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문학수첩 문학사상사 자료조사연구실 편저 문학사상사 머리말을 대신하여 하루키 문학의 탐험을 위한 길잡이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와 비밀을 지닌 그의 문학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길잡이 로서 이 책을 편찬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제 일본의 작가로부터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하고 있으 며, 한국에서는 국내외의 다른 어느 작가의 작품보다도 많이 읽히고 있고,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는 그의 작풍을 본따서 이른바 '하루키 문학적 소설기법'을 수용 하는 작가들이 속출, 찬반의 논쟁이 벌어지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현대의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이 전공투 또 는 운동권이라는 '관념의 왕국'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긍정하려는 의욕에 차 있으면서도, 허무와 고독의 영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의 의미와 가 치를 찾는 데 있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답을 줄 수 있는 작가가 바로 하루키이 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거의 예외없이 작가의 감성과 독자의 감성이, 그들과 너무도 많 이 닮은 작중 인물의 감성에 의해서 서로 공명하고 감동하며, 각자가 함께 동시 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연대감 속에서 안심하게 하는 그런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0여 년 간에 걸쳐 계속 작품 활동을 펼쳐 나감으로써, 일찍이 세 계 어느 곳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보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리면서도 여 전히 그의 작품 속에 수수께끼와 비밀스런 부분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은 그런 하루키 문학의 수수께끼와 비밀스런 부분의 의문과 궁금증에 갈 증을 느끼는 많은 독자를 위하여 꾸며졌다. 이 책을 편찬하기 위하여 <문학사상사>는 자료 조사 연구실에 전담반을 편성 하여 지난 1년 동안 주로 일분에서 발행된, 하루키 문학을 해설 또는 비평한 평 론을 수록한 10여 권의 단행본을 비롯하여, 여러 일간지와 잡지에 실렸던 수십 편의 하루키 문학에 관한 평론 해설은 물론, 하루키 자신의 육성을 통한 인터뷰, 고백기 등 입수 가능한 모든 국내외의 자료를 수집했다. 이 책은 그 숱한 자료들을 면밀하게 분석, 역편 종합하여, 하루키 문학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풀고, 그의 문학을 보다 올바르게 그리고 보다 넓고 깊게 이해하 고 감상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 이 책은 하루키를 직접 인터뷰한 내용, 수기, 그리고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해 스스로 밝힌 내용을 날줄로 하고 여러 평론가의 해설과 평론 등을 씨줄로 하여 완성했다. 따라서 여러 필자에 의하여 씌어진 이 책은, 부분적으로 중복된 내용과 상반 된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며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독자는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이 책의 여러 글을 통하여 독자적인 해석과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기록된 글은 필자를 밝힌 것을 제외하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학사 상사> 자료 조사 연구실의 필진을 중심으로, 외부의 일본 문학 연구가들의 협조 를 얻어 씌어진 것이다. 1년 간에 걸쳐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이 책을 편찬했으 나 워낙 하루키 문학이 질과 양에 있어 방대하다는 특성 때문에, 아직도 군데군 데 미비점이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독자로부터 의견을 존중하며, 계속 주기적인 증보판을 통해서 완벽을 지향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 끝으로 몇 가지 양해를 얻고자 하는 것은 첫째, 성명 표시에 관한 것이다. 일 본인은 성과 이름을 함께 부르지 않을 때는, 성씨만 부르는게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무라카미'라고 성만 표시한 경우가 많지만, 그의 독자들 사이에는 흔히 '하루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경향이 있어 그에 관한 글 을 쓴 여러 필자들도 '하루키'라고 쓸 때가 적지않아, 이 책에서도, '무라카미' 또 는 '하루키'를 병용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둘째,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여러 필자에 의해서 신문, 잡지, 단행본 등에 씌 어진 글을 참고하여, 단편적으로 초역하거나 또는 간추린 부분도 있어 당시의 하루키의 연령, 또는 저작물의 발행 부수 등은 그 씌어진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특히 여러 수치들은 필자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참작하여 읽어주기 바란다. 셋째, '하루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는, '와타나베'나 '나오코'와 같 이 고유한 이름의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그의 작품 속의 인물을 지칭할 때는 그 점을 살려 " '나' 가"라고 표시한 부분이 있음을 첨기하고자 한다. 하루키 문학과 한국 독자와의 가교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하루키 현상'의 파장이 밀려왔다. 그 동안 일본 문학 기피 현상을 보여 왔던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놀랄 만한 이 변이다. 그 '하루키 문학'의 모든 것을 넓고 깊게 파헤치는 작업의 일환으로 이 책을 편찬했다. 하루키 소설의 본격적인 한국 진출 <문학사상사>의 편집진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대해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초 그의 장편소설 <상실의 시대>가 일본에서 400만 부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출판된 직후부터였다. 당 시 편집 위원 중 한분이 영역된 <상실의 시대>를 밤을 세워 단숨에 독파하고, 번역 출판을 적극 권유했다. 수차례 거듭된 내부 검토와 작가, 평론가 몇 분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매우 탁월한 작품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문학사상사> 편집진은 당시 일본에서 출간 되어 호평을 받고 있던 <댄스 댄스 댄스>와 함께 번역, 출판을 하기로 결정했 다. <댄스 댄스 댄스>는 저작권 보호를 받고 있는 작품으로, 출판에 관한 국제 조약에 우리 나라도 정식 가입함으로써 쉽게 출판 계약을 맺었으나, <상실의 시 대>는 그 조약 발효 이전에 발행되어 이미 한국에서의 국내법상 저작권을 인정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문학사상사>는 무라카미 하루키 씨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당신의 훌륭한 작품을 정성을 다해 번역, 출판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 달하면서,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보낼 수 없겠느냐고 간곡히 요청했다. 얼마 후 하루키 씨는 자신의 책이 이미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으나 반응이 미약해 실망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문학사상사>에서 좋은 번역자를 찾아 자 신의 작품의 제대로 평가를 받고, 많은 한국의 독자들과 가까이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다음과 같은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함께 발행인 앞으로 보내 왔다. 이 작품을 말하기 전에 하루키가 몸소 한국의 독자들에게 첫대면 인사를 하면 서 <상실의 시대>에 대한 자작평을 내린 것을 옮겨 보고자 한다. 이 글은 좀처럼 자기 작품에 대한 창작 의도를 밝히지 않는 하루키로서는 지 극히 보기드문 글이다. <상실의 시대>를 읽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엽에 이르는 나날은 (즉 나의 10대의 끝에서 20대 초기에 걸친 시기가 되는 셈이지만), 우리들에게 있어 이른바 '배멀미의 시 대'였습니다. 그 시절엔 모든 주위의 사물이 흔들흔들 크게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 다. 그리고 그 요동은 매우 오랫동안 강력하게 계속되어, 그것이 잠잠해진 뒤에 도 우리들에겐 아직도 지면이 줄곧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모든 게 변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기에선 당장이라도 무엇인가가 벌렁 굴러떨어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엇인가가 굳은 껍 질을 깨고, 지금 막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들은 그 변동을 자기 손에 움켜잡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우리 들은 그러한 확연한 실감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엔 이상이란 것이 있었 습니다. 또는 이상에 근접하거나 유사한 것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은 투쟁이 있었고, 탄압이 있었고, 히피와 마리화나와 비스마르크와 반 전가가 있었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와 짐 모리슨이 있었습니다. 재즈 음악 다방에 서는 프리 재즈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스커트가 점점 짧아지고, 데모의 열 풍에 휩싸였던 대학은 봉쇄된 채로 있었습니다. 악인이 있었고 선인이 있었습니다. 가치관은 반전되고 또 반전되었습니다. 진 짜와 가짜가 똑같이 소리 높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진실의 언어가 있었고, 허위 의 언어가 있었습니다. 깨끗함이 더러움이 되었고, 더러움은 깨끗함이 되었습니 다. 그로부터 어언 20년이나 지나 나는 마흔 살이 되었습니다. 내 나이 스무 살 무렵엔 잘 이해되지 않았던 일입니다. 20세의 청년이 20년이 지나면 40세가 된 다는 것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서서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는 매우 이상한 기분에 잠기게 됩 니다. 그 격렬한 시대를 탄생케 한 변동의 에너지는,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 무 엇을 가져오게 한 것인가 하고. 그 당시에 매우 대단한 큰일로 생각했던 것은 도대체 어리도 사라져 버린 것인가 하고. 이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에 그러한 생각은 줄곧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소설은 정치적인 소설도 아니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소설도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 여러분은 이 소설이 정치성이나 사회성에 등을 돌린 지극히 개인적인 종류의 소설이라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것은 진실입니다. 읽어 보면 알 수 있게 되겠지만, 내가 여기서 그려 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동시에 하나의 시대를 감싸고 있었던 공기라는 것을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적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그 싸움에서 살아 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 로 괴로운 일이긴 하지만. 이 소설에 대해서 나는 독자로부터 실로 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것은 10대, 20대의 젊은 독자들로부터였습니다. 그들은 이 소설을 읽고 여러 가 지를 느끼고, 생각하고, 공감하며, 또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감 상을 매우 솔직하게 써서 보내 주었습니다. 이 소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의 독자 여러분이 이 소설을 읽고 난 감상 을 편지로 보내 준다면 더 이상의 기쁨이 없겠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의 한국인 여러분의 기분을 나는 퍽이나 알고 싶습니다(편지는 영어나 일어로 써서,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 80번지 (주)문학사상사로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창사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소설을 소개한 이유 자신의 작품에도 서문을 쓰지 않거나 간단한 후기 정도로 대신해 온 하루키가 그처럼 성의를 다해 장문의 메세지를 한국 독자에게 보내 왔다는 건 참으로 이 례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문학사상사>는 창사 이래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작가의 작품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출간 즉시 한국의 독자들을 매료시키기 시작했다. 1989년 6월 27일 초판 제1쇄를 내놓은 이후, 1995년 12월말까지 도합 55쇄 30만 부라는 놀라운 판매 기록을 세웠다. 책 한 권을 보통 2, 3인이 읽는다고 본다면, 100만 명 안팎의 우리 나랄 사람 들이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고 볼 수 있다.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폭넓은 독자층 을 형성해 온 이 책은, 출간 이래 2년 전까지 꾸준히 외국 소설 부문에서 상위 권의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그러던 것이 2년 전부터 서서히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더니, 1994년부터 국내 외 서적을 통틀어 집계한 종합 출판 베스트 셀러 순위에 오르기 시작하여, 1995 년 내내 종합 상위권의 자리를 확고하게 유지해 왔다. 출간과 동시에 독자들의 관심을 모아온 스테디 셀러가, 출간된 지 5년이 지나 서 갑작스럽게 종합 베스트 셀러 순위 4-5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은, 일찍이 유 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며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수년만에 다시 '베스트'에 오른 비밀 대체로 아무리 인기를 끈 베스트 셀러라고 해도 1년 이상은 순위를 지키지 못 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런 출판 풍토 속에서 5-6년 간이나 스테디 셀러 의 하나로 자리 매김해 온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인데, 갑작스럽게 종합 베스트 셀러 순위의 자리로 뛰어 올라 1년 이상을 확고하게 자르를 유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이변이 아닐 수 없다. <문학사상사>는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면밀한 독자 조사를 실시한 결과, 독자층이 일부의 중학생을 포함해서, 고교생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파급되고 있다 는 것을 확인했다. 삶의 실체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 는 것인가를 절묘한 소설 기법을 통해 묘파한 이 소설이, 대학 입시에 논설의 비중이 커지면서 교과서 이외의 교양서를 읽기 시작한 고교생들에게 필독서의 하나처럼 된 것이다. 또한 젊은 일군의 작가들 사이에서, 하루키적 창작 기법과 표현이 유행처럼 퍼지기 시작하여, 그런 현상을 부질없는 모방이라고 보는 부정적 견해와, 건전한 창작 기법의 원용이라고 보는 긍정적 견해를 둘러싸고, 문학 평론가들 사이에 찬반의 논전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일본이나 다른 모든 나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대중 소설이 아닌 순문학 작품 에 이처럼 많은 독자가 몰린다는 건 지극히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순문학 작품이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수십만의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 기를 확보해 왔으며, 그 파급 효과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은 매우 이 례적인 기현상이라고 하겠다. 하루키의 작품은 <상실의 시대>에 이어, <댄스 댄스 댄스>, <양을 쫓는 모 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 포함)>, <태엽 감는 새>, <하루 키 단편 걸작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단편선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등 그의 모든 작품이 번역 출판되 어, 더러는 베스트 또는 스테디 셀러가 되어 있고, 대부분 10여쇄 이상의 중판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소설 작품 이외에도 <슬픈 외국어>,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등의 자전적 에세이 선집을 비롯해서 <먼 북소리> 등 하루키 수필집도 출간되는 즉시 스테 디 셀러에 올라, 독자의 관심이 대단함을 입증하고 있다. 아마도 외국 작가도서 20여 권이 넘는 거의 모든 작품이 번역 출판되고, 10여년이나 독서계를 휩쓸고 있다는 건, 일찍이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며, 앞으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현상이라고 하겠다. 입수 가능한 모든 자료 모아 종합 분석 해설 하루키의 작품은 손에 들면, 놓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독특한 키 워드와 문학적 장치들을 구사하면서 깊은 뜻을 담고 있어, 여러모로 해석이 필요한 대목도 적지 않게 나온다. 하루키는 자기 작품이 어떻게 씌어졌다는 것에 대해 인터뷰나 수필 등을 통해 스스로 언급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설적인 견해는 밝히지 않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는 독자에 따라 자신의 작품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러기를 바란다고 한다. 하루키의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평론 등은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만 해도 10여 권이 넘고, 신문이나 잡지, 기타 평론집에 실린 하루키의 작품론 또는 작가론은 수십 편에 이르고 있다. 그만큼 하루키의 작품이 풍부한 문학성을 담고 있다는 증거이며, 또한 다각적 인 감상과 해석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 책은 역편한 뜻은, 한국 의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하루키의 여러 작품에 대한 좀더 깊이 있는 감상을 위 하여 종합적인 해설서를 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지난 3년 간 다방면에 걸친 국 내외의 자료를 모아 편찬했다. 이 <하루키 문학수첩>이 그의 모든 작품을 보다 깊고 바르게 이해는 데 있어 도움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1.세계 무대에 오른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 일본에서의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 현상'은 왜 일어났는가 한 때 일본의 매스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이라는 말이 자주 오르내린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다섯 번째 소설 <상실의 시대>가 수백만 부의 베 스트 셀러로 떠올라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을 때의 일이다. 그 소설의 영향 을 받은 젊은이들이, 의식의 변화는 물론 작중 인물의 행동 양식이나 말투, 복장 까지 모방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그처럼 순문학 소설 한 권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독자를 사로잡고, 사회에 큰 변화의 소용돌이를 자아낸 예는, 일 찍이 찾아 볼 수 없었다. 굳이 비슷한 경우를 찾자면 1955년에 이시하라 신타로 의 작품 <태양의 계절>이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고, 베스트 셀러가 된 예를 들 수 있다. 이시하라의 경우는, 이른바 순수 문학 작품이 순문학 독자층뿐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층에서도 널리 읽혀지고, 그 후 정계로 진출한 그가 국회 의원 선거에서 1위로 당선하는 등 작가가 문학적 테두리 밖에서도 주목을 받게 된 경 우였다. 그러나 <태양의 계절.은 고작 20만 부 정도의 발행 부수를 기록했을 뿐이다. 그 작품은 기성의 윤리에 초연하고, 드라이한 이성 관계와 '신타로가리'라고 하 는 상고머리 스타일의 머리형을 유행시키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면서, 이 른바 '태양족'이라고 하는 젊은 세대를 탄생케 하였다. 그러나 그 후 30여 년이 지나 '이시하라 현상'보다 훨씬 강력하고 영향력이 큰 '하루키 현상'이 빚어졌던 것이다. 그처럼 종래 소소의 독자에게만 관심을 끌었던 순문학 작품들이 대중적인 독 자들에게도 광범위하게 읽혀졌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같은 소 설은 일본에서 10년 동안에 문고판까지 합치면 1,000만 부나 팔려 나갔다고 하 니, 그 책이 일본인의 정신 세계에 끼친 엄청난 영향이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 따. 독자층의 확대, 그것은 그것대로 대단히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동적 이기 한이 없는 독자, 그것도 순수 문학 작품의 독자가 10만을 넘어 수백만대를 기록했다는 것은 1950년대는 물론 1995년 현재까지 전무후무한 놀라운 일이 아 닐 수 없다. 하루키 작품의 특징 그렇다면 그런 하루키 현상은 어디에서 우러난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하루키 작품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가 하는 물음에 대해 독자들은-적어도 그에게 흠뻑 취해 있는-한 마디로 "그 분위기입니다"라고 말한다. 그 분위기란, 우선, 등장 인물, 즉 '주인공'의 삶의 양식이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 여기서 그 주인공은 전공투 세대에 속하고, 학원 투쟁에서 상당히 빠른 시기에 물리적인 힘으로 인해 탈락했거나 도망쳤고, 심리적으로 좌절했으며, 그 이래 그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좌절과 도망이 부담이 되지만, 또 그것에 반드시 구애받고 있지도 않다. '나'는 이미 '되어 버린' 자기 그대로이며, 자신을 질질 끌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의 생 활 방식은 좌절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성품에서 유래하고 있는 행동과 , 좌절과, 도망의 반복된 틀을 따르고 있다. 물론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은 그 틀을 극복하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민, 이 생활 방식에 표시되어 있는 인격적, 심정적인 무엇인가가 전공투 세대의 후예인 70년대 및 80년대 세대, 혹은 그 세대에 속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팬의 실리적 구조와 비슷하다. 아니 심정적으로는 일치하고 있다고 독자들은 생각한 다. 영원히 계속되는 불확실성-결정이 되지 않는-보다, 정확하게는 불확실성의 의식적 지속이야말로, 모라토리엄(일시적 정지)의 기본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분 위기란 것은 그런 의미이다. 둘째로는, 그의 작품의 어휘와 스타일이다. 친근감을 주는 특유의 문체와 기술 되는 사항의 방식, 혹은 에피소드의 전환, 그 단절과 연속성이 만드는 구성과 스 타일이, 하루키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감성의 움직임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셋째로, 그에게는 고유한 레토릭이라고 할까, 메타포-은유라고 할까? 예를 들면, 단편집 <빵 가게 재습격>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구절에서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맹렬한 회오리바람 같은 공복감이..., 하늘에서 본 시나이 반도와 같은 망막한 우리들의 공복에는..., 시간은 물고기의 배에 삼켜진 납봉처럼 어둡고 둔중했다..., 그것은 마치 새벽 하늘에 색이 바랜 별의 모습을 찾아 헤매는 것 같은 눈이었다..., 잉카의 우물을 바라보는 관광객 같은 눈초리...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메타포는 독자의 경험에 의거한 이미지를 기대하고 있 지 않고, 오히려 한 말, 어휘 자체의 이미지에 의거하고 있다. 많은 하루키의 작품에서 시도되고 있는 현실과 환상의 연속적이고 융합적인 기술, 이미지의 자기 운동, 즉 환상과 몽상, 백일몽의 자연스럼운 삽입, 환상의 의식적 조작 또한 이런 맥락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상이 독자들이 말하는 하루키 작품의 분위기이다. 그 분위기는 결국, '우리 들의 기분에 딱 들어맞는' 것이다. 그 곳에는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전통적인 태 도나 스타일이 없어도 좋다. 다분해 쾌락적이고, 어떤 종류의 공감도 있다. 삶의 진실을 구해서, 혹은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일환으로서 순수 문학을 읽는 것과,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생활 방식에 공감하고 반발하면서 읽는 것 사이에 결정적 인 차이 같은 것은 없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모든 작품은 쉽고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매우 깊은 문학적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존재의 이유와 존재 가치에 대해서, 그의 모든 작품을 통하여, 읽으면 읽을수록 그 문학적 향기에 젖어 들게 되고 삶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된다. 그와 같은 하루키 작품은 점차 해외로 뻗어나가, 이제는 세계적인 작가로서 우뚝 서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본 작가에 대한 거부 반응의 유일한 예외로, 그의 작품은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다른 어느 외국 작가보다도 많은 애 독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 가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의 파장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노래>가 나온 것은 1987년이었다. 7년 전 <바람의 노 래를 들어라>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하루키는, 그 동안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에 이어 1985년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발 표, 중견 작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이 작품으로 하루키는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의 하나인 다니자키 준이 치로 상을 받아, 문단을 놀라게 했다. 그는 전후 세대로서는 최초로 이 상을 수 상했으며, 30대의 약관으로서는 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에 이 어 두 번째로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2년이 지나, 하루키가 발표한 <상실의 시대>는 1년 만에 350만 부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워, 일본 사회에 일대 충격적인 파란을 자아내게 했다. 1988년 12월 27일자 <아사히 신문>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제하 의 사설을 통해서 하루키가 이 소설에서 추구한 현대인의 존재 찾기의 의미를 부각했다. 600만 부의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대신문 <아사히>가 한 작가의 소 설을 테마로 장문의 사설을 쓴 예는, <아사히 신문>은 물론 다른 신문에서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며, 앞으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일로서 하나의 이변이 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아사히 신문>은 이 사설에서 그 동안 사회의 중요한 지표의 하나로 인식되 어 왔던 '공정'이란 관념이 날이 갈수록 흐려져 가고,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치관이 흔들이고 있음을 개탄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다. "<노르웨이의 숲(주:<상실의 시대>의 원제>은 주인공인 청년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절실한 자문의 되풀이로 끝나고 있다. 커다란 시대의 흐름 은 갑작스럽게 바꿔놓기란 어렵다. 하지만 우리들도 역시 물어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타 일본 작가와의 비교 최근 "제 2의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불리는 작가가 있다. 사상가이며, 시인인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딸인 요시모토 바나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가 써내 는 책마다 모두 베스트 셀러가 되어서 '바나나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는데. 그녀 는 1987년 가을 <키친>으로 가이엔 신인상을 수상한 이후로, 데뷔한 지 2년밖 에 되지 않았는데도, 현대 문학의 초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녀가 발표한 <키친>, <생튜어리>, <우타카타>, <슬픈예감>, 등의 모든 책이 수십만 부에서 1백만 부를 넘는 초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정말로 놀랄 만한 일 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무엇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최근 요시모토 바나나는 그 작품의 '가벼움'이라는 점에 있어서, 무라카미와 나란히 비교되는 일이 많은데, 정말로 두 사람은 비슷한 작가일까? 그녀의 처녀작인 <키친>은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를 읽은 뒤, 할머니의 친지 였던 남자 대학생의 집에서 기숙을 하게 된 여대생의 감성과 생활을 그렸는데, 거기에 '사랑'을 자아내도록 고안된 작품이다. 이 작품과 무라카미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비교해 보면, 양자는 완전히 그 '가벼움'의 질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라카미의 경우는 그 가벼움 뒤에 '상실'이라는 무거운 정신적 상흔이 있으 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에는 그와 같은 '과거'는 전혀 없고 온통 전부가 가 벼움뿐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이 '만화' 같다는 말을 듣는 것도, 그녀의 표현이 단지 지극히 감각적인 것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세계는 자신과 자신의 키 정도만 큼의 각각과 일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즉 그녀의 소설에는 역사도, 세계도, 사회 도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풍요로운' 나라의 두서 없는 생활뿐이다. 이에 비해 무라카미에게는 요시모토 바나나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소시민성' 이 전혀 없다. 그는 그녀처럼 자신의 키만큼의 수준에 달하는 감각과 생활상을 결코 쓰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은 그녀의 작품과 비교하면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진다. 이 경중의 차이는, 단순하게 마흔 살이 넘은 작가와 아직 20대인 작가 와의 차이에서 오는 것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현대 문학과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가 처음 출현했을 때, 누구나가 다 지금까지는 다른 어떤 이질적인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1976년)의 무라카미 류, 또 유행어가 되기까지 한 <나는 무엇>(1977년)의 미타 세이코, 혹은 <왠지 모 르게 크리스털>(1980년)의 다나카 야스오가 나왔을 때하고 비교해 보면, 그의 출현은 신선하고 새로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 더라도, 이절적인 데가 있다는 점에서는 유난히 뛰어난 데가 있었다. 즉 무라카미 류도, 미타도, 다나카도, 이 시대와의 관계를 그들이 설사 반면 교사로 삼고 있었다고 해도, 그 시대적 상황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미군 기지 주변을 배회하는 안타까운 정열의 폭발을 충격적인 섹스 장면이나 드러그 컬쳐(약물 중독 문화)와 함께 그린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 루>, 혹은 70년대 전후의 학생 운동-전공투 운동을 캐리커처화한 <나는 무엇> 등, 이들 작품들은 모두 시대와의 긴장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무라카미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제외하고, 나머지 작품의 기점을 모두 1970년대에 동결시킴으로써, 이 시대나 세계와는 거의 관계 가 없는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자기 소설의 특징으로 삼고 있다. 완전히 자유자재로 자신의 감성과 관념을 구사하며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무라카미 의 작품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미타나 다나카 등과는 달리, 시대와의 관계와 무관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거기에는 이 시대에 대한 깊은 절망, 바꿔 말 하면 씻을 수 없는 허무주의가 누구보다도 강하게 배어 있고, 그 허무주의 안에 머무르는 것을 스스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전쟁이 끝난 지도 이미 40년 이상이 지났고, 이제 외면상의 '평화'와 '풍요로움' 은 더욱더 그 난숙도를 더해 하고 있다. 그러나 난숙한 사회를 영구히 유지해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역사 속에서 증명된 바, 현재의 이 자본주의 사회가 충 분히 발전한 뒤에 찾아올 다음 사회가 어떠한 것인지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물론 19세기에는 마르크스주의라고 하는 확실한 지침이 있어서, 그 지침에 따 라서 20세기를 준비하기만 하면 되었지만, 이제 마르크스주의가 갖고 있는 온갖 결함이 드러남으로 인해 20세기 말의 인류가, 21세기는 어떤 성격의 1세기가 될 지를 전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환경의 파괴나 핵을 생각한다 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에 대한 어떠한 비전도 모두 환상이 되어 버릴 것이다. 따라서 무라카미가 절망, 즉 허무주의 속에 스스로를 존재시키며 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창작 방법을 택했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라카미보다 한 시대 앞선 문학세대인 '내향의 세대'의 작가들이 여전히 '심리' 나 '늙음'이나 '일상생활'에 계속 집착하는 것도, 관점에 따라서는 그들이 허무주 의에 깊이 침투되어 있음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것이 본래적으로 오락적인 요소임과 동시에, 이 시대와 인 간 본연의 자세에 대해서 '이화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허무주의라 는 것은 결국 시대에 뒤지는 것이지 결코 시대를 앞서간다고 볼 수는 없지 않겠 는가. 1955년도 노벨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전후 문학에서 오늘날의 곤경 까지'라는 강연 속에서, 무라카미 문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약간 길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에 전문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무라카미 문학의 특징은, 사회에 대해서, 혹은 개인 생활의 가장 가까운 환경 에 대해서조차도 일체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루어져 있습 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관습에서 비롯되는 환경으로부터의 영향엔 저항 하지 않고, 마치 배경 음악을 듣는 것처럼 순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 의 파괴된 내적인 몽상의 세계를 짜내는, 그것이 바로 그의 방법입니다. 전후 문학가들의 '능동적인 자세'에 서는 그런 작업에서, 거의 30년이나 건너 뛰어서, '능동적인 자세'와는 전혀 다른 '수동적인 자세'로 서는 작가가, 오늘날의 문학계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전후 문학가들의 다양 한, 그러면서도 동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주제성의 명확함에 반해서, 이 신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는, '자신은 주제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다만 잘 쓰는 기 술만이 중요하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작가로서의 자각을 뛰어넘어서, 세계, 사회에 대해서 '능 동적인 자세'에 서는 시점-즉 주제-을 상실하고 있는 동시대인이라는, 또 하나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젊은 독자들을 폭넓게 사로잡고 있 는 것입니다. 어떤 '능동적인 자세'도 갖지 않은 인간이 풍요로운 소비 생활의 도시 환경에서, 과연 어떻게 유쾌하고도 경쾌하게 살아가는가? 그 모델을 얼마 간의 투명한 비애함과 함께-그것은 동시대의 세계와 사회로부터 비쳐지는 엷은 그림자를, 선명하게 반영하고 있는 감정입니다-제시하고 있는 것이 무라카미 하 루키의 문학입니다. 여기서 오에는 현대 문학에는 크게 두 가지의 경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전 후 문학가 계열에 속하는 '능동적인 자세'를 가진 문학가와, 이 시대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자세'에 서는 문학가의 두 가지 부류이다. 후자는 '사회라든가, 예술이라든가, 인간이라든가, 그러한 키워드는 이제 의미 를 잃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근본으로 하여 창작하는 문학가들이다. 현재 무라카미의 <상실의 시대>가 4백여 만 부나 팔리고,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집들이 모두 수십만 부가 넘게 발행되었으며, 일상 생활을 노래한 다와라 만지의 <샐러드 기념일>이 백만 부를 넘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것을 감안한 다면, 현대 문학의 중심은 이 젊은 층들의 '수동적인 자세'에 서는 문학가 쪽으 로 옮겨 가는 것 같다. 이들 작가의 공통점은, 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는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분명히 무라카미 는 이 새대의 풍조를 넘치거나 부족함 없이 사실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작가이 다. 확실히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는 하나의 시대적 전환기에 엄청난 추진 력을 발휘하여, 구시대적 사고 방식과 가치관을 밀어 내고, 전후의 세대를 중심 으로 한 사회관과 가치관이 확고하게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 역 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시대적 배경 60년대를 살아 왔던 작가들의 뒤늦은 데뷔 무라카미 하루키는 40년대 후반에 출생해서, 6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음에 도 불구하고, 어찌된 셈인지 다른 작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20대에 작품 활 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30대에 와서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60년대 세대라는 특수한 상황이 낳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문화 인류학자인 아오키 야스시는, <60년대를 고집하는 무라카미가 왜 80년대 의 젊은이들게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일까?>라는 기사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특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그곳에 나타나는 것이 현대 일본의 일상으로서, 주 인공이 사는 것은 '먼지만(주:<중국행 화물선>속에서, 주인공이 초등 학교 때 뇌 진탕을 일으키는데, 그때 땅에 떨어진 급식 빵을 가리키며 헛소리로, "괜찮아, 먼지만 털어내면 다시 먹을 수 있어" 하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의 60년대 총에서 80년대에 이르는 '발전'의 시대 그 자체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가볍게 무심히 읽지만, 읽으면서도 싫증을 느끼지 않고 다음을 기다리는 것은, 비록 가볍고 무심한 것 같지만 그야말로 동시대 감각이 생생하게 거기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주오코론>, 1983년 12월호에서 요컨대 아오키는 무라카미 문학이 60년대부터 80년대의 시대상을 '도시'를 무 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무라카미의 문학은 고도 성장-안정 성장이라는 일본의 60년 이후의 '번영'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무라카미는 이 '풍요로움'이 집중하는 도시라는 장소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그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무라카미의 소설에 분명 도시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도쿄나 삿 포로라고 하는 명칭일 뿐이지, 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그 도시의 '풍속'이며,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분' 이외에 별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라카미보다 약간 연장자인 작가 아오야마 사토시가, <양을 쫓는 모험>을 '멋진 동화'라고 평한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그는 무라카미 소설에 등장하는 '도시'란, 어느 특정한 '도시'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시큰둥한 섹스', 그리고 우익 거물의 비서가 얘기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부정의 말, 그 위에 자기 요양 행위로서의 섹스나 시간 때우기로서의 섹스라고 하는 성 생활론, 또 "완전히 무정부주의적인 관념의 왕국이라고. 거기에서는 모 든 대립이 일체화하는 것야"하는 말. 어느것이나 간단하게 지나칠 수 없는,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문학의 현대적 과제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마치 위스키 의 라벨처럼 아주 가볍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질문하지도 않는다. 도대체 이 래서 되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불만을 느낀다. 그러나 보도 블록처럼, 어떤 때는 스프링처럼 통통 튀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도시 생활의 노 련한 기수인 '나'와 함께 동화의 세계를 떠돈다. -<군조>, 1982년 12월호에서 왜 무라카미는 '섹스'나 '혁명', 혹은 '관념의 왕국'과 같은 '오늘의 뜨거운 과제' 앞에 멈춰 서거나,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일까? 바꿔 말하면, 왜 무라카미는 '현대적 과제'들을 깊숙히 파헤쳐 가지 않고, 단지 '동화'만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무라카미 문학의 원점은, '1970년의 정치 체험' 과 그 해에 일어난 '실연'에 있다. 오오키가 말한 것처럼, 비록 무라카미의 세계 라고 불리우는 것의 특징이 6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친 '동시대 감각'이 뒷받침된 것이라 하더라도, 현대 문학의 기수인 무라카미의 '현대' 의식의 기점은 '1970년' 과 '실연'에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소설에 있어서의 '테마'의 의미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아서 마침내 자신의 마음속가지 파고들어 간 무라카미 는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비평가, 가와모토 사부로 앞에서, 현재의 문학적 인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오늘날 소설에 있어서 테마라는 것은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결과로서, 테마 비슷한 것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나는 이런 테마 로 쓰겠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쓴 소설은 거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됩니다.(...중략) 그것은 그러혹, 지금의 젊은이들은 써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다만 살고 있는 이상, 살아가는 것 자체의 서글픔이라든다, 업 보라든가, 모순이라든가, 부조리라든가, 그런 것은 느끼고 있겠지요. 느끼고 있으 니까 그것을 표출하고 싶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단순히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명예욕이나 야심과는 다른 어떤 것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표현 의욕이 있다는 거죠. 정말로 소설에서 테마라고 하는 것이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일까? 하 지만 이 인용문의 뒷부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살아간다는 것 자체의 서글픔이 라든가, 업보라든가, 모순이라든가, 부조리라든가'를 느끼고, 그것을 표출하고 싶 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훌륭한 테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현대 문학 속에서 테마는 변함없이 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3.세계 무대 속의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 미국, 독일, 중국, 한국에서의 하루키 바람 지난 1989년경부터 조심스럽게 선을 보이기 시작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은, <상실의 시대>가 베스트 셀러에 오른 뒤를 이어, <댄스 댄스 댄스>ㄹ 번역 출판으로 이 땅의 독서계에 하루키 선풍을 자아내게 했다. 그 후 7년 동안에 하루키의 장편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 감는 새> 등이 계속 출간 됐으며, 하루키 장편의 대부분은 베스트 또는 스테디 셀러 로 수 많은 독자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장편 소설 뿐만 아니라 5, 6권의 단편 소설도 번역 출판되었고, 수필집만 해도 다섯 권이나 나왔다. 그러니까 하루키의 작품은 장, 단편은 물론 수필집까지 거의 전부가 우리 나 라에서 번역 출판되었고, 그 대부분의 작품이 중판을 거듭하여, 적어도 1백만 명 이 하루키의 작품을 한, 두 편 이상 읽은 것으로 출판계에서는 추산하고 있다. 또한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하루키 작풍을 모방하는 현상까지 벌어져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이때까지 일본의 두 노벨문학상 작가를 포함하여, 수많은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번역 출판되었으나, 더러는 한때 반짝하고 독자의 관심을 끌다가도, 곧 그 대부분이 외면을 당하고 한국 상륙에 실패하고 만 예에 미추어, 한국에서의 하루키 열풍은 거의 예외ㅈ인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더욱이 동서 고금의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지만, 하루 키의 작품처럼 장,단편 소설에 수필집까지 거의 남김없이 20여권의 책이 번역 출판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놀라은 하루키의 바람은 영어권 출판의 본산이라고 할 미국에도 불고 있 다. 미국에서도 그의 주요 작품이 대부분 번역 출판되고, 계속 많은 독자들의 관 심을 모으고 있다. 또한, 유럽에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 서서히 하루키작품이 퍼져 가 고 있으며, 러시아, 폴란드 등 구 공산권과 중국에까지 하루키의 작품은 점진적 으로 침투돼 가고 있다. 대중 소설도 아닌 하루키의 소설과 수필들이 그처럼 전세계에 퍼져 가고, 좋 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건, 세계적으로 봐도 매우 보기 드문 일로 알려지고 있 다. 다음에 미국, 독일, 중국 등의 하루키 작품의 보급 현황을 일본에서 발행되는 <고쿠분가쿠> 1995년 3월호의 하루키 특집 기사를 참조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미국에서의 하루키 문학 프린스턴 대학의 동양학부 교수 호세아 히라타는 <미국에서 읽히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철저하게 영어로 번역된 현대 일본 작가는 없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미국에 소개된 일본 작가의 작품은 일본 현대 작가를 대표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다니자키 준이치로, 미시마 유키오 정도 였다. 그들의 작품은 어떤 보편적인 문학성보다도 이국적인 요소로 인한 호기심 의 대상으로 서양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번역 출판된 하루키의 작품들은 첫째 양적으로 다른 일본 작 가와 비교가 안 되는 실정이라고 한다. 아무튼 거의 전 작품이 번역 출판되어 있기 때문이다. 1989년에 <양을 쫓는 모험>을 시작으로 1991년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뒤를 이어, 최근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과 <태엽 감는 새> 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작품이 번역 출판되고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소식이다. 최근 미국에서 손꼽히는 큰 출판사인 <크노프>사에서 1993년에 하루키의 단 편집 <코끼리의 소멸>도 나와, 장편에서 단편으로 까지 번역 출판의 범위가 넓 혀져 가고 있다. 그와 같은 미국에서의 하루키 작품의 경이적인 반응은 노벨문학상을 받고, 바 야흐로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한 오에 겐자부로의 영어 번역 출판 상황과 비교해 도,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에의 작품은 1995년에 접어들어, 겨우 동양학 계통의 작은 전문 출판사인 사에서 나온 <핀치런너>를 포함해서 <개인적인 체험>, <만연 원 녀의 풋볼>에, 17년 전에 발표된 단편집이 전부이다. 현대 일본 문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나카가미 겐지마저도 단편 <불 사> 하나가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한 권으로 엮은 앤솔러지(역주: 일정한 기준에 따라 선정된 시가집 혹은 문예 작품집)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미국에 서의 일본 작가는 별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미국의 독자들은 하루키의 작품에 대해서 후한 점수를 주 고 있는가. 이런 의문에서 호세아 히라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하루키의 작품을 읽는 미국의 학생들은 그 작품의 무대가 일본이라는 것을 잊고, 그저 재미있다고 말한다. 소리내어 웃으며 읽기도 하고, 아주 솔직하게 슬 픈 감정이 솟아 오른다고도 한다. 그리고 참으로 희한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한 다." 히라타 교수는 하도 열심히 하루키의 작품을 읽는 학생들이 많아 그들을 유심 히 지켜보며 학생들의 감상을 듣고, 그런 글을 썼던 것이다. 미국에서 하루키 작품이 성공한 또 다른 이유는 베테랑급 번역자를 만났기 때 문이라고도 한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일본어 영역의 최고급 번역자라고 하는 J. 루빈이나 알프레드 반폼이 번역한 것으로, 그들 모두 매우 재능이 풍부한 번역 자로서 유명하다. 그들의 펜 끝으로 옮겨진 하루키의 작품은 이제까지 다만 이국적이라는 호기 심이나 들여다 보던 종전의 일본 문학이 아닌, 예리한 감성과 풍부한 문학성을 맛볼 수 있는 동시에 재미가 있다는 데서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문학 중에서 하루키의 작품처럼 'FUN'스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는 독 후감이 적지 않게 나온다고 히라타 교수는 말하고 있다. 이 'FUN(재미)'이란,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일상에서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라 고도 할, 즐거움과 재미를 함께 수렴한 그런 개념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하루키 작품에서 느껴지는 그 'FUN'이란 개념 속에는 감동에서 우러난 눈물도 함께 포 함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거의 한국과 같은 시기에 하루키 문학이 소개되기 시작하여, 점점 상승 기류를 타고 거의 전작품이 번역 출판되고, 다른 어느 외국 작가 못지않게, 그의 작품이 광범위한 독자층에 의하여 애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에서의 하루키 문학 최근 독일에서는 일본 현대 문학의 번역 출판이 다른 어느 나라 보다도 활발 하다. 한 통계를 보면, 1990년 이후 증쇄를 포함해서, 한 해에 1백 편 이상의 일 본 현대 문학 작품의 번역 출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처럼 비약적인 일본 문학의 독일어 출판은 1980년대 초두에서 1955년까지 총누계가, 과거 1백 년 동안 출판된 독일어 번역판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 져 있다. 그 기간 동안에 번역된 일본 작품은 고문이나 시 같은 장르를 제외하고도 1천 편이 넘는다. 그와 같은 독일에서의 일본 문학 붐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번역 출 판은 1995년 현재까지 단편집을 포함하여 9편을 기록하여, 이곳에서도 큰 인기 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7년 일본에서 발표된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된 하루키의 작 품은, 전통있는 문예지 <노이에 룬트샤스>에 실린 <로마 제국의 붕괴, 1881년의 인디언 봉기,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 그리고 강풍 세계>라는 긴 이름의 단편 소 설이었다. 그 작품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뒤를 이어, 하루키의 작품은 매년 여러 출 판사에서 앞다투어 번역 출판되었다. 독일에서 그처럼 단시일 내에 계속 주요 작품이 번역 출판되어 많은 독자를 획득한 예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독일에서는 특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양을 쫓는 모험>에 인기가 집중됐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양을 쫓는 모험>은 출판되자마자, 권위 있는 주요 신문들이 일제히 신간평을 통해서, 절찬을 보내고 하루키를 "포스트 모던 일본의 스타"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 책은 초판 3천 부가 2-3일 만에 전 국 서점에서 매진된 판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종전의 일본 작품과는 달리 하루키의 경우처럼 단시일 내에 많은 독자를 확보 하고 다른 작품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 계속 출판된 예가 없었다. 독일의 독자들은 하루키의 어떤 점에 끌리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독일의 일본 연구소 연구 위원 율겐 슈탈프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키의 작품은 이제까지 독일의 독자들이 알고 있던 일본 작품과는 너무도 이질적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의 단편이나 장편이 독자에게 안겨 주는 인상은 만개한 '사쿠라(역주:벚꽃)'도 '기모노(역주:일본 여성들의 전통 의 상)'도 아니다. 또한 갈고 닦여진 동양의 미학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어둠속 에 갇혀 있는 일본 정신의 저류도 아니다. 그것은 깡통 맥주를 한 손에 들고, 자 기가(그렇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맨 처음에 상실했던 것-초능력과 권력을 향 해 지칠 줄 모르는 야망을 품은 정신적인 '양'이나, 멀리 떠난 친구 '쥐'를. 또는 자신의 '마음'이나 '코끼리'를, 때로는 그저 '빵'을 찾아 헤매면서, 인디애나 존스 뺨치는 모험을 끊임없이 펼쳐 나가는 '쿨'한 주인공이다. 이런 이야기는 서양인 들도-물론 독일인도 문제없이 쉽게 이끌려 갈 수 있다. 주인공과의 일체감을 맛보는 데 있어-적어도 등장 인물을 떠올리는 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쉽게 작품 속의 인물에 몰입 할 수 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서양의 독자들이 즐기는 것은 하루키의 작품 속에 끊임없 이 등장하는 비틀즈나 비치보이스, 모차르트나 바흐, 브람스 등 현대와 고전의 음악 세계이며, 존 포드의 <조용한 사나이>, <2001년 우주 여행>과 같은 영화 이며, 오에 겐자부로나 가와바타 야스나리 또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이 아닌, 거의 예외없이 '서양의 문학'을 발견하는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일본 문학 속에서도 완전한 '서양의 문학'같은 하루키의 작품에 쏠린다는 해석이다. "격렬하면서도 조용하고, 애처로운 100퍼센트 연애 소설"이라는 캐치프레이즈 를 내건 작품인 <상실의 시대(역주:<노르웨이의 숲>의 한국판 제목>에서도, 트 루먼 카포티, 레이먼드 챈들러 등 23며의 서양 작가들이 등장한다. 그처럼 하루키의 소설을 둘러싼 분위기가 서양적이라는 데서, 독일의 독자들 도 마음의 부담이나 저항 없이 하루키의 작품을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율겐 슈탈프는 일본의 <코쿠분가쿠>지에서, 외래어가 많이 뒤섞여 있고 문장 자체도 영어 번역문 같은 이른바 '일본어로 둔갑한 영어'라고도 일컬 어지는 일본어 원작에는 군데군데 깍뚝깍뚝한 번역 문투가 거슬리지만, 오히려 '재번역'됐다고도 볼 수 있는 영어나 독일어로 읽으면, 너무도 자연스럽고 막힘 없이 가슴에 와닿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하루키의 장, 단편은 마치 제트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전광석화처럼 급강하하는가 하면, 때로는 부르더운 멜랑콜리조로 상승해서 커브 를 돌고, 최상의 부조리 팬터지를 가상하면서, '쿨'한 말씨로 간결한 위트를 마구 뿌리며, 때로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선한 메타포(은유)와 비 유가 극채색을 자아낸다고 극찬한다. <상실의 시대>이후 내놓기만 하면 밀리언 셀러에 오르는 하루키의 꿈 같은 얘기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의 매스컴은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이라는 말을 고심 끝에 창안해 냈지만, 서양에서는 그런 구차스런 말 대신에 이렇게 설명할 수 있 다고 율겐 슈탈프는 강조한다. "하루키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밀려드는 재미를, 현대의 재료를 쓰면서 현대를 그려 낸다. 그 현대라는 것이 서양의 많은 독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 은 일본의 현대인 동시에 미국이나 유럽의 현대이기도 하다. 그런 하루키의 뛰 어나 보편성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무라카미 문학 주크박스(역주:카페나 음악 감상실 등에 비치된, 동전을 넣고 곡목을 선택해서 듣는 기계장치)에 서슴지 않 고 동전을 넣어 자신이 즐기는 곡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다음 곡을 초조하게 고대하게 하는 것이다." 중국에서의 하루키 문학 최근 중국에서는 서방 사회의 최첨단 문학을 익히기 위해서 젊은 작가나 평론 가들이 일본의 현대 작가와 그 작품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그것은 정부의 문 예 정책이 완화됨으로써 가능해졌다고 한다. 한편으로 '일본을 통해서 세계를 본 다'라고 하는 지금까지 걸어 온 과정에서도, 일본의 현대 문학을 연구하는 것은 중국의 문학에 무엇인가 세계적인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으려는 노력으로 나타 나기도 한다. 그들은 서양 문학에서보다 아시아의 문학-특히 아시아의 대표적인 국가인 일 본의 작가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는 자세를 지녀 왔다는 것이다. 일본 문학 가운데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과 산문이 매년 끊임없이 번 역 출판되고 있다. 중국의 젊은 작가들은 하루키의 문학에서 '연애 소설', '청춘 소설', '도시 소설'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학적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 중국에서 처음으로 번역 소개된 작품은 <일본 문 학> 잡지 1986년 제2호에 게재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거울>의 두 단편 이다. 편집자는 하루키가 그린 도시를, '실체 따위는 아무데도 없는, 가공화되어 있는 곳이고', 하루키가 그린 세계는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에 사는 청년들의 세 계'라고 해설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는 '고도로 발달한 물질 문명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 지 않으려고 고독과 필사적으로 싸우는 청년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작가는 일본이 경제 대국이 된 지금, 새삼 '현대'란 무엇인가 를 다시 묻고자 하는 것이라고 무라카미의 창작 의도를 밝히고 있다. <일본 문학> 잡지 동년 6호의 평론에 의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시 소설의 대표 작가, 또 일본 전후 제8대-'침묵적 1대'라 불리며, 가장 '활발한 당대 작가' 의 한 사람으로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여기서 설명되는 것은-일본에서 말하는 '현대'의 개념과 중국에서 말하는 '당 대'의 개념이 일치하느냐 어떠냐는 접어 두고, '근대 이념의 붕괴', '내향적 세대', '제도에 대한 저항', '신세대의 해외 감각' 등 무라카미의 소설에 나타나 있는 것 이 일본의 젊은 세대와 중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 공통적인 것으로 되어 가고 있 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경향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무라카미 하 루키는 중국 당대 소설의 새로운 전개를 상징하는 그런 작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 같다. 87년 1호에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소개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 해는 중국의 문단이 이른바 '좌익 문학'에서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노골화되고, 종전까지 통용돼 온 '관념의 왕국'에서의 가치관 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루키는 그런 경향을 부추기게 한 작가로서 기억되고 있다. <외국 문학> 잡지 88년 6호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가 생활 10년 회고에 의한, 일본 현대 문학에 대한 고찰적 문장이 게재되었다. 거기에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중국행 화물선>, <개똥벌레, 헛간을 태우다, 그 밖의 단편>을 거쳐, <댄스 댄스 댄스>에 이르기까지의 대략 10년 간 을 한 구회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기조음에는 일본의 70년 전후의 '정치적 계절'에 경험한 '상실'이라는 무거운 감각이 흐르고 있다", "각 이야기의 도처에 기술되어 있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라는 '현실'을 무대호 하여, 그와 같은 사회를 비판하고 혐오하면서도, 그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 었던 것이 아닐까?", " '상실과 붕괴 뒤에 오는 것이 설사 무엇이든, 나는 이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라고 작가가 술회하고 있듯이, 10년 간의 작품의 표현은 각기 다르지만, 일본 현대 문학에서의 전형적, 또한 특수한 표현으로서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되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세계 문학> 잡지 90년 2호의 <세계 문학 신사>에서는, '문학의 단층과 재생 -전형기의 일본 문학'이라는 제목의 논문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외 감각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작가는 동서양을 불구하고, 시대나 사회, 역사를 보는 눈이 똑같다면, 똑같은 작품 세계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이 논문은 또한 "이와 같은 신세대의 해외 감각은, 일본 문학의 현대화를 강력 하게 촉진하는 기폭제 구실을 했다"고 하며,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한 그 밖의 전후 출생 작가들의 해외 감각에 의한, 일본 현대 문학의 해외로의 진출을 긍정 적으로 평가하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의 작가들이 급속히 흡수하려고 한것 도 이와 같은 최첨단 문학의 최신 감각이나 수법이다. 91년에 <상실의 시대>가 번역되어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그의 많은 작품이 잇따라 중국에 하루키 붐을 불러 일으켰다. 선풍적인 무라카미 하루키 붐의 영향을 크게 받은 중국의 작품에도 기성의 전 통적, 교조적인 이야기 형식을 파괴하려고 하는 경향과 아울러, 중국판 '도시 소 설' '연애 소설'이 대량으로 등장하였다. <신민만보> 94년 12월 5일자 서평에서 는, 홍콩에서 번역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으로 상해에 소개한 갈우의 말을 인용하여, "무라카미 하루키는 애정에 건 대가가 너무 커서, '상실, 죽음'을 안고 있으면서도, 살아가야만 하는 현대인들에 게 그들을 대신하여 '무언가' 탈출구를 찾아내 주는 것이 아닐까"라고 하면서 그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 예를 든 여러 평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현재 중국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비판의 논점은 아직 찾아볼 수 없고, 그저 수동적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현실주의, 상징적인 표현에 의한 스토리 텔링이, 이제까지의 근대, 현대 문학의 도식을 타파하고자 하는 현대의 방향성과, 무라카미가 그린 세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국 독자의 감성에 기묘하게 합치한 데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하루키 문학 한국에서의 하루키 문학의 현황에 관해서는 책머리에 실은 '하루키 문학의 탐 험을 위한 길잡이'와 '하루키 문학과 독자와의 가교'에서 자세히 언급했다. 따라 서 세계 다른 어느 나라 못지 않게 하루키의 거의 모든 작품이 번역 소개되고, 10년 간에 걸쳐 끊임없이 '베스트' 또는 '스테디 설러'의 대열에 오르고 있는 기 현상에 관해서 더 이상 논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국에서의 '하루키 현 상'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세밀하게 관찰한 일본의 한 언론인이 쓴 '하루키 현상' 의 한국판에 관한 글을 싣는 것으로 대신한다.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은 광범위한 독자층, 10년 간 스테디 셀러에 올라 있는 기현상을 일본의 언론인을 이렇게 보았다. '상실의 시대'의 젊은이들 구리무라 료이치 반일 감정의 저류를 거슬러 상승하는 하루키 소설 최근에 한국에서는 반일 경향을 가진 서적이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실제 한국인들은 훨씬 더 냉정하게 일본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으로 보인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세대간에 여러 가지 차이가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 중에서는 지나치게 편견을 갖지 않고,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일본을 보려 고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역사는 알지만, 문화적으로 좋은 것은 좋다고 드라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한국 젊은 세대의 특징이다. 그것은 한국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최근 그러한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조용하고 착실하게 공감과 지지를 넓혀 가고 있는 일본 작가가 있다. 그는 일본에서도 젊은이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로서, 사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 다. 서울에 온 일본 젊은이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굉장히 인기가 있다고 말하면, 그들은 모두들 "그래 요?"하고 놀라는 얼굴을 한다. 처음에는 의외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윽고, 그들은 한국의 젊은이들 역시 자기들과 같은 감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한국의 젊은이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통해서, 일본의 젊은이들 역 시 한국의 젊은 세대와 같은 감성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를 살면서 비슷한 고뇌 와 실연, 허탈감을 맛보고 있구나, 하고 일본의 젊은 세대에 대하여 친근감을 느 끼게 되었다는 것이기다 하다. 최초로 한국인에게 받아들여진 이례적 작가 지금까지 한국에 번역된 일본 현대 소설은 그다지 많지 않았느데, 옛날에는 미우라 아야코나 소노 아야코의 소설이 몇 편 소개된 정도였다. 과거의 식민지 지배라는 굴욕적인 역사와 굴절된 민족 감정을 생각한다면, 한국인이 일본 문화 에 대하여 저항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니 일본의 소설이 그다지 많이 번역되지 않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 이 한때 인기를 끈 적이 있었고, 최근에는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 한 뒤 역시 한때, 그의 작품이 서둘러 서점의 가판대를 장식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도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출판 관계자로부 터 들었다. 그러한 중에도, 유독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기는 단연 뛰어나서, 일본 소설가로 서는 이례적으로, 그리고 최초로 한국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형태로 받아들여지 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서울에 부임하고 나서, 친구가 데리고 온 이십 대 중반의 직장 여성으로부터 하루키의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때 나는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국어의 번역명으로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고 말했다. 즉, <노르웨 이의 숲>을 말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꽤나 좋아하지 만, 그는 일본에서도 우리들보다는 좀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지지 받고 있는 작가이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최근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 설이 차례차례 번역되어,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공감하는 층이 소리 없이 확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는 1989년에 번역되고 나서 현재까지 10만 부(주:1994년 현재의 필자 추산, 1996년 상반기 현재 약 30만 부)나 팔려 나간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계속 착실하게 팔려 나가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순수 문학 소설은 3천 부 도 팔리지 않느다고들 한다. 게다가 1만 부 이상 팔리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그 것도 일본 작가의 책이 그 정도로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대사건이 고 하나의 기적에 가깝다"고, 어떤 출판 관계자는 말했다. <댄스 댄스 댄스>도 8만 부가 나갔으며, 최근에 <태엽감는 새>까지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번역되어, 출판 후 4, 5개월만에 1만 5천 부나 팔렸다고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공감과 지지받는 이유 무라카미의 소설은 한국의 젊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젊은 신세대 작가들에게 도, 커다란 정신적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는 문학 평론가의 글을, 신문의 서평 같은 곳에서 읽은 기억도 있다. 젊은 작가들 사이에, '무라카미 하루키 신드롬' 현상이 일어나서 그의 소설을 모방한 작품이 나타나고, 개중에는 표절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부른 사건까지 있었다고 한다. 어째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그처럼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공감과 지지를 넓혀 가고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하루키의 대부분의 작품을 출판하고 있는 <문학사상사>의 임홍빈 회장님과 만났을 때, 그는 재미있는 지적을 해주 었다. 일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속하는, 이른바 '단괴의 세대'에 대응하는 것 이, 한국에서는 80-90년대에 학생 운동에 참가한, 현재 20-30대의 젊은 세대라고 하는 것이다. 일본의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의 학생 운동이 좌절된 뒤에 찾아 온, 하루키 작품에 짙게 깔려 있는 '상실의 시대'가, 한국에서는 일본보다 20년쯤 뒤늦게 한국의 학생 운동이 좌절된 뒤, 한국에 찾아왔다는 것이다. 즉, 한국에서 는 지금이 '상실의 시대'이고, 젊은이들은 그 시대가 잉태한 자식들이라는 것이 다. 80년대 일본에서 동시대의 젊은이들로부터 강력한 공감의 소용돌이를 몰고 온, 그리고 파도처럼 독자층이 넓어져 갔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지적은 정곡을 찌르는 것 같다. '상실의 시대'와 한국의 학생 운동 무라카미 하루키의 독자들은 주로 20-30대의 젊은이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전 두환, 노태우 양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던 80년대에 학생 시절을 보냈고, 학생 운 동의 고양기를 경험한 바 있다. 그들은 민주화를 탄압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어 둡고 답답한 사회에 살면서, 학생 운동에 참가하고, 정신적으로 고뇌하고 방황하 면서, 괴로움과 아픔을 맛본 세대인 것이다. 사실 그 이전의 세대들도 학생 운동을 펼치면서, 비슷한 고뇌와 아픔을 경험 해 왔다. 다만 80년대 후반에는,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하거나, 투신 자살하는 충 격적인 사건이 연이어서 발생하였다. 시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잔인하고 애처로운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의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시대에 대한 한이 소용 돌이치고 있었을 것이다. 1987년 6월의 반군부 독재의 민주화 항쟁에서, 한국의 학생 운동은 찬란한 민 주화의 성과를 올리고 영광의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미로에 빠 져 들고 말았다. 학생등은 강대한 사회의 벽 앞에, 자신들이 신봉하며 내세운 이 상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좌절감에 빠져 들고 말았다. 즉, 절대적인 가치나 목 표를 상실하고 깊은 허탈감의 바다를 떠돌게 되었던 것이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서, 그러한 좌절을 경험한 새대가 맞이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실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한 시기에 한국에 상륙한 하루키의 탈감상주의 소설이, 일종의 열풍처럼 젊은이들의 가슴속을 휩 쓸고 지나갔을 것이다. 마치 그것이 70년대 초, 학생 운동이 좌절된 뒤에, 공허 감과 상실감을 안고서 80년대를 맞은 일본 젊은이들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 던 것처럼. 동시대성이 느껴지는 하루키 소설 한국의 문학 평론가인 장석주 씨는 신문 서평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것을 즐겁다. 나는 그의 소설에서 '동시대성'의 감각을 발견한다"라고 썼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역사, 신, 이념과 같은 절대적인 가치가 붕 괴한 이래, 집단에서 개별화로, 이념에서 욕망으로 달려 올라가는 고도 자본주의 세계인 90년대의, 새로운 문학의 상징이고 기호이다"라고 칭찬했다. 일본이든, 한 국이든, 젊은이들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리라. 한국 학생 운동의 좌절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만, 한국이 80년대 의 고도 경제 성장을 토대로 하여, 90년대에 고도 소비 사회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하루키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안성맞춤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일본의 고도 대중 소비 사회의 도시를 무대로 한 하루키의 소설이 한국 의 젊은이들에게 아무런 위화감도 저항도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동시 대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리라. 만일 일본과 거의 같은 시기인 80년대 초에서 중반에 번역되었다고 한다면, 지금만큼의 공감과 지지는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미 시기상조였을 것이다. 그때의 한국 학생들의 감성은, 학생 운동의 절대적인 정의와 이념에 뜨겁게 불 타오르고 있는 중이었으며, 한국 사회에 찾아올 고도 소비 사회의 모습은 아직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대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살아 숨쉬는 하루키 소설의 공명하는 감성 어쨋든, 지금의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일본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하 루키의 소설 세계에 공명하는 감성이 살아 숨쉬고 있다. 또한 함께 동시대의 공 기를 호흡하고 있다. 거기에는 편견이나 반일의 그림자가 없으며, 옛날로부터 내 려와 고정 관념이 되어 버린 반일 감정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친일과도 무관한다. 다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작품을 통해서, 좋은 것은 좋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 젊은이들 특유의 유연하고 신축성 있는 감성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현대 젊은이들의 공통 언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한 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또한 어디에서도 그것은 같을 것이다. 이제 한국의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극단적인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즉 쇼비니즘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개개의 작품을 통해서, 국경을 뛰어넘어 공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반일도 친일도 관계없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개개인의 판단 기준이 되어 가고 있으며, 공감할 수 있는 부분만 있다 면, 그것으로부터 서로의 이해가 시작되고, 선입관과 편견의 고정 관념에 좌우되 지 않는 인간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한국 에 새롭고 유연하며 가벼운 감성을 지닌, 하루키에게 공감하는 세대가 출현한 것은, 일본과 한국의 문화 교류와 상호 이해에 있어서 매우 밝고 바람직한 일이 라고 생각한다. <문학사상사>의 임회장님도 내가 만났을 때, 하루키의 작품이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공감의 토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커다란 벽, 장벽이 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 설은 그것을 뛰어넘고 있다. 최소한 하루키를 읽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쇼비니즘 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감성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호 이해가 진일보한 다. 일본과 한국의 참다운 우호 친선 관계에 있어서, 문화의 영향력은 상당히 크 니까." 그리고 또 그는 "이미 일본과 한국은 언제까지나 적대시할 시대가 아니다"라 고 말하고, "하루키에게 공감하는 젊은 세대야말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벽 을 허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것은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2.하루키 문학의 고향 1.하루키의 성장과 작가로 가는 길 그의 문학에 깃든 어린 시절의 감성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1월 12일, 일본 쿄토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주 로 효고현 아시야시에서 십대를 보냈는데, 그가 십대를 보낸 아시야는 "극히 평 범한 사람이 사는 지역"으로서, 그의 말에 의하면 그곳은 "우리 집 주변은 납치 당할 뻔해서 큰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네다섯 명 정도는 족히 튀어나올 듯한, 극히 평범한 주택가이다"라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십대를 아주 조용하고 내성적으로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데, 특히 그는 스스로 '공주님' 같은 여자 아이와는 단 한 번도 말을 해본 기억 이 없으며, 지금도 그곳에 대해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이라곤 한밤중에 종종 해 안가로 빠져 나가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모닥불을 피웠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바다만 있다면 어디에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라고 지극히 평범했던 자신의 십대 시절을 회고한다. 그의 친구들 또한 성격이 그와 비슷해서 비교적 느긋한 편이라고 한다. 즉 흔 히 남자들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다든지 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는,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격동과 혼돈 속에 보낸 학창 시절의 투영 학창 시절의 그는 학교란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공부도 그다지 열 심히 하지 않았고, 반항심 또한 강한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는 교사에게 매를 맞 기가 일쑤였고, 고교 시절에는 마작을 하거나 여자들과 놀러 다니는 것을 일삼 으며 3년이란 시간을 흘려 보내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한 그는 직간접적으로 학 원 분쟁에 휘말렸는데, 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7년 동안이나 다녔지만, 그곳에서도 특별히 학문 을 연구했다든가, 문학 작품에 열정을 품고 뛰어 들었다든가 하는 일 없이 평범 한 일상을 보냈다. 그런 가가 매사에 공부하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제도 교육을 모두 다 끝마친 이른바 '사회인'이 되고 나서부터라고 하는데, 그는 일하는 틈틈이 짬이 나면, 좋 아하는 영어 소설을 번역하거나, 친구에게서 불어를 배워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그는 의식적으로 주위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주로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으로 서, 반대로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데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고, 때문에 강연이라든가 강좌 의뢰가 들어 올 경우 거절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그가 소설가로 서의 소질을 어떻게 발현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남의 얘기 듣는 것을 꽤 재미있어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 고, 여러 가지 사고 방식이 있다. 개중에는 '과연 그렇군' 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의견도 있짐나, 전혀 무의미한 생각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무의미한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잘 들어 보면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에 따라 확고하게 성립된 의견이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내가 한 걸음 물러나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 려는 태도를 보이면, 대개 사람들은 마음을 열어 놓고 정직하게 얘기해 준다. 당 시에 나는 소설을 쓰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 경험은 훗날 내가 소 설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대학에서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것 중의 하나였다." 2. 하루키 문학의 원초적 배경 '전공투'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그려진 '전공투'는 어떤 것인가. 초기의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등에서는 '전공투'적인 것이 긍정도 부 정도 안된채, 지나간 사실로서 그대로 등장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버텼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 는 '쥐'의 이야기나, 기동대에게 맞아 부러진 앞니를 보고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 고 묻는 여자 친구에게 '나'의 이야기에서 전공투 체험이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상실의 시대>에서는 전공투에 관한 내용이 매우 왜소하게 다루 어지고 있고, <댄스 댄스 댄스>에 이르러서는 '전공투'의 형사를 연상케 하는, 연신 담배를 입에 물고 서성거리는 꼴사나운 왜소화의 정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 다. 한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전공투를 왜소화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공투'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정신적인 활로가 열릴 수 없다는 점에서 과거의 청산과 허무, 공허의 세계 속에서도 미래 지향적인 삶을 누리자는 하루 키로서는 당연한 사리의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작품 속에 배어 있는 깊은 상실감과 허무, 그리고 아픔은 '전공투'가 몰 아온 인간 관계의 상실과, 관념의 왕국이 무너져 버린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감성이 가장 예민한 20대에 너무도 충격적인 '전공투' 체험을 겪으면서 형성된 하루키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댄스 댄스 댄스>까지의 초, 중기의 거의 모든 작 품 속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전공투'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무라 카미 하루키는 전공투 세대다. 1967년 일본의 대학가는 정부에 항거하는 대학생 들의 공동 투쟁의 전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67년 10월, 사토총리의 베트남 방문을 저지하려는 실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한 쿄토 대학생이 피살되자, 전공투의 투쟁 대열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확대 되고 격화되어 갔다. 그후 72년 2월, 아사마 산장에서 벌어진 경찰과 연합적군파 와의 총격전에서, 마지막 전공투 세력의 전원이 체포될 때까지 5년 간에 걸친 이른바 '전공투 투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니까 하루키는 입학에서 졸업까지 대 학 생활을 전공투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낸 셈이다. 하루키는 이 대학생들의 투쟁 대열에서 그 선두에 서지는 않았지만, 결코 그 대열 밖에 서서 방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대학생들의 이상 주의적 관념에 입각하는 투쟁은 엄청난 상처와 상실의 아픔을 남기고, 하루키의 인격 형성과 세계관, 그리고 인생관 정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사라지고 말 았다. 하루키 초기의 문학은 그 전공투 시절에 얻은 것과 잃은 것, 그리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돌아보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장식됐다. 