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완전히 멈춰 버렸다. 멍하니, 인형처럼 텅 비어 있었다. 피렌체 발 밀라노 행 기차의, 4인석 닳아빠진 좌석에 몸을 털썩 맡기면서. 폭풍우 같은, 그리고 빛의 홍수 같은, - 아오이. 일어선 쥰세이는, 옆얼굴로 저녁 햇살을 받고 있었다. 학생 시절보다 얼굴이 날칵로워 보였다. - 오고 말았어. 나는 말했지만, 그러나 말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나는 쥰세이 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티셔츠만으로는 다소 쌀쌀한, 초여름 두오모의 지는 해 속에서, - 기다리고 있었어. 늘 그렇다. 쥰세이의 말은 나를 안심시켜 준다. 진정으로, -응. 고개를 끄덕이기가 고작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에 쥰세이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 서른 살 생일, 축하해. 쥰세이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미소, 잊고 있었다. 이 사람의 미소는, 이렇게도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 오리라고 생각 안 했어. 쥰세이의 목소리는, 오히려 난감하다는 듯이 들렸다. - 이미 그런 약속 잊어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고 말했을 때도, -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절대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라고 말했을 때도. 행복하게? 잘 모를 소리였다. 벌써 잊고 있다. 마빈도, 밀라노도, 어떤 이야기 속의 일처럼 멀다. -그런데, 와 주었어. 쥰세이가 말했다. 쥰세이가 말을 하면 할수록,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쥰세이를 난감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어째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마냥 우뚝 서 있었다. 10대들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떨리는 환희와 절망적인 불안 사이에서, 장및빛과 파란색이 뒤섞인 하늘 아래서. 10년, 그 시간이 한줌 보잘 것 없는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옆으로 비켜 놓으면, 없었던 것처럼 될 것 같았다. 10년, 하지만 동시에, 현기증이 일 만큼 긴 세월이란 생각도 들었다. - 내내, 내내.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아무말 하지마, 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 말 하지마, 라고. 빨려들어가듯 몇 걸음 다가가, 쥰세이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살며시, 깨져 버리면 어쩌나 겁나 하면서, 아니면, 내가 지금 이 순간에 부서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겁나 하면서. 쥰세이의 두 팔이 나를 껴안는 것을 느꼈다. 목 뒤로 쥰세이의 온도를 느꼈다. 쥰세이의 두 팔에 먼저 힘이 주어졌는지, 내가 먼저 힘주어 매달렸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내내, 이러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있는 것 보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이렇게 있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쥰세이...... 흘러 넘치는 마음이, 그 말로밖에 표현되지 않았다. 기차는 똑바로 달리고 있다. 창 밖은 단조로운 전원 풍경이다. 군데군데 퇴색한 핑크색과 수수한 황금색 소박한 집들이 서 있을 뿐이다. 건너편 의자에 앉아 있는 비즈니스 맨은 긴 다리를 불편하게 구부리고, 무릎에 서류 가방을 올려놓고 신문을 읽고 있다. 나는, 내가 기차를 타고 움직이고 있다기 보다, 기차가 나를 주변 공기와 함께 에워싸고 짐처럼 이동시키고 있는 것 처럼 느낀다. 기계적으로. 쥰세이와 나는 두오모의 좁은 계단을 함께 내려왔다. 몹시 기묘한 기분이었다. 방금 전, 그 계단을 혼자 올랐을 때, 이렇게 쥰세이와 둘이서 내려오는 장면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피렌체 거리를 걸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흘렀다. 쥰세이는 피렌체 거리거리를 잘 알고 있었다. - 살았더랬어. 그렇게 말하여 나를 놀래켰다. 쥰세이가 피렌체에 살고 있었다. 밀라노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곳인 피렌체에. 역사가 저만치 내 버려 둔 듯한 이 조그만 도시에. 그 말은 후회 비슷한 애틋함으로 내 가슴을 옭죄었다. 10년. 모든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다리위에 서서 아르노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완구 같은 기념품 가게가 늘어선 해질녁, - 미안. 아무 준비도 못했어. 쥰세이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 약속한 날에 약속한 장소에 와 놓고서 좀 이상한 말이지만, 여기서 아오이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어. 그래서 만나면 어디에 갈지, 어떻게 할지, 아무 생각도 못했어. 정말 난감하다는 투다. 