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 그녀의 작은 개(1) by Murakami Haruki 1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비는 벌써 사흘째 계속 내리고 있다. 단조롭고 개성이 없고 참을성이 많은 비다. 비는 내가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동시에 오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잠을 깼을 때에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밤에 잘 동안에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런 되풀이의 나날이 사흘 동안 계속 되었다. 비는 단 한번도 그치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는 비는 몇 번인가 그쳤는지 모른다. 그러나 설령 비가 그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잠이 들었거나 눈을 잠시 뗐거나 했을 사이의 일이었다. 내가 바깥으로 눈길을 두는 한, 비는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뜨면 항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비라고 하는 것이 순수하게 개인적 체험이 된다. 즉 비를 중심으로 의식이 회전함과 동시에 의식을 중심으로 해서 비가 회전한다 -대단히 막연한 표현이지만- 그런 때가 있다. 그럴때, 내 머리는 지독히 혼란스러워진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비가 어느 쪽 비인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지나치게 개인적이다. 결국, 비는 단지 비일 뿐인 것이다. 나흘째 아침, 나는 수염을 깎고, 머리를 빗고, 엘리베이터로 4층에 있는 식당에 올라갔다. 밤늦게까지 혼자서 위스키를 마셨기때문에 위는 까끌까끌하였고, 아침밥 따윈 먹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아침용 메뉴를 맨 위에서부터 맨 아래까지 다섯번정도 보고 나서, 단념하고 커피와 플레인 오믈렛을 주문했다. 그리고 음식이 올 때까지 비를 바라보면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담배는 맛이 전혀 없었다. 아마 위스키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6월의 금요일 아침이고, 식당은 텅 비어서 인기척이 없었다. 아니, 인기척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테이블이 스물네 개하고 그랜드 피아노, 개인풀장만한 크기의 유화, 그리고 손님은 나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주문은 커피와 오믈렛뿐. 하얀 상의를 입은 두 사람의 웨이터는 뭐를 뚜렷이 한다고할 것도 없이 멍하니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맛이 없는 오믈렛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신문을 읽었다. 신문은 전부해서 이십사 페이지지만, 자세히 읽어 보고 싶은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 시험삼아 이십사 페이지부터 거꾸로 페이지를 들춰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신문을 접어서 테이블 위에 놓고, 커피를 마셨다. 창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다른때 같으면 해안선 수백 미터 앞에 작은 초록색 섬이 보일 터였지만,오늘 아침은 그 윤곽 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가 회색빛 하늘과 어두운 바다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었다. 빗속에 모든 것이 흐릿하게 퍼져 보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퍼져 보이는 것은 내가 안경을 쓰지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눈을 감고 눈꺼풀 위로 안구를 눌렀다. 오른쪽 눈이 아주 피곤했다. 한참 뒤에 눈을 떴을 때에도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초록색 섬은 비 뒤에 감춰져 있었다. 내가 커피포트에서 두잔째 커피를 잔에 따르고 있을 때, 젊은 여자 한 사람이, 식당에 들어왔다. 하얀블라우스에 어깨에는 파란 색의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무릎까지 오는 쌈박한 감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걸으면 .똑.똑. 하는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고급 하이힐이 고급 나무마루에 부딪치는 소리다. 그녀의 출현으로, 호텔 식당은 겨우 호텔 식당다워졌다. 웨이터들도 조금 마음이 놓인 듯보였다. 나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문가에 서서 식당을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순간 주저했다. 그도 그럴것이다. 리조트 호텔의 비가 오는 금요일이라 해도, 아침 식사 시간에 손님이 하나뿐이라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너무 쓸쓸하다. 나이가 많은 쪽 웨이터가 틈을 두지 않고 그녀를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내 테이블의 저쪽이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간단히 메뉴를 점검하고, 그레이프 프루츠 쥬스와 롤 빵과 베이컨 에그와 커피를 주문했다. 고르는데에 십오 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베이컨은 바싹 구워 주세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어딘가 사람을 부리는 일에 익숙 한 말투였다. 