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서른일곱 살의 나는 그때 보잉 747기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비행기는 두꺼운 비구름을 器고 강하하여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려는 순간이었다. 11월의 차가운 비는 대지를 검게 물들였 고, 비옷을 입은 정비공들이며 . 밋밋한 공항 빌딩 위에 세워진 깃발 이며, BMW의 광고판이며, 그 모두가 플랑드르파 그림의 음산한 배 경처럼 보였다 다시 또 독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가 착지를 완료하자, 도련 사인이 꺼지고 천장의 스피커에 서 나지막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음악은 어딘가의 오케스트 라가 연주하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 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아니, 여느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한 혼란과 동요로 몰아넣었다. 나는 머리가 터지지 않도록 몸을 웅크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독일인 스튜어디스가 다가오더니, 기분 이 언짢으냐고 영어로 물었다. 괜찮다. 조금 현기증이 날 뿐이다 라 고 나는 대답했다. "정 말 괜찮으신가요?" "괜찮아요. 고맙소." 스튜어디스는 생긋 웃더니 가버리고, 음악은 빌리 조엘의 곡으로 바뀌었다 나는 얼굴을 들어 북해의 상공에 떠있는 어두운 구름을 바라보며 . 이제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수많은 것들을 생 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거나 떠나버린 사람들 다시 돌이킬 수 없 는 추억들 비행기가 완전히 정지하여 사람들이 시트 벨트를 풀고 선반에서 가방이나 상의를 꺼내기 시작할 때까지 , 나는 줄곧 그 초원 속에 있 었다. 나는 풀 냄새를 맡았고. 피부로 바람을 느꼈고, 새들의 노랫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1969년 가을로, 내가 스무 살이 되기 직전이 었다 방금 전의 스튜어디스가 다시 다가오더니 내 옆에 앉으며 이제는 괜찮으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고맙소. 잠시 쓸쓸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니까.(It's all right n()w, tl)ant yowl. 1 I)nl felt lonely, y()Li kn~)w.)" 나는 미소를 지었다. 'bfll, 1 frcl :Elme wa, same filing, ()ncE in :1 wtlile, 1 kn4)w wllat oㄴ1 mean. (그런 일은 저에게도 가끔 있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 그 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멋진 미소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t hope oㄴ1'll haute a nice trip.4ㄴIf Wierte%ellen! (즐거 운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안녕 .)" 나도 'Aㄴif'Wie[ler:it:henl" 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18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다 며칠간 계속된 부드러운 비로 여름 동안의 먼지 가 깨끗이 씻겨 내린 산은 깊고 선명한 푸른색을 띠었고, 10월의 바 람은 주위의 억새풀 이삭을 흔들었다. 싸늘하게 보이는 하늘 저편에 는 가느다란 구름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높은 하늘은, 가만히 보 고 있으면 눈이 아플 정도였다 바람은 초원을 건너와, 그녀의 머리 카락을 살며시 흔들고 잡목림 사이로 빠져나갔다 나뭇가지의 잎이 메마른 소리를 냈고,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다른 세계의 입구에서 들려오는 듯한 작고 희미한 소리였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 았다. 어느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새빨간 새 두 마리가 무엇엔 가 놀란 듯이 초원 위로 높이 날아올라 잡목림 쪽으로 사라지는 것 을 보았을 뿐이다. 오솔길을 거닐며 나오코는 나에게 우물 이야기를 해주었다. 기억이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다. 내가 그 속에 실제로 몸을 담고 있었을 때, 나는 그러한 풍경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었 다.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18년이나 지 난 후에 그 풍경을 자세히 기억해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무렵의 나에게는 풍경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내 자신을 생각했고,그때 내 곁을 나란히 거닐던 아름다운 여자를 생 각했고, 나와 그녀를 생각했고, 그리고 다시 내 자신을 생각했다. 그 무렵은 무엇을 보건 무엇을 느끼건 무엇을 생각하건, 결국 모든 것 이 부메랑처럼 내 자신의 손아귀로 돌아오는 나이였던 것이다. 더구 나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 사랑은 몹시 미묘한 곳으로 나를 이 끌어가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에 신경을 쓸 여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초원의 풍경이 맨 먼저 떠오른다 물 냄새, 희 미한 냉기를 머금은 바람 산의 능선, 개 짖는 소리.그러한 것들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러한 것들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손을 넣으면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쓰다듬을 수 있을 것 같은 일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2 풍경 속에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 무도 없다. 나오코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들은, 그녀와 그 당시의 나 그리고 내 세계는, 모두 어디 로 가버린 것일까. 그렇다. 나는 나오코의 얼굴을 지금 당장 기억해 낼 수조차 없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인적이 없는 배경뿐이다. 물론 시간만 충분하다면 나는- 그녀의 얼굴을 생각해낼 수 있다. 작고 차가운 손이며, 산뜻한 촉감의 곱게 뻗은 아름다운 머릿결이 며, 부드럽고 둥근 모양의 귓볼이며, 바로 그 밑에 있는 조그만 점이 며 . 겨울이 되면 즐겨 입던 우아한 카멜 코트며 . 언제나 상대방의 눈 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질문하던 버릇이며 이따금 까닭 없이 떨리는 듯한 목소리 (마치 강풍이 부는 언덕 위에서 이야기하는 듯했다)며 . 그러한 이미지를 하나하나 더해 가면, 문득 자연스럽게 그녀의 얼굴 이 떠오른다. 우선 옆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아마도 나오코와 내 가 언제나 나란히 거닐었던 탓이리라. 그래서 맨 먼저 떠오르는 것 은 언제나 그녀의 옆모습이다 그러면 그녀는 나를 향해서 생긋 웃 은 뒤. 약간 목을 갸웃이 하여 말을 걸고는, 내 눈을 들여다본다 마 치 맑은 샘물 바다에 언뜻 스쳐가는 작은 물고기의 모습을 찾기라도 하듯이 하지만그런 식으로 내 머릿속에서 나오코의 얼굴이 떠오르기까 지는 약간 시간이 걸린다. 또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그에 필요한 시간은 점차로 길어진다 서글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다 처음에는5초면 기억 해냈는데 그것이 10초가되고30초가되고 1분이 된다. 마치 저녁 무렵의 그림자처럼 그것은 점점 길어진다. 그리고 아마도 머지않아 밤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리겠지 그 렇다. 나의 기억은 나오코가서 있던 장소로부터 확실히 멀어져가고 있다. 마치 내가 예전에 나 자신이 서 있던 장소로부터 확실히 멀어 져가고 있듯이. 그리고 풍경만이 . 10월의 그 초원의 풍경만이, 마치 영화속의 상징적인 장면처럼 되풀이되어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풍경은 내 머리의 한 부분을 집요하게 걷어차고 있다. 이봐, 일어나, 난아직 여기에 있다구 일어나,일어나서 이해하란 말이야 왜 내가 아직 여기에 있는지를! 통증은 없다. 통증은 전혀 없다 걷어찰 때 마다 공허한 소리가 날 뿐이다. 그리고 그 소리마저 언젠가는 사라 져버리겠지. 다른 것들이 결국에는 모두 사라져버렸듯이 . 그러나 함 부르크 공항의 루프트한자 비행기 속에서. 그러한 기억들은 여느 때 보다도 오랫동안. 여느 때보다도 강하게 내 머리를 걷어차고 있었 다. 일어나, 이해하라구 하고 소리치며.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무엇이건 글로 써보지 않으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타입의 인간이다. 그녀는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그렇지, 柔녀는 나에게 들판의 우물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 우 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나는 모른다. 어쩌면 그 것은 그녀의 내부에만 존재하는 이미지나 기호였는지도 모른다 어두웠던 나날에 그녀가 머릿속에서 자아낸 그밖의 수많은 사물 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나오코가 그 우물 이야기를 들려준 뒤로, 나는 그 우물의 모습이 없이는 초원의 풍경을 기억해낼 수 없게 되 어버 렸다 실제로 본 것도 아닌 우물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는 분 리시킬 수 없는 일부로서 풍경 속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드디어 나는 그 우물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할 수도 있다. 우물은 초원 이 끝나고 잡목림이 시작되는 바로 그 경계선 부근에 있다. 대지의 뻥 뚤린 직경 1미터 정도 되는 어두운 구덩이를 풀이 교묘하게 뒤덮 어 가리고 있다. 주위에는 울타리도 없고 나지막한 돌담도 없다. 단 지 그 구덩이가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가장자리의 돌은 풍우에 시달려 희끄무레하게 변색되어 있고, 군데군데 금이 가서 깨져 5 다 작은 초록색 도마뱀이 깨진 돌 틈으로 슬며시 기어 들어가는 모 습이 보인다. 몸을 내밀어 우물 안을 들여다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 우물이 무척이나 깊다는 사실뿐이 다.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그리고 구덩이 속에는 암흑뿐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종류의 암흑을 바짝 졸여놓은 듯이 농밀한 암흑이-가득 차 있다. '우물은 정말로 . 정말로 깊어요."나오코는조심스럽게 어 휘를 선택하면서 설명했다. 그녀는 이따금 그런 식으로 말했다. 정 확한 어휘를 찾아가면서 아주 천천히 말을 한다 "정말로 깊어요 하지만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이 부근의 어디엔지 있는 건 확실하지만." 그렇게 말한 그녀는 트위드 상의의 호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잠자 코 내 얼굴을 보더니, '정말이에요라는 듯이 생긋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몹시 위험하지 않을까?" 나는물었다. "어딘가에 깊은 우물이 있는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다니 말이야. 빠지게 되면 어쩔 수가 없잖아?" '어쩔 수가 없죠. 휘익 , 퐁당. 그걸로 끝이니까. '그런 일이 실제로 있나?" "이따금 있어요. 2년이나3년에 한 번 정도. 사람이 갑자기 없어 지더니, 아무리 찾아도 발견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 부근 사람 들은 말하죠, 그건 틀림없이 우물에 빠진 거라고." "그다지 좋은 죽음은 아닌 것 같군 "끔찍한 죽음이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윗옷에 붙은 풀잎을 손으로 떨쳐냈다. "그대로 목뼈라도 부러져서 깨끗이 죽어버린다면 좋겠지만. 자칫 다리가 부러지는 정도로 끝난다면 어쩔 수가 없어 요. 아무리 힘껏 외쳐봤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고,누군가가 발견 해줄 가망도 없고, 주위에는 지네나 거미 같은 것들이 우글거리고, 거기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백골이 주위에 잔뜩흩언져 있고,어둡고 질퍽질퍽해요. 그리고 위쪽에는 동그란 빛이 마치 겨울날의 달처럼 아주 조그맣게 떠 있죠. 그런 곳에서 서서히 혼자 죽어가는 거예 요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치는군" 나는 말했다. "누군가가 찾아내 서 울타리를 만들어야 해 ." "하지만 아무도 그 우물을 찾아낼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제대로 된 1에서 벗어나면 안 돼요." "벗어나지 않을게.' 나오코는 호주머니에서 왼손을 꺼내어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은. 당신은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은 어 두운 밤에 이 주변을 마구 걸어 다녀도 절대로 우물에는 빠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당신 곁에 붙어 있는 한, 저도 우물에 빠지는 일이 없을 테고 "절대로?" "절대로." "어떻게 그걸 알지?' "저는 알아요 .그냥 알아요." 나오코는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그럭 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말없이 걸었다. "이런 것에 관해선 제 가 잘 알아요. 이유 같은 건 없어도, 그냥 느끼는 거예요. 예를 들자 면 지금 이렇게 당신 곁에 꼭 붙어 있으면, 전 조공도 무섭지 않아 요. 어떠한 죄악이나 어둠도 저를 유혹하려 들지 못하니까요 "그러면 이야기는 간단하군. 언제까지고 이렇게 하고 있으면 되 잖아" "그 말 진심으로 하는 건가요?" '물론 진심이지." 나오코는 멈추어 섰다. 나도 멈추어 섰다. 그녀는 양손을 내 어깨 에 올리고는 정면에서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새까맣고 무거운 액체가 기묘한 무의의 소용돌이를 뿌 리고 있었다. 그러한 한 쌍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오랫동안 나의 내 부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딸돌움을 하여 내 뺨에 살짝 자신의 뺨을 대었다 그것은 일순간 숨이 멎을 정도로 따뜻하 고 멋진 동작이었다 '고마워요." 나오코는 말했다. "천만에 ' "당신이 그렇게 말해주시니 저는 아주 기뻐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서글픈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왜?" "그건 나쁜 짓이기 때문이에요.그건 너무나 심한 짓이기 때문이 에요. 그건. " 하고 말을 꺼내다가 나오코는 문득 입을 다물고 는,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빙 빙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나도 잠자코 그녀의 곁을 걸었 다- '그건 옳지 않은 짓이기 때문이에요, 당신에게도 저에 게도." 한참 후에야 그녀는 그렇게 말을 이었다 "어떤 식으로 옳지 않다는 거지?"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보 았다 "그야 누군가가 누군가를 쉬지 않고 영원히 지킨다는 것은 불가 능하기 때문이에요. 만약에요. 만약에 제가 당신과 결혼할 경우에 말이에요. 당신은 회사에 근무하잖아요. 그러면 당신이 회사에 가 있는 동안 도대체 누가 저를 지켜주죠? 당신이 풀장 간 사이에 도대 체 누가 저를 지켜주구ㅛ? 저는 죽을 때까시 당신에게 꼭 붙어다녀야 하나요? 그런 건 대단하지가 않아요 그런 건 인간 관계라고도 부를 수 없잖아요?그리고 당신은 언젠가 저에게 싫증이 날 거예요. 내 인생은 도대체 뭐야, 이 여자를 지키는 것뿐인가? 하고. 저는 그런 건 싫어요 그래서는 제가 지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간주할 수 없어요." "이런 상태가 평생 계속되는 것은 아니야" 나는 그녀의 등에 손 을 대고 말했다. "언젠가는 끝나지. 끝난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하면 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그때는 어쩌면 나 오코가 나를 도와줄지도 몰라. 우리는 수지 결산표를 들여다보며 살 고 있는 게 아니거든. 만약 나오코가 지금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를 이용하면 돼. 그렇지? 어째서 모든 것을 그토록 경직되게 생각하 지'~l 자, 좀더 어깨의 힘을 빼라구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 런 태도로 모든 것을 보게 되는 거야 어깨의 힘을 빼면 몸이 훨씬 가벼워질 거야." "왜 그런 말을 하나요?" 나오코는 몹시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 나는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된 말을 입 밖에 낸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왜요?" 나오코는 가만히 땅 및의 지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깨 의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 말을 해줘 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아시겠지요? 만약 제가 지금 어깨의 힘을 뺀다면, 저는 산산이 부서질 거예요. 저는 옛날부 터 이런 식으로밖에 살아오지 않았고, 지금도 이런 식으로밖에 살아 갈 수 없어요. 한 번 힘을 빼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어요. 저는 산산이 부서져서 어디론가 날려가 버릴 거예요 왜 그걸 모르세요?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돌봐주겠다는 말을 할 수 있어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혼란에 빠져 있어요. 어 둡고, 춥고, 깊은 혼란에. 그런데, 왜 당신은 그때 저와 관계를 맺었 나요? 왜 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은 거죠?" 우리는 아주 고요한 소나무 숲 속을 거닐고 있었다. 늦여름이라 길 위에는 죽은 매미들이 메말라 흩어져 있어서,구두 털에서 파삭 파삭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나오코와 마치 무언가 찾필 있는 사람 처럼 , 지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 소나무 숲 속 길을 걸었다 "죄송해요." 나오코는 네 팔을 다정하게 잡았다. 그리고는 몇 번 이고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요. 제가 한 말,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로 죄송해요. 저는 그냥 제 자신에게 화를 냈을 뿐이에요." "아마 난 나오코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나는 말했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고. 무언가 이해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려. 하지만 시간이 있다면 나는 나오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고. 결국은 내가 이 세상에서 나오코를 가장 잘 이해하게 될 거야. 우리늘 그 자리에 머물러 선 채 정적 속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구두 끝으로 죽은 매미나 솔방울을 굴리기도 했고. 소나무 가지 사 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나오코는 상의 주머니에 양 손을 넣은 채 초점이 없는 눈으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와타나베 씨. 저를 좋아하세요?" "물론 "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 소원 두 가지 들어주시겠어요?" "세 가지 들어주지." 나오코는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돼요.하나는,당신 이 이렇게 저를 만나러 와주신 것에 대해서 제가무척 감사하고 있 다는사실을 알아주시는 거예요. 정말로 기쁘고, 정말로 . 도움 이 돼요. 설령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요." "또 만나러 올게." 나는 말했다 "또 하나는?" "저를 기억해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존재했으며 , 이렇게 당신 곁 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고 기억해주실 수 있겠어요?" "물론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있을게 "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그대로 아무 말도 없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뭇가 지 사이로 비치는 가을 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살짝살짝 춤을 추었다-. 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우리 쪽으로 상 당히 다가와 있는 듯이 여겨 졌다. 나오코는 작은 언덕처럼 솟아오른 숲으로 올라가더니 소나무 숲을 벗어나. 완만한 언덕을 빠른 걸음 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두세 걸음 뒤를 따라서 걸었다. "이리 와봐 이 부근에 우물이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녀의 등에 대고 말을 걸었다. 나오코는 걸음을 멈추고는 생긋 웃더니. 내 팔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남은 길을 둘이서 나란히 걸었다 "정말로 언제까지고 저를 잊지 않으실 거죠?" 그녀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까지고 잊지 않을 거야." 나는 대답했다 "나오코를 잊을 리 가 있나.' 그래도 기억은 차츰 희미해져서. 나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것들 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가며 문장을 쓰고 있노라면 이 따금 몹시 불안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혹시나 나는 가장 중요한 부 분에 관한 기억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 때문 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변두리라 할 수 있는 어두운 장소가 있어 서 , 중요한 기억들은 전부 그곳에 쌓여 부드러운 진흙으로 변해 가 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러나 어쨌든 간에. 지금 현재로는 그것이 네가 손에 넣을 수 있 는 전부이다. 이제 희미해져 있고.또한 지금도 시시각각 희미해져 가는 그 불완전한 기억들을 가슴에 꼭 껴안고, 뼈라도 빨아먹는 듯 한 기분으로 나는 이 문장을 쓰고 있다. 나오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말고는 아무런 방법도 없나 오랜 옛날. 내가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더 선명했을 때.나는 나오코에 관해서 써보려고 한 적이 한 번 있다 하지만 그떼에늘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처음의 한 줄만 쓰게 된다면, 나머지는 모두 거 침없이 쓸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 한 줄이 아무 래도 써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뚜렷해서 어디서부터 시 작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너무나도 자세한 피포가, 너무나도 자 세하기 때문에 이따금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 만 지금은 알고 있다 결국은-내 생각에는 문장이라는 불완전 한 용기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추억밖에 없다. 그리고 나오코에 관한 기억이 나의 내부에서 희미해져갈수록, 나는 더욱더 깊이 그녀를 이해할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째 서 그녀가나를 향해서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부탁했는지 지 금은 그 이유도 알 수 있다. 물론 나오코는 알고 있었다. 나의 내부 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가리라는사실을 그레 서 그녀는 나에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저를 언제까지 고 잊지 마세요. 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견딜 수 없게 슬프다. 왜냐하면 나오코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장 아주 먼 옛날, 그래 봐야 고작 20년 전쯤의 일이지만, 나는 어느 학생용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대학에 갓 입 학했을 무렵이다. 도쿄에 관해서는 아무겄도 몰랐고,독신 생활을 하는 것도 처음이어서, 나를 걱정하신 부모님이 그 기숙사를 알아봐 주셨다. 그곳이라면 식사도 나오고 여러 가지 설비도 갖추어져 있으 니 열여덟 살의 철부지 소년이라도 그럭저럭 지낼수 있으리라는것 이었다 물론 비용문제도 있었다. 기숙사의 비용은 밖에서 혼자 지 내는 것보다 훨씬 적다. 우선 이불과 전기 스탠드만 있으면 나머지 는 아무것도 장만할 필요가 없었다. 나로서는 가능한 한 아파트를 빌려서 혼자 마음 편히 지내고 싶었지만, 사립대학의 입학금과 등록 금, 그리고 다달이 들어갈 생활비를 생각하니 내 고집만 부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 역시 결국 잠자는 곳인데 아무 데면 어떻겠느냐 는 생각이었다. 그 기숙사는 시내의 전망이 좋은 고지대에 있었다. 넓은 부지에, 사방은 높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 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수령은 적어도 150년이라 고 했다. 나무 밑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은 그 푸른 잎에 완전 히 가려져버린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도로는 그 커다란 느티나무를 우회하듯이 구 부러져, 다시 길게 직선으로 안뜰을 가로지르고 있다. 안뜰의 양쪽 에는 철근 콘크리트로 된 3층 건물이 두 채 나란히 서 있다. 창문이 잔뜩 달린 커다란 건물로, 보는 사람에게 아파트를 개조한 형무소나 형무소를 개조한 아파트와도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결코 불결하 지는 않고, 어두운 분위기도 아니다. 활짝 열린 창문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창문의 커튼은 어느 방이고 똑같이 크림 색으로, 햇 볕에 바래더라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색이다. 포장도로를 곧장 가면 정면에는 2층으로 된 본부 건물이 있다. 1 층에는 식당과 커다란 욕실, 2층에는 강당과 몇 개의 집회실, 그리 고 무슨 일에 쓰이는지는 모르지만 귀빈실까지 있다. 본부 건물의 옆쪽에 세번째 기숙사가 있다. 이것도 3층 건물이다. 안뜰이 넓고 푸른 잔디 위에는 스프링쿨러가 햇빛을 반사하며 빙빙 돌고 있다. 본부 건물 뒤에는 야구와 축구 겸용의 운동장과 테니스 코트가 여섯 개 있다. 완벽한 시설이라 할 수 있었다. 이 기숙사의 유인한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데에 있었다. 기숙사는 극도로 우익 적인 인물이 중심인 정체 불명의 재단 법인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었으며,그 운영 방침은-물론 내 눈으로 보자면 말이지만-상당히 8B.하게 뒤틀려 있었다 입실 안내 팸플릿과 기숙사 규칙을 읽어보면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교 칙에 힘써 국가에 유익한 인재를 육성한다. ' 이것이 이 기숙사 창설 의 정신이며,또한그 정신에 찬동한 수많은 재계 인사들이 사재를 털어 세웠다고 하지만, 그 배후는 여전히 모호하다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단순한 세금 대책이라는 사람도 있고, 이름을 팔려 는 행위라는 사람도 있고. 기숙사 설립이라는 병목하에 이곳의 일등 피를 사기나 다름없는 수법으로 손에 넣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 훨씬 깊은 속셈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 기숙사출신들을 모아서 정계와 재계에 지하 파벌을 만 들려는 것이 설립자의 목적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기숙사에는 입실 자들 중에서 톱 엘리트들을 넣은 특권적인 그룹이 있는데. 나도 자 세한 것은 모르지만. 한 달에 몇 번인가 그 설립자를 포함한 연구회 가 열렸으며.그클럽에 가입되어 있는 한 취직 걱정은 없다는 이야 기였다 도대체 그러한 소문들 가운데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틀 린지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었지만. 피력한 소문들은 '하여튼 이곳 은 수상쩍다'는 점에서 공통되어 있었다 어쨌든 1968년 봄부터 70련 여름까지의 2년간을 나는 이 -수상쩍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왜 그런 수상쩍은 곳에 2년이나 있었냐는 질 문을 받아도 대답할 수가 없다 일상 생활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우 익이건 좌익이건, 위선이건 위악이건, 그다지 대단한 차이는 없으니 까 말이다. 기숙사의 하루는 장엄한 국기 게양식과 더불어 시작된다. 물론 국가도 들려준다 스포츠 뉴스에서 행진곡이 빠질 수 없듯이, 국기 게양식에서 국가를 뺄 수 없다. 국기 게양대는 안뜰 한가운데 에 있 기 때문에 어느 기숙사의 창문에서라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국기를 게양하는 일은 동쪽 동(내가 입실해 있는 기숙사였다) 사 감이 맡았다. 그는 키가 크고 눈매가 날카로운 60 전후의 사내로, 몹 시 뻣뻣해 보이는 머릿결에는 흰머리가 섞이고. 햇볕에 그을은 목에는 긴 상처가 나 있다. 이 인물은 육군 나카노 학교 출신이라는 소문이 지만. 그것도 진위를 가릴 수 없다. 그 곁에는 이 국기 게양식 을 보조하는 조수 같은 학생이 대기하고 있다. 이 학생에 관해서는 아무도 잘 모른다 까까머리에, 언제나 학생복을 입고 있다. 이름도 모르고 어느 방에 사는지도 모른다. 식당에서도 욕실에서도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정말로 학생인지 아닌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학 생복을 입고 있으니 학생이겠지.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그 리고 사감보다는 키가 작고, 통통하며 피부가 희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이 2인조가 매일 아침 기숙사 안뜰에 일장기를 게양한다. 나는 처음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 신기한 느낌에 일부러 여섯 시 에 일어나 곧장 이 애국적 의식을 구경했다. 아침 여섯 시, 라디오 시보가 울리자마자 두 사람은 안뜰에 나타난다. 학생은 물론, 학생 복에 검 정 구두, 사감은 점퍼에 하얀 운동화 차림이다. 학생은 가끔 오동나무 상자를 들고 있다. 사감은 소니의 휴대용 녹음기를 들고 있다 사감이 녹음기를 게양대 밑에 둔다. 학생이 오동나무 상자를 연다. 상자 속에는 단정히 접은국기가들어 있다. 학생이 사감에게 정중하게 국기를 내민다. 사감이 국기를 밧줄에 묶는다. 학생이 녹 음기의 스위치를 누른다. 기 미 가요. 그리고 국기가 게양대를 따라서 슬슬 올라간다. '조약돌이'라는 부분에서 국기는 게양대의 한가운데까지, '까 지' 라는 부분에서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그러면 두 사람은 등을 쭉 펴고 '차려' 자세를 취한 채 국기를 똑바로 올려다본다. 하늘이 맑고 바람이 불 때면. 이 광경은 상당히 볼 만하다. 저녁때의 국기 하강식도 대체로 비슷한 식으로 거행된다. 단지 순서는 아침과 완전히 반대이다. 국기는 술술 내려와, 오동나무 상 자 속으로 들어간다. 밤에는 국기가 펄럭이지 않는다. 왜 밤에는 국기를 내리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밤사이라도 국가는 어엿하게 존속하고 있고,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선 로 인부나 택시 운전사나 바의 호스테스 혹은 야근 소방수나 빌딩 경비원 등, 그렇게 밤에 일하는 사람들이 국가의 비호를 받을 수 없 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 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런 것에는 전혀 신 경을 쓰지 않겠지. 신경을 쓰는 사람은 나뿐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도 우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뿐, 그것을 깊이 따져볼 의사는 전혀 없었다. 기숙사의 방 배당은 원칙적으로 1, 2학년생이 2인용, 3. 4학년생 이 1인용으로 되어 있다. 2인용 방은 6조(3평)짜리 방보다 약간 긴 정도의 넓이로, 맞은편 벽에 알루미늄 게시로 된 창이 있고, 창 앞에 서 등을 마주 대고 공부할 수 있도록 책상과 걸상이 배치되어 있다. 입구의 왼쪽에 철제 2단 침대가 있다. 가구는 모두가 지극히 간결하 고 튼튼한 것들이었다. 책상과 침대 이외에는 로커가 두 개, 작은 커 피 테이블이 하나, 그리고 붙박이 책장이 있다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아도 시적인 공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느 방이나 책장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헤어드라이어와 전열기와 인스턴트 커피와 홍차와 각설탕과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 먹기 위한 냄비와 간단한 식 기가 몇 개 놓여 있다. 회반죽을 바른 벽에는 (헤이된 펀치)(에로틱 한내용이 많은 대중 잡지)의 핀업 걸 사진이나 어디선가 뜯어온 포 르노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그 중에는 장난 삼아 돼 지의 교미 하는 사진을 붙여 놓은 방도 있지만, 그러한 것은 극히 드물고, 대부 분의 방에 붙어 있는 것은 여자들의 나체나 여가수 혹은 여배우의 사진이었다. 책상 위의 책꽂이에는 교과서와 사펀 겐 소설 통이 늘 어서 있었다. 남자들만의 방이라서 대체로 아주 지저분하다. 쓰레기통 바닥에 는 곰팡이가 準 글껍질이 달라붙어 있고, 재떨이 대용의 깡통에는 담배꽁초가 10센티 이상이나 쌓여 있는데, 거기에서 연기가 솟아오 르면 커피나 맥주 따위를 부어서 끄는 탓으로, 코를 찌르는 쉰 냄새 가풍긴다. 식기는 모두 검게 변색된 데다가 군데군데 정체 불명의 물질이 달라붙어 있고, 바닥에는 인스턴트 라면의 비닐 봉지며 빈 병이며 무언가의 뚜껑 등 잡동사니가 흩어져 있다. 그것들을 빗자루 로 쓸어 모아 쓰레받기에 담아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방바닥에서 먼지가 뿌옇게 날아오 른다. 그리고 어느 방이건 지독한 냄새가 풍긴다 방에 따라서 그 냄 새는 조금씩 다르지만 냄새를 구성하는 요소는 똑같다. 땀과 체취 와 쓰레기다 모두들세탁물을 항상 침대 밑에 던져넣어 두는 데다 가, 정기적으로 이불을 말리는 사람이란 없으니까 이불은 땀을 잔뜩 빨아들여 구제하기 어려운 냄새를 풍긴다 그러한 카오스 속에서 용 케도 치명적인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지금도 나는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비하면 내 방은 영안실처런 청결했다 바닥에는 먼지 하나 없고. 유리함은 깨끗했으며 , 이불은 매주 한 번씩 말렸고. 연필은 연필꽂이에 잘 꽂혀 있고 커튼조차 매달 한 번은 세탁을 했 다 내 동거인이 병적으로 청결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는다른 친 구들에게 "저 녀석은 커튼까지 세탁한다' 하고 말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커튼도 가끔 세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커튼이란 반영구적으로 창문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저 녀석은 성격 이상자'라고 말했 다. 그 이후로 그들은 그를 나치 당원이나 돌격대라고 부르게 되었 다. 내 방에는 주간지의 사진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대신에 암스텔 담 운하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내가 누드 사진을 붙이면 "와타나 베, 나, 난 이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고 말하며 그 사진을 떼어 내고, 운하 사진을 붙였다. 나도 특별히 누드 사진을 붙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어서, 별로 불평은 하지 않았다. 내 방에 놀러오는 사람들 은 모두 그 운하 사진을 보고는 "뭐야. 이건?" 하고 물었다. "돌격대 는 이걸 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한다구' 하고 나는 대답했다. 농담 삼아 한 말이지만, 모두들 그 말을 쉽게 믿어버렸다. 너무나도 쉽게 믿었기에 나중에는 나도 그가 정말로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모두들 내가 돌격대와 같은 방이 되었다는 점을 동정해주었지만 나 자신은 그다지 싫지 않았다 내가 내 주변을 청결히 하고 있는 한, 그는 나에게 일체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오히려 편 안할 정도였다. 청소는 전부 그가 해주었고. 이불도 그가 말려주었 고, 쓰레기도 그가 치워주었다. 내가 바빠서 사흘간 목욕을 하지 못 하면 킁킁 냄새를 맡고는 목욕을 하는 게 좋으리라고 충고도 해주었 고, 이발을 할 때가 되었다는 등 코털을 깎는 게 좋으리라는 등 말해 주었다. 그러나 벌레가 한 마리라도 있으면, 방안에 온통 살충제를 뿌려대어서,그럴 때면 나는 옆방의 카오스 속으로 대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격대는 어느 국립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했다. "나는 말이야. 지, 치, 지도를 공부하고 있어." 처음 만났을 때, 그 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지도를 좋아하나?" 나는 물어보았다 "응, 대학을 졸업하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서. 피. 지 지도를 만들 거야." 정말로 이 세상에는 갖가지 희망과 인생의 목적이 있구나 하고 나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것은 도쿄로 올라와 내가 처음으로 감 탄한 사실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지도 제작에 흥미를 지니고 열의 를 보이는 사람이 전혀 없다면-너무나 많을 필요도 없겠지만 그야말로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지도'라는 말을 입 밖에 낼 때마 다 말을 더듬는 인간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은 어쩐 지 기묘했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말을 더듬기도 하고 더듬지 않기 도 했지만, '지도'라는 말이 나을 때에는 100퍼센트 확실히 더듬었 다. '너는 뭘 전공하지?" 그가 물었다. "연극" 나는 대답했다. "연극이라니 연기를 하나?" "아니 , 그런 건 아니야 희곡을 읽으면서 , 연추하는 거야. 라신(17 세기 후반에 활약하던 프랑스 극작가)이라든가 이오네스코(20세기의 프랑스 극작가)라든가 혹은 세익스피어 등을 " 세익스피어 이외의 사람은 이름을 들은 적이 없어,하고 그는 말 했다. 나도 거의 들은 적이 없다. 강의 계획서에 그렇게 적혀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런 걸 좋아하는 거니?" 그는 물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는 대답했다. 그 대답은 그를 혼란시켰다 혼란이 되자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나는 정말로 나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무엇이든 상관없었어." 나는 설명했다 "민속학이라도 좋 고 퐁양사하도 좋았어. 그냥 우연히 연극이었던 거야, 마음 내킨 게. 그것 뿐이야" 하지만 그 설명은 물론 그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잘 모르겠군." 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 내 경우는, 지, 지, 지도를 좋아하니까, 지, 지, 지. 지도 공부를 하는 거야. 그 공부를 하려고 일부러, 도쿄의 대학에 들어와, 부, 부모님 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지내고 있어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다고 하 니까 . " 그가 하는 말이 정론이었다. 나는 설명을 포기했다. 그리고 우리 는 성냥개비로 제비를 뽑아서 2단 침대의 상하를 정했다 내가 상단 이고 그가 하단이었다. 그는 언제나 하얀 셔츠에 검정 바지와 감색 스웨터 차림이었다. 까까머리에 키가크고, 괌대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학교에 갈 때는 언제나 교복을 입었다 구두도 가방도 검정색이었다. 언뜻 보면 우 익 학생 같은 차림이어서, 주위의 학생들도 돌격대라고 불렸지만 사 실 그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옷을 고르기가 귀찮으니까 언제나 그런 차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관심을 지니고 있는 것은 해안선의 변화라든가 새로운 철도 터널의 완성이라든가, 그러 한 종류의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한 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 작하면, 그는 말을 마구 더듬거리며 ,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쪽 이 도망치 거나 잠들어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그는 아침 여섯 시면 '기미가요'를 괘종시계 삼아서 기상했다. 주 위에 과시라도 하듯이 요란스럽게 거행되는 국기 게양식도 전혀 도 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상하면 옷을 입고 세면실로 가서 세 수를 한다. 세수를 하는 데에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린다. 이빨을 하나 하나 뽑아내서 씻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으로 돌 아오면 탁탁 소리를 내며 수건의 주름살을 완전히 편 다음 스팀 위 에 걸어서 말리고, 칫솔과 비누는 책장에 원위치시킨다 그리고는 라디오를 켜고 라디오 체조를 시작한다. 나는 대체로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아침 여덟 시까지 숙면을 취 했다. 그래서 그가 일어나서 부스럭거리거나, 라디오를 켜고 체조를 시 작해도, 여전히 잠에 푹 빠져 있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때라 도, 라디오 체조의 도약 부분에 이르면 반드시 잠이 깨게 되었다. 깨 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그가 도약할 때마다-그것도 정말로 높이 도약했다-그 진동으로 침대가 덜컹덜컹 상하로 움직였기 때문이 다 하지만 사흘째 아침, 나는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결론에 도달 했다. "미안하지만. 라디오 체조는 옥상이나 다른 홋에서 해주지 않겠 니?" 나는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걸 하면 잠이 깬다구." "하지만 이미 여섯 시 반이야."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건 알고 있어. 여섯 시 반이지? 여섯 시 반은 나에게는 아직 잠자고 있을 시간이야. 어째서인가는 설명할 수 없지만 하여간에 그 렇게 되어 있다고." "안돼 옥상에서 하면 3층사람들이 불평할거야 여기라면 아래 층은 창고니까 아무도 트집 잡는 사람이 없지만 "그러면 안뜰에서 해. 잔디 위에서." "그것도 안 돼 . 나. 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아니니까, 저. 전원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고. 음악이 없으면 라디오 체조란 불가능하다 구.' 사실 그의 라디오는 아주 오래된 모델의 전원식이었고, 내 것은 트랜지스터였지만 FM밖에 청취할 수 없는 음악 전용의 라디오였 다. 안되 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서로 절충하자" 내가 제의했다. "라디오 체조는 해도 좋아. 그 대신에 도약 닥만큼은 하지 말아줘 그거 무척이나 시끄 러우니까. 그러면 됐지?" '도, 도약: 그는 깜짝 놀란 듯이 되물었다. "도약이라니. 그게 뭐 지?" "도약이 도약이지 뭐야. 깡충깡충 뛰는 거 말이야." "그런 건 없어 " 나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무러면 어떻겠느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말을 꺼낸 부분은 명백히 해두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실제로 NHK 라디오 채조 제1절을 노래하면서 방바닥 위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봐 이거야, 분명히 있잖아.' "그,그렇군 분명히 있군 그런데토모,몰랐어. )그러니까," 나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말했다. "그 부분만 생략해 곽란 말이야. 다른 부분은 전부 참을 테니까. 도얀 분만 생략해서 네가 푹 잘 수 있도록 해줄 수 있겠나?" "안 돼 ." 그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하나만 뺄 수는 없어 . 10년이 나 매일같이 해 왔으니까. 역시 시작하면.무,무의식적으로 전부 해 버린다구 하나를 빼면 저 , 전부, 할 수 없게 될 거야." 나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 겠는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끔찍한 라디오를 그가 없는 사이에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것이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지옥에 뛰어 들 듯한 소란이 벌어질 게 뻔했다 돌곁대는 자신의 소유물을 극단 적으로 아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말을 잃고 허탈하게 침대에 앉아 있으려니까 그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를 위로해주었 다. "너, 너도. 함께 일어나서 체조를 하면 좋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호는 아침 식사를 먹으러 가버린다. 내가 돌격대와 그의 라디오 체조 이야기를 하자, 나오코는 콕콕 웃었다 웃기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나도 웃었 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기는-그 웃음은 불과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지만-정말로 오래간만이었다 나오코와 나는 요쓰야역에서 전차를 내려 , 이치가야 쪽을 향해서 선로 곁의 제방을 걷고 있었다 5월 중순의 일요일 오후였다. 아침 결에 흩뿌리다가 그치다가 하던 비도 오전 중에 완전히 개이고. 낮 게 드리우고 있던 침울한 비구름도 남쪽에서 부는 바람에 쫓겨서 모 습을 감추었다. 선명한 녹색을 띤 벚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햇 빛을 반짝반짝 반사시키고 있었다. 햇살은 이미 초여름이었다. 스쳐 가는 사람들은 스웨터나 상의를 벗어, 어깨나 팔에 걸치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는 누구나 행해 보였다. 제방 건너편에 보이는 테니스 코트에서는 젊은 사내가 셔츠를 벗고 반바지 차림이 되어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란히 벤치에 앉은 수녀 두사람만이 단정하게 검은색 겨울 옷을 입고 있어서, 그녀 들 주위에만큼은 아직 여름 햇살이 비추고 있지 않은 듯이 여겨졌지 만 그래도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양지바른 곳에서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15분 정도만 걸어도 등에 땀이 배어들었고, 나는 두터운 면 셔츠 를 벗고 티셔츠 바람이 되었다 그녀는 옅은 회색 트레이닝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 깨끗하게 빨래한 옷인 듯 제법 보기 좋을 정도로 색이 바래 있었다. 훨씬 오래 전에 그녀 가 그 옷가 같은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본 것 같았지만,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당시의 나 는 나오코에 관해서 그다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공동 생활은 어때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건 재미있어 요" 나오코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 아직 한 달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대 답했다 "하지만 그다지 나쁘지는 않더군. 적어도 참기 어려운 일은 없어 ' 그녀는 수돗가 앞에 멈추어 서서, 겨우 한 모금 정도 물을 마시 고, 바삐 호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닦았다. 그리고 는 몸을 구부려 정성스럽 게 구두끈을 고쳐 매었다. "있잖아요 저도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공동 생활 말이야?" "그래요." 나오코는 말했다. "글쎄, 그런 건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성가신 점이 상당히 많다고 할 수 있지 규칙도 까다로운 데다가, 별 볼일 없는 녀석이 어깨에 힘을 주질 않나, 룸 메이트는 아침 여섯 시 반이면 라디오 체조를 시 작하질 않나 말이야 하지만 그런 일은 어디에 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신경에 거슬리지 않아. 여기에서 살수밖에 없다 고 생각하면, 그런 대로 살 수 있어 대충 그렇지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늣 듯했다. 그리고 신기한 물체라도 들여다보듯이 내 눈을 가만히 들여 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은 섬뜩할 정도로 깊고 투명했다. 그녀가 그토록 투명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까지 몰 랐나. 생각해보면 나오코의 눈을 가만히 볼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둘이서만 걷는 것도 처음이고. 이토록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기숙사 같은 곳에 들어갈 작정인가" 나는 물어보았다 "아니,그런 건 아니에요." 나오코는 대답했다. "단지 저는,잠간 생각했던 거예요. 공동 생활이란 어떤 걸까 하고. 그리고 그건 . ." 나오코는입술을깨물며 적당한 어휘나 표현을찾는모양이 었지만 결국은 찾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한숨을 네쉬며 눈을 내리 깔았다. "잘 모르겠어요, 됐어요."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나오코는 다시금 동쪽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고, 나는 약간 떨어 져서 그 뒤를 걸었다. 나오코와 만난 것은 1년 만이었다 1년 동안에 나오코는 몰라볼 정도로 여위어 있었다. 그녀의 특징이었던 도톰한 볼살도'대부분 빠 지고, 목도 아주 가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배만 앙상하다거나 건강 하지 못하다거나 하는 인상은 전혀 없었다. 그녀의 여윈 모습은 아 주 자연스럽고 온화하게 보였다. 마치 어딘가 길고 비좁은 장소에 살짝 몸을 감추고 있던 중 몸이 제멋대로 가늘어져 버렸다는 인상이 었다. 그리고 나오코는 내가 과거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뻤다 나는 그러한 일에 관해서 나오코에 게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어떻 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서 망설이다가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우리는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나오코와 나는 중앙선 전차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혼자서 영화라도 볼까 하는 생각에 나온 것이고. 나는 간다(神田)의 책방에 가던 중 이었다. 양쪽이 모두 그다지 중요한용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릴까요 하고 나오포가 말하기에. 우리는 전차에서 내렸다 그곳이 우연히 요쓰야 역이었던 것뿐이다. 물론 둘만이 되자 우리는 서로 이야기할 화제가 별로 없었다 나오코가 왜 전차에서 내리자고 했는 지 .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무지 이야깃거리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역 바깥으로 나오자, 그녀는 어디로 가자는 말도 없이 무작정 걷 기 시작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르듯이 걸었다. 나오코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1미터 정도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물론 거리를 좁히려 한다면 좁힐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 았다 나는 나오코의 1미터 가량 위를, 그녀의 등과 곧게 뻗은 검은 머리를 보며 걸었다. 그녀는 커다란 갈색 머리디를 하고 있어서, 고 개를 옆으로 돌릴 때마다 작고 하얀 귀가 보였다. 이따금 나오코는 뒤를 돌아다보며 나에게 질문했다. 제대로 대답이 나오는 질문도 있 고,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를 막연한 질문도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들리건 안 들리 건 그녀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오코는 자기가 하 고 싶은 말만 하고는,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갔다. 나는, 상관없겠지 산보하기에는 좋은 날씨로군, 하고 생각하며 체념했다 그러나 산보라고 하기에는 나오코의 걸음은 너무나도 본격적이 었다. 그녀는 이이다바시에서 오른쪽으로 禁어져 오호리바타로 나 온 다음, 다시 진보초의 교차로를 넘어 오차노미즈의 비탈을 오르더 니, 그대로 혼고로 빠졌다. 그리고 전차 선로를 따라 고마고메까지 걸었다. 상당한 거리였다 고마고메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온화한 봄날 저녁이었다. "여긴 어디에요?" 나오코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물었다. "고마고메 " 나는 대답했다. "몰랐나? 우리는 빙 돌아왔어.' "왜 이런 곳에 왔을까?" "나오코가 왔잖아. 난 뒤를 따라오기만 하구." 우리는 역 부근의 분식 집으로 들어가 간단한 식사를 했다. 목이 말라서 나는 혼자서 맥주를 마셨다. 주문해서 식사를 끝낼 때까지 우리는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걷느라 지쳐서 약간 녹초 가 되어 있었고, 그녀는 테이녁 위에 양손을 談은 채 다시 무언가 생 각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뉴스가 일요일인 오늘은 행락지가 어디나 만원이었습니다. 라고 전했다. 그리고 우리는 요쓰야에서 고마고메 까지 걸었습니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몸이 대단히 튼튼하군" 나는 메밀국수를 다먹고 난 후에 말했 다 "깜짝 놀랐나요?" '그럼 "이 래봬도 중학교 시 절에는 장거리 선수로 10킬로나 15킬로를 달 렸거든요. 게다가 아버님이 등산을 좋아하신 덕분에 , 어려서부터 일 요일이면 등산을 했어요. 정말, 우리 집 뒤가 바로 산이잖아요?그 러니까 자연히 다리가 튼튼해진 거예요." 그렇게는 보이 지 않는데." "그래요. 모두들 저를 아주 연약한 아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사 람은 보기와는 다른 법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펏붙이듯 이 살짝 웃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주 지쳤어 " 죄송해요, 하루 종일 같이 있게 해서 .' )하지만 나오코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 사실 둘이 서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무슨이야기를 했는지 생각해내려 해도,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별다른 의미도 없이 테이블 위의 재떨이를 만지작거렸다. "있잖아요, 만약 괜찮으시다면,당신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말 이에요.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말을 할 입장이 아 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입장?"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입장이 아니라니,무슨 말이 야"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아마도 내가 지나치게 놀란 탓이리라 "잘 설명할 수는 없어요." 나오코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녀는 트레이닐 셔츠의 양쪽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끌어올렸다가, 다시 원 래대로 내렸다. 전등 불빛이 그녀의 솜털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입 장이라고 말할 작정은 아니었어요. 조금 다르게 말하려 했어요." 나오코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잠시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무언가 적당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 고 기대하며 보고 있는 듯이도 여겨졌다. 물론 적당한 표현은 발견 되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눈을 감더니 , 머리띠를 만지작거 렸다 상관없어." 나는 말했다. "나오코가 하려는 말의 뜻을 막연하게 나마 알고 있으니까. 나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나오코가 말했다. "요즈음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어요. 무언가 말을 하려 해도. 언제나 엉뚱한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엉뚱하거나, 아니면 전혀 반대거나 그래서 그걸 정정하려 들면. 더더욱 혼란에 빠져서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 고, 그러면 처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죠. 마치 자신의 몸이 둘로 나뉘어 있어서. 서로 쫓아다니며 장난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에요. 한가운데 에 아주 計뜬 기둥이 서 있어 서 . 그 주위를 빙빙 돌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거예요. 제대로 된 말은 언제나 다른 한 사람의 내가 지니고 있는데 저는 절대로 쫓아갈 수 가 없는 거예요 " 나오코는 한팔을 들어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 느낌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많건 적건 그런 느낌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지 " 나는 대답 했 다. "모두들 자신을 표현하려다가. 정확히 표현할 수 없어서 초조해 하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나오코는 약간 낙담한 듯했다 "그것과는 또 달라요." 나오코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이상은 아 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만나는 건 전혀 상관없어." 나는 말했다. "어차피 일요일에는 언 제나 빈둥거리며 지낼 뿐이고, 걸으면 건강에 좋으니까." 일단 함께 야마노테 선을 탄 뒤, 나오코는 신주쿠에서 중앙선으 로 갈아탔다. 그녀는 고쿠분지에 작은 아파트를 빌려서 살고 있었 다 "있잖아요, 제 말투가 옛날에 비해서 약간 변했나요?" 헤어질 때 나오코가 물었다. "약간 변한 듯한 느낌이 드는군."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잘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자주 만나 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한 기억이 별로 없으니까." "그렇군요." 그녀도 그것을 인정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전화 해도 좋을까요?" "좋아, 물론 기다릴게." 나오코와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봄이었다. 그녀도 역시 학년으로, 미션 계열의 품격 있는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면 '품격이 없다'고 손가락질을 당할 정도로 품격이 있는 학교였다. 나에게는 기즈키라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친하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나오코는 그의 애인이었다 기즈키와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의 소꿉친구로, 서로 의 집이 2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데에 있었다 대부분의 소꿉친구가 그렇듯이 , 그들의 관계는 무척 공개적이어 서 둘이서만 있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듯했다. 둘이 는 자주서로의 집을 방문해 저녁 식사를 상대방 가족과 함께 들거 나, 마작을 하곤 했다 나와 더블 데이트를 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 다 나오코가 같은 반 여자아이를 데려와, 넷이서 동물원에 가거나, 수영장에 수영하러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가거나 했다. 하지만 솔직 히 말해서. 나오코가 데려오는 여자아이들은 귀엽기는 했지만, 나에 게는 다소 지나치게 고상했다. 나로서는 다소 품격이 없더라도 마음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공립 학교의 같은 반 여학생들이 성격에 맞 았다. 나오코가 데려오는 여자아이들이 그 귀여운 머리로 도대체 무 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기즈키는 나와의 더블 데이트를 포기하고. 우리 셋이서만 외출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기즈키와 나와 나오코 셋이었 다. 생각해보면 진보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가장 마음 편했고, 별 탈이 없었다. 한 사람 더 들어오면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 해졌다. 셋이서 있으면, 마치 네가 게트이고, 기즈키가 유급한 호 스트이고. 나오코가 어시스턴트인 텔레비전 프로그램 같았다 언제 나 기즈키가 일행의 중심에 있었고, 그는 그러한 것에 능숙했다. 기 즈키에게늪 사실 냉소적인 경향이 있어서. 남들에게 오만하다는 인 상을 주는 적이 많았지만, 본질적으로는 친절하고 공평한 사내였다. 셋이 있으면 그는 나오코에게도 나에게도 똑같이 공평하게 말을 걸 거나 농담을 하며, 심심해 하는 사람이 없도록 신경을 썼다. 누군가 가 오랫동안 잠자코 있으면 그쪽에 말을 걸어서 상대방의 말을 능숙 하게 이끌어냈다 그러한 기즈키를 보고 있노라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에게는 그 자리의 분위기를 순간순간 판단하여 상황에 적절히 대응 하는 능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은 상대방의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몇 가지 찾아낼 수 있는 좀처럼 드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내가 아주 재미있는 인간이고 아주 재미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 이 들곤 했다. 물론 그는 결코 사교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학교에서는 나 말고는 어느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했다 그토록 두뇌가 명석하고 좌 담의 재능이 있는 사내가 왜 그 능력을 더 넓은 세계로 이끌어내지 못하고 우리 세 사람만의 작은 세계에 집중시키는 데에 만족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왜 그가 나를 선택하여 친구로 삼았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혼자 책을 읽거나 음악 듣 기를 좋아하는.아주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인간으로서, 기즈키 가 일부러 주목하여 말을 걸어을 만한, 남들보다 뛰어난 점을 한 가 지도 지니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금세 마음이 맞 아 사이가 좋아졌다. 그의 아버 지는 치과 의사로, 뛰어난 솜씨와 비 싼 요금으로 유명 했다 "돌아오는 일요일에, 더블 데이트하지 않을래? 내 여자 친구가 여학교에 다니는데, 귀여운 아이를 데리고 올 거야."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기즈키가 그렇게 물었다. 좋아,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하 여 나오코와 내가 만난 것이다. 나와 기즈키와 나오코는 그런 식으로 몇 차례나 함께 시간을 보 냈지만, 그래도 기즈키가 자리를 비워 둘만이 되면, 나오코와 나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도대체 무슨 이야기 를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사실, 나오코와 나 사이에는 공통되 는 화제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을 마시거나 테이블 위의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기즈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즈키가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오코도 그다지 말 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나도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상대방이 하 는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타입이었으니까, 그녀와 둘만이 되떤 나 로서는 다소 거북했다. 성격이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그냥 이 야깃거리가 없어서였다. 기즈키의 장례식이 끝나고 2주일 정도 지나서 나오코와 나는 딱 한 번 만났다. 간단한 용건이 있어서 찻집에서 만났지만. 용건이 끝 나자 그 다음은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몇 가지 화제를 꺼내 어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도중에 끊겨 버렸 다. 게다가 그녀의 말투는 왠지 모르게 차가웠다 나오코는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헤 어진 이후로. 나오 코와는 1년 후에 중앙선 전차에서 마주칠 때까지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오코가 나에게 화를 낸 이유는, 그녀가 아니라 내가 기 즈키와마지막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물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기분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도 가능한 한 이해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은 지나간 일이고. 아무리 생각해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월의 따사로운 날 낮에, 점심 식사가 끝나자 기즈키는 나에게 오후 수업을 빼먹고 당구라도 치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특별히 오후 수업에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우리는 학교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는 어슬렁거리며 언덕을 내려가 항구 쪽으로 가 서 네 게임 정도 당구를 쳤다 첫 게임을 내가 가볍게 이기자 그는 갑자기 심각해지더니 나머지 세 게임을 모두 이겨버렸다. 약속대로 내가 게임 값을 냈다. 게임을 하는 동안 그는 농담 한 번 하지 않았 다.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게임이 끝나자 우리는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오늘은 어쩐 일로 심각하지?" 나는 물어보았다. "오늘은 지고 싶지 않았거든." 기즈키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날 밤 그는 자기 집 차고에서 죽었다. N36O의 배기 파이프에 고 무 호수를 연결한 뒤, 창문 무 테이프로 바르고 엔진을 고속 으로 회전시킨 것이다. 죽을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나는 모른다. 친척의 문병을 갔던 부모님이 귀가하여 차고에 차를 넣으려 고 문을 열었을 때,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카 라디오가 켜져 있었 고, 와이퍼에는 주유소의 영수증이 꽃혀 있었다. 유서도 없었고 심증이 가는 동기도 없었다. 그와 마지막으로 만 나서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나는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설마 그러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씁니다 라고 나는 담당 경관에게 말했다 경관은 나에 대 해서도 기즈키에 대해서도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그는 학교 수업을 빼먹고 당구나 치러 가는 따위의 인간이라 면 자살을 한다 하더라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 이었다. 신문에 자그맣게 기사가 실리고, 그것으로 사건은 끝났다. 빨간n36o은 처분뇌었다. 교실에 있는그의 책상 위에는 얼마간 하 얀 꽃이 놓여 있었다 기즈키가 죽고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10개월간, 나는 주위의 세계 속에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정할수가 없었다. 나는 한 여학생과 친해져서 그녀와 잤지만. 6개월도 지속되지 않았다 그에 는 나에게 무엇 하나 호소해 오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도쿄의 사립대학을 선택하여 시험을 보고, 아무런 감흥도 없이 입학했다. 그 여학생은 나에게 도쿄로 가지 말 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고베의 거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리 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은 나와 이미 자버렸으니까. 나야 어떻게 되든 아무 관심이 없어져 버린 거죠?"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설명했다 나는 단지 그 도시를 떠나고 싶 었던 것뿐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도쿄로 향하는 신간선 안에서 나는 그녀의 좋은 부력이나 훌릉한 부분을 떠올리고는, 자신이 너무나 잔혹한 짓을 했다는 생각 에 후회도 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잊기로 했 다. 도쿄에 도착하여 기숙사로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 각하지 말 것, 모든 것들과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뿐이었다. 나는 녹색 펠트천을 깐 당구대와. 빨간N36O과 책상 위 의 하얀 꽃 등, 그러한 것들을 전부 깨끗이 잊어버리기로 했다. 화장 터의 높은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나, 경찰의 조사실에 놓여 있던 두루뭉실한 모양의 문진 같은 것들도 전부. 처음에는 그것으로 만사 가 해결될 듯이 여겨졌다 그러나 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마치 내 부에는 무언가 딱연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 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 덩어리는 확실하고 단순한 형태를 보이기 시 작했다 나는 그 형태를 말로 표현할 수가 있다. 그것은 이러한 것이 었다 죽음은 생의 대립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표현하면 평범하지만, 그때의 나는 하나의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 덩어리로서 체내에 느꼈던 것이다 문진 속에도. 당구 대 위에 나란히 놓인 적과 백 네 개의 총 속에도 죽음은 존재하고 있 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먼지처럼 폐 속으로 들 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삶에서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 '죽음은 언젠가 확실히 우리들을손안 에 사로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자면 죽음이 우리들을 붙잡을 날까시. 우리들은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라고. 나는 그 것이 지극히 짙상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이라고 여겼다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지 , 저쪽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기즈키가 죽던 날 밤부터, 나는 더이상 죽음을(그리고 삶 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죽음은 勢에 대립 되는 존재가 아니다. 죽음은 나리는 존재 속에 이미 본원적으로 내 포되어 있는 것이고, 그러한사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잊을 수가 없 다. 열일곱 살의 5월의 밤에 기즈키를 사로잡은 죽음은. 그때 동 시에 나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공기 덩어리를 체내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심각해 진다고 해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지리한 숨막히는 배반성 속에서 . 器임없는 공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확실히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 이다 다음 토요일에 나오코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일요일에 우리는 데 이트를 했다 그냥 데이트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그 이외에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번처럼 길을 걷다가 어딘가 가게로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다시 걸었다 그러다 저녁 무렵에 식사를 한 뒤, 작별 인사 를 하고 헤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띄엄띄엄 말을 했지만,스스로그 점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였고.나도 특별히 의식하여 말하 지는 않았다. 기분이 내키면 서로의 생활이나 대학 이야기를 했지 만. 모두가 단편적이어서. 그것이 다른 이야기와 연결되지는 않았 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체로 무작정 길을 걷기만 했다 다행히도 도쿄의 거리는 넓어서. 아무리 걸어도 끝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나서.그런 식으로 걸어다녔다. 그녀가 앞에 서고, 내가 약간 떨어져서 그 뒤를 걸었다. 나오포는 여러 가지 모양 의 머리띠를 지니고 있었고, 언제나 오른쪽 귀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 그녀의 뒷모습만 보았던 탓으로, 그런 것만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나오코는 부끄러울 때면 곧잘 머리띠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자주 입을 닦았다. 손수건으로 입 을 닦는 것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의 버릇이었다. 그러한 행동을 보늪 사이에 나는 조금씩 나오코에 대해서 호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녀는 무사시노 변두리에 있는 여대에 다니고 있었다. 열어 교 육으로 유명한 아담한 학교였다 그녀의 아파트 주변에는 깨끗한 물 이 흐르는 개울이 있어서. 때때로 우리는 그 곳을 산책했다. 나오 코는 나를 자기 방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방안 에 나와 단 둘이 있어도 어색해 하거나 하지 않았다 깨끗하게 잘 정 돈된 방이어서 창가 구석 쪽에 스타킹이 널려 있지만 않았더라면 독 신 여성의 방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아 주소박하고 간소하게 지냈으며 친구가 거의 없는 듯했다. 그러한 생활은 고등학교 시절의 그녀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가 알고 있는 과거의 그녀는 언제나 화려한 옷을 입고, 수많은 친구 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방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대학에 들어가, 집을 떠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 는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 다. "제가 이 대학을 선택한 건, 같은 독효에서 아무도 여기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나오코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여기에 들어 왔어요. 다들 좀더 세련된 학교로 가고 싶어 하거든요. 아시겠죠?" 하지만 나오코와 나의 관계도 아무런 진보가 없는 것은 아니었 다. 조금씩 조금씩 나오코는 나에게 익숙해졌고. 나는 나오코에게 익숙해져 갔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 나오코는 아 주 자연스럽게.마치 당연한 일처럼,내 곁을 걷게 되었다. 나는 그 것을 나오코가 나를 친구로 인정해준 표시라고 생각했고. 그녀처럼 아리따운 아가씨와 나란히 걷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 는 둘이서 도쿄 거리를 목적도 없이 걸었다. 언덕을 오르고, 강을 건 너고. 선로를 건너서 , 무작정 걸었다 어디로 가고 싶다는 목적 의식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냥 걸으면 되었다. 마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종긴 의 직처런, 우리는 곁눈도 팔지 않고 열심히 걸었다.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고 걸었다 가을이 되자 기숙사 안뜰은 피나무 및으로 뒤덮였다 스웨터를 입으니 새로운 계절의 냄새가 났다. 나는 구두 한 켤레가 다 닳자, 스웨 이드 구두를 샀다. 그 무렵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 도무지 기억해낼 수가 없 다. 아마도 대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전히 우리는 과거의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기즈키라는 이름은 두 사람의 입 밖에 절대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어 새 찻집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한 채 잠자코 있는 데에 완전히 익 숙해져 있었다 나오코가 돌격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해서, 나는 자주 그 이야기 를 했다 돌격대는 같은 과 여학생(물론 지리학과 여학생)과 한 차 례 데이트를 했는데, 저녁 무렵이 되어 무척 낙담한 모습으로 돌아 왔다. 그것은 6월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는 나에게 "이 있잖아. 와타나베, 너는 여, 여자아이와 말이야, 만나서 무 무슨 이야기를 하 니?" 하고 질문했다. 내가 무엇이라 대답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 만. 어쨌든 그는 질문할 상대를 완전히 잘못 골랐던 것이다 7월에 그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가 암스텔담 운하 사진을 떼어내고, 샌프란 시스코의 금문교 사진을 붙여 놓고 갔다. 금문교를 보면서 마스터베 이션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다만 그것을 알고 望다는 이유에서였 다 "무척 기뻐하며 하더군" 하고 내가 적당히 대답을 하자 누군가 가 다시 그것을 빙산 사진으로 바꾸었다. 사진이 바뀔 때마다 돌격 대는 몹시 혼란스러워 했다. "도대체. 누 누,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그는 물었다 '글쎄, 하지만 상관없잖아? 모두 좋은 사진이니까. 누가 했건, 고 마운 일이잖아." 나는 위로해주었다. "그야 그렇지만, 기분 나쁘군 " 돌격대 이야기를 하면 나오코는 언제나 웃었다. 그녀가 웃는 일 은 적었기 때문에, 나는 자주 돌격대 이야기를 했지만, 솔직히 말해 서 그를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삼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 니었다. 그는 단지 그다지 유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가정의 다소 지 나치게 진지한 셋째 아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도를 만드는 일만이 그의 소박한 인생의 소박한 꿈이었다. 누가 그것을 비웃을 수 있겠 는가? 하지만 '돌격대 조크'는 기숙사내에서는 이미 빼놓을 수 없는 화 제의 하나가 되어 있어서. 새삼스럽게 내가 수습하려 해봤자 수습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오코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나름대로 기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모두에게 돌격 대 이야기를 제공했다. 나오코는 나에게 단 한 번 좋아하는 여자는 없었 냐고 물었다. 나 는 헤어진 여자아이 이야기를 했다. 좋은 아이였고, 그녀와 있는 것 도 좋아했고, 지금도 이따금 그리워지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이 동 요되늑 일은 없노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내 마음에는 단단한 껍질 같은 게 있어서. 그것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정 되어 있는 듯하다고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남을 사랑할 수 가 없는 게 아니겠느냐고. "이제까지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없나요?" 나오코가 물었다 "없어."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가을이 지나 차가운 바람이 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계절이 되 자, 그녀는 이따금 내 팔에 몸을 기대었다. 더플 코트의 두꺼운 천을 통해서, 나오코의 숨결을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팔에 팔장을 끼거나, 내 코트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정말로 추을 때 에는 내 팔에 매달려서 떨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 녀의 그러한 행동에는 그 이상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코 트의 호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평소와 마찬가지로 계속 걸었다. 나도 나오코도 고무 밑창이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 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도로에 떨어져 있는 커다란플라 타너스의 마른 잎을 밟을 때에만 바삭바삭 메마른 소리가 났다. 그 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나오코가 가엽게 여겨 졌다. 그녀가 원하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누군가의 팔이었다. 그녀가 원하고 있는 것은 내 체온이 아니라 누군가의 체온이었다. 나는 내 자신일 뿐이 라는 사실에 , 어쩐지 쑥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그녀의 눈은 예전보다도 더욱 투명하게 느껴 졌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투명 함이었다. 이따금 나오코는 아무 런 이유도 없이, 무엇인가를 찾기라도 하듯이 내 눈 속을 잠자코 들 여다보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쓸쓸하고 견딜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이 되었다. 아마도 그녀는 나에게 무언가 전하고 싶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 게 되었다. 하지만 나오코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라 고. 아니 .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자기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다. 그래서 재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그녀는 쉬지 않고 머 리띠를 만지작거리거나 손수건으로 입을 닦거나. 잠자코 내 눈을 의미도 없이 들여다보거나 하는 것이다. 나오코를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가질 때도 있지만, 언제나 망설이던 끝에 포기했다. 어써면 그 때문에 나오코가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함없이 포쿄의 거리를 걸었고, 나오코는 여전히 허 공 속에서 말을 찾아 헤맸다. 기숙사의 학생들은 나오코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거나, 일요일 아 침에 외출을 하거나 하면, 언제나 나를 놀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모두들 나에게 애인이 생겼다고 믿었다 변명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어서, 나는 그냥 내버려뒀다 저녁 무렵 돌아오면 반드시 누군가가 어떤 체위로 했냐는 등 그녀의 그곳은 어땠나 는 등 내의는 무슨 색이었느냐는 등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나 는 그럴 때마다 적당히 대답해두었다 그리하여 나는 열여덟에서 열아홉이 되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 고, 국기가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리고 일요일이 오면 죽은 친구의 애인과 데이트를 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 이제 부터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수업 때문에 클로델 을 읽고. 라신을 읽고, 에이젠슈테인을 읽었지만. 그러한 책들은 나 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다. 나는 대학 강의실에서 한 사랄도 친구를 만들지 않았고, 기숙사에서의 핀재도 형식적이었다 기숙사 의 학생들은 내가 언제나 혼자서 책을 읽고 있기 때문에 작가가 되 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같 은 별로 없었다. 아무것도 되고 싶은 게 없었다 나는 그러한 기분을 나오코에게 몇 번인가 이야기하려 했다 그 녀라면 내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로군, 하 고 나는 생각했다 이건 마치 그녀의 '말 찾는 병'이 나에게도 옮아 버린 듯하지 않은가, 하고 토요일 밤이 되자 나는 전화가 있는 현관 로비의 의자에 앉아서 나오코한테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토요일 밤에는 학생들이 대 부분 밖으로 놀러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로비는 평소보다 사람이 적 어 조용했다 나는 언제나 素리한 침묵의 공간 여기저기에 떠다니는 빛의 입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파악하려고 노력 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하지만 대답다운 대답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이따금 공중에 떠도는 빛의 입자를 향해서 손을 뻗쳐 보았지 만, 손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나는 자주 책을 읽었지만, 이것저것 많은 책을 익지 않고. 마음에 드는 책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당시에 내가 좋아했던 짜 가는 트루먼 카포트. 존 업다이르, 스코트. 피츠제럴프, 레이먼드 챈 들러 등이었지만. 강의실에서도 기숙사에서도 그러한 류의 소설을 즐겨 읽는 학생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읽는 것은 주로 다카하시 가즈비(高橋和已), 오에 낀자부로(大江健三郎). 미시마 로의느띤101리 글귿 ii 유키오(프烏論紀央) , 혹은 현대 프랑스 작가들의 소설이었다. 그래 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혼자서 묵묵히 책을 읽 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다가는 이따 금 눈을 감고 책 냄새를 후욱 들이마셨다. -2 책의 냄새를 맡고, 페 이지에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지곤 했다 열여덟 살의 나에게 최고의 서적은 존 업다이쳐의 반수인3():獸 人)이었지만,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는 동안 그것은 조금씩 처음 의 광채를 잃어.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게 베스트 원의 지 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그 후로 언제나 나에게 최고의 소설이 되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면 책장에서 위대 한 개츠비를 꺼내어 .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는, 그 부분을 한 차례 읽는 것을 습관으로 삼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한 페이지도 시시한 곳이 없었다. 정말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했 다. 그리고 남들에게 그 출중함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 주위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사람이 없었고, 읽어美 좋다고 생각할 것 같은 사랄조차 없었다. 1懼辨년에 스핀트 피츠제 럴드를 읽는 것은 반동이라고까지 할수는 없어도, 결코 권장할 만 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 당시 내 주위에서 위대한 개츠t를 익은 사란은 단 한 명밖 에 없었고, 나와 그가 친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나가자와였는데. 도쿄 대학 댑학부 학생으로. 나보다도 두 학년 위 였다. 우리는 같은 기숙사에 있어서, 이미 어느 정도는 서로 알고 있 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식당의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쪼이며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있노라니까, 옆에 와 앉으며 무엇을 익느냐 고 물었다. 나는 위대한 개츠비라고 대답했다. 재미있냐고 그가 물었다 전부 읽은 것은 세 번인데 읽을수록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늘어난다고 나는 대답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이나 읽는 사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겠군 "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 다 10월의 일이었다. 나가자와는 자세히 알게 될수록 내게 묘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인생의 과정에서 수많은 기묘한 인간들과 만나, 사귀고, 스쳐 가곤 했지만, 그처럼 기묘한 인간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독서가였지만, 죽은 지 2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원칙적으로 손에 잡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한 책 밖에 신용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 건 아니야. 단지 나늪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책을 읽으며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인생은 짧으니까 " "나가자와 씨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십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발자크, 단테. 조셉 폰래드. 더킨즈." 그는 즉각 대답했다. "그다지 현대적인 작가라고는 할 수 없군요 " "그러니까 읽는 거야. 남들과 같은 책을 읽으면 남들과 같은 생각 밖에 할 수 없게 되잔아. 그런 건 촌논이나 속물들의 세계지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그런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알고 있나, 와타 나베? 이 기숙사에서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인간은 나와 너 둘 뿐이 야.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지 .'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습니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질문했다 "나는 알아. 이마에 표식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기만 해도 확실히 알아. 게다가 우리 두 사람 모두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으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하지만 스코트 피츠제럴드가 죽은 지 아직 20년밖에 지나지 않았잖아요?" "2년 정도는 상관없어 ." 그는 말했다. "柔트 괴츠제럴드 정도의 훌륭한 작가는 어디까지나 예외 적인 존재라구 물론 그가 고전 소설의 숨은 독서 가라는 사실은 기숙사내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고, 만약 알려졌다 하더라도 거의 주목을끝 일은 없었으리라 그는 뭐니뭐니 해도 우선 머리가 좋기로 유명했다. 간 단히 도쿄 대학에 입학하여 , 두말할 나위 없는 성적을 취득했고, 공 무원 시험을 쳐서 외부성에 들어가 외교간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 다. 아버지는 나고야에서 큰 병원을 경영했고, 형 역시 토쿄 대학 의 학부를 나와, 아버지 뒤를 잇기로 되어 있었다. 아주 완벽한 일가처 럼 보였다 용돈도 충분히 지니고 있었고.더구나 풍채도 좋았다 그 래서 누구나 그를 높게 평가했고, 사감조차도 나가자와에게는 심한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요구당한 사람은 불평 한마디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 었던 것이다 나가자와는 아주 자연스럽게 남을 끌어들여 복종 시키는 재주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남들 위에 서서 잽싸게 상황을 판단 하고, 남들에게 능숙하고 정확한 지시를 내리며 , 남들을 순순히 복종시키는 종류의 능력이다. 그의 머 리 위에는 그러한 힘이 갖추어져 있음을 상징하는 오로라가 천사의 머리 테처럼 퐁랑게 떠 있어서, 누구나 한 번 보기만 하면 '이 사내는 특별한 존재다'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써 나처럼 이렇다 할 특징도 없는 사람이 나가자와의 개인적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모두들 놀라워 했고, 그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에 게 약간의 경의를 표 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모두들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 이유는 아 주 간단했다. 나가자와가 나를 좋아한 이유는 내가 그에 대해서 전 혀 존경도 감탄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이 인간성에 있 어서 특히 미묘한 부분이나 복잡한 부분에 흥미를 느끼기는 했지만, 성적이라든가 오로라라든가 사내다움이라든가에는 티끌만한 관심 도 지니지 않았다. 나가자와로서는 그러한 나의 태도가 상당히 신기 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나가자와는 몇 가지 상반되는 특징을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지니 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나조차도 감동할 정도로 친절했고, 또 몹시 심술궂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고취한 정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구제할 길 없는 속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을 인솔하여 낙천 적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지만, 그 마음은 음울한 진흙탕 바닥 에서 외로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처 음부터 확실히 알아차리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왜 그러한 것 을 보지 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사내는 이 사내 나름 데로 지옥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에 대해서 호의를 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최대의 미덕은 정직이었다 그는 별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자신 의 잘못이나 결점은 언제나 어 김없이 인정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 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친절했고, 여러모로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그가 그렇게 해주지 않았 더라면, 나의 기숙사 생활은 훨씬 복잡하고 불쾌했을 것이다. 그래 도 나는 그에게 한번도 마음을 허락한 적이 없었고. 그런 면에서 그 와 나의 관계는 기즈키와 나의 관계와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나는 나가자와가 만취해서 어떤여자이에게 몹시 못되게 행동하는 것 을 본 이래로, 이 사내에 게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음을 허락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나가자와는 기숙사내에서 몇 가지 전설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그 하나는 그가 관태충(복족류의 연체 동물로. 달팽이 같이 생겼으나 껍데기가 없음.길이 6센티미터 정도이며,특히 일본에 널리 분포되어 있 기 때문에. 몹시 놀라서 위축되었을 때를 가리켜 '괄태충에 소금'이라는 속담까지 생김)을 세 마리 먹은 적이 있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 가무척이나큰 페니스를 지니고 있어서, 이제까지 백 명의 여자와 잤다는 것이었다. 괄태충 이야기는 정말이었다. 내가 질문을 하자, 그는 응 진짜 그 랬어. 하고 대답했다. "커다란 놈을 세 마리 삼켰지." "왜 그런 일을 한 겁니까?" "여러 가지 사정이 얽혀 있지" 그는 대답했다. "내가 이 기숙사 에 들어오던 해에, 신입생과 상급생 사이에 사소한 시비가 벌어졌 어 . 그런데 상대는 우익으로. 목도도 지니고 있으니 , 도저히 이야기 의 결말이 날 분위기가 아니더라구. 그래서 내가 알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걸로 끝내주 십시오 하고 나섰지. 그렇다면 괄태충을 먹으라는 거야. 좋습니다. 먹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지. 그래서 먹었던 거야. 그 녀석들이 커다 란 걸 세 마리 잡아오더군 "기분이 어땠나요?" "기분이고 뭐고, 관태충을 삼킬 때의 기분이란, 관태충을 삼켜본 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모를 거야. 미끄러운 관태충이 목구멍을 지나, 쑤욱 뱃속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란 정말 끔찍하지. 그야말로. 싸늘하고, 입안에 됫맛이 남으니 말이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 는군 그걸 토하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았지, 왜냐하면 토했다가 는 다시 삼켜야 하니까. 그래서 결국 세 마리 전부 삼켰지 '삼키고 나서 어떻게 했나요?" "물론 방으로 돌아와 소금물을 벌컥벌컥 마셨지." 나가자와는 말 했다. "그 외에는 별 도리가 없잖아." "그렇군요." 나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아무도 나에게 무슨 말을 하지 못하게 됐지. 상급생도 포함해서 아무도 말이야. 징그러운 괄태충을 세 마리나 삼 킬 수 있는 인간은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없겠죠." 나는 말했다. 페니스의 크기를 알아보는 것은 간단했다. 함께 목욕을 하면 되 었다. 사실 그것은 제법 훌륭했다 백 명이나 되는 여자들과 잤다는 소문은 과장된 것이었다. 75명 정도가 아닐까, 하고 그는 잠시 생각 하더니 대답했다. 잘 기억은 못하지만 70명은 될 거라고도 말했다 내가 한 명하고밖에 같이 자지 못했다고 말하자, 어이, 그런 건 간단 해 하고 눈을 찡긋했다. '요번에 나와 함께 가자구 괜찮아, 금세 할 수 있게 되니까." 나는 그때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실제로 해보니 정말로 간단했다 너무나 간단해서 맥이 빠질 정도였다. 그와 함께 지부야 나 신주쿠 언저리의 바인지 스낵인피에 들어가서 (가게는 대체로 정 해져 있었다) , 적당한 여자아이 두 명을 발견하여 이야기를 하고(세 상은 둘이서 다니는 여자들로 가득했다) , 술을 마시고, 그리고는 호 텔로 들어가 섹스를 했다. 하여간에 그는 이야기가 능숙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그가 이야기를 하면 여자아이들은 모 두들 감탄하여. 그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고. 결국은 술을 과하게 마 시고는 취해서 , 그와 자게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핸섬하고. 친 절하고, 눈치가 빨라서 여자들은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했다. 그리고 이것은 나로서도 무척 불가사의하게 여기는 일이지만, 그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조차도 제법 매력적인 사내처럼 보 이는 모양이었다 나가자 와의 독촉으로 내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면 여자들은 나가자와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이야기에 대해서 도 몹시 감탄을 하거나 웃어주는 것이었다. 전부 나가 자와의 매력 덕분이었다. 정말로 대단한 재능이라고 나는 그때마다 감탄했다. 그 것에 비하면, 기즈키의 화술이란 아이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스케일이 달랐다 하지만 나가자와의 그러한 매력에 이끌 리면서도, 나는 기즈키를 몹시 그리워했다. 새삼스럽게도, 기즈키가 정말로 성실한 사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즈키는 자신의 그 러한 소박한 재능을 나오코와 나만을 위해서 간직해두었던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나가자와는 그 압도적인 재능을 게임이라도 하듯이 주위에 마구 뿌렸다. 우선 그는 앞에 있는 여자아이와 정말로 함께 자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그것은 단지 게임에 불과했 다 나는 처음 만나는 여자아이들과 자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 다 성욕을 처리하는 방법으로서는 부담이 없었고, 여자아이들과 포 옹을 하거나 서로 몸을 만지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아침에 헤어질 때였다. 눈을 뜨면 옆에 모르는 여자아이가 쿨 쿨 자고 있고, 방안에 술 냄새가 가득하고, 침대며 조명이며 커튼이 며 하나같이 러브 호텔 특유의 화려한 것인 데다가, 머리는 숙취로 멍해져 있었다. 이윽고 여자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어슬렁거리며 속 내의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스타킹을 신으면서 "당신, 간밤에 확실 히 그거 착용했었죠? 나는 정확히 그날이거든요" 하고 말한다 그리 고 거을 앞에 앉아 머리가 아프다는 등 화장이 잘 먹지 않는다는 등 투덜투덜 불평을 하며, 립스틱을 바르기도 하고 속눈썹을 붙이기도 한다 나는그런 것이 싫었다 그래서 아침까지 있고싶지 않았지만 밤 열두 시 이후로는 출입 금지라는 기숙사의 규칙에 신경을 쓰면서 여자아이를 설득할 수도 없어서(그런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 다), 아무래도 외박 허가를 받아 나오게 되었다. 그러면 아침까지 호텔에 있어야만 하고. 결국은 자기 혐오와 환멸을 느끼며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햇살이 몹시 눈부시고. 입안이 까칠까칠 하고, 머리는 어쩐지 다른 사람의 머리처럼 여겨진다 나는 서너 차례 그런 식으로 여자아이들과 잔 후. 나가자와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짓을 일흔 번이나 되풀이하면 허무한 느낌이 들지 않느냐고 "자네가 이런 것을 허무하게 느낀다면, 그건 자네가 정상적인 인 간이라는 증거이고,그건 반가운 일이야." 그는 대답했다. "모르는 여자와 자며 돌아다녀 봤자 얻는 건 아무것도 없어 . 지쳐서 . 자신이 싫어질 뿐이 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왜 그런 짓을 계속하죠?" "그걸 설명하기는 어렵군.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에 관해서 쓴 게 있지? 그것과 마찬가지야. 즉, 가능성이 주위에 가득할 때, 그것 을 못 본 척하고 지나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 그거 . 알겠나?" "막연히 " 나는 대답했다. "날이 저물어, 여자아이들이 거리로 나와 그 주변을 얼정거리며 술을 마시거나 하지. 그녀들은 무언가를 원하고 있고, 나는 그 무언 가를 그녀들에게 줄 수가 있어.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수도꼭지 를 틀고 물을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일이라구. 그런 건 단 숨에 해치울 수 있고, 상대도 그걸 기다리고 있지 그게 가능성이라 는 거야 그런 가능성이 눈앞에 굴러 다니는데, 그걸 못 본 척하며 지 나칠 수 있겠나? 자신에게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 자네는 잠자코 지나치겠는가?" "그런 입장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것 인지 상상도 되지 않는군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이지 " 나가자와는 말했다 집이 유복하면서도 나가자와가 기숙사에 들어와 있는 이유는. 바람기가 원인이었다. 도쿄에서 혼자 생활하면 별 수 없이 여자들과 놀기만 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한 아버 지가 4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 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가자와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 이었기에,그는 기숙사의 규칙 따위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좋 을 대로 생활했다. 마음이 내키면 외박 허가를 받아서 여자를 꾀러 가거나, 애인의 아파트에 자러 가거나 했다 외박 허가를 받기는 상 당히 까다롭지만. 그의 경우는 거의 프리 패스였고. 그가 말을 해 주는 한 나도 마찬가지 였다. 나가자와에게는 대학에 입학할 당시부터 사귀어온 어엿한 애인 이 있었다. 그와 동갑의 하쓰디라는 여자로. 나도 몇 번인가 얼굴을 본 적이 있지만, 아주 인상이 좋았다. 특별히 남의 눈을 끌 정도의 미인은 아니어서 , 처음에는 나가자와같이 특별한 남자가 이런 평범 한 여자와 사귀다니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조금 이야기를 해보 면 그녀에게 호감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러한 타입의 여자였다. 온화하고, 이지적이고, 유머가 있고. 사려가 깊고 언제나 정말로 우아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고, 나에 게도 이런 애인이 있다면 별 볼일 없는 다른 여자들과 자거나 하지 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나에게 호감을 가져 . 자신이 소 속된 클럽의 하급생을 소개시켜줄 테니 넷이서 데이트하자고 나에 게 열심히 권했다. 그러나 나는 과거의 실패를 되 풀이하고 싶지 않 았기 때문에, 적당히 얼버무리며 언제나 발뺌을 했다. 하쓰미가 다 니는 대학은 특출하게 부유한 집안의 딸들을 모아놓은 곳으로 유명 한 여대여서 , 그러한 곳의 여학생과 내가 이야기가 맞을 리가 없었 다 그녀는 나가자와가 자주 다른 여자아이들과 자며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일로 그에게 불평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녀는 나가자와를 진지하게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무엇 하나 강요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과분한 여자야" 나가자 와는 말했다. 나도 그렇다고 생 각했다 겨울에 나는 신주구의 작은 레코드 가게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 했다. 급료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일이 재미있고. 주 3회의 밤일 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레코드도 싸게 살 수 있었다. 크리스마 스에 나는 나오코가 좋아하는 '디어 하트'가 삽입된 헨리 맨시니의 레코드를 사서 선물했다. 내가 직접 포장하여 빨간 리본을 달았다. 나오코는 자기가 짠 털장갑을 나에게 선물했다. 엄지손가락 부분이 약간 짧기는 했지만, 꽤 따뜻했다 "죄송해요. 저는 솜씨가 형편없어요." 나오코는 얼굴을 붉히며 부 끄러운 듯이 말했다. 괜찮아. 봐, 꼭 맞잖아." 나는 장갑을 끼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아도 되겠죠?" 나오 코는 말했다. 나오코는 그해 겨울 고베에는 폴아가지 않았다. 나도 연말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냥 도쿄에 머무르고 말았다. 고베로 돌아가 봤자 별로 재미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나고 싶은 상대가 있 는 것도 아니었다. 설 연휴에 기숙사 식당이 문을 닫아 나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식사를 했다. 둘이서 떡을 만들어 간단한 떡국을 끓여 먹었다. 1969년 1월에서 2월애 걸쳐서는 제법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 1원말애 돌격대가 40도 가까운 열을 내며 드러누웠다. 덕분에 나 는 나오코와의 데이트를 포기해야만 했다 나는 콘서트 초대권 을 힌들게 입수하여, 나오코를 그 콘서트에 초대했다. 오케스트라는 나오코가 가장 좋아하는 브람스의 4번 교향곡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녀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돌격대가 침대 위를 출띠 골 쿡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괴로워 했으므로. 그걸 내버려두고 외출 할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나는 얼음을 사다가 여러 겹의 비닐 봉지로 얼음주머니 를 만들고. 타월을 식혀 땀을 닦아주고, 한시간마다 열을 재고, 셔츠 까지 갈아입혀 주었다 열은 하루 종일 내리 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 째 아침이 되자 그는 불쑥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체온을 재어보니 36도2부였다 인간이라고는 여겨 지지 않았다. '이상하군. 이제까지 열이 나본 적이 없었는데." 