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지은이: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한양출판 옮긴이의 말 무라카미 하루키는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부터 <1973년의 핀볼>(1980), <양을 둘러싼 모험>(1982)에 이르기까지의 초기 삼부작에서 계속하여 상실된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 고 있다. 상실감과 고독이 청춘의, 혹은 인간 실존의 회피 불가능한 한 부분임을 인정한다면 찾아 헤매다 출구 없는 막다른 지점까지 도달해 보는 것도 삶의 한 증명이 될 것이다. 무라카미 자신 은 이 삼부작의 주제는 상실된 무엇인가를 찾는 행위와 생명이 없는 것, 다시 말해 이승과 피안 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고 있다. 삼부작이 끝나고 "겨우 건너편 기슭에 헤엄쳐 도달했다."고 느꼈을 때, 그가 손댄 것이 <중국행 슬로 보트>(1983)(본 단편집의 원제)에 수록된 단편들이다. 작가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내 몸 속의 파워를 어디 가에 밀봉해 두고 싶다. 납상자 같은 데 가두어 놓고, 그 상자를 책 상 위에 올 려놓고 그걸 보면서 문장을 쓰고 싶다.' 무라카미가 그의 파워를 납상자 속에 잠가 두고 쓴 작품 이 이 단편집이 된다. 파워를 상자 속에 가두어 두고 쓰면 어떤 작품이 나오게 될까? 여전히 상실감을 지닌 인간이 투명한 문체로 표출될 것인가? 혹은 <노르웨이의 숲>에 보이는 리리시즘이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흐르게 될까? <세계의 종말과 하드보일드 원더 랜드>에 깃든 판타지가 주아이 될까? 그런뜻에서 는 이 단편집에는 그 다양한 무라카미가 다같이 공존하고 있다. 오소독스란 리얼리즘으로 그려진 <중국행 슬로 보트>, 약간은 동화적인 <시드니의 그린 스트 리트>. 희미한 흔적밖에 남겨 두지 않은 상실된 존재인 어떤 소녀와 애인에게서 '나는 아무래도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요구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별을 선언 받은 '나'의 이야 기인<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중국행 슬로 보트> 끝부분에서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언어는 어느틈엔가 사라져 버리고, 꿈은 언젠가 붕괴될 것 이다.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자.' 다시 말해 작가는 이들 단편을 통해 모든 것의 무너짐을 끝까지 지켜보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정신 을 개척하기 위한 고독한 시도를 전개하겠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아주 조용하고 고독 을 숙명처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과거나 타인과의 절연을 처절하게 자각하면서 그래도 새로운 연 관을 희구하는 그의 절망적인 구애를 받쳐 줄 파워는 납상자에 갇혀진 채 조용히 존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1980년 봄부터 1982년 여름에 걸쳐 발표한 일곱 개의 단편이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장편을 이정표로 삼는다면, <1973년의 핀볼> 집필 후 앞 네 편을 썼고, <양을 둘러싼 모 험>발표 후 후반의 세 편을 쓴 것이 된다. 따라서 <캥거루 통신>과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사 이에는 일년 가까운 블랭크가 있다. 이것은 나에게는 최초의 단편집이다. 중국행 슬로 보트 최초로 중국인을 만난 것이 언제 일이었을까? 이 문장은, 그와 같은, 말하자면 소위 고고학적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여러 가지 출토품에 라 벨을 붙이고, 종류별로 구분하고, 분석을 한다. 저 , 그런데 최초의 중국인을 만난 것이 언제였지? 1959년, 혹은 1960년이라는 게 나의 추정이다. 어느 쪽이라도 좋다. 어느 쪽이라 해도 대수로운 차이는 없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전혀 없다. 나에게 있어서 1959년과 1960년은, 볼품없는 유니 폼을 입은 추한 쌍둥이 형제와 같다.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에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1959년과 1960년을 구별하려면 나는 상당히 고생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나의 작업은 참을성 있게 추진된다. 구멍의 틀 안에 넓혀지고 아주 조금씩이기 는 하지만 새로운 출토품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렇지, 그것은 분명히 요한슨과 패터슨이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겨룬 해였다. 그렇다면, 도 서관에 가서 옛날 신문연감에서 스포츠 난을 들춰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끝날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자전거를 타고 근처에 있는 시립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 현관 곁에는 어떻게 된 셈인지 닭장이 있었다고, 닭장 안에서는 다섯 마리의 닭이 조금 늦은 아침인지 조금 이른 점심인지를 먹고 있었다. 날씨가 아주 좋았기 때문에 나는 도서관에 들 어가기 전에 닭장 옆에 있는 작은 돌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기로 했다. 그리고 담배를 피 우면서 닭들이 모이를 쪼고 있는 것을 쭉 바라보고 있었다. 닭들은 굉장히 바쁜 듯이 모이 상자 를 쪼고 있었다. 그들이 너무 헐레벌떡 서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식사 풍경은 마치 옛날의 화면 수가 모자란 뉴스 영화처럼 보였다. 담배를 다 피웠을 때, 내 안의 무엇인가가 확실하게 변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왜인지 를 몰랐지만, 다섯 마리의 닭과 담배 한 개비만큼의 거리를 두게 된 새로운 나는, 나 자신에게 두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우선 첫째, 내가 중국인을 만난 정확한 날짜 따위에 누가 흥미 따위를 갖는단 말인가? 또 하나, 양지바른 독서실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신문 연감과 나 사이에, 더 이상 서로 나누어 가질 만한 그 무엇이 존재할 것인가? 타당한 의문이었다. 나는 닭장 앞에서 또 한 개비의 담배를 필 우고,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도 서관과 닭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니까 하늘을 나는 새에게 이름이 없듯이, 나의 그 기억에는 날 짜가 없다. 하긴, 내 기억의 대부분은 날짜를 지니지 않는다. 나의 기억력은 대단히 불확실하다. 그것은 너 무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가끔 그 불확실함에 의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증명하려고 하 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나는 전혀 모른다. 도대체가 불확실함이 증명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 따 위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어쨌든, 이라고나 할까, 그런 식으로, 나의 기억은 대단히 애매하다. 앞뒤가 거꾸로 되거나, 사 실과 상상이 뒤바뛰거나, 어떤 때는 나 자신의 눈과 남의 눈이 뒤섞이기도 한다. 그쯤 되면 그런 것은 기억이라 고조차 부를 수 없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시절(전후 민주주 의의 그 우스꽝스럽고도 서글픈 육 년간의 석양의 나날)을 통틀어 제대로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는 사건이라고는, 겨우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려는 중국인의 이야기고, 또 하나는 어느 여름 방학 오후에 있었던 야구 시합의 일이다. 그 야구 시합에서 나는 센터를 맡 았고, 3회 말에 뇌진탕을 일으켰다. 물론 내가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뇌진탕을 일으킨 것은 아니 다. 우리 팀이 그 시합 때 동네 고등학교 교정의 한쪽 귀퉁이밖에 사용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 그 날 내가 뇌진탕을 일으키게 된 주원인이었다. 즉 나는 센터 오버로 날아가는 공을 전속력으로 쫓 아가다가 얼굴부터 바스켓 볼의 골 포스트라고 격돌한 것이었다. 정신이 든 것은 포도 넝쿨 아래에 있는 벤치, 이미 날은 저물어 있었고, 건조한 그라운드에 뿌 려진 물 냄새와 베개로 쓰인 새 글러브의 가죽 냄새가 맨 처음 내 코를 찌른 것들이었다. 그리고 둔탁한 옆이마의 통증, 나는 무엇인가를 얘기한 것 같다.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내 곁에 같이 있 어 중 친구가, 나중에 부끄러운 듯이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괜찮아, 먼지 만 털면 아직 먹을 수 있어. 그런 말이 어째서 나왔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아마 꿈이라도 꾸고 있었는가 보다. 어쩌면 그것은 급식빵을 나르는 중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밖에 내가 한 말에서 연상할 수 있는 상황이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머릿속에서 이말을 되풀이해 본다. 괜찮아, 먼지만 털면 아직 먹을 수 있어. 그리고 이 말을 머릿속에 간직하면서, 나는 나라고 하는 한 인간의 존재와 나라고 하는 한 인 간이 걷지 않으면 안 될 도정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이 당연히 도달하게 되는 한 지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은, 적어도 나한테는 지독히 막연한 작업이다. 그리고 죽음은 왠지 나에게 중국인을 생각나게 한다. 항구 도시의 야마노테에 있는 중국인 자제를 위한 국민하교(이름은 전혀 기억에 없으니까 이후 편의상 중국인국민학교로 부르기로 하겠다. 이상한 호칭일지 모르지만 용서해 주기 바란다)를 방 문하게 된 것은, 그곳이 내가 치르게 된 모의 시험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험장은 몇 개인가로 분산되어 있었지만, 우리 학교에서 중국인 학교에 가도록 정해진 학생은 나 하나뿐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사무상 무슨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반 다른 친구들은 모두 가까이에 있는 시험장에 지정되었으니까. 중국인 국민학교? 나는 닥치는 대로 안무나 붙잡고 중국인 국민학교에 관해서 뭐 아는 게 없느냐고 물어 보고 다 녔다. 누구 하나 무엇 하나 몰랐다. 알게 된 것이라고는, 그 중국인 국민학교가 우리 학군에서 전 차로 삼십 분이나 되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당시 나는 혼자서 전차를 타고 어딘가에 가 는 그런 타입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은 나에게는 세계의 끝이라는 이야기나 같 은 이야기였다. 세계의 끝이 있는 중국인 국민학교. 이 주일 후의 일요일 아침, 나는 지독히 어두운 기분으로 새로운 연필 한 타스를 깎고, 지정된 대로 도시락과 슬리퍼를 비닐 가방에 넣었다. 날씨가 매우 좋은, 조금 덥게 느껴지는 가을의 일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두꺼운 스웨터를 입혔다. 나는 혼자서 전차를 타고, 역을 놓치지 않 게 쭉 문 앞에 선 채 바깥 광경을 주의해서 보고 있었다. 중국인 국민학교는 수험표 뒤에 인쇄되어 있는 지도를 볼 것도 없이 금방 알 수 있었다. 슬리 퍼와 도시락으로 가방이 불거진 한 무리의 국민 학생 뒤를, 쫓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가파른 고갯 길을 몇십 명, 몇백 명이라고 할 국민 학생이 열을 지어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 은 이상하다고 하면 이상한 풍경이었다. 그들은 공 장난을 하면서 가는 것도 아니었고, 하급생의 모자를 잡아당기거나 하면서 가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나에 게 어딘지 균일하지 못한 항구 운동 같은 것을 연상시켰다.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나는 너무 두꺼운 스웨터 속에서 계속 땀을 흘렸다. 나의 막연한 예상과는 달리, 중국인 국민학교는 외관상 우리 국민학교와 거의 다르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세련되어 있었고, 어둡고 긴 복도, 축축하고 곰팡이 냄새 나는 공기... 이 주 일 동안 내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부풀리고 있었던 이미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세련된 철문을 지나 식수림 사이의 돌길이 완만한 호를 그리면서 길게 이어졌고, 현관 정면에는 많은 연 못이 오전 아홉 시의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시키고 있었다. 교사를 따라 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그 하나하나마다 중국어로 된 설명문이 달려 있었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씨도 있었고,. 읽을 수 없 는 글씨도 있었다. 현관 저쪽에는 파테오 형태로, 교사에 둘러싸인 네모난 운동장이 있었고., 그 구석마다 누군가의 흉상이나 기상 관측용 하얀 상자라든가 철봉이 있었다. 나는 지시된 대로 현관에서 신을 벗고, 지시된 교실로 들어갔다. 밝은 교실에는 깨끗한 여닫이 책상이 정확히 사십 개 늘어서 있었고, 각각의 책상 위에는 수험 번호가 적힌 종이 조각이 셀로판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내 자리는 창가의 제일 앞줄 즉, 이 교실에서 가장 빠른 번호였다. 칠판은 새로운 짙은 초록색, 교단 위에는 분필 상자와 화병, 화병 속에는 하얀 국화가 한 송이. 모든 것이 청결하고 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아마 우리 수험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부 러 치웠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의자에 앉고, 책상 위에 필통과 책받침을 내놓고 나서,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답안지를 옆에 낀 시험 감독이 교실에 들어온 것은 십오 분 뒤였다. 감독관은 마흔 살이 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왼쪽 다리를 마루 위에 끌 듯이 가볍게 절뚝거리고 왼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것은 산에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 선물가게에서나 팔고 있음직한 조잡하게 만들어진 벚 나무로 된 지팡이였다. 그리고 그가 절뚝거리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그 지 팡이의 조잡함만이 이상하게 눈에 띄었다. 마흔 명의 국민학교 학생들은 감독관의 모습을 보자,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험지를 보자,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다. 감독관은 교단 위에 올라서자, 우선 답안지 다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음에 딸가닥하는 소 리를 내면서, 그 옆에 지팡이를 놓았다. 그리고 모든 좌석이 결원 없이 차 있는 것을 확인하자, 기침을 한 번 한 다음에, 잠시 손목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몸을 지탱하듯이 책상 귀퉁이에 양손 을 짚은 채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한참 천장 구석을 올려다보았다. 침묵. 십오 초 정도 그 각각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긴장한 국민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책상 위의 답안 지를 바라보고, 다리가 불편한 감독관은 가만히 천장 귀퉁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엷은 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본 다음 순간에 어떤 색이었는지 무늬였는지 곧 잊어버릴 만큼 인 상이 흐린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천천히 안경을 닦고, 그리고 다시 썼다. "제가 이 테스트 감독을 합니다." 제가 라고 그는 말했다. "답안지를 돌리면, 책상 위에 엎어 놓은 채로 두세요, 절대로 보면 안 됩니다. 양손은 무릎 위 에 똑바로 올려 주세요. 제가 자, 라고 하거든 뒤집어서 풀기 시작하세요. 끝나기 십 분 전이 되 면 십 분 전, 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틀린 것이 없는가 다시 한 번 확인하십시오, 그 다음에 내가 자,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답안지를 뒤집어 놓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도록. 알겠죠?" 침묵. "처음에 이름과 수험 번호를 쓰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세요." 침묵. 그는 다시 한 번 손목 시계를 보았다. "자, 아직 십 분 정도 시간이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과 조금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모 두 편히 하세요." 휴, 하는 한숨 소리가 몇몇 들렸다. "저는 이 학교에 근무하는 중국인 교사입니다." 그래, 나는 이와 같이 해서 최초의 중국인을 만났다. 그는 전혀 중국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때가지 나는 중국 인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 교실에서는"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보통 때는 여러분과 같은 나이의 중국인 학생이 여러 분하고 똑같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중국과 일본은, 말하자면 이웃 나라입니다. 모두가 기분 좋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렇죠?" 침묵. "물론 우리 두 나라 사이에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비슷하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 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요.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친구를 생각해 봐도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렇죠? 우리 두 나라 사이도 그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노력을 한다면, 우리들은 틀림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서로서로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첫걸음입니다." 침묵. "예를 들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당신들 학교에 많은 중국인 학생들이 테스트를 받으러 왔다고 합시다. 지금의 여러분하고 똑같이, 이번에는 여러분 책상에 중국인 아이들이 앉는 것입니 다. 그렇게 생각해 보세요." 가정. "월요일 아침, 여러분이 학교에 옵니다. 그리고 책상에 앉습니다. 그러자 책상은 낙서나 상처투 성이, 의자에는 껌이 달라붙어 있고, 책상 안의 덧신은 한쪽밖에 없고. 자, 어떤 기분이 들까요?" 침묵. "예를 들어서 자네"그는 실로 나를 지목한 것이다. 내 수험번호가 제일 앞이었기 때문이다. "기쁠까요?"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중국인을 존경할 수 있습니까?"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하고 그는 다시 정면을 향했다. 모두의 눈도 겨우 교단 쪽으로 돌아갔다. "여러분도 책상에 낙서를 하거나, 껌을 의자에 붙여놓거나, 책상 안에 있는 물건을 장난치거나 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침묵. "중국 학생들은 좀더 분명하게 대답을 합니다." 넷, 하고 사십 명의 학생들이 대답했다. 아니, 서른 아홉 명. 나는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됐습니다. 얼굴을 들고 가슴을 펴세요." 우리들은 얼굴을 들고 가슴을 폈다. "그리고 프라이드를 가지세요." 이십 년도 더 된 옛날 시험의 결과 따윈, 지금은 전혀 기억에 업다.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 은 언덕길을 걷고 있던 국민학생들의 모습과 그 중국인 교사의 말뿐이다. 그리고 육 년인가, 칠 년 지난 고등학교 삼 학년 가을, 그 때와 똑같이 기분 좋은 일요일 오후, 나는 같은 언덕길을 클래스메이트인 여자아이와 걷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잊어 버렸다. 어쨌든 그것은 우리들의 최초의 데이트였 고, 둘이서 도서관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우리들은 언덕 가운데쯤에 있는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그 중국인 국민학교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그녀는 킥킥 웃었다. "이상하네."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테스트를 받았거든." "설마." "정말이야." 그녀는 커피 크림을 얇은 컵 가장자리에 흘려 넣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교 실은 달랐나 봐. 그런 연설은 없었거든." 그녀는 스푼을 잡고, 컵을 들여다보듯이 하면서 몇 번인가 커피를 저었다. "감독 선생님이 중국이었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에 없어. 그런 건 생각조차 해보지도 않았는 걸 뭐." "낙서는 했어?" "낙서?" "책상 위에 말야." 그녀는 컵 가장자리에 입술을 댄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아, 어땠을까, 기억이 안 나는데."라고 그녀는 말하면서 살짝 웃었다. "옛날 일인걸 뭐." "하지만, 아주 깨끗한 반짝반짝하는 새 책상이었잖아? 기억 안나?" 고 내가 물었다. "음, 글쎄, 그랬는지도 모르겠네."하고 그녀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라고 할까, 굉장히 미끌미끌한 느낌의 냄새가 났어. 온 교실에서 말야, 잘 표현할 수 는 없 지만, 아주 얇은 베일 같은 그런 것 말야. 그래서..."라고 말하고, 나는 오른손으로 커피 스푼을 쥐 고, 조금 생각했다. "그리고 책상이 마흔개, 전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지. 칠판도 아주 예쁜 초록 색이었고 말야." 우리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낙서했다고 생각해? 생각나지 않아?"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물어 보았다. "이봐, 정말 생각이 나지 않는단 말야."라고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듣고 보니 한 것 같은 느낌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하지만 그것은 옛날 얘기니까..." 아마도 그녀의 이야기가 제대로 된 거겠지. 몇 년 전에 어딘가에 있는 책상에 낙서를 했는지 안 했는지 따위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옛날 이야기고, 그리고 아무래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 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중 후, 나는 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한 중국인 소년의 모습을 떠올려 보 았다. 월요일 아침, 자기 책상 위에 누군가의 낙서를 발견한 중국인 소년의 일, 말이다. 침묵. 고등학교가 항구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내 주위에는 제법 많은 중국인이 있었다. 중국인이라고 해도, 우리들하고 어딘가가 다른 것은 아니다. 또 그들만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확실한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하나하나는 천차만별했고,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도 그들도 완전히 같았 다. 내가 항상 생각하는 일이지만, 개인의 개체성의 기묘함은, 모든 카테고리나 일반론을 초월한 다. 우리 반에도 몇 명인가의 중국인이 있었다. 성적이 좋은 아이도 있었고, 좋지 않은 아이도 있었 고 명랑한 아이도 있는가 하면 조용한 아이도 있었다. 그럴싸한 호화 주택에 사는 아이도 있는가 하면, 햇볕이 잘 안 드는 세 평짜리 단칸방에 부엌이 딸린 아파트에 사는 아이도 있었다. 여러 가 지다. 그러나 나는 그들 중의 누구하고도 특별히 친하거나 하지 않았다. 도대체가 나는 되는대로 아무하고나 친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상대가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그 것은 똑같다. 그들 중의 하나하고는 십 년 정도 후에 우연히 만나게 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 하는 편이 좋겠다,. 무대는 동경으로 옮겨간다. 순서대로 한다면-라는 것은 죽, 별로 친하게 말을 나누지 않던 클래스메이트였던 중국인들을 빼 고, 라는 이야기지만-나에게 있어서 두 번째인 중국인은 대학 이 학년 봄에 아르바이트하던 곳에 서 만난 말수가 적은 여자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나하고 똑같이 열 아홉 살이었고, 자 그마했으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미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와 나는 삼 주일 동안 함께 일 했다. 그녀는 아주 열심히 일했다. 나도 덩달아 열심히 일했지만, 그녀가 일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 으면, 그녀의 열성과 나의 열성은 전혀 질이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즉, 나의 열성리라는 것이 '적어도 무엇인가를 하려면, 열심히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에 있어서의 열성임에 비해, 그녀의 열성은 좀더 인간 존재의 근원에 가까운 종류의 것이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열성에는,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일상성이 그 열성 때문에 겨우 지탱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 게 하는 기묘한 절박감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녀하고 일의 페이스가 맞지 않아, 도중에 화를 냈다. 마지막까지 화를 내지 않고 그녀와 공동으로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 하나뿐이 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하고 특별히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녀와 처음 제대로 말을 나눈 것 은, 함께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되고 나서였다. 그녀는 그날 오후, 삼십 분 정도, 일종의 패닉(돌연한 공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아 주 사소한 사고였는데, 그것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점점 커져,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혼 란으로 변해 갔다. 그 동안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꼼짝 않고 겁먹은 채 서 있었 다. 그녀의 모습은 나에게, 밤바다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아 가는 배를 연상시켰다. 나는 모든 작업을 스톱하고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꽉 쥔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 주고, 뜨거운 커 피를 마시게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근본적인 잘못은 아니었고, 잘 못된 부분을 처음부터 다시 해도, 그것 때문에 작업이 그다지 늦어질 일도 아니었다. 커피를 마시 자 그녀는 조금 침착해진 것 같았다. "미안해."하고 그녀는 말했다. "괜찮아."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가볍게 세상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자기가 중국인이리고 했다. 우리가 일하는 곳은, 작은 출판 회사의 어둡고 좁은 창고였다. 간단하고, 그리고 재미없는 일이 었다. 내가 전표를 받고, 지시된 권수의 책을 안고 창고 입구까지 날아간다. 그녀가 거기에 로프 를 두르고 장부를 체크한다,. 그뿐인 일이었다. 게다가 창고에는 난방 장치라고는 아무것도 없었 기 때문에, 동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싫든 좋든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이다. 점심 시간이 되면, 우리는 밖에 나가서 따뜻한 점심을 먹고, 점심 시간이 끝날 때까지의 한 시 간을, 몸을 녹이면서 둘이서 가끔, 마음이 내키면 이야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요코하마에서 작은 수입상을 경영하고 있었고, 그 취급하는 물건의 대부분은, 홍콩에서 오는 바겐용 싸구려 옷 가지였다. 중국인이라고 해도, 그녀는 일본에서 태어나, 중국에도 홍콩에도 대만에도 간 적이 없 었고, 그녀가 다닌 국민학교는 일본인 국민학교로, 중국인 국민학교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여 자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장래 희망은 통역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마고메에 있는 오빠의 아 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혹은 그녀표현을 그대로 빌린다면, 굴러 들어가 있었다. 아버지하고 뜻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은, 대충 그런 것이었다. 그 해 3월의 이 주일은, 가끔 진눈깨비가 섞인 차가운 비와 함께 지나갔다. 일이 끝나는 마지막 밤에, 경리과에서 월급을 받은 뒤 나는 전에 몇 번인가 가본 적이 있는 신주쿠의 디스코테크에 가자고 그녀에게 말했다. 오 초 정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서, 기꺼이, 라고 그녀는 말했다. "간단해."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우선 레스토랑에 들어가 맥주와 피자로 천천히 식사를 망치고 두 시간 정도 춤을 췄다. 홀은 기분 좋은 따뜻함에 넘쳐 있었고, 땀 냄새와 누군가가 태운 듯한 향내가 떠돌고 있었다. 땀 이 나면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땀이 식으면 다시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 가끔 스트로보 플래시가 점멸했다. 스트로보 광선 속에서 그녀는, 오래 된 앨범의 사진처럼 멋져 보였다. 