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남자 "그 파도가 나를 집어삼키려 한 것은 내가 열 살이던 해의 9월, 어느 오후의 일이었습니다." 일곱번째 남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는 그날 얘기하기로 되어 있는 마지막 인물이었다. 시계 바늘은 벌써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안에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창 밖 깊은 어둠 속에서 서쪽으로 부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람은 정원수들의 잎을 살랑살랑 흔들고 유리창을 달그락 달그락 흔들고, 그리고 조그만 호루라기를 불듯 뾰족한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불어갔다. "그것은 특수한 종류의, 예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파도였습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 파도는, 간발의 차로 나를 집어 삼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신 내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삼키고서 다른 세계로 가버렸습니다. 내가 그것을 다시 발견하고 회복하기까지는, 긴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되돌이킬 수 없는 길고도 귀중한 세월입니다." 일곱번째 남자는 5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야윈 남자였다. 키가 크고 턱수염을 길렀고, 오른쪽 눈 옆에 마치 날카로운 나이프로 찔린 듯 조그만, 그러나 깊은 흉터가 있었다. 머리칼은 짧고, 드문드문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꺼내기가 좀처럼 어려울 때 흔히 짓는 표정이 어려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 얼굴에 잘 녹아 있었다. 그는 회색 트위드 상의 아래로 소박한 파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가끔 셔츠 깃에 손을 대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리고서 일곱 번째 남자는 소리 낮춰 컹컹 헛기침을 하였다. 그리고 잠시 침묵 속에 자신의 말을 묻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내 경우, 그것은 파도였습니다. 물론 여러분의 경우에 그것이 무엇일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 그것은 우연찮게도 파도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산더미 같은 파도로 그 치명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나는 S현의 바닷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조그만 마을이라,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을 밝힌다 해도 여러분은 들어본 기억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계셨습니다. 덕분에 나는 별 부족함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죠. 내게는 철이 들 무렵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이름은 K라고 하지요. 그는 바로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었고,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습니다. 우리는 학교에도 늘 같이 다니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항상 함께 놀았습니다. 거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지요. 사귄 지도 오랜데, 그 동안 싸움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친형이 한 명 있지만 나이가 여섯 살이나 차이 나서 좀처럼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인간적으로 성격이 잘 맞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나는 친형보다 그 친구 쪽에 따뜻한 형제의 정 같은 것을 품고 있었습니다. K는 몸도 가냘프고 피부도 하얗고 마치 여자처럼 예쁘장한 생김의 아이였습니다. 그런 데다 언어 장애가 있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혹 지능 장애아로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몸도 약해서 학교에서 돌아와 놀 때에는 내가 항상 보호자처럼 그를 보살폈습니다. 나는 비교적 몸집도 크고 운동도 잘했고, 그래서 다들 나에게는 꼼짝 못했으니까요. 내가 그런 식으로 K와 함께 있기를 좋아한 것은 무엇보다 그의 자상하고 고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절대로 지능에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어 장애 때문에 학교 성적도 별로 좋지 못했고, 수업을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만은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여 연필과 물감만 쥐어주면 선생님도 혀를 내두를 만큼 멋지고 생명력 넘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미술 대회에서도 몇 번이나 입상을 하였고 표창을 받은 일도 있습니다. 만약 그대로 성장했다면 훌륭한 화가로서 이름을 날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가 즐겨 그린 그림은 풍경화였습니다. 그는 가까운 해변에 가서는 진 종일 지치지도 않고 바다 풍경을 그렸습니다. 나는 곧잘 옆에 앉아 붓을 놀리는 그의 날렵하고 정확한 손길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새하얀 공백 위에 저렇게 생생한 모양과 색채를 순식간에 탄생시킬 수 있는지 나는 감탄스럽고 놀라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순수한 재능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어느 해 9월의 일입니다만, 내가 살고 있는 지방에 엄청난 태풍이 몰아 닥쳤습니다. 라디오의 일기 예보에서는, 그 태풍이 10년 만에 오는 최대의 태풍이라고 보도하였습니다. 학교는 일찌감치 휴교하여 문을 닫았고, 온 동네의 가게들도 굳게 셔터를 내리고 태풍에 대비하였습니다. 아버지와 형은 망치와 못, 상자를 들고 아침부터 온 집의 덧문에 못질을 하셨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비상식이 될 주먹밥을 만드셨습니다. 병과 물통에 물을 담고, 만에 하나 피난해야 할 경우를 위하여 우리들은 각자 소중한 물건을 챙겨 배낭을 꾸렸습니다. 어른들에게는 해마다 닥쳐오는 태풍이 그저 위험하고 성가신 존재일 뿐이지만,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그것은 가슴 설레는 행사 같은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한낮이 지나자 하늘의 색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색에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비현실적인 색상도 섞여 있었습니다. 