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서 지방 사투리에 관하여 나는 관서(關西)에서 태어나 관서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교토(京都)의 스님 자식이고, 어머니는 센바(船場)*의 장삿집 딸이니까, 백 퍼센트 관서 토박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지만 관서 지방 사투리를 쓰며 살아 왔다. 그 이외의 언어는 말하자면 이단이고, 표준어를 구사하는 인간 중에는 쓸 만한 일간이 없다는 몹시 내쇼널리스틱한 교육을 받았다. 투수하면 무라야마(村山), 식사는 슴슴하게, 대학하면 쿄토 대학, 장어 요리하면 장어밥의 세계이다. 그러나 와세다에 들어가게 되어(와세다 대학이 어떤 대학인지도 거의 몰랐다. 그렇게 지저분한 곳인 줄 알았다면 아마 안갔을 거다) 선뜻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동경에 올라 왔는데, 동경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어찌 된 영문인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일주일 사이에 거의 완전하게 표준어─즉 동경 사투리─로 바뀌어 버렸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말은 지금까지 써본 적도 없고, 특별히 바꿔야겠다는 의식도 없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그렇게 바뀌어 버렸다는 걸 문득 깨달은 것이다. 문득 깨닫고 보니 '그런 핑계를 늘어놔봤자, 그거야 알 수 없지.' 하는 꼴이 돼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동경으로 올라온 관서의 친구들로부터 '너 말야, 그 말투, 관서 사투리 잊지 말고 써야 될 거 아니야. 엉터리 같은 말 쓰지 말라구.' 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미 바뀌고 만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언어는 공기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토지에나 그곳만의 공기가 있고, 그 공기에 맞는 언어가 있어, 그것을 거역하기란 웬만해서는 불가능하다. 먼저 액센트가 바뀌고, 그러고는 어휘가 바뀐다. 이 순서가 반대가 되면, 언어는 쉽사리 마스터할 수 없다. 어휘란 이성적인 것이고, 액센트는 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즉 나는 관서로 돌아가면 역시 관서 지방 사투리를 쓴다. 신칸(新幹)선 코베(神戶)역에 내리면 첫 마디가 벌써 관서 사투리로 돌아와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거꾸로 표준어가 입에서 안 나온다. 친구의 견해에 의하면 '너 관서 사투리 어째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인 모양이지만, 지금 막 도착했으니 별 수 없다. 일 주일 정도 있으면 완벽한 관서 사투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내 마누라는 삼 대 째 계속되는 야마노테(山手)선 내족(이라고 한다)*인데, 그녀도 얼마간 관서에 가 있으면 곧 바로 관서 사투리에 물들어서는, '죄송하지만, 여기 가려면 어떻게 가면 되죠?' 를 관서 사투리로 사람들에게 묻곤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가지고 뭐라 얘기할 수 없지만, 곁에서 보고 있으면 놀랍다. 언젠가 함께 이치가와 콘 감독의 <싸락눈>*을 보고 난 다음 액센트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아 한참을 애먹었다. 관서 지방을 무대로 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배우 중에도 사투리 습득에 능란한 사람과 서투른 사람이 있어 제법 흥미롭다. 능란한 사람은 공기처럼 사뿐 인토네이션을 체득하고, 서투른 사람은 지나치게 어휘에 의존함을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천부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싸락눈>은 언어상으로 그럭저럭 합격이고, <도톤보리강>*은 한심했다. 옛날 영화로는 <부부 좋을씨고>*라는 훌륭한 관서 사투리 영화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런 차이는 그 지방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도치기 사람들은 <원뢰(遠雷)>*를 보고, 저런 건 도치기 사투리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데, 나는 왜 그런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외국어를 습득한다는 것도, 대충 이런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암만 영어 회화 공부를 해도, 실제로 외국에 가 보면, 언어란 그런 인위적인 습득과는 상당히 다른 위상으로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번역 같은 것도 하니까 영어를 읽고 이해하는 데는 부자유스럽지 않지만 회화가 서툴러, 작년에 처음으로 미국 여행을 하기까지 거의 한 마디도 영어를 주절거린 일이 없다. 학교의 ESS나 영어 회화 교실 같은 곳에서 모두들 영어로 토론을 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면 한기가 들어─이것은 물론 편견입니다, 죄송 ─도무지 영어 회화를 해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한 일 주일 정도 있으면 익숙해지겠지, 하고 가 봤더니, 거기에는 역시 그곳만의 공기 같은 게 있어 별 다른 불편없이 한 달 반을 지내며, 많은 작가들과 인터뷰까지 했다. 이런 것은 역시 순응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일본에 돌아오면, 또 다시 영어로는 얘기하기 어려워진다. 관서 사투리 얘기로 되돌아가서, 나는 관서 지방에서는 아무래도 소설을 쓰기 힘들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관서에 있으면 결국 관서 사투리로 사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관서 사투리속에는 관서 사투리 특유의 사고 시스템이 있어, 그 시스템 속에 갇히고나면, 동경에서 쓰는 문장과는 전혀 문장의 뉘앙스나 리듬, 발상이 달라지고, 심하면 내가 쓰는 소설의 스타일까지도 싹 바뀌는 것이다. 내가 줄 곧 관서 지방에 살면서 소설을 썼다면, 지금과는 꽤 다른 분위기의 소설을 썼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면 좀 괴롭지만. ---------------------------------------------------------------------- * 센 바 : 오오사카시의 한 지역. * 야마노테선 내족 : 야마노테선 전철은 동경의 중심부를 동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순환선이다. 그 안쪽에서 줄 곧 살았다 함은 동경 토박이를 말한다. * 싸락눈 : 타니자키 쥰이치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 오오사카의 센바가 작품의 무대이다. * 도톤보리강 : 미야모토 테루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 역시 오오사카를 무대로 한 작품. * 부부 좋을씨고 : 1955년작. 도요다시로 감독에 의한 토호 영화사의 영화. 우유부단한 남자 주인공이 강직한 애인의 보호 아래 어리광을 피우며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 원뢰 : 1981년작. 도치기현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택지 개발로 급격히 변화하는 도시 근교 농촌의 희비극을 그린 영화이다. 네기시 기치다로 감독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