몇 곡인가 추고 나서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3월의 밤바람은 아직 차가웠지만, 그래도 어딘지 봄의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봄이 아직 더웠기 때문에 우리들은 코트를 손에 든 채,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게임 센터를 들여다보고,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 또 걸었다. 봄방학은 아직 반 남 아 있었고, 무엇보다 우리는 열 아홉 살이었다. 걸어, 라고 누가 말하며 다마강 까지 걸어갔을지 도 모른다. 시계가 열시 이십 분을 가리켰을 때, 슬슬 가야돼, 하고 그녀가 말했다. "열한 시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거든." "굉장히 엄하구나." "응, 오빠가 시끄러워." "구두를 잊지 않도록 해/" "구두?" 대여섯 발자국 걷고 나서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아, 신데렐라 말이군. 알았어, 잇지 않을게." 우리들은 신주쿠역의 계단을 오라가 나란히 벤치에 걸터앉았다. "또 초청해도 될까?" "응."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몇 번인가 끄덕였다. "상관없어, 전혀." 나는 그녀의 전화 번호를 묻고, 그것을 디스코테크 종이 성냥갑 뒤에 볼펜으로 적었다. 전차가 와서 거기에 그녀를 태우고, 안녕하고 말했다. 즐거웠어, 고마웠어, 그럼 또. 문이 닫히고,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담뱃불을 붙이고, 초록색 전차가 폼 끝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기둥에 기댄 채, 그대로 담배를 끝까지 피웠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면서, 왠지는 모르지만, 기분이 이상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구둣바닥으로 담배를 비벼 끄고, 그리고 또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러 거리의 소음이, 엷은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래도 이상한 기분은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았 다.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솜씨가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처음 데이트치고는, 나 는 제법 잘 해냈는데, 적어도 순서는 제대로였다. 그래도 내 머릿속에는 무엇인가가 여전히 걸려 있었다. 아주 작은 그 무엇, 말로 표현할 수 없 는 그 무엇이었다. 무엇인가가 있었다. 무엇인가가 손상되어 버린 것이다. 그 무엇을 깨달을 때까지 십오 분 걸렸다. 십오 분 지나고 나서, 나는 내가 마지막에 지독한 잘 못을 저질러 버린 것을 겨우 깨달았다. 바보스러운, 의미도 없는 잘못이었다. 그러나 의미가 없는 만큼, 그 잘못은 그로테스크했다. 즉 나는 그녀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야마노테선에 태운 것이다. 왜 그렇게 되어 버렸는지, 알 순 없었다. 내 하숙은 메지로에 있었으니까, 그녀하고 같은 전차 를 타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었다. 맥주? 혹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자기 일로 너무 머 리가 가득 차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무엇인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었다. 역의 시계는 열시 사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도 제 시간에는 대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빨리 내 잘못을 알아차리고 반대로 도는 전차로 갈아타지 않는 한...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것 이다, 라는 것이 막연한 나의 예감이었다. 빨리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아니 예를 들어 문이 닫히 기 전에 그것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녀가 고마고메역에 모습을 보인 것은 열한 시에서 십 분 정도 지난 때였다. 계단 옆에 서 있 는 나를 보고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잘못 알았어." 나는 그녀하고 마주 서듯이 해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착각했어, 어떻게 되었었나 봐, 틀림없이." "..."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지, 너한테 사과하려고."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채 입을 오므렸다. "정말 잘못 안 거야?" "정말이라니..., 물론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될 리가 없잖아?"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했지." "내가?"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왜 내가 그런 짓을 하리라고 생각했어?" "모르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벤치에 앉게 하고, 나도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다리를 앞으로 뻗고, 하얀 구두 끝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왜, 일부러 했다고 생각했어?" 나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물어 보았다. "화났는가 하고 생각했거든." "화가 나?" "응." "왜." "왜냐면..., 내가 빨리 간다고 말했기 때문에." "여자가 빨리 돌아가겠다고 말할 때마다 화내면 몸이 못 견디지." "아니면 나랑 함께 있는 것이 재미없었든지, 틀림없이." "설마. 가자고 한 것은 내가 아냐." "하지만 재미없었던 거 아냐. 그렇지?" "재미없지 않았단 말야. 아주 재미있었어. 거짓말이 아냐." "거짓말이야, 나랑 함께 있어서 즐거울 리가 없어. 네가 정말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네 마음속에서 그렇게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런 일 이 번이 처음도 아니고, 틀림없이 마지막 도 아닐 텐데 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두어 방울 흘러, 코트 깃으로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우리들은 그대로의 자세로 쭉 있었다. 전차가 몇 대인가 와서는 승객을 뱉어 냈고, 그들의 모습이 계단 위로 사라지면 다시 정적이 돌 아왔다. "부탁이야. 이제 내 일은 내버려 둬." 나는 아무 소리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정말 이젠 됐어." 라고 그녀가 계속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하고 있을 때 아주 즐거웠어. 이런 일은 아주 오래간만이야. 그러니까 참 기 뻤어. 모든 것이 잘돼 갈 걸로 생각했지. 야마노테선의 거꾸로 도는 전차에 탔을 때도, 괜찮아, 하 고 생각했지. 뭔가 잘못되었던 거겠지,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목이 메이고, 눈물 방울이 그녀의 코트 깃을 까맣게 물들였다. "하지만 전차가 동경 역을 지날 때쯤부터, 모든 것이 지긋지 긋해졌어. 이젠 이런 꼴 당하고 싶지 않다. 이젠 꿈 따윈 꾸고 싶지 않다라고 말야." 그렇게 오랫동안 그녀가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마치자, 긴 침묵 이 우리들 사이에 내렸다.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라고 내가 말했다. 차가운 밤바람이, 석간을 뿔뿔이 흐트러뜨려, 플랫폼 가장자리까지 날려 버렸다. 그녀는 눈물에 젖은 앞머리를 옆으로 치우고 미소지었다. "괜찮아. 애당초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거든." 그녀가 말하는 장소가 이 일본이라고 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암흑의 우주를 계 속 돌고 있는 이 바위 덩어리를 가리키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손을 잡아 내 무릎에 올려놓고, 그 위에 가만히 내 손을 포갰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손바닥은 촉촉했다. 그 자그마한 온기가 내 마음속에 잊혀졌던 몇 개인가의 낡은 추억을 생각나게 했다. 나 는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이봐. 이제 다시 한 번 처음부터 해보지 않을래?... 분명히 나는 네 일은 아무것도 몰라. 하지 만 말야, 좀더 알고 싶다고 생각해. 그리고 좀더 너를 알게 된다면, 좀더 너를 좋아하게 될 것 같 아." 그녀는 아무 소리 안 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안에서 약간 움직였을 뿐이었다. "틀림없이 잘돼 가리라고 생각해." 내가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아마도." 라고 나는 말했다. "약속은 할 수 없어. 하지만 노력할게. 그리고 좀더 정직해지고 시 다고 생각해." "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일 만나고 싶어. 괜찮아?"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할게."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눈물 자국을 닦고 나서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고마워. 여러 가지로 미안해." "에가 사과할 필요 없잖아. 내가 잘못한 걸 뭐." 그날 밤, 우리들은 헤어졌다. 나는 혼자 벤치에 앉은 태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빈 갑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시계는 이미 열두 시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그날 밤에 범한 두 번째 실수를 알아차린 것은 그로부터 아홉 시간 뒤였다. 그것은 너무 나도 황당하고, 너무나도 치명적인 실수였다. 나는 담배 빈 갑과 함께, 그녀의 전화 번호를 적은 성냥갑까지도 버려 버린 것이다. 아르바이트했던 곳의 명부에도, 전화 번호부에도 그녀의 전화 번 호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 이후 그녀하고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녀가 내가 만난 두 번째 중국인이다. 세 번째 중국인 이야기. 그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의 고등학교 때의 지인이다. 친구의 친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 이다. 몇 번인가 말을 한 적은 있다. 우리들의 만남에는 드라마다운 것은 거의 없다. 그것은 리빙스턴과 스탄레이의 만남만큼 극적 인 것도 아니고, 야마시타 대장과 퍼시벌 중장과의 해후만큼 명암이 엇갈리는 것도 아니고, 시저 와 스핑크스의 해후처럼 영광에 차 있지도 않고, 혹은 또 괴테와 베토벤의 해후처럼 불꽃 튀기는 것도 아니다. 구태여 역사적인 사건(그것을 역사적이라고 해도 괜찮은지는 극히 의심스럽지만)을 예로 든다 면, 옛날, 소년 잡지에서 읽은 태평양 전쟁시 격전지에서 이 두 병사의 해후라고 하는 것이 가장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나는 일본군, 하나는 미군이다. 원부대를 놓친 두 병사는 정글 속 빈터에 서 우연히 맞닥뜨려 버린다. 양쪽 다 총을 잡을 여유도 없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사이에, 한쪽 병 사 (어느 쪽이었지?)가 갑자기 손가락을 두 개 올려서 보이 스카우트 식의 경례를 한다. 상대방 병사도 반사적으로 손가락 두 개를 들고 보이 스카우트식 답례를 한다. 그리고 둘은 총을 내린 채, 가만히 원부대로 되돌아갔다. 나는 스물 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 결혼한 지 육 년의 세월이 흘렀다. 육 년 동안 세 마리 고양 이를 매장했다. 몇 가지인가의 희망을 태워 없애 버리고, 몇 가지인가의 괴로움을 두꺼운 스웨터 에 싸서 땅 속에 묻었다. 모든 것은 이 종잡을 수 없는 거대한 도시 속에서 행해졌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얇은 막에 둘러싸인 것 같은 12월의 오후였다. 바람은 없다 해도, 공기는 정말이지 차가웠다. 가끔, 구름 틈에서 새어 나오는 광선도, 거리를 뒤덮은 어두운 회색 그림자를 조차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은행에 갔다 오는 길에, 아오야마 거리에 있는 조용하고 유리창이 큰 찻집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고, 막 산 소설을 뒤적이고 있었다. 소설에 실증이 나면 눈을 들 어 거리를 끊임없이 흘러가는 차를 보고 그리고 다시 책을 읽었다. "야아." 하고 그 남자는 말했다. 그리고 내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렇지?" 나는 깜짝 놀라서 책에서 눈을 때고 그렇다, 고 했다. 그의 얼굴이 기억에 없었다. 나이는 나하 고 같을 정도, 잘 재단된 네이비 블루의 블래이저 코트에, 잘 어울리는 레지멘털 타이라고 하는 정장 차림이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조금씩 닳아빠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얼굴 생김새도 비슷 했다. 제대로 정돈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 떠 있는 표정은, 장소에 걸맞게 어디에선가 억지로 주워 모은 단편의 집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임시 변통의 파티 테이블에 늘어놓은 짝이 맞지 않는 접시들. "앉아도 될까?" "앉으시지."라고 나는 말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마주 앉더니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 터를 꺼내고, 불을 붙인다고 할 것도 없이 테이블 위에 그냥 놓았다.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 나지 않는데." 나는 그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깨끗이 그렇게 고백했다. "미안하지 만 언제나 그렇거든. 사람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옛날 일을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거야, 그것은, 틀림없이 잠재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그럴지도 모르겠어." 하고 나는 인정했다. 분명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웨이트리스가 물을 갖고 오자, 그는 아메리칸 커피를 주문했다. 아주 옅게, 하고 그는 말했다. "위가 나빠서 말야, 사실은 의사한테 커피도 담배도 삼가도록 명령받았지." 그는 한 점 결점이 없는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잠시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아참, 그렇지, 아 까 이야기의 계속인데 말야, 나는 자네하고 같은 이유로, 옛날일 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 지.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옛날 일이 기억 난단 말씀이야. 난처하게도." 내 의식의 반은 혼자만의 시간이 방해받는 것이 지겨워지고, 그래도 나머지 반은 그이 화술에 이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말이지, 정말 생생하게 생각이 나거든, 그때의 날씨부터, 온도, 냄새까지 말야. 가끔 나 자신도 모르겠다 이거야. 도대체 어느 쪽에 살고 있는 것이 진짜 나인가 하고 말야. 그런 느낌 든 적 있어?" "아니." 그럴 작정은 아니었지, 내 말은 대단히 무뚝뚝하게 들렸다. 그렇지만 상대는 전혀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즐거운 듯이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뭐 그런 이유로 자네 일도 잘 기억하고 있지, 길을 걷다가 유리창 너머로 보고 한눈에 알았다 이거야. 말을 걸어서 방해가 됐나?" "미안해 할 것 없어. 이쪽이 멋대로 쫓아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 생각날 때가 되면 자연히 생각난다. 뭐 그런 거지."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없을까. 퀴즈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퀴즈 따위가 아냐. 즉, 지금의 나에게는 이름 따위는 없는 거나 같다 이거지. 물론 옛날에는 나에게도 제대로 된 이름이 있었지, 아직 때가 묻지 않은 반짝반짝 빛나는 거이 말야." 그는 그 지점에서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그것을 자네가 기억해 내도 좋고, 기억해 내지 못해 도 좋다. 솔직히 말해서, 어느 쪽이라 해도 나는 상관없다는 말이지." 커피가 오고 , 그는 그것을 맛도 없다는 듯이 마셨다. 나는 그의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려 웠다 "너무나 많은 물이 다리 밑을 흘렀다, 거지 , 고등학교 시절 영어 교과서에 있었지. 기억 나?" 고등학교 시절? "정말이지; 십 년이 지나면 여러 가지가 변하는 법이지. 물론 여기 있는 나는 십 년 전의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만, 실감으로는 아무래도 와 닿지 않거든. 어느 지점에서인가 내 알 맹이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어떻게 생각해?" "모르겠는데." 그는 팔짱을 끼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 이번에는 어떻게 지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결혼했어?" 그는 그 자세로 나에게 물었다. "응." "아이는?" "없어." "나는 하나 있지. 사내아인데 말야." 아이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고, 우리들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자, 그가 금방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조촐한 장사야."라고 내가 대답했다. "장사?" 그는 잠시 멍하니 입을 열고 있다가 그렇게 말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말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놀라운데, 자네가 장사를 한다니 말야. 도대체가 자네랑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단 말야." "그래?" 하고 내가 말했다. "그 정에는 책만 읽고 있었지." 그는 이상한 듯이 계속 그렇게 말했다. "책이라면 지금도 읽고 있지만 말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백과 사전은?" "백과 사전?" "그래, 갖고 있나?" "아니."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저었다. "백과 사전은 읽지 않나?" "있으면, 읽겠지." "사실은 말야, 나는 지금 백과 사전을 팔고 있거든." 그때까지 마음의 반을 차지하고 있던 이 사나이에 대한 흥미가 , 한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한숨 을 쉬고 담배를 재떨이 안에 비벼 껐다. 얼굴이 조금 발개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갖고는 싶지만, 기금은 돈이 없어. 겨우 빚을 갚기 시작했거든." "이봐, 이봐, 그만둬.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가나하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야. 같이 같은 하늘을 우러러본다. 뭐 그런 거지. 그리고 뭐 자네한테 백과 사전을 팔아먹으려고 하는 것도 아냐. 사실 은 나는 말야. 일본 사람한테는 팔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거든. 뭐라 그럴까, 계약상 말이지." "일본인?" "그래 나는 중국인 전문이라고. 전화부에서 도내에 있는 중국인의 가정을 픽업해서 말야, 닥치 는 대로 호별 방문하지. 누가 생각해 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대로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그리고 판매 상태도 그렇게 나쁜지 않거든. 도어의 벨을 누르고 명함을 내민다. 그뿐이야,말하자면 동포 를 봐 주는 거지..." 무엇인가가 갑자기 머릿속의 키를 퉁겼다. "생각났다!" "정말?" 나는 생각난 이름을 입밖에 냈다. 고등학교 시절에 알던 중국인이었다." "왜 중국인을 상대로 백과 사전 따윌 팔아먹으며 살아나가는 처지가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 어." 물론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는 가정도 나쁘지 않았고, 성적도 나보다는 상 위권에 들어가 있었다. 여자아이들한테도 인기가 있었던 편이었다. "아주 길고 어둡고 평범한 이야기야. 듣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가만히 끄덕였다. "왜 자네한테 말을 걸었지? 어떻게 되었었나 봐, 틀림없이.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자기 연민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는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방해가 되었지?" "아니, 괜찮아. 방해가 아니였어."우리들은 테이블 너머로 눈을 마주쳤다. "또 언제 보자." 우리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담배의 나머지를 마셨다. "자, 슬슬 가기로 할까."라고 그는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넣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너무 한가하 게 앉아 있을 수 없거든. 달리 팔 것도 있고 말야." "팜플렛은 갖고 있지 않나?" "팜플렛?" "백과 사전 말야." "아아." 그는 멍하니 말했다. "지금은 갖고 있지 않아.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그럼 집으로 우송해 줄게. 주소를 가르쳐 줄래?" 나는 수첩을 패이지를 찢어서, 주소를 써서 그에게 건넸다. 그는 그것을 꼼꼼하게 네 개로 접어 서 명함 주머니에 넣었다. "꽤 괜찮은 사전이야. 컬러 사진도 많고 말야. 틀림없이 도움이 될 거야."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여유가 생기면 꼭 살게." "그렇게 되면 좋겠다." 그는 선거 포스터용 같은 미소를 입가장자리에 다시 한 번 띠었다. "하 지만 그때쯤에는 나는 백과 사전하고 인연을 끊었을지도 모르지. 이번에는 생명 보험일까? 그것 도 중국인 상대로 말야." 이미 서른 살을 넘은 한 사나이로서 바스켓 볼의 골 포스트에 전속력으로 부딪히고, 다시 한 번 글러브를 베개로 포도 넝쿨 아래에서 눈을 뜬다면, 나는 이번에는 뭐라고 소리칠까? 모르겠다. 아니 혹은 이렇게 소리칠지도 모르겠다. 이봐,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냐, 라고. 그렇게 생각이 든 것은 야마노테선의 전차 안에서였다. 나는 문 앞에 서서, 표가 없어지지 않도 록 꽉 손에 쥔 채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거리 ..., 그 풍경은 왠지 나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도시 생활자가 연중 행사처럼 빠지는 저 낯익은, 흐릿한 커피 젤리와 같은 저녁나절의 어둠이었다. 어디까지고 빽빽이 들어서 있는 빌딩과 집들, 둔탁하게 흐린 하늘. 가스 를 내뿜으면서 열을 짓는 차의 행렬, 좁고 가난한 목조 아파트(그것은 나의 집이기도 하다)의 창 에 걸린 낡은 무명 커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삶, 프라이드와 자기 연민의 끊임 없는 진폭. 이것이 도시다. 그것은 차안에 매달려 있는 한 장의 광고와 뭣하나 다르지 않다. 새로운 시즌을 위한 새로운 입술 연지에 바쳐진 한 장의 카피. 실체 따위는 아무 데도 없다. 헛된 것을 파는 자와 헛된 것을 사는 자에게 지탱되어 팽창을 계속하는 거대한 중개인의 제국... "도대체가"하고 그녀가 말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중국. 나는 중국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었다. <사기>부터 <중국의 붉은 별>까지. 그래도 나의 중국 은 나를 위한 중국일 뿐이다. 혹은 나 자신이다. 그것은 또 나 자신의 뉴욕이기도 하고, 나 자신 의 페테르스부르크이기도 하고, 나 자신의 지구고, 나 자신의 우주다. 지구의 위의 노랗게 칠해진 중국. 장래에도, 내가 거기를 방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나 를 위한 중국이 아니다. 뉴욕에도 레닌그라드에도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 곳은 나를 위한 장 소가 아니다. 나의 방랑은 지하철 찻간이나 택시의 뒷좌석에서 행해진다. 나의 모험은 치과 의사 의 대합실이나 은행 창구에서 행해진다. 우리들은 아무데고 갈 수 있고,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동경. 그리고 어느날, 야마노테선의 찻간 안에서 이 동경이라는 거리조차도 갑자기 그 리얼리티를 상 실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여기는 나의 장소도 아니다. 언어는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리고, 꿈은 언젠가 붕괴될 것이다. 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되었던 지루한 아돌레상스가 어느 지점에서 인가 사라져 없어져 버렸던 것처럼. 모든 것이 멸망하고, 모습이 사라진 뒤에 남는 것은 아마도 무거운 침묵과 무한한 어둠뿐일 것이다. 오류..., 오류라는 것은 그 중국인 여자 대학생이 말했던 것처럼(혹은 정신 분석의가 말했던 것 처럼)결국은 역설적인 욕망일지도 모른다. 아무데도 출구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옛날의 충실한 외야수로서의 조촐한 긍지를 트렁크 밑바닥에 집어넣고, 항구의 돌 계단에 걸터앉아, 하얗게 새는 수평선상의 언젠가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르는 중국행 슬로 보트를 기다리겠다. 그리고 중국 도시의 빛나는 지붕을 상상하며, 그 초록에 물든 초원을 생각하자. 그러니까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자. 클린업이 내각의 슛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혁명가가 교수대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만일 그것이 정말로 실현될 수 있다면... 친구여. 친구여, 중국은 너무나도 멀다.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애당초의 일의 시작은 7월의 어느 개인 오후였다. 뛰어나게 기분이 좋은 일요일 오후다. 잔디 위에 구겨져 버려진 초콜릿 껍질조차, 그런 7월의 왕국에서는 호수 밑바닥의 수정처럼 빛나고 있 었다. 불투명하고 마음이 여린 것 같은 빛의 꽃가루가 수줍어하면서, 천천히 춘추며 지상으로 내 려오고 있었다. 나는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미술관 앞 광장에 앉아, 동행과 둘이서 일각수 동상을 멍하니 올 려다보고 있었다. 장마가 막 개인 후의 상쾌한 바람이 초록색 잎사귀를 흔들고, 얕은 연못 수면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맑은 물 밑바닥에는 녹이 난 콜라 깡통이 몇 개 가라앉아 있었고, 그것은 아주 옛날에 버려진 폐허가 된 거리들 생각나게 했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몇 쌍이나 되는 아마추어 야구팀이라든가, 개라든가 임대 자전거라든가, 조깅 슈즈를 신은 외국인 청년이 연 못가에 앉아 있는 우리 둘 앞을 지나쳐 갔다. 누군가가 잔디 위에 놓아 둔 라디오에서, 설탕이 너 무 많이 들어간 커피처럼 달콤한 팝송이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 오고 있었다. 잃어버린 사랑 이라든가, 잃어버릴 것 같은 사랑에 대한 노래다. 태양 광선이 나의 양팔로 고요하게 빨려 들어가 고 있다. 그런 오후 가난한 아주머니가 왜 내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가까이 에는 가 난한 아주머니의 모습조차도 없었다. 그래도 그 극히 짧은 몇백 분의 일 초인가의 시간, 그녀는 내 마음속에 있었고, 그 차갑고 이상한 촉감은 언제가지고 거기에 남아 있었다. 가난한 아주머니? 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어는 바람처럼, 촉은 투 명한 탄도처럼, 일요일의 오후 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시작은 항상 이렇다. 어느 순간에 는 모든 것이 존재하고, 다음 순간에는 모든 것이 상실되어 버린다. "가난한 아주머니에 대해서 무엇인가 쓰고 싶어." 나는 동행을 보고 그렇게 말해 보았다. "가난한 아주머니?" 그녀는 조금 놀란 듯했다. 그녀는 그 '가난한 아주머니'라고 하는 말을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몇 번인가 굴리고 나서는 잘 모르겠다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어째서 가난한 아주머니야?" 어째서인지, 나로서도 알 리가 없다 .작은 구름에 스치는 그림자같이 무엇인가가 문득 내 안을 스쳐 지나갔다. 그뿐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한 거야, 왠지 말이지." 우리들은 오랫동안, 어휘를 찾으면서 쭉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구가 회전하는 부드러운 소리 만이 나와 그녀를 연결 짓고 있었다. "당신이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를 쓸 거야?" "그래. 내가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를 쓴다고." "그런 이야기, 아무도 읽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도 쓰고 싶어?" "할 수 없어."라고 내가 변명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나는 틀린 서랍을 열었는 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지, 결국 서랍을 연 것은 나거든. 즉, 그런 거지." 그녀는 잠자코 미소지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꾸겨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런데"라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 친척 가운데 가난한 아주머니는 계셔?"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 집안에는 가난한 아주머니가 한 분 계시거든. 정말 이건 진짜라고, 몇 년 함께 산적도 있 어." "음."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아."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흘러간 노래를 흘려 보내기 시작했다. 이 세상은 틀림없이 잃어버린 사랑 이나, 잃어버릴 것 같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자, 당신한테는 가난한 아주머니 따위는 한 사람도 없다."라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가 난한 아주머니에 관해서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상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왜일까?" 