바람이 신음 소리를 지르고, 마치 모래를 갖다 뿌리는 것처럼 타닥타닥 마른 소리를 내며 비가 세차게 집을 때리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툇마루에 앉아 그런 하늘의 모양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덧문을 닫아 캄캄해진 집 안에서 우리 가족은 한방에 모여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강우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강풍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였습니다. 많은 집의 지붕이 날아갔고, 배는 몇 척이나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바람에 날리는 무거운 것에 맞아 죽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도 몇 명 있었습니다. 절대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이라고 아나운서는 몇 번이나 경고했습니다. 강풍 때문에 집이 가끔, 마치 커다란 손이 붙잡고 뒤흔드는 것처럼 삐걱삐걱 소리를 냈습니다. 무거운 것이 덧문에 부딪치면 쾅 하고 큰소리가 들리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집 기와가 날아온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머니께서 준비하신 주먹밥과 계란말이를 점심으로 먹고,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태풍이 이 근방 어딘가로 빠져나가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태풍은 좀처럼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뉴스에서는 태풍은 S현의 동부에 상륙한 시점부터 급격하게 풍속이 떨어져 현재는 인간이 뜀박질을 하는 정도의 느릿한 속도로 북동쪽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쉴새없이 흉포한 소리를 내며 지표에 있는 모든 것을 땅끝까지 날려보내려 하였습니다. 그런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 약 한 시간쯤 경과했을 때입니다. 문득 사방이 잠잠해진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죠. 어디선가 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는 덧문을 살며시 열고 그 틈으로 바깥 상황을 살폈습니다. 바람은 잔잔하고 비도 개어 있었습니다. 두꺼운 회색 구름이 천천히 상공을 흐르고 있었습니다. 구름이 갈라진 틈으로는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원 나무들은 비에 푹 젖어, 축 늘어진 가지 끝으로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태풍의 눈 속에 있는 거다." 라고 아버지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잠시 동안, 15분이나 한 20분 정도 휴식 시간처럼 이 고요함이 지속될 거다. 그 다음에는 다시 아까 같은 바람이 몰아칠거야." 나는 밖에 나가보아도 되는냐고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멀리만 가지 말고 잠시 걷다 오는 정도면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곧바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밖으로 나가 사방을 돌아보았습니다. 바로 몇 분 전까지 그렇게 모진 바람이 불었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하늘에 거대한 태풍의 '눈'이 둥실 떠 있고, 우리를 싸늘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눈이 있을 리가 없죠. 우리들은 기압의 중심이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고요함 속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무슨 피해가 있지는 않나 집 안팎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나는 혼자 바닷가 쪽으로 걸어가 보았습니다. 꺾이고 잘려 나간 나뭇가지들이 길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습니다. 어른도 혼자서는 들어올리지 못할 만큼 굵직한 소나무 가지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조각조각 부서진 기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돌을 맞은 자동차 유리에는 산산이 금이 가 있었습니다. 개 집도 길 위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손바닥이 하늘에서 뻗어나와 지상을 힘껏 쓸어간 듯한 광경이었습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K가 내 모습을 보고는 밖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어디 가느냐고 K가 물었습니다. 내가 잠시 바다를 보러 간다고 대답하자, K는 아무 대꾸도 없이 내 뒤를 따라왔습니다. K의 집에는 하얀 복슬 강아지가 있는데, 그 강아지도 우리 뒤를 쫄랑쫄랑 따라왔습니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돼." 내가 그렇게 말하자 K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집에서 2백 미터 정도 걸으면 바다입니다. 당시 내 키 정도 되는 방파제가 있었는데, 그 계단을 올라 우리는 해변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 해변으로 놀러 왔고, 그 부근 바다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풍의 눈 속에서는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게 보였습니다. 하늘의 색, 바다의 색, 파도 소리, 바다 냄새,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 그런 바다에 관한 모든 것이 달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방파제 위에 앉아 그런 광경을 아무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태풍의 한가운데 있다는데도, 파도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잠잠했습니다. 해변가에 철썩이는 파도도 저 멀리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우리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만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썰물 때도 바닷물이 그렇게 빠지지는 않습니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가구를 죄 들어낸 커다란 방처럼 유난히 휑하게 느껴졌습니다. 