돌격대는 그것이 마치 내 과실이기라도 한 듯 무심코 말했다. "하지만 열이 났잖아" 나는 화가 나서 말했다 그리고 그의 발열 덕분에 못 쓰게 된 그 秊 장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초대권이니 다행이로군." 돌격대는 말했다. 나는 그의 라 디오를 집어서 창 밖으로 던져버리려 했지만,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 려서 다시 침대로 올라가 잠을 잤다 2월에는 몇 차례인가 눈이 내렸다. 2월 말경에 나는 하찮은 일로 싸움을 하며 기숙사의 같은 층에 사 는 상급생을 때렸다. 상대는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다행 히 큰 부상은 아니었고, 나가자와가 딧처리를 잘해주었지만. 나는 사감실로 불려 가서 주의를 들었고, 이후로 기숙사 생활이 거북해 졌다. 그런 식으로 학년이 끝나고. 봄이 왔다. 나는 학점을 몇 개 놓쳤 다. 성적은 평범했다. 대부분이 C나 I)이고, 1)가 조금 있을 뿐이었 다. 나오코는 학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2학년이 되었다 4월 중순에 나오코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나는 )1월생이니까. 그녀 가 약 7개월 연상인 셈이다. 나오코가 스무 살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신기하게 느껴 졌다. 나도 나오코도 사실은 열여덟에서 열아홉 사이 를 오락가락해야 당연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열여덟의 다음이 열아 홉이고. 열아홉의 다음이 열여덟. 그렇다면 납득이 간다. 하지만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가을에는 나도 스무 살이 된다 죽 은 사란만이 언제나 열일곱 살이었다 나오코의 생일에는 비가 내렸다. 나는 학교가 끝나자 근처에서 케이크를 사서 전차를 타고, 그녀의 아파트로 갔다. 일단 스무 살이 되었으니까 축하라도 하자고 내가 말을 꺼낸 것이었다. 만일 반대 입장이었더라면 나도 같은 것을 원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다 字자 스무 살의 생일을 보낸다면 틀림없이 가슴이 아플 것이 다 전차가 붐비는 데파가,몹시 흔들렸다 덕분에 나오코의 아파트 에 도착했을 때, 케이크는 로마의 롤로세움 유적과도 같은 모양으로 부서져 있었다. 그래도 준비한 작은 양초를 스무 개 꽃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커튼을 닫고 전기를 끄자, 어쩐지 생일 분위기가 느껴 졌다 나오코가 와인을 땄다 우리는와인을마시호,케이크를조금 먹고, 간단한 식사를 했다 스무 살이 되다니 어쩐지 바보 같아요 " 나오코가 말했다. "저는 스무 살이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거든요. 이상한 기분이에요 어쩐지 뒤에서 억지로 밀어대는 듯한 느낌이에요." "나는 아직 7개월 남아 있으니까 천천히 준비하도록 하지 "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좋겠군요, 아직 열아홉이라니 " 나오코는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돌격대가 새로 스웨터를 산 이야기를 했 다. 그는 그때까지 스웨터를 한 벌(고등학생용 감색 스웨터)밖에 갖 고 있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그것이 두 벌이 긴 것이나. 새 것은사 슴 무의가 새겨진 빨강과 검 정의 귀여운 스웨터로. 자체는 멋진 것이었지만, 그가 그것을 입고 다니면 모두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왜 모두들 웃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와타나베, 뭐, 뭐가 이상하니?" 그는 식당에서 내 옆에 앉아 그 렇게 물었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이상하지도 않아"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거 좋은 스웨터로군.' "고마워 ." 돌격대는 정말로 기쁜 듯이 생긋 웃었다 나오코는 그 이야기를 하자 기뻐했다. "저는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 "안 돼. 나오코가 틀림없이 웃음을 터뜨릴 거야." "정말로 웃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기를 해도 좋아 나는 매일 함께 있으면서도, 이따금 우스워서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는 걸." 식사가 끝나자 둘이서 설거지를 하고. 바닥에 앉아서 음악을 들 으며 나머지 와인을 마셨다. 내가 한 잔 마시는 동안 그녀는 세 잔을 마셨다. 나오코는 그날 모처럼 말이 말았다 어릴 때 이야기라든가.학교 이야기. 집안 이야기 등을 했다. 모두가 긴 이야기로. 마치 세밀한 그럼처럼 자세했다. 대단한 기억력이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했다 하지만 이윽고 나는 그녀의 말투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가 정차로 마음에 밀려왔다 무언가 이상했다. 무언가 부자연스럽 게 왜 곡되어 있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그럴싸하고 앞뒤도 잘 맞았지 만 그 접속 부분이 아무래도 기묘했다. A 이야기가 어느 틈엔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H이야기가 되고.이윽고H에 포함되어 있는G 이야기로 바뀌어 . 그것이 무한정으로 계속되었다 끝이라는 것이 없 었다. 나는 처음에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그 만두었다. 나는 레코드를 틀고, 그 음악이 끝나면 바늘을 들어 다음 레코드를 틀었다. 한 차례 전부 틀고 나자. 다시 처음 레코드를 틀었 다 레코드는 전부 여섯 장밖에 없었는데.사이클의 처음은 '서전트 페페즈 론기 하트 클럽 밴드'였고, 마지막은 빌 에반즈의 '왈츠 포 데비'였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나 오코는 혼자써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오코의 말투가 부자연스러운 이유는 그녀가 몇 개의 포인트에 언급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이야기하는 데에 있는 듯했다. 물론 기 즈키에 관한 것도 그 포인트 중의 하나였지만 그녀가 피하고 있는 포인트늑 그것만이 아닌 듯했다. 그녀는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몇 차례나 얼버무리면서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은 상세하게 쉬 지 않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나오코가 그토록 정 신없이 이야기하기 는 처음이었기에 . 나는 그녀가 계속 이야기를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시계 바늘이 열한 시를 가리키자 나는 불안해졌다. 나오 코는 이미 네 시 간 이나 쉬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마지 막 전차 시간도 마음에 걸렸고, 기숙사의 제한 시간도 마음에 걸렸 다. 나는 적당한 기회를 노려 , 그녀의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그만. 그만 돌아갈게. 마지만 전차 시간이 되었으니까 " 나는 시 계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이 나오코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면 들렸어도.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일순간 입 을 다물었지만,즉각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다시 앉아,두 번째의 남은 와인을 마셨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말하고 싶은 만 큼 말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 나는 마지막 전차도 기 숙사의 제한 시간도, 모두 그냥 신경을 끊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나오코의 이야기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나오코의 이야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말의 조각이 , 뜯겨 져 나온듯한 모습으로 공중에 맨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녀 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선가 문득 사라져버린 것이 었다 아니면 내가 그것을 망쳐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말한 것 이 잠시 후 그녀의 귀로 들어가, 한참이 지나서 이해되자. 그 때문에 그녀는 계속 떠들어대던 에너지를 상실하고 만 것일지도 몰랐다 나 오코는 입술을 약간 떨린 채로. 내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늘 작동 도중에 전원이 빠져버린 기계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은 마치 불투명한 엷은 막을 뒤 집어 씌워 놓은 듯이 희미했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나는 말했다. "다만 시간이 너무 늦었 고, 게다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러 뺨을 따라. 커다랄 소리를 내며 레코드 재킷 위에 떨어졌다. 첫 눈물이 넘치자 그 다음은 겉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몸을 앞으로 수그려서. 마 치 토하는 듯한 자세로 울었다 다른 사람이 그토록 심하게 우는 모 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살며시 손윽 뻗쳐서 그녀의 어깨를 만졌다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어서 나는 거의 무의식적 으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 팔 안에서 부들부들 떨면 서 소리 없이 울었다. 눈물과 뜨거운 입김 때문에 , 내 셔츠에 습기가 느껴지더니, 결국은 축축하게 젖었다. 나오코의 열 손가락이 마치 무언가를-예전에 그곳에 있었던 소중한 무엇인가를애타게 찾 기라도 하듯이 내 등 뒤에서 방황했다. 나는 왼손으로 나오코의 몸 을 부축하고. 오른손으로 그 곱고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자세에서 나오코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하 지만 그녀는 울음을 그치 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나오코와 잤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는지 아닌 지 . 나로서는 알 수 없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역시 그것을 모 르겠다.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때에 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흥분하여 , 혼란에 빠져 있었고. 내가 그것을 진정시켜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방의 전등을 끄 고, 천천히 다정하게 그녀의 옷을 벗기고, 내 옷도 벗었다. 그리고 서로 껴안았다 비가 내리는 포근한 밤이라. 우리는 알몸이라도 추 위를 느끼지 않았다. 나오코와 나는 어둠 속에서 말없이 서로 상대 방의 몸을 더듬었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젖가슴을 부드럽 게 손으로 감쌌다 나오코는 나의 단단해진 페니스를 쥐었다. 따뜻 하게 젖은 그녀의 바기나는 나를 익했다 그때 내가 삽입을 하자 그녀는 몹시 아파했다. 처음이냐고 묻 자, 나오코는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이 뜻밖이라서 나는 약간 당황 했다-. 나는 이 제까지 그녀가 기즈키와 간계를 맺었던 것으로만 여겼 기 때문이다 나는 페니스를 가장 깊은 곳까지 넣고는. 그대로 움직 이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오랫동안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안정 을 되찾자 천천히 오랫동안 움직인 후에 사정했다. 마지막에는 나오 코가 내 몸을 꼭 껴안고 소리를 냈다. 그것은 내가 그때까지 들어온 오르가즘 소리 중에서 가장 애달픈 소리였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나는 어째서 기즈키와 관계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묻지 말았어야 했다. 나오코는 내 몸 에서 손을 떼더니.다시 소리도 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벽장에서 이불을 꺼내어 그녀를 그 위에 눕혔다. 그리고 창밖에 내리는 4월의 비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아침이 되자 비는 그쳤다. 나오코는 나에게 등을 돌린 채로 지 쳐 있었다. 아니면 그녀는 한잠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고 있었건 깨어 있었건. 그녀의 입술은 일체의 말을 잃었고.몸은 얼어붙은 듯이 굳어 있었다. 몇 차례나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대답도 없고. 몸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잠자코 그 녀의 맨 어깨를 바라보다가, 결국은 일어나기 로 했다. 방바닥에는 레코드 재킷과 글라스와 와인 병과 재떨이 등, 그러 한 것들이 어젯밤 그대로 남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모양이 일그 러진 생일 케이크가 절반 가량 남아 있었다. 마치 그곳에서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 움직이지 않게 된 듯이 였다. 나는 방바닥 위에 흩 어 진 것들을 주워 모아 정리하고, 싱크대에서 물을 두 잔 마셨다. 책 상 위에는 사전과 불어 동사표가 있었다. 책상 앞의 벽에는 달력이 붙어 있었다. 사진도 그림도 아무것도 없는 숫자만의 날젼이었다 달력은 깨끗했다. 메보도 없었고 표식도 없었다 나는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옷을 주워 입었다 셔츠의 가솎 부분 은 아직도 차갑게 젖어 있었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나오코의 냄새가 났다. 나는 책상 위의 메모 용지에. 나오코가 안정이 되면 차 분히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조만간 전화를 해달라. 생일 축하한다. 고 썼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오코의 어깨를 바라보고는, 아파트를 나서서 살짝 문을 닫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나오코의 아파트에는 전화로 연락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요일 아침 고쿠분지까 지 가보았다 그녀도 없고.문에 붙어 있던 문패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은 덧문까지 꽉 닫혀 있었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나오코는 사흘 전에 이사를 갔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는 잘 모 르겠다고 관리인은 대답 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그녀의 고베 주소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나오코가 어디로 이사를 했건, 그 편지는 나오코에게로 전송될 테니 까 나는 나의 느낌을 솔직히 썼다. 나로서는 여러 가지 점을 아직 잘 알수 없었고, 알려고 진지하게 노력하지만,그러기 위해서는 시간 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버린 후에 자신이 도대체 어 디에 있게 될 것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짐작도 할수 없다. 그 래서 나는 나오코에게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고. 무언가 요구하거 나,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을 수도 없다. 우선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나오코가 나에게 시간을 준다면, 나는 최선 을 다할 것이고. 우리는 훨씬 더 서로를 잘 알게 될 것이다. 하여간 에 다시 한번 나오코를 만나서 충분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기즈키 가 죽은 후. 나는 자신의 기분을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를 잃어버렸고. 그 점은 나오코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우리 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서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 까 생각한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무척이나 멀리 우회하여 걸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삐뚤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우회할 필요가 없었으 리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나오코에 대해서 느꼈던 친밀하고 따듯한 느낌은 내가 이 제까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답장을 주기 바란다. 어떠한 답장 이라도 좋으니 보내달라--그런 내용의 편지였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몸 속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 그 자리를 메을 것을 찾지 못한 채, 그 부분은 순수한 공동(奈洞)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몸은 부자연 스럽게 가벼웠고, 소리는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나는 평일에는 예전 보다도 더 착실하게 학교에 다니며 강의에 출석했다 강의늘 따분 했고, 클래스메이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나는 혼자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들었고. 누구 와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혼자서 식사를 했고, 담배를 끊었다 5월말에 대학에서 데모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대학 해체'를 외쳤 다. 좋다. 해체할 생각이라면 해라,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해체해서 산산조각으로 만들고, 발로 밟아서 박살을 내달라. 전연 상관없다 그렇게 해준다면 나도 기분이 상해해질 것이고. 그 후의 일은 혼자 서 어떻게든 해나갈 테니까.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줄 수도 있다 빨리 해다오. 대학이 봉쇄되어 강의가 없었기에. 나는 운송사에서 아르바이 트를 시작했다-.운송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서 짐을 싣고 내리는 일 이었다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처음에는 몸이 쑤셔 서 아침일찍 일어날 수가 없을 정도였지만, 그 대신에 급료는 좋았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 동안은 내 몸 속의 공동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일주일에 4일은 운송회사에서 낮일을 하고, 3 일간은 레코드 가게에서 밤일을 했다. 그리고 일이 없는 밤에는 방 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돌격대는 술을 한 방울도 못 마 시는 탓으로, 알코올 냄새에 무척 민감했다. 그래서 내가 침대에서 살며 깡 위스키를 마시고 있노라면, 냄새가 나서 공부를 할 수 없 으니 나가서 마시지 않겠냐고 불평을 했다 "네가 나가." 나는 대꾸했다. "하지만. 기 기숙사 안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규, 규,규칙 이 있잖아" 그는 반박했다. "네가 나가라구." 나는 되풀이했다. 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기분이 불쾌하여, 옥상 으로 가서 혼자 위스키를 마셨다. 6월이 되자 나는 나오코에게 다시 한번 긴 편지를 써서, 역시 고 베의 주소로 보냈다 내용은 대체로 지난번과 같았다. 그리고 마지 막 부분에, 답장을 기다리기가 몹시 괴롭다. 내가 나오코에게 상처 ㅤ를 주었늘가의 여부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 편지를 우체 통에 넣고 나자, 내 마음속의 공동은 또다시 조금 커 진 듯이 여겨졌 다 6월에 두 번, 나는 나가자와와 함께 시내로 나가 여자와 잤다 두 번 다 무척 간단했다. 한 여자는 내가 호텔의 침대로 데리고 가서 옷 을 벗기려 하자 반항을 했지만, 귀찮은 생각에 침대 속에서 혼자 책 을 읽고 있노라니 까, 잠시 후 스스로 접근해 왔다. 또 한 여자는 섹 스후에 나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알고 싶어했다 이제까지 몇 명의 여자와 잤냐, 어디 출신이냐. 어느 대학이냐, 무슨 음악을 좋아하 느냐, 다자이 오사무(太字治)의 全설을 읽은 적이 있느냐, 외국 여 행을 한다면 어디에 가 보고 싶으냐. 내 젖꼭지는 다른 사람들에 비 해서 약간크지 않냐. 등등 하여간에 갖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는 자버렸다. 눈을 뜨자 그녀는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찻집으로 들어가 뇌넝 서비 스의 맛없는 토스트와 맛없는 닭얄을 먹고 맛없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식사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 질문을 했다. 아버지의 직업은 무엇이냐. 고등학교 시절의 성적은 좋았느냐. 몇 년생이냐, 개다리 를 먹어본 적이 있느냐.등등 나는 머리가아파왔기에 식사가끝나 자. 이제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만날 수 없나요?" 그녀는 섭섭하다는 듯이 말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 ."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헤어 졌다. 그리고 혼자가 되자.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런 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 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내 몸은 신한 허기와 갈증을 느끼듯이 여자와 자기를 원했다. 나는 그녀들과 자 면서 언제나 나오코를 생각했다 어둠 속에 하얗게 떠오르는 나오코 의 나체와, 그 숨결과. 옷소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생 각할수록 내 몸은 더욱더 굼주림과 갈증에 시달렸다 나는 혼자 옥 상에 올라가서 위스키를 마시며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월 초순에 나오코에 게서 편지가 왔다. 짧은 편지였다 답장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해해주십시오. 글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읍니다 그리고 이 편 지도 벌써 열 번이나 다시 쓰는 겁니다. 글을 쓰는 것이 저에게 정말로 괴로운 일입니다 결론부터 쓰겠습니다. 일단 대학을 1년간 휴학하기로 했습니 다 일단이라고는 하지만,다시 대학에 돌아가는 일은 아마도 있 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휴학은 어디까지나 절차일 뿐입니다. 당신 에게는 급작스러운 일로 여겨질지 몰라도. 저로서는 예전부터 늘 생각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당신에게 몇 번 이나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결국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입 밖에 내는 게 정말로 무서웠습니다. 여러 가지 일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설령 무슨 일이 있었다 하 더라도, 혹은 아무 일도 없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되었으 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식의 이야기는 당신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2렇다면 용서하십시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의 일로 당신 자신을 책망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 다. 이것은 정말로 제 자신이 전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최근 1 년 남짓 저는 그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그 때문에 당신에게도 상 당한 폐를 끼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한계이 리라고 생각합니다. 고쿠분지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고베의 집으로 돌아와서 , 잠시 동안 병원에 다녔습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교토의 산 속 에 저에게 알맞은 요양소가 있다고 하시니까. 잠시 그곳에 들어 가 있어 볼까 생각합니다 정확한 의미로는 병원이 아니라. 훨씬 자유로운 요양을 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 회에 쓰기로 하겠습니다. 지금은 아직 제대로 쓸수가 없습니다. 지금 저에게 필요한 것은 외계와 차단된 조용한 곳에서 신경을 안정시키는 일입니다. 당신이 1년간 제 곁에 있어주신 것에 대해서는, 저는 제 나름대 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믿어주십시오.당신이 저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 상처를 준 것은 제 자신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로서는 아직 당신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 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 은 겁니다. 만약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당신에게 편 지를 쓰겠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좀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 을까 생각합니다. 당신이 말씀하셨듯이.우리는 서로를 더 많이 알아야 하겠지요. 그럼 안녕히. 나는 수백 번이나 이 편지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되풀이 해서 읽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이 슬퍼졌다. 그것은 마치 나오코가 나 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와 같은 종류의 슬픔이었다. 나는 그렇게 안타까운 심정을 어디에 갖고 갈 수도, 어딘가에 접어둘 수도 없었 다. 그것은 몸 주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 도 없었다. 나는 그 안타까운 심정을 몸에 걸칠 수조차 없었다. 풍경 이 내 앞을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하는말은내 귀에는들어 오지 않았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여전히 로비의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 냈다. 전화를 걸어올 상대도 없었지만,그 외에 할 일이 없었다. 나 는 언제나 텔레비전을 켜놓고 야구 중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그리 고는 텔레비전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막막한 공간을 두 개로 나누 어, 그 하나된 공간을 다시 두 개로 나누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그 작 업을 계속하여, 마지막에는 손바닥에 놓일 정도로 작은 공간을 만들 어 냈다. 열 시가 되면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방으로 돌아가 잤다. 그달 말 돌격대가 나에게 반딧불을 주었다. 반딧불은 인스턴트 커피병에 들어 있었다. 병 안에는 나뭇잎과 물이 조금 들어 있고, 뚜껑에는 작은 공기 구멍이 몇 개 뚤려 있었 다. 주위가 아직 밝은 탓으로, 반딧불은 그냥 물가에 사는 평범한 벌 레처럼 보였지만. 돌격대는 그것이 틀림없는 반딧불이라고 주장했 다. 그는 반딧불에 관해서 잘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나로서는 별달 리 그의 말을 부정할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좋아. 이건 반딧불이다. 반딧불은 어쩐지 졸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미끌미 끌한 유리벽을 올라가려다가 그때마다 아레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정원에 있더군." "여기 정원에',"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웨 이, 이 부근의 호텔에서 여름이 되면 손님을 끌려고 반딧불 을 놓아주잖아? 그게 여기까지 날아온 거야." 그는 검은 보스턴 백 에 옷과 공책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이미 몇 주 1이 지난 뒤여서. 기숙사에 남 아 있는 건 우리들 정도였다. 나는 실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실습이 끝나자,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돌격 대의 집은 야마나시에 있었다 "이거 말이야. 여자아이에게 주면 좋을 거야, 틀림없이 기뻐할 거 야." "고마워." 나는 대답했다. 해가 지자 고요한 기숙사는 마치 폐허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국 기가 게양대에서 내려지고, 식당의 창문에는 불이 켜졌다 학생들 수가 줄어든 탓으로, 식당의 전깃불은 평소의 절반밖에 켜지 않았 다. 오른쪽 절반은 끄고 왼쪽 절반만 켰다. 그래도 희미하게 저녁식 사 넴새가 났다 크림 스튜 냄새였다. 나는 반딧불이 들어 있는 인스턴트 커피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 라갔다.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잊고서 거둬들이지 않 은 아직 빨랫줄에 널려 있는 하얀 셔츠가, 마치 무슨 허물처럼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옥상 구석에 있는 철제 사다리를 타 고 급수탑 위로 올라갔다. 원통형의 급수 탱크는 낯 동안에 충분히 흡수한 열로 아직 따뜻했다. 좁은 공간에 주저앉아, 난간에 기대자, 아주 조금 기운 하얀 달이 눈앞에 떠있었다. 오른쪽에는 신주쿠 번 화가의 불빛이, 왼쪽에는 이케부쿠로 번화가의 불빛이 보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선명한 빛의 강물을 이루어 , 거리에서 거리로 흘러가 고 있었다 갖가지 소음이 뒤섞인 드러운 소리가 마치 구름처럼 어렴풋이 거리 위에 떠있었다 반딧불은 병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약했고, 그 색깔은 너무나도 옅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반딧불 을 본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그 기억 속에서 반딧불은 훨씬 뚜렷하고 선명한 빛을 여름의 어둠 속에서 발하고 있었다. 나는 이 때까지 반딧불이란 그토록 선명히 타오르는 듯한 빛을 발하는 것 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딧불은 몸이 약해져서 죽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병 마개 를 잡고 몇 번인가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반딧불은 유리벽에 몸을 부딪치고는 아주 조금 날았다. 하지만 그 불빛은 여전히 희미했다. 반딧불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였던가 하고 나는 생각해보았 다 그리고 그것은 도대체 어디였을까? 나는 그 광경을 기억해낼 수 는 있었다 하지만 장소와 시간을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밤의 어두 운 물소리가 들렸다. 벽돌로 지은 子식 수분도 있었다. 핸들을 빙 돌 려서 여닫는 수분이다. 커다란 강은 아니다. 물가의 수초가 수면을 거의 뒤덮고 있는 듯한 작은 냇물이었다. 주위는 캄캄하여, 손전등 을 끄면 내 발등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수문의 웅덩이 위를 수백 마리나 되는 반딧불이 날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타오르 는 불꽃처럼 수면에 반사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기억의 어둠 속에 잠시 몸을 맡겼다. 바람 소 리가 여느 때보다도 훨씬 뚜렷하게 들렸다 그다지 강한 바람도 아 닌데, 그 바람은 신비로을 정도로 선명한 괘적을 남기며 내 몸 주위 를 스쳐 지나갔다. 눈을 뜨자. 여름밤의 어둠은 아주 조금 깊어져 있 었다. 나는 병 뚜껑을 열고 반딧불을 꺼내어 , 3센티 정도 튀어나온 급수 탑의 테두리 위에 놓았다. 반딧불은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잘 이 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반딧불은 나사 주위를 비틀거리며 한 바퀴 돌기도 하고, 피딱지처런 들떠 있는 페인트에 발을 올려놓기도 했 다. 잠시 오른쪽으로 가다가 그곳이 막다른 곳임을 확인한 후, 다시 왼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볼트 위쪽으로 기어 올라가, 그 곳에 웅크린 채로 잠자코 있었다 반딧불은 마치 숨이 끊 긴 것처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난간에 기대어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나도 반딧불도 오랫동 안꼼짝않고 있었다. 바람만이 우리들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느티나무가 그 무수히 많은 익사귀를 비벼대고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기다렸다. 반딧불이 날아간 것은 한참 후였다 반딧불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이 문득 날개를 펴더니 난간 너머의 희미한 어둠 속으로 떠올랐 다 반딧불은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듯이, 급수탑 곁에 서 잽싸게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빛이 바람에 물드는 것을 확인이 라도 하듯이 잠시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가. 이윽고 동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반딧불이 날아가 버린 후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마음속에 오랫 동안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보잘것없는 희 미한 빛은.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고 방황하고 있었 다. 나는 어둠 속으로 몇 번이고 손을 뻗쳐 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 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끝보다 약간 멀리 있었 다. 여름 방학 동안에 대학이 기동대의 출동을 요청하여, 기동대는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안에서 농성하던 학생들 전원을 체포했다 그 당시는 어떤 대학이건 상황이 비슷했기 때문에 별 달리 진기한 사건 은 아니었다. 대학은 해체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학에는 대량의 자본이 투입되어 있어서, 학생들이 폭력을 휘두른다고 대학이 순순 히 해체될 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한 자들도 진짜 대학을 해체시키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 학이라는 기구의 주도권 이양을 요구했을 뿐이지만, 주도권이 어떻 게 되건 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데모대가 박살이 났다 고 해서, 뭔가 특별한 감회를 지니지 않았다. 9월이 되어 나는 대학이 거의 폐허가 되어 있기를 기대하며 가보 았으나,대학은 여전했다 도서관의 책도 약탈당하지 않았고,핀수 실도 파괴되지 않았고, 학생과의 건물도 불타지 않았다. 그 녀석들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거야 하며 나는 아연해졌다. 동맹 휴학이 철회되고 기동대의 점령하에 강의가 재개되자, 먼저 출석한 것은 싸움을 지도하던 입장에 있었던 학생들이었다. 그 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강의실에 앉아 필기를 했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했다. 이것은 정말로 이상한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동맹 휴학 결의는 아직 유효하여 아무도 종결을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대학이 기동대를 불러들여 바리케이드를 파괴했을 뿐 원리적으로는 싸움은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동맹 휴학 결의 때 에는 하고 싶은 말을 원기 왕성하게 하고는. 휴학에 반대하는(혹은 의문을 표명하는) 학생들을 매도하거나 규탄했다. 나는 그들에게 왜 동맹 휴학을 계속하지 않고 강의에 나오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출석 일수 부족으로 학점을 따지 못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자들이 대학 해체를 외쳤는가 생각하니 가소로을 뿐이었다. 그런 비열한 자 들이 상황의 변화에 따라 큰소리를 치기도 하고 움츠려 들기도 하는 것이다. 어이, 기즈키. 여기는 지독한 세계야.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이 런 녀석들이 대학에서 빠짐없이 학점을 따고 사회로 나가서, 부지런 히 비열한 사회를 만든다. 나는 당분간 강의에는 나가도 출석을 부를 때에는 대답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짓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은 잘 알고 있었지만,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 지만 그 덕분에 학과내에서 의 내 입장은 더욱더 고립되고 말았다. 이름을 불러도 내가 잠자코 있으면. 강의실 안에 거북한 공기가 흘 렀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도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9월 둘째 주에, 나는 대학 교육이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 달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따분함을 견디는 훈련기간으로 간주하 기로 했다. 지금 여기서 대학을 그만둔다고 해서 사회로 나가 무언 가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매일 학교에 가 서 강의에 출석하고 필기를 하고. 빈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 거나 자료를 찾아보거나 했다 9월의 둘째 주가 되어도 돌격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드문 일이라기보다는 경천동지의 사건이었다. 그가 다니는 대학은 이미 수업을 시작하고 있었고, 돌격대가 수업을 게을리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책상과 라디오 위에는 부옇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선반에는 플라스틱 컵과 칫솔, 차가 들어 있는 깡통 스프레 이 살충제, 그런 것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놓여 있었다. 돌격대가 없는 동안은 내가 방 청소를 했다. 최근 1년 동안에 방 을 청결히 하는 습관이 들어 돌격대가 없다면 내가 그 청결을 유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바닥을 쓸고 3일에 한 번씩 창문을 닦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이불을 말렸다. 그리고 돌격대가 돌아와서 '와, 와타나베, 어쩐 일이야') 괭장히 깨끗하잖아' 하고 칭찬해주기 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그의 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방문의 이름표도 없어져,내 것만 남아 있었다 나는 사감실에 가서 그가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물 어보았다 "퇴실했어." 사감은 대답했다 "당분간 그 방은 자네 혼자서 쓰 게" 나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았지만, 사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인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자기 혼자서 모 든 것을 관리하는 데에 최상의 기쁨을 느끼는 속물이었다 방의 벽에는 여전히 빙산사진이 얼마동안 걸려 있었지만, 이윽 고 나는 그것을 떼어내고, 짐 모리슨과 마일즈 데이비스의 사진을 붙였다. 그러자 약간은 내 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르바이 트로 모은 돈으로 작은 전축을 샀다. 그리고 밤이 되면 혼자서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이따금 돌격대 생각이 났지만 그래도 혼자 만의 생활은 좋은 것이었다. 월요일 열 시부터 (언극사 )의 에우리피대스에 관한 강의가 시 작되어 열한시 반에 끝났다 강의 뒤에 나는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작은 레스토랑으로 가서 오블렛과 샐러드를 먹었다. 그 레스토랑은 복잡한 거리로부터는 떨어져 있었고, 학생 위주의 식당보다는 조금 비쌌지만, 조용해서 마음이 가라앉았고, 제법 맛있 는 오물렛을 팔았다. 말이 없는 부부와 아르바이트 아가씨 셋이서 일을 했다 내가 창가의 자리에 혼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 네 명의 학생들이 가게로 들어왔다.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으로. 모두들 산뜻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입구 가까이의 테이블에 앉아서 메뉴를 들여다보며 뭘 먹을까 고민하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의견을 모아 아르바이트 아가씨에게 주문했다 그러던 중 나는 한 여자아이가 내 쪽을 힐끗거리며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주 짧게 자른 머리에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하 얀 면으로 된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본 기억이 없어서 내가 그대로 식사를 계속하고 있으려니까. 잠시 후 그년가 불쑥 일어나 내 쪽으로 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끝에 한 손을 짙고 내 이름을 불렀다. "와타나베 씨시죠'~?" 나는 머리를 들어 다시 한번 상대방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하 지만 아무리 보아도 기억이 없었다. 그녀는 상당히 눈에 띄는 스타 일이어서, 어디선가 만났더라면 즉각 생각이 났을 것이다. 게다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이 대학에 그토록 많이 있을 리는 없었 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아니면 여기 누군가 올 건가요?"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오지 않아 앉아 요 그녀는 달각달각 소리를 내며 의자를 끌어다가 내 맞은편에 앉 았다. 그리고는 선글라스 너머로 잠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 접시로 시선을 옮겼다. "그거 맛있겠군요." "맛있지 버섯 오물렛과 그린 피스 샐러드 "흠." 그녀는 대답했다. "다음 번에는 이걸로 할 거예요. 오늘은 이미 다른 걸 주문했으니까 ' "무얼 주문했는데'~" '마카로니 그라탱 ." '마카로니 그라탱도 나쁘지 않아." 나는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서 만났었나? 아무래도 생각이 나질 않는데.' "에우리피데스." 그녀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엘렉트라. '아니오 신도 불행한 자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 방금 수업 이 끝났잖아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제서야 나는 간신히 기억해냈다. (연측사 D )의 수업에서 본 적( 있는 1학년 여학생이었다 단지 너무나도 지나치게 헤어스타일이 바뀌었기에 누구인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여름방학 전까지는 머리가 여기까지 내려왔었어요?" 그녀 는 어깨에서 10센티 정도 밑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래요. 여름에 파마를 했어요 그런데 그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하더라구요. 한 번은 죽어 버릴까 생각했을 정도였어요. 정말로 심했지요. 머리에 미역이 엉켜 붙은 익사체 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 래도 죽을 정도라면 뭘 못하겠느냐 하는 생각에 이판사판으로 박삐 깎아버렸어요. 시원하기는 시원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44 센티나 1센티 정도 되는 머리를 손으로 시원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서 생긋 미소지었다 '그래 그다지 나쁘지는 않군" 나는 남은 오물렛을 먹으며 말했 다. "잠깐 옆으로 돌아봐주겠나?"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1초 가량 가만히 있었다 "음,상당히 잘어울리는군 아마도 머리 모양이 좋은가봐 귀여워 예뻐 보이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짧은머리가 되어 보고는, 음. 이 것도 나쁘진 않구나 하고 생각했죠. 하지만 남자들은 누구나 그렇게 말해주지는 않더군요. 초등학생 같다는 둥. 강제 수용소라는 둥 그 런 말만 해요. 하지만, 왜 남자들은 머리가 긴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 나요? 그런 건 그야말로 파시스트잖아요. 재미없어요. 왜 남자들은 머리가 긴 여자가 품격이 있고 싹싹하고 여자답다고 생각하는지 모 르겠어요? 나는 머리가 길고 천박한 여자들을 2EO명 정도는 알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지금이 더 좋아." 나는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거 짓이 아니 었다. 머리가 길었을 때의 그녀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극히 평범한 귀여운 소녀였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는 마치 봄을 맞이하여 세상으로 갓 뛰쳐나온 작은 동물처럼 싱싱한 생명감을 온 몸에 내뿜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마치 독립된 생명체처럼 즐거운 듯이 움직이면서 , 웃거나 화내거나 질리거나 체념하거나 했다. 나는 오랫만에 이토록 생생한 표정을 보았으므로 감탄하며 잠시 동안 그 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샐러드를 먹으며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는, 그 속에서 내 얼굴을 보며, "정말로, 당신은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글쎄. 가능하다면 솔직한 인간이 되고 싶어하지 " 나는 대답했 다. "그래요?" 그녀는 말했다 "어째서 그런 짙은 선글라스를 끼 지?" 나는 물어 보았다. "갑자기 머리가 짧아지니까 굉 장히 무방비 상태라는 느낌이 들었 어요 마치 알몸으로 인과 속에 네던져진 것처럼 , 전혀 안정이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선글라스를 끼죠." '그렇군." 나는 동조했다 그리고 남은 오물렛을 먹었다. 그녀는 내가 음식을 먹어치우는 것을 흥미진진하다는 눈으로 가만히 지켜 보았다 저쪽 자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나'" 나는 그녀와 같이 온 세 사 람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아요. 음식이 나오면 돌아갈 테니까. 상관없어요. 하지만 여 기에 있으면 식사에 방해가 될까요?" "방해고 뭐고, 이미 다 먹었어."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 신의 테이블로 돌아갈 기색이 없어서. 식후의 커피를 주문했다. 주 인 아주머니가 접시를 치우고 설탕과 크림을 놓고 갔다 "있잖아요, 왜 오늘 수업 시간에 출석을 부를 때 대답하지 않았나 요? 와타나베는 당신 이름이죠? 와타나베 도루 "그래 " "왜 대답하지 않았나요" "오늘은 그다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 그녀는 다시 한번 선글라스를 벗어서 테이블 위에 놓고,마치 진 귀한 동물이 들어 있는 우리라도 들여다보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가 만히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다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 하고 그녀 는 내 말을 되풀이했다. "당신은 어딘가 험프리 보카트 같은 말투를 쓰는군요. 냉정하고 날카롭고 "설마. 나는 극히 평범한 인간이야. 길거리 어디에나 있는. 주인 아주머니가 커피를 갖고 와서 내 앞에 놓았다. 나는 설탕도 크림도 넣지 않고, 그것을 살짝 마셨다 "봐요, 역시 설탕도 크림도 넣지 않잖아요." "그냥 단 것을 싫어할 뿐이야." 나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아 마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왜 그렇게 햇볕에 탔죠'," '2주일 정도 계속 걸어서 여행했지. 여기저기. 배낭과 슬리핑백 을 짊어지고. 그러니까 햇볕에 탔지. "어디를?" "가나자와에서 노토 반도를 빙 돌아서, 니이가하까지 갔어." "혼자서?" "그래." 나는 대답했다. "이따금 길동무가 생기기도 했지만.' "로맨스도 생기곤 했나요? 객지에서 뜻하지 않게 모르는 여자들 과 사귀 었다든가." "로맨스"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이런. 아무래도 뭔가 착각 하고 있는 것 같군 침낭을 짊어지고 수염이 덥수룩해서 다니는 인 간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로맨스 따위를 경험할 수 있겠어?" "언제나 그렇게 혼자 여행을 하나요?" "그래 " "고독을 좋아하나요?" 그녀는 턱을 괴고 물었다. "혼자서 여행하 고, 혼자서 밥을 먹고, 수업 시간에는 혼자서 뚝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게 좋은가요?"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억 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을 따름 이 지. 만들어봤자 실망만 할 뿐이니까 "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선글라스 손잡이를 입에 물고, 혼잣말처럼 "고독을 좋아 하는 인간은 없다. 실망하는 것이 싫을 뿐이다'라고 중얼거렸다. 만약 당신이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그때에는 이 말을 써먹을 수 있 겠네요." '고마워 " 나는 말했다. '초록색은 좋아하세요?" "왜?" "당신이 초록색 폴로 셔츠를 입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초 록색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야. 아무 거라도 좋아."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다. 아무 거라도 좋다 " 그녀는 또 되풀 이했다. "저는 당신의 말투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깨끗하게 벽을 단장한 길이라서. 이제까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서?" 없어 . 하고 나는 대답했다. "저는 미도리(초록색이라는 뜻)라는 이름이에요. 그런데도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이상하죠.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요? 이건 마치 저주받은 인생 같잖아요. 있잖아요, 제 언니는 峯 코(모모는 복숭아라는 뜻)라고 해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래서 핑크가 어울리나?" "굉장히 잘 어울려요. 핑크를 입기 위해서 태어난 듯한 사람같아 요. 음, 정말로 불공평 하다니까." 그녀의 테이블에 음식이 나오자, 마드라스 체흐의 상의를 입 은 사내가 "어이, 미도리, 식사' 하고 불렀다. 그녀는 그쪽을 향해 알았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와타나베 씨, 강의 노트를 적었나요? (연극사 B )의?" "적었지." 나는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빌려줄 수 없나요? 저는 두 번 빠졌거든요. 그 반 에 아는 사람도 없고." "물론, 좋아."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서 다른 쓸데없는 것 이 적혀져 있지 않나 확인하고는 미도리에게 건네뒀다. "고마워요. 와타나베 씨. 모레 학교에 나오나요'?" "나올 거야." "그럼 열두 시에 이리로 오겠어요? 노트를 돌려드리고 점심 대접을 할 테니까 설마 혼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면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설마." 나는 말했다. "하지만 답례는 필요없어. 노트를 보여줄 뿐인데, 뭘." "아니에요. 저는 답례를 하는 걸 좋아하니까 됐어요. 괜찮아요 수첩에 적어놓지 않아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잊어버리지 않아. 모레 열두 시에 여기서 ." 저쪽에서 "어이. 미도리, 빨리 오지 않으면 식는다구' 하는 소리 가 들려왔다 "당신, 옛날부터 그런 말투를 썼나요?" 미도리는 그 소리를 무시 하고 물었다. "그래. 별로 의식한 적은 없지만."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말투가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내가 그 테이블 곁을 지날 때 그녀는 나 를 향해서 손을 들었다 다른 세 사람은 힐끗 네 얼굴을 봤을 뿐이었 다. 수요일 열두 시가 되어도 미도리는 그 레스토랑에 나타나지 않았 다. 나는 그녀가 올 때까지 맥주를 마시며 기다릴 작정이었지만붐 비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음식을 주문하고 혼자서 먹었 다. 다 먹고 나니 열두 시 35분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미도리는 나타 나지 않았다. 돈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와, 가게 맞은편에 있는 작은 신사의 돌계단에 앉아서 술기운이 깨기를 기다리며 , 한 시까지 그녀 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래도 오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고 학교로 돌 아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두 시부터 시작되는 독일어 수업에 들어갔다 강의가 끝나자, 나는 학생과로 가서 강의 등록부를 살펴보고, (연 극사 D)플래스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다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은 고바야시 미도리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어서 카드식으 로되어 있는학생 명부를 뒤져서 69년 입학생 중에서 '고바야시 미 도리'를 찾아내, 주소와 전화번호를 메모했다. 주소는 도요시마구이 고 집은 자택이었다 나는전화박스로가서 그번호를돌렸다 '여보세요, 고바야시 서점입니다. " 사내 목소리가 들렸다 고바야 시 서점? '죄송합니다만, 미도리씨 계신가요?" 나는 물었다. "아니, 미도리는 지금 없어요." 상대방은 대답했다. "학교에 갔나요?" "음, 글쎄, 병원에 간 것 같은데. 댁은 누구시죠?" 나는 이름은 대지 않고, 인사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병원? 그 는 다쳤거나 아니면 병에 걸리거나 해서 병원에 간것일까?하지 만 사내의 목소리에서는 그런 종류의 비 일상적인 긴박감은 전혀 느껴 지지 않았다 '음,글쎄. 병원에 간 것 같은데',그것은 마치 병원 생활의 일부라는 듯한 말투였다. 생선 가게에 생선을 사러 갔다는 듯하는 정도의 가벼운 말투였다. 나는 그 점에 관해서 잠시 동안 이 리저리 생각해봤지만 귀찮아져서 생각을 그만두고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에서 굴며 나가자와에게서 빌린 조셉 콘래드 로드 짐B의 나 머지를 전부 읽었다. 그리고 그에게 그것을 돌려주러 갔다. 나가자와는 식사를 하러 가려는 참이어서, 나도 함께 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들었다 "외무성 시험은 어땠나요?" 하고 물어보았다. 외무성의 상급 시 험의 2차가 8월에 있었던 것이다. "보통이야." 나가자 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 런 건 보통으로 해두면 패스하지. 그룹 토론이나 면접은 여자를 사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그럼 잘 보셨겠군요." 나는 말했다. "발표는 언젠가요?" "10월 초. 붙으면 맛있는 걸 사줄게." "외무성 상급 시험의 2차란 건 어떤가요? 나가자와 씨 같은 분도 치러 오나요?" "설마 대부분멍청이들이지.멍청이가 아니면 변태야 관료가되 려는 인간의 95퍼센트는 쓰레기이거든.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 녀석들 글자도 제대로 못 읽는다구." "그럼 왜 외무성에 들어가려고 하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 나가자와는 대답했다. "외국에서 근무 하는 게 좋다든가, 하여간 여러 가지야 하지만 첫번째 이유는 자신 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기 때문이야 결국은 국가지. 이 어마어마 한 관료 기구에서 자신이 어디까지 위로 올라갈 수 있는가, 어디까 지 힘을 쓸 수 있는가 그런 것을 시험해보고 싶은 거지. 알겠나?" "뭔가 게임처럼 들리는군요." "그렇지 게임 같은 거야 나한테는 권력욕이나 금전욕 같은 건 거의 없어. 정말이야. 나는 변변찮고 방자한 사내일지 몰라도, 그런 점은 깜짝 놀랄 정도지 . 소위 무사무욕의 인간이야. 단지 호기심이 있을 뿐이지. 그리고 넓고 거친 세계에서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어 ." "그리고 이상 같은 것도 지니고 있지 않겠지요?" "물론 없지 " 그는 대답했다. "인생에는 그런 건 필요없어. 필요 한 건 이상이 아니라 행동 규범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생도 많이 있잖아요?" 나는 물었다. "나 같은 인생은 마음에 들지 않는가?" "그만두세요." 나는 말했다. "좋지도 싫지도 않아요. 그렇잖아요, 저는 도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때에 원하는 여자와 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높게 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류 사립대 학 문학부를 졸업 해봤자 장래의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무 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 인생이 부러운가?" "부럽지 않아요." 나는 대답했다. "저는 너무나도 제 자신에게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토쿄 대학에도 외무성 도 흥미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 부러운 것은 하쓰미 씨처럼 멋진 애인을 가졌다는 점이지요." 그는 잠시 동안 잠자코 식사를 했다. "이봐, 와타나베." 식사가 끝나자 나가자 와는 나에게 말했다. 자네와 나는 이곳을 떠나 10년이나20년쯤 지나서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리고 무슨 일인가로 서로 관련을 갖 게 되리라고 생각되는군." "마치 디킨즈의 소설 같은 이야기로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그렇군." 그도 웃었다. "하지만 예감이란 잘 적중한다구." 식사 후에 나가자와와 나는 둘이서 근처의 스낵바로 술을 마시러 갔다. 그리고 아홉 시가 넘도록 그곳에서 마셨다. "저기, 선배님. 그런데 선배님 인생의 행동 규범은 도대체 어떤 겁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아마도. 웃을걸.' "웃지 않아요." "신사로서 사는 거야." 나는 웃지는 않았지만 자칫하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신사 라니 그 신사 말입니까')" '그래, 그 신사야." "신사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만약 정의가 있다면 가르 쳐 주시겠습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 사야 " "선배님은 내가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괴짜로군요." "자네는 내가 이제까지 만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정상적인 인간 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술값을 계산했다. 다음 주 월요일의 (연극사 t ) 시간에도 고바야시 미도리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강의실 안을 획 둘러보고 그녀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여느 때처럼 맨 앞줄 자리에 앉아. 교수님이 오실 때까지 나오코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나는 여름 방학의 여행에 관해서 썼다. 걸었던 코스와, 지나쳤던 마을들,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에 관 해서 썼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언제나 나오코를 생각했다고. 나오코 를 만날 수 없게 되자, 나는 자신이 얼마나 나오코를 원하고 있었는 가를 알게 되었다. 대학은 따분하기 짝이 없지만, 자기 훈련을 하는 셈치고 제대로 출석하여 공부하고 있다. 나오코가 떠나고 나니, 무 엇을 해도 재미없이 느껴 지게 되었다. 한번 나오코와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만약 가능하다면 나오코가 들어가 있는 요양소 를 방문하여. 몇 시간만이라도 만나고 싶은데 그것은 가능할까? 그 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둘이서 나란히 걷고 싶다. 폐가 될지 모르지 만, 아무리 짧은 편지라도 좋으니 답장을 보내달라 이렇게 쓰고는 그 넉 장의 편지지를 반듯이 접어서 준비한 봉투 에 넣고. 나오코의 고베 집 주소를 적었다 이윽고 우울해 보이는 얼굴의 자그만 교수가 들어와 출석을 부르 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는 발이 불편하여 언제나 금 속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연극사 R )는 재미있다고는 할 수 없 지만, 그런 대로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강ㅢ다. 여전히 덥 지요. 라고 운을 뗀 교수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서 데우스 에왔 마키나가 하는 역할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에우리피데우스 에서의 신이, 아이스킬로느나 소포클레스의 신과 어떻게 다른가' 에 관한 강의였다 십여분 정도 지났을 때. 교실 문이 열리며 미도리가 들 어왔다. 그녀는 짙은 청색의 스포츠 셔츠에 그림색 면바지를 입고 요전과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녀는 교수를 향해서 '늣 어서 죄송합니다'는 식의 미소를 띄우고는 내 곁에 앉았다. 그리고 숄 더백에서 노트를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노트 속에는 "수요일 에는 죄송합니다. 화나셨어요?"라고 적힌 메모가 들어 있었다 강의가 절반 가량 진행되어 , 교수가 칠판에 .)리스 연극의 부 장의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다시 문이 열리더니 헬멧을 쓴 학생이 두 명 들어섰다. 마치 만담의 롬비 같은 2인조였다. 한 사람은 여 리고 흰 피부에 키가 컸고, 또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둥근 얼굴과 검은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키가 큰 쪽이 유인물 을 안고 있었다. 기가 작은 쪽이 교수 쪽으로 가서. 수업의 후반을 토론 시간으로 하고 싶으니 양해해주십사, 그리스 비극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현 재의 세계를 뒤덮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요구가 아니라. 단순한 통보였다. 교수는, 나는 그리스 비극보다 심각한 문 제가 현재의 세계에 존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무슨 말을 해 도 소용없을 테니까 좋을 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책상 테두리 를 꽉 잡고 다리를 내려 , 지팡이를 집더니 다리를 끌며 교실을 나갔 다 키가 큰 사람이 유인물을 나누어주는 동안 둥근 얼굴의 학생이 단상에 서서 연설을 했다. 유인물에는 두엇이건 단순히 秀헌하는 특 유의 간격한 서체로 '기만적 총장 신거를 분쇄하고' '새로운 전학 (全學) 스트라이크에 전력을 집결시켜' '일제산학 협동 노선에 철퇴를 가한다'라고 씌어 있었다. 주장은 훌륭했고. 내용에 특별히 이의는없었찌만 문장에 설득력이 없었다 신뢰성도 없었고 사람의 마음을 선동하는 힘도 없었다. 둥근 얼굴의 연설도 엇비슷했다. 여 느때의 케케묵은 노래였다. 멜로디가 같고. 가사의 내용이 약간 다 를 뿐이었다 나는 이 자들의 진정한 적은 국가권력이 아니라 상상 력의 결핍이리라고 생각했다. "나가요." 미도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둘이서 교실을 나갔다. 그 때 둥 근 얼굴 쪽이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미도리는 "안녕" 하며 그에게 사뿐히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반혁명일까요?" 교실을 나서자 미도리가 나에게 말했다 "혁명이 성취된다면 우리는 나란히 전신주에 매달리게 될까요?" "매달리기 전에 가능한 한 점심을 먹어두고 싶군." "먹지, 좀 멀기는 하지만 당신을 데리고 가고 싶은 가게가 있어 요. 약간 시간이 걸려도 좋을까요?" "좋아. 두 시부터의 수업까지는 어차피 한가하니까." 미도리는 나를 데리고 버스로 욕스야까지 갔다. 그녀가 데리고 간 가게는 요쓰야 뒷골목의 약간 후미진 곳에 있는 도시락 가게였 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주문도 하기 전에 빨간 색의 네모난 용기에 든 그날의 특별 도시락과 국을 가지고 왔다. 확실히 일부러 버스를 타고 먹으러 올 만한 가게였다. "맛있군 " "네. 게다가 상당히 싸요.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가끔 이리로 점심 먹으러 왔었어요. 있잖아요. 제가 다니던 학교는 바로 이 근처 에 있어요. 굉장히 엄한 학교라서, 학생들은 몰래 숨어서 먹으러 오곤 했어요." 선글라스를 벗으니, 미도리는 요전보다 약간 졸린 듯한 눈빛이었 다. 그녀는 왼쪽 손목에 찬 가느다란 은팔찌를 만지작거리거나 새끼손가락 끝으로 눈가를 긁적긁적 긁거나 했다. "졸린가?" 나는 물었다 "약간.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하지만괸 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대답했다. "요전에는 죄송해요 아무래도 빠져나올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생겼었어요. 그것도 아친 에 갑자기 생기니까,어쩔 수가 없었어요.그 레스토랑에 전화를 할 까 생각했지만, 가게 이름도 기언나지 않고, 당신 집 전화번호도 모 르고 많이 기다렸나요?" 상관없어.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 인간이니까." "그렇게 남나요?" "내 시간을 조금 떼어주어, 그 속에서 미도리가 잠을 잘 수 있도 록 해주고 싶을 정도야." 미도리는 턱을 괴고 생긋 웃으며 내 얼굴을 보았다. "당신은 친 절하군요." "친절한 게 아니라. 그냥 단지 한가한 거야." 나는 말했다. "그런 데 그날 미도리 집에 전화를 하니까. 병원에 갔다고 하던데, 무슨 병 이 있었나?" "집에?" 그녀는 미간에 약간주론을 세우며 말했다. "저희 집 전 화번호를 어떻게 아셨나요?' '학생과에서 찾아봤어. 누구나 찾아볼 수 있지 " 그녀는 두세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팔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렇군요, 그 생각은 하지 못했군요. 당신의 전화번호도 그렇게 하 면 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 병원에 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게요. 지금은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죄송해요.' "상관없어. 뭔가 쓸데없는 것을 물었나 보군." "아니 그렇지 않아요 제가 지금 약간 피곤할 뿐이에요. 비를 맞 은 원숭이처럼 피곤하군요." "집에 돌아가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 '아직 자고 싶지 않아요. 조금 걸을까요." 미도리는 말했다 그녀는 요쓰야 역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그녀가 다니던 고 등학교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요쓰야 역 앞을 지날 때 나는 문득 나오코와 하염없이 걸었던 일 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모두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만일 그 5월의 일요일에 중앙선 전차 안에서 우연히 나오코를 만나 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도 지금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으리라고, 나 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나 금방. 아니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 은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우리는 그때 만나야 했기에 만난 것이고, 만일 그때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 른 어디에선가 만나게 되었으리라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 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바야시 미도리와 나는 둘이서 공원 벤치에 앉아 그녀가 다니던 학교 건물을 바라보았다. 교사에는 담쟁이덩쿨이 얽혀 있었고. 창틀 에는 비둘기가 앉아서 날개를 쉬고 있었다. 낡았지만 운치가 있는 건물이었다. 정원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그 옆쪽에 서 하얀 연기가 촌장 솟아오흐고 있었다. 늦여름의 햇빛에 연기가 유달리 뿌옇게 보였다 "와타나베 씨. 저 연기가 뭔지 알아요?" 갑자기 미도리가물었다 몰라, 하고 나는 대답했다. "저건 생리대를 태우는 거예요." "그래?" 하고 나는 대꾸했다. 그 이외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 지 몰랐다. "생리 냅킨, 탐폰 같은 것들이에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 생긋 웃었다 "대개 화장실 쓰레기통에 그런 것들을 버리잖아요. 학 교니까. 그것을 청소부 할아버지가 돌아다니며 모아서 소각로에 태우는 거죠. 그게 저 연기예요." "그러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살벌하군." 나는 말했다 "네. 저도 교실 창문에서 저 연기를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 어요 우리 학교는 중학교 고등학교 합하면 1천 명 가까운 여자아이 들이 있어요. 물론 아직 시작하지 않은 아이도 있으니까90명이라 치면,그 중의 5분의 1이 생리중이라 하더라도, 대략 180명이죠 하루에 100명분의 생리대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셈이에요 "그렇겠지. 자세한 수는 잘 모르지만." "상당한 양이죠. 100명분인걸요. 그런 걸 모아 와서 태우는 기분은 어떨까요?" "글쎄, 잘 상상이 되지 않는군." 나는 대답했다 어떻게 내가 그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잠시 동안 하얀 연기를 바라 보았다. '사실 저는 저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았어요" 미도리는 말하며 약간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주 평범한 공립학교에 들어 가고 싶었어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다니는 아주 평범한 학교에. 그 리고 느긋하게 청춘을 보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부모의 허영 때문에 저곳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왜 국민학교 때 성적이 좋으면 그런 것이 있잖아요 '선생님이 이 아이의 성적이라면 그곳에 들어갈수 있씁니다. 하고 권하잖아요. 그래서 들어가게 된 거예요. 6년 동안 다 녔지만 아무래도 좋아지지 않더군요.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학교에 다녔어요. 하지만, 저는 무지각 무결 석으로 표창까지 받았어요. 그토록 학교가 싫었는데도. 어째서인지 아세요?" "몰라 " "학교가 죽고 싶을 만큼 싫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한 번도 쉬 지 않은 거예요. 쉴 수 없다고 생각한 거죠. 한 번 쉬면 끝장이라고 생각했어요. 한 번 쉬면 마냥 끌려다니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웠던 거예요. 열이 39도나 됐을 때에도 기어서 학교에 갔어요. 선생님이 어이 고바야시 몸이 아픈 게 아닌가 하고 물어도, 아니오 괜찮아요 하고 거짓말을 해 버렸죠. 그래서 무지각 무결석의 표창장과 불어 사전을 받았어요.그렇기 때문에 저는, 대학에서 독어를 신청한 거 예요. 왜냐하면 그 학교의 덕을 보는 건 싫거든요. 이건 농담이 아니 에요 "학교의 어디가 싫었나?" "당신은 학교를 좋아했나요?" "좋아하지도 특별히 싫어하지도 않았지, 나는 아주 평범한 공립 학교에 다녔지만 그다지 신경은 쓰지 않았어 . "저 학교 말이에요 " 미도리는 새끼손가락으로 눈가를 긁으며 말 했다. "엘리트 여자아이들이 모이는 학교예요. 가정도 좋고 성적도 좋은 학생들이 1천 명 가까이 모여 있어요. 일단은. 부잣집 딸들뿐 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다닐 수가 없어요. 등록금은 비싸고, 수시로 기부도 해야 하고, 수학여행이라면 교토의 고급 여관을 전세내서 고 급 밥상에 비싼 요리를 먹고, 일년에 한 번 호텔 오쿠라의 식당에서 테이블 매너 강습이 있고, 하여간에 보통이 아니에요. 그거, 아세 요? 저희 학년 1학년 중에서 도요시마구에 사는 학생은 저뿐이에요. 제가 학생 명부 를 한 번 전부 훑어본 적이 있어요. 모두들 대체 어떤 곳에 살고 있나 싶어서요. 굉장하더군요, 지요다구 미나토구 모토아자부, 오타구 덴엔초후, 세타가야구 세이죠. 하지만 모두 그런 곳뿐이에요. 멀기는 하지만 우리 집에 놀러 와, 하고 말하기에 그래 하고 가봤지요. 놀라 자빠질 정도였어요. 우선 마당 한바퀴 도는 데 15분 걸려요. 어마어마한 정원이 있고, 소형차 개 두 마리가 소고기 덩어리를 마구 먹고 있었어요. 그런베도 어떤 아이는, 자기가 지바에 살고 있다고 교실 안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지각할 것 같으면, 운전사가 딸린 차로 벤츠를 타고 오는 아이가 말이에요. 그 운전사는 '그린 호넷' (Green Hornet, 30분짜리 국의 텔레비전 연속물 이소룰이 운전사로 분장)에 나오는 운전사 모자를 쓰고 흰 장갑을 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그 아이는 다른 아이을 부러워 하더라구요. 믿어지지 않아요. 당신은 믿어지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요시마구 기타오쓰카는 학교를 전부 뒤져봐도 저 이외에는 없어요. 더구나 부모의 직업란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서점 영'이라고. 덕분에 같은 반 아이들이 저를 무척 신기하게 생각하 더군요. 좋아하는 책을 읽고 싶은 만큼 읽을 수 있으니 좋겠구나,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 아이들이 생각하는 건 (기노쿠1 of(신주쿠 번화가에 위치한 서점) 같은 대형 서점이에요. 그 아이 들은 책방이라면 그런 것밖에 상상하지 못해요. 하지만, 착실하다는 건 비 참하다는 뜻이에요. 고바야시 서점. 불쌍한 고바야시 서점. 문을 열면 눈앞에 잡지가 잔뜩 진열되어 있고. 가장 착실하게 팔리는 것은 여성 잡지, (새로운 섹스의 테크닌 40가지 그림)이 목 록으로 붙어 있는 잡지 말이에요. 동네 주부들이 그런 책을 사 가서 부엌 식탁에 앉아서 열심히 읽고는 남편이 돌아오면 살짝 시험해보 지요. 그게 제일 잘 팔려요. 도대체 이 세상의 주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걸까요?그리고 만화 이것도 잘팔려요 (마징거) ;선데이) (점프). 그리고 물론 주간지죠. 하여간에 대부분 잡지예 요. 문고 책도 다소 팔리기는 하지만, 대수로운 정도는 아니에요. 추 리 소설이나, 역사 소설. 음란 서적, 그런 것밖에 팔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바둑 교실, 분재 교실, 결혼식 스피치,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성 생활, 담배 끊는 법 등등의 실용 서적. 게다가 우리는 문구류도 팔 아요. 카운터 옆에 볼펜이나 연필 혹은 노트 따위를 놔두고. 하지만 그것뿐이에요 전쟁과 평화책도 없고 성적 인간3도 없고 호밀밭의 파수꾼도 없어요. 그것이 고바야시 서점이에요. 그런 서점의 어디 가 좋다는 말일까요? 당신은 부러우세요?" "상황이 눈앞에 떠오르는군.' "대충, 그런 가게예요. 동네 사람들은 모두들 우리 가게에 책을 사러 오고. 배달을 오고, 단골 손님도 많으니까, 일가족 네 사람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요. 빛도 없고 딸 둘을 대학에 보낼 수는 있 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죠. 그 이상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할 수 있는 여유는 우리 집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저런 학교에 저를 넣는 게 아 니었어요. 그래 봤자 비참해질 뿐이죠. 무슨 일로 기부를 할 때마다 부모님이 투덜투덜 불평을 하니까 같은 반 친구들과 어딘가에 놀러 가더라도 비싼 음식점에 들어가서 돈이 모자라지나 않을까 조마조 마하지요. 그런 인생이란 어두워요 당신네 집은 부자인가요?" "우리 집?우리 집은 아주 평범한 월급쟁이 집이야.특별히 부자 도 아니고, 특별히 가난하지도 않아. 아들을 도쿄의 사립대학에 보 내는 건 상당히 힘들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자식이 나 하나니 까 문제는 없어 용돈은 그다지 많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 지. 지극히 흔한 집이야 작은 정원이 있고. 도요타 카롤라가 있고."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나요?" "일주일에 세 번 신주쿠의 레코드 가게에서 밤일을 하고 있지 . 쉬 운 일이야. 가만히 앉아서 가게나 지키고 있으면 돼 ." "그래요." 미도리는 말했다. "저는. 와타나베 씨가 돈 때문에 고 생한 적은 없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어쩐지, 외모가." "고생한 적은 별로 없어 . 돈이 많은 부잣집 아들이 아니라는 것뿐 이고,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잖아 "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였다구요." 그 녀는 무릎 위에서 양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는 말했다. "그게 문제였던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렇지 않은 세계를 싫증이 날 정도로 보게 될 거야." "부자에게 가장 큰 이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모르겠군."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이에요. 예를 들면 제가 같은 반 친 구에게 무언가 하자고 제의하잖아요, 그러면 상대방은 이렇게 말하 는 거예요, '나는 지금 돈이 없어서 안 돼'라고. 반대 입 장이라면, 저 는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어요. 제가 만약 '지금 돈이 없어'라고 말하면, 그건 정말로 돈이 없다는 뜻이 되니까요 비참할 뿐이에요. 얼굴이 잘생긴 아이가 '나는 오늘 얼굴이 엉망이니까 바깥에 나가 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못생긴 아이가 그런 말 을 해보세요. 웃음거리가 될 뿐이죠. 저에게는 그런 세계였어요. 작 년까지 6년간." "곧 잊어버리게 될 거야.' "빨리 잊어버리고 싶어요 저는 대학에 들어와서 정말 안심했어 요. 평범한 사람들이 잔뜩 있어서 ." 그녀는 살짝 입술을 일그러뜨려 미소짓고는, 짧은 머리를 손바닥 으로 쓰다듬었다 "미도리는 무언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나?" "응, 지도 해설을 하고 있어요. 왜, 지도를 사면 작은 해설서가 붙 어 있잖아요? 거리의 설명이라든가. 인구라든가, 명소라든가에 관 해서 여러 가지 적혀 있는 거. 여기에 이런 하이킹 코스가 있고, 이 런 전설이 있고, 이런 꽃이 피어 있고. 이런 새가 있다든가하고 글 을 쓰는 일이에요. 그런 건 정말 간단해요. 금방 써요. 히비야 도서 관에 가서 하루만 자료를 뒤져보면 한 권은 쓰죠. 약간의 요령만 알 면 일거리는 얼마든지 있고." "요령이라니 어떤 요령?" "이를테면 말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쓰지 않는 것을 조금만 추가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지도 회사의 담당자는 '저 아이는 문장력 이 있다고 생각해주죠. 무척 감탄해서, 일거리를 맡겨주거든요. 그 리 대단한 게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사소한 것을 추가하면 돼요. 예 를 들자면, 댐을 건설하느라 마을이 하나 물에 잠겼지만, 철새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마을을 기억하고 있어서 , 계절이 오면 새들이 그 호수 위를 언제까지고 맴도는 광경을 볼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런 에 피소드를 하나 넣어두면, 모두들 무척 좋아해요. 아주 감상적이고 서정적이잖아요. 보통 아르바이트하는 아이들은 그런 머리를 쓰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 원고를 써서 제법 많은 돈을 받아요." "하지만 잘도 그런 에피소드를 찾아내는군." "글쎄요." 미도리는 약간고개를 갸우뚱했다. "찾을 생각만 있다 면 찾을 수 있고. 찾지 못하면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만들면 돼요. "그렇군." 나는 감탄했다. 'OK." 미도리는 미소지었다. 그녀가 내가 살고 있는 기숙사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기 때문에 나는 여느 때처럼 국기 게양식 이야기와 돌격대의 라디오 체조 이야 기 등을 했다. 미도리도 돌격대 이야기에 크게 웃었다. 돌격대는 온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모양이었다 미도리는 재미있을 것 같 으니까 꼭 한 번 그 기숙사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봐야 재미없어 하고 나는 말했다. "남학생 수백 명이 지저분한 방안에서 술을 마시거나 마스터베이 션을 하거나 할 뿐이지." "와타나베 씨도 하나요, 그런 짓?" "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나는 설명했다. "여자에게 생리가 있듯 이 남자는 마스터베이션을 하지. 모두들 해. 누구나 한다구 "애인이 있는 사람도 하나요? 즉 섹스 상대가 있는 사람도?"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내 옆방의 게이오 대학에 다니는 학생은 마 스터베이션을 하고 나서 데이트를 가거든. 그 편이 안정이 된다나." "저는 그런 걸 잘 모르겠어요. 계속 여학교에만 다녔으니 까." "그런 건 여성 잡지의 부록에는 써 있지도 않을 테고." "그래요." 미도리는 웃었다. '그런데 와타나베 씨,요번 일요일에 는 한가하세요? 시간이 있나요?" "일요일에는 늘 한가하지. 여섯 시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지 "괜찮으시다면 고바야시 서점에 한 번 놀러 오지 않겠어요? 가게 는 열지 않지만, 저는 저녁때까지 지키고 있어야 하니까.중요한 전 화가 올지도 모르거든요. 어때요. 점싫 식사가요? 만들어 드릴게 요.' "고맙군." 미도리는 공책을 뜯어서 집까지의 자세한 지도를 그려주었다. 그 리고 빨간 볼펜을 꺼내어 집이 있는 곳에 커다랗게 x표를 했다.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고바야시 서점이라고 커다란 간판이 붙 어 있으니까. 열두 시경에 와주시겠어요? 식사 준비를 해둘 테니 까.'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지도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슬슬 대학으로 돌아가 두 시부터 시작되는 독일어 수업에 들어가겠 다고 말했다. 미도리는 갈 홋이 있다며 요쓰야에서 전차를 탔다 일요일 아침, 나는 아홉 시에 일어나 면도를 하고, 빨래를 하여 그 옷들을 옥상에 널었다 쾌창한 날씨였다 처음으로 가을 넴새가 났다. 잠자리 떼가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고, 동네 아이들은 잠자리 채를 들고 쫓아다녔다. 바람이 없어서 , 일장기는 밑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잘 다림질한 셔츠를 입고 기숙사를 나와 전철역까지 걸었다. 일요일의 학생가는 텅 비어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고. 대부 분의 가게는 닫혀 있었다. 거리의 갖가지 소리가 평소보다도 훨씬 뚜렷하게 들렸다. 나막신을 신은 아가씨가 딸각거리며 아스팔트길 을 가로질렀고, 전철 차고 옆에서 너덧 명의 아이들이 빈 깡통을 세 워 놓고 돌을 던지고 있었다. 꽃집이 한 채 열려 있었으므로. 나는 그곳에서 수선화를 몇 송이 샀다 가을에 수선화를 사는 것이 이상 하기는 했지만, 나는 옛날부터 수선화를 좋아했다 일요일 아침의 전차에는 할머니 일행이 세 명 타고 있을 뿐이었 다. 내가 타자 할머니들은 내 얼굴과 손에 든 수선화를 번갈아 보았 다. 할머니 한 사람이 네 얼굴을 보고 싱긋 웃었다. 나도 싱긋 웃었 다 그리고는 맨 뒤쪽에 앉아서, 바로 창 밑을 스쳐가는 낡은 집들을 바라보았다 전차는 그 집들의 처마 가까이를 달리고 있었다. 어 느 집의 베란다에는 토마토 화분이 열 개나 놓여 있고 그 옆에서 커 다란 검은 고양이가 햇볕을 쬐고 있었다. 꼬마 아이가 마당에서 빙빙 방울을 날리는 모습도 보였다. 어디서인가 이시다 아유미의 노래가 들려왔다. 카레 냄새조차 풍겼다 전차는 그렇게 오밀조밀한 골목길 을 누비듯이 달렸다. 도중의 역에서 몇 사람인가 탔지만, 아주 머니 세 사람은 시종일관 무엇인가 열심히 얼굴을 들이대고 이야기 를 했다. 오쓰카 역 부근에서 짐차를 내려, 그다지 화려하지 못한 거리에서 그녀가 지도에 그려준 대로 걸었다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은 어느 집이나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건물들이 모두 낡았고, 주위 는 어두웠다. 간판의 글자가 거의 다 지워진 곳도 있었다. 건물의 낡 은 정도나 모양으로 보아, 이 부근이 전쟁 때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이었다. 물론 개축한 곳도 있었고, 모두들 증축을 하거나 부분적으 로 보수를 하거나 했지만, 그런 곳은 그냥 헌 집보다도 더욱 너저분 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어나는 자동차와 나쁜 공기. 그리고 소음과 비싼 임대료에 견디지 못하여 교외로 옮겨가 버려서, 뒤에 남은 것 은 싸구려 아파트나 사택이나 이사가 어려운 점포. 혹은 완고하게 옛날부터 살던 땅에 고집하는 사람들뿐인 듯한 분위기의 거리였다 자동차의 배기 가스 때문에. 마치 안개가 낀 듯이 모든 것이 뿌옇게 더러워져 있었다 그런 길을 10분 가량 걷다가 주유소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자 작은 상점가가 있고, 그 한가운데에 (고바야시 서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분명히 큰 가게는 아니었지만 미도리의 이야기를 듣고 상 상했던 것만큼 작지는 않았다. 극히 평범한 거리의 극히 평범한 가 게었다. 어렸을 때. 발매일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소년 잡지를 사러 달려갔던 홋과 비슷한 책방이었다 고바야시 서점 앞에 서 있노라니 까 나는 어쩐지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거리에나 이런 책방이 있게 마련이다. 가게는 완전히 셔터를 내렸고. 셔터에는 '(문예 춘추) 매주 목요 일 발매'라고 적혀 있었다 열두 시까지는 아직 이십분 정도 남아 있었 지만 수선화를 들고 상점가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주 쑥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셔터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누르고 는. 두세 걸음 물러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11초 가량 기다렸지만 대 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누를까 망설이기 시작했을 때, 위 쪽에서 드르륵 창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올려다보니 미도리가 창문 에서 고개를 내밀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셔터를 올리고 들어오세요." 그녀가 소리 쳤다. "좀 이르지만. 괜찮겠어?" 나도 같이 소리 쳤다 "물론 괜찮아요. 2쪽으로 올라오세요. 저는 지금 바쁘거든요." 그 리고 다시 드르륵 창문이 닫혔다 나는 엄청나게 소리를 내며 셔터를 1미터 가량 들어올리고는, 몸을 수그려 안으로 들어간 뒤, 다시 셔터를 내렸다. 가게 안은 캄캄 했다 끈으로 묶어서 바닥에 둔 반품용 잡지 때문에 자빠질 뻔하면 서 간신히 가게 안으로 들어간 나는, 손을 더듬으며 구두를 벗고 위 로 올라갔다.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마루로 올라서니 바로 응접실 처럼 되어 있고.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그다지 넓지는 않은 방으 로, 창문에서는 옛날의 폴란드 영화처럼 희미한 빛이 새어들고 있었 다. 왼쪽에는 창고나 광 같은 장소가 있고, 화장실 문도 보였다. 오 른쪽의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가자 2층이었다. 2층은 1층 에 비해서 한결 밝아서 , 나는 다소나마 안심이 되었다. "여기, 이쪽." 어디선가 미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올 라가서 바로 오른쪽에 식당 같은 방이 있고, 그 안쪽에 부엌이 있었 다.집 자체는 낡았지만, 부엌은 바로 얼마 전에 개축한 듯. 싱크대도 수도꼭지도 수납고도 반짝거리는 새것이었다. 그곳에서 미도리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냄비로 무엇인가 끓이는 부글부글하는 소 리가 들리고, 생선 굽는 냄새가 났다. "냉장고에 맥주가 있으니까, 거기에 앉아서 드시겠어요?" 미도리 는 나를 힐끗힐끗 보며 말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어 식탁에 앉아 마셨다. 맥주는6개월쯤 그곳에 들어 있었던 게 아닌까 싶을 정도로 차거워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흰색의 작은 재떨이 신문과 간장 병이 놓여 있었다. 메모지와 볼펜도 있었는데, 메모지 에는 전화번호와 장거리 전화의 계산인 듯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10분이면 될 것 같은데, 거기에서 기다리시겠어요? 기다릴 수 있겠어요?" "물론 기다릴 수 있지. "기다리면서 뱃속을 비워 놓으세요 제법 음식이 많으니까." 나는 차가운 맥주를 홀짝이면서 부지런히 요리를 만들고 있는 미 도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요리의 맛을 보는가 싶으면 도마 위에서 무엇인가 잽싸게 썰다가 냉장고에서 무엇인가 꺼내어 접시에 담기도 하고, 이따 禁 냄비를 분주히 씻었다. 뒤에서 보고 있노 라니 그 모습은 인도의 타악기 연주자를 연상시켰다. 저쪽 벨을 울 리는가 싶으면 이쪽 판을 두드리고, 다시 물소 뿔을 두드리는 식이 었다. 하나하나의 동작이 민첩하고 정확했으며 전체적인 밸런스도 아주 좋았다. 나는 감탄하여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도을 게 있다면 할게 " 나는 말을 걸어보았다. "괜찮아요. 저 혼자서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며 힐끗 이쪽을 향해서 웃었다. 그녀는 통 좁은 청바지 에 네이비 블루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의 등에는 애플 레 펀드(비플즈가 설립한 음반 제작 회사)의 사과 마크가 커다랗게 새겨 져 있었다. 뒤에서 보니 그녀의 허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가늘었다. 마치 허리를 튼튼하게 하는 성장 과정 하나가 생략된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연약한 허리였다 그 때문에 보통 여자들이 통 좁은 청바지를 입었을 때의 모습보다는 훤씬 중성적인 인상이었다 싱크 대 위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녀의 몸 윤곽에 희미한 실 루엣을 만들었다. "그렇게 대단하게 차릴 필요늘 없어 ." "전혀 대단하지 않아요." 미도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어제는 바빠서 장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까, 냉장고에 있는 것만 으로 대충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전혀 신경쓸 거 없어요 정말이에 요. 그리고. 손님 대접을 잘 하는 건 우리 집의 가풍이에요. 우리 식 구들은, 원래 남을 대접하기를 무척 좋아해요. 이건 이미 고칠 수 없 는 병이나 마찬가지예요. 남달리 친절한 일가도 아니고.특별히 덕 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하여간에 손님이 오면 만사 제쳐놓고 대 접하게 돼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두가 그런 성격이에요. 그러니까 저희 아버님은 혼자서는 거의 술을 안 드시는데도. 집 안이 온통 술 투성이예요. 어째서라고 생각해요? 손님에게 내놓기 위해서예요 그러니까 맥주 많이 드세요, 사양 말고. '고마워.' 그때 문득 수선화를 아래층에 그냥 놔둔 것이 생각났다. 신발을 벗을 때 옆에 두고는 그대로 잊고 온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아래 로 내려가 어둠침 침한 솥에 누워 있는 열 송이의 하얀 수선화를 갖 고 돌아왔다 미도리는 찬장에서 갸를한 컵을 꺼내어, 거기에 수선 화를 꽂았다. "저는 수선화를 아주 좋아해요." 미도리가 말했다. "고등학교 축제 때에 '일곱 송이 수선화'를 부른 적이 있어요. 아세요, '일곱 송이 수선 화?" 물론 " "옛날에 포크 그룹을 했었어요. 기타 치면서 ' 그리고 그녀는 일곱 송이 수선화'를 부르며 음식을 접시에 담 기 시 작했다. 미도리의 요리 솜씨는 나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대단한 것이었 다. 식초로 양념한 전쟁이 요리에, 두툼한 닭얄말이, 직접 만든 교또 식 삼치 절임, 가지 조림, 순채국, 송이버섯밥.그리고 단무지를 잘 게 썰어 그 위에 참깨를 뿌린 것이 듬뿍 곁들여져 있었다 맛은 완전 히 관서 지방식으로 싱거운 듯하면서도 담백했다. "정말 맛있군."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와타나베 씨 , 솔직히 말해서 제 음식 솜씨가 좋으리 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죠? 제 외모를 보고." "그렇다고 할 수 있지 "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관서 지방 사람이니까 그런 맛을 좋아하시죠?" "나를 위해서 일부러 싱겁게 맛을 낸 건가?" "설마. 아무리 정성을 들인다 해도 그렇게까지 는 하지 않아요. 우 리 집은 언제나 이런 맛이에요." '그렇다면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관서 지방 출신인가?" '아니에요, 아빠는 계속 이곳에만 계셨고, 엄마는 후쿠시마 출신 이에요. 친척을 모두 뒤져도 관서 지방 출신이라곤 한 사람도 없어 요. 우리 집안은 도쿄 뚝관동炯In鬪束)계의 일가예요." "잘 이해가 안 되는군."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순수한 관서 지방 요리를 만들 수 있지? 누구에게 배운 건가?" "음, 이야기하자면 길어지지만요." 그녀는 달걀말이를 먹으며 말 했다. "우리 엄마는 집안일을 싫어하셔서 정성들여 이것저것 음식 을 만들지 않았어요. 게다-가 우리 집은 가게를 하잖아요. 그래서 바 쁘면 동네 가게에 시켜 먹거나 정육점 같은데서 튀기기만 하면 되는 크로켓을 사다가 끼니를 때울 때가 상당히 많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그런 게 아주 싫었어요. 너무나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카 레를 사흘치 만들어서 매일 그것을 먹는다든가 하는 게. 그래서 어 느 날,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인데, 식사는 내 손으로 제대로 만들어 먹기로 결심한 거예요. 그래서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에 가서 가장 그럴싸해 보 이는 이는 요리책을 사다가,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을 처 음부터 끝까지 전부 마스터 했어요. 도마를 고르는 법. 식칼을 가는 법. 생선을 가르는 법 , 가쓰오부시(가다랭이를 삶아서 말린 것. 대체로 엷게 깎아서 음식의 잉구으로 씀)를 깎는 법 , 등등. 그런데 그 책을 쓴 사람이 관서 지방 출신이라서 제 요리는 전부 관서 식이 된 거예요 "그렇다면 이건, 전부 책에서 배운 건가?"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 다. "그 외에는 돈을 모아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으러 가거나 했죠 저는 이론적 사고는 엉망이지만 제법 눈썰미가 있거든요."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이만큼 만들 수 있다는 건 정말 굉장 한 솜씨야 " "그야 굉장했죠" 미도리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우선 요리 따 위에는 전혀 이해도 관심도 없는 일가잖아요' 제대로 된 식칼이나 냄비를 사고 싶다고 말해도 돈을 주지 않는 거예요. 지금 것으로 충 분하다면서요. 농담이 아니 라구요. 그런 얄팍한 식칼로 어떻게 생선 을 가르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생선 따위는 가르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더라구요. 부지런히 용돈을 모 아서 식칼이니 냄비니 소쿠리 따위를 샀지요. 그게 믿어지세요? 열 다섯 여섯의 여자아이가 열심히 궁상을 떨며 돈을 모아서 소쿠리니 숫돌이니 튀김 냄비 따위를 사다니. 주위의 친구들은 용돈을 잔뜩 받아서 멋진 드레스나 신발 같은 걸 산다는데 말이에요. 불쌍하다고 생각되죠?" 나는 쑨채국을 마시며 끄덕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저는 달걀 부치는 기구가 몹시 갖고 싶었 어요. 달걀말이 다시마를 만들 때 사용하는 길다란 유리 제품 말이 에요. 그래서 저는 새 브래지어를 살 돈으로 그걸 샀어요. 덕분에 몹 시 고생했어요. 왜냐하면 석 달 동안 브래지어 하나로 지내야 했으 니까요. 믿어지세요? 밤에 씻어서, 열심히 말려서. 아침에 그걸 하 고 나가는 거예요. 마르지 않으면 비참해요. 세상에 슬픈 일도 많지 만, 덜 마른 브래지어를 하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어요. 정말로 눈물 이 나요. 특히 그것이 달걀말이 부치는 기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요 "물론 그렇겠지 "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엄마에 게는 죄송하게 생각하지만 약간은 안심했어요. 생활비를 마음대로 쓰고 갖고 싶은 건 마음대로 사게 됐거든요. 그러니까 이제는 요리기구가 제법 잘 갖추어져 있어 요. 아빠는 생활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 시거든요." "어머님은 언제 돌아가셨지?" '2년 전."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암이에요. 뇌종양. 1년 반 입원해서 몹시 고생했는데. 결국 머리가 이상해져서 약으로 죽어버렸 어요. 그래도 죽지 않으니까 거의 안락사와 다름없는 죽음을 택했 어요. 뭐라고 할까. 그건 최악의 죽음이에요. 본인도 괴롭고, 주위 사람들도 괴롭고. 덕분에 우리는 빈털터리가 됐어요 한 대에 1만 엔짜리 주사를 마춰 맞질 않나, 전담 간호사를 둬야 하질 않나, 이런 저런 일로. 간병하느라고 저는 공부를 못해서 재수를 했어요, 엎친 데에 덮친 격이죠. 더구나 . "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그만 두고, 젓가락을 놓더니 한숨을 쉬었다 "너무 어두운 이야기가 됐군 요 어째서 이런 이야기가 됐죠?" "브래지어 이야기에서 " "바로 그 닭얄말이예요. 명심하고 드세요." 미도리는 진지한 얼굴 로 말했다. 나는 내 그릇을 먹고 나자 배가 불렀다. 미도리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만드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져요,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식사가 끝나자 그녀는 설거지를 하고, 식탁 위를 닦은 후. 어디선가 말보로 갑을 갖다가 한 대 입에 물고는 성 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수선화가 꽃힌 컵을 손에 들고 잠시 동 안 바라보았다. "이대로가 좋은 것 같군요." 미도리는 말했다. "화병에 옮기지 않 아도 될 것 같아요. 이렇게 꽂아 놓고 보니 , 근처의 물가에서 수선화 를 꺾어다가 임시로 컵에 꽂아 놓은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오쓰카 역 앞의 물가에서 꺾어온 거야 " 나는 말했다. 미도리는 밝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로 별난 사람이에요. 농담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농담을 하거든요." 미도리는 턱을 핀 채로 담배를 반쯤 피우고는, 재떨이에 꼭꼭 눌 러서 껐다. 연기가 눈에 들어갔는지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여자라면 좀더 품위 있게 담배를 꺼야지 " 나는 말했다 "그래가 지고는 나무하는 여자나 다름없잖아. 억지로 끄려 하지 말고. 천천 히 옆에서부터 꺼가는 거야.그러면 그렇게 짓이기지 않아도돼. 이건 좀 심하잖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푀로 연기를 내뿜으면 안 돼 남자와 둘이서 식사를 할 때 석 달 동안 던래끼어 한 개로 버: 다는 이야기도 별로 하지 않지, 보통 여자아이들은" "저는, 나무하는 여자예요," 미도리는 코 옆을 긁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품위 있게 되지가 않아요. 이따금 농담 삼아 하지만 어떡 해요. 그 외에 할 말이 있나요?" '보로는 여자들이 피우는 담배가 아니야." "상관없어요. 어차피 무엇을 피우건 똑같이 맛이 없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 안에서 말보로의 하드 케이스를 빙빙 돌려 댔다. "지난달부터 피우기 시 작했어요. 꼭 피우고 싶었던 것은 아니 었지만, 좀 피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득."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지?" 미도리는 탁자 위에 놓인 양손을 서로 꼭 붙이고는 잠시 동안 생 각했다. '그냥요. 와타나베 씨는 담배를 피우지 않나요'?" '6월에 끊었어 .' "왜 끊었어요?" "귀찮으니까. 한밤에 담배가 떨어졌을 때 來근 피호움 따위가 崙 번지. 그러니까 끊은 거야.무언가에 그렇게 얽메이는 건 좋아하지 않아." "당신은 비교적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해두는 성격인가 봐요, 그렇 죠?" "음.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가 봐. 옛날부터 그랬어 그것은 당신이. 남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 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당신 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닐까요." 그녀는 팔에 턱을 괴면서 중얼거리듯 이 말했다 "하지만 저는 당신과 이야기하는 게 좋아요. 말투도 아 주 별나고 말이죠. '무언가에 그렇게 얽매이는 건 좋아하지 않아.'" 나는 그녀의 설거지를 거들었다. 나는 미도리의 곁에 서서,그녀 가 씻은 접시를 타월로 닦아서 싱크대 위에 쌓아놓았다 "그런데 가족들은 모두 어디 갔지?" 나늘 물어보았다. "엄마는 무덤 속이에요. 2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건 아까 들었어." '언니는 약혼자랑 데이트하러 나갔구 어딘가에 드라이브하러 갔 을 거예요 언니의 그이는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거든요. 그래서 자 동차를 무척이나 좋아해요. 저는 그다지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지 만." 미도리는 잠자코 설거지를 했고, 나도 잠자코 접시를 닦았다. "나머지는 아빠인데 " 잠시 후에 미도리가 말했다 '그래 " '아빠는 작년 ()월에 우루과이 로 떠난 뒤 소식이 없어요." '우루과이'"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왜 하필이면 우루과이 야?" "아빠는 우루과이로 이민가려고 했던 거예요. 바보 같은 이야기 지만 군대에 있을 때 사귄 사람이 우루과이 에 농장을 가지고 있으 니까, 그곳에 가면 무슨 수가 생길 거라면서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렸어요. 우리는 필사적으로 말렸죠, 그런 곳에 가봤자 살 수 없고, 말도 통하지 않고, 우선 아빠는 도쿄에서 벗어나 본 적도 없지 않느냐고. 하지만 소용없었어요 아마도 엄마가 돌아가신 게 굉장한 쇼크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판단력이 흐려진 거예요. 그 정도로 아 빠는 엄마를 사랑하셨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제대로 대꾸를 할 수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 미도리를 보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빠는 언니와 저에게 뭐라고 하셨는 지 아세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지금 몹시 억울하다. 나는 네 엄마를 잃느니 차라리 너희 둘을 잃는 편이 낫다'라고 저는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그 말이 아무리 진심이라 하더라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있나: 그야. 가장 사랑하는 반려를 잃은 쓰라림과 슬픔과 괴로움은 있을 수 있어요. 안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자기 딸들을 향해서 너희 들이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니, 너무하잖아요? 그건 너무 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야 그렇지 ." "우리도 상처받긴 마찬가지예요." 미도리는 고개를 저었다. " 하여간에, 우리 식구들은 모두들 약간 별난 데가 있어요. 어딘가 조금씩 정상이 아 니라구요. "그런 것 같아." 나는 그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한다는 건 멋지다고 생각하 지 않으세요?딸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대신 죽었더라면 좋았을 거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내를 사랑한다는 건?" "음, 듣고 보니 그렇게 생각되는군." '그리고는 우루과이 로 가버렸어요. 우리를 획 내팽개치고 나는 잠자코 접시를 닦았다. 접시를 전부 닦고 나자 미도리는 나 가 닦은 접시를 찬장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래서 아버님에게서는 연락이 없나',?" 나는 물었다. '딱 한 번 그림 엽서가 왔어요. 금년 3월에 .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더군요. 이쪽은 덥다나, 생각보다는 과 일이 맛이 없다느니. 그런 말뿐이 에요.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구요. 별 볼일 없는 당나귀 사진이 실린 그럼 엽서로. 끝 부분에 좀더 안정 이 되면 언니와 저를 부르겠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 이후로 감감 무 소식이에요. 이쪽에서 편지를 보내도 답장도 주지 않고." "그럼 아버님이 우루과이 로 오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할 건 가?" "저는 가볼 거예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언니는 절대로 가 지 않을 거래요. 우리 언니는 지저분한 것이나 불결한 장소를 아주 싫어해요.' "우루과이란 곳이 그렇게 불결한가?" "몰라요. 하지만 언니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길바닥은 당나귀 똥 으로 가득하고, 거기에 파리가 잔뜩 꾀어 있고. 수세식 변소에는 물 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도마뱀이나 전갈이 득실거린대요. 어디선가 그런 영화를 본 게 아닐까요? 언니는 벌레도 아주 싫어해요. 언니가 좋아하는 건 멋진 차를 타고 쇼난(潮南,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도쿄 근교의 해수욕장) 부근을 드라이브하는 거예요." "흠 ." "우루과이 . 좋잖아요' 저는 가볼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이 가게는 지금 누가 하지?" 나는 물어보았다 "언니가 마지못해 하고 있어요 근처에 사는 친척 아저씨가 매일 도와주면서 배달도 해주고. 저도 틈이 있으면 돕고. 일단 책방이란 그다지 중노동이 아니니까 그럭 저 럭 유지되고 있어요. 도저히 감당 할 수 없으면 가게를 정리해서 팔아치울 작정이 지만 "아버님을 좋아했나?" 미도리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좋아했던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왜 우루과이 까지 쫓아가지?" '신뢰하고 있으니까요." '신뢰하고 있다구?" 그래요, 별달리 좋아했던 건 아니지 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빠를 신뢰하고 있어요 우루과이로 쇼크로 집도 자식도 일도 내팽개치고는 훌쩍 떠나버리는 따위의 사람을 저는 신뢰해요. 이해하실 수 있으 세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미도리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내 등을 가볍게 쳤다. 상관 없어요,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녀는 말했다 그 일요일 오후에는 갖가지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기묘한 일이었다. 미도리의 집 근처에서 불이 나, 우리는3층 베란다로 올라 가 불 구경을 했고. 무심코 키스를 했다. 그렇게 말하고 보니 머 처 느낌이 들지만 모든 일들이 진짜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우리가 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식후의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소방차 사이 렌 소리가 들렸다. 사이렌 소리가 점차로 커 지면서 그림 자도 늘어나는 듯했다. 창 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가고 915 고. 그 중의 몇 사람은 큰소리로 외 쳐댔다. 미도리는 길가 쪽의 방으 로 가서 창문을 열고 밑을 보더니, 잠깐 여기서서 기 다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쿵쿵쿵쿵 분주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혼자서 커피를 마시면서 우루과이가 도대체 어디쯤에 있더 라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브라질이 거기고. 베네주엘라가 거기 고, 이 언저리가 콜롬비아이고 하며 이리저리 생각해봤지만. 우루과 이가 어느 부근에 있는지는 도저히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미도리가 밑으로 내려와 와타나베 씨 . 빨리 따라오세요, 하고 불 렀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서 복도 끝에 있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넓은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는 근처 집들의 지붕보다도 훨씬 높았기에, 일대가 한눈에 보였다. 서너 채 건너에서 연기가무 럭무럭 솟아, 미풍에 실려서 큰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떠돌았다 "저건 사카모토 씨 집이에요." 미도리는 난간에서 몸을 내밀며 말 했다 "사카모토씨네는 예전에 지물포였어요. 지금은 문을 닫고 장 사를 하지 않지만 나도 난간에서 몸을 내밀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3층 건물의 뒤쪽이라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소방차가 서너 대 모여서 진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길이 좁아서, 고작 두 대밖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머 지 차들은 큰길 쪽에서 대기하고 있었 다. 그리고 큰길은 예외 없이 구경꾼들로 붐볐다. "중요한 물건들이 있다면 챙겨서, 여기서 나가 있는 게 좋겠군." 나는 미도리에게 말했다. "지금은 바람이 반대쪽으로 불어 괜찮지 만. 언제 바릴지 모르고 바로 저쪽이 주유소잖아. 도와줄 테니까 짐 을 싸라구 "중요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 미도리는 대답 했다 "하지만 무언가 있겠지. 저금통장이라든가 인감이라든가 증서라 든가 하는 것들 말이야. 우선은 돈이 없으면 곤란할 테고 "괜찮아요. 