강을 따라 나있는 가로수 길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아직 기운 해가 남아 있어서, 불빛이 눈에 띄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는데도, 하나씩 불을 밝히고 있다. - 알아. 나는 말했다. - 나도 똑같은 걸, 너를 만나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어. 아무 생각도 없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 우리는 조금 더 걸어, 아담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였다. 쥰세이는 값은 비싸지 않아도 맛이 또렷한 적포도주를 골랐다. 예쁜 동작으로 포도주 잔을 입으로 옮긴다. - 술, 많이 세졌네. 쥰세이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씩 웃고는, - 어어, 나름대로. 라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쥰세이의 10년을 생각했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우리는 둘 다 별로 먹지 않았다. 먹을 생각이 없었다. - 쳐다 보기만 해서 미안해. 쥰세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내가 혼이 난 줄 알았다.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무지 쥰세이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는 것은 내쪽이었으므로, 실제로 우리는 도가 지나친 연인들처럼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애정이기 보다, 어떤 유의 비현실감 속에서. 비현실감. 그건 말 그대로 비현실감이었다. 빛 속에서, ?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하지만 그것이 환상이 빚어내는 빛의 숭고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환상이 빚어내는 빛. 그것은 일몰 같은 숭고함으로, 우리의 온몸을 구석구석 채웠다. 아가타 쥰세이. 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완벽한 신뢰감으로 바라보았다. 그 풍요롭고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과, 놀람과 기쁨에 일일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눈동자, 때로 겸연쩍게 미소짓는 엷은 색 입술, 곱상하게 자랐음을 드러내는 목덜미. 알고 있다. 과거 나는 그 하나하나를 사랑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 서양배와 파르미자노(파르마산 치즈- 옮긴이)로 디저트를 끝내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촉촉하고 상쾌한 밤 공기 속을 또 걸었다. 묵을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 하며 밀라노로 돌아가려면 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따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 이 공기. 나는 말했다. - 쥰세이가 있는 공기, 오랜만이야. 피렌체는 조용한 도시다. 밤이지만 이 시간에도 우리처럼 거리를 어슬렁 거리는 관광객들로 거리의 조용함이 더욱 부각된다. 새 건물이 없는 도시. 쥰세이가 묵고 있는 호텔의 1층, 허름한 바에 들어갔다. 카운터 자리에서, 우리는 아페롤을 주문했다. 아말레드가 아닌,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바에 가면 늘 그것을 마셨다. 오렌지 색, 그리 독하지 않은 술. 바에서 우리는 추억을 얘기했다. 일본에서의 일, 대학을 다닐 때. 쥰세이가 타고 다니던 영국제 스쿠터. 다카시에 관해서도, 내가 살던 아파트의, 옆방에 살았던 루이 비통을 좋아하는 여자, 학교 식당의 메뉴, 우메가 오카에서 있었던 일, 하네기 공원. 기억은 하염없이 되살아 나고, 말은 끝없이 흘러 넘쳤다. 마치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층 허무해질 만큼. 얘기하면서, 나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줄 몰랐던 것까지 기억하고 있어 놀랐다. 그 시절 에어컨이 없었던 쥰세이의 방에서 무더웠던 여름, 쥰세이의 할아버지가 그린 추상화의, 파랑도 초록도 아닌 깊은 색과 노란색의 대조, 두툼하게 끝이 부풀어 오른 붓. 언어가 기호 같았다. 기호이기에, 그렇게 쉽사리 입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리라. 소중한 것은 무엇 하나 말하지 못한 채. 쥰세이는 푸근하게 풀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쪽이나 조금도 풀어져 있지 않다는 것도. - 한잔 더 마실래? 쥰세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럼. 방으로 갈까? 쥰세이의 말이, 단순한 질문처럼 울렸다. 쥰세이의 성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거절해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쥰세이다운 잔혹함이었다. - 그래. 나는 말하고, 싱긋 미소지어 보였다. 어느 쪽이라도 좋지만, 그럼 그렇게 하지 뭐. 마치,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라도 하듯. 옛날, 우리가 둘 다 학생이고 형제처럼 사이가 좋았던 연인 시절, 나는 쥰세이의 방에서 자는 날이 기뻤다. 섹스 ?문이 아니라 그냥 둘이 몸을 기대고 잘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렇게 잠잘 때, 우리는 아마도 같은 속도와 같은 리듬으로 숨을 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지의 모국 일본에서, 같은 세포를 만났다고. 