해변에는 여러 가지 표류물이 밀려 올라와 띠처럼 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파제에서 내려가 주변의 모습을 살피면서 드러난 개펄 위를 걸어 거기에 널려 있는 것들을 일일이 조사해 보았습니다. 플라스틱 문구며 샌들이며 가구의 일부인 듯한 나무 조각이며 옷가지며, 진기한 병이며 외국어가 적혀 있는 나무 상자며, 그밖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마치 구멍가게의 진열대처럼 무수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태풍으로 인한 높은 파도가 그것들을 저 먼 곳에서 이리로 날라온 것이겠죠. 나는 무슨 진기한 것이 눈에 뜨이면 그것을 집어들고 꼼꼼하게 쳐다보았습니다. K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킁킁거리며 하나하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렇게 거기에 있었던 시간은 불과 5분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득 얼굴을 들어보니 파도가 모래사장 바로 코 앞까지 밀려 와 있었습니다. 파도는 소리도 없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우리들 발치께까지 다가와 그 매끄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파도가 바로 옆까지 밀려오다니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나는 바닷가에서 자란 인간이라 어린 나름으로 바다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다가 때로는 미처 예측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흉포함을 지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조심 주의를 기울이면서 바닷물이 일렁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이쯤이면 안전하겠다.' 싶은 지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파도는 어느 사인가 내가 서 있는 장소에서 불과 10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밀려왔다가는 또 소리도 없이 밀려갔습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파도는 다시는 밀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다가온 파도는 절대로 불온한 종류의 파도가 아니었습니다. 살며시 모래를 훑고 밀려간 온화한 파도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 아주 불길한 것이 마치 파충류의 살갗에 닿은 감촉처럼 순식간에 내 등줄기를 얼어 붙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까닭없는 공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공포였습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살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틀림 없었습니다. 그 파도는 틀림 없이 생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파도는 그 자리에 있는 나의 모습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제 나를 그 수중에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육중한 육식 동물이 나를 날카로운 이빨로 짓찢어먹는 상상을 하면서 초원 어딘가에서 숨소리마저 죽이고 나를 노리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망가야 돼, 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K에게 '그만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와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나에게 등을 보인 자세로 몸을 구부리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꽤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K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정신이 팔려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K에게는 그런 구석이 있었으니까요. 금방 무언가에 열중하고 그러면 주변에 있는 것들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혹은 내 목소리가 내가 생각한 만큼 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내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더랬습니다. 그때 나는 웅웅거리는 신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면을 뒤흔드는 소름 끼치는 소리였습니다. 아니 그 소리 전에 다른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구멍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오듯 쿨럭쿨럭 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 쿨럭쿨럭 하는 소리가 한 차례 계속되다가 이번에는 우우우웅 하는 굉음 같은 불길한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K는 아직 얼굴을 들지 않았습니다. 몸을 구부리고 꼼짝하지 않은 채 발치에 있는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일에 의식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K한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죠. 어째서 땅울림처럼 그렇게 엄청난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는지. 그것은 나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나 혼자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그 소리는 나한테만 들리는 특수한 형태의 소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옆에 있는 강아지도 역시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개들이란 아시다시피 소리에는 매우 민감한 동물이니까요. 나는 당황하여 K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 그를 붙잡아 그곳에서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방법밖에 없었으니까요. 파도가 다시 밀려오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K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 두 발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파제를 향하여 혼자 도망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마도 그 끔찍스럽기까지 한 공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공포가 나의 목소리를 빼앗고, 내 다리를 제멋대로 조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부드러운 개펄을 구르듯 달려 방파제에 도착하자, 거기서 K를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위험해. 