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하루키 단편걸작선 지은이: 무라카미하루키 옮긴이 유유정 출판사: 문학사상사 중국행 화물선 처음으로 중국인을 만난 게 언제였더라? 말하자면 이 글은 그런 고고학적 의문에서부터 출발했다. 갖가지 출토품에 설 명서가 붙여지고, 종류별로 구분되어 분석이 행해진다. 그래, 최초로 중국인을 만난 게 언제였더라? 1959년이나 1960년이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게 언제건 별 상관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혀 상관이 없다. 나에게 있어서 1959년과 1960년은 꼴사나 운 유니폼을 입은, 못생긴 쌍둥이 형제나 다름이 없다. 사실 내가 타임 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1959년과 1960년을 분간해 내기 위 해서는 상당히 고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래도 역시, 나의 노력은 참을성 있게 계속된다. 구멍의 틀이 넓혀지고, 얼마 안되지만 새로운 출토품이 그 모습 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기억의 파편들이. 그렇다, 그건 분명 요한슨과 파터슨 이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 매치를 벌인 해였다. 나는 그해에 텔레비전으로 그 시합을 본 기억이 난다. 도서관에 가서 낡은 신문 연감의 스포츠 항을 찾아보 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확실해지리라. 이튿날 아 침,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까운 구립 도서관에 가보았다. 도서관의 정문 옆에는 어떻게 된 셈인지 닭장이 있었고, 닭장 안에서는 다섯 마리의 닭들이 좀 늦은 아침인지 좀 이른 점신인지를 먹고 있었다. 기분 좋은 날씨여서 나는 도서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닭장 옆에 있는, 도로 포 장에 쓰이는 돌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기로 했다. 담배를 피우면서 줄곧 닭 들이 모이를 먹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닭들은 아주 분주하게 모이통을 쪼아대고 있었다. 그들이 너무나도 허겁지겁 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식사 광경은 마치 몇 컷 되지 않는 옛날 뉴스 영화처럼 단속적으로 보였다. 담배를 다 피웠을 때, 내 안의 무엇인가가 확실히 변해 있었다. 그러나 왜인 지는 알 수 없는 채, 다섯 마리의 닭과 담배 한 개비만큼의 거리를 두게 된 새 로운 나는, 스스로에게 두 가지 의문을 던졌다. 먼저 한가지는, 내가 최초로 중 국인을 만난 정확한 날짜 따위에 누가 흥미를 가질까 하는 거였고, 다른 한 가 지는 볕이 따스하게 드는 도서실의 책상에 놓인 낡은 신문 연감과 나 사이에, 더 이상 서로 나눠 가질 그 무엇이 존재한단 말인가 하는 거였다. 그것은 타당한 의문인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닭장 앞에서 담배 한 개비를 더 피운 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과 닭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가 이름을 가지지 않듯이, 나의 그 기억도 날짜를 갖지 않는다. 하기야 대부분의 나의 기억은 날짜를 갖지 않는다. 나의 기억력은 몹시 불확 실하다. 그것은 너무도 불확실한 것이라서, 가끔 그 불확실성에 의해, 내가 누 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통 알 수가 없다. 불확실성이 증명하고 있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어떻든, 그런 식으로 나의 기억은 지독히도 애매하다. 앞뒤가 뒤바뀌기도 하 고, 사실과 상상이 헷갈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내 가신의 눈과 타인의 눈이 뒤섞이기도 한다. 그런 것은 이미 기억이라고조차 부를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국민학교 시절(전후 민주주의의 저 우스꽝스럽고도 서글픈 6년 간의 석양의 나날들)을 통해서 제법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는 사건이라고는 단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이 중국인 이야기고, 또 하나는 어느 여름 방학 오후에 있었던 야구 시합 이야기다. 그 야구 시합에서 나는 센터를 지켰는데, 3회 때에 뇌진탕을 일으켰다. 물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뇌진탕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근처 고등학 교 운동장의 한구석에서 그 시합을 했던 것이, 그날 내가 뇌진탕을 일으키게 된 주된 이유엿다. 나는 센터를 넘어서 날아가는 야구공을 전속력으로 쫓아가다가, 농구 골대에 얼굴을 정면으로 부딪혔던 것이다. 눈을 뜬 건 포도덩굴 아래의 벤치에서였다. 벌써 날은 저물어 가고, 바싹 마 른 운동장에 뿌려진 물 냄새와, 베개 대신 베고 있던 새 글러브의 가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양쪽 머리에 통증이 왔다.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무슨 말인가를 지껄인 것 같다. 내 곁을 지키고 있던 한 친구가, 나중에 주저하면서 그걸 알려 주었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괜찮아, 먼지만 털면 아직 먹을 수 있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아직도 나는 알 수가 없다. 아마 꿈이라도 꾸었었나 보 다. 어쩌면 그 꿈은 급식빵을 운반하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꿈이었는지 도 모른다. 그렇지 않곤 그런 말에서 연상되는 정경이라고는 달리 생각나는 게 없으니까. 나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도 대때로 그 말을 머리 속에서 굴려 보곤 한 다. "괜찮아, 먼지만 털면 아직 먹을 수 있어." 그 말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나는 나라는 인간의 존재와 나라는 인간이 더듬 어 가지 않으면 안될 '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가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하나의 지점-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몹시 막막한 작업이다. 죽음은 어쩐지 나에게 중국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항구 도시의 산기슭에 있는, 중국인 자녀를 위한 국민학교(이름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으니 앞으로는 편하게 '중국인 국민학교'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좀 어색 한 호칭인 것 같지만 양해를 바란다)를 방문하게 된 것은 그곳이 내가 치를 모 의 시험 고사장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고사장은 여러 군데로 나뉘어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중국인 국민학 교로 가도록 지정받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아 마 무슨 사무상의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근처의 고사 장으로 지정받았으니까. 중국인 국민학교? 나는 아무나 붙잡고, 중국인 국민학교에 대해 아느냐고 묻고 다녔다. 누구 한 사람, 무엇 하나도 알지 못했다. 단지 아는 것이라고는, 그 중국인 국민학교가 우리 학군으로부터 전철로 30분이나 되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당시의 나는 혼자서 전철을 타고 어딘가로 갈 수 있는 타입의 아이가 아니었 기 때문에, 사실상 나에게 그곳은 '세상의 끝'과 같았다. 세상의 끝에 있는 중국인 국민학교. 2주일 후의 일요일 아침, 나는 몹시 우울한 기분으로 한 다시의 새 연필을 깎 아, 지정된 대로 도시락, 슬리퍼와 함께 비닐 가방에 넣었다. 그날은 유난히 맑 고 따뜻한 가을날 일요일이었는데, 어머니는 나에게 두툼한 스웨터를 입혀 주었 다. 나는 혼자서 전철을 타고, 내가 내릴 곳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출입문 앞에 붙어 서서 바깥 풍경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중국인 국민학교는 수험표 뒤에 인쇄된 지도를 볼 것도 없이 금새 찾을 수 있 었다. 슬리퍼와 도시락으로 불룩해진 가방을 든 한 무리의 국민학생들 뒤를 따 라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가파른 고갯길은 수십, 수백명의 국민학생들이 줄을 지어 같은 방향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불가사의하다면 불가사의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땅바닥에 공을 쳐대지도, 하급생의 모자를 잡아당기지도 않고 그저 묵 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나에게 어쩐지 일정하지 않은 끊임 었는 움직임 같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고갯길을 오르면서, 나는 너무 두꺼운 스웨터 탓에 계속 땀을 흘렸다. 나의 막연한 상상과는 달리 중국인 국민학교의 전경은 우리 학교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훨씬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어둡고 긴 복도, 끈끈하고 곰팡내 나는 공기.......2주일 동안 내가 머리 속에서 멋대로 그려 온 그런 이미지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멋진 철문 밑을 들 어서자 정원수에 둘러싸인 자갈길이 완만한 활 모양을 그리면서 길게 이어져 있 었고, 현관 정면에는 맑은 연못이 오전 9시의 태양을 눈부시게 반사시키고 있었 다. 학교 건물 주위에 있는 나무들 하나하나에는 중국어로 쓰인 설명판이 매달려 있었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자도 있었고, 읽을 수 없는 글자도 있었다. 현관 저쪽에는 학교 건물에 둘러싸인 네모난 운동장이 있었는데, 구석마다 누군가의 흉상이나 기상 관측용 흰색 상자, 철봉 등이 있었다. 나는 지시대로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지정받은 교실로 들어섰다. 밝은 교실 에는 정확하게 마흔 개의 산뜻한 용수철식 책상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각 책상 에는 수험 번호를 쓴 쪽지가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내 자리는 창문 가의 맨 앞, 결국 나는 이 교실에서 제일 앞 번호인 셈이었다. 흑판은 새것인 듯 진초록색이었고, 교탁 위에는 분필 상자와 하얀 국화 한 송 이가 꽂힌 꽃병이 있었다. 모든 것이 청결하고 단정하게 정된되어 있었다. 벽 면의 코르크 보드에는 그림이나 작문이 한 장도 붙어있지 않았다. 수험생들에 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부러 떼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필통과 책받침을 나란히 꺼내 놓고 나서 턱을 고 이고는 눈을 감았다. 답안지를 옆구리에 낀 감독관이 교실로 들어온 건 그로부터 15분 가량이 지나 서였다. 감독관은 마흔 살이 더 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왼발을 마룻바닥에 끌 듯 가 볍게 절름대는 걸음걸이에, 왼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것은 등산길 어귀의 토산물 가게에서난 팔고 있을 법한 조잡하게 만든 벚나 무 지팡이였다. 그리고 그의 절룩대는 걸음걸이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그 지팡이의 조잡함이 더욱 눈에 띄었다. 마흔 명의 국민학생들은 감독관의 모습이 나타나서라기보다는 그가 기고 온 답안지를 보자,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교단에 오른 감독관은 먼저 답안지 뭉치를 교탁 위에 내려 놓고, 그 옆에다 딸깍 소리를 내며 지팡이를 세웠다. 그리고 모든 좌석이 결원없이 차 있음을 확인하고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흘깃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몸 을 지탱하려는 듯 교탁 모서리를 두 손으로 짚고 얼굴을 꼿꼿이 들어, 잠시 천 장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침묵. 그 침묵은 15초 가량 계속되었다. 긴장한 국민학생들은 숨을 죽인 채 책상 위의 답안지를 응시했고, 다리가 불편한 감독관은 물끄러미 천장 구석만 바라보 고 있었다. 그는 연한 쥐색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었고, 시선을 떼자마자 곧 그 색깔이나 문양이 잊혀질 듯한 특징 없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천천히 렌즈의 양면을 닦은 후 다시 끼었다. "제가 이 시험의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가'라고 말했다. "답안지가 배포되면 책상 위에 엎어놓은 채 움직이지 말아 주십시오. 절대로 겉이 보이게 놓어선 안됩니다.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 놓도록 하세오. 제가 '시작하세요'하거든 겉이 보이도록 뒤집어 놓고 문제를 풀도록. 종료 10분 전이 되면 '10분 전'이라고 알려 주겠습니다. 사소한 실수는 없었는지, 다시 한 번 확 인하고 제가 '됐습니다'하거든 시험을 끝내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처음처럼 답 안지를 엎고 양손은 무릎 위에 올려 놓도록. 알겠어요?" 침묵. "맨 먼저 이름과 수험 번호부터 적어 넣는 걸 잊지 말도록" 침묵. 그는 다시 한 번 손목시계을 들여바보았다. "자, 아직 10분 가량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동안 여러분과 얘기나 좀 할까 합 니다. 모두 마음을 편안히 가지세요" 휴우, 하는 긴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저는 이 국민학교에 근무하는 중국인 교사입니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 해서 최초로 중국인을 만났다. 그는 전혀 중국인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제 껏 중국인을 만나 본일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 교실에선 평소 학생 여러분 또래의 중국인 학생들이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중국과 일본은, 말하자면 이 웃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이웃끼리 사이 좋게 지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죠?" 침묵. "물론 우리 두 나라 사이엔 비슷한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점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여러 분과 여러분의 친구 사이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아무리 사이가 좋 은 친구라 하더라도, 역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죠? 우리 두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노력만 한다면, 반드시 좋은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서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첫걸음입니다." 침묵.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봅시다. 가령, 여러분이 다니는 학교에 많은 중국인 아 이들이 시험을 보러 왔다고 합시다. 지금의 여러분들처럼 여러분의 책상에 중 국인 아이들이 앉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가정(假定). "월요일 아침, 여러분이 학교에 갑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이 게 웬일입니까. 책상은 온통 낙서랑 상처 투성이가 되어 있고, 의자엔 껌이 붙 어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책상 속의 실내화는 한짝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자,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침묵. "어때요. 학생? 기분이 좋겠습니까?" 하고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겠는가. 나의 수험 번호가 제일 앞번인 탓이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중국인을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하며 그는 앞쪽으로 돌아섰다. 나를 바라보던 눈들도, 그제야 교단 쪽으로 되돌 아갔다. "여러분도 책상에 낙서를 하거나, 껌을 의자에 붙이거나, 책상 속의 물건을 가 지고 장난을 치거나 해선 안됩니다. 알겠습니까?" 침묵. "중국인 학생들은 좀더 분명히 대답한답니다." 그러자 "예"하고 40명의 국민학생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아니 39명이. 나는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됐습니다. 얼굴을 들고 가슴을 펴십시오." 우리는 모두 얼굴을 들고 가슴을 폈다. "그리고 자존심을 가지십시오." 20년이나 지난 지금, 옛날의 시험 결과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건, 고갯길을 걸어가던 국민학생들의 모습과 그 중국인 교사 에 대한 것뿐이다. 그리고 얼굴을 들고 가슴을 펴고 자존심을 가지라는 것. 나는 항국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기에, 주위에는 제법 많은 중국인들이 있었다. 중국인이라지만 우리들과 다른 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또 그들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천차만별인 것처럼,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와 그들 사이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개인이 가지는 개체성(個體性)의 기묘함이란 온갖 카테고리나 일반론을 초월한다. 우리 반에도 몇 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성적이 좋은 녀석이 있는가하면 좋지 않은 녀석도 있었고, 명랑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말이 없는 녀석도 있었다. 대 궐같이 큰 집에 사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햇빛도 들지 않는 세 평짜리 단칸방 에 부엌이 하나 딸린 초라한 아파트에 사는 녀석도 있었다. 갖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특별히 친하게 지낸 적은 없었다. 나는 아무 나하고 쉽게 친해지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상대방이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다른 누구이건 간에 마찬가지다. 그들 중 한 사람과는 10년쯤 뒤에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데, 거기에 대해선 나 중에 얘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무대를 도쿄로 옮긴다. 내가 두 번째로 만난 중국인은-이렇게 말하는 건, 즉 '별로 친하게 말을 주고 받은 적은 없지만, 클라스메이트였던 중국인들을 빼놓고는'이라는 뜻이다-대학 2 학년 봄에 아르바이트하던 데서 알게 된 말이 없던 여자 대학생이다. 그녀는 나와 같은 열아홉 살이었고, 작달막한 키에, 생각하기에 따라선 미인이 랄 수도 있는 여자였다. 나와 그녀는 3주일간을 함께 일했다. 그녀는 아주 열심히 일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열심히 일했는데, 그녀의 일하 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나의 열성과 그녀의 열성은 근본적으로 질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하자면, 나의 열성이 '적어도 무엇인가를 한다면, 열심히 할 만한 가치가 있 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열성이라면, 그녀의 열성은 좀더 인간 존재의 근원에 가 까운 종류의 것으로 보였다.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열성에는 그녀 주위의 온갖 일상성이 그 열성에 의해 가까스로 하나로 묶이고 지탱되는 게 아닌가 생각되는 그런 기묘한 절박감이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와 일의 보조가 맞지 않아, 도중에 화를 냈다. 끝까지 불평하지 않고 그녀와 짝이 되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나밖에 없 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나와 그녀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말을 걸 어 봤지만, 그녀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한 태도여서 나도 더 이 상은 말을 걸지 않았다. 나와 그녀가 최초로 대화라고 할 수 있는 얘기를 나눈 건, 함께 일하기 시작 한 지 2주일 가량 지나서였다. 그녀는 그날 오전에 30분 가량, 일종의 패닉(광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 가 그런 증세를 보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원인은 작업 순서의 대단치 않은 착오 때문인 듯했다. 분명 그 일은 그녀에게 책임이 있긴 했지만 내가 볼 때 그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실책이었다. 일시적인 실수였을 뿐으로 누구나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그마한 '실수'의 파문은 그녀의 머리 속에서 조금씩 커져, 이윽고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혼란의 구렁으로 모습 을 바꾸어 갔다. 그녀는 앞쪽으로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입을 다문 채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그녀의 모습은 나에게 밤 바다에서 서 서히 침몰해 가는 배를 생각게 했다. 나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녀를 의자에 앉힌 다음, 꼬옥 주먹을 쥔 그녀의 손가 락을 하나하나 풀어 주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게 했다. 그리곤 아무 걱정 말라 고 기분을 돋우어 주었다. 처음부터 일을 다시 한다고 그렇게 작업이 늦어질 것도 아니고, 가령 늦어진댔자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도 아니라고. 그녀는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마시고 나자, 좀 나아진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그녀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점심 시간에 우리는 가벼운 잡담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했다. 우리는 분쿄구에 있는 조그마한 출판사의 어둡고 비좁은 창고 안에서 일했다. 창고 옆으로는 더러운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단순하고, 지루하고, 게다가 분주한 일이었다. 내가 전표를 접수해서, 지시받 은 수효의 책을 안고 창고 입구까지 나르면, 그녀가 그것에 로프를 감고 기록부 에 체크를 했다. 그것이 다였다. 창고에는 난방 장치 같은 건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얼어 죽지 않으려면 우리는 싫든 좋든 쉬지 않고 움직이는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앵커리지 공항에서 제설 작업을 하고 있는 거나 별 차이가 없을 듯한 생각이 들 만큼 추웠다. 점심 시간이 되면,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따뜻한 점심을 먹고, 휴식이 끝나기 까지의 한 시간을, 몸을 녹이면서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몸을 녹이 는 게 휴식 시간의 주요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패닉을 일으킨 후부터,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단편적으로밖에 얘기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녀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요코하마에서 작은 수입품 가게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가 취급하는 하물의 태반은 홍콩으로부터 들어오는 값싼 의료품이었다. 중국인이라지만 그녀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중국이나 홍콩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으며, 다닌 학교도 일본인 국민학교였다. 중국어는 거의 못했으나, 영 어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도쿄의 사립 여자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장래 희망은 통역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마고메의 아파트에서 오빠와 같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표현을 빌 린다면, 오빠한테로 굴러들어갔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마음이 맞지 않았기 때문 이다.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알게 된 사실은, 대강 그런 정도였다. 그 3월의 2주간은, 가끔씩 진눈깨비 섞인 차가운 비가 뿌리곤 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던 날 저녁, 경리과에서 급료를 지불받은 나는 잠시 망설이 다가 이전에 몇 번 가본 적인 있는 신쥬쿠의 디스코테크로 그 중국인 여학생을 유인해 보았다. 그녀를 유혹해서 어째 보자든가,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다. 나에겐 고교 시절부터 사귀어 온 여자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서, 우리 사이는 이전만큼 잘 맞지가 않았다. 그녀는 고베에 살았고 나는 도쿄 에 있어서, 만나는 건 고작해야 2개월이나 3개월마다였다. 우리는 아직 어렸으며, 그만한 거리와 시간의 공백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서 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앞으로 그 여자 친구와 의 관계를 대체 어떤 식으로 전개해 나가면 좋을는지도,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나는 도쿄에서는 완전한 외톨이였다. 친구라고 할 만한 친구도 없었고, 대학 수업은 따분하기만 했다. 그때의 나는 숨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여학생을 꼬 셔서 춤을 추러 가거나 가볍게 술을 마시고, 터놓고 얘기를 하면서 즐기고 싶었 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그때 나는 아직 열아홉 살, 뭐니뭐니해도 가장 인생을 즐기고 싶은 나이였던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5분 가량 생각에 잠겼다가, "하지만 춤을 춰본 적이 없는 걸요" 하고 말했다. "별건 아니야. 춤이란 건 대단한 게 아니라구. 음악에 맞춰서 몸을 이리저리 흔들기만 하면 되니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먼저 레스토랑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피자를 먹었다. 이제 아르바 이트는 다 끝났다. 두 번 다시 그 추운 창고 속에 들어가 책을 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해방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많은 농담을 했고, 그녀는 어느 때보다 잘 웃었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예정대로 디스코테크로 가서 2시간쯤 춤을 추었다. 홀은 적당한 온도였고, 땀 냄새와 누군가에게서 풍겨 나오는 향수 냄새가 감 돌고 있었다. 필리핀 밴드가 산타나를 모방하고 있는 듯한 디스코테크였다. 땀이 나면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땀이 마르면 또 춤을 추었다. 가끔씩 무대 위의 조명들이 점멸했다. 조명등 불빛 아래에서의 그녀는, 창고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춤추기에 익숙해지자 그녀는 그것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지칠 때까지 춤을 추고 나서 그곳을 나왔다. 3월의 밤바람은 아직 쌀 쌀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봄이 느껴졌다. 몸에는 아직 더운 열기가 남아 있 어서 우리는 코트를 팔에 걸친 채로 정처없이 거리를 걸었다. 게임 센터를 기웃거리고,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는 또 걸었다. 봄 방학은 아 직도 절반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걸으려고만 한다면 그대로 다마가와 강변까지라도 걸어갔을지 모른다. 나는 지 금도 그날 밤 공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시계가 10시 20분을 가리켰을 때, 이제 가야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11시까지는 가야 하거든요." 그녀는 몹시 미안한 듯이 나에게 말했다. "아주 엄하신가 봐?"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오빠가 까다로워요. 보호자인 양하면서. 그렇지만 얹혀사는 형편에 뭐랄 수도 없고." 하지만 그녀가 자기 오빠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말투로 알 수 있었다. "구두 잊지 마" 하고 나는 말했다. "구두? 아아, 신데렐라 말이군요. 알았어요. 잊지 않을게요." 우리는 신쥬쿠 역 계단을 올라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괜찮다면 전화 번호 좀 가르쳐 주지 않을래? 다음 번에 또 어디든 함께 놀 러 갔으면 좋겠어" 하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화 번호를 일러 주었다. 나는 그것을 디스코테크에서 가지고 나온 종이 성냥 뒷면에다 볼펜으 로 받아 적었다. 전철이 도착하자 나는 그녀를 먼저 태워 주며 "안녕"하고 말했 다. "즐거웠어. 정말 고마워. 또 만나." 문이 닫히고 전철이 움직이자 나는 옆쪽 플랫폼으로 옮겨가 이케부쿠로 방면 으로 가는 전철을 기다렸다. 나는 기둥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면서 그날 밤의 일을 순서대로 되새겨 보았다. 레스토랑에 들어갔던 일부터 디스코테크, 그리고 산책까지.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여학생과 데이트를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것이 즐거웠고, 그녀 역시 즐거워했다. 우리는 적어도 친구는 될 수 있을 테지. 그녀는 말수가 좀 적은 편이고 신경질적인 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 게 본능적으로 호의를 가질 수가 있었다. 나는 구두창으로 담배를 밟아 끄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수많은 거 리의 소음들이 하나로 뒤섞여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나 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줄곧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삼켜 버리려고 해 도 까끌까끌한 것이 목에 걸려 있어서 넘길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나 는 어쩐지 황당한 실수를 저지른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것이 뭔자글 알아낸 것은 15분 후였다. 그제야 나는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반대편인 야마테 방면 전철에 태워 보냈던 것이다. 나는 메구로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타고 갔던 전철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지극히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녀를 반대편 전철 에다 태웠단 말인가? 술은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을까? 혹은, 나는 나 자신의 생각으로 머리 속이 꽉 차 있었는지도 모른다. 역의 시계는 10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집의 문을 닫을 시간까지 도착하진 못할 것이다. 그녀가 빨리 내 실수를 알아차리고, 전철을 제대로 갈아 탔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타입이 아니다. 잘못 알고 태워 준 전철이라도, 줄곧 그대로 있을 타입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게다. 자기가 전철을 잘못 타고 있다는 사 실을. 아이고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고마고메 역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11시 10분이 좀 지났을 때였다. 계단 옆에 서 있는 나를 보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 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팔을 끌어 벤치에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그녀는 백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그 끈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다리를 앞으로 뻗어 하 얀 구두의 코끝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과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고, 깜빡 착각을 했었나 보 다고 말했다. 틀림없이 멍청하게 있었기 때문일 거야. "정말 몰랐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당연하지. 안 그러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일부러 그런 줄 알았어요." "일부러?" "화가 난 줄 알았다구요." "화가 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어째서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지?" "몰라요. 나하고 함께 있는 게 따분해서 그랬을 테죠 뭐" 하고 그녀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따분하긴? 함께 있는 게 정말 재미있었는걸. 거짓말이 아니야." "거짓말, 나하고 함께 있는 게 뭐가 재미있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건 내 가 더 잘 알고 있는걸요. 정말 실수로 착각을 했다 하더라도, 그건 사실 마음속 으로 그렇게 바라고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지 말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일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틀림없이 마지막도 아닐텐데 뭐." 그녀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려 무릎 위의 코트에 굴러 떨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잠자코 앉 아 있었다. 전철이 몇 대나 달려와서 승객들은 토해 놓고 지나갔다. 그들의 모 습이 계단 위로 사라지자 다시 조용해졌다. "부탁이에요. 나를 그만 내버려두세요. 처음에는 나도 뭔가 착각했겠지, 그렇 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대로 전철을 타고 있었죠. 그런데 전차가 도쿄 역을 지날 때쯤부터 맥이 풀려 버리는 것이었어요. 그때부 터 모든 게 싫어지고, 다시는 이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는 눈물에 젖을 앞머리칼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무슨 말이건 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밤바람에 흐트러진 석 간 신문이 펄럭이며 플랫폼 끝 쪽으로 날아갔다. 그녀는 다시 눈물에 젖은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기며 힘없이 웃었다. "됐어요. 처음부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어요. 여기는 나를 위한 장 소가 아니야." 그녀가 말하는 장소란, 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암흑 의 우주를 돌고도는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를 가리키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 었다. 나는 아무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나의 무릎 위에 올려 놓고, 그 위에다 내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손바닥은 촉촉했다. 나는 큰맘먹고 입을 열었다. "사실 난, 나라는 인간을 누구한테 그럴듯하게 설명하지 못해. 나 자신도 가 끔 나라는 인간을 잘 모를 때가 있으니까. 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을 찾고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을 때가 있어. 그래서 내 자신이 어떤 능력 을 지니고 있고, 그 능력을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할지 그것도 모르겠단 말야. 그런 걸 일일이 세심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때때로 정말 두려워지곤 해. 그러 다 보면 자기 자신밖에 생각지 못하게 되거든.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아주 고집스러워지는 거야. 그러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기 도 하거든. 그래서 나는 내가 괜찮은 인간이라고 말할 용기가 조금도 없어." 나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서 말을 그치고 말 았다. 그녀는 내 말이 계속되기를 기다리듯이 꼼짝 않고 있었다. 여전히 자기의 구 두 코끝만을 응시하며.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역무원이 우리를 무시한 채 빗자 루로 플랫폼의 먼지를 쓸어 모으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오가는 전철의 횟수도 아주 뜸해졌다. "난 함께 있는 게 정말 즐거웠어.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리고 뭐라고 말 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너라는 사람이 나한테는 어쩐지 아주 진지하게 생각된 단 말이야.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왜 그럴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줄곧, 너와 함께 있고 싶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어. 그래서 나 는 늘 그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지. 그 진지하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 일까 하고." 그녀는 얼굴을 들고 한참이나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전철을 일부러 잘못 태워 준 건 아니야. 아마 무슨 생각에 골몰해 있었나 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전화할게. 어디 가서 우리 이야기 좀 많이 하자."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눈물 자국을 지우고 나서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 다. "..........고마워요. 정말 미안해요." "네가 미안할 건 뭐야. 잘못은 내게 있는데."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혼자 벤치에 남아, 마지막 담배에 불 을 붙이고, 빈 담뱃갑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시간은 벌써 12시가 다되었었 다. 내가 그날 밤에 저지른 두 번째 실수를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9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건 너무나도 바보스럽고, 너무나도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빈 담뱃갑 과 함께 그녀의 전화 번호가 적힌 종이 성냥까지 함께 버렸던 것이다. 나는 모든 방법을 다해 알아보고 다녔지만, 아르바이트하던 곳의 명부에도, 전 화 번호부에도, 그녀의 전화 번호는 없었다. 대학 학생과에도 문의해 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 이후 그녀하고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녀가 내가 만난 두 번째의 중국인 이었다. 세 번째의 중국인 이야기. 그는 앞에서도 썼듯이 내가 고교 시절에 만난 사람이다. 친구의 친구쯤 되는 사람으로 몇 차롄가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결혼을 하고도 벌써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6년 동안에 고양이를 3마리를 매장했다. 몇 개의 희망을 태워 버리고, 몇 개의 고통을 두툼한 스웨터에다 싸서 땅에 묻었다. 모두가 이 막막하고 거대한 도시 안에서 행해졌다. 싸늘한 12월의 오후였다. 바람은 없었지만 날씨는 몹시 추웠으며, 가끔씩 구 름 사이로 보이는 햇빛도 거리 위로 내린 어둑한 회색 막을 없애 버리지는 못했 다. 나는 은행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아오야마 거리에 있는 우리벽 찻집으로 들어 가 커피를 마시면서, 방금 산 소설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소설이 싫증나면 눈을 들어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또 책 을 읽었다. 한 사내가 앞에 서 있다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렇지요. 네?" 나는 깜짝 놀라 책으로부터 눈을 들어 그렇다고 말했다. 상대방의 얼굴을 전 혀 생소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바느질이 고급스런 네이비 블루의 블레이저 코트와, 색깔이 잘 맞는 레지멘털 타이를 한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조금씩 닳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양복이 구석이라든가 낡았다든가 그런 건 아 니었다. 다만 그저 닳았다는 말이다. 얼굴 생김새도 그와 비슷했다. 단정하고 반듯하긴 하지만, 얼굴에 나타나 있 는 표정은, 급한 대로 어디선가 억지로 긁어 모은 단편(斷片)의 집합에 지나지 않은 듯이 보였다. 마치 갑작스런 파티의 테이블에 차려 놓은 고르지 못한 접 시 같았다. "앉아도 될까요?" "그럼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마주보고 앉자 불을 붙이는 것도 아니면서, 호주머니에서 담뱃갑과 조그 만 금제 라이터를 꺼내 테이블 위에다 놓았다. "어때요. 날 모르겠소?" "모르겠는데요. 유감스럽지만 난 늘 그런 식이라오. 다른 사람을 잘 기억하 지 못해요."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아예 그렇게 고백했다. "어쩌면 옛날 일을 잊고 싶어하는 게 아닌지? 무의식적으로 말이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나는 인정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여자 종업원이 물을 날라오자, 그는 아메리칸 커피를 주문했다. 그는 아주 약 하게 해달라고 했다. "위가 나쁘거든. 사실은 커피, 담배 모두 금해야 된다네." 그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위가 나쁜 사람이 위 장 이야기를 할 때의 특유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데 아까 이야기의 계속인데 말야, 나는 자네하고 똑같은 이유로, 옛 날 일을 남김없이 몽땅 기억하고 있다네. 정말 묘하지 뭔가. 나 역시도 구차한 모든 일들을 깨끗이 잊고 싶다네. 하지만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여러 가지 일 들이 자꾸 떠오른단 말일세. 잠을 자려고 하면 할수록 여러 가지 일들이 자꾸 떠오른단 말일세. 잠을 자려고 하면 할수록 눈이 말똥말똥해질 때가 있지. 그 와 마찬가지야. 왜 그런진 나도 모르겠어. 알고 있을 사람이 없는 일까지도 기 억한다니까. 이처럼 세세하게 옛날 일만 기억한다면, 앞으로의 인생 기억을 담 을 만한 공간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건 아닌가 하고 불안해질 정도로 기억 이 선명하다니까. 정말 피곤해."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다 엎어 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도 정말 생생하게 기억하는 거야. 그때의 날씨부터 온도, 냄새까지. 마 치 지금 거기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만큼. 그래서 이따금 나 자신도 뭐가 뭔 지 알 수 없게 돼버리거든. 도대체 진짜 나는 어디서 살고 있는가 하고. 지금 현재의 일들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단지 기억에 지나지 않는 듯한 생각이 들 때조차 있어. 그런 기분 알겠나?"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에 대해서도 난 아주 잘 기억하고 있지. 거리를 지나가다 유리창 너머로 한눈에 알아보았으니까. 아는 척해서 방해가 됐나?" "아니야. 그런데 난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는걸.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미안하다니. 이쪽이 멋대로 쳐들어왔는데 뭐. 마음 쓰지 말게.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그런 거라니까. 기억이란 사람에 따라 활동 방법이 전혀 다르다구. 용량도 다르고 그 방향도 다르지. 두뇌의 활동을 돕는 기억이 있는 가 하면, 제지해 버리는 기억도 있지.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거야. 그러니 마음 쓰지 말라구. 대단한 건 아니니까." "이름을 알려 주지 않겠나?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으니. 끝내 모르면 기분이 안 좋거든." "이름 따위 아무려면 어때. 글세, 뭐 그걸 자네가 기억해도 좋고, 기억하지 못 해도 좋아.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다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만약 자네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그처럼 마음이 거북하다면,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다지 지장이 있는 건 아니 니까." 커피가 왔지만 그는 그것을 별로 달갑지 않다는 듯이 홀짝거렸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의 진의가 파악되지 않았다. " '너무나 많은 물이 다리 밑으로 흘러갔다.' 왜 그런 문장이 고등학교 때 영어 교과서에 있었지. 기억 나나?" 하고 그는 물었다. 고등학교 때? 그렇다면 이 사람은 고교 시절의 친구란 말인 가? "그럼, 틀림없어. 요전번에 다리 위에 서서 멍하게 아래를 보고 있었거든. 그 랬더니 그 영어 예문이 문득 떠오르는 거야. 실감한 셈이지. 옳거니, 시간이란 이렇게 흘러가고 있구나 하는 걸." 그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깊숙이 묻혀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 이 도대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표정을 만들고 있는 유전자의 군데군데가 닳아서 끊겨 버린 그런 느낌이 들었 다. "결혼했나?" 하고 그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없어." "나는 하나 있다네. 남자아이야. 벌써 네 살이지. 유치원에 다녀. 튼튼한 게 자랑이야." 아이 이야기가 끝나자, 우리는 잠자코 있었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자 그는 얼른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아주 자연스럼 손놀림이었다. 나는 남이 담 뱃불을 붙여 주거나 술을 따라 주거나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경 우는 거의 자연스러웠다. 불을 붙여 준 것을 얼마 동안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 였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하고 있지?" 하고 그가 물었다. "하찮은 사업" 하고 나는 대답했다. "사업?" 그는 잠시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 대단한 건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물거렸다. 그는 몇 번 고개를 끄덕거렸을 뿐 더 이 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 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이야기가 길어질 테고, 나는 그것을 일일이 다 설명 하기에는 다소 지쳐 있었다. 게다가 나는 상대방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다. "놀랐는 걸. 자네가 사업을 하고 있다니. 사업에는 전혀 맞지 않게 보였는데 말야." 나는 웃었다. "옛날에는 책만 파고 있었지." 그는 뜻밖이라는 듯 계속해서 말했다. "글세, 책이야 뭐 지금도 읽고 있지만" 하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백과사전은?" "백과사전?" "그래, 백과사전은 가지고 있어?" "아니." 나는 이유도 모르는 채 고개만 저었다. "백과사전은 보지 않나?" "그야 있으면야 읽겠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방에는 그런 걸 둘 만한 장소조차 없었다. "사실은 말야, 나는 지금 백과사전을 팔러 다닌다네." 그때까지 마음속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그에 대한 호기심이 싹 가셔 버렸다. 옳거니, 그는 백과사전을 판매하고 있구나. 나는 다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소리나지 않게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탐나는 건 사실이야. 있으면 좋겠다 싶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돈 이 없네. 정말 빈털터리야. 빚을 잔뜩 안고 있다가 겨우 갚기 시작한 판국이라 네." "이봐, 이봐, 그만둬. 내가 뭐 자네한테 백과사전을 떠맡기려고 하는 걸로 생 각하진 마. 나 역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의 가난뱅이 신세지만, 그렇게까 지 억지로 팔지는 않아. 게다가 나는 일본인한테는 팔지 않아도 좋다고 돼 있 다구. 이건 계약이야" 하고 그는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일본인?" "그렇지. 나는 중국인 담당이거든. 중국인한테만 그 백과사전을 파는 거지. 전화 번호부에서 시내의 중국인 가정을 골라낸 후 목록을 작성해서 깡그리 호별 방문을 하는 거야. 누가 생각해 냈는지 모르지만 아주 그럴듯한 아이디어 아닌 가. 매상도 나쁘진 않아. 초인종을 누르고,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이런 거 한 번 구경하시죠'하면서 명함을 슬쩍 내놓거든. 그거면 돼. 그 다음 엔 소위 동포애 따위로 이야기를 슬슬 풀어 나가는 거지." 그때 갑자기 머리 속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났어" 하고 나는 소리쳤다. 그는 고교 시절에 알고 지내던 중국인이었다. "참 이상하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중국인을 상대로 백과사전을 팔러 다니는 신세가 됐는지, 나 자신도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물론 하나하나 자잘한 사 정이야 생각이 나지만 말야, 그것이 하나로 뭉뚱그려져서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 가는 것과 같은 전체적인 것은 내다보지 못했어. 하지만 알고 보니 어느 틈엔 가 이렇게 돼 있더군." 그는 남의 얘기라도 하는 듯한 어조였다. 나와 그는 같은 반이 된 적도 없었고, 개인적으로도 그다지 친근하게 이야기 를 나눈 적은 없었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정도의 사이였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그는 백과사전을 팔러 다니는 세일즈맨이나 하고 있을 타입 의 사람은 아니었다. 가정 환경도 나쁘진 않았고, 성적 역시 분명 나보다는 나 았었고, 여자애들한테도 인기 있는 편이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굉장히 지루하고 우울하고 그저 그런 이야기들 이야. 별로 들을 만한 것도 아니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대꾸할 말도 없고 해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나만의 탓도 아니지. 별의별 까다로운 일들이 겹치고 겹쳤거든. 하기야 뭐 결국은 내 잘못이긴 하지만"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동안에 고교 시절의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려 고 했다. 그러나 아주 막연하게밖에는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언젠가 누구 네 집 식탁에 둘러앉아서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일이 기억났다. 아마도 어느 여름날 오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확실한 건 아니다. 그 건 아주 오래 전에 꾸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꿈처럼 여겨졌다. "어째서 자네를 아는 척했을까?"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묻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테이블 위의 라이터를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리다 말을 이었다. "어쨌든 분명히 방해가 됐겠지. 미안해. 하지만 자네를 만나 반가웠어. 뭐가 반가운 건지 알 수 없지만." "방해될 거 없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나 역시도 특별한 이유 없이 조금은 반가 웠던 것이다.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더 이상 할말을 찾지 못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머지 담배를 빨아들였고, 그는 남은 커피를 마셨 다. "자아 슬슬 가볼까. 이렇게 수다만 늘어놓을 처지가 아니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팔아야 할 물건이 있거든." 그는 담배와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 속에다 집어 넣어면서 이렇게 말하곤 의자 를 약간 뒤로 뺐다. "혹시 팜플렛 가진 것 없나?" 하고 나는 물었다. "팜플렛?" "백과사전용 말이야." "아아, 지금은 없는데, 보고 싶나?" 그는 멍청하게 말했다. "보고 싶군. 그냥 호기심으로 말야." "그럼 집으로 우송해 주지. 자네 주소를 알려 주지 않겠나?" 나는 수첩에서 종이 한 장을 떼내어 주소를 적은 후 그에게 건네 주었다. 그 는 그것을 흘깃 보고는 착착 넷으로 접더니 지갑 속에 집어 넣었다. "꽤 괜찮은 사전이라네. 내가 팔고 있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잘 만 든 거야. 컬러 사진도 많아. 틀림없이 도움이 될 거야. 나도 가끔은 손에 들 고 대강대강 읽어 보는데, 심심치 않아."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유가 생기면 사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좋겠군. 하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난 아마 백과서전하고는 인연 을 끊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중국인 가정을 대충 한바퀴 돌고 나면 그 다음엔 일거리가 없어질텐데 뭐. 그렇게 되면 무엇을 하지? 다음에는 중국인을 대상으 로 한 손해보험이나 비석 세일즈는 어떨까? 아무려면 어때, 뭔가 팔 물건이 있 을 테지." 그는 선거 포스터에 있는 얼굴처럼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때,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마도 그 친구하고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에게 뭔가 중국인에 관한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내 자 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상투적인 인사말을 입에 담았을 뿐이다. 지금이라고 해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서른 살을 넘어선 한 사람의 남자로서, 다시 한 번 외야 플라이 볼을 전속력으로 쫓다가 농구 골대에 부딪혀, 다시 한 번 글러브를 베개 삼고 포도덩 굴 밑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났다고 하면, 나는 이번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중얼 거릴 것인가? 어쩌면 나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야'라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야마테 방면의 전철 안에서였다. 나는 문 앞에서 붙어 서서 차표를 잃지 않도록 손에 꼭 쥔 채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 다. 우리들의 거리, 그러나 그 풍경은 왠지 내 마음을 몹시 침울하게 했다. 도시 생활자가 연중 행사처럼 빠져 드는 저 익숙하고, 텀텀한 커피나 젤리와 같은, 정 신의 어슴푸레한 어둠이 나를 또 사로잡고 있었다. 후줄근한 빌딩, 이름도 없는 사람들의 군상, 끊임없는 소음, 빽빽하게 늘어선 자동차 행렬, 회색빛 하늘, 공간을 뒤덮는 광고판, 욕망과 체념과 초조함과 흥분. 거기에는 수많은 선택과 무수한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건 무수(無數)이자 동시에 제로(0)였다. 우리는 그러한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또한 우리 손에 있는 것은 제로였다. 그것이 도시였다. 나는 문득 그 중국인 학생의 말이 생각났다. "처음부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어." 나는 도쿄의 거리를 바라보면서 중국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렇게 해서 많은 중국인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중국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었다. <사기(史記>로부터 <중국의 붉은 별>까지, 나는 중국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중국은 나만의 중국일 따름이 다. 그건 나만이 읽을 수 있는 중국이다. 내게만 메시지를 보내는 중국이다. 지구 위에 노랗게 칠해진 중국하고는 다르다. 또 하나의 중국인 것이다. 그것 은 하나의 가설이며, 하나의 잠정적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중국이라 는 말에 의해 잘려진 나 자신이다. 나는 중국을 방랑한다. 하지만 나는 비행기를 탈 필요가 없다. 그 방랑은 이 도쿄의 지하철 안이나 택시의 뒷자리에서도 행해진다. 그 모험은 이웃 치과의 대기실이나 은행 창구에서도 행해진다. 나는 어디나 갈 수 있고, 어디도 갈 수 없다. 도쿄-그리고 어느날, 야마테 방면 전철 안에서 이 도쿄라는 거리는 갑자기 그 리얼리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 풍경은 창 밖에서 무참하게 붕괴되기 시작했 다. 나는 차표를 움켜쥐면서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 도쿄 거리에 나의 중국이 재처럼 쏟아져서 이 거리를 결정적으로 침식해 간 다. 그것은 자꾸자꾸 허물어져 가고 있다. 그렇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말은 사라지고, 우리가 품었던 꿈도 언젠가는 아슴푸레 잊혀져 간다. 저 영원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지루한 애돌레슨스(adolescence:청년기)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잦아들어 소멸되듯이. 오류......오류라는 건 저 중국인 여대생이 말했듯이(어쩌면 정신분석의가 말했 듯이) 결국은 역설적인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류야말로 나 자신이자 당 신 자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디에도 출구 같은 건 없다. 그래도 나는 과거의 충실한 외야수로서의 작은 보람을 트렁크 속에 챙기고, 항구의 돌층계에 걸터앉아, 공허한 수평선 위로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를 중국행 화물선을 기다리자. 그리고 중국 거리의 휘항한 지붕들과 그 푸르른 초 원을 생각하자. 상실과 붕괴 뒤에 오는 것이 비록 무엇이건, 이제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 으리라. 마치 명타자가 내야의 수비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신념에 찬 혁명가가 교수대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면.... 그러나 친구여, 중국은 너무나 멀다.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 이야기의 발단은 투정부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맑게 갠, 7월의 일요일 오후였다. 7월의 첫 일요일이었다. 조그마한 구름덩이가 둘인가 셋, 잘 음미된 품위 있는 구두점인 양, 머나먼 하 늘에 하얗게 떠 있었다. 태양의 햇살은 그 무엇에도 막힘이 없이, 한껏 대지로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잔디밭 위에 똘똘 뭉쳐서 버려진 초콜릿 은종이마저, 그 런 7월의 왕국에서는, 호수 속 전설의 수정(水晶)처럼 자랑스럽게 광채를 발산하 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상자 속에 상자가 있는 장치처럼, 광채 속에 또 하나 다른 광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광채 속의 광채는 마치 무수하게 자잘한 꽃가루처럼 보였다. 불투명하고 부드러운 꽃가루였다. 그것들은 공중을 어디나 없이 떠돌다가, 이윽고 서서히 시간을 들여 춤추듯 땅에 내려앉았다. 나는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미술관 앞 광장에 들렀다. 그리고 연못 가에 앉아서, 동행과 둘이서 별 하는 일도 없이 맞은편에 있는 일각수(一角獸) 동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초여름 장마가 그제서야 막 갠 참이었다. 바람에 떡갈나무 잎이 희미하 게 팔락거리고, 얕은 못물 수면(水面)은 이따금씩 잔물결을 일으키곤 했다. 시간은 그런 식으로 움직였다가는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움직였다. 맑은 물 속에는 콜라 깡통이 숱하게 잠겨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수몰되어 버린 고대 도시의 폐허를 연상케 했다. 모두가 똑같은 유니폼 차림의 동네 야구 팀, 자전거를 탄 아이들, 개를 데리고 온 노인, 조깅 셔츠를 걸친 외국인 청년 하나가 우리 앞을 가로질러 갔다. 잔디밭 위에 놓인 대형 트랜지스터 라디어로부터 달콤한 멜로디의 팝송이 바 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 왔다. 잃어버린 사랑이라느니, 잃어버릴 것만 같은 사 랑이라느니, 하는 노래였다. 어디선가 전에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은 멜로디였는데, 확실히 들었다고 확 신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저 다른 그 무엇인가를 닮았을 뿐인지도 몰랐다. 나는 멍하게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태양의 햇살이 나의 벌거숭이 양팔에 흡수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소리도 없이 아주 평온하고, 조용하게. 나는 이따금씩 팔을 얼굴 앞으로 올려 꼿꼿하게 뻗쳐 보았다. 여름이 막 왔던 것이다. 그런 일요일 오후에, 어째서 하필이면 가난한 아줌마가 나의 마음을 붙잡았는 지, 나로선 짐작도 가지 않는다. 주위에는 가난한 아줌마의 모습은 없었으며, 가난한 아줌마의 존재를 상상케 하는 '그 무엇'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아줌마는 나를 찾아왔다가 사라져 갔다. 겨우 몇백 분의 1초의 순간이긴 해도, 그녀는 나의 마음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뒤에 불가사의한 사람 형상의 공백을 남겨 놓고 갔다. 마치 창 밖을 누군가가 쓱 지나쳐 그대로 사라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급히 창께로 뛰어가서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거기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가난한 아줌마? 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여름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찾 아왔다가, 그리고 사라져 갔던 것이다. 어휘는 투명한 탄도(彈道)처럼, 일요일 오후의 한낮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시작이란 항상 그렇다.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존재하며, 다음 순간에는 모 든 것이 상실된다. "난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 나는 동행에게 그렇게 말해 보았다. 나는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다. "가난한 아줌마? 왜 그럴까? 왜 가난한 아줌마일까?" 그녀는 좀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뭔가 눈으로 재기라도 하듯이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다니, 난들 알게 뭐야. 무슨 일인지 항상 나를 사로잡고 있으니 알다 가도 모르겠어." 그리고 나서 잠시 동안 우리는 말없이 있었다. 나는 그동안 가슴속에 남아 있는 사람 형상의 공백을, 손가락으로 그려 보았다. "그런 이야길 누가 읽고 싶어할까?"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야 읽을 거리로는 매력적이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고 나는 수긍했다. "그럼 왜 그런 걸 쓰려고 해?" "그건 말로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순 없어. 내가 왜 가난한 아줌마에 대한 소설 을 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소설을 써야만 하고, 또 거기에 대한 소설을 다 쓰고 나면, 그 소설을 써야 할 이유를 설명할 이유도 없어지는 거 아닐까?" 그녀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담배를 끄집어 내어 불을 붙였다. 그녀는 항상 담배를 꾸긴다. 때로는 너무나 꾸겨져서 불이 붙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게 불이 붙었다. "그래, 당신 친척 중에 가난한 아줌마 있어?" "아니, 없어." "내 친척 중에는 가난한 아줌마가 한 분 있어. 그분은 정말 진짜배기야. 진 짜 가난한 아줌마. 몇 년간 함께 산 적도 있어."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평소나 다름없이 아주 조용했다. "하지만 난 아줌마 이야기는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아. 한마디도 쓰고 싶지 않아."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다른 노래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앞에 것과 비슷 한 노래였는데, 이번 노래의 멜로디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당신한테는 가난한 아줌마가 한 사람도 없어. 그러면서도 가난한 아줌마에 대한 이야기를 뭔가 쓰고 싶어하지. 나한테는 진짜 가난한 아줌마가 있어. 그 런데도 그에 대해서는 쓰려 하지 않아. 어쩐지 좀 이상하지 않아?" 나는 그럴싸해서 수긍했다. "왜 그럴까?" 그녀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했을 뿐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돌아앉은 채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물 속을 휘젓고 있었다. 마치 나의 질문 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타고 물 속의 폐허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틀림없이 지금도 저 물 밑에는 나의 물음표가 닦고 또 닦은 금속 조각처럼, 반짝반짝 빛나면서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주위의 콜라 깡통을 향 해 똑같은 질문을 해대고 있지나 않을까.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왜 그럴까? 그녀는 꾸깃꾸깃 꾸겨진 담배 끝에서 꾸깃꾸깃한 담뱃재를 땅바닥에다 떨구었 다. "솔직히 말해서 그 가난한 아줌마에 대해서는 나도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한 적당한 표현을 알아낼 수 없단 말이야. 나로서는 감 당할 수 없어. 난 진짜 가난한 아줌마를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모르긴 해도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먼 데까지 뿌리가 뻗어 있을걸." 나는 다시 한 번 일각수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두 마리의 일각수는 어딘가에 내팽개쳐진 시간의 흐름을 향해 초조하다는 듯이 네 개의 앞발을 치켜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물에 담그고 있던 손가락을 셔츠 자락으로 몇 번인가 훔치고 나서 정면을 보았다. "당신은 가난한 아줌마에 대해 쓰려 하고 있어. 당신은 그것을 받아 들이려 하고 있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걸 받아들인다는 건 동시에 그걸 구제하는 일 도 되거든. 하지만 지금의 당신 형편으로 그걸 할 수 있을지 어떨지? 당신한 테는 진짜배기 가난한 아줌마조차도 없으면서." 나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아니야, 상관없어. 그 말이 옳은 것 같애." 그렇다. 내게는 진짜배기 가난한 아줌마조차도 없다... 이건 마치 노래 구절 같잖아. 당신 친척 중에도 역시 가난한 아줌마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하고 당 신은 '가난한 아줌마를 갖고 있지 않다'는 공통점을 가진 셈이다. 기묘한 공통점이다. 마치 조용한 아침의 물구덩이 같은 공통점이다. 하지만 당신도 뭐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가난한 아줌마의 모습 정도는 본 적이 있을텐 데. 어느 서가에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는 책이 한 권 정도 있듯이, 또 어느 옷 장에나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셔츠 한 벌이 있듯이, 어느 결혼식에나 한 사람의 가난한 아줌마는 있게 마련이다. 그녀는 누구에게 소개되는 적도 거의 없고, 누가 말을 거는 적도 없다. 연설 을 권유받는 적도 없다. 그녀는 낡은 우유병처럼 테이블 앞에 그저 얌전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눈치를 살피듯이 소리 나지 않도록 콘소메 수프를 먹고, 생선용 포크로 샐러 드를 먹고, 강낭콩을 잘 집지도 못하고, 막판에는 아이스크림 스푼이 모자란다는 꼴을 하면서. 그녀가 보낸 선물을 운이 좋으면 옷장 속에 간직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 으면 이사할 때에, 먼지 투성이의 뭔지 모를 트로피들과 함께 버려지고 말 터이 다. 가끔씩 끌려 나오는 결혼식 앨범에도 그녀는 말이 찍혀 있을뿐, 그 모습을 마 치 허울 좋은 익사체를 방불하고 있다. 여기 있는 이 여잔 누구지? 여기 이 두 번째 줄에 안경 낀... 으응 아무도 아니야, 하고 젊은 남편은 대답한다. 그저 가난한 아줌마일 뿐이야. 그녀에게는 이름도 없다. 그저 가난한 아줌마일 뿐이다. 물론 이름 같은 거야 언젠가는 소멸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소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우선 맨 먼저 죽음과 동시에 이름마저 소멸되는 경우. 이건 간단하다. '강물 은 마르고 고기는 죽어 소멸되라', 혹은 '불길은 숲을 에워싸고 새들은 타서 소 멸되라'...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또한 낡은 텔레비전처럼, 죽은 후에도 하얀 빛이 화면 위로 깜박깜박 헤매다 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어지는 경우. 이것도 나쁘진 않다. 길을 잃은 인도 코끼리의 발자국 같긴 하지만, 그런 대로 괜찮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죽기 전부터 이미 이름이 없어지고 마는 경우, 이 른바 가난한 아줌마들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때로 가난한 아줌마와 같은 상실 상태에 빠져 들 때가 있 다. 저녁 때 터미널의 혼잡 속에서는, 내가 가야 할 곳이며, 이름이며, 주소가 머리 속에서 싹 지워져 버린다. 물론 아주 짧은 순간, 5초나 10초 동안의 일이 긴 하지만. 이런 일도 있다. "당신 이름이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아요" 하고 누군가가 말한다. "좋아요, 마음 쓰지 말아요. 별로 대단한 이름도 아니니까요." 그러자 그는 자신의 목젖께를 몇 번이고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까지 나올 뻔했지만 말이지." 그럴 때면 나는 흙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왼쪽 발끝만을 땅 위로 내놓고 있는 그런 기분이 든다. 누군가 때로는 거기 걸려서, 그리고 빗나가기 시작한다. 이 거 실례, 하는 말이 여기까지 나와 있긴 하지만 말이야....... 자 그럼, 잊혀진 이름은 도대체 그 모습이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이 미로와 같은 도시에서 그들이 살아 남을 확률은 모르긴 해도 지극히 낮을 것임 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수송 트럭에 치어 노상에서 납작해지고, 또 누군가는 그 저 마침 잔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차도 타지 못하고 객사를 하고, 또 누군가는 주머니 가득한 훈장을 저울추 삼아 깊은 강물에 가라앉아 버리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 중의 몇 사람은 용케 살아 남아, 잊혀진 이름의 거리에 당도해서, 거기다 조용한 공동체를 쌓아 올렸을지도 모른다. 작은, 정말 작은 거리다. 그리고 그 입구에는 틀림없이 이런 간판이 서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진 다. 외인 출입 금지. 용건 없이 끼여든 자는, 물론 그 나름대로의 사소한 앙갚음을 받게 되는 것이 다. 그건 어쩌면 나를 위해 준비된 사소한 앙갚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잔등 에는 작은 가난한 아줌마가 붙어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8월 중순이었다. 어떤 동기로 해서 알 게 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저 문득 느꼈을 뿐이다. 내 잔등에는 가난한 아줌마 가 있다고. 그건 결코 불쾌한 감각을 아니었다. 대단한 무게도 아니었고, 귓전에다 구린 내 나는 입김을 토해대지도 않았다. 그녀는 표백된 그림자처럼 내 잔등에 착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어지간히 주의해 보지 않고는 붙어 있는 사실조차 남 들은 몰랐다. 동거하고 있는 고양이들도 처음 이삼 일은 그녀를 의심스런 눈으로 보았지만, 그녀 쪽에 자기들의 구역을 짓밟을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내 그 존재에 익숙해졌다. 몇몇 친구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틈 에, 내 등뒤에서 그녀가 가끔씩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불안한 걸." "염려할 거 없어. 얌전한데다 무슨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니." "아니, 그야 잘 알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어쩐지 청승맞아 보여서." "되도록 안 보면 되잖아." "글세 말이야,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들쳐 업고 왔나?" 하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어디랄 것도 없어. 그저 줄창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지. 그것 뿐이 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지었다. "알 만하네. 자넨 옛날부터 성격이 그랬으니까." "응." 우리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채로 한 시간쯤 위스키를 마셨다. "이것 봐, 도대체 어디가 그토록 청승맞단 말인가?" "말하자면 말이지, 왠지 어머니가 엿보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드는 거야." "그건 또 왜 그럴까?" "왜 그렇다니.....아무래도 자네 잔등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우리 어머니 같단 말야" 하고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몇 사람인가의 그러한 인상을 종합해 보니-나 자신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 었으니까-내 잔등에 붙어 있는 것은,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된 가난한 아줌마가 아니고, 보는 사람 나름대로의 심상에 따라, 형상이 만들어지는 일종의 에테르 (精氣)와 같은 그런 모양이었다. 어느 친구의 경우는, 그것이 작년 가을에 식도암으로 죽은 아키타 개(犬)였다. "열 다섯 나이에 말이지, 벌써 비리비리한 늙은 개지 뭐야.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식도암이라니 참 안됐어." "식도암?" "그래, 식도에 생긴 암. 못 견딜 일이지. 나도 그것만은 질색이야. 매일같이 찍찍 울어댔다니까. 그렇다고 목소리가 온전하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웬만하 면 안락사를 시켜 줄 까도 생각했지만, 어머니가 반대하는 바람에." "왜?" "알게 뭐야. 틀림없이 당신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게지, 뭐" 그는 별 재미도 없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무튼 한두 달 동안을 물만 먹고 살았다니까. 헛간 바닥에서 말이야. 그건 정말 지독한 냄새였다구." 거기서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단한 개도 아니었지. 겁쟁이라서 사람만 보면 짖어대고, 아무런 쓸모도 없 었어. 귀찮기만 하고, 주제에 피부병까지 앓고 말이야." 나는 수긍이 갔다. "숫제 개가 아닌 매미로 태어났던들 본인으로서도 무척 행복했을 지 모르지. 아무리 울어대도 사람들이 싫증내지 않았을 테고, 식도암에 걸리는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개로서, 입에 플라스틱 튜브를 내민 채로 내 잔등에 달 라붙어 있었다. 어느 부동산업자의 경우, 그것은 훨씬 옛날의 국민학교 여교사였다. "1950년 분명 한국전쟁이 시작되던 해였지요." 그는 두꺼운 타월로 얼굴의 땀을 닦으면서 말을 이었다. "한 2년동안 그분은 저희 반 담임을 맡았죠. 정말 그때가 그리워지는군요. 그립다고 할까, 실은 거의 잊고 있었지만." 그는 내가 그 여교사의 친척쯤 되는 것처럼 나에게 시원한 보리차를 권하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참 불쌍한 분이었지요. 결혼하던 해에 남편이 징용으로 끌려가 버렸는데, 수송선을 타고 가는 도중에 펑, 그게 그러니까 1943년의 일이었던가? 그분은 그대로 국민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이듬해의 공습으로 화상을 입었다지 뭐요. 왼쪽 뺨에서부터 왼쪽 팔까지 말입니다." 그는 왼쪽 뺨에서부터 왼쪽 팔에다 길게 선을 내리그으면서 자기 보리차를 단 숨에 들이키고 나서 타월로 또 땀을 닦았다. "곱상하게 생긴 분이었는데 가엾게끔....., 듣자하니까 성격까지도 딴판으로 달 라졌다지 뭡니까. 살아 계신다면 벌써 예순에 가깝겠지요. 1950년이라....." 이처럼 거리의 지도며, 결혼식의 좌석 표가 만들어져 갔다. 나의 잔등을 중심 으로 가난한 아줌마의 고리가 조금씩 넓어져 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주위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 마치 빛살이 빠지듯이 친구들이 사라져 갔다. "그 친구 자체는 나쁜 녀석을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그 청승맞은 어머니- 식도암으로 죽은 늙은 개, 혹은 화상 입은 흉터가 남아 있는 여교사-의 얼굴이 엿보이는 건 좀....." 나는 어쩐지 나 자신이 치과 의사가 되어 버린 그런 느낌이 들었다. 누가 나 를 책망하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나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다 들 나를 피했고, 어디선가 얼굴을 대하더라도 그럴듯하게 구실을 대어 이내 모 습을 감추었다. "당신하고 둘이 있다 보면 아무래도 어색해요" 하고 어느 여자아이가 아주 민망하다는 듯이, 하지만 정직하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우산 꽂이나 뭐 그런 거라면, 나도 참 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우산 꽂이. 