그런 말투라는 게 있는 것이다. 그녀는 주문을 마치자 테이블 위에 볼을 괴고, 나와 비를 바라보았다. 나와 그녀는 마주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커피포트 손잡이 너머로 눈에 띄지 않게 그녀를 관찰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정.말.로 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의 저쪽 편인지 비의 이쪽 편인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나는 사흘간이나 쭉 비를 보아 왔기 때문에, 비를 보는 방법에 대해서는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비를 정말로 보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별정도는 할 수 있다. 그녀는 아침 치고는 꽤 잘 다듬어진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머리칼은 길고 부드럽고, 귀 부근부터 아주 약간 웨이브가 있었다. 그리고 가끔, 아마 한가운데서 가른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언제나 오른손 가운뎃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언제나 손바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잠시 바라본다. 아마 버릇인가보다. 가운뎃 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이 조금 사이가 벌어진 채 모아져 있고, 약지와 새끼 손가락이 살짝 구부러져 있다. 어느 편인가 하면 마른 편이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다. 미인이라고 못할 것도 없지만, 입술양 끝이 독특한 각도로 휘어있는 점하고 눈두덩이 두꺼운 점 - 완고한 편견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 이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질 부분일 것이다. 내 취향으로 말한다면 그다지 나쁜 인상은 아니다. 옷 취미도 좋았고, 몸놀림도 상큼했다. 무엇보다도 괜찮았던 것은 비 오는 금요일에 리조트 호텔에서 혼자 아침 식사를 하는 젊은 여자가 발산하기 쉬운 그 독특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점이었다. 그녀는 보통의 커피를 마시고, 극히 보통으로 롤 빵에 버터를 바르고, 극히 보통으로 베이컨 에그를 입으로 가져 갔다. 그다지 재미도 없지만, 별로 지루해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두 잔째 커피를 마시고 나서 냅킨을 접어서 테이블 위에 놓고, 웨이터를 불러서 계산서에 사인을 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비 같습니다." 하고 웨이터가 말했다. 그는 나를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삼 일 동안이나 비에 갇혀 있는 숙박객을 보면 누구라도 동정하겠지. "그렇군요." 라고 내가 말했다. 내가 신문을 겨드랑이에 끼고 의자에서 일어섰을 때도 여자는 커피잔을 입술에 댄 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나 같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매년 이 호텔을 찾는다. 내가 묵는 것은 대개 숙박 요금이 싸지는 오픈 시즌이다. 여름이나 연말 연시와 같은 하이시즌 요금은 나의 수입으로 본다면 너무 사치스러웠고, 게다가 그때는 지하철역처럼 복잡하다. 4월이나 10월 같으면 두말 할 게 없다. 요금은 사십 퍼센트 정도 싸고, 공기는 맑고, 해안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없고, 매일 계속 먹어도 싫증 나지 않을 만큼 맛있고 신선한 굴 요리를 먹을 수가 있다. 오르되브르 두 종류, 수프, 메인 디시가 두 종류, 몽땅 굴이다. 물론 공기와 굴 요리 외에도 내가 이 호텔이 마음에 드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우선 방이 넓다. 천장이 높고, 창이 크고, 침대가 넓고, 당구대 만큼 큰 책상도 있다. 모든 것이 넉넉하다. 요컨대 장기 숙박객이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평화스러운 시대에 그러한 사람들의 요구에 응해서 세워진 옛날식 리조트 호텔인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유한 계급 같은 개념 그 자체가 연기처럼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뒤에도, 호텔만은 변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온 것이었다. 로비의 대리석 기둥, 계단참의 스테인드 글라스, 식당의 샹들리에, 마모된 은식기, 거대한 기둥시계, 마호가니의 체스트, 핸들을 눌러서 여닫는 유리창, 목욕탕 타일의 모자이크....... 나는 그러한 것들을 좋아했다. 이제 몇 년 인가 지나면 -아마도 십 년도 안 갈 것이다.- 그것들은 전부 사라져 버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건물 그 자체의 수명도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덜덜 거렸고, 겨울철의 다이닝 룸은 마치 냉장고처럼 추웠다. 개축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누구도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다만 그 개축 시기가 조금이라도 연기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개축한 새 호텔 방이 현재의 사 미터 이십센티미터의 천장 높이를 유지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대체 누가 사 미터 이십센티미터나 되는 높이의 천장을 원하겠는가? 나는 자주 걸 프렌드를 데리고 이 호텔에 왔다. .몇.명.인.가. 의 걸 프렌드다. 