울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이익, 하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신문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 켜 기둥에 기대어 정원을 바라보았다. 조금 있다가 새는 다시 한 번 울었다. 이 웃 정원의 소나무 위쪽에서 그 끼이이이익, 하는 울음 소리가 드렸다. 눈을 부릅 뜨고 보았으나 새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울음 소리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어쨌든 이렇게 하여 전세계의 하루분의 태엽이 감기는 것이다. 10시가ㅣ 되기 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단한 비는 아니다. 내리고 있는지 어떤지 잘 알 수 없을 정도의 적은 비다.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보면 틀림없이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는 상황과 비가 내리고 있지 않다는 상황이 있으며, 그 두 개의 상황에는 어딘가에 경계선이 그 어져 있어야 한다. 나는 한동안 툇마루에 걸터앉아 그 어딘가에 있을 경계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점심 때까지 근처에 있는 시립 수영장에 수영하러 갈까, 아니면 골목으로 고양이르 찾으러 갈까, 하고 망설였다. 툇마루의 기둥에 기대어 정원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얼마 동안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수영장/고양이 찾기 결국 고양이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고양이는 이미 이 근처에 없다고 가노 마 루타는 말했다. 그러나 왠지 그날 아침에는 고양이를 찾으러 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고양이를 찾으러 가는 것은 이미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고, 게다가 내가 고양이를 찾으러 간 것을 구미코가 알면 조금은 기뻐할지도 모른다. 나는 얇은 레인코트를 입었다. 우산은 쓰지 않기로 했다. 테니스화를 신고 레인코트 주머니에 집 열쇠와 레몬 사탕 몇 개를 집어 넣고 집을 나섰다. 정원을 가로질 러 담에 손을 올렸을 때 전화 벨이 울리고 있는 것이 들렸다. 나는 그 자세 그 대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게 우리 집의 전화 벨 소리인지 아니면 어딘가 다른 집의 전화 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전화 벨 소리라는 것은 한 발짝 집 밖으로 나와 버리면 모두 똑같게 들리는 것이다. 나는 포기하고 그 담을 넘어 골목으로 내려갔다. 풀의 부드러움이 테니스화의 얇은 고무 밑창에 느껴졌다. 골목은 여느 때보다 조용했다. 한동안 가만히 서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아무런 소리 도 들리지 않았다. 전화 벨은 이미 멈추어져 있었다. 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거리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은 한치의 틈도 없이 단색인 회색으로 물들 어 있었다. 이런 날에는 아마도 구름이 여러 지표의 소리를 흡수해 버리는 것이 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냐, 그들이 흡수해 버리는 것은 소리만이 아니다. 거기에 는 다른 여러 가지의 것도 함께 흡수되어 버리는 거다. 이를테면 감각 같은 것 까지도. 나는 레인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 좁은 골목을 빠져 나갔다. 빨랫대 에 밀려 좁아진 담벼락 사이를 옆으로 기듯이 빠져 나가 어느 집인가의 처마 밑 을 지나 그 폐기된 운하와 같은 길을 살며시, 조용히 걸었다. 테니스화의 밑창은 풀 위에서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종간 지점의 어느 집에는 라디오가 켜져 있었다. 그것이 내가 들은 유일한 소리였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인생 상담이었 다. 중년의 남자가 장모에 관한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단편적으로밖에 들을 수 없었는데, 장모는 68세로 경마에 몰두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집을 지나쳐 버리자 점점 라디오 소리도 작아지고 마침내는 사라져 버렸다. 라디오 소리만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중년 남자와 경마광인 장모까지 조금씩 희미해져 사라져 버린 듯했다. 이윽고 나는 그 빈집 앞에 이르렀다. 빈집은 변함없이 고요히 거기에 있었다. 덧문을 단단히 못으로 박아 둔 이층 건물 가옥은 낮게 드리워진 회색 비구름을 배경으로 그곳에 솟아 있었다. 예전 폭풍우 치던 밤에 강 어귀의 암초를 들이받 아 그대로 버려진 화물선처럼 보였다. 만일 정원의 잡초가 요전에 보았을 때보 다 키가 더 자라 있지 않았더라면, 뭔가의 이유로 그 장소에만 시간이 멈춰졌다 고 해도 나는 그것을 믿었을지 모른다. 며칠 동안 계속된 장마 덕분에 풀잎은 선명한 초록으로 빛나며 흙에 뿌리를 내린 풀만이 가질 수 있는 들가의 냄새를 주변에 풍기고 있었다. 그 풀바다 한가운데의 주변에는, 새의 석상이 요전에 보 았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지금이라도 날아가려는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그 새가 날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었 으며 새도 알고 있었다. 새는 그곳에 고정된 채로 어딘가로 운반되든지 아니면 부서질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외에 새가 이 정원에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거기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곤 훨훨 풀 위를 방황하고 있는, 계 절에 뒤떨어진 배추흰나비뿐이었다. 배추흰나비는 무엇인가를 찾는 사이에 무엇 을 찾고 있었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배추흰나비는 발견될 가능성도 없는 무엇인가를 5분 가량 찾다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나는 사탕을 빨면서 철망의 담벼락에 기대어 한동안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의 기척은 없었다. 그곳은 뭔가 막강한 힘으로 자연의 흐름을 억지로 막 아 버린 웅덩이처럼 보였다. 문득 등뒤로 사람의 기척 같은 게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 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집의 울타리와 작은 문이 있었다. 요전에 여자 아이가 서 있었던 문이다. 그러나 문은 닫혀진 채였고 울타리 저쪽의 정원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모든 것은 희미한 습기를 지니고 있으며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잡초와 비 냄새가 났다. 내가 입은 레인코트의 냄새도 났다. 그리고 내 혀의 뒤쪽에는 반쯤 녹은 레몬 사탕이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각양 각색의 냄새가 났다. 둘레를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아무도 없었다. 가 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멀리서 아득하게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구름 위를 날고 있겠지. 하지만 그 소리도 점점 멀어져 마침내 주위는 다시금 침묵에 휩싸였다. 빈집의 정원을 둘러싼 철망의 울타리 입구에는 역시 철망으로 만들어 놓은 문 이 있었다. 시험 삼아 밀어 보니 싱거울 정도로 쉽게 열렸다. 그 문은 그냥 쑥 들어오면 돼요,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빈집이라고 해도 남의 집 의 대지에 마음대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약 8년에 걸쳐 세세하게 축적된 나의 법률 지식을 새삼스럽게 동원하지 않더라도 법률에 위반되는 행위다. 만일 근처 의 사람이 빈집에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의심쩍게 생각하여 경찰에 알린다면 경관이 바로 달려와 나를 심문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고양이를 찾고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기르고 있었던 고양이가 행방 불명되어 근처를 여기저기 찾고 있 었다고. 경관들은 나의 조소와 직업을 묻겠지. 그렇게 되면 실직 상태인 것을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실은 아마도 상대에게 경계심을 갖게 할 것임에 틀림 없다. 경찰은 최근 좌익 테러리스트 때문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그들 은 도쿄의 도처에 아지트가 있으며 그 바닥 밑에는 소총과 수제 폭탄을 몰래 숨 겨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말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아내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되면 구미코는 아마도 이성을 잃 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 정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알게 뭐야, 하 고 나는 생각했다. 무엇인가가 일어난다면 일어나면 돼.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싶 으면 일어나면 돼. 상관없어. 나는 천천히 주위을 살피면서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풀을 밟는 테니스화는 여 전히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키 작은 과실 나무가 몇 그 루 있었으며 잔디로 이어지는 꽤 넓은 구역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풀에 뒤덮여 무엇이 무엇인지 거의 분별할 수 없었다. 과수 나무 중에 두 그루 는 보기 싫은 덩굴 가시에 찔려 그대로 질식하여 죽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철 망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박달나무는 벌레의 알 탓으로 새하얗게 더럽혀져 있 었다. 날개 달린 작은 벌레가 귓가에서 한동안 시끄럽게 맴돌았다. 나는 석상 옆을 빠져 나가 처마 밑에 쌓여 있는 하얀 플라스틱 정원용 의자가 있는 데까지 가서 그것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맨위에 있는 의자는 흙투성이였 으나 그 바로 밑에 있는 의자는 그렇게 더럽지 않았다. 손으로 표면의 먼지를 털고 의자 위에 걸터 앉았다. 무성해진 잡초에 가려질 듯한 위치였으므로 골목 에서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처마 밑에 들어가 있으니 비에 젖을 염려도 없 었다. 거기에 앉아서 잔잔한 비를 맞고 있는 정원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휘파 람을 불었다. 그것이 무슨 곡이었는지 한동안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로 시니의〈도둑 까치〉의 서곡이었다. 이상한 여자가 전화를 걸어 왔을 때 내가 스파게티를 삶으면서 역시 휘파람으로 불었던 곡이다. 아무도 없는 정원에 앉아 서 잡초와 새의 석상을 바라보며 서투른 휘파람을 불고 있자니 왠지 어렸을 때 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장소에 있다. 아무도 내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무척이나 겨냥하여 작은 돌을 던지는 거다. 새의 석상이 좋겠지. 맞더라도 딱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살짝 던지는 거 다. 어렸을 적에 혼자 곧잘 그런 놀이를 했다.저기 멀리에 빈깡통을 놓고 그것이 꽉 찰 때까지 돌을 던지곤 했다. 나는 그것을 몇 시간이고 질리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발 밑에는 돌이 없었다. 모든 게 다 갖추어진 장소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다리를 의자 위에 올리고 무릎을 구부리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그리고 한동 안 눈을 감고 있었다.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눈을 감은 어둠은 구름에 휩싸인 하늘과 닮아 있었으나 그것보다는 회색이 약간 짙었다. 그리고 몇 분 간 격으로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것을 조금 다른 감촉의 회색으로 바꿔 갔다. 금색 이 들어간 회색, 초록을 섞은 회색, 빨강이 두드러지는 회색으로. 그렇게 많은 회색이 존재한다는 것에 나는 감탄했다. 인간은 참 신기한 존재라고 나는 생각 했다. 10분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종류의 회색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회색 색상 견본을 바라보면서 얼마 동안 아무 생각도 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저기요"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당황하여 눈을 떴다. 그리고 옆으로 몸을 기울이듯이 하여 잡초의 그늘에 서 울타리가 있는 문 쪽을 보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열려진 채였다. 내 뒤를 따라 누군가가 여기로 들어온 것이다.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저기요"하고 그 누군가가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여자 목소리였다. 그녀는 석상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지난번에 맞은편 집 정원에서 일광욕을 하던 여자 아이였다. 그녀는 전에 입었던 것과 똑같은 아디다스 티셔 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다리를 조금 끌고 있었다. 요전과 다른 점은 선글라스 를 쓰고 있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이런 데서 대관절 뭘 하고 있는 거예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고양이르 찾으러 왔어"하고 나는 대답했다. "정말?"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더구나 이런 곳에 꼼짝도 않고 앉아서 눈을 감고 휘파람을 불고 있는다고 해서 고양이가 나 타나지는 않을걸요?"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상관없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변태일지도 모른다고 여길 거예요. 조심하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변태는 아니죠, 아저씨?" "아니라고 생각해"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내 옆에 와서 처마 밑에 쌓아 놓은 정원 의자 중에서 덜 더러운 것을 시간을 두고 골라 그것을 다시 한 번 세심하게 점검한 후 지면에 놓고 걸터앉았 다. "게다가 무슨 곡인지 모르겠지만 아저씨의 휘파람은 도저히 멜로디로는 들리지 않아요. 혹시, 아저씨 게이는 아니죠?" "아니라고 생각해"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왜?" "게이는 휘파람이 서툴다고 들었거든요. 그거, 정말이에요?" "글쎄?"하고 나는 말했다. "아저씨가 게이든 변태든 뭐든 난 조금도 상관없지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이름을 모르니까 부르기 힘들어요." "오카다 도루"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나의 이름을 몇 번 되풀이했다. "그다지 신통치 못한 이름이네요."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오카다 도루라는 이름에는 왠지 전쟁 전의 외무 대신 같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말 해봤자 난 몰라요. 역사는 잘 모르거든요. 어쨌든 좋아요, 그런 건. 근 데 별명 같은 건 없어요? 오카다 도루 씨. 더 부르기 쉬운 걸로." 나는 생각해 보았으나 별명 같은 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태어나서 남들에 게 별명으로 불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왜일까? "없어"하고 나는 대답했다. "이를테면 곰이라든지 개구리라든지. "없어." "어휴, 뭐 하나 생각해 봐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태엽 감는 새"하고 나는 말했다. "태엽 감는 새?"하고 그녀는 입을 반쯤 벌리고 내 얼굴을 보았다. "그건 뭐예 요?" "태엽을 감는 새야"하고 나는 말했다. "매일 아침 나무 위에서 온 세계의 태엽 을 감는다구. 끼이이이익 하고." 그녀는 아직도 나의 얼글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문득 생각이 난 거야. 게다가 그 새는 매일 우리 집 근처에 오거든. 이웃집의 나무 위에서 끼이이이익 하고 울어. 하지만 누구도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없지." "그래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쨌든 좋아요. 그것도 상당히 부르기 힘들지만 오카다 도루보다는 훨씬 나아요. 태엽 감는 새님." "고마워"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의자에 양다리를 얹고 턱을 무릎 위에 괴었다. "그런데 네 이름은?"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가사하라 메이"하고 그녀는 말했다. "5월이라는 메이." "5월생이니?" "당연하잖아요? 6월에 태어나고선 메이 같은 이름을 붙였다면 헷갈려서 어떡하 겠어요?" "그건 그렇군. 근데 넌 아직도 학교에 안 가니?"하고 나는 물었다. "아저씨를 쭉 보고 있었어요. 태엽 감는 새님."가사하라 메이는 내 질문에는 대 답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철망의 문을 열고 이 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방안에 서 망원경으로 보고 있었어요. 난 항상 손에 작은 망원경을 들고 있거든요. 그리 곤 이 골목을 지켜 보죠. 아저씨는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여기는 꽤 여러 사람이 지나다녀요. 사람만이 아니라 갖가지 동물도 지나다니죠. 아저씨는 이런 데 혼자 앉아서 뭘 하고 있었어요?" "그냥 멍하게 있었어. 옛날 일을 떠올리기도 하고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가사하라 메이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저씨는 좀 별다르네요." "별다르지 않아. 누구든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만, 일부러 집 근처의 빈집에 들어가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그냥 멍하니 옛일을 떠올리며 휘파람을 부는 그런 건 자기 집 뜰에서 해도 되잖아요?" 그녀 말이 맞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쨌든 와타야 노보루 고양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죠?"