그래 좋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원래부터가 남하고 사귀는 일에 능숙한 편이 아니니까. 게다가 나는 우산 꽂이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싶진 않단 말이다. 그런 식으로 친구들은 나를 피했지만, 그 대신에 매스컴이 앞을 다투어 취재 차 나를 찾아왔다. 그 대부분이 주간지였다. 그들은 하루 건너 찾아와서 나와 아줌마의 사진을 찍고, 그녀의 모습이 잘 찍히지 않는다고 투덜대고는 얼토당토 않은 질문만 산더미처럼 퍼붓고는 돌아갔다. 나로서는 잡지에 실림으로 해서 가난한 아줌마에 대해 뭔가 새로운 발견이나 전개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런 발견도 없었거 니와 전개도 없었다. 피로만이 겹쳐 갈 뿐이었다. 텔레비전의 모닝 쇼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아침 6시 전에 두들겨 깨워져 자 동차로 방송국 스튜디어에 나가 정체 모를 커피를 얻어 마셨다. 주위에서는 누군지 모를 동아리들이, 뭐가 뭔지 모를 짓들을 하고 있었다. 나 는 그대로 스튜디오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멈칫멈칫하는 동안에 내 차례가 오고 말았다. 사회자는 카메라에 비치지 않을 때는 아주 심통스럽고, 오만하며, 천박한 사내 였다. 사사건건 주위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나는 첫눈에 그 사내가 싫었다. 그런데 다시금 카메라에 붉은 불이 켜지자, 그는 돌변했다. 그는 상냥하고 지적 이며 인상 좋은 중년 남자가 되었다. "자, 그럼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다'코너입니다." 하고 그는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지금 여기 계시는 OO씨는 우연한 일로 잔등에다 가난한 아줌마를 짊어지게 되셨습니다. 어쨌든 잔등에 가난한 아줌마가 달라붙어 있는 분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렇게 된 경위라든가 고충담을 들어 보려고 합니다." 그는 내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떻습니까? 무슨 불편을 느끼시는 일은 없으신지요?" "특별하게 불편하다든가 고생스럽다든가 하는 건 없습니다. 무거운 것도 아니 고, 먹고 마시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어깨가 결린다거나 뭐 그런 일도...." "없습니다." "언제부터 거기 달라붙어 있었습니까?" 나는 일각수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말했지만, 사회자는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말씀입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선생님께서 연못 가에 앉아 있는데, 그 연못 속에 가난한 아줌마가 숨어 있다 가 선생님의 뒷잔등에 달라붙었다, 그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이구 답답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역시 이런 곳에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식의 웃음거리 아니면 이류(二流)의 괴담일 뿐이었다. "가난한 아줌마는 유령이 아닙니다. 어디에 숨어 있지도 않았거니와 누구한테 달라붙은 적도 없어요. 그건 이를테면 그저 평범한 낱말일 뿐이지요. 평범한 언어일 뿐입니다." 나는 시들해지면서 그렇게 설명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말하자면, 언어라는 것은 의식에 접속된 전극과도 같은 것이니까, 그것을 통 해서 똑같은 자극을 계속적으로 보내고 있노라면, 거기에 반드시 뭔가 반응이 일어나게 마련이지요. 물론 개인에 따라 그 반응의 종류는 전혀 다르겠지만, 제 경우 그것은 독립된 존재감 같은 것입니다. 꼭 입 안에서 혓바닥이 자꾸만 부 어오르는 그런 기분이지요. 제 잔등에 붙어 있는 것도, 결국은 가난한 아줌마라 는 말에 불과합니다. 거기엔 의미도 없고 형체도 없지요. 굳이 말한다면 그건 개념적인 기호같은 것입니다." 사회자는 어쩐지 난처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의미도 없고 형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우리는 현재 댁의 등에서 확실하게 뭔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게 하고 있 습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기호라는 건 그러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지워 버리려는 마음만 있다면 자신의 의지로 그 이미지든 존재든 자유롭게 지워 버릴 수 있다, 그 말씀이겠군요" 하고 젊은 여성 보조 진행자가 어색함이 보이기 시작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끼 여들어 질문했다. "아니지요. 그건 의지하고는 관계없이 계속 존재하지요. 기억이나 다름없습 니다. 예를 들어 잊고 싶은데 아무리 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란 것이 있지 요. 바로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여성 진행자는 납득이 가지 않는 상태에서 질문을 계속했다. "예를 들어서요, 아까 말씀하신 말을 개념적인 기호로 만드는 작업은 저에게도 가능한 일일까요?" "잘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때 사회자가 말참견을 했다. "가령 제가 개념적이라는 말을 매일같이 되풀이했다고 합시다. 그럼 언젠가는 제 잔등에도 개념적인 모습이 나타날지도 모르겠군요?" "대개 원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고 나는 대답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 '개념적'이란 말의 '개념적인 기호화'가 행해진다, 그 말이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스튜디오의 강한 라이트와 역겨운 냄새가 밴 공기 탓으로 나는 머리가 아파 왔다. 사람들의 요란한 목소리도 나의 고통을 조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념적'이란 도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요?" 하고 사회자가 물었다. 몇몇 방청객들이 웃었다. "몰라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나는 이미 있는 가난한 아줌마 한 사람을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형편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일이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다음 광고 시간이 되기까지 뭔가 지껄이고 있었을 뿐이란 말이다. 물론 세계 전체가 광대다. 누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강한 빛에 노출된 방송국의 스튜디어로부터 어두운 숲속 깊은 곳 은둔자의 암자에 이르기 까지, 상황의 뿌리는 모두가 하나다. 나는 잔등에 가난한 아줌마를 짊어진 채 그러한 세계를 걷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런 광대의 세계 속에서도 두드러진 광대였다. 어쨌든 가난한 아줌마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으니까. 짐작컨대 그 여자아이가 말했듯이 나는 차라리 우산 꽂이라도 짊어졌어야 옳 았다. 그랬더라면 사람들은 나를 동아리 속에 깨워 주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격주로 그 우산 꽂이의 색깔을 바꾸어 가며 온갖 파티마다 얼굴을 내밀었을 게 아닌가. "이번 주 우산 꽂이는 핑크색이네" 하고 누군가 말하면, "그래 맞아" 하고 나는 대답한다. "다음주에는 블리티시 그린으로 바꾼다." 핑크색 우산 꽂이를 짊어진 사내와 침대에 파고드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여자 아이가 세상에 있을지 누가 알겠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짊어진 것은 우산 꽂이가 아닌 가난한 아줌마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내가 짊어지고 있는 아줌마에 대한 세상의 흥미는 자꾸 자꾸 희미해져 갔다. 결국은-나의 동행이 말했듯이-누구도 가난한 아줌마에 대해 흥미를 가지지 않 을 것이다. 당초에 있었던 약간의 진지함이 가야 할 길을 다 가고 나서 소멸되 고 나면, 나중에는 바다 밑과 같은 침묵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은 나하고 가난 한 아줌마가 일체화해 버린 그러한 깊은 침묵이었다. "당신이 출연한 텔레비전 프로 봤어" 하고 나의 동행이 말했다. 우리들은 전과 다름없이 연못 가에 앉아 있었다. 그 녀를 만난 것은 3개월 만이고, 지금은 벌써 초가을이다. 시간은 눈 깜짝 할 사 이에 흘러 버렸다. 그만큼 오래도록 그녀를 만나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었다. "좀 피곤해 보이더군." "몹시 피곤했다구." "당신이 너무나 달라 보였어."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랬었지, 아닌게아니라 나는 나답지가 않았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다 트레이너 셔츠의 긴 소매를 몇 번이나 접고 있었다. 접 었다가는 펴고, 폈다가는 접고 했다. 마치 시간을 보냈다 당겼다 하듯이. "당신도 이제야 겨우 자기 몫의 가난한 아줌마를 갖게 되었나 봐" 하고 그녀는 말했다. "겨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기분이 어때?" "마치 우물 속에 빠진 수박 같은 기분이야." 그녀는 무릎 위에 착 접힌 부드러운 트레이너 셔츠를, 마치 고양이를 쓰다듬 듯이 만지작거리면서 웃었다. "그녀에 대해 뭐 좀 알아낸 게 있어?" "조금은 알아냈다고 생각해. 적어도 조금은." "그래서 얼마나 썼어?" "아니야" 하고 나는 고개를 약간 저었다. "전혀 쓸 수 없어.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어쩌면 이대로 못 쓸지도 몰라." "엄살은." "언젠가 네게 말했듯이 내가 아무것도 구제할 수 없다면, 내가 가난한 아줌마 에 대해 뭔가 쓴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잖아?"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한참을 잠자코 있었다. "그러지 말고 나한테 뭐든지 물어 봐.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를 테니." "가난한 아줌마에 대한 권위로 말이야?" "그래, 물어 봐. 내가 가난한 아줌마에 대해 뭐든 지껄여 보고 싶은 그런 기 분이 드는 일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그것을 가다듬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때때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가난한 아줌마가 되는 걸까 생각해 보거든. 가 난한 아줌마는 나면서부터 가난한 아줌마일까, 아니면 가난한 아줌마라는 상황 이 개귀신처럼 거리 모퉁이에 딱 입을 벌리고 있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삼 켜 가지고 몽땅 가난한 아줌마로 둔갑시켜 버리는 걸까 하고 말이지." 그녀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질문을 했다는 듯이. "그건 대개 어느 쪽이건 똑같을 거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똑같다고?" "응, 이를테면, 가난한 아줌마한테는 가난한 아줌마적인 소녀 시절이 있었고, 청춘이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없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건 그 어느 쪽 이든 상관없어. 이 세상에는 몇백만의 결과를 위한 몇백만 개의 이유가 넘쳐나 고 있으니까, 이유를 붙이기 위한 몇백만 개의 이유라든가. 그런 따위야 전화 한 번만 걸면, 한무더기 간단하게 손에 넣을 수 있잖아. 하지만 당신이 원하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닐 테지?" "글세, 그거하곤 다르다고 생각해" "그녀는 존재하는 거야. 그러니 당신은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해. 이 유고 원인이고 그런 거야 아무러면 어때. 가난한 아줌마는 그저 거기 존재할 뿐이야. 가난한 아줌마란, 그 존재 자체가 이유거든. 우리가 특별한 이유도, 원 인도 없이 이렇게 현재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은 거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줄창 연못 가에 앉아 있었다. 해맑은 가 을 햇빛이 그녀의 옆 얼굴에 작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봐, 당신 잔등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내게 묻지 않을래?"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내 잔등에 뭐가 보이지?" 하고 내가 물어 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여. 당신밖에 보이지 않아" 하고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하고 나는 말했다. 물론 시간은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어 가겠지. 마치 노상에서 죽기까 지 늙은 말을 후려치는 저 마부처럼. 하지만 그것은 지독하게 조용한 타박이기 에, 스스로가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는 얼마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가난한 아줌마라는 이른바 수족관의 유리창을 통해서, 그 런 상황의 버둥거림을 목격할 수 있다. 답답한 유리 상자 속에서 시간은, 가난 한 아줌마를 오렌지를 짜내듯 짜고 또 짰다, 즙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그녀 속의 그 같은 완벽함이다. 더는 정말이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거야! 그렇다. 완벽함은 마치 빙하 속에 갇혀 버린 시체처럼, 아줌마란 존재의 핵 (核) 위에 걸터 앉아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었나 싶을 정도의 훌륭한 빙 하다. 아마 1만 년의 태양만이 그 빙하를 녹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가난한 아줌마가 1만 년이나 살아 있을 리는 만무하니까, 그녀는 그 완벽주의와 함께 살고, 그 완벽주의와 함께 죽어, 그 완벽주의와 함께 장사지 내게 되는 것이다. 흙 속의 완벽함과 아줌마. 그럼, 1만년 후에는 어둠 속에서 빙하가 녹고 완벽주의는 무덤을 비집어 열 듯이 지표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도 모른다. 지표의 양상은 분명 완전 하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자리에 결혼식이라는 의식이 의연하게 존재하고 있다면, 가난 한 아줌마가 남겨 놓은 완벽주의는 그 자리에 불려가, 사치스런 테이블 매너로 코스를 끝내고, 일어나서 정성껏 축사를 늘어놓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자. 결국 그건 서기 11980년의 일 일 테니까. 가난한 아줌마가 나의 잔등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늦가을의 일이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끝내야 할 볼일이 생각나서, 나는 아줌마와 함께 교외선 전 차에 올랐다. 오후의 교외선 전차에는 숫자로 셀 만큼의 승객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장거리 외출은 정말 오랜만이었기에 나는 창 밖의 풍경을 지루한 줄도 모르고 바라보고 있었다. 공기는 상큼하게 맑았고, 산은 부자연스러우리만큼 푸르렀으 며, 선로 가의 나무들은 군데군데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돌아오는 전차칸에서 맞은편 좌석에 앉은 사람은 30대 중반의 갈강갈강한 엄 마와 두 아이였다. 엄마 왼편에 앉아 있는 큰 여자아이는 유치원 제복인지 감 색 서지의 원피스를 입었고, 빨간 리본이 달려 있는 새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 다. 폭이 좁고 둥근 챙이 달려 있는 예쁜 모자였다. 엄마 오른편에는 세 살 정도의 사내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특별히 남의 눈을 끌 만한 특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얼굴 생김새며 옷차림이 모두 수수했 다. 엄마는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대개의 엄 마들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전차에 올라와서 통로를 거쳐 나와 맞은 편 자리에 앉았을 때, 한 번 흘끔 보았을 뿐이다. 그 다음부터 나는 줄창 문고본만 읽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칭얼칭얼대는 여자아이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아이의 목소 리에는 뭔가 호소하는 듯한 절박한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시끄러워, 전차 안에서는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하는 엄마의 말이 들렸다. 엄마는 무릎 위에다 보따리를 올려 놓은 채, 잡지 를 펼쳐 들고 열심히 읽고 있었다. "있잖아, 엄마 내 모자가....." 하고 그 여자아이가 말했다. "그만해" 하고 엄마가 톡 쏘아붙였다. 여자아이는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그 말을 그대 로 삼켜 버린 채, 불만스러운 듯이 입을 다물었다. 엄마를 가운데 놓고 앉아 있 는 사내아이가 조금 전까지 누나 머리에 있던 모자를 손에 들고, 두 손으로 장 난을 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손을 뻗어 그걸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사내아 이는 몸을 피하면서 절대로 놓으려 하지 않았다. "모자가 망가진단 말이야" 하고 여자아이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엄마는 귀찮다는 듯이 사내아이 쪽을 흘 깃 보고, 앉은 채로 손을 내밀어 모자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두 손으로 힘껏 모자를 움켜쥔 채 고집스럽게 놓지 않았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깨끗하게 단념했다. "잠시 그대로 가지고 놀게 하려무나. 어차피 이내 싫증이 날 테니까" 하는 식으로 엄마는 딸에게 말했다. 여자아이는 죽어도 승복할 수 없다는 얼 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그 말에 달리 말대꾸하지는 않았다. 말대꾸해 봤댔자 꾸중만 들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아이는 입을 꼭 악문 채 남동생의 손에 있는 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동안에도 줄곧 잡지만 읽고 있었다. 잠시 후, 사내아이가 이번에는 모자에 달려 있는 빨간 리본을 잡아 당기기 시 작했다. 엄마의 무관심이 그를 부추기고 있는 듯했다. 그는 리본을 주무르는 일이 누나를 초조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 면서 그는 일부러 리본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건 정말 짓궂은 행위였다. 내가 보아도 조금 화가 치밀었다. 어지간하면 일어나서 사내아이 손에서 모자를 빼앗아 버릴까도 싶을 정도였다. 여자아이는 꼼짝 않고 남동생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 생각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그녀는 순간 벌떡 일어나 손바닥으로 남동생의 뺨을 찰싹 때리고는 상대방이 주춤하는 틈에 잽싸게 모자를 낚아채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굉장히 재빠른 동작이었다. 모든 행위가 순간적으로 일어났으므로 엄마와 동 생이 그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엔 심호흡을 한 번 해야 할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동생이 갑자기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그와 동시에 엄마의 손바닥이 여자 아이의 드러내 놓은 무릎을 찰싹 때렸다. 그리고 나서 사내아이의 뺨을 쓸어 주며 울음을 그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 다. "하지만 엄마, 내 모자가....." 하고 여자아이는 말했다. "전차칸에서 시끄럽게 구는 아이는 우리 아이가 아니야" 하고 엄마는 말했다. 여자아이는 입술을 깨문 채 얼굴을 숙이고 자기 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저리 가서 앉아." 엄마는 내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여자아이는 눈을 외면한 채 곧장 뻗어 있는 엄마의 손가락을 무시하려고 시도했지만, 엄마의 손가락은 공중에 얼어붙 은 채로 한참 동안이나 내 왼편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아, 어서 저리 가지 못하니. 너는 이제 우리 집 아이가 아니니까." 여자아이는 체념한 듯이 모자와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통로를 가로질러 와, 내 옆자리에 앉아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무릎 위에 올려 놓은 모자의 챙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정말 나쁜 건 동생이라고 여자아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 모자 의 리본을 데어 버리려고 했으니까. 아래를 보고 있는 아이의 뺨에 몇 줄기 눈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때는 이미 저녁 나절이 가까웠다. 차내 전 등의 희미한 노란 빛이, 마치 슬프게 보이는 나방의 비늘 가루처럼 주위를 반짝반짝 춤추듯 날고 있었다. 그것은 공중에 감돌며, 사람들 코며 입을 통해 소리 없이 몸속에 흡수되었다. 나는 책을 덥고 나서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어 놓고, 한참 동안 내 자신의 손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손바닥을 그처럼 차근차근 들여다본 것은, 생 각하면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차내 전 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내 손 은 유난히도 거무칙칙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그건 내 손 같지가 않았다. 그건 내 마음을 슬프게조차 만들었다. 그 손은 아무리 보아도 앞으로 그 누구도 행 복하게 해줄 손으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손같이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옆자리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그 여자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달래 주고 싶었다. 네가 한 일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고, 모자를 빼앗을 때의 그 솜씨는 정말 장한 것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물론 여자아이에게 손도 대지 않았거니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그 여자아이를 더욱 혼란에 빠뜨려 한층 겁에 질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내 손은 이렇게 더러워져 있지 않은가. 전차에서 내리자 주위에는 이미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스웨터의 계절이 가고 두꺼운 코트의 계절이 거리에 다가서고 있었다. 나는 잠시 겨울 코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코트를 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서 계단을 내려와 개찰구를 빠져 나왔을 즈음에 나는 갑자기 생각했 다. 알고 보니 가난한 아줌마가 어느 틈엔가 내 잔등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언제 그녀가 없어졌는지 나는 짐작도 못했다. 그녀는 올 때나 다름없이 누구 에게도 들키지 않고 내 잔등에서 살며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장소로 돌아가고, 나도 본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본래의 내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나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 다. 그것은 원래의 나 자신을 꼭 닮은,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 여겨졌다. 이제부터 어쩌면 좋을지 나는 막막하기만 했다. 사막 한복판에 서 있는, 글씨 가 지워져 버린 표식과도 같이, 나는 완전히 나 혼자뿐이었다. 그리고 방향의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서 거기에 들어 있던 잔돈을 몽땅 공중 전화에다 털어 넣 고, 그녀의 아파트 전화 번호를 돌렸다. 여덟 번 벨이 울리고 아홉 번째에 그녀 가 받았다. "자고 있었어" 하고 그녀는 흐리멍텅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저녁 6시에?" 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어젯밤부터 줄곧 작업이 밀려 있어서, 그걸 겨우 처리한 게 바로 2시간 전이 었어." "깨워서 미안해. 이런 말하는 거 좀 이상할 지 모르지만 그냥 진짜로 네가 살 아 있는지 어떤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구.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전화 저편에 있는 그녀의 차분한 미소를 느낄 수가 있었다. "염려해 줘서 고마워. 염려하지 마,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기 위해 열심히 일했더니, 덕분에 졸리고 또 졸려서 죽을 것만 같아. 이제 됐어? 안심했어?" "안심했어." "이봐, 산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하고 그녀는 털어놓듯이 말했다. "하긴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사실 그 말이 맞다. 산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웬만하면 이제부터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을래?" 하고 나는 물었다. "안됐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지금은 그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푹 자고만 싶어. 그뿐이야." "나도 별로 배고픈 건 아니야. 단지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지. 할 말이 많아서." 수화기 저편의 그녀는 잠시 잠잠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새끼손가락 끝을 눈썹에 댄다. 나는 그녀의 그런 행동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중에" 하고 그녀는 천천히 끊듯이 그렇게 말한 후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아무튼 자게 내버려둬. 잠깐이라도 좋아. 아주 조금만 자고 나면 틀 림없이 뭔가 잘될 거 같아. 일어나면 당신한테 전화할게. 알았지?" "알았어. 안녕." "안녕히." 하지만 그녀는 한순간 망설였다. "그런데 그거 급한 이야기야?" "급한 건 아니야. 특별히 급할 거 없다구. 나중이라도 상관없어." 하기야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1만 년이고 2만 년이고 나는 기다릴 수 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안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손에 있는 노란 수화기를 잠시 바라보고 나서조용히 제자리에 놓았다. 전화를 끊자 갑자기 엄청나게 배가 고팠다. 미칠 것만 같은 공복감이었다. 뭐든지 닥치는 대로 무작정 먹고만 싶었다.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 이건 상관없다. 그들이 나에게 뭐든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그 들의 손가락까지도 빨아먹을지 모른다. 좋아, 나는 자네들의 손가락을 빨지. 그리고 나서 비에 씻긴 침목(枕木)처럼 곯아떨어져 잠을 자겠다. 누가 걷어찬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 다. 나는 1만 년 동안 푹 자는 것이다. 나는 전화기에 기대 서서 머리 속을 텅 비워 놓고 눈을 감았다. 몇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파도처럼 나를 씻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까지 나 어디까지나 끝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터벅터벅 그들은 발걸음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가난한 아줌마는 도대체 어디로 돌아갔단 말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 고 나는 도대체 어디로 돌아왔단 말인가? 만약, 하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1년 후에 가난한 아줌마들만의 사회가 출현 한다고 하면, 나를 위하여 그녀들은 거리의 문을 열어 줄까? 그곳은 가난한 아줌마들에 의해 선택된 가난한 아줌마들의 정부가 있고, 관청 이 있고, 가난한 아줌마들이 핸들을 잡은, 가난한 아줌마들을 위한 전차가 달리 고, 가난한 아줌마들의 손에 의해 씌어진 가난한 아줌마들을 위한 소설이 존재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지, 그녀들은 그 따위 것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부 도, 전차도, 소설도. 그녀들은 오히려 거대한 식초병 같은 것을 수없이 만들어서, 그 속에 들어가 호젓하고 차분하게 살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하늘에서 바로다보면, 그러한 병 들, 수만,수십만 개가 온통 지표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이 보일 테지. 그리고 그 건 아마도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경관일 것이다. 그렇다. 만약 그 세계 에, 한 편의 시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있다면, 나는 거기에 대해 시를 써도 좋 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아줌마들의 세계의 영예로운 최초의 계관(桂冠) 시인이 되는 것이다. 나쁘지 않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녹색 유리병에 밝게 비치는 태양을 노래하고, 그 발 아래 펼쳐지는 아침 이슬 에 빛나는 풀의 바다를 노래하자. 하지만 결국, 그것은 서기 11980년의 이야기다. 그리고 1만 년이라는 세월은 기다리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다. 그때까지 나는 무수한 겨울을 넘기지 않으면 안된다. 뉴욕 광탄의 비극 태풍이나 집중 호우가 들이닥칠 때마다 동물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하는 다 소 기묘한 습관을, 10년 이래 꾸준히 지켜 온 사내가 있다. 그는 나의 친구다. 그는 동물원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살고 있다. 태풍이 거리에 접근해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 덜컹거리는 덧문을 닫 거나, 생수를 사러 내달리거나, 트랜지스터 라디어와 회중 전 등의 상태를 확인 할 무렵이 되면, 그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절에 입수한 미군용 판초로 몸을 감싸고, 양쪽 주머니에 캔맥주를 쑤셔 넣을 채 동물원으로 향했다. 그는 이를 위해, 태풍이 불면 늘 회사를 쉬곤 했다. 운이 나쁘면, 동물원의 문은 닫혀져 있었다. 금일은 악천후로 휴원(休圓)합니다. 그것은 글세,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도대체 누가 일부러 태풍이 오는 오후 에 기린이랑 '얼룩말'을 구경하러 동물원을 찾아온단 말인가? 그는 선뜻 단념하고 정문 앞에 줄지어 선 다람쥐 석상(石像)에 걸터앉아, 약간 미지근해진 캔맥주를 마시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다. 운이 좋은 날은 동물원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요금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 이내 질척질척하게 젖어 버린 담배를 애써 피우면서, 동물들을 한 마리 한 마리 꼼꼼히 구경하고 다녔다. 손님은 거의 없 었다. 동물들은 모두 우리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들은 얼빠진 듯한 멍청한 눈 으로 창을 통해 빗줄기를 바라보거나, 강풍속을 흥분해서 뛰어다니거나, 급격한 기압의 변화에 겁을 먹거나,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벵갈 호랑이 우리 앞에 앉아서 캔맥주 하나를 마시고(태풍이 불 면 언제나 벵갈 호랑이가 가장 화를 내곤 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고릴라 우리 앞에서 두 번째 맥주를 마셨다. 고릴라는 태풍보다도 사람의 모양새 쪽에 많은 흥미를 가지는 것 같았다. 반 은 물고기 같은 모습으로 콘크리트 마룻바닥에 앉아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는 그 를, 고릴라가 언제나 가엾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마치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공교롭게도 단둘이 타게 된 것 같은 느낌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하긴 태풍이 부는 날 오후의 그런 행동을 제외하면,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 람이었다. 별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인상이 좋은 외국인 무역 회사에 근무했고, 산뜻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그는 반년마다 여자 친구를 바꿨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토록 부지런히 여자 친구를 갈아대는지, 나로선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들은 모두 세포 분열이라도 한 것처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로선 전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웬일인지 그를 평범하며 둔중하다고 필요 이상으로 믿어 버리 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서는 사람들의 그런 태도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모 양이었다. 그는 상태가 나쁘지 않은 중고차와 발자크 전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례식에 입고 가기에 안성맞춤인 검정 양복과 검정 넥타이와 검정 가죽 구두를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죽어서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면, 나는 으레 그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양복과 넥타이와 가죽 구두를 빌리기 위해서다. 양복과 가죽 구두는 나에겐 한 치수씩 더 컸지만, 물론 그 이상의 사치를 말할 처지는 못 되었다. "미안해. 또 장례식이야" 하고 내가 말하면, 그는 늘 "어서, 어서, 급할텐데. 앞으로 또 가지러 와도 괜찮아" 라고 했다. 그곳에 가면, 테이블 위에는 말쑥히 다림질한 양복과 넥타이가 이미 갖춰져 있었고, 구두는 광이 나 있었으며, 냉장고에는 외국산 맥주가 알맞게 차가워져 있었다. 무엇이든 언제라도 곧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 타입의 남자 였다. 분명 그러한 인간이 아니고선, 반년마다 여자 친구를 바꾸는 귀찮은 짓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동물원에서 고양일 봤어" 하고 그는 맥주 마개를 따면서 나에게 말했다. "고양이?" "응, 한 2주일 전에 출장으로 훗카이도에 갔었는데, 그때 근처 동물원에 들어 가 봤지. 그곳에 '고양이'라는 팻말이 걸린 조그만 우리가 있었는데 말이지, 그 안에 고양이가 자고 있지 뭐야." "어떤 고양이?" "보통 고양이야. 어디에나 있는 그런 것. 갈색 줄무늬에 꼬리가 짤고, 지독히 살찐 놈이었어. 그것이 그저, '벌렁' 드러누워서 뒹굴고 있더란 말일세." "훗카이도에선 고양이가 진기한가 보지?" "농담 마, 훗카이도에도 고양이쯤은 있어. 그런게 진귀할 리가 없다구."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어째서 고양이가 동물원에 들어가 있으면 안된다는 거지? 고양이 역시 동물이잖아." "그건 습관이야. 고양이나 개는 '흔해빠진' 동물이거든. 일부러 동물원까지 가서 구경할 만한 것은 못 된다는 거지. 주위만 둘러봐도 얼마든지 있어" 하고서 그는 덧붙였다. "인간과 마찬가지지" 둘이서 반 상자 가량의 맥주를 마시고 나자, 그는 커다란 백화점 봉투에다 넥 타이와 비닐 커버를 씌운 양복과 구두 상자를 꼼꼼하게 챙겨 주었다. "늘 미안해. 내 돈 내고 사야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어째 사게 되지를 않아. 상복을 사면, 어째 누가 죽는 걸 인정해 버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나는 사용하지도 않는걸. 양복 입장에서 보더라도 무의미하게 걸려 있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편이 기분 좋겠지." 그 자신은 삼 년 전에 그 장례식용 양복을 맞추고 나서 한 번도 그걸 사용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양복을 맞춘 이래로 누구 한 사람 죽지 않는단 말야" 하고 그가 말했다. "모두 그런 식이야. 전부 그러게 마련이야" 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그래." 정말이지, 그해에는 장례식이 굉장히 많았다. 내 주위에서는 친구와 예전의 친구들이 차례차례로 죽어 갔다. 마치 가문 여름날의 옥수수밭 같은 광경이었 다. 내가 스물여덟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주위의 친구들도 대강 비슷한 나이였다.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 아홉... 그 건 죽음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나이다. 시인은 스물 하나에 죽고, 혁명가와 로큰롤 가수는 스물넷에 죽는다. 그것만 지나고 나면, 당분간은 어떻게든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우리 들 대부분의 예측이었다. 전설의 '불길한 커브'도 지나갔으며, 조명이 어두운 습기 찬 터널도 뚫고 나왔 다. 이제는 곧게 뻗은 6차선 도로를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목적지를 향해 내 달리기만 하면 되는 셈이다. 우리들은 머리를 깎고, 매일 아침 수염을 밀었다. 우리들은 이제 시인도, 혁 명가도, 로큰롤 가수도 아니란 말이다. 술에 취해 전화 부스 안에서 자거나, 얼 이 빠지도록 술을 마시거나, 새벽 4시에 도어즈의 레코드 볼륨을 높여 듣거나 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교제 관계로 생명 보험에도 들었고, 호텔의 바에서 술을 마시게도 되었고, 치 과 의사의 영수증도 받아 두어 의료비 공제를 받게도 되었다. 아무튼, 이젠 스 물여덟이니까... 예기치 못한 살육이 시작된 것은 그 직후였다. 그것은 참으로 '기습'이라고 할 만했다. 우리들은 온화한 봄날 햇살 아래에서 한창 양복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좀처 럼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셔츠 소매가 뒤집혀 있거나, 오른쪽 다리는 현실적인 바지에 밀어넣으면서 왼쪽 다리는 비현실적인 바지에 밀어넣어 보거나 하는, 그 런 작은 소란을 피웠다. 살육은 기묘한 총성과 함께 찾아왔다. 누군가 형이상학적인 언덕 위에 형이상학적인 기관총을 대놓고, 우리들을 향 해 형이상학적인 탄환을 퍼부어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다시 말해, 모자에서 튀어나오건 보리밭 에서 튀어나오건, 토끼는 토끼일 뿐이다. 고열(高熱)의 '화덕'은 고열의 화덕일 뿐이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일 뿐이었다. 현실과 비현실(또는 비현실과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그 어두운 연못을 처음 으로 건너뛴 이는, 중학교의 영어 교사로 대학 시절 친구였다. 결혼한 지 삼 년 되었고, 아내는 출산 때문에 연말부터 시코쿠에 있는 친정에 가 있었다. 1월치고는 무척 따뜻한 일요일 오후, 그는 백화점의 철물 매장에서 코끼리 귀 라도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서독제 면도칼과 면도용 크림 두 통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목욕물을 끓였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스카치 위스 키 한 병을 비운 뒤, 욕조 속에서 간단히 손목을 자르고 죽었다. 이틀 후에 그의 어머니가 시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경찰이 몰려와 몇 장이나 현장 사진을 찍었다. 욕조는 피로 인해 토마토 주스 같은 색깔을 띠었다. '자살'이라는 것이 경찰의 공식 발표였다. 온 집안의 문은 잠겨 있었으며, 그 날 면도칼을 산 것은 죽은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도대체 무슨 목 적으로, 사용할 가망도 없는 면도용 크림을(그것도 두 통씩이나) 샀는지는 아무 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이제 몇 시간이 지난 뒤에는 죽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뜻대로 익숙해 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살하려고 하는 것을 백화점 점원에게 간파 당할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유서도 메모도, 아무것도 없었다. 부엌의 식탁 위에는 글라스와 빈 위스키병 과 얼음을 넣는 그릇, 그리고 두 통의 면도용 크림만이 남아 있었다. 분명히 그는 목욕물이 끓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헤이그의 온 더 록을 몇 잔 이나 목구멍 속으로 흘려 넣어면서, 테이블 위의 면도용 크림통을 줄곧 바라보 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수염을 깎지 않아도 된다. 스물여덟 살 청년의 죽음은 겨울 비처럼 어쩐지 서글프다. 그것에 이어진 12개월 동안, 네 명의 인간이 죽었다. 3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인지 쿠웨이트인지의 유전 사고로 한 명이 죽었고, 6 월에는 두 명이 죽었다. 심부전증과 교통 사고다. 7월에서 11월까지, 평화로운 계절이 이어진 다음, 12월 중순에 마지막 한 명이 역시 교통 사고로 죽었다. 맨 처음 자살한 친구를 제외하면, 모두가 죽음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죽어 갔다. 늘 오르내리던 계단을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발로 디딜 판자 한 장이 뻥 뚫려 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부자리 좀 깔아 주지 않을래?" 하고 한 사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6월에 심부전증으로 죽은 친구다. 그것은 오전 11시의 일이었다. 그는 가구 (家具) 디자이너였다. 아침 9시에 일어나 잠시 동안 자기 방에서 일을 하고는, "어째 졸리는걸" 하며 부엌에 와서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졸음은 가시기 않았다. "좀 자야겠어. 왠지 머리 뒤쪽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걸."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왠지 머리 뒤쪽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걸. 그는 이불 속에 들어가 잠든 후,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았다. 12월에 죽은 여자아이가 그해에 있어서 최연소 사망자며, 동시에 유일한 여성 사망자기도 했다. 그녀는 스물네살이었다. 스물네 살, 혁명가와 로큰롤 가수가 죽는 나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차가운 비가 내리던 저녁, 맥주 회사의 운반트럭과 콘크 리트 전신주 사이에 만들어진 비극적인(그리고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그녀는 압사당하듯 죽어 갔다. 마지막 장례식의 며칠 뒤엔가, 나는 세탁소에서 갓 돌아온 양복과 답례용 위 스키를 안고 양복 주인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참으로 고마워. 번번이 도움을 받는군." 하고 나는 말했다. 냉장고에는 역시 차가운 맥주가 채워져 있었고, 푹신한 소파에서는 희미하게 태양의 냄새가 났다. 탁자 위에는 갓 닦아 놓은 재떨이와 크리스마스용 포인세 티아 화분이 있었다. 그는 비닐로 포장된 양복을 받아 들고 막 동면에 들어간 새끼곰을 굴속으로 되돌려주는 듯한 손놀림으로 살며시 옷장 속에 집어 넣었다. "양복에 장례식 냄새가 배어들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하고 나는 말했다. "양복은 괜찮아. 그야 그걸 위한 양복인걸. 하지만 걱정은 알맹이 쪽이야" "응,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여하튼 한 해가 자네에겐 장례식 투성이였지 뭔가." 그는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내던지고, 맥주를 글라스에 따르면서 그렇게 말했 다. "전부 해서 몇 명이었지?" "5명" 하고 나는 왼쪽 손가락을 전부 펼쳐 보인 후 "하지만 이제는 끝났겠지" 하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이젠 충분한 수의 인간들이 죽었잖아." "어쩐지 피라미드의 저주 비슷한데. 그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충분한 수의 인간들이 죽을 때까지, 그 저주가 계속된다는 거지. 붉은 별이 하늘을 맴 돌고, 달 그림자가 태양을 덮어 버릴 때까지." 맥주 반 상자를 마셔 버리고, 우리는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 겨울의 석양 이 완만한 고갯길처럼 방안으로 비쳐 들고 있었다. "요즘 어째 얼굴 표정이 어둡구나"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런가" 하고 내가 말했다. "틀림없이 밤중에 무언가를 너무 깊이 생각하기 때문일 거야. 난 말이지, 밤 중에 깊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어." "어떻게?" "어두운 기분이 들 것 같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청소를 해. 2시건 3시 건, 닥치는 대로 접시도 닦고, 가스 레인지도 닦고, 마룻바닥도 걸레질하고, 행주 표백도 하고, 책상 정리도 하고, 양복장 속에 있는 셔츠를 전부 다림질하기도 한 단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손가락 끝으로 글라스의 얼음을 빙빙 돌렸다. "파김치가 될 때까지 그러고 나서는, 술을 한잔만 꿀꺽 마시고 잠들어 버리는 거야. 그것뿐이야. 아침에 일어나 양말을 신을 때쯤 해선 대개의 일을 잊어버 리지. 무엇을 생각했었는지조차 말야. 기억이 안 나." 나는 새삼스레 그의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지나치리만 큼 잘 정돈된 청결한 방이었다. "한밤중 3시에 사람들은 별별 일을 다 생각하게 마련이거든. 이것저것 말야. 누구나 다 그래.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거기에 대항할 방법을 생각해 내 지 않으면 안돼." "그럴지도 몰라." "한밤중 3시에 동물원에 가본 적 있어?" "아니, 없어" 하고 나는 멍하게 대답했다. "난 꼭 한 번 있어. 동물원에서 일하고 있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가 야 근할 때 들어갔었지. 사실은 안되는 일이지만 말야." 그리고는 글라스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실로 기묘한 체험이었지.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말이야. 마치 땅바닥 이곳저곳이 소리도 없이 갈라지고, 거기에서부터 무엇인가 기어올 라 오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어. 그리고 밤의 어둠 속에서, 글세, 땅속에서 기어올라 온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날뛰고 있는 거야. 차가운 공기 덩어 리 같은 거라고나 할까. 눈에는 안 보여. 하지만 동물들은 '그것'을 느끼지. 그리고 나는 동물들이 느끼는 '그것'을 느꼈어. 결국 우리들이 딛고 있는 대지 는 지구 중심까지 통해 있으며, 그 지구의 중심엔 엄청난 양의 시간이 흡수되어 있다는 거지." 나는 잠자코 있었다. "두 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 한밤중의 동물원 같은 데는." "태풍 쪽이 더 좋아?" "응, 태풍 쪽이 훨씬 나야." 전화 벨이 울렸다. 그는 침실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느 때처럼 세 포 분열적인 그의 여자 친구에게서 온, 세포 분열적으로 끝없이 긴 전호인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는 아무리 기다려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단념하고 텔레비전을 켰다. 27인치 컬러 텔레비전으로, 곁에 있는 리모 트 컨트롤 스위치에 살짝 손만 대도 소리 없이 채널이 바뀌었다. 스피커가 여 섯 개나 달려 있는 덕분에 상당히 좋은 소리가 났다. 나는 그렇게 훌륭한 텔레 비전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채널을 위에서 아래까지 되풀이해서 눌러 본 다음 뉴스 쇼를 보기로 결 정했다. 국경 분쟁이 있었고, 빌딩 화재가 있었으며, 통화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자동차의 수입 제한이 있었는가 하면, 동계 수영 대회가 있었고, 일가 족 동반 자살이 있었다. 각각의 사건들이 중학교 졸업 사진처럼, 어딘가 조금씩 관련되어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재미난 뉴스 있었어?' 그가 되돌아와서 그렇게 물었다. "그저 그래." "텔레비전은 자주 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텔레비전이 없어." "텔리비전엔 적어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지. 그것은 원할 때 끌 수 있다는 거야." 그는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아무도 뭐라고 안하거든." 그는 리모컨 손에 들고, 스위치를 '오프(off)로 했다. 그 순간 화면이 꺼졌다. 방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창 밖은 빌딩 불빛으로 환해지기 시작했다. 한 5분쯤, 우리는 이렇다 할 화제도 없이 위스키를 계속 마셔댔다. 다시 한 번 전화 벨이 울렸지만, 그는 이번에는 못 들은 척했다. 전화벨이 울리기를 멈 출 때쯤 해서, 그는 생각난 듯이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다시 '온(on)'으로 했다. 순식간에 화면이 돌아오고 뉴스 해설자는 등뒤의 꺾은선 그래프를 막대기로 가리키면서 최근의 석유 가격 변동에 대해 계속 떠들고 있었다. "봐, 저 친구는 우리가 5분 동안이나 스위치를 끄고 있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어." "그야 그렇지." "어째서?"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스위치를 끄는 순간, 어느 쪽인가 존재가 제로가 된 거야. 우리든, 아니면 저 친구든, 어느 쪽이든지 말야. 아무튼 스위치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관계가 끝나 는 거지. 그런 게 편리해." "글세,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 "생각하는 방식에는 백만 가지도 더 있어. 인도에는 야자나무가 자라고 있고, 베네수엘라에선 정치범을 헬리콥터로 뿌리고 있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텔레비전을 껐다. "남의 일에 대해선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세상엔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 죽음도 있어. 냄새가 안 나는 죽음도 있고"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잠자코 수긍했다. 그가 말하려는 뜻을 알 것도 같고 전혀 모를 것도 같 았다. 나는 지치고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포인세티아의 초록색 잎사귀를 손으 로 만지작거렸다. "실은 말야, 샴페인이 있어. 지난번 출장 때 프랑스에서 가지고 온 거야. 샴 페인의 효능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지만, 확실히 상등품이야. 함께 마시지 않을 래?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될 거야, 틀림없이" 하고 그는 생생한 얼굴로 말했다. "크리스마스 밤에 어떤 여자와 마시려고 따로 두었던 거 아냐?"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냉장한 샴페인 병과 유리잔 두 개를 가지고 와서, 탁자 위에 조용히 놓 았다. 그는 시원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샴페인에는 용도 같은 건 없어. 마개를 따야 할 때가 있을 뿐이야." "과연" 하고 나는 감탄했다. 우리는 샴페인 마개를 땄다. 그리고 파리의 동물원과 그곳의 동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확실히 상등품 샴페인이기는 했다. 그해 연말에 조그마한 파티가 있었다. 롯폰기 근처의 가게를 빌려 매년 그믐날 밤에 여는 파티였다. 피아노 삼중주 가 있고, 제법 맛있는 요리와 술이 나온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가볍게 잡담을 한다. 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에 관계된 것이다), 나는 해마다 그곳에 얼굴을 내민다. 파티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모임은 비교적 마음이 편했 다. 그믐날 밤에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적당히 구석 쪽에 앉아 한가롭 게 술이나 마시면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고, 무리한 소개를 받아, 채식으로 암을 고치는 따위의 지루한 설교를 들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누군가 나에게 한 여성을 소개했다. 나는 적당히 잡담을 하고 나서, 여느 때처럼 구석자리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물에 탄 글라스를 들고 내 자리까지 따라왔다. "당신한테 소개해 달라고 제가 부탁했어요" 하고 그녀는 애교 있게 말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큼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인상이 좋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적당히 돈을 들여 장만한 파란 실크 원피스가 제법 잘 어 울렸다. 나이는 서른두 살 정도겠고, 좀더 젊게 보이려고만 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처 럼 보였지만,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두 손에 전부해서 세 개의 반지를 끼었고, 입가에는 안개 낀 저녁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은 제가 알고 있는 분과 꼭 닮았어요. 얼굴 생김새부터 키, 분위기, 말투 까지 깜짝 놀랄 만큼 똑같네요. 당신이 여기에 오시면서부터 계속 관찰하고 있 었어요." "그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니, 한 번 만나 보고 싶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달리 무슨 말이 좋을 지 몰랐기 때문이다. "정말이요?" "예, 그래요.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도대체 어떤 기분이 들지..." 그녀의 미소가 잠시 깊어지는 듯 싶더니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젠 무리에요. 그는 5년 전에 죽고 말았으니까요. 바로 지금의 당 신과 비슷한 나이였지요." "그렇습니까" "제가 죽였어요" 피아노 삼중주가 두 번재 무대를 마친 듯, '짝짝짝짝' 주위에서 내키지 않는 듯한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음악을 좋아하세요?" 하고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좋은 세계에서 듣는 좋은 음악이라면 그렇죠." "좋은 세계엔 좋은 음악이라는 건 없어요. 좋은 세계의 공기는 진동하지 않는 데요" 하고 그녀는 소중한 비밀을 털어놓듯 나에게 말했다. "과연 그렇군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다르게 대답할 도리가 없었다. "워렌 비티가 나이트 클럽의 피아노 연주자로 나온 영화는 봤어요?" "아뇨, 보지 못했어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럽의 손님이었죠. 아주 가난하고 비참한 역이었어 요." "흐응." "그래서 워렌 비티가 엘리자베스한테 묻는 거예요. '무슨 신청곡은 없습니까' 라고요" "그래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무엇을 신청했습니까?" "잊었어요. 옛날 영화니까요." 그녀는 반지를 반짝거리면서, 물 탄 술을 마셨다. "하지만 전, 신청이라는 걸 싫어해요. 어쩐지 비참한 느낌이 들거든요. 도서 관에서 빌려 온 책 같아서 말이죠. 시작되는 순간에 벌써 끝날 때를 생각하게 되는걸요." 그녀가 담배를 물고, 내가 성냥으로 불을 붙여 주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과 꼭 닮은 사람의 이야기였죠?" "어떻게 해서 죽였습니까?" "꿀벌통 속에 던져 넣었어요." "거짓말이요?" "거짓말이에요." 나는 한숨을 쉬는 대신 물 탄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아주 녹아 버려 위스키 맛은 거의 없었다. "물론 법률상의 살인 같은 건 아니죠. 게다가 도의상의 살인도 아니고요." "법률상의 살인도, 도의상의 살인도 아니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거기까지의 요점을 정리해 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사람을 죽였잖아요." "그래요, 당신과 꼭 닮은 사람을요" 하고 그녀는 유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 저쪽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 소리에 끌려서 주위의 몇 사람이 따라 웃었다. 글라스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굉장히 먼 곳에서 났지만, 하지만 무서우리만큼 선명하게 들려 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커다랗게 부풀어올라, 그것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듯했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땅바닥을 걸어 다니 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5초도 걸리지 않았죠. 죽이는 데 말예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그 침묵을 곰곰이 즐기고 있는 것 같 았다. "자유에 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가끔식. 그런데 왜 그런 걸 묻죠?" "데이지ㄱ을 그릴 줄 아세요?" "아마도요... 어째 이거 성격 테이트 같군." "비슷해요" 하고 그녀는 웃었다. "그래, 저는 통과했습니까?" "예, 문제없어요.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은 반드시 장수할 테니까. 제 육감 이지만." "대단히 고맙습니다." 밴드가 <올드 랭 사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11시 55분." 그녀는 목걸이 끝에 달린 금시계를 흘깃 바라보고 그렇게 말했다. "저는 <올드 랭 사인>을 무척 좋아해요. 당신은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저는 <언덕 위의 집>쪽이 더 좋은데요. 사슴이랑 들소가 나오니까요." 그녀는 다시 한 번 생긋 웃었다. "동물을 좋아하시나봐요?" "예, 동물을 좋아합니다" 라고 말하며 문득 동물원을 좋아하는 친구와 그의 상복을 떠올렸다. "당신하고 얘기해서 즐거웠어요. 안녕." "안녕" 하고 나도 말했다. 공기를 절약하기 위해 칸델라(휴대용 석유등)를 끄자, 주위는 칠흑같은 어둠에 묻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5초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이 어둠 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들, 되도록 숨을 쉬지 말라구. 남은 공기가 적으니까 말야." 나이 많은 광부가 그렇게 말했다. 나직한 소리였지만, 그래도 천장의 암반이 약간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광부들은 어둠 속에서 몸을 서로 기대고, 귀를 기 울여, 단 하나의 소리가 들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곡괭이 소리, 생명의 소 리 말이다. 그들은 이미 몇 시간이고 그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조금씩 현실을 용 해시켜 갔다. 모든 것이 훨씬 옛날에, 어딘가 먼 세계에서 일어났던 일같이 여 겨졌다. 혹은 모든 것이 먼 앞날에, 어딘가 먼 세계에서 일어날 것 같은 일처럼 도 여겨졌다. 다들, 되도록 숨을 쉬지 말라구. 남은 공기가 적으니까 말야. 바깥에서는 물론 사람들이 굴을 계속 파고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뒤안길에서 나는 100퍼센트의 여자아이 와 엇갈린다. 솔직히 말해 그다지 예쁜 여자아이는 아니다. 눈에 띄는 데가 있는 것도 아 니다.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카락 뒤쪽에는 나쁜 잠버릇이 끈 질기게 달라붙어 있고, 나이도 적지 않다. 벌써 서른 살에 가까울 테니까. 엄 밀히 말하면 여자아이라고 할 수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50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그녀를 알아볼 정도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부터 내 가슴은 땅울림처럼 떨리고, 입안은 사막 처럼 바싹 말라 버린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좋아하는 여자아이 타입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발목이 가느다란 여자아이가 좋다든지, 역시 눈이 큰 여자아이라든지, 손 라락이 절대적으로 예쁜 여자아이라든지, 잘은 모르겠지만 천천히 식사하는 여 자아이에게 끌린다든지와 같은 식의. 나에게도 물론 그런 기호는 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아이의 코 모양에 반해 넋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100퍼센터의 여자아이를 유형화하는 일은 아무도 하루 수가 없다. 그 녀의 코가 어떻게 생겼었나 하는 따위는 전혀 떠올릴 수가 없다. 아니, 코가 있 었는지 어땠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할 수 없다. 내가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다는 사실뿐이 다. 왠지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어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와 길에서 엇갈렸단 말이야" 하고 나는 누군가에게 말한다. "흠, 미인이었어?" 라고 그가 묻는다. "아니야, 그렇진 않아." "그럼, 좋아하는 타입이었겠군." "글세, 생각나지 않아.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슴이 큰지 작은지, 전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겠다구." "이상한 일이군." "이상한 일이야" "그래서, 무슨 짓을 했나? 말을 건다든가, 뒤를 밟는다든가 말야." "하긴 뭘 해, 그저 엇갈렸을 뿐이야." 그녀는 동에서 서로, 나는 서에서 동으로 걷고 있었다. 제법 기분이 좋은 4월의 아침이다. 비록 30분이라도 좋으니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녀의 신상 이야기를 듣고도 싶고, 나의 신상 이야기를 털어놓고도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81년 4월 어느 해맑은 아침에, 우리가 하라주쿠의 뒤안 길에서 엇갈리기에 이른 운명의 경위 같은 것을 밝혀 보고 싶다. 거기에는 틀 림없이 평화로운 시대의 낡은 기계처럼, 따스한 비밀이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어딘가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우디 알렌의 영화라도 보며, 호텔 바에 들러 칵테일이나 뭔자를 마신다. 잘만 하면, 그 뒤에 그녀와 자게 될지도 모른다. 가능성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는 벌써 15미터 가량으로 좁혀졌다. 자, 도대체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면 좋을까? "안녕하세요. 단 30분만, 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이건 너무나 바보스럽다. 마치 보험 권유 같지 않은가. "미안합니다. 이 근처에 혹시 24시간 영업 세탁소가 없는지요?" 이 역시 같은 정도로 바보스럽다. 무엇보다도 내 손에 세탁물 주머니조차 없 지 않은가. 누가 그런 대사를 신용하겠는가? 어쩌면 솔직하게 말을 꺼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나에게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입니다." 아니, 틀렸어. 그녀는 아마도 이런 대사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믿어 준다 해도, 그녀는 나와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있 어 내가 100퍼센트의 여자라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 당신은 100퍼센트의 남자는 아닌걸요, 죄송하지만'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사태가 그렇게 되면 나는 틀림없 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나는 그 쇼크에서 두 번 다시 회복될 수 없을 지도 모 른다. 내 나이 벌써 서른두 살, 결국 나이를 먹는 다는 건 그런 것이 아닐까. 꽃가게 앞에서, 나는 그녀와 엇갈리게 된다. 따스하고 조그마한 공기 덩어리 가 피부에 와닿는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 위에는 물이 뿌려져 있고, 언저리에 서는 장미꽃 향기가 풍기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 수도 없다. 휜 스웨터를 입은 그녀는 아직 우표를 붙 이지 않은 휜 사각 봉투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그녀의 눈이 졸린 듯한 것으로 봐서, 어쩌면 하룻밤 동안 그것을 썼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각 봉투 속에는 그녀에 관한 비밀이 전부 들어 있는 지도 모른다. 몇 걸음인가 걷고 나서 뒤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 그녀를 향해 어떻게 말을 걸었어야 했는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너무나도 긴 대사이므로 틀림없이 제대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실용적이지 못하다. 아무튼 그 대사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어,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지 않습니 까"로 끝난다. 옛날 옛적에, 어느 곳에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소년은 열여덟 살이었고, 소 녀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다지 잘생긴 소년도 아니었고, 그다지 예쁜 소녀도 아 니었다. 어디에나 있는 외롭고 평범한 소년과 소녀였다. 하지만 그들은 틀림없이 이 세상 어딘가에 100퍼센트 자신과 똑같은 소녀와 소년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그들은 '기적'을 믿고 있었던 것이 다. 그리고 기적은 확실히 일어났다. 어느날 두 사람은 거리 모퉁이에서 딱 마주치게 된다. "놀라워, 난 줄곧 너를 찾아다녔단 말야. 네가 믿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넌 내 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야" 하고 소년이 소녀에게 말한다. "너야말로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야. 모든 것이 모두 내가 상상했 던 그대로야. 꼭 꿈만 같아."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서로의 손을 잡고 언제까지나 실컷 얘기를 나 눈다. 두 사람은 이미 고독하지 않다. 그들은 각기 100퍼센터의 상대자를 원하 며, 자신은 그 상대자의 100퍼센트가 되고 있다. 100퍼센트의 상대자를 원하며, 상대자의 100퍼센트가 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은 이미 우주적인 기적일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속을 얼마 안되는, 극히 얼마 안되는 의구심이 파고든 다. 이처럼 간단하게 꿈이 실현되어 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하는... 대화가 문득 끊어졌을 때, 소년이 말한다. "이봐, 다시 한 번만 시도해 보자. 가령 우리 두 사람이 진정한 100퍼센트의 연인이라고 하면, 반드시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이 다음 에 다시 만났을 때도 역시 서로가 서로의 100퍼센트라면, 그때 바로 결혼하자구. 알겠니?" "응, 알았어."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서쪽과 동쪽으로.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시 도해 볼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그런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는 말이다. 왜 냐하면 그들은 진정 100퍼센트 완벽한 연인이었으니까. 그것은 기적적인 사건 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어려서, 그런 것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정석처럼 비정한 운명의 파도가 두 사람을 마구 농락하기에 이른다. 어느 해 겨울, 두 사람은 그해에 유행한 악성 인플루엔자에 걸려, 몇 주일간이 나 사경을 헤맨 끝에, 옛날 기억들을 몽땅 잃고 말았던 것이다. 어찌된 일일까, 그들이 깨어났을 때 그들의 머리 속은 마치 D.H.로렌스의 소년 시절 저금통처럼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참을 성 있는 소년과 소녀였기 때문에, 노력하고 또 노력해 서 다시금 새로운 지식과 감정을 터득하여, 훌륭히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아아 하느님, 그들은 진정 확고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지 하철을 갈아타거나 우체국에서 속달을 부치거나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못해도 75퍼센트의 연애랑, 85퍼센트의 연애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소년은 서른두 살이 되었고, 소녀는 서른 살이 되었다. 시간은 놀라운 속도로 지나갔다. 그리고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소년은 모닝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하라주쿠의 뒤안길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고, 소녀는 속달용 우표를 사기 위해 똑같은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엇갈린다. 잃어버린 기억의 희미한 빛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 비춘다. 그들의 가슴은 떨린다. 그리고 그들은 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다. 그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야. 그러나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빛은 너무 연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 제 14년 전만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그냥 말없이 엇갈려 혼잡한 사람들 사이 로 사라지고 만다. 영원히.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렇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 보았어야 했던 것이다. 졸립다. 나는 수프를 먹으면서 졸았다. 졸음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지독했다. 스푼이 나의 손을 떠나서, 접시에 부딪히며 '딱'하고 꽤나 큰소리를 냈다. 몇 사람인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옆자리에서 그녀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 순간을 얼버무리기 위해, 오른쪽 손바닥을 펼쳐서 그것을 겉으로 했 다 뒤집었다 하며 살펴보는 척했다. 수프를 먹으면서 졸았다는 것을 들키고 싶 지는 않았다. 나는 15초 가량 오른손을 점검하는 척하며 살짝 심호흡을 하고, 다시금 수프 를 먹기 시작했다. 머리 뒤쪽이 멍하니 마비되어 있었다. 아주 부드러운 물건 에 실컷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부분을 천천 히 어루만졌다. 수프 접시 바로 위 30센티미터쯤 떨어진 곳에 계란형의 흰 가스가 둥실 떠 있 었다. 그 가스는 나를 향해 '됐다, 됐어. 더 참지는 말고 자자구, 자"하고 속삭 였다. 아까부터 그러고 있었다. 그 계란형의 흰 가스는 주기적으로 윤곽이 선명해졌다가 희미해졌다가 했다. 그리고 내가 그 윤곽의 자잘한 변화를 확인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의 눈꺼풀은 조금씩 조금씩 무거워져 갔다. 물론 나는 몇 번인가 고개를 젓고, 눈을 꽉 감거 나 눈을 돌려, 그 가스를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스는 줄곧 테이블 위 에 떠 있었다. 잠이 쏟아졌다. 나는 졸음을 쫓기 위해 수프 스푼을 입으로 옮기면서 머리 속으로 콘 포타즈 수프의 철자를 생각해 보았다. "Corn Potage Soup." 너무 간단해서 효과는 없었다. "스펠링이 까다로운 단어를 하나 말해 주지 않을래?" 하고 나는 그녀 쪽을 향해서 슬쩍 말했다. 그녀는 중학교 영어 선생이었다. "미시시피" 하고 그녀는 주위에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다. "Mississippi" 하고 나는 머리 속에서 철자를 헤아려 보았다. s가 넷, I가 넷, p가 둘. 기묘한 단어다. "그 밖엔?" "잠자코 좀 먹어요." "굉장히 졸리단 말야." "알고 있지만 부탁이니까, 졸지 마세요. 아까부터 다들 흘깃거리고 있단 말이 에요." 역시 결혼식 같은 데는 오는 게 아니었다. 나는 애당초 결혼식 따위는 질색 이었다. 신부 쪽 친구 테이블에 남자가 앉아 있다는 것도 어째 묘한 일일뿐더 러 사실은 친구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런 건 역시 딱 잘라 거절해 버렸어야 했다. 그랬던들 지금쯤 나는 내 집 침대 위에서 쿨쿨 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크셔 테리어" 하고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스펠링을 말하는 거라는 걸 알아채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Y,O,R,K,S,H,I,R,E,T,E,R,R,I,R." 나는 이번에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예전부터 한자 받아쓰기라든가 스펠 링 테스트 같은 것은 잘하는 편이었다. 언제나 학급에서 일 등을 했다. 틈만 있으면 사전만 읽었다. "그래, 그런 식이야. 이제 한 시간만 버티면, 실컷 자게 해줄 테니까요." 나는 수프를 다 먹은 후, 손으로 입을 막아 가며 연거푸 세 번 하품 했다. 몇 십 명의 웨이터가 몰려와서 수프 접시를 가져 가자, 그 뒤에 샐러드와 빵이 나 왔다. 퍽이나 긴 과정을 더듬어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싶은 느낌이 드는 빵이 었다. 누군가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연설을 장황하게 계속하고 있었다. 인생이니, 날씨니, 그런 류의 이야기였다. 나는 다시금 졸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끝으로 나의 복사뼈를 걷어찼다.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졸리는 건 난생 처음이야." "왜 제대로 자지 않았어요?" "제대로 잤다구. 아홉 시간이나 잤어. 거짓말 아니라구." "그럼 어째서 그렇게 졸리죠? 아무튼 졸지 말아요. 내 친구 결혼식이란 말 이에요." "내 친구는 아니야" 하고 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녀에겐 그것이 들렸던 것 같다. 아니면 내 입술 놀 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빵을 접시 위에다 도로 놓고는 아무 말도 않고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체념을 하고 굴조개 그라탕을 먹기 시작했다. 고대의 생물 같은 맛이 나는 굴조개였다. 굴조개를 먹고 있는 중에 나는 아주 멋진 익수룡(翼手龍)이 되어 눈깜짝 할 사이에 원시림을 날아 넘어, 황량한 지표(地表)를 냉철하게 내려다보았다. 지표에서는 온화해 보이는 중년의 피아노 교사가 신부의 국민학교 시절에 대 한 회상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을 때는 납득이 갈 때가지 질문을 해대는 그런 아이였지 요. 그만큼 다른 아이들보다 진도가 늦었지만, 마지막에는 누구보다도 마음이 담긴 피아노를 쳤지요. 흐응, 하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저 사람을 따분한 여자라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실은 아주 훌륭한 사 람이래요" 하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신부는 그녀의 고교 시절 같은 반 친구였다. 나는 그녀와 다섯 번인가 여 섯 번 만난 적이 있다. 여럿이서 함께 스키 여행을 간 적도 있다. 하지만 그녀 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특별히 따분하다고도, 특별히 훌륭하다 고도 생각지 않았었다. 다만 단순히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 뿐이란 말이다. "흐응" 하고 나는 말한다. 그녀는 손에 집어든 스푼을 허공에서 멈춘 채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했다. "정말이에요. 당신은 믿지 않을지 몰라도." "믿고 있다구. 그저 지금은 졸릴 뿐이라니깐." 그녀는 잠자코 스푼을 접시 위에다 착 놓고, 무릎 위의 흰 냅킨으로 입 가장 자리를 닦았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플래시가 여러 번 터졌다. 나는 "졸릴 뿐이란 말이야" 하고 톡 쏘듯이 말했다. 옷가방도 없이 알지 못하는 거리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팔짱을 기고 있는 내 앞에 스테이크 접시가 놓여졌지만, 그 위에도 역시 흰 가스가 둥실 떠 있었다. 예컨대, '여기에 하얀 시트가 있다'고 하며 그 흰 가스는 말을 걸어왔다. "세탁소에서 막 돌아온 빳빳하기만 한 시트란 말이야. 알겠지? 자네는 거기 에 들어가 자기만 하면 돼. 약간 차가운 것 같지만, 그러면서도 따스하거든. 그리고 태양 냄새가 난단 말이야." 그녀의 조그만 손이 나의 손 등에 와닿고, 희미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녀 의 가늘고 꼿꼿한 머리카락이 나의 뺨을 스쳤다. 나는 퉁긴 듯이 눈을 떴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끝나요. 부탁해." 귓전에서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가슴 모양이 뚜렷이 눈에 띄는, 하얀 실크 원피스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집어 들고, T자로 금을 긋듯 천천히 고기를 잘랐 다. 테이블들은 흥청거렸고, 사람들은 누구나 시끌벅적 지껄여댔고,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거기에 뒤섞여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누군가의 결혼식에 나올 때마다 졸립다구. 언제나 늘, 꼬 옥 그렇단 말야" 하고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녀는 길바닥에 떨어진 영문 모를 물건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 다. "설마" 하고 그녀가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정말 그렇다구. 왠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처구니없이 졸린단 말이야, 영문을 모를 정도로 졸립다구. 결혼식에만 나오면 말이야. 여 태 선잠을 자지 않은 결혼식이 하나도 없었거든." 그녀는 나이프와 포크를 양손에 집어든 채 말똥말동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경우만 해도 결혼식 같은 덴 나오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거든. 하지만 어째 거절할 수가 없었어. 거절하면 당신이 불쾌해 할 것만 같아서..." "거, 꾸며서 하는 소린 아닐 테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으니 머리 뒤쪽이 뻐근히 아파 왔다. "거짓이 아니야. 사실이라구." 그녀는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 위에다 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지저분한 글씨로 씌어진 답안지를 앞에다 놓을 때 같은 얼굴을 했다. 희미하게 눈썹을 찌푸리고, 입술 끝을 깨물었다. "그거, 무슨 콤플렉스가 아닐까요?" "짐작도 안 가는데." "틀림없이 콤플렉스예요." "그러고 보니 노상 묘한 꿈을 꾼단 말이야. 백곰과 함께 창문 유리를 깨부수 고 다니는 꿈 말이야. 하지만 사실은 펭귄이 못돼먹었단 말이지. 