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더호젠 내가 이 책에 수록된 일련의 스케치 비슷한 것을 쓰려고 생각한 것은 몇 년 전 여름이었다. 그 이전까지 나는 이런 종류의 문장을 쓰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만일 그녀가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던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가 소설의 소재로서 성립될 수 있는지, 하고 질문해 오지 않았던들--나는 어쩌면 이 책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성냥을 그어준 건 그녀 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성냥을 긋고 나서, 그 불이 나의 몸에 옮겨 타오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나의 몸에 달려 있는 도화선 중의 어떤 것은 몹시 길이가 길단 말이다. 때로 그것은 너무나 길어서, 나 자신의 행동 규범이나 감정의 평균적 인 수명마저 넘어서고 마는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불이 간신히 몸에 와 닿더라도, 이미 거기에선 아무런 의미도 찾아볼 수 없는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경우, 발화는 어떻게 어떻게 그 제한 시간 안에 수습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나는 이 문장을 쓰기에 이르렀다. 그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 건 아내의 예전 동급생이었다. 그녀와 나의 아내는 학교 시절에는 특별히 친했던 건 아니었는데, 서른이 넘은 후 공교로운 장소에서 딱 마주치고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로 꽤나 친하게 오가게 되었다. 나는 가끔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의 친구만큼 기묘한 존재는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래도 그녀에게는 최초로 만났을 때부터 일종의 호감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녀는 여자치고는 무척 몸집이 큰 편으로, 키나 체격이 나와 거의 같은 정도였다. 직업은 엘렉톤(전자 오르간) 교사였는데, 근무 이외 시간의 태반을 수영이나 테니스, 스키에 할당하고 있었으므로, 근육은 긴장되어 탄탄하고 항상 산뜻하게 그을려 있었다. 각종 스포츠에 대한 그녀의 의욕은 광적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정열적이었다. 휴일이 되면 그녀는 조깅을 마치고 나서 근처의 온수풀에서 한바탕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두 세 시간 테니스를 치고, 그리곤 에어로빅도 했다. 나도 스포츠는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질 면에서나 양 면에서 도저히 그녀를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적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그녀가 갖가지 사물에 대해 병적이었거나 편협했거나 공격적이었거나 했다는 건 아니다. 반대로 그녀는 천성적으로 온순한 성격이어서, 감정적으로 타인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다만 그녀의 육체가, 그리고 그 육체에 따라 정신이, 혜성처럼 끊임 없는 격렬한 운동을 갈구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독신이었다. 물론--다소 덩치가 크긴 하지만 그런대로 미인이라고 할 만했으니까--몇번인가 연애도 했고, 결혼 신청을 받은 적도 있었으며, 그녀 자신도 결혼 할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결혼할 단계가 되면, 거기에 반드시 그 어떤 뜻 밖의 장애가 생겨서, 그 이야기는 그대로 없었던 것이 되고 말기가 일쑤였다. "운이 나쁜거예요." 하고 아내는 말했다. "그렇군." 하고 나도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전적으로 아내의 의견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 분명 인생의 어느 부분은 '운' 이라는 것에 지배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얼룩진 그림자처럼 우리 인생의 지표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만약 거기에 의지라는 것이 존재한다면--그리고 그것이 20킬로미터 를 달리고, 3킬로미터를 헤엄칠 수 있을 만큼의 강한 의지라면--대개의 문제점을 편의적인 사닥다리 같은 물건을 사용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결혼하지 못하는 건, 그렇게 하기를 그녀가 '진심으로.' 바라지 않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요컨대 결혼이라는 것이 그녀의 혜성 같은 에너지 범위 내에 전적으로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녀는 엘렉톤 교사를 계속했으며, 틈만 있으면 스포츠에 열을 올리고, 정기적으로 불운한 연애를 했다. 대학 2학년 때 양친이 이혼한 이래, 그녀는 아파트를 빌려 줄곧 독신 생활을 계속해왔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린 거예요. 반바지 문제가 원인이래요." 하고 어느 날 그녀는 나한테 말해주었다. "반바지?" 나는 깜짝 놀라서 물어 보았다. "우스꽝스런 얘기라구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얘기라서, 다른 사람한테 별로 얘기한 적도 없어요. 당신은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어떤 도움이 되지 않을까 모르겠네요. 듣고 싶어요?" 나는 부디 들려달라고 했다. 비오는 그 일요일 오후에 그녀가 나의 집으로 찾아 왔을 때, 아내는 쇼핑하러 나가고 없었다. 그녀는 약속한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찾아 왔던 것이다. "미안해요. 테니스 강습이 비 때문에 취소되어서 시간이 남았어요. 집에 혼자 있으려니 따분하고 해서, 일찌감치 찾아뵐까 한 건데 방해되는 건 아닌가요?" 나는 별로 방해될 것도 없다고 했다. 