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피플 무라카미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차 례 역자 서문/김난주 TV 피플 비행기-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하였는가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고도 자본주의 전사 가노 크레타 존비 잠 역자 서문 김난주 가끔 꿈을 꾼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꿈이다. 있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꿈 속에서 나는 내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한다. 그렇게 불쑥 일상 속에 꿈처럼 예기치 않은 비일상이 파고들 때 환타지가 시작된다. 비일상이 일상을 조금씩 파먹어들어가고, 당황한 주인공들과 그의 주변은 애매모호한 구분 속에서 조금씩 뒤틀려간다. 그리고 환타지는 가지를 뻗어간다. 과연 비일상의 침입으로 해체된 일상의 이면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그것을 파헤치는 작업은 하나의 실험이다. 단편집 은 그런 실험의 장이다. 하루키 소설에 있어, 장편과 단편의 유기적 관계는 잘 알려져 있다. 1988년 <댄스 댄스 댄스>를 발표한 이래 몇 년이나 지속된 소설의 동면기에서, 1990년에 엮어진 단편집 은 1992년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과 1994년-1995년의 <태엽감는 새 연대기>를 잇는 가교적인 소중한 작품집이다. 이 단편집에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과 <태엽감는 새 연대기>를 위한 실험의 씨앗이 거의 노이로제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철저하게 뿌려져 있다. 표제작 을 비롯한 6편의 단편으로 모두 일상에서 실재하기 어려운 모험적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설정된 상황은 소름이 끼칠 만큼 리얼리티를 띠고 우리를 환타지로 이르는 문턱에 데려다 놓는다. 최신작까지 하루키의 모든 작품이 번역 소개되어 있는 마당에, 은 뒤늦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수수께끼에 싸여있던 작품집이었다. 이제 드디어 하루키 문학의 전모가 드러난 셈이다. 올해 하루키 씨는 철인 경기에 도전할 계획이란다. 여건이 되면 응원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다. 1996년 2월 김난주 TV 피플 1 TV 피플이 내 방을 찾아온 것은 일요일 저녁 나절의 일이었다. 계절은 봄이다. 아마 봄이었을리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다지 덥지도 않고, 그다지 춥지도 않은 계절이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 여기서는 계절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일요일 저녁 나절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나는 일요일 저녁 나절이란 시각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에 부수되는 모든 것-요컨대 일요일 저녁 나절적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일요일 저녁 나절이 가까워지면, 내 머리는 어김없이 쑤시기 시작한다. 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여하튼 쑤신다. 양 관자놀이에서 일 센티미터나 일 센티미터 반 정도의 깊이에서, 부드럽고 하이얀 살덩어리가 기묘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그 살 중심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튀어나와 있는데 한참 떨어진 저편에서 누군가가 그 실의 한 끝을 살며시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다. 딱히 아픈 것도 아니다. 아파도 이상할 것은 없는데, 신기하게도 통증은 없다. 깊이 마취를 시킨 부분에 긴 바늘을 폭 찌르는 것처럼. 그리고 소리가 들린다. 아니, 소리라기보다 그것은 두터운 침묵이 어둠 안에서 일으키는 삐걱거림 같은 것이다. 윽쿠르-주샤아아타르 윽쿠르-즈샤아아아아타르, 으으으윽쿠르-즈므므므스, 하고 그런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첫 징후이다. 우선 욱씬거림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세계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한다. 들고나는 바닷물처럼 예감이 기억을 잡아당기고, 기억이 예감을 잡아당긴다. 하늘에는 날카롭게 날이 선 면도칼 같은 달이 떠 있고, 의문의 뿌리가 어두운 땅 속을 긴다. 사람들은 내게 들으란 듯이 부러 큰 소리를 내며 복도를 걷는다. 카-르스파무쿠 다부 카-르스파무쿠 다부쿠 카-르스파무쿠 쿠부, 하고 그런 소리를 들린다. 그래서 TV 피플은 일부러 일요일 저녁 나절을 노려 내 방에 찾아왔다. 마치 우울한 상념이나, 소리도 없이 비밀스레 내리는 비처럼, 그들은 어슴푸레한 시각에 슬며시 파고 들어오는 것이다. 2 우선 TV 피플의 외견에 대해 설명해 두기로 하자. TV 피플은 몸 사이즈는 나나 당신들의 그것보다 얼마간 작다. 그렇다고 눈에 띄게 작은 것은 아니다. 얼마간 작다. 대충 그렇다. 이할이나 삼할 정도. 그것도 몸의 각 부분이 모두 고르게 작다. 그러니까 작다기보다는, 축소되어 있다고 하는 편이 용어상으로는 오히려 정확할 것이다. 당신이 어디에선가 TV 피플을 본다해도, 어쩌면 처음에는 그들이 작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당신에게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인상을 안겨줄 것이다. 뭔가 석연치않은, 이라 말하면 어떨까. 틀림없이 당신은, 어쩐지 좀 이상하군,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그들을 곰곰 눈여겨보게 될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특별히 부자연스러운 곳이 없는데, 그래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TV 피플의 왜소함은 어린아이나 난쟁이의 작음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들은 어린아이나 난쟁이의 작음과는 전혀 다른다. 우리들은 어린아이나 난쟁이를 보면, 그들이 <작다>고 느끼는데, 그런 감각적 인식은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균형이 덜 잡혀 있는 체격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작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균일하게 작지는 않다. 손은 작지만 그에 비해 머리통이 커다랗거나 하는 일도 있다. 그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TV 피플의 작음은 그런 것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TV 피플의 경우는 마치 축소복사기를 사용하여 만든 것처럼, 모든 부분이 실로 기계적이고 규칙적으로 작은 것이다. 키가 칠할짜리 축소판이라면, 어깨폭도 칠할짜리 축소판이고, 다리 사이즈도 머리통의 크기도 귀의 크기도 손가락의 길이도 칠할짜리 축소판이다. 실물보다 조금 작게 만들어진 정밀한 플라스틱 모형처럼. 혹은 그들은 원근법의 모델처럼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코앞에 있는데,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마치 속임수 그림처럼, 평면이 뒤틀리고, 파도친다. 닿아야 마땅할 장소에 손이 닿지 않는다. 닿지 않아야 할 물건에 손이 닿는다. 그것이 TV 피플 그것이 TV 피플 그것이 TV 피플 그것이 TV 피플 3 그들은 모두 세 명이었다. 그들은 노크도 하지 않았고, 벨도 누르지 않았다. 안녕이라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살며시 방으로 들어왔을 뿐이었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명이 문을 열고, 나머지 두 사람이 텔레비전을 들고 들어왔다. 그렇게 큰 텔레비전은 아니었다. 소니 제품인 아주 평범한 컬러텔레비전이었다. 아마도 문은 잠겨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잠그는 걸 잊었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문을 잠그는 일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 일에 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다. 아마도 잠갔으리란 생각은 하지만. 그들이 들어왔을 때, 나는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집에는 나밖에 없었다. 그날 오후, 아내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돼 있었다. 여고 시절 사이가 좋았던 동급생들 몇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어디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할 것이다. [당신은 아무거나 적당히 먹어요.] 집을 나서기 전 아내는 말했다. [냉장고에 채소니 냉동 식품이니 이것저것 들어있으니까. 그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겠죠? 그리고 한 가지, 해가 지기 전에 빨래만 걷어들여 줘요.] 알았어, 라고 나는 말했다. 전혀 문제가 없다. 그래봐야 저녁 식사다. 고작해야 빨래다. 사소한 일이다.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사류우우웃 푸쿠루우우우츠, 하고. [무슨 말 했어요?] 아내가 물었다.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라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오후 내내 혼자서 소파에 드러누워 멍하니 있었다. 달리 할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책을 읽었다.-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새로운 소설. 음악도 조금 들었다. 맥주도 조금 마셨다.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기분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잘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잠에도 신경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 경우, 일요일 오후에는 많은 것이 그렇게 조금씩이 되고 만다. 무슨 일을 해도 전부 어중간해지고 만다. 무언가에 제대로 열중할 수가 없다. 아침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듯 느껴진다. 오늘은 이 책을 읽고, 이 레코드를 듣고, 지난번에 받은 편지의 답장을 써야지, 하고 생각한다. 오늘이야말로 책상 서랍을 정리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오랜만에 세차를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계 바늘이 두 시를 돌고, 세 시를 돌아 점점 저녁에 가까워짐에 따라, 모든 생각이 허물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언제나, 소파에 누워 어쩔바를 모른다. 귀에는 시계소리만 들린다. 타르푸 쿠 샤우스 타르푸 쿠 샤우스, 하고. 그 소리가 빗줄기처럼 주변의 사물을 조금씩 깎아내려 간다. 타르푸 쿠 샤우스 타르푸 쿠 샤우스. 일요일 오후에는 그렇게 모든 것이 조금씩 마모되어 크기가 조금씩 줄어들어 보인다. 마치 TV 피플 그 자체인 것처럼. 4 TV 피플은 나란 존재 따위 전혀 무시하고 있다. 세 사람 다, 그곳에는 나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은 문을 열고, 텔레비전을 방 가운데다 날라놓는다. 두 사람이 텔레비전을 사이드 보드 위에 올려 놓자, 한 사람이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는다. 사이드 보드 위에는 탁상 시계와 잡지가 잔뜩 놓여있다. 시계는 결혼을 축하한다고 친구가 준 것이다. 아주 소리도 크다. 타르푸 쿠 샤우스 타르푸 쿠 샤우스, 하고 그 소리는 온 방으로 울린다. TV 피플은 사이드 보드 위에 있는 그것을 치워, 바닥에 내려놓는다. 틀림없이 아내가 화를 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방안의 물건을 마음대로 움직이면 굉장히 싫어한다. 같은 물건이 같은 장소에 놓여있지 않으면, 몹시 언짢아한다. 게다가 시계를 바닥에 내려 놓으면, 나는 분명 한밤중에 발로 걷어차고 말 것이다. 나는 늘 두 시가 지나면 잠에서 깨어나 화장실에 가곤 하는데 그때는 잠이 덜 깬 상태라서, 금세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든가 부딪치든가 했다. 그리고나서 TV 피플은 잡지를 정리하여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전부 아내가 읽지 않는 잡지였다(나는 잡지를 거의 읽지 않는다. 책밖에 읽지 않는다. 나 개인적으로는 세상에 있는 잡지란 전부 싹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엘르>라든가 <마리 끌레르>라든가 <가정화보>라든가, 그런 류의 잡지다. 사이드 보드 위에 얌전하게 쌓여있는 그런 잡지들의 순서가 바뀌기라도 하면 웬만한 소동이 벌어진다. 그래서 나는 아내의 잡지 옆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들추어 본 적조차 없다. 그러나 TV 피플은 그런 일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 차례차례 잡지를 치워버린다. 그들에게 잡지를 소중하게 다루려는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들은 그것들을 그저 단순히 사이드 보드 위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싶을 뿐인 것이다. 쌓여 있던 잡지의 순서가 뒤바뀐다. <마리 끌레르>가 <크로왓상> 위에 놓인다. <가정화보>가 <앙앙> 밑에 놓인다. 그것은 실수다. 더구나 그들은 아내가 잡지에다 끼어둔 책갈피를 팔랑팔랑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책갈피가 끼어 있는 페이지에는, 아내에게 중요한 정보가 실려있다. 그것이 어떤 정보이고,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녀의 일에 관계되는 것인지, 혹은 개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일에 관계되는 것인지, 혹은 개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튼, 그녀에게 그것은 중요한 정보인 것이다. 분명 잔소리를 마구 늘어놓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친구를 만나 기분 좋게 즐기고 오면, 집안이 언제나 이 꼴로 엉망진창이라니까, 라는 둥 하며. 나는 그 대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떠올릴 수 있다. 어이구 골치야, 하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5 어찌되었건 사이드 보드 위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TV 피플은 거기에다 텔레비전을 올려 놓았다. 벽에 있는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고, 스위치를 켰다. 치직치직하는 소리가 나고 화면이 하얘졌다. 한동안 기다려 보았지만 화상이 뜨지 않는다. 그들은 리모컨으로 채털을 차례차례 바꾸었다. 하지만 전 채녈이 모두 새하얗다. 나는 안테나를 연결하지 않은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방 어딘가에 안테나에 접속하는 콘샌트가 있을 것이다. 이 맨션에 입주할 때, 관리인으로부터 텔레비전 안테나의 접속에 대해 설명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든다. 여기에 이렇게 연결하면 됩니다, 라고. 그러나 그게 어디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으니까, 그런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TV 피플은 방송을 수신하는 일에는 별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안테나의 접속 콘센트는 찾는 척도 하지 않았다. 화면이 하얀 채라도, 화상이 전혀 비치지 않아도,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스위치를 켜고 전원이 들어와 있으면, 그것으로 그들의 목적은 달성된 듯하였다. 텔레비전은 신품이다. 비록 상자에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신품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취급 설명서와 보증서가 들어 있는 비닐 봉지가, 텔레비전 앞에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져 있다. 코드는 막 잡은 물고기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TV 피플은 방 이쪽저쪽에서 그 텔레비전의 하얀 화면을 점검하듯 바라보았다. TV 피플 한 명이 내 곁으로 와서, 내가 앉아 있는 위치에서는 텔레비전 화면이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를 확인하였다. 텔레비전은 내 쪽을 정면으로 향하고 놓여있다. 거리도 적당한 거리였다.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한 듯했다. 이제 작업이 한 차례 끝났다는 분위기다. TV 피플 한 명이 내게 와서(내 옆에 와서 화면을 확인한 TV 피플이다) 텔레비전 위에다 리모컨을 놓았다. TV 피플은 그 일을 하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확하게 계획대로 행동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딱히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 사람 다 한결같이, 자신이 해야 할 직무를 빈틈없이 표율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솜씨가 좋다. 기민하다. 작업에 걸린 시간도 짧다. 마지마긍로 TV 피플 한 명이 바닥에 놓아둔 채인 시계를 손에 들고, 어디 적당한 장소는 없을까, 하고 한참이나 방안을 물색하다가, 결국은 찾아내지 못하여 단념하고 다시 바닥에 내려 놓았다. 타르푸 쿠 샤우스 타르푸 쿠 샤우스, 하고 그것은 바닥 위에서 변함없이 묵직하게 시간을 새기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맨션은 아주 좁고, 그런데다 내 책과 아내가 모으고 있는 있는 자료들로, 거의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상태이다. 언젠가 틀림없이 나는 저 시계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틀림없다. 반드시 걸려 넘어질 것이다. 내기를 해도 좋다. TV 피플은 세 사람 다 짙은 파란색 윗도리를 입고 있었다. 무슨 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매끈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블루진에 테니스 화를 신고 있다. 옷도 구두도 조금씩 사이즈가 작았다.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있으려니, 점점 내 시각에 문제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반대 방향으로 앉아 청룡 열차를 차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풍경의 앞뒤가 뒤틀려 있다. 지금껏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몸을 두고 있었던 세계의 밸런스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TV 피플은 그들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다. TV 피플은 결국 마지막까지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셋이서 다시 한 번 텔레비전 화면을 점검하여,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는 리모콘으로 화면을 껐다. 하얀 화면이 스르륵 사라지고, 치직치직하던 작은 소리도 사라졌다. 화면은 원래대로 무표정하고 거무티티한 회색으로 돌아갔다. 이미 창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맨션의 복도를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지나갔다. 언제나처럼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면서. 카르스 파무쿠, 다루프, 카르스 파쿠, 디이이크 하는 구두발 소리가 들렸다. 일요일의 저녁 나절이다. TV 피플들은 다시 또 방안을 점검하듯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본 후, 문을 열고 나갔다. 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내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라는 인간이 마치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 행동하였다. 6 TV 피플이 방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때까지, 나는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내내 소파에 드러누운 채, 그들의 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어쩌면 그런 나의 반응에 대해 부자연스럽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방안에 생면부지의 인간이 불쑥, 그것도 세 명씩이나 들어 와, 제멋대로 텔레비전을 두고 갔는데, 뭐라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런 광경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니, 어째 좀 이상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상황의 진전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나란 존재를 철저하게 무시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당신이 나 같은 입장에 놓인다면, 역시 나처럼 처신하지 않을까 싶다. 구차스럽게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눈 앞에 있는 타인에 그런 식으로 깨끗하게 존재를 무시당하면, 스스로도 자신이 거기에 존재하는지 아닌지 점차 확신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문득 들여다 본 자신이 손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무력감이다. 주술이다. 자신의 몸이, 자신이란 존재가 점차 희박해져 간다. 그리하여 나는 움직일 수 없어진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세 사람의 TV 피플이 내 방에다 텔레비전을 두고 나가는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지켜볼 수밖에 없다. 입을 제대로 열 수가 없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두려워진다. TV 피플이 방을 나가자,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나의 존재감이 돌아온다. 내 손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온다. 문득 사방을 돌아보니, 석양은 이미 캄캄한 어둠 속에 삼켜져 있다. 나는 내 방에 불을 켠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거기에는 역시 텔레비전이 있다. 시계는 여전히 때를 새기고 있다. 타르프쿠 샤우스, 타르푸 쿠 샤우스, 하고. 7 아내는 방안에 텔레비전이 출현한 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다. 신기한 일이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전혀 제로다. 그 일을 눈치채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아까도 말했듯, 그녀는 방안의 가구나 물건이 어떻게 놓여 있고, 배열되어 있는 가에 몹시 민감한 여자이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방안에 있는 무언가가 손톱만큼이라도 자리가 옮겨져 있거나 변화가 있으면, 그녀는 그것을 한 눈에 알아본다. 그녀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눈썹을 찡그리고, 그것을 원래 상태대로 반듯하게 고쳐 놓는다. 나는 다르다. 나는 <가정 화보>가 <앙앙>밑으로 가든, 연필꽂이에 볼펜이 한 자루 섞여 있든, 그런 것쯤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시 그렇다는 것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녀 같은 식으로 일상을 살아간다면 상당히 피곤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딱히 뭐라 군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하도록 내버려둔다. 나는 애당초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가 않다. 때로 그녀는 몹시 화를 낸다. 나의 무심함이 견딜 수 없어질 때가 있다고 한다. 나 역시 가끔은 중력과 원주율과 E=C2의 무신경함이 견딜 수 없어지는 때가 있어, 라고 나는 말한다. 정말 그러니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입을 다물고 만다. 아마도 나의 그 말을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내게는 그녀를 개인적으로 모욕할 뜻이 없다. 나는 그저 내 느낌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그날 밤도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우선 방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나는 설명할 말을 잊지 않고 준비해 놓고 있었다. TV 피플이 와서, 방안을 어지럽혀 놓았다는 것. TV 피플에 대해서 그녀에게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믿어주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정직하게 설명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방안을 빙 둘러보았을 뿐이다. 사이드 보드위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잡지는 뒤바뀐 순서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탁상 시계는 바닥에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저녁밥 잘 챙겨 먹었어요?> 라고 그녀가 원피스를 벗으며 말했다. 나는 먹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왜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라고 나는 말했다. 아내는 원피스를 벗다 말고 나의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 동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시게가 둔중한 소리로 침묵을 분할하고 있다. 타르푸 쿠 샤우스, 타르푸 쿠 샤우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였다. 귀에 들여보내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너무도 무겁고, 거대하였다. 싫다는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뭐, 간단히 만들어 줄까?>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지 뭐> 라고 나는 말했다. 딱히 뭘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먹을 것이 있다면 그것을 먹어도 좋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부엌에서 떡국과 계란 부침을 만들며, 친구와 만난 이야기를 하였다. 누가 무엇을 하고, 누가 무슨 말을 하고, 누가 사귀던 남자와 헤어졌다는 둥의 이야기다. 나도 그녀들은 알고 있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응, 응하고 대꾸를 하였다. 그러나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줄곧 TV 피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 그녀는 텔레비전이 출현한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고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직 모르는 것일까? 설마 갑작스레 출현한 텔레비전의 존재를 그녀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인가. 참 이상하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뭔가 보통 때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 다른 것을 어떤 식으로 정정하면 좋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떡국이 다 만들어지고, 나는 그것을 부엌 테이블에 앉아 먹었다. 계란 부침을 먹고, 우메보시를 먹었다. 내가 식사를 끝내자, 아내는 그릇을 치웠다. 나는 또 맥주를 마셨다. 그녀도 맥주를 조금 마셨다. 나는 불현듯 얼굴을 들어 사이드 보드 위를 보았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전원은 꺼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리모콘이 놓여 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 리모콘을 들어서는, 스위치를 켰다. 텔레비전 화면이 스르륵 하얘지고, 치직치직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화면에는 변함없이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하얀 빛이 브라운 관 위에 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십 처나 삼십 초쯤 그 빛을 바라보다가, 스위치를 껐다. 빛과 소리가 순간에 사라졌다. 아내는 그 동안 카펫 위에 앉아 <엘르>를 팔락팔락 들춰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이 켜졌다 꺼진 일에 그녀는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듯하였다. 나는 리모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읽다 만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긴 소설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저녁 식사 후에 책을 읽는다. 삼십 분 읽고 그만두는 날도 있고, 두 시간을 계속하여 읽는 날도 있다. 하여튼 매일 읽는다. 그런데 그 날은 반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 아무리 책에 의식을 집중하려 해도, 내 신경을 금세 텔레비전으로 돌아갔다. 번번이 눈을 올려 뜨고 텔레비전을 보고 마는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은 나를 정면으로 향하고 놓여 있었다. 8 새벽 두 시 반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텔레비전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이 사라져 없기를 기대하며 침대에서 나왔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그 자리에 어김없이 놓여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 후에, 소파에 앉아 다리를 테이블 위로 뻗었다. 그리고 리모콘으로 텔레비전을 다시 켜 보았다. 그러나 새로운 일을 아무 것도 없었다.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하얀 빛, 잡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나는 한 동안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화면을 쳐다보고는 스위치를 껐다. 빛과 잡음도 사라졌다. 나는 침대로 돌아가 잠자려 하였다. 나는 아주 졸렸다. 그러나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TV 피플의 모습이 떠올랐다. 텔레비전을 나르던 TV 피플, 시게를 바닥에 내려놓던 TV피플, 잡지를 테이블 위에다 옮겨놓은 TV 피플,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던 TV피플, 화상을 점검하던 TV 피플, 문을 열고 말없이 사라진 TV 피플. 줄곧 머리 속을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 머리 속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다시 침대에서 나와 부엌으로 가서는, 바구니에 담겨 있는 커피 잔에다 브랜디를 가득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소파에 누워 마르께스를 열었다. 하지만 문장은 역시 내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마르께스를 내동댕이치고, <엘르>를 읽었다. 가끔은 <엘르>를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엘르>에는 내 흥미를 자극할만한 아무런 글도 실려 있지 않았다. 새로운 헤어 스타일이라든가, 새하얀 고급 실크 블라우스라든가, 맛있는 비프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가게라든가, 오페라를 관람하러 갈 때에는 어떤 복장으로 가면 좋다든지, 그런 것밖에 쓰여 있지 않았다. 나는 그런 일들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엘르>도 내동대이쳤다. 그리고는 다시 사이드 보드 위에 자리하고 있는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결국 나는 아침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깨어 있었다. 6시에 주전자에 물을 끓여, 커피를 마셨다. 달리 할 일이 없어 아내가 일어나기 전에 햄 샌드위치를 만들어 두었다. <꽤나 일찍 일어났네> 아내가 아직도 졸립다는 듯 말했다. <응>이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별 대화없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함께 집을 나와, 각자 다른 회사로 갔다. 아내는 소규모 출판사에 다니고 있다. 자연식에 관한 전문지를 편집하고 있다. 표고 버섯 요리가 예방에 좋다는 등, 유기 농법의 미래에 관해서 라는 등, 그런 제법 전문적인 내용을 싣는 잡지다. 잘 팔리는 것은 아니지만, 잡지를 만드는데 비용도 얼마 들지 않고, 종교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열심인 고정 독자가 있어, 적자를 볼 위험은 없다. 나는 전기 회사에서 홍보 선전부 일을 하고 있다. 토스터니 세탁기니 전자 렌지니 하는 제품들의 광고를 만들고 있다. 9 출근하는 길에, 회사 계단에서 나는 TV 피플의 한 사람과 스쳤다. 그 전날 우리 집에 텔레비전을 가지고 온 TV 피플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틀림없이 맨 처음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 작자다. 텔레비전을 메고 있지 않았던 작가. 그들의 얼굴에는 특징이랄 만한 특징이 없어, 한 사람 한 사람을 분간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십중팔구는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파란색 윗도리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걸어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싫어한다. 그래서 늘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나의 사무실은 건물의 9층에 있으므로, 거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급한 용무가 있을 때에는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만다. 하지만 나로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기보다는 땀범벅이 되는 편이 훨씬 좋다. 모두들 그런 나에게 우스개 소리를 한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도 비디오도 없고, 심지어 엘리베이터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기묘한 사고방식이다. 그들이 어째서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튼 그때도 나는 평소처럼 걸어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계단을 걸어다니는 인간이라니 요즘 세상에 거의 없는 것이다. 4층과 5층 사이의 계단에서 나는 그 TV 피플과 스쳤다.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나는 어째야 좋을지를 몰랐다. 뭐라 말을 걸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순간 생각나지 않았고, TV 피플에게는 말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는 아주 기능적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일정한 속도로, 정밀하고 규칙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내 존재 따위 전혀 무시하고 있었다. 