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보기의 추락에는 비교도 안될 만큼 하찮은 사고일지 모르겠으나 몇 년전에 태풍 때문에 중앙선 열차 안에 하룻밤 내내 갇혀 있었던 적이 있다. 저녁나절에 마쓰모토(松本)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오오쯔키(大月)를 지나쳤을 무렵에, 선로변의 절벽이 무너져 내려 열차가 완전히 멈추고 만 것이다.날이 밝고 나서 보니 태풍은 이미 물러가고 날씨는 안정을 되찾았는데, 선로의 복구 작업에는 별 다른 진척이 없어 우리들은 결국 그날 오후까지 열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나란 인간은 워낙 한가한 족속이라 동경에 하루 이틀 늦게 돌아간들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나는 열차가 멈춰 선 시골의 조그만 마을을 산책하다가 포도 한 봉지와 필립 K. 딕크의 문고본을 세 권 사가지고 자리로 돌아와, 포도를 먹으며 느긋하게 독서를 했다. 스케줄이 빡빡한 여행을 하고 계셨던 분께는 상당히 미안하지만, 내게는 더할 나위없이 즐거운 체험이었다. 장시간 책을 읽을 수 있지, 도시락도 제공해 주지, 특급 요금은 되돌려 주지, 그런데도 불평을 한다면 벌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통 상황 같으면 절대로 내릴 리가 없는 조그만 역에 내려서, 거기에 있는 조그만 마을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걷는다는 것도 아주 신나는 일이다. 이름은 잊어 버렸지만, 한 십 오분쯤 걸으면 이 끝에서 저끝까지를 다 구경할 수 있을만큼 조그만 동네였다. 우체국이 있고, 책방이 있고, 약국이 있고, 소방서의 출장소가 있고, 운동장이 유난히 넓은 소학교가 있고, 강아지가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다. 태풍이 훑고 지나간 다음의 하늘은 한 없이 푸르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웅덩이에는 하얀 구름의 그림자가 또렷이 비쳐 있다. 포도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도매상 비슷한 가게 앞을 지나가려니, 싱싱하고 시큼한 포도 향내가 코를 찌른다. 그 가게에서 나는 포도를 한 봉지 샀다. 그리고 필립 K. 딕크를 읽으며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웠다. 덕분에 내가 소장하고 있는 <화성의 타임 슬립>에는 도처에 포도물이 얼룩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