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다니자키 by Murakami Haruki 토니 다니자키는 토니 다니자키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는 그 이름(호적상 이름은 물론 다니자키 토니로 되어 있을 테지만)과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인 생김새며 곱슬머리 때문에 어릴 적엔 곧잘 혼혈아로 오해를 받았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절이라 세간에 미국 병사의 피가 반쯤 섞여 있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버젓한 일본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라고 하는, 전쟁 전부터 약간은 이름이 알려진 재즈 트럼본 연주자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4년쯤 전에 여자가 얽힌 문제를 일으켜서 도쿄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이왕 떠날 바에야, 하며 악기 하나 달랑 들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 당시 나가사키에서 하루 뱃길이면 상하이에 닿았다. 그는 도쿄에건 일본에건 잃어선 안 될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니 미련이 남을 것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상하이라는 번화가가 제공하는 기교적인 우아함 쪽이 그의 성격에는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의 갑판에 서서 아침 햇살에 빛나는 상하이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거리를 본 순간부터,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그 거리가 마음에 쏙 들어 버렸다. 그 빛은 그에게 굉장히 밝은 무언가를 약속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때 그는 스물 한 살이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중일 전쟁부터 진주만 공습, 그리고 원폭투하에 이르는 전란격동의 시대를 그는 상하이의 나이트 클럽에서 한가로이 트럼본을 불면서 보냈다. 전쟁은 그와는 전연 상관없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요컨대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역사에 대한 의지라든가 성찰 같은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었다. 마음껏 트럼본을 불 수 있고, 그럭저럭 하루 세 끼 식사를 할 수 있고, 여자가 몇 명 주위에 있으면 그 이상 딱히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를 좋아했다. 젊고 남자다운데다 악기까지 잘 다루니, 어딜 가건 눈 내린 날 까마귀 마냥 눈에 띄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자들과 자기도 했다. 일본인에서 중국인, 백러시아인, 매춘부에서 유부녀, 아름다운 여자에서부터 그다지 예쁜 것도 아닌 여자에 이르기까지 그는 거의 닥치는 대로 여자들과 뒤섞였다.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한없이 달콤한 트럼본의 음색과, 거대하고 활동적인 그 페니스로 당시 상하이의 명물 같은 존재가 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또 ― 본인은 별로 의식하지 않았을 테지만 ― '도움이 되는' 친구를 사귀는 재능까지 타고났다. 그는 육군 고관, 돈 많은 중국인들, 그 밖의 다양한 정체불명의 방법으로 전쟁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이며 당당한 위세를 자랑하는 무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대부분 항상 웃 옷 안에 권총을 숨겨 놓고, 건물에서 밖으로 나올 때는 일단 거리를 아래위로 쓱 훑어 보는 타입의 사람들이었지만,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묘하게 그들과 죽이 맞았다. 그리고 또 그들은 그를 특별히 귀여워했다. 뭔가 문제가 일어나면 그들은 흔쾌히 다니자키 세이사부로의 편의를 봐 주었다. 그 시절의 다니자키 세이사부로에게 인생이란 참으로 만만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능력도 때로는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어딘가 수상쩍은 무리들과의 교제가 중국군의 눈길을 끌어 오랫동안 형무소에 처넣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투옥된 무리들 대부분은 변변한 재판도 받지 못하고 모조리 처형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무런 언질도 없이 형무소 마당으로 끌어내어 자동권총으로 머리를 쏘는 것이다. 처형은 늘 오후 2시에 행해졌다. 피융, 하고 단단하게 응축된 듯한 자동권총의 총성이 형무소 마당에 울려 퍼졌다. 다니자키 세이사부로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그 곳에서는 삶과 죽음의 사이가 그야 말로 머리카락 한 올쯤의 틈밖에 없었다. 죽는 것 자체는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머리에 총을 맞고, 그걸로 끝인 것이다. 고통은 한 순간에 끝나 버린다. 지금까지 나는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고, 꽤 많은 여자들과도 잤다. 맛있는 걸 먹었고, 갖가지 재미있는 경험도 했다. 인생에 대해 별 아쉬움은 없다. 여기서 깨끗이 죽임을 당한다 해도 불평할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이 전쟁에서는 몇백 만이나 되는 일본인이 죽었다. 더 처참한 방법으로 죽은 사람들도 잔뜩 있다. 그는 그런 각오를 하고 독방 안에서 느긋이 휘파람을 불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쇠창살이 달린 작은 창 밖을 흘러가는 구름의 모양을 바라보며, 얼룩덜룩한 벽 위에 여태껏 잔 여자의 얼굴이며 몸매를 하나 하나 떠올렸다. 하지만 결국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그 형무소에서 살아서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단 두 명의 일본인 중 하나였다. 다니자키 세이사부로가 바싹 마른 몸뚱이 하나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쇼와 21년 봄이었다. 돌아와 보니 도쿄의 집은 지난해 3월 도쿄 대공습으로 불타 없어지고, 양친은 그 때 사망했다. 하나 있던 형은 미얀마전선에서 행방불명이 된 채였다. 