저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여기가 불에 타더라도' "네 " 미도리는 대답했다 "죽어도 상관없어요 나는 미도리의 눈을 보았다 미도리도 내 눈을 보았다. 그녀가 하 는 말이 어디까지 진심이고 어디부터 농담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무러면 어떻겠느냐 생각이 들었다. "좋아, 알았어 . 함께 있어줄게, 미도리하고." 나는 그렇게 말했다. "함께 죽어줄 거예요?" 미도리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설마 위험을 느끼면 나는 도망칠 거야. 죽고 싶으면 혼자서 죽어" "냉담하시군요." '점심 식사를 얻어먹은 정도로 함께 죽을 수는 없잖아. 저녁 식 사라면 몰라도 "흥. 좋아요, 하여튼 여기에서 잠시 상황을 지켜보며 노래라도 불러요. 상황이 위태로워 지면 그때 또 생각하면 되니까 "노래?" 미도리는 아래층에서 방석 두 개, 캔 맥주 네 개, 그리고 기타 를 베란다로 갖고 왔다. 우리는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 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이어서 미도리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이런 짓을 하다간 주위의 빈축을 사지 않겠느냐고 미도리에게 물어보았다 인근의 화재를 구경하면서 베란다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다니 그다지 정상적인 행위라고는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 이다 '그런 건 괜찮아요. 우리는 주위의 일에 일체 신경쓰지 않기로 했어요." 미도리는 대답했다. 그녀는 옛날에 유행했던 포크 송을 불렀다. 노래도 기타도 도 저히 능숙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본인은 무척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레몬 트리'에서 시작해서 '팝 더 매직 트래건''백 마 '꽃들은 모두 어디에' '노 저어라 마이클' 등의 노래를 쉬지 않고 불러댔다. 미도리는 처음에는 나에게 저음 파트를 가르쳐주고 둘 이서 합창하려 했지만. 내 노래가 너무나도 형편없었기 때문에 포기하 고, 결국은 혼자서 성이 찰 때까지 계속 불러댔다 나는 맥주를 홀짝 이며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화재 상황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는 갑자기 거세지다가 수그러들곤 했다. 사람들은 큰소 리로 무엇인가 외쳐대기도 했고 명령하기도 했다. 커다랗게 프로펠 러 소리를 내며 신문사의 헬기가 와서는 사진을 찍어 갔다. 나는 우 리 모습이 찍히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이 확성기로 구경 꾼들을 향해서 좀더 뒤로 물러서라며 고함치고 있었다. 어디선가 유 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바람이 불안정하게 불기 시작하더 니, 하얀 잿가루 같은 것이 우리 주위에도 여기저기 날아오게 되었 다. 그래도 미도리는 여전히 맥주를 홀짝이며 기분 좋게 노래를 불 러댔다. 알고 있는 노래를 한 차례 부르고 나더니, 요번에는 자신이 작사 작곡했다는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당신을 위해서 스튜를 만들고 싶지만 나에게는 냄비가 없어 . 당신을 위해서 머플러를 짜고 싶지만 나에게는 털실이 없어 당신을 위해서 시를 쓰고 싶지만 나에게는 펜이 없어. "'아무것도 없어'라는 노래예요." 미도리는 말했다 가사도 형편 없고 곡조도 엉 망이었다. 나는 그러한 터무니없는 노래를 들으면서. 만일 주유소에 불이 옮겨 붙으면 이 집도 날아가버리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도리 는 노래를 부르다가 지치자. 기타를 놓고는 양지의 고양이처럼 내 어깨에 기대어 푹 늘어졌다. "제가 만든 노래 어땠어요?" 미도리가 물었다. "유니크하고 독창적이며, 만든 사람의 성품이 잘 나타나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 그녀는 말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테마예요 "알 겄 같군." 나는 끄덕였다 "있잖아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실 때의 일인데 말이에요." 미도리 는 내 쪽을 향해서 말했다. "응 ." "저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어요." "응 ." '그리고 아빠가 떠나버려도 전혀 슬프지 않아요.' "그래?" "그래요. 제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지나치게 차 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 그렇게 된 데에는 '글쎄요, 음, 여러 가지로 말이에요." 그녀는 대답했다. "나름대로 복잡했어요,우리 집.하지만 저는 늘 이렇게 생각했어요. 뭐니뭐니 해도 친부모님이니까. 죽거나 헤어지거나 하면 슬프리라고. 하지만 소용없더군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요. 슬프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고, 엄마 생각도 나지 않아요. 이따금 꿈에서 보1 뿐 엄마가 나타나서,어둠속에서 잠자코 저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하는거예요, '너는 네가죽어서 기쁘지?' 하고 별로 기쁠 건 없 어요, 엄마가 죽었다고 해서. 단지 그다지 슬프지 않다는 것뿐이 에요.솔직히 말해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어요. 어릴 때 키우던 고양이가 죽었을 때에는 밤새도록 울었는데 " 어째서 이토록 심하게 연기가 날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불길도 보이지 않고, 옆으로 번진 기색도 없었다. 단지 끊임없이 연기가 솟 아오르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토록 오랫동안 무엇이 타고 있을까 하 고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제 탓만은 아니에요. 물론 저에게도 정이 깊지 못한 데가 있어요. 하지만, 만약 그분들이, 아빠와 엄마가 조금만 더 저를 사랑해주셨더라면. 저도 좀더 다른 느낌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해요. 훨씬 더 슬픈 기분이 된다든가 말이에요." "그다지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크게 끄덕였 다. "'충분하지 않다'와 '아주 부족하다'의 중간 정도겠죠. 저는 언 제나 굶주려 있었어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애정을 듬뿍 받아 보 고 싶었어요. 이제 됐어요, 배가 불러요, 잘 먹었습니다 하는 정도 로. 한 번이면 돼요, 단 한 번이면. 하지만 그 분들은 단 한 번도 저 에게 그렇게 해주지 않았어요. 응석을 부리면 뿌리치면서, 돈이 든 다고 불평만 했죠, 언제나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 요, 일년 내내 저만을 백퍼센트 사랑해줄 사람을 스스로 찾아내어 손에 넣어 보이겠다고. 국민학교 5학년 때인가6학년 때에 그렇게 결심했어요." "굉장하군."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그래서 성과가 있었나?" "어렵더군요." 미도리는 대답했다. 그리고 연기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린 탓이겠죠, 저는 아 주 완벽한 것을 바라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려운 거예요 "완벽 한 사랑을?" "아니에요. 제가 아무리 심하다 해도 거기까지는 요구하지 않아 요 제가 바라는 것은 어리광이에요. 예를 들자면 지금 제가 당신에 게 딸기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그러면 당신은 긴일 을 내팽개치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서 '자,미도리.딸기 케이크야' 하고 내밀면, 저는 '흥, ( 그건 이제 먹고 싶지 않아요' 하며 창문 밖으로 획 던져버리는 거에요 제가 바라는 건 그런 거예요." "그런 긴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되는데." 나도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관계가 있어요. 당신이 모를 뿐이죠." 미도리는 말했다. "여자 아이들에게는요. 그런 것이 무척 소중하게 여겨질 때가 있어요." "딸기 케이크를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게?" "그럼요. 저는 상대방 남자가 이렇게 말해주길 바래요. '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미도리가 딸기 케이크가 먹기 싫어 버렸다 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리고 있어야 했는데. 나는 당나귀들처럼 바보 고 무신경했어. 사과하는 뜻에서 다시 한번 뭔가 다른 걸 사러 갔다 올게 뭐가 좋을까? 초로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저는. 그렇게 해준 만큼 착실하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 "몹시 부조리한 이야기처럼 들리는군.' "하지만 저에게는 이것이 사랑이에요.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지 만."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 위에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사랑이란 사람에 따라서는 극히 사소하거나, 아니면 쓸데없는 것 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거기서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가 않아요 " '그런 생각을 하는 여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로군 "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요." 그녀는 손톱 뿌리 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진지하게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어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뿐이에요. 남들과 크게 다르게 생 각한다-고 여긴 적도 없고,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 만 제가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모두들 농담이나 연기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때로늘 모든 게 귀찮게 여겨지기도 해요." "그래서 화재로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어머, 제 이야기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이건요, 단순한 호기심 일 뿐이죠." "화재로 죽는 게?" '그게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싶었던 거예요 미도리는 말했다. "하지만 죽는 것 자체는 전혀 무섭지 않아요. 이 건 정말이에요.까짓것 연기에 쉽싸여 정신을 잃고 그대로 죽는 것 뿐이잖아요,눈깜짝할사이에 전혀 무섭지 않아요. 이제까지 제가 봤던 엄마의 죽음이나 친척들의 죽음에 비하면 말이에요. 정말, 저 희 친척들은 모두 큰 병에 걸려서 괴로워하던 끝에 죽었거든요. 아 무래도 그런 혈통인가 봐요. 죽을 때까지 무척 시간이 걸려요. 숨을 거둘 때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예요. 남아 있는 의 식 이라곤 통증과 괴로움뿐." 미도리는 말보로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제가 무서워하는 건. 그런 종류의 죽음이에요. 서서히 죽음의 그 림자가 생명의 영역을 침식해서 , 어느 틈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지고, 주위 사람들도 나를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으 로 생각하는 따위의,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 건 정말 싫어요. 저는 절대로 견디지 못할 거예요 결국 그로부터 30분 정도 지나자 불길이 잡혔다. 불길은 그다지 확산되지 않았고, 부상자도 없는 모양이었다. 소방차도 한 대만 남 기고 돌아가고,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상점가를 떠나갔다 교통을 통 제하기 위해서 남은 순찰차의 라이트가 빙빙 회전하고 있었다. 어디 에선가 날아온 비둘기 두 마리가 전신주 꼭대기에 앉아서 지상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소동이 끝나버리자 미도리는 어쩐지 맥이 풀리는 모양이었는지 몸의 힘을 뺀 채 멍하니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피곤한가?" 나는 물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미도리는 대답했다 "오랜만에 힘을 뺀 것뿐 이에요. 멍하니." 내가 미도리의 눈을 보자, 미도리도 내 눈을 보았다. 나는 그녀 의 어깨를 안고. 키스했다. 미도리는 아주 미미하게 어깨를 흠칫 움츠 렸지만, 즉각 다시 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5. 6 초 가량, 우 리는 살짝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초가을의 태양이 그녀의 뺨 위에 눈썹의 그림자를 떨구어 , 그것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또한 어디로 향해야 좋을지 목적도 없는 키스였다 오후의 햇살 속에서 베란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불 구경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날 미도리에게 키스 따위 는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한 기분은 그녀 쪽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고 생각한다. 우리는 베란다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지붕과 연기 와 고추잠자리 등을 바라보던 중, 따뜻하고 친밀한 기분이 되자 무 의식적으로 그러한 기분을 무엇인가의 형태로 남겨 두고 싶다는 생 각을 했던 것이리라. 우리의 키스는 그러한 종류의 키스였다. 그러 나물론 모든 키스가 그렇듯이,모종의 위험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미도리였다. 그녀는 내 손을 살짝 잡았다. 그 리고는 어쩐지 거북한 어조로 자기에게는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 했다 그 점은 막연히 알고 있었다고 나는 대꾸했다 '당신에게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요?" "있어 ." "하지만 일요일은 언제나 한가하잖아요?" "아주 복잡해."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초가을 오후의 한순간의 마력이 이미 어디론가 사라 져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섯 시에 나는 아르바이트를 간다며 미도리의 집을 나섰다. 함 께 밖으로 나가 간단한 식사를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았지만,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며 그녀는 거절했다. "하루 종일 집안에 있으면서 전화를 기다려야만 한다니 정말로 싫어요. 혼자 있으면, 몸이 조금씩 썩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점점 썩어 녹아서 마지막에는 초록색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되어,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뒤에는 옷만 남게 되죠. 그러 한 기분이 들어요, 하루 종일 기다리다 보면 " "또 전화 당번을 하게 된다면 함께 있어줄게. 점심 식사가 제공된 다는 조건으로." "좋아요. 식후의 불 구경도 준비해둘 테니까." 미도리는 말했다. 이튿날, (연극사 fr )의 강의에 미도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자 학생 식당으로 들어가 혼자서 싸늘하고 맛도 없는 점심을 먹 은 후, 양지에 앉아서 주위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바로 곁에서는 여 학생 둘이서 무척이나 긴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갓난 아이라도 안은 듯이 소중하게 테니스 라켓을 가슴에 안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몇 권의 책과 레너드 번 스타인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예쁘장한 여학생으로, 꽤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큰 회관 쪽에서는 누군가가 베이스의 음계를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들은 곳곳에 너덧 명씩 그룹을 이루어. 이런저런 내 관해서 제멋대로 의견을 발표하거나 웃거나 고함치고 있었다. - 운동장에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학생들이 있었다. 가죽 가방을 껴 안은 교수가 스케이트보드를 피하는 듯한 자세로 그곳을 가로지르고 있다. 교정의 안쪽에서는 헬멧을 쓴 여학생이 지면에 웅크리고 서 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이 이러니저러니 하는 대좌보를 붙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대학의 점심 시간 풍경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그러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아 차렸다. 사람들은 모두 다 나름대로 행복하게 보인다 그들이 정말 로 행복한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그렇게 보이는 것뿐인지늘 모른다 그러나 하여간에 그 9월 하순의 기분 좋은 오후에.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게 보였고, 그 덕분에 나는 전에 없이 쓸쓸한 기분을 느꼈다 나 혼자만이 그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듯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최근 몇 년 동안 도대체 어떤 풍경과 어울려 왔다는 말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최후의 희 밀한 광경은 기즈키와 둘이서 당구를 치던 항구 부근의 당구장이었 다 그리고 그날 밤 기즈키는 죽어버렸고. 그 이후로 나와 세상과 사이에는 무엇인지 모를 엄격하고 싸늘한 공기가 개입되게 된 것이 었다. 나에게 기즈키라는 사내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 대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내가 아는 바 로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서 나의 청춘이라고 불 러야 할 기능의 일부가 완전히 영원히 손상되어 버렸다는 사 실뿐이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하는 점은 전 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곳에 앉아서 캠퍼스의 풍경과 그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혹시나 미도리를 만날지도 모른 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 그날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점 심 시간이 끝나자 나는 도서관으로 가서 독일어 예습을 했다 1 주의 토요일 오후에 나가자와가 내 방으로 와서, 외박 허가를 받아줄 테니까 괜찮다면 밤에 놀러 나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좋습 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최근 일주일 가량은 머릿속이 몹시 답답 하여, 누구라도 좋으니까 함께 자고 싶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나는 저녁 무렵 목욕과 면도를 하고.폴로 셔츠 위에 면 상의를 입었다. 그리고 나가자와와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 고 신주구 번화가로 나갔다. 신죽쿠 3가의 소란스러운 곳에서 버스 를 내려, 그 부근을 어슬렁거리다가 늘 다니던 바에 들어가 적당한 여자아이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여자들만의 일행이 많은 것이 특징인 술집이었지만, 그 날 따라 펀혀라고 해도 좋을 전도로 우리 주위에 여자들이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는 취하지 않을 정도로 위스 키 全부를 찔끔찔끔 마시면서 두 시간 가까이 그곳에 있었다. 붙임 성이 있어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카운터에 앉아서 김렛과 마척가리 타글 주문했다 나가자와가 잽싸게 말을 붙이러 갔지만, 두 사람은 남자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잠시 동안 넷이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다리던 상대가 나타나자 두 아이는 그쪽으로 가버렸다 나가자와는 장소를 바꾸자며 나를 다른 바로 데리고 갔다.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가게로,손님 대부분이 이미 거나하 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안쪽 테이블에 여자 셋이 있어서 ,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가 다섯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모두들 그런 대로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장소를 빌 어 조금 더 마시지 않겠느냐고 묻자,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해요. 시간이 정해져 있거든요, 하고 대답했다. 세 사람 모두 어딘가의 여 대 기숙사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로 풀리지 않는 하루였다. 다시 장소를 바꾸어 보았지만 허사였다. 어찌 된 일인지 여자들이 전혀 접근해 오지 않았다. 열한 시 반이 되자 오늘은 틀렸군, 하고 나가자와가 말했다. "미안해, 이리저리 끌고 다녀서." "저는 괜찮습니다. 선배님에게도 이런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 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 "이런 일이 일년에 한 번 정도 있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미 섹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 이었다. 토요일 밤의 요란한 신주쿠 거리를 세 시간 반이나 서성대며 성욕과 알코올 등으로 뒤범벅이 된 모호한 에너지를 바라보고 있 으려니 나자신의 성욕 따위는 하찮고 왜소한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 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가. 와타나베?" 나가자와가 물었다 "심야 영화라도 보겠습니다 최근에 영화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럼 나는 하쓰미에게로 갈게. 괜찮겠나?" "괜찮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만일 상관없다면 재워줄 여자 하나 정도는 소개해줄 수 있어, 어 때?" "아니오, 오늘은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 '미안하군 언젠가 오늘의 빚을 같도록 하지." 그는 말했다. 그리 고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햄버거 가게로 들어가 치즈 버 거를 먹고. 뜨거운 커피로 취기를 가시게 한 다음, 근처의 재개봉관 에서 '졸업'을 봤다 그다지 재미있는 영화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 만,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한 번 더 그 영화를 봤다. 그리고 영화관 을 나서서 오전 네 시경의 싸늘한 신주쿠 거리를 생각에 잠긴 채 정 처도 없이 천천히 걸었다. 걷다가 지치자 철야 영업을 하는 찻집으로 들어가 책을 읽으면서 전철의 첫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가게 안은 나와 마찬가지 로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웨이터가 와서 죄송 하지만 합석을 부탁합니다. 하고 말했다. 좋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 했다. 어차피 나는 책을 읽고 있을 뿐이어서 누가 앞에 앉건 개의치 않았다. 나와 합석을 한 것은 여자 둘이었다. 아마 네 또래였을 것이다. 둘 다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상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화 장도 복장도 극히 평범한 것이, 아침 다섯 시 반에 가부키초(각종 유 흥업소가 밀집되어 있는 신주쿠의 거리 이름)를 서성거릴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무슨 사정이 있어서 막차를 놓쳤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은 합석 상대가 나라는 사실에 약간 안 심한 듯했다. 나는 깔끔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저녁에 수염도 깎았 고, 더구나 초마스 만의 마의 산B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녀들 가운데 몸집이 큰 사람은 회색 요트 파카와 흰색 진 차림 에. 커다란 비닐 가방을 들고, 조개 모양의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있 었다 또 몸집이 작은 사람은 안경을 끼고, 바둑판 무의의 셔츠 위에 청색 카디건을 걸치고, 손에는 러쿼이즈 블루의 반지를 끼고 있 다. 작은 쪽 여자는 안경을 벗고 손끝으로 눈언저리를 누르는 게 버릇인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똑같이 카페오레와 케이크를 주문하여, 무엇인가 작은 소리로 상담하며 천천히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몸집이 큰 여자는 몇 번인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작은 여자는 몇 번인가 고개 를 옆으로 저었다. 마빈 게이라든가 비지스 등의 음악이 큰소리로 울려대고 있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마도 작은 여자가 고민을 하거나 화를 내니까, 큰 여자가 그것들 을 적당히 달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녀들을 열 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작은 여자가 숄더 백을 껴안고 화장실로 가 버리자, 커다란 여자 가 나에게 죄송합니다. 하고 말을 걸었다. 나는 책을 놓고 그녀를 보 았다. "혹시 이 부근에 아직 술을 마실 수 있는 가게가 있나요?" "아침 다섯 시에 말입니까?"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글쎄요, 아침 다섯 시 20분이라면 다들 술이 깨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요." "네, 그건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몹시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제 친구가 꼭 술을 마시겠다고 하거든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사 정이 있어서 ." "집으로 돌아가 둘이서 마시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 '하지만 저는, 아침 일곱 시 반 차로 나가노에 가거든요." "그렇다면 자동판매기에서 술을 사서, 그 부근에 앉아서 마시는 수밖에 없겠군요." 죄송하지만 함께 어울려주지 않겠느냐고 그녀가 말했다 여자 둘 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하고 덧붙였다 나는 당시의 신주쿠 거리에서 갖가지 경험을 했지만, 아침 다섯 시 20분에 알지도 못하 는 여자에게 술을 마시자는 권유를 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거절하는 것도 귀찮았고, 따분하기도 해서 나는 근처의 자동판매기 에서 정종 몇 병과 적당히 안주를 사가지고는, 그녀들과 함께 역 서 쪽의 빈터로 가서, 즉석 연회 같은 것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두 사람은 같은 여행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었 다 양쪽 모두 금년에 전문대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닌 지 얼마 안 되 는,절친한 사이였다 작은쪽 여자에게 애인이 있어서 1년 가량원 만하게 사귀어 왔는데, 지근 그 애인이 다른 여자와 잤다는 사실을 알고는,그녀가 몹시 울적해 있었다. 이상이 대충의 이야기였다 커 다란쪽 여자는 오늘오빠의 결혼식이 있기 때문에,어제 저녁에 나 가노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신 주쿠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일요일 아침 특급 열차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다른 여자와 잤다는 사실을 알았죠?" 나는 작은 여자에게 물었다. 작은 쪽 여자는 정종을 홀짝홀짝 마시며 발 밑의 잡초를 잡아뜯 고 있었다. "그사람아파트문을여니까 바로눈앞에서 하고 있었 는걸요, 그러니 알고 모르고도 없잖아요." "그건 언제 이야긴가요?" '그저께 밤 "흠 " 나는 끄덕였다. "현관문이 잠겨 있지 않았나요?' '그래요." "왜 문을 잠그지 않았을까?" "몰라요, 어째서인지 알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그건 정말로 쇼크였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너무하지 않아요? 내 친구의 기분이 어땠겠어요?" 마음씨가 좋을 것 같은 커다란 여자가 말 했 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서로 한 번 잘 이야기해보는 게 좋겠 죠.용서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되겠지만, 결국은." 나는 말했 다 "아무도 내 기분은 모를 거야." 작은 쪽 여자가 여전히 술을 마셔 대며 내뱉듯이 말했다. 까마귀 무리가 서쪽에서 날아와 오다큐 백화점 위로 사라졌다 이미 날은 환히 밝아 있었다.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큰 쪽 여자의 열차 시간이 가까워 와서, 우리는 남은 술을 지하도의 부랑자에게 주고, 입장권을 사서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가 탄 열차 가 보이지 않게 되자, 작은 여자와 나는 누가 먼저 말을 꺼냈다고 할 것도 없이 호텔로 들어갔다. 나도 그녀도 특별히 상대방과 자고 싶 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함께 자지 않고는 결말을 낼 수 가 없었다. 호텔에 들어가자 나는 먼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 안에 서 거의 자포자기 기분으로 맥주를 마셨다. 나중에 그녀가 들어오 자, 둘은 욕조 안에서 편안히 누운 채 잠자코 맥주를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도 않고, 졸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피부는 희고 매끈 매끈했으며 , 다리 모양이 상당히 예뻤다. 내가 다리를 칭찬하자 그 녀는 무뚝뚝한 소리로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침대로 들어가자 그녀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내 몸 의 움직임에 따라서 그녀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몸을 뒤틀고, 소리 를 질렀다 내가 삽입을 하자 그녀는 내 등에 힘차게 손톱을 세웠고 오르가즘이 다가오자 열여섯 번이나 다른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나 는사정을 늦추기 위해서 열심히 그 횟수를 세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잠이 들었다 열두 시 반에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없었다. 편지도 메모도 없었 다. 때아닌 시간에 술을 마신 탓으로, 머리 한쪽이 야릇하게 무거운 느낌이었다. 나는 샤워로 정신을 차리고, 면도를 한 다음. 알몸으로 의자에 앉아서 냉장고의 주스를 한 병 마셨다 그리고 어젯밤에 있 었던 일들을 순서대로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모든 것이 유리 두 세 장을 사이에 끼워 놓은 듯 기묘하게 서먹서먹하고 비현실적으로 여겨졌지만 틀림없이 나에게 있었던 일들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맥 주를 마시던 잔이 남아 있었고, 세면대에는 이를 닦고 난 칫솔이 있 었다 나는 신주쿠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전화 박스로 들어가 고바 야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혹시 그녀가 오늘도 혼자서 전화 당번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열다섯 번이나 전화 벨이 울려도 받지 않았다 20분 후에 다 시 한번 전화를 해봤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버스를 타고 기 숙사로 돌아왔다. 입구의 우편함에 내 앞으로 온 속달 우편이 들어 있었다. 나오코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 잘 받았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편지는 나오코의 본가에서 '이곳'으로 즉각 전송되어 온 것이었다. 편지를 받으니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무척 기뻤다. 사실은 내가 그녀에게 편지 를 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고,그 편지에 적혀 있었 다. 거기까지 읽고 나서 나는 창문을 열고는, 윗옷을 벗고. 침대에 걸 터앉았다. 부근의 비둘기 집에서 구우구우 하고 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나는 나오코에게서 온 일곱 장 의 편지를 손에 든 채. 두서없는 상상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처음의 몇 줄인가를 읽은 것만으로, 내 주위의 현실 세계가 문득 시간을 잃 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마음을 가다 듬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그 다음을 읽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4개월 가까이 됩니다'라고 계속되었다. 저는 최근 4개월 동안 당신에 관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리 고 생각할수록 저는 제가 당신에 대해서 공정하지 않았던 게 아 닌가 하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당신에 대해서, 보다 어엿한 인간으로서 공정하게 행동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별로 정상적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제 또레 나이의 여자는 '공정' 따위의 말은 사용하지 않 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젊은 여자에게. 모든 것이 공정한가 아닌 가는 별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평범한 여자는 무 엇이 공정한가 보다는 무엇이 아름다운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가 등등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공 정'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들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이 '공정'이라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습 니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따위는 저에게는 너무 번거롭고 복잡한 문제여서. 결국 다른 기 준에 매달려버리기 때문이겠지요. 예를들자면 공정이라든가, 정 직이라든가, 보편성 같은 것. 하지만 일단은. 제가 당신에 대해서 공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합 니다. 그리고 때문에 당신에게 폐를 끼쳤고, 제 자신에게도 상 처를 입혔던 겁니다. 변명하는 것도 아니고,자기 변호를 하자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로 그랬습니다. 만약 제가 당신 내부에 무엇 인가 상처를 남겼다면, 그것은 당신만의 상처가 아니라, 저의 상 처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일로 저를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당신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미워하거나 하면 저는 정말로 산산조각이 날 겁니다. 저는 당신처럼 자신의 껍질 속으로 숨어 들어가 자기 가 수습되기를 기 다리지는 못하거든요. 당신이 정말로 어떤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왠지 그렇게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당신을 몹시 부러워하고, 당신에게 필요 이상으로 폐 끼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견해는 어쩌면 지나치게 분석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이곳의 치료는 결코 지나치게 분석적 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입장에 놓여서 몇 개월이나 치료를 받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다소는 분석적이 되어버립 니다. 그것이 이렇게 된 것은 이러이러한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것을 의미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러하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 다. 이러한 분석이 세상을 단순화시키려는 것인지 세분화시 키려 는 것인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저는 전보다 많이 회복된 것 같습니다. 스스로 도 그렇게 느끼고 있고, 주위 분들도 그 점은 인정해줍니다. 이토 록 차분하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것도 오랜만의 일입니다 7월에 당신에게 보낸 편지는 처절한 심정으로 썼지만(솔직히 말해서, 무엇을 썼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형편없는 편지는 아니 었나요?) 요번에는 아주 차분한 기분으로 쓰고 있습니다. 깨끗한 공기, 외계로부터 차단된 조용한 세계, 규칙적인 생활, 매일의 운 동, 이러한 것들이 역시 저에게는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누군가 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로군요. 누군가 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에, 책상 앞에 앉아서 펜 을 들고, 이렇게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 다. 물론 문장으로 써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의 극히 일부분밖 에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무 언가 적어 보내고 싶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저는 행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 습니다. 지금은 저녁 일곱 시 반, 저녁 식사를 끝내고, 방금 목욕 도 했습니다. 주위는 고요하고, 창밖은 캄캄합니다. 한줄기 빛 도 보이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별이 정말 아름답게 보이는데 오 늘은 날이 흐려서 보이지 않습니다. 이곳에 있는 분들은 모두들 별에 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것이 처녀자리라는 등 사수 자리라는 등 저에게 가르쳐 줍니다. 아마도 해가 지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별에 관해서 잘 알게 되는 것 이겠지요. 그리고 역시 똑같은 이유에서, 이곳 분들은 새나 꽃이 나 곤충에 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과 이야 기를 하고 있노라면. 저는 자신이 모든 면에서 얼마나 무지하였 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곳에는 전부 70명 정도의 분들이 들어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스태프(의사 선생님, 간호사, 사무원, 그 외에 여러분들) 가20명 남짓 있습니다. 무척 넓은 곳이니까, 이 인원은 결코 많 은 숫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산하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널찍한 자연 속에,사람들은 모두 평온하게 생활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평온하기에 이따금 이곳이 바로 정상적인 세계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 다 저희들은 특정한 전제하에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으니까, 이 렇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테니스와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 농구 팀은 환자(라는 어 휘는 불쾌한 표현이지만 어쩔 수 없군요)와 스태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에 열중하다 보면, 누가 환자이고 누가 스 태프인지 점차 알 수 없게 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 상한 이야기지만, 시합을 하면서 주위를 보고 있노라면 모두가 비 슷한 정도로 삐뚤어져 있는 듯이 보입니다 어느 날 제 담당 의사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제가 느끼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는 저희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그러한 왜곡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왜곡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저희들이 지닌 문제점의 하나는 그 왜곡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에 있다고 합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걸음걸이에 버릇c 있듯이, 느낌이나 생각이나 견해에도 버릇이 있게 마련이고, 이런 것은 고치려 해도 갑자기 고쳐지는 게 아닐 뿐더러. 억지로 고치 려 들면 다른 곳이 이상하게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 은 아주 단순화시킨 설명이고, 그러한 점은 우리들이 품고 있는 문 제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의 뜻은 저도 막연하게나마 이해합니다. 저희들은 사실 자기 의 왜곡에 제대로 순응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그 왜곡이 야기하는 현실적 아픔이나 괴로움을 자신의 내부에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고, 결국은 그러한 것들로부터 멀어 지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와 있는 셈입니다 이곳에 있는 한 우리 들은 타인을 괴롭히지 않아도 되고, 타인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자신이 '비뚤어져 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이 외부 세계와는 전혀 다 릅니다. 바깥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왜곡을 의식 하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이 자그만 세계에 서는 왜곡이야말로 전제 조건입니다 저희들은 인디언의 머리에 그 부족을 상징하는 깃털이 달려 있듯이, 왜곡을 몸에 달고 있습 니다. 그리고 서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생활하고 있 습니다 운동을 하는 이외에는. 저희들은 야채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토마토. 가지, 오이, 수박, 딸기. 양배추, 무, 그 외에 여러 가지 것 들입니다. 흔히 보는 야채 대부분을 재배하는 셈입니다. 온실도 사용합니다. 이곳 분들은 야채 재배에 관해서 지식이 아주 풍부 하고, 열성적입니다. 관련 서적을 읽기도 하고, 전문가를 초청하 기도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어떤 비료가 좋다는 등 지질이 어떻 다는 둠. 그런 이야기만 합니다. 저도 야채 재배를 정말로 좋아하 게 됐습니다. 여러 가지 과일이나 야채가 매일 조금씩 자라는 모 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입니다. 당신은 수박을 키워 본 적이 있으신 가요' 수박이란. 마치 작은 통물처런 부풀어오를 니다. 저희들은 매일 그러한 갓 딴 야채나 과일을 먹으며 지내고 있 습니다. 고기나 생선도 물론 나오지만. 이곳에 있으면 그러한 것 들을 먹고 싶은기분이 점차사라지게 됩니다. 야채가 싱싱하 고 맛있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나가 산나물이나 버섯을 채취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 방면에도 전문가가 있어서 그러고 보면 이 곳은 전문가투성이에요) . 이것은 좋다. 이것은 안 된다고 가르쳐 줍니다. 덕분에 저는 이곳에 온 이후로 살이 3킬로나 쪄버렸습니 다 아주 적당한 체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동과 제대로 된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대개 책을 읽거나. 레코드를 듣거나,뜨개질 을 하거나 합니다. 텔레비 전이나 라디오 같은 것은 없지만, 그 대 신 제법 잘 갓추어진 도서실도 있고. 레코드 라이브러리도 있늡 니다. 레코드 라이브러리에는 마차의 친향촉 전집에서부터 비틀 즈까지 잘 갖추어져 있으니까. 저는 늘 여기에서 레코드를 빌 려서 , 방에서 듣습니다. 이 시설의 문제점은 일단 이곳에 들어오면 밖으로 나가기가 - 많아지거나 혹은 두려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저희들은 이 안에 있는 한 평화롭고 온화한 기분이 됩니다 자신들의 왜곡에 대해 서도 자연스러운 기분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회복된 다고 느끼는 겁니다. 하지만 바깥의 세계가 과연 우리들을 그렇게 마찬가지로 수용해 줄지, 저로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제가 이제는 서서히 외부 사람들과 접촉을 시 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외부사람'이란 정상적인 세계의 정 상적인 사람을 말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저에게는 당신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 저는 부모님들과는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제 일로 몹시 혼란되어 계시니까,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저는 어쩐지 비참한 기분이 들 뿐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당신께 설명 드려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것 이어서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저에게 부담은 느끼지 말아주 십시오. 저는 누군가에게 부담만큼은 주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저에 대한 당신의 호의를 느끼고 있으며, 그것을 기쁘게 생각하 고 있고, 지금 그 기분을 정직하게 당신께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 지금의 저는 그러한 호의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당신이 제가 쓴 편지의 내용을 부담스럽게 느끼신다면 사과 하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당신 이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만일 당신과 제가 아주 당연하고 평범한 상황에서 만나, 서로에게 호의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제가 정상이고, 당신도 정상이 고(처음부터 정상이었죠), 기즈키 씨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 을까 하고. 하지만 이 만일은 너무나도 큽니다. 적어도 저는 공정 하고 정직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시설은 보통 병원과는 달라서 면회는 원칙적으로 자유입니 다. 하루 전까지 전화 연락을 하면 언제라도 만날 수가 있습니 다 식사도 함께 할 수 있고, 숙박 시설도 있습니다. 당신의 사정 이 좋을 때 한 번 와주십시오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지도를 동봉합니다 편지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그리고 아래 층으로 내려가 자동판매 기에서 롤라를 사다가, 그것을 마시면서 다 시 한번 읽었다. 그리고는 그 일곱 장의 편지지를 봉투에 넣어, 책상 위에 두었다. 핑크색 봉투에는 젊은 여자가 보낸 편지라기에는 지나 치게 정중할 정도로 반듯한 글씨로 내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잠시 그 봉투를 바라보았다. 봉투 뒷면의 주 소에는 '아미료'(FT) f?f)라고 적혀 있었다. 기묘한 이름이었다 나 는 그 이름에 관해서 1,6초간 생각해 보다가, 이것은 아마도 프랑스 어의 'ami'(친구)에서 인용한 이름이리라고 추측했다 나는 편지를 서랍에 넣고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 편 지 가까이에 있으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나오코와 둘이서 그랬듯 이, 일요일의 도쿄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그녀가 쓴 편지의 내용 을 한 구절 한 구절 떠올리고, 그것에 관해서 나 나름대로 이리저리 생각하면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방황했다. 그리고 해가 져서야 기숙사로 돌아와. 나오코가 있는 아미료로 장거리 전화를 걸어보았 다. 안내하는 여자가 받아, 내 용건을 물었다. 나는 나오코의 이름을 말하고 가능하다면 네일 오후에 면회를 가고 싶은데 가능한가 물어 보았다. 그녀는 내 이름을 묻고,30분 후에 다시 한번 전화해 달라고 말했다 내가 식사후에 전화를 걸자 같은 여자가 받더니 면회가 가능하 니까 오라고 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는, 작은 배낭에 갈아입을 옷과 세면 도구를 넣었다. 그리고 잠이 올 때까지 브랜디를 마시며 마의 산1의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간신히 잠이 든 것은 새벽 한 시가 지나서였다. 월요일 아침 일곱 시에 눈을 뜨자 나는 서둘러 세수와 면도를 하 고, 아침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즉각 사감실로 가서. 이틀 가량 등산 을 하고 오겠노라고 보고했다. 나는 예전에도 틈만 나면 몇 번이나 여행을 했기 때문에 사감도 '어어'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복 잡한 통근 전차를 타고 도쿄 역으로 가서 교토까지의 신간선 자유 석 표를 샀다. 그리고는 가장 빠른 '히카리 호'에 말 그대로 뛰어올 라. 뜨거운 커피와 샌드위치를 아침 식사 대신 먹고 한 시간 정도 끄 덕끄덕 졸았다 교토 역에 도착한 것은 열한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나는 나오코 가 지시한 대로 시내버스로 산조까지 가서 그곳 가까이에 있는 버 스 터미널에서 16번 버스는 어느 홈에서 몇 시에 떠나는가 물었다. 열한 시 35분에 저쪽 맨끝 승차장에서 출발하는데, 목적지까지늘 대략 한 시간 남짓 걸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매표소에서 승차권을 산 다음, 부근의 서점으로 들어가 지도를 사서는, 대합실 벤치에 앉 아서 아미료의 정확한 위치를 살펴보았다. 지도에서 보는 한 아미료 는 아마도 산 속 깊숙한 곳에 위치한 듯이 보였다. 버스는 산을 몇 개나 넘어 북상하여. 더이상은 나아갈 수 없는 곳까지 갔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가 내리는 정거장은 종점 바로 전이었 다. 정거장에서 곧장 등산로로 이어지니까, 20분 정도 걸으면 아미 료에 도착한다고 나오코가 짙어 보냈다 이토록 깊은 산 속이라면 당연히 조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명 가량의 손님이 타자 버스는 즉각 출발하여, 가모강을 따 라 교토 시내를 벗어나 북쪽으로 향했다. 뚝쪽으로 갈수록 거리가 한적해지고, 밭과 공터가 눈에 띄었다. 검은 기와 지붕이나 비닐 하 우스가초가을의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이을고 버스는 산 속으로 접어들었다. 구불구불한 길이라, 운전사가 쉰새없이 좌우로 핸들을 돌려대니 , 나는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아침에 마신 커피 냄새가아직도 위 속에 남아 있었다. 이을고 커브 길이 점점 적어져 서 간신히 한 숨 돌릴 무렵, 버스는 갑자기 싸늘한 삽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원시림처럼 놀이 솟은 삼나무가 햇빛을 가로막아 주위는 어두컴컴한 그늘로 뒤덮여 있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 오는 바람이 갑자기 싸늘해지고..2 습기에 피부가 아플 정도였다 계곡을 따라서 그 삼나무 속을 상당히 오랜 시간 달리다가, 온 )산 이 영원히 삼나무 숲으로 뒤덮인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기 시 작할 즈음에 간신히 숲이 끝나고. 버스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같은 곳으로 나왔다. 분지에는 푸른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 고. 도로를 따라 깨끗한 강이 흘렀다. 멀리서 하얀 연기가 한 가닥 가늘게 솟았고, 여기저기의 건조대에는 빨래가 걸려 있었으며. 개들 이 몇 마리 짖어댔다. 집 앞에는 처마 밑까지 쌓아놓은 장작 위에서 고양이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 잠시 동안 그런 집들이 계속되었지만사람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풍경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버스는 삼나무 숲으로 들 어가는가 싶으면, 삼나무 숲을 벗어나 부락으로 들어갔다가, 부락을 벗어나 다시 삼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부락에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몇 사람인가의 승객이 내렸다. 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시내를 출발하여 40분 정도 지나자 전망이 트인 언덕 위에 도착하였는데, 운전사는 그곳에서 버스를 세우더니, 5,6분 가량 대기할 테니까 잠 시 내리고 싶은 사람은 내려도 좋다고 승객들에게 알렸다. 승객은 나를 포함해서 네 사람밖에 남지 않았지만 모두들 버스에서 내려 기 지개를 켜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눈 아래에 펼쳐진 교토 시내를 바라보기도 했다. 운전사는 길가에 선 채로 소변을 보았다. 끈으로 묶은 커다란 상자를 차에 갖고 탄 쉰 살 전후의 햇볕에 잘 그 을은 사내가, 산에 오를 작정이냐고 나에게 물었다. 귀찮아서,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을고 반대편에서 버스가 올라와 우리 버스 옆에 서더니, 운전 사가차에서 내렸다. 그 운전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각자의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들도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대의 버스 가 제각기의 방향을 향해서 출발했다. 왜 우리 버스가 언덕 위에서 다른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는지 그 이유는 금세 읽혀졌다 산을 조 금 내려간 곳에서 도로 폭이 갑자기 좁아져서 대형 버스 두 대가 동 시에 지나가기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버스는 몇 대의 라 이트 번이나 승용차와도 스쳐 지나갔는데, 그럴 때마다 어느 쪽인가 가 뒤로 물러나서, 커브 길의 빈자리로 차체를 비켜주어야만 했다. 계곡을 따라 늘어선 부락도 아까보다는 훨씬 작아지고, 경작하는 평지도 좁아졌다. 험난한 산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개가 많 은 점은 어느 부락이나 마찬가지여서. 버스가 오면 개들이 경쟁이라 도 하듯이 짖어댔다. 내가 내린 정거장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가도 없고. 밭도 없었다 정거장 표식이 달랑 세워져 있고. 작은 강이 흐르고. 등산 로의 입구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배낭을 어깨에 걸치고, 계곡을 올 라 등산로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길 왼쪽에는 강이 흐르고. 오른 쪽에는 잡목림이 계속되었다 그러한 완만한 비탈길을 이십분 정도 오 르노라니. 오른쪽에 간신히 차가 한 대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샛길 이 나왔고. 그 입구에는 '아미료 관계자 이외의 출입을 엄금합니다 라 는 푯말이 서 있었다. 잡목림을 빠져나오자 하얀 돌담이 보였다. 돌담이라고는 하지만 내 키 정도의 높이로 위에 울타리나 망이 쳐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넘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넘을 수 있었다 쇠로 만든 검은 색 문은 튼 튼해 보였지만 활짝 열려 있었고. 수위실에는 수위 모습이 보이 지 않았다. 문 옆에는 '아미료 관계자 이외의 출입을 엄금합니다 라는 아까와 같은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수위실에는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재떨이에는 달배꽁초가 몇 개 있고. 찻잔에는 마시다 남은 차가 남아 있고, 울타리에는 트랜지 스터 라디오가 있고, 벽에서는 시계가 똑딱똑딱 메마른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수위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돌 아올 기색이 전혀 없어서,가까이에 있는 초인종 같은 것을두세 번 눌러보았다. 문 안쪽은 바로 주차장처럼 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마 이크로 버스와 사륜 구동의 랜드 르루저와 다크 력루의 볼보가 세워져 있었다. 30대 정도는 주차할수 있는 공간이었지만.세워져 있는 것은 그 세 대뿐이었다. 2, 3분 지나자 감색 제복을 입은 수위가 노란색 자전거를 타고 숲 속 길을 달려왔다. 예순 살 가량의 키가 크고 머리가 벗겨진 사내였 다. 그는 노란색 자전거를 수위실 벽에 기대어 세워놓고, "이거 정 말로 죄송합니다' 하고 몹시 미안하다는 듯이 나에게 사과했다. 자 전거의 흖막이에는 하얀 페인트로 32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이름 을 말하자 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내 이름을 두 번 반복해서 말했다. 상대방이 무엇인가 말하자,그는 네.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본관으로 가셔서 말입니다 이시다 선생님을 찾으세요' 하고수 위는 말했다 "저 숲 속 길을 가면 로터리가 나올 테니까 왼쪽에서 두번째 아시겠습니까? 왼쪽에서 두번째 길로 가주세요. 그러 면 낡은 건물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우회전해서 숲을 하나 지나면 철근 콘크리트로 세운 건물이 있는데, 그것이 본관입니다. 계속 안 내판이 나오니까 잘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수위에게서 설명을 들은 대로 로터리 좌측에서 두번째 길로 나아 가자, 막다른 곳에는 그야말로 왕년의 덜장이었음을 알 수 있는 낡 았지만 우아한 건물이 있었다 정원에는 모얄 좋은 돌이며 석등 따 위가 배치되어 있고. 정원수도 잘 손질이 되어 있었다 이곳은 원래 누군가의 별장지인 듯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숲을 빠져나 가자 눈앞에 철 콘크리트의 3층 건물이 보였다. 3층이라고는 하 지만 지면을 파헤쳐 놓은 듯 움푹한 곳에 서 있었기에. 특별히 위압 적인 느낌은 주지 않았다 건물의 디자인이 심플한것이,제법 청결 해 보였다 현관은 2 층에 있었다. 계단을 몇 개 올라가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석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이름을 대고. 수위에게서 이시다 선생님을 만나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그녀는 생긋 웃고는 로비에 있는 갈색 소파를 가리키며, 그곳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 다 그리고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나는 어깨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그 폭신폭신한 소파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결하고 훌륭한 로비였다. 관엽 식물 화분이 몇 개 있고, 벽에는 고상한 느낌의 초상 화가 걸려 있었으며, 바닥은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여 있었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줄곧그 바닥에 비친 자신의 구두를 바라보고 있었 다 도중에 한 번 안내하는 여자가 "잠시 후면 오실 거예요' 하고 나 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무척이나 조용한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마치 낮잠 자는 시간처럼 여겨졌다. 사람도 동물도 벌레도 초목도, 삼라만상이 잠에 푹 빠져버린 듯이 조용한 오후였다 그러나 이윽고 고무함 구두의 부드러운 발소리를 내며, 짧고 뻣 뻣해 보이는 머리칼을 가진 중년 여자가 나타나더니, 서슴없이 내 곁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나와 악수했다. 악수하면서, 내 손을 앞뒤로 뒤집으며 관찰했다. "댁은 적어도 최근 몇 년간 악기라곤 만져본 적이 없죠?" 그녀의 첫마디는 이런 질문이었다. "네." 나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손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무척 기묘한 느낌의 여자였다. 얼굴에 주름이 잔뜩 있어서.우선 그 주름이 눈에 띄었지만, 그 때문에 늙어 보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연령을 초월한 젊음 같은 것이 주름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었다. 그 주름은마치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이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얼굴 에 잘 어울렸다. 그녀가 웃으면 주름도 함께 웃고. 그녀가 심각한 표 정을 지으면 주름도 함께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얼굴도 심각 한 얼굴도 아닌 때에는 주름은 어딘가 짓궂으면서도 따듯한 느낌으 로 얼굴 전체에 퍼져 있었다. 30대 후반의 연령에, 느낌만 좋은 게 아니라, 뭔가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는 여자였다. 나는 첫눈에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머리는 마구 커트되어 군데군데 솟구쳐 있었고, 앞머리도 멋대로 이마에 흘러내려 있었지만, 그 헤어스타일은 그녀와 아주 잘 어울렸 다 하얀 티셔츠위에 청색 작업복을 입고,크림색의 헐렁한면바지 에 테니스화를 신고 있었다 홀쭉하게 여위어 가슴이 거의 없었고. 입술은 냉소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데다가, 눈가의 주름이 가 늘게 움직였다. 어딘가 세상을 등지고 사는 친절하고 솜씨 좋은 여 자 목수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턱을 약간 끌어당기고. 입술을 일그러뜨린 채로 잠시 나 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당장이라도 호주머니에 서 줄자를 꺼내어 내 몸의 각 부분을 측정하려 들지나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뭔가 악기를 연주할 수 있나요?" "아니오, 못합니다. " 나는 대답했다 "유감이로군요. 무엇이건 연주할 수 있다면 즐거울 텐데 " 그렇겠죠. 하고 나는 말했다 어째서 악기 이야기만 하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슴 호주머니에서 세븐 스타를 꺼내어 입에 물고는, 라 이터로 불을 붙여서 맛있다는 듯 연기를 내뿜었다. "그런데 와타나베라고 했던가요, 당신이 나오코와 만나기 전에 내 쪽에서 이곳에 관한 설명을 해두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해요. 그 래서 우선 우리 둘이서만 잠깐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여 기는 다른 곳과는 좀 달라서 . 예비 지식이 전혀 없으면 약간은 난처해 질 테니까. 당신, 아직 이곳에 관해서 잘 모르죠?" "네. 거의 모릅니다. " '그렇군요,그럼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하고 말을 꺼내다 말 고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녀는 탁 하고 손가락으로 소리를 냈다 "점심 식사는 했나요? 배고프지 않아요?" "고프군요"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따라와요.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합시 다 식사 시간은 끝났지만, 지금 가면 아직 뭔가 먹을 수 있을 거 에요. 그녀는 앞장서서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서. 계단을 내려가 1층 에 있는 식당까지 갔다. 식당에는 2백 명분 정도의 좌석이 있었지만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절반뿐이고, 나머지 절반은 칸막이로 가려 져 있었다. 어쩐지 휴가철이 지난 리조트 호텔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점심 메뉴는 국수가 들어 있는 포테이토 스튜와. 야채 샐러드와 오렌지 주스 그리고 빵이었다. 나오코가 편지에 쓴 것처럼 야채는 깜 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나는 접시 위의 음식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먹어치웠다. "당신. 정말로 음식을 맛있게 드는군요." 그녀는 감탄한 듯이 말 했다 정말 맛있습니다. 게다가 아침부터 제대로 먹 지도 못했고." 괜찮다면 내 것도 들어요, 이거. 나는 이제 배가 부르니까. 들 어요?" "안 드시겠다면 제가 먹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나는 위가 작아서 조금밖에 들어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밥이 모 자라는 만큼 담배를 피워서 채우는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 니 다시 세븐 스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아 참 내 이름은 레이 코예요. 모두들 2렇게 부르고 있지요." 조금밖에 손을 대지 않은 그녀의 포테이토 스튜와 빵을 먹는 내 모습을 레이코는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오코의 담당 의사 선생님입니까?"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내가 의사?" 그녀는 깜짝 놀란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째서 내가 의사인가요?" "왜냐하면 이시다 선생님을 찾아뵈라는 말을 듣고 왔거든요." "아아, 그 말이군요 맞아요, 나는, 여기에서 음악 선생을 하고 있 어요. 그러니까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사싶은 나도 환자예요. 하지만 7년이나 이곳에 있으면서 음악을 가 르치기도 하고 업무를 돕기도 하니까, 이제는 환자인지 스태프인지 모르게 되었죠. 나오코가 나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레이코는 말했다. "하여간에, 나오코와 나는 같은 방에 서 지내고 있어요. 즉 룸 메이트인 셈이죠. 그 아이와 함께 지내는 건 재미있어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니까. 당신 이야기도 자주 하 고 "저의 어떤 이야기를 합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아참 그렇지,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곳에 관한 설명부터 해야 겠군" 레이코는 내 말들을 묵살하고는 말했다. "우선 당신이 이해 해주길 바라는 것은 이곳이 소위 일반적인 '병원'이 아니라는 점. 간 단히 말해서, 이곳은 치료를 하는 곳이 아니라 요양을 하는 곳이에 요. 물론 의사가 몇 명 있어서 매일 한 시간 정도는 입회를 하지만, 그건 체온을 재듯이 상황을 체크하기 위한 것이지 , 다른 병원이 하 고 있는 따위의 소위 적극적 치료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곳에는 철창도 없고, 문도 열려 있어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안 으로 들어오고, 자발적으로 이곳에서 나가죠. 그리고 이곳에 들어 올 수 있는 사람은, 그러한 요양에 적합한 사람들뿐이 에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전문적인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스에 따라서 전문적인 병원에 가게 되죠.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겠어요?" "대충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요양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레이코는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남아 있는 오렌지 주스를 마 셨다. "이곳의 생활 자체가 요양이에요. 규칙적인 생활,운동, 외계. 로부터의 격리 , 조용함, 신선한 공기. 우리들은 밭을 가꾸어 거의 자급 자족하며 살아가고 있고, 텔레비전도 먼고. 라디오도 없으니까. 요 즈음 유행하는 코윈 같은 것이죠. 물론 여기에 들어오려면 상당 히 많은 돈이 든다는 점은 코윈과는 다르지만" "그렇게 비싼가요?" "터무니없이 비싼 건 아니지만 싸지는 않아요. 우선 엄청난 시설 이잖아요? 장소도 넓고. 환자들 숫자는 적은데 스태프는 많고. 내 경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으면서 , 스태프나 다름없으니까 입원비 는 실질적으로는 면제받고 있죠, 이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지 만 당신, 커피 들겠어요?" 마시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 나, 카운터의 커피 워머로 가더니 컵 두 개에 커피를 따라서 갖고 왔 다. 그녀는 설탕을 넣고 스푼으로 휘저은 다음, 얼굴을 징그리며 그 것을 마셨다. "이 요양소는, 영리 기법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직 그다지 비싸 지 않은 입원비로 유지될 수 있죠. 이곳 토지도 어떤 사람이 전부 기 부한 거예요. 법인을 만들어서 말이죠. 옛날에는 이 부근 전체가 그 사람의 별장이었죠.20년쯤 전까지 는요 낡은 저택을 봤나요?" 봤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옛날에는 건물이라곤 그곳뿐이라서, 그곳에 환자들을 모아 놓고 집단으로 요양을 했었죠 왜 그런 일을 시작했는가 하면, 그 사람 아 들이 정신병 낌새가 있었는데, 어느 전문의가 그 사람에게 집단 요 양을 권유한 거예요. 외딴 곳에서 모두가 상부상조하여 육체 노동을 하며 살고. 거기에 의사가 가담하여 어드바이스를 하고, 상황을 체 크하면 병에 따라서는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 의사의 이론이었 죠. 그리하여 이 요양소가 시작된 거예요. 그러다가 점차 커지면서, 법인이 됐고, 농장도 넓어지고, 5년 전에 본관도 세워졌죠." "치료 효과가 있었던 거로군요 네, 물론 만병통치는 아니고. 좋아지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어 요.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효과를 못 보던 사람 상당수가 여기에서 좋아져서 회복되어 나갔어요. 이곳의 가장 좋은 점은, 모두가 서로 돕는다는 것이죠. 모두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상부상조하는 거예요. 다른 곳은 그렇지 않아요, 유감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의사는 어디까지나 의사이고. 환자는 어디까지나 환자예 요. 환자는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고,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는 거죠. 하지만 이곳에서는 우리들은 서로 도와요. 우리들은 서로가 상대방 의 거울이에요. 그리고 의사는 우리들의 동료인 셈이죠. 겉에서 우 리들을 보고 있다가 무엇인가 필요하구나 하고 생각되면 그들이 잽 싸게 다가와서 우리들을 도와주지만, 우리들도 때로는 그들을 도와 주거든요. 다시 말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이 그들보다 뛰어날 때가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자면 내가 어느 의사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든가, 어느 환자가 간호원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친다든가, 그런 것들이죠. 우리들과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 중에는 전문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 상당히 많아요. 그러니까 이곳에서 우리들은 모 두 평범한 셈이에요. 환자도 스태프도. 그리고 당신도. 당신도 이곳 에 있는 동안은 우리에 속하니까, 나는 당신을 돕고, 당신도 나를 도 와야 해요." "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먼저 상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것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 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 두번째는. 정직 할 것 상황을 얼버무리거나, 입장이 불리하다고 해서 속이려 들지 말 것. 그것뿐 이에요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레이코 씨는 왜 7년이나 이곳에 계십니 까 아까까지는 지금까지 이야기하면서 당신에게 이상한 점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낮에는 그렇죠" 그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사정이 달라요. 밤이 되면 난. 침을 흘리며 방바닥을 구 르거든요." "정말입니까?" 나는 물었다 "거짓말이에요.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당황하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 다 나았어요. 다만 이곳에 남아 서 여러 사람들의 일을 돕는 게 정말로 즐겁거든요. 음악을 가르 치거나 야채를 재배하거나 하면서. 난 이곳을 좋아해요. 모두들 친 구 같고.그에 비하면 바깥 세계에는 무엇이 있나요?나는 지금 서 른여덟이니까 곧 마흔이에요. 나오 코와는 다르다구요. 내가 이곳을 나간다고 해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맞아줄 가정도 없고, 이렇다 할 일거리도 없고, 친구도 거의 없고. 더구나 나는 이 곳에 이미 7년이나 들어와 있어요. 바깥 세상에 관해서 이젠 아무것 도 몰라요. 이제 와서 나가봤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잖아요." "하지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지도 모르잖습니까?" 나는 말했다 "시험해볼 가치는 있겠지요 "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바닥 안에 서 라이터를 빙빙 돌렸다. "하지만 와타나베 씨, 나에게도 나름대 로 사정이 있어요 상관없다면 지금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그런데 나오코는 좋아지고 있습니까?" 글쎄요, 우리는 그렇다 고 생각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상당히 혼 란되어 있어서, 우리도 어떻게 될까 하고 약간은 걱정을 했지만. 지 금은 안정되어 있고. 말하는 것도 상당히 좋아졌고, 자신이 하고 싶 은 말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일단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사 실이에요. 하지만, 그 아이는 좀더 일찍 치료를 받았어야 했어요. 그 녀의 급우, 기즈키라는 남자 친구가 죽은 시점에서 이미 증상이 나 타나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점은 가족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 고,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가정적인 배경도 있고 "가정적인 배경?"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어머나, 당신은 그걸 몰랐었군요" 레이코 쪽은 더욱더 놀라는 모습이었다 나는 함자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나오코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그 편이 좋 을 테니까. 그 아이도 이제 당신에게는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고 싶어하지요 " 레이코는 다시 스푼으로 커피를 저어서, 한 모금 마셨 다. "그리고 이건 규칙으로 절해져 있으니까 먼저 이야기해두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당신과 나오코가 둘이서만 만나는 것은 금 지되어 있어요. 이건 규칙이에요. 외부인이 면회 상대와 둘이서만 만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항상 두 사람에게는 옵서버가 -현실 적으로는 내가 되겠지만 따라다녀야만 해요 유감스럽지만 양해 해주셔야겠어요.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사양하지 말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좋아요. 내가 옆에 있 다고 해서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당신과 나오코 사이의 일은 거의 전부 알고 있으니까." "전부?" "거의 전부."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그룹 세션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잘 알아요. 게다가 나오코와 나는 둘이서 무 슨 이야기건 하는 걸요. 이곳에는 비밀이 그다지 많지 않아요 " 나는 커피를 마시며 레이코의 얼굴을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저 는 잘모르겠습니다. 도쿄에 있을 때 제가 나오코에게 했던 행동이 정말로 옳았는지 아닌지 . 그 점에 관해서 늘 생각해왔지만.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 다. " '그건 나도 몰라요." 레이코는 말했다 '나오코도 모르죠 그건 당신들 둘이서 잘 이야기해서 앞으로 정해야 할 일이에요. 그렇죠' 설령 무슨 일이 있었건,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 거 예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행동이 옳았는가 아닌가 는 그 다온에 다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셋이서 서로 있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당신과 나와 나오코 셋이서. 서로 정 직하게 상대를 들겠다고 생각한다면 말이에 요 셋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 경우에 따라서는 강당한 효과를 내 죠 당신은 언제까지 이곳에 계실 수 있나요? '모레 저녁에 토쿄로 돌아갈 작정입니다 아르바이트도 가야만 하고, 목요일에는 독일어 시험이 있으니까요." "좋아요, 그렇다면 우리 방에 묵으세요. 그러면 돈도 들지 않고 시간에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우리라니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물론 나와 나오코의 방이죠." 레이코는말했다. "방도 나뉘어 있 고, 소파 겸 침대가 하나 있으니까 충분히 잘 수 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까? 남자 방문객이 여자 방에 묵어도?" "그야 설마- 당신이 밤 한 시에 우리 침실로 들어와서 번갈아 욕을 보이 찌는 않을 거잖아요?" "물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짓은." "그렇다면 문제 없잖아요?우리 방에 머물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기로 해요. 그 편이 좋을 꺼예요 그러면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 할 수 있을 거고, 내 기타를 들려줄 수도 있고. 솜씨가 제법이거든 요. "하지만 정말로 폐가 되지 않을까요?" 레이코는 석 대째의 세븐 스타를 입에 물고. 입을 잔뜩 일그러뜨 리며 불을 붙였다. "우리 둘이는 일에 관해서 자주 이야기했어 요. 그리고 둘이서 당신을 초대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예의 바르재 응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물론 기꺼이 응하겠씁니다." 나는 대답했다 레이코는 눈가에 주룸을 지으며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 신의 말투는 어딘가 기묘하게 들리는군요." 그녀는 말했다. '호밀 밭의 파수군의 남자 주인공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니겠죠?" '설마."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레이코도 담배를 문 채로 웃었다. "하지만 당신은 솔직한사람인 것 같아요. 보면 알 수 있으니까. 나는 여기에 7년이나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겪었기 때문에 알 수 있어요. 마음을 잘 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당신은 열 수 있는 사람이에요 확실히 말하자면, 열려고 마음만 먹으면 열 수 있는 사람이죠." "열면 어떻게 됩니까?" 레이코는 담배를 문 채 즐겁다는 듯이 테이블 위에 양손을 포 갰다. "회복되는 거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본부 건물을 나와 작은 인적을 넘어 .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와 농구 핀트 곁을 지나쳤다. 테니스 코트에서는 남자 둘이서 테 니스 연습을 하고 있었다. 홀죽한 중년 사내와 뚱뚱한 젊은 사내로 두 사람 모두 실적은 제법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것이 테니스 외에 전혀 별개의 게임처럼 보였다. 게임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볼의 판 에 흥미를 느껴서 그것을 연구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묘 하게도 깊은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공을 주고받았다. 그리 고 양쪽 모두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 가까운 쪽에 있던 젊은 사내가 레이코가 오늡을보더니 게임을 중단하고는 다가와서. 싱글 싱글 웃으며 두세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테니스 코트 옆에서는 커 다란 제초기를 든 사내가 무표정하게 잔디를 깎고 있었다. 계솥 걸어가자 물이 나오고, 숲 속에는 서양식의 아파트며, 주택들 이 띄엄띄엄 열다섯 채 내지 스무 채 가량 간격을오 세워져 있었 다. 대부분의 집 앞에는 수위가 하던 겄과 똑같은 노란색 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는 스태프의 가족들이 살고 있어요 하고 레이 코가 가르쳐주었다 마을로 나가지 않더라도 필요한 것은 대부분 이곳에서 마련할 수 있죠." 레이코는 걸으면서 나에게 설명하였다. "식료품은 아까 말했듯이 거의 자급자족이에요. 양계장이 있으니까 달걀도 얻을 수 있고. 책도 레코드도 운동 설비도 있고. 작은 슈퍼마켓 같은 것도 있 고, 매주 미용사도 오고. 주말에는 영화도 상영해요. 특별한 것은 마 을로 나가는 스테프에게 부탁하면 되고. 옷은 카탈로그로 주문하면 되니까, 크게 불편한 점은 없어요 " "마을로 나갈 수는 없나요?" 나는 물었다 "그건 안 돼요. 물론 예를 들어 치과에 가야 한다든가 하는 특수 한 일이 있다면 별도지만, 원칙적으로 외출은 금지되어 있어요. 이 곳을 나가는 것은 완전히 그 사람의 자유이지만. 한 번 나가면 다시 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어요. 다리를 태워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예 요. 2, 3일 마을고 나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따위의 행동은 불가능해요. 사실 그렇잖아요? 그런 짓을 하다가는, 들락날락거리 는 사람들 투성이가 될 테니까 " 숲을 빠져나가자 완만한 비탈이 나왔다. 비탈에는 기묘한 분위기 의 2층 정도 주택이 불규칙하게 들어서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기묘 한지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집들은 기 묘하다는 느낌이 들 었다. 그것은 우리가 비현실적인 대상을 아늑한 분위기로 묘사한 그 림에서 느끼는 정감과도 흡사했다. 월트 디즈니가 뭉크의 그림을 바 탕으로 만화영화를 만든다면 혹시나 이런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문득 들었다. 집폭은 모두가 아주 똑같은 모양이었고, 같은 색 으로 칠해져 있었다. 모양은 거의 정 육면체에 가까웠으며, 좌우가 대칭으로 입구가 넓고. 창문이 많이 달려 있었다. 그 림들 사이로 자 동차 교습소의 푀느j1럼 i될구될한 길이 나 있었다. 어느 집이고 앞에 꽃을 심어. 잘 손질해놓았다. 사람 모습은 없고. 창문마다 커튼 이 쳐져 있었다. "이곳은 ㄷ지구라고 불리는 곳으로, 여자들이 살고 있어요. 즉 우리들이죠. 이런 건물이 열 채 있는데, 한 채가 네 구역으로 나뉘죠 한 구역에 두 사람씩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전부 80명이 살 고 있는 셈이죠. 현재는 32명밖에 살지 않지만 " "정 말로 조용하군요 " "지금 시간에는 아무도 없어요." 레이코는 말했다. "나는 특별 급이니까 지금 이렇 시간에 자유로이 행동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각 각의 커리클럽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어요.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 고, 정원을 가꾸는 사람도 있고, 그룹 치료를 받는 사람도 있고, 밭에 나가서 산나물을 캐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것은 자신이 정해서 커리클럽을 만드는 거예요. 나오코는 지금 뭘 하고 있더라? 벽지 갈거나 페인트를 다시 칠하는 따위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잊어버렸네. 그런 작업이 대체로 다섯 시까지 몇 가지 있거든요 그녀는 'c-7'이라는 번호가 붙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막다 른 곳의 계단을 올라가 오른쪽 문을 열었다. 문에는 자물쇠가 채 워져 있지 않았다 레이코는 나에게 집 내부를 보여주었다-. 거실과 침 실과 부엌과 욕실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 실플하고 좁은 느낌이 주는 이미지로, 여분의 장식이나 불필요한 가구가 없으면서도 썰렁한 느낌은 주지 않았다. 합안에 있으려니까. 어쩐지 레이코 앞에 있을 때 처럼 몸의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졌다. 거실에는 소파 하나와 테이 블이 있고.흔들의자가 있었다. 부엌에는 식사용 데이블이 있었다. 테 이블마다 커다란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침실애는 침대 두 개와 책 상이 있었다 침대의 머리맡에는 작은 테이블과 독서용 스탠드 가 있고. 물론 책이 덮어놓은 채로 있었다. 부엌에는 세트로 된 소 파와 레인지와 냉장고가 놓여 있어서 . 간단한 요리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욕조는 없고 샤워기뿐이지만 그런 대로 훌륭하잖아요?" 레이코 는 말했다. "욕조와 세탁기는 공동으로 나음해요." "과분할 정도로 훌륭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기숙사는 천장과 창 문박에 없으니까요." "당신은 이곳의 겨울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레이코 는 내 등을 두드려 소파에 앉히고는, 자신도 곁에 앉았다 "길고 괴 로운 겨울이에요. 이곳의 겨울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 눈. 눈이 죠,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속까지 파고들어요 우리들은 겨울 이 되면 매일같이 눈을 치우며 살아요. 그런 계절이 되면, 우리들은 방을 따뜻하게 하고 음악을 듣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뜨개질을 하며 지내요. 이러니까 이 정도의 공간이 없으면 숨이 막혀서 제대로 지 낼 수가 없죠. 당신도 겨울에 이곳에 오면 그걸 잘 알게 될 거예요.' 레이코는 기나긴 겨울을 떠올리기라도 하듯이 깊은 한숨을 쉬며 , 부들 위를 양손을 마주 댔다 "이걸 뉘어서 침대를 만들어 드릴게요." 그녀는 우리가 앉아 있는 소파를 탁탁 두드렸다. "우리는 침실에서 잘 테니까, 당신은 여기서 주무세요. 그럼 되 겠죠?" "저는 아무래도 괸찮습니다 "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해요." 레이코는 말했다. "우리는 아마 다 섯 시에 이곳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때까지 나오코도 저도 할 일이 있으니까,당신 혼자 여기서 기다려주면 좋겠군요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을 테니까." 레이코가 나가버리자 나는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파 위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몸을 쉬고 있으려니 . 문득 기즈키와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 떠났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때가.가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가을이었 던가? 4년 전이다. 나는 기즈키의 가죽 잠바 냄새와 소리가 몹시 요 란했던 야마하 125cc의 빨간 오토바이를 떠올렸다. 우리는 아주 먼 해변까지 갔다가 저녁 무렵에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때의 드라이브를 잘 기억하고 있 다. 귓전에서 날카롭게 울려대는 가을 바람 소리를 들으며, 양손으 로 기즈키의 잠바를 꽉 잡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마치 자신의 몸이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나는 같은 자세로 소파에 누워. 그 당시의 일들을 잇달 아 생각했다. 무슨 까닥인지 몰라도, 이 방 안에 누워 있노라니 이 제까지 그다지 생각나지도 않았던 옛날 일들이며 정경이 잇달아 머 리에 떠올랐다. 어떤 기억은 즐거웠고, 어떤 기억은 조금 슬펐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하고 있었을까. 나는 예상도 못했던 그러한 기억의 분출(그것은 정말로 샘물처런 바위틈에서 콸콸 쏟아져 나왔 다)에 완전히 젖어 있었기 때문에, 나오코가 문을 살짝 열고 방에 들 어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득 보니까 곁에 나오코가 있었다. 나는 얼굴을 들어 잠시 동안 나오코의 눈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 녀는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 한 나오코의 모습이 내 자신의 기억에서 솟아난 이미 지가 아닐까 여 겨졌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나오코였다. "자고 있었나요?"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아니,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는 몸을 일으켰다 "별일 없었나?" :'네. 별일 없었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미 소는 옅은 색의 머나먼 정경처런 보였다. "지금 시간이 별로 없어 요. 사싶은 이곳에 오면 안 되지만 잠깐 틈을 내서 온 거예요. 그러 니까 곧 돌아가야만 해요 지금 제 머리 , 흉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 정말로 예쁜데."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마치 국민 학교 여학생처럼 산뜻한 헤어스타일을 하고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한 쪽을 단정하게 핀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헤어스타일은 나오 코에게 참 잘 어울렸다. 그녀는 중세의 목판화에 많이 등장하는 아 름다운 소녀처 럼 보였다. "귀찮아서 레이코 씨에게 잘라 달라고 했어요 진짜 그렇게 생각 하세요' 예쁘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저희 어머님은 흥하다고 하셨어요." 나오코는 핀을 뽑아. 머리를 풀어서 , 손가락으로 몇 차례 쓰다듬고는 다시 핀으로 고정시 켰다 나비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저는.셋이서 함께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둘이서 만 만나고 싶었어요.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당신 얼굴을 보고 당신에 게 익숙해지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당 신에게 적응할 수가 없거든요. 저는 무슨 일이건 서투니까요.' "조금은 익숙해 졌나' " "조금은요." 그녀는 다시 머리핀에 손을 댔다. "하지만 이제 시간 이 없어요. 가봐야 되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타나베 씨. 이곳에 와주셔서 고마워요. 저는 정말 기뻐요. 하 지만 이곳에 계시기가 부담스러우시면 거리낌없이 그렇다고 말씀 해주세요. 이곳은 약간 특수한 장소이고, 시스템도 특수해서 전혀 친숙해질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느끼신다면 솔직 하게 그렇다고 말씀해주세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낙담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곳에서는 모두들 솔직해요. 솔직하게 여러 가지 것들을 이 야기 하거 든요 " "응,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 나는 대답했다. 나오코는 내 옆에 앉아, 나에게 몸을 기댔다. 어깨를 껴안자, 그 녀는 머리를 내 어깨에 올리고, 코끝을 내 목에 댔다. 그리고 마치 내 체온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나오코를 살며시 껴안고 있노라니. 가슴이 조금 뜨거워져 왔다. 이 을고 나오코는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문 을 살짝 열고 나갔다. 나오코가 가버리자. 나는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다. 잠을 잘 생각 은 없었지만. 나는 나오코의 존재감 속에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 다. 부엌에는 나오코가 사용하는 식기가 있고, 욕실에늑 나오코가 사용하는 칫솔이 있고, 침실에는 나오코가 자는 침대가 있었다. 나 는 이러한 방안에서, 세포의 구석구석까지 피로감을 하나하나 닦아 내듯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둠친침한 곳을 날아 다니는 나비 꿈을 꾸었다. 눈을 떴을 때, 손목 시계는 네 시 3E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햇빛 치 색깔이 약간 바뀌고, 바람이 불고. 구름 모양이 바쮜어 있었다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기에 . 배낭에서 타월을 꺼내 얼굴을 닦고, 셔 츠를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싱 크대 앞에서 바깥을 바라 보았다. 그곳 창문에서는 맞은편 집의 창문들 이 보였다 그 창문 안쪽에는 색종이로 만들 장식이 벽 과 실에 메달 려 있었다. 새, 구름. 소, 고양이 등의 실루엣을 세밀하고 정성스럽 게 도려내어 잘 마춘 것이었다. 주위에는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잘 기부이진 폐허 속에서 혼자 생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ㄷ지로 돌아오기 시작한 겄은 다섯 시가 약간 지났 을 무렵이었다. 부억 창문으로 내다보니. 여자 셋이 바로 길을 지나 가는 모습이 보였다 세 사람 모두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 생김새 나 연령은 잘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로 판단하건대 그렇게 젊지는 않은 듯했다. 그녀들이 귀퉁이를 돌아 사라진 후 얼마 되지 않아, 다 시 같은 방향에서 네 명의 여자들이 나타나, 역시 귀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 주위에는 석양이 물들어 있었다. 거실의 창문에서는 숲과 산의 능선이 보였다 능선 위에는 마치 테두리를 둘러놓은 듯이 옅 은 석양빛이 맴돌고 있었다. 나오코와 레이코는 둘이 함께 다섯 시 반에 돌아왔다. 나오코와 나는 처음 만나는 것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나오코는 정말 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레이코는 내가 읽던 책을 보더니 무엇 을 익고 있었냐고 물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3이라고 나는 대 답했다 "왜 이런 곳에 일부러 그런 책을 갖고 오는 거예요' 레이코는 어 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듣고 보니 그렇기는 했 다 레이코가 끓여온 커피를 셋이서 마셨다 나는 나오코에게 돌격대 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그가 나에게 반딧불을 준 이야기를 했다. 유감이로군요 그 사람이 없어져서. 저는 그 사람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었는데. 하고 나오 코는 정말로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레이코가 돌격대에 관해서 알고 싶어하기에 . 나는 다시 그의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녀도 크게 웃었다. 돌격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한 세상은 평화롭고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섯 시가 되자 우리 셋은 일단 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나오코와 나는 생선 튀김과 야채 샐러드와 조립과 밥과 된장국을 먹 었고. 래이코는 마카로니 샐러드와 커피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는 역시 담배였다. "나이를 먹으면.그다지 많이 먹지 않아도 괜찮게끔 체질이 바뀌 는법이에요." 그녀는 설명하듯이 말했다. 식당에는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테이블 앞에 앉아서 저녁 식 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몇 사람이 들 어오고, 몇 사람이 나갔다. 식당의 풍경은 사람들의 연령이 각각인 점을 제외하고는 기숙사 식당의 풍경과 대체로 비슷했다 기숙사 식 당과 다른 것은 모두가 일정한 음냥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이었다. 큰 소리를 내는 일도 없었고, 목소리를 낮추는 일도 없었다 소리를 높 여 웃거나 놀라거나, 손을 들어 누군가를 부른다거나 하는 사람은 하 나도 없었다 모두가 비슷한 음량의 목소리로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식사를 했다. 하나의 그룹은 세 사 람에서 많아야 다섯 사람이 었다 한 사람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응 응 하고 끄덕였고. 그 사람이 이야기를 끊내면 다른 사람이 그 이야기에 관해서 잠시 동안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 무엇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 수 없 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낮에 보았던 그 기묘한 테니스 게임을 연상 시켰다 나오코도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늘 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기묘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나 는 일순간 질투가 섞인 외로움을 느꼈다. 내 뒤쪽 테이블에서는 흰 가운 차림에 어 디를 보나 의사다운 분위기가 풍기는 머리숱이 선은 사내가. 안경을 낀 신경 질적인 느김 의 작은 사내와 다람쥐 같은 얼굴의 중련 여자에게 무중력 상태에서 는 위액이 어떻게 분비되는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청 년과 여자는 "네" 혹은 '그렇습니까?" 하고 대꾸를 하며 듣고 있었 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니 , 머리숱 적은 흰 가운의 사내가 정말로 의사인지 아닌지 나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식당 안의 누구도 나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 도 내 쪽을 주시하지 않았으며. 내가 그곳에 끼여들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끼여든 것이 그들에게는 극히 자연스 러운 일인 모양이었다 단 한 번 힌 가운을 입은 사내가 갑자기 뒤돌아보며 "언제까지 이 곳에 계실 예정입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다 "이틀 자고 수요일에는 돌아갈 생각입니다. " 나는 대답했다. "지금은 좋은 계절이지요. 이곳은. 하지만 겨울에도 또 오십시오 모든 것이 새하얗게 뒤덮여 보기 좋습니다. " 그는 말했다 "나오코는 눈이 내리기 전에 이곳을 나갈지도 몰라요." 레이코가 사내에게 말했다. 아니. 그래도 겨울은 보기 좋습니다. "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되 풀이했다. 그 사내가 정말로 의사인지 아닌지 나는 점점 더 알 수 없 게 되었다 "모두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씁니까," 나는 레이코에게 물어보 았다 그녀는 질문의 요지를 잘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무슨 이야기라니. 의통 이야기예요.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읽 은 책. fil일의 날씨 . 그런 잡다한 것들 말이에요. 설마 누군가가 불 쑥 1어나서 '오늘은 틸측곤이 별님을 먹어 치웠으니 내1은 비가 올 거다'라고 외치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 겠죠?" "아니 물론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 나는 말했다. "모두들 너무나 조용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 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입니다 "이곳은 조용하니까. 누구든 자연히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게 되는 거예요." 나오코는 생선뼈를 점시 귀퉁이에 가지런히 모아놓 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게다가 목소리를 크게 낼 필요가 없 는 거예요. 상대방을 설득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의 주목을 끌 필요 도 없으니까." "그렇겠군."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그리워졌다. 사람득 의 웃음소리나 무의미한 외침 또는 과장된 표현이 그리워졌다. 이러 한 기묘한 정적 속에서 생선 요리를 먹고 있자니. 아무래도 기분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 식당의 분위기는 특수한 기계 공구의 견관 전 시장과도 흡사했다. 한정된 분야에 깊은 흥미를 지닌 사람들이 한정 된 장소에 모여서. 당사자들밖에 모르는 정보를 교환하는 느낌이었 다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자 나오코와 레이코는 'ㄷ 지구' 내에 있는 대중탕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샤워만으로도 괜 찮다면 욕실을 사용해도 좋파고 말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나는 대 답했다 그녀들이 가 버리자 나는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머리도 감 았다. 그리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지면서 . 책장에 꽃혀 있는 빌 에 반스의 레코드를 꺼내어 들었는데. 잠시 후 그것이 나오코의 생일 날 그녀의 방에서 내가 몇 번이고 틀었던 것과 같은 레코드라는 사 실을 알아차렸다 나오코가 울자. 내가 그녀를 껴안아주었던 그날 밤에. 불과6개월 전이건만. 몹시 오래된 옛날 일처럼 여겨졌다 아 마도 그때의 일을 몇 번이고 되새긴 탓이리라. 너무나 여러 번 생각 했기 때문에 시간 감각이 둔해져 어긋나버린 것이다 달빛이 아주 밝아서 나는 방의 불을 끄고, 소파에서 빌 에 반스의 피아노를 들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날덴은 갖가지 사물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마치 묽은 벽들을 칠한 듯이 희미하게 벽을 물들였다. 나는 배낭 속에서 브랜디를 담은 엷은 금속제 물통 을꺼내어 한모금 입에 머금고는 천천히 삼켰다 따뜻한 기운이 목 애서 위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따뜻한 기운 은 위에서 몸의 구석구석으로 퍼져갔다. 나는 브랜디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물통의 뚜껑을 덮어. 배낭 속에 다시 넣었다. 달빛이 음악 에 맞추어 흔들리는 듯이 보였다 나오코와 레이코는 20분 가량 지나자 목욕을 끝내고 돌아왔다. '밖에서 보니, 방의 불이 꺼지고 칸캄해서 깜짝 놀랐어요." 레이 코가 말했다. "짐을 꾸려서 도쿄로 돌아갈 줄 알았거든요." 설마. 이토록 밝은 달은 오랜만에 보니까 불을 끈 겁니다. " "하지만 멋있잖아요, 이런 분위기?" 나오코가 말했다. "레이포 씨. 요전의 정전 때에 사용했던 양초가 아직 남아 있나요?" "아마 부엌의 서랍에 있을 거야." 나오코는 부억으로 가서 서랍을 열고, 커다란 양초를 꺼내왔다 나는 그 양초에 불을 붙인 다음, 촛농을 재떨이에 떨어뜨려 세웠다 레이코가 촛불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전히 주위가 고요한 가운 데, 셋이서 촛불을 둘러싸고 앉자, 우리만이 세계의 끝에 떠밀려 와 있는 것 같앗다 고요한 낙덴 그림자와 불빛에 흔들거리는 그림자가 하얀 댁 리에서 서로 겹치며 교차했다 나오코와 나는 나란히 소파 에 앉았고. 레이코는 맞은편 흔들의자에 앉았다 "어때요. 와인이라도 마시겠어요?" 레이코가 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술을 마셔도 괜찮습니까?" 나는 약간 놀라서 되물었다 '사실은 안 되 지만요 " 레이코는 귓불을 만지며 겸연쩍은 듯이 말 했다 "그래도 대개 관대하게 봐주죠. 과음하지 않는 한 와인이나 맥주 정도라서 괜찮아요. 나는 잘 아는 스태프에게 부탁해서 조금씩 사 두고 있어요.' "이따금 둘이서 술판을 벌여요 " 나오코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좋군요." 레이코는 냉장고에서 화이트 와인을 꺼내어 코르크 마개를 뽑 고는, 잔을 세 개 갖고 왔다. 마치 뒤뜰에서 만든 것처럼 개운하고 맛있는 와인이었다. 레코드가 끝나자 레이코는 침대 밑에서 기타 케 이스를 꺼내어 신중하게 조율을 하고는, 천천히 바흐의 '푸가'를 연 주하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마음이 담긴 정통파 바흐였다. 따뜻하고 친밀했고 연주하는 기쁨으로 치는득했다 "기타는 이곳에 와서 시작했어요. 방에 피아노가 없잖아요. . 여기서독학으로 배운 데다가.손가락 구조가 기타에 적합하지 않 아서 좀처럼 솜씨가 늘지 않아요. 하지만 기타 치는 것은 좋아해요 작고. 심플하고, 상냥하죠. 마치 작고 따뜻한 방 같아요." 그녀는 바흐의 소품을 한 곡 더 연주했다 조곡 중의 하나였다 촛불 앞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레이코가 연주하는 바흐에 귀를 기 울이고 있노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늑한 기분이 되었다. 바 흐가 끝나자, 나오코는 레이코에게 비틀즈의 곡을 연주해 달라고 부 탁했다. "리퀘스트 타임!" 레이코는 한쪽 눈을 씽긋하며 나에게 말했다 "나오코가 온 이후로 나는 매일같이 비틀즈 곡을 연주하게 되었죠 마치 가련한 음악 노예처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셀'을 아주 멋지게 연주했다 "좋은 곡이죠. 이 곡을 정말로 좋아해요." 레이코는 와인을 한 모 금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마치 넓은 초원에 부드럽게 비가 내리 고 있는 듯한 곡이에요." 이어서 그녀는 '노웨어 땐'과 '굴리아'를 연주했다 기타를 치면 서 이따금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와인을 마시고. 담 배를 피웠다 " '노르웨이 숲'을 쳐줘요." 나오코가 말했다 레이코가 부엌에서 고양이 의 얀철 저금통을 갖고 오자. 나오코는 지갑에서 뱉 엔짜리 동전을 꺼내어 거기에 넣었다. "뭡니까. 그건?" 나늑 물었다 '내가 '노르웨이의 숲을 신청할 때에는 이곳에 백 엔을 넣기로 했어요." 나오코가 대답했다 "이 곡을 제일 좋아하니까. 특별히 그 렇게 약속한 거예요. 진심으로 신청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돈이 내 담배값이 되는 거죠 " 레이코는 손가락을 잘 풀고는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했다. 그녀 가 연주하는 곡을 듣노라면 마음이 낚기 있으면서도, 감정에 치우치는 일이 없었다. 나도 주머니에서 백 엔짜리 동전을 꺼내어 저금통에 넣었 다. 고마워요." 레이코는 답례를 하며 생긋 웃었다.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이따금 몹시 슬퍼지는 때가 있어요 왠지 몰라요. 자신이 깊은 숲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거든 요." 나오코가 말했다 '어두운 곳에서 나 홀로 추위에 떠는데. 아무 도 올 사람도 없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신청을 하지 않 는 한. 그녀는 이 곡을 연주하지 않아요." '여인이 방황하는 이야기죠." 레이코가 웃으면서 말했 다. 이어서 래이코는 보사 ,=바플 턱 곡을 연주했다. 그 동안 나는 나오 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편지에 쓴 것처럼 예전보다는 건강해진 듯했고. 잘을렸으며. 운동과 옥외 작업 덕분에 몸도 튼튼해진 것처럼 보였다 호수처럼 말고 깊은 눈동자와 고 요한 듯이 율동하는 작은 입술만큼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전체적 으로 보아 그녀의 아름다움은 성숙한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되 고 있었다. 예전에 그녀의 아름다움 속에 살짝살짝 비치던 일종의 날카로움 느닷없이 상대방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던 얇은 날 같은 날카로움은 거의 사라지고. 그 대신에 부드럽게 위로 해 주는 듯한 그녀 특유의 고요함이 주위에 맴돈고 있었다. 나는 그 아 름다움에 감동했다 그리고 불과 6개월 사이에 한 여성이 이토록 크 게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오코의 새로 운 아름다움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니면 그 이상으로 나를 매료시 켰지만, 반면에 그녀가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면 유감스러운 느낌 도 들었다. 사춘기 소녀 특유의. 자유분방한 아름다움은 이미 그녀 에 게서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나오코는 네 생활에 관해서 알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학생들의 데모와, 나가자와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내가 나오코에게 나가자와 의 이야기를 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가자와의 기묘한 인간성 과 독자적인 사고력 그리고 편줌된 모럴리티에 관해서 정확히 설명 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결국 나오코는 내가 하려늘 말을 대부분 이해해주었다. 나가자와와 둘이서 여자를 낚으러 갔던 일은 덮어두었다. 단지 기숙사에서 친하게 지내고 있는 유일한 사내 는 이러이러하게 유니크한 인들이라고 설명했을 뿐이었다 그 동안 레이코는 기타를 부등켜안고. 다시 한번 아까의 '푸가'를 연습했다. 그녀는 여전히 틈만 있으면 와인을 마시거나 달배를 피우거나 했다. "기묘한 사람인 모양이에요." 나오코가 말했다. "기묘한 사내지 " 그래도 사람을 좋아하나요'?" "잘 모르겠어."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아마도 좋아하는 건 아닐 거야. 그 사람은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로 구분되거나 할 인간 이 아니거든. 