우리는 여기서 굴 요리를 먹고, 해안을 산책하고, 사 미터 이십 센티미터 되는 천장 아래서 섹스를 하고, 널찍한 침대 위에서 잤다. 내인생 그 자체가 럭키한지 어떤지는 별개의 문제로 하더라도, 이 호텔에 관한 한, 나는 럭키했다. 이 호텔 지붕 아래있는 한 우리의 관계도 -나와 그녀들의 관계는- 잘돼 나갔다. 일도 잘 됐다. 운은 내 편에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멈추는 일 없이 흘렀다. 운이 바뀐 것은 얼마 전이다. 아니, 운이 바뀐 것은 훨씬 전의 일이고, 단지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운이 바뀌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우선 걸 프렌드와 싸웠다. 다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경 렌즈를 깨버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주일 전에 나는 호텔에 전화를 걸고, 더블 침대를 오 일간 예약했다. 처음 이틀 동안 일을 마치고, 나머지 삼 일을 걸 프렌드와 둘이 느긋하게 지낼 생각이었다.그러나 여행을 떠나기 삼 일 전에 아까 말했듯이 나와 그녀는 약간 싸웠다. 대부분의 싸움이 그렇듯이 발단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우리는 어딘가의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토요일 밤이었고, 가게는 혼잡했다. 우리는 둘 다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우리가 간 영화관은 만원이었고, 게다가 영화는 평판만큼 재미가 없었다. 공기는 굉장히 탁했다. 내 쪽은 일의 연락이 잘 되지 않았고 그녀는 생리 기간의 삼 일째 였다. 여러가지가 겹쳐 있었다. 우리 테이블 옆에는 이십대 중반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둘다 굉장히 취해 있었다. 여자가 갑자기 일어서려고 하면서 내 걸 프렌드의 하얀 스커트에 칸팔리 소다 글라스 한 잔 분을 몽땅 쏟았다. 여자가 사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따지니까, 동반한 남자가 나서서 말씨름이 됐다. 상대 남자는 체격으로는 나보다 나았지만, 나는 술이 안 취했었다. 막상막하였다. 가게 안의 손님들이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바텐더가 와서, 싸움을 하려면 계산을 하고 밖에 나가서 해 달라고 했다. 우리 넷은 셈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자, 모두가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어졌다. 여자가 사과하고, 남자가 클리닝 값과 택시값을 냈다. 나는 택시를 잡아서, 걸 프렌드를 그녀의 아파트까지 바래다 주었다. 아파트에 도착하자 그녀는 스커트를 벗어, 화장실에서 빨았다.그 동안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서, TV스포츠 뉴스를 보면서 마셨다. 위스키를 마시고 싶었지만, 위스키가 없었다. 그녀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 위에 쿠키 깡통이 있어서, 나는 몇 개인가 집어 먹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그녀는 목이 마르다고 했다. 나는 또 하나의 맥주를 따서, 둘이 마셨다. '왜 아직까지 옷을 입고있어,' 하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상의를 벗고, 넥타이를 풀고, 양말을 벗었다. 스포츠 뉴스가 끝나자, 나는 채널을 딸깍딸깍 돌려 영화 프로를 찾았다. 영화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렐리아의 동물 다큐멘터리 프로를 켜 두었다. '이런 식으로 지내는 것은 싫어,'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일주일에 한 번 데이트하고 섹스, 또 일주일이 지나면, 또 데이트와 섹스.... 언제까지 이렇게 해 나갈거야? 그녀는 울었다. 나는 위로하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다음날 점심 시간에 사무실로 전화를 해 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밤에 아파트에 전화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같았다. 그리고 나는 단념하고 혼자 여행에 나섰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커튼도 시트도 소파도 벽지도, 모든 것이 축축했다.에어 컨디셔너의 조정 다이얼이 잘못 되어서, 스위치를 켜면 너무 추워졌고, 끄면 방은 습기로 꽉 찼다. 할 수 없이 창문을 반쯤 열어 놓고 에어 컨디셔너를 켜보았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담배를 피웠다.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질 않는다. 여기에 오고 난 후, 한 줄도 문장을 쓰지 못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추리 소설을 읽다가, TV를 보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했다. 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나는 호텔방에서 그녀 아파트로 몇 번인가 전화를 해 보았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전화벨 소리만이 언제까지고 계속 울렸다. 그녀는 혼자서 어딘가로 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수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으면, 주위는 언제나 .조.용.했다. 천장이 높은 덕분에, 침묵은 공기 기둥처럼 느껴졌다. 그날 오후, 나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본 그 젊은 여자를 도서실에서 다시만났다. 도서실은 일층에 있는 로비의 훨씬 안쪽에 있다. 