나 같은 것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나는 어쩔 바를 모르는 채 그와 그냥 스쳐지나가고 말았다. 서로 스칠 때 순간적인 일이지만, 주변의 중력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 날, 회사에서 아침부터 회의가 있었다. 신상품의 판매 전략에 관한 상당히 중요한 회의였다. 몇 몇 사원이 리포트를 보고 하였다. 칠판에 숫자를 열거하고, 컴퓨터 화면에 그래프를 띄웠다. 열렬한 토론이 있었다. 나도 그 회의에 참석했지만, 그 자리에서 내 입장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프로젝트에 직접 관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회의를 하는 동안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도 딱 한 번 발언을 하기는 했다. 대수로운 발언을 아니었다. 옵서버로서 극히 상식적인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아무리 관계가 없다해도 아무 말 않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딱히 일에 대해 의욕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월급을 받는 이상, 그 나름의 책임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그때껏 다른 사원들이 발언한 의견들을 좍 일괄하여 정리한 후, 그 자리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가벼운 농담까지 하였다. 아마도 회의 내내 TV 피플을 생각한 터라 뒤가 켕겨서 였을 것이다. 몇 명인가 웃었다. 그러나 일단 발언을 끝내고, 다음 자료를 한 번 훑어보는 척한 나는 다시 TV 피플을 생각하였다. 내 머리에는 TV피플밖에 없었다. 새로운 전자 렌지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내 머리 안에는 TV피플밖에 없었다. 나는 줄곧 그들을 생각하였다. 그 텔레비전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등등의. 왜 TV 피플이 일부러 내 방에다 텔레비전을 갖다 놓았을까 하는 등등. 어째서 그 까다로운 아내는 텔레비전의 출현에 대해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하는 등등. 왜 TV 피플이 우리 회사에까지 들어와 있는 가하는 등 등의. 회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나지 않았다. 12시에 점심식사를 위한 짧은 휴식 시간이 있었다. 밥을 먹으러 밖으로 나갈 여유는 없었으므로, 모두에게 샌드위치와 커피가 배급되었다. 회의실은 담배 냄새가 지독하여 나는 그것을 들고 내 자리에 와서 먹었다. 한참 먹고 있는데 과장이 나를 찾아 왔다. 나는 정직하게 말해, 이 사나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좋아할 수 없는지,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무엇하나 반발할만한 구석은 없다. 사뭇 올곧게 자라는 듯한 분위기를 몸에 지니고 있다. 머리도 나쁘지 않다. 매고 다니는 넥타이도 그럴 법하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을 내세우지도 않고, 부하 직원에게 위엄을 부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게 신경을 써주기까지 하였다. 때로는 점심을 같이 먹자고 말을 걸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이 사나이에게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얘기를 하는 상대방의 몸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만지작거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남자든 여자든, 얘기하는 도중 상대방의 몸을 슬며시 만지는 것이다. 만진다고 하여, 딱히 기분 나쁜 흑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세련되고 자연스럽게 살며시. 상대방은 그가 만지고 있다는 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자연스럽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의 그런 동작이 몹시 신경에 거슬린다. 그래서 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띨 때마다 본능적으로 긴장하고 만다. 이건 사소한 일이라고 하면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튼 나는 마음이 쓰인다. 그가 허리를 꺾고,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까 자네가 회의에서 한 발언 말이야, 좋았어>라고 과장은 친근하게 말한다. <아주 요령 있고, 간결하고. 나도 감탄했어. 적합한 지적이었어. 자네 발언으로 자리에 긴장감이 돌았어. 타이밍도 좋았고. 음,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잘해 봐> 그런 말만 하고 그는 어딘 가로 재빨리 가고 말았다. 아마 점심을 먹으로 간 걸 거다. 나는 그 자리에서는 순순히 고맙다고 대꾸하였지만, 솔직히 당황했다. 나는 자신이 회의에서 무슨 말을 하였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안하고 있기에는 머쓱하여, 적당히 생각난 말을 했을 따름이었다. 왜 그런 정도의 일로 과장이 일부러 내 자리에 와서 칭찬을 하는 것일까? 훨씬 멋진 발언을 한 인간이 나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좀 이상하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는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나머지를 먹었다. 그리고 문득 아내를 생각하였다.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점심을 먹으로 밖으로 나갔을까? 나는 그녀 회사로 전화를 걸어볼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슨 말이든 한 두 마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국번을 돌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고 도중에 그만두었다. 일부러 전화를 걸만한 거리가 아무 것도 없다. 세계가 얼마간 균형을 잃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점심 시간에 아내의 회사에 전화를 걸어, 이런 나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하면 좋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는 자기 회사에 전화를 걸면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고 남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플라스틱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10 오후로 이어진 회의에서 나는 또 TV 피플을 보았다. 이번에는 두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들은 어제와 똑같은 소니 컬러 텔레비전을 짊어지고 회의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 사이즈는 어제보다 한 뼘쯤 컸다. 이것 참, 하고 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소니는 우리들 회사의 적수였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그런 물건을 회사 내로 반입하면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상품을 비교하기 위하여 타사 제품을 부내로 가지고 들어오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에라도 회사 마크는 떼어버린다. 타 부서의 눈에 뜨이면 성가신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방 아랑곳하지 않고, SONY라는 마크를 당당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실내를 한 바퀴 빙 훑어보았다. 텔레비전을 둘 장소를 물색하고 있는 듯한데, 결국 적당한 장소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텔레비전을 짊어진 채 다시 뒷문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TV 피플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TV 피플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역시 TV 피플은 보였다. 그 증거로 TV 피플이 텔레비전을 메고 회의실로 들어오자,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은 자리를 비켜, 그들의 앞길을 터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TV 피플에 대해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은 근처 다방 아가씨가 주문 받은 커피를 들고 왔을 때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원칙적으로 TV 피플이 거기에 없는 것으로 여기고 대응하고 있다. 나는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TV 피플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나 혼자만 TV피플에 대한 정보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일까? 어쩌면 아내 역시 TV 피플에 대해 미리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느닷없이 방안에 텔레비전이 출현했는데도 놀라지도 않고, 그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이 않은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TV 피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들은 늘 텔레비전을 나르고 있는 것인가. 동료 한 명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를 뜰 때, 나도 덩달아 그 뒤를 좇듯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나는 이 사내와는 입사 동기이기도 하여, 비교적 사이가 좋다. 이따금 일이 끝나면 둘이 마시러 가는 일도 있다. 나는 아무하고나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못된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소변을 보았다. 아이휴, 이대로 나가다가는 저녁때까지 끌겠지, 참 내 허구한 날 회의 회의, 라고 그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는 둘이서 손을 씻었다. 그도 내가 오전 중에 한 발언을 칭찬해 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좀 전에 텔레비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 말인데 -> 라고 나는 넌지시 말을 꺼내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도 꼭지를 꽉 죄어 물을 잠그고는, 페이퍼 타올을 두 장 홀더에서 잡아당겨서는 손을 닦았다. 내쪽으로는 힐긋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정성껏 손을 닦고서는, 타올을 둘둘 말아 쓰레기 통에 버렸다. 어쩌면 내가 한 말이 들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들었는데도 못 들은 척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자리의 분위기로 보아,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는 편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잠자코 페이퍼 타올로 손을 닦았다. 공기가 매우 딱딱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패 복도를 걸어 회의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는 내내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11 내가 회사에서 돌아왔을 때, 집안은 온통 캄캄했다. 밖에는 조금 전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베란다 창으로, 낮게 드리워진 어두운 구름이 보였다. 방안에서 비 냄새가 났다. 날이 저무는 시각이었다. 아내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다. 나는 넥타이를 풀고, 주름을 펴서 넥타이 걸이에 걸었다. 브러시로 양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와이셔츠는 빨래 통에 던져 넣어 두었다. 머리카락에 담배냄새가 배어 있어, 샤워를 하며 머리를 감았다. 늘 하는 일이다. 장시간 회의를 하다 보면 담배 냄새가 배고 만다. 아내는 그 냄새를 굉장히 싫어한다. 우리가 결혼을 하자, 그녀는 제일 먼저 담배를 끊으라고 주장하였다. 4년전 일이다. 나는 목욕탕에서 나와, 소파에 앉아 타올로 머리칼을 닦으며 캔 맥주를 마셨다. TV피플이 날라다 둔 텔레비전은, 아직 사이드 보드 위에 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리모콘을 들어, 텔레비전을 켜 보았다. 그런데 몇 번이나 power 보튼을 눌러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화면은 거무티티한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전원 코드를 확인해 보았다. 플러그는 분명히 콘센트에 껴져 있었다. 나는 플러그를 인단 뺐다가 다시 콘센트에 꼭 꼽아 보았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리모콘 스위치를 제 아무리 열심히 눌러도 화면은 하얘지지 않았다. 만에 하나 건전지가 다 달았다면 하고, 나는 리모콘의 뒷뚜껑을 열러 건전지를 꺼내서는, 간이 테스터로 체크해 보았다. 건전지는 신품이었다. 나는 단념하고 리모콘을 내던지고는, 맥주를 목 깊숙이 쏟아 부었다. 어째서 그런 일이 마음에 걸리는 것일까, 하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텔레비전이 켜 진다한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냐. 하얀 빛이 떠오르고, 치직치직 하는 잡음이 들릴 뿐이지 않은가. 그러니 전원이 들어오든 말든 신경쓸 필요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전원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손가락 하나 댄 일이 없으니, 말이 안된다. 나는 다시 한 번 리모콘을 들고 시험해 보았다. 천천히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서.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반응도 없다. 화면은 완전히 죽어 있다. 싸늘하게 식어 있다. 나는 두 번째 캔을 냉장고에서 꺼내, 마개를 따고 마셨다. 플라스틱 용기에 들어 있는 감자 샐러드를 먹었다.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서 석간을 읽었다. 여느 때보다 한층 시시한 신문이었다. 거기에는 읽을만한 기사거리는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을 듯한 뉴스뿐이었다. 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나는 꽤 오랫동안 그 신문을 읽고 있었다. 신문은 다 읽으면, 뭔가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에 대한 생각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시간을 질질 연장시키듯 신문을 읽었다. 그렇지, 편지의 답장을 쓰는 것은 어떨까? 사촌 여동생한테서 온 청첩장이 와 있다. 가지 못한다고 답장을 써야 한다. 나는 바로 결혼식 날 아내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키나와에 갈 것이다. 이 여행을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둘의 휴가 시기를 껴 맞추었다. 지금 새삼스레 변경할 수는 없다. 지금 그 여행 계획을 변경했다가는, 언제 다시 함께 긴 휴가를 받을 수 있을지 그건 하느님밖에 모르는 일이다. 더구나 나는 그 사촌 여동생과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다. 벌써 10년이나 만난 적도 없다. 어찌되었든 답장을 빨리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참가 여부를 빨리 알려줘야 식장을 예약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리다. 지금 편지라니 도무지 쓸 수가 없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다. 나는 다시 신문을 펼쳐 들고,같은 기사를 두 번 읽었다. 그리고는 불쑥 저녁 식사 준비나 해 놓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는 일 관계로 저녁을 먹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애서 지은 저녁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나 혼자 먹는 정도라면 있는 것으로 대충 해결할 수 있다. 일부러 만들 일까지는 없다. 만약 그녀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들어온다면, 밖에 나가 외식을 하면 된다. 어째 좀 이상하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6시를 넘을 것 같은 때에는, 반드시 미리 연락을 하기로 되어 있다. 그것은 규칙이다. 만약 전화를 받지 않으면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라고 남겨 둔다. 그렇게 해 두면 상대방이 그에 맞춰 행동을 취할 수 있다. 혼자 먼저 식사를 한다던가, 상대방 몫을 만들어 둔다던가, 아니면 먼저 잠을 잔다던가. 나는 직업의 성격상 아무래도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 많고, 그녀도 무슨 약속이나 마감일이 임박한 교정쇄를 보느라 늦어지는 일이 있다. 양쪽 다, 정확하게 아침 9시에 일이 시작되어, 오후 5시에 끝나는 타입의 직업이 아니다. 서로가 바쁠 때에는 한 사흘 정도 제대로 말을 주고받는 일이 없는 경우도 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쩌다 그런 식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현실적인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규칙은 빈틈없이 지키려 애쓴다. 늦어질 것 같으면, 전화를 걸어 상대방에게 전한다. 그러나 나는 때로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잊어버린 일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자동 응답기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녹음되어 있지 않다. 나는 신문을 집어던지고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12 회의를 하는 꿈을 꾸었다. 내가 일어서서 발언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주절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말을 끝내면 나는 죽고 만다. 그래서 그만 둘 수가 없다. 의미도 알지 못하는 말을 영원히 계속할 수밖에 없다. 주변에 있던 인간은 이미 다 죽었다. 죽어 돌이 되었다. 딱딱한 석상이 되어 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유리창은 전부 개져 있고, 거기로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TV 피플이 있다. 그들은 세 사람으로 늘어나 있다. 맨 처음과 마찬가지으로. 그들은 꿈속에서도 역시 소니 컬러 텔레비전을 나르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TV 피플이 비치고 있다. 나는 점차 말을 잃어간다. 그와 더불어 손가락 끝이 점점 딱딱해짐이 느껴진다. 나는 차츰 돌로 변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눈을 뜨니, 방이 허여끄레했다. 마치 수족관의 복도 같은 색이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것이다. 사방은 이미 완전한 어둠이고, 그 어둠 속에서 텔레비전 화면이 치직치직 작은 소리를 내며 빛나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손가락은 아직 부드러운 살 그대로였다. 입안에는 자기 전에 마신 맥주 맛이 남아 있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목구멍 속이 바싹 말라 있어, 삼키는데 시간이 걸렸다. 리얼한 꿈을 꾼 후에는 늘 그렇지만, 잠보다는 각성해 있는 쪽이 리얼하지 않은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이것이 현실인 것이다. 아무도 돌이 되지 않았다. 몇 시쯤일까 싶어 나는 바닥에 놓여 있는 시계를 보았다. 타르푸 쿠 샤우스, 타르푸 쿠 샤우스. 8시 몇 분전이었다. 그런데 꿈속에서처럼, 텔레비전 화면에는 한 명의 TV 피플이 비쳐 있었다. 그 TV 피플은 회사 계단에서 나랑 스쳐 지나간 TV 피플과 같은 작자였다. 틀림없이 그 사나이다. 문을 열고 맨 처음 방으로 들어온 사나이. 100퍼센트 틀림없다. 그는 형광등처럼 하얀 빛을 배경으로, 꼼짝 않고 서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현실로 파고 들어온 꿈의 꼬리 같았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환영처럼 쓰윽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화면 속의 TV 피플의 모습은 반대로 점점 커졌다. 그의 얼굴이 화면 가득하게 비쳐졌다. 멀리에서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는 식으로, TV 피플의 얼굴이 점점 클로즈업되었다. 그리고서 TV 피플은 텔레비전 밖으로 나왔다. 마치 창을 넘어 나오듯, 텔레비전 틀을 잡고 다리를 들어 어여차 하고 걸어나온 것이다. 그가 나온 다음의 화면에는 하얀 배경 빛만이 남았다. 그는 텔레비전 바깥 세계에 몸을 적응시키려는 듯 한 동안 오른 손가락으로 왼 손을 비비고 있었다. 조그만 사이즈의 오른 손이 조그만 사이즈의 왼손은 한참이나 비벼댔다. 그는 전혀 서두름이 없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는 양 사뭇 여유 있는 동작이었다.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의 능란한 진행자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내 얼굴을 보았다. <우리는 비행기를 만들고 있어>라고 TV 피플은 말했다. 원근감이 없는 목소리였다. 납작하여, 마치 종이에 쓰여진 목소리 같았다. 그의 목소리와 더불어 텔레비전 화면에 검은 기계가 비쳐졌다. 정말 뉴스 쇼 같다. 먼저 넓은 공장임직한 공간이 비치고, 그 다음 한 가운데에 있는 작업장이 클로즈업되었다. 두 사람의 TV 피플이 그 기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스패너를 써서 볼트를 조이기도 하고, 계기를 조정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 작업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기계였다. 원통형인데 위로 길쭉하고, 여기 저기 유선형 돌출부가 있었다. 그것은 비행기라기 보다는 거대한 오렌지 짜는 기계처럼 보였다. 날개도 없거니와 좌석도 없었다. <도저히 비행기로는 보이지 않는데>라고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 같지 않았다. 아주 이상한 목소리다. 두툼한 필터가 양분을 죄 빨아먹은 다음 같은 목소리다. 자신이 몹시 늙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아직 색을 칠하지 않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닐까>라고 TV 피플이 말했다. <내일은 색을 칠할 거야. 그러면 비행기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게 될 테지> <문제는 색이 아니야. 형태라고. 그건 비행기가 아니야> <비행기가 아니라면, 그럼 뭐지?>라고 TV 피플이 내게 물었다. 나는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니까 색 탓이라니까>라고 TV 피플이 자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색을 칠하면 틀림없는 비행기가 된단 말이야.> 나는 그 이상의 토론은 단념하였다. 아무려면 어떠냐,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 아닌가,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오렌지를 짜는 비행기이든, 하늘을 날 수 있는 오렌지 짜는 기계이든, 그게 어찌됐단 말이냐. 어느 쪽이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 마누라는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나는 손가락 끝으로 다시 한 번 관자놀이를 눌렀다. 시계소리가 울리고 있다 타르푸 쿠 샤우스, 타르푸 쿠 샤우스. 테이블위에는 리모콘이 놓여 있다. 그 옆에는 여성 잡지가 쌓여 있다. 전화는 여전히 침묵한 채이다. 방은 텔레비전의 희뿌연 빛에 둥실 드러나 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두 사람의 TV 피플이 열심히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화상이 아까보다 훨씬 선명하다. 지금은 기계의 계기 판에 있는 숫자까지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 희미하기는 하나 그 소리도 들린다. 기계가 타아아부주라예훗구 타아부주라예훗구 아르프 타아부주라예 훗구, 하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때로 금속이 금속을 두드리는 마른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난다. 아리이이이잉부츠, 라리이이잉부츠, 그 소리를 그렇게 들린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소리가 뒤석여 있다.그러나 나는 그 이상을 소리를 구별할 수가 없다. 아무튼 그 두 사람의 TV 피플은 화면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것이 이 화상의 테마인 것이다. 나는 한참이나 두 사람의 작업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화면밖에 있는 TV 피플도 잠자코 화면 속의 동료들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 그것은 내게는 도무지 비행기로 보이지 않는다 - 시커먼 기계는, 하얀 빛 속에 떠 있다. <부인은 돌아오지 않을 거요>라고 화면밖에 있는 TV 피플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새하얀 브라운 관을 들여다보듯 그의 얼굴을 지그시 보았다. <부인은 이제 안 돌아온다구요>라고 TV 피플은 똑같은 말투로 말했다. <왜?>라고 나는 물었다. <왜냐구라니, 이제 돌아와 봐야 소용이 없으니까지>라고 TV 피플은 말했다. 호텔에서 사용하는 카드식 플라스틱 열쇠 같은 목소리였다. 평면적이고, 억양이 없는 목소리가, 옆으로 가늘게 난 구멍에서, 칼날처럼 에고 들어온다. <이제 돌아와 봐야 소용이 없으니까지> 돌아와 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안 돌아온다, 라고 나는 머리 속으로 되풀이하였다. 평평하고 리얼리티가 없다. 나는 그 문맥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원인이 결과의 꼬리를 깨물고 삼키려 하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러, 심호흡을 하고, 캔 맥주를 가지고 소파로 돌아왔다. TV 피플은 텔레비전 앞에 우뚝 선 채, 마개를 따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른쪽 팔굽을 텔레비전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딱히 맥주가 마시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캔을 들고 왔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손에 들고 있다가, 무거워져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서 나는 아내가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TV 피플의 성명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우리 사이가 이미 틀렸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 관계가 그렇게 되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완전한 부부는 아니다. 우리는 4년 동안 몇 번이나 말다툼을 하였다. 우리 사이에는 과연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해 이따금 대화를 나누었다. 해결된 적도 있고 해결되지 않은 적도 있다. 해결되지 않은 일들 대부분은 그대로 방기되어, 적당한 시간의 경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케이, 우리는 문제가 있는 부부였다.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이가 이미 틀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 세상 어디에 문제가 없는 부부가 있단 말이냐? 더구나 8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다. 그녀는 무슨 사정이 있어 전화를 걸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런 사정이라면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러나 나는 한 가지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나는 몹시 혼란에 빠져 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저 비행기는 - 만약 저것이 비행기라면 - 대체 어떤 식으로 나는 것일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추진력을 무엇인가? 창문은 어디에? 도무지 어디가 앞쪽이고 어디가 뒤쪽인가? 나는 아주 피곤해졌다. 아주 얄팍하다. 사촌 여동생한테 결혼식에 못 간다는 답장을 써야 할 텐데,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 때문에 사정이 있어 도저히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유감스럽군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라고. 텔레비전 속의 두 사람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부지런히 비행기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한 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기계를 완성시킬 때까지 그들이 해야만 하는 작업은 무한한 모양이다. 한 가지 작업이 끝나면, 쉴 틈도 없이 그 다음 작업을 시작한다. 반듯한 공정표와 도면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면 되는지, 그 다음에는 또 어떤 일을 하면 되는지 숙지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그들의 그런 나무랄데없는 일솜씨를 요령 있게 따라다니고 있었다. 알기 쉽고 적확한 카메라 워크였다. 설득력 있는 화면이었다. 아마 다른 TV 피플이(제 삼의 혹은 제 사의)카메라와 컨트롤 판넬 작업을 맡고 있는 것이리라. 신기한 일이다. TV 피플들의 그런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일솜씨를 지긋이 보고 있는 동안, 나한테도 그것이 조금씩 비행기으로 보여졌다. 적어도 비행기여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든, 그런 일 따위 별 상관이 없지 않은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저만큼 정밀한 작업을 저렇게 훌륭하게 해내고 있으니, 그것은 틀림없이 비행기일 것이다. 설사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들에게 그것은 비행기인 것이다. 정말 이 남자가 하는 말 대로다. 비행기가 아니라면, 대체 뭐지? 텔레비전밖에 있는 나TV 피플은 아까부터 털끝 하나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오른 쪽 팔굽을 텔레비전 위에 올려놓고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보여지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의 TV 피플은 일을 계속하고 있다. 시계 소리가 들렸다. 타르프쿠 샤우스, 타르프 쿠 샤우스. 방은 어둡고, 답답했다. 누군가 발걸음 소리를 울리며 복도를 걷고 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고 나는 갑작스레 생각했다. 아내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는 아주 먼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모든 교통 기관을 이용하여, 내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과연 우리 사이는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상실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만 몰랐던 것이다. 내 안에서 수많은 상념이 풀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뭉쳐졌다. 그렇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중얼거려 보았다. 나의 목소리는 자신의 몸 속에서 아주 허망하게 울렸다. <내일 색을 칠하면, 더 잘 알 수 있게 될 거야>라고 TV 피플이 말했다. <이제 색만 칠하면 번듯한 비행기가 된다고> 나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내 손바닥은 여느 때와 비교해 약간 줄어든 듯 보였다. 아주 조금. 그렇게 생각하는 탓인지도 모른다. 빛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근감의 균형이 아주 조금 일그러진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내 손바닥은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잠깐 기다려 봐. 나는 발언을 하고 싶다. 나는 무슨 말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점점 줄어들어, 돌이 되어버린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곧 여기로 전화가 걸려 올 거야>라고 TV 피플이 말했다. 그리고는 계산을 하듯 잠시 짬을 두었다. <앞으로 5분 정도 후에> 나는 전화기를 보았다. 나는 전화기 코드를 생각했다. 어디까지고 하염없이 이어져 있는 전화기 코드. 그 그 끔찍한 미로로 얽힌 회선의 끄트머리 어딘가에 아내가 있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저 먼 먼, 내 손길이 닿지 않는 멀리에. 나는 그녀의 고동의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5분,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냐? 나는 일어나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어난 순간 언어가 꺼졌다. 사라지고 말았다. 비행기 - 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하였는가 그 오후, 그녀가 물었다. <있지, 당신 옛날부터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어?> 그녀는 마치 불현듯 생각이 났다는 듯, 테이블에서 조용히 얼굴을 들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어쩌다 문득 생각난 것이 아님은 명백했다. 그녀는 필시 그 점에 대해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런 경우이면 반드시 묻어 있는, 약간은 쉰 듯한 딱딱한 울림이 있었다. 실제로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그 말은 그녀의 혓바닥 위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망설임에 자맥질을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부엌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앉아 있었다. 가끔씩 근처에 있는 선로 위를 지나가는 전철 소리를 제외하면, 사방은 대체로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다. 때로는 너무 조용하다 싶을 만큼 조용했다. 전철이 지나가지 않을 때의 선로란 불가사의할 정도로 조용한 법이다. 부엌 바닥에는 비닐 타일이 깔려 있고, 그것은 맨발이 그의 발바닥에는 싸늘하게 감촉이 좋았다. 벗은 그의 양말은 바지 주머니 속에 쑤셔 박혀 있다. 4월치고는 지나치게 따뜻한 오후였던 것이다. 그녀는 엷은 색상의 체크 무늬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부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커피 스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려니, 의식이 기묘하게도 평탄해졌다. 그녀가 세계의 끝자락을 쥐고, 그것을 조금씩 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은 걸리지만, 아무튼 거기에서부터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양, 어전지 사무적으로, 그리고 아주 무감각하게.