그녀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했을 분,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본 채, 가느다 란 손가락을 오랫동안 물속에서 헤엄치게 했다. 마치 나의 질문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통해서 물 밑바닥 폐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틀림없이 지금도 그 연못 바닥에는 내 퀘스천 마크가 잘 닦여진 금속 조각처럼 반짝반작 빛나면서 가라앉아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 다. 그리고 아마도, 주위의 콜라 깡통을 향해서 똑같은 질문을 끼얹고 있을 것이다. 왜? 왜? 왜? "나는 모르겠어." 한참 뒤에 그녀는 툭 하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볼을 괴고, 담배를 입에 문 채 다시 한 번 일각수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두 마리 일각수는 어디엔가 내버려진 시간의 흐름을 향 해서, 신경질이 난 듯이 네 개의 앞다리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머리 위에 쟁반을 올려놓은 채 하늘을 올려다볼 수 는 없다는 사실뿐이야." 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 이야기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없을 까?" 그녀는 물에 담그었던 손가락을 셔츠 끝으로 몇 번 닦고 나서 똑바로 정면으로 향했다. "지금 현재의 당신한테는 무엇 하나 구제할 것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무엇 하나 말이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아냐. 괜찮아." 라고 나는 말했다. "틀림없이 지금의 나는 싸구려 베개 하나도 구제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 그녀는 다시 한 번 미소지었다. "게다가 당신한테는 가난한 아주머니조차 없잖아." 그렇다. 나에게는 가난한 아주머니조차 없구나... 이것은 마치 노래 가사 같구나. 당신 친척 중에도 역시 가난한 아주머니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가난한 아 주머니를 갖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갖는 셈이 된다. 이상한 공통점이다. 마치 곤한 아침의 물웅덩 이 같은 공통점이다. 하지만 당신도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가난한 아주머니의 모습 정도는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 떤 책꽂이에도 오랫동안 읽혀지지 않는 책이 있듯이, 어떤 양복장에도 거의 입지 않는 한 벌 의 셔츠가 있듯이, 어떤 결혼식에도 한 사람의 가난한 아주머니가 있다. 그녀는 거의 아무한테도 소개되지 못하고, 거의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스피치를 해달라는 요구도 받지 못한다. 그녀는 낡은 우유병처럼 테이블 앞에 똑바로 앉아 있을 뿐이다. 의지 할 세 도 없는 작은 소리를 내면서 콘소메 수프를 먹고, 피시 포크로 샐러드를 먹고, 완두콩을 잘 집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아이스크림 스푼이 모자란다, 는 식이다. 그녀가 보낸 프레젠트는 운이 좋으 면 이불장 안에 던져져 있을 것이고, 운이 나쁘면 이사갈 때 먼지투성이의 볼링 트로피와 함께 버려질 것이다. 가끔 끄집어 내는 결혼식 앨범에도 그녀는 찍혀 있지만, 그녀의 모습은 상태가 괜찮은 익사체 처럼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여기에 찍혀 있는 이 여자는 누구야? 여기 말야, 이 둘째 줄의 안경을 쓴.. 아, 아무도 아냐, 라고 젊은 남편은 대답한다. 단지 가난한 아주머니지.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다 단지 가난한 아주머니, 그뿐이다 물론 이름 따윈 언젠가는 사라진다. 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라지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처음에는, 죽음과 함께 이름이 사 라져 버리는 타입, 이것은 간단하다. '강은 말라 버리고 생선은 죽어 버렸다. "혹은 "불꽃은 숲을 뒤덮고, 새들은 완전히 타 버렸다. " ...우리들은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다음으로는 오래 된 텔 레비전처럼, 죽은 뒤에도 하얀 광선이 화면 위를 어른어른 헤매고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뚝 하 고 꺼져 버리는 타입. 이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길을 잃은 인도코끼리의 발자국 같긴 하지만, 분명히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죽기 전부터 이름이 없어져 버린 타 입, 즉 가난한 아주머니 같은 타입이 있다. 그러나 나도 가끔, 이러한 가난한 아주머니 같은 이름 상실 상태에 빠져 버리는 일이 있다. 터 미널의 석양의 혼잡속에서, 자기의 행선지나 이름이나 주소가 머릿속에서 공백이 된 채 사라져 버린다. 물론 정말로 아주 짧은 동안, 오 초나 십 초 정도지만. 이런 일도 있다. "당신 이름을 아무래도 기억해 낼 수가 없네요." 하고 누군가 말한다. "괜찮아요, 마음쓰지 마세요. 게다가 그렇게 대단한 이름도 아니니까." 그는 자기 목 가운데를 몇 번이고 가리킨다. "아니, 여기까지 나오려고 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의 땅 속에 묻혀 있으며, 왼쪽 발끝만을 땅 위로 내밀고 있는 것 같은 느 낌이 든다. 누군가가 어쩌다가 거기에 걸리고, 그리고 사과하기 시작한다. 아, 실례, 하지만 여기 가지 나오려고 하고 있는데 말이야... 자, 그렇다면 상실된 이름은 도대체 어디에서 그 모습을 없애 버린 것일까? 이 미로와 같은 도 시에서는,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확률은 아마도 극히 적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 중의 어느 것 은 수송 트럭에 치여서 길바닥에 납작해지고, 어떤 것은 단지 잔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전차도 타지 못한 채 길바닥에서 죽어 버리고, 어떤 것들은 포켓 하나 가득한 프라이드와 함께 강 속에 가라앉아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운 좋게 살아 남아 상실된 이름들의 거리에 도달하여, 거리에서 조용하 게 커뮤니티를 구축했을지도 모른다. 작은, 정말로 작은 거리다. 그리고 그 입구에는 틀림없이 이 런 간판이 세워져 있을 것이다. 일이 없는 자, 출입 금지 용무 없이 들어간 자는, 물론 그 나름대로의 조촐한 되갚음을 받게 된다. 혹은 그것은, 나를 위해서 마련된 작은 되갚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등에는 조그마한 가난한 아주머니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처음 깨달은 것은 8월 중순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알아차리게 된 것 이 아니다. 다만, 문득 느꼈을 뿐이다. 나의 등에 가난한 아주머니가 있다고 그것은 결코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대단한 무게도 없었고, 귀 뒤에서 냄새 나는 숨을 뿜어 대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표백된 그림자처럼 내 등에 꼭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남들은 모르리라. 동거하고 있는 고양이들도 처음 이삼 일은 그녀를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 쪽에서 자기들의 테리터리를 침범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금방 그 존재에 익숙해져 버렸다. 몇 명인가의 친구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주 보고 술을 마시고 있는 도중에 내 등에서 그녀가 가끔 얼굴을 내비치기 때문이다. "어째 기분이 스산한데." "신경 쓰지마."하고 나는 말했다. "이렇다 할 해는 없으니까." "응. 그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말야, 뭔가 구질구질해서 말이지." "응" "도대체 어디에서 그 따위 것을 짊어지게 됐지?" "어디에서도 아냐."라고 나는 말했다. "다만 말야, 여러 가지 일들을 쭉 생각해 왔었지. 그뿐이 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옛날부터 그런 성격이었지." "응." 우리들은 신이 나지 않은 채 한 시간 가량 위스키를 마셨다. "이봐." 하고 나는 질문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구질구질하지?" "즉 말이지, 아무래도 어머니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야." "왜일까?" "왜라니..."라고 그는 난처한 듯이 말했다. "자네 등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우리 어머니니까지." 몇 명인가의 그러한 인상을 종합해 보니까(나 자신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내 등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하나의 형태로 고정된 가난한 아주머니가 아니고, 보는 사람에 따라 각각의 심상에 따라 각각 형상지어지는 일종의 에테르같은 것 같았다. 어느 친구에게는, 그것이 작년에 식도암으로 죽은 아키다 개 였다. "열 다섯 살이었으니까 말야, 아주 늙은 개였지.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식도암이라니, 불쌍도 하지." "식도암?" "그래, 식도에 생긴 암. 괴롭단 말야, 나도 그것만은 사절이야,. 매일 꺼이꺼이 울고 있었지. 하 지만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더라고." "응." "차라리 안락사 시킬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어머니가 반대해서 말야." "어째서?" "글세 알게 뭐야. 아마 자기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게지." 그는 재미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두 달 정도는 주사만으로 살았다고. 창고 바다에서 말야. 지옥이었지." 그 지점에서 그는 한참 입을 다물었다. "대단한 개는 아니었어. 겁쟁이라서 사람을 보면 짖고, 아무쓸모가 없었어. 시끄러울 뿐이고 말 야. 피부병도 걸려 있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개가 아니라 매미로라도 태어난 편이 본인한테는 행복했을지도 모르지. 아무리 울어도 아무도 싫어하지 않고, 식도암에 걸렸을 리도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개였고, 입에 플라스틱 튜브를 꽂은체 내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떤 부동산업자에게는, 그것은 아주 옛날의 초등 학교 여선생이었다. "1950년, 분명히 한국 전쟁이 시작한 해였죠." 그는 두꺼운 타월로 얼굴의 땀을 닦으면서 그렇 게 말했다. "이 년간 제 클래스를 거의 잊고 있었지만 말예요." 그는 내가 그 여선생의 친척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듯이, 나에게 차가운 보리차를 권했다. "생각해 보면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결혼한 해에 남편이 군대에 가서 말이요, 수송선을 타고 가 는 도중에 꽝. 그것이 1943년의 일이었던가, 그녀는 그대로 초등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 다음해 공습 때 화상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왼쪽 볼에서 왼쪽 팔까지 말입니다." 그는 손끝으로 왼쪽 볼에서 왼쪽 팔에 걸쳐 긴 선을 긋고 나서 자기 보리차를 한 입에 먹어 치우고, 또 타월로 목을 닦았다. "예쁜 사람이었는데, 불쌍하게도... 뭐 성격까지도 변해 버렸다고 합디다. 살아 있으 면 벌써 육십 가까운 나이죠. 1950년이니..." 이와 같이 거리의 지도자, 결혼식의 좌석표가 만들어져 간다. 내 등을 중심으로 해서, 가난한 아주머니의 둘레가 점점 넓어져 간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 주위에서 하나하나, 마치 빛의 이가 빠지듯 친구들이 사라져 갔다. "저 녀석 자체는 나쁜 녀석은 아니지만."하고 그들은 말했다. "다만 만날 때마다 음침한 어머니 (혹은 식도암으로 죽은 개. 혹은 화상 자국이 있는 여선생)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좀." 나는 왠지 내가 치과 의사의 의자라도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탓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무도 나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모두가 나를 피했고, 우연히 어디에선 가 얼굴을 마주쳐도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서는 금방 사라져 버렸다. 당신하고 둘이 있으면 아 무래도 거북하거든. 하고 한 여자아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내 탓이 아니야. 알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거북한 듯이 웃었다. 만일 당신이 등에 지고 있는 것이 우산 $꽂 이라든가 다른 것이라면 그래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지... 우산 꽂이. 알게 뭐냐. 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는 편이었고, 뭐니뭐니 해도 우산 꽂 이를 등에 지고 살아나가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낫지 않은가. 그 대신 나는 몇 개인가의 잡지에 취재당하는 처지에 빠졌다. 그들은 하루 건너마다 찾아와서 는 나하고 아주머니의 사진을 찍고, 아주머니의 사진이 잘 찍히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엉뚱한 질 문을 산더미같이 붓고는 돌아갔다. 하기는 나 자신은 그런 기사가 실린 잡지 따위는 들춰 보지도 않는다. 읽었더라면 틀림없이 목을 매서 죽어 버리고 싶어졌을 것이다. TV 모닝쇼에도 나간 적이 있다. 아침 여섯 시에 두들겨 깨워지고 차로 스튜디오에 실려가서 정체도 알 수 없는 커피를 대접받았다. 사회자는 저쪽 저편까지 비쳐보일 것 같은 중년의 아나운 서 였다. 틀림없이 하루에 여섯 번 정도는 이를 닦겠지. "그럼 오늘 아침의 게스트인...씨입니다." 박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에...씨는 어쩌다가 등에 가난한 아주머니를 지게 되셨습니다만, 그때의 경과라든가 고생담을 좀..." "사실은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라고 나는 말한다. "무겁지도 않고,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것 도 아니니까요." "그러면 어깨가 아프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쯤부터, 즉 여기에 달라붙어 버린 것인가요?" 나는 일각수 동상이 있는 광장 이야기를 간단히 해 보았지만, 사회자는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하 는 것 같았다. "즉 말이죠." 하고 나서 말했다. "당신이 앉은 그 연못 안에, 그 가난한 아주머니가 숨어 있다 가, 당신 등에 달라붙었다는 이야기입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모든 사람이 구하고 있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거나 이류 기담 인 것이다 "가난한 아주머니는 유령이 아닙니다. 아무데도 숨어 있지 않고, 아무한테도 달라붙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단순한 낱말이죠." 나는 넌더리를 내면서 그렇게 설명했다 "단순한 언어입니다." 아무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즉 언어라는 것이 의식에 접속된 전극 같은 것이니까, 그것을 통해서 같은 자극을 계속해서 내다 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무슨 반응이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 그 반응 의 종류는 전혀 다르지만, 내 경우 그것은 독립된 존재감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입안에서 혀가 자꾸만 팽창해 가는 것 같은 기분이죠. 내 등에 달라붙어 있는 것도, 결국은 가난한 아주머니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거기에는 의미도 없고, 형태도 없습니다. 구태여 말한다면, 그것은 개념적인 기 호와 같은 것입니다. " 사회자는 뭔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의미도 없고 형태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저희들은 현실적으로 당신의 등에 분명하게 무엇인가를 볼 수 있고, 그것은 우리들에게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게 하고 있는데요."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기호란 그런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하고 젊은 여자 어시스턴트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질문했다. "지우려고 한다면, 자신의 의사로 그 이미지 혹은 존재는 자유롭게 지울 수 잇다는 의미가 되겠네요.": "그것은 무리입니다. 한 번 생긴 것은 내 의사하고는 관계없이 존재합니다." 젊은 여자 어시스턴트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질문을 계속했다. "예를 들어서 말이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언어를 개념적인 기호로 만드는 작업은 저에게도 가능한 것인가요." "가능합니다.. "라고 내가 대답했다. "만일 제가"하고 그때 사회자가 말을 했다. "가령 개념적이라는 말을 매일 몇 번씩 되풀이한다 고 합시다. 그러면 제 등에는 개념적인 모습이 언젠가는 나타날지도 모르겠네요." "아마도." "개념적이라는 말의 개념적인 기호화가 행해진다는 말이죠." "그대로입니다." 스튜디오의 강하 라이트 때문에 내 머리는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개념적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모르겠다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나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문제였고, 나는 가난한 아주머니 하나 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 물론 세계의 모든 것은 우스꽝스럽다. 누가 거기에서 도망칠 수 가 있을까? 강한 라이트로 비 춰진 TV방송국의 스튜디오로부터, 어두컴컴한 깊은 숲 속의 은자의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뭣하나 다른게 없다. 나는 등에 가난한 아주머니 하나를 짊어진 채 그런 세상을 계속 걸었다. 물론 나는 이런 우스광 스러운 세계 가운데서도 특별나게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아마도 그 여자아이가 말 했듯이, 나는 차라리 우산 꽂이라도 지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패거리에 끼 워 주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일주일마다 그 우산 꽂이의 색을 바꿔 칠하고, 모든 파티에 얼굴을 내밀었을 것이다. "야아, 이번 주 우산 꽂이 색은 핑크네." 라고 누가 말한다. "그래." 하고 내가 대답한다. "금주는 핑크빛 우산 꽂이 같은 기분이거든." 귀여운 여자아이들이 말을 걸어 올지도 모른다. "이봐, 당신 우산 꽂이 아주 근사해" 핑크빛 우산 꽂이를 등에 진 남자하고 침대에 들어가는 것은, 그녀들에게 틀림없이 근사한 경 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가 진 것은 우산 꽂이가 아니고, 가난한 아주머니였다. 때가 지남에 따 라 나나, 내가 등에 진 아주머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흐려져 갔다. 그리고 끝내는 약간 의 악의만이 남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결국 (내 동행이 말했듯이)아무도 가난한 아주머니 따위 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처음 약간의 신기함이 그 갈 길로 가고 사라지고 남녀, 그 뒤에는 바다 밑바닥 같은 침묵만이 남는다. 그것은 나와 가난한 아주머니가 일체화돼 버린 것 같은 침묵이었 다. 당신이 나온 텔레비전 프로 봤어." 하고 내 동행이 말했다. 우리들은 그 전과 똑같이 연못 기슭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를 만나는 것은 삼 개월 만이었고, 지금은 벌써 가을의 시초였다. "조금 피곤한 것 같네." "글쎄." "당신답지 않아." 나는 끄덕였다. 그녀는 무릎 위에서 긴소매의 트레이너 셔츠를 몇 번이고 접었다. " 당신도 드디어 자기 자신의 가난한 아주머니를 갖게 된 모양이야." "그런 것 같아." "어때, 어떤 느낌이야?" "우물 밑바닥에 떨어진 수박 같은 느낌이야." 그녀는 꼼꼼하게 갠 트레이너 셔츠를, 마치 고양이를 쓰다듬듯이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그녀에 대해서 뭔가 알게 되었어?" "조금씩." "그래서 얼만가 쓸 수 있었어?" "아니." 하고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쓸 수 없어. 이젠 쭉 쓸지도 모르겠어." "마음이 약해졌나 봐." "이제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다는 느낌이 들어. 내가 언젠가 말했듯이, 내가 뭣하나 구제 할 수 없다면 말야."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한 참 동안 잠자코 있었다 "이봐, 나한테 뭔가 질문을 해봐,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어." "가난한 아주머니에 대한 권위자로서?" "그래." 어디에서 시작한면 좋을지, 생각해 낼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가끔, 도대체 어떤 사람이 가난한 아주머니가 될까 생각하게 돼."라고 나는 말했다. "가난한 아주머니라는 것은 태어날때부터 가난한 아주머니일까. 아니면 가난한 아주머니라는 상황이 개미 지옥같이 길거리 모퉁이에 뻐끔히 입을 열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삼켜서 닥치 는 데로 가난한 아주머니로 바꾸어 버리는 것일까하고 말야." "틀림없이 그 어느 쪽이나 똑같을거야."고 그녀가 말했다. "똑같다고?" "응, 즉 말야, 가난한 아주머니한테는 가난한 아주머니적인 소녀 시절이 있었고, 청춘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 혹은 없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어. 이 세상에는 분명히 몇백만이나 되는 이유가 넘쳐 흐르고 있거든. 살아가기 위한 몇백만이라는 이유, 죽기 위한 몇백만이나 되는 이유. 그런 것은 한 다발에 얼마하는 식으로 살 수 있지. 하지만 네가 구하고 잇는 것은 그런게 아니잖아?" "그렇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존재할 뿐, 그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뒤는 네가 받아들일 것인지 아닐지의 이야기야." 우리는 아무 소리 안하고 그대로의 자세로 쭉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가을 햇살이, 그녀 의 옆얼굴에 작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이봐. 당신 등에 무엇이 보이는가 나한테 질문해 보지 않을래?" "내 등에 뭐가 보이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 라고 그녀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밖에 안 보여." "고마워." 라고 나는 말했다. 물론 시간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재기 불가능하도록 쓰러뜨릴 것이다. 마치 늙은 말이 길바 닥에 쓰러져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는 저 마부처럼,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고요한 몽둥이 질이기 때문에 자기가 맞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래도 우리는 가난한 아주머니라고 하는, 말하자면 수족관의 유리창을 통해서, 그런 때의 헐떡 임을 직접 볼 수가 있다. 좁다란 유리 케이스안에서, 시간은 오랫동안 자듯이 아주머니를 짜고 있 다. 즙 따윈 이제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나를 이끌리게 하는 것은, 그녀가 지니는 그러한 완벽함이다. 이제는 정말로 한 방울도 더 나오지 않는다! 그래, 완벽함이 마치 빙하에 갇힌 시체처럼, 아주머니의 존재의 핵 위에 걸터앉아 있다. 스테인 리스 스틸같이 훌륭한 빙하다. 아마도 일만 년이 되는 태양밖에는 그 빙하를 녹일 수 가 없을 것 이다. 그러나 물론 가난한 아주머니가 일만 년이나 살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그 완벽함과 함께 살 고, 그 완벽함과 함께 죽고, 그 완벽함과 함께 묻혀지게 된다. 흙 아래 있는 완벽함과 아주머니. 자. 일만 년 뒤에 어둠 가운데서 빙하는 녹고, 완벽함은 무덤을 밀어듯이 지상에 그 모습을 나 타낼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상의 모습은 완전히 변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전히 결혼식이 라고 하는 의식이 존재한다면, 가난한 아주머니가 남긴 완벽함은 그 자리에 초청받아, 근사한 테 이블 매너로 식사 코스를 마치고, 일어서서 마음이 담긴 축사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자. 결국 그런 것은 서력 일만 일천구백팔십 년의 이야기니까. 가난한 아주머니가 내 등을 떠난 것은 가을이 끝날 때쯤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해 놓지 않으 면 안 될 일이 생각나서, 나는 가난한 아주머니와 함께 교외선을 탔다. 오후의 교외선에는 셀 수 있을 만큼의 손님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멀리 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나는 싫증도 내지 않고 쭉 창밖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기는 아주 맑았고, 산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파랗고, 선로 가까이의 나무들은 군데군데 빨간 열매를 달고 있었다. 돌아오는 전차에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은 것은 삼십대 중반의 바짝 마른 어머니와 두 아이였다. 누나인 것같은 여자아이는 유치원 제복 같은 감색 서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빨간 리본이 달린 새로운 그레이색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폭이 좁은 동그란 챙은 부드러운 커브를 그리면서 위로 꾸부러져, 모자는 마치 작은 동물처럼 그녀 머리 위에서 가만히 쉬고 있었다. 어머 니하고 그 딸 사이에 끼듯이, 사 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아주 심심한 듯이 앉아 있었다. 어느 전차 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식구다. 특히 아름답지도 않고 특히 밉지도 않다. 부자라고 할 정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것도 아니다. 나는 하품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한 번 머리 속을 텅 비우고, 얼굴을 옆으로 향한 채 갈 때의 반대편광경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들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것은 십 분 뒤의 일이었다. 억누른 것 같은 어머니 와 딸의 토막토막 나 대화가 나를 문득 현실로 되돌아오게 했다. 시간은 이미 저녁나절에 가까웠 고, 전차의 낡은 등이 세 사람의 모습을 오래 된 사진처럼 누렇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 내 모자가..." "알았으니까 얌전하게 있어." 여자아이는 입까지 나온 말을 삼키고 불만스러운 듯이 입을 다물었다. 가운데 앉아 있는 남자 아이가 조금 전가지 누나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모자를 쥐고 양손으로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엄마, 때려서 뺏어줘." "잠자코 있으라고 했잖아." "하지만, 벌써 저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어..." 어머니는 남자아이를 잠깐 보고 나서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틀림없이 피곤한 거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월부 지불이라든가 치과 의사의 청구서라든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 시간 같은 것이 석양녘의 그녀를 완전히 압도한 것이겠지. 남자아이는 모자를 계속 잡아당겼다. 컴퍼스로 그린 것같이 동그랗던 원형의 챙이 이제는 반쯤 망가져 버렸고, 옆에 붙어 있던 우쭐대는 것 같은 빨간 리본도 남자아이 손 안에 구겨져 버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무관심함이 분명히 그를 조장시키고 있었다. 그가 그 일에 싫증낼 때쯤에는 아 마도 그것은 모자로서의 형태를 남기고 있지 않을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아이도 한참 고민한 결과 나하고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그녀는 갑자기 손을 뻗쳐 서 남동생의 어깨를 밀어젖히고, 상대가 기가 꺾인 사이에 싹 모자를 배앗자, 동생의 손이 닿지 않는 시트 위에 올려놓았다. 모든 것이 순간에 행해졌기 때문에, 어머니와 동생이 그 행위의 의미 를 이해할 때까지는 심호흡을 한 번 할 만한 시간이 걸렸다. 동생이 갑자기 큰 소리로 울기 시작 하였고, 그와 동시에 어머니가 손바닥으로 여자아이의 맨 무릎을 찰싹 때렸다. "하지만 엄마. 얘가 먼저..." "전차 안에서 떠드는 아이는 이제 우리 지 아이가 아냐." 여자아이는 입술을 깨문채 얼굴을 돌릴고 시트 위의 모자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 어머니는 내 옆의 빈 자리를 손가락질했다. 여자아이는 눈길을 돌린 채, 똑바로 뻗친 어머니의 손가락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손가락은 공중에 얼어붙은 채 언제까지고 내 왼쪽 옆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 가, 이제 너는 우리 집 아이가 아니라니까." 여자아이는 체념한 듯이 모자와 가방을 손에 쥐고 자기 자리를 떠나, 천천히 통로를 가로질러, 내 옆에 앉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기가 정말로 집에서 내쫓겼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 같 았다.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모자의 챙의 주름을 생각난 듯이 잡아당기고 있었다. 만일 정말 로 집에서 내쫓긴 것이라면은, 하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부터 도대체 어디로 가야 될까? 그리고 그녀는 내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잘못한 것은 쟨대. 내 모자를 이 렇게 엉망 진창으로 해 버린 것...고개 숙은 그녀의 빨간 볼 위에 몇 줄기인가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평범한 생김새의 소녀였다. 