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엘리트(초단편) 내가 어제선을 본 상대는 엘리트였다. 물론 최종 학력은'동경대학 졸업'이었다. 본인은 '변변치 않은 학교를 나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손끝에 은행나무 잎사귀 뱃지를 가지고 만지작거리고 있어서 알게 되었다. 우리들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다.날씨가 조금 추워서 어깨를 움츠리자 그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서 나에게 걸쳐줬다.옷 속에는 '버버리'마크가 선명히 찍혀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신일본 제철의 간부였다. 이 사실은 내 직감으로 알아앴다. '무척 머리가 좋군요'라며 그는 웃었다. 그도 감각이 뛰어난 편이었다. 어떻게 내가 미용사인지를 잘 알아맞추었던 것이다 그는 엘리트라고 내세우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동백나무 집에서 "저어,데이트 한번 해보지 않겠어요?" 싹싹한 말투로 먼저 말을 건넨건 그였다. 차는 벤츠였다. 열쇠고리에 벤츠 마크가 찍혀 있었다. "벤츠군요." 그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와 그는 셰익스피어 팬으로 그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했다.올리비아 핫세를 옛날에는 좋아했었 다고 그는 말했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말하며 내 몸을 원했다. 엘리트는 우아하다고 생각 되었다.자신이 감추려고 감추려고 애쓴 등뒤에는 커다랗게 '엘리트'라는글자가 문신되어 있었다. ◀커피컵▶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것은 여자를 택시에 태워 돌려보낸 뒤, 한 시간 동안이 아닐까 한다. 침대에는 아직도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다. 테이블 뒤에는 그녀가 마셨던 커피잔이 있다. 거기에도 같은 느낌이다. 마치 물을 다 빼낸 수족관의 수조 밑바닥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 의 한 시간이다. 책을 읽어도, 레코들르 틀어도,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씩 배가 고파왔다. 그래서 밥에다 발효한 콩을 간해서, 식사를 하게 된다. 계란을 풀어 먹기도 한다. 무우 꽁지가 남아 있어서 그걸로 된장국을 해먹는다. 또 전갱이 말린 식품도 생각이 난다. 친구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왜김치도 생각이 난다. 이렇게 되면 백중날에 선물로 받은 말린 김도 썩 어울린다. 이런 것들을 다 먹고 나면, 어쩐지 허전했던 기분은 싹 가시게 된다. 참으로 묘한 일이다. ◀탤컴파우더(활석가루에 붕산 향료를 섞어만든 화장품)▶ 어쩌다 나는 예고 없이, 세상에 남겨진 것은 나와 탤컴파우더뿐이라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나와 탤컴파우더가 정말 그 정도로 상이가 좋은 건 아니다. 마음이 전혀 통하지 않는 잘도 있었다. 아무튼 나와 탤컴 파우더의 사이는 소의 고통 체험을 통해서 배양된 제 2의 천성이라고 할 그 뭔가가 존재했다. 결국 똑같은 여자와 자본 일이 있다든가, 옛날과 똑같은 성병을 옮았다든가, 페니스 사이즈가 완전히 똑같다든가, 똑같은 평론가에게서 기분 나쁜 평을 들었다든가, 세무서에서 돌려 받을 환급금이 , 똑같다든가 등등 아마 그런 것이었다. 헤어브러시, 오데코롱, 스포츠 샴푸, 치약, 목욕 타올 등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어디까지나 탤컴 파우더뿐이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카펫▶ 카펫 밑에 숨어있는 돗자리는 무엇을 의미하나. 그것은 고기와 달걀에 의해 보이지 않게 된 포크 커틀릿의 쌀밥과 같다. 그러나 이 경우에 쌀밥 때문에 억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또 키이쿠니야 서점의 포장지로 싼 [여자에게 환심 사는 법]이란 책과 약간 비슷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있는 사람은 대개 커버보다도 내용을 더 좋아한다. 선그라스와 눈과의 관계는 어떤가. 선글라스를 낀 채로 목욕탕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눈은 오히려 돗자리보다 비극적 상태는 아니다. 명함에 의해 숨겨진 인격. 인격이란 것이 좋아 숨겨져 있기 때문에 이 또한 비슷하지 않다. 외국제 유명 브랜드로 치장하는 사람은 어떤가. 어쨌든 이런 경우가 가장 비슷하다. ◀오니온 수프▶ 우리들은 어머니 같은 자연스런 이끌림으로 섹스를 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 또 어머니 같은 자연스러움에 이끌려 두번째 섹스를 했다. "후유~" 첫번째 섹스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옆방에 있는 사자가 굼지럭대면 이빨을 닦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두번째 섹스는 정말로 멋졌다. 어떻게 멋있었는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말로 할 수 없는 일을 육체가 체험한다는 것은 대단히 멋진 일이다. 그런일 없이 사는 것은 삶에 의미가 없는 것이다. 새벽 한시, 두번째 섹스를 끝낸 뒤 나는 침대 옆에서 담배를 피웠다. 옆방에는 사자가 야식용 수프를 끓이고 있었다. 낯익은 양파 냄새가 문틈으로 흘러들어왔다. 부드러운 습기가 갑자기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조그만 손등으로 내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블루베리아이스크림▶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 새벽 두 시에 그녀가 말했다. 여자라는 사람은 정말로 적격이 아닌 시간에, 적격이 아닌 것만을 생각했다. 특별히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해도 나는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가 걸어가야 하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며 셔츠를 갈아입고는 큰 길로 나와서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든 좋으니까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주 십시요."