하고 그녀는 말했다. "갈색 줄무늬에 꼬리 끝이 조금 구부러진 고양이죠? 한 번도 못 봤어요. 그 이후로 쭉 신경 써서 봤는데." 가사하라 메이는 짧은 바지 주머니에서 쇼트 호트 갑을 꺼내어 종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없이 담배를 피웠으나 이윽고 나의 얼굴을 가 만히 들여다보았다. "있잖아요, 아저씨, 머리 숱이 줄지 않았아요?" 나는 무의식중에 머리를 만졌다. "아니에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거기말고 앞머리 있는 부분. 정도 이상으로 벗 겨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아마 거기서부터 벗겨질 거예요. 알거든요, 난. 아저씨 같은 경우는 점점 이렇 게 뒤쪽으로 물러날 거예요"하며 그녀는 자기 머리를 꽉 잡고 뒤로 당겨 드러낸 하얀 이마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조심하라니 어떤 식으로 조심하면 되는 거지?" "하기야 사실 조심할 방법도 없지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머리가 벗겨지는 것에 대한 대응책은 없어요. 벗겨질 사람은 벗겨지고 벗겨질 때는 벗겨지죠. 그 런 건 막을 길이 없어요. 그러니까 왜 곧잘 머리 손질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둥 하는 건 다 거짓말이에요. 그 예로 신주쿠 역 근처에 가서 그 주변에 누워 있는 부량자들을 봐요. 벗겨진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매일 클리닉이니 사순이니 하는 샴푸로 머리를 감고 있다고 생각해요? 매일매일 무슨 무슨 로션을 쓱쓱 바를 것 같아요? 그런 건 화장품 회사가 적당하게 지어내서 머리 숱이 적은 사람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는 상술일 뿐이에요." "그렇군"하고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데 넌 어떻게 머리가 벗겨진 것에 대 해서 그렇게 상세하게 알지?" "요즘 가발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거든요. 어차피 학교에도 가지 않고 한 가하니까요. 앙케이트라든지 조사라든지 그런 걸 하고 있어요. 그래서 대머리에 관해선 꽤 상사하죠.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렇군." "하지만"하고 말하고 그녀는 담배를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구두 밑창으로 밟아 껐다. "내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절대로 대머리란 말을 써서는 안되 죠. 우리들은 ‘숱이 적으신 분’이라고 해야 하거든요. 대머리는 있잖아요, 차 별 용어래요. 내가 한번은 농담으로 ‘두발이 부자유스러운 분’이라고 말했다 가 굉장히 야단맞았어요. 그런 걸로 장난치면 안된다고요. 모두 굉장히 진지하게 일하고 있죠. 알아요?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굉장히 진지하단 말예요." 나는 주머니에서 레몬 사탕을 꺼내 하나 입에 넣곤 가사하라 메이에게도 권했 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 대신 담배를 또 꺼냈다. "저기요, 태엽 감는 새님"하고 가사하라 메이가 말했다. "아저씨 지금 실직 상 태죠?" "그래." "성실하게 일할 생각은 있어요?" "있지."그러나 스스로가 한 말에 점점 자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모르겠어" 하고 나는 고쳐 말했다. "뭐랄까,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스스로도 확실하게는 모르겠으니 잘 설명할 수가 없지만." 가사하라 메이는 한동안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저기요, 태엽 감는 새님, 만일 괜찮다면 요다음에 나랑 같이 그 가발 회사에 아르바이트하러 가지 않겠어요? 그다지 보수가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편한 일 이고 시간도 꽤 자유로워요. 그러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얼마 동안 그런 식으로 임시 변통적인 일을 해보면, 여러 가지 것들이 더 알기 쉬워지지 않을까 요? 기분 전환도 될 테고요." 그것도 나쁘진 않다도 생각했다. "나쁘진 않군"하고 나는 말했다. "좋아요, 그럼 요다음에 데리러 갈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집이 어디였죠?" "좀 설명하기 힘든데, 이 길을 쭉 따라 몇 번쯤 돌아가면 왼쪽에 빨간 혼다 시 빅이 세워져 있는 집이 있어. 범퍼에 ‘세계 인류가 평화롭기를’하는 스티커가 붙여져 있어. 그 하나 앞이 우리 집인데, 골목으로 접해 있는 입구는 없으니까 벽돌담을 넘어야 하거든. 내 키보다 조금 낮은 정도의 담인데." "괜찮아요. 그 정도의 담이라면 쉽게 넘을 수 있어요." "다리는 이제 아프지 않니?" 그녀는 한숨을 쉬는 듯한 소리를 내고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괜찮아요. 학교 에 가시 싫어서 억지로 다리를 끌며 다녀요. 부모님 앞에서 그런 척을 하고 있 을 뿐이에요. 그런데 어느샌가 그게 버릇이 되어 버렸어요. 아무도 보고 있지 않 을 때도, 혼자서 방에 있을 때도 다리가 불편한 척을 하게 되어 버렸죠. 난, 완 전주의자거든요. 남을 속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속이라고 하잖아요? 있잖아 요, 태엽 감는 새님, 아저씨는 용기가 있는 편이에요?"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옛날부터 용기가 없었어요?" "옛날부터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마 그렇겠지." "호기심은 있어요?" "호기심이라면 조금 있지." "용기와 호기심은 비슷한 게 아닐까요?"하고 가사하라 메이는 말했다. "용기가 있는 곳에 호기심이 있고, 호기심이 있는 곳에 용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 분명 비슷한 점은 있을지도 모르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네가 말 하는 것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호기심과 용기가 하나가 될 수도 있겠지."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간다든지 할 경우에는요." "그렇지."나는 혓바닥 위에서 레몬 사탕을 굴렸다. "몰래 남의 집 정원에 들어 간다든지 할 때는 호기심과 용기가 함께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리고 때로 호기심은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북돋워 주기도 해. 하지만 호기심이라는 것 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금방 사라져 버리지. 용기 쪽이 훨씬 먼 길을 가야 한다 구. 호기심이라는 것은 신용할 수 없는, 비위를 잘 맞춰 주는 친구와 똑같지. 부 추길 대로 부추겨 놓고 적당한 시점에서 싹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혼자서 자신의 용기를 긁어 모아 어떻게든 해나가야 한다구." 그녀는 그것에 대하여 얼마 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네요. 분명히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네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짧은 반바지에 묻어 있는 먼지를 손으로 털어 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있잖아요, 태엽 감는 새님, 우물을 보고 싶지 않아요?" "우물?"하고 나는 물었다. 우물이라고? "말라 버린 우물이 있어요. 여기에"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그 우물을 꽤 좋아 하는데 태엽 감는 새님은 보고 싶지 않아요?" 우물은 정원을 빠져 나가 집 건물을 옆으로 돌아가는 곳에 있었다. 대략 직경 1.5미터 정도인 둥근 모양의 우물로 두꺼운 둥근 판자로 만든 뚜껑이 얹혀져 있 었으며, 뚜껑 위에는 누름돌로서 콘크리트 벽돌이 두 개 얹혀 있었다. 지면으로 부터 1미터쯤 솟아오른 우물의 가장자리 둘레에는 마치 그 우물을 자기가 양보 해 주었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한 그루의 오래 된 나무가 있었다. 무슨 과실 나무 같았으나 그 이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우물은 이 집에 속해 있는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꽤 장기간에 걸쳐서 버림받 은 듯했다. 거기에는 ‘압도적인 무감각’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이 시선을 주는 것을 그만두면 무생물은 더욱더 무생물적으로 되 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버림받은 집’이라는 제목으로 이 집과 정원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린다면 그 우물을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플라스 틱 정원 의자나 새의 석상, 빛 바랜 덧문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완만한 시간의 경사가 숙명적인 붕괴를 향하여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주의 깊게 관찰해 보니 그 우물은 주변에 있는 다른 것들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집 이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이 우물은 여기에 존재했던 것 같았다. 뚜껑의 판자도 무척이나 오래된 것이었다. 우물의 벽은 시멘트로 단단히 칠해져 있었으나 그것 은 아무래도 이전부터 있었던 무슨 벽 위에―아마 보강을 위해서겠지―새로 시 멘트를 칠하여 굳힌 것처럼 보였다. 우물 옆에 있는 나무조차도 자기는 주위의 어떤 나무보다 훨씬 전부터 여기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 다. 벽돌을 치우고 반달 모양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판자를 들고 우물의 가장자리 에 손을 얹은 채 몸을 앞으로 쑥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도저히 밑바닥까 지는 볼 수 없었다. 꽤 깊은 우물인 듯, 중간쯤부터는 어둠 속으로 흡수되어 있 었다. 나는 냄새를 맡아 보았다. 곰팡내가 약간 났다. "물은 없어요"하고 가사하라 메이가 말했다. "물이 없는 우물." 날 수 없는 새, 물이 없는 우물, 나는 생각했다. 출구가 없는 골목, 그리고……. 그녀는 발 밑에 떨어져 있는 기왓장 조각을 집어 우물 속에 던졌다. 조금 있다 가 탁,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것뿐이었다. 손으로 비벼 뭉갤 수 있지 않을 까 싶을 정도로 꺼칠꺼칠하고 메마른 소리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가사하라 메 이의 얼굴을 보았다. "어째서 물이 없는 것일까? 말라 버렸을까? 아니면 누군가 가 묻어 버렸을까?"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일 묻었다면 전부 묻어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구멍만을 남겨 놓아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고, 누군가가 빠진 다든지 하면 위험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건 분명 그렇군"하고 나는 인정했다. "아마 뭔가의 영향으로 물이 말라 버렸 겠지." 이전에 혼다 씨가 이야기했던 것을 문득 떠올렸다. ‘위로 올라 가야 할 때는 가장 높은 탑을 찾아내어 그 정상에 오르면 되지. 아래로 내려가야 할 때는 가 장 깊은 우물을 찾아내어 그 밑에까지 내려가면 돼.’우선 우물은 여기 하나 찾 아낸 셈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몸을 굽혀 아무 생각 없이 그 어둠을 그냥 가만히 내려다보았 다. 이런 곳에, 이런 대낮에, 이런 깊은 어둠이 있다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헛 기침을 하고 침을 삼켰다. 헛기침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른 인간의 헛기침처 럼 울렸다. 침 속에는 레몬 사탕의 맛이 남아 있었다. 나는 우물에 다시 뚜껑을 덮고 벽돌을 제자리에 얹었다. 그리고 손목 시계를 보았다. 벌써 11시 30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점심 시간에 구미코에게 전화를 걸 어야 했다. "이제 슬슬 집에 가야겠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가사하라 메이는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좋아요, 태엽 감는 새님. 집으로 돌아 가세요." 우리가 정원을 가로지를 때, 새의 석상은 변함없이 그 메마른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한치의 틈도 없이 회색 구름에 휩싸여 있었으 나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가사하라 메이는 풀잎을 하나 집어 뜯어 그것을 하 늘 속으로 던졌다. 바람이 없었으므로 풀잎은 그대로 펄럭거리며 그녀의 발 밑 에 떨어졌다. "이제부터 해가 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있죠?"하고 그녀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상당히 있지"하고 나는 말했다. 6 오카다 구미코는 어떻게 태어나고, 와타야 노보루는 어떻게 내어났는가 나에게는 형제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미 성년이 되어 제각기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는 형제나 자매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는지 제대로 상상할 수가 없다. 구미코는 와타야 노보루가 화제에 오르면 뭔가 맛이 이상한 것을 잘 못 입에 넣은 것과 같은 좀 기묘한 표정을 짓는데, 그 표정 속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 나로서는 알기가 힘들었다. 내가 그녀의 오빠에 대해 호감이라 부 를 수 있는 감정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구미코는 잘 알고 있으며, 그 것을 또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와타야 노보루라는 인 물을 결코 바람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만일 그녀와 와타야 노보 루 사이에 오빠와 동생이라는 혈연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들 두 사람이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은 오 빠와 여동생 사이며, 따라서 모든 것이 좀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구미코와 와타야 노보루가 현실적으로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 다. 나는 아내의 친정과 전혀 왕래가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구미코의 아버지 와 싸워서 결정적으로 결별했던 것이다. 그것은 상당히 격한 싸움이었다. 태어나 서 지금까지 내가 다른 사람과 싸운 것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밖에 안된다. 하지 만 그 대신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심각해져서 도중에 그만둘 수 없게 되어 버린 다. 그러나 말하고 싶은 것을 깡그리 말해 버린 후에는 장인에 대해 신기할 정 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떠맡고 있던 무거운 짐으로부터 겨우 해방된 듯한 느낌뿐이었다. 증오도 분노도 남지 않았다. 저 사람의 인생도―그것이 내 눈을 통해 볼 때 얼마만큼이나 불쾌하고 어리석은 행태를 취하고 있었든―나름 대로 힘들었을 것이라고까지 여겼다. 나는 구미코에게 말했다. 이제 다시는 당신 의 부모를 만나지 않겠다, 하지만 당신이 부모를 만나러 가는 건 당신의 자유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고. 그러나 구미코는 그들을 만나러 가려고 하지 않았다. 「괜찬아요. 지금까지도 각별히 만나고 싶어서 만났던 것은 아니니까요」하고 구미코는 말했다. 와타야 노보루는 그때 이미 양친과 동거하고 있었으나, 당시 나와 장인과의 싸 움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초연하게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와타야 노보루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 전혀 관 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내의 친정과 왕래가 끊긴 후 내가 와타야 노보루와 얼굴을 마주할 이유는 없어졌다. 그리고 구미코도 역시 구태여 그와 얼굴을 마주칠 이유를 갖지 않았다. 그도 바빴고 그녀도 바빴다. 더구나 두 사람은 원래 그다지 친밀한 사이의 남매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구미코는 때때로 대학 연구실로 전화를 걸어 와타야 노보루와 이야기 를 했다. 와타야 노보루도 때때로 구미코의 회사로 전화를 건다(우리 집으로는 절대 전화하지 않는다). 오늘은 오빠에게 전화를 했는데, 혹은 오늘은 오빠가 우 리 회사에 전화를 걸어 왔어, 하고 구미코는 나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그들이 전 화로 무엇을 이야기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물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녀도 필요 없다면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와 와타야 노보루와의 대화 내용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또 아내 와 와타야 노보루가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 다만 솔직히 말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다. 구미코와 와타야 노보루라는, 어 떻게 생각해도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화제가 존재하는 지, 그리고 그것은 남매라는 특수한 혈연 관계를 통해 처음으로 성립되는 것인 지 어떤지. 내 아내와 와타야 노보루는 남매라고는 하지만 아홉 살이나 나이 차이가 있다. 게다가 어렸을 때 구미코는 몇 년 동안 아버지의 본가에 맡겨져서 자랐기 때문 에 두 사람 사이에서 남매의 친밀함 같은 것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 와타야 노보루와 구미코는 남매가 그들 둘만은 아니었다. 그들 둘 사이에 는 구미코의 언니인 또 다른 여자 형제가 있었다. 구미코보다 다섯 살 위였다. 그들은 원래 3남매였던 것이다. 구미코는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의 본가에 맡 겨지게 되어 도쿄를 떠나 니가타로 갔다. 그리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태어 날 때 그다지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기가 좋은 시골에서 자라는 편이 좋다 고 생각했다는 것이 나중에야 양친이 말해 준 이유였으나, 구미코에게 그건 납 득되지 않는 이유였다. 그녀는 이렇다하게 약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큰 병을 앓은 적도 없었고, 시골에 살 때 주위 사람들이 각별히 건강에 신경을 쓴 듯한 기억도 없었다. 「그건 변명일 따름이에요」하고 구미코는 말했다. 한참 후에 한 친적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할머니와 구미코의 어머니 사이에는 오랜 세월에 걸친 심한 불화가 있었다고 한다. 