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외국어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 문학사 상사 머리말을 대신하여 프린스턴-그 미국의 아름다운 지성의 고향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처음으로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을 찾아간 것은 1984년 여름이었다. 암트랙 선 열차를 타고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가던 도중에 환승역인 프린스턴 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프린스턴 대학까지 갔다. 1984년이라면 레이건 대 먼데일의 대통령 선거전이 있던 해였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본인 더 USA)를 어디를 가나 들을 수 있었고 마이클 잭슨이 화상을 입은 손을 가리기 위해서 은색 장갑을 끼고 다니던 해기도 하다.(이렇게 말하니 불과3~4년 전의 일처럼 생각되는데, 나이 탓일까?) 프린스턴 대학이 F.스콧 피츠제럴드의 모교이기 때문에 그 캠퍼스를 한 번 내 눈으로 보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나는 프린스턴에 갔었다. 특별히 다른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기차를 타고 모처럼 프린스턴이라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고, 앞으로 이 근처에 올 일도 없을 것 같아서 잠깐 들러 볼까 하는 정도였다. 한가롭게 캠퍼스를 거닐며, 도서관의 특별실에서 그가 직접 쓴 원고도 열람하고, 거리를 산책하고, 프린스턴 모터 롯지라는 도로변의 조촐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암트랙 선 열차에 올라 뉴욕으로 향했다. 어쩐지 참 평화롭고 목가적인 곳이구나, 하고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여름 방학중인 탓도 있어 넓은 캠퍼스에는 사람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고 거리도 쥐둑은 듯이 고요했다. 아침에 조깅을 할 때는 근처에서 토끼를 많이 볼 수 있었고, 다람쥐도 많이 뛰어다녔다.(그 다음 번에 왔을 때, 이 부근의 벌판은 커다란 쇼핑 몰로 개발되어 있었다.) 또 하나 그 여행에서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은 프린스턴 역에서 왔던 택시다. 요즘에는 프린스턴 환승역 앞에 꽤 많은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때는 공교롭게도 한 대도 없었다. 이 유는 잊어버렸지만 프린스턴 역과 대학을 잇는 작은 연락 열차도 그 때는 운행되지 않고 있었다. 프린스턴 역사는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 한가운데 외따로 서 있었고, 주위에는 집 한 채도 없었다. 역에서 내린 승객이라곤 모두 네 명뿐이었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와 스무 살 안팎의 젊은 흑인, 그리고 나와 내 아내였다. 우리 네 명은 역 앞에 앉아서 그저 택시가 오기를 꾹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택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30분이 지나고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할 무렵에, 겨우 택시 한 대가 모습을 나타냈다.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고는 다 같이 합승을 하기로 했다. 젊은 여자가 앞자리에 타고 나머지 세 명이 뒤에 탔다. 운전사는 몸집이 큰 중년의 백인 남자였다.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차가 출발하고 나서 조금 지나자, 내 옆에 앉아 있던 흑인이 주섬주섬 여행 가방에서 헤어 스프레이를 꺼내더니 위아래로 몇 번 흔들고는 자기 머리에 뿌려대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택시 안에서 헤어 스프레이를 뿌려아ㅁ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같이 탄 사람들이 잠자코 견딜만한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만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운전사가 차를 길가에 세우고 내리더니 뒷좌석의 문을 열고는"이봐, 너 여기서 내려!" 하고 흑인에게 고함을 쳤다. 흑인은 잠깐 동안 중얼중얼 말대꾸를 하며 대드는 듯했지만, 운전사가 워낙 몸집이 단단해 보여서 그랬는지, 머뭇거리다가 여행 가방과 스프레이를 들고 얌전히 차에서 내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모르겠는데 마약 같은 걸 조금 한 모양이었다. 운전사는 다시 차에 올라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머지 세 사람을 시내까지 데려다 주었다. 운전사는 잠시 후에 "옛날에는 저런 놈들은 오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비즈니스 단진가 뭔가를 이 근교에 유치한 탓으로 저런 놈들이 자꾸만 오게 되었죠. 이 주변도 몇 년 후에는 도대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원" 하고 내뱉듯이 말했다. 그로부터 7년 후에 나는 다시 프린스턴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장기간 대학의 체류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어떤 미국인을 만났을 때, 몇 년 전에 프린스턴에 가본 이야기를 하면서, 가능하면 그런 조용한 곳에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느긋하게 소설을 써봤으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렇다면" 하고 프린스턴 대학 관계자를 만나서 일사천리로 방문계획을 이루게 해 매듭 지어 주었던 것이다. "이봐, 프린스턴 대학이 자네를 초청해 준대. 