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그 동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기 대문이다. 그의 커피 잔 속에 남아 있는 커피는, 이미 식어 탁해지고 있었다. 그는 막 스무 살이 도니 참이었다. 여자는 그보다 일곱 살이나 나이가 많고, 결혼을 했고, 어린애까지 있다. 요컨대 그녀는, 그에게는 달의 이면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을 해외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그 탓에 한 달의 반은 집을 비운다. 런던이니 로마니 싱가폴이니 하는 곳으로 출타중인 날이 많았다. 그녀의 남편은 오페라는 좋아하는 모양이다. 집에는 베르디와 푸치니와 도니제티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세 장짜리 네 짱짜리 두툼한 레코드가, 작곡가별로 정리되어 즐비하게 레코드 장을 장식하고 있다. 그것은 레코드 컬렉션이라기 보다, 오히려 일종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차분하고 아주 확고하게 보인다. 그는 언어가 궁해지거나 어쩐지 따분하다 싶은 때에는, 늘 그 레코드 재킷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눈으로 더듬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제목을 일일이 머릿속으로 읽어나갔다. <라 보엠> <토스카> <트란도트> <노르마> <피델리오>...... . 그는 그런 종류의 음악을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좋아한다던가 싫어한다든가를 따지기 이전에,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가족이든, 친구든, 그의 주변에는 오페라를 좋아하는 인간 따위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오페라라는 음악이 있고, 그것을 듣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의 한 면모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딱히 오페라는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싫어하지는 않아>라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너무 길어> 레코드 장 옆에는 꽤나 멋들어진 오디오 시스템이 있다. 외제인 커다란 진공관 앰프가 잘 훈련받은 갑각 동물처럼, 묵직하게 몸을 구부리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교적 검소한 다른 살림살이 속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띠었다. 존재감 그 자체가 각별했다. 그 쪽으로 자연히 눈길이 가고 만다. 하지만 그는 그 오이오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녀는 전원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 지조차 모르고 있었고, 그 역시 구태여 그것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야, 라고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몇 번이나 거듭 그렇게 말했다. 남편은 자상하고 부드러운 사람이고, 아이도 무척 사랑하고 있어, 아마 나는 행복할 거야, 라고 그녀는 온화하고,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뭔가 둘러대고 있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그녀는 교통 규칙이나 날짜 변경선에 관해 이야기하듯 객관적으로 결혼 생활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해, 문제라 할만한 문제는 없어, 라고. 그럼 어째서 나랑 자는 것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꽤 열심히 생각해 보았지만, 그로서는 그 대답을 알 수 없었다. 도무지 결혼 생활의 문제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지조차 그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 직접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말을 꺼내기가 묘했다. 뭐라고 물으면 좋지? 그렇게 행복하다면 왜 나랑 자느냐, 라고 솔직하게 질문하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질문을 했다간, 그녀는 틀림없이 울음을 터뜨릴 거야,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곧잘 운다. 아주 작은 소리로, 긴 시간을 운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그녀가 왜 우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여자는 한 번 울었다 하면 좀처럼 그치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대신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놔두기만 하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 울음을 그친다. 인간이란, 어찌도 이렇듯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것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때껏 몇 몇 여자와 사귄 적이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울거나 화를 내거나 하였다. 그녀들의 울음, 그녀들의 웃음, 그녀들의 분노, 그것들은 하나같이 모습을 달리하고 있었다. 닮은 부분도 간혹은 있지만, 다른 부분이 훨씬 많다. 그것은 아무래도 연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하였다. 연상의 여자와 사귀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가 생각한 만큼 나이가 신경에 쓰이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사람들 하나 하나가 지니고 품고 있는 경향의 차이가 훨씬 더 의미심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녀가 울음을 그치면, 그 다음 대개 두 사람은 성교를 하였다. 여자는 운 다음에만 그를 원했다. 그 밖의 경우에는 늘 그 쪽에서, 여자를 원했다. 여자가 거절하는 때도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잠자코 고개를 젓는다. 그런 때 그녀의 눈은, 하늘 구석데기에 떠 있는, 새벽녘의 하얀 달처럼 보였다. 새 날을 알리는 새들의 지저귐에 몸을 떠는, 납작하고 암시적인 달. 그런 눈을 보면, 그는 더 이상 채근을 할 수가 없었다. 성교를 거부당해도, 별로 짜증이 나지도 않았고, 불쾌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런 가보다 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마음속으로 휴우, 하고 안심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때 두 사람은 부엌 테이블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조그만 목소리로 쉬엄쉬엄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양 쪽 이야기를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었고, 공통적인 화제도 그리 많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그는 이미 기억해낼 수 없다. 그저 띠엄 띠엄 도막난 이야기를 했다는 것밖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창밖으로 전철이 지나갔다. 두 사람의 육체적 접촉은 언제나 차분하고 조용했다. 거기에는 정확한 의미의 육체의 환희 같은 것은 없었다. 물론 남자와 여자가 성을 나누는 희열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너무도 많은 다른 상념과 요소와 양식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경험한 그 어떤 섹스와도 달랐다. 그것은 그에게 좁다란 방을 연상케 했다. 깨끗하게 정리된 느낌이 좋은 방이다, 분위기도 좋다. 그 방 천장에는 알록달록한 색상의 끈이 매달려 있다. 각기 모양도 다르고 길이도 다르다. 그 한 줄 한 줄이 그의 기분을 유혹하고, 전율케 한다. 그는 어느 한 줄을 당겨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들 줄은 그가 잡아당겨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줄을 잡아당기면 좋을지, 그는 알 수가 없다. 어떤 줄을 잡아당기면 멋진 광경이 눈앞에 활짝 펼쳐질 듯한 기분이 들고, 반대로 순간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화할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몹시 망설인다. 망설이는 사이에 그 하루가 끝나버린다. 그는 그런 상황이 불가사의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껏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방에서, 연상의 말수가 적은 여인을 안고 있느라면, 때로 자신이 압도적인 혼란 속을 방황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애당초 이 여자에게 애정을 품고 있는 것일까, 라고 그는 자신을 향하여 몇 번이나 물어 보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확신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조그만 방의 천장에 매달린 알록달록한 끈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거기에 있다. 그 기묘한 성교가 끝나면, 그녀는 언제나 힐긋 시계를 보았다. 그의 품안에서 얼굴을 약간 돌리듯 하여, 베개머리에 있는 시계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FM라디오에 붙어 있는 검은 자명종 시계였다. 그 당시 시계 라디오의 글자판은 아직 디지털이 아니고, 찰칵찰칵하고 조그만 소리를 내며 글자판이 넘어가는 타입이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면, 창밖으로 전철이 지나갔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시게에 눈길을 주면 항상 전철 소리가 났다. 마치 숙명적인 조건 반사처럼. 그녀가 시계를 보면 - 전철이 지나간다. 그녀가 시계를 보는 까닭은, 4살 박이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딱 한 번 우연찮게 그녀의 딸아이를 본 적이 있다. 어딘지 모르게 얌전하다 싶은 여자 아이란 인상밖에 없었다. 오페라를 좋아하고 여행 회사에 근무하는 남편과는 한 번도 맞닥뜨린 적이 없다. 고맙게도. 여자가 혼잣말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은, 5월의 느지막한 오후였다. 그녀는 그 날도 역시 울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섹스를 하였다. 그녀가 그 날 왜 울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아마도 그녀는 그냥 울고 싶어서 울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울고 싶어, 나랑 사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그렇게 생각한 일까지 있다. 그녀는 어쩌면 혼자서는 울 수가 없어서, 그래서 울기 위해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문을 꼭꼭 잠그고, 창문의 커튼을 치고, 전화기를 머리맡에 갖다놓고,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섹스를 하였다. 늘 그렇듯 아주 조용하게. 도중에 한 번 현관 벨이 울렸는데,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특별히 놀라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니까>라고 말하는 양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현관 벨은 몇 번을 울리다가, 상대방이 포기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그녀 말대로, 별 대수롭지 않은 상대였던 것이다. 세일즈 맨이든가 뭐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알 수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가끔씩 전철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는 멜로디다. 옛날, 학교 음악실에서 들은 적이 있는 음악이다. 하지만 그 제목은 끝내 생각나지 않았다. 채소 장사 트럭이 한 대 덜컥덜컥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그는 사정을 하였다. 아주 조용히. 그는 먼저 목욕탕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였다. 그가 배스 타올로 몸을 닦으며 돌아오니, 그녀는 침대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그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늘 그러듯 세워진 오페라 레코드의 글자를 눈으로 더듬으며 여자의 등을 손끝으로 살며시 어루었다. 그리고 나서 여자는 일어나 옷을 단정히 입고는, 부엌에서 커피를 끓였다. 잠시 후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있지 당신, 옛날부터 죽 혼잣말하는 버릇 있었어? 라고. <혼잣말?> 그는 놀라 되물었다. <혼잣말이라니? 당신이랑 섹스할 때?> <아니. 그게 아니고 보통 때. 가령 샤워를 할 때라든가, 내가 부엌에 있고, 당신은 혼자서 신문을 읽고 있거나 할 때 말이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몰랐는데. 내가 혼잣말을 하다니> <하지만 하고 있는 걸, 정말로> 그녀는 그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딱히 당신 말을 안 믿는 것은 아니야> 라고 그는 어정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담배를 물고, 여자의 손에 있던 라이터를 들어 불을 붙였다. 그는 바로 얼마 전부터 담배를 세븐 스타로 바꾸어 피고 있었다. 그녀 남편이 세븐 스타를 피우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까지 내내 쇼트 호프를 피웠었다. 그녀가 세븐 스타를 피우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스스로 신경을 써서 바꾼 것이다. 그러는 편이 어쨌거나 편리할 것이라 생각하여. 텔레비전의 멜로 드라마에서 그러는 것처럼. <나도 어렸을 적에는 곧잘 혼잣말을 했었거든> <그래?> <하지만 엄마가 그 버릇을 고치라고 해서. 흉측스럽다고. 그래서 혼잣말을 할 때마다 심하게 꾸중을 들었어. 벽장에 갇히기도 하고. 벽장은 너무 무서웠어. 어둡고 곰팡이 냄새도 나고. 얻어맞은 적도 있었지. 막대자로 무릎을 때리는 거야. 그리곤 얼마 안 있어 혼잣말을 하지 않게 되었지. 전혀 한 마디도 하지 않게 되었어. 어느 사인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된 거지> 그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도 불쑥 말이 튀어나올 것 같으면, 반사적으로 삼켜버려. 어렸을 적에 혼이난 탓에. 하지만 모르겠어. 혼잣말을 하는 게 어디가 그렇게 나쁘다는 건지. 말이 자연히 나오는 것뿐이잖아. 지금 엄마가 살아 있다면 물어보고 싶을 정도야. 어디가 잘못된거냐구> <돌아가셨어?> <응>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꼭 물어보고 싶었어. 왜 나한테 그런 짓을 했냐고> 그녀는 계속 커피 스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문득 벽에 걸린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그녀가 시게를 보면 창밖으로는 전철이 지나갔다. 그녀는 전철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깊은 우물 같은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 그 바닥에 무엇이 있는 지는 모르지. 가끔 떠오르는 것들의 모양을 보고 상상할 수밖에 없어> 두 사람은 한 동안 우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혼잣말을 했지, 예를 들어?> <음, 글쎄>라고 말하고 그녀는 천천히 몇 번인가 고개를 저었다. 마치 목의 관절이 잘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며시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예를 들면, 비행기에 관해서> <비행기?>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 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 그는 웃는다. 어째서 또 하필이면 비행기란 말인가. 그녀도 웃는다. 그리고 오른 손의 집게 손가락과 왼손의 집게 손가락을 사용하여, 공중에 뜬 가공의 물체의 길이를 재었다. 그것은 그녀의 버릇이었다. 때로는 그도 똑같은 몸짓을 할 때가 있다. 그녀의 버릇이 옮은 것이다. <아주 분명하게 말하는데. 정말 기억 못하는 거야?> <기억 안 나>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볼 펜을 집어, 그것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또 시계를 보았다. 5분 동안 시계 바늘은 정확하게 5분치 움직였다. <당신은 마치 시를 읽듯 혼잣말을 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내가 혼잣말을 한다는데 어째서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자, 그는 어쩐지 이상했다 나는 마치 시를 읽듯 혼잣말을 한다 그는 그렇게 말해 보았다. 그녀는 다시 볼펜을 손에 잡는다. 무슨 무슨 은행의 어디 어디 지점 10주년 기념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노란 색 플라스틱 볼펜. 그는 그 볼펜을 가리켰다. <내가 또 혼잣말을 하거들랑 그 볼 펜으로 메모를 좀 해 주겠어?> 여자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듯 지긋이 보았다. <정말 알고 싶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메모 용지에, 볼펜으로 뭐라고 쓰지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막히거나 쉬거나 하는 일없이, 그녀는 볼펜을 움직였다. 그 동안 그는 턱을 괴고, 그녀의 긴 속눈썹을 보고 있었다. 몇 초에 한 번씩, 그녀는 불규칙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런 속눈썹을 - 방금 전까지 눈물에 젖어 있었던 속눈썹을 -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또 알 수 없어졌다. 그녀와 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를. 복잡한 시스템의 일부가 찍 잡아당겨져 놀랄 만큼 단순해진 듯한 기묘한 결락감이 그를 엄습하였다. 이대로 나는 더 이상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 자신이란 존재가 그대로 녹아 없어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그는 막 생겨난 진흙탕처럼 아직 젊고, 시라도 읽듯, 혼잣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 쓰고 나자, 여자는 테이블너머로 그 메모 용지를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부엌에는 무언가의 잔상이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때때로 그는 그런 잔상의 존재를 감지한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무언가의 잔상.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의 잔상. <난, 전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것이 비행기에 관한 혼잣말> 그는 소리를 내어 그것을 읽어보았다. 비행기 비행기가 날아 나는, 비행기에 비행기는 날아 하지만, 난다 해도 비행기가 하늘인가 <이것뿐이야?>라고 그는 어안이 벙벙하여 말했다. <응, 그 말뿐이야>라고 그녀는 말했다. <믿을 수 없군. 이렇게 길게 혼잣말을 하면서, 자신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니>라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고는, 잠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말했어, 그렇게> 하지만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군, 느닷없이 비행기라니, 비행기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런 기억이 전혀 없어. 어떻게 비행기가 불쑥 튀어나온 거지> <하지만 당신, 아까 목욕탕에서도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렸는 걸. 그러니까 당신이 아무리 비행기를 생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신 마음은 어딘가 먼 숲속에서 비행기를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어쩌면 어느 숲 속 깊은 데서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녀는 탁하는 조그만 소리를 내며 볼 펜을 테이블 위에 놓고는,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없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커피는 점점 식어, 탁해지고 있었다. 지축이 회전하고, 달은 은밀히 중력을 바꾸어 조수를 만든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선로위로는 전철이 통과한다. 그도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다. 그의 마음은 숲 속 어딘 가에서 만들고 있는 비행기를. 그것은 어느 정도 크기에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어떤 색을 하고 있을까, 어디로 가려 하는가, 하는 것들을. 거기엔 과연 누가 탈 것인가. 깊은 숲속에서 끈기 있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비행기를. 잠시 후에 그녀가 또 울었다. 하루에 그녀가 두 번이나 울다니,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두 번 운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특별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테이블너머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왠지 아주 리얼한 감촉이었다. 마치 인생 그 자체인 것처럼, 딱딱하고 매끌하고, 그리고 멀리에 있었다. 그는 생각한다. 그래, 그 무렵, 나는 마치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다.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 -고도 자본주의 전사(前史) 이것은 실화이며, 동시에 우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1960년대 우리들의 포크로어(민간전승)이기도 하다. 나는 1949년에 태어났다. 1961년에 중학교에 들어갔고, 1976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예의 좌충우돌 소동 속에서 스무 살을 맞이하였다. 우리는 말그대로 60년대의 아이들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한 평생에서 가장 상처 입기 쉽고, 가장 덜 성숙되어 있고, 그런 연유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1960년대란 터프하고 와일드한 공기를 듬뿍 마시며,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숙명적으로 그에 취해버렸던 것이다. 도어즈에서 비틀즈 밥 딜런까지, BGM도 빈틈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1960년대란 시대에는, 과연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지금 떠올려 보아도 그렇고 그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뭐 그렇다고 회고적인 기분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자신이 자라난 시대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대체 어디에 사는 누구를 위하여, 어떤 한 시대를 자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냐?). 나는 다만 사실을 사리로써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거기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분명히 있었다. 하기야 - 내 생각에 - 거기에 있었던 것 자체는 대단히 진귀한 것도 아니었다. 시대의 회전이 뿜어내는 열과, 거기에 내걸은 약속과, 어떤 종류의 무언가가 어떤 종류의 시기에 자아내는 어떤 종류의 한정된 찬란함, 그리고 망원경을 거꾸로 보고 있는 듯한 숙명적인 답답함, 영웅과 악한, 도취와 환멸, 순교와 전신, 총론과 각론, 침묵과 웅변, 그리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기다리기, 그 밖의 등등, 등등.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그런 것들은 빠짐없이 있었고, 지금도 분명 있다. 하지만 우리들 시대(란 과장된 표현을 용서해 주길 바란다)에는, 그런 것들 하나 하나가, 손에 꽉 잡힐 듯한 모양을 하고 존재했던 것이다. 하나 하나가 선반에 올려져 있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무언가를 하나 손에 올려놓으면, 허울좋은 광고라든가 도움이 되는 관련 정보라든가 할인 서비스권이라든가 그레이드 업을 위한 옵션이라든가, 그런 복잡한 것들이 줄줄이 따라오는 일이 없었다. 두툼한 매뉴얼 북이 몇 권이고 덤으로 받는 일도 없었다(예, 이 책이 초급 취급 설명서이고, 그리고 이 쪽이 중급이고, 이 것이 상급의 응용편이고, 그리고 이것이 초급 기종과 어떻게 연결하는가 하는 커넥션 설명서이고......). 우리들은 그저 단순히 무언가를 손에 들어,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밤에 가게에서 히요코를 사는 것처럼. 아주 간단하고 거칠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방식이 통용될 수 있었던 최후의 시대이기도 했다. 고도 자본주의 전사.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거의 신품에 가까운 남성용 식기를 지닌 우리들과, 그 무렵 아직 소녀였던 그녀들과의, 우당탕탕 유쾌하고 애처로운 성적 관계에 대하여. 그것은 이 이야기의 테마중 하나이다. 우선 처녀성에 대하여(<처녀성>이란 글자의 느낌은 내게 날씨 좋은 봄날 오후의 드넓은 들판을 상상하게 한다. 어째서일까?) 1960년대에는 처녀성이라고 하면, 현재에 비해 여전히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내 감상으로 하자면 - 물론 앙케트 조사를 하여 검사를 해 본 것도 아니니 대충 말할 수밖에 없지만 - 우리들 세대에서 스무 살 전에 처녀성을 버린 여자는 전체의 반 정도가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비율은 그랬다. 즉 반정도 되는 여자들이 의식적으로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처녀성이란 것은 아직 존중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들 시세대의 여자들 대부분은(중간파라 해도 좋을 것이다), 처녀였든 아니었든 결과적으로, 내심 어쩌면 좋을까 하고 망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새삼스레 처녀성이 소중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녀성 따위 아무 의미도 없다, 어리석은 짓이다, 라고 단언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 다음은 요컨대 - 사실 그대로 말하자면 - 대와 경우에 따른 문제가 되고 말았다. 상황에 따라서, 상대방에 따라서, 어떤 식으로도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름으로 상당히 타당한 사고이며, 삶의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비교적 차분한 매져리티인 그녀들을 가운데 두고 리버럴과 컨서버티브가 존재했다. 섹스란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여자들로부터, 결혼을 할 때까지 반드시 처녀로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여자들까지 있었다. 남자들 중에도, 결혼을 한다면 상대방은 처녀라야 한다고 말하는 작자도 있었다. 어느 시대도 그렇지만, 다양한 인간이 있고, 다양한 가치관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근접하는 다른 연대와 달랐던 점은, 이대로 시대를 잘만 운영해 가면 그런 서로 다른 가치관의 차이를 어느 정도는 메울 수 있으리라고 우리들이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피스. 이건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나와는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다. 한 마디로 하자면, 그는 무엇이든 잘하는 남자 애였다. 성적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었다. 특별히 핸섬한 것은 아니지만, 사뭇 청결한 느낌은 깔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당연한 일이듯 반장이니 하는 위원을 맡고 있었다. 목소리도 청명하여, 노래도 잘 불렀다. 말솜씨도 좋았다. 반에서 대화 모임이 있을 때면, 제일 마지막에 모임을 정리하는 발언을 하였다. 물론 독창적인 의견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반의 대화 모임에서 독창적인 의견을 추구한단 말인가. 우리들이 그 모임에서 추구한 것은 뭐가 어찌되었든 빨리 대화를 끝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면, 과연 모임은 적당한 시간에 틀림없이 끝이 났다. 그런 의미에서 보배 같은 남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세상에는 독창적이지 않은 의견을 필요로 하는 때가 아주 많은 것이다 - 고 할까, 그런 경우가 훨씬 많은 법이다. 그는 또 규율과 양심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남자이기도 하였다. 자습 시간에 장난을 하며 소란을 피우는 놈이 있으면, 온건하게 주의를 주었다. 불평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때로 머리통을 목에서 떼내어 흔들어보고 싶어진다. 어떤 소리가 날까, 하고. 하지만 여자 애들한테는 상당히 인기가 있다. 교실에서 그가 쓰윽 일어나 무슨 말을 하면, 여자 아이들은 모두 <우와, 그래>하는 식의 감탄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뭐가 뭔지 모를 수학 문제가 있으면, 그한테 물으러 간다. 나보다 27배는 인기가 있다. 뭐 실제로 그런 남자 애였다. 공립학교에 다닌 분이라면, 그런 타입의 남자애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반에든 한 명쯤은 이런 학생이 있고, 또 없어서는 반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장기간에 걸친 학교 교육을 통하여, 여러 가지 생활의 매뉴얼을 자연스럽게 터득해 가는데, 싫든 좋든 간에, 공동체 안에서는, 이런 타입의 인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내가 거기에서 습득한 지혜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이런 타입의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 나는 뭐랄까, 몹시 불완전하더라도, 점 더 존재감이 있는 인간을 좋아한다. 그래서 일 년이나 같은 반에 있으면서도, 친밀하게 지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로 말을 한 적조차 거의 없었다. 내가 그와 대화라 할만한 대화를 나눈 것은, 대학교 1 학년 여름 방학 때 일이다. 우리는 같은 자동차 교습소에 다니면서, 거기에서 몇 번인가 얼굴이 마주쳐 얘기를 나누었다. 시간을 기다리는 사이에 둘이 커피를 마셨다. 자동차 교습소란 곳은 정말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 누구라도 좋으니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진다. 농담이 아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딱히 나쁜 인상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신기하게도,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인상이 없었다(하기야 나는 면허를 따기도 전에 지도 요원과 싸움을 하여 보기 좋게 도중에 탈락하고 말았으므로, 사귀었다고 해봐야 실로 짧은 기간이었다). 그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걸 프렌드가 있었다는 것 정도이다. 그녀는 다른 반의 여자 애였는데, 교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인이었다. 미인이고, 성적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리더십이 있고, 반의 대화 모임에서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발언을 하였다. 어떤 반이든 이런 여자애가 한 명쯤은 있는 법이다. 아무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곤 했다. 점심 시간에는 곧잘 교종의 구석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종종 서로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같은 전철을 타고, 다른 역에서 내렸다. 그는 축구 부이고, 그녀는 ESS부였다(지금도 ESS란 말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요컨대 영어 회화반이다).과외 활동이 끝나는 서로 맞지 않는 날에는 먼저 끝난 쪽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기다렸다. 그들은 틈만 있으면 같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참 그렇게 할 말이 많은가 하고 감탄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들은(이라 함은 나와 내가 사귀고 있었던 불완전한 친구들을 말한다)아무도 그들을 놀리거나 하지 않았다. 화제에 올리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두 사람에게는 우리들의 상상력이 파고들 여지가 손톱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은 당연한 무엇으로서 거기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스터 클린과 미스 클린. 치약 광고 같은 것이다. 우리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그런 일에든 털끝만큼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우리들의 관심을 자극하는 것은 훨씬 더 바이털한 세계였다. 정치와 섹스와 록과 마약과. 우리들은 약국에 가서는 의기양양하게 콘돔을 사고, 한 손으로 브래지어를 푸는 방법을 배웠다. 우리들은 LSD를 대신하는 효과가 있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주어듣고, 바나나 가루를 만들어 그것을 파이프로 피웠다. 대마인 듯한 풀을 찾아내서는, 그것을 말려 종이에 말아 피웠다. 물론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효과가 없어도 좋았다. 그것은 일종의 축제인 것이다. 우리는 축제 그 자체에 대해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기에 누가 미스터 클린과 미스 클린이란 클린한 쌍에게 관심을 가질 것인가? 물론 우리들은 무지하고 오만했다. 우리들은 인생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 현실 세계에는 미스터 클린도 미스 클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이다. 그런 것은 디즈니 랜드나 치약 광고 같은 세계에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품고 있었던 환상도, 그들이 품고 있었던 환상도, 정도에 있어서는, 그닥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이다. 별 유쾌한 이야기도 아니고, 교훈비슷한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이며,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즉 포크로어인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것도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잡다한 세상 이야기를 하던 끝에,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는 실화라고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흘려들어 잊어버린 부분도 있고, 세세한 부분은 적당히 나의 상상을 섞어 쓰고 있다. 