구미코가 니가타의 본 가에 맡겨진 것은, 말하자면 그 두 사람 사이의 잠정 협약과 같은 것이었다. 구 미코의 양친은 구미코를 일시적으로 할머니에게 맡김으로써 당신의 분노를 가라 앉힐 수 있었고, 할머니 쪽은 손녀 한 사람을 곁에 둠으로써 당신의 아들에 대 한(즉, 구미코의 아버지에 대한) 유대를 가지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 었던 것이다. 그건 인질과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하고 구미코는 말했다. "이미 언니와 오빠가 있었으니까 나 한 명쯤 없 어도 별로 상관이 없었던 거예요. 물론 우리 부모님에게 나를 버릴 생각까지는 없었겠지만, 아직 어리고 하니까 별 상관없겠지 하고 가벼운 기분으로 할머니께 보냈을 거예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게 가장 편한 해결책이었겠죠. 그런 걸 믿 을 수 있어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부모님은 전혀 알지 못했던 거예 요. 그런 것이 얼마나 어린아이에게 지독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그녀는 니가타의 할머니 곁에서 세 살 때부터 여섯 살 때까지 자랐다. 그것은 결코 불행한 생활도, 부자연스러운 생활도 아니었다. 구미코는 할머니의 맹목적 인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나이차가 많은 오빠나 언니와 함께 있는 것보다 나이 가 비슷한 또래의 사촌들과 노는 것이 오히려 즐겁기도 했다. 국민학교에 입학 할 나이가 되자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도쿄로 네려오기로 했다. 구미코와 오래 떨어져 있는 것에 그녀의 부모가 점점 불안을 느끼게 되어,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 된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도쿄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이미 늦은 때였다. 그녀가 도쿄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결정되고 나서 몇 주일 동 안 할머니는 심하게 흥분하여 부아를 끓였다. 할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밤에도 거의 자지 않았다. 그녀는 울기도 하다가, 심하게 화를 내기도 하다가, 입을 다 물고 있기도 했다. 구미코를 힘껏 껴안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팔이 부르틀 정 도로 자로 세게 때리곤 했다. 그리고 구미코의 어머니가 얼마나 지독한 여자인 가를 천한 말로 들려주곤 했다. 너를 보낼 수 없다, 네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이 대로 죽어 버리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가 하면, 너 같은 건 보고 싶지도 않다, 빨 리 어딘가로 가버리라고도 했다. 그녀는 가위를 꺼내와 자신을 손목을 찌르려고 도 했다. 구미코는 자기 주위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때 구미코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외부 세계로부터 마음을 일시적으로 닫아 버 리는 것이었다. 뭔가를 생각한다든지 뭔가를 원한다든지 하는 마음을 모두 없애 버리는 것이다. 상황은 그녀의 판단 능력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구미코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사고를 정지시켰다. 그로부터 몇 개월 동안의 기억이 그녀에게 는 거의 없다. 그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 하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하튼 정신이 돌아왔을 때 구미코는 새로운 가정 속에 있었다. 그 것은 본래 그녀가 있어야 하는 가정이었다. 거기에는 부모가 있었고 오빠와 언 니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가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환경 일 뿐이었다. 어떤 사정으로 자신이 할머니로부터 떨어져 거기로 데려와졌는지 구미코는 알 수 없었으나, 니가타의 집으로 이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장소는 여섯 살인 구미코에게는 거의 이해를 초월 한 세계였다. 구미코가 그때까지 있었던 세계와 그 세계는 모든 것이 너무나 다 른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닮은 듯이 보이는 것도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세계를 성립시키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관이나 원리 같은 것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가족과의 대화에 낄 수조차 없었다. 구미코는 그런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말이 없고 까다로운 아이가 되었다. 그녀는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지한면 되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이따 금씩 어머니나 아버지의 무릎에 안겨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의 몸에서 나 는 냄새가 그녀의 기억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냄새는 그녀를 아주 불 안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그 냄새를 증오하기조차 했다. 가족 중에서 그녀가 겨 우 마음을 열 수 있었던 사람은 언니뿐이었다. 양친은 그녀의 까다로움에 당황 해 했고, 오빠는 그 당시부터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니만은 그녀가 혼란되어 고독 속으로 꼼짝도 않고 들어가 있 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니는 참을성 있게 구미코를 돌보았다. 구미코와 같은 방 에서 자며 조금씩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고, 책을 읽어 주기도 하고, 함께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공부도 봐주었다. 그녀가 방의 한구석에서 몇 시간이고 혼자서 울고 있으면 곁에 와서 꼭 안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동생의 마음을 열어 주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만일 그녀가 집에 돌아온 이듬해에 언니 가 식중독 사고로 죽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여러가지 사정은 무척이나 달라졌을 것이다. "만일 언니가 쭉 살아 주었더라면 우리 집 일가는 좀더 잘되었을 거예요"하 고 구미코는 말했다. "언니는 그때 국민학교 6학년 밖에 안되었는데 이미 우리 집에선 대들보 같은 존재였거든요.언니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주었더라면 우리 모두는 지금보다는 나았을지도 몰라요. 적어도 나는 지금보다는 얼마만큼 구원 받았으리라고 생각해요. 이해할 수 있어요? 나는 그 이후로 모두에게 죄책감을 느껴 왔어요. 어째서 언니 대신 내가 죽어 버리지 않았는가 하고 말예요. 어차피 나 같은 건 살아 봤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누군가를 기쁘게 해줄 수도 없는데 하고요. 그리고 나의 부모님도, 나의 오빠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았어요. 어디 그뿐인가,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은 언니 이야기를 했어요. 언니가 얼마나 예쁘며, 얼마나 머리가 좋았는지. 모두가 얼마나 언니를 좋아했는지. 얼마나 인정이 많 고, 얼마나 피아노를 잘 쳤는지. 그리고, 나에게도 피아노를 배우게 했어요. 언니 가 죽은 후에도 우리 집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남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피아노를 치는 것에 흥미조차 느끼지 못했어요. 나는 언니처럼 잘 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는 내가 언니보다 모든 면에서 뒤지는 인간이라는 것을 일 일이 증명하고 싶지도 않았죠. 나는 누구의 대역이 될 수도 없고, 그런 건 되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들은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내가 말하 는 것은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단 말예요.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피아노를 보 는 게 싫어요.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도 싫어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녀의 가족에게 화가 났다. 그들이 구미코에게 한 행위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이 구미코에게 하지 않았던 행위에 대하여. 그 즈 음 우리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다. 알게 된 지 두 달이 조금 지났을 때였 다. 그 이야기를 들은 건 조용한 일요일 아침이었으며,우리는 침대 속에 있었다. 그녀는 엉클어진 끈을 풀어 가듯이 천천히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자신의 소녀 시 절을 이야기했다. 구미코가 그렇게 길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 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녀의 가정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 랐다. 내가 구미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말이 없고, 그림을 좋아하며, 아름답고 곧은 머리결을 가지고 있고, 오른쪽 어깨 위에 점이 두개 있다는 것뿐 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나와 잔 것이 최초의 성경험이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구미코는 조금 울었다. 울고 싶어지느 기분은 나도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일 언니가 살아 있었더라면 당신도 아마 우리 언니를 좋아하게 되었을 거예 요. 누구든 한눈에 좋아하게 되었죠"하고 구미코는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난 네가 좋아. 이 봐, 이건 매우 단순한 일이야. 이건 나와 너 사이의 일이지, 네 언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라구." 그리고 얼마 동안 구미코는 입을 다문 채 꼼짝도 않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 었다. 일요일 아침의 7시 30분에는 모든 소리가 부드럽고 작게 느껴졌다. 나는 아파트 지붕 위에 있는 비둘기의 발소리를 들었으며, 누군가가 멀리서 개의 이 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구미코는 정말 오랫동안 천장의 한 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고양이 좋아해요?"하고 구미코는 나에게 물었다. "고양이 좋아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아주 좋아해. 어렸을 적에는 쭉 길렀지. 늘 고양이와 함께 놀았어. 잘 때도 함께였고." "그런 건 멋지겠죠?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고양이를 기르고 싶었는데 기를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고양이를 싫어했거든요.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나는 무 엇인가를 정말로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가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 어요. 단 한번도 말예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어떤 인 생인지 당신은 아마 알 수 없을 거예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인생 에 익숙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분명 이제까지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이제 아이가 아니니까 자신의 인생을 다시 선택할 권리가 있어. 고양이를 기르 고 싶거든 고양이를 기를 수 있는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면 돼. 간단한 일이야. 당신에게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어. 안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구미코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았다. "그렇죠"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나와 구미코는 결혼 이야기를 했다. 구미코가 그 가정에서 비틀어지고 복잡한 소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면, 와타 야 노보루는 또 다른 의미에서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진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 의 양친은 외아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했는데, 그냥 귀여워만 한 것이 아니라 동 시에 무척 많은 것을 그에게 요구했다. 장인은 일본이라는 사회 속에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우수한 성적을 받아 한 사람이라도 더 밀 어내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정말로 심각하게 그렇 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장인의 입을 통해 직접 그 이야기를 들 은 적이 있다. 인간은 본디 평등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학교에서 원칙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뿐이지 그런 건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구조적으로는 민주 국가지만 동시에 치열한 약육강식의 계급 사회로서, 엘리트가 되지 않으면 이 나라에서 살 의미 같은 건 거의 없다. 다만 맷돌 안으로 짓찧어져 들어갈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한 단계 라도 높은 자리로 오르려 한다. 그것은 매우 건전한 욕망이다. 사람들이 만일 그 욕망을 잃어버린다면 이 나라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장인의 그러한 의견 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도 말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나에게 의견이라든지 느 낌 같은 것을 요구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영구적으로 변할 수 없는 스스로의 신념을 토로했던 것뿐이다. 나는 그때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이런 사람들과 같은 공기를 마 시며 살아가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 첫걸음인 것이다. 그리고 몇 번 이고 몇 번이고 이런 일이 되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몸 속에 심한 피 로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무서우리만치 천박하고 일면적이며 오만한 철학 이었다. 이 사회를 진정한 뿌리로 지탱하고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부족했고, 인간의 내면서이나 인생의 의의라는 것에 대한 성찰도 부족했다. 상상력도 부족하고 회의라는 것도 부족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마음 저변에서부 터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으며, 무엇을 가지고도 이 남자의 신념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장모는 도쿄의 야마노테에서 아무런 부족함 없이 자란 고급 관료의 딸로서, 남 편의 의견에 대항할 의견이나 인격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내가 본 바로는, 그녀 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하여(실제로 그녀는 심한 근시 였으며)어떠한 의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이상의 넓은 세상에 대하여 자신 의 의견을 가질 필요가 있을 때면 그녀는 언제나 남편의 의견을 빌렸다. 그것뿐 이라면 그녀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결점은 그런 타입의 여성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허영꾼이라 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이라는 것을 가지지 않았으니, 타인의 기준이나 시각을 빌려 오지 않으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 두뇌를 지 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 하는 것뿐이다. 그 리하여 그녀는 남편의 지위와 아들의 학력만이 눈에 들어오는 편협하고 신경질 적인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좁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아들에게도 가장 유명한 고등학교 에 갈 것과 가장 유명한 대학에 갈 것을 요구했다. 아들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서 행복한 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 어떤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인생관을 갖게 되는지 등은 그녀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그와 같 은 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을 나타낸다면 그녀는 아마도 심하게 화를 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그녀의 귀에는 당치않은 개인적인 모욕처럼 느껴졌을 테니 까. 그렇게 하여 양친은 어린 와타야 노보루의 머리 속에 문제가 많은 자기들의 철 학과 추한 세계관을 철저하게 불어넣었다. 그들의 관심은 장남인 와타야 노보루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양친은 와타야 노보루가 누군가의 뒤에서 만족하는 것 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학급이나 학교라는 좁은 집단에서 일등을 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더 넓은 세계에서 일등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양친은 항상 최고의 가정 교사를 붙여 아들을 끊임없이 격려했다. 우수한 성적 을 받으면 그들은 그 상으로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주었다. 