요컨대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완전히 천애고아 신세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걸 그다지 슬프거나 안타깝게 느끼지 않았고, 별 충격도 받지 않았다. 물론 결락감 같은 것은 있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는 혼자가 되고 마는 법이다. 그 때 그는 스물 셋이었다. 혼자가 되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불평을 늘어놓을 만한 나이도 아니다. 몇 살쯤 왕창 나이를 먹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 이상의 감정은 별로 솟아나지 않았다. 그렇다.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어쨌거나 잘 살아 남았고, 일단 살아 남았으니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달리 할 수 있을 만한 일도 없고 해서, 그는 옛날에 알던 사람을 부추겨 작은 재즈 밴드를 결성했고, 미군부대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천부적으로 원만한 대인 관계를 살려, 재즈를 좋아하는 미군 소령과 친구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소령은 뉴저지 출신의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그 자신도 클라리넷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보급부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필요한 레코드가 있으면 내키는 대로 본국에서 들여올 수 있었다. 한가한 시간이 나면 두 사람은 곧 잘 함께 연주를 했다. 소령의 숙소로 가서 맥주를 마시면서 바비 해켓이라든가 잭 티가든, 베니 굿맨 같은 쪽의 해피한 재즈 레코드를 듣고, 열심히 프레이즈를 카피했다. 소령은 그를 위해서 그 당시 구하기 어렵던 식료품이며 우유, 술을 얼마든지 조달해 주었다. 뭐 그다지 나쁘지 않은 시절이로군, 하고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생각했다. 그가 결혼한 것은 쇼와 22년이었다. 상대는 어머니 쪽의 먼 친척 뻘 되는 아가씨였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우연히 딱 마주쳐 차를 마시면서 친척들 소식을 묻기도 하고 옛날 이야기를 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서로 오가게 되었고, 이윽고 자연스럽게 ―아마 그녀가 임신한 탓이 아닌가 싶지만 ―같이 살게 되었다. 적어도 그것이 토니 다니자키가 아버지의 입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다니자키 세이사부로가 얼만큼 아내를 사랑했는지, 토니 다니자키로서는 알 수 없다. 예쁘고 다소곳한 아가씨였지만 별로 몸이 좋지 않았다, 고 아버지는 말했다. 결혼한 이듬 해에는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난 지 3일 뒤에 아이 엄마가 죽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그녀는 죽고, 아차 하는 순간에 재가 되어 버렸다. 아주 조용한 죽음이었다. 아무런 갈등도 없이, 고통다운 고통도 없이, 쓰윽 사라지듯이 죽어 버린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뒤로 와서 슬며시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그것에 대해 대체 어떤 느낌을 가져야 좋을지 자신도 잘 몰랐다. 그는 그런 감정에 대해 서툴렀던 것이다. 뭔가 평평한, 원반 같은 것이 가슴속으로 쑥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물체이며, 어째서 거기에 있는지 그로서는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그 물체는 줄곧 거기에 있으면서 그가 그 이상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걸 저지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그로부터 1주일 가량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병원에 맡겨 둔 채인 아이의 일조차 떠오르지 않았을 정도였다. 소령은 그런 그를 부모처럼 돌봐 주었다. 매일같이 둘은 기지의 바에서 술을 마셨다. 알았나? 자네는 더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구,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만큼은 잘 길러야 해, 하고 소령은 그에게 강하게 말했다. 소령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상대의 호의만큼은 이해가 갔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소령은 문득 생각난 듯이, 혹 괜찮다면 자기가 그 아이 이름을 지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아직 아이 이름조차 짓지 않았던 것이다. 소령은 자신의 퍼스트 네임인 토니라는 이름을 그 아이에게 붙여 주면 되겠다고 했다. 토니라는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 아이의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소령의 머릿속에는 그것이 어울리는 이름인지 아닌지 하는 의문은 한 순간도 떠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집에 돌아와서 종이에 '다니자키 토니'라는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놓고 며칠간 그것을 바라보았다. 다니자키 토니 ―, 나쁘지 않은 걸, 하고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생각했다. 앞으로 얼마 동안은 미국의 시대가 올 것이고, 아들에게 미국식 이름을 붙여 두는 것도 뭔가 편리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이름을 지어준 덕분에 학교에서는 혼혈아라고 놀림을 당했고, 그가 이름을 대면 상대방은 묘한 얼굴을 하거나, 혹은 좀 꺼리는 표정을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안 좋은 농담식으로 받아들였고, 개중에는 화를 내는 사람조차 있었다. 토니 다니자키는 그런 탓도 있고 해서 대단히 자폐적인 소년이 되었다. 친구다운 친구도 사귈 수 없었지만, 그는 그것을 그다지 괴롭게 여기지도 않았다. 혼자 있는 건 그에게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엄격히 말해 인생에 있어 일종의 전제(前提)이기 조차했다. 사물을 분별할 줄 알게 된 때부터 아버지는 늘 악단을 이끌고 연주 여행을 떠나 있었다. 