게다가 본인도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은 아주 정직하고, 스토익하다고 볼 수 있지."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잤는데 스토익하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 로군요." 나오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몇 명과 잤다구요?" '아마도 80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나는 말했다. "하지만그사 람을 상대하는 여자는 수가 늘수록, 그 하나하나의 행위가 지니는 의미는 점점 희박해져 갈 뿐이야, 그것이 바로 그가 바라는 바라고 생각해." "그것이 스토익한 건가요?" 나오코가 물었다 " 그 사람에 게는 " 나오코는 잠시 내가 한 말에 관해서 생각했다. "그사람, 저보다 도 훨씬 머리가 이상한 것 같군요." 나오코는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의 경우는 자기 내부의 왜곡을 전 부 체계화해서 논리를 부여했지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그 사람을 이곳에 데리고 와 봐. 이틀이면 나갈걸. 이것도 알고 있고. 저것도 이미 알고 있고, 음 이제는 전부 알겠다 하며 말이야. 그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은 세상에 나가면 존경을 받지 " "틀림없이 나는, 머리가 나쁜가 봐요." 나오코는 말했다 "이곳에 관해서 아직 잘 모르니까요. 제 자신을 아직 잘 모르듯이 ."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보통인 거야. 나도 나 자신에 관해서 모 르는 것이 많아 그게 보통 사람인 거야. 나오코는 양다리를 소파 위로 올려 구부리고는 그 위에 턱을 얹 었다 "저는. 와타나베 씨에 관해서 더 알고 싶어요." 그녀는 말했 다. "평범한 인간이야.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고, 평범 한 얼굴에. 평범한 성적으로, 평벌한 일을 생각하고 있지 " "하지만, 자신을 평범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신용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핀트 피츠제럴프 아니었 나요? 그 책. 당신에게서 빌려서 읽었거든요." 나오코는 짓굿게 웃 으면서 말했다. "아마도 그럴 거야." 나는 나오코의 말을 인정했다. "하지만 나도 특별히 의식 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본심에서 그 렇게 생각하는거라구 자신이 평범한인간이라호 나오코는나애게 서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연하잖아요." 나오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그런 것도 모르세요? 평범하지 않다면 왜 내가 당신과 잤겠어요? 술 에 취해서 누구라도 좋으니 함께 자자는 생각에서 당신과 잤다고 생 각하나요?" "아니 물론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 나는 부정했다 나오코는 자신의 발들을 바라보며 잔자코 있었다. 나도 무슨 말 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와인을 마셨다. "와타나베 씨, 당신이 함께 잔 여자는 몇 명이에요?" 문득 생각이 났는지 나오코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여덟 명이나 아홉 명 "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레이코가 연습을 하다가 기타를 무릎 위에 쿵 떨어뜨렸다 "당신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잖아요?' 도대체 어떤 식으로 생활하고 있 는 거예요'" 나오코는 아무 말도 없이 맑은 눈으로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레이코에게 첫번째 여자와 자고는 헤어진 자초지종을 설명했 다. 나는 도저히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가 자와의 권유로 딘그는 여자들과 마구 어울리게 된 사정도 이야기했 다. 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제로 될지 " 나는 나오코에게 말했다 "나오코와 매주 만나서 이야기를 하지만. 나오코의 마음속에 있는 건 기즈키 뿐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로괴로웠지 그러 니까 마음에 없는 여자들과 잔 거라고 생각해 " 나오코는 몇 번인가 머리를 흔들고는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보 았다. "당신은. 그때 어째서 기즈키 씨와 자지 않았냐고 물었죠? 아 직도 그 이유를 알고 싶으세요' "아마도 알고 있는 편이 좋겠지 " 나는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오코가 말했다. '죽은사람은 언제나 죽은 채로 있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코는 어려운 소절을 몇 번이고 되돌 이해서 연습하고 있었다. "저는, 기즈키 씨와 자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나오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끈을 잡아 머리를 풀어 내렸다 그리고는 나비 모양 의 머리핀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물론 그 사람은 저와 자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몇 차례나 시도해 봤죠. 하지만 소용없 었어요. 불가능했어요 왜 불가능한지 저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고, 지금도 알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기즈키 씨를 사랑하고 있었고, 처녀성 따위에는 전혀 구애받고 있지 않았거든요 그가 원한다면 저 는..무엇이든 해주겠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불가능했어요.' 나오코는 다시 머리를 위로 올려 , 머리핀을 꽂았다 "전혀 느끼지 못했던 거예요." 나오코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열 리지가 않았어요. 전혀. 그러니까 몹시 아팠어요. 메말라서 아팠던 거예요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시험해봤죠.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소용없었어요. 다른 것으로 적 시고 시도해도 역시 아팠어요. 그러니 까 저는 언제나 기즈키 씨에게 손이나 입으로 해 드렀지요. 아시겠어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코는 창 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아까보다도 밝고 크게 보였다 "저로서도 되도록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와타 나베 씨 . 가능한 한 이런 이야기는 제 가슴속에 묻어두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저로서도 해결할 방도가 없는걸요. 왜냐하면 당신과 잤을 때 저는 충분히 느 끼고 있었잖아요? 그렇죠'." "음." 나는 대답했다. '저는 스무 살이 되는 생일날 저녁 . 당신과 만났을 때 이미 나는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계속해서 당신 품에 안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품에 안겨서, 마음이 되어 애무를 밭고, 당신을 죽 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기는 처음이에요. 왜', 왜 그런 일이 벌어 졌을까요? 저는, 진심으로 기즈키 씨를 사랑하고 있 었는데."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라는 이야긴가?" "죄송해요." 나오코는 말했다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 지만,다만 이 점만은 알아주세요. 저와 기즈키 씨는특별한관게였 어요 우리는 세 살 때부터 함께 놀았어요.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으 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서로 이해하면서 자랐어요. 처음 으로 키스를 한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였어요. 정말로 미쳤어요 제가 처음 생리를 했을 때 에도 가서 엉엉 울었죠. 하여간에 우 리는 그런 관계였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죽어써용. 후에는, 도대 체 어떤 식으로 다른사람들을 대하면 좋을지 그렇게 되었던 거예요.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하늪 것도 그녀는 테이블 위의 와인 잔을 들려고 했지만, 제대로 들지 못하 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와인은 카펫 위로 쏟아졌다. 나는 몸을 구부 려 잔을 집어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나오코에게 와인을 좀더 마시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갑자기 몸을 떨며 울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몸을 구부려 양손에 얼 굴을 묻고 예전처럼 숨이 끊어지듯이 격렬하게 울었다. 레이코가 기타를 놓고 다가와, 나오코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나오코의 어 깨에 손을 올려놓자. 나오코는 마치 어린애처럼 레이코의 가슴에 머 리를 묻었다. "와타나베 씨 " 래이코가 나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20분 가량 산보라도 하고 오지 않겠어요? 그 동안에 진정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셔츠위에 스웨터를 걸쳤다 죄송 합니다. " "괜찮아요. 당신 탓이 아니니까. 신경쓸 거 없어요. 돌아올 때까 지 안정시켜 놓을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서 한쪽 손을 잡았다. 나는 기묘하리만치 비현실적인 달빛이 비치는 길을 따라 잡목릴 속으로 들어가. 정처 없이 발길을 옮겼다. 달빛 아래에서는 갖가지 소리가 신비스럽게 울려 퍼졌다 내 발소리는 마치 바다 위를 걷는 것처럼, 어딘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둔탁하게 울렸다 이따금 뒤쪽 에서 파삭거리는, 자그맣고 메마른 소리가 났다. 야행성 동물들이 가만히 숨을 죽이고 내가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숲 속에 맴돌고 있었다 잡목림을 벗어나 약간 높은 언덕의 비탈에 주저앉아. 나는 나오 코가 살고 있는 집 쪽을 바라보았다 나오코의 방은 금방 찾을 수 있 었다. 전등이 꺼져 있는 창문 속에서 작은 빛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곳이 바로 그 방이었다 나는 꼼짝도 않고 그 작은 빛을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빛은 타다 남은 영혼의 최후의 몸부림을 연상 시켰다. 나는 그 빛을 양손으로 감싸 쥐어주고 싶었다. 나는 개츠비 가 강 건너의 작은 빛을 매일 밤 지켜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희 미하게 흔들리는 빛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30분 후, 방으로 돌아가려고 집 입구까지 가자 레이코가 기타 연 습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용히 계단을 올라가. 문을 뚜드렸 다. 방에 들어가자 나오코의 모습은 없고. 레이코가 혼자 카펫 위에 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을 뿐이었다 . 그녀는 나에게 손가락으로 침실 문쪽을 가리켰다 나오코는 저 안에 있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이어 서 레이코는 기타를 바닥에 놓고 소파에 앉더니. 곁에 앉으라고 나 에게 말했다. 그리고 병에 남아 있는 와인을 두 개의 잔에 나누어 따 랐다. '나오코는 괜찮을 거예요." 레이코는 내 얼굴을 가볍게 치면서 말 했다. "잠시 혼자 누워 있으면 안정이 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잠깐 흥분했던 것뿐이니까 그 동안 나와 둘이서 잠깐 산보라 도 하지 않겠어요?" "좋습니다. " 나는 대답했다 레이코와 나는 가로등이 비치는 길을 천천히 걸어. 테니스 코트 와 농구 코트가 있는 곳까지 가서 살며시 벤치에 앉았다. 그는 벤 치 밑에서 오랜지색 농구공을 꺼내어 잠시 동안 손에 들고 빙빙 돌 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테니스를 칠 줄 아냐고 물었다. 나는 어설 프기는 하지만 쫌 칠 줄은 안다고 대답 했다. "농구는'," "그다지 잘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잘하나요?" 레이코는눈가에 잔 주름을 지어 웃으며 물었다. "여자들과 자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재주가 있어서 잔 것은 아닙니다. " 나는 약간 언짢게 대 답했다 '화내지 말아요.농담으로 말했을 뿐이니까.그렇다면 솔직히 말 하세요 뭘 잘하는지 ." "잘하는 건 없습니다. 좋아하는 건 있지만 "어떤 것을 좋아하나요'"' "활보 여행, 수영, 독서 " '혼자서 하는 것을 좋아하는군요'" "글쎄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는 말했다 "남들과 함께 하는 게임에는 옛날부터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무엇이건 제대로 빠져들지 못합니다 아무러면 어떻겠느냐는 식이 되니까요 '그렇다면 겨울에 이곳에 오세요. 우리들은 겨울에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하거든요 당신 마음에 들 거예요. 눈 속을 하루 종일 터벅터 벅 걸어다니면 땀투성이가 되거든요." 레이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마치 낡은 악기를 점검하기라도 하듯이 자신 의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오코에게는 그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글쎄요, 이따금." 레이코는 이제 왼손을보면서 대답했다. "이따 금 그런 상태가 되죠. 흥분해서 울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년 나 온대로 감정을 배출시키곤 하니까 무서운 건 그러한 감정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게 될 때예요 그러면 감정이 몸 안에 쌓여서 점점 굳 어지거든요. 여러 가지 감정이 굳어져서,몸 속에서 죽어가죠. 그렇 게 되는 날에는 큰일이에요." "제가 아까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요?"전혀 괜찮아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으니 까 걱정하지 않아 도 돼요. 무엇이건 솔직히 말하세요. 그게 가장 좋아요. 정령 그것이 서로에게 약간의 상처를 입힌다 하더라도, 아니면 아까처럼 어느 쪽 인가의 감정을 자극하게 된다 하더라도, 긴 안목에서 보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요. 당신이 진정으로 나오코의 회복을 원한다 면, 그렇게 하세요. 처음에도 말했듯이 나오코를 돕고 싶다고 생각 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를 회복시킴으로써 자신도 회복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것이 이곳의 방식이니까. 그러니 이곳에서는 당신 도 모든 것을 솔직히 이야기하도록 노력하세요. 사실, 바깥 세계에 서는 사람들이 언제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군요." "나는7년이나 이곳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보 아왔어요." 레이코는 말했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본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얼굴만 봐도, 회복이 될지 안 될지 , 비교적 직감적으로 알 수 있어요. 하지만 나오코의 경우는, 저도 잘 모르겠 어요. 그 아이가 도대체 어떻게 될지, 나로서도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요. 한 달만 지나면 깨끗이 나을지도 아니면, 어쩌면 몇 년이고 지금의 상태가 계속될지도 모르니까 그 점에 관해서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조언을 할 수가 없어요. 단지 솔찍하게 행동하라든 가, 서로 도우며 지내라든가, 그러한 극히 일반적인 것밖에 "어째서 나오코에 관해서 감을 잡을 수 없읍니까?" "아마도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하기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지나치게 감정이 개입돼서 난. 그 아이를 정말 좋아해요. 그리고 그것과는 반대로, 그 아이의 경우 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꼬여 있는 실처럼 뒤엉켜 있어 요. 그것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게 중요해요. 그것을 푸는 데에는 오 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고 혹은 우연하게 한꺼번에 전부 풀릴지도 몰라요. 대충 그런 이야기예요. 그래서 나는 확언을 할 수 없는 거 죠 그녀는 다시 한번 농구공을 집어들고는. 손으로 빙빙 돌리다가 땅에 튀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초조해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래이코는 나 에게 말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충고예요. 초조해 하지 말 것. 모든 것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뒤엉켜 있더라도 절망하거나, 성급해져서 무리하게 잡아당기면 안 돼요. 시간이 걸려도 좋다는 생 각으로, 천천히 하나하나 풀어가지 않으면 안 돼요. 할 수 있겠어 요?" "해보겠습니다. " 나는 대답했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고, 시간이 걸려도 완전히는 낫지 않을지 도 몰라요. 당신은 그 점을 생각해봤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는 것은 괴로운 일이죠." 레이코는 공을 튀기며 말했다 "특히 당신 나이의 사람에게는 말이죠. 그냥 오로지 그녀가 낫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런 기한도 보증도 없어요. 당신이 그럴 수 있을까요? 그정도로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나요?" '모르겠습니다. "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저도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오코와는 다른 의미에서 말입 니다. 하지만 능력이 닿는 데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 으면 제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아까 레이코 씨가 말씀하신 대로, 나오코와 저는 서로를 구원해야만 하고, 그렇게 하는 수밖에 달리 서로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으 리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계속 지나가는 여자들과 자겠다는 건가요?" "그 점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 나는 말했다. "도대 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계속 마스터베이션을 하며 기다려야 할 까요? 그런 일은 저 혼자서는 제대로 수능할 수가 없습니다" 레이코는 공을 땅에 놓고, 내 무릎을 가볍게 쳤다 "난, 당신이 다 른 여자들과 자는 게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걸 로 만족한다면, 했어요. 당신의 인생이니까, 당신 스스로 결정하면 돼요. 단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자신을 마모 시키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런 것은 낭비일 수도 있어 요. 열아홉에서 스무 살은 인격 형성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이 니까, 그런 시기에 쓸데없이 자신을 왜곡하게 되면, 나이가 들어서 괴로울 뿐이죠.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잘 생각하세요. 나오코를 아 끼고 싶다면 자신도 아끼세요.' 생각해보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나에게도 스무 살 때가 있었죠. 아주 옛날의 일이지만" 레이코 는 말했다. "믿어 지세요?" 믿습니다. 물론." "진심으로 믿으세요'? "진심으로 믿습니다. "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오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무렵에는 나도 제법 예뻤어요. 지금 처럼 주룸도 없었고." .)주름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하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고맙다 는 인사를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여자에게 당신의 주름이 매력적이라고 말하면 안 돼요.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기쁘지만." '조심하겠습니다. "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카드 넣는 곳에 들어 있는 사진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열 살 전후의 예뿐 소녀 사 진이었다. 그 소녀는 화려한 스키복을 입고 스키를 신고, 눈 위에서 생긋 웃고 있었다 제법 미인이죠? 우리 딸이에요." 레이코는 말했다. "올해 초에 이 사진을 보내왔어요. 지금. 국민학교 4학년이던가." "웃는 모습이 닮았군요." 나는 사진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지갑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머리를 극적거리며 담배를 물고는 불을 붙였다 "난 어렸을때.피아니스트가 될 생각이었어요. 재능도 제법 있었 고, 주위에서도 그것을 인 정 해주었으니까 나름대로 귀하게 자랐어 요. 콩쿠르에서 우승한 적도 있고, 음대에서는 언제나 성적이 일등 이었고, 졸업하면 독일로 유학 가기로 대충 정해져 있었으니까, 티 끌 하나 없는 청춘이었죠. 무엇을 하건 잘 풀렸고, 잘 풀리지 않으면 주위에서 잘 풀리도록 손을 써줬었죠. 하지만 기묘한 일이 벌어져서 전부 엉망이 됐어요 음대 4학년 때였죠. 꽤 중요한 콩쿠르 가 있어서,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 갑자기 왼쪽 새끼손가락이 움직 이지 않게 되었어요.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지 모르지만, 하여간에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마사지도 하고. 더운 물에 담그기도 하 고. 2, 3일 연습을 쉬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혀 소용이 없었어요. 나 는 새파랗게 질려서 병원에 갔죠. 그리고 갖가지 검사를 해봤지만, 의사도 잘 모르는 거예요. 손가락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고, 신경도 제대로 통하고 있으니,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까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겠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정신과에 가봤 어요. 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었어요. 콩쿠루전의 스트레스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정도밖에는 말이죠. 그러니까 당분간 피아노를 떠나서 지내라는 거예요 ' 레이코는 담배 연기를 깊이 마셔서 내뱉었다 그리고는 고개 를 몇 번인가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이즈에 계시는 할머니에게로 가서 잠시 요양하기로 했죠 그 콩쿠르는 포기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그 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하며 놀자고 생각한 거예요. 하지만 소용 없었어요. 무엇을 하 건 머릿속에는 피아노밖에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더라구요. 평생 이대로 새끼손가락이 움직이지 않 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면 좋 을까? 그런 것만 자꾸 되풀이해서 생각나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잔 아요, 그때까지의 인생에서 피아노가 나의 전부였으니까 나는 네 살 때 피아노를 시작해서, 피아노만 생각하며 살아왔는걸요. 그 외의 것은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손가락을 다치면 안 된다 는 탓에 한 번도 집안일을 한 적이 없고, 피아노를 잘 친다는 이유만으로 주위에서 신경을 써 주었는데. 그런 식으로 자란 여자아이에게서 피 아노를 빼앗아 보세요. 도대체 뭐가 남겠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끝 장난 거죠. 머릿속의 나사가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거예요. 머릿 속 이 뒤죽박죽으로. 캄캄해졌죠." 그녀는 담배를 발로 비벼서 끄고는, 다시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서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는 꿈은 좌절했어요. 2개원 입원 했다가 퇴원했죠. 입원한 지 얼마 안 되어 새끼손가락은 움직이게 됐으니까, 응대에 입학해서 어떻게든 졸업은 할 수 있었어요. 하지 만. 이미 무언가가 사라져버린 거예요. 무언가, 에너지의 중심 같은 것이 , 몸 속에서 사라져버린 거죠. 의사도 직업 피아니스트가 되기 에는 신경이 너무 약하니까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 집에서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치며 지냈어요. 하지만 그런 일은 정말로 싫어졌어요. 마치 내 인생이 거 기서 완전히 끝나버린 느낌이 들었거든요. 내 인생의 가장 좋은 부 분이 20년 남짓 만에 끝나버린 거예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 세요? 나는 갖가지 가능성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도, 정신이 들어보 니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고 아무도 아껴주 지 않고,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집 안에만 틀어박혀서 매일같이 저의 아이들에게 바이엘이나 소나티네를 가르칠 뿐이 니까요. 비참한 느낌이 들어서 항상 울며 지냈어요. 분했어요. 분명 히 나보다 재능이 없는 사람이 어딘가의 콩쿠르에서 2위를 했다느 니. 어딘가의 홀에서 바이올린 리사이틀을 열었다느니. 그런 이야기 를 들으면 분해서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부모님도 내 신경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었죠. 하지 만 나는 알고 있었어요.이 분들도 실망하고 있구나하고 바로 얼 마 전까지만 해도 딸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지금은 정신병원 경력 까지 있으니 , 혼담도 제대로 꺼낼 수 없잖아요. 그러한 분위기가, 함 께 살고 있노라면 피부에 닿을 정도로 느껴졌어요. 너무나 싫어서 견딜 수 없었어요. 바깥에 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 무서워서 외출도 할 수 없고. 그래서 다시 나사가 획 빠 져버렸죠. 나사가 빠지고, 실이 엉키고, 머릿속이 캄캄해 졌어요. 그 것이 스물네 살 때의 일인데, 그때는 7개월이나 요양소에 들어가 있 었어요 이곳이 아니라, 높은 담이 있고 문이 닫혀 있는 곳이었어요. 지저분하고 피아노도 없고 난그때 접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 어요. 하지만 이런 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필사적인 노력을 해서 고쳤어요. 7개월 - 정말 길었어요. 그레서 주름이 조금 씩 늘어난 거예요." 레이코는 입술을 양쪽으로 잡아당기듯 펼쳐서 웃었다 "퇴원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을 만나서 결혼했어요. 그이는 나보 다 한 살 아래인데, 항공기를 제 작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기사로, 나 에게 피아노를 배운 제자였어요. 좋은 사람이에요. 월수입은 적지만 성실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그이가 6개월 가량 래슨을 받은 후. 갑자기 나에게 결혼해주지 않겠냐고 물었어요. 어 느 날 레슨이 끝나고 차를 마실 때 갑자기 말이에요. 믿어지세요'! 그때까 지 우리는 데이트도 한 적이 없고 손을 잡은 적도 없었어요. 나는 깜 짝 놀랐어요. 그래서 나는. 그이에 게 결혼할 수 없다고 대답 했어요. 당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호의를 갖고 있긴 하지만 여러 가 지 사정이 있어서 당신과 결혼할 수는 없다고 말이죠. 그이가 그 사 정을 듣고 싶어해서. 나는 정말 솔직하게 설명했어요 두 차례 머리 가 이상해져서 입원한 적이 있다고. 자질구레한 것까지 자세히 이야 기했어요.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했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같 은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좀 생각할 시간을 더 달라고. 그는 천천히 생각하라고 말했어요.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그 다음 주에 그이가 찾아와서 다시 생각해봤냐고 말했어 요 그래서 저는 대답했죠. 개월만 기다리라고. 개월간 서로 사귀 어 봅시다. 그런 후에 여전히 당신에게 결혼하고 싶은 의사가 있다 면, 그때 가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합시다-. 라고 개월간 우리는 매주 한 번씩 데이트를 했어요. 여러 곳에 다니 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난, 그이를 정말로 좋아하게 됐 어요. 그이와 함께 있으면 내 인생을 간신히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드 는 거예요. 둘이 함께 있으면 안심을 할 수 있으니까. 갖가지 싫었던 일 들을 잊을 수가 있었어요.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해도, 정신병원에 입원한 경력이 있어도,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는 내가 모르는 멋진 부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 리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준 것만으로도, 나는 그이에게 진 심으로 감사했어요. 개월이 지나자, 그이는 다시 나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만약 저와 자고 싶으시다면 자도 좋아요' 하고 나는 말했죠 '저는, 아직 누구와도 잔 적이 없지만. 당신을 정말로 좋아하니까. 저를 안고 싶으시다면 안아도 좋아요. 하지만 저와 결 혼하겠다는 이야기는 그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예요. 당신은 저와 결혼함으로써 저의 성가신 문제도 함께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 그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곤란한 일이에요. 그래도 괜찮겠 어요?' 하고. 괜찮아 하고 그이는 대답했어요. 나는 단지 함께 자는 게 목적이 아니야, 레이코와 결혼하고 싶어. 레이코 내부의 모든 것을 레이코 와 공유하고 싶어, 라고. 그이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그 이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만 입 밖에 내는 사람이었고, 입 밖 에 낸 말은 반드시 실행하는 사람이었어요. 저도, 좋아요. 결혼해요 하고 말했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결혼한 것은 4개월 후였나? 그이는 나 때문에 부모님들과 싸우고는 인연을 끊었어요. 그이의 집은 시코쿠의 시중에서도 전통을 중요시하는 집안이라,부 모님이 저에 관해서 철저하게 조사하고는. 입원 경력이 두 번이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거예요. 그래서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싸움 이 벌어졌어요. 사실 반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래서 우리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어요. 구청에 가서 결혼 신고를 하고. 하코네에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을 뿐이죠. 하지만 정말로 행 복했어요,모든 것이. 결국 난, 결혼할 떼까지 처녀였어요, 스물 다 섯이 되도록 거짓말 같죠?" 레이코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농구공을 집어들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는 한 괜찮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레이코는 말 을 이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는 한 내가 나빠질 일은 이제 없으리 라고 말이에요. 우리들의 병을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 한 신뢰감이에요. 이 사람에게 맡겨두면 만사 모두 조금이라도 내가 나빠지면, 즉 나사가 헐거워지기 시작하면, 이 사람이 즉각 눈치를 채고는 사려 깊고 참을성 있게 고처주겠지 나사를 다시 조여주 고,뭉쳐 있는 실뭉치를 풀어주겠지 -그러한 신뢰감이 있으면. 우 리들의 병은 일단 재발하지 않아요. 그러한 신뢰감이 존재하는 한 일단은 나사가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뻤어요. 인생이란 얼마나 멋진가 하고 생각했어요. 마치 거칠고 차가운 바다에서 구조 되어 모포에 둘러싸여 따듯한 침대에 누워 있는 듯한 기분이었죠 결혼해서 2년 후에 아이가 태어나자, 그 이후로는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덕분에 자신의 병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였 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그이가돌아 오면 식사를 차려주고. 하루하루가 이러한 일들의 되풀이였죠. 하지 만 행복했어요. 내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을 거예 요. 그러한 나날이 몇 년 계속되었을까' 서른한 살 때까지 계속되었 어요 그리고 다시 나사가 획 빠져 버렸죠. 파열된 거 예요." 레이코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람은 멎어 있었다 연기는 똑바로 솟아올라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저갔다. 하 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는 물었다 "그래요" 래이코는 대답했다 "아주 대단한 일이 있었어요.마치 무언가 넋이나간 듯이 저를 가만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 었던 거예요.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쳐요." 그녀는 담배를 들지 않은 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분질렀다. "하지만 미안하군요. 내 이아기만 해서 당신, 모처럼 나오코를 만나러 왔는데." 정말로 듣고 싶습니다. " 나는 말했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그 이 야기를 들려주시 지 않겠습니까?"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자, 나는 조금씩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 었죠." 레이코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 라,자신을 위해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거예요. 바흐니 모차르트 너 스가를파티니 , 그러한 사람들의 간단한 곡부터 시작했어요. 물론 아주 오랫동안 공백이 있었으니까 쉽게 감을 되찾을 수는 없었죠. 손가락도 옛날에 비하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하지만 기뻤어요.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에요. 그렇게 피아노를 치고 있노라니,자신이 얼마나 음악을 좋아했는가 절실히 느낄 수 있더군요. 그리고 자신이 음악에 얼마나 굶주려 있었는가 하는 사실 도. 하지만 멋진 일이었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음악을 연주할 수 있 다는 것은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지만. 생각해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피아노를 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시 험에 붙기 위해서라든가. 바흐곡이기 때문이라든가 남들을 감동시 키기 위해서라든가. 이런 목적에서만 피아노를 쳐왔던 거예요. 물론 그러한 것도 중요하기는 해요. 하나의 악기를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말이에요 하지만 일정한 연령이 지나면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음악 을 연주해야만 해요 음악이란 그런 것이에요. 그런데 나는 엘리트 코스에서 탈락되어 서른한두 살이 되어서야 겨우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거예요. 아이를 유치원애 보낸 다음. 집안일을 부지런히 해 치우고는. 그때부터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연 주하곤 했어요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재가 없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어 느 날, 길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눌 정도로 안면이 있는 아주머니가 나를 찾아와서, 사실은 딸아이가 당신에게 피아노를 배 우고 싶어하는데 가르쳐줄 수 없겠느냐는 거예요. 근처라고는 하지 만,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니까, 저는 그 아이를 잘 몰랐어요. 하지만 그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아이는 우리 집 앞을 자주 지나 다니면서 내 피아노소리를 듣고는 무척 감동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 얼굴도 알고 서 흠모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아이는 줌학교 2학년 인데 예전에도 몇 번인가 다른 선생님 밑에서 배웠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성과가 없어서 . 지금은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않는다고 말하 더군요 난 거절했어요. 이미 상당한 공백기가 있기 때문에, 완전한 초심 자라면 몰라도 몇 번이나 레슨을 받았던 사람을 도중에 가르치기는 무리라고 했죠 우선 딸아이를 돌보기도 바쁘다고. 게다가, 물론 그 떼 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자꾸 선생을 바꾸는 아이는 누가 가 르치건 조금 무리거든요.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한 번이라도 좋으니 자기 딸을 만나주기라도 해보라는 거예요. 몹시 끈질긴 사람이라서 끝까지 거절하기도 귀찮고. 날 꼭 만나고 싶다는상대를 뿌리치는 것도 예의가 아니어서 . 만나는 것만으로 족하다면 괜찮다고 대답 했죠. 사흘 후에 그 아이 혼자서 찾아왔더군요. 천사처럼 아리따운 아이였 어요. 정말 투명할 정도로 아리따웠어요. 그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어요. 긴 머리가 마치 칠흑처럼 검고. 팔다리 가 늘씬하고, 반짝이는 눈에, 입술은 갓 만들어낸 것처럼 작고 부드 러워 보였죠. 저는 잠시 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토록 아리 따운 아이였어요. 그 아이가 우리 집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으니 , 마치 다른 방처럼 호화스럽게 보이는 거예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너무나 눈이 부셔서 , 이렇게 눈을 가늘게 떠야 할 지경이었어요. 하 여간에 그런 아이였죠 지금도 또렷이 눈앞에 떠올라요." 레이코는 그 여자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듯이 잠시 동안 눈을 가늘 게 뜨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 가 지 이야기를. 음악이나 학교 친구 에 관해서. 겉보기에도 머리가좋아 보이는 아이였어요. 말도 조리 있게 하고. 의견도 확실하며 날카롭 고, 상대를 끌어들이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거예요.두려울 정도 로. 하지만 그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 그때 저는 잘 알 수 없었 죠 어쨌든그아이를 앞에 놓고 이야기를 하자니 점차로 정상적인 판단이 흐려지는 거예요. 즉 상대방이 너무나도 젊고 아름다우니까. 그것에 압도당해서 자신은 아주 못생긴 인간처럼 여겨지고. 그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그런 건 분명히 삐뚤어지고 불결한 생각이 아닐까 하고 여겨지는 거예요 그녀는 몇 번인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 내가 그 아이 또래의 나이에 예쁘고 영리했더라면, 훨씬 훌 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그 정도로 머리가 좋고 예쁜데. 그 이상 무얼 바라겠어요? 그토록 주위의 사랑을 밭고 있는데, 왜 자기보다 못한 약자를 기죽이고 짓밟아야만 하나요? 도무지 그런 짓을 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잖아요')" "무언가 심한 짓을 당하셨습니까'" "일단 순서대로 이야기하자면. 그 아이는 병적인 거 짓말쟁이였어 요. 그건 정말로 병이에요 무엇이건 이야기를 꾸며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야기하는 동안에 자기 자신도 그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 죠 또한 그 이야기의 앞뒤를 맞추기 위해서 다른 것들도 마구 뒤바 꿔놓는 거예요. 하지만 어라, 이상하다. 어떻게 된 거지, 하고 생각 해야 할 부분도, 그 아이는 머리 회전이 정말 빨라서, 남들을 앞질러 서 미리미리 손을 써두니까,상대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거예 요.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우선 그토록 아리 따운 아이가 대수롭지 않은 일로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지 않으니까요. 나 역시 그랬어요. 난, 그 아이가 꾸며낸 이야기를 6 개월간 산더미처럼 들었지만,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낸 이야기인데도. 너무나 똑 같았어요 "어떤 거짓말을 합니까?" "갖가지 거짓말이죠." 레이코는 빈정대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방금 전에도 말했잖아요? 인간은 무슨 이유에서 인가 거짓말을 하 게 되면, 그것에 맞춰서 잔뜩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허언증(쵸)이에요. 하지만 허언증에 걸린 사람들의 거 짓말이란 대체로 죄가 되지 않는 것들이고. 주위 사람들도 일단은- 눈치를 채 거든요. 하지만 그 아이의 경우는 달라요. 그 아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거 짓말을 해요. 엄마나 친한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면 금방 들통이 나는 상대에게늑 다시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해야 할 경우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 여서 거짓말을 하죠. 결코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을, 그리고 만약 들통나는 일이 있으면 , 그 예쁜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변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거예요, 애걸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러면 아무 도 그 이 상은 화를 낼 수가 없죠 웨 그 아이가 나를 선택했는지 ,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자신의 희 생자로서 나를 선택했는지 아니면 무슨 추원을 바라며 나를 선택했 는지를. 저는 지금도 전혀 모르겠어요. 물론 이제 와서는 아무렇 건 상관없는 일이지만요. 이미 모든 것이 끝장났고, 결국은 이런 꼴 이 되어버렸으니까."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아이 엄마가 했던 말을 그 아이도 다시 하더군요.우리 집 앞 을 지나면서 내 피아노소리를 듣고 감동했다고.나와도 밖에서 몇 번인가 만났는데 흠모하고 있다고. '흠모하고 있다'고 말하는 거예 요.난 얼굴이 빨개 졌어요 인형처럼 예쁜 소녀에게 흠모를받다니 하지만 그건 전혀 거 짓말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해요. 물론 나는 이 미 서른이 지났고. 그 아이처럼 미인도 아니고, 머리가 좋지도 않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죠. 그래도 나의 어디엔가 는 그 아이를 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던 거예요. 무언가 그 아이에게 는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그 아이는 나에게 흥 미를 갖게 된 것1테죠. 지금 와서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건 자만이 아니에요." "알것 같습니다. 막연하게나마." 나는 말했다. "그 아이는 악보를 들고 와서는 피아노를 쳐봐도 좋겠냐고 물 었어요. "좋아 어디 쳐봐. 하고 저는 말했죠. 그러자 그아이는 바흐 의 '인뗀션'을 쳤어요. 그런데 그게 말이에요. 뭐라고나 할까, 재미 있는 연주였어요. 재미 있다고나 할까 기묘하다고나 할까. 일단 평범 하지는 않았어요 물론 그다지 기량이 뛰어난 건 아니에요. 전문적 인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한 것도 아닌데, 레슨도 밭다 말다 하면서 제멋대로 익힌 솜씨니까. 하지만 그 연주는 제법 들을 만했어요. 곡 전체의 99퍼센트는 엉망이었지만, 나머지 1퍼센트의 중요한 부분은 제대로 노래를 하면서 들려주는 거예요 그것도 바흐의 '인벤션' 이에요! 그래서 결국 그 아이에게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죠. 이 아 이는 도대체 어떤 아이이일까 하고. 그야. 이 세상에는 훨씬 능숙하게 바흐를 연주하는 젊은 이들도 많이 있어요. 그 아이의 스무 배는 능숙하게 연주하는 아이도 있겠 죠. 하지만 그러한 연주란 대체로 알맹이가 없거든요. 허점투성이에 요. 하지만 그 아이는 서툴면서도 사람을. 적어도 나를 끌어들이는 힘을 약간은 지니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죠. 이 아이라 면 가르쳐볼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다시 연습을 시작해서 프로가 되는 건 무리였죠. 하지만 그때의 나처럼-지금도 그렇지 만 기꺼이 자신을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흔한 피아니 스트로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것은 결국 허망한 꿈 이었어요. 그 아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조용히 무언가를 하는 인 간이 아니었거든요. 그 아이는 남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 단을 동원하여 세밀한 계산을 하는 아이였죠. 어떻게 하면 남들이 감탄할까, 칭찬해줄까 하는 것만을 연구해서 그 방법을 잘 알고 있 었던 거예요. 어떤 형태의 연주를 하면 나를 끌어들일 수 있을까 하 는 것도 말이에요 전부 정확히 계산되어 있었어요. 그리고는 중요 한 부분만을 되풀이해서 죽어라고 연습해둔 거 겠지요. 눈에 선해요.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도 말이에요. 역시 그 연주 는 멋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다시 한번 그것을 듣는다 하더라도, 역 시 가슴이 뜨끔해지리라고 생각해요. 그 아이의 교활함과 거짓과 결 점을 전부 인정한다 해도 말이에요. 이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는 법 이에요." 레이코는 메마른 소리로 헛기침을 하더니, 이야기를 멈추고는 잠 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가르치기로 했습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그래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오전 중에 그 아이의 학교늪 토 요일도 쉬니까.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지각도 없었고, 이상적인 제 자였어요. 연습도 제대로 해오고. 레슨이 끝나면, 우리는 케이크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어요." 레이코는 거기에서 문득 정신이 든 듯 손목 시계를 보았다. "이제, 슬슬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나오 코가 좀 걱정이 되니까. 당신 설마 나오코를 잊은 건 아니겠죠?"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단지 이야기 에 정신이 팔렸던 것뿐입니다. " "만약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면 내일 해드리죠. 긴 이야기니까 한 번에는 전부 말할 수 없어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 같군요." 그럼요. 도쿄에 돌아갈 수 없게 될 거예요." 레이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잡목림 속의 길을 지나, 방으로 돌아 갔다. 촛불도, 거실의 전등도 꺼져 있었다 열려 있는 침실 문을 통 해서 침대 곁의 램프 불빛이 거실 쪽으로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 다. 그러한 어둠 속에서 나오코는 소파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운을 입고 있었다 옷깃을 목 위까지 단단히 여민 채, 소파 위에 다리를 올려,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레이코는 나오코 에게 다가가서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이 제 괜찮아?" "네, 괜찮아요. 죄송해요." 나오코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리 고 내 쪽을 향해서 부끄러운 듯이 죄송해요 하고 말했다. "깜짝 놀 라셨죠?" "조금."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나오코가 말했다 내가 곁에 앉자, 나오코는 소파 위에서 무릎을 구부린 채.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내 귓전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귀 옆에 살짝 입술을 댔다. "죄송해요' 하고 다 시 한번 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약간 뒤로 물러 앉았다. "이따금 저 자신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를 때가 있어요." 나오 코가 말했다. "나도 그럴 때가 자주 있지. 나오코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보았다. 괜찮다면 나오코 당 신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군 하고 나는 말했다 이곳에서 의 생활. 매일 무슨 일을 하는지 ,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나오코가 자신의 하루 일과에 대해서 띄엄띄엄, 그러나 또렷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새장 청소 를 한 뒤, 대개 야채를 가꾸며 농장에서 일을 한다. 점심 식사를 전 후해서는 한 시간 정도 주치의와 개인 면담을 하거나 그룹 세션에 참석하지만 오후에는 자신이 짠 커리쿤럼에 따라서 . 자기가 좋아하 는 강좌나 야외 작업 혹은 스포츠를 선택할 수 있다. 그녀는 불어나 뜨개질이나 피아노 혹은 고대사 등의 강좌를 가르치고 있었다. "피아노는 레이코 씨에게서 배워요." 나오코는 말했다. 그밖에도 기타를 가르쳐요. 우리들은 모두 선생이 되기도 하고 학생 이 되기도 해요. 불어를 잘하는 사람은 불어를 가르치고, 사회 선생 을 하던 사람은 역사를 가르치고. 뜨개질을 잘하는 사람은 뜨개질을 가르치고, 그것만 하더라도 제갭 학교처런 되죠. 유감스럽게도 저에 게는 남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나에게도 없어 "하여튼 저늑 이곳에서 대학에 다니던 때보다도 훨씬 열심히 배 우고 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렇게 지내요." "저녁 식사 후에는 보통 무얼 하지?" "레이코 씨와 잡담을 하거나, 책을 일거나, 래코드를 틀거나. 다 른 사람의 방에 가서 게임을 하거나 해요.' 나오코는 대답 했다. "난 기타를 연습하거나, 자서전을 쓰고 말이지 " 레이코가 말했 다. "자서 전?" "농담이에요." 레이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열 시 경에 자-요 어때요, 건전한 생활이죠' 잠을 깊게 잘 수 있어요.' 나는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조금 전이었다. "이제 서서히 졸릴 때가 되 지 않았나요?"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요. 조금 늦어지더라도." 나오코가 말했다. "오랜만이니까 좀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무엇이건 이야기를 해 보세요." "아까 혼자 있을 때, 갑자기 옛날 일들이 많이 떠오르더군." 나는 말했다. "옛날에 기즈키와 둘이서 나오코에게 문병 갔던 일 기억나 나? 바닷가의 병원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여름 방학이었던가?" "가슴 수술을 했던 때로군요 " 나오코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똑 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과 기즈키 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었 죠. 엉망으로 녹아버린 초콜릿을 들고. 그걸 먹느라고 고생했어요 하지만 어쩐지 오래된 옛날 이야기 처럼 여겨지는군요. "그렇군. 그때, 나오코는 긴 시를 쓰고 있었지?" "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란 모두들 시를 쓰게 마련이에요." 나오 코는 큭큭 웃으면서 말했다. "왜 그런 것까지 값자기 생각해내셨나 요?" "모르겠어. 그냘 생각이 나는군 바닷바람 냄새라든가 협죽도라든가 그런 것들이 문득. , 머리에 떠올랐어. 기즈키는 그 무 렵 자주 문병을 갔었나?" "문병 따위는 거의 오지 않았어요. 그 떼문에 우리는 나중에 싸우 기까지 했으니까요. 처음에 한 번 오고, 그리고 당신과 둘이서. 오고. 그것뿐이 에요. 너무하죠? 처음 왔을 때에도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 다가. 10분쯤 후에 가버렸어요. 오렌지를 들고 와서는. 무슨 뜻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꺾질을 벗겨서 저에게 주고는, 다시 무 슨 뜻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돌아간 거예요. 자기는 병원이 싫다던가 뭐라던가 그러면서." 나오코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그 런 면에서는 그 사람은 언제나 어린애였죠. 사실 그렇잖아요? 병원 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그러니까 입원한 사람을 위로 하러 문병 오는 거잖아요? 힘을 네라고. 그 사람은 그런 걸 잘 몰랐 던 거예요." "하지만 나와 함께 갔을 때에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어 . 아주 평범 하던 걸." "그건 당신 앞이었기 때문이에요" 나오코는 말했다 "_-1사람 당신 앞에서는 언제나 그랬어요. 악한 면은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죠. 아마도 기즈키 씨는 당신을 좋아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자신의 좋은 면만 보여 주려고 노력했던 거예요. 하지만 저와 둘이서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약간 방심을 해요. 사실은 변덕이 심 한 사람이에요. 예를 들자면 혼자서 마구 떠들어대는가 싶으면 다음 순간에는 침울해지거나 말이에요. 그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그랬어요. 언제나 자신을 바꾸려고, 향상시키려고는 했지요 나오코는 소파 위에서 양다리를 바꾸어 다시 포갰다 "언제나 자신을 바꾸려고, 향상시키려고 하다가,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초조해 하거나 슬퍼하거나 했죠. 정말로 훌륭한 면이나 아름다운 면도 있는데, 끝까지 자기에게 자신감을 지니지 못하고. 이것도 해야지, 저것도 바꿔야지 하는 1다위의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너무나 불쌍해요." "하지만 만약 그애가 나에게 자신의 좋은 면만을 보이려고 노력했 다면, 그 노력은 성공한 보양이군 왜냐하면 나는 기즈키의 좋은 면 밖에 보지 못했거든. 나오코는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듣는다면 그 사람이 분명히 기 뻐할 거예요. 당신은 그의 유일한 친구였으니까요." " 기즈키도 나에게는 유일한 친구였지." 나는 말했다 "기 즈키 이외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겐 없었거든. "그레서 저는. 당신과 기즈키 씨와 셋이서 함께 있기를 좋아했어 요. 그러면 저도기즈키 씨도 좋은 면만 보고 그럴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저는, 기분이 아주 편안했어요. 안심할수 있었어요.그러니 까 셋이 함께 있는 걸 좋아했어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 지는 모르지만 "나도 나오코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마음에 걸렸지 "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상태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리가 없다는 점 이었어요. 그런 자그만 세계가 영원히 유지될 리는 없으니까요. 그 건 기즈키 씨도 알고 있었고, 저도 알고 있었고, 당신도 알고 있었어 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솔찍히 말해서 저는 그 사람의 나약한 면도 정말로 좋아 했어요. 좋은 점과 같은 정도로 좋아했어요 왜냐하면 그에게는 교 활한 데나 짓궂은 데가 전혀 없었거든요. 단지 나약할뿐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그렇게 말해도 그는 믿지 않았어요. 그리고 언제나 이 렇게 말하는 거예요. 나오코, 그건 너와 내가 세 살 때부터 늘 붙어 다녀서 네가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그러니까무엇이 장점이고 무엇이 단점인지 구분을 못하고 몽땅 뒤섞어서 생각하는 거야, 라고. 그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무슨 말을 하건 저는 그 사람을 좋아했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흥미 를 느끼지 못했어요." 나오코는 나를 향해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평범한 남녀 관계와는 아주 달랐어요. 어딘가 육체의 어떤 부분이 붙어 있는 듯한 관계였죠. 어쩌다가 멀리 떨어져 있게 되더 라도 특수한 인력이 작용해서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는, 그런 관계였 어요. 그러니까 저와 기즈키 씨가 애인 관계가 된 것은 아주 자연스 러운 일이었어요. 고려하거나 선택할 여지가 없었던 거예요. 우리는 열두 살 때에 키스를 했고, 열세 살 때에는 이미 페팅을 했죠. 제가 그의 방에 가든가 그가 제 방에 놀러 오든가 해서는, 그의 것을 손으 로 치료해주거나 했죠. 하지만 저는 우리가 조숙하다고는 전혀 생각 하지 않았어요. 그런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이가 내 가슴이나 성기를 만지고 싶어한다면 그 정도는 만지더라도 전혀 개 의치 않았고, 그이가 사정을 하고 싶어하면 그것을 도와주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그러니 누군가가 그런 일로 우리를 비난했더 라면, 저는 분명히 깜짝 놀라거나 화를 냈으리라고 생각해요. 왜냐 하면 우리는 잘못된 짓을 한 것이 아니니까요. 당연히 하게 될 짓을 했을 뿐이거든요. 우리는, 서로의 육체를 숨김없이 봐왔기에 마치 서로의 육체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우리는 얼마 동안 그 이상의 것은 하지 않았어요. 임신하는 게 두려웠고. 어떻게 하면 임신하게 되는지 아직 잘 몰랐으니까요. 그래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성장해왔어요, 둘이서 한 몸이 되어 손을 잡고. 보통 성 장기 의 아이들이 경험하는 성의 중압감이나 성기의 팽창으로 인한 괴로 움- 같은 것을 거의 경험하지 않고 말이에요. 우리는 아까도 말했듯 이 성에 관해서는 언제나 개방적이었고. 자아도 서고 흡수할 수 있 었으니까 특별히 강하게 의식할 필요도 없었지요 제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어요?" "알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우리 둘은 떨어 질 수 없는 관계였던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 기즈 키 씨가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함께 지낼 것이고, 서로 사랑을 할 것이고, 그러면서 조금씩 불행해져가리라고 생각해요." "왜 ' " 나오코는 손가락으로 몇 번인가 머리를 빗었다. 이미 머리핀을 꽂지 않고 있었기에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 머리가 흘러내려 얼굴을 가렸 다. '우리는 이 세상에 빚을 갚아야만 했던 모양이에요." 나오코는 얼 굴을 들며 말했다. "성장의 괴로움 같은 것을 말이에요. 우리는 지 불해야 할 시기에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그 빚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즈키씨는 그렇게 되었고, 저는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죠. 우리는 무인도에서 자란 발가숭이 아이들과 마 찬가지였어요. 배가 고프면 바나나를 먹고, 외로우면 서로 껴안고 팠어요. 하지만 그런 상태는 언제까지고 계속되지 않아요. 우리는 점젊 성장해서 ,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했죠.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 에게 중요한 존재였던 거예요. 당신은 우리와 바깥 세계를 잇는 다 리와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어요. 우리는 당신을 통해서 바깥 세게에 잘 동화하려고 우리들 나를대로 노력했어요. 결국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가 당신을 이용했다고는 생같하지 마세요. 기즈키 씨는 정말로 당신을 좋아했고. 우리에게는 우연히 당신과의 관계가 최초의 타인과의 관계였던 거예요. 그리고 그 관계는 지금도 계속되 고 있어요. 기즈키 씨는 이미 죽었지만, 당신은 지금도 저와 바깥 세계를 잇는 유일한 다리예요. 그리고 기즈키 씨가 당신을 좋아했던 것처럼 저도 당신을 좋아해요. 그리고 본의는 아니지만, 결과적으 로 우리는 당신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을지도 몰라요. 상처를 주리라 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거든요." 나오코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때, 코코아라도 마시겠어'" 레이코가 물었다 "네, 마시고 싶어요." 나오코는 대답했다 "저는 가지고 온 브랜디를 마실 생각입니다만 괜찮겠습니까' " 레이코에게 물어보았다. "네, 괸찮아요." 레이코는 대답했다 "나에게도 한 잔 주겠어요')" "물론 드리겠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레이코가 잔을 두 개 가지고 와서, 그녀와 나는 그 잔으로 건배를 했다. 그리고 레이코는 부엌으로 가서 코코아를 탔다 "좀더 밝은 이야기를 하지 않겠어요?" 나오코가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밝은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돌격대가 사라진 것 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 녀석만 옆에 있어 준다면,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고, 그러면 그 이야기만으로도 모두가 즐거워 질 수 있을 텐데 할 수 없이 나는 기숙사 안에서 모두들 얼마나 불 결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했다. 너무나 불결 해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기분이 되었지만, 두 여자는 그 러한 이야기가 신기하다는 듯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이어서 레이코 가 갖가지 정신병 환자들의 흉내를 내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었 다. 열한 시가 되자 나오코가 졸린 표정을 지었으므로, 레이코가 소 파를 뉘어서 침대로 만들고는 시트와 모포와 베개를 준비해주었다 "심야에 욕을 보이러 오는 건 좋지만 상대를 잘못 팔단하지 마세 요." 레이코가 말했다. "왼쪽 친대에서 자고 있는 주름살없는 몸이 나오코이니까" "거짓말이에요. 제가 오른쪽이에요." 나오코가 말했다 '내일은 오후의 커리클럼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게 해두었으니 까. 피크닉이라도 가요. 부근에 정말 좋은 곳이 있으니까" 레이 코가 말 했다. "그거 좋겠군요." 나는 말했다 그녀들이 번갈아 욕 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침 실로 들어가버리자 나는 브랜디를 조금 마시고는.소파 침대에 누워서 오늘 하루의 일 들을 아침부터 밤까지 더듬어보았다 웬지 무척이나 긴 하루처럼 여 겨졌다. 방 안에는 여전히 달빛이 하얗게 비치고 있었다. 나오코와 레이코가 잠들어 고요해진 침 실에서는. 거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이따금 삐그덕거리는 침대 소리가 자그맣게 들릴 뿐이었 다- 눈을 감으니 어둠 속에서 미세한 도형이 어른거리며 춤을 추었 고, 귓전에서는 레이코가 연주하는 기타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그다지 오랫동안 계속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수마가 나를 따뜻한 진흙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나는 버드나무 꿈을 꾸었다. 산길 의 양쪽에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버드나무였다. 제법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버드나무 가지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보니, 버드나무 가지 하나하나에 작은 새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 무게로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 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막대기로 가까운 곳의 가지를 두드려 보았다. 새들을 쫓아버리고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도록 하기 위해 서였다. 하지만 새들은 날아가지 않았다. 날아가는 대신에 새들은 새 모양의 금속으로 변해서 투두둑 소리를 네며 지면에 떨어 졌다 잠에서 깼을 때. 나는 마치 그 꿈이 계속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방안은 하얀 달빛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반사 적으로 마룻바닥에서 새 모양의 금속을 찾아보았지만, 물론 그런 것 은 아무 데도 없었다 나오코가 내 침데 곁에 우두커니 앉아서, 창 밖을 가만히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구부려 세우고 는, 굼주린 고아처럼 그 위에 턱을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시간을 보 려고 머리맡의 손목 시계를 찾았지만 시계는 내가놓아둔 곳에 없 었다. 달빛의 정도를 보아 아마도 두 시나 세 시쯤이리라고 짐작했 다. 목이 몹시 말랐지만 나는 잠자코 나오코의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나오코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파란색 가운을 입고, 머리 한 쪽 에 그 나비 모양의 머리핀을 꽃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예쁜 이 마가 달빛에 뚜렷이 비춰졌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전 에 그녀는 머리핀을 빼고 있었다. 나오코는 똑같은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달빛 에 이끌려 나온 자그만 야행성 동물 같았다 달빛의 각도 탓으로, 그 녀의 입술 모습이 과장되어 보였다. 너무나도 연약해 보이는 그 입 술은,그녀의 심장 고동이나 마음의 움직임에 맞추어,움찔움찔 가 늘게 흔들렸다. 마치 밤의 어둠을 향해서 소리 없는 말을 내뱉고 있 는 듯이 갈증을 해소시키려고 침을 삼키자, 밤의 정적 속에서 그 소리는 아주 크게 울려퍼졌다. 그러자 나오코는 마치 그 소리가 무슨 신호 이기라도 하듯이 불쑥 일어나, 희미하게 옷자락 소리를 내며 내 머 리맡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자 코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그녀의 눈을 보았지만. 그 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맑은 눈동자늘. 저편의 세 계가 들여다보일 정도였으나,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안에서 무엇 인가를 발견할 누는 없었다 내 얼굴과 그녀의 얼굴은 불과30센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몇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느껴졌다. 내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만지려 하자, 나오코는 살짝 몸을 뒤로 피했다. 입술이 약간 떨렸다. 이어서 나오코는 양손을 들어 천천히 가운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단추는 전부 일곱 개였다. 나는 그녀 의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차례대로 그 단추를 풀어가는 모습을, 아까 그 꿈이 다시 이어지는 것을 보기라도 하듯이 바라보았다 그 작은 일곱 개의 하얀 단추가 전부 풀어지자, 나오코는 벌레가 허물 을 벗을 때처런 허리쪽으로 가운을 벗어 내려. 알몸이 되었다. 가운 밑에, 나오코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는 나비 모 양의 머리핀뿐이었다. 나오코는 가운을 벗고 나더니, 마룻바닥에 무 릎을 꿇은 채로 나를 보았다. 부드러운 달빛을 받은 나오코의 몸은 마치 갓 태어난 신선한 육체처럼 윤기가 돌며 애처롭게 보였다 그 녀가 약간 몸을 움직이면 극히 미세한 움직임인데도-달빛이 닿 는 부분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몸에 물들어 있는 그림자의 모양이 바뀌었다. 동글게 솟아오른 젖가슴. 자그만 젖꼭지, 옴폭한 배꼽, 그 리고 허리뼈 및 음모가 만들어네는 거친 입자의 그림자는 마치 조용 한 호수 위를 맴도는 파문처럼 그 모습을 바꾸어 갔다. 이 얼마나 완벽한 육체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오코는 어느 틈에 이토록 찬댁한 육체를 지니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날 밤에 내 가 안았던 그녀의 육체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날 밤 울음을 그치지 않는 나오코의 옷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벗겼을 때. 나는 그녀의 육체가 어딘지 모르게 불완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방은 단단했고. 젖꼭지는 엉뚱한 곳에 튀어나와 있는 듯 이 여겨졌고, 허리 언저리도 어쩐지 굳어 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 오코는 아름다운 여자였고,. 육체는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나를 성적으로 흥분시켜, 거대한 힘으로 나를 휩쓸고 갔다. 하지만 그러 한 상황에서, 나는 그녀의 나체를 껴안은 채. 애무하고, 키스하면서 도, 인간의 육체란 얼마나 불균형하고 어설픈 것인가 하고 문득 기 묘한 감개를 느꼈었다 나는 나오코를 안으면서,그녀를 향해서 이 렇게 설명하고 싶었다 나는 지금 너와 성교를 하고 있다. 나는 너의 몸 속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데수로운 일이 아니다. 해도 그 만 안 해도 그만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체의 친정에 불과하기 때 문이다 우리는 서로 불완전한 육체를 접촉시켜야만 가능한 이야기 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자의 불완전함을 서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물론 그런 말을 입 밖에 내 어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나오코의 몸을 힘 껏 껴안을 뿐이었다. 그녀의 몸을 안고 있노라면, 속에 무엇인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이물질의 껄끄러운 감촉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물질이 나로 하여금 사랑스러운 기분을 느끼도록 하여, 엄청날 정도로 단단하게 발기시켰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나오코의 육체는 그때와는 전혀 달랐 다 나오코의 육체는 몇 차례의 변천을 겪은 결과, 이토록 완전한 육 체가 되어 달빛 속에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우선 소녀답게 통통하던 살은 기즈키의 죽음을 전후하여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대 신에 성숙된 살을 지니게 되었다. 나오코의 육체는 너무나도 아름답 게 성숙해 있었으므로, 나는 성적인 흥분조차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냥 멍하니 그 아름다운 허리의 곡선과 둥글고 윤기나는 유방과, 호흡에 맞추어 조용히 율동하는 날씬한 배, 그리고 그 밑으로 난 부 드럽고 검은 음모의 그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그 나체를 내 눈앞에 드러낸 것은 아마도 5분이나 6분 정 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 가운을 입고, 위에 서부터 차례로 단추를 채웠다. 단추를 전부 채우자 나오코는 불쑥 일어나더니, 조용히 침 실 문을 열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생각을 바꾸 어 침대에서 일어나,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던 시계를 집어들어, 달 빛에 비추어 보았다. 세 시 40분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물을 몇 잔 마시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결국 날이 새어 햇살이 실내에 가 득하던 창백한 달빛을 지워버릴 때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레이코가 오더니 내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아침 이에요, 아침" 하고 소리 쳤다. 레이코가 내 침대를 정리하는 동안 나오코는 부엌에서 아침 식 사를 준비했다. 나오코는 나를 향해서 생긋 웃으며 "안녕히 주무셨 어요' 하고 말했다. 안녕, 하고 나도 말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물을 끓이기도 하고 빵을 자르기도 하는 나오코의 모습을 곁에 서서 잠시 동안 바라보았지만, 어젯밤 내 앞에서 발가숭이가 되었다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빨갛군요. 어찌 된 일이에요?" 나오코가 커피를 타면서 나 에게 물었다. "밤중에 눈이 떠지더니 다음에는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 '우리가 코를 골지는 않았나요' " 레이코가 물었다. '골지 않았습니다 " 나는 대답했다. "다행이로군요." 나오코가 말했다 "와타나베 씨는. 예의상 그렇게 대답한 것 뿐이야." 레이코는 하 품을 하면서 말했다 처음에 나는 나오코가 레이코의 앞이라서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 는 것이거나, 아니면 부끄러워 하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 이코가 잠시 어디론가 가 있는 동안에도 그녀의 행동에는 전혀 변화 가 없었고, 그 눈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티없이 맑았다 "잘 잤나?" 나는 나오코에게 물었다 "네, 아주 잘 잤어요." 나오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그녀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심플한 머리핀을 꽃고 있었다. 나의 석연치 않은 기분은,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 다. 나는 버터를 빵에 바르기도 하고, 삶은 달걀의 껍질을 벗기기도 하면서,무언가 증거를 찾으려고. 이따금 맞은편에 앉은 나오코의 얼굴을 힐끗힐끗 살펴보았다. "와타나베 씨 왜 오늘 아침에는 제 얼굴만 보세요?" 나오코가 이 상하다는 듯 물었다. "이 사람. 누군지-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레이코가 말했다. "당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나요?" 나오코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럴지도 몰라 하고 대답하고는 웃었다. 이어서 두 여자가 나를 화젯거리로 삼아 서로 농담을 주고밭는 것을 보면서. 어젯밤 그 일에 관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빵과 커피를 들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두 여자가 이제부터 새장에 모이를 주러 간 다고 하기에,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두 여자는 작업용 청바지와 셔 츠로 갈아입고는, 하얀 장화를 신었다. 테니스 코트 뒤쪽의 자그만 공원 안에 있는 새장에는, 닭을 비롯해서 비둘기. 공작새. 앵무새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새들이 들어 있었다 주위에는 화단과 정원수, 그리고 벤치가 있었다 역시 환자인 듯한 두 사내가 길에 떨어 진 낙 엽을 빗자루로 쓸어 모으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마흔에서 쉰 사이 로 보였다. 레이코와 나오코는 그 두 사람에 게로 가서 아침 인사를 했고. 레이코는 다시 무엇인가 농담을 하여 두 사내를 웃겼다. 화단 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고, 정원수는 정성껏 가꾸어져 있었다 레이코의 모습을 보자, 새들은 마구 소리를 질러대며 우리 안을 이 리 저리 날아다넜다 그녀들은 새장 곁에 있는 작은 창고로 들어가 모이 봉지와 고무 호수를 꺼내 간다. 나오코가 호수를 수도꼭지에 연결시켜. 물을 틀 었다. 그리고는 새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주의하면서 우리 안 으로 들어가 오물을 씻어냈다 레이코는 브러시로 바닥을 박박 문질 렀다. 물보라가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가운데. 공작새들이 물방울 을 피해서 우리 안을 이리 저리 도망다녔다 칠면조는 고개를 들고는 성질이 까다로운 노인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앵무새는 체 위에서 명쾌하다는 듯이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날개를 쳤다. 레이코 가 앵무새를 향해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내짜. 앵무새는 구석에 숨어서 어깨를 움츠리고 보더니 잠시 후 "고마워요. 미친 놈, 병신" 하며 외 쳐대었다. "누군가가 저런 말을 가르쳤어요 " 한숨을 쉬며 나오코가 말했다 "난 아니야 나는 그런 말을 가르치지는 않으니까." 레이코가 말 했다 그리고 다시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앵무새는 입을 다 물었다 "저 녀석. 한 번 고양이에게 심하게 당했기 때문에, 고양이가 무 서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레이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청소가 끝나자 두 여자는 청소 도구를 놓고는. 모이통에 모이를 담았다') 칠면조는 첨벙 첨벙 바닥에 고인 물을 튀겨대면서 오더니 머리 를 치박고는. 나오코가 엉덩이를 때려도 아랑곳없이 모이를 먹어댔 다 '매일 아침 이렇게 하나' " 나는 나오코에게 물었다 '그래요. 신참 여자는 대체로 이것을 해요. 간단하니까 토끼를 보고 싶으세요?" 보고 싶군, 하고 나는 대답했다. 새장 뒤쪽의 토끼장에는. 열 마 리 가량의 토끼들이 짙더미 위에서 자고 있었다. 나오코는 빗자루로 똥을 쓸어 모으고, 먹이통에 먹이를 넣어준 다음, 토끼 새끼를 안아 들고는 뺨을 비 볐다 "귀엽죠?" 나오코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토끼 를 안겨주었다. 자그맣고 따뜻한 그 덩어리는 내 품안에서 가만히 몸을 웅크린 채. 귀를 부들부들 떨었다. "괜찮아 이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 아니야." 나오코는 그렇게 말 하고는 손가락으로 토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향해서 생긋 웃 었다. 아무런 그늘도 없는 눈부신 미소여서, 나도 그만 덩달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젯밤의 나오코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 고 생각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진짜 나오코였다. 꿈이 아니라-그 녀는 분명히 내 앞에서 옷을 벗고 나체가 되었었다 레이코는 휘파람으로 '프라우드 메리'를 멋지게 부르면서 쓰레기 를 모아. 비닐로 된 쓰레기 봉투에 담고는 그 입구를 묶었다 나는 그녀들을 도와서 청소 도구와 모이통을 창고로 날랐다 "저는 아침이 제일 좋아요." 나오코는 말했다. "모든 것이 처음부 터 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이니까요. 그러니까 점심때가 되면 슬 퍼져요. 저녁때가 가장 싫고. 매일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당신들도 나처럼 나이를 먹게 되지 아침이 오고 밤이 오고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이에." 레이 코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금방이야, 그런 건." "하지만 언니는 나이 드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여요." 나오 코가 말했다. "나이 드는 게 즐겁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다시 젊어지고 싶지 도 않아" 레이코는 말했다. "왜 그렇죠?" 나는 물었다. "귀찮기 때문에 . 당연하잖아요." 레이코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 시 '프라우드 메리'를 불러대며 빗자루를 창고에 던져 넣고, 문을 닫 았다. 방으로 돌아오자 그녀들은 고무 장화를 벗고는 평소의 운동화로 갈아신은다음 이제부터 농장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구경해봤자 별로 재미 있는 작업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 작업이니까 당 신은 여기에 남아서 책이라도 읽는 게 좋을 거라고 레이코가 말했 다 '그리고 욕실에 우리가 벗어놓은 속옷이 빨래통 가득히 있으니까 빨아주겠어요?" 하고 레이코가 말했다. "농담이죠' "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물론 농담이에요." 레이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건 농담인 게 당연하잖아요. 당신 정말로 귀엽군요. 그렇지 않아, 나오코?" '그렇군요." 나오코도 웃으면서 동의했다. "독일어 공부나 하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착한 아이로군 점심 전에 돌아올 테니까 얌전히 공부나 하고 있 어야 해요." 레이코가 말했다-. 그리고 두 여자는 콕콕 웃으며 집을 나섰다. 사람들이 몇 명인가 창문 아래를 지나가는 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나는 욕실로 들어가 다시 한번 세수를 하고는, 그곳에 있는 손톱 깎이로 손톱을 깎았다. 여자 둘이서 사는 곳치고는 상당히 간결한 욕실이었다 화장크림이며 립스틱이며 선 크림이며 로션등이 불규 칙하게 놓여 있을 뿐. 제대로 된 화장품은 거의 없었다. 손톱을 깎고 나서 , 나는 부엌에서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는 식탁 앞에 앉아서 커 피를 마시며 독일어 교과서를 절했다. 부엌의 양지바른 곳에서 티셔 츠 차림으로 독일어 문법표를 통째로 암기하고 있으려니 , 어쩐지 이 상한 기분이 들었다. 독일어의 불규칙 동사와 이 부엌의 식탁은 무 한히 긴 간격을 두고 떨어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여자는 열 시 반에 농장에서 돌아와 번갈아 샤워를 하고는, 산 뜻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셋이서 식당으로 가서 점심 식사를 한 후, 정문까지 걸었다. 요번에는 수위가 수위실을 제대로 지키며 . 책상 앞에 앉아서 식당에서 배달된 듯한 점심 식사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선반 위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는 가요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들이 다가가자 그가 "여어 " 하며 인사를 하기에 , 우리 들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인제부터 셋이서 바깥을 산보하고 오겠다. 세 시간 정도 지나 돌 아올 것이다. 라고 레이코가 말했다. "내, 다녀오십시오. 좋은 날씨로군요. 계곡 옆의 길은 요전의 비 로 무너져서 위험하지만, 그 이외의의 곳이라면 괜찮습니다. 문제 없 습니다. " 수위가 말했다. 레이코는 외출자 명단인 듯한 용지에 나오 코와 자신의 이름 그리고 외출 시간을 기입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수위가 말했다 "친절한 사람인 것 같군요." 나는 말했다. "저 사람. 여기가 좀 이상해요' 하고 말하며 레이포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어쨌든 수위의 말대로 정말 좋은 날씨였다. 한없이 푸른 하늘에 작고 많은 구름이 마치 페인트를 시험상아 친해놓은 듯이 하늘 끝에 하얗게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는 잠시 아미료의 낮은 돌담을 따라 걷다가, 담을 벗어나 폭이 좁고 가파른 비탈길을 일렬로 올라갔다. 선두가 레이코이고, 가운데가 나오코, 맨 뒤가 나였다. 레이코는 이 부근의 산이라면 구석구석 알고 있다는 듯 확신에 찬 걸음걸이로 그 좁은 비탈길을 올라갔다. 우리는 말도 없이 그냥 무작정 걸음을 옮 겼다. 나오코는 청바지와 흰 셔츠 차림에, 상의를 벗어서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곧은 머릿결이 어깨쯤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모 습을 바라보며 걸었다. 나오코는 이따금 뒤돌아보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 오르막길은 끝없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지 만, 레이코의 발길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고, 나오코도 이따금 땀 을 닦으며 뒤처지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 나는 최근에 등산을 한 적이 없었기에 숨이 찼다 "언제나 이렇게 등산을 하나?" 나는 나오코에게 물어보았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요." 나오코는 대답했다. "힘들죠, 제법' " "약간 " '3분의 2는 왔으니까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당신은 남자잖아요? 힘을 내야지." 레이코가 말했다. "운동 부족입 니다. " "여자들하고 놀기만 하니까." 나오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무슨 말인가 대꾸를 하려 했지만, 숨이 차서 제대로 말이 나 오지 않았다 이따금 눈앞을 머리에 깃 같은 장식이 달린 빨간 새가 가로질러 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르는 새들의 모습은 너무나 도 선명했다. 주위의 초원에는 울긋불긋한 꽃들이 무수히 피어 있었 고, 여기저기서 벌들이 붕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위의 그 러한 경치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잊고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 겨 갔다. 10분쯤 후에 오르막길은 끝나고, 고원 모양의 평탄한 곳이 나타 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며 땀을 닦기도 하고. 숨을 돌리며 물을 마시기도 했다. 레이코는 무엇인가 나뭇잎을 주워 오더 니, 그것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길은 완만한 내리막이었고, 양쪽에는 억새풀 이삭이 무성하게 자 라 있었다. 15분 가량 걸어가자 마을이 나왔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열두세 채의 집이 모두 폐허가 되어 있었다. 집 주위에는 허리 높이 정도의 풀이 무성했고, 구멍이 난 곳에는 비둘기 똥이 새하얗 게 말라붙어 있었다 어떤 집은 기둥만을 남기고 완전히 무너져 있 었지만, 그 중에는 덧문만 떼어내면 지금이라도 당장 들어가 살 수 있을 것 같은 집도 있었다. 우리는 죽어 말이 없는 집들 사이의 길을 빠져나갔다 "불과 7, 8년 전까지 , 이곳에는 몇 명인가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 요." 레이코가 가르쳐 주었다. '주위에 넓은 밭도 있었구요. 하지만 이제는 모두들 떠나버렸어요. 생활하기 힘드니까. 겨울에는 눈이 쌓 여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데다가. 땅도 그다지 비옥하지 않거든요. 시 내로 나가서 일하는 편이 훨씬 좋은 돈벌이가 되죠." "아깝군요. 아직 충분히 살 수 있는 집도 있는데." 나는 말했다. "한때 히피족들이 살기도 했지만. 겨울이 되자 비명을 지르며 떠 나버렸어요." 마을을 빠져나와 잠시 걸어가자 낱으로 둘러싸인 넓은 방목장이 있고, 멀리에 말들이 몇 필인가 풀을 뜯는 모습이 보였다. 담을 따라 서 걷노라니, 커다란 개가꼬리를 치며 달려와, 레이코에게 덮치는 듯한 자세로 얼굴 냄새를 맡고. 이어서 나오코에게도 달려들어 애교 를 부렸다. 네가 휘파람을 불자 다가와서는, 긴 혀로 내 손을 핥아뎄 다 "목장에 사는 개예요" 나오코가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미 스무 살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요. 이가 약해서 딱딱한 것은 거의 먹지 못해요. 언제나 가게 앞에서 자다가 주인의 발소리가 들 리면 달려와서 애교를 부리죠." 레이코가 배낭에서 치즈 조각을 꺼내자 개는 그 냄새를 맡고는 그쪽으로 달려가 반갑다는 듯이 치즈를 덥석 물었다 '이제 곧 이 녀석과도 만나지 못할 거예요" 레이코가 개의 머리 를 두드리며 말했다 "10월 중순이 되면 소와 말을 트럭에 싣고 아 래쪽 축사로 가거든요. 여름에만 이곳에 방목해서, 풀을 먹이고, 관 광객을 상대로 자그만 찻집 같은 것을 열어요. 관광객이라야, 등산 객이 하루에 스무 명 정도 올까말까 할 뿐이지만. 당신, 무언가 마시 고 싶지 않아요' 어때요?" "마시 겠습니다 " 나는 대답했다 개가 앞장서서 우리를 그 찻집까지 안내했다. 정면에 포치를 만 들고 하얀 페인트로 칠한 아담한 건물로, 커피 잔 모양의 낡은 간판 이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 개는 먼저 포치로 올라가. 옆으로 누워 눈 을 감았다. 우리가 포치의 테이블에 앉자, 안에서 트레이닝 셔츠와 흰색 진 차림에 , 머리를 뒤로 올려 묶은 아가씨가 나오더니, 레이코 와 나오코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이 사람은 나오코의 친구." 레이코가 나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그 아가씨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도 인사를 했다 세 여자가 한바탕 잡담을 하는 동안, 나는 테이블 밑에 있는 개의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 개의 목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 다 그 판판한 부분을 살살 긁어주자, 개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은 채 숨을 헐떡였다. "이름이 뭐죠?" 나는 찻집 아가씨에게 물었다 "페페."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페페 !" 하고 불러보았지만. 개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귀가 잘 안 들리니까, 더 큰 소리로 불러야 해요." 아가씨는 . 사투리로 말했다 "페페!" 내가 큰 소리로 부르자. 개는 눈을 뜨고 불쑥 몸을 일으 켜, 멍멍 짖었다 "그래 그래, 이제 됐으니까 푹 자고 오래 살아야지" 하고 아가씨 가 말하자, 페페는 다시 내 발 밑에 드러누웠다 나오코와 레이코는 아이스 밀크를 주문했고. 나는 커피를 주문했 다. 레이코가 아가씨에게 FM을 틀어달라고 하자, 아가씨는 앰프의 스위치를 들어 FM방송을 켰다 블러드 웨트 앤드 티어즈가 부르 는 '느그닝 호일'이 들렸다. "난, 사실대로 말하자면 FM이 듣고 싶어서 이곳에 온 거예요." 레 이코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도대체가 우리 집에는 라디오도 없으니, 이따금 이 곳에라도 오지 않으면 요즈음 어떤 음악이 인기를 얻는지 알 수 없거든요." "항상 이곳에 머물고 계신가요?" 나는 아가씨에게 물어보았다 "그렇지는 않아요." 아가씨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런 곳에서 밤을 보내다간 외로워서 죽을 거예요. 저녁이면 목장 사람이 저절로 시내까지 태워다 줘요. 그리고 아침에 다시 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약간 떨어진 곳의 , 극장 사무실 앞에 세워져 있는 사륜 구동 차를 가리켰다 "이제 곧 손님도 끊기잔아?" 레이코가 물었다. "슬슬 문을 닫아야 되겠죠." 아가씨는 대답했다 레이코가 그녀에 게 담배를 권하고는 함께 피웠다. "네가 없으면 쓸쓸할 거야" 레이코는 말했다 "내년 1월에 다시 올게요." 아가씨는 웃으면서 말했다 크림의 '화이트 룸'에 이어서 , CM이 있은 뒤 , 사이몬 앤드 가펀클 의 '스카보로페어'가흘렀다 음악이 끝나자레이코는나에게 이 노 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 봤습니다. " 나는 말했다 '누가 나오죠?" "더스틴 호프만 "잘 모르는 사람이로군요." 레이코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세상은 쉬지 않고 바뀌니까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레이코는 아가씨에게 기타를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아가씨는 그 러세요 하고 말하고는 라디오 스위치를 끄고, 안에서 낡은 기타를 들고 나왔다 개가 머리를 들더니 기타 냄새를 킁킁 맡았다. "먹을 게 아니야. 이건 " 레이코가 개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풀 냄새 가 풍기는 바람이 포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산 능선이 뚜렷하게 우 리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치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 같군요." 나는 현을 맞추고 있는 레이코에게 말했다 "뭔데요. 그게?" 그녀는 물었다. 그녀는 스카보로 페어'의 첫 소절을 연주했다. 악보 없이 연주하 기는 처음인 듯 잠시 정확한 연주를 하느라 망설였지만 몇 번인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던 중 그녀는 일종의 흐름 같은 것을 포착하여 , 끝까지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세번째에는 군데군데 반주를 넣어가며 부드럽게 연주했다 "소질이 있죠?" 레이코는 나를 향해 서 윙크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세 번 정도 들 으면, 악보가 없더라도 대부분의 곡을 칠 수 있어요." 그녀는 멜로디를 자그맣게 흥얼거리면서 '스카보로 페어'를 마지막 까지 완전하게 연주했다. 우리 세 사람은 박수를 쳤고, 레이코는 정 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옛날에 모차르트의 콘체르토를 쳤을 때에는 박수 소리가 훨씬 컸어요." 그녀는 말했다 점원 아가씨가,만일 비틀즈의 '히어 컴즈 더 선' 을 연주해준다면 아이스 밀크 값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레이코는 엄지 손가락을 들 어 OK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가사를 붙여가며 '히어 컬프 더 건'을 연주했다 그다지 성량이 풍부하지 못했고, 아마도 담배를 많이 피 운 탓인지 약간은 목이 쉬어 있었지만, 존재감이 있는 멋진 목소리 였다 맥주를 마시며 산을 바라보고, 그러면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 정말로 산 위에서 태양이 다시 한번 얼굴을 드러낼 듯한 느낌이 들었다 . 그것은 정말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히어 컴즈 더 선'의 노래가 끝나자. 레이코는 기타를 점원 아가 씨에게 들려주고는, 다시 FM 방송을 틀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 오코와 나 두 사람에게 이 부근을 한 시간 가량 거닐다 오라고 말했 다. "나는 여기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이 아가씨와 농담을 하고 있을 테니까, 세 시까지 돌아오면 될 거야.' "그렇게 오랫동안 둘이서만 지내도 상관없습니까" 나는 물었다 '사실은 안되 지만, 괜찮지 않겠어요' 나는 병간호하는 할머니가 아니니까 조금은 편안히 쉬고 싶거든요, 혼자서. 게다가 모처럼 멀 리서 왔으니까 할 이야기도 있을 거 아니에요?" 레이코는 새 담배 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가요." 나오코가 일어섰다 나도 일어서서 나오코의 뒤를 따라갔다 잠이 깬 개가 잠시 동안 우리 뒤를 따라오더니. 도중에 포기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우리 는 목장 울타리를 따라 평탄한 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따금 나오코 는 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했다'이렇게 걸으니까 어쩐지 옛날 기분이 나지 않으세요?" "그건 옛날이 아니야. 작년 봄이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작 년 봄까지 이런 식이었지. 그것이 옛날이라면 10년 전은 고대사가 되 겠군." "고대사나 마찬가지죠." 나오코는 말했다- "그런데 어제는 죄송 했어요 어쩐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모처럼 당신이 와주셨는데, 미안해요." '상관없어 아마도 여러 가지 감정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게 좋을 거야, 나오코에게도 나에게도. 그러니까 만일 누군가에게 그러한 감 정을 들어내고 싶으면, 나에게 하면 돼 . 그러면 서로를 훨씬 잘 이해 할 수 있게 될 거야 " "저를 이해하면, 어떻게 되나요'," "어이, 전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 나는 말했다. "이건 어 떻게 되는 문제가 아니야. 이 세상에는 열차 시간표를 찾아보는 게 싫어서 하루 종일 시간표를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어 . 혹은 성냥개비 를 이어서 길이 1미터의 배를 만들려는 사람조차 있지. 그러니까 이 세상에 나오코를 이해하려는 인간이 한 사람 정도 있어도 이상할 건 없잖아'," "취미 같은 걸까요' " 나오코는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취미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지 . 일반적으로 머리가 정상인 사람 은 그러한 것을 호의라느니 애정이라 느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나오코가 취미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불러도 좋아." "이봐요, 와타나베 씨 " 나오코가 말했다. "당신은 기즈키도 좋아 했죠?" "물론 " 나는 대답 했다. "레이코 씨는 어때요?" "그 사람도 아주 좋아해. 좋은 사람이야." "어째서 당신은 그런 사람들만 좋아하게 되나요',?" 나오코는 말했 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 나사가 비뚤어지고. 어긋나서. 제대로 헤 엄을 칠 수 없기 때문에 , 자꾸만 물속으로 빠저드는 사람들이에요. 저 도 기즈키 씨도 레이코 씨도. 모두들 그래요. 어째서 좀더 제대로 된 사람을 좋아하지 않나요?" "그래 나 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잠시 생각 한 후에 그렇게 대답했다 "나오코나 기즈키나 레이코 씨의 나사가 비뚤어져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어 . 나사가 삐뚫어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되려 원기 왕성하게 바깥을 활보하고 있지." "하지만 저희들은 나사가 비뚤어져 있어요. 저는 알 수 있어요." 우리는 잠시 말없이 걸었다. 길은 목장의 울타리를 벗어나, 작은 호수처럼 주위가 숲으로 둘러싸인 둥그런 모양의 초원으로 이어졌 다. "이따금 밤중에 잠이 깨어, 견딜 수 없이 무서워져요." 나오코는 내 팔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뒤틀린 채 두 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게 아닐까. 이대로 나이를 먹어 썩 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 속까지 얼어붙는 듯 한 생각이 돼요. 끔찍해요. 두렵고. 차갑고." 나는 나오코의 어깨에 손을 올려서 껴안았다. "마치 기즈키 씨가 어두운 곳에서 손을 내밀며 소리를 지를듯한 느낌이 들어요. 어이 나오코. 우리는 떨어져 있을 수 없어, 하고. 그 러면 저는. 정말로 어쩔 수가 없게 돼요 "그 떼에는 어떻게 하나?" "와타나베 씨 .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레이코 씨에게 안아 달라고 해요 " 나오코는 말했다 "레이코 씨 를 깨워서 . 그녀의 침대로 들어가, 꼭 껴안아 달라고 하죠. 그리고는 우는 거예요. 그녀가 제 몸을 쓰다듬어줘요 몸 속이 따뜻해질 때까 지. 그런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세요?" "이상하지 않아 레이코 씨 대신에 내가 껴안아주고 싶은대 "지금 안아주세요, 여기에서 ." 나오코가 말했다. 우리는 초원의 메마른 풀 위에 앉아 서로 껴안았다. 바닥에 앉자 우리의 몸은 풀 속에 완전히 가려져, 하늘과 구름 이외에는 아무것 도 보이 지 않았다. 나는 나오코의 몸을 천천히 풀 위에 눕히고는, 껴 안았다. 나오코의 몸은 부드러우면서 따뜻했고. 그 손은 내 몸을 요 구하고 있었다 나오코와 나는 마음에서 우러난 키스를 했다 "이봐요. 와타나베 씨?" 내 귓전에서 나오코가 말했다 "-응'~? '저와 자고 싶으세요?' "물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기다릴 수 있어요?" 물론 기다릴 수 있지 ." "당신과 자기 전에. 저는 좀더 제 자신에 관해서 정리해두고 싶어 요. 흐트러짐이 없고, 당신의 취향에 맏는 인간이 되고 싶어요. 그때 까지 기다려주시 겠어요?" 물론 기다리지 "지금 단단해져 있나요'' 발귀한거 말인가?" "멍 청이." 나오코는 생긋 웃었다 "발기 해 있어 나는- 말자지처럼발기해 있지 물론." "당신, 물건이라는 말 좀 안할수 는 없어요'." "좋아. 그만두지." 나는 말했다. "그런 건 괴로운가요'?" "이 같이 단단해저 있는 게 "괴롭냐구?" 나는 되물었다. "즉 그게 견디기 힘드냐는 말이에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꺼내버릴까요'." "손으로?" "그래요." 나오코는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까부터 그게 몹시 단단해서 아파요.' 나는 몸을 약간 젓혔다. "이젠 괜찮아'," "고마워요." 나오코." 나는 말했다 "왜 요'~" "하고 싶어 ." "좋아요." 나오코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내 바지의 지퍼 를 내려 단단해진 페니스를 손으로 잡았다. "따뜻해요." 나는 나오코가 손을 움직이려는 것을 제지하고는, 그녀의 블라우 스 단추를 벗긴 다음. 손을 등뒤로 돌려서 브래지어 고리를 풀었다 . 그리고는 부드러운 핑크색 젖가슴에 살짝 입술을 댔다 . 나오코는 눈 을 감은 채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제법인데 . "얌전히 계셔요 사정이 끝나자 나는 부드럽게 그녀를 안고, 다시 한번 키스를 했 다. 그리고 나오코는 브레지어와 블라우스를 다시 입었고, 나는 바 지의 지퍼를 올렸다 "이젠 조금 편안히 걸을 수 있게 됐나요," 나오코가 물었다 '덕분에."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좀더 걸어도 좋을까요?' "좋아." 우리는 초원을 빠져나가. 잠목림을 지나, 다시 초원을 통과했다 걸으면서 나오코는 죽은 언니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는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이 없지만. 당신에게는 해주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하니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여섯 살 차이였고, 성격도 상당히 달랐지만, 그래도 사이 가 아주 좋았어요." 나오코는 말했다. "싸움 한 번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의견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요 " 언니는 무엇을 해도 일등을 했니? 나오코는 말했다. 공부도 일 등이고 운동도 일등인 데다가, 친절하고 성격도 밝아서 남자들에게 도 인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에게도 사랑을 받았고. 교장 상장이 백 장이나 되는 소녀였다 어느 국린학교에도 한사람 정도는 이러한 학생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자기 언니라고 해서 하는 말 이 아니라 그런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해서 성격이 삐뚤어져. 거만 하게 굴거나 잘난 척하지도 않았고, 남들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것 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지 무엇을 시켜도 자연히 일등을 할 뿐이었 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귀여운 아이가 되려고 결심했어요. 나오코는 억세풀 이삭을 빙빙 돌려데며 말했다. '사실 그렇잖아요, 항상 주위 사람들로부터 언니는 머리가 좋고, 운동도 잘하고, 인기 도 좋다는 등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걸요. 발버둥쳐봤자 언니는 당할 수 없어요. 게다가 얼굴은 제가 조금 예쁜 편이었으니까. 부모님도 저를 귀엽게 키우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그레서 국민학교 때 부터 그런 학교에 보낸 거죠. 빨간 원피스라든가 프힐이 달린 브라우 스라든가 에나멜 구두라든가, 피아노나 발래 레슨 같은 것을 시키면 서 말이죠. 하지만 덕분에 언니는 저를 정말로 귀여워해줬어요, 귀 여운 꼬마 여동생이라는 식으로.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서 선물해줬 고, 여러 곳에 데려가주기도 했고, 공부도 봐줬고. 남자 친구와 데이 트할 때 저를 데려가 주기도 했어요. 정말로 멋진 언니였어요. 언니가 어째서 자살을 했는지 ,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어요 기즈 키 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이에요. 나이도 같은 열일곱살이 아니 에요. 죽기 직전까지 자살할 것 같은 기척도 없었고, 유서도 없 고 똑같잖아요?" "그렇군" 나는 대답했다 "모두들 그 아이는 머리가 너무 좋았다는 등 책을 너무 많이 읽었 다는둥 이야기했죠.사실 책은많이 읽었어요. 책을 잔뜩 지니고 있 어서, 저는 언니가 죽은 후에 그 책들을 많이 읽었지만, 슬펐어요, 메모가 적혀 있기도 하고. 돈이 꽂혀 있기도 하고. 그런 것들 때문에 저는 여러 번 울었어요 나오코는 다시 잠시 입을 다문 채 억세풀 이삭을 빙빙 돌렸다. "대부분의 일은 자기 혼자서 처리하는 사람이었어요. 누군가에 게 의존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은 결코 없었어요. 자존심이 셌기 때문은 아니에요.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리고 부모님도 그러한 것에 익숙해져서. 이 아이는 내버려둬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예요. 저는 자주 언니에게 의논했고. 언니도 정말로 친절하게 여러 가지 것을 가르쳐주었지만, 언니 자신은 아무에게도 의논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처리해버리죠. 화를 내는 일도 없고, 언짢아하는 일도 없어요. 이건 과장이 아니라 정말이에요. 대부분의 여자들이란 예를 들어 생리 때가 되거나 하 면 공연히 짜증이 나서 남들에게 데들거나 하잖아요, 그런데 언니는 그런 것도 없었어요. 언니는 불쾌해지는 대신에 우울해지거든요. 2 개월이나 3개월에 한 번 정도로 그런 일이 있어서, 이틀 가량 자기 방에 틀어박혀 누워 있었죠. 학교도 쉬고 음식도 거의 들지 않고 방을 어둡게 해놓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말이에요. 하지 만 언짢아하는 건 아니었어요.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으로 불러 옆에 앉혀 놓고, 저에게 그날 있었던 일들을 물었어요.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친구들과 '픈엇을 하며 놀았다느니,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느니, 시험 성적이 어떻다느니 그런 이야기예요 언니는 저의 그런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는 감상을 말하거나, 충고를 하거나 했어요. 하지만 내가 없으면 예를 들어 친구들과 놀러 가 거나, 발래 레슨을 받으러 가거나 하면다시 혼자서 멍하니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틀 가량 지나면 말끔하게 회복되어 명랑하게 학교 에 가곤 했어요. 그런 일이. 글쎄요. 4년 정도 게속되었을 거예요. 처음에는 부모님도 마음에 걸려서 담임 선생님께 상담했던 모양이 지만. 이틀만 지나면 말끔하게 회복되곤 하니까. 결국은 그냥내버 려두면 곧 좋아지리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머리가 좋고 야무진 아이 였으니까요 하지만 언니가 죽은 뒤에, 저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엿들은 적이 있어요. 아주 오래 전에 죽은 아버님의 일생 이야기 . 그사람도 아주 머리가 좋았지만 열 일곱에서 스물 하나까지 4년간 집 안에 틀어박 혀 지내시다가 결국은 어느 날 값자기 바깥으로 나가셔서 전차에 뛰어들 었다는 거예요.그래서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집 내 림인지도 몰라.'" 나오코는 이야기하면서 무심코 손끝으로 억세풀 이삭을 비벼서 바람에 날려보냈다. 전부 날려 보내고는, 그것을 끈처럼 손가락에 둘 둘 말았다. "언니가 죽은 것을 발견한 사람은 저예요." 나오코는 이야기를 계 속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의 가을이었죠. 11월. 비가 네리는, 어둠 침침한 하루였어요. 당시에 언니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제가 피아노 레슨에서 돌아오니까 여섯 시 반이었는데. 저녁 식사를 준비 하시던 어머님이, 준비가 다 됐으니 언니를 불러오라고 하셨어요. 저는 2층으로 올라가 언니 방문을 두드리며 식사하라고 소리쳤어 요.하지만 대답이 없고.조용했어요. 그래서 어째 이상하다는 생 각이 들어, 다시 한번 두드리고는 문을 살짝 열어보았죠. 잠이 들었 나 해서요. 하지만 언니는 자고 있었던 게 아니에요. 창가에 서서.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고, 바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마치 생각에 잠긴 것처럼.방이 어두운 데다가. 전등도 켜지 않았으 니까.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일 뿐이었죠 저는 '언니 뭐 하고 있어? 식사시간이 라고 말을 걸었어요 하지만그렇게 말하고 나서 언 니의 키가 평소보다 커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도대 체 어떻게 된건가 하고 좀 이 상하게 생각했죠. 하이힐을 신고 있나, 아니면 무언가 발판 위에 올라서 있는 건가 하고. 그래서 가까이 다 가가 말을 걸려다가 문득 알아차린 거예요. 목 위에 끈이 붙어 있다 는사실을. 천장의 곳에서 똑바로 끈이 내려와 그게, 정말 깜 짝 놀랄 정도로 똑바로 내려와 있는 거예요, 나의 작은 대뇌 공간에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언니는 하얀 블라우스에 그래요. 바로 지 금 제가 입고 있는 것처럼 심플한 것이었어요-회색 스커트를 입 고 있었는데 발끝이 발레를 할 때처럼 똑바로 세워져서,방바닥과 발끝사이에 20센티 정도공간이 벌어져 있었어요. 저는 그러한 것 들을 빠짐없이 전부 봤어요. 얼굴도, 얼굴도 봤어요. 보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저는 즉각 아래로 내려가 어머님께 알려드려야지 , 소리를 질러야지 하고 생각했죠.