나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그 다음은 눈을 감은채 하품을 해댔다. 십오분쯤 지나 택시는 잘 모르는 거리의, 잘 모르는 빌딩 앞에 멈 췄다. 무척 낡은 3층짜리 건물이었다. 현관만이 묘하게 컸다. 옥상 에는 잘 알 수 없는 기(旗)가 일곱 개 꽂혀있었다. "정말 여기가 아이스크림 파는 곳입니까?" 운전사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운전사는 말했다. 드라마 터지적인 전통에 따르면 정말 멋진 대답이었다. 나는 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빌딩 수납처에는 스무 살 쯤 되어보이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실제로 꼼짝도 안 하면서 정말로 바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 정을 지어보였다.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 ." 그녀는 하필 공교롭게 이런 때라는 불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 고는 정말로 멋진 파스텔 색조의 종이쪽지를 나에게 불쑥 내밀었다. "여기에다 주소와 이름을 쓰시고 3번 문으로 가보세요."나는 연필을 빌려서 종이쪽지에다 주소와 이름을 썼다. 그리고 터 널처럼 생긴 계단을 올라가 3번 문을 열었다. 방의 한 가운데는 탁 구대 크기의 테이블이 있었고 거기에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 다. 오 른쪽 손과 왼쪽 손에 서류를 한 장씩 들고는 서로 비교해보고 있었 다. "블루베리 아이스크림 - ." 말하고 종이쪽지를 내밀자, 남자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종 이에다 고무도장을 푹 찍어주었다. "6번 문으로 - ." 6번 문에 도착하기까지는 깊은 냇가를 건너야만 했다. 서치라이트 불빛이 냇물 위를 비추고 있었고 가끔 총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6번과 8번 문 사이에는 낡은 교회를 이용한 야전병원이 있었다. 다리인지 손인지를 여기저기 붕대로 감은 많은 수의 군인들이 잔디 밭에서 뒹굴고 있었다. 야전 병원 식당에는 세 드럼통 분량의 럼레 이즌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그러나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은 없었다. "블루베리는 14번." 요리사가 말했다. 14번 문은 야간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문짝만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문짝에는 메모 용지가 핀으로 붙어 있었다. "용무 있는 사람은 17번으로." 17번 문앞에는 낙타의 대군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밤의 어 둠 속은 낙타의 비명소리와 소변 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생각을 겨 우 가다듬어 우호적인 낙타 한 마리를 찾아내 17번 문을 열었다. 17번 문을 열자 그 안에는 멋진 옷을 입은 두 명의 중년남자와 굉 장히 큰 개미핥기가 벌써부터 오래전부터 서로 뒤엉켜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몸뚱이 여기 저기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들도 역시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노리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저주받을 블루베리 아이스크림. 그러나 나는 결코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두 명의 중년남 자와 그 커다란 개미핥기를 마치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에서처럼- 만도린 등판으로 그들을 차례대로 때려 죽였다. 그리고 냉동 금고를 열어 블루베리 아이 스크림을 꺼냈다. "드라이 아이스는 어느 정도로 넣어드릴까요." 매장의 여자가 물었다. "삼십 분." 나는 냉정히 대답했다.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집에 도착한 것은 새벽 다섯시였다. 그녀는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어시스턴트▶ 어시스턴트는 선생님이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놓은 만두를 사전 양해없이 먹어서는 안 된다. 어시스턴트는 선생님을 방문해온 여자 손님이 단지 미녀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사무실에 들여보내지 않아서는 안 된다. 어시스턴트는 차를 끓일 때 선생님에게는 재탕을 끓여드리면서 자신은 처음끓인 차를 마셔서는 안 된다. 어시스턴트는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 '저--.글쎄요'라는 말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어시스턴트는 선생님보다 많은 급료를 받는다거나 선생님보다 안락한 의자에 앉으면 안 된다. 어시스턴트는 명함에 함부로 '사장'이라는 글자를 인쇄해서는 안 된다. 이같은 이유로 해서 나는 영원히 어시스턴트가 될 생각을 버렸다. ◀잊혀진 왕국 ▶ 잊혀진 왕국 뒤편에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깨끗해서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수초가 자라고 있어서 물고기들은 그것을 먹으며 살았다. 물고기들은 왕국이사라지건 말건 상관없었다. 그건 그렇다. 물고기들에겐 왕국이니 공화국이나 하는 건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투표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세금 따위도 납부하지 않았다. "그런 건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야." 물고기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냇물에서 발을 씻었다. 냇물은 차가워서 잠깐 발을 담그고 있어도 금새 빨개졌다. 