아마도 그녀를 둘러싼 평탄함이 마치 연기처럼 그녀의 얼굴 에 스며든 것이리라. 통통한 표정에 떠도는 이 또래의 소녀 특유의 투명감도, 사춘기를 맞이할 때 쯤이면 둔한 살집 속으로 온전히 사라져 버리겠지.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모자의 주름살을 잡 아당기면서 소녀에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상상이 갔다. 나는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이제까지 알게된 몇 명인가의 여자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녀들이 남기고 간 토막난 말이라든가, 대수롭지 않은 몸짓이라든가 눈물 이라든가, 발목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들은 지금,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까? 어쩌면 그녀들 중의 몇 사람은 암흑 속을 우왕좌왕하면서 밤의 숲 안으로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아이들 처럼, 부지불식간에 어두운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막연한 슬픔이, 차내 등의 누런 전기불속에서 나방의 은가루처럼 춤추고 있었다. 나는 무릎 위에 양손을 펴고, 오랫동안 두 손바 닥을 내려보았다. 마치 여러 사람의 피를 배불리 빨아먹은 것처럼, 내 손은 시커멓고 더러웠다. 나는 옆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여자아이의 어깨에서 가만히 손을 올려놓고 싶었지만, 내 손은 틀림없이 그녀를 두렵게 만들어 버릴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내 손은 이대로 영원히, 이제는 누구 하나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회색 펠트 모자의 챙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전차에서 내리자, 주위에 벌써 겨울 바람이 불고 있었다. 스웨터의 계절은 끝나고, 두꺼운 코트 의 계절이 거리에 다가오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개찰구를 빠져 나오자, 석양 무렵의 교외 전차의 주술, 그 누런색 찻간의 전기불 의 주술에서 겨우 나는 풀려난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몸 안에서 무엇인가가 완전히 빠져 나가 버 린 것 같은... 나는 개찰구 옆의 기둥에 기댄 채 여러 가지 색깔의 각각의 껍질을 둘러쓴 사람들 의 무리가, 강의 흐름처럼 내 앞을 흘러가는 것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알 아차렸다. 가난한 아주머니가 내 등에서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린 것을. 그녀는 올 때와 똑같이,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내 등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이제부터 어 디로 가면 될는지 나는 알수가 없었다 사막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한 개의 아무 의미 없는 표지처 럼 나는 외토리였다. 나는 주머니에 있는 잔돈을 몽땅 공중 전황에 넣고, 그녀의 아파트 전화 번 호를 돌렸다. 여덟 번 벨이 울리고, 아홉 번째 그녀가 받았다. "자고 있었어."리고 그녀는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여섯 시에?" "엊저녁부터 일이 쭉 밀려서 말이야. 겨우 끝낸 것이 두 시간 전이야." "깨워서 미안해."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네가 아직 살아 잇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 고 싶었어.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말야."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웃었다. "살아 있어.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덕택에 졸려서 죽을 지경이야. 이제 됐어?"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을래?" "미안하지만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 지금은 오로지 자고 싶어. 그뿐이야." "너하고 얘기하고 싶어." 수화기 저쪽에서 그녀가 잠시 침묵했다. 아니면 하품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녀는 천천히 말을 끊듯이 그렇게 말했다. "얼마나 뒤에?" "어쨋든 나중에. 좀 자게 해 줘. 조금 자고 나면, 틀림없이 모든 것이 잘되리라고 생각해. 알겠 어?" "알았어."라고 나는 말했다. "안녕." "잘자."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손에 든 노란 색 수화기를 한참 가만히 바라보고 나서 조용히 제자리에 놓아다. 지독히 배가 고픈 것 같은 느낌이다. 무턱대고 무엇인가가 먹고 싶었다. 그들이 나에게 무엇인가 준다면,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그들의 손가락까지 빨지도 모르겠다 좋다, 나는 자네들의 손가락을 빨리라. 그리고 나서, 비에 젖은 침목같이 푹 자리라. 나는 터미널 빌딩 유리창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만일, 하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일만 여 년 뒤에 가난한 아주머니들만의 사회가 출현한다고 하 면, 우리에게 그녀들은 도시의 문을 열어 줄까? 가난한 아주머니들이 봅은 가난한 아주머니들의 정부가 있고, 가나한 아주머니들이 핸들을 쥔 가난한 아주머니들을 위한 전차가 달리고, 가난한 아주머니들의 손으로 씌어진 소설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 그녀들은 그런 것들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정부도 전차도 소설도... 그녀들은 거대한 식초병을 몇 개든지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서 조용하게 살기를 바랄지도 모 르겠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런 병이 몇 만개, 몇십 만개 눈길이 미치는 한 지상에 늘어서 있 을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멋진 광경일 것이다. 그렇다. 만일 그 세계에 한편의 시가 들어갈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 나는 시를 써도 좋다 가난 한 아주머니들의 계관 시인이다. 나쁘지 않은데. 나는 초록색 유리병에 반사하는 태양을 노래하고, 그 발밑에 펼쳐지는 아침 이슬에 빛나는 풀 밭을 노래하리라. 그러나 결국, 그것은 서력 일만 일천구백팔십 년의 일이다. 그리고 일만 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다. 그때까지 나는 수많은 겨울을 넘지 않으면 안 된다. 뉴욕 탄광의 비극 태풍이나 집중 호우가 닥칠 때마다 동물원에 가는 비교적 기묘한 습관을, 십 년 동안 지켜 온 사나이가 있다. 내 친구다. 태풍이 도시에 접근하고,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살마들이 덧문을 닫거나,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회 중 전등의 상태를 점검할 때가 되면, 그는 베트남전이 한참이었을 때 손에 넣은 미군용 우천 판 초에 몸을 감싸고, 주머니에 깡통 맥주를 집어넣고 집을 나선다. 운이 나쁘면, 동물원의 문은 닫혀 있다. 오늘은 일기 불순으로 휴원합니다. 그것은 하기는, 타당한 이유였다. 도대체 누가 태풍이 오는 날 오후에 기린이나 얼룩말을 보려 고 동물원에 오겠는가? 그는 기분 좋게 단념하고 문 앞에 늘어서 있는 다람쥐 석상에 걸터앉아, 조금 미지근해진 깡통 맥주를 마시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다. 운이 좋으면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요금을 치르고 아예 들어가, 그 방 흠뻑 젖어 버리는 담배를 피우고, 동물들을 한 마리 한 마리 꼼꼼하게 보고 돌아다닌다. 동물들은 자기 우리에 틀어박혀 멍한 눈으로 밖의 비를 보고 있거나, 강풍 속을 흥분해서 뛰어 다니거나, 급격한 기압의 변화에 겁먹거나, 화를 내거나 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벵골 호랑이 우리 앞에 앉아서 맥주를 한 병 마시고(태풍에 대해서는 항상 벵골 호랑이가 가장 화를 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고릴라 막사 앞에서 두 번째 맥주를 마신다. 고릴 라는 대개의 경우 태풍에는 무관심하였다. 고릴라는 항상 반은 물고기 같은 모습으로 콘크리트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깡통 맥주를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을 딱하다는 모습으로 보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어쩌다 둘이 같이 탄 것 같은 느낌이야."하고 그는 말했다. 하긴 그러한 태풍이 부는 날을 제외하고는, 그는 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지만, 조촐하고 인상 좋은 외자계 무역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고, 깨끗한 아파트에 혼자 살고, 반년마다 걸 프렌드를 바꿨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부지런히 걸 프렌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세포 분열이라도 한 것처럼 비슷했기 때문이 다. 많은 사람들이 왠지 그를 평범하고 둔하다고 필요 이상으로 생각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전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상태가 나쁘지 않은 중고차를 갖고 있었고, 발자크 전 집을 갖고 있었고, 장례식에 입고 가기에 딱 알맞은 까만 양복과 깜나 넥타이와 까만 가죽 구두 를 갖고 있었다. 군가 죽었을 때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양복과 넥타이와 가죽 구두를 빌리기 위해서 다. 양복과 가죽 구두는 나한테 한 사이즈씩 컸지만 물론 사치스러운 말을 할 처지가 아니다. "미안해."하고 나는 말했다. "또 장례식이거든." "괜찮아."고 항상 그는 말한다. 그의 아파트는 우리 집에서 택시로 십오 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의 방에 도착하면, 테이블 위에는 잘 다려진 양복과 넥타이가 임 준비되어 있었고, 구두는 닦 여져 있었고, 냉장고에는 외제 맥주가 반타스 식혀져 있었다. 그런 타입의 남자였다. "지난번에, 동물원에서 고양이를 봤어"하고 병따개로 맥주병을 따면서 그가 말했다. "고양이?" "응. 이 주 정도전에 출장으로 북해도에 갔었는데, 그때 근처 동물원에 들어가 보았더니 고양이 우리라는 팻말이 걸린 작은 우리가 있고 말이야. 그 안에 고양이가 자고 있었어." "어떤 고양이?" "극히 보통의 고양이야. 작은 갈색 줄무늬에, 꼬리가 짧고, 지독히 살쪄 있었어. 그게 그냥, 벌 렁 드러누워 있었다는 얘기야." "아마 북해도에서는 고양이가 진기한가 보지?" 하고 내가 말했다. "설마."라고 그가 말했다. "게다가, 왜 고양이가 동물원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라고 나는 물어 봤다. "고양이도 동 물이 아니겠어." "습관이지. 즉, 고양이나 개는 흔한 동물이니까 말야. 일부러 돈을 치르면서 볼 만한 것이 못 돼." 라고 그가 말했다. "인간하고 똑같지." "과연."하고 나는 말했다. 반타스가 되는 맥주를 다 마시면, 그는 커다란 종이 봉투에, 넥타이와 비닐 커버로 싼 양복과 구두 상자를 꼼꼼하게 집어넣어 주었다. 그대로 피크닉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나 미안해."하고 내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마." 하고 그가 말했다. 하긴 그 자신은 삼 년 전에 그 양복을 만든 후, 거의 입은 적이 없다. "아무도 죽지 않거든."하고 그가 말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이 양복을 만들고 나서는 누구 하나 죽지 않아." "다 그런 거지 뭐." "정말이야."라고 그는 말했다. 정말이지, 그해는 지독히도 장례식이 많은 해였다. 내 주위에서는, 친구라든가 옛날의 친구가 차례차례 죽어 갔다. 마치 날이 가문 여름의 옥수수 밭 같은 광경이었다. 스물여덟살인데 말이다. 내 주위의 친구들도, 대개가 비슷한 나이였다. 스물 일곱, 스물 여덟, 스물 아홉... 죽기에는 왠 지 부적합한 나이다. 시인은 스물한 살에 죽고, 혁명가와 로큰롤러는 스물 네 살에 죽는다. 그 나이만 지나면, 당분 간은 그럭저럭 잘해 나가리라, 라는 것이 우리들의 대체적인 예측이었다. 전설의 불길한 커브도 지나갔고, 조명이 어두운 축축한 터널도 빠져 나왔다. 이제는 곧장 뻗은 육차선 도로를 (그다지 마음은 내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 목적지를 향해서 오로지 달리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매일 아침 수염을 깎았다. 우리는 이제는 시인도 혁명가도 로큰롤 러도 아니었다. 술이 취해서 전화 부스 안에서 잠들거나 지하철 찻간에서 버찌를 한 봉투 먹어치 우거나, 아침 네 시에 도어즈의 LP를 큰 볼륨으로 듣거나 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교제상 생명 보 험에도 들었고, 호텔 바에서 술도 마시게끔 되었고, 치과의 영수증을 간수해 두었다가 의료 공제 를 받게도 되어 있다. 벌써 스물 여덟인걸... 예기치 않았던 살육이 시작된 것은 그 직후였다. 급습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우리는 느긋한 봄 햇살 아래에서, 양복을 갈아 입고 있는 도중이었다. 좀처럼 사이즈가 맞지 않 거나, 셔츠 소매가 뒤집혀 있거나, 오른 쪽다리를 현실적인 바짓가랑이에 집어넣으면서 왼쪽 다리 는 비현실적인 바짓가랑이에 집어넣거나, 말하자면 대단치 않은 소동이다. 실육은 기묘한 총성과 함께 닥쳐 왔다. 누군가가 형이상학적 언덕 위에 형이상학적인 탄환을 쏟아 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모자에서 튀어나오거나, 보리밭에서 튀어 나오거나, 토끼는 토기일 뿐이다. 가마솥은 고열의 가마솥일 뿐이고, 연통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는, 연통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일 뿐이다. 현실과 비현실(혹은 비현실과 현실)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그 어두운 연못을 처음 건넌 것은, 중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대학 시절 친구였다. 결혼한 지 삼 년 되었고, 아내는 출산 때 문에 연말부터 시코쿠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1월 치고는 아주 따뜻한 일요일 오후, 그는 백화점 철물 매장에서 코끼리 귀라도 자를 수 있을 것 같은 서독제 면도칼과 셰이빙 크림을 두 깡통 사고, 집에 돌아와 목욕물을 끓였다. 그리고 냉 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스카치 위스키를 한 병 다 비운 후, 욕조 안에서 간단하게 손목을 자르고 죽어 버렸다. 이틀 후 그의 어머니가 시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경찰이 와서 몇 장이고 현장 사진을 찍었다. 관엽 식물의 분만 잘 배치하면 토마토주스의 커머셜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광경이 었다. 자살이라는 것이 경찰의 공식 발표였다. 온 집안에[ 열쇠가 걸려 있었고, 도대체 그날 면도칼을 산 것은 죽은 본인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쓸 예정도 없는 셰이빙 크림을 (그것도 두 개나) 샀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자기가 이제 몇 시간 뒤에는 죽어 있으리라는 생각에 익숙해질 술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면, 백화점의 점원이 자기가 자살하려고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까봐 그것을 두려워 했는지도 모르겠다. 유서도 메모도, 아무것도 없었다. 부엌 탁자 위에는, 위스키잔과 빈 위스키 병과 얼음을 담은 볼, 그리고 두 개의 셰이빙 크리만이 남겨져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목욕물이 끓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헤이그의 온 더 록을 몇 자이고 몇 잔이고 목구멍 안으로 흘려 보내면서, 셰이빙 크림 깡통을 쭉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 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수염을 깎지 않아도 된다. 고 스물 여덟 살짜리 청년의 죽음은, 겨울 햇살처럼 뭔지 애달프다. 그리고 그 후의 열두 달 동안에, 네 사람이 죽었다. 3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인지 쿠웨이트인지의 유전 사고로 하나가 죽었고, 6월에는 둘이 죽었다. 심장 마비와 교통 사고였다. 7월부터 11월까지, 평화로운 계절이 계속된 뒤, 12월 중순에 마지막 하나가 역시 교통 사고로 죽었다. 처음에 자살한 친구를 빼놓고는, 죽음을 의식할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었다. 항상 걸어 올라가는 계단을 멍하니 올라가고 있는 중에 판때기가 한 장 빠져 버렸다. 그런 느낌이다. "이부자리를 깔아 주지 않을래?" 라고 한 사나이는 말했다. 6월에 심장 마비로 죽은 친구다. "머리 뒤에서 딱딱 소리가 나." 그는 이불에 기어 들어가 잠들고, 그리고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12월에 죽은 여자아이가 그해에 있어서 최연소자의 죽음이었고, 동시에 유일한 여성이기도 했 다. 스물네 살, 혁명가와 로큰롤러의 나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차가운 비가 내리는 저녁, 맥주 회사의 운반 트럭과 콘크리트 전주가 만들 어 낸 비극적인 (그리고 극히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소녀는 깔아 뭉개지듯이 죽어 갔다. 마지막 장례식의 며칠 뒤엔가에, 나는 세탁소에서 막 돌아온 양복과 감사의 뜻의 위스키를 안 고 양복 주인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오, 어차피 쓰지도 않는걸."하고 그가 말했다. 냉장고에는 여전히 맥주가 반타스 식혀져 있었고, 앉기 편한 소파에서는 희미하게 태양의 냄새 가 났다. 책상 위에는 막 씻은 재떨이와 크리스마스용 포인세티아의 분이 있었다. 그는 비닐에 담겨진 양복을 받아들자, 막 동면에 들어간 새끼곰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같 은 손놀림으로 양복장 안에 가만히 집어넣었다. "양복에 장례식 냄새가 스며 있지 않으면 좋겠는데."라고 내가 말했다. "양복은 괜찮아. 그걸 위한 양복인걸. 걱정인 것은 알맹이 쪽이지." "응." 하고 나는 말했다. "도대체가 온통 장례식뿐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는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올려놓고, 맥주를 잔 에 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전부해서 몇 명이었지?" "다섯 명." 하고 말하고 나는 왼쪽 손가락을 전부 펼쳐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끝이야." "그렇게 생각해?" "그런 느낌이 들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젠 충분한 숫자의 인간이 죽었어." "마치 피라미드의 저주 같군. 별이 하늘의 돌고, 달의 그림자가 태양을 덮을 때..." "그런거지." 반타스분의 맥주를 마셔 버리자, 우리는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 겨울 석양이 완만한 언덕길 처럼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최근 아무래도 얼굴이 어두운데."라고 그가 말했다. "그런가." 하고 내가 말했다. "틀림없이 밤중에 무엇인가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웃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말야, 밤중에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어."하고 그가 말했다. "어떻게?" "기분이 어두워지면 청소를 하지. 청소기를 돌리거나, 창을 닦거나, 잔을 닦거나, 책상을 움직이 거나, 셔츠를 닥치는 대로 다림질을 하거나, 쿠션을 말리거나 말이지." "응." "그리고 열한 시가 되면 술을 마시고 자버려. 그뿐이야, 아침에 깨서 양말을 신을 때쯤은 대개 의 일은 잊고 있지. 깨끗이 말이야." "으응." "한밤 세 시쯤에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거든, 이것 저것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한밤중 세 시에는 동물도 무엇을 생각하거든." 생각난 듯이 그는 그렇게 말했다. "밤 세 시에 동물원에 가 본 적이 있어?" "아니."라고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없어. 물론." "나는 꼭 한 번 있지. 아는 사람한테 부탁을 했었어. 원칙으로는 안 되지만 말이야." "으응." "이상한 체험이었지. 말로는 잘 표현 못 하겠지만 말이야. 마치 땅이 여기 저기에서 소리도 없 이 갈라지고, 거기에서 무엇인가가 기어올라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지. 그리고 밤의 어둠 가운데서 말이지. 땅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뛰고 있었어. 차가운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지. 눈에는 보이지 않아. 하지만 동물들은 그것을 느끼지. 그리고 나는 동 물들이 느끼는 그것을 느끼고, 결국, 우리들이 밟고 있는 이 대지는 지구의 중심부까지 통하고 있 어서, 그리고 그 지구 중심부에는 끝도 없는 시간이 빨려 들어가 있단 말이야, ... 이런 얘기 이상 한가?"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두 번 다시 가려는 생각이 들지 않아. 한밤중의 동물원 같은 덴 말야." "태풍 쪽이 좋아?" "응"이라고 그가 말했다. "태풍 쪽이 훨씬 좋아." 전화벨이 올렸다. 언제나와 같이 세포 분열적인 그의 걸 프렌드로부터 세포 분열적으로 끝없이 긴 전화였다. 나는 체념하고 텔레비전 스위치를 켰다. 27인치 컬러 텔레비전으로 앞에 있는 리모트 컨트롤 스위치에 가볍게 손을 대기만 하면 소리도 없이 채널이 바뀐다. 스피커가 여섯 개나 다려 있는 덕분에 옛날 영화관에 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뉴스와 만화 영화가 동시 상영되는 그런 영화관이다. 나는 채널을 위부터 아래까지 두 번 돌리고 나서, 뉴스 쇼를 보기로 했다. 국경 분쟁이 있고, 빌딩에 화재가 잇고, 통화가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고 있다. 자동차 수입제한이 있고, 겨울 수영 대회가 있었고, 일가 동반 자살이 있었다. 각각의 사건이 중학교 때의 졸업사진과 같이, 어느 지 점에서인가 조금씩 연결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재미있는 뉴스가 있었어?"그가 돌아와서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글세." 하고 나는 말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오래간만이니까 말이야." "텔레비전에는 적어도 한 가지 괜찮은 점이 있지." 한참 생각한 뒤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원하는 때에 끌 수 있어." "처음부터 켜지 않으면 돼." "그만둬." 하고 그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이래도 나는 마음이 따뜻한 인간이라고." "그런 것 같군." "괜찮지." 하면서 그는 스위치를 오프로 했다. 순간 화면이 사라졌다. 방안은 조용하게 가라앉았 다. 창문 밖에서는 빌딩의 불빛이 빛나고 있다. 오 분 정도, 우리는 이렇다 할 이야기도 없이 위스키를 계속 마셨다. 다시 한 번 전화벨이 올렸 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척 했다. 전화가 울리기를 멈추었을 때, 그는 생각난 듯이 텔레비전 스위 치를 다시 온으로 했다. 한 순간에 화면이 돌아오고, 뉴스 해설자는 배후의 구부러진 그래프를 막 대기로 가리키면서 석유의 가격 변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오 분간이나 스위치를 끄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그야 그렇지."하고 내가 말했다. "왜지?" 생각하는게 귀찮았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스위치를 끈 순간, 어느 족인가의 존재가 제로가 되었기 때문이지. 우리든지, 아니면 저놈이든 지. 그 어느 족인가가 말이야." "달리 생각할 수 도 있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야 그렇지. 다른 생각 따위는 백만 개도 더 있지. 인도에는 야자나무가 자라고 있고 , 베네 수엘라에서는 정치범을 헬리콥터에서 뿌리고 있고." "응." "남의 이야기는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지 않아."하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세상엔 장례식이 없는 죽음도 있어. 냄새가 없는 죽음도 있어." 나는 잠자코 끄떡였다. 그리고 포인세티아의 잎사귀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벌써 크리스마스 군." "사실은 샴페인이 있거든. "하고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상등품인데, 마실래?" "누군가 여자아이용 아냐?" 그는 차가운 샴페인 병과 새 잔을 두 개 테이블 위에 놓았다. "몰랐어?" 하고 그가 말했다. "샴 페인에는 용도 따윈 없지 마개를 딸 때가 있을 뿐야." "과연." 우리들은 마개를 땄다. 그리고 파리의 동물원과 그 동물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해 연말에 조촐한 파티가 있었다. 롯퐁기 부근의 가게를 빌려서 매년 행해지는 그믐에서 신 년에 걸친 파티였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피아노 트리오가 있고, 맛있는 식사와 맛있는 술이 나오 고, 거의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으면 되는 그런 마음 편한 모임이었다. 물론 몇 사람인가한테 소개받기도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그렇죠, 정말이요, 응, 그런 것이 죠. 하지만 잘되면 좋을텐데요, 등등... 나는 빙긋 웃고 적당히 매듭을 짓고, 물을 탄 마실 것을 다 시 받아들고 구석의 자리에 되돌아가, 남미 대륙의 나라들과 그 수도에 대해서 생각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날 내가 소개받은 여성은, 두 잔 째의 마실 것을 손에 든 채 내 자리까지 따라왔다. "당신을 소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부탁했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눈길을 끌만큼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지독히 인상이 좋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적당히 돈 이 들은 파란 실크 원피스를 잘 소화하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둘 정도겠지. 좀더 젊게 보이려고 마음먹는다면 간단히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 았다. 양손에 전부해서 세 개의 반지를 끼고 있었고, 입가에는 여름 저녁 같은 미소를 띠고 있었 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똑같이 미소지었다.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분하고 꼭 같거든요." "그래요."라고 나는 말했다. 학생 시절 자주 사용했던 여자를 꼬시는 말서두와 똑같았지만, 그녀 는 그런 흔한 수법을 허락하는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얼굴 생김새부터 모습, 분위기, 얘기하는 법까지 깜짝 놀랄 만큼 똑같아요. 당신이 여기에 오 시고 난 후부터 쭉 관찰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만나고 싶네요."라고 나는 말했다. 이것도 전에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는 대사였다. "정말?" "예,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죠." 그녀의 미소가 한순간 깊어지고,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무리죠."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는 오년 전에 죽었으니까. 꼭 지금의 당신과 같은 정도의 나이였죠." "아아." 하고 내가 말했다. "내가 죽였어요." 피아노 트리오가 두 번째 스테이지를 마쳤는지, 주위에서 드문드문 신이 나지 않는 박수를 쳤 다. "얘기가 잘되어 가고 있는 것 같네요." 파티의 호스티스역이 우리들의 옆에 와서 그렇게 말했다. "네."하고 나는 말했다. "그야 뭔." 하고 그녀가 애교 있게 그 뒤를 이었다. "뭔가 리퀘스트곡이 있으면 연주해 준다는데, 어때요?"하고 호스티스 역이 말했다. "아니에요. 됐어요, 여기에서 이렇게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걸요. 당신은요?" 나도 같습니다." 호스티스 역은 생긋 웃고 다음 테이블로 옮겨갔다. "음악은 좋아하세요?" 하고 그녀가 내게 물었다. "좋은 세상에서 듣는 좋은 음악이라면 말이죠." 하고 내가 말했다. "좋은 세상에는 좋은 음악 따윈 없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좋은 세계의 공기는 진동하지 않 거든요." "과연." "워렌 비티가 나이트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는 영화는 봤어요?" "아니요, 보지 않았는데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럽의 손님이고 말예요, 아주 가난하고 비참한 역이었어요." "아아." "그래서 워렌 비티가 엘리자베스 테일러한테 물었죠. 무엇인가 리퀘스트가 있습니까 하고 말이 죠." "그래서 "하고 나는 질문했다. "뭔가 리퀘스트했습니까?" "잊어버렸어요. 옛날 영화였으니까." 그녀는 반지를 반짝이면서, 마실 것을 들었다 "하지만 리퀘 스트라는 것을 싫어해요. 왠지 비참한 느낌이 드는 걸요,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같이 말이죠. 시 작한 순간에 벌써 끝날 때를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녀가 담배를 물고, 내가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런데"하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닮은 사람 얘기였죠." "어떻게 해서 죽였어요?" "꿀벌통에 집어 던졌지요." "거짓말이겠죠?" "거짓말이에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는 대신에 마실 것을 들었다. "물론 법률상으로는 살인이 아니었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도의적인 살인도 아니고." "법률상의 살인도 아니고 도의적인 살인도 아니고"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거기까지의 요 점을 정리해 보았다. "그렇지만, 당신은 사람을 죽였다." "그래요."하고 그녀는, 즐거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아주 닮은 사람을 말이죠."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다. 제목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곡이었다. "오 초도 걸리지 않았지." 하고 그녀가 말했다. "죽이는데 말예요."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그 침묵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자유에 대해서 생각한 적은 있어요?" 