파도가 오고 있어." 이번에는 내 입에서 소리가 나왔습니다. 우우우웅 하던 굉음은 어느 사인가 잦아 있었습니다. K가 간신히 내 외침 소리를 듣고 얼굴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때는 벌써 산더미 같은 파도가 뱀처럼 높이 고개를 쳐들고 해안을 덮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파도를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높이는 족히 3층짜리 빌딩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파도가 거의 아무런 소리도 없이 (적어도 나는 소리가 들렸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그것은 내 기억 속에서는 소리 없이 다가왔습니다), K의 등뒤에 있는 하늘을 제압하듯 솟구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K는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도망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다음 순간 그는 파도에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전속력으로 질주해 오는 무자비한 기관차에 정면으로 충돌한 꼴이었습니다. 파도는 굉음을 일으키고 부서지면서 모래사장을 격렬하게 매질하고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어 올라, 공중을 날듯 내가 있는 방파제로 덮쳤습니다. 하지만 나는 방파제 뒤에 숨어 그 난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방파제를 넘어온 물방울 끝이 옷을 적셨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후 나는 서둘러 방파제 위로 올라가 해안을 살폈습니다. 파도는 방향을 바꾸어 거친 아우성을 남기고 전속력으로 다시 저 먼바다로 밀려나가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마치 땅 끝에서 누군가 거대한 카펫을 힘껏 잡아당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뚫어져라 바다를 살펴보았지만 K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강아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닷물이 다 말라 해저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파도는 단숨에 저 먼 곳까지 물러갔습니다. 나는 방파제 위에 혼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정적이 돌아왔습니다. 억지로 소리를 쥐어 뜯어낸 듯한 절망적인 정적이었습니다. 파도는 K를 삼킨 채 어딘가 멀리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해변으로 내려가 볼까 하고도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K는 해변 어느 모래 속에 파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바꾸고 방파제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큰 파도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밀려오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얼마나 시간이 경과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10초나 20초, 고작 그 정도였겠죠. 아무튼 그 불길한 공백 뒤에, 내가 예측했던 대로 파도는 해안으로 다시 밀려왔습니다. 굉음이 또 지면을 격렬하게 뒤흔들고, 그 소리가 사라지자 마침내 파도는 고개를 높이 쳐들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아까워 똑같이. 파도는 하늘을 제압하고 치명적인 암벽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파도가 덮쳐오는 광경을 꼼짝 않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K를 잃은 지금 도망쳐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 그저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파도는, 맨 처음 파도에 버금가는 큰 파도였습니다. 아니 한층 더 큰 파도였습니다. 천천히 몸을 뒤틀면서 파도는 마치 벽돌로 쌓은 성벽이 무너져 내리듯 내 머리 위를 덮쳤습니다. 너무도 어마어마하여 현실 속의 파도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저 먼 또 하나의 세계에서 찾아온, 파도 모양을 한 무언가 다른 것처럼,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암흑이 자신을 사로잡는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눈을 감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때 나의 심장이 뛰는 고동 소리를 바로 귓전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도는 바로 내 코 앞에 와서는 힘이 다했다는 듯 갑자기 기운을 잃고는 공중에 뜬 채 뚝 정지하였습니다. 비록 한 순간의 일이었지만 파도는 무너져 내리던 모습 그대로 거기에 뚝 정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파도의 머릿속에서, 그 투명하고 잔인한 혓바닥 속에서, K의 모습을 또렷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내 말을 믿지 않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내 자신도 지금까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설명드릴 수도 없지요. 그러나 그것은 환상도 착각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그 파도의 끝 부분에 마치 투명한 캡슐에 갇혀 있는 것처럼, K의 몸이 둥실 옆으로 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K는 나를 향하여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눈앞에서, 방금 전 파도에 삼켜진 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틀림 없었습니다. 그는 나를 향해 웃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예사로운 웃음이 아닙니다. K의 입은 말 그대로 귀까지 찢어질 만큼, 크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싸늘하게 얼어붙은 한 쌍의 눈길이 빤히 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습니다. 마치 내 손을 잡고 그쪽 세계로 끌고 가려는 듯. 