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거예요. 제 의 식과는 별도로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제 의식은 빨리 아래 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몸은 멋대로 움직이며 언니의 몸에서 끈을 풀려고 했어요. 하지만 물론 어린아이의 힘으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 저는 그곳에서 5,6분 가량 멍하니 서 있었 을 거예요, 방심 상태로.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수가 없었어요.몸 속에서 무엇인가 죽어버린 느낌이었죠. 어머님이 '뭐 하고 있니?' 하며 보러 올 때까지, 저는 계속 그곳에 있었어요, 언니 와 함께. 그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나오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사흘간, 저는 전혀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침대 속에서 죽은 듯이, 눈만 뜬 채로 가만히 있었죠.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거든요." 나오코는 내 팔에 몸을 기댔다. "편지 에 썼잖아요?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한 인간이 라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병에 걸려 있고. 그 뿌리 는 아주 깊어요. 그러니까 만약 더 나아갈 수 있다면 당신 혼자서 가 주시면 좋겠어요. 저를 기다리지 말고. 다른 여자와 자고 싶으면 자 도 좋아요. 저 때문에 사양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고 싶은 일은 마음 껏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당신과 동반 자살을 할지도 모르는 데,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인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누구의 인생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요. 아까도 말했듯이 이따금 만나러 오고, 언제까지 고 저를 기억해 주시면 돼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 에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 아니야." 나는 말했다 "하지만 저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망치고 있어요.' "나는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어." "어쩌면 저는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당신은 저를 기다리실 건가요? 10년이고 20년이고 저를 기다릴 수 있어 요?" "나오코는 지나치게 겁을 내고 있군 " 나는 말했다. "어둠이나 괴 로운 꿈 혹은 죽은 사람들의 모습 따위에 나오코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는 일이고, 그런 것들을 잊기만 한다면 반드시 회복 될 거야." "잊을 수만 있다면요." 나오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곳을 나가게 되면 함께 살지 않겠나'?" 나는 말했다. "그러면 나오코를 어둠이나 꿈 따위로부터 지켜줄 수도 있고. 레이코 씨가 없더라도 나오코가 괴로워할 떼 안아줄 수 있으니까." 나오코는 내 팔에 더욱더 몸을 밀착시키며 말했다 "그럴 수 있다 면 접말로 좋겠어요." 그녀는 말했다 우리가 찻집으로 돌아간 것은 세 시 조금 전이었다. 래이코는 책 을 읽으며 시간속에서 흐르는 던랄스의 2번 협주곡을 듣고 있었다. 3악장 첼로의 첫 소절을 그녀는 휘파람으로 따라 불렀다 "박하우스(Will)1Inl 1):1(kh:t~If)와 봤(토rl fbi)tim)이' 하고 레이포 가 말했다. "옛날에는 이 레코드를 닮아버릴 정도로 좋아했죠. 정말로 미쳐버렸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어요. 빠짐없이.' 나오코와 나는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이야기는 제대로 나누었니?" 레이코가 나오코에게 물었다 "네, 아주 많이." 나오코가 대답했다. "나중에 자세히 가르쳐줘. 와타나베 씨가 어떻게 했는지." "그런 짓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나오코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 다 정말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레이코는 나에게 물었다 "하지 않았습니다. " "시시하군 " 레이코는 김이 샌 듯이 말했다. "그렇군요."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저녁 식사의 광경은 대체로 전날과 비슷했다. 분위기도 이야기하 는 소리도 사람들의 표정도 전날 그대로였고, 메뉴만이 바뀌었다. 전날 무중력 상태에서의 위액 분비에 관해서 이야기하던 흰 가운의 사내가 우리 테이블로 와서, 뇌의 크기와 그 능력의 상관 관계에 대 해서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우리는 콩으로 만든 햄버거 스테이크라 는 것을 먹으면서, 비스마르크나 나폴레옹의 뇌의 용량에 관한 이야 기를 들었다. 그는 접시를 옆으로 치우고. 메모 용지에 볼펜으로 뇌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아니. 좀 빠르게 그려졌 군, 이건" 하며 다시 그렸다. 그리하여 그림이 완성되자 메모 용지 를 소중하게 흰 가운의 호주머니에 넣고, 볼펜을 가슴 호주머니에 꽂았다. 가슴 호주머니에는 볼펜 세 자루와 연필과 자가 들어 있었 다. 식사가 끝나자 "이곳의 겨울은 좋습니다 다음 번에 꼭 와주십 시오' 하고 전날과 같은 말을 하고 갔다. '저 사람은 의사인가요, 아니면 환자인가요?" 나는 레이코에게 물었다. "의사 쪽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느 쪽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군요. 어느 쪽이건 그다지 정상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 "의사예요. 비야타 선생님이라고 하죠." 나오코가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 일대에서 가장 머리가 이상해요. 내기를 해 도 좋아요" 레이코가 말했다. "수위인 오무라 씨도 정상이 아니에요." 나오코가 말했다 '음. 그 사람도 이상하지 " 레이코가 브로콜리를 포크로 찍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매일 아침 영문을 모르는 소리를 질러대며 엉망진창으 로 체조를 하거든요. 그리고 나오코가 놀러오기 전에 있었던 기시 타라는 경리 아가씨는 노이로제도 자주하려고 했었고, 포루시마라 는 간호사는 작년에 알콜 중독이 심해져서 해고당했고 말이야." "환자와 스태프를 전부 바꿔버려도 됐을 정도로군요." 나는 감탄 해 서 말했다. "정말로 그래요." 레이코는 포크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당신 도 조금씩 이 세상의 구조를 이해하게 된 모양이로군요." "그런 모양입니다" 나는 말했다. '우리가 정상적인 점은." 레이코가 말했다 "우리들이 정상이 아 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죠 방으로 돌아와 나오코와 나는 트럼프를 쳤고, 레이코는 다시 기 타를 껴안고 바흐를 연습했다 내일 몇 시에 돌아가세요?'" 레이코가 손을 멈추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나에게 물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떠나겠습니다 아홉 시에 버스를 타고, 그러면 아르바이트를 빼먹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유감이로군요, 좀더 천천히 쉬었다 가면 좋을 텐데.' "그랬다가는. 저도 아주 이곳에 붙어 있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듭 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5-.그렇군요." 레이코가 말했다. 그리고는 나오코에게 "그렇지 오카 비에게서 포도를 받아 와야지. 깜밭 잊고 있었네. "함께 잘까요')" 나오코가 물었다 잠깐 와타나베 씨를 빌려도 좋을까?" "그러세요 " 그럼. 둘이서 밤 산책을 갑시다." 레이코는 내 손을 잡으며 말 했다. "어제는 도중에서 중단됐지만, 오늘은 끝까지 제대로 해요." 그러세요. 어때 들으실 대로." 나오코는 콕콕 웃으면서 말했다 바람이 차가웠으므로, 레이코는 셔츠 위에 옅은 청색의 카디건을 입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걸으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는. 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는 "비 넴새가 나는군 요' 하고 말했다. 나는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 았다. 하늘에 정말로 구름이 많아지고, 달도 그 뒤에 가려져 있었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공기 냄새로 날씨를 대충 알수 있어요.' 레 이코는 말했다 스태프들의 주택이 있는 잡목림으로 들어가자. 레이코는 잠시 기 다려 달라며 . 혼자서 어느 집 앞으로 가더니 초인종을 눌렀다. 부인 인 듯한 여자가 나와서 레이코와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콕콕 웃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비닐 봉지를 들고 나왔다. 레이 코는 그녀에게 고마워요.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인사를 한 후 나에 게로 돌아왔다 "이것 봐요, 포도를 얻어왔어요." 레이코는 비닐 봉찌 속을 보여 주었다. 봉지 속에는 포도송이가 꽤 많이 들어 있었다. "포도 좋아하세요'?" "좋아합니다. "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맨 위의 한 송이를 꺼내어 내 손에 건네주었다 "이건 씻 은 거니까 그냥 먹어도 돼요." 나는 걸으면서 포도를 먹고는, 껍질과 씨를 땅바닥에 내뱉었다. 싱싱한 포도였다. 레이코도 한 송이 꺼내어 먹었다. "그 집의 사내아이에게 이따금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있어요. ) 그래서 답례로 나한테 이것저것 줘요. 어제 와인도 그렇고. 시내에 서 간단한 쇼핑을 부탁하기도 하죠." "어제 하시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군요." "좋아요." 레이코는 말했다 "하지만 매일 밤 귀가가 늦어지면 나 오코가 우리 사이를 의심하지나 않을까 모르겠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이야기의 속편을 듣고 싶군요. 'OK, 그럼 이불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해요.오늘은 제법 쌀쌀하 니 까." 그녀는 테니스 코트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 좁은 계단을 내려가 더니, 작은 창고가 몇 개 늘어서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가장 앞쪽의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전등 스위치를 켰다 "들어 와요. 아무것도 없는 곳이 지만." 창고 안에는 크로스컨트리용 스키와 느혹과 선박이 한 벌 가지런 히 있고. 바닥에는 눈을 치우는 도구와 제설용 약품 등이 쌓여 있었 다. '옛날에는 곧장 이곳에 와서 기타 연습을 했어요. 혼자 있고 싶을 때에는 아담하고 좋은 곳이죠?" 레이코는 약품 자루 위에 앉더니, 나에게도 옆에 앉으라고 말했 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연기가 좀 차겠지만, 담배를 피워도 좋을까요?" "좋습니다. 피우세요." 나는 말했다. "이것만큼은 끊을 수가 없어요 " 레이코는 얼굴을 징그리며 말했 다. 그리고 맛있다는 듯 담배를 피웠다. 이만큼 맛있게 담배를 피우 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나는 한 알 한 알 천천히 포도를 먹으면서 꺾질과 씨를 쓰레기통 대 신 사용하는 양철통에 버렸다. '어제는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레이코가 물었다 "폭풍이 불던 날 땀 바다제비 와 김을 따러 험한 절벽을 올라가는 데 까지 했습니다 " 나는 대답했다. "당신은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하니까 이상해요." 레이코는 질렸 다는 듯이 말했다 "매주 토요일 아침에 그 여자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는 데까지였죠. 분명히?" "그렇습니다. " "이 세상 사람들은 남에게 무언가 잘 가르치는 사람과 잘 가르치 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나는 아마도 전자에 속하리라고 생각 해요." 레이코는 말했다 "젊었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점도 있었겠죠, 어 느 정도 나이가 들어 자신을 파악하게 되자.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 예요 나는 남들을 잘 가르치는 솜씨가 있다고. 난, 정말로 솜씨가 있어요 '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말했다. "나는 내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해서 훨씬 참을성이 있고, 내 자신 보다는 타인에 대해서 모든 것을 좋은 방면으로 충고 할 수 있어요. 난 런 타입의 인간이거든요. 말하자면 성냥갑 옆구리에 붙어 있는 깔깔한 빨간 탁피 같은 존재예요. 하지만 그까짓 겄 상관 없어요. 그 런 면이 특별히 싫은 건 아니에요. 난. 이류인 성냥개비도 나도 일류 인 성냥갑쪽이 좋으니까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글쎄요. 그 아이를 가르치게 된 이후일 거예요 그 전에도 아르바이트 삼아 서 몇 사람인가 가르친 적이 있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죠 그 아이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어 머나, 내가 이토록 남들을 잘 가르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을 정도 로 레슨이 좋았죠. 어제도 말했듯이 테크닉이라는 점에서 그 아이의 피아노 솜씨는 대단하지 않았고, 음악을 전공하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도 부담 없이 가르칠 수 있었죠. 게다가 그 아이가 다니던 학교는 어느 정도 의 성적만 되면 대학까지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진학할 수 있는 여학 교라서, 그다지 힘들여 공부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애 어머니도 '쉬엄쉬엄 피아노라도 배워라'라는 식이었죠. 그러니까 나도 그 아 이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강요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았으니까요. 입으로는 싹싹 하게 '네, 네' 하지만, 절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밖에 하지 않는 아이예요. 그러니까, 우선 그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치도록 내버려 두죠. 백퍼센트 자기 마음대로. 그 다음에 내가 같은 곡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연주해서 들려주는 1예요. 그리고 둘이서 어떤 게 좋다는 둥 마음에 든다는 둥 토론을 하죠 그리고는 그 아이에게 다시 한번 연주하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먼저보다 훨씬 좋아지거든요. 좋은 점을 발견해서 잘 이용하는 거죠." 레이코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 끝의 불 붙은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잠자코 포도를 먹고 있었다 "나도 제 음악적 소질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아이는 내 이상이었어요. 아깝다고 생각했죠. 어렸을 때부터 좋은 선생님 밑에 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더라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텐데 하 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요컨대 그 아이는 본격적인 훈 련을 겪어 낼 수 없는 아이였어요.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죠.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 도. 그것을 체계화시키는 노력을 하 지 못하고, 재능을 작게 썰어서 뿌리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 나 도 그런 사람들을 여럿 보아왔으니까 처음에는 다들 굉 장하다고 생 각하죠. 예를 들면 아무리 어려운 곡이라도 악보를 보면 즉각 연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도 제법 능숙하게. 보는 쪽이 압도당하게 되죠. 나 같은 것은 근처에도 못 간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뿐이에요. 그들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해요. 어째서 일까요? 나 아갈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노력하는 훈련이 몸에 배어 있 지 않기 때문이에요. 결국 자신의 늠력을 망쳐버리고. 어설프게 재 능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노력하지 않아도 제법 솜씨를 부릴 수 있 는 덕분에 다들 대단하다고 칭찬해주니까. 노력이라는 것을 얕잡 아 보는 거예요. 다른 아이들이 3주일 걸리는 곡을 그 절반 만에 마 스터하잔아요 그러면 선생님도 이 아이는 됐다면서 다음 단계로 넘 어가는 거예요. 그것도 역시 남들의 절반 만에 마스터해버리죠. 다 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리하여 고친 출현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 인간 형성에 필요한 요소를 한 가지 빼먹게 되죠. 그건 비극이에요. 저에게도 그런 적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제 선생님이 몹시 엄격하셔서 이 정도에서 끝났지만요 하지만 그 아이에게 레슨을 하는 일은 즐거웠어요. 고성능 스포 츠 카를 타고 고속 도로를 질주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손가락을 약 간 움직이기만 해도 잽싸게 반응하니까요. 다소 지나치게 잽싸다고 여겨지는 것도 있지만. 그런 아이를 가르칠 때 주의할 점은 너무 칭찬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칭찬받는 데에 익숙해 져 있으니까.아무리 칭찬을 해도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거 든요. 이따금 요령 있게 칭찬을 해줘야 충분해요. 그리고 우격다짐 으로 강요하지 말 것. 스스로 선택하도록 내버려둘 것. 자꾸만 앞으 로 나아가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생각하게 할 것. 그겄뿐이에 요. 그러면 상당한 성과를 올릴 수 있어요." 레이코는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밟아서 껐다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레슨이 끝나면 차를 마시며 이야 기를 했어요. 이따금 재즈 피아노를 흉내내어 가르치기도 하며 이 것이 버드 파우엘, 이것이 셀로니이-스 몽크라고 가르쳐주기도 했죠. 하지만 대체로 그 아이 혼자서 이야기를 했어요. 이야기를 아주 조 리있게 잘해. 나도 모르게 그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어요. 어제도 말 했듯이 대부분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어요. 관찰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데다가 신랄하면서도 유머가 있어서 , 듣 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거든요. 어쨌든 감정을 자극해서 사람을 움 직이는 기술이 대단했죠. 더구나 자신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사 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가능한 한 교묘하고 유효하게 그 능력을 이 용하려 드는 거예요. 상대방을 화나게 하기도 하고. 슬프게 하기도 하고, 동정하게끔 만들기도 하고, 낙담시키기도 하고, 기쁘게 하기 도 하고. 자유자재로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하는 거예요. 그것도 자 신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농락 하기도 하죠. 물론 그런 것들도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될 뿐. 당시에 는 모르는 거예요." 레이코는 고개를 젓고 나서 포도를 몇 알 먹었다 "일종의 병이에요" 레이코는 말했다 "병에 걸려 있는 거예요 그것도 썩은 사과가 주위의 사과들을 모두 망쳐 놓는 듯한,그런 병 이에요 그리고 그런 그녀의 병은 이미 아무도 고칠 수가 없었어요. 죽을 때까지 그런 식으로 앓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생각하기에 따 라서는 불쌍한 아이예요. 나도 피해자가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생각 했을 거예요. 이 아이도 희생자의 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다시 포도를 먹었다.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눈치 였다 "일단은 6개월 가량 그런 대로 즐겁게 지냈어요. 이따금 깜짝 놀 랄 때도 있었고, 어쩐지 이상하게 여겨지는 때도 있었죠 나중에 이 야기해보고는. 그 아이가 누군가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하 고 무의미하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격렬한 악의를 품고 있다는 사 실을 알게 되어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우도 있었고. 너무나도 눈치가 빨라서 이 아이는 속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고 궁금 해 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결점이 있게 마련이잖아 요? 더구나 나는 일개 피아노 교사에 불과하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잖아요' 인간성이라든가 성격이라든가, 제 대로 연습만 시켜준다면 그걸로 오케이 잖아요? 게다가 난 사실 그 아이를 꽤 좋아했어요. 단지, 그 아이에게 개인적인 사항은 가능한 한 이야기하지 않도 록 했어요. 나는 왠지 본능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고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그 아이가 나에 관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도 괸장히 알고 싶어했지만-중요한 것들은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어떤 식으로 자랐다는 둥 어느 학교에 다녔다는 둥, 대충 그런 정도 의 것들이죠.나에 관해서 알아봤자 아무 쓸데없어, 시시껄렁한 인 생이니까, 평범한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고. 가사 일로 정신이 없다 는 식으로 대답했어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며 그 아이 는 네 얼굴을 잠자코 들여다보는 거예요, 매달리듯이 . 그렇게 쳐다 보면, 나는 가슴이 뜨끔해지죠. 물론 불쾌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에 요 그래도 필요이상의 것들은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5월의 어느날이었던가 레슨을 하는 도중에 아이가갑자기 기 분이 언짢다고 말했어요. 얼굴을 보니 정말로 새파랗게 질려서 땀을 흘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쩌나, 집으로 돌아가겠니? 하고 물 으니까, 잠시 누워 있게 해주세요. 그러면 좋아질 거에요. 하고 말하 는 거예요 그래, 이쪽으로 와서 내 침대에 누워라,하며 그 아이를 안다시피 해서 내 침실로 데려갔어요. 우리 집의 소파는 아주 소형 이었으니까. 침실에 눕히는 수밖에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폐를 끼 쳐 드려서 . 하고 .그 아이가 말하기에 , 괜찮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 아도 돼 하고 나는 대답했죠 어때. 마실 거라도 줄까' 하고 물으니 까.아니에요. 잠시만 제 옆에 함게 계셔주시면 되요. 하고 그 아이 가 말하더군요. 좋아. 곁에 있어 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하고 나는 대답했어요. 잠시 후 '죄송하지만, 등을 좀 쓰다듬어주시 겠어요?' 하고 그 아 이가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보니까 몹시 땀을 흘리고 있 어서 , 나는 등을 열심히 어루만져줬어요. 그러자 '죄송하지만, 브레 지어를 벗겨주시겠어요, 갑감하니까요'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 서 난 어쩔 수 없으니까 벗겼죠 몸에 꽉 끼는 셔츠의 단추를 풀 고. 등 뒤의 고리를 벗겼어요. 열세 살치고는 가슴이 큰 아이더군요. 내 두 배는 됐어요. 브래지어도 주니어용이 아니라 아주 고긁스런 성인용이었어요.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잖아요? 나는 바보처 럼 계속해서 등을 어루만져줬죠. 죄송해요 하고 그아이가 정말로 송구스럽다는 듯한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나는, 신경쓸 거 없어 괜 찮으니까 하고 대답했어요." 레이코는 발 밑으로 탁탁 담뱃재를 털었다 나도 그때는 포도를 먹다가 말고,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아이가 훌쩐훌쩍 울기 시 작했어요. '아니. 왜 그러니?' 하고 나는 물었어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니잖아. 솔직하게 이야기해봐 ' '이따금 이렇게 돼요.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외롭고, 슬프 고, 의지할 사람이 전혀 없고, 아무도 저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으니 까.그것이 견딜 수 없어서,이렇게 돼요 밤에도 제대로 잘수 없고, 식욕도 전혀 없고. 저는 선생님께 오는 것만이 유일한 즐거움이에 요 '그럼.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말해 봐 들어줄 테니까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거예요, 하고 그 아이는 말했어요. 부모님 을 사랑할 수 없고 부모님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아빠는 다른 여자가 있어서 제대로 집에 들어오지 않고, 엄마는 그래서 미 친 듯이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며 매일같이 때린다고 그 아이는 말했 어요 집에 돌아가는 게 괴롭다고. 그렇게 말하며 엉엉 우는 거예요. 그렇게 집에 돌아가는 게 괴롭다면, 레슨받을 때 말고도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말했쇼. 그러자 그 아이는 나에게 매달려서 '정말로 죄 송해요.선생님이 없으면. 저는 어떻게 해야좋을지 모르겠어요. 저 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선생님께 버림받으면, 저는 갈곳이 없어요' 하고 말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그 아이의 머리를 안고 쓰다듬어줬죠, 괜 찮아 괜찮아 하며 . 그때 그 아이는 내 등에 이렇게 손을 돌려서, 쓰 다듬고 있었어요. 그러자 점차로 나도 기분이 이상해졌어요. 몸이 어쩐지 뜨거워지는 것이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림에서 도려낸 듯이 예쁜 여자아이와 둘이 침대에서 껴안고 있으면서 그 아이가 내 등을 쓰다듬어 주는데, 너무나 본능적인 몸놀림이었으니까요. 정말 대단 했어요 정신이 들어보니 그아이는 내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벗 기고는, 내 젖가슴을 애무하고 있는 거예요. 그제야 저는 깨달았죠. 이 아이는 본격적인 래즈비언이라고. 저는 과거에도 한 번 당한 적 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상급생에게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안 돼, 그만 둬 하고 말했죠. '제발. 잠깐이면 돼요. 저는 정말 외로워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정말로외로워요. 선생님밖에 없어요. 저를버리지 말아주세요.' 그 리고 그 아이는, 내 손을 잡아서 자신의 가슴으로 갖고 갔어요. 정말 로 모양이 좋은 젖가슴이라, 그걸 만지니까. 어쩐지 가슴이 설레는 느낌이더군요. 여자인 나조차도 말이에요.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서. 안 돼. 이러면 안 된다니까 하고 바보처럼 뇌까릴 뿐이었죠. 어 찌된 일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때에는 힘껏 밀어 젖 힐 수 있었는데, 그때에는 전혀 그럴 수가 없었어요.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요. 아이는 내 젖꼭지를 빨면서 '외로워요. 선생님밖에 없어요. 버리지 말아주세요. 정말로 외로워요' 하고 게속 말했고 나는 안 돼 안 돼 하는 말만 계속했죠. 레이코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난.남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처음이에요." 레이 코는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당신에게는 이야기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몹시 부끄럽군요, "죄송합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 외에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가 잠시 동안 게속되다가. 점차로 오른손이 밑으로 내 려왔어요. 그리고 팬티 위로 그곳을 만졌어요 그때 나는 이미 그곳 이 참을수 없을 정도로 젖어 있었어요.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토 록 흥분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사실, 나는 그때 까지 자신이 심 적으로 결백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러 니까 그렇게 흥분되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다소 망연자실했지 요. 이어서 펜티 속으로 그 아이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들 어와,그리고는 그건 대충 알겠죠?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내 입으 로 할 수 없어요. 그건 남자들의 억센 손가락에서 느끼는 것과 전혀 달랐어요. 진짜 굉장했죠. 마치 부드러운 털로 간질이는 듯이 나는 정말로 머리의 퓨즈가 터져버릴 것 같았어요. 하지만 난, 정신이 멍 한 가운데에서도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 이런 짓을 하면 계속해서 이런 것을 하게 될 테고, 그런 비밀을 지니게 된 다면 내 머리는 다시 혼란에 빠질 것이 뻔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 을 했어요. 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면 어쩌나 하고. 딸아이는 토요 일이면 세 시까지 외갓집에서 놀도록 되어 있지만. 만일 무슨 일이 생겨서 갑자기 돌아오거나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 래서 난. 있는 힘을 다해서 일어나 '그만둬, 제발!' 하고 외쳤어요. 하지만 그 아이는 멈추지 않았어요. 그 아이는, 그때 제 팬티를 벗기고 입으로 애무하고 있었고. 나는 부끄러워서 남편에게조차 그 런 짓은 거의 못하게 했는데, 열세 살 짜리 여자아이가 내 그곳을 마 구 핥는 거에요. 난 감당할수 없었어요.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그 기분이 정말 천국에라도 올라가듯이 굉 장했거든요. 그만두라니 까!'하고 다시 한번 소리치며. 그 아이의 뺨을 때렸 죠. 힘껏. 그러자 그 아이는 중단했어요. 그리고 몸을 일으켜 가만히 나를 보는 거예요. 우리는 그때 두 사람 모두 완전히 발가숭이가 되 어 ,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 아이늑 열세 살이고. 나늪 서른한 살이었지만, 그 아이의 몸을 보고 있노라니. 난 어쩐지 압도당하는 느낌이었어요. 지금도 생생히 기억 하고 있어요. 나에게는 그것이 열세 살 소녀의 육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아이 앞 에 서니까. 내 몸은 마구 울음이 터져 나올 듯이 비참하게 여겨지더 군요. 정말이에요." 나는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잠자코 있었다 "어째서냐고 그 아이는 물었어요. '선생님도 이런 것을 좋아하시 잖아요?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좋아하시죠?그 정도는 알 수 있어요.남자와 하는 것보다 훨씬 좋죠? 이렇게 젖어 있잖아요? 제가 훨씬 좋게 해드릴게요. 정말이에요. 몸이 녹아버릴 정도로 좋 게 해드릴게요. 괜찮겠죠' 그런데 정말 그 아이가 말한 대로였어 요. 정말로. 남편과 하는 것보다도 그 아이와 하는 편이 훨씬 좋았 고, 더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죠 '우리 . 일주일에 한 번 이걸 하도록 해요. 한 번이면 되요. 아무도 모 를 거예요 선생님과 저만의 비밀로 해요' 하고 그 아이는 말했어 요. 하지만 나는 일어나서 가운을 입고. 일딴 돌아가진. 두 번 다시 오지마. 하고 말했어요. 그 아이는 저를 잠자코 쳐다봤어요. 그 눈은 평소와는 달리 전혀 입체감이 없었어요. 마치 두터운 종이에 그림 물감으로 그려 놓는 것처럼 밋밋했어요. 원근감이 없고. 잠시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 잠자코 자기 옷을 주워 모아, 마치 보라는 듯 이 천천히 하나씩 입고는 피아노가 있는 거실로 돌아가. 가방에서 브러시를 꺼내어 머리를 빗고, 손수건으로 입술의 피를 닦은 뒤. 구 두를 신고는 나가버렸어요. 나갈 때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생님은 레즈비언이에요. 정말이에요.아무리 속여봤자 죽을 때 까지 바뀌지 않을 거예요'라고" "정말로 그렇습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레이코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잠시 생각에 잔겼다. "예스이기도 하고, 노이기도 해요. 남편과 할 때보다 그 아이와 할 때 더욱 느꼈 으니까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한때는 스스로도 레즈비언이 아 닌가 하고, 역시 심각하게 고민했죠. 이제까지 사실을 깨닫지 못 했을 뿐이라고 말이에요. 물론 그러한 경향이 저의 내부에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확한 의미 에서는 나는 레즈비언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쪽에서 여자를 보고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죠. 아시 겠어요?" "단지 일부분의 여자가 나에게 감응하고,그 감응이 나에게 전해 져 올 뿐이죠. 그런 경우에 한해서 나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까 예를 들어 나오코를 안는다고 해도, 나는 특별한 것을 느끼지 않 아요. 우리는 날씨가 더우면 방 안에서 거의 발가숭이로 지내고. 목 욕도 함께 하고. 때로는 같은 이불 속에서 자기도 하지만 아무 일도 없어요. 아무것도 느끼지 않거든요. 그 아이의 경우도 몸은 정말로 예쁘기는 하지만. 글쎄요. 그것뿐이에요. 참. 우리는 한 차례 레즈비 언 놀이를 한 적이 있어요. 나오코하고 나하고. 이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겠죠? "말씀해 주십 시오 " "내가 이 이야기를 나오코에게 했을 때 우리는 무슨 이야기라 도 하거든요 나오코가 시험삼아 내 몸을 만저 줬어요. 둘이서 발 가숭이가 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이죠. 하지만 느끼지 못했어 요. 전혀. 너무나 간지러워서 웃을 지경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근 질근질해요. 나오코는 그런 방면에는 정말로 소질이 없으니까. 어때 요. 약간은 안심했나요?" '그렇군요. 솔직히 말해서 "대충 그런 이야기예요." 레이코는 새끼손가락으로 눈썹을 긁으 며 말했다. '그 아이가 나가버리자, 난 의자에 앉아서 잠시 동안 멍하니 있었 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축 처져 있었어요. 몸의 깊숙한 곳에서 심 장 뛰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려오고, 입안이 바싹 말랐어요 그러나 딸 아이가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어 목욕을 했어요 어쨌든 그 아이가 핥았던 몸을 깨끗이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하지만 비 누칠을 해 아무리 힘껏 문질러도, 끈적거리는 감촉은 사라지지 않더 군요. 아마도 기분 탓이 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날 밤, 남편에게 안아 달라고 했어요. 그 불결함을 씻어버릴 작정으로. 물 론 남편에게는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죠 도저히 밝히지 못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할 수가 없었어요. 다만 안아 달라고 하고늪. 섹스를 했을 뿐이에요. 평소보다도 오랫동안 천천히 해달라고 했어 요. 남편은 정말로 신중하게 해주었죠 아주 오랫동안. 그러자 나는 진짜 절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게 만족한 것은 결혼 이후 처음 이었어요. 왜 그랬다고 생각하세요? 그 아이의 손가락 감촉이 내 몸 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뿐이 에요. 정말 이 이야기 부끄럽 군요. 땀이 다- 나는군요. 섹스를 해달라느니 절정에 달했다느니 " 레이코는 다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하지만,그래도 역 시 소용이 없었어요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남아 있는 거예 요, 그 아이의 감촉이. 그리고 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머릿 속에서 메아리처럼 웅웅 울려 퍼지는 거예요. 그 다음 주 토요일에는 그 아이가 오지 않더군요. 만약 오면 어쩌 나하고,가슴을 두근거리며 집에 있었죠.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 더군요 하지만 오지 않았어요. 물론 올 수가 없었겠죠. 자존심이 센 아이였는데,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다음 주도. 또 다음 주도 오지 않은 채 한달이 지났어요.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리라 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어요. 혼자 집에 있으면 어쩐 지 그 아이의 느낌이 문득 내 주위에 느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진 정되지 않는 거예요. 피아노도 칠 수 없고, 깊은 생각을 할 수도 없 고 무엇을 하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거예요. 하여튼 그런 식으 로 한 달 가량 지난 어느 날이었어요. 바깥을 걷고 있으려니까 무언 가 이상하더군요. 동네 사람들이 묘하게 나를 의식하는 거예요. 나 를 보는 눈이 어쩐지 기묘하고. 서먹서먹하더라구요. 물론 인사 정 도는 하지만, 목소리도 태도도 예전과는 다른 거예요. 이따금 우리 집에 놀러 오던 옆집 아주머니도 왠지 나를 피하는 느낌이었고. 하 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죠. 그런 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정신병의 초기 증세이니까. 며칠 뒤 나와 친하게 지내는 내 또래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 왔어요. 어머님이 잘 아시는 분의 따님이고 아이들이 같은 유치원을 다녀서 우리는 비교적 친한 편이었어요.글쎄,그 아주머니가 당신 에 관한 나쁜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알고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나 는 모른다고 대답했죠. '어떤 소문인데요?' '어떤 소문이냐고 물어도, 대답하기 곤란한 소문이에요 '대답하기 곤 란하다니. 이미 이야기를 꺼 냈잖아요. 전부 말씀하 세요.' 그래도 그녀는 아주 꺼려했지만, 결국은 전부 이야기했어요. 처 음부터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온 거니까, 어차피 털어놓게 마련 이었지만요. 그녀의 말에 의하면. 소문이란 네가 정신병원에 몇 번 이나 들어갔을 정도로 악명 높은 동성애자로,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다니던 여자아이를 발가벗기고는 못된 짓을 하려고 했는데, 그 아이 가 반항하자 얼굴이 부어오르도록 때린다는 거예요. 이야기가 터무 니없이 날조된 것도 놀라웠지만, 내가 입원했던 사실을 어떻게 알았 는가 하는 점이 더욱더 놀라웠어 요. '저는, 당신에 관해서 옛날부터 알고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아니 라고 했어요' 하고그여자가말하더군요. '하지만.그아이의 부모 가 그렇게 믿고서 , 동네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퍼뜨리고 있어요. 딸아이가 당신에게 못된 짓을 당했다고 해서 , 당신에 관해서 알아보 니까 정신병 경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이죠.' 그녀의 이야기에 의하면,어느 날- 즉 그사건이 있었던 날이죠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그 아이가 피아노 레슨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업마가 자세히 물어봤던 모양 이에요. 도대체, 믿어 지세요? 물론 이야기를 날조하기 위해서 그 아 이가 혼자서 전부 꾸며낸 거예요. 블라우스에 일부러 피를 묻히고 단추를 뜯어내고,브래지어의 레이스를 찢고.혼자서 엉엉 울어 눈 을 빨갛게 만들고.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다음 집으로 돌아 가 거짓말을 마구 늘어놓은 거예요. 그런 모습이 눈에 선하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의 말을 믿은 사람들을 책망할 수 는 없죠. 아마 나라도 믿었을 거예요, 만일 그런 입 장에 놓였더라면. 인형처럼 예쁘고 악마처럼 말주변이 좋은 그 아이가 훌쩍훌쩍 울면 서 '싫어요, 저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부끄러워요' 하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그야 모두들 감쪽같이 속아넘어가죠. 더구나 불리하게도,내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는 것은사실이잖아 요? 그 아이의 얼굴을 세게 때린 것도 사실이고. 그렇다면 대체 누가 내 말을 믿어 주겠어요? 믿어주는 건 고작해야 남편 정도겠죠. 며 칠인가 몹시 고민한 끝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남편에게 말했더 니 , 남편은 믿어 주더군요. 물론 난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남편에게 이야기했어요 레즈비언 같은 짓을 당했다. 그래서 때렸다고. 물론 느꼈던 일까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좀 난처하더군요. '말도 안 돼. 내가 그 집에 가서 직접 말을 할 테 야' 하고 남편은 마구 화를 냈어요. '당신은 나와 결혼해서 자식도 있잖아. 어쌔서 레즈비언이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지? 그런 얼토 당토않은 소리가 어디 있어?'라구요. 하지만 난. 남편을 말렸어요. 가지 말라고. 그만두세요 그런 짓 을 했다가는 우리의 상처가 깊어질 뿐이니까요, 하며. 틀림없이 그 래요,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 아이가 마음속으로 병들어 있다 는 사실을. 나도 그런 병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봐왔으니까 잘 알아 요.그 아이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썩어 있어요 그 고운 피부를 한 껍질 벗기면 속은 전부 썩은 고기예요. 이렇게 말하면 너무 지나친 것 같지만, 정말로 그래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일단 그런 사실을 모를 테니까,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우리가 이길 수는 없었어요, 그 아이는 어른들의 감정을 다루는 데 능숙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이렇다 할 무기도 없었으니까. 도대체 열세 살짜리 소녀가 서른이 넘은 여자에게 동성애를 하자고 제안했다는 말을 누가 믿어주겠어 요?무슨 말을 하건, 세상사람들이란 자신이 믿고 믿은 것밖에 믿 지 않으니까요. 발버둥 칠수록 우리가 훨씬 불리하게 될 뿐이었죠. 이사를 가요, 하고 내가 말했어요. 그 방법밖에 없어요, 더이상 이곳에 있으면 너무나 긴장이 되어, 머리의 나사가 다시 빠져버릴 거예요 지금도 난 몹시 흔들리고 있어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가요. 하고. 하지만 남편은 움직이려 하지 않더군 요. 그 사람, 상황이 얼마나 중대한지 아직 잘 모르고 있었어요. 남 편은 회사 일이 재미있어서 신나 하던 때였고, 정 장사가 피운 보잘 것없는 집이지만 그래도 간신히 집을 장만했고, 딸아이도 유치원에 적응하기 시작했을 때였으니까. 아니 잠깐만 그렇게 갑자기 이사할 수는 없잖아 하고 남편은 말했어요. 직장도 쉽사리 찾을 수 없고. 집도 팔아야 하고, 아이의 유치원도 알아봐야 하니까 아무리 서둘 러도 두 달은 걸릴 거야, 라고. 안 돼요 그래서는,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 을 거예요, 하고 나는 말했죠. 겁주는 게 아니라 이건 사실이에요, 하고. 나는 잘 알아요, 하고. 나는 그 무렵 귀가 울리는 증세에 환청 과 불면 등의 현상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거든요. 그렇다면 당신 먼저 어디든지 가 있어 , 나는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고 갈 테니까, 하 고 남편이 말했어요 '안 돼요' 하고 나는 거절했죠 '혼자서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요. 지금 당신과 헤어지면 나는 산산조각이 날 거예요. 난 지금 당신이 필요해요. 같이 있어주세요.' 남편은 나를 안아줬어요. 그리고는 잠시만 참아 달라는 거였어 요. 한 달만 참아 달라고. 그동안에 내가 전부 알아서 할 테니까. 일 도 정리하고, 집도 팔고, 아이의 유치원도 알아보고. 새로운 직장도 찾을 테니까 어쩌면 호주에 일거리가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한 달만 기다려줘.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테니까 하고. 그 말을 듣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할 수록 점 점 고독해질 뿐이니까." 레이코는 한숨을 쉬며 천장의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한 달이 가지 못했어요. 어느 날 머리의 나사가 획 빠져 버린 거예요! 요번에는 몹시 심했어요,수면제를 먹고 가스를 켰어 요. 하지만 죽지 못하고, 정신을 차리니 병원 침대였어요 그걸로 끝 이었어요. 몇 달인가 지나서 좀 안정이 되고 사고력이 생겼을 무렵. 이혼해 달라고 남편에게 말했어요. 그것이 당신을 위해서도 자식을 위해서도 가장 좋을 거라고 이혼할 생각은 없어.하고 남편이 대답 하더군요 '다시 한번 시작할수 있어 새로운 곳으로 가서 셋이서 새 출발 을 하자구' 하고 '이미 늦었어요' 하고 나는 말했어요. '그때 전부 끝나버린 거예 요. 한 달만 기다려 달라고 당신이 말했을 때 만약 정말로 새 출발 을 원한다면 당신은 그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요. 어디로 가 건, 아무리 먼 곳으로 이사하건, 다시 똑같은 일이 생길 거예요.그 리고 나는 다시 똑같은 요구를 하며 당신을 괴롭히게 될 것이고 난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혼했죠.아니 내 쪽에서 억지로 이혼한 거예요 그 사람은 2년 전에 재혼했지만, 난 지금도 그렇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이에요.그 무렵에는 자신의 일생이 늘 이런 식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러한 것에 다시는 아무도 끓 어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언제 머리의 나사가 풀릴지 몰라서 겁을 먹으며 사는 생활을 누구에게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남편은 나에게 아주 잘해주었어 요. 그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성 실한 사람인 데다가, 강인하고 참을성이 있어서, 나로서는 이상적인 남편이었어요. 그 사람은 나를 고쳐보려고 최대한 노력했고, 나도 나아지려고 노력했어요. 남편을 위해서도 자식을 위해서도. 그리하 여 나는 이미 나았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결혼해서 6년. 행복했죠. 남편은 몇퍼센트까지 완벽하게 해주었어요. 하지만 1퍼센트가 그 1퍼센트가 어긋났던 거예요. 결국은 나사가 획 빠졌죠. 그래서 우리가 쌓아올린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 완전히 제로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 아이 하나 때문에 ." 레이코는 발로 끈 담배꽁초를 비벼서 양철 깡통에 버렸다. "너무하잖아요? 우리가 그토록 고생해서, 모든 것을 조금씩 쌓아 올렸는데. 무너지는 것은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예요 눈 깜짝할 사 이에 무너져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거예요 레이코는 일어나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방으로 돌 아가요. 너무 늦었으니까." 하늘은 아까보다도 훨씬 어둡게 구름에 뒤덮여. 달도 전혀 보이 지 않았다. 이제는 나도 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손에 든 공기 속 의 싱싱한 포도 냄새가 비 넴새와 어울려 풍겼다. "그러니까 난 이곳을 좀처럼 나갈 수 없어요." 레이코는 말했다 "이곳을 나가서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것이 두려워요. 여러 사람들 과 만나서 여러 가지 일을 겪는 게 두려워요." "그 기분은 잘 알겠습니다. " 나는 말했다. "하지만 래이코씨라면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바깥에 나가서 잘 적응하리라고 " 레이코는 싱긋 웃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오코는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다리를 포갠 채, 손가 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은, 마치 머리로 들어오는 어휘를 손 가락으로 확인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고. 전등 불빛이 미세한 분말처럼 그녀의 몸 주위에 맴돌고 있었다. 레이코와 둘이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 눈 뒤에 나오코를 보니 . 그녀가 얼마나 젊은가를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늦어져서 미안해 " 레이코가 나오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 다 "둘이서 재미있었나요?" 나오코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 "물론이 지." 레이코가 웃으면서 대답 했다. "뭘 했어요, 둘이서?" 나오코가 나에게 물었다.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짓." 나는 대답했다. 나오코는 콕콕 웃고는 책을 놓았다.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포 도를 먹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니 마치 이 세상에 우리 세 사람밖에 없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나오코가 말했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면, 우리 세 사람은 영원히 이렇게 하고 있을 텐데 " "그러면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동안, 나는 눈치 없는 노예처럼 길다란 손잡이가 달린 부채로 마구 부쳐대거나 기타로 배경 음악을 연주하거나 하겠지? 그런 건 나는 싫어 " 레이코가 말했다. "어머나, 이따금 빌려 드릴게요." 나오코가 웃으면서 말했다. 음, 그렇다면 나쁘진 않지 " 레이코는 말했다. "비야 내려라!"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이따금 천둥도 쳤다. 포도를 다 먹고 나자 레이코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침대 밑에서 기타를 꺼내어 연주했다. '데사피너드'f) '이파네마의 소녀' 를 연주한다음,이어서 바카라크의 곡. 그리고 레논파 배카트니의 곡을 연주했다. 레이코와 나는 둘이서 다시 와인을 마시고,와인이 떨어지자 물통에 남아 있 던 브랜디를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는 아주 친밀한 기분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이대로 계속 비가 내려준다면 좋을 텐데 하고 나도 생각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러 와주시겠어요" 나오코가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물론 오지." "편지도 주시고?' "매주 보낼게." "나에게도 가끔 보내 주겠어요?" 레이코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보내겠습니다. 기꺼이 " 나는 대답했다. 열한 시가 되자 레이코가 나를 위해서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소파 를 뉘어 침대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 고는 전등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 배낭 속 에서 손전등을 꺼내 비추고 마의 산을 읽었다 열두 시 가까이에 침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나오코가 나와서 내 곁으로 들어왔다. 어 젯밤과는 달리 나오코는 여느 때의 나오코였다. 눈빛도 초롱초롱했 고 동작도 민첩했다. 그녀는 내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는 "왠지 잠 이 오지 않아요'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대답 했다. 나는 책을 놓고 손전등을 끈 다음, 나오코를 껴안고 입을 맛추 었다. 빗소리가 부드럽게 우리들을 에워쌌다 "레이코 씨는?" '괸찮아요. 잠에 푹 빠져 있으니까 그 사람은 일단 잠이 들면 도 중에 깨는 일이 없어요." 나오코는 말했다. "정말로 다시 만나러 와 주실 거예요?" "올 거야"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데도" 나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코의 젖가슴 모양이 뚜 렷하게 내 가슴에 느껴 졌다. 나는 가운 위로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어깨에서 등으로. 그리고 거기로 나는 천천히 몇 번이고 손을 움직 이며 그 몸의 곡선과 부드러운 감촉을 자신의 머릿속에 주입시킨다 잠시 동안 그런 식으로 부드럽게 서로 포옹한 후 나오코는 내 이마 에 살짝 입을 맞추더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나오코의 옅은 청 색 가운이 마치 물고기처럼 매끄럽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안녕." 나오코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조용히 잠이 들었다. 비는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어젯밤과는 달리,눈 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가을비였다. 고인 물 위로 떨어지 는 빗방울과 처마로 흘러내리는 낙숫물 소리로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잠에서 깼을 때 창 밖에는 뿌연 안개가 끼여 있었지만, 해가 뜨면서 안개는 바람에 밀려가고. 잡목 림과 산의 능선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아침과 마찬가지로 우리 셋이서 식사를 하고. 새장으로 갔 다. 나오코와 레이코는 모자가 달린 노란 비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스워ㅐ터 위에 방수 윈드 재킷을 입었다. 공기는 축축하고 차가웠다. 새들도 비를 피하는지 새장 안쪽에 모여서 서로 몸을 기댄 채로 잠 자코 있었다 "춥군요. 비가 내리니까." 나는 레이코에게 말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조금씩 추워 지다가, 어느 날엔가 눈으로 바뀌 죠" 레이코는 말했다. "일본해에서 밀려오는 구름이 이 부근에 잔 뜩 눈을 뿌리고는 저편으로 빠져나가니까요.' "새들은 겨울에 어떻게 합니까? "물론 실내로 옮기죠. 봄이 되어 얼어붙은 새들을 눈 밑에서 파내 어 해동시킨 후 되살아나면 '자. 이제, 식사시간이야' 하고 말할수 는 없잖아요" 내가 손가락으로 철망을 찔러대자 앵무새가 날개를 파닥이며 '빌 어먹을, 고마워 '미친놈 하고 외쳐댔다. 저 녀석은 냉동시키면 좋겠어요." 나오코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 했다. "매일 아친 저 소리를 들으면 정말로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 아요 새 장 청소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자. 나는 짐을 싸기 시 작했다. 그녀들은 농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우리는 함께 집을 나와. 테니스 코트 바로 앞에서 헤어졌다. 그녀들은 오른쪽 길로 꺽여졌고. 나는 곧장 갔다 우리들은 안녕 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다시 만나러 올 게. 하고 나는 말했다 나오코는 미소를 짓더니. 로터리를 돌아 사라 졌다 정문으로 가는 사이에 몇 명의 사람들과 지나쳤지만 모두들 나 오코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노란 비옷 차림에 모자를 뒤 집어쓰고 있었다. 비가 내린 덕분에 주위의 모든 것들이 아주 선명해 보였다 지면은 검은색이었고. 소나무 가지는 짙은 녹색이었고. 노란색 비옷 을 입은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아친에만 지면을 나다닐 수 있도록 허락받은 영혼처럼 보였다. 그들은 농기구나 바구니 혹은 무엇인가 지를 들고 소리도 없이 살며시 지면을 이동했다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수위는 내가 나갈 때 방물)1: 리스트에 있는 내 이름에 표시를 했다. "도쿄에서 오셨군요." 그 노인은 내 주소를 보며 말했다. "나도 단 한 번 그곳에 간 적이 있는데, 돼지고기가 아주 맛있더군요." '그렇습니까')" 나는 그런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에 적당히 얼버 무렸다. "도쿄에서 먹은 음식들은 대체로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 만, 돼지고기만큼은 맛있더군요. 특별한 사육법이라도 있겠죠?"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도쿄의 돼 지고기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그건 언제 일 입니까, 도쿄에 가신 건?" 나는 물어보았다. "언제였더라,"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의 결혼식 때 였나? 아들놈이 도쿄에 있어서 한 번 오라기에 갔습니다만 그때 먹 어봤지요." "그렇다면 그 무렵에는 아마도 도쿄의 돼지고기가 맛있었던 모양 입니다. " "요즈음은 어떤가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소리는 별로 들은 적이 없다고 나는 대답했 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약간 실망한 눈치였다. 노인은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지만, 나는 버스 시간이 다 되었다며 이야기 를 끝내고. 도로 쪽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강가의 길에는 아직 군 데군데 안개가 남아 있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산등성 이를 방황했 다 나는 도중에 몇 번이고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다보기도 하고, 한 숨을 쉬기도 했다 왠지 마치 중편이 빠른 혹성에 와 있는 듯한 느낄 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그렇다. 이것이 바로 외부 세계 다'라는 생각에 슬퍼 졌다 기숙사에 도착하니 네 시 반이었다 나는 짐을 방에 놓고는 옷을 갈아입은 다음 아르바이트를 하러 신주구의 레코드 가게로 갔다. 그 리고 여섯 시부터 열 시 반까지 가게를 지키며 레코드를 팔았다 아 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가게 밖을 지나가는 잡다한 종류의 사람 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족 동반이며 커플이며 술 주정꾼이며 폭 력배며 . 짧은 스커트를 입은 발랄한 아가씨며 , 히피족 같은 머리 모 양의 사내며 클럽의 호스테스며. 그밖에도 부랑자들이 몇 명인가 가게 앞에 모여서 춤을 추기도 하고. 시거를 흡입하기도 하고, 그냥 할 일 없이 앉아 있기도 했다 포니 떼네트의 레코드를틀자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레코드 가게 옆은 섹 숍으로. 졸린 듯한 표정의 중년 사내가 기 묘한 도구를 팔고 있었다. 누가 무슨 이유에서 사는지 나로서는 상 상도 못할 도구들뿐이었지만, 그래도 가게는 제법 번창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비스듬히 마주 보고 있는 골목에서는 과음한 학생이 토하 고 있었다.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위치한 게임 센터에서는 근처의 요 릿집 주방장이 현금 내기의 뎅고 게임을 하면서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커먼 얼굴의 부랑자가 문을 닫은 가게의 처마 밑에서 꼼 짝도 않고 웅크린 채로 있었다 엷은 핑크색 립스틱을 바른, 아무리 보아도 중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아이가 가게에 들어오더 니 롤링 스톤즈의 '점핑 잭 플레쉬'를 틀어달라고 했다 내가 레코드 를 꺼내어 틀어주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어 박자를 맞추 며 허리를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는 담배 있나요? 나에게 물었다. 나는 지배인이 두고 간 라프를 한 대 주었다 그녀는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는. 레코드가 끝나자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나가버렸 다. 십분 간격으로 구급차인지 순찰차인지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 다. 똑같은 정도로 취한 세 명의 샐러리맨이 공중전화를 걸고 있는 긴 머리의 멋진.아가씨를 향해서 몇 번이고 '보지'라고 외치면서 웃어 댔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 나는 젊차로 머리가 혼란해져서.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도대체 이 건 무엇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이러한 광경들은 전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지배인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어이. 와타나베. 그젓께 저쪽 부 티크의 아가씨와 한탕 했지 하고 나에게 말했다 예전부터 부근의 부티크에서 일하는 아가씨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던 그는, 이따금 가 게의 레코드를 가져나가 선물하곤 했다 기분 좋으시겠습니다.하고 내가 말하자, 그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여자들과 한 탕 하고 싶으면 말이야. 하고 그는 득의만만해서 가르쳐주었다 난은 무엇인가 선물을 한 다음. 마구 술을 먹여서 취하게 만드는 거 야, 그러면 나머지는 오케이라구 간단하지? 나는 혼란해진 머리로 전차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의 커 튼을 치고 불을 끈 다음. 침대에 눕자, 당장이라도 나오코가 곁으 로 와서 눕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으니 그 젖가슴의 부드러운 볼륨이 가슴에 느껴 지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양손에 그 몸의 곡선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나오 코의 그 자그만 세계로 되돌아갔다. 나는 초원의 넴새를 맡았고. 밤 의 빗소리를 들었다. 달빛 아레에서 본 나오코의 나체를 떠올렸으 며,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육체가 노란색 비옷을 입고 새장을 청소 하기도 하고 야채를 가꾸기도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나는 발기한 페니스를 잡고, 나오코를 생각하며 사정했다. 사정이 끝나자 내 머릿속의 홀란이 조금은 진정되는듯했지만, 그래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몹시 피곤하고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도, 도 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서, 잠시 동안' 안뜰의 국기 게양 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국기가 달려 있지 않은 하얀 게양대는 마 치 밤의 어둠을 꿰뚫는 거대한 낄골처럼 보였다. 나오코는 지금 무 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잠들어 있겠지 . 그 자그맣고 신비스 런 세계의 어둠에 둘러싸여 곤히 잠들어 있겠지 . 나는 그녀가 괴로운 꿈을 꾸지 않기를 기도했다 이튿날인 목요일 오전 체육 시간에. 나는 길이 10미터 풀을 몇 차 례나 왕복했다 격렬한 운동을 한 덕분에 어느 정도 기분이 상쾌해 지고, 식욕도 솟았다 나는 음식점에서 양이 많은 점심을 먹고, 자료 를 찾아보러 문학부 도서실로 걸어 가다가 고바야시 미도리와 마주 쳤다. 안경을 낀 작은 여학생과 함께 있던 그녀는. 내 모습을 보자 혼자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디 가세요?"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도서실." 나는 대답했다. "그런 곳에 가지 말고 저와 함께 점심 식사라도 하지 않겠어요'?" "방금 먹었어 ." "상관없잖아요. 다시 한번 드세요." 결국 미도리와 나는 찻집으로 들어가. 그녀는 카래라이스를 먹 고 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긴소매의 힐 셔츠 위에 물고기 무의 를 수놓은 노란 털 조끼를 입고, 가느다란 금목걸이와 디즈니 시계 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맛있다는 듯 카레라이스를 먹고는 물을 석 잔 마셨다. "요즈음 계속 안 계셨죠? 제가 몇 번이나 전화했었어요." 미도리 는 말했다. 용건이라도 있었나?" "별로 용건은 없어요. 그냥 전화해본 것뿐이에요." "흠 " " '흠'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그건?" "별 뜻은 없어, 그냥 맞장구를 쳤을 뿐이야." 나는 대답했다. "어 때, 최근에는 불이 나지 않았나?" "음. 그땐 정말 재미있었죠. 피해가 그다지 없으면서도 비교적 연 기가 많이 솟아서 , 리얼리티가 있었으니까, 아주 좋았어요." 미도리 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숨을 돌 린 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와타나베 씨, 무슨 일이 있었나 요? 지금 멍한 표정을 짓고 있군요. 눈의 초점도 맞지 않고." "여행에서 돌아와 조금 피곤한 거야." "유령이라도 보고 온 듯한 얼굴이에요 "유령? " "와타나베 씨, 오후 수업 있나요?" "독일어와 종교학." "그거 빼먹을 수 없나요?" "독일어는 무리야. 오늘 시험이거든 "언제 끝나죠?" "두 시 ." "그렇다면 시험이 끝나고 시내로 가서 함께 술이라도 마시지 않 겠어요?" "대낮 두 시부터?" "때로는 그것도 좋잖아요? 지금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으니 까, 저랑 함께 술이라도 마시면서 기운을 내세요. 저도 당신과 함께 술이라도 마시며 기운을 차리고 싶으니까. 어때요, 괜찮겠죠?" "좋아, 그렇다면 마시러 가지."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두 시에 문학부 안뜰에서 기다릴게." 독일어 수업이 끝나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신주쿠로 나가, 기노 쿠니야 서점 뒷골목 지하에 있는 cTG로들어가 보드카 토닉을두 잔씩 마셨다. "이따금 이곳에 와요. 대낮에 술을 마셔도 쑥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으니까." 그녀는 말했다. "대낮부터 이렇게 마시나?" "이따금요." 미도리는 술잔에 남은 얼음을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흔들었다 "이따금 세상살이가 괴로워지면, 이곳에 와서 보드 카 토닉을 마셔요 "세상살이 가 괴롭다구'?" "이따금은요." 미도리는 말했다. "저도 제 나름대로 여러 가지 문 제가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어떤 거 지?" 집안 일. 남자 친구. 생리통 여러 가지로.' "한 잔 더 먹겠어'?" "물론이죠." 나는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러 . 보드카 토닉을 두 잔 부탁했다 "요번 일요일에 당신 저에게 키스했죠?" 미도리는 말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는데, 정말 좋았어요, 정말" "다행 이 로군." " '다행이로군' " 하고 미도리가 다시 반복했다. "당신 정말로 말투 가 기묘해요." "그런가?" "그런 후로, 저는 그때 생각했어요. 이것이 난생 처음 남자와 하는 키스라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만일 제가 인생의 순서를 뒤바 꿀 수 있다면. 그걸 첫번째 키스로 할 거예요, 반드시. 그리고 나머 지 인생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사는 거죠. 내가 옥상에서 난생 처 음 키스를 한 와타나베라는 사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식여덟 살이 된 지금은, 하면서 어때요,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멋지 겠지 " 나는 피스타치오 껍질을 벗기면서 말했다 "당신. 어째서 그렇게 얼이 빠져 있어요? "아마도 이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탓일 거야 " 나는 잠시 생 각한후에 대답했다. "이곳이 어쩐지 진정한 세계가 아닌 듯한 느낌 이 들어 사람들도 주위의 풍경도 어쩐지 정말이 아닌 듯이 여겨지 거든" 미도리는 카운터에 한쪽 팔꿈치를 대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짐 모리슨의 노래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죠 '1)r()ply Irt: Etnlnf:e wllcn y()ㄴ1 Are d strtnf:cr "피스(I'e:1ㄴr) " 미도리가 말했다 "피스." 나도 따라서 말했다 저와 함께 우루과이 로 가면 될 거예요." 미도리는 카운터에 한 쪽 팔꿈치를 댄 채로 말했다. "애인도 가족도 학교도 모두 버리고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 나도 웃으면서 말했다. "모두 내팽개치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버릴다는 건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는 이따금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몹시 그러니까 만약 당신이 저를 훌쩍 어딘가멀리 데려가 주신다면, 저는 당신을 위해서 소처럼 튼튼한 아이를 잔뜩 낳아드릴 거예요. 그리고 모두 함께 즐겁게 사는 거죠. 마룻바닥을 이리 저리 뒹굴며 . 나는 웃고는 석 잔째의 보드카 토닉 잔을 비웠다 '소처럼 튼튼한 아이는 아직 그다지 원하지 않는 모양이죠" 미도리는 말했다 "흥미는 당연히 있지. 어떤 건지 한 번 보고 싶군 "상관없어요,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미도리늘 피스타치오 를 먹으며 말했다. "저도 오후에 술을 마시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 는 것뿐이니까 모두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다고." 그런 데 우루과이 에 가봤자 어차피 당나귀 똥밖에 없을지 몰라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 "어딜 가나 당나귀똥이에요 이곳에 있건. 그곳에 가건 이 세상 은 당나귀들이에요. 여기. 이 딱딱한 걸 드릴게요." 미도리는 나에 게 꺾질이 딱딱한 피스타치오를 주었다. 나는 그것의 껍질을 벗기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요전 일요일에는, 정말로 마음이 우울했어요 당신과 둘이서 옥상으로 올라가 불 구경을 하며. 술을 마시고. 노래 도 부르고. 그토록 마음이 푸근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사실 모두들 저에게 여러 가지 것을 강요하거든요. 만나기만 하면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적어도 당신만큼은 저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아 요 "무언가 강요할 정도로 미도리에 관해서 아직 잘 모르는 거야." '그렇다면 저에 관해서 좀더 알게 되면. 당신도 역시 저에게 여러 가지를 강요하실 작정인가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럴 가능성은 있겠지 " 나는 대답했다. "현실 세계에서는 모두 들 서로 여러 가지를 강요하며 살고 있으니까 " "하지만 당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요. 막연하게 나마 알 수 있어요. 강요하거나 강요당하는 일에 관한 것이라면 저 도 제법 위선 자니까요. 당신은 그런 타입이 아니니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놓여요. 알고 계세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일을 강요하거나 강요당하기를 좋아하는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어 요. 그리고 강요했느니, 강요당했느니 하며 야단법석이죠 그런 것 을 좋아하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런 게 싫어요. 어쩔 수 없이 하 기는 하지만" "어떤 일을 강요하거나 강요당한다는 말이지')" 미도리는 얼음을 입에 넣고 잠시 동안 빨아댔다 "저에 관해서 좀더 알고 싶으세요'~?" "흥미는 있어. 조금 "지금. 저는 '저에 관해서 좀더 알고 싶으세요?'하고 질문했어요 그런 대답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좀더 알고 싶어 미도리에 관해서 "정말로?" "정말로." '끔씩한 일이 있더라도'" "그토록 끔찍 한가',?" "어떤 의미에서는요." 미도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한 잔더 마시 고 싶어요. 나는 웨이터를 불러서 네 잔째를 주문했다. 술이 올 때까지 미도 리는 카운터에 올린 팔에 턱을 괴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셀로니어 스 몽크가 연주하는 '허니 서클 로즈'를 듣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우리말고도 대여섯 명의 손님이 더 있었지만 술을 마시는 것은 우리 뿐이었다 커피의 향긋한 냄새가 어두운 실내에 오후의 친숙한 분위 기를 맴돌게 했다. "요번 일요일, 시간 있으세요?" 미도리가 나에게 물었다 "요전에도 말했지만. 일요일은 언제나 한가하지 여섯 시의 아르 바이트를 제외하면." "그렇다면 요번 일요일은 저와 지내지 않겠어요" "좋아 " "일요일 아침에 기숙사로 갈게요 시간은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괜찮겠어요?" "물론, 괜찮지 ." "와타나베 씨 .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아세요?" '글쎄, 상상이 안 되는군 '우선 널찍하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눕고 싶어요." 미도리는 말했 다. "기분 좋게 취해서,주위에는 당나귀똥 따위는 전혀 없고, 옆에 는 당신이 누워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제 옷을 하나씩 벗기는 거예요. 아주 다정하게. 엄마가 아이의 옷을 벗기듯이, 조심스럽 게. "흠 " "저는 잠시 동안 기분이 좋아서 멍한 상태에 있죠 하지만 문득 제정신이 들어서 '안 되요. 와타나베 씨' 하고 외치는 거에요. '저 는 와타나베 씨를 좋아하지만, 저에게는 사귀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런 짓을 할 수는 없어요. 저는 이런 면에서는 보수적이에요. 그러니까 그만두세요, 제발' 하고 말하죠. 하지만 당신은 그만두지 않아 요 '그만둘 거야, 나는 "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상상 속의 장면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이대로 좋아요." 미도리는 말했다 "그리고 저에게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거예요, . 우뚝 선 것을. 저는 즉각 눈을 돌리 지만. 그래도 살짝 보이죠.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거죠, '안 돼요. 정말로 안 돼요 그렇게 크고 단단한 것은 도저히 들어가지 않아요' 하고 "그렇게 크지 않아. 보통이야 " "상관없다니까요. 상상일 뿐이니까. 그러면 당신은 몹시 슬픈 듯 한 표정을 짓죠. 저는. 불쌍하니까 위로해주는 거예요. 어쩌나, 불쌍 하게도 하고." "바로 그게 미도리가 지금 하고 싶다는 건가?" "그래요 " "맙소사 결국 다섯 잔의 보드카 토닉을 마신 후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내 가 돈을 내려 하자 미도리는 내 손을 찰삭 때리며 물리 치고는, 지갑 에서 빳빳한 1만 엔짜리흘 꺼내어 계산을 했다 "괜찮아요, 아르바이트에서 돈도 받았고. 오늘은 제가 오자고 한 거니까요." 미도리는 말했다. "만약 당신이 철저한 파시스트라서 여 자에게 술을 얻어먹기 싫다고 생각한다면 몰라도 'o)ㄴ1 . 그1킁~?늘근 른o)." 더구나 넣지도 못하게 했으니까. "단단하고 크니 까 " '-그래요." 미도리는 말했다. "단단하고 크니까 미도리가 취해서 발을 헛딛는 바람에. 우리는 자칫하면 밑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바깥으로 나가짜 하늘에 옅게 덮여 있던 구름이 개어, 석양에 가까운 해가 길거리에 부드러운 햇살을 비추고 있었 다 미도리와 나는 그런 거리를 잠시 동안 거닐었다. 미도리는 나무 에 올라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신주쿠에는 마침 그런 나무가 없었 고, 신주쿠 어원(ffjaP)은 이미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유감이로군요, 저는 나무에 올라가기를 아주 좋아하는데." 미도 리는 말했다. 미도리와 둘이서 윈도쇼핑을 하며 걷고 있노라니, 아까에 비해서 거리의 풍경이 그다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미도리를 만난 덕분에 조금은 이 세상에 익숙해진 느낌이 드는군" 미도리는 멈추어 서서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이에 요. 눈의 초점이 제법 또렷해진 것 같아요. 저와 함께 있으면 나름대 로 좋은 점도 있죠?" "그렇군." 다섯 시 반이 되자. 미도리늑 식사 준비를 해야 하니까 집으로 돌 아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겠다고 말했 다 나는 그녀를 신주쿠 역까지 바래다주고. 그곳에서 헤어졌다. "지금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세요?" "짐작이 안 되는데. 미도리가 생각하는 게 뭔지 " 당신과 둘이서 해적에게 붙잡혀서 발가숭이가 되어. 서로 부등 켜안은 채로 밧줄에 꽁꽁 묶이는 거예요 "어째서 그런 짓을 하지?" "해적이 변태니까요." "미도리 쪽이 훨씬 변태적인 것 같은데?" "그리고 한 시간 후에는 바다로 던져버릴 테니까, 그때까지 그 자 세로 마음껏 즐기고 있어, 하며 배 안의 창고에 내버려두는 거예 요 "그래서? " "우리는 한 시간 동안 마음껏 즐기는 거죠. 이리저리 뒹굴며,몸 을 비벼대기도 하고." "그게 미도리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인가?" "그래요 "맙소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요일 아침 아홉 시 반에 미도리가 나를 만나러 왔다. 나는 막 잠에서 깨어나 세수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 드리며, 어이 와타나떼, 여자가 찾아왔어! 하고 소리치기에 현관으 로 내려가 봤다. 그곳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은 미도리가 로비의 걸상에 앉아서 다리를 꼰 채로, 하품을 하고 있었 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에 모두 그녀의 곧 게 뻗은 다리를 쳐다보며 갔다. 그녀의 다리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제가 너무 일찍 왔나요?" 미도리는 말했다 "와타나베 씨, 방금 일어 난 모양이로군요 "지금부터 세수와 면도를 하고 올 테니까 이십분 가량 기다려주겠 어?" 기다리는 건 좋지만, 아까부터 모두들 제 다리를 쳐다봐요. "당연하잖아. 남자 기숙사에 그런 짧은 치마를 입고 오니까 그렇 지. 보는 게 당연하지 모두들." '하지만 괜찮아요. 오늘은 아주 예쁜 팬티를 입고 있으니까 핑크 색인데 멋진 래이스가 달려 있어요. 하늘하늘.' "그러니까 안 된다는 말이야."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가능한 한 서둘러 세수를 하고, 면도를 했다. 그리고 푸른 색의 버튼 다운 셔츠 위에 회색 트위를 입고 내려가, 미도리 를 기숙사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진땀이 흘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마스터베이션을 하나요?' 손으로?" 미도리는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마도 하겠지 . "남자들은 여자를 생각하면 그걸 하나요" "그렇겠지." 나는 대답했다. "주식 가격이라든가 동사 활용이라 든가 수에즈 운하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사내는 아마 도 없겠지 대부분 여자를 생각하면서 하지 않을까?" '수에즈 운하?" "예를 들자면 말이야. "즉. 특정한 여자를 생각하는 거로군요?" "어이, 그런 건 애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말했다. "어째서 내가 일요일 아침부터 미도리에게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 "그냥 궁금했을 뿐이에요." 미도리는 말했다 "게다가 그이에게 이런 걸 물으면 마구 화를 내거든요. 여자가 그런 걸 뭍는 게 아니라고" "음, 옳은 소리 지 ." "하지만 저는 알고 싶어요. 이건 쑨수한 마음이라구요. 정말로 마스터베이션을 할 때 특정한 여자를 생각하나요?" "생각하지. 적어도 나는.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잘 모르지만" 나 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와타나베 씨는 저를 생각하며 한 적이 있으세요?솔직하게 대답 하세요. 화내지 않을 테니까.' "한 적 없어, 정말이야."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어째서죠? 제가 매력적이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니야 미도리는 매력적이고, 귀엽고, 도발적인 모습이 잘 어울려 "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생각하지 않죠?" "우선 첫째로 나는 미도리를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짓에 연 관시키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러한 성적인 환상에 말이야. 두번째 로 '달리 떠올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 ' "일단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 "당신은 그런 점에서도 예의가 바르군요." 미도리는 말했다. "저 는 당신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한 번 정도 저를 출연 시켜주시지 않겠어요? 그성적인 환상인지 망상인지에 저는 그런 데에 나가보고 싶어요. 이건 친구 사이니까 부탁하는 거예요. 어차 피 이런 일은 타인에 게는 부탁할 수 없잖아요? 오늘 밤 마스터베이 션을 할 때 잔깐 저를 생각하셔야 돼요, 하고 아무에게나 부탁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니까 부탁하는 거예 요. 그리고 어땠는지 나중에 가르쳐주면 고맙잔어요. 함께 무엇을 했 는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삽입시키면 안 돼요. 우리는 친구 사이니까 아시겠어 요? 삽입만 하지 않는다면 그 외에는 무슨 짓을 해도 좋아요, 무슨 생각을 해도 글쎄. 그런 제약이 있는 상대는 별로 다루어본 적이 없으니까 생각해봐-주시 겠어요?" "생각해두지 ." "와타나베 씨. 저를 음란하다라든가 욕구불만이라든가 도발적이라 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단지 그런 일에 몹시 흥미 를 느끼고, 정말로 알고 싶은 것뿐이니까요 그것도 여성 잡지의 부 록 따위가 아니라 소위 케이스 스터디로서 " "케이스 스터디라." 나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가 여러 가지를 알고 싶어하거나 하고 싶어하면, 그이 는 불쾌해 하거나 화를 내거든요. 음란하다면서. 제 머리가 이상하 다는 거예요. 펠라티오도 좀처럼 시켜주지 않는 거예요. 저는 그것 에 관해서 정말로 연구하고 싶은데.' "흠 "당신은 펠라티오하는 거 싫으세요?' 싫지는 않아, 별로 '좋아하는 편인가요? "좋아하는 편이지."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기 회에 하지 않겠어?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일요일 아침인데, 마스터 베이션이니 펠라티오니 하는 이야기를 해서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좀 다-른 이야기를 하자구 미도리의 남-자 친구는 우리 학교 사람인 가?" "아니오. 다른 학교예요. 물론. 보통 시설에 클럽 활동을 하 면서 알게 됐어요. 저는 여학교이고, 그 사람은 남학교이지만. 있잖 아요 그런 거. 합창 콘서트니, 그런 거. 연인 관계가 된 것은 고등학 교를 졸업한 다음이지만 와타나베 씨?" "응?" 정말 단 한 번이면 되니까 저를 생각하셔야 돼요.' '요번에 시험해 보지." 나는 체념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역에서 전차를 타고 오차노미즈까지 갔다 나는 아침 식 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 신주쿠 역에서 전차를 갈아탈 때, 구내 매 점에서 얇은 샌드위치와, 신문 잉크를 끓여 놓은 듯한 맛의 커피를 사서 먹었다. 일요일 아침의 전차는 이제부터 어디론가 외출하려는 가족이나 커플로 만원이었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내아이들이 야구 방망이를 들고 차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전차 안에는 짧 은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몇 명 있기는 했지만 미도리처럼 짧은 치 마를 입은 여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미도리는 이따금 치마자락을 잡아당겨 내렸다 몇몇 사내들이 그녀의 허벅지를 쳐다봐서 아무래 도 불안했지만, 그녀 쪽에서는 그러한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 이었다. "있잖아요, 제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세요?" 이치가야 부근에서 미도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잘 모르겠군 "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부탁이니까. 전차 안에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곤란하니까." "유감이로군요. 요번에는 상당히 과격한 이야긴데." 미도리는 몹 시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오차노미즈에 뭐가 있지?" "하여튼 따라오세요. 그러면 알 게 될 테니까 일요일의 오차노미즈는 모의 시험이 있는지 아니면 학원 강의가 있는지 중고등학생들로 붐볐다 미도리는 왼손으로 숄더 백의 끈을 오른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그러한 학생들 사이를 거침없이 헤치며 "와타나베 씨, 영어의 가정법 현재와 가정법 과거의 차이를 제대 로 설명할 수 있어요?" 미도리는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했다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묻겠는데, 그런 것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도움이 되나 요?"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도움이 되는 일은 별로 없지." 나는 대답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그러한 것들 은 체계적인 사고를 키우기 위한 훌련이 되리라고 생각해.' 미도리는 잠시 동안 그 문제에 관해서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했 다. "당신은 훌륭하군요." 그녀는 말했다. "저는 이제까지 그런 생각 은 한 적이 없어요. 가정법이니 화학 기호니 ,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될 리가 있겠느냐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언제나 무시 하며 지내왔어요, 2런 복잡한 것들은. 저의 생활 방식이 잘못될 것 일까요?" "무시하며 지내왔다고?" "네.그래요.그런 것들은, 완전히 무시하며 지내왔어요. 저는사 인, 코사인조차 전혀 몰라요 "그래가지고 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왔군 " 나늘 어이가 없었다. "당신. 바보로군요." 미도리는 말했다 "모르세요? 눈치만 빠르면 아무것도 몰라도 데학 시험 정도는 합격할 수 있어요. 저는 굉장히 눈치가 빠르거든요. 다음 세 개 중에서 옳은 것을 고르시오 하는 질 문 따위는 금방 알아차려요." "나는 미도리만큼 눈치가 빠르지 못하니까, 체계적인 사고 방식을 익힐 필요가 있어. 까마귀가 나무 구멍에 유리 조각을 모으듯이." "그런 게 무슨 도움이 되나요?" "출쎄." 나는 말했다. '무언가 도움이 되겠지 "예를 들자면 어떤?" "형이상학적 사고. 몇 개 국어의 습득 , 예를 들자면 말이야." "그러한 것들이 도움이 되나요?" "그야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 도움이 되는 사람도 있고,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훈련일 뿐 이지 도움이 되느니 안되니 하는 것은 다음 문제야. 아까도 말했 듯이 "흐응" 미도리는 감탄했다는 듯한 대답-을 하고는, 내 손을 끌며 언덕길을 내려갔다 "와타나베 씨는 남들에게 무언가 설명하는 솜 씨가 좋군요 "그럴까?" "그래요. 왜냐하면 저는 이제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영어의 가정 법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질문을 했지만, 아무도 그렇게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거든요. 영어 선생님조차 모두들 제가 그런 질문을 하면 난처해 하거나. 화를 내거나. 바보 같아지거나 했어요.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그때 당신 같은 사람이 있어서 제대로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저도 가정법에 흥미를 지녔을지도 모르죠." "흠 ." "혹시 자본론을 읽은 적이 있으세요?" "있지. 물론 전부 읽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정 도로 '이해할 수 있었나요?" "이해할 수 있는 곳도 있고. 못하는 곳도 있었지. 자본론을 정 확히 읽으려면 그것을 위한 체계적인 사고력이 필요하니까 물론 마 르크스주의에 관한 개요는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종류의 책을 별로 읽은 적이 없는 신입생이 자본론을 읽 고 간단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그야 일단은 무리 겠지 ." 나는 대답했다 "저는 대학에 들어왔을 때 포크 클럽에 가입했어요 노래를 부흐 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지독한 사기꾼들만 모여 있는 곳이라,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해요. 그곳에 들어가니까. 우선 마르크스를 읽 으라는 거예요. 몇 페이지에서 몇 페이지까지 읽어오라고. 포크송이 란 이 사회와 래디컬하게 관련을 맺어야만 한다는 따위의 연설을 하 면서 말이죠. 그래서 일단은 어쩔 수 없이 열심히 마르크스를 9했었 어요, 집에 돌아가서 하지만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더군요. 가정법 이상으로. 세 페이지를 읽고는 내던졌어요. 그래서 그 다음 주 미팅 에서, 물어봤지만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죠. 그러자 그 다음부터는 바보 취급을 하는 거예요. 문제 의식이 없다늘 등. 사 회성이 결여되어 있다는등.웃기는 일이 아닌가요?저는단지 문장 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흠 '토론이라는 게 또 굉장했어요. 모두들 잘난 척하며 어려운 어휘 들을 구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잘 모르니까 그때마다 질문을 했죠. '미 제국주의적 착취란 무슨 말입니까? 동인도 회사와 관계가 있나요?'라든가 '산학 협동체 분쇄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에 취 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라든가. 하지만 아무도 설명해주 지 않았어요 뿐만 아니라 정말로화를내는 거예요 제 말이 믿어지 세요?" "그런 것도 모르고 어쩔 작정이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느냐. 하는 따위의 대답이 고작이에요. 너무하잖아요? 물론 저는 그다지 머리가 좋지는 않아요. 서민이에요. 하지만 이 세상은 서민 층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고, 착취당하는 것도 서민들이잖아요?서 민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휘를 남발하면서 뭐가 혁명인가요, 뭐가 사회 변혁이냐구요! 저도 나름대로, 이 세상이 잘 되도록 협력하고 싶어요. 만약 누군가가 정말로 착취를 당하고 있다면 그런 일은 없 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한 거잖아요. 그 렇죠?" "그렇지 .' '그 때 저는 생각했어요. 이 녀석들 모두 사기꾼이라고. 어려운 어 휘들을 마구 남발하며 잘난 척해서 , 신입생 여자아이를 감탄하게 만 들고는,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을 생각밖에 하지 않을 거예요, 그 사 람들은. 그리고 4학년이 되면 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미쓰비시니 TRS니 IBM이니 후지 은행이니 하는 데에 일지감치 취직해서 , 마르 크스 따위는 읽은 적도 없는 부인을 맞이하고. 아이에게는 격에 맞 지도 않는 이름을 붙여주죠. 뭐가 산학 협동 분쇄인가요. 가소로워 서 눈물이 날 정도예요. 다른 신입생들도 마찬가지예요. 모두들 아 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실실거리니까요. 그리고는 나중에 저 에게 말하는 거예요. 정말 바보로군, 모르더라도 네 네 그렇군요 하 고 말하면 되는데 하고.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화가 나는 일이 있었 는데 들어주시겠어요?" "들어주지 ." "어느 날 제가 심야의 정의 집회에 나가게 됐는데, 여자아이들은 모두들 1인당 스무 개씩 야식용 주먹밥을 만들어 오라는 거예요. 농 담이 아니라구요. 그런 건 완전한 성차별이 아닌가요? 하지만 언제 나 말썽만 피울 수는 없으니까. 저는 잠자코 주먹밥 스무 개를 만들 어 갔죠. 매실 장아찌도 넣고 김으로 말아서. 그런데 나중에 무슨 소 리를 들었는지 아세요? 고바야시의 주먹밥에는 매실 장아찌밖에 들 어 있지 않았다니 , 깨소금도 입히지 않았다느니 하며 불평을 하는 거예요. 다른 여자아이들은 속에 연어나 대구 알도 넣고, 달걀 프라 이도 있었다는 거예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더군요. 혁명 운운하는 자들이 어째서 야식용 주먹밥 따위를 가지고 난리를 치는 건가요, 일일이? 김으로 싸고, 안에 매실 장아찌가 들어 있으 면 충분하잖아요? 인도의 아이들을 생각해보세요." 나는 웃었다. "그래서 그 클럽은 어떻게 했나?" '6월에 그만뒀어요, 너무나 화가 나서." 미도리는 말했다 "하지 만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사기꾼이에요. 모두들 자신이 아무것 도 모른다는 사실을 남들이 눈치 챌까 봐 두려워서 벌벌 떨면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모두들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말을 지껄이고. 존 볼트레인을 듣거나 파졸리니의 영화를 보며 감동하는 거예요. 그런 게 혁명인가요?" "글쎄. 직접 혁명을 본 적이 없으니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 "그런 게 혁명이라면, 저는 혁명 따위는 필요 없어요 저는 틀림 없이 주먹밥에 매실 장아찌밖에 넣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살당할 테 니까요. 당신도 틀림없이 총살당할 거예요. 가정법을 제대로 이해하 고 있다는 이유로." "그럴 수도 있겠지 ." "하지만 저는 알고 있어요. 저는 서민이니까. 혁명이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서민이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살아갈수 밖에 없다는사실을 혁명이 뭔가요?고작해야 당국의 멍청이 밥일 뿐이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바보예 요. 그 쓸데없는 어휘를 남발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당신. 세무감사 원을 본 적이 있으세요?" "없어 ." "저는 몇 번이나 봤어요. 우리 집에 마구 들어와서 뽐내는 거에 요. 큰일이야, 이 장부는, 당신네 정말로 형편없이 장사하는군. 이거 정 말로 경비인가? 영수증 좀 봅시다. 영수증 하며 . 우리는 구석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최고급 초밥을 주문하죠. 하지만. 우리 아버 지는 세금을 속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정말이에 요.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에요, 고리타분한 성격이거든요 그런데도 세무감사원은 끈질기게 시비를 거는 거예요. 이건 수입이 너무 적지 않냐면서. 농담이 아니라구요. 수입이 적은 건 벌이가 적기 때문 이잖아요? 그런 말을 들으면 너무나 무서웠어요. 부잣집 에나 가서 그렇게 말하세요, 하고 소리치고 싶어 지더군요. 만약 혁명이 일어난 다면 세무감사원들의 태도가 바뀌리라고 생각하세요?" "극도로 의 심스럽군." "그렇다면 저는. 혁명 따위는 믿지 않겠어요. 저는 애정밖에 믿지 않겠어요." "키스' 하고 나는 말했다. "키스' 하고 미도리도 대답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길로 가는 중이지?'" 나는 물어보았다. "병원이에요. 아빠가 입원하고 계시니까, 오늘 하루 종일 제가 시 중을 들어야 해요. 재 차례거든요 "아버지?" 나는 깜짝놀라서 물었다. "아버님은 우루과이에 가신 게 아니 었어" "그건 거 짓말이에요." 미도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옛날부터 우루과이 에 가겠다고 난리였지만, 갈 리가 없 잔아요? 제대로 도쿄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병세는 어떠신가?" 히 미해서 시간 문제예요 우리는 잠시 동안 말없이 걸었다. "엄마의 병과 똑같으니까 잘 알아요. 뇌종양. 믿어지세요? 2년 전 에 엄마가 그 병으로 돌아가셨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뇌 종양이에요 일요일이라 그런지 대학 병원 안은 방문객들과 가벼운 증상의 환 자들로 몹시 붐볐다 그리고 병원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소독약과 꽃다발과 소변과 담요 냄새가 함께 어울려 병원을 완전히 뒤덮은 가 운데, 간호사들이 딸각딸각 메마른 구두 소리를 내며 그 안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미도리의 아버지는 2인용 방의 앞쪽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가 누 워 있는 모습은 깊은 상처를 입은 작은 동물을 연상시켰다. 옆으로 누워, 링겔 주사 바늘이 꽃힌 왼팔을 축 늘어뜨린 채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여위고 작은 남자였는데, 보는 사람에게 앞으로 더욱더 야위 고 더욱더 작아지리라는 인상을 주었다 머리에는 하얀 붕대를 감 고, 창백한 팔에는 주사 자국인지 링겔 바늘 자국인지가 점점이 나 있었다. 그는 절반쯤 뜬 눈으로 허공의 한 곳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그 붉게 충혈된 눈을 조금만 움직여서 이쪽을 보았 다. 10초 가량 본 후에 다시 허공의 한 곳으로 그 나약한 시선을 돌 렸다. 그 눈을 보자, 이 사내는 이제 곧 죽으리라고 직감할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서 생명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한 생 명체의 나약하고 희미한 흔적이었다. 그것은 가구나 장식을 전부 들 어낸 뒤 해체되기만을 기다리는 헌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메마른 입 술 주위에는 마치 잡초처럼 드문드문 수염이 자라 있었다. 이토록 생명력을 상실한 사내에게도 수염만큼은 어김없이 자라는구나 하 는 생각이 들었다 미도리는 창가의 침대에 누워 있는, 듬직한 체구의 중년 사내에 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상대방은 제대로 말을 할수 없 는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는 두세 차례 기침을 하고는 머리맡에 있는 물을 마시더니,다시 서서히 몸을 움직여 옆 으로 돌아누워 창 밖으로 눈을 주었다. 창 밖에는 전신주와 전선이 보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 었다 "어때요.아빠. 괜찮으세요?" 미도리가아버지의 귓전에 대고 말 을 걸었다. 마치 마이크 테스트를 하고 있는 듯한 어조였다. "어때 요, 오늘은?" 아버지는 입을 약간 움직였다. "좋지 않아' 하는 대답이었다. 말 을 한다기보다는, 일단 목 안에 있는 메마른 공기를 말로 바꾸어 내 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 하고 그는 말했다. "머리가 아프세요?" 미도리가 물었다. "그래" 하고 아버지는 대답했다. 4음절 이상의 말은 제대로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어요. 수술 직후니까 아무래도 아프겠죠. 안됐지만, 좀더 참으세요." 미도리는 말했다 "이 사람은 와타나베라고 해요. 제 친구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나는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입을 조금 열 더니 , 다시 닫았다. "저기 앉으세요." 미도리는 침대 아래쪽에 있는 둥근 비닐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순순히 그곳에 앉았다. 미도리는 아버지에게 물병의 물을 조금 마시게 하고는, 과일이나 야채 젤리를 드시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필요 없어" 하고 아버지는 대답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드시지 않으면 안돼요 하고 미도리가 말하자. "먹었어" 하고그는 대답했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사물함 겸 테이블 위에는 물병이며 컵이며 접시며 작은 시계 따위가 놓여 있었다. 미도리는 그 밑에 넣어두 던 새파란 종이 봉지에서 갈아입을 파자마와 네의 . 그 밖에 자질구레 한 것들을 꺼내어 정리한 뒤. 입구 옅에 있는 로커에 넣었다. 종이 봉지 바닥에는 환자를 위한 음식이 들어 있었다 자몽 두 개, 야채 셀리와 오이가 세 개.생 "오이?" 깜짝 놀란 미도리가 어이가 없다는 소리를 내었다 " 오이 같은 게 여기에 있지?' 정말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 네.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이러이러한 것을 사오라고 전화로 자세히 말했는데도. 오이를 사달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난." "키위(오이와 키위는 일본어 발음이 비슷함)를 잘못 알아들은 게 아 닐까?" 하고 나는 말해보았다. 미도리는 손가락으로 탁 소리를 냈다 "분명히 제가, 키위를 부탁 했어요. 바로 그거예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잖아요? 어째서 환자가 생오이를 먹겠어요? 아빠, 오이 드시겠어요?" "필요 없어" 하고 아버지는 대답했다. 미도리는 머리맡에 앉아서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잡다한 이야기 를 했다 텔레비전이 잘 나오지 않아서 수리를 부탁했다느니, 다카 이도의 아주머니가 2. 3일내로 한 번 문병을 오겠다고 말했다느니 약국의 미야와키 씨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자빠졌다느니. 그런 이야 기였다. 아버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응' '응' 하고 대답을 할 뿐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드시고 식지 않으세요, 아빠?" "필요 없어 ." "와타나베 씨, 자몽 드시겠어요?" "필요 없어." 나도 그렇게 대답했다. 잠시 후 미도리는 나를 데리고 휴게실로 가서 , 그곳의 소파에 앉 아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휴게실에는 파자마 차림의 환자 세 명이 역시 담배를 피우며 정의 토론회 같은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있었다 저기, 지팡이를 집고 있는 아저씨 , 아까부터 내 다리를 힐끗힐끗 보고 있어요. 저기, 파란색 파자마에 안경을 낀 아저씨 " 미도리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야 보겠지. 이런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누구든지 보겠지 " "하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모두들 따분할 테니까, 때로는 젊은 여 자의 다리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흥분해서 회복이 빨라지지 않을까요?" "그 반대가 아니라면 좋겠군." 미도리는 잠시 동안 똑바로 솟아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아빠 말인데요." 미도리는 말했다 "그분, 나쁜 분이 아니 에요. 이따금 심한 소리를 하니까 화가 나기는 하지만 적어도 정직 한 분이고,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더구나 아빠는 아빠 나름 대로 열심히 살아왔어요. 성격도 약간은 연약한 데가 있었고, 상술 도 있었고. 덕망도 없었지만, 그래도 거짓말만 하면서 요령 있게 행 동하는 주위의 약삭빠른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에요. 저 는 한번 말을 꺼내면 양보하지 않는 성격이니까,둘이서 항상 다투 기는 했지만요.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미도리는 무엇인가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줍기라도 하듯이 네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놓았다. 내 손은 절반은 치마 위에, 절 반은 허벅지 위에 올려졌다. 그녀는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았 다. "와타나베 씨. 이곳에 데리고 와서 죄송하지만. 좀더 저와 함께 계시지 않겠어요?" "다섯 시까지는 괜찮으니까 계속 있을게." 나는 대답했다. "미도 리와 함께 있는 게 즐겁기도 하고. 달리 할 일도 없으니까 "일요일에는 대체로 뭘 하세요?" "빨래."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다림질." "와타나베 씨 , 저에게 그 여자에 관해서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 으시죠? 지금 사귀고 있다는 사람 말이에요." "글쎄.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 웨냐하면 복잡해서 제대로 설 명을 할 수 없으니까." 괜찮아요. 설명하지 않아도." 미도리는 말했다. "하지만 제가 상 상하고 있는 것을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요?" "해봐. 미도리가 상상하는 것이라면, 재미있을 것 같으니 꼭 듣고 싶군." "저는 와타나베 씨가 사귀고 있는 상대는 유부녀라고 생각해요." "흠 " '서른둘이나 셋 정도의 예쁜 부잣집 마나님으로. 밍크 핀트.며 챨 스 조르단 구두며 비단으로 된 녹옷이터. 그런 차림에 더구나 몹 시 섹스에 굼주려 있는 사람 그래서 아주 못된 짓을 하는 거예요. 평일 오후에 , 와타나떼 씨와 둘이서 서로의 몸을 탐욕스럽게 만끽하 는 거죠. 하지만 일요일에는 남편이 집에 있으니까 당신과 만날 수 없는 거예요. 아닌가요?'" "아주 재미 있는 추리로군 " '틀림없이 몸을 묶어 놓고, 눈도 가린 채로, 몸을 구석구석 핥도 록 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있잖아요. 이상한 것을 삽입시키기도 하 고, 서커스 같은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그런 장면을 폴라로이드 카 메라로 찍기도 하고." "즐겁겠군." "몹시 굼주려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짓은 전부 하는 거예요. 그녀 는 매일같이 여러 가지 궁리를 하죠. 일단은 한가하니까. 요번에 와 타나베 씨가 오면 이런 걸 해야지. 저런 걸 해야지 하고 그리고 침 대에 들어가면 탐욕스럽게 여러 가지 체위로 세 차례 정도는 즐기는 거예요. 그리고는 와타나베 씨에게 이렇게 말하죠. '어때요. 제 몸 이 마음에 드세요? 당신은 이제 젊은 여자들로는 만족하지 못할 거 예요. 젊은 여자가 이런 짓을 해주겠어 요? 어때요? 기분 좋아요? 하 지만 안 돼요. 아직 싸면' 하고 말이에요 "미도리는 포르노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아."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그럴까요?' 하지만 전, 포르노를 아주 좋아해요. 다음에 한 번 같이 보러 가지 않겠어요?" "좋아. 미도리가 틈이 날 때 함께 보러 가지 "정말? 기대하고 있을게요. SM을.보러 가요 채찍으로 찰싹찰싹 때리거나, 모두들 보는 앞에서 여자에게 오줌을 누게 하는 거. 저는 그런 게 좋아요." "좋아." "와타나베 씨 , 포르노 영화관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아 세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섹스 신이 나오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들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거든요. 저는 그 꿀걱 하는 소리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정말 귀여워요." 병실로 돌아가자 미도리는 다시 아버지를 향해서 여러 가지 이야 기를 했고,아버지는 '어어'니 '응'이니 하며 맞장구를 치거나.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있거나 했다. 열한 시경 옆 침대에서 자고 있던 사 내의 부인이 오더니. 남편의 잠옷을 갈아입히기도 하고 과일을 깎아 주기도 했다. 동그란 얼굴에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부인으로, 미도 리와둘이서 여러 가지 잡담을 했다. 간호사가 와서 링겔 병을 새로 갈고는, 미도리와 그 부인과 함께 잠시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다 그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을 멍하니 둘러보거나, 창 밖의 전선을 바라보거나 했다. 이따금 참새가 와서 전선에 앉았다 미도 리는 아버지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땀을 닦아주기도 하고. 가래를 받아주기도 하고, 옆 침대의 부인이나 간호사와 이야기를 하기도 하 고, 나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링겔의 상태를 체크하 기도 했다. 열한 시 반에 의사의 회진이 있어서. 미도리와 나는 도로 나가 서 기다렸다. 의사가 나오자, 미도리는 "선생님, 상태가 어떻습니 까?" 하고 물었다. '수술한 지 얼마 안 되는 데다가 진통제를 맞았으니까, 체력이 많 이 떨어져 있지 " 의사는 대답했다 '수술 결과는 앞으로2. 3일이 지 나야만 알 수 있을 거야. 글쎄 결과가 어떨지 모르겠어 . 썩 좋지 않 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지 " "다시 머리를 설개하-는 건 아니겠죠?' "그건 그때 봐야 알수 있지." 의사는 말했다 "오늘은 굉장히 짧 은 치마를 입고 있군.' "멋있죠')" "하지만 그거 게단을 올라갈 땐 어쩌지?" 의사가 물었다 '상관없어요 그냥 다 보여줘요" 미도리가 그렇게 말하자. 뒤에 있던 간호사가 콕콕 웃었다 "아가씨. 언제 한 번 입원해서 머리를 열어 봐야겠군" 어이가 없 다는 듯이 의사가 말했다. "그리고 이 병원 안에서는 될 수 있으면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 더이상 환자를 늘리고 싶지 않으니까. 요즈 음 그렇지 않아도 바쁘거든 " 회진이 끝나자 곧 식사시간이 되었다. 간호사가 왜건에 식사를 싣고 병실마다 나누어주며 다녔다 미도리 아버지의 식사는 포타주 수프와 과일과 부드럽게 졸여서 뼈를 제거한 생선과, 야채를 갈아서 젤리처럼 만든 것이었다. 미도리는 아버지를 똑바로 눕히고 발판의 핸들을 빙빙 돌려서 침대를 위로 올린 다음, 숟가락으로 수프를 떠 서 먹여드렸다. 아버지는 대여섯 숟가락 들고는 얼굴을 돌리며 "필 요 없어" 하고 말했다 "이 정도는 드셔야 해요, 아빠" 아버지는 "나중에" 하고 말했다. "안 돼요. 밥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힘이 나지 않아요." 