그리고 그 후의 하루키 문학에 있어서도 하루키 문학의 출발점이요, 고향이라 고 할 전공투 체험은 직접, 간접으로 하루키와 문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하루키 문학을 보다 깊이 그리고 보다 넓게 이해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되고, 또 한국의 '운동권' 투쟁과의 비교를 위한 사색의 자료로 삼기 위해, 일본의 '전 공투' 운동의 전모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대학의 반란'이라는 전공투 운동 전공투 운동은 196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을 지칭하는 것으 로, 60년대 중반부터 여러 대학이나 학원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어 온 대학 분 쟁이, 이미 단순한 개량 투쟁이나 반대 투쟁만으로는 밀고 나갈 수 없다는 인식 에서 출발하였는데, 70년 안보 상황에늬 투쟁과 결부되는 가운데, 전국적인 대학 (학생) 반란의 양상을 띠면서, 급진적인 투쟁으로 변모되어 갔다. 전공투란 전국 학생 공동 투쟁 회의의 약칭으로, 직접 민주주의에 의거한 조 직의 운영을 그 원칙으로 하고, 개개의 주체가 각기 주체적으로 결의하고, 책임 을 유지하면서 결집된 대중적 전투 조직이며, 투쟁하는 주체의 결집체였다. 이러한 전공투 운동의 배경에는 6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 정책에 의한 인플레 기조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배경이 있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정부에 의한 대 학의 '노동력 생산 공장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생산 공장'으로의 재편 등이 있 었다. 이러한 공격적인 재편은, 60년대 중반부터 학비 인상, 기숙사, 학원에 대한 관리 강화, 커리큘럼 개편 등으로 잇따라 구체화되었고, 60년대 말에 이르러 목 적별 대학과 대학원만 둔 대학의 구상, 쓰쿠바 대학 설치 등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러한 교육의 제국주의적 재편과 관리 체제 강화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학원 투쟁의 배경이었다. 동시에 세계 각지의 스튜던트 파워, 즉 프랑스 의 5월 혁명, 서독, 미국 등에서의 세계적인 학생 반란과도 공통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즉 정보화 사회의 진행과 고도로 발달한 그 정보화 사회 속에서의 관리 조작 체제의 강화에 대한 반역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에 있어서의 학생 반란(대학의 투쟁)은, 학원이나 대학의 개별 적인 영역을 넘어 '대학 혁명'의 슬로건을 등장시키고, '권력 투쟁'으로까지 치달 았던 것이다. 또 전공투 운동은, 이른바 '대학 해체론', '자기 부정론'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권력 투쟁인 동시에 사상적인 운동이기도 했다. 전투적 행동대로서의 전공투의 조직 형태 전공투의 조직 형태는, 간접 민주주의 대신 직접 민주주의 방식을 채택하는 동시에 행동대적 요소를 가진 조직으로 형성되었고, '반대학', '자주 강좌'를 통한 학문, 사상의 재구축을 지향하면서, 좌익사상에 물들어 앞 뒤 돌보지 않고, 저돌 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대원들을 끌어모아 갔다. 이 전공투의 조직 형태와 운영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전공투는 섹트와 논섹트, 학생과 연구자, 개인 가맹 조직과 집단 가맹 조직이, 아무런 서열도 매겨지지 않 은 채로 모인 조직이다. 대체로 도쿄 대학 투쟁의 경우는, 기존의 조직에 얽매이 지 않고, 운동에 참가하는 개개인이 자유 분방하게 조직을 만들어 갔다. 이 조직에는 개인의 주체적 결의에 의해서만 참가하고, 지도부는 만들지 않았 으며, 시시때때로 제시되는 문제들은 전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토의하게 되어 있었다. 반란은 요원의 불길처럼 확대되었다.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공방전을 거쳐, 전공투 운동(학원 투쟁)의 물결은 순식 간에 전국의 대학, 고교 및 전문 학교에까지 파급되었다.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 에 돌입하는 대학, 고교가 잇따라 발생했다. 1969년 2월에 도교 대학, 도교 수산 대학, 교토 시립 의대, 히로시마 대학 등이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에 돌입했고, 3월에는 야마가타 대학, 도야마 대학, 간사이 가쿠인 대학, 4월에 오키나와 대학, 오카야마 대학, 시마네 대학... 등 한없이 계속되었다. 1년 동안에 국립 대학 75개 중 68개 교가, 공립 대학 34개 중 18개 교가, 그리 고 사립대학 270개 중 79개 교가 각각 투쟁의 전열에 가담한 것이다. 이는 일본 의 대학수의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숫자이다. 그리고 투쟁의 스타일은 더욱더 격렬해져 갔다. 쇠파이프나 화염병은 일상적 인 무기가 되었고, 수제 폭탄이 개발되었다. 또 바리케이드 사수, 철저한 항전의 전술이 일상적인 일로 되어 갔다. 투쟁의 불길은 사방에서 불타 올랐다. 그리고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갔다. 그렇게 퍼져 나가는 가운데 불꽃은 하나가 되었다. 투쟁은 이미 개별적인 대학 투쟁의 영역을 넘어 '대학 해체', '교육 분쇄'의 위상에까지 치달았다. 그리고 이 때 하나의 역설이 생겨났다. 여러 대학의 개별적인 전공투 운동은, 전공투 운동 이라는 하나의 운동 자체가 된 것이다. 전국 대학의 두쟁 지도는, 반드시 하나하 나의 대학( 및 고교)의 투쟁의 소재를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종합적 인) 단 하나의 투쟁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국 전공투 연합의 결성 학생 반란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그때까지 각 대학의 개별적인 투쟁 조직이 었던 전공투들 사이에 횡적인 연락 조직이 생겨났다. 그것이 전국 전공투 연합 니다. 1969년 9월 5일에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 개최된 결성 대회는, 전국 178 개 대학의 2만 6천 명에 이르는 전공투 학생들이 결집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대회는 의장에 도쿄 대학 전공투의 야마모토 요시다카, 부의자에 니치다이 대 학 전공투의 아키다 메이다이를 선출하고,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채택되었다. 70년 안보 분쇄! 오키나와 투쟁 승리! 10월 10일, 10월 21일 투쟁 승리! 파방법(파괴 활동 방지법), 소란죄 공격 분쇄! 대학 입법 발동 분쇄, 전국 대학 투쟁 승리! 베트남 인민의 해방 투쟁 승리, 온 아시아 인민과 연대하여 투쟁하자! 반전파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싸우자! 전국 대학을 바리케이드로 점령하라! 히비야 야외 음악당은 아침 일찍부터 헬멧 모습의 학생들로 가득 메워지고, 슈프레흐코르(슬로건 등을 일제히 외치는 일)와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란의 시대 상징하는 미니 스커트 여자들의 다리가 기묘하게 눈부셔 보였다. 계속 달려가고 있던 시대였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달렸다. 나라 안의 모든 살마들이 계속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도 달렸다. 쫓겨서 달려가기도 하 고, 쫓아가느라 달려가기도 했다. 남자도 여자도 달렸다. 기동 대원들과 샐러리 맨도 계속 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60년대라는 시대였던 것 같다. 시대는 뜨거운 꿈을 꾸고 있었다. 계속 꿈을 꾸고 있었다. 일종의 '풍속'이 범람했다. 모든게 '풍속'이었다. 실수를 하면 투쟁마저 '풍속'이 되어 버릴 지경이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투쟁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 않으 면 안 되었다. 모두들 기묘한 패션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이 시대의 패션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예쁜 다리를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했다. 문화 인류학자인 앨프레드 크로버의 말에 의하면, 미니스커트의 유행은 전란 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핫팬츠와 미니스커트 차람의 아가씨들이 시 대 속을 헤엄치고 다녔다. 회색의 압송 차량의 쇠창살 사이로 내다보이는, 긴자 의 거리를 거니는 여자들의 다리가, 기묘하게 눈부셔 보였던 일이 생각난다. 아무튼 '풍속'이 시대의 '열쇠'인 것만을 확실한 것 같다. 전공투의 적은 민청과 경찰 기동대 그리고 매스컴 우익, 민청, 기동대 등이 당장 눈앞에 있는 적이라면, 매스컴 또한 거대한 '적' 이었다. "도쿄 대학 투쟁은 매스컴에 의해 포위도니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 그 무렵의 도쿄 대학 전공투 기관지인 <신케키>에 실려 있었다. 이 말은 전공 투 운동(학생 반란)이 놓여 있던 좌표 같은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매스컴은 투쟁을 왜곡하여 선동적인 중상 모략이나 유언비어만을 보도하고 있었고, 과격 파 캠페인을 펴, 활동가를 폭도라고 부르고 있었따. 매스컴은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의 하나였다. 그리고 눈앞에서 직접 대결하게 되는 '적'은 역시 민청과 우익, 기동대 등이었다. 니치다이 투쟁에 서는, 실제로 투쟁 파괴자로서 투입된 우익과의 대결 없이는 운동이 진척되지 않았으며, 민청은 더욱 지독하게 굴었다. 민청은 '일반 학생'이라는 그 묘한 가면 을 쓰고 투쟁 파괴자로 활동한 것이다. 운동이 고양되어 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면, 언제나 전면에 나타난 것이 기 동대의 '벽'이었다. 기동대는 데모를 규제하며 가두를 제압하고, 나중에는 아예 교내에 상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스총을 난사하고, 두랄루민 방패로 테러와 린 치를 가했으며, 온갖 포학한 짓을 다하는 정치 권력자들의 폭력 장치였다. 투쟁은, 이 권력의 폭력 장치로서의 '벽'을 돌파하며 무너뜨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쟁터로 변한 도심 70년 안보 투쟁은, 11월의 사토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최대의 고양기를 맞았 다. 국제 반전 데이인 10월 21일에는, 도쿄 시 공안 위원회가 모든 집회와 데모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주투, 간다, 긴자 등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이 전개되어 도심부는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11월 16일과 17일에는 사회당 계열의 반안보 실행 위원회가 주최한 항의 집회 (사토 방미 저지 투쟁)가 요요기 공원에서 개최되어 7만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 이 모였따. 전공투 반전 청년 위원회의 부대는 그 후 속속 가마다 역 주변에 결 집하고, 격렬한 시가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기동대의 저지선에 막혀, 하네다 공 항에는 돌입하지 못했으며, 새벽녘에는 투쟁이 끝나 버렸다. 이날 체포된 사람은 모두 2천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날의 투쟁을 계기로 하여, 운동은 이윽고 무장 투쟁 및 게릴라전으로 치닫 게 되었다. 레몬과 헬멧-'자기 방어'와 '자기 주장' 최루탄을 터뜨리면 모두들 울었다. 울고 싶지도 않은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중에는 분해서 장말로 울고 싶어졌다. 개중에는 생각이 세심한 데까지 미치는 학생도 있어,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레몬 한 개를 갖고 다녔다. 레몬을 짜낸 즙을 눈에 넣으면, 이상하게 아픔이 사 라졌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커다란 투쟁이 벌어지게 되면, 모두들 미리 다투어 레몬을 가지고 다녔다. 레몬은 점퍼나 코트의 포켓에 몰래 숨겨져 투쟁의 현장 으로 나간 것이다. 투쟁이 있는 곳에서 역시 발견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헬멧이었다. 헬멧은 학생들의 자기 주장이었다. 학생들은 가지각색의 헬멧을 쓰고 있었다. 헬멧은 원래 게발트(폭력)나 투석에 대항하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학생들에게 있어썬 '자기 주장'의 상징이기도 했다. 특정한 섹트(당파)의 헬멧 이외에 각 대학의 전공투마다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색깔의 헬멧을 썼다. 은빛 헬멧, 금빛 헬멧, 여러 색깔이 칠해진 헬멧 등이 나타 났다. 전면에는 '전공투'라고 커다랗게 씌어져 있거나 당파의 이름이 적혀 있고, 옆이나 뒤쪽에는 여러 가지 슬로건이 씌어져 있었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는 캠퍼스에 새로운 헬멧을 사가지고 오면, 학생들은 스 프레이식 페인트로 색깔을 칠했다. 이 헬멧의 끈에 타월을 끼워 넣어 마스크처럼 복면을 하는게 투쟁할 때의 일 반적인 스타일이었다. 전공투 일지-학생 반란의 궤적 다음은 전공투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 중요한 사건을 뽑아 연대순으로 기술 한 것으로, 전공투 운동의 생생한 발자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67년 10월 8일에는 수상 사토의 베트남 방문 저지를 위한 투쟁이 하네다에서 벌어졌다. 이 날 쿄도 대학생인 야마자키 히로아키가 경찰과의 공방전이 벌어지 는 와중에서 학살당했다. 68년 1월 5일에는 사세보에 엔터프라이즈가 기항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투 쟁이 벌어졌다. 전학련 1,500명이 히라세바시 위에서 기동대와 충돌하였고 이후 일주일 동안 현지에서 격투를 벌였다. 같은 해인 10월 21일은 국제 반전 데이로 신주쿠, 방위청 국회등에서 격렬한 데모를 벌였고, 기동대와 충돌, 소란죄가 적용되었다. 해가 바뀌어도 전공투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69년 1월 18일에는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에서 공방전이 벌어져, 2일 동안에 걸친 격투를 벌였고, 간다에 서는 해방구 투쟁이 있었다. 69년 4월 28일에는 긴자, 오차노미즈, 신바시 등에서 기동대와 충돌한, 일명 오키나와 투쟁이 벌어졌다. 같은 해 9월 5일, 드디어 전국 전공투 연합이 결성되었다. 전국의 학생 3만 4 천 명이 결집한, 전공투 사상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11월 16일에는 사토 방미를 저지하려는 투쟁이 벌어져, 가마다역 주변에서 기 동대와 격돌, 약 2,000명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듬해인 1970년 3월 31 일에는 적군파 9명이 일본 항공기 요도호를 공중 납치한 사건이 있었고, 71년 1 월 25일에는 적군파와 일공 혁명 좌파의 공동 정치 집회(지요다 공회당)가 벌어 졌다. 72년 2월 19일에는 연합적군 사카구치 히로시 등 5명이 아사마 산장에서 농 성, 총격전을 전개하다가 28일에 모두 체포되었다. '야스다'강당 낙성 이후 20년, 1989년의 풍경 1989년 쇼와 시대가 끝나고, 풍경은 바뀌었다. 1969년 겨울, 야스다 강당의 낙 성이 있은 이후로, 2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 해에 우리가 본 광경은, 기묘한 허무주의와 그로테스크해 보일 정도로 애국적인 것으로의 회귀였다. 신주쿠 거 리의 양쪽 연변에는 작은 일장기들이 여러 겹으로 이어져 있고, 그 한가운데를 검은색의 거대한 투구풍뎅이와도 같은 영구차가 천천히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릿느릿 달려가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에 그 대로 남아 있다. 소리를 지워 버린 슬로 모션 비디오처럼 언제까지나 달려간다. 1989년 2월에도 우리가 계속 지켜봐야 했던 광경은 어떤 광경이었는가, 눈을 감 으면, 언제나 그 느릿느릿 앞으로 나가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슬로 모션 비디오 의 풍경이 떠오른다. 1969년에는 사방에 '해방구'가 출현했었다. 신주쿠, 시부야, 오차노미즈 등지 에... 그리고 그 후 '보행자 천국'이라는 게 출현했다. 권력은 그 '해방구'에서 아 주 중요한 것을 하나 배웠던 것이다. 우리가 돌멩이와 화염병과 책상, 의자의 부 서진 조각 따위로 '해방구'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권력 은 단 한 장의 시달서로 신주쿠의 대로에 '보행자 천국'을 출현시켜 버렸다. 그 러나 그 풍경은, 우리의 '해방구'와 너무도 흡사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시이비 한 것이었다. 20년 동안에 사람이 변하고 풍경도 바뀌었다. 풍경의 변모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들의 의식의 변모를 말해 주는 것이다. 거리의 광경을 보면, 사람들마저도 균일화되어 버렸다. 모두들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3.하루키가 영향을 받은 11인의 미국 현대 작가 하루키와 미국의 현대 문학 하루키는 일본 소설은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읽지 않았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페이퍼 백으로 나온 미국 현대 작가들의 소설을 탐독했다. 하루키는 일본인이지 만, 일본 문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 미 문학적인 작품의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특히 미국의 현대 작가 11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그의 솔직하고 소박한 인간성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일로, 흔히 일본에서도 큰 작가가 되면 여간해서 자기가 영향을 받은 작가를 제대로 밝히지 않거나, 누 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미국 작가 11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문학적 영양소를 얻 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되풀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존 업다이크, 헤밍웨 이, 포크너 같은 현대 미국의 문단을 풍미하고 있거나 과거의 한때를 지배했던 그런 거물급 작가들은 아니다. 그들 11인에는 중견 작가라고 확실히 자리 매김되기 전의 작가도 포함대 있 어, 모드 제일급의 작가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그 작가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그것으로 자신의 작품 속의 자양분을 삼은 것이다. 그는 그 11인의 작가들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어떤 점에 공감하였으며 무엇을 참고했는가. 이제 하루키가 가장 선호하고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콧 피츠제럴드, 스티븐 킴을 중심으로 이른바 하루키의 문학적 영양소가 됐다고 하 는 11인의 미국 작가에 다해서 알아 보고자 한다. 챈들러적인 소설 기법 80년대의 세계적인 인기 작가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자각적이라는데 있다. 무 엇에 대해 자각적이냐 하면 방법에 대해서 자각적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전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보르헤스(역주:아르헨티나의 소ㅅ다이자 시인), 민화와 만난 뒤에 '소설의 마술사'가 된 칼비노, 근대 오컬티 즘(자연 또는 인간의 숨어 있는 힘이나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의 영향 아래, 뛰 어난 환상의 세계를 차례로 발표한 미하엘 엔데, 혹은 사상과 종교의 스케일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크게 설정하고, 그 스케일에서 현대의 문제를 거시적으로 재 파악하여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장미의 이름>의 움베르토 에코. 이러한 경향은 일본에서도 마친가지다. 사실 일본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 에 대해 진지하게 도전하고 있는 작가들은, 방법에 있어서 자각적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런 자각적인 의식을 갖게 되면,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연주의적인 소설을 쓸 수 없게 된다. 하루키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소설의 방법에 있어서 매우 자각적이다. 그리고 자신의 문학사적 위치, 현대 세계에서의 위치에 대해서도 충 분히 유념하고 있다. 특히 그는 소설 기법에 있어서 다분히 챈들러(역주:미국의 추리 소설가, 하드보일드파의 거장)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하루키: ... 내가 챈들러를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로우-작품 속의 주인공-라는 존재 자체가, 존재감이 있는 가설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식 으로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챈들러 자신의 자질 문제라고도 생각하지만, 그것을 잘 표현해 내지 못하면, 도시라고 하는 것 을 그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가설이라는 뿌리를 빼버리면, 굉장히 피상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가와모토: 챈들러는 도시 속에서 황야를 본다고 할까, 도시를 도시로서 보고 있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평소에 살고 있으면서 알아 차리지 못하는, 도시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쓰는 것이지요. -가와모토 사부로, <도시의 풍경학> 중에서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양을 쫓는 모험>의 작품 구 성은 분명히 챈들러적이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한 사나이가 경제 사정이 좋지 않게 되자, 어떤 기묘한 의뢰를 떠맏게 되고, 그 의뢰에 따라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과정에서 주도 면밀하게 준비된 사건이 꼬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차츰차츰 의뢰주가 수상해지고, 의뢰받은 일 자체도 수상해지면서, 소설의 구 성 그 자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스릴 넘치는 변화가 일어난다. 하루키 자신은 이 변화를 'seek and find'라는 말을 사용하며, 가와모토와의 대 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이때 쓰여진 'seek and find'라는 말은, 후에 마 치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대명사처럼, 연구자나 팬들 사이에서 쓰여지게 되었 다). 'find' 했을 때는 'seek'했던 것이 이미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 테마라고 생각합 니다. 그의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구태여 챈들러나 하루키 문학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모든 문학은 발견했을 때에는, 찾고 있던 것이 당연히 변질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 점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그것에 또 다른 테마를 불러올 수 있 기 때문이다. 그것은 찾아 내야 할 것이 미리 상실되어 있는, '부재'라고 하는 테 마이다. 'seek and find'에서 테마가 찾아야 하는 것의 부재로-상실로-이행할 때, 무라 카미 문학은 챈들러와 뚜렷이 결별하고, 일본으로, 자신의 원래의 체험에 입각한 표현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시대인 1920년대 하루키는 스콧 피츠제럴드를 가리켜 "한동안 그만이 나의 스승이요, 대학이요, 문학하는 동료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감수성이 예 민한 고교 시절부터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라면 닥치는 대로 구해서 열심히 읽었 다고 한다. 1920년대 미국의 작가를 대표하는 그는 감각적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에 가까 웠고, 유연함과 오만한, 센티멘탈리즘과 시니시즘, 극단의 낙천주의와 자기 파괴 적인 욕망, 상승 지향과 하강 감각, 도시적 세련미와 중서부적인 소박함 같은 서 로 상반된 감정이 작품 속에서 약동하고, 그런 대립된 요소를 조화시킨 점에 그 매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한 요소는 하루키의 여러 소설 속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하루키의 문학을 상실이라는 테마에서 살펴보면, 기법상으로는 물론 챈 들러적이지만-지극히 하드보일드적인-, 테마 그 자체로 보면, 피츠제럴드 쪽에 가깝다. 왜냐하면 피츠제럴드의 작품 속에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기본이 되는 상실감이 농밀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역주: 잃어버린 세대, 제 1차 세계 대전 후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인 및 예술인들에 게 주어진 명칭. F.S 피츠제럴드, J. 더스패서스, E.E. 커민스, W.H 포크너 등이 이에 속함)'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난 피츠제럴드는 태어난 지 2년 만에 부친 회 사의 도산으로 인해, 뉴욕의 버팔로로 이사를 한다. 그리고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남부에서 군 복무를 하다가, 종전과 함께 뉴욕으로 올라와 카피라이터 를 하면서, <낙원의 이쪽>을 완성했다. 처음 쓴 이 장편 소설이 순식간에 전미 국의 베스트 셀러가 되어, 그는 작가로서의 운 좋은 첫출발을 하게 되었다. 1920년-<낙원의 이쪽)을 출판한 그 해에, 피츠제럴드는 운명의 여성, 젤다와 결혼하였고, 그 5년 뒤인 1925년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을 발표하기 전까지 피츠제럴드는 젤다와 함께 이 파티에서 저 파티로 뛰어다니며, 며칠씩이나 파티를 벌여댔다. 결국 베스트 셀러 작가로서 얻은 막대한 수입은 술값과 호텔비와 모피로 사라져 버리고, 급기야 출판사로부터 가불까지 해야 하 는 형편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10개월 가량 유럽에 머물면서, <위대한 개츠비>를 완성했던 것이다. 무라카미는 그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이 라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한 대목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하루키의 피츠제럴 드에 대한 기호는 각별한 것 같다. 피츠제럴드라는 작가 체험 및 작품 체험에 못지않게, 하루키는 그의 작품을 번역함에 있어서도, 역시 독특한 특징일 보이고 있다. 미국 문학의 연구자인 다 쓰미 다카유키는, 대학에서 미국 문학을 가르치면서 "오늘날 피츠제럴드를 읽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것이다"라고 까지 하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비유나 유추가 아니라, 피츠제럴드를 읽는 것은 하루키의 일부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라 는 뜻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가령 <마이 로스트 시티> 원문에서는 단순히 '더 걸 (the girl)'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하루키는 '꿈의 소녀'라고 번역하였다. 그것은 '누구라도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장인데도, 번역문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 장이 찍혀 있다'는 얘기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번역이 대단히 적절했다는 사 실이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연상되는 다른 작가들-스티븐 킹 외 피츠제럴드 외에도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국 작가들 들어 보면-환상 문학의 연구자 가제마 겐지의 연구-, <댄스 댄스 댄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공포 소설가, 스티븐 킹을 들 수 있다. 스티븐 킹은 매년 한 작품 정도 베스트 셀러 소설을 내고 있는데, 작품마다 정성을 다해 치밀한 구상과 탁월한 소설 기법을 발휘,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 에 갖춘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하루키는 킹의 소설의 일관된 모티프인 반부권성, 반권력적 경향에 공감 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은 가제마 겐지가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나서 연상되는 작가들에 대해서 서술한 것으로, 그 대목을 인용해 보기로 하겠다. 장편 소설 <댄스 댄스 댄스>를 예를 드렁 보자. 우선, 이야기 전반부에서 무 대가 되는 '돌핀 호텔', 이 호텔은 엘리베이터의 정체 모를 존재도 포함하여, 스 티븐 킹의 작품 <샤이닝>의 무대가 되는 '오버루크 호텔'의 재판에 지나지 않는 다. 킹의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샤이닝>은 "자비로 몇 번인가 사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정도"라고 공언했을 정도로, 그의 마음에 드는 작품인 것 같다. 겨울철 자연 조건이 나빠서, 일단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한 5, 6개월은 외부와 접촉할 수 없게 된다는 유령 호텔 '오버루크'는, <양을 쫓는 모험>에서 일단 눈 이 쌓이면 길이 폐쇄되어, '그야말로 동명'으로 화하는 쥬니타키 마을의 산 위 '별장'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밖에도, 주인공인 '나'와 약간의 영매 능력을 갖고 있는 열세 살의 소녀 유 키와의 관계는, <파이어스타터>의 맥기 부녀를 방불케 하며, 저주받은 외제차 마세라티는 <크리스틴>의 58년형 플리머스 퓨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한 인상을 열거해 나가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조금도 중요 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하루키는 스티븐 킹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의 작품도 똑 같이 이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C.S.루이스의 <나르니 아국 이야기>,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50년대 SF>, 혹은 보 네거트의 <고양이의 요람>, 레이먼드 챈들러나 로버트 B. 파커의 하드보일드 소 설, 르 구인의 <그림자와의 싸움>, 브로우티건의 <사랑의 행방>, 카프카의 <성>, 라브 크래프트의 <쿠트르 신화>, 그리고 킹의 <파이어스타터>와 <데드 존>과 같은 작품을,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인용하거나, 또 어떤 때는 암시하면 서, 독자에게 친밀한 눈짓을 보내고 있다. 그 밖에도 하푸키가 문학 수업을 하면서 가까이 한 작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트루먼 카포티 : 대학 수험용 영어 부독본에 실린 트루먼 카포티의 <머리 없 는 매>를 읽고 감탄한 이래, 그의 많은 작품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작품을 특히 좋아했다고 하며,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카포티의 단편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카포티로부터 작품의 내용보다도 그 문장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그의 문장에는 읽어 가면서도 어디에서 뒤집어질지 알 수 없 는 무서움이 있다"고도 말했다. 커크 보네거트 : 그 역시 하루키가 애독한 작가의 한 사람이다.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를 처음으로 읽었을 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루키는 말하고 있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발표됐을 때, 문장이 너무 번역투고, 보테 거트의 문장과 비슷하다고 어는 평론가가 지적한데 대해서, 그는 보네거트의 영 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솔직하게 시인한 적도 있다. 폴 세로 : 주로 단편 소설을 많이 쓴 폴 세로도 하루키가 높이 평가하는 작이 다. 특히 <스위스의 로빈슨>이나, <모스킷 코스트> 같은 작품은 여러 번 읽었 고, 그의 싱싱한 문장과 표헌에 큰 매력을 느꼈으며, 특히 그의 작품 세계의 고 립성에 끌렸다고 한 인터뷰에서 하루키는 말했다. 리처드 브로우티건 : <미국의 숭어 낚시>로 200만 부의 베스트 셀러 기록을 세웠던 리처드 브로티건도 하루키가 좋아했던 미국 작가였다. 데뷔작이 화제가 되어 화려하게 등단하게 되면, 브로우티건처럼 심리적 압박을 많이 받게 된다고 자신의 경우와 비교하며 하루키는 조심해 왔다. 브로우티건은 한동안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점점 평판을 잃게 되었고, <그렇게 그 바람은 모두 날려 버리지는 않는다>는 긴 이름을 단 가장 만년의 작품은 1 만 5000부 밖에는 팔리지 않았다. 브로우티건은 그런 좌절의 아픔에 견디지 못 한 탓인지 권총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하루키는 브로우티건을 추모하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후기의 브로우티건은 저 천마가 하늘을 달리는 것과 같은 상상의 날 개를 잃어 버렸지만, 그래도 평범한 몇백 명의 작가들이 흉내낼 수 없는, 차분하 고 부드러우며 유머에 넘친 독자적인 세계를 그려 냈다." 브로우티건은 만년에는 미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번역 작품을 통해서 더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그의 아주 오밀조밀하고 정치한 문장이 분재 원예같은 미니어처 적이고 우아한 것을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성향에 잘 영합된 탓이라는 해석도 있 다. 게이 타리즈 : 하루키가 애독했던 작가 중에는 게이 타리즈도 포함된다. 특히 그의 초기 작품 <뉴욕 산책자의 수기>와 <당신의 이웃집 아내>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시선이 아주 낮아서 사물을 정확히 보는 멋있는 문장을 나는 좋아한다. 길 위에 떨어진 것에서 쓰레기통의 위치 같은 것도 모두 자세히 보고 걸으며 쓰 고 있다. 역시 모든 사믈은 위에서 본 시선으로 쓰면 절대로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레이먼드 카버 : 하루키는 레이먼 카버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그의 단 편 <발 밑을 흐르는 깊은 강>을 읽고, 미국에는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작가가 있다고 감탄하면서 그의 매력에 끌려 작품집을 번역했다. 그는 카버를 만나기도 했으며, 인간과 작품을 통해서 친숙해졌다. 또한 그가 죽었을 때는 가장 좋은 친구의 한 사람을 잃었다고 애도하기도 했다. 하루키는 레이먼드 카버를 가리켜 "그는 항상 오리지널한 창작자였으며, 그가 아니고는 쓸 수 없는 세계를, 그만이 쓸 수 있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아 픔과 고통, 그리고 기쁨이 농축된 인생을 통해서 자신의 몸으로 익히고 터득한 것을 그대로 그의 작품 세계에 표출하는 작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팀 오브라이언 :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누군가와 무척 얘기를 하고 싶었다. 뭔 가 기대고 싶은 하염없는 공백을 메우고 싶은 말을 찾고 싶었다"고, 그가 번역한 <그래도 살고 싶다(원제:뉴클리어 에이지, 문학사상사 간행)>의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래도 살고 싶다>를 처음 읽고 나서 너무 흥분하고 감탄했던 그는 그 긴 소설을 번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소설은 자신이 읽은 그 어느 소설보다도 영혼의 총합 소설이라고 할 만큼, 갖출 것을 다 갖춘 훌륭한 작품이라고 이렇게 격찬했다. "이 소설은 '현대의 총합 소설', 또는 '영혼의 총합 소설'이라고 할만큼 엄청난, 그리고 진지한 소설이다. 이 작가는 자기의 안에 있는 정신성의 모든 요소와 조 각조각의 단편-형태를 갖춘것에서 그렇지 못한 것까지의 모든 것을 다 소모해서 이 소설을 써냈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지점에서 이 작품을 마무리 지었다." 하루키는 그 밖에도 오브라이언의 장편 <진짜 전쟁 이야기를 하죠>도 번역하 였다. 존 어빙 : 그 밖에도 <호텔 뉴햄프셔>, <사이더 하우스 룰즈>, <곰을 놓아 주다> 등의 작품을 쓴 존 어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하루키는 장편 <곰을 놓아 주다>를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따. 4. 하루키 문학에 있어서의 미국과 중국 로크스 제너레이션의 미국 무라카미 소설이 미국 현대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것은 무라카미 자신도 주저없이 자인한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군조 신인상을 수상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자루 거론되어 왔던, 미국 문학과 무라카미에 대한 예를 들면, 군조 신인상의 심사 위원 중 한 사람인 마루타니 시이이치는 선후평 <새로은 미국 소설의 영향>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무라카미 씨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현대 미국 소설의 강한 영향 밑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커트 보테거트라든가, 브로우티건이라든가, 그런 작품 을 매우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연구 태도는 대단히 진지한 것으로, 뛰어 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면 이 정도로 깊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옛날식의 리얼리즘 소설에서 빠져 나오려고 해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 현재 일본 소설 의 일반적인 경향인데, 설사 외국의 본보기가 있다고는 한, 이처럼 자유자재로, 그리고 교묘하게 리얼리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주목해야 할 성과라고 해도 좋 은 것입니다.(... 중략) 그리고 이런 점을 잘 살려 나간담녀, 이 일본적 사정에 의 해서 도장된 미국품의 소설이라는 성격은 마침내는 이 작가의 독창성이 될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평론가 구로코 가즈오는 "무라카미의 소설은 옛날 식의 리얼리즘 소설 (사소설)의 전통이 끊어진 곳에 성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라카미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한 직후, <나의 문학을 이야기한 다>라는 인터뷰에서, "일본의 순수 문학은 외면하고, 당신의 소설 속에 나오는 피츠제럴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소설 쪽을 읽었겠군요?"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피츠제럴드와 카포티와 보네거트, 이 세 작가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야 물론 모두 유명한 작가들이니까, 그다지 직접 본보기는 될 수 없지만, 그들 에게서 글을 쓰는 자세 같은 것을 배웠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후 하루키는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말이나 글로 되풀이해왔다. 그렇다면, 무라카미는 미국 문학의 어떤 면에 끌린 것일까? 무라카미는 저서, <더 스콧 피츠제럴드 북>(1988년) 속의 <영화, <위대한 개 츠비>에 대한 코멘트>에서, 그 이유의 일단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미국 문학사 가운데서 가장 미국적인 소설은 멜 빌의 <백경>과 피츠제럴트의 <위대한 개츠비>,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작품아리고 생각했다. 이 세 작품은 미국이라는 국가와 그 문화의 특수성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는, 가 장 전형적이며 미국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세편의 작품은 모두 각 소설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 다. (1) 뜻은 고귀하며, (2) 행동 스타일은 희극적이며, (3) 결말은 비극적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특성을 좀 더 단순화해서 말하면, 아메리카 신대륙에 계승된 돈키호테 성=기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문학에서 프런티어 시대의 멜 빌, '잃어버린 세대'의 피츠제럴드, 1950년 대의 샐린저와 현재 문학의 보네거트, 어빙을 더한다면, 무라카미의 미국 문학과 의 인연이 어떤 것인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진 헤밍웨이나 포크너, 혹은 미국의 전후 문학이라고 불리우는 긴즈 버그나 케라워크 등의 비트 세대의 문학을 무시하고 있다. 무라카미는 왜 피츠제럴드를 좋아하느냐, 라는 물음에, "구체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없고, 다만 서로 기분이 통하기 때문이라고 밖에 는 말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무라카미를 매료케 한 피츠제럴드의 문학은 1920년대의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이 물질 문명의 붐을 이룬 끝에 경제 대공황에 이르기까지 물질 적 목적 추구의 시대에 살았던 청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린 주인공은 자동차, 토키(유성 영화), 라디오가 발달하고, 기사, 증권 중매인, 세일즈맨, 영화 배우가 각광을 받았던 시대에 청춘을 보낸, 중산 계급의 인텔리 였다. 물질적 추구에 여념이 없는 청년, 그러나 많은 것을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을 가슴 깊이 지닌 청년의 모습이 피츠제럴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 이다. 그것은 동시에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난숙한 물질 문명 속에서, 자신 을 상실하지 않으려고-또는 이미 상실된 자신을 애써 찾으려고 하는 무라카미 문학의 주인공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라카미의 소설의 항상 '잃어버린 것=로스트'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도, 그가 미국 문학사에서 로스트 제러레이션에 강한 흥미를 갖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 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미국 작가들이 제 1차 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대량 참사 가 낳은 비인간적 소행의 체험을 근거로, 전후의 니힐리즘을 뒤에 감춘 퇴폐와 필사적으로 싸우며 자기파괴적인 고독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과, 무라카미가 60 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의 학생 반란=전공투 운동을 통과하여, 외면상의 '평화'와 '풍요로움' 속에서 '정신의 상처'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쓰고 있는 것은 거의 같 은 맥락이라고 보아야 하다. 그러나 무라카미와 미국 문학과의 관계를 말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그가 '미 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그 일본의 구세대가 지녀왔던 '종속'의식이나 열등 의 식, 또는 '동경'의 마음은 거의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선진 공업국으로서의, 그 리고 파트너로서의 공통 부분에 커다란 공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 문학 속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 무라카미의 어린 시절의 환경은 그의 문학에 줄곧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고 향이 상업 무역 지역인 간사이 지방이었고, 자라난 곳이 국제 무역항을 갖는 도 시의 주택가였다는 것이, 그가 미국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요인이라고 한다면, '중국'에 대한 관심도 역시 그의 성장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본시 간사이 지방에는 재일 한국인이나 재일 중국인(화교)이 비교적 많이 살 고 있어 일상 생활에서 '중국'과 만나는 일은 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라카미의 '중국'에 대한 관심의 대상은 중국의 역사나 혁명 또는 문 화 같은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기 주변에 있던 '중국인'에 대한 것이다. 단편집 <중국행 화물선> 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중국인에 대한 관심이랄 까, 인연의 범위가 바로 그것이다. 고교가 항구 도시에 있었던 탓으로, 내 주위에는 꽤 많은 중국인이 있었다. 중 국인이라고 해도 특별히 우리들과 어딘가가 다른 점이 있는 건 아니었따. 또 그 들에게 공통된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략) 우리 반에도 몇 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도 있었고, 좋지 않은 학생도 있었으며, 명랑한 사람도 말수가 적은 사람도 있었다. 굉장한 저택에 살 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햇빛이 들지 않는 방 한 칸에 부엌만 있는 아파트에 살 고 있는 살마도 있었다.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 가운에 누구와도 특 별히 친해지지는 않았다. 애당초 나는 아무나하고 쉽게 친해지는 성격이 아니다. 상대가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누구이건 간에, 그것은 마찬가지다. -<중국행 화물선> 중에서 '나'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회의를 갖고 '죽음'을 생각했을 때, 왠지 세 사 람의 중국인을 생각해 낸다. 한 사람은 초등 학교 때 치룬 모의 고사의 감독과. 또 한 사람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만났던 여대생. 마지막 한 사람은 28세가 되어 재회한, 백과 사전 외판을 하고 있는 고교 시절의 동창생이다. 이 세 사람과의 우연과 우연이 겹친 것 같은 만남과 헤어짐이 '나'에게 '나 자 신의 지구'나, '나 자신의 우주'를 느끼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이란 '지구의 상의 황색 중국'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흔 히 발길에 닿는 그런 생활 주변이다. '나'는 그곳에 가는 것을 '모험'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가령 "치과 의사의 대합 실"이나 "은행 창구" 등, 극히 일상적인 장소이다. 다만 '나'는 갈 수 있을지 없 을지조차 알 수 없는 '중국'을 향해서 "언젠가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른는 중국행 화물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단편 소설에 나타나 있는 것은, 민족이나 인종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하는 철저한 개인주의 사상이다. 무라카미의 사고 방식 밑바닥에는 '평등'과 '개인주의'를 기치로 삼고 있던 '전후 민주주의 교 육'의 성과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런 인간관에 잘 나타나 있다. '차별'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추하고 증오해야 할 만한 것이라는 사고 방식이 근저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누구이건 간에 마찬 가지다"라고 하는 생각을 무라카미는 굳은 신념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무라카미는 자진해서 소리 높이 반차별 사상의 소유자라고는 말하지 않 지만, 미국 '문학'에 대해서 아무런 위화감도 갖지 않는 감성과 '중국인'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대응하는 자세에는 상통하는 것이 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하여 등거리를 유지하는 생활 태도는, 무라카미 의 내부에 확실한 '민주주의=개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무라카미의 경우, 이 '민주주의=개인주의' 사상은 이 '풍요'롭고 '평화' 로운 사회 속에서 '니힐리즘'으로 전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행 화물선>은 이 글의 머리 부분에서 말한 세 사람의 중국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 마무리는 이렇게 당돌하게 끝난다. 지구의 상의 황색 중국, 앞으로 내가 그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중국이 아니다. 뉴욕에도 레닌그라드에도 나는 가지 않을 것 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나의 방랑은 지하철의 차 안이나 택시 뒷자석에서 행해진다. 나의 모험은 치과 병원의 대합실이나 은행 창구에서 행해 진다. 우리들은 어디에도 갈 수가 있고,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마무리의 전반부에는 '중국'이라는 메타포어에 위탁한 무라카미의 상황 인식의 표백이 있다. 물론 이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은 '미국'이라고 하거나 '소 련'이라고 해도 전혀 상관이 없는 메타포어이다. 그리고 "나의 방랑은 지하철의 차 안이나 택시 뒷자석에서", "나의 모험은 치 과 병원의 대합실이나 은행 창구에서"라고 말함으로써, 일상 생활이나 내면=관 념에서 '방랑'이나 '모험'의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그것은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라고도 해설할 수 있으며, 동시에 무라카미가 작가 로서 '관념의 왕국'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닌가, 라고 구로코 가즈오 씨는 지적했다. 무라카미의 장편 제 2작, <1973년의 핀볼>이 '정신의 상처'를 입은 채 타인에 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핀볼 머신을 찾아 헤매는 청년의 '헛된 정열'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면, <중국행 화물선>은 그런 정열의 뒤쪽에 깊은 어둠이 존재한 다는 것을 명백히 하는 단편 소설이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그리고<1973년의 핀볼>과 함께 <중국행 화 물선>을 읽을 때, 거기에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멘탈리티의 원형이 떠올라 온다. 3. 하루키 작품의 전부 1.<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년작) 작품론 대강의 줄거리와 작품의 성격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장편 소설로서, <군조>지 신인 문학상 수상 작이다. '이 이야기는 1970년 8월 8일에 시작되어, 18일 후에-즉 같은 해의 8월 26일에-끝난다'라고 씌어져 있는 것처럼, 대학교 3학년생인 주인공 '나'의 여름 방학 18일 동안의 이야기다-스물아홉 살이 된 '내'가 스물한 살이었던 과거의 2 주일 간을 회상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1970년 8월 여름에, 스물한 살의 주인공인 '나'는 방학을 이용하여 고향인 항 구 도시로 돌아간다. '나'의 고향은 인구가 7만 명쯤 되는 작은 항구 도시로서, 도쿄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던 나는 그 작은 도시로 돌아 왔지만,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저녁 때에는, 정확히 여덟 시에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구두를 닦 고, 그 일이 끝나면 대학을 중퇴하고 이곳에 돌아와 있는 친구인 '쥐'와 함께, 중 국인 '제이'가 경영하는 제이스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 나의 유일한 일과였 다. 제이스 바는, 무척 쾌적하고 좋은 느낌을 주는 곳으로 방학 동안 '나'와 '쥐' 는 줄곧 이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나'는 이 바의 세면장에 쓰러져 있던 아가씨를 발견하고,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그녀를 차에 태워 그녀의 방으로 데려가 준다. 이 아가 씨에게는 왼손의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그녀의 방에 데려다 준 다 음날, 우연히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거기에서 일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나'와 새끼손가락이 없는 그 아가씨는 점차 친숙해진다. 그리고 종종 제이스 바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거나 아가씨의 방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러 나 어찌된 일인지 서로는 그 이상 가까운 사이로는 발전하지 못한다. 그녀 내면 에 어느 선 이상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뭔가 무겁고 견고한 것이 있음을 알아챈 '나'는, 더 이상 깊이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덧 여름 방학이 끝나고, '나'는 다시 도쿄로 돌아온다. 한편, '쥐'는 어떤 중 압감을 느끼는 모양이던지, 도무지 책이라곤 읽지도 않던 그가, 갑자기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대학을 그만두고 소설가가 되려 하는 '쥐'로부터, 나의 생일 인 12월 24일에 한 편의 소설이 보내져 온다. 그의 소설의 특징은 섹스 신이 없다는 점과,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의 작품은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리고, 아무도 그것을 붙잡아 둘 수는 없다는 점을-'시간의 흐름'을-의식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떤 종류의 단념과 거기에서 생겨나는 결정적인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 하거나, 혹은 스스로를 구제하는 일에 대한 단념. 그것은 조용한 체념이 아니라, 훨씬 강렬하고 세찬 체념이다. 특히나 그들은 그러한 일들을 의지적으로 단념하 고 있는 듯한데, 작가는 결코 그 단념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현하려고 하 지 않는다. 대신, '나'의 말이나 등장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단념을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소설의 끝 부분에, 여행을 떠난다며 모습을 감추었던 아가씨가 되돌아온다. 두 사람은 해질녘의 항구를 오랫동안 산책하는데, 그녀는 여행을 떠났다는 건 거짓 말이고, 사실은 낙태 수수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게다가 상대방 남자의 얼굴조차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날 밤, '나' 는 아가씨의 방에서, 그녀를 살며시 껴안아 자리에 눕혀 준다.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라는 것처럼. 그리고 여름이 끝난다. 재즈 음악을 들려주는 다방을 경영하면서, 심야에 잠깐 동안 시간을 들여 쓴 이 처녀작은, 1979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1970'년이라는 시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1970년 8월 한달 중 단지 2주일 간의 일을 묘사한 작품으로, 이 작품의 세계가 1970년 8월의 2주간임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왜냐하면 이때는 60년대 중반부터 계속되던 정치적 혼란이 아직은 완전히 안정 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혹은 일본이 격동의 나날에서 풍요롭고 평온한 70년대, 80년대를 맞이하는 입 구에 들어선 시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 이때, 번영과 평온 의 한구석에서는, 1965년에 시작된 월남전 확대 반대 운동이 있었고, 1966년 와 세다 대학에서 치솟은 전공학 운동이 전공투 운동으로 변칭되어 확산되면서, 1969년 도쿄 대학 공방전이 상징하는 패배의 도래를 예상케 한 해이기도 했다. 또한 이듬해 3월에는, 세계 동시 혁명을 부르짖던 적군파가 일본 항곡의 요도 호를 납치하여 북한으로 도망갔고, 11월 25일에는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무사도 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 자살했다. 무라카미는 이 1970년이라는 해의 그 전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세대에 있어서 '전공투' 운동이나 '정치적 반란', 혹은 '카운터 컬처 (counter culture:반체제 문화. 기성 사회의 가치관을 부인하는 젊은이의 문화)' 체험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후천적인 것이다. 그것은 67년이나 68년부터 분출되 어 올라와서 70년에 마침표를 찍은 것으로, 결코 60년대의 분위기 그 자체를 전 체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들에 대해서 간단히 '전공투 세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상당한 저항감이 있다. 우리들은 분명히 '전공투 운동'의 형태로써 기성 세대에 저항한 시기가 있었지 만, 나 자신의 느낌으로는, 우리들의 세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하 깊 숙한 곳에서 마그마가 양성되는 그런 시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즉, 60년대 전반과 중반의 고도 경제 성장과 그것에 수반되는 '전 후체제'으 붕괴이다. '전공투 운동'은 분명히 갖가지 요인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궁극적인 의미는 '전후 체제'와 그 '가치관의 소멸'이라는 것에 있다고 본다. 우리들은 그 소멸을 음화로 포착하느냐, 양화로 포착하느야 하는 것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분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70년이라는 시점에서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냉동되어 버린 것이다. -<이야기를 위한 모험>(1985년) 중에서 전공투 운동이란 결국, 기존 조직 안의 구성원이 그 제도나 질서의 개혁을 기 도한 운동이라 할 수 있으며, 제도나 질서,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사랑이 나 문화의 전면적 개혁을 요구하는 분출구였다. 그것은 평화와 민주주의로 대변 되는 전후적 가치가, 산학 협동이니 학생 자치권의 축소라느니 하는 식으로 새 로운 경제적 제국주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데 대한 반발이었고, 인간 해방의 실 험이라는 면을 지니는 것이었다. 자연히 이 운동은 '자기 부정', 즉 이미 형성되어진 나 자신의 사상이나 문화 에 대한 변혁을 요구하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정치 투쟁이라는 형태로 이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점차 첨예화, 폭력화됨으로써, 그 주도권이 혁명을 목 표로 하는 신좌익당파나 적군파로 넘어갔고, 투쟁 양상이 격화돼 가는 한편, 운 동 자체의 확산, 종언이라는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시기를 무라카미가 20세 전후의 시간을 보낸 대학 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논한다면, 바리케이드로 일시적 해방구를 이룬 대학이 공권력에 의해 차례로 해체되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강의가 재개되고 정상화된 학교 안 은, 개혁을 부르짖는 학생과 이에 전혀 무관심한 학생,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듯 기존 사회의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 학생들이 공존하던 혼란한 공간이었다. 이 렇게 형체 없는 정열이 식으면서 그 굴절된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헤매던 곳, 그것이 당시의 대학이라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전공투 운동은 그 정치적 의미는 논외로 하더라도 사상이나 문화 체제의, 변 혁의 돌파구를 제공하였다는 점만으로도 기억될 만한 존재이다. 현실적으로는 기존 질서나 체제가 거의 변혁되지 않았을지 모르나 그 내부의 사상이나 문화 는, 1975년 이후 완만하기는 하나 광범위하고도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즉, 포스트 모더니즘이나 뉴아카데미즘으로 지칭되는 세대의 등장을 촉구시키는 계 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그 시기를 1970년 8월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와 '쥐'는 둘다 전공투 세대이다. 그들은 모두 가두 투쟁에서 기동대와 몸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앞에서 말했듯 이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에서 농성하고 있었던 전공투 학생들은 이틀 간의 공 방전 끝에 전원 체포되었는데, 그 벽에 남아 있던 '연대를 추구하되 고립을 두려 워 않고, 힘이 다해서 쓰러지는 것을 사양하지 않으나, 힘을 다하지 않고 무너지 는 것은 사양한다"는 글에 담긴 정신과 '쥐'의 정서의 기본적 구도는 같다. 아마도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 타인과의 진정한 연대가 가능 했겠지만, 동 시에 연대를 희구하는 마음은 이 시대를 사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타인과 단절된 고독한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도 될 것이다. '쥐'는 나름대로 열심히 지냈었지만, 어느 날 문득 둘러보니 오직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고 자각 한 것은, 결국 그가 손에 넣은 것이 타인과의 관계의 상실이었음을 의미한다. 그 상실감은 '나'와 '쥐'가 똑같이 공유한 것이었고,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맥주를 마신다. 한여름 내내 '나'와 '쥐'는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25미터 풀 하나분의 맥주를 마시고, 제이스 바 마루 가득히 5센티미터 두께의 땅콩 껍질을 흩어 놓았다. 그 리고, 그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을 만큼 지루한 여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대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남자와 여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결코 적극적 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도'에 등을 돌리고 함께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은, 그야 말로 1970년을 상징하는 '청춘'의 한 형태였다. 한 시대의 거품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 속에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느끼면서도, 인간과 인간의 체온 에서 최후의 안식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 그것이 바로 1970년이었 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와 같은 '1970년의 이야기'를, 70년대도 다 끝나 가는 79년에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쉽게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작 가가 자신의 청춘이 끝났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 의해서, 그 만가, 혹은 진혼의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이라는 것은, 설사 그 작품이 작가의 사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하더 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작가의 사생활을 담게 되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형식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사상이나 감성을, '말'을 매개로 하여 타인에게 개방한다는 숙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처녀작에는 작가의 그 후의 삶과 사상까 지 예상 할 수 있는 갖가지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그대로 여기저기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도 그 예외일 수 없다. 1949년생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이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발표 연도 -1979년-를 비교해 보면, 딱 서른 살이 된다. 그야말로 '청춘의 만가'를 부르기에 적합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서른 살이 되려는 이가, 자신의 과거를 정화하기 위 해서, 한 편의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무라카미의 경우에는 <바람의 노래 를 들어라>라는 작품인 것이다. 이 작품이 청춘 소설과 비슷한 틀과 표현법을 쓰고 있으면서도 지나친 정념이 나 관념에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게 전개되어 나가는 것도, 자신의 청춘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작가의 냉엄한 눈길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일 본의 뿌리 깊은 문학 전통 중의 하나인 '리얼리즘'위에 이 소설이 성립되어 있는 것도, 작가가 작품의 무대인 청춘에서 멀리 떨어진 나이에 도달해 있으며, 그 사 실을 슬퍼하거나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냉 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라카미 하루키는 1970년이란 시대의 청춘을 살았다. 그리고 <바람 의 노래를 들어라>는 그와 같은 청춘의 나날들을 회고하고, 기념할 만한 일종의 '묘비명'인 것이다. 상실한 것, 1. 만일 청춘이 좌절이라고 하는 정신적 고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면, 그 고통은 겉으로 보이는 순수성에 대한 체념이나 모순된 사회로의 회귀가 아니 라, 한 인간의 깊은 상실감과 그 곳에서 생겨난 텅 빈 공허감을 메울 수 없는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때의 상실감이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내'가 '쥐'에게 대학을 중퇴한 이유를 묻자, 자신 이 경험한 학생 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왜 그만두었니?" "글세, 진절머리가 나서였겠지, 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버텼어.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나를 생각하는 것 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순경에게 얻어맞기도 했어. 그러나 때가 되면 결국은 모두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더군. 나만 돌아갈 장소가 없더라구. 마치 의자 차지하기 게임 같 은 거지." "앞으로 무엇을 할 건데?" '쥐'는 수건으로 발을 닦으면서 한참 동안 생각했다. 아무리 격렬하게 타당한 '이의'를 제기했다 하더라도, 다시 말해 스스로를 이 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식'을 갖는 자로 믿고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다 미리 정해져 있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 리를 잡아 간다. '쥐'는-그러니까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그와 같은 학생 운 동의 참가자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나만 돌아갈 장소가 없 었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쥐'는 비록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그것이 사실인 것 처럼 말하고 있으나, 과연 '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얘기는 완전히 거꾸로 되 는 것이 아닐까? 즉 '쥐'는 그 시대에 대한 '이의 제기'의 정신을 버리지 않고, 단 호히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홀로 이 무정한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돌아갈 장소가 없게 느껴진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쥐'는, 즉 무라카미 하루키는, 학생운동의 물결이 빠져 나간 뒤, 자신이 돌아가 앉아야 할 의자도 없는 상황을 스스로 선택해서 받아들이지 않으 면 안 될 심경이 된 것일까? 다시 말해 왜 '고립'을 선택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이 의문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참다운 유대에 대한 갈구, 이 연대를 구하는 마음이 결국은 이 시대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단절되어진 존재 외 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쥐'가 자신은 열심히 싸웠는데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혼자만 외따로 남겨져 있었다고 '나'에게 원망하지 않으 면 안 되었던 것도, '쥐'가 그곳에서 철저한 '고립'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 다. 타인과의 '유대'를 추구한 결과로서의 '인간 불신', '쥐'가 학생 운도에 가담한 대가로 얻은 것은 그런 지독한 정신적 타격이었다. 즉, '쥐'는 여기서 타인과의 관련성을 상실한 것이다. 도쿄에서 대학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매일 제이 스 바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쥐'의 생활은 분명히 '고립된 우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때까지 맺고 있던 '인 간의 유대 관계'가 사실은 환상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일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단순히 습관적으로 이루어진 무의미한 관계일 뿐이고, 본질적 으로는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공허감과 두려움, 아마 어른이 된다는 것은 청년 시절에 생기는 그와 같은 공포와 불안을 충분히 인식하고, 또다시 인 간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발걸음을 새로 내디뎌야 하는 것을 의미한는 것일 것 이다. 그러나 '쥐'는 그러한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서 <바람의 노래를 들 어라>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청춘'의 이야기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을 위해서 쓰느냐, 아니면 매미를 위해서 쓰느냐지..." 하고 '쥐'는 매우 엉뚱한 말로, '나'에게 소설을 쓰는 이유를 말하는데, 여기에 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설을 쓰는 데는 그럴듯한 이유란 필요없다고 하는 무라카미 소설관을 엿볼 수 있다. 어쨌든 간에, 무라카미는 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통하여, 타인과의 관계에서 유대감을 상실한 인간의 정신적 상태를, '쥐'를 매개로 부각시켰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작가와 같은 전공투 세대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은 것도, 그들 자신에게 공통적으로 통하는 정서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쯤은 '나'도 '너'도 '쥐'였던 때가 있다. 그리하여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70년 대에 청춘을 보냈던 많은 이들에게 읽혀졌던 것이다. 상실한 것, 2. 여하튼 이 작품은 해설자이가도 한 '나'의 이야기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학생 운동의 경험에 의해서 '인간의 유대'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쥐'와 3년 간이 나 사귀어 오고 있는 '나'도 또한 '쥐'와 마찬가지로, 참을 수 없는 공허감을 안 고, 그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서 맥주를 마셔대는 인물이고, <바람의 노래를 들 어라>는 그런 인물의 이야기로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공허감은 과연 어디로부터 왔을까? 이 작품속에는 '나'의 성장 과정이 여기저기에 조금씩 나타나 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어릴 때, 나는 굉장히 말수가 적은 소년이었어. 부모님은 걱정이 되어서 나를 정신과 의사에게 데리고 갔지." 그러나 이와 같은 성장 과정이 현재의 '내'게 존재하는 공허감을 만들어 낸 실 체는 아닐 것이다. '말이 없는 소년'이거나 '냉정'한 체하는 것은 청소년기에 누구 나 한 번은 경험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나'는 특별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 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나'의 공허감의 실체는 다른 곳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스물한 살의 '나'는 그때까지 세 명의 여자와 잔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중 세 번째 여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세 번째로 잔 여자는 나의 페니스를 '당신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 역주:존재 이유)'라고 불렀다.(... 중략) 나는 이전에, 인간의 '레종 데트르'를 테마로 한 짧은 소설을 쓰려고 한 적이 있었다. 결국 소설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 동안 나는 줄곧 인간의 레종 데트르 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때문에 기묘한 습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을 수치로 옮겨 놓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버릇이었다. 나는 약 8개월 간, 그 충동에 의해 쫓겨 다녔다. 나는 전차를 타면 우선, 승객의 수를 세고, 계단의 수 를 세고, 틈만 있으면 맥박을 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969년 8월 15일부터 이듬해 4월 3일까지, 나는 358회 강의에 출석했고, 54회 섹스를 했으며, 6,921개피의 담배를 피웠다. 그 시기에 나 는 모든 것을 그렇게 수치로 옮겨 놓음으로써,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전할 수 있 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 한,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피운 담배의 개피 수나, 올라간 계단의 수나, 나의 페니스의 크기에 대해서 누구 한 사람도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레종 데트르를 상실하고, 또다 시 외톨박이가 되었다.(... 중략) 그런 연유로, 그녀의 죽음을 알았을 때, 나는 6,922개피의 담배를 피우고 있었 다. 즉, '내'가 타인과의 관계를 상실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에서도 이 <1973년의 핀볼>에서 나오코로 등장하는-그의 작품 속에서 기호가 아닌 고유명으로 구별되는-세 번째 연인의 자살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다. 대학 도서관에서 알게 된 불문과 여학생이었던 그녀는 교내 테니스 코트 옆에 있는 초라한 잡목 숲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그녀의 시체는 신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꼭 2주간 바람에 날 리면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1970년 4월 4 일 이었다. 무라카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70년경인가요. 내가 말이란 전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래서 일 본 소설은 거의 안 보고 영어 책만 읽은 겁니다. 영어로 읽는다는 것을 기호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거든요(1983.11.<보도>지와의 인터뷰 기사)." '나'에게 있어서 그녀의 죽음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지며, '나'의 페니스를 '당신의 레종 데트르'라고 부르던 그녀가 존재하는 한 '외톨박이'가 아니었던 '내' 가, 그녀를 잃음으로써 외톨박이가 되었던 것이다. 분명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나'는 '의리와 인정'을 부르짖는 일본적 정 서와는 다른 하드보일드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차갑다'고 하는 외관적인 처세 를 뛰어넘은, 메마를 공허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1970년 8월의 '나'는 그와 같은 '정열'의 존재를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하 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쥐'와 마찬가지로 도쿄에서의 생활에서 모든 것을 상실 해 버렸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연애' 관계가 사회적인 관계의 기본 단위라고 하는 것은, 그것 이 발전해서 가족을 형성하기 때문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남자, 혹은 여자는 자신과 다른 성을 아는 것에 의해서, 그때까지의 가족이라는 온상을 벗어나 비 로소 의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연인이나 사회에 대한 정열을 상실한채 현재를 산다고 하는 것은, '내'가 사회에의 참가를 원하고 있지 않다거나 혹은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즉, 고립된채, 학생이라는 특권적 신분 속에서 계속 살고 있는 것이 현재의 '나'인 것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 인가와 같은 구도적 세계에서 가장 동떨어진 삶의 태도를 실천하고 있는 셈인 데, 그것이 현대에 대한 충동적 자세이며, 허무주의의 하나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스물한 살에 이미 허무주의를 느낀다는 것은, 외면뿐인 '평화'와 '풍요로움' 속 에서 절감하는 전형적인 삶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의 구절이 나온다.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되었고, 쥐는 서른 살이 되었다.(... 중략) 나는 결혼해서 도쿄에서 살고 있다.(... 중략)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렇겠지, 하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꿈이란 결국 그런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결혼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허무의 심연을 걷고 있는 것이다. 바람, 혹은 '이야기' 인간에게 있어 20대의 8년 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이 시기에 인간은 청년에서 성인으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등장하는 인 물들은 제이스 바의 제이를 빼놓고는 그 누구도 생활 속의 활력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다만 중산 계급, 혹은 도시 생활자로서 마치 안개를 먹으며 살아가고 있 는 듯한 희미하고 불확실한 측면만이 강조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을 그리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는 작가의 '청춘 소설'에 대한 부정의 의지가 숨겨져 있는데, 이 작품의 서두가 문 자-소설론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라고 할 수 있다. 완벽한 문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 럼. 이것은 '내'가 댁학생이었을 때 알게 된 어느 작가의 말이라고 하고 있으나, 무라카미의 문장관-소설관이며, 인생관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이 문장관-소설관, 혹은 인생관에 의거해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쓴 것이다. '나'는-즉 무라카미는, 어떤 자기 요법을 시도했을까? 그리고 그 결과, 구제받 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소설의 제목이 <바람 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바람'이란 스물한 살부터 스물아홉 살까지의 8년 간이라고도 할 수 있으 며, 그 시간이 '나'의 내면에 심어 준 '허무', 또는 모든 불순물들을 침전시킨 '맑 은 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간에, 무라카미는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바람'이라고 명명했고, 만물은 바람에 불어 날려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이 '자기 요법에의 시도'이며, 그 시도 끝에, '구제되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고 상정한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쳐 간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그 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은 정말로 그가 말하는 것처럼, '바람'의 노래밖에는 들을 수 없는 것일 까, 라는 자문을 던지게 하는 이 작품은, 독자들을 깊은 상념의 세계로 이끄는 작품이라는 것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대한 지배적인 평가라고 하겠다. 2. <1973년의 핀볼>(1980년작) 작품론 대강의 줄거리와 작품의 성격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다음에 발표된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 번 째 장편 소설 <양을 쫓는 모험>과 합쳐서, '초기 3부작', 또는 '쥐 3부작'이라고- 등장 인물이 같다는 이유로-불리운다. 이 작품의 도입부는 상당히 긴데, 이야기는 그의 과거의 연인 '나오코'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된다. 우선, 도입부의 내용을 살펴 보면. 주인공 '나'에게는 옛날 학창 시절에 사귀던 '나오코'라는 연인이 있었따. '나'는 73년 현재, 친구와 번역 사무소를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으며,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다. 1969년 봄에, '나오코'는 '나'에게 그녀 고향의 기차역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 는데, 그 역의 플랫폼에는 언제나 개들이 산책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녀가 죽은 후 1973년 5월에, 플랫폼에서 산책하는 개들을 보기 위해 혼자서 그 역을 찾아간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플랫폼 주변을 어슬렁거리 고 있던 개를 만난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전차 속에서 '이제는 잊어버려라'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하지만 잊을 수는 없었다. '나오코'를 사랑했던 일도 그리고 그녀가 이미 죽어 버린 일도. 결국 무엇 하나 끝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그녀의 죽 음은 참을 수 없이 깊은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이 긴 도입부가 끝이 나면 '나오코'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으며 다른 스토리가 전개된다. 즉 <1973년의 핀볼>이라는 소설은, 이런 독특한 소설 기법이 자유자재로 구사되며 '나오코의 죽음, 상실'위에서 성립된 것이다. '나'의 아파트에는 어느 틈엔지 쌍둥이 아가씨들이 살고 있다. '나'는 편의상 그 쌍둥이를 '208', '209'라고 부르기로 하고, 그야말로 세 사람의 '동서생활'이 시작 된다. '나'는 그녀들이 끓여 주는 커피를 마시거나, 함께 골프장을 산책하면서 하 루하루의 나날을 보낸다. <1973년의 핀볼>은 대략 절반쯤이 '내'가 화자가 되어 진행되지만, 나머지 절 반은 친구인 '쥐'의 이야기이며, '내'가 이야기하는 장과 번갈아 가며 놓여지는 '쥐'의 장은, 3인칭으로 진행된다. '나'와 '쥐'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는 의미에 서, 이 소설은 분명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속편인 셈이다. '쥐'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보다 더욱더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제이스 바가 있는 고향인 작은 도시에서, 아버지가 마련해 준 맨션 에서 살면서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다. '쥐'는 초가을에 한 여자를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되고, 함께 자게 된다. 그러나 여자 친구를 갖고 있는데도, '쥐'의 고뇌는 더욱더 깊어져 간다. 어째서 그런지, 작자는 '쥐'의 내부로 깊이 파고들어 가 그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 다. 걷잡을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쥐'는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자 와 헤어지고 그 도시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나'는 1970년 겨울에, '쥐'와 함께 핀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이 스 바에 있었던, 스리 플리퍼의 '스페이스십'이라 불리는 멋진 핀볼대가, 71년 2 월에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핀볼대와의 '짧은 밀월 기간'이 끝나 버린 것이다. 주인공인 '나'는 그것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핀볼대를 찾기 시작한다. 어느 게임 센터에서 핀볼광인 스페인어 강사를 소개받았는데, 그에 의 하면 스리 플리퍼의 스페이스십은 미국제이며, 일본에는 세 대밖에 수입되지 않 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찾아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노력해 보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얼마 후에 스페인어 강사는, 핀볼대가 발견되었다고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그의 안내로 핀볼대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도교 근교에 있는 양계장의 거대한 냉동 창고에서 '나'는 그 핀볼대와 재회한다. 그러나 핀볼대의 발견은, 그대로의 새로운 상실, 혹은 상실의 확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을 상실했는지, 작 가는 여기서도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상실했다는 분위기만이 소설의 끝부 분에 진하게 감돌고 있다. 동시에 그것을 상징하는 듯, 동거하고 있던 아가씨들 이 '나'의 방을 나가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도 그랬지 만, 이 <1973년의 핀볼>에서도 '과거'에 얽매인 상황에서 성립되고 있다. 주인공 인 '나'는 '나오코'와의 연애 및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이라는 사건에 얽매여 마음 을 동결시켜 버린다. '나오코'와의 관계를 주인공이 얽매여 꼼짝못하고 있는한, '나오코'를 상실한 지금도,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관심을 돌릴 수는 없다. 주인공 인 '내'가 인간보다는 핀볼에 열중한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슬픈 사실'인 것 이다. 마음의 문을 닫고, 타인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 채로, 그래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강인한 정신을 요구하는 일인가 하는 것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밀 접하게 지내는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뒤돌아보면 이내 알 수 있는 일이다. '풍요로움' 속에서 나약해져 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무라카미 문학에 열중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차갑다는 말을 듣는 무라카미 문학의 주인공들이, 실은 견 고한 자기 통제력을 가진 '강한' 인간이라는 점일 것이다. 자신도 타인에게 괜치 친밀한 체하며 다가가지 않지만, 타인이 자신에게 친밀한 체하며 접근해 오는 것도 거부하는 무라카미 문학의 주인공들은, 그야말로 하드보일드(hardboiled, 역 주:사실주의 문학의 한 파. 감상을 배제하고, 비정하게 대상을 그리는 수법)풍의 인물들이다. '거의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나의 1970년대 무렵의 라이프 스 타일이었다. 신문 구독을 권유하는 사람말고는 내방의 방문을 노크하는 사람이 라곤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방문을 열어 본 적도 없고 대답을 한 적도 없다. 이러한 생활이 가령 전형적인 도회 생활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 이 라이프 스타일을 견지할 수 있을 것인가. 주인공은 번역 사무소의 공동 경영자에게도 결코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는 살아가기 위한 직업상의 파트너이긴 해도, 흉허물없이 사귈만한 상대는 아니라고 주인공에게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타인과 관계를 갖지 않는 주인공의 고독한 라이프 스타일은, 어느 날 갑자기 '쌍둥이 아가씨들'이 그의 아파트에서 동거하게 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끝없이 계속되는 침묵 속을 나는 거닐어 왔다. 사무소의 일이 끝나면 아파트로 돌아와, 쌍둥이 아가씨가 끓 여 주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순수 이성 비판>을 몇 번이나 읽어 보았다. 이따금 어제의 일이 작년의 일처럼 생각되고, 작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생 각되었다. 심할 때는 내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에스콰이 어>(1971년 9월호)에 실려 있는 케네스 타이넌의 <폴란스키 론>을 번역하면서, 죽 볼 베어링에 관한 것을 생각하기도 했다. 몇 개월이나 몇 해 동안이나, 나는 혼자서 깊은 풀의 밑바닥 같은 데에 계속 앉아 있었다. 따스한 물과, 부드러운 햇빛, 그리고 침묵, 그리고 침묵... 핀볼에서 얻는 것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부터 약 9개월 지나서 발표된, 무라카미의 두 번째 작품 <1973년의 핀볼>(1980년 3월작)은, 기본적으로는 '1970년의 상실' 을 작품의 동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거의 다를 바 가 없다. 또한 이 작품은 등장 인물이 같다는 점에서,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와, 세 번째 작품 <양을 쫓는 모험>(1982년 8월작)과 함께 '초기 3부작', 또는 '쥐 3부작'이라고 불리운다. 사실 이 세 작품들이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이 <1973년의 핀볼>의 기본 구조가 같은 것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도 있다. 그것은 무라카미의 첫 작품 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1970년 8월의 2주일간'의 나날을 그리고 있는 것 에 비하여, 이 작품은 그 이후부터 약 3년쯤이 지난 시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다. 죽, '상실'에 의해서 생겨난 '공허함'을 내면에 끌어안은 채 살아온 3년 간의 '청춘'이 이 작품에서는 상당히 의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학생이라는 시기를 거쳐서 사회의 구성원이 되면, 젊었을 때 받은 정신적 상처를 '처세술'이라는 것으로 포장하고, 마치 그것이 어른이 된 증 거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법인데, <1973년의 핀볼>의 주인공인 '나'는 학생이 었던 1970년에 시간을 정지시킨 채, 마지못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태도로 일관하 고 있다. 