냇가에는 잊혀진 왕국의 성벽과 첨탑이 보였다. 첨탑에는 두가지 색으로 된 깃발이 게양된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냇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 깃발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것 봐. 저건 잊혀진 왕국의 깃발이야." * * * Q는 내 친구다. 또는 친구였다. 왜냐하면 Q와 나는 10여 년간 서로 친구다운 관계를 단 한 차례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친구였다고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는 친구였다. Q라는 인물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절망적인 무력감에 휩싸인다. 나는 원래 설명을 잘 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역시 Q라는 인물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 일을 시도할 때마다 깊고 깊은, 아주 깊고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 Q는 나와 동갑으로, 나보다 570배 가량은 핸섬하다. 성격도 좋다. 결코 남 앞에서 뽐내는 일이 없다. 자기 자랑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 실수로 자기에게 폐를 끼쳤다 하더라도 별로 화를 내지 않는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쳤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환경도 좋았다. 그의 아버지는 시코쿠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꽤 많은 용돈을 갖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특별히 낭비를 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 선수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테니스 부원으로 인터하이(고등학교 테니스부 경기)에도 나갔다. 취미는 수영으로 일주일에 두 번은 수영장에 갔다. 정치적으로는 온건한 자유주의자였다. 성적도 - 우수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 좋았다. 시험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학습량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수업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피아노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빌 에반스와 모짜르트의 레코드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소설은 발자크와 모파상 등 프랑스 문학을 좋아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글도 때때로 읽었다. 그리고 제법 날카로운 비평도 했다. 그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사귀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지적이고 예쁜 여자 친구가 있었다. 어는 전통 있는 여자 대학 2학년생으로 매주 일요일마다 데이트를 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대학 시절의 Q다. 뭔가 빠트린 말이 있는 것 같지만 그건 무엇이건 대수롭지 않은 것이리라. 한마디로 말해서 Q는 거의 흠잡을데 없는 인물이었다. 그 무렵, Q는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소금을 빌려 주거나 드레싱을 빌리러 오면서 우리는 친해졌다. 서로의 방을 오가며 레코드를 듣기도 하고, 함께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와 내 여자친구, Q와 그의 여자 친구, 이렇게 넷이서 가마쿠라까지 드라이브를 간 적도 있었다. 아주 유쾌한 나날이었다. 대학 4학년 여름에 내가 아파트를 나오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 * * 내가 Q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10년쯤 뒤였다. 나는 아카사카 근처에 있는 호텔 수영장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Q는 내 옆 의자에 않았다. Q옆에는 아슬아슬한 비키니 수영복을 걸친, 다리가 긴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Q의 동행이었다. 나는 Q를 한눈에 알아 봤다. Q는 여전히 핸섬했으며, 서른을 조금 지난 그에게는 예전엔 없었던 위엄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여자들이 지나가면서 흘끔흘끔 그를 훔쳐보곤 했다. 하지만 Q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평범한 얼굴인데다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Q는 옆의 여자와 이야기에 빠져 있었으므로 불쑥 아는 체 하면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와 Q 사이에는 공통의 화제가 거의 없었다. 소금을 빌려 주셨지요, 드레싱을 빌리러 왔지요. 이런 정도의 얘기 갖고는 그다지 대화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책을 읽었다. 수영장은 아주 조용했기 때문에 Q와 동행한 여자의 이야기는 듣기 싫어도 귀에 들어왔다. 아주 복잡한 이야기였다. 나는 책 읽는 것을 단념하고,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싫어요. 글쎄 싫다니까요. 농담 마세요." 다리가 긴 여자가 말했다.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당신이 하는 말은 잘 알아. 하지만 내가 하는 말도 이해해 달라구. 나라고 해서 뭐 이런 일이 좋아서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결정한 게 아니야. 위에서 결정한 일을 당신한테 전달하는 것 뿐이라구.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Q는 말했다. "흥, 어쩐지." 