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그래피티(4) 메지로의 기숙사에서 쫓겨난 뒤 네리마(練馬)에 있는 하숙집으로 옮겼다. 와세다 대학의 학생과에서 조사한 것 중 가장 싼 방이다. '삼 조에 4,500엔. 보증금·예의금 없음' 이건 그야말로 진짜 싸다. 보증금·예의금 없음이라니 이곳 빼고는 없을 것이다. 하숙집은 세이부(西武) 신주쿠선 '도립가정(都立家政)'역에서 걸으면 한 십 오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주변은 그림에서 보는 듯한 무우밭이다. 동경에도 이런 곳이 남아 있구나 싶어 정말 경탄스러웠다. 도대체가 '도립가정'이란 역 이름부터가 한심하다. 일단 이름이라도 붙이고 보자는 속셈이 빤히 들여다 보인다. '도립가정' 이라니 한번 들은 것만으로는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무우밭에 드문드문 집이 섞여 있다는 정도의 인상밖에 주지 않는 동네였다. 땅은 검고, 질척하게 물기가 차 있어 겨울이 몹시 추웠다. 여자친구와 순조롭지 못했던 점도 있고 해서, 네리마 시절은 내게는 좀 어두운 시절이었다. 학교에도 거의 가지 않고, 신주쿠에서 올 나이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가부키초(歌舞技町)에 있는 재즈 찻집에 드나들며 음악에 푹 젖어 있었다. 재즈 찻집 중에서는 <빌리지 게이트>라든가 <빌리지 방가드>같은 어두컴컴한 데를 좋아했다. 여자애랑 같이 갈 때는 <다그>라든가 <올드 블라인드 캐츠> 같은 데가 좋았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정말이지 궁상맞은 아저씨 같지만, 재즈가 짜릿짜릿하게 몸으로 파고드는 시절이었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아마도 '연속 사살마(射殺魔)사건'*의 범인 나가야마 노리오도 비슷한 시기에 역시 도립가정에 살면서 <방가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럭저럭 벌써 십 년 가까이 세이부 신주쿠선을 타지 않았는데, 저 가부키초→세이부선→도립가정의 생활은 지금도 내 몸 속에 까끌까글한 느낌으로 아주 리얼하게 남아 있다. 그곳에는 1968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살았다. ---------------------------------------------------------------------- * 연속 사살마 사건 : 1968년 동경, 쿄토, 하코다테, 나고야 등지에서 피스톨로 4명을 연달아 사살한 사건. ⊙ 일본에서는 방이나 집을 빌리는데 전세라는 건 없고 모두 월세이다. 그런데 빌릴 집을 계약하기 위해서는 시키킹(數金)=보증금(집을 나올 때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돈), 레이킹(禮金)=예의금(집을 빌려 줘서 고맙다는 조로 집주인에게 주는 돈), 거기에다 복덕방비가 월세를 1로 하여 대충 2:2:1의 비율 정도가 필요하다. 더구나 월세가 선불이라 새로이 집을 계약하려면 월세의 6배, 심하면 7배 정도의 몫 돈이 든다. 이사 그래피티(5) 도립가정의 어두운 삼조 방에서 반년을 생활하다, 살아 있다는 게 못 견디게 싫어져서 또 이사를 하기로 했다. 1969년 봄의 일이다. 가구와 짐이라고는 거의 없으니까 이사하기는 실로 간단하다. 이불과 옷가지와 그릇 나부랭이를 자동차 트렁크에 던져 넣고나면, 그것으로 준비 완료다. 인생이란 모름지기 이랬으면 좋겠다. 이번 터전은 미타카에 있는 다세대 주책이다. 닥지닥지 복잡한 곳은 이제 진절머리가 나서, 교외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육조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려서 7,500엔(와 싸다), 2층 모퉁이에 있는 방으로 사방이 전부 빈 들판이어서 참으로 햇빛이 잘 들었다. 역까지 먼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공기가 깨끗하고, 좀 걸으면 아직도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무사시노(武藏野)의 잡목림이 있어, 굉장히 행복했다. 