그러나 아주 근소한 차이로 그의 손은 나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한번 K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습니다. 그쯤에서 나는 정신을 잃은 모양입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아버지의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내가 눈을 뜨자, 간호사는 아버지를 부르러 갔고, 아버지는 곧장 달려왔습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 보고 맥을 짚어 보고 동공을 들여다보고,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었습니다. 나는 손을 움직이려 하였지만 도무지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 타오르듯 뜨겁고, 머리는 멍하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며칠이나 고열에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나더러, 네가 사흘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시종일관 지켜보던 동네 사람이, 쓰러져 있는 나를 안고 집으로 데리고 와준 것입니다. K는 파도에 쓸려간 채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고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혀는 붓고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다른 생물이 내 입안에 눌러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나는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려 하였지만 미처 기억이 나기도 전에 다시 의식을 잃고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는 일주일동안 침대에 누워 유동식으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토하고 가위에 눌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동안 나의 의식이 심한 충격과 고열 때문에 영원히 손상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몹시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는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육체적으로 그럭저럭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몇 주일 후 나는 학교에도 다녔습니다. 그러나 물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K의 주검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파도에 삼켜진 강아지의 시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주변 해안에 빠져 죽은 사람은 대개 조류를 타고 동쪽에 있는 조그만 만으로 옮겨져 며칠 후면 해변으로 밀려 올라오는 법인데, K의 시체는 끝까지 행방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태풍의 파도가 너무도 엄청나 저 먼 바다까지 옮겨져 해변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바다 깊이 가라앉아 물고기 밥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죠. K의 시체를 수색하는 작업은 동네 어부들의 도움을 받아 꽤 오래도록 계속되었지만, 그 일도 마지막에는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일 중요한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장례식도 치를 수 없었습니다. K의 부모님은 거의 반 미친 상태에서 연일 해변을 헤매 다니거나 아니면 집에 틀어박혀 불경을 외웠습니다. 그렇게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K의 부모님은 내가 그 태풍의 한 가운데로 K를 데리고 나간 일에 대해서는 한번도 나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K를 친형제처럼 귀여워하고 소중히 여겼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나의 부모님들 역시 그 사건에 관해서는 가능하면 언급을 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어요. 만약 내가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K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K한테로 달려가서 그를 끌어 잡아당겨 파도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기억 속의 시간을 더듬어보면 그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압도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K를 버리고 혼자 도망쳤던 것입니다. K의 부모님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도 종기를 다루듯 조심조심 사건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은 탓에 나는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학교에도 가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누워서 매일 천장만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 파도 머리끝에 옆으로 누워, 히죽 웃던 K의 얼굴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듯 앞으로 내민 손을, 그 손가락 하나 하나를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꿈속에 그 얼굴과 손이 나타났습니다. 꿈속에서 K는, 내 손을 잡고 그대로 파도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꿈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바다를 헤엄치고 있습니다. 때는 아주 맑게 갠 여름날 오후, 나는 천천히 바닷물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태양이 내 등을 반짝반짝 비추고, 바닷물은 나를 기분 좋게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물속에서 누군가 나의 오른쪽 다리를 잡습니다. 발목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손의 감촉을 느낍니다. 그 힘이 세서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대로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맙니다. 나는 K의 얼굴을 봅니다. K는 그때처럼 얼굴이 찢어져라 입을 히죽 벌리고 웃으면서 나를 빤히 보고 있습니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 합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어푸어푸 물을 마실 뿐입니다. 물이 나의 폐로 차오릅니다. 