긴 복도를 따라가서, 계단을 몇개인가 올라가면, 건너가는 복도가 붙은 양옥으로 만들어진 작은 별채로 나서게 된다. 위에서 보면 왼쪽이 팔각형의 꼭 반모양, 오른쪽이 정방형의 꼭 반모양인 약간 별난 구조의 건물이다. 옛날에는 시간이 남아도는 손님들이 제법 유용하게 이용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이용하는 손님따위는 거의 없다. 장서는 숫자상으로는 그런대로 꽤 되었지만,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면 손에 들어 보려는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른쪽 정방형 부분에 서가가 늘어서 있고, 왼쪽편 팔각형 부분에 책상과 소파세트가 놓여 있다. 테이블 위의 화병에는 눈에 익지 않은 이 지역의 꽃이 꽂혀 있었다. 방안에는 먼지 하나 없다. 나는 삼십분 걸려서, 곰팡이 냄새가나는 서가에서 아주 옛날에 읽은 적이 있는 헨리 라이더 해거드의 모험 소설을 찾아냈다. 낡은 영문 하드 북으로, 뒤에는 기증자(이겠지) 영국인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책에는 군데 군데 삽화가 들어 있었다. 내가 전에 읽은판의 삽화하고는 상당히 느낌이 다른것 같았다. 나는 책을 들고 밖으로 튀어나온 창의 움푹한 곳에 걸터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페이지를 뒤적였다. 고맙게도 이야기 줄거리의 대부분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어떻게든 하루나 이틀 분량의 지루함은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해서 이십분인가 삼십 분 지났을 때, 그녀가 도서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안에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는지,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주저했지만, 한 호흡 두고 나서 가볍게 인사했다. 그녀도 인사를 했다. 그녀는 아침 식사 때하고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책을 찾고 있는 동안, 나는 잠자코 책을 계속 읽었다. 그녀는 아침과 똑같이 똑똑 하고 기분 좋은 구두 소리를 울리면서 서가에서 서가로 걸어 다녔다. 침묵이 한참 있고, 그리고 나서 똑똑 하는 구두 소리가 계속된다. 서가 뒤쪽이어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마음에 드는 책을 찾지 못하는 것은 발걸음 소리로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 도서실에는 젊은 여자아이가 흥미를 가질 만한 책 따윈 한 권도 없는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체념한 듯이 빈 손인 채 서가 줄을 떠나,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구두 소리가 내 앞에서 멈추자, 기품 있는 오데코롱 향내가 났다. "담배를 빌릴 수 있을까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가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두세 번 흔들고 나서 상대편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가 한 개비 빼서 입에 물었을때,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그녀는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연기를 빨아, 천천히 토해 내고, 그리고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가까이서 보니까, 그녀는 처음 인상보다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였다. 항상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안경을 벗으면, 대개의 여자가 실제보다 젊게 보인다. 나는 책장을 덮고, 손가락으로 눈을 문댔다. 그리고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으로 안경 다리를 말아 올리려고 했다가, 안경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안경이 없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꽤 무료해지는 법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란 거의 의미없는 사소한 동작의 축적으로 성립되어 있다. 그녀는 가끔 담배를 피우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침묵의 무게를 견디어 내지 못할 만큼 그녀는 오래 잠자코 있었다. 처음에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고 말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는 동안에 그녀한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내가 입을 열었다. "뭐 재미있는 책 있었습니까?" "전혀 없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문 채 미소를 지었다. 입술 양 끝이 아주 약간 위로 올라갔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책들뿐이니, 도대체 언제 적 책일까?" 나는 웃었다. "옛날 통속 소설이 많습니다. 세계 대전 전에서 1940년, 50년 경의 것이죠." "누구 읽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읽지 않겠죠. 삼십 년이나 사십 년 지나고 나서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 같은 것은 백 권에 하나 정도니까요." "왜 새 책을 갖추지 않을까요?" "아무도 이용하지 않으니까요. 