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립다나는 스프를 먹으면서 졸았다. 스푼이 손에서 떨어지는 순간 접시에 부딪히며 '쨍그랑' 하고 꽤나 요란한 소리를 냈다. 주위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옆자리에서 그녀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 순간을 얼버무리기 위해서 오른쪽 손바닥을 펼치고, 앞뒤로 뒤집으면서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척했다. 스프를 먹으면서 깜박 졸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15초 가량 오른손을 점검하는 척하며 살짝 심호흡을 하고, 다시 옥수수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뒷골이 뻣뻣하게 마비되어 있었다. 사이즈가 작은 야구 모자를 눌러 쓴 것처럼 뒤통수가 뻐근했다. 스프 접시 위로 30센티쯤 올라온 곳에 계란형의 하얀 가스가 둥실 떠 있었다. '눈치 같은 건 볼 필요 없어. 괜찮아, 괜찮다구, 더이상 참지 말고 자라구, 자.' 그 가스가 나를 향해 은밀히 속삭였다. 아까부터. 계란형의 하얀 가스는 주기적으로 윤곽이 선명해졌다가 이내 희미해지곤 했다. 그리고 그 윤곽의 세밀한 변화를 확인하려고 하면 할수록, 눈꺼풀은 조금씩 무거워졌다. 나는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고, 눈을 꼬옥 감거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서 그 가스를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스는 계속 테이블 위에 떠있었다. 잠이 쏟아졌다. 나는 졸음을 쫓기 위해 스푼을 입으로 옮기면서 머리 속으로 옥수수 스프의 철자를 써 보았다. 'corn poatage soup' 너무 간단해서 효과가 없었다. "스펠링이 어려운 단어를 하나만 말해 봐." 나는 그녀를 향해서 슬쩍 말했다. 그녀는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었다. "미시시피" 그녀는 주위에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 속으로 미시시피란 철자를 써 보았다. 'Mississippi' s가 4개, i가 4개, p가 2개. 묘한 단어다. "그것 말고 더 까다로운 건?""좀 조용히 하고 먹기나 하세요.""난 지금 굉장히 졸리단 말이야.""알고 있어요. 하지만 부탁이니 졸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아까부터 이쪽을 보고 있단 말이에요."그녀는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역시 결혼식 같은 데 오는 게 아니었다. 신부 쪽 친구 테이블에 남자가 앉아 있다는 것도 어색하거니와, 사실 나는 신부의 친구도 아니었다. 애시당초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딱 잘라 거절해야 했다. 그랬던들 나는 지금쯤 침대 위에서 늘어지게 잘 수 있었을 것이다. "요크셔 테리어." 그녀가 불쑥 엉뚱한 말을 했다. 스펠링을 대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Y.O.R.K.S.H.I.R.E.T.E.R.R.I.E.R"이번에는 소리 내어 스펠링을 말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스펠링 테스트는 자신이 있었다. 언제나 반에서 일등을 차지했다. 틈만 있으면 사전만 읽었다."좋아요. 앞으로 한 시간만 버티면 돼요. 그러면 실컷 자게 내버려 둘게요." 나는 스프를 다 먹고, 연거퍼 세 번이나 하품을 했다. 몇 십명의 웨이터가 몰려와서 스프 접시를 가져가자, 그 뒤에는 셀러드와 빵이 나왔다. 꽤나 긴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구나 싶은 느낌이 들 정도로 퍽이나 모양에 신경을 쓴 빵이었다. 누군가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축사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즐거우나 괴로우나 항상 함께하고......하는 판에 박힌 이야기였다. 나는 다시 졸기 시작했다. 그녀가 구둣발로 내 복사뼈를 걷어찼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 졸리는 건 난생 처음이야.""도대체 어제 저녁에 무얼 했길래 그러는 거예요?""밤새 이것저것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자지 못한 것 뿐이야.""자자, 쓸데없는 생각은 이제 그만 두세요. 그리고 아무튼 졸지 마세요. 내 친구 결혼식이란 말이에요.""내 친구는 아니야" 나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녀는 빵을 접시 위에다 도로 올려 놓고는 아무 말도 않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나는 체념을 하고 조개 그라탕을먹기 시작했다. 고대의 생물 같은 맛이 나는 조개였다. 조개 그라탕을 먹으면서 나는 날렵한 익수룡이 되어 눈깜짝할 사이에 원시림을 가로질러 황량한 지표를 냉철하게 내려다 보았다. 지표에서는 온화해보이는 중년의 피아노 선생님이 신부의 국민학교 시절에 대한 추억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있으면 이해 될 때까지 질문을 해대는 아이였습니다. 그 만큼 다른 아이들보다 진도가 늦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누구보다도 멋드러지게 피아노를 쳤지요. 흐응, 하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저 분을 따분한 여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에요."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그래?"나는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그녀는 입 가까이까지 가져간 스푼을 허공에서 멈춘 채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정말이에요. 물론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왜 이래. 