그리고 실재 인물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하지만 이야기의 줄거리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사실을 변조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도 거의 이 대로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야기의 세부는 잊어버렸지만, 그의 얘기하는 톤만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문장화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의 톤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 톤만 확실하게 포착하고 있으면, 그 이야기는 진실한 이야기가 된다. 사실은 얼마간 다를지 모르겠으나, 진정한 이야기가 된다. 사실과 이야기와의 차이가 진실함을 고양시키는 경우마저 있다. 반대로 세상에는, 사실과 전무 맞아 떨어져도 진정하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그런 이야기는 대체로 시시하고, 어떤 경우에는 위험하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들은 냄새로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미리 말해 두고 싶은 것은, 그가 이야기의 화자로서는 이류였다는 것이다. 어찌된 셈인지, 다른 부분에서는 넘치리만큼 듬뿍듬뿍 재능을 부여한 하느님도, 이야기를 하는 능력만큼은 그에게 부여하지 않은 모양이다(하기야 그런 목가적인 재능은 현실 생활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지만). 그래서 정직하게 말해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하품을 할 뻔했다(물론 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탈선도 있었다. 이야기가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을 기억해내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는 이야기의 편린을 손에 들고 찬찬이 바라보고는, 틀림이 없다고 스스로 납득을 한 후에야 하나 하나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그러나 차례는 쉬 오락가락하였다. 나는 소설가로서 - 이야기의 전문가로서 - 그들 편린의 전후를 뒤바꾸어, 접착제로 주도면밀하게 한 줄기로 이었다. 나와 그는 우연찮게도 루카라는 중부 이탈리아의 한 마을에서 만났다. 중부 이탈리아다. 나는 그 무렵 로마에 아파트를 빌려 살고 있었다. 마침 아내가 일이 있어 일본으로 돌아간 터라, 나는 그동안 혼자서 느긋하게 철도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베로나 만투바 모데나를 거쳐, 루카에 들렀던 것이다. 루카에는 두 번째로 오는 것이었다. 조용하고 좋은 마을이다. 그리고 맛있는 버섯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이 마을 어귀에 있다. 그는 사업차 루카에 와 있었다. 우연하게도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이 같았다. 세상은 참 좁다. 그날 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하였다. 우리는 양쪽 다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었고, 양쪽 다 따분해 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홀로 여행은 따분한 것이 된다. 젊은 시절은 다르다. 혼자든 둘이든, 어디를 가든 마음껏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그렇지가 않다. 처음의 한 이틀이나 사흘 나홀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뿐이다. 점점 풍경이 시큰둥해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성가셔진다. 눈은 감으면, 옛날에 있었던 기분 나쁜 일이 떠오르고 만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기가 귀찮아진다.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무한정 길게 느껴진다. 몇 번이나 시계를 힐긋거리게 된다.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싫어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상대방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어쩌면 천만다행이다 싶어 안도의 한숨의 내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레스토랑의 난로 앞 테이블에 앉아, 붉은 색 고급 포도주를 주문하고, 버섯 전채를 먹고, 버섯 파스타를 먹고, 버섯 로스트를 먹었다. 그는 가구를 사들이러 루카까지 온 것이었다. 그는 유럽 가구 전문 수입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그는 물론 그 사업에 성공하였다. 딱히 자랑을 하지도 않았고, 그럴싸한 냄새를 풍기지도 않았지만(그는 내게 명함을 한 장 주고는, 조그만 회사를 하나 경영하고 있어, 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가 현세적 성공을 수중에 넣었다는 것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며, 말투며, 표정이며, 몸짓이며, 두르고 다니는 공기로 금방 알 수 있었다. 성공은, 그라는 인간에게, 착 배어 있었다. 아주 상큼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내 소설을 전부 읽었다고 말했다. <나와 자네와는 필경 생각하는 방식도 다를 것이고, 지향하는 것도 다를 거야. 하지만 타인에게 뭐라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나는 생각해> 지당한 의견이었다. <제대로 잘할 수 있다면 말이지>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대해 얘기했다. 열차의 발착 시간이 제멋대로라는 둥, 식사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둥. 그런데 어쩌다 얘기가 그 쪽으로 흘렀는지 기억하고 있지만, 두 병째 캔티 와인이 테이블에 놓여졌을 때, 그는 이미 그 이야기를 시작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이따금 응, 응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이야기를 누구에겐가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장소가 중부 이탈리아의 조그만 마을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포도주가 향그런 83년도 산 콜티브오노가 아니었더라면, 난로에 불이 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 이야기를 영영 하지 못한 채 세월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나는 옛날부터 자신은 따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였어. 늘 자기 주위로 틀 같은 것이 보이고, 거기에서 삐져나가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살아왔지. 언제나 눈앞에 가이드 라인 같은 게 보여. 친절한 고속도로 같은 것이지. 무슨 무슨 방면은 오른쪽 차선으로 붙어라, 이 앞에는 커브길이 있다, 추월 은 금지한다, 는둥 말이야. 그 지시대로만 쫓아가면 길을 잘못 드는 일없이 갈 수 있지. 어디로든. 그런 식으로 사는 나를 사람들을 칭찬해 주었어. 모두가 감탄을 하면서 말이야. 어렸을 적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이 보일 테지 하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나는 포도주 잔을 들어 불 앞에 비추며, 잠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내 인생은, 적어도 처음 부분을 그렇다는 뜻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아주 순탄한 것이었어. 문제라 할만한 문제는 아무 것도 없었지. 하지만 그 대신에 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의미 같은 것은 제대로 포착할 수가 없었어. 성장함에 따라 그런 어정쩡한 기분은 점점 더 강렬해졌지.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그걸 모르겠는 거야. 올 에이 증후군이지. 요컨대 말이야, 수학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체육도 잘하고, 아무거나 다 잘하는. 부모는 칭찬을 하고, 선생님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데 문제가 없다고 하였지. 하지만 자신은 대체 어떤 것이 적성에 맞는가, 자신은 뭘 하고 싶어하는가. 그걸 알 수 없었어. 대학의 과만 해도 어떤 과를 선택하면 좋을지 나 자신은 전혀 모르는 거야. 법과에 가야할 것인지, 공학부에 가야 마땅한 것인지, 아니면 의학부에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그래서 부모와 선생님이 가라는 대로 도쿄 대학 법학 부로 진학을 한 거야. 그게 가장 타당한 길이라고들 하기에 말이지. 확실한 지침이라는 게 없었어> 나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자네 내 고등학교 시절 걸 프렌드 기억하나?> <후지사와란 이름이었던가>라고 나는 이름만 간신히 기억해내 말했다. 별로 자신이 없었는데, 제대로 맞추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후지사와 요시코. 그녀 일만해도 그랬어. 난 그녀를 좋아했지. 그녀랑 함께 있으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어. 나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녀도 내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해 주었어. 하염없이 긴 얘기를 하면서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 그건 정말 멋진 일이었지. 그렇지 않겠어,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와 후지사와 요시코는 소위 정신적인 쌍생아였다. 두 사람이 자라난 환경은 기분 나쁠 정도로 비슷했다. 둘 다 얼굴 생김이 반듯하고, 성적이 좋고, 타고난 리더였다. 반의 슈퍼 스타였다. 양쪽 다 가정은 유복하지만, 부모의 사이는 나빴다. 엄마 쪽이 약간 연상이고,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만들어, 집에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총을 의식한 체면 때문이었다. 집에서는 엄마가 권력을 쥐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일등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친밀한 친구라는 것이 없었다. 둘 다 인기는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없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보통 불완전한 인간은 자기와 비슷한 정도로 불완전한 인간을 친구로 삼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언제나 고독하고, 언제나 긴장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아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허락하고, 이윽고 연인 사이가 되었다. 항상 둘이 함께 점심을 먹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틈만 있으면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 얘기가 산처럼 많았다. 일요일에는 함께 공부를 하였다. 두 사람은 둘이서만 있을 때 가장 편안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손바닥에 올려놓듯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지금까지 품고 있었던 고독감이며 상실감, 불안과 그리고 어떤 유의 꿈같은 것에 대해서, 두 사람은 질리지도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일 주에 한 번 꼴로 페팅을 하게 되었다. 대개는 어느 한 쪽의 집에서 했다. 어느 쪽이든 집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으므 로(아버지는 늘상 집에 없었고, 엄마는 볼일이 많아 나다니기가 일쑤였다), 그러기는 간단했다. 그들 사이의 규칙은 옷을 벗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손가락만을 사용했다. 그런 식으로 10분이나 15분 가량 서로를 탐닉하듯 격렬하게 껴안고는, 그 다음 한 책상에 나란히 의자를 놓고 공부를 하였다. <자, 이제 이 정도로 됐지? 슬슬 공부나 하자>라고 그녀는 치마자락을 펴며 말했다. 두 사람의 성적은 거의 엇비슷하여, 그들은 게임을 하듯 공부를 즐길 수 있었다. 수학 문제를 시간을 재가며 앞다투어 풀기도 하였다. 공부란 그들에게는 전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공부는 그들에게 제 이의 천성 같은 것이었다. 그런 일들이 모두 아주 즐거웠어. 바보짓이라도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재미있었어. 그런 즐거움이란, 아마 우리 같은 인간밖에 모를 거야. 그러나 그가 그런 관계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고 그는 느꼈다. 그렇다, 그는 그녀와 자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진짜 섹스를 요구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일체감>,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필요했어. 거기까지 도달함으로 해서, 우리는 좀 더 해방되고, 좀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건 나로서는 아주 자연스런 심정의 추이였지. 그러나 그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매사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앙 다물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너를 무척 좋아해. 하지만 나는 결혼할 때까지 처녀로 있고 싶어>라고 그녀는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있는 말을 다하여 설득을 해도,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너를 좋아해, 아주 아주. 그렇지만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과 이 문제와는 별개야. 이 점은 내게는 명백하게 정해져 있는 일이야. 미안하지만, 참아 줘. 부탁이야. 나를 정말 좋아한다면, 참을 수 있겠지?>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녀의 말을 존중할 수밖에 없잖아, 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그것은 생의 방식의 문제이고, 그런데도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고. 내 자신은 상대방이 처녀이든 아니든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만약 내가 결혼한 상대가 처녀가 아니라 하더라도, 특별히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나는 딱히 래디컬한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인간도 아니고 몽상적인 인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수적인 것도 아니거든. 나는 다만 현실적일 뿐이야. 처녀이든 아니든, 내게는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었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니까 말이지.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거지. 그녀에게는 그녀가 생각하는 인생의 모습이란 게 있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참았어. 줄곧 옷 밑으로 손을 넣어서 페팅만 했어. 대충 어떤 일인지 자네도 알겠지? 대충 알아, 라고 나는 말했다.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그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씁쓸히 웃었다. 그건 그것대로 좋았어.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는 한, 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는 없었어. 내게 그것은 도중에 불과한 것이었거든. 내가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그녀와 한 몸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소유하고, 소유되는 것. 그렇다는 증거가 필요했어. 물론 성욕도 있었지. 그러나 그것뿐만은 아니야. 내가 말하는 것은 육체적인 일체감이야.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그런 일체감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어. 난 언제나 혼자였지. 그리고 언제나 어떤 틀 안에서 긴장하고 있었어. 나는 자신을 해빙시키고 싶었던 거야.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지금까지 희미하게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 그녀와 하나로 딱 연결됨으로써, 나는 자신을 규제해 온 틀을 털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던 거야. <그런데, 그게 안 됐다는 거야?>라고 나는 물었다. <응, 뜻대로 되지 않았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한동안 난로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장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묘하게도 밋밋했다. <결국은 마지막까지 불가능했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그녀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또 그 생각을 단호하게 그녀에게 말해 보기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곧바로 결혼할 수 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약혼이라면 더 빨리도 할 수 있다. 그녀는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띠었다. 그것은 정말 멋진 미소였다. 그녀가 그의 말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세상에 길든 인간이 손 아래 인간의 미숙한 정론을 들을 때 같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그리고 여유가 있는 미소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꼈다. 있지, 너, 그건 무리야. 나는 너랑 결혼할 수 없어. 나는 나보다 몇 살 위인 사람이랑 결혼할 것이고, 너는 몇 살 아래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야. 그게 세상의 보통 흐름이라고. 여자란 남자보다 성장이 빠른 법이니까, 그래서 더 빨리 노화하고. 너는 아직 세상이란 것을 잘 모르고 있어. 우리가 대학을 나와 곧장 결혼한다 해도, 멋지게 살아갈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어. 우리는 지금처럼 살 수는 없을 거야. 물론 나는 너를 좋아해. 태어나서 지금껏 너 이외에 다른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어. 하지만 그것과 이것과는 별개야(그것과 이것과는 별개, 라는 말을 그녀는 입버릇처럼 하였다). 우리는 아직 고등학생이고, 주변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어. 하지만 바깥 세상을 그렇지가 않다고. 훨씬 더 거대하고, 훨씬 더 현실적인 거야. 우리는 그에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돼. 그녀가 하려는 말은 그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해도 또래의 남자아이들에 비하면 훨씬 현실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다른 자리에서 이런 말을 일반론으로 들었다면, 어쩌면 그 의견에 찬동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문제였다. 난 납득이 안 가, 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를 아주 사랑하고 있고, 너랑 하나가 되고 싶어. 이런 나의 바람은 아주 확실한 것이고, 내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야. 가령 거기에 현실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해도, 솔직히 그건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그만큼 너를 좋아하고 있어. 사랑하고 있다고. 그녀는 또 고개를 저었다. 정말 어쩔 도리가 없구나, 라고나 말하려는 듯. 그리고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사랑에 대해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 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 사랑은 아직 아무런 시련도 당하지 않았어. 우리는 아무런 책임도 지고 있지 않다고. 우린 아직 어린애야. 너나 나나.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서글펐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쳐부술 수 없는 것이 서글펐다. 방금 전까지, 그 벽은 그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그의 앞 길을 막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꼈다. 나는, 이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그는 느꼈다. 나는 아마도 이대로, 이 막강한 틀에 갇힌 채, 거기에서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나이를 먹어가겠지, 하고. 결국 두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관계를 계속하였다. 도서관에서 만날 약속을 하여, 함께 공부를 하고, 옷을 입은 채 페팅을 하였다. 그녀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의 불완전성이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녀는 그런 불완전성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 두 사람이 아무런 문제없이 청춘을 보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미스터 클린과 미스 클린. 그 혼자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품고 내내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1967년 봄 그는 도쿄대학에 입학하고. 그녀는 코베에 있는 기품 있는 여자 대학에 들어갔다. 여자대학으로서는 분명 일류였지만, 그녀의 성적으로 하자면 그것은 성에 안 차는 선택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원하기만 한다면 도쿄 대학에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학 시험조차 치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일들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공부가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대장성에 들어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난 여자야. 너랑은 달라. 너는 훨씬 더 높은 데까지 올라가야 할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앞으로 4년간 좀 느긋하게 지내고 싶어. 알겠어 좀 쉬고 싶다고. 안 그래, 결혼해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잖아? 그녀의 그런 선택은 그를 실망시켰다. 그는 둘이서 도쿄로 올라가, 새로이 두 사람의 관계를 재편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도쿄에 있는 대학에 와, 라고. 그러나 그녀는 역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는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에 코베로 내려가 매일처럼 그녀와 데이트를 하였다(그 해 여름에, 나는 자동차 교습소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많은 곳을 다니며,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페팅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변화가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이란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소리도 없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언가 확실한 것이 구체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도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말투며, 그녀의 옷차림, 화제를 고르는 그녀의 취향, 그에 대한 의견 - 그런 것들은 옛날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처럼 자신이 두 사람의 세계에 녹아들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 무언가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진폭을 조금씩 잃어가면서 계속되는 반복 행위처럼 여겨졌다.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내 쪽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도쿄 생활은 고독했다. 대학교에서도 역시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거리는 복잡하고 더럽고, 음식은 맛이 없었다. 사람들은 품위 없는 말투로 얘기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는 도쿄에 있는 동안 내내 그녀 생각만 하였다. 밤이 되면, 방에 틀어박혀 줄곧 편지를 썼다. 그녀한테서도(그가 보내는 편수의 횟수보다는 훨씬 적지만)답장이 왔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일일이 자세하게 써 보냈다. 그는 그런 편지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읽었다. 만약 그녀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았더라면, 내 머리는 벌써 오래 전에 어떻게 되고 말았을 거다, 라고 그는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게 되었다. 가금을 강의를 빼먹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여름 방학이 되어 막상 기다렸다는 듯 코베로 달려 내려가 보니, 그는 여러 가지 일들에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불가사의하게도, 불과 석 달을 떠나 있었을 뿐인데, 다시 돌아와 보는 그곳은, 모든 것이 먼지가 낀 듯 뿌옇고 생기를 잃어 있었다. 어머니와의 대화는 죽도록 짜증이 났다. 도쿄에서는 그립게 느껴졌던 거리의 풍경도, 구제할 길 없이 낡게 보였다. 코베 거리 역시 결국은 자기 충족적인 시골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타인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싫어지고, 어릴 적부터 다녀온 이발관에 가는 일조차 성가셨다. 매일처럼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던 해변가지도, 어쩐지 썰렁하고, 쓰레기만 눈에 띠었다. 그녀와 데이트를 해도 그의 기분은 고양되지 않았다. 데이트가 끝나 집으로 돌아오면 그는 늘 생각에 골몰하였다. 대체 무엇이 잘 못 된 것일까, 하고. 그는 물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기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언가가 모자란다, 어떻게든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고 그는 생각했다. 정열이라는 것은, 어떤 시기에는 그 자체의 내재적인 힘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 즈음에서 손을 쓰지 않으면, 우리의 관계도 언젠가는 궁지에 몰려, 그 정열도 질식하여 소멸해버릴 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 날, 줄곧 동결되어 있었던 섹스 문제를 다시 한 번 꺼내 보기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래볼 심산이었다. <나는 석 달 동안 도쿄에 혼자 있으면서, 늘 너 생각을 했어.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내내 떨어져 있으면, 많은 것들이 상당히 불안해져. 암울한 생각이 점점 부풀어 가는 경우가 있단 말이다. 인간이 혼자 있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야. 너는 잘 모를 거야. 나는 지금껏 이런 식으로 혼자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그것은 아주 힘겨운 일이야. 그래서 나는 너와의 사이에 확실한 연대감 같은 것이 필요한 거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단단히 맺어져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 하지만 그녀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입맞춤을 하였다. 아주 부드럽게. <미안해. 그러나 너에게 처녀를 바칠 수는 없어.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어. 하지만 그만은 안 돼. 나를 좋아한다면 그 얘기는 꺼내지 말아 줘. 부탁이야>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과에도 약혼을 한 친구가 있어. 두 사람>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 상대는 모두 탄탄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약혼이란 그런 거야. 결혼이란 책임이 따르는 거야. 자립하여,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책임을 지지 않고,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어> <나는 책임질 수 있어>라고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좋은 대학에도 들어갔어. 앞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성적을 다 낼 수 있다고. 그러면 어떤 회사든 어떤 관청이든 내가 원하는대로 들어갈 수 있다. 너가 좋다는 곳에 제일 좋은 성적으로 들어가겠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대체 뭐가 문제야?> 그녀는 눈을 감고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난 무서워>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도 사실은 무서워. 너랑 다름이 없을 만큼 무섭다고. 하지만 나는 너랑 함께라면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나와 네가 힘을 합하면 무서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넌 몰라. 난 여자야. 너랑은 다르다고. 너는 그걸 몰라, 전혀> 그 이상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 그녀는 내내 울었다. 그리고 다 울고 나서도 이상한 말만 했다. <있지, 만약 말이야...... 만약 너랑 헤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너는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있을 거야, 정말이야. 결코 잊지 않아.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해하는 걸. 너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이고, 너랑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즐거웠어. 그것만은 알아줘. 단 그것과 이것과는 별개야. 만약 약속을 하라고 하면 하겠어. 난 너랑 잘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내가 누군가와 결혼한 다음에 너랑 잘 거야. 거짓말이 아니야, 약속해> <그때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라고 그는 난로 속의 불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웨이터가 메인 디쉬를 날라 오는 길에 난로에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불똥이 소리를 내며 튀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중년 부부가 열심히 디저트를 고르고 있었다.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어. 마치 수수께끼 같았지. 집으로 돌아가 그녀가 한 말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는 그녀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 자네는 알겠는가?> <요컨대, 결혼을 할 때까지는 처녀로 있고 싶지만, 결혼을 하면 이미 처녀일 필요가 없으니, 자네랑 바람을 피워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것인가?> <아마 그런 뜻이었겠지.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 <유니크한 발상이기는 하지만, 일단 앞뒤는 맞잖나> 그는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 말대로야, 일단 앞뒤는 맞지> <처녀로 결혼을 한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된 다음에 바람을 피운다. 옛날 프랑스 소설 같군. 무도회라든가, 몸종이라든가, 그런 것이 등장하지 않을 뿐>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현실적인 해결책이었던 거야>라고 그는 말했다. <가엾게도>라고 나는 말했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엾게도. 정말 그 말대로야. 자네가 한 말 그대로야. 자네는 다 이해하는 모양이로군>, 이라며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으면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나도 그 나름으로 나이를 먹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 당시에는 꿈에도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어. 나는 아직도 형편없는 어린애였던 거야. 인간들 저마다의 미세한 마음의 떨림 같은 것을, 나는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저 놀라기만 했을 뿐. 솔직히, 정말 속이 뒤집힐 정도로 놀랐어> <이해가 가는군>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서 우리는 한 동안 침묵 속에 그 요리를 먹었다.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지만>이라고 그는 얼마 후에 다시 말을 꺼냈다. <나랑 그녀는 결국 헤어졌어. 어느 쪽이 먼저 그러자고 말을 꺼낸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그냥 자연히 끝나버린 거지. 아주 조용히. 나나 그녀나 틀림없이 그런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데 지쳤던 거겠지. 내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그런 삶의 방식은 뭐랄까 - 그다지 성실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어. 아니야 말을 좀 다르군.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그녀가 좀 더 반듯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어. 그래서 나는 좀 실망을 했을 거야. 처녀니 결혼이니, 그런 일들만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고, 좀 더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는가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데>라고 나는 말했다. 그는 긍정하였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는 두툼한 버섯을 잘라먹었다. <탄력성이 없어져. 난 잘 알 수 있어. 늘어져버리는 것이지. 나만해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어.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쫓겨다녔어. 잘해라, 더 잘해라 하고 말이야. 그리고 그런 능력이 있는 만큼, 하라는 대로 하지. 그러나 자아의 형성이 그에 따라갈 수 없었던 거야.그리곤 어느 날, 찍 늘어져버리는 것이지. 