살집도 정해졌다는 군. 짐을 챙겨서 내년 1월말까지 그 쪽으로 가보라구." 아무튼 후닥닥 빠르게 일이 진행되는 것이 미국의 장점이다. 그때가 1990년 가을이었다. 우리는 다시 허겁지겁 짐을 챙겨 미국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나와 아내는 그 해 초에 3년 동안의 유럽생활을 가까스로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또다시 외국에서 살게 된 것이었다. 좀 지나치게 서두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프린스턴에서 살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1월에 미국 영사관으로 비자를 받으러 갔을 때, 마침 걸프전쟁이 터졌다. 우리는 아카사카로 가는 택시 안에서 미군이 마사일로 바그다드를 공격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조짐은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의 싸움이라고는 하나, 전쟁중인 나라에 가서 산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수속이 이미 끝난 상태라서 우리는 그대로 미국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적은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 미국의 애국적이고 전투적인 분위기는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프린스턴 대학의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걸프전 어쩌고 저쩌고라고 씌어진 프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길래 '야, 그리운 반전 집회군' 하고 생각하며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놀랍게도 그것은 전쟁을 지지하는 데모였다. 남의 나라에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내가 30여년 전에 참여했던 반전 데모가 회상되며 감회가 새로웠다. 그 후에 라트거스라는 주립대학(이곳은 좀더 서민적인 대학이다)의 학생과 이야기를 해보았더니"그건 프린스턴 대학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무라카미 씨. 우리 대학에서는 버젓하게 반전 집회를 했는 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프린스턴에서는 그 후에도 전쟁지지 그룹이 반전 플래카드를 들고 있던 학생을 덮친 후에 플래 카드를 빼앗고 부러뜨린 폭력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쨋든 그 전쟁도 잘 끝나고 이제는 한숨을 돌릴 수 있으려나 했더니, 이번에는 진주만 공격 50주년 기념을 앞두고 미국 전역에서 반일 감정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걸프전쟁으로 촉발된 애국적 고양심 같은 것이 그대로 반일 운동으로 발전한 흔적도 있었고, 많은 사람이 오래 계속되고 있는 미국 경제의 불황에 욕구불만을 터뜨릴 수 있는 분출구를 찾고 있었다는 요소도 작용했다. 일본에는 어떤 방향으로 보도되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 반일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꽤나 힘이 들었다. 아무튼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다고 할까, 주위의 공기 속에 가시가 있어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때가 많았다. 특히 12월에 접어든 이후에는 필요한 물건을 살 때말고는 별로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았다. 이런 느낌을 가진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일본인들도 같은 느낌을 갖게 됐던 것 같다. 그런 때에 안 해도 좋을 말을 해서 미국인들의 신경을 건드린 정치인이 있기라도 하면(실제로 있었지요), 나는 도대체 그 인간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 싶어 정말이지 무척 화가 났었다. 그 무렵의 일인데 한 미국인 친지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고 갔을 때의 일이다. 자리에 같이 있던 어떤 미국인(은퇴한 대학 교수)이 얘기 도중에 입을 잘못 놀려 "당신들 잽이......"라고 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온 방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지고, 주인은 그야말로 새파랗게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국의 디너 파티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그 때 막 일어나고 만 것이었다. 그 말을 한 당사자는 자기가 실언을 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중에 주인이 조용히 나를 불러, "이봐 하루키, 저 사람이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네. 너그럽게 용서해 주게. 저 사람은 젊었을 때 군대에 징집되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웠는데, 그때 받은 교육이 아직까지도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걸세. 절대로 당신들 개인에게 무슨 감정이 있는 건 아니라구" 하며 열심히 해명을 했다.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렇게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동석했던 사람들은 상당히 긴장했던 걸로 기억된다. 