라고 그녀가 물었다. "가끔."이라고 나는 말했다. "왜 그런 것을 묻죠?" "들국화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아마도...마치 IQ테스트 같군요." "비슷해요."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웃었다. "그래서 저는 패스했나요?" "네에."하고 그녀는 말했다. 밴드가 올드 랭 사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열한 시 오십오 분." 그녀는 펜던트 끝에 붙은 금시계를 잠시 바라보고 나서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올드 랭 사인이라는 노래를 아주 좋아해요. 당신은?" "언덕 위의 우리 집 편이 더 좋은데요, 영양이라든가 들소라든가가 나오니까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방긋 웃었다. "당신과 얘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안녕." "안녕"하고 나도 말했다. 공기를 아끼기 위해서 칸델라를 꺼버리자,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아무도 입을 열 지 않았다 오 초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어둠 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두, 될 수 있는 대로 숨을 쉬지마. 남은 공기가 얼마 안 되니까." 나이 많은 광부가 그렇게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천장의 암반이 약간 삐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광부들은 어둠 속에서 가까이 모여, 귀를 기울이고, 단지 하나의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곡괭이의 소리, 생명의 소리다. 그들은 벌써 몇 시간이나 그와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조금씩 현실을 용해해 갔다. 모든 것이 아주 옛날에 아주 먼 세계에서 일어난 적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혹은 모든 것이, 훨씬 먼 장래에 어딘가 먼 세계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처럼 생각됐다. 모두, 될 수 있는 대로 숨을 쉬지마. 남은 공기가 얼마 안 되니까. 밖에서는 물론 사람들이 굴을 계속 파고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캥거루 통신 야아, 안녕하십니까? 오늘 아침, 근처에 있는 동물원에 캥거루를 보러 갔다 왔습니다. 별로 큰 동물원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고릴라부터 코끼리까지 동물이라는 것은 대충 그럭저럭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당 신이 라마라든가 개미핥기 (중부 및 남아메리카에 분노하는 개미를 먹고사는 포유 동물) 팬이라 면은, 이 동물원에는 오시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동물원에는 라마도 개미핥기도 없습니다. 임팔라도 하이에나도 없습니다. 표범조차도 없습니다. 그 대시에 캥거루가 네 마리 있습니다. 한 마리는 새끼고,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됐습니다. 그리고 수놈은 한 마리에 암놈이 두 마리. 도대체 어떻게된 가족 구성인지,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캥거루를 볼 때마다, 도대체 캥거루가 된 기분은 어떤 것일까 언제나 궁금하게 여겨집니다. 그 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 따위의 별볼일 없는 곳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부메랑 따위의 엉성한 막대기로 살해당하는 것일까? 나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대수로운 문제가 안됩니다. 어쨌든 캥거루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당신한테 편지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어째서 캥거루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나한테 편지를 보내고 싶어졌는지, 캥거루와 나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냐, 라고. 하지만 그런 것에는 마음을 쓰지 말아 주십시오. 아무래도 괜찮은 문제인 것입니다. 캥거루는 캥거루고, 당신은 당신입니다. 즉 이런 이야깁니다. 캥거루하고 당신 사이에는 서른 여섯 개의 미묘한 노정이 있어서, 그것을 적당한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쫓다보니까, 나는 당신이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뿐입니다. 그 노정을 일일이 설 며해 봤자 당신은 틀림없이 이해를 못할 것이고, 우선 나 자신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글쎄 서른 여섯 개나 된단 말이에요! 그 중의 하나라도 순서가 잘못 되었다면, 내가 당신한테 이런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겠죠. 혹은 나는 문득 마음이 내켜 남극에서 향유고래의 등에 올라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나는 근처 담뱃가게 불을 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서른 여섯 개의 우연의 축적이 유도하는 바를 따라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 냅니다 . 이상하죠. 오케이, 그러면 우선 자기 소개부터 시작하죠. 나는 스물 여섯 살이고, 백화점 상품 관리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도 쉽게 상상이 가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지독히 시시한 일입니다. 우선 구매과에서 구매하기로 결정한 상품에 문제가 없는지를 조사합니다. 이 일은 구매과와 업자의 유착을 방지하기 위한 작업입니다만, 실제 로는 엉터리여서, 잡담을 하면서 구두 버클을 조금 잡아당겨 보거나, 과자를 몇 개 집어먹어 보거 나, 하는 정도의 일입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상품 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즉 이 것이 우리들의 업무의 중심이 되는 셈입니다만, 소비자가 보낸 상품에 대한 불만에 대한 응답,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금방 스타킹이 두 켤레 잇달아 줄이 가 버렸다든가, 나사로 돌리는 곰이 책상에서 떨어졌을 분인데 움직이지 않게 됐다든가, 배스로브 를 세탁기에 넣어 돌렸더니 사분의 일이나 줄어 버렸다든가, 그런 따위의 불만입니다. 아마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러한 불만 건수는 정말이지 넌더리가 날 정도로 많습니다. 네 사람 의 과원이 하루 종일 헐레벌떡 뛰어다녀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불만 가운데는 타당 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고, 또 정말로 말도 안돼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쪽이라고 하 기도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편의상 a, b, c 세 랭크로 분류합니다. 방 한가운데에 a, b, c 세 상자가 있어 서, 거기에 편지를 집어넣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방법을 이성의 삼 단계 평가라고 부르고 있습 니다. 물론 이것은 , 직업상의 농담입니다. 마음에 두지 말아 주세요 어쨌든 세 개의 랭크에 대해 설명을 하겠습니다. (a) 타당한 불만. 우리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케이스입니다. 우리는 과자상자를 들고 소비자댁을 방문하고, 적당한 상품과 교환해 드립니다. (b) 도의적, 상업 관습적, 법률적으로는 우리한테 책임이 없습니다만, 백화점 이미지가 나빠지 지 않게 하기 위해, 쓸데없는 트러블을 피하기 위한 적당한 조치를 취합니다. (c) 분명히 소비자 책임이고, 우리는 사정을 설명해서 소비자가 포기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당신이 보내 주신 불만을 나는 신중하게 검토해 보았습니다만, 결국 당신이 제기하신 불만은 c랭크에 분류되는 성격의 것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이유로서는 좋 습니까, 잘 들어주세요. 첫째 한 번 산 레코드는 둘째 특히 일주일이나 지난 뒤에 셋째 영수증도 없는데, 교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온 세계 어디에 가셔도 못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드린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자, 이것으로 나의 사정 설명은 끝입니다. 당신의 불만은 각하되었습니다. 그러나 직업적 관점을 떠나서 사실 나는 툭 하면 거기에서 떠나 버립니다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당신의 불만에 대해서 브람스와 마라를 잘못 알고 사버렸다는 불만에 대해서 충심으로 동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형식적인 사무 통지가 아니라, 이와 같 이, 어떤 의미에서는 친밀함이 담긴 메시지를 당신한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이 일주일 동안, 나는 몇 번이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죄송 합니다만 상업 관습상 레코드를 교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보내신 편지에는 무엇인가 내 마음을 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줄줄줄... 이런 편지입니다. 하지만 쓰지 못했습 니다. 결코 문장을 쓰는 것이 서툰 것은 아닙니다마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면 으레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떠오르는 말은 언제나 엉뚱한 것뿐이었습니다. 이상하기도하죠.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는 편지를 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불완전한 편지를 낼 지경이면 아 무 것도 보내지 않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온벽하지 않은 메시지 같은 것은, 엉터리 시간표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 캥거루 울타리 앞에서, 나는 서른 여섯 개의 우연의 축적을 거쳐, 하나의 계시를 얻었던 것입니다. 즉 크나큰 불완전함, 이라는 것입니다. 크나큰 불완전함이란 무엇이냐. 고 당신은 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물으시겠죠. 크나큰 불완전함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 버린다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결과적으로 용서한다는 얘기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캥거루를 용서하고, 캥거루가 당신을 용서하고, 당신이 나를 용서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흐응. 그러나 이러한 사이클은 물론 항구적인 것은 아니고, 어느 순간 캥거루가 이제는 당신을 용서하 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캥거루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 아 주세요. 그것은 캥거루 탓도 아니고 당신 탓도 아닌 것입니다. 혹은 내 탓도 아닙니다. 캥거루 쪽에도 아주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누가 캥거루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순간을 포착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입니다. 순간을 포착해서 기념 사진을 찍어 두는 일. 맨 앞쪽 왼쪽 끝부터 당신 캥거루, 나. 문장을 쓰는 일은 이제는 단념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잘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우 연이라는 글자를 쓴다. 그러나 이 우연이라는 글자에서 당신이 느끼는 것은, 내가 똑같은 글자에 서 느끼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그 무엇 혹은 방대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불공평 하지 않은가, 고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팬티까지 벗었는데, 당신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세 개밖에 풀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이지 불공평합니다. 그래서 나는 카세트 테이프를 사가지고,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취입하기로 했습니다. (휘파람, 보기 대령의 마치(행진) 8소절) 어때요, 들립니까? 이 편지 즉 카세트 테이프를 받고 당신이 어떤 기분이 될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아주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왜냐하면... 백화점 상품 관리 계원이 고객의 불만 편지에 대해서 카세트 테이프에 취입한 편지를 그것도 개 인적인 메시지를 말이죠 보내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말이지 터무 니없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불쾌한 기분이 되어서, 이 테이프를 제 상사한테 반송하게 된다면, 나는 사내에서 대단히 미묘한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만일 그러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하신다 하더라도, 나는 화를 내거나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입장은 배 퍼센트로 대등합니다. 즉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고, 당신은 내 생활을 위협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는 대등합니다. 그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그렇지. 말씀드릴 것을 깜박 잊었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캥거루 통신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이름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당신이 만일 일기를 쓰고있다고 한다면, 오늘 백화점 상품 관리계에서 불만에 대 한 대답이 왔다고 길게 쓰는 대신에 오늘 캥거루 통신 오다. 이것으로 끝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캥거루 통신이라는 것은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넓은 초원 저쪽에서 캥거루 가 배주머니에 편지를 가득 채우고 뛰어오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통, 통, 통 (책상을 치는 소리). 이것은 노크입니다. 노크, 노크, 노크...아시겠어요? 만일 당신이 문을 열고 싶지 않다면, 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정말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이 이상 듣고 싶지 않다면 여기에서 테이프를 끄고, 쓰레기통에 버려 주십시오. 나는 다만 당신 집 현관 앞에 잠시 동안 혼자 말해보고 시파, 그뿐입니다. 당신이 들어주고 계신지는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고,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실 제로 당신이 듣든 듣지 않든 아무래도 좋을 것이 아닙니까? 하하하. 오케이, 어쨌든 해 봅시다 하지만 불완전함이라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원고도 없이 펜도 없이 마이크를 향해 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마치 사막의 한 가운데 서 서, 컵으로 물을 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무엇 하나 보이지 않고, 무엇 하나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쭉 VU미터의 바늘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VU미터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 음량에 응해서 반짝반짝 바늘이 흔들리는 그것입니다. V하고 U라는 것이 무슨 말의 머릿 글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들이 나의 연설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 주는 존재 인 것입니다. 야아, 야아. 그런데 그들이 가치관은 정말 단순합니다. 즉, V가 U입니다. V와 U라는 것은 , 말하자면 만다 콤비와 같은 것입니다. V가 아니면 U, U가 아니면 V, 멋진 세계입니다. 내가 무엇을 얘기하든,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흥미를 갖는 것은, 내 목소리가 어느 만큼 공기를 진동시키느냐, 그것뿐입니다. 그들에게는 공기가 진동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들을 보고 있으면,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하자라는 기분이 듭니다. 으흠. 참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아주 가엾은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무리 농담을 해도 아무도 웃어 주지 않는 코미디언의 이야기였습니다. 알겠습니까, 누구 하나 웃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마이크를 향해서 떠들고 있자니 무심결에 그 영화가 생각납니다. 이상하죠. 같은 대사라도 어떤 이가 이야기하면 아주 우습고, 다른 이가 이야기하면 전혀 우습지도 않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생각해 봤습니다마는, 그 차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천성적인 것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즉 보세요, 삼반규관의 끝이 남보다 조금 더 구부러져 있 다든가, 그런 느낌입니다. 만일 그럴 능력이 나한테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가끔 생각합니다. 나는 언제나 재미있 는 일이 생각나서는 혼자서 때굴대굴 웃고는 합니다마는, 막상 입밖에 내서 누군가에게 얘기해 보면, 이게 말이죠, 조금도 우습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이집트의 모래 사나이가 돼버린 것 같은 기분입니다. 게다가 말이죠... 이집트의 모래 사나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으음, 즉 말이죠, 이집트의 모래 사나이는 이집트의 왕자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아주 옛날, 피라 미드라든가 스핑크스라든가 그런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주 추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 에 정말로 지독히 보기 싫었던 것입니다. 임금님이 싫어하셔서 정글 저 안으로 버려졌던 것입니 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결국 늑대인지 원숭이인지가 키워 줘서 살아 남았던 것이죠. 흔히 있는 이야기죠. 그리고 어떻게된 셈인지 모래 사나이가 돼 버렸습니다. 모래 사나이라고 하 는 것은, 그의 손에 닿는 것은 모두 모래 먼지가 되고, 작은 개울은 흐르는 모래가 되고, 초원은 사막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모래 사나이의 이야기.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없죠? 왜냐하면, 이 건 내가 멋대로 만들어 낸 얘기니까요. 하하하. 어쨌든, 나는 당신을 향하여 이렇게 얘기하고있으니까 이집트의 모래 사나이가 돼 버린 것 같 은 느낌이 듭니다. 내 손이 닿는 모든 것이 모래, 모래, 모래, 모래, 모래... ...나는 아무래도 나 자신에 대해서 너무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 은 어쩔 수 없는 일이 기도 하죠.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 대해서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내가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주소와 이름, 그뿐입니다 나이는 몇 살인지. 연수입은 얼마 정도인지, 코 모양이 어떤지, 뚱뚱한지 말랐는지, 결혼했는지 안 했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 이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편이 오히려 편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가능한 한 단순하게, 될 수 있는 대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형이상학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습니 다. 즉, 여기에 당신의 편지가 있다. 나한테는 이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동물학자가 정글에서 채집한 똥을 기반으로 해서 코끼리의 식생활이나 행동 양식이나 체중이나 성생활을 추측해 내듯이, 나는 한 통의 편지를 기반으로 당신이라고 하는 사람이 존재를 실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용모라든가 쓰는 향수의 종류라든가, 그런 시시한 것은 배고 말입니다. 존재 그 자체 말입니다. 당신의 편지는 정말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문장, 필적, 구두점, 줄 바꾸기, 레토릭, 그 모든 것 이 완벽합니다. 나는 매달 오 백 통의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마는, 솔직히 말해서 당신 편지만큼 감동적인 편지 는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당신 편지를 몰래 집으로 갖고 와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편지를 철저하게 분석했습니다. 짧은 편지니까,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분석에 의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콤마 수가 압도적으로 많습 니다. 마침표 하나에 대해서 콤마가 6.36개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그 콤마 를 치는 방식이 실로 무원칙합니다. 이봐요. 내가 당신의 문장을 놀리고 있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세요, 나는 단지 단순히 감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동, 입니다. 구두점뿐만이 아닙니다 당신 편지의 모든 부분이 잉크의 얼룩 하나까지도 나를 도발하고, 뒤흔 드는 것이었습니다. 왜일까? 결국, 그 문장 속에 당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토리는 있습니다. 한 여자아이가 혹은 여 성이 잘못 레코드를 사버렸다. 그 레코드에는 아무래도 다른 곡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지만, 레코드 자체가 잘못된 것을 그녀가 알아차리는 데는 꼭 일주일이 걸린다. 매장이 여자아 이는 교환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불만 편지를 쓴다. 이것이 스토리입니다. 나는 그 스토리를 이해하기까지, 당신의 편지를 이해하기까지, 당신의 편지를 세 번 읽어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편지는 우리한테 오는 다른 어떤 불만 편지하고도 완전 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하면 당신 편지 가운데는 불만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감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토리만이 존재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나는 조금 고민했습니다. 당신 편지의 목적이 불만인 것인지 고백인 것인지 선언인 것인지, 혹은 어떤 종류의 테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인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편지는 나에게 대량 학살 현장의 보도 사진을 연상시켰습니다. 코멘트도 없 고, 기사도 없고, 단지 사진뿐입니다. 어딘지 모르는 나라의 어딘지 모르는 길바닥에 딩굴딩굴 시 체가 구르고 있는 사진입니다. 당신이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고있는지, 나는 그것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 편지는 임시 변 통으로 만든 개미집처럼 복잡하게 엉켜 있고, 그러면서 손댈 만한 실마리 하나 주지 않습니다. 정 말 대단합니다. 빵빵빵...대량 학살입니다. 글쎄요, 일을 좀더 단순화시켜 봅시다. 아주아주 단순하게 말입니다. 즉, 당신의 편지는 나를 성적으로 고양시킵니다. 그런 얘깁니다. 섹스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통, 통, 통. 노크입니다. 흥미가 없으시면 테이프를 꺼 주세요. 저는 VU미터를 향해서 혼자서 얘기합니다. 재잘재잘재 잘. 오케이? 앞다리는 짧고 다섯 발가락을 지니나, 뒷다리는 현저하게 길고 굵고 네 발가락을 지니며, 넷째 발가락이 강대하게 발달하고, 둘째, 셋째발가락은 극히 작고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캥거루의 발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하하. 그러면 섹스에 대해서. 나는 당신 편지를 집으로 갖고 온 이래. 쭉 당신하고 같이 잘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침대 에 들어가면 옆에 당신이 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역시 옆에 당신 있습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이미 당신은 일어나서, 원피스의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봐요, 아십 니까, 원피스의 지퍼만큼 잘 망가지는 것은 없다고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잠자는 시늉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방을 가로질러 화장실 안으로 사 라집니다. 그리고 나서 겨우 나는 눈을 뜹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나갑니다. 밤은 새까맣고 나는 특별히 새까매지도록 유리창에 특별블라인드를 달고 있습니다. 당신 얼굴 은 물론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도 체중도, 무엇 하나 모릅니다. 그러니까 몸에 손을 대볼 수가 없 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당신과 섹스를 하든 하지 않든 아무쪽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냐, 아닌가? 조금 생각하게 해 주세요. 오케이. 이런 얘깁니다. 나는 당신하고 자고 싶다. 하지만 자지 않아도 된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공평한 입장을 취하고 싶습니다. 남한테 무엇인가를 떠맡기거나, 남한테서 무엇인가를 떠맡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내 곁에 느낀다든가, 당신의 구두점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 다든가,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합니다. 이해해 주실려나? 즉 이런 것입니다. 나는 가끔, 개에 대해서 개체의 개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아주 괴로워집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온 몸이 조각조각 흩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예를 들어서 전차를 타지요. 전차 안에는 몇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타고 있습니다. 원칙적 으로 생각하면 이들은 단순한 승객입니다 .아오야마 일번가에서 아카사카 미츠케까지 가는 승객 입니다. 다만 말이죠, 가끔 이러한 승객 하나하나의 존재가 아주 마음에 걸릴 때가 있거든요.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일까,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긴자선 따위를 타고 있을까, 고 말이죠. 그러면 끝장입니다.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게 된다니까요. 저 샐러리맨은 이제 곧 이마 양쪽부터 대머리가 되겠지라든가, 저 여자아이는 다리털이 조금 너무 많다. 일주일에 한 번 은 깎고 있을까라든가, 왜 맞은편에 앉은 저 젊은 남자는 저렇게 색깔이 맞지 않는 넥타이를 매 고 있을까라든가, 그런 식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몸이 덜덜 떨려 오고, 전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집니다. 요전번에 말이죠 당신은 틀림없이 웃으시겠지만 자칫하면은 문 옆에 있는 비상 정지 단추를 누를 뻔했다니까요. 하지만 내가 예민한 인간이라든가. 신경질적인 인간이라든가, 그렇게는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예민하지도 신경질 적이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극히 보통의 , 극히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샐 러리맨이고 백화점 상품 관리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하철도 좋아합니다. 성적으로도 문제가 없습니다. 나한테는 애인 비슷한 여성이 하나 있고, 일년 전쯤부터는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있고, 그녀도 나도 그에 대해서는 그런 대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담나 나는 그녀에 대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깊이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죠. 결혼할 생각도 없습니다 만일 결혼해 버리면 틀림없이 나는 그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잘 해 나갈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함께 살고 있는 여자의 치아 상태라든가 손톱생 김새에, 잘해 나갈 수 있겠어요. 조금 더 나에 대해서 얘기하게 해 주세요. 이번에는 노크는 빼고 입니다. 이왕 여기까지 들으셨거든, 내친김에 마지막까지 들어주세요. 잠깐 기다려 주세요. 담배를 피울게요. (딸깍딸깍딸깍)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에 대해 얘기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얘기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 다. 