나는 큰 소리를 지르고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면서 어둠 속에서 눈을 뜹니다. 그해 막바지에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동네를 뜨고 싶다고 부모님꼐 애원했습니다. 내 눈앞에 K를 삼켜버린 파도와 해안을 보면서 이대로 살수는 없다고, 아시는 대로 나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고. 그러니까 이 동네를 떠나서 어디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가능하면 멀리로 떠나고 싶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미쳐버릴 것 같다. 내 말을 들을 아버지는 나를 1월에 나가노 현의 한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코모로 근처에 있는 친가에 살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중,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방학 때도 집에 가지 않았고, 부모님이 나를 만나러 가끔 올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나가노에 살고 있습니다. 나가노 시에 있는 공과 대학을 졸업하고, 현지의 정밀 기계 회사에 취직하여 지금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나는 아주 평범한 인간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특별히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를 떠나고 얼마 후부터는 이전처럼 악몽을 꾸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생활에서 아주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수금원이 현관문을 두드리듯 불쑥 나를 찾아왔습니다. 잊어버릴 만하면 반드시 찾아옵니다. 언제나 같은 꿈입니다. 꿈의 세부까지 같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뜹니다. 이불이 땀으로 푹 젖어 있곤 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한 밤중 두세 시에 큰 소리를 지르면서 옆에서 자고 있는 누군가를 깨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좋아한 여자도 몇 명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와도 밤을 함께 지낸 적은 없습니다. 공포가 내 골수까지 파고 들어와 있었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난 40년 이상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해안에도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 해안뿐만 아니라, 바다라는 것도 일체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혹 바다에 가면 꿈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또 나는 원래 수영을 좋아했지만, 난 그 이후로는 수영장에도 절대 가지 않았습니다. 깊은 강에도 심지어 호수에도 발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자신이 어딘가에서 익사하여 죽는 이미지를 뇌리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두운 예감은, 꿈속의 싸늘한 K의 손처럼 내 의식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K를 휩쓸어간 해안을 다시 찾은 것은 작년 봄의 일이었습니다. 지난해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형이 재산 처분을 위해 고향집을 매각했는데, 광을 정리하면서 나의 어릴적 물건들을 내게 보내주었습니다. 대부분 잡동사니였는데, 그 중에 K가 내게 그려준 그림이 한 묶음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기념으로 남겨둔 것이겠죠. 나는 두려움에 숨이 막힐 듯 하였습니다. K의 혼이 그림 속에서 내 눈앞에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장 처분할 생각으로 나는 그것을 원래대로 얇은 종이에 싸서 상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K의 그림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고민한 끝에 종이를 풀고 K가 그린 수채화를 굳은 마음으로 꺼내 보았습니다. 풍경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눈에 익은 바다와 모래사장과 소나무 숲과 동네가, K다운 특징이 있는 선명한 색상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신기하게 색도 바래지 않아 옛날에 보았던 인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을 들고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 나는 아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그림들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고 예술적으로도 우수하였습니다. 나는 마치 내 자신의 일처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림을 보면서 K와 함께 놀았던 기억이며 함께 찾았던 장소들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소년 시절 내 자신의 눈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절 나는 K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똑같이 맑고 깨끗한 눈으로 세계를 보았던 것이죠. 나는 회사에서 돌아오면 매일 책상 앞에 앉아 K의 그림을 손에 들고 들여다 보았습니다.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내 의식이 오래도록 강경하게 거부해온 소년 시절의 아련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K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 몸 속으로 무언가가 살며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일주일쯤 지났을 때일까요, 나는 퍼뜩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혹시 내가 지금까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저 파도 끝에 누워 있던 K가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 한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닐까. 그의 진심은 혹 다르지 않았을까. 히죽 웃은 것처럼 보인 것은 단순히 그렇게 보인 것일 뿐. 그는 그때 의식도 아무 것도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K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영원한 작별을 고한 것은 아닐까. 