지금은 모두 로비에 있는 잡지를 읽거나, TV게임을 하거나, TV를 보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책을 한 권 다 읽을 만큼 오랫동안 묵을 손님은 이제는 별로 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네.."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까가이에 있던 의자를 손으로 잡아당겨, 앉아 다리를 꼬았다. "당신은 그런 시대를 좋아해요? 모든 것이 좀더 느긋하고 사물이 좀더 단순했던.... 그런 시대." "아뇨." 라고 나는 말했다. "특별히 그런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 시대에 태어 났더라면, 그때는 또 그때 대로 화를 냈으리라 생각합니다. 대단한 뜻은 없죠." "틀림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좋아하는군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또 잠자코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어쨌든."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읽을 책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좀 문제네. 과거의 옅은 빛도 좋지만, 비에 갇혀서 TV도 보고 싫고 시간이 남아돌아 가는 손님도 조금은 생각해 주어야 되지 않을까요?" "혼자세요?" "네, 혼자." 라고 그녀는 말하고 자기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여행할 때는 항상 혼자예요. 누군가하고 함께 여행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당신은?" "그건 그렇죠." 라고 나는 말했다. 설마 걸 프렌드가 약속을 어겼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추리 소설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몇 권인가 갖고 있는데요." 라고 나는 말했다. "새로운 거니까 마음에 드실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읽으시겠다면은 빌려 드리지요." "고마워요. 하지만 내일 오후에는 여기를 출발할 생각이니까, 아마 다 읽지 못하지 않을까요." "상관없습니다. 드리지요. 어짜피 문고본이고, 짐이 되니까 여기에 두고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미소짓고, 그리고 손바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항상 생각하지만, 물건을 받는 데 익숙하다는 것도 위대한 재능의 하나다. 내가 책을 가지러 갈 동안 커피라도 마시고 있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도서실을 나와 로비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심심한 듯한 웨이터를 붙잡고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천장에는 거대한 선풍기가 달려 있어서, 그것이 방안의 공기를 천천히 휘젓고 있었다. 돌아 보았댔자 별 수 없는 습습한 공기가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왔다 할뿐이다. 커피가 올 동안 나는 엘레베이터로 삼 층에 올라가, 방에서 두 권의책을 들고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곁에는 길이 잘 든 가죽 슈트 케이스가 세 개 늘어서 있었다. 새로운 숙박객이 온 것 같았다. 슈트 케이스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늙은 세 마리의 개처럼 보였다. 내가 자리에 돌아오자, 웨이터가 납작한 커피잔에 커피를 부어 주었다. 하얀 잔 거품이 표면을 덮고, 그리고 사라졌다. 나는 테이블 너머로 그녀에게 책을 건냈다. 그녀는 책을 받아들고, 타이틀을 본 후,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적어도 그런 형태로 입술이 움직였다. 그 두 권의 책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는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한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책을 겹쳐 놓고 커피를 한 입 마셨다. 그리고 다시 컵을 아래에 놓고, 그래뉼당을 가볍게 한 스푼 넣어서 커피잔을 젓고, 크림을 컵 가장자리로부터 천천히 부었다. 크림의 하얀 선이 깨끗한 소용돌이를 그렸다. 이윽고 그 선은 뒤섞여, 하얀 엷은 막을 이루었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고 그 막을 마셨다. 손가락은 가늘고, 매끄러웠다. 그녀는 손잡이를 가볍게 잡듯이 컵을 지탱하고 있었다. 새끼 손가락만이 똑바로 공중으로 뻗어 있었다. 반지도, 반지 자국도 없었다. 나와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잠자코 커피를 마셨다. 열어 젖혀 둔 창에서 비 냄새가 났다. 비에는 소리가 없었다. 바람도 없었다.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유리창 밖에 떨어지는 빗소리에도 소리는 없었다. 비 냄새만이 방안으로 살그머니 스며 들어왔다. 창 밖에 늘어선 수국 꽃이 마치 작은 동물처럼 가지런히 들어서서 6월의 비를 맞고 있었다. "여기에 오래 계세요?"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글쎄요. 닷새 정도." 라고 내가 말했다. 그녀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했다.특별히 감상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동경에서 오셨어요?" "그렇습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당신은?" 여자는 웃었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 이가 보였다. "동경이 아니예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나도 웃었다. 그리고 남은 커피를 마셨다. 