아마도 젊은 독자들은 이와 같은 생활 자세 때문에 무라카미에 끌리는 것이리 라.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러면서도 아주 스마트하게 작은 번역 사무소 를 친구와 공동으로 경영하는 라이프 스타일. 명예도, 돈도, 그리고 사회적인 신 분도 탐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생활에 나가면 되는 것이다. 맥주를 마시고, 배 가 고프면 빵 가게에 가든가 적당히 자기 손으로 요리해서 배를 채우고, 때때로 여자와 자고... , 어쩌면 그것은 우아하게 까지 보인다. "당신이 핀볼에서 얻는 것은 것의 없다. 혹시라도 얻는 것이 있다면 수치로 옮 겨진 프라이드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1969년에서 1973년까지 4년 동안의 무라 카미의 심리가 역적-굴절된 것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인간보다 도 기계를 상대하기를 원하고, 혹은 '자아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를 원한다는 것 은, 무라카미가 4년 간 경험했던 결정적인 인간 불신, 절망의 결과가 아니었을 까?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몇 번씩이나 내게 들려주었다. 모든 것은 끝난 거야. 이 제 잊어버려라 하고. 그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잊어벌릴 수가 없었다.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이미 죽어 버렸 다는 것도. 결국은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끝났다, 잊어버려라 하고 말하면서, 끝났다고 하는 실감을 얻을 수 가 없고, 또 죽은 연인 '나오코'의 일도 잊을 수가 없는 주인공. '끝'이 없으면 '시 작'도 없다. '끝'도 '시작'도 없다면, 결국 '시간'은 정지해 버린다. 무라카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도 그랬지만, 이 작품에서도 '과거' 에 얽매여서 성립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 '나'는 '나오코'와의 연애- '나오코'의 돌연한 죽음이라는 사건에 마음을 동결시키고, 진혼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장소 무라카미 문학의 주인공들은 외부에 대하여 마음을 닫고, 타인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도 타인에게 응석부리지 않지만, 타인이 자신에 게 가까이 접근해 오는 것도 거부하는 것이다. 친구와 공동으로 경영하는 번역 사무소에서도, 일을 마치고 간 술집에서도, 쌍 둥이 아가씨들이 기다리고 있는 아파트에서도, '나'는 나 자신의 장소라는 느김 을 갖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끝없이 부유한다. 결코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왠 지 나 자신을 붙들어매 두는 확실한 끈이 없는 '나'의 일상. 왜 나는 그런 살아 있는 송장과 같은 나날들을 감수해야 하는가? 이 작품에서, 이처럼 허무주의의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은 주인공인 '내' 가, 가장 활동적이어야 할 스물한 살에 자신의 삶을 동결시켜 버리고, 스물네 살 이 된 현재를 '덤'으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무라카미의 소설이 많 은 젊은이들에게 환영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적당히 풍요로우면서 도 조금도 유동적이지 않은 이 정적인 사회에서, 많은 젊은이들은 이십 대 전후 에 자기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쪽이든 그다지 대수로울 것은 없다. 그렇다면 그 뻔하디뻔한 삶은 한껏 스마트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그때 무라카미 소설의 주인공들은 안성맞춤의 모델로 눈에 띈다. 적당한 '풍요 로움'속에서 스마트하게 퇴폐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는 그들은 서글픈 동격의 대 상으로서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간다. 헛수고의 대가 1970년 겨울 '나'는 핀볼에 몰두한다. 1970년 겨울은, '내'가 연인인 '나오코'를 잃은 직후의 시기로서 '나'의 시간이 동결된, 연인의 죽음으로 인해 시간이 멈추 어진 시기라고 해도 좋다. 그 결과, 절망과 인간에 대한 불신에 빠진 '나'는 구멍 저 밑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타인과의 교제를 거부하고 핀볼 기계에로 몰입해 들어간 것이다. '나'의 나락 밑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이러한 행위는, '청춘'이라는 이름의 감 미로운 시기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보편적인 일로서, 그들에게서는 공통 된 정서를 찾을 수 있다. 연인 '나오코'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나'. 그리고 "끝났어요, 모든 것이"하고 말하는 핀볼의 기계음은 동시에 '나' 자신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 러던 '내'가 3년 후인 1973년 가을에, 쌍둥이 자매와 산책을 하다가 돌연 그 옛 날 어둠의 나날을 함께했던 스리 플리퍼의 스페이스십을 생각해 낸다. 그리고 무엇엔가 씌운 것처럼 그 게임 센터로 찾아가, 지금은 없는 보고 싶은 '그녀'를 찾기 시작한다. 여기서 '나'는 핀볼에 몰두하면서-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행 위이다-연인 '나오코'의 죽음과, 그 뒤에 이어지는 나락 끝에서의 나날들을 경험 함으로써, '그녀'의 죽음과 함께 이미 '끝나 버린 나의 삶'을 살 것을 결의하고 있 었던 것이다. 결국 그처럼 열중했던 핀볼도 '끝나 버린' 삶을 살고 있는 '나'에 대한 현재의 확인에 지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와 같은 '나'의 열렬한 행위는 객관 적으로 보았을 때 헛수고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헛수고가 쌓여 가는 것을 자랑하는 일에 불 과할지도 모른다고 이 소설은 시사한다. 또한 이 작품의 '나'와 '쥐'는 처음부터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데, 여기서 독자는 작가의 허무주의의 깊이 를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 <양을 쫓는 모험>(1982년작) 작품론 대강의 줄거리와 작품의 성격 노마 문예 신인상 수상 작품이면서, '쥐 3부작'의 마지막인 이 소설은 무라카 미의 기념비적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나카기미 겐지의 <가리키나 다>(1977년작), 무라카미 류의 <코인 로커 베이비스>(1980년작)에 자극을 받아 그들에게 지지 않는 장편 소설을 쓰기로 하고 완성한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친구와 함께 번역 사무소를 겸한 광고 회사를 경영하고 있따. 그러던 1978년 7월, '내'가 학창 시절에 사귀던 여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만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내'가 그녀의 장례식에 갔다가 집에 돌 아와 보니, 이혼하기로 한 아내가 짐을 꾸려 집을 나가 버렸고, 그 해 9월에 '나' 는 새로운 여자 친구와 사귀게 된다. 그녀는 완벽한 모양의 귀를 갖고 있었던 탓으로 전문적의 귀 모델을 하고 있고, 아르바이트로 작은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기도 하며, 동시에 고급 콜걸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는 미지의 앞날을 미리 점 칠 수 있는 기이한 예지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나'에게 앞으로 양을 쫓는 모험이 시작될 것라고 예언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친구와 함께 경영하고 있는 광고 회사가 어느 우익 조 직의 거물로부터 협박을 당하게 된다. 그 우익의 거물은 태평양 전쟁중에 만주 에서 활약하며 막대한 재물을 축적한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A급 전범으로 스가 모 형무소에 투옥되지만, 석방되자마자 갖고 있던 재보를 둘로 나누어 절반으로 는 보수당의 파벌을 매수하고, 나머지 절반으로는 광고 업계에 군림하게 된다. 그 거물의 비서로부터의 협박은, '내'가 어느 잡지의 화보에 사용한 한 장의 사진의 출처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그 사진은 양떼와 초원, 그리고 홋카이도 특 유의 거대한 자작나무 숲이 찍혀져 있는 평범한 사진이었다. '나'는 그 우익 거물의 비서를 만났다. 비서는 반듯한 얼굴에 차가운 눈을 가 진, 완벽하게 호모 같은 남자였다. 그는 '나'에게 양 사진의 출처를 밝히라고 하 며, 차가운 어조로 이렇게 강요한다. '선생님'은 정, 재계, 매스컴 관계 등 모든 영역에 침투되어 있는 강대한 지하 조직을 갖고 있다. 그러니 작은 광고 회사를 쓰러뜨려 너의 장래를 망쳐 놓는 일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양의 사 진을 누가 찍었는지 즉시 밝혀라, 라고. 그러나 '나'는 끝내 그것을 밝히지 않는 다. 그러자 비서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확대경으로 사진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 는데, 일본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양이 한 마리 있다. 그 양이 '선생님'과 관계가 있다. 우익의 말단에서 일하고 있던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형무소 에 들어가 있었는데, 1936년에 출소하자마자 자기 변혁이 이루어진 듯했으며, 그 후로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면을 보여, 결국에는 우익의 톱으로 뛰어오르게 되 었다. 같은 해에 '선생님'의 머리 속에 혈류가 생겨났다. 혈류가 생겨나면서 '선생 님'은 자주 양의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1936년에 '선생님' 속으로 양이 들어간 것 같다. 그리고 그 양이 '선생님'의 탁월한 힘의 원천이 된 것 같다. 병상에 누워 있는 '선생님'은 2주일 전부터 의식을 잃고 있으며, 죽음이 임박 한 것 같다. '선생님'이 죽기 전에 '선생님'과 양 사이의 비밀을 해명하지 않으면, '선생님'이 만들어 낸 조직은 와해되어 힘을 잃을 것이다. 비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만일 사진의 출처를 밝히기가 싫다면, 당신 스스로 그 사진에 찍혀 있는 양을 발견해야 하며, 기한은 1개월 이내이다, 라고. '나'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별 모양의 얼룩 무늬가 있는 양을 찾으로 홋카이도로 떠난다. 양을 찾기 위한 열쇠를 가진 여자 친구를 데리 고. 사실 '내'가 사진의 출처를 밝히기를 거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고향을 떠나 행방 불명이 된 '쥐'로부터 '나'에게 두 차례 편지가 왔기 때문이다. 두 번째 편지 (1978년 5월)에 문제의 양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고, '쥐'는 그 사진을 어디든 사람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놔두었으면 좋겠다고 적어 두었다. 그리고 이는 자신 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나'와 귀 모델을 하는 여자 친구는 우선 삿포로로 갔다. 그리고 별로 고급 호 텔이라고는 할 수 없는 '돌고래 호텔'에 묵으며, 1주일 동안은 실마리를 잡지 못 한 채 시간을 허비하였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작 실마리는 '내'가 머 물러 있는 '돌고래 호텔' 안에 있었다. 호텔의 전신은 홋카이도 면양 회관이었으 며, 호텔의 지배인은 면양 회관의 관장이었던 양 박사의 아들이었다. 아들의 소개로 '나'는 호텔 안쪽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양 박사를 만난다. 양 박사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도쿄 제국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농림부에 들 어갔으며, 1935년에는 시찰을 하러 만주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 박사의 몸 속에 양이 들어 가고, 이어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그는 농림부를 그만두고 홋 카이도로 건너가 양을 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면양 회관의 관장이 되었던 것이다. 1935년 여름에, 그는 만주와 몽고의 국경 부근에서 방목 상태를 조사하고 있 다가 길을 잃었는데, 그때 양이 양 박사의 머리 속으로 들어왔던 것 같다. 그 양 의 눈의 색깔이 마치 물처럼 투명했고, 새하얀 털에, 등에는 별 모양의 갈색 털 이 나 있었다, 라고 양 박사는 말했다. 그러나 양은 얼마 후에 양 박사의 몸에서 나가 버렸는데, 양은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그 인간 속에서 나가 버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그는 평생 동안 양의 그림자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박사의 이야기를 연결해 보면, 박사의 몸에서 나간 양 이, 지금은 '선생님'이라 불리는 당시의 우익 청년 속으로 들어갔고, 금년 봄에 그에게서 나와 버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양 박사의 이야기에 따라, 그 사 진에 찍혀진 장소를 찾아간다. 목장의 한 쪽 구석에 미국식의 시골집 2층 건물이 있었는데, 집 안에는 아무 도 없었고, '죽은 시간'의 냄새가 풍겨 왔다. 한쪽 방에는 '쥐'의 소지품과 의복이 있었지만, '쥐'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며칠 동안, 나는 '쥐'를 기다렸다. 그리고 여자 친구는 두통을 앓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예지 능력이 이 목장에 들어온 뒤로부터는 작용하지 않았다. 여자 친구는 목장을 떠나가 버리고, 차츰차츰 겨울이 다가왔다. 이곳에 온 지 12 일째 되던 날-세 번째로 눈이 내린 날-밤에, '나'는 드디어 '쥐'를 만났다. 사실상 '쥐'는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1주일 전에 이미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 었었다. 그 죽은 '쥐'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와 '쥐'의 유령은, 캔 맥주를 마 시면서 지금까지 쌓였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양이 자 신의 몸속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자신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라고. 그러나 자신은 양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양을 죽이 려고 결심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양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재빨리, 양이 몸 속에 있을 때 자살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고. 그래서 '쥐'는 목매달아 죽었던 것이다. 왜 양을 거부했는가 하고 '내'가 묻자, '쥐'는 "나는 나의 연약함을 좋아해. ...여 름의 햇빛이나 바람 냄새나 매미 소리 같은 것을 좋아해. ...너하고 마시는 맥주 따위를 좋아해"하고 대답했다. 이윽고 '나'는 목장을 떠나고, 돌아가는 길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 '선생님' 의 비서를 만난다. 그는 처음부터 '쥐'의 몸 속에 양이 들어가 있었음을 알고는, 나를 이용하여 '쥐'를 자신의 수중에 넣어, 양의 힘을 이용하려 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는 '나'를 만난 다음에, '쥐'를 만나기 위해 혼자서 목장으로 갔다가, '쥐' 가 장치해 둔 폭약이 터지는 바람에 죽어 버린다.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나'는 '쥐'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작은 도시를 찾아간다. 그리고 제이스 바로 찾아가, 그 비서가 넘겨준 거액의 돈을 제이스에 게 모조리 건네준다. '쥐'와 '내'가 같이 번 돈이라고 말하며. 이 작품에 나오는 '양'은,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별 모양의 무늬가 있는-특별한 양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몽고의 초원에서 '양 박사'라는 학자의 몸 속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우익의 거물' 속으로 들어 가 그를 정치, 경제의 지하 조직의 지배자가 되게 만들었다. 이 '양'이 용의 주도하게 준비된 메타포(은유)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의 평 론가들 가운데는, 이 '양'이 사실은 일본에서 1960년대 말경부터 70년대 초에 걸 쳐 당시의 젊은 세대를 사로잡은 '혁명 사상'이나 '자기 부정' 등의 관념이라고 보는 이도 있고, 또 그러한 관념이나 학생 운동을 상징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 듯하다. 한편 이 작품 속에서 '쥐'가, '양'이 자신의 몸을 완전히 지배하기 전에 자살한 것은, '양'의 야망을-강대한 권력 기구를 만들어 내려는 야먕을-분쇄한 것을 의 미하고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쥐'를 '양'과 함께 죽임으로써, 모든 이상이나 이념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고 있다. 타인의 내면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 미우라 우타시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내'가 술에 취해 제이스 바의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여자를, 그녀의 아파트까지 데려단 준 '다정함'에 대 해 <무라카미 하루키와 이 시대의 윤리> 속에서 이렇게 쓰고있다(<우미>,1981 년 11월호) 두말할 것도 없이, 여자에게는 만취해서 정신을 잃지 않으면 안 될 만한 이유 가 있었고, 또 '나'에게도 그러한 상태의 여자를 데려다 주고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의 행위는 비상식적이라 할 수 있 지만, 지극히 다정하다. 또한 그 다정함은 '내'가 여자의 내면에 결코 발을 들여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서 기인하며, 그것은 '내'가 '나'의 내면에 결코 발을 들 여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만취해서 정신을 잃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여자도, 생전 처음 만난 여자를 집까 지 데려다 주고 혼자 사는 그 여자의 방에서 여자가 정신이 들 때까지 간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나'도, 여기서는 그 이유를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 즉, 내면적 인 것은 전부 지워져 있는 것이다. 미우라는 '내면에 결코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다정함'이라고 했 는데, 정말로 그것이 '다정함'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분명히, 만취한 여자 에게는 만취할 만한 이유가 있고, 그 여자를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고 간호해 준 '나'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내면적인 필연이 있으면서도, 그 이유에 발을 들여놓 지 않는 것은 일종의 상대에 대한 배려, 즉 '다정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 및 타인의 내면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그와 같은 인간의 관계가 '다정함'이라 한다면, 그 '다정함'이란 얼마나 쓸쓸한 것일까? 타인에게 마음을 닫 고, 그와 동시에 타인에게 몸을 기대고 사는 것도 거절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을 가리켜 '강 인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우라가 말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 즉 무라카미가 생각하고 있는 '다정함'이란, '강함'과 표리일체이며, 그 '강함'의 밑바닥에는 말할 수 없는 고독이 잠재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타인과 자신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동결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한없 이 '다정'해질 수 있는 그것이, 미우라가 말하고 있는 '다정함'이다. 이것이 아마도 현대품의 '다정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 는 것은 아닐까? 본질적으로 '약한 동물'인 인간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는 현실을 감안할 때, 타인을 구하고, 또 구해지는 관계 속에, 참다운 '다정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무라카미는 이 시대에 그런 진정한 '다정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확신하기에 이른 것일까? 그것은 그의 세 번째 장편 소설인 이 작품의 제1장이, '1970/11/25'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데에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사실 1970년의 일본은 누구나 다 대단히 감각적인 반면, 또 한편으로는 놀랄 정도로 윤리적이고, 그 감각과 윤리가 모두 세계를 향해서 동원되었다. 즉, 구체 적인 인간 개개의 상태보다는 일본의 현실이나 그것을 둘러싼 세계의 정세와 자 신과의 관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그런 것에 당시 학생들의 정신이 집중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랑이냐 혁명이냐'가 아 니고, '혁명과 함께 사랑을' 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따라서, '왜 우는가?', '어째서' 하는 식으로 묻는 것은, 상대의 내면에 발을 들 여놓는 일이므로, 결코 하지 않는다. 하여간, 세 작품 모두 타인에 대해서 마음 을 열지 않는 '다정함'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그러나 연인의 자살을 경험함으로써, 마음을 동결해 버린 채 살아나가는 '나' 의 '다정함'이란 얼마나 잔혹한 것일까? 마음을 닫은 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자와의 생활은 또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일까? 아내의 불륜을 책망하지도 않고, "일어나 버린 일은 일어나 버린 일이다" 하고 큰소리를 치며, 불륜-별거-이혼도, "결국 그것은 그녀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라고, 차갑게 말하는 '나'. 아마 아내는 그런 '나'의 마음에 불어 지나가는 황량한 바람소리를 더 이상 견디지 못했을지 도 모른다. 이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상처를 입은 것은 '내' 쪽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불륜을 택한 아내 쪽이었다는 것은, 무라카미의 작품에 나타나 있는 '다 정함'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여실히 얘기해 주고 있다. 결국 얼어붙은 마음을 건드리려고 하는 사람은, 그 차가움에 동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라카미의 '다정함'은 현대 사회에 걸맞는 감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가페(정신애)가 사라지고 에로스(육욕)만이 선행하 는 현대는, 그야말로 무라카미식의 '다정함'이 유행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기 회복의 여행 그런 얼어붙은 마음을 안고 살아온 '내'가, 함께 '청춘'을 공유한 '쥐'에게서 보 내 온 홋카이도의 사진 속의 '양'을 발견한 것에 의해서, '양 찾기'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어쩌면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려는 심층적인 마음의 움직임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친구에게 사무소의 모든 권리를 넘겨주고까지 결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양 찾기'의 '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소설에서 '양'은 인간의 체내 에 들어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별 마크가 붙은 특별한 양으로 되어 었다. 전쟁 전에 몽고의 초원에서, 오랜 잠에서 깨어나 '양 박사'라는 학자의 체내로 들어가고, 그 뒤 '우익의 거물'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를 지하 정치와 경 제의 지배자로 끌어올리고, 이제는 이용 가치가 없어진 '우익의 거물'에게서 빠 져 나와 다음 대상을 찾아서 전국을 방황하고 있는 '양'. 이 '양'은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메타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양'이 '양 박사'를 경유하여 '우익의 거물' 안에 들어갔다가, 마지막 에는 '쥐'와 함께 홋카이도의 산속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으로 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면서, 어떤 일에도 가담하지 않으려는 의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무라카미는 그와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었을까? 아마 그것은 스 스로의 체험을 포함하는 학생 운동, 즉 전공투 운동의 시절을 모두 과거에 가둬 버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중년 남자들이, "옛날에 우리들은 말이야, 돌을 던지면서 기동 대와 대결을 벌였단 말아" 하고 회고담을 늘어 놓는 것 같은 회고 의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신화'는 현재와의 직접적 회로를 갖지 않는 것에 의해서만이 '신화'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양을 쫓는 모험>에서, '내'가 '양'을 찾으러 간다고 하는 것은, '과 거'에 봉인했던 '청춘'을 찾아내는, 말하자면 자신을 찾는 감상 여행이었다고 풀 이된다. 1970년이라는 시기 이후로, 마음을 동결한 채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양 찾기' 여행은 운명에 의해 조종된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귀 모델의 여자 친구', '쥐', 그리고 '양' 살해 '나'의 '양 찾기' 여행에 동행하게 된 '귀 전문 모델을 하는 여자 친구'는, 귀를 통해서 특수한 예지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지 능력을 지니게 되었던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귀를 폐쇄했던 그녀가, '나'에게만은 귀를 개방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또한 '나'와 그녀가 홋카이도의 산골짜기 별장에서 생활하 고 있는 '쥐'를 찾아갔을 때, 갑자기 그 산을 내려가 자취를 감춘 것은 왜일까? 이 두 가지는 그녀의 '귀'가 의미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귀'는 '내'가 '귀와 의식 사이의 통로를 폐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외계와 내부면, 의식 을 잇는 통로의 입구 역학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열두 살의(첫월경 나이) 나이에 귀를 폐쇄했다는 것은, 외부 의 더러운 현실을 자신의 내면에 받아들이는 것을, 열두 살이라는 어른에의 입 구에서 거부했다는 것으로, 그만큼 그녀는 내면 세계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어른이 되기 직전에 '시간'을 동결하고, 출판사의 교정 아르바이트와 귀 광고 모델, 콜걸 등의 일을 하며 살아온 그녀, 그녀의 이러한 나날들은, '시간'을 1970 년에 동결하고 살아온 '나'와 아주 유사하다. 그녀가 '나'와 함께 있을 때만 귀를 개방하는 이유도 위의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한편 '쥐'는 자살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몸 안에 들어온 '양'에게 지배당하는 것에 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거대한 힘을 지닌 '양'의 야망 은 강대한 권력 기구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마지막에는 '모든 대립을 단일화'하 는, '완전히 무정부주의적인 관념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쥐'가 '양'이 자신을 지배하기 전에 자살한 것은, '양'의 야망을 영원히 어둠 속에 묻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장편 소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양'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푸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무라카미는 '양'이란 '완전히 무정부주의적 인 관념의 왕국'의 지배자라고 했다. 그것은 젊음의 이상과 이념을 뜻하는 것으 로, 무라카미는 '쥐'를 '양'과 함께 죽게 함으로써, 모든 이상이나 이념에 대하여 불신을 표명하고, 그것들에게 등을 돌렸음을 선언하고 있다. '무정부주의적인 관 념의 왕국'의 지배자인 '양'과 함께 '쥐'를 매장시켰다는 것은, 무라카미에게 있어 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던 1970년부터 꼭 10년 만에 '1970년의 속박, 전공투 와 그것에 연관된 연인의 죽음'에, 간신히 결말을 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으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부터,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 험>으로 이어지는 '쥐 3부작'이 모두 끝났다. 그렇다면, 이 3부작을 통한 작가의 의도(테마)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양 살해'로 상징화된 '청춘' 에의 만가를 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년작) 작품론 대강의 줄거리와 작품의 성격 1985년도 다니자키 문학상 수상작인-30대 작가로서는 오에 겐자부로에 이어 두 번째로 수상하였다-이 작품은,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호응하면서 진행되는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 되어 있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적인 문학 세계가 가장 정확하고 뚜렷하게 표현됐 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많고 적은 다소간의 차이와, 직접적이냐 간접적이냐 하는 차이는 있다고 해도, 모두 이 작품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와 같은 평가는 대부분의, 하루키를 깊이 연구하고 평론집을 내놓은 문학 평론가의 거의 일치된 견해이며, 하루키 자신도 시인하는 지배적 평가라고 하겠 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어 간다. 하나는 '하드보일드 원더 랜드'이고, 또 하나나는 '세계의 끝'인데, 이 두 이야기가 번갈아 씌어지며 병행하 여 전개되어 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네 번째 장편 소설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이색적인 작품으로서, 무라카미가 지금까지 시도하 지 않았던 여러 가지 방법을 구사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 간 야심작이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공인 '나(=자아)'는 서른다섯 살이고, 독신이며, 이혼한 계산사이다. 주인공 '나'는 자신의 무의식의 핵(코어)를 이용하여 정보를 암호화하거나, 암호화된 정보를 다시 알기 쉬운 수치로 나타내는 '샤프링'이라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샤프링 시스템의 개발자이며 생물학자인 노 박 사가, '나'의 의식 속에 '나'의 의식의 핵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그가 다시 편 집한 별개의 의식의 핵을 실험적으로 주입해 버린다. 그러나 그 실험을 해제하고, 본래의 상태로 돌려놓기 위한 자료를 다른 조직 의 사람들이 가져 가버렸기 때문에, '나'의 의식은 3일 후에 내 의식과는 다른, 노 박사가 편집한 별개의 의식으로 영원히 이행하게 되고 만다, '하드보일드 원 더랜드'에는, 이 의식의 이행이 초저녁의 땅거미처럼 소리 없이 다가올 때 까지 의 시간이 묘사되이 있다. 그 동안 '나'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조직'-고도의 정보를 소유하고 지키는 단체-과, 또 다른 마피아적인 정보 처리 그룹의 기호사들이 만든 '공장'-조직의 정보를 도중에서 가로채어 이익을 취한는 경쟁 단체-과, 지하를 지배하고 있는 '야미쿠로(암흑)' 등의 조직 사이의 정보전에 말려들어, 초근대적인 빌딩과 도쿄 의 지하 등으로 노 박사 및 박사의 손녀딸과 함께 이동한다. '하드보일드 원더랜 드'는 이처럼 속도감 있고 개방적인 배경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한편, '세계의 끝'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는 대조적으로 폐쇄적이다. 주인공 인 '나'는 주위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상한 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높 이가 7미터나 되는 이 도시의 벽은 아무도 파괴할 수 없으며, 이 도시를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일각수와 하늘을 자유로이 날 수 있는 새들뿐이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상실한 대신, 조용하고 평온한 나날 을 보내고 있다. '나'도 역시 시내의 도서관에 다니며, 일각수들의 두개골 앞에서 오래된 꿈을 읽으면서 지낸다. 사람들이 이 도시로 들어가려면 우선, 출입문 앞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 내야 한다. '나'도 나의 '그림자'를 출입문 앞에서 떼어 내고 그것을 문지기에게 맡긴 다음, 이 도시의 주민이 되는데, 이 도시에서는 주민들이 평온한 생활을 보 내고 있는 대신, '그림자'를 떼어 낸 후에 점차 '마음'을 상실하여 간다. 그리고 몸에서 떨어져 나간 '그림자'는 서시히 쇠약해져 죽어 간다. 이 도시는 그야말로 '세계의 끝'과도 같은 도시인 것이다. 이윽고 점차 쇠약해져 가는 나의 '그림자'가 역시 '마음'을 상실하여 가고 있는 '나'에게, 이 세계는 완벽하지만, 뭔가 잘못되어 있으니 둘이서 이 도시를 탈출하 자고 제의한다. '그림자'와 '나'의 비밀스런 탈출 계획이 진행되어 가는 한편, '나' 는 '그림자'와 함께 이 도시를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이 도시에 머물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게 된다. 이처럼 대조적이고 아주 판이한 두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데, 도중에 양쪽 이야기 속에 도서관이 등장하면서부터 두 이야기가 묘하게도 연결된다. '하 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자아'와 '세계의 끝'의 '나'의 관계는, 처음에는 직접 연결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내레이터 사이에는 어딘지 친화력이 느 껴진다. 그것은 단지 두 사람이 모두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에 어울리는 인물 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나'가 '자아'의 전신 같은, 혹은 그 반대 같은 인 상을 받는 것과 동시에, 한 쪽이 다른 쪽의, 아니면 양자가 서로의 꿈을 꾸고 있 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는 것이다. 클립, 도서관, 일각수의 두개골, <대니 보 이>... 두 스토리는 하나로 수렴하면서도, 그 각각에 그려진 패럴렐 월드(대비되 는 세계)는 결코 만나는 법이 없다. 다만 위에 나열한 사물들에 의해 순간적으로 접촉할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에서 여러 가지의 새로운 수법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의 끝'이 '정'의 세계라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동'의 세계이다. 몸이 비 대하지만 활발하고 매력적이며, 핑크빛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노 박사의 젊은 손녀딸과 같은 캐릭터의 인물을 등장시킨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또 '나'는 도서 관의 사서 담당 직원과의 첫 아방튀르때에 성적 불능에 빠져 버리는데, 그가 '불 능'을 묘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가 변해 버린 것은 아니다. 노 박사의 손녀는 여섯 살 때에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교통 사고로 사망했고, 서른다섯 살인 '나' 는 이혼한 경험이 있는 독신자이다. 이처럼 존재와 부재가 병존하고 있는 무라 카미의 세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두 개의 별도로 엇갈리며 전개되는 이야기 가운데, '세계의 끝'에 해당하는 부분의 이야기는, 1980년 문학 잡지에 발 표했지만, 미완성의 작품이라고 생각한 저자가 단행본에 수록하지 않고, 버려 두 었던 중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확대해서 장편으로 고쳐 쓴 것이다. 본 인은 "뜻이 있는 실패작"이라고 그 중편 소설을 자평했는데, 5년만에 다시 생명 을 불어 넣은 대작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런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나'와 '그림자'가 함께, 그 도시를 탈출하 기 위하여 웅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데서 끝나는데, 장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 드 원더랜드>에서도 '나'와 '그림자'가 함께 그 도시를 탈출하느냐 마느냐가, 최 후의 커다란 문제가 된다. '그림자'가 '나'에게 하는 강한 설득의 말, '나'의 '마음'의 쇠약과, 도서관 여직 원과의 사라의 진전이 얽혀 가며, 스토리는 진전되어 가지만, 역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같이, '나'와 '그림자'는 함께 탈출구인 웅덩이까지 달려온다. 그러나 한 번은 탈출하기로 결심했었던 '나'는, 마지막 순간에 이 도시에 계속 머물러 있겠다고 '그림자'에게 말한다. '세계의 끝'의 '나'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이 도시에 남기로 결심한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마음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사람들은 도시의 숲 속으로 추 방되는데, '나'도 사랑하는 도서관 아가씨와 함께 그 숲 속으로 가는 길을 택한 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는 도시 안에 남고, '그림자'만이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탈출한다. <나의 문학을 이야기한다>라는 인터뷰에서 하루키 스스로가 밝힌 바에 따르 면, "마지막 부분은 다섯 번인가 여섯 번을 고쳐 썼다. 지금이니까 말할 수 있지 만, '나'와 '그림자'가 마지막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결말을 짓는 방법에 따라, 작 품 전부가 확연히 달라진다. 보통은 최후의 매듭 부분을 쓰게 될 무렵이면, 분명 하게 결말이 머리 속에 굳어져 있게 마련인데, 이 작품만은 전혀 예외였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이 결말 부분에서 하루키가 고민한 것은 "벽의 바깥쪽으로 나가는 데는 필연 적인 이유가 있고, 벽의 안쪽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삶의 리얼리티를 잃는다"고 하는 전혀 상반된 그 생각을 더떻게 실현하느냐, 라는 점이었다. 하루키는 이 문제에 대해서,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다 시 그 안에서 추방을 당하는 '숲'이라고 하는 장소에 머문다는 것으로 대답하려 했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라는 부정형, 다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추방되는 '숲 속'이라는 부정형, 그 삶의 이중부정에 의한 긍정성에 따라 벽의 안쪽에 있다는 부정성에서 탈출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머물러 책임을 다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삶의 이중 부정에 의한 긍정성"에 의해서, 인간의 근원적인 삶을 지탱 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가 벽의 안쪽에 머물면서, 부풀어 있는 적극적인 인상을 읽는 이에게 안겨 주는 이유라고 하겠다. 그 "어떻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바깥으로 나가느냐"라는 물음은 하루키뿐만 아니라, 현대 문학을 관통하는 커다란 물음이다. 이 작품은 그 어려운 문제를 정 면에서 맞붙어 결판을 내려고 한 하루키의 대단한 야심작이다.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도시는 '마음=자아'가 없는 세계이며, 확실히 '세계의 끝' 같은 도시이다. 마음이 없는, 그러한 세계에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간 '그림자'와 헤어진 다음에 숲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리고 '세계의 끝'과도 같은 도시에 존재하는 평화로운 숲 속에서 속이 평화롭고 여러 가지의 생산도 이루어지는 장소라 하더라도, '벽'의 안쪽인 점은 마찬가지 다. 아무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니힐리즘=절망'을 잘 그려 낸 작품이다. '자아'를 향하여 '쥐 3부작'이 '과거'의 한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씌어져 있는데도 현재의 이야 기로 읽혀지는 것은, 시대에 따라 작품에 나타난 자아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졌 다가 다시 합일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쥐 3부작'은 그 누구도 '과거의 이야기'로서 읽지 않는다. 여기에 바로 무라카미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써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쥐 3부작'은 과거에서 현재를 관통하는 '자아'의 정신 세계를 탐색하는 것이었으 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그와 같은 '자아'의 '현재'를 명백히 하려는 동기에 의해서 뒷받침된 작품인 것이다. 누구나 때로는 멈춰 서서, 자신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경우가 있다. 나는 왜 지 금 여기에 있는가, 혹은 이럴 리가 없는데, 하는 자기 성찰은 일상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자신의 심층 깊숙이 '또 하나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다면, 혹은 자신이 겉과 속, 밝음과 어두움, 정의와 사악과 같이, 두 개로 갈라져 있는 '자아'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또 자신이 마치 자신 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면, 인간은 누 구든 반드시 자신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누구의 가슴속에나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엇인가를 찾고 싶 은 충동이 존재하고,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특히 일본의 경 제가 고도로 성장하면서 순조롭게 발전하여, 그 결과로 미증유의 번영을 가져다 주었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안정적인 성장을 계속함으로써, '물질'은 범람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 현실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성찰을 촉구당한다. 즉, 어느 틈엔 가 물질에 의해서 지배되는 구조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많은 사 람들이 '자아'를 상실한 것이 지금의 현재라는 것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자아'와 '나'의 두 가지 이야기로 병행 되어 진행되고, 마지막에는 '자아'도 '나'도 '나'의 양면성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 는 결론을 갖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좀처럼 자아를 파악하기 어려운 현재 상황 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상 생활 속의 '자아', 의식의 세계 속에 사는 '나', 과연 현재의 나 자신이란 무엇인가 하는 거듭되는 의문은 당연히 이중화딘 '자아'의 의식을 각기 다른 이야기로 그려 낼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자아'와 '나'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존재와 부재라는 느낌이 듭니다. 즉 평행선산에 있다는 거지요.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해도 좋고, 현실적인 존 재와 내재적인 존재라는 식으로도 파악할 수 있으며, 선택이라든가 선택지의 차 이라는 식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야기를 위한 모험> 중에서 '자아'...'원더랜드' 2,600매가 넘는 장편 소설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총 40장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확히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으로 각각 20 장씩 나뉘어져 하나씩 교대로 전개되는 구성이다. 무라카미는 <지난 10년>이라는 글 속에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 드>를 언급하며, 이 작품의 성립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먼저 습작으 로서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씌어졌고, 그것이 '세계의 끝'이라는 정적, 고정적 이야기가 되었으며, 거기에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또 하나의 이야기 '하 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짝지웠다고 말하고 있다. '자아'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른다섯 살의 독신인 '계산사'이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이 계산사인 '자아'가 어떤 사건에 말려들어 감으로써 전개된다. '자아'가 말려든 사건이란, 머리 속에 특별한 회로를 장치한 스물여섯 명의 계산사 중 한 사람인 '자아'가 나머지 계산사들은 모두 그 회로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반해 혼자만 살아 남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조 직'과 '공장'에게 쫓기게 되고, 그 회로를 장치한 '박사'의 의해서 '자아'가 현실 세계에서 죽게 됨-다른 세계에서의 불사를 선고받는다. '계산사'하며, 로보토미 수술(역주:뇌 전두엽 절제 수술)을 연상시키는 '박사'의 수술 하며, 또 지하의 미로 하며, 이 이야기의 전체 구조는 언뜻 보기에 마치 공 상 과학 소설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가령 '나는 언젠가-분명히 연합적군파 사건 이 일어난 해의 일이다-허리와 허벅지가 이상할 정도로 뚱뚱한 여자와 잔 일이 있었다(7장)'에서 알 수 있듯이 '자아'의 생활은 현실적이기 그지없다. 이발소, 슈퍼마켓, 술집, 혹은 일요일이면 학생으로 가득 차는 도서관 같은 것 도 '자아'가 1980년대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음을 명시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무라카미는 <하드보일드 원ㄹ랜드>를 현실 세계와 SF적 세계의 이중 구조 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여기에는 분명 이 시대에 대한 무라카미의 날카로운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야기 속에 몇 차례나 '계산사'인 '자아'를 대신해서, '정보 전쟁'이라는 말이 나 오는데, 그것은 고도 성장 이후에 물질을 만드는 것보다는 만들어진 물질에 대 한 '정보' 쪽이 중요시되는 사회, 즉 정보 사회로서의 현실이 두드러져 가고 있 는 오늘날의 상황을, 무라카미는 올바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산사'라든가, '기호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시대의 대표적인 메타포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 다. 이 사회는 '관리'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고급 관리자들의 뜻대로 톱니의 하나 로서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선진 공업국으로서 세계의 톱의 위치까지 올라간 '일본 자본주의' 그 자체로서, 고도로 발달한 테크놀러지 사회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오직 온순하고 정교한 부붐일뿐이다. '계산사'로서의 '자아'가 '조직'의 요청으로 로보토미와 같은 수술을 받고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 다는 것은, 혹은 '자아' 이외의 수술을 받은 스물다섯 명의 계산사들은 아주 간 단히 죽어 버렸는데, '자아'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 으로서의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한 오늘날의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자아'의 소멸도 이 시대에 대한 어떤 종류의 메타 포가 되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 무라카미는 '인간'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져 가버린 테크놀러지 문명 속에서, 인간이 보다 인간적인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자신의 의식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참으로 절망적인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나'... '세계의 끝' 왜 '자아'의 머리 속에 장치된 회로의 키 워드가 '세계의 끝'일까? '자아'의 뇌 에 회로를 설치한 '노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있는 이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마음 속에서 세계가 끝나는 것이라네."(... 중략) "요컨대, 그것이 자네의 의식의 핵이라네. 그리고 자네의 의식이 그리고 있는 것이 세계의 끝이네... 어째서 자네가 그런 것을 의식 밑바닥에 숨겨 가지고 있 는지는 모르겠어. 그러나 어쨌든 거런 거야. 자네의 의식 속에서 세계는 이미 끝 나 있어. 거꾸로 말하면, 자네의 의식은 세계으 ㅣ끝 속에 살고 있다는 거지. 그 세계에는 지금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어야 할 것이 대부분 결여되어 있네. 그 곳 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삶도 죽음도 없네. 정확한 의미에서의 가치관이 나 자아도 없고 말일세. 그 곳에서는 짐승들이 사람들의 자아를 지배하지." 도대체 '자아'의 의식 밑바닥에서는 이미 '세계의 끝이 나' 있고, 그 곳에는 '가 치관'이나 '자아'도 엇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세기말적 인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 개체의 의식 상태가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애초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는 요즘의 젊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자 신의 '삶'을 '외부'와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요소가 거의 없다. 그런 작가가 자신이 번영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살을 응시하게 된다면, 자기 내면의 풍경을 어떻 게 느끼게 될까? 그것은 지극히 공허하다는 느낌일 것이다. 바로 그때 그 곳에 세기말적인 절망이 숨어 든다. 허무주의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와 같은 허무주의가 이 시대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다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자신의 '삶'이 거대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한 개으 톱 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아 버린 '풍요로움' 속의 젊은 '독자'들에 게 있어서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의식 속의 세계인 '세계의 끝'에 사는 '나'가 결국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로 부터의 탈출을 단념하는 것도, 이 시대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기본적인 인식에 서 도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출구야. 틀림없어" 하고 그림자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이 도시도 우리들을 가둬 둘 수는 없어. 우리는 새처럼 자유로 워질 수 있는 것야." '나'는 왜 '그림자'와의 약속을 깨뜨리면서까지 '세계의 끝'에서 탈출하려고 하 지 않는가? 그것은 그 곳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자아'의 의식의 핵을 형성하고 있는 키 워 드가 '세계의 끝'이라는 것과 이 부분이 서로 대응하고 있다. '나'는 자신의 책임 때문에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마음을 상실한 채 머물 겠다고 말한ㄷ. 결국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자아'의 죽음이, '세계의 끝'의 '나' 으 무의식의 세계에 머물겠다고 하는 것에 이어져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절 망=허무주의이다. 왜냐하면, '나'도 '자아'도 감연히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 니라, 의식의 세계 속에 안주하는 것을 승낙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자아'가 없는 세계, 분명히 그것은 '세계의 끝'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 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가 말하는 것처럼,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싸움이나 미움, 욕망 혹은 절망이나 환멸, 슬픔도 없고, 또 기쁨이나 행복이나 애정도 없 다는 것이기도 하다. 즉, 감정=인간이 그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와 같은 세계에서 인간이 견뎌 낼 수 있을까? 물론 견뎌 낼 수 없으니까, '나'는 옛날의 세계로 돌아간 '그림자'와 헤어진 뒤에 '숲'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숲'에 대해서는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그 곳은 "일단 벽을 떠나서 숲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니까, 그 곳에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평화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ㅇ은, 깊은 자연이 가져다 주는 대지의 선명한 숨결이 사방에 가득 차고, 그것은 나의 마음을 조용히 풀어헤쳐 주었다. 그 곳은 늙은 대령이 충고하고 경고해 준 위험한 장소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곳에는 수 목과 풀과 작은 생물이 가져도 주는 끝없는 생명의 순환이 있고, 한 개의 돌에 서도 한줌의 흙에서도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섭리 같은 것이 느껴지는" 장 소였다. 어쨌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 를 사는 무라카미의 '허무주의=절망'에의 진화를 통째로 반영하는 작품이다. 물 론 공상 과학적 취향에 다소의 무리는 있으나, 이 시대의 '허무주의=절망'이 분 명하게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5.<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1987년작) 작품론 대강의 줄거리와 작품의 성격 <상실의 시대> 한국어판에 부쳐 한국 독자들에게 보낸 무라카미 하루키의 메 시지를 보면 이 작품을 통해 그가 무엇을 이야기 하려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기 위해, 또 하나는 하나의 시대를 감싸고 있던 공기라는 것을 그려 보기 위해 썼다는 이 소설은, 서른일곱 살인 '내'가 18년 전의 '사건=실연'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나'를 태운 보인 747기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왜 함부르크 공 항이 나오는지, 어디에서 출발한 비행기인지는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대학에 갓 입학하여, 주위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나'는 어는 날 전차 속에서 우연히 고교 시 절에 자살한 친구 기지키의 연인인 '나오코'를 만난다. 여러 차례의데이트를 거 듭한 끝에, '나'와 '나오코'는 재회한지 1년 후인 어느 비가 내리던 날-'나오코'가 스무 살이 되던 생일날-에 '나오코'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잔다. 그러나 '나오코'는 그 직후 실종되어 버리고, 그 후 '나'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 던 '나오코'가 교토의 산 속에 있는 아미료라는 요양소에 들어가 있음을 그녀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다. 이 무렵, '나'는 진한 색깔의 선글라스를 쓰고 하얀 미니 원피스를 입은 활발한 아가씨 '미도리'를 만난다. 미도리는 같은 대학의 1학년생 이며, 마치 봄을 맞아 세계로 갓 뛰쳐나온 작은 동물처럼 싱그러운 생동감을 발 산시키고 있었다. 이리하여 두 여성-쿄토 산 속의 '나오코'와 도쿄의 '미도리'-사 이를 오가는, '나'의 격력하고 슬픈 연애가 진행된다(이 '나오코'와의 재회로부터 '나오코'의 실종까지는, 이전에 발표한 단편 <개똥벌레>가 그 원형인데, 이 작품 의 제 2장과 3장이 바로 <개똥벌레>의 부분이다). '나오코'가 들어가 있는 쿄토의 요양소는 '외계와 차단된 조용한 세계'이다. 거 기서 살고 있는 '나오코'는 조용한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 고, 고무공 같은 미도리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요양하고 있는 '나오코'와 발랄한 이미지의 미도리. 이 두 사람은 각각 '정'과 '동', 혹은 '사'와 '생' 등의 무라카미 유의 두 개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대조적인 두 사람의 세계를 번갈아 가며 그려 가는 스타일은, 폐쇄적인 이야 기와 개방적인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전개되어 가는 전작, <세계의 끝과 하드보 일드 원더랜드>와 비슷하다. 하지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마 지막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거나 설명되는 데 반해, 이 <상실의 시대>에서는 여러 가지 묘사나 에피소드, 매력적인 등장 인물 등에 의해, 문제가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레 해명되고 있다. 이를테면 '나'와 미도리의 두 차례의 키스 신, 그리고 미도리와 섹스를 할 수 없는 '내'가, 미도리의 속옷에 사정을 하는 장면, 그리고 향락주의와 금욕주의가 공존하고 있는 듯한 기숙사 선배인 나가사와와 그의 연인인 하쓰미, '나'와 '나오 코'를 잘 이해해 주는 레이코 여사. 이러한 등장 인물들과 장면 묘사가 축적되 어, 마지막에는 독자의 마음을 세차게 뒤흔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상실의 시대>는, 작 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거의 같으며, 이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무라카미 하 루키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무엇인가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상실의 시 대>에서 무엇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또 다루려고 했던 것은, 섹스와 죽음의 문 제이다.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섹스와 죽음의 문제를 피하고 있고, <상실의 시대>에서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에는 '나오코'를 비롯하여 '나오코'의 언니, '나'의 친구인 기즈 키, 미도리의 부모, 나가사와의 연인인 하쓰미 등의 많은 죽음이 내포되어 있다. 결국 이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나오코'는 깊은 숲 속에서 목을 매달아 죽고 만 다. 끝내 '나'는 그녀를 구해 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전화 박스 속에서 정신없이 미도리에게 전화 를 걸어, 어떻게든 너와 꼭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온 세상에서 너 외에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랜 침묵 끝에 미도리가 "당신, 지금 어디에 있어요?"하고 물어 오자,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내'가 전화기에 대고 미도리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장면에서 이 작 품은 끝이 난다. 이 '어디도 아닌 장소'에 도달해 버린 마지막 장명도, 이 장편 소설의 첫 장면 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미진한 느낌을 준다. 단순히 '나오코'에 대한 사랑이 미도 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행한 것으로 읽는다는 것은, 작가에 의해 의식적으로 저 지되고 있다. 왜냐하면 함부르크에 착륙한 서른일곱 살인 '내'가 과거를 회상하 는 제 1장에, 미도리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가 연애(=실연)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가벼운 느 낌을 주는 것은, 등장 인물들의 외부(=시대, 정치)왕의 현실적, 상상적인 격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소설에는 '외부'를 형성하 고 있는 '어른'이, 주인공들보다 약간 연상인, '나오코'와 같은 정신 병원에 입원 해 있던 '레이코 여사'를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물론 미도리의 아버지가 등장하지만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기묘한 일로 서, 등장 인물들은 '청춘'이라는 진공 상자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이 가벼운 니낌을 주는 이유의 하나는, 이 진공 상태와 같은 '청춘'밖에 묘 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상실의 시대>가 상, 하권 합쳐 1년 동안에만 430만 부나 팔린 베스트 셀러 가 되어, 일본 내에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 혹은 '<상실의 시대> 현상'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게 된 이유를 보면, 이 ㅈ가품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으 ㅣ'내 면의 갈등'이 거의 묘사되어 있지 않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정신 병원에 들어간 '나오코'의 편지나 '나'와의 대화에는 '나오코'의 '내면'의 갈등 같은게 토 로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나'는 그저 센티멘털하게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나오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1개월 정도의 여행을 떠나는데, 언뜻 보기에 연인의 죽음에 의한 충격 때문인 것처럼 보이는 이 여행도, 사실은 '죽음 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나'에게 있어서는 '진리'를 재확인한 여행에 불과하다. 즉, 결과적으로 감상 여행에 지나지 않는 것 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행에서 돌아온지 4, 5일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 게 죽은 '나오코'의 친구 '레이코 여사'와 태연히 잘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미도리'를 향해 계속 '온 세계에 서 너밖에 구하는 게 없다'고 호소하는 '나'의 모습은 비장한 것 같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왠지 우스꽝스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정신 병원을 퇴원하여 홋카이도 로 가려고 하는 '레이코 여사'와 하룻밤에 네 번이나 섹스를 하는 '내'가, '미도리' 에게 '너밖에는 구하는 게 없다'고 호소하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변화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왜, 지금? 무라카미가 그 작가적 출발에서, 자신의 작품을 결정지은 초기의 '쥐 3부작'에 서는, 주인공 '나'에게 결정적인 정신적 상처를 남긴 '실연'이 조용하게, 그러나 그 뒤의 '나'으 삶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 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는 그때까지의 작품 속에서는 단편적으로밖에 언급하 지 않았던 '나'의 실연의 경과가, 마치 그림처럼 섬세하고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무라카미의 소설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제외하고는 장편과 단편을 막론하고, 청춘의 안타깝기 짝이 없는 '상실'을 테마로 해 성립되어 있는 데, <상실의 시대>는 그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청춘 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 니다. 그것은 무라카미가 연애=실연이라는, 누구든 다 경험하는 청춘의 '이야기' 를 쓰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청춘을 이미 과거의 것으로밖에 느낄 수 없는 작가가, 너무나도 감미롭고 아름답게 이 작품을 완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라카미는 왜 '실연' 이야기인 <상실의 시대>를 지금에 와서 쓰지 않 으면 안 되었을까? 이때, 중요한 것은 <상실의 시대> 다음 작품으로서 <댄스 댄스 댄스>가 씌어졌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외관상으로는 '쥐 3부작'과 연결되 어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거의 단절되어 있다. '쥐 3부작'이 작가의 청춘 시절을 점철하고 있던 전공투 체험을 축으로 하는 '상실'을 테마로 했다면, <댄스 댄스 댄스>는 현재 속에서 상실된 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다. 적어도 <댄스 댄스 댄스>에서는 '쥐 3부작'에 존재하고 있던 '과거'에 대한 집 착이 그다지 강하게 나타나 있지 않고, 오히려 그보다는 '현재'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즉 이 작품에서는 현재에서의 '재생'이 최대의 테마라고 해도 좋을 것이 다. 연애 소설로서의 <상실의 시대> 다음은 무라카미가 <상실의 시대>에 대해 스스로 내린 정의이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종류의 소설입니다. 그리고 꼭 한 번은 쓰고 싶었던 종류의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연애 소설'입니다. 무처 낡아빠진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밖의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격렬 하고, 조용하며, 슬픈 100퍼센트 연애 소설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연애 소설'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과연 이 장편 소설을 그렇게 간단하게 '연애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까? 분명히 이 소설에서는 한 사람의 남자가, 즉 주인공이 두 가지의 '연애'를 경험하는 모습이 상다히 극 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사랑'이라기보다는 '다정함'이라고나 해야 할 주인공 의 연인들에 대한 따사로움이 그려져 있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중략) 그때 까지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삶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서 파악 하고 있었다. (... 중략)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날 밤을 경계선으로 해서, 나로서 는 이제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죽음을 (혹은 삶을) 파악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 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망각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죽음'을 '삶'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는 '나'의 감성, 이와 같 은 이에게 과연 삶의 극치인 연애, 즉 '사람'의 실현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바 꿔 말하면 연애는 삶의 증명이며, 죽음과는 인연이 먼 인간적 행위이므로, '죽음' 을 살아있는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인 젊은이에게 그와 같은 진정한 남녀 관계가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딱 한 번 관계를 가진 뒤, 산 속의 정신 병원으로 들어가 버린 '나오코'를, 도쿄에서 쿄토까지 몇 번씩이나 병문안을 가는 것은 '나'의 '다정함'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다정함'이 1980년대를 풍미하는 또 다른 '사랑'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 <상실의 시대>란 작품이 특이한 것은, 소 설 속 시대 배경은 분명 1970년인데, 그려져 있는 풍속은 80년대 후반이라는 것 이다. 분명히 70년대의 '사랑'과 <상실의 시대> 속의 '다정함'은 이질적인 것일 텐데도 말이다. 이와 같이, 시대적 배경은 70년 전후, 풍속은 80년대 후반이라는 구성상의 엇 갈림은, 주인공들이 나누는 '사랑'의 방식에 커다란 작용을 미치고 있다. 즉, 밤마 다 '나가사와'와 함께 섹스를 하기 위해 일회용 여자를 찾아 다니면서도, 한편으 로는 '나오코'와 '미도리'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이와 같은 '성 도덕'이 70년대 후 반에서 80년대에 걸친 성 풍속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금세 알 수 있다. <상실의 시대>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 그런데, 어째서 이런 <상시의 시대>가 그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 되었을까?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요소를 지적해 왔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나 =와타나베'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나가사와, 하쓰미, 나오코, 레이코 여사, 미도 리-의 스마트한 삶의 태도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독자는 이 사람들의 스마트함에 동경을 느끼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미한 일상 과 비교하면, 그들은 얼마나 스마트한가. 만일 가능하다면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 이와 같은 소망이 <상실의 시대>를 베스트 셀러로 만들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나'의 스마트한 나날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동맹 휴학이 철회되고 기동대의 점령하에서 강의가 재개되자, 맨 먼저 출석한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선동, 주도했던 패거리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강 의실에 나와 강의를 들었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했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따. 왜냐하면, 동맹 휴학 결의는 아직 유효했고, 아무도 동맹 휴학 종결을 선언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측이 기동대를 끌어들여 바리케이트를 파괴했을 뿐, 원칙적으로 동맹 휴 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풍경은 당시 학생 운동 패배 후의 캠퍼스의 한 장면이다. '대학 탈환'을 외 치면서 대학 주변에서 시위를 하는 학생들, 패배를 곱씹으며 어두운 하숙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학생들, 대학생으로서의 투쟁의 한계를 깨닫고 당파의 활동 으로 옮겨 간 학생들, 혹은 시골로 낙향한 학생들, 치열한 전공투가 사그라진 뒤 의 풍경을 '나'=무라카미는 위와 같이 풍자화한 것이다. <상실의 시대>는 70년대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이면서도, 그 등장 인물의 정 서는 80년대 후반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했다고 할 수 있다. <상실의 시대>의 무대 뒷이야기 비틀즈의 노래 제목 <상실의 시대>는 무라카미 하루키로 하여금 세계적인 소설가의 자리에 오르 게 한 대표작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상실의 시대>를 읽지 않은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상실의 시대>에 얽힌 뒷이야기 까지 화제가 되었다. 우선, 가장 큰 궁금증은 제목에 대한 의문으로, 이 소설의 제목이 왜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의 원제)'으로 됐으며, 하루키 스스로 장정한 표지으 색깔이 왜 1권은 빨강, 2권은 녹색으로 됐는가. 즉, 무라카미는 수많은 비틀즈의 곡 중에서 어떤 이유로 단 하나, <노르웨이으 숲>을 골랐느냐 하는 것이고, 또 저자의 첫 자장본이 된 단행본 상하 2권의 장정에 사용된, '빨 간색'과 '초록색'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작품 타이틀, <노르웨이의 숲>에 관해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전집 제6권의 <나의 작품을 이야기한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타이틀은 최후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4월에 볼로냐의 서적 박람회에 온 고단샤(일본의 출판사 이름)의 직원에게 최종 원고를 건제주 었지만, 그 직전까지 이 소설에는 다른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물론 <노르웨이 의 숲>이라는 타이틀은 선택지로서 줄곧 존재하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딱 들어 맞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이것만은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고 비틀즈의 곡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다는 것에도 저항이 있었다. 세대적인 때 가 지나치게 많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강하게 내 머리에 달라붙어 있어서, 그 밖의 어떤 타이틀도 작품과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마지막에 아내에게 읽게 하고 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타이틀을 가르쳐 주지 않고, "어떤 타이틀이 좋을 까? "하고 물었더니, "<노르웨의 숲>이면 좋지 않겠어요?"하고 말했기 때문에 결국은 이 타이틀로 결정이 났다. 덧붙여 말하면, 아내는 그때까지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은 들어본 일도 없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타이틀은 정말로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노 래의 원래 시를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것인데, NORWEGIAN WOOD라는 말에 는 말 자체가 자연스럽게 부풀어 어로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조용하고 우울하고 그리고 왠지 모르게 고상한 느낌이 든다. 물론 여러 가지 해석법이 있겠지만, 일 본어로 바꿔 놓는다면, 역시 <노르웨이의 숲>이 가장 원어의 맛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이 글로 미루어 제목은 요코 부인의 의견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그러나 그때까지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그의 아내 가 단번에 <노르웨이으 숲>이라는 타이틀을 머릿속에 떠올린 것으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노르웨이의 숲>이 인상 깊게 다뤄진 작품이다. 스 토리의 첫부분인 제1장에서 "어떤 오케스트라가 달콤하게 연주하는" 곡이 <노르 웨이의 숲>이고 또 제6장에는 나오코가 "<노르웨이의 숲>을 쳐줘요"라고 요청 하면서, 그 곡을 제일 좋아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그처럼 <노르웨이의 숲>만이 특별 대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곡을 전혀 몰랐던 사람이라도 대뜸 타이틀을 <노르웨이의 숲>으로 눈을 뜨고> 라는 제목으로 쓴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분석을 참고할 만하다. 백 페센트 순수한 연애 소설의 걸작, <나날의 거품>을 쓴 보리스 비안은 사 막으로 가는 철도 부설을 하는 남녀들의 이야기를 엮은, 그 환상적이고 불가사 의한 소서을 북경이나 가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는데도 굳이 <북경의 가을>이 라고 명명했다. 무라카미의 <노르웨이의 숲>도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노르웨이'하고도 '숲'하고도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된ㅁ다. 물론 그것은 귀에 익은 비틀즈의 히 트 곡으로, 작중에서 백 그라운드 뮤직처럼 흐르고 있는 선율임에는 틀림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노르웨니'는 둘째치고, '숲'쪽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숲이라는 회의 문자. 물론 그것은 나무라는 상형 문자를 세 개 합친 것 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가 세 그무 모이면 숲이 된다. 가령, 나는 여기서 이런 시를 생각해 낸다. 나무 한 그루가 흔들린다. 나무 한 그루가 흔들리면. 나무 두 그루도 흔들린다. 나무 두 그루가 흔들리면 나무 세 그루도 흔들린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나무 한 그루의 꿈은 나무 두 그루의 꿈 나무 두 그루의 꿈은 나무 세 그루의 꿈 이것은 한국의 여류 시인 강은교씨의 <숲>이라는 시이다. 흔들리는 세 그루 의 나무. 그것은 숲을 의미하는 삼이라는 한자를 응시하고 있는 동안에 한 그루 씩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왔기 때문에 씌여진 것이 아닐 까? 옆에 있는 나무의 흔들림에 호응해서, 흔들리는 또 한 그루의 나무. 그러면 또 그 옆으 한 그루의 나무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노르웨이의 숲> 속에서는 이러한 '숲'의 세 그루의 나무의 배합과 같은 삼 각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있다. 그것은 우선 '나(와타나베)'와 기즈키와 나오코란고 하는 고교 시절의 남자 2명, 여자 1명의 '삼각'을 형성하고, 그것은 다음으로 미도리와 '나'와 나오코, 그리고 다시 레이코 씨-'나'-나오코라고 하는 삼각 관계로 변형되어 간다. 그야말로 세 그루의 나무가 모인 숲고 ㅏ같은 삼각 의 도형이 작품의 여기저기에 짜넣어져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노르 웨이의 숲>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나'를 둘러싼 갖가지 삼각 형태의 '사람'의 갈 등을 그린 것이다. -<군조> 1987년 11월호 한국어도 잘하며 부산의 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는 가와무라 씨의 이런 지적에 여러 문학 평론가들도 공감을 표시했고, '삼'이라는 한자가 이 작품 과 은밀한 연관이 있다는 것은, <분게이ㅅ주(1989년 4월호)>의 <<노르웨이의 숲>의 비밀>에 실려 있는 하루키의 인터뷰 기사 중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등장 인물 각자의 삼각 관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로 확실해 졌다. 문: 그런 삼각 관계의 이야기라는 면이 있다는 말이군요. '나'와 나오코와 미도 리가 가장 큰 삼각 관계라고 한다면, '나'와 기즈키와 나오코... 하루키: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나오코, '나'와 미도리는 평 행하는 흐름입니다. 삼각이 아니지요. 정말로 삼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나' 와 나오코와 기즈키 군의 세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와 레이코 씨와 나오코의 세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와 하쓰미 씨와 나가사와 군의 세 사람이지요. 이것은 삼 각 관계입니다. 세 사람이 일체가 되어서 이야기가 진행되어 나가니까요. 하지 만, '나'와 미도리, '나'와 나오코는 평행하고 있습니다. 평행 관계이든 삼각 관계이든 간에 실제로 '100퍼센트의 연애 소설'인 <노르웨 이의 숲>은 가와무라 씨의 분석대로, " '삼'의 세 그루의 나무의 배합과 같은 삼 각 관계가 이야기 구조의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무라카미가, <예스터데이>도 <페니 레인>도 아니고, 비틀즈의 곡 가운데서 단 하나 <노르웨이의 숲>을 선택한 것은 거기에 숲이라는 세 그루의 나무를 배합한 한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설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거은 애당초 '숲'이 전자, <세계으 ㅣ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인 공 '나'가 결심 끝에, '그림자'와 헤어져서 남아 있기로 한 장소이기도 하다는 인 식을 포함한 전제하의 일이기도 하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기즈키'의 '키'도 역시 '기즈쓰이타 키(상처 입은 나무)'라고 파악한다면,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노르웨이의 숲>의 다음 작품으로 나온 <댄스 댄스 댄스>도 역시 그 타이틀이 세 개의 같은 단어로 이루어진 '숲'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지적도 가능 하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메이, 쥰, 유키라는 세 여성과 세가지 댄스를 춘다. "최 후까지-" 하루키는 이렇게 해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후 '숲'과의 무 척이나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저자 자신이 한 장정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가 직접 장정을 맡아, 제1권은 빨강 바탕, 제2권은 녹색 바탕에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타이틀만 검은색 활자로 표현한 지극히 평 범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이 작품이 수백만 부씩이나 팔인 이유 중 하 나가 저자의 손에의한 장정의 힘이라는 말이 적지 않지만, 무라카미 자신은 일 찍이 장정의 '빨강과 초록'에 관해서 앞서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루키: 나는 <노르웨이의 숲>을 쓰고 있을 때부터, 어찌된 셈인지, 장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글자만, 그림은 없고, 문자는 세로 로 쓰고 색깔은 두 가지밖에 쓰지 않는다, 상하권에서 색깔로 역전시킨다, 이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출판사도 그다지 달가워하지를 않았어요. 색깍이 너무 진하 고, 그리고 너무나도 단순하다고 할까, 애교가 없다고 할까요? 하지만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으로 해 달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회사 안에서도 평판이 좋 이 않았을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리고 내 주위에서도, 쓸데없는 일(장정)에 고집을 피우지 ㅇ낳는 것이 좋다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그러나 나 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이다, 하는 확신이 있었지요. 이 소설은 대단히 감정이 강한 소설이니까, 선명하고 강한 색깔을 쓰고 싶었 던 겁니다. 따라서 초록과 빨강이었지요. 문: 상권을 빨간색으로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까? 하루키: 없습니다. 어느 쪽이라도 좋았습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이 책의 표 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나와 아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부터 어느 쪽이나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요. 글자뿐이고, 강하고 선명한 색깔을 두 가지만 쓴다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였어요. 그는 왜 쓰고 있을 때부터 "장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무리를 써서"까지도 '빨 강과 초록'으로 만든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빨강과 초록' 두 색깔밖에 쓰지 않은 이 장정을 인쇄할 당시의 고생담에 대하 여 담당 편집자인 기노시타 요코씨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 자신이 장정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만큼 힘을 많이 들인 작품 이었고 섣불리 그림을 집어넣으면 선입견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만두자고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빨강과 초록색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몇 종류의 색깔을 늘어놓았더니, 눈이 따끔따끔해서 모두 알 수 없게 되고 말아서, 최후에 는 무라카미씨 자신에게 결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두 권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을 발표한 프랑스 문학자 스즈무라 가즈 나리는 <도서신문>(1987년 10월 3일자)에서 <해금된 비틀즈 체험>이라는 제목 으로 다음과 같은 '빨강과 초록'의 색깔을 해석했다. 상하 2권의 책은, (... 중략) 동기 없는 죽음의 유희적인 색채에 의해서 장정되 어 있다, -당구대의 초록색 펠트와 그곳에서 은밀히 서로 부딪친 빨간 공과 흰 공의 빨강과 초록과 (흰 페이지의)흰색의 3색으로. 이것은 저자 최초의 자장본이 다. 물론 빨강과 초록에는 다른 함축도 있다. 기즈키가 배기 파이프에 고무 호스 를 연결해서 자살한 '빨간 N360', 또 소설의 모티프를 이루는 비틀즈의 <서전트 페퍼즈 론리 하트 클럽 밴드> 재킷의 빨강과 초록, 같은 비틀즈의 곡 <노르웨 이의 숲>의 초록도 그렇다.(... 중략) 그리고 또한 삶의 질서의 외설스러움을 주로 체현하며 발랄하게 움직여 돌아 다니는 걸프렌드, 고바야시 미도리라는 아가씨의 이름인 '미도리'. 스즈무라도 역시 '비틀즈의 <서전트 페퍼즈 론리 하트 클럽 밴드>의 재킷의 빨강과 초록'에까지 이 색깔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노력을 기울여 심혈을 쏟은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북>(<분가쿠카이>, 1991년 4월 임시 중간호)에는, '베이브 리지 클럽'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한 이런 새로운 설이 발표되었 다. 이 책이 발매되었을 때, 저자 자신이 장정한 빨강과 초록의 참신한 디자인이 화제가 되었다. 그 상권의 피를 연상시키는 빨간색은 생명력의 세계를 나타내고, 하권의 깊은 숲은 연상시키는 녹색은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데, 각 권의 타이틀은 각각 반대쪽 색깔로 인쇄되어 있어서, 이런 곳에도 "죽음은 삶의 대극 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저자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죽음의 세계의 상징인 숲의 초록이, 생명력의 상징인 여성 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며, 그런 단순한 해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작품이 되 어 있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빨강과 초록'의 배색을,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고딕체 표기로 강조하고 있는,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고 하는 주인공 '나'의 강한 주장과 겹쳐서 파악하고 있는 것 등등, 이 사람들 의 '수읽기'는 상당한 것이다. "상권의 피를 연상시키는 빨간색은 생명력의 세계 를 나타내고, 하권의 깊은 숲을 연상시키는 녹색은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 다"는 인식도 예리하지만, "죽음의 세계의 상징인 숲의 초록이 생명력의 상징인 여성의 이름으로서 붙여지고 있으며, 그런 단순한 해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작품이 되어 있는 것도 역시 사실"이라는 지적도 또한 날카롭다. '양'이 선악 양면을 함께 지니고, '일각수'도 또한 그러한 존재인 것처럼, '빨강 과 초록'도 각각 삶 및 죽음의 '쌍방'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상실의 시대>의 장정에서 '빨강과 초록'의 상징성은 <양을 쫓는 모험>에 나온 '사이프러스'의 상징성과 완전히 같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세계에서는, "피를 연상시키는 빨간색은 생명력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임과 동시에, '죽음' 그 자체의 세계의 상징이기도 하며, "깊은 숲을 연상시키 는 녹색은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또한 '삶'의 세계의 상 징이기도 한 것이다!-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어쩌면 이 이야기를 조용히 흐르는, "대극으로서가 아닌" 삶과 죽음의 세계의 올바른 이해로 이어질 것이다. <양을 쫓는 모험>을 돌이켜 보면 에필로그 바로 앞의 라스트신에 다음과 같 이 씌어 있다. "이제 이만 나는 가봐야겠어" 하고 쥐는 말했다. "너무 오래 있을 수는 없어. 틀림없이 또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겠지." "그것도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될 수 있으면 좀더 밝은 곳에서, 계절이 여름이라면 좋겠군" 하고 쥐가 말했 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내일 아침 9시에 벽 시계를 맞추고, 그리고 나서 기둥 시계 뒤쪽에 나와 있는 코드를 접속해 주었으면 좋겠어. 녹색의 코드와 녹색의 코드, 빨간색의 코드와 빨간색의 코드를 연결한는 거야. 그리고 9시 반에 여기를 나와 산을 내려가 주었으면 좋겠어. 12시에 조촐하게 친구들까리의 차 파티가 있어. 알겠지?" "그렇게 할게." "너를 만나게 되어 기뻣어." 침묵이 한 순간 우리들을 감쌌다. "잘 있어" 하고 쥐가 말했다. "또 만나자" 하고 나는 말했다. 여기에 나오는 "녹색의 코드와 녹색의 코드, 빨간색의 코드와 빨간색의 코드를 연결한다"는 것이, '쥐'가 '나'에게 부탁한 최후의 '나머지 하나'이다. 무라카미의 세계에서는 이때부터 '빨강과 초록'은 문자 그대로, 삶과 죽음의 세계를 연결하 는 색깔의 배합이었던 것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하나의 테마로 설정해 놓고 씌어진 <노르웨이의 숲>의 장정 색깔이, 다른 것이 아닌 '빨강과 초록'이었던 것은, 이렇게 되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까? 