미도리가 말했다. "오줌은 아직 괜찮으세요?" "응 " "와타나베 씨 , 우리 아래층 식당에 식사하러 가요.' 좋아. 하고 나는 대답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식사를 할 기분은 아 니었다. 식당은 의사와 간호사와 문병 온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창 문이 하나도 없는 썰렁한 홀에 의자와 테이블이 잔뜩 놓여 있는데, 그곳에서 모두들 식사를 하면서 제각기 무언가 떠들어대고 있으 니 그 소리가 지하도 속처럼 왕왕 울려퍼졌다 이따금 그러한 소리를 뚫고, 의사나 간호사를 호출하는 방송이 들려왔다. 내가 테 이블을 확보하고 있는 동안. 미도리가 2인분의 정식을 알루미늄 쟁 반에 얹어서 갖고 왔다 핀림 크로켓과 포테이토 샐러드와 잘게 썬 양배추와 생선 조린과 밥라 된장국으로 된 정 의이 환자용 식사와 마 찬가지로 하얀 플라스틱 식기에 담겨 있었다. 나는 반쯤 먹고 남겼 다. 미도리는 맛있다는 듯 전부 먹어치웠다. "와타나베 씨. 별로 시장하지 않으세요?" 미도리는 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응, 별로." "병원이라서 그래요." 미도리는 주위를 힐끔 둘러보며 말했다. "익 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그래요. 넴새, 소음. 탁한 공기 환자들 의 얼굴 긴장감. 초조감, 실망, 고통. 그런 것들 탓이에 요 그런 것들이 위장을 압박해서 식욕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하지 만 익숙해지면 그런 것들은 별 게 아니에요 더구나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도저히 간병을 할수가 없거든요. 정말이에요. 저늪 할 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네 사람을 간병해왔으니까 잘 알아요. 일이 생겨서 가끔은 식사를 못하게 되는 일이 있거든요 그러니 까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어두지 않으면 안 되죠." "그말을 이해할 수 있겠군 "친척들이 문병을 오면 이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잖아요. 그러면 모두들 역시 반쯤 남기더군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제가 깨 끗이 먹어치우면 '미도리는 원기 왕성해서 좋겠군. 나는 가슴이 답 답해서 밥을 먹을 수가 없어'하고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환자의 병시중을 드는 건 바로 저라구요. 장난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은 이따금 와서 동정을 할 뿐이잖아요? 대변이나 가래를 받아주고 몸 을 닦아주고 하는 것은 바로 저예요. 그런데도 제가 밥을 전부 먹어 치우면 모두들 저를 비난하는 눈으로 보면서, 하는 소리가 고작 '미 도리는 원기 왕성해서 좋겠군'이에요. 모두들 저를 짐수레를 끄는 당나귀처럼 여기는가 봐요. 나이가 들 대고 들었는데도 어째서 모두 들 이 세상 일을 잘 모르는 걸까요, 그 사람들?' 입으로는 무슨 말이 라도 할 수 있죠. 중요한 건 대변을 받아 주느냐 못 받아주냐예요. 아무리 저라도 마음이 상하는 일은 있어요 지쳐버리는 일도 있어 요. 저도 울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회복될 가망도 없는데 의사들이 몰려들어 머리를 설개하기도 하고 주물러대기도 하고. 그런 짓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게 되면. 되풀이할 때마다 병세가 나빠지고, 머리가 점점 이상해지고, 그런 것들을 계속 눈앞에서 봐보세요, 끔찍해요, 이런 일은. 더구나 은행 대출은 점점 줄어드니까. 저도 앞으로 3년 반 동안 대학을 무사히 다닐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고, 언니도 이런 상태에서는 결혼식조차 올릴 수 없고." "미도리는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여기에 오지?'" 나는 물어보았다 "사흘가량." 미도리는 대답했다. "이곳은 일단 완전 간호 시스템 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간호사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요. 그 사람들 정말로 잘해주지만, 그래도 인원수가 모자라고, 해야 할 일 은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가족이 붙어 있지 않을수 없어 요, 어느 정도는 언니는 가게 일을 봐야 하니까, 학교 강의가 비는 틈을 타서 제가 오지 않으면 안 돼요. 언니가 그래도 일주일에 사흘 은 오고, 제가 사흘 정도.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서 우리는 데이트를 하죠. 과다한 스케줄이에요." "그렇게 바쁜데도, 어째서 자주 나와 만나지?"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좋으니까요." 미도리는 흰 플라스틱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 했다. "두 시간 가량 혼자서 어딘가 산보라도 하고 와 내가 잠시 동안 아버님을 봐드릴 테니까. "왜 요'" "잠시 병원을 떠나서 , 혼자 기분 전환이라도 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말고 머릿속을 텅 비운 채로 말이야." 미도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그럴 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병시중 드는 법?" "아까 봤으니까 대충은 알 것 같아. 링겔을 체크하고, 물을 드리 고, 땀을 닦고, 가래를 받고, 휴대용 변기는 침대 밑에 있고, 시장해 하시면 점심 식사 남은 것을 드리고. 그 외에 모르는 것은 간호사에 게 묻도록 할게. "그 정도 아시면 됐어요." 미도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빠는 지금 머리가 좀 이상해지기 시작했으니까 이따금 이상한 소 리를 할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는 소리를. 만약 그런 소리를 하더 라도 그다지 신경 쓸 거 없어요. "알았어 . 걱정 마." 병실로돌아가자 미도리는 아버지에게 볼일이 있어서 잠깐 외출 하고 오겠다. 그 동안 이 사람이 병시중을 들 거라고 말했다. 아버지 는 그 말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미도리 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똑바로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눈만 깜박거리 지 않는다면, 죽었다고 해도 통할 것 같았다. 눈은 술에 취한 것처 럼 붉게 충혈되 어 있었고, 깊게 숨을 쉬면 코가 조금 부풀었다 그는 이제 꼼짝도 않고. 미도리가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혼 탁한 의식 밑바닥에서 무엇을 상상하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 는지 나로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미도리가 나간 후 나는 그에게 무엇인가 말을 걸어볼까도 생각했 지만.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그는 눈을 감고 잠이 들어버렸다 나는 머리맡의 의 자에 앉아서, 미도리 아버지가 이대로 죽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코 가 이따금 꿈틀꿈틀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리고 만일 내가 곁에 있을 때 이 사내가 숨을 거둔다면 기묘한 느낌이 들거라고 생 각했다. 사실 나는 이 사내와 조금 전에 만났을 뿐이고, 이 사내와 나를 잇는 것은 미도리뿐이다, 미도리와 나는 (연극사 H)를 같이 듣는 관게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숨을 거두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얼굴에 귀를 가까이 대자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는 안신하고 옆 침대의 부인과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나 를 미도리의 애인으로 여기는 듯, 계속 나에게 미도리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아이, 정말로 착한 아이예요." 그녀는 말했다. "정말로 아버 지 병시중을 잘 들고. 친절하고 부드럽고, 눈치가 빠르고, 야무지고, 더구나 예쁘고. 그 아이에게 잘해줘야 돼요. 놓치면 안 되요. 좀처럼 그런 아이는 없으니까 " "잘해주겠습니다. " 나는 적당히 대답해두었다 "우리 집에는 열한 살짜리 딸과 열일곱 살짜리 아들이 있지만 병원에는 통 오지를 않아요. 노는 날에는 서평이니, 데이트니. 뭐니 뭐니 하며 어디론가 논러 가 버리거든요. 해도 너무해요. 용돈만 잔 뜩 뜯어갈 뿐. 다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요." 한 시 반이 되자 부인은 잠깐 장을 봐야겠다며 병실을 나가버렸 다 환자 두 사람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후의 온화한 햇살 이 방 안 가득히 들어와, 나도 둥근 의자 위에서 그만 잠이 든 것 같 았다 창가의 테이블에 흰색과 노란색 국화가 화병에 꽃혀 있어. 지 금이 가을이라고 알려주었다. 손도 대지 않은 점심 식사의 생선 조 림에서 풍기는 비릿한 넴새가 실내에 맴돌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여 전히 딸각딸각 소리를 네며 복도를 돌아다니며, 낭랑한 목소리로 대 화를 주고받았다. 그녀들은 이따금 병실로 와서, 환자가 둘 다 깊게 잠이 든 것을 보고, 나를 향해서 생긋 미소짓고는 모습을 감췄다. 무 엇인가 읽을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병실에는 책도 잡지도 신문도 전혀 없었다 달력이 벽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오코를 생각했다 머리핀 이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오코의 나체를 생각했다 허리의 곡선과 음모에 덮인 곳을 생각했 다 어째서 그녀는 내 앞에서 발가숭이가 되는 것일까? 그때 그녀는 몽유 상태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 일까? 시간이 지나고, 그 작은 세계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날 밤의 일이 정말로 있었던 일이었는지 나로서는 점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분명히 그렇다는 느낌이 들고, 환 상이라고 생각하면 환상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환상이라기에는 너 무나도 모든 것이 뚜렷했고, 정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모든 것이 아 름다웠다 나오코의 몸도 달빛도. 미도리 아버지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 기침을 시작했다 나의 상 상은 그곳에서 중단되었다. 나는 화장지로 가래를 닦아내고, 타월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물을 드시겠습니까?" 하고 내가 묻자, 그는 4밀리미터 정도 끄덕 였다. 작은 유리병으로 조금씩 천천히 물을 주자, 메마른 입술이 떨 리며 , 목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는 물병의 미지근한 물을 전부 마 셨다. "좀더 드시겠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가 무슨 말인가 하려 는 것 같아서.나는 귀를 가까이 했다. "이제 됐어" 하고 그는 메마 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소리는 아까보다도 더욱더 메마르고, 더욱더 작게 들렸다. "무언가 드시지 않겠습니까? 시장하시죠?" 나는 물었다 그는 자 그맣게 끄덕였다 나는 미도리가 하던 것처럼 핸들을 돌려서 침대를 일으키고 야채 젤리와 생선 조림을 스푼으로 번갈아 한입씩 떠서 먹여주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절반 가량을 들고는, 이제 됐 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약간 옆으로 저었다. 머리를 크게 움직이면 통증이 있는 듯, 아주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과일은 어떻게 하 겠느냐고 묻자 그는 "필요 없어" 하고 대답했다. 나는 타월로 입가 를 닦아준 다음, 침대를 다시 수평으로 해놓고. 식기를 복도에 내놓 았다. "맛있었습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맛없어" 하고 그는 대답했다 "네, 사실 그다지 맛있어 보이지는 않는군요." 나는 웃으면서 말 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감을까 뜰까 망설이는 듯한 눈으로 가만 히 나를 보고 있었다. 문득 이 사내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쩐지 미도리와 함께 있을 때 보다도 나와 둘 이만 있을 때 오히려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나를 누군 가 다른 사람과 혼돈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일 그렇다면 나로서는 그 편이 고마웠다. "바깥은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 나는 둥근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포개고 말했다. "가을인 데다가. 일요일이고,날씨가 좋으니까, 어 디를 가도 사람들로 붐비더군요. 하지만 이런 날에는 이런 식으로 방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최고입니다 피곤하지도 않고. 복잡한 곳에 가 봤자 피곤하기만 할 뿐. 공기도 나쁘니까요 저는 일요일에 는 대체로 빨래를 합니다. 아침에 빨아서, 기숙사 옥상에 말렸다가 저녁 무렵에 들여다가 열심히 다림질을 합니다. 저는 다림질을 좋아 하는 편입니다. 우글쭈글하던 것이 똑바로 펴지는 모습은 정말로 보 기 좋으니까요.제 다림질 솜씨는 제법 좋습니다 처음에는물론 잘 다려지지 않더군요,좀처럼. 여기저기 주름이 생기고 하지만 한달 정도 하니까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빨래와 다림질을 하 는날입니다 오늘은 못했습니다만 유감이로군요,이렇게 빨래하기 에 좋은 날인데 하지만 괜찮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면 되니까요. "그 다지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일요일이라야 별로 할 일도 없으니까 요 내일 아침에 빨래를 해서 널어놓고. 열 시에 강의를 들으러 갈 겁 니다. 그 강의는 미도리 씨와 함께 듣습니다. (연극사 B )인데. 지금 은 에우리피데스를 하고 있습니다. 에우리피데스를 아십니까') 고대 그리스인으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ll리스의 3대 비 극 작가라고 들 하지요. 결국에는 마케도니아에서 개에게 물려죽었 다고 합니다만. 다른 설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에우리피데스입니 다. 저는 소포클레스 쪽을 좋아하지만, 그건 취향 문제라고 할 수 있 겠죠. 그러니까 뭐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군요 그의 연극의 특징은 여러 가지 것들이 뒤죽박죽으로 뒤엉켜서 꼼 짝도 할 수 없게 피는 절에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 각각의 사법과 이유와 주장이 있고. 모두 들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 그렇지요. 모 두의 주장이 관철되어 , 모두의 행복이 달성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는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카오스를 초래하게 됩니 다. 그러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 다. 마지막에 신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통 정리를 합니다. 너 는 저쪽으로 가고, 너는 이쪽으로 오고, 너는 잠시 거기서 기다려라 는 식으로 말이죠. 진짜 공정하게 잘 조정 해주니까, 모든 것이 완벽 하게 해결됩니다. 그 신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 라고 합니다. 에우리 피데스의 연극에서는 언제나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등장하는데, 바로 그 부분에서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평가가 갈라집니다 하지만 만일 현실 세계에 그러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신이 존재한다면, 정말로 편하겠지요. 어쩌나, 꼼짝도 못하게 됐군, 하며 난처해 할 때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부 처리해주니까요. 더이상 편한 게 없겠지요. 하여튼 그것이 (연극사 H)입니다. 우리들은 대 체로 대학에서 그런 것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미도리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멍한 눈 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그가 조금이라도 이해 하는지 못하는지 그 눈빛으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 "피스!" 하-고 나는 말했다. 거기까지 이야기하자,몹시 배가 고팠다. 아침 식사를 거의 먹지 못한 데다가, 점심의 정식도 반쯤 남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지만, 후회한다고 해도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 먹을 게 없을까 하고 테이블 밑을 뒤져봤 지만, 김이 들어 있는 깡통과 사탕과 간장이 있을 뿐이었다. 종이 봉 지 안에는 오이와 자몽이 들어있었다. "배가 고파서 오이를 먹겠씁니다만, 괜찮을까요?" 나는 물어보았다. 미도리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욕실에서 오이 세 개를 씻어왔다. 그리고 접시에 간장을 조금 부은 다음-, 오이에 김 을 말아서, 간장에 찍어 먹었다. "맛있군요. 싱싱하면서 . 신선하고, 생명의 향기가 납니다. 맛있는 오이로군요. 키위보다 훨씬 좋은 음식입니다. " 나는 한 개를 다 먹고 다른 한 개를 집어들었다. 아작아작 하는 정말로 기분 좋은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오이 두 개를 통째로 먹고 나니까 그런 대로 허기가 가셨다 이어서 토에 있는 가스 곤 로로 물을 끓여, 차를 타서 마셨다 "물이나 주스 드시 겠습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오이" 하고 그는 대답했다. 나는 싱긋 웃었다. "좋습니다. 오이도 함께요?" 그는 희미하게 끄덕였다 나는 다시 침대를 일으키고는, 가위 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오이를 김에 말아서 간장에 찍어 , 이쑤시 개에 꽂아서 입에 갖다 주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몇 번이고 씹 은 다음, 삼켰다. "어떻습니까? 맛있죠',?" 나는 물어보았다 "맛있어 ." 그는 대답 했다 "음식이 맛있다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요 결국 그는 오이 한 개를 먹었다 오이를 먹고 나자 물을 마시고 싶어하기에, 나는 다시 물병으로 먹여주었다. 물을 마시고 잠시 후 소변을 보고 싶다기에 . 나는 친대 밑에서 휴대용 변기를 꺼내어 , 그 입구에 페니스 끝을 대어주었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소변을 버리 고, 변기를 씻었다 그리고 병실로 돌아와 남은 차를 마셨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조금 " 그는 말했다. "머리 "머 리가 조금 아프신 가요?" 그렇다는 듯이 그는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수술 후이니까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수술을 받은 적이 없 어서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표' 하고 그가 말했다. "표." "표' 무슨 표 말씀입니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도 잠시 잠자코 있었 다. 그리고는 "부탁해" 하고 말했다 '부탁한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똑바로 뜨고 가만히 나를 보았다.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부탁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나로서는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 다 "우에.'.=' 하고 그가 말했다 "미도리." "우에도 옅 말씀입니가?" 그는 작게 끄덕 였다 "표 미도리 부탁해 우에도 역" 하고 나는 정리해보았다. 하지만 전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의식이 흐려져서 머리가 혼란스 러워 진 것이리라고 생각했지만, 눈매가 아까에 비해서 아주 또렷했 다. 그는 링겔 바늘이 꽃혀 있지 않은 쪽의 팔을 들어 나에게 내밀었 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상당한 힘이 드는지 . 손은 허공에서 부들부 들 떨렸다. 나는 일어나서 그 주름살투성이의 손을 잡았다. 그는 힘 없이 내 손을 마주 잡으면서, "부탁해" 하고 되풀이했다. 표도 미도리도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씁니 다- 하고 내가 말하자 그는 손을 내리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나는 그가 죽지 않은 것을 확인 하고는 밖으로 나가서 물을 끓여, 다시 차를 마셨다. 그리고 자신이 죽어가는 이 자그만 사내에게 호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음을 알아 차렸다 잠시 후 옆 침대의 부인이 돌아와서는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의 남편도 씩씩거리는 소리를 내며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미도리는 세 시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공원에서 멍하니 있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당신 말씀대로, 혼 자서 잠자코, 머릿속을 텅 비운 채로." "어때?" '고마워요. 아주 편안해진 기분이에요. 아직도 조금은 나른하지 만, 아까보다는 훨씬 몸이 가벼워졌어요. 저는, 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지쳐 있었던 모양이에요." 미도리 아버지는 잠이 깊게 들었고, 별로 할 일도 없어서, 우리들 은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사서 휴게실에서 마셨다 그리고 나는 미 도리에게, 그녀가 없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보고했다. 푹 자고 일어나, 남은 식사를 반쯤 들고는, 내가 오이를 먹고 있노라니 자기도 먹고 싶다며 한 개 먹고, 소변을 본 후 잠이 들었다고. "와타나베 씨.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미도리는 감탄해서 말했 다. "아빠가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모두들 고생을 하는데, 오이까지 잡숫게 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정말 "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맛있게 오이를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당신에게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능력이 있는 걸까요?" '설마' 하며 나는 웃었다. "그 반대로 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 만 "우리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좋아해.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쩐지 좋은 사랑이라는 느낌은 들더군. "점잖던가요?" "아주 " "하지만 일주일 전에는 정말 굉장했어요." 미도리는 고개를 저으 며 말했다. "머리가좀 이상해져서, 날리를 쳤어요. 저에게 컵을 집 어던지며, 바보 자식, 콱 죽어버려 하고 소리치는 거예요. 이 병은 이따금 그런 증세가 있어요. 어째서 인지는 모르지만, 간혹 가다가 몹시 못되게 구는 거예요. 엄마 때에도 그랬어요. 엄마가 저를 향해 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너는 내 아이가 아니야, 꼴도 보기 싫어, 하시는 거예요. 저는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 졌어요. 그런 게 바로, 이 병의 특징이에요. 무엇인가가 뇌의 일부분을 압박해서 환자를 초조 하게 만들고, 결국은 있는 일 없는 일 떠들어대게 만드는 거죠 저도 그런 정도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알면서도 마음이 상하더군요. 그 토록 열심히 병시중을 들고서도, 어째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하 고. 한심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 점은 이해가 되는군" 나는 말했다. 그리고 미도리 아버지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던 일을 기억해냈다. "표?우에도 역?" 미도리는 말했다. "무슨 뜻일까요?잘 모르겠 네요." "그리고 '부탁해' '미도리'라고 하시더군" 그건 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어쩌면 미도리가 우에도 역에서 표를 사주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몰라." 나는 말했다 "하여간에 그 네 마디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서 의미를 잘 모르겠더군. 우에도 역이라는 말에서 생각나는 거 없 나?" "우에도 역" 하며 미도리는 생각에 잠겼다 "우에도 역이라는 말 에서 생각나는 건 제가 두 번 가출을 했던 일이에요. 국민학교 3학 년 때와 1학년 때, 홧김에 했어요 후쿠시마에 숙모님이 계시는데, 그 숙모님을 특히 좋아했기 때문에, 그곳에 갔었지요.그러자 아빠 가 저를 데리러 왔죠 후쿠시마까지. 둘이서 전차에서 도시락을 먹 으며 우에 노까지 돌아왔어요. 그때 아버지는 아주 띄엄띄엄이기는 하 지만.저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죠.관동 대지진 당시의 이 야기라든가, 전쟁 당시의 이야기라든가, 제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 라든가, 평소에는 그다지 한 적이 없는 그런 이야기를 말이에요. 생 각해보면 아빠와 제가 둘이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한 것은 그때뿐이 었어요. 제 말이 믿어지세요?우리 아빠, 관동 대지진 때에 도쿄의 한복판에 있었으면서도 지진이 일어난 사실조차 몰랐다는 거예요 "설마."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건 정말이에요. 아빠는 그때 자전거에 짐수레를 날고 고이시 카와 부근을 달리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거예요 집에 돌아오자 지붕의 기와가 전부 떨어져 있고,가족들은 기둥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더군요. 그래서 아빠는 영문도 모르는 채 '도대체 뭣들 하는 거야?' 하고 물었대요. 그게 아빠의 관동 대지 진 추억담이에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아빠의 추억 담이란 대부분 그런 식이에요. 전혀 극적인 데가 없어요. 전부 어딘 가가 어긋나 있어요, 삐끗하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최근 5, 6년간 일본에는 별다른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던 듯한 느 낌이 들어요.2 26 사건(1936년 2월 26일,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일으 켰던 쿠데타)도 태평양 전쟁도, 그러고 보면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 는 느낌이죠. 이상하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띄엄띄엄 해주는 거예요. 후쿠시마에서 우에노로 돌아오는 동안에 그리고 마지막에는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시죠. 어 딜 가나 마찬가지야, 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어린 마음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우에노 역의 추억담인가?" "그래요." 미도리는 말했다 "와타나베 씨는 가출한 적 있으세 요" "없어 " "왜 요?" "가출 따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든 "당신 정말 유별난 사람이에요." 미도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감 탄한 듯이 말했다. " 그럴까?" "그런데 아빠는 당신에게 저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 라고 생각해요. "정 말?" "정말이에요. 저는 알 수 있어요. 직감적으로. 그래서 어떻게 대 답했나요?" '잘 알았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미도리도 표도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하고 말씀 드렸지 "그렇다면 아빠에게 그렇게 약속한 셈이로군요? 저를 책임지겠다 고."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며 진지한표정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 다.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몰라서 . . " "괜찮아요, 농담이니까. 잠깐 놀려본 것뿐이에요." 미도리는 웃었 다 "당신 정말로 그런 점이 아주 귀여워요. 커피를 다 마시자 미도리와 나는 병 실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다 시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귀를 가까이 대자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창 밖의 햇빛은 정말로 가을답게 부드럽고 고요한 색으로 변했다 새들이 떼지어 전깃줄에 와 앉더니, 다시 날아갔다 미도리와 나는 나란히 구석 쪽에 앉아서. 작은 소리로 여러 가지 이 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 손금을 보고는, 백 살까지 살면서 세 번 결혼하고 교통 사고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인생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시가 좀 지나 아버지가 눈을 뜨자. 미도리는 머리맡으로 가서, 땀을 닦아주기도 하고, 물을 드리기도 하고, 머리가 아프냐고 묻기 도 했다 간호사가 오더니 열을 재고, 소변 횟수를 체크한 후 링겔을 점검했다 나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서 잠시 축구 중계를 봤다 "슬슬 가볼게." 다섯 시가 되자 나는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지금부터 아르바이트를 가야 합니다" 하고 설명했다. "여섯 시부터 열 시 반까지 신주쿠에서 레코드를 팝니다 " 그는 내 쪽으로 눈을 돌리고는 작게 끄덕였다 "와타나베 씨. 지금 뭐라고 제대로 말은 못하겠지만,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고마워요." 현관 로비에서 미도리가 나에게 말했다. "감사받을 정도의 일은 하지 못했는걸. 하지만 내가 도움이 된다 면 다음 주에도 올게. 미도리 아버님과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고." "정 말?" "어차피 기숙사에 있어 봤자 할 일도 없고, 이곳에 오면 오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까." 미도리는 팔짱을 끼고, 신발 뒤축으로 리골륨 바닥을 쿵쿵 두드 렸다. "언젠가 또 둘이서 술 마시러 가고 싶어요." 그녀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며 말했다. "포르노 영화는?" "포르노를 보고 나서 술을 마셔요" 미도리는 말했다. "그리고 여 느 때처럼 둘이서 엉큼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거예요." "나는 하지 않았어. 미도리가 했지." 나는 항의했다. "아무래도 좋아요. 하여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잔뜩 마시 고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함께 부둥켜안고 자는 거예요." "그 다음은 대체로 상상이 가는군"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하려고 덤비면, 미도리가 거절하는 거겠지?" "흐흥 " "하여간에 오늘 아침처럼 데리러 와, 다음 주 일요일에, 함께 이 리로 오지.' "좀더 긴 치마-를 입고?" 하지만 그 다음 주 일요일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미도리 아 버지가 금요일 아침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여섯 시 반에 미도리가 전화로 그 사실을 알려왔다 전 화가 왔다는 벨이 울리자, 나는 파자마 위에 카디건을 걸쳐 입고 로 비로 내려가 전화기를 들었다. 차가운 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 었다. 아빠가 방금 돌아가셨어요, 하고 미도리는 작은 소리로 조용 히 말했다 뭔가 도와줄 일이 있나? 하고 나는 물어보았다. "고마워요. 괜찮아요." 미도리는 대답했다. "우리는 장례식에 익 숙해져 있으니까요. 다만 당신에게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 그녀는 한숨 같은 것을 쉬었다. "장례식에는 오지 마세요. 저는 그런 거 싫어요. 그런 곳에서 당 신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알았어 " 나는 대답했다. "정말 포르노 영화 볼 거예요?" "물론 "아주 야한 거 예요 '잘 찾아놓을 게, 그런 걸로." "그럼. 재 쪽에서 연락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고 미도리는 전화 를 끊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일주일간, 그녀로부터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학교 강의실에서도 만나지 못했고,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기숙사 에 돌아갈 때마다 나에게 메모가 남겨져 있지 않을까 하고 주의해서 봤지만, 전화라곤 단 한 통도 걸려오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나는 미 도리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그녀를 생각하며 마스터베이션 을 해보았으나. 아무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도중에 나오코로 바꾸어 보았지만, 나오코의 이미지 역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머쓱해져서 그만두고, 위스키를 마신 후 이를 닦고 잤다. 일요일 아침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편지에 미도리 아버지에 관해서 썼다. 나는 같은 과 여학생의 아버지 문병을 가서 남아 있는 오이를 먹었다. 그러자 아버지도 먹고 싶다며 오이를 아 작아작 씹어 먹었다. 하지만 결국 닷새 후 아침에 그는 죽었다. 나는 그가 오이를 먹을 때 아작아작하고 나던 작은 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란 자그맣고 기묘한 추억을 뒤에 남기 는 법이다. 라고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침대에서 나오코와 레이코. 그리고 새 장을 생각합니다. 공작새와 비둘기와 앵무새와 칠면조, 그리고 토끼를 생각합니다. 비 내리는 아침에 두 여자가 입고 있던. 모자 가 달린 노란색 비옷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듯한 침대 속에서 나오코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치 나오코가 내 곁에서 몸을 웅크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따금 몹시 외로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나는 대체로 원기 왕성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나오코가 매일 아침 새들을 돌보거나 밭일을 하거나 하듯이 나도 매일 아침 자신의 나사를 조이고 있 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 이를 닦고, 면도를 하고. 아침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나 는 대체로 서른여섯 번 정도 나사를 조여 댑니다 자,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도 잘 모르던 일인데 나는 최근에 자주 혼잣말을 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나사를 조이 면서 중얼중얼 무엇인가 말하는 것이겠지요. 나오코와 만날 수 없는 것은 괴롭지만. 만일 나오코가 이 세상 에 없다면 도쿄에서의 생활은 더욱더 비 참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침대 속에서 나오코를 생각하는 덕분에, 나사를 조이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오코가 그곳에서 열 심히 살고 있듯이, 나도 이곳에서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나사를 조이지 않아도 되는 아침 입니다. 빨래를 끝내고, 지금은 방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으면 저녁때까지는 아무 런 일거리도 없습니다. 일요일에는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평일에 시간이 나는 대로 도서관에서 제법 열심히 공부를 하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일요일 오후는 조용하고 평화롭고, 또한 고독합니다. 나는 혼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합니다. 나오코가 도쿄에 있었을 때 일요일이면 같이 걸었던 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나오코가 입 고 있었던 옷도 대부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요일 오후 가 되면 나는 정말로 여러 가지 일들을 머리에 떠올립니다. 레이코 씨에게 안부 전해주십시오. 밤이 되면 그녀의 기타 소 리가 몹시 그리워집니다. 편지를 써서 2뱉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우체통에 넣은 딜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점심 식사 대신 근처 빵집에서 산 에그 샌드위치와 콜라를 먹었다. 공원에서는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었 다. 가을이 깊어짐에 따라 하늘은 더욱더 푸르고 높아져, 문득 올려 다보니 두 줄의 비행기 구름이 전차의 신로처럼 평행을 이루고 서쪽 으로 곧게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가까이에 굴러 온 파울볼을 주워서 던져 주었더니. 아이들은 모자를 벗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 다. 아이들 야구가 대부분 그렇듯이 포볼과 도루가 많은 시합이었 다. 오후에 나는 방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지만.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 천장을 바라보며 미도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버 지는 정말 로 나에게 미도리를 잘 부탁한다는 말윽 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이리라 어 쨌든 차가운 비가 내리는 금요일 아침에 그가 죽었으니 . 사실 여부 를 확인할 수는 없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죽을 때, 더 자그맡게 움 츠려들어 있었으리라고 나는 상상했다. 그리고 소각로에서 화장되 어 재만남게 된 것이다 . 그가 남기고 간 것이라곤 극히 평범한 상 점가 속의 평범한 책방과 두 딸-적어도 그 중의 하나는 다소 유별 난 그 뿐이었다. 그것은 도대체 어떤 인생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 했다. 그는 병원 침대 위에서 , 수술 뒤 혼탁해진 머리를 감싼 채. 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보았을까? 그런 식으로 미도리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으려니 울적해져서, 나 는 일찌감치 옥상의 빨래를 거둬 들이고 신주쿠 거리를 걸으며 시간 을 보내기로 했다. 일요일의 혼잡한 거리는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나는 통근 열차처럼 붐비는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포크너의 꼴월의 빛을 사 가지고, 일부러 시끄러울 것 같은 재즈 찻집을 골라 들어 갔다. 오네트 롤맨이나 배드 파우엘 등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뜨 겁고 진하고 맛없는 커피를 마시면서. 방금 사 온 책을 읽었다. 다섯 시 반이 되자,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가 간단한 저넉 식사를 했다. 그 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몇 십 번, 몇 백 번 되풀이해야 하는가 하고 문득 생각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 하 고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나는 일요일에는 나사를 조이지 않는다 그 주중에 나는 유리에 베어서 손바닥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레 코드 선반의 유리 칸막이가깨져 있는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솟구쳐 주위의 바닥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지배인이 타원 몇 장을 들고 오더니 붕대 대신 그것으로 단단히 묶어주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밤에도 치료를 하 는 응팝 병원의 위치를 물어봐 주었다. 칠칠치 못한 사내였지만, 그 런 조치만큼은 잽쌌다: 다행히도 병원은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곳에 도착하는 동안 금세 타월을 적신 피가 아스팔트 위로 뚝뚝 떨어졌 다. 사람들은 당황해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들은 싸움을 하다가 다 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통증은 대수롭지 않았다 단지 끊임없이 피가 솟아날 뿐이었다. 의사는 무표정하게 피투성이의 타월을 풀더니. 손목을 꽉 조여서- 지혈을 하고는 상처를 소독하여 꿰맨 뒤, 내일 또 오라고 말했다. 레 코드 가게로 돌아가자 자네 그만 들어가도 좋아. 출근한 것으로 해 둘 테니까. 하고 지배인이 말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 왔다. 기숙사에 도착해 나가자와의 방으로 가보았다. 상처 탓인지 약간 흥분이 되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나가자와와 상당 히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에서, 텔레비전의 스페인어 강좌를 보며 캔 맥주를 마시 고 있었다. 그는 내 붕대를 보더니, 어이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물었 다. 약간 상처를 입었지만 별것 아니라고 나는 대답했다. 맥주 마시 겠나 하고 그가 묻기에, 필요 없다고 나는 말했다 "이제 곧 끝날 테니까 기다려." 나가자와는 그렇게 말하고는. 스 페인어 발음 연습을 했다. 나는 직접 물을 끓여 홍차를 타서 마셨다. 스페인 여자가 예문을 읽었다 '이렇게 심한 비는 처음이에요. 바르 셀로나에서는 다리가 몇 개나 떠내려갔습니다. ' 나가자와는 예 문을 읽으며 발음 연습을 하고는 "형편없는 예문이로군' 하며 불평 했다. "외국어 강좌의 예문은 이런 것뿐이 라니까." 스페인어 강좌가 끝나자, 나가자와는 텔레비전을 끄고 소형 넹장 고에서 맥주를 하나 더 꺼내어 마셨다. "방해가 되지 않습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나? 전혀 방해될 거 없어. 따분해 하던 참이었거든. 정말 맥주 안 마시겠나?" 안 마시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아참. 요전에 시험 발표가 있었지 붙었어." 나가자와가 말했다 "외무성 시험?" "그래, 정식으로는 외무 공무원 채용 1종 시험이라고 하는데, 웃 기지도 않지'." "축하합니다. " 나는 왼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고마워 "당연한 일입니다만." "당연하기는 하지." 나가자와는 웃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고 보니 좋군, 일단은 말이야." "취직하면 외국에 갑니까?" "아니 처음 1년간은 국내 연수야. 그리고 나서 당분간 외국에 보 내지 ." 나는 홍차를 마셨고, 그는 맛있게 맥주를 마셨다. "이 넹장고 말인데, 만일 원한다면 이곳을 떠날 때 자네에게 주 지." 나가자와는 말했다. "필요하지? 이게 있으면 차가운 맥주를 마 실 수 있으니까." "그야 주신다면 고맙게 받겠습니다만, 선배님도 필요하지 않습니 까? 어차피 아파트에 살게 될 테니까" "무슨 소리야. 이런 곳에서 나가면 나는 더 큰 냉장고를 사서 화 려하게 지낼 거야 이런 구질구질한곳에서 4년이나참았잖아 이런 곳에서 사용하던 물건은 쳐다보기도 싫어.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 든 주지 , 텔레비전이건, 보온병이건. 라디오건 "아무 거라도 좋습니다. " 나는 책상 위의 스페인어 텍스트북을 집 어들었다. "스페인어를 시작하셨습니까?" "응. 어학은 하나라도 많이 해두는 게 도움이 되고. 또 그런 방면 에 소질이 있으니까.불어도 독학을 했지만 거의 완벽하거든 개임 과 비슷하찌 룰을 하나 알게 되면, 나머지는 모두 엇비슷하니까 여 자나 마찬가지 라구." "상당히 자기 관찰력이 뛰어나시군요." 나는 비꼬아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언제 함께 식사라도 하러 가지?" "또 여자를 꼬시러 가는 건 아니겠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순수한 식사야. 하쓰미와 셋이 그럴싸한 레스토랑에 가서 회식을 하는 거지. 내 취직 축하야. 가능하면 비싼 곳으로 가자구 어차피 돈은 우리 아버지가 내니까." "그런 축하는 하쓰미 씨와 둘이서 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자네가 있어야만 안심이 되거든 하쓰미도 나도." 나가자와는 말 했다. 맙소사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기즈키와 나오코의 경우와 똑같지 않은가. "식사가 끝나면 나는 하쓰미의 아파트로 가서 잘 테니까. 식사 정 도는 셋이서 해도 되잖아" 두 분께서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신다면 가겠습니다. " 나는 말했다 '하지만 하스미 씨를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연수가 끝나면 해외 근무를 하게 될 테고, 그럼 몇 년이고 돌아오지 않겠지 요? 그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하쓰미의 문제지 , 내 문제가 아니야. 무슨 말씀인지 그 의미를 모르겠군요." 그는 책상에 팔을 올려놓은 채 맥주를 마시고는, 하품을 했다 "즉 나는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고, 그 점은 하쓰미에게도 이 야기했어 . 그러니까 하쓰미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한다면 해 도 좋아 결혼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겠다면 기다려도 좋고. 그런 이 U 야." "흐을.' 나는 감탄했다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겠지 , 나를?" "좋씁니다 " '이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게 되어 있지.그건 내 탓이 아니야 처 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하쓰미를 속인 적이 한 번도 없어 .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매정한 인간이니까, 그 점이 싫다면 헤어 져도 좋다고 확실히 말해뒀지." 나가자와는 맥주를 다 마시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선배님은 인생에 대해서 공포를 느낄 때가 없습니까?" 나는 물 어보았다. "이봐,나는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나가자와는 말했다. "물 론 인생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는 일은 있지 . 그건 당연하잖아? 단지 나는 그런 것을 전제 조건으로는 인정하지 않아.자신의 힘을 백퍼 센트 발휘할 수 있는 데까지 발휘할 거야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손에 넣고, 갖고 싶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아, 그렇게 사는 거지 . 그래 도 안 되는 일이 있으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니까. 불공평한 사회 란 역으로 생각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이기도 하거든 " "지나치게 에고이스틱한 이야기로군요." "하지만, 나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과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지는 않아. 나는 내 나름대로 상당히 노력하고 있지 자네의 열 배 정도는 노력한다구. "그렇겠지요." 나는 그 말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이따금 이 세상을 둘러보고는 정나미가 떨어지는 때가 있어 어째서 이 녀석들은노력을하지 않을까 노력도 하지 않고불 평만 하는 걸까 하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나가자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가 보기 에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들 악착같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 같은 데, 제 생각이 틀린 걸까요?"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이지." 나가자 와는 간단히 말했 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니야. 노력이란 보다 더 구체 적인 목적하에 행해지는 거라구." "예를 들자면 취직이 결정되어 모두들 안심하고 있을 때 스페인 어 공부를 시작한다든가 하는 것이로군요?" "그렇지 나는 내년 봄까지 스페인어를 완전히 마스터할 작정이 야. 영어. 독어, 불어는 이미 완벽하고, 이태리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지 . 그런 걸 노력도 없이 할 수 있겠나?" 그는 담배를 피웠고, 나는 미도리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미 도리 아버지는 텔레비전 앞에서 스페인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한번도 한 적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과 노동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생각해보지도 못했으리라 그는 그런 것들을 생 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바빴던 것이다. 일도 바빴고, 가출한 딸을 데 리러 후쿠시마까지 가야만 했다. "식사는 이번 주 일요일이 어떨까?" 나가자와가 물었다 좋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가자와가 정한 음식점은 아자부 뒷골목에 있는 조용하고 품위 있는 곳이었다. 나가자와가 이름을 말하자 우리는 안쪽의 방으로 안 내되었다. 작은 방으로 벽에는 판화가 15점 정도 걸려 있었다. 하쓰 미가 올 때까지, 나가자와와 나는 조셉 콘래드의 소설 이야기를 하 며 맛있는 와인을 마셨다 나가자와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회색 양복 차림이었고, 나는 아주 평범한 네이비 블루의 블레이저 코트를 입고 있었다. 15분 가량 지나자 하쓰미가 왔다. 그녀는 곱게 화장을 하고, 금귀 고리에, 짙은 청색의 멋진 원피스 붉은 색의 고상한 펌프스를 신고 있었다. 내가 원피스의 색을 칭찬하자, 미드나이트 블루라는 거예 요, 하고 가르쳐주었다 "멋진 곳이로군요." 하쓰미가 말했다. "아버님이 도쿄에 오실 때마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시지. 예전에 한 번 같이 온 적이 있어 나는 이렇게 고급스러운 요리는 별로 좋아 하지 않지만." 나가자와가 말했다. "그래도 이따금은 괜찮군요, 이런 곳도. 안 그래요, 와타나베 씨?" 하쓰미가 말했다 '그렇군요. 내가 돈을 내는 게 아니라면." 나는 대답했다. "우리 아버님은 대체로 여자와 함께 오지." 나가자와가 말했다. "도쿄에 여자가 있으니까." '그래요?" 하쓰미가 말했다. 나는 듣지 못한 척하며 와인을 마셨다. 이윽고 웨이터가 오자, 우리는 요리를 주문했다. 전채와 수프를 함께 고른 후, 메인 디시로 나가자와는 오리 요리를. 하쓰미와 나는 농어 요리를 주문했다. 요리가 나오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우리는 와인을 마시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나가자와 가 외무 고시 이야기를 했다. 수험자들의 대부분은 구덩이 속에 던 져버리고 싶을 정도의 쓰레기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쓸 만한 사람도 몇 명 있더군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 비율이 일반 사회의 비율과 비교해서 높은가 낮은가 물어보았다 "마찬가지야, 물론." 나가자와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건, 어디나 마찬가지야, 일정 불변이지 .' 와인이 떨어지자 나가자와는 또 한 병을 주문하고, 자기 몫으로 카의 위스키를 더블로 부탁했다 이어서 하쓰미가 나에게 소개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은 하쓰미와 나 사이의 영원한 화젯거리였다. 그녀는 나에게 '클럽 후배인 예쁜 아이'를 소개하고 싶어했고, 나는 언제나 반가워했다. "하지만 정말로 좋은 아이예요. 미인이고. 다음에는 데리고 올 테 니까 한 번 이야기해보세요. 틀림없이 마음에 드실 거예요." "싫습니다. " 나는 말했다. "하쓰미 씨가 다니는 학교의 여학생과 사귀기에는 제가 너무나 가난하니까요. 돈도 없고, 이야기도 맞지 않고 ." "어머나 그렇지 않아요 그아이는 아주 밝고 좋은 아이예요.잘 난 척하거나 하지도 않고." "와타나베 한 번 만나보는 게 좋잖아?" 나가자와가 말했다. "섹스 는 하지 않아도 되니까." "당연하잖아요? 그런 짓을 했다간 큰일나요. 어엿한 버진이니 까." 하쓰미가 말했다. "옛날의 하쓰미처럼 ." "네, 옛날의 저처런 " 하쓰미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와 타나베 씨. 가난하다는 둥 어떻다는 둥, 그런 건 별로 관계가 없어 요. 물론 같은 과에 몇 명인가 잘난 척하며 설쳐대는 아이들도 있지 만,나머지는 저처럼 평범해요. 점심 시간에는 학교에서 250엔짜리 점심을 먹고 "하쓰미 씨." 나는 말을 가로막았다. "저희 학교 식당의 점심은A B. C 세 가지가 있는데 A가 12()엔이고 H가 100엔, C가 80엔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쩌다가 A를 먹으면 모두들 아니꼽다는 눈으로 쳐다 봅니다 C도 먹지 못하는 녀석은 50엔짜리 라면을 먹습니다 그런 학교입니다. 대화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쓰미는 웃음을 터뜨렸다 "싸군요, 한 번 먹으러 가고 싶어요. 하지만, 와타나베 씨,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히 그녀와 이야 기가 맞을 거예요. 그녀도 120엔짜리 점심을 마음에 들어할지도 모 르잖아요?" "설마 "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씁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 먹는 거죠." "하지만 겉만 보고 저희들을 판단하지 마세요. 와타나베 씨. 버룻 없는 부잣집 딸들이 다니는 학교라고는 하지만, 진지하게 인생을 생 각하며 살아가는 아이들도 많이 있어요. 전격 스포츠 키를 한 남학 생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 나는 말했다. "와타나베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나가자와가 말했다. "하지 만 그 여자에 관해서 이 친구는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아. 일단 입이 무거우니까.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지." "정말이세요?" 하쓰미가 나에게 물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수수께끼 따위는 없습니다 다만 사정이 아 주 복잡해서 이야기하기가 곤란할 뿐이지요." "불륜의 관계라든가 그런 건가요? 어디, 저에게 상담해보세요.' 나는 와인을 마시며 얼버무렸다. '그것 봐, 입이 무겁지?" 석 잔째의 위스키를 마시며 나가자와가 말했다. "이 친구는 한 번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면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으니까." '유감이로군요." 하쓰미는 잘게 썬 음식을 포크에 찍어서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 아이와 당신이 잘 되면 우리는 더블 데이트를 할 수 있을 텐데." '술에 취해서 스와핑도 할 수 있고." 나가자와가 말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이상한 소리가 아니야, 와타나베는 너를 좋아하니까." '그것과 이것과는 별개잖아요." 하쓰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 다. "와타나베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자신의 것을 아주 소중 하게 여기는 분이에요. 저는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자를 소개하 려는 거예요." "하지만 와타나베와 나는 한 번 여자를 서로 바꿔본 적이 있다구. 요전에. 그렇지'?" 나가자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위스키 잔을 치켜들고, 다시 한 잔 주문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어디 이야기해봐. 상관없으니까." 나가자와가 말했다. 나는 입장 이 난처했다. 이따금 술이 들어가면 나가자와는 짓궂게 행동하는 때 가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의 나가자와의 짓궂은 행동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쓰미를 향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나 로서는 더더욱 거북한 느낌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아주 재미있겠는데요?" 하쓰미가 나 에게 말했다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 "괜찮아요. 변명하지 않아도. 책망하는 게 아니니까. 다만 그 이 야기를 듣고 싶을 뿐이에요." "시부야의 바에서 선배님과 둘이서 술을 마시다가, 여자 두 명과 가까워 졌습니다 무슨 전문대학 학생들인데, 그쪽도 잔뜩 취해 있어 서, 결국 부근의 호텔로 들어가 잤습니다. 나란히 붙어 있는 방 두 개를 빌려서요. 그런데 밤중에 나가자와 씨가 제 방문을 두드리면 서, 어이 와타나떼. 서로 여자를 바꾸자구 하고 말씀하시니까 제가 나가자와 씨 방으로 가고, 나가자와 씨가 제 방으로 온 겁니다' "그 아이들은 화를 내지 않던가요?" "그 아이들도 취해 있었으니까, 결국 상대가 누구이건 상관없었 던 모양입니다. 그 아이들 입장에서도." "그런 짓을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나가자와가 말했 다. "어떤 이유?" "그 아이들 말인데, 너무나 차이가 나더라구. 하나는 예뻤지만, 또 하나는 아주 못생겼으니까,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즉 내가 예쁜 쪽을 차지했으니까 와타나베에게 미안하잖아? 그래 서 교환한 거라구. 그렇지 와타나베?"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 면, 나는 예쁘지 않은 쪽의 아이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도 재미있게 하고, 성격도 좋은 아이였다. 그녀와 내가 섹스를 끝내고 침대 속에서 정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가자와가 오 더니 파트너를 바꾸자고 했던 것이다. 내가 그 아이에게 괜찮겠느냐 고 묻자, 괜찮아요, 당신들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고 그녀는 대답 했다 그녀는 아마도 내가 예쁜 쪽 아이와 자고 싶어하는 것으로 생 각한 모양이 었다. "즐거웠나요?" 하쓰미가 나에게 물었다 "교환한 게 말씀입니까?" "그것도 포함해서 전부." "특별히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단지 관계를 할 뿐이죠. 그런 식으로 여자들과 자봤자 별달리 재미있는 일이 있 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짓을 하나요?" "내가 꼬시니까 나가자와가 말했다. "저는, 와타나베 씨에게 질문하고 있어요." 하쓰미는 냉담하게 말 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죠?" "이따금 몹시 여자와 자고 싶어 집니다. " 나는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어떻게든 해결할 수는 없나 요?" 하쓰미는 잠시 생각하고는 물었다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하쓰미는 한숨을 쉬었다. 그떼 방문이 열리더니 요리가 들어왔다 나가자와의 앞에는 오리 요리가, 하쓰미와 내 앞에는 농어 요리가 놓여졌다. 웨이터가 데친 야채에 소스를 뿌리고 물러가자, 다시 우리 셋만 남게 되었다. 나가 자와는 나이프로 오리 고기를 잘라서 맛있다는 듯 먹고는 위스키를 마셨다. 나는 시금치를 먹어보았다. 하쓰미는 요리에 손을 대지 않 았다 이봐요, 와타나베 씨,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런 종류 의 행동은 당신 적성에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은데, 당 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쓰미는 물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손 을 놓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 나는 대답했다. "저 자신도 이따금 그렇게 생각합 니다" "그렇다면, 왜 그만두지 않죠" "이따금 온기가 그리워집니다. "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한 피부의 온기 같은 것이 없으면, 이따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워 집니다. " '다시 말해서 이런 1야." 나가자와가 끼여들었다. "와타나베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지만 무슨 사정이 있어서 관계를 할 수 없지 그 러니까 섹스는 섹스라고 딱 잘라서 생각하고는 다른 곳에서 처리를 하는 거야. 그러면 되는 게 아닌가' ?극히 정상적인 이야기지. 방에 들어박혀서 마스터베이션만 할 수도 없잖아?" "하지만 그녀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와타 나베 씨?" 하스미는 잠시 생각하고는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크림 소스를 뿌린 농어 를 입으로 가져갔다 "하쓰미는 남자의 성욕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가자와가 하스 미에게 말했다. "예를 들자면 나는 하쓰미와 5년간 사귀어 오면서 도, 그 동안에 상당히 많은 여자들과 잤어. 하지만 나는 그 여자들 에 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해. 상대가 누구이건 한 번밖에 자지 않으니까 만나서, 섹스를 하 고, 헤어지지. 그것뿐이 야. 그게 어디가 나쁜가?" "제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낭만의 그러한 오만함이에요.' 하쓰미 는 조용히 말했다. "다른 여자들과 자냐 자지 않나의 문제가 아니 에요. 제가 이제까지 당신의 여자관계에 대해서 정말로 화를 낸 적 은 한 번도 없잖아요' ?" "그런 건 여자 관계라고 할 수 없지 단순한 게임이야. 아무도 상 처를 입지 않는다구" 나가자 와는 말했다. "저는 상처를 입었어요" 하쓰미는 말했다. "어째서 저만으로는 부족한가요?" 나가자와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위스키 잔을 흔들어댔다. "부 족한 게 아니야 그건 전혀 다른 측면의 이야기야. 내 몸 속에는 무 엇인가 그러한 것을 요구하는 갈증 같은 게 있거든. 그리고 그것이 하쓰미에 게 상처를 주었다면 미안하게 생각해. 그건 하쓰미 하나 만 으로는 부족하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아. 하지만 나는 그러한 갈 증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사내이고, 그것이 나야 어쩔 수 없잖 아?" 하쓰미는 그제야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들고 농어를 먹기 시작했 다. "하지만 당신은 적어도 와타나베 씨를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 어요." "와타나베와 나는 맞는 데가 있어." 나가자와는 말했다. "와타나 베도 나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밖에 흥미 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야 오만하냐 오만하지 않으냐의 차이는 있 지만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자신이 어떻 게 행동할 것인가. 그런 것밖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지. 그러니까 자 신과 타인을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와타나베를 좋 아하는 건 그런 점이야. 단지 이 사내는 그 점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망설이거나 상처를 입거나 하지 않지" "망설이 거나 상처를 입 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쓰미는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망설이거나 상처를 입는 일이 없다는 말 인가요?" "물론 나도 망설이거나 상처를 입거나 하지 다만 그것은 훈련에 의해서 경감시킬 수 있어. 생쥐조차 전기 쇼크를 가하면 상처를 입 찌 않는 길을 찾아가게 되거든." "하지만 생쥐는 사랑을 하지 않아요." "생쥐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 나가자와는 그렇게 되풀이하고는 내쪽을 보았다 "멋지군 백 뮤직이 있으면 좋겠군 오케스트라에 하프를 두 대 끼워서 농담으로 얼버무리지 마세요. 진지한 이야기니까." "지금은 식사를 하고 있어." 나가자와가 말했다. "게다가 와타나 베도 있고. 진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게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나는 말했다 "여기에 계세요. 그 편이 좋아요." 하쓰미가 말했다. "모처럼 왔으니까 디저트도 먹고 가야지." 나가자와가 말했다. "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잠자코 식사를 계속했다. 나는 농어를 남김없 이 먹었지만, 하쓰미는 반쯤 남겼다. 나가자와는 일찌감치 오리를 먹어치우고는. 계속해서 위스키를 마셨다. "농어가 제법 맛있군요." 나는 그렇게 말해보았지만 아무도 대답 을 하지 않았다. 마치 깊은 구멍 속으로 돌멩이를 던져 넣은 느낌이 었다 접시가 치워지고, 레몬 셔벳과 에느프레소 커피가 나왔다 나가 자와는 양쪽을 조금씩 맛만 보았을 뿐, 즉각 담배를 피웠다. 하스미 는 레몬 셔벳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맙-소사 하고 생각하면 나는 셔벳을 다 먹고. 커피를 마셨다 하쓰미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 인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쓰미가 몸에 걸치고 있는 옷 이나 장식품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양손은 정말로 세련되고 우아하 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나는 나오코와 레이코 생각을 했다 그녀들 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오코는 소파에서 뒹굴며 책을 읽 고 있을 것이고, 레이코는 기타로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하고 있을 지도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이 있는 그 작은 방으로 돌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나는 도대체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와타나베와 나의 닮은 점이란, 남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원 하지 않는다는 거야." 나가자와가 말했다. "그 점이 다른 사람들과 는 다르지. 다른 사람들은 누구나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이 해해주길 바라며 애를 태우거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고. 와타나 베도 그렇지 않아 이해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고, 남은 남. "그래요?" 하쓰미가 나에게 물었다 "설마." 나는 대답했다. "저는 그토록 강한 인간이 아닙니다 아 무도 이해해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서로 이해하 고 싶은 상대도 있습니다. 단지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포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배님이 말씀하시듯이 이해해주 지 않아도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 "내가 하는 말도 거의 같은 뜻이야." 나가자와는 커피 스푼을 집 어들며 말했다. "정말로 같은 뜻이야. 늦은 아침 식사와 이른 점심 식사의 차이 정도밖에 없어. 먹는 음식도 같고, 먹는 시간도 같은데, 단지 호칭이 다를 뿐이지." '나가자와 씨,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당신을 이해해주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다는 이야기인가요' 또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는 건가 요?" 하쓰미가 물었다 "아직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인데. 인간이 누군가를 이 해하는 건 그럴 수 있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 지 . 그 누군가가 상대방 의 이해를 요구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렇다면 제가 누군가에게 저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말인가요',? 예를 들자면 당신에게?" "아니, 별로 잘못된 생각은 아니야." 나가자와는 대답했다 "정상 적인 인간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만약 하쓰미가 나를 이해하 려 든다면 말이야. 내 시스템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스템과는 아주 다르거든 " "하지만 저를 사랑하지는 않는군요'?" "그러니까 하쓰미는 내 시스템을 "시스템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요!" 하쓰미가 소리쳤다. 그녀가 소리치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가자와가 테이블 옆의 벨을 누르자 웨이터가 계산서를 갖고 왔 다 나가자와는 크레디트 카드를 꺼내어 웨이터에게 건네주었다. "와타나떼, 오늘은 미안하게 됐군 " 그는 말했다. "나는 하쓰미를 데려다줄 테니까, 자네 혼자 알아서 가게나 " "괜찮습니다. 저는.식사도 맛있었고."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그 말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웨이터가 카드를 갖고 오자. 나가자와는 금액을 확인하고는 볼펜 으로 사인을 했다 이어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 다. 나가자와가 차도쪽으로 가서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하쓰미가 제지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오늘은 더이상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데려다주지 않아도 좋아요. 식사 잘했어요." "좋도록 해." 나가자와는 말했다. "와타나베 씨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겠어요." 하쓰미는 말했다 "좋도록 해." 나가자와는 말했다. "하지만 와타나베도 나와 다를 바 없을 거야. 친절하고 부드러운 친구지만,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 랑하지는 못하지 언제나 냉정한 부분을 지니고 있으면서 , 다만 갈 증을 느낄 뿐이야. 나는 잘 알아." 나는 택시를 세워 하쓰미를 먼저 태운 뒤 , 일단 보내드리고 오겠 습니다 하고 나가자와에 게 말했다. "미안하군." 그는 나에게 사과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전혀 다 른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에비스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나는 하쓰 미에게 물었다 그녀의 아파트가 에비스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쓰미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럼 . 어디선가 한 잔 하시겠습니까?" "응." 그녀는 끄덕였다. "시부야." 나는 운전사에게 말했다. 하쓰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택시의 좌석 끝에 기대어 있었 다. 택시가 흔들릴 때마다 자그만 금귀고리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 녀가 입은 미드나이트 블루의 원피스는 마치 택시 구석의 어둠과 어 울리도록 맞춘 색처럼 보였다 옅은 색으로 칠한 그녀의 예쁜 입술 이 마치 혼잣말을 중얼거리려다 그만둔 것처럼 이따금 살짝 움직였 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가자와가 어째서 그녀를 특별한 상 대로 선택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쓰미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든지 있으리라, 그리고 나가자와라면 그러한 여자들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하쓰미라는 여성의 내부에 는 무언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상대방을 뒤흔든다는 뜻은 아 니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힘은 미미하지만 그것이 상대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택시가 시부야에 도착할 때까지 나 는 줄곧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내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이 동 요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내가 그 정체를 알아차린 것은 10여 년이나 지난 후였다. 나는 어 느 화가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뉴멕시고 주의 산타페로 갔을 때 저녁 무렵 근처의 피자 하우스로 들어가 맥주와 피자를 먹으면서 기 적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상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손도 접시도 테이블도,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특별한 과즙을 뒤집어쓴 듯이 선명한 빨강이었 다. 그처럼 주위를 압도하는 석양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를 머리 에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불러일으킨 마음의 동요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했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았던. 그리고 앞으로 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소년기의 동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토 록 애절하고 무구한 동경을 먼 옛날, 어디엔가 내버려두고는 그런 것이 일찍이 나의 내부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도 오랫동안 기억하 지 못했던 것이다 하쓰미가 불러일으킨 것은 나의 내부에서 오랫동 안 잠들어 있던 '나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거의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 는 정말로 정말로 특별한 여자였던 것이다 누군가가 무슨 수를 쓰 더라도 그녀를 구제하여야만 했다. 하지만 나가자와도 나도 그녀를 구제하지 못했다 하쓰미는-내 가 아는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인생의 어느 단계에 이르자,문 득 생각이 난 듯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나가자와가 독일 로 떠나자 2년 후에 다른 사내와 결혼했고, 그 2년 후애 면도날로 손 목을 그었다. 그녀의 죽음을 알려준 것은 물론 나가자와였다. 그는 본에서 나 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하쓰미의 죽음으로 인해서 무엇인가가 사 라져버렸고, 그것은 견딜 수 없이 슬프고 지류다. 나에게조차도. 나는 그 편지를 찢어버리고, 두 번 다시 그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우리는 작은 바에 들어가. 술을 몇 잔씩 마셨다. 하쓰미도 나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마치 권테기의 부부처럼 마주 앉아서 잠자코 술을 마시며, 안주로 땅콩을 먹었다. 우리는 잠시 바깥을 산보하기로 했다 하쓰미 는 자기가 계산을 하겠노라고 말했지만, 한 잔 하자고 권한 것은 나 였기 때문에 내가 술값을 냈다. 바깥으로 나오자 밤 공기가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다. 하쓰미는 옅은 회색의 카디건을 걸쳤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내 곁 을 걸었다. 특별한 목적지도 없었지만, 나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밤거리를 걸었다. 마치 나오코와 거닐던 때와 비 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와타나베 씨. 이 근처에 당구를 칠 수 있는 곳 모르세요?" 하쓰 미가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당구?"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하쓰미 씨가 당구를 친다는 말씀입니까?" "네 이래봬도 제법 잘 쳐요. 와타나베 씨는 어때요?" "네 당구라면 가끔 칩니다. 그다지 잘 치지는 못합니다만" '그렇다면, 가요." 우리는 근처의 당-구장을 찾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뒷골목의 막다 른 곳에 있는 작은 가게였다. 세련된 원피스를 입은 하쓰미와, 네이 비 블루의 녁레이저 코트에 레지멘털 타이 차림의 우리 롬비는 당구 장 안에서 유달리 눈에 띄었지만, 하쓰미는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큐를 골라서, 그 끝에 초크를 문질렀다 그리고 핸드백에 서 머리핀을 꺼내어 머리를 고정시켜 당구를 칠 때 방해가 되지 않 도록 했다. 우리는 두 게임을 쳤다 하쓰미는 본인의 말처럼 제법 솜씨가좋 았지만, 나는 손에 붕대를 잔뜩 감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게임 모두 그녀가 압승을 거두었다. "솜씨가 대단하시군요."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보기보다는 제법이죠?" 하쓰미는 신중하게 당구알의 거리를 측 정하면서 생긋 웃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연습을 하셨습니까?" "저희 친할아버지가 옛날에 대단히 놀기를 좋아하는 분이셔서, 집에 당구대를 갖고 계셨어요. 그레서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 가면 오빠와 둘이서 당구를 치며 놀았죠. 좀 크고 나서는 할아버지가 정 식으로 당구치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좋은 분이셨어요. 스마트 하고 핸섬했죠. 이젠 돌아가셨지만 옛날에 뉴욕에서 다이애너 다빈 을 만났던 일을 늘 자랑거리로 여기셨죠." 그녀는 세 번 연속 득점을 하고, 네번째에 실패했다 나는 간신히 한 차례 득점을 하고는. 간단한 것을 미했다. "붕대를 감고 있어서 그래요." 하쓰미는 위로해주었다. '오랫동안 치지 않은 탓입니다. 벌써 2년 5개월이나 치지 않았으 니 까."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게시죠'. " "친구와 당구를 쳤던 그 날 밤 그가 죽었으니까요 그 래서 잘 기억 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그 이후로 당구를 치지 않게 되었나요' ?" "아니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그 렇게 대답했다. "단지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 이후로 당구를 칠 기회 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것뿐입니다." "친구는 왜 죽었나요?" "교통 사고입니다. " 그녀는 몇 차례 계속해서 쳤다. 공의 위치를 측정하는 그녀의 눈 은 진지했고, 공을 칠 때의 자세도 정확했다. 그녀가 단정하게 세팅 한 머리를 뒤로 휙 돌려서 금귀고리를 반짝이며 밭의 위치를 정확 히 잡고, 늘씬하게 뻗은 손가락으로 큐를 고정시켜 당구를 치는 모 습을 보고 있노라면, 너저분한 당구장이 어쩐지 그곳만 멋진 사교장 의 한 구석처런 여겨 졌다 그녀와 둘이서만 지내는 것은 처음이었지 만, 나로서는 멋진 경험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 인생이 한 단 계 위로 상승한 듯이 느껴졌다. 세번째 게임이 끝났을 때 - 물론 세 게임 모두 그녀의 압승이었다 내 손의 상처가 약간 쑤셔 왔기에 우리는 게임을 끝내기로 했다. "죄송해요. 당구장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쓰미는 정말로 미안 하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슴니다. 대단한 상처도 아니고. 아주 즐거웠습니다 당구장을 나설 때 주인인 듯한 깡마른 중년 여자가 하쓰미에게 "아가씨 솜씨가 대단하군요' 하고 말했다. "고마워요." 하쓰미는 생긋 웃었다 게임 값은 그녀가 지불했다. "아프세요?" 바깥으로 나오자 하쓰미가 물었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습니다. "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게 아닐까요?" "괜찮을 겁니다. "그렇지, 제 아파트로 가요.상처를 보고 붕대도 다시 감아드릴 테니까" 하쓰미가 말했다. "제 아파트엔 붕대도 소독약도 갖추어 져있고, 바로 근처니까 " 나는 그렇게 염려할 정도가 아니라며 사양했지만, 그녀는 상처가 다시 벌어 지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니면 저와 함께 있는 게 싫으세요? 1초라도 빨리 자신의 방으 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하쓰미는 농담처럼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렇다면 사양하지 마시고 제 아파트로 가요. 걸어서 금방이니 까." 하쓰미의 아파트는 시부야에서 에비스 쪽으로 향해서 도보로 11 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호화스럽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법 멋진 아파트로, 작은 로비도 있고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하쓰미는 아파트의 부엌 식탁에 나를 앉혀 놓고. 옆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 고 왔다 프린스턴 유니버시티라는 글자가 새겨진 요트 파카와 면바 지 차림에, 금귀고리는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선가 응급 상자를 갖고 와서는 식탁 위에서 내 손의 붕대를 풀어보더니 , 상처 가 벌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일단 그곳을 소독하고, 새 붕대로 감아 주었다. 정말로 솜씨가 능숙했다. "어째서 그렇게 무엇이건 능숙하게 하십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옛날에 자원 봉사로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어요. 간호사 흉내 같 은 거죠. 그때 배웠어요." 붕대를 다 감고 나자 그녀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두 개 꺼내왔 다. 그녀가 캔 하나의 반쯤을 마셨고, 내가 하나 반을 마셨다. 그리 고 하쓰미는 후배 여학생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정말로 몇 명인가 귀여운 여학생이 있었다. "만약 여자 친구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저에게 오세요 즉각 소개해드릴 테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와타나베 씨, 제가 마치 중매쟁이 아줌마처럼 보이죠, 솔 직히 말해서?" "약간은."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고 웃었다. 하쓰미도 웃었다. 그 녀는 웃는 얼굴이 정말로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와타나베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가자와 씨와 저를?" "어떻게 생각하다뇨, 어떤 점이 말씀입니까?"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앞으로',?" "제가 말해봤자 소용없겠죠." 나는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대답했 다. "괜찮아요, 무엇이건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주세요." "제가 하쓰미 씨라면 그 사내와는 헤어질 겁니다. 그리고 좀더 건실한 사고를 지닌 상대를 찾아내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사실 아무 리 호의적으로 보더라도 그 사람과 사귀어 행복해질 리가 없으니까 요. 그 사람은 자신이 행복해지려 한다거나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 한다거나 하는 식의 생각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함께 있으면 이쪽도 정신이 이상해집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쓰미 씨가 그 사람과 년이나 사귀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입니다. 물론 저도 저 나름대로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 고 훌륭한 점도 많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따위는 발끝 에도 미치 지 못할 정도의 능력과 힘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고. 하지 만 그 사람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방식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 사람 과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이따금 제가 똑같은 곳을 맴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 사람은 자기 페이스로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는데, 저는 계속해서 제자리만 맴도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몹시 허무하게 느껴 지 지요. 간단히 말해서 시스템 자체가 다른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을 아시겠습니까?" "잘 알아요." 하쓰미는 냉장고로 가서 맥주를 하나 더 꺼내다 주 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외무성에 들어가 1년간의 국네 연수가 끝나 면 당분간 해외로 가버리잖아요? 하쓰미 씨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 니까' 계속 기다리시겠습니까? 그 사람 아무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거든요." "그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제가 드릴 말씀은 없군요. 더이상." "그렇죠." 나는 천천히 맥주를 잔에 따라서 마셨다 "아까 함께 당구를 치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만," 나는 말했 다. "즉, 저에게는 형제가 없으니까 이제까지 혼자서 자라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롭다든가 형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 습니다. 혼자라도 좋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하쓰미 씨와 아 까 당구를 치다가. 저에게도 당신 같은 누나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예쁘고 세련되고. 미드나이트 블루의 원피스와 금 귀고리가 잘 어울리고, 당구를 잘 치는 누나가." 하쓰미는 기쁘다는 듯 웃으면서 내 얼굴을 보았다. "적어도 최 근 1년 동안 들은 말 중에서 지금 당신이 한 말이 가장 감동적이에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저로서도 하쓰미 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그녀 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로군요. 당 신 같은 사람이라면 상대가 누구이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데, 왜 하필이면 나가자와 선배 같은 사람에게 매달려 있는 거지 요?"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 요. 나가자와 씨는, 그건 하쓰미의 책임이야. 나는 관계없어, 라고 대답하겠지 만요." "그렇겠죠." 나는 동의했다 "하지만, 와타나베 씨. 저는 그렇게 머리가 좋은 여자가 아니에 요. 저는 어느 쪽이냐 하면 구식 여자예요. 시스템이니 책임이니, 그 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결혼해서. 매일 밤 좋아하는 사람의 품에 안 기고, 그 사람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만족해요. 그것뿐이 에요. 제 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나가자와 씨가 원하는 건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 "하지만 사람은 변하는 법이에요. 그렇잖아요?" 하쓰미는 말했다 "사회에 나가서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좌절을 겪으며, 어른이 된 다는 이야긴가요?" "그래요. 게다가 오랫동안 저와떨어져 있으면. 저에 대한감정도 바뀔지 모르잖아요' ?" "그건 평범한 사람의 이야깁니다. " 나는 말했다. "평범한 인간이 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사람은 특별합니다. 그 사람은 우 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고, 더구나 매일 그 의지를 보강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를 당할수록 더 욱더 강해지려는 사람입니다. 남들에게 약점을 잡히느니 , 관태충이 라도 먹을 사람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시는 검 니까?" "하지만. 와타나떼 씨. 지금의 저로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요." 하쓰미는 식탁 위에 턱을 괴며 말했다. "그토록 나가자와가 좋습니 까?" "좋아요." . 그녀는 즉각 대답했다 "맙-소사" 나는 한숨을 쉬고는. 남은 맥주를 마셨다. "그토록 확 신을 지니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정말로 멋지겠군요.' "저는 그저 단순한 바보인 데다-가 구식 여자일 뿐이에요." 하쓰미 는 말했다. "맥주 더 드시겠어요?" "아니, 됐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붕대와 맥주는, 감사 합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노라니 , 전화벨이 울렸다 하쓰미는 나를 보고, 전화를 보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나 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 로 나갔다. 문을 살짝 닫을 때 하쓰미가 수화기를 집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이 네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것은 열한 시 반이었다 나는 곧장 나가자-와의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결국 10여 차례나 두드린 후에 오늘이 토요일 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토요일 밤이면 나가자와는 친척 집에 묵는다는 명목으로 매주 외박 허가를 받았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넥타이를 풀고 상의와 바지를 옷걸이에 건 다음 파자마로 갈아입고 양치질을 했다. 그리고 어이구 내일이 또 일요일이구나하고 생각했다. 마치 사흘에 한번씩 일요일이 찾 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두 차례 일요일이 오면 나는 스 무 살이 된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벽에 걸린 달력을 보고는, 암울한 기분이 되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책삳 앞에 앉아서 나오 코에게 편지를 썼다. 커다란 잔에 커피를 타서 . 마일즈 데이비스의 레코드를 들으며, 긴 편지를 썼다. 창 밖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 고, 방안은 수족관처럼 싸늘했다. 박스에서 갓 꺼낸 두터운 스웨터 에서는 나프탈렌 냄새가 남아 있었다. 유리 창 위쪽에는 퉁퉁하게 살 찐 파리 한 마리가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장기는 바람이 없 는 탓으로, 원로원 의원의 토가자락처럼 게양대에 착 달라붙은 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겁이 많아 보이는 누런 색의 여윈 개가, 안뜰 화단을 긍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왜 비오는 날에 개가 꽃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편지를 쓰다가. 펜을 쥘 오른손이 아파 오 면, 비 내리는 안뜰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나는 우선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던 중 손에 깊은상처를 입은 일 을 쓰고. 토요일 밤에 나가자와의 외무고시 합격을 축하하여 나가자 와와 하스미와 나 셋이서 저녁을 먹었다고 썼다. 그리고 나는 그곳 이 어떤 음식 점이고, 무슨 요리가 나왔는가를 설명했다. 요리는 제 법 맛있었지만. 도중에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는 것도 빼지 않았 다 나는 하쓰미와 당구장에 갔던 것과 관련해서 기즈키의 이야기를 쓸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끝에, 결국 쓰기로 했다. 써야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날 기즈키가 죽은 날 -- 그가 마지막으로 친 당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쿠션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설마 그것이 제대로 맞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우연이겠지만, 그 쿠션은 완벽하게 들어가, 초록색의 당구대 위에서 하얀 공과 빨간 공이 거의 소리 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살짝 닿아 결국 그것이 결승점이 되었습 니다 하지만 하쓰미 씨와 당구를 친 그날 밤, 나는 첫 게임이 끝날 때까지 기즈키에 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그 점이 나로서 는 적잖은 쇼크였습니다. 왜냐하면 기즈키가 죽은 후 항상, 이제 부터 당구를 칠 때마다 . 그를 떠올리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 니다. 하지만 나는 한 게임이 끝나고 가게 안의 자동판매기에서 펩시 콜라를 사서 마실 때까지. 기즈키에 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때 기즈키 생각이 났는가 하면, 그와 함께 자주 다니던 당구장에도 역시 펩시 콜라 판매기가 있어서 , 우리는 자 주 콜라 내기 시합을 했기 때문입니다. 기즈키가 생각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에 대해서 어쩐지 나쁜 짓을 한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 때는 마치 내가 기즈키를 저 버린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방으로 돌아와, 이렇 게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미 2년 반이 지났다. 그리고 그 녀 석은 여전히 열일곱 살 그데로이다, 라고. 하지만 그것은 나의 내 부에서 기즈키에 관한 기억이 흐려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의 죽음이 가져다 준 것들은 아직도 선명하게 나의 내부에 남아 있 고, 그 중의 일부는 그 당시보다도 오히려 선명할 정도입니다 내 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씁니다. 나는 이제 곧 스무 살이고, 기 즈키와 내가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 때에 공유하고 있던 것들의 일부는 이미 소멸되어 버려서, 아무리 한탄을 해도 소멸된 겄들 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더이상 구체 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지만, 나오코라면 내가 느꼈던 것을, 말하 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 고 이러한 것들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오코뿐이리 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예전보다도 더욱더 자주 나오코를 생각합니다. 오늘은 비 가 내리고 있습니다. 비 내리는 일요일은 다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비가 내리면 빨래를 할 수 없고, 따라서 다림질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보도 할 수 없고. 옥상에 누워 있을 수도 없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카인드 오브 블루를 오토리버스로 해놓고 되풀이해서 들으며 비 내리는 안뜰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일요일에는 나사를 조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편지가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여 기에서 그만 끝맺겠습니다. 이제 식당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할 생 각입니다 그럼 안녕. 이튿날인 월요일의 강의에도 미도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한 이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집에 전화를 걸어볼까도 생각했지만,자기 쪽 에서 전화를 하겠다는 그녀의 말이 떠올라서 그만두었다. 그 주의 목요일에, 나는 식당에서 나가자 와를 만났다. 그는 식사 를 남은 쟁반을 들고 와서 내 옆에 앉더니 , 요전에는 정말로 미안하 게 됐다며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대접을 잘 받았으니까요. 정말로 기묘하 다면 기묘한 취 직 축하였습니다만." "정 말로 그랬지 ." 그리고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하쓰미와는 화해했어 " 그가 말했다. "짐작이 갑니다 " 나는 대답했다 "자네에게도 몹시 심한 말을 한 모양이더군." "어쩐 일입니까, 반성을 다 하다니? 어딘가 불편하신 게 아닙니 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두세 차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런데 자네, 하쓰미에게 나와 헤어지라고 충고했다며?" "당연하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 "그 사람. 좋은 분이더군요." 나는 된장국을 마시며 말했다. "알고 있어 " 나가자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나에게는 좀 과 분하게." 전화가 걸려왔다고 알리는 벨이 울렸을 때, 나는 죽은 듯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2때 정말로 나는 잠의 중심부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자고 있 는 동안 머릿속이 물에 흠뻑 젖어서 뇌가 불어터진 듯한 느낌이었 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십분이었지만,그것이 오전인지 오후인지 도 알수없었다 몇 월 며칠 무슨요일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창 밖을 보니 안뜰의 게양대에는 국기가 걸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 마도 지금은 저녁 여섯 시 15분일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국기 게양 대도 제법 쓸모가 있었다 "와타나베 씨 지금 시간 있으세요?" 미도리가 물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 지?" "금요일." "지금 저녁인가')" "당연하잖아요? 이상한 사람이네 오후, 그러니까, 여섯 시 10 분 역시 저녁이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침대에서 뒹굴며 책을 읽고 있던 중 잠에 푹 빠져버린 것이었다 금요일 -하며 나는 머리 를 회전시켰다 금요일 밤에는 아르바이트가 없다 "시간 있어 지 금 어디지?" "우에도 역. 지금부터 신주쿠로 가니까 어디선가 만나지 않겠어 요?" 우리는 장소와 대충의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곳에 도착했을 때, 미도리는 이미 카운터의 맨 끝에 앉아서 술 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구깃구깃한 남자용 스탠드 칼라 코트 위 에 노란색의 얇은 스웨터 . 그리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또한 손등 에는 팔찌를 두 개 끼고 있었다. '무얼 마시고 있지?" 나는 물었다 톰 롤린즈." 그녀는 대답 했다. 나는 위스키 소다를 주문하고서야, 발 밑에 커다란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행 갔었어요. 방금 돌아온 거예요." 그녀는 말했다 '어디에 갔었는데?" "나라와 아오모리 .' "한꺼번에?"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설마 아무리 제가 별난 여자라 해도 나라와 아오머리를 한꺼번 에 가지는 않아요.따로따로 갔어요 두번에 걸쳐서 나라에는 그이 와 가고. 아오머리는 혼자서 훌적 갔었어요." 나는 위스키 소다를 한 모금 마시고. 미도리가 입에 물고 있는 말 보로에 성냥불을 붙여준다. "여러 가지로 힘이 들었나? 장례식이니 뭐니 해서." "장례식 따위는 간단해요. 우리는 익숙해져 있으니까. 검은 옷을 입고 얌전히 앉아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적당히 진행시켜주거 든요. 친척 아저씨나 이웃집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술도 사오고, 초 밥도 주문하고, 위로도 해주고, 울기도 하고, 소란을 피우기도 하고, 유품을 나누어 갖기도 하니까, 대수로을 거 없어요.까짓거 피크닉 이나 다름없어요. 매일 간병하느라 정신이 없던 때에 비하면, 정말 피크닉이라 할 수 있죠. 언니나 저나 기진맥진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던걸요. 정말이지 맥이 빠져서 눈물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하지 만그런 얼굴로 앉아 있으면,주위 사람들은 저 집 딸들은 차갑다.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하며 수군거리죠. 그러면 우리는 오기로라도 울지 않아요. 거짓 울음을 울려면 울 수도 있지만,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오기가 나서 모두들 우리가 울기를 기대하고 있으니 까, 더더욱 울지 않는 거예요. 언니와 저는 그런 점에서 마음이 아주 잘 맞아요.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미도리는 팔지를 짤랑거리며 웨이터를 불러서, 톰 롤린즈를 한 잔 더 주문하고 피스타치오를 한 접시 부탁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모두들 돌아가버리자. 우리 둘이서 새벽녘까지 정종을 마셨어요,한 되 반 정도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욕을 마구 해댔어요 녀석은 바보다. 머저리나, 병신이다. 돼지다. 위선자 다. 도둑놈이다 하며 , 그런 욕설을 쉬지 않고 지껄여댄 거예요. 속이 후련하더군요. "그렇겠지 "그리고는 취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푹 잤어요. 정말로 잘 잤어 요. 도중에 전화가 걸려와도 완전히 무시하고는, 쿨쿨 잔 거예요 잠 에서 깨자 둘이서 초밥을 시켜다가 먹고, 상의를 해서 결정했어요. 당분간 가게문을 닫고 서로 하고 싶은 것을 하자고. 이제까지 둘이 서 열심히 하느라고 했으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지 않을까요? 언니는 남자 친구와 둘이서 편안한 시간을 갖고, 나 도 그이와 2박 3일 정도 여행을 하며 실컷 섹스나 즐기기로 한 거예 요."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입을 다문 채, 귀 언저리를 긁 적긁적 긁었다 "죄송해요. 막된 소리를 해서 ' "괜찮아. 그래서 나라에 간 거로군 " '그래요. 저는 옛날부터 나라를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실컷 섹스를 했나?"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호텔에 도착해 서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생리가 시작된 거예요. 왕창 " 나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빨랐어요. 정말로 눈 물이 나더군요. 여러 가지로 긴장을 해서, 결국 주기가 바뀐 거 겠죠 그이는 마구 화를 냈어요. 비교적 화를 잘 내는 사람이거든요. 금방. 하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요, 저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니까. 게 다가 저는 그걸 상당히 심하게 하는 편이거든요. 처음 이틀 가량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그럴 때에는 저와 만나지 마세요." "만나지 않으려 해도, 어떻게 알 수 있지?" 나는 물었다 "생리가 시작되면 2, 3일 빨간 모자를 쓸게요. 그러면 알 수 있잔 아요?" 미도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빨간 모자를 쓰고 있으면 길에서 만나더라도 모른 척하고 잽싸게 도망치면 돼요." "기왕이면 이 세상 여자들이 모두 그렇게 해주면 좋겠군."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나라에서 무엇을 했지?" "어쩔 수 없으니까 사슴 구경도 하고, 1부근을 산보하기도 하다 가 돌아왔죠. 비 참했어요. 정말. 그이와는 다투고 나서 그 이후로 만 나지도 않고 그래서 도쿄로 돌아와 2, 3일 빈둥거리다가, 요번에는 혼자서 마음 편히 여 행하기로 작정하고 아오모리로 갔던 거예요. 히 초사키에 친구가 있으니까 그곳에서 이틀 정도 머물고,그 다음에 시의키타머 닷피(99곤)며 돌아다녔어요. 정말로 좋은 곳이더군요. 저는 그 지방 지도의 해설을 쓴 적이 있거든요. 당신도 간 적이 있으 시지요?" 없어.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래서 말이에요." 미도리는 톰 롤린즈를 한모금 마시고.피스 타치오의 껍질을 벗겼다 "혼자서 여행하는 동안 계속 와타나베 씨 만 생각했어요. 지금 당신이 내 곁에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말이에 요 "왜 ?" "왜?" 미도리는 허무를 들여다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라니 . 무슨 뜻이에요 그건?" "즉, 왜 나를 생각했냐는 말이야." "당신을 좋아하니까 그런 게 당연하잖아요? 그밖에 어떤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어느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와 함께 있고 싶어하겠어요?" "하지만 미도리에게는 애인이 있으니까 나를 생각할 필요가 없 지 않을까?" 나는 천천히 위스키 소다를 마시며 말했다 "애인이 있으니까 당신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요?" "아니 , 특별히 그런 의미가 아니라 . "이봐요, 와타나베 씨 " 미도리는 집게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경고해두겠지만. 지금 내 속에는 말이에요, 1개월분이나 이런저런 일이 밭이고 쌓여서 폭발 직전에 있어요. 잔뜩. 그러니까 더 이상 한 말은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여기에서 엉엉 울어버릴 테고, 한 번 울기 시작하면 하룻밤은 계속될 거예요. 그래도 좋겠어 요? 저는 막무가내로 짐승처럼 울어댈 거예요. 정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스키 소다를 두 잔째 주문하고, 피스타치오를 먹었다 세이커를 흔드는 소리, 잔이 부딪치는 소리, 제빙기의 얼음을 퍼내는 소리 등이 들리 는 가운데, 사라 본이 부르는 옛 러브 송이 흘렀다. "일단 탐폰 사건이 있은 이후, 그이와 저의 사이는 상당히 험악해 졌어요." 미도리는 말했다. "탐폰 사건?" "네, 한 달쯤 전에, 그이와 저는 그이의 친구들 대여섯 명과 함께 술을 마셨어요. 그때 제가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아주머니가 재채기 를 하는 순간 탐폰이 빠진 이야기를 했어요. 우습죠?" "우습군 " 나는 웃으면서 동의했다. "모두들 아주 재미있어 했어요. 하지만 그이는 화를 내는 거예요. 그런 천박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며 그래서 어쩐지 흥이 깨져버렸 죠 흠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는 꽉 막혀 있거든요." 미 도리는 말했다 "예를 들자면 제가 흰색 이외의 내의를 입으면 화를 낸다든가. 막힌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런 점에서'?" "글쎄 그런 건 기호 문제이니까'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로서는 그런 사람이 미도리를 좋아하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지만. 그 말은 입 밖에 네지 않기로 했다. "당신은 무얼 하고 계셨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언제나 똑같지 ." 나는 약속대로 미도리를 생각하며 마스터베이션을 했던 일을 생각해냈다. 나는 옆 사람들에 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미도리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미도리는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울려서 소리를 냈다. "어땠어 요? 잘 되던가요?" "도중에 어쩐지 쑥스러워서 그만뒀지 " "안 서던가요?" "그래 ." '틀렸군요." 미도리는 곁눈질로 나를 보며 말했다. "쑥스러워하 면 안 돼요. 아주 나쁜 생각을 해도 좋으니까. 그렇죠, 제가 좋다고 했으니까 괜찮지 않겠어요' ? 그렇지 . 다음 번에 전화로 들려드릴 게 요.아아 그곳이 좋아요 너무좋아 안돼요,저는, 못 참겠어요 아아, 그러면 안 돼요 하고 신음하는 거예요. 그걸 들으면서 하시면 돼요." "기숙사 전화는 현관 옆의 로비에 있어서, 모두들 그 앞으로 지나 다닌다구-." 나는 설명했다. "그런 곳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다가는 사감에게 맞아 죽을 거야, 틀림없이 ." "그래요? _그거 난처하군요." "난처할 것까지는 없어 언젠가 다시 혼자서 어떻게든 해볼 테니 "힘을 내세요." "제가 별로 섹시하지 않은 걸까요, 저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나는 말했다 "뭐라고나 할까. 입장 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 " "저는, 등에서 많이 느껴요. 손가락으로 스윽 만져주면." "기억해둘게 " "지금부터 야한 영화관에 가지 않겠어요? 아주 야한 SM." 미도리 가 말했다 미도리와 나는 뱀장어 요릿집에서 뱀장어를 먹고, 신주쿠에서 몇 곳 안 되는 허름한 영화관으로 들어가, 세 편을 연속 상영하는 성: 영화를 봤다. 신문을 뒤져보니 SM영화를 하는 곳이 그곳밖에 없었 기 때문이었다. 묘한 냄새가 풍기는 영화관이었다. 우리가 영화관 으로 들어서자, 마침 SM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극 장 여성인 언니 여고생인 동생이 사내들 몇 명에게 붙잡혀 감금당한 채, 사피스틱 행위를 당하는 내용이었다 사내들은 여동생을 강간하겠다고 협박 하여 언니를 마음껏 농락하는데, 그러다 언니는 완전한 마조키스트 가 되고, 동생은 그러한 행위를 보고 머리가 이상해져버린다는 이야 기였다 지나치게 과장되고 분위기가 어두운 데다가 똑같은 행위만 반복하여, 도중에 나는 다소 따분해졌다. "제가 여동생이라면 저런 정도로 미치지는 않을 거예요 좀더 자 세히 구경할 텐데." 미도리는 나에게 말했다 '그렇겠지." '그런데 저 여동생 말이에요, 처녀인 여고생치고는 젖꼭지가 너 무 검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렇군." 