펭귄이 나하 고 백곰한테 억지로 누에콩을 먹인단 말이야. 그것도 굉장히 커다란 누에콩인 데..." 하고 나는 농담도 해보았다. "입 다무세요" 하고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결혼식에 나오기만 하면 졸립다는 건 사실이라구. 한 번은 맥주병을 엎질렀고, 한 번은 나이프와 포크를 세 번씩이나 마룻바닥에 떨어뜨렸지." "딱도 해라." 그녀는 접시 위에서 생선의 흰 살을 꼼꼼히 갈라놓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당신, 사실은 결혼한 거 아네요?" "그래서 남의 결혼식에서 선잠을 잔다, 그건가?" "복수죠." "잠재적 욕망에서 오는 복수 행위?" "그래, 그럼 지하철을 탈 때마다 선잠 자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탄광 갱 부의 욕망, 그렇게 되나?" 그녀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스테이크 먹는 것을 단념했다. 졸려 서, 나이프로 고기를 써는 것마저 귀찮았다. "요컨대" 하고 말한 후 잠시 있다가 그녀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언제까지라도 어린아이로 있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잠자코 검정 구스베리의 셔벗을 먹고, 시커멓고 뜨거운 에스프레소 커 피를 마셨다. "졸려요?" "아직도 좀"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내 커피 마실래요?" "고마워" 나는 두 잔째 커피를 마시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서른여섯 번째의 하품을 했 다. 하품을 다하고 나서 얼굴을 들었을 때엔, 테이블의 하얀 가스는 벌써 어디 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여느 때나 다름없다. 가스가 사라졌을 즈음엔, 테이블 케이크 상자가 돌려지게 된다. 그리고 나의 졸음은 어딘가로 자취도 없이 날아가 버리고 없다. 그것은 결혼식의 시작과 더 불어 찾아왔다가, 마침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콤플렉스?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틀리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저 졸릴뿐이다. "이제부터 어떡하지?"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특별한 예정은 없어요." "수영하러 안 갈래? 이제 졸립지 않군. 이 호텔 풀에서 헤엄치고 싶어." "지금?" "아직 해는 높아." "그렇긴 하지만, 수영복은 어떡해요?" "호텔 매점에서 사면 되지." 우리는 케이크 상자를 안고, 호텔의 복도를 따라 매점가지 걸었다. 일요일 오 후의 호텔 로비는 결혼식 손님이랑 가족 동반이랑 해서 뒤죽박죽이었다. "보라구, 한데 '미시시피'라는 단어엔 정말 s가 네 개나 들어 있는 건가?" "몰라요, 그런 건. 그런 거 알아 가지고 무슨 득이 있어요, 도대체?" 그녀의 목덜미에서는 근사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빵 가게 습격 아무튼 우리는 배가 고팠다. 아니, 배가 고픈 정도가 아니라 마치 우주의 공허를 그대로 삼켜 버린 것같이 속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 도넛 구멍처럼 작은 공백이었던 것이, 날이 감에 따라 우리 몸 안에서 자꾸자꾸 커져서 마침내는 바닥 모를 허무가 되었다. 공복(空腹)이라는 장중한 BGM(background music)이 달린 금자탑인 것이다. 공복감은 왜 생기는가? 물론 그것은 식료품의 부족에서 온다. 왜 식료품이 부족한가? 적당한 등가(等價) 교환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등가 교환물을 갖고 있지 못한가? 어쩌면 우리에게 상상 력이 부족한 까닭일 것이다. 그렇다, 공복감은 상상력의 부족에 기인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때. 신(神)도 마르크스도, 존 레논도 죽었다. 아무튼 우리는 배가 고팠고, 그 결과 악(惡)으로 달리려 했다. 공복감이 우리를 악으로 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 이 공복감으로 하여금 우리를 달리게 하는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실존주의 같은 것이다. "아니야, 난 이제 안되겠어." 하고 내 단짝은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런 말이 된다. 그럴 수밖에, 우리는 이미 꼬박 이틀을, 물밖에 마시지 못했다. 꼭 한 번 해 바라기 이파리를 먹어 봤지만, 다시 또 먹고 싶은 생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식칼을 들고 빵 가게로 떠났다. 빵 가게는 상가 중앙에 있었 고, 양 옆으로는 이불 가게와 문방구가 있었다. 빵 가게 주인 남자는 대머리의, 쉰 살이 넘은 공산당원이었다. 우리는 손에 식칼을 들고, 천천히 상가의 빵 가게까지 걸어갔다. '백주의 결 투'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빵 굽는 냄새가 차츰 강하게 풍겨 왔다. 그 냄새가 강 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는 '악'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져 갔다. 빵 가게를 습격한다는 것과 공산당원을 습격한다는 데에 우리는 흥분했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행해진다는 사실에 힐틀러 유겐트적인 감동을 느끼고 있 었다. 늦은 오후여서 빵 가게 안에는 손님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엉성한 시장 가 방을 들고 있는 눈치코치 없는 아줌마였다. 그 아줌마의 주위에서는 위험한 냄 새가 떠돌고 있었다. 범죄자들의 계획적인 범행은 자주 푼수 같은 아줌마들 때 문에 훼방을 받곤 한다. 적어도 텔레비전의 범죄물에선 노상 그렇다. 나는 단짝더러, 아줌마가 나갈 때까진 아무것도 해선 안된다는 눈짓을 보냈다. 그리곤 식칼을 몸 뒤에 감추고, 빵을 고르는 척했다. 아줌마는 이쪽이 지칠 만큼 시간을 끌면서, 마치 양복장이나 삼면경(三面鏡)을 고르는 듯한 신중함으로 튀김빵과 메런빵을 접시에 담았다. 그러고도 이내 그걸 사는 게 아니었다. 튀김빵과 메런빵은 그녀에게 있어선 일시적인 선택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그것으로 결정하기엔 아직 한참의 시 간이 더 필요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선 메런빵이 선택으로부터 미끄러졌다. 어째서 난 메 런빵을 고르고 말았을까, 하는 듯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 고르는 게 아 니었는데, 첫째 너무나 달다. 그녀는 메런빵을 다시 선반에다 되올려 놓고, 조금 생각한 뒤 크라상 두 개를 살며시 접시에 담았다. 새로운 선택이 행해진 것이다. 빙산(氷山)은 약간 풀리고, 구릉 사이로는 봄의 햇살마저 넘쳐 나오기 시작했 다. "아직도야? 저 아줌마도 함께 해치우자구" 하고 나의 단작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글세, 기다리라니까" 하고 나는 그를 제지했다. 빵 가게 주인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바그너의 선율에 도취된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공산당원이 바그너를 듣는 일이 과연 옳은 행위인지 어떤지 나로선 잘 알 수 가 없다. 아줌마는 크라상과 튀김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뭔가 또 탐탁치 않은 듯했다. 크라상과 튀김빵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질적인 면까지 느낀 것 같았다. 서모스탯(자동온도조절 장치)이 고장난 냉장고처럼, 빵을 얹어 놓은 접시는 그 녀의 손 안에서 달각달각 흔들렸다. 물론 정말로 흔들린 것 아니다. 어디까지 나 비유적으로 흔들렸단 말이다. 달각달각달각... "해치우자" 하고 단짝은 말했다. 그는 공복감과 바그너와 아줌마가 만들어 내는 긴장감 때 문에 복숭아 털처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아줌마는 아직도 접시를 손에 들고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지옥을 방황하고 있었 다. 튀김방이 먼저 연단(演壇)에 서서, 로마 시민들을 향해 감동적이지 않다고 할 수도 없는 연설을 했다. 아름다운 어구, 근사한 문장, 듣기 좋은 목소리... 짝짝짝 하고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다음으로 크라상이 연단에 서서, 교통 신호에 관한 어딘지 두서 없는 연설을 했다. 회전을 하려는 차는 정면의 청신호를 보고 직진하다 마주오는 차들의 유 무를 확인한 다음에 좌회전합니다, 뭐 그런 식이다. 로마 시민들은 무슨 소린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어려운 이야기 같아서 짝짝짝짝 하고 박수를 보냈다. 박수 소리는 크라상 쪽이 약간 컸다. 그러자 튀김빵은 다시 선반으로 되돌려 졌다. 아줌마의 접시에는 아주 단순한 완벽함이 찾아들었다. 크라상이 두 개. 마침내 아줌마는 가게를 나갔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너무 너무 배가 고파요. 그런데 돈이 한푼도 없답니다." 하고 나는 주인에게 고백했다. 식칼을 몸 뒤에 감춘 채 말이다. "옳아" 하고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터 위에는 손톱깎이 하나가 얹혀 있었다. 우리는 그 손톱깎이를 물끄러 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늙은 매의 발톱이라도 깎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손톱깎이였다. 아마 뭔가 장난을 하려고 만들어 낸 모양이다. "그렇게 배가 고프면 빵을 먹으면 되잖아." 주인이 말했다. "하지만 돈이 없는걸요." "돈은 필요 없으니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구." 주인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손톱깎이 쪽을 보고 말했다. "아세요, 우리는 나쁜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래서 남의 동정을 받을 수 없지요." "응." "그런 말입니다." "좋아"하고 주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자네들 맘대로 빵을 먹어도 좋아. 그 대신 이 늙은이는 자네들을 저주해 주지. 그럼 되겠지." "저주라니, 어떤 식으로요?" "저주는 언제나 불확실한 거야. 버스 시간표하고는 다르다구." "이봐, 잠깐" 단짝이 끼여들었다. "난 싫어. 저주는 받기 싫단 말이야.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게 어때?" "잠깐, 잠깐. 난 죽고 싶지 않아" 하고 주인이 말했다. "나도 저주받는 건 싫다구" 하고 단짝이 대꾸했다. "하지만 뭐든지 교환이 필요하잖아" 하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손톱깎이만 노려보며 잠자코 있었다. "어때 자네들 바그너 좋아하나?" 하고 주인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내가 대답했다. "좋아요." 단짝이 대답했다. "좋아해 준다면 빵을 먹게 해주지." 마치 암흑 대륙에 전도를 나선 선교사의 말 같았지만 우리는 곧 그말을 듣기 로 했다. 적어도 저주를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좋아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도 좋아할게요." 단짝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바그너를 들으면서 배가 부를 때까지 빵을 먹었다. "음악사상에 찬연하게 빛나는 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1859년 발표된 것으 로, 후기 바그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작품이 되었습니 다." 하고 주인은 해설서를 읽었다. "흠흠." "우물우물." "콘봐르 국왕의 조카 트리스탄은 숙부의 약혼자인 왕녀 이졸데를 맞이하러 갔 는데, 귀로 선상에서 이졸데와 사랑에 빠져 버립니다. 초반에 나오는 첼로와 오 보에의 아름다운 테마가, 이 두 사람의 사랑 모티프입니다." 두 시간 후, 우리는 서로가 만족한 상태로 헤어졌다. "내일은 <탄호이저>를 듣자구" 하고 주인이 말했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허무는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상상력이, 경사진 고갯길을 굴러 떨어지듯이 달까닥달까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캥거루 통신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휴일이라서, 아침 나절에 근처 동물원으로 캥거루 구경을 다녀왔습니 다. 별로 큰 동물원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고릴라를 비롯해서 코끼리까지 대강의 동물은 그럭저럭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라마라든가 개미핥기의 팬이라고 한다면, 아마 그 동물원 엔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거기엔 라마도 개미핥기도 없답니다. 암팔라 도 하이에나도 없답니다. 표범조차 없답니다. 그 대신 캥거루가 네 마리 있습니다. 한 마리는 새끼인데, 태어난 지 2개월밖에 안되었답니다. 그리고 수 놈 한 마 리에 암놈 두 마리. 도대체 어떠한 가족 구성으로 된 것인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캥거루를 볼 때마다, 도대체 캥거루로 있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하고 항상 궁 금해집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멋대가리 없는 장소를, 저렇게 야릇한 꼴을 하고 뛰어 다니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부메랑인지 뭔지 하는 볼품없는 막대기에 의해 간단히 죽고 말까요? 하지만 글세, 그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대수로운 문제는 아니지요. 적어도 이야기의 진짜 줄거리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아무튼 캥거루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진 것 입니다. 어쩌면 당신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어째서 캥거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지, 캥거루와 나 사이에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하고요. 하지만 부디 그런 일에는 신경 쓰지 말아 주십시오. 캥거루는 캥거루고, 당신 은 당신입니다. 캥거루와 당신 사이에, 시선을 끌 만한 뚜렷한 상관 관계가 있 는 것은 아닙니다. 요컨대 이런 얘기지요.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일과 캥거루 사이에는 36개의 미묘한 노정(路程)이 있 어, 그것을 순서에 맞게 하나하나 더듬다 보니,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것뿐입니다. 그 노정을 일일이 설명해 봤자, 당신은 틀림없이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우 선 나만 해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해요. 글세 36개의 노정이라니까요! 그중 한 가지만 순서가 틀렸어도, 나는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쓰지 않았을 것 입니다. 어쩌면 나는 문득 마음내키는 대로 남극해에서 향유고래의 등에 올라타고 있 었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근처 담배 가게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 36개의 우연의 축적이 인도하는 바에 따라, 나는 이처럼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먼저 자기 소개부터 시작합시다. 나는 스물여섯 살로, 백화점 상품 관리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당신 도 쉽게 상상하리라 생각합니다만-지극히 하찮은 일이지요. 우선 구매과에서 구매한다고 결정한 상품에 문제가 없는지 어떤지를 조사합니 다. 이것은 구매과와 업자의 유착을 막기 위한 작업입니다만, 그것이 당신이 상 상하는 것만큼 엄격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백화점에는 손톱깎이에서 모터 보트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들이 나 날이 크게 변모하고 있어, 그런 상품들을 일일이 테스트하다가는 하루가 64시간 이고 우리들의 손이 8개 있다 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지요. 회사 쪽에서 도 우리들에게 거기까지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구두 버클을 슬쩍 잡아당겨 보거나, 과자를 몇 개 집어먹어 보거나 하는 정도 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이른바 상품 관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주된 업무는 소비자 상담, 즉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을 접수해 서 하나하나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불만을 분석하고 원인을 조사해 서, 메이커에게 불만을 말하든가, 구입을 중담해 버리든가 합니다. 예를 들면, 갓 사간 스타킹이 두 켤레나 잇달아 줄이 가버렸다거나, 태엽 장치 를 한 콤이 탁자에서 떨어졌을 뿐인데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거나, 목욕용 실내 복을 세탁기에 넣었더니 4분의 1이나 줄어들었다거나 하는 식의 불만 말입니다. 글세, 당신은 모르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같은 불만의 사례는 실로 지긋지긋 할 정도로 많답니다. 내가 취급하고 있는 것은 상품 자체에 대한 불만 처리뿐 인데도 굉장히 많은 불만이 날아들어 오곤 합니다. 우리 부서 인원은 네 명인데, 아침부터 밤까지 타인의 불만에 쫓겨 다닌다 해 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만이 글자 그대로 굶주린 짐승처럼 우리들의 뒤를 쫓아 온다는 말입니다. 불만 가운데는 사리에 맞는 것도 있고, 또 정말 터무니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쪽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요. 우리들은 그것을 편의상 A, B, C 세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방 한가운 데에 A, B, C라는 커다란 상자 세 개가 있어, 거기에다 편지를 던져 넣는 것입 니다. 우리들은 이 직업을 '이성(理性)의 3단계 평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직업상의 농담이지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쨌든 세 등급에 관해 설명을 하겠습니다. (A) 사리에 맞는 불만. 우리 쪽이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경우입니다. 우리들은 과자 상자를 들고 고객의 집을 방문, 그에 상당하는 상품과 교환해 줍니다. (B) 도의적, 상업 관습적, 법률적으로는 우리 쪽에 책임이 없는 것이지만, 백화 점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고, 또 쓸데없는 트러블을 피하기 위하여 상응한 조치를 취합니다. (C) 명백히 고객의 책임으로, 우리 쪽은 사정을 설명하고 포기하도록 부탁합 니다. 그래, 일전에 당신이 접수하신 불만 신청에 대해 우리들은 신중히 검토해 보 았습니다만, 결국 당신의 신청은 C등급에 분류될 성격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 했습니다. 그 이유로서는-좋습니까, 잘 들어주세요. 1 한 번 사간 레코드는, 2 더구나 1주일이나 지난 뒤에, 3 영수증도 없이, 다 른 상품과 교환할 수는 없습니다. '전세계 어디를 가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자, 이상으로 나의 사정 설명은 끝났습니다. 당신의 불만 신청은 기각되었습 니다. 그러나 직업적 관점을 떠난다면-사실 나는 언제나 그 관점에서 떠나곤 합니다 만-개인적으로는 당신의 신청, 즉 브람스의 심포니와 마라의 심포니 레코드를 뒤바꿔 사갔다는 불만 신청에 대해, 정말로 동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저 상투적인 사무통지가 아니라, 이처럼 어떤 의미에선 친밀함이 담긴 메시지를 당신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1주일 동안,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상업 관습상 레코드를 교환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이 우리 쪽에 보내신 편지에는 무엇인지 제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있었습니 다. 개인적으로는...운운..." 이런 편지지요. 하지만 잘 쓸 수 없었습니다. 결코 글을 쓰는 것이 고역스러웠기 때문은 아 닙니다.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뭣하지만, 글쓰기에 능숙한 편이라서 편지 쓸 때 고심한 적은 별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만 하면, 아무리 해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떠오르는 말은 언제나 빗나간 것들뿐이지요. 글자의 겉 모양 은 옳은 듯해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나는 다 써서 봉투에 넣고 우표까지 붙 인 편지를 몇 통이나 찢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당신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불완 전한 편지를 내기보다는 아무것도 내지 않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완벽하지 못한 메시지란, 오식이 있 는 시각표나 다름 없는 것이지요. 그런 것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셈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아침 캥거루 울타리 앞에서, 36개 우연의 집적을 거쳐 하나 의 계시를 얻었던 것입니다. 즉, '위대한 불완전성'이라는 것이지요. "위대한 불완전성이란 무엇인가" 하고 당신이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당연히 물으시겠죠. 위대한 불완전성이란, 간단하게 말해 버리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결과적으로 용서한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캥거루를 용서하고, 캥거루가 당신을 용서 하고, 당신이 나를 용서하는-예컨대 이런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사이클은 물론 항구적인 것이 아니고, 어느 때 캥거루가 이제 는 당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캥거루에게 화내지 말아 주세요. 그것은 캥거루 탓도 당신 탓도 아닙니다. 또 내 탓도 아닙니다. 캥거루 쪽에도, 아주 복잡한 사정이 있답니다. 도대체 누가 캥거루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순간을 포착하는 것,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입니다. 순간을 포착해 서 기념 사진을 찍어 둔다는 말입니다. 앞줄 왼쪽 끝부터 당신, 캥거루, 나...처 럼. 글을 쓰는 일은 이제 단념했습니다. 간단한 사무 통지 성격의 글이라도 틀렸 습니다. 이제는 글자 그 자체를 신용할 수 없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우연'이라는 글자를 씁니다. 그러나 이 '우연'이라는 글자에서 당신이 느끼는 것은, 내가 똑같은 글자에서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혹은 반대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굉장히 불공평한 일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팬티마저 벗었는데 당신은 블라우스 단추를 세 개밖에 끄르지 않았다, 이것은 어떻게 봐 도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나는 불공평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계는 불공평합니다. '그 러나 적어도 내 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그런 것에 가담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 이 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나는 직접 카세트 테이프에다가,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취입하기 로 했습니다. (휘파람-<보기 대령의 행진곡>8소절) 어때요, 들립니까? 이 편지-즉, 카세트 테이프지요-를 받아 들고 당신이 어떤 기분이 들지, 나로 서는 알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전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아주 불쾌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백화점의 상품 관리 담당이 고객의 불만 신청 편지에 대해 카세트 테이프에 취입한 답장-그것 도 개인적인 메시지를 말입니다-을 보낸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지극히 이례 적인 일이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으 니까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불쾌하거나 몹시 화가 나서, 이 테이프를 내 상사 앞으로 반송하게 되면, 나는 회사 내에서 굉장히 미묘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겁니다. 만약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더라도, 나는 화를 내거 나 당신을 원망하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우리들 입장은 100퍼센트 대등한 것입니다. 즉,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권리를 가지고 있고, 당신은 내 생활을 위협할 권리를 가지고 있 다.' 어떻습니까, 공평하죠? 그래요, 나는 나름대로의 책임을 맡고 있답니다. 내가 뭐 농담이나 장난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참, 말하다가 잊었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캥거루 통신'이라고 이름 붙였습니 다. 그야 어던 것에나 이름은 필요하니까요. 예를 들어 당신이 일기를 쓰고 있다고 하면 '오늘 백화점 상품 관리과로부터 불만에 대한 답장(카세트 테이프에 취입된 것)이 도착함'이라고 길게 적는 대신, '오늘 <캥거루 통신> 도착'이라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간단해서 좋죠? 게다가 '캥거루 통신'이라는 것은 제법 멋진 이름 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넓은 초원 저만치서 캥거루가 배주머니에서 우편물을 채워 넣고, 깡충깡충 뛰어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똑 똑 똑(책상 두드리는 소리). 이것은 노크입니다. 노크 노크 노크...아시겠어요? 나는 댁의 문을 노크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당신이 문을 열고 싶지 않다면 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거짓말이 아닙 니다. 나로서는 정말 아무래도 좋다구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면, 여기서 테이프를 끄고 쓰레기통에라도 던져 버리십시오. 나는 다만 당신 집 현관 앞에 앉아, 잠시 동안 혼자 떠들어 보고 싶다는 것뿐 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들어주고 있는지 어떤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하고, 만약 그러하다면 사실 귀하가 듣던 안 듣던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하하하. 이것도 사태가 공평하다는 증거겠지요. 나에게는 지껄여댈 권리가 있고, 당신에게는 듣지 않을 권리가 있고. 좋아요. 아무튼 해보겠습니다. 노크는 했고, 당신에게는 그 노크에 응수할 의무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지요. 하지만 불완전성이란 아주 대단한 것입니다. 원고도 없고, 계획도 없이 마이 크에 대고 떠든다는 것이 이처럼 어려우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서서, 컵으로 물을 뿌리고 있는 것 같은 심정입니다. 무 엇 하나 보이지 않고, 무엇 하나 반응도 없습니다. 그러니가 나는 지금 줄곧 VU(volume unit, 음량을 재는 단위)미터의 바늘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VU미터라고, 알고 계시죠. 음량에 맞춰서 똑똑 바늘이 흔들리는 '그것'말입니 다. V와 U라는 것이 무엇의 머리 글자인지 나는 잘 몰라요. 하지만 뭐니뭐니해 도 그들이 나의 연설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 주는 유일한 존재랍니다. V와 U라는 것은 실로 완벽한 2인조입니다. V아니면 U, U아니면 V, 그저 그 뿐입니다. 멋진 세계지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누구를 향해 무엇을 떠들건, 그런 것은 그들에게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흥미를 갖는 것은 내 목소리가 얼마만큼 강하 게 공기를 진동시키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그들로서는 공기가 진동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멋지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들은 바라보고 있으면, 뭐라도 좋으니 무작정 떠들어대고 싶은 기분이 든답 니다. 무엇이라도 좋아요. 불완전이든 뭐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들 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공기의 진동입니다. 의미가 아니죠. 그저 공기의 떨림 일 뿐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양식이랍니다. 후유. 그러고 보니 요전에 몹시 슬픈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무리 농담을 해도 누구 도 웃어 주지 않는 코미디언의 이야기였습니다. 아시겠어요, 누구 한 사람 웃지 를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마이크에 대고 떠들다 보니, 문득문득 그 영화가 생각납니 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똑같은 대사인데도 어떤 사람이 얘기하면 죽도록 우습고, 다른 사람이 얘기하 면 전혀 우습지 않고. 이상하죠? 그래서 나는 생각해 보았는데, 그 차이란 것은 아무래도 타고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왜, 반고리관(척추 동물의 속귀에 있는, 평형 감각 담당 기관)의 끝이 남보다 약간 더 구부러져 있다든가 하는 느낌입니다. 만약 그러한 능력이 나에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가끔 생각합니다. 나는 늘 우스운 일이 생각나서 혼자 웃어대곤 하지만, 막상 입 밖에 내서 누 구에게 들려주거나 하면, 이것이 전혀 우습지 않은 거 있죠. 마치 이집트의 모 래 사내가 돼버린 심정입니다. 게다가 첫째로... 이집트의 모래 사내를 알고 계십니까? 저 말입니다, 이집트의 모래 사내는 이집트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아주 옛 날, 피라미드라든가 스핑크스라든가 뭐라 하는 시대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얼굴이 몹시 추하게 생겼기 때문에-정말 지독히도 못생겼지요-이를 싫어한 임금 님은 그를 정글 속에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하면, 결국 그는 늑대인지 원숭이인지에 의해 키워져서 생명을 연장하게 됩니다. 흔히 있는 이야기지만요. 그리고 어떻게 된 셈인지 모래 사내가 돼버렸습니다. 모래 사내는 말이죠,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모래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어요. 산들바람은 모래 먼지가 되고, 개울물을 흐르는 모래가 되고, 초원은 사막이 돼 버렸습니다. 이것이 모래 사내 이야기지요.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으시죠? 왜냐하 면 이것은 내가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니까요. 하하하. 아무튼 당신을 향해 이렇게 수다를 떨고 있으면, 이집트의 모래 사내가 돼버 린 듯한 느낌이 든답니다. 내 손에 닿는 모든 것이 모래, 모래, 모래, 모래, 모 래, 모래... 어쩐지 내 자신에 대한 것만 떠든 것 같군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하나도 없으니까요. 내가 당신에 대 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주소뿐입니다.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일년 수 입이 얼마인지, 코가 어떻게 생겼는지, 뚱뚱보인지 말라깽이인지, 결혼은 했는지 안했는지, 나는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쪽이 오히려 편할 수도 있으 니까요.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단순하게, 가능한 단순하게, 이른바 형이상학적 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요컨대 여기 당신의 편지가 있습니다. 나로서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심한 예를 들어 죄송합니다만, 동물학자가 정글에서 채취한 똥을 근거로 해서 코끼리의 식생활과 행동 양식, 체중, 성 생활을 추측하듯이, 나는 한 통의 편지 를 근거로 해서 당신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용 모라든가 향수의 종류라든가 하는 그런 하찮은 것을 빼고 말입니다. 존재, 그 자체입니다. 당신의 편지는 실로 매혹적인 것이었습니다. 문장, 필적, 구두점, 행길이, 수사 법, 모두가 완벽햇습니다.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오로지 완벽 그 자체였 습니다. 나는 매달 불평 불만에 관한 편지와 보고서를 5백 통 넘게 읽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편지만큼 감동정인 불만의 편지는 처음입니다. 나는 당신의 편지를 몰래 집으로 가지고 가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어 보 았답니다. 그리고 당신의 편지를 철저하게 분석했지요. 짧은 편지라서 많은 시 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분석을 통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우선 쉼표의 수가 압도적으 로 많았지요. 마침표 하나에 대해서 쉼표가 6개. 어떠세요, 많다고 보시지 않 습니까? 아니,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 쉼표를 찍는 방법이 참으로 무원칙합니 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내가 당신이 쓴 문장을 비웃고 있다고는 생각지 마십 시오. 나는 그저 단순히 감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동입니다. 구두점분만이 아닙니다. 당신 편지의 모든 부분이-잉크 자국 하나에 이르기 까지-나를 도발하고 흔들어대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결국, 그 문장 속에는 당신이 없는 까닭입니다. 물론 스토리야 있지요. 한 여자아이가-혹은 여성이-레코드를 잘못 샀다. 그 레코드에는 아무래도 다 른 곡이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레코드 자체를 잘못 샀다는 것 을 그녀가 깨닫기까지는 꼭 1주일이 걸렸다. 매장의 여자아이는 교환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불만의 편지를 썼다. 이것이 스토리입니다. 나는 그 스토리를 이해하기까지, 당신의 편지를 세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편지는 우리들한테 오는 다른 어떤 불만의 편지하 고는 완전히 달랐으니까요. 불만의 편지에는 불만의 편지 나름의 서식이라는 것이 있지요. 건방지다든가, 비굴하다든가, 따지고 든가든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 톤이야 어떻든 간에 그것으로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의 존재라는 핵 을 더듬어 알게 됩니다. 그 핵이 있고, 그 핵을 축으로 해서 각양 각색의 불만 이 형성됩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나는 온갖 종류의 불만의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 말하자 면 불만의 권위자인 셈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불만은 내가 보기에는 불만이라 고조차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만을 제출하는 당신 자신과, 당신이 제출한 불만 사이에는 연관성이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혈관이 붙어 있지 않은 심장이나 체인 없는 자전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약간 고민스럽더군요. 당신 편지의 목적이 과연 불만인 지 고백인지 선언인지, 아니면 일종의 규정 확립인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 으니까요. 당신의 편지는 나에게 대량 학살 현장의 사진을 연상시켰습니다. 코멘트도 없고 기사도 없이 그저 사진뿐입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나라의 알 수 없는 길바닥에 뒹굴뒹굴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는 사진이죠. 당신이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나는 그것조차 몰라요. 당신의 편지 는 급한 대로 만들어진 개미굴처럼 얼기설기 엉켜 있으면서도 손댈 수 있는 실 마리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탕탕탕탕...대량 학살이지요. 그래요. 사물을 좀더 단순화시켜 봅시다. 아주아주 단순하게 말입니다. 즉, 당신의 편지는 나를 '성(性)적으로' 고양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성적으로요.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똑 똑 똑. 노크입니다. 흥미가 없다면 테이프를 꺼버리십시오. 10초 동안 침묵하겠습니다. 그 다음 나는 VU미터를 향해서 혼자 떠들어 댑니다. 그러니까 혹 듣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그 10초 동안에 테이프를 끄고, 버리든지 백화점으로 우송하든지 하십시오. 좋습니까, 지금부터 침묵에 들어갑니다. (10초 동안의 침묵) 시작합니다. 앞다리는 짧고 다섯 발가락이 있으나, 뒷다리는 현저하게 길고 네 발가락이 있으며, 넷째 발가락만이 강대하게 발달해 있고, 둘째와 셋째 발가락은 지극히 작게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캥거루 다리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하하. 그럼 섹스에 대하여. 나는 당신의 편지를 집으로 가지고 돌아온 뒤로, 줄곧 당신과 함께 자는 일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침대에 들어가면 옆에 당신이 있고, 아침에 깨어도 역시 옆 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당신은 이미 일어나서 원피스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하지만 나는-아시나요, 상품 관리과 사람으로서 한마디해 본다 면, 원피스 지퍼만큼 망가지기 쉬운 것은 없답니다-눈을 꼭 감은 채 꼼짝 않고 자는 척하고 있지요. 나는 당신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방을 가로질러 화장실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제서야 나는 겨우 눈을 뜹니다. 그리고 식사를 끝내고 회사로 나간답니다. 밤은 캄캄하고-나는 특히 어둡게 하기 위해 창문에다 특별한 블라인드를 달아 놓았습니다-당신의 얼굴은 물론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도 체중도 아무것도 모 릅니다. 그러니까 몸에다 손을 대보지도 못하지요. 하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당신과 섹스를 하건 말건 아무 쪽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지. 조금 생각하게 해주십시오. 오케이, 이런 말입니다. 나는 당신과 자고 싶습니다. 하지만 자지 않아도 좋 아요. 즉,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될 수 있는 한 공평한 입장에 서고 싶은 것입 니다.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남으로부터 강요받거나 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당신 존재가 내 옆에 있음을 느낀다든가, 당신의 구두점이 내 주위를 뱅뱅 돌고 있다든가,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알아줄 수 있을까?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나는 가끔씩 '개'-개체의 개(個)입니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주 괴로워 진답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몸이 산산조각 나버릴 것만 같답니다. ...가령 전차를 탄다고 합시다. 전차칸에는 수십명의 사람이 타고 있죠. 원칙 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단순한 '승객'입니다. 아오야마 1가로부터 아카사카 미츠케까지 가는 '승객'이지요. 단지 때때로 그런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몹시 마음에 걸릴 때가 있 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이며, 저 사람은 도대체 뭘까, 어째서 긴자선 따 위를 타고 있는 것일까 하고요. 그러기 시작하면 큰일입니다. 끝이 없으니까요. 저 샐러리맨은 금새 이마 양 옆에서부터 벗겨지겟죠라든가, 저 여자아이는 다리에 털이 조금 많은 편이다, 일 주일에 한 번쯤은 깎아 주고 있겠지라든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저 젊은 남자 는 어째서 저렇게 색깔이 안 맞는 넥타이를 매고 있을까라든가, 뭐 그런 식입니 다. 그리고 막판에는 몸이 덜덜 떨려 와서 전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지죠. 요전 번에는 (분명히 당신은 웃을 테지만) 하마터면 문 옆에 있는 비상 정지 벨을 누 를 뻔했다니까요. 하지만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나를 과민한 인간이거나 신경질적인 인간이라 고 여기지는 마십시오. 나는 그처럼 과민한 것도 아니고, 남들에 비해 특별히 신경질적인 것도 아니니까요. 지극히 보통의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샐러리맨입 니다. 백화점 상품 관리과에 근무하면서 불평 불만을 처리하고 있지요. 성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단언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면에 있어 지나칠 정도로 고지식한 편이 아닐까 싶습 니다. 내게는 연인이라고 할 만한 여성도 한 사람 있습니다. 1년쯤 전부터 그녀와 일주일에 두 번쯤 자기도 하고, 그녀도 나도 그런 관계에 제법 만족하고 있답니 다. 다만 나는 그녀에 대해 깊이 생각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혼할 생 각은 없습니다. 만약 결혼을 해버리면, 필시 나는 그녀라는 인간의 세부에 대해 깊이 생각하 게 될 것이고, 그럴 때에 그녀와 잘해 나갈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 습니까, 함게 살고 있는 여자의 치열이며 손톱 모양을 염려하면서 어떻게 잘 꾸 려 나갈 수 있겠어요. 조금만 더 나 자신에 대해 말하게 해주십시오. 이번에는 노크는 안하기로 하지요. 여기까지 들었다면 내친 김에 끝까지 들어주시지요. 잠깐 기다려 주세요. 담배를 피우겠습니다. (딸각 딸각 딸각)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에 대해 이처럼 많은 것을, 이처럼 솔직하게 말한 적 이 없습니다. 이번이 처음입니다. 왜냐하면 일부러 남을 향해 떠벌릴 만한 일 도 없었거니와, 혹 떠벌린다 해도, 아무도 그런 것에 대해 흥미 같은 건 가져 주 지 않겠지 싶어서였죠. 그럼, 지금은 왜 당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지금, 위대한 불완정성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위대한 불완전성을 촉발한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편지와 네 마리의 캥거루입니다. 캥거루. 캥거루는 아주 매력적인 동물로서, 몇 시간을 바라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를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캥거루는 당신 편지를 꼭 닮았지요. 캥거루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들 무리는 하루 종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우리 안을 뛰어다니고, 이따금씩 땅바닥에 굴을 팝니다. 그래 굴을 파서 무엇을 하는가 하면, 그냥 아무것도 하 지 않아요. 그저 굴을 팔 뿐입니다. 하하하하. 캥거루는 한 번에 한 마리밖에 새끼를 낳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캥거루 암컷 은 새끼를 한 마리 낳는 즉시 또 임신을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캥거루의 전체 수효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즉, 암캥거루는 일생을 거의 임신과 육아로 소비 하는 셈입니다. 임신 아니면 육아, 육아 아니면 임신. 그러니까 캥거루는 캥거루를 존속시키기 위해 존속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 다. 캥거루의 존재 없이, 캥거루는 존속하지 않을 테고, 캥거루의 존속이라는 목적이 없다면 캥거루 자체도 존속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이야기의 앞뒤가 바뀌어서 죄송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 좀더 말하겠습니다. 사실인즉, 나는 나 자신이라는 자체에 대해서 몹시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용모 라든가 재능이라든가 지위라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단순히 내가 나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서지요. 몹시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란 사람을 불만 투성이라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나 는 직장과 월수입에 대해서는 한 번도 불평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하는 일 이 시시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일이란 시시한 법이죠. 돈이란 대단한 문제가 아 닙니다. 확실하게 말씀드리지요. 나는 동시에 두 장소에 있고 싶습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러한 나의 희망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몹시 불쾌한 사실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억지스런 압박이라고 여기지 않습니까? 나의 이 희망은 어느 쪽인가 하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지배 자가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적인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하 늘을 날고 싶다는 것도 아니에요. 단지 동시에 두 장소에 있고 싶다는 것뿐입 니다. 아시겠어요, 세 개, 네 개도 아닌 '단지 두 개'입니다. 나는 콘서트홀에서 관현 악을 들으면서, 롤러 스케이트를 타보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백화점의 상품 관 리과에 있으면서 맥도널드 쿼터 파운드 햄버거이고도 싶다는 말입니다. 나는 연인과 자면서 당신과도 자고 싶다는 것입니다. 나는 개체이면서 원칙이고 싶 습니다. 또 한 대 담배를 피우게 해주십시오. 후유. 솔직히 말해서 약간 피곤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일에-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는 일에-전혀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요. 나는 당신이라는 한 여성에 대해, 성적인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나 자신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약간 화를 내고 있습니다. 하나의 '개체'라는 것, 이것은 지독히 불쾌합니다. 나는 홀수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개인인 당신과는 자고 싶지 않습니다. 혹시 당신이 두 개로 분할되고, 내가 두 개로 분할되고, 그리고 그 네 사람이 침대에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무척 솔직하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제발 답장은 보내지 마십시오. 내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면, 회사 앞으로 불만 접수 형식의 편지를 주십시오. 만약 불만이 없다면, 뭔가 생각해 내십시오. 그럼, 이만. (스위치 소리) 여기까지의 테이프를 지금 다시 돌려서 들어 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 는 몹시 불만입니다. 잘못해서 '강치'를 죽여 버린 수족관의 사육사 같은 기분 이지요. 그러니까 이 테이프를 당신에게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나로서는 무척 고민을 했습니다. 보내기로 작정한 지금도 나는 또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불완전성을 지향한 것입니다. 또는 완전한 필요성을 포 기한 것이지요.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서 이번에는 순순히 불완전성의 뜻에 따르기로 합니다. 그 불완전성을 당신과 네 마리의 캥거루와 함께 나눠 가지겠습니다. 그럼, 이만. (스위치 소리) 서른두 살의 데이 트리퍼 내가 서른둘이고, 그녀는 열여덟이고... 이렇게 하면 아무래도 지루한 표현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 서른둘이고, 그녀는 벌써 열여덟... 좋아, 이거다. 우리는 그저 그런 친구 사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에겐 아내 가 있고, 그녀에겐 남자 친구가 여섯이나 있다. 그녀는 주말마다 여섯 명의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일 요일에 나하고 데이트를 한다. 그 이외의 일요일에는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 전을 볼 때의 그녀는 해마(海馬)처럼 귀엽다. 그녀는 1936년에 태어났는데, 그해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그해에, 나는 처음으로 여자아이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유행하던 곡은 클리프 리처드의 <서머 홀리데이>였던가? 뭐, 그런 거는 아무러면 어때. 아무튼 그해에 그녀는 탄생했다. 그해에 탄생한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하게 되다니, 그 즈음에는 물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달위 뒤쪽에 가서, 바위에 기대어 담배라도 피우고 있는 그런 기분이 든다. "나의 어린 여자아이는 따분하기만 하지" 라는 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고, 반 응도 평범하기 짝이 없지 뭐야'하고 그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치들만 해도 곧잘 어린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한다. 그 렇다면 그들은 요행히도 따분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를 찾아냈단 말일까? 아니 지, 그런 게 아니다. 말하자면 그녀들의 따분함이 그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들은 따분함의 물 을 양동이 하나 가득 머리로부터 뒤집어쓰면서도, 상대방 여자아이에게는 물방 울 하나 뿌리지 않는다는 꽤 까다로운 게임을 아주 순수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 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여겨진다. 사실, 어린 여자아이들의 열 명 중 아홉 명은 따분한 '물건'들이다. 그러나 물 론 그녀들 자신은 그런 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녀들은 젊고 아름답 고, 그리고 호기심에 차 있다. 따분함이란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그녀 들은 생각하고 있다. 아이고 참. 하지만 내가 뭐 어린 여자아이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싫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녀들을 좋아한다. 그녀들은 나 에게, 내가 따분한 청년이었던 시절의 일을 회상하게 해준다. 이건 뭐라고 할까, 아주 근사한 일인 것이다. 우리들도 그 옛날엔 어쩔 수 없 이, 아름다울 만큼 평범하고, 따분했던 것이다. "어때요, 다시 한 번 열여덟 살로 되돌아가고 싶어요?"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 하고 나는 대답했다. "되돌아가고 싶지 않군.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열여덟 살로 되돌아가고 싶어요?"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 하고 나는 대답했다. "되돌아가고 싶지 않군.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열여덟 살이 되고 싶진 않아." 그녀는 내 대답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구요...정말?" "물론." "어째서요?"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까." 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기면서 커피잔 속에서 스푼을 딸깍딸 깍 저었다. "그 말은 어쩐지 믿기지 않는걸요." "믿는 게 좋아." "하지만 젊다는 건 근사하잖아요." "그렇긴 해." "그런데 어째서 지금 쪽이 좋죠?" "한 번으로 충분하거든." "난 아직 충분치 않은걸요." "넌 아직 열여덟 살이니까." "흐응" 하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넌 벌써 열여덟 살인걸, 하고 나는 나 자신을 향해 살며시 덧붙여 말 한다. 나는 종업원을 불러 두 번째의 맥주를 부탁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창으로는 요코하마 항구가 보였다. "있잖아요, 열여덟 살 무렵엔 무얼 생각했었어요?" "여자아이하고 자는 것." "그 밖엔?" "그것뿐이야." 그녀는 킬킬 웃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잘됐어요?" "잘된 적도 있고, 잘되지 않은 적도 있어. 물론 잘되지 않은 쪽이 많았지만 말야." "몇 명 정도의 여자아이하고 잤어요?" "세어 보지 않았어." "정말?" "세고 싶지 않았거든." "내가 남자였다면 반드시 세어 봤을 거야. 재미있잖아요?" 다시 한 번 열여덟 살로 되돌아간다는 것도 나브진 않겠군, 그렇게 생각되는 때도 있긴 하다. 그러나 열여덟 살로 되돌아간다면 먼저 무엇부터 할까? 생각 해 보니 나로선 이제 무엇 한 가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혹시 내가 다시 한 번 열여덟 살이 된다면 어쩌면 서른두 살의 매력적인 여성 과 데이트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거라면 그리 나쁠 건 없다. "다시 한 번 열여덟 살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을 것이다. "그건..." 하고 그녀는 생그레 웃으며 잠시 생각하는 척하고는 '없어요. 아마도'하고 말할 것이다. "정말로?" "예." "이상하네요. 젊다는 건 근사한 일이라고 모두들 말하잖아요." "그렇죠, 근사한 일이죠." "그런데 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건가요?" "당신도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될 거예요." 하지만 역시 나는 서른두 살이고, 1주일 동안만 운동을 거르면 배가 나오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젠 열여덟 살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이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아침에 조깅을 마치고 나면 야채 쥬스를 한잔 마시고, 의자에 벌렁 드러누워, 비틀즈의 <데이 트리퍼(day tripper, 여행자)>를 튼다. <데-이-트리퍼>. 그 곡을 듣고 있으면, 열차의 시트에 걸터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 신주랑 역이랑 터널이랑 철교랑 소랑 말이랑 굴뚝이랑 온갖 것들이 빠르게 뒤쪽 으로 지나가 버린다. 어디까지 달려도 별다른 경치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옛날 엔 무척이나 근사한 경치처럼 여겨졌었는데도 말이야. 옆자리에 앉는 상대방만이 가끔씩 바뀐다.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열여덟 살의 여자아이다. 나는 창가에, 그녀는 통로 쪽에 앉아 있다. "자리를 바꿔 줄까." 하고 내가 묻는다. "고마워요. 친절하시네요" 하고 그녀가 말한다. 친절한 게 아니란다, 하고 나는 쓴웃음을 짓는다. 너보다는 훨씬 따분함에 익 숙해져 있을 뿐이란다. 그저 그뿐이란다. 전신주 세기에도 지쳤다. 서른두 살의 데이 트리퍼. 이것은 실패작 하이쿠(俳句:일본 전통의 짧은 시). 창(窓) 삼가 아룁니다. 추위도 하루하루 수그러져, 햇살 속에 희미한 봄 기운이 느껴지는 어제오늘이 되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전날 주신 편지, 반갑게 받아 보았습니다. 특히 햄버그 스테이크와 향신료의 관계에 대한 대목은, 생동감 넘치는 상당히 훌륭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주 방의 따스한 향기와 양파를 써는 싹둑싹둑 칼질 소리가 생생히 전해져 왔습니 다. 그런 데가 한 군데라도 있으면, 편지는 살아납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고 있으려니까 햄버그 스테이크가 못 견디게 먹고 싶어져, 그날 밤 당장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주문했지요. 그 레스토랑에는 실로 여덟 종류나 되는 햄버그 스테이크가 있었습니다. 텍 사스 식이랄까, 캘리포니아 식이랄까, 하와이 식이랄까, 일본식이랄까 하는 것입 니다. 텍사스 식이라는 것은 아주 크답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그런 것을 안다면 텍사스 사람들은 깜짝 놀라겠지요. 하와이 식이라는 것에는 파인애플이 곁들여져 나옵니다. 캘리포니아 식이라는 것은...잊어버렸습니다. 일본 식에는 무 즙이 딸려 나옵니다. 가게는 멋지게 꾸며져 있고, 여종업원들은 모두 제법 귀여우며 아주 짧은 스 커트를 입고 있답니다. 그러나 내가 뭐 레스토랑의 실내 장식을 연구하거나 여종업원의 다리를 구경 하러 그곳에 갔던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저 햄버그 스테이크를, 그것도 무슨 무슨 식이 아닌 극히 보통의 햄버그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던 것입니다. 나는 여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극히 보통의 햄 버그 스테이크, 그것이라고. 죄송합니다만 저희 가게에는 무슨 무슨 식 하는 햄버그 스테이크밖에는 없답 니다, 하고 여종업원은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물론 여종업원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녀가 메뉴를 정하는 것도 아니겟고, 그릇을 치울 때마다 허벅다리가 다 드러나는 제복을 일부러 걸치고 있는 것도 아니겠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빙긋 웃고는 하와이 식 햄버그 스테이크라는 것을 주문했지요. 드실 대 파인애플을 제쳐놓기만 하면 된답니다, 하고 그녀가 가르쳐 주더군요. 세상이란 데는 기묘한 곳입니다. 내가 참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주 보통의 햄 버그 스테이크라는 형태로만 제공되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 만든 것은, 극히 보통의 햄버그 스테이크겠죠? 편지를 읽 고 있노라니까, 당신이 만든 아주 보통의 햄버그 스테이크를 꼭 먹고 싶어졌답 니다. 그에 비하면, 전철표의 자동 판매기에 관한 문장은 어째 좀 겉핥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발상은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 풍경이 읽는 이에게 전달되지 않 는다는 말입니다. 제발 첨예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문장이란 것은 결국 임기 웅변적인 것입니다. 전체로 봐서 이번 편지의 점수는 70점 정도입니다. 조금씩 문장력이 향상되 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분발해 주십시오. 다음 편지를 기대하겠습니다. 어서 정말 봄이 오면 좋겠군요. 3월 12일 P.S. '쿠키'세트, 정말 고마웠습니다.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 규칙 상 편지 이외의 개인적인 교류는 일절 금지되고 있으므로, 이후로는 이러한 선 물을 사양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무튼 고마웠습니다. 이상과 같은 아르바이트를 나는 1년 가량 계속했었다. 스물두 살 때쯤의 일 이다. 나는 이이다바시에 있는 '펜 소사이어티'라는 명칭의, 뭐가 뭔지 모를 조그마 한 회사와 계약을 맺고, 위의 글과 엇비슷한 편지들을 한 달에 30통 이상씩-한 통당 2천 엔-마구 써댔다. '당신도 상대방의 마음을 울리는 편지를 쓸 수 있게 됩니다'가 이 회사의 캐치 프레이즈였다. 입회자는 입회비와 월회비를 내고, 한 달에 네 통의 편지를 '펜 소사이어티'앞으로 써보낸다. 그에 대해 우리들 '펜 마스터(지도 교사)'가 첨삭을 하고, 위에 예로든 것 같은 소감과 지도의 편지를 쓰는 것이다. 나는 문과대학 학생과에 붙어 있는 모집 광고를 보고, 그 회사에 면접 시험을 보러 갔었다. 나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대학을 휴학하기로 결정한 참이었 다. 부모님은 만약 내가 휴학한다면 내년부터 학비 송금을 줄이겠노라고 통지해 왔다. 그래서 당연한 일이겠으나 나는 생활비를 벌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 게 되었던 것이다. 면접 시험을 치르고, 몇 가지 작문을 쓰고, 그리고 1주일 후에 채용되었다. 그로부터 1주일간에 걸쳐 전문 지도원에게서 첨삭의 비결과 지도의 노하우, 갖 가지 마음가짐 등을 배웠다. 그것은 별로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성 회원에게는 남성이, 남성 회원에게는 여성이 '펜 마스터'로 붙는다. 내가 맡은 회원은 연간 스물네 명으로, 연령층은 아래로 열네 살부터 위로 쉰세 살에 이르고, 대부분은 스물다섯 살부터 서른다섯 살까지의 여성이었다. 즉, 대다수 회원들이 나보다 연상이었다. 그래서 처음 1개월 가량,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회원들 대부분은 나보다 훨씬 더 글을 잘 썼으며, 훨씬 더 편지 쓰기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로 말하자면, 그대까지 그럴싸한 편지는 거의 써본 적도 없는 상태였다. 나 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처음 1개월을 어떻게 어떻게 보냈다. 필시 몇 사람들쯤 은-그것은 회원의 권리로서 회칙에도 내세우고 있었던 일이지만-'펜 마스터'교체 를 요구해 오리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1개월이 지나도 누구 한 사람 나의 문장 능력에 대해 불만의 소리를 높이는 회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나에 대한 평판이 썩 좋다고 회 사 사람이 내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3개월 후에는 나의 '지도'에 의해 회원들 의 문장력이 향상된 것 같기조차 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녀들은 마음속으로부터 나를 교사로서 신뢰하고 있 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되자, 나도 회원의 편지에 대한 비평의 답장을 그때까지 보다 훨씬 편안한 기분으로 자유로이 쓸 수 있게끔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알 수 있지만, 그녀들은 다들 쓸쓸했던 것이다. 그녀 들은(또는 그들은) 다만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써보내고 싶었던 것뿐이다. 하 지만-그 무렵의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그녀들로서는 그 편지를 보 낼 만한 상대방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라디오의 디스크 자키에게 편지를 보낼 타입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좀더 개인적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첨삭'이나 '비평'같은 것이었 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 모양으로 20대 초반의 세월을, 한쪽 발만 있는 물개처럼 소극적인 편 지의 하렘(harem, 회교도의 아내와 첩이 거처하는 방)속에서 지냈다. 회원들은 실로 갖가지의 편지를 내 앞으로 보내 주었다. 지루한 편지가 있는 가 하면 절로 미소 짓게 하는 편지도 있었고, 슬픈 편지도 있었다. 무척 옛날 일이기도 하고, 그녀들이 보낸 편지가 지금 수중에 없으므로-그것 은 규칙으로, 전부 회사에 반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유감스럽게도 구체적으로 또렷이 상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실로 온갖 종류의 인생 모습이-몹 시 커다란 일부터 몹시 자잘한 일까지-아로새겨지고, 잔뜩 채워지고, 내동댕이쳐 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녀들이 전해 오는 그러한 메시지들은 나에게, 즉 스물한 살이나 스물두 살 의 대학생에게는 기묘하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것들은 대개의 경우 리얼리티라는 것이 결여돼 있는 것처럼 여겨졌고, 어떤 경우에는 전면적으로 무 의미한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내가 인생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만이 그 원인은 아니었다. 이제 와 서 생각해 보니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사물의 리얼리티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전달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만들어야'할 것이란 말이다. 그리 고 의미라는 것은 거기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당시의 나로서는 그런 것을 알 수 없었고, 그녀들로서도 알 수 없었다. 이것 역시, 그 편지들에 씌어진 모든 사물이 내 눈에 단조롭게 비친 원 인의 하나였던 것 같다. 사정이 있어서 그 아리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내가 지도하고 있던 회 원들은 모두 애석해 했다. 나도 어떤 의미에서는-솔직히 말해서 그런 식으로 질질 끌어가면서 직업적으 로 편지를 써대는 작업에는 어지간히 싫증이 나 있던 터니만-유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그토록 정직해질 수 있는 기회란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햄버그 스테이크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녀(첫 편지를 보낸 여성)가 만 든 햄버그 스테이크를 실제로 먹을 수 있었다. 그녀는 서른두 살이었고, 아이는 없었다. 남편은 다섯 번째 정도로 유명한 상 사 계통의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 편지에, 유감스럽지만 이번 한 달로 이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썼을 때, 그녀는 나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극히 보통의 햄버그 스테이크를 만들겠어요'라고 그녀는 편지에 썼다.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나는 굳이 가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스물두 살 의 청년의 호기심을 누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맨션은 오다큐의 선로 부근에 있었다. 아이가 없는 부부답게, 집은 정 결했다. 가구나 조명이나 그녀의 스웨터 모두 값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품위 있 는 것들이었다. 나는 그녀가 생각 밖에 훨씬 젊어 보인다는 데 놀랐으며, 그녀는 내가 생각 밖에 훨씬 젊다는 데 놀랐다. 그녀는 나를 자기보다 연상의 남자인 줄 알고 있 었던 것이다. '펜 소사이어티'는 '펜 마스터'의 연령을 밝히지 않았다. 서로가 한 번씩 놀라고 나서 초대면의 긴장은 풀어졌다. 우리는 같은 열차를 놓쳐 버린 승객끼리라는 분위기에서 햄버그 스테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열차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방이 있는 3층 창문에서는 전차 선로가 보였다. 그날은 아주 좋은 날씨여서, 주위의 아파트 베란다에는 이불과 시트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가끔가끔 이불을 두드리는 소리가 탁탁났다. 나는 지금도 그 소 리를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기묘하게 거리감이 없는 소리였다. 햄버그 스테이크 맛은 근사했다. 향신료를 알맞게 썼고, 파삭파삭하게 구워진 껍질 안쪽에는 육즙이 잔뜩 괴어 있었다. 소스 상태도 이상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맛있는 햄버그 스테이크를 먹은 것이 생전 처음이랄 수는 없어 도 실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기뻐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 비트 바카락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신상 이야기를 했다. 신상 이야기라지만 나에게는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었으므로, 거의 다 그 녀가 했다. "학생 시절엔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팬이라면서, 나에게 사강의 이 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녀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좋아했다. 나도 사강이 싫지는 않다. 적어도 다들 말하는 것만큼 속되다고는 생각지 않 는다. 누구나가 헨리 밀러니 장 즈네 같은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규칙 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저로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고 가르쳐 준 건 당신이에요. 당신한테 편지를 쓰던 중에, 그걸 잘 알게 됐어요. 저한테는 그런 힘이 없다고요" 하고 그녀는 웃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스물두 살 무렵, 나는 이내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하지만 당신의 문장엔 아직 솔직한 데가 있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주 희미한 미소였다. "적어도 전 당신의 편지를 읽고서 햄버그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 죠." "분명히 그때 배가 고프셨던 거예요" 하고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전차가 딸까당딸까당 메마른 소리를 내며 창문 밑을 지나갔다. 시계가 5시를 쳤을 때, 나는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말했다. "바깥양반이 오기 전에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남편은 아주아주 늦게 온대요. ...한밤중이 되기 전에는 오지 않는대요" 하고 그녀는 턱을 고인 채 말했다. "무척 바쁘신가 보군요." "그래요." 하고 그녀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편지에도 썼지만요, 남편하곤 여러 가지 얘기가 서로 잘 통하지 않거든요. 기분이 잘 전달되지 않아요. 그 사람과 얘기하고 있으면, 서로가 꼭 다른 말로 얘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어떻게 대꾸하면 좋을지 나로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처럼 기분이 전달되지 않는 상대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괜찮아요" 하고 그녀는 가만가만히 말했다. 정녕 그래도 괜찮은 것처럼 들렸다. "...오랫동안 편지를 써줘서 고마워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당신한테 편지를 씀으로써, 어쩐지 구원을 받은 것 같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저도 재미있었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어떤 편지를 어떤 문장으로 써보냈었는지, 나는 거의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벽에 걸린 시계를 얼마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시 간의 흐름을 점검하고 있는 것처럼. "대학을 졸업하면 어떡할 작정이세요?" 하고 그녀는 내게 물었다. 아무런 작정도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나 자신 무엇을 하면 좋을지 잘 모르 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제 생각인데요. 당신은 무슨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당신이 강평으로 써주는 편지는 아주 근사했거든요. 전 그걸 굉장히 기다리곤 했었죠. 아첨이 아니에요. 당신은 그걸 다만 단순히 아르바이트의 어떤 기준으 로 썼는지 몰라도, 거기엔 무엇인지 마음이 담긴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전부 빠 짐없이 정리해 두고, 가끔씩 꺼내 다시 읽곤 해요." "고마워요. 그리고 또 햄버그 스테이크, 정말 잘 먹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오라큐의 전차를 타고 그녀의 맨션 근처를 지날때마다, 그녀와 그 파삭파삭한 햄버그 스테이크가 생각난다. 나는 선로 양 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맨션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어느 창문이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녀의 집 창문으로 보이던 풍경을 상기하고, 그 것이 어느 언저리였더라, 하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제 전혀 상기할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이제 거기에 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다면, 그 창문 안에서 그녀는 지금도 혼자서 버트 바카락의 같은 레코드를 계속 듣고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대 그녀와 동침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것이 이 글의 테마다. 나로서는 그 해답을 알 수 없다. 지금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제아무리 나이 를 먹더라도, 제아무리 경험을 쌓더라도, 알 수 없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그저 전차의 창문을 통해 저것일까 싶은 건물의 창문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모든 창문이 그녀가 살았던 방의 창문인 것처럼 여겨지는 때도 있다. 그리고 어느 창문도 전부 다른 창문인 것처럼도. 그곳에는 너무나 많은 창문들이 있다는 말이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 도서관은 아주 조용했다. 책이 소리를 전부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책에 흡수된 소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물론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요컨대 소리가 사라진 게 아니고, 공기의 진동이 흡수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책에 흡수된 진동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진동은 다만 단순히 사라져 버렸을 뿐이다. 진동은 어차피 언젠가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영원한 운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운동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만 해도 영원한 운동은 아니다. 다음 주가 없는 이번 주도 있었고, 지난 주가 없는 이번 주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주가 없는 다음 주는... 이제 그만하자. 아무튼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그리고 도서관은 아주 조용했다. 도서관은 필 요 이상으로 조용했다. 나는 새로 산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으므로, 회색의 리 놀륨이 깔린 마룻바닥을 걷자 뚜벅뚜벅 하는 딱딱한고 메마른 소리가 났다. 어 쩐지 내가 내는 구두 소리 같지가 않았다. 새 가죽 구두를 신으면 자신의 발소 리에 익숙해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대출 코너에는 본 적이 없는 중년 여인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주 두툼한 책인데, 오른쪽은 외국어, 왼족은 국어로 씌어진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 다. 같은 문장은 아닌 것 같았다. 좌우의 단락이나 행이 전혀 달랐으며, 삽화 도 달랐다. 왼쪽 페이지의 삽화는 태양계의 궤도도(軌道圖)였고, 오른쪽의 것은 잠수함의 밸브 비슷한 금속 부품이었다. 무엇에 대한 책인지, 통 알 수가 없었 다. 그러나 그녀는 응,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은 책을 달리고 있었다. 눈 의 움직임으로 보아 왼쪽 눈으로는 왼쪽 페이지를, 오른쪽 눈으로는 오른쪽 페 이지를 읽는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하고 나는 말을 걸었다. 그녀는 책을 옆으로 밀어 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책을 반환하러 왔습니다" 하고 나는 두 권의 책을 카운터에 올려 놓았다. 한 권은 <잠수함 건조사(建造 史)>였고, 또 한 권은 <어느 양치기의 회상>이었다. <어느 양치기의 회상>은 상당히 흥미있는 책이었다. 그녀는 책의 뒤표지를 넘겨서 기한을 살폈다. 물론 기한 내에 가져왔다. 나 는 날짜나 시간은 반드시 지킨다. 그래야 한다고 교육을 받아왔다. 양치기도 그렇다.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양들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혼란 스러워져 버린다. 그녀는 익숙한 태도로 대출 카드를 살피고, 내 두 장의 카드를 돌려 주었다. 그리곤 다시 곧 독서에 열중했다. "책을 찾고 있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계단을 내려가서 오른쪽, 107호실" 하고 그녀는 짤막하게 말했다. 계단을 내려가서 오른족으로 돌자, 정말 107이라고 적힌 문이 있었다. 아주 깊고 어둑어둑한 지하실로, 문을 열면 그대로 브라질로라도 가버릴 수 있지 않 을까 싶었다. 나는 이 도서관에 백번도 더 왔었지만, 지하실이 있다는 말은 처 음 들었다. 아무러면 어때. 나는 문을 두드렸다. 가볍게 두드렸을 뿐인데도 경첩이 빠져 나올 뻔했다. 아주 낡아빠진 문이었다. 나는 경첩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살며시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작고 낡은 책상이 있었고, 그 뒤쪽에는 얼굴에 검버섯이 잔뜩 핀 노 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대머리였고, 도수가 높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어딘 지 깔끔하지 못한 대머리였다. 쪼글조글 비틀어진 흰 머리카락이 산불이 난 뒤 처럼 어수선하게 두피에 단단히 매달려 있었다. 차라리 전부 면도기로 밀어 버리면 좋을텐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런 건 물론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어서 오시오. 무슨 용건이오?" 하고 노인이 물었다. "책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쁘시다면 다음 번에..." 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오, 아니, 아니, 바쁘달 게 있겠소이까,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무슨 책이건 찾아 드리죠. 그래, 어떤 책을 찾으시는 거요?" "저어,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을 알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노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옳거니,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이라..." 나는 그 자리가 몹시 어색했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을 꼭 알 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 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문득 생각했을 뿐이다. 