얼른 커피를 마시고 컵을 내려놓고, 방긋 웃고 이야기를 끝내고, 커피 값을 치르고 방에 올라가 버리는 것이 가장 제대로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내 머리 안 어디에선가, 무엇인가가 껄끄러웠다. 가끔 그런 때가 있다. 잘 설명할 수는 없다. 육감 같은 것이다. 아니, 육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분명 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희미한 그 .무.엇.인가다. 이럴 때, 나는 내 쪽에서는 무엇 하나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정하고 있다. 상황에 몸을 맡기고, 일이 돼가는 것을 지켜 본다. 물론 그것이 .예.상.을.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흔히 말하듯이, 아주 사소한 일이 나중에 터무니 없이 큰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일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마음을 정하고 커피를 다 마신 후, 깊이 소파 등에 기대어 다리를 꼬았다. 참기 시합과 같은 침묵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었다.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것이 아니고, 그녀의 조금 앞에 있는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덕분에, 오랫동안 한곳에 초첨을 맞추고 있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상대편이 조금 초조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테이블위의 내 담배를 집어서, 호텔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맞춰도 될까요?" 라고 타이밍을 재면서 내가 물었다. "맞추다니, 무엇을?" "당신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디에서 왔다라든가, 무엇을 하고 있다라든가 ..... 그런것." "좋아요." 하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그리고 재떨이 안에 담뱃재를 털었다. "맞춰봐요." 나는 입술 앞에서 깍지를 끼고 눈을 가늘게 뜨고, 정신을 집중하는 척했다. "뭔가 보여요?" 라고 놀리는 듯한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여자의 입 가장자리에 신경질적인 미소가 떠오르고, 그리고 사라졌다. 페이스가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적당한 때를 맞추어 나는 손가락을 풀고, 몸을 똑바로 했다. "당신은 아까, 동경에서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죠." "네."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것은 거짓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쭉 동경에 살고 계셨죠? ... 이십 년 정도인가?" "이십 이 년." 라고 그녀가 말하고, 성냥갑에서 성냥개비를 꺼내, 손을 뻗어 내 앞에 놓았다. "자 당신이 한 점." 그리고 담배를 피운다. "재미있을 것 같네. 계속해 봐요." "그렇게 급하게는 못 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시간이 걸려요. 천천히 합시다." "좋아요." 나는 이십 초 정도 또 정신을 집중 하는 척 했다.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여기에서 봐서.... 서쪽이죠." 그녀는 두번째 성냥개비를 로마 숫자 II의 형태가 되게 늘어놓았다. "괜찮죠?" "훌륭한데요." 그녀는 감탄한 듯이 말했다. "프로예요?" "어떤 뜻에서는 그렇죠. 프로와 같은 것입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분명히 그대로인 것이다. 언어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과 미묘한 인토네이션의 차이를 구별 할 수 있는 귀만 갖고 있다면, 이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 관찰에 관해서라면, 나는 프로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나는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독신이군요." 그녀는 왼쪽 손가락 끝을 잠시 비비고 나서 손을 펼쳤다. "반지군요... 하지만 됐어. 자. 이것으로 석 점." 내 앞에 세 개의 성냥개비가 III의 형태로 늘어섰다. 거기에서 나는 조금 더 간격을 두었다. 상태는 양호하다. 다만 머리가 약하게 아플 뿐이다. .이.짓.을 하고 있으면 항상 머리가 아파온다. 정신을 집중하는 척 하기 때문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정신을 집중하는 척 하는 것은 정말 정신을 집중 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라고 여자가 재촉했다. "피아노는 어릴때부터입니까?" 라고 내가 말했다. "다섯 살 때부터예요." "프로로 하고 있군요?" "콘서트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뭐 프로죠. 반은 레슨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니까..." 네 개째. "어떻게 알았어요?" "프로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녀는 킥킥 웃었다. 나도 웃었다. 하지만 술수를 밝힌다면 아주 간단하다. 프로 피아니스트는 무의식중에 특수하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그 터치를 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록 아침 식사 테이블을 두들기는 것이라 하더라도-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별 정도는 할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옛날에 피아노를 치는 여자아이와 사귀었으니까, 그 정도는 알 수가 있다. "혼자 사시네요?" 