덕분에 와타야 노보루는 물질적으로는 상당히 혜택받은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리나 인 생에 있어서 가장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시기를 그는 여자 친구를 만들 틈도, 친구와 흥겹게 놀아 볼 여유도 없이 보냈다. 일등을 지키기 위하여, 그 목적만을 위하여 모든 힘을 경주해야 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생활을 와타야 노보루가 좋 아했는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며 구미코로서도 알 수 없다. 와타야 노 보루는 양친에게도 그녀에게도 또 다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 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좋아했건 그렇지 않았건 어차피 그 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내 생각엔, 어떤 종류의 사고 시스템은 그 일면성, 단순성 때문에 반박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 어찌되었건 그 리하여 그는 우수한 사립 고등학교에서 도쿄대학의 경제학부에 진학하여 우등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했다. 장인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고급 공무원이 되든지 아니면 어디 큰 기업에 들어가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그는 대학에 남아 학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와타야 노보루는 바보가 아니었다. 현실 세계로 나가 집단 속에서 행동하기보다 는, 지식을 조직적으로 다루는 훈련을 필요로 하며 개인적인 지적 우수성이 더 중시되는 세계에 남는 편이 자신에게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 일대학의 대학원에서 2년 간 유학하고 도쿄대학의 대학원으로 돌아왔다. 일본으 로 돌아온 얼마 후에 양친이 권유하는 대로 선을 보아 결혼했지만, 그 결혼 생 활은 결국 2년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이혼하자 그는 전처럼 본가로 돌아와 양 친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즈음에 와타야 노보 루는 꽤 기묘하며 유쾌하지 못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스물네 살 때 그는 한 권의 두꺼운 책을 완성하여 발표 했다. 그것은 전문적인 경제학 책으로, 나도 그것을 구하여 읽어 보았으나 솔직 히 말해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한 페이지도 이해랄 수 없었다고 말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책장을 넘기려 해도 문장 그 자체를 이해랄 수 없었던 것 이다. 거기에 씌어져 있는 내용 그 자체가 난해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문장이 나쁜 것인지, 그것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책은 전문가 사이에서 꽤 화제가 되었다. 몇 명의 비평가가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씌어진, 완전히 새 로운 종류의 경제학」이라고 절찬하며 비평을 썼으나, 그 비평이 말하려는 것조 차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대중 매체는 조금씩 그를 새로 운 시대의 주인공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의 책을 해석하는 책까지 몇 권 나 왔다. 그가 책 안에서 사용한 ‘성적 경제와 배설적 경제’라는 말은 그해의 유 행어가 되기까지 했다. 잡지나 신문은 그를 새로운 시대의 지성인의 한 사람으 로 들어 특집으로 실었다. 와타야 노보루가 쓴 경제학의 내용이 그들에게 이해 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이 한 번이라도 그 책을 펼친 적이 있 는지 어떤지조차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와타야 노보루가 젊고 독신이며 알 수 없는 난해한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두뇌가 명석하다는 사실이었다. 여하튼 그 책의 출판을 계기로 와타야 노보루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각양 각색의 잡지에 평론 같은 것을 쓰고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경제나 정치 문 제에 관한 해설자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토론 프로그램의 정규 출연자가 되기도 했다. 와타야 노보루의 주변 사람들은(나나 구미코도 포함하여) 그가 그런 화려한 일에 어울리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햇다. 그는 말하자면 신경질적이고 전문적인 일에만 흥미를 갖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 나 일단 매스컴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활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가 막히게 잘해 냈다. 카메라 앞에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현실 세계에 있을 때보다 카메라 앞에 있을 때가 더 편안해 보일 정도였다. 우리들은 모두 아연해 하며 그의 급속한 변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 나 올 때의 와타야 노보루는 보기에도 돈이 좀 들었음 직한 바느질이 훌륭한 양복 으로 몸을 감싸고, 그 분위기에 걸맞는 넥타이를 매고, 값비싼 테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헤어 스타일도 현대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마 전문 스타일리스타가 붙 었던 것 같다. 그가 훌륭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게 비록 방송국에서 해입힌 옷이라고 해도 그의 옷차림은 참으로 그에게 잘 어울렸다. 그런 것을 훨씬 이전부터 입어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도대체 이 남자는 뭘까, 하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 남자의 실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카메라 앞에서 그는 과묵하게 행동했다. 의견을 요청받았을 때에도 간단한 말 과 이해하기 쉬운 논리로 확실한 의견을 말했다. 사람들이 큰소리로 논쟁하고 있을 때에도 항상 냉정하게 대비하고 있었다. 상대의 도전에는 응하지 않았고, 상대에게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하게 해놓곤 마지막에 그의 말을 한마디로 뒤집어 엎곤 했다. 상냥한 얼굴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등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요령을 그는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면, 어째서인 지는 모르겠지만, 실물보다 훨씬 지적이고 훨씬 신뢰할 수 있을 듯이 보였다. 특 별하게 잘생긴 것은 아니었으나, 키가 크고 날렵하며, 보기에도 좋은 가정에서 자란 듯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와타야 노보루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 안에서 자신에게 딱 맞는 공간을 발견했던 것이다. 대중매체는 기쁘게 그를 받아들였고, 그도 기쁘게 대중 매체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문장을 읽는 것도, 그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도 싫 었다. 그는 분명 재주와 재능이 있었다. 그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는 짧은 말로 짧은 시간 내에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해치울 수가 있었다. 상황을 순식간에 정 확히 파악하는 동물적인 직감력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주의하여 그의 의견을 듣고 그가 쓴 것을 읽어 보면, 거기에는 일관성이라는 것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확실한 신념이 뒷받침된 세계관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의 세계는 부분적인 사고 시스템을 복합적으로 조합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는 그 조합을 필요에 따라서 어떻게든 수시로 바꿀 수 있었다. 기묘한 사상적 순열과 조합이었다. 예술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한낱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그의 의견에 일관성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의견에는 항상 일관성이 없다’는 일관성뿐이었으며, 만일 그에게 세계 관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세계관뿐이었다. 그 러나 그것들의 결핍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지적인 재산이기조차 했 다. 일관성이나 확고한 세계관이라는 것은 시간을 촘촘하게 나눈 대중 매체에서 는 불필요한 것이며, 그와 같은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에게 크나큰 이익이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지켜야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순수한 전투 행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공격만 하면 되었다. 단지 상대방을 해치우 면 되었다. 와타야 노보루는 그런 의미에서는 지적인 괴물이었다. 상대의 색깔에 따라 자신의 색깔을 바꾸어 그때그때마다 유효한 논리를 만들어 냈고, 그러기 위하여 온갖 수사학을 동원했다. 수사학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는 어딘가에서 빌린 것이었고, 어떤 경우는 분명 내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마치 마술사처럼 재빠르고 솜씨 좋게 그것을 공중에서 꺼내 왔으므로 그 공허함을 그 자리에서 지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만일 사람들이 그의 논리의 속임수를 어쩌다 알아차렸다 해도 그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정 론(正論)에 비하면(정론은 확실히 정직할지는 모르나 논지를 전개하는 데에 손이 갔고, 대부분의 경우 시청자에게 평범한 인상밖에 주지 못했다) 훨씬 신선했으 며, 훨씬 강하게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기술을 익혔는 지 나는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그는 대중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선동하는 요령 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대다수의 인간이 어떠한 논리로 움직이는지를 함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정확한 논리일 필요는 없었다. 논리로 보이면 되는 것이 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대중의 감정을 환기시키는가 어떤가 하는 것이다. 어떤 때에 그는 난해한 학술 용어 같은 것을 줄줄 나열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 이 정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경우에도 ‘만일 이것을 모른다면 모르는 쪽이 나쁘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 다. 혹은 곧잘 연이어서 숫자를 끄집어내었다. 숫자는 그의 머리 속에 전부 입력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상당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숫자의 출처가 공정한 것인지, 혹은 근거를 신뢰할 수 있는 것 인지에 대해서는 논의다운 논의가 단 한 번도 행해지지 않았다. 숫자 같은 건 인용 하나로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 러나 그의 전략은 너무나도 기묘했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위험성을 쉽게 간파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기묘한 전략은 내게 견디기 힘든 불쾌감을 주었으나 그 불쾌감을 타 인에게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것을 논증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 치 실체가 없는 유령을 상대로 권투를 하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펀치를 많이 날려도 그것은 허공을 칠 뿐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처음부터 반응이 있는 알맹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꽤 지적으로 세련된 사람들마저도 그의 선동에 움직여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이상할 정도로 초조 하게 했다. 그리하여 와타야 노보루는 가장 지적인 인간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세상은 일관성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텔레비 전 화면에 되풀이되어 펼쳐지는 논쟁의 시합이며,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거기에서 요란하게 흘려지는 빨간 피였다. 월요일과 목요일에 같은 인간이 전혀 다른 의견을 내세워도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다. 내가 와타야 노보루를 처음 만난 것은 나와 구미코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다.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먼저 노보루를 만나기로 했다. 아버지보다는 아들 쪽이 연령도 비슷하니 사전에 이야기를 해두면 뭔가 편의를 봐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지 의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하고 구미코는 왠지 거북한 듯이 말했다.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오빠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만나야 되잖아?"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죠. 그건 분명 그렇지만요"하고 구미코는 말했다. "그럼 이야기해 봐도 괜찮겠지. 무엇이든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그렇죠. 분명 그럴지도 모르죠." 전화를 걸어 보니 와타야 노보루는 나와 만나는 것에 썩 기분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만약 꼭 만나고 싶다면 30분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 다고 말했다. 우리는 오차노미즈역 근처에 있는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당시 그는 아직 책도 쓰지 않은 일개 대학의 조교였으며, 차림새도 그다지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 재킷의 주머니는 오랫동안 손을 집어 넣고 있었던 탓으로 불룩 해져 있었으며, 머리는 2주일 정도 전혀 손질하지 않은 것처럼 자라 있었다. 갈 색 폴로 셔츠와 블루그레이의 양복 상의는 색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대 학에나 있을 법한 젊은 조교의 모습이었다. 그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가 잠깐 빠져 나온 듯한 졸린 눈을 하고 있었으나, 자세히 보면 그 속에서 예리하고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내 소개를 한 후 에 가까운 시일에 구미코와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가능한 한 솔직하게 그에게 설명했다. 지금은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나, 그것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 아직 자기 자신을 모색하고 있는 단계다. 그런 사람이 동생과 결혼 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행위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사 랑하고 있으며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를 아 끼며 서로 도와가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와타야 노보루는 나의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팔 짱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끝내도 그는 한동안 꿈쩍도 안했다. 뭔가 다른 것을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처음 한동안은 그의 앞에 있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나의 입장 탓 이리라고 생각했다. 초면인 상대에게 실은 당신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만 하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분명히 쉽고 편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마 주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 있기가 거북하다는 것을 넘어서서 나는 점점 불쾌해졌 다. 마치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이물질이 배 밑바닥에서부터 조금씩 쌓여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이나 행동의 무엇인가가 나를 자극한 것은 아니다. 내가 싫었던 것은 와타야 노보루라는 사람의 얼굴 그 자체였다. 내가 그때 직감 적으로 느낀 것은 이 남자의 얼굴은 뭔가 다른 것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뭔가 옳지 못한 것이 있다. 이건 그의 진짜 얼굴이 아니다. 나는 그렇 게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한 이상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그만둘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냉 커피를 마시면서 그곳에 머물며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하고 그는 마치 힘을 절약하려는 듯,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지금 이야기한 것이 나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으 며, 또한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소. 내가 흥미를 갖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인데 그것은 아마 당신이 이해할 수 없으며 흥미도 없으리라 생각하오. 