나도 일할 생각이 나지 않아서, 고양이를 무릎에 안고 혼자서 멍하게 비디오 영화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그녀를 집에 들이고, 주방에서 커피를 끓여서 냈다. 그리고 둘이서 커피를 마시면서 <조스>의 마지막 20분 가량을 함께 보았다. 하긴 둘이 다 그 영화를 이전에 몇 번이나 보았으므로, 특별히 열심히 감상했던 건 아니었다. 우선은 그저 무엇인가 볼 것이 필요해서 그걸 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끝' 자막이 나오고 나서도 아내는 돌아 오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와 얼마 동안 잡담을 주고 받았다. 우리는 상어 얘기를 하고, 바다 얘기를 하고, 수영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앞서도 말했듯이 그녀에 대해 결코 나쁜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었지만, 그래도 얼굴을 맞대고 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누기에는 우리 사이의 공감대가 부족했다. 요컨대 그녀는 나의 아내의 친구지, 내 친구는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내가 무료해져 차츰 다음 영화라도 볼까, 생각하고 있는 참에, 그녀가 갑자기 양친의 이혼얘기를 시작했다. 어째서 그녀가 두서없이--적어도 나는 수영 얘기와 양친의 이혼 얘기 사이에는 명확한 맥락을 찾아낼 수 없을 것 같다--그러한 화제를 꺼내게 됐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거기엔 그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반바지라는 건 정확한 이름이 아니에요."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레더호젠.....레더호젠이란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독일인들이 잘 입는 반바지 아닌가? 위쪽에 멜빵이 달린 것."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죠. 아버지가 그걸 선물로 사달라고 했대요. 그 레더호젠을 말예요. 우리 아버진 그 시대의 사람치고는 퍽이나 키가 큰 편이어서, 그런 반바지 같은 게 비교적 잘 어울리는 체형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걸 입고 싶어하셨나 봐요. 전 레더호젠은 일본인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뭐 그건 사람 나름이겠지만." 이야기를 정돈하기 위해서,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레더호젠을 선물로 사달라고 부탁했는지 질문했다. "미안해요, 전 언제나 얘기하는 순서가 거꾸로 되버리곤 하죠. 그러니까 이해할 수 없는 데가 있으면 사양말고 질문하세요, 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이모가 그 즈음 독일에 살고 있었는데, 놀러 오지 않겠냐고 어머닐 부추켰대요. 어머닌 독일어는 한마디도 할 수 없고, 외국 여행 경험도 없었지만, 오랫동안 영어 교사를 하고 있었던 탓에 한 번쯤 외국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던가 봐요. 뿐더러 오랫동안 이모와도 만나지 못했고......그래서 아버지한테 한 열흘쯤 휴가를 얻어 둘이서 독일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꺼냈었는데, 아버진 사업 관계로 아무래도 휴가를 낼 수가 없어서, 어머니 혼자서 독일로 가게 됐던 거예요." "그때에 아버님이 어머님께 레더호젠을 선물로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인 가요?" "예, 그래요. 어머니가 선물로 무엇을 갖고 싶냐고 물으니까, 레더호젠이 갖고 싶다고 아버지가 대답했거든요." "옳거니."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무렵 그녀 양친 사이는 비교적 친밀한 편이었다. 적어도 큰소리로 밤중에 언쟁을 하거나, 아버지가 화를 내고 며칠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예전에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었던 시절엔 그런 경우가 몇 번인가 있었던 것이다. "성격도 나쁘지 않겠다, 꼼꼼히 일 처리도 잘하는 분이었겠다, 그런데도 여자 관계에선 비교적 흐리멍텅한 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한순간 그녀의 부친이 이미 돌아가셨나보다 생각했을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그 즈음엔 아버지도 이미 나이가 들었었고, 그런 문제도 없어졌고 해서, 그런대로 의좋게 지낼 것만 같았다구요." 그러나 실제로 만사가 그렇게 잘 되어 가지는 않았다. 그녀의 모친은 당초 예정 같아서는 열흘 동안 독일에서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한달 반으로 연기했고, 가까스로 귀국한 후에도 오사카에 있는 또 다른 여동생 집에 머문 채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 오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되고 말았는지 딸인 그녀로서도 남편인 그녀의 부친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수밖에, 비록 여태껏 몇 번인가의 불화가 있긴 했어도 그녀의 모친은 천성적으로 참을성이 많았고 - 어떤 경우엔 상상력이 좀 부족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참을성이 많았고 -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으며, 딸을 지극히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으며, 제대로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들로서는 짐작할 수조차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나 부친이 오사카의 이모네 집에 몇 번인가 전화를 걸어도 , 모친은 거의 전화를 받지 않아서 그녀에게 진의를 따져 물을 수 조차 없었다. 모친의 진의가 드러난 것은, 그녀가 독일에서 귀국한 지 두 달 가량이 지난 9월 중순의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집에다 전화를 걸어서, 남편을 향해 '이혼 수속에 필요한 거류를 보내니 서명 날인을 하고 돌려보내 주면 좋겠다.' 