또 설혹 제가 얘기한다고 해도, 아무도 흥미 따윈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당신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나는 지금, 크나큰 불완전함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나큰 불완전함을 촉발한 것이 무엇이냐? 당신의 편지와 네 마리의 캥거루입니다. 캥거루. 캥거루는 아주 매혹적인 동물이고, 몇 시간을 바라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캥거루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뜻도 없이 하루 종일 우리 안을 뛰어다니고, 가끔 땅 바닥에 구멍을 팝니다. 그래 구멍을 파서 물 하느냐 하면, 아무 것도 D나 합니다. 다만 구멍을 팔 뿐이죠. 하하하. 캥거루는 한 번에 한 마리밖에 새끼를 낳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암캥거루는 새끼를 한 마리 낳 으면 금방 또 임신을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캥거루 전체로 봐서 적정수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암캥거루는 일생의 태반을 임신과 육아에 바치게 됩니다. 임신이 아니면 육아, 육 아가 아니면 임신. 그러니까 캥거루의 존속이라는 목적이 없으면 캥거루 자체도 존재하지 않습니 다. 이상하죠.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미안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사실은, 나는 내가 나 자신이라는 점에 아주 불만입니다. 용모라든가, 재능이라든가 지위라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단순하게 내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아주 불공평하 다고 느끼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불만이 많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직장이라든 가 월수입이라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습니다. 일은 분명히 시시하지 만 일이라는 것은 대개 시시합니다. 돈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히 말하죠. 나는 동시에 두 곳에 있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이라고 하는 개체성이, 이러한 나의 희망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것은 극 히 불쾌한 사실이라고 생각 하지 않으십니까? 나의 이러한 바람은 어느 편이냐 하면 작은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지배자가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적인 예술가가 되고 싶 다는 거소 아닙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고 싶다는 것뿐 입니다. 아시겠어요, 세 군데도 네 군데도 아닌 단지 두 군데입니다. 나는 콘서트 홀에서 오케스 트라를 들으면서, 롤러 스케이트가 타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백화점 상품 관리 계원이면서, 맥도 널드의 쿼터 파운드 햄버거고 싶기도 합니다. 나는 애인과 자면서 당신하고 자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개이면서 동시에 원칙이고 싶습니다 다시 한 대 담배를 피우겠습니다. 후우. 조금 피곤하군요. 이렇게 자신을 정직하게 얘기한다는 일에 나는 익숙하지 않거든요. 한 가지만 확인해 두고 싶은데요, 나는 당신이라는 여성에 대해서 성적인 욕망을 품고 있는 것 은 아닙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나는 나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매우 화가 나 있습니다. 하나의 개라는 것, 이 사실이 지독히 불쾌합니다. 나는 기수라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개인 인 당신과 자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둘로 분할하고, 내가 둘로 분할하고, 그리고 그 네 명이 잠자리를 함께할 수 있다 면 은 얼마나 멋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답장은 보내지 마세요. 나한테 편지를 보내고 싶거든. 회사 앞으로 불만 형식으로 편지를 보내 주세요. 만일 불만이 없으시거든, 무엇인가 생각해 내 주세요. 자 그럼. 여기까지의 테이프를, 지금 플레이 백 해서 들어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주 불만족스럽습니다. 실수로 강치를 죽여 버린 수족관의 사육 계원 같 은 기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테이프를 당신한테 보내야 할지 보내지 말아야 할지 나는 상당히 고 민을 했습니다. 보내기로 한 지금도, 여전히 나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불완전함을 지향합니다. 그러니까 기분 좋게 그것을 쫓겠습니다. 그 불완 전함을 ,당신과 네 마리 캥거루가 지탱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내가 잔디를 깎던 것은 열 여덟 살이나 열 아홉 살 때였으니까, 벌써 십사오 년 전의 일이 된 다. 꽤 오래 전이다. 가끔, 십사 년이나 십 오 년 정도라면은 오래 전이라고 할만한 세월은 아니지 않는가 하고 생각 할 때도 있다. 짐 모리슨이 라이트 마이 파이어를 노래하거나 폴 매카트니가 롱 앤드 와인딩 로 드를 노래하거나 하던 시절 조금 앞뒤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때다 그것이 그렇게 오래 전이라니, 나는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나 자신이 그때에 비해서 그다지 변한 게 없는 게 아닌가하고도 생각한다. 아냐, 그럴 리는 없겠지. 나는 틀림없이 상당히 변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잘 설명 이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다. 야, 나는 변했다. 그리고 십사오 년 전이라는 것은 제법 오래 전이다. 우리 집 근처에 나는 얼마 전에 여기로 이사 왔다. 공림 중학교가 있고, 나는 물건을 사러 가거 나, 산책하러 가거나, 할 때마다 그 앞을 지나간다. 그리고 걸으면서 중학생들이 체조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장난치거나 하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특별히 좋아서 보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달리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른 편에 있는 벚꽃나무 가로수를 보아도 되지만, 그것 보다는 중학생을 바라보는 편이 그런대로 조금은 낫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매일 중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그들은 열네 살이나 열 다섯 살이라고, 이것은 나한테는 그런 대로 하나의 발견이었고, 작은 놀라움이었다. 시 사 년이나 십오 년 전에 그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태어나 있었다 해도 거의 의식이 없는 핑 크빛 고깃덩어리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벌써 브래지어를 하거나, 마스터베이션을 하거 나, 디스크 자키한테 시시한 엽서를 보내거나, 체육관의 창고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어느 집 담벼락에 빨간 스프레이 페인트로 x지라고 쓰거나, 전쟁과 평화를 아마도 읽거나 하고 있는 것이 다. 맙소사. 나는 정말로 맙소사 라고 생각했다. 십사 오 년 전이라면은, 내가 잔디를 깎고 있었던 때가 아닌가. 기억이란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란 기억과 비슷하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 그 사실을 절실하게 실감하게 되었다. 기억이란 소설과 비슷 하다. 혹은 운운 아무리 잘 마무리된 형태로 정리하려고 노력해 보아도, 문맥은 이쪽 저쪽으로 왔다갔다하고 마 지막에는 문맥도 아니게끔 돼 버린다. 왠지 꼭 축 늘어져 버린 새끼 고양이를 몇 마리인가 쌓아 올려놓은 것 같다. 따뜻하고, 게다가 불안정하다. 그런 것이 상품이 되다니 상품 말이야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가끔 느낀다. 정말로 얼굴이 빨개질 때도 있다 내가 얼굴이 빨개지면 온 세계 가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를 비교적 순수한 동기에 기초를 둔 상당히 어리석은 행위로 간주한다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 따위는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억이 생겨 나고 소설이 생겨난다. 이것은 이미,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영구 기계와 같은 것이다. 그 것은 딸가닥달가닥 소리를 내면서 온 세계를 돌아다니고, 땅 위에 끝없는 한 줄기 선을 그어 나 간다. 잘되면 좋겠습니다. 하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잘될 리가 없다 잘돼 본 적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된다는 거냐? 그렇게 해서, 나는 또 새끼 고양이를 모아서 쌓아올려 간다. 새끼 고양이들은 축 늘어져 있고, 아주 부드럽다. 잠이 깨서 자기들이 캠프파이어의 장작더미처럼 쌓아 올려진 것을 알아 차렸을 때, 새끼 고양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오라, 뭔가 이상하구나라는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조금은 마음이 놓일 것이다 . 그런 것이다 . 내가 잔디를 깎던 것이 열 여덟 살 아니면 열 아홉 살 때니까, 제법 옛날 얘기다. 그 당시 나에 게는 동갑내기 애인이 있었지만, 그녀는 약간 사정이 있어서, 꽤 먼 도시에 떨어져 살고 있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일년에 기껏해야 전부해서 이 주일 정도였다. 우리는 그 이 주일 동안 에 섹스를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비교적 호사스러운 식사를 하거나, 끝없이 이렇다 할 것도 없 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꼭 크게 싸움을 하고, 화해를 하고, 또 섹스를 했다. 요컨대 세상에 있는 일반적인 연인들이 하는 일을 압축한 영화같이 하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정말로 그녀를 좋아했는지 어쩐지,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생각은 나지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녀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좋 아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바기나 안에 들어가는 것도 좋았다. 섹스가 끝난 뒤,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이야기하거나 자고 있거나 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장 래 일 따위는 무엇 하나 알 수 없다. 그녀와 만나는 이 주일을 빼면, 내 인생은 지독히 단조로웠다. 가끔 대학에 나가서 강의를 받고 간신히 남만큼의 학점을 땄다. 그리고 혼자 영화를 보거나, 별뜻도 없이 거리를 어슬렁하거나, 사 이가 좋은 여자 친구와 섹스가 배제된 데이트를 하거나 했다. 여럿이 모이거나 떠들거나 하는 일 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조용한 사람이라고들 생각하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로큰롤만 들었다.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불행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 지만 그 나이에는 모두 그런 것이다. 어느 여름날 아침, 7월초에 애인한테서 긴 편지가 왔고, 거기에는 나하고 헤어지고 싶다고 씌어 있었다. 당신을 쭉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앞으로도...운운. 요컨대 헤어지고싶다는 이야기였 다. 새 보이프렌드가 생긴 것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담배를 여섯 개비 피우고, 밖에 나가서 깡통 맥주를 마시고, 방에 돌아와서 또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긴 HB 연필을 세 자루 분질렀다. 특별히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무얼 해야 할지 말랐을 뿐이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 고 일하러 갔다. 그리고 얼마동안, 나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한테서 많이 밝아졌네라는 말을 들었 다. 인생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나는 그 해, 잔디깎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잔디깎기 회사는 오다큐선의 교도역 근처에 있었고, 제법 장사가 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집을 지음여 마당에 잔디를 심는다. 또는 개를 키 운다. 이것은 조건 반사와 같다. 한 번에 양쪽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 다. 잔디의 초록색은 예쁘고, 개는 귀엽다. 그러나 반년쯤 지나면, 모두가 다소 지겨워지기 시작한 다. 잔디는 깎지 않으면 안 되고, 개는 산책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좀처럼 잘 되어 가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잔디를 깎아 주었다. 나는 그 전해의 여름, 대학 학생 과에서 이 일거리를 찾아냈다. 나 외에도 몇 명인가 같이 들어간 녀석들이 있었지만, 모두 금방 그만 뒤 버리고, 나만이 남았다. 일은 고됐지만, 급료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남하고 별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나한테 알맞았다. 나는 거기에 근무하게되고 나서, 약간의 목돈을 모았다. 여름 에 애인과 어딘가에 여행하기 위한 자금이었다. 그러나 그녀하고 헤어져 버린 지금에 와서는 그 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헤어지자는 편지를 받고 일주일 정도,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다, 라기보다는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일 정도밖에 생각할 것이 없었 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일주일이었다. 내 페니스는 남의 페니스 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내 가 모르는 누군가가 그녀의 작은 젖꼭지를 가만히 씹고 있다. 뭔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다. 돈이 사용처는 끝끝내 생각해 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중고차 스바루 1000cc를 사지 않을래라고 했다. 물건은 나쁘지 않았고 가격도 적당했지만,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스피커를 새로 바꿀 까 하고도 생각해 봤지만, 내가 사는 작은 목조 아파트로는 무리한 얘기였다. 아파트를 옮겨도 되 었지만, 옮길 이유가 없었다. 아파트를 옮기면, 스피커를 새로 살 만한 돈이 남지 않는 것이었다. 돈을 쓸데가 없었다. 여름용 폴로 셔츠 한 장과 레코드를 몇 장 샀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성능이 좋은 소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도 샀다. 커다란 스피커가 붙어있었고, FM 이 아주 깨끗이 들린다. 그 일주일이 지난 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즉, 돈을 슬 일이 없다면, 슬 일 없는 돈 을 버는 일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느 날 아침 잔디깎기 회사 사장한테 일을 금나두고 싶은데요, 라고 말했다. 슬슬 시험 준비도 하지 않으면 안 되고요, 그전에 여행도 하고 싶거든요, 설마 이제는 돈이 필요없어서요라 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 거 유감인데."하고 사장은 말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천장 을 올려다보면서 뚝뚝하는 소리가 나게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자네는 정말이지 잘해주었어. 아 르바이트생 중에서는 제일 오래 되었고, 단골 손님들 평판도 좋고 말이지. 젊은이답지 않게 정말 잘해 주었어." 네, 하고 나는 말했다. 사실 나는 대단히 평판이 좋았다. 일을 꼼꼼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의 아르바이트생들은 대형 전기 잔디깎기 기계로 대충 잔디를 깎아 내고 나면은, 나머지는 적당 히 해치운다. 그렇게 하면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고, 몸도 고되지 않다. 내가 하는 방법은 완전히 거꾸로 였다. 기계로는 적당히 하고, 손으로 하는 일에 시간을 들였다. 당연히 일은 깨끗이 완성 된다. 단, 벌이는 적다. 한 건에 얼마라는 급료 계산법이었기 때문이다. 정원의 대체적인 면적으로 가격이 정해진다. 그리고 쭈그리고 일을 하기 때문에 허리가 지독히 아파진다. 이것은 실제로 해 보지 않는 사람은 모를 일이다. 익숙해지기 전에는 계단의 오르내리기에도 부자유스러울 지경이 다. 나는 특별히 좋은 평판을 듣자고 일을 꼼꼼히 한 것이 아니었다.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잔디를 깎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잔디 깎기 가위를 갈고, 잔디깍기 기계를 실은 라이트밴으로 단골집에 가고, 잔디를 깎는다. 여러 유형의 정원이 있고, 여러 유형의 잔디가 있고, 여러 타입의 부인들이 있다. 얌전하고 친절한 부인이 있는가 하면, 무뚝뚝한 부인도 있다. 노브라 에다 넉넉한 T셔츠를 입고 잔디를 깎고 있는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젖꼭지까지 보여 주는 부 인도 있다. 어쨌든 나는 잔디를 계속 깎았다. 대부분의 경우 잔디는 충분히 웃자라고 있다. 마치 풀밭 같았 다. 잔디가 웃자라 있으면 있을수록, 일은 할 만했다. 일이 끝난 뒤에는, 정원의 인상이 완전히 변 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멋진 느낌이다. 마치 두꺼운 구름이 한 순간 걷히고, 태양 광선이 주위에 꽉 찬 것 같은 느낌이다. 꼭 한 번 일이 끝난 뒤에 부인들 중 하나하고 잔 적이 있다. 서른하나나 둘, 그 정도 나이의 부 인이었다. 그녀는 자그마했고, 작고 탄탄한 유방을 갖고 있었다. 덧문을 전부 닫고, 불을 끈 컴컴 한 방안에서 우리는 관계를 했다. 그녀는 원피스를 입은 채 속옷을 벗고, 내 위에 올라탔다. 가슴 보다 아래쪽은 나한테 만지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몸은 이상할 정도로 차가 웠고, 바기나만이 따 뜻했다.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잠자코 있었다. 원피스 옷자락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고 그것이 늦어지거나 빨라지거나 했다. 도중에 한 번 전화벨이 울렸다. 벨은 한참 울리고 나서 그쳤다. 나중에 내가 애인하고 헤어지게 된 것은 그 일 때문이 아닐까 문득 생각하기도 했다. 특별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었건 것은 아니다. 왠지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다. 받지 않았던 전화벨 때문이다. 하지만, 됐다. 어차피 끝난 일이다 '하지만 난처한데." 하고 사장이 말했다. "자네가 지금 빠져버리면, 예약을 처리할 수가 없어. 지 금이 한 창 시즌이고 말이지." 장마 탓에 잔디가 아주 길게 자란 것이다. "어때, 일주일만 더 일해 주지 않으려나? 일주일 정도면 사람도 어떻게 구할 수 있을 거고, 그 럭저럭 해 나갈 수 있겠는데 말이지. 만일 해 준다면 특별 보너스를 주지." 괜찮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당장 이렇다 할 예정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일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상하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돈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돈이 들어온다. 삼 일 개고, 나서, 하루 비가 오고, 또 삼 일 개었다. 그런 식으로 마지막 일주일이 지나갔다. 여름이었다. 그것도 반대 버릴 만큼 멋진 여름이었다. 하늘에는 옛 추억 같은 하얀 구름이 떠있었 다. 태양은 따갑게 살갗을 태웠다. 내 등껍질은 깨끗이 세 번 벗겨지고, 새까매졌다. 귀 뒤켠까지 도 새까맸다. 마지막 일하는 날 아침, 나는 T셔츠와 쇼트 팬츠, 테니스 슈즈에다가 선글라스의 차림으로 라 이트 밴에 올라탔고, 내게는 마지막이 될 정원으로 향했다. 자동차 라디오는 망가져 있었기 때문 에, 집에서 들고 온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로큰롤을 들으면서 차를 몰았다. 클리댄스나 그랜드 펑 크 같은 그런 느낌이다. 모든 것이 여름의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나는 토막토막 휘파 람을 불고, 휘파람을 불지 않을 때는 담배를 피웠다. FEN의 뉴스 아나운서는 이상한 인토내션으 로 베트남의 지명을 연발하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 일터는 유미우리 랜드 근처에 있었다. 맙소사, 왜 가나가와에 사는 사람이 세타가 야에서 잔디깎기 서비스를 불러야 했을까?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일에 대해서 불평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그 일을 선택했 기 때문이다. 아침에 회사에 나가면 칠판에 그날이 일터가 전부 씌어 있고, 각자가 마음에 드는 장소를 고른다.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장소를 택한다. 왕복 시간이 걸리지 않고, 그만큼 일을 많 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로 될 수 있는 대로 먼 곳의 일터를 고른다. 어제나 그랬다. 그에 대해는 모두가 의아해 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아르바이트생 중에서는 제일 고참이고, 마음에 드는 일을 남보다 먼저 고를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대단한 이유는 아니다. 멀리 가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먼 정원에서 먼 잔디를 깎는 것 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먼 길의 먼 광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해 봤자, 아마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차의 유리창을 전부 열어 놓고 운전했다. 도시가 멀어짐에 따라 바람이 시원해지고, 녹색 이 선명해져 갔다. 풀 내음과 마른 흙 냄새가 강해지고, 하늘과 구름의 경계가 분명한 획을 긋기 시작하였다. 멋진 날씨였다. 여자아이하고 둘이서 간단한 여름 여행을 나서기에는 최고의 날씨다 나는 시원한 바다와 뜨거운 모래사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에어컨디셔너가 잘된 작은 방과 풀이 잘 먹여진 블루 시트를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모래밭과 블루 시트가 교대로 머리에 떠올랐다. 가솔린 스탠드에서 기름 탱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동안에는 같은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스탠드 옆의 풀밭에 드러누워, 서비스 요원이 오일을 체크하거나 유리창을 닦거나 하는 것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땅에 귀를 대면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린다. 먼 파도와 같은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파도 소리는 아니었다. 땅이 흡수란 여러 가지 소리가 섞였을 뿐이다. 눈앞의 풀 잎사귀 위를 작은 벌레가 기어가고 있었다. 날개가 있는 작은 초록색 벌레다 .벌레는 풀잎 끝 까지 가자, 한참 주저하고 나서 같은 길을 되돌아갔다. 그다지 낙심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벌레도 역시 더위를 느낄까? 모르겠는데. 십 분쯤 지나 급유가 끝났다. 서비스 계원이 차 클랙슨을 울려서 나에게 끝났다고 알렸다. 목적의 집은 언덕 중턱에 있었다. 평온하고 고상한 언덕이다. 꼬불꼬불한 길 양편에는 느티나무 가 늘어서 있었다. 어느 집 정원에서는 작은 사내아이가 둘, 벌거벗고 호스의 물을 서로 끼얹고 있었다. 하늘로 향한 물보라가 오십 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무지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누군 가가 유리창을 열어 놓은 채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다. 아주 잘 치는 피아노 였다. 레코드 연주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집 앞에 라이트 밴을 세우고 벨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주위는 지독히 고요했다. 사람 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계 나라에서 흔히 있는 낮잠 자는 시간같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그리고 가만히 응답을 기다렸다. 아담하고 인상이 좋은 집이었다. 크림색 모르타르로 되어 있었고, 지붕 한가운데는 같은 색 네 모난 굴뚝이 나와 있었다. 창틀은 회색이고, 하얀 커튼이 걸려 있었다. 양쪽 다 지독하게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 오래 된 집이지만 그 낡음이 썩 어울렸다. 피서지에 가면, 흔히 이런 느낌의 집이 있다 반년은 사람이 살고, 반년은 빈집이다. 그런 분위기다. 건물의 존재감이 일상적 삶의 냄새를 엷게 해 버린다. 프랑스식으로 쌓아올린 벽돌담은 허리 높이밖에 없었고, 그 위는 장미 울타리 였다. 장미꽃은 다지고, 초록 색 잎사귀가 눈부신 여름 햇빛을 담뿍 받고 있었다. 잔디는 보이지 않았지만, 정원 은 제법 넓고, 커다란 녹나무가 크림색 벽에 시원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세 번째 벨을 눌렀을 때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고, 중년의 부인이 나타났다. 아주 큰 여자 였다. 나도 결코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나보다 삼 센티미터는 컸다 어깨 폭도 넓었고 꼭 뭔가 에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는 아마 쉰 살 전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인은 아니 라고 하더라도, 단정한 얼굴이었다. 하기 단정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 만한 그런 타 입의 얼굴은 아니다. 짙은 눈썹과 네모난 턱은 한 번 말을 꺼내면 뒤로 물러서지 않는 완고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의 졸린 듯한 멍한 눈으로 귀찮은 듯이 나를 보았다. 백발이 약간 섞인 뻣뻣한 머리카락이 머리 위에서 물결치고 있었고, 갈색 면 원피스 어깨로부터는 튼튼한 두 개의 팔이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팔은 새하얗다. "뭐야?" 라고 그녀가 말했다. "잔디를 깎으러 왔는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잔디?" 하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잔디를 깎는단 말이지?" "네, 전화를 주셨는데." "아. 그렇지. 잔디야. 오늘이 며칠이지?" "십사 일입니다. " 그녀는 하품을 했다. "그래 십사 일인가?" 그리고 나서 다시 함 번 하품을 했다. "그런데 담배 있어?" 나는 주머니에서 쇼트 호프를 꺼내서 그녀에게 주고, 성냥으로 불을 붙여 주었다. 그녀는 기분 좋은 듯이 하늘을 향해서 훅 하고 연기를 뿜어냈다. "해." 하고 그녀가 말했다. "얼마나 걸리는데?" "시간 말입니까?" 그녀는 턱을 앞으로 쭉 내밀면서 고개를 끄덕했다. "넓이와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보아도 될까요?" "물론 되지. 도대체 보지 않으면 할 수 없을 것 아냐." 나는 그녀 뒤를 다라서 정원을 돌아 보았다. 정원은 평평한 장방형이었고, 육십 평 정도의 넓이 였다. 자양나무 숲이 있었고, 느티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머지는 잔디밭이었다. 유리창 아래 빈 새 장이 두 개 내던져져 있었다. 정원은 잘 손질되어 있었고, 별로 깎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잔디는 짧았다. 나는 조금 낙심했다. "이런 정도라면 아직 이 주일은 괜찮겠는데요. 지금 깎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야. 그렇지?" 나는 잠깐 그녀를 보았다. 그건 분명 그렇다. "좀더 짧게 해 주었으면 해. 그 때문에 돈을 지불하는 거야." 나는 끄덕했다. "네 시간이면 끝나겠습니다. " "상당히 시간이 걸리잖아." "천천히 일하고 싶어서요." "좋을 대로 하지."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라이트 밴에서 전동 잔디 기계와 잔디 가위와 갈퀴와 쓰레기주머니와 아이스 커피를 담은 보온병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꺼내서 정원으로 날랐다. 태양은 빠른 걸음으로 하늘 한가운데로 다가가, 기온은 자꾸만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도구를 운반하는 동안, 그녀는 현관에 구두를 열 켤레 정도 늘어놓고 헝겊으로 먼지를 털고 있었다. 구두는 전부 여자 것이고, 작은 사이즈와 특대 사이즈의 두 가지 종류였다. "일을 하는 동안에 음악을 틀어도 괜찮을까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녀는 몸을 굽힌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론이지. 나도 음악을 좋아해." 나는 먼저 정원에 흩어져 있는 잔돌을 치우고, 그리고 기계를 돌렸다. 돌이 들어가면 기계 날이 상해 버린다. 잔디 깎는 기계 앞면에는 플라스틱 소쿠리가 가득 차면 그것을 배서 쓰레기통에 버 린다. 정원이 육십 평이나 되면, 짧은 잔디라 해도 제법 양이 많다. 태양은 따갑게 내리쬐었다. 나 는 땀에 젖은 T셔츠를 벗고, 쇼트 팬츠 하나만의 모습으로 일했다. 마치 꼴 좋은 바베큐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일하고 있으면 아무리 물을 마셔도 소변 따윈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전부 땀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잔디 깎기 기계를 쓰고 나서 한숨 돌리고,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아이스 커피를 마셨다. 당분이 몸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갔다. 