결론부터 말 하자면 당신이 구미코와 결혼하고 싶고 구미코가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한다면 그것에 대하여 나에게는 반대할 권리도, 이유도 없소. 그러니 반대하지 않겠소. 생각할 것도 없소.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나에게 기대하지 않기를 바라오. 그리 고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개인적인 시간을 더 이상 빼앗지 않기를 바란 다는 점이오." 그리고 그는 손목시계를 보고 일어났다. 조금 다르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나 지금 정확한 말투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틀림없이 이것이 그가 한 남의 요지였다. 여하튼 그것은 매우 간결하고 요점이 분명한 발언이었다. 필요 없는 부분도 없을 뿐더러 부족한 부분도 없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매우 명확 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그가 나라는 인간에 대하여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구미코와 결혼하여 와타야 노보루가 처남이 되었기에, 그후 몇 번인가 우 리는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화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것이었 다. 우리 사이에는 분명히 그가 말했듯 공통된 기반이라는 것이 없었다. 따라서 아무리 이야기한들 대화가 이루어질 리 없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언어를 이야 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릭 도르피가 죽어 가는 달라이 라마에게 베이스 클라 리넷의 음색 변화를 가지고 자동차 엔진 오일 선택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편이, 우리의 대화보다 더 유익하고 효과 적이었을지 모른다. 누군가와 관계하는 것으로 인해 오랫동안 감정적으로 혼란 상태에 놓이게 되는 일은 나에게 거의 없다. 불쾌한 경우를 당해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초조해 한 적은 물론 있다. 그러나 길게는 가지 않는다. 나에게는 나 자신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를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하도록 구별해 놓는 능력이 있다(이것을 능력이라해 도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랑은 아니지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 니기 때문이다). 즉, 나는 무엇인가로 불쾌해지거나 초조해질 때 그 대상을 나 개인과 관계 없는 어딘가의 다른 영역으로 이동시켜 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생 각한다. 됐어, 나는 지금 몹시 불쾌하고 초조해. 하지만 그 원인은 이미 여기에 는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 버렸어.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천히 검 증하여 처리하기로 하자고. 그리하여 일시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동결시켜 버리 는 것이다. 물론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른 후에 그 동결을 풀어 천천히 검증을 해 도 아직껏 감정이 혼란 상태일 때도 간혹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예외에 가깝 다. 적당한 시간이 경과하면 대개의 것은 독기가 빠져 무해한 것이 된다. 그리하 여 나는 늦건 빠르건 그 일을 잊어버린다. 지금까지의 인생의 과정에서 나는 그런 감정 처리 시스템을 적절히 적용하여, 수많은 쓸데없는 문제 속에서도 나 자신의 세계를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유지시 켜 왔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유효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적잖게 긍 지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 시스템은 와타야 노보루에 대해서는 전혀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기 능을 하지 않았다. 나는 와타야 노보루라는 인간을 간단히 ‘나와는 관계없는 영역’에 밀어 넣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거꾸로 와타야 노보루 쪽에서 나를 재빠르게 ‘자신과는 관계없는 영역’으로 밀어 넣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구미코의 아버지는 분명히 오만하며 불쾌한 사 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신념을 고집하며 살고 있는, 시야가 좁은 작은 인 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와타야 노보루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자각하 고 있었다. 그리고 나라는 인간의 내용 또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법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를 철저하게 해치울 수도 있었 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가 나에 대해 관심이라는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라는 인간은 구태여 시간과 정열을 들여 해치울 가치가 없는 상대였던 것이다. 내가 와타야 노보루 에게 초조함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그 탓이리라 생각한다. 그는 본질적으로 야 비한 인간이며, 내용물이 없는 이기주의자였다. 그러나 분명히 나보다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난 후 한동안, 나는 뒷맛이 몹시 씁쓸한 느낌을 가진채로 지냈다. 마치 이상한 냄새가 나는 벌레를 입 안에 한 움큼 집어 넣은 그런 기분이었다. 벌레 는 토해 냈으나 그 감촉은 아직 입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며칠 동안 계속 와 타야 노보루를 생각했다.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려 해도 생각의 귀결점은 언제 나 와타야 노보루였다. 콘서트에 가고, 영화를 보았다. 직장 동료와 함께 야구 경기도 보러 갔다. 술을 마시고, 언젠가 시간이 생기면 읽으려고 아껴 두었던 책 도 읽었다. 그러나 그는 늘 내 시야 안에서 팔짱을 끼고, 흐리멍텅한 늪과 같은 블길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초조하게 했고, 내가 서 있는 기 반 같은 것을 심하게 흔들었다. 그후 구미코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오빠가 어떻더냐고 물었다. 그 렇지만 나는 그에 대한 느낌을 정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가 틀림없이 쓰고 있는 가면이나, 그 속에 감춰져 있을 부자연스럽게 비뚤어진 무엇인가에 대하여 구미코에게 추궁해 보고도 싶었다. 불쾌감이나 마음의 혼란에 대해 정직하게 고 백해 버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제대로 설명 해도 잘 전달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잘 설명할 수 없 다면 그서은 지금 말해서는 안되는 것일 게다. "분명히 좀 별다른 사람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에 덧붙여 뭔가 더 말을 하여 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미코도 더 이상 물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와타야 노보루에 대한 나의 감정은 그 이후로 지금껏 거의 변하지 않았다. 나 는 그때와 같은 초조함을 지금도 그에게서 느끼고 있다. 그것은 미열처럼 늘 내 마음속에 있다. 나는 집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가 어 딘가의 장소에서 어쩌다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볼 때마다 늘 거기에는 와타야 노 보로가 나와서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대합실 같은 곳에서 잡지를 손에 들고 책장을 넘길 때도, 거기에는 언제나 와타야 노보루의 사진과 와타야 노보 루의 문장이 실려 있었다. 와타야 노보루가 전세계의 길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리 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좋아, 정직하게 인정하자, 나는 어쩌면 와타야 노보루를 증오하고 있는지도 모 른다. 7 행복한 세탁소, 그리고 가노 구레타의 등장 나는 구미코의 블라우스와 스커드를 들고 역 앞에 있는 세탁소로 갔다. 평소 에는 집 근처에 있는 세탁소에 세탁물을 맡긴다. 특별히 거기가 마음에 들어서 가 아니라 단지 거리상으로 가깝기 때문이다. 역 앞에 있는 세탁소는 아내가 출 근길에 이따금씩 이용한다. 회사에 출근하는 길에 맡기고 퇴근하는 길에 찾아오 는 것이다. 그녀는 거기가 조금 가격은 비싸나, 집 근처에 있는 세탁소보다 마무 리를 잘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옷은 조금 귀찮더 라도 역 앞에 있는 세탁소에 맡긴다. 그래서 나는 그날은 일부러 자전거를 타고 역 앞까지 나가기로 했다. 그녀가 자신의 옷을 그 세탁소에 맡긴 것을 알면 좋 아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초록색의 얇은 면바지에 늘 신고 다니는 테니스화를 신고, 구미코가 언딘 가에서 받아 온 레코드 회사의 선전용인 반 헬렌의 노란 티셔츠를 입고, 블라우 스와 스커트를 들고 집을 나섰다. 세탁소의 주인은 역시 지난번처럼 크게 JVC사 의 라디오 카세트를 듣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앤디 윌리엄스의 테이프였다. 내가 문을 열었을 때에는 마침〈하와이안 웨딩 송〉이 끝나고 〈캐나디안 선세 트〉가 시작되는 참이었다. 주인은 볼펜으로 노트에 뭔가를 부지런히 써넣으면 서 멜로디에 맞춰 행복한 듯이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선반 위에 쌓여 있는 카 세트 컬렉션 중에는 ‘세르지오 멘데스’라든지 ‘베르트 켐페르트’라든지 ‘ 101스트링스’라는 이름이 보였다. 그는 아마 이지 리스닝 장르의 음악광일 것 이다. 앨버트 아이러나 돈 체리, 세실 테일러의 열렬한 신봉자 역 앞의 상점가에 있는 세탁소 주인이 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하고 나는 문득 행각했다. 가능 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다지 행복한 세탁소 주인은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초록색의 꽃무늬 믈라우스와 빨간 샐비어 색깔의 플레어드 스커트를 카운 터에 놓자 그는 그것을 펼쳐 한번 살펴본 다음, 전표에다 블라우스와 스커트라 고 정성스러운 글씨로 써넣었다. 정성스러운 글씨를 쓰는 세탁소 주인이 나는 좋다. 게다가 앤디 윌리엄스를 애호한다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오카다 씨였죠?"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 이름을 써넣고는 복사지를 찢어서 나에게 주며 말했다. "다음주 화요일에 완성되니까 이 번에는 잊지 말고 찾으러 오세요. 부인 옷인가요?" "그래요"하고 나는 대답했다. "예쁜 색이군요"하고 그가 말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일기 예보는 비가 올 것이라고 했다. 9시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는데, 서류 가방과 접은 우산을 든 출근길의 사람들이 역 계단을 향하여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아마 출근이 늦은 샐러리맨들이겠지. 무더운 아침이었으나 그들은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이 양복을 똑바로 차려 입고, 똑 바로 넥타이를 매고, 똑바로 까만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와 같은 또래의 샐러리 맨인 듯한 남자도 많이 보았으나, 아무도 반 헬렌의 티셔츠 같은 건 입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양복 깃에 회사 배지를 달고 ‘일본경제신문’을 겨드랑이에 끼 고 있었다. 플랫폼의 벨리 울리자, 몇 명은 계단 위로 뛰어올라 갔다. 그런 사람 들의 모습을 본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 1주일 동안 집 과 슈퍼마켓, 도서관, 집 근처의 시립 수영장 사이를 왔다갔다했을 뿐이다. 이 1 주일 동안에 내가 본 것은 주부와 노인, 어린이들과 몇 명의 상점 주인뿐이었다. 나는 거기에 서서 얼마 동안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역 앞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모닝 서비스 커피라도 마 실까 하고 생각했으나 귀찮아져서 그만두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특별히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나는 꽃가게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 았다. 티셔츠의 소매 끝에는 어느샌가 토마토 소스가 묻어 얼룩이 져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캐나디안 선세트〉를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11시에 가노 마루타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하고 나는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여보세요"하고 가노 마루타가 말했다. "거기가 오카다 도루씨 댁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오카다 도루입니다."전화를 건 사람이 가노 마루타라는 것을 난 처음부터 알 수 있었다. "저는 가노 마루타라고 합니다. 지난번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후 에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나는 없다고 말했다. 철새가 저당용 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나도 계 획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면 오늘 1시에 동생인 가노 구레타가 댁으로 찾아뵐 겁니다." "가노 구레타라고요?"하고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동생 말입니다. 지난번에 사진을 보여 드린……"하고 가노 마루타가 말했다. "아, 예. 동생분이라면 기억합니다. 하지만……." "가노 구레타는 제 동생 이름입니다. 동생이 저 대신 댁으로 찾아뵐 겁니다. 1 시가 괜찮으신지요?" "그건 상관없습니다만." "그럼 찾아뵙겠습니다"하고 가노 마루타는 자기 용건만 밝히고 전화를 끊었다. 가노 구레타? 나는 청소기를 꺼내 바닥을 청소하고 집 안을 치웠다. 신문을 모아 끈으로 묶 어 수납장에 집어 넣고, 어지럽혀진 카세트 테이프를 케이스에 넣어 정리하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 었다. 원두 커피를 만들어 놓고 햄샌드위치와 삶은 달걀을 먹었다. 그리고 소파 에 앉아 《생활 수첩》을 읽으며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만들어 먹을까 생각했 다. 나는 ‘녹미채(鹿尾菜)와 두부 샐러드’라는 페이지에 표시를 해두고 필요한 재료를 메모해 두었다. FM 방송을 켜니 마이클 잭슨이 〈빌리 진〉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노 마루타를 생각하고, 가노 구레타를 생각했다. 어쩌면 자매가 나란히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일까> 이건 꼭 무슨 만담 콤비의 이름 같잖 아? 가노 마루타, 가노 구레타. 나의 인생은 틀림없이 기묘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고양이가 사라졌다. 이 상한 여자로부터 알 수 없는 전화가 걸려 왔다. 이상한 여자 아이와 알게 되어 골목에 있는 빈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와타야 노보루가 가노 구레타를 범했다. 가노 마루타가 넥타이의 출현을 예상했다. 아내는 나에게 이제 일을 하지 않아 도 된다고 했다. 나는 라디오를 끄고 《생활 수첩》을 책장에 집어 넣은 후 커피를 한잔 더 마 셨다. 1시 정각에 가노 구레타가 벨을 눌렀다. 그녀는 정말로 사진 그대로였다. 몸집 이 작고, 20대 초반으로 보였으며, 얌전해 보였다. 그리고 기가 막힐 정도로 1960년대 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메리칸 그래피티〉를 일본을 무대로 하 여 찍었다면 가노 구레타는 아마 그 모습 그대로 엑스트라가 될 수 있을 것이 다. 그녀는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이 머리를 부풀려 끝에 컬을 넣은 모습이었다. 앞머리는 뒤로 싹 잡아당겨 거기에 반짝이는 큰 머리핀을 꽂고 있었다. 까만 눈 썹은 아이 펜슬로 또렷하고 깨끗하게 그려져 있었고, 마스카라가 눈가에 신비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으며, 입술은 당시 유행했던 색깔의 루즈로 칠해져 있었 다. 마이크를 쥐어 주면 그대로 〈조니 앤젤〉이라는 노래를 부를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화장보다는 훨씬 간소하고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사무 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단조로운 하얀 블라우스에 단조로운 초록색 타 이트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액세서리라 부를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하 얀 에나멜 핸드백을 옆구리에 끼고, 앞이 뾰족한 하얀 펌프스를 신고 있었다. 구 두의 사이즈는 작았고, 굽은 연필심처럼 가늘고 뾰족하여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 다. 그런 것을 신고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올수 있었는지 나는 참으로 감탄스러 웠다. 사진보다는 실물이 훨씬 예뻐 보였다. 모델이라고 해도 통할 정도로 예쁜 여자 였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왠지 옛날 도호 영화사에서 제작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했다. 가야마 유조와 호시 유리코가 출연하고, 사카모토 큐가 국수집 배달원으 로 나오고, 고릴라와 고래를 합성한 괴물 고지라가 습격해 오는, 그런 영화 말이 다. 나는 일단 가노 구레타를 집에 들여 거실의 소파에 앉히고 커피를 끓여 주었 다. 나는 이미 점심을 먹었는데, 그녀는 어떤지를 물어 보았다. 어쩐지 그녀는 배가 고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직 점심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그녀는 대 답했다. "하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하고 그녀는 당황하여 덧붙였다. "정말 신경 쓰지 마 세요. 점심은 항상 조금밖에 안 먹거든요." "정말입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정로라면 아무것도 아니니 까, 사양 안하셔도 돼요. 