좀처럼 겪어보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런 일도 있고 해서 처음 1년 동안은 이것저것 신경도 많이 쓰고 긴장도 했다. 그때는 미국인들에게 있어서나 우리에게 있어서도 무척 힘든 1년이었던 것 같다. LA 폭동이 일어난 것도 바로 그 직후였다. 그 1년 동안 나는 계속 집안에 틀어박혀 장편 소설을 썼다. 거의 아무래도 가지 않았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장편소설은 이상야릇한 우여곡절 끝에 두 개로 세포 분열되어, 하나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라는 약간 긴 중편 소설(혹은 짧은 편인 장편 소설)이 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태엽 감는 새)라는 상당히 긴 장편 소설이 되었다. 그렇게 작업에 열중하던 1년이 지나고 한숨을 돌릴 만하자, 이번에는 수필 비슷한 걸 쓰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그래서 고단샤의 (책)이라는 작은 잡지에 매달 연재를 하게 되었다. 한 회분의 원고 량은 400자 원고지 스물한 장에서 스물두장 정도였는데, 그 분량은 그 때까지 내가 쓴 연재 수필 중에서 가장 많은 매수였다. 그렇지만 1년 반 동안 연재하면서 같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작가라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그럴지 모르는데,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글자를 써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하는 성격이다. 글자를 쓰고 나서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게 편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는 매달 그 정도 분량의 원고를 씀으로써 넓게 사고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미국에 오고 나서 1년 동안에 차분하게 글자로 써놓고 깊이 생각해야 할 일들이 그만큼 쌓여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1984년에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때, "이 주변도 몇 년쯤 지나면 도대체 어떻게 되려는지, 원" 하고 독백하던 프린스턴의 택시 운전사가 걱정하던 일은 결과적으로 들어맞았다고도 할 수 있고, 맞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프린스턴이 여전히 평화롭고 복잡한 속세와는 동떨어진 아름다운 교외의 작은 도시라는 점에서는 그의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쇼핑 몰이나 분양 주택 같은 게 많이 생겨서 아침저녁으로는 교통체증도 일어나게 되었지만, 이 고장의 본래 모습 그 자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포함한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변했다는 점에서는 아무래도 그 운전사의 걱정이 현실화된 것도 같다. 미국을 안에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면, 그저 이기고 또 이기고 승리에 휩싸이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통감하게 된다. 베트남에서는 좌절했다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 나라는 냉전에서도 이겼고 걸프전에서 이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사람들이 행복해졌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곳 사람들은 10년 전에 비해서 훨씬 많은 문제를 않고 있으며, 그 때문에 어느 정도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시점에서는 국가나 개인이나 때로는 좌절이나 패배라는 게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을 대신할 만큼 명확하고도 강력한 가치관을 내놓을 수 있는 다른 나라가 현재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 일반적인 미국인들이 느끼고 있는 현실에 대한 깊은 피폐의 감각과 현재 일본인들이 느끼고 있는 답답증은 동전의 앞뒤를 이루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단순하게 말해버리면 명확한 이념이 있는 피로와 명확한 이념이 없는 불편한 심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지치고 고통스런 선택은 일본인에게 있어서도 앞으로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책에 수록된 글을 쓰는 것으로써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내 나름대로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결론 같은 건 짓지 못했다. 따라서 유감스럽긴 하지만 이 책은 읽기만 해도 척척 미국을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책은 아니다. 얼마만큼 미국을 이해하고, 인간과 세상일을 생각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된다면 글쓴이로서는 정말 고맙겠지만 말이다. 1993년 12월 보스턴에서 보스턴 마라톤을 뛰면서 생각한 것 - 미국인들의 일본 두들겨 패기의 근원에 있는 것 1992년의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4월 20일 '애국 기념일'에 치러졌다. 내가 이 유명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서 뛴 것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다. 