도저히 헤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지는 것도, 이렇게 추억을 얘기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벌써 체재한지 한 달이 넘었다는 쥰세이의 방은, 조그맣지만 편안하고, 창문으로 피렌체와 강이 내려다보이는 미색 벽지의 방이었다. - 이상해. 일본에서 있었던 일은, 생각하지 않은지 오랜데.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추억을 계속 얘기하려고 애썼다. -아오이.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쥰세이가 내 앞을 가로 막고 서서, 내 몸을 쓰러뜨리며 입술을 포갰다. 눈을 감아도 언제든 알 수 있는, 쥰세이의 살, 쥰세이의 느낌. - 아오이. 토막토막 귓전에서 속삭여지는 내 이름, 내가 그러려고 생각하기 전에, 내 팔이 쥰세이를 끌어안고, 내가 그러려고 생각하기 전에, 내 손가락이 쥰세이의 등을 기어다녔다. 내내, 이렇게 있고 싶었다. 이럴 수 있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리웠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말도, 기억도 닿지 않는 장소에 있었다. 둘만의 장소에.밀라노도, 마빈도, 내가 모르는 쥰세이의 10년도 좇아오지 못할 장소에. - 보고 싶었어. 나는 겨우,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보고 싶었다고, 너무너무. 기차가 중앙역 홈으로 들어가자, 건너편 자리에서 서류 가방 위에다 엽서를 쓰고 있던 비즈니스 맨이 볼펜은 가슴 주머니에 꽂고 엽서는 서류 가방에 넣고 서둘러 일어선다. 저녁이다. 엷게 구름진 회색의. 쥰세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마치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드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할 수 가 없다. 쥰세이는 나를 붙잡지 않았고, 나 또한 그래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쥰세이에게 버림받기는 두 번째다.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힘없이 웃는다. - 무사한 거야? 오늘 아침, 전화에서 파올라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 가게는 염려없어. 알베르토도 있고. 그런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야. 어디 있는 거야. 다니엘라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그렇게 갑자기 없어지다니, 아오이 답지 않아. 또박또박한 이탈리아 어에, 끝내 웃고 말았다. -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전 아무 일 없어요. 괜찮아요. 저녁때는 돌아갈 거예요. 내일은 가게에 나갈테니까. 다니엘라가 있는 밀라노, 파올라가 지나가 있는 밀라노, 내일부터 나는 나의 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일을하고, 끝까지 친절하였던 마빈을 보내고, 처음부터.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 인생이 있다. 나는 매점에서 콜라를 사서, 선 채로 그것을 마셨다. -이제야 겨우 돌아와 주었군.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쥰세이가 말했을 때, 쥰세이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겨우 돌아왔다고, 쥰세이의 몸은 따뜻하고, 강인하고, 내 몸을 껴안기에 꼭 알맞는 사이즈였다. 우리는 형제처럼 달라붙어 잠들었다. 행복하고 불행한, 무모하고 야만스런 형제처럼. 눈을 떴을 때, 방안은 이미 아침 해로 가득했다. - 이리 와봐. 속옷만 입은 모습으로, 창가에 선 쥰세이가 불렀다. - 저기. 아르노 강이었다. 수면 가득 아침해가 빛나고 있다. - 5월 26일이네. 나는 말했다. 어제를 경계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쥰세이가 나의 등을 껴안고, 우리는 잠시 그렇게 강을 바라보았다. 옛날, 같은 자세로, 우메가오카의 아파트 창문으로 하네기 공원을 바라보았듯. - 오늘은 어디로 갈거야? 내가 명랑한 목소리로 묻자, 쥰세이도 밝은 목소리로, - 어디든. 이라고 대답했다. - 우선 아침을 먹어야지. - 좋아. 우선은 아침. 우리는 여행자였다. 발랄한, 그리고 순간적인. 미술관에 갔다. 시뇨리아 광장을 걸어서, 오르산미케레 교회도 들여다보았다. 다리를 건너, 낙원 추방 벽화가 있는 교회까지 걸음을 하였다. 따뜻한 날이었다. 그림을 보고 있는 쥰세이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렸다. 먼 옛날, 그림을 대하는 이 사람의 한결같은 열정에, 나는 절반은 사랑을, 절반은 질투를, 그리고 외로움을 느꼈다. - 굉장하군, 이 그림. 쥰세이는 팔라티나 미술관에 전시된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 수심에 찬, 그러나 한없이 부드러운 표정이야. 나는 그림을 잘 모른다. 다만, 몇 번이나 보았을 그 그림을, 마치 처음 보기라고 하는 것 처럼 흥분과 열정으로 얘기하는 쥰세이의 그 목소리와 말투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그 밤에도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난폭할 정도로 사랑을 나눈 후에. 미색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 사랑해. 