그렇게 간단한 것을 만드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어서 그 런 건 전혀 일도 아니니까요. " 그녀는 약하게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었다. "마 음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커피만 으로 충분합니다." 그래도 나는 시험 삼아 초콜릿 쿠키를 몇 개 접시에 담아 내보았다. 가노 구레 타는 그것을 맛있게 네 개 먹었다. 나도 쿠키를 두 개 먹고 커피를 마셨다. 쿠키를 먹고 커피를 마시자 그녀는 조금 안정된 듯했다. "오늘은 마루타 언니 대신 찾아뵈었습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저는 가노 구 레타라고 합니다. 가노 마루타의 동생이죠. 물론 이 이름은 제 본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니의 일을 돕게 된 후로 이 이름을 쓰게 되었죠. 뭐랄까요? 직업상의 이름입니다. 저는 크레타(Crete) 섬에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크레타 섬에 간 적도 없습니다. 언니가 몰타 섬에서 비롯된 마루타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서 그것에 관련된 이름을 적당히 고른 것뿐이죠. 마루타 언니가 구레타라는 이름을 골라 붙여 주었어요. 혹시 오카다 씨께서는 크레타 섬에 가본 적이 있으신지 요?" 나는 유감스럽게도 없다고 말했다. 크레타 섬에는 간 적도 없으며, 가까운 장래 에 갈 예정도 없다. "크레타 섬에는 언젠가 가보고 싶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타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까운 그리스 의 섬이죠. 큰 섬으로 고대 문명이 번창한 곳입니다. 마루타 언지는 크레타 섬에 도 간 적이 있는데, 멋진 곳이라고 했어요. 바람이 강하고 꿀이 아주 맛있답니 다. 저는 꿀을 매우 좋아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여기에 왔습니다"하고 가노 구레타는 말했다. "실은 댁의 물을 채취했으면 합니다." "물이라고요?"하고 나는 말했다. "수돗물 말입니까?" "수돗물도 좋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 부근에 우물이 있다면 그 물도 채취했으면 합니다." "아마 이 근처에 우물은 없을 겁니다. 하나 있기는 한데, 그건 남의 집 안에 있 는 것이고 이미 말라 버려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노 구레타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우물에서는 정말로 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분명합니까?" 빈집의 우물에 그 여자 아이가 돌을 던졌을 때 들려 왔던 툭하는 메마른 소리 를 나는 떠올렸다. "분명히 말라 버렸어요. 틀림없습니다." "됐습니다. 그렇다면 댁의 물을 채취하게 해주세요." 나는 그녀를 부엌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하얀 에나멜 핸드백에서 작은 약병 같 은 것을 두 개 꺼냈다. 그리고 그 하나를 수돗물로 채우고는 주의 깊게 마개를 닫았다. 그리고 그녀는 욕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욕실로 안내했다. 탈의실에는 아내가 속옷과 스타킹을 가득 걸어 놓았으나, 가노 구레타는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수도꼭지를 틀어 다른 한 개의 병에 물을 넣었다. 그 녀는 그것에 마개를 덮고 나서, 거꾸로 들고 물이 새지 않는지를 확인했다. 두 개의 약병 마개는 제각기 색깔이 달랐다. 욕실의 물을 넣은 쪽의 병 마개는 파 랑이며, 부엌의 물을 넣은 쪽의 병 마개는 초록이었다. 거실로 돌아오자 그녀는 작은 플라스틱 냉동 주머니에 그 두개의 약병을 넣고 지퍼같이 생긴 뚜껑을 잠갔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한 듯이 하얀 에나멜 핸드백 에 집어 넣었다. 탁, 하는 건조한 소리가 나고 핸드백의 물림쇠가 닫혔다. 그녀 가 그와 같은 작업을 이제까지 몇 번이고 해왔다는 것을 그 손놀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하고 가노 구레타는 말했다. "그걸로 된 겁니까?"하고 나는 물었다. "예, 지금은 이걸로 됐습니다"하고 가노 구레타가 말했다. 그리고 스커트 끝을 바로잡고 핸드백을 옆구리에 끼고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갑자기 그녀가 돌아가 버리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좀 혼란스러웠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고양이의 행방은 그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집사람이 알고 싶어합니다. 사라진 지 벌써 2주일이 다 되어가니 뭔가 조금이라도 알게 된 것 이 있다면 가르쳐 주실 수 없겠습니까?" 가노 구레타는 핸드백을 소중한 둣이 옆구리에 끼고 잠시 내 얼굴을 보다가 몇 번인가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그녀가 끄덕이자 컬을 넣은 머리가 60년대 초 풍으로 나붓거렸다.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자, 그 큰 까만 인조 속눈썹은 흑인 노 예가 손에 든 무늬 있는 긴 부채처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것은 생각보다 더 긴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고 언니는 말합니다." "생각보다 더 긴 이야기라뇨?" ‘더 긴 이야기’라는 표현은, 보이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넓고 평평한 황야 에 홀로 한 그루 높이 서 있는 썩은 나무 같은 것을 나에게 상기시켰다. 태양이 기울면 그 그림자가 점점 길게 뻗어 그 끝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고양이가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성싶다는 겁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없어진 고양이의 행방을 찾는 것뿐입니다. 고양이를 찾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만일 죽어 버렸 다면 그 사실을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그것이 어째서 긴 이야기가 되는 겁니 까?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려는 머리위에 꽂혀 있는 반 짝이는 머리핀을 만져 그것을 조금 뒤로 밀어 냈다. "하지만 언니를 믿어 주세 요. 물론 모든 것을 언니가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언니가 ‘거기에는 더 긴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거기에는 분명히 ‘더 긴 이야기가 있다’는 겁 니다." 나는 잠자코 끄덕였다. 그 이상 어떻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오카다 씨는 지금 바쁘십니까? 지금부터 무슨 예정이라도 있으신지요?"하고 가노 구레타는 격식을 차리고 물었다. 전혀 바쁘지 않다, 아무런 예정도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선충류 부부가 피임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나도 예정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 분명 나 는 아내가 귀가하기 전까지 근처의 슈퍼마켓에 가서 몇 가지 재료를 사와 ‘녹 미채와 두부 샐러드’와 ‘리거트니의 새우 토마토 소스’를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아직 충분하며, 더욱이 꼭 그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요?"하고 가노 구레타가 말했 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하얀 에나멜 핸드백을 소파 위에 놓고 초록색 타이 트 스커트의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양손의 손가락에는 예쁜 분홍빛 매니큐어 가 칠해져 있었다. 반지는 하나도 끼고 있지 않았다. "어서 이야기해 주세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그런 것은 가노 구레타가 현관 벨을 눌렀을 때부터 충분히 예측된 것이나―점점 기묘한 방향으 로 흘러가게 되었다. 8 가노 구레타의 장황한 이야기, 고통에 대한 고찰 "저는 5월 29일 태어났습니다"하고 가노 구레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저는 스무 살이 되던 생일날 저녁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했죠." 나는 새로 사놓은 커피를 타서, 그녀 앞에 커피 잔을 놓았다. 그녀는 커피에 크 림을 넣고, 스푼으로 천천히 휘저었다. 설탕은 넣지 않았다. 나는 평소처럼 설탕 도 크림도 넣지 않고 블랙으로 한 모금 마셨다. 탁상 시계가 째깍째깍 메마른 소리를 내며 시간의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가노 구레타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좀전처럼 차례대로 이야 기하는 편이 좋을까요? 제가 태어난 장소라든가, 가정 환경이라든가, 그런 것부 터요?" "좋을 대로 이야기하세요. 자유롭게, 당신이 이야기하기 편한 대로 하세요"하고 나는 말했다. "저는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하고 가노 구레타는 말했다. "언니 마루타 위에 오빠가 한 명 있죠. 아버지는 가나가와 현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계셨어요. 가정적으로 문제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아주 평범한, 어디에나 있을 법 한 그런 가정이었죠. 부모님은 근면을 존중하는 매우 성실한 분들이었어요. 가정 교육은 엄격한 편이었지만,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소한 부분은 우리들이 어느 정도 자주성을 가질 수 있게 해주셨어요. 경제적으로는 혜택을 받은 환경이었지만 쓸데없는 사치는 하지 않았고, 어린이에게 불필요한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양친의 방침이었죠. 생활은 오히려 검소한 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마루타 언니는 저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은데, 언니에게는 어렸을 적부터 좀 남다른 점이 있었어요. 여러 가지 일을 알아맞히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 몇 호실 의 환자가 죽었다든지, 잃어버린 지갑이 어디어디에 떨어져 있다든지, 하고 아주 정확하게 맞히는 것이었어요. 처음 얼마 동안은 모두들 그것을 재미있어 하기도 하고, 소중한 보배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는 동안에 점점 무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부모님은 언니에게 그러한 ‘확실한 근거도 없는 말’을 사람들 앞에서 자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께는 병원 원장으 로서의 입장도 있었고, 딸에게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 다른 사 람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셨던 겁니다. 그후 마루타 언니는 입을 굳게 닫아 버렸어요. 그러한 ‘확실한 근거 없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 라, 평상시의 대화에도 거의 끼지 않게 되어 버렸던 것이죠. 그러나 마루타 언니는 여동생인 저에게만은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우리는 사이 좋은 자매로 성장했죠. 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이야기해 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이 근처에서 화재가 일어난다’라든 지 ‘세타가야에 사는 숙모의 건강이 나빠진다’등의 얘기를 몰래 들려주었어 요. 그리고 실제로 그대로 되었죠. 저는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것이 재미 있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무섭다든지 왠지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 습니다. 저는 철이 들고 나서도 계속 마루타 언니에게 바짝 달라붙어 다니면서, 언니의 ‘예언’을 들었어요. 마루타 언니의 특수한 능력은 성장함에 따라 점점 강해졌어요. 그러나 언니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그런 능력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발전시켜 가면 좋을지 알지 못했죠. 마루타 언니는 그것 때문에 계속 고민했어요. 그러한 의미에서 10 대인 언니는 상당히 외로웠죠. 마루타 언니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 결해야만 했으니까요. 언니는 그 해답을 전부 스스로 찾아야만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마루타 언니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어요. 집에서 언니는 한순간도 마음 편히 쉴 수 없었죠. 집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억제하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겨 두어야만 했기 때문이죠. 그것은 마치 커다란 식물을 작은 화분 안에서 기 르고 있는 것과 같았어요. 그것은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것이었죠. 마루타 언니가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여기서 조금이라도 빨리 빠져 나가야 한다는 것뿐이었어 요. 세계 어딘가에 자신을 위한 올바른 세계가 있고, 살아갈 방법이 있으리라고 언니는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꾹 참고 있어야만 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루타 언니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 혼자서 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나 저의 부모님은 매우 상식적인 인생 을 살아온 분들이었으므로 그것을 쉽게 허락할 리가 없었죠. 그래서 마루타 언 니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돈을 모아, 부모님께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자기 마 음대로 집을 뛰쳐나가 버렸어요. 언니는 우선 하와이의 카우아이 섬으로 가서 그곳에서 2년 동안 살았습나다. 카우아이 섬의 북쪽해안에 좋은 물이 나오는 지 역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죠. 마루타 안니는 그 무렵부터 물에 대해서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물의 성분비가 인간의 존재룰 크게 지배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언 니는 카우아이에서 생활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카우아이 안쪽에는 큰 규모의 히 피 생활 공동체가 남아 있었죠. 언니는 그곳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생활했어 요. 그곳의 물은 마루타 언니의 영적 능력에 큰 영향을 주었죠. 언니는 그 물을 체내에 넣음으로서, 언니의 육체와 능력을 '더욱더 융화' 시킬수 있었어요. 그것 은 정말로 멋진 일이라고 언니는 제게 편지를 보냈어요. 저도 그것을 읽고 매우 기뻤죠. 그러나 그 땅에서도 언니는 충분히 만족할수 없었어요. 아름답고 평화로 운 땅에서 사람들은 물욕을 떠나 정신의 평온을 추구하고 있었죠. 그러나 그들 은 약물이나 성적인 방종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어요. 그곳은 가노마루타 언 니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죠. 그리하여 2년 후에 언니는 카우아이 섬을 떠 났어요. 그후 언니는 캐나다로 건너가 아메리카 북부를 여기저기 돌고 나서 유럽 대륙 으로 건너갔어요. 언니는 각지의 물을 마시면서 여행을 했죠. 좋은 물이 나오는 장소를 몇 군데 발견했지만, 완전한 물은 아니었어요. 그리하여 마루타 언니의 여행은 계속 되었죠. 돈이 떨어지면 점치는 일을 했어요.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 람을 ㅊ이 주고 사례를 받는 것 말이에요. 언니는 사례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요. 하늘에서 받은 능력을 물질과 바꾸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죠.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도리가 없었어요. 마루타 언니가 치는 정은 어디에서나 명성을 얻어 어렵지 않게 돈을 모을 수 있었죠. 영국에서는 경 찰의 수사에 협력하기도 했어요. 행방 불명이 된 어린 여자 아이의 시체가 숨겨 진 장소를 알아맞히고 부근에 떨어져 있던 범인의 장갑도 찾아냈죠. 범인은 체 포되어 곧 범행을 자백했어요. 그것은 신문에도 났죠.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오 카다씨에게도 신문에서 오려 낸 그 기사를 보여 드릴께요. 그렇게 언니는 유럽 의 여기저기를 방랑하다가 마침내 몰타 섬에 도착했어요. 몰타에 도착한 것은, 일본을 떠난 지 5년째 되던 해죠. 그리고 그곳이 언니가 물을 탐색한 따이 되었 던 겁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마루타 언니에게서 들으셨겠죠?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랑 생활을 하는 동안, 마루타 언니는 언제나 저에게 편지를 보내 주었어요. 어떠한 사정이 생겨서 쓸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대게 1주일에 한 번은 저를 위 해 장문의 편지를 써주었어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 이에요. 우리는 매우 사이 좋은 자매였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편지로 어 느 정도 서로 마음이 통할 수 있었어요. 그것은 정말로 멋진 편지였죠. 그 편지 를 읽어 드리면 마루타 언니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오카다 씨도 알수 있을 겁니다.저는 언니의 편지를 통해서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알게 되었죠. 여러 흥 미로운 사람들의 존재도 알 수 있었어요. 그렇게 언니의 편지는 저를 북돋워 주 었죠. 또 저의 성장을 도와주었어요. 저는 그것에 깊이 감사해요.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편지에지나지 않죠. 제가 언니의 존재를 가장 필요로 했 던 10대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언니는 언제나 어딘가 멀리 있었어요. 손을 뻗어 도 거기에 언니는 없었죠. 저는 집에서도 외톨박이었어요. 저의 인생은 고독했 죠. 저는 고통에-그 고통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상세히 이야기 하겠지만-가득 찬 10대를 보냈어요. 저에게는 상담할 상대도 없었어요. 그러한 의미에서 저 역 시 마루타 언니와 마찬가지로 고독했죠. 만약 그 때 마루타 언니가 가까이에 있 어주었다면, 제 인생은 틀림없이 지금과는 좀 달라졌을 겁니다. 언니는 저에게 유익한 조언을 해주고, 저를 구원해 주었을 거예요. 그러나 이제와서 그것을 어 쩔 수 없는 겁니다. 마루타 언니가 혼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했죠. 