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느냐.' 고 부친이 물었다. 모친은 즉석에서 '당신에 대해 그 어떤 형태의 애정도 가질 수 없게 됐기 때문.' 이라고 대답했다. 서로간에 다가설 만한 여지가 없겠느냐, 고 부친이 물었더니, 그녀는 전혀 없다, 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고서 두 달인가 세 달 동안 양친 사이에서 전화를 통한 실랑이며, 교섭이며 타진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모친은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부친도 마지막엔 체념하고 이혼을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도 갖가지 경위로 해서 부친 쪽은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으며, 게다가 원래 만사를 쉽게 체념하는 성격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일로 해서 저는 무척 쇼크를 받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다만 단순히 이혼이라는 행위 자체로부터 받은 쇼크는 아니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몇 번인가 두 사람이 이혼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구요, 거기에 대한 정신적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극히 당연한 형태로 두 사람이 이혼 했었더라면, 그토록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거예요. 문제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저마저 버렸다는 거였어요. 그 일로 해서 저는 아주 혼란스러웠고, 깊은 상처를 입었던 거예요. 아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때까지 줄 곧 어머니 편에 서 있었고, 어머니도 저를 신뢰하고 있는 줄로만 믿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도 어머닌 아무 설명다운 설명도 없이 아버지와 함께 저를 버린 거예요. 그런 저로선 어머니의 결정을 더할 수 없이 심한 행동으로 여겨졌고, 그로부터 오랫동안 저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게 됐던 거예요. 저는 어머니한테 몇 번이나 편지를 써서, 모든 것을 확실히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었지만, 어머니는 그 일에 관해선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어요. 저를 만나 보고 싶다는 말조차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모친을 만난 건 그로부터 3년 후의 일이었다. 친척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두 사람은 가까스로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그녀는 대학을 나와 엘렉톤 교사로 있었고, 모친 쪽은 영어 학원의 교사로 재직중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모친은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이제까지 너한테 아무 말도 안한 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얘기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그랬다. 나 자신조차 일이 어떻게 되어 나가는지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단 말이다. 하지만 애당초 말썽은 그 반바지가 원인이었단다." "반바지라뇨?" 하고 그녀는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며 어머니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모친과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은 호기심이 노기를 제쳐 버렸다. 그녀는 모친과 상복 차림인 채 함께 근처 다방에 들어가, 냉차를 마시면서 그 반바지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 반바지, 곧 레더호젠을 파는 가게는, 함부르크에서 전차를 타고 한 시간 가량 걸리는 조그마한 도시에 있었다. 모친의 여동생이 그 가게를 알아보아 주었던 것이다. "독일 사람 모두가 레더호젠을 사려면 그 가게가 제일 좋다고들 해. 제품도 아주 확실하고, 값도 그다지 비싸지 않대." 하고 동생이 말했다. 모친은 혼자서 전차를 타고, 남편에게 줄 선물로 레더호젠을 사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그녀는 열차의 객실에서 독일인 중년 부부와 같이 있게 되어 영어로 잡담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선물을 할 레더호젠을 사기 위해 가요.' 라고 하자, 그 독일인 부부는 '어느 가게를 갈 참인가요?' 하고 물었다. 그녀가 가게 이름을 말하자, 두 사람을 이구동성으로 '그러면 틀림 없어요. 그 가게가 제일.' 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참으로 기분 좋은 초여름의 오후였다. 거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은 시원한 물소리를 들려주고, 냇가의 풀들은 그 초록 잎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동그란 자갈들을 깔아 놓은 낡은 도로가 느슨한 곡선을 그리면서 어디까지나 이어지고, 어디에서나 고양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침 눈에 띈 커피 하우스에 들어가, 거기에서 점심 대신에 치즈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거리의 모습은 아름답고 조용했다. 