그건 삼(杉)나무 화분병(花粉 炳)의 치료법이라도 주제라도 상관없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이라..." 하고 노인은 되뇌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렇게 급할 것은 없어요. 그리고 아주 전문적인 사항이 니까요, 국회 도서관에라도 가보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실없는 소리하지 말게" 하고 노인은 화난 듯이 말했다. "여기엔 분명히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금 징수 정책을 다룬 책이 몇권이나 있 으니까,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예." 노인은 방 안쪽에 있는 철제 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거기에 선 채 15분이나 노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도중에 몇 번이나 달아날까도 생 각했지만, 아무래도 노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 작고 검은 벌레가 전등갓 뒤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노인은 세 권의 두툼한 책을 안고 돌아왔다. 모두 지독하게 낡아서 겉장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방안에 묵은 종이 냄새가 풍겼다. "자, 이거" 하고 노인은 책을 건넸다. "<오스만 터키 세금 징수 역사>, 그리고 <오스만 터키 세금 징수 담당자의 일지>, 그리고 또 <오스만 터키 제국 내의 비납세 운동과 그 탄압에 관하여>... 어때, 있잖은가?"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나는 그 세 권을 받아 들고, 출구 쪽으로 나가려 했다. "기다리게, 기다려. 그 책은 세 권 다 대출이 금지된 걸세." 분명 그 책들의 겉장에는 '대출 금지'라는 빨간 표가 붙어 있었다. "만일 읽고 싶다면 안쪽 방에서 읽고 가도 되네." "그런데..." 하고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5시 12분이었다. "벌써 도서관도 폐관 시간이고요, 저도 저녁 식사 때까지 귀가하지 않으면 어 머니가 걱정하시거든요." "폐관 시간 같은 건 문제가 안돼. 내가 괜찮다고만 하면 그걸로 되는 거야. ... 그런데 내 호의가 싫단 말인가? 여보게,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책들을 찾았지? 운동이라도 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정말 미안합니다" 하고 나는 사과를 했다. "결코 악의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대출 금지'인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 니다." 노인은 깊은 기침을 하고는, 휴지에다가 가래를 뱉었다. 그리곤 잠시 그걸 바 라보고 나서 휴지통 대신 마룻바닥에 놓인 마분지 상자 속에다 버렸다. 검버섯 핀 얼굴이 떨리고 있었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하고 노인은 뱉어 버리듯 말했다. "내가 자네 나이쯤 되던 시절엔,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책을 읽었단 말일세." "그럼 한 30분만 읽다가 가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안될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굉장히 걱정을 하시거든요. 어릴 때 개에게 물린 다음부터는, 저의 귀가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거의 광란 상태가 되곤 한답니다. 나머지는 이 번 일요일에 와서 계속 읽을게요." 나는 이렇게 힘없이 말했다. 나는 무엇이든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 이다. 노인의 얼굴이 가까스로 누그러졌다. 나는 안도했다. "이리로 오게나" 하고 노인은 철제 문을 열고 나에게 손짓을 했다. 문의 안쪽은 어스레한 복도 였다. 낡은 전등 불빛이 먼지처럼 희뜩희뜩했다. "내 뒤를 따라오게" 하고 노인은 복도를 걸어갔다. 기묘한 복도였다. 얼마를 걷자니까 복도는 좌우 로 갈라져 있었다. 노인은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 그 바로 뒤로, 마치 개미굴 처럼 복도의 양 옆으로 여러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노인은 별로 살펴보지도 않고 갈림길 중 하나로 들어섰다. 나는 세 권의 책을 가슴에 안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채 노인의 뒤를 따 랐다. 노인의 발걸음은 보기보다 빨라서 나는 도대체 우리가 몇번째 갈림길로 들어섰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조금 가다간 또 갈림길. 그리고 T자 길. -나의 머리는 이제 완전히 혼란스러워졌다. 시립 도서관의 지하에 이런 광대 한 미로(迷路)가 있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시(市)에서 이런 지하 미로의 건 설을 승인할 까닭이 없다. 나는 노인에게 그 점을 질문해 볼까도 했지만, 호통 을 당할 것만 같아서 결국 그만뒀다. 막다른 데에 또 전과 같은 철제 문이 있었다. 문에는 '열람실'이라는 표찰이 걸려 있었다. 주위는 무덤 가처럼 조용했다. 나의 가죽 구두만이 뚜벅뚜벅 소 리를 내고 있었다. 노인은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노인은 윗도리 주머니에서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꺼냈 다. 그리고 전등 아래 열쇠 하나를 골라내어, 문의 열쇠 구멍에 밀어 넣고 돌렸 다. 어쩐지 이상한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자아, 이제 어쩐다?" 하고 노인은 잠깐 생각하더니 "안으로 들어가세" 하고 말했다. "하지만 안은 너무 컴컴한걸요" 하고 나는 대꾸했다. 노인은 불쾌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등을 꼿꼿이 펴고 내 쪽을 향 했다. 갑작스레 노인의 덩치가 커진 것처럼 보였다. 노인의 눈이 저녁녘의 염 소처럼 반작였다. "여보게, 젊은이. 아무도 없는 방의 전등을 하루 종일 켜놓으란 말인가, 응? 자네가 나한테 그렇게 명령하겠단 말인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닙..." "에이, 시끄럽군. 이젠 됐네. 가보게, 어디든 가버려."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로서도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노인은 어쩐지 불길한 존재인 것만 같았으며, 동시에 화통만 터뜨리는 불행한 사람 같기도 했 다. 나는 대체로 노인에 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말 곤란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제가 말을 잘못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모두가 같은 말이지. 입으론 무슨 말이나 할 수 있지." "사실은 제가 한 말과는 달라요. 어두울 때까지 밖에 있어도 괜찮답니다. 쓸 데없는 소릴 해서 미안합니다." "흐응" 하고 노인은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그럼, 안에 들어갈 테지?" 라고 말했다. "예,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내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로 쉽게 말하고 행동해 버리는 것일까. "안에는 계단이 놓여 있어.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벽의 난간을 꼬옥 잡도록 해" 하고 노인은 말했다. 나는 앞장서서 어둠 속을 나아갔다. 노인이 등뒤에서 문을 닫았다. 딸깍 하 고 열쇠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왜 열쇠를 잠급니까?" "규칙이야, 규칙. 윗것들이 그런 규칙을 몇천, 몇만 개나 만들었다구. 나한테 이러쿵저러쿵하면 곤란해." 나는 체념하고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굉장히 긴 계단이었다. 마치 잉카의 우물 같았다. 벽에는 녹슬 대로 녹슨 쇠난간이 붙어 있었다. 한 줄기의 햇살, 한 조각의 불빛도 없었다. 머리에서부터 두꺼운 자루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캄 캄절벽이었다. 내 가죽 구두가 뚜벅거리는 소리만이 어둠 속에 울리고 있었다. 구두 소리라 도 없다면 내 발인지 아닌지조차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됐어. 거기서 멈춰" 하고 노인이 말했다. 나는 멈춰 섰다. 노인은 나를 밀어젖히듯 앞으로 나서더니, 주머니에서 절렁 절렁 소리를 내며 열쇠를 꺼냈다. 그리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캄캄했는데도, 노인은 마치 무엇이나 다 보이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반갑게도 안에서부터 노오란 불빛이 흘러 나왔다. 약한 빛이었 으나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문 안쪽에서 양(羊)같은 모습을 한 작달막한 사내가 나와서, 내 손을 잡았다. "어이, 잘 왔소" 하고 그 양 같은 사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나는 말했다. 뭐가 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양(洋)사내는 진짜 양가죽을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 손에는 검은 장갑, 발에 는 검은 작업 구두, 그리고 얼굴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로부터 붙임성이 있는 두 개의 작은 눈동자가 엿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었으나, 아무 튼 그 모습은 그에게 잘 어울렸다. 그는 내 얼굴을 얼마 동안 바라보다가 내가 안고 있는 책을 흘낏 쳐다보았다. "자넨 이리로 책을 읽으로 온 건가?" "그렇습니다." "정녕 '자네의 의지로' 이리 온 건가?" 양사내의 말투는 어딘지 묘했다. 나는 머뭇거렸다. "분명하게 대답하게. 자네의 의지로 왔지 않은가. 왜 우물쭈물하지. 이 늙은 이한테 창피를 줄 셈인가?" 하고 노인이 다그쳤다. "제 의지로 왔습니다." "그것 봐" 하고 노인이 득의 양양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 아직 어린애인걸요" 하고 양사내가 노인을 향해 말했다. "에이, 시끄러워." 노인은 갑자기 양복 바지 뒷주머니에서 짧은 버드나무 가지를 꺼내어 양사내 의 얼굴을 철썩 갈겼다. "어서 방으로 데려가라구." 그 말을 들은 양사내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입술 언저 리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자아, 가자꾸나." "어딜 가지요?" "독서실이지. 아, 자넨 책 읽으러 왔잖나?" 양사내가 앞장을 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개미굴처럼 꼬불꼬불 꼬부라진 좁은 복도를 걸어갔다. 우리는 한참을 걸어갔다. 오른쪽으로 몇 번을 꼬부라지 고, 왼쪽으로 몇 번을 꼬부라졌다. 비스듬한 모퉁이도 있었으며, S자형 커브도 있었다. 그 때문에 출발한 곳으로부터 어느 만큼이나 떨어져 있는지 통 알 수 가 없었다. 나는 방향 확인을 도중에서 단념하고 줄곧 양사내의 펑퍼짐한 등허리만 바라 보며 걸었다. 양가죽 옷엔 짤막한 꼬리도 달려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그것이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자, 이제 다 왔네" 하고 양사내가 갑자기 멈춰 서며 말했다. "잠깐만요, 이건 감옥이 아닙니까?" "그렇지" 하고 양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네" 하고 노인이 말했다. "말이 다르잖아요. 당신이 독서실로 간다고 해서 내가 여기가지 따라온 거 아 닙니까?" "속은 거야" 하고 양사내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속였다네" 하고 노인이 말했다. "아니, 그런..." 노인이 양복 바지 뒷주머니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꺼내 나의 얼굴을 철썩 갈겼 다. "입다물고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세 권의 책을 전부 읽고 다 암기해 버려. 한 달 후에 내가 몸소 시험을 할 테니까. 틀림없이 암기하고 있으면 여기서 놓 아주겠다." "이런 법이 어딨어요? 한 달 만에 이렇게 두꺼운 책들을 전부 암기할 수는 없 어요. 그리고 집에선 지금쯤 어머니가..." 하고 나는 항의했다. 노인이 다시 버드나무 가지를 내리쳤다. 내가 살짝 몸을 비키자, 그것은 양사 내의 얼굴에 맞았다. 노인은 성난 듯이 다시 한 번 양사내를 후려갈겼다. 끔찍 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놈을 안에다 쳐넣어" 그렇게 말하고는 노인은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져 버렸다. "아프지 않습니까?" 하고 나는 양사내에게 물어 보았다. "괜찮아. 난 이골이 났으니까. 그보다도 자네를 이 안에 넣어야만해." "어째 내키질 않는걸요." "나도 그래. 하지만 뭐, 세상사란 다 그런 거 아니겠나." "거부하면 어떻게 되죠?" "내가 또 지독히 얻어맞게 되는 거지." 나는 양사내가 가엾어서, 순순히 감옥 속으로 들어갔다. 감옥 속에는 침대와 책상과 수세식 변기가 있었다. 세면대엔 칫솔과 텁이 놓여 있었는데, 어느 것이 나 굉장히 지저분했다. 치약은 내가 싫어하는 딸기 맛이었다. 무거운 쇠문짝에 는 위쪽에 격자 무늬의 감시 창문이 붙어 있었고, 아래쪽에는 음식을 넣어 주는 가늘고 긴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양사내는 책상 위 전기 스탠드의 스위치를 몇 번이나 켰다 껐다 하고 나서, 내 쪽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나쁘진 않지?" "네에, 그냥..." "식사는 하루 세 끼, 3시엔 도넛하고 오렌지 주스도 줄게. 도넛은 내가 직접 만든다네. 파삭파삭한 게 아주 맛있어." "거 참, 고맙군요." "자, 그럼 발을 내봐." 나는 발을 내밀었다. 양사내는 침대 밑에서 육중한 둥근 쇳덩어리를 꺼내 그 끝에 달린 사슬을 내 발목에 채우고 열쇠로 잠갔다. 그리곤 그 열쇠를 양가죽 의 가슴께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굉장히 써늘하군요." "뭐, 곧 익숙해질 거야. 이제 저녁밥 갖다 줄게." "이봐요, 양사내님. 정말로 한 달이나 여기에 있어야 하나요?" "그래, 그렇다니까" "한 달 후면 정말 여기서 나가게 해주는 거겠죠?" "아니지."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얘기하기 곤란해." "부탁이니 좀 가르쳐 주세요. 집에선 어머니가 걱정하고 계신답니다." "응, 결국은 말이지, 톱으로 머리를 잘리게 되는 거야. 그리고 나선 뇌수를 쭉 쭉 빨아먹히고." 나는 침대 위에서 머리를 감쌌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부터 잘못되었단 말인 가. 나는 조금도 못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걱정 마, 걱정 마. 밥 먹으면 기운이 날 거야" 하고 양사내가 말했다. "보세요, 양사내님. 어째서 제가 뇌수를 쭉쭉 빨아먹혀야 하는가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응, 그건 말야, 지식이 꽉 찬 뇌수란 건 아주 맛있으니까. 그 뭐랄까, 찐득찐 득하고 쫄깃쫄깃한데다가 응어리가 알알이 섞여 있기도 하고..." "그래서 한 달 동안 지식을 꽉 채워 가지고 빨아먹는다 그거군요." "그런 셈이지." 양사내는 옷에 붙어 있는 주머니에서 세븐스타 담배를 꺼내, 백 엔짜리 라이 터로 불을 붙였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어느 도서관에서나 그렇게들 하고 있다구. 말 하자면 자넨 운이 나빴던 거야." "어느 도서관에서나 그렇게 하고 있다구요?" "그렇다네. 글세 지식을 대출하는 것만으론 도서관이 손해를 보는거 아닌가. 게다가 뇌수를 다 빨리더라도 지식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이 제법 있거든. 자네 만 해도 다른 데선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얻고 싶어서 이리로 온게 아닌가?" "아닙니다. 그저 순간적인 생각에서 그랬던 거예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왔 답니다." "거 안됐군." 양사내는 딱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서 내보내 주지 않겠어요?" "안돼, 그건 안된다구. 그런 짓을 했다간, 그땐 내가 지독한 꼴을 당하게 되고 말거든. 정말 지독한 꼴이란다. 전기톱으로 배를 절반으로 잘리고 마니까. 무 섭지?" "정말 무서운 일이군요." "나도 옛날에 한 번 당한 적이 있었는데 말야, 도로 맞붙는 데에 2주일이 걸렸 단다. 2주일이나 말야. 그러니까 자네가 단념해 주게나." "그럼, 그건 그렇다치고요, 만약에 제가 책 읽는 걸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죠?" 양사내가 벌벌 몸을 떨면서 말했다. "그런 일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나쁜 말은 안할 테니까. 이 지하실의 또 지하엔 한층 더 지독한 곳이 있단다. 뇌수를 빨리는 쪽이 훨씬 낫다구." 양사내가 가버리자 나는 감옥 속에 혼자 남았다. 나는 딱딱한 침대에 엎드려 서 한 시간 가량 흑흑 흐느껴 울었다. 푸른 메밀을 넣어 만든 베개가 눈물로 축축이 젖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뇌수를 쭉쭉 빨아 먹히는 것도 싫지만, 한층 더 지하의 한층 더 지독한 곳으로 쫓겨 들어가는 것도 싫었 다. 시계는 6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다. 집에선 어머니가 몹 시 걱정하고 계실 것이다. 밤중이 되어도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성을 잃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어머니다. 언제나 나쁜 것만 상상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나, 그 어느 쪽이다. 어머니는 나의 찌르레기한테 제대로 모이를 주고 있을까? 7시에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더니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아 름다운 소내가 손수레를 밀고 방으로 들어왔다. 눈이 아플 만큼 아리따웠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손과 다리와 목은 금세라도 뚝 부러져 버릴 것 처럼 가늘고, 길다란 머리카락은 보석을 녹여 넣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 었다. 누구나 꿈꾸어 보는, 그리고 꿈에서밖에 볼 수 없는 소녀였다. 그녀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아무 말없이 손수레 위의 음식을 책 상 위에 늘어놓았다. 나는 얼이 빠진 듯 그녀의 조용조용한 동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요리는 공을 들인 것들이었다. 섬게 수프와 삼치의 샤워 크림, 서양 깨소금으 로 무친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포도 쥬스. 그것들을 늘어놓고, 그녀는 손짓으로, '이제 그만 울고 밥을 먹어요'라고 했다. "아가씬 말을 못하나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래요, 어릴 때 성대를 못쓰게 되었어요.' "그래서 양사내의 심부름을 하고 있나 보군요?" '그래요.' 그녀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둘로 갈라질 만큼 아름다운 미소 였다. '양사내님은 친절한 분이에요. 하지만 할아버지를 굉장히 무서워하고 있어요.'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내 리뜨고, 곧 방에서 나가 버렸다. 5월의 바람처럼 가벼운 동작이었다. 문 닫히 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절반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납덩이를 위장 에 밀어넣는 기분이 들었다. 식기를 치우고 나서 침대에 누워 뒹굴면서,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튼 여기서 빠져 나가야 한다. 도서관의 지하에 이런 미로가 있다니 너무나 잘못된 일이며, 누군가가 누군가의 뇌수를 빨아먹다 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어머니를 미치게 하거나, 찌르레기를 굶어 죽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여기서 빠져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선, 나로서도 통 방법이 생 각나지 않았다.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문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게 다가 가령 이 방에서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캄캄한 미로를 어떻게 달아날 것인 가. 나는 한숨을 쉬고, 또 한바탕 울었다. 나는 마음이 아주 약해서 언제나 어머 니와 찌르레기만 생각하고 있다. 어째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필시 개에게 물린 탓일 것이다. 한바탕 울고 나서, 그 아름다운 소녀 생각을 하며 기운을 내기로 작정했다. 하는 데까지 해보자.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양사내도, 아름다 운 소녀도, 그다지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았고,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 다. 나는 <오스만 터키 세금 징수 담당자의 일지>를 손에 들고, 책상에 앉아 읽 었다. 기회를 붙잡기 위해선 우선 유순해진 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원래 아주 유순한 성격이니까. <오스만 터키 세금 징수 담당자의 일지>는 옛 터키어로 씌어진 난해한 책이 었는데, 이상하게도 술술 읽혔다. 게다가 읽은 부분은 하나하나 남김없이 머리 속에 기억되었다. 머리가 좋아진다는 건 실로 멋진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해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뇌수를 쭉쭉 빨아먹혀도 좋으니, 비록 한 달만이라도 똑똑해 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책장을 넘겨 가면서 세금 징수 담당자 이븐(이븐 아르무드 하슐)이 되어 -사실은 훨씬 더 긴 이름인데-반달 모양의 칼을 허리에 차고, 세금을 거두기 위 해 바그다드 거리를 걸어 다녔다. 거리에는 닭 냄시와 담배와 커피 냄새가 흐름을 멈춘 냇물처럼 서려 있었다. 과일 장수는 낯선 과일을 팔고 있었다. 하슐은 조용한 인물로, 세 명의 아내와 다섯 명의 아이가 있었다. 그는 잉꼬 두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잉꼬는 찌르레기 못지 않게 귀여웠다. 하슐인 나는 세 명의 아내와 몇 번인가 사랑의 시간을 가졌다. 이런 일은 어 쩐지 좀 이상하다. 9시 반에 양사내가 커피와 쿠키를 가지고 들어왔다. "아이구 이런, 감탄할 일이네. 벌써 공부를 시작했나?" "그래요, 양사내님. 아주 재미있는걸요." "거 다행이군. 하지만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커피라도 좀 마시게나. 처음부터 너무 열심히 하면 나중에 힘들어져." 나는 양사내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쿠키를 먹었다. 바삭바삭. "있잖아요. 양사내님. 뇌수를 빨아먹힌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응, 그건 생각만큼 나쁘진 않은가 봐. 마치 머리 속에 얽힌 실이 쑤욱 뽑히 는 것 같은 느낌이래. 다시 한 번 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니까 말 야." "허어." "뭐 그런 거야." "빨아먹힌 다음엔 어떻게 되죠?" "나머지 인생을 멍청하게 꿈이나 꾸면서 지내게 되는 셈이지. 고민도 없고 고 통도 없지. 초조할 것도 없고. 시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숙제 걱정을 하 지 않아도 되거든. 어때, 근사하지?" "글세요, 하지만 톱으로 머리를 잘리게 되겠죠?" "그야 조금은 아프겠지. 하지만 그런 건 잠시면 끝나거든." "그럴까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어쩐지 너무 간단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소녀를 뇌수를 빨아먹히지 않았나요?" 양사내는 의자에서 20센티미터나 뛰어올랐다. 만들어 붙인 귀가 펄럭펄럭 흔 들렸다. "뭐지, 그 아름다운 소녀라는 건?" "식사를 갖다 준 여자아이 말예요." "이상하군. 식사는 내가 가져왔지 않은가. 그때 자넨 쿨쿨 자고 있었어. 나 는 아름다운 소녀가 아니란다." 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아아. 이튿날 저녁, 아름다운 벙어리 소녀는 다시 내 방에 나타났다. 그녀는 손수레 위에 저녁 식사를 싣고 왔다. 이번 식사는 트루즈 소시지의 포테이토 샐러드 곁들임과 실로 꼰 팔시와 떡잎 샐러드, 거기에다 주전자에 든 진한 홍차였다. 쐐기풀 무늬의 멋진 포트도, 찻잔도, 스푼도 이상적인 고풍스러 움을 지니고 있었다. '천천히 드세요. 남기지 마시구요.' 아름다운 소녀는 손짓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생긋이 웃었다. 하늘이 두 조각 날 만큼 근사한 웃음이었다. "아가씬 도대체 누구요?" '저는 저일 뿐이에요.' 그녀의 말은 귀에서가 아니라, 내 가슴의 한복판에서부터 들려 왔다.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양사내님은 아가씨라는 존재를 모르고 있던데. 게다가..." 그녀는 조그만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갖다 대고, 나에게 입을 다물라는 시늉 을 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명령에 참 잘 복종하는 편이다. 그것은 특수한 능력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었다. '양사내님한테는 양사내님의 세계가 있죠. 저한텐 제 세계가 있고, 당신한텐 당신 세계가 있듯이오. 그렇죠?' "그래요" '그러니까 양사내님 세계에 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곤 할 수 없겠죠?" "그렇군요. 말하자면 그런 여러 가지 세계가 모두 여기에 한데 뒤섞여 있다, 그 말이군요. 그리고 포개져 있는 부분도 있고, 포개져 있지 않은 부분도 있 고..." '그래요.' 나는 그다지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다. 개에게 물린 이후로 그 기능이 좀 나 빠졌을 뿐이다. '알았으면 어서 식사하세요.' "아가씨, 밥을 먹을 테니까, 잠시 여기에 있어 주지 않겟어요? 혼자 있으면 굉 장히 쓸쓸하거든요."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두 손을 착 무릎 위 에 놓고, 내가 저녁밥을 먹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아침 햇 살을 받는 유리 장식물처럼 봉ㅆ다. "요전번에 아가씨와 닮은 여자아이를 보았어요. 아가씨와 같은 또래고, 똑같 이 예쁘고, 아가씨와 비슷한 향기가 났어요" 하고 나는 포테이토 샐러드를 먹으며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하고 찌르레기를 한 번 만나 주면 좋겠는데, 찌르레긴 정말 근사 하거든요." 그녀는 아주 약간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고 또 어머니도 말예요. 어머닌 나를 너무나 걱정하시거든요. 어릴 때 개한테 물렸으니깐 말예요. 하지만 내가 개한테 물린 것 내 탓이지 어머니 탓 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머닌 날 그렇게 걱정하실 건 없는데. 글세 개는..." 하고 나는 덧붙였다. '어떤 개요?' 하고 소녀가 물었다. "커다란 검정 개였어요. 보석이 박힌 가죽 개목걸이를 걸었고, 눈이 초록빛에 다리가 아주 굵고, 발톱이 여섯 개나 있었죠. 귀 끝은 둘로 갈라졌고, 코는 햇 볕에 그을은 것처럼 갈색이었어요. 개한테 물린 적은?" '없어요. 하지만, 이제 그만하고 식사하세요.' 나는 잠자코 저녁 식사의 나머지를 마저 먹었다. 음식을 다 먹은 뒤 접시를 치우고, 홍차를 마셨다. '이봐요, 여기서 나가서 저와 함께 당신 어머니와 찌르레기한테로 돌아갑시다.' "그래요. 하지만 여기서 빠져 나갈 수가 없어요. 문이란 문엔 전부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바깥은 깜깜한 미로랍니다. 게다가 내가 도망치면 양사내님이 지 독한 꼴을 당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뇌수를 빨리는 건 싫겠죠? 뇌수를 빨아먹히면, 두 번 다시 저를 만날 수 없게 돼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로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나 겹쳐 있었따. 뇌수를 빨아먹히고 싶지도 않았고, 아름다운 소녀와 헤어 지는 것도 싫었다. 또 캄캄한 어둠도 무섭고, 양사내가 심한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양사내님도 함께 도망치는 거예요. 당신하고 저하고 양사내님하고 셋이서 도 망치는 거예요.' "그러면 되겠군요. 하지만 언제?" 하고 내가 물었다. '내일요. 내일은 할아버지가 잠을 자는 날이에요. 할아버진 초승달이 뜨는 날 밤밖엔 잠을 자지 않아요.' "양사내님이 승낙을 할까요?" '모르죠. 그런 양사내님 자신이 결정할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이제 전 가봐야겠어요. 양사내님께는 내일 밤이 될 때까지 이 일을 말하지 말아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름다운 소녀는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아주 약간만 열린 문 틈새로 훌쩍 모습을 감워 버렸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했을 즈음에 양사내가 도넛과 레모네이드를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잘돼 가나?" "예, 양사내님." "저번에 약속해 두었던 도넛을 가져왔다구. 갓 튀겨 온 거니까 파삭파삭할 동 안에 먹는 게 좋지." "고마워요, 양사내님." 나는 책을 치우고, 도넛을 집어 먹었다. 아닌게아니라, 파삭파삭한 게 아주 맛이 좋았다. "어때, 맛있지?" "예, 양사내님, 이런 맛있는 도넛은 어디에도 없을걸요. 양사내님이 도넛 가겔 차린다면 굉장히 번창할 거야." "응, 나도 말야, 그걸 좀 생각해 봤지. 그런 걸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 "틀림없이 할 수 있다구요." 양사내는 아름다운 소녀가 걸터앉았던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 끄트머리에 짧은 꼬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글렀는걸.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이런 이상한 꼴을 하고 있겠다, 이도 제대로 안 닦겠다..." "제가 도와드리겠어요. 제가 물건을 팔고, 접시를 닦고, 냅킨을 접고, 돈 계산 을 하죠. 양사내님은 안쪽에서 도넛을 튀기기만 하면 된답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군" 하고 양사내는 쓸쓸한 듯이 말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결국 나는 여기서 줄곧 버드나무 가지로 얻어맞을 것이며, 자넨 얼마 후면 뇌수를 빨아먹힐 게 아닌가... 양사내는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쟁반을 손에 들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그만 탈출 계획에 대해 털어놓을 뻔했으나, 아름다운 소녀의 말을 생각하고 그만두었 다. 아무튼지 내일이 되면 이런저런 일들이 명백해질 것이다. <오스만 터키 세금 징수 담당자의 일지>를 읽고 있는 중에 나는 다시금 세금 징수 담당자 이븐 아르무드 하슐이 되었다. 나는 낮에는 바그다드 길거리를 돌 아다니고, 저녁에는 두 마리 잉꼬에게 모이를 주었다. 밤하늘에는 면도칼처럼 가느다란 달이 떠 있었다. 멀리에서 누군가가 부는 피리 소리가 들렸다. 흑인 노예가 방안에 향을 피운 후 조그만 파리채를 들고 나의 둘레에서 모기를 몰아냈다. 침대에서는 세 아내 중 한 명인 아름다운 벙어리 소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 다. '아주 좋은 달이에요. 내일은 초승달이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잉꼬에게 모이를 줘야겠는데요" 하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잉꼬한테 아까 모이를 주시던데요' 라고 했다. "그래, 그랬던가." 나는 잉꼬 생각만 한단 말이다. 그녀가 옷을 벗고 나도 옷을 벗었다. 그녀의 몸은 미끈미끈했고, 좋은 향기가 났다. 면도칼 같은 초승달빛이 그녀 몸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빛깔을 던지고 있었다. 피리 소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모기장이 쳐진 넓다란 침대 위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침대는 주차장만 큼 넓었다. 옆방에서는 잉꼬가 울고 있었다. '아주 좋은 달이에요. 내일은 초승달이에요' 하고 얼마 후에 아름다운 소녀가 말했다. "바로 그렇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초승달'이라는 말에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하인을 불러 침대에 드러누운 채 수연초(水煙草)를 피웠다. "초승달이라는 말에는 무엇인지 떠오르는 게 있군"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초승달이 뜨는 밤이 오면, 이 일 저 일이 명백해지지요' 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말했다. 확실히 그대로다. 초승달 밤이 오면 이 일 저 일들이 명백해진다. 그리곤 나는 잤다. 초승달 밤은 눈이 없는 돌고래처럼 살며시 찾아왔다. 물론 도서관의 지하 깊은 데서는 하늘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깊 숙한 블루 잉크의 어둠은 육중한 쇠문짝과 미로를 빠져 나와써 나의 둘레를 소 리도 없이 둘러쌌다. 아무튼 초승달 밤이 찾아왔단 말이다. 저녁녘에 노인이 독서의 진척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요전번 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엔 여전히 버드나무 가지를 끼고 있 었다. 그는 나의 독서 진척 상황을 보고 어지간히 만족해 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나도 좀 기뻤다. "응, 꽤나 잘했군" 하고 노인은 턱을 빡빡 긁으면서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잘 나가는 것 같군 그래. 탄복할 만한 아이로군." "예, 뭐..."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칭창받는 게 아주 좋다. "얼른 책만 다 읽는다면" 하고 노인은 문득 그대로 입을 다물고는 물끄러미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굉장 히 오랫동안 노인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인가 외면을 하려 했으나 소 용없었다. 노인의 한 쌍의 눈과 내 한 쌍의 눈이 무엇인가로 꽈악 붙잡아 매어 진 것 같았다. 그러는 중에 노인의 눈이 마구 부풀더니, 방안 벽 전체가 안구의 흰색과 검은 색으로 몽땅 덮였다. 나이가 들어 늙고 닳아 흐릿해진 흰색과 검은색이었다. 그러는 동안 노인은 눈 한 번 깜빡 하지 않았다. 이윽고 안구는 썰물이 밀려 가듯 줄어들더니 노인의 눈구덩이에 다시금 포옥 걷혀 들어갔다. 나는 눈을 감 고 그제서야 숨을 돌렸다. "일찌감치 책을 읽어 버리면 일찌감치 여기서 나갈 수 있지. 그 밖의 것은 생 각지 않아도 돼. 알겠나?" "예." "무슨 불만은 없느냐?" "어머니와 찌르레긴 잘 있을까요?" "세상은 별일 없이 흐르고 있다. 모두가 제각각 자기 일을 생각하고, 그날이 오기까지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 너의 모친도 마찬가지, 너의 찌르레기 도 마찬가지, 모두 마찬가지란다." 무슨 영문인지 잘 알지 못했으나, "예"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나가고 나서 30분 가량 있다가 아름다운 소녀가 여느 때처럼 살며시 방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초승달 밤이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군요' 하고 아름다운 소녀는 조용히 대답한 후 침대 끄트머리에 살며시 걸터앉았다. 초승달 어둠 덕분에 내 눈을 얼얼했다. "정말 오늘 여기서 나가나요?" 하고 나는 물었다. 아름다운 소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주 지친 것 같았다. 얼 굴빛이 여느 때보다 창백했고, 맞은편 벽은 흐릿하게 투명해 보였다. 그녀의 몸 속에서 공기가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어디 아파요?" '조금요. 초승달 탓이에요. 초승달 때가 되면 이것저것이 조금씩 차질이 난 대요.'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그녀는 생긋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걱정없어요. 틀림없이 여기서 빠져 나 갈 수 있어요.' "아가씨는?" '제 일은 제가 생각하겠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의 일만 생각하세요.' "하지만 아가씨가 없어진다면 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른단 말이오." '그런 느낌이 들 뿐일 거예요. 정말이에요. 당신은 강해지고 있고, 앞으로 자 꾸자꾸 강해진단 말이에요. 아무한테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해질 수 있어요.' "그럴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길은 양사내님이 알고 있어요. 저는 반드시 뒤를 쫓아갈 테니, 먼저 도망치 세요.' 내가 끄덕이자 소녀는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소녀가 사라지자 나는 그만 쓸쓸해졌다. 이젠 앞으로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9시 전에 양사내는 도넛을 접시에 가득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어이, 오늘 밤 여기서 도망친다지?" 하고 양사내가 말했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죠?" 하고 나는 약간 놀라 물었다. "어떤 여자아이가 가르쳐 주었어. 굉장히 예쁜 아이였지. 이 근처에 그런 여 자아이가 있다는 걸 통 몰랐었지. 친군가?" "예, 뭐?" 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 나도 그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하고 양사내가 말했다. "여기서 빠져 나가면 양사내님께도 반드시 친구가 잔뜩 생길 겁니다." "그러면 좋겠군. 잘되지 않으면, 나도, 자네도 지독한 꼴을 당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래요" 하고 나는 말했다. 지독한 꼴이란, 도대체 어떤 지독한 꼴일까? 그러고 나서 우리는 둘이서 도넛을 먹고 포도 주스를 마셨다. 나는 통 식욕 이 없었지만 무리를 해서 도넛 두 개를 먹었다. 양사내는 혼자서 여섯 개나 먹 었다. 대단한 식욕이었다. "무슨 일을 하려면 우선 속을 잔뜩 채워야지" 하고 양사내가 말했다. 그리곤 굵다란 손가락으로 입가에 묻은 설탕을 닦았다. 입가는 설탕 누성이였다. 어디에선가 벽시계가 9시를 쳤다. 양사내는 일어서서 소매를 흔들어 몸에 맞 추었다. 출발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방을 나서서, 어둑어둑한 미로 같은 복도를 걸었다. 노인이 깨지 않도 록 우리는 발소를 죽여서 걸었다. 나는 도중에 구두를 벗어 복도 구석에다 버 렸다. 2만5천 엔이나 하는 갓 산 가죽 구두를 버리긴 아까웠지만 별수없었다. 결국 잘못은 이런 이상한 곳에 말려든 내게 있었다. 가죽 구두를 잃어버렸다고 어머닌 화를 많이 내실지도 모른다. 뇌수를 빨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 버렸다고 하면 어머니가 믿어 줄까? 아니, 절대 안 믿으실 거야. 어머니는 내가 가죽 구두를 잃어버린 걸 얼버무리기 위해 거짓말하는 줄 알 게다. 그건 그렇다. 도서관의 지하에서 뇌수를 빨릴 뻔했다는 소리를 도대체 누가 믿으랴? 사실을 말해도 믿어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쇠문짝에 당도하기까지의 긴 노정에서 나는 줄창 그런 것만 생각했었다. 양 사내는 내 앞을 잠자코 걸었다. 양사내는 나보다 머리 절반만큼 키가 작았다. 그래서 나의 코끝에서 양사내의 만들어 붙인 귀가 깡충깡충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보세요, 양사내님, 잠깐 구두를 가지러 되돌아가면 안되나요?" 하고 나는 작은 소리를 물었다. "응? 구두?" 하고 양사내는 약간 놀란 듯이 말했다. "안된다구, 그런 건. 구두 생각은 잊어버려. 구두보단 뇌수 쪽이 훨씬 더 소 중하지 않나?" "예"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구두 생각은 잊었다. "할아버진 지금쯤 쿨쿨 잠자고 있지만, 저 사람 저래봬도 굉장히 민감하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구." "예." "도중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큰소리 내면 안된다구. 한 번 저 사람이 잠이 깨 어 뛰어온다면, 그땐 내가 자네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거든. 저 버드나무 가지로 얻어맞으면 나는 절대로 저항할 수 없단 말이야." "특별한 버드나무 가지인가요?" "글세, 어떨까?" 하고 양사내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극히 보통의 버드나무 가지가 아닐까? 나도 잘 모르겠는걸." 나로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보라구" 하고 좀 있다가 양사내가 나에게 말했다. "뭡니까?" "구두 생각, 이젠 잊었나?" "예, 잊었습니다"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다시 구두 생각이 났다. 그것은 생일에 어머니가 사준, 아주 소중한 가죽 구두였단 말이다. 또박또박 기분 좋은 소리가 나는 훌륭한 가죽 구두였다. 내가 그걸 잃어버린 탓으로 어 머니는 찌르레기를 학대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찌르레기를 몹시 귀찮게 여기 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찌르레기는 전혀 귀찮지 않다. 찌르레는 아주 조용하고 단정하게 있 다. 개 같은 것들보다 훨씬 조용하다. 개. 개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났다. 어째서 다들 개 같은 걸 기를까? 어째서 다 들 찌르레기를 기르지 않을까? 어째서 내 어머니는 그렇게도 찌르레기를 싫어할 까? 어째서 나는 그런 고급 가죽 구두를 신고 도서관에 왔던 것일까? 우리는 가까스로 쇠문짝에 당도했다. 초승달의 어둠이 약간 짙어진 것 같았 다. 양사내는 양쪽 주먹에다 하앗, 하고 숨을 불어대고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리고 또 주머니에 손을 밀어넣어 살며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곤 내 쪽을 보고 생긋 웃었다. "조용히 해야 한다구." "그러죠." 무거운 쇠문짝 열쇠는 덜컹 소리를 내고 벗겨졌다. 작은 소리였으나 몸에 와 닿아 육중하게 울렸다. 조금 있다가 양사내는 살며시 문짝을 밀어 열었다. 문짝 저편으로부터 완전한 어둠이 부드러운 물처럼 밀어닥쳐 왔다. 초승달이 공기의 조화를 흐트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반드시 잘될 거야" 하고 양사내는 나의 팔을 탁탁 쳤다. 그럴까, 정말 잘될까? 양사내는 주머니에서 회중전 등을 꺼내어 스위치를 켰다. 노란 불빛이 계단 을 흐릿하게 비추었다. 내가 여기로 올 때에 노인의 안내로 내려온 길다란 계 단이었다. 계단 위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미로가 계속되고 있었다. "보세요, 양사내님." "뭐야?" "저 미로의 갈래를 알고 계세요?" "아마 기억해 낼 수 있을 거지만 말이다, 요 3~4년 동안 가본 적이 없어서 확 실히 말할 순 없지만 뭐 어떻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양사내는 자신이 없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굉장히 불안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새삼스레 무슨 말을 했다고 해서 어 떻게 될 것도 아니다. 결국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 다. 양사내와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양사내는 낡은 테니스 화를 신고 있었고, 나는-앞에서도 말한 것처럼-맨발이었다. 양사내는 앞장을 서 고 회중전등으로 자기 앞쪽만을 비추면서 걸었다. 그래서 나는 캄캄한 어둠 속 을 걷게 되어 자꾸만 양사내의 엉덩이에 부딪혔다. 양사내 쪽이 나보다 훨씬 다리가 짧아서 아무래도 걷는 속도가 내가 빨랐던 것이다. 계단은 차갑고 미끌미끌하면서 모서리가 둥굴게 닳아 있었다. 몇천년 전에 만들어진 계단이었다. 공기에 냄새는 없었으나, 이곳저곳에서 뚜렷한 층을 이루 고 있었다. 층에 따라 밀도와 온도가 달랐다. 내려올 때엔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이다. 아마도 무서워서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가 보다. 때때로 벌레 같은 걸 밟았다. 연하고 물렁한 감촉이며 딱딱하고 투박한 감촉 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벌레인 것 같았다. 아무튼 굉장히 기분이 언짢았다. 역시 구두를 신고 왔어야 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계단을 다 오른 후 나와 양사내는 가까스로 숨을 돌렸다. 다리가 저리고 시릴 대로 시려 왔다. "굉장한 계단이군요. 내려갈 땐 이렇게 긴 것 같지 않았는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아주 옛날에는 우물이었대. 하지만 물이 마른 후로는 다른 일에 사용하게 됐 다는 거야" 하고 양사내가 가르쳐 주었다. "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뭐 그런 이야기야" 그 다음에 우리는 일어서서 문제의 미로를 향해 나아갔다. 양사내는 최초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나가 얼마 동안 생각한 다음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왼 쪽으로 나갔다. "문제없나요?" 하고 나는 다시 걱정스러워서 물어 보았다. "응, 문제없다고. 틀림없어. 이쪽이야" 그래도 나는 불안했다. 미로의 문제점은 끝까지 나가 보지 않고선,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끝까지 나가서 착오였다고 알게 되었을 때엔 이미 손쓰기에 늦다. 그것이 미로의 문제점이다. 양사내는 몇 번이나 망설이기도 하고 되돌아가기고 하면서 전진했다. 멈춰 서서 벽을 비빈 손가락 끝을 혀로 핥아 보기도 하고, 귀를 바닥에 갖다 대보기 도 하고, 천장에 줄을 친 거미와 중얼중얼 이야기해 보기도 하고, 공기의 냄새를 킁킁 맡아 보기도 했다. 양사내는 보통과는 좀 다른 기억의 회로를 터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 새벽녘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양사내는 가끔씩 포켓 에서 회중전 등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2시 50분. 이제 차츰 초승달의 힘이 약해지니까 조심해야 한다구" 하고 양사내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어둠의 밀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따끔따끔하 던 눈의 아픔이 어느 정도 덜해졌다. 나와 양사내는 서둘러 걸었다. 날이 샐 때까지 마지막 문에 당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노인이 잠에서 깨어나 양사내가 없어진 걸 알고 이내 뒤쫓아올 게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끝장이다. "시간 안에 닿을 수 있을까요?" 하고 나는 양사내에게 물었다. "응, 문제없다구. 나머지 길은 죄다 기억해 냈거든. 걱정하지 말라구. 틀림 없이 빠져 나가게 해줄게. 나한테 맡겨 두라구." 분명 양사내는 길을 기억해 낸 것 같았다. 나와 양사내는 꼬부라진 모퉁이에 서 모퉁이로 미로를 누비고 빠져 나갔다. 이윽고 우리는 곧은 복도로 나섰다. 양사내가 회중 전등을 돌려대자 복도 끝에 어렴풋이 문이 보였다. 문 틈새로 불빛이 희미하게 흘러 나왔다. "보라구, 내가 말했잖아" 하고 양사내는 득의 양양해서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문제없어. 나머지는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뿐 이야." "고마워요, 양사내님" 양사내는 포켓에서 또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문을 열 자 그곳은 도서관의 지하실이었다. 전구가 천장으로부터 늘어뜨러져 있었고, 그 아래에 테이블이 있었으며, 테이블에는 노인이 앉아서 이쪽을 가만히 보고 있었 다. 노인 곁에는 커다란 검정 개가 앉아 있었다.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건 초록빛 눈의 개였다. 다리는 굵고, 발이 여섯 개나 있었다. 귀 끝이 둘로 갈라졌고, 코는 갈색이었다. 예전에 나를 물었던 개다. 개는 피투성이가 된 찌르레기를 이빨 사이에 꽉 물로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양사내가 손을 뻗어 내 몸을 받쳐 주었다. "줄곧 너희들을 기다렸다구. 퍽도 늦었지 뭔가" 하고 노인이 말했다. "선생님,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하고 양사내가 말했다. "에이, 시끄럽구나" 하고 노인이 호통을 쳤다. 그리곤 허리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뽑아 들고, 테이블 을 철썩 때렸다. 개가 귀를 세웠다. 양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주위가 조용해 졌다. "자아, 이제 널 어떻게 해줄까?" 하고 노인이 말했다. "자고 있었던 게 아닌가요?" 하고 내가 말했다. "흐응" 하고 노인이 비웃듯이 웃은 후 "잔꾀를 부리는구나, 이애가. 누구한테 배웠는진 몰라도 난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너희들이 생각하는 만큼은 꿰뚫어 보고 있단 말이다" 하고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잘될 리가 없다. 덕분이 찌르레기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너" 하고 노인은 버드나무 가지로 양사내를 가리켰다. "넌 싹둑싹둑 베어 찢어서 구덩이에 처넣어 지네의 먹이가 되게 해주마." 양사내는 내 등뒤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다음에 너" 하고 노인은 나를 가리켰다. "넌 개밥이 된다. 심장과 뇌수만을 남기고 온몸을 물어 찢게 할 테다. 살과 피로 방바닥이 질척거리게 될 만큼." 노인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개의 초록색 눈이 번들번들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개의 이빨 사이에서 찌르레기가 조금식 조금씩 부풀어오르고 있음 을 알았다. 찌르레기는 이윽고 닭만큼의 크기가 되어, 마치 잭(작은 기중기)처 럼 개의 입을 커다랗게 젖혀 열었다. 개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그땐 이미 늦 었다. 개의 입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황급히 버드나무 가지로 찌르레기를 때렸다. 그러나 찌르레기는 여전히 부풀어올라 이번엔 노인 을 단단히 벽에다 밀어붙였다. 찌르레기는 어느새 사자만큼 커져 있었다. 그리고 비좁은 방은 찌르레기의 단단한 날개침으로 덮였다. '자, 이때에 도망쳐야 해요.' 뒤에서 아름다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뒤돌아보았는데, 뒤에 는 양사내밖에 없었다. 양사내도 어이없다는 듯이 뒤를 돌아다보고 있었다. '자, 어서 도망치세요.'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양사내의 손을 잡고 정 면의 문으로 달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뒹굴 듯이 밖으로 나섰다. 이른 아침의 도서관에는 사람 그림자라곤 없었다. 나와 양사내는 홀을 달려 나가 열람실 창문을 뜯어 열고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숨이 턱에 닿도 록 달려 이윽고 공원의 잔디밭에 지쳐서 뒹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혼자만 남아 있었다. 양사내의 모습은 어디에 도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큰소리로 양사내를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밤은 완전히 걷히고 아침의 태양이 그 첫 햇빛을 나무들 잎사귀에 던지고 있었따. 양사내는 어딘가로 가버린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아침 식사를 만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잤니?"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나도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침을 먹었다. 찌르레기도 평화로운 듯 모이를 쪼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구두를 잃어버린 것에 관해서도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옆얼굴을 여느 때보다 조금 슬퍼 보였다. 하 지만 그건 단지 느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후로 나는 한 번도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거기에 가서 그 지 하실 입구를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이제 거기에는 접근 하고 싶지 않다. 해질녘에 도서관 건물을 보기만 해도 발이 오그라든단 말이다. 때때로 지하실에 두고 온 새 가죽 구두 생각이 난다. 그리고 양사내를 생각 하고, 아름다운 소녀를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어디까지가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나로선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자꾸자꾸 그 지하실로부터 멀어져만 간다. 지금도 나의 가죽 구두는 지하실 한 구석에 놓여 있고, 아름다운 소녀는 이 지상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슬프다. 내가 한 일이 정말 옳았는지 어떤지 그것조차도 나론선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지난 주 화요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조용한 장례식이 있었고, 나는 외톨 이가 되었다. 나는 지금 오전 2시의 어둠 속에서 그 도서관의 지하실을 생각하 고 있다. 어둠의 안은 아주 깊다. 마치 초승달의 어둠 같다. 잊혀진 왕국 잊혀진 왕국의 뒤편에는 깨끗한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맑아서 많 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수초도 자라고 있어, 물고기들은 그걸 먹으며 살아 가고 있었다. 물고기들은 왕국이 쓸모없이 되건 말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건 그렇다. 물고기들에겐 왕국이니 공화국이니 하는 건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투표 같은 것도 하지 않았고, 세금 따위도 납부하지 않았다. "그런 건 우리완 관계없는 일이야" 하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냇물에서 발을 씻었다. 냇물을 차가워서, 잠깐 발을 담그고 있었는데도 금새 빨개졌다. 냇가에서는 쓸모없게 된 왕국의 성벽과 첨탑이 보였다. 첨탑에는 아직 2가지 색으로 된 깃발이 게양된 채로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냇가를 지나가는 사람 들은 모두 그 깃발을 보았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저것 봐. 저게 잊혀진 왕국의 깃발이야." Q씨는 나의 친구다. 또는 친구였다. 왜냐하면 Q씨와 나는 최근 10여 년간 피차 친구다운 일 같은 건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친 구였다고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는 친구였었다. Q씨라는 인물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설명하려 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절망적 인 무력감이 사로잡힌다. 나는 원래 설명을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런 점을 계산에 넣더라도, Q씨라 는 인물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특별하고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 일을 시도할 때마다 기나긴, 아주 깊고 깊은 절망감에 맞닥뜨리곤 하는 것이 다. 간단하게 말하자. Q씨는 나와 동갑인데, 나의 570배 가량은 핸섬했다. 성격도 좋아서 결코 남 앞에서 뽐내는 일이 없었다. 자기 자랑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실수로 그에게 폐를 끼쳤다 하더라도, 별로 화를 내지도 않았다. "괜찮아. 뭐, 피장파장인걸" 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에게 폐를 끼쳤단 얘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또 살아온 환경도 좋았다. 그의 부친은 시코쿠의 어딘가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꽤 많은 용돈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 고 별로 낭비를 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운동 선수이기도 했다. 고교 시절엔 테니스 부원으로 '인터 하이 (고교단 대항 시합)'에도 나갔다. 취미가 수영이어서 1주일에 두 번은 수영장을 다니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온건한 자유주의자였다. 성적도-우수하달 정도는 아니지만-좋았다. 시험 공부 따위는 거의 하지 않았 지만, 학습량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수업중에 꼬박꼬박 강의를 들었기 때 문이다. 피아노도 꽤 잘 쳤고, 빌에반스와 모차르트의 레코드도 잔뜩 가지고 있었다. 소설은 발자크와 모파상 등 프랑스 소설을 좋아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글도 때때로 읽었다. 그리고 제법 정확한 비평도 했다. 그는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렇다고 해서 아무나 사귀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고상하고 예쁜 연인이 있었 다. 어느 품위 있는 여자대학 2학년생인데, 일요일마다 데이트를 했다. 아아.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대학 시절의 Q씨다. 뭔가 빠뜨린 말도 있겠지만 그게 무엇이건 대수로울 건 없다. 한마디로 말해, Q씨는 거의 흠이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Q씨는 그 무렵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소금을 꾸어 주거나 드레싱을 꾸러 오거나 하면서 우리는 친하게 되었으며, 그러는 중에 서 로의 방을 오가며 레코드를 듣거나 함께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나와 나의 여자친구, 그와 그의 여자 친구, 이렇게 넷이서 가마쿠라까지 드라 이브를 한 적도 있다. 아주 기분 좋은 교제였다. 대학 4학년 여름에 내가 아파 트를 나오게 되어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Q씨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10년쯤 뒤었다. 나는 아카사카 근처 호 텔의 풀장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Q씨는 내 옆의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Q 씨 옆에는 아주 멋진 비키니를 걸친, 다리가 긴 여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 는 Q씨의 동행이었다. 나는 그가 Q씨라는 걸 알아챘다. Q씨는 여전히 핸섬했으며, 서른을 조금 지 난, 그에게서는 이제 예전엔 없었던 위엄 같은 것도 느낄 수가 있었다. 지나가 던 젊은 여자들은 흘끔흘끔 그를 바라보곤 했다. 그쪽에선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평범한 생김새였는데다가 선글라스까 지 끼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Q씨는 옆의 여자와 얘기에 몰두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 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와 Q씨 사이에는 공통의 화제랄 것이 거의 없었다. 소금을 꾸 어 주셨지요, 드레싱을 꾸러 왔지요, 이런 정도의 얘기 갖고는 그다지 대화거리 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책만 읽고 있었다. 풀장은 아주 조용했기 때문에, Q씨와 동행한 여자의 이야기 소리는 듣기 싫어 도 나의 귀에 들어왔다. 아주 복잡한 이야기였다. 나는 책 읽는 것을 단념하고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글세, 그런 건 싫어요. 농담 마세요" 하고 다리가 긴 여자가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당신이 하는 말은 잘 알겠다구. ...하지만 말이지, 내가 하는 말도 이해해 달라 그거야. 나라고 해서 뭐 이런 일 좋아서 하는 건 아니 니까. 내가 결정한 게 아니야. 위에서 결정한 일을 당신한테 전달하는 것뿐이 라구. 그러니깐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하고 Q씨는 말했다. "흥, 어쩐지" 하고 여자가 말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물론 상당 부분은 나의 상상에서 나온 셈인 데-이러한 것이었다. 즉, Q씨는 텔레비전 방송국인지 뭔지에서 디렉터 같은 일을 맡고 있었고, 여 자 쪽은 좀 유명한 가수인가 여배우였다. 그런데 여자 쪽에 무슨 트러블인지 스캔들인지가 있어서-혹은 그저 단순히 인기가 떨어졌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프로에게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현장의 직접적인 책임자 Q씨에게, 그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 줄 역할이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연예계 쪽에는 그다지 밝지 않아서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줄거리의 대강은 그다지 틀리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들은 얘기대로라면 Q씨는 실로 성실하게 그 직책을 다하고 있었다. "우리는 스폰서 없이는 일을 해나갈 수 없단 말이야. 당신도 이 세계에서 밥 을 먹고 있으니, 그런 정도는 알 거 아니야" 하고 Q씨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한텐 전혀 책임도 발언권도 없다, 그 말인가요?" "전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아주 제한된 거라구." 그리곤 또 얼마 동안 두 사람은 끝이 나지 않는 대화를 계속했다. 여자는 그 가 자기를 지켜 주기 위해 어느 정도의 노력을 했는지 알고 싶어했다. "힘닿는 만큼은 했단 말이야" 하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 증거는 없었다. 여자는 믿지 않았다. 나도 별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Q씨가 성실하게 설명하 려고 하면 할수록, 불성실한 공기가 안개처럼 언저리에 떠돌았다. 그러나 그것 은 Q씨의 책임은 아니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엔 두 사람의 대화엔 출구가 없었다. 여자는 이제까지 줄곧 Q씨에 대해 호감을 품어 왔던 것처럼 보였다. 이번 일 이 있기까지,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듯했다. 그래서 여자는 더욱 화 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여자 쪽이 단념을 했다. "알겠어요. 이제 됐으니까 콜라나 사와요" 하고 여자가 말했다. Q씨는 그 말을 듣곤 안도한 듯이 일어나 매점으로 갔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가만히 옆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책의 똑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고 있었다. 이윽고 Q씨는 콜라가 들어 있는 종이컵을 두 손에 들고 되돌아왔다. 그리곤 하나를 여자에게 건네주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면 안돼. 그러다 보면 또 분명히..." 하고 Q씨가 말했다. 그때,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콜라 종이컵을 Q씨의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 컵은 Q씨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 L사이즈의 컵 속에 든 코카 콜라의 4분의 1이 나에게 뿌려졌다. 그런 다음 여자는 아무 말도 않고 일어서서, 수영복의 엉덩이 부분을 조금 끌 어내리곤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나와 Q씨는 15초 가량 아연해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깜짝 놀란 듯이 우리를 보고만 있었다. 먼저 침착함을 되찾은 건 Q씨였다. 그는 나에게 "죄송합니다" 하고 타월을 내밀었다. 샤워를 할 테니까 괜찮다며 나는 그것을 사양했다. Q 씨는 좀 난처한 얼굴을 하고선 타월을 거두어, 그걸로 자기 몸을 훔쳤다. "책을 변상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그가 말했다. 책은 완전히 폭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싸구려 문고판이었으며, 그다지 재미있는 책도 아니었다. 누군가 콜라를 뿌려서 읽지 못하게 훼방을 놓아 준 것만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싱긋이 웃었다. 옛날처럼 기분 좋게 웃는 얼굴이었 다. 그는 그러고 나서 곧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갈 즈음 해서 다시 한 번 나에 게 사과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잊혀진 왕국>으로 한 것은, 그날의 석간 신문에서 우 연히 아프리카의 어느 잊혀진 왕국의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왕국이 퇴색해 가는 것은..." 하고 그 기사는 기술하고 있었다. "후진 공화국이 붕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서글프다." 개똥벌레 나는 몇 번이나 그 어둠 속으로 살며시 손을 뻗쳐 보았지만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가는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의 아주 조금 앞에 있었다. 옛날이라고는 하지만 따져 보면 14~15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어느 학생 기숙사에 있었다. 나는 그 무렵 열여덟 살로 대학에 갓 들어간 참이었다. 도쿄의 자리는 어느 곳 하나 아는 데가 없었고,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혼자 살아 본 경험도 없었다. 해서 부모님이 염려하며 그 기숙사의 방을 얻어 주었다. 물론 비용 문제도 있었다. 기숙사 비용은 독신 생활의 그것에 비해 아주 싸게 먹혔다. 나로서는 되도록이면 아파트를 빌려 가지고 혼자 마음내키는 대로 살고 싶었지만 입학금이며, 수업료며, 다달이 보내 오는 생활비를 생각하면 그런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기숙사는 전망이 좋은 분쿄구의 높은 지대에 있었다. 택지는 넓고, 주위는 높다란 콘크리트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기숙사의 정문을 들어서면 거대한 느티나무가 솟구쳐 있었다. 수령은 150년, 혹은 좀더 나이를 먹었는지도 모른다. 밑둥에 서서 위를 쳐다보면, 하늘은 그 초록색 가지에 몽땅 덮여 버려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콘크리트 같은 그 느티나무 거목을 우회하듯 돌아나가 다시 기다란 직선이 되어 가운데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운데뜰 양쪽에는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의 용마루가 두 채, 평행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커다란 건물의 열어재친 창문으로는 라디오의 디제이소리가 울려 나왔다. 창문의 커튼은 어느 방이나 똑같은 크림빛-햇살에 바랜, 제일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이었다. 포장도로의 정면에는 2층짜리 본부 건물이 있었다. 1층에는 식당과 공중 목욕탕, 2층에는 강당과 집회실, 그리고 귀빈실도 있었다. 본부 건물과 나란히 세 번째 기숙사 동이 있었는데, 그 역시 3층짜리였다. 가운데뜰은 넓었고, 초록 잔디밭 속에서는 스프링쿨러가 태양의 햇살을 받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본부 건물 뒤쪽에는 야구와 축구 겸용 그라운드와 테니스 코트가 6개 마련되어 있었다. 이것을 볼 때,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치고는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이 기숙사의 유일한 문제점은-그것을 문제점이라 할 것인가 어떤 가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그것이 어떤 우익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정체 불명의 재단 법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입사 안내의 팜플렛 및 기숙생 규칙을 읽으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교육의 근간을 추구하며 국가에 있어서 유용한 인재를 양성함.' 이것이 이 기숙사 창설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 정신에 찬성하는 많은 재계인이 사유 재산을 들여...' 라는 것이 표면적인 얼굴인 셈인데, 그 이면적인 것은 늘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정확한 진상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세금 혜택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자도 있었고, 기숙사 설립을 명목 삼아 사기나 다름없는 수법으로 토지를 입수했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매명 행위라고 단정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어떻든 1967년의 봄부터 이듬해 가을에 걸쳐, 나는 그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일상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우익이건 좌익이건, 위선이건 위악이건 간에, 별로 대단한 차이는 없었다. 기숙사의 하루는 장엄한 국기 게양과 함께 시작되었다. 물론 국가도 흘러 나왔다. 국기 게양과 국가는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스포츠 뉴스와 행진곡의 관계라고나 할까. 국기 게양대는 가운데뜰의 한복판에 있어서 어느 동 창문에서도 보이게끔 되어 있었다. 국기를 게양하는 건 동쪽 동의 동장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동장, 그는 키가 크고 눈초리가 날카로운 쉰 살 안팎의 사내였다. 머리칼은 억세고 어느 정도 흰털이 섞여 있었으며, 목덜미에 길쭉한 상처가 있었다. 이 인물은 육군 나카노학교(2차대전 때의 스파이 양성 학교) 출신이라고들 했다. 그 옆에는 국기 게양을 돕는 조수 같은 학생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학생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했다. 빡빡 깎은 머리에 언제나 학생복을 걸치고 있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며, 어느 방에 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식당에서도 목욕탕에서도 한 번도 누구와 얼굴을 맞댄 적이 없었다. 정말로 학생인지 어떤지조차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학생복을 입고 있는 걸 보면 역시 학생일 테지, 그렇게 밖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카노학교 출신과는 반대로 학생복을 입은 사람은 키가 작고, 통통하고 피부 색깔이 하ㅇ다. 이 2인조가 매일 아침 6시 기숙사 가운데뜰에 히노마루(일장기)를 올리는 셈이었다. 나는 기숙사에 갓 들어갔을 당시, 곧잘 창문을 통해 이 광경을 바라보곤 했다. 아침 6시 시보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그 두 사람은 가운데뜰에 모습을 나타냈다. 학생복이 오동나무 얄팍한 상자를 들고 있었다. 나카노학교는 소니의 포터블 리코더를 갖고 있었다. 그 나카노학교가 테이프 리코더를 게양대의 밑둥에다 내려놓았다. 학생복이 오동나무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단정하게 접힌 국기가 들어 있었다. 학생복이 나카노학교에게 기를 내밀면, 나카노학교가 로프에 기를 매달았다. 학생복이 테이프 리코더의 스위치를 눌렀다. '기미가요(일본 국가의 이름).' 그리곤 국기가 스르르 깃봉을 기어올라갔다. '사자레이시노-'하는 대목에서 국기는 깃봉의 한복판 언저리에 오게 되고, '마데-'하는 대목에서 정상에 다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등줄기를 쭉 펴고선 '차렷' 자세를 취하고, 국기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맑고 제법 바람이 불면, 이는 꽤나 멋들어진 광경이었다. 저녁 의식도 형식은 대체로 아침과 비슷했다. 다만 순서가 아침과는 정반대였다. 국기는 스르르 아래로 내려와 오동나무 상자 속에 수납되었다. 밤에는 국기가 펄럭이지 않았다. 어째서 밤에는 국기가 거둬들여지는지, 나로선 잘 알 수 없었다. 밤에도 국가는 확고히 존속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일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국기의 비호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공평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대단한 건 아닐지도 몰랐다. 아무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는 건 나 같은 사람뿐인 듯했다. 게다가 나만하더라도,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을 뿐, 심각한 의미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숙사의 방 할당은 원칙적으로 1~2학년은 한 방에 두 명씩, 3~4학년생은 독방, 그런 식으로 돼 있었다. 두 명씩 쓰는 방은 육조방(다다미 6장, 곧 3평 넓이의 방)을 세로로 길게 펼쳐 놓은 형태였다. 막다른 쪽 벽에 커다란 알루미늄 틀의 창문이 박혀 있었다. 가구는 극히 간결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모두가 탄탄한 것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두 개씩, 2단 침대, 로커가 두 개, 그리고 만들어 붙인 선반이 있었다. 대개의 방 선반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헤어드라이어, 전기 포트와 인스턴트 커피, 설탕, 인스턴트 라면을 끓이기 위한 냄비, 그리고 식기가 몇 개 비치돼 있었다. 대개의 경우 석회칠을 한 벽에는 <플레이 보이>지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었다. 책상 위 책꽂이에는 교과서와 최근 유행하는 소설책이 몇 권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자들만의 방이라 대체적으로 아주 지저분했다. 쓰레기통 바닥엔 곰팡이 낀 귤껍질이 달라붙어 있었고, 재떨이 대용의 빈깡통에는 담배꽁초가 10센티미터나 쌓여 있었다. 컵에는 커피 앙금이 말라붙어 있는가 하면 바닥에는 인스턴트 라면의 셀로판 종이랑 빈 맥주 깡통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바람이 불면 바닥에서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지독한 냄새도 났다. 모두들 세탁물을 침대 밑에 쑤셔 넣어 놓았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이불을 말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어느 이불이고 간에 땀과 온갖 체취를 흠뻑 빨아들인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내 방은 청결, 바로 그 자체였다. 바닥엔 티끌 하나 없었고, 재떨이는 늘 씻겨져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이불을 햇볕에 말렸으며, 연필은 차곡차곡 연필꽂이에 꽂혀 있었다. 벽에는 핀업 대신에 암스테르담의 운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런 모든 결과는 동거인이 병적일 만큼 청결을 따지기 때문이다. 그가 전부 청소를 해주었다. 세탁마저 해주는 판이어서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캔 맥주를 마시고 나서 빈깡통을 테이블 위에 놓으면, 다음 순간 그것은 내 동거인의 손에 의해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식이었다. 나의 동거인은 지리학 전공이었다. "난 지, 지, 지도 공부를 하고 있단다."하고 그는 맨 처음 나에게 말했다. "지도를 좋아하니?" "응, 앞으로 국토지리원에 들어가서 말야, 지, 지도를 만들겠어." 세상엔 실로 갖가지 종류의 희망도 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때까지 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해서 지도를 만들고 있는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뿐더러, '지도'란 어휘를 입에 담을 때마다 더듬어 버리곤 하는 인간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도 어째 기묘하게 여겨졌다. 경우에 따라 말을 더듬기도 하고 더듬지 않기도 했는데, '지도'란 어휘가 나오는 한, 그는 백 퍼센트 확실히 더듬었다. "자네는 무엇을 전공하고 있니?"하고 그가 물었다. "연극"하고 나는 대답했다. "연극이란 무대에서 하는 그거겠지?" "아니야, 무대에서 하는 건 아니야. 희곡을 읽고 연구하는 것뿐이지. 라신느라든지, 이오네스코라든지, 셰익스피어 그런 거지." "셰익스피어 이외 다른 사람의 이름은 들은 적이 없어."하고 그는 말했다. 나도 거의 들은 적이 없었다. 강의 요강에 그렇게 씌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떻든 그런 거 좋아하나 보군."하고 그가 말했다. "별로 좋아하진 않아."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혼란을 일으켰다. 혼란을 일으키자 말더듬이 심해졌다. 나는 아주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려면 어때? 상관없다구. 인도 철학이건 동양사건 말이야, 무엇이건 별로 상관없었던 거야, 다만 어쩌다가 연극이었던 거지. 그것 뿐이야."라고 나는 설명했다. "모르겠는걸. 나, 나, 나의 경우는 지, 지도가 좋길래 지, 지, 지도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거든. 그러기 위해 도쿄 대학에 입학한 거고, 그 때문에 부모님께 무리를 해서라도 돈을 내게 하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고 말야..." 그가 하는 말이 정론이었다. 나는 설명하는 것을 단념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들은 제비를 뽑아 2단 침대의 위아래를 결정했다. 그가 상단을 잡았다. 그는 언제나 흰 셔츠에 검정 바지 차림새였다. 머리는 빡빡 깎았고, 귀가 컸으며, 광대뼈가 불거졌었다. 학교에 갈 때엔 학생복을 입었다. 구두도, 가방도 시커먼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우익 학생 꼴이었고, 주위 학생의 대부분은 실제로 그렇게 간주하고 있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정치에 대해서는 백 퍼센트 무관심했다. 무엇을 입을지 선택하는 게 귀찮아서 언제나 그런 꼴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관심은 해안선의 변화라든지, 새 철도 터널의 완성이라든지, 하는 종류의 사건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일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말을 더듬으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쪽이 비명을 지르든지 잠들어 버리든지 상관없이 떠들어댔다. 매일 아침 그는 6시 정각에 맞춰 일어났다. '기미가요'가 자명종 시계를 대신했다. 이걸 보면 국기 게양도 전혀 쓸모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옷을 입고 세면장에 가서 세수를 했다. 세수를 하는 데에는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렸다. 이빨을 하나하나 뽑아 내서 닦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방으로 돌아오면 타월의 주름을 하나하나 펴 가지고 옷걸이에 걸고, 칫솔과 비누를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 다음에 라디오를 켜고, 아침 체조를 시작했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밤이 꽤 깊어서야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 늦게까지 푹 자는 쪽이라서, 라디오의 체조 프로그램이 시작되어도 쿨쿨 잠들어 있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도약' 부분이 되면 반드시 뛰어 일어나게끔 되었다. 아무튼 그가 도약할 때마다-그는 실로 높이 도약했다-나의 머리는 베개 위에서 5센티미터나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그러니 잠들어 있을 수가 있냐 말이다. "미안하지만 말야, 체조는 옥상 같은데서 해줄 수 없겠니? 잠이 깨고 마는걸."하고 나는 나흘째 되는 날 말했다. "안돼. 옥상에서 하면 3층에 있는 사람들이 불평을 하거든. 여기는 1층이라 그럴 염려는 없잖아.'하고 그는 잘라 말했다. "그럼 가운데뜰에서 하면..." "그것도 안되지. 너나 나나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없으니까 음악을 들을 수가 없어. 음악이 없으면 잘 되질 않아." 분명 그의 라디오는 전원식이었으며, 내 라디오는 트랜지스터였으나 에프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 미안하지만 소리를 작게 하고 도약을 그만둬 줄 수 없겠니? 굉장히 울리니까 말야." "도약? 도, 도약이란 것이 뭐야?"