모럴 같은 것이 말이야> <자네 경우는 그렇지 않았단 말이지?>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나는 간신히 극복했다고 생각해>라고 그는 잠시 생각한 후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나는 그녀와 헤어진 후, 도쿄에서 애인을 만들었지. 좋은 여자였어. 우리는 한 동안 동거를 하기도 했어.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와의 관계에는 후지사와 요시코와 사귀었을 때 같은 미묘한 마음의 떨림은 없었어. 하지만 나는 그 여자 역시 아주 좋아했다. 우리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상당히 정직하게 사귀었어.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어떤 아름다움과 어떤 약점을 갖고 있는가, 나는 그녀에게서 그런 것들을 배울 수 있었지. 그리고 나는 친구도 생겼어. 정치적인 관심도 갖게 되었고. 그렇다고 나라는 인간의 인간성이 싸그리 변한 것은 아니야. 나는 줄곧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었고, 아마 지금도 그럴 거야. 나는 소설을 쓰지 않고, 자네는 가구를 수입하지 않는다. 그런 거야. 하지만 나는 대학에서 세계에는 여러 가지 현실성이 있다는 것을 배웠어. 세계는 넓다, 그 세계에는 다양한 가치관이 병행하려 존재하고 있다, 반드시 우등생일 필요는 없다, 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는 사회로 나갔지> <그래서 성공을 거두었다> <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는 겸연쩍은 듯이 한숨을 쉬며, 음모의 공범자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같은 연대 사람들에 비하면, 과연 내 쪽이 수입이 훨씬 많지. 실제적으로 말해서>, 그 말만 하고 그는, 또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야기가 다 끝난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던 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다음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그 다음부터 후지사와 요시코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어>라고 그는 말을 이었다. <줄곧 말이야.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어떤 상사회사에 들어갔지. 그리고 거기서 약 5년 동안 일했어. 외국에 주재하기도 하면서. 하루 하루가 바빴지. 대학을 졸업한 지 한 2년쯤 지났을까,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어머니가 알려 주더군. 상대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어. 내가 그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한 생각은 그녀는 정말 결혼할 때까지 처녀였을까, 하는 거였지.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이 든 거야. 그랬더니 조금 슬퍼지더군. 그 다음 날을 더욱 슬퍼지고. 어째 많은 것이 끝나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어. 배후에서 영원히 문이 닫혀진 듯한 기분이 들었어. 하기야 당연한 일이지. 나는 그녀를 정말 좋아했으니까. 그녀랑은 4년정도 연인으로 사귀었더랬어. 나는, 적어도 내 쪽을 그랬다는 얘기지만, 결혼까지도 생각했었고. 그녀는 내 청춘기에 있어 굉장히 큰 부분을 점하고 있었던 거야. 슬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나는 그녀가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뭐랄까, 그녀가 조금은 걱정스러웠으니까. 그녀한테는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운 구석이 있었거든> 웨이터가 우리의 접시를 치웠다. 그리고 디저트 바구니를 들고 왔다. 우리는 디저트를 사양하고, 커피를 부탁했다. <나는 뒤늦게 결혼했지. 서른 두 살에 했으니까. 그러니까 후지사와 요시코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난 아직 독신이었어. 스물 여덟 살이었지, 아마. 생각해 보면 벌써 십 년이나 지난 일이야. 나는 그때껏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막 독립한 참이었어. 아버지에게 담보를 빌려 융자를 얻어서, 조그만 회사를 차렸지. 나는 앞으로는 반드시 수입 가구 시장이 확대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어. 하지만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처음부터 매사가 형통하게 진행될 리는 없는 법이지. 납품은 늦어지고, 물건을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고, 창고대는 연체되고, 융자낸 돈을 갚아야 할 날짜는 임박해 오고, 그 때는 솔직히 말해 나도 지쳐서 자신감을 잃었더랬어. 지금까지 내 인생살이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인지도 모르겠군. 바로 그런 때 그녀한테서 전화가 온 거야. 어떻게 내 전화 번호를 알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밤 8시경에 전화가 걸려 온 거야. 그 목소리가 후지사와 요시코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지. 그런 것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법이거든. 반가웠어, 무척. 나는 마음이 약해져 있었고, 그런 때 옛 애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위로가 돼> 그는 무슨 기억을 떠올리듯, 난로의 장작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사방을 돌아보니 레스토랑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웃음 소리와,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실내는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손님들은 거의 그 지역 사람들 모양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웨이터를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고 있었다. 쥬세페! 파올로!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에 대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알고 있었어. 내가 아직 독신이라는 것도, 오래 동안 외국에서 살았다는 것도. 1년 전에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을 하였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더군. 괜찮아, 모든 게 잘 되갈거야. 자신을 가져, 라고 그녀는 말해 주었어. 너는 틀림없이 성공할 거야. 못할 리가 없잖아. 그녀의 그런 말이 나는 참으로 기뻤어. 아주 상냥한 목소리였다. 나는 할 수 있다, 고 나는 새삼스레 생각했지. 그녀의 목소리가 내 옛 자신감을 되새기게 해 준 거야. 현실이 현실인 한 반드시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것은 나를 위한 세계라고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녀가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어. 어떤 사람과 결혼을 했는가, 아이는 있는가, 어디에 살고 있는가, 등등을 말이야. 그녀에게는 아이가 없었어. 결혼한 상대는 나이가 네 살 위고, 텔레비전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다더군. 디렉터 일을 하고 있다고. 상당히 바쁘겠군, 이라고 내가 말했지. 그녀는, 아주 바빠, 아이를 만들 틈이 없을 정도로, 라고 하더군. 그러면서 웃었어. 그녀는 도쿄에 살고 있었어. 시나가와(品川)에 있는 맨션에. 나는 그 무렵 시로가네다이(白金台)에 살고 있었어. 근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 참 신기한 일이군, 이라고 내가 말했지. 우리는 아무튼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 과거 고등학교 시절에 한 쌍이었던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전부 했지. 약간 어색하기도 했지만, 하지만 즐거웠어. 결국 우리는 번 옛날에 헤어졌고,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그리운 옛 친구로써 이야기를 했던 거야.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는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어. 꽤나 오래 얘기했지. 서로 할 얘기를 다 하고 나자, 침묵이 찾아왔지. 뭐랄까...... 아주 짙은 침묵이야. 눈을 감으면, 많은 것들의 영상이 도렷하게 떠오를 그같은 그런 침묵이었어>라며 그는 한 동안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은 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보았다. <나로서는 가능하면 거기에서 전화를 끊고 싶었다. 전화해 주어서 고마워, 너랑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상당히 즐거웠다, 라고 말이야. 그건 알겠지> <현실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그게 가장 현실적이겠지> <그런데 그녀는 전화를 끊지 않았어. 그리곤 나를 자기 집으로 부르는 거야. 지금 놀러오지 않겠냐면서. 남편은 출장중이라 집에 없고, 혼자서 심심하다고. 나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 지 몰라, 입을 다물고 말았지. 그녀도 말이 없었어. 그 침묵은 잠시 계속되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난 옛날에 너랑 한 약속을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고 말이야> 나는 옛날에 너랑 한 약속을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한참 동안이나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그녀가, 자기가 결혼한 다음에 그와 자겠노라고 한 말을 기억해냈다. 그 역시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약속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입에 담은 것은 그 당시 그녀가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워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만 그런 말을 하고 만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그것은 약속이었던 것이다. 명백한 서약이었다. 그는 순간 방향을 잃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정당한 일인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어쩔 바를 몰라 사방을 돌아보았다. 이미 아무 것도 그를 이끌어 주지 않았다. 물론 그녀와 자고 싶었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도, 몇 번이나 그녀와 자는 장면을 상상했던 것이다. 애인이랑 있을 때에도, 그는 어둠 속에서 그런 장면을 수없이 상상하였다. 따지고 보면 그는 그녀의 벗을 몸은 힐긋조차 본 일이 없는 것이다. 그가 그녀의 육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옷안으로 파고 들어간 손가락의 감촉뿐이었다. 그녀는 팬티도 벗지 않았었다. 그 안으로 손가락을 넣을 수 있게 해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단계에서 그녀와 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일은 많은 것은 훼손시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과거라는 어둠 속에 살며시 놔두고 온 것을, 지금 새삼스레 흔들어 일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나답지 않은 행위하고 그는 느꼈다. 거기에는 무언가 비현실적인 것이 명백하게 섞여 있었고, 그런 비현실성은 그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어떻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영원한 옛날 이야기다. 그것은 한 평생에 오직 한 번밖에 맛볼 수 없는 멋들어진 페어리 테일인 것이다. 그가 가장 상처 입기 쉬운 시기를 함께 한 아름다운 여자 친구가, 너랑 자고 싶으니까 지금 집으로 와 달라고 하고 있다. 그녀는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먼 먼 옛날 숲속에서 은밀하게 나누어진 전설적인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말을 잃었음을 느꼈다. <여보세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 . . 너 거기 있니?> <응, 있어>라고 그는 말했다. <알았어. 지금 가지. 한 30분 정도 걸릴 거야. 너네 집 주소를 가르쳐 주려마> 그는 맨션의 주소와 호수와 전화 번호를 메모하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잡아 그곳으로 갔다. <자네라면 어떻게 했겠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어려운 질문에 도저히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웃으며 테이블 위의 커피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 역시 대답하지 지나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지. 나는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려야만 했어. 그든지 안 가든지. 중간은 없어. 그리고 나는 그녀의 집으로 갔다. 나는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옛날처럼 똑같이 아름다웠어. 옛날과 다름없이 매력적이었고. 그리고 옛날처럼 좋은 냄새가 났지. 우리는 둘이서 술을 마시고, 옛날 이야기를 했어. 옛날에 듣던 레코드까지 들었지. 그 다음 어찌되었을 거라 생각하나?>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짐작이 안 간다, 고 나는 대답했다. <옛날, 아주 어렸을 적에 한 동화를 읽은 일이 있었어>라고 그는 먼 쪽 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떤 줄거리였는지는 다 잊어버렸는데, 마지막 구절만큼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지. 왜냐하면 그렇게 이상하게 끝나는 동화는 처음 읽어봤기 때문이야. 그 동화는 이런 식으로 끝이나. <<모든 것이 끝난 다음, 임금님도 신하도 모두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동화의 끝치고는 좀 이상하다 싶지 않나?> <음, 그렇군> <어떤 줄거리였는지 기억할 수 있으면 하고 생각하는데, 그게 도무지 기억이 안 나. 그 마지막 야릇한 한 구절밖에 기억하고 있지 않아. <<모든 것이 끝난 다음, 임금님도 신하도 모두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하였습니다>>, 대체 어떤 줄거리였을까> 그 즈음 우리는 이미 커피를 다 마신 상태였다. <우리는 서로를 안았어>라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섹스를 하지는 않았지. 나는 그녀의 옷을 벗기지 못한 거야. 나는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만 사용했어. 그러는 게 가장 좋으리라 생각한 거지. 그녀도 똑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야.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길디 긴 페팅을 하였다. 우리들이 이해해야 할 일들은, 그런 식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어. 물론 옛날이었다면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는데. 우리는 아주 자연스레 섹스를 나눔으로써, 훨씬 더 서로를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어쩌면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행복해질 수 있었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어. 그것은 이미 봉인되고, 동결된 일이었어. 이미 어느 누구도 그 봉인을 뜯을 수는 없는 거지> 그는 접시 위에 놓인 빈 커피 잔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그는 커피 잔을 돌렸다. 웨이터가 무슨 일인가 싶어 살피러 왔을 정도였다. 그러는 그는 이윽고 커피 잔을 반듯하게 제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웨이터를 불러 에스프레소를 한 잔 더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녀 집에 머물렀던 시간은 길어야 한 한 시간 정도라고 생각해. 확실하게는 기억 못하지만. 대충 그 정도였을 것이란 기분이 들어. 아마 그 정도였을 거야. 그 이상 거기에 있으면, 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렸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안녕을 고하고 집을 나왔지. 그녀도 안녕이라 말했고. 진짜 마지막 안녕이었던 거야. 그렇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고, 그녀도 알고 있었어. 마지막 본 그녀의 모습은, 팔짱을 끼고, 문 께에 서 있는 모습이었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하지만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나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나는 몹시......몹시 텅 빈 느낌이었다. 속이 휑한 공동처럼.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고막에서 이상한 울림으로 변하고. 모든 거의 모습이 뒤틀려 보였어. 나는 그 주변을 정처없이 걸어다녔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비한 시간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소모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의 방으로 되돌아가, 그녀는 한껏 껴안고 싶은 심정이었어. 하지만 물론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가능할 리가 없지>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웨이터가 가져다 준 두 잔째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부끄러운데, 나는 그 길로 거리로 나가 여자를 샀네. 여자를 사기는 난생 처음이었어. 그리고 아마도 그에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네> 나는 잠시 자신의 커피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그 얼마나 오만한 인간이었나, 그 점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그런 나의 생각을 그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 마치 다른 사람에게 생긴 일 같군>이라 말하고 그는 웃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침묵했다. 나도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그가, <모든 것이 끝난 다음, 임금님도 신하도 모두 배를 움켜쥐고 폭소를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이 문장을 생각해, 조건 반사처럼. 내 생각에, 깊은 슬픔에는 언제나 약간의 해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나 싶네> 맨 처음 미리 말했듯, 이 이야기에는 교훈이라 할만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에게 실제로 일어나 일이며, 우리들 모두에게 일어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도 폭소를 터뜨릴 수는 없었으며, 지금도 그럴 수 없다. 가노 크레타 내 이름은 가노 크레타, 언니 가노 마루타의 일을 거들고 있다. 물론 나의 진짜 이름은 가노 크레타가 아니다. 이 이름은 언니의 일을 거들 때만 쓴다. 즉 업무상의 이름이다.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가노 다키라는 본명을 사용한다. 내가 크레타라고 이름을 대는 까닭은, 언니가 마루타라고 이름을 대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크레타 섬에 가 본 일이 없다. 가끔 지도를 바라본다. 크레타는 아프리카에 가까운 그리스의 섬이다. 개가 입에 물고 있는 뼉다귀처럼 울퉁불퉁 길쭉한 꼴을 하고 있고, 유명한 유적이 있다. 크놋소스 궁전이다. 젊은 영웅이 미로를 무사히 빠져나와 여왕을 구해내는 이야기.만약 크레타 섬에 갈 길이 생긴다면 꼭 거기에 가보려고 한다. 내 일은 물의 소리를 듣는 언니를 거드는 것이다. 나의 언니는 물의 소리를 듣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몸을 채우고 잇는 물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능도 필요하고, 훈련도 필요하다. 아마 일본에서는 언니밖에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언니는 그 기술을 아주 오랜 옛날 마루타 섬에서 습득했다. 언니가 수행을 하던 장소에는 알렌 긴즈버그도 왔었고, 키스 리챠드도 왔었다. 마루타 섬에는 그런 특별한 장소가 있다. 그 장소에서 물은 아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언니는 그 곳에서 몇 변이나 수행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와, 가노 마루타란 이름으로, 사람의 몸 속을 흐르는 물의 소리를 듣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산 속에 오래된 집 한 채를 빌려 생활하고 있다. 지하실도 있다. 언니는 지하실에 일본 각지에서 운송되어 온 수 십 종류의 물을 진열해 놓고 있다. 물은 도기 물 항아리에 담겨 있다.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물을 보존하기에는 지하실이 가장 적합하다. 내 일은 그 물을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쓰레기가 떠 있으면 떠내고, 겨울에는 얼음이 얼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여름에는 벌레가 끼지 않도록 한다. 그닥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하루중 대부분의 시간을, 건축 도면을 그으며 지낸다. 언니를 찾는 손님이 오거나 하면 차를 대접하기도 한다. 언니는 지하실에 보존하고 있는 물 항아리 하나 하나에 매일 귀를 갖다대고, 그들이 발하는 미미한 소리에 귀기울인다. 그 물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다. 언니는 나한테도 물의 소리를 듣도록 하였다. 나는 눈을 감고, 온 몸의 신경을 귀로 집중시킨다. 하지만 내게는 물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필경 내게는 언니만큼의 재능이 없는 것이리라. 우선 물 항아리의 물소리를 들어. 그러면 머지 않아 사람 몸의 물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니까,라고 언니는 말한다. 나도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아주 어렴풋하게 들린 듯하다고 생각하는 적도 있다. 아주 아주 멀리에서 문득 무언가가 움직인 듯한 기척을 느낀다. 조그만 벌레가, 두 세 번 날갯짓을 한 듯한 소리가 들린다. 들렸다기 보다는, 공기가 아주 미미하게 흔들렸다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 미미한 흔들림마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숨바꼭질을 하듯. 마루타는 내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깝다고 한다. <너 같은 인간이야말로, 몸 속의 물소리를 반드시 들어야할 필요가 있어>라고 마루타는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문제를 껴안고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너가 그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말이야>라고 마루타는 말한다. 그리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만약 너가 그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문제는 해결된 거나 다름이 없어>라고 마루타는 말한다. 언니는 진정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분명 문제를 갖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제를 도저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남자들은 나를 보면 반드시 범하려고 한다. 그 누구든 나를 보면 바닥에 넘어뜨리고, 혁대를 푸는 것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옛날부터 죽 그렇다.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내내 그렇다. 나는 과연 자신을 미인이라고 생각한다. 몸매도 멋지다. 가슴을 크고, 허리에는 탄력이 있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스스로도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거리를 걷고 있으면 남자들이 모두 입을 헤 벌리고 나를 본다. <그렇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미인들이 하나같이 강간을 당하는 것을 아니잖아>라고 마루타는 말한다. 언니의 말 대로라고 생각한다. 그런 황당한 일을 당하는 것을 나뿐이다. 아마 내게도 책임은 있을 것이다. 남자에게 그러고 싶은 기분이 생기는 것은, 내가 주뼛 쭈뼛거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두들 그런 나를 보고 답답해져, 저도 모르게 범하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연유로, 아무튼 지금까지 수많은 종류의 남자들이 나를 범했다. 억지로 폭력적으로 범하는 것이다. 학교 선생을 비롯하여, 동급생들, 가정 교사, 외숙부, 가스 요금을 받으러 온 남자, 이웃집에 난 불을 끄러 왔던 소방 사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그런 일을 피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칼에 찔리기도 하고, 얼굴을 얻어맞기도 하고, 호스로 목을 졸리기도 하였다. 그런 식으로 몹시 폭력적으로 강간을 당한다. 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다. 그런 일을 계속 당하고 있다간, 나는 언젠가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나는 언니 마루타와 도회지를 떠나 산 속에 파묻혀, 지하실에 있는 물 항아리는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닥 한 번 나를 범하려 한 상대방을 죽인 일이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죽인 것은 언니다. 그 남자 역시 나를 범하려 하였다. 이 지하실에서. 그 남자는 경찰이었다. 그는 무슨 조사를 하러 우리 집에 왔는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일초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서 나를 넘어뜨리고는, 내 옷을 북 북 찢더니, 자기의 바지를 무릎까지 내렸다. 피스톨이 달그락 딸그락하는 소리를 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으니까 날 죽이지 말아요, 라고 나는 벌벌 떨면서 말했다. 경찰은 내 얼굴을 때렸다. 그런데 그 대 마침 언니가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수상쩍은 소리를 눈치채고는, 큼지막한 발을 한 손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그 발로 힘껏 경찰관의 뒷머리 통을 내려쳤다. 무언가가 움푹 패는 듯한 퍽 하는 소리가 나고, 경찰관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언니는 부엌에서 부엌칼을 가지고와, 그것으로 생선의 배를 가르듯 경찰관의 목을 주저없이 갈랐다. 쓰윽 소리도 없이 경관의 목이 잘리고 말았다. 언니는 칼을 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언니가 간 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짤린다. 나는 경악하여 그런 언니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왜 목을 자르느냐고?>라고 나는 소리질렀다. <일단 이렇게 해 두는 편이 좋아. 뒤탈이 없고. 상대방은 경찰이니까 말이지. 귀신이 되어 안 나타나란 법도 없고>라고 마루타는 대답했다. 언니는 아주 현실적으로 매사를 처리한다. 꽤나 피가 많이 나왔다. 언니는 그 피를 한 물 항아리에 담았다. <피를 빼 두는 게 최선이야>라고 마루타는 말한다. <이렇게 해 두면 뒤탈이 없으니까>. 우리는 피가 전부 빠질 때까지 부츠를 신은 경관의 다리를 들어 몸을 거꾸로 세우고 있었다. 덩치가 큰 남자라, 다리를 들고 몸을 받치고 있기에는 상당히 무거웠다. 마루타가 힘이 세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는 처럼 몸집이 크고, 힘이 센 것이다. <남자들이 그렇게 너를 덮치는 것은 네 탓이 아니냐>라고 마루타는 다리를 잡을 채 말했다. <네 몸 속의 물 탓이야. 네 몸은 그 물에 맞지 않아. 그래서 모두들 그 물에 이끌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 물을 몸밖으로 내쫓을 수가 있지?>라고 나는 물었다. <나, 언제까지 이렇게 사람 눈을 피해 숨어 살 수는 없어. 이런 식으로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아>. 나는 사실을 바깥 세계로 나가 살고 싶었다. 나는 일급 건축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나는 통신 교육을 통해 그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자격증을 딴 후에는, 여러 가지 도면 콩쿠르에 응모하여, 상을 몇 번 받기도 하였다. 나의 전문 분야는 화력 발전소를 설계하는 것이다. <서둘러서는 안 돼. 귀를 기울려. 그러면 언젠가는 답이 들릴 테니까>라고 마루타는 말했다. 그리고는 경찰관의 다리를 털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항아리에다 떨구었다. <그건 그렇고,우리는 경찰관을 한 명 죽였어.어떻게 하면 좋지? 들키면 큰 일이잖아?>라고 나는 말했다. 경찰을 살해했다는 것은 중죄다. 사형을 받을 수도 있다. <뒤뜰에 묻어버리자>라고 마루타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목이 잘린 경찰관을 뒤뜰에 묻었다. 피스톨도 수갑도 도 부츠도 모두 묻어버렸다. 구멍을 파고, 사체를 운반하는 일도, 구멍을 메우는 일도 전부 마루타가 하였다. 마루타는 믹 재거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고잉 투 어 고 고>>를 부르며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사체를 묻은 후 우리는 흙을 꼭꼭 밟고, 그 위에다 낙엽을 흩뿌려 놓았다. 물론 지방 경찰서를 철저하게 조사를 하였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실종된 경찰관을 수색하였다. 우리 집에도 형사가 찾아왔다.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다. <걱정 마, 들킬 리가 없으니까>라고 마루타는 말했다. <목을 잘라 두었고, 피도 다 뺐고. 괘 깊은 구멍에 파묻었으니>.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며 한 숨을 돌렸다. 그러나 그 다음 주부터 우리가 죽인 경찰관의 유령이 집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경찰관의 유령은 바지를 무릎께까지 내린 채 지하실을 오락가락하였다. 피스톨이 딸그락딸그락하는 소리를 내었다. 어째 볼상 사나운 꼴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어떤 꼴을 하고 있건 유령은 유령이다. <이상하네, 귀신이 되어 나타나지 않도록 분명히 목을 잘랐는데>라고 마루타는 말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유령이 무서웠다. 그렇지 않은가. 그 경찰을 죽은 것은 우리들이다. 그래서 나는 어니 침대로 파고 들어가 벌벌 떨면서 잠을 잤다. <무서워할 것 없어, 유령은 아무 짓도 할 수 없으니까. 목을 틀림없이 잘라 두었고, 피도 다 뺐어. 자지도 세울 수 없다고>라고 마루타는 말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나는 유령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경찰 유령을 잘린 목을 뻐끔뻐끔거리며 그저 왔다리갔다리 할 뿐, 다른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걸어다닐 뿐이다. 익숙해지고 나면, 딱히 무서울 것도 없다. 이미 나를 범하려 하지도 않는다. 피도 없고, 나를 범할 수 있을만한 힘도 없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공기가 구멍으로 쉭쉭 빠져나가, 전혀 헛수고다. 과연 언니가 말한 대로였다. 잘라 두면 뒤탈이 없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일부러 옷을 벗고 몸을 비비꼬며, 그 경찰 유령을 자극해 보기도 하였다. 가랑이를 벌려 보이기도 하였다. 이상한 몸짓도 하여 보았다. 자신이 언제 그런 몸짓을 할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징글맞은 포즈를 취해 보기도 하였다. 아주 대담하게. 하지만 유령은 이미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일로 나는 굉장한 자신감을 얻었다. 나는 벌벌 떨기를 그만두었다. <나는 이제 벌벌 떨지 않아. 아무도 무섭지 않아. 아무한테도 치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아>라고 나는 마루타에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라고 마루타는 말했다. <하지만 너는 그래도 자신의 몸의 물소리를 들어야만 해.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어느 날 전화가 걸려 왔다. 새로이 건축할 계획이 서 있는 화력 발전소의 설계를 해 보지 않겠느냐는 권유였다. 그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나는 머리 속으로 새 화력 발전소위 도면을 몇 가지나 그려본다. 나는 바깥 세계로 나가, 마음껏 화력 발전소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너 밖으로 나가면 또 몹쓸 짓을 당할지도 모른다>라고 마루타는 말한다. <그렇지만, 난 해보고 싶어>라고 나는 말한다.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해 보고 싶어. 이번에는 잘될 것 같은 기분이야. 이제 나는 벌벌 떨지 않잖아.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마루타는 고개를 저으며, 할 수 없군, 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라고 마루타는 말한다. 나는 바깥 세계로 나갔다. 그리고 화력 발전소를 몇 개나 설계했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세계에서 제 일인자가 되었다. 내게는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만드는 화력 발전소는 독창적이고, 견실하고, 그리고 고장 하나 없었다.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평판이 아주 좋았다. 누군가가 화력 발전소를 만들려고 할 때는 반드시, 내게 설계를 요청하였다. 나는 금방 부자가 되었다. 나는 도지이 가장 좋은 장소에 있는 빌딩은 한 채 고스란히 사 들여, 그 제일 이층에서 살았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경보 장치를 부착하고, 각 방에는 전자 열쇠를 달고, 고릴라 같은 게이 보디 가드를 고용했다. 그렇게 나는 우아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 남자가 찾아올 때까지는. 무지하게 덩치가 큰 남자였다. 불타오르는 듯한 푸른 눈의 사나이였다. 그는 모든 경보 장치를 떼어내고, 자물쇠를 짓뭉개고, 보디 가드를 때려눕히고, 내 방 문을 발로 걷어차 부서뜨렸다. 나는 그 앞에서 서서 벌벌 떨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내가 어떻하든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내 옷을 북 북 찢고, 바지를 무릎까지 내렸다. 그리고는 나를 있는 힘을 다해 범하고서는, 내 목을 나이프로 갈랐다. 아주 잘 드는 칼이었다. 그것은 마치 따끈한 버터를 자르듯 내 목을 싹둑 자르고 말았다. 너무도 매끌하게 잘 드는 칼이라, 나는 자신의 목이 잘리고 있다는 것조차 잘 감지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경찰관이 걸어다녔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 하였지만, 목이 잘려 있어, 공기가 쉬익 쉬익 하는 소리를 낼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자신의 몸을 흐르는 물의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 정말 들렸다. 