그녀가 커피를 마시고 나서 고양이와 놀고 있자니까, 커피 하우스의 주인이 오더니, 이제부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레더호젠을 사러 왔다고 말하자, 주인은 메모 용지를 집어들고 와서는 그 가게의 위치를 그려주었다. "정말 고마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혼자서 여행한다는 건 참 멋지구나, 하고 그녀는 동글한 자갈돌을 깔아 놓은 도로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이건 그녀에게 있어선 55년이라는 인생 중 비로소 혼자 해보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혼자서 독일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외로움이나 두려움이나 따분함은 단 한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모든 풍경은 신선하고, 모든 사람들은 친절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들 하나하나가, 오랫동안 쓰여지지 않고 그녀의 육체 속에 잠들어 있던 갖가지 종류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녀가 이제까지 소중하게 부둥켜 안고 살아왔던 가지가지 것들-- 남편이며, 딸이며, 가정 --은 이미 지구의 뒤쪽에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것들에 대해 무엇 하나도 걱정하거나 머리를 썩히거나 할 필요가 없었다. 레더호젠을 파는 가게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쇼윈도도, 화려한 간판도 없는 조그만 낡은 가게였지만,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레더호젠이 주욱 진열되어 있는게 보였다. 그녀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서는 두 노인이 일하고 있었다. 두 노인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면서 포목의 치수도 재고, 노트에 무엇을 써넣기도 했다. 커튼으로 칸막이를 한 가게 안 쪽은 한층 넓은 작업장으로 되어 있는 듯, 그쪽에서는 단조로운 재봉틀 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사모님." 하고 몸집이 큰 노인이 일어서면서 독일어로 말을 걸어왔다. "래더호젠을 사려고요." "사모님께서 입으시려고요?" 하고 노인이 어색한 영어로 물었다. "아뇨, 그렇진 않아요. 일본에 있는 남편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요." "아하!" 하고 노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다면, 바깥 양반은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 말씀이시군요?" 라고 했다. "그렇죠. 물론 .... 그럼요, 일본에 있으니까요."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거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요컨대 저희들은 존재하지 않는 고객에겐 물건을 판매할 수 없다, 그 말씀입니다." 하고 노인은 정중하게 말을 고르면서 말했다. "제 남편은 존재합니다."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바깥 양반은 존재하고 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하고 노인은 당황한 듯 말했다. "영어를 잘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음, 바깥양반이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면, 바깥양반을 위한 레더호젠을 판매할 수 없다, 그 말씀입니다." "어째서요?" 하고 그녀는 혼란스런 머리로 물었다. "가게의 방침이랍니다. 방침. 저희들은 저희 가게를 찾아오신 고객에게, 체형에 맞는 레더호젠을 실제로 입어 보시게 하고, 알맞게 고치고 나서 비로소 판매합니다. 백년도 더 되는 동안, 저희들은 그렇게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방침 덕분에 저희들은 신용을 쌓아 온 것입니다." "전 댁에서 만든 바지를 사기 위해, 반나절이나 걸려 모처럼 함부르크에서 찾아왔단 말예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하고 정말 죄송하다는 듯이 노인은 말했다. "하지만 예외라는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신용이라는 것만큼 얻기가 어렵고, 그리고 무너지기 쉬운 건 없답니다." 그녀는 한숨을 짓고, 얼마 동안 문가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돌파구는 없을까. 하고 머리를 회전시켜 보았다. 그러는 동안 키 큰 노인을 키 작은 노인을 향해 독일어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키 작은 노인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ya, ya.(그래, 그래)" 하고 번번이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두 노인은 키는 퍽 차이가 났으나, 얼굴 생김새는 쌍둥이라고 할만큼 닮아 있었다. "이것 보세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요? 제가 남편과 똑같은 체형의 사람을 찾아 가지고 이리 올게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 반바지를 입혀 보고 당신네들이 그걸 조정해서, 저한테 팔면 어떨까요?" 하고 그녀는 제안을 했다. 키 큰 노인은 아연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나 말씀드렸지만, 사모님, 그건 규칙 위반입니다. 바지를 입을 분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사모님의 바깥 양반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건 안되겠습니다." "댁들은 알지 못하는 일로 해두면 되잖아요. 댁들은 그 사람에게 레더호젠을 팔고, 제가 그 사람에게서 그걸 사면 댁들 방침엔 하자가 없지 않겠어요. 안 그런가요? 잘 생각해보세요. 저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독일에 오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 만일 지금 레더호젠을 사지 않으면 전 영원히 그걸 손에 넣을 수 없을 거란 말예요." "음......" 하고 키 큰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키 작은 노인에게 다시 독일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키 큰 노인이 이야기를 끝내자, 이번엔 키 작은 노인이 독일어로 한바탕 지껄였다. 