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신문 지하철 긴자 선에서 난동 부리는 큰 원숭이 이야기를 들은 지 이미 몇 개월 된다. 나는 친구들한테서 여러 번 그들이 겪은 체험담을 들었고, 직접 이 눈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큰 원숭이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도, 신문에서 그에 대한 기사를 본 적도 없고, 경찰이 조사를 시작한 흔적도 없다. 신문이나 경찰이 큰 원숭이의 저주를 '별것 아닌 것' 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크게 반성하라고 말하고 싶다. 큰 원숭이들의 활동 범위는 현재로서는 지하철 긴자 선 차량에 한정되어 있지만, 이것이 마루노우치 선이나 한조몬 선으로 확대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되고 나서 뭔가 조치를 취하려 한다면, 그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내가 목격한 것은 비교적 해가 크지 않은 수준의 '큰 원숭이의 저주' 였다. 2월 15일, 즉 발렌타인데이 다음날의 일이다. 나는 오모테산도에서 긴자 선을 타고 도라노몬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옆에서는 40대 전반으로 보이는 단정한 옷차림의 샐러리맨이 마이니치 신문 조간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달러의 하락이 미국 경제에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인가?' 라는 기사였다. 나는 그 밑에 있는 '5킬로 마르면 인생이 바뀐다' 라는 신간서적의 광고를 힐끔힐끔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철이 점차 아카사카 미츠케에 가까워지고, 여느 때처럼 차내의 불이 꺼지고, 다음 순간 다시 켜졌다. 그러나 내가 다시 한 번 옆자리의 마이니치 신문에 눈길을 주었을 때, 거기에는 이변이 일어나 있었다. 신문의 좌우가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저런, 저런. 또 큰 원숭이 녀석들 짓이군요." 샐러리맨이 나에게 말했다. "정말이지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나도 말했다. 이런 일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어서는 정말이지 곤란하다. 하루키-호른 예컨대 호른이라는 악기가 있다. 그리고 그 호른 연주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일은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이런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내 머리는 입체적인 미궁처럼 혼란스러워진다. 왜 그게 호른이어야만 했을까? 왜 그는 호른연주자가 되었고, 나는 되지 않았을까? 어떤 한 인간이 호른 연주자가 된다는 행위에는, 어떤 한 인간이 소설가가 되는 것보다 더 많은 수수께끼가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을 풀기만 하면 인생의 모든 것을 간단히 알 수 있는 그런 수수께끼가.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내가 소설가이지 호른 연주자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호른 연주자였다면, 어떤 한 인간이 소설가가 된다는 행위 쪽이 훨씬 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 날 오후ㅡ 깊은 숲 속에서 호른 우연히 맞닥뜨렸을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상상해본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따위를 하다가 아주 의기투합해져서, 그래서 그는 직업적인 호른 연주자가 된 것이다, 라고. 혹은 호른은 그에게 극히 호른적인 신세타령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소년 시절이라든가, 성적인 고민이라든가 그러한 것을. "바이올린이라든가, 플루트 일 같은 건 난 잘 몰라"라고 호른은 나뭇가지로 땅바닥을 후비면서 말했을는지도 모른다. 커피를 마시는 어떤 방법에 대하여.....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中에서) 그날 오후에는 윈톤 켈리의 피아노가 흘렀다. 웨이트리스가 하얀 커피잔을 내 앞에 놓았다. 그 두툼하고 묵직한 잔이 테이블 위에 놓일 때 카탕하고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마치 수영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자그마한 돌멩이처럼, 그 여운은 내 귀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나는 열여섯이었고, 밖은 비였다. 그 곳은 항구를 낀 아담한 소도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늘 바다냄새가 풍겼다. 하루에 몇 번인가 유람선이 항구를 돌았고, 나는 수업이 그 배에 올라타 대형 여객선과 도크의 풍경을 질리지도 않고 바라보곤 했다. 설사 그것이 비 내리는 날이라해도, 우리는 비에 흠뻑 젖어 가며 갑판 위에 서 있었다. 항구근처에 카운터 외에는 테이블이 딱 하나밖에 없는 조 촐한 커피집이 있어, 천장에 붙어 있는 스피커에서는 재즈가 흘러 나왔다. 눈을 감으면 깜깜한 방에 가두어진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 찾아왔다. 거기 엔 언제나 친숙한 커피잔의 온기가 있었고, 소녀들의 보드라운 향내가 있었다. 내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커피맛 그것보다는 커피가 있는 경 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내 앞에는 저 사춘기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이 있고, 거기에 커피를 마시는 내 자신의 모습이 또렷 하게 비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의 배후로는 네모낳게 도려내진 작은 풍경이 있었다.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선율처럼 따듯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은 나를 축복했다. 그것은 또한 아담한 소도시에서 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해 가기 위한 은밀 한 기념사진이기도 하다. 자, 커피잔을 가볍게 오른손에 쥐고, 턱을 당기고, 자연스럽게 웃어요……. 좋았어, 찰칵.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다 주는 따스함의 문제, 라고 리차드 브로티간의 작품 어딘가에 씌어 잇다. 커피를 다룬 글 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 제일 흡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