여자가 말했다. 물론 상당 부분은 나의 상상이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Q는 방송국에서 디렉터 일을 맡고 있었고, 여자는 좀 유명한 가수인가 여배우였다. 그런데 여자 쪽에서 무슨 트러블인지 스캔들을 일으켜 - 어쩌면 그저 단순히 인기가 떨어졌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 고정 프로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현장의 직접적인 책임자 Q가 그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연예계 쪽에는 그다지 밝지 않아서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지만, 아마 줄거리의 대강은 그다지 틀리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들은 대로라면 Q는 성실하게 그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우리는 스폰서 없이는 일을 해나갈 수 없어. 당신도 이 세계에서 잔뼈가 굵었으니까 그 정도는 알 거 아니야." Q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한테는 전혀 책임도 발언권도 없단 말인가요?" "글쎄,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아주 제한되어 있어." 그리고 두 사람은 끝이 나지 않는 대화를 계속했다. 여자는 Q가 자기를 지켜 주기 위해 어느 정도 노력했는지 알고 싶어했다. "힘 닿는 데까지는 노력해 봤어." Q가 말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여자는 믿지 않았다. 나도 별로 믿어지지 않았다. Q가 성실하게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불성실한 공기가 안개처럼 주위에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Q의 책임은 아니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대화에는 출구가 없었다. 여자는 이제까지 Q에 대한 호감을 품어왔던 것처럼 보였다. 이번 일이 있기까지 두 사람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더욱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여자가 단념을 했다. "알겠어요. 이제 됐으니까 콜라나 사주세요." Q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놓이는 듯이 가볍게 일어나 매점으로 갔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가만히 앞 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같은 페이지의 똑같은 문장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었다. 잠시 후 Q는 콜라가 들어 있는 종이컵을 두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하나를 여자에게 건네주고, 의자에 걸터 앉았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그러다 보면 또 분명히......." 그때,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콜라 컵을 Q의 얼굴을 향해 내 던졌다. 컵은 Q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 L사이즈 컵에 든 코카콜라 3분의 2가 Q를 덥쳤고, 3분의 1은 나에게 뿌려졌다. 그런 다음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수영복의 엉덩이 부분을 조금 끌어 내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나와 Q는 15초 가량 넋을 놓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깜짝 놀란 듯이 우리를 쳐다봤다. 먼저 침착을 되찾은 건 Q였다. "죄송합니다." 그는 타월을 내밀며 정중히 사과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샤워를 하면 되지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가볍게 거절했다. Q는 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타월을 거두어 자기 몸을 닦았다. "새 책을 사드리죠." 책은 푹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싸구려 문고판이었고, 그다지 재미있는 책도 아니었다. 누군가 콜라를 뿌려서 읽지 못하게 도와준 것만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Q는 빙긋이 웃었다. 옛날처럼 기분 좋게 웃는 얼굴이었다. Q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사과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 * *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잊혀진 왕국'으로 한 것은, 그날 석간 신문에서 우연히 아프리카의 어는 잊혀진 왕국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왕국이 퇴색해 가는 것은.....' 이렇게 시작된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었다. '후진 공화국이 붕괴되는 것보다 훨씬 서글프다.' ◀스파게티의 해에▶ 1971년은 스파게티의 해였다. 1971년에, 나는 살아가기 위해 스파게티를 계속 삶았고, 스파게티를 삶기 위해 계속 살아갔다. 알루미늄 냄비에서 피어 오르는 증기야말로 나의 자랑 이고, 소스팬 속에서 부글거리는 토마토 소스야말로 나의 희망이었다. 나는 주방 용품 전문점에 들러 독일 셰퍼드를 목욕시키는 데라도 사용될 법한 거대한 알루미늄 냄비를 손에 넣고, 쿠킹 타이머를 사고, 외국인용 슈퍼마켓을 돌며 기묘한 이름의 조미료들을 사고, 양서(洋書)를 파는 책방 에서 스파게티를 전문으로 다룬 책을 발견하고, 한 박스 단위로 토마토를 샀다. 나는 모든 종류의 파스타를 사들여 온갖 종류의 소스를 만들었다. 마늘이나 양파, 올리브 오링 따위의 냄새를 미세한 입자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서, 혼연 일체가 되어 내가 살고 있던 좁은 단칸방의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바닥이나 천장이나 벽에도, 양복이나 책이나 레코드 재킷에도, 테니스 라켓이나 오래된 편지 뭉치에도 배어 들었다. 