어렸을 적엔 파출부가 그를 돌봐 주었으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그는 뭐든 혼자서 하게끔 되었다. 혼자서 요리를 하고, 혼자서 문 단속을 하고, 혼자서 잤다. 별로 외롭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가 이것저것 신경 써 주기보다는 스스로 하는 쪽이 훨씬 마음 편했다.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아내가 죽은 후 어째서인지 다시 결혼하지는 않았다. 물론 여전히 수많은 걸 프렌드를 사귀긴 했지만 누군가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식의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혼자서 해 나가는 데 익숙해져 버린 듯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그런 생활이라면 이렇겠지 싶을 만큼 소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엇비슷하게 깊고 습관적인 고독에 물든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어느 쪽도 나서서 마음을 열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아버지 노릇이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토니 다니자키 역시 아들 노릇이 어울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토니 다니자키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매일 방에 틀어박혀 혼자서 그림만 그렸다. 특히 기계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았다. 연필 끝을 바늘처럼 뾰족하게 해서 자전거며 라디오며 엔진이며, 그런 것들의 세세한 부분을 극명하게 그리는 게 특기였다. 꽃 그림을 그려도 잎맥 하나 하나까지 극히 세밀하게 그렸다. 누가 뭐라건 그는 그렇게밖에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과목의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도면 미술 성적만큼은 늘 뛰어나게 좋았다. 대회가 있으면 대개 1등상을 차지했다. 그러니, 그가 고등학교를 나와 미술대학에 들어가고(대학에들어간 해부터 아비와 아들은 어느 한쪽이 먼저 얘길 꺼냈다고도 할 것 없이 그저 당연한 일처럼 따로 살게 되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것도 자연스런 결과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달리 그 이외의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주위의 청년들이 사색하고 고민하고 있을 동안,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묵묵히 메카니컬한 그림을 정밀하게 그려 갔다. 그 시절은 청년들이 권위나 체제에 대해 절실하게 폭력적으로 반항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그가 그리는 극도로 실제적인 그림을 평가할 만한 사람은 주위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미술대학 교수들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비웃었다. 같은 과 동기들은 그것의 무사상성을 비판했다. 하지만 토니 다니자키에게는 같은 과 동기들이 그리는 '사상성 있는' 그림의 어디에 가치가 있는지 전연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눈으로 보자면 그런 그림들은 그저 미숙하고 추하며, 부정확한 것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일단 대학을 졸업하자 사정이 싹 달라졌다. 극도로 실전적인 기술과 현실적인 유용성 덕분에 토니 다니자키는 처음부터 일에는 자유로웠다. 복잡한 기계나 건축물을 그만큼 극명하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물을 보는 것보다 리얼하다'고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사진을 찍는 것보다도 정확했고, 어떤 설명의 말을 늘어놓는 것보다도 이해하기 쉬웠다. 그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인기 절정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자동차 잡지 표지 그림에서부터 광고 일러스트까지, 그는 메커니즘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지 맡았다. 일을 하는 건 즐거웠고, 좋은 벌이도 되었다. 그러는 동안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줄곧 트럼본을 유유히 불고 있었다. 모던 재즈 시대가 됐건, 프리 재즈 시대가 됐건, 일렉트릭 재즈 시대가 됐건,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여전히 옛날 그대로의 재즈를 연주했다. 일류 연주가랄 순 없어도 이름이 꽤 팔려 있었고 늘 일거리는 있었다.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었고, 여자에 자유롭지 못한 적도 없었다. 불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관점에서 인생을 보자면, 일단 그건 썩 괜찮은 인생이었다. 토니 다니자키는 틈만 나면 일을 했고, 돈이 들 만한 이렇다 할 취미도 없었으므로 서른 다섯 살이 된 무렵에는 상당한 자산가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세타가야에 커다란 집을 샀고, 임대용 아파트도 몇 채 소유하게 되었다. 회계사가 그 뒤를 전부 봐 주었다. 토니 다니자키는 그 때까지 몇 명의 여자들과 사귀었다. 철부지 때는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함께 산 일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을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혼할 필요성이란 걸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요리도, 청소도, 빨래도 전부 스스로 했고, 일이 바쁠 때는 파출부를 부르면 됐다. 아이가 있었으면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는 뭔가 상의하거나 마음을 탁 터놓을 수 있는 친한 친구도 없었다. 같이 술을 마실 상대조차 없었다. 그렇긴 해도 그는 결코 편협한 인간은 아니었다. 아버지만큼 숫기가 있는 건 아니었어도, 일상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게 주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는 잘난 체하지 않았고, 자만하지도 않았다. 