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자공 비화 이 연재를 시작한 지도 벌써 팔 개월째다. '마감일이 있는 인생은 빨리 흐른다.' 는 어느 미국 저널리스트의 말이 있는데, 정말 말씀 그대로이다. 아는 척하는 것 같아 죄송스럽지만, 영어로는 마감날짜를 '데드라인'이라고 한다. 데드라인이라는 말에는 이 뜻 외에도 '사선·죄수가 이 선을 넘으면 총살당한다.' 라는 의미가 있어, 이것은 일본어의 '마감' 보다 훨씬 어감이 절실하다. 끔찍하다. 단 마감이란 작가 쪽뿐만 아니라, 상대편 편집자에게도 말 그대로 데드라인이라서, 편집자와 얘기를 하다 보면 이 마감날 얘기가 곧 잘 화제에 오른다. ① 마감날짜에 늦는다 ② 악필이다 ③ 건방지다 이 세 가지는 편집자를 울리는 삼대 요소라 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③에 대해서는 제법 기억거리가 있는데 ①과 ②에 대해서는 대체로 결백하다. 마감날짜는 대개 정확하게 지키고, 글씨는 특출나게 읽기 쉽다. 따라서 마감날짜를 지키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작가나 악필인 작가에 대한 불평 같은 것은 남의 일이니까 웃으며 흘려 들을 수 있고, '응, 그건 좀 심한데.' 하면서 적당히 편집자를 동정하기도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지필(遲筆) 또는 악필이라는 것은 재능이나 인격과는(아마도) 무관한 성향 내지는 경향이니까 소문으로써도 비교적 칼칼하고 밝다. 편집자의 얘기에 의하면 거물급 작가가 되면, 그 중에는 마감날짜 사나흘 전에 전화를 걸어 '아, 자네 이번 호 연재는 좀 쉬어야겠어!' 하는 말만 하고는 뚝 전화를 끊어 버리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 일이 생기면 잡지사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우습다고 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혹 나 같은 작가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즉각 어디 벌판을 질질 끌려나가 총살을 당하고 말 것이다. 오분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지금 한말은 거짓말입니다. 원고,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으니까.' 라고 말한들 두 번 다시 일거리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아도 편집자가 작가의 집에서 반을 지새웠다든가, 원고를 받아 쥐고 자동차를 전속력으로 몰아 데드라인 한 시간 전에 겨우 인쇄소에 던져 넣었다는 류의 얘기는 종종 듣는다. 'XX씨한테는 이제 두손 두발 다 들었다니까.' 하고 편집자는 투덜거리지만, 내가 듣기에는 편집자쪽도 제법 그런 데드라인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이 글로 만약 저자의 모든 작가들이 정확하게 마감 사흘 전에 원고를 완성시키게 된다면 ─그런 일은 혹성이 직렬로 나란히 늘어선 데다 헬리혜성까지 겹치는 정도의 확률로밖에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편집자 나으리들께선 필시 어디 바 같은 데 옹기종기 모여서 '요즘 작가들은 기개가 없다니까. 옛날이 좋았지.' 하며 또 투덜거릴 것이다. 이 얘기는 목을 걸어도 좋을 만큼 명백한 일이다. 작가 중에도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꽤 많아, 내가 막 첫 소설을 써 냈을 무렵, 이 삼일 후로 다가 온 마감날짜를 걱정하고 있으려니 '어이, 이봐. 원고란건 말이야, 마감날이 되면 그때부터 쓰기 시작하는 거라구.' 하며 충고를 해주기도 하였다. 한편 편집부란 반드시 며칠쯤은 날짜를 앞당겨 마감일을 정하는 게 보통이라 그 사람의 일설에도 일리는 있지만, 나는 성격상 도저히 그렇게는 못한다. 마감 사흘 전쯤까지는 원고를 완성하여, 원고용지의 모서리를 톡톡 두드려 가지런하게 맞추어서는 책상 위에다 쌓아 두지 않는 한 웬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리고 쿨 오프 효과라는 것도 있다. 다 쓰자마자 곧장 원고를 넘기면 나중에서야 '아휴, 그런 글 안쓰는게 좋았을텐데.' 라든가, 거꾸로 '하참, 이렇게 썼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일이 가끔씩 있는데, 사흘 쯤 시간여유가 있으면 그런 위험을 피할 수도 있다. 어지간한 베테랑이 아닌 이상 글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게 빗나가고 마는 그런 것이다. 단 사흘의 여유를 둠으로 타인에게 무의미한 폐를 끼치거나, 곤욕을 치르게 하거나 내 쪽이 쓸데없이 창피를 당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다. 그 다음, 마감 시간에 아슬아슬하도록 원고가 늦으면 인쇄소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는 일도 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신문을 만드느라 줄곧 인쇄소를 들락날락했기 때문에 잘 아는데, 인쇄소 아저씨들은 누군가의 원고가 뒤늦게 도착하곤 하면 철야를 해가며 활자를 뽑아 내야만 한다. 참 안됐다. 그런 식자공 집에서는 부인이 식탁에 저녁식사를 차려 놓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행여 국민학생짜리 아들이 '아빠 되게 안 돌아오시네.' 라고 말하기라도 하면, 엄마는 '아빤 말이야,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의 원고가 늦어져서 야근을 하시게 됐데. 그래서 집에 못 돌아오시는 거야.' 라고 설명한다. '흥,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 나쁜 사람이야.' '그래 맞아. 틀림없이 별 볼일도 없는 어중간한 소설을 써서는 세상을 속여 먹고 있을 거야.' '엄마, 난 말이지 어른이 되면 그런 나쁜 자식들 때려 줄거야.' '얘는 원.' 이런 대화를 상상하고 있으면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곧 바로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어쩌면 상상력(이랄까. 망상력이겠죠, 이런 건)이 지나치게 발달한 건지도 모르겠으나, 식자공의 처자들한테까지 미움을 받는 가능성만큼은 일단 배제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