작은 소리지만, 그것은 분명히 들렸다. 나는 나 자신의 몸 속으로 내려가, 그 벽에 살며시 귀를 대고, 똑 똑 떨어지는 희미한 물소리를 들었다. 래롯프 래롯프 리롯프. 래롯프 래롯프 리롯프 내 이름은 가노 크레타. 잠 1 잠을 이루지 못한 지 열 이레 째다. 나는 불면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면증에 대해서라면 조금은 알고 있다. 대학생일 시절, 한 번 불면증 비슷한 것에 걸린 일이 있다. 구태여 <비슷한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 증상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불면증이라 부르는 증상과 일치하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병원에 갔더라면 그것이 불면증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병원에 간다 한들 필경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딱히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직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가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병원에도 가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줄곧 아무 말 않고 지냈다. 누군가와 의논을 하면, 틀림없이 병원에 가 보란 말밖에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그 <불면증 비슷한 것>은 계속되었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한 번도 정상적인 잠을 자지 못했다. 밤이 되면 침대로 들어가 이제 잠을 자자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순간, 마치 조건 반사처럼 의식이 말짱해지고 마는 것이다. 아무 리 자려고 노력을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자자고 의식을 하면 할수록, 반대로 눈이 말똥말똥해 진다. 시험삼아 술이나 수면제를 먹어보기도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새벽녘에 되어 간신히 졸음이라도 올까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이라 부를 수 있는 정도의 잠이 아니다. 나는 잠의 테두리 같은 것을 손가락 끝으로 어렴풋하게 느낀다. 그러나 나의 의식은 깨어 있다. 나는 잠시 존다. 그러나 얇은 벽으로 나누어진 옆 방에서, 그 의식은 말똥말똥하게 깨어, 나는 지긋이 보고 있다. 나의 육체는 어슬렁어슬렁 어두컴컴한 공중을 떠다니면서, 내 자신의 의식과 시선과 숨결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나는 잠자고 싶어하는 육체이며, 그와 동시에 각성하려 하는 의식이다. 그렇게 불완전한 졸음이 단속적으로 하루 종일 이어진다. 내 머리는 늘 뿌옇게 안개가 서린 듯하다. 나는 사물의 정확한 거리와 질량과 감촉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가 없다. 그리고는 졸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도처럼 밀려온다. 전철 좌석에서, 교실 책상에서, 혹은 저녁 식탁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존다. 의식이 내 몸에서 떠나간다. 세계가 소리도 없이 흔들린다. 나는 이런 저런 것들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연필과 핸드 백과 포크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차라리 이대로 엎드려 푹 잠에 바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다. 각성이 언제나 내 곁에 있다. 나는 그 싸늘한 그림자를 줄곧 느낀다. 그것은 내 자신의 그림자다. 기묘하다, 고는 졸음 속에서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졸면서 걷고, 졸면서 밥을 먹고, 졸면서 대화를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주변에 있는 모두가 내가 그런 극한적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는 듯하다. 요 한 달 동안 나는 실로 6킬로그램이나 살이 빠졌다. 그런데도, 가족도 친구도 누구 하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내내 졸면서 살아 있었다는 것을. 그렇다, 나는 말 그대로 자면서 살아 있었다. 내 몸은 익사체처럼 감각을 상실했었다. 모든 것이 둔하고, 탁했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불확실한 환각처럼 느껴졌다. 세찬 바람이 불면 내 몸은 저 세계의 끝으로 휘날려 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세계의 끝에 있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땅으로. 그리하여 내 몸과 의식은 영원히 분리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게 곡 매달려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매달릴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극단적인 각성 상태가 찾아왔다. 그 각성 앞에서, 나는 완전히 무력했다. 나는 강력한 힘으로 각성의 핵에 딱 고정되어 있었다. 그 힘은 너무도 강력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침이 올 때까지 꼼짝없이 각성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나는 밤 속에서 줄곧 깨어 있었다. 거의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시계가 때를 새기는 소리를 들으며, 밤이 조금씩 깊어졌다가, 그리하여 다시 옅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끝나버렸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아무런 외적 요인도 없이, 그야말로 당돌하게 그것은 끝나버렸던 것이다. 나는 아침 식탁에서 갑자기 의식이 아득해질 만큼 깊은 잠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무 주저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 기억도 없다. 나는 비틀비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곧장 침대로 파고들어가, 그대로 잠에 빠졌다. 그로부터 27시간을 푹 잤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듯 나를 흔들어댔다. 뺨을 두드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27시간,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에서 개어났을 때,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아마도. 어떤 이유로 불면증에 걸렸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이유로 갑작스레 나았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바람을 타고 멀리에서 날아온 두터운 구름 같은 것이었다. 그 구름 속에는, 내가 모르는 불길한 것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날아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날아와 내 머리 위를 뒤덮었다가는, 그리고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지금 내가 잠들지 못하는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다르다. 나는 단순히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한 숨도 잘 수 없다. 하지만 잠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다. 전혀 잠은 오지 않지만, 의식은 매우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다. 오히려 보통 때 이상으로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몸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다만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남편도 아이도, 내가 한 잠도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 봐야, 병원에 가보란 말밖에 하지 않을 테이므로.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병원 따위 가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번 불면증도 옛날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초라하지 않으면 안되는 종류의 것임을. 그래서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나의 생활은 표면적으로는 여느 대와 아무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다. 아주 평온하고, 아주 규칙적으로. 나는 아침이면 남편과 아이를 배웅한 후, 평소와 마찬가지로 차를 차고 시장을 보러 간다. 남편은 치과 의사이고, 우리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자동차로 한 십 분쯤 되는 거리에 진료소를 갖고 있다. 그는 치과 대학 시절의 친구와 공동으로 그 진료소를 경영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기공사도 접수 아가씨도 두 사람이 공동으로 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예약 손님으로 시간이 꽉 차 있으면, 나머지 한 쪽이 그 환자를 맡는 일도 가능하다. 남편이나 그 친구나 수완이 좋은 편이라. 거의 아무런 커넥션도 없이 그 장소에서 개업을 하여 아직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셈치고는, 꽤 환자가 많다. 환자가 너무 많아 너무 바쁠 지경이다. <나로서는 좀 더 느긋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뭐, 투정은 부릴 수 없지>라고 남편은 말한다. 그렇죠, 라고 내가 말한다. 투정은 부릴 수 없다. 그것은 분명하다. 진료소를 개업하기 위하여, 우리는 은행에서 처음에 예상했던 것 이상의 돈을 빌려야만 했다. 치과 의사의 진료소란 거액에 이르는 설비에 투자를 해야 한다. 그리고 경쟁은 가혹하다. 진료소를 열어두면 그 다음 날부터 환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그런 일은 없다. 환자가 오지 않아서 망한 치과도 무수히 많다. 병원을 개업했을 때, 우리는 아직 젊고 가난하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있었다. 우리가 이 터프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5년이 지나도, 그럭저럭 우리는 살아남은 것이다. 투정은 부릴 수 없다. 빚만 해도 아직 삼분의 이는 남아 있다. <틀림없이 당신이 핸섬한 남자라서 환자들이 몰려오는 걸 거야>라고 나는 말한다. 늘 하는 농담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전혀 핸섬하지 않은 남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편은 불가사의한 얼굴을 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하는 일이 있다. 어떻게 하다 내가 저렇게 불가사의한 얼굴을 한 남자랑 결혼을 했을까, 훨씬 더 핸섬한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하고 말이다. 그의 얼굴이 지니고 있는 불가사의함을, 나는 뭐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물론 핸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남인 것도 아니다. 소위 말하는 분위기가 있는 얼굴도 아니다. 정직하게 말해, 그저 <불가사의함>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아니면 <인상에 남는 구석이 없다>란 형용이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훨씬 중요한 포인트는 남편의 얼굴에 특별한 인상을 못 느끼게 하는 어떤 요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파악할 수가 없다. 나는 한 번을 그럴 필요가 있어, 그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릴 수가 없었다. 연필을 들고 종이를 대하면, 남편의 얼굴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일로 조금은 놀랐다. 이렇게 오래도록 함께 살고 있는데, 나는 남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보면 알 수 있다. 머리에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그림으로 그리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 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친 것처럼, 나는 어쩔 바를 모른다. 그저 불가사의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기억밖에 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 일로 이따금 불안해진다. 하지만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고,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그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치과 의사가 되지 않고,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도 그는 성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안심감을 품는 것이다. 나는 남편을 만나기까지. 그런 타입의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내 여자 친구들도, 그런 그를 모두 좋아한다. 물론 나 역시 그를 좋아한다.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딱히 <마음에 드는>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 아무튼 그는 어린 아이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싱긋 웃을 줄을 안다. 보통 어른 남자들은 그런 웃음을 웃지 못한다. 그리고 이 또한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는 아주 근사한 치열의 소유자이다. <내가 핸섬한 것은 내 탓이 아니야>라고 남편은 웃으며 말한다. 늘 똑같은 반복이다. 그 농담은 우리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농담을 주고받음으로 해서, 말하자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는 꽤나 중요한 의식인 것이다. 그는 아침 8시 15분에 블루 버드를 타고 아파트 주차장을 나선다. 아이를 옆 자리에 앉히고. 아이가 다니는 국민학교가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것이다. <조심해요>라고 나는 말한다. <괜찮아>라고 그는 말한다. 언제나 똑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심해요, 라고. 그리고 남편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괜찮아, 라고. 그는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테이프를 카 스테레오에 꽂고, 흥흥 멜로디를 웅얼거리며 엔진을 튼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떠나간다. 두 사람은 기이할 정도로 닮은 포즈로 손을 흔든다. 똑같은 각도로 얼굴을 갸웃하고, 똑같이 손바닥을 내게로 향하고, 그것은 살며시 좌우로 흔든다. 마치 누군가에게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내 전용 차는 중고 혼다 시티이다. 2년 전에, 나는 그것을 여자 친구한테서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물려받았다. 범퍼도 움푹 들어갔고, 구형이다. 여지 저기 녹이 슬어 있기도 하다. 주행 거리가 무려 25만 킬로미터나 된다. 가끔은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쯤, 엔진이 극단적으로 말을 안 들을 때가 있다. 아무리 키를 돌려도 엔진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수리 공장으로 끌고 가야할 정도는 아니다. 한 십 분쯤 어르다 말다 하다 보면, 엔진이 부르릉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할 수 없는 일이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무슨 일이든, 누구든 한 달에 한 두 번쯤은 상태가 안 좋은 일도 있고, 매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날도 있는 것이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남편은 내 자동차를 <당신의 당나귀>라고 부른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하든, 그것은 나의 차다. 나는 그 시티를 타고 슈퍼마켓으로 시장을 보러 간다. 시장을 다 보면 집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린다. 점심 식사를 준비한다. 오전 중에 가능한 한 몸을 빨리 움직여 일을 끝내도록 유념한다. 저녁 식사 준비도 가능하면 다 해 놓는다. 그러면 오후 내내 내 마음대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남편이 12시가 조금 넘어 점심을 먹으러 온다. 그는 외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혼잡하고, 맛도 없고, 옷에 담배 냄새가 밴다>라고 말한다. 오고가느라 시간이 걸려도, 집에 돌아와 식사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봐야, 나는 점심 때에는 그리 손이 많아 가는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어제 먹다 남은 것이 있으면 그것은 렌지에 데워 먹고, 없으면 메밀 국수로 때운다. 그래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것 자체에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물론 나 역시 혼자 묵묵히 밥을 먹기보다는, 남편과 함께 먹는 편이 즐겁다. 이전, 그러니까 병원을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나, 예약된 환자가 없어 오후 첫 타임이 비는 경우가 흔히 있었는데, 그런 때 우리는 점심을 다 먹고 나면 곧잘 침대로 들어갔다. 그것은 멋진 섹스였다. 사방은 조용하고,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방안 가득하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젊고, 그리고 행복했다. 지금도 물론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 가정에는 문제의 그림자 하나 없다. 나는 남편을 좋아하고 있고, 신뢰하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세월이 흘러감과 함께 생활의 질이 조금씩 변화해 간다. 그리고 지금은 오후의 예약도 늘 만원이다. 그는 식사가 끝나면 목욕탕에서 이를 닦고, 재빨리 차를 타고 병원으로 돌아간다. 몇 천 몇 만의 병든 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늘 우리가 서로 확인하듯, 투정은 부릴 수 없다. 남편이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수영복과 수건을 들고 근처 스포츠 클럽으로 차를 몬다. 그리고 그곳에서 30분 정도 수영을 한다. 꽤 하드하게 물살을 가른다. 딱히 수영을 한다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내가 수영을 하는 까닭은, 단지 몸에 불필요한 살이 붙는 게 싫어서이다. 나는 옛날부터 자신의 몸선을 아주 좋아한다. 솔직히 나는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든 적은 한 번도 없다. 못난 얼굴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몸은 좋아한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서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윤곽이며, 균형 잡힌 생명감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그것에는 내게는 상당히 중요한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는 듯이 느껴진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른 살이다. 서른 살이 되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서른이 되었다고 해서 세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는 일이 그리 반가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나이를 먹어 편해지는 일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서른이 된 여자가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선을 유지하고 싶다고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 나름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 라는 것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로부터 그것을 배웠다. 나의 어머니는, 과거에는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다. 수영을 한 후, 오후의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그날 그날에 따라 다르다. 역 앞 상점가로 나가 어슬렁어슬렁 아이 쇼핑을 하는 일도 있다.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FM 방송을 듣거나, 그대로 끄덕끄덕 잠들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윽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다. 나는 아이의 옷을 갈아입게 하고, 간식을 준다. 아이는 간신을 다 먹으면 밖으로 나간다. 친구랑 함께 놀러 가는 것이다. 아직 2학년이니까, 학원에도 가지 않고, 과외 활동도 시키지 않는다. 그냥 놀게 내버려두면 돼, 라고 남편은 말한다. 놀다 보면 자연히 크니까, 라고. 아이가 밖으로 나갈 때면, 나는 조심해라, 라고 말한다. 아이는, 괜찮아요, 라고 대답한다. 남편과 똑 같다. 느지막한 오후에 나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6시까지는 돌아온다. 그리고 텔레비전 만화를 본다. 진료 시간이 연장되지 않는 한 남편은 7시까지는 돌아온다. 남편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쓸데없는 일로 타인과 만나거나 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일이 끝나면 대개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저녁을 먹는 동안, 우리들 세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우리들은 각자 그 날 있었던 일을 얘기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잘 조잘대는 것은 역시 아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하나 하나가 그에게는 신선하고, 수수께끼에 쌓여 있는 것이다. 아들이 얘기를 하면, 남편과 나는 거기에 대해 감상을 얘기한다. 식사가 끝나면, 아들은 혼자서 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논다.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한다. 또는 남편과 게임을 하는 경우도 있다. 숙제가 있을 때에는, 방에 틀어박혀 숙제를 해치운다. 그리고 8시 반에는 침대로 들어간 잔다. 나는 아들에게 이불을 반듯하게 펴 주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잘 자라>라고 말하고 전등을 끈다. 그 다음은 남편과 나의 시간이다. 남편은 소파에 앉아, 석간을 읽으며 나와 얘기를 한다. 환자 이야기, 신문에 난 기사 이야기다. 그리고 하이든인지 모차르트를 듣는다. 나도 음악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차이를 구별할 수가 없다. 내 귀에는 어느 쪽이나 똑같이 들린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남편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몰라도 아무 상관없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 그것으로 족하잖아, 라고 말한다. <당신이 핸섬한 것처럼>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래, 내가 핸섬한 것처럼>이라고 남편은 말한다. 그리고 싱긋 웃는다.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그것이 내 생활이다. 즉,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기 전의 생활이다. 대략, 매일 매일이 똑같은 일의 연속이다. 나는 간단한 일기 비슷한 것을 쓰고 있었는데, 이 삼일 깜빡 잊고 안 쓰다 보면, 어느 날이 어느 날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어제와 엊그제가 뒤바뀌어도 아무 이상할 것이 없다. 때로 참 이게 무슨 인생인가 하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허망함을 느낀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놀랄 뿐이다. 어제와 엊그제를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런 인생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고,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 자신이 새긴 발자취가 그것을 확인한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에. 그런데 나는 목욕탕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본다. 15분 정도 꼼짝 않고 본다. 머리를 텅 비우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얼굴을 순수한 물체로써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면 내 얼굴이 점차 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간다. 그저 순수하게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그리고 나는 이것이 현재라고 인식한다. 발자취 따위 관계없다. 나는 이렇게 지금 현실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라고. 하지만 지금 나는 잠들 수 없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이래 일기를 그만 쓰게 되었다. 2 잠을 이룰 수 없게 된 첫날 밤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때 무서운 꿈을 꾸고 있었다. 아주 암울하고, 끈적끈적한 꿈이었다. 꿈의 내용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불길한 감촉뿐이다. 그리고 그 꿈의 정점에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더 이상 꿈속에 잠겨 있었다가는 되돌이킬 수 없을 위태로운 시점에서, 무언가가 나를 현실로 끌어 잡아당기듯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눈을 뜨고서도 한참이나, 나는 하아하아 숨을 크게 쉬었다. 손발이 저려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꼼짝못하고 있으려니, 마치 동굴 속에 누워 있는 것처럼 자신의 숨결만이 유난스레 커다랗게 들렸다. 꿈이었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천장을 향하고 누워, 가만히 숨결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활동하고, 거기에 재빨리 혈액을 공급하기 위하여, 폐가 풀무처럼 천천히 그리고 조그맣게 수축하였다. 그러나 그 진폭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서서히 감소하였다. 도대체 지금은 몇 시쯤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베갯머리에 있는 시계를 보려 했지만, 고개를 제대로 돌릴 수가 없었다. 그 때 발 밑으로 문득 무언가 보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희미하고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심장도 폐도, 내 몸 속의 모든 기관이 순간에 얼어붙은 것처럼 정지하였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 그림자 쪽을 보았다. 내가 눈을 부릅뜨자,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는 급격하게 똑똑한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다. 윤곽이 명확해지고, 그 안으로 실체가 부어져, 세부가 떠올랐다. 그것은 딱 맞는 검은 옷을 입은, 야윈 노인이었다. 머리칼은 회색이고, 짧고, 뺨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 노인이 내 발치에서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노인은 아무 말없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주 큰 눈으로, 거기에 새겨져 있는 붉은 핏줄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표정이란 것이 없었다. 그 노인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구멍처럼 텅 비어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야,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방금 전에. 그것도 막연하게 깨어난 것이 아니고, 퉁겨 오를 듯 잠에서 깨어났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꿈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다. 나는 움직이려 하였다. 남편을 깨우던가, 아니면 전등을 켜던가 하려고. 하지만 아무리 힘을 다해도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것은 근원적인, 마치 바닥 없는 기억의 우물에서 소리도 없이 피어오르는 냉기 같은 공포였다. 그 냉기는 내 존재의 뿌리까지 알알이 스며들었다. 나는 소리를 치려고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혓바닥조차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노인을 그저 빤히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노인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길쭉하고, 둥글둥글한 것이었다. 하얗게 빛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은 뚫어지게 보았다. 한참을 보고 있으려니, 그 무엇인가도 확실한 형태를 지니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주전자였다. 내 발치에 있는 노인은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옛날식 도기 주전자였다. 마침내 그는 그것을 위로 들어올려, 내 발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물의 감촉을 느낄 수도 없었다. 내 발에 떨어지는 물이 보인다. 그 물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내 발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노인은 하염없이 내 발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암만 뿌려도, 그 주전자의 물은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불현듯 내 발이 머잖아 썩어 녹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긴 시간 물을 맞고 있으면 썩어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자신이 발이 썩어문드러질 것이란 생각이 들자,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 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의 혀는 공기를 진동시킬 수 없었다. 그 비명은 내 몸 속에서 그저 공허하게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무음의 비명은 내 몸 속을 윙윙 달리고, 내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다.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내 세포의 구석구석까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속에서 무언가가 죽고, 무언가가 녹아버렸다. 폭발의 섬광처럼, 그 진공의 떨림은 내 존재에 관계되어 있는 많은 것을, 뿌리째 억지로 태워버리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노인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주전자도 없었다. 나는 자신의 발을 보았다. 침대에 물이 떨어진 흔적은 없었다. 침대보는 마른 채였다. 그 대신 내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끔찍할 정도의 땀이었다. 한 인간이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리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땀이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또 하나 움직여보고, 그 다음에는 팔을 움직여 보았다. 그리고 다리도 움직여 보았다. 발목을 돌려보고, 무릎을 구부려 보았다. 그렇게 원활하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각 부분은 그럭저럭 움직여 주었다. 나는 주의 깊게 몸 전체를 한 차례씩 움직여 확인을 하고서는,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가로등 불빛에 어렴풋이 비쳐 보이는 방의 구석 구석을, 휘 둘러 보았다. 방안 어디에도 노인의 모습은 없었다. 베갯머리의 시계는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로 들어간 것이 11시전이니까, 한 시간 반정도 밖에 자지 않았다. 옆 침대에서는 남편이 쿨쿨 자고 있었다. 남편은 마치 의식을 잃은 사람처럼, 잠소리 하나 내지 않고 숙면하고 있었다. 그는 한 번 잠이 들면, 웬만한 일이 없는 한 눈을 뜨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목욕탕으로 가서는, 땀으로 젖은 옷을 벗어 세탁기에 던져놓고, 샤워를 하였다. 그리고 몸을 닦고, 서랍장에서 새 잠옷을 꺼내 입었다. 그런 다음 거실 스탠드를 켜고, 소파에 앉아 브랜디를 한 잔 마셨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편처럼 체질적으로 전혀 술을 못 마시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제법 많이 마셨지만, 결혼을 하고부터는 일체 마시지 않게 되었다. 가끔가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브랜디를 한 모금 마시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 날밤 날카로워진 신경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한 잔 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선반 안에 레미 마르탱이 한 병 들어 있다. 그것은 이 집안에 있는 유일한 알코올이었다. 누군가가 선물을 한 것이다. 오랜 옛날 일이라, 누구한테 받았는지도 잊어버렸다. 병은 먼지가 얇게 덮여 있었다. 브랜디 잔 따위 있을 리가 없으므로, 나는 보통 잔에다 그것을 따라,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몸으로는 아직도 잔 물결이 일고 있었지만, 공포감은 점차 엷어져 갔다. 아마도 가위에 눌렸었나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가위에 눌린 것은 처음이지만, 가위를 경험한 적이 있는 대학 시절 친구한테서 이전에 얘기를 들었었다. 그것은 아주 생생하고 클리어해서, 도저히 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라고 그녀는 말했었다. <그 당시에도 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지금도 생각할 수 없어>라고. 과연 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라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것은 꿈이다. 꿈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종류의 꿈인 것이다. 