마치 고대 로마의 하수도와도 같은 냄새였다. 서기 1971년인 스파게티의 해에 있었던 일들이다. * * * * 기본적으로 나는 혼자서 스파게티를 삶고,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누구 와 둘이서 먹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서 먹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그 무렵의 나는 스파게티란 혼자서 먹어야 하는 요리인 양 생각했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유는 잘 알 수 없다. 스파게티를 먹을 때는 언제나 홍차를 마셨다. 샐러드도 만들었다. 대개 양상추와 오이를 섞기만 한 간단한 샐러드였다. 하지만 양만은 충분했다. 그것 들을 식탁에 가지런히 올려 놓고, 신문을 훑어보며 천천히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일요일 에서 토요일까지 스파게티를 먹는 나날이 계속되고, 그게 끝나 면 새로운 일요일 부터 새로운 스파게티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고 있으면 곧잘 금방이라도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을까하는 느낌이 들었다. 비 내리는 날의 오후는 특히 더 그랬다. 내 방을 찾아오려고 하는 인물은 그때마다 달랐다. 어떤 때는 알지도 못하는 인물이고, 어떤 때는 본 기억이 있는 인물이었다. 또, 어떤 때는 고등학교 때 단 한 번 데이트한 적이 있는, 다리가 가느다란 아가씨고, 어떤 때는 몇해 전의 나 자신이며, 어떤 때는 제니퍼 존스를 데리고 온 윌리엄 홀든이기도 했다. 월리엄 홀든? 그러나 그들 중 누구 하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확실히 기억의 자투리 답게 문밖을 서성거릴 뿐, 결국은 노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어디론가 떠나 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봄과 여름, 가을에 걸쳐 나는 스파게티를 계속 삶았다. 그건 마치 무엇에 대한 복수와도 같았다. 배반한 연인이 예전에 보내온 연애 편지 뭉치를 난로 속에 집어 넣는 고독한 여자처럼, 나는 스파게티를 계속 묵묵히 삶았다. 나는 짓밟혀진 시간의 자취를, 그릇 속에서 독일 셰퍼드와도 같은 모양으로 반죽하여, 펄펄 끓는 물 속에 집어 넣고 소금을 뿌렸다. 그리고 기다란 젓가락 을 손에 들고 알루미늄 냄비 앞에서서, 쿠킹 타이머의 찌르릉 하는 비통한 소리 가 울릴 때까지 한발짝도 거기를 떠나지 않았다. 스파게티들은 굉장히 교활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로부터 눈을 딴 데로 돌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냄비 가장자리를 슬쩍 넘어 밤의 어둠 속으로 잠입해 버릴 것 같았다. 열대의 정글이 원색의 나비들을 영겁의 시간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삼켜 버리는 것처럼, 밤의 어둠 역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스파게티 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파게티 알라 파르미쟈나(spagetti alla parmigiana) 스파게티 알라 나폴레타나(spagetti alla napoletana) 스파게티 알라 프레마트라(spagetti alla premature) 스파게티 알 카르토치오(spagetti al cartoccio) 스파게티 알라 알리오 에 올리오(spagetti alla aglio e olio) 스파게티 알라 카르보나라(spagetti alla carbonara) 스파게티 델라 피나(spagetti della pina) 그리고 냉장고 속의 남은 음식을 아무렇게나 집어 넣어 만든-이름도 없는-가엾은 스파게티들. 스파게티들은 증기 속에서 태어나, 시냇물처럼 1971년이라는 시간의 경사면을 흘러 내려가고,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들을 애도한다. 1971년의 스파게티들. * * * * 3시 20분에 전화 벨이 울렸을 때, 나는 다다미 바닥에 드러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의 햇살이 마침 내가 누워 있는 부분에만 햇빛의 풀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마치 죽은 파리처럼 1971년 12월의 햇살 속에서 몇 시간이나 멍하니 드러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전화 벨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마치 공기의 층 사이로 조심스레 살짝 들어온, 본 기억이 없는 '기억'의 단편처럼 느껴졌다. 벨 소리가 여러번 울리는 동안에, 겨우 그것은 전화 벨 소리로서의 체제를 띠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100퍼센트 확실한 전화 벨 소리가 되었다. 100퍼센트의 현실의 공기를 진동시키는 100퍼센트의 전화벨 소리다. 나는 드러누운 채로 손을 뻗 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걸어 온 상대는 한 아가씨였다. 아주 인상이 희미하고, 오후 네 시 반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가씨였다.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사 람의 예전 연인이었다. 그 남자와 그 인상이 희미한 아가씨는 어떤 연유로 함 께 지내게 되고, 그리고 또 어떤 연유로 해서 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두 사 람이 서로 알게 되는 데에 확실히 내가(내키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중간 역 할을 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전화기를 바라보고, 전화 코드를 살펴보았다. 코드는 제대로 전화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쩐지 좀 불길 해서 나는 되도록이면 그러한 문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요. 모두 모르는 체해요. 하지만 중요한 용건이 있어요. 부탁이에요. 가르쳐 줘요. 