내가 K의 표정에서 읽었던 처절한 증오의 색은 그 순간 나를 사로잡고 지배한 깊은 공포의 투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K가 그린 옛 수채화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의 그런 생각은 점점 굳어져 갔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K의 그림에서는 티없이 맑고 온화한 영혼밖에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랜 시간 꼼짝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해가 기울고, 침묵의 밤이 왔습니다. 밤이 끝없이 계속 되고 다시 날이 밝았습니다. 새로운 태양이 하늘을 연분홍으로 물들이고 새들이 새 아침을 노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지금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간단히 짐을 꾸리고 회사에 결근한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고향 동네는 이미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적한 바닷가가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 근교에 공업 도시가 들어서는 바람에 주변 풍경이 크게 변모해 있었습니다. 역 앞에는 상점이 즐비하고, 영화관이 있던 자리도 큰 슈퍼마켓이 들어 서있었습니다. 이미 우리 집도 없었습니다. K가 살던 집도 없었습니다. 그 주변은 주차장이었고 승용차와 밴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에도 나는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곳은 오랜 옛날부터 이미 나의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해안으로 가서 계단을 걸어 방파제 위로 올라갔습니다. 방파제 너머로는 이전과 다름없는,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드넓은 바다였습니다. 멀리로 한 줄기 수평선이 보였습니다. 해변 풍경도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오후 네 시가 지나자 저녁으로 기우는 부드러운 햇살이 사방을 감쌌고, 태양은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서편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모래 위에 주저앉아 가방을 옆에 놓고, 그런 풍경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참으로 온화하고 평온한 풍경이었습니다. 먼 옛날 거기에 그렇게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쳤고, 그 높은 파도가 나의 둘도 없는 친구를 삼키고 말았다는 일 따윈 거짓말 같았습니다. 그 풍경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고를 기억하는 사람도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 머릿속의 환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앞의 어둠은 이미 소멸하고 없었습니다. 그것은 찾아왔을 때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바지를 걷어올리지도 않은 채 바닷물 속으로 조용히 발을 내디뎠습니다. 구두를 신은 채 밀려오는 파도에 두 다리를 맡겨 보았습니다. 어릴 적 밀려 왔던 파도가 화해라도 하듯 정겹게 내 다리를 때리고 내 옷과 구두를 검게 적셨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나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럼 사람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이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솜을 뜯어 놓은 듯 자그마한 회색 구름이 하늘에 듬성듬성 떠 있었습니다. 바람도 잔잔하여, 그 구름들은 한자리에 가만히 머물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뭐라고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그 구름들은 나 하나만을 위하여 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소년 시절 태풍의 커다란 눈을 찾느라 하늘을 올려다 보았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시간의 축이 삐걱삐걱 커다란 소리를 내었습니다. 40년이란 세월이, 내 안에서 썩어 빠진 집처럼 무너져 내리고, 낡은 시간과 새로운 시간이 소용돌이 속에 뒤섞였습니다. 사방에서 소리가 사라지고, 빛이 휘청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몸의 균형을 잃고 밀려오는 파도 속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심장이 나의 목구멍 속에서 쿵쿵 울리고, 손발의 감각이 몽롱해졌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그 꼴로 거기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일어날 수가 없었던 거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지난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무서운 꿈을 꾸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밤중에 눈을 뜨는 일도 없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사 너무 늦었다 해도, 나는 자신이 마침내 구원 받고 회복되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심연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인생을 끝마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으니까요." 일곱 번째 남자는 잠시, 아무 말없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몸을 뒤트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일곱 번째 남자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도 완전히 멎었는지,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말을 찾듯, 셔츠 깃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나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포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잠시 짬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공포는 물론 존재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고, 때로는 우리 존재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그 공포에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내 경우에- 그것은 파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