하고 그는 놀란 듯이 말했다.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것 있잖아." "그런 게 어딨어?" 나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젠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일단 꺼냈으면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나는 NHK 라디오 제1체조의 멜로디를 부르면서 방바닥 위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보라구, 이거야. 있잖아, 이런 거?" "그, 그렇군. 분명 있지. 주의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말야, 그 부분만을 생략해주면 좋겠단 말이야. 다른 부분은 참아 줄 테니까." "안 되겠는걸. 하나만 배고 넘어갈 수는 없다구. 10년이나 줄창 해온 거니까. 하기 시작하면 무, 무의식중에 전부 해버린단 말야. 하나를 빼먹으면 말야, 전, 전부를 할 수 없게 되거든." 그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전부를 안하면 되잖아." "그런 말투는 좋지 않다구. 남에게 명령하거나 하는 건 말야." "보라구, 난 뭐 명령 같은 거 않았어. 적어도 8시까진 잠자고 싶고, 좀더 일찍 일어난다 하더라도 아주 자연스레 눈을 뜨고 싶단 말이야. 빵 먹기 경주를 하는 것 같은 기상을 하긴 싫단 말이다. 그것 뿐이야. 알겠어?" "그래, 어떡하면 좋을까? 함께 일어나 체조하면 좋지 않을까? 나는 단념을 하고 잤다. 그는 그후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라디오 체조를 계속했다 내가 나의 동거인과 그의 라디오 체조 이야기를 하니까, 그녀는 킬킬 웃었다. 우스갯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었지만, 결국은 나도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건-그건 아주 짧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지만-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나와 그녀는 요츠야 역에서 전차를 내려, 선로 옆 둑을 걸어 이치가야 방향으로 갔다. 5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아침에 내리던 비도 낮이 되기 전에 개고, 나직이 가라앉았던 울적한 잿빛 구름은 남풍에 쫓기듯 어딘가로 사라졌다. 선명한 초록빛 벚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려 반짝이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살 끝에서는 벌써 싱그러운 초여름 향기가 풍겼다. 엇갈려 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웃옷이랑 스웨터를 벗어서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테니스 코트에선 젊은 남자가 쇼트 팬티 바람으로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끔씩 라켓의 금속 테가 오후의 태양을 받아 번뜩이곤 했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수녀 두 사람만이 검은 색 겨울 제복을 단정하게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아주 즐거운 듯이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으므로,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름은 아직도 훨씬 멀리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15분을 걸어가자 등에 땀이 배었다. 나는 두터운 무명 셔츠를 벗고 티셔츠 바람이 되었다. 그녀는 엷은 회색 트레이너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잦은 세탁으로 색이 바랜 낡은 트레이너 셔츠였다. 훨씬 전에 그녀가 그것을 입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느낌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저런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곤 했다. 모든 것이 굉장히 먼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같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거 즐거워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모르겠는걸. 아직 그다지 오래 산 게 아니니까." 그녀는 수돗가 앞에 멈춰 서서, 한 모금 물을 마시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그리고는 테니스화의 끈을 고쳐 매었다. "그런 데에 어울리나 봐요?" "공동 생활이라는 거? "예." "글세, 생각하는 것보단 제법 성가신 일이 많아. 자잘한 규칙이라든지 라디오 체조라든지 말야." "그렇군요."하고 그녀는 얼마 동안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나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투명해 보였다. 그녀가 이토록 투명한 눈을 하고 있었다니, 나는 그때까지 미처 알지 못했다. 좀 불가사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투명감이었다. 마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끔씩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즉..."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의 눈을 들여다본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고는 덧붙였다. "모르겠어요. 됐어요." 그것이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그녀와 만난 건 반면 만이었다. 반년 동안에 그녀는 몰라볼 만큼 야위어 있었다. 특징적이었던 볼의 탐스런 살도 거의 빠졌고, 목선도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골격이 두드러진 인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예뻐졌다. 나는 그 점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나, 어떤 식으로 말하면 좋을지를 몰라 그만두었다. 우리들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 요츠야에 온 건 아니었다. 나와 그녀는 중앙선 전차칸에서 우연히 만났다.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별다른 예정은 없었다. "내려요"하고 그녀가 말했고, 우리는 전차에서 내렸다. 그것이 공교롭게도 요츠야 역이었을 뿐이었다. 둘이서만 있게 되자, 우리 사이엔 딱히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그녀가 왜 나에게 전차에서 내리자고 했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애당초 이야기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역에서 내리자, 그녀는 아무 말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나는 그 뒤를 쫓기라도 하듯이 걸었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언제나 1미터 가량의 거리가 있었다. 나는 줄곧 그녀의 아담하고 작은 등을 보면서 걸었다. 가끔씩 그녀는 뒤를 돌아다보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가 하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곤란한 적도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런 건 별 상관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서 다시 앞을 향해 잠자코 걷기만 할뿐이었다. 우리는 이이다번지에서 오른쪽으로 진보쵸 교차점을 넘었다. 거기서 오차노미즈 고개를 올라, 그대로 홍고로 빠졌다. 그리고 도쿄도 전차를 따라 고마고메까지 걸어갔다. 어지간히 먼 거리였다. 고마고메에 닿았을 때엔 날이 이미 저물어 있었다. "여긴 어디죠?"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고마고메야. 한바퀴 돌아온 거야." "어째서 이런 델 왔지요?" "네가 온 거야. 난 뒤를 따라온 것뿐이고." 우리는 역근처의 국수집에 들어가 가벼운 식사를 했다. 우리는 주문하고서 다 먹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걷는데 지쳐서 몹시 피곤했고, 그녀는 줄곧 무엇인가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퍽도 몸이 튼튼한가 보군."하고 나는 국수를 다 먹고 나서 말했다. "놀랐어요?" "응." "이래뵈도 중학교 시절엔 장거리 선수였다구요. 게다가 아버지께서 산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일요일이면 등산을 가곤 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다리, 허리만은 튼튼하죠."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 그녀는 웃었다. "집까지 바래다줄게." "괜찮아요. 혼자서 갈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난 전혀 상관없는 걸." "정말 괜찮다니까요. 혼자서 집에 가는데 익숙해 있으니까." 사실을 말하면, 그녀가 그렇게 말해 주어서 나는 적이 안심했다. 그녀의 아파트까지는 전차로 가는 것만 해도 한시간 이상 걸렸으며, 그러는 동안 둘이서 잠자코 좌석에 앉아 있으면 어색해질 게 분명했다. 결국 그녀는 혼자서 돌아가기로 하고, 그 대신 내가 저녁을 샀다. "어때요, 만약 괜찮다면-폐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또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말, 도리가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말이에요."하고 헤어질 무렵에 그녀가 말했다. "도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내라 놀란 것이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는걸요."하고 그녀는 변명했다. 그녀는 트레이너 셔츠의 양쪽 소매를 팔꿈치까지 끌어올리고, 그리곤 다시 제자리로 끌어 내렸다. 전등 불빛이 그 솜털을 예쁜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도리'란 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좀더 다른 식으로 말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양쪽 눈을 깔고는, 합당한 말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찮아."하고 나는 말했다. "잘 말할 수가 없어요. ...요즈음 줄곧 그런 상태예요. 정말 잘 말할 수가 없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언제나 얼토당토않은 말밖엔 떠오르지 않는 걸요. 얼토당토않거나, 전혀 반대되거나 하죠. 그래서, 그걸 고쳐 보려고 하면 더더욱 햇갈려서 엉망으로 되어 버리거든요. 그러면 처음에 나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조차 모르게 되는 거예요. 마치 내몸이 둘로 갈라져서 술래잡기라도 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한복판에 굉장히 붉은 기둥이 서 있고, 그 둘레를 빙그빙글 돌면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느낌 말이에요. 그래서 제대로 된 말을 또 하나의 내가 늘 안고 있고, 다른 나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놓고, 나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알겠어요?" "누구나 많든 적든 그런 느낌이란 있는 법이야. 모두가 자신을 정확히 표현하진 못해. 그래서 초조해 하기도 하는 거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좀 낙담한 것 같았다. "그것과는 또 틀려요."하고 그녀는 말했으나,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만나는 건 전혀 상관없다구. 어차피 언제나 놀고 있고, 혼자서 빈둥거리며 있느니 걸어다니는 쪽이 건강에도 좋을 것 같고..." 우리는 역에서 헤어졌다. 내가 "안녕"하고 말하자, 그녀도 "안녕"하고 말했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봄이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나이로, 미션 계통의 명문 여고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를 소개해 준 이는 나와 사이 좋은 친구로, 그와 그녀는 연인 사이였다. 두 사람은 국민학교 시절부터 친구 사이로, 집도 2백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어린 시절 친구가 그렇듯이 그들에겐 두 사람끼리만 있고 싶어하는 소망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노상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었다. 나하고 더블 데이트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 쪽의 하찮은 연애는 별로 그럴싸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새 나와 친구와 그녀, 그렇게 셋이서만 놀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마음이 제일 편했다. 역할로는 내가 게스트고, 내 친구가 유능한 호스트, 그녀는 인상이 좋은 어시스턴트이자 동시에 주역이었다. 그는 그러한 역할에 아주 뛰어났다. 얼마간 냉소적인 경향은 있었으나, 본성은 친절하고 공정한 사내였다. 그는 나에 대해서나 그녀에 대해서나 마찬가지고 농담을 하고 놀려댔다. 어느 쪽이건 잠자코 있으면, 이내 그쪽에 말을 걸어서 교묘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끌어내곤 했었다. 그는 또 그다지 재미없는 상대방의 이야기 중에서 재미난 부분을 이것저것 찾아내는 보기 드문 재능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때때로 나는 나 자신이 아주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나 한 번 그가 자리를 비우면, 나와 그녀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 공통되는 화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대개 아무 말도 없이 탁자 위의 재떨이를 만지작거리거나 물을 마시거나 하면서 그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장례식이 끝난 3개월쯤 후에, 나와 그녀는 꼭 한 번 얼굴을 마주쳤다. 대수롭지 않은 용건이 있어서 다방에서 만났는데, 용건이 끝난 다음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몇 번인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았으나, 이야기는 그때마다 도중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뿐더러 그녀의 어투에는 어딘지 모르게 모 난 데가 있었다. 그녀는 무엇인지 나로선 알지 못할 일로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와 그녀는 헤어졌다. 그녀가 나에게 화를 낸 건 어쩌면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자기가 아니고 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될 수만 있다면 그때의 상황을 바꾸었으면 싶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한 번 일어난 일은, 제아무리 노력해도 사라지지 않고, 또 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해 5월의 오후, 나와 그는 하교 길에-하교길이라지만 정확히 말하면 등교 도중에서 돌아왔던 셈이다-당구장에 들러서 네 게임 가량 당구를 쳤다. 첫 게임을 내가 이기고, 나중의 세 게임을 그가 이겼다. 약속대로 내가 게임 요금을 물었다. 그는 그날 밤 차고 안에서 죽었다. N3 60의 베기 파이프에 고무 호스를 연결해 차안으로 끌어들이고, 창문 틈을 고무 테이프로 막아 버리고서 엔진을 걸었던 것이다. 죽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친척의 병문안을 갔던 양친이 귀가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카 라디오가 켜진 채였다. 와이퍼에는 주유소의 영수증이 끼여 있었다. 유서도 없었거니와 짚이는 동기도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와 만났던 탓에, 경찰에 불려가서 심문을 받았다.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습니다. 여느 때와 똑같았습니다." 도대체 자살하겠다고 마음먹은 인간이 당구에서 세 게임이나 계속 이길 까닭이 없단 말이다. 경찰은 나에 대해서나 그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인상은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학교 수업을 빼먹고 당구장에 가는 그런 인간이라면 자살했다 한들 별로 이상할게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신문에 작은 기사가 실리고, 그걸로 사건은 끝났다. 빨간 N3 60은 처분되었다. 그가 앉았던 교실의 책상에는 한동안 하얀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나왔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그것뿐이었다. 나는 녹색 펠트를 발라 놓은 당구대랑, 빨란 N3 60이랑, 책상 위의 하얀 꽃이랑, 그런 것들은 죄다 잊어버리기로 했다. 화장터의 높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랑, 경찰의 취조실에 놓여 있던 종이가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펑퍼짐한 문진이랑, 그런 모든 것들을 말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렇게 잘 되어 갈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안에는 무엇인지 어렴풋한 공기 비슷한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공기는 뚜렷이 단순한 형상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이런 말로 바꿔 놓을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 놓고 보면 역겨우리만큼 평범하다. 완전한 일반론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로서 몸속에 느꼈던 것이다. 문진 속에도, 당구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네 개의 공 속에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자잘한 티끌처럼 허파 속으로 빨아들이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죽음이란 것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존재로서 파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포착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포착하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그것은 나로선 지극히 정당하고도 논리적인 사고 방식인 것으로 여겨졌다.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쪽에 있다. 그러나 나의 친구가 죽어 버린 그날 밤을 경계로 해서, 나로선 이미 그렇게 단순하게 죽음을 파악할 수는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적 존재가 아니다. 죽음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로선 그것을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저 열 일곱 살의 5월 밤에 나의 친구를 포착한 죽음은, 그날 밤 나를 또한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명백히 그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에 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열여덟 살이고, 사물의 중간점을 찾기에는 너무나 어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후로도 한 달에 한 번인가 두 번, 그녀를 만나 데이트를 했다. 다분히 데이트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라 믿는다. 그 외에 마땅한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녀는 도쿄에 있는 여자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평판이 좋은 아담한 여자 대학이었다. 그녀의 아파트로부터 대학까지는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길가에는 깨끗한 용수가 흐르고 있어서 가끔씩은 그 언저리를 걸어다니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친구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띄엄띄엄 밖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특별히 이야기할 것도 없었으므로, 나도 그다지 말을 하지 않았다. 얼굴을 맞대면, 우리는 그저 걷기만 했다. 그러나 아무런 진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에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의 곁에서 걷게 되었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고개를 오르고 고개를 내려오고, 다리를 건너고, 거리를 가로질러 걷고 또 걸었다.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었고, 무엇을 하리라는 목적도 없었다. 한바탕 걷고 나면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나면 또 걸었다. 슬라이드의 필름이 갈아 끼워지는 것처럼, 계절만이 지나갔다. 가을이 와서, 기숙사 가운데뜰이 느티나무 낙엽으로 뒤덮였다. 스웨터를 입으니 새로운 계절의 냄새가 풍겼다. 나는 새 스웨이드 구두를 샀다. 가을이 끝나고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그녀는 가끔씩 나의 팔에 몸을 기대었다. 더블 코트의 두꺼운 천을 통해, 나는 그녀의 호흡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나는 코트의 포켓에 손을 밀어 넣은 채, 언제나 다름없이 걷기만 했다. 나도 그녀도 러버 소울 구두를 신고 있었기에,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플라타너스의 구깃구깃한 마른 잎을 밟을 때에만, 마른 잎이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찾고 있는 건 내 팔이 아니라 '누군가'의 팔이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건 나의 체온이 아니라 '누군가'의 체온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여겨졌다. 그녀의 눈은 전보다도 더욱 투명하게 느껴졌다.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투명함이었다. 가끔씩 그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슬퍼졌다. 기숙사 동료들은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거나 일요일 아침에 내가 외출하려고 하거나 하면, 언제나 나를 놀려댔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다들 나에게 연인이 생긴 줄 알았다. 설명을 할 수도 없으려니와 할 이유도 없어서, 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데이트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누군가가 섹스는 어떻더냐고 질문했다. 그러면 나는 고만고만하더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열여덟 살은 지나갔다. 해가 뜨고 지고, 국기가 올랐다가 내렸다가 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죽은 친구의 연인과 데이트를 했다. 도대체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나로선 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대학의 강의에서 클로델을 읽고, 라신느를 일고, 아이겐슈타인을 읽었다. 그들은 누구나 정상적인 문장을 쓰고 있었는데, 그저 그것뿐이었다. 나는 학급에서 거의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기숙사에서의 교제도 대체로 비슷한 것이었다. 나는 늘 책을 읽고 있었으므로, 다들 내가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줄 여기고 있었는데, 사실 나는 소설가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심정을 그녀에게 몇 번인가 말하려 했다. 그녀라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정확하게 알아주리라 여겼다. 그러나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맨 처음 나에게 말한 것처럼, 정확한 말을 찾으려고 하면 그것은 언제나 내 손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잠겨 들곤 했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전화가 있는 로비의 의자에 앉아서, 그녀로부터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는 3주일 동안 걸려 오지 않는 수도 있었고, 2주일 동안 연거푸 걸려 오는 수도 있었다. 그래서 토요일 밤에는 로비의 의자에 앉아서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다. 토요일 밤에는 태반의 학생들이 놀러 나갔으므로, 로비는 대개 조용했다. 나는 언제나 그런 침묵의 공간에 떠오르는 빛깔의 입자를 응시하면서, 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앞의 것은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손을 내민 그 바로 앞에, 막연하게 나마 한 공기의 벽이 있었다. 겨울 동안 나는 신주쿠의 조그만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크리스마스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디어하트>가 들어 있는 헨리 맨시니의 레코드를 선물했다. 나는 직접 포장을 하고, 핑크색 리본을 매었다. 전나무 무늬의 크리스마스용 포장지였다. 그녀는 나에게 털질 장갑을 짜주었다. 엄지손가락 부분이 좀 짧았으나, 따뜻하기만 했다. 그녀는 겨울 방학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나는 1월 한달 동안 그녀의 아파트에서 식사 대접을 받았다. 그 겨울에는 갖가지 일이 벌어졌었다. 1월말에 나의 동거인이 40도 가까운 고열이 나서 이틀 동안 드러누웠다. 그 탓에 나는 그녀와의 데이트를 망치고 말았다. 금새 죽어 버릴 것처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둔 채 외출할 수는 없었다. 나말고 병간호를 해 줄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얼음을 사다가 비닐봉지로 얼음주머니를 만들고, 타월을 식혀서 땀을 닦아주고, 한시간마다 열을 쟀다. 열은 꼬박 하루 동안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째 아침에 그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체온은 36도 2부까지 내려 있었다. "이상하군. 여지껏 열 같은 게 난 적은 없었는데."하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나았잖아?"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곤 그 때문에 쓸모 없이 되어 버린 두 장의 콘서트 초대권을 내보였다. "하지만 뭐 초대권이니 다행이잖아."하고 그는 말했다. 2월에는 몇 번인가 눈이 내렸다. 2월이 끝날 무렵에 나는 하찮은 일로 싸움을 하고 기숙사의 같은 층에 사는 상급생을 때렸다. 상대방은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다행히 대단한 부상은 아니었으나, 나는 사감에게 불려가 주의를 받았다. 덕분에 기숙사 생활이 몹시 불편해졌다. 나는 열아홉살이 되었고, 이윽고 2학년이 되었다. 나는 몇몇 강의를 빼먹었다. 성적은 거의 C아니면 D였고, B가 아주 약간 있을 뿐이었다. 그녀 쪽은 무난히 모든 학점을 따서 2학년이 되었다. 계절이 반 바퀴 돈 셈이다. 6월에 그녀는 갓 스무 살이 되었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된다는 건 어쩐지 불가사의한 느낌이 들게 했다. 나로서나 그녀로서나 실상은 열여덟 살과 열 아홉 살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는 쪽이 옳지 않은가 하는 느낌도 들었다. 열여덟 다음이 열 아홉이고, 열 아홉 다음이 열여덟이라면. 하지만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나도 다음 겨울에는 스무 살이 된다. 죽은 자만이 언제까지나 열 일곱 살이었다. 그녀의 생일날엔 비가 내렸다. 나는 신주쿠에서 케이크를 사들고 전차를 타고, 그녀의 아파트로 갔다. 전차는 붐볐고, 게다가 자주 흔들렸다. 때문에 저녁 무렵 그녀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케이크는 로마의 유적 같은 형상으로 뭉개져 있었다. 그런 대로 일단 스무 자루의 양초를 꽂아 성냥불을 켰다. 창문의 커튼을 치고 전등을 끄자, 그럭저럭 생일다워졌다. 그녀가 와인을 땄다. 그런 다음에 케이크를 먹고 간단한 식사를 했다. "스무 살이 된다는 건, 어째 바보 같네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식사가 끝나자 둘이서 함께 그릇을 치우고, 방바닥에 앉아서 와인의 나머지를 마셨다. 내가 한 잔을 마시는 동안에 그녀는 두 잔을 마셨다. 그날 그녀는 드물게 잘도 지껄여댔다. 어릴 적의 일이랑 학교 일이랑 집안일 따위를 이야기했다. 어느 것이나 아주 긴 이야기였다. 긴데다가 이상하리만큼 세세한 이야기였다. A이야기가 어느 틈엔가 거기에 포함되는 B의 이야기가 되고, 이윽고 B에 포함되는 C의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계속되었다. 끝이 없었다. 나는 처음 얼마 동안은 적당하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그만두었다. 나는 레코드를 걸고, 그것이 끝나면 바늘을 올리고 다음 레코드를 걸었다. 한바퀴 전부 돌아 끝이 나면, 다시 처음에 레코드를 걸었다. 창 밖에선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서서히 흐르고, 그녀는 혼자서 지껄여대고 있었다. 시계가 11시를 가리켰을 때, 나는 아닌게아니라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벌써 4시간이나 지껄여대고 있었다.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전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지껄이고 싶은 만큼 지껄이게 하는 쪽이 좋을 것 같기도 했고, 시간을 보아서 어디선가 그만두게 하는 쪽이 좋을 성도 싶었다. 나는 꽤나 망설이다가 결국 이야기를 그만두게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너무 지껄여댔던 것이다. "너무 늦어져도 미안하니까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어. 며칠 뒤에 또 만나자구."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한 말이 그녀에게 전해졌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주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을 뿐, 이내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는 단념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된 바에야 그녀가 지껄이고 싶은 만큼 지껄이게 하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 뒷일은 되어가는대로 내맡길 수밖에. 그러나 이번에 그녀의 이야기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때엔 그녀의 이야기가 이미 끝나 있었다. 말의 끊어진 조각들이 잡아 찢기거나 한 것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꺼지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계속하려 했으나. 거기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인가 깨지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벙긋이 연 채, 멍하게 내 눈을 보고 있었다. 마치 불투명한 막을 통한 것 같은, 그런 시선이었다. 나는 아주 몹쓸 짓을 하고 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훼방놓을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이젠 시간도 많이 늦었고, 뿐더러..."하고 나는 한마디 한마디를 확인하듯 천천히 말했다.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지나 레코드 자켓위에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첫 눈물이 흘러내리자, 다음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두 손을 방바닥에 짚고, 마치 토하는 듯한 자세로 울었다. 나는 살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의 어깨는 잔잔히 요동치고 있었다. 그 다음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나의 가슴속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나의 셔츠는 뜨거운 입김과 눈물에 젖었다. 그녀의 열 손가락이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듯이 나의 등뒤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몸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대로 그녀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좀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녀와 잤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는지 어떤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밖에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자아이와 자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녀 쪽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어째서 '그'와 자지 않았었느냐고 물어 보았다. 하지만 그런 건 묻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창밖의,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아침이 되니 비는 그쳐있었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줄창 깨어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던 간에 나에게는 마찬가지였다. 1년전과 똑같은 침묵이 그녀를 짙은 안개처럼 뒤덮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대로 그녀의 하얀 잔등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단념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바닥에는 레코드 자켓이 어젯밤 모습대로 흩어져 있었다. 갑자기 거기에서 시간의 흐름이 멈춰 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상 위에는 사전과 프랑스어 동사표가 얹혀 있었다. 책상 앞 벽에는 달력이 걸려 있었다. 사진도 그림도 아무것도 없이 숫자만이 달려 있었다. 달력은 새하ㅇ다. 써넣은 것도 없었고, 달리 표시해 놓은 것도 없었다. 나는 침대 다리 밑에 떨어져 있는 옷을 집어서 입었다. 셔츠의 가슴 부분은 아직도 차갑고 축축했다. 얼굴을 가까이 하니 그녀의 머리 냄새가 났다. 나는 책상 위의 메모 용지에다, 가까운 시일 안에 전화를 해달라고 썼다. 그리고 방에서 나와, 살며시 문을 닫았다. 1주일이 지나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녀의 아파트는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긴 편지를 썼다.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것들을 되도록 솔직하게 썼다. 나로선 여러 가지를 잘 알 수 없으며, 알려고 애쓰고는 있으나. 그러자면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도대체 내가 어디에 있을지 나로선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되도록 심각하게 사물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심각하게 생각하기엔 세계는 너무나 불확실하며, 아마 그 결과로 주위의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타인에게 무엇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정말 너와 만나고 싶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 그것이 옳은 것인지 어떤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그런 내용의 편지였다. 7월의 초순경에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다. 짧은 편지였다. 우선 대학을 1년간 휴학하기로 했어요. 우선이라고 했지만, 이젠 아마 되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휴하가은 어디까지나 절차상의 일입니다. 아파트는 내일 퇴거하기로 했어요. 갑작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예요. 당신에게 몇 번인가 의논할까도 했었지만, 아무래도 할 수가 없었어요. 입에 담는게 매우 두려웠던 거예요. 이런저런 일에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이런 말투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는지도 모르겠군요. 만약에 그렇다면 사과할께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의 일로 해서 당신이 자기 자신을 책망하거나 다른 누군가를 탓하지는 말라는 거예요. 이건 정말이지 제가 전적으로 떠맡아야 하는 일이에요. 1년 남짓 저는 그것을 연기하고 또 연기해 왔어요. 그 탓으로 당신에게 퍽이나 폐를 끼친 것 같아요.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한계겠지요. 교토의 산중에 좋은 요양소가 있다고 하니, 우선은 그곳에 정착할 겁니다. 병원은 아니고, 훨씬 자유로운 시설이래요. 자세한 것은 다음 기회에 쓰겠어요. 지금은 잘 써지지 않는군요. 이 편지도 벌써 열 번가량 고쳐 썼답니다. 당신이 1년간 제 곁에 있어 준 데 대해,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해 하고 있어요. 그 점만은 믿어 주세요. 그 이상의 것은 저로선 아무말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주신 레코드는 언제나 소중히 듣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이 불확실한 세계의 어딘가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그때엔 좀더 여러 가지 일들을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게 돼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안녕히. 나는 몇백 번이나 그녀의 편지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되풀이해서 읽을 때마다 슬퍼지곤 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나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볼 때 느끼는 것과 같은 호소할 데 없는 슬픔이었다. 나는 그런 심정을 어디로 가져 갈 수도, 어디다 챙겨 놓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바람처럼 형체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 걸칠 수조차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서서히 지나갔다. 나의 귀에는 그들이 하는 말이 와닿지 않았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여전히 로비의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전화가 걸려 올 데는 없었으나, 그 이외에 도대체 무엇을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텔레비전의 야구 중계를 켜고, 그것을 보는 척했다. 그리곤 나와서 텔레비전 사이에 가로놓인 막막한 공간을 응시했다. 나는 그 공간을 둘로 가르고, 그 갈라진 공간을 다시 둘로 갈랐다. 그리고 그것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해, 마지막엔 손바닥에 얹힐 만큼의 조그마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10시가 되면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방으로 돌아와 잠들었다. 그 달의 끝 무렵에 나의 동거인이 인스턴트 커피 병에 넣은 개똥벌레를 주었다. 병 속에는 개똥벌레 한 마리와 풀잎과 물이 조금 들어 있었다. 뚜껑에는 공기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다. 사방은 아직 밝았으므로, 그것은 그저 그런 냇가의 검은 벌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분명 그것은 개똥벌레였다. 그 별레는 미끌미끌한 유리의 벽을 기어오르려다가 그때마다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지곤 했다. 개똥불을 본 건 오래간만이었다. "마당에 있더라구. 근처 호텔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풀어놓은 것들이 이리로 잘못 들어왔나 봐."하고 그는 보스턴 백에다 의류며 노트를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벌써 여름 방학이 시작된 지 몇 주일인가 지나 있었다. 기숙사에 남아 있는 건 우리들 정도였다. 내 쪽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쪽은 실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실습도 끝나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여자아이한테 주면 좋을 거야. 정말 좋아할 테니."하고 그는 말했다. "고마워."하고 나는 말했다. 날이 저물자 기숙사는 조용하기만 했다. 국기가 깃봉에서 내려지고, 식당 창문에 전등불이 켜졌다. 학생이 적어진 탓으로, 식당 불은 여느 때의 절반밖에 켜져 있지 않았다. 오른쪽 절반이 꺼지고, 왼쪽 절반만이 켜져 있었다. 그런대로 희미하게 저녁 식사 냄새가 났다. 크림 스튜 냄새였다. 나는 개똥벌레가 들어 있는 인스턴트 커피 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사람 그림자라곤 없었다. 누군가 거워들이는 걸 잊어버린 흰 셔츠가 빨랫줄에 걸려, 무슨 곤총의 껍데기처럼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옥상의 구석 쪽에 있는 녹슨 철제 다리에 올라가 급수탑 위로 나섰다. 원통형의 급수 탱크는 낮 동안에 듬뿍 빨아들인 열로 해서, 아직도 따스했다. 비좁은 공간에 걸터앉아 난간에 기대고 있노라니, 아주 약간 일그러진 하얀 달이 눈앞에 가까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신주쿠 거리가, 왼쪽으로는 이케부쿠로 거리가 보였다.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가 선명한 빛깔의 냇물이 되어, 거리에서 거리로 흐르로 있었다. 갖가지 소리가 뒤섞인 부드러운 소음이 마치 구름인 양 거리위에 떠 있었다. 개똥불은 병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깔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색깔조차 너무나 엷었다. 내 기억속의 개똥불은 좀 더 뚜렷한 선명한 빛깔을 여름의 어둠속에 발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개똥벌레는 힘이 빠져 죽으려 하는 지도 모른다. 나는 병의 목을 잡고 몇 번인가 흔들어 보았다. 반디는 유리 벽에 몸을 부딪히고, 아주 조금 날았다. 그러나 그 빛깔은 여전히 희미하기만 했다. 다분히 내 기억이 잘못되어 있나 보다. 개똥불은 실제로 그다지 선명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저 그렇게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혹은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너무나도 깊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나로선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개똥불을 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밤의 어두운 목소리뿐이었다. 벽돌 구조의 낡은 수문도 있었다. 그건 핸들을 빙글빙글 돌려서 여닫는 수문이었다. 강가의 수초가 수면을 거의 다 덮어 버린 것 같은 조그마한 시내였다. 사방은 아주 캄캄했고, 수문의 물 웅덩이 위를 몇백 마리나 되는 반딧불들이 날아다녔다. 그 노오란 빛깔의 덩어리가, 마치 마구 불타오르는 불똥처럼 수면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언제 일이었더라? 그리고 도대체 어디였더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와선 이런저런 일들이 앞뒤가 맞지 않게 뒤섞여 버렸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해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노라면, 몸이 금세라도 여름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날이 저물고 나서 급수탑에 오른 건 처음이었다. 여느 때보다 바람 소리가 두드러지게 들려 왔다. 그다지 센 바람도 아닐텐데, 그것은 불가사의할 만큼 선명한 행적을 남기고 내 곁을 휘몰아쳐나갔다. 서서히 긴 시간이 지나고 밤이 지표를 뒤덮어 갔다. 도시의 불빛이 강하게 그 존재를 돋보이려 해도 밤은 제 몫을 확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나는 병의 뚜껑을 열고 개똥벌레를 꺼내아, 3센티미터쯤 내민 급수탐 가장자리에 놓았다. 개똥벌레는 자신이 놓여진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개똥벌레는 주의를 비실거리면서 한바퀴 돌기도 하고, 부스럼 딱지처럼 말라 있는 페인트 자국에다 발을 걸기도 했다. 잠시 동안 오른쪽으로 나가 거기가 막바지임을 확인하고서는 다시 왼쪽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시간을 들여 볼트의 꼭대기로 기어올라가, 거기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았다. 개똥벌레는 마치 숨이 끊어진 듯,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난간에 기대어 선 채, 그런 개똥벌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만이 우리 사이를, 냇물처럼 흘러갔다. 느티나무가 어둠 속에서 무수한 잎사귀들을 비벼댔다. 나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었다. 개똥벌레가 날아오른 건 훨씬 뒤였다. 개똥벌레는 무언가 생각난 듯 문득 날개를 펴, 그 다음 순간에는 난간을 넘어 엷은 어둠 속에 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듯 급수탑 옆에서 잽싸게 활 모양을 그렸다. 그리고 그 빛의 선이 바람에 스며드는 것을 지켜 보듯 잠시 동안 거기에 멈췄다가, 이윽고 동쪽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개똥불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나의 가슴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조그마한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넋인 양 언제까지나 헤매 다니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어둠 속으로 살며시 손을 뻗쳐 보았다. 하지만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가는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의 아주 조금 앞에 있었다. 거울 나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지.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만큼 겁나는 것이 또 있을까 하고 말이지. 아까부터 자네들의 체험담을 듣고 있자니까 말이지, 그런 경우의 이야기엔 몇 가지의 패턴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거든. 우선 한 가지는, 이쪽에 삶의 세계가 있고, 저쪽에 죽음의 세계가 있어서, 그것이 그 어떤 힘에 의해 어디선가 교차한다는 형식의 이야기란 말이지. 예를 들면 유령이라든가 하는 거. 그리고 또 한 가지는, 3차원적인 상실을 넘어선 어떤 종류의 현상이나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이지. 다시 말해서 예지라든가 예감이라든가 하는 거 말이야. 크게 나누면 그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러한 것을 종합해 보면 말일세, 모두가 어느 쪽인가 한 쪽 분야만을 집중해서 경험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결국 말일세, 유령을 보았다는 사람은 흔히 유령은 보지만 예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고, 예감을 곧잘 체험하는 사람은 유령 같은 건 보지 못한단 말이지. 왠지는 잘 몰라고, 그러한 개인적인 경향이라는 건 확실히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어. 그리고 물론 어느 쪽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도 있지. 가령 내가 그런데 말야, 나는 이미 서른 몇 해 살아왔지만, 유령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구. 예지몽이라든가 예감이라든가,. 그런 걸 경험한 적도 없어. 두 친구하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들은 유령을 봤다고 하는데도, 난 전혀 알아채지 못한 적도 있거든. 둘 다, 회색옷을 입은 여자가 내 곁에 서 있었다고 하지만, 여자 같은 건 절대로 타고 있지 않았단 말이야. 우리들 셋 뿐이었어. 거짓말이 아니야. 한데 그 두사람도 일부러 나를 놀리거나 할 친구는 아니거든. 뭐 그건 그걸로 굉장히 을씨년스런 체험이었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유형을 보지 않았다는 점에는 다름이 없지. 아무튼 그렇단 말이야. 나라는 인간은 유형도 보지 못하며, 초능력도 없어. 뭐라고 할까, 실로 산문적인 인생이란 말이야. 하지만 나한테도 꼭 한 번, 꼭 단 한 번, 마음속으로부터 무서움을 느낀 적이 있었어. 이젠 십 년도 넘은 이야기지만, 이제껏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은 없어. 입밖에 내는 것조차 무서웠단 말이야. 입밖에 내기만 하면 같은 일이 또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구. 그래서 여지껏 잠자코 있었지. 하지만 오늘 밤은 모두들 차례차례로 각자 무서웠던 체험담을 들려 준 셈이니, 주최측인 내가 마지막으로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자리를 달아나 버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야. 그래서 나도 마음먹고 애기해 보기로 했어. 아니야, 됐어. 박수는 그만두라구. 대수로운 이야기가 아니라니깐.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령도 나오지 않으며, 초능력도 없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무서운 얘기가 아니고, 이게 뭐야, 이런 식이 되고 말지도 모르지 뭐, 그래도 좋아. 아무튼 얘기하겠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건 60년대 말 그 일련의 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는데, 입만 열었다 하면 체제 타파니 뭐니 하던 시대였지. 말하자면 나도 그런 물결에 휘말린 한 사람으로, 대학 진학을 거부하고, 몇 해동안 육체 노동을 하면서 일본 열도를 방랑하고 있었어. 그런 것이 옳은 인생인 줄 알았었지. 말하자면, 젊은 놈의 패기라고나 할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재미있는 생활이었다구. 그것이 옳았나 틀렸나 그게 아니고, 다시 한 번 인생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아마 똑같은걸 할 거란 말이지. 그런 거 아니겠나? 방랑 2년째의 가을에, 난 2개우러 가량 중학교 야간 경비를 했었어. 니가타라는 조그만 도시의 어느 중학교에서 말이지. 나는 마침 여름 내내 꽤나 고되게 일했던 탓으로, 좀 느슨하게 지내고 싶었거든. 어쨌든 야간 경비라는건 쉬운 일 아닌가. 낮 동안은 사무실에서 잠이나 자다가, 밤중이 되면 전체 학교 건물을 두 번 순찰하기만 하면 되거든. 그 이외는 음악실에서 레코드를 듣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체육관에서 혼자 농구를 하거나 했었지. 밤중에 학교에서 혼자만 있다는 것도 그다지 나쁘진 않더군 그래. 아니지, 조금 겁자거나 하지 않았거든. 그래, 열여덟, 열아홉, 그 시절이란 정말 겁 모를 때가 아닌가. 자네들은 중학교 야간 경비 같은건 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순서를 우선 설명하자면, 순찰은 오후 9시와 새벽3시에 한 번씩 하면 되거든. 그렇게 정해져 있어. 건물은 제법 새 콘크리트의 3층이고, 교실 수는 18개에서 20개쯤으로 그다지 큰 학교는 아니었어. 거기다 음악실이니, 재봉실이니, 미술실, 거기다 직원실이랑, 교장실 같은 것이 있지. 학교 건물 이외엔 급식실과 풀장과 체육관과 강당이 있어. 그런 것들을 한바탕 순찰하는 셈이야. 순찰하며 표시해야 하는 곳은 20개 가량 되는데, 걸어다니면서 일일이 그걸 확인하고, 볼펜으로 OK 사인을 용지에 써넣는다. 직원실-OK, 실험실-OK, 이런 식으로 말이야. 사무실에 뒹굴면서 OK, OK하고 써넣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정도의 수고를 아끼진 않았어. 왜냐하면 순찰을 돈다해도 뭐 힘들지도 않고, 또 수상한 자가 침입했거나 하면, 잠결에 기습을 당하는 건 이쪽이니깐 말야. 그래, 9시와 3시에 나는 대형 회중전등과 나무 막대기를 들고 학교안을 돌았어. 왼손엔 회중전등, 오른손엔 나무 막대기를. 나는 고등학교때, 검도를 했으니까 팔 힘에는 자신이 있었지. 상대방이 프로가 아닌 한, 비록 저쪽이 진짜 칼인 일본도를 갖고 있다 한들 별로 겁날 것이 없었거든. 그 시절엔 말이지. ...지금이라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겠지, 물론. 그건 10월 초의 바람이 드센 밤이었지. 춥지는 않았어. 어느 쪽이냐하면 오히려 무더운 편이었지. 저녁쯤부터 더럽게 모기기 많지 않겠나. 가을인데도 모기향을 두 개나 켰던 걸 기억하고 있어. 줄창 바람이 윙윙거리고 있었지. 마침 풀장이 칸막이문이 망가졌었는데, 그것이 바람에 덜커덩거려서 시끄럽기 짝이 없지 뭔가. 고쳐 놓을까도 했지만, 어두워서 고칠 수도 없었어. 그래서 밤새도록 덜커덩거렸지 뭔가. 9시에 순찰을 돌 땐 아무 일도 없었어. 20곳의 순찰 표시는 OK였고, 열쇠는 딱딱 걸려 있겠다, 모든 것이 어김없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었겠다,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사무실로 되돌아와 자명종을 3시에 맞춰 놓고 깊은 잠에 빠져 버렸어. 3시에 시계의 벨이 울렸을 때 나는 어쩐지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단 말이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말야, 일어나고 싶지 않더란 말일세. 일어나려고 하는 나의 의지를, 몸이 마구 눌러 막으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지. 나는 잠자리를 잘 털고 일어나는 편이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어. 그래서 억지로 일어나, 순찰 돌 채비를 했지. 덜커덩거리는 칸막이 문 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어. 한데 말이지, 그 소리가 어쩐지 아까하곤 틀리다는 느낌이 들지 않겠나. 신경 과민이라면 그만이겠지만 어째 제대로 몸에 착 와닿지 않더란 말이야. 으스스하군, 순찰하고 싶지 않군, 그렇게 느꼈어. 하지만 역시 마음을 다져 먹고 가기로 했지. 글쎄, 그런 일은 한번 얼버무려 버리면, 다음엔 몇 번이고 얼버무려 버리게 되니까 말이야. 나는 회중전등과 나무 막대기를 들고 사무실을 나섰어. 으스스한 밤이었다구. 바람은 더욱더 드세어지고, 공기는 더 축축하게 젖어 있었어. 피부가 마구 쑤시고, 정신이 제대로 집중되지 않았어. 맨 먼저 체육관과 강당과 풀장을 순찰했지. 어느 곳이나 OK였어. 칸막이 문짝은 머리가 돈 인간이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는 것처럼 덜커덩덜커덩 열렸다 닫혔다 하고 있었어. 더럽게 불규칙하더라구. 응, 응, 아니야, 응,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런 느낌이 드는 소리였단 말일세. 어째 좀 묘한 비유지만, 그땐 진짜 그렇게 느꼈단 말이야. 학교 건물 내부에도 별 이상은 없었지. 여느 때나 다름없었어. 쭉 한바퀴 돌아보고 순찰결과 보고서에 전부 OK 사인을 써넣었어. 결국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려했지. 마지막 순찰 장소가 급식실 옆의 보일러실이었는데, 그건 학교 건물의 동쪽 끝에 있었지. 사무실은 서쪽 끝에 있었어. 그래서 항상 나는 1층의 긴 복도를 걸어서 사무실로 돌아와야 했지. 그날 밤은 여느 때보다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었어. 농구화의 고무 밑창이 리놀륨 위에서 털썩, 털썩 하고 소리를 냈어. 녹색 리놀륨이 깔려 있는 복도였어. 이끼가 낀 것 같은 낡은 녹색이었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구. 그 복도의 한복판 언저리에 학교의 현관이 있었는데 말이지, 거기를 지났을 때 갑자기 '으악!'하는 느낌이 들지 않겠나. 칠흙속에서 무슨 현상이 보인 것 같았단 말이야. 옆구리 밑이 섬뜩했어. 나는 나무 막대기를 다시 움켜잡고, 그쪽 방향으로 돌아섰지. 그리곤 그쪽으로 번쩍 회중전등 불빛을 비추었어. 신발장 옆 벽 언저리로 말이지. 거기엔 내가 있었어. 다시 말해-거울이었단 말일세. 별 거 아니라구. 거기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을 뿐이란 말야.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런 곳에 거울 같은 건 없었는데, 어느 틈엔가 걸려 있더란 말이야. 그래서 난 깜짝 놀랐던 셈이지. 몸 전체가 비치는 세로로 기다란 체경이었어. 나는 안도의 숨을 쉬는 것과 동시에 너무나 어이없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게 뭐야, 싱겁게시리, 하고 느꼈지. 그래서 거울 앞에 선 채 회중전등을 아래에 내려놓고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어. 그리곤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면서 한 모금 빨았지. 창문으로 아주 희미하게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와, 그 불빛은 거울 속에까지 미쳐 있었어. 등 뒤쪽에서는 덜커덩덜커덩 하는 풀장 칸막이 문짝 소리가 들려 왔고. 담배를 세 번 가량 빨아당기고 나서, 갑자기 기묘한 사실을 깨달았어. 즉, 거울 속의 형상은 내가 아니더란 말이야. 아니지, 외견상으로는 완전히 나였지. 그건 틀림없었어. 하지만, 그건 절대로 내가 아니었어. 나는 그걸 본능적으로 알았어. 아니지, 틀렸어. 정확히 말해서 그건 물론 나였어. 하지만 그건 나 이외의 나였단 말이야. 그것은 내가 그럴 수 없는 형상으로서의 나였단 말일세. 어떻게 말하면 될까. 이 느낌을 타인에게 말로 설명하기란 지독히 어렵군 그래. 하지만 그때 단 한가지 나로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방이 마음속으로부터 나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이었어. 마치 그것은 캄캄한 바다에 떠오른 딱딱한 빙산 같은 증오였어. 그 누구도 치유해 줄 수 없는 증오였지. 나로선 그것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었어. 나는 거기에 한참 동안 망연히 서 있기만 했어. 담배가 손가락 사이로부터 바닥에 떨어졌어. 거울 속의 담배도 바닥에 떨어졌지. 우리는 똑같이 서로가 서로의 몰골을 바라보고 있었어. 나의 몸은 쇠사슬로 포박당하기나 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어. 이윽고 그 놈팽이의 손이 움직였어. 오른손 손가락이 천천히 턱을 만지고, 그리고는 조금씩 조금씩, 마치 벌레처럼 얼굴로 기어오르고 있었어. 알고 보니 나도 역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마치 내 쪽이 거울 속의 형상인 것처럼 말일세. 즉, 그 놈팽이 쪽이 나를 지배하려고 했던 거지. 나는 그때, 최후의 힘을 몽땅 짜내어 아우성을 쳤지. '우오오'랄까 '구오오'랄까, 그런 소리로 말이야. 그랬더니 쇠사슬 포박이 아주 조금 풀리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거울을 향해 목도를 한껏 던졌어. 거울 깨지는 소리가 났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서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방문 열쇠를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어. 현관 바닥에 떨어뜨리고 온, 불이 붙은 담배가 신경에 걸렸지. 하지만 나는 도저히 다시 거기로 되돌아갈 순 없었어. 바람은 줄곧 불어대고 있었어. 풀장의 칸막이 문짝 소리는 날이 샐때까지 계속되었어. 응, 응, 아니야, 응, 아니야, 어나여, 아니야... 그런 식으로 말야. 이런 이야기의 결말이란, 이미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되지만, 물론 거울이란건 처음부터 없었던걸세. 태양이 솟아오를 즈음엔 태풍은 이미 사라졌어. 바람도 그치고, 태양이 따스하고 뚜렷한 빛은 던져 오고 있었지. 나는 현관으로 가보았어. 거기엔 담배 꽁초가 떨어져 있었어. 나무 막대기도 떨어져 있었고, 하지만 거울은 없었어. 그런 건 애당초 없었던 거야. 현관의 신발장 옆에 거울이 달려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랬단 말일세. 이런 경위로 해서, 나는 유령 같은 건 보지 못했어. 내가 본 것은 그저 그런 나 자신이야. 하지만 나는 그날 밤에 맛본 공포만은 여태껏 잊을 수가 없어.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생가가하지.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만큼 겁나는 것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고 말이지. 자네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런데 자네들은 이 집에 거울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아챘나? 사실말이지, 거울을 보지 않고 수염을 깎을 수 있게 되려면, 제법 시간깨나 걸리는 거라구. 뾰쪽구이 이번엔 귀하께서 만들어 오신 신제품 뽀쪽구이를 뿌려 봅시다. 먹으면 입선, 안 먹으면 낙선입니다. 별 생각없이 아침 신문을 들춰보는데 구석 쪽에 '명과 뾰쪽구이 신제품 모집 대설명회'라는 광고가 실려 있었다. '뾰쪽구이'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명과'라고 했으니까 과자임은 분명하다. 나는 과자에 관해선 좀 할 말이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한가하기도 해서, 그 '대설명회'라는 곳에 한 번 얼굴을 내밀어 보기로 했다. '대설명회'는 한 호텔의 홀에서 열렸는데, 차와 과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과자는 물론 '뾰쪽구이'였다. 나는 한 개를 집어먹어 보았는데, 특별히 감탄할 만한 맛은 아니었다. 단맛은 끈적끈적하기만 하고, 껍질도 너무 두꺼웠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걸 즐겨 먹으리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설명회에 온 사람들은 나와 같은 또래거나, 아니면 조금 아래인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내가 952번 번호표를 받았는데, 그 뒤에도 백 병쯤은 더 왔으므로, 대략 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설명회에 온 셈이었다. 대단하긴 했다. 내 옆에는 스무 살 가량의 도수 놓은 안경을 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착해 보였다. "어때요, 아가씨는 여태까지 '뾰쪽구이'라는 걸 먹어 본 적이 있나요?" "당연하죠. 인기가 대단한걸요." "하지만 그렇게 맛있는 것 같지는..."하고 내가 말하는 도중에 그녀가 내 다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내 쪽을 흘릿 쳐다보았다. 기분 나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동화 속의 곰 '푸'같은 천진스러운 눈을 하고 그 자리를 얼버무렸다. "아저씬 좀 바보 같아요. 여기 와서 뾰쪽구이 악담을 했다간, 뾰쪽까마귀한테 붙잡혀서 살아 돌아갈 수 없게 된다구요."하고 얼마 후에 여자가 살며시 귓속말을 했다. "뾰쪽까마귀? 뾰쪽까마귀라니...?"하고 나는 깜짝 놀라 외쳤다. "쉬-"하고 여자아이가 말했다.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설명회에선 먼저 '뾰쪽제과'의 사장이 뾰쪽구이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헤이안 시대(8~12세기)에 누가 무엇을 해서 이렇게 된 것이 뾰쪽구이의 원형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진위를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고금와카집(10세기 초에 제작된 일본 고대의 시집)>에도 뾰쪽구이에 관련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으나 주위 사람들이 모두 진지한 얼굴로 경청하고 있었고, 뾰쪽까마귀라는 것도 겁나고 해서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사장의 설명은 꼬박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너무나 따분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요컨대 '뾰쪽구이는 전통의 과자다.'라는 것이었다. 그 말 단 한마디면 끝나는게 아닌가. 그 다음으로 전무가 나와서, 뾰쪽구이 신제품 모집에 대한 설명을 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국민의 뾰쪽구이도 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맛을 개발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설명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럴싸했다. 요컨대 뾰쪽구이의 맛이 진부해져서 매상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다고 분명히 말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돌아올 때에 모집 요강을 받았다. 뾰쪽구이를 모델로 한 새로운 과자를 만들어 가지고 1개월 후에 출품할 것, 상금은 2백만 엔 등이 적혀 있었다. 2백만 엔이 있으면 애인과 결혼해, 새 아파트로 옮길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뾰쪽구이를 만들기로 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는 과자에 대해선 좀 아는 편이다. 팥속이랑 크림이랑 파이 껍질 같은 것에 대해. 나는 고자를 어떤 식으로나 만들 수 있다. 한 달만에 새롭고 현대적인 뾰쪽구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나는 마감날 신품 뾰쪽구이를 두 상자 만들어, 뾰쪽제과의 접수처로 가져갔다. "맛있겠는데요."하고 접수처의 여자가 말했다. "맛있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뾰쪽제과로부터 내일 회사로 와주면 좋겠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넥타이를 매고 뾰쪽제과로 갔다. 그리고 응접실에서 전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응모하신 신제품 뾰쪽구이는 사내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에-, 젊은 층의 평판이 좋았습니다."하고 전무는 말했다. "거 참,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말씀이야, 마-, 나이 많은 축에선, 이건 뾰쪽구이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해서 말씀인데, 마, 갑론을박의 상황이올시다." "네에."하고 나는 말했다.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차제에 뾰쪽까마귀님의 고견을 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중역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진 것이올시다." "뾰쪽까마귀! 뾰쪽까마귀라니 도대체 그게 뭡니까?" 전무는 오히려 자신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니, 귀하는 뾰쪽까마귀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이 모집에 응모하셨단 말씀이오?" "죄송합니다. 제가 어째 좀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몰라서..." "곤란하군요."하고 전무는 고개를 저었다. "뾰쪽까마귀님도 알지 못하시다니. ...하지만, 마, 좋습니다. 제 뒤를 따라 오시지요,"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그곳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6층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의 끝에 커다란 철문이 있었다. 버저를 누르자 건장한 체격의 수위가 나와, 상대방이 전무임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쇠로 열었다. 몹시 엄중한 경비였다. "이 안에 뾰쪽까마귀님이 계십니다. 뾰쪽까마귀님은 옛날 옛적부터 뾰쪽구이만을 잡수시며 살아오신 특수한 까마귀의 일족이오며..."하고 전무가 말했다. 그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했다. 방안에는 백 마리 이상의 까마귀들이 있었다. 높이 5미터 가량의 휑뎅그렁한 창고 같은 방에 여러 개의 가로대가 건너질러 있었고, 거기에 뾰쪽까마귀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뾰쪽까마귀는 보통 까마귀보다 몸집이 훨씬 커서, 큰 놈은 몸 길이가 1미터 가량이나 되었고, 작은 놈만 해도 60센티미터 가량은 되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에겐 눈이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허연 지방 덩어리가 달라붙어 있을 따름이었다. 더구나 몸통은 팽팽할 정도로 부어 올라 있었다. 우리가 안에 들어서는 소리를 알아듣자 뾰쪽까마귀들은 날개를 마구 퍼덕거리면서 일제히 무슨 소리인가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처음 한동안은 그저 그런 굉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으나, 이윽고 귀에 익숙해지자, 그들 모두가 '뾰쪽구이, 뾰쪽구이'하고 외쳐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으스스한 모습이었다. 전무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속에서 뾰쪽구이를 꺼내 마룻바닥에 뿌리자, 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일제히 그것이 덤벼들었다. 그리곤 뾰쪽구이를 찾아서 서로의 발을 물어 뜯고, 눈을 쪼아뎄다. 어이쿠, 그러니 눈이 없어지지 않곤 배길 수 없을 법도 했다. 그런 다음 전무는 아까와는 다른 상자에서, 뾰쪽구이와 비슷한 과자를 꺼내 와르르 마룻바닥에 흩뿌렸다. "아시겠어요. 이건 뾰쪽구이 신제품 응모에서 낙선한 것입니다."하고 전무는 말했다. 까마귀들은 아까처럼 그것에 몰려 들었으나, 그것이 뾰쪽구이가 아닌 걸 알아채자 다시 내뱉고는, 저마다 성난 소리를 질렀다. "뾰쪽구이!" "뾰쪽구이!" "뾰쪽구이!" 그들은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가 천장에 되울려, 귓속이 아플 지경이었다. "보시오, 진짜 뾰쪽구이밖엔 안 먹는답니다. 가짜엔 입도 대지 않아요."하고 전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뾰쪽구이!" "뾰쪽구이!" "뾰쪽구이!" "그럼, 이번엔 귀하께서 만들어 오신 신제품 뾰쪽구이를 뿌려 봅시다. 먹으면 입선, 안 먹으면 낙선입니다." 어떻게 될까 하고 나는 불안해졌다. 어쩐지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괴상한 동물들에게 먹여 보고 당락을 결정하다니,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전무는 나의 걱정 같은 건 아랑곳 없이, 내가 응모한 '신제품 뾰쪽구이'를 마룻바닥에 가볍게 뿌렸다. 까마귀들은 다시 그것에 몰려 들었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어떤 까마귀는 맛있게 그걸 먹고, 어떤 까마귀는 그걸 뱉어 내곤 '뾰쪽구이!'하고 소리쳤다. 그것을 먹지 못한 까마귀는 흥분해서, 그걸 먹은 까마귀의 목덜미를 주둥이로 쪼았다. 피가 흩뿌려졌다. 다른 까마귀가 누군가 뱉어 놓은 과자로 덤벼들었으나, '뾰쪽구이!'하고 외치던 까마귀에세 붙잡혀 배가 찢겼다. 그런식으로 난투가 벌어졌다. 피가 피를 부르고, 증오가 증오를 불렀다. 고작 과자를 가지고 그런 놀라운 일이 생길 수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까마귀들에겐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뾰쪽구이냐 뾰쪽구이가 아니냐, 그것만이 생존을 건 문제인 것이다. "저것 보십시오. 갑자기 저렇게 뿌려 놓으니까 자극이 너무 강했던 겁니다."하고 나는 전무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 방에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와, 뾰쪽제과 건물을 나왔다. 상금 2백만 엔은 아까웠지만, 앞으로 남은 날들을 저런 까마귀들의 상대나 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만을 만들어, 내 손으로 먹으리라. 까마귀 따위는 서로가 쪼아대건 죽어 버리건 그만이다. 택시를 탄 남자 나의 인생은 이미 많은 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그것은 한 부분이 끝났을 따름이며,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거기에서 얻을 수가 있을 거라구요. 몇 년 전에, 필명을 사용해 조그마한 미술 잡지의 화랑 탐방 비슷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화랑 탐방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림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어서 특별히 전문적인 기사를 쓴 건 아니었고, 화랑의 분위기며, 그 화랑 주인의 인상을 가벼운 터치로 기술하는 정도의 기사였다. 유달리 의욕적으로 덤벼들었던 것이 아니라 하찮은 관계로 해서 공교롭게 손댄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퍽이나 재미난 작업이 되었다. 나 자신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기사로 정리하는 작업은 문장을 배우는 데 매우 좋은 공부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떤 식의 말로 표현하는가 하는 것을 나는 되도록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것을 잘 익혀서 나 자신의 문장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연재 기사는 1년간 계속되었다. 잡지는 격월 발매이므로, 전부 해서 6회가 되는 셈이었다. 편집부-편집부 라지만, 편집자 하나밖엔 없었다-로부터 재미있을만한 화랑 몇 군덴가 소개받아, 내 발로 직접 다녀 보고, 그 중 하나를 골라 기사화 하는 것이었다. 400자 원고지 15장 정도의 기사였지만, 나 자신이 어설프고 붙임성이 없는 성격이어서 처음 얼마 동안의 작업은 난항을 거듭했다. 도대체 상대방에게 무엇을 묻고, 어떻게 뭉뚱그려 놓으면 좋을지 통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대로 몇 번인가 회를 거듭하고, 자잘한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던 중에, 나는 거기에서 하나의 '비결'같은 것을 발견했다. 취재자는 인터뷰하는 상대방 안에 남달리 출중하게 숭고한 그 무엇이거나, 예민한 그 무엇이거나, 따스한 그 무엇인가를 더듬어 찾아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점이라도 상관없다. 인간 하나하나 속에는 반드시 그 사람됨의 중심을 이루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듬어 찾아내는 일에 성공한다면, 질문은 저절로 나오며, 따라서 생생한 기사를 쓸 수 있다. 아무리 진부하게 들릴지언정, 제일 중요한 점은 애정과 이해, 그것이다. 나는 그 이래로 수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상대방에 대해 마지막까지 한 조각의 애정도 품을 수 없었던 예는 단 한번밖에 없었다. 그것은 주간지에 대학 탐방 기사를 쓰기 위해 어느 유명한 사립 대학을 취재했을 때다. 일주일 가까이 그 대학을 돌아다녔지만, 어디에서나 권위와 부패와 불성실의 냄새밖에 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끝난 일이다. 평화로운 화랑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내가 취재 다닌 화랑의 대부분은 권위와는 무관한 조그마한 거리의 화랑이었다. 나이가 서너 살 위인, 키 큰 카메라맨과 둘이서 화랑으로 찾아가, 내가 화랑 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이에 카메라맨은 실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일단 취재가 끝나면 나는 언제나 화랑 주인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가지 했다. 이제껏 직접 본 그림들 중에서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질문이었다. 이건 인터뷰 질문으로서 그다지 고급 종류의 것은 아니다. 소설가에게, 이제까지 읽었던 소설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설은 어떤 것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아서, 너무나도 질문의 내용이 막연하단 말이다. "그런 게 잔뜩 이어서 알 수 없구려." 그런 대꾸를 듣거나, 아니면 몇 번이나 되풀이되어 진부해져 버린 대사가 돌아올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 이유는 첫째, 미술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다는 건 취재 그 나름의 요체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다음으로는 잘만 맞추면 어떤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택시 탄 남자>라는 제목의 그림 이야기를 해준 것은 마흔살 안팎의 여자였다. 그녀는 결코 미인이랄 수는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온화하고 품위 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리본이 달린 흰 블라우스에 회색 트위드 스커트를 받쳐입고 , 검은 색의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발이 불편한 그녀가 마룻바닥을 바로 질러 걷자 고르지 못한 발소리가 텅 빈 실내에 쐐기 박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녀는 아오야마 빌딩의 1층에서 판화를 중심으로 하는 화랑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때 벽에 장식되어 있던 판화는 나 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우수한 작품은 아닌 듯했으나, 그녀의 인품 속에는 남의 시선을 끄는 일종의 자석 같은 것이 잠재해 있어서, 그 기묘한 힘이 그녀를 둘러싼 갖가지 사물을 실제 이상으로 빛나 보이게 하는 것처럼 느꼈다. 취재가 끝나자 그녀는 커피 잔을 치우고, 찬장에서 붉은 포도주병과 잔을 꺼내어, 나와 카메라맨에게 건네고 자기 잔에도 따랐다. 그녀의 손가락은 아주 가느다랗고 섬세했다. 안쪽 방에는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트렌치 바바리 코트가 회색 캐시미어 머플러와 함께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사무용 책상 위에는 오리 문양의 문진과 조그만 금빛 가위가 놓여 있었다. 그때는 12월 초순이라, 천장에 설치된 소형 모니터 스피커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작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서서 마룻바닥을 가로질러, 어디선가 담배 상자를 가지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가늘고 길다란 금빛 라이터로 불을 붙여, 연기를 입술에서 가늘게 뱉어 냈다. 구두 소리를 빼면 그녀의 몸놀림에는 부자연스런 부분이라곤 통 찾아볼 수가 없었다. "끝으로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만약 괜찮으시다면."하고 나는 말했다. "물론이지요,"하고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투, 어째 텔레비전 형사물 비슷하잖아요?" 나도 웃었다. 카메라맨도 웃었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보셨던 그림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어떤 그림이었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얼마동안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재떨이에다 담배를 끄고 내 얼굴을 보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충격적'이란 말의 의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격적'이라는 건 뭐냐 하면요, 그건 예술적 감동이랄까, 아니 좀더 소박하게 말하자면 놀라움이라고나 할까요." "예술적 감동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의미하는 건 좀더 피부에 와 닿는 생리적인 충격 말이지요," "피부에 와 닿는 감동 없이는 우리들의 직업은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런 건 얼마든지 주위에 뒹굴고 있어요. 모자라는 건 오히려 예술적 감동 쪽 아니겠어요."