무라 카미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타이틀로 전작 <세계의 끝과 하드보잉ㄹ드 원더 랜드>의 라스트 신과 연결하고, 또 장정에는 확신을 가지고 '빨강과 초록'을 사 용하는 것에 의해서, 단숨에 <양을 쫓는 모험>의 라스트 신과도 연결하고 있었 던 것이다. 결코 무의미하게 구애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품을 떠난 영역에까지 최선을 다한는 작가 정신 (1988년 4월호)에서의 인터뷰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루 키 자신도 많은 고민 끝에 타이틀을 결정한 것 같다. 문: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타니틀에 대해서인데요, 이것은 비틀즈의 히트 곡 의 타이틀입니다. 그것은 깊은 숲속에서 헤매고 있는 상징으로 받아들여도 괜찮 겠습니까? 하루키: 글쎄요.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곡의 타이틀을 <노르웨이의 재목의 가구>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번역하면, 아무런 정취도 함축도 없어져 버립니다(웃음). 자구적으로는 아마 별로 틀린 곳이 없겠 지만요. 나는 처음부터 이 소설은 <노르웨이의 숲>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쓰고 있는 동안에 점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래서 바꾸려고도 생각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외국을 무대로 한 소설이라고 여 겨지는 것도 싫었고, 비틀즈의 곡명을 안이하게 끌어 왔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싫었고, 아무튼 여러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도중에는 <빗속의 뜰>이라는 것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이탈리아 어로 말하면, 이르 자르디노 소토 라피오자. 이 소설 은 비오는 장명이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이 제목은 얼마간 어두웠습니다. 이 탈리아 어로 말하면 그럴 듯하지만, 이탈리아 어로 타이틀을 붙일 수도 없고요. 그래서 결국은 처음으로 되돌아와서 <노르웨이의 숲>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 각해도 이것밖에는 없었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손쇱게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생 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나의 경우, 타이트롤 고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 것만은 고생했습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때와 같은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1984년 2월호)에서 안자이 미즈마루씨와의 대담에서는 이 런 발언을 하고 있다. 하루키: 나는 자주 레코트를 삽니다. 레코드라도 재킷을 봅니다. 그래서 소설 이나 책 같은 것도 표지가 좋으면 상당히 많이 팔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습 니다. 그래서 표지에는 신경을 씁니다. 미즈마루: 음, 그런 영향동 꽤 있겠지요. 하루키: 내용(문장)이 좋다는 자신이 있으면 그다지 상관없겠지만요. 역시 표 지의 도움을 받으려는 마음이 상당히 있으니까요. 지금은 그러한 책을 즐기는 측면이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레코도도 알맹이는 별로 뛰어나지 않아도 재킷이 좋아서 끔찍이 아끼고 있는 것도 상당히 있구요. 그런 것이 별도로 있어 도 좋습니다. 미즈마루: 그래요, 계속 꺼내 보고 싶은 레코드 재킷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하루키: 나는 그래서 책을 만들 때는 상당히 많은 주문을 합니다. 글자의 크기 서부터 활자, 종이 색깔, 체재,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주문 을 하지만 최후의 자질구레한 부분은 전부 출판사 사람들이 하지요. 그런 것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적당히 해버리는 부분이 상당히 많으니까요. 엄격한 전문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수공업적으로요. 그런 것이 상당한 갭이라고 생각합 니다. <중국행 화물선>의 경우는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배치도, 글자의 크기도, 띠지를 붙이는 법 하나라도 내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짜증이 납니다. 이렇게 보면 무라카미는 <노르웨이의 숲> 이전부터 책의 장정고 같은 디자인 적인 면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밖에도 이 대담에서는, ...생활 속에서 그림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는 것이 모두 똑 같이 좋았었으요, 20대를 통해서 줄곧 말입니다 라는 발언도 행해지고 있다. 작품 속에는 그다지 나오지 않지만, 무라카미는 책이나 음악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그림까지도 역시 '줄곧' 좋아했던 것이다. 6.<댄스 댄스 댄스>(1988년작) 작품론 대강의 줄거리와 작품의 성격 이 장편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 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등 3부작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서, 제목은 비치보이스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다. 시대 배경은 1983년, 주인공인 '나'는 서른세 살이며 이혼 경력이 있고, PR 잡 지 등에 글을 기고하며 생계를 꾸려 가고 있는 프리라이터이다. '나'는 옛날부터 마음에 걸렸던 무엇인가를 해결하기 위해 홋카이도의 삿포로로 여행을 떠난다. 삿포로에 도착한 나는 '이루카 호텔'을 찾아간다. 그곳은 4년 전에 여자 친구 인 키키와 찾아간 적이 있는 작은 호텔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져 버리고 눈앞에 는 26층짜리 초현대식 건물인 '돌핀 호텔'이 세워져 있다. '나'는 그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 프런트 담당자인 유미요시라는 이름의 여성 을 만난다. 그녀는 호텔의 요정 같은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나'는 그녀을 알게 됨으로써, 인생에 있어서 잃어 가고 있던 정신적 고양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 른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그녀가 이 호텔의 어둠 속에서 겪었던 체험을 들려 주자, '나'는 호텔 속에 물 리적인 것과는 별개의 공간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곳을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 서 '나'는 '양 사나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오랜만에 그와 재회하게 된 '나'는, '양 사나이'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제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되어 버렸고, 또 어디에도 갈 수 가 없다. 무엇을 추구하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라고. 그러자 '양 사나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돌고래 호텔'에 포함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고 여기서 끝난다. '당신'은 이곳과 이어져 있다. '나'의 역할은, '당신'이 구하고 손에 넣은 것을, 배전반처럼 이어 주는 것이다. 이 호텔은 그것을 이어 주고 연결시켜 주는 곳이다. 잘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당신'을 위해 연결시켜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다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춤을 추는 일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되도록 능숙하게 춤을 추는 일이다, 라고. 그리고 '나'는 이 호텔에서 열세 살의 예쁜 소녀 유키와 만나게 되고, 삿포로 에서 우연히 관람한-'나'의 중학교 시절의 친구인 고혼다가 주연을 하고 있는-영 화 속에서 행방 불명이 된 키키가 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려고, 도쿄에서 호놀룰루까지의 재생을 위한 여 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열쇠가 되는 여러 여성들을 만나게 된다. 유 키의 어머니인 아메, 콜걸 메이, 이전에 삿포로에서 사라져 버린 키키. 그리고 '나'는 삿포로에서 우연히 만난 유키를 도쿄로 데리고 가는데, 영적인 능력을 가 진 이 소녀는, 이야기의 전개상 매우 중요한 역학을 한다. 호놀룰루에서 키키를 뒤쫓아가다가 들어가게 된 어느 빌딩에서 '나'는 여섯 개의 백골과 마주치게 되 고, 그 후 '내' 주위에서 사람들이 잇따라 죽어 간다. 키키를 죽인 사람으, '나'의 친구이며 영화 배우인 고혼다라고 유키가 말해 주어, '나'는 그에게 찾아가 진상 을 추궁한다. 그 후 그는 차를 몰고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유키의 어머니인 아메의 애인이며 외팔이 시인인 딕 노스도 교통 사고로 죽는 다. 여러 가지의 상실과 절망을 극복하고,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삿포로로 떠난 다. 호텔에서 알게 된 유미요시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녀와 자면서 '나'는 다시 마음의 평온을 되찾아 간다. 이 작품의 마지막 대사인 "유미요시, 아침이야"라는 말은 아주 상쾌하고 인상적으로 독자들의 기억에 남는다. 이전의 3부작이 모두 1970년대를 무대로 삼고 있었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그 무대가 1980년대로 이행되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1980년대는 그때까지 통용 되고 있던 가치관이 전혀 제 기능을 하지 않게 된 시대이며, 어디에서도 절대적 인 가치 기준을 발견할 수 없는, 모든게 유동적인 시대이다. 그 속의 '어디'에서 '나'는 새 시대의 도래를 자각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려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거와의 연결 속에서가 아니라, 제각기 서로 연 관이 없는 채로 이동하여 가고 있는 사람들-의미를 찾이 않고, 스텝을 밟으며 계속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속에서 새로운 관계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이어감으로써 생을 뒷받침해 주는 새로운 가치관을 탐색하려 하고 있 는 것 같다. 키키, 유키, 유미요시를 비롯한 주요 등장 인물들은 거의 모두, 처음에는 이름 을 갖지 않은 무명의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다 나중에 하나하나 이름이 붙여져 가는 것도, 그러한 생각의 반영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청순한 소녀 유키와 사 방으로 돌아다니며, 유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고, 또한 유키의 싱그러운 감성에 매료되고 감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고도 자본주의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일하면서도, 스스 로를 제대로 지켜 가고 있는 유미요시 곁에 정착해야 할 현실을 발견하는 것이 다. '1970'년대로부터의 해방 <양을 쫓는 모험>은 권력 기구의 중추를 지배하려고 하는 '양'의 야망을, '쥐' 의 결단(자살)에 의해 이 세상에서 소멸시키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양'의 이야기 는 일단 거기서 끝난 셈이다. 바꿔 말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등의 '쥐 3부작'을 씀으로써, 1970년을 원점으로 하는 자신의 학생 운동과 깊이 관련된 문제와, 그 후의 10년 간을 총결산한 것이다. '양(혁명 사상이나 자기 부정 등의 관념)'에 관한 이야기 는 이때 이미 매듭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왜 <양을 쫓는 모험>을 발표한 지 6년 후에, 다시 '양'에 관한 장편 소설 <댄스 댄스 댄스>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는 가. 무라카미는 이 6년 동안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년), <상실의 시대>(1987년) 등의 두 개의 장편 소설과 단편, 번역, 에세이 등을 발 표하였다. 나는 자주 이루카 호텔의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꿈은 분명히 그러한 계속성을 제시하고 있다. 꿈속에서는 이루카 호텔의 모양이 일그러져 있다. 아주 길쭉한 것이다. 너 무 길쭉하기 때문에, 그것은 호텔이라기보다는 지붕이 딸린 기다란 다리처럼 보 인다. 그 다리는 태고로부터 우주의 종곡에 이르기까지 길쭉하게 이어져 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거기서는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 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호텔 자체가 나를 포함하고 있다. 나는 그 고동 소리나 따스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나는, 꿈속에서는, 그 호텔의 일부 이다. 그러한 꿈이다. 이<댄스 댄스 댄스>의 서두 부분에, 이 장편 소설이 <양을 쫓는 모험>의 속편 임이 명시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이루카(돌고래 ) 호텔'은 <양을 쫓는 모험> 에서는 '돌핀 호텔'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주인공의 '양을 찾는 일'의 중계점이 되기도 한 곳이다. '양 박사'와 만난 장소이고, 또 주인공과 동행하고 있던 '완벽 한 귀를 가진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사라져 버린 장소이기도 하다. 그 '돌고 래 호텔'이 주인공의 꿈속에 자주 등장하고, 더구나 그것은 '태고로부터 우주의 종국에까지 길쭉하게 이어져 있는' 다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 '다리'에 주인공인 '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주인공의 '꿈속'의 의식에 대해 생각할 때, 시사적인 것은 <양을 쫓는 모험>의 마지막(제 9장 에필로그)에 나오는 '양 박사'와 '나'의 대화이다. "모든 게 다 끝났군"하고 양 박사는 말했다. "모든 게 끝났어." "끝났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틀림없이 자네에게 감사해야 할 거야."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냐" 하고 양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이제 살아가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양을 쫓는 모험>의 '나'는 최종적으로 '쥐'가 양을 죽인 것을 확인함으로써, 많은 것을 잃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1970년 전후의 '청춘'과 그 후의 10년이었다고 한다며, '양 박사' 의 "자네는 이제 살아가기 시작하고 있다"는 말은, 바로 '내'가 과거의 환영 (illusion)으로부터 이제 해방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관념(과거)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은 곧 현실에의 귀환이었다. 물론 10여 년 동 안에 걸쳐 한 인간을 완전히 점거하고 있던 관념(과거)이, 하루아침에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 생활로 복귀하는 데는 그 나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사정으로 인해 그때까지 친구와 둘이서 경영하고 있던 사무소를 그만둔 다음, 나는 반년쯤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살아가고 있었다. 무 엇을 할 생각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전해의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서 내겐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중략) 그리고 모든게 끝났을 때, 나는 그때까지 경험한 적이 없으리 만큼 깊은 정적 에 푹 싸여 있었다. 두려울 만큼 농밀한 부재감이 내 방 속을 떠돌고 있었다. 나 는 그 방 속에 반 년 동안 가만히 틀어박혀 있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쇼 핑을 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낮에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는 새 벽녘이면 나는 거리에 나가 목표도 없이 산책을 했다. 사람들이 거리에 모습을 나타낼 무렵이 되면, 방으로 되돌아와 잠을 잤다. 관념(과거)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 현실의 생활도 이전에 번역 사 무소를 공동 경영하고 있던 때의 연줄로 기업 팸플릿, 여성지 등의 짤막한 기사 를 써주는 일을 하는 생활이다. '나'의 말에 의하면, '문화적 눈 치우기' 같은 일 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삭 줍기와동 같은 일이지만,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 최소 한으로 필요한 일인 '문화적인 눈 치우기'를 하는 생활, 이것이 '나'의 현재의 생 활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외관상 보기 좋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세상에 대해 삐딱하게 나가는 듯한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면 서도, 완전히 사회에서 이탈하는게 아니라, <댄스 댄스 댄스>의 주인공처럼 지 적이고 문화적인 일에 관여하는 데 있다. 그들은 결코 공장에서 노동을 하거나 막노동 등에 종사하지 않는다. 기름투성이나 땀투성이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다. 그리고 외관상 보기 좋은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쓰는' 이들의 세계에서 살아 간다. 설령 그것이 '문화적인 눈 치우기'라는 표현처럼 품위 있는 일이 아니더라 도, 지적이고 문화적인 냄새가 나기 때문에 일단은 보기 좋은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삿포로의 '돌고래 호텔'을 찾아가고, 거기서 그때까지 상실되었던 타인과의 관계의 실마리를 발견하여 가는 것은, 착 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주제로 삼고 있는 이 작품에 있어서 필연적인 일이었 다. '돌핀 호텔(돌고해 호텔의 전신)'의 프런트 일을 보고 있는 '유미요시'나, 이혼 한 여성 카메라맨의 열세 살짜리 딸인 '유키' 등과의 만남은, 고독한 생활을 보 내고 있던 '내'가 현실로 내려가는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그 현실에의 하강은, '양 사나이'의 충고처럼 우선 '춤을 추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여섯 구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 '나'는 <양을 쫓는 모험>에서 '쥐'를 잃게 되는데, 그 밖에도 '내' 앞에서 사라 져 버린 유일한 사람은 '완벽한 귀를 가진' 여자 친구이 '키키'이다. '키키'는 '나' 에게 있어 '양을 탐색하는 일'의 길잡이인 동시에 관념(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나'와 현실을 이어 주는 매개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 '키키'가 이<댄스 댄스 댄스>에서는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환영' 으로 등장, '양 사나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현실과 결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 고 있다. 바꿔 말하면, '키키(실체가 아닌 환영)'는 '내'가 관념(과거)에서 현실로 하강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여러 가지 시련에 입회하는 무녀인 셈이다. '내'가 삿포로의 '돌고래 호텔'에 머물게 된 것도, 그곳이<양을 쫓는 모험>에서 '키키'가 마지막으로 사라져 버린 장소이고, 또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된다고 생각 한 때문이었다. '이루카 호텔'로 가는 것이다. 그곳이 출발점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그녀를 만나야 한다. 나를 'ㅇ루카 호텔'로 이끌어 준, 그 고급 매춘부 노릇을 하고 있던 아가씨를. 왜냐하면 '키키'는 지금 내게 그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키키'가 출발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한 번 더 이 방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한 번 나간 사람은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이 방 으로. 그러한 일이 가능한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해보는 수 밖에 없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루카(돌고래) 호텔'에는 당연히 '키키'가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키키' 대 시 '양 사나이'가 등장하여, '나'에게 계속 춤을 추는 일의(즉 타인과의 관련성을 회복하여 가는 일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다. '내'가 '돌고해 호넬'에서 계속 춤을 추는 일의 중요성을 배운 결과, 거기서 비로소 타인과의 관계가 생겨나게 된다. 유명한 여성 카메라맨인 '암'의 열세 살짜리 딸 '유키'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려는 열세 살이지만, ㅈ유 분방한 어머니와 이혼한, 이전에 베스트 셀러 작가 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놀랄 만큼 조속하며, '나'의 연하의 친구로서 관계를 지속해 간다. '나'는 '유키'와 친구가 된 후 함께 하와이로 가게 된다. 하와이에서 남자 친구 와 함께 살면서 일을 하고 있는 '아메'에게 '유키'를 데려다 주는 역할을, '유키'의 아버지로부터 의뢰받았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나'는 유키의 아버지가 선물로 보내 준 매춘부와 하룻밤을 지내게 되는데, 그녀가 '키키'가 소속되어 있던 일본 의 콜걸 조직과 관계가 있음을 알고, '양 사나이'가 말한 것처럼 춤을 추고 있기 만 하면 모든 게 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하와이에서 지내게 된 지 2주일쯤 되어, '나'는 '유키'와 드라이브를 하고 있던 중, '키키'의 모습을 목격한다. '유키'를 차에 남겨 두고 '키키'를 뒤쫓아간 '나'는, '키키'가 사라져 버린 빌딩의 한 방에서 여섯 구의 백골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백골은 '키키'의 '환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환시'로서 씌어져 있 는데, 이 여섯 구의 백골과 '나'와의 만남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백골 의 환시는 주변의 친근한 사람의 '죽음'의 표지로서 의미를 갖는다. 아마도 무라 카미 하루키는 이 <댄스 댄스 댄스>를 구상했을 때, 관념(과거)으로부터 현실로 귀환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인가를(즉 과거를) 죽여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었을 것이다. 즉 '죽음'을 통과 의례로서 거치지 않는 한, 현재를 살아가는 길로 되돌 아올 수 없다는 사상이, 이 소설에는 진하게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양의 세계와 음(죽음)의 세계의 평 행선을 그려 내고 있던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있어, '죽음'을 통과함으로써 현실 의 생에의 확실한 반을을 획득하는 일은, 이미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때 라서 '내'가 하와이 도심에 있는 빌딩의 한 방에서 발견한 여섯 구의 사체는, '내' 가 관념(과거)을 죽임으로써 재생한다는 주에와 깊이 관련된 장치였던 것이다. '키키(환영)'는 그것을 '나'에게 알려 주기 위해 하와이의 도심에 출현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관념(과거)을 죽이는 것을 상징하는 여섯 구의 백골은, 구 체적으로 누구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 이야기 속에서 명확히 죽음을 맞는 사람은, '아메'의 연인이며 베트남 전쟁 에 참가하여 한쪽 팔을 잃은 시인 '딕 노스', 그리고 '키키'와 같은 콜걸 조직에 속해 있고 '나'도 몇 번인가 잔 적이 있는 '메이', 그리고 '고혼다' 등의 세명이다. 딕 노스는 교통 사고로 죽고, 메이는 고혼다로부터 살해당하고, 고혼다는 자살을 하는데, 아무튼 이 세 사람의 명확한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베트남 전쟁에 참 가했던 딕 노스나 중학교 시절의 동급생 고혼다의 '죽음'이 상징하는 것처럼, 분 명히 '과거'와의 결별이다. 일련의 '쥐'이야기의 하나로서 <댄스 댄스 댄스>를 읽는다고 한다면, <양을 쫓는 모험>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살한 '쥐'와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키 키(환영)'도, 여섯 구의 백골 중 두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쥐'나 '키키'도 '나'의 '과거'와 깊이 관련되어 있던 인물이므로, '죽음'으 ㅣ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겨진 마지막 한 구의 백골은 누구의 것인가. 이 이야기에서는 이 점에 대해 명확히 씌어져 있지 않다. 다만 고혼다의 자살에 의해 춤추는 일이 일단 끝난 '내'가, 마지막으로 '돌핀 호텔'의 프런트 일을 보고 있는 유미요시와 생활을 함께 할 결심을 하고 삿포로로 향했음을 생각해 보면, 남겨진 마지막 한 구의 백골은 '과거'에 얽매여 있던 '나' 자신이었으리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즉<댄스 댄스 댄스>의 주제가 주인공의 '과거'로부터의 '현재'로의 귀환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와 유미요시와의 그 후의 생활은 '나'의 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마지막 백골은 분명히 과거의 '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관계가 있던 인물의 연이은 '죽음'과 만남으로써 스스로의 '재 생'을 도모한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씌어져 있다. 이는 고혼다와의 교유 및 고혼다의 살인에서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생각 보면 납득이 간다. '나' 와 고혼다의 관계는, '내'가 고혼다가 출연하고 있던 영화에 단역으로 나오는 '키 키'를 발견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 꽃을 피우거나, 때로 는 고혼다가 특별히 그 내부를 잘 알고 있는 콜걸 조직-여기에 '키키'와 메이가 속해 있었다.-의 여자를 데리고 자는 정도의 사이로, 예전부터 특별히 깊은 관계 를 유지해 오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 고혼다가, '내'가 계속 춤을 추고 있는 데로 뛰어들어와서 '죽음'을 연출하 고, 그리고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고혼다가 차를 몰고 바다로 뛰어들어 죽 는 것은, '과거(관념, illusioni)의 멍레로부터 행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혼다가 자신이 '키키'를 죽인 것을 고백하는 장명이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어.(...중략) 왜 내가 그녀를 죽여야 하나? 하지만 죽였다구, 이 손으로. 살의는 없었어. 나는 내 자신의 그림자를 죽이는 것처럼 그녀의 목을 졸라 죽였어. 나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동안, 이것이 내 그림자라고 생각하 고 있었지. 이 그림자를 죽이면 나는 잘되어 가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거야. 하 지만 그것은 내 그림자가 아니었어. 키키였지. 그것은 어둠의 세계에서 일어났 어. 여기와는 다른 세계야, 알겠나? 여기가 아니라구. 그리고 키키가 유혹했어. 내 목을 조르라고 키키가 말했어. 좋아요, 목을 졸라 죽여요, 라고 말야. 그녀는 나를 유혹하고, 나늘 용서한 거야. 거짓말이 아냐. 정 말로 그랬다구.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 그러한 일이 왜 일어나는 걸까? 모든 게 꿈 속의 일같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현실이 용해되어 가는 거야. 왜 키키가 나 를 유혹했지?왜 나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했지? 고혼다는 연기를 하는 자신과 근원적인 자신 사이의 공백을 메울 길이 없었기 때문에 살인을 했다고도 말한다. '나'는 고혼다를 잃은 다음에, 이렇게 말하고 있 다. 메이의 죽음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은 낡은 꿈의 죽음과, 그 상실감이었다. 딕 노스의 죽음은 나에게 일종의 체념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고혼다의 죽음이 가져다 준 것은 출구가 없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 속에 갇혀 버린 것 같은 절 망감이었다. '상실감'과 '절망' 등을 뚫고 나갔을 때, 사람들은 자기를 다시금 회복할 수 있 다. '내'가 삿포로로 유미요시를 찾아가서 '나는 여기(현실)에 머무르겠다'고 결심 하고, '죽음' 즉, '과거(관념)'의 멍에로부터 완전히 이탈할 수 있었던 것도, '죽음' 보다는 '생'을 긍정하는 작가의 강인한 사상이 거기에 살아있었기 때문이라고 보 아야 할 것이다. 7.<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1992년작) 작품론 대강의 줄거리와 작품의 성격 <댄스 댄스 댄스> 이후 4년 만에 발표된 이 작품은, 발표가 되자마자 다른 작품에 대한 그때까지의 높은 평가와는 달리, 심한 비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서른일곱 살의 주인공 '나(히지메)'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아무런 불만도 없 이 순조롭게 생활한다. 또한 직접 경영하는 두 곳으 lwowm 바도 잘 운영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재즈 바가 잡지에 실린 것이 계기가 되어, 초등 학교 시절의 동 급생인 '시마코토'라는 여자가 '나'를 찾아오게 된다. 25년 만의 재회. 그녀는 어렸을 때 절던 왼쪽 다리를 수술하고, 완벽한 아름다 움을 지닌 채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그녀의 '흡인력'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버릴 결심을 한다. 하코네의 별장에서 '나'를 벌거벗겨 놓고, 페니스를 입에 물고 자위하는 그녀 의 눈동자에서 '나'는 죽음의 광경을 들여다 보며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내'가 잠든 사이에 사라져 버리고 할 수 없이 도쿄로 돌아온 '나'는 아내 에게 모든 것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살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는, 다시 한 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무라카미는 이 작품에서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후로 일관되게 고 집해 온 1970년대를 떠나,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지 금 변해 가고 있는 자신'이며, '마음이 밖을 향해서 열리기' 시작한 '징조'인 것이 다. 이 작품은 '중년 남자'의 현재의 '연애 이야기'이다. '시마모토'를 만나기 전까지 만 해도, 평이했던 '나'의 생활이 아래와 같이 묘사되고 있다. 타인이 보기에,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생처럼 보였다. 나는 열의를 갖 고 일을 하고 있었고, 그 일은 꽤 높은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아오야마에 나의 맨션이 있고, 하코네의 산속에 작은 별장이 있으며, BMW와 지프(체로키)를 갖 고 있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두 딸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인생에서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아내와 딸들이 내게로 와서 자신들은 더 좋은 아내와 딸이 되어 나한테 서 더 사랑을 받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주면 좋겠는냐고 고개를 숙여 말 한다고 해도,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으리라. 나는 그녀들에게 정말로 무엇 하나 불만이 없었던 것이다. 가정 생활에도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더 이상 쾌적한 생활을 나로선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러한 성공한-어디에나 있을 법한- '중년 남자'의 '더할 나위 없는 인생'에 갑 자기 나타난, 어린 시절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시마모토'라는 여자. 두 사람은 마치 25년 동안의 공백을 메우려는 것처럼 사랑에 빠지고, 서로 격렬히 사랑하 게 되며, 주인공인 하지메는 그녀를 위해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을 버리려고까지 한다. 이 소설은 환상(illusion)이 되어 버린 '시마모토'가, 불완전한 현실 세계에 머 물러 있는 '하지메'를 그녀의 완전한 세계로 이끌어, 생의 리얼리티를 제거해 가 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즉, '시마모토'와 '하지메'의 관계는, 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의 관계이며, 완전한 것은 오직 환상(illusion)일 수밖에 없다. '시마모토'는 이 소설 속에서 마성의 여자(femme fatale)의 정형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하지메' 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문자 그대로 '죽음'의 심연을 느낀다. 보편적인 연애 소설의 패턴 즉, 연애의 대상의 환영(illusion)으로 묘사되는 전 형적인 틀을 갖추고 있는 이 작품 속의 '시마모토'는 이 환영을 완벽하게 재현해 보인다. '하지메'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의 환영을 쫓아가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집필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주간문춘>,1992년 12월호).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지금 변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는 변했고, 마음의 문을 점점 외부를 향애 열어 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의 단계로서-어떤 의미에 서는 나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이 소설을 쓰는 것이 나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변화'는 어떤 것이었는가. 우선 그 첫 번째 변하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후로 줄곧 집착해 온 '1970년'으로부터 벗어난 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무 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청춘을 지내 온 1970년 전후를 '동결'함으로써, 그 시대 를 출발점으로 한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를테면 '포식의 시대'였던 80년대 풍 속의 한가운데에서, 아직 '가난함'이 남 아 있던 1970년 전후의 '순애'를 묘사한 <상실의 시대>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무라카미의 '밖을 향해 마음을 여는' 변화는, 그의 번역서 <뉴클리어 에이지(The Nuclear Age, 한국판 제목으로는 <그래도 살고 싶다>)>(89년)를 번역한 직후부 터 씌어진 단편들을 모은 (90년)에 이미 나타나 있다. 무라카미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불안감이나 위기감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 려서 표현한 이 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변화'가 일시적인 생각이 아 니라, 앞으로의 명확한 방향성임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 <국경의 남쪽, 태 양의 서쪽>은,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가 확실하게 '변화(현실에의 착지)'했음을 보여 준 장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번째 변화가, '1970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현재'라 는 시간에 착지한 것이라면, '타인이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인생처럼 보이는' 생활에도 어떤 위기가 존재한다는 주제를 선택한 것이 그의 제2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을 보내고 있는 일상 속에서 생겨나는 '죄 악'이나 '허무'에,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변화'된 그의 커 다란 주제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수용, 이화, 재구축 무라카미가 <댄스 댄스 댄스>를 발표하고 나서, 이 소설을 발표하기까지에는 많은 공백 기간이 있었다. 또한 이 시기-1988년부터 1992년까지의 4년 동안-의 세계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소련과 동류럽 사회주의의 붕괴, 걸프 전쟁 등, 이러한 격렬한 변화는 작가들의 내면에 유형 무형의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무라카미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아사히 신문>의 인터뷰 기사(1989년 5월)에 명확히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무라카미는 "사회적인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언젠가는 찾아옵니다. 전공투 경험자라고 할까, 우리 세대가 다시 한 번 그러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때까 지 우리들은 우리들의 가치관을 일단 해체해서 새롭게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해체화 확립의 필요성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나온 잡지 <유레카> 특집호(1989년 6월)에서 우리는, 그 가 왜 문학의 테마를 바꿨는가에 대해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발언을 찾을 수 있다. "우리들은 이제 공동 투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개개인의 자기 내 면에서의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여간 다시 한 번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자신을 이화시키느냐, 어떤 가치관을 만들 어 가느냐, 마치 <양을 쫓는 모험>에게 '쥐'가 '양'을 삼킨 것처럼 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삼켜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곳에는 공동 투쟁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은 무라카미 문학의 본질을 얘기해 주고 있다. 무라카미는 '수용, 이화, 재구축'이라는 작업을, 개개인이 자신의 내면 속에서 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무라키미는 90년대에 전략적인 전환을 도모했다. 물론 그의 문제 의식이, 앞에 서 말한 것 같은 '수용, 이화, 재구축' 중의 이화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분 명하며, 이 '이화'를 고찰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무라카미는 이 작품 속에서 다수의 독자가 읽기 쉽게, 소설의 세계 속으로 자 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그곳에 '이화'와 '재구축'의 테마를 은 밀히 집어 넣는 비범함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이란 본래 알기 쉬워야만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는 무라카미의 완고하기까지 한 신념을 그곳에서 엿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조용한 일상과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잃어 왔다. 그리고 해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그 상실감은 깊어만 갈 뿐이다. 그 상실감을 무라카미가 절묘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본래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 라>는 '상신한 것들을 위해 씌어진' 이야기였으며, 그 뒤의 장편들은 그 '상실한 것'을 '찾고, 발견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 작품 속의 '나'는 잃은 것을 열거하거나 찾으려 하지 않는 다. 다만 한 여자를 만남으로써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상실할 뿐이다. "나라는 인간에게는 무엇인가가 크게 결락되어 있다.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언제나 굶주리고 메말라 있다."고 하는 '나'의 인식은, 이 작품 이 '불륜'을 다룬 단순한 흥미 거리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시마모토'를 매개로 해서 그때까지 만족하며 살고 있던 '나' 자신에게 무엇인 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묻는 것 이다. 나의 아이덴티티의 탐색은 현시점을 서른여섯 살(이야기 속에서는 서른일곱 살로 진행되지만)로 하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장 첫머리는, '내가 태어 난 것은 1951년 1월 4일이다'로 시작된다. '나'는 성장 과정을 얘기한 뒤, '내'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외아들이라는 것에 집착했는지를 얘기한다. '외아들'이란 본질적으로 누구하고도 마음을 통할 수 없는, 자폐적인 정신 세계엥 갇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 계속 혼자 살아왔으나, 외부로부터 그 껍질을 깨는 타인이 나타나, 그 사 람의 흡인력에 의해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게 되고, 마음의 교류가 끝나자 그 사 람은 사라져 버린다. 섹스도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면, '시마모코'와 '내'가 하룻밤은 지낸 하코네 별장에서의 일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로서, '외아들'은 '시마모토'라는 여 성에 의해서 자신을 허물지만 곧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자전한 지구처럼 다시 원래 위치로 회귀한 것 뿐이다. 그럼 왜 무라카미는 이와 같은 '엇갈미'과 '위화' 그리고 '흔들림'을 작품 속에 도입한 것일까? 주인공의 일상을 '시마모토'의 출현으로 흔들어 본 것일까? 따라 서, 이 작품은 '시마모토'를 푸는 것이 키 포인트일 것이다. '시마모토'는 누구인가? '나'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시마모토'는 초등 학교 5학년 때, '나'의 반으로 전학해 혼, 왼쪽 다리를 절고 있었지만 미인 타입의 소녀였다. 그러나 중 학교에 입학하자, '나'의 집이 이사를 하게 되었고, 마침 서로가 이성으로 느껴져 사이가 멀이지게 되었다. 후에 '시마모토'도 이사를 가게 되어, 그 소식을 엽서에 적어 '나'에게 전했지만, '나'는 받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서 하나의 '엇갈림'이 생긴다. 두 번째 엇갈림은 '내'가 스물여덟 살 때, 우 연히 시부야의 혼잡한 거리에서 '시마모토와 비슷한 여성'을 보았을 때 일어난 다. '나'는 값비싼 옷을 입은 그 여성을 미행해서 확인하려 하지만, '내' 앞에 어 떤 중년 남자가 나타나 그 여성에게 관심을 갖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세 번재는 4월 중순에, '내'가 경영하는 재즈 바로 찾아온 시마모토가 짧은 메 시지를 보내고 사라진다. 네 번째는 최후의 클라이맥스 장면이다. 하룻밤을 함께 지내고, 다음날 아침 잠을 깨니 그녀는 자취를 감춰 버림으로써, 또다시 그녀와의 애달픈 '엇갈림'이 생겨난다. 이처럼 어긋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시마모토'에 의해서 벌어지는데, '시마모토'는 무라카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샤면의 요소를 지닌 여성이 라 볼 수 있다. 무라카미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샤면적 요소를 지닌 여자들은 때 로는 '쌍둥이 208과 209'이거나, '핑크ㅍ 원피스의 여자'이거나, '귀 모델이며 고 급 콜걸인 키키'이거나, 병든 '나오코'이다. 재생의 근거 앞에서 인용한 무라카미의 <유레카> 잡지의 인터뷰는 바로 1990년대의 우리 들, 즉 무라카미와 그 동시대인들에게 제시되고-즉 언급된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이화시키며, 어떻게 가치관을 확립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있는 사항이다. 무라카미는 '수용, 이회, 재구축'을 자신의 문학에 부과하고 있으며, 이 <국경 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야말로, 그 중 '이화'의 부분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작품 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태엽 감는 새>를 집 필하던 중에 어쩔 수 없이 독립된 두 개의 장이 만들어져서, 그것을 별도로 보 충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즉, <태엽 감는 새>를 중단하 고서라도, '꼭 쓰고 싶었던' 이 작품을 쓴 것은, 실은 '이화'를 강조해 두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90년대가 무라카미에게 있어서, '자기 회복'의 시대인 것처럼, 우리들에게 있어 서도 재생의 시대인 것이다. 그 재생의 근거를 무라카미는 이 작품에서 '시마모 토'라는 과거의 인간, 이계의 여성을 출현시킴으로써 우리들에게 알려 주고 있 다. 21세기를 앞둔 1990년대에는, 사회 변화가 더욱더 극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변화하고, 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인가 를 이 작품은 진지하게 생각게 한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사고와 행동으로, 이 곤란한 시대를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고단한 길을 걸을 것을 '시마모토'는 우 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8.<태엽 감는 새(원제:태엽 감는 새 크로니클)>(1994년작) 작품론 대강의 줄거리와 작품의 성격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들 가운데 최고의 수준을 보여 주었다 는 평가를 받은 작품으로서, 하드보일드풍의-물이 없는 우물과도 같은-터치와 작가의 정교한 필력에 의해, 독자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 어 간다. 화자인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고양이 일로 아내 구미코로부터 영매인 가노 마루타와 만나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녀는 '내'게 이제부터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아내는 "당신 기억에는 분명 뭔가 사각 지대 같 은 곳이 있어요"하는 말을 남기고 실종해 버린다. '나'는 꿈속에서 마루타의 동생 구레타와 성교를 하는데, 그 후 마루타가 예언 한 대로 기묘한 사건이 계속 일어난다. 그리고 그 사건들에는 아내 구미코의 오 빠인, 와타야 노보루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느 날, '나'는 옛날에 고양이를 찾을 때 발견했던 '우물'로 들어가 이상한 체 험을 하게 된다. 그곳은 호텔 208호실이었고, 그 어두운 방 안에 있던 여자가 "내 이름을 생각해내 달라"는 기이한 말을 한다. 잠시 후 인기척을 느끼고는 그 녀가 인도하는 대로 '거대한 젤리와 같은' 벽을 뚫고 들어간다. 벽 안에서 참을 수 없는 사정의 욕망을 느낀 후 눈을 떠보니, '나'는 벽의 이족, 즉 '우물' 밑바닥 에 있었다. 그 이후, '나'의 내부에서 얼어붙었던 것이 녹기 시작한다. 구미코가 '나'에게 구원을 청하고, '나'는, "좋은 소식은 조그만 소리로 말해지는 것입니다" 하고 말 한 마루타의 말을 떠올리며 귀를 기울인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 목소리가 되지 않는 목소리로, 말이 되지 않는 말로." '나'는 고양이 찾는 일에서 아내 구미코를 찾는 일로 돌아서게 되고, 아내의 오빠 와타야 노보루를 비롯한 그녀의 식구들은 나에게 구미코와의 이혼을 종용 한다. 한편 '나'는 우물 속에서 반점을 얻는데, 그 푸른 반점은 나중에 신비한 치유 력, 초자연적 힘을 갖게 된다. 우물에 대해 뭔가 마음에 걸리게 된 '나'는 우물이 있는 그 빈집을 사기로 하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카사카 너트메그, 시나몬 모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나'는 와타야 노보루의 심부름꾼인 우시카와라는 사람 의 도움으로 아내와 컴퓨터 통신으로 대화하게 되는데, 서로에 대해 이해하진 못한 채 통신은 끊긴다. 오랫동안 '나'의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가사하라 메이로부터 편지가 도착하 고, 집을 나간 고양이도 돌아오지만, 아내 구미코와는 연락할 길이 없다. 우물에서 야구방망이를 잃어버린 '나'는 그것과 같은 방망이로 누군가가 와타 야 노보루를 공격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오빠를 죽이겠다는 구미코의 편지를 받는다. 오랜만에 가사하라 메이를 만난 '나'는 감옥에 있는 구미코의 소식을 전하고 그녀를 배웅하면서 마음속으로 작별의 인사를 한다. 예측 불능성으로 가득찬 기묘한 세계 예측 불능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 '나', 열여섯 살의 소녀 가사하라 메이 는 '나'를 이렇게 평한다. "당신 자신은 아주 정상적인데, 실제로는 정상적이 아 닌 일을 하고 있고, 그리고 뭐라고 할까요. 음, 예측을 할 수가 없네요." 그리고 2권에서 '나'는 가사하라 메이에게 결정적인 말을 한다. "나는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라고.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는 가사하라 메이에게 결정적인 말을 한다. "나는 선택 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라고.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는 주체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에 예측 불능의 요인이 있다. 그러나 예측 불능인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내' 주위의 여자들-가사하라 메 이를 비롯하여, 포르노 전화를 거어 오는 수수께끼의 여자, 예지 능력을 갖고 있 는 가노 마루타, 그녀의 여동생이며 영매인 구레타, 아내 구미코 등은, '나'보다 더 예측할 수 없다. 아내의 실종도 절대적인 예측 불능의 사태이며, 그녀의 대역인 것처럼 잇따라 나타나는 여자들의 출현이나 소멸도 예측 불능이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나'도, 일체의 합리적인 예측을 단념하고, 예지나 예언 비슷한 말밖에는 사용할 수가 없다. 이리하여 저주와 불길한 소식 등으로 이루어지는 소설이 생겨나는데, 이는 오늘날의 정보 사회의 불확실한 구조에 대응하고 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댄스 댄스 댄스>에 이어, 하루키는 여 기서도 '벽을 뚫고 나가는' 장면을 묘ㅅ다. 그리고 우물 속에서 '나'는 꿈을 꾼다. 그 꿈에 포르노 전화를 거어 왔던 여자가 등장하고, 그녀에게 이끌려 벽을 뚫고 나간다. 이러한 현실과 비현실이 어울리는 세계를 묘사하는 작가의 필력은 너무 나 절묘하다. 꿈속에서 '나'와 섹스를 하고, 생시에서도 '나'의 꿈 이야기를 하며 '나'와 어울 리는 구레타는, 비현실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점프하여 온 여자이다. '나'는 꿈결에 사정한다. 사실 누구나 사정할 때는 여성을 비현실화시킨다고 한다. 무라카미는 이 작품 속에서 여성의 비현실적인 본질을 파고들고, 그것을 '우 물'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여성의 성욕을 철저히 파헤친 데 있다. 갑자기 성욕을 느껴 다른 남자와 쾌락에 잠기는 아내 구미코, "내 몸 속의 태 엽은 모조리 풀어져 떨어져 나가 버렸다"고 말하는 구레타, 그녀들 속에서는 혼 란스러운 카오스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태엽 감는 새'라고 불리는 '나'는, 여성들의 예측 불능성을 그대로 체현한 여성 적 존재로서, 소프트하고 반응이 없는 여성 세계의 '풀어져 떨어져 나가 버린' 태엽을 감는다. 그러나 아무리 돌려, 그 태엽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고 만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단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상실의 시대>가 단편 <개똥벌레>를 각각 핵으로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장편 소설도,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이 그 원형이다. 이은 하루키 작품의 '미완'의 성격을-그 '태엽'의 끊임없는 회전을-잘 말해 주고 있다. 미완선인 것의 보완과 거기에 이어져 가는 단편의 집적. 그 집적을 통해 하루 키의 장편 소설이 생성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기묘한 태엽니다. 세계에 대해 서는 그 해체에 도움을 주고, 소설에 대해서는 그 구축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태엽 감는 새'의 정체는? '우리들이 속하는 조용한 세계의 태엽을 감는다'고 하는, '태엽 감는 새'의 정체 는 과연 무엇이며, 그곳에는 어떤 우의가 담겨 있고, 또 영매인 가노 마루타와 그녀의 동생 구레타는 어떤 인물이냐, 하는 것 등에 이 소설을 푸는 실마리가 있다. 그처럼 이 소설은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부르는 중층적인 장치로 되어 있어서,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 가게 된다. 무라카미 자신이 지금까지의 작품 중에서 '제일 긴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예 고했던 <태엽 감는 새>는, 그의 90년대의 대작으로서, 이른바 그의 문학에 있어 서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이다. (제1부 '작은 삶 큰 의미', 제2부 '욕망의 뿌리', 제3부 '나는 누구인가', 제4부 '사람은 누구나 태엽 감는 새'등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태엽 감는 새>의 내레이터는 물론 주인공인 '나', 오카다 도루이다. 이야기는 '내'가 만난 사소한 사건을 둘러싸고 한없이 전개되고, 몇 가지 얘기가 중층적, 복합적으로 뒤엉켜 있다. 여기서는 그 중층적인 층들을, 인물들을 둘러싼 에피소 드를 중심으로 하나씩 해체, 정리,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보기로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수수께끼의 여인 제1부의 도입부에서 '나'에게 어떤 정체 불명의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그녀는 십 분만 얘기하자고 하는데, '나'는 스파게티를 삶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 한다. 그날 오후에 두 번째 전화가 다시 걸려 온다. 그 여자는 십 분만 있으면 서로 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점점 텔레폰 섹스 같은 양상을 띠게 되고, '나'는 전화를 끊어 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11장에서) 전화를 걸어 와 따뜻 한 흙탕물 속에 누워있듯이 속을 비우라고 '내'게 말한다. 여기에서 무라카미 작품의 모티프 중의 하나인, '전화'라는 현대적인 도구가 등장한다. 무라카미의 작품에서 전화는 매우 중요한 위치르 차지하고 있으며, 직 접 대화가 불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현대를 상징하고 있다. 이 수수께끼의 여인을 둘러싸고 하나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나'의 자문자답은 계속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나'는 그녀를 모르기 때 문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구미코 다음에 전화를 걸어 오는 것은 아내인 구미코이다. 그녀는 자연 식품이나 음 식을 전문으로 하는 잡지 일을 하고 있으며, 부업으로 삽화 일도 하고 있다. '나' 와 구미코는 결혼한 지 6년이 되는데, 친척 집을 빌려서 세타가야에 살고 있다. '나'는 현재 서른 살이며 구미코는 스물여덟 살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것은, '고양이 찾기'이다. 아내 구미코가 귀여워하던, '와타야 노보루'라느-그녀의 오빠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이름의 고양이로, 1주일 전부터 없어졌던 것이다. '나'는 아내의 부탁을 받고 고양이를 찾으러 집 바로 근처의 '골목'으로 나가고, 그곳에서 가사하라 메이라는 여자 아이를 만난 다. 이 작품의 모든 이야기는 '고양이 찾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고양이를 찾지 못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가노 마루타'라는 영매를 알게 된다. 결국 '고양이 찾기'는 세 명의 여자를 끌어들이고, 수수께끼는 더욱더 깊어 진다. 세 번째 에피소드:가사하라 메이 제1부의 도입부에서 '내'가 만난 여자 아이. 그녀는 이웃에 살고 있는 고교 1 학년생으로, 교통 사고로 인해 오른발을 약간 전다. 그녀는 매우 고독한 인물로, 아무도 없는 뜰에서 휠체어에 앉아 라디오 카세트를 듣거나, 남성 대상의 월간 지를 읽거나, 무엇인가를 기다리거나 한다. 그리고 그녀는 일광욕을 하면서 '나'의 질문을 가로막고 일방적으로 얘기한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나 네 개의 유방'에 대해서, 혹은 '죽음의 덩어리 같은 것을 메스로 절개해 보고 싶다'는 식이다. 그녀는 '내'가 졸고 있는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다음에 그녀가 등장하는 것은 '내'가 다시 '고양이를 찾으러 갔을 때(제5장)이다. 그녀는 빈 집에 들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멀리서 관찰하고는 '나'에게 '태엽 감는 새'라는 별명을 붙여 준다. 그리고 메이는 '나'에게 '우물'을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다. 도대체 '나'를 그런 어두운 세계로 유인하려고 하는 그녀는 누 구인가? 수수께끼 같은 전화의 여인, '고양이 찾기'를 의뢰한 비밀스런 아내, 그 리고 말라 버린 우물을 보여 주는 가사하라 메이. '나'는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느끼고 있다. 날지 못하는 새, 물이 없는 우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출구가 없는 골목, 그리 고... 무엇인가가 시작되는 예감이 들고, 소녀와 성숙한 여인 사이에 있는 것 같은 가사하라 메이가 그것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그녀는 제1부의 9장에 서 다시 나타난다. '나'를 가발 상표를 조사하는 아르바이트로 끌어들인다. 그리 고 '내'게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한다. "태엽 감는 새님, 이따금 나는 생각하는데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조금씩 죽어 가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나는 그 질문의 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손잡이를 잡은 채 자세를 바꾸 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천천히 조금씩 죽어 간다니?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데?" "예를 들면요... 어딘가 어두운 곳에 혼자 갇혀 있으면서,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이 조금씩, 조금씩 죽어 가는 경우 말예요." "그건 확실히 힘들고 괴롭겠지" 하고 나는 말했다. "될 수 있으면,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태엽 감는 새님. 인생이란 애초에 그런 것이 아닐까요? 모두들 어딘 가 어두운 곳에 갇혀서, 먹을 것이나 물을 압수당하고, 조금씩 천천히 죽어 가는 것 아닐까요?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는 웃었다. "너는 네 나이치고는 이따금 엄청나게 염세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구나." 이것은 그녀의 삶에 대한 위화감을 그야말로 염세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날지 못하는 새. 물이 없는 우물, 출구가 없는 골목.'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사물들에게 '나'의 시선이 내려간다. 네 번째 에피소드: 가노 마루타와 구레타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미인 자매, 가노 마루타와 구레타이다. 우선 먼저 나 타나는 것은 언니인 마루타 쪽. '내'가 점심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까(이번에는 샌 드위치), 또다시 전화 벨이 울린다. 역시 모르는 여자에게서였고, 그녀는 '나'와 아내와 아내의 오빠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는 전화를 끊 어 버린다. 어정쩡한 기분으로 점심을 먹고 나자, 이번에는 아내로부터 전화가 온다. 아내 는 '내'게 가노라는 여자가 고양이 때문에 전화를 걸어 올 테니까, 오늘이라도 만나라고 부탁한다. 2시 반쯤에 다시 가노 마루타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고, 나는 그녀와 만날 것 을 약속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는 명함을 내놓으며, 자기 이름 의 유래와 직업에 대해서 얘기한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른 채, 그녀의 얘 기를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진해서 그녀의 동생, 가노 구레타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동생은 나보다 다섯 살 아래예요. 그리고 동생은 와타야 노보루 씨에게 강간 을 당했어요. 폭력적으로 범한 거구요. 지난주 화요일의 일이에요." '나'는 깜짝 놀라서,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처남'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일 로 인해 '나'는 다시 미로와 같은 세계로 발들 들여놓고 만다. 마루타는 헤어질 때, "한동안 당신 몸에는 앞으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거예요. 고양이 건은 그 시작에 불과해요." 하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가버린다. 그리고 며칠 뒤에, 이번에는 동생 가노 구레타가 등장한다(제7장과 8장). 가노 구레타는 '몸집이 작고 얌전해 보였으며, 1960년 초의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미인이었다. 그녀는 언니 대신에 '내' 집의 물을 채취하러 왔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것으로 인해 '나의 인생은 점점 더 기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가노 구레타는, 그녀가 안고 있는 어릴 때부터의 육체적 고통, 자살 미수, 창 녀가 된 사연 등을 얘기했는데, '내'가 처남과의 사건을 물으려고 하니까, 돌연 커피를 끓여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마치 유령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그녀는 혹 시 실재 인물이 아닌 것은 아닐까? 수수께끼는 다시 깊어져만 간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 와타야 노보루 와타야 노볼루는 아내의 오빠이다. 그는 가면을 쓴 엘리트이자, 학자이며, 텔 레비전이나 잡지에 자누 나오는 유명인이다. 와타야 노보루에 대한 '나'의 생리 적인 혐오와 비판을 통해서, 일본의 문화인, 인텔리들에 대한 무라카미의 태로를 암시한다. 가노 구레타와 와타야 노보루는 소설이 진전되어 감에 따라서, '나'의 내면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한다. 여섯 번째 에피소드: 혼도 노인과 마미야 중위 '내'가 처음으로 가노 마루타와 만나고 돌아온 날 밤, 아내인 구미코는 고양이 의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하자 몹시 실망한다. 왜냐하면 그 고양이는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주워 온 집 없는 고양이로, 우리들의 결혼 생활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양이 사건은 일련의 사건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마루타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결혼한 후 일 년 가량 접촉이 있었던 '혼다'라고 하는 노인을 떠올린다. 그는 장인이 높이 평가한 '신이 내린' 점쟁이로, '나'와 구미코는 결혼 조건으로 그녀의 부친에게, 한 달에 한 번씩 그 노인의 집에 갈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혼 다 노인과의 교제는 '내'가 장인과 다투고, 또 혼다 노인에 대해 지불하는 돈을 낼 수 없게 되었을 때 끝이 난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 '우리'들은 그의 부 고를 접하는데, 그 부고와 노인의 유품은 노인이 과거 만주에 주둔하고 있을 때 함께 생사를 같이한, 마미야 전직 중위가 전달해 준다. 과연 이들은 또 '나'와 어 떤 관계를 놓이게 될 것인가? 이들의 만주 주둔 당시의 이야기는 이 우화적인 소설 속에서 일종의 기묘한 리얼리즘을 자아내는 효과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일곱 번째 에피소드: 아카사카 너트메그, 시나몬 모자 아카사카 너트메그는 '내'가 신주쿠에 있는 어떤 건물 앞 광장에 앉아 있을 때, '내'게로 접근해 온 중년 여자다. '나'에게 우물이 있는 빈집을 살 수 있도록 돈을 대주며, '나'의 얼굴에 있는 반점의 힘을 이용한다. 그녀의 아들은 아카사카 시나몬은 원래 벙어리가 아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말문을 닫아 버리는 수수 께끼의 인무이다. 그의 컴퓨터에서 나는, '태엽 감는 새 크로니클'이란 프로그램 에 우연히 접속하게 되고, 수수께끼는 더욱 깊어만 간다. 지금까지 우리는 <태엽 감는 새>가 지닌 중층적인 이야기의 세계를, 편의상 열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곱 가지 에피스드로 나누어서 각각 분석해 보았다. 그러면 이제 '태엽 감는 새'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에 답 을 내려 보자. 이 새는 '나'의 집 근처에 날아와서, '마치 태엽을 감듯이 끽끽 하 는, 규칙적인 소리로' 우는 새로서, 구미코가 '태엽 감는 새'라는 이름을 붙여 주 었다. '태엽 감는 새'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공간에 나타나서 마치 태엽을 감는 듯한 소리로 운다. 이 장소는 가로 마루타의 말을 빌리면, '흐름이 소외된 장소' 이다. 가사하라 메이는 '나'를 '태엽 감는 새'라고 부르는데 그녀의 통찰은 정확하다. '내' 주위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무엇인가 모자라거나 빠져 있는 상태에 있고, 그 때문에 본래의 의미가 없는 것만이 존재한다. 무의미한 존재와 무엇인가 모 자라고 빠져 있는 듯한 감각에 의한 지배는 무라카미 문학의 특징이다. 결국, 날 지 못하는 새란, '나'의 상징이고, '태엽 감는 새'는 '나'의 별칭이다. 무의식의 심연 문학평론가 진형준은 <작지만 거대한 사랑의 노래>에서 <태엽 감는 새>에 대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태엽 감는 새>가 상식적으로 얼마나 하찮은 존재들의 하찮은 삶의 모습, 언 제나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까. '오카 다 도루'와 '오카다 구미코'는 그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어느 날 느닷없이 가 출한 구미코르 찾는 오카다의 이야기는 실상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하찮은 이야기의 뒤안에서 작가는 "누군가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진지하게 노력을 거듭하면 상대의 본질에 얼마만큼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에 관하여 그에게 정말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있는 것일까?"라는 이런 의미 심장한 말을 작품의 앞뒤에 던져 놓고 있다. <태엽 감는 새>는 실은 바로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존재,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둘만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이겨 나가야 하는 존재가 진정으로 가 까워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며, 둘이 온전히 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라는 외적인 조건에 대한 자각만으로는 불충분하 고, 내부로부터의 새로운 탄생이 필수 불가결함을 보여 주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간단하게 말해 버린 새로운 탄생의 과정은 물론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이 소설의 진정한 재미는, 그 새로운 탄생의 과정에서 모색되는 삶에 대한 성찰, 오 늘날의 삶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이 건조하고 메마를 상실의 시대에서 그 하찮 은 삶의 새로운 탄생이 지니고 있는 진장한 의미에 대한 성찰 등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편소설 1.<중국행 화물선>(1983년작) <중국행 화물선>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 단편집이다. 표제작 <중국행 화 물선>을 비롯해서 <뉴욕 탄광의 비극>,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가난한 아 줌마 이야기>, <캥거루 통신>, <땅 속의 그녀의 작은 개>, <시드니의 그린 스 트리트> 등이 실려 있다. <중국행 화물선> 주인공인 '내'가 만난 세 명의 중국인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초등 학교 때에 모의 시험 감독관 이었던 중국인 교사와, 대학 2학년 때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알게 된 말이 없는 여대생, 그리고 고교 시절에 알고 지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백과 사전 세일즈맨. 이 세 명의 중국인과 '나'와의 만남, 그리고 영원한 작 별, 그리고 이들과의 만남이 '나'에게는 어쩐지 '여기는 내 자신이 있을 장소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뉴욕 탄광의 비극> 비지스의 노래에서 따온 제목이다. 태풍이 다가오면 동물원을 찾아가는 별난 친구가 있는데, 그는 장례식용 의복이나 신발을 갖고 있었기 때무에, '나'는 누군 가가 죽을 때마다 그에게서 그 옷들을 빌려 사용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주위에서는 장례식이 계속되었지만, 친구는 그 상복을 마련한 이후로 주위에서 아무도 죽지 않는다. 그는 한밤중에 동물원에 갔었던 이야기를 '내'게 한다. 그리 고 밤의 어둠 소에서, 무엇인가가 지면으로 기어올라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 한다. 이야기는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갑자기 탄광으로 반전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모두들 되도록 숨을 쉬지 말아요. 남은 공기가 적으니까" 라는 말 이 들려온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십수년 전에 '나'는 연인과 여행을 떠나기 위해 잔디 깍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 헤어지게 되어, 그 돈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 으므로 일을 그만두려고 마음 먹는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일을 하려고 찾아간 어느 미망인의 집에 가서 '나'는 열심히 잔디를 깍는다. '내'가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본 미망인이, '나'를 그녀의 딸의 방으로 안내호가, 오랫동안 부재중인 듯 한 자신의 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묻는다. 딸의 양복자을 열어 본 '나'는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양복과 속옷을 보고 웬지 슬퍼진다. 그리고 그 딸은 자신이나 타인이 요구하고 있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돌아오는 기에, '나'는 모든게 먼 세계에서 일어난 일처럼 생각되었으며, "당신 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원하고 있겠지만, 나느 당신이 나에게 무엇인가 요구하 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아요" 라고 했던, 헤어진 '그녀'의 말을 떠올린 다. <캥거루 통신> 백화점의 상품 관리과에서 일하는 남자가 손님의 고충이나 불만을 듣고 발송 한 동화 같은 펴지-테이크로 녹음된-이야기. 이 편지는 동물원에서 캥거루를 보 고 있다가 우연히 발송할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것을 '캥거루 통신' 이라고 부른다. 고백적인 내용 속에, '나는 동시에 두 장소에 있고 싶어요'라는 대목이 나온다. <땅 속의 그녀의 작은 개> 사흘 동안 비가 계속 내렸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아침, '나'는 호텔의 식당 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 이때 한 '젊은 여자'가 나타나는데, 나는 이 여자와 호텔 의 도서실에서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눈다. 사실 '나'는 연인과 함께 이곳으로 올 작정이었으나, 그녀와 헤어져 이렇게 혼자 오게 된 것이다. '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가 점점 이상한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하 자, 결국 그녀는 귀여워하던 자신의 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그 개를 마당에 묻었고, 그 후 함께 붇어둔 저금 통장을 다시 파내게 되었는데, 그 때 맡은 지독한 냄새가 지금도 손에 배어들어 있다고 한다. '나'는 그녀와 헤어진 다음에, 방으로 돌아와 헤어진 그녀에게 한 번 더 전화 를 건다. 그러나 신호만 가고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그녀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갑부인 '나'는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라는 거리에서 사립 탐정 사무소를 열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별로 할 일이 없어, 매일 시간이 남아들었다. 이때 양의 모 양을 하고 있는 몸집이 작은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양 사나이' 라고 불 러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용건은 자신의 '귀'를 되찾고 싶다는 거였다. 그의 오 른쪽 귀를 '양 박사'가 떼어 갔다는 것이다. 세계에는 약 3천 명의 양 사나이가 있는데, 귀를 모으고 있느 '양 박사'라는 사람이 양 사나이들을 미워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겨우 '내'가 할 일이 생겼 는데, 결국 '양 박사'도 양 사나이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 그들을 미워하고 있지 는 않음을 알게 되어, 모두 행복해졌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이 단편집의 표제작인 <중국행 화물선>의 마지막 부분에, "상실과 붕괴 다음 에 오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리라"는 마니페스토 (선언) 같은 말이 나온다. 즉 작가는 이 단편들을 통해 모든 붕괴를 확인하고, 모두 사라진 장소에서 혼자 새로운 정신을 구축하려 하지만, 과거나 타인과의 단절과 자각을 통한 새로운 연속에의 갈망은,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속에 가만히 존재하고 있다. 2.<캥거루 구경하기 좋은 날씨>(1983년작) 여기에는 23편의 단편 소설의 수록되어 있는데, 작가는 이 단편들은 'ㅉ은 소 설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확실히 매우 짧은 단편들이지만, 23편의 내용은 모두 풍부하고 재미있다. <캥거루 구경하기 좋은 날씨> 표제작인 이 작품은, 젊은 부부가 동물원으로 캥거루를 구경하러 가는 이야기 를 스케치풍으로 묘사한 것이다. 신문에서 새끼 캥거루가 태어났다는 뉴스를 본 '나'는, 그것을 보기에 알맞은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1개월 후 그날이 오자, 동물원을 찾아간다. 우리 안에는 네 마리의 캥거루, 즉 한 마리의 수컷과 두 마리의 암컷, 그리고 새끼 캥 거루가 있었다. 우리에 기대어 네 마리의 캥거루를 구경하는 젊은 부부, '나'와 나의 아내에게 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은 특별히 행복하거나 불행해 보이지도 않 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특히 젊은 여성의 말을 묘사하는 데 능숙하다는 평가 를 받고 있는데, 이것은 그러한 평판을 실증해 보인 듯한 작품이다. <5월의 해안선> 이것은 이 단편집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나'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1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나'의 고향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무대를 연상시키는, 해변의 작은 도시이다. 그 거리엔 '내'가 12년 전에 사귀었던 연인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다 내음 을 맡으며 그녀에 대한 그리운 생각을 떠올린다. '나'는 거리에서 스포츠 셔츠와 운동화를 산 다음, 호텔로 들어가서 새 셔츠로 갈아입고, 새 신발을 신는다. 그 리고 바다가 손짓하며 부르고 있는 듯한 해안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해인이 매립되어 낡은 방파제가 보기 흉하게 남아 있을 뿐, 방파제 너머로 밀려오는 파도는 전혀 없었다. 다만 콘크리트로 가득 채워진 넓은 황야가 펼쳐져 있고, 그 황야에는 수십 동의 고층 아파트가 거대한 묘표처 럼 늘어서 있었다. "나는 예언한다. 너희는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메우 고, 우물을 메우고, 사자의 영혼 위에 너희가 세운 것은 대체 무엇인가? 콘크리 트와 잡초와 화장터의 굴뚝뿐이잖은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노여운 목소리는, 억제되면서도 강하게 독자의 가슴에 와닿는다. <치즈 케이크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나의 가난> '나'와 '그녀'는 끝이 뾰족하고 기다란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하고 있는, '삼각 지 대'라고 불리는 곳에서 살았었다. 우리가 거기서 사글세를 얻게 된 것은, 월세가 산 이유 때문이었다. 집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철로변이어서 소음이 무척 심했다. 그리고 그 소음은 심야에도 계속되었다. 엉성하게 지어진 집이어서, 여름에는 좋았지만 겨울철엔 추워서 견디기 어려 웠고, 봄이 와야 겨우 숨을 돌렸던 집. '나'는 '가난'이라는 말을 들으면, 젊은 시 절의 그 '삼각 지대'를 떠올린다. <스파게티의 해> '스파게티의 해'인 1971년, '나'는 1년 내내 매일처럼 스파게티를 끓이고 있었 다. 그리고 그것을 혼자서 먹었다.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고 있으면, 누군가가 방 문을 노크하고 들어올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결국 한 사람도 방에 들어오지 않 았다. 그러던 12월의 어느 날 오후, 방에서 멍하니 드러누워 있으려니까,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사람의, 옛날 연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가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귀찮고 까다로운 일을 하기가 싫었으므로 모른다고 대 답하고, 지금 스파게티를 끓이고 있기 때문에 손을 놓을 수가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하고는 슬퍼한다. <거울> 등장 인물들이 모두들 차례로 각자가 체험했던 '무서웠던 이야기'를 한다. '나' 는 딱 한 번, 정말로 무서웠던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고등 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의 야경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내'가 그날의 두 번째 순찰을 시작했을 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본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섬뜩한 느낌이 든 '내'가 자세히 살펴보니, 거기에는 거울이 있었고, 내가 그 거울에 비추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묘한 것을 알아냈다.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는 원래 '거울'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에도 이와 같이 '거울' 이야기가 나온다. <1963, 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1963년의 '이파네마 아가씨'는 1982년인 지금도 여전히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레코드 속에서의 그녀는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들을 때마다 고등 학교 시절의 복도를 생각해낸다. 그리고 그 복도는 컴비네이션 샐러드를 연상시킨다. 또 컴비네이션 샐러드는 예전에 알고 있던 한 아가씨를 연상시킨다. 해변에 드러누워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나'는 '이파네마' 아가씨에게 이봐요, 하고 말을 건다. 그녀를 이따금 지하철 속에서도 만난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도 해변 의 뜨거운 모래 사장을 거닐고 있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 중 가장 긴 작품이다. 그리고 '연속되는 활극 이야기를 읽어 보고 싶다는 아내의 요망에 부응하여 쓰게 되었다'는(작가의 말) 이 작품에 는, 이미 독자들에에 친숙해진 '양 사나이'도 등장한다. '내'가 쥐죽은 듯이 조용한 도서관에서 읽을 책을 찾자, 대출 코너의 여성이 '107호실'로 가보라고 한다. 그 방에는 어떤 노인이 있었는데 '내'가 찾고 있는 책 이름을 대자, 그것은 대출이 안 되는 책이므로, 여기서 모두 읽고 나가라고 한 다. '나'는 '개미집처럼' 복잡한 지하의 복도를 거쳐, 열람실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몹시 어두웠는데, 그 어둠 속을 한참 걸어가자, 희미한 등불이 켜져 있는 방이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양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내'가 다시 구불구불 하고 좁은 복도를 걸어가 도착한 곳은, 독서실이 아니라 '감옥'이었다. 노인은 여 기서 빌린 책을 모두 읽고 암기하여, 1개월 후에 치르는 시험에 합격하면, 여기 서 내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양 사나이'는 그것은 거짓말이고, 결국에는 '나'의 뇌수를 모두 뽑아내 고 말 거라고 한다. 만약 '내'가 책 읽기를 거부하면, 더 깊은 지하 쪽으로 끌려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예쁜 벙어리 소녀가 저녁 식사를 날라다 주는 것을 보 고, 기운을 내어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소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 사나이'의 말을 듣고, 몹시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나 이튿날에도, 그 소녀는 나 타난다. 그리고 '양 사나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양 사나이'에게는 그의 세계 가 있고, 그녀에게는 그녀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그녀의 설명을 듣는다. 그녀는 어두운 밤에 '양 사나이'와 함께 셋이서 여기를 달아나자고 했다. '나'는 '양 사나이'에게 이끌려 출구로 향하고, 소녀는 나중에 쫓아오겠다고 했다. 하지 만 겨우 출구까지 도착하자, 노인이 거기에 대기하고 있어싸. 그러나 달아나려면 지금 도망쳐야 한다는 소녀의 말에 딸, '나'는 쏜살같이 달아난다. 잠시 후 정신 을 차려 보니, '나'는 혼자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모든 것이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택시를 탄 흡혈귀> '나'는 교통 체증이 심하여, 택시 속에 갇혀 있었다. 그때 택시 운전사가 갑자 기 '흡혈귀'가 정말로 있다고 믿느냐고 물어 온다. '내'가 모른다고 말하자, 있다 고 믿는지 혹은 믿지 않는지 어느 한쪽으로 결정해 달라고 말한다. '내'가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그는 그것을 믿고 있으며, 실증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이 '흡혈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도시와 그녀의 양> '나'는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삿포로에 도착해서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헤 어진 다음에, 호텔의 방에서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어느 작은 도시의 홍보 프로 그램을 본다. 마침 시청의 홍보과 아가씨가 나와서, 그 도시의 자랑을 하고 있었 다. 그 도시에는 100마리의 양이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불어날 것이라는 것이었 다. '나'는 호텔의 방에서, '나'와 그녀의 인생이 '문득 서로 접촉하고 있다'고 생 각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고 느낀다. 3.<개똥벌레, 헛간을 태우다, 그 밖의 단편>(1984년작) 이 단편집에는 <개똥벌레>를 비롯하여, 사람의 마음속에 깃드는 무서운 욕망 을 조용히 묘사한 <헛간을 태우다>, <춤추는 난쟁이>, 사실적인 문체로 묘사하 면서도, 현실에 기억의 세계가 침입해 들어오는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 자>, 독일의 중후한 감각을 다룬 <세 가지 독일 환상> 등, 실로 다채로운 무라 카미 하루키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개똥벌레> 장편 소설 <상실의 시대>의 모태가 된 작품. 등장 인물에게 이름이 주어져 있지 않으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14,5년 전에 도쿄의 높은 지대에 있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리학을 전공하는, 깨끗한 걸 좋아하는 룸메이트와 함께 생활 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고교 시절 친구의 연인이었던 '그녀'를 전차 속 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녀'와 만난 것은 반년 만의 일이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고교 2학년 봄의 일이었다. 그녀가 '내' 친 구의 연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셋이서 자주 어울렸는데, 그가 죽자 우리는 장 례식이 끝난 다음에 한 번 만났을 뿐, 소식이 끊긴 채 살아왔다. 도쿄의 교외에 있는 여자 대학에 다니고 있었던 그녀와 '나'는 한 달에 한두 번씩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의 스무 살이 되는 생일날에 '나'는 그녀의 아파트를 갔고, 그날 밤, '나'는 그녀와 잠을 잔다. 그 후 그녀는 쿄토의 산 속에 있는 요양소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녀의 편지에 는 '이 불확실한 세계'의 어딘가에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능숙하게 이야 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론다고 적혀 있었다. 그 달이 끝나갈 무렵에, '나'는 룸메이트로부터 유리병 속에 들어 있는 개똥벌 레를 받는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기숙사의 옥상으로 올라가, 개똥벌레를 날려 보내 준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가만히 있던 개똥벌레 는, 갑지기 무엇인가 생각난 것처럼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마치 상실된 시간을 되찾으려는 것처럼 <헛간을 태우다> '나'와 '그녀'와 그녀의 애인인 '개츠비 같은 사나이'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그 녀의 애인은 자신이 이따금 헛간을 불태운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의 표적이 '나'의 집 부근이라고 가르쳐준다. 그는, 헛간들은 불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묘한 말을 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 헛간은 불태워지지 않았다. 그 후 그녀는 행방 불명이 되고, 1년이 지나도 헛간은 하나도 불태워지지 않 았다. '개츠비 같은 사나이'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헛간을 태운다고 말한다. 물론 실제로는 행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헛간을 태우는 '범죄'를 계속 범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춤추는 난쟁이> '나'의 꿈속에 '난쟁이'가 나타나, 춤을 추지 않겠느냐고 유혹한다. '내'가 피로 해서 안 되겠다고 거절하자, '난쟁이'는 음악에 맞추어 아주 능숙하게 춤을 춘다. 헤이질 때에 'ㅓ내'가 춤추는 걸 보여 주어 고맙다고 말하며, 이제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난쟁이'는 "당신은 또 이곳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숲 속에서 살며 나와 함께 계속 춤을 추게 된다.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공장으로 가서 코끼를 만드는데, 어느 동료가 옛날에, '춤 을 잘 추는 난쟁이' 이야기를, 한 노인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 노인에게 찾아가 난쟁이에 대해서 묻자, 노인은 혁명 전에 오래된 술 집에서 매일 난쟁이가 춤을 추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가 춤추는 것을 보고, 행복 감과 비탄에 잠겼으며, 마침내 난쟁이는 궁정으로 불려가 춤을 추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준다. 그러나 혁명이 끝나자, 황제는 살해됐고 난쟁이는 달아났는데, 혁명군은 지금 도 난쟁이를 찾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궁정에 있을 때, 난쟁이가 좋지 않은 힘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그 후 얼마 동안 '나'는 난쟁이 꿈을 꾸 지 않았는데, 공장에 새로 온 아가씨를 유혹한 날 밤에, 다시 그의 꿈을 꾸게 된 다. 그는 그가 '내' 속으로 들어와, 그녀 앞에서 능숙하게 춤을 추면, 그녀가 '내 것'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 때까지 말을 한ㄷ마디도 하 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만일 단 한마디라도 하게 되면, 그가 '나'의 몸을 빼앗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 는 그녀 앞에서 화려하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고 '내' 몸 을 지키기 위해서, 여자의 얼굴이 뭉그러지고, 난쟁이의 웃음 소리가 들려 오는 등의 난쟁이의 농간을 참아 냈다. 그러나 춤을 잘 춘다는 소문이 퍼져, 혁명군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고, 난쟁이 는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서, '내' 몸 속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나'는 귓병을 앓고 있는 사촌 동생과 함께 병원행 버스를 타는데, 문득 버스 속에 뭔가 기묘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음을 느낀다.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에 탄 사람들은 모두 노인들이었고, 노인들은 마치 희미한 그림자처럼 우리 주위를 둘 러싸고 있었다. '나'는 사촌 동생이 치료를 받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열일곱 살 때에, 지금은 죽고 없는 친구와 함께 그의 여자 친구를 병문안했던 일을 떠 올린다. 