그녀는 아주 열심히, 뚫어져라 그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이토록 열 심히 본다면 충분히 본전은 뽑겠구나 하고 나는 감탄했다. 미도리는 무언가 생각이 날 때마다 나에게 그것을 보고했다 '보세요, 굉장해요, 세상에 저런 짓을 하다니 '라든가, '너무해요 세 사람에게 한꺼번에 당하면 망가질 거예요'라든가, '와타나베 씨 저는 저런 짓을 누군가에게 잠깐 해보고 싶어라든가, 그런 따위 였다. 나는 영화를 보는 것보다도, 그녀를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었 다. 휴식 시간에 밝아진 영화관 안을 둘러보았지만, 미도리 이외에는 여자 손님은 없는 듯했다. 가까이에 앉아 있던, 학생 같아 보이는 젊 은 사내가 미도리의 얼굴을 보더니 멀찌감치 자리를 옮겼다 "와타나베 씨?" 미도리가 물었다 "이런 걸 보고 있으면 서나요?" "음. 그야 이따금." 나는 대답했다. "이런 영화는,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니까." '그래서 그런 장면이 되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그것이 우뚝 서 겠죠? 서른 개나 마흔 개가 일제히 우뚝? 그런 생각을 하면 어전지 기묘하다고 여겨지지 않으세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 하고 나는 대답했다. 두번째 영화는 비교적 제대로 된 영화였지만, 제대로 된 영화인 만큼 처음 것보다 훨씬 따분했다 입으로 하는 행위가 많이 나오는 영화로, 펠라티오며 쿤닐링추스며 식스티나인을 할 때마다 쩝쩝거 리거나 찌걱거리는 효과음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런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나는 자신이 이 기묘한 혹성 위에서 생을 영위하고 있다 는 사실에 대해서 어쩐지 기묘한 감동을 느꼈다. "누가 저런 소리를 생각해냈을까?" 나는 미도리에게 물었다. "저는 저 소리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미도리는 대답했다. 페니스가 바기나에 들어가 왕복 운동을 하는 소리도 있었다. 그 런 소리가 있으리라고는 나는 그때까지 상상도 못했었다. 사내가 헉 헉거렸고,여자는 신음하며, '좋아요'라든가 '좀더'라든가하는비교 적 진부한 말을 입에 담았다 침대가 삐그덕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 러한 장면이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미도리는 처음에는 재미 있게 보았지만, 결국에는 싫증이 났는지 , 이제 나가요 하고 말했다. 우리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했다. 신주구 거리의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재미있었어요 " 미도리는 말했다. "다음에 또 보러 가요 "몇 번을 가도 비슷한 것밖에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리들도 언제나 똑같은 짓만 하고 있으니 까.' 그러고 보니 사실 그 말대로였다 이어서 우리는 어딘가의 바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 나는 위스키 를 마셨고, 미도리는 이상한 칵테일을 서너 잔 마셨다. 술집을 나서 자 미도리는 나무 타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언저리에는 나무가 없어 더구나 그렇게 취해 가지고는 나무 에 올라갈 수 없잖아." "당신은 언제나 잘난 척하며 남의 기를 죽여놓는군요. 취하고 싶 으니까 취한 거예요. 그러면 된 거 아닌가요? 술에 취해도 나무 타 기 정도는 할 수 있어요. 흥! 아주 골은 나무에 올라가, 매미처런 꼭 대기에 매달려서 모두에게 오줌 세례를 해줄 거예요." "혹시.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거 아냐?" '그래요 " 나는 미도리를 데리고 신주쿠 역의 유표 화장실로 가서, 동전을 내고 미도리를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매점에서 석간을 사서 읽으며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도리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십분이 지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잠깐 살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 을 때, 미도리가 나왔다. 안색이 약간 창백해저 있었다 '죄송해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았어요." 미도리는 말했다 "기분은 어때?" 나는 코트를 입혀 주면서 물었다. "별로 좋지 않아요." "집까지 바래다줄게 집에 가서 긋하게 목욕이라도 하고 자면 될 거야. 피곤해 있으니까 "집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지금 집에 돌아가봤자 아무도 없 는데, 그런 곳에서 혼자서 자고 싶지는 않아요.' "맙소사." 나는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이 부근의 러브 호텔에 들어가서, 당신과 둘이서 부둥켜안고 자 겠어요. 아침까지 푹. 그리고 아침이 되면 어딘가 이 근처에서 식사 를 하고 함께 학교에 가는 거예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나를 불러냈나?" "물론이죠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을 불러내면 되잖아? 아무리 생각 해도 그게 정상이잖아? 애인이란 그래서 있는 거니까." "하지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럴 수는 없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첫째로 나는 열두 시 까지 기숙사로 돌아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무단 외박이 되거든. 요 전에도 한 번 무단 외박을 했다가 아주 난처한 꼴을 당한 적이 있어. 두번째로 나 역시 여자와 자면 당연히 하고 싶어지는데, 그걸 참으 면서 안달하는 건 싫어. 정말 강제로 할지도 몰라." "저를 때리고 묶은 다음 뒤에서 범하나요?" '어이 , 농담이 아니야, 지금의 경우는." "하지만 저는 외로워요. 정말로 외로워요. 저도 당신에게 미안하 다는 생각은 들어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면서 이것저것 요구만 해 서.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해대고. 멋대로 불러내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하지만 제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상대는 당신뿐이에요. 태 어나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제 응석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빠도 엄마도 전혀 상대해주지 않았고, 그이조차도 그런 타입이 아 니에요. 제가 응석을 부리면 화를 내는걸요. 결국은 싸움이 되죠. 그 러니까 이런 말은 당신에게나 할 수 있는 거에요. 그 리고 저늑 지금 정말로 피곤하고 지쳐서. 누군가에게선가 귀엽다니 예쁘다니 하 는 말을 들으며 자고 싶어요. 단지 그것뿐이 에요. 잠에서 깨면 기운 을 차려서. 두 번 다시 당신에게 이런 응석을 부리지 않을 테니까 절대로. 아주 얌전히 하고 있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곤란해 " 나는 말했다. "부탁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이곳에 앉아서 밤새도록 엉엉 울 거예요. 그리고 제일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과 잘 거예요."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숙사에 전화를 걸어 나가자와에게 연락했 다. 그리고는 내가 기숙사에 돌아와 있는 것처럼 꾸밀 수 없겠느냐 고 부탁했다. 지금 여자와 함께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좋아,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힘이 되어주지 하고 그는 대답했다 "이름표를 재실로 바꾸어놓을 테니까 걱정 말고 천천히 재미나 보라구. 내일 아침 내 방 창문으로 들어오면 돼 ." 그는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 나는 전화를 끊었다. "잘 됐나요?" 미도리가 물었다. "응, 그럭 저 럭 "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아직 시간이 이르니까, 디스코 택에라도 가요." "지금 피곤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는 괜찮아요. "맙소사." 사실 디스코 택으로 가서 춤을 추는 동안에 미도리는 조금씩 기 운을 차리는 듯했다 그리고 위스키 코흐를 두 잔 마시고. 이마에 땀 이 솟을 때까지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 "정말 즐거워요." 미도리는 테이블로 돌아와 숨을 돌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춤을 추는군요. 몸을 움직이니까 어쩐지 정신이 해방되는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언제나 해방되어 있는 것 같은데 " '어머나,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 다 "그건 그렇고 힘이 솟으니 배가 고파요. 피자라도 먹으러 가지 않겠어요?" 네가 잘 다니는 피자 하우스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생맥주와 안 주와 피자를 주문했다. 나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열 두 조각 중에서 네 조각만 먹었고, 나머지를 미도리가 전부 먹었다. "상당히 회복이 빠르군. 아까까지 얼굴이 창백해서 중심을 제대 로 못 잡더니 "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응석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에요." 미도리는 말했다. "그래서 체했던 게 내려갔어요. 그런데 이 피자 맛있군요. "어이, 정말로 집에는 지금 아무도 없나?" "네, 없어요. 언니도 친구 집에 묵으러 가고 없어요. 언니도 몹시 무서움을 타니까, 제가 없을 때 혼자 집에서 자지 못하거든요." "러브 호텔에 가는 건 그만두지." 나는 말했다 '그런 곳에 가봤 자 허탈해질 뿐이야. 그런 데는 그만두고 미도리 집에 가자구. 내가 덮을 이불 정도는 있겠지'?" 미도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우리 집에 서 자요." 우리는 아마노테선을 타고 오쓰카까지 가서. 고바야시 서점의 셔 터를 올린다. 셔터에는 '휴업중'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오랫 동안 셔터를 올린 적이 없었었는지. 가게 안에는 퀴퀴한 종이 넴새가 맴돌고 있었다. 책꽂이의 철만은 비어 있었고 잡지는 거의 반품용 으로 묶여 있었다 가게 안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도 휑하괴 으스스 했다. 마치 해안에 버려진 폐선처런 보였다. "이제 가게를 할 생각은 없나?" 나는 물어보았다 '팔기로 했어요." 미도리는 간단 명료하게 대답했다 "가게를 팔 아서, 언니와 제가 그 돈을 나누어 갖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누구에게 의 지할 것도 없이 혼자서 살아가는 거예요. 언니는 내년에 결혼할 거고, 저는 앞으로 3년 남짓 대학에 다녀야 하니까요. 일단 그 정도의 돈은 되 겠죠. 아르바이트도 할 테니까. 가게가 팔리면 어 딘가 아파트를 구해서 당분간 언니와 둘이서만 지낼 작정이에요." "가게는 팔릴 것 같은가?" "아마도. 친척 중에 털실 가게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얼마 전부터 가게를 팔지 않겠느냐고 이야기 해왔어요." 미도리는 말했다 "하지만 아빠가 불쌍해요. 그토록 열심히 일해서. 가게를 장만하고. 빚을 조금씩 같아왔는데,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 어요. 마치 물거품처럼 사라진 거예요." "미도리가 남아 있잖아." "저요?" 미도리는 웃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마셔서 내뱉었다 "이제 위로 올라가요. 여긴 추우니까," 2층에 올라가자 그녀는 나를 식탁에 앉혀 놓고. 목욕물을 데웠다 그동안 나는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차를 탔다. 그리고 목욕물이 데 워질 때까지 미도리와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아서 차를 마셨다. 그녀 는 턱을 괸 채로 잠시 동안 가만히 내 얼굴을 보았다. 똑딱거리는 시 계 소리와 냉장고의 모터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 계를 보니 이미 열두 시에 가까웠다. "자세히 보니 와타나베 씨는 상당히 재미있는 얼굴을 하고 있군 요." 미도리가 말했다. "그런가?" 나는 약간 언짢은 기분이 되었다. "저는 주로 얼굴만 따지는 편인데, 당신 얼굴은요, 왠지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이따금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나 정도면 됐지 하고.' "저는 나쁘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감정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자주 오해를 받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당 신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아까도 했던가?" "했지 ." "즉, 저는 조금씩 남자에 관해서 배우고 있는 거예요.' 미도리는 말보로를 들고 와서 한 대 피웠다. "처음이 제로라면 여 러모로 배운 게 많아요." "그렇겠지.' "아, 그렇지. 아빠에게 분향해주시겠어요?" 미도리가 말했다. 나 는 그녀의 뒤를 따라 불단이 차려져 있는 방으로 가서, 분향을 하고 합장을 했다 "저는, 요전에 아빠의 이 사진 앞에서 발가숭이가 됐어요. 옷을 전부 벗고 찬찬히 보여드렸죠. 요가 자세로 말이에요. 아빠, 이게 젖 가슴이에요, 이게 보지예요 하며." "어째서 그런 짓을 했지?" 나는 약간 아연실색해서 물었다 "그냥 보여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사실 저라는 존재의 절반은 아빠의 정자잖아요? 보여드려도 상관없잖아요? 이게 당신의 딸이 에요 하며 . 물론 약간 취해 있었던 탓도 있죠 "흠 ." '그때 언니가 와서 기 절초풍을 했어요. 하긴 제가 아빠의 영정 앞에서 사타구니를 벌리고 있으니 . 놀라는 게 당연하죠 "음, 그렇겠지 " "그래서 저는,그 이유를 설명했어요 이러이러한 이유에서야,그 러니까 언니도 내 곁에 와서 옷을 벗고 함께 아빠에게 보여드리자 고. 하지만 언니는 하지 않았어요 질려서 방을 나가버렸어요. 그런 점은 아주 보수적이죠." "비교적 정상이로군 " 나는 말했다. "와타나베 씨는 저희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남들과 처음 만나면 쑥스러워 하는 편인데, 그분 과는 둘이서 만 있어도 쑥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더군. 비교적 편안한 느낌이었 어 .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하고." 이야기를 했죠?" "에우리피 데스." 미도리는 무척 즐겁다는 듯 웃었다 "당신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 에요. 신음하며 죽어가는 초면의 환자에게 느닷없이 에우리피데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버님 영정 앞에서 사타구니를 벌리는 딸도 별로 없지." 나는 말했다. 미도리는 콕콕 웃고는 일단 앞의 종을 한 차례 울렸다. "아빠, 안 녕히 주무세요. 저희는 이제부터 재미를 볼 헤니까, 안심하고 주무 세요. 이제는 괴롭지 않죠? 이미 죽었는걸요, 괴로울 리가 없겠죠 만얕 괴로우시다면 하느님께 불평하세요.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천국에서 엄마와 만나서 마음껏 즐기세요. 오줌 뉘어드릴 때 그곳을 봤는데. 제법 듬직하더군요. 그러니까 힘을 내세요. 안녕히 주무세 요 우리는 번갈아 목욕을 하고.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나는 미도리 아버지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파자마를 빌려 입었다 약간 작기는 했 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미도리는 불단이 있는 방에 손님용 이 부자리를 펴주었다 "불단 앞이라 무섭지 않겠어요?" 미도리가 물었다. "무섭지 않아. 특별히 나쁜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웃으면 서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으면서 안아주실 거죠?" "그렇게 하지 " 나는 미도리의 자그만 침대에서 볕 만이고 굴러 떨어질 뻔하면서 도, 계속 그녀의 몸을 안고 있었다. 미도리는 내 가슴에 코를 들이댄 채, 내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그녀의 등뒤로 돌리 고. 왼손으로는 침데끝을 꽉 붙잡아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도저히 성적으로 흥분할 환경이 못 되었다. 바로 내 얼굴 앞 에 있는 미도리의 짧은 머리가 이따금 내 코를 간질였다 "이봐요. 이봐요, 이봐요, 무슨 말인가 하세요." 미도리는 내 가슴 에 얼굴을 묻은 채로 말했다. '어떤 말' ?" "아무거라도 좋아요. 제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걸로 "아주 귀여워 " "미도리 " 그녀는 말했다. "이름을 붙여서 말하세요." "아주 귀엽군, 미도리." 나는 고쳐 말했다. "아주라니 얼마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버릴 정도로 귀여워." 미도리는 얼굴 을 들어 나를 보았다. "당신은 표현이 유니크하군 요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군."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좀더 멋진 말을 해주세요.' "너를 정말로 좋아해, 미도리 . "얼마나 좋아하세요?" "봄날의 곰만큼 좋아해." "봄날의 곰?" 미도리가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게 뭔데요,봄날 의 곰이라니?" "봅날의 들판을 미도리가 걷고 있을 때, 저편에서 비로드 같은 털 에 눈빛이 또렷한 새끼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미도리에게 이 렇게 말하지. '안녕하세요, 아가씨, 저와 함께 굴며 놀지 않겠습 니까?' 하고. 그래서 미도리와 새끼 곰은 서로 부둥켜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의 비탈을 굴며 하루 종일 노는 거야. 그러면 멋지겠 지 ?" "아주 멋져요 "그만큼 너를 좋아해 미도리는 내 가슴을 꼭 껴안았다 "최고예요." 그녀는 말했다. '그토록 좋아한다면 제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들어주시겠어요? 화 내지 않겠죠?" "물론 " "그리고, 저를 언제나 아껴주실 거죠?" "물론." 나는 그녀의 짧고 부드러우며 사내아이 같은 머리를 쓰다 듬었다 "괜찮아, 걱정할 거 없어.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하지만 무서워요, 저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껴안고 있으려니 이윽고 어깨가 불규칙하게 상하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잠이 든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용 히 미도리의 침대를 빠져 나와, 부엌으로 가서 맥주를 한 병 마셨다 잠이 오지 않아서 무엇인가 책이라도 읽고 싶었지만 주위를 둘러보 아도 책 같은 책은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 미도리의 방으로 가서 책 장의 책을 하나 빌릴까도 생각했지만, 부스럭대다가 그녀를 깨울까 봐서 그만두었다. 잠시 동안 멍하니 맥주를 마시다가, 그렇지, 여기는 책방이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밑으로 내려가 가게의 전등을 켜고, 문고 책 선반을 찾아보았다. 읽을 만한 것도 별로 없고, 대부분 이미 읽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읽을거리가 필요했으므로, 오랫동안 팔 리지 않았는지 표지가 변색되어 있는 헤르만 헷세의 수레바퀴 밑 에서 를 집어들고, 책값을 카운터 옆에 놓았다. 적어도 이것으로 고 바야시 서점의 재고는 약간 줄어든 셈이 되었다. 부엌의 식탁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었 다. 처음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은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였 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 후에 나는 여대생 집의 부엌에서 심야에 죽은 아버지가 입던 작은 파자마를 입고 같은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다.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 더라면, 나는 수레바퀴 밑에서를 다시 읽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수레바퀴 밑에서는 다소 진부한 느낌은 있어도, 괜찮은 소설이었다. 나는 고요한 심야의 부엌에서, 그런 대로 즐겁게 그 소 설을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었다. 선반에 먼지를 뒤집어 쓴 브랜디가 한 병 있어서, 그것을 코카콜라 컵에 따라서 마셨다. 브랜디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지만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세 시 가까이에 미도리에게로 가보니, 몹시 피곤했는지 잠에 푹 빠져 있었다. 창 밖에 있는 상점가의 가로등 불빛이 달빛처럼 하얗 게 방 안을 물들인 가운데서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미도리의 몸은 마치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귀를 가까이 대자 숨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잠자는 모습이 그녀의 아버지를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곁에는 여행 가방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흰색 코트가 의자 등에 걸쳐져 있었다. 책상 위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그 앞의 벽에늘 스누피 달력이 걸려 있었다. 나는 창문의 커튼을 조금 젖히고, 인기 척이 없는 상점가를 내려다보았다. 가게들의 셔터가 모두 닫힌 가운 데, 술집 앞에 늘어선 자동판매기만이 몸을 웅크린 듯한 자세로 날 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거리 트럭의 타이어 소리가 이따금 주위의 공기를 무겁게 뒤흔들었다. 나는 부억으로 돌아가 브랜디를 한 잔 더 마시고는, 계속해서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었다. 그 책을 다 읽었을 떼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물을 끓여서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고, 식탁 위에 있는 메모 용지에 볼펜 으로 편지를 썼다. 브랜디를 몇 잔 마신다. 수레바퀴 밑에서를 샀 다. 날이 밝아서 그만 돌아간다- 안녕, 하고 적었다. 그리고 잠시 망 설인 후 '잠들어 있는 너는 정말로 귀엽더군' 하고 적었다. 이어서 나는 커피 잖을 씻어 놓은 후, 부엌의 전등을 끄고. 계단을 내려가 살그머니 셔터를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동네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 게 여기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침 여섯 시도 안 된 시간이라 길에 는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까마귀가 지붕 위에 앉아서 주위를 흘겨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엷은 핑크색 커튼이 쳐져 있는 미도리의 방을 잠시 올려다본 다음 전철역까지 걸어가, 전철을 타고 종점에서 내려, 그곳에서 기숙사까지 걸었다 아침 식사를 파는 음식점이 문 을 열어서, 그곳에서 따뜻한 밥과 된장국과 소곯겊이 야채와 계란 프라이를 먹었다. 그리고 기숙사 뒤쪽으로 돌아가 1층에 있는 나가 자와 방의 창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나가자와는 즉각 창문을 열어주 었다. 나는 그 창문을 통해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가자와가 "커피라도 마시겠나?" 하고 물었지만 나는 필요 없 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이를 닦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꼭 감았다. 이윽고 꿈도 없는. 납덩어 리처럼 무거운 잠이 밀려왔다 나는 매주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고 나오코에게서도 몇 통인가 편지가 왓다. 그다지 긴 편지는 아니었다 11월이 되자 제법 아침 저 녁으로 쌀쌀해 졌다고 적혀 있었다. 당신이 도쿄로 돌아가버리자 이내 가을이 깊어졌습니다. 몸 속 에 구멍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당신이 없는 탓인지 아 니면 계절 탓인지, 한동안 분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레이코 씨와 당신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그녀가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레이코 씨는 여전히 저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 해줍니다 만약 그 녀가 없었더라면, 저는 이곳의 생활을 견뎌내지 못했을 겁니다. 외로워지면 저는 웁니다 울음이 나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레 이코 씨는 말합니다. 하지만 외로움은 정말로 괴롭습니다. 제가 외로워하고 있으면, 밤의 어둠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말을 걸어 옵니다 밤의 나무들이 바람에 시끄럽게 소리를 내듯이, 여러 사 람들이 저에게 말을 걸어 옵니다. 그러면 기즈키 씨나 언니와 자 주 이야기를 합니다. 그 사람들 역시 외로워서 , 이야기 상대를 원 하고 있으니까요. 이따금 이렇게 외롭고 괴로운 밤에 당신의 편지를 다시 읽어 봅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들은 대부분 저의 머리를 혼란스럽 게 만들지만,당신의 편지에 적혀 있는 당신 주변 세계의 일들은 왠지 저를 안심시켜줍니다. 이상하지요. 어째서일까요? 그러니까 저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일고, 레이코 씨도 역시 몇 번이고 읽 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관해서 둘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미 도리라는 분의 아버님에 관해서 쓴 부분이 정말로 마음에 듭니 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당신의 편지를 소중한 오락 삼아 서 -- 이곳에서는 편지가 오락입니다. -부푼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도 가능한 한 틈을 내어 편지를 쓰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만,편지지를 앞에 놓고 앉으면 언제나 기분이 침울해집니다. 이 편지도 있는 힘을 다해서 쓰고 있습니다. 답장을 쓰라고 레이코 씨가 야단을 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는 마세요. 저는 와타나베 씨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나 전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단지 그 것을 제대로 문장으로 옮길 수가 없습니다. 미도리 씨는 정말로 재미있는 분인 것 같군요. 당신 편지를 읽 고 그녀가 당신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 레이 코 씨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당연하잖아, 나도 와타나베 씨를 좋 아하니까' 하고 말하더군요. 저희들은 매일 버섯을 따거나 밤을 주워서 먹습니다. 밤밥이나,송이버섯밥이 계속해서 식탁에 오르 지만, 맛이 있어서 질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레이코 씨는 여전히 식사는 별로 들지 않고 닮배만 피우고 있습니다. 새들도 토끼도 건강합니다. 그럼 안녕히 내 스무번째 생일의 사흘 후에 나오코가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속에는 포도색 라운드 스웨터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생일 축하합 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행복한 스무 살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의 스무 살은 무슨 까닭인지 비참하게 끝나버렸지만, 당신이 내 몫까지 합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진심입니다. 이 스웨터 는 레이코 씨와 제가 절반씩 짰습니다. 만약 저 혼자서 짰더라면, 네년 발렌타인 데이까지 걸렸겠지 요. 잘된 부분은 그녀가 짠 곳 이고 엉망인 부분은 제가 짠 곳입니다. 레이코 씨는 무엇을 하건 솜씨가 좋으니까,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저 자신이 싫어 집니다. 사실 저에게는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 으니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건강하시고 레이코가 보낸 짧은 메시지도 들어 있었다 잘 지네고 있나요? 당신에게 나오코는 지극히 사랑스런 존재 인지 몰라도. 저에게는 단지 손끝이 무딘 여자에 불과합니다. 하 지만 간신히 날짜에 맞춰서 스웨터가 완성되었습니다. 어때요, 멋지죠? 색상과 모양은 둘이서 정했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1969년이라는 해는 나에게 진퇴양난의 진흙탕을 연상시킨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신발이 쑥 벗겨질 듯 깊고 무겁게 느껴지는 끈적끈적한 진흙탕이다 그러한 진흙탕 속을 나는 몹시 애를 먹으 며 걷고있었다 주위 사방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그 어 두운 색깔의 흙탕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조차도 그러한 나의 걸음에 맞추어 더듬더듬 흘렀다. 주위 사람들은 일찌감치 앞으로 나아갔지만, 나와 내 시간만이 진흙탕 속 에서 어물어물 기어다니고 있었다 내 주위의 세계는 크게 변하려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존 볼트레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사람들은 변혁을 외쳤고, 변혁은 바로 길딘충이까지 와 있는 듯 이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아무런 실체를 지니지 못 하는 무의미한 배경화에 불과했다. 나는 거의 얼굴도 들지 않고. 하 루 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끝없이 계속되는 진 흙탕뿐이었다 오른쪽 발을 앞으로 내딛은 다음, 왼쪽 발을 들어 앞 으로 내딛고,다시 오른쪽 발을 들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다만 어디론가 가지 않을 수 없어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길을 옮 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었지만, 내 생활에는 변화다운 변화가 없었다 나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학교에 다녔고, 일주일에 사흘 아르바이트를 했고. 이따금 위대한 개츠비 를 읽었고, 일요일이 되면 빨래를 했고, 나오코에게 긴 편지를 썼다. 가끔 미도리와 만나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동물원에 가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고바야시 서점의 매각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 되어. 그녀와 그녀의 언니는 지하철 모가다니 역 부근에 아파트를 빌려서 둘이 살게 되었다 언니가 결혼하면 그곳을 나와 어딘가에 아파트를 빌릴 작정이라고 미도리는 말했다. 나는 한 차례 그곳에 초대받아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볕이 잘 들고 깨끗한 아파트로, 미 도리는 고바야시 서점에 있을 때보다 훨씬 즐거워 보였다. 나가자와는 몇 번인가나에게 놀러가자고 말했지만.나는 그때 마다 볼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낭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 자들과 자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술을 마시고 밤거리에 서, 적당한 여자를 찾아서, 이야기를 하고, 호텔로 가는 과정을 생각 하니 다소 진저리가 났다. 그리고 그러한 짓을 언제까지고 계속하면 서 질리 지도 않는 나가자와라는 사내에게 새삼 경외감을 느꼈다 하 쓰미의 풍보 다도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이름도 모르는 시시껄렁한 여자 들과 자는 것보다 나오코를 생각하는 편이 더 행복했다. 초원의 한가운데 에서 나에게 사정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줄 나오코의 손가락 감촉은 나의 내부에 너무나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나는 12월초에 나오코에게 편지를 써서. 겨울 방학에 그곳으로 만나러 가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레이코가 답장을 보내왔다. 기쁜 마 음으로 오는 날을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나오코는 지금 편지를 쓸 수 없어서 내가 대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그 녀의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파도와 같은 주기 탓일 뿐입니다. ' 방학이 되자 나는 배낭에 짐을 꾸려. 설화를 신고 교토로 향했다 그 기묘한 의사의 말대로 눈 덮인 산의 풍경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나는 지난번처럼 레이코와 나오코가 사는 집에서 2박을 하며, 지난번과 비슷한 사흘을 보냈다. 날이 저물면 레이코의 기타 연 주를 듣기도 했고,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낮에는 피크닉 을 가는 대신에 셋이서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겼다 스키를 타고 한 시간쯤 산 속을 돌아다니다 보면 숨이 차고 땀이 마구 흘렀다. 한 가한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제설 작업을 거들기도 했다. 미야타라 는 그 기묘한 의사가 또 우리들의 저녁 식사 테이블로 오더니, '어째 서 가운뎃손가락은 집게손가락보다 길고, 발가락은 그 반대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수위인 오무라는 여전히 도쿄의 돼지고기 이야 기를 했다 레이코는 네가 선물로 가져간 레코드를 받고는 정말로 기뻐하며. 그 중의 몇 곡인가의 악보를 만들어 기타로 연주했다. 가을에 왔던 때에 비해서 나오코는 말수가 훨씬 적어져 있었다 셋이 있을 때면 그녀는 거의 말도 없이 소파에 앉아서 미소를 띄 울 뿐이었다. "지금은 그런 시기예요. 직접 말하는 것보다. 당신들 이야기를 듣는 게 훨씬 편해요." 레이코가 볼일이 생겨서 나가버리자, 나오코와 나는 침대 위에서 포옹을 했다. 나는 그녀의 목과 어깨와 유방에 살짝 키스를 했고, 나 오코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나를 애무해 주었다. 사정이 끝난 뒤 나는 나오코를 껴안으면서. 최근 2개원 동안 계속해서 나 오코의 손가락 감촉만을 생각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오코를 생 각하며 마스터베이션을 했노라고 "다른 여자와는 자지 않았나요?" 나오코가 물었다. "자지 않았어 . "그렇다면, 이 것도 기억해두세요." 그녀는 아래쪽으로 몸을 옮기 더니. 페니스에 살짝 키스를 하고는, 이어서 따듯하게 입으로 감싸 며,혀를 움직였다 나오코의 곪은 머리가 내 아랫배로 흘러내려 그 녀의 움직임에 맞추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하여 나는 두번째 사 정을 했다. '기억할 수 있겠어요?" 일이 끝나자 나오코가 나에게 물었다. "물론, 항상 기억하고 있지." 나는 나오코를 끌어안고, 팬티 속으 로 손가락을 넣어 바기나를 만져보았지만, 메말라 있었다. 나오코는 고개를 저으며 , 내 손을 치우게 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 껴안았다 "요번 학기가 끝나면 기숙사를 나와서, 어딘가에 방을 구할 작정 이야." 나는 말했다 "기숙사 생활도 이제 지겨워졌고, 아르바이트 를 하면 생활비 걱정은 없을 테니까.혹시 괜찮다면 함께 살지 않겠 어? 요전에도 말했지만." 고마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기뻐요." '이곳도 그다지 나쁜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조용하고. 환경 도 완벽하고. 레이코 씨도 좋은 사람이고. 하지만 오랫동안 있을 곳 은 못 돼 . 오래 있기에는 너무나 특수한 장소야. 오래 있을수록 이곳 을 떠나기 어렵게 될 것 같아." 나오코는 아무 말 없이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창 밖에는 눈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낫게 드리워져 있는 탓으 로, 눈에 덮인 대지와 하늘 사이의 공간이 무척이나 비좁아 보였다 "천천히 샐같해도 돼." 나는 말했다. "어쨌든 3월까지는 이사를 할 테니까,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와" 나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들 어올리듯이 양팔로 나오코를 살며시 껴안았다. 그녀는 네 목에 팔 을 감고 있었다 나는 알몸이었고, 그녀는 흰색의 가느다란 팬티만 입 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저는 왜 그곳이 젖지 않는 걸까요?" 나오코는 작은 소리로 말했 다 "단 한 번 그곳이 젖었을 뿐이에요. 스무 살이 되던 4월의 생일 날 당신 품에 안겼던 그날밤 그때 뿐이었어요. 저는 왜 느끼지 못 하는 걸까요?" "그런 건 정신적인 문제니까,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야. 초조해 할 필요는 없어 ." '저의 문제는 모두가 정신적인 거예요." 나오코는 말했다 "만일 제가 평생 동안 느끼지 못하고, 평생 동안 섹스를 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변함없이 저를 좋아하실 수 있으세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손과 입술만으로 참을 수 있으세요') 아니면 섹스 문제는 다른 여자 들과 자면서 해결하실 건가요?" "나는 본질적으로 낙천적인 인간이야 나오코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티셔츠를 머리에서부터 입은 다 음, 플란넬 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 나도 옷을 입었다. "천천히 생각해보겠어요." 나오코는 말했다. "당신도 천천히 생 각해보세요.' "생각할게." 나는 말했다. "그런데 나오코의 펠라티오, 정말 굉장 했어 나오코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생긋 웃었다. "기즈키 씨도그렇게 말하더군요." "나와 그 친구는 의견이나 취미가 잘 맞아 "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어서 우리는 부엌에서 식탁을 사이에 두고 커피를 마시며 옛날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조금씩 기즈키에 관한 이야기를 할수 있게 되어 있었다 띄엄띄엄 적절한 표현을 골라가며. 그녀는 이야기했 다 눈은 내리다 그치다 했지만, 사흘 동안 한 번도 언 적은 없었다 3월에 다시 올게, 하고 나는 헤어질 때 말했다. 그리고 두터운 코트 위로 그녀를 안고. 키스를 했다. 안녕,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1969년이라는 귀에 건 느낌의 해가 되자, 나의 10대는 완전히 종 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진흙탕에 발을 들여놓았다 학 년말 시험에 , 나는 비교적 수월하게 패스했다. 달리 하는 일도 없이 매일같이 학교에 다녔으니까.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시험에 패 스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기숙사내에서 몇 가지 트러블이 있었다. 운동권 학생들이 기숙사 내에 헬릿과 쇠 파이프를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감의 총애를 받고 있던 체육과 학생들과 실랑이가 벌어져 두 명이 부상을 당하고 여 섯 명이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그 사건은 상당히 오랫동안 불씨를 남겨서. 매일같이 어디선가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기숙사내에는 언제나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모두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나도 그 바람에 체육과 학생들에게 몰매를 맞을 뻔했지만 나가자와 가 사이에 끼여들어 간신히 무마시켜 주었다 어쨌든 그 기숙사를 떠 나야 할 시기였다 일단 시험이 끝나자 나는 본격적으로 아파트를 찾아보기 시작했 다 . 그리고 일주일 만에 간신히 기치조지 교외에 적당한 곳을 발견 했다. 교통편은 약간 나빴지만, 고맙게도 단독 주택이었다. 횡재라 해도 좋았다. 넓은 부지의 한 구석에 별채나 개집처럼 외떨어져 있 는 집으로, 주인집과의 사이에 몹시 황폐해진 정원이 펼쳐져 있었 다 주인은 정문을 사용하고, 나는 뒷문을 사용하기에 프라이버시는 지킬 수 있었다. 방 하나와 작은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벽장이 달려 있었다. 정원 쪽 으로 툇마루도 있었다 내년에 어쩌면 손자가 상경할지도 모르니까. 그때에는 집을 비워주는 조건이었지만. 대신에 시세보다는 방 값이 훨씬 쌌다. 집주인은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노부부로, 그다지 간섭 은 하지 않을 테니 마음 편히 지내라고 했다 이사는 나가자와가 도와주었다. 어디선가 소형 트럭을 빌려와서 내 짐을 나르고, 약속대로 냉장고와 텔레비전과 대형 보온병을 선물 해주었다. 나로서는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 이틀 후에 그도 기숙사 를 나와 미타의 아파트로 이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분간 만날 일이 없겠지만 건강하게 지내라구 " 헤어질 때 그가 말했다 "하지만 전에도 언젠가 말했지만. 먼훗날 기묘한 곳에서 말없이 자네와 마주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그날을 기대하겠습니다 ' '그런데 요전에 체인징 파트너를 했을 때 말이야, 미인이 아닌 쪽 아이가 더 좋더군 " "동감입니다 "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선배님은 하쓰미 씨 에게 좀더 신경을 쓰시는 게 좋을 겁니다 . 그렇게 좋은 여자는 좀처 럼 없을 테고. 보기보다는 상처받기 쉬울 사람이니까요." "응. 그건 알고 있어 "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터놓고 말하지만 내 뒤를 자네가 맡아주면 가장 좋을 텐데. 자네와 하쓰미 라면 잘 어울릴 테고." "농담하지 마세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농담이야."나가자와는 말했다. "하여튼,행복하라구 여러 가지 일이 있겠지만, 자네도 상당히 터프하니까 잘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내가 한 가지 충고를 해도 좋을까?" "좋습니다. " "자신을 동정하지 말게나" 그는 말했다 "자신을 동정하는 건 비 열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야." "명심해두겠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는 새로운 세계로. 나는 자신의 진흙탕으로 돌아갔다 이사하고 사흘 후에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새 집의 느낌 을 쓰고, 복잡한 기숙사에서 벗어나, 더이상 쓸데없는 자들의 쓸데 없는 이해 관계에 쉽쓸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기쁘고 마음이 놓인다. 이곳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 한다고 썼다. 창밖에 넓은 정원이 있는데,그곳은 동네 고양이들이 집회 장 소로 사용하는 모양입니다 나는 시간이 나면 툇마루에 누워서 그 고양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도대체 몇 마리인지 모르지 만, 하여간에 딴은 고양이가 있습니다. 그 고양이들이 모두들 누 워서 일광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네가 이곳 별채에 살게 된 것이 좨 못마땅한 모양이지만 오래된 치즈를 놔두자 몇 마리인 가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먹었습니다. 머지않아 그들과도 사이 가 좋아질지도 모릅니다. 그중에 키가 반쯤 잘려나간 얼룩무늬의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그 고양이는 내가 살던 기숙사의 사감 과 놀라우리만치 생김새가 닮았습니다. 당장이라도 정원에서 국 기를 게양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학교에서는 약간 멀어졌습니다만. 전문 과정에 들어가면 오전 강의도 훨씬 줄어들 테니까. 별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전차 속에서 마음놓고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오히려 좋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기치조피 주변에서 일주일에 사나흘 그다지 힘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으면 됩니다. 그러면 다 시 매일같이 나사를 조이는 생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서두르는 것은 아니지만-, 불끈 무엇인가를 새로이 시작하기에 적당한 계절이니까. 만약 우리가 4월부터 함께 지낼 수 있게 된다 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잘 하면 나오코도 대학 에 복학할 수 있을 테고. 함께 사는 데에 문제가 있다면. 이 근처 에 나오코를 위해서 아파트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늘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특별히 봄이 라는 계절을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름이 좋다면. 여름이라 도 좋습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 , 답장을 주시겠습니까? 나는 이제부터 좀 본격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입니다. 이 사 비용을 벌기 위해서 입니다. 혼자 살게 되니까 이런저런 일로 상당히 돈이 듭니다. 냄비며 식기며 사야 하니까요. 하지만 3월이 되면 한가해질 테니까 반드시 나오코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언 제가 좋을지 날짜를 지정해주면 좋겠습니다. 그 날짜에 맞춰서 교토로 갈 작정입니다. 나오코와 재회할 날을 손곱아 기다리겠습 니다 답장 주십시오. 그로부터 2, 3일간. 나는 기치조피에서 조금씩 생필품을 사들여 , 집 에서 간단한 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근처의 목공소에서 나무를 구 입하여 그 것으로 책상을 만들었다. 식사도 일단은 책상에서 먹기로 했다. 선반도 만들고. 조미료도 이것저것 샀다. 생후 6개원 정도 되 는 하얀 고양이가 나를 잘 따르더니. 내 집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나는 그 고양이에게 '갈매기'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일단 그 정도로 사람 사는 집 모습이 갖추어지자 나는 시내로 나 가 페인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찾아내어 2주일 내내 페인트공 조수로 일했다 급료는 좋았지만 대단한 중노동이었고. 시너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일이 끝나면 싸구려 식당에서 맥주를 곁 들인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고양이와 놀다가. 밤에는 긱 은 잠에 빠져들었다. 2주일이 지나도 나오코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나는 페인트 칠을 하다가 문득 미도리를 생각해냈다 그러고 보 니 벌써 3주일 가까이 미도리와 연락을 취하지 않았고, 이사한 사실 조차 알리지 않았다. 내가 슬슬 이사를 할까 생각한다고 말하자, 그 녀가 그러냐고 대답한 것이 끝이었다. 나는 공중전화로 가서 미도리가 사는 아파트에 전화를 걸었다 언니인 듯한 사람이 받더니 내 이름을 대자 "잠깐 기 다리세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미도리는 나오지 않았다. "있잖아요, 미도리가 마구 화를 내며. 당신과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군요." 언니인 듯한사람이 말했다. "이사할 때,당신이 미도 리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죠? 어디로 가는지 알리지도 않고 훌쩍 사라져버린 뒤, 감감 무소식이었죠 그래서 마구 화를 내는 거 예요. 미도리는 한 번 화가 나면 좀처럼 풀리지 않아요. 동물이나 마 찬가지니까." "설명할 테니까 받으라고 해주시겠습니까?'" "설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대요." '그렇다면 잠깐 설명을 드릴 테니. 죄송하지만 미도리에게 전해 주시 겠습니까?" "그런 건 싫어요." 언니인 듯한 사람은 딱 잘라서 거절했다. "그 런 건 자신이 직접 설득하세요. 당신 남자잖아요? 스스로 책임을 지 고 제대로 설명하세요.' 어쩔 수 없이 나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미도리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사하고, 새로 살림을 장만하고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하느라 미도리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미도리만이 아니라나오코 조차도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나 에게는 옛날부터 그런 데가 있었다. 무엇엔가 열중하게 되면 주위의 것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미도리가 아무 연락도 없이 어디론가 이사를 하여 3 주일이나 전화를 하지 않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고 생각해보았 다. 아마도 나는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깊은 상처를. 왜냐하면 우리는 연인은 아니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그 이상으로 친밀하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 니 몹시 안타까웠다. 타인의 마음에, 그것도 소중한 상대의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주는 것은 정말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새 책상 앞에 앉아서 미도리 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썼다. 변명도 설명 도 하지 않고 자신이 부주의하고 무신경했던 점을 사과했다. '몹시 만나고 싶다. 새 집도 보러 와주기 바란다. 답장을 달라'고 썼다. 그 리고 속달 우표를 붙여서 우체통에 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기묘한 봄의 시작이었다. 나는 봄 방학 내내 답장이 오기를 기다 렸다. 여행도 하지 못하고, 고베의 집에 들어 가지도 못하고, 아르바 이트도 하지 못했다. 며칠쯤에 만나러 와 달라고 나오코가 편지를 보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기치조지 시내로 나가 연속 상 영하는 영화를 보기도 하고, 재즈 찻집에서 한나절 책을 읽기도 했 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거의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속에서 나는 답장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를 독촉하기 싫었기 때문이 었다. 나는 페인트 가게의 아르바이트에 관해서 썼고, '갈매기'에 관 해서 썼고, 정원의 복숭아꽃에 관해서 썼고, 친절한 두부 가게 아주 머니와 성질 고약한 반찬 가게 아주머니에 관해서 썼고, 내가 매일 어떤 식사를 만들고 있는가에 관해서 썼다. 그래도 답장은 오지 않 았다. 책을 읽거나. 레코드를 듣는 것도 싫증이 나면, 나는 조금씩 정원 을 손질했다. 주인 집에서 빗자루와 갈퀴와 쓰레받기와 삽을 빌려와 잡초를 뽑고 마구 자판 정원수를 적당히 손질했다. 잠깐 손질을 한 것만으로도 정원은 제법 말쑥해졌다. 그러면 주인집 아저씨가 나를 불러. 차라도 마시자고 했다. 나는 주인집 툇마루에 앉아서 그와 둘 이서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으며. 잡담을 하곤 했다. 그는 퇴직한 이후 잠시 보험회사의 중역으로 있다가, 몇년 전에는 그것도 그만두 었는데, 집도 부피도 옛날부터 있던 것이고, 아이들도 모두 독립해 버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노라고 말했 다. 그러니까 부부 둘이서 자주 여행을 한다고 "좋으시 겠군요." "좋지 않아." 그는 말했다. "여행 같은 건 전혀 재미가 없어. 일을 하는 편이 훨씬 좋아.' 정원을 손질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 것은 이 부근에 변변한 정원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자신이 조금씩 하면 되지만 최근에 비염이 심해져서 풀을 만질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습니 까, 하고 나는 말했다. 차를 다 마시자 그는 나에게 창고를 보여주 며 , 답례라고까지 는 할 수 없겠지만, 이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불필 요한 것들이니까 사용하고 싶은 게 있다면 사용해도 좋다고 말했다. 창고 안에는 정말로 갖가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목욕통을 비롯해 서 어린이용 품과 야구 방망이도 있었다. 나는 낡은 자전거와 그다 지 크지 않은 식탁과 의자 두 개, 그리고 거울과 기타를 찾아내어, 괜찮다면 이것들을 빌리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 고 주인 아저씨가 대답했다 나는 하루 종일 자전거의 녹을 닦아내고, 기름을 칠하고, 타이어 에 공기를 넣고. 기어를 조정하고, 자전거 가게에서 클러의 와이어 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자전거는 몰라볼 정도로 새것이 되었 다. 식탁은 먼지를 깨끗이 털고 니스를 새로 발랐다. 기타 줄도 전부 새것으로 바꾸고, 틈이 벌어지려는 곳에는 접착제를 발랐다. 녹도 와이어 브러시로 깨끗이 닦아내고, 나사도 조절했다 별로 좋은 기 타는 아니었지만, 일단 정확한 음이 나게끔 되었다 그러고 보니 고 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기타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서, 옛날에 연습했던 프리프터즈의 '업 꼰 더 루프'를 머리에 되 새기며 천천히 쳐보았다. 신기하게도 아직 대부분의 코드를 기억하 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남아 있는 목재로 우편함을 만들어, 빨간 페인트를 칠하고 이름을 써서 문 앞에 세워놓았다. 하지만 4월 3일까지 그 우 편함에 들어온 우편물이 란 전송되어 온 고등학교 동창회 통지서뿐 이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곳에는 절대로 참석하고 싶 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즈키와 내가 같은 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통지서를 즉각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4월 4일 오후에 한통의 편지가 우편함에 들어 있었다. 레이코에 게서 온 편지였다. 봉투 뒤쪽에 이시다 레이코라는 이름이 적혀 있 었다 나는 가위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고는 툇마루에 앉아서 편 지를 읽었다 애초부터 그다지 좋은 내용의 편지는 아니리라는 예감 은 있었지만, 읽어보니 과연 예상했던 대로였다. 우선 레이코는 답장이 많이 늦어진 점을 사과했다 나오코는 당 신에게 답장을 쓰려고 악전고투했지만,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나 는 몇 번이고 대신 써줄게, 답장이 늦어지면 안 되니까 하고 말했지 만, 나오코는 이것이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며 아무래도 자기가 써야 한다고 우겨. 이토록 답장이 늦어졌다 여러 가지로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고 그녀는 적어 보냈다. 당신도 최근 한 달 동안 답장을 기다리느라 괴로웠겠지만, 나 오코로서도 최근의 한 달은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 점은 양해해 주시기 바람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그녀의 상태는 그다지 좋 지 않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지만, 현재로서는 좋은 결과가 오고 있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최초의 징후는 제대로 편지를 쓰지 못하게 된 것이 었습니다. 1월말인가, 12월초부터입니다. 그리고는 조금씩 환청 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가 편지를 쓰려고 하면, 여러 사람들이 말을 걸어와 방해를 합니다 적절한 어휘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두번째 찾아왔을 때까지는, 이러한 증상도 비교적 가벼웠고, 나도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심 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어느 정도 그런 증상의 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가버린 후에, 증상은 아주 심해졌습니다 그녀는 지금 일상적인 대화조차도 힘겨운 상태입니다. 적절한 어휘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나오코는 지금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혼란과 두 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환청도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전문의와 함께 세션을 하고 있습니다. 나오코: 나와 의사 선생님 셋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 머릿속의 손상된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려는 것입니다. 저는 가능하 다면 당신도 세션에 참여시키자고 제안했고, 의사 선생님도 그 의견에 찬성이었습니다만, 나오코가 반대했습니다. 그녀의 표 현을 빌리자면, '깨끗한 몸으로 그이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 그 이 유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회복하는 것 이라고 저는 여러 차례 설득했습니다만, 그녀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당신에게 설명을 드렸듯이, 집중적인 치료는 곤란합 니다. 이곳 시설의 목적은 환자가 자기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유효 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의학적인 치료는 포 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나오코의 증상이 더 욱 악화되는 날에는, 다른 병원이나 의료 시설로 옮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로서도 괴로운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 니다. 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치료를 위한 ' 시적 '푼장'의 형식으 로,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습니다 혹은 잘 되면 그대로 완치 되어 퇴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저희들도 전력을 기울이 고 있고, 나오코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당신도 그녀의 회 복을 기원해주십시오. 그리고 예전과 같이 편지를 보내주십시오 3월 31일 이시다 레이코 편지를 다 읽고 나서도 나는 그대로 툇마루에 앉아, 봄기운이 완 연히 느껴지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늙은 벚나무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바람은 부드러웠고, 햇빛은 아련하게 신비스러운 색상을 띄우고 있었다. 잠시 후 어디선가 '갈매기'가 나타나더니 툇 마루의 판지를 발톱으로 긁어 대다가, 내 옆에서 기분 좋게 몸을 뻗 고 잠이 들었다. 무언가 방도를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 야 좋을지 몰랐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조만간 무언가 방도를 강구해야 할 때가 올 테니, 그때 천천 히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 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서 갈매기를 쓰다듬으며 기둥에 기댄 채로 하 루 종일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온몸의 힘이 빠져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오후가 깊어지고, 땅거미가 찾아들고, 이어서 희미한 청색의 어둠이 정원을 에워쌌다 갈매기는 이미 어디론가 모습을 감 추었지만, 나는 여전히 벚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봄날의 어둠 속에 서 , 벚꽃은 마치 찢어 진 피부 위에 솟아오른 짓무른 살처럼 보였다. 정원은 달콤하고 무거우면서도 썩은 살 냄새로 가득했다. 그 속에서 나는 나오코의 육체를 생각했다 나오코의 아름다운 육체는 어둠 속 에 누워 있었다. 그 육체의 피부에서 무수한 식물의 싹이 솟아나고. 초록색의 그 작은 싹들은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가늘게 떨렸다. 왜 이토록 아름다운 육체가 병 들어야만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왜 그들은 나오코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것일까' 나는 방으로 들어가 창문의 커튼을 닫았다. 방 안에도 역시 봄날의 향기가 가득했다. 봄의 향기는 이 세상 어디에나 가득했다 그러니 지금, 향기에서 연상되는 것은 썩은 넨새뿐이었다. 나는 커튼이 꼭 닫힌 방안에서 격렬하게 봄을 증오했다. 나는 봄이 나에게 가져 다준 것을 증오했고. 또한 그것이 내 몸 속에서 빛어내는 둔감한 통 증을증오했다 태어나서 이제까지 이토록 강렬히 무언가를증오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사흘 동안, 나는 마치 바다 속을 거니는 듯한 기묘한 나날 을 보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도 잘 들리지 않았고, 내가 누 군가에게 말을 걸어도, 그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마치 내 주 위가 보이지 않는 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막 때 문에, 나는 제대로 외계와 접촉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도 내 피부를 만질 수 없었다. 나 자신은 무력하지만. 이 렇게 하고 있는 동안, 그들도 나에 대해서는 무력한 셈이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배가 고프면 주위 에 있는 것을 씹고, 물을 마셨다. 슬퍼질 때에는 위스키를 마시고 잤 다. 목욕도 하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사흘을 보 냈다. 4월 6일에 미도리에게서 편지가 왔다. 4월 10일에 수강 신청이 있 으니까. 그날 학교 안뜰에서 만나 함께 점심을 먹지 않겠느냐는 것 이었다. 편지에는,답장이 많이 늦어졌지만. 이것으로 서로 비긴 셈 이니까 화해를 해요, 당신과 만나지 못하니까 외로워요,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네 번이나 읽었지만, 그녀가 하려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 편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사고력은 몹시 막연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하나의 문장과 다음 문장을 잇는 접점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수강 신청' 하는 날에 그녀를 만나는 것이 '비긴 셈'이 된다는 말일까? 어째서 그녀는 나와 '점심'을 먹겠다는 것일까? 어쩐지 내 머리조차 이상해 지는 느낌이로군, 하고 생각했다. 의식이 몹시 이완되어, 암흑 식물 의 뿌리처럼 불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지내면 안 되겠구나, 하고 흐 릿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야지. 그리고 문득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는 나가자와의 말 을 떠올렸다. '자신을 동정하는 것은 비열한 인간이 하는 짓이다. ' 어이구 나가자와 씨. 당신은 훌륭한 인간이로군요, 하고 나는 생 각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나는 오랜만에 빨래를 하고, 목욕탕으로 가서 면도도 하고, 방 청 소를 끝낸 다음, 장을 보아 제대로 된 식사를 만들어 먹었다. 배를 곯고 있는 갈매기에게도 먹을 것을 주고. 맥주 이의의 술은 입에 대 지 않고, 30분 가량 체조를 했다. 면도할 때 거울을 보니. 눈에 띄도 록 얼굴이 홀쭉하게 여위어 있었다. 눈만 불길하게 뒤룩거리는 것 이, 어쩐지 다른 사람의 얼굴 같았다. 이튿날 아침 나는 자전거를 타고 좀 멀리까지 돌아다니다가, 집 으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하고. 레이코의 편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레이 코의 편지를 읽고 크게 충격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나오코가 순조 롭게 쾌유되고 있으리라는 자신의 낙관적인 관측이 일순간에 뒤질 어져버린 탓이었다. 나오코 자신도. 자신의 병은 뿌리가 깊다고 말 했고. 레이코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나 오코와 두 차례 만나서, 그녀가 좋아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유 일한 문제는 그녀가 현실 사회에 복귀할 용기를 되찾는 일이라는 식 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용기를 되찾는다면. 우리 서로 힘을 합쳐서 분명히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취약한 가설 위에 쌓아올린 환상의 성은 레이코 의 편지로 일해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뒤에는 무장지 고 밋밋한 평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태 를 재정비해야만 했다. 나오코가 다시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 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설령 회복된다 하더라도, 회복이 그녀는 전보다 훨씬 쇠약해지고. 자신같이 없을 것이리라. 나는 그러한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전을시켜야만 한다. 물론 내가 강해진 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 다 그러나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사기를 높이 는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회복을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이 기즈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너와는 달리 살기로 결 심했어. 나 나를대로 열심히 살기로 결심했어. 너도 괴로웠겠지만 나도 괴롭다구. 정말이야. 이렇게 된 건 자네가 나오코를 남겨놓고 죽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보다는 내가 강하기 때문이지. 나는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해질 것이고 어른이 될 거야.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야. 나는 이제까지 가능한 한 열일곱 이나 열여덟 살에 머물러 있으려고 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 아. 난 이미 10대 소년이 아니라구 나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 어 이. 기즈키,난 이미 너와 함께 지내던 시절의 내가아니야. 이제 는 스무 살이거든. 그리고 난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 지 않으면 안 돼 "어떻게 된 거예요 와타나베 씨?" 미도리가 물었다 "몹시 여위 었어요." "그런가?" "섹스가 과다했던 건 아닌가요, 유부녀 애인과?"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작년 11월초 이래로 여자와 잔 적 은 한 번도 없어." 미도리가 탄성 같은 휘파람을 불었다 "벌써 6개월이나 그걸 하 지 않았어요',? 정말?" "그래 ." '그렇다면. 어째서 이토록 야위었죠?" "어른이 되었으니까 " 미도리는 내 양쪽 어깨를 잡고는,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얼굴을 찡그리는가 싶더니, 다시 생긋 웃었다. "정말이 로군요 분명히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에 비해서 ." "어른이 되었으니까." "당신 정말 멋져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 그녀는 감탄한 듯 이 말했다 "밥 먹으러 가요. 배가 고파요.' 우리들은 문학부 위쪽에 있는 작은 래스토랑으로 가서 식사를 하 기로 했다 네가 점심 정식을 주문하자. 그녀도 같은것을 달라고 했 다. "와타나베 씨 , 화났어요'" 미도리가 물었다 "제가 복수할 생각으로 답장을 보내지 않은 일로 그러면 안 된다 고 생각하세요? 당신은 정 식으로 사과를 했는데도?" "내가 나빴으니까 어쩔 수 없지 " "언니는 그러면 못 쓴다고 하더군요 너무 유치하고 너그럽지 못 하다고." "하지만 그래서 일단은 화가 풀렸잖아? 복수를 해서?" "응 " "그렇다면 그걸로 됐잖아?" "당신은 정말 너그럽군요." 미도리는 말했다. "와타나베 씨, 정말 로 6개원간이나 섹스를 하지 않았어요? "아마, 그럴 거야" "그런데도 저에게 손을 대지 않은 거로군요?' "미도리는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미도리를 잃고 싶지 않거든 "저는 그때 당신이 접근해왔더라면 아마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에 요. 그때 몹시 나약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물건은 딱딱하지 않은 걸." 그녀는 생긋 웃으며, 내 손목을 살짝 만졌다 "저는, 얼마 전부터 당신을 믿기로 결심했어요. 백퍼센트. 그러니까 그때도 저는 안심하 고 푹 잤던 거예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걱정 없다. 안심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깊게 잠들어 있었죠. 제가?" "응 그랬지." "그리고,만일 반대로 당신이 저에게 '어이 미도리. 한번하자 그러면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야. 그러니까 나와 하자구' 하고 말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허락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말을 했다 고 해서, 제가 당신을 유혹한다거나 놀리면서 자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마세요 저는 단지 제가 느끼는 걸 솔직하게 당 신에게 전하고 싶을 뿐이에요." "알고 있어."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수강 신청서를 보고는 두 과목을 같이 신청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주일에 두 번 그녀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의 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 녀의 언니도 그녀도 얼마 동안은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의 인생에 비해서 아파트 생활이 너무나도 편했 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누군가를 간병하거나 가게 일을 돕거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라 고 미도리는 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이걸로 됐다고 여기게 됐어요." 미도리는 말 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본레의 생활이라고. 그러니까 누구 의 눈치도 될 필요 없이 마음껏 팔다리를 뻗고 지내면 된다고. 하지 만 그래도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거예요. 목이 2, 3센티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들어서, 거짓말이다 이토록 편안한 인생이 현실의 인생일 리가 없다. 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이제 곧 다시 뒤바뀐 게 틀림없다며 우리는 마음을 조였죠 " "걱정도 팔자인 자때로군 "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까지의 생활이 너무나 가혹했던 거예요." 미도리는 말했다. 하지만 괸찮아요. 우리는 이제까지 고생한 만큼 앞으로 더 행복해 질 거니까요." "미도리 자매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나는 말했 다. "언니는 매일 무얼 하지?" "언니 친구가 얼마 전에 오모테산도 가까이 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시작했는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일을 도와주러 다녀요. 그 외에는 요리를 배우기도 하고, 약혼자와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 기도 하고, 멍하니 있기도 하고, 하여간에 인생을 즐기고 있어요." 매가나의 새 생활에 대해서 물어서.나는 집의 구조와 넓은 정 원과 고양이인 갈매기와 집주인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즐거우신가요?" "재미 없지는 않아." "하지만 그에 비해서 기운이 없군요." "봄인데 말이야." "게다가 그녀가 짜준 스웨터를 입고 있는데 말이에요." 나는 깜짝 놀라서 자신이 입고 있는 포도색 스웨터에 눈을 주었 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당신 정말 솔직한 사람이로군요. 저야 단순히 추측해 보았을 뿐 이잖아요?" 미도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힘을 내려고는 노력하는데."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나는 몇 번인가 고개를 흔들고는 미도리의 얼굴을 보았다. "아마 도 내 머리가 나쁜 탓이겠지만, 이따금 미도리가 하는 말을 잘 이해 할 수 없을 때가 있어.' "비스킷 통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비스킷 중에는. 좋아하는 것도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먼저 먹 다 보면. 나머지는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 반 대인 경우도 있을수 있잖아요. 저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그 렇게 생각해요. 지금 이것을 해두면 나중에 편안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다 라고 " 그것도 하나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군 "하지만 그건 정말이에요. 저는 경험 적으로 이것을 배웠거든요 미도리는 말했다.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미도리와 같은 학과의 친구인 듯한 여 학생 둘이 가게로 들어와, 미도리와 셋이서 서로 수강 신청서를 보 여주면서. 작년에 독일어 성적이 어쨌냐는 둥 운동권 학쌩들의 파 벌 싸움에 휘말려서 부상을 당 했다는 둥 그 구두 멋진데 어디서 샀 느냐는 둥, 한동안 그런 두서없는 이야기를 했다. 무심코 듣고 있자 니 , 그 이야기는 어쩐지 지구 뒤쪽에서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 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봄날의 대학 풍경이었다. 하늘은 뽀얗고, 벚꽃이 피어 있 고.보기에도 신입생 같은 차림의 학생들이 새 책을 부둥켜 안고 겉 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는 다시 멍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작년에도 학교에 복학하지 못한 나오코를 생각했다 창가에는 아네모네를 꽂은 작은 유리컵이 놓여 있었다. 여학생들이 형 또 만나자고 인사를 하고 자기들 테이블로 돌아 가버리자. 미도리와 나는 가게를 나와 둘이서 거리를 산보했다. 헌 책방을 돌며 책을 몇 권인가 사고, 다시 찻집으로 들어가 커피를 마 시고, 게임 센터에서 핀볼을 하고, 공원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 다 대체로 미도리가 이야기를 하고. 나는 응응 하는 대답만 했다. 미도리가 목이 마르다고 하기에 , 나는 부근의 제과점에서 콜라를 두 병 사줬다. 그 동안 그녀는 리포트 용지에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 었다. 그게 뭔데 하고 내가 묻자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데답했 다 세 시 반이 되자 그녀는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언니와 진자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하고 말했다. 우리는 지하철역까지 걸어가. 그 곳에서 헤어졌다.헤어질 때 미도리는 내 코트주머니에 네 겹으로 접은 리포트 용지를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집에 가서 읽으라고 말 했다. 나는 그것을 전차 안에서 읽었다 전랸 지금 당신이 콜라를 사러 간 사이에 이 편지를 씁니다. 벤치 옆 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기는 저도 처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당신에게 전달될 것 같군요 사실 제가 무슨 말을 하건 거의 들어주지 않는걸요. 그렇죠? 알고 계신가요? 당신은 오늘 저에게 몹시 심한 짓을 했어요. 당신은 제 헤어스타일이 바뀐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죠? 저는 고 생하며 조금씩 머리를 길러서 간신히 지난 주 말에 그런 대로 여 자아이 같은 헤어스타일로 바꿀 수 있었어요. 당신은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했잖아요? 제법 예쁘게 되어서 오랜만에 만나서 깜 짝 놀라게 해주려 했는데, 눈치채지 못하다니 , 그건 너무 심하잖 아요? 어차피 당신은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겠죠? 저도 여자예요. 아무리 생각할 것이 많다고늘 하지만 잠깐은 저를 제대로 봐 주어도 좋지 않을까요? 단 한 마디 '그 머 리, 예쁘군' 하고 칭찬해주었더라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하건 아무 리 딴 생각을 하건, 저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언니와 진자에 서 만나기로 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저는 오늘 당신 집에 묵 을 작정으로 파자마까지 갖고 왔어요. 그래요, 제 가방 속에는 파 자마와 칫솔이 들어 있어요. 하하하. 바보같이. 그런데 당신은 집 에 오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은 저따위는 아랑곳없이 혼자 있고 싶어하니까. 혼자 있게 해드릴게요. 열심 히 여러 가지 일들을 마음껏 생각하며 지내세요 저는 당신에게 무작정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다 만 외로을 뿐이에요. 당신은 저에게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제가 당신에게 해드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 니까요 당신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혀. 제가 똑똑, 와타 나베 씨, 똑똑, 하고 노크를 해도 잠깐 눈을 들어 쳐다볼 뿐, 다시 원래로 돌아가버리니까요. 지금 당신이 콜라를 들고 왔어요.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오길 래 나자빠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자빠지지 않더군 요. 당신은 지금 옆에 앉아서 꿀꺽꿀꺽 콜라를 마시고 있어요. 콜 라를사왔을 때 '어라,헤어스타일이 바뀌었구나!' 하고 알아차 릴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역시 아니었어요. 만일 눈치 채주었 더라면 이런 편지는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당신 집에 가요. 맛있 는 저녁 식사를 만들어드릴 테니까. 그리고 사이좋게 자요' 하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당신은 철판처럼 무신경했어요 안녕 . p. s. 이 다음에 강의실에서 만나더라도 말을 걸지 마세요 기치조지 역에서 미도리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무 도 밭지 않았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 나는 기치조지 거리를 걸으 며. 학교에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보았다. 나 는 토. 일요일은 하루 종일 비어 있고, 월, 수 목요일은 저녁 다섯 시부터 일할 수 있었지만. 그런 스케줄에 꼭 맞는 일거리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 장도 볼 겸 다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언니가 받아서, 미도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늘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저녁 식사후 미도리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써도 제대로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오코에게 쓰기로 했다. 봄이 되어 다시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고 썼다 나오코를 만날수 없어서 몹시 외롭다 설령 어떠한 형태로든지 나오코를 만나고 싶었 고, 나오코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강해지 기로 결심했다. 그 이외에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듯하기 때 문이다. 라고 썼다. 그리고 이런것은 내 자신의 문제일 뿐, 나오 코와는 아무런 관련 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제 누구와도 자지 않습니다. 나오 코가 나를 만져주던 때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 다 나에게 그것은 나오코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입 니다. 나는 언제나 그때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인 다음, 책상 앞에 앉아서 잠 시 동안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보다는 아주 짧은 편 지였지만, 어쩐지 그 편이 상대에게 내 뜻을 잘 전달할 수 있으리라 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컵에 3센티 정도 위스키를 따라서 마시고 는, 잠을 잤다 이튿날 나는 기치조지 역 부근에서 토요일과 일요일만 하는 아 르바이트를 찾아내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이태리 음식점의 웨이터로, 조건은 보통이었지만, 점심 식사를 주고, 교통비도 주었다. 월, 수. 목요일에 밤 당번이 쉬게 되면-그들은 자주 쉬었다 대신에 출근 해도 좋다는 이야기도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3개월 근무하면 급료 를 올려주겠다. 요번 주 토요일부터 출근해 달라고 지배인이 말했 다. 신주쿠에 있는 레코드 가게의 그 칠칠치 못한 지배인에 비하면 상당히 의젓하고 성실해 보이는 사내였다 미도리의 아파트에 전화를 걸자 또 언니가 받더니. 미도리는 어 제부터 계속 돌아오지 않는데, 이쪽이 행선지를 알고 싶을 정도다. 어딘가 집히는 데가 없느냐고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은 그녀가 가방에 파자마와 칫솔을 넣어 가지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수요일의 강의 때에, 나는 미도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쑥 색 스웨터를 입고, 여름에 곧잘 끼던 짙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 다. 그리고 가장 뒷좌석에 앉아서,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안경 을 끼고 키가 작은 여학생과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곳으로 가서, 나중에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미도리에게 말했다 안 경을 낀 여학생이 먼저 나를 보았고. 그 다음에 미도리가 나를 보았 다. 미도리의 머리는 전에 비하면 훨씬 여자다운 스타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저, 약속이 있어요." 미도리가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다지 시간은 걸리지 않을 거야. E분이면 돼." 미도리는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가늘게 움츠렸다. 마치 1백 미터 전방의 쓰러져 가는 폐옥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었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하지만." 안경 낀 여학생이 '그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대요, 미안하지만' 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맨 앞줄의 오른쪽 끝에 앉아서 강의를 듣고 (테네시 윌리엄 즈의 희곡에 관한 총론 미국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 강의가 끝 나자 천천히 셋을 센 다음 뒤를 돌아다보았다. 미도리의 모습은 이 미 보이 지 않았다. 4월은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나 외로운 계절이었다 4월에는 주위 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 보였다. 사람들은 코트를 벗어던지고, 밝은 햇살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캐치볼을 하기도 하고. 사랑 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나오코도 미도리도 나가자와도, 모두 내가 서 있는 장소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지금 의 나에게는 '안녕하세요'라든가 '잘 있었니' 하고 인사를 할상대 도 없었다 그래서 그 돌격대조차도 그리웠다 나는 그러한 안타까 운 고독 속에서 4월을 보냈다 몇 번인가 미도리애게 전화를 걸어보 았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어조에서, 진심으로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그녀는 언제나 그 안경 낀 여학생과 함께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키가 크고 머리가 긴 남학생과 함 께 있었다. 무척이나 다리가 긴 남학생으로, 언제나 농구화를 신고 있었다. 4월이 지나고 5월이 되었지만, 5월은 4월보다도 더욱 심했다 5월 이 되자 나는 봄이 무르익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이 떨리고 흔들리 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떨림은 대체로 저녁 무렵에 시작되었다 목련꽃 향기가 은은하게 떠도는 듯한 옅은 어둔 속에 서. 내 마음은 까닭 없이 부풀고, 떨리고, 흔들리고, 아픔을 느꼈다 그런 때면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느낌은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지 나가면서. 뒤에 둔탁한 통증을 남겼다. 그럴 때면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나오코에게 보내는 편 지에는 멋진 일이나 기분 좋은 일. 혹은 아름다운 이야기밖에 쓰지 않았다 풀냄새 기분좋은 봄바란, 달빛, 관람한 영화, 좋아하는 노 래, 감명을 받은 책, 그러한 것들에 관해서 썼다. 그 편지를 다시 읽 으면, 마음의 위안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멋진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러한 편지를 몇 통이나 썼다. 나오코 에게서도 레이코에게서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레스토랑에서 나는 이토라는 동갑내기 아르 바이트 학생과 알게 되어 이따금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미대의 유 화과에 다니는 점잖고 과묵한 사내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 때까 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자, 우리는 일이 끝나면 근처의 술집에서 맥주를 한 잔 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 누게 되었다. 이토는 갸름하고 핸섬한 사내로, 미대 학생치고는 머 리도 짧게 깎고. 청결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다지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는 뚜렷한 취향과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 소설을 좋아하여 조르주 바타이유와 보리스 비앙의 작품을 즐겨 읽 었고, 음악은 모차르트와 모리스 라벨을 즐겨 들었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를 찾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나를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했다. 이노가시라 공원 뒤 쪽에 있는 기묘한 구조의 단층 아파트로, 방 안에는 화구와 캔버스 가 가득했다 나는 그림을 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부끄러운 수준이 라며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 몰래 가져온 시바스 리 갈을 마시고, 풍로에 시샤모(작은 바다 고기의 일종)를 구워 먹으며, 로벨 카사드슈가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들었다 그는 나가사키 출신으로,고향에 애인이 있어서,나가사키로 돌 아갈 떼마다 그녀와 잤다. 하지만 최근에는 어쩐지 사이가 벌어진 느낌이야, 하고 말했다. "대충 감이 잡히잖아." 그는 말했다 "여자란 말이야 스물이나 스 물하나가 되면 갑자기 여러 가지 것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 하는 거야. 너무나 현실적 이게 되는 거지 . 그러면 이제까지 아주 귀 엽게 느껴지던 부분이 평범하고 따분하게 보이는 거야. 나와 만나 면, 대체로 그 일이 끝난 다음에. 대학을 졸업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하고 묻거든." "어떻게 할 건데?" 나도 물어보았지- 그는 시샤모를씹으며 머리를 저었다. "어떻게 할 거냐고물어봤 자 별 수가 없잖아, 유화과 출신인데 그런 걸 생각한다면 아무도 유 화과에 오지 않을 거야. 사실 졸업 해봤자 제대로 먹고 살 수 없다고 대답하면.그녀는 나가사키로 돌아와서 미술 선생이 되라는 거야. 그녀는 영어 선생이 될 작정이니까." "이젠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로군?" "그렇다고 할수 있지." 이토는 인정했다. "게다가 나는 미술 선 생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 원숭이 새끼처럽 소리치며 난리를 피워 대는 버릇없는 중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다가 일생을 끝내고 싶 지는 않거든."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와는 헤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서로 를 위해서." 나는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말을 꺼낼 수가 없어 , 미안해서 그 녀는 나와 결혼할 생각이야. 이제는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헤어지자, 하는 말을 꺼낼 수가 없어." 우리는 얼음도 넣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시바스 리갈을 마시고 시샤모가 떨어지자 오이와 샐허리를 가늘게 썰어서 된장에 찍어 먹었다. 오이를 아 작아작 씹고 있으려니 돌아가신 미도리 아버 지가 생 각났다 그리고 미도리를 잃은 후의 내 생활이 얼마나 무미건조해졌 는가 하는 생각에, 안타까운 심정이 되었다. 알게 모르게 나의 내부 에서 그 녀의 존재가 점차로 부풀어 갔던 것이다. "자네는 애인이 있나?" 이토가 물었다. 있기는 있어 . 하고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 했다. 하지만 사정 이 있어서 지금은 멀리 떨어져서 지내지. "하지만 서로 마음은 통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구제받을 수 없으 니까."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그는 딘파그트가 얼마나 멋진가를 조용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는 시골 사람들이 산길을 잘 알고 있듯이,모차르트의 음악이 얼마나 멋진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모차르트를 좋아해서 세 살 때 부터 계속 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클래식에 관해서 별로 아늘 바가 없었지만. '이것 봐. 이곳이-라던가 '어때. 이-라 는 식의 적절하고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모차르트의 콘체르토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우 리들은 이노가시가 공원의 숲 위에 뜬 초승달을 바라보며, 시바스 리갈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다. 맛있는 술이었다. 이또는 자고 가라고 권했지만, 나는 좀 볼일이 있다며 사양하고 는, 아홉 시경에 그의 아파트를 나왔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공중 전화 박스로 들어가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처럼 미도리가 전 화를 받았다. 죄송해요. 지금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미도리는 말했 다 . "그건 잘 알고 있어 몇 번이나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미도리와의 관계를 끝내고 싶지 않아 미도리는 정말로 몇 명 안되 는 내 친구 중의 하나이고. 미도리를 만날 수 없어서 몹시 괴로워 언제나 다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것만 가르쳐줘 . "제가 사과를 드릴게요. 떼가 되면 "별일 없나? " 나는 물어보았다. "그럭 저럭 " 그녀는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5월 중순에 레이코에게서 편지가 왔다. 언제나 편지 잘 받아보고 있어요. 나오코는 아주 반가워하며 읽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보여줍니다. 괜찮겠죠, 읽어도? 오랫동안소식 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조금은 지쳤고, 좋은 소식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나오코의 상 태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며칠 전 고베에 계시는 나오코의 어 머님이 오셨기에, 전문의와 저도 함께 넷이서 여러 가지로 이야 기한 결과, 당분간 전문적인 병원으로 옮겨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결과를 보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게 좋겠다고 합의를 보았습니다. 나오코도 가능한 한 이곳에 계속 머물며 치료를 하 고 싶다고 하고, 저도 그녀와 헤어지기 섭섭하고 걱정도 됩니다 만, 솔직히 말해서 이곳에서 그녀를 컨트롤하기는 점차 어려워지 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별 일 없지만. 이따금 감정이 몹시 불안정 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 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심한 환청과 더불어, 나오 코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자신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그래서 나도 당분간 적절한 시설로 들어가 그곳에서 치료를 받 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전에도 당신에게 말했듯이,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희 망을 버리지 말고, 뒤엉킨 실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겁니다 사태 가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이더라도, 어딘가에 반드시 실마리가 있 을 겁니다. 주위가 어두워지면, 잠시 눈이 그 어둠에 익숙해질 때 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도착할 무렵에는 나오코는 이미 다른 병원 으로 옮겨져 있을 겁니다. 연락이 자꾸 늦어져서 죄송하게 생각 합니다만. 여러 가지 일들이 한거번에 결정되어버렸습니다. 새 병원은 제대로 된 좋은 병원입니다. 좋은 의사도 있습니다. 주소 를 아래에 적어드릴 테니까, 그쪽으로 편지를 보내주세요. 그녀에 관한 정보는 저에게도 들어오니까, 무엇인가 알게 되면 연락하도 록 하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도 힘들겠지만 힘을 내십시오. 나오코가 없더라도 가끔 저에게도 편 지를 주십시오 그럼 안녕히 그해 봄에 나는 무척이나 많은 편지를 썼다 나오코에 게는 일주 일에 한번씩 편지를 썼고, 레이코에게도 썼고.미도리에게도 몇 통 인가 썼다 한쪽 강의실에서도 썼고. 집에서는 갈매기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책상앞에 앉아 썼고,휴식 시간이면 이태리 음식점의 식 탁에서도 썼다. 마치 편지를 씀으로써 ,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자신 의 생활을 간신히 유지해 나가고 있는 듯했다. 함께 이야기하지 못해서. 정말로 괴롭고 외로운 4월과 5월을 보 냈다. 라고 나는 미도리에 게 편지로 썼다. 이토록 괴롭고 외로운 봄 을 경험하기는 처음이다. 차라리 3월이 두세 차례 계속되는 편이 좋 을 것이다. 이제 와서 미도리에게 이런 말을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 겠지만, 새 헤어스타일은 정말 잘 어울린다. 아주 귀엽다. 이태리 음 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방장에 게서 맛있는 스파게티 만드 는 법을 배웠다. 언젠가 미도리에게 내가 만든 스파게티를 대접하고 싶다 나는 매일 학교에 다니고, 일주일에 두세 번 이태리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토와 함께 책이나 음악 이야기를 하고. 그에 게서 보리스 비앙을 몇 권 빌려서 읽고. 편지를 쓰고, 갈매기와 놀 고, 스파게티를 만들고, 정원 손질을 하고. 나오코를 생각하며 마스 터베이션을 하고, 수많은 영화를 보았다. 미도리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 그것은 6월 중순이었다 미도리와 나 는 벌써 2개월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의가 끝나자 내 옆 자리에 앉더니, 잠시 턱을 괸 채로 잠자코 있었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철 특유의, 바람도 없이 곧장 내리는 비는, 이 세상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적셨다 다-른 학생들이 모두 강의실을 나 가버린 후에도, 미도리는 계속 그 자세로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진 재킷 호주머니에서 말보로를 꺼내어 물고는, 나에게 성냥을 건넸다. 나는 성냥을 줘서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미도리는 입술을 동그랗 게 해서 연기를 내 얼굴에 천천히 내뿜었다. "이 헤어스타일 마음에 드세요?" "아주 좋군." "얼마나 좋아요?" 미도리가 물었다 "이 세상 모든 숲의 나무들이 전부 쓰러질 정도로 좋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오른손을 내밀었 다. 나는 그 손에 악수를 했다. 나보다도 그녀가 더 안심하는 모양이 었다 미도리는 담뱃재를 바닥에 털고는 불쑥 일어섰다. "식사하러 가요. 배고파 죽겠어요" 미도리는 말했다. "어디로 가지?" "니혼바시에 있는 다카시마야 백화점 식당." "왜 일부러 그런 데까지 가는 건가'?" "저는 이따금 그곳에 가고 싶어 져요." 그래서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니혼바시까지 갔다. 아침부터 비가 계속 내린 탓인지 . 백화점 안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건물 안에는 비 냄새가 맴돌았고, 점원들도 어쩐지 심심해 하는 것 같았다. 우리 는 지하 식당가로 가서, 쇼윈도의 견본을 면밀하게 점검하고는 둘 다 마쿠노우치(양이 많고 비싼 도시락)를 먹기로 했다. 점심 때였지 만 식당도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백화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건 오랜만이로군." 나는 백화점 식 당이 아니면 좀처럼 볼 수 없는 흰색의 만질만질한 잔에 물을 따르 면서 말했다. '이런 곳 저는 좋아해요. 어쩐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기 분이 들거든요. 아마도 어렸을 때의 기억 탓이겠죠 어쩌다가 한 번 백화점에 따라오곤 했으니까 " "나는 항상 왔던 것 같아. 어머님이 백화점에 가는 걸 좋아했거든" "부럽군요." '부러을 건 없어 나는 백화점에 가는 게 싫었으니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 부모님이 관심을 갖고 키워주신 게 부럽다 는 뜻이에요." "외아들이 었으니까 "어른이 되면 혼자 백화점 식당에 와서 먹고 싶은 음식을 잔뜩 먹 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떼. 하지만 허사예요, 혼자서 이런 곳에 와서 남들의 눈치를 살피며 먹어봤자 전혀 즐겁지 않으니까. 별달리 맛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넓고 붐비고 시끄러운 데다가. 공기는 나 쁘고. 그래도 이따금 이곳에 오고 싶어 져요." "최근 2개월간 외로웠어 " 나는 말했다. "그건, 편지에서 읽었어요." 미도리는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간에 식사부터 해요. 저는 지금 식사 이외의 일은 생각하고 식 지 않아요." 우리는 반원형 도시락 상자에 담긴 마쿠노우치를 깨끗이 먹어 치 우고, 국을 마시고, 물을 마셨다. 미도리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다 피우자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불쑥 일어나 우산을 집어들었다. 나도 일어나서 우산을 받았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지?" 나는 물어보았다 "백화점에 와서 식당에서 식사를 했으니, 다음은 옥상이 당연하 잖아요?" 미도리는 대답 했다 비가 내리는 옥상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애완 동물용품점 매장에도 점원의 모습은 없고, 매점도, 간이 유원지의 입장권 판매 소도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비에 흠뻑 젖은 록 마와 벤치와 포장마차 사이를 산책했다 도쿄의 한복판에 이토록 인 기척이 없는 황량한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미도리가 망원 경을 보고 싶다고 하기에, 나는 동전을 넣어주고. 그녀가 망원경을 보고 있는 동안 우산을 씌워줬다. 옥상 구석 쪽의 지붕이 달린 게임 코너에는, 어린이용 게임기가 몇 대 놓여 있었다. 미도리와 나는 그것의 발판 같은 곳에 나란히 앉 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지만 그때는 나도 몹시 지쳐서. 머릿속이 멍해 있었어. 그래서 모든 걸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던 거야 하지만 미도리와 만나지 못하게 되자 깨달았지 . 미도리가 있어준 덕분에 이 제까지 그럭저럭 버텨온 것이라고. 미도리가 없으니까, 정말로 괴롭 고 외롭더군 " "하지만 당신은 모르시죠, 와타나베 씨? 당신과 만나지 못해서 제가 최근 2개월간 얼마나 괴롭고 외로웠는지?" '그런 건 몰랐어 . 미도리는 나 때문에 화가 나서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거든 "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바보 같이-요? 만나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요? 저는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저는 그렇게 쉽사리 남을 좋 아하게 되거나, 싫어하게 되는 타입이 아니에요. 그런 것도 모르세 요?" "그야 물론 그렇겠지 "정말로 화가 치밀더라구요. 백 번 정도는 걷어차주고 싶을 정도 로. 사실 그렇잖아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당신은 멍하니 다른 여자 생각만 하고 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요. 화가 치미는 게 당연하잖아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저는 당신과 잠시 떨어져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여러 가지 일들을 확 실히 해두기 위해서라도 "여러 가지 일들이 라니?" "저와 당신의 관계예요 요컨대 저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점점 즐거워졌거든요, 그이와 함께 있을 때보다도 그런 건, 아무래도 부 자연스럽고 곤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물론 저는 그이를 좋아 해요, 그야 다소는 제멋대로이고 편협하고 파시스트이지만 좋은 점 도 많이 있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좋아하게 된 사람이고. 하지만 당 신은 어쩐지 특별한 느낌이 들어요, 저에게는 말이죠. 함께 있으면 정말 잘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당신을 신뢰하고 있고, 좋아 하니까. 놓치고 싶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제 자신이 점점 혼란에 빠 져든 거예요. 그래서 그이에게 가서 솔직하게 상담했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그이는 앞으로 당신과 만나지 말라는 거예요. 만 약 당신과 만날 작정이면 나와 헤어지자고.'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그이와 헤어졌어요, 깨끗이." 미도리는 말보로를 입에 물고, 손 으로 가리며 성냥불을 붙여서, 연기를 들이마셨다. "왜?" "왜?" 미도리는 소리를 질렀다. "당신 머리가 이상하지 않은가 요? 영어의 가정법을 이해하고, 수열을 이해하고, 마르크스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왜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나요? 왜 그런 바보 같 은 질문을 하는 거예요? 왜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하게끔 하는 거예 요? 그이보다 당신을 좋아하니까 헤어진 게 당연하잖아요? 저로서 도 좀더 핸섬한 남자를 사귀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을 좋아하게 됐으니까." 나는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목에 무엇인가 걸려 있는 듯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미도리는 물이 고여 있는 곳에 담배를 내던졌다 "이봐요,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시죠. 서글퍼 지니까. 괜찮아요, 당신에게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니까 특별한 기대는 하 지 않겠어요. 하지만 안아주는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요'! 저로서도 두 달 동안 정말로 괴로웠으니까." 우리는 게임 코너 뒤쪽에서 우산을 쓴 채로 포옹했다. 몸을 밀착 시키고, 서로의 입술을 빨았다. 그녀의 머리에서도. 진재킷에서도 비 냄새가 났다 그녀의 몸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졌 다. 상의를 통해서 그녀의 유방의 감촉을 뚜렷이 느 낄 수 있었다. 나 는 정말로 오랜만에 살아 있는 인간과 몸을 마주 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 번 당신과 만났던 날 밤에 그이와 만나서 이야기했어요. 그 리고 헤어진 거예요." 미도리는 말했다 "나는 정말로 미도리가 좋아. 진심으로 좋아해. 두 번 다시 놓치 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지금은 전혀 꼼짝도 할 수 없 거 든." "그 여자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럼, 말씀해주세요. 그 여자와 잔 적 있나요?" "1년 전에 단 한 번." '그 이후로 만나지 못했나요?" "두 번 만났지 하지만 관계는 하지 않았어 ." "그건 어째서인가요? 그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나요?" "나로서는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군.사정이 아주 복잡해. 여러 가지 문제가 뒤얽힌 채로,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으니까, 사실이 어 떤지 나도 점점 알 수 없게 된 거야 나로서도 그녀로서도. 내가 알 고 있는 건, 그것이 일종의 인간으로서의 책임이라는 사실뿐이지 그리고 나는 그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어 .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느끼고 있지. 설령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봐요, 저는 살아 있는, 피가 통하는 여자예요 " 미도리는 내 목 에 팔을 대며 말했다. "그리고 저는 당신 품에 안겨서,당신을 좋아 한다고 고백했어요. 당신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저 는 다소 엉뚱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정직하고 좋은 여자이고, 일도 잘하고. 얼굴도 제법 예쁘고. 젖가슴 모양도 좋고,요리도 잘하고, 아빠의 유산도 신탁 예금에 넣어 두었으니까, 파격적인 값에 내놓은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당신이 사지 않으면 머지않아 저는 다른 곳으로 팔려갈 거예요." "시간이 필요해. 생각하고, 정리하고, 판단할 시간이 필요해 미 안하게는 생각하지만, 지금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 미도리는 내 품에서 떨어져 나와, 생긋 웃으며 내 얼굴을 보았다. "좋아요, 기다릴게요. 당신을 믿으니까. 하지만 저를 선택할 때에는 저만을 선택하세요. 그리고 저를 안을 때에는 저만을 생각하세요 제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아시 겠어요?" "잘 알아." "그리고 저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지만. 상처만은 주지 마세요 저는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충분히 상처를 받으며 지내왔으니까.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요. 행복해 지고 싶어요 " 나는 그녀의 몸을 껴안고 키스했다 '쓸데없이 우산을 들고 있지 말고, 양손으로 더 꼭 껴안아주세 요." 미도리는 말했다 '우산을 쓰지 않으면 온통 비에 젖을 거야."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요.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당신에게 안 기고 싶어요. 저는 두 달 동안 참으며 이 순간을 기다렸어요." 나는 우산을 발치에 두고. 빗속에서 미도리를 꼭 껴안았다. 고속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둔탁할 하이어 소리만이 마치 안개처럼 우리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집요하게 내리는 비는 우리의 머리를 흠뻑 적시고. 눈물은- 뺨으로 흘러내려, 그녀의 진 재킷과 나의 노란색 나일론 윈드 브레이커를 어두을 색으로 물들였 다 "이제 그만 지붕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겠어?" 나는- 말했다. '우리 집에 오세요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이대로 있다가는감기 걸리 겠어요." "정말 그래 " "우리는 마치 헤엄쳐서 강을 건너온 것 같군요 " 미도리가 웃으면 서 말했다 "기분이 상쾌해요." 우리는 타월 매장에서 커다란 타월을 사 갖고. 