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상책 사기에 대하여 어린 시절 외상으로 책을 살 수 있었던 것만큼 사치스런 일도 없었다고 나는 생각 한다. 우리 가족은 아주 평범한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가 책을 좋아해서 내가 동네 책방에서 갖고 싶은 책을 외상으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물론 만화나 주간지는 안되고, 올바른 책만이다. 그러나 어쨌든 외상으로 책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신나는 일이었고, 덕분에 남 못지 않은 독서 소년이 되었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하면 모두들 한결같이 놀라는데, 내가 자란 곳에서는 아이가 외상으로 책을 사는 일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당시 내 친구 중에도 몇 명인가 그런 아이가 있어, 책방 계산대에서 '저요, 미도리가오카에 사는 ○○인데요, 외상으로 해 주세요.' 라고 얘기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 그러나 그런 특권을 부여받은 아이가 모두 독서광이 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으니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하지요? 옛날 얘기를 계속하자면 당시(1960년대 전반기) 우리 집에서는 가와데쇼보(河出書房)에서 출간하는 <세계문학전집>과 중앙공론사에서 나오는 <세계의 역사>를 매달 책방으로 배달되도록 주문하여, 나는 그것을 한권 한권 읽으며 십대를 보냈다. 덕분에 나의 독서 범위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외국 문학 일색이다. 소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는데, 최초의 인연이라든가 환경에 의해 사람의 취향은 대개 결정되고 마는 모양이다. 만약 그 당시 우리 집에서 주문했던 책이 <일본문학전집>과 <일본의 역사>이고, 최초로 읽은 책이 <파계>*였다면 나는 지금쯤 탐욕스런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란 요령부득이다. 어른이 되고서는 외상으로 책을 산 적이 없다. 마음 먹으면 크레디트 카드로 살 수도 있지만, 웬지 내키지 않아 현금으로 지불한다. 역시 'XX동에 사는 무라카미인데요, 외상으로 해 주세요.' 하고 스무스하게 말이 나오지 않으면 기분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 * 파계(破戒) : 1906년 자연주의 소설가 시마자키 토송(島崎藤村)이 발표한 장편 소설로 일본 자연주의 문학 운동의 기점을 이룬 작품이다. - 사인회 소감 새로운 책이 나오면 예외없이 책방으로부터 사인회를 하자는 제의가 들어오는데, 나는 이 사인회라는 걸 지금까지 한번도 해본 일이 없다. 사인하기를 딱히 싫어하는 까닭은 없지만, 좌우지간 귀찮다는 것과 부끄럽다는 명분으로 사인회만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이 하는 사인회 현장을 들여다보는 것은 싫지 않아서,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며 '제법 좋은 구두를 신고 있군.' 이라든가 '글자 가지고 되게 멋부리고 있군.' 이라든가 '사진보다 훨씬 늙었잖아.' 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거꾸로 말하면,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절대로 사인회를 하지 않는다. 사인회란 존재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그런건 결코 아니다. 사인회를 하면서 사인을 청하는 독자가 안 오는 것만큼 거북살스러운 일도 없다. 팬이 기노쿠니야(紀伊國屋) 서점 둘레를 일곱 바퀴쯤 에워싸고 사인을 기다리는 정도라면 문제는 다르지만, 그렇게 쉽사리 일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무라카미 류(村上龍)* 씨조차도 '저 말이지, 그게 한 동안 끊어질 때가 있거든.' 하는 정도니까, 하물며 다른 작가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랴. 내가 시부야에 있는 세이부 백화점 서적 매장에서 목격한 사인회를 예로 들자면, 이십 분동안 한 명의 독자도 오지 않는 모 작가가 있었다. 그 작가의 건너편에서는 다케미야 케이코(竹宮惠子)*의 사인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 쪽은 밀치고 떠밀리고 야단법석이다. 얼마 안 있어 모 작가 쪽도 따분해진 듯 다케미야 케이코 쪽을 들여다보느라 기웃기웃거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불쌍했다. 이런 일만큼은 절대로 당하고 싶지 않다고 절실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인이 들어 있는 책 얘기인데, 가령 헌책방에 내 사인이 들어 있는 책을 팔러 가면 가격을 쳐 주는가 하면, 그런 일은 결코 없다. 헌책방 아저씨에게 들은 얘기로는 사인이 들어 있어 비싸지는 책은 기껏해야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카이코 켄(開高健)* 세대까지로, 그 다음 젊은 세대 작가의 서명 따위 낙서나 다름없다고 한다. 낙서라니 그 또한 섬뜩하다. ------------------------------------------------------------------------ * 무라카미 류 : 소설가. 우리에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어필했던 작가이다. * 다케미야 케이코 : 만화가. * 엔도 슈사쿠 : 소설가이자 예술원 회원. 그의 작품은 <침묵>을 비롯, 많이 소개되어 있다. * 카이코 켄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