자기 변명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험담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 떠들기보다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므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와 현실적인 레벨을 뛰어넘는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아버지와는 무슨 용건상 이삼 년에 한 번 정도 얼굴을 마주할 뿐이었다. 만나도 용건이 끝나면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이상 별로 할 말이 없었다. 토니 다니자키의 인생은 이처럼 조용하고 평안하게 흘러갔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결혼할 일은 없을 거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토니 다니자키는 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그의 사무실에 일러스트레이션 원고를 가지러 온 출판사의 아르바이트생 여자아이였다. 나이는 스물 둘이었다. 그녀는 그의 사무실에 있을 동안 내내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꽤 괜찮은 느낌의 얼굴을 한 아가씨였지만, 눈에 띄는 미인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뭔가 그의 마음을 강하게 울리는 것이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가슴이 메어 숨을 잘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 속의 무엇이 그렇게 강하게 그의 마음을 울렸는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사 이해가 되었더라도,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가씨의 옷맵시에 주의가 끌렸다. 그는 옷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여자가 입고 있는 옷에 일일이 신경을 쓰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 아가씨가 기분 좋게 옷을 입고 있는 모습에 웬일인지 정말 감탄을 하고 말았다. 감동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단지 멋지게 옷을 입는 여자들은 꽤 있다. 보란 듯이 옷으로 치장한 여자들은 그 이상으로 많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여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마치 머나먼 세계를 향해 날아오를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걸치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매우 우아하게 옷을 걸치고 있었다. 옷도 그녀의 몸에 걸쳐짐으로 해서 새로운 생명을 획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고맙습니다." 하며 원고를 받아 간 뒤, 한동안 입도 떼지 못했다. 저녁이 찾아와 방 안이 캄캄해져 버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튿날 그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그녀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사무실에 오지 않으면 안될 용건을 무리하게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용무가 끝난 후에 그녀에게 점심을 먹자고 했다. 두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 세상 이야기를 했다. 나이 차가 열 다섯이나 나는 데도 불구하고 둘은 이상하게 말이 통했다. 무슨 말을 해도 이야기가 잘 맞물렸다. 그런 경험은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처음이었다. 그녀도 맨 처음엔 긴장했었으나 차츰 마음이 풀어져 많이 웃고 많이 얘기하게 되었다. "늘 옷맵시가 멋지군요." 하고 토니 다니자키는 헤어질 때 그녀를 칭찬했다. "옷을 좋아해요." 하고 그녀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봉급 대부분은 옷값으로 없어져 버리는 걸요." 그후로 두 사람은 몇 번인가 데이트를 했다. 딱히 어딜 가는 것도 아니고, 둘은 어딘가 조용한 곳에 앉아 줄곧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신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언제까지라도 질리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 둘은 마치 공백을 메우는 것처럼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만났을 때 그는 청혼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 온 연인이 있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는 지지부진해져서 지금은 만날 때마다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게끔 됐다. 토니 다니자키와 같이 있을 때가 즐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인과의 관계를 바로 끊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녀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토니 다니자키와 그녀 사이에는 열 다섯이나 나이 차가 있었다. 그녀는 아직 젊었고, 인생 경험이 부족했다. 열 다섯이라는 그 연령 차이가 앞으로 어떤 의미를 띨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가 생각을 할 동안 토니 다니자키는 매일 혼자서 술을 마셨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외로움이 별안간 중압적으로 그를 짓누르고 고민하게 했다. 외로움이란 감옥 같은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걸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벽의 두께와 차가움을 절망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난 이대로 죽어 버릴지도 몰라.' 그는 아가씨를 만나 그런 마음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이 얼마만큼 외롭고, 얼마만큼 많은 것을 잃어왔는지를.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알아차리게 해 준 것은 바로 그녀라고. 그녀는 머리가 좋은 아가씨였다. 