그녀는 볼펜으로 냅킨에 무엇인가를 그렸었다. 언덕이 있고 그곳의 작은 집에 는 여자가 잠들어 있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집 주위에는 '장님 버드나무'가 자라 고 있었다. 그 나무가 여자를 잠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녀 말에 의하면, 이 '장님 버드나무'는 어느 시기에 이르면 위로는 뻗어 나가지 않고, 아래를 향해서만 뻗 어 나간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둠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나고, 그 나무의 꽃가루 를 파리가 여자의 피 속으로 운반하여, 여자를 잠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 리는 그녀의 살을 먹는다. 이 단편에 묘사되어 있는 버스 속의 장면은, 브로우티건의 에 그려져 있는 것과 유사한 정경이다. <세가지 독일 환상> 1. 겨울의 박물관으로서의 포르노그라피 '내'가 섹스에 관한 말이나 행위를 통해 상상하는 것은, '겨울의 박물관'이다. '나'는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고, 그 입구에 누군가가 서 있따. 그리고 '내'가 섹스 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겨울의 박물관에 있고, 우리는 모두 거기서 고아 처럼 웅크리고 앉아 따스함을 구하고 있다. 2. 헤르만 게링 요새 1983 어느 날 점심 시간에 우연히 알게 된 '그'는 '나'에게 동베를린의 거리를 오랜 시간 동안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1945년 베를린 전투의 흔적을 자세히 보여 주 었다. 이렇게 안내를 받고 있는 동안 '나'는 마치 최근에 전쟁이 끝난 듯한 느낌 에 사로 잡힌다. 그는 헤어질 때 '헤르만 게링 요새'는 굉장하지요, 하고 '나'에게 자랑스레 말한다. 3. 헤르 W의 공중 정원 '나'는 짙은 안개개 끼어 있던 11월의 어느 날 아침에, '헤르 W의 공중 정원' 으로 안래되었다. 그것은 공중 정원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여느 정원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는데, 거기에 있으면 이상하게도, 땅과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 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경계에 세워져 있는 벽 바로 옆쪽 빌딩의 옥상 에 위치해 있으므로, 왜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지 않는가 묻자, 헤르 W는 그 곳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쾰른도 프랑크푸르트도 아닌, 이곳 크로이트 베르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4.<회전 목마의 치열한 경쟁>(1985년작) <머리말, 회전 목마의 치열한 경쟁> 이것은 이 단편집의 서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원칙적으로 사실에 입각하고 있으며, 이 일련의 문장을 하루키는 '스케치'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장편 소설을 위한 '워밍업'으로 여기고 쓰기 시작했지만, 써나감에 따라 그것들이 '이야기해 주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아챘다. '내'가 소설을 쓸 때에 는, 자신의 스타일이나 소설의 전개에 따라, 무의식중에 재료가 되는 단편을 선 택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소설과 '나'의 현실 생활이 모두 일치하고 있는 게 아니므로, 아 무래도 '내' 속에 소설에는 사용할 수 없는 '앙금(침전물)' 같은 것이 축적되어 간다. '앙금'은 인간의 몸 속에 활식하게 축적되어 간다. 이 스케치들의 재료는, 어느 소설에도 삽입되는 일 없이, '내'속에서 가만히 잠 들어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언짢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문장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정신이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작품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며, 쓰는 일 자체 에는 아무런 효용도 없고, 구제도 없다. 따라서 '앙금'은 그대로 '내' 속에 남아 있다. '스케치'라고 부르는 것은, 소설도 픽션도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는 어떤 무력감에 빠져든다. '앙금'이란 이 무력감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는 게 이 무력감의 본 질인 것이다. <회전 목마의 치열한 경쟁>이라는 타이틀만큼 무라카미 하루키다운 타이틀은 없다. 머리말에 '어디로도 가지 않고, 내리거나 갈아탈 수도 없다.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추월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런 회전 목마 위에서 가상의 적을 향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 이 씌어 있으며, 타이틀도 여기서 가져온 것이다. <레더호젠< '나'는 아내의 이전 동급생으로부터, 대학 2학년 때에 '그녀'의 어머니가 아버지 를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유는 '레더호젠'이라는 이름의 반바지 때문이었 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여동생을 만나러 독일에 가게 된 그녀의 어머니에게, '레 더호젠'을 선물로 사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독일엘 다녀온 후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곧장 오사카에 있는 또 다른 여동생 집으로 가버린다. 그리고 귀 국한 지 2개월쯤 지났을 때, 갑자기 전화로 이혼하고 싶다고 말해 온다. '그녀'는 3년 후에야 어머니를 만났는데, 그때서야 이혼하게 된 원인을 처음으 로 듣게 된다. '레더호젠'을 사려고 가게를 찾아간 어머니는, 옷을 입을 본인이 오지 않으면 팔 수 없다고 거절당하자, 아버지의 체격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 가 게에 데리고 간다. 어머니는 점원들이 그 남자의 체격에 맞게 '레더호젠'을 조정 해 주고 있는 30분 동안에 이혼하기로 결심했는데, 그것은 그 남자를 보고 있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하나의 느낌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얼마나 남편을 미워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택시를 탄 남자> 수년 전에 '나'는 작은 미술 잡지를 발간하기 위해 화랑을 탐방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어느 여성으로부터 <택시를 타고 있는 남자>라는 제목의 그림 이야 기를 듣게 되는, 그것은 1968년 그녀가 뉴욕에서 구입한 유일한 그림이었다. 그 것은 택시의 뒷좌석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의 그림이었다. 사실 그녀는 그림이 마음에 든 것이 아니라, 그림 속의 '남자'가 마음에 들어 서 샀던 것으로, 그 '남자'를 볼 때마다 '자신이 상실한 것의 크기를 뼈저리게 느 꼈다'고 했다. 그때 그녀의 청춘은 이미 끝나 가고 있었고, 그 남자를 자신이 상 실한 삶의 일부로 느꼈던 것이다. 그 '남자'와 그녀는 '어떤 종류의 슬픔'을 나누 어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그림을 불태워 버려, '남자'를 해방시켜 주었 다. 그런데 그녀는 작년 여름 아테네에서 그를 만났다. 우연히 택시의 뒷좌석에 함께 탄 그는 배우였고, 그와 헤어진 후 그녀는 '무엇인가가 끝났음'을 느낀다. <구토 1979>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다. 그래서 심지어는 구역질-그저 토할 뿐 불쾌감이 없는-이 1979년 6월 4일(맑음)에 시작되어, 그 해 7월 15일(흐림)에 끝 난 것도 알 수 있다. 그는 40일 동안 아무런 원인도 없이 구토를 계속했는데, 구 토의 기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매일 알지 못하는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단지 '자신'의 이름만 말하고 끊어 버리는 전화였다.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보았 지만, 어디에도 나쁜 데는 없었다. 그래서 환경을 바꿔 보려고 호텔 방에서 지내 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호텔방으로 간 후에도 한밤중에 또 전화 벨이 울렸다. 그리고 그는 또 구토를 했다. 그는 구토와 전화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 각하게 되었다. 그 후 어디로 옮기든 여전히 이 두가지는 계속되었고 이러한 일들은 반드시 그가 혼자 있을 때 일어났다. 그러던 중 7월 14일에, 이 두 가지 일이 갑자기 멎 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는 여느때와는 달랐다. 상대방이 "내가 누군인지 알고 있습니ㄲ"라는 말을 처음으로 덧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며> '나'는 비를 피하기 위해 가게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전에 한 번 '나'와 잡지 때 문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 한 여성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그녀는 2년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고, 거의 동시에 연인과도 헤어졌다. 드려는 다음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지내기로 했는데, 열흘쯤 지났을 무렵부터 일할 의욕을 읽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바에서 중년 남자가 말을 걸어 왔을 때, 그녀는 "나는 비싸다구요"라는 말을 자연스레 했다. 이리하여 그녀는 처음으로 돈을 받고 남자 하고 잠을 잤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상대방을 보면 직감적으로 액수가 머리에 떠오른다고 했다. '내'가 만약에, '나'라면 얼마를 요구하겠는가, 하고 묻자, 그녀 는 2만 엔이라고 대답했다. 그 후 '나'는 2만 엔을 주고 그녀와 자는 것을 상상 해 보았지만, 돈을 치르고 섹스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기묘한 일이었다. <사냥용 나이프> 호텔의 우리 방은, 평화롭고 조용한 해안에 면해 있었다. 옆방에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아들과 그의 어머니가 머무르고 있었고, 그들은 마치 노부부처럼 조 용했다. 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작은 버본(양주의 일종) 병 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가든 바로 가보니, 휠체어를 탄 청년이 혼자서 바 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나'에게 '나이프'에 관해 잘 알고 있는가고 물었다. 그는 작은 '사냥용 나이프'를 꺼내어, '내'게 보여 주며, 무엇에[ 사용하겠 다는 목적은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나이프가 갖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것은 근사한 나이프였고, '기묘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이따금 머리에 나이프가 꽂히는 꿈을 꾼다고 했다.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 미인이고 부자인데다 무엇에든 재능을 발휘하는 '그녀'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 를 입히는 데에 천재적이었다. 그래서 '내' 주위의 친구들은 모두 그녀에게 열중 해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그 녀를 껴안는 사런이 발생했다. 남녀가 여럿이 함께 뒤섞여 자고 있었던 때의 일 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십여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수년 전에 우연히 그녀의 남편을 만났는데, 그녀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기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항상 자신만을 생각하는 데 익 숙해져 있던 그녀는, '타인의 부재가 가져 오는 아픔'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변해 버린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며, 괜찮다 면 전화를 좀 걸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14년전 그날 밤에 느꼈던 그녀의 따스한 온기를 잊을 수가 없어, 지금도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걸지 못하고 있다. <풀 사이드> 화자인 '내'게 '그'는 풀 사이드의 카페 테라스에서 자신은 서른다섯 살이 된 시점을 인생의 '반환점'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또한 서른다섯 살이 된 생일 다음 날에, 벌거벗은 나체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까지 바라보았는 데, 아직은 전체적으로 젊음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자세히 보니, '숙명적인 늙음 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자기 속에 '뭐라고 형언할 수 없 고, 파악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잠겨 있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했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 가 '이제 젊지는 않다'고 느낀 것은, 결혼한 지 2년째 되는 해의 일이었다고 한 다. 그는 노력하에 체형을 유지했고 연인도 생겼으나, 정신을 차려 보니 혼자 울 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야구장> 어느 '청년'이 자신이 쓴 첫 번째 소설을 '내'게 보내 왔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그와 만나게 되었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자기와 같은 모임에 속해 있던 '그녀'의 아파트의 방이 잘 보이는 곳-야 구장 주변에 셋방을 얻었고ㅡ 그녀에게 열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커다란 카메라 의 망원 렌즈를 구해 와서, 그녀의 방이 보이는 곳에 설치하고는, 그녀의 방을 엿보았으나 1주일쯤 지나자 그만두려고 마음먹었다. 그너나 그녀의 생활을 엿보 지 않고는 참을 수 없게 된 자신을 깨닫고, 또다시 카메라와 망원 렌즈를 설치 하여, 그녀를 계속 관찰한ㄷ. 그 일이 마치 '몸의 기능의 일부'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밖의 모든 일에 대한 흥미를 잃고 심지어는 학교에도 나가 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녀를 만나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확대'된 '프레임' 속의, 단편적인 인간 존재를 보는 것은, 결코 매력적인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 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에, 그녀가 그에게 말을 걸어 왔지 만, 그는 이미 그녀에게 흥미를 잃고 있었다. 5.<빵 가게 재습격>(1986년작) 이 단편집에는 표제작을 포함한 7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7편의 길이나 테마, 문체 등이 통일적이지는 않지만,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단편들이다. <빵가게 재습격> 나와 아내는 잠을 자다가 배가 고파 잠에서 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내가 심야에 영업하는 레스토랑에는 가기 싫다고 해서, 우리는 할 수 없어 캔 맥주를 마신다.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아내에게 예 전에 빵 가게를 습격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파 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건을 생각해 낸 것이다. 십여 년 전에 '나'와 '나'의 동료는 몹시 가난했다. 그 무렵에 두 사람은 배를 채우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는데, 빵 가게를 습격한 것도 그러한 일들 중의 하나였다. 두 사람이 어느 빵 가게를 습격하려고 들어갔을 때, 마침 빵 가 게 주인은 가게에서 바그너의 서곡집을 듣고 있었다. 주인은 클래식 음악의 마 니아였던 것이다. 그는 지금 틀어 놓은 레코드를 자신과 함께 조용히 끝까지 들 어 주면, 빵을 얼마든지 주겠다고 제안했다. '나'와 동료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음악을 끝까지 다 듣고, 빵을 듬뿍 챙겨 가지고 와서는 4,5일 동안 그것을 계속 먹어댔다. 결국 습격은 '범죄'가 아니라 '교환'으로 끝나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있은 후에, 여러 가지 일들에 변화가 일어났다. 빵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만, 거기에 뭔가 중대한 과오가, 일종의 '저주'처럼 '나'에게 달라 붙은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오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내는 그 '저주'를 풀지 않으면, ㄱ녀와 '내'가 평생 동안 고통받게 될 거라고 하면서, 오늘 밤에 빵 가게를 다시 습격하여 매듭을 짖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산탄총을 챙겨 심야의 도쿄 거리를 돌아다녔다. 하 지만, 문을 연 빵집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로 들어 가서 서른 개의 햄버거를 빼앗고, 콜라 값은 지불한 후에 나왔다.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이 단편은 <태엽 감는 새>의 원형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실업중인 '내'가 스파 게티를 삶고 있는데 모르는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그녀는 10분 동안만 시간을주면, '서로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나'느 어이없고 우스운 소리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여자가 말한 1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 설정'에 마음이 쓰 인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아내에게서 잔화가 걸려오고, 그녀는 행방 불명이 된 지 4일이 지난 고양이를 찾아 달라고 한다. 쇼핑을 하고 돌아오자, 다시 그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그녀는 '나'에 관해 알고 있는 모양으로, '내' 의식 속에 사각 지대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을 한 다. '나'는 '나'의 내부에 '상실된 땅 속의 세계와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 것이 '내' 인생을 빗나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10분이 되기 전에 전화를 끊고 고양이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아내가 가르쳐 준 빈 집으로 가서, 예쁜 귀를 갖고 있는 아가씨를 만나, 그녀에게 '와타 나베 노보루'라는 고양이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여기서 기다리면 고양이 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하여, 잠시 기다리지만 고양이는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 동안, '나'는 고양이의 네 개의 다리만을 떠올리며, 졸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는 "당신의 머릿속 어딘가에 치명적인 사각 지대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하 는 정체 불명의 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졸음에서 깨어났지만, 고양이는 없었다. 아내는 '내'게 당신이 고양이를 죽였다. 직접 손을 대지 않으면서도 많은 걸 죽여 간다고 말했다. '나'는 사건의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비 내리는 날의 여자 #241,242> 비가 내리고 있는 어느 날, 검은 아타셰 케이스(007가방)을 손에 든 중년 여자 가 현관 벨을 눌렀다. 나는 차양 틈새로 살짝 녹색의 비닐 우산을 들고 있는 그 여자를 관찰했는데, 그녀는 화장품 판매원이었다. 그녀의 케이스에 그려진 화장 품 회사의 마크밑에는 '#241'이라는 번호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녀는 '241호 여자' 였던 것이다. 두 번째 벨이 울리고, 시간이 한참 경과했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 다. 이윽고 여자는 현관에서 떠나갔다. '나'는 어쩐지 '그 여자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혀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현관 문을 열어 놓았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붕괴> 일요일 아침, 빨래를 널었을 때에는 전혀 바람이 불지 않았으나, 오후가 되면 서 세찬 바람이 불어댔다. '저선 시대의 로마 제국처럼 평화로운 일요일'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내'가 일주일분의 일기를 모두 쓰고 있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그런데 수화기에서 들려 오는 것은 세찬 바람소리 뿐이다. 그것은 1881 면에 일어났던 인디언의 봉기와도 같았다. 토요일에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입 했었다. 아니, 그것은 그날 관람한 영화 속의 사진이었지. 일기를 다 쓰고 나니, 또 전화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여자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 왔고, 바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와서 요리를 하고 있을 동안에, '나'는 다음 주에 한꺼번에 일기를 쓸 때를 위해, 오늘 하루 동안의 사건 을 간단히 메모해 두었다. 로마 제국, 인디언 봉기, 이렇게 적어 두면, 다음 주에 도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용의 주도한 시스템이 다. <코끼리의 소멸> '나'는 코끼리 사육소에 있던 코끼리와, 코끼리를 사육하던 남자가 사라져 버 렸다는 신문 기사를 읽는다. 이 도시에서 그 코끼리를 사육하게 된 것은, 나이가 많은 때문이었다. 동물원이 폐쇄됨에 따라, 다른 동물들은 모두 사방으로 실려 갔지만, 이 코끼리만은 인수하려는 곳이 없어, 결국 이 도시가 사유 재산으로, 인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년 후에 갑자기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경찰이 수색을 벌이고, 신문에서도 며칠 동안 사건을 크게 다루었지만,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잠잠해져 갔다. 이 코끼리의 소멸은 이 사회의 움직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코끼리가 사라져 버린 후로, '나'의 내부에 서는 어떤 균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패밀리 어페어> '나'는 누이동생과 둘이서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가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유는 스파게티가 맛이 없어서 남긴 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의 스파게티에 대한 견해나 대응 방식이 너무 편협하다'고 비난했다. 그 일은 그녀의 약혼자의 문제로 이어졌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즐겁게 지내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그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우리의 그런 관계를 끝내고 싶었지만, 그 계기를 만들 수가 없었다. '나'의 머릿속에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려 하고 있 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무라카미의 작품 중에서도 유일하게 가정적인 풍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단편이다. <쌍둥이와 가라앉은 대륙> <1973년의 핀볼>의 속편과도 같은 단편으로, '쌍둥이'가 다시 등장한다. '쌍둥 이'와 헤어진 지 반년 후에, '나'는 잡지에 실려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다. 함께 살고 있던 떼와는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져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 었다. '나'는 그녀들과 함께 찍혀져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몇 번이나 사진을 들 여다본 다음에, 그가 '쌍둥이'들의 현재의 정부일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이 세 사람의 공동 생활을 머리에 그려 보았지만, 질투하지는 않았다. 이미 '나'는 쌍둥이를 상실했고, 계속해서 더욱 더 깊이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젠 예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다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리얼리티라 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이미 나를 통과해 버린 것'이며 만일 이전의 상태로 되 돌려 놓는다 해도, 같은 일이 되풀이될 뿐이다. 그것은 무의미했고 그것이 '내' 현실이었다. '나'는 언제나 같은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는 벽이 모두 유리로 된 빌딩이 나오고, 그것은 어김없이 공사중이며, 안에서는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벽 은 이중이었는데 그 사이 공간에, '쌍둥이'들이 끼워져 있었다. 그녀들은 갇혀 있 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작업을 중지시키려고 했지만, 입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잃었다고 확신하는 때는, 그것을 잃은 순간 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렸음을 알아챈 때이다. 6.(1990년작) 이 단편집에는 표제작인 , <비행기-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이 혼자말을 했는가>, <우리 시대의 포클로어-고도 자본주의 전사>, <가노 구레 타>, <좀비>, <수면!> 등의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어느 날 저녁, '나'의 방에 갑자기 TV 피플이 찾아왔다. TV 피플은, 보통 사 람보다 약간 작은 체구로, 약 2할이나 3할쯤 축소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세 명의 TV 피플은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별안간 방에 들어와서, 소니 컬러 텔레비젼을 방의 한쪽 구석에 설치한다. 그리고 점검이 끝나자,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나'는 이튿날 회사에 출근해서도, 회의실에서 그 TV 피플을 발견한다. 그들은 회의실에 대형 소니 텔레비젼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은 모두 TV 피플을 보고도 못본 체했다. '내'가 동료를 향해 그것을 화제로 삼 으려 하자, 동료들은 그 이야기를 피하려는 것처럼 '내' 곁에서 이내 떠나 버린 다. 회사 일을 끝내고 귀가한 그날 밤에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밤에 텔레비 젼을 틀어 보니, 화면에 TV 피플이 등장했다. 이윽고 그들중 한 명이 화면에서 뛰어나와 방으로 들어오더니, "부인은 이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하고, 처음에 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윽고 '나'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은 기묘하고, 두려운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소설 속의 TV 피플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 전에, 어쩐지 그 존재가 기분 나쁘고 두려운 것이다. 아내와 회사의 동료들도, TV 피플이 운반해 온 텔 레비전과 세 며의 TV 피플이 눈앞에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한다. TV 피플을 볼 수 있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인 듯하다. 이 작품은 가족이나 사회 등의 가장 친밀한 집단조차도 실은 전혀 의지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고립되고 작기 단절된'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는 것을-그리고 그러한 사회나 사람의 자세야말로 현대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라 는 사실은-가르쳐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혹은 요즘 사람들의 생활 속에 만연 하고 있는 텔레비전 문명과, 그것 때문에 이전의 인간이 가지고 있던 신체적, 정 서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가 소멸된 것에 대한 통렬한 풍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동서양을 막록하고 현대의 인류는, 휴머니즘이나 사회주의 등의 이념을 하나 의 지표로 삼고 발전되어 온 근대와는 달리, 여러 가지의 근대적 이념의 붕괴와 해체로 인해, 인간의 존재 이유 자체가 동요하고 있다. 사람들은 물질에만 매달 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파편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다. 텔레비젼이 운반되어 온 방에서 TV 피플하고만 대화를 하는 인간-이는 바로 평균적인 현대인이다. 인간이 인간의 0.7배로 축소되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풍자 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축소되어 버린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닌 것이다. 단편집 에는 이러한 위기감이 충만해 있다. <좀비> 장래르 약속한 두 약혼자가 자고 있는데, 여자의 '꿈속'엣, 약혼자가 갑자기 용 모가 추하다느니, 어머니에게 식사를 차려드리는게 엉망이라느니 하며 욕을 퍼 붓고, 마침내는 얼굴의 살이 무너져 좀비(역주:마법으로 되살아난 시체)로 화하 여 그녀를 습격한다. 이 작품에는 SF적 취향을 넘어, 혼돈 상태에 빠져 버린 이 시대에 대한 작가 의 두려움, 또는 거절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연애'라는 최상의 인간 관 계(공동 환상)가 이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시대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인식이 만들어 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라카미는 물질적인 번영 속에서 밋밋하고 두루뭉실한 모양 밖에는 보여 주 지 않는 이 사회와,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감과 초조감, 노여움을 <좀비>와 같은 기괴한 이야기로써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수면!> 치과 의사의 젊은 아내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며 화자이다. '나'는 잠을 전혀 잘 수 없게 된 지 17일째가 된다. '내'게는 초등 학교에 다는 사내 아이가 하나 있고, 가정은 원만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잠을 잘 수 없게 되더니 그 증세가 계속되었다. 잠을 자고 싶은데 잠을 이룰 수 없는 불면증과는 달리 전혀 잠을 자고 싶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식욕도 있고, 몸의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잠을 잘 수 없게 되어 버린 첫날 밤에 한 가지 묘한 꿈을 꾼다. 몸이 여위고 눈매가 날카로운 노인이 '내' 발앞에 서서, '내' 발에 주전자의 물을 계속 부어대는 그런 꿈이었다. '나'는 두려움에 큰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난 다. 17일째 되는 날 밤에, '나'는 심야에 혼자서 드라이브를 하려고 밖으로 나서는 데, 공원 안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휴식을 취하던 '내' 앞에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와서 차를 뒤흔든다. 정말 까닭도 알 수 없는,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공포는 확실히 존재하며, 인간을 조용히 침식하여 간다. 작가가 표사하는 그러한 두려움은 바로 이 시대가 가져온 것이며, 이나 이 작품은, 작가가 그러한 상황을 민감하게 그려내고 있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우리 시대의 포클로어-고도 자본주의 전사> 처녀성을 둘러싼 '우화'이다. 이는 처녀성에 구애되는 여자, 페팅은 하지만 섹 스는 하지 않는 <상실의 시대>에 등장하는 나오코에 대한 패러디이다. 그녀는 연인에게, 다른 남자와 결혼한 다음에 "당신과 자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처녀성은 '동결'된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한 뒤, 연인과 만나도 또 페팅만 할 뿐 이다. 그리고 그 처녀성이 지금은 상실된 처녀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작 가가 처녀성에 구애 받는 여자의 이야기에 '고도 자본주의 전사'라는 부제를 붇 인 우의(알레고리)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고도 자본주의는 상실된 처녀성을 무한히 연기시켜 가는 시스템으로 기능하고 있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1983 에세이집을 내는 제 멋쩍어하는 무라카미가 중국행 화물선, 개똥벌레 헛간을 태우다 그 밖의 단편등을 장정하여 단짝을 이루고 있는 안자이 미즈마루와 함께 만든 수필집이다. 업다이크의 책을 읽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에 대해 쓴 존 업다이크 책을 한 권 들고 상경하던날, 고등학교때에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원서로 읽은 로스 맥 도널드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이 네임 이즈 아처, 사춘기 시절, 항구에 있는 커피 숍에서 재즈 음악을 듣던 때를 회상하며 쓴 커피가 있는 풍경등이 안자이 미즈 마루의 색채감 있는 삽화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안자이 미즈마루와의 대담인 화가와 작가의 해피엔드 가 실려 있다. 더 스콧 피츠제럴드 북 1988 무라카미가 하나의 규범 기준으로 여기고 있는 피츠제럴드에 관 수필집. 그는 피츠제럴드를 자신을 위한 소설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책의 후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은 지 벌써 20년 이상이 지났고, 나도 그가 죽은 나이 44세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의식한다. 그는 또한 피츠제럴드가 자신의 나이일 때에는 무엇을 하고있었을까, 하고 생 각한다고 한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에서는 피츠제럴드와 인연이 깊은 다섯 개의 도시를, 도시와의 관계라 는 시점에서 논하고 있다.-무라카미 하루키는 실제로 그 미국의 다섯 개 도시를 방문하였다. 제 2부에는 피츠제럴드에 관한 글 세 가지가 수록되어 있고, 제3부에는 그가 번역한 피츠제럴드의 두 개의 단편, 즉 자립하는 아가씨와 리치 보이 부유한 청 년 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또한 언젠가 그의 대표작인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고 싶다고 한다. 먼 북소리 1990 1986년 가을부터 1989년 가을까지, 무라카미는 그리스와 이탈리아, 특히 로마 를 본거지로 삼아 오래 체재하였는데, 그러한 이국에서의 여행과 생활을 그린 여행기, 그는 그런 자신을 스스로 상주적 여행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 3년 동안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댄스 댄스 댄스 등 두개의 장 편 소설을 완성하고, 단편집 TV 피플을 간행했다. 영화를 둘러싼 모험 1985 이 책은 가와모토 사부로와 함께, 비디오케이프 및 비디오디스크로 감상할 수 있는 영화 264편을 선정하고, 각 편마다 간단한 해설을 첨부한 공저이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유럽 영화나 명작도 포함되어 있다. "일요일에 아버지와 함께 고베등지의 영화관에서 전쟁영화나 서부극을 보는 일이 거의 습관처럼 되어 있던 소년 시절, 내게 있어 영화관은 축제의 공간이었 다. 고등 학교 시절에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던 곳도 영화관이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의식으로서 영화관 다니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혼하여 일을 시작 하면서부터 그것이 갑자기 끝나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조만간 우리는 ...... 그 그립고, 따스하고, 그리고 잠정적인 어둠에 작별을 고 하고, 다른 종류의 어둠을 향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관 에 전혀 가지 않게 될 거라는 말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쯤은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입장권을 사고 의자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 전의 객석을 둘러 보았을 때, 우리는 이미 무엇인가가 상실되어 버렸음을 알게 된다. 그곳은 이미 우리에게 있어서 의식의 장소가 아닌 것이다." 워크 돈트 런 1981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현대 작가 무라카 미 류와의 대담을 모은 대담집이다. 같은 세대의 작가인 두 사람이 각기 자신의 문학관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 으며 도덕관, 사회관등을 정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소설을 쓰는 것은 자기 해방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자기 변혁이라고 생각한 다.(하루키)" "자기 펴현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등 창작의 핵심에 다가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다. 꿈속에서 만나요 1981 무라카미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할 사람 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도이 시게사코 와 함께 엮은 앤솔러지(역주: 일정한 기준에 따라 선정된 시가집 혹은 문예 작품 짐)이다. 이 책은 외래어를 사용한 언어 유희로서 사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파도의 그림, 파도 이야기 1984 이나코시 고이치의 사진집 속에 무라카미의 에세이, 무라카미가 번역한 노래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무라카미의 작품에 곧잘 등장하는 슈퍼마켓에 관한 이야기인 1980년에 있어서 의 슈퍼마켓적 생활, 그가 좋아하는 재즈에 관한 이야기인 <1장의 LP>등의 에 세이가 담겨져 있다. 무라카미 아사히도 1984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라카미 아사 히도>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다. 이것은 그 처 번째 작품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잡문집 같은 것'이다.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1985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후로 단짝을 이루고 있는 사사키 마키의 그림과 무라 카미의 글이 담겨져 있는 그림책이다. '양 사나이'를 비롯하여 ' 양 박사','쌍둥이'등이 등장한다. 무라카미 아사히도의 역습 1986 무라카미 아사히도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각 편마다안자이 미즈마루의 삽화가 실려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등을 집필한 경위가 씌 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무라카미 유의 신개인주의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집이 다. 그는 이 책 속에서 고교 시절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와 장크리스토프, 전쟁과 평화등을 세번씩 읽었다고 말하고 있다. 랑게르한스섬의 오후 1986 2년 동안에 걸쳐 잡지에 연재된 에세이 등을 모아 놓은 작품집으로, 안자이 미즈마루의 화려한 색상의 그림을 곁들이고 있다. 죽음, 어둠 등의 무라카미적 세계의 테마를 다루고 있는 낡은 혼의 흔들림 같 은 여름의 어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지도 관련된 이야 기인 내가 좋아하는 지도 그리기, 그리고 고양이의 상태를 관찰 기록한 수수께 끼에 휩싸인 고양이,집에 두고 온 생물책을 가지러 가는 길에 문득 봄을 느끼고, 개구리의 시신경과 그 신비로운 강게르한스섬(역주:췌장에 섬 모양으로 산재한 내분비 세포)에도 봄내음이 풍겨 온다는 내용의 랑게르한스섬의 오후등이 수록 되어 있다. 해뜨는 나라의 공장 1987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별난 것 중의 하나. 초등 학교때에 껌 공장을 견학한 이후로, 그의 마음속에 공장에 대해 관심을 갖는 어두컴컴한 부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미지가 또렷한 개 체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도 만들어 내는 공장(이르테면 코끼리 공장티나 성욕공장)에 대해 이따금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이 책에는 그럼 공장을 방문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즉 일종의 르포르타주(젼지 보고, 보고 기사)인 셈이다.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공장은 1. 인체 표본 공장, 2.공장으로서의 결혼 식장, 3. 지우개 공장, 4.낙농공장, 5 꼼므 데 갸르송 공장, 6.콤팩트 디스크 공장, 7.가 발 공장등의 7개소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공장 견학기가 아니라, 어떤 사상적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THE SCRAP-그리운 1980년대 1987 이 단행본은 4년 동안에 걸쳐 잡지에 연재된 글을 모은 에세이 집이다. 여기 에는 81편의 짧은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글들은 모두 에스콰이어, 뉴옥등의 미국 잡지 속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스크랩하고, 감상을 곁들여 일본어로 소개한 것이다. 어빙, 피흐제럴드, 스티븐 킹, 브로우티건등의 미국 작가들에 관한 글도 포함 되어 있다. 무라카미 아사히도 하이호! 1989 이 책에는 약 5년 동안에 걸쳐 씌어진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거의 모두 패션 잡지에 랜덤 도킹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것이며, 그 밖에 군 조 잡지의 휴먼 인터리스트라는 제목의 칼럼에 게재된 것의 일부도 포함되어 있 다. 또 개중에는 수정되어 있는 것도 있다. "혼자 여행을 하고 있을 때 곤란한 것은,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아가씨와 만 나는 일이다","청춘은 끝났다-라고 씌어진 글을 보면 약간 두렵죠? 나도 두려워 요","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외모를 가진 여성은 거의 100 퍼센트가 내면적으로는-즉 인간적으로는-내가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다." 무라카미의 에세이를 읽는 즐거움의 하나는, 이러한 아포리즘을 발견하는 데 있다. 우천 염천 1990 이 책은 두 권의 책이 한 케이스 속에 담겨져 있는 여행기이다. 한 권은 제목이 TURKY 차이와 군대와 양 -21일 동안의 터키 일주이고 다른 한권으 GREECE 아토스-신의 리얼 월드이다. 그리스 아토스 반도의 여행기에는, 일종의 종교적 원더랜드에서의 체험이 묘 사되어 있다. 슬픈 외국어(원제 : 이윽고 슬픈 외국어) 1994 이국의 언어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 대한 슬픔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국에서 4년 반 동안을 체류하며 겪게 된 일에 대하여 심층적이고, 고백적으로 기술한 자전적 에세이집이다. 무라카미는 3년간에 걸쳐서 유럽, 특히 이탈리아나 그리스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온 지 불과 1년도 안 되어 일본에서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 고, 다시 미국으로 떠난 버렸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무라카미는 이 에세이집의 '후기'에서 '이윽고 슬픈 외국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 일본에 돌아오면,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되며 다시 이상하게 슬 픈 기분이 든다. 우리들이 이렇게 자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정말로 우리들에게 있어 서 자명한 것일까? 하고. 하지만, 물론 그러한 나의 생각은 적절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명성에 대해 묻는다는 것 자체가, 자명성의 결여를 분명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한동안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으면, 이 자명성은 다시 나의 내부로 서서히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개중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도 있을 것 이다. 이것도 또한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자명성이라는 것이, 영원 불멸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의 기억이다. 설사 어디에 있든 간에, 우리들은 모두가 어떤 부분에서는 이방인이며, 우리들 은 그 어두컴컴한 어둠의 영역에서 언젠가는 무언의 자명성에 배신당하고, 버림 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몸이 으스스해지는 회의적 감각이다. 여기서 무라카미가 말하는 자명성이란 자신에게 있어서 일본어처럼 스스로 명 백한 자명성을 갖지 못한 이국의 언어에, 무슨 운명인지 자신이 이렇게 둘러싸 여 있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어떤 종류의 슬픔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지금 여기에서밖에 살 수가 없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어떤 시간으로도, 어떤 공간으로도 비상할 수 있으나, 일상 에 계속에서는 어디까지나 지금 여기가 전부인 것이다. 그와 같은 일상세계에 언제나 이방인으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서글픔이, 무 라카미의 어둠 속에서 엿보인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감상적인 후기는 무라카미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여기에 실린 16편의 에세이는 각각 무라카미의 특색이 잘 드러나 있고 신선한 체험이 가벼운 유머와 함께 진지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가령 나와 비슷한 미국 의 같은 세대 사람들에서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손녀에게 초대받아 그녀의 농장 을 방문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미국의 50년대 세대인 그녀와 그 남편은 의식 적으로 농장에 살고, 물론 시내에 직장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환경보호운 동의 중심적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무라카미는 그 부부의 생활을 보고 미국판 단카이 세대와 비교해서 일본의 전 후 세대인 우리는 지금 무엇을 가장 문제로 삼고, 무엇을 실행하고 있는 것일 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찾아내고 싶다고 말한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로서의 경험을 재인식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를 생각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의 근원을 향한 고독한 싸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무라카미는 우리들은 모두가 어떤 부분에서는 이방인이 며, 우리들은 그 어두컴컴한 어둠의 영역에서 언젠가는 무언의 자명성에 배신당 하고 버림을 맡아 간다고 하는 고독과 허무주의를 안고서, 그것을 문학 작품 속 에서 삶에의 긍정으로 전환해 간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작가로서의 고고한 정신에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슬픈 이라는 말에는 공허감을 배경으로 한, 어둠 속에서의 불빛의 명 멸로 상징되는, 신나는 놀이 뒤의 적적함, 생활인이 아닌 나그네, 이방인의 슬픔 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무라카미가 말하나 는 이윽고 슬픈은 사실은 외국 생활이 아니라, 전쟁 을 모르는 세대, 즉 정공투 세대로 대표되는 중년이 되어 먹고 살기 위해 쉴새 없이 일하는 샐러리맨이난, 아직도 방랑을 계속하고 있는 이들 모두에게 디밀어 진 1970년대를 향한 언어이다. 무라카미는 미국이란 일본이라는 공간적인 장소나,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부조리한 이 세계에 대해 거부를 표명한 세대로서, 아직까지도 그는 부 조리한 세계와 타협하지 않고 있으며, 또 그 세계 역시 확고 부동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쪽에서 보자면, 세계에 타협하지 않고 거부하는 우리들이 이 방인인 것이다. 물론 세계와 화해한 많은 동세대인도있다. 그러나 무라카미는 그러한 속에서 자신의 문학의 근원을 향해, 혼자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자명성에 배신당한다고 하는, 몸이 으스스해지는 외의의 감각이 밑바닥에 깔 려 있다고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를, 혼자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 평론 및 에세이 친구와 영구 운동과 여름의 종말 친구에 관해 뭔가 글을 쓰려고 했을 때, 비로소 자신에게는 친구가 거의 없음 을 알아챘다는 무라카미가, 겨우 네 명쯤 되는 그의 친구들의 공통점 세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함께 있어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맵고 짠 것과 달콤한 것을 번갈아 가며 마치 영구운동처럼 먹는데 그것은 결코 영구 운동이 아니며, 그 두 가지 음식이 없어졌을 때-다 먹었을 때 -에 끝나 버린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이처럼 영구운동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많다는 생 각을 하는 사이에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기호로서의 미국 실체로서의 미국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성 속에서 인식하는 미국, 즉 상상하는 미국, 작은 유리창 - 소설이나 영화를 뜻함-으로 들여다보는 미국에 흥미를 갖 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엮은 작품이다. 그러나 이 유리창을 통해 얻는 정보가 진짜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며, 가령 정확한 것이라고 가정해보아도, 그것 역시 결국은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대개 우리는 그것을 몇 개의 보다 작은 기호로 나누고, 재구성하여, 하나의 메 시지로 성립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메시지들이 몇개가 모여 보다 큰 메시지가 이루어진다. 그것이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서의 미국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미국 공포 소설의 일인자-스티븐 킹 1 미국의 대표적인 공포 괴기 소설가 스티븐 킹에 관한 작품. 무라카미는 이 글 속에서, 킹 속에는 공포에 대한 본질적인 지향, 혹은 진지함 이 존재하지만, 공포 소설의 계보 속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통속적이라는 쪽의 최우익이라고 할하고 있다. 즉 그가 지니고 있는 공포에의 진지함이 스토리의 통속성을 깨뜨리고 있는 데 에 기표한 매력이 있다고 분석한다. 또한 그는 킹의 소설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의 하나는 권위에 대한 공포이고 (이는 어둠으로 표현된다.), 또 하나는 이에 대항할 가치관을 상실한 인간 존재 에의 공포라고 분석하였다. 전자는 미국적인 정치 체계, 물질 문명,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에 의해 표상 되고, 후자는 신을 상실하고, 방향성을 상실한 현대 사회에 의해 표상되며, 킹의 이야기는 그러한 어둠에서 벗어나고, 빛을 찾으며, 새로운 길을 구하는 현대의 오디세우스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데드 존에 삼켜져버리는 좌절의 이야기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과 빛이라는 테마는 무라카미의 작품에도 자주 등장한다. 피폐 속의 공포-스티븐 킹 2 스티븐 킹에 관한 작품집, 무라카미는 이 작품 속에서 자신은 킹의 소설 속에 서 일종의 동세대적감감을 느낀다고 했는데, 동세대적 감각이란, 어떤 정황에 대 한 인식과 그 정황의 붕괴, 혹은 변질에 수반되는 인식의 수정, 그 두 가지 인식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동시 체험일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60년대와 70년대의 차이에 대해, 킹은 공포 소설이라는 형태로써 해답을 내놓 았다고 말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사이의 세대 차이는, 위험한 테마이다 피터 예츠의 작품인 영 제너레이션에 관한 평이다. 그는 여기서 이 영화의 첫 부분의 묘사 방식은 훌륭하지만, 뒤에 계속되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세대 차이는 물론 재미있는 테마이긴 해도, 실제로 훌륭히 묘사된 적이 한 번도 없고, 대개 수박 겉핥기식이거나 도식적으로 끝난 버리는 위험한 테마이기도 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청춘 영화에서 젊은이가 어른이 제시한 해결 방법을 따르는 데에 무 의미함이 있다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청춘은 결국 일종의 허구성위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며, 어른에 대한 반발이 결여되어 있는 청춘에 대해서는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프의 세계 존 어빙의 가프의 세계에 관한 서평이다. 현대 소설이 추구해야 할 것은, 종교적인 문제 바꿔 말하면 도덕적인 문제이 며, 물론 이 방법이 시대와 더불어 단순화되어 가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을 문학 의 쇠퇴라든지 막다른 골목이라고 무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틀 린 말이라고 무라카미는 단언한다. 또한 문학에 막다른 골목이 있는 게 아니라, 작가에게 있을 뿐이며, 어빙은 그 러한 문학의 방향성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작가라고 말하고 있다. 보리밭 지난 14년 동안에 아홉번 이사를 다녔다는 이야기. 그는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간 후 3년쯤 지나면,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고한다. 그것은 어딘가 더 재미있는 동네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아홉 번째로 이사하면서 겨우 도쿄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무라카미는, 사실은 훗카이도로 이사를 가고 싶었지만, 결국 도심에서 두 시간 가량 걸리는 통근권 내로 옮겨 갔다. 대부분의 지방 도시에는 문화가 없고, 있는 것이라곤 대도시 문화의 모방뿐이 라고 지적하는 그는, 도회의 눈으로 지방도시를 바라보면,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얄팍함과 부신경성뿐이라고 한다. 확실히 도시에서의 생활은 재미있다. 마치 구분 좋은 보리밭을 횡단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약간 익숙해지면 어디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지 금방 알 수 있고, 그것만 알 고 있으면, 다음에는 얼마만큼 조심스러운 보조로 걸어가는냐 하는 문제가 남을 뿐이다. 게이 타리즈 이것은 잡지의 독서 생활이라는 칼럼에 6회에 걸쳐 연재한 글의 제1회분으로 서 게이 타리즈의 FAME AND OBSURITY 유명과 무명 을 평한 작품이다. 그는 타리즈의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절찬하고 있다. 온화함이 있고, 계산된 교활함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탄로나 버리는 데에 이 책의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타리즈의 내부의 굶주린 감각이다. 무라카미는 굶주림이 없는 곳에는 문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 굶주림 이 뉴저널리즘에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묻는다. 그리고 작품으로서 아무리 재미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유연성을 잃고 리얼리 즘의 마지막 성채로서의 색채를 띠기 시작할 때, 장법으로서의 뉴저널리즘의 역 할은 끝나는 게 아닐거라고 말하고 있다. 외설과 양식에 대하여 미국 속어에 관한 평론집. 그는 CROMWELL사의 슬랭 사전은 대충 훑어보 기만 해도 정말 재미있고, 언어는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이 글에서 FUCK이라는 말을 번역하는 방법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양식이라는 말만해도, 사용하기에 따라 추잡스럽고 외설스러운 말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역의 연구 번역에는 오역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내용의 작품집. 오차없는 번역은 없다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특히나 록 음악 가사중에는 번역 이 잘못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일본어까지 이상해 보일 정도라고 지적 하고 있다. HARUKI MURAKAMI IN NEW YORK 이것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뉴욕에서 존 어빙을 찾아가 인터뷰한 것을 요약하 여 소개한 것이다. 무라카미는 작가인 어빙의 정치에 대한 자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빙은......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편이다. 레이건을 미워하고, MX의 유렵배치를 비난하고, 낙태에 대한 접적 규제의 강 화에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60년대의 자유주의가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정치적 좌절감 도 느끼고 있다. 나도 그의 그러한 기분을 어는 정도 이해 할 수 있다. 소설에 있어서의 제도 소설 혹은 문장이라는 것에도 당연히 제도는 존재하며, 자신도 그 제도의 범 위내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 내용. 문체나 테마, 사물에 대한 느낌도 그 제도의 일환으로서, 사회 제도가 없으면 국가나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장 역시 제도가 없으면 존 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견해가 밝혀져 있다. 그리고 문장가나 작가가 문장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자기 내부의 제도의 벽을, 그 한계점을, 조금이라도 벌리 밀어내고 확 대시켜 가는 일이고, 또 하나는 제도의 체계를 심화시키며 정교화시키는 일이다. 3.번역서 부지런한 그는 많은 단편 소설의 써나가다가, 2~3년에 한 편꼴로 장편 소설을 써낸다. 그 사이에 널리 세계를 돌아다니며 장기 여행을 하면서 작품의 구상, 집필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미국 작가들의 소설을 번역한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페이퍼 백으로 된 피츠제럴드, 챈들러, 카포티등의 작 품을 탐독하던 하루키는 수입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문학 수업을 위해 번역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어로 번역한 작품들이다. 마이 로스트 시티 (1981,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 5편과 무라카미의 개인적 인 피츠제럴드론이 실려 있다.) 위대한 데스리프(1987,CDB 브라이언 지음) 곰을 놓아 주다 (1986, 존 어빙 지음)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1983,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8편) 밤이 되면 연어는 ......(1985,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과 무라카미에 의한 미국 현 대 문학론)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일(1989,레이먼드 카버의 12편의 단편과 무라카미의 글) 서풍호의 조난(1985,C.V. 올즈버그 지음)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1988, 트루먼 가포티 지음) 급행 북극호(1987, 올즈버그의 그림책, 크리스마스 동화) 이름이 없는 사람(1989,올즈버그 지음) 크리스마스의 추억(1990, 트루먼 카포티 지음) 어느 크리스마스(1989,트루먼 카포티 지음) 뉴클리어 에이지(1989,팀 오브라이언 지음, 한국판 제목은 그래도 살고 싶다.) 진짜 전쟁 이야기를 하죠(1990, 팀 오브라이언 지음) 월즈 엔드(1987, 폴 세로 지음) 이 밖에도 앤솔러지나 문학지, 잡지, 전집등에 실려 있는 번역물 등도 다수 있 다. 4.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기법의 특성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축제 무라카미의 반전의 구조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가의 시간. 시대와 소설의 시간.시대를 만나게 하는 기법 을 크로니클이라 부른다. 나라는 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인 임물이 그의 소설에 일관되게 등장해서 최대 한의 기능ㄹ 발휘하고, 소설을 푸는 열쇠도 이 나라는 기표한 인물에게 쥐어져 있다. 나는 소설의 등장 인물로서 과서 시제에 속하지만, 작가의 현재를 대변하는 분신이기도하다. 이 작중 인물인 나와 현실의 내가 그의 소설에서 어떻게 시간의 미로를 헤매 는가 살펴보자. 나는 그녀에게 이ㄲ르린 채 어둠 속을 앞으로 나아갔다. 천천히 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까닭도 없이 나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방의 어둠속에 복도의 불빛이 환히 들이비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우리는 벽속 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벽은 마치 거대한 젤리처럼 차갑고, 물컹했다. 나는 그것이 입 속에 들어오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맙소사, 나는 벽을 빠져 나가고 있는 거야,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서, 벽을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벽을 빠져 나가고 있는 나에게는 ,그것이 더없이 자연스런 행위로 여겨졌다. 여자의 혀가 내 입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혀였다. 그것은 내 입속을 이리 저리 핥으며, 혀를 휘갈겼다. 답답한 꽃잎 내음이 내 폐의 벽을 쓰다듬었다. 허리 깊숙한 곳에서 사정의 나른한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단단히 눈을 감고 그것을 참았다. 조금 지나서, 오른쪽 뺨 위에 격심한 열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기표한 감촉이었다. 고통은 없었다. 단지 열이 거기에 있다는 감각이 있을 뿐이다. 그 열이 외부로부터의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올라 온 것인 지, 그것조차도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모든 것이 사라져 갔다. 혀도, 꽃잎 내음도, 사정의 욕망도, 뺨 위의 열도, 그리고 나는 벽을 빠져 나갔 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벽의 이쪽에 있었다.-깊은 우물 밑바닥에. 태엽 감는 새 제 1부, 제2부를 통해서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무라카미 소설의 주인공 나는 어는 소설에서나 모든 것을 상실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잃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 가 없다. 나란 잃고 있는 시간의 화신 그 자체인 것이다. 태엽 감는 새에서는-무라카미의 소설에서는 대개-, 잃는 사람은 나이고 내가 잃어버리는 대상은 여성이다. 하지만 소설이 핵심에 다다르고, 거기서 시간이 소용돌이치며 미궁에 빠지기 시작할 무렵, 잃는 사람인 나와 잃어버린 대상인, 그녀가 만난다. 그것은 현재와 과거, 작가와 작중 인물이 만나는 장소로서, 무라카미는 그런 장소를 우물이라고 이름지었다. 하지만 나와 그녀, 그리고 두 얼굴의 나는 서로 겹쳐지는 일이 없다. 양자는 계속 엇갈린다. 마치 회전 목마의 치열한 경쟁처럼 아직과 이미의 틈새가 양자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틈새, 이 어긋남, 온갖 것이 소멸해 가는 소실점에서, 우리는 태엽 감새의 내가 내려앉는 우물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왜 우물 속에서, 나는 그녀를 만나면서도 만나지 않았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나는 우물속에서, 다시 말해서 시간의 골짜기라고나 할 만한 어긋남속에서 그 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태엽감는 세의 이 우물은 치명적인 사각이다. 그곳을 통해서 시간을 육체를 여자 친구를 고양이를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그 리고 무엇보다도 그것들을 잃어 가는 이유를-,잃어 가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우물 장면에서는 실종된 아내와 전화의 여자에게 이끌려 나는 벽을 빠져 나간다. 그리고 나의 뺨에 반점이 남는다. 그것은 벽을 빠져 나간 자국으로서, 실종된 아내, 전화의 여자의 입맞춤을 받 은 자국이기도 하다. 나는 이렇게 해서 뺨에 잃어버린 사람들의 각인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벽을 빠져 나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벽의 이쪽에 있었다.-깊은 우물 밑바닥에. 무라타미 하루키의 소설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나에게서 다른 사람 으로,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출구를 향해서 빠져 나가는 그런 구조를 위치하고 있지 않다. 출구는 있지만 거기를 빠져 나간 저쪽이 다시 이쪽인 것과 같은 반전의 구조 가 분비되어 있을 뿐이다, 나와 전화의 여자가 존재와 부재의 이차원 세계를 이루고 있어서, 어느쪽을 다른 사람이라고도 결정하지 못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뫼비우스의 띠를 나와 함께 계속 더듬어 가는 것이다-목적도 없이, 이유도 없이, 하물며 수수꼐끼의 해 졀도 없이. 등가의 바다-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으로서의 존재감 소설=허구의 세계 무라카미 하루키는 움직이는 것과 정지하는 것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정지하는 것이란 죽음, 공허, 부재를 뜻하는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 랜드를 예로 들어서 말하자면, 세계의 끝이라는 멈추어진 세계에, 하드보일드 원 더랜드라는 움직이는, 흘러가는 현재가 뒷받침되어 있다. 그리고 이 구조는 도시라고 하는 상적세계와 대비된다. 도시란 우선, 현상적으로 보더라도, 온갖 상에 잠김 공간이다. 광고, 사진,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 책 등...... 도시는 조직적인 선을 긋는다면, 대략 1970년을 경계로 하여, 그와 같은 도시 의 본질, 다시 말해서 상적 공간으로서의 도시에 대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1970년이란 무라카미가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시대 배 경으로 설정한 해이고, 또 세 번째 장편 소설 양을 쫓는 모험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 사건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숲을 빠져 나가 ICU(국제 기독교 대학)의 캠퍼스까지 걸어가 여는 때 처럼 다운지에 앉아서 핫도그를 먹었다. 오후 두 시였는데, 라운지의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미시다 유키오의 모습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 비쳐지고 있었다. 볼륨이 고장 난 탓에 음성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쨋든 그것은 우리 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 묘사의 앞부분에는 1970년 11월 25일이라고 정확한 날짜가 기입되어 있다. 미시마 유키오가 이치가야의 자위대 주둔지에 난입했던 날로서, 여기서는 미 시마의 할복 자살이라는 영웅적인 행위가 켈레비전의 영상 공간에 옮겨져서 글 자 그대로 상화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사실, 우리가 진짜 놀랄 일은 미시마의 할복이라는 사건의 의외성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있는 우리가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건의 핵은 현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보게 하는 것은 현실=허구뿐이라는 패러독스를 무라카미의 문학은 텔 레비전에 비치는 미시마의 상을 통해 빗대어 소설=허구의 세계로 전환해서 전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라카미의 소설에서 우리라 불리고 있는 것은 나와 여자 친구의 두 사람만은 아니다.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에 자신의 상을 투영하고 있는 미시마도, 독자도, 똑같이 무라카미가 우리라 부르는 영상 공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모두 다 똑같아 라고 쓰고, 거기에 방 점을 찍었다. 무구나 알고 있듯이, 이 현실 세계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아라는 이념이 통용 되지 않는다. 그것이 통용되는 곳은 도시라는 허구 공간, 영상공간으로, 그것도 등가성, 수 평성이라는 전제를 달 때에 한해서이다. 무라카미는 이것을 등가의 바다라고 부르는데, 거기서는 사거느이 깊은 핵심 이 근ㅎ임없이 상실되어, 세계의 끝 쪽으로 계속 보내진다. 대신 그곳, 그 부재의 자리에 상, 허구, 스토리가 모습을 나타낸다. 허구가 허구를, 상이 상을,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바짝 뒤쫓아간다. 그런 숨막히는 데드 히트, 무라카미의 표현을 빌면 회전 목마의 치열한 경쟁 이다. 디지털화한 시대의 비극 신문에서 우연히 그녀의 죽음을 안 친구가 전화로 나에게 그것을 알려 주었 다. 무라카미의 장편 양을 쫓는 모험의 첫머리이다. 이 그녀에게는 다른 많은 무라카미의 소설에서 그러한 것처럼, 이름이 없다. (무라카미는 상실의 시대에서부터 등장 인물에 이름을 붙였다.) 어쨌든, 그녀에게도, 그리고 독자에게도, 이름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것 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양을 쫓는 모험의 첫머리에서, 전화로 죽음이 알려지는 존재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양을 쫓는 모험의 첫머리는 이 장편에서 기묘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데, 제 1장 1970/11/25 라 이름 붙여진 이 부분이, 이하의 스토리의 전개, 다시 말해서 양을 쫓는 모험이라는 것과는 다르게 독립된 내용으로 되어 있어, 그것만이 단 독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은 더구나, 앞에서 인용한 신문에서 우연히 그녀의 죽음을 안 친구가 전 화로 나에게 그것을 알려 주었다로 시작하여 1978년 7월 그녀는 스물여섯에 죽 었다의 한 행으로 끝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음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난다. 여기서 무라카미는 1969년 가을, 나는 스무 살 인 해에서부터 그녀의 죽음을 전화로 알게 되는 78년 2월까지의 9년 간의 연대기를 소묘하고자 했던 것은 명 백하다. 그러면 69년에서부터 78년까지의 사이에 일어난 일은 무었일까? 78년에는 69년에 서로 알게 된 누구하고나 자는 여자아이 가 죽었고, 나는 아 내와 헤어졌다. 양을 쫓는 모험의 첫머리, 기묘한 분위기의 단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첫 머리에서 무라카미는, 뭔가의 종말을 묘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매우 비극적인 종말이다. 어떤 것은 잊혀져 버리고,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죽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비극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7월 24일, 오전 8시 25분 나는 디지털 시계의 네 개ㅡ이 숫자를 확인하고 나서 눈을 감고 그리고 잤다. 이것이 1969년부터 1978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아날로그한 전달의 시대에서 디지털한 전달의 시대로, 물론 무라카미가 이 변 화를 긍정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라카미의 글에는 가치관이 들어 있지 않다. 그는 디지털한 시대에서의 비극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했 을 뿐이다. 그것은 비극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비극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다. 무라카미의 비극은 숫자로 환산되어서 전달된다. 우리는 남의 죽음을 전화의 다이얼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인식한다. 텔레비전의 채널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인식한다. 그리고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이것은 우리의 감정에 깊은, 무의식적인 변화 를 미치고 있다. 더구나 이 변화는 시시각각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시시각각으로, 비극의 감정을 디지털화해서 생활하고 있 다. 그와 같은 사태를 무라카미의 소설은, 소설이라는 미디어를 사용하여 충실하 게 그리고 있다. 축제를 위하여 무라카미 소설의 주술성과 비현실성 무라카미 소설의 나는 한정된 하나의 연대를 호흡하고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1970년, 상실의 시대는 1967~1970년, 1973년의 핀볼은 1973년, 양을 쫓는 모험은 1978년,댄스 댄스 댄스는 1983년, 각각의 나는 각각의 해의 부산물이며, 고유한 시간의 냄새와, 바람, 햇빛을 몸에 지니다. 독자는 나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다. 얼굴이 공백으로 되어 있고, 거기에는 시간의 마스크가 씌워져 있다. 나의 얼굴은 시간이다. 그것은 날짜에 의해서 명확하게 구획지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날자는 연대기 를 구성하지 않는다. 가령, 무라카미의 4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 험, 댄스 댄스 댄스의 주인공인, 작가가 동일 인물이라고 하는 나의 연보를 만 들어 본다고 치자. 당장 그 시도가 부질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만 맥락이 없는 뿔뿔이 흩어진 카드를 안고 막막해지게 된다. 나의 약력이 비현실성을 띤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의 기억의 치명적인 사각 에 연유한다. 4부작을 내려다보는 초월적인 시점은 아무데도 없다. 나의 생활에는 사람들이 개인의 역사, 아니면 전기라 부르는 것의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무라카미는 나의 기억에 결락을 설정한다. 그가 그리는 것은 나의 전체상이 아니다. 나의 전체상을 아무데도 없다. 시간이라는 용기 속에 봉입되어서, 시간의 응의 얇은 한 장의 조각으로 화한, 시간의 정렬과 같은 인물이 단편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무라카미는 시간의 표층, 두께가 없는 순간, 얇은 현실의 층을 포착한다.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 실체가 아니라 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희적인 것, 도박의 과정과 비슷하다. 셰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의 대령의 체스라든가, 노인들의 목적 없는 구덩이 파기, 1`973년의 핀볼의 핀볼이나 쌍둥이들의 말잇기, 상실의 시대 의 당구대, 게임을 지배하는 영능력이 부여된 많은 여자 친구들. 그녀들은 종종, 손으로 공간에 기묘한 도현을 그린다. 그것은 무의식의 시간의 기저, 밑바닥이 없는 밑바닥에 무녀가 아폴로적인 형 상을 그려 내는 몸짓을 닮았다. 우리는 한동안 새가 사라진 언저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마른 잔가지로 땅바닥에 영문 모를 도형을 몇개 그렸다. - 양을 쫓는 모험 중에서 그녀는 내 등으로 돌린 손의 힘을 늦추고, 손가락 끝으로 어깨뒤에 작은 원을 몇 번 그렸다. -바라므이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그런데 복점의 공간에 몸을 두는 것은 여자에 국한하지 않는다. 여자와 짝이 되어, 그녀와 공시적으로 존재하는 나에게도, 복점은 행동의 규범 이 되어 있다. 상실의 시대의 나와 나오코의 만남에서 나오코의 죽음에 이르는 스토리는 우 연이라는, 그야말로 무라카미적인 핵심요소에 의하여 유도된다.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대강의 연대를 더듬어 보자, 나는 고등 학교 시절에 나오코와 나오코의 애인 기즈키와 셋이서, 기묘한 사 랑의 공동체를 경험한다. 1967년, 그것은 허구의 신화 세계이다. 여기서 우선 무녀의 모티프는 기즈키의 동기 없는 자살이라는, 세 사람의 공 동체를 파괴하는 행위의 몫이 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서 나는 대학생이 되고, 우연히 나오코를 다시 만난다 1968년.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1969년. 그러나 나오코는 정신 질환으로, 교토의 산 속에 있는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 아야만 한다. 그곳도 역시, 기즈키와 나오코와 내가 공유한 것과 똑같은, 긴밀한 공동체의 세계이다. 나는 나오코를 만나기 위해서 요양원으로 간다. 나는 레이코 여사라는 연상의 여인을 알게 되고, 그녀를 통해서 나오코의 정 신의 균형을 되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나오코는 자살한다.(1970년). 이 소설은 요양원에서의 나오코와의 짧은 접촉, 거기서 두사람이 산책한 초원 의 광경을 회상하는 데서 시작된다. 불완전한 사람들의 일그러짐 상실의 시대의 첫머리에서 초원을 헤매는 나와 나오코는 무녀의 연설을 쓴다. 그것은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 초원이 끝나고 잡목 숲이 시작되는 그쪽 경 계쯤에 있는 우물에 대한 이야기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우물-독자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가공의 작가 하트필드의 화성의 우물 이 야기가 생각날 것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이 우물을, 1973년의 핀볼의 잠언풍의 단편을 퍼즐처럼 짜 맞춘 서장에서, 나오코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에 나오는 우물을, 그 전신으로 가 지고 있다. 나오코는 먼저 1973년의 핀볼의 우물 이야기와 함께 무라카미의 소설에 등장 한 것이다. 무라카미의 소설에서 이야기는 언제나 일종의 시공의 일그러짐이라는 비현실 성을 띠고 있다. 거기서 말하는 우물의 주술성에 부목하자. 상실의 시대는 1973년의 핀볼의 똑같은 주술성을 이어받는 것이다. 무라카미는 핀볼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건을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날, 뭔가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무엇이든 좋다. 사소한 일이다. 장미꽃 봉오리, 잃어버린 모자, 어렸을 때에 마음에 들었던 스웨터, 낡은 진 피트너의 레코드...... 더이상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하찮은 것들의 나열이다. 이틀이나 사흘쯤, 그 뭔가는 우리의 마음을 헤매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 돌아간다. 어둠, 우리의 마음에는 여러 개의 우물이 파져 있다. 그리고 우물 위로 새가 가로질러 간다. -1973년의 핀볼중에서 상실의 시대의 첫머리에서 나에게 우물 이야기를 하는 나오코는, 우물 위로 날아가는 새의 궤적에 의하여, 바로 소설의 블랙 홀을 점치는 한 사람의 무녀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녀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시커먼 무거운 액체가 이상한 도형의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똑같은 도형, 복점의 도형은 바람의 모래를 들어라 의 새기 손가락이 없는 여 자 아이에게도, 양을 쫓는 모험의 완벽한 귀를 가진 키키에게도, 키키의 분신같 은 유키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괴한 여자 아인인 나에게도,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영매, 주술사의 세계이다. 특징적인 것은, 무라카미의 영매는 댄스 댄스 댄스의 호텔이나 전화, 1973년의 핀볼의 핀볼적인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드의, 무기질인 인공 세계에 등장한다 는 것이다. 전자 기숭의 영매와 나오코의 영매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의 부라운관에서 보는 아이들은 onoff작동에 의하여 나타났다 가 소멸하는 영매가 아니었던가? 그녀들의 나타남을 우리는 아날로그하게 유츄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서 1973년의 핀볼의 주제이고 주물인 핀볼도 역시, 작가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선택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소한 일이다. 핀볼이 아니고는 안된다는 필연성은 아무데도 없다. 핀볼과 나의 만남에는 드라마도 없고 이야기도 없다. 우연의 메커니즘이 정밀하게 작용할 뿐이다. 그리고 이 우연의 메커니즘은 어떠한 의지적이 선택이 낳는 드라마보다도 심 오하고, 어쩐지 무섭다. 무섭고, 유머러스하다. 분만 아니라, 작가는 소설의 주제 핀볼이 우연의 산불이며, 그것이 다른 무엇 으로도 대치될 수 있는 것임을 소설 속에서 명백하게 보여 준다. 이 분명한 언명에 의하여 무라카미의 소설 공간은 전통적인 소설 밖에 놓인 다.. 그 탯줄이 끊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소설의 아날로그한 이야기 구성 방식-원인과 결과가 연쇄하는 인과 관 계의 유기적 연계-을 해체하는 언표가 된다.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는, 댄스 댄스 댄스에서 불려 나온 도깨비 패의 이루언 중 대표적이 존재다. 그녀는 무라카미 취향의 쿨한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쿨한 여자다. 뿐만 아니라 나오코는 냉감증의 여자다. 다시 말해서 글자 그대로 쿨하다. 그녀는, 나와의 단 한 번의 성교 뒤에 볼 수 있었던, 당구의 아름답고 인상적인 쇼트를 연상케 하는 유일한 경우를 제ㅚㅇ하고, 언제나 메말라 있다. 그것은 그녀가 기즈키라는 나와 그녀의 공통된 친구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평 형성이 결정적으로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라카미의 성애 뵤사는, 실제의 여성과의 섹스를 묘사할 때에도 결코 열을 띠지 않는다. 그것은 무라카미가 여기서도 축어성의 원칙, 즉 낱말이나 구절을 수식없이 그 대로 표현하는 원칙을 충실히 적용하기 때분이다. 성교는 성교, 페니스는 페니스, 음모는 음모, 바기나는 바기나라고 바로 집어 말한다. 에로틱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아무런 주저 없이 펴현하기 때문에 오히려 청결 한 느낌이 든다. 절대 영도의 에로티시즘이다. 시체 보관소의 성애를 연상시킨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해부학적은 아니다. 심리의 메스도, 깊숙이 파고들어 가는 내시경도 쓰지 않는다. 페니스는 페니스라는 이름의 얄팍함과 썰렁함에 머물고, 바기나는 바기나라는 이름의 얄팍함, 썰렁함에 머물러, 페니스라는 이름, 바기나라는 이름의 비현실성 이 교차하고 있는 듯하다. 이름의 비현실성에 되돌려진 페니스와 바기나, 그것은 죽음의 완전성, 세계의 끝의 완전성에 의하여 군살을 뺀 기관, 기관 없는 신체라고나 할 만한 것이다. 상실의 시대의 핵심을 구성하는 기즈키의 죽음은, 동기가 없는 자살이다. 그것은 앞뒤 문맥에서 끊어진,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죽음이다. 우리는 이 죽음에 연속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모른다. 이 죽음에 닿으려고 하는 손은, 손가락의 조금 앞에 빛을 띄운 개똥벌레에 내 미는 손처럼 허공을 잡는다. 모든 의미 부여가 배제되어 있는 만큼, 이 죽음을 도체에 전이하여 나오코와 나 그리고 상실의 시대라는 작품에 절대적이라고 할 만한 힘을 미친다. 이 힘이 미치는 곳, 불완전한 삶을 사는 사람을 확실하게, 완전한 죽음으로 끌 어당긴다. 나오코의 살은 기즈키의 죽음을 전후하여 완전히 빠져 버려, 완전한 육체로 변용해 있다. 완전한 육체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돌의 꿈, 죽음의 비현실성을 이미 몸에 지 닌 육체이다. 그 육체를 앞에 두면, 나는 성적인 흥분조차 느끼지 않을 정도이다. 내게 나오코의 냉감이 옮는다. 기즈키의 완전한 죽음, 죽음의 거세 작용이 가능하는 것이다. 무라카미는 기즈키의 죽음을 그리기 위하여 환유를 쓴다. 앞에서 언급한 당구장의 이런 환유이다. 나는 그날-기즈키가 죽은 날-그가 마지막으로 친 볼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 어.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쿠션을 필요로 하는 볼이어서, 나는 설마 그게 제대로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지. 그런데, 아마도 무슨 우연에 의한 것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쇼트는 흰 볼과 붉은 볼이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부딪쳐서, 그것이 결국 최종 득점이 된 거야. 지금도 눈에 선할 정도로 깨끗하고 인상적인 쇼트였어. 이 쇼트, 죽음의 쇼트는 또한, 성의 쇼트-무라카미식의 무기질, 무동기, 쿨의 극치로 묘사된 남녀의 성교-로 치환해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완전히 우연에 의한 쇼트, 그것이 나오코를 쳐서, 그녀의 눈동자에 이상한 도 형의 소용돌이, 복점의 도형을 그렸던 것이다. 나오코는 이 기억 속에서 산다, 라기보다는, 그녀는 이 잔존기억 자체이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헤어진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나에 대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이것을 달리 말해보자. 그러면 그것은 고도 자본주의 사회가 당신에게 알리는 마지막 신탁이 될 것이 다. 고도 자본주의 사회는 쿨한 여자, 무녀의 말로 이렇게 알리는 것이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나에 대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라고. 나오코가 죽은 후, 그녀의 여자 친구인 레이코 여사도 같은 말, 똑같은 잃어버 린 인간의 말을 되풀이한다. 나는 이젠 끝나 버린 인간이예요. 당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이전의 나 자신의 잔존 기억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지즈키의 죽음은 나오코를 붙잡아, 그녀를 죽음의 세계로 빼앗아 간다. 그 죽음은 이번에는 레이코 여사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죽음의 제패, 그것이 이 소설의 결론일까? 우리의 이름과, 우리의 세계는 그 잔존 기억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첫머리 시문에는 많은 축제를 위하여라고 씌어져 있다. 지즈키의 완전한 죽음, 블랙 홀, 그 기시감, 잃어버린 것의 기억을 앞에 하고 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일그러져 보인다. 무라카미가 말하는 축제는 , 이 살아 있는 자의 일르러짐이다. 나오코에게는 그것이 보인다. 나오코의 일그러짐을 보는 나에게도 그것이 보인다. 그것은 우리 불완전한 사람, 잔존 기억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공통된 일그러 짐이다. 무라카미는 그것을 축제라 부르고, 그 축제를 위하여 상실의 시대를 바친 것 이다. 2.허무의 숨결 주물적인 관계 설정을 나타내는 시적 대상물 왼쪽하고 조금 지나서 관리인이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채 깅의 왼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어둡고 미근미끈한 원시림의 벽이 찢겨 나간 것처럼 사라져 버리고, 대지가 허무 속으로 함몰했다. 거대한 골짜기였다. 경치는 장관이었지만, 거기에는 따듯함이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깎아지른 수직의 암벽을, 온갖 생명의 모습을, 거기에서 떨어내 버리고, 그래 도 모자라서 둘레의 풍경에 그 불길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의 불길한 커브이다. 무라카미는 종종 가공과 현실이 접하는 기묘한 장소를 소설속에 그려 낸다. 이와 같은 불길한 숨을 토해 내고 있는 허무의 장이 야말로, 무라카미 소설의 제작 현장임에 틀림없다. 그는 백지 위에 가공의 양의 이야기를 써나가면서, 분명히 이 허무의 숨결을 느꼈을 것이다. 똑같은 숨결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보다 단적으로 두 세 계를 가르는 강의 웅덩이에서 피어 오르고 있다. 초원의 입구 가까이에 있는 마지막 커브를 꺾은 데서부터 강은 갑자기 정체하 기 시작하여, 그 빛깔이 불길한 느낌이 드는 깊은 푸른 색으로 변하면서 천천히 나아가, 앞쪽에서 마치 작은 동물을 삼킨 뱀처럼 볼록해지면서, 거기에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세계의 끝에서 또한 아래에서도 볼 수 있다. 웅덩이에서 증기처럼 솟아오르는 거대한 숨결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땅속에서 울려 퍼지는 무수한 사자의 몸부림치는 신음 소리 같기도 했 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세계의 끝에서 무라카미의 소설에는 이와 같이 허무의 숨결이 몰아치는 곳이 설정되어 있어 서, 거기서 허구는 현실로, 현실은 허구로 재빨리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웅덩이의 저편에, 거리의 외부, 세계의 끝의 밖, 다시 말해서 현실 세계, 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내가 활약하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곳도 역시 소설의 세계인 것은 물론이다.) 시적인 대상물 클립 두 세계의 접점을 몇 가지 더 살펴보자. 내가 지하의 어둠에 익숙해져서, 지상의 아주 하찮은 빛, 예를 들면 지하철의 라이트에도 눈이 부셔서 눈물을 흘리는 부분이다. 전에도 이와 똑같았던 기억이 있어 라고 나는 말했다. 지하철의 구내를 걸었어요? 그게 아니야, 빛 말이야, 눈부신 빛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일 말이야. 그런 것, 누구에게나 있는 일 아니예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것과는 달라. 특수한 눈이고, 특수한 빛이야. 그리고 아주 추워. 내 눈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줄곧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져 있어서 빛을 볼 수가 없는 거야. 아주 특수한 눈이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세계의 끝의 나도 역시, 이렇게 해서 빛을 볼 수 없게 된다. 