잘자, 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 사랑해. 여분하나 없는 무게로, 쥰세이도 말했다. 말 그대로였다. 줄곧 알고 있었다. 이제 얼마나,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점차 견딜 수 없어졌다. 아마도 쥰세이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암암리에 그것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하루, 나는 잠들기 전에 생각했다. 부탁이니까 하루만 더. 사흘?도 날이 맑았다. 방에서 커피를 주문하여 마셨다. 슬픔이 극도에 달해 있었다. - 오늘은 어디 갈거야? 내 말은, 이제 더 이상 명랑하게 울리지 않았다. - 아오이. 고통에 일그러진 목소리로, 하지만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쥰세이가 말했다. 나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듣고 싶지 않다고. - 아오이. 쥰세이는 다시 한번 말했다. - 이리 와봐.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잔인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 나는 이름을 불리운 아이처럼, 침대에 걸터 앉아 있는 쥰세이의 품에 안겼다. 커피 잔을 든 채로. - 네 이야기를 해 봐. 내 머리에 입마춤을 하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쥰세이가 말했다. -아오이가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나는 숨을 가쁘게 들이 쉬었다, 토했다. 몸을 비틀어 쥰세이를 보았다. 슬픈 얼굴을. 그리고 앞을 쳐다보고 얘기했다. 지나와 파올라의 보석가게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 거기서 마빈을 만났다는 것, 함께 살기 시작한 것, 다니엘라가 결혼하여 여자아이를 낳았다는 것, 페데리카는 잘 지내고 있고, 가끔 저녁 식사에 초대해 준다는 것, 마빈과 헤어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 행복한거지? 나는 앞을 향한 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쥰세이는 내 머리칼에 또 입맞춤을 하였다.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그리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고화 복원사가 되려고 피렌체에 왔다는 것. 선생님을 만났다는 것, 선생님의 그림 모델이 되었던 것, 쥰세이는 그림을 복원하는 일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얘기해 주었다. 복원사가 '잃어 버린 시간을 되돌이킬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직업 '이란 것도. 그리고, 메미란 여자에 대해서도, '새끼 고양이' 처럼 분방하고 제기발랄하고, 한결같고 정직한 여자라고. 소중한 그림을 누군가가 칼로 그은 사건이 있었다는 것, 일본으로 귀국하자 메미가 뒤쫓아왔다는 것, 할아버지가 입원한 것,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피렌체에 다시 돌아온 것. 이야기를 다 끝내자, 쥰세이는 커피를 마셨다. - 오락가락, 한심하지. 두오모에서 만났을 때, 볼이 야위어 보였던 기억을 떠올렸다. 정갈한, 그러나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던 것도. - 쥰세이. 나는 온몸으로 쥰세이를 향하고, 한 손으로 쥰세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응? 하지만 알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내가 끼여들 수 없는 장소에서, 이 사람은 이미 새로운 인생을 쌓아 가고 있다. - 쥰세이. 쥰세이. 쥰세이. 쥰세이. 나는 몇 번이나 중얼거리면서, 쥰세이의 두 손을 잡고 일으켰다. - 한 번만 더. 사랑하고 있어. 너무너무.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어쩌면 너도 알아 주지 못할 정도로. 쥰세이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우었다. - 좋아. 하자, 물론 좋지. 우리는 침대로 쓰러졌다. 온 방으로 넘치는 하얀 빛 속에서. 슬픔만이 가득한 입술을 포개고, 이제 하나의 이야기를 끝내려 몸을 섞었다. 절망 속에서, 과거와 미래가 연결된 장소에서. - 대담해졌는걸. 달콤한 땀을 잔뜩 흘린 후, 시트 속에서 쥰세이가 말했다. - 옛날에는, 햇빛속에서는 싫다고 했는데. 나를 놀리듯 말한다. - 음, 나름대로. 나는 시치미를 떼고 일어났다. - 우리, 맛있는 점심 먹자. 오후 기차로 돌아갈 테니까. 쥰세이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붙잡아 주지 않는 쥰세이의 올바름과 성실함을 사랑한 것이었다. 쥰세이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풀고 미소짓더니, - 알겠어. 라고 말했다. - 걱정 마, 막지 않을 테니까. 내 얼굴이 뒤틀린 것을, 쥰세이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 아오이. 만나서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라고 쥰세이가 말했다. 사랑한다, 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울림으로. -나도. 샤워를 하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화창한 한낮의, 피렌체 거리로. <냉정과 열정사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