그녀는 토니 다니자키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만나면 만날수록 좋아졌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지 어떨지, 그녀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뭔가 굉장한 것이 있다고 그녀는 느꼈다. 이 사람과 하나가 되면 자신이 행복해질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토니 다니자키 인생의 외로운 시기는 끝이 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는 우선 그녀의 모습을 찾았다. 곁에서 그녀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심했다.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져서 집안을 헤집고 찾아다녔다. 외롭지 않다는 건, 그에게는 좀 기묘한 상황이었다. 외롭지 않게 됨으로써, 또 다시 외로워지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런 생각을 들면 그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무서웠다. 그런 공포는 결혼하고 석 달쯤 계속됐다. 그러나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리고 그녀가 별안간 사라져 버릴 가능성이 적어져 감에 따라, 그것도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그는 겨우 마음을 놓고 평온한 행복 속에 잠길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다니자키 세이사부로의 연주를 들으러 갔다. 시아버지가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 그녀가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이 연주를 들으러 가면 당신 아버지가 신경 쓰이실까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걸." 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니자키 세이사부로가 연주하고 있는 긴자의 클럽에 갔다. 어렸을 때를 빼고 토니 다니자키가 아버지의 연주를 들으러 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다니자키 세이사부로는 옛날과 꼭 같은 종류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가 어릴 적부터 레코드판으로 노상 듣던 곡 투성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류 프로의 손에 의해 교묘하게 빚어져 청중을 기분 좋게 만드는 음악이었다. 토니 다니자키는 전에 없이 거듭 술을 마시며 그 음악에 귀기울였다. 그런데, 한 동안 연주를 듣고 있자니, 마치 가느다란 파이프에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먼지가 쌓여 가는 것처럼, 그 음악 속의 무언가가 그를 숨막히게 하고 기분 나쁘게 했다. 그 음악은 토니 다니자키가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예전 음악과는 좀 다른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이야기고, 게다가 어린아이의 귀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차이가 중요한 것처럼 여겨졌다. 아주 사소한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는 스테이지 위로 올라가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도대체 뭐가 다른 거예요, 아버지, 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즈와리를 마시면서 아버지의 스테이지를 끝까지 다 들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박수를 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일은 변함없이 순조로웠고, 둘은 싸움 한번 하지 않았다. 곧잘 나란히 산책을 하고, 영화를 보러가고, 여행을 했다. 그녀는 그 나이치고는 상당히 유능한 주부인데다 무슨 일에든 절도가 있었다. 척척 집안일을 하고, 남편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토니 다니자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너무나 많은 옷을 사는 것이었다. 눈 앞에 옷이 있으면 그녀는 완전히 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제심을 잃고 말았다. 순식간에 낯빛이 바뀌고 목소리까지 변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별안간 컨디션이 안 좋아진 건가 싶었을 정도였다. 결혼 전부터 그런 경향이 눈에 띄긴 했지만 특히 심해진 건 신혼여행으로 유럽에 갔을 때부터였다. 그녀는 그 여행 중에 질려버릴 만큼 엄청나게 옷을 사 댔다. 밀라노와 파리에서 그녀는 아침부터 밤까지 홀린 듯이 부띠끄를 돌아다녔다. 두사람은 아무곳도 구경하지 않았다. 대성당에도, 루브르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그 여행에 관한한 옷가게 기억밖에 없다. 발렌티노, 미소니, 생 로랑, 지방시, 페라가모, 알마니, 세루티, 지안프란코 페레.... 그녀는 단지 넋나간 듯한 눈빛을 하고 닥치는 대로 옷을 사 댔고, 그는 뒤를 쫓아다니며 돈을 치렀다. 크레딧 카드의 돌출 글씨가 닳아 없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을 정도였다.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옷을 계속해서 샀다. 옷의 수는 급속도로 불어났다. 큰 옷장을 몇 개나 주문해야만 했다. 구두를 수납하기 위한 신발장도 특별히 제작했다. 집은 컸고, 방은 남아 돌았다. 돈에 부자유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내는 옷맵시가 매우 뛰어났다. 새 옷만 있으면 그녀는 행복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불평을 해서는 안된다. 고 생각했다. '뭐 어때, 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이란 없는 걸.' 하지만 아내의 옷이 방 하나로 끝나지 않을 정도의 양에 이르자 역시 불안해졌다. 한번은 아내가 없을 때 옷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매일 두 차례씩 옷을 갈아 입어도, 옷을 전부 걸쳐보는 데 2년 가까이 걸린다. '이건 아무래도 너무 많다. 어딘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안되겠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은 후, 그는 과감히 말을 꺼냈다. "옷 사는 걸 좀 줄이는 게 어떨까." 