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오리 좁은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서자 길다란 복도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천장이 높아서 그런지 복도는 고갈된 배수관처럼 보였다. 군데군데 붙어 있는 형광등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그 빛은 가는 망을 빠져나온 듯 불균일했다. 게다가 세 개 중에 하나는 전구가 빠져 있었다. 앞을 내다 보는 것도 힘들 정도로 어둠침침했다. 주위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다만 운동화 고무 밑창이 콘크리트를 밟는 평평한 음만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흐릿한 복도에서 울렸다. 2맥 미터인가, 3백 미터인가, 아니 족히 1킬로는 걸은 것 같다.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걸었다. 거리도 없고, 시간도 없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감각조차도 잃어버렸다. 하지만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T자로가 나타났다. T자로? 나는 윗옷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엽서를 꺼내 찬찬히 다시 읽어 보았다. "복도를 똑바로 걸어가시오. 막다른 곳에 문이 있습니다." 엽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주의 깊게 벽을 훑어 보았지만, 거기에는 문의 그림자도 없었다. 문이 있었다는 흔적도 없고, 앞으로도 문이 설치될 것 같지 않은 곳이다. 그것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일 뿐, 무엇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형이상학적인 문도, 상징적인 문도 비유적인 문도 없었다. 이거야 원. 나는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신중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내게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었다. 나는 가난한 생활에 충분히 질력이 나 있었다. 월부금, 이혼한 부인에게 줘야 할 위자료, 좁은 아파트와 욕실의 바퀴벌레, 러시아워의 지하철.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가까스로 얻은 짭짤한 일거리가 바로 이 일이다. 일은 편하고, 급료는 많다. 일년에 보너스 두 번, 여름에는 장기 휴가. 문 하나, 모퉁이 하나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운동화 바닥으로 담배를 부벼 끄고, 10엔짜리 동전을 하늘에 날려서 손등으로 받았다. 앞. 나는 우측으로 나아갔다. 복도는 오른쪽으로 두 번 꺽어지고, 한 번은 왼쪽으로 계단을 열칸쯤 내려서서 다시 우측으로 꺽였다. 공기는 식은 커피처럼 썰렁했다. 나는 돈을 생각하고, 에어콘이 들어 오는 기분 좋은 오피스를 생각하고, 멋쟁이 여자를 떠올리면서 계속 걸어갔다. 문에 도달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윽고 앞쪽에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에서 보기에 그것은 써버린 우표같이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서면서 조금씩 확실한 문이 되었다. 문, 확실히 문이다. 나는 헛기침을 크게 하고,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한 발 물러나서 대답을 기다렸다. 15초가 지나도록 대답이 없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조금 강하게 노크하고, 다시 한 발 물러선다.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다. 공기가 조금씩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세번째 노크를 하려고 할 때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마치 바람에 밀려서 열린 것 같이 자연스러웠다. 그 때 전등불을 켜는 소리가 들려 오고, 한 남자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나보다 5센티 정도 작았다. 이제 막 머리를 감았는지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갈색의 알몸을 바쓰로브로 감싸고 있었다. 펜습자 견본책과 같은 또렷한 얼굴 생김이기는 했지만, 입가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목욕 중이어서." "목욕이요?" 나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봤다. "규칙이죠. 점심식사 후에는 반드시 목욕을 해야 한다는." "그렇군요." "그런데 용건이 뭐죠?" 나는 윗옷 주머니에서 엽서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물을 뭍히지 않으려는 듯 손가락 끝으로 집어들고 몇 차례 읽었다. "5분 정도 늦기는 햇지만......." 나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으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엽서를 내게 돌려주었다. "여기서 일하게 되신 모양이군요." "그래요." 나는 말했다. "나는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지만, 하여튼 윗분에게 연결해 드리지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암호는?" "암호라니요?" "암호에 대해서 듣지 못했나요?" 나는 멍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이거 곤란한데. 암호 없이는 아무도 들여 보내지 말라는 윗 사람의 강력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엽서를 읽었지만, 역시 암호는 없었다. "엽서에 쓰는 걸 잊었나 보죠. 그래도 윗분에게 연락해 줄 수는 없을까요?" "그러니까, 그것을 위해서 암호가 필요한 거요."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으려 했지만, 바쓰로브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내밀고 불을 붙여 주었다. '곤란한데......, 그런데 무언가......, 암호 비슷한 것이라도 생각나는 것이 없나요?" 