머리 위에서는 매미가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라 디오 스위치를 켜고, 다이얼을 돌려 적당한 디스크자키를 찾았다. 스리 덕 나이트의 마마톨드 미 가 나오는 곳에다 다이얼을 맞추고, 똑바로 드러누워서 선글라스를 통해서 나뭇가지와 그 가지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태양 빛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오서 내 곁에 섰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까. 그녀는 느티나무처럼 보였다. 그녀의 오른 손에 글라스를 들고 있었다. 잔 안에는 얼음과 위스키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여름 태양 광선에 반짝반짝 흔들리고 있었다. "덥지?" 하고 그녀가 말했다. "네."라고 나는 말했다. "점심은 어떻게 할거야?"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열한 시 이십 분이었다. "열 두 시가 되면 어딘가에 먹으러 가겠습니다. 가까이에 햄버거 스탠드라도 있으면." "일부러 갈 거야 없지. 내가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줄게." "괜찮습니다. 항상 밖에 나가서 먹으니까요." 그녀는 위스키 글라스를 들고, 한 입으로 반을 마셨다. 그리고 입을 오므리고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어차피 하는 김이니까 말야. 내 것도 만든단 말야. 먹으려무나." "그럼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괜찮아."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어깨를 흔들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열두 시까지는 가위로 잔디를 깎았다. 우선 기계로 깎은 부분 가운데 고르지 않은 부분을 다 시 고르고, 그 잔디를 갈퀴로 쓸어모으고, 다음에는 기계로는 깎이지 않는 부분을 깎는다. 느긋하 게 해야 하는 일이다. 적당히 하려고 하면 적당히 할 수 있고, 꼼꼼하게 했다고 해서 그만큼 평가 받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느릿느릿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전에 말했듯이, 비 교적 나는 꼼꼼하게 일한다. 이것은 성격상의 문제이다. 그리고 아마도 프라이드 문제이다. 정오의 사이렌이 어딘가 에서 울리자, 그녀는 나를 부엌으로 들어오게 해서 샌드위치를 내주었 다. 넓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고 청결한 부엌이었다. 커다란 냉장고가 내는 소리 외에는 아주 조용 했다. 식기도 스푼도 옛날 것이었다. 그녀는 맥주를 권했지만, 나는 일하는 도중이니까요 하고 사 절했다. 그녀는 대신 오렌지 주스를 내주었다. 맥주는 그녀가 마셨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남은 화인 호스 병도 있었다. 개수대 아래에는 여러 종류의 빈 병이 구르고 있었다.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햄과 래터스와 오이샌드위치로, 겨자가 잘 배합되어 있었다. 정말 맛있어 요. 하고 나는 말했다. 샌드위치 하는 잘 만들거든,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한 조각도 먹지 않았다. 피클을 두 조각 먹었을 뿐, 맥주만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도 할 얘기가 없었다. 열 두 시 반에 나는 잔디로 돌아갔다. 마지막 오후의 잔디밭이다. 나는 FEN의 로큰롤을 들으면서 잔디를 꼼꼼하게 깎았다. 몇 번이고 갈퀴로 깎은 잔디를 치우 고, 이발사가 하듯이 여러 각도에서 깎다 만 부분이 없는지 점검했다. 한시 반이 됐을 때는 삼분 의 이가 끝났다. 여러 번 땀이 눈으로 들어갔고 그 때마다 정원의 수도에서 얼굴을 씻었다. 몇 번 이고 페니스가 발기했고, 그리고 가라앉았다. 잔디를 깎으면서 발기하다니 왠지 우스꽝스러웠다. 두 시 이십 분에 일이 끝났다. 나는 라디오를 끄고, 맨발로 잔디 위를 빙 둘러보았다. 만족할 만한 작품이었다. 깎다 남은 부분도 없었고, 얼룩도 없었다. 카펫처럼 매끄러웠다. 당신을 아직도 매우 좋아합니다. 라고 그녀는 마지막 편지에 썼다. 따뜻하고 아주 훌륭한 사람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게 너무 심한 줄 압니다 .아마 무엇 하나 설명된 것이 아니겠지요. 열 아홉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기분 나쁜 나이 입니다. 몇 년 지나면 좀더 설명을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몇 년인가 지난 후에 는, 아마 설명할 필요도 없어져 버리겠지요. 나는 수돗물로 얼굴을 씻고, 도구를 라이트 밴으로 나르고, 새 T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현관문 을 열고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맥주라도 마시렴."하고 그녀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맥주 정도는 마셔도 되겠지. 우리는 정원 끝에 나란히 서서 잔디를 바라보았다. 나는 맥주를 마시고, 그녀는 길쭉한 글라스 에 레몬을 뺀 보드카 토닉을 마시고 있었다. 술집에서 자주 덤으로 주는 그런 글라스였다. 매미는 아직도 울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숨소리만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휴 하고 이 사이에서 새는 것 같은 숨소리다. "자네는 일을 잘하네." 하고 그녀가 말했다. "지금까지 잔디 깎는 사람을 여럿 불러 보았지만, 이렇게 꼼꼼하게 해 준 것은 자네가 처음이야." "네 " 하고 나는 말했다. "죽은 남편이 잔디에 대해서는 까다로워서 말야. 언제나 자기가 꼼꼼하게 깎았지. 자네가 깎는 방법하고 아주 비슷해." 나는 담배를 꺼내서 그녀에게 권하고, 둘이서 담배를 폈다. 그녀의 손은 내 손보다도 컸다. 오른손의 글라스도 왼손의 쇼트 호프도 아주 작게 보였다. 손가 락은 굵고, 반지도 없었다. 손톱에는 선명하게 세로로 선이 몇 개인가 가 있었다. "남편은 노는 날에는 잔디만 깎았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나는 이 여자의 남편에 대해 잠시 상상해 보았다. 잘 되지 않았다 . 느티나무 부부를 상상할 수 없는 것하고 같다. 그녀는 또 휴하고 숨을 쉬었다. "남편이 죽고 나서는"하고 그녀가 말했다. "쭉 업자가 와 주었지. 나는 태양에 약하고, 딸도 태 양에 그으는 것을 싫어하고 말이야. 어쨌든, 햇볕에 타는 것은 치지 않더라도 젊은 여자아이가 잔 디깎기 따위를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말이지." 나는 끄덕였다. "하지만 자네 일은 마음에 들었어. 잔디라는 것은 이렇게 깎아야 하는 거야." 나는 다시 한 번 잔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트림을 했다. "내달에도 또 오려무나." "내달에는 안 됩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왜?" 하고 그녀가 물었다. "오늘이 마지막이거든요." 라고 내가 말했다. "슬슬 학생으로 돌아가서 공부하지 안으면 학점 을 못 따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발 밑을 바라보고, 그리고 또 내 얼굴을 보았다. "학생이야?" "네." 라고 내가 말했다. "어느 학교?" 나는 대학 이름을 댔다. 대학의 이름은 그녀에게 대단한 감명을 주지 않았다. 감명을 줄 만한 대학이 아닌 것이다. 그녀는 둘째손가락으로 귀 뒤를 긁었다. "이젠 이 일을 안한다고?" "네 올 여름은." 하고 나는 말했다. 올 여름은 이제 잔디깎기를 하지 않는다. 내년 여름에도, 그 리고 내후년 여름에도, 그녀는 양치질이라도 하듯이 보드카 토닉을 입에 담고, 그리고 아끼듯이 반씩 마셨다. 땀이 이 마 가득히 맺혀 있었다. 작은 벌레가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에 들어오렴." 하고 여자가 말했다. "밖은 너무 더워." 나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두 시 삼십오 분. 이른 것인지 늦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일은 다 끝 났다. 내일부터는 이제 일 센티미터도 잔디를 깎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다. "바쁜가?" 라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집에 들어와서 차가운 거라도 마시렴.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자네가 좀 봐 주었으면 하는 것도 있거든." 봐 주었으면 하는 것? 하지만 나에게는 주저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앞장서서 쑥쑥 걷기 시작했다. 나를 뒤돌 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녀 뒤를 쫓아갔다. 더위 때문에 머리가 멍하다. 집안은 여전히 고요하다. 여름 오후 태양 광선의 홍수 안에 갑자기 실내로 들어가자, 눈꺼풀 속 이 쑤시듯이 아파 왔다. 집안에는 물에 탄 것 같은 옅은 어둠이 떠돌고 있었다. 몇 십 년 전부터 거기에 늘어붙어 버 린 것 같은 그런 어둠이다. 특히 어둡다 할 만하지도 않은, 옅은 어둠이었다. 공기는 시원했다. 에 어 컨디셔너의 시원함이 아니고, 공기가 움직이고 있는 시원함이었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들어와, 어딘가로 빠져 나간다. "이쪽이야." 라고 그녀는 말하고, 똑바로 뻗은 복도를 퉁퉁 소리를 내면서 걸어갔다. 복도에는 몇 개인가 유리창이 붙어 있었지만, 이웃집 담과 너무 자란 느티나무 가지가 광선을 차단하고 있 었다. 복도에서는 여러 가지 냄새가 났다. 어느 냄새도 기억에 있는 냄새였다. 시간이 만들어 내 는 냄새다. 시간이 만들어 내고, 그리고 언젠가 또 시가니 지워 버리는 냄새다 낡은 양복이나 낡 은 가구, 낡은 채이라든가, 낡은 생활의 냄새다. 복도 막다른 곳에 계단이 있었다. 그녀는 뒤를 돌 아보고 내가 쫓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가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오래 된 나무 판자가 끽끽 소리를 냈다. 계단에 올라서자 겨우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층계참에 달려 있는 유리창에는 커튼도 없었고, 여름 태양이 마루 위에 빛의 풀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층에는 방이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창고이며, 또 하나가 제대로 된 방이었다. 가라앉은 옅은 그린 도어에, 작은 불투명한 유리창이 붙어 있었다. 그린 색 페인트는 조금 터져 있었고, 노브는 손잡이 부분만이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 다. 그녀는 입을 오므리고 휴 하고 숨을 토해 내고는 거의 빈 보드카 토닉 글라스를 창틀에 놓고, 원피스 주머니에서 열쇠다발을 꺼내, 큰 소리를 내고 문을 열었다. "들어와." 하고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방에 들어갔다 안은 캄캄했고 찌는 듯했다. 더운 공기가 들어 차 있었다. 꼭 닫은 덧문 틈에서 은박지 같이 납작한 광선이 몇 줄기인가 방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끄무레하게 먼지가 떠있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커튼 을 젖히고 유리창을 열고, 덧문을 잡아당겼다. 눈부신 빛과 시원한 남녘 바람이 금방 방안에 찼 다. 방은 전형적인 틴에이지 여자아이의 방이었다. 창가에 책상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 작은 나무 침대가 있다. 침대에는 주름살 하나 없는 코럴 블루의 시트가 덮여 있었고, 같은 색 베개가 놓여 있었다. 발 쪽에는 담요가 한 장 개켜져 있었다. 침대 옆에는 양복장과 드레서가 있었다. 드레서 앞에는 화장품이 몇 개인가 놓여 있었다. 헤어 브러시라든가 작은 가위라든가 립스틱이라든가 콤 팩트 따위, 그런 것이다. 특히 열심히 화장을 하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노트라든가 사전이 있었다. 불어 사전과 영어 사전이었다. 괘 많이 사용한 것같이 보였다. 그것도 함부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꼼꼼하게 사용한 그런 느낌이었다. 펜꽂이에는 필기 도구가 대충 늘어놓여 있었다. 지우개만은 한쪽이 동그랗게 닳아 있었다. 그리고 자명종 시계와 전기 스탠드와 유리 문진, 그 어느 것이나 간소했다. 나무 벽에는 새의 원색화가 다섯 장 그리고 숫자만 있는 캘린더가 걸려 있었다. 책상위를 손가락으로 훑어보니, 손가락이 먼지로 하얘졌다. 한 달 정도 분량의 먼지였다. 캘린더도 6월의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방은 그 또래 여자아이 것치고는 간소한 것이었다. 인형도 없고 록 싱어 사진도 없 다. 화려한 장식도 없고, 꽃무늬 쓰레기통도 없다. 벽에 달아맨 책장에는 여러 가지 책이 꽂혀져 있었다. 문학 전집이 있기도 하고, 시집이 있기도 하고, 영화잡지가 있고, 회화전의 팜플렛이 있었 다. 영어 페이퍼 북도 몇 권인가 놓여 있었다. 나는 이 방 주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헤어진 애인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덩치가 큰 중년 여인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을 쭉 쫓 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이 나를 향하고 있을뿐이지, 사실 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아서 그녀 뒤의 석회 벽을 바라보았다 벽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단지 하얀 벽이다. 가만히 벽을 바라보고 있자, 위쪽이 앞으로 기울 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려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 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광선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뭐 마실래?"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거절했다. "사양하지 않아도 돼. 뭐 잡아먹지는 않을 테니깐." 그럼 같은 걸로 엷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하고 나는 그녀의 보드카 토닉을 가리켰다. 그녀는 오 분 뒤에 보드카 토닉 두 잔과 재떨이를 갖고 돌아왔다. 나는 내 보드카 토닉을 한 입 마셨다. 전혀 엷지 않았다. 나는 얼음이 녹는 것을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 아마도 내 것보다 훨씬 짙은 보드카 토닉을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가끔 아삭아삭하는 소 리를 내면서 얼음을 씹었다. "몸이 튼튼해."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취하지를 않지."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하지만 알코올과 경쟁해서 이긴 사람은 없다. 자기 코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릴 때까지 여러 가지 일을 깨닫지 못한다는 얘기일 뿐 이다. 아버지는 내가 열 여섯 살 난 해에 죽었다. 아주 간단한 죽음이었다. 그 전에 살아 있었는 지조차 잘 기억 나지 않을 만큼 간단한 죽음이었다. 그녀는 쭉 잠자코 있었다. 글라스를 흔들 때마다 얼음 소리가 났다 열어 놓은 창에서 가끔 시 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바람은 남쪽에서 언덕을 건너서 왔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조용한 여름의 오후다. 어딘가 먼 곳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양복장을 열어 봐."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양복장 앞에서 , 시킨 대로 양쪽으로 열게 되어 되어있는 장문을 열었다. 장안에는 옷이 가득 걸려 있었다. 반은 원피스고, 나머지 반은 스커트나 블라우스나 재킷이었다. 전부 여름 것이다. 낡은 것도 있고 거의 입지 않은 것 같은 새것도 있었 다. 스커트 길이는 대부분이 미니였다. 취미도 물건도 나쁘지 않았다. 특별히 남의 눈을 끄는 것 은 아니었지만, 매우 인상이 좋다. 이만큼 옷을 갖추고 있으면 한 여름내, 데이트할 때마다 다른 복장을 할 수가 있다. 한참 양복들을 보고 나서 문을 닫았다. "멋있는데요." 라고 내가 말했다. "서랍도 열어봐."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고 나서 단념하고 양복장에 붙어 있는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여자아이가 방을 비운 사이에 방안을 뒤진다는 것은 비록 모친의 허 가가 떨어졌다 하더라도 정당한 행위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지만, 거역하는 것 또한 귀찮 다. 아침 열한 시부터 술을 마시는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제일 위 커다란 서랍에는 진 바지라든가 폴로 셔츠, 티셔츠가 들어 있었다. 세탁되고, 잘 개켜져, 주름 하나 없었다. 두 번째 서랍에는 핸드백이라든가 벨트라든가 손수건, 블레이슬렛이 들어 있었다. 헝겊 모자도 몇 개인가 있었다. 세 번째 서랍에는 속옷과 양말이 들어 있었다. 모든 것이 청결하 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뚜렷한 까닭도 없이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왠지 조금 마음이 무거 워지는 그러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서 서랍을 닫았다. 여자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창 밖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보드카 토닉 그라스는 거의 비어 있었다. 나는 의자에 돌아와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유리창 밖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고, 그 경사가 끝난 지점에서, 또 새로운 다른 언덕이 시작되고 있었다. 초록색 기복이 어디까지고 계속 되었고, 거기에 달라붙듯이 주택가가 늘어서 있었다. 어느 집에도 정언이 있고, 어느 정원에도 잔 디가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하고 그녀는 창에 눈길을 둔 채 말했다. "그녀를 말이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라고 내가 말했다. "옷을 보면 여자 일은 대충 알 수가 있지."하고 여자가 말했다. 나는 애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전혀 생각 이 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 관해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전부가 막연한 이미지 였다. 내가 그녀의 스커트를 생각해 내려고 하면은 블라우스가 사라져 없어지고, 모자를 생각해 내려고 하면, 그녀의 얼굴은 누군지 다른 여자아이의 얼굴이 되었다. 겨우 반년 전의 일인데 무엇 하나 생각나 지 않았다. 결국, 내가 그녀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모르겠습니다."라고 나는 되풀이했다. "느낌만으로도 괜찮다니깐. 어떤 것이라도 좋아. 아주 조금이라도 들려주면 된다고."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 보드카 토닉을 한 입 마셨다. 얼음은 거의 녹았고, 토닉 워터는 달콤 한 물같이 변해 있었다. 보드카의 독한 냄새가 목을 지나, 위에 들어가 희미한 따뜻함으로 화했 다. 유리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책상 위의 하얀 담뱃재를 흩날렸다. "대단히 인상이 좋은 단정한 사람 같아요." 하고 내가 말했다. "별로 남한테 부담을 주지도 않 고,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성적은 중의 상 클래스, 학교는 여자 대학이나 전 문대. 친구는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사이는 좋다. ...맞습니까?" "계속해 보렴." 나는 손안에서 글라스를 몇 번인가 돌리고 나서 다시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 이상은 모르겠어 요. 게다가 도대체 지금 말한 것도 맞았는지 어떤지 전혀 자신이 없는걸요." "대체로 맞았어." 라고 그녀는 표정없이 말했다. 그녀의 존재가 조금씩 방안으로 스며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희미한 하얀 그 림자 같았다 .얼굴도 손도 발도 아무것도 없다. 빛의 바다가 만들어 낸 아주 작은 굴절 가운데 그 녀는 존재하였다. 나는 보드카 토닉을 또 한 모금 마셨다. "보이 프렌드는 있습니다. " 하고 나는 말을 계속했다. "하나나 둘, 모르겠는데요, 어느 정도의 사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문제는 ... 그녀가 여러 가지 일 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이라든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든가, 자기가 구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남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뭐 그런 것에 대해서 말입니 다." "그렇지." 하고 조금 있다가 그녀가 말했다. "자네가 말하는 뜻을 알겠어."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내 말이 뜻하고 있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한테서 누구에게로 향해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주 피곤했고, 자고 싶었다. 자 버리면, 여러 가지 일이 확실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이 확실해 진다고 해서 무엇인가가 편해지 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뿐 그녀는 쭉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도 잠자코 있었다. 십 분이나 십 오 분, 그렇게 하고 있 었다. 심심했기 때문에 결국 보드카 토닉을 반 마셔 버렸다. 바람이 조금 강해지고, 느티나무의 둥그런 잎사귀가 흔들렸다. "붙잡아 두어서 미안해." 하고 한참 뒤에 여자가 말했다. "잔디가 굉장히 깨끗이 깎여서 말이지. 기뻤거든." "천만 에요."라고 내가 말했다. "돈을 치르지." 하고 여자는 말하면서 원피스 주머니에서 커다란 하얀 손을 집어넣었다. "얼마 지?" "나중에 제대로 정리된 청구서를 보내드립니다. 은행으로 넣어 주세요." 라고 나는 말했다. "흠." 하고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또 같은 계단을 내려와서 똑같은 복도를 되돌아와 현관으로 나왔다. 복도와 현관은 갈 때하고 똑같이 냉랭하고, 어둠에 싸여 있었다. 어렸을 때의 여름, 얕은 강을 맨발로 거슬러 올라 가다가, 커다란 철교 아래를 지나갈 때 꼭 이런 느낌이 들었다 캄캄하고, 갑자기 무의 온다고 내 려간다. 그리고 모래밭이 이상하게 미끌미끌한 느낌이 난다. 현관에서 테니스슈즈를 신고 문을 열 었을 때는 정말이지 마음이 놓였다. 햇빛이 내 주위에서 넘치고 있었고, 바람에서는 초록색 냄새 가 났다. 벌이 몇 마리인지 졸린 듯한 날개 소리를 내면서 울타리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굉장히 잘 깎여졌어."라고 그녀는 정원의 잔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잔디를 바라보았다. 정말 굉장히 깨끗이 깎여져 있었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여러 가지 정말이지 여러 가지를 끄집어내고서 그 가운데서 구겨진 일만 엔 짜리를 골라냈다. 그렇게 낡은 지폐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구겨져 있었다. 십사오 년 전에 일만 엔이라면 대단한 액수다. 조금 주저했지만, 거절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받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여자는 아직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 지 잘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잘 알 수 없는 채 오른손에 든 글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글라스는 비워져 있었다. 그래 서 또 나를 보았다. "또 잔디깎기 일을 시작하면 우리 집에 전화하렴. 언제라도 좋으니까 말야." "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샌드위치와 술 감사했습니다. " 그녀는 목 속에서 응인지 흥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그리고 나서 빙글 등을 돌리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차 시동을 걸고, 라디오 스위치를 켰다. 벌써 훨씬 전에 세시가 지나 있었 다. 도중에 졸음을 쫓기 위해 드라이브인에 들어가 코카콜라와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스파게티는 지독히 맛이 없어서, 반밖에 먹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던 것이다. 안색 이 나쁜 웨이트리스가 그릇을 갖고 가 버리자, 나는 비닐 의자에 앉은 채 잠깐 졸았다. 가게는 텅 비어 있었고 적당하게 쿨러가 돌고 있었다 아주 짧은 잠이었기 때문에 꿈 같은 것은 꾸지 않았 다. 잠 자체가 꿈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눈을 떴을 때는 태양 광선이 얼만가 약해져 있었다. 나 는 다시 한 잔 콜라를 마시고, 아까 받은 일만 엔짜리로 셈을 치렀다.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열쇠를 대시보드에 올려놓은 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여러 가지 자질구 레한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 결국 나는 아주 피곤한 것이었다. 나는 운전하는 것을 단념하고 시트에 깊이 앉아, 다시 한 대 담배를 피웠다 모든 것이 먼 세계에서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쌍 안경을 반대로 들여다볼 때처럼, 모든 것이 이상하게 선명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당신은 나한테 여러 가지를 요구하고 있었겠지만, 하고 연인은 썼다. 나는 아무래도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요구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제대로 잔디를 깎는 일뿐이야, 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기계로 잔디를 깎고, 갈퀴로 훑어 모으고, 그리고 잔디깎기 가위로 제대로 정리한다. 그뿐이라고, 나는 그걸 할 수 있 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소리내어 말해 보았다. 답이 없었다. 십 분 뒤에 드라이브인의 매니저가 차 옆에 와서 허리를 굽히고, 괜찮아 하고 물어 왔다. "조금 어질어질했어요."라고 내가 말했다. "더우니까 말야. 물이라도 갖다 줄까?"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나는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 동쪽을 향해 달렸다. 길 양편에는 여러 가지 집이 있었고, 여러 가 지 정원이 있었고, 여러 사람들의 여러 생활이 있었다. 나는 핸들을 잡으면서 그런 풍경을 쭉 바 라보고 있었다. 등뒤에서 잔디 깎는 기계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한 번도 잔디를 깎지 않았다. 언젠가 잔디가 있는 집에 살게 되면, 나는 또 잔디 를 깎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훨씬 더 먼 나중의 일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때가 되어도, 나 는 굉장히 꼼꼼하게 그리고 가지런히 잔디를 깎을 것임에 틀림없다.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는 당신이 그 이름에서 상상하는 것만큼 아마 그렇게 상상하는 것이 아 닌가고 나는 상상하는 것이지만 멋진 거리가 아니다. 우선 그 거리에는 나무 따위는 단 한 그루 도 없다 .잔디밭도 공원도 물을 마실 곳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그린스트리트와 같은 근사한 이름 이 붙여졌는지, 이건 하나님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도 모를지도 모르겠다. 아주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린 스트리트는 시드니에서도 가장 시원찮은 거리다 좁고 혼잡하고 더럽고 가난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나고 환경이 나쁘고 낡았고, 게다가 기후가 나쁘다. 여름에는 지독히 춥고, 겨울에는 지독히 덥다. 여름에는 지독히 춥고, 겨울에는 지독히 덥다. 라는 말은 왠지 이상하다. 비록 남반구와 북반구 에서는 계절이 반대가 된다고는 하지만 현실 문제로서는 더운 것이 여름이고, 추운 것이 겨울이 기 때문이다. 즉 8월이 겨울이고, 2월이 여름이 되는셈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람들은 모두 그 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모든 사물을 그렇게 간단 명쾌하게 처리해 버릴 수는 없다. 거기에는 계절 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커다란 문제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즉 12월이 됐기 때문에 겨울인 지, 아니면 추워졌기 때문에 겨울인지, 하는 문제다. "그런 건 간단해 추워졌으니까 겨울이지"하고 당신은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잠깐 기다려 줬으면 좋겠다. 만일 추워졌으니까 겨울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섭씨 몇 도 이하가 되어야 겨울이 란 말인가? 한겨울에 굉장히 따뜻한 날이 며칠 계속되면 따뜻해졌으니까 봄이 되는 것인가? 그것봐, 잘 모르겠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겨울이니까 추워야 한다. 라는 사고 방식은 너무 단면적인 게 아닌가하고 나는 생각하 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주위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라도 12월에서 2월까지는 겨울이 라고 부르고 6월에서 8월 까지를 여름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겨울은 덥고, 여름은 춥다. 이런 연유로 주위 사람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건 어쨌든 상관이 없다 .그린 스트리트 이야기를 하자.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드니에서 가장 시원찮은 거리다. 어쩌면 남반 구 전체에서 가장 시원찮은 거리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서 지금, 10월의 오후, 나는 빌딩 삼층 에 있는 사무실에서 그린 스트리트의 한가운데쯤 되는 곳을 내려다보고 있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여러 가지가 보인다. 햇볕에 그을은 알코올 중독자 부랑자가 개천에 한쪽에 다리를 처박은 채 낮잠을 자고 있다. 요란한 옷차림을 한 애송이 건달이 점퍼 주머니에 체인을 집어넣고 짤랑짤랑 소리를 내면서 거 리를 돌아다니고 있다. 반쯤 털이 빠진 병이난 고양이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일곱 살이나 여덟 살쯤 된 어린 아이가 송곳으로 차례차례 자동차 타이어에 펑크를 내고 있다. 벽돌 벽에는 색색 가지의 구토물이 말라서 달라붙어 있다. 거의 모든 상점은 셔터를 내린 채다. 모두 이 거리에 정이 떨어져, 문을 닫고 다른 어딘 가로 도망가 버린 것이다. 