하고. "난 뭐 돈 때문에 그러는 것만은 아냐. 필요한 걸 사는 거야 전연 상관없고, 당신이 예뻐지는 거야 나도 기쁘지. 그렇지만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비싼 옷들이 필요한 걸까?"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 말씀대로라고 생각해요, 저렇게 많은 옷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눈 앞에 예쁜 옷이 있으면 난 그걸 안 살 수가 없어요. 필요하건 필요치 않건, 많건 적건, 그런 건 문제가 안 돼요. 그저 단지, 사는 걸 그만 둘 수가 없어져요. 꼭 뭐에 중독된 것처럼요." 하지만 어떻게든 거기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그녀는 약속했다. "이대로라면 머잖아 집이 옷으로 가득 차 버릴 거예요." 일주일쯤 그녀는 새로운 옷을 보지 않으려는 듯이 집안에 틀어박혀 가만히 있었다. 공기가 별로 없는 혹성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매일 옷방에 들어가 자기 옷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바라보며 지냈다. 옷감을 쓰다듬고, 냄새를 맡고,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 보았다. 아무리 봐도 싫증 나지 않았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새 옷이 갖고 싶었다. 갖고 싶다고 생각하면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냥 단순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존경하기도 했다. 남편이 하는 말은 확실히 옳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옷은 필요 없는 거다. 몸은 하나밖에 없다. 그녀는 단골 부띠끄에 전화를 걸어 산 지 열 흘밖에 안 된, 아직 입어 보지도 않은 코트와 원피스를 반품할 수 없느냐고 점장에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가져오시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하고 상대는 말했다. 그녀는 최상급 단골 손님이었고, 그 정도 융통성은 있었다. 그녀는 그 코트와 원피스를 차에 싣고 아오야마까지 갔다. 그리고 부띠끄에 그것을 되돌려 주고, 크리딧 카드 이체금을 중지시켰다. 그녀는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와 가능한 주위를 보지 않게끔 최대한으로 차를 몰아 246호선을 타고 그대로 곧장 집으로 향했다. 옷을 돌려주자 그녀는 약간 기분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래, 그런 건 필요 없는 거였어.' 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난 죽을 때까지 부자유스럽지 않을 만큼의 코트와 원피스를 가지고 있는 걸.' 하고. 하지만 교차점 맨 앞에 정지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내내 그 코트와 원피스 생각을 했다. 그게 어떤 색깔이었고 어떤 모양이었는지, 어떤 감촉이었는지,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세부까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마에 땀이 나는 게 느껴졌다. 핸들 위에 양 팔꿈치를 붙인 채로 크게 숨을 들여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신호가 파랑으로 바뀌는 게 보았다. 그녀는 튕기듯이 힘껏 액셀을 밟았다. 그 때, 황색 신호에서 무리하게 교차점을 뚫고 나가려고 한 대형 트럭이 그녀가 운전하는 푸른빛 르노 생크의 코끝을 옆에서 풀 스피드로 돌진해 왔다. 그녀는 뭔가를 느낄 틈조차 없었다. 토니 다니자키에게 남겨진 것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운 사이즈 7 옷의 산더미였다. 신발만 해도 2백 켤레에 이르렀다. 그것을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내의 몸에 걸쳐졌던 것을 언제까지고 껴안고 있는 게 싫어서 장신구류는 업자를 불러 달라는 값에 넘겼다. 스타킹이며 속옷류는 한데 모아 정원의 소각로에서 태웠다. 옷과 구두만은 너무 많았으므로 그대로 두었다. 아내의 장례식이 끝나자, 그는 그 옷방에 혼자 틀어박혀 그곳에 빼곡이 걸려 있는 옷들을 아침부터 밤까지 줄곧 바라보았다. 장례식 열흘 뒤, 토니 다니자키는 신문에 어시스턴트할 여성을 모집하는 구인광고를 냈다. 사이즈 7, 신장 161㎝ 전후, 신발 사이즈 22의 여성을 구함. 고급료 우대. 그가 제시한 급여는 파격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으므로 전부해서 열 세 명의 여성들이 미나미아오야마에 있는 그의 작업실 겸 사무실에 면접을 하러 왔다. 그 중 다섯 명까지는 분명히 사이즈를 속인 것이었다. 나머지 여덟 명 중에서 그는 아내의 체형과 제일 가까운 여성을 골랐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얼굴을 한 이십대 중반의 여자였다. 그녀는 장식이 없는 흰 블라우스에 푸른 타이트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옷도 구두도 깨끗하긴 했지만, 잘 보면 꽤 낡아빠진 것이었다. 토니 다니자키는 여자에게 말했다. 일 자체는 전혀 어렵지 않다. 매일 9시에서 5시까지 사무실에 나와 전화를 받고, 내 대신에 원고를 갖다 주거나 자료를 받아오거나, 복사를 해 주기만 하면 된다. 다만 딱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실은 아내가 죽은 지 얼마 안됐는데, 아내의 옷이 집에 굉장히 많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새것이거나 아니면 새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걸 여기에서 일할 동안 유니폼 대신 당신이 입어 줬으면 한다. 그래서 옷 사이즈와 신발 사이즈와 키를 채용 조건으로 내건 거였다. 이건 아마 기묘한 얘기로 들릴 거라 생각한다. 당신은 이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얘기라고 생각할 게 틀림없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 다른 뜻은 없다. 단지 아내가 없어져 버렸단 사실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요컨대 나는 주변 공기의 압력 같은 것을 조금씩 조절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기간이 나에겐 필요하다. 그럴 동안 당신에게 아내의 옷을 입혀 곁에 두고 싶다. 그러면 아내가 없어졌다는 게 나한테도 실감이 날 테니까. 여자는 입술을 깨물면서 그 기묘한 조건에 대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이야기였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토니 다니자키가 하고 있는 말의 의미가 잘 납득되지 않았다. 