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담에 관하여(1) 일본의 잡지에는 정말 대담이 많다. 나는 외국 잡지로는 <롤링스톤>과 <뉴욕커>와 <에스콰이어>와 <라이프> 정도까지는 대충 훑어보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이런 잡지에서 대담 기사를 본 적이 없다. 한번 정도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인상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니까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왜 미국에서는 대담이란 형식이 그다지 사용되지 않고, 한편 일본에서는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것일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인데, 미국에 대담이란 장르가 없는 까닭은 그만큼 미국인이 대화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일본인처럼 상대방이 하고 있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잘 납득이 안 가면서도 '음, 그런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걸.' 이라는 둥, 어물쩡거리지 않고 좀 더 파고들어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다.' 는 식이 되는 것일 테고, 그렇게 되면 얘기가 하염없이 길어져 할당된 페이지 않에 다 수록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일본인은 역시 재주가 좋아 잡담의 일단락되면 '그럼 이쯤에서 일단 결론 비슷한 것을 내 보기로 할까요.' '그렇군요.' 하는 식으로 제법 매끌하게 끝난다. 과연 앞뒤가 잘 맞아 떨어지는 국민성이다. 또 하나 일본적인 현상은 대담 내용의 교정지에 빨간 글자를 무더기로 집어 넣는 것으로, 요컨대 얘기한 내용을 나중에 정정하는 셈인데, 누구든 한 쪽이 먼저 자신이 말한 부분을 정정하고, 그 다음에 다른 한 쪽이 먼저 한 사람에게 맞추어 자기의 대사를 정정한다. 이런 때의 호흡도 꽤 까다로와 '아, 먼저 하시죠.' '그렇습니까, 그럼.' 하는 식이 되는데, 생각해 보면 이렇게 미묘하고 골치 아픈 일을 미국인이 해낼 리가 없다. 일본의 특산품은 도요타와 패내소닉뿐만이 아닌 것 같다. - 대담에 관하여(2) 지난 회에는 어째서 일본의 잡지에는 대담이 많고, 미국의 잡지에는 적은─아니 거의 없는─가에 대한 이유를 썼는데, 오늘도 그 계속. 현실적인 얘기를 하자면, 대담은 개런티가 그다지 높지 않다. 노대가(老大家)의 경우라면 잘 모르겠지만, 나 정도의 수준이라면 별 볼 일 없다. 그대신 비교적 푸짐한 식사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푸짐한 식사란, 스스로 돈을 내면서까지는 먹을 엄두가 안나는 식사를 일컫는다. 술도 나온다. 술이 아직 모자란다 싶은 사람에게는 2차도 마련돼 있다. 그런 대접으로 낮은 개런티를 보충하는 셈이다. 출판사 사람들의 지론에 의하면, 고금을 막론하고 작가들이란 대개가 궁핍한 인종들이라, 대담 때가 아니면 맛있는 음식을 구경조차 하기 힘드니까, 차제에 작가에게 도 사치스런 기분을 좀 만끽하게 해 주자는 편집자측의 따뜻한 배려라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그런가. 흠, 따뜻한 배려인가' 하고 시이나 마코토*식으로 감탄하지만,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은 맥주와 메밀국수 정도로 족하니까 개런티를 좀 더 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따뜻한 배려 운운하면서 편집자도 제법 열심히 잡숩지 않습니까, 하고 투덜투덜 불만을 털어놓으며 쓰다가 문득 생각한 건데, 이 분위기야 말로 '맞선'을 보는 자리하고 똑같다. 좀 고급스런 레스토랑이나 요리집 독실에서 첫 대면하는 두 사람을 편집자=중매장이가 소개를 하고, 잡담 따위를 조잘거리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린다. 그런 과정이 한차례 지나가면 '그럼 이제 두 분이서 담소라도 나누시며...' 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이거야 두말할 것도 없이 완벽한 맞선이다. 녹음기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대담에서 알 게 된 남녀가 실제로 인연을 맺게 되는 일도 있다 하니, 하물며 사태가 거기까지 이르면 말해 무엇하리. 나는 그런 행복한 운과 만난 적이 한번도 없다. 화가 난다. 그러나 그 일은 제쳐 두고, 이런 '자, 적당히 얘기라도 나누십시오.' 라는 방식은 미국인 편집자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 * 시이나 마코토 : 소설가, 르뽀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