라고 내가 말했다. 근거는 없다. 단순한 육감이다. 대충 워밍업이 끝나면, 제법 육감이 움직이게 된다. 그녀는 입술을 장난스럽게 앞으로 내밀고, 그리고 새로운 성냥개비를 꺼내서, 지금까지의 네 개째 위에 옆으로 올려놨다. 비는 어느틈엔가 약해지고 있었다. 오고 있는지 오고 있지 않은지 시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의 비였다. 먼곳에서 자동차 타이어가 자갈을 누르는 소리가 났다. 해안가에서 호텔 현관으로 통하는 언덕길을 차가 올라오는 소리다. 프런트에 대기하고 있었던 보이가 두 사람, 그 소리를 듣고 큰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현관 밖으로 나갔다. 한사람은 큰 까만 우산을 들고 있었다. 이윽고 현관의 넓은 차 대는 곳에 까맣게 칠한 택시가 모습을 나타냈다. 손님은 중년 남녀였다. 남자는 크림색 골프바지위에 갈색 상의를 입고, 챙이 좁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넥타이는 하고 있지 않다. 여자는 풀빛의 매끄러운 옷감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튼튼한 체격으로, 햇볕에 잘 그을어 있었다. 여자는 하이힐도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자쪽이 머리 하나 정도 키가 더 컸다. 한 보이가 택시 트렁크에서 슈트 케이스 두개와 골프 팩을 꺼내고, 다른 하나가 우산을 펴서 손님에게 씌웠다. 남자가 손을 흔들어 우산을 사양했다. 비가 이제는 거의 그친 것 같았다.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자,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꺼번에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여자가 무엇인가 말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례?" 하고 내가 말했다. "지금의 저 두 사람 부부라고 생각해요?" 라고 그녀가 되풀이 했다. 나는 웃었다. "글쎄, 어떨까요. 모르겠는데요. 한꺼번에 여러 사람의 일을 생각할 수는 없으니까요. 조금 더 당신에 대한 것을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나는 뭐라고 할까... 대상으로서 재미있는 걸까?" 나는 등줄기를 펴고, 한숨을 쉬었다. "글쎄요,모든 인간은 똑같이 재미있죠. 이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원칙 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안에 있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 나는 거기에 이을 적당한 단어를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찾아낼 수가 없었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조금 복잡한 설명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잘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계속합시다." 나는 소파에 고쳐 앉고, 입술 앞에서 다시 한 번 깍지를 꼈다. 그녀는 아까하고 같은 자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앞에는 성냥개비가 다섯 개 예쁘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한 후, 육감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도 된다. 아주 작은 힌트면 되는 것이다. "당신은 옛날에 정원이 넓은 집에 사셨댔죠?" 하고 내가 말했다. 이것은 간단했다. 그녀의 차림이나 몸놀림을 보면 양가집에서 자랐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이를 한 사람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서는 상당한 돈이 든다. 소음 문제도 있다. 아파트 단지 같은 데에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정원이 넓은 집에 살았다고 해서 우스울게 없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무엇인가 이상한 반응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얼어붙은 것처럼 나에게 향해졌다. "예, 분명히...." 하고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분명히 정원이 넓은 집에 살고 있었어요." 키 포인트는 .정.원.이라는 것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시험 삼아 조금 더 캐물어 보기로 했다. "정원에 관해서 무엇인가 추억이 있으시죠?" 라고 내가 말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잠자코 자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오랫동안이었지만, 이윽고 얼굴을 들었을때는 그녀는 이미 자기 페이스를 되찾고 있었다. "그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잖아요? 누구나 정원 있는 집에 오래 살다 보면 정원에 대한 추억이 하나 정도는 있게 되죠. 그렇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인정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나는 그대로 아무 소리 안 하고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려, 수국을 바라보았다. 오래 내린 비가 수국을 선명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2편으로 이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