당신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을 테니까요. 그는 지금 어디에 있죠?" 하고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몰라요. 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거든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말해 보았지만, 그것은 전혀 내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오랫동안 그와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소와 전화 번호는 알고 있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면 목소리가 아주 이상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화기는 얼음 덩어리처럼 차가워졌다.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게 얼음 덩어리로 변해 갔다. 마치 J.G.발라드의 사이언스 픽션의 한 장면처럼. "정말로 몰라요. 오래 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요" 하고 나는 되풀이해 말했다. 전화기에 대고 그녀는 웃었다. "농담하지 마세요. 그만큼 생각이 세심한 데까지 미치는 남자가 아녜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요. 그는 주변에 떠들어대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남자인걸요." 그녀의 말이 맞다. 그다지 생각이 세심한 데까지 미치는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줄 수는 없었다. 내가 가르쳐 준 것을 알면, 이번에는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올 것이다. 쓸데없는 소란에 말려들 기는 싫었다. 나는 언젠가 결심을 하고는 뒷마당에 깊은 구멍을 파고, 모든 걸 거기에 묻어 버린 것이다. 이젠 아무도 그것을 다시 파낼 수는 없다. "미안하지만"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나를 싫어하는 거죠?"하고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나는 특별히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나는 그녀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이라는 게 없었기 때 문이다. 인상이 없는 인간을 싫어할 수는 없다. "미안하지만"하고 나는 되풀이해 말했다. "지금 스파게티를 삶고 있는 중이에요" "네?" "스파게티를 삶고 있다구요"하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해버 렸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내 마음과 썩 잘 어울렸다. 그 것은 그 때의 나에게 있어서는 전혀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냄비 속에 공상 (空想)의 물을 붓고, 공상의 성냥으로 공상의 불을 붙였다. "그래서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펄펄 끓는 물에 공상의 소금을 뿌리고, 공상의 스파게티 뭉치를 살짝 집어 넣고, 공상의 쿠킹 타이머를 12분에 맞췄다. "그래서 지금은 손을 놓을 수가 없어요. 스파게티가 뒤엉키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스파게티는 삶는 게 꽤 까다롭거든요." 그녀는 침묵했다. 수화기는 내 손에 쥐어진 채 다시 얼음 덩어리처럼 차가워 지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하여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까, 나중에 한 번 더 전화를 걸어 주지 않겠어요?" "스파케티를 한창 삶고 있는 중이니까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네, 그래요." "그 스파게티는 누구를 위해 삶고 있나요? 아니면 당신 혼자서 먹을 건가요?" "혼자서 먹어요." 그녀는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어요. 이제 어쩔 도리가 없어요."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해요"하고 나는 말했다. "돈 문제도 있고요." "네." "돌려주었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주었거든요. 빌려 주어서는 안 되었는데 말예요. 하지만 빌려 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스파게티에 대해 생각하다가, "미안하지만"하고 말했다. "스파게티를 삶고 있으니까요." "네."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안녕히 계세요. 당신의 스파게티에게 안부 전해 줘요. 맛있으면 좋겠군요." "안녕히 계세요."하고 나도 말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 바닥 위의 햇살의 풀은 몇 센티미터인가 이동해 있었다. 나는 그 햇살 속에 한 번 더 드러누워, 천장을 쳐다보았다. * * * * 영원히 삶아지는 일 없이 끝나 버린 한 뭉치의 스파게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때 그녀에게 모든 걸 다 가르쳐 주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약간 후회하고 있다. 어차피 상대는 대수로운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자칭 예술가인 척하는, 실없고 텅 빈 남자였다. 말솜씨만 좋고, 거의 누구에게도 신용을 받지 못했다. 그때 그녀는 정말로 돈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리라. 그리고 빌린 돈은 어떤 사정이 있든 간에 빌려 준 사람에게 분명히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나는 이따금 생각한다. 