그러한 응수가 몇 번인가 계속되었다. 그것이 끝나자 키 큰 노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사모님. 예외적으로--어디까지나 예외적으로-- 저희들은 일의 경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일본에서까지 저의 레더호젠을 사러 오시는 분이 그리 많이 계시는 것도 아니고, 저희 독일인도 그토록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올시다. 되도록 바깥 양반과 꼭 닮은 체형을 가지신 분을 찾아오십시오. 제 형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마워요." 하고 그녀는 말하고 나서 형이라는 노인을 향해 다시 독일어로 말했다. "Das ist so nett von Ihnen.(정말 감사합니다.)" * * * 그녀--나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 아내의 친구--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책상 위에 두 손을 포개고 한숨을 돌렸다. 나는 다 식어버린 커피의 나머지를 마셨다. 비는 아직도 계속 내리고, 아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야기가 이제부터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지, 나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꼭 닮은 체형의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요?" 하고 어서 결말이 났으면 하고 나는 끼여들었다. "예, 찾아내긴 찾아냈죠. 어머닌 벤치에 앉아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그 중에서 아버지와 체형이 똑같은, 되도록 인상이 좋아 보이는 사람을 골라, 가타부타 설명도 않고--그 사람은 영어를 전혀 못했으니까--가게로 데리고 갔어요." 하고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퍽이나 행동력이 있는 분인가 보군요." "저로선 잘 모르겠어요. 글쎄, 일본에 있을 땐 어느 쪽이냐 하면 온순하고 상식적인 분이었는걸요." 하고 그녀는 한숨을 쉰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 남자분은 가게 사람한테서 일의 경위를 설명 듣고는, 좋다, 그런 일이라면 하면서, 모델이 될 것을 선뜻 승낙해 주더라 그거예요. 그리곤 레더호젠을 걸치고, 가게 사람이 이쪽 저쪽 여러 군데를 늘이고 줄이고 했대요. 그리고 그러는 동안 그 남자분과 두 노인은 독일어로 농담을 하고선 서로 웃고 웃기고 하더래요. 그리고 한 30분만에 그 작업이 끝났을 때 어머닌 아버지와 이혼할 것을 결심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야기의 줄거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군. 즉, 그 30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 말인가?"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세 독일인이 화기애애하게 서로 농담을 주고 받았을 뿐." "그럼, 어째서 어머닌 그 30분 동안에 이혼할 결심을 할 수 있었단 말이죠?" "그건 어머니 자신으로서도 줄 곧 알 수 없었던 일이래요. 그래서 어머니도 몹시 혼란스러웠던가 봐요. 어머니가 알 수 있었던 건, 그 레더호젠을 걸친 남자를 가만히 보고 있는 동안에 아버지에 대한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혐오감이 몸 속 아주 깊은 데서부터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어 올라 왔다는 것뿐이래요. 그분 으로선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대요. 그 사람은 --그 레더호젠을 걸쳐 입은 남자는-- 피부색만 빼면 아버지와 정말로 꼭 닮은 체형을 하고 있었데요. 다리 모양하며 배 모양하며, 머리털이 없어진 모양까지 말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새 레더호젠을 걸치고 사뭇 즐거운 듯 몸을 흔들면서 웃어대더라지 뭐예요. 어머닌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중에 자신 속에서 이제까지 막연하던 하나의 생각이 조금씩 명확하게 되고, 단단히 굳어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대요. 그리고 어머닌 자신이 얼마만큼 지독히 남편을 미워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는 거예요." 아내가 쇼핑에서 돌아와 그녀와 둘이서 수다를 떨기 시작하고 나서도, 나는 혼자서 줄곧 그 레더호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셋이서 식사를 하고, 그리곤 가볍게 술을 마셨을 때에도 나는 아직 그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이제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나요?" 나는 아내가 자리를 뜰 때를 보다 그녀에게 그렇게 물어 보았다. "그래요, 이젠 미워하지 않아요. 결코 친밀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미워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 반바지 이야기를 들려줬기 때문인가요?" "예, 그래요. 그런가봐요. 그 얘기를 들은 후로 저는 어머니를 계속 미워할 수가 없게 됐거든요. 왜 그런지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요, 분명 그건 우리 두 사람이 여자이기 때문이 아닌가 해요." 나는 수긍했다. "그래서 가령..가령, 아까의 이야기에서 반바지 부분을 빼버리고, 한 여성이 여행길에서 자립을 획득한다는 것만의 이야기였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머니가 당신을 버린 사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안되겠죠." 하고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고서 "이 얘기의 포인트는 반바지에 있는걸요." 하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고 나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