부인이 최근에 죽었단 건 알아들었다. 그녀가 많은 옷을 남겨두고 갔다는 것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이 그의 앞에서 그 옷을 입고 일을 해야만 하는지, 그녀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무슨 속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할 일이지, 하지만 이 사람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건 상대방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부인을 잃고 어디가 좀 이상해진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딴 사람에게 해를 입힐 만한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좌우지간 일을 해야만 했다. 요 몇 달간 내내 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달에는 실업보험도 끊긴다. 그렇게 되면 아파트 임대료를 내는 것도 힘들어져, 이렇게 좋은 급료를 주는 직장은 아마도 앞으로 다시는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저로서는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말씀하시는 대로겠죠. 하지만 그 전에 일단 그 옷을 보여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정말 사이즈가 맞는지 어떤지 시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물론이죠." 하고 토니 다니자키는 대답했다. 그리고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방 안에 가득한 옷을 보여주었다. 백화점을 빼곤 그렇게 많은 옷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걸 여자는 그 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것이나 다 척 보기에도 비싸게 주었을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취향도 말할 나위 없었다. 그것은 정말 눈부신 광경이었다. 그녀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의미도 없이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것은 어딘지 성적 고조감과 비슷한 것 같았다. 토니 다니자키는 사이즈를 시험해 보라고 말하고 그녀를 그곳에 남겨두고 나갔다. 여자는 정신을 가다듬고 가까이 있는 옷을 몇 벌인가 시험 삼아 입어 보았다. 구두도 신어 보았다. 옷도 구두도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딱 맞았다. 그녀는 그런 옷을 하나 하나 손에 들고 바라보았다. 손끝으로 쓰다듬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몇 백 벌이나 되는 아름다운 옷들이 그곳에 죽 걸려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물은 주룩 주룩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제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죽은 여자가 남긴 옷을 걸친 채 소리를 죽이며 꾹꾹 울었다. 얼마후 토니 다니자키가 상황을 보러와, 왜 울고 있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수의 예쁜 옷을 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서 아마 혼란스러워졌던 거겠죠, 죄송합니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괜찮으면 내일부터 사무실에 와 줬으면 하는데." 하고 토니 다니자키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일주일치 옷과 신발을 이 중에서 골라 가지고 가요." 여자는 시간을 들여 6일치 옷을 골랐다. 그런 다음 옷에 맞춰 신발을 골랐다. 그리고 그것들을 수트 케이스에 넣었다. 추우면 안되니까 코트도 가지고 가라고 토니 다니자키는 얘기했다. 그녀는 따뜻해 보이는 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골랐다. 코트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가벼운 코트를 들어본 건 난생 처음이었다. 여자가 돌아간 뒤, 토니 다니자키는 옷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아내가 남긴 옷들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째서 저 여자는 옷을 보고 울었던 걸까, 그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옷들이 그에게는 아내가 남기고 간 그림자처럼 보였다. 사이즈 7의 그녀의 그림자가 포개진 듯 줄줄이 열을 지어 행거에 늘어져 있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무한한(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의 샘플들을 얼마간 모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 그림자들은, 예전에는 아내의 몸에 달라붙어 따뜻한 숨결을 받으며 아내와 함께 움직이던 그림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생명의 뿌리를 잃고 일초 일초 말라비틀어져 가는, 볼품 없는 그림자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그저 낡고 바랜 옷일 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는 사이 그는 점점 숨이 막혀왔다. 갖가지 색깔들이 마치 꽃가루처럼 공중을 떠돌며 그의 눈과 귀와 콧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탐욕스러운 프릴이며 단추, 어깨 장식, 장식용 주머니, 레이스며 벨트가 묘하게 방 안 공기를 희박하게 만들었다. 넉넉히 갖춰 놓은 방충제 냄새가 무수한 작은 날벌레들처럼 무음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젠 그런 옷들을 증오하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외로움이 어둠 속에서 미적지근한 물처럼 그를 감겨들었다. '이건 이미 끝나 버린 일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더 이상 뭘하든, 완전히 끝나 버린 거다.' 그는 여자의 집에 전화를 걸어 이번 일은 잊어 버려 달라고 했다. 미안하지만 할 일은 더 이상 없다고 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거죠?" 