믿는다구. 그저 지금은 졸릴 뿐이야.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그 믿음이 더욱 강해질거야." 그녀는 잠자코 스푼을 접시 위에 내려 놓고, 무릎 위에 있던 흰 냅킨으로 입 가장자리를 닦았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플래시가 여러 번 터졌다."그저 졸릴 뿐이란 말이야."나는 툭 쏘듯이 말했다. 옷가방도 없이 낯선 거리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내 앞에 스테이크 접시가 놓여졌는데, 그 위에도 역시 하얀 가스가 둥실 떠 있었다. '여기에 하얀 시트가 펼쳐져 있어.' 하얀 기체가 말을 걸었다.'세탁소에서 막 찾아온 빳빳한 시트란 말이야. 알겠지? 너는 거기에 들어가서 자기만 하면 돼. 약간 서늘한 기운이 감돌지만, 그러면서도 포근하기 이를 데 없지. 그리고 태양 냄새가 솔솔 풍긴단 말이야.' 그녀의 조그만 손이 나의손등에 와닿는 순간, 엷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녀의 가늘고 찰랑찰랑한 머리카락이 나의 뺨을 스쳤다. 나는 번쩍 눈을 떴다."이제 조금만 참으면 끝나요. 부탁이에요." 귀에 대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가슴이 두드러져 보이는 하얀 실크 원피스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들고, T자로 금을 긋듯이 천천히 고기를 잘랐다. 사람들은 시끌벅적 지껄여 대고,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거기에 뒤섞여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결혼식에 참석할 때마다 졸립다구. 언제나 늘, 그래."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설마."그녀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정말이라구. 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결혼식에 오기만 하면 잠이 쏟아진단 말이야. 지금까지 졸지 않은 결혼식은 한 번도 없었어."그녀는 나이프와 포크를 양손에 집어든 채 말똥말똥 나를 쳐다 보았다."그래서 오늘 결혼식에도 오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거든. 하지만 당신이 오자고 하도 졸라서 마지 못해 온 거라구. 거절하면 화를 낼 것 같아서......" "꾸며낸 이야기 아니에요?"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흔들었더니 뒷골이 당기고 아팠다."내가 왜 허튼 소리를 하겠어. 사실이라구." 그녀는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 위에다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다음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지저분한 글씨로 씌어진 답안지를 앞에다 놓았을 때 같은 얼굴을 했다. 살짝 눈썹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무슨 콤플렉스가 아닐까요?""그럴지도 모르지.""틀림없이 콤플렉스에요.""그러고 보니 이따금 백곰과 함께 창문 유리를 깨부수고 돌아 다니는 꿈을 꾸곤해. 하지만 그건 펭귄 잘못이야. 펭귄이 나하고 백곰한테 억지로 누에콩을 먹인단 말이야. 그것도 굉장히 커다란 녹색 누에콩을......" 나는 농담을 했다."그만 두세요."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결혼식에 오기만 하면 졸립다는 건 사실이라구. 한번은 맥주병을 엎질렀고, 한 번은 나이프와 포크를 세 번씩이나 마룻바닥에 떨어뜨렸어.""딱도 해라."그녀는 고기의 비계 부분을 꼼꼼히 자르면서 그렇게 말했다."당신, 사실은 결혼한 거 아녜요?""그래서 다른 사람 결혼식에서 잔다, 그건가?""복수죠.""잠재적 욕망에서 배출되는 복수 행위?""그래요.""그럼 지하철을 탈 때마다 자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탄광 갱부의 욕망, 그렇게 되나?"그녀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스테이크 먹는 것을 단념하고,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그러니까......"그녀는 잠시 있다가 말을 이었다."당신은 언제까지라도 어린 아이로 남아 있고 싶은 거에요."우리는 잠자코 검정 구즈베리 샤베트를 먹고, 뜨거운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셨다."졸려요?""응, 아직도 좀.""내 커피 마실래요?""고마워." 나는 두 잔째 커피를 마시고, 두 가치째 담배를 피고, 서른여섯번째 하품을 했다. 하품을 다 하고 나서 얼굴을 들었을 때는 테이블 위의 하얀 가스도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때와 똑같다. 가스가 사라질 때 쯤이면, 테이블에 답례품으로 케이크 상자가 돌려지게 된다. 그리고 나의 졸음은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것은 결혼식의 시작과 더불어 찾아왔다가, 끝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다. 콤플렉스?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틀리다. 나는 그저 졸릴 뿐이다. "수영하러 안 갈래?"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지금?""아직 해는 길어.""그렇긴 하지만, 수영복은 어떻게 하고요?""호텔 매점에서 사면 되지." 우리는 케이크 상자를 들고, 호텔 복도를 따라 매점까지 걸었다. 일요일 오후의 호텔 로비는 결혼식 축하객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미시시피'라는 단어에는 정말로 s가 네 개 씩이나 들어 있는 건가?""몰라요, 그런 건. 그런 거 알아 가지고 무슨 득이 있어요, 도대체?"그녀 목덜미에서는 근사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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