하고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잔을 집어들어, 와인으로 입을 축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문제는요, 아무도 진정으로 감동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안 그런가요? 선생님께서도 글을 쓰고 계시면서, 그렇게 안 느끼세요?" "그럴지도 모르지요,"하고 나는 대답했다. "예술적 감동의 불편한 점은, 그걸 제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혹 표현했다 하더라도, 판에 박힌 것이 되고 말지요. 판에 박힌 여전한 구식, 상투적인 진부함... 마치 공룡처럼 말예요. 그래서 다들 좀더 간결하고 간편한 것을 찾는답니다. 자신의 표현이 파고들 여지가 있는 것이나, 텔레비전의 리모트 컨트롤처럼 척척 채널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걸 말이죠. 피부에 와 닿는 충격, 감성...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요." 그녀는 다 마셔 비어 있는 세 개의 포도주 잔에 다시 와인을 따르고,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죠?" "아니요, 퍽 재미있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에어컨디셔너의 우르릉거리는 희미한 소리와 가습기의 배기음과 크리스마스 캐롤이 나지막이 섞여 기묘하게 단조로운 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만일 예술적 감동도 아니고, 피부에 와 닿는 충격이 아닌 것이라도 괜찮다면, 제 마음에 남아 있는 한 장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겠어요. 한 장의 그림에 얽힌 이야기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거라도 괜찮을는지요?" "물론 좋습니다." "1968년의 일입니다."하고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애당초 화가가 될 작정으로 미국 동부의 미술 대학에 유학했었는데, 졸업 후에도 그대로 뉴욕에 남아서 자활하기 위해-혹은 제 자신의 재능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지만-그림바이어 비슷한 일을 시작했었지요. 말하자면 뉴욕에 있는 젊은 무명화가의 아틀리에를 돌면서 소질이 돋보이는 작품을 찾아내어, 그걸 사들여 도쿄의 화상에게 보내는 일이었지요. 처음 얼마 동안은 제가 컬러의 네가를 보내면, 도쿄의 스폰서가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그걸 제가 현지에서 사들이는 시스템이었는데, 점차 신용을 얻어서 저의 재량만으로 직접 그림을 살 수 있게 됐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저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화가들 세계에 상당히 확실한 정보망이랄까, 소식통 같은 걸 갖고 있었지요. 덕분에 누가 재미난 걸하고 있다는 등, 누가 돈에 쪼들리고 있다는 둥 하는 정보가 전부 저의 귀에 들어왔죠. 1968년의 그리니치 빌리지라는 거, 그야말로 대단했다구요, 그 즈음의 일을 알고 계신지 모르겠네?" "대학생이었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럼 아시겠네요." 그녀는 혼자서 수긍했다. "...거기엔 모든 것이 있었지요. 진짜 모든 것 말예요. 제일 위로부터 제일 아래까지 말예요. 잡것이 섞이지 않은 진짜부터 백 퍼센트 가짜까지. ...저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그 시절의 빌리지는 마치 보물섬 같은 거였답니다. 확실한 감식안만 가졌다면, 다른 시대의 다른 장소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 멋진 사람들이랑, 힘있고 참신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답니다. 사실 말이지, 제가 그 당시 도쿄로 보낸 작품의 대부분은 지금 상당한 값이 붙어 있지요. 그 중 몇 개만이라도 제 자신을 위해 챙겨 두었더라면, 저도 지금 '소'재벌쯤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그 시절엔 진짜 가진 돈이 없었거든요. ...유감이지 뭐예요." 그녀는 무릎 위에 놓았던 양쪽 손바닥을 위로 벌려 보이고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 당시 한 장, 딱 한 장, 예외적으로 제 자신을 위해 사놓은 그림이 있었답니다. '택시를 탄 남자'라는 게 그 그림의 제목이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예술적으로 우수한 것도 아니었고, 기법 상으로 우수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거친 대로 재능의 싹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답니다. 작가는 무명의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화가로, 무명인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물론 비싼 값도 불을 리 없지 않아요? ...어때요, 이상하죠? 타인을 위해서는 값나가는 그림만 잔뜩 고르고, 저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장의 전혀 값어치 없는 그림이라니요. ...하지만 결국 그런 거 아니겠어요."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제가 그 화가의 아파트로 간 건 1968년 9월의 오후였지요. 비가 막 개고, 마치 뉴욕 전체를 통째로 찌는 것 같은 날씨였지요. 그 화가의 이름은 이제 잊어버렸어요. 아시다시피 동유럽계 사람들의 이름이란 미국식으로 고치지 않으면 굉장히 기억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를 소개 해 준 건 저하고 같은 아파트에 살던 독일인 화학도였습니다. 그가 저의 방문을 노크하고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이것 봐 도시코, 내가 아는 사람으로 아주 돈이 궁한 환쟁이가 있단다. 만일 괜찮다면 내일이라도 잠깐 들러서 그림을 보아주지 않겠니?' 그래서 전 '오케이'하고 말했지요. '그래, 그 사람 재능은 있어?'하고 제가 물으니까 '아마, 별로 없나봐, 하지만 착한 녀석이야.', 그랬어요. 그래서 저희들은 그 체코인의 아파트로 갔었습니다. 그 다아시의 빌리지엔 그런 데가 있었습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조금씩 서로가 어깨를 다가 붙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데가 말이죠." 그녀는 그 체코인이 살고 있는 지독하게 지저분한 아파트 방에서 20장 가량의 그림을 보았다. 체코인은 스물 일곱 살로, 3년 전에 국경을 넘어서 망명해 온 참이었다. 그는 빈에서 일년을 산 후, 그 다음에 뉴욕으로 왔다. 프라하에 아내와 어린 딸을 남겨 놓고 왔다고 했다. 그는 낮 동안에는 아파트에서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근처의 터키 요리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체코엔 표현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으나, 우선 당장 그에게 필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 이전의 것이었다. 독일인 화학도가 말했던 것처럼 그에겐 재능이라는 것이 부족했다. 프라하에 머물러 있을 걸 그랬네요, 하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체코인의 그림은 기술적으로는 부분 부분 볼 만한 것이 있었다. 특히 색채 용법에는 괄목할 만한 데가 있었다. 근사한 터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프로의 눈으로 보면, 그의 그림은 거기서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 의식의 확산이랄 것이 없었단 말이다. 마찬가지로 정지해 있더라고, 그것은 예술적 '막바지'까지에도 도달해 있지 못했다. 그저 그런 '한계점'이었다. 그것뿐(댓츠 올). 그녀는 독일인 화학도 쪽을 흘깃 보았다. 그의 표정이 무언중에 말하는 결론도 그녀와 같았다. 그것뿐(디스 이스트 알레스). 체코인만이 멍청하고 불안한 듯한 눈으로 그녀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체코인의 아파트에서 나오려 했을 때, 문 옆에 놓여 있던 한 장의 그림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20인치의 텔레비전 화면의 크기의 옆으로 긴 그림이 있었다. 다른 그림과 같이, 그 그림 속에는 무엇인가 숨쉬고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었다. 아주 사소한 그 무엇인가였다. 가만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점점 졸아들어 사라지고 말 것만 같은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그림 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그녀는 체코인에게 부탁해서 다른 그림들을 전부 옆으로 치워 벽에다 순백의 스페이스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그 그림을 세우게 한 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건 제가 뉴욕에 와서 맨 처음 그린 그림입니다."하고 체코인은 안절부절못하는 듯 빠르게 말했다. "뉴욕에 온 맨 첫날 밤, 타임즈 스퀘어의 모퉁이에서 서서, 몇 시간이나 길거리를 바라보았지요. 그리고 방으로 되돌아와 하룻밤만에 그린 겁니다." 그것은 택시의 뒷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의 그림이었다. 카메라로 말하자면, 렌즈가 앞자리의 한복판에서 약간 넓게 남자의 모습을 포착했다. 남자는 얼굴을 옆으로 돌려, 창 밖으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핸섬한 남자였다. 야회복에 흰 정장 셔츠, 검정 나비 넥타이, 그리고 하얀 스카프. 얼핏 지골로 같기는 하지만, 지골로는 아니다. 지골로가 되기엔 그에겐 무엇인가 부족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집약된 굶주림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에게 굶주림이 없다는 건 아니다. 굶주림이 없는 젊은 남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다만 그 속의 굶주림은 너무나도 막연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주위에서 보면-혹은 그의 눈으로 보더라도-그것은 무슨 별개의 발전 도상에 있는 일종의 '사물의 견해'처럼 여겨진단 말이다. 그것은 마치 푸른 안개 같기도 하다. 존재하고 있다는 건 알겠으나 포착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 푸른 안개처럼, 밤이 택시를 뒤쫓고 있다. 차의 뒤편 유리창으로, 그 밤의 색깔이 보인다. 밤의 색깔밖에 보이지 않는다. 푸른 색깔 속에 검정과 보라가 주입된다. 제법 멋진 색깔이다. 듀크 에린튼 오케스트라의 음색처럼, 세련되고 중후하다. 거기에 손을 대기만 해도, 다섯 손가락이 몽땅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중후하다. 남자는 옆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창문 유리 저편에 무엇이 보이건 간에, 그 풍경은 그의 마음에 찰과상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차는 계속 움직이고 있다. 남자는 어디로 가려 하는가? 남자는 어디로 돌아가려 하고 있는가? 그림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택시라는 한정된 틀 속에 포함되어 있다. 택시는 이동이라는 그 본래적인 원칙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이동한다. 어디로 가건 어디로 돌아가건, 어느 쪽이면 어떠냐 말이다. 어디든 좋단 말이다. 그것은 광대한 벽에 열려진 어두운 구멍이다. 그것은 입구고, 출구다. 이를테면 남자는 그 어둠을 보고 있다. 남자의 입술은 메말라 있고, 담배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담배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다. 광대뼈가 불거져 있다. 턱의 살은 빠져 있다. 아주 심하게 빠져 있다. 거기에, 마치 생채기처럼 가느다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소리 없는 전투가 남기고 간 그늘이다. 하얀 스카프가 그 생채기의 끝머리를 덮고 있다. "결국 저는 제 자신을 위해 120달러를 내고 그 그림을 샀습니다. 120달러는 한 장의 그림 값으로선 그다지 비싼 것은 아닙니다만, 당시의 저로선 좀 호된 부담이었지요. 저는 그때 임신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실직 상태였습니다. 그는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의 배우였는데, 직업이 있었다 해도, 대수롭지 않은 수입이었죠. 그래서 생활비의 대부분은 제가 벌어들였지요." 그녀는 거기서 이야기를 중단하고, 옛날을 회상하듯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가 보군요?"하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림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림 그 자체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아마추어에 털이 돋은 정도의 것이죠. 나쁘지는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어요. 제 마음에 든 건, 거기에 그려진 젊은 남자였습니다. 저는 그 남자를 보기 위해 그 그림을 샀던 겁니다. 그것뿐이죠. 체코인은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로선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테지요. 제가 그 그림을 산, 진정한 이유 같은 건 말이죠." 크리스마스 캐롤 테이프가 거기서 끝나고,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깊은 침묵이 왔다. 그녀는 트위드 스커트 위에서 손가락을 포개었다. "저는 그때 스물 아홉 살이었지요. 진부한 표현입니다만, 저의 청춘은 끝나려 하고 있었지요. 저는 화가가 되려고 미국에 와서, 결국 화가는 되지 못했죠. 저의 재능이 자신의 안목만큼 훌륭하진 못했으니까요. 저의 재능으로는 그 무엇도 창조해 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그림의 남자는... 어쩐지 제 자신이 상실하고 만 인생의 일부인 것처럼 여겨졌던 겁니다. 저는 그 그림을 아파트의 방 벽에 걸어 놓고, 매일매일 바라보며 지냈어요. 그 그림의 남자를 볼 때마다, 저는 제가 상실한 것이 얼마나 컸던가를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혹은 그것이 얼마나 작았던가를 말이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남편은 곧잘 저를 보고 '당신은 그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나 보군."하고 놀려댔지요. 제가 언제나 그 그림을 말없이 바라보곤 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그는 잘못 생각한 거예요. 제가 그 남자에게 품고 있던 감정은 이를테면 '심퍼시(sympathy)'같은 겁니다. 제가 말하는 '심퍼시'는 '동정'도 '공감'도 아닌, 두 인간이 어떤 종류의 '슬픔'을 나눠 가지는 그런 것이죠. 아시겠어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 <택시를 탄 남자>를 바라보았던 탓에, 그는 어느 틈엔가 제게 있어서 분신 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그는 제 심정을 이해했던 거예요. 저 역시 그의 심정을 이해했고요. 저는 그의 슬픔을 이해했어요. 그는 '범용'이라는 이름의 택시 속에 갇혀 있었던 거죠. 그는 거기서부터 빠져 나올 수가 없었던 거예요. 영원히 말이죠. 진정한 영원 말입니다. 범용함이 그를 거기에 있게 하고, 그리고 범용한 배경의 우리 속에 가두었던 거지요. 슬픈 일이라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그녀는 입을 다물고, 얼마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든 그렇다는 이야기예요. 예술적인 감동이나 충격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감성이니 피부로 느끼는 충격 같은 것도 없었어요. 하지만 가장 마음에 남아 있는 그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한 장밖엔 없어요. 이 정도면 될까요?" "한 가지만 더 질문 드리죠. 그 그림을 지금도 갖고 계신가요?"하고 나는 물었다. "갖고 있지 않습니다. 태워 버렸으니까요."하고 그녀는 즉시 대답했다. "언제요?" "1971년입니다. 1071년 5월. 바로 얼마 전 일 같지만,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네요. 이런저런 사건들이 계속 겹쳐서, 저는 남편과 헤어져 일본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죠. 어린애도 내놓았지요. 자세한 것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넘어갈게요. 그때 저는 모든 것을 버리기로 마음먹었죠. 모든 것을 말이죠. 그 땅이 저를 사로잡았던 꿈이며, 희망이며, 사랑이며, 그런 것들의 진상, 그 모든 것을 말입니다. 저는 친구에게서 소형 트럭을 빌려 짐칸에다 방안의 물건 일체를 실어 가지고 빈터로 가서, 등유를 뿌리고 불태웠답니다. <택시를 탄 남자>도 그 속에 있었지요. 감상적인 음악이 걸맞을 법한 정경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녀가 생긋 웃었기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 "그림을 태우는 게 아깝진 않았어요. 그것은 제 자신이 해방됨과 동시에 '그'를 해방시키는 것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는 불에 탐으로써 범용의 '우리'에서 가까스로 해방된 거지요. 저는 그를 태웠고, 그리고 저의 일부를 태웠습니다. 1971년 5월의 맑게 갠, 기분 좋은 오후였죠. 그리고서 저는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경위로 해서"하고 말한 후 그녀는 방안의 주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바로 이렇습니다. 저는 화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사업은 순조롭구요. 저한테, 그 뭐라고 할까요, 상술이라는 게 있나 봐요. 지금은 독신이지만, 별로 힘들진 않아요. 그런 대로 재미나게 살고 있답니다. 하지만 '택시를 탄 남자'의 이야기는 1971년 5월 오후의 뉴욕의 빈터에서 끝난 건 아니었어요. 이야기는 계속 있지요." 그녀는 플레이어즈 곽에서 담배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카메라맨이 기침을 했다. 나는 의자 위에서 몸의 위치를 바꾸었다. 담배 연기가 서서히 위로 피어올라 에어컨디셔너 바람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작년 여름에, 아테네 거리에서 저는 '그'를 만났던 거예요. '그'말예요. 그림 속의 '택시를 탄 남자'를 말예요. 틀림없었어요. 확실히 '그'였어요. 저는 아테네에서 택시 뒷자리에 그와 합석했던 거예요."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녀는 여행중이었고, 저녁 6시쯤에 아테네의 이집트 광장 앞에서부터 바시리시즈 소피어스 대로까지 택시를 탔던 것인데, 그 젊은 남자는 오모니어 광장 언저리에서 그녀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아테네의 택시는 행선지만 잘 맞으면 마구 손님을 합승시킨다. 남자는 홀쭉한 몸매로, 아주 핸섬했다. 그리고 여름의 아테네에선 보기 드물게도 야회복을 입고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중요한 파티장에 참석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에서 열까지 털끝 하나도, 틀림없이 뉴욕에서 그녀가 사들인 그림 속의 남자와 똑같았다. 그녀는 한순간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그릇된 시간에 그릇된 장소에 뛰어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자기 몸이 10센티미터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 속이 새하얘지고, 그것이 조금씩 제대로 돌아가기까지는 퍽 긴 시간이 걸렸다. "안녕하세요?"하고 남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안녕하세요?"하고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일본인이시죠?"하고 남자는 깨끗한 영어로 말했다.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엔 한 번 간 적이 있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곤 침묵의 길이를 재는 듯한 시늉으로 공중에서 손가락을 펼쳤다. "공연 여행을 갔었죠." "공연?"하고 그녀는 막연한 기분으로 한마디했다. "전 배우입니다. 그리스 국립극장의 배우입니다. 그리스의 고대극은 아시겠지요? 유리피데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그리스입니다. 낡은 극기 가장 훌륭하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고는 화제를 중단하고, 날씬한 목을 옆으로 돌려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무도 아닌 그저 배우일 뿐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창 밖으로 논을 돌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스타디오 거리는 통근차로 붐비어, 택시는 거북이 걸음으로 나가는 꼴이었지만 남자는 그런 데엔 아랑곳 않고 상점의 진열장이나 영화관의 간판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머리 속을 정리하려고 했다. 현실을 정확한 현실의 틀에 넣고, 상상을 정확한 상상의 틀 속에 넣었다. 그러나 그래도 사태는 털끝만큼도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7월 아테네 거리의 택시 안에서 그림 속의 남자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잘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그러는 중에 차는 가까스로 스타디오 거리를 지나, 신터그머 광장 옆을 빠져서, 바시리시스 소피어스 대로로 들어섰다. 택시는 이제 2~3분이면 그녀가 묵은 호텔 앞에 당도할 참이었다. 남자는 침묵한 채 물끄러미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좋은 저녁 미풍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흔들고 있었다. "실례합니다만, 지금 어느 파티에라도 가시는 건가요?"하고 그녀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예, 물론."하고 남자는 그녀 쪽을 향해 대답했다. "파티죠, 아주 크고 훌륭한 파티입니다. 온갖 사람들이 오고, 술잔치가 벌어지지요. 아마 새벽녘까지 계속되겠지요. 전 도중에 나올 작정입니다만."하고 남자가 말했다. 택시는 호텔의 현관에서 멈추고, 택시 기사가 문을 열었다. "카로 택시지(즐거운 여행)"하고 남자가 그리스어로 말했다. "애후카리스트 보리(참 고맙습니다)"하고 그녀도 그리스어로 말했다. 택시가 저녁의 도로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그녀는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엷은 어둠이 바람에 일렁이는 장막처럼 도시 위를 헤매듯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호텔의 바에 앉아 워트카 토닉을 석 잔 마셨다. 바 안은 조용하기만 했고, 그녀 외엔 손님의 모습도 없었으며, 저녁 어둠도 거기까지는 와 닿지 않았다. 마치 그녀 자신의 일부를 저 택시 속에 버려두고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일부가 아직도 저 택시의 뒷자리에 남아 있어서, 저 야회복을 입은 젊은 배우와 함께 어느 파티장으로 향하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꼭 흔들리는 배에서 내려, 강고한 땅에 섰을 때에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잔존감이었다. 육체가 흔들리고, 세계가 멈추어 있었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의 긴 시간이 지나고, 그녀 내부의 그 흔들림이 사라졌을 때, 그녀 내부의 무엇인가가 영원히 사라졌다. 그녀는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가 있었다. 무엇인가가 끝난 것이다. "그가 저를 향해 한 마지막 말은 저의 귀에 아직 똑똑히 남아 있어요. '카로 택시지'라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모았다. "멋진 말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답니다. -나의 인생은 이미 많은 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그것은 한 부분이 끝났을 따름이며,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거기에서 얻을 수가 있을 거라구요."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입술을 조금만 옆으로 펼치듯이 빙그레 웃었다. "이걸로 '택시를 탄 남자'이야기는 끝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서 미안합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진 않다, 아주 재미난 이야기다, 하고 나와 카메라맨은 말했다. "이 이야기엔 교훈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귀중한 교훈 말입니다. 그것은 이런 것이지요. 사람은 무엇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지워져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거 말이에요."하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나와 카메라맨은 잔에 남아 있는 와인을 다 마시고,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화랑을 나섰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곧 원고지에다 정리해 보았으나, 그때엔 잡지의 지면 관계로 아무래도 기사화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 이러한 형태로 발표할 수 있어서, 나는 매우 다행스럽게 여긴다. 빵 가게 재습격 나와 아내는 중고 도요타 카로러를 타고, 새벽 2시 반에 빵 가게를 찾아 도쿄 거리를 헤매었다. 빵 가게를 습격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려준 것이 옳았는지 어땠는지, 나는 지금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아마도 그건 옳다든가 옳지 않다든가 하는 기준으로는 잴 수 없는 문제였던 것 같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옳은 결과를 가져오는 옳지 못한 선택도 있으며, 옳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옳은 선택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부조리-이렇게 말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한다-를 회피하기 위해선, '우리는 실제로 아무것도 선택하고 있지 않다.'라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으며, 대체로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며,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란 말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사물을 생각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우선' 아내에게 빵 가게 습격을 얘기하고 말았다는 것이 된다. 얘기하고 만 것은 얘기하고 만 일이며, 거기에서 생긴 일은 이미 생겨 버린 일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사건이 사람들의 눈에 기묘하게 비친다고 하면, 그 원인은 사건을 포함한 총체적인 상황 존재 속에서 구해야만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건, 그래서 무엇이 달라진다는 건 아니다. 그런 건 그저 그런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 말이다. 내가 아내 앞에서 빵 가게를 습격한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그게 그런 하찮은 계기에서였다. 그 얘기를 꺼내려고 미리 작정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며, 그때에 문득 생각이 나서 "그러고 보니-"하는 식으로 얘기하기 시작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 '빵 가게 습격'이란 말을 아내 앞에서 입에 올리기까지, 나 자신이 이전에 빵 가게를 습격했다는 일 같은 건 싹 잊어버리고 있었단 말이다. 그때 나에게 빵 가게 습격이란 걸 떠올리게 한 것은 견딜 수 없을 지경의 공복감이었다. 시간은 한밤중 2시가 못 되어서였다. 나와 아내는 6시에 가벼운 저녁식사를 하고, 9시 반에 침대에서 눈을 감았던 것인데, 그 시간에 웬일인지 둘 다 동시에 잠이 깨고 말았다. 잠이 깨어 얼마 있자니까,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회오리처럼 공복감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막무가내라 해도 좋을 만큼의 엄청난 공복감이었다. 그러나 냉장고 속에는 '먹을 것'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프렌치 드레싱과 6개의 캔 맥주와 말라비틀어진 2개의 양파와 버터와 탈취제뿐이었다. 우리는 그때 결혼한 지 2주일밖에 안 된 참이라서, 식생활에 관한 공동 인식 아직 명확히 확립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 당시 확립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그 밖에도 산더미만큼 많았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법률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아내는 디자인 스쿨에서 사무 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스물 여덟인가 아홉쯤이었고-웬일인지 결혼한 해는 아무리 해도 생각해 낼 수가 없단 말이야-그녀는 나보다 2년 8개월 아래의 나이였다. 우리의 생활은 몹시 바빴고, 입체적인 동굴처럼 뒤죽박죽 뒤섞여 있어서, 도저히 예비 식품까지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침대에서 나와 부엌으로 옮겨, 하릴없이 테이블을 끼고 마주앉아 있었다. 다시 한 번 잠자리에 들기엔 둘 다 너무나 배가 고팠으며-몸을 가로누이는 것만 해도 고통스러웠다-그렇다고 해서 일어나 무엇을 하기에도 배가 너무나 고팠다. 이 같은 강렬한 공복감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서 왔을까, 우리로선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와 아내는 한 조각의 희망을 안고 교대로 냉장고 문짝을 몇 번이나 열어 보았으나, 몇 번을 열어 보아도 그 내용물은 변하지 않았다. 맥주와 양파와 버터와 드레싱과 탈취제, 그것뿐이었다. 양파로 버터 튀김을 만들 수는 있지만, 2개의 말라비틀어진 양파가 우리의 공복감을 유효하게 채워 주리라곤 여겨지지 않았다. 양파라는 건 다른 것과 함께 입에 넣어야 할 것이어서, 그것만 갖고 허가를 채울 수 있는 종류의 식품은 아니라고 여겼다. "프렌치 드레싱의 탈취제 튀김은 어때?"하고 나는 농담 삼아 제안해 보았으나 예상대로 묵살 당했다. "차를 타고 나가서, 철야 레스토랑을 찾아보자, 국도로 나서면 반드시 그런 게 있을 거야."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녀는 바깥에 나가서 식사하는 건 싫다고 했다. "밤 12시가 넘어서 식사를 하려고 외출하다니, 어딘가 틀렸다구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그런 면에서는 몹시 고풍스러웠다. "그래, 그렇군"하고 나는 한 호흡 두고서 말했다. 결혼한 직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아내의 그러한 의견-내지는 강령-은 어떤 종류의 계시처럼 나의 귀에 울렸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자신이 지금 안고 있는 굶주림은 국도변의 철야 레스토랑에서 편의적으로 채울 수 없는 특수한 굶주림인 것처럼 느껴졌다. '특수한 굶주림'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하나의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1.나는 조그마한 보트를 타고 조용한 해양에 떠 있다. 2.아래를 내려다보니, 물 속에 해저 화산의 정상이 보인다. 3.해면과 그 정상 사이는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닌 것처럼 보이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4.왜냐하면 물이 너무나 투명해서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내가 철야 레스토랑 같은 덴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나서, 내가 '그래, 그렇군'하고 동의할 때까지의 2초 아니면 3초 동안에 내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는 대체로 그러한 것이었다. 나는 물론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아니므로, 그 이미지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분석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계시적인 종류의 이미지인 것만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갔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공복이 이상한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식사를 위해 외출을 않겠다는 그녀의 강령-내지는 성명-에 반쯤은 자동적으로 동의했단 말이다. 별수 없이 우리는 캔 맥주를 마셨다. 양파를 먹는 것보다는 맥주를 마시는 편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아내는 맥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내가 6개 중 4개를 마시고, 그녀는 나머지 2개를 마셨다. 내가 맥주를 마시는 동안, 그녀는 11월의 다람쥐처럼 부지런히 부엌의 선반들을 뒤지다가, 자루 속에 버터 쿠키가 4장 남아 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냉동 케ㅇ을 만들었을 때 쓰고 남은 것으로, 습기를 먹어 아주 말랑말랑해져 있었는데, 우리는 그걸 소중스레 2장씩 깨물어 먹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캔 맥주도 버터 쿠키도,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나이 반도처럼 막막하기만 한 우리들의 공복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것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풍경의 일부처럼 창 밖을 잽싸게 지나쳤을 뿐이다. 우리는 맥주의 알루미늄 깡통에 인쇄된 글자도 읽어보고, 시계도 몇 번이고 바라보고, 냉장고 문짝에도 눈을 보내고, 어제의 석간 신문도 뒤적거리고,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쿠키 찌꺼기를 엽서 모서리로 모으기도 했다. 시간은 물고기의 뱃속에 삼켜진 납덩어리처럼 어둡고 둔중했다. "이렇게 배가 고픈 건 처음 있는 일이에요. 이것이 결혼한 것과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건가?"하고 아내가 물었다. "모르겠는걸"하고 나는 대답했다. 있는지도 모르겠고,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새로운 식품 조각을 찾아 부엌 안을 뒤지고 다니는 동안, 나는 또 보트로부터 몸을 내밀어 해저 화산의 정상을 내려다보았다. 보트를 둘러싼 해수의 투명함은, 나를 몹시 불안하게 했다. 명치의 안쪽 언저리에 퀭하니 구멍이 생겨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출구도 입구도 없는, 순전히 텅 빈 구멍이었다. 몸속의 그 기묘한 결락감-부재가 실재한다고 하는 감각-은 높은 첨탑의 꼭대기에 올랐을 때 느끼는 공포에 싸인 감각과 어딘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복과 고소공포와 상통하는 데가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예전에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꼭 그때였다. 나는 '그때에도' 지금과 마찬가지고 배를 곯고 있었단 말이다. 그건... "빵 가게를 습격했을 때다."하고 나는 무의식중에 말했다. "빵 가게 습격이라니, 무슨 소리예요?"하고 아내가 물었다. 그렇게 해서 빵 가게 습격의 회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훨씬 예전에 빵 가게를 습격한 적이 있었단 말야. 별로 큰 빵 가게도 아니고, 이름 있는 빵 가게도 아니었어. 특별히 맛있는 곳도 아니었고, 특별히 맛없는 곳도 아니었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빵 가게였지. 상가 한 복판에 있었는데, 영감쟁이가 혼자서 빵을 구워서 팔고 있었어. 아침에 구운 빵이 다 팔리면 그대로 가게문을 닫아 버리는 그런 조그마한 빵 가게였지." "어째서 그런 대단치 않은 빵 가게를 골라서 습격했죠?" "대단한 가게를 습격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랬지. 우리는 자신의 굶주림을 채워 줄 만한 양의 빵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지, 뭐 돈을 빼앗으려 했던 건 아니었거든. 우리는 습격자지, 강도는 아니었어." "우리?" "'우리'라니 누구 말예요?" "나한텐 그 즈음 짝패가 있었단 말이야. ...벌써 십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말야, 우리는 둘 다 너무너무 가난해서, 가루 치약조차 살 수 없었지. 물론 먹을 것마저 언제나 부족했었고. 그래서 그 당시 우리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참으로 갖가지 못할 짓들을 했던 거야. 빵 가게 습격도 그 중의 하나인데..." "잘 이해가 안돼요."하고 아내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새벽녘 하늘에서 바랜 별의 모습을 찾아내려는 것 같은 눈매였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죠? 일하지 않았죠? 아르바이트를 했다면 빵쯤은 살 수 있었을텐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빵 가게를 습격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은 것 같아요." "일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말야. 그건 뭐,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단 말야."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일하고 있잖아요." 나는 수긍을 하고 맥주를 한 모금 홀짝거렸다. 그리곤 손목의 안쪽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몇 병째의 맥주가 나에게 졸음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엷은 진흙처럼 나의 의식 속으로 숨어 들어와, 공복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시대가 달라지면 공기도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거든. 이제 슬슬 자지 않겠어? 둘 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졸리지 않으니 빵 가게 습격한 얘기나 듣고 싶어요."하고 아내는 말했다. "시시한 얘기야. 적어도 당신이 기대하고 있는 그저 재미난 얘기는 아니야. 요란한 액션도 없고 말이지." "그래서 습격은 성공했나요?" 나는 단념을 하고 맥주 하나를 또 땄다. 아내는 무슨 말을 묻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답을 듣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성미였다.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고, 성공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지. 요컨대 우리는 빵을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었지만 그게 강탈은 될 수 없었다, 그 말이야. 말하자면 우리가 빵을 강탈하려고 하기 전에, 빵 가게 주인이 우리한테 그것을 주었다, 그 말이야." "공짜로?" "공짜는 아니지. 그 점이 꽤 까다로운데."하고 나는 고개를 흔든 후 말을 이었다. "빵 가게 주인은 클래식 음악광이라, 마침 그때 가게에다 바그너의 <서곡집>을 틀어 놓고 있었지.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그 레코드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들어준다면 가게 안의 빵을 원하는 만큼 갖고 가도 된다는 흥정을 제의해 왔단 말이야. 나와 짝패는 둘이서 의논했지.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했단 말이야. 음악을 들어주는 것쯤 괜찮지 않느냐고 말이지. 그건 순수한 의미에서의 노동도 아니고, 누구를 해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래서 우리는 식칼과 나이프를 보스톤 백에 넣어 가지고 의자에 앉아서 빵 가게 주인과 함께 <탄호이저>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서곡들 들었던 거야." "그리고 빵을 얻었다, 그거군요." "그렇지. 나와 짝패는 가게에 있던 빵을 대부분 백에 넣어서 갖고 와, 나흘인가 닷새 동안 그걸 먹어댔지." 나는 다시 맥주를 홀짝거렸다. 졸음은 해저 지진으로 생겨난 소리 없는 파도처럼 나의 보트를 둔중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물론, 빵을 훔친다는 소기의 목적은 성취한 셈이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범죄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지. 이를테면 그건 교화이었거든. 우리는 바그너를 들었고, 그 대신 빵을 입수한 셈이니까 말이야. 법률적으로 보면 상거래 같은 거지." "하지만 바그너를 듣는 건 노동은 아니죠."하고 아내는 말했다. "바로 그거야. ...가령 빵 가게 주인이 그때 우리에게 접시를 닦는 일이나 유리창 닦는 일을 요구해 왔다면, 우리는 그걸 단호히 거부하고, 숫제 빵을 강탈했을 거란 말이야. 그러나 주인은 그런 건 요구하지 않고, 다만 단순히 바그너 레코드판을 끝까지 듣는 것만 요구했단 말이야. 그래서 나와 짝패는 몹시 혼란을 일으키고 말았지. 바그너가 나오다니,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거든. 그건 마치 우리들에게 내린 '저주'같은 거였지. 이제 와서 생각하니, 우리가 그런 제안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고, 처음 예정했던 대로 그자를 흉기로 위협해 단순히 빵만 강탈했으면 됐던 거야. 그랬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거라구."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나는 또 손목 안쪽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그렇지. 하지만 그건 똑똑히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문제라는 건 아니지. 다만 여러 가지 일들이 그 사건을 계기로 서서히 변했을 뿐이야. 그리고 한번 변해 버린 것은, 이미 원상 복구는 될 수 없었지. 결국 나는 대학으로 되돌아와서 무사히 졸업하고,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사법 시험 공부를 했지. 그리고 당신을 알게 되어 결혼한 거야, 두 번 다시 빵 가게를 습격하지 않게 된거지." "그걸로 끝인가요?" "그래, 그저 그런 얘기라구." 나는 남아있는 맥주를 마셨다. 그래서 6병의 맥주를 전부 비워 버렸다. 재떨이 속에는 6개의 풀링이 벗겨져 떨어진 반어인의 비늘처럼 남아 있었다. 물론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똑똑히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일만 해도 몇 가지는 확실히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얘기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의 짝패는 지금 어떡하고 있죠?"하고 아내가 물었다. "몰라, 그 뒤에 사소한 일로 해서, 우리는 헤어졌지. 그 이후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지금 뭘하고 있는지도 몰라." 아내는 얼마 동안 잠자코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내 말투에 무엇인지 석연치 못한 구석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점에 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들이 헤어진 건 그 빵 가게 습격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었겠죠?" "아마, 그랬겠지. 그 사건에서 우리가 받은 충격이 얼핏 보기 보단 훨씬 큰 것이 아니었나 싶어. 우리는 그 후 며칠이고 빵과 바그너의 상관 관계에 대해 논의했었지. 과연 우리가 취한 선택이 옳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말야. 하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어. 그냥 생각하면 선택은 옳았던 거야. 누구 한 사람 다치지 않았으며, 모두가 일단은 만족한 편이었으니까 말이지. 빵 가게 주인은-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지만, 어쨌든-바그너를 선전할 수 있었고, 우리는 배 터지도록 빵을 먹을 수 있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엇인가 중대한 착오가 존재하고 있다고 우리는 느꼈단 말이야. 그리고 그 오류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생활에 어두운 그림자를 떨어뜨리게 됐단 말이야. 내가 아까 '저주'란 말을 쓴 건 그 때문이라구. 그건 의심할 여지없이 '저주'와 같은 거였지." "그 저주는 이제 사라져 버린 건가요, 당신들 두 사람을 위해서?" 나는 재떨이 속에 있는 여섯 개의 풀링을 사용해서 팔찌만한 크기의 알루미늄 고리를 만들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어. 세상엔 퍽이나 많은 저주가 넘쳐 있는 것 같으니까.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어느 저주 탓인지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거든." "아니에요, 그렇진 않아요." 아내는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구요. 그리고 당신이 자기 손으로 그 저주를 풀지 않는 한, 그건 충치처럼 당신이 죽을 때까지 괴롭힐 거예요. 당신뿐만 아니라, 나도 같이 말예요." "당신을?" "그럼요, 이제는 내가 당신의 단짝이니까요. 예를 들면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배고픔이 그거에요.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이런 지독한 공복감을 맛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는걸요. 이런 일이 이상하단 생각이 안 들어요? 분명 당신한테 걸린 저주가 나마저 몰아가고 있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리로 만든 풀링을 다시 흐트러뜨려서 재떨이 속으로 도로 넣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어떤지 나로선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동안 의식의 바깥으로 멀어져 있던 공복감이 다시 되돌아왔다. 그 허기는 전보다도 더 강렬하나 것이어서, 그 탓으로 머리의 한가운데가 몹시 아팠다. 위바닥이 캥기더니, 그 떨림이 크러치 와이어로 머리 중심에 전도되었다. 나의 몸속에는 갖가지의 복잡한 기능이 조립돼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또다시 해저 화산으로 눈을 보냈다. 바닷물은 아까보다도 훨씬 투명해서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거기에 물이 존재해 있다는 것조차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마치 보트가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두둥실 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밑바닥에 있는 조약돌 하나하나까지도 손에 잡힐 듯 또렷이 보였다. "당신과 함께 지낸 지 아직 반달밖에 안 됐는데도 나는 어떤 저주의 존재를 신변에 계속 느껴 왔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는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한 채 테이블 위에서 좌우의 손가락을 깍지꼈다. "물론 당신의 말을 들을 때 까진 그것이 저주인 줄 알지 못했지만요, 이제와선 그걸 똑똑히 알 수 있어요, 다아신은 저주받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그 저주를 어떤 존재로 느끼고 있단 말이지?" "몇 해 동안이나 빨지 않은 먼지투성이의 커튼이 천장으로부터 드리워져 있는 그런 느낌이 든다구요." "그건 저주가 아니라 나 자신일지도 몰라."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걸요." "만일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게 저주라고 한다면, 난 도대체 어떡하면 좋지?" "한 번 더 빵 가게를 습격하는 거예요. 그것도 지금 즉시요."하고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그것밖에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다구요." "지금 즉시라고?"하고 나는 되물었다. "그래요, 지금 곧. 이 공복감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성취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 성취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런 한밤중에 빵 가게가 문을 열고 있을까?" "찾아봐요. 도쿄는 넓은 도시 아녜요? 반드시 어딘가엔 밤새 내내 영업하고 있는 빵 가게가 하나쯤은 있을 거예요."하고 아내는 말했다. 나와 아내는 중고 도요타 카로러를 타고, 새벽 2시 반에 빵 가게를 찾아 도쿄 거리를 헤매었다. 내가 핸들을 잡고, 아내는 조수석에 앉아, 도로 양쪽에 육식조 같은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달리고 있었다. 뒷좌석에는 레밍턴의 자동 산탄총이 경직된 가느다란 물고기 같은 꼴로 누워 있었고, 아내가 걸친 윈드브레이커의 주머니에서는 예비 산탄이 짤랑짤랑 메마른 음향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트렁크에는 검은 스키마스크가 2개 들어 있었다. 어째서 아내가 산탄총을 소유하고 있었는지, 나로선 짐작도 가지 않았다. 스키마스크만 해도 그렇다. 나도 그녀도 스키 따위는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단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그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결혼 생활이란 기묘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완벽하달 수도 있는 장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철야 영업을 하는 빵 가게를 한 집도 찾아 내지 못했다. 나는 밤중의 텅 빈 도로에서, 요요기로부터 신주쿠로, 그리고 우츠야, 아카사카, 아오야마, 히로오, 롯폰기, 다이칸잔, 시부야에로 차를 몰았다. 깊은 밤의 도쿄에서는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과 가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빵 가게만은 없었다. 그들은 한밤중에 빵을 굽거나 하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는 도중에 두 번 경찰의 순찰차와 마주쳤다. 한 대는 도로 옆에 가만히 숨어 있었고, 또 한 대는 비교적 느린 속도로 우리 차를 추월해 나갔다. 그럴 때마다 내 옆구리에서는 땀이 배어 나왔는데, 아내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도 않고, 열심히 빵 가게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몸의 각도를 바꿀 때마다, 주머니 속의 산탄이 베갯속 메밀 껍질 같은 소리를 냈다. "이제 그만 단념하자구. 이런 밤중에 빵 가게 같은 건 열지 않는다구. 이런 일은 역시 미리 사전조사를 하고서 해야 한다구..." "차를 세워요!"하고 아내가 당돌하게 말했다. 나는 당황해서 차의 브레이크를 밟았다. "여기로 해요." 그녀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핸들에 손을 놓고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빵 가게 비슷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도로 옆의 상점은 모두 다 거무스레한 셔터를 내리고,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이발소의 간판이 비틀어진 인공 눈처럼, 어둠 속에 차갑게 떠올라 있었다. 2백미터 가량 앞쪽에 맥도널드 햄버거의 밝은 간판이 보일 뿐이었다. "빵 가게 같은 건 없다구."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아내는 아무 말도 않고 트렁크를 열어 헝겊 제품의 접착 테이프를 꺼내, 그것을 손에 쥐고 차에서 내렸다. 나도 반대쪽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차의 앞쪽에 웅크리더니, 접착 테이프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번호판에 붙여 번호를 읽을 수 없게끔 했다. 그 다음에 뒤쪽으로 돌아가, 그 쪽 번호판도 마찬가지로 감추었다. 제법 익숙한 솜씨였다. 나는 멍청하게 서서 그녀의 작업을 보고만 있었다. "저 맥도널드를 해치우기로 해요."하고 아내가 말했다. 마치 저녁 식사의 반찬을 예고할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였다. "맥도널드는 빵 가게가 아니라구."하고 나는 지적했다. "빵 가게나 다름없어요. 타협이라는 것도 경우에 따라선 필요한 거예요. 아무튼 맥도널드 앞에 대라구요."하고 아내는 차 안으로 돌아갔다. 나는 설득을 단념하고 차를 2백미터 전진시켜, 맥도널드의 주차장에 넣었다. 주차장에는 반짝거리는 빨간색 블루버드가 한 대 멈춰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모포로 둘둘 만 산탄총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런 건 쏘아 본 적도 없고, 쏘고 싶지도 않아."하고 나는 항의했다. "쏠 필요 없어요. 갖고 있기만 하면 돼요. 아무도 저항하진 않을테니까요. 알겠어요? 내가 하나는 대로 하는 거예요. 먼저 둘이서 당당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거예요. 그리고 점원이 '어서오세요, 맥도널드로'하고 말하면 그걸 신호로 잽싸게 스키마스크를 뒤집어 쓰는 거예요, 알겠어요?" "알겠어. 하지만..." "그러면 당신은 점원한테 총을 들입다 겨누고는, 전체 종업원들과 손님들을 한군데에다가 모아 놓는 거예요. 잽싸게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나머지는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까 맡겨 놓으세요." "그렇지만..." "햄버거는 몇 개쯤 필요하죠? 한 30개쯤 있으면 되겠어요?"하고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아마도 그쯤."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한숨을 쉰 후 산탄총을 받아들고, 모포를 조금 젖혀 보았다. 총은 모래 자루처럼 무겁고, 밤의 어둠처럼 거무칙칙했다. "정말 이럴 필요가 있을까?"하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절반은 그녀에게 하는 질문이었고, 절반은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물론이에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서 오세요, 맥도널드로." 맥도널드 모자를 쓴 카운터의 여자아이가 맥도널드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한밤중의 맥도널드에선 여자아이가 일하지 않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한순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이내 생각을 고치고 스키 마스크를 머리 위로부터 푹 뒤집어썼다. 카운터의 여자아이는 갑자기 스키마스크를 뒤집어 쓴 우리들의 모습을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법은 <맥도널드 접객 안내서>의 어디에도 씌어 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는 '어서 오세요, 맥도널드로.'의 다음을 계속하려 했으나, 입이 굳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래도, 사교적인 미소만은 새벽녘 초승달처럼 입술 가장자리에 불안정하게 걸려 있었다. 나는 되도록 서둘러 모포를 헤치고 총을 꺼내, 그걸 객석으로 돌려댔는데, 객석에는 학생 비슷한 커플이 한 쌍 있을 뿐이고, 그것도 플라스틱 테이블에 엎드려서, 쿨쿨 자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들의 머리 2개와 스트로베리 셰이크 컵이 2개, 전위적인 물체처럼 정연히 줄지어 있었다. 두 사람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방치해둔다 해도 우리의 작업에 특별히 지장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총구를 카운터 안으로 돌렸다. 맥도널드의 종업원은 전부 해서 세 사람이었다. 카운터의 여자아이, 20대 후반으로 보이고 혈색이 나쁜 달걀형의 얼굴을 가진 지점장, 표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희미한 그림자 같은 조리장의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다. 세 사람은 레지스터 앞에 모여서, 잉카의 우물을 바라보는 관광객 같은 눈초리로 내가 겨눈 총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고, 덤벼들지도 않았다. "돈을 드리겠습니다. 11시에 회수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진 않지만요, 전부 갖고 가십시오. 보험에 들어 있으니까 괜찮습니다."하고 지점장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정면의 셔터를 내리고, 간판의 전기를 끄세요."하고 아내가 말했다. "기다려 주십시오. 그건 곤란합니다. 임의로 가게를 닫으면 저의 책임 문제가 됩니다요."하고 지점장이 말했다. 아내는 똑같은 명령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되풀이했다.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좋아."하고 나는 충고를 했다. 지점장은 무척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는 레지스터 위의 총구와 아내의 얼굴을 얼마동안 견주어 보다가, 이윽고 체념을 하고 간판의 등불을 끄고, 파넬의 스위치를 눌러 정면 문짝의 셔터를 내렸다. 혼란 통에 얼렁뚱땅 그가 비상 경보 장치나 무슨 보턴이라도 누르지 않을까 하고 나는 줄곧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 맥도널드 햄버거 체인점에는 비상 경보 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햄버거 가게가 습격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정면의 셔터가 야구 배트로 양철통을 두드려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를 내고 닫혀 버린 다음에도, 테이블의 커플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토록 깊이 잠든 걸 본 적이 없었다. "빅맥은 30개, 테이크 아웃으로."하고 아내가 말했다. "여분으로 돈을 드릴 테니까, 어디 딴 가게에서 주문해 드시지 않겠습니까. 장부 기입이 굉장히 까다로워진답니다. 다시 말해서..."하고 지점장이 말했다.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좋아."하고 나는 되풀이하여 말했다. 세 사람은 함께 조리장에 들어가 30개의 빅맥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햄버거를 굽고, 지점장이 그것을 빵에 끼워 넣고, 여자아이가 흰 포장지로 감아 쌌다. 그러는 동안 누구도 한마디 입을 놀리지 않았다. 나는 대형 냉장고에 기대어, 산탄총의 총구를 철판 위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철판 위에서는 고기가 갈색의 물방울 무늬처럼 나열되어,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고기 굽는 달콤한 냄새가 마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벌레 떼처럼 나의 온몸 털구멍으로 기어들어, 혈액에 섞여 몸의 구석구석을 돌아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몸의 중심에 생긴 굶주림의 빈 굴에 집결해, 그 핑크색 벽면에 단단히 매달렸다. 흰 포장지에 싸여 옆으로 쌓아 올려지는 햄버거를 한 개나 두 개 손에 집어서 허겁지겁 먹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에 부응하는 행위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기에, 어떻게든 30개의 햄버거가 한 개도 빠짐없이 구워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조리장 안은 더웠고, 나는 스키 마스크 밑에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햄버거를 만들면서, 가끔 총구에 흘깃흘깃 눈길을 주었다. 나는 이따금씩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긁적거렸다. 나는 긴장하면 반드시 귓구멍이 가려워진다. 내가 스키 마스크 위로 귓구멍을 긁적거릴 때마다, 총신이 불안정하게 위아래로 흔들렸고, 그것이 세 사람의 기분을 얼마간 햇갈리게 하는 것 같았다. 총의 안전 장치를 걸어 놓은 채였으므로 오발할 걱정은 없었지만, 세 사람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나도 일부러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다. 세 사람이 햄버거를 만들고, 내가 철판을 향해 총구를 대고 망을 보고 있는 동안, 아내는 객석도 엿보고, 완성된 햄버거 수도 세어 보곤 했다. 그녀는 포장지로 싸놓은 햄버거를 손에 든 종이 봉지에다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종이 봉지 1개에는 15개의 빅맥 햄버거가 들어갔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죠? 돈을 갖고 달아나, 그걸로 좋아하는 걸 사먹으면 될텐데요. 첫째, 빅맥을 30개 먹어 봤자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요?"하고 여자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않고 그저 고개를 모로 저었다. "나쁘다곤 생각하지만, 빵 가게가 열려 있지 않았단 말이야. 빵 가게가 열려 있었다면, 제대로 빵 가게를 습격했을 텐데 말야."하고 아내가 그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나는 그런 설명이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들은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았으며, 잠자코 고기를 구워 빵에 끼워 넣고 그것을 포장지에 쌌다. 손에 든 2개의 봉지에 30개의 빅맥을 집어 넣자 아내는 여자아이에게 대형 컵 콜라를 2개 주문하고, 그 몫의 돈을 지불했다. "빵 이외는 아무것도 뺏을 생각이 없다구."하고 아내는 여자아이에게 설명했다. 여자아이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복잡한 표정을 하고 머리를 움직였다. 그것은 고개를 흔드는 것 같기도 하고, 끄덕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양쪽 동작을 동시에 하려고 했던가 보다. 그녀의 심정은 나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아내는 그 다음에 주머니에서 짐 묶는 가느다란 끈-그녀는 무엇이나 갖고 있다-을 꺼내 가지고, 세 사람의 몸을 단추라도 꿰매는 식으로 솜씨 좋게 기둥에다 붙잡아 묶었다. 세 사람은 이젠 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는 줄 알았는지, 잠자코 이쪽에서 하는 대로 내맡겼다. 아내가 '아프지 않아?'또는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아?'하고 물어도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모포에 총을 싸고, 아내는 두 손에 맥도널드의 마크가 붙은 자루를 들고, 셔터 틈으로 해서 밖으로 나섰다. 객석의 두 사람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깊은 바닷속에 사는 어류처럼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 두사람의 깊은 잠을 깨뜨릴 수 있을까하고 나는 의아해했다. 30분가량 차를 달리고 나서, 적당한 빌딩 주차장에 멈추고, 우리들은 실컷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셨다. 나는 전부해서 6개의 빅맥을 위장의 빈 굴을 향해 들여보내고, 아내는 4개를 먹었다. 그래도 차의 백시트에는 아직 20개의 빅맥이 남아 있었다. 날이 새면서 우리의 그 영원히 계속되는 게 아닌가 싶던 깊은 허기도 사라져갔다. 최초의 태양 빛깔이 빌딩의 지저분한 벽면을 연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소니 베이터 하이파이'의 거대한 광고탑은 눈부시게 반짝이게 했다. 가끔씩 지나가는 장거리 트럭의 타이어 소리에 뒤섞여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 왔다. FEN에서는 컨트리 뮤직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둘이서 한 개비의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고 나자, 아내는 내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얹었다. "하지만, 꼭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있었던 걸까?"하고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물었다. "물론이죠."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리곤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쉬고 나서, 잠을 잤다. 그녀의 몸은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그리고 가벼웠다. 혼자가 되어 버리자, 나는 보트에서 몸을 내밀어, 바닷속을 들여다 보았는데, 거기에는 이미 해저 화산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수면은 조용히 하늘의 푸르름을 비추고, 잔물결이 바람에 흔들리는 비단 파자마처럼 보트의 뱃전을 부드럽게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보트 바닥에 몸을 누인 후 눈을 감고는, 밀물이 내가 가야 할 장소로 실어다 줄 것을 기다렸다. 코끼리의 소멸 늙은 코끼리 한 마리와 늙은 사육사 한 사람이 이 지상에서 소멸되었다 해도 사회의 추세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시에서 운영하는 코끼리 사육소에 코끼리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나는 신문을 통해 알았다. 나는 그날 여느 때처럼 6시 13분에 맞춰 놓은 자명종 시계 소리에 눈을 떠, 부엌에 가서 커피를 끓이고, 토스트를 만들고, FM방송을 틀고, 토스트를 씹으면서 조간 신문을 식탁 위에 펼쳤다. 나는 1면부터 순서대로 신문을 읽어 나가는 편이라서, 그 코끼리 소멸 기사를 접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우선 제1면에는 무역 마찰 문제와 SDI에 관한 기사가 있고, 다음으로 국내 정치면이 있고, 국제 정치면이 있고, 경제면이 있고, 독자 참여란이 있고, 독서란이 있고, 부동산 광고 면이 있고, 스포츠 면이 있고, 끝으로 지방판 면이 나타났다. '코끼리 소멸'은 지방판 톱기사로 실려 있었다. 우선 <..시에서 코끼리 행방 불명>이라는 큼직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 불안 고조, 관리 책임 추궁의 소리도>라는 약간 작은 제목이 이어지고 있었다. 경찰관 몇 명이 코끼리가 없는 코끼리 우리를 검증하고 있는 사진도 실려 있었다. 코끼리 없는 사육소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필요 이상으로 휑뎅그렁하고 무표정하여, 그것은 마치 내장을 뽑힌 채 건조된 거대한 생물처럼 보였다. 나는 신문지 위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털고, 그 기사를 한 줄 한 줄 주의 깊게 읽었다. 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코끼리의 부재를 알게 된 것은 5월 18일(즉, 어제) 오후 2시였다. 여느 때처럼 코끼리 사료를 트럭으로 운반해 온 급식 회사의 직원이 (코끼리는 시립 국민학교의 학생들이 먹다 남긴 급식을 주식으로 하고 있었다.)코끼리 사육소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코끼리 발에 연결되어 있던 쇠 족쇄는, 마치 코끼리가 발을 쑥 빼낸 것처럼 열쇠가 걸린 채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사라진 것은 코끼리만이 아니었다. 줄곧 코끼리를 돌보아 왔던 사육 담당 남자도 코끼리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사육사의 모습을 보았던 것은 그 전날(즉, 5월 17일) 저녁 5시를 지나서였다. 다섯 명의 국민학생들이 코끼리를 스케치하기 위해 코끼리 사육소에 찾아와서, 2시간동안 크레용으로 코끼리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 학생들이 코끼리의 마지막 목격자며, 그 후 코끼리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그렇게 신문 기사는 보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6시 사이렌이 울리면, 사육사는 코끼리 광장의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코끼리에게도, 사육사에게도 아무런 이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다섯 명의 학생들은 입을 모아 증언했다. 코끼리는 보통 때처럼 온순하게 광장 한복판에 서서, 가끔씩 코를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주름 투성이의 눈을 가늘게 떠보기도 할 뿐이었다. 코끼리는 몹시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몸도 간신히 움직였다. 처음으로 이 코끼리를 본 사람은, 코끼리가 당장이라도 땅바닥에 넘어져 숨을 거두지나 않을까 불안해 할 지경이었다. 코끼리가 시(즉, 내가 살고 있는 시 말이다)에 인수된 것도, 그 노령 때문이었다. 시의 변두리에 있었던 조그만 동물원이 경영난을 이유로 폐쇄되었을 때, 동물들은 동물 거래 중개업자의 손을 통해 전국의 동물원으로 인수되었는데, 그 코끼리만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인수하겠다는 사람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동물원이나 이미 충분할 정도로 코끼리를 소유하고 있었고, 금새라도 심장 발작을 일으켜 죽어 버릴 듯 휘청거리는 코끼리를 인수해 갈 만큼 유별나고 여유있는 동물원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 코끼리는 동료들이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습을 감추어 버린 폐허 같은 동물원에, 별로 하는 일도 없이-그렇다고 처음부터 특별하게 무슨 일을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삼사 개월 동안을 홀로 남아 있었다. 동물원 측으로서도, 시로서도, 그것은 상당히 골치 아픈 사태였다. 동물원 측에서는 이미 택지업자에게 동물원의 남은 땅을 매각중이었고, 업자는 그곳에다 고층 맨션을 세울 계획이었으며, 시는 그 업자에게 개발 허가를 내주었다. 코끼리의 처리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이자만 쌓여 갔다. 그렇다고 해서 차마 코끼리를 죽여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미원숭이나 박쥐라면 또 몰라도, 코끼리 한 마리를 죽인다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쉽고, 만약 진상이 탄로나게 되면 문제가 커질 것이다. 그래서 세 곳의 대표가 모여 협의한 끝에 늙은 코끼리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1. 코끼리는 시 소유의 재산으로서 시가 무료로 인수한다. 2. 코끼리를 수용하는 시설은 택지업자가 무상으로 제공한다. 3. 사육담당자의 급여는 동물원 측이 부담한다. 이것이 그들 삼자간에 체결된 협정의 내용이다. 꼭 일년 전 이야기다. 나는 그 '코끼리 문제'에 대해 원래 처음부터 개인적인 흥미를 느끼고 있어서, 코끼리에 관한 신문 기사는 모조리 스크랩하고 있었다. 코끼리 문제를 토의하는 시의회의 방청회에도 갔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사태의 추이를 척척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질지 몰라도, 이 '코끼리 문제'의 처리 과정은 코끼리 소멸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예 여기서 기술해 둔다. 시장이 이 협정을 체결하고, 마침내 코끼리를 인수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의회의 야당을 중심으로(그때까지 나는 시의회에 야다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어째서 시가 코끼리를 떠맡아야 하는가?"하고 그들은 시장을 다그쳤다. 그들의 주장을 리스트로 만들어 보면(리스트가 많아서 미안하지만, 이쪽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다음과 같다. 1. 코끼리 문제는 동물원과 택지업자라는 사기업 사이의 문제며, 시가 관여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2. 관리비, 식비 등에 너무 많은 돈이 든다. 3. 안전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4. 시가 자비로 코끼리를 사육해서 얻을 이득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코끼리를 사육하기에 앞서, 하수도 정비와 소방차 구입 등, 시를 위하여 할 일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라고 반박하며, 심하게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장과 업자 사이의 뒷거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시의 변명은 다음과 같다. 1. 고층 맨션군이 생겨나면 시의 세금 수익은 비약적으로 증대하여, 코끼리 사육비 정도는 문제 될 것이 없다. 그 같은 프로젝트에 시가 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코끼리는 고령이고, 식욕도 대단치 않다. 사람에게 해를 가할 염려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만약 코끼리가 죽으면, 코끼리의 사육지로서 업자로부터 제공받은 토지는 시 소유 재산이 된다. 4. 코끼리는 시의 상징이 된다. 결국 오랜 토의 끝에 시는 코끼리를 인수하기로 했다. 이 시는 오래된 교외 주택지로, 시민들은 대부분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시의 재정도 풍부했다. 게다가 오갈 데 없는 코끼리를 인수한다는 행위에 대해 사람들은 호감을 가졌다. 확실히 사람은 하수도나 소방차보다는 늙은 코끼리 쪽에 호의를 갖는 모양이다. 나도 시가 코끼리를 사육하는 일에는 찬성이었다. 고층 맨션군이 생기는 것은 지긋지긋하지만, 그래도 내가 살고 있는 시가 코끼리 한 마리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산림을 개간하고 노후한 국민학교 체육관을 코끼리 우리로 개조시켰다. 동물원에서 줄곧 코끼리를 돌보아 온 사육사가 그리로 와서 살기로 했다. 국민학생들이 먹다 남긴 급식으로 코끼리 사료를 충당하였다. 그리고 코끼리는 폐쇄된 동물원으로부터 트레일러에 의해 새 우리로 운반되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코끼리 우리 낙성식에도 참석했다. 코끼리를 앞에 둔 채 시장의 연설(시의 발전과 문화 시설의 확충에 대한)이 있었고, 국민학생 대표가 작문(코끼리님,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운운하는)을 읽었으며, 코끼리 사생 대회(그후 코끼리 스케치는 국민학생 미술 교육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었다)가 열렸고, 팔랑팔랑하는 원피스를 입은 두 젊은 여성(별로 미인이랄 것도 없는)이 코끼리에게 바나나를 한 덩이씩 주었다. 코끼리는 거의 꼼짝도 하지 않고 상당히 무의미한-적어도 코끼리에게 있어서는 완전히 무의미했다-그 의식을 꾹 참으며, 멍청한 눈빛으로 바나나를 꾸역꾸역 먹었다. 코끼리가 바나나를 먹어 치우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코끼리의 오른쪽 뒷다리에는 튼튼하고 묵직한 쇠고리가 채워져 있었다. 고리에서부터 연결된 10미터쯤 길이의 굵은 사슬 끝은 콘크리트 토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 쇠고리와 사슬은, 코끼리가 백년동안 힘을 쏟는다 해도 끊지 못할 정도로 튼튼해 보였다. 코끼리가 그 족쇄를 꺼림칙하게 여기는지 어떤지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면, 코끼리는 자기 다리에 감겨 있는 그 쇳덩어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코끼리는 항상 멍청한 눈으로 어딘지 알 수 없는 허공의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귀와 몸에 난 흰털이 가볍게 흔들렸다. 코끼리 사육사는 60대 초반일지도 모르고, 70대 후반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겉모습이 연령에 좌우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피부는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검붉게 햇볕에 그을렸고, 머리칼은 억세고 짧았으며, 눈은 작았다. 이렇다 할 특징이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형에 가까운 두 귀는 좌우로 불거져서, 얼굴 전체가 작은 만큼 몹시 눈에 띄었다. 그는 결코 무뚝뚝하지는 않았으며, 누가 말을 걸면 꼬박꼬박 그 말에 대답했고, 말하는 태도도 빈틈이 없었다. 그렇게 되려고 마음먹으면-어느 정도 어색하게 느껴질 수는 있더라도-상냥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말이 없고 고독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듯 아이들이 오면 애써 친절하게 행동하려 했지만, 아이들은 이 노인에게 별로 마음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 사육사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있는 것은 코끼리뿐이었다. 사육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코끼리를 보살펴 주었다. 코끼리와 사육사는 이제 십 년 이산된 친구로서 둘 사이가 친밀하다는 것은 각각의 순간적인 동작과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곳에 멍청히 서 있는 코끼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 할 때면, 사육사는 코끼리 옆구리 쪽에 서서 코끼리 앞다리를 톡톡 가볍게 두드리며 뭐라고 속삭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코끼리는 귀찮다는 듯이 꾸물꾸물 몸을 흔들면서, 정확하게 그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코끼리는 그곳에 위치를 정하고 나면 또 이전과 마찬가지로 허공의 한 지점을 지켜보았다. 나는 주말이면 코끼리 우리에 들러서 그 같은 작업을 주의 깊게 관찰했지만, 어떠한 원리에 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가 성립되는지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코끼리가 사람의 간단한 언어를 이해하는지도 모르고(어쨌든 오래 살고 있으니까) 혹은 다리를 톡톡 치는 방법에 의해 말을 이해하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코끼리한테는 텔레파시 비슷한 특수 능력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사육사의 생각을 알아내는 지도 모른다. 나는 한번 그 사육사 노인에게 '코끼리한테 어떻게 명령하느냐?'라고 물어 본 적이 있다. 노인은 웃으면서 '오래 사귀다 보니까'하고 대답했을 뿐, 그 이상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아무튼 그럭저럭 아무 탈없이 일년이 지났다. 그런데 갑자기 코끼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두 잔째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 기사를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그것은 상당히 미묘한 기사였다. 셜록 홈즈가 파이프를 두들기면서 '와트슨 좀 보라구. 여기 제법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구.'하는 말이 나올 법한 종류의 기사였다. 그 기사에 기묘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기사를 쓴 기자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을 당황과 혼란이었다. 당황과 혼란은, 명백하게 상황의 부조리성에 기인하고 있었다. 가령 기사에서 '코끼리가 탈주했다.'하는 표현을 취하고 있었는데, 기사 전체를 훑어보면 코끼리가 탈주한 게 아니라는 것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코끼리는 확실히 '소멸'했던 것이다. 기자는 그러한 자기 모순을 '세부적으로는 아직도 몇몇 불명확한 점이 남아 있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이 '세부'라든가 '불명확'이라든가 하는 판에 박힌 용어로 정리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우선 첫째로, 코끼리 다리에 채워져 있었던 족쇄에 대한 문제였다. 