여전히 가게를 열고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은 전당포와 술집과 찰리의 피자 스탠드뿐이다. 하이힐을 신은 젊은 여자가 깜나 에나멜 백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똑똑 하는 날카로운 구두 소 리를 내면서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마치 누군가한테 쫓기고 있는 것 같지만, 쫓아가는 사 람은 아무도 없다. 두 마리 들개가 거리 한가운데서 스쳐 지나간다. 한 마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나가고, 또 한 마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간다. 두 마리 다 걸으면서 땅바닥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엇 갈릴 때조차도 얼굴을 들지 않는다.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라는곳은 이런 거리다. 나는 항상 생각하는 일이지만, 만일 지구상의 어 딘가에 초 특대 사이즈 똥구멍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여기 외에는 있을 수 없다. 즉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말이다. 내가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에 사무실을 갖고 있는 데는, 물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가난 하기 때문은 아니다. 여기의 집세는 물론 굉장히 싸지만, 나는 별로 돈이 궁하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넘칠 정도의 돈을 갖고 있다. 시드니의 번화가에 있는 십육 층짜리 신축 빌딩을 한꺼번에 열 개 살 수도 있고 최신식 항공 모함을 제트기 오십 대를 껴서 살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보기 도 지겨울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금광왕이었고, 그 아버지가 나 하나한테 전 재산을 남겨놓고 이 년 전에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돈을 쓸데가 없어서 은행에 몽땅 집어넣었는데 이번에는 그 이자를 다 쓸데가 없다. 그래 서 그 이자도 그 은행에 집어넣어 두었는데, 이번에는 또 그 이자가 는다. 생각만 해도 정말이지 지겹다. 내가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에 사무실을 마련한 것은, 여기에 있는 한 아는 사람 같은 것은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같은 곳에 올 리가 없다. 누구나 이 거리를 굉장히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저것 잔소리를 할 친 척도 어지 않고, 주제넘게 간섭하는 친구도 오지 않고, 돈이 목적인 여자아이도 오지 않는다 .고 문 변호사가 재산 운영에 관한 상담 때문에 오는 일도 없고, 은행 총재가 아첨하러 오는 일도 없고, 롤즈 로이스 세일즈맨이 팜플렛을 한 다발 끌어안고 문을 노크하는 일도 없다. 전화도 없다. 편지는 찢어 버린다. 정말로 조용하다. 나는 시드니의 그린스트리트에서 사립 탐정 사무실을 열고 있다. 즉 나는 사립 탐정이다. 간판 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사립 탐정. 싸게 사건을 맡습니다. 단 재미있는 사건에 한합니다. 간판의 문구를 한자를 빼고 쓴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에는 한자를 읽 을 수 있는 사람 따위는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세 평 정도 되는 지독히 더러운 방이다. 벽에도 천장에도 더 이상 낄 곳이 없을 만큼 누런 색 얼룩이 달라붙어 있다. 문은 잘못 달려서 닫는 데 고생하고, 닫아 버리면 이번에는 여는 데 고생한다. 문 유리에는 사립탐정 사무실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다. 도어 노브에는 재실 부재라 고 나는 문구가 앞뒤에 씌어진 표찰이 걸려 있다. 재실이라는 쪽이 겉으로 되어있으면 나는 사무 실에 있다. 부재라고 하는 쪽이 겉으로 되어 있으면, 나는 외출중이다. 사무실에 없을 때의 나는 옆방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든지, 피자 스탠드에서 웨이트리스인 찰리 하고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든지, 그 어느쪽인가다. 찰리는 나보다 몇 살 아래의 귀여운 여자아이 다. 중국인의 피가 반 섞여 있다. 시드니가 넓다고 해도 , 중국인의 피가 반 섞여 있는 여자아이 는 찰리밖에 없다. 나는 찰리를 매우 좋아한다. 찰리도 나를 매우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남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일인 것이다 . 사립 탐정이라는 것은 돈이 많이 벌려? 라고 찰리가 나에게 묻는다. "아니 안 벌려"하고 나는 대답한다. "돈이 벌려 봤자, 돈이 들어올 뿐이잖아."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하고 찰리는 말한다. 찰리는 내가 대재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재실이라는 표찰이 걸려 있을 때, 나는 대개 사무실 비닐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글렌 글드의 레코드를 듣고 있다. 나는 글렌 글드의 피아노를 무척 좋아한다. 글렌 글드의 레코드만 서 른여덟 장이나 갖고 있다. 나는 아침에 제일 먼저, 오토 체인지 플레이어에 레코드를 여섯 장 올려놓고, 오래오래 글렌 글 드의 레코드를 듣는다. 그리고 맥주를 마신다. 글렌 글드에 싫증이 나면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튼다. 찰리는 AC/DC를 좋아한다. 사립 탐정 사무실이라고 해도 손님은 거의 없다.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의 주민들은 뭔가를 해결하기 위해서 돈을 쓴다는 일은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 제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한 가지씩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럭저럭 타협해서 지내려는 기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쨌든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는 사립 탐정한테는 결코 바람직한 거리는 아니다. 아주 어쩌다 싸게 사건을 맡습니다. 라는 말에 끌려서 손님이 올 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물론 나한테는 이라는 이야기지만 극히 시시한 사건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 집 닭이 계란을 이틀에 한 번밖에 낳지 않게 된 것은 왜일까요라든가 매일 아침 우리 집 우유를 누가 훔쳐 가는데, 범인을 잡아서 혼 좀 내줴요라든가 친구가 꿔간 돈을 돌 려 주지 않는데, 돌려 주도록 말 좀 해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따위의 일이다. 나는 그런 시시한 일은 전부 거절해 버린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나는 누군가의 닭이나 우유 나 째째한 빚 처리를 하려고 사립 탐정이 된 것 은 아닌 것이다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은 좀더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예를 들자면 이 미터 정도의 키가 큰 파란 의안을 한 집사가 까만 색 리무 진을 타고 와서 백작 따님의 루비 보석을 지키는 데 한몫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든가 그런 사건 말이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백작 따님 같은 것은 없다. 백작은커녕 자작도 남작도 없다. 정말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아주 한가하다. 나는 손톱을 자르거나 글렌 글드의 레코드를 듣거나, 골 동품 권총을 손질하거나, 피자 스탠드에서 찰리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하면서 시간 을 보낸다 . "당신도 사립 탐정 따위 같은 짓 그만두고, 제대로 자리잡으면?" 하고 찰리는 말한다. "인쇄공 이라든가 그런 것 말이지" 인쇄공,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찰리하고 결혼하고 인쇄공이 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현재로는 나는 사립 탐정이다. 그 양의 모습을 한 작은 사나이가 방에 들어선 것은 금요일 오후였다. 양의 모습을 한 작은 사 나이는 빠른 걸음으로 방에 들어오자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나 서 문을 닫았다. 문은 좀처럼 잘 닫히질 않았다. "안녕하세요."하고 작은 사나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라고 나는 말했다. "에..." "양사나이라고 불러 주세요."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양사나이씨." 하고 내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사립탐정이신 분이죠?" "그렇습니다. 내가 사립 탐정입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플레이어 스위치를 끄고 글렌 글드의 인벤션을 레코드 선반에 집어넣고, 빈 맥주 깡통을 치우고, 손톱깎이를 서랍에 집어넣고, 양사나이에게 의자를 권했다. "사립 탐정을 찾고 있었어요."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네." 하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사립 탐정을 찾을 수 있는지 몰랐거든요." "음. 음." "그래서 모퉁이에 있는 피자 스탠드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여자분이 여기에 가면 된다고 가르 쳐 주었습니다. " 찰리다 "양사나이씨"라고 내가 말했다. "용건을 들어 봅시다. " 양사나이는 양 모양의 옷을 입고 있었다. 양 모양의 옷이라고 해도 째째하게 헝겊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제대로 된 진짜 양털로 만든 것이다. 꼬리도 달려 있고 뿔도 달려 있다. 손과 발과 얼굴 부분만 뚫려 있다. 눈에는 까만 마스 크를 하고 있다 .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어서 이 남자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지금은 가을도 꽤 깊어졌으니까, 이런 옷차림을 하고 있으면 상당히 땀이 날 것이다. 게다 가 거리를 걷고 있으면 아이들이 놀려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정말 모르겠다. "만일 더우시다면" 하고 내가 말했다. "사양하지 마시고, 응 그 상의를 벗으시죠." "아니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이 옷차림이 익숙하거든요." "그러면 양사나이 씨"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용건을 말씀해 주시죠." "실은 제 귀를 찾아 주셨으면 하는데요." 라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귀?" 하고 내가 물었다. "즉 제 옷에 붙어 있던 귀 말입니다. 보세요. 이 자리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양사나이는 손가락 으로 머리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동자도 잡아당기듯이 오른쪽 위로 올라갔다. "이쪽 편 귀가 찢어져서 없어졌죠." 분명히 양옷의 오른쪽 귀가 찢겨 없어져 있었다. 왼쪽 귀는 제대로 붙어 있었다. 나는 양이 어 떤 귀를 하고 있는지 그런 일은 그때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양의 귀라는 것은 납작하고 한 들한들하고 옆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래서 귀를 찾아 주셨으면 하는데요."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나는 책상 위의 메모와 볼펜을 들고, 볼펜 꼭지로 툭툭하고 책상을 두드렸다. "자세한 사정을 들려주십시요."라고 내가 말했다. "없어진 것은 어제입니까? 찢어 버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없어진 것은 삼 일 전입니다. 찢은 것은 양박사입니다 .그리고 나는 양사나이입니다." "저런저런" 하고 내가 말했다. "좀더 자세하게 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내가 말했다. "양박사니 뭐니 말씀을 하셔도,, 저 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 "그러면 말씁드리죠."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이 세상에는 아마 당신은 모르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약 삼천 명의 양사나이가 살고 있습니 다.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알래스카에도 볼리비아에도 탄자니아에도 아이슬란드에도, 온갖 곳에 양사나이가 살고 있습니 다. 그러나 이것은 비밀 결사라든가 혁명 조직이라든가 종교 단체라든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 컨대 우리들은 단지 양사나이고, 양사나이로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양사 나이로서 사물을 생각하고, 양사나이로서 식사를 하고, 양사나이로서 가정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들은 양사나인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잘 알 수는 없었지만 흠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 앞길을 막는 사람들도 몇인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양박사입니다. 양박 사의 본명은 나이도 국적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한 사람인지, 복수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나이가 든 노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양박사가 사는 보람은 양사나이의 귀를 찢어서 컬렉션하는 것입니다. " "그건 또 어째서?" 하고 나는 말했다. "양박사는 양사나이들이 사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술로 귀를 찢어 버 리는 거죠. 그리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 "상당히 난폭한 사람 같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어딘가에서 기분 나쁜 일을 당해서 성격이 삐뚤어진 거겠죠. 그러니까 나로서는 귀만 돌아오면 되는 겁니다. 양박 사한테 원한은 없습니다." "좋습니다. 양사나이씨."라고 나는 말했다. "당신의 귀를 찾아 드리죠." "감사합니다.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비용은 하루에 일천 엔, 귀를 찾으면 오천 앤, 삼 일분 비용은 지금 지불해 주세요." "선불입니까?" "선불입니다."라고 내가 말했다. 양사나이는 가슴 주머니에서 커다란 지갑을 꺼내 꼼꼼하게 접은 천 엔짜리를 석 장 꺼내더니, 서글픈 듯이 책상 위에 놓았다. 양사나이가 돌아간 뒤에 나는 천 엔짜리의 주름을 펴고, 내 지갑에 집어넣었다. 천 엔짜리에는 얼룩이라든가 냄새라든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피자 스탠드에 가서 안초비 피 자하고 생맥주를 주문했다. 나는 하루 세 끼 피자 파이를 먹는다. "겨우 일거리가 생겼네."하고 찰리가 말했다. "그래, 바쁘다고."라고 나는 피자 파이를 먹으면서 말했다. "양박사를 찾지 않으면 안 되거든." "양박사라면 찾을 것도 없어, 이 근처에 살고 있는데 뭐. 가끔 우리 집에 피자를 먹으러 오는 걸." 하고 찰리가 말했다. "어디에 살고 있단 말이야?" 하고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런 건 몰라. 직접 전화 번호부를 조사해 보면 되잖아?" 나는 설마 하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전화번호부의 양자 페이지를 조사해 보았다. 양박사의 전화번호가 거기에 기재되어 있었다. 양사나이의 전화 번호까지 있었다. 정말 어떻게 된 세상일까. 양사나이(무직)...3649847 양정(술집)...4972001 양박사(무직)...2026374 나는 수첩을 꺼내서 양박사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메모했다. 그리고 나서 맥주를 마시고 나머지 피자를 먹었다. 사건은 의외로 빨리 끝날 것 같았다. 양박사의 집은 그린 스트리트의 서쪽 끝에 있었다. 벽돌로 만든 자그마한 집으로, 정원에는 장 미꽃이 피어 있었다. 그린 스트리트에서는 보기 드물게 단정한 집이었다. 물론 꽤 낡아서 부실해 진 곳은 많았지만, 적어도 집으로는 보인다. 나는 겨드랑이 밑의 자동 권총의 무게를 확인하고 선글라스를 쓰고, 팔리아치의 서곡을 휘파람 을 불면서 집 주위를 빙 일주해 보았다. 특별히 별다른 구석은 아무데도 없었다. 집안은 조용했고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창에는 새하얀 레이스 커튼이 달려 있었다. 아주 조용하고 그리고 조촐해 서, 양사나이의 귀를 찢거나 하는 그런 인물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현관으로 들어가 보았다. 문패에는 양박사라고 되어 있다. 틀림없다. 우편함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신문, 우유 등 사절이라는 종이 쪽지가 붙어 있었다. 양박사네 집은 찾아냈지만, 이제 어떡하면 좋을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너무 쉽게 집을 찾아 냈기 때문이다. 원칙대로라면 이것저것 복잡한 일이 있거나, 이것저것 우리하거나 해서 겨우 집을 찾아내야 하는 법인데, 이렇게 간단하게 찾아내 버리고 나면 아무래도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 법이다. 이런 것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나는 바하의 주여, 인류의 소망의 기쁨이요를 휘파람으로 불면서, 이제 어떻게 하면 될지를 생각해 보았다. 제일 간단한 것은 초인종을 누르고, 양박사가 나오면 죄송합니다. 양사나이의 귀를 돌려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 정말 간단하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나는 초인종을 열 두 번 눌렀다. 그리고 문 앞에서 오 분간 기다렸다. 대답이 없었다. 집안은 조용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참새가 정원 잔디 위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내가 단념하고 이제는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문이 쾅 열리면서, 덩치가 큰 백발 노인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굉장히 무서운 인상의 노인이다. 나는 할 수 있다면 그대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야아, 시끄러워." 하고 노인이 소리쳤다. "남이 모처럼 기분 좋게 낮잠 자고 있는데, 너는 도대 체 ...:" "양박사시죠?" 하고 내가 질문했다. "거기에 종이가 붙어 있지 않은가, 자네는 한자도 못 읽어?" 잘 들어, 신문, 우유..." "한자는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신문이라든가 우유 세일즈맨이 아닙니다. 저는 사립 탐정입니 다. " "사립 탐정? 뭐든지 똑같아. 그런 거 일없어." 양박사는 그렇게 말하고 쾅 하고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나는 발을 끼워서 막아 버렸다. 문이 발목에 부딪혀서 굉장히 아팠지만 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참았다. "당신은 일이 없으셔도 저는 일이 있거든요." 하고 내가 말했다. "알게 뭐야."라고 말하면서 양박사는 내 발목을 구두 끝으로 걷어찼다. 다리가 부서지는 게 아 닌가 할 정도로 아팠지만, 나는 이것도 참았다. "냉정하게 얘기합시다."하고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이거라도 먹어라."하고 양박사는 말하자마자 가까이에 있는 화병을 집어서 내 머리를 힘껏 내 리쳤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의식을 잃었다. 나는 우물물을 길어 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서, 그 물을 커다란 다라이에 넣고 있었다. 다라이에 물을 가득 차면 악어가 와서 그 물을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 버 린다. 다라이에 또 물이 가득 차면, 이번에는 다른 악어가 와서 그 물을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 버 린다. 그 일의 되풀이였다. 나는 열 한 마리까지 악어를 셌다. 그리고 나서 정신이 들었다. 주위는 캄캄했다. 하늘에는 별이 나와 있었다. 시드니의 밤하늘은 아주 아름답다. 나는 양박사 의 문 앞에 드러누워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지갑도 자동 권총도 그냥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고, 선글라스를 가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러 볼까 생각했지만, 머리가 지독히 아팠기 때문에, 우선 오늘은 돌아가기로 했 다. 나는 이미 오늘 하루치 이상의 일을 했다. 의뢰인의 이야기를 들었고, 선금을 받았고, 범인의 집을 찾아냈고, 발목을 걷어차이고, 머리를 맞았다. 나머지는 내일 하면 된다. 나는 피자 스탠드에 들러서 찰리한테 상처치료를 받았다. 지독한 혹이네 하고 찰리는 찬 수건으로 내 머리를 닦으면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 야?" "양박사한테 맞았어."하고 내가 말했다. "설마." 하고 찰리가 말했다. "정말이야." 하고 내가 말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자기 소개를 했더니 화병으로 내리쳤어." 찰리는 혼자 한참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 동안 머리를 문지르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함께 가자." 하고 찰리가 말했다. "어딜 가려고."하고 내가 말했다. "양박사한테 가지 어디 가겠어." 하고 찰리가 말했다. 찰리는 양박사네 집의 벨을 계속해서 스물 여섯 번이나 눌렀다. "야. 시끄러워."하고 양박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신문도 우유도 사립 탐정도..." "뭐가 시끄러워야. 이 멍텅구리."하고 찰리가 소리쳤다. "뭐야 찰리 아냐"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당신이 이 사람 머리를 화병으로 팼다면서?" 하고 찰리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 다. "응, 뭐랄까, 응 ,거 말이지." 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이 사람은 내 애인이라고." 양박사는 난처한 얼굴을 하고 머리를 득득 긁었다. "거 미안하게 되었는데, 몰랐거든. 아니 그 런 줄 알았더라면 그런 짓을 안 했을 텐데 말이야." 나도 그런 건 몰랐다. 내가 찰리의 애인이라니 말이지. "자 어쨌든 들어오지 그래"라고 말하면서 양박사는 문을 활짝 열었다. 나와 찰리는 안으로 들어 갔다. 문을 닫으려고 하다가 또 발목을 부딪혀 버렸다. 정말 재수가 없다. 양박사는 우리를 거실로 안내하고 포도 주스를 내왔다. 잔이 더러웠기 때문에 나는 반밖에 마 시지 않았다. 찰리는 상관하지 않고 모두 마셔 버리고, 얼음까지 깨물어 먹어 버렸다. "자아 자,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지."라고 양박사는 나한테 말했다. "머리는 아직도 아파?" 나는 잠자코 끄덕였다 .남의 머리를 힘껏 화병으로 때리고 아직도 아퍼.라니 말이다.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 정말이지"하고 찰리는 말했다. "아냐 아냐, 최근에는 정말 사람이 싫어져서 말이지." 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게다가 신문 배달 이라든가 우유 장수라든가 그런게 시끄러워서 말이지, 모르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때리게 된다니까, 아, 잘못했어, 하지만 젊은이, 나는 신문도 읽지 않고, 우유도 마시지 않는다고." "저는 신문 배달도 아니고, 우유 장수도 아닙니다. 저는 사립탐정입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아 그렇지, 사립 탐정이었지, 잊어버리고 있었군." 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실은 양사나이의 귀를 돌려주셨으면 하고 찾아뵈었는데요." 하고 내가 말했다. "박사님께서는 삼 일 전에 슈퍼마켓의 레지스터에서 양사나이의 귀를 찢어가셨죠." "오 그렇지." 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그것을 돌려주세요."하고 내가 말했다. "싫어."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귀는 양사나이의 것입니다."라고 내가 말했다. "지금은 내 것이라고." 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나는 말하고 겨드랑이 밑에서 자동 권총을 꺼냈다. 나는 성격이 굉장히 급한 것이다 ."그러면 당신을 쏴 죽이고 귀를 갖고 가겠습니다. " "이봐요."하고 찰리가 중간에 끼여들었다. "당신은 정말 생각이 모자른다니까."하고 그녀는 나한 테 말했다. "정말이고 말고."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서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찰리가 당황해하며 말렸다. 그리고 내 발목을 힘껏 걷어차고서 권총을 재빨리 뺏어갔다. "당신도 당신이라고요."라고 찰리는 양박사에게 말했다. "왜 양사나이 귀를 돌려주지 않겠다는 거야?" "귀는 절대 안 돌려 줄거야. 양사나이는 내 적이야. 이번에 만나면 왼쪽 귀도 마저 찢어 줄거 야."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왜 그렇게 양사나이를 미워하십니까? 착한 사람이 아닙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이유 같은 게 있을 게 뭐야. 다만 그 녀석들이 미울 뿐이지. 그녀 석들이 그렇게 보기 흉한 꼴 을 하고 즐겁게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무턱대고 밉다고." "원망 증오야." 하고 찰리가 말했다. "음?" 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응?" 하고 내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은 자기도 양사나이가 되고 싶은 거라고,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반대로 양사나이를 미워하게 됐다는 얘기라고." "그런가?" 하고 양박사는 감탄한 듯이 말했다. "몰랐는데." "어째서 그런 것을 알지?" 하고 내 가 찰리한테 물어 보았다. "당신네들은 프로이트라든가 융 같은 것을 읽지 않아?" "아니." 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유감이지만."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결코 양사나이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군." 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그런 얘기가 되네요." 하고 내가 말했다. "당연하잖아." 하고 찰리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양사나이한테 아주 나쁜 짓을 해 버린 것같은 느낌이 드는데."하고 양박사가 말 했다. "그렇겠죠." 하고 내가 말했다. "당연해." 하고 찰리가 말했다. "즉, 양사나이의 귀는 돌려 줘야 한다는 얘기군." 하고 양박사가 말했다. "으음, 그렇게 되겠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지금 곧 돌려 줘요." 하고 찰리는 말했다. "하지만 이미 여기에는 없단 말이야." 하고 양박사는 말했다. "사실을 말하면 버려 버렸거든." "버리다니... 어디에 버리셨습니까?" 하고 내가 물어 보았다. "아니, 그..." "얼른 말해요."하고 찰리가 소리쳤다. "응, 사실은 말이지 찰리네 가게 냉장고 안에 집어넣어 두었어. 살라미에 섞어서 말이야. 응, 별 로 큰 악의가 있었던 것은..." 양박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찰리는 가까이에 있던 화병을 집어서 양박사의 머리 꼭대기에 힘 껏 내리쳤다. 나로서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결국 나와 찰리는 양사나이의 귀를 찾을 수가 있었다. 하긴 찾았을 때는 귀는 갈색으로 물들고, 타바스코 소스가 끼얹어져 있었다. 손님 중 한사람이 살라미 피자를 주문하고, 그 한쪽을 입에 집 어넣으려는 바로 그 순가에 우리들이 그것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위기 일발이었다. 나는 그것을 깨끗이 씻어서 치즈는 떼어냈지만 타바스코 소스의 얼굴만은 아무래도 지워지지 않았다. 양사나이는 귀가 돌아온 것을 굉장히 기뻐했지만, 갈색으로 물들고 게다가 타바스코 소스가 붙 어 있는 것을 보고는 말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 낙심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요금을 이 천 엔 깎아 주었다. 찰리가 바늘과 실을 가지고 옷에다가 귀를 붙여 주었다. 양사나이는 거울 앞 에 서서 두세 번 뛰어보았다. 귀가 흔들흔들 흔들렸다. 아주 만족스러운 듯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양박사는 경사스럽게도 양사나이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매일 양사나이의 옷 을 입고 찰리네 가게에 피자를 먹으러 온다. 양사나이가 된 양박사는 매우 행복해 보인다 이것도 전부 프로이트 덕분이다. 사건이 해결된 뒤에, 나하고 찰리는 데이트를 했다. 우리는 중국요리를 먹고 난 후에 다운타운 영화관에서 루키노비스콘티의 루드비히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그녀는 하이힐 뒤꿈치로, 나의 발목을 힘껏 걷어찼다. 너무 아파서 십 분 정도 말을 할 수 없었 다. "하지만 나를 애인이라고 했잖아."라고 십 분 후에 말을 했다. "그때는 그때고." 하고 찰리는 말했다. 하지만 찰리는 정말은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자아이란 여러 가지 거꾸로 되 는 때가 있는 법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미안해"하고 나는 영화가 끝난 뒤에 말했다 . "당신이 사립 탐 따위 바보 같은 일은 그만두고,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가서, 저금이라도 하게 되면, 다시 한 번 고려해도 좋아.'하고 찰리가 말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지겨울 정도의 예금이 있다. 하지만 찰리는 그것을 모른다. 가르쳐 줄 생각은 없다. 나는 찰리를 매우 좋아한다. 그러니까 인쇄공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나는 아직 사립 탐정이고,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에 있는 사무실의 소파에 드러누워서, 손님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스피커에서는 글렌 글드의 피아노가 흐르고 있다. 브람스의 인터메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코드다. 만일 당신이 뭔가 문제가 있으시다면, 내가 인쇄공이 되기 전에 그린 스트리트에 있는 내 사무 실 문을 노크래 주십시오. 아주 싼 가격으로 맡겠습니다. 깎아 드리기도 합니다. 단 그 것이 재미 있는 사건이라면 말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