비록 공포감을 줄어들었지만, 몸의 떨림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내 피부의 표면은 지진이 일어나 다음의 물 무늬처럼, 언제까지고 부들부들 잘게 떨고 있었다. 그 잘디잘은 떨림은 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 그 비명탓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가지 못한 그 비명이 내 몸 속에서 웅크리고 있어, 그것이 내 몸을 이다지도 떨게 하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또 한 모금 브랜디를 마셨다. 목구멍에서 위로 천천히 내려가는 따끈한 액체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리얼한 감촉이었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아들 일이 걱정스러워졌다.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잰 걸음으로 아이 방에 갔다. 아이 역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한 손은 입 언저리에 놓여 있고, 또 한 손은 이불 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아니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안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이의 흐트러진 이불을 바로 해 주었다. 나의 잠을 난폭하게 방해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것은 나 혼자에게만 엄습했던 모양이다. 남편도 아이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는 거실로 돌아가, 하릴없이 잠깐 걸었다. 전혀 졸리지 않았다. 또 한 잔 브랜디를 마셔볼까 하고 생각했다. 실은 나는 좀 더 술을 마시고 싶었다. 좀 더 몸을 따스하게 데우고, 좀 더 신경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그리고 그 짜릿한 강렬한 냄새를 다시 한 번 입 속으로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역시 안 마시기로 하였다. 내일까지 취기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브랜디를 선반에 다시 올려놓고, 잔을 싱크대로 가져가 씻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딸기를 꺼내 먹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피부의 떨림은 어언 가라앉아 있었다. 그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전혀 기억에 없는 노인이었다. 그 검은 옷도 기묘했다. 몸에 딱 맞는 니트 양복 같은, 고풍스런 것이다.. 그런 옷을 보기는 처음이다. 그리고 그 눈. 깜빡거리지조차 않는 충혈된 눈. 누구였을까? 그리고 또 어째서 내 발에 물을 부었을까? 어째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짐작이 갈 만한 아무 것도 없었다. 내 친구는 그녀의 약혼자 집에 묵으러 갔다가 가위에 눌렸다고 하였다. 그녀가 잠을 자고 있는데 쉬흔 살 정도의 까다로운 표정을 한 남자가 나타나, 너, 이 집에서 당장 나가, 라고 하였다. 그녀는 그 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역시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 사람은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령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 아버지가 나더러 나가라고 하는 것이다, 하고 그는 그 때 생각했다. 하지만 이튿 날 약혼자가 보여 주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니, 그것은 어젯밤 나타난 남자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아마 내가 너무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가위에 눌리기까지 한 걸 거야, 라고. 하지만 나는 긴장커녕, 아무 걱정도 없이 살고 있다. 여기는 우리 집이다. 나를 위협하는 요인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어째서 내가 이 집에서 가위에 눌리거나 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나는 머리를 저었다. 그만 생각하자. 생각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건 그냥 단순히 리얼한 꿈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피로가 쌓인 모양이다. 틀림없이 엊그제 테니스를 친 탓이리라. 수영을 한 후에, 클럽에서 친구가 가자는 대로 따라가 지나치다싶게 오래 쳤던 것이다. 그 다음 손발에 한 동안 힘을 줄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나는 딸기를 다 먹고 나서,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시험삼아 눈을 감아 보았다. 하지만 전혀 자고 싶지 않다. 아이 참,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전혀 졸립지 않은 것이다. 잠이 올 때까지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침실로 들어가, 책꽂이에서 소설을 한 권 골랐다. 불을 켜고 찾는데도, 남편은 아무 반응이 없다. 내가 고른 책은 <<안나 카레리나>>였다. 나는 어찌되었든 긴 러시아의 소설을 읽고 싶었다. <<안나 카레리나>>오랜 옛날에 한 번 읽은 일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줄거리가 어땠는지, 거의 기억에 없다. 맨 첫 줄과, 마지막에 주인공이 철도 자살을 하는 부분만 기억하고 있다. <행복한 가정의 종류는 한 가지이지만, 불행한 기정은 모두 제 각기 다르다>, 이것이 맨 첫 문장이다.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첫 부분에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의 자살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경마장 장면이었던가? 아니면 그건 다른 소설의 한 장면인가? 나는 하여튼 소파로 돌아가 책을 펼쳤다. 이런 식으로 차분하게 책을 읽어 본 지가 몇 년 만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오후의 남은 시간에 한 30분이나 1시간 정도 책을 읽는 일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하게는 독서라고 할 수 없다. 책을 보고는 있지만, 내 머리는 금방 단 생각으로 점령당하고 만다. 아이 일이라든가, 시장볼 일이라든가, 아니면 냉장고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둥, 친척 결혼식에 무슨 옷을 입고 가면 좋을까, 아니면 한 달 전에 위 수술을 받은 아버지 일이라든가, 그런 잡다한 일들이 머리로 떠올라, 그것이 점점 파생적인 방향으로 부풀어 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간만 경과해 있고, 책은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어느 사이엔가 책을 읽지 않는 생활에 길들고 말았다. 새삼스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상당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는 일은 내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조리 읽었고, 용돈은 거의 전부 책값으로 사라졌다. 나는 먹을 것을 줄여가며, 그 돈으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었다.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나만큼 책을 많이 읽는 인간은 없었다. 나는 다섯 형제 중 가운데였고, 부모님은 양 쪽 다 일을 갖고 있어서 바쁜 사람들이었고, 가족 중 어느 누구 하나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읽고 싶은 만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독서 감상문 콩쿠르가 있으면 나는 반드시 응모를 하였다. 상품으로 주는 도서권이 탐이 나서였는데, 대개는 입상을 하였다. 대학은 영문과로 진학했다. 거기에서도 좋은 성적을 땄다. 캐더린 맨스필드에 관해 쓴 졸업 논문은 최고점을 받았다. 교수는 대학원에 남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사회로 나가고 싶었다. 결국 나는 학구적인 인간도 아니고, 그런 자신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다만 책읽기를 좋아했을 뿐인 것이다. 대학에 남고 싶었다 한들, 우리 집에는 나를 대학원에 보낼만한 경제적 여유는 없었다. 우리 집은 가난한 편은 아니었지만, 내 밑으로도 여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 집을 나와 자립하여 살아가야만 했다. 나는 말 그대로 자신의 두 손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책을 한 권 꼼꼼히 읽었던 게 언제였더라? 그리고 그 때 읽은 책이 뭐였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 책의 제목조차 생각해낼 수 없었다. 인생이란 어째서 이다지도 싹 그 양상이 바뀔 수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뭐에 홀린 것처럼 책을 마구 읽어대던 과거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 세월과, 정상이 아니었다고도 할 수 있는 그 격렬한 열정은 내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나는 그 날밤, <<안나 카레리나>>에 의식을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몰두하여 페이지를 넘겼다. 나는 안나 카레리나와 브론스키가 모스크바 역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장면까지 단숨에 읽고나서,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워놓고는, 브랜디 병을 다시 꺼내 왔다. 그리고 그것을 잔에 딸라 마셨다. 옛날에 읽었을 때는 전혀 깨닫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면 기묘한 소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소설의 히로인인 안나 카레리나가 무려 소설이 116페이지까지 진행되어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이런 경우가 별로 부자연스럽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그 점에 대해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오브론스키라는 별 볼 일없는 인물의 생활상이 언제까지고 지루하게 묘사되어 있어도, 그들은 지긋이 인내하면서, 아름다운 히로인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시간적인 여유만은 듬뿍 있었으리라. 적어도 소설을 읽는 계층 사람들에게는. 불현듯 시계를 보니, 바늘은 벌써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3시? 그런데 나는 전혀 졸립지 않다. 자, 이제 어떻게 하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전혀 잠이 오지 않는다. 이대로 죽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 다음을 계속해서 읽고 싶다. 하지만 나는 잠을 자야만 한다. 나는 이전에 불면으로 시달렸던 때의 일을 문득 떠올렸다. 하루 종일 뿌연 구름에 둘러싸여 있듯 살았던 때의 일을.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싫다. 그 때 나는 아직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도 살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한 남자의 아내이며, 한 아이의 어머니이다. 내게는 책임이란 것이 있다. 남편의 점심도 준비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대로 침대로 들어간다 해도 아마 한 잠도 잘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나는 전혀 잠이 오지 않고, 더구나 책을 계속 읽고 싶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결국 나는, 아침 채가 창문을 물들일 때까지 <<안나 카레리나>>에 빠져 있었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무도회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그리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안나는 경마장(역시 경마장이 등장했다)에서 브론스키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광란하며, 남편에게 자기의 부정함을 고백한다. 나는 브론스키와 함께 말을 타고 장해물을 뛰어넘으며, 사람들의 환성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관객석에서 브론스키가 낙마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창이 밝아오자, 나는 부엌에서 커피를 끓여 마셨다.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소설의 장면과, 갑작스레 찾아온 격렬한 공복감 탓에,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 의식과 육체는 어딘 가에서 어긋난 채, 그대로 고정돼 것 같았다. 나는 빵을 잘라, 버터와 마스터드를 발라, 치즈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싱크대 앞에 선 채 그것을 먹었다. 이렇게 배가 고프기는 나로서는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실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폭력적인 공복감이었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났는데도 여전히 배가 고파, 나는 샌드위치를 다시 만들어 그것도 먹어치웠다. 그리고 커피도 한단 더 마셨다. 3 가위에 눌렸던 일도, 아침까지 한 잠도 자지 못했다는 것도, 나는 남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딱히 숨길 마음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말한다고 어떻게 되는 일도 아니고, 게다가 하룻밤쯤 잠을 못 잤다고 해서 별 대수로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구한테든 가끔은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남편에게 커피를 끓여 주고, 아이에게는 뜨거운 우유를 주었다. 남편은 토스트를 먹고, 아이는 콘 플레이크를 먹었다. 남편을 신문을 죽 훑어보고, 아이는 새로 배운 노래를 작은 소리로 흥얼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블루 버드를 타고 나갔다. 여느 때와 아무 다를 것이 없다. 두 사람이 집을 나선 다음, 나는 소파에 앉아,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하고 생각하였다. 할 일이 무엇인가? 반드시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부엌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점검하였다. 그리고는 오늘 하루쯤 시장을 보지 않아도, 특별히 지장은 없겠다고 확인하였다. 빵도 있다. 우유도 있다. 계란도 있다. 고기 냉동되어 있다. 채소도 있다. 내일 점심때까지는 먹을 거리가 있다. 은행에 갈 일이 있었지만, 반드시 오늘 중에 가야하는 일을 아니었다. 내일로 미뤄도 지장은 없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읽었다. 다시 읽으며 새삼스레 깨달은 일인데, 나는 <<안나 카레리나>>의 내용을 거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등장 인물도, 장면도, 별 기억이 없었다.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신기한 일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읽었을 때는 제법 감동을 했을 텐데, 결국은 아무 것도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다. 그 당시 느꼈을 감정의 떨림이며 고양된 기분은, 어느 틈엔가 깨끗이 하나도 남김없이 떨어져나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내가 책을 읽느라 소비한 방대한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책을 덮고, 한 참을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불현듯, 나는 그저 멍하니 창밖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상권의 한 가운데를 조금 지난 부분에 초콜릿 부스러기가 끼어 있었다. 초콜릿은 바싹 말라, 바슬바슬한 채로 책에 눌러 붙어 있었다. 아마도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초콜릿을 먹으면서 이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뭘 먹으면서 책읽기를 아주 좋아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결혼한 이래 초콜릿을 전혀 먹지 않았다. 남편이 단 과자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이한테도 거의 주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다 과자류를 사 두는 법은 일체 없다. 10년이나 오랜 옛날에 먹다 남은 그 하얗게 변색한 초콜릿 부스러기를 보고 있는 사이에, 초콜릿이 무지하게 먹고 싶어졌다. 나는 옛날처럼 초콜릿을 먹으며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싶었다. 온 몸의 세포란 세포가 초콜릿을 원하며 숨을 죽이고, 수축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나는 가디건을 걸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과자 집에 가서 그 중에서도 유독 달콤해 보이는 밀크 초콜릿을 두 개 샀다. 그리고는 가게를 나오자 마자 껍질을 까 걸어가면서 먹었다. 밀크 초콜릿을 향이 입안으로 퍼졌다. 그 사뭇 직접적인 달콤함이 몸 구석구석까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나는 두 번째 조각을 입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초콜릿 향이 떠다녔다. 나는 소파에 앉아, 초콜릿을 먹으면서 <<안나 카레리나>를 읽었다. 조금도 졸립지 않았다. 피곤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하염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초콜릿을 하나 고스란히 먹어치우자, 두 개째 껍질을 벗겨, 그것도 반이나 먹었다. 상권의 삼분의 이 정도를 읽은 즈음에, 나는 시계를 보았다. 11시 40분이었다. 11시 40분? 이제 금방 남편이 돌아올 것이다. 나는 황망하게 책을 덮고는,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는 냄비에 물을 담고, 가스 불을 켰다. 그리고 양파를 썰어 메밀 국수를 삶을 준비를 하였다. 물일 끓을 사이에 를 불려, 식초 조림을 만들었다.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 찬 두부 요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목욕탕으로 가서 이를 닦아, 초콜릿 냄새를 없앴다. 물이 끓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남편이 돌아왔다. 예정보다 일이 일찍 끝났어, 라고 남편은 말한다. 우리는 둘이서 메밀 국수를 먹었다. 남편은 메밀 국수를 먹으며 새로 구입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의료 기구 이야기를 하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깨끗하게 치석을 제거할 수 있는 기계였다 시간도 단축할 수 있다고 한다. 가격은 뭐 늘 그런 것처럼 제법 비싸지만, 본전은 뽑을 수 있을 거야, 라고 남편은 말했다. 요즘은 치석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부러 오는 환자도 많으니까 말이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라고 남편이 내게 물었다. 나는 치석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식사 중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깊이 생각하고픈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장해물 경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석 따위 아무려면 어떤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남편은 심각하다. 나는 그 기계가 얼마나 하냐고 물은 뒤, 생각하는 척하였다. 꼭 필요한 기계라면 사면 되잖아, 라고 나는 말했다. 돈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될 거에요, 노는데 쓰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 라고 남편은 말했다. 노는데 쓰는 돈이 아니니까, 라고 남편은 나의 대사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묵묵히 메밀 국수를 먹었다. 창밖 나무 가지에는 커다란 새가 줄줄이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나는 망연히 그 새들을 보고 있었다. 졸리지 않았다. 나는 전혀 졸립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릇을 치우는 동안 남편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안나 카레리나>>가 놓여 있었지만, 그는 책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책을 읽든 말든 남편은 그런 일에는 흥미가 없는 것이다. 내가 설거지를 다 끝내자, 오늘 좋은 일이 있어, 라고 남편이 말했다. 뭘 거 같아? 모르겠는데, 라고 나는 말했다. 오후 첫 번째 손님이 약속을 취소했거든. 그래서 1시 반까지 난 여유야. 그렇게 말하고 남편은 싱긋 웃었다. 나는 남편의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왜 그것이 좋은 일인지 짐작이 안 갔다. 무슨 소리일까? 그 말이 섹스를 하고 싶다는 뜻인 줄을, 나는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로 가자고 했을 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왜 섹스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빨리 책을 읽고 싶었다. 소파에 혼자 드러누워, 초콜릿을 먹으면서, <<안나 카레리나>>의 페이지를 넘기고 싶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줄곧 브론스키라는 인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톨스토이라는 작가는 등장 인물을 이렇게도 멋들어지게 자신의 손으로 꼭 감싸쥘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아주 멋지고 정확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거기에는 구원이 그 손길을 뻗을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이란 즉 -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었다. 그리고 실은 오늘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요, 라고 말했다. 미안, 미안하지만, 이라고. 나는 종종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는 일이 있어, 남편은 내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무리하지 말고 잠깐이라도 누워서 쉬는 게 좋지 않겠어, 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 라고 나는 말했다. 그는 2시가 넘어서까지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신문을 읽었다. 그리고 다시 의료 기구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최신예에다 값도 비싼 기계를 사다 놓아도 이삼년 지나면 구식이 되고마니, 계속 새것으로 바꿔 사야 한단 말이야, 의료 기구를 만들어내는 제조 회사만 돈을 벌고 있어, 그런 내용의 이야기였다. 나는 가끔 그의 말에 대꾸를 하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였지만, 거의 아무 말도 듣고 있지 않았다. 남편이 오후 진료를 위해 짐을 나가고 난 뒤, 나는 신문을 접어 치우고, 소파의 쿠션도 탁탁 두드려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창틀에 기대어, 방안을 둘러보았다. 나는 알 수 없었다. 왜 잠이 오지 않는 것일까? 나는 옛날 몇 번이나 철야를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시간 깨어 있었던 일은 한 번도 없다. 보통 때의 나 같으면 벌써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을 것이고, 만약 잠에 빠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잠이 와서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전혀 졸리지 않았고, 머리도 말짱했다. 나는 부엌에 가서 커피를 데워 마셨다. 그리고 이제 뭘 하지 하고 생각했다. 물론 <<안나 카레리나>.를 계속 읽고 싶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느 때처럼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결국 수영장에 가기로 하였다. 뭐라 설명은 하기 어렵지만, 한껏 몸을 움직임으로 하여, 몸안에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를 내쫓고 싶은 느낌이었다. 내쫓는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내쫓는단 말인가? 나는 그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무엇을 내쫓는다는 것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무언가는 내 몸속에서 어떤 유의 가능성처럼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이름을 부여하고 싶었지만, 내 머리에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언어를 찾아내는데 서투른 것이다. 아마도 톨스토이라면 딱 어울리는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을 테지만. 하여튼 나는 가방에다 수영복을 집어넣고, 시티를 타고 스포츠 클럽으로 갔다. 풀에는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젊은 남자 한 명과, 중년의 여자가 한 명 수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감시원이 따분하다는 듯 수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안경을 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30분 동안 수영을 하였다. 그런데 30분으로는 모자랐다. 나는 그 다음에도 15분이나 더 수영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전력을 다하여 크롤로 왕복을 하였다. 숨은 가빴지만, 몸에는 아직도 힘이 넘쳐흐르는 듯하였다. 내가 풀에서 나오자, 주변 사람들이 나는 힐금힐금 보고 있었다. 3시가 되려면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 나는 시티를 몰아 은행으로 가서 볼일을 보았다. 슈퍼마켓에 들러 시장을 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안나 카레리나>>를 읽었다. 나머지 초콜릿을 먹었다. 4시에 아들이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주스를 먹이고, 내가 만든 과일 젤리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저녁 준비를 하였다. 우선 냉동실에도 고기를 꺼내 해동을 하고, 채소를 썰어 볶을 준비를 해 놓았다. 된장국을 끓이고, 밥을 지었다. 나는 아주 잽싸게 그리고 기계적으로 일을 해치웠다. 그리고 나서는 또 <<안나 카레리나>>를 읽었다. 졸립지 않았다. 10시가 되어 나는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같이 자는 척하였다. 남편은 금방 잠이 들었다. 베갯맡에 있는 전등을 끄자, 거의 동시에 그는 잠으로 빠져들어갔다. 전등의 스위치와 그의 의식이 코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참 대단하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사람은 흔치 않다. 잠이 오지 않아 고생스러워하는 사람 쪽이 훨씬 많은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그랬다. 아버지는 언제나 숙면을 하지 못한다고 투덜거렸다. 잠도 어렵사리 드는 데다가, 바스락하고 무슨 조그만 소리가 나거나 사소한 기척으로도 눈을 뜨고 말았다. 하지는 내 남편은 그렇지 않다. 일단 잠이 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까지 일어나지 않는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나는 그 점이 하도 이상해서,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눈을 뜨는 것일까, 하고 몇 번이나 실험을 해 보았다. 스포이트로 얼굴에 물을 떨어뜨려 보기도 하고, 으로 콧잔등을 간질여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끈덕지게 계속하면, 그제야 간신히 성가시다는 듯 뭐라 웅얼거릴 뿐이었다. 남편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적어도, 어떤 꿈을 꾸었는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물론 가위에 눌린 일도 없다. 그는, 진흙탕 속에 묻힌 거북이처럼, 그저 잠에 푹 빠져 있을 뿐이었다. 참 대단한 일이다. 나는 10분 정도 누워 있다가, 살며시 침대에서 빠져 나온다. 그리고 거실에 가서는 플로어 스탠드를 켜고, 잔에 브랜디를 따랐다. 브랜디를 한 모금 한 모금 핥듯이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기분이 내키면 선반에 감추어 두었던 쿠키나 초콜릿을 꺼내 먹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침이 왔다. 아침이 되자, 나는 책을 덮고, 커피를 끓여 마셨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매일, 같은 일을 거듭하였다. 나는 재빨리 집안 일을 끝마치고, 오전 중에는 내내 책을 읽었다. 그리고는 점심 시간이 되면, 책을 놓고 남편을 위해 점심을 준비했다. 남편이 1시가 되기 전에 다시 나가고 나면, 나는 차를 타고 스포츠 클럽에 가서 수영을 하였다. 나는 잠을 자지 않게 된 이후로는,매일 1시간을 꼬박 수영하게 되었다. 30분 운동으로는 도저히 신에 차지 않았다. 수영을 하고 있는 동안은, 수영에만 온 의식을 집중하였다. 다른 일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효율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만 생각하며,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도 별로 얘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어디에 가자고 하는 일이 있으면, 미안해요, 집에 일이 있어서 빨리 돌아가봐야 되요, 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와도 관계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누구와 두서도 없는 수다를 떨 틈이 없는 것이다. 나는 실컷 수영을 한 후에는 한 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책을 읽고 싶었다. 나는 의무로써 시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아이를 상대하였다. 의무로써 남편과 섹스를 하였다. 길들고 나면, 그것은 결코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간단한 일이었다. 머리와 육체의 커넥션을 끊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몸이 제 멋대로 움직이는 동안, 내 머리는 내 자신의 공간을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집안 일을 하였다. 아이에게 간식을 주고, 남편과 세상 이야기를 하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부터 나는, 현실이란 이 얼마나 쉬운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현실을 살아가는 따위 실로 간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단지 현실에 불과했다. 그것은 그저 집안 일에 불과했고, 그저 가정이었다. 단순한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번 작동 순서를 기억하고 나면, 그 다음을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 쪽 단추를 누르고, 저 쪽 레바를 잡아당긴다. 눈금을 조절하고, 뚜껑을 닫고, 타이머를 맞춘다. 그런 반복에 불과하다. 물론 때로는 변화도 있었다. 남편의 어머니가 다니러 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다. 일요일에는 온 가족이 동물원에 갔다. 아이가 심한 설사를 하였다. 하지만 그 사건들 어느 하나 내 존재를 흔들지는 못했다. 그들은 소리 없는 바람처럼 내 주위를 불며 지나갈 뿐이었다. 나는 시어머니와 시시껍절한 세상 이야기를 하고, 사인분 식사를 준비하고, 곰 우리앞에서 사진을 찍고, 아이의 배를 따뜻하게 해 주고, 약을 먹였다. 그런 식으로 일주일이 지났다. 나의 끊임없는 각성 상태가 두 주일 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과연 불안해졌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사태가 아니었다. 사람은 으레 잠을 자는 법이고,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는 옛날에, 사람을 잠재우지 않는 고문에 대한 얘기를 어디에선가 읽은 있다. 나치스가 행한 고문이었다. 사람은 좁은 방에다 가두고, 잠을 잘 수 없도록 눈을 뜨고 있게 하고는 빛을 갖다대거나, 커다란 잡음을 쉴 새없이 들려주거나 한다. 그러면, 사람은 발광을 하고, 끝내는 죽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정도 기간이 경과되고 발광을 하는지, 나는 기억할 수 없었다. 사흘이나 나흘째쯤, 그런 정도가 아닐까? 내 경우 잠을 자지 못한 채 일 주일이 지났다. 아무리 뭐라 해도 너무 길다. 그런데도 내 몸은 전혀 쇠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느 때보다 건강할 정도이다. 나는 어느 날 샤워를 한 후, 알몸인 채로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선이 터져나갈 듯한 생명력을 띠고 있음에 놀랐다.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신을 구석구석 체크해 보았지만, 거기에는 단 한 조각의 불필요한 군살이나 한 줄기 주름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내 몸은 물론 소녀 시절의 몸매와는 달랐다. 하지만 나의 피부는 옛날에 비해 훨씬 더 빛나고 탄력이 있었다. 나는 시험삼아 뱃살을 손가락으로 집어 보았다. 그것은 탄탄한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서 나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아름다워져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나는 마치 젊음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스물 살이라 해도 틀림없이 통할 것이다. 피부는 매끈매끈하고,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입술은 촉촉이 젖어 있고, 불거져 나온 광대뼈의 그림자(나는 내 몸 중에서 거기를 가장 싫어했다)도 그다지 눈에 띠지 않았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30분 정도 자신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여러 각도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 아름다워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변이 생긴 것일까? 나는 병원을 찾아볼까 하고도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신세를 지고 있는 절친한 의사가 있다. 하지만 의사가 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생각하면,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도무지 그가 나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 줄 것인가? 일 주일이나 전혀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하면, 그는 우선 내 머리를 의심할 거이다. 아니면 단순한 불면증 노이로제로 결론지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나는 어딘 다른 큰 병원으로 보내 검사를 받도록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거기에 갇혀, 이리 저리로 검사를 받는다는 빌미로 뺑뺑이를 돌아야 할 것이고, 이런저런 실험을 당할 것이다. 