스무 살 이 되었을 때, 저는 자살을 결심했어요." 가노 구레타는 커피 잔을 손에 들고, 남아 있는 커피를 마셨다. "맛있는 커피네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감사합니다."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말했다. "방금 전에 삶은 계란이 있 는데, 혹시 드시겠습니까?" 그녀는 조금 망설이고 나서, "한 개 주시면 먹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나는 부엌 에서 삶은 계란과 소금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잔에 커피를 부었다. 나와 가노 구레타는 천천히 계란 껍질을 벗겨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 동안에 전화 벨이 울렸지만, 나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열다섯 번 울리고 나서, 벨은 뚝 멈췄다. 가노 구레타는 전화 벨이 울리고 있다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노 구레타는 계란을 다 먹고 나자, 흰 에나멜 핸드백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어 입 가를 닦았다. 그리고 스커트 자락을 끌어 내렸다. "죽으려고 결심한 후에, 저는 유서를 쓰기로 했어요. 저는 책상에 앉아 한 시간 정도 제가 죽는 이유를 거기에 쓰려고 했죠. 제가 죽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 니고, 어디까지나 제 자신의 문제 때문인 것이라고 써서 남겨 놓고 싶었어요. 제 가 죽은 후에, 누군가가 잘못된 짐작으로 인하여 책임 같은 것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그 유서를 다 쓸수 없었어요. 몇 번인가 고쳐 보았지만, 몇번이고 고쳐 봐도 다시 읽어 보면 모두 시시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어요. 신중하게 쓰 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우스꽝스러워 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결국 아무것 도 쓰지 않기로 했죠. 죽은 후의 일까지 생각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리고 제가 쓴 유서를 전부 갈기갈기 찢어 버렸죠. 이것은 단순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저는 단지 제 인생에 실망했던 겁니 다. 제 인생이 저에게 끊임없이 줄 다양한 종류의 고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 어요. 저는 그 때까지 20년 동안 계속된 고통을 참아 왔어요. 제 인생은 20년에 걸친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죠. 그래도 저는 그 때까지 쭉 어떻게든 그 고통 을 참으려고 노력해 왔어요. 그 노력에 대하여 저는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 습니다. 저는 가슴을 펴고 여기에서 단언할 수 있어요. 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 을 정도로 노력해 왔죠. 간단히 투쟁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스무 살 생일을 맞이했을 때 드디어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인생은 실제로 그러한 노 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없다고, 그것은 정말이지 쓸데없이 낭비한 20년이었다 고. 이러한 고통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무릎 위에 놓인 흰 손수건의 모서리를 ㅁ추었다. 그 녀가 눈을 내리뜨자, 검은 인조 속눈썹이 그녀의 얼굴에 조용한 그림자를 만들 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뭔가를 말하는 편이 좋을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무슨 이야 기를 하면 좋을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멀리서 태엽감는 새의 울음 소리가 들렸 다. "제가 죽음을 결심한 까닭은 바로 그 아픔 때문이었어요. 고통 때문 이었죠." 하고 가노 구레타가 말했다. "제가 말하는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이나 비유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고통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육체적인 고통이죠. 단 순하고 일상적이고 직접적이며 물리적인 , 그렇기 때문에 절실한 고통 말이에요. 구체적으로 말쓰드리면 두통, 치통, 생리통, 요통, 어깨 결림, 발열, 근육통, 화상, 동상, 염좌, 골절, 타박..... 그러한 종류의 고통입니다. 저는 타인보다 훨씬 빈번하 게, 그리고 훨씬 강하게 그러한 고통을 체험해 왔어요. 예를 들면, 제 치아에는 선천적인 결함이 있는 듯했어요. 제 치아는 1년 내내 어딘가가 아팠죠. 아무리 정성껏 하루에 몇 번씩이나 닦아도, 아무리 단 것을 먹지 않아도 소용없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충치가 생겨 버리는 겁니다. 게다가 저는 마취가 그다지 잘되 지 않는 체질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치과 의사는 저에게 악몽 같은 존제였죠. 게다가 생리통도 대단했어요. 저의 생리통은 지독하게 심했고, 거의 1주일 내내 송곳으로 비틀어 뚫은 것같이 하복부가 아팠죠. 두통에도 시달렸어요. 아마도 오 카다씨는 이해하지 봇하겠지만, 그건 정말로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웠어 요. 한 달 1중일동안 저는 그와같은, 마치 고문과 같은 고통에 시달렸던 겁니다. 비행기를 타면, 기압의 변화로 언제나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어요. 귀의 구조 탓일 거라고 의사는 말했죠. 귀의 내부가 기압의 변화에 민감하면 그런 일이 일 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그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그렇기 때 문에 저는 고층 빌딩에 가도 엘리베이터를 탈수 없었죠. 머리의 여기저기가 찢 어지고 거기에서 피가 뿜어 나오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들 정도로 통증에 시 달렸어요.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쿡쿡 위장이 쑤시는 일이, 1주일에 적어도 한 번정도는 있었죠. 몇 번이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지 만, 원인다운 원인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정신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 을 들었어요. 그래도 저는 학교에 결석하지 않았어요. 아플 때마다 결석한다면, 거의 학교에 갈 수 없기 때문이죠. 어딘가에 부딪치면, 그것은 반드시 멍이 되어 몸에 남았어요. 제 몸을 욕실 거 울에 비추어 볼 때마다, 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죠. 몸의 도처에 상처 입은 사 과처럼 검은 멍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수영 복 입은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서 철이 들고부터는 거의 수영하러 가지 않았어 요. 그리고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의 크기가 달랐기 때문에, 새로 신발을 살 때마 다 구두에 쓸려서 살갗이 심하게 벗겨져 고민했죠. 그러한 까닭으로 저는 스포 츠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중학교 때 어거지로 다른 사람의 권유를 받아 아이스 스케이트를 탄 적이 있어요. 그때 넘어져서 허리를 크게 부딪힌 탓에, 그 후 겨울만 되면 그 부분이 욱신욱신 심하게 아파요. 굵은 바늘을 힘껏 찔러 넣 는 듯한 통증을 느낍니다. 의자에서 일어서려고 하다가 그대로 굴러 떨어진 적 도 여러 번 있었어요. 변비도 심해서, 사나흘에 한 번 배변하는 것은 고통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 죠. 어깨결림도 또한 대단했어요. 어깨가 결릴 때면, 그 부위도 마치 돌처럼 딱 딱해졌죠. 계속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고통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대로 역시 고통스러웠어요. 옛날에 어느 책에서, 좁은 나무 상 자에 몇 년이나 사람을 가두어 두는 중국의 형벌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 는데, 그 고통이 아마 이러한 느낌일 것이라고 저는 상상했죠. 어깨 결림이 심할 때 저는 거의 숨조차 쉴 수 없었어요. 저는 아직 제가 느낀 아픔을 얼마든지 나열할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언제까지 나 이런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오카다 씨가 지루해 하실 테니까, 적당히 여기서 그만두겠어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 몸은 그야말로 고통의 견본과 같 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온갖 고통이 제 몸 위로 내려왔어요. 저는 무언가로부터 저주받고 있다고 생각했죠. 누가 뭐라고 말하든지, 인생이란 불공평하고 불공정 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만약 세상 사람들도 저와 똑같이 아픔을 짊어지 고 살아가고 있다면 저는 참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아 픔이라는 것은 상당히 불공평합니다. 저는 여러 사람들에게 아픔에 대해서 물어 보았죠. 그러나 아무도 진짜 아픔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어요. 대 부분의 사람들은 아픔이라는 것을 일상적으로는 거의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거 예요. 그것은 알고(그것을 확실히 인식했던 것은 중학교 초반 무렵이았습니다 만),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슬펐어요. 어째서 나만이 이런 육중한 짐을 짊어지 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죠. 가능한 일이라면 그대로 깨끗하게 죽어 버리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저는 이렇게도 생각했어요. 아니야, 이런 일이 언제까지 나 계속될 리가 없어,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고통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라 져서, 정말이지 새롭고 평화로운 아픔 없는 인생이 내 앞에 열릴 것임에 틀림없 다. 그래도 저는 확신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었어요. 저는 마루타 언니에게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싫어.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죠. 마루타 언니는 잠시 생각 하고 이렇게 말했어요. '나도 너에게 뭔가가 확실히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어.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는 나도 알 수 없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어. 나에게는 아직 그와 같은 판단을 내릴 힘이 없단다.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어쨌든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참고, 그러고 나서 여러 가지 일 을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언니는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하여 저는 어쨌든 스무 살까지 살아 보기로 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무엇 하나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어요. 그 뿐 아니라 고통은 더욱 심해졌죠. 제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뿐이었어요. 그것은 '몸이 성장하면 할수록 고통의 무게도 커져 간다' 는 것이었죠. 그러나 8년 동안 저는 그것을 참 았어요. 그동안 저는 인생의 좋은 면만을 보려고 항상 주의하면서 생활했죠. 저 는 누구에게도 한탄을 한다거나 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고통스런 때일지라도 언 제나 생긋생긋 웃으려고 노력했죠. 고통이 심해서 서 있기조차 힘든 때에도 시 치미를 떼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는 훈련을 했어요. 울어봐도, 한탄을 해 봐도, 고통이 줄어들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봐야 스스로가 더욱 한심 스러워질 뿐이죠. 그와 같은 노력 덕분에, 저는 얌전하고 인상이 좋은 여자라고 했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신뢰를 받았으며, 많은 또래 친구들도 만 들 수있었어요. 만약 고통 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그것은 트집 하나 잡을 것 없 는 인생이며 청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었 어요. 고통은 저의 그림자 같은 것이었죠. 제가 그것을 조금씩이라도 잊어버릴 만하면 곧 찾아와서 제 몸의 어딘가를 강타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자 애인도 생겨 대학 1학년 여름에 저는 처녀성을 잃었어요. 그 러나-당연히 예측할수 있었던 것이었지만-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경 험 있는 여자 친구들은 '조금만 참으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아프지 않게 되 니까 괜찮아'하고 말해 주었죠.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애인과 잘 때마다, 저는 너무나 아파서 눈물을 흘렸죠. 그리고 섹스를 하는 것에 진력이 나버렸어요. 어느 날 저는 애인에게 '당신을 좋아하지만, 이런 고통스러운 일은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했죠. 그는 깜짝 놀라며, 그런 당치 않은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고 말했어요. '너에게는 분명 뭔가 정신적 으로 문제가 있어' 하고 그는 말하더군요. '좀더 여유를 가져봐. 그러면 통증도 사라지고 기분도 좋아져. 누구나 하는 거잖아? 네가 못할 이유가 없어. 너에게는 노력이 부족해. 결국은 자신에게 어리광부리고 있는 거야. 너는 여러 가지 문제 를 전부 고통에 떠맡기고 있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 말을 듣자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것이 제 안에서 말 그대로 폭발해 버렸어 요. '농담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픔이 무엇인지 알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느끼 고 있는 아픔은 보통의 아픔 정도가 아니예요. 아픔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온갖 종류의 아픔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내가 아프다고 말할 때는 정말로 아픈 거예 요.' 저는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그때까지 제가 경험한 아픔이라는 아픔을 모 조리 늘어놓으면서 설명했죠. 그렇지만 그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어요. 진정한 아픔이라는 걱은 그것을 경험한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헤어졌어요. 그리고 저는 스무 살 생일을 맞았어요. 저는 20년을 어딘가에서 무엇인가 눈부 신 큰 전환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지그시 참아 왔던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 은 없었어요. 저는 정말이지 실망해 버렸죠. 좀더 일찍 죽어 버렸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저는 고통을 연장시켰을 뿐이예요." 가노 구레타는 거기에서 이야기해 버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 앞에는 계란 껍질이 담긴 접시와 빈 커피 잔이 놓여 잇었다. 스커트의 무릎 위에는 손 수건이 깔끔하게 접혀진 채로 놓여 있었다.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이 책상 위의 탁상 시계를 쳐다 보았다. "죄송합니다"하고 가노 구레타는 작고 메마를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 다 이야기가 너무나 길어졌네요. 더 이상 오카다 씨의 시간을 빼앗는 다면 폐가 되겠죠. 장황하게 따분한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정말 용서를 빌어야 좋을지 모르 겠네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흰 에나멜 핸드백의 가죽끈을 쥐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어중간 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마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내 시간만을 신경 쓰는 것이라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오후는 어차피 한가하니까요. 여기 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니, 그냥 마지막까지 계속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이야기는 더 길게 이어지나요?" "물론 더 길게 이어집니다" 하고 가노 구레타는 일어선 채로, 내 얼굴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핸드백의 가죽끈을 꽉 쥐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것은 말하자면 서론과 같습니다." 나는 잠깐 거기에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부엌으로 갔다. 싱크대를 향해 두 번 심호흡을 한 후, 식기장에서 두 개의 유리 잔을 꺼내 얼음을 넣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부었다. 나는 작은 쟁반 위에 그 두 개의 유리 잔을 올려 놓고, 그것을 들고 거실로 되돌아왔다. 그 정도의 동작을 아주 천천히 해서 시간이 좀 걸렸는데, 내가 되돌아왔을 때 가노 구레타는 여전히 거기에 가 만히 서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녀 앞에 오렌지 주스 잔을 놓자, 그녀는 마음 을 고쳐 먹은 듯이 소파에 앉아 핸드백을 옆에 놓았다.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전 부 해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하고 그녀는 나에게 확인하듯이 물었다. "물론"이라고 나는 말했다. 가노 구레타는 오렌지 주스를 반 정도 마시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저는 자살에 실패했어요. 그것은 벌써 오카다 씨도 아실겁니다. 