망루를 내려가서 강을 건너 서쪽 언덕을 올라 방으로 돌아와 보니, 아침 햇빛 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눈이 상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감으면 눈물이 그치지 않고 줄줄 쏟아져 내려, 소리내어 무릎위에 떨어 졌다. 찬물로 눈을 씻어 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나는 창의 무거운 커튼을 내리고, 눈을 꼭 감은 채로, 거리감이 상실된 어둠 속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져 가는 기묘한 모양의 선이란 조형을 몇 시간이난 바라 보고 있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세계의 끝에서 또 있다. 클립이다. 클립은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단편성에 대한 주물적인 관계 설정을 적절하 게 나타낼 수 있었던 시적대상물이다. 클립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의 두 세계에 등장하는데,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필이면 왜 클립인가. 라는 물음은 영원히 허공에 뜬 채이다. 클립에 관해서는 우리는 아무런 아는 바가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클립은 나에 의해서 발견되어, 그 존재 이유가 없음을 알자 마자, 시적인 차원으로 옮겨져 세계의 끝의 정태적인 질서로 짜 넣어졌던 것이 다. 생각이 나지 않아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카운터로 가서 거기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클립을 하나 손으로 집 어,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하지만 뭔가가 있었던 것 같아. 그건 확실하다구.. 그리고 당신도 거기서 만났던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세계의 끝에서 이 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소설가가 그의 현실 속에서의 일상 생활에서, 예를 들어 탁자 위의 클립이 눈 에 들어와, 어떤 가람과 클립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이것은 소설가의 완전히 자의적인 행위로서, 필연성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소설의 등장 인물이 클립과 짝지워진다. 기묘한 배합이었다. 새털 베개와 과자라든가, 잉크 병과 레터스라든가 하는 정도로 기묘한 배합이 었다. 공통점 같은 것은 아무데도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반드시 내가 모르는-아니면 생각이 나지 않는-비밀의 터널이 있을 것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이런 식의 감상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클립을 집어 들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생 각이 나지 않아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나는 강한 기시감을 가지고 있어서, 이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 낌이 든다. 당신도 어딘가 에서 만났던 것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대화의 중간에 내가 클립을 하나 집어 든 것은 완전한 우연이다. 소설가의 붓으로 소설의 등장 인물이 된 사람이 어쩌다 기묘한 배합으로, 클 립을 앞에 두고 생각이 나지 않는다.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러니까 독자쪽, 다시 말해서 소설밖에 있는 시점에서의 감상일 뿐이다. 소설 속에 있는 등장 인물인 나는, 그런 감상을 가질 이유가 없다. 나와 클립은 단지 영상의 질서 속에서 만난것이다. 영사의 질서 속에서란 무엇을 말하는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는 원더랜드 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서 한 장의 사진에 찍힌 한 사나이와 종이 클립의 기묘한 배합. 현실이라면 그 사람은 클립을 유심히 바라본다든지, 깊이 관찰한다든지, 철학 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상의 차원에서는, 그들 모든 설정이 무의미해진다. 영상의 차원에서는, 그 사람이 클립을 바라본다는 것조차도 할 수 없다. 그 사람과 클립은 그 저 단지 거기에, 일체의 과거, 일체의 이유를 상실하고, 한없이 디지털하게, 한없이 비연속적으로, 희박하게, 추상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존재한다라기보다도 이미 그 존재가 소멸하고, 그림자만을 남길 뿐인 것이다. 상화의 공시성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등장 인물은, 무엇과 함께 변화한다는 공시성, 코끼리 의 소멸에서 말하는 선득함 별개의 시간성을 호흡하고 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내가 서서히 세계의 끝의 내 쪽으로 상화되어 가는 과 정을 보면, 이것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인조 직원이 나의 방을 파괴하고 간 뒤, 거기를 찾아온 도서관 서적 담당 여직원의 대응은 그 가장 가까운 예이다. 아니, 내 방은 쓸 수가 없거든 하고 나는 말했다. 냉장고도 망가졌고, 식기도 거의 다 없어졌거든, 그래서 음식을 만들 수가 없 어. 알아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알아?. 네, 하지만 제법 깨끗이 정리돼 있었지요?. 당신이 치운 거야?. 그래요, 안 되나요?. 오늘 아침에 다른 책을 한 권 더 가지고 갔더니 문은 열 려 있고 방안이 흐트러져 있길래 치워 둔 거예요. 이것은 명백히 이미 저쪽으로 조금 건너가 있는 사람의 표백이다. 그 덩치 큰 사나이가 얼마나 철저하게 나의 아파트를 파괴했는가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녀의 이 담담한 말이야말로 오히려 보통일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 는다. 사실은 그녀도 역시 나와 함께, 그 밖의 온갖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공간과 함께, 상화의 작용을 받아 소설의 등장 인물로 화해 있으므로, 세계의 끝쪽으로 아주 조금 이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처럼 거창한 액션 영화식의 폭력의 흔적을 보고도, 문이 열려 있 고 방 안이 흐트러져 있길래라는 정도의 감상 밖에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사진에 찍힌 인물이 그의 곁에 배합된 클립이라는 이물-객 관적으로 보면 이물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실제로는 객관적으로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람과 종이 클립의 관계를 기묘한 배합으로 보는 것은 인간의 주관성, 그의 마음이다.-을 완전히 무감동, 무관심, 무감각으로 보는 관계 설정과 균형이 맞는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그 정도까지, 사진 속의 인물 정도가지는, 상화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나를 찾아오는 갖가지 상화의 단계와 연동하는 형태로 새로운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무라카미의 상화의 공시성은 다음과 같은 광경의 서술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모든일이 휠씬 이전에 한 번 일어났던 일 같았다. 벗는 옷과 깔리는 음악과 대사가 조금씩 변화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차이 같은 것은 별반 의미가 없다. 빙글빙글 돌다가 언제나 똑같은 데에 다다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회전 목마를 타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아무도 따라잡지도 않고, 아무에게도 따라잡히지도 않으며, 똑같은 데에만 다 다른다. 모든 것이 옛날에 일어났던 일 같아라고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물론이예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내 손에서 그라스를 사져 가고, 셔츠의 단추를 강낭콩 깍지의 심줄을 벗길 때처럼 하나씩 천천히 벗겨 갔다. 어떻게 알지? 알고 있으니까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내 발가벗은 가슴에 입술을 댔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내 배위에 걸쳐 있었다. 모두가 옛날에 한 번 일어났던 일이거든요. 그저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에 요, 그렇죠?.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입술과 머리카락의 감촉에 몸을 맡겼다. 나는 손톱깎이에 대해서 생각하고, 세탁소 가게 앞 평상에 있던 달팽이에 대 해서 생각 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에서 여기에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무라카미 하루키답게 하는 특색이 전부 나타나 있다. 우선, 나는 수동적이다. 상화하는 주체의 능동성에 비하여, 상화되는 대상에 수동성이 지적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등장 인물은, 사랑하는 주체가 아니라, 사랑 받는 객체이다. 그런데, 사랑 받는 객체, 즉 상화되는 대상은, 수동적인 것과 동시에 희박하고, 냉담하며 쿨하다는 것이, 종종 관찰된 바이다. 사랑 받는 객체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등장 인물들은, 그리하여 성긴 언설-디 지털한, 비연속적인 언설밖에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일반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의 언술에서 다음 언술사이에는 대개 비약이 있고, 미연속적으로 되어 있 어서, 그 간극을 설명이 메워 준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언어의 디지털화 사랑 받는 객체의 언설, 상화된 대상의 언설은 이리하여 차츰 성기게 되고, 냉 담해지고, 마음을 잃어 공백의 언설에 접근해 갈 것이다. 사랑하는 주체의 언설에 비해서 사랑 받는 객체의 언설은 더욱더 적어질 것이 다. 그리하여 한족은 서서히 밀도가 높아지고, 다른 쪽은 서서히 밀도가 희박해질 것이다. 그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사랑 받는 객체의 언설의 소멸이라는 사태가 초래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등장 인물에게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음 을 지적해 왔는데, 이와 같은 의지의 결여라는 상화 현상은 마지막에 가서는 아 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침묵, 소설 자체의 무화로 기운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다. 헛간을 태우다라는 단편에 나오는 나의 여자 친구의 애인인 그는 사랑 받는 객체의 언설의 소유자이다. 그는 나의 집에 여자 친구와 함께 놀러 와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는 중에, 느닷없이 가끔 헛간을 불태우거든요 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나에게 한다. 헛간을 불태운다라는 말은 앞뒤의 문맥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필연성에 서 가장 먼 곳에 놓인 언어로서, 앞에서 언급한 클립이 시적인 대상물이었던 것 과 똑같은 의미로 시적인 언어이다. 가장 디지털한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단편이 무라카미의 소설 군에서 이색적인 것은, 그의 소설의 주인공인 내 가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능동적인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사랑 받는 객체이자, 지지철한, 성긴 언설을 가 진 사람의 헛간을 태운다라는 무에 가까운 말을 앞에 두고, 내쪽이 사랑하는 주 체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된 데에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지극히 강력한 디지털성을 지닌 그에 대해서 나는 상대적으로 아날로그화되는 것이다. 다른 무라카미의 소설에서는 그다지 볼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왜라고 묻지 않고는 못 배긴다. 왜 헛간 같은 걸 불태우는 거지?. 이상해요? 모르겠는 걸, 당신은 헛간을 불태우고, 나는 헛간을 불태우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고, 나로서는 어느쪽이 이상한가라기보다는, 우 선 그 차이를 분명히 해두고 싶거든, 서로를 위해서 말이지. 게다가, 헛간 이야기는 당신이 먼저 꺼낸 것이다. 그렇군 하고 그는 말했다. 틀림없이 그 말이 맞아. 그런데 라비 상카의 레코드 가지고 있어요?.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나는 그의 지나친 디지털성을 앞에 놓고 애가 타는 것이다. 원래가 내 존재의 양태가 보통 멍한 것이었고, 항상 비연속적인 언설과, 사랑 받는 객체의 언설로 상대방을 따돌렸지 않았던가? 라비 샹카의 레코드 가지고 있어요? 이런 식상한 디지털형의 대화는 앞뒤 관 계에서 조금 비약해 있어서, 일종의 공백이 있다는 데에 비밀이 있는 듯하다. 본래는 나의 언어인, 이와 같은 그물코가 성긴 언어를 그가 쓴 셈인데, 그로 인하여 나는 당장에 밀도가 짙은, 아날로그형의 사람으로 변모한다. 이 관계는 모든 인간 관계에 부연할 수 있는 심리주의의 정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멍한 사람, 공백에 가까운 의식의 소유자, 비연속적인 언어를 가 진 사람, 무라카미식으로 말하면 쿨한 사람은, 아날로그적인 사람보다 항상 정신 적인 우위에 선다는 것이다. 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이 두 행 속에서는, 다른 어떠한 논리의 응수보다도 격렬한, 두 멍한 정신의 열띤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헛간을 태운다 라는 비연속적인 언어의 공백, 그 성긴 그물 코가 승리를 거두게 되어, 나는 스스로의 수동적인 스타일을 버리고, 헛간을 태 운다라는 말을 둘러싸고 면밀하고 이론적인 조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지는 것이다. 다음의 예문에서는, 그가 쿨하다는 것이 거의 희화화되어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자리를 찾는 척하고, 그의 모습을 찾았다. 그는 곧 눈에 띄었다. 그는 창가에 혼자 앉아서 카페오레를 마시고 있었다. 점포 안은 안경이 새하얘지도록 더웠는데, 그는 검은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채였다. 머플러도 풀지 않고 있었다. 상화되는 객체가 수동적 존재이고, 상화하는 주체가 능동적 존재라는 것은, 헛 간을 태우다에서는 거의 도식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상화되는 객체의 수동성이, 공백에 가까운 비연속 언어를 불러들인다 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수동성이 그 극한에서는, 언어의 불가 능성으로까지 다다르게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헛간을 태운다라는 비연속적인 언설을 둘러싼 소설은 그런대로 가능하지만-사 실, 단편 헛간을 태우다는 소설로서도 성립의 위태로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 임 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에 가까운 언설의 거세 작용이 소설 자체에까지 미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헛간을 태운다라는 언설에 의한 소설은, 아마도 불가능하다. 완전히 비연속인 언어는 언어의 죽음, 바로 침묵에 다름 아니다. 세계의 끝의 거리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는 차츰 거기에 접근해 가는 것이 아 닐까?. 내면이 없는 여자 등장 인물의 존재감의 부재 자연에서 반곡이란 없다. 물론 아침은 날마다 찾아오고, 봄은 해마다 찾아온다. 하지만 똑같은 아침은 하나도 없고, 마찬가지로 똑같은 봄은 없다. 완전히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자연의 현상에서 추상화 된 사념을 끌어들여야만 한다. 반복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상적 공간에서뿐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1이라는 숫자는 몇 번 되풀이해도 변함없이 1이다. 마찬가지로, 탁자 위에 흩어져 있는 클립은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클 립이라는 개념 아래서 보고 있으므로 동일하게 보이는 것이고, 그 자체는 하나 하나 미묘하게 서로 다는 것이다. 그런데, 클립을 찍은 사진의 경우, 사진에 찍힌 클립은 다른 종이 클립을 반복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허용된다. 왜냐하면 상으로서의 클립은 종이 위에 놓인 그림자와 빛의 집합일 뿐만 아니 라, 우리의 클립이라는 심상에서 그 상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등장 인물이 고유 명사를 갖지 않고, 특별히 인상적 인 성격을 갖지 않으며, 또 일반적으로 고유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그와 같은 상이 지 니는 반복의 본질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소설들 통하여 동일한 내가 정확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을 독자는 본다. 무라카미는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 한 권의 장대한 소설을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래로 계속 써왔다고 할 수 있다. 나의 반복을 소설가의 주체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반복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불가사의한, 마치 나의 분신처 럼 나에게 바싹 붙어 있는 여자의 반복이다. 무라카미의 네권의 장편 소설과 두권의 단편집을 읽는 중에 떠오르는 것은, 나란 존재의 희박함과 동시에, 여자란 존재의 희박함이다. 무라카미의 네 권의 장편 소설과 두 권의 단편집을 읽는 중에 떠오르는 것은, 나란 존재의 희박함과 동시에, 여자란 존재의 희박함이다. 소설이라는 것에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등장 인물의 존재감이, 그에게서는 오 히려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이전의 소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지평에 서는 것은, 바 로 이런, 인물의 존재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야말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다. 아마도 무라카미는 소설이라는 것의 존재 양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인물의 존재감이 아니라 부재감을 그릴 수 있는 소설의 가능성을 만난 것인지도 모른 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다. 상화된 인물을 소설이라는 상적공간에 등장시킨다는 무라카미의 방법론이, 인 물 조형의 부재라는 결과에 도달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한 권의 장편 소설을 계속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과 마찬가지의 뜻에서, 들림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 한 사람의 여자를 주인 공으로 하는 한 권의 소설밖에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 다. 무라카미 소설의 여자들은 서로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에, 새끼손가락이 하나 없다든가등등 그녀들에게서 외면적인 수식을 제거하면, 그녀들은 구별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녀들에게는 내면이 없는 것이다. 여성적인 존재로의 전이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은 한 편의 유머 소설로서 읽을 수도 있다. 원한다면, 거기에서 연애 소설의 풍자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나는 객체라는 것이 얼마나 달아나 버리기 쉽고 희미한, 손에 잡기 어려 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실은 우리의 아날로그한 사랑하는 마음이, 사랑 받는 객체를 그런 식으로 달 아나 버리는 여자로 바꾸어 버리는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디지털한 존재란, 언제나 여성적인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적이란 생물적 분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수동과 능동이라 는 두 상대적 관계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디지털한 존재, 사랑 받는 객체는 또 상화되는 대상이기도 해서, 우리는 거기 에서 일관되게 수동적인 존재-여성-를 볼 수 있다. 무라카미 소설의 나는,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여성화된 존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이란, 대개 수동적이고, 비연속적인 언설을 쓰며, 달아나 버리기 쉽고, 사라져 버리기 쉬운 희박한 삶을 가진 사람, 상화된 존재의 디지털 성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다. 무라카미 소설의 나와 여자는 반드시 두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 개별적인 개 체가 아니다. 내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여자가 있다. 나는 여자와 합쳐서 하나의 페스소나를 형성하고 있다. 그 페스소나란 바로 육체의 소멸-세계의 끝-이라는 패스 워드에 다름 아닌지 도 모른다. 나와 여자는 사라져 버리는 데에 그 가장 강력한 디지털성을 발휘하는, 희박 한 영상공간의 부민이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에 나타나는 부재인 여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여 자들의 원형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존재가 조금씩 방안에 잠입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희미한 흰 그림자 같았다. 얼굴도, 손도, 발도 아무것도 없다. 빛의 바다가 만들어 낸 아주 사소한 일그러짐 속에 그녀는 있었다. 그녀가 나의 이야기와 함께 부재인 여자의 방에 등장해 오는 모습에 주목하 자. 그녀는 여자임과 동시에 여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녀에게는 야릇한 비현실감, 부재를 둘러싼 리얼리티 같은 것이 주어지고, 그녀가 호흡하는 공간에 빛의 바다가 만들어 낸 아주 사소한 일그러 짐, 다시 말해서 바로 영상 공간에 다름 아니다, 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 다. 공허한 언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은 공허한 언설이다. 언설 그 자체가 공허하다는 것을 인식한 언설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공허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면 투명한 푸른 하늘의 공허 함 같은 것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불필요한 형용을 배제한 하지만도 만약도 그러나도 그대도도 없는 푸른 하늘 의 순수함에 가까운 것이, 무라카미 문학의 가장 뛰어난 점이다. 그것은 무라카미가 그의 문학에 의지적으로 관여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의 문학에 대하여 무의지적이고 또한 무방비적이다. 그는 때때로 주체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뭔가에 의해서 씌어짐을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은 스타일을 취할 때가 있다. 이하는 그 몇몇 예이다. 그녀가 알몸으로 침대에서 빠져 나가, 부엌에서 보드카 토닉을 만들고 있는 동나, 나는 탓치 미 투나잇이 들어 있는 조니 마티스의 레코드를 올려 놓고, 침 대로 돌아와서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나와 나의 말랑말랑한 페니스와 조니 마티스와 함께. 하늘은 커다란 칠판이고...... 하고 노래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두 잔의 마실 것 을 일각수에 관한 책 위에 쟁반 대신 올려서 가지고 왔다. 내가 눈을 감고 컴퓨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그녀가 새로운 보드 카 토닉을 두 잔 만들어서 가져 왔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둘이 나란히 어깨에 기대어, 두 잔째의 보드카 토닉을 홀 짝거렸다. 레코드가 끝나자 바늘이 되돌아가, 조니 마티스의 레코드를 다시 한 번 처음 부터 연주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하늘은 커다란 칠판이고......하고 흥얼거리게 되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에서 게으르고, 수동적이고, 쾌락에 찬, 이것은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원형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인용문에서 무라카미의 창조 행위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뭔가를 표현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몇 개의 단어를 짜 맞출 뿐이다. 노래의 노랫말이라든가 사람의 이름이라든가, 음악의 제목이란든가, 음료나 술 의 이름 중, 의미가 지극히 적은 말이 몇 개 나열됨으로써, 그의 문학 에서는 저 절로 성립한다. 더 과 감한다면, 두 예문 중 두 번째 예문은 첫 번째 예문의 단순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창조에 대한 의지가 거의 작용하고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수동성도 역시 완벽한 것이다. 술은 그녀가 가져다 주는가 하면, 레코드는 완벽하게 재 작동된다. 나는 틀림없이 노래를 부르지만, 그것도 남의 노래를 따라서 부를 뿐이다. 이런 게으름, 이런 무의식처럼 으스스한 것은 없다. 무라카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무의식성처럼 정확한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에서 이것은 한편으로 지극히 낙천적인 사상이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한 절망의 표 현이기도 하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전면 부정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비연속적인 전신 현실의 세계에서 비현실의 세계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의 제 30장은 나의 머릿속에 들리는 표하게 비현실적인 소리의 서술로 시작된다. 그것은 노인들이 구덩이를 파고 있는 기표한 소리다. 우리는 여기서 모두 제각기 순수한 구덩이를 계속 파고 있는거야. 목적이 없는 행위, 진보가 없는 노력, 아무데도 다다르지 않는 보행, 멋지다고 생각지 않나?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지. 아무도 앞지르지 않고, 누구에게도 따라잡히지 않아.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어. 아킬레스가 거북을 앞지를 수 없다는 놀리 배반이 성립하는 세계이다. 인간은 시간을 확대해서 불사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분해해서 불사에 이른다. 아킬레스의 다리가 거북을 따라잡을 때까지의 시간을 무한히 분석해 가는 한, 아킬레스는 영구히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 여기서 노인들이 파고 있는 구덩이도, 그와 같은 영원의 시간, 두께가 없는 순 간 속에서 파지고 있는 것이다. 무한히 계속되는 순수한 결과로서 구덩이를 파지만, 그 구덩이는 왜?,어디로/ 라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 구덩이이다. 여기서, 노인들의 구덩이를 파는 행위는 예술 작품의 제작을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와 같은 공허한 장난으로서의 예술 창조에 감정 이입을 하고 있지 않다. 노인들의 구덩이 파는 소리는, 나의 머릿속에 비현실적인, 평평한 것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현실적인 공간에 사는 사람이 그 비현실성을 의식하고 있다는, 자기 언급의 구조가 여기에도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앞의 인용에서 한군데, 기억에 남을 만한 문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도 앞지르지 않고, 누구에게도 따라잡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를 둘러싼 세계의 공시성과 기시감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하여 참고로 한 나의 독백 아무도 따라잡지 않고, 누구에게도 따라 잡히지 않으며 와 정확히 대응하고 있다. 두 세계, 즉 현실과 비현실사이의 침범이 여기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의 레벨에서 다른 레 벨로의 역전을 볼 수 있는데, 역전의 순간에, 현실인 것으로 여겨졌던, 레벨이 소설이라는 비현실의 레벨-여기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소 설-로 다시 역전하는 것이다. 싸고 있던 것이 싸여 있는 구조 속에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는 하나의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 바흐의 푸가처럼 무한히 계속 상승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무한히 계속 상승한다는 착각을 주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비현실성의 심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에서는 그와 같이 세계의 끝이 비현실을 표 상하고, 하드보일드 원더랜스가 현실을 표상한다. 거기에 첫 번째 비연속인 것이 가로놓여 있다. 그런데 현실 쪽에 속해야 하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비현실성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은 방금 본 그대로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해서 그의 소설의 비현실성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소설에서 이른바 리얼리티를 뽑아 내어, 가능화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현실의 살을 도려내고, 말하자면 추상적인 선만을 남기는 것이다. 그의 소설이 독자에게 수척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단편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에서, 가난한 아줌마의 이야기가 얼마나 추상화되 고, 비현실화되어 있는가를 다음 문장에서 살펴보자. 마치 가난한 아줌마는 비연속인 그물코가 성긴 틈새에서, 계속 풀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비좁은 유리케이스 속에서 시간은 오렌지처럼 아줌마를 쥐어 짜고 있었다. 물 같은 건 이제 단 한 방울도 나올 게 없다. 나를 잡아 끄는 것은, 그녀 속의 그런 완벽함이다. 이제 정말 단 한 방울도 나올 게 없다구!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중에서 가공화, 비현실화, 요컨대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무라카미는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다. 다음은 헛간을 태우다에서의 인용이다. 차츰차츰 내 둘레에서 현실감이 빨려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다. 옛날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밀실에 가도고 공기를 조금씩 뽑아 가는 형벌에 어울린다는 말이 나온 적이 있다. 어떤 식으로 죽게 되는지,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나는 문득 그 일이 생각 났다. 종래의 소설가가 그 모든 재능을 쏟아서 등장 인물에게 현실감을 부여하려고 애쓸 때, 무라카미는 그 반대로, 소설의 등장 인물을 소설의 등장 인물답게 하기 이하여, 그 현실감을 뽑아 간다. 이 커다란 전환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사로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것이다. 무라카미는 소설의 현실감을 심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얇게 만든다. 그리고 비현실감을 심화하는 것이다. 비현실감은 그 심도를 더해 감에 따라서, 마침내는 스스로의 비현실성을 명시 하기에 이른다. 비현실적인 것의 자기 언급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설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소설이라 일컫고, 이야기는 스스로를 가리켜서 이 야기라 일컬으며, 말은 스스로를 가리 켜서 말이라 일컫는다. 등장 인물이 그림자를 잃고, 스토리는 어는 소실점을 향해서 소실하려고 한다. 무라카미의 소설에서는, 그와 같은 공허감을 향한 전신이, 소설과 그 등장 인 물을 향해서 기다리고 있다. 이 전신은 자기 자신을 향한 전신이므로, 남의 눈에 띄는 거창한 전신은 아니 다. 오히려 두드러지지 않는, 비연속성인, 대개의 경우 간과되기 일스인 젓니, 그 것은 투명한 전신이다. 4.하루키 소설에서의 키 워드 1) 깊은 우물에 담김 뜻 직유와 은유의 자유로운 구사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의 초기 3부작이나, 세 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는 우화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으므로, 그 비유 는 직유든 은유든 간에 중복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특히 1973년의 핀볼은 전편 이 모드 비유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1973년의 핀볼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70년대 의 학생 운동을 일종의 게임, 유희로 보고 있다는 뜻이며, 그래서 마른 우물에 돌이라도 던져 넣는다라든가. 깊은 우물 바닥의 소금쟁이와 같은 비유가 나타난다. 또 1장에 들어가기 전, 1969-1973년 이라는 제목이 붙은 프롤로그에서는 나오 코라는 하는, 나의 대학생 때의 연인과 우물 이야기를 결부시키고 있는데, 그는 죽어 버린 연인, 잃어버린 사람, 차단된 관계등 상실을 표현하는 데에 깊은 우물 이란 키 워드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나는 우물을 좋아한다. 우물을 볼 때마다 돌을 던져 넣어 본다. 돌멩이가 깊은 우물 바닥의 수면을 때리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없 다. 폐쇄성과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우물이라는 키 워드 무라카미가 그처럼 우물이라는 말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작품을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소설속의 소설로서, 데레크 하트필드라는 가공의 작가가 쓴 화성의 우물이라 는 sf 풍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는 날 우주를 방황하는 한 청년이 화성 표면에 무수히 패어진 우물에 내려 가, 기묘한 힘에 감싸여 다시 땅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가 우물을 빠져 나오는 데 15억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우화이다. 여기서의 우물은 시간의 일그러짐을 상징하고 있다. 이 청년에게 얘기를 거는 바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네가 우물을 빠져 나오는 동안에 약 15억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 자네들의 속담에 있듯이, 세월은 화살과도 같지. 자네가 통과해 온 우물은 시 간의 일그러짐에 따라서 파여 있는 것일세. 그러니까 우리들은 시간 사이를 방황하고 있는 셈이지. 우주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그래서 우리들에게도 갈비도 없고, 죽음도 없어. 다만 바람뿐이네. 여기서의 우물은 폐쇄적인 공간임과 동시네 시간의 흐름을 상정하고 있다. 반면 상실의 시대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렇다. 그녀는 나에게 들판의 우물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우물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는지 어떤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내부에만 존재하는 이미지나 기호였는지도 모른다. 무라카미에게 있어서 우물이라는 말은, 주인공 자신의 자폐나 내향적인 마음 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60년대 후반 이래의 대항 문화가 폭풍처럼 스치고 지나간 뒤의, 폐쇄된 시대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우물이라는 좁은 세계 속에 갇혀 버리고, 또 들어앉아 버린, 실어증의 상태,무 언가 전달하는 것은 물론, 커뮤니케이션을 할수 없는 상황. 무라카미의 소설을 꼼꼼하게 읽어 보면, 그곳에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간과 는 서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허무주의가 짙게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자가 우물이라는 말은 키 워드로 해서 그의 소설을 의식적으로 읽는다면, 그 숨은 테마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우물이라는 키 워드는 최신작인 태엽 감는 새에서도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 하고 있다. 독자들이 무라카미의 소설을 일고 느끼게 되는 것은, 어둡다는 것과, 비유난 대화가 멋지다는 것, 두 가지라고 생각되는데, 이것은 상대적인 평행 관계이며 빛과 그림자 같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 이것은, 무라카미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미국화된 일본 사회 속에서, 일종의 밝음과 그 이면의 자폐적 상황 및 퇴행적인 사회 상황은, 무라카미의 소설 속에서와 마찬 가지로 빛과 그림자, 표면과 이면을 짊어진 상황과 같기 때문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안고 있는 우물과 수맥 파내려 가기 무라카미의 상실의 시대가 수백만 부나 팔린 배경에는, 이러한 누구나 다 안 고 있는 우물이나 삶과 죽음과 같은 양면성을 연애라고 하는 이야기로 씀으로 써, 독자의 지지를 받았기 대문이 아닐까? 무라카미가 데뷔작 당시 붙어 리얼리즘을 배제하고, 미국 소설을 모방했다든 가, 문체가 번역투라든가 하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고작 80년대에 와서야 우화적 인 세계를 구축해 온 일본 문단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라카미는 90년대에 도대체 어떤 것을 생각하고, 무엇을 지향하려 고 하는 것일까? 그는 시대의 변화란 인간의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상황을 어 떻게 받아들이는가? 그곳에서 어떤 가치관을 만들어 나가는가/ 하는 것의 중요 성을 말하고 있다. 즉, 수용, 이화, 재국축 이라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90년대를 무라카미의 테마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재구축, 재생의 시 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공투 세대라고 불리우는 중년들에게 있어서, 청춘기에 상실한 것, 앞 에서 지적한 우물로 상징되고 있는 자폐나 내향의 세계에서 다시 한 번 세계를 재인식하고, 세계상을 확립하려고 하는 시도인 것이다. 또 하나는 문학의 근본, 아이덴티티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는 시대가 될 것이 다. 그것은 할자 문화와 영상문화, 이른바 버추얼화된 사회 속에서, 문학이라는 것 이 과연 살아 남을 수 있는가, 그리고 모양을 다르게 바꿔서라도 살아 남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과학 기술의 진보는, 문학 그 자체에도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물론 위대한 문학, 시대나 국영을 초월하여 인간의 심리를 깊이 통찰한 문학 은, 그 어려운 역경을 견뎌낼 것이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진보해도, 인간의 심리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애 형태나 방법은 사회나 풍속과 함께 변화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테크놀러지가 발달한 컴퓨터의 세계에서는, 가상 현실감이라는, 생동감 넘치는 영상이 인류의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비현실인가 하는 경계 가 애매해질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구별이 불가능한 사태가 예상된다는 말이다. 만약 이것이 상품화되고, 일반화된다면, 자연히 문학의 아이덴티티 같은 것은 사라져 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어떤 측면에서는, 무라카미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의식적으로 리얼리즘을 배제한 것은, 문학사 속에서 본다면 획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미국이 조정해 온 80년대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될지도 모른 다. 지금의 사회는 겉으로는 마치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수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며, 그 모순과 인간의 내면을 충분히 그려 내지 못한다면, 문학은 사멸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다. 현대의 모든 인간은 각자의 마음속에 우물을 안고 있으며, 그 우물을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독한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면, 그 수맥을 한층 더 깊이 파 내려가 보려는 시도가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90년대 문학의 과제가 될 것이다. 2) 쥐의 비밀 쥐라고 불리는 인물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부터 시작된 쥐 3부작과 댄스 댄스 댄스에 이르는 쥐 완결편까지, 그 전공투 시절에 꿈과 삶, 생사를 같이했던 친구 쥐의 이름은 끝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쥐라는 별명으로 일관한다. 이 쥐는 단순한 별명 이상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쥐는 작가의 손에 의해서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그렇게 이름 붙여 진 것이며, 그에게는 이 쥐라는 호칭이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쥐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 제3장에서 우선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부자 놈들은 모두 엿이나 먹어라." 쥐는 카운터에 양손을 짚은 채, 나를 향하여 우울한 얼굴로 그렇게 고함쳤다. 이렇게 부자를 싫어하는 쥐에 대해서도 하트필드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되어 왔다. 그 중세서도 가라야 유키히토 씨는, 쥐라는 호칭에 관해서 198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런 해답을 내놓았다. ...그 이름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단순한 변별적인 기호이다. 그것은 1973년의 핀볼에서 쌍둥이 아가씨에게 붙여진 이름과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 그녀들은 나에 의해서 208과 209라고 불린다. 나와 쥐와의 최초의 만남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제4장에서 이렇게 시작된 다. 내가 쥐와 처음으로 만난 것은 3년 전 몸의 일이었다. 그것은 우리들이 대학에 입학한 해로, 두 사람 모두 굉장히 술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사정으로 우리들이 새벽 4시가 넘어서 쥐의 검은색 피아 트 600에 함께 타게 되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공통의 친구라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쥐라고 불러 줘"하고 그가 말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은 거지?" "잊어버렸어, 아주 오래된 옛날 일이야. 처음에는 그렇게 불리면 싫었는데, 지 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무엇에든지 익숙해져 버리는 법이지." 쥐에게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그 뒤의 모든 작품에서도 일체 해명이 되어 있지 않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불명이다. 그러나 어쨌든, 여기서 작가는 그에게 쥐라고 하는, 유일한 호칭을 부여한 것 이다. -얼굴이 쥐처럼 생겼으니까 별명이 쥐. 누구나 다 쥐라는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어는 작품 에서도 쥐 같은 얼굴을 한 쥐 묘사는 행해지고 있지 않다. 즉, 쥐라는 기호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닌 것이다. 쥐에게는 도대체 어떤 기호 조작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일까?. 쥐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은, 단순히 변별적인 기호라고 말한 가라야 씨는 또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가령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에 고유명이 없는 것과, 무라카미의 작품에 고유명 이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연원년의 풋볼의 다카시나 미쓰사부로, 혹은 후자의 별명인 쥐는 타입명이 다. 그러나 무라카미의 초기 3부작에 등장하는 쥐라는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인 물의 외형이나 성격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무라카미 작품에 나오는 쥐는 과연 쥐처럼 몸집이 작고 약삭 빠르다고 해서 쥐라는 별명이 붙여진 것은 아닌 듯하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제18장에는, 키가 큰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170센티미터정도라고 되어있다. 이렇게 보면, 쥐의 키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닌 일반적인 일본인의 키이고, 키가 작다고 해서 쥐라고 불릴 정도로 작지는 않다. 왜 쥐인가 쥐의 태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완전히 무시되어 왔다. 그것은 오로지 작품속 표면상의 어디에도 씌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다 소 쥐 해독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무도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 자신도 이 건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문장을 쓸 때에는 어딘가에 있는 친구에게 조용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 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알아 줄 사람은 알 줄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무라카미는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래, 알아 줄 사람은 알 줄 메시지 라는 것의 설정을 굉장히 의도적으로 해해 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색적인 이상한 기호=쥐도 또한 그러한 것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무라카미가 어느 날, 쥐를 그렇게 이름 붙였을 때에는 역시 그곳에 어떤 의도 가 분명히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제 39장에는 이것으로 나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물론 후일담은 있다라는 전제가 나온 뒤, 나는 29세가 되었고 쥐는 30세가 되었다고 씌어 있다. 이 기술만으로 쥐의 태어난 해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다. 우선 내가 태어난 해를 특정할 수 있다면 쥐가 태어난 해도 상대적으로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제19장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야기하면 길어지지만 나는 21세가 된다. 제2장에서 이 이야기는 1970년 8월 8일에 시작해서 18일 후 즉 같은 해 8월 26일에 끝난다고 나와 있다. 이것으로 적어도 1970년 8월에 나는 21세가 되는 셈이니까, 나의 태어난 해는 1948년, 혹은 1949년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8월까지 그 해의 생일을 맞았으면 1949년, 맞지 않았으면 1948년이다. 그렇다면, 나의 생일은 언제인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제35장에서 작가는 그렇게 쓰고 있다. 따라서, 나의 태어난 해는 1948년이라고 여기서 명백히 특정할 수 있게 되었 다. 작가가 나는 29세가 되고, 쥐는 30세가 되었다고 했으니까, 당연히 쥐는 1947 년생이 돼야 하지만, 만일 무라카미가 일부러 후일담이 씌어진 시기를 나와 쥐 의 생일 사이의 시기에 설정했다고 하면 쥐의 태어난 해를 1947년이라고 확정지 을 수는 없는 것이다. 쥐가 태어난 달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6장에서 알 수 있다. 본문 속 이야기는 1970년 8월중의 이야기이므로 다음달이 생일이라는 쥐의 말 에 의해, 그가 태어난 달은 9월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다음에 씌어진 1973년의 핀볼이라는 작품에서는 본문의 시작인 1969-1973에 다음과 같은 작품이라고 설명이 되어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쥐라고 불리는 사나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 14장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쥐는 눈앞에 늘어서 ㄴ6개의 빈 맥주 명을 멍하니 바라본다. 은퇴할 시기 일지도 모른다고 쥐는 생각한다. 이 술집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마신 것은 18세때다. 수천 병의 맥주, 수천 개의 후라이드 포테이토, 주크 박스의 수천 장의 레코 드, 물논 30이 되건 40이 되건 얼마든지 맥주는 마실 수가 있다. ...25세, 은퇴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나이다. 똑똑한 인간이라면 대학을 나와 은행의 대부계라도 앉아 있을 나이이다. 위의 내용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이미 알고 있던 사항을 합쳐 계산해 보면, 쥐가 태어난 해는 1948년 9월이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만약 쥐가 1948년 9월생이었다면 1973년 10월에 이미 그는 26세가 되어 버리 기 때문이다. 나는 29세가 되고 쥐는 30세가 되었다.고 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의 후일 담에서의 이 기술은 굉장한 속임수 기술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나와 쥐는 사실은 같은 나이이며, 실은 그 생일은 불과 3개월 가량밖에 차이 가 나지 않은 것이다. 즉 무라카미는 이 후일담이 씌어진 시기를, 일부러 나와 쥐의 생일 사이의 시 기에 설정했다는 얘기인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하트필드와 같이 이 교묘한 속임수 기술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 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쥐가 태어난 1948년이라는 해는 사실은 쥐해였던 것이다. 쥐해에 태어났으니까 그 사람의 호칭은 쥐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왠지 쥐라고 부르는 것은 근거가 빈약한 것 같다. 그뿐이라면 같은 1948년생인 나도 역시 쥐가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 상세하게 쥐의 발자국을 쫓아가 보기로 하자. 쥐를 통해 알 수 있는 무라카미의 교묘한 기호 조작 쥐3부작 째이기도 한 장편 제3작 양을 쫓는 모험에서, 쥐의 탄생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나는 스물아홉이 되었다. 앞으로 9개월만 있으면 서른이 되려 하고 있다는 대목뿐이다. 이것은 쥐가 나에게 보낸 최초의 편지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로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나는 아니다. 그것은 쥐를 가리킨다. 쥐가 앞으로 9개월이면 서른이 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9개월이라는 그때는 도대체 언제냐 하면 1977년 12월이다. 그렇다면, 쥐가 양을 쫓는 모험에서 1977년 12월 21일경, 나에게 앞으로 9개월 이면 서른이 되려 하고 있다고, 편지를 써 보내고 있는 것에 의해서, 그의 생일 은 1948년 9월 21일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도 역시 이 작품 이전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의 생일 설정과도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보기 좋게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쥐 도 역시 나처럼, 이 3부작에서는 엄연한 연결을 가진 동일 인물로 그려지고 있 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니까, 무라카미는 처음부터 그러한 생일 설정을 한 다음에, 나와 마찬가지 로 쥐를 쥐로서 본격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결코 적당한 설정을 가지고서 나나 쥐를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쥐에 대하여 무엇인가 새롭게 발견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쥐의 더욱 정확해진 생일 날짜이다. 쥐의 생일은 1948년 9월 21일경이다. 이 새로운 사실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쥐를 쥐해 태생으로 숨겨 가면서 일 부러 설정하고 있던 무라카미가, 그 쥐에는 또한, 사실은 처음부터 9월 20일 태 생의 생쥐라는 것도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쥐라고 부른 것은 외형이나 성격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쥐는 결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은, 단순히 변별적인 기호라고 할 정도로 단수 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쥐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와 같이 쥐와 많은 인연을 갖고 있었니까, 옛날부터 쥐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라카미의 기호 조작을 절대로 얕잡아 보면 안 된다. 텍스트를 충분히 철저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양을 쫓는 모험에는 이런 기술이 있다. 누군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수고만 아끼지 않는다면 대개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3.하루키 소설 속의 양의 의미 기독교적인 세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양 단편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소나 언어와 함께 주인공 나는 양도 역 시 파묻었다가 언어와 함께 부활시킨다. 소와 양의 결정적인 차이는, 소는 매우 일본적인, 일본인과는 인연이 깊은 동 물인 반면, 양이라는 동물은 완전히 서양적인 동물이라는 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소와 양은 12지에서 그 방향성, 방위도 역시 정반대의 관계에 있다. 하루키는 소와 양을 그런 대조 동물로서 은밀히 포착하고 있지는 않았을가. 소가 불교 문화 혹은 선사상문화에서는 깨우침을 얻은 성스러운 동물인 한편, 양이라는 동물은 서양 사회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결부되는, 매 우 신성한 동물이며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사람들 앞에 부활한 것처럼, 무라 카미의 양도 역시 일단 파묻힌 뒤에 부활한 것이다. 무라카미에게 있어서 양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되는 양이라고 생각되며, 무라카미와 성서 세계와는 참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우선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주인공 나의 생일이다. 12월 24일이라는 것은 물론 크리스마스 이브이지만, 그것은 당연히 그리스도 교 사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되는 성스러운 날이다. 이 생일 설정에서는 어떤 의도적인 냄새를 느낄 수 있다. 한편, 쥐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제31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이런 말 을 하고 있다.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이 만일 그 효력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니." 쥐는 그렇게 말했다. 쥐의 이 말,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효력을 잃으면.....은 성 서 중에서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말이다. 그처럼 하루키의 작품과 성서 세계는 적지 않은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양에 관해서 분명히 성서=그리스도교 세계를 밑바탕으 로 해서 쓰고 있다고 생각되는 대목이 있다. 자동차는 약간 높은 언덕의 중심에 멈춰 서 있었다. 등뒤에는 차가 올라온 것 같은 자갈길이 이어져 있었고, 그것은 인위적일 정 도로 구불구불 구부러지면서 멀리 보이는 문으로 통해 있었다. 길 양쪽에는 사이프러스와 수은등이 연필꽂이 모양으로 똑같은 간격으로 늘어 서 있다. 사이프러스의 각 나무 줄기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매미가 기를 쓰고 매 달려서, 세계가 종말로 향하여 굴러가기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울어대고 있었 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이프러스이다. 유럽에서 죽음의 상징으로 묘지에 많이 심고, 또 잔가지를 장례의 상징으로 쓴다는 나무이다. 구약성서 속에 여러 차례 나오는 사이프럿, 그리고 삶과 죽음의 상징인 성스 러운 수목=사이프러스를 무라카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수목에 해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매미를 달라붙게 하고, 그리고 세계 가 종말을 향하여 굴러가기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울어대고 있었다고 동시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사이프럿,-종말이라는 흐름은 구약성서의 세계를 잘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발상의 흐름이다. 다음 문장을 주목해 보자. 하지만, 몇 가지 세밀한 증세는 분명해졌다. 40일 주기로 3일간, 강한 두통이 일어난다. 이것은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노인에게 옛날에 양이 들 씌웠을 때에 보여지던 증상이다. 이곳에는 40일 주기로 3일간이라고 씌어 있는데, 성서 세계에서 3일 간이란,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데 걸린 시간이고, 40일이란 하느님이 지상에 큰 비를 내 리게 하여 이른바 노아의 홍수를 일으킨 기간, 혹은 모세가 산 속에 틀어박혀 있던 기간, 그리스도가 단실을 하고 있던 기간이다. 무라카미가 들고 나오는 숫자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 지금가지의 정설이지만, 항상 평론가의 예상을 뒤엎은 작품을 발표해 온 무라카미는 여기서 명백히 의미 있는 숫자를 제시한 것이다. 양을 쫓는 모험에는 양 자체에 관해서 이렇게 씌어져 있다. 양의 목적은 도대체 무었이었습니까?. 나도 모른다하고 양 박사는 내뱉듯이 말했다. 알 수가 없다. 양은 나에게는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놈에게는 커다란 목적이 있어. 그것만은 나도 알 수가 있었다.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입변시켜 버리는 거대한 계획이다. 그것을 한 마리의 양이 하려고 했습니까?. 놀랄 성 없다. 칭기즈칸이 한 일을 생각해 보라. 양이 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가 말한 것처럼 유감이지만, 나로서는 말로 그것을 표현할 수가 없다. 양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양적 사념의 구현이라 고밖에는. 그것은 선적인 것입니까?. 양적 사념에서는 물론 선이다. 시험 삼아 이러한 양을 그대로 그리스도로 바꿔놓아 보면 양이 그대로 그리스 도는 아니라 해도 그 존재 자체는 상당히 그리스도적 요소가 강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소설이 추구해야 할 것은 크건 작건 간에 종교적인 문제라고 나는 생 각한다고 무라카미는 기술하고 있다. 무라카미는 당시 분명히 종교적 문제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일단 죽은 쥐가 부활한 뒤,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키 포인트는 나약함이라고 하고 쥐는 말했다. 모든 것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거야. 나약함이라는 것은 몸 안에서 썩어 가는 것이지. 마치 회저병에 걸린 것처럼 말이야. 나는 10대 중반부터 줄곧 그것을 느껴오고 있었어. 그래서 언제나 짜증을 부리고 있었지. 내 속에서 무엇인가가 확실히 썩어 가고 있다는 것이, 또 그것을 당사자가 계 속 느끼고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네는 알 수 있겠나? 그 나약함이란 도덕적인 나약함, 의식의 나약함, 그리고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나약함이다. 키 포인트는 나약함이다, 모든 것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말하는 쥐. 양의 그림자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던 것도 그 나약함 탓이다. 그러나 결국은 양의 완전한 지배를 거부하고 부엌의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신 의 목숨을 끊는 것과 함께, 양가지도 함께 죽이려고 한 쥐. 무라카미는 어느 정도나 깊이, 그리고 자세하게 그리스도교 세계를 알고 있었 을까?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가령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에게는 하느님이라는 개념은 없다. 나는 하느님의 존재는 믿지 않으나, 인간의 시스템으로서 그러한 힘 같은 것 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종교에 대해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를 보자 나이 먹은 성직자가 다가와서 어디서 왔는냐고 물었다. 일본이라고 내가 대답하니까, 종교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는 수 없이 불교 신자라고 대답했다. 무종교라고 했다가는 아토스 반도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니까. -우천염천중 GREECE에서 이렇게 보면, 아무래도 무라카미에게 있어서 하느님이나 종교라는 것은 그다 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무라카미가 양 세계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제39장에는 아내가 영화 수녀 요안나를 좋아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영화는 제목대로 크리스천영화이다. 여기에서의 아내와 실제 아내, 즉 무라카미 부이노가는 그 소설이 자전적인 소설인 점에 비추어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아내도 그러한 완전주의자 중 한 사람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녀를 만난 것은 1968년 4월, 문학부의 301강의실이었다. 최초에 얘기를 건 것은 그녀였다. 제국주의라니, 도대체 그게 뭐죠?하고 그녀는 말했다. 고대사다. 내가 우울증에 빠져서 모든 것이 싫어져 있을 때, 그녀는 언제나 나에게 성년 세셀리아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녀는 카톨릴계의 여자고등 학교에서 그리스도교 윤리 시간에 그것을 배웠 다. 그녀의 교양의 태반은 그리스도교 윤리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다. 위에 인용한 글은 하루키의 단편 사슴과 하느님과 성녀 세실리아의 한 대목이 다. 실제로 어떤 좌담에서, 무라카미는 부인과의 만남을, 그러고 보면 나도 최초의 강의 때, 아내의 옆자리에 앉았었지요.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클래스였어요. 클래스 토론을 하고 있었어요. 그 코론이 미국 제국주의와 아시아 침략이라는 테마였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여러 가지로 물어 왔지요. 제국주의가 뭐예요? 하고, 카톨릭의 여자 고등 학교를 나온 사람이어서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나도 대충 가프텨 주곤 했지요. 그러는 사이에 가까워졌습니다 하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무라카미 부인은 사슴과 하느님과 성녀 세실리아의 이야기 그대 로, 카톨릭계 여자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수녀 요안나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래, 무라카미가 지금가지 양 세계를 은밀하게 도입하 고 있었던 것은, 그러한 그녀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무라카미가 언제쯤부터 성서 세계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쨌든, 무라카미는 카톨릭 여자 고등 학교를 나온 여자와 22세때 이 른 결혼을 한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 살고 있으면 부부는 여러 가지로 닮아 가는 법이다. 무라카미가 현 부인의 영향 아래, 성서 세계에 강한 관심을 나타내게 되었다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동양의 12지에도 이어지고 있는 양 그런데, 크리스천이 아닌 무라카미에게 있어서 양은 구태여 성서 세계에만 관 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는 양이라는 말과 혼자 유쾌하게 장난도 치고 있었던 것이다. 12지를 아는 일본인인 무라카미에게 있어서 양이란 미이며 그것은 미시를 가 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제27장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가 2시 정각에 제이스 바 앞에 차를 댔을 때, 쥐는 가드레일에 걸터앉아서 카잔차키스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일고 있었다. 그리스도-양으로, 오후 2시 정각.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계가 2시 종을 치고 난 직후에,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처음에 두번, 그리고 호흡을 두번 충분히 사이에 두고 세 번. 문을 여니까, 그곳에는 양 사나이가 서 있었다. 오후 2시 종을 복선으로 해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양 사나이. 무라카미의 숨은 기술은 이처럼 철저하다.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양이 분명히 오후 2시 정각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 기호는 남남서라 고 하는 방각도 역시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라브 크래프트는 일직이 15세의 나이에 해왕성 외에 제9혹성의 존재의 가능성 을 논하고, 천문학자는 이것의 발견에 진력해야 한다는 투서를 사이엔티픽 아메 리칸 지에 했다고 전해지는데, 과학의 진보의 의한 당시의 제9행성=명왕성의 발 견과도 같이, 무라카미의 작품 세계에서도 역시 또한 확실한 궤도 관측에 의해 서 오후 2시 다음에는, 남남서라고 하는 새로운 별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라카미는 말 자체에 갖추어진 힘과 교묘히 희롱을 하는 명인이다. 쥐가 춧카이도라고 하는 북쪽, 그러니까 자의 방각으로 향한 것도 우연한 일 은 아니었을 것이다. 양은 그 구조에서 선이나 의 그리고 미와도 역시 단단히 이어지는 것으로 파 악되었을 것이다. 무라카미 자신은 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째서 양이냐, 하고 자주 질문을 받는다. 그것에 대한 답은 존재하고 있지만,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이라서 서보았자 별로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계기가 있어서, 양이라는 개념이 나의 머리 속에 입력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그래, 양을 테마로 한 소설을 쓰자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 시점에서 타이틀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양을 쫓는 모험이다. 그리고 즉각 춧카이도에 취재를 갔다. 양을 쫓는 모험은 번역되어서 해외에 소개된 나의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1989 년).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나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을 읽은 대부분의 미국인은, 이것은 순수한 폴리티컬 노벨이다 하고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소설에 나오는 양의 의미를 제각기 해석해서 나에게 들려 주었다. 그들 대부분은 양을 신화적이고 토착적인 것의 표상으로 파악하고, 그와 같은 역사적 의지가 글로벌한 세계와 커미츠해 나갈 때의 발열과 같은 것에 대해서 굉장히 흥미를 갖고 있었다. 나는 특별히 그러한 것에 흥미를 가지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니지만, 파악 방법으로서는 대단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지저스와 겹쳐지는 제이를 지적할 수 있는 것도, 이 소설 이 순수한 폴리티컬 노벨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제이, 만일 그가 그곳에 있어 주었더라면, 여러 가지 일이 틀림없이 잘 풀려 나갈 것이 틀림없다. 모든 것은 그를 중심으로 회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과 연민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을 중심으로, 지저스의 J,예루살렘 의 J,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J는 특별한 기호이다. 4) 일각수의 열활 상상 속의 동물인 일각수 무라카미의 소설에는 상상력이 빚어낸 상징물이 자주 등장한다. 태엽 감는 새 속의 태엽 감는 새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일각 수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는 일각수를 중심으로 그의 상징물 활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등장하는 일각수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 까. 가을이 찾아오자, 그들의 몸은 털이 길다란 금색의 체모로 뒤덮이게 되었다. 그들은 명상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조용한 동물이었다. 숨소리조차도 아침 안개처럼 조용했다. 그들은 녹색 풀을 소리를 내지 않고 먹고, 그것에 물리면 다리를 구부리고 땅 바닥에 앉아 짧은 잠에 빠져들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중, 세계의 끝에서 이러한 일각수의 기용에 대해서 무라카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 했다. 그것은 이른바 일각수는 아닙니다. 단지 뿔이 한 개 있는 동물입니다. 동물이 필요했었지만, 보통 동물로는 이야기에 잘 끼여 들어갈 수가 없었거든 요. 그것이 사슴이었다면 약간 곤란합니다. 나라 공원이 되어 버리니까요. 이렇게 보면, 무라카미가 그리는 단지 뿔이 한 개 있는 동물, 즉 일각수는 애 당초 상상 속의 동물이니까, 가을이 되면 털 색깔이 금색으로 변신하거나, 눈 색 깔이 청색이 되거나하기도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유니콘은 유럽의 전설상의 동물. 인도에서 태어나고, 말과 비슷하며 이마에 일각을 갖는다. 그 뿔로 만든 잔은 독을 제거한다고 한다고 씌어 있다.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양이상으로 낯설은 이 가공의 동물=일각수에 대해서, 세 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도서판의 여직원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선 최초에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일각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는 그리스에서 발달된 서구판 일각수이고, 또 하나는 중국의 일각수예요. 동양과 서양에서는 같은 일각수라고 해도 이 정도로 달라요. 동양에서는 평화와 고요함을 의미하는 것이 서양에서는 공격성이라든가 정욕 을 상징하는 것이 되니까요. 하지만, 어느쪽이든 간에 일각수가 가공의 동물이며, 그것이 가공이기 때문에 갖가지 특수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보면, 앞에서 인용한 세계의 끝에서 한 일각수의 묘사는 그 성격이나 의미에서 본다면 참으로 중국적이고 동양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판 일각수는 서양판 일각수와는 달리 성격이 매우 온순하고, 평화와 고요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다네무라 스에비로씨의 일각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일각수란 또한 이 런 동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상과 현실 사이의 공중에 떠 있는 일각수는 처음에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 의의 상징주의에서는, 아버지인 신에게 쫓겨난 천사 가브리엘에게 추격 당하거 나 해서 마리아의 태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숨는, 수태 고지나 처녀수태의 표상 을 떠맡고, 더나아가서는 그리스도 자체를 의미하고 있었으나, 중세를 지나자 갑자기 지상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다. 일각수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또는 존재할 수 없는 한에 있어서 불가능한 처녀수태의 증거, 따라서 지상의 현실의 오탁을 면한 순결의 증거였다. 일각수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 자체를 의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라카미는 이러한 일각수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도서관의 여직원에 의한 앞에서와 같은 설명은 모두 보르헤스의 환수사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녀의 설명에는 없었지만, 환수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문도 또한 실려 있 다. 성령, 예수 그리스도, 사자, 악, 그러한 모든 것이 일각수에 의해서 표현되어 왔다. 심리학과 연금술(1944년)에서, 융은 그러한 상징의 역사와 분석을 기술하고 있 다. 그러니까 무라카미는 일각수의 설명에 관해서, 한편에서는 공자나 칭기즈칸과 연관되는 것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분명하게 제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 의한 것이었을까?. 어떤 중요한 사실을 용이하게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대립의 결합성을 상징하는 동물-일각수 일각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동물인 데, 그것은 물론 이 작품의 밑바탕이 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빈번히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무라카미가, 1973년의 핀볼이후, 양을 쫓는 모험을 사이에 두고, 일 각수의 세계를 꼼꼼하게, 또 집요하게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무라카미 작품은 여러 가지로 연결이 되는 것들인데, 일각수-양-일각수라는 이 흐름도 역시 그러한 연결 아래 선택된 것이 아닐까?. 융의 심리학과 연금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성령, 예수 그리스도, 사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처녀가 사자의 여성적, 수동적 측면을 나타내는 데 대해서, 일각수 내지 라이 온은 사자의 영의 거칠고 길들이기 어려운 남성적인, 꿰뚫고 침투하는 힘을 나 타낸다. 그리스도의 비유 및 성령으로서의 일각수의 상징은 중세기 전체에 걸쳐서 알 려져 있었으니까, 물론 연금술사들도 이 상관 관계에는 깊이 통하고 있었으므로, 이 상징을 사용할 때마다 사자와 그리스도의 친근성, 아니 오히려 동일성이 그 들의 뇌리를 스쳐 지났갔을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미 말한 것처럼, 일각수는 일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악을 의미하는 일도 있다. 무라카미가 불확실한 벽에 둘러싸인 세계의 끝을 그리는 데 있어서, 사슴이 아니라, 일각수를 선택한 것은 이 동물이 악을 의미하는 일도 있다고 하는 대립 의 결합성 혹은 양성의 괴물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환수사전에 소개되고, 융의 심리학과 연금술에도 여러 부분에 걸 쳐 기재되어 있는 일각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개로 해서 명백히 양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아름답고 그리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악하다는 양 의 이 양면성은 얼마나 일각수적인가? 또한 숨소리조차도 아침 안개처럼 고요 한, 명상적이라고 해도 좋은 정도로 조용한 동물이라는 일각수는 얼마나 야오가 닮았는가?. 무라카미는 1973년의 핀볼이후 사실은 일각수라는 이름의 양을 혹은 양이라는 이름의 일각수를 자주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파악함으로써, 양을 쫓는 모험에서 한 불가사의 한 다음과 같은 묘사 도 역시 용이하게 납득할 수 있다. 그들의 눈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푸르고, 마치 얼굴 양끝에 솟구쳐 오른 작 은 우물처럼 보였다. 여기서 그들이란 양을 말한다. 내가 훗카이도에서 본, 서포크종의 양을 말한다. 양들은 저 푸른 눈으로 각자의 침묵의 공간을 응시하고 있는것이리라. 상식적인 판단에서 본다면 여기서 무라카미가 실재하는 양의 눈 색깔을 푸르 게 표현한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아무리 서포크종의 양이 오똑하고 긴 콧날을 갖고, 왠지 모르게 이국적인 풍 취가 있다 하더라도, 그 눈이 실제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푸를리가 없는 것이 다. 무라카미가 양의 눈 색깔을 명백하게 청색이라고 규정한 것은, 일각수와의 수 면하에서의 연결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도 그것은 깊은 호수와 같은 푸른 눈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무라카미에게 있어서 이러한 동물들에 대한 푸른 눈의 풍경은, 그에게 있어서 대단히 의미 깊은 숲 안쪽, 혹은 우물 밑바닥에 존재하는 침묵의 색깔이며 경치 인 것이다. 무라카미가 일각수나 양에게 보내는 간절한 생각은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다. 무라카미의 작품에서 일각수가 수행하는 역할은 사람들의 마음을 흡수하고, 회수하고, 그것을 바깥 세계를 가지고 가 버린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그러한 자아를 몸 속에 담아 둔 채 죽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희생적인 역할인가! 예수 그리스도도 또한 일찍이 사람들의 자 아의 무게를 짊어지고 죽어 가지 않았는가? 십자가란 바로 그러한 것이었을 것 이다. 물론 그 죽음은 예수 자신이 원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도시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었다. 세계의 끝이라는 도시는, 결국 일각수의 희생 아래 성립되어 있는 완벽한 도 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약함, 무력함과 같은 것은 그리스도 최후의 시도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묘사한 양 세계이기도 하다. 무라카미는 니체에 깊이 빠진 이 그리스인 작가한테서도 역시 커다란 근원적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5)전화에 담김 깊은 상징 하루키 소설에는 전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전화를 걸고, 받고, 또 아무도 받지 않는-그런 전화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이 적지 않다. 하루키 소설에 있어 전화란 단순한 통신 수단 이상의 깊은 듯이 담겨 있는 경 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하루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전화 이야기로 텔레폰이라는 단행본을, 불 문학자이며 요코하마 시립대 교수인 스즈무라 가즈나리 씨가 출판했다. 하루키 소설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와 비중을 차지하는 창작기법의 하나인 전화에 관한 중요 대목을 발췌요약한다. 전화에 있어서의 장소라는 개념 전화가 울린다는 것은 언제나 그 전화가 울리고 있는 장소를 불안정한, 혹은 불안한, 혹은 부재의 장소로 바꾼다. 먼저 전화가 울리고 있는 장소의 개념부터 생각해 보면, 대충 이렇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전화가 울리는 소리가 우리들을 어디까지 데려다 주는지 알 수가 없 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전화가 울리는 소리는, 단순한 물리적인 소리-그곳에 무엇 인가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무엇인가가 없거나, 결여 되어 있어서 누군가가 부르고 있다는 것, 즉 다른-장소에 있는-누군가의 -부름 까지도 나타내는 소리인 것이다. 전화가 울리는 소리는 그러한 사건이 닥쳐 왔다거나, 아직일어나지 않은 시간 과 이미 일어난 사건 사이에서, 언제나 늦게 닥쳐 오는 사건의 도래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전화벨이 지속되는 순간에 유지되는 것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고 하는 확실한 긍정성, 즉 벨 소리에 의해서 되풀이 긍정되는 누군가의 세계이며, 그 세계 그 자체가 되풀이해서 긍정되는 절단면이다. 아직 누구라고는 명명할 수 없으나, 이미 누군가로서, 부재의 상태에서 존재의 상태로 도래하려고 하는 사람,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임 부재하지도 않는 사 람, 그러한 불안정한, 존재하지도 부재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엇갈려 가는 사람의 결계속을 전화 벨 소리는 건너가는 것이다. 전화 벨 소리는 커뮤니케이션이 이어진다고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전화 벨 소리는 커뮤니케이션이 이어지는, 그 의미 자체를 알려 주는 소리 처럼 들리는 것이다. 전화로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예를 들어 수백 킬로미터 떨어 진 곳에 있다고 치고-전화는 두 사람 중 어느 쪽에 이어졌다고 말해야만 할까?. 수백 킬로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전화가 동시에 이어진다는 것에는-어긋난다 는 것에는-커뮤니케이션 그 자체가, 특히 거리를 전제로 하는 전화의 커뮤니케 이션 그 자체가 안고 있는 어긋남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거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전화는 이 거리를 명확히 열어서 보여주는 미디어일 뿐이다. 거리 속에서 거리를 열어서 보여 준다고 말해야 할까? 혹은 거리 그 자체를 멀리하는 것에 의해서 거리를 열어서 보여 준다고 해야 할까? 전화에는 거리 속에 이미 거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이미의 구조가 전화를 비현실적인 잃어버린 현실의 매체로 삼고 있는 것이 다. 이미 속에 이미 있는 이미, 후퇴해 가는 이미 반복되어지는 이미, 이미...이 어 미와 함께 전화의 공간은 일상적인 비현실성, 일상성에 내재하는 비현실성, 잃어 버린 세계의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존재와 부재 사이에 위치하는 생성 여기서 들뤼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생성이란, 역사나 진화에 있어서의 주체 개 념, 시간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생성으로서의 존재는, 존재라기보다는 존재/부재라고 불러야 할 것으로, 존재 에서 부재로의 변화 도중, 혹은 변화 사이에 있는 추상적인 선, 강도가 있는 면 이다. 조직도 아니고, 기관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며, 다만 사이를 흘 러가는 순수한 생성의 선, 동시 존재....., 소녀를 정의하는 것은, 분명히 처녀성은 아니다. 운동과 휴식, 빠름과 느림의 관계,원자의 결합, 입자의 방출의 존재가 소녀를 정의한다. 소녀는 기관 없는 육체 위를 계속 달린다. 소녀는 추상적인 선, 혹은 도망의 선이다. 그래서 소녀들은 나이나 섹스 사이를 미끄러져 간다. 소녀는 생성의 블록과 비슷한 것이어서, 그것과 대립하는 여러 가지 사항, 남 자라든가, 여자라든가, 아이라든가, 어른이라든가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다. -쥘르 들뤼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천의 고원중에서 전화의 목소리는 육체로부터 분리된 목소리라고 하는 본래의 성격을, 육체와 의 동시 존재라는 허구적인 형식으로 은폐하면서-그러니까 무의식중에 우리들의 의식에-현실로부터 동떨어진 거리라고 하는 의식의 상태를 준비하게 만든다. 우리들은 전화의 목소리에 의해서, 무의식중에 현실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 다. 무의식중헤 행해지는, 이 현실로부터의 동떨어진 거리라고 하는, 일종의 거세 작용을 , 오늘날에는 아무도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집합적인, 다수의 , 압도적으로 다수의 , 아니 인간이라는 무리 그 자 체의 무의식에 밤낮으로 쉴새없이 작용하는 묵시의 행사이기도 하다. 전화의 음성은 끝임과 동시에 끝나지 않는 끝 전화라고 하는 미디어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심정적 거리를 없애고, 연속성을 구하는 미디어이면서, 동시에 육체의 소멸,세계의 끝이라는 묵시적인 세계관으로 반전하는 것은, 전화의 음성이 육체를 떠나 표류하면서, 이 세계의 살아 있는 현 실, 현재의 표상 체계에 계속 부유하는 거세 작용을 내부에 잉태하고 있기 때문 이다. 전화의 목소리는 육체로부터의 추상적인 도망의 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고양이의 얼굴 없는 미소이다. 그것은 도망쳐 가는 존재-존재라기보다는 존재로부터 부재로의 이행인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거리를 없앰과 동시에 거리를 유지하기도 하는 것 같은, 멀어지는 것이 가까 이 가는 것과 일치하는 것 같은, 전화의 목소리는 여성=생성의 미디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전화의 목소리에 의해서 여성=생성의 세계에 짜 넣어지는 것이다. 전화를 통산 무라카미의 반복 기법 그녀와 헤어진 뒤에 나는 방으로 돌아와 여자 친구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 어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받지를 않았다. 신호음만이, 내 손 안에서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계속 울렸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의 전화 벨을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 씩이나 계속 울리게 했다. 그녀가 그 전화 앞에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 똑독히 느낄 수가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단편 땅속의 그녀의 작은 개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 전화를 통해 그려 보인 것은, 위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반복이라는 것이 문 학에 미치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극히 자명한 것으로서의 반복은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내가 계속 울리게 하는 전화 벨 소리에 나타나 있지만, 여기에서의 무라카미의 어법은 이미 기묘한 일그러짐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 어법이라면, 신호음만이 나의 손안에서 몇 번씩이나 계속 울려댔다고 쓰면 충분할 것이다. 무라카미의 문학은 간결함으로 특징지워지는데, 그런 그가 몇번씩이나 라고 써야 할것을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라고 세 차례나 되풀이한 것 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더구나 몇 번씩이나 하는 말은, 그 자체가 내부에 반복을 포함한 단어이므로,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서 그 말을 몇 번씩이나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번씩이나는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하고 되풀이되는 것에 의해서, 그 말 자체에 겹쳐지고, 몇 번씩이나 반복되는 사이에, 그 말이 본래 지 니고 있었을 몇 번씩이나라고 하는 말의 실체를 상실하여,말라르메가 말한 의미 에 가까운 무로 돌아가서, 어떤 소실점을 향하여 소실해 간다. 그러한 심연의 구조가 엿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무라카미는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라고 하는 세 차례 반복된 말은, 다시 한 번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얕지만, 동시에 아찔할 정도로 깊은 반복 기법 다시 한번 그 부분을 인용해 보자. 신호음만이, 내 손 안에서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계속 울렸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의 전화 벨을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 씩이나 계속 울리게 했다. 여기에서 심연의 바다를 알 수 없는 어법이라는 것은 사실은 심연이라는 것이 반전하여 어떤 뒤엉킴을 일으키면서, 심연의 각 구성 요소가 모조리 얕음으로 전환해 버린 심연 말하자면 얕은, 한없이 얕은 심연이라고 할 수 있다. 심연은 여기서 얕음으로 올라오는 것이다. 마치 전화 벨의 반복되는 소리가 심연에 작용해서, 그것을 얕음으로 부상시키 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전화 벨 소리가 얕은 공간을 되풀이해서 두드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전화 벨 소리가 심연을 얕음으로 되불러들이고 있다고 해서 그 깊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아찔할 정도로 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얕은 것이다. 여기서 전화 벨 소리가 몇 번씩이나 반복된다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근원이며 원형이라고 믿고 있는 것, 그 실재, 그 현존, 그 진실은 항상 이미 반복된 것의 흔적이라는 것을, 벨의 반복되는 소리를 통해서 몇 번씩 이나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순환하는 전화 벨 소리 무라카미가 쓴 작품의 반복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기로 하자. 그 처음과 끝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그녀와 헤어진 뒤에 나는 방으로 돌아와 여자 친구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 어 보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다시 한 번 천천히 다이얼을 돌렸다. 두 번째 문장의 다시 한 번은 첫 번째 문장의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보았다 로 돌아가 있다. 아니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회귀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데리다를 흉내내서 서로 이어져 있다고 보아도 좋다.