족쇄는 '자물쇠가 걸려 있는 채로'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가장 타당한 추론은, 사육사가 열쇠로 그 쇠고리를 벗겨 낸 다음에 다시 자물쇠만 채워 놓고, 코끼리와 함께 도망쳤다는 것이다(물론 신문도 그 가능성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육사가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열쇠는 두 개가 있었는데, 그 열쇠들은 안전 보호를 위해 하나는 경찰서 금고 속에, 또 하나는 소방서 금고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사육사가-혹은 그 밖의 누군가가-그곳에서 열쇠를 훔쳐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의 하나 그것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사용한 다음에 열쇠를 일부러 원래의 금고에 갖다 놓을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 조사한 결과, 두 개의 열쇠는 경찰서와 소방서 금고 속에 분명히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열쇠를 사용하지 않고, 그 튼튼한 족쇄로부터 다리를 빼냈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은 톱을 사용해서 다리를 잘라 내지 않는 한 절대로 불가능했다. 두 번째 문제는, 탈출 경로였다. 코끼리 우리와 '코끼리 광장'은 3미터쯤 되는 높이의 튼튼한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코끼리의 안전관리가 의회에서 논의되었던 일로 해서, 시는 한 말미의 늙은 코끼리에 대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비 체제를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울타리는 콘크리트와 굵은 철봉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그 비용은 물론 토지 회사가 부담했다), 입구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 입구에는 안에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코끼리가 그처럼 요새와 같은 울타리를 넘어 밖으로 나갔을 리는 없다. 세 번째 문제는, 발자국이었다. 코끼리 우리 뒤쪽은 가파른 언덕이라서 코끼리가 올라갈 리 없으므로, 만약 코끼리가 어떤 방법으로 족쇄에서 다리를 빼내어 비상한 방법으로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해도, 정면의 길로 걸어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드러운 모래가 깔린 그 길 위에는 코끼리의 발자국인 듯 싶은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그, 곤혹과 고통의 표현으로 가득 찬 신문 기사를 종합해 보면, 사건의 결론이랄까 본질은 한 가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즉, 코끼리는 도망친 것이 아니고 '소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신문도 경찰도 시장도, 코끼리가 소멸했다는 사실을,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경찰은 '계획적인 교묘한 방법에 의해 코끼리를 강탈당했거나 탈출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코끼리를 은폐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에 사건 해결은 시간 문제일 것"이라고 낙관적인 예측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은 근교 사냥 동우회 및 자위대 저격 부대의 출동을 요청하여, 산을 뒤질 작정이었다. 시장은 기자 회견을 열어(이 기자 회견의 보도는 지방판이 아닌 전국판 사회면에 게재되었다), 시 경비 체제의 허술함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시장은 동시에 '코끼리의 관리체제는 시설 면에서 전국 어느 동물원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으며, 견고함에서도 기준보다 훨씬 만전을 기했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이것은 '악의에 찬 위험 또는 무의미한 반사회적 행위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야당 의원들은 일년 전과 다름없이 '안이하게 기업과 결탁해서 코끼리 처리 문제에 시민을 끌어넣은 시장의 정치 책임을 추궁한다'라고 했다. 어느 어머니(37세)는 '당분간 아이를 밖에 내보내고 안심하지 못하겠네요'라며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신문에는 시가 코끼리를 떠맡게 된 자세한 경위와 코끼리 수용 시설의 약도가 실려 있었다. 코끼리의 약력도 씌어 있었고, 코끼리와 함께 사라져 버린 사육사(와타나베 노보루, 63세)에 대한 기술도 있었다. 와타나베 사육사는 지바 현 야카다야마 출신으로, 오랫동안 동물원에서 포유류 사육사로 근무했는데, '동물원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온후하고 성실한 인품으로 관계자들 사이에서 신뢰가 두터웠다'라고 했다. 코끼리는 22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보내져 왔는데, 정확한 나이도 알 수 없었고, 그 '성질'도 불확실했다. 기사의 맨 마지막에는, 경찰이 시민으로부터 코끼리에 대한 모든 형태의 정보를 구하고 있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커피를 두 잔째 마시면서 그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경찰에는 전화를 걸지 않기로 했다. 별로 경찰과 관련맺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내가 제공하는 정보를 경찰이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소멸했을 가능성조차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이야기해도 헛수고가 아닐까. 나는 책상에서 꺼낸 스크랩북에다가 신문에서 오려 낸 코끼리 관계 기사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컵과 접시를 닦아 놓고 회사로 나갔다. 밤 7시 NHK뉴스에서, 나는 산몰이하는 양상을 보았다. 마취탄이 장전된 대형 라이플 총을 옆구리에 낀 사냥꾼들과 자위대원, 경찰, 소방대원들이 근교의 산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고, 하늘에는 몇 대의 헬리콥터가 날고 있었다. 산이라고 해야 도쿄 근교의 주택가 산이니까 대충 알 만하다. 그만큼의 사람들이라면 하루에 대충 수색을 끝낼 수 있고, 게다가 찾는 대상은 작은 덩치의 살인자가 아니라 거대한 아프리카 코끼리인 것이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는 자연히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저녁때까지 코끼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경찰서장은 '수색은 계속한다'라고 말했다. 텔레비전의 뉴스캐스터는 '누가 어떤 방법으로 코끼리를 탈출시켰으며, 어디에 숨겼는지, 그리고 그 동기가 무엇인지, 모든 것은 깊은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하고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나서 며칠인가 수색은 계속됐지만, 결국 코끼리를 찾아내지 못했고, 당국은 실마리다운 실마리조차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매일같이 신문 보도를 꼼꼼히 읽고, 눈에 띄는 기사마다 하나하나 가위로 오려 내서 스크랩했다. 코끼리 사건을 취급한 만화까지도 스크랩했다. 덕분에 스크랩북은 이내 꽉 차버려서 문방구에 들러 새로운 스크랩북을 사야만 했다. 하지만 그처럼 방대한 양의 기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에는 내가 알고자 하는 사실이 하나도 씌어 있지 않았다. 신문에 적혀 있는 것은 '여전히 행방 불명'이라든가, '고뇌의 색이 짙은 수사진'이라든가, '배후에 비밀 조직'이라는 따위의 엉뚱한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코끼리 소멸 이후 일주일이 지난 때부터는 그나마 그 기사조차 눈에 띄게 줄어들어, 마침내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몇몇 주간지도 흥미 위주로 기사를 싣고, 개중에는 심령술사까지 끌어들인 것도 있었지만, 그것도 이윽고 꼬리를 감추는 식으로 끝나 버렸다. 사람들은 코끼리 사건을 '해결 불능의 수수께끼' 범주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듯이 보였다. 늙은 코끼리 한 마리와 늙은 사육사 한 사람이 이 지상에서 소멸되었다고 해도 사회의 추세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지구는 단조로운 회전을 계속하고, 정치가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성명만을 잇달아 발표하고, 사람들은 하품을 하면서 회사로 나가며, 아이들은 시험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나가는 끝없는 일상의 파도 속에서 행방 불명 돼 버린 코끼리 한 마리에 대한 흥미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이렇다 할 특징도 없는 몇 개월인가가, 창 밖을 행진해 가는 피폐한 군대처럼 지나가 버렸다. 나는 이따금 틈을 내어 코끼리 우리로 찾아가 코끼리가 살던 곳을 바라보았다. 철책 입구에는 굵은 쇠사슬 자물쇠가 둘둘 감겨 있었다. 코끼리를 찾아 내지 못한 경찰은 잃어버린 땅의 회복을 위해, 코끼리가 없어진 뒤의 코끼리 우리에 필요 이상의 경비를 강화하고 있는 듯했다. 주위는 휑뎅그렁해서 인기척이라고는 없었고, 코끼리 우리의 지붕 위에서 비둘기 한 떼가 날개를 쉬고 있을 뿐이었다. 손질하는 이 없는 코끼리 광장에는, 마치 떼를 만난 듯 푸른 잡초만이 무성했다. 코끼리 우리 문에 감겨 있는 쇠사슬은, 폐허가 돼버린 밀림 속 왕궁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커다란 뱀을 연상시켰다. 불과 수개월 동안의 코끼리 부재는,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황폐함을 그 자리에 가져왔고, 비구름과도 같은 침울한 공기를 그곳에 감돌게 했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9월도 막바지에 이르러서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계절에 곧잘 내리는 가늘고 부드러운 빗줄기의 단조로운 비였다. 그 같은 비가, 땅 위에 새겨져 있는 여름의 기억들을 조금씩 씻어 가는 것이다. 모든 기억은 도랑을 타고 하수도며 강으로 흘러들어, 어둡고 깊은 바다로 운반되어 간다. 우리는, 내가 근무하는 회사가 펼친 캠페인을 위한 파티에서 만났다. 나는 어떤 대규모의 전기 기구 회사 광고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가을 결혼 시즌과 겨울 보너스 시기에 맞춰 발매할 예정인, 일련의 주방 전기 제품 프레스 퍼블리스티를 담당하고 있었다. 몇몇 여성 잡지에 타이업 기사를 싣기 위해 교섭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었다. 그다지 머리를 쓰는 일은 아니었지만, 독자에게 광고라는 냄새를 풍기지 않게끔 요령있게 기사를 정리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우리들은 잡지에 광고를 게재하게 된다. 세상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식이었다. 그녀는 젊은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잡지의 편집자로서, 그 퍼블리스티에 관련된 취재를 위해 파티에 와 있었다. 마침 나는 손이 비어 있어서 그녀를 상대로,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컬러플한 냉장고며 커피 메이커, 전자 레인지랑 주서기에 대해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통일성입니다. 제아무리 멋지게 디자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주위와 균형이 맞지 않으면 죽어 버립니다. 색채의 통일, 디자인의 통일, 기능의 통일, 이것이 현재의 부엌에 가장 필요한 것이지요. 조사에 의하면, 주부는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부엌에서 보냅니다. 부엌은 주부의 작업장이자 서재이자 거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부엌을 조금이라도 편리한 장소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넓이는 관계없어요. 설령 그것이 넓든 좁든 훌륭한 부엌의 원칙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단순성, 기능성, 통일성이지요. 이번의 이 시리즈는 그 같은 컨셉에 따라 설계되고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쿠킹 플레이트를 보십시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노트에다 메모했다. 그녀도 뭐 특별히 그런 취재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 역시 쿠킹 플레이트에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들은 나름대로의 사업을 요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설명을 끝내자 '부엌일에 아주 정통하시네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사업이니까요. 하지만 그것하고는 별도로 요리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간단한 요리지만 매일 만들고 있는걸요."하고 나는 영업용의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부엌에는 정말 통일성이 필요할까요?" "부엌이 아니고 키친입니다."하고 나는 정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무래도 좋겠지만, 회사가 그렇게 정해놓고 있어서요.' "미안합니다만, 그 키친에는 정말 통일성이 필요할까요? 당신의 개인적인 의견은요?" 나는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은 넥타이를 풀어놓지 않는 한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만은 특별히 말하겠는데, 부엌에는 통일성에 앞서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존재하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요소는 우선 상품이 되지 않을 테고, 이 편의적인 세계에 있어서 상품이 되지 않는 팩터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죠." "세계는 정말 편의적으로 성립하고 있을까요?"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냥 그렇게 말해 봤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많은 일들을 알기도 쉽고, 사업도 수월하고. 게임과 같죠. 본질적인 편의성이라든가 편의적인 본질이라든가, 갖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풍파도 일지 않고, 복잡한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아주 재미있는 의견이네요." "별로 재미날 건 없지요. 누구나 다 생각하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꽤 그럴듯한 샴페인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고마워요. 주시겠어요?" 나와 그녀는 그때부터 차가운 샴페인을 마시며 세상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 몇 명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업계는 범위가 그다지 넓지 않아서, 돌을 몇 개 던지다 보면 한두 개는 '공통으로 아는 사람'에게 맞게 된다. 그것에 한 술 더 떠서 내 누이동생이 마침 그녀와 같은 대학 출신이었다. 우리는 그 같은 몇몇 이름을 발판으로 해서, 비교적 부드럽게 화제를 펼쳐 나갈 수 있었다. 그녀도 나도 독신이었다. 그녀는 스물 여섯 살이었고, 나는 서른 한 살이었다. 그녀는 콘택트 렌즈를 꼈고, 나는 안경을 꼈다. 그녀는 나의 넥타이 색깔을 칭찬했고, 나는 그녀의 웃옷을 칭찬했다. 우리는 각기 살고 있는 아파트 집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월급 액수와 일의 내용에 대한 불만도 털어놓았다. 요컨대 우리는 상당히 친밀해졌다. 그녀는 꽤 매력적인 여성이었고, 억지스러운 구석도 없었다. 나는 한 20분쯤 그녀와 선 채로 이야기했는데, 그녀에게 호의를 가져서 안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파티가 끝날 무렵, 나는 그녀와 호텔 안의 칵테일 라운지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 앉아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라운지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초가을의 비를 볼 수 있었다. 비는 여전히 소리 없이 내리고, 그 깊숙한 곳에서는 거리의 불빛이 각양 각색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라운지에는 손님의 모습은 거의 없었고, 눅눅한 침묵만이 주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로즌 다이커리를 주문했고, 나는 스카치 온 더 록을 주문했다. 우리는 각자 주문한 술을 마시면서 어느 정도 친밀해진 초대면의 남녀가, 흔히 주점에서 주고받는 식의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 시절 이야기, 좋아하는 음악과 스포츠, 일상적 습관 등에 관한. 그리고 나서 나는 코끼리 이야기를 했다. 어째서 갑자기 코끼리 이야기가 튀어나왔는지, 나는 그 연관성은 기억할 수 없다. 아마 뭔가 동물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그것이 코끼리로 연결되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누구에게-말솜씨가 뛰어난 누구에게-코끼리 소멸에 대한 내 나름의 견해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단순히 술김에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그와 같은 상황에 가장 부적당한 화제를 끄집어냈다는 것을 알았다. 코끼리 이야기 같은 것은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이미 때 지난 화제였다. 그래서 나는 즉시 화제를 집어치우려고 했지만, 그녀는 뜻밖에 그 코끼리 소멸 사건에 관심을 나타냈다. 내가 그 코끼리를 여러 번 보았다고 하자, 쉴 틈도 주지 않고 잇달아 질문을 퍼부었다. "어떻게 생긴 코끼리였나요? 어떤 식으로 도망쳤다고 보세요? 항상 무엇을 먹고 있었나요? 위험하진 않을까요?"등등 그런 식이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신문에 실려 있는 대로 지극히 일반적이고 판에 박힌 듯한 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어투에서 부자연스럽게 비뚤어진 냉담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나는 옛날부터 거짓말하는 것을 무척이나 고역스러워하는 편이었다. "코끼리가 없어졌을 때는 굉장히 놀랐겠네요? 코끼리 한 마리가 갑자기 사라지다니...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녀는 다이커리를 두 잔째 마시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하고 말하며, 나는 유리 접시에 담긴 프레첼을 손에 들고, 두 개로 나눠 절반을 먹었다. 웨이터가 와서 재떨이 이후로 다시금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뇨? 그 말은, 코끼리가 사라질 것을 조금은 예측했었다는 말 같군요?"하고 그녀는 질문했다. "예측이라니, 어떻게? 어느 날 갑자기 코끼리가 사라지다니, 그런 전례도 없거니와 필연성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의 얘기는 아주 이상해요. 그렇잖아요? 내가, '코끼리가 사라지다니...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더니, 당신은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하고 대답했잖아요. 보통 사람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을텐데. '정말이야'라든가 '짐작도 못한다'라든가. 그렇지 않았을까요?" 나는 그녀를 향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러 스카치를 더 가져오라고 했다. 새 온 더 록이 오기까지 잠정적인 침묵이 계속되었다. "있잖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당신은 조금 전만 해도 아주 또박또박 말했다구요. 코끼리 이야기가 나오지 전까지는, 그런데 코끼리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말하는 태도가 이상해졌어요.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구요. 도대체 어찌된 셈이죠? 코끼리 때문에 뭐 잘못된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면 내 귀가 어떻게 돼버린 걸까요?" "당신의 귀는 정상입니다." "그럼 그쪽에 문제가 있군요." 나는 손가락을 글라스 속에 집어넣고 얼음을 빙글빙글 돌렸다. 나는 온 더 록의 얼음이 글라스에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다. "문제라고 할만큼 대단한 건 아니요. 아주 사소한 일이죠. 특별히 남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말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어서 말하지 않은 것뿐이죠. 색다르다면, 글세 좀 그렇긴 하지만." "어떤 식으로요?" 나는 체념하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가 없어진 코끼리의 마지막 목격자란 점이죠. 내가 코끼리를 본 것은 5월 17일 오후 7시가 지나서였죠. 그 동안에 코끼리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저녁6시면 코끼리 우리의 문을 닫아 버리니까." "이야기 줄거리는 잘 모르겠지만, 코끼리 우리의 문이 닫혔다면서 당신은 어떻게 코끼리를 볼 수 있었나요?"하고 그녀는 내 눈을 들여다 보면서 물었다. "코끼리 우리 뒤쪽에는 거의 벼랑에 가까운 산이 있거든요. 누군가 임자 있는 산인데, 길다운 길도 나 있지 않아요. 거기에 코끼리 우리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지점이 꼭 한군데 있었어요. 그런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만." 내가 그 지점을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뒷산을 산책하다가 길을 알지 못해 적당히 짐작으로 걸어가던 중에 공교롭게도 그 지점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것에는 사람이 혼자 누워 뒹굴 수 있을 만큼 평평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관목 틈새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바로 아래쪽에 코끼리 우리 지붕이 보였다. 지붕의 조금 아래쪽에는 꽤 큼직한 통풍구가 있었고, 그곳을 통해 코끼리 우리 내부가 똑똑히 보였다. 그후로는 심심할 때마다 그곳을 찾아가서, 우리 속에 있는 코끼리를 바라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했느냐고 물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다만 나만의 시간 속에서 코끼리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더 이상 깊은 이유는 없다. 코끼리 우리 안이 어두울 때는 물론 코끼리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초저녁 동안에는 사육사가 코끼리 우리 전등을 켜놓고 코끼리를 돌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 모습을 자세히 구경할 수 있었다. 내가 우선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은 코끼리 우리 안에서 둘이만 있을 때의 코끼리와 사육사는, 사람들 앞에 그 공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보다 훨씬 친밀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사소한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곧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둘만이 남게 되는 밤을 위해, 낮 동안에는 둘 사이의 친밀함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게끔 주위 깊게 절약해 두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코끼리 우리 안에서 무언가 특이한 짓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코끼리는 코끼리 우리 속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멍청이 있었다. 사육사도 덱 브러시로 코끼리의 몸을 씻어 주거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대한 똥덩어리를 긁어모으거나, 식사 뒤처리를 한다거나 하는, 사육사로서의 당연한 작업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들 둘 사이에 맺어진 신뢰감이 풍겨 내는 독특한 온정은 그대로 전해졌다. 사육사가 바닥 청소를 하고 있을 때면, 코끼리는 코를 휘둘러 사육사의 등을 가볍게 톡톡 치거나 했다. 나는 그런 코끼리의 모습을 좋아했다. "코끼리를 옛날부터 좋아했나요? 꼭 그 코끼리가 아니더라도..."하고 그녀가 물었다. "글쎄, 그랬던 것 같아요. 코끼리란 동물한테는 뭔가 내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이 있어요. 옛날부터 줄곧 그랬었거든요. 왜 그런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래서 그날도 해가 지고 나서 뒷산으로 올라가 혼자서 코끼리를 보고 있었나 보죠? 그러니까, 5월..." "17일, 5월 17일 오후 7시쯤. 그때는 상당히 해가 길어져서 하늘에는 아직도 저녁 노을이 조금 남아 있었죠. 하지만 코끼리 우리 속에는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구요." "그때는 코끼리한테도 사육사한테도 별 이상은 없었나 보죠?" "이상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고, 이상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나로서는 정확한 말을 할 수 없거든요. 어쨌든 바로 눈 앞에서 본 건 아니니까, 목격자로서의 신뢰성은 그다지 높다고 할 수 없겠지요." "도대체 뭐가 있었죠?" 나는 얼음이 녹아서 약간 엷어진 온 더 록을 한 모금 마셨다. 창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영원히 정지되어 버린 풍경의 일부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도 아니죠. 코끼리와 사육사는 늘 같은 일을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지요. 청소도 하고 식사 준비도 하고, 아주 사이 좋게 툭툭 장난을 치거나 하는 정도였어요. 단지 내가 약간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 밸런스란 말입니다." "밸런스?" "즉, 크기에 대한 밸런스지요. 코끼리와 그 사육사 몸 크기 사이의 균형인데, 그 균형이 평소와 좀 다르게 느껴졌어요. 코끼리와 사육사의 몸 크기 차이가 평소보다 줄어든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녀는 잠시 동안 자기가 들고 잇는 다이커리 글라스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속의 얼음이 녹아서, 그 물이 작은 해류처럼 칵테일 틈새로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그 말은 코끼리의 몸이 줄었다는 얘긴가요?" "아니면 사육사가 커졌거나 혹은 그 양쪽이 동시에 일어났거나 했겠죠." "그 사실을 경찰한테 알리지 않았나 보죠?" "물론, 그런 걸 알려 봤자 경찰은 우선 신용하지 않을 테고, 그런 시간에 뒷동산에서 코끼리를 구경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면, 내가 의심받을 것이 뻔할텐데 뭐." "그런데 그 밸런스가 평소하고 달라져 있었다는 건 확실한 거죠?" "그럴 겁니다. 그럴 거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어요. 아무런 증거도 없지. 게다가 몇 번이나 거듭 말했지만, 통풍구를 통해 안을 들여다 보았을 뿐이거든요. 하지만 나는 수십 번이나 마찬가지 조건에서 코끼리와 사육사를 봐왔으니까, 그 크기의 밸런스를 착각했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래, 나는 그때 그것이 눈의 착각일지 모른다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머리를 흔들었다 해보고, 다시 보고 또 보고 했는데도, 코끼리의 크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확실히 코끼리는 줄어든 것으로 보였다. 나는 처음에는 시에서 작은 코끼리를 새로 입수했나,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고-내가 코끼리에 대한 뉴스를 놓칠 리도 없었고-해서 지금까지 있었던 늙은 코끼리가 무슨 까닭으로 해서 갑자기 줄어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고 있으려니까, 그 작은 코끼리가 하는 짓이 늙은 코끼리가 늘 하던 그대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끼리는 몸을 닦아 줄 때면 좋아라고 오른 발로 땅바닥을 찼고, 어느 정도 가늘어진 코로 사육사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한 광경이었다. 통풍구를 통해 꼼짝 않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 코끼리 우리 속에만 썰렁한 감촉의 시간성이 흘러가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코끼리와 사육사는 자신들을 휘몰아넣으려는-혹은 이미 일부를 휘몰아넣고 있는-그 새로운 체계에 기꺼이 몸을 맡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코끼리 우리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시간은 다 해서 30분도 채 안된 것 같았다. 코끼리는 우리에서는 여느 때보다 훨씬 빠른 7시 30분에 등불이 꺼졌으며, 그것을 고비로 전체가 어둠에 싸여 버렸다. 그래도 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 번 더 코끼리 우리에 불이 켜지기를 기다렸으나, 전등은 두 번 다시 켜지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코끼리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럼 당신은, 코끼리가 그대로 자꾸자꾸 줄어들어 울타리 사이로 도망을 쳤거나 아니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나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나는 자신이 이 눈으로 본 것을 조금이라도 정확하게 기억해 내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라구요. 그 이상 앞일은 거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요. 눈으로 본 것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 솔직히 말하면 거기서 뭔가 짐작한다는 건,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죠." 그것이 코끼리 소멸에 대한 내 이야기의 전부였다. 내가 애초에 예상한 대로 그 이야기는, 처음 만난 젊은 남녀가 주거지 받거니 할 화제로서는 너무나 특수했고, 그 자체가 지나치게 완결돼 있었다. 내가 이야기를 끝내자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사라져 버린 코끼리에 대한, 거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다음으로 도대체 어떤 종류의 화제를 끄집어내야 할 지 나로서도 그녀로서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칵테일 글라스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고, 나는 코스러에 인쇄된 문자를 25회정도 되풀이해서 읽었다. 역시 코끼리 이야기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입밖에 내어 누구에게 털어놓거나 할 성질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옛날에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일은 있었지만, 고양이가 사라지는 것과 코끼리가 사라지는 것은 전적으로 다르잖아요."하고 얼마 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야 다를테죠. 크기부터 비교가 안되니까." 그리고 30분 후에 우리는 호텔 입구에서 헤어졌다. 그녀가 칵테일 라운지에 우산을 두고 온 것이 생각났기에 나는 그 길로 되돌아가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 손잡이가 큼직한 벽돌색 우산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안녕." 그후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꼭 한 번 광고 기사의 세부 사항에 대해 우리는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어지간하면 그녀를 식사에라도 초대해 볼까 생각했지만, 결국 그만두라고 했다. 전화로 이야기하는 동안 어쩐지 그런 것이 탐탁지 않게 여겨졌다. 코끼리의 소멸을 경험하고 난 이후로, 나는 자주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행위가 가져올 결과와 그 행위를 회피함으로써 가져오게 될 결과 사이의 차이를 찾아낼 수 없게 되고 만다. 때때로 나는 주위의 사물이 그 본래의 정당한 밸런스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낀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코끼리 사건 이후 나의 내부에서 무슨 밸런스가 무너져 버려, 여러 가지 외부의 사물이 내 눈에 기묘하게 비치는 지도 모른다. 그 책임은 아마도 내쪽에 있겠지. 나는 여전히 편의적인 세계 속에서 편의적인 기억의 잔상을 바탕으로 냉장고랑 오븐 토스터랑 커피 메이커를 팔러 다니고 있다. 내가 편의적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우리들의 캠페인은 우리들이 낙관적으로 예상했던 선을 뛰어넘어 성공했다-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 간다. 아마도 사람들은 세계라는 키친 속에서 일종의 통일성을 구하고 있는가보다. 디자인의 통일, 색채의 통일, 기능의 통일. 이제 신문에는 거의 코끼리 기사는 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가 한때 코끼리 한 마리를 소유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코끼리 광장에 무성했던 풀은 마르고, 주위에서는 마침내 겨울의 기척이 느껴진다. 코끼리와 사육사는 소멸해 버렸고, 그들은 이제 다시는 이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패밀리 어페어 그런 건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여동생의 약혼자가 애당초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런 남자와 결혼할 결심을 하기에 이른 여동생 자체에 대해서도 적잖은 의문을 품기에 이르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주 낙담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나의 편협한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여동생은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드러내어 그 화제를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 약혼자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여동생 쪽에서도 똑똑히 짐작하고 있었으며, 그런 나에 대해 그녀는 신경질을 부렸다. "오빠는 사물을 보는 눈이 너무 좁아."하고 여동생은 나에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스파게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스파게티에 대한 나의 생각이 너무 좁다고 지적한 셈이었다. 그러나 물론 여동생은 스파게티 그것만을 문제로 삼았던 건 아니다. 스파게티 얘기를 하기에 앞서 그녀의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그녀는 어느 쪽이냐 하면 약혼자 쪽을 더 문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대리 전쟁이나 같은 것이었다. 애당초 발단은 일요일 낮에 여동생이 같이 스파게티라도 먹으로 나가자고 나에게 말을 꺼낸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도 마침 스파게티가 먹고 싶던 참이라 '좋지.'하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역전에 새로 생긴 아담한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갔다. 나는 가지와 마늘을 넣은 스파게티를 주문했고, 여동생은 바지리코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요리가 나올 때까지 나는 맥주를 마셨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5월의 일요일이고, 게다가 좋은 날씨였다. 문제는 가져온 스파게티 맛이 '재앙'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형편없었다는 점이다. 면은 겉이 설익어 몹시 깔깔하고 속에 심줄이 남아 있었으며, 버터는 강아지라도 먹다 말 것 같은 '물건'이었다. 나는 어떻게 어떻게 절반쯤만 먹고서 단념하고, 웨이트리스에게 나머지는 치워 달라고 했다. 여동생은 그런 나를 흘깃흘깃 보고 있었는데, 그땐 아무 말 않고 자기 접시의 스파게티를 마지막 한 가닥까지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먹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창 밖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두 병째 맥주를 마셨다. "오빠, 뭐 그렇게 보란 듯이 남길 건 없잖아요."하고 자기 접시가 치워진 다음 여동생이 말했다. "맛없군."하고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절반이나 남길 만큼 맛없진 않았어요. 좀 참으면 될텐데." "먹고 싶을 땐 먹고, 먹고 싶지 않을 땐 안 먹는다. 이건 내 위장의 문제지, 임마 네 위장의 문제는 아니야," "'임마'란 말 쓰지 마세요. 부탁이니까. ...'임마'란 말을 하면 꼭 어디서 굴러먹은 건달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내 위장의 문제지, 네 위장의 문제는 아니야."하고 나는 정정을 했다. 스무 살이 지나면서, 동생은 자신은 '임마'하고 부르는 걸 질색하면서 점잖게 부르도록 나를 훈련시켜 왔던 것이다. 그 둘의 차이가 어디 있는지 나로선 잘 모르겠다. "이 가게는 갓 개점한 참이라서 틀림없이 조리장이 아직 익숙하지 못한 거예요. 조금쯤은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져도 되잖아요?"하고 여동생은 아까 나온 스파게티처럼 보기만 해도 맛없는 싱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맛없는 요리를 남긴다는 것도 하나의 식견이 아닐까"하고 나는 설명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도도해졌죠?" "더럽게 트집잡네. 생리중이냐 뭐냐?" "시끄러워요. 웃기지 말아요. 오빠한테 그런 소리들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별로 신경 쑬 건 없다구, '너'의 맨 처음 생리가 언제였던가도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퍽도 늦어서 어머니하고 함께 의사한테 갔었잖아?" "입 다물지 않으면 백을 던질 거예요!" 동생이 정말 화내고 있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가 말예요, 사물에 대한 오빠의 견해는 너무나 편협하다구요." 동생은 커피에다 크림을 추가로 넣으면서-필시 맛이 없나 보다-말했다. "...오빠는 사물의 결점만 끄집어내어 비판하지, 좋은 점을 보려고 들지 않는단 말이에요. 무언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일절 손도 대려 하지 않는다구요. 그런 걸 곁에서 보고 있자면 굉장히 신경에 거슬린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건 내 인생이지, 네 인생은 아니야." "그래서 남을 다치게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곤 하나 보군요. ...마스터베이션만 해도 그렇죠." "마스터베이션? 무슨 소리냐, 그게?"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오빠는 고교 시절에 툭하면 마스터베이션을 해서 시트를 더럽혔잖아요. 다 알고 있다고요. ...그걸 빠는 게 얼마나 힘들다구요. 마스터베이션쯤 시트 더럽히지 않게 하면 어때요? 그런 걸로 남에게 폐를 끼친 말이에요." "명심하겠어. 그 점에 대해선 말야. ...하지만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 내 인생이 있고, 좋아하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어. 별수 없잖아." "하지만 사람을 다치게 해요. 어째서 노력하려 하지 않죠? 어째서 사물의 좋은 면을 보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어째서 조금이라도 참으려 들지 않고, 어째서 성장하지 않는 거죠?" "성장하고 있어."하고 나는 좀 기분이 상해서 말했다. "참기도 하고, 사물의 좋은 면도 보고 있어. 너와 같은 데를 보고 있지 않을 뿐이야." "그게 오만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물 일곱 살이나 되어서도 제대로 된 애인도 생기지 않는 거라구요." "여자 친구는 있다구." "잘 때만 필요한 여자 말이겠죠. 그렇죠? 1년마다 자는 상대를 갈아대면서, 그래도 즐거워요? 이해심이라든지 애정이라든지 헤아려 줌이라든지 그런 거 없이는,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마스터베이션이나 다를 바 없죠." "1년마다 갈아대지는 않았어."하고 나는 맥없이 말했다.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조금쯤은 건전한 생각을 갖고, 건전한 생활을 하는 게 어때요? 조금만 어른스러워진다면?" 그것이 우리 대화의 끝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동생은 거의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째서 동생이 나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나로선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바로 일년 전쯤만 해도 동생은 나의 확고한 '되는 대로의 생활'을 함께 즐겨왔으며, 나에 대해-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면-어떤 의미에선 동경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조금씩 비난하게 된 건 그 약혼자와 사귀게 되면서부터였다. 그건 공정하지가 못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와 동생은 이제까지 23년이나 사귀어 왔단 말이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정직하게 서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이 좋은 남매였으며, 싸움도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동생은 나의 마스터베이션 같은 걸 알고 있으며, 나는 동생의 초경 같은 걸 알고 있다. 동생은 내가 처음으로 콘돔을 샀을 때-나는 그때 열 일곱 살이었다-의 일을 알고 있고, 나는 동생이 처음으로 레이스 속옷을 샀을 때-동생은 그때 열 아홉 살이었다-의 일을 알고 있다. 나는 동생의 친구와 데이트 한 일-물론 자지는 않았다-도 있으며, 동생은 내 친구와 데이트한 일-물론 자지 않았었다고 믿는다-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자라왔단 말이다. 그런 우호적인 관계가 단 1년 사이에 후딱 변하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차츰 분한 생각이 치밀었다. 역전의 백화점에서 구두를 구경하겠다는 여동생을 남겨 놓고, 나는 혼자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녀는 집에 없었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일요일 오후 2시에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 여자아이를 꼬여 봤자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나는 수화기를 놓고, 수첩의 페이지를 넘겨 딴 여자아이 집에 전화를 돌려 보았다. 어느 디스코장에서 알게 된 여대생이다. 그녀는 집에 있었다. "뭐 마시러 가지 않을래?"하고 하는 유혹했다. "아직 오후 2신걸요"하고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시간이 무슨 문제야. 마시다 보면 저물걸. 실은 석양 보는 게 제격인 좋은 바가 있어. 오후 3시까지 가지 않으면 좋은 자리를 못 잡아." "싱거운 사람 같으니라구"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나와 주었다. 필경 친절한 성격일게다. 나는 차를 운전해 해안을 끼고 달려 약속대로 요코하마 해변에 있는 바에 들어갔다. 나는 거기서 IW하퍼의 온 더 록을 네 잔 마시고, 그녀는 바나나 데이키리-'바나나 데이키리'다!-를 두 잔 마셨다. 그리고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술 마시고 차 운전할 수 있어요?"하고 그 아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염려 마. 난 알코올에 관해선 언더파(표준이상)란 말야." "언더파?" "네 잔 정도는 보통이야. 그러니까 무슨 걱정이야. 문제 없다구." "아휴." 그러고 나서 우리는 요코하마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차 안에서 키스를 했다. 나는 그녀에게 호텔로 가자고 유혹했지만, 그녀는 안된다고 했다. "글쎄, 탐폰이 들어 있다구요." "빼면 되잖아." "농담 마세요. 아직 이틀째인걸." 어이쿠,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이게 뭐냐. 이럴 바엔 애당초 여자 친구하고 데이트를 했더라면 좋았을걸, 오랜만에 여동생과 여유있게 하루를 지내려고 하는 이번 일요일에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꼴이란 말이다. "미안해요,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하고 그 여자아이가 말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 탓은 아니야, 내 탓이지." "내 '생리'가 당신 탓이에요?"하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 여자아이가 말했다. "아니야, 무슨 운명이냔 말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당연한 말이 아닌가. 어째서 내 탓으로 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아이가 '생리'를 하게 되냔 말이다. 나는 그녀를 세타가야의 집까지 차로 바래다주었다. 도중에 클러치가 달깍달깍, 작기는 했지만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이러다가는 수리 공장으로 가야겠군, 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가 제대로 안되면, 연쇄적으로 무엇이나 다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전형적인 하루였다.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만나자고 해도 되겠어?"하고 나는 물었다. "데이트하러? 아니면 호텔로" "양쪽 다"하고 나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건, 그렇지, 표리일체 그거야. 칫솔과 치약처럼..." "그렇군요, 생각해 보겠어요." "그래, 생각한다는 거 머리가 늙지 않아서 좋지." "당신 집은 어때요? 놀러 가도 돼요?" "안 되겠는걸. 여동생하고 살고 있거든. 규칙이 있단 말야. 난 여자를 끌어들이지 않고 여동생은 남자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진짜 여동생?" "진짜구말구, 다음 번에 주민등록 등본을 갖다 줄까?"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웃었다. 그 여자아이가 자기 집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차에 엔진은 넣어, 크러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파트 안은 캄캄하기만 했다. 나는 열쇠로 문을 열고 전등을 켠 후 여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동생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밤 10시에 어디에 갔단 말이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석간 신문을 찾았는데, 신문은 없었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잔과 같이 거실로 가져와 오디오 스위치를 넣고, 턴테이블에 허비 핸콕의 새 레코드를 얹었다. 그리곤 맥주를 마시면서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오디오가 사흘 전부터 고장 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원은 들어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텔레비전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모니터용 텔레비전 수신기로, 오디오를 통하지 않고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장치가 돼 있었던 것이다. 별수 없이 나는 소리없는 텔레비전 화면을 노려보면서, 맥주나 마시기로 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오래 된 전쟁 영화를 하고 있었다. 론멜의 전차대가 나오는 아프리카 전쟁물이었다. 전차포가 소리없는 포탄을 쏘고, 자동소총이 침묵의 탄환을 흩뿌리고, 사람들은 말없이 죽어 갔다. "으휴"하고 나는 그날 열 여섯 번째-아마도 그만큼 됐을 것이다-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된 건 5년전 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스물 두 살이었고, 여동생은 열여덟 살이었다. 즉, 내가 대학을 나와 취업을 하고, 그녀가 고등학교를 마치면 대학에 들어간 해다. 부모님은 나와 함께 산다는 조건하에 여동생이 도쿄의 대학에 다니는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동생은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나도 좋다고 했다.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제법 그럴싸한 방이 두 개 있는 넓은 아파트를 세 내 주었다. 집세의 절반은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와 여동생은 사이가 좋았으며, 둘이서 산다는 것에 나는 거의 불편을 느끼지 않았었다. 나는 전자 제품 회사의 광고부에 근무하고 있었던 탓으로, 아침엔 비교적 일찍 출근했으며, 밤에는 늦게 돌아오곤 했다. 여동생은 아침 일찍 학교에 가고, 대개 저녁에 돌아왔다. 그래서 내가 눈을 떴을 때 동생은 이미 없었고, 내가 돌아왔을 때엔 동생은 벌써 잠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뿐더러 나는 거의 대부분의 토요일과 일요일에 데이트를 했으므로, 동생과 제대로 말을 주고받는 건, 일주일에 한 두 번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싸울 틈조차 없었으며,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간섭하지도 않았다. 동생에게도 아마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겠지 싶었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일절 참견하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 넘은 여자아이가 누구하고 자건 말건 그런 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꼭 한 번, 한밤중 1시부터 3시까지 동생의 손을 잡아 준 적이 있다. 내가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 부엌 식탁에서 동생이 울고 있었다. 식탁에서 울고 있다는 건 필시 나더러 뭔가 알아 달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왜냐하면 간섭하는 게 싫었다면 자기 방 침대에서 울면 그뿐인 것이다. 나는 편협하고 고집스런 인간일지 모르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옆에 앉아 여동생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여동생 손을 잡아 본 건, 국민학교 때 잠자리 잡으러 갔을 때 말고는 처음이었다. 여동생의 손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그야 당연한 일이겠지만-훨씬 크고 따뜻했다. 동생은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2시간이나 울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눈물이 몸속에 들어 있나 싶어 나는 감탄했다. 나 같으면 단 2분만 울어도 몸이 바삭바삭 말라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3식 되자 아닌게 아니라 나도 피곤해져서 그럭저럭 끝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쯤에서 오빠로서 뭔가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건 질색이지만 하는 수 없지.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는 너의 생활에 일절 간섭하고 싶지 않아. 네 인생이니까 좋을 대로 살면 돼." 여동생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지만 한마디만 충고하고 싶은데, 백 속에다 콘돔을 넣고 다니는 일만은 그만 두는 게 좋겠어, 매춘부로 착각하기 쉬우니까." 그 말을 듣자 동생은 식탁 위의 전하번호부를 집어들어, 나에게로 힘껏 내던졌다. "왜 남의 백 속을 뒤지는 거야!'하고 동생은 소리쳤다. 동생은 화를 낼 때면 으레 뭐든지 내던지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동생의 백 속을 뒤진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식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그것을 계기로 동생은 울음을 그쳤고, 나는 내 침대 속으로 쑤시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여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여행사에 근무하게 되고 나서도, 우리의 그러한 생활 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동생의 회사는 9시부터 5시까지 규칙적으로 근무하는 곳이었고, 내 쪽의 생활은 갈수록 게을러졌다. 점심 전에 출근하여, 데스크에서 신문을 읽고,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2시경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서 광고 대행사와 약속을 해놓고,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귀가하는 일과가 계속되었다. 여행사에 근무하던 첫해의 여름 휴가 때, 동생은 여자 친구와 둘이서 아메리카의 서해안에 갔다가-물론 할인요금이었다-그 여행단에서 만나게 된 한 살 위의 컴퓨터 엔지니어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와서도 툭하면 그와 데이트를 했다. 글쎄,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은 딱 질색이었다. 우선 단체 여행이라는 것이 맘에 안 들었고, 그런 곳에서 누구를 만나 사귀다니 생각만 해도 역겨워졌다. 그런데 그 컴퓨터 엔지니어와 교제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동생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명랑해진 것 같았다. 집안 일도 차분하게 처리하게 되었고, 옷에도 신경을 쓰게끔 되었다. 그때까지 동생은 워크셔츠와 색바랜 블루진과 운동화를 신은 모양새로 어디나 갈 수 있는 여자였다. 옷차림에 집착하기 시작한 덕분에 신발장은 온통 동생의 구두로 들어찼고, 집안은 세탁소의 철사 옷걸이 투성이였다. 동생은 열심히 빨래-그때까지는 욕실에 아마존 개미둑 모양으로 더러워진 것들을 쌓아 놓고 있었다-를 했고, 열심히 다림질을 했으며, 열심히 요리를 만들었고, 열심히 청소를 하게 되었다. 나도 약간의 체험은 있었지만, 그런 것은 위험한 징후였다. 여자아이가 그런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면 남자는 줄행랑을 놓든지 아니면 결혼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여동생은 나에게 그 컴퓨터 엔지니어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여동생이 나에게 그 사진을 보여 준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위험한 징후였다. 사진은 두 장인데, 한 장은 샌프란시스코의 낚시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청다랑어 앞에 여동생과 그 컴퓨터 엔지니어가 나란히 서서 생긋이 웃고 있었다. "청다랑어가 멋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농담 좀 작작해요, 난 진지하다구요."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니?" "아무 말 안해도 좋아요, 그런 사람이에요." 나는 다시 한 번 그 사진을 손에 들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 세상에서 첫눈에 역겨워지는 얼굴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런 얼굴이었다. 한 술 더떠서 그 컴퓨터 엔지니어는 내가 고교 시절에 가장 싫어하던 클럽 선배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얼굴 생김새는 그런 대로 나쁘진 않았지만, 머리가 텅 빈 억지스런 남자였다. 더구나 코끼리 처럼 기억력이 좋아서, 별 하찮은 일도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가 텅 빈 부분을 기억력으로 보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했니?"하고 나는 물었다. "엉터리 소리 그만해. 자기 척도로 세상을 재는 짓은 그만두라구요. 세상 사람이 누구나 다 오빠 같은 인간은 아니니까요."하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여동생이 말했다. 두 장째 사진은 일본에 돌아와서 찍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컴퓨터 엔지니어 혼자 찍혀 있었다. 그는 사이가 붙은 옷을 입고 대형 오토바이에 기대 서 있었다. 시트 위에는 헬멧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와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밖의 다른 표정이 없는 모양이다. "오토바이를 좋아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보면 알아. 오토바이를 싫어하는 인간이 뭐가 좋다고 아래위가 붙은 가죽옷을 입겠니?"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이것도 물론 편협한 성격이 부리는 심술이겠지만-아무리 해도 오토바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인간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모양새가 요란하고 자기 선전만 너무 늘어놓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잠자코 사진을 여동생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뭐예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될 것이냐, 그 말이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결혼하게 될지도 몰라요." "결혼 신청을 받았다, 그 말이니?" "글쎄 뭐, 아직 대답한 건 아니지만." "흐음.." "솔직히 말해서 난 취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좀더 혼자서 편안하게 즐기고 싶거든요. 오빠만큼 분방하게는 아니더라도." "하기야 건전한 사고 방식이긴 하지."하고 나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고, 결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생각중이에요."하고 동생이 말했다. 나는 식탁 위의 사진을 집어들어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맙소사,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전의 일이다. 해가 바뀌고 나서 얼마후, 어머니가 아침 9시에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블루스 스프링스턴의 <본 인 더 USA>를 들으면서 칫솔질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여동생이 교제하고 있는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여동생이 2주일 후 주말에 그 남자와 함께 집에 가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고 했다. "결혼한 거 아닐까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있잖니. 얼굴을 대하기 전에 이것저것 알아두고 싶어서."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글쎄 만난 적은 없어요. 한 살 위에다 컴퓨터 엔지니어래요. IBM이래나 뭐래나 그런 곳에 근무하고 있구요. 알파벳이 3개에요. NEC라든가 NTT라든가. 사진으로 보기엔 별로 유별난 데는 없는 얼굴이었어요. 제 취향은 아니지만, 뭐 제가 결혼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느 대학을 나왔으며, 집안은 어떤지 모르니?" "알 길이 없잖아요. 그런 건."하고 나는 쏘아붙였다. "한 번 만나서 이모저모 좀 물어 보아 주지 않겠니?"하고 어머니가 부탁했다. "싫어요, 전 바쁘단 말이에요. 2주일 뒤에 직접 물어 보면 되잖아요."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컴퓨터 엔지니어와 만나게 되었다. 다음 일요일에 여동생이 그의 집으로 정식 인사차 가는데 함께 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메고 가장 수수한 양복을 입고, 메구로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오래된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 상당히 훌륭한 집이었다. 차고 앞에는 언젠가 사진에서 본 '혼다 500cc'가 세워져 있었다. "제법 멋진 청다랑어군."하고 나는 말했다. "있잖아, 부탁이니 오빠, 그 쓰잘 데 없는 농담은 안하기에요. 오늘 하루면 되니까."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알았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의 부모님은 제법 점잖고-약간 점잔이 지나쳐서 못마땅한 점은 있었지만-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석유 회사의 중역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시즈오카에서 주유소 체인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동떨어진 혼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고상한 쟁반에다 홍차 잔을 받쳐서 들여 왔다. 나는 점잖게 인사를 하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쪽에서도 나에게 명함을 주었다. "원래는 저희 부모님이 찾아뵐 예정이었지만, 오늘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제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다시 날을 잡아 정식으로 찾아뵈었으면 하십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여러모로 아들한테서는 이야기는 듣고 있었지만 지금 만나 보니 아들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얌전한 아가씨며, 집안도 좋다고 들었고, 해서 자기네 쪽에서는 이 혼사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필시 이것저것 알아봤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열 여섯 살까지 초경이 없어서 만성적 변비로 고민했던 사실까지야 알지 못하겠지. 일단 형식적인 이야기가 큰 문제없이 끝나자 그의 아버지는 나에게 브랜디를 따라주었다. 상당히 맛이 좋은 브랜디였다. 우리는 그걸 마시면서 각자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여동생의 슬리퍼 끝으로 나의 말을 차서, 너무 지나치게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 동안 아들인 컴퓨터 엔지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장된 얼굴로 아버지 곁에 앉아 있었다. 그가 적어도, 이 집 지붕밑에서는 아버지 권력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옳거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그때까지 내가 본 적도 없는 기묘한 무늬의 스웨터를 입고, 그 속에다 색깔도 맞지 않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급해서 좀더 진지하고 똑똑한 남자를 고르지 못했단 말인가? 이야기가 일단락되고 4시가 되어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우리 두 사람을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어디 가서 함께 차라도 한 잔하지 않으시겠습니까?"하고 그가 나와 여동생에게 말했다. 나는 차 같은 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고, 그런 요상한 무늬의 스웨터를 입은 남자와 동석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면 어색해질 것 같아서 셋이서 가까운 다방에 들르기로 했다. 그와 여동생은 커피를 주문하고, 나는 맥주를 주문했는데, 맥주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커피를 마셨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하고 그는 나에게 인사 치레를 했다. "뭐 별로, 당연한 일이니까"하고 나는 점잖게 말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농담을 할 만한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을 통해 형님 이야기는 늘 들었습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형님?' 나는 커피 스푼의 손잡이로 귓볼을 긁고 나서 그것을 도로 접시에 놓았다. 여동생은 또 나의 발끝을 걷어찼지만, 컴퓨터 엔지니어 쪽은 그 동작의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 '이진법'의 농담이란 것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나 보다. "아주 사이가 좋아 보여서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서로 발 걷어차기를 한다네."하고 나는 말했다. 컴퓨터 엔지니어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생각하는 어정쩡한 얼굴을 했다. "농담을 한 거예요. 그러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하고 여동생이 정나미 떨어졌다는 듯이 말했다. "농담일세. 가사를 분담하고 있지. 동생은 빨래를 하고 나는 농담을 하고"하며 나도 말했다. 컴퓨터 엔지니어-와타나베 노보루가 정확한 이름이다-는 그 말을 듣고 다소 안심했다는 듯이 웃었다. "명랑해서 좋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가정을 갖고 싶군요. 밝은 것이 첫째입니다." "보라구, 밝은 것이 첫째잖아. 네 신경질은 너무 지나쳐."하고 나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재미난 농담이라구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되도록이면 가을에는 결혼하고 싶습니다."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결혼식이야 역시 가을이 좋겠지. 그러면 다람쥐도 곰도 부를 수 있을테고." 컴퓨터 엔지니어는 웃었고 여동생은 웃지 않았다. 동생은 정말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볼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트에 돌아온 후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대충의 상황을 설명했다. "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하고 나는 귀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별로 나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제대로 됐다는 말이죠, 적어도 저보다는 나아 보였어요." "네가 뭐 어디가 어때서?" "좋아라, 고마워요."하고 나는 천장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 대학은 어느 대학?" "대학?" "어느 대학을 나왔대, 그 사람?" "그런 거야 본인한테 물어 보시죠."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한심한 기분으로 혼자서 마셨다. 스파게티 건으로 해서 여동생과 말다툼을 한 그 다음날, 나는 오전 8시 반에 잠에서 깼다. 전날이나 다름없이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씨였다. 꼭 어제 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밤 동안 일시 중단하고 있던 인생이 다시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땀으로 축축해진 파자마와 속옷을 세탁물 바구니 속에 던져 넣고, 샤워를 하고 수염을 깎았다. 그리고 수염을 깎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서 재미 보기에 실패하고 만 어제 저녁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고,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기회는 또 얼마든지 있다. 아마 다음 일요일에는 잘 되겠지. 나는 주방에서 토스트 두 개를 굽고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나서 FM방송을 들으려 했지만, 오디오가 고장이란 생각이 떠올라 단념하고, 신문의 독서란을 읽으면서 빵을 먹었다. 독서란에는 흥미를 끌 만한 종류의 책은 한 권도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것은 늙은 유태인의 공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성생활에 대한 소설이라든가, 분열증 치료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든가, 아시오 총독 사건의 전모라든가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 따위 책을 읽을 거라면 차라리 여라 소프트볼 부의 주장과 자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신문사는 분명 우리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려고 이런 책을 선정했나 보다. 바삭바삭하게 구운 빵을 한 개 먹고, 신문을 식탁 위에다 도로 놓으려는데 잼 병 밑에 메모 용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여동생이 평소나 다름없는 작은 글씨로 이번 일요일 저녁 식사에 와타나베 노보루를 초청했으니, 나도 꼭 집에 있다가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적어 놓은 것이었다.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셔츠 위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털고, 그릇을 싱크대의 설거지통에 처넣고 나서, 여동생이 근무하고 있는 여행사에다 전화를 걸었다. 여동생이 나와 '지금 바빠서 틈이 없으니, 10분 후에 내가 다시 걸게요.'라고 했다. 전화는 20분 후에 걸려 왔다. 그 20분 동안 나는 43회나 팔굽혀펴기를 하고, 손발을 합쳐서 20개의 손톱과 발톱을 깎고, 셔츠와 넥타이, 웃옷, 그리고 바지를 골라 놓았다. 그리고 이를 닦고, 빗질을 하고, 하품을 두 번했다. "메모 읽어 봤어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읽었어. 그런데 안 됐지만 이번 일요일에는 선약이 있어서 안되겠어. 좀더 빨리 알았다면 비워놓을 수도 있었는데, 정말 유감천만이다." "뻔뻔스런 소리 좀 작작하라구요. 어차피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아이하고, 어디론가 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그런 약속일 테지 뭐. 그거 토요일로 돌리면 안돼요?"하고 여동생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구. 전기 담요 CF를 만들어야 하거든. 요즘 좀 바빠서." "그럼 그 데이트 취소해요." "반환 요금을 빼앗기는 걸. 지금 비교적 미묘한 단계야." "내 일은 미묘하지 않아요?"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야."하고 나는 의자에 걸어 놓은 셔츠에 넥타이를 맞추면서 말했다.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규칙 아니었어? 너는 네 약혼자하고 밥을 먹고... 나는 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그럼 됐잖아." "된 게 아니라니까요. 오빠는 줄곧 그를 안 만났잖아요? 여태까지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어요. 그것도 4개월 전의 일이에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몇 번이나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도, 오빠는 줄창 도망만 다녔잖아요. 굉장한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빠 여동생의 약혼자라구요. 한 번쯤 함께 식사 좀 하는 것이 뭐가 어때요." 여동생이 하는 말에도 일리는 있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나는 확실히 아주 자연스럽게 와타나베 노보루와 동석할 기회를 피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와타나베 노보루와 나 사이에는 그다지 공통된 화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동시 통역을 대동하고 농담을 하는 것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부탁이에요. 하루면 되니까 그렇게 해줘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여름이 끝날 때까지 오빠의 성생활에 대해 훼방놓지 않을 테니까." "내 성생활이란 아주 사소한 거야. 여름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를 정도라구." "아무튼 이번 일요일에는 집에 있어 주는 거죠?" "별 수 없군."하고 나는 체념하면서 말했다. "모르긴 해도 그가 오디오를 수리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 사람 그런 거 정말 특기라니까요." "손가락 놀림이 특기겠지." "이상한 생각좀 작작하라구요."하고 여동생은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나는 넥타이를 매고 회사로 나갔다. 그 주일 동안 줄창 맑은 날씨였다. 매일매일이 한결같았다. 수요일 저녁에 나는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이 바빠서 이번 주말에도 만나기 어렵겠다고 했다. 내가 벌써 3주일 동안이나 그녀와 만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일요일에 데이트했던 여대생 집에 전화를 돌렸는데, 그녀는 없었다. 목요일에도 금요일에도 그녀는 집에 없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8시에 여동생 등쌀에 일어났다. "시트를 빨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예요."하고 동생이 말했다. 그리고 시트와 베갯잇을 벗기고 파자마를 벗겼다. 나는 갈 것이 없어서 샤워장으로 들어가 수염을 깎았다. 저것도 차츰 어머니를 닮아 가는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란 마치 연어와 같다. 뭐니뭐니해도 다들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샤워실에서 나온 후 나는 반바지를 입고, 색이 바래서 거의 글씨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티셔츠를 뒤집어써서 입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오렌지 쥬스를 마셨다. 몸속에는 아직도 어젯밤의 알코올이 얼마만큼 남아 있었다. 신문을 펼쳐 보고 싶지도 않았다. 식탁 위에 크래커 상자가 있기에, 나는 그것을 서너 개 먹고는 아침 식사 대용으로 때웠다. 여동생은 시트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고, 그 동안에 내 방과 자기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걸 끝내자 세제를 풀어 거실과 주방의 바닥과 벽을 걸레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줄곧 거실 소파에 누워서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 준 '허슬러'의 누드 사진을 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성기는 참으로 여러 가지 크기와 형태가 있다. 키의 크기랑 지능 지수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있잖아요, 거기서 뒹굴지 말고 시장 좀 봐다 줄래요?"하고 여동생이 가득 적어 놓은 메모지를 내게로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책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춰 두라구요. 깔끔한 사람이니까." 나는 '허슬러'를 탁자 위에 놓고 메모지를 노려보았다. 레터스, 토마토, 샐러리, 프렌치 드레싱, 스모크 서먼, 마스터드, 양파, 수프 스톡, 감자, 파슬리, 스테이크 고기 세 조각... "스테이크 고기? 난 어제도 스테이크를 먹었다구. 스테이크는 싫어. 크로켓으로 하는 게 좋아." "오빠는 어제 스테이크를 먹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먹지 않았어요. 고집 좀 부리지 마세요.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놓고, 크로켓을 내놓을 수는 없잖아요?" "난 여자아이 집에 초대받아 가서 금새 튀긴 크로켓이 나온다면 감동하고 말텐데 말이야. 가늘게 채썰은 하얀 양배추를 수북하게 담아 곁들이고 바지락 조개 된장국이 있고... 생활이란 그런 거라구." "하지만 오늘은 아무튼 스테이크로 정했어요. 크로켓 정도야 앞으로 죽도록 먹여 줄 테니까, 오늘은 군소리 작작하고 꾹 참고 스테이크를 먹으라구요. 제발 부탁이에요." "좋습니다요."하고 나는 순순히 따라 주었다. 나는 이러고저러고 군소리는 하지만 결국엔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이다. 나는 가까운 슈퍼마켓으로 가서 메모되어 있는 모든 물건을 하고, 술 가게에 들로 4,500엔 짜리 샤브리를 샀다. 나는 약혼한 두 사람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샤브리를 선물할 셈이었다. 그런 것으로나 친절한 사람이 될 수밖에. 집에 돌아오자 침대 위에는 랄프 로렌의 블루 폴로셔츠와 얼룩하나 없는 베이지색 면바지가 놓여 있었다. "그걸로 갈아 입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생각했지만 군소리 않고 갈아입었다. 뭐라고 말해 봤자, 평소의 따스하고 지저분하고 평화로운 휴일이 쟁반 위에 담겨져 돌아올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와타나베 노보루는 3시에 찾아왔다. 물론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산들바람과 함께 찾아왔다. 그의 혼다 500cc의 퍽퍽 거리는 불길한 배기음은 5백미터 앞에서부터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베란다에서 머리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가 아파트 현관 앞에다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헬멧을 벗는 것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STP의 스티커가 붙어 있는 헬멧만 빼놓고, 오늘은 지극히 보통 사람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풀을 빳빳하게 먹인 체크 무늬의 앞 트인 셔츠에다, 통 넓은 하얀 바지, 술 장식이 붙어 있는 갈색 로퍼 슈즈의 모양새였다. 구두와 벨트색이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낚시 전시회의 친구가 온 것 같애."하고 나는 부엌에서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그럼 잠시만 오빠가 얘기를 나눠줄래요? 나는 저녁을 준비할 테니까."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걸. 무슨 말을 할지 모르잖아. 내가 식사 준비를 해줄게. 너의 둘이서 이야기하면 어때?" "바보 소리 좀 그만해요. 그런 짓을 했다가는 꼴이 말이 아니잖아요. 오빠가 앉아 있어야 해요." 벨이 울려 문을 열자, 거기 와타나베 노보루가 서 있었다. 나는 그를 거실로 맞아 들이고, 소파에 앉게 했다. 그는 선물로 서틴원 아이스크림을 들고 왔는데, 우리 냉장고에는 좁은데다가 냉동 식품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그것을 집어넣는데 몹시 애를 먹었다. 정말로 귀찮게 구는 녀석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고많은 중에 아이스크림 따위를 사들고 오냐 말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맥주를 마시지 않겠냐고 권했다. 안 마신다고 그는 대답했다. "체질상 술을 못합니다. 맥주 한잔만 마셔도 기분이 좋지 않을 정도라서요."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학생 시절에 친구들하고 내기를 해서 큰 사발 가득하게 맥주를 마신 적이 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물었다. "꼬박 이틀동안 소변이 맥주였어. 덕분에 트림이..." "저어. 이럴 때 오디오 수리를 부탁하면 어떨까요?"하고 여동생이 불길한 연기 냄새라도 맡듯이 다가와 오렌지 쥬스 두 잔을 탁자 위에 놓으면서 말참견을 했다. "좋지요."하고 그가 대답했다. "손재주가 있다면서?"하고 나는 물었다. "그렇습니다."하고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옛날부터 프라(플라스틱)모델이랑 라디오 조립을 좋아했습니다, 온 집안의 망가진 것을 수리하며 돌아다녔지요. 오디오의 어디가 안됩니까?" "소리가 나오질 않아."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앰프의 스위치를 넣고 레코드를 걸고,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맹수 같은 모양새로 오디오 앞에 앉아서 하나하나 스위치를 점검해 보았다. "앰프 계통이군요, 그것도 내부가 잘못된 게 아니고." "어떻게 알지?" "귀납법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귀납법',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형 프리 앰프와 파워 앰프를 끄집어내 놓고 전선을 전부 뜯어, 하나하나 정성들여 점검했다. 