제가 자 살에 성공했다면, 여기 이렇게 앉아서 주스를 마시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 ㄹ게 말하고 가노 구레타는 가만히 내 눈을 보았다. 나는 동의 하듯이 약간 웃 음을 띠었다. "만약 제가 계획대로 죽었다면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 마지막 해결 이 되었을 겁니다. 저는 죽음을 통해 의식이라는 것을 영구히 잃어버려서, 두 번 다시 아픔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그것이 제가 바라는 바였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는 방법을 잘못 선택했던 겁니다. 저는 5월 29일 오후 9시에 오빠 방에 가서, 잠깐 자동차를 빌려 달라고 했어요. 산 지 얼마 안되는 새 차였기 때문에 오빠가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 차를 살 때 오빠는 저에게 돈을 빌려 갔으므로 거절할 수가 없었죠. 저는 열쇠를 받아 들고, 번쩍번쩍 하는 그 도요타 MR 2를 타고 30분 정 도 달렸어요. 그것은 아직 1,800킬로미터밖에 달리지 않은 새 차였죠. 가볍게 액 셀러레이터를 밟자 눈 깜짝 할 사이에 속력이 붙었어요. 제 목적에 실로 딱 맞 는 차였죠. 다마카와 둑이 가까졌을 때 저는 정말 튼튼해 보이는 커다란 돌벽을 발견했어요. 어떤 맨션의 외벽이었죠. 게다가 그것은 마침 T자 길의 막다른 곳 에 있었어요. 저는 가속하기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액셀러레이터를 과감히 끝까 지 밟았죠. 그리고 그 벽에 차의 머리부터 들이 박았어요. 시속 150킬로미터는 되었을 겁니다. 차의 앞 부분이 벽을 들이받는 순간에 저는 의식을 잃었어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벽은 보기보다 훨씬 부드럽기 만들어져 있었어요. 아마 공사흐는 사람들이 일손을 덜기 위해 기초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었 죠. 벽은 무너져 내리고, 차의 앞 부분도 완전히 납작해져 버렸어요. 그렇지만 그것뿐이었어요. 벽이 부드러워서 그 충격을 완전히 흡수해 버렸던 겁니다. 게다 가, 제 머리가 그 만큼 혼란스러웠다는 증거겠지만, 저는 안전 벨트 푸는 것조차 도 잊어버렸어죠. 그런 이유로 저는 목숨을 건졌어요. 그뿐만 아니라 거의 상처도 입지 않았죠. 이상하게 아픈 데조차 거의 없었어요. 마치 여우에게 홀린 듯했죠. 저는 병원으 로 실려 가 하나만 부러진 갈비뼈를 잘 접골시켰어요. 경찰이 병원에 조사하러 왔는데, 저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죠. 그렇지만 아마 액셀러레이터 와 브레이크를 착각하여 밟은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경찰은 제 말을 전부 믿 었어요. 저는 아직 스무 살이 된지 얼마 안되었고, 운전 면허를 딴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저는 언뜻 보아서는 자살할 것 같은 타입으로 보이지 않 았어요. 무엇보다도 안전 벨트를 맨 채 자살하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퇴원한 후 저는 몇 가지 곤란한 현실 문제제 직면하게 되었어요. 우선 첫째로 저는 그 고철이 되어 버린 MR 2의 대부금을 지불해야만 했죠. 불행하게 도 보험 회사와의 수속에 약간의 착오가 생겨 차가 아직 보험으로 처리되지 않 았던 겁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확실하게 보험을 들어 놓은 렌트카라도 빌렸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그때에는 보험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설마 오빠의 그 시원찮은 차가 보험에 들어 있지 않으며, 더구나 자살에 실패하 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어쨌든 15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돌벽에 부딪혔 던 겁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했어요. 얼마 지나자 맨션의 관리 조합으로부터 벽의 수리비 청구서가 왔어요. 청구서 에는 136만 4294엔이라고 씌어 있었죠. 저는 그것도 지불해야만 했어요. 현금으 로 즉각 지불해야만 했던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아버지께 그 돈을 빌려서 지불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돈에 관한 한 확실한 분이셨기 때문에, 저에게 그 돈은 빌려 준 것이니 갚으라고 하셨어요. 그런 사고를 일으킨 것은 너의 책임이 니까 그 돈은 1엔도 남기지 말고 확실하게 돌려줘야 한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 죠. 그리고 실제로 아버지도 돈에 여유가 있지도 않았어요. 때마침 그 무렵 병원 이 확장 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도 돈을 변통하기에 골머리를 썩고 계셨던 겁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자살을 생각해 보았어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죽어 버리리 라고 생각했죠. 대학 본부 빌딩의 15층에서 뛰어내리는 겁니다. 그러면 확실히 죽습니다. 일단 실수가 없죠. 저는 몇 번이고 아래를 조사해 보고, 뛰어내릴 수 있는 창도 하나 확보해 두었어요. 정말로 거기에서 뛰어 내리려는 참이었죠. 그런데 그때 뭔가가 저를 잡아 세웠어요. 이상한 뭔가가 말입니다. 뭔가가 제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뭔가'가 마지막 순간에 저를 말 그대로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잡아 세웠어요. 그래도 그 '뭔가'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죠. 아픔이 없었던 겁니다. 그 사고를 일으키고 입원한 이래, 저는 아픔이라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했어요. 차례차례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 정신이 없었으므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 했지만, 아픔이라는 것이 제 몸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거예요. 변통은 자연 스러워졌고, 생리통도 없어졌으며, 두통도 없어졌고, 위도 아프지 않았어요. 부러 진 갈비뼈조차도 거의 아픔을 느낄수 없었죠. 어째서 그런일이 일어났는지 저는 짐작도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쨌든 아픔이라는 아픔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겁 니다. 저는 우선 좀더 살아 보자고 생각했어요. 흥미가 생겼던 거죠. 아픔이 없는 인 생이 어떤 것인지, 저는 조금이라도 좋으니 맛보고 싶었어요. 죽는 것은 언제라 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제 삶을 연장하는 것은, 바꿔 말하면 빌린 돈을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 했어요. 빌린 돈은 전부 3백만 앤이 넘었어요. 그런 이유로 저는 그 빌린 돈을 갚기 의해서 창녀가 되었죠." "창녀가 되었다구요?"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노 구레타가 말했다. "돈이 단기간 에 필요했던겁니다. 빌린 돈은 가능한한 빨리 갚아 버리고 싶었고, 그것 이외에 는 제가 적절하게 돈을 모을 수단이 없었어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죠. 저는 진 정을로 죽으려고 생각했고, 그리고 조만간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때는 고통이 없는 인생에 대한 호기심이 일시적으로 저를 살게 했을 뿐이죠. 죽 음에 비유하면 육체를 파는 것 따위는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렇군요." 가노 구레타는 얼음이 녹아 버린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휘젖고 나서 조금 마셨 다. "한 가지 질문해도 괜찮습니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물론입니다. 말씀해 보세요." "당신은 그 일을 언니에게 상담하지 않았습니까?" "마루타 언니는 그 무렵 쭉 몰타 섬에서 수행하고 있었어요. 언니는 수행중에는 자기 주소를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죠.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에요. 집중 하는 데 방해받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몰타에 있는 3년 동안, 제가 언니에 게 편지를 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 했죠." "그렇군요." 나는 말했다. "커피 좀더 드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가노 구레타는 말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뜨겁게 데웠다. 나는 그 동안 환풍기를 바라보면서 ㅂ 번 심호흡을 했다. 커피가 뜨거워지자 나는 그것을 새 잔에 붓고, 쵸골릿 쿠 키를 담은 접시와 함께 쟁반에 담아 거실로 거져왔다. 우리는 잠시 커피를 마시 고 쿠키를 먹었다. "당신이 자살하려고 했던 것이 언제입니까?"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제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즉, 1978년 5월의 일이예 요" 하고 가노 구레타가 대답했다. 1978년 5월은 우리가 결혼한 달이다. 그때 가노 구레타는 자살을 도모하고, 가 노 마루타는 몰타 섬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번화가로 나가 적당한 남자에게 말을 걸어 값을 흥정하고 가까은 호텔에 가서 잤어요" 하 고 가노 구레타는 말했다. "섹스를 하는 것에, 저는 이제 더 이상 육체적인 고통 을 느끼지 않았죠. 이제 이전과 같이 아프지는 않았어요. 거기에 쾌감이라는 것 은 전혀 없었어요. 그렇지만 고통도 없었죠. 그것은 단지 육체의 움직임에 지나 지 않았어요. 저는 돈을 받고 섹스를 하는 것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 았죠. 저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깊은 무감각에 휩싸여 있었어요. 상당한 돈을 모을 수 있었어요. 저는 한달 만에 1백만 앤 가까운 돈을 저축할 수 있었 죠. 이후에도 그대로 3, 4개월 계속한다면 빌린 돈을 모두 쉽게 돌려줄 수 있었 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는 저녁에 거리로 나가 늦어도 10시 까지는 일을 끝 내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부모님께는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다고 말해 두었죠.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죠. 그렇게 많은 돈을 한 번에 갚아 버리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으므로, 저는 한 달에 10만앤만 갚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 외에는 은행에 두었죠. 그런데 어느 날 밤, 평소처럼 역 근처에서 남자에게 말을 걸려고 했을 때, 갑자 기 뒤에서 두 명의 남자가 제 팔을 잡았어요. 저는 경찰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들은 그 지역의 야쿠자였어요. 그들은 저를 뒷골목으로 끌고 가 서 칼 같은 것을 보이며, 근처에 있는 사무실로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저를 구 석방으로 데려가서 발가벗긴 후 꽁꽁 묶었죠.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저를 범했 어요. 그리고 그 장면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었어요. 저는 그 동안 조용히 눈을 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왜냐하면 저에게는 고통도 쾌감도 없었으니까요. 그 후 그들은 그 비디오를 보여 주었어요. 그리고 그 비디오를 공개하고 싶지 않으면 자기네의 조직에 들어와 활동하라고 말했죠. 그들은 제 지갑에 들어 있 는 학생증을 빼앗고, 만약 거절하면 이 비디오를 복사하여 부모님께 보내, 돈을 뜯어내겠다고 말했어요.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아무래도 상관없다, 시 키는 대로 하겠다고 저는 말했어요. 저는 그때 정말 어찌되든 상관없다고 생각 했죠. '우리 조직에 들어와서 활동하면 실제로 받는 돈은 줄어들지도 모른다' 고 그들은 말했어요. '우리들이 매상의 70퍼센트를 가져 갈 테니까, 그러나 그만큼 손님을 잡는 수고는 덜게 돼. 경찰에게 붙잡힐 염려도 없지. 질이 좋은 손님도 돌려주겠다. 너처럼 분별 없이 남자에게 말을 걸고 있다간 언젠가 호텔에서 교 살되어 버려' 하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길모퉁이에 서 있을 필요가 없었어요. 저는 저녁이 되면 그들의 사 무실에 얼굴을 내밀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지정된 호텔로 가면 되었어요. 그들 은 저에게 좋은 손님을 보내 주었죠.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특별 대우를 받았어요. 제 외모는 아무리 봐 도 그런 경험이 없어 보였고, 다른 여자들보다는 성장 과정이 좋은 것처럼 보였 죠. 아마도 저 같으 타입을 좋아하는 손님이 많았을 겁니다. 다른 여자들은 보통 하루에 세명 이상의 손님을 받았는데, 제 경우는 하루에 한 명이나 또는 두 명 으로 괜찮았어요. 다른 여자들은 언재나 호출기를 핸드백에 넣고 다니다가, 사무 실에서 부르면 서둘러 어딘가 초라한 호텔로 가서, 신분을 알 수 없는 남자와 자야만 했죠. 그러나 제 경우에도 대체로 언제나 예약이 정확히 되어 있었어요. 장소도 일류 호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어딘가에 있는 맨션으로 갈때도 있었 어요. 상대는 대체로 중년 남자였는데, 때로는 젊은 남자도 있었죠. 1주일에 한 번, 저는 사무실에서 돈을 받았어요. 그 금액은 이전만큼은 많지 않 았지만 손님이 개인적으로 주는 팁을 포함하면 괜찮은 액수였죠. 이상한 행위를 요구하는 손님도 물론 있었지만, 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그 요구가 이 상하면 이상할수록 그들은 저에게 더 많은 팁을 주었죠. 몇몇 사람은 몇번이나 저를 지정하기도 했어요. 그런 사람들은 대개 돈을 잘 주는 사람들이었죠. 저는 그런 돈을 몇몇 은행에 나누어 예금해 두었어요. 그렇지만 그 무렵에는 이미 실 제로 돈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렸죠. 돈은 단지 숫자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어요. 저는 단지 자신의 무감각을 확인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같 았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저는 침대에 누운 채로 제 몸이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아픔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눈을 뜨고, 천천히 정신을 차 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차례대로 내 육체의 감각을 확인해 갔죠. 어디에도 아 픔은 없었어요. 정말로 아픔이 존재하지 않는지, 아니면 아픔 그 자체는 존재하 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저는 판단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 나 어찌되었든, 아픔은 없었어요. 아픔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감각도 없었 죠. 그러고 나면 저는 침대에서 나와 세면대로 가서 이를 닦았어요. 잠옷을 벗고 나체가 되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죠. 그러면 몸이 아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 어요. 둥실 둥실 떠 있는 것 같아 제 몸같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마치 제 혼이 저의 것이 아닌 육체에 기생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거울에 제 몸을 비춰 보았죠. 그렇지만 거기에 비쳐져 있는 것은 상당히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요. 아픔이 없는 생활, 그것은 제가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것 이 실제로 실현되자, 저는 아픔 없는 생활 속에서 제가 있을 장소를 제대로 찾 아낼 수가 없었죠. 거기에는 뚜렷한 엇갈림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저를 혼 란에 빠뜨렸죠. 저라는 인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 어요. 지금까지 저는 세상을 계속 증오해 왔죠. 그 불공평과 불공정을 저는 계속 증오해 왔던 거예요. 그러나 적어도 거기에서는, 저는 저고 세상은 세상이었어 요. 그러나 이제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었고, 저는 제가 아니었죠. 저는 자주 울게 되었어요. 이제는 낮에 혼자서 신주쿠 공원이나 요요기 공원에 가서 잔디에 앉아 울었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해서 울 때도 있었어요. 목소리를 높여서 울 때도 있었죠. 길 가는 사람들을 빤히 쳐다 보았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 때, 5월 29일 밤에, 깨끗하게 죽어 버렸더라면 너무나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지금의 저에게는 죽는 것조차도 불가능해 져버렸죠. 무감각 속에서 저는 제 목숨을 끊을 기력조차 잃어버렸던 거예요. 저 에게는 아픔도 없었지만 기쁨도 없었죠. 아무것도 없었어요. 있는 것이라곤 단지 무감각뿐이었죠. 그리고 저는 저 자신이 아니었어요." 가노 구레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나서, 커피 잔을 손에 들고 그 안을 잠깐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저으며 잔을 커피 받침 위에 놓았다. "제가 와타야 노보루 씨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어요." "와카다 노보루 씨를 만났다고요?" 나는 놀라서 말했다. "그것은, 그러니까, 손 님으로써 말입니 까?" 가노 구레타는 잠자코 수긍했다. "하지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잠깐, 나는 그 말을 음미했다. "잘 모르겠군 요. 당신의 언니는 나에게, 당신이 와카다노보루 씨에게 강간당했다고 했어요.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까?" 가노 구레타는 무릎 위의 손수건을 손에 들고 입술 언저리를 가볍게 닦았다. 그리고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뭔가 내 마음을 혼란 시키는 것이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커피 한잔만 더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테이블 위의 잔을 쟁반에 오려놓고, 부엌 에서 커피를 데웠다. 나는 바지 호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개수대에 기대 서 서 커피가 끓기를 기다렸다. 내가 커피 잔을 가지고 거실로 되돌아 왔을 때 소 파에는 가노 구레타의 모습이 없었다. 그녀의 핸드백도, 그녀의 손수건도,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현관으로 가 보았다. 거기에도 그녀의 신발은 없었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