대게는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그녀는 전화를 끊은 다음, 그대로 오후 네 시 반의 환영에게 삼켜져 사라져 버린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내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누구하고도 관련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 혼자서 스파게티를 삶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독일 셰퍼드를 집어 넣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냄비에다가. 듀람 세모리나. 이 탈리아의 평야에서 자란 황금색 보리. 1971년에 자신들이 수출한 것이 '고독'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았다면, 이탈리아 인들은 아마도 깜짝 놀랐으리라. ◀강오리▶ 좁은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서자 길다란 복도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천장이 높아서 그런지 복도는 고갈된 배수관처럼 보였다. 군데군데 붙어 있는 형광등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그 빛은 가는 망을 빠져나온듯 불균일했다. 게다가 세 개 중에 하나는 전구가 빠져 있었다. 앞을 내다 보는 것도 힘들 정도로 어둠침침했다. 주위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다만 운동화 고무 밑창이 콘크리트를 밟는 평평한 음만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흐릿한 복도에서 울렸다. 2맥 미터인가, 3백 미터인가, 아니 족히 1킬로는 걸은 것 같다.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걸었다. 거리도 없고, 시간도 없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감각조 차도 잃어버렸다. 하지만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T자로가 나타났다. T자로? 나는 윗옷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엽서를 꺼내 찬찬히 다시 읽어 보았다. "복도를 똑바로 걸어가시오. 막다른 곳에 문이 있습니다." 엽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주의 깊게 벽을 훑어 보았지만, 거기에는 문의 그림자도 없었다. 문이 있었다는 흔적도 없고, 앞으로도 문이 설치될 것 같지 않은 곳이다. 그것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일 뿐, 무엇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형이상학적인 문도, 상징적인 문도 비유적인 문도 없었다. 이거야 원. 나는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신중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내게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었다. 나는 가난한 생활에 충분히 질력이 나 있었다. 월부금, 이혼한 부인에게 줘야 할 위자료, 좁은 아파트와 욕실의 바퀴벌레, 러시아워의 지하철.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가까스로 얻은 짭짤한 일거리가 바로 이 일이다. 일은 편하고, 급료는 많다. 일년에 보너스 두 번, 여름에는 장기 휴가. 문 하나, 모퉁이 하나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운동화 바닥으로 담배를 부벼 끄고, 10엔짜리 동전을 하늘에 날려서 손등으로 받았다. 앞. 나는 우측으로 나아갔다. 복도는 오른쪽으로 두 번 꺽어지고, 한 번은 왼쪽으로 계단을 열칸쯤 내려서서 다시 우측으로 꺽였다. 공기는 식은 커피처럼 썰렁했다. 나는 돈을 생각하고, 에어콘이 들어 오는 기분 좋은 오피스를 생각하고, 멋쟁이 여자를 떠올리면서 계속 걸어갔다. 문에 도달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윽고 앞쪽에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에서 보기에 그것은 써버린 우표같이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서면서 조금씩 확실한 문이 되었다. 문, 확실히 문이다. 나는 헛기침을 크게 하고,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한 발 물러나서 대답을 기다렸다. 15초가 지나도록 대답이 없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조금 강하게 노크하고, 다시 한 발 물러선다.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다. 공기가 조금씩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세번째 노크를 하려고 할 때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마치 바람에 밀려서 열린 것 같이 자연스러웠다. 그 때 전등불을 켜는 소리가 들려 오고, 한 남자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나보다 5센티 정도 작았다. 이제 막 머리를 감았는지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갈색의 알몸을 바쓰로브로 감싸고 있었다. 펜습자 견본책과 같은 또렷한 얼굴 생김이기는 했지만, 입가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목욕 중이어서." "목욕이요?" 나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봤다. "규칙이죠. 점심식사 후에는 반드시 목욕을 해야 한다는." "그렇군요." "그런데 용건이 뭐죠?" 나는 윗옷 주머니에서 엽서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물을 뭍히지 않으려는 듯 손가락 끝으로 집어들고 몇 차례 읽었다. "5분 정도 늦기는 햇지만......." 나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으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엽서를 내게 돌려주었다. "여기서 일하게 되신 모양이군요." "그래요." 나는 말했다. "나는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지만, 하여튼 윗분에게 연결해 드리지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암호는?" "암호라니요?" "암호에 대해서 듣지 못했나요?" 