봄에는 보스턴, 가을에는 뉴욕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는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일 중의 하나(또는 둘)다. 일본에서도 종종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대회인 만큼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반환점이 있는 일반적인 왕복 코스가 아니라, 뉴욕 마라톤 대회와 마찬가지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향하는 편도코스다. 출발지점은 보스톤 교외에 있는 홉킨톤이라는 작은 전원도시고 골인 지점은 보스턴의 중심가다. 그리고 30 킬로미터쯤 달리고 나서 이제 슬슬 골인 지점이 나오겠구나 생각할 무렵에, 그 유명한 보스턴의 명물'심장 터지는 언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약간 과장된 이름의 고개이긴 하지만 실제로 달려 보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정말 가혹한 언덕이다. 언덕을 넘는 것 자체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지만, 언덕을 넘고 난 뒤가 괴로운 것이다. 여기만 잘 넘으면 그 다음에는 그리 대단한 언덕이 없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자신을 격려하며,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언덕을 넘는다. 그러고 나서 한숨 돌리고 이제부터는 평탄한 길이니 보스턴 중심가까지 곧장 달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피로가 와장창하고 들이닥치는 것이다. 이 피로에 지친 느낌은 사람에 비유하면 40세의 액년에 따라 사람의 일생 중 재난을 당하게 되는 해, 40세도 비슷하다. 20, 30대를 힘겹게 넘기고 겨우 한숨을 돌리는가 싶을 무렵에, 느닷없이 밀려오는 그런 피폐한 느낌 말이다. 중심가에 들어서면 아주 완만한 언덕조차-이런 언덕길 따위는 구배로 보나 거리로 보나 '심장 터지는 언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마치 고문처럼 느껴지게 된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랬다. 특히 올해는 출발 직후부터 기온이 점점 올라가서 에너지 소모도 심했다. 시간도 올해는 작년보다 7분이 더 걸려 기록이 3시간 38분이었다. 하기야 도로가 좁은 탓에 출발 지점이 매년 극심하게 혼잡해서 출발신호가 떨어진 뒤 실제로 달리기까지는 5분 이상이 걸린다. 그런 걸 계산에 넣으면 나로서는 뭐 이 정도면 됐다 싶은 기록이다. 여하튼 우리는 모두 보스턴에서 참가자 전용 버스를 타고 출발 지점인 이 홉킨톤으로 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오의 출발 신호를 기다린다. 인구2500명의 아담한 교외의 작은 고을이 미국 각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8,000명이나 되는 열성적인 마라톤 주자들로 두 세 시간 동안 술렁이게 된다. 1년에 한 번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다. 홉킨톤은 미국의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는 평범한 교외의 주택지로 외지인이 볼 때 이렇다 할 특별한 특징이라곤 전혀 없는 곳이다. 교회가 하나, 고등 학교와 소방서가 하나, 짧은 중심가가 하나. 주유소, 대중 식당, 부동산 중개소, 꽃가게. 중심가가 끝나면 그 너머에는 마당이 딸린 예쁜 단독 주택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집은 잘 손질되어 있고, 잔디밭도 깔끔하게 깎여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호화 저택도 없지만, 눈길을 끌 만큼 초라한 집도 없다. 마치 타인의 눈길을 끌지 않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만약 이 흡킨톤이 보스턴에서 42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보스턴 마라톤의 출발 지점으로 뽑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고장은 이곳 주민 이외의 어느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한 채- 어쩌면 그것이 원래 이 고장의 바람이었는지도 모르지만-잠자듯이 조용히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찮게 이곳이 보스턴 마라톤의 출발 지점이라는 이유덕분에 나는 2년 연속 이 작고 평화로운 고장을 자세히 관찰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작년에 내가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했을 때 미국은 한창 걸프전 중이었다. 미국 어디를 가더라도 노란 리본과 성조기, 그리고 애국적인 슬로건이 눈에 띄었다. 언뜻 보기에도 평화 그 자체였던 흡킨톤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 인근의 어떤 집 마당에 폐차된 클라이 슬러 다지가 세워져 있었는데, 보닛 위에는 흰 페인트로 "SADAM"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해머가 놓여 있었다. 이 차를 사담 후세인으로 생각하고 실컷 때려 달라는 뜻이다. 요즘은 한 번 때리는 데 1달러로, 모인 돈은 마을 청년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적립된다고 했다. 누가 생각해 낸 건지도 몰라도 그 아이디어는 꽤 인기를 끌어, 내 가 보는 앞에서도 마을 주민인 듯한 몇 사람이 1달러를 내고 해머를 손에 들고 마음껏 그 차를 때려부수고 있었다. 권위 있는 보스턴 마라톤의 출발 지점에 어울리는 풍경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뭐 전시니까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이제 걸프전도 끝났으니, 올해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흡킨톤 마을에 다시 갔는데, 놀랍게도 같은 장소에 비슷한 차가 여전히 세워져 있었다. 