그녀는 깜짝 놀라 물었다. 안 됐지만 사정이 달라졌다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가지고 간 신발과 양복은 전부 당신에게 주겠다, 수트 케이스도 주겠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잊어 버려 달라, 이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 달라고 토니 다니자키는 말했다. 여자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더 이상 입씨름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알았다고 하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 후 한동안 그녀는 토니 다니자키에 대해 화가 났다. 하지만 얼마후에는 결국 일이 이렇게 된게 잘된 일 아닌가 싶었다. 애당초 처음부터 뭔가 부자연스러운 이야기였던 것이다. '일이 없어진 거야 좀 그렇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녀는 토니 다니자키의 집에서 가져 온 몇 벌의 옷을 한 벌 한 벌 곱게 펼쳐 옷장에 걸고, 구두를 신발장에 넣었다. 그 새 식구들에 비하면 전부터 거기에 있던 자기 옷이며 신발들은 어이가 없을 만큼 죄다 초라해 보였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소재로 만들어진 다른 종류의 물질인 것 같았다. 그녀는 면접을 위해 입고 갔던 자기 옷을 행거에 걸고 블루 진과 트레이너 셔츠로 갈아입은 뒤 마룻바닥에 앉아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토니 다니자키 집 옷방에 있던 그 산더미 같은 옷을 떠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수 없이 많은 아름다운 옷. 휴우, 그 옷방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 방보다도 넓더라. 그 정도로 옷을 모으려면 틀림 없이 엄청난 돈과 시간이 들었을 거야. 그치만 그 사람은 이미 죽어 버렸지. 방 한 가득 사이즈 7짜리 옷을 남겨 두고 말야. 그렇게 멋진 옷을 잔뜩 남기고 죽어 버린다는 건 어떤 기분이 드는 걸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가 쪼들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만날 때마다 그녀가 새 옷을 입고 나오는 걸 보고 몹시 놀랐다. 그 어느 것이나 다 세련되고 값비싼 브랜드의 옷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옷을 대체 어디서 어떻게 얻은 거니?" 친구들은 물었다. "말할 수 없어, 약속했으니까." 그녀는 대답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설사 얘기를 해봤자 어차피 니들은 믿지도 않을 걸 뭐." 토니 다니자키는 중고 옷 중개상을 불러 아내가 남기고 간 옷을 전부 인계했다. 별 돈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로서는 한 푼 안 받아도 좋으니까 한 벌도 남기지 않고 가져가길 바랬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자신의 눈에 띄지 않을 먼 곳으로. 이따금 그는 그 방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 방 바닥에 주저앉아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죽은 자의 그림자, 그 그림자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는 예전에 그곳에 있던 것들을 기억해 낼 수 없게 됐다. 그 색깔이며 냄새에 대한 기억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예전에 품었던 그 신선한 감정조차도 기억의 영역을 뒷걸음치듯이 물러가고 있었다. 기억은 바람에 흔들리는 안개처럼 서서히 그 모습을 바꾸고, 그 모습을 바꿀 적마다 희미해져 갔다. 그것은 그림자의 그림자, 또 그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었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예전에 존재했던 것이 남겨 놓은 결락감뿐이었다. 때로는 아내의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예전 그 방 안에 아내가 남겨놓은 옷을 보고 눈물을 흘리던 낮선 여자를 떠올렸다. 그 여자의 특징 없는 얼굴이며 낡은 에나멜 구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조용한 흐느낌이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그런 걸 떠올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자꾸만 되살아났다. 온갖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뒤에도 이상하게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그 여자만은 잊혀지질 않았다. 아내가 죽은 지 2년 뒤에 다니자키 세이사부로가 간암으로 죽었다. 암치고는 고통도 적었고, 입원 기간도 짧았다. 거의 자는 듯이 죽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최후까지 운이 좋았다. 약간의 현금과 증권을 빼고는 토니 세이사부로가 남긴 재산이라 할만한 것도 없었다. 남긴 것이라곤 유품인 악기와 엄청나게 모은 재즈 레코드정도였다. 그 레코드들을 토니 다니자키는 택배 회사의 골판지 상자에 넣은 채로 텅빈 옷방 바닥에 쌓아 두었다. 레코드에서 곰팡이 냄새가 났으므로 환기를 위해 정기적으로 창문을 열어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때를 제외하고 그가 그 방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일단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하지만 집안에 그 레코드 더미를 떠안고 있는 것이 그는 점차 괴로워졌다. 그 곳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때때로 끔찍하게 숨이 막혀왔다. 한밤중에 눈을 뜨고나면 그대로 잠이 오지 않는 일도 있었다.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응분의 무게를 가지고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중고 레코드상을 불러 값을 매기게 했다. 아주 오래 전에 폐반된 귀중한 레코드가 많았던 탓으로 상당한 가격이 매겨졌다. 소형 자동차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지만, 그래봐야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레코드 더미가 말끔히 사라져 버리자, 토니 다니자키는 비로소 진짜 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