나는 멍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이거 곤란한데. 암호 없이는 아무도 들여 보내지 말라는 윗 사람의 강력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엽서를 읽었지만, 역시 암호는 없었다. "엽서에 쓰는 걸 잊었나 보죠. 그래도 윗분에게 연락해 줄 수는 없을까요?" "그러니까, 그것을 위해서 암호가 필요한 거요."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으려 했지만, 바쓰로브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내밀고 불을 붙여 주었다. "곤란한데......, 그런데 무언가......, 암호 비슷한 것이라도 생각나는 것이 없나요?" 암호 따위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나는 고래를 저었다. "나도 이런 귀찮은 일은 좋아하지 않지만, 윗분에게는 윗분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알겠습니다만......"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도 암호를 잊어 버리고 손님을 한 사람 연결시켜 주었다가 목이 날아갔소. 요즈음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은 많지 않으니까요." 나는 끄덕였다. "저, 이건 어떻습니까? 약간 만이라도 힌트를 준다면......" 남자는 문에 기대 선 채로 담배 연기를 하늘로 뿜어댔다. "그것은 금지 사항인데요." "조금만이라도." "하지만 누군가 도청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내게 귓속말을 했다. "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쥘 수는 있지만, 먹을 수는 없죠." 이번에는 내가 생각할 차례이다. "첫 발음은 뭐죠?" "강."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강아지."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았다. "아니오." 그는 잘라 말했다. "기회는 두 번이오." "두 번이라니요?" "앞으로 두 번 더 틀리면 그것으로 끝이요. 미안하지만 나도 위험을 무릅쓰고 규칙을 깨면서까지 힌트를 줬으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만 힌트를 더 줄 수는 없을까요. 예를 들자면 몇 글자인지." "전부 다 말해 달라는 거요?" "그럴 수야 없죠." 나는 시치미를 뗐다. "다만 몇 글자인지만 가르쳐 달라는 거죠." "세 글자." 그는 포기한 듯이 말했다. "아버지가 말한 그대로군." "무슨 소리인지 몰라 반문했다. "아버지가 자주 말했죠. 구두를 닦아 주면, 그 다음에는 구두끈을 묶어달라고 한다고 말이오." "그건 맞는 말이군요." 나는 건성으로 말했다. "하여간, 세 글자요." "물과 관계가 있고, 손바닥 만한 크기지만 먹을 수는 없다?" "바로 그거에요." "강오리." 나는 말했다. "강오리는 먹을 수 있습니다." "아닐 텐데요......" "맛은 없어도......." 그는 자신 없다는 듯이 말했다. "게다가 손바닥에 안 들어가잖소."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그는 역시 자신 없게 말했다. "강오리." 나는 계속 억지를 썼다. "손에 들어가는 강오리는 너무 맛이 없어서 개도 안 먹는다구요."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암호는 강오리가 아니오." "하지만, 물과 관계가 있고, 손바닥 만하지만 먹을 수는 없다. 게다가 세 글자." "억지 부리지 마세요. 당신은 틀렸으니까." "어디가 틀렸단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암호는 강오리가 아니란 말이오." "그럼 뭐요?" 그는 일순간 말을 잃었다. "그것은 말할 수 없죠."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렇죠?"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다. "강오리 이외에 물과 관계가 있고, 손바닥 만하며, 세 글자인 것은 아무 것도 없잖소." "하지만 분명히 있소." 그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없어요." 나도 지지 않고 버텼다. "있다니까 그러네." "있다는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나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게다가 강오리는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지 않소?" "하지만 그 뭐야......강오리를 먹는 개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어디에 있죠? 그리고 어떤 개요?" "으음." 그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나는 개에 대해서라면 모르는게 없는 사람이요. 하지만 강오리를 먹는 개는 본 적도 없소." "그렇게 맛이 없나요?" "섬뜩하게 맛이 없지요." "당신은 먹은 적이 있나 보죠?" "없어요. 그렇게 맛 없는 것을 내가 미쳤다고 먹겠소." "그건 그렇군요." "여하튼 윗사람에게 전해 주시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강오리." "할 수 없군." 그는 포기하고 말했다. "일단은 연결해 드리죠. 무리이기는 하지만." "고맙습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런데 손바닥 만한 강오리가 정말 있습니까?" "있죠." 손바닥에 올라가는 강오리는 빌로우드 천으로 안경을 닦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른쪽 어금니가 욱신거렸다. 치과에 가야 하나 하고 그는 생각한다. 지겨워 죽겠다. 치과 의사, 확정 신고, 자동차 할부금, 에어콘 고장...... 그는 껍질 뿐인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죽음은 깊은 바다처럼 조용했다. 손바닥 만한 강오리 여기에 잠들다. 그 때 인터폰 부져가 울렸다. "뭐야?" 손바닥 만한 강오리는 기계에 대고 소리쳤다. "손님입니다." 인터폰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손바닥만한 강오리는 손목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15분 지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