암호 따위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나는 고래를 저었다. "나도 이런 귀찮은 일은 좋아하지 않지만, 윗분에게는 윗분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알겠습니다만......"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도 암호를 잊어 버리고 손님을 한 사람 연결시켜 주었다가 목이 날아갔소. 요즈음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은 많지 않으니까요." 나는 끄덕였다. '저, 이건 어떻습니까? 약간 만이라도 힌트를 준다면......" 남자는 문에 기대 선 채로 담배 연기를 하늘로 뿜어댔다. "그것은 금지 사항인데요." "조금만이라도." "하지만 누군가 도청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내게 귓속말을 했다. "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쥘 수는 있지만, 먹을 수는 없죠." 이번에는 내가 생각할 차례이다. "첫 발음은 뭐죠?" "강."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강아지."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았다. "아니오." 그는 잘라 말했다. "기회는 두 번이오." "두 번이라니요?" "앞으로 두 번 더 틀리면 그것으로 끝이요. 미안하지만 나도 위험을 무릅쓰고 규칙을 깨면서까지 힌트를 줬으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만 힌트를 더 줄 수는 없을까요. 예를 들자면 몇 글자인지." "전부 다 말해 달라는 거요?" "그럴 수야 없죠." 나는 시치미를 뗐다. "다만 몇 글자인지만 가르쳐 달라는 거죠." "세 글자." 그는 포기한 듯이 말했다. "아버지가 말한 글대로군." "무슨 소리인지 몰라 반문했다. "아버지가 자주 말했죠. 구두를 닦아 주면, 그 다음에는 구두끈을 묶어달라고 한다고 말이오." "그건 맞는 말이군요." 나는 건성으로 말했다. "하여간, 세 글자요." "물과 관계가 있고, 손바닥 만한 크기지만 먹을 수는 없다?" "바로 그거에요." "강오리." 나는 말했다. "강오리는 먹을 수 있습니다." "아닐 텐데요......" "맛은 없어도......." 그는 자신 없다는 듯이 말했다. "게다가 손바닥에 안 들어가잖소."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그는 역시 자신 없게 말했다. "강오리." 나는 계속 억지를 썼다. "손에 들어가는 강오리는 너무 맛이 없어서 개도 안 먹는다구요."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암호는 강오리가 아니오." "하지만, 물과 관계가 있고, 손바닥 만하지만 먹을 수는 없다. 게다가 세 글자." "억지 부리지 마세요. 당신은 틀렸으니까." "어디가 틀렸단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암호는 강오리가 아니란 말이오." "그럼 뭐요?" 그는 일순간 말을 잃었다. "그것은 말할 수 없죠."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렇죠?"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다. "강오리 이외에 물과 관계가 있고, 손바닥 만하며, 세 글자인 것은 아무 것도 없잖소." "하지만 분명히 있소." 그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없어요." 나도 지지 않고 버텼다. "있다니까 그러네." "있다는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나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게다가 강오리는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지 않소?" "하지만 그 뭐야......강오리를 먹는 개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어디에 있죠? 그리고 어떤 개요?" "으음." 그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나는 개에 대해서라면 모르는게 없는 사람이요. 하지만 강오리를 먹는 개는 본 적도 없소." "그렇게 맛이 없나요?" "섬뜩하게 맛이 없지요." "당신은 먹은 적이 있나 보죠?" "없어요. 그렇게 맛 없는 것을 내가 미쳤다고 먹겠소." "그건 그렇군요." "여하튼 윗사람에게 전해 주시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강오리." "할 수 없군." 그는 포기하고 말했다. "일단은 연결해 드리죠. 무리이기는 하지만." "고맙습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런데 손바닥 만한 강오리가 정말 있습니까?" "있죠." * * * 손바닥에 올라가는 강오리는 빌로우드 천으로 안경을 닦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른쪽 어금니가 욱신거렸다. 치과에 가야 하나 하고 그는 생각한다. 지겨워 죽겠다. 치과 의사, 확정 신고, 자동차 할부금, 에어콘 고장......그는 껍질 뿐인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죽음은 깊은 바다처럼 조용했다. 손바닥 만한 강오리 여기에 잠들다. 그 때 인터폰 부져가 울렸다. "뭐야?" 손바닥 만한 강오리는 기계에 대고 소리쳤다. "손님입니다." 인터폰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손바닥만한 강오리는 손목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15분 지각." etext down page
Downloading ETEXT


  etext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etext는 아직은 많이 모자라지만,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고 만들어가는 공간이니 자주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Palm사용자 여러분이 경우엔, .prc 파일의 다운로드 창이 뜨면 적절히 저장위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셀비안(Cellvic) 여러분, 그리고 WindowsCE계열, 또는 Newton이나 Psion 사용자 여러분들은 .ZIP 파일 형태로 제공되는 etext를 압축을 풀어서 저장하시면 됩니다.
 다 받으신 다음에는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시면 계속해서 etext를 여행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dlif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