날아갈 듯 기분이 산뜻하여 전당포에서 중고 플롯을 사가지고와 연습을 하고 있었더니, 옆 방에 카마야츠 히로시*와 비슷하게 생긴 기타보이가 '해피맨 같이 해요.' 라기에, 매일 <멤피스 언더 그라운드>만 열심히 불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는 미타카=<멤피스 언더 그라운드>가 되어 버렸다. 그 무렵에 관한 나머지 기억이라고 하면, 브래지어가 하늘을 날았다는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브래지어가 정말 하늘을 날았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바람에 날려 공중을 떠다녔을 뿐이다. 아주 바람이 강한 밤이었는데, 내가 집 근처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무슨 하얀 물체가 하늘 높이 둥실둥실 날고 있어, '아니, 백로인가.' 하고 곰곰 올려다 보니, 그게 브래지어였단 말씀에요. 브래지어가 밤 하늘을 날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아실 테지만, 그게 또 몹시도 희안한 광경입니다. '설마 그런 게 어떻게...' 하는 의아스러움, 공기 역학적인 움직임의 재미가 일체화되어 그 장면 정말 멋있었다. ----------------------------------------------------------------------- * 카마야츠 히로시 : 가수. 이사 그래피티(6) 나는 절대로 일기를 쓰지 않는 인간인데, 미타카 시절에 한해서는 무슨 이유에선가 짧은 일기를 썼다. 뭐 대단한 일기는 아니고, 뭘 먹었다든지, 무슨 영화를 봤다든지, 누구를 만났다든지, 몇 번 했다든지, 그 정도의 일밖에 씌어 있지 않지만, 그래도 뒷날 읽어 보니 제법 재밌다. 1971년 당시를 보니, 석간이 15엔이다. 헤이본(平凡) 펀치는 80엔, 쇠고기 200그램 180엔, 하이라이트 80엔, 콜라 40엔, 대충 지금 물가의 반 정도다. 그 해 1월 3일과 5일에는 눈이 내렸다. 1월 3일에는 10센티미터나 쌓였다. 이 날은 미타카 다이에(大英) 극장에서 야마시타 코사쿠(山下耕作)*의 <승천하는 용>(좋은 영화다)과 아츠미 마리*의 <좋은 거 드리죠>(좋은 제목이다)를 동시 상영으로 보았다. 5일에는 신주쿠의 게이오(京王) 명화관에서 <석양을 향해 달려라>와 <이지라이더>를 보았다. <이지 라이더>는 그것으로 세 번째 관람이다. 1971년이란 해는 대학의 학생 운동이 일단 전성기를 넘어서고, 투쟁이 음습화되어 폭력적인 내부 투쟁으로 치닫기 시작한 아주 복잡하고 암울한 시기였지만*, 이렇게 돌이켜보니 실제로는 매일 여자 친구랑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제법 뻔뻔스럽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요즘 젊은 남자들이 이러니 저러니.' 하고 잘난 척 얘기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다. 인간이란 특별히 대의명분이나 불변의 진리나 정신적 향상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고, 이를테면 깜찍한 여자애랑 데이트나 하면서 맛있는 것 먹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이를 먹어서 되새겨 보면 자신이 몹시도 긴장된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이 드는 법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고, 모두들 바보 같은 생각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이다. 오래된 옛 일기를 읽고 있으려니, 그런 분위기가 삼삼하게 전해져 온다. ---------------------------------------------------------------------- * 야마시타 코사쿠 : 영화 감독. * 아츠미 마리 : 동경태생. 영화 배우. * 1968년과 1969년 전공투의 투쟁이 실패로 끝나자, 학생운동은 전술의 상이함과 주도권 쟁탈전으로 인한 신좌익 당파간의 무장 당파 싸움으로 양상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