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에 겹쳐지고, 거기에서 깊이와 얕음의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면서 첫 번째 문장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몇 번씩이나 가 그러한 이어짐에 속해 있었다 고 한다면, 이번에는 다시 한 번 이 문장에서 문장 자체가 문장으로 되돌아간다 고 하는 회귀의 , 그러나 회귀해 가는 장소가 전과는 전혀 다른 회귀의 구분을 구성해 보이는 것이다. 전화에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 우주 그녀는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글라스를 흔들 때마다 얼음 소리가 났다. 열려 있는 창문에서 때때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바람은 남쪽에서 다른 언덕을 넘어 불어왔다. 이대로 잠이 들어 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조용한 여름날의 오후다. 어딘가 먼 곳에서 전화 벨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에 관계되는 먼 곳의 감각과 비연속성. 여기서 말하는 그녀란 잔디를 깎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집의 주부인데, 그녀는 나를 집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녀의 딸로 보이는 여자의 부재의 방을 나에게 보 여 준다. 이 부재의 그녀의 방에서 울리는 전화 벨 이상으로, 전화의 디지털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예는 드물 것이다. 맥루헌이 전화를 편지와 비교해서 쿨 미디어라고 한 것이 상기된다. 분명히 무라카미에게는 전화의 우주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 곳에서는 나에게서 그녀에게 혹은 부재의 그녀에게 또한 그녀에게서 나에 게 전화가 걸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재의 그녀가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는 방황하는 전화도 있는가 하면 구역질과 반드시 동시에 걸 려 오는 무언의 전화도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팝스 텔레폰 리퀘스트의 디스크 자키의 방송국 안처 럼 말이다. 그런데 여섯 시의 접수 개시부터 한 시간, 방송국에는 10대들이 거는 전화가 쉴새없이 계속 울려댄다구, 그래, 잠깐, 벨소리라고 들어 보겠어?.......어때, 굉장하 지?. 10대들이 거는 전화도 있는가 하면, 한밤중의 전화, 어두운 전화도 있다. 한밤중의 전화는 언제나 어두운 전화였다. 누군가가 수화기를 들고, 그리고 조그만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고.....,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어쩔 수 가 없다니까, 안 그래?....거짓말이 아니라고, 왜 거짓말 같은 걸 하겠어?......아니, 그냥 지쳤을 뿐이야....., 물론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그러니까 말이야....., 알았 어, 알았으니까, 조금 생각하게 해주지 않겠니?....전화로는 잘 말할 수가 없다 구.... -1973년의 핀볼중에서 최초의 장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도, 전화는 문자 그대로 매체의 역할을 맡고 있다. 사실, 바람의 노래는 또한 전화의 노래이기도 해서, 전화에 의해서 비로소 무 라카미의 텍스트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팝스 텔레폰 리퀘스트는 그 가장 좋은 예인데, 여기에서 그야말로 하루키 그 라모폰이라고 불러야 할 세계, 전화의 우주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 라디오 프로그램으로부터 나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그리고 나는 5년전에 비치보이스의 캘리포니아 걸즈를 빌렸던 아가씨의 전화 번호를 알아내려 한다. 그것도 몇 통의 전화에 의해서, 그리고 전화를 통해 전화 번호를 찾는 수단이 없어졌을 때, 나와 그녀를 잇는 최후의 실마리도 끊어진다. 전화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은 내적인 공간이기는 하지만, 내성의 공간 은 아니다. 그곳에는 전화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 거의 독재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시스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그 속에 들어간 사람은 적어도 커뮤니케 이션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시스템이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것은 텔레비전 등의 영상에 의한 우리들의 의식의 지배와는 비교가 되지 않 을 정도로 직접적이고 일원적인 지배의 힘을 휘두른다. 양을 쫓는 모험에 등장하는 나의 여자 친구는 콜걸과 같은, 전화에 의해서 불 려지는 창녀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장편 소설은 어찌 보면 전화를 둘러싼 모험 소설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독특한 귀 역시 전화에 관계되는 페티시인데, 그녀의 개방된 귀는 이 렇게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내가 그때까지 눈으로 본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모든 것이 우주처럼 팽창하고,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이 두꺼운 빙하속에 응 축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오만할 정도로 과장되고,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이 깎아 내려져 있 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한의 모든 관념을 초월해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귀는 잎체가 되어, 낡은 한 줄기의 비처럼 시간의 경사면을 미 끄러져 내려갔다. 이 귀와 일체가 된 세계는 전화의 내적인 우주, 우리들 자신의 의식이 거기에 깊이 빠져 있어서, 대상화할 수도 상대화할 수도 없는 전화내부의 공간 자체이 다. 전화는 무정부주의적인 관념의 왕국 전화 목소리의 페티시즘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보다 전화의 목소리는 본래적으로 페티시하고, 그것은 언제나 앞뒤 문 장의 단절된 곳에서 들을 수가 있다. 그것은 돌연 앞뒤의 맥락을 단절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다시 당돌하게 소실한 다. 전화는 그야말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바람처럼 갑자기 찾아왔다가, 바람처럼 갑자기 사라져 간다. 그리고 뒤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이것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는 페티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구토 1979라는 단편 소설은, 전화의 그러한 페티시성, 일상 생활의 앞뒤 관계 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곳에서 가능 하는 전화, 구토 전화라는 것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의 구토의 원인은 이유도 없이 걸려 오는 장난 전화를 받고 나면, 반드 시 일어나는 구토이다. 여기서는 전화와 구토의 관련이 긴밀하기 때문에 전화의 비연속성이 명백해진 다. 무라카미가 기술하는 것은 그러한 원인으로부터 단절된 결과-여기서는 전화- 의 절단면이다. 전화의 목소리는 그 목소리의 소유자인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 라, 그 목소리가 발생한 장소로부터도 분리되어서 다른 장소로 옮겨와 있기 때 문에, 말하자면 목소리만이 독립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의 개성과 같은 것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존재로부터 일부분을 난폭하게 잘라낸 것 같은, 존재의 절단면과 같다. 그리고 양을 쫓는 모험에서, 문자 그대로 전화에 의해서 나의 귀에 전해지는 양의 이야기에서, 양이 갖고 있다고 하는, 인간의 체내에 들어가 발휘하는 카리 스마성도 또한 나에게는 앞에서 언급한 특별한 귀를 가진 여자 친구의 개방된 상태의 귀와 맞물려서, 전화의 목소리가 우리들의 의식에 대해서 발휘하는 내적 인, 영향력에 관한 기술에 겹쳐져서 읽혀지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도가니다. 정신이 아득해 질 정도로 아름답고, 그리고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사악하 다. 거기에 몸을 파묻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의식도, 가치관도, 감정도, 고통도 모두 사라진다. 우주의 한 점에 이르는 생명의 근원이 출현했을 때의 다이너미즘에 가까운 것 이다. 완전히 무정부주의적인 관념의 왕국이다. 거기에서는 무든 대립이 일체화한다. 그 중심에 나와 양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고 깨달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전화의 내적 우주에서는, 무든 대립이 일체화하는 것이다. 그이와 그녀가 전화로 통화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통화의 세계가 완전히 무 정부주의적인 관념의 왕국이라는 것은, 과장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페티시적인 전화 목소리 여자 친구의 귀가 페티시였던 것처럼, 양도 페티시이고, 그리고 전화의 목소리 도 페티시이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그 세가지 귀, 양 전화의 목소리가 일종의 주술성을 띠 고, 내적인 우주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폐쇄계의 우주여서 어느 곳에도 출구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폐쇄적 이고 내적인 이 우주가, 이야기의 진행과 함께 파괴되는 것처럼 양을 쫓는 모험 에는 기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전화의 목소리를 우주화시킨 무라카미에게 있어서, 어떤 특정한 개 인으로부터 개인에게 걸려지는, 배달자로서의 전화만이 소설 속에서 울리는 전 화일 리가 없다. 전화의 목소리를 페티시라고 할 때, 우리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물로서의 페티시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사물로서의 페티시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페티시란 사물의 흔적이며, 도망쳐 가는 대상이 남긴 흔적과 같은 것이니 말 이다. 혹은 데리다가 지금은 없는 재에서 말하고 있는 재 또는 재라고 하는 이름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재라고 하는 이름은 재 그 자체의 , 아직도 일종의 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명제로서의 재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 재는 있다. 혹은 거기에밖에 없다. 전화의 목소리는 거기에 라고 지정되고, 고유화되어서, 그 장소를 가졌을 때 그 순간에만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장소는 없다. 그 장소는 항상 이미 지정된 장소로부터 어긋난 곳에 있다. 여긴가 하고 생각하면 저기이고, 저기인가 하고 생각하면 여기인 식으로, 그것 은 비실재로서의 장소이며, 지금은 없는 재의 장소, 옛날에는 불이고 이윽고 재 가 되는 것이지만, 아직은 불이고 이미 재인 것 같은, 불이었던 과거가 재가 될 미래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그러한 장소를 갖지 못한 장소, 거기를 전화의 목 소리는 표류해 가는 것이다. 그것은 페티시로서의 전화의 목소리이다. 육체, 이 의식에 현존하는 현재로부터 단절되어서, 근원적인 것을 상실하고, 한없이 추상적인, 추상화된 선으로 화하면서, 전화의 목소리는 아직도 육체에 작 별을 고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육체이며, 육체의 현존에 한없이 가까운 곳에 있 으면서, 우리들을 향해서 와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단편 개똥벌레에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온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전화가 있는 고비의 의자에 앉아서, 그녀로부터의 전 화를 기다렸다. 전화는 3주일 간이나 걸려 오지 않는 적도 있는가 하면, 2주일 계속해서 걸려 오는 일도 있었다. 개똥벌레가 날아오른 것은 휠씬 나중의 일이었다. 개똥벌레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기라고 한 것처럼, 문득 날개를 펼치고, 그 다음 순간에는 난간을 넘어서 엷은 어둠 속에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급수함 옆에서 재빨리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빛의 선이 바람에 스며드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동안 거기에 머물고 나서, 이윽고 동족을 향하여 날아가 버렸다. 개똥벌레가 사라져 버린 뒤에도, 그 빛의 자취는 나의 내부에 오랫동안 머물 러 있었다. 데리다의 지금은 없는 재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라카미의 개똥벌레도 죽음의 암시에 의해서 그 강도를 가진 존재, 혹은 비존재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내가 전반의 인용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녀의 전화이고, 후반의 인용문 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개똥벌레가 날아오르는 순간인데, 두 가지 모두 같은 형태의 구문 속에 놓여 있어서, 그것은 이미 잃어버린 세계에 속하고 있다. 그녀는 나의 친구의 여자 친구였지만, 그 친구가 죽어서 지금은 그 죽은 친구 의 여자 친구의 전화를 나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나는 죽은 친구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화란 육체로부터 단절된 현재의 목소리를 전한다고 하는 의미에 서, 죽은 이로부터의 전화 이외의 존재 양태를 취할 수 없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듣고 있는 친구의 혹은 그이의 혹은 그녀의 전화의 목소리는, 이미 죽 어 있는 치국, 그이, 그녀의 미래의 죽음을 선취한, 이미 과거가 된 미래의 죽음 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것은 죽음의 목소리가 현재에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그런 것이다. 가상 엑스터시 전화가 끊어진 직후의, 그 뭐라고 할 수 없는 안타까운 미련, 잃어버렸다고 하 는 감정,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하는 결핍 의식, 그것은 목소리가 전해진다고 하는 연속성에 의해서 바타이유적인 의미로 의식된 죽음의 감촉이 남긴 미련이 며, 결여의 의식인 것이다. 전화란 그러한 갈 곳을 잃은 영혼이 언제까지나 방황을 계속하는 장소, 또는 개똥벌레가 있는 장소이다. 실제로 우리들은 전화라고 하는 미디어 이외의 장소에서, 그런 방황을 계속하 고 있는 영혼을 만나는 일은 없다. 바타이유의 연속성의 개념에서 말한다면, 성의 엑스터시가 그것에 해당되지만, 성의 엑스터시는 전화의 엑스터시와는 명백히 달라서, 비일상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 우리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다반사로 성의 엑스터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 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사무실이나 공중 전화나 응 접실에서 그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을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화의 목소리는 그것이 아무리 사무적이고 산문적인 용건의 목소리라 하더라도, 육체 밖으로 나온, 그리고 육체 혹은 현재를 구하는, 즉 거 리를 없애려고 하는 일종의 목소리의 공동체, 교류, 이어짐을 구하는 목소리라고 하는, 그 본래의 조건을 결코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화의 목소리는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끊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매일매일 완전한 무의식 상태인 채로 보편적으로 또 일상 적으로 작은 죽음, 작은 황홀, 작은 연속과 비연속의 희롱, 이른바 가상 엑스터 시르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이 아닌 어떤 엑스커시가 있을 수 있겠는가를 무라카미는 그려 나 간다. 전화의 공간은 비현실의 공간이다. 무라카미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결말, 결말없는 결말이라고 해야 할 소멸이 이야기하는 것도, 역시 작은 나와 작은 신의 스토리, 이 북시에 대한 하나의 재구축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무라카미의 소설은 하니야의 죽은 이의 전화통의 논리의 전개 가 도달한 장소를, 자신의 소설의 장소로 삼고 있다. 거기에서 작은 나와 작은 신의 스토리는 이미라고 하는 형식속에서 디컨스트 럭트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드보일드 원 더랜드의 나가 소멸하고, 이미 소멸되어 있는 세계, 이미 끝나 버린 세계인 세계 의 끝의 나의 세계에 하니야의 존재의 전화통식으로 말한다면-들어간다고 하는 부분은 결코 스토리 전개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없다. 거기에서는 분명히 주와 객의 일체화가 이야기되지만, 하니야의 존재의 전화 통에서의 작은 신, 사라져 가는 삶과는 달라서, 세계의 끝의 나는 이미 소멸된 삶의 흔적,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1973년의 핀볼의 그녀,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이라는 핀볼대가, 나에게 말하 는 것처럼 전화라고 하는 미디어의 세계는, 끝났어요,, 모든것이 라고 해야 옳은 세계이다. 전화에서 끝나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현존의 형이상학이다. 그것이야말로, 세계의 끝이라고 해야 할까? 세계의 끝속에서 끝난다고 하는 무라카미적인 사건이 전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전화속에서 세계 가 끝난다고 하는 그 끝나는 상태의 구조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하니야가 말하는 존재의 전화통에서는 주와 객이 일체화하는 동시에 주객의 통화는 끊기고, 이른바 불통이 된다는 대목에서 하나의 우화는 끝이 났는데, 내 가 이해하는 일반 전화에서는-그것도 죽은 이의 전화통임에는 틀림없지만-주와 객은, 미리 일체화되어 있는, 혹은 커뮤니케이션이 통하는 그 순간에 이미 두 사 람의 통화자는 동시적으로 세계의 끝속에 들어가 있는 사태가 보편적으로, 그리 고 항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고 치고, 커뮤니케이션이 통할 때까지 는 그이가 전화를 거는 사람, 나이고, 주이다. 그이 쪽에 모든 현존성이 쥐어져 있다. 그녀는 여기에 없는 사람이고, 이직없는 사람이며, 다른 장소의 사람,타인이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부재가 된다. 왜냐하면, 전화가 연결된 순간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서, 현존하는 육체가 상실되고 목소리라고 하는 추상적인 것, 육체의 뒷받침이 없는 목소리와 상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화에 의한 통화의 세계는 바로 그러한 세계의 끝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주체가 항상 이미 다른 주체에 의해서 객체로 변용되고, 주체가 상호 적으로 객체로 관통되는 형태로 소실하고 있는 게계, 객체=객체의 수평한 통화 가 유지되고 있는 공간인 것이다.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만"하고 나는 말했다. '제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쥐의 옛날의 연인 그녀와 내가 말을 나누는, 그 최초의 대화는 위와 같은 것이지만, 이 대화는 작중에서 그것이 전화의 대화라는 것이 명시될 때까지는, 전화의 대화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무라카미의 대화는 일반적인 마주보고서 하는, 현존의 대화라 할지라도, 전화 의 대화와 마찬가지로 1대1의 두사람이 기본인 대화이다. 더구나 무라카미의 대화에는 서로의 현존성, 그 주체에 관한 기술은 가능한 한 희박해서-즉, 이미 부재성의 각인을 띠고 있기 때문에-그것을 전화의 대화와 구별할 이유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라카미의 언어적 공간 무라카미의 소설에서 대화는, 일반적으로 ......라고 말했다는 식의 글로 도입되 어 있어서, 화자의 육체나 동작에 관계되는 사실적인 묘사가 결여되어 있다. 무라카미는 화자에 대해 세부적으로 살을 붙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야기로서의 추상적인 선은 있어도 육체가 갖는 존재감은 희박하 다. 이것은 무라카미의 대화가 전화의 대화와 비슷하다는 말은 아니다. 전화와 비슷한 대화에는 전화 대화의 리얼리티가 요구될것이다. 단지 무라카미는 소설의 대화에 전화라고 하는 미디어의 논리를 적용한 것이 다. "야아, 안녕하십니까? 오늘 아침, 근처의 동물원으로 캥거루를 보러 갔다 왔습 니다. 거기에는 라마도 개미핥기도 없습니다. 임팔라도 하이에나도 없습니다. 표범조차 없습니다. 그 대신 캥거루가 네 마리 있습니다." -캥거루 통신중에서 이것은 전화의 대화가 아니다.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한 편지의 서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은 명백하게 전화의 에크리튜르이지, 그 이외의 것은 아 니다. 하지만 단순히 대화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전화의 에크리튜르라고 부르는 것 은 아니다. 무라카미는 캥거루 네 마리라고 말하고, 그 이상의 묘사는 하지 않는다. 캥거루는 캥거루라고 하는 명사로만 기술되어 지는 것이다. 무라카미는 캥거루에 관해서, 그 이름만 취하고 다른 것은 버린 것이다. 그것은 있는 것을 그 이름으로 부르고, 그 밖의 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언 어의 공간이다. 그리고 무라카미 소설의 메크리튜르가 고유 명사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과, 그의 소설에 인명이 나오지 않는 것과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나, 그녀와 같은 무라카미 소설의 인물이 이름을 갖지 않는 것이 나, 그녀가 이미 고유 명사로-캥거루나 그 밖의 명사와 같이-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으 그녀는 새끼 손가락이 없는 아가씨라고 하는 이름을 갖고 있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그녀는 핑크빛 원피스의 뚱뚱한 처녀이며 위확장증의 아가씨인 것이다. 옛날 어느 곳에 아무하고나 자는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다. 그러나도 하지만도 단지도 그래도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술에 취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좀더 예의 바른 주정뱅이가 된다. 가장 일찍 일어나는 찌르레기가 되고, 가장 마지막에 철교를 건너는 유개 화 차가 된다. -양을 쫓는 모험 중에서 나는 좀더 예의바른 주정뱅이가 된다. 가장 일찍 일어나는 찌르레기가 된다. 무라카미의 혹은 전화의 고유 명사란, 그러한 생성의 결과=흔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 무라카미 소설의 전문을 전화에서의 이야기와 마찬가 지로 괄호에 집어 넣고 ......라고 말했다, 라고 고쳐 쓰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도망의 선에 의해서 요약된 말인 것이다. 무라카미의 페티시즘은 사물에 관계되는 페티시즘일 뿐만 아니라, 언어의 페 티시즘이기도 하다. 그것은 소설에서 기술의 단편화=블록화를 촉진시킴과 동시에, 이 단편화=블록 이 소설 언어에 대해서 고유 명사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라카미의 고유 명사는 브랜드 이름처럼 복수 원칙을 지닌, 씨앗 뿌 리기를 하는 성질의 것이어서, 인간의 이름처럼 어느 한 개체에 고정되지 않는 다. 단편집 빵 가게 재습격에 등장해서, 코끼리의 사육사가 되거나, 나의 여동생 의 약혼자가 되거나, 나의 공동 경영자가 되거나, 고양이의 이름이 되거나 하면 서, 여러 가지의 소설 사이를 표류하게 되는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하는 이름은, 그러한 복수 원칙의 고유 명사의 전형적인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가 이미 소멸되어 있는 곳, 전화의 유토피아 전화라고 하는 미디어의 비현실성을 그것이 동시 존재의 픽션을, 미디어의 내 부에 도입하는 것에서 기인하고 있다. 전화의 동시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당신과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 픽션이다. 내가 당신과 동시에 존재할 때, 나와 당신사이의 거리는 소멸되어 있어야 하 고, 그때 나를 나로서, 당신을 당신으로서 규정하는 주체는 상실되어 있다. 그래서 전화의 동시 존재는 그것이 성립했을 때, 이미 그 동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전화 공간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패러독스가 생 겨난다. 이것이 전화 공간의 동시성의 패러독스이다. 전화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지적되지 않는 일이지만, 거기에는 두 사람 이상 의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한다. 물론 제삼자가 함께 존재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만 전화의 이야기를 지탱하 는 것은 두 사람에게 한정된다는 것은 전화의 동시 종재성을 매우 원칙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세 사람도, 네 사람도, 다섯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라고 하는 것, 그렇기 때 문에 거기에는 엄밀하게 말해서 변증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고, 상호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상호 확인할 뿐인, 비인칭적인 대화가, 전화 대화으 기본적인 성격이 된다. 전화의 대화에는 외부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두 사람 사이를 목소리라고 하는 비현실적인 것이 오고 가는 것이다. 목소리라고 하는 비현실적인 것의 의미는, 전화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목소리 는 아니라고 하는 현실까지도 함축하고 있다. 전화의 목소리는 살아 있는 목소리는 아니다. 한없이 살아 있는 목소리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없이 살아 있는 목 소리에 가까운 것으로서 내보내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상의 목소리다. 물론 살아 있는 목소리라는 것도 가상임에 틀림없다. 살아 있는 목소리와 전화의 목소리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전화의 목소리는, 그 세련된 깊은 가상의 성질에 의해서, 살아 있는 목 소리의 가상적인 성질을, 그 내부로부터 우리들에게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그리고 이 비유의 유효성은 과소 평가 되어서는 안된다- 전화를 통해서 보내져 오는 목소리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내져 오는 영상과 평행적인 관계에 있다. 텔레비전의 영상을 실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나-그렇지만, 그것이 실 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텔레비전 본래의 목적, 그 신화 작용이 존재한다- 전화의 목소리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의 육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텔레비전 등의 영상이 우리들의 일상 세계에 부여하는 신화 작용보다, 전화의 목소리가 부여하는 신화 작용이 더 고도의 것이며, 정교한 것 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전화의 목소리가 지닌 정교함은, 전화 목소리의 살아 있는 목소리에 대한 은 폐 효과, 베일 작용일 것이다. 텔레비전 등의 영상에서의 은폐 효과나 베일 작용이상으로, 목소리의 은폐효 과, 베일 작용에 대해서는 우리들은 거리를 취할 수 없다. 전화의 목소리의 관해서 우리들은 그 은폐 효과에 근접해 있는 것이 외의 장 소를 갖지 않는다. 은폐의 효과는 또한 거세의 효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전화를 둘러싼 논고가 끊임없이 우리들의 사고를, 순환을 그리듯이 하면서, 죽 음 옆에 있는 것 쪽으로 이끌고 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들은 항상 이 거세의 효과, 묵시의 말에 근접해 있으면서, 그 베일을 되풀 이해서 들어올리는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화 공간이라는 비현실 공간, 매우 정교한 내부 공간에서, 거기에 갇힌 두 사 람의 대화자는 그런 줄도 모르고 비현실적인 것의 거세 효과에 침투 당하고 있 다. 전화는 우리들의 현실의 허구성의 한계를 후퇴시켜 간다. 그 한계를 차례로 미루어 간다고 해도 좋다. 그 한계에 희롱을 하고, 그것에 되풀이해서 자교용하고, 그것을 어떤 소실점으 로 이끌어 간다. 그러한 경계의 매체가 되는 것이야 말로 바로 전화이다. 우리들의 시대의 확실한 징후는, 허구의 영역을 그곳이라고 한정할 수 없다는 있다. 어긋나는 경계, 횡단하는 선, 소실한 것의 흔적......, 허구가 시작되는 곳, 현실 이 끝나는 곳, 세계의 끝을 우리들은 명확히 자칭할 수가 없다. 그 경계는 이미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경계를 넘는 것만이 있다고, 우리들은 이미 세계의 끝에 짜 넣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이미 이미 없는 세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가 무한히 후퇴한 장소, 이미가 이미 소멸되어 있는 장소, 그곳을 전화의 유토피아라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6) 그 외의 표현 기법 비유 1 : 손 나는 그녀의 왼손을 잡고, 다운라이트 불빛 밑에서 유심히 바라보았다. 칵테일글라스처럼 싸늘한 작은 손으로, 거기에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네 손가락이 편안해 보이게 나란히 있었다. 그 자연스러움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고, 적어도 손가락이 여섯 개 있는 것 보다는 휠씬 설득력이 있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의 새끼손가락이 없는 여자의 손에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그의 처 소설의 여주인공이 새끼손가락이 없다는 결락을 최대의 특징 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가 그리는 여성상의 원형이, 이 새끼손가락이 없는 여자에 있었던 것이다. 손은 또 땅속의 그녀의 작은 개에서도 주술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비유2 : 계시 왜 당신은 오른손을 바라보는 거지요? 라는 질문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오른손 에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바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서 미끄러져 내리듯이 사라졌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녀의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하고 탁자 위에 엎어져 있었다. 땅속의 그녀의 작은 개에서 그녀의 결락감은, 귀여워하던 개를 뜯어 묻고, 그 냄새가 손에서 없어지지 않는 데에서 유래한다. 나는 점이라도 치듯이 그녀의 비밀을 찾아낸 것이다. 무라카미의 소설 공간은 리얼리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와 같은 계시나 주술 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다. 비유3 : 주물 앞의 땅속의 그녀의 작은 개의 인용에서 내가 그녀의 오른손을 언급하자마자,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서 미끄러져 내리듯이 사라졌다라고 한 장면을 통해 우리 는, 그녀가 그 얼굴을 잃어버리고, 말하자면 오른손만의 존재로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물이 성립하는 순간이고, 무라카미적인 사랑이 성립되는 순간일 것 이다. 즉 무라카미의 주인공은 사랑의 대상을 그 전체성, 혹은 인격, 그 인격을 대표 하는 것으로서의 얼굴, 얼굴을 형성하는 표정이 말해 주는 것으로써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신체의 일부분, 단평에 의해서만 파악한다. 무라카미의 여자들이 숙명적으로 달아나 버리는 여자이고, 소멸을 그 사명으 로 삼고 있는 것은, 나의 이와 같은 주물적인 기호로 보아 당연한 결과일 것이 다. 무라카미의 여자들은 나에 의하여 끊임없이 단편화된다-그 단편의 틈새로 그 녀의 본질을 끊임없이 달아나게 하는 것이다. 비유 4 : 사소한 사물의 결정적인 역할 - 귀 양을 쫓는 모험에서 카피라이터인 나는 귀의 사진에 붙일 헤드 카피를 준비하 라는 편집장의 지시를 받고, "왜 귀지요? 라고 반문하다. 그러자 편집장은 이렇게 말한다. 알게 뭐야, 어쨌든 귀야. 전화로 시작되는 장편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수화기를 잡는 손과, 거기서 갖 가지 단편적인 정보를 받는 귀가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오히려 무엇이든, 사소한 일이 그가 고도 자본주의 사회라 이름 붙이는 세계에서 얼마나 절대적인 요인인가에 주의를 돌리는 쪽이 낫다. 귀라도 좋다라는 자위성, 또는 편의성은 일단 어쨌든 귀야라고 결정된 순간부 터 이제는 뭔가가 아니라 양을 쫓는 모험이라는 장편의 귀추를 결정하는 신탁과 같은 힘을 지니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그의 소설에서는 아무것이나 상관없는 것이 느닷없이 울리기 시작해 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화의 벨 소리처럼, 그 구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 소로 작용한다. 비유5 : 창부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누군가는 곤란해, 이것은 쌍둥이와 가라앉은 대륙에서 내가 견딜 수 없이 여자를 안고 잎은 기분이 되었을 때에 생각하는 말이다. 무라카미의 여자는 이와 같이 누군가에서 누구라도로 옮겨 가는 경계에 그 희 미한 상을 떠올린다. 그것이 양을 쫓는 모험에서 귀 모델의 여자 친구로, 태엽감는 새에서 가노 구 레타와 같은 창부로서 규정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단적으로 말해서 무라카미는, 영매이고 창부인 여자를 그의 소설의 여주인공 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매우 중요하다. 비유 6 : 코어(핵) 그렇다면, 영매란 무엇일까?. 그것은 거간이다. 혹은 미디어라고 해도 상관없다. 무라카미에게 있어서는 그의 여자가 바로 창부임과 동시에 매체다. 이와 같은 여성적인 생성을 작품의 본질 안에 포함하는 무라카미의 소설은, 그 자체가 매체라는 점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지금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 드 원더랜드가 단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상실의 시대가 단편 개똥벌레를 그 전신으로 가지는, 무라카미 장편의 성립 과정에 관한 문제이다. 이 경우, 단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나 개똥벌레가 장편에 대하여 매체로 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쉴새없이 흐르는 소설 속의 음악 독자의 예민한 감성을 뒤흔드는 음악들 하루키 문학에는 수없이 많은 음악이 인용되고, 쉴새없이 음악소리가 흘러나 온다. 등장 인물들은 대체로 음악이 나오면 휘파람으로 또는, 콧노래로 따라 부른다. 레코드를 틀거나, FM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기울이기도 한다. 특히 미지의 땅, 또는 처음 가는 장소에서는, 상실의 시대의 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댄스 댄스 댄스에서 돌핀 호텔의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할 때 분 리버가 손님을 마중하듯, 환영의 의식처럼 음악이 울려 온다. 한마디로 그 모든 음악은 백그라운드 뮤직 또는 의미 있는 어떤 효과음 같은 역할을 한다. 음악의 곡명이나 연주자, 가수, 작곡가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 음악 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고유 명사가 발산하는 도발적이 효과와, 무엇인가 깊은 뜻이 어려 있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또한 그 음악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그리움이나 정겨움을 안겨 주고, 그 노래 가 유행했을 때 만났었던, 오래전에 헤어진 애인, 친구등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 다. 그 인용되는 음악들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것보다도 휠씬 더 어떤 시대 상황, 사물의 성질, 상태를 잘 묘사하게 된다. 하루키는 그런 효과를 충분히 계산하고, 사람의 이름이나 지명은 물론, 음악을 둘러싼 고유 명사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독자의 무의식을 교묘하게 도발하고 있다. 하루키와 60년대 60년대 하루키는 청춘의 중심에 있었다. 하루키는 스스로를 60년대의 아이였다고 후에 회상하고 있다. 나는 1949년에 태어났다. 1961년에 중학교에 입학하고, 1967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혼란함 속에서 20세를 맞이 했다. 따라서 나는 문자 그대로 60년대의 아이였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상처받기 쉽고, 미성숙하며, 가장 중요한 시기에 60년대의 와일드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숙명적으로 그것에 도취되어 갔다. 60년대라고 하는 시대에는 확실히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러하며,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시대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TV 피플 중 우리시대의 포클로어-고도 자본주의 전사에서 이 시대는 세계적으로 비소 두 진영을 중심으로 냉전 상태에 들어가 있었고, 62년의 쿠바 위기는 제 3차 세계대전의 공포를 전 인류에게 안겨 주었으며, 미 국의 젊은이는 물론 세계의 젊은이들을 들뜨게 만들었으며, 반항의 깃발을 들게 했다. 63년에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되고, 65년부터는 북 베트남 폭격을 계기 로 월남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비틀즈의 레코드가 미국에서만 2억장이 순식간에 팔려 나가는 등, 시대에 대한 불안이 포퓰러 뮤직에 대한 열광으로 전환되었다. 이 무렵 젊은이들의 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은 태평양을 넘어 일본 땅에 상륙, 대학은 휴학과 분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이른바 전공투의 열기는 화염병과 가스총이 쏟아지는 속에서, 대학생 조직과 경찰 기동대 간의 전쟁을 방불케 하 는 혈투가 벌어져, 수많은 희생자를 내 끝에 1970년대 초에 완전히 종식되었다. 하루키는 적극적으로 전공투 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한 동언 그 저항의 열기에 젊음을 불태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루키 문학이 전공투 시대를 거친 상실의 아픔에서 출발하여, 그 문학 속에 60년대 투쟁의 열기와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공투 대열의 성 가처럼 불리어졌던 바람에 흩날리며를 그 역시 목이 터져라고 불렀을 법하다. 보브 딜런이 62년에 작곡한 이 노래는 미국의 흑인들 사이에서 반전 평화 단 체의 투쟁가로 불려졌고, 일본의 전공투의 성가가 되기도 했다. 바람에 흩날리며-밥 딜런 얼마나 길을 걸으면 한 사람의 남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인가.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하얀 비둘기는 모래 위에 깃을. 내릴 수 있는가. 몇 번이나 총탄의 비가 쏟아져 내려야 무기는 영원히 버려지게 될 것인가. 그 답은, 친구여, 바람속에 그 답은 춤을 추고 있네. 몇 번이나 쳐다봐야 푸른 하늘이 보일 것인가. 몇 개의 귀를 붙이면 위정자는 민주의 울부짖음이 들이는 것인가. 몇 사람이 주어야 알게 될 것인가. 너무도 많이 주었다고?. 그 답은, 친구여, 흩날리는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있네. 흩날리는 바람 속에서. 바다에 씻겨나가지 건가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산은 계속 존재하고. 자유를 부여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을 것인가. 그 답은, 친구여, 흩날리는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있네. 그 답은, 흩날리는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있네. 하루키는 이 바람에 흩날리며를 소설의 중간 제목으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 드 원더랜드의 라스트 신에 원용했다. 더욱이 미래에 다가올 세계을 죽음을 예고하는 노래로서 폭풍우를 함께 배치 하고 있다. 세계에서 소멸되어 가고 있는 주인공에게 먼저 바람에 흩날리며를 들려주고, 그 다음에 폭풍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삶의 부질없음과 허무함을 계속 작품 속에서 그려가면서도, 그는 절망이나, 포 기, 체념 대신에 그런 제한된 삶속에서의 가치와 보람과 찾고자 하는 열망을 끊 임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런 하루키의 문학에 있어, 음악은 그 어떤 설명이나 인용보다 설득력이 있 고 소구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작품속의 음악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시작된 하루키의 모든 문학 작품 속에서는 갖 가지 음악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온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몇 번이나 하고, 하루에 두 번씩 면도를 하고, 오래된 레 코드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듣는다. 지금 내 뒤에서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피터 폴 앤드 메리가 노래하고 있다.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마, 벌서 끝나 버린 일이잖아. 이 작품의 주인공은 추억의 노래를 들으며, 이미 지나간 회한에 찬 시절-허무 사고 덧없이 허송한 세월에 대한 회상에 잠겨 있다가, 낸 끝 노래말로 마음 속 깊이 더 이상 지난 일에 얽메이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된다. 더 이상 지난 일을 돌아보지 말고, 다가올 앞날을 생각해야겠다는, 이 작품의 초점인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마, 벌서 끝나 버린 일이잖아라는 주제는 노 래의 형식을 빌어 독자에게 전달된다. 이 작품 속에는 60년대에 전세계 젊은이들을 흥분시킨 엘비스 프레슬리의 굿 럭 참을 비롯해서 만토바니 악단의 이탈리아 민요등 24곡의 음악이 들어 있다. 1973년의 핀볼 하루키의 두 번째 소설인 1973년의 핀볼에서는 피흘려 싸우던 전공투 시절의 하루하루를 음악의 선율 속에 이렇게 떠올리기도 한다. 기분 좋게 맑게 개인 11월의 어느 날 오후, 제3기동대가 대학의 9호관으로 돌 입했을 때에는, 비발디의 조화의 환상이 풀 볼륨으로 울려 오고 있었다고 하는 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수가 없다. 69년을 둘러싼 마음 따뜻한 전설 중 하나다. 우아하고 서정성이 풍부한 비발디의 협주곡이 그 생사를 건 싸움터에서 흘러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양을 쫓는 모험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음악이 울려 온다. 모차르트, 바흐, 쇼팽 그리고 베토벤등 고전 음악에서부터 60년대에서 70년대 에 걸쳐, 전세계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려 주던 냇킹 콜의 국경의 남쪽, 그리고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선율이 작품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주인공과 함께 양 탐색 작업에 BGM으로 함께 동참하고 있는 음악은, 제1권 에 20곡, 제2권에 9곡 모두 합해 29곡이다. 식사를 하고 있을 때도 음악이 없으면 어색해하는 젊은이들의 습성을, 하루키 는 이 소설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치킨 커틀릿과 롤빵을 주문하고, 그게 나올 때까지, 브라더스 존슨의 새 레코 드를 들으면서, 또 맥주를 마셨다. 브라더스 존슨의 노래가 끝나면 레코드는 빌 위저스로 바뀌고, 나는 빌 위저 스의 노래를 들으면서, 치킨 커틀릿을 먹었다. 그리고 메이너드 퍼거슨의 스타 워즈를 들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별로 식사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음악이 단지 BGM만의 역할이 아닌,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교묘하게 암시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나는, 항구에서 가을 볕을 받아가면서, 이 세계에서 만났 던 여러 사람들에게 축복을 보내며 보브 딜런의 폭풍우가 흐르는 속에서 잠을 자듯 세계의 끝을 향한 여행길에 오른다. 세계에서 소명되어 가고 있는 주인공에게 이 다가올 죽음을 암시하는 폭풍우 는 이미 단순한 백그라운드 뮤직의 기능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깊은 잠 속에 빠져들어 갔다. 밥 딜런 폭풍우를 계속 노래하고 있었다. 특히 밥 딜런의 노래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밥 딜런이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을 노래하기 시작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혁명 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고, 딜런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 간다. 그것은 비가 오는 것과 같이 틀림없이 확실한 일이다. 전기 기타를 잡기 시작한 딜런이 1965년에 발표했던 라이크 어 롤링 스톤은 락 음악 사상 불멸의 명곡으로 남아 있는 충격적인 작품으로, 현재까지 많이 불 리워지고 있다. 이 노래 속에는 60년대의 사회 혁명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모든 것이 다 포함 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의 주제곡이라고 할 만한 세계의 끝은 60년대의 팝송의 여왕 스키터 데이 비스가 노래한 히트송이며 그녀의 대표작인데, 마음의 상처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서정적으로 잘 표현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는 제1권에는 여덟 곡, 제 2권에 스물일곱 곡이 들어 있다. 이 작품에서도 모차르트,브루크너, 바흐등의 고전 음악 여덟 곡을 제외하면, 마이클 잭슨, 듀란듀란, 고저 윌리엄스등이 노래한 팝송, 재즈 곡등 경음악이 대 부분을 차지한다. 상실의 시대 하루키는 이 소설을 워크맨으로 서전트 페퍼즈 론리 하츠 클럽 밴드 테이프를 120회쯤 되풀이 들으면서 써나갔다고 그 후기에서 밝힌 것과 같이, 음악속에서 탄생한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원제목도, 그리고 첫대목도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으로 장식되어 있다. 비틀즈가 그들의 활동 중반기에 내놓은 앨범 러버 솔에 수록 된 존 레논의 작 품인 이 곡은, 인도의 민속 악기와 어쿠스틱 기타, 탬버린이 조화를 이룬 4분의 3박자 리듬의 아름다운 곡이다. 가슴속에 파고드는 듯한 내성적인 멜로디에, 쓰디쓴 그리고 달콤한 러브 어페 어를 상징하는 노래로, 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오랫동안 세계의 젊은이들이 즐겨 브르던 노래다. 이 소설책 맨 앞에 나와 있는 노래말은 다음과 같다. 노르웨이의 숲-존 레논 작사 / 비틀즈 노래 예전에 나는 한 여자를 소유했었지, 아니 그녀가 나를 소유했다고 할 수도 있 고. 그녀는 내게 그녀의 방을 구경시켜 줬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그녀는 나에게 머물다 가길 권했고 어디 좀 앉으라고 말했 어.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의자 하나 없었지. 양탄자 위에 앉아 기계를 흘끔거리며 와인을 홀짝이며 우리는 밤 두시까지 이 야기했어. 이윽고 그녀가 이러는 거야. 잠잘 시간이잖아. 그녀는 아침이면 흥분한다고 말했어. 그리곤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지. 나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곤 목욕탕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어. 눈을 떴을 때 난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 거야. 난 벽난로 불을 지폈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먼 외국의 공항에 도착했을 때, 스피커를 통해서 울려 오는 노르웨이의 숲을 듣는 순간,주인공 나는 격렬한 마음의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그 노래는 친구의 애인이었던 나오코가 너무도 좋아하던 곡이다. 그 친구가 돌연 세상을 떠난 후, 그녀와 나는 죽음을 삶의 한복판에 감싸안 고 살아가게 된다. 대학생이 된 어는 날 나는 우연히 나오코와 다시 만나게 되어 비가 쏟아지던 날 두 사람은 운명적인 결합을 한다. 하지만 나오코가 요양소로 들어간 후, 나는 끓어 넘칠 것 같은 생명력을 지니 고 다가오는 미도리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지는 동안 나오코의 병세는 악화되고, 마침내 그녀는 자살하고 만다. 나오코의 장례식에 참가한 후, 나는 나오코와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눔눌짓는 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온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다가 수화기를 든 채, 공중 전화 주변을 둘러보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이며,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가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이 작품 속에는 모두 76곡의 음악이 들어 있다. 그 가운데 고전 음악은, 거의 작품마다 빼놓지 않고 인용하는 바흐의 음악이 네 고, 모차르크가 세고, 그리고 말러, 번스타인, 듸뷔시, 브람스, 라벨이 각각 한 곡씩 들어 있다. 나머지는 모두 경음악-대중 음악인데, 비틀즈의 곡이 무려 열일곱 곡이나 들 어 있어 하루키가 얼마나 비틀즈에 빠져들었던 가를 짐작케 한다. 댄스 댄스 댄스 이 작품은 양을 쫓는 모험의 속편인 동시에 그 작품으로 일단 매듭을 지었던 쥐 3부작, 완결편이라고 볼 수 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돌연 행방을 감춘 여자 친구 키키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 가 줄거리의 중심을 이루고, 유키라는 좀 건방지기도 한 예쁜 소녀를 통해서 사 건이 전개되는 댄스 댄스 댄스에서는 무려 177곡의 음악이 한 시대의 풍경을 연 속 그림 이야기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키키를 찾다가 알게 된 유미요시와 가까워지면서 현실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 에 살고 있는 양 사나이를 다시 만나고, 마치 흘러가는 시대란 공동과 같은 것 이며, 그 속에서 그 어떤 것을 상실한다고 해도, 살아 있는 한 음악이 울리고 있 는 동안은 계속 춤을 춰야 한다는 격려를 받고, 다시 키키를 찾는 여행을 계속 한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삿포로, 도쿄, 하와이, 하코네를 무대로 경쾌한 스텝을 밟아가며 춤을 추며, 섹스가 범람하는 어둠의 세계로 휩싸여 들어간다. 나와 유미요시는 그 후 어떻게 살아가며, 유키라는 소녀는 어떻게 변모해 가 는가, 그런 점치기 어려운 기대를 남기고 이 소설은 끝난다. 이 작품은 제목부터가 비치보이스의 히트 곡 댄스 댄스 댄스를 그대로 빌려 온 것이다. 여석 시간이나 수업을 받았으면 춘분하지, 라디오 다이얼을 돌려 춤을 추자, 댄스 댄스 댄스!. 이렇게 밝고 명랑한 노래말에 경쾌한 선율의 댄스 댄스 댄스는 들뜬 기분이 느껴지는 코러스와 둔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운드가 매력적이다. 이 작품에서는 모차르트의 세 곡과 슈베르트, 쇼팽을 제외하고는 클래식 음악 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 첫 모차르크의 곡은 이렇게 인용된다. 체념을 하고 침실을 나와서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면도를 했다. 기운을 내기 위해서 피가로의 결혼 서곡을 콧노래로 불렀다. 정욕을 채우지 못하고 체념한 체, 주인공이 콧노래로 부른 피가로의 결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곡은 모차르트가 서른 살 때 완성한 오페라 곡으로서, 이발사 피가로의 결 혼과 당시 영주들이 시집가기 전의 신부에게 행사하던 첫날밤의 권리와 갖가지 연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배를 움켜쥐게 하는 희극으로, 프랑스 혁명기 귀족들 의 부패상을 통렬하게 풍자한 음악이다. 수백 마디 말로 표현하기보다, 소설의 바로 그 대목에 피가로의 결혼을 살짝 인용함으로써, 절묘하게 그 분위기를 살린 것이다. 또 다른 모차르트의 마적의 서곡 역시, 밤의 여왕의 딸인 파미나와 왕자 타미 너를 중심으로 한 환상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곡이다. 그 나머지 곡들은 비치보이스의 노래가 아홉곡,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다 섯 곡, 마이클 잭슨과 롤링 스톤즈의 노래가 각각 세 곡이며, 그 나머지는 60년 대에서 70년대에 등장한 히트 송과 폴 모리아 악단, 퍼시 페이스 오케스트라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악단의 연주곡이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장편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고, 중편이라고 하기엔 좀 긴 소설-그것이 바로 국 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다. 제목은 냇킹 콜이 부른 국경의 남쪽에서 절반은 빌려온 셈이 된다. 달콤한 선율에 걸맞는 로맨틱한 노래말은 이렇게 되어있다. 국경의 남쪽 멕시코 근처에서 황혼이 깃들며 별들이 놀러 나올 때 나는 사랑 에 빠졌지. 이렇게 여로를 떠도는 나의 마음은 언제나 아득한 저 멀리 국경의 남쪽 멕시 코 근처에 머문다. 그녀는 낡은 스레인의 레이스를 걸치고 그림처럼 아름다웠지. 산 순간 아주 부드럽게 나는 그녀의 웃는 얼굴에 입을 맞췄어. 축제의 밤이었기에, 즐겁게 정신없이 취했어. 국경의 남쪽, 멕시코 근처에서. 한없이 경쾌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곡, 국경의 남쪽은 멕시코에서 사랑의 그리 움을 노래한 곡으로, 1950년대부터 세계에 널리 퍼져 1970년대까지 불리워졌던 노래다. 1988년 댄스 댄스 댄스 이후, 오랜 공백을 거쳐 1992년에 나온 이 소설은, 발 표되자마자 그때까지의 안정된 높은 평가를 맡았던 것과는 달리, 평론가들로부 터 타작이다, 실패작이다, 하는 결력한 비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 소설은 쥐 3부작 과 댄스 댄스 댄스를 통하여, 처녀작 발표 이래 시종일관 고집해온 1970년대에의 고집에서 벗어나, 과거 아닌 현재에 대해 이야기한,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준 소설이었다. 그러나 주제의 통속성을 지나치게 중요시한 나머지, 실패작으로 낙인이 찍히 긴 했지만, 하루키는 언젠가 이 소설의 진가를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장담 했다. 이 소설에는 롯시니의 소곡집을 비롯해서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 리스트의 피 아노 콘체르토 제1번, 제2번, 슈베르크의 겨울 나그네, 그리그의 페르귄트등 고 전 음악 여섯 곡을 비롯해서 냇킹 콜의 프리템드, 국영의 남쪽등 열 곡을 곁들 여 모두 열여섯곡의 음악과 일곱명에 이르는 연주자, 가수등의 이름이 나온다. 태엽감는 새 흔히 있는 일상의 도처에 흐트러져 있는 현실과 비 현실. 우의식의 세계의 있는 벽과 같은 단층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해 나가는 이야기 -그것이 하루키의 대표작이라고 할 태엽 감는 새의 주제이다. 이 소설은 서두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런던 교향악단의 연주곡 도 둑 까치, 서고 롯시니 작곡이 흘러나온다. 나는 FM방송에 맞추어, 롯시니 도둑 까치 서곡을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그 곡은 스파게티를 삶는 데는 안성맞춤인 곡이었다. 도둑 까치는 은식기나 은화를 훔치는 새인 까치를 사랑 이야기에 얽히게 한 희가극으로 아바도가 지휘하는 런던 교향악단의 이 곡은 특이 낭랑한 선율과 경 쾌한 리듬을 스피디하고 상쾌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바흐의 곡인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가 FM방송을 통해서 흘러나온다. 그런데 하루키의 가장 긴 대하 소설이라고 할 이 작품에는 다른 어느 장편 소 설보다도 등장하는 음악이 적다. 제 1부, 작은 삶, 큰 의미편에 열아홉곡, 제2부 욕망의 뿌리편에 일곱 곡, 제3 부 나는 누구인가편에 다섯곡, 제4부 사람은 누구나 태엽 감는 새편에는 두 곡 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이 1994년에 1ㅡ2부 두 권이 나오고, 3부는 1995에 발 행됐음에도 불구하고 90년대의 음악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2부에서는 1983년 마이클 잭슨이 부른 빌리 진이 등장 근 10년 전의 노래가 가장 최근 곡으로 나와 있다. FM방송을 크니까 마이클 잭슨이 빌리 진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노 마루카를 생각하고, 가노 구테타를 생가 했다. 어쩌면 자매가 나란히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일까?. 이건 꼭 무슨 만담 콤비의 이름 같잖아? 가노 마루카, 가노구레타....... 나는 라디오를 끄고 생활 수첩을 책장에 집어 넣은 후, 커피를 한 잔 더 마셨 다. 전세계에 4500만 매가 팔렸다는 폭발적인 히트 곡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 곡은, 마이클 잭슨이 인기 절정기에 부른 노래이다. 야한 정사를 노래한 이 노래는, 바로 소설의 이 대목에 안성맞춤인 배경 음악 이라고 하겠다. 제3부에는 바흐의 음악의 헌정이 나온다. 나는 눈을 감는다. 시나몬이 그날 아침 일을 하면서 되풀이해서 듣고 있던 음악의 선율이 내 귀 에 달라붙어 있다. 바흐의 음악의 헌정이다. 천장이 높은 홀에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남아 있듯이 그것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말이 없는 침묵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나몬의 이미지와 바흐의 곡이 오버랩되면서 독자들을 나의 상념 안으로 안내한다. 4부에는 다시 도둑 까치 서곡이 나온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멈춰 서서 막막해 하고 있을 때 멀리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토시카니니가 지휘하는 그 서곡의 레코드가 있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생기 발랄하고 현대적이며 유려한 연주에 비하면, 코스 카니니의 지휘는 세찬 격토 끝에 강적을 쓰러뜨리고 나서 천천히 목졸라 죽이려 고 하는 더한, 기운이 넘치고 피가 용솟음치는 연주였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듯이 되풀이되는 도둑 까치는 태엽감는 새에서 단순히 한 곡의 음악이나, 배경 음악의 의미가 아닌, 주인공의 현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기 도 하다. 바로 그 점이 하루키 월드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일 것이다. 5.하루키 인터뷰 모음 나의 문학을 이야기 한다. 나의 문학을 이야기한다. 우화성이라는 게 일본 문학 풍토에는 적어요. 그리고 그러한 우화성이 짙은 작품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됩니다. 현재의 것을 모두 재 구축하여, 하나의 우화의 세계까지 가져가는 데도 십여 년, 또는 사십 년이 걸릴 겁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역시 아직은 그 영역에 도달하지 않은 발전 도상의 소 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소설이란 너무 감성에 의지하면 출구가 없어져 버리지 않을까 생각합니 다. 역시 소설이라는 건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입구로 들어가면 뭔가 안티테제에 부딪혀서, 다른 것이 되어 출구로 나오는게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문학에는 그러한 면이 좀 적은 것 같습니다. 즉 그것은 일종의 우화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또 그렇게 편리하게 안티테제가 생겨나고, 편리하게 출구가 생기는 건 아니니 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며 의미가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화성이 강한 작가로 나는 미국의 카포티를 예로 들고 싶습니다. 재능있고, 따스하고, 더구나 그것을 감추려 하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좋은 작품은 그러한 데서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미국 소설을 읽고 느끼는 것은, 미국에는 단락이나 기회가 있다는 점이 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세계 대전이나 베트남전쟁을 치르고, 드러그 컬처가 있었기 때문에, 굉장 히 소설을 쓰기 쉬운 상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히려 평화로운 것이 제일 그려 내기 어렵습니다. CLOSE UP 챈들러의 방법론으로서, SEEK AND FIND 라는 테마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찾아냈을 때는 찾아내려 했던 것이 이미 변질된 상태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미스터리 형태를 휘하고 있을 뿐이며, 이 테마는 나의 작 품 세계와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챈들러의 영향을 받고 있 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챈들러의 소설을 무대로 하여, 도시론이 전개되었고, 그와 나의 도시 소설의 기법은 결국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상이란,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입 니다. 양을 쫓는 모험은 챈들어의 긴 이별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의 취미 중 하나는 달리기인데, 그 중에서도 장거리형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장편과 단편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장편 소설을 써나가고 있을 동안엔 조금씩 내 자신이 변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단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작했을 때의 자신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단편 소설을 쓸 때에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제시한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고, 세계를 잘라 낸다는 느낌이 들지요. 하지만 아무리 능숙하게 잘라 내도, 결국은 거짓말입니다. 다만 장편 소설에는 꾸밈 없고 자연스러운 부분이 많이 생겨나며, 그러한 점 이 어색한 것을 메워 준다고 생각 합니다. 단편의 경우는 굉장히 생경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어색한 걸 메워주지 않아 요. 그래서 단편집을 나중에 다시 읽어 보는 건 몹시 괴로운 일입니다. 젊은이들의 신 나는 앞으로 소설을 쓰는 젊은이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도 필요 없고, 누구와 의논을 하거나 통근할 필요도 없다는 점에서 소설 가란 이상적인 직업이므로, 소설가를 지망하는 젊은이가 늘어날 것이고, 결과적 으로 전혀 새로운 타입의 소설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지금의 젊은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반대로, 그들이야말로 앞으로 좋은 작품을 남길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위한 모험 나는 일본의 순수 문학은 별로 읽지 않고, 미국의 페이퍼책을 읽으며 문장 수 업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학과와는 달리 고등 학교때부터 영어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영 어로 된 소설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뭔가 다른 페이스로 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그 때문에 언어에 대한 감각이 다른 사람과 약간 달라진 듯합니다. 나의 작품에는 가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내 자신이 가족에 대해 절로 중 점을 두지 않으며, 가족뿐만 아니라 단체나 그룹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인간 내부에는 이미 청춘이나 폭력등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은 공통된 것이므로 굳이 직접적으로 표현할 필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나는 나 나름의 조용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상쾌함은 그런 데서 기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것을 가장 단적으로 배웠던 것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에서였을 것입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영미번역 소설의 문체이며, 보네거크의 문체와 흡사 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처음에는 종전의 문체로 써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우선 영어로 조금 써본 후, 그것을 번역했더니 휠씬 다음에 들어, 쉽고 수월하게 써나갈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보네거크뿐만 아니라 브로우티건도 좋아했으며, 나 자신이 그들의 영향을 확실히 받았음을 인정합니다. 내가 챈들러의 소설을 읽고 감탄한 것은 그 작품이 호소해 오는 리얼리티였 습니다. 그는 작가에게 살아가는 데 대한 확고한 자세가 있고, 사물을 파악하는 확실 한 시점이 있으며,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허구를 묘사해도 리얼리티는 반드시 스며 나오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문체를 모방하기는 쉽지만, 시점을 모방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73년의 핀볼을 쓴 후에, 나는 작가로서 하나의 방향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는 언어적인 스타일의 추구였고, 또 하나는 스토리 텔링-스토리를 이야기 하는 식으로 나가는 기술 방식-이었습니다. 나는 스토리 텔링 기법을 선택하였는데, 그 결과 양을 쫓는 모험이 완성되었 습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나와 쥐가 그들의 70년대를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주제이지만,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나만으로 seek-and-find-story 을 추구하고, 쥐에 대해서는 부재로서 병력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나와 쥐의 존재와 부재가 표리 관계를 이루며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작품 속의 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자신도 알지 못하며, 그것이 이 작품이 성공한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그 개념을 알지 못한 채 써나갔지만, 양의 존재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나는 스토리 텔링의 재미를 이 작품에서 가장 강하게 느꼈습니 다. 나는 쓰고 싶은 게 없기 때문에 반대로 긴 소설을 쓸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쓰고 싶은 게 없으므로 그만큼 구조가 간단해지니까요. 나의 경우, 처음부터 테마를 정해 놓고 쓰는 일은 없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테마 비슷한 게 생겨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으 로 쓰는 소설에는 거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작품에는 죽음이 곧잘 묘사되고 있는데, 나 자신의 의식은 원칙적으로는 리얼 타임입니다. 그러나 상실된 것에 대한 공감은 매우 강합니다. 또한 나의 내면에는 사물을 현재 존재하는 것과 이전에 존재했지만 현재는 존 재하지 않는 것 두개의 세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패럴렐 월드 같은 겁니다. 즉 이 현실의 정황은 나에게 있어서는 가정된 것입니다. 절대적인 정황은 아닙니다. 약간 위상이 다른 곳에, 지금의 정황과 같거나 다른 관계로서, 반대의 정황이 존재하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나의 경우, 상실된 것에 대한 동경은 결코 회고적인 게 아닙니다. 리얼 타임이에요. 부재의 존재감이나 존재의 부재감 같은 감각이죠. 이 패럴렝 월드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는 분 명히 이 기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1973년의 핀볼이나 양을 쫓는 모험의 경우처럼, 이 소설에서도 존재의 이야기 와 부재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양을 쫓는 모험같은 이야기를 쓸 때에 존어빙의 존재가 힘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현재에 있어서도 쓸 수 있다는 케제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빙을 읽었기 대문에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어 요. 어빙의 경우는, 강간과 같은 생생한 현실이 묘사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을 기 호나 신호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별로 생생한 소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작가에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까, 기호 같은 게 있으며, 그의 경우....폭력이나 죽음 자체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롱 인터뷰 나의 소설의 어떤 등장 인물 에는 이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리얼리 티가 있다고 하는 데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어떤 특징을 나타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그 특징부터 시작합니다. 손가락이 없다든지, 쌍둥이라든지, 핑크빛 원피스를 입고 있다든지, 그런데 그 특징은, 써 내려가고 있는 동안에 저절로 형성되어 가죠. 그 특징 자체가 본질이 되고 인간이 속성처럼 되어 버리는데, 오늘날의 인간 도 이와 유사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카포티의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라. 바람에게만 마음을 돌리겠다는 대목에서 생각해 낸 것인데, 지금에 와서 생각 하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나는 언젠가 전국 청소년들의 눈물을 자아낼 만한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작가가 번역을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소설적인 시야가 넓어지는 동시에 자가 중독적으로 되지 않기 때문 입니다. 상실의 시대에는 아무래도 성 묘사가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방식의 신선한 성 묘사가 필요했던 것이죠, 리얼 하고 또 청결한 섹스 묘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설의 경우는 내 방식은 이렇다. 이것이 옳고 이것이 틀린 것이다,라는 식으로 밀고 나갈 수 있어요. 무엇을 쓰든 결국은 픽션이니까요. 에세이라는 것은 그 반대여서,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부끄러우니까 말이죠. 소설의 경우는 계속 밀고 나갈 수 있죠. 그래서 소설에 있어서는 주인공의 아이덴티티라고 할까, 그러한 것을 나름대 로 굳혀 갑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그 주인공 편에 서서, 이를테면 주인공이 지하로 잠입하면 같은 시점에서 어둠을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무엇이 나타날까, 어떻게 전개될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쓴 겁니 다. 픽션의 경우, 잇따라 여러 인물이 나오잖아요? 소설을 쓰고 있으면서도 재미 있어요. 이러한 사람이 있는가, 하고 스스로도 감탄하곤 해요. 소설가들 중에는 처음부터 프로그램을 가지고 쓰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경우는 프로그램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폰터니어티가 생겨나지 않아요. 이를테면 단편 소설 코끼리의 소멸의 경우를 예를 들자면, 코끼리가 사라진 코끼리 우리는 어떤 상태일까하고 생각하는 데서, 즉 일종의 풍경에서 시작됩니 다. 우리 속에 있던 코끼리를 생각하면 뭔가 쓸수 있게 되죠. 지금이 소설을 쓰기에는 좋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확고한 체제나 스타일, 문체등이 없기 때문에 즉 전국시대와도 같아서 힘이 있는 작품을 쓰면, 그것이 내일의 주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존어빙의 곰을 놓아 주다는 청춘 소설의 걸작이다. 내가 번역한 어빙의 곰을 놓아 주다와 같은 긴 소설을 번역하고 있으면, 텍스 트 속에 잠겨 있는 일종의 리듬감 같은 것이 전달되어 옵니다. 따라서 이러한 번역 작업에 의해서, 나의 소설에도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던 중에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상당히 긴 장 편 소설이 된 것도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러한 변화는 당연한 일이고, 또 그 때문에 나는 즐겨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 인터뷰 무라카미 하루키-내가 번역하기 시작하는 장소 내 스스로 발견한 좋은 작품이 아니면 나는 번역을 할 수 없습니다. 남이 가져온 것을 번역하기란 매우 어려운데, 그 이유는 텍스트에는 흐름이 있으므로 문장의 호흡을 파악하여 리듬을 타지 않으면, 작업이 잘 진행되지 않 기 때문입니다. 즉 나 자신과 문장의 흐름이 합치되지 않을 경우, 번역을 제대로 할 수 없습 니다. 나는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머릿속이 영어로 되어 있는 사람-에 대 해 번역은 영어적인 생각과 글의 구조를 일본어적인 느낌이나 일본어적인 글의 구조로 옮기는 일이므로, 사실상 머리가 일본어적 구조로 되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즉, 나의 머리 구조가 선천적으로 일본어적이므로 번역이 가능하다고 말해 주 고 싶습니다. 6.한국의 평론가, 번역가들의 하루키 작품평 하루키 문학과 태엽 감는 새 활자 문화의 쇠퇴와 문학의 위기-장석주-문학평론가 20세기가 서서히 끝나 가고 있다. 우리는 어떤 혼란과 혼돈에 떠밀려 부유하는 듯하다. 실재는 사라지고 그것을 대체하는 이미지와 기호들만 명멸한다. 우리의 판단과 가치 척도의 근거였고, 지적 구심점의 역할을 했던 중심, 기원 진리들은 무너져 내리고, 그것들이 차지했던 자리들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 지 못하고 비어 있는 그대로 즉 공백과 부재로 남아 있다. 그 공백과 부재의 자리 위로 수없이 많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났다가 빠르 게 사라진다. 인류가 이룩해 낸 문명과 문화 전체로 아우르는 변화는 그것을 뿌리부터 뒤흔 들 만큼 강력하며, 그 속도 역시 엄청나게 빠르다. 지금은 분명히 세기말이며, 문명의 대전화의 시대고, 동시에 엄청난 혼돈의 징 후들을 품어 안고 있는 위기의 새대기도 하다. 진행되는 모든 것은 위기다. 위기는 진행되는 모든 변화를 지칭하는 말에 다 름아니다. 탈냉전 이후 세계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었고, 그 이후로 문학, 더 넓게는 인문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담론들이 급격하게 떠올랐다. 세계를 뒤덮고 있는 이 거대한 변화와 혼돈속에서 활자 문화가 서서히 쇠퇴해 가고 있다는 징후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활자의 문화 쇠퇴라는 피할 수 없는 문명사적 변화에 직면해서 오랫동안 활 자 언어에 기대어 발전해 온 문학 역시 과거와 같은 위의 을 잃고 차츰 왜소화 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다. 미국의 비평가 레이먼드 페더만은 문학이 무기력하고 활기차게 됐고, 나아가 소멸할 지경에까지 이른 심각한 위험 상태에 빠져 들고 있다고 진단한다. 진지하고 진정한 문학은 서점의 가장 좋은 진열대에서 치워지고, 그것들이 치 워진 자리를 잘 팔리는 책들, 이른바 텔레비전 방영물로 팔려 나가기를 기대하 며 씌어진 금박으로 돋을새김 한 외설적인 표지의 문고 책들 즉 로망스 미스터 리물 탐험 소설 스파이 소설, 유치한 과학 소설 혹은 공포 소설들, 연속 멜로 드 라마등이 차지한다. 한국에서라면 그것들은 변두리의 양식에서 소비 자본의 조명을 받으며 읽을 거리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수기, 천민 자본가의 출세담, 무협지, 이상 한 역사 소설, 유치한 추리물, 명상류, 가자 지혜물들의 목록으로 바뀌리라. 어쨌든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서가의 구석에 꽂혀 있는 진지하고 진정한 문 학 책들은 오늘날 문화의 중심부에서 속절없이 밀려나 차츰 몰락하고 있는 문학 의 암울한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페더만은 이것을 죽음에 이른 예언자 혹은 문학의 위기라고 명명한다. 문학은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문학이 직면하고 있는 문화의 주변부로의 전락이라는 이 심각한 위기적 상황 들을 회피하려고만 할 때, 그리고 자꾸 사회적 타협속으로 후퇴하게 될 때 문학 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임에 틀립없다. 페더만은 문학이 살아남기 위해 대중 매체들의 세계를 포착하는 방식, 세계를 재현하는 방식,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문학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그 위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위 기 그 자체를 문학 담론의 육체로 삼아야 한다. 오늘의 작가들이 시대의 리듬에 걸맞는 기호들을 전송할 내밀한 사상가들로 거듭 태어나지 못할 때 문학은 그저 거대 소비시장의 한 상업주의의 소비 품목 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공허와 싸우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공중을 떠도는 갖가지 냄새들, 온기, 예감, 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들 이 모두는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것들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또 다른 곳에서 주인공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벼운 것 들로 바닷바람, 먼 기적 소리, 여자아이의 피부의 감촉, 헤어 린스의 레몬 향, 석 양의 바람, 옅은 희망, 그리고 여름날의 꿈들을 언급한다. 그것들은 모두 냄새 맡아지거나, 들리거나, 감촉되어지거나, 정서적 느낌으로 짧게 다가왔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들,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것들이다. 찰나적으로 다가왔다가 이내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의 갊과 닮아 있 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아무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지나가 버리는 것은 가벼운 것이며, 그것들은 어떤 의미도 머금지 않는다. 모든 가벼운 것들은 감각적 향유의 대상이지 의미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바람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것, 가볍게 떠나니는 것, 그리고 텅 비어 있는 것의 상징이며 이미지다. 바람은 역동적 의지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에서는 공허 함과 텅 빔을 환기시키는 이미지다. 하루키는 고도 자본주의의 시대를 가로질러 가는 현대인들의 내면에 소용돌이 치고 있는 바람을 본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텅 빈 바, 비수기의 훼한 호텔, 매립된 바다. 초원, 개 한 마리가 플랫폼을 어슬렁거리는 교외선의 역, 수도원이 있는 그리스의 외딴 섬, 터키의 황량한 들판,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훗카이도의 목장을 떠돈다. 일본의 비평가인 사토루는 하루키의 소설들이 공허함의 확인으로부터 시작하 며, 하루키를 공허와 싸우는 작가라고 규정한다. 그는 하루키가 시대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게서도 그리고 언어 속에서도 공허 함을 보고 있다. 그 텅 빈 세계에 끝없이 집착한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공허함을 환기해 주는 이미지들이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생활이라는 삶의 구체적 물질의 기반을 상실한 채 허공 위를 떠서 흘러간다. 하루키란 작가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에게 주는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 을 기꺼이 향유하면서도 그 근원에 있어서는 텅 빈 공동을 안고 살아가는, 텅 빈 세계를 다만 스쳐 지나갈 뿐인 현대인들의 삶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 사회 국가 떠나 외톨이로 남으려는 하루키의 주인공들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작중 인물들의 큰 특징중의 하나는 그들이 한결같이 가족 사회 국가 공동체와 같은 집단에의 소속을 한사코 거부하고 외톨이로 남아 있고자 한다는 점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한 작중 인물의 아버지는 5년전에 뇌종양으로 돌아가셨어. 끔찍했어. 꼭 2년 간 고생하셨지. 우리는 그래서 돈을 전부 써버렸어. 아주 깨끗이, 아무것도 없이, 게다가 가족은 지쳐서 공중 분해했지, 흔히 있 는 얘기야라는 말을 빌려 가족의 해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가족은 해체되고 외톨이가 된 그들은 존재의 결핍감과 공허와 싸우며 자신이 실존을 영위해 간다. 상실의 시대의 요양원에 유폐되어 있는 나오코나 레이코가 그렇고, 또한 미도 리 역시 마찬가지다. 상실의 시대의 주요 등장 인물 거의 전부가 가족이 해체되어 혼자만 남은 사 람들이다. 외톨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당연히 있 어야 할 사회적 성공의 욕구도 없으려 가족으로부터 떠나 혼자 산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도 나의 가족에 대한 언급은 딱 한 군데 나온다. 주인공은 어쨌든 아버지는 매일 밤 시계추처럼 여덟시에 돌아오지, 나는 구두 를 닦고 그리고 항상 맥주를 마시러 튀어나온다. 이것이 이 소설에 나오는 최초이자 마지막인 가족에 대한 언급인데, 그것도 실제의 인물은 부재한 채 단지 그 인물의 상징 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 구두로만 언급된다. 이것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 혹은 아버지라는 자리가 지워져 버렸음을 상 징적으로 말해 주는 대목이다. 태엽 감는 새, 존재의 작음과 불확실함에 관한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가장 최근의 장편 소설인 태엽 감니 새는 눈에 보이지 않 는 저편의 세계에서 가시적 세계와 삶을 움직여 나가는 어떤 미지의 동력과 그 흐름을 조절해 나가는, 이 세계와는 전혀 또 다른 비현실적인 세계의 이야기, 혹 은 실업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한 젊은 남자가 겪게 되는 기묘하고도 비현실적 인 체험을 통해 인간 관계의 가변성과 존재의 작음과 불확실함을 보여 주려는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처음에 고양이가 사라지고 낯선 여자로부터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고, 영매의 자매가 접근해 오고 이윽고 느닷없이 아내가 가출해버리는, 조 금은 자질구레하고 하찮은 이야기들로 시작하지만, 그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 지 온통 상징적 장치들을 깔아 놓아 하나의 거대하고도 신비환 상징의 숲을 이 루고 있다. 여섯 개의 손가락과 네개의 유방이 보여 주는 육체 기형성, 말라 버린 우물, 날아가지 못하는 새의 석상, 학교에 가지 않은 채 빈집에 방치된 열여섯 살 소 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고양이, 가출하는 아내, 꿈속의 섹스, 우물 속으로 들 어가기, 우물에 드리워진 사다리,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여자로부터 걸려 오는 외설적인 내용의 전화, 영매의 자매들, 사막, 미로, 지하의 눈에 보이지 않 는 수로들, 입구와 출구가 다 같이 폐쇄되어 버린 막힌 골목, 죽은 사람이 남긴 유품으로 배달되는 빈 상자 작가는 숨은 그림 찾기처럼 소설의 도처에 이와 같 은 상징들을 숨겨 놓고 그것의 의미를 찾아 읽으라고 독자들에게 속삭인다. 성공 욕구가 완벽하게 거세된 전형적인 작중 인물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 오카다 도루는 법률 사무실에서 일하다 뚜렷하지 않은 이유로 그곳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 서른 살의 젊은 남자다.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하는 것이란 빨래를 세탁기에 집어 넣고, 그 동안에 침 대를 만지고, 그릇을 씻고, 바닥에 청소기를 돌렸다. 그리고 고양이와 함께 툇마루에 앉아 신문의 구인 안내, 바겐세일 광고들을 눈으로 훑었다. 점심때가 되자 간단히 한 사람분의 점심을 만들 먹고 슈퍼에 물건을 사러가는 등의 하찮은 가사 노동이다. 그는 그런 생활에 대해 오히려 신선하게 느낀다.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구가 거의 완벽하게 거세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무라 카미 하루키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나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자주 신문의 구인 광고를 꼼꼼하게 살핀다. 때대로 나는 구인 광고를 읽으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에 빠져들기도 한 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물들은 거의 전부가 사회적 수동성을 견지하며 살아간 다. 그들은 현실과 적당한 거리를 두가, 외국어 번역과 같이 그다지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은 일을 하거나 아예 직업을 갖지 않고,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 는 정치 사회적인 일에 대해서 거의 무관심하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 의 꿈과 내면 속으로 침잠한다. 오히려 그들은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이를테면 태엽 감는 새의 오카다 도루의 경우에도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좀 뭣하지만, 이의 실제적인 업무 수행에 있어서 나는 꽤나 유능한 사람이었다. 빠른 이해력, 민첩한 행동, 그리고 불평을 하지 않았으며, 사고 방식이 현실적 이었다. 그래서 내가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 노선생님이 급료를 조금 더 올려 주겠다고 말했을 정도다라는 언급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유능하다.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 나인 오카다 도루 역시 사회적 성공에의 욕망이 없고, 뚜렷한 희망이나 전망이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에 대한 적당한 환멸과 적 당한 절망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하루키의 주인공들의 전형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잡지사에서 일하는 아내가 있다. 그들은 특별히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극단적으로 궁핍하지도 않다. 적당히 불편하지 않게 살아갈 정도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누적된 말들이나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아이도 없다. 처음엔 그들이 기르던 고양이가 사라지고, 다음엔 이상한 여자의 전화가 걸려 오고, 고양이 찾는 일을 도와 주는 영매의 자매가 오카다 도루앞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오카다 도루는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어떤 흐름이 완벽하게 바뀌어 져 버렸음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우물 속으로 숨기, 세계로 나아가는 사다리 나는 그 완벽한 어둠의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무뿐이었다. 나는 그 무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나의 심장 소리와 혈액이 체내를 순환하는 소리, 폐가 풀무질 하듯 수축하는 소리, 그리고 미끈미끈한 내장이 먹을 것을 찾아 몸을 비비꼬는 소리를 들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는 모든 움직임이, 모든 진동이 부자연스럽게 확장되어 있었 다. 이것이 나의 육체인 것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그것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몸뚱이였다. 태엽 감는 새중에서 가족, 학교, 회사, 사회, 국가와 같은 집단이나 제도로부터 벗어나온 하루키의 작중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우물이다. 하루키의 하가의 상상력에서 돌연 솟아난 그 우물은, 타인들과의 관계가 완벽 하게 단절된 자아의 삶과 죽음, 실재와 환, 현실과 비현실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외톨이가 되어 버린 진정한 나-자아들이 빠져 들어가게 되 는 자기 세계로의 깊은 침잠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물은 모든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외부들과 대척되는 자리에 놓여진 여 성적 혹은 모성적 영역에 속한 내부의 상징물이다. 그 한 상징인 태엽감는 새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 마른 우물 속으로 들어가 기다. 나는 아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출을 해버리고 자신의 삶이 온통 불투명하 고 모호해져 버리자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우물속의 세계는 완벽한 어둠의 세계고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무 즉 죽음이 다. 육체는 그 죽음에 저항하지 못하고 다만 무기력하고 혈액이 가녀리게 체내를 순환하며 내는 소리, 폐가 풀무질하듯 수축하는 소리를 낸다. 우물이란 바로 나의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죽음이며 무의식의 세계를 나타내는 표상이다. 우물 그것은 또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가 요양하던 곳의 들판에 숨겨져 있던 그 우물이다. 우물은 물을 가두고 있는 심연이며, 비밀스런 장소다. 그것은 어둠을 머금고 있는 공동이며, 요나의 뱃속, 깊은 구렁, 무덤, 동굴의 이미지와 동렬에 놓인다. 우물의 상징은 분명히 이중적이다. 나오코가 병든 몸을 그 들판의 버려진 우물 속에 던지는 행위는 그것이 여성 의 자궁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무의식의 욕망을 보여준다. 동시에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죽음에의 잠재된 욕구를 보여주며, 명백 하게 고통을 주는 세계로부터 도피다. 그 캄캄한 우물 바닥에서 주인공은 태엽감는 새로 존재하는 것을 그만 두고 나 자신의 세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존재론적 각성에 이르게 된다. 