뇌파 검사며 심전도며 소면 검사며 심리 테스트며, 등등의. 내가 그런 것들을 견뎌 내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싶었다. 매일 1시간을 꼬박 수영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자유가 필요했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였다. 병원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 게다가 병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무엇을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닥치는 대로 검사를 해대고는, 산더미 같은 가설을 세울 것이다. 나는 그런 곳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도서관에 가서 잠에 관한 책을 읽어보았다. 잠에 관한 책은 그리 만지도 않을 뿐더러, 대수로운 내용도 없었다. 결국 그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잠이란 휴식이다 - 그뿐이었다. 그것은 자동차의 엔진을 끄는 것과 마찬가지다. 엔진을 끄지 않고 내내 작동시키면, 그것은 금방 마모된다. 엔진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열을 동반하고, 고인 열은 기계 자체를 피폐하게 만든다. 그래서 방열을 위해 휴식을 취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쿨 다운하는 것이다. 엔진을 끈다 - 그것이 즉 수면인 것이다. 인간의 경우, 그것은 육체의 휴식이며 동시에 정신의 휴식이기도 하다. 인간은 몸을 누이고 근육을 쉬게 함과 동시에, 눈을 감고 사고를 중단한다. 그리고도 남은 사고는 꿈이란 형태로 자연 방전된다. 어떤 책에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인간이란 사고에 있어서나 육체의 행동에 있어서나, 일정한 개인적인 경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라고 그 책의 저자는 말한다. 사람이란 것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행동, 사고의 경향을 형성해 가는 법이고, 일단 형성된 그런 경향은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지워지지 않는다. 즉 사람은 그런 경향이란 우리 안에 갇혀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잠이야말로 그런 경향의 편향을 - 구두굽이 한 쪽만 다는 것과 마찬가지 - 중화시킨다. 즉 잠이 그 편향을 조정하고, 치유하는 것이다. 인간은 잠 속에서 집중적으로 사용한 근육을 자연스레 풀고, 집중적으로 사용된 사고 회로를 진정시키고, 또 방전한다. 그런 식으로 인간은 쿨 다운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시스템 안에 숙명적으로 프로그램 되어 있는 행위이다, 어느 누구도 그 프로그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만약 그것에서 벗어나면, 존재 그 자체가 존재 기반을 잃데 된다, 라고 저자는 썼다. 경향? 하고 나는 생각했다. 경향이라 말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집안 일이었다. 내가 아무런 감동없이 기계적으로 매일 매일 하고 있는 수많은 집안 일. 요리니 시장 보기니 빨래니 육아니, 그런 것들은 그야말로 경향 그 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감고서도 그런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경향에 지나지 않으므로. 단추를 누르고 레바를 잡아당기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이란 것이 점점 앞으로 흘러간다. 똑같은 식으로 움직이는 몸 - 그저 경향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구구굽이 한 쪽만 달듯 경향적으로 소비되어지고, 그것을 조정하고 쿨 다운시키기 위해 나날의 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겨우 그런 일인가? 나는 다시 한 번 그 문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 그렇다면, 나의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경향적으로 소비되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잠을 잔다. 내 인생은 단지 그 반복에 불과하지 않은가? 어디로도 갈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도서관 책상을 향하고 머리를 저었다. 잠 따위 필요없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발광한다 해도, 잠을 자지 못하여 내가 그 생명적 <존재 기반>을 잃어버린다 해도, 그래도 좋다. 상관없다. 나는 아무튼 경향적으로 소비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경향적 소비를 치유하기 위한 잠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면, 그런 것도 필요없다. 내게는 필요없다. 만약 내 육체가 경향적으로 소비되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정신은 내 자신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반드시 내 자신을 위해 취하리라.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으리라. 치유 따위 필요없다. 나는 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는 도서관에서 나왔다. 5 그런 식으로, 나는 잠을 못 자는 데 대한 두려움을 없앴다. 아무 것도 두려할 일이 없다. 좀 더 미래를 내다보며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인생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밤 10시에서 아침 6시까지의 시간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 하루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시간은 지금까지 잠이란 작업에 - <쿨 다운시키기 위한 치유 작업>이라고 그들을 말한다 - 낭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지금 나만을 위한 것이 되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어떤 요구도 받지 않고. 그렇다, 그것은 그야말로 확대된 인생이다. 나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그런 짓은 생물학적 견지에서 올바르지 않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과연 당신이 말하는 대로다. 그리고 나는 그 비정상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는 데 대한 빚을, 언젠가 갚지 않으면 안 될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그 확대된 부분을 - 나중에 반납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근거 없는 가설이지만, 그것을 부정할만한 근거 또한 없다. 나는 일단은 이치가 맞는 생각이라고 느낀다. 요컨대 최후에는 빌린 시간과 갚을 시간의 아귀가 꼭 맞는 셈이다. 하지만 전직하게, 그런 일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만약 어떤 예기치 못한 일로 자신이 일찍 죽어야만 한다 해도,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가설에 따른 길을 저 좋은 대로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나는, 자신의 인생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멋진 일이었다. 거기에는 보람이란 것이 있었다. 자신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실감이 있었다. 나는 소비되고 있지 않다. 적어도, 소비되고 있지 않은 부분의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실감을 할 수 없는 인생따위 제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 하여도,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에서 분명하게 그런 생각을 한다. 남편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는, 나는 거실 소파에 안자, 혼자서 브랜디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나는 첫 일 주일 동안 <<안나 카레리나>>를 세 번 읽었다. 되읽으면 되읽을수록, 나는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그 장대한 소설은 수많은 발견과 수많은 수수께끼로 가득하였다. 세공한 상자처럼, 세계 안에 조그만 세계가 있고, 그 조그만 세계 안에도 조그만 세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시계가 복합적으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우주는 내내 거기에 있으면서, 독자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의 나는 그들 세계의 편린밖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것을 분명하게 관통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톨스토이가 그 소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독자들이 어떻게 읽어 주기를 바랐는지, 그런 메시지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소설적인 결정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그 소설의 무엇이 결과적으로 작가 자신을 능가하고 있는지. 나는 그것들을 꿰뚫을 수가 있었다. 아무리 의식을 집중하여도 나는 지치지 않았다.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싶은 만큼 실컷 읽은 후에,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나는 얼마든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의식을 집중하여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난해한 부분도 나는 무리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이것이 내 원래의 모습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잠을 버림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확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집중력이 없는 인생 따위, 눈만 반짝 뜨고 아무 것도 보지 않는 상태나 다름없다. 마침내 브랜디가 바닥을 드러내었다. 나는 거의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셔버린 것이다. 나는 백회점에 가서 같은 레미 마르탱을 한 병 샀다. 초콜릿도 쿠키도 샀다. 그리고 고급 브랜디 잔도 샀다. 사는 김에 붉은 포도주도 한 병 샀다. 때로, 책을 읽으면서, 기분이 상당히 고양되는 일이 있었다. 그런 때, 나는 책을 그만 읽고 방안에서 몸을 움직였다. 유연 체조를 하기도 하고, 혹은 그냥 가볍게 방안을 거닐었다. 기분이 내키면 밤중에 산책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에서 시티를 타고, 근처 거리를 정처없이 달렸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 일도 있었지만,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기가 싫어, 대개는 차안에 있었다. 위험하지 않을 성싶은 데다 차를 세우고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일도 있었다. 항구까지 가서 한동안 배를 바라보는 일도 있었다. 한 번은 경찰이 다가와, 몇 가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깊은 밤, 시간이 2시 반이었고, 나는 부두 근처에 있는 가로등 밑에 차를 세우고, 배의 불빛을 보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경찰이 톡톡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유리창을 내렸다. 젊은 경관이었다. 핸섬하고, 말투도 정중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라고 나는 경관에게 설명하였다. 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하여, 나는 보여 주었다. 경관은 잠시 그것을 보았다. 지난 달 여기에서 살인 사건이 있어서 그렇다, 라고 경관을 말했다. 아베크 족이 세 젊은이의 습격을 받아, 남자는 죽고, 여자는 강간을 당했다. 그 사건이라면 아도 들은 기억이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부인, 만약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렇게 깊은 밤에 이런 데서 어슬렁거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라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제 갈께요, 라고 나는 말했다. 그는 면허증을 돌려주었다.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말을 건 것을 그 한 번 뿐이었다. 나는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밤 거리를 1시간이나 2 시간 헤맸다. 그리고는 아파트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어둠 속에 꼼짝 않고 잠들어 있는 남편의 하얀 블루 버드 옆으로. 그리고 식어 가는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사라지면, 나는 차에서 나와, 집으로 올라갔다.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우선 침실로 들어가 남편이 자고 있는가를 확인하였다. 남편은 언제나 변함없이 자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 방으로 가 보았다. 아이도 똑같이 숙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가 아무런 변화도 없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완전히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세계는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점점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어느 날 밤, 자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본 적이 있다. 침실에서 탕하는 소리가 나, 당황하여 가 보니 자명종 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남편이 잠결에 팔을 움직이거나 해서, 그 때 떨어진 것이리라. 그런데도 남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숙면하고 있었다. 어이휴, 도무지 이 사람은 무슨 일이 생겨야 눈을 뜨는 것일까? 나는 시계를 주어, 베갯맡에 놓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남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운 데서 바라보다니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다. 몇 년 만일까? 막 결혼했을 무렵에는 곧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이 이렇듯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한, 나는 무사할 수 있다, 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옛날, 남편이 잠든 후면, 그렇게 종종 그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젠 가부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더라?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아이의 이름을 짖는 일로, 나와 남편의 어머니 사이에 말다툼 비슷한 것이 있었던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어머니는 종교에 집착하고 있어, 거기에서 이름을 <받아>왔던 것이다. 어떤 이름이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아무튼 나는 그 이름을 <받을>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나와 시어머니는 꽤 격렬하게 언쟁을 벌였다. 하지만 남편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옆에서 우리를 달랠 뿐이었다. 나는 그 때, 남편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실감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렇다, 남편은 나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주 화가 났었다. 물론 그것은 옛날 일이고, 나와 시어머니는 화해를 하였다. 아이의 이름은 내가 붙였다. 물론 나와 남편은 금방 화해를 하였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나는 남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거기에 선 채 남편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은 평소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불 끝으로 묘한 각도로 맨 발이 쑥 비져 나와 있었다. 마치 누군가 타인의 발 같은 각도로. 그것은 큼직하고 우둘투둘한 발이었다. 커다란 입을 반쯤 헤벌어져 있고, 아랫 입술을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이따금 생각났다는 듯 코 언저리가 피끗 움직였다. 눈 아래에 있는 사마귀가 징그럽도록 크고 볼품없이 보였다. 감은 눈도 어딘가 모르게 품위가 없었다. 눈꺼풀이 늘어져, 그것이 색바랜 살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바보처럼 잠자고 있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 잠든 얼굴에는 아무런 욕십도 없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이다지도 추한 꼴을 하고 자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라고 나는 생각했다. 결혼했을 당시, 이 사람은 훨씬 팽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똑같이 숙면을 하고 있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칠칠맞은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남편이 옛날에는 어떤 모습으로 잤는지를 기억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한심한 얼굴은 아니었다, 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나 혼자만의 지나친 느낌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감정 이입을 하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내 어머니라면 아마도 이런 말을 할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 특유의 논리인 것이다. 너 말이지, 결혼해서 행복한 시절도 고작해야 이 삼 년뿐이라니까. 이것이 그녀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대사다. 잠든 얼굴이 귀엽다는 둥, 반해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라고. 그녀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남편은 추해졌다. 얼굴은 팽팽함을 잃었다. 그것이 아마도 나이를 먹는다는 일일 것이다. 남편은 나이를 먹었고, 그리고 지쳐 있다. 닳아 있다. 앞으로도 계속, 점점 더 추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리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주 아주 힘겨운 한숨이었지만, 물론 남편은 옴짝도 하지 않았다. 한숨정도로는 눈을 뜨니 않는 것이다. 나는 침실에서 나와, 거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브랜디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책을 덮고, 아이 방으로 갔다. 그리고 문을 열어, 복도의 불빛을 배경으로 아이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이도 남편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나는 한동안 아들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 아들은 아주 매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남편과는 상당히 다르다. 아직 어린애인 것이다. 피부는 반들반들하고, 저질적인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내 신경에 거슬렸다. 아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느끼기는 이 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아들의 무엇이 내 신경에 거슬리는 것일까. 나는 거기에 선 채, 또 팔짱을 끼었다. 물론 나는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 몹시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확실하게 지금, 내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떠 아들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짜증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아들의 잠든 얼굴이 남편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또 시어머니와 똑 같았다. 혈통적인 완고함, 자기 충족성 - 나는 남편의 가족이 지니고 있는 그런 유의 오만함을 싫어하였다. 물론 남편은 나에게 잘 대해 준다. 자상하고, 많이 배려를 해 준다. 바람 한 번 피운 일이 없고, 일도 열심히 한다. 성실하고, 아무한테나 친절하다. 내 친구들도 모두, 네 남편 같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니, 라고 입을 모아 칭찬한다. 흠잡을 데가 없다, 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 흠잡을 데가 없다는 완벽함이 때로 나를 짜증스럽게 한다. 그 <흠잡을 데 없음>안에는, 왠지 상상력의 개재를 허락하지 않는 듯한, 딱딱하고 야릇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이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들 또한 같은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또 머리를 흔들었다. 결국은 타인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된다 해도, 결국은 내 기분 따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편이 지금 나의 기분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아들을 사랑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장래, 이 아들을 그렇게 진지하게 사랑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어감이 들었다. 엄마답지 않은 생각이다. 세상의 엄마들은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앞으로 언젠가는 불현듯 이 아이를 경멸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는 사이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슬퍼졌다. 나는 아이 방의 문을 닫고, 복도의 불을 껐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나는 몇 페이지를 읽다가, 다시 책을 덮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3시 조금 전이었다. 잠을 자지 않게 된 이후로, 오늘이 며칠 째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처음 잠을 자지 못한 날이 그러니까, 지지난 주 화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로 꼭 열 이레가 된다. 나는 열 이레 동안 한 잠도 자지 않았다. 열 일곱 전의 낮과 열 일곱 번의 밤. 아주 긴 시간이다. 잠이란 것이 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잘 기억해낼 수가 없다. 나는 눈을 감아 보았다. 그리고는 잠의 감각을 되새겨보려 하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깨어 있는 어둠이 존재할 뿐이었다. 깨어 있는 어둠 - 그것은 내게 죽음을 상기시켰다. 만일 이대로 내가 죽는다면,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던가,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 인생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내가 알 리가 없다. 그럼, 죽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잠을 일종의 죽음의 원형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즉 나는 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써, 죽음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이란 요컨대, 보통 대보다 훨씬 깊은, 의식이 없는 잠 - 영원한 휴식, 블랙 아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문득 생각하였다. 죽음이란, 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상황이 아닐까 -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끝이 없고 깊은 깨어 있는 어둠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그런 암흑 속에서 영원히 각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너무하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죽음이란 상황이 휴식이 아니라면, 우리들의 이 피폐로 가득한 불완전한 생에 대체 어떤 구원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결국은, 아무도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누가 죽음을 실제로 보았는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죽음을 본 사람은 이미 죽어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추측이든, 그것은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 죽음은 마땅히 휴식이어야 한다는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작스런 두려움이 내 전신을 감쌌다. 등줄기가 얼어붙고, 딱딱하게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또 눈을 꼭 감았다.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꺼운 어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둠은 우주 그 자체인 것처럼 깊고, 구원이 없었다. 나는 외톨이였다. 나는 의식을 집중하고, 확대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 우주의 저 깊은 곳까지 환히 꿰뚫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안 보려 하였다. 아직 이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죽음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죽는다는 것이, 영원한 각성 상태에서, 이렇게 어둠을 지긋이 응시하는 것이라면? 나는 간신히 눈을 뜨고, 잔에 남아 있었던 브랜디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6 나는 잠옷을 벗고 대신 블루진을 입었다. 그리고 티 셔츠 위에다 요트 파카를 입는다. 그리고는 머리칼을 뒤에서 하나로 뭉쳐 요트 파카 속으로 쑤셔 넣고, 남편의 야구 모자를 쓴다. 거울을 보니, 남자처럼 보인다. 이제 됐다. 그리고 나는 운동화를 신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나는 시티에 올라타자마자 키를 돌려, 엔진을 잠시 움직여 본다. 그리고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여느 대와 다름없는 소리다. 나는 핸들에 양 손을 얹고, 몇 번인가 심 호흡을 한다. 그리고 기어를 로로 한 후, 아파트 밖으로 차를 몬다. 차가 보통 때보다 훨씬 가볍게 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얼음 위를 달리는 것 같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기어를 조심스레 바꾸어, 거리를 빠져나와, 요코하마로 향하는 간선 도로로 들어선다. 벌써 3시가 넘은 시간인데, 도로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 수는 결코 적지 않다. 거대한 장거리 운송 트럭이 노면을 울리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갔다. 그들은 잠자지 않는다. 운송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난제 자고, 잠에 일하는 것이다. 나라면 밤낮으로 일할 수 있는데,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잠잘 필요가 없으므로. 그것은 생물학적 견지에서 보면 부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 누가 자연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인가? 어떤 상태가 생물학적으로 자연인가 하는 따위, 결국은 경험적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추론을 넘어선 지점에 있는 것이다. 가령, 나를 인류의 비약적 진화의 선험적 샘플로 간주한다면 어떨까? 잠들지 않는 여자. 의식의 확대. 나는 웃고 만다. 진화의 선험적 샘플. 나는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항구까지 달린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었지만, 한밤중에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방송국은 없었다. 어떤 주파수에 맞추어도 흘러나오는 음악이라니, 별 볼 일없는 일본이 록 뮤직뿐이다. 끈적끈적한 랩 송. 할 수 없어 나는 그런 음악을 듣는다. 그 음악은 나로 하여금 아주 먼 장소로 오고 만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나는 모차르트나 하이든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공원의 하얀 줄로 구분된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엔진을 끈다. 사방이 탁 트인, 가로등 아래 가장 밝은 곳을 나는 고른다. 주차장에는 차가 한 대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즐겨 탈법한 차다. 하얀 투 도어 쿠페. 낡은 형이다. 아마 연인들이겠지 호텔에 묵을 돈이 없어, 차안에서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혹 생길지도 모르는 성가신 일을 피하여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여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 문이 잠겨져 있는지도 다시 확인한다. 멍하니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대학교 1학년 때의 남자 친구와 둘이서 드라이브를 갔다가, 차안에서 페팅을 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도중에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넣게 해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안된다고 하였다. 나는 핸들 위에 양 손을 올려놓고, 음악을 들으며 그 때 일을 기억해낸다. 하지만 나는 상대 남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다. 모든 일들이 터무니없이 먼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인 듯한 기분이 든다. 내게는 잠을 못 이루기 이전의 기억이, 점점 가속도적으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아주 신기한 느낌이다. 매일 잠 잘 시간이 되면 잠잤던 당시의 자신이 진정한 자신이 아니고, 그 당신의 기억도 자신의 기억이 아닌 듯 느껴진다. 사람은 이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아무도 모른다. 나조차 모른다. 설명을 해도 그들은 모르리라.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만약 믿는다 해도, 내가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가 따위, 절대로 정확하게는 모를 것이다. 그들은 나를, 자신들이 추론한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로밖에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변화하고 있다. 얼마만큼 긴 시간 거기에 그러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핸들 위에 양 손을 얹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리고 잠이 없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인기척을 느끼고 불현듯 내 자신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있다. 나는 눈을 뜨고 사방을 본다. 누군가 창밖에 있다. 그리고 문을 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문은 물론 잠겨 있다. 검은 그림자가 양 쪽으로 보인다. 오른쪽 문과 왼쪽 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두운 그림자로, 거기에 서 있었다. 그 두 그림자에 끼어, 내가 타고 있는 시티는 아주 작게 느껴진다. 마치 조그만 케이크 상자 같다. 자동차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가 오른 쪽 유리창을 톡톡 두드린다. 하지만 그 사람이 경찰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경찰을 그런 식으로 두드리지 않는다. 차를 흔들어대거나 하지도 않는다. 나는 숨을 삼켰다. 어쩌면 좋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머리는 몹시 혼란스럽다. 겨드랑이 밑으로 땀이 배인다. 빨리 어디론가 가야겠다, 라고 생각한다. 키다, 키를 돌리자. 나는 손을 뻗어 키를 잡고 오른쪽으로 돌린다. 셀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엔진이 점화되지 않는다. 내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키를 천천히 돌려본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거대한 벽을 긁는 듯한 키리릭 키리릭 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헛바퀴를 돌고 있다. 헛바퀴를 돌고 있다. 그리고 남자들은 - 그 그림자는 내 차를 계속 흔들어대고 있다. 흔들림이 점점 커진다. 틀림없이 그들은 이 차를 뒤엎을 작정이다. 무언가가 잘 못되어 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생각하자. 생각하자. 침착하게, 천천히, 생각하자. 무언가가 잘 못 돌아가고 있다. 무언가가 잘 못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잘 못 되었는가, 나는 모른다. 내 머리 속은 농밀한 어둠으로 꽉 차 있다. 그것은 이미 나를 어디로도 데리고 가지 않는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손가락이 덜려 열쇠 구멍에 키를 집어넣을 수가 없다. 나는 키를 빼어, 다시 꼽으려고 한 순가, 열쇠가 바닥에 떨어진다. 나는 몸을 구부려 그것을 주우려고 한다. 하지만 주울 수가 없다. 차체가 요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을 구부리려 하다가, 나는 핸들에 이마를 거세게 부딪치고 만다. 나는 단념하고 시트에 몸을 기대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그리고 운다. 나는 우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나는 외톨이이고, 이 조그만 상자에 갇힌 채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지금은 밤의 가장 깊은 시각이고, 그리고 남자들은 내 차를 뒤흔들어대고 있다. 그들은 내 차를 엎어뜨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