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식에 대하여(2) 며칠 전 영국 신문을 읽고 있는데, 광고란에 개가 목을 매달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읽어 보았더니, 그게 애견가 협회에서 보내는 메세지로 '한국에서는 개를 죽여서 먹는 습관이 있는데, 이건 야만적 행위니까 저지합시다.' 란 내용이었다. 그 후 한 달쯤 지나 호놀룰루에서 신문을 읽고 있으려니, '중국인은 들개 사냥을 하는데다 그 일부는 먹는다고 하는데, 그건 지나친 야만 행위니 우리는 중국 제품을 보이코트 하자.' 는 투고가 게재돼 있었다. 투고는 북경에서 행해진 대규모 들개 사냥으로, 6주 동안에 처분된 개의 숫자가 약 이십 만 마리라는 사건(끔찍하다!)에 대한 한 호놀룰루 시민의 반응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조선과 영국 사이에는 개소동이 백 년쯤 전에도 한번 있었다. 그때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고 생각한다)이 우호를 위해 조선 황제에게 선물로 보낸 개를 조선 조정 쪽에서 완전히 잘못 받아들여, 고맙게 요리를 하여 먹어 버린 터라, 당시에는 상당한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재밌다고 말하면 안되겠지만 재밌다. 이렇게 개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습관의 문제를 편식과 동일하게 논하는 것은 좀 무리겠지만, 그래도 무엇은 먹고 무엇은 안 먹는다는 선택이 기본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비슷한 차원의 것이다. 야만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닌 성향의 문제가 아니고, 개념의 문제이다. 내가 굴은 먹을 수 있지만 대합은 못 먹는다는 점에 대해 누가 '왜 그런가?' 하고 집요하게 묻는다면, 나로서는 설명하기가 무척 곤란 하다. 성향을 설명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얘기가 한참 비약되는데, '왜 그런 마누라랑 함께 살 게 되었나?' 하는 질문도 같은 선상에 있는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현실을 잠정적으로 '동시 존재적 정당성(同時 存在的 正當性)'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어째 이번은 얘기가 좀 골치 아파졌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