그 동안에 나는 냉장고에서 버드와이저 캔을 꺼내 혼자서 마셨다.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건 역시 즐거운 일이겠지요."하고 그는 샤프 펜슬 끝으로 플러그를 건드려 보면서 말했다. "글쎄, 옛날부터 줄창 마셨으니 잘 모르겠어. 비교할 길이 없거든." "저도 조금 연습하고 있습니다." "술 마시는 연습을?" "예, 그렇습니다. 이상합니까?" "이상하긴, 우선 백포도주로 시작하는 게 좋겠지. 커다란 잔에다 백포도주와 얼음을 넣고 거기다 페리에를 타고 레몬을 짜 넣어 마시는 거지. 난 쥬스대신 마시지만." "시험해 보겠습니다. 옳지, 역시 이거였군," "뭐가?" "프리와 파워 사이의 코넥팅 코드지요, 좌우 모두 핀 플러그가 뿌리부터 빠져 버렸군요. 이 플러그는 구조적으로 상하의 흔들림에 약합니다. 그런데 엉성하게 만들었네요. 이 앰프 요즘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았나요?" "그러고 보니 그 뒤를 청소할 때 움직였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바로 그거야."하고 그가 말했다. "그거 오빠 회사 제품이죠? 그렇게 약한 플러그를 붙여 놓는 자체가 잘못이지."하고 여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만든 건 아니라구, 나는 광고를 만들고 있을 뿐이야."하고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땜질 인두가 있으면 곧 되겠는데요, 있습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나는 '없다.'고 했다.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제가 한달음에 사오겠습니다. 땜질 인두는 한 개쯤 있으면 편리하니까요." "그렇겠지, 그런데 철물점이 어디 있더라?"하고 나는 풀이 죽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까 그 앞을 지나서 왔으니까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나는 또 베란다로 얼굴을 내밀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앉아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죠?"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마음이 누그러지는군."하고 나는 말했다. 핀 플러그의 수리가 무사히 끝난 것은 5시 전이었다. 그가 가벼운 보컬을 듣고 싶다기에 여동생은 훌리오 이글레시어스의 레코드를 걸었다. 훌리오 이글레시어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맙소사 어떻게 그 따위 두더지 똥 같은 것이 집에 있었지? "형님은 어떤 음악을 좋아하십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물었다. "이런 거 좋아한다구."하고 나는 심통스럽게 말했다. "그밖에는 블루스 스프링스턴이라든가 제프 벡이라든가 도어즈라든가, 그런거지." "다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역시 이런 느낌의 음악입니까." "대개 비슷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지금 그가 속해 있는 프로젝트 팀이 개발중인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 이야기를 했다. 철도 사고가 일어났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되돌리는 운전을 하기 위한 다이어그램을 순간적으로 계산하는 시스템인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까, 확실히 편리하긴 하겠지만, 그 원리는 핀란드어의 동사 변화만큼 잘 알 수 없었다. 그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나는 적당히 받아넘기면서 줄창 여자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휴일에는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시고, 어디서 식사를 하고, 어느 호텔에 들어갈까, 뭐 그런 것이었다. 나는 필시 나면서부터 그런 것이 구미에 맞았다. 프라 모델을 만들고 전차의 다이어그램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편에 있듯이 나는 이런저런 여자와 술을 마시고 그녀들과 자는 것이 좋았다. 그런 것은 꼭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 숙명과도 같은 것일거다. 내가 네 병째 맥주를 거의 다 마셨을 무렵에 저녁 준비가 되었다. 메뉴는 스모크 서본과 버시 소워즈, 스테이크, 샐러드와 프라이드 포테이토였다. 평소나 다름없이 여동생이 만든 요리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샤브리를 따서 혼자 마셨다. "형님은 어떻게 전자 제품 회사에 취직을 하셨는지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전기에 대해 별로 취미도 없는 것 같은데."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텐덜로인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면서 물었다. "오빠는 대개 유익하고 사회적인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일자리는 어디라도 관계없는 거죠. 공교롭게 거기 연줄이 닿아서 들어갔을 뿐이에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맞았어."하고 나는 힘차게 동의했다. "머리 속엔 노는 일밖에 없어요. 뭔가 진지하게 탐구한다든가 그런 생각은 제로라고요." "여름 날의 베짱이."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을 삐딱하게 보고 즐기고 있다구요." "그건 아닌데. 남의 일과 내 일은 별개의 문제야. 나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정해진 열량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라구. 남의 일과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 삐딱하게 보지도 않고, 확실히 나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을 훼방놓거나 하진 않아."하고 나는 말했다. "별 볼일 없다니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필시 가정교육이 잘 되어 있다. "고맙네."하고 말하며 나는 포도주 잔을 치켜 들었다. "그리고 약혼을 축하하네, 혼자만 마셔서 안됐지만." "식은 10월에 올릴까 합니다. 다람쥐도 곰도 부르지 못하지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그거 마음에 두지 말게나."하고 나는 말했다. 어이쿠, 이 녀석 농담도 하는군. "그래 신혼 여행은 어디로 가지? 할인 요금으로 갈 수 있을 테지?" "하와이"하고 여동생이 간결하게 말했다. 그 다음 우리는 비행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안데스 산중의 비행기 조난 사건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을 뿐이라서 그 이야기를 했다. "사람 고기를 먹을 때에는 비행기의 듀랄루민 파편 위에다 고기를 올려 좋고, 태양 볕에 익혀서 먹는대."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식사 중에 어떻게 그따위 얘기를 할 수 있죠? 그런 악취미가 어디 있어요? 다른 여자아이를 꼬일 때도 식사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나요?"하고 여동생이 손을 멈추고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형님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으십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치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가 손님을 초대한 꼴과 같았다. "기회가 없어서."하고 나는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어린 여동생 시중도 들어주어야 했고, 오랜 전쟁도 있었고." "전쟁, 어떤 전쟁이죠?"하고 와타나베 노보루는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쓸데없는 농담이에요."하고 여동생은 드레싱을 뿌리면서 말했다. "그래, 쓸데없는 농담이야. 하지만 기회가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라구. 나는 성격이 편협한데다 양말도 제대로 빨아 신지 않았으니 함께 살아도 좋다는 생각을 해주는 멋진 여자아이를 만날 수가 없었다네. 자네하고 달라서 말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양말이 어떻다구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물었다. "그것도 농담이죠. 양말정도는 내가 매일 빨아 준다구요."하고 여동생이 지친 목소리로 설명했다. 와타나베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1초 반동안 웃었다. 이 다음에는 3초쯤 웃겨 주자고 나는 결심했다. "하지만 동생과는 줄창 함께 사셨지 않습니까?"하고 그는 여동생 쪽을 가리켰다. "그거야 여동생이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오빠가 멋대로 놀아도 내가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진짜 생활이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진짜 어른들의 생활이란 말이지, 진짜 생활이란 사람과 사람이 좀 더 정직하게 대하는 것이죠. 하긴 오빠와 함께 지낸 5년간의 생활은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어요. 자유롭고, 속 편하고. 하지만 최근에 와서 이런 것은 진짜 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생활을 실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오빠는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고 있고, 진지하게 말하려 해도 이죽거릴 뿐이고." "소극적일 뿐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오만한 거예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소극적이고 오만하고. 소극적인 것과 오만의 되돌리기 운전을 하고 있는 셈이지."하며 나는 포도주를 따르면서 와타나베 노보루를 향해 설명했다. "알 것 같습니다."하고 와타나베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하지만 혼자 있게 되면-말하자면 동생과 제가 결혼하면 그 말인데-역시 형님도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친구 중에 착한 아이가 있는데, 소개해 줄까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그때가 되면, 지금은 아직 위험 천만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자리를 거실 쪽으로 옮겨 커피를 마셨다. 여동생은 이번엔 윌리 넬슨의 레코드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훌리오 이글레시어스보다는 조금 괜찮았다. "저도 사실은 형님처럼 서른 가까이 까지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여동생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와타나베 노보루는 나에게 털어놓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자 왠지 결혼하고 싶어졌습니다." "괜찮은 애지. 다소 고집이 있고 변비 증세가 있지만, 선택은 잘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결혼한다는 거 어쩐지 두려워지는군요." "좋은 면만 보고 좋은 일만 생각하면 뭐 두려울 게 있겠나. 나쁜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면 그만이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나서 나는 여동생 곁으로 다가가 잠시 근처를 산책하고 오겠다고 했다. "10시 지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테니 둘이서 실컷 즐기라구, 시트도 갈았겠다." "이상한 쪽에만 정신을 파는군요." 여동생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내가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와타나베 노보루 곁에 가서, 이웃에 볼 일이 있어 다녀오겠는데 좀 늦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무척 즐거웠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자주 놀러 오십시오."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고맙네."하고 나는 상상력을 일시적으로 멈추고 말했다. "차는 가지고 가지 말아요. 오늘은 많이 마셨으니까." 나가는데 여동생이 말했다. "걸어갈게."하고 나는 말했다. 근처에 있는 바에 들어간 것은 8시 조금 전이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서 IW 하퍼의 온 더 록을 마셨다. 카운터 속의 텔레비전에서는 거인과 야쿠르트의 야구 중계를 방영하고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고 그 대신 신디 로퍼의 레코드가 걸려 있었다. 피처는 니시모토하고 오바나인데, 득점은 3대2로 야쿠르트가 이기고 있었다. 무음의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걸,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야구 중계를 바라보면서 온 더 록을 석 잔 마셨다. 9시가 되자 3대3의 동점인 채 7회 후반에서 야구 중계가 끝났다. 그러자 텔레비전도 꺼졌다. 내 자리 하나 건너 옆자리에 가끔씩 여기서 만나는 스무 살 안팎의 여자아이가 앉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중계가 끝나자 나는 그녀와 야구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자기는 거인의 팬인데, 어느 팀을 좋아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무 팀이면 어떠냐고 나는 대답했다. 단지 시합 자체를 보는 것이 좋다고. "그런 게 무슨 재미일까? 그런 식으로 야구를 보면 열중할 수 없잖아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열중 안해도 좋아. 어차피 남들이 하고 있는 일인걸." 10시가 되자 나와 그녀는 그 바를 나와서, 좀 더 편안한 의자가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나는 거기서 또 위스키를 마시고, 그녀는 글라스 호퍼를 마셨다. 그녀는 상당히 취해 있었고, 나도 아닌게 아니라 취해 있었다. 11시가 되자 나는 그 여자를 바래다 줄 겸 그녀의 아파트로 가서 당연한 일처럼 섹스를 했다. 방석과 차를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을 꺼요."하고 그녀가 말하기에 나는 불을 껐다. 창으로는 커다란 니콘 광고탑이 보였고, 옆집으로부터는 텔레비전의 프로 야구 중계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어두운데다 상당히 취해 있어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것은 섹스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페니스를 움직여 정액을 방출하는 것뿐이다. 적당히 간략화한 한바탕의 행위가 끝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내 잠이 들어서, 나는 제대로 정액도 닦지 못한 채 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옷과 뒤섞여 있는 나의 폴로셔츠와 바지와 팬티를 찾아내는 것은 적잖은 고생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취기가 한밤중의 화물열차처럼 급격하게 나의 몸 속을 빠져나갔다. 정말이지 지독한 기분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사나이처럼 몸이 삐걱거렸다. 술을 깨려고 자동 판매기의 쥬스를 한 병 마시자마자 나는 위 속의 것을 전부 토해냈다. 스테이크랑 스모크 서본이랑 레터스랑 토마토의 잔해들이었다. 아이구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술을 마시고 토하다니, 도대체 몇 년 만일까?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더욱 나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나서 나는 불쑥 와타나베 노보루와 그가 사온 땜질 인두를 생각했다. "땜질 인두 하나쯤 있으면 편리하니까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는 말했다. 건전한 생각이지, 하고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자네 덕분에 드디어 우리 집에도 땜질 인두가 생겼군. 하지만 그 땜질 인두 탓으로 거기는 나의 집이 아닌 양 느껴졌다. 아마도 그것은 내 성격이 편협한 탓이겠지. 내가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한밤중이 지나서였다. 물론 현관 옆에 오토바이의 모습을 없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로 4층까지 올라가 자물쇠를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개수대 위에 조그만 형광등이 하나 켜져 있을 뿐 나머지는 캄캄했다. 여동생은 지쳐서 먼저 자버린 모양이다. 그 기분 알 만하다. 나는 유리잔에다 오렌지 쥬스를 따라 단숨에 들이키고, 그리고 나서 샤워실로 들어가 비누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땀을 씻어내고 정성스레 이를 닦았다. 샤워실에서 나와 세면장의 거울을 보자 스스로도 오싹하리만큼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마지막 전차의 시트에서 볼 수 있는 추한 주정뱅이 중년 남자의 얼굴이었다. 피부는 거치고 눈은 움푹 꺼지고 머리에는 윤기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세면장의 전깃불을 끄고 목욕 타월을 한 장 허리에 두른 모양새로 주방으로 돌아와 수돗물을 마셨다. 내일이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안되면 또 다음날 생각하자. 오브라디 오브라다, 인생은 흘러간다. "많이 늦었네요."하고 어둑한 속에서 여동생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술 마시고 있었어?" "오빤 너무 과해요." "알고 있어."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어 손에 들고, 여동생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이따금 맥주만 들이키고 있었다. 바람이 베란다 화분의 잎을 흔들고, 그 저편에는 멍청하게 반달이 보였다. "말해 두지만 하지 않았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뭘?" "뭐든지, 마음에 걸려서 할 수 없었다구요." "헤에." 나는 반달이 떠 있는 밤에는 어쩐지 말이 없어진다. "뭐가 걸렸느냐고 묻지 않아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뭐가 걸렸는데?"하고 나는 물었다. "이 방이. 이 방이 마음에 걸려서 여기서는 할 수 없어요, 나는." "흐응." "아니, 어쩐 일이에요? 몸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피곤해, 나라고 피곤하지 않을까?" 여동생은 잠자코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남은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등받이에다 목을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오빠, 우리 때문에 피곤해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아니야."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말하기에 지쳤다, 그거에요?"하고 여동생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동생 쪽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어, 오늘 내가 오빠한테 좀 심한 말을 했잖아요? 이를테면 오빠 자신에 대해서라든가, 오빠와의 생활에 대해서라든가..." "아니야." "정말?" "너는 요즘 줄곧 옳은 말만 했지. 그러니 신경 쓸 거 없다구.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지?" "그가 돌아가고 나서 줄고 여기 앉아서 오빠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좀 지나친 말을 한 게 아닌가 하는."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 두 개를 꺼내고, 오디오의 스위치를 넣어 작은 소리로 리치 바이라크 트리오의 레코드를 걸었다. 한밤중에 취해서 돌아왔을 때 늘 듣는 레코드였다. "좀 혼란스러워. 생활의 변화 따위에 대해서 말이야. 기압의 변화와 마찬가지야. 나도 내 나름대로 얼마만큼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거야."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빠한테 대들어서요?" "다들 누군가에게 대들고 있어. 하지만 만약 네가 그 중에서 나를 뽑아 대들고 있다면, 그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어. 그러니까 신경 쓸 거 없다구." "때때로 어쩐지 굉장히 무서워요. 앞날의 일들이." "좋은 면만 보고 좋은 일만을 생각하도록 해. 그럼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면 돼."하고 나는, 와타나베 노보루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렇게 잘 될지 모르겠네요." "잘 안되면 그때 가서 또 생각하면 돼." 여동생은 깔깔 웃었다. "오빠는 옛날이나 다름없이 묘한 사람이야."하고 동생이 말했다. "이봐,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하고 나는 맥주의 풀링을 따면서 말했다. "좋아요." "그말고 앞에 몇 남자하고 잤지?" 동생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손가락을 두 개 내보이며 말했다. "두 사람." "한 사람은 동갑이었고, 또 한 사람은 연상의 남자였지?" "그걸 어떻게 알죠?" "상식이지."하고 말하며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나라고 무작정 놀고 잇는 건 아니라구, 그 정도는 알아." "표준이라는 건가요?" "건전하다, 그거지." "오빠는 몇 여자하고 잤어요?" "스물여섯 명. 요전에 세어봤지. 생각나는 것만 스물 여섯명. 생각나지 않는 것이 열 명쯤 있을지 몰라. 일기에 적어 두는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여자하고 자요?" "몰라, 어디선가 끝을 맺어야 하겠는데, 나 스스로도 계기를 잡지 못하는 거야."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 다음에도 말없이 나름대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멀리서 오토바이의 배기음이 들렸는데, 그것이 와타나베 노보루일 까닭은 없었다. 이미 새벽 1시였다. "있잖아요,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와타나베 노보루?" "그래요."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내 구미에 맞지 않고 복장에 대한 취향도 약간 동떨어진 건 있지만"하고 조금 생각하고 나서 나는 솔직하게 덧붙였다. "하기야 한 집안에 한 사람쯤 그런 사람이 있어도 괜찮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오빠가 좋아요. 하지만 세상 사람이 다 오빠 같다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돼버리지 않을까요?" "그렇겠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나머지 맥주를 마시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시트는 새것이라 청결했고 주름 하나 없었다. 나는 그 위에 몸을 눕히고, 커튼 사이로 달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하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눈을 감자 졸음은 어두운 망처럼 소리 없이 머리 위에서 내려와 나를 덮었다. 레더호젠 내가 이 책에 수록된 일련의 스케치 비슷한 것을 쓰려고 생각한 것은 몇 년전 여름이었다. 그 이전까지 나는 이런 종류의 문장을 쓰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만일 그녀가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던들-그리고 이러한 이야기가 소설의 제재로서 성립될 수 있는지 어떤지 하고 질문해 오지 않았던들-나는 어쩌면 이 책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성냥을 그어 준 건 그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성냥을 긋고 나서, 그 불이 나의 몸에 옮겨 타오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나의 몸에 달려 있는 도화선 중의 어떤 것은 몹시 길이가 길단 말이다. 때로 그것은 너무나 길어서, 나 자신의 행동 규범이나 감정의 평균적인 수명마저 넘어서고 마는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불이 간신히 몸에 와 닿더라도, 이미 거기에선 아무런 의미도 찾아볼 수 없는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경우, 발화는 어떻게 어떻게 그 제한 시간 안에 수습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나는 이 문장을 쓰기에 이르렀다. 그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 건 아내의 예전 동급생이었다. 그녀와 나의 아내는 학교 시절에는 특별히 친했던 건 아니었는데, 서른이 넘은 후 공교로운 장소에서 딱 마주치고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로 꽤나 친하게 오가게 되었다. 나는 가끔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의 친구만큼 기묘한 존재는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래도 그녀에게는 최초로 만났을 때부터 일종의 호감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녀는 여자치고는 무척 몸집이 큰 편으로, 키나 체격이 나와 거의 같을 정도였다. 직업은 엘렉톤(전자 오르간)교사였는데, 근무 이외 시간의 태반을 수영이나 테니스, 스키에 할당하고 있었으므로, 근육은 긴장되어 탄탄하고 항상 산뜻하게 그을려 있었다. 각종 스포츠에 대한 그녀의 의욕은 광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정열적이었다. 휴일이 되면 그녀는 조깅을 마치고 나서 근처의 온수풀에서 한바탕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두세 시간 테니스를 치고, 그리곤 에어로빅도 했다. 나도 스포츠는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질 면에서나 양 면에서 도저히 그녀를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적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그녀가 갖가지 사물에 대해 병적이었거나 편협했거나 공격적이었거나 했다는 건 아니다. 반대로 그녀는 천성적으로 온순한 성격이어서, 감정적으로 타인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다만 그녀의 육체가, 그리고 그 육체에 따라 정신이, 혜성처럼 끊일 새 없는 격렬한 운동을 희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독신이었다. 물론-다소 덩치가 크긴 하지만 그런 대로 미인이라고 할 만했으니까-몇 번인가 연애도 했고, 결혼 신청을 받은 적도 있었으며, 그녀 자신도 결혼할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결혼할 단계가 되면 거기에 반드시 그 어떤 뜻밖의 장애가 생겨서, 그 이야기는 그대로 없었던 것이 되고 말기가 일쑤였다. "운이 나쁜 거예요."하고 아내는 말했다. "그렇군."하고 나도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전적으로 아내의 의견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 분명 인생의 어느 부분은 '운'이라는 것에 지배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얼룩진 그림자처럼 우리 인생의 지표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만약 거기에 의지라는 것이 존재한다면-그리고 그것이 20킬로미터를 달리고, 3킬로미터를 헤엄칠 수 있을 만큼의 강한 의지라면-대개의 문제점을 편의적인 사닥다리 같은 물건을 사용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결혼하지 못하는 건, 그렇게 하기를 그녀가 '진심으로' 바라지 않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요컨대 결혼이라는 것이 그녀의 혜성 같은 에너지 범위 내에 전적으로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녀는 엘렉톤 교사를 계속했으며, 틈만 있으면 스포츠에 열을 올리고 정기적으로 불운한 연애를 했다. 대학 2학년때 양친이 이혼한 이래, 그녀는 아파트를 빌려 줄곧 독신 생활을 계속해왔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린 거예요. 반바지 문제가 원인이래요."하고 어느 날 그녀는 나한테 말해 주었다. "반바지?" 나는 깜짝 놀라서 물어 보았다. "우스꽝스런 얘기라구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얘기라서, 다른 사람한테 별로 얘기한 적도 없어요. 당신은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어떤 도움이 되지 않을까 모르겠네요. 듣고 싶어요?" 나는 부디 들려 달라고 했다. 비 오는 그 일요일 오후에 그녀가 나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아내는 쇼핑하러 나가고 없었다. 그녀는 약속한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찾아왔던 것이다. "미안해요. 테니스 강습이 비 때문에 취소되어서 시간이 남았어요. 집에 혼자 있으려니 따분하고 해서, 일찌감치 찾아뵐까 한 건데 방해되는 건 아닌가요?" 나는 별로 방해될 것도 없다고 했다. 나도 일할 생각이 나지 않아서, 고양이를 무릎에 안고 혼자서 멍하게 비디오 영화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그녀를 집에 들이고, 주방에서 커피를 끓여서 냈다. 그리고 둘이서 커피를 마시면서 <조스>의 마지막 20분 가량을 함께 보았다. 하긴 둘이 다 그 영화를 이전에 몇 번이나 보았으므로, 특별히 열심히 감상했던 건 아니었다. 우선은 그저 무엇인가 볼 것이 필요해서 그걸 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끝' 자막이 나오고 나서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와 얼마 동안 잡담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상어 얘기를 하고, 바다 얘기를 하고, 수영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앞서도 말했듯이 그녀에 대해 결코 나쁜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었지만, 그래도 얼굴을 맞대고 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누기에는 우리 사이의 공감대가 부족했다. 요컨대 그녀는 나의 아내의 친구지, 내 친구는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내가 무료해져 차츰 다음 영화라도 볼까 생각하고 있는 참에, 그녀가 갑자기 양친의 이혼 얘기를 시작했다. 어째서 그녀가 두서없이-적어도 나는 수영 얘기와 양친의 이혼 얘기 사이에는 명확한 맥락을 찾아낼 수 없을 것 같다-그러한 화제를 꺼내게 됐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거기엔 그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반바지라는 건 정확한 이름이 아니에요."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레더호젠... 레더호젠이란 것을 정화하게 알고 있어요?" "독일인들이 잘 입는 반바지 아닌가? 위쪽에 멜빵이 달린 것"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죠. 아버지가 그걸 선물로 사달라고 했대요. 그 레더호젠을 말예요. 우리 아버진 그 시대의 사람치고는 퍽이나 키가 큰 편이어서, 그런 반바지 같은 게 비교적 잘 어울리는 체형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걸 입고 싶어하셨나 봐요. 전 레더호젠은 일본인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뭐 그건 사람 나름이겠지만." 이야기를 정돈하기 위해서,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레더호젠을 선물로 사달라고 부탁했는지 질문했다. "미안해요, 전 언제나 얘기하는 순서가 거꾸로 돼버리곤 하죠. 그러니까 이해할 수 없는 데가 있으면 사양 말고 질문하세요. 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이모가 그 즈음 독일에 살고 있었는데, 놀러 오지 않겠냐고 어머닐 부추겼대요. 어머닌 독일어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외국 여행 경험도 없었지만, 오랫동안 영어 교사를 하고 있었던 탓에 한 번쯤 외국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던가 봐요. 뿐더러 오랫동안 이모와도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아버지한테 한 열흘쯤 휴가를 얻어 둘이서 독일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꺼냈었는데, 아버진 사업 관계로 아무래도 휴가를 낼 수가 없어서, 어머니 혼자서 독일로 가게 됐던 거예요." "그때에 아버님이 어머님께 레더호젠을 선물로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인가요?" "예, 그래요. 어머니가 선물로 무엇을 갖고 싶냐고 물으니까, 레더호젠이 갖고 싶다고 아버지가 대답했거든요." "옳거니."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무렵 그녀 양친의 사이는 비교적 친밀한 편이었다. 적어도 큰 소리로 밤중에 언쟁을 하거나, 아버지가 화를 내고 며칠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예전에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었던 시절엔 그런 경우가 몇 번인가 있었던 것이다. "성격도 나쁘지 않겠다, 꼼꼼히 일처리도 잘하는 분이었겠다, 한데도 여자 관계에선 비교적 흐리멍텅한 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한순간 그녀의 부친이 이미 돌아가셨나 보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그 즈음엔 아버지도 이미 나이가 들었었고, 그런 문제도 없어졌고 해서, 그런 대로 의좋게 지낼 것만 같았다고요." 그러나 실제로 만사가 그렇게 잘 되어 가지는 않았다. 그녀의 모친은 당초 예정같아서는 열흘 동안 독일에서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한달 반으로 연기했고, 가까스로 귀국한 후에도 오사카에 있는 또 다른 여동생 집에 머문 채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되고 말았는지 딸인 그녀로서도 남편인 그녀의 부친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수밖에, 비록 여태껏 몇 번인가의 불화가 있긴 했어도 그녀의 모친은 천성적으로 참을성이 많았고-어떤 경우엔 상상력이 좀 부족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참을성이 많았고-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으며, 딸을 지극히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으며, 제대로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들로서는 짐작할 수조차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나 부친이 오사카의 이모네 집에 몇 번인가 전화를 걸어도, 모친은 거의 전화를 받지 않아서 그녀에게 진의를 따져 물을 수조차 없었다. 모친의 진의가 드러난 것은, 그녀가 독일에서 귀국한 지 두 달 가량이 지난 9월 중순의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집에다 전화를 걸어서, 남편을 향해 "이혼수속에 필요한 서류를 보내니 서명 날인을 하고 돌려보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느냐"고 부친이 물었다. 모친은 즉석에서 '당신에 대해 그 어떤 형태의 애정도 가질 수 없게 됐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서로간에 다가설 만한 여지가 없겠느냐고 부친이 물었더니, 그녀는 전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고서 두 달인가 세 달동안 양친 사이에서 전화를 통한 실랑이며, 교섭이며 타진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모친은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부친도 마지막엔 체념하고 이혼을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의 갖가지 경위로 해서 부친 쪽은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으며, 게다가 원래 만사를 쉽게 체념하는 성격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일로 해서 저는 무척 쇼크를 받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다만 단순히 이혼이라는 행위 자체로부터 받은 쇼크는 아니었어요. 저는 그때까지 몇 번인가 두 사람이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구요, 거기에 대한 정신적 준비는 이미 다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극히 당연한 형태로 두 사람이 이혼했었더라면, 그토록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거예요. 문제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저마저 버렸다는 거였어요. 그 일로 해서 저는 아주 혼란스러웠고, 깊은 상처를 입었던 거예요. 아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때까지 줄곧 어머니 편에 서 있었고, 어머니도 저를 신뢰하고 있는 줄로만 믿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도 어머닌 아무 설명다운 설명도 없이 아버지와 함께 저를 버린 거예요. 그런 저로선 어머니의 결정은 더할 수 없이 심한 행동으로 여겨졌고, 그로부터 오랫동안 저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게 됐던 거예요. 저는 어머니한테 몇 번이나 편지를 써서, 모든 것을 확실히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었지만, 어머니는 그 일에 관해선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어요. 저를 만나 보고 싶다는 말 조차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모친을 만난 건 그로부터 3년 후의 일이었다. 친척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두 사람은 가까스로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그녀는 대학을 나와 엘렉톤 교사로 있었고, 모친 쪽은 영어 학원의 교사로 재직중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모친은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이제까지 너한테 아무 말도 안한 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얘기하면 좋을 지 알 수 없어서 그랬다. 나 자신조차 일이 어떻게 되어 나가는지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나 말이다. 하지만 애당초 말썽은 그 반바지가 원인이었단다." "반바지라뇨?"하고 그녀는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며 어머니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그대까지 모친과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은 호기심이 노기를 제쳐 버렸다. 그녀는 모친과 상복 차림인 채 함께 근처 다방에 들어가, 냉차를 마시면서 그 반바지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 반바지, 곧 레더호젠을 파는 가게는, 함부르크에서 전차를 타고 한 시간 가량 걸리는 조그마한 도시에 있었다. 모친의 여동생이 그 가게를 알아보아 주었던 것이다. "독일사람 모두가 레더호젠을 사려면 그 가게가 제일 좋다고들 해. 제품도 아주 확실하고, 값도 그다지 비싸지 않대."하고 동생이 말했다. 모친은 혼자서 전차를 타고, 남편에게 줄 선물로 레더호젠을 사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그녀는 열차의 객실에서 독일인 중년 부부와 같이 있게 되어 영어로 잡담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선물할 레더호젠을 사기 위해 가요.'하고 하자, 그 독일인 부부는 '어느 가게를 갈 참인가요?'하고 물었다, 그녀가 가게 이름을 말하자,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그러면 틀림없어요, 그 가게가 제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참으로 기분 좋은 초여름의 오후였다. 거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은 시원한 물소리를 들려주고, 냇가의 풀들은 그 초록 잎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동그란 자갈들을 깔아 놓은 낡은 도로가 느슨한 곡선을 그리면서 어디까지나 이어지고, 어디에서나 고양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침 눈에 띈 커피 하우스에 들어가, 거기에서 점심 대신에 치즈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거리의 모습은 아름답고 조용했다. 그녀가 커피를 마시고 나서 고양이와 놀고 있자니까, 커피 하우스의 주인이 오더니 이제부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레더호젠을 사러 왔다고 말하자, 주인은 메모 용지를 집어들고 와서는 그 가게의 위치를 그려 주었다. "정말 고마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혼자서 여행한다는 건 참 멋지구나, 하고 그녀는 동글한 자갈돌을 깔아 놓은 도로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이건 그녀에게 있어선 55년이라는 인생 중 비로소 혼자 해보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혼자서 독일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외로움이나 두려움이나 따분함은 단 한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모든 풍경은 신선하고, 모든 사람들은 친절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들 하나하나가, 오랫동안 쓰여지지 않고 그녀의 육체 속에 잠들어 있던 갖가지 종류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녀가 이제까지 소중하게 부둥켜안고 살아왔던 가지가지것들-남편이며, 딸이며, 가정-은 이미 지구의 뒤쪽에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것들에 대해 무엇 하나도 걱정하거나 머리를 썩히거나 할 필요가 없었다. 레더호젠을 파는 가게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쇼윈도도, 화려한 간판도 없는 조그만 낡은 가게였지만,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레더호젠이 주욱 진열되어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서는 두 노인이 일하고 있었다. 두 노인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면서 포목의 치수도 재고, 노트에 무엇을 써넣기도 했다. 커튼으로 칸막이를 한 가게 안쪽은 한층 넓은 작업장으로 되어 있는 듯, 그쪽에서는 단조로운 재봉틀 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사모님."하고 몸집이 큰 노인이 일어서면서 독일어로 말을 걸어왔다. "레더호젠을 사려고요."하고 그녀는 영어로 말했다. "사모님께서 입으시려고요?"하고 노인이 어색한 영어로 물었다. "아뇨, 그렇진 않아요. 일본에 있는 남편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요." "아하!"하고 노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다면 바깥양반은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 말씀이시군요?"하고 했다. "그렇죠, 물론...그럼요, 일본에 있으니까요."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거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요컨대 저희들은 존재하지 않는 고객에겐 물건을 판매할 수 없다, 그 말씀입니다."하고 노인은 정중하게 말을 고르면서 말했다. "제 남편은 존재합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바깥양반은 존재하고 계시겠지요. 물론입니다."하고 노인은 당황한 듯 말했다. "영어를 잘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음, 바깥양반이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면, 바깥양반을 위한 레더호젠을 판매할 수 없다, 그 말씀입니다." "어째서요?"하고 그녀는 혼란스런 머리로 물었다. "가게의 방침입니다, 방침. 저희들은 저희 가게로 찾아오신 고객에게 , 체형에 맞는 레더호젠을 실제로 입어 보시게 하고, 알맞게 고치고 나서 비로소 판매합니다. 백 년도 더 되는 동안, 저희들은 그렇게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방침 덕분에 저희들은 신용을 쌓아 온 것입니다." "전 댁에서 만든 바지를 사기 위해, 반나절이나 걸려 모처럼 함부르크에서 찾아왔단 말예요." "죄송합니다, 사모님."하고 정말 죄송하다는 듯이 노인은 말했다. "하지만 예외라는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신용이라는 것만큼 얻기가 어렵고, 그리고 무너지기 쉬운 건 없답니다." 그녀는 한숨을 짓고, 얼마 동안 문가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돌파구는 없을까 하고 머리를 회전시켜 보았다. 그러는 동안 키 큰 노인이 키 작은 노인을 향해 독일어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키 작은 노인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아, 야아(그래, 그래)'하고 번번이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두 노인은 키는 퍽 차이가 났으나, 얼굴 생김새는 쌍둥이라고 할만큼 닮아 있었다. "이것 보세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요? 제가 남편과 똑같은 체형의 사람을 찾아 가지고 이리 올게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 반바지를 입혀 보고 당신네들이 그걸 조정해서, 저한테 팔면 어떨까요?"하고 그녀는 제안을 했다. 키 큰 노인은 아연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나 말씀드렸지만, 사모님, 그건 규칙 위반입니다. 바지를 입을 분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사모님의 바깥양반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건 안 되겠습니다." "댁들은 알지 못하는 일로 해두면 되잖아요. 댁들은 그 사람에게 레더호젠을 팔고, 제가 그 사람에게서 그걸 사면 댁들 방침엔 하자가 없지 않겠어요. 안 그런가요? 저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독일에 오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 만을 지금 레더호젠을 사지 않으면 전 영원히 그걸 손에 넣을 수 없을 거란 말예요." "음..."하고 키 큰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키 작은 노인에게 다시 독일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키 큰 노인이 이야기를 끝내자, 이번엔 키 작은 노인이 독일어로 한바탕 지껄였다. 그러한 응수가 몇 번인가 계속되었다. 그것이 끝나자 키 큰 노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사모님. 예외적으로-어디까지나 예외적으로-저희들은 일의 경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일본에서까지 저희 레더호젠을 사러 오시는 분이 그리 많이 계시는 것도 아니고, 저희 독일인도 그토록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올시다. 되도록 바깥양반과 꼭 닮은 체형을 가지신 분을 찾아오십시오. 제 형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마워요."하고 그녀는 말하고 나서 형이라는 노인을 향해 다시 독일어로 말했다. "디스 이스트 조 네트 폰 이넨(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나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 아내의 친구-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책상 위에 두 손을 포개고 한숨을 돌렸다. 나는 다 식어 버린 커피의 나머지를 마셨다. 비는 아직도 계속 내리고, 아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야기가 이제부터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지, 나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꼭 닮은 체형의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요?"하고 어서 결말이 났으면 하고 나는 끼어들었다. "예, 찾아내긴 찾아냈죠. 어머닌 벤치에 앉아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그 중에서 아버지와 체형이 똑같은, 되도록 인상이 좋아 보이는 사람을 골라, 가타부타 설명도 않고-그 사람은 영어를 전혀 못했으니까-가게로 데리고 갔어요"하고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퍽이나 행동력 있는 분인가 보군요." "저로선 잘 모르겠어요. 글쎄, 일본에 있을 땐 어느 쪽이냐 하면 온순하고 상식적인 분이었는걸요."하고 그녀는 한숨을 쉰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 남자 분은 가게 사람한테서 일의 경위를 설명 듣고는 좋다, 그런 일이라면 하면서, 모델이 될 것을 선뜻 승낙해 주더라 그거예요. 그리곤 레더호젠 걸치고, 가게 사람이 이쪽저쪽 여러 군데를 늘이고 줄이고 했대요. 그리고 그러는 동안 그 남자분과 두 노인은 독일어로 농담을 하고선 서로 웃고 웃기고 하더래요. 그리고 한 30분 만에 그 작업이 끝났을 때, 어머닌 아버지와 이혼할 것을 결심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야기의 줄거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군. 즉, 그 30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말인가?" "아니요, 아무일도 없었어요. 세 독일인이 화기애애하게 서로 농담을 주고 받았을 뿐." "그럼 어째서 어머닌 그 30분 동안에 이혼할 결심을 할 수 있었단 말이죠?" "그건 어머니 자신으로서도 줄곧 알 수 없었던 일이래요. 그래서 어머니도 몹시 혼란스러웠던가 봐요. 어머니가 알 수 있었던 건, 그 레더호젠을 걸친 남자를 가만히 보고 있는 동안에 아버지에 대한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혐오감이 몸 속 아주 깊은 데서부터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라 왔다는 것뿐이래요. 그분으로선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대요. 그 사람은-그 레더호젠을 걸쳐 입은 남자-피부색만 빼면 아버지와 정말로 꼭 닮은 체형을 하고 있었대요. 다리 모양하며, 배 모양하며, 머리털이 없어진 모양까지 말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새 레더호젠을 걸치고 사뭇 즐거운 듯 몸을 흔들면서 웃어대더라지 뭐예요. 어머닌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중에 자신 속에서 이제까지 막연하던 하나의 생각이 조금씩 명확하게 되고, 단단히 굳어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대요. 그리고 어머닌 자신이 얼마만큼 지독히 남편을 미워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는 거예요." 아내가 쇼핑에서 돌아와 그녀와 둘이서 수다를 떨기 시작하고 나서도, 나는 혼자서 줄곧 그 레더호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셋이서 식사를 하고, 그리곤 가볍게 술을 마셨을 때에도 나는 아직 그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이제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나요?" 나는 아내가 자리를 뜰 때를 보아 그녀에게 그렇게 물어 보았다. "그래요. 이젠 미워하지 않아요. 결코 친밀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미워하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 반바지 이야기를 들려줬기 때문인가요?" "예, 그래요. 그런가봐요. 그 얘길 들은 후로 저는 어머니를 계속 미워할 수가 없게 됐거든요. 왜 그런지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요. 분명 그건 우리 두사람이 여자이기 때문이 아닌가 해요." 나는 수긍했다. "그래서 가령...가령, 아까의 이야기에서 반바지 부분을 빼버리고, 한 여성이 여행길에서 자립을 획득한다는 것만의 이야기였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머니가 당신을 버린 사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안되겠죠."하고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고서 "이 얘기의 포인트는 반바지에 있는걸요."하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하고 나는 말했다. 로마제국의 붕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걸 느낀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정확히 말하면 오후 2시 7분이다. 그때 나는 여느 때처럼-즉, 언제나 일요일 오후면 그렇듯이-부엌의 식탁 앞에 앉아서 괜찮은 음악을 들으면서 일주일분의 일기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메모해 뒀다가 일요일에 그것들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정리하고 한다. 화요일까지의 사흘분 일기를 다 쓰고 났을 때 나는 창밖을 휩쓸고 가는 거센 바람 소리를 느꼈다. 나는 일기 쓰던 일을 중단하고, 펜 뚜껑을 덮은 다음, 베란다로 나가서 빨래를 걷어들였다. 빨래는 마치 떨어져 나가려는 혜성의 꼬리처럼 퍼덕퍼덕 메마른 소리를 내면서 공중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조금씩 기세를 더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아침에-정확히 말하면 오전 10시 48분에-빨래를 베란다에 넣었을 때에는, 바람 같은 건 살짝도 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나는 용광로의 뚜껑만큼이나 완강하고도 확실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바람이 없는 날엔 빨래를 집게로 집어 놓을 필요도 없겠군,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바람 같은 건 결코 한 줄기로 불지 않았었단 말이야.' 나는 빨래를 솜씨 있게 착착 개어서 쌓아 놓고, 아파트의 창문을 전부 꼭꼭 닫았다. 창문을 전부 닫아 버리자, 바람 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았다. 창 밖으로, 나무들-히말라야 삼목과 밤나무-이 소리는 없이 꼭 가려움증에 못 견디는 개처럼 몸을 배배 꼬고, 구름 조각이 눈초리가 언짢은 밀사처럼 황급히 하늘을 달려가고, 맞은편 아파트의 베란다에선 몇 벌의 셔츠가 버림받은 고아처럼 빨랫줄에 둘둘 감긴 채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꼭 폭풍 같은걸,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신문을 펴고 일기도를 들여다보아도, 어디에도 태풍의 징후 같은 건 없었다. 비가 올 확률은 완전히 제로였다. 일기도에 의하는 한, 그날은 전성기의 로마제국처럼 평화로운 일요일이어야 했다. 나는 30퍼센트 가량의 가벼운 한숨을 쉬고, 신문을 접은 후, 빨래를 장롱 속에 정리해 넣고, 괜찮은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끓여 마시고 일기를 계속 썼다. 목요일에 나는 여자친구와 잤다. 그녀는 섹스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 비행기의 오바-나이트 백에 들어있는 헝겊 눈가리개를 가지고 다녔다 나는 그런 취미를 특별히 가졌던 건 아니지만, 눈가리개를 한 그녀가 굉장히 귀여웠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해선 아무런 이의를 갖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이란, 모두 다 조금씩 어딘가 다르게 마련이니까. 나는 일기의 목요일 치에 그런 것을 대강 썼다. 80퍼센트의 사실과 20퍼센트의 성찰이 일기 기술의 요건이다. 금요일에 나는 긴자의 서점에서 옛 친구를 만났다. 그는 몹시 야릇한 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줄무늬 바탕에 무수한 전화번호가... 여기까지 썼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1881년의 인디언 봉기 전화벨이 울렸을 때, 시계는 2시 3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십중팔구 그녀일 거라고-즉, 눈가리개하기를 좋아하는 나의 여자친구일거라고-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요일에 나에게 놀러 오기로 돼 있었으며, 나한테 올 땐 언제나 미리 전화를 거는 게 그녀의 습관이었다. 그녀가 저녁 식사 거리를 사오기로 했었다. 그날 우리는 굴 모듬 요리를 해먹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아무튼 전화 벨이 울린 건 오후 2시 36분이었다. 자명종 시계가 전화 옆에 놓여 있어서, 나는 전화 벨이 울릴 때마다 시계를 보곤 했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해서도 내 기억은 완벽하다. 그러나 내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을 때, 거기서 들려온 것은 강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고오오오오오우"하는 바람 소리만이, 1881년의 인디언 봉기처럼 수화기 속에서 광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척 가옥을 불태우고, 통신선을 끊고, 캔디스 바겐을 침범했었다. "여보세요"하고 나는 말해 보았지만, 나의 목소리는 압도적인 역사의 성난 물결 속으로 흔적없이 빨려 들어갔다. "여보세요" 나는 큰 소리로 외쳐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바람의 틈새로부터 아주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 비슷한 것이 언뜻 들린 것 같았으나, 그것은 어쩌면 나의 착각일 지도 몰랐다. 아무튼 바람의 기세는 너무 강했다. 그리고 아마도 버팔로의 수효가 너무나 줄어들었을 것이다. 나는 얼마간 아무 말도 않고 수화기에 가만히 귀를 대고 있었다. 귀가 수화기에 달라붙어서 떼어낼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할만큼 찰싹대고서. 하지만 15초 내지 20초 정도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마치 발작이 고조된 궁극에서, 생명의 실오라기가 끊어지기나 하듯, 그 전화는 뚝 끊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는 지나치게 표백된 속옷 같은, 따스함이 없는 휑뎅그렁한 침묵만이 남았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 "아아"하고 나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일기를 계속 써나갔다. 서둘러 써버리는게 좋을 것 같았다. 토요일에는 히틀러의 기갑사단이 폴란드에 침입하고 있었다. 급강하 폭격기 바르샤바 거리에...아니지, 틀리다. 그렇지 않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은 1939년 9월 1일의 사건이다. 어제 일은 아니다. 어제 나는 저녁 식사 후에 영화관에 가서 메릴 스트립이 주인공으로 나온 <소피의 선택>을 보았던 것이다. 히틀러가 폴란드에 침입한 건 그 영화 속의 사건이다. 메릴 스트립은 그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과 이혼하는데, 통근 열차 안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분장한 중년의 토목기사와 알게 되어 재혼을 한다. 무척 재미있는 영화였다. 나의 옆자리에는 고교생 커플이 있었는데, 서로의 배 부분을 줄곧 더듬고 있었다. 고교생의 배부분이란, 그리 나쁘지는 않다. 나만해도 옛날엔 고교생의 배 부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강풍 세계 나는 지난주분 일기를 전부 쓰고 나서 전축 앞에 앉아, 강풍이 휘몰아치는 일요일 오후에 듣기 알맞을 성싶은 음악을 골라 보았다. 결국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콘체르토와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의 레코드가 그런 바람이 부는 날에는 어울릴 것 같아서 나는 그 두 장의 레코드를 계속해서 들었다. 창 밖으로 가끔씩 갖가지 물체가 날아 지나갔다. 하얀 시트가, 풀뿌리를 삶고 있는 마술사처럼,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아갔다. 가늘고 길다란 새 양철 간판은 항문 성애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그 연약한 척추를 발랑 젖뜨리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콘체르토를 들으면서 그런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까, 또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 옆의 자명종 시계는 3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보세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여보세요."하고 나도 말했다. "지금 굴 요리 재료를 갖고 그쪽으로 가고 싶은데, 괜찮겠어요?"하고 나의 여자 친구가 말했다. 그녀는 굴 요리 재료와 눈가리개를 가지고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 하지만..." "뚝배기 갖고 있어요?" "갖고 있어." "하지만, 왠일이지? 바람 소리가 안 들리는군." "그래요, 이제 바람은 그친걸요. 나카노에선 3시 25분에 그쳤으니까, 이제 슬슬 그쪽에서도 그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는 전화를 끊고, 부엌 찬장에서 뚝배기를 꺼내 싱크대에서 씻었다. 그녀가 예고한 것처럼 바람은 4시 5분전에 뚝 그쳤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창 밑에서는 커다란 검정 개가, 킁킁거리며 흙 냄새를 열심히 맡으며 돌아다녔다. 개는 15분 내지 20분 가량이나 싫증도 안 나는지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개가 어째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나로선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은 별도로 하고, 세상의 모습과 그 역할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기 전과 어느 한가지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히말라야 삼목과 밤나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침하게 빈터에 서 있었고, 빨래는 빨랫줄에 축 늘어져 있었으며, 까마귀는 전봇대 꼭대기에 앉아서 크레디트 카드처럼 미끌미끌한 날개를 위아래로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여자 친구가 와서 굴 냄비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엌에서 굴을 씻고 사각사각 배추를 썰고, 두부를 나란히 놓고, 국물을 만들었다. "걸었어요." 그녀는 쌀을 씻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말도 들리지 않더군."하고 나는 말했다. "아, 그래요? 바람이 굉장했거든요."하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식탁 모서리에 걸터 앉아서 그걸 마셨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그런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것이 갑자기 뚝 그쳐 버렸을까?"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요"하고 그녀는 나에게 등을 보이고 서서 손톱 끝으로 새우 껍질을 벗기면서 말했다. "바람에 대해선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게 아주 많다구요. 고대사랑, 암이랑, 바다 밑이랑, 우주랑, 섹스에 대해서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게 잔뜩 있는 것처럼요." "흐응." 그런 대답은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제에 관해 그녀가 이야기해도 그 이상의 발전은 바랄수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단념하고 굴 냄비 요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때, 잠깐 아랫배를 만져도 될까?"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나중에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굴 냄비 요리가 완성되기까지, 나는 다음주에 몰아서 쓰게 될 일기를 위해, 오늘 하루 동안 생긴 일들을 간단히 메모로 정리해 놓았다. 1. 로마제국의 붕괴 2. 1881년의 인디언 봉기 3.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 이런 메모다. 이렇게 해두면 다음주가 되어도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정확히 기억해 낼 수가 있다. 바로 이러한 용의주도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나는 요 22년 동안 단 하루도 빠뜨림 없이 일기를 계속 써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온갖 의미 있는 행위는 그 나름의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 불든 불지 않든,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신세대 작가의 신세대적 소설 <옮긴이의 말> 일본에서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한 권의 소설로 6백만 부라는 공전의 판매 기록을 세운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우리의 젊은 시인들과 소설가들을 들쑤셔대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 내용과 표현을 표절했다는 시비, 하루키 열풍과 그 영향설... 이런 문구들이 자주 신문의 문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 주인공 하루키의 소설을 번역하는 작업은 더욱 뜻깊은 일이라 생각된다. 재미있는 비디오 소설, 오밀조밀한 상상력, 엄청난 흡입력... 이것들은 일본 전역을 휩쓸고 있는 신세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평이다. 하루키, 그는 도대체 누구이며, 그의 무엇이 이토록 독자들을 사로잡는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에 태어난 이른바 전후 작가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상>지의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데뷔, <상실의 시대>, <댄스댄스댄스>등 일련의 장편소설을 발표하여 인기 작가로 부상했다. 특히 <상실의 시대>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보기 드물게 수백만 부라는 판매 기록을 세워 나가고 있으며,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큰 반응을 블러일으키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잃어버린 자아 찾기'를 내세운 젊은이들의 방황을 다루고 있다.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 공허함을 인식하고 절망하지만 그러면서도 존재 그 자체를 포기하거나 거부하지는 않는 젊은이들. 그들에게는 한없이 나약한 듯하면서도 실은 아픔을 견디는 강인함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젊은 층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의 주인공들은 고도로 발달된 물질 문명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고독한 투쟁을 벌인다. 하루키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미국 소설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은 주인공과 도시의 이름만 바꾸면 미국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국 취향적'이다. 하루키는 사춘기 시절에 미국의 탐정소설, 음악, 옷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하지만 미국의 풍속을 배경에 깔고, 그 위에다 단편적인 구성, 짧은 문장으로 스피드하게 끌어가는 솜씨는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하루키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객원 연구원으로 체류중이다. 일본 문화계의 총아인 하루키, 그의 소설을 읽지 않으면 대화가 안 통할 정도로 대단한 신드롬을 일으킨 작가. 직접 눈으로 보는 듯한 선명한 이미지, 직접 귀로 듣는 듯한 경쾌한 리듬, 그리고 직접 입으로 맛을 보는 듯한 상큼함이 있는 재치 넘치는 대화... 특히 하루키의 작품은 장편소설에 못지 않게 단편소설에서 그 탁월한 문학성이 드러나, 무한의 소설적 재미를 맛볼 수 있게 한다. 하루키의 단편소설 중 돋보이는 것만 고른 이 단편 소설집을 통해 하루키의 다양한 모습과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상실의 시대>, <댄스댄스댄스>에 이어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걸작선>을 번역하면서 나는 또 한 번 그의 매력에 빠져들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유유정- 상실된 원초에 대하나 갈망(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 -김정란(시인, 상지대 교수) *애절한 '아닌' 삶에 대한 갈망 우리의 젊은 작가들 가운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표절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해서 물의가 분분하다. 이것은 하루키의 그 무엇인가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의 암시면서, 동시에 그의 작품이 쉽게 모방할 수 있을 것 같은 만만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나는 여러 명의 소설가들로부터 하루키의 작품이, "자도 이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하루키의 작품을 꼼꼼히 읽으면서, 이 작가에게 단순히 어떤 레테르를 붙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모순된 이야기지만, 나는 하루키가 말한 것보다도 그가 말하지 못한 것, 또한 말하려다 그만둔 것 때문에 더욱더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이를테면, 나는 하루키가 떠난 자리에서 하루키를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하루키가 오해되고 있는 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자신조차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겅중겅중 뛰어 다니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해서도 나는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난 알아요>라고 큰소리를 뻥뻥 쳐대지만, 정작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누군가가 와서 그들에게 설명해 줄 때까지 그냥 말과 노래 사이에서 중얼댈 것이다. 그리고 춤이 그 설명되지 않는 사이를 맹렬하게 메워 준다. 그들은 아주 많이 말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아니! 한가지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지금 그들의 삶을 '아닌'삶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하루키의 모든 글들은 그 '아닌'사람 찾아가기고 귀결된다. 그의 가벼워 보이고, 단순한 말장난처럼 보이는 '만만한' 세계 아래에는, 드러나지 않은 채 숨죽여 흐르고 있는 애절한 '아닌'삶에 대한 갈망이 있다. 늘, 못된 버르장머리대로 후딱 말해 버리는 '구원'또는 '시원','잃어버린 왕국'그가 늘 말하는 식대로 '그런거지'뒤에 꼭 뒤쳐진 철새처럼 남아 떠도는 여운... 나는 그것을 읽는다.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루키에게 복수한다는 뜻이다. 대강 말해 버리고 시침떼고 싶어하는 작가에게 나는 기어이 내용 증명으로 '갈망'이라는 각서를 보낸다. 그 말해지지 못한 하루키를 나는 말해진 하루키에게 집어 던진다. 왜냐하면, 지금은 1992년이지 11992년이 아니니까. *완벽함에 대한 꿈 여기 묶여진 하루키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귀엽다. 약간은 만화적 어법으로 씌어진 이 글들은 '위대한 불완전성'(캥거루 통신)이라는 단어로 한꺼번에 설명된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완벽함에 대한 꿈'이다. 즉, 불완전함이 위대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것이 '완벽'을 꿈꾸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모든 글들은 그렇게 해서 씌어지기 시작한다. 그의 글쓰기는 자아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다. '사실인즉, 나는 나 자신이라는 자체에 대해서 몹시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용모라든가, 재능이라든가, 지위라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단순히 내가 나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서지요.'-<캥거루 통신>중에서 그 불만의 궁극적인 의미는 '나는 개체이면서 원칙이고 싶다'라는 문장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편지를 보내는 미지의 여성에게 '개인인 당신과는 자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그렇지만 '당신이 혹시 두 개로 분할되고, 내가 두 개로 분할되고, 그리고 그 네 사람이 침대에서 함께 할 수 있다면'이라고 칭얼댈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닌 나와 '당신'이 아닌 당신의 짝, 즉 개체의 원칙으로부터의 자유로운, 개체이면서 보편인, 그의 신나는 표현대로 어떤 '형이상학'에 의해 '탕탕탕탕...대량 학살'된, 실재 원초의 통일성이다. 캥거루 네 마리에 의해 상징되는 이 나/아닌 나-당신/아닌 당신의 짝패는 4*4=36개의 글쓰기 공정에 의하여 복원된다. 그때 개체라는 껄끄러움은 극복된다. 작가가 결혼식에 가서 매일 졸립기만 한 것은 (졸립다), 결혼이라는 형식이 단순히 개체-이 '불공평한' 형식-로서의 나, 당신의 짝에 불과한, '불만'의 단순 재생산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갓 결혼한 '나'는 일종의 '특별한 배고픔'을 느끼는데, 그 배고픔이란 '철야 레스토랑에서 편의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것이다. 그 배고픔을 작가는 이런 이미지로 표현한다. 1. 나는 조그마한 보트를 타고 조용한 해양에 떠 있다. 2.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 속에 해저 화산의 정상이 보인다. 3. 해면과 그 정상 사이에는 그다지 먼 거리는 없는 것처럼 보이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것은 요컨대 이미 상실된 어떤 원초에 대한 갈망이다. 그 물밑에 가라앉아 있는 아틀란티스와 수면과의 '거리'지우기, 그것이 하루키의 글쓰기, 네 마리의 <캥거루 통신>이다. *내면의 불가사의한 존재 찾기 나/아닌 나의 통일성의 추구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롭게 표현된다. 이 작품 속에서 우리는 하루키가 얼마나 절묘하게 작품의 디테일들을 전체의 통일성 안에 짜 넣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어느 날 문득 '가난한 아줌마'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진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의 주제는 '7월의 어느 일요일'이라는 시점, 주인공이 바라다보는 '일각수'동상으로 벌써 완벽하게 드러난다. 숫자 7과 일요일이 암시하는 원초적 통일성은 유니콘의 외뿔의 상징성으로 강화되고, 그것은 벌써 일상에 겹쳐진 비일상의 시적인 분위기로 드러난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상자 속에 상자가 있는 장치처럼, 광채 속에 또 다른 광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가난한 아줌마'란 돈이 없는 불쌍한 아줌마가 아니라-일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요인이기는 하지만-일상과 '무관한'아줌마, 남성인 주인공 내면의 '불가사의한'존재, 또 다른 자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아줌마는 나를 찾아왔다가 사라져 갔다. 겨우 몇백 분의 1초인가의 순간이기는 해도, 그녀는 나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뒤에 불가사의한 사람 형상의 공백을 남겨 놓고 갔다. 마치 창 밖을 누군가 쓱 지나치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급히 창께로 뛰어가서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거기엔 이미 아무도 없다. 가난한 아줌마?' 이 의문 부호와 더불어 소환되는 내면의 여성은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먼 데까지 뿌리가 뻗어 있다'. 그리고 드디어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목젖께'까지 거의 '나올 뻔한'그 이름, '잊혀진 이름'의 아줌마는 8월 어느 날 작가의 잔등에 달라붙어 살기 시작한다. 그 아줌마가 비개인적인 어떤 원칙을 상징한다는 것은, 그 아줌마의 모습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 따라 멋대로 모습이 바뀐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그녀의 존재와 '말'과의 관계를 분석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지만, 이 글에서는 지면의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겠다.) 이 기묘한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본래의 내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나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라는 문장 속에 요약되어 있다. *내면의 밤을 향해 떠나는 여행 <거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똑같은 불안이다. '미칠 것 같은 공복감', 하지만 하루키의 결말은 만 년 뒤로 미루어진다. 11980년이나 되어야 그 아줌마들은 편안히 자기들의 갇힌, 무관한, '가난한'왕국을 건설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흥, 포도주 한 잔, 우수에 어린 팝송 한 곡, 담배 두어 개비, 그리고 잠, 댓츠 올(하루키 식으로) 그리고 하릴없이 실실 늙어 간다? 하루키의 글들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신뢰할 수 없다'. 제스추어만으로 어떻게 존재의 깊이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평범한'이라는 택시에 갇힌 우리의 잊혀진 존재를 망연히 그리워하는 <택시를 탄 남자>에서 하루키는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사람은 무엇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지워져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테네라는, 근원을 상징하는 어떤 장소에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 존재. 그러나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는다. 어쨌든, 그것이 사라져 버릴 때까지는, 그때까지 우리는 끝장난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지금 사는 일이 꿀맛이라 하더라도, 끝장나 버린 존재가 될 생각이 없다면, 하루키의 충고처럼 '불만이 없다면, 뭔가 생각해 내' 시기를.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면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의미는 전혀 없다. 이 '불만의 권위자'가 그의 가볍고 세련된 도시적 감수성을 통해 정말로 권하는 싶어하는 것은 그 밤중에, 중고 도요타를 타고 털털거리면서라도 내면의 밤을 향해 떠나는 여행(빵가게 재습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카로 택시지!(그리스어로 '즐거운 여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