번갈아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를 말렸다 그리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묘가다니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까지 갔다. 미도리는 즉각 나에게 샤워를 하도록 하 고. 자신도 샤워를 했다. 그리고 내 옷이 마를 때까지 배스 로브를 빌려주고, 자신은 폴로 셔츠와 스커트로 갈아입었다 우리는 식탁에서 커피를 마셨다. "당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 좀 해보세요." 미도리가 말했다. "나의 어떤 이야기" '글쎄요, 싫어하는 게 뭐예요?'" "닭고기와 성병과 말 닦은 이발사가 싫어 "그 외에는?" '4월의 고독한 밤과 레이스가 달린 전화기 커버를 싫어하지. "그 외에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 그외에는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군 "저의 그이는- 과거의 그이는- 싫어하는 게 아주 많았어요 제가 아주 짧은 스커트를 입는 거라든가, 담배 피우는 거라든가. 금 방 취해버리는 거라든가 외설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라든가, 그이 친구의 욕을 하는 지라든가 그러니까 만일 저에 관해서 그런 종류 의 싫어하는 점이 있다면 서슴없이 이야기해주세요. 고쳐야 할 점은 제대로 고쳐야 하니까 " "별로 없어."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아 무것도 없어 ." "정 말-?" "미도리가 입은 옷은 무엇이건 마음에 들고, 미도리가 하는 행동 이나 이야기도 걸음걸이도 술버릇도, 전부 마음에 들어 ." "정말 이대로 좋은가요?" "어떻게 바뀌어야 좋은 것인지를 모르니까, 이대로가 좋아." "얼마나 저를 좋아하세요?" 미도리가 물었다 "이 세상의 정글에 사는 호랑이들이 모두 녹아서 버터가 되어버 릴 정도로 좋아해." "흐응" 미도리는 그런 대로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다시 한 번 안아주시 겠어요?" 미도리와 나는 그녀의 침대에서 서로 포옹을 했다 낙숫물 소리 를 들으며 이불속에서 우리는 입술을 마주 댔다 그리고 천지 창조 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삶은 달걀을 얼마나 좋아하느냐 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대화를 나누었다. "비오는 날이면 개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미도리 가 물었다. "글쎄. 집을 청소하거나 저장품을 정리하거나 하지 않을까. 개미 는 일을 열심히 하니까."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데 어째서 개미는 진화하지 못하고 옛날부 터 개미인 채로 있나요?" "모르겠군. 하지만 몸의 구조가 진화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 아 닐까? 원숭이에 비해서.' "당신은 의외로 모르는 게 많군요." 미도리가 말했다. "와타나베 씨는 세상 일을 대부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은 넓으니까." "산은 높고, 바다는 깊어요." 내 말을 받아서 부끄럭게 말한 미도리가 배스 로브 속으로 손을 넣더니 발기해 있는 페니스를 손으로 잡 았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와타나베 씨, 죄송하지만 정말로 농담 이 아니라, 이렇게 크고 단단한 건 들어가지 않아요. 안 되겠어요." "농담이 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미도리는 콕콕 웃으며 말했다. "괸찮아요. 안심하 세요. 이 정도라면 무난히 들어갈 테니까 자세히 봐도 되 겠어요?" "마음대로 해 " 미도리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시 동안 내 페니스를 이리저리 주물렀다. 피부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고환의 무게를 측 정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이불에서 머리를 내밀어 후우 하고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당신의 이거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공연한소리 가 아니라." "고마워." 나는 쑨순히 답례를 했다. "하지만 와타나베 씨 , 저와 관계하고 싶지는 않죠? 여러 가지 문 제가 정리될 때까지는 " "하고 싶지 않을 리가 있나. 미 칠 정도로 하고 싶지. 하지만 할 수 가 없어 ." "의지력이 대단하군요. 만약 제가당신이라면 해버릴 텐데.그리 고는 해버린 후에 생각할 텐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농담이에요." 미도리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도 하지 않으리 라고 생각해요 만일 제가 당신이라면, 역시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 해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그런 점을 좋아해요. 정말로 정말로 좋아 해요." "얼마나 좋아하지?" 나는 그렇게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 았다. 그리고 대답하는 대신에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켜 내 젖 꼭지에 입술을 맞추고는 페니스를 낀 손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 다. 처음에 내가 느낀 그것은 나오코의 손놀림과는 전혀 다르구나 하 는 생각이었다. 양쪽 다 부드럽고 좋았지만. 무엇인가가 달라서, 전 혀 별개의 체험처런 느껴졌다. "와타나베 씨, 다른 여자 생각을 하고 있죠?" "아니야." 나는 거짓말을 했다. "정 말?" "정말이야 " "이러고 있을 때 다른 여자 생각을 하면 싫어요." "생각할 리가 있나." "제 가슴이나 그곳을 만지고 싶으세요" "만지고 싶지만, 아직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하면 자극이 너무 강하니까" 미도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며 팬티를 벗어 서 내 페니스 끝에 데었다. "여기에 사정해도 좋아요.' "하지만 팬티가 더럽혀지잖아." '눈물이 날 것 같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미도리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깨끗이 빨면 돼요. 사양말고 마음껏 사정 하세요. 마음에 걸리면 새 것을 사서 선물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 그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정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 "설마 " "그럼 사정하세요. 괜찮아요, 어서." 내가 사정을 끝내자, 그녀는 내 정액을 점점했다. "정말 많이도 나왔네요." 그녀는 감탄한 듯이 말했다 "너무 많은가?" "괜찮아요.바보 같으니 마음껏 사정해도 돼요." 미도리는 웃으 면서 나에게 키스했다. 저녁 무렵이 되자 그녀는 근처에서 장을 봐다가, 식사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저녁 식탁에서 맥주를 마시며 튀김을 먹고. 완두콩 밥을 먹었다. "많이 먹고 정액을 잔뜩 만드세요." 미도리는 말했다. "그러면 제 가 상냥하게 처리해드릴 테니까.' "고마워." "저는.여러 가지 테크닉을 알고 있어요. 책방을 할때 여성 잡지 에서 그런 걸 배웠거든요. 임신중의 여자들이 섹스를 할수 없으니 까,그 기간에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 않도록 갖가지 테크닉으로 처 리해주는 방법이 특집으로 나왔었어요. 정말로 갖가지 방법이 있어 요. 기대하세요 "기대가 되는군." 미도리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나는 역에서 산 석 간 신문을 펼쳤지만 전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읽어 봤자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뜻도 알 수 없는 신문의 지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도대체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나를 둘 러싼 모든 것들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때로는 내 주위 의 세계가 이따금 맥박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나는 전혀 후 회하지 않았으며, 만일 다시 한번 오늘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역시 똑같은 행동을 하리라고 확신했다. 역시 비 내리는 옥상에서 미도리 를 꼭 껴안고, 비에 젖어서 , 그녀의 침대 속에서 그녀의 손에 의해서 사정을 하리라.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이 없었다. 나는 미도 리를 좋아했고, 그녀가 내 곁으로 돌아온 것이 정말로 기뻤다 그녀 와 함께라면 둘이서 잘 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미도리는 그녀 자신이 말했듯이 피가 통하는 살아 있는 여자였고, 그 따뜻한 몸을 내 팔에 내맡기고 있었다. 나로서는 미도리의 몸을 벌려 놓고, 그 따뜻한 속에 내 몸을 담그고 싶다는 격렬한 욕망을 억 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 페니스를 쥔 채로 천천히 움직이는 그 녀의 손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원했고, 그녀도 그것을 원했고 우리는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누가 그것을 멈 추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나는 미도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리고 그 사실을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단지 그 결론을 오랫동안 회피하고 있었을 뿐이다. 문제는 내가 나오코에게 그러한 상황의 전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다른 시기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오코에게 내 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나오코 역시 사랑하고 있었다. 과거의 어느 과정에서 기이하게 뒤틀려버린 사랑이기는 하지만, 나는 틀림없이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었고, 나의 내부에는 나오코를 위하여 장만된 넓은 장소가 손도 대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솔직한 편지를 레이코에게 쓰는 일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툇마루에 앉아서, 굵은 빗줄기가 내리치는 밤의 정원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몇 가지 문장을 정리해보았다 그리고는 책상 앞에 앉아서 편지를 썼다 우 선 '레이코 씨에게 이런 편지를 써야만 한다는 사실이 저로서는 견 딜 수 없이 괴롭습니라고 썼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미도리와의 관계를 대충설명한다음 오늘두사람사이에 있었던 일을설명했 다. 저는 나오코를 사랑해왔고, 지금도 역시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저와 미도리 사이에 존재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결 정적인 힘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대로 마구 그쪽으로 이끌려갈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제가 나오코에게서 느끼는 그것은 몹시 조용하고 부드럽고 맑은 애정입니다만, 미도리 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낍니다 그것은 일어서 서 걷고. 호흡하고, 고동치는 듯한 감정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저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몹시 혼란 되어 있습니다 결코 변명을 할 생각은 없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고,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 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왔습니다. 그런 데 어째서 이런 미궁 같은 곳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저로서도 전 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레이코 씨밖에 상당할 상대가 없습니다. 나는 속달 우표를 붙여. 그날 밤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레이코에게서 답장이 온 그것은 닷새 후였다. 전략. 우선 좋은 소식 나오코는 생각보다 빨리 회복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도 한 번 전화를 했습니다만, 말투도 상당히 또렷해 졌습니다.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 다. 다음은 당신에 관해서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그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사랑한다는 그것은 멋진 일이고, 그 애 정이 성실한 것이라면 아무도 미궁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자신을 가지세요 저의 충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선 첫째로 당신이 미도리 씨 에게 강하게 이끌린다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그것은 당연한 것 입니다. 그 사랑은 잘 이루어질 수도 있고.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 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애당-초 그런 겁니다. 사랑에 빠졌다면 그곳에 몸을 맡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겠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도 성실함의 한 형태입니다- 두번째로 당신이 미도리 씨와 섹스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당신 자신의 문제이니까, 저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미 도리 씨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납득이 가는 결론을 내려주 세요 세번째로 나오코에게는 그 이야기를 하지 말아주세요. 만약 그 녀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여야만 할 상황이라면, 그때는 저와 둘이서 좋은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해요. 그러니까 지금은 나오 코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합시다. 그 점은 저에게 맡겨주세 요 네번째로 당신은 이제까지 나오코에게 많은 힘이 되어왔으니 까, 설령 당신이 그녀에 대해서 연인으로서의 감정을 지니지 않 게 되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나오코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얼마 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을 그토록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우리들(우리들이란 말은 정상적인 사람과 정상적이 아닌 사람을 모두 합친 총칭입니다)은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 는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자로 길이를 재고 분도기로 각도를 재 거나 해서 은행 예금처럼 고지식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렇지 않은가요? 저의 개인적인 감정을 말씀 드리자면, 미도리라는 아가씨는 상 당히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그녀에게 이끌리고 있 다는 그것은 편지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오코에게도 이끌리고 있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 그것은 전혀 죄악 이 아닙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자주 있는 일입니다. 쾌청한 날씨 에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고는. 하늘도 아름답고 호수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그렇게 고민하지 마세 요. 가만 내버려두어도 모든 그것은 흘러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고, 인간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상처를 입을 때는 상처 를 입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잘난 척하는 것 같습니다만, 당신도 그러한 인생의 법칙을 배워도 좋을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이따금 지나치게 인생을 자기 스타일에 맞추려 드는 것 같습니 다.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몸을 맡기세요. 저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정말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당신도 많이많이 행복해지세요. 행복해지도록 노력하세요. 물론 저는 당신과 나오코가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한 점을 유감 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어느 쪽이 좋았다고 누가 단 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그 무엇에도 구애되지 말 고, 행복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 기회를 잡아서 행복해지 세요. 저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기회는 인생에 서 두 번이나 세 번밖에 없고, 그것을 놓치면 평생 후회합니다. 저는 매일같이 혼자서 기타를 치고 있습니다. 이 짓도 어쩐지 따분하군요.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도 싫습니다. 언젠가는 당신과 나오코가 있는 방에서 포포를 치고 싶습니다 그럼 이만 덕으떠 기타 6월 17일 "IA r) ffTo 핀 나오코가 죽은 후에도, 레이코는 나에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내 어 , 그것은 내 탓도. 누구의 탓도 아니며, 내리는 비처럼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편지에 대 해서 답장을 쓰지 않았다 무엇이라 말해야 좋은가? 그리고 그런 문 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오코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8월말에 조촐한 장례가 끝나자, 나는 도쿄로 돌아와 집주인에게 당분간 집을 비울 테니까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아 르바이트하는 가게로 가서 죄송하지만 당분간 올 수 없게 되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미도리에 게는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미안하 게 생각하지만 좀더 기다려달라는 내용의 짧은 편지를 썼다 그리고 는 사흘 동안 매일 영화관을 돌며 아침부터 밤까지 영화를 보았다. 도쿄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모두 보고 나자, 배낭에 짐을 꾸리고, 은 행 예금을 전부 찾아, 신주쿠 역으로 가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급행 열차를 탔다. 도대체 어디를 어떤 식으로 돌아다녔는지, 나는 전혀 기억을 하 지 못한다 풍경이나 냄새나 소리는 그런 대로 기억하고 있지만, 지 역은 훤히 기억해낼 수가 없다. 순번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한 역 에서 다음 역으로 열차나 버스로. 혹은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이동했고, 띤터떠 역이며 공익이며 강변히며 바닷가며 그 외에도 잠 을 잘 만한 곳이 있으면 아무 데나 침낭을 베고 잤다 파출소 신세를 진 적도 있고. 묘지 옆에서 잔 적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푹 잘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 데라도 좋았다. 나는 걷다 가 지친 몸으로 침낭에 들어가 싸구려 위스키를 꿀걱꿀꺽 마시고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인심이 좋은 마을에 가면 사람들은 먹을 것 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모기향을 빌려주기도 했다. 인심이 고약한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경찰을 불러다가 나를 공익에서 내쫓았다. 하 지만 그런 일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다만 낙선 곳에서 마음껏 자고 싶었을 뿐이었다 돈이 떨어지면 사나흘 육체 노동을 해서 당장 필요한 돈을 마련 했다 어디에 가건 일거리는 있었다. 나는 정처 없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차례대로 이동했다 이 넓은 세상은, 기묘한 사람이나 기괴 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한 번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견딜 수 없이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로군요, 강의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됐어요." 미도리는 말 했다. "리포트를 제출해야 하는 것도 상당히 많아요.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당신 벌써 몇주일이나 소식 불통이었어요.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세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학교로도 돌아갈 수 없어 아직 .' "하실 말씀은 그것뿐이세요?" "그러니까 지금은 아무말도 할 수 없어 11월이 되면 미도리는 잠자코 전화를 뚝 끊었다. 나는 그대로 여행을 계속했다. 이따금 싸구려 여인숙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수염을 뽑았다 거울을 보니 정말로 한심한 몰골이었 다 방금 어두운 구멍 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처런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틀림없이 내 얼굴이었다 그 무렵 내가 걸었던 곳은 산인의 해안이었다. 돗토리 현이 나 효고 현 언저리였다. 해안을 따라서 걷기는 수월했다 모래사장 의 어디엔가는 반드시 기분 좋게 잠잘수 있는 장소가 있었기 때문 이다. 땔감을 주워 모아 불을 피우고. 생선 가게에서 사온 마른 생선 을 구워 먹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위스키를 마시고, 파도 소리에 귀 를 기울이며 나오코를 생각했다. 그녀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나로서는 여전히 그 사실을 납 득할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관에 몸을 막는 소리조차 들었는데도, 나는 그녀가 무로 돌아가 버렸다는 사실에 순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내 페니스를 살짝 입으로 감쌌을 때.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아랫배 로 흘러내리던 그 광경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온 기와 숨결과. 안타까운 사정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 을 마치 요전의 일처런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있었다. 마치 나오 코가 내 곁에 있어서 . 손을 내밀면 그 몸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곁에 없었다. 그녀의 육체는 이미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면 나오코의 갖가지 모습을 떠올렸다.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내부에는 나오코의 추억 이 너무나도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추억들은 조금만 틈 이라도 있으면 그 틈을 비 집고 줄줄이 뛰 쳐나왔다 나로서는 도저히 그러한 추억의 분출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가 비오는 날 아침에 노란 비옷을 입고서 새장을 청소 하기도 하고, 모이 봉지를 나르기도 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반들이 그려진 생일 케이크와. 그날 밤 내 셔츠를 적시던 나오코의 눈물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렇다. 그날 밤에 비가 내렸다. 더욱이 먼 그녀는 카멜 오버코트를 입고 내 옆에 서서 걸었다 그녀는 언제나 머리 핀을 꽃고 있었고, 언제나 그 머리핀을 손으로 만졌다. 그리고 언제 나 투명한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청샌 가운을 입고 소파 위 에 앉아서 두팔을 구부려 그 위에 턱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그녀의 마음은 밀물처럼 잇딸아 나에게로 밀려와 내 몸을 기묘한 장소로 떠밀고 갔다. 기묘한 장소에서. 나는 죽은 사람과 함께 생활했다. 그곳에는 나오코가 살아 있어서. 나와 이야 기를 나누거나, 혹은 서로 껴안을 수 있었다 그 장소에서는 죽음이 란 삶을 매듭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인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나오코는 죽음을 내포한 채로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 했다 '괜찮아요, 와타나베 씨, 이건 단순한 죽음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그곳에서는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 죽음은 죽음이고, 나오코는 나오코였기 때문이다 보세요. 괜찮잖아요, 저는 여기에 있잖아요? 하고 나오코는 수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평소의 자그만몸짓이 내 마음을 달래주고, 치유시 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 다 이것이 비록 죽음이라면 죽음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구나 하고. 그래요, 죽는 건 그다지 대수로운 게 아니에요, 하고 나오코는 말했 다. 죽응이란 단순한 죽음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저는 이곳에 있으 면 아주 편안해요. 어두운 과도 소리 사이로 나오코는 그렇게 말했 다 그러나 이윽고 썰물이 되어, 나는 홀로 모래사장에 남게 되었다. 나는 무력감 속에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슬픔의 깊은 어둠에 둘 러싸여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곧장 혼자 울었다. 운다기보다는 땀 처럼 저절로 눈물이 흘러 뚝뚝 떨어졌다. 기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써 받아들였다. 혹은 받아들인 것으로 여겼다 . 그것 은 이러한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에 내재 해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진실이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다. 허나 그것은 우리들이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불 과했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가르쳐준 그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어떠한 진리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해소시켜주 지 못한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인함도, 어떠 한 다정함도. 그 슬픔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 우리들은 슬픔을 고스란히 맛본 이후에야,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 뿐이 며 그리하여 배운 것조차도,차후에 다가오는 예기치 못한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는 오직 혼자서 그날 밤의 과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 매일같이 그런 생각 에 잠겨 있었다 위스키를 몇 컵이나 비우고,빵을 씹고,물통의 물 을 마시고. 머리에 온통 도래를 붇힌 채 초가을의 해안을 배낭을 짊 어진 채 서쪽으로 마냥 걸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느 날 저녁. 내가 폐실 그늘에서 침낭에 몸 을 감싼 채 눈물을 흘리고 있노라니 젊은 어부가 다가와서 담배를 권했다. 나는 그 담배를 받아들고 10여 개월 만에 피웠다 어째서 울고 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고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너무나 슬퍼서 여행을 계속 하고 있노라고. 그는 진심으로 동정 해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더니 한 되짜리 술병과 잔을 두 개 갖고 왔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모래사장에서 우리는 함께 술을 마셨다. 나도 열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노라고 그 어부는 말했다. 몸도 별로 좋 지 않은데 아침부터 밤까지 일만 하다가, 몸을 망쳐서 죽었다고 그 는 말했다 나는 컵으로 술을 마시며 멍하니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적당히 대답을 했다. 그것은 아주 먼 세계의 이야기처런 느껴졌다. 그것이 도대체 어땠다는 말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 사내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당신의 어머니가 도대체 뭐란 말이야? 나는 나오코를 잃었다구! 그토록 아름다운 육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단 말이야! 그런데도 어째서 당신은 당신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하지만 그러한 분노는 즉각 사라져버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끝 없이 계속되는 어부의 이야기를 멍하니 흘려듣고 있었다 이윽고 그 는 나에게 식사는 했느냐고 물었다. 먹지는 않았지만, 배낭 안에 빵 과 치즈와 토마토와 초콜릿이 들어 있다고 대답했다 낮에는 무엇을 먹었냐고 그가 묻기에. 빵과 치즈와 초콜릿이라고 대답했다. 그러 자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말리려 했지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잽싸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컵으로 술을 마셨다 모래사장에는 뱃 놀이를 한 뒤의 쓰레기들이 잔뜩 널려져 있었고, 파도는 마치 미 쳐 날뛰듯이 포효하며 밀려와서는 모래사장에서 부서졌다. 말라빠 진 개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더니 무엇인가 먹을 게 없느냐는 듯이 내가 피워 놓은 모닥불 주위를 어슬렁거렸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사 실을 알아-차리자 포기하고는 사라졌다. 30분 정도 지나자 아까의 젊은 어부가 초밥 도시락 두 개와 새로 이 한 되짜리 술병을 들고 돌아왔다. 이거 드시오, 하고 그는 말했 다 아래쪽은 김초밥과 유부초밥이니까 내일 먹으면 될 거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술병의 술을 자신의 잔에 따르고, 네 잔에도 따랐 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충분히 2인분은 되어 보이는 초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둘이서 술을 마셨다. 더이상 마실 수 없을 때까 지 마-신 후 그는 자기 집으로 와서 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난 이곳 에서 혼자 자는 편이 좋다고 말하자, 더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리고 헤어질 때 호주머니에서 네 겹으로 접은 1000 엔짜리를 꺼내어 네 셔 츠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 이걸로 무엇인가 영양가 있는 걸 사 드시 오. 당신 얼굴이 너무 안 좋으니까, 하고 말했다. 이토록 친절하게 대접을 받았는데, 돈까지 받을수늣 없다면서 거절했지만 그는 돈을 돌려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건 돈이 아니라 내 기분이오, 그러니까 쓸떼없는 생각 말고 갖고 가시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돈을 받았다 어부가 가버린 뒤, 문극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같이 잤던 여자 아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자신이이 그녀에게 얼마-나 심하게 대했 는가를 떠올리고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워졌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상처를 받았는가는 거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그녀를 제대로 머리에 떠올린 적 도 없었다. 그녀는 무척 자상한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 러한 자상함을 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의 되돌아보지도 않았 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를 용서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속이 몹시 울렁거려서 폐전 옆에다 토했다 과음한 탓으로 머리 가 아팠고, 어부에게 거짓말을 하여 돈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불쾌하 게 여겨졌다. 이젠 도쿄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 제까지고 영원히 이런 짓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나는 침낭을 접어 서 배낭속에 넣고는. 배낭을 짊어지고 전철역까지 걸어가, 이제부 터 도쿄로 돌아가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역원에게 물어 보 았다. 그는 시간표를 살펴보더니, 야간열차를 잘 갈아타면 아침에는 오사카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그곳에서 신 간선으로 갈아타면 된다 고 가르쳐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젊은 어부에게서 받은 1천 엔으로 도쿄까지 가는 표를 샀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신문 을 사서 날짜를 보았다 1970년 10월 2일이었다. 꼭 1개월간 여행을 한 셈이었다. 어떻게든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 되 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1개월간의 여행은 내 기분을 전환시켜주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 라, 나오코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도 완화시켜주지 못했다. 나는 1개 월 보다 그다지 변함없는 상태로 도쿄로 돌아왔다. 미도리에게 전화 를 걸 수조차 없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모든 게 끝났어 우리 둘이서 행복하게 지내자 그렇게 말하면 될까? 물론 나로서는 그 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말을 하건, 어떤 변명을 하건, 결국에 이야기해야 할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나오코는 죽었 고, 미도리는 남아 있다. 나오코는 하얀 재가 되었고, 미도리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남아 있다. 나는 내 자신이 불결함으로 가득한 인간처럼 여겨졌다. 도쿄에 돌아와서도, 혼자 방안에 틀어박힌 채 며칠인가를 보냈다. 내 기억 의 대부분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었 다 내가 나오코를 위해서 비워 둔 방에는 셔터가 내려지고, 가구에 는 하얀 천이 덮이고 창문틀에는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는 하 루의 대부분을 그런 방 속에서 지냈다. 그리고 나는 기즈키를 생각 했다 어이 기즈키, 너는 결국 나오코를 손에 넣었구나, 하고 생각했 다. 괜찮아. 그녀는 애당초 네 것이었으니까. 결국 그곳이 그녀가 가 야 할 장소였겠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 , 이 불완전한 인간들의 세상 에서, 나는 나오포에 게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나오코 와 둘이서 어떻게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노력했다구 하지만 됐 어 . 기즈키. 나오코는 너에게 줄게. 나오코가 너를 택했으니까 그녀 자신의 마음처럼 어두운 숲 속에서 나오코는 목을 매었지. 어이 기 즈키, 너는 옛날에 나의 일부를 죽은 사람들의 세계로 끌어 들였어. 그리고 지금, 나오코가 나의 일부를 죽은 사람들의 세계로 끌어들이 는 거야. 이따금 내가 박물관 관리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드는군 아무 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텅 빈 박물관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거야 도쿄에 돌아온 지 나흘째 되던 날 레이코에게서 편지가 왔다. 봉 투에는속달우표가붙어 있었다 편지 내용은아주간단했다 당신 과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서 걱정이 된다. 전화를 해달라. 아침 아홉 시나 밤 아홉 시에 이 번호로 걸어달라. 나는 밤 아홉 시에 그 번호를 돌려보았다. 레이코가 바로 받았다. "별일 없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내일 모레쯤 당신을 만나러 가도 좋을까요'!" "만나러 오다니, 도쿄로 오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그래요. 당신과 둘이서 한번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그곳을 나오는 건가요, 레이코 씨는 "나가지 않으면 만나러 갈 수가 없잖아요' ? 이제 슬슬 나갈 때가 됐어요. 이제 8년이나 있었으니까요. 더이상 있다가는 썩어버릴 거 에요." 나는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일 모레 신 간선으로 세 시 0분에 도쿄 역에 토착할 테니까 마 중 나와주겠어 요? 내 얼굴은 아직 기억하고 있나요? 아니면 나오코 가 죽었으니 까 나 같은 건 흥미가 없어졌나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레 세 시 경에 도쿄 역으로 마 중 나가겠습니다. " "금방 알아 볼거예요. 기타를 든 중년 여자는 그리 흔치 않으니까." 도쿄 역에서 나는 금방 레이코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남성 용 트위드 재킷에 흰 바지를 입고 빨간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작은 머리는 여 전히 군데군데 솟아 있었고, 오른손에 는 가죽으로 된 갈색 여행 가방을, 왼손에는 검은색 기타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얼굴에 온통 주름을 지으며 웃었다. 레이코의 얼굴을 보자 나도 자연히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녀의 여행 가방을 들고 중 앙선 승차장까지 함께 걸었다. "와타나베 씨, 언제부터 얼굴이 그렇게 됐어요? 아니면 도쿄에서 최근에 그런 얼굴이 유행하나요?" "잠시 여행을 한 탓입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까" 나는 대답했다. "신간선을 타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너무하더군요. 창문이 열리지 않더라구요.도중에 도시락을 사 려고 했는데 혼만 났어요." "열차 안에서 무언가 팔러 오지 않던가요?" '그 맛없고 비싼 샌드위치 말인가요? 그런 건 배고파 죽어 가는 말도 먹지 않을 거예요. 난, 호텔바에서 도미밥을 즐겨 사 먹었거든 요 "그런 소릴 하다가는 노인 취급을 당할 겁니다. ' "괜찮아요, 나는 노인인걸 뭐." 레이코는 말했다 기치조지로 가는 전차 안에서 ,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창 밖의 무 사시도 풍경을 계속 바라보았다. '8년 전에 비해 풍경이 많이 바뀌었나요?" "와타나베 씨 .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모르죠?" "모릅니다" "너무나 겁이 나서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에요.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혼자서 이런 곳애 내버려 지니까." 레이코는 말했다 "하지만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다'는 표현은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 으세요?" 나는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걱정 마세요 레이코 씨는 이제 전혀 걱정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곳을 나왔으니까요.' '내가 그곳을 나올 수 있었던 그것은 내 힘만이 아니에요." 레이코 는 말했다 "내가 그곳을 나올 수 있었던 그것은, 나오코와 당신 덕분 이에요. 나오코도 없는 그곳에서 혼자 남아 버틸 수도 없고, 한 번 도쿄로 올라와서 당신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어요. 그 래서 그곳을 나온 거예요. 만일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나는 평생 그 곳에 있었을지도 몰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레이코씨는?" "아사히가와로 갈 거에요. 아사히가와라구요! 음대 시절에 아주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아사히가와에서 음악 교실을 하고 있는데. 함 께 일하지 않겠냐고 2,3년 전부터 권해 왔어요. 하지만 추운 곳에는 가기가 싫어서 거절했었어요. 사실 그렇잖아요, 간신히 자유의 몸이 되자, 행선지가 아사히가와라면 좀 흥이 깨 지거든요. 그곳은 형편없 는 촌동네 라던 데 ." "그렇지 않습니다. " 나는 웃었다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재미있는 분위기에 " " 그래요?" "네. 도쿄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분명히.' "별달리 갈 곳도 없고, 집은 이미 구했으니까." 그녀는 말했다 "와타나베 씨 . 언제 한 번 아사히가와에 놀러 오지 않겠어요?" "물론 가겠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가실 겁니까? 가시기 전에 잠 시 도쿄에 계실 거죠?" "네. 이틀이나 사흘 가량 푹 쉬다-가 가고 싶어요. 당신 집에 신세 를 져도 좋을까요' ? 폐는 끼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좋습니다. 저는 침낭에 들어가 벽장 속에서 잘 테니까요." "미안하군요" "괜찮습니다 굉 장히 넓은 벽장이거든요." 레이코는 다리 사이에 둔 기타 케이스를 두드리며 약지를 맞추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몸을 적응시킬 필요가 있을 거예요. 아사히가 와로 가기 전에. 아직 바깥 세계가 몹시 낯설게 느껴지니까. 모르는 것도 많고. 긴장도 되고. 그런 것들을 좀 도와주겠어요? 난 당신밖 에 의지 할 사람이 없으니까.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혹시. 당신에게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요?" "저에게 무슨 방해를 하신다는 겁니까'. " 레이코는 내 얼굴을 보고, 입가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치조지에서 전차를 내려. 버스를 타고 내가사는 곳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쿄 거리의 모습이 바 뀌었다는 것과. 그녀의 온데 시절 이야기와, 내가 아사히가와에 갔 었던 이야기 등을 간헐적으로 했을 뿐이었다, 나오코에 관한 이야기 는 전혀 하지 않았다 레이코를 만나는 그것은 10개월 만이었다. 그녀 와 함께 걷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위안을 느꼈 다 그리고 예전에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 올렸다 생각해보면 나오코와 둘이서 도쿄 거리를 거닐던 시절. 나 는 이것과 똑같은느낌을 가졌었다. 예전에 나오코와 내가 기즈키라 는 죽은 사람을 공유했던 것처럼. 지금 레이코와 나는 나오코라는 죽은 사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갑자 기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레이코는 잠시 혼자서 이야기를 했 지만. 내가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그녀도 입 을 다물었다 우리는 잠자코 버스를 타고 내가 사는 곳까지 왔다. 초가을이었다. 마치 1년 전에 나오코를 방문하러 교토에 갔을 때와 마 찬가지로 청명한 오후였다 구름은 뼈처럼 희고 가늘었고, 하늘은 끝없이 높았다. 다시 가을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 넴새 와, 햇빛의 색과. 풀숲에 핀 작은 꽃과. 귓전에 들리는 소리들이, 나 에게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계절이 바뀐 때마다 죽은 사람과 나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기즈키는 열일곱 그대로이고, 나 오코는 스물한 살 그대로이다 영원히 '이런 곳에 오면 마음이 놓여요." 버스에서 내리자. 주위를 둘러 보며 레이코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니까요.' 내가 뒷문을 통해서 정원으로 들어가 별채로 안내하자, 레이코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굉장히 좋은 곳이로군요." 그녀는 말했다. "이거 전부 당신이 만 들었나요? 선반이며 책상이며?" '그럭습니다." 나는 물을 끓여 차를 타면서 말했다 "솜씨가 제법인데요, 와타나베 씨 방도 아주 깨끗하고. "돌격대 덕분이지요. 그 친구가 저를 청결한 것을 좋아하게끔 만 들어주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집주인이 좋아하더군요. 깨끗하게 사용해준다며 " '아, 참 집주인에게 인사하고 올게요." 레이코는 말했다 "집주 인은 정원 건너편에 살고 있죠?" "인사? 인사를 해야 하나요?" "당연하잖아요. 당신 방에 이상한 중년 여자가 찾아와서 기타를 쳐대면 집 주인으로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이런 건 사전에 확실히 해두는 게 좋아요. 그럴려고 과자 상자도 준비해왔으니까 "상당히 치밀하시군요."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나이는 괜히 먹었겠어요? 당신 외가 쪽의 아주머니가 교토에서 온 것으로 해둘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하지만 이런 때에 . 나 이 차이가 많으면 편리하군요.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 까.' 그녀가 여행 가방에서 과자 상자를 꺼내어 가자. 나는 툇마루에 앉아서 차를 한 잔 더 마시고는, 고양이와 놀았다. 레이코는 20분이 나 지나서야 돌아왔다. 그녀는 돌아오더니 여행 가방에서 전병통을 꺼내어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20분이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가?" 나는 전병을 먹으며 물어보았다. "그야 물론 당신 이야기죠." 그녀는 고양이를 안아 올려서 뺨을 비비며 말했다 "성 실하고 진지한 학생이라며 감탄하더군요 제가 말씀입니까?" "그래요,물론 당신 이야기예요." 레이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 리고 내 기타를 보더니 집어 들고는 잠시 음을 맞춘 다음 카를로스 조인의 '데사피너드'를 연주했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기타였지 만. 그 소리는 여전히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당신 기타를 연습한고 있나요?" "창고 안에 뒹굴던 것을 빌려와서 조금 칠 뿐입니다. " "그렇다면, 나중에 무료 레슨을 해드릴게요." 레이코는 기타를 놔 두고. 트위드 상의를 벗은 다음 툇마루 기둥에 기대어 , 담배를 피웠 다. 그녀는 살의 민에 마프라스 체크의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 셔츠, 멋 지지 않아요?" 레이코가 물었다. "그렇군요." 나는 동의했다. 정말로 세련된 무늬의 셔츠였다. "이거,나오코 옷이에요" 레이코는 말했다. "알고 있나요?나오 코와 나는 양복 사이즈가 거의 비슷했어요. 특히 그곳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나중에 그 아이는 좀 살이 붙어서 사이즈가 바뀌었지만, 그래도 대체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셔츠도 바지도 구두도 모 자도. 브래지어 정도가 아닐까요, 사이즈가 다른 건. 나는 가슴이 거의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옷을 바꿔 입었어요. 바꿔 입 었다기보다는, 거의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죠." 나는 새삼스럽게 레이코의 몸매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체격은 나오코와 비슷했다. 얼굴 모양이나 가느다란 손목 탓으로 레이코가 나오코보다 여위고 작다는 인상을 주지만. 자세히 보니 의외로 다부진 체격이었다. "이 바지도 윗도리도 그래요. 전부 나오코 거예요. 당신은 내가 나오코의 옷을 몸에 걸친 게 싫으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오코도 누군가가 자기 옷을 입어주면 기 뻐할 겁니다. 특히 레이코 씨가" "참 이상해요." 레이코는 가볍게 손가락으로 소리를 냈다. "나오 코는 아무에게도 유서를 쓰지 않았지만,옷에 관해서는 써서 메모 용지에 한 줄 갈겨쓴 게 책상 위에 있었어요. '옷은 전부 레이 코 씨에게 드리세요'라고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언 제부터 죽으려는 사람이 어째서 옷 생각을 한 걸까요' 그런 건 아무 래도 상관없잖아요? 그 외에도 할 말이 많이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 레이코는 담배를 피우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당신, 처음부터 차 근차근 이야기를 듣고 싶죠?" "듣고 싶습니다. " "병원에서의 검사 결과에 의하면, 나오코의 증상은 현재로서는 회복 단계에 있지만, 조만간에 근본적인 집중 치료를 해두는 편이 훗날을 위해서 좋으리라고 하기에, 나오코는 오사카의 그 병원에 좀 더 입원해 있기로 했어요. 거기까지는 편지에 썼던 그대로예요. 아 마도 8월 10일 전후에 보낸 걸로 기억하는데," "그 편지는 일었습니다. " '8월 24일에 나오코의 어머님이 전화를 걸어와, 나오코가 한 번 그쪽으로 가고 싶어하는데 괜찮겠냐고 하시는 거예요 자기가 직 접 짐을 정리하고 싶어하고, 저와도 당분간 만나게 될 테니까 마 음껏 이야기도 나누고 . 싶어하니까 가능하다면 하룻밤 묵을 수 있겠 느냐는 이야기였어요. 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고 대답했죠. 나 도 무척 나오코를 보고 싶었고, 이야기도 하고 싶었으니 까 이튿날 인 25일에 그녀는 어머니와둘이서 택시를 타고 왔어요 그래서 세 사람이 짐을 정리했죠.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저녁 무렵이 되어 나오코가 어머님께 이제 돌아가도 좋아요. 나머 지는 별 게 없으니까 하고 말하자. 어머님은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해서 타고 가셨어요. 나 오코는 아주 건강해 보였으니까. 저도 어머님도 그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사실 몹시 걱정을 했었거든요. 그녀가 의욕을 상실한 채 풀이 죽어 여위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왜냐하면 그런 병원의 치료란 체력을 몹시 소모시킨다는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괜찮을까 하고 걱 정을 했던 거 예요. 하지만 나는 첫눈에 , 이 정도면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얼굴 색도 생각보다 는 건강해 보였고. 생긋생긋 웃으며 농담도 하고, 말투도 예전보다 훨씬 또렷해지고. 미장원에 갔었다며 새 헤어스타일을 자랑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이 정도라면 어머님이 안 계셔도 둘이서 잘 지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레이코 씨 저는 요번 기회에 병원에 서 충분한 치료를 받을 생각이에요 하고 말하기에 , 그런 . 그게 좋을 거야 하고 저도 대답했죠. 그래서 우리는 둘이서 바깥을 산보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따위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 그녀는 이런 말도 하더군요. 둘이서 이곳을 나 가, 함께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고." "레이코 씨와 둘이서 말입니까?" "그래요." 레이코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 죠. 나는 아무래도 좋지만. 와타나베 씨는 어쩌지 하고. 그러자 그녀 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사람 문제는 확실히 해둘 테니까'라고 그 말뿐이었어요. 그리고는 나와 둘이서 어디에 살자는 둥, 무엇을 하자는 둥 이야기를 했죠. 그리고 새 장에 가서 새들 하-고 놀았어요."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어 마셨다. 레이코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고, 고양이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나오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결정해놓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생기가 돌고 생글생글 웃으며 건강하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아마도 모든 걸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거겠죠. 그리고는 방안에 있는 잡동사니들을 정리해서 , 필요 없는 물건들은 드럼통에 넣어 태웠어요. 일기장 대신 사용하던 노트며 편지며, 그런 거 전부. 당신이 보낸 편지도.그래서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왜 태 우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이재까지의 것들은 모두 처분하고, 이 제부터 새롭게 다시 태어날 거예요'라고 말을 해서 나는그냥 그런 가 보다 하고 비교적 단쑨하게 납득을 했어요. 일단은 나오코의 말 에도 일리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나오코가 건강을 되찾아 행복해 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그날의 나오코는 정말 귀여웠어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는 우리는 평소처럼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목욕을 하고, 아껴두었던 고급 와인을 꺼내 둘이서 마시고, 내가 기타를 쳤 어요. 역시 비틀즈였죠. '노르웨이의 숲'이며 '미셀'이며,그 아이가 좋아하는 곡으로. 우리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전등을 끄고, 적당 히 옷을 덧고, 침대에 누웠어요. 몹시 무더운 밤이라. 창문을 열어도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어요.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벌레 소 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어요. 방안에도 숨이 막힐 정도로 풀 냄새가 가득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나오코가 당신 이야기를 시 작했어요. 당 신과 섹스를 한 이야기예요. 그것도 아주 자세히 이야기하는 거예 요. 어떤 식으로 옷을 벗기고, 어떤 식으로 몸을 만지고, 자신이 어 떻게 느꼈고, 어떤 식으로 사정을 했고, 그것이 얼마나 멋졌는가 하 는 따위의 이야기를 정말로 자세하게 들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나 는 왜 지금에 와서야 느닷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냐고 물었어요.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오코는, 섹스에 관해서 그토록 적나라하게 이 야기한 적이 없었거든요. 물론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요법과 관련해 서 솔직하게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 아이 는 자세한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수줍어하며. 그런데 갑 자기 마구 이야기를 해대니까 나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거예 요. 그냥 어쩐지 이야기하고 싶어졌어요. 레이코씨가 별로 듣고 싶 지 않으시다면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하고 말하더군요. '괜찮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숨김없이 말해봐. 들어줄 테니 까' 하고 저는 말했죠 그이가 삽입을 했을 떼, 너무나 아파서 어째야 좋을지 몰랐어요' 하고 나오코가 말했어요. '저는 처음이었거든요. 젖어 있었으니까 거침없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하여간에 아팠어요. 머리가 멍해질 정 도로. 그이가 훨씬 깊숙이 들어오기에 이제는 됐나 했더니 제 다리 를 약간 들어올리고는, 더욱더 깊숙이 삽입을 시키는 거예요. 그러 자 온몸이 싸늘하게 느껴졌어요. 마치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손 발이 마구 저리면서 .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나는 이 대로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죽게 되더라도 상관없겠지 하고 생각했 어요. 하지만 그이는 제가 아파하는 것을 알고서는. 깊숙이 삽입을 시킨 채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쩨 몸을 부드럽게 안아서 머리며 목 이며 가슴이며 키스해 주었어요, 오랫동안. - 그러자, 온몸에 온기가 되살아났어요. 이어서 그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정말. 레 이코 씨, 너무나 멋진 거예요. 머릿속이 녹아 버릴 정도로 이대로. 이 사람 품에 안긴 채로, 평 생토록 이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 도예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 그렇게 좋았다면 와타나베 씨와 함께 살면서 매일 그걸 하면 좋 았을 거 아니야?' 하고 나는 말했어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레이코 씨' 하고 나오코는 말하더군 요 '저는 알아요 그 느낌은한 차례 저에게 다가왔다가.다시 사라 져버렸어요. 그것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우연한 기회 에 단 한 번 있었던 일이에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저는 아무런 느 낌을 받지 못했어요.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채감도 느끼지 못했어요.' 물론 나는 충분히 설명을 했죠. 그런 것은 젊은 여자들에게는 흔 히 있는 일이고.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 저 절로 낫는다-고. 더구나 한 번은 제대로 이루어졌으니까 걱정할 겄 없다. 나도 결혼 초에는 여 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노라고 설득했어요. '그런 게 아니에요' 하고 나오코가 말하더군요. '저는 아무 걱정 도 하지 않아요. 저는 이제 아무도 제 몸 속에 들어오지 않길 뿐이에 요. 이젠 아무에게도 침범 당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나는 맥주를 다 마셨고, 레이코는 두 대째의 담배를 다 피웠다. 고양이는 레이코의 무릎 위에서 기지개를 켜고는. 자세를 바꾸어 다 시 잠이 들었다. 레이코는 잠시 망설이더니 세 대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더니 나오코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어요." 레이코는 이야 기를 계속했다. "나는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 면서 , 괜찮아, 모든 게 잘 풀릴 거야 하고 달래주었어요. 나오코처럼 젊고 예쁜 여자는 남자 품에 안겨서 행복하게 살아야 해. 하고. 무더 운 밤이라 나오코가 땀이며 눈물이며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기에 , 나는 목욕 타월을 가져다가. 아이의 얼굴과 몸을 닦아줬어요 팬 티까지 축축하기에, 잠깐 벗어봐 하고 벗겨서 , 하지만 이상한 것을 한 건 아니에요. 어차피 우리는 목욕도 함께 하는 사이였고, 그 아이 는 동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나오코가 안아달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무거운데 어떻게 안아 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지만. 더이상 귀찮게 굴지 않겠다고 하기에 안아줬어요. 몸을 목욕 타원로 감싸서, 땀이 묻지 않도록 하고는 잠 시 동안. 그리고 기분이 안정되자 다시 땀을 닦아주고, 잠옷을 입혀 서 재웠어요.곧바로 깊게 잠이 들더군요.어쩌면 자는 척한 것일지 도 모르지만. 하지만 어쨌든 아주 귀여운 얼굴이었어요. 마치 태어 나서 지금까지 상처를 받은 적이 없는 열서너 살의 소녀 같은 얼굴 이었어요. 그 얼굴을 보고는 나도 잠을 잤죠, 안심하고. 여섯 시에 눈을떴을 때 그녀는 이미 없었어요 벗어 놓은 잠옷이 있고. 평상복과 운동화. 그리고 언제나 머리맡에 두는 손전등이 없 더군요. 큰일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손전등을 들고 나갔다는 그것은 날이 밝기 전에 나갔다는 뜻이 되니까요. 그리고 혹 시나 해서 책상 위를 보니까.그 메모지가 있는 거예요. '옷은 전부 레이코 씨에게 드리세요'라는. 저는 즉각 다른 사람들에게로 가서 모두들 분발해서 나오코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전원이 숙소 안팎에서 숲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뒤졌죠. 찾아내는 데에 다섯 시간이나 걸렸어요. 그 아이는 밧줄까지 준비해 갔던 거예요 " 레이코는 숨을 쉬며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고마워요." 나는 물을 끓여 차를 타서, 툇마루로 돌아왔다. 이미 저녁이 가까 워. 햇살은 약해지고. 나무 그림자가 길게 우리들의 발치까지 뻗어 있었다. 나는 차를 마시며 . 황매화며 철쭉이며 남천촉을 마음 내키 는 데로 대충대충 심어 놓아, 기묘하게 산만한 느낌을 주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구급차가 와서 나오코를 싣고 갔고, 나는 경관에게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어요. 질문이라야 별다른 것은 없었어요. 일 단 유서인 듯한 쪽지가 있으니까, 자살이 확실하고. 더구나 정신병 원 환자이니까 자살 정도는 하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 단 형식적인 질문을 하는 거예요. 경찰이 돌아가자 저는 즉각 전보 를 쳤어요, 당신에게 "쓸쓸한 장례식이더군요." 나는 말했다. 아주 조용하고,사람도 별로 없고. 가족들은 나오코가 죽었다는 소식을 제가 어떻게 알았느 냐며. 그 점에만 신경을 쓰고. 아마도 자살이라는 사실이 주위에 알 려지는 게 싫었던 모양입니다 사실은 장례식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 다. 저는 그 때문에 몹시 충격을 받아서 . 즉시 여행을 떠났습니다. " "와타나베 씨. 산보하지 않겠어요?" 레이코가물었다. "저녁 장이 라도 보러 가요. 슬슬 시 장기가 느껴 지니까. '좋습니다. 뭔가 잡수시고 싶은 게 있나요?" "스키야키 " 그녀는 대답했다. "난, 낼비 요리라곤 벌써 몇 년이 나 먹어보지 못했거든요. 스키야키는 꿈에도 나타나더라구요. 소고기와 파와 가늘게 썬 곤약과 쑥갓을 넣고. 보글보글끓여서 " "그건 좋습니다만, 스키야키 넴비가 없습니다. 제 집에는 "괜찮아요, 내게 맡겨요. 주인 집에서 빌려올 테니까." 그녀늣 즉각 주인집 쪽으로 가더니, 멋진 스키야키 냄비와 가스 곤로와 길다란 고무 호수를 빌려왔다 "어때요? 그럴싸하죠?' " "놀랍군요."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부근의 작은 상점가에서 소고기와- 달걀과 야채와 두부 를 사고, 술 가게에서 비교적 좋은 백포도주를 샀다. 내가 계산을 하 겠다고 우겼지만. 결국은 그녀가 전부 지불했다. "조카에게 장보는 값을 내게 했다는 소문이 돌면 내가 웃음거리 가 되니까요." 레이코는 말했다. "게다가 지금 상당한 돈을 갖고 있 거든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설마 빈털터리로 나올 리 는 없잖아요. 집으로 돌아오자 레이코는 쌀을 씻어서 안쳤고. 나는 고무 호수 를 연결시켜 툇마루에서 스키야키를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준비 가 끝나자 레이코는 기타 케이스에서 자신의 기타를 꺼내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툇마루에 앉아서 , 악기의 상태를 점검하듯이 천천히 바흐의 '푸가'를 연주했다. 섬세한 부분을 일부러 천천히 치 기도 하고. 빨리 치기도 하고 감상적으로 치기도 하면서 , 그러한 갖 가지 소리에 정말로 애착을 느끼는 듯 귀를 기울였다. 기타를 칠 때 의 레이코는, 마치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바라보는 열일곱이나 열여 덟 살 색씨처런 보였다. 눈이 반짝이기도 하고. 입 주위에 힘이 들어 가기도 하고, 희미한 미소가 스치기도 했다. 연주가 끝나자, 그녀는 기둥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며 .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잠깐 말을 걸어도 좋을까요?" 나는 물었다. "좋아요. 배가 고프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니까 "레이코 씨는 남편이나 따님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도쿄에 계 시죠?" "요코하마. 하지만 가지 않아요. 요전에도 말했잖아요' 그 사람 들 이제는 나와 관계를 끊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새로운 생활이 있고, 나와 만나면 공연히 괴롭기 만 할 테니까. 만나지 않는 게 가장 좋아요. 그녀는 다 피운 세븐 스타 갑을 동그랗게 말아서 버리고는, 가방 속에서 새 담뱃갑을 꺼내어 뜯더니. 한 대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은 붙이 지 않았다. "나는 이미 끝장-난 인간이에요. 당신 눈앞에 있는 나는 과거의 잔 존 기억에 불과해요. 내 자신의 내부에 있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미 옛날에 죽어버렸고. 나는 단지 기억에 의졸해서 행동할 뿐이에 요" "하지만 저는 지금의 레이코 씨를 정말로 좋아합니다. 잔존 기억 이건 무엇이건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은 드려봤자 소용없겠지 만. 레이코 씨가 나오코의 옷을 입고 계시니까 저로서는 정말로 기 쁩니다. " 레이코는 싱긋 웃고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신은 나 이에 비해서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솜씨가 좋군요." 나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저는 단지 생각하는 그데로를 솔직하 게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 "알고 있어요." 레이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밥이 다 되어서 나는 낸비에 기름을 뿌려 스키야키를 만들 준비를 했다. "이건 꿈이 아니 겠죠?" 레이코는 냄새를 킁킁 맡으며 물었다. "백 퍼센트 현실의 스키야키입니다. 경험적으로 말해서 . 우리들은 비교적 말도 없이. 묵묵히 스키야키를 먹고. 맥주를 마 시고. 밥을 먹었다 갈매기가 낼새를 맡고 왔기에 고기를 나누어주 었다. 포만감이 느껴 지자. 우리는 툇마루 기둥에 기대어, 달을 바라 보았다 "만족했습니까, 이제는?" "만족했어요. 충분히." 레이코는 괴로운 듯이 대답했다. "이렇게 많이 먹기는 처음이예요." "이제부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담배 한 대 피우고 목욕탕에 갔다와야겠어요. 머리가 엉망이라 서 감긴 실어요." "그렇게 하세요, 바로 근처에 있으니까. "그런데 와타나베 씨 . 괜찮다면 물어보겠는데, 미도리라는 그 아 가씨와는 이미 잤나요?" 레이코가 물었다. "섹스를 했냐는 말씀입니까' ?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일단락되어 질 때까지는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으니까요. "이제는 일달락지어 진 게 아닌가요?"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오코가 죽었으니까 그 것이 안정을 찾았다는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어차피 당신은 나오코가 죽기 전부터 이미 결심하고 있었잖아요. 미도리라는 아가씨와 헤어질 수 없다고 나오코가 살아 있건 죽었건 그건 관계없잖아요? 당신은 미도리를 선택했고. 나오코는 죽음을 선택했어요. 당신은 이미 성인이니까.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책임을 져야돼요. 그렇게 하 지 않으면 모든 게 다 엉망이 된다구요." "하지만 잊을 수가 없습니다. " 나는 말했다. "저는 나오코에게 언 제까지고 기다리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다리지 않았습 니다 결국 최후의 단계에서 그녀를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탓인가를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제 자신의 문제입니다. 아마 제가 도중에 포기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생각합니 다. 나오코는 역시 죽음을 선택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 과는 별도로. 저는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레이코 씨는 .그것 이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나오코와 저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 면 우리는 처음부터 생사의 갈림길에서 맺어졌던 것입니다. " "당신이 만약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무엇인가 아픔 같은 것을 느낀다면, 당신은 그 아픔을 이제부터의 인생에서 항상 느끼도록 하 세요. 그리고 만약 배울 수 있다면, 거기에서 무언가 배우세요. 하지 만 그것과는 별도로 미도리 씨와 둘이서 행복해지세요. 당신의 아픔 은 미도리씨와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더 이상 그녀에 게 상처를 준다 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괴롭겠지만 강해져 야 해요. 더욱 성 장해서 어른이 되세요. 저는 당신에게 이 말을 하려 고 요양소를 나와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관 같은 전차를 타 고 머나먼 길을." "레이코 씨가 하시는 말씀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는 아직 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너무나 쓸쓸한 장례식이었 습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죽으면 안 됩니다. " 레이코는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모두 언젠 가는 그런 식으로 죽는 거예요. 나도 당신도." 우리는 강가의 길을 십분 가량 걸어 목욕탕으로 가서, 약간은 산뜻 한 기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와인 병을따서,툇마루에 서 마셨다 "와타나베 씨, 잔 하나만 더 가져다 주겠어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쓰시게요?" "이제부터 둘이서 나오코의 장례식을 치르는 거예요." 레이코는 말했다 "외롭지 않은 장례식을 " 내가 잔을 갖고 오자 레이코는 그 잔에 가득 와인을 따라, 정원 의 석등 위에 놓았다.그리고 툇마루에 앉아서. 기둥에 기대어 기타 를 껴안고는. 담배를 피웠다 "혹시 성냥이 있으면 갖다 주겠어요? 될 수 있으면 큰 게 좋겠어요" 나는 부엌에서 커다란 성냥 통을 갖고 와서, 그녀 옆에 앉았다 '이제부터 제가 한 곡 연주할 때마다. 거기에 성냥개비를 하나씩 늘어놓아 주겠어요? 내가 이제부터 칠 수 있는 만큼 칠 테니까." 그녀는 우선 헬리 밴시니의 '디어 하트'를 아주 멋지고 은은하게 연주했다. "이 레코드. 당신이 나오코에게 선물했죠?" "그렇습니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에. 나오코가 이 곡을 아주 좋 아했으니까 "나 , 좋아해요, 이 곡. 정말로 부드럽고 아름다워요." 그녀는 '디어 하트'의 멜로디를 다시 한 번 몇 소절인가 연주하고는 와인을 홀짝였다 "그런데 취하기 전에 몇 곡이나 칠 수 있을까? 어때요. 이 런 장례식이라면 쓸쓸하지 않아서 좋죠?" 래이코는 비틀즈로 바꾸어, '노르웨이의 숲 '예스터데이' '미 셀' '섬씽'을 치고, '히어 컴즈 더 선'을 노래하며 치고, '풀 온 더 할'을 쳤다. 나는 성냥개비를 일곱 개 늘어놓았다. 레이코는 '일곱 곡' 하고 말하고는 와인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 다 "이 사람들은 인생의 슬픔이나 아름다움을 정말로 잘 알고 있어 요 이 사람들이란 물론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그리고 조지 해리슨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기타를 들고 '게니 레인' '블랙 버드' '헤이 주드'를쳤다."이제 몇 곡이죠?" "열 네 곡 " "휴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 아무거나 한 곡쯤 칠 수 있 어요?" "서툽니다. ' '서툴어도 좋아요." 나는 내 기타를 가지고 와서 '업 온더 루프'를 더듬거리며 쳤다. 레이코는 그 동안에 천천히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와인을 마셨다. 내 기타가 끝나자 그녀는 박수를 쳤다. 이어서 레이코는 기타용으로 편곡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와 드뷔시의 '월광'을 신중하고 아름답게 연주했다. "이 두 곡은 나오코가 죽은 후에 마스터한 거예요. 그 아이의 음악 취미는 결국 센티멘털리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바카라크의 곡을 몇 가지 연주했다. '클호즈 투 '비에 젖어도' '워크온바이' '웨딩 벨블루스.' "스무 곡' 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마치 인간 주크 박스 같군요." 레이코는 즐거운 듯이 말했 다. "음대 시절의 교수님이 이걸 보시면 놀라 자빠질 거예요." 그녀는 와인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계속해서 아는 곡들을 연 주했다. 보사 노바를 열 곡 가까이 쳤고, 로저스 하트와 거쉰의 곡을 쳤고 밥 딜런이며 레이 찰스며 캐롤 킹이며 빅멘 보이스며 스티비 언더며 '위를 보고 말자'며 '불루 벨벳'이며 '그린 필즈'며, 하여튼 갖가지 곡을 모두 연주했다. 이따금 눈을 감거나 고개를 젓거나, 멜 로디에 맞춰서 흥얼거리기도 했다 와인이 떨어지자, 우리는 위스키를 마셨다. 나는 정원에 놓아두 었던 잔의 와인을 석등 위에 뿌리고, 그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지금 이걸로 몇 곡인가요?" "마흔 여덟." 나는 대답했다. 레이코는49곡 째에 '엘리나 리그비'를 치고 쉰 곡째에 다시 한 번 '.'I르웨이의 을 쳤다. 10곡을 치고 나자 레이코는 휴식을 취하 며 위스키를 마셨다. "이 정도 쳤으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충분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와타나떼 씨, 이제는 쓸쓸한 장례식은 깨끗이 잊어버리는 거예 요." 레이코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방금의 장례식만 기억 하세요. 멋있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덜이에요' 하며 레이코는 51 번째 곡으로 평소에 즐겨 치던 바흐 의 '푸가를 연주했다-. "와타나베 씨, 나와 그거 해요." 연주가 끝나자 레이코가 작은 소 리로 말했다 "기묘하군요. 저도 똑같은 생각을 했거든요." 커튼을 닫은 어두운 방안에서 레이코와 나는 정말로 당연한 일인 듯이 서로 포옹을 했고. 상대의 몸을 요구했다. 나는 그녀의 셔츠를 벗기고. 바지를 벗기고. 내의를 벗겼다. "난. 지금까지 유별난 인생을 보내왔지만. 열아홉 연하의 남자가 팬티를 벗겨주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그렇다면 직접 벗으시겠습니까?" "아니에요, 벗겨주세요. 하지만 난 주름살 투성이니까 실망하지 마세요." "저는, 레이코 씨의 주름살을 좋아합니다. " "감동적 이로군요." 레이코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온몸에 키스를 하였고. 주름살이 있는 부분은 혀로 핥았다. 그리고 소녀처럼 납작한 젖가슴에 손을 대고는 젓꼭지를 가볍게 깨물며. 따듯하고 촉촉한 바기나에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움 직였다 "와타나베 씨." 레이코가 내 귓전에 대고 말했다 "그곳이 아니에 요. 그곳은 그냥 주름살이에요." '이런 때에도 농담만 하시려는 겁니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죄송해요." 레이코는 말했다 "두려워요, 난. 오랫동안 한 적이 없거든요. 어쩐지 열일곱 살소녀가 남자 친구의 하숙집에 놀러 왔 다가 발가숭이가 된 기분이에요." "정말로 열일곱 살의 소녀를 범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나는 그 주름살 속으로 손가락을 넣고는. 목 언저리에서 귀에 이 르기까지 키스를 하며, 젖꼭지를 애무했다. 그리고 그녀의 숨이 거 칠어지고 목이 가늘게 떨리기 시 작하자 나는 그 가느다란 다리를 벌 리게 하여 속으로 삽입시켰다 "괜찮을까요? 임신하지 않도록 해줄 거죠'?" 레이코는 작은 소리 로 나에게 물었다. "이 나이에 임신하면 챙피하니까. "괜찮습니다. 안심하세요." 페니스를 깊숙히 삽입시키자, 그녀는 몸을 떨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녀의 히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페니스를 몇 차례 움직이다 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발적으로 사정을 했다. 그것은 억제할 수 없는 격렬한 사정이었다. 나는 그녀를 부등켜안은 채, 그 따뜻한 속 에다가 몇 차례나 정액을 쏟아 넣었다 "죄송합니다. 참을 수가 없었어요." "바보로군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요." 레이코는 내 엉덩 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섹스를 하나요?" "대체로, 그렇습니다." "나와 할 때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좋아요. 잊어버리세요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사정하세요 어때요. 기분 좋았나요?" "정말 좋았습니다 그러니까 참지 못했던 겁니다. " 참을 필요 없어요. 이걸로 충분해요. 나도 아주 좋았어요." "레이코 씨." "응'" "레이코 씨는 누군가와 다시 사랑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멋진 분인데,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 "글쎄요, 생각해볼게요,그 점은." 레이코는 말했다. "하지만 아 사히가와에서도 사람들이 사랑을 할까요?" 나는 잠시 후 다시 한번 단단해진 페니스를 그녀의 속으로 삽입 시켰다. 레이코는 내 밑에서 숨을 삼키며 몸을 꿈틀거렸다. 나는 조 용히 페니스를 움직이며 그녀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내부에 삽입시켜 놓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것은 정말로 멋있었다. 내가 농담을 하여 그녀가 콕콕 웃으면, 그 진동이 페니스로 전달되 어왔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포옹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정말 기분이 좋아요 " 레이코가 말했다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 "어디 움직여보세요, 그럼 ." 나는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깊숙히 삽입시킨 뒤 몸을 돌려대며 그 감촉을 맛보았고, 마음껏 맛본 뒤에 사정을 했다. 결국 그날밤 우리는 네 차례 관계를 했다. 네 차례의 섹스후에, 레이코는 내 품안에서 눈을 감은 채 깊은 한숨을 쉬며 . 몇 번인가 가 볍게 몸을 떨었다. "난 이재 평생 섹스를 하지 않아도 되겠죠'" 레이코는 말했다 '그렇다고 대답하세요, 제발. 남은 인생의 몫까지 전부 했으니까 안 심하라고 "누가 . 그런 걸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비행기로 가는 편이 빠르고 편안하다고 권했지만. 레이코 는 기차로 가겠노라고 고집 했다. "난 세이칸 연락선을 좋아하거든요. 하늘 위로 날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우에노 역까지 배웅했 다. 그녀는 기타 케이스를, 나는 여행 가방을, 들고 둘이서 플랫폼 벤치에 앉아서 열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처음 왔을 때처럼 같은 트위드 재킷과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사히가와란 곳이 정말로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레이코가 물었다 좋은 홋입니다. " 나는 대답했다 "조만간에 한 번 찾아뵙겠습니 다' "정 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를 쓰겠습니다 " "당신 편지가 마음에 들어요. 나오코는 전부 태워버렸지만 그렇 게 좋은 편지였는데." "편지란 단순한 종이입니다" 나는 말했다. "태워버리더라도 마 음에 남을 그것은 남고, 보관하고 있어도 남지 않는 그것은 남지 않습니 다. "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몹시 두려워요. 혼자서 아사히가와에 가는 게. 그러니까 편지 주세요 당신 편지를 읽으면 언제나 당신이 내 곁 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제 편지라도 좋으시다면 얼마든지 쓰겠습니다. 하지만 걱 정하지 마세요. 레이코 씨라면 어디에 가건 틀림없이 잘 할 수 있을 겁니 다 '그런데 내 몸 속에 무엇인가 아직 틀어박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드 는데. 그건 착각일까요?" "그건 잔존 기억입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레이코도 웃었 다. "나를 잊지마세요." "잊지 않겠습니다. 영원히." "당신과 만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지 모르지만 어디에 가더라 도 당신과 나오코를 언제나 기억할 거예요." 나는 레이코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무심결에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았지만,나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는 살아 있었고, 앞으로 살아 갈 일만을 생각해야 했다. "행복해지세요." 헤어질 때 레이코가 말했다. "당신에게 충고할 수 있는 건 전부 충고했으니까, 더이상 할 말이 없어요. 행복해지라는 말 밖에 내 몸과 나오코의 몸을 합친 것만큼 행복해지세요, 라고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꼭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야기할 것이 많이 있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이 세상에서 미도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미도리와 만나서 이 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 둘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다. 고 말했다. 미도리는 한동안 전화 저편에서 잠자코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잔디밭에 온통 이슬비가 내리고 있는 듯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나는 그 사이에 계속 유리 창에 이마를 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 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 계세요?"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잡은 채 고개를 들어, 전화 박스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나는 그곳이 어디인 지 알 수 없었다. 짐작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이라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뿐 이었다. 나는 어디도 아닌 장소의 한복판에서 미도리를 불러대고 있 었다. 내 작품을 말한다/무라카미 하루키 1백 퍼센트 리얼리즘에의 도전 처음 로마 공항에 내려섰을 때의 일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1986년 10월초, 맑게 갠 따뜻한 날이었다. 강한 햇살에, 공기 는 눈부실 정도로 맑았지만 하늘 끝까지 뚜렷이 보일 정도로 새파 란 일본의 가을 하늘과는 달리, 로마의 하늘에는 뿌연 안개 같은 것 이 끼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는. 마치 음악의 베이스처럼, 모든 소리와 모든 시간에 부드럽게, 그러나 숙명처럼 오버 랩되고 있었다. 아피아 거리의 소나무에도. 파라및의 붉은색 벽에도, 테베르 강 수 면에도 무엇이라 표현할수 없는 가을 안개의 필터가 걸려 있었다. 남유럽의 가을은 어딘가 우수를 느끼게 했다. 아내와 나는 일단 이렇게 유럽까지 오기는 왔지만 어디에 살 것 인지 정하지도 못했고, 앞으로 충분한 수입이 있으리라는 확신도 없 었고, 일단 유사시에 의지할 만한 조직도 없었다 우리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곤 당분간의 생활비와 당장 필요한 옷가지와 소량 의 일본 음식과 필기 도구뿐이었다. 나는 비교적 낙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직접 가서 부딪쳐보면 어떻게든 되리라고 생각했 지만 그래도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일본을 떠난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장편 소설을 쓰기 위 해서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을 쓸 수 있다고는, 나로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쓸 수 있으리라는 예상뿐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어디까 지나 예상에 불과하다. 어쩌면 일부러 유럽까지 왔지만 결국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고, 괜한 시간과 노력만 낭비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에 잠겨서 걷는 로마의 거리 풍경은(아마도 감정이입 탓도 있 겠지만 왠지 모르게 애절하게 느껴졌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발표한 뒤 오랫동안(정확 히 말해서 년간그 장편소설을 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유는 언 제나 그렇듯이,몹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 1년간 단편 을 여섯 편 정도 한꺼번에 썼다. 그 작품들은 단편집 빵집 재습격지 에 수록되었지만, 그 해는 나에게 완전히 단편의 해였다. 그것이 일 단락지어지자, 그 다음에는 주로 번역을 했다. 조지 어법의 곰을 쓰다 레이몬드 커버의 밤이 되면 개구리는B, 폴 세로의 월즈 엔 드(이 세상 끝, C. D 1그 브라이언의 위대한 데스리프를 번역하 여 출판한 것도 세계의 쁠과 하드보일드 원더 랜드3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잡지에 실었던 에세이를 모아 책으로 내기도 했다. 무라 카미 아사히 도의 역습3이나 굘토 SCARB릇이 바로 그 에세이 집이다. 그 외에도 야스니시 미즈마루 씨와 둘이서 일본 전국의 공장을 견학 하여. 책으로 출판한 해가 솟는 나라의 공장t이 있다. 나로서는 이 기획이 마음에 들었고, 글을 쓰기 위해서 여러 곳을 다니며, 여러 사 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사실 이러한 문학 적 '농한기'에는 몸을 움직이는 작업이 무척 즐겁게 느껴지게 마련 이고, 또한 훗날에 유형 무형으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 동안에 나는 주거를 후지사와에서 도쿄로 옮겼다가, 다시 오 이소로 옮기는 등.짧은 기간에-여러 가지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자주 이사를 했다. 나는 이사하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고 익 숙해져 있기는 했지만, 나이가 들어 가재 도구가 늘어나자, 여기저 기 이사를 다니는 것이 그만 귀찮아졌다. 이제는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정 착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나도 곧 40대에 접어든다. 언 제까지고 이리저리 방황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었 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심한 초조감을 느꼈다 무언가 특별히 불쾌 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불쾌한 일은 언제나 있지만. 특별히라 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슬럼프에 빠진 것도 아니다. 물론 작업은 너무 나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생활도 별로 불안하지 않았고, 객 관적으로 보아 작가로서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하지만 어 디에 가건, 무엇을 하건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내 머리 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는 탓 이리라고 생각한다 전편을 기울여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윈 더랜드라는 소설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는 만족하고 있었 다. 물론 욕심을 부리자면 끝이 없겠지만, 현재의 내 힘으로 이 정도 썼으면 일단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구성의 이야기를 어떻게 든 완성시킴으로써 , 소설가로서의 자신감도 다소는 붙게 되었다. 적 어도 완성된 이후로 6개월 가량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윽고,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 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을 완전히 부숴버리지 않는다면, 나에 게는 더이상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네 작품을 따라 다녔다 어떤 식으로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부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좋을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내부에 무언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론이나 전망과는 성격이 달랐다 일종의 본능적인 예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작가로서 자신의 위치나 존재가 나름대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초조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일본에서는 작가로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굶어 죽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정 말로 풍요로운 나라이다. 기업은 돈을 잔뜩 지니고 있으니까, 이익 금의 일부를 광고에 쏟아 붓고, 광고로 수많은 잡지가 수입을 올리 고, 그 국물이 작가들에게도 흘러 들어온다. 그러한 행복한 잉여금 의 문화 유입이라는 도식이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될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토록 여유만만하게 지내도 좋을까 하는 불안감은 확실히 있다. 물론 아무리 풍요로운 나라라 하더라도, 작가로서 인 간으로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야기는 그다지 단 순하지가 않다 이 세상 어느 구석엔가 굶주리는 사람이 있어도, 고 급 스테이크만 먹는 사람의 이빨은 역시 고급 스테이크용의 이빨로 변해버린다-는 이야기다 또한 초조감을 느끼게 된 데에는 적지 않은 내 나이 탓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 랜드B를 쓴 그것은 서른여 섯 살이 되던 해이고, 일본을 떠난 그것은 서른여덟에 가까운 때였지 만 나는그무렵 자신이 지금 인생의 가장중요한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젊음을 전면에 내세워 작품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젊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성 숙을 전면에 내세울 정도로 나이가 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려 운 시기에나 할 수 있는 일들을 지금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 해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를 썼을 때 이상으로 정 신적인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글을 쓴다는 점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나는 무척 신경질적이고 재주가 없는 인간이다. 어디에서나 무조건 집중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니 일본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먼 북소리B에서도 언급했지만, 노르웨이의 숲은 1986년 말에 그리스의 미코노스 섬에서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로마에서 완 성시켰다.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그것은 아마도 내 작품의 계보상 에 있어서 상당히 예외적인, 어떤 의미에서는 '외전'(자서전적인 작 품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특별히 강렬한 욕구를 지니고 이 소 설을 쓴 것은 아니다. 얼마 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워밍업 으로 가벼운 것을 하나 시험해보자는 정도의 기분에서 착수했다. 평 소와는 다른 근육을 사용하여, 평소와는 다른 운동을 해보자는 식의 가벼운 기분으로 썼다.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의도한 것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이것은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도 노르웨이의 숲도, 포 맷 자체는 이른바 청춘 소설이다 그곳에 묘사된 것은. 스무 살 전후 의 청년이 성장 과정에서 발견하는 세계의 광경이다. 그러나 이 두 소설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노르웨이의 숲을 쓸 때 내가 의도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철 저하게 리얼리즘 문체로 쓸 것.둘째 섹스와 죽음에 관해서 철저하 게 언급할 것, 셋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보이는 처녀작 같 은 수치감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반(In그 수치감'을 정면에 내세울 것 이었다. 그러나 이 세번째 점에 관해서는 더이상 자세히 설명하 기가 곤란하다. 기분상 그러했다는 것 이외에, 나로서는 적절한 말 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은, 내 계획으로는(어긋나기 로 유명한 내 계획으로는 그 무렵 지니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성 격의 책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 이의 숲 같은 소설도 썼지요,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작정이었다. 다른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다소 다르고. 세간의 평은 그다지 좋지 않더라도, 국부적으로는 열렬한 팬을 지니는 소품과 같은 소설을 쓸 생각이었다. 그런것이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시피 , 그렇게는 되지 않 았다 책(일본 원서 그의 띠지에 '백 퍼센트 연애 소설'이라는 문구를 넣은 이유는. 이러한 소설을 펴낸 데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명이었다. UT 가 의도했던 것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은 레디컬(rAtSta 하지도 세련되지도 지적이지도 포스트 모던하지도 실험적이지도 않고 단 순히 평범한 리얼리즘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그 점은 염두에 두고 읽어주십시오'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그런 말을 책 내에 쓸 수는 없으니까. 열심히 궁리해서 '연애 소설'이라는 말을 끄집어 낸 것이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이 연애 소설이라는 관점에서 평 론되는 데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몹시 당황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르웨이의 숲은 정 확한 의미에서 연애 소설이라고는 할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연애 소설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몰랐다(지금도 모르지만. 나는 이제까지 수많은 소설을 읽어 왔지만 그 대부분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인간이 어떻게 사랑을 주고(주지 않고, 어떻게 사랑을 받아들일(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그 문제가 끊임 없이 다루어져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소설을 연애 소설로 취급한 적은 없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책에 묘사된 갖가지 종류의 사랑 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랑의 범주를 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러므로 노르웨이의 낸 것이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이 연애 소설이라는 관점에서 평숲이라는 소설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애는 묘사되고 있지 않으니까, '연애 소설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비평 을 받는다고 해도 사실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소설을 굳이 정의하자면, 성장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이다. 이것은 내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을, 당초의 예상대로 가벼운 소설로서 끝내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써 나아 가다. '이것을 이대로 도중에서 내팽개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점차 로 고개를 들게 되었다. 나는 (반딧불이라는 소설을, 어느 단계에 서 멋대로 내팽개칠 수 있었다 '내팽개치다'라는 표현으로 고개를 들게 되었다. 나 는 (반딧불이라는 소설을, 어느 단계에 서 멋대로 내팽개칠 수 있었다 '내팽개치다'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면. 어느 기점까지 밀고 가다가 손을 떼었다고 해도 좋다. 왜냐 하면 그것은 단편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이러한 이야기입니다. 나머 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2것이 소설입니다-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 단편을 바탕으로 좀더 길게 끌어보자는 결심을 한 순간, 나는 이야기에 대한 전면적인 책임을 져야만 했다. 노르웨이의 숲 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랑에 대해서. 혹은 모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듯이 나도 그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잇달아 죽어간다. 그건 지나치게 편의주의 적이 아니냐는 비평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변명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이야기가 그것을 나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정말로 나 로서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캐주얼티즈(cA uA tie . 적절한 번역을 할 수 없다. 전투원의 감원이 라고나 할까 그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내 주위에서 죽어간, 혹은 사 라져간 수많은 캐주얼티즈에 관한 이야기이며, 혹은 나 자신의 내부 에서 죽거나 사라져간 수많은 캐주얼티즈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정말로 이 소설에서 쓰고 싶었던 그것은 연애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 려 그러한 캐주얼티즈의 모습이며, 그 캐주얼티즈의 뒤에 남아서 존 속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혹은 사물들의 모습이다. 성장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고독하게 싸우고, 상처받고. 상실되 고, 상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야만 하는 모습이다 이 소설이 처음 예정보다 훨씬 길어지게 된 것은, 제작과정에서 점차로 그러한 모습들이 보인 까닭이다. 마치 산꼭대기를 향해서 등 반하는 도중에 조금씩 주위의 안개가 걷히듯이 . 내 눈에 여러 가지 것들이 선명하게 보여왔다 그러니까 만약 이 소설에 어떤 흠이나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물론 많이 있다,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책임을 완수했노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내 자신에 대 해서는 작은 소리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대한 갖가지 반응 중에서 가장 의외로 생각되는 그것은, 이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반응이 제일 강했던 것에 비해서,문체에 관해서는 그다지 문제가 제기되 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소설의 문 체와 줄거리는 자동차(vehic e그와 승객(paEiengrr그의 관계나 마찬가 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에 관해서 말 하자면, 나는 승객보다는 오히려 자동차를 만드는 데에 상당한 신경 을 썼다. 리얼리즘이라는 문체는 시종일관 나에게 신종의 자동차였 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리얼리즘이란. 우선 담백(conventiona 이 아니라,iimp e하고 스피드가 있을 것. 문장은 줄거리의 흐름을 저해하지 않고, 독자에게 그다지 물리적 , 심리적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것이 내가 설정한노르웨이의 숲에서의 문장적 액세스의 개 요였다. 그것은 나에게는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결국-내가 상상하기에는-많은 사람들이(특히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이 문장을 리얼리즘으로는 간주하지는 않은 듯하다. 내가 생각하는 리 얼리즘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성 립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나는 전혀 엉뚱한 짓 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은 마지막 단계에서까지 결정되지 않 았다 4원에 (볼로냐 서적 게스티벌그에 온 (고단샤그(펼f ea찬그 사람에 게 원고를 넘겼는데, 그 직전까지 이 소설에는 다른 제목이 붙어 있 었다 물론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은 후보 명단에 항상 들어 있기는 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정확히 맞는 제목이어서, 이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비틀즈의 노래 제목을 그대로 쓴다는 점에도 저항을 느꼈다. 세대적 티가 너무 많이 묻어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 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단어에 너무 나도 친숙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제목들은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 는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에 아내에게 읽어보도록 한 다음, 노르웨 이의 숲이라는 제목을 알려주지 않은 채 "어떤 제목이 좋을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 '노르웨이의 이라고 하면 좋지 않을까 요?" 하는 대답이어서 결국 이 제목으로 낙착되었다. 단. 아내는 그 때까지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은 상징적이라고 여겨진다. 원작의 시를 읽어보아도 역시 그렇지만. NORWEGUIN WOOD라는 말에 는.어휘 자체가 자연스럽게 부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이 있다 조용 하고. 멜랑코릭하고, 더구나 어딘가 텐션(ten i()n이 느껴진다 물론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일본어로 바꾼다면 역시 '노르웨이의 숲'이 가장 원어의 뜻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된다. 노르웨이 사람에 게서 들은 말인데 노르웨이 어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말에는, 정 말로 그것에 가까운 분위기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레논인피 매카 트니인지는 과연 그 뜻을 알고 있었을까? 옮긴이의 말 요즈음 학생들에게, 일본 소설은 누구의 작품을 읽어 보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대답한다. 하루키늪 언제부 터인가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일본 작가가 된 것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금각사의 미시마 유키 오, 혹은 대중적인 작가로서는 빙점의 미우라 아야코 등이 우리들 에게 친숙한 일본 작가였다. 아마도 하루키는 가와바타나 미시마와 같은 문학 작가들에 비해서 훨씬 부담이 없으며,미우라 아야 코의 작품과 비교하더라도 구시대의 멜로 드라마적인 냄새가 적기 때문에 요즈음 독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 국에서의 하루키 열풍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문학 정서가 상당 히 접근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도회지의 인간을 그린 작품이란 전세계 어디에서나 받아들여지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기도 하다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도 노르웨이의 숲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 는 작품이다. 1987년에 (고단샤그에서 간행되자 단숨에 4백만 부가 팔리면서 일본에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이라는 유행어를 낳게 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었더라면 하 루키라는 작가가 그토록 각별한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 리나라에서도 하루키의 주요 작품들은 각 출판사에서 앞다투어 번 역판을 출간했기에 노르웨이의 숲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단일 출판사로서는 (열림원이 처음으로 하루키의 작 품을 일관성 있게 모아 본격적으로 출판하고자 기획한 덕분에. 노 르웨이의 숲도 요번에 새로운 번역판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의 외 국 작품에 대해서 여러 종류의 번역물이 나오는 그것은 결코 나쁜 현 상이 아니다. 어느 나라이건 유명한 외국 작가의 작품들은 다양한 번역판이 출간되게 마련이며, 각 번역물마다 역자 나름대로의 개성 이 담겨 있기 때문에,독자들로서는 취향에 맞는 좋은 번역물을 읽 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히려 어설픈 번역판이 한 차례 출간된 것으로 그 작품에 대한 번역이 끝난다는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다. 그렇기에 이번의 번역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단어 하나하나에 구 애되지 않고 원본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림과 동시에, 번역물이 하나 의 완결된 문학 작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단편소설 (반딧불그을 장편으로 재구성한 작품 으로서, 일본의 (국문학)잡지를 보면, 연애소설로 분류되어 있다 특히 '나'(와타나베와나오코와 기즈키 세 사람이 이루는 삼각관 계는, 작중에서 도 여러 차례 언급이 되고 있는 피츠제럴드의 위대 한 개츠비가 모델이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작품의 고전으로서는 너무나도 유명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있지만 그러한 테마를 하루키가 현대적인 감각으로 살려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 다는 점에 성공의 비결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하루키 본인은 (내 작품을 말한다)를 통해 노르웨이의 숲을 '청춘 소설'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청춘시절에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되는 고뇌와 소외감, 그것을 통해서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모습.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끊 임없이 되풀이되어 온 소설의 테마이다 다만 작가나 작품에 따라서 고뇌의 실체가 우정이냐 사랑이냐 아니면 사상이냐 등의 차이는 있 지만, 결국 그러한 고뇌를 극복하고 성장해가는 청년상은 모두가 공 통된 것이다. 그렇기에 노르웨이의 숲에서 전개되는 사랑은 처음 부터 실연이 예정되어 있으며, 그 실연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로 승화된다. 결국, 작품 의 중심은 주인공 '나'(와타나베)와 나오코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 라, '나'의 내면적 갈등에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과 여인을 잃고 방황하는 '나'는 결국 어른으로 성장 해가는 과정의 청년상을 대표하는 인간이라 할 수 있으며 젊은층의 독자라면 누구나 '나'의 비극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 기에 노르웨이의 숲은 단순히 한 차례 스쳐가는 붐이 아니라. 오 랫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서 수많은 젊은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작 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앞으로도 이 작품에 관심을 두고 새로 운 각도의 번역을 시도하는 역자가 계속 나오기를 기대한다. 1997년 9월 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