나는 스스로 자청했던 태엽감는 새의 소임을 감당하는 데 실패한다. 나는 모든 것을 잃고 폐허의 재를 손에 쥐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실패는 위대한 실패다. 자신의 아내가 나를 절실히 필요로 했으며, 격렬하게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것도 필사적으로 그랬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나는 세계를 향해 손을 뻗기 우한 방법을 찾아내 야게식론적 깨달음에 도달한다.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다는 것은 이 세계 속에서 외롭게 고립되어 있는 모든 우물들, 타자화된 무수한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뜻한다. 물속에서의 죽음과 정화, 그리고 재생 아내의 갑작스런 가출에 의해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였던 세계의 표피가 한 꺼 풀 벗겨내졌을 때 나 오카다 도루가 목격한 것은 날 수 없는 새, 물이 없는 우 물, 출구가 없는 골목의 세계다. 그것은 근원, 중심, 질서를 잃어버리고 흐름과 맥락이 엉켜 버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세계, 불모와 상실의 세계다. 그것이 하루키가 말하고 있는, 어디선가 조금씩 조그마한 태엽을 감아 복잡하 고 거대한 세계를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던 태엽감는 새가 사라져 버린 세계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아무도 그 태엽감는 새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힘과 진리의 주체의 표상 아버지의 상실 태엽 감는 새의 사라짐은 이제까지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과 진리의 주 체의 표상인 아버지의 상실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우물 속에서 반점을 얻는데, 그 반점은 나중에 신비한 치유력, 초자연적 힘을 갖게 된다. 나의 반점은 아버지 없는 공허한 세계 속에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징표다. 큰아버지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중의원이 되고 매스 미디어에 장래가 촉망되는 차세대 지도자로 등장하는 와타야 노보루는 현실적 악의 상징이며, 동시에 가짜 아버지다. 무수한 가짜 아버지들이 현실을 지배할 때 이 세계는 심하게 뒤틀리고 훼손되 어 버린다. 와타야 노보루는 이 세계의 생명과 생산성의 담지자인 여자들을 더럽히는 것 으로 암시되고 나의 아내 구미코의 가출도 그와 연관되어 있다. 평범한 남자에 불과했던 나는 아내의 가출로부터 시작된 불가사의한 사건의 연쇄속으로 불가피하게 휘말려 들어가며, 끝없는 미로와 미궁을 헤맨 끝에 가짜 아버지-와타야 모보루를 살해하고 왜곡된 세계의 질서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은 엄청난 소임을 떠맡은 것이다. 태엽 감니 새 3,4의 이야기의 중심 축은 바로 나와 가짜 아버지와의 싸움이다. 마침내 나는 뒤죽박죽인 세계의 이면에 숨어 있는 와타야 노보루의 실체를 발 견하고 미로와 비궁을 헤쳐 나가 그를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뜨려 버리고, 아내 의 조력을 맡아 끝내 그를 살해해 버림으로써 완벽하게 태엽 감는 새의 소임을 다하게 된다. 내면의 무의식에서 역사에로 하루키의 소설들은 고도 자본주의의 사회 속에서 본원적 건강성을 칼취당한 채 기묘한 불구성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실감과 허무를 경쾌한 문체로 그 려 낸다. 그의 문체는 투명한 가벼움을 머금고 있다. 그 투명함은 상실의 깊이를 보여 준다. 그의 세계를 포착, 재현하는 방식은 그 탁월한 동시대성의 감각 때문에 쉽게 큰 공감을 얻어 낸다. 그러나 하루키는 그의 상상력을 세계를 전복하는 대까지는 밀고 나가지 않는 다. 언제나 근원, 중신, 질서를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의미가 거세된 삶은 무력하 게 피동적으로 수납한 작중인물들이 그 상실, 우의미성,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현실과 싸우지마, 그들이 궁긍적으로 도달하려는 곳은 우물, 즉 자기의 우의식의 심연이다. 그들은 우물처럼, 깊이를 전부 드러내지 않은 우물에 와 자기의 얼굴을 비춰 보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조금씩 나르시시즘이란 소것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루키의 작중 인물들이 보여 주는 비사회성은 의미 심장하다. 그들은 사회의 중심으로 편입되지 못한 채, 혹은 사회에 편입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며 사회의 겉에서 떠돈다. 익명의 표류 자들인 그들에게 고도 자본주의의 사회는 상실된 낙원의 대체물 이다. 그것은 매혹의 세계며 동시에 혐오의 세계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게 평범한 일상성의 바깥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고 이내 엄청난 비현실적 모험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는데, 그 때 화려하게 펼쳐지는 다양한 이미지의 연쇄는 작중 인물의 무의식의 심상들과 정확하게 조응한다. 그가 재현해 내는 미시 서사의 세계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회귀의 여정을 보여 준다. 그의 소설을 읽는 일은 진정한 자아로의 회귀의 여정을 되짚어 보는 일이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회귀의 길은 희미한 흔적으로 새겨져 있다. 여전히 그의 주인공들은 무의식이 만들어 낸 미궁속을 혼자 떠돌고,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마른 우물의 바닥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거기서 힘을 회복 한다. 하루키는 태엽 감니 새에서 의미 있는 변화의 조짐을 보여 준다. 한 작중 인물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처럼 벌어졌던 만주, 몽고, 시베 리아에서의 전쟁 체험이 꼼꼼하게 복원된다. 이것은 작가의 시선이 현실과 고립, 유폐되어 있는 나에게서 현실의 중심에 있는 타자들에게로 , 무의식의 환상에서 현실에로, 개인의 삶에 역사에로 옮겨 가고 있다는 하나의 징후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약하는 것일까. 어쨌든 하루키는 이제 작품 세계의 변화의 계기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현란할 정도의 그의 상상력이 펼쳐 보여 줄 새로운 작품 세계를 기다려 보자. 하루키, 죽음의 견딤-김정란(시인, 상지대 교수) 거리두기, 가벼움의 철학 하루키의 매력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 작가의 그 무엇이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표면의 경쾌함 뒤에 숨겨져 있는 깊이의 추구였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 놓고 내색하지 않을 뿐, 그의 작품들은 모두 존재의 의미 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하루키의 글쓰기는 죽음과의 싸움의 기록이다. 그는 글쓰기로써 시간의 소멸에 대항한다. 그 싸움은 명백하게 제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부드럽고 가볍게, 쉬크하게 진행되므로 작가가 외면적 인 가벼움의 제스처 밑에서 진지한 제의를 치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쉬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일생일대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것은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 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이다. 그러나 그 거리두기는 외면의 세계에 대해서만 기능을 발휘한다. 내면은, 작가의 기질적인 무심함에도 불구하고 포기되지 않는다. 또는 전공투의 비본질적이 수선스러움에 대한 근원적인 혐오감이 이 작가에게 내면의 길을 제외한 모든 길을 차단시켜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방법적인 무심함의 한계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다. 어떤 수준에 이르면 그 방식은 전혀 쓸모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 거리두기가 삶의 근원적인 상실감을 가볍게 띄워 버리는 방법으로서 훌륭 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점이 하루키 문학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 한 것이 다. 그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쳐 넘긴다. 그 가벼움의 미학은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특히 주인공들의 경쾌한 대화에서 가장 잘 구현된다. 쥐는 제이스 바에서 불쑥 부자들이란 똥이나 처먹으라지라고 내뱉는다. 쥐가 견딜 수 없는 것은 부자들의 욕망의 끈적거림이다. 그래서 그는 부자들을 진드기라고 부른다. 하루키는 끈적임을 견디지 못한다. 그가 선호하는 이미지들은 모두 삶의 끈적임으로부터 해방된 것들이다. 그 이미지군의 선두에 바람이 놓여 있다. 바람은 절대로 질척이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며, 즉 묶여 있지 않으며 언제나 자유롭고 완벽 하게 가볍다 바람의 숭배자들은 육체의 끝으로, 무거움이 취소되는 비물질서의 방향, 바깥으로, 위로 간다. 새, 나뭇잎사귀, 달리는 오토바이, 음악, 소녀들의 머리카락, 샴푸 냄새, 낮잠, 작가의 감수성은 그런 가벼운 것들을 향해 민첩하게 움직인다. 하루키는 아주 잠깐의 터치로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일단은 그의 말에 대한 특별한 재능 때문에 가능해진다. 그 재능은 또한 남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타인에게 적당한 거리를 요구하 지마 그러나 절대로 쌀쌀하지 않은, 한 없이 다정한 하루키적 인물들의 특성과 짝을 이룬다. 나는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지만, 그러나 이야기가 심각해질 만한 국면에 접하면 절대로 그 위기에 빠져 들지 않는다. 그는 가볍게 문제를 띄워 버린다. 바로 와타나베의 그러한 말하기 방법에 귀여운 미도리는 매혹된다.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순수의 대명사처럼 등장하는 나오코의 진지한 추구에 대해 나 와타나베는 어깨에 힘을 빼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나오코는 절대로 고리타분한 그녀의 방식을 버리지 못한다. 나오코는 나오코대로 와타나베는 와타나베대로 자신의 방식에만 충실하다. 와타나베가 나오코에게 기울이는 정성을 자기 식의 가벼움의 방식에 나오코를 끌어 들이는 방향으로만 기울어진다. 그는 정확한 말을 찾는라고, 또는 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무슨 말을 할 때면 하얀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는 나오코를 만나러 그녀가 입원해 있는 요양 원으로 가는 길에서조차 그에게 산해을 하느냐고 물어 오는 남자에게 귀찮아서 그렇다고 대답하고 나오코가 자살을 하고 난 뒤 방황하며 바닷가에서 울고 있는 그에게 이유를 물어 보는 어부에게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거의 반사적으 로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작품이 씌어질수록 이 가벼움의 태도가 결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는 사실을 작가는 점점 더 깊이 자각해 간다. 상실감은 다만 잠시 유보될 뿐 3센티미터 정도 잔 밑에 남아 있는 맥주처럼 다시 찰랑이기 시작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제이스 바의 한구석에서 던져졌던 상실감은 두 번 째 작품 1973년의 핀볼에서 다시 기어이 되돌아온다. 첫 번째 작품에서 상실감은 거의 시적인 아름다움마저 지니고 있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아무런 압박감도 느끼지 않 는다. 그들은 그것과 더불어 산다. 첫 작품에서 고유 명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로 이 작품의 주 인공들이 주체의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며 그 익명성의 삶에 대해 아무런 책임 의 식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두 번째 작품에 이르며, 첫 번째 작품에서 대학 테니스 코트 옆에서 목매어 죽은 불문과 여학생이 나오코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게 된다. 그것은 작가가 어떤 태도의 유형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전히 주인공들은 익명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첫 번째 작품의 등장 인물들의 태도 도 사뭇 다르다. 그들은 말놀이 가벼운 뒤틀기로 삶에 시시각각 쳐들어 오는 죽음에 대항하는 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하면서 쥐는 j 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봐, 제이, 안돼. 누구나가 그런 식으로 묻지도 않고 얘기하지도 않고 서로 이해하는 척해 봤 자. 아무데도 도달하지 않아. 이런 것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야, 나는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그런 세 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렇게 말할 대 쥐는 분명히 자신의 예전의 태도가 어떤 한계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j는 쥐에게 자네가 변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한다. 상실의 시대에서 하루키는 상실감에 대한 정면 대결을 시도한다. 포에지는 줄거리를 가지게 되고, 인물 들은 별명과 이니셜 또는 숫자 대신에 자신의 고유명사를 부여받는다. 하루키의 인물들은 그러나 다른 대안을 찾아내는 데 실패한다. 제1,2작품에서 어렴풋이 얽혀 있었던 두 개의 존재 유형은 제 3작품에 이프면 완전히 갈라져 버린다. 딴전을 피우며 적당히 살기, 또는 그것을 맏아들일 수 없다면 죽어 버리는 방 법뿐이다. 어느 경우에도 나라고 불리는 작중 인물은 전자의 생존 방식을 자기화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껍질 속으로 쏙 들어간다. 이 완강한 거리두기의 방식은 하루키의 독서와 음악 취향에서도 고스란히 드 러난다. 그는 죽어 버린 작가가 아니며 절대로 읽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세기나 고전주의 심지어는 낭만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도 아니다. 그는 죽은 지 약 30년쯤된 작가들의 작품을 즐겨 읽는다. 그 중에서도 피츠제럴드가 최고의 작가로 여겨진다. 일단은 현실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두기를 원하는 교양인답게 그는 외국 작가 를 선택한다. 현존하는 작가는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는 현실에 먹혀들어가는 평균치의 감수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에는 그의 자아는 너무나 현대적이 며 계산에 빠르다. 그는 골치 아프게 그의 감수성에서 멀리 떨어진 작가들을 찾아 모험을 떠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유럽 작가들이 아니라 미국 작가들이 선호된다는 것도 그가 어떤 문화적 정통 성에서 적절히 이탈한 문화 기호를 더욱 선호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 적당히 거리두기는 하루키로 하여금 JF케너디가 암살당했던 1963년을 원년 으로 삼게 만들고, 그리고 현대의 록스타들보다 60년대의 팝송 스타들을 선호하 게 하고, 현대의 오락기들보다는 6,70년대ㅡ이 구식 오락기들을 좋아하게 만들 다. 그러한 태도는 내가 즐겨 입는 의상들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는 정장 대신에 코튼 상의나 더블 버튼 블레이저를 즐겨 입으며, 와이셔츠 보다는 버트다운 셔츠를 더욱 좋아하고, 딱딱한 부드러운 스웨이드 구두를 즐겨 신는다. 말하자면, 아주 정식 정장은 아니지만, 그러나 아주 캐주얼하지는 않은, 충분 히 정장의냄새를 풍기는 옷차림을 즐기는 것이다. 그 모든 취향들은 현실로부터 전격적으로 도망치지 않는, 그러나 그렇다고 해 서 현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 하루키적인 가벼움의 철학을 흥미롭게 반영한다. 제의, 말찾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추구가 포기된 것은 아니다. 내면의 추구는, 비록 작중 인물들에 의한 존재론적인 각성에까지 이르지는 못 하고 있지만, 그러나 생생한 욕구로서 하루키 작품의 핵을 이루고 있다. 나는 앞에서 그의 작품이 제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는 존재의 무의미함을 인식하고 그 의미를 찾는 방편으로서 글쓰기를 선 택한다. 모든 제의는 존재의 의미화를 겨냥한다. 떠도는 삶의 모든 사건들은 제의를 통하여 비로소 의미 있는 것으로 변화한 다. 내가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하루키의 세 작품들은 모두 성년식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유년의 조화로운 공간을 떠나 낯선 어른들의 세계로 내던져진 스무 살 안팎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자아를 찾아 떠나는 내면의 여행을 다루고 있다. 그의 소설들이 한결같이 일인칭 서술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도 이 제의의 수 행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주인공인 내가 삼인칭 서술 형태로는 결코 추구할 수 없는 어떤 내면 적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서술 형태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거의 삼인칭 기술법에 가까운 특 성을 보인다. 쥐는 쥐대로 나는 나대로 따로따로 소설 공간에 등장한다. 그러나 1973년의 핀볼에 이르면 쥐와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명확히 구분 할 수 없을 만큼 얽혀 버린다. 그것은 결국 쥐와 내가 한 인물의 분신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닌 게 나이라 작가는 한 인터부에서 나와 쥐는 앞장과 뒷장 같은 준재라고 말한다. 1973년의 핀볼에서도 작가는 그 점을 명확히 밝힌다. 이것은 나의 ㅣ이야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쥐라고 불린사나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해 가을 우리들은 칠백KM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었다. 1973년 9월 이 소설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입구다. 축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일 없으면 문장을 쓰는 의미 따위는 전혀 없다. 나와 쥐 사이의 공간적인 700KM의 거리는 나오코와 와타나베 사이에서는 7 개월의 시간적 거리로 환치된다. 그 7만큼의 거리는 이 숫자가 상징하는 순수성 또는 완결성과 주인고 나가 속 해 있는 세속 공간과의 거리이다. 쥐는 상실의 시대에서는 기즈키로 분리된다. 소설은 독립적인 개인의 인격을 부여받은 이제는 고유명사인 와타나베라고 불 리는 나를 위한 완벽한 일인칭 서술 형태의 소설로 변형된다. 글쓰기라는 제의는 시작된다. 그것은 입구이다. 글쓰기가 끝난 뒤, 작가라는 비의전수자는 작품 첫머리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의 추구는 하루키 작품의 처음과 끝에 놓여 있다. 그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는 완벽한 문장에 대한 근심으로 시작된 다. 작가는 완전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소설의 서두를 떼지만, 그러 나 기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욕망은 어두움의 심연으로 빠져 드는 정확한 말에 대한 욕망이다. 그리고 그 완벽한 말에 대한 근심은 존재의 구원, 즉 존재의 순결성의 회복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1973년의 핀볼 역시 말의 추구로 시작된다. 그는 남들이 잔뜩 들려준 골판지 상자에 빽빽이 쑤셔 넣어진 원숭이 무리같은 말을 초원에다 놓아 준다. 그렇게 해서 그는 삶의 줄거리에 꽁꽁 묶여 있는 타락한 말들에게 원래의 충 만함을 되돌려 주고 싶어한다. 이 말의 추구는 실상 하루키의 실제적인 성년식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절판이 된 하트필드의 최초의 책 한 권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된 것은 사 타구니에 심한 피부병을 앓았던 중학교 3학년 때의 여름방학이었다.. 내게 그 책을 준 숙부는 3년 후에 장암을 앓아 몸 속을 난도질당하고 몸의 입 구와 출구에 플라스틱 파이프가 한껏 채워진 채 몹시 고통스럽게 죽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교활하게 원숭이처럼 검붉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트필드라는 불모의 언어는 고통스러운 육체대신에 얻어진다. 그것은 입구와 축구가 몽땅 막힌 육체의 반대편에서 추구되는 열려 있는 우 주, 또는 바람의 가치이다. 존재의 순결성의 회복과 관련되어 있는 언어의 추구라는 주제는 1973년의 핀 볼의 쌍둥이의 에피소드에서 흥미롭게 표현된다. 이 여자 쌍둥이 형제는 이 소설에서 강하게 부각되는 위화감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조화의 존재들이다. 그녀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정히 원한다면 오른쪽과 왼쪽, 종과 횡, 상과 하, 앞과 뒤, 동과 서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그녀들은 말한다. 작가는 거기에다 입구와 출구를 덧붙인다. 그녀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다른 등장 인물들이 익명이라는 사실과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시간의 분화와 개체적 구분 이전의 개별적 이름으로 호명 될 수 없는 존재 이전의 순수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그녀들을 양옆에 누이고 침대 속에서 읽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만일 데카르트가 그 책을 썼다면 나는 데카르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들고 침 대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 책이 선택된 이유는 단 한 가지, 순수라는 말 때문이다. 그녀들과 살면서 주인공의 시간에 대한 감각이 눈에 띄게 퇴보했다든가, 그녀 들이 벌거벗은 채 목욕탕 바닥에서 빨래를 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정말로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실감한다든가 하는 대목들이 그녀들이 이성이 지배하는 낮의 역사적인 세계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밤의 초역사적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한 그녀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장소에 숨겨져 있는 구식 배전반은 단번 에 찾아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전반은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집적되는 엄마말, 원초의 언어를 상 징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배전반이 뭐냐는 쌍둥이들의 질문에 대해 전화공은 전화 회선이 몇 개나 보이 는 엄마 개라고 대답한다. 엄마 개는 죽어 가고 있다. 쌍둥이는 그 엄마 개를 저수지에 장례 지내러 간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저수지에는 지독하게 개가 많다. 그 개들은 아마도 새끼 말들, 머물지 못하고 헤매어 다니는 현대인의 소통하 지 못하는 타락한 언어들의 상징일까. 쌍둥이 중의 한 사람은 손바닥을 나의 팬티 안쪽에 넣고 몇 번이고 쓰다듬는 다. 그것은 나를 애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한 행위인 것처 럼 보인다. 어쨌든 그의 직업은 말을 다루는 번역가이니까. 지금은 하나의 시궁창을 다른 시궁창으로 옳기는 정도의 일밖에는 하지 못하 지만, 언젠가 엄마의 신비를 번역해 낼지도 모른다. 비는 저수지 밑바닥에 가라앉은 엄마말의 장례식, 원초적 혼돈으로 되돌려진 말의 죽음에 어울리는 기상 조건이다. 이 말의 카오스에 동반되는 비는 내가 얼토당토않은 온갖 상호 관련성이 없는 텍스트들의 번역을 의뢰 받았던 날에도 내린다. 그 비는 나오코가 처녀성을 잃던 그녀의 20세 생일날에도 내린다. 그녀의 순결의 상실은 그녀의 말 찾기 추구의 도정에서 중요한 한 단계를 형 성한다. 그녀는 이제 소녀의 말이 아니라 여성의 말을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이제 그녀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소녀로서의 존재 의미가 아니 라, 여성으로서의 존재 의미이다. 그러나 그 추구는 실패로 끝난다. 이야기의 말끝이 잡아뜯긴 꼴로 공중에 떠 있었다. 배전반을 장례 지낸 뒤, 저수지를 들여다보는 나와 쌍둥이에 대해서 작가는 멀리서 바라보면 틀림없이 기품있는 기념비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기념비? 이제 힘을 잃어 버린 엄마말 대신에 새로운 말의 시대를 준비하 는 자들의 ? 아닌 게아니라 이제부터 잘 들어야 한다는 듯, 쌍둥이는 양쪽에서 나의 귀를 열심히 파준다. 그리고 그녀들은 어느 날 그의 곁을 더나 그녀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다. 이제 말을 찾는 것은 그의 몫이니까. 그녀들을 실어갈 버스가 올 때까지 나는 그녀들과 말잇기놀이를 한다. 언어의 추구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하루키문학에서 숫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작가는 숫자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대문이다.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숫자는 아주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는 좀처럼 잠시라든가 오랫동안 이라든가 하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 는다. 5분 뒤에, 10초동안, 그런 식으로 그는 숫자를 명기한다. 그는 그의 존재 이유도 숫자로 환치시켜 보려고 노력한다. 그 시도의 밑바탕에는 상호간의 소통이 이미 불가능해진, 현대 사회의 타락한 말에 대한 절망이 숨어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숫자들은 흥미롭게도 마치 어떤 주제 변주 를 하듯이 하나의 숫자가 되풀이되든가 또는 하나의 숫자와 그 배수가 반복되기 도 하고 끝자리수가 계속 되풀 되기도 한다. 숫자에 대한 하루키의 선호는 그의 불모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 숫자는 언어의 결에 끼여드는 삶의 냄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숫자는 언어의 결에 끼여드는 삶의 냄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그것은 정제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소독된 차가운 기호로서 가치를 가진 다. 숫자의 의미는 핀볼 게임에 이르면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마저 가지게 된다. 그 오락 기계는 이 작가에게 어떤 우주적 구멍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그의 불모의 철학에 의하여 물컹물컹한 살의 기억이 완전히 제거된 차 갑고 단단한 여성성의 상징이다. 그는 마치 연인을 부르듯이 그 기계를 그녀라고 부른다. 핀볼 머신의 철학의 요지는 무용성이다. 그것은 단지 숫자로 환치된 프라이드이며, 고독한 소모이며 영겁성을 목표로 하는 존재 연습, 리플레이, 리플레이, 일 뿐이다. 그것은, 숫자로 환치된 존재의 의미이다. 핀볼의 목적은 자기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혁에 있다. 예고의 확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축소에 있다. 분석에 있는 것이 아니고 포괄에 있다. 만일 당신이 자기 표현이나 에고의 학대나 분석을 지향한다면, 당신은 반칙 램프에 의해 가차없이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가장 무용한 존재론적 게임, 내용으로부터의 탈출, 무의미의 영 역에의 편입, 불모 연습이다. 이 아름다운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루키의 문학이 지향하는 합리와 유용, 지성 적 분석에 근거를 두고 있는 남성 원칙의 반대어인 여성 원칙을 추구한다. 이 대목에서 여성 원칙은 포괄이라는 말로 대변되고 있다. 포괄의 철학은 쌍둥이의 철학이며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양손의 열 손가락을 꼼꼼히 살펴 보는 버릇을 가진 쥐의 철학이다. 그들은 왼쪽 또는 오른쪽 어는 한편을 들기를 요구하는 세계를 등지고 전부인 어머니에게 간다. 쥐는 사랑하던 여인이 그녀에게 몸무게를, 남자를 사랑하고, 늙어서 죽어 가는 하나의 존재가 갖는 무게를 기대어 온 뒤 그 여자를 포기한다. 그는 누군가 한 명의 살고 늙어 가는 여자의 남자가 되는 대신, 전부의 남자 가 되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바다 밑 도는 핀볼 머신이 놓여 있던 전혀 다른 종류의 어둠에게로 가 는 일이다. 그것은 탄생 이전의 무로의 회귀, 죽음, 조금씩 실체를 잃고 무게를 잃고, 감 각을 잃어 가는 것이다. 쥐는 잠든다. 그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다. 달의 여신과 일상의 여성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쥐 대신 나는 살고 늙어 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핀볼 머신을 만나러 가고, 그리고 그녀에 대한 추구를 중단 한다. 에우리디체는 잠깐 부재로부터 끌어 올려졌다가, 다시 부재 속으로 되돌려진 다. 나는 핀볼 머신을 떤단다. 안녕 그리고 내내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핀볼의 신음 소리를 그의 삶에서 깨끗이 지워 버린다. 그는 그의 내면의 분신인 쥐에게 밤의 가치의 추구를 떠맡겨 버린다. 기즈키, 나오코는 네 여자야, 데리고 가, 난 할 만큼 했어. 당신은 나쁘지 않아. 힘껏 했잖아. 추구는 중단된다. 다만 마음속을 헤매어 다는 따뜻한 추억의 낡은 빛만으로 그는 만족하기로 한 다. 이 태도는 상실의 시대에서도 그대로 견지된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쥐와 나의 존재 방식이 두 쌍의 주인공들을 통해 표현된 다. 서로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면서도 결코 한데 통합되지 못하는 이 두 개의 존 재 방식은 나오코와 미도리라는 두명의 여성을 통하여 드러난다. 작가는 놀라운 세심함으로 두 명의 너무나 다른, 그러나 매력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선 두 여성의 다름은 그녀들의 이름에서 드러난다. 나오코의 식자는 이 여성이 자신의 말대로 공정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여성 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미도리의 종자는 그녀가 생명의 신선함, 육체적 재생산 의 원칙을 상징하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나오코는 늘 나비 모양의 머리핀을 만지작거리고, 미도리는 늘 팔지를 만지작 거린다. 머리와 나비의 결합은 나오코가 상부의 탈 육체적 정신적 존재라는 것을 암시 하며 미도리의 팔찌는 성적 상징성을 숨기고 있다. 그것은 이 두여성이 작가의 두 형태의 아니마의 투사임을 나타내어 보여준다. 그녀들은 성모마리아와 이브의 반복이다. 나오코는 눈이 특히 아름답고 미도리는 다리가 특히 아름답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데이트할 때면 그저 국수 정도의 가벼운 음식을 먹는데 반해서 미도리와는 온갖 종류의 음식을 다 먹는다. 미도리는 늘상 우리 뭐 먹으러 가요라고 졸라댄다. 그것은 나오코와 주인공이 늘 걸어다니는 데 반해서 미도리와는 늘 어떤 장소 엔가 머물러 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나오코는 추구의 존재이다. 그녀가 그토록 와타나베를 끌고 도쿄 시내를 걸어다니는 것은 세상에 그녀가 머물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미도리는 특히 요리를 잘하고 좋아하는데, 그녀의 허름한 집에서 유독 부엌만 이 환하고 현대식이라든가 그녀가 용돈을 아껴서 주방 기구를 산다든가 하는 사 실들은 성적 상징주의가 음식의 상징 주의의 늘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 실을 염두에 두면 전혀 우연한 연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미도리가 와타나베를 끌고 포르노 영화관에 가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나오코 집안의 죽음이 설명되지 않는 어떤 정신적인 이유에 의한 빼어난 사람 들의 자살이라면, 미도리 쪽의 죽음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병으로 인한 죽음 이다. 나오코는 정확한 말을 고르기 위하여 애쓰고 미도리는 참으로 귀엽고 발 랄하게 아무렇게나 말한다. 나오코가 어떤 일상성을 벗어난 신화적인 여성성을 대변한다면, 미도리는 삶 의 힘겨움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견디어내는 일상적 위안의 원칙으로서의 여성 성을 대변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와타나베가 미도리의 집으로 찾아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평안한 일 상의 풍경에서 따스하게 확인된다. 거리의 갖가지 소음은 여느 때보다 한층 또렷또렷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의 전차에는 일행인 듯한 세할머니들만이 타고 있었다. 내가 차에 오르자 할머니들은 내 얼굴과 내 손에 들고 있는 수선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중 한 할머니는 나의 얼굴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 나도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맨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싹 스쳐 지나가는 낡은 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집의 빨래터에는 코마코의 모종 화분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그 옆에서 는 커다란 검은 고양이가 햇살을 쬐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어린아이가 비누방울을 날리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이시다 아유미의 노래가 들려 왔다. 어디선가 카레 냄새마저 풍겨 왔다. 그 세 할머니들은 어쩐지 운명의 실을 잣는 세 여신 파르크들을 연상시킨다. 나의 생각이 영 엉뚱하지만은 않은 것은 작가가 몇 번인가에 걸쳐 전차를 관 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해석을 고집하지 않더라고, 어쨌든 그녀들의 늙음은 미도리가 상징하는 육체적인 살기 그리고 늙어 가기와 무관하지 않다. 미도리에게 가는 와타나베는 미도리식으로 늙음에 따스하게 적응하는 방식에 게로 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비누방울의 가벼움과 노래와 음식은 병으로 죽어 가는 아버지를 간호 하는 미도리가 늙어 가는 육체에 대항하는 방법들이다. 미도리는 나오코의 비일상적 추구의 반대편에서 조촐한 일상의 아기자기함을 상징한다. 그녀가 말끝마다 외치는 피스는 평화주의자의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평온함 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나오코의 닫혀 있는 깨끗한 탈속적인 요양원에 다녀온 뒤, 그 세계의 매혹에 빠져 멍해 있는 와타나베를 미도리는 병원으로 끌고 간다. 그곳에는 나오코의 정신적인 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육체의 고통에 신음 하는 늙은 미도리의 아버지가 누워 있다. 아버지는 와타나베에게 차표, 미도리, 우에노 역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 린다. 그 역은 가출했던 미도리를 아버지가 찾아 데려온 역이다. 미도리의 역은 집으로 돌아오는 역이다. 그러나 나오코의 역은 떠나는 역이다. 작가는 나오코를 세속의 공간에서 떼어내어 산 속의 고요한 성스러운 공간에 위치시킨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기묘한 평온함 속에서 움직인다. 어느 달 밝은 날 밤, 나오코는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의 여신으로 현현한 다. 그 장면에서 불완전했고, 그래서 아타나베에게 참을 수 없는 갈망을 불러일으 켰던, 육체의 껴안기라는 행위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었던 지상적 사랑의 언어는 완전히 소멸된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불가능한 언어의 시니피에로 바뀌어 버린다. 나는 버드나무의 꿈을 꾸었다. 산길 양 옆으로 버드나무가 줄줄이 서 있다. 버들가지 하나하나에 작은 새가 앉아 있었다. 새들은 날아가지 않았다. 날아가는 대신에 새들은 새 모양을 한 금속이 되어, 텅텅 소리를 내면서 땅위 에 떨어졌다. 눈을 떴을 때, 나오코가 내 침대 발치에 앉아 창밖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아까와 같은 하늘색 가운 비슷한 것을 입고 있었지, 머리를 예의 그 나비핀으로 묶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머리핀을 뽑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두 손을 올리고 천천히 가운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단추는 모두 일곱개가 있었다. 그 일곱개의 흰 단추가 전부 끌러지자 그녀는 벌레가 허물을 벗듯 가운을 허 리 쪽으로 스르르 미끄러뜨려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완전한 육체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오코가 단 한 번 와타나베와의 사랑에 성공한다는 것도 달의 여신으로서의 나오코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의 심리적인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류학적인 자료를 활용하는 것은 때로 대단히 유용하다. 나오코 또는 나오코를 통해 투사된 작가의 아니마는, 그녀 자신이 전혀 인격 체로 인지할 수 없는 비인격적인 원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녀가 그토록 육체적으로 와타나베를 원하면서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개인의 존재를 넘어서는 어떤 원칙의 의인화이기 때문이다. 인퓨학자들에 따르면 고대 사회의 여성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일생에 꼭 한 번 달의 여신의 신전에 가서 불 특정한 남성과 성적 관계를 가져야만 했 다고 한다. 그것은 달의 여신의 원칙에 자신을 맡기는 제의 였다. 나오코는 단지 훗날 달의 여신으로 현현하기 위해서, 즉 순결을 상실하고 풍 요의 성으로서 태어나기 위해서만 와타나베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와타나베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누군가의 팔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와타나베는 달의 제의에 동원된 불 특정한 남성, 비인격체인 남성적 원칙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나오코는 완벽한 여성, 달의 여신으로 현현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현현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다. 그녀의 내면의 에로스는 성숙한 여성적 인격으로 구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른으로서의 삶이 단지 늙고 추해져서 죽어 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녀는 자살한다. 제의는 작품의 놀라운 성공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난다. 하루키는 나오코와 기즈키 그리고 하쓰미라는 순수한 존재들에게 삶에서의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추구는 추구대로, 삶은 삶대로 여전히 따로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나오코의 존재 의미는 영원히 죽은 자의 몫으로 떠밀려 버린다. 작가는 나오코의 죽음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와타나베는 최선을 다했다 고 애써 항변한다. 그리고 미도리에게로 돌아선다. 그럴까? 미도리가 그 긴 추구의 대답이 될 수 있을까? 나오코의 의미를 타락 한 사회에서 삶의 결 안에 짜넣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유보된 결론 재생 램프 결론을 유보하자, 어쨌든 나는 그의 초기의 세 작품을 읽었을뿐이니까. 그러나, 지금으로서 나는 반칙 램프의 불을 켤 수 밖에 없다. 하루키씨, 미도리는 결론으로서 좀 약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죽음의 견딤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그건 물론 나름대로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결론을 위해서 그토록 길고 오랜 추구를? 램프에 불이 켜진다. 그래요, 제의는 반복되는 것이니까. 어쨌든, 그의 작품은 놀라운 깊이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아무렇게나 가볍게 씌어진 작품이 아니다. 그의 매력에 촉발되어 씌어진 국내의 작품들은 그의 외면적 감수성만을 따라 간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들은 늙은 레이코와 젊은 와타나베의 정사도 단순히 예외적인 섹스의 한 예로만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앞서 밝힌 것처럼 그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내적 필연성의 장치를 단단히 갖추고 있다. 문제는 다시 내면, 존재의 추구이다. 그것이 빠져 잇는 한, 아무리 뛰어난 감수성이라도 풍속도 이상의 것을 써내 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쥐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는냐는 질문에 대해 안마당의 잔디 깎는 방 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라고 한 대답은 정말은 아무렇게나 한 대답이 아닌 것 이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안이니까. 또는 하루키가 발명해 낸 작가의 이름에 따르면 마음의 장, 하크릴드가 문제 가 되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다시 형이상학이다. 내가 형이상학이라고 말할 때 나는 거창한 어떤 철학의 체계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다 거덜난,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영혼이 그곳에 젖줄을 대고 있는 본 질적인 거의 추구를 의미한다. 삶은 늘 거기 있다. 있는 채로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가. 실재는 있는 바대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흔들리는 가능성의 아우라를 요구한다. 실재는 열려있다. 열린 실재, 그것이 문학의 길이다. 공허감과 결핍감 속에서 찾는 젊음의 낭만-김석자(단국대 일문과 교수) 메마른 청춘의 편린을 경쾌한 터치로 묘사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일본의 군조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임과 동시에 무라 카미 하루키의 처녀작이다. 이 작품의 프롤로그 부분에서 작가는 주인공 나의 문장에 대한 자세와 무엇을 쓴다고 하는 의미, 그리고 나가 문장에 관해서 많이 배웠다는 데레크 하트필드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트필드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한 동기를 나에게 부여하는 미국작가로 되어 있 는데, 사실은 작가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하트필드는 뉴욕까지 가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려 개구리처럼 납작해져 죽었다라 는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하트필드의 경력이나 저작물등을 정성껏 설정해서 하 트필드가 마치 실존의 인물인 것처럼 꾸며 놓았다. 게다가 재미있다. 또 하트필드의 문장 방법을 주인공이 사용해 소설을 쓰는 것으로 일종의 중층 감이 있다. 이것은 작자가 주인공과 하트필드를 겹쳐 맞추어 진한 맛을 내려고 계산한 장 치일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라는 문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는 곧 글을 스는 건 몹시 고통스런 작업이라는 것을 시사해 부며, 또한 삶 의 어려움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1970년 8월 8일에 시작해서 8월 26일에 끝난다. 등장 인물은 나와 쥐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다. 1970년 여름 나는 대학의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해변의 도시인 고향에 돌아와 있다. 그 고향은 주인공이 태어나 자라고 여자 친구와 처음으로 잠자리를 같이한 도 시다. 앞에는 산, 뒤에는 바다, 주위는 항구며, 인구 7만 정도의 아주 작은 도시-거 기에는 친구이자 대학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고 있는 쥐가 있다. 나는 집이 가난하고 쥐는 부자다. 쥐의 아버지는 아주 가난했지만 전쟁 전부터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장사 를 시작해 성공한 사람이다. 3층 건물의 저택, 옥상에는 온실이 있고 지하에는 차고가 있다. 쥐는 소년 시절에는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었지만 눈이 나빠져 체념한다. 대학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학생 운동에 함여했지만, 주위의 친구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고 쥐는 돌아갈 곳이 없어 중퇴해 버린다. 쥐는 자기 집이 부자인 것도 극도로 싫어한다. 소설을 마음내키는 대로 쓰고 있지만, 그 소설에는 섹스 장면이 없는 것과 사 람이 죽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그후 10년 가까이 지나 30세가 되었어도 쥐는 변함없이 섹스 장면이 없고 사 람이 죽지 않는 소설을 계속해서 쓰고 있다. 나는 고향에 돌아와 거의 맥주를 마시며 지낸다. 어느 날 제이스 바에서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와 만나게 된다. 나이는 10대 후반쯤이고, 마른 편이고, 키는 158cm정도며 그녀의 왼쪽 손은 새끼손가락이 없이 네개다. 나는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게 되어 하룻밤을 같이 지내게 된다. 그런 인연으로 둘 사이는 가까워지고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된다. 두 사람이 각각 사랑이 거북스러움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맞아들이는 동안 나 의 여름은 석연치 않게 씁쓸하게 지나간다. 겨울에 다시 나가 돌아왔을 때, 왼쪽손에 새끼손가락이 없는 여자는 레코드 가게를 그만두고 아파트에서도 이사 가고 없었다. 그녀는 사랑의 홍수와 시간의 흐름속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 다. 내면을 언어화하려는 이미지와 언어 갈등의 소용돌이 이러한 줄거리를 놓고 볼 때 이 소설은 메마른 젊음의 한 편린을 경쾌한 터치 로 묘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내부적인 의미를 살펴 볼 때 우선 주목 되는 것이 나와 쥐와의 분신 관계다. 물론 주체는 나다. 그러나 나와 쥐가 겹쳐지는 정도가 모호하고 독립된 개인같이 생각되는 곳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나와 쥐의 사고 방식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내향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는 쥐는 드디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소설을 쓰려고 한다. 말하자면 나가 자신의 얘기 속에서 배제하려는 내면적인 부분을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쥐는 자기가 표현하려고 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나는 잠자코 고분을 바라보면서 수면을 가르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어. 그때 내가 느낀 기분을 도저히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업서. 아니, 기분 같은 게 아니었다.. 마치 뭔가에 푹 감싸인 듯한 감각이었오. 그러니까 매미나 개구리, 거미나 바람, 모든 게 하나가 되어 우주를 흘러가는 거지. 자기의 내면을 언어화하려고 하는 이미지와 언어의 간들의 소용돌이 속에 빠 진 나르시시스트적인 쥐는 그 소용돌이 저편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말이라고 하는 불확실한 무지개 저쪽의 어딘가에 푹 감싸일 듯하고 모든 게 일 체가 되어 우주를 흘러가는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즉,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화를 계속해서 억제하려고 하는 나에 비해, 내 면에 침잠해 있는 자아를 드러내고자 하는 쥐는 상호 보완의 존재인 것이다. 과거를 동결한 나와 과거를 버린 쥐를 그린 1973년의 핀볼 1973년의 핀볼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속편, 내지는 연작이라고 볼 수 있 다. 이 작품에서는 나와 쥐가 독립된 인간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나는 1973년 현재 시부야에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사무실을 차려 생계를 유지 하면서 쌍둥이 자매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나는 매일 같은 생활을 반복하면서 지내고 있다. 하루하루가 변화 없는 지루한 일상 생활이었다. 한편 쥐는 나가 사는 도시로부터 700km 떨어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묘 사된 그 도시에 머문 채, 타이프라이터를 물려준 여자와 관계를 맺고 소설을 계 속 쓰고 있다. 그리고 쥐의 일상 생활도 나와 같이 지루한 생활의 연속이다. 1970년 쥐가 대학을 그만둔 해의 봄, 쥐는 시간의 균등성을 조금씩 상실해 갔 다. 대학을 그만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는 아무에게도 설명하 지 않았다. 여자와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쥐의 생활은 1주일의 끝없는 반복으로 바뀌었 다. 그날 그날의 감각이 전혀 없었다. 몇 월? 아마 10월일 것이다. 알 수가 없다. 토요일에 여자와 만나고,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사흘 동안 그 추억에 잠겼다.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의 절반은 다가올 주말의 계획을 세우는 데 썼다. 그리고 수요일만이 갈 장소를 잃고 공중에 떠서 방황했다. 앞으로 전진할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수요일. 쥐는 누군가로부터 뻗어 오는 손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상 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고 자신을 바꾸어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며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모두 썩어 가지만 썩는 방법의 선택은 극히 한정 쥐 자신한테도 이 도시를 떠나야 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기 변혁을 하기 전에 자신의 주위 상황을 바꾸어 줄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도시를 떠난다고 하는 행위는 쥐가 얻은 결론인 것이다. 그리고 왠지 마음에 걸리는지 j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J 인간은 모두 썩어 가는 거지, 그렇지?. 그렇겠지. 썩어 가는 데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겠지.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 선택의 수는 굉장히 한정되어 있는 것 같아. 기껏해야, 두세가지 정도 쥐는 지금의 자신이 그대로 썩어 가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나는 매일 같은 생활의 반복중에서 어느 날 문득 핀볼에 마음을 사로잡 힌다. 1970년에 몰두했었던 쓰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이라고 불리는 모델이었다. 나는 그 모델을 간신히 찾아 옛날 그대로의 스페이스십과 재회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와 핀볼 기계와의 밀월이 시작된다. 대학에는 거의 얼굴도 내밀지 않고 아르바이트 수입의 태반을 핀볼에 쏟아 부 었다. 그러나 갑자기 핀볼 오락실이 도넛 가게로 바뀌고 스리플리퍼 스페이스십이 행방을 감춰 버린다.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로 인해 나는 핀볼을 그만두게 된다. 그것은 나가 마음을 두고 있었던 시대를 봉쇄하는 일이었다. 나는 과거를 동결하고 쥐는 과거를 버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오코의 얘기는 스토리에는 직접 관계되지 않는다. 스토리는 나가 이전에 몰두했었던 쓰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이라는 핀볼 기계에 어느 날 갑자기 사로잡혀 찾아다닌다고 하는 얘기를 축으로 전개된다. 독자를 매혹시키는 하루키 문학의 특색 이상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을 중심으로 하루키 문학을 살펴보았다. 간단하나마 독자들이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작품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하루키문학의 특징을 몇 가지 열거하며 끝을 맺겠다. 첫 번째, 스토리의 전개보다는 독자를 매혹시키는 문장력이다. 인간의 복잡한 내면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짧고 읽기 쉬운 문장으로 경쾌하다. 두 번째, 이미 알려져 있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는 어느 특 정한 사람이나 물건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기본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의 흥미를 지속시켜 소설을 읽어 갈 수 있게 한다. 세 번째,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국 작가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일본 소설과는 달리 일본 소설이라고 하는 감각이 희박하다. 도희적인 센스가 있고 세련되어 세계 여러 나라의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 는 이유가 된다. 네 번째, 독자로 하여금 작품 속에 감도는 공허감과 결핍감에 호응하게 한다. 고도 소비 사회에 있어서 물질적, 금전적으로는 풍요하지만 원가 메워지지 않 는 정신의 결핍을 무라카미 문학이 채워 주고 있는 것이다. 슬픈 외국어에 담긴 뜻-남진우(문학 평론가) 일본 문학 황무지에 하루키 열풍의 기적 왜 하필이면 무라카미 하루키인가. 90년대의 개막과 더불어 한국의 독서계를 휩쓴 하루키 열풍을 지켜보며 많은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다. 하루키의 거의 모든 소설이 소개되고, 상당수 작품이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오른, 심지어 표절 시비가 일 정도로 젊은 세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 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제기된 이 질문엔 질시와 곤혹, 자괴감등 복합적인 감정이 개입되 있다. 일본 문학은 우리 나라에선 여타의 다른 외국 문학과 달리, 아직도 객관적인 분석이나 향수의 대상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우선 국내에 소개된 현대 일본 작가의 수가 극히 한정돼 있을 뿐 아니라, 그 작품들 또한 소수 문학 독자의 관심을 끌었을 뿐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80년대 중반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일본 문학은 추리물이나 역사물, 무 협물 같은 대중 소설류였다. 우리가 그 동안 일본 문학을 얼마나 등한시해 왔는가 하는 것은 가와바타 야 스나리나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국내 문인들이 보인 냉소 에 극명히 드러나 있다. 물론 이러한 일본 문학에 대한 거리감 내지 상대적 경시엔 당연히 지난 시절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적 기억이 버티고 있지만, 그것 못지 않게 일본 문학은 무조건 서구 문학보다 한 수 아래로 놓고 보려는 분위기가 작용한 면도 없지 않았던 듯하다. 가벼움, 무국적성, 상실감등 신세대 정서가 비밀의 열쇠 이런 가운데 갑자기 불어온 하루키 바람은 정말 평지 돌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라성 같은 여러 일본 작가들도 달성하지 못한 한반도 상륙을 성공리에 마친 거의 유일한 작가가 되어 버렸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하루키인가, 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하루키의 어떤 점이 한국 독자들의 강한 일본 혐오를 무장 해제시키고 그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하루키를 여타의 현대 일본 작가들과 구분시켜 주고 있는가. 많은 답변이 주어질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나온 설명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것은 하루키 문학이 담고 있는 신세대 정서에 모아진다. 하루키의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의 소설은 이 땅에서 경쾌하고 재미있으 면서도 산뜻한 이야기를 선호하는 신세대의 감수성에 적절히 부합하는 작품으로 읽혀지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을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자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단 절감과 고독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이데올로 기에 대한 관심의 퇴조와 더불어 새롭게 사회 전면에 나선 세대의 감성을 대변 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하루키를 한 시절 잠시 반짝했다 사라지는 인기 작가로 치부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하루키를 만만한 일본의 대중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여기는 태도는 국내의 일 부 하루키 모방자들에 대한 비난의 근거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루키의 올 바른 수용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된다. 미국 땅에서의 자신의 내면과 주위 풍물 관찰한 흥미로운 체험기 그런 점에서 이번에 번역된 하루키의 수필집 슬픈 외국어는 하루키에 대한 국 내 독자들의 시각 교정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수필집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감성적인 혹은 환상적인 하루키가 아니 라 이지적이고 성찰적인 하루키이기 때문이다. 그는 낯선 이국땅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주위 풍물을 관찰하고, 거기서 어떤 통찰 내지 지혜를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루키의 관점은 다른 일반적인 미국 견문집과는 다른 매우 흥 미로운 요소를 내장하고 있다. 그것은 하루키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미국 문학의 영향을 짙게 받은 미국 취 향적 작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삼 젊은 시절 하루키가 미국 문화에 얼마나 경도됐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가 인터뷰에서 종종 고백했듯이 일본의 사소설보다 미국의 현대 작가 들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의 작품에 할리우드 영화나 록음악, 재즈등 에 대한 남다른 애호가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는 한때 자동차 판매를 둘러싸고 일어난 미일 양국인 간의 감정적 대립을 고찰하기도 하고, 육상 경주를 예로 들어 일본 사회의 관료적 분위기와 엘리트 의식의 허위성을 공박하기도 한다. 또 그가 머물던 프린스턴 대학촌의 분위기를 스케치하며 지식인의 속물 근성 을 꼬집기도 한다. 미국 사회의 보수화와 여성의 지위 향상, 중산층의 불안 심리를 설득력 있게 진단하기도 한다. 평이하면서도 심층적으로 다룬 광범위한 주제의 깊이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를 이야기하며 정보가 음미를 앞서고 감각이 인식을 앞 서고 비평이 창조를 앞선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피곤하다고 토로하는 대목을 읽으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각인된 하루키와는 다른 하루키, 첨단적인 것에 편승하기보 다는 어떤 근원적인 것에 더 관심을 둔 작가 하루키를 만나게 된다. 하루키는 광범위한 주제를 극히 평이하면서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사 물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는 일본 문학의 세계화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일본어를 상대화하는 것, 일본인이면서 다시 한번 일본인의 성격을 상대 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이 책의 성격을 정확히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야말로 상대적인 시작, 반성적인 관점에서 일본, 일본인, 일본어를 점검하는 내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정작 하루키를 즐겁게 읽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는 하루키를 포함한 일본 문학, 일본 문화를 상대화해서 바라보기 힘든 조건 속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하루키 단편 문학의 특징 -문학사상사 자료조사 연구실 1.단편 문학과 하루키 단편 소설 체호프가 수모를 견디며 열어 놓은 단편 소설의 길 근대 문학에서 단편 소설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러시아의 체 호프는 어느 날 젊은 작가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느 점에 관해선 자네들은 나에게 간사해야 하네. 단편 소설의 길을 열어 놓은 건 나일세. 그전엔 원고를 가지고 문학 잡지 편집부에 가면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모멸적 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지. 뭐라고요? 이런게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참새 코빼기보다 짧지 않습니까. 안돼요, 이런 쓰다 만 꼬맹이 소설은 필요 없어요. 난 그런 수모를 견디면서 노력을 계속해서 앞으로 모든 작가를 위하여 단편 소설의 길을 열어 놓은 거야 -구프린, 체호프의 추억에서 누가 인정하든 말든, 받아 주든 말든 아랑곳하지 안호 체호프는 많은 단편 소 설을 썼다. 스물 다섯 살 때, 그는 한 해 동안에 무려 125편의 단편을 썼다는 기록이 남 아 있다. 거의 같은 시대에 프랑스에서는 모파상이 단편 소설을 확고하게 문학의 장르 에 올려 놓기 위해 열을 올렸다. 그는 10년 간이라는 짧은 작가 활동 기간 동안에, 일곱편의 장편을 남겼지만, 단편은 약 360편이나 남겼다. 그러니까 단편 소설이 문학 장르의 하나로 시민권을 얻게 된 건 불과 100년 남짓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물론 단편뿐만 아니라, 소설이란 단편 역시 무엇을 어떻게 써도 좋다는 자유 로운 문학 형식으로 태어난 가장 새로운 문학의 장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젊은 문학 장르, 소설 그리고 단편 소설 이전에 존재해 왔던 시가 운율의 지배를 받고, 희곡이 인물, 장소, 시간 등 3일치의 법칙 같은 까다로운 형식상의 구속을 받던 것을 휠휠 떨쳐 버리고, 내용과 형식에 있어 완전히 자유로운 창작의 형태로 등장한 것이 소설이다. 따라서 소설의 길이가 길고 짧은 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문예지등 잡지의 수요에 의해서 단편 소설이 활발하게 양산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단편은 주류인 장편의 지류가 아니면, 장편을 쓰기 위한 밑그림처럼 여겨져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장편 못지 않게 소설로서의 단편의 비중이 적지 않고, 점점 분주한 생 활에 쫓긴 현대인은 장편보다 단편을 더욱 선호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고 역설한 작가는, 1934년에 명작 단편 뱀을 발표하여 미국 문단에서 주목을 맡았던 윌리 엄 살로얀이었다. 단편을 통한 데뷔와 성장, 한일간 공통적 특히 순문학의 경우는 대부분 신인들이 단편을 통해서 등단하게 되고, 권위있 는 문학상이 또한 단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서, 대체로 신인들의 성장 패턴 이 활발한 단편 창작의 사이사이에 주목을 끄는 방편을 발표하여, 문단에 확고 한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히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우리 나라의 경우와도 매우 흡사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거의 모든 신인이 신문, 잡지들의 신춘 문예 또는 신인 발굴 등을 통하여 단편으로 등단하고, 거의 대부분의 문학상도 단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이 해마다 베스트 셀러의 상위권에 오르는 예에 서도 볼 수 있듯이, 중편을 포함한 단편의 독자가 해마다 격증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 그 까닭은 바쁜 현대인은 많은 시간과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장편보다, 짧으 면서도 아기자기한 재미와 소설의 흥취와 묘미를 감상할 수 있는 단편 쪽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장편의 한 중요 부분을 뚝 떼내어, 그 이야기의 최고조 황금 부 분을 집중적으로 부각하여, 플롯 전개의 치밀성과 간결성 그리고 농축성으로써, 독자에게 짙고 강렬한 문학적 감동과 정서, 그리고 흥취를 자아내게 하는 단편 의 참맛에 끌리는 독자가 해마다 격증하고 있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를 스승으로 성장한 하루키의 단편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장편으로 분류되고 있지 만, 200자 원고지로 300매 정오인 길이에 비추어, 장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 다. 우리 문단의 기준에 따르면 약간 긴 단편, 또는 중편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 지 못한다. 하루키 본인도 굳이 장편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출판사에서 책을 낼 때 상품성을 고려해서 장편이라는 레테르를 붙였다고 한다. 처음 하루키는 문단 데뷔를 결심하고 문예지 분가쿠카이를 선택하려 했으나, 그 잡지는 원고의 길이를 200매로 제한하고 있어, 400매까지 맡아 주는 군조에 신인상 응모작품으로 냈다고 한다. 후일 그는 그 작품이 떨어졌다면 나는 아마도 작가 지망의 뜻을 포기하고 다 시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그 출세작은, 그가 문학의 스승으로 추앙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는 트루 먼 카포티의 ㅣ단편집 머리 없는 독수리를 애독하고, 그 작품 속에서 창작의 힌 트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 작품집에 실린 티파니에서 아침을, 머리 없는 독수리를 특히 좋아했고, 특 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제목은 그 단편집에 수록된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서 힌츠를 어었다고 할 정도로 카포티 단편의 영양을 크게 받았다. 문학 수업 시절에 일본적인 것에서 탈피하고자 일본 소설을 전혀 읽지 않고,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트루먼 카포티등 십여명에 이르는 미국 작가 의 작품을 탐독하여 철저히 연구했고, 그의 수므권에 가까운 번역서 가운데는 단편밖에 쓰지 않은 에리먼드 카버의 책이 세권, 트루먼 카포티의 작품은 단편 집 두권에 장편 한권이 포함되어 있다. 처음 수년 동안의 작가 수업 시절에는 스콧 피츠제럴드만이 나의 스승이었고, 대학이었으며, 문학 동료였다고 고백한 만큼 하루키와 피츠제럴드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그처럼 눈부신 성장의 과정에서 그가 데뷔한 다으다음해에 작가는 번역을 한 한다는 일반적인 터부를 스스로 깨고, 피츠제럴드의 단편집 마이 로스트 시티를 번역 출판, 문학에 관심을 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루키는 열여섯 살 때부터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의 독서 체험에서 맛보지 못했던 감동을 맏아 왔다고 한다. 그가 최초의 번역서로 피츠제럴드를 택한 것은, 절망과 환별을 맛볼 대로 맛 보고 난 잃어버린 세대의 작가 피츠제럴드에 얼마나 심취했고, 사진의 작품 세 계를 개척해 나가는 데 있어 얼마나 큰 영향을 입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단편 소설은 하루키 문학의 고향이며 출발점 그리고 그 원형 그처럼 하루키에게 있어서 단편은 장편을 향한 출발점이며, 문학의 고향이기 도 하다. 하루키 필생의 대작이라고 하는 4부작 장편 태엽 감는 새는 그의 명단편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을 확대해서 고쳐 쓴 것이다. 그가 펴낸 장편 에세이집 슬픈 외국어에는 외국 생활의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4년반에 걸쳐 완성한 태엽감는 새 1~4의 집필 동기와 그 과정이 상세 히 그려져 있다. 또한 이 책에 수록된 춤추는 난쟁이나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에는 귀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 귀 모델을 하고 있는 고 급 콜걸에게까지 이어져 있다. 또 이 책에 실린 세 가지 독일 환상속에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와 맥이 닿는 부분도 있다. 그는 그 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작품집에 수록하지 않았고 아예 작품 목록에서도 제외해 버렸다. 그 대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뼈대로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을 활용하여 가장 자신 있고 마음에 드는 작품의 하나로 완성했다. 그의 단편 중 개똥벌레는 큰 수정 없이 대부분 그대로 장편 상실의 시대의 도 입 부분에 삽입되었다. 이렇듯 그의 단편은 장편을 위한 시발점이자, 교차점이고 그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식의 영역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을 맛보는 것도 단편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하루키 문학의 핵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벌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상륙한 지 1996년 현재 7년째의 해를 맞이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 할수록 하루키라는 이름은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 는 한국의 젊은 독자들의 가슴에 더욱 깊이 각인되고 있다. 과연 이 현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더러는 하루키의 문학을 가리켜 가벼움 또는 스쳐 지나가기라는 식으로 평가 하는 이도 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의 문학을 다시 꼼꼼히 읽어 보면 그의 문학에 대한 보다 깊고 올바른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 문학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것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인간의 존재 이유, 또는 존재 증명을 추구하는 것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그것은 하루키의 창작법에 있어 나는 찾아낸다는 것, 나를 구현해 낸다 는 것이며, 그 끝없이 외롭고 힘겨운 자기와의 투쟁을 이룩해 하루키가 그의 내면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서 그 깊은 샘에서 퍼 올려 내는것이 바로 그의 문학의 핵으로서, 단편을 통해서 농축되어 나타나고, 장편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완결을 짓게 되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처럼 하루키의 단편 소설들은 그의 문학의 고향이며 출발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집은 지난 연도판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걸작선에 이어, 그의 대표작 을 모두 망라한 주옥편이라고 하겠다. 2. 하루키 단편의 감상을 위한 노트 상실과 붕괴 뒤에 오는 중국행 화물선 3년 전에 하루키의 단편 중 대표적인 작품을 모아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걸작 선을 펴낸 문학사상사가 당시 두 권 분량으로 계획하고 번역해 두었던 작품을 이제 더 많은 독자를 위하여 다시 출판하게 된 것이다. 앞서의 작품집은 이미 10쇄를 발행, 수만부의 판매 기록을 세워, 하루키의 또 다른 단편 문학에 접하고자 하는 요청에 따라 기획되었다. 이번 하루키의 단편선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려는 중국행 화물선, 캥거루 구경하기 좋은 날씨, 개똥벌레 헛간을 태우다, 기타의 단편, 회전 목마의 치열한 경쟁, 빵 가게 재습격등에서 재미있고 다양한 하루키 단편의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닌 작품을 정선한 스물 다섯 편을 수록하고 있다. 표제작인 중국행 화물선에서는 화자인 나가 초등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 교에서 알게 된 중국인 두 남성과 한 여성과의 만남과 영원한 이별을 그리고 있 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같은 작품에서는 십수 년 전 연인과의 여행 자금을 마련 하려고, 잔디 깎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으나, 그 연인이 갑자기 일방적인 결 별을 선언하고 떠난 후의 상실의 아픔을 모더니스트들의 서사시처럼 담담하게 그려 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은 상실과 붕괴의 뒤에 오는 것이 설사 어떤 것이라 해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격언과 같은 표제작에 적 힌 말로 특징 지을 수 있다. 즉 하루키는 그 여러 단편 속에 모든 붕괴를 지켜본 후 그 아무것도 남지 않 은 빈 터전에서, 홀로 새로운 정신의 지주를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를 가득 담고 있다. 그런 과거나 타인과의 단절의 자각을 통해서 새로운 출발을 향한 뜨거운 열망 이 작품 속에 담겨 있다. 작지만 큰 작품들 담은 캥거루 구경하기 좋은 날씨 캥거루 구경하기 좋은 날씨에 수록된 스물세편을 하루키는 짧은 소설과 같은 것이라고 스스로 주석을 달아 출판했다. 길이로 따져서 200자 16~28매 정도로 단편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다. 그렇다고 콩트라고 하기엔 어엿한 단편 소설로서의 갖출 것을 갖춘 작품으로 평가를 받아 왔다. 이 책에 실린 표제작 캥거루 구경하기 좋은 날씨는 젊은 부부가 동물원으로 캥거루의 새끼와 그 어미들을 보러 가는 스케치풍의 소설이다. 우리에 기대어 네 마리의 캥거루를 구경하는 젊은 부부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 지 않고, 이른바 어떤 소설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유별나게 행복하다든가, 불행하다든가 하는 기색은 없다. 하루키가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마구 지껄여대는 말을 묘사하는 데 대단한 특기 가 있다고 하지만, 바로 이 작품은 그런 평가를 실증 할 만한 것이다. 5월의 해안선은 원 작품집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의 하나다. 친구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나는 12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바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무대를 연상케 한다. 택시를 타고 늘 그리던 해변가로 갔을 때 거기에는 바다가 없었다. 바다는 매축지로 변하여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활량한 콘크리트의 시가 가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 나는 분노를 폭발시킨다. 이 작품에 나온 배경이 하루키의 고향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자전적인 작품이 라고 짐작된다. 감각적이고 환상적인 작품, 그리고 현실에 대한 불만과 회의를 폭발시키는 작 품등 표현 양식과 소재의 다양성이 돋보이며, 소설적 흥취에 젖게 한다. 개똥벌레 헛간을 태우다, 기타의 단편은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래 상실의 시대를 거쳐 그를 애독해 온독자들에게 상실감과 결각감을 딛고 재 생을 지향하는 인간을 투명한 문체로 그린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작품집은 하루키가 지닌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상실의 시대적인 서정성과 센티멘털리즘, 그리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적인 지적인 무색 투명 한 환상을 느낄 만한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이 작품집에 실린 개똥벌레는 문학사상사의 하루키 단편 제1집인 무라카미 하 루키 단편 걸작선에 수록됐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상실의 세대의 언틀이 되는 단편이다. 이 단편은 상실의 시대 제2장에 거의 그대로 삽입되었다. 코끼리 모형을 만드는 공장에 근무하는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야기인 춤 추는 난쟁이나 실업중인 나가 오른쪽 귀를 앓는 조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장 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같은 귀에 무게가 실린 공통적인 작품도 있는데, 그 것은 장편 양을 쫓는 모험에 등장하는 귀의 모델을 하는 콜걸로까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세 가지 독일 환상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연결되어 나간 작품이다. 섹스, 성행위, 성교, 교합 그 밖에 어떤 것이든 괜찮지만, 그러한 말, 행위, 현 상에서 내가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겨울의 박물관이다. 이렇게 세 가지 독일 환상은 전혀 그 연관성을 짐작할 수 없는 섹스와 박물관 을 성정하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헤르만 게링 요새 1983, 세 번째는 헤르W의 공중 정원 이 야기로, 상상을 초월한 환상의 세계를 펼쳐놓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 드의 밑그림이라고 할까, 기본 구상도적인 작품으로 주목된다. 인생을 상징하는 회전 목마의 치열한 경쟁 회전 목마의 치열한 경쟁이라는 타이틀만큼 하루키다운 타이틀은 없다고 한 다. 그저 빙빙 돌기만 하고, 아무데도 못가고, 내릴 수도 바꿔 탈 수도 없는 회전 목마 - 그것은 인생이라고 하는 운행 시스템과 같다. 이 작품집에 실린 수작의 하나인 풀 사이드는 은퇴한 수영선수가 서른다섯 살 이 된 봄에 인생의 전환점에 이른 것을 확인하고 보람 있는 일 높은 수입, 행복 한 가정, 젊은 애인, 건장한 체격, 클래식 레코드의 수집등등, 더 바랄 것 없는 인생을 즐기고 있는데 문득 빌리 조엘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눈물 짓는다. 왜 우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이 작품의 중심에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재미의 요소를 파악할 수 있고, 주위 의 정화을 그대로 이해함으로써, 웃음과 울음이 뒤범벅이 된 인생의 단면을 실 감할 수 있다. 야구장은 야구 구경과는 무관하고, 마음에 둔 여성을 카메라의 망원 렌즈를 통해서 관찰하기 위한 적당한 장소로서의 공간과 연관이 있다. 대학의 같은 동아리에 소속된 그녀를 망원 렌즈로 계속 관찰하다가 학교도 안 가게 되고, 관찰 말고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마는데, 결국 프레임 속의 한정 된 단편적인 인간 존재를 본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관 찰을 포기하고 하교로 나가기 시작한다. 등교 도중 망원 렌즈 속에 비쳤던 그녀가 반갑게 인사하지만, 벌서 흥미를 잃 은 상대임을 깨닫는다. 사랑을 찾아 헤매던 치기 어린 젊은 날을 잔잔한 미소를 띤 채 회상케 하는, 삶과 사랑의 실체를 잘 그려 낸 작품이다. 이 단편집의 표제작으로 정한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려는 단편 소설의 교과 서적 작법이라고 할 인생을 탁 하고 자른 단면과 같은 전형적 작품임을 보여 준 다. 그녀는 미인이고, 부자고, 무엇을 시켜도 척척 해내는 그야말로 공주와 같은 존재지만, 오만하고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데는 천부적 소질이 있어, 나는 늘 불쾌감을 갖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그룹의 남녀가 합숙을 하게 된 기회에 서로 성관계를 맺는 상상을 계속한 끝에 30분 동안이나 나는 그녀와 단지 물리적 관계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밤을 새운다. 그 수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녀와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고, 몇 년전인가 우연히 그녀의 남편과 만난 일이 있다. 그녀는 평범한 결혼 생활에 딸 하나를 두었으나 생후 5개월만에 사고로 딸이 죽자, 감정적인 훈련을 체험하지 못한 그녀는 타인의 부재가 초래하는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 그 남편은 나에게 전화라도 한번 걸어서 위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나는 아 직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 14년전 밤의 그녀를 끌어안았을 때의 그녀의 숨소리와 피부의 따스함과 부 드러운 유바응 감촉이 아직도 나의 내무에 남아 있기 때문에 나는 14년전의 그 날 밤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 작품에는 하루키의 소설에는 보기 드문 긴 관능 묘사 장면이 전개된다. 질이니 페니스니 하는 노골적인 성 기관의 묘사까지 펼쳐지지만, 하루키 소설 의 특징인 결핍 또는 결락감이 감도는 가운데, 몸을 섞는 일보 직전에서 그날 밤의 이변이 끝나는 대목은 외설적인 분위기는 전혀 풍기지 않고, 어린 남녀의 천진스런 성의 유희를 지켜보는 더한 흥취를 느끼게도 한다. 이 단편이야말로 웬만한 장편 못지 않게 남녀의 관계,사랑,성,죽음등 삶의 오 묘한 이치를 느끼게 하는, 이 작품집의 압권이라고 할 만하다. 하루키식 유머가 넘치는 빵 가게 재습격 이 작품집에서는 표제작을 포함한 여섯 편을 수록했는데, 길이와 테마, 문체등 이 일관성은 없지만, 하루키 스타일의 유머가 두드러지게 풍기는 공통점을 지니 고 있다. 이 작품은 그가 에세이집 슬픈 외국어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글을 쓰기 위해, 주위로부터 아무 도움도 영향도 받지 않는 고도와 같은 상태인 외국에서 4년 반에 걸친 각고 끝에 완성한 대하 소설 태엽 감는 새 1~4의 모체 가 됐다. 이 단편은 장편 태엽 감는 새 1~4의 도입 부분에 원작에 약간의 가감 삭제는 했지만 거의 그대로 이식했다. 이 단편은 근 8년만에 장편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 이다. 태엽 감은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은 전화로 시작해서 전화로 끝난다. 실직중인 나에게 전화를 걸어 온 그 여자는 외설적인 말을 곁들여 일방적으로 통화를 강요한다. 전화는 상대가 있지만 현재 가기 앞엔 없고 오이지 않아, 현실적으로 있지만 보이지 않고 없는 것과 같은 존재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걸려 오기 때문에 수화기를 들기 전엔 누군지도 노르고 또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주인공 나는 실업중이어서, 일자리에 관한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만, 미 지의 여자로부터 걸려 온 전화가 갖는 주술과 같은 덫에 걸려 버린다. 나는 전화에서 아내가 지시한 대로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골목을 헤매며 도망간 고양이를 찾다가, 이상한 소녀를 만나 거기서 기다리면 고양이를 찾을 수 있을 듯해서 잠시 기다린다. 그러나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고, 오늘의 인간들이 직면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허구의 기구를 지닌 일상적인 도구를 중심 매개체로 하여, 매일매일 쉬지 않고 우리의 주위에 펼쳐지는 비현실성과 허구성의 실체가 부각되어 갖가지 희한한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접종한다. 하루키는 이 소설에서 현대 사회의 정체성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동시에, 발전 과 존립의 흐름이 꽉 막혀 버리고 점점 해체 가정에 접어들어, 붕괴를 향한 속 도가 더해 가는 현대 사회를 상징적으로 잘 그려 낸 것이다. 상실의 시대를 충격적으로 드러낸 마성적인 소설 미학-유유정(전 연세대 교수) 이 작품 상실의 시대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일본의 사회 상황이 바로 오늘의 우 리나라의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역자는 우선 놀랐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며,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 준 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현대 일본의 학원과 시정의 희비극이 고도의 풍 자적 수법으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그 하나하나가 어쩌면 우리 젊은이들의 욕망과 이렇게 닮았을까, 하고 거듭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을 무엇보다도 모든 교조적이고 엄숙한 이념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 다. 이 소설 속에서는 지도층을 자처하는 보수주의자도,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과 격파도 다같이 냉정한 지성의 비판대에 오르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인 성의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작가는 분게이슈주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에서 성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 루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성적인 장면을 리얼하지만 혐오감은 주지 않도 록 그리려고 했다. 그래서 그만큼 세밀하게 그렸는데도 혐오감을 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모두들 공통된 인식으로 가져준 게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을 지금부터 이를테면 7,8년전에 내놓았다면, 화를 내는 독자들이 휠씬 많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게 보내온 편지들중에도 혐오감을 주지 않아 구원받은 것 같다는 내용이 굉 장히 많았다. 더구나 13,14세 정도의 소녀들이 그런 편지를 보내오고 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읽어 가는 동안에 이건 진진하게 씌어진 작품이다, 혐오 감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었다고. 나는 그 만큼 소설적인 사회 상황이 진전되어 가고 있다고 할까, 섹스에 대한 터부의 벽이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게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걸 외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종의 성적인 억압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다. 개인적으로 나는 성적인 상황이 더욱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행위로서 해방되어야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시점으로서 라는 측면 이 강하다. 그러므로 섹스를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능동적인 하나의 표현형태로 성을 파악하는 시점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 다. 성문제에 대해 개방론자에 속하는 작가는 지켜야 할 성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한편, 관능의 자유로운 표현에 대해서는 거리낌없이 추구하고 있 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70년대다. 그러나 작가도 술회하고 있지만 회고적인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을 엮어 가는 자세는 완전히 오늘의 시점에 입각해 있다. 가치관이라는 사닥다리가 제거된 이 연대에 20대를 산 작가는, 그때에 비해 주위의 환경이 완전히 변해 있는 오늘의 시점에 서서 그 시대의 사랑과 삶을 들 려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60년대는 정치성 내지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주도한 시대며, 70년대 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혼합되어 소용돌이친 끝에 경제주도형의 시대로 접어들었 다고 보고 있다. 석유 쇼크와 통화의 유동, 정보 산업이 기간 산업이 되는 등의 스텝을 거쳐 오늘날엔 가치관이 완전히 전화되어 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 즉 80년대는 이른바 고도의 자본주의로 접어들었다. 이는 이미 모든 요소를 삼켜 버린다. 고르바초프마저 삼켜 버린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무엇이 전위고 무엇이 후위인가 를 -통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한 구조 자체가 붕괴되어 버린다. 이러한 가운데서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 남아 가느냐 하는 점에 나는 흥 미를 느끼고 있다. 그것이 댄스 댄스 댄스라는 소설을 나에게 쓰도록 만든 의미다. 작가의 또 다른 화제작인 양을 쫓는 모험의 경우에는 역사속에서 상실되어 가 는 농업성, 혹은 토착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일본 군부가 메이지 시대에 양모를 자급하기 위해 국책으로서 양의 양육을 도 입했는데, 전쟁이 끝나자 경제 기구나 사회 구조가 완전히 변하여, 양을 사육할 필요성이 소멸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토착성이나 농업 성뿐만 아니라, 한 단계 위인 산업 구조까지 완전히 제거된 것으로 작가는 보고 있다. 일본에 있어서,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10년동안은 고도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고, 올림픽이 열리고,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는 등 외적 변화와 함께 로 큰롤 음악의 혁명적인 진화와 프리 재즈가 생기고 히피 운동이 일어나는 등 급 격한 변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그러한 사회 변동을 배경으로 한, 작가의 표현처럼 격렬하고 조용 하고 슬프고 더없이 흥미 있고 감동에 찬 연애 소설이다. 그것은 다 말해 버려 고갈된 언어가 아니라 앙금처럼 독자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에 출생한 이른바 전후 작가의 한사람이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발표, 군조지의 신인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이후, 1973년의 핀볼 1980년, 양을 쫓는 모험 1982년 등 충격적인 역작 장편들을 속속 내놓았으며, 이 작품 상실의 시대 1988년로 현대 일본 문단에 중 견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무라카미의 작품 세계를 하찮은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섬세한 관심을 통 해, 오늘의 젊은이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 표출하는 데 있다. 이 점이 곧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는 그의 마성적인 매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