작년의 그 차를 그대로 둔 게 아닐 까 하고 여겨질 정도로, 그 두 대의 자동차는 모양도 찌그러진 정도도 매우 비슷했다. 하지만 그렇게 무참하게 찌그러진 차가 다시 임무를 수행하는 건 불가능할테니, 분명히 매우 흡사한 다른 차를 어딘가에서 조달해 왔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차의 보닛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씌어져 있지 않았다. 그저 작년과 마찬가지로 차 옆에 해머가 놓여 있고, 여전히 "한 번 때리는데 1달러"라는 간판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모인 돈은 역시 장학 기금으로 쓰여진다고 했다. 선수 한 사람이 옆에 서 있는 아저씨에게 "이거 일본차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저씨는 좀 어물거리면서 "아니......음, 이건 일본차가 아니에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보고 있는 동안에는 그 메시지 없는 폐차를 1달러씩 내고 해머로 내리치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해머로 차를 때려부수는 일 따윈 어차피 스트레스를 발산하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특별한 명목까지는 필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역시 뭔가 활력소가 될 만한 게 필요한 모양이다. 만약에 보닛에 'JAPANESE CAR'라고 씌어져 있었다면, 어쩌면 몇 사람쯤은 1달러를 내고 해머를 손에 들고 차를 내려쳤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무도 때려부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나로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해머로 때려 주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차는, 왠지 모를 불길한 폭력의 분위기를 풍겼다. 거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구체적인 메시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거운 무엇인가가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옆에 있던 아저씨도 지나가던 그 선수의 질문에 "아니, 이건 일본차가 아니에요"라고 딱 잘라 말하지 못하고, "아니......음(우물쭈물)" 하고 뜸을 들였던 것이다. 그 속에는 "이게 일본차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이라는 의식이 담겨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그 우물쭈물 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고, 글로 쓸 수 없는 메시지인 것이다. 자주 듣는 얘기지만, 미국인이 적대시하는 대상이 요 1년 사이에 사담 후세인에서 일본 경제로 바뀌었다고 한다. 어떤 뉴스 매체를 봐도 그 전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신문에는 일본과 일본인을 규탄하는 투서와 논설이 흘러 넘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직은 해머로 일본차를 때려부수려고 하지는 않는다. 메사추세츠주 홉킵톤 마을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공기 속에 숨겨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듣고, 글로 쓸 수 없는 메시지를 읽으려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미국에서 '일본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구체적이면서 직접적으로 곤욕을 치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일은 있었다. 호놀룰루의 에이비스 렌터카에서 차를 빌렸다가 브레이크 성능이 좋지 않아 다른 차로 교환하러 갔더니, 사무실 직원이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당신네 일본인들은 외국인인 주제에 다른 나라에 몰려와서는 잘난 척하려 든단 말이야." 자동차의 브레이크 성능이 좋지 않은 것과 내가 일본인인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참 난감했다. 그 후로는 되도록 에이비스에서는 차를 빌리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그건 벌써 5년 전 얘기라 지금 한 창 고조되고 있는 반일 감정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 내갈 살고 있는 프린스턴은 대학을 중심으로 한 평온한 고급 주택가로, 주민들 대부분이 부자거나 인텔리 혹은 돈 많은 인텔리라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반일 의식이라 할 만 한 건 없다. 하긴 여기에서 얼마 안 떨어진 트렌턴 시 근교에 GM공장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대폭적인 조업 단축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일본차를 해머로 때려부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1번 국도 변에 있는 도요타 대리점 앞에서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주도한 미국 물건 사기 운동의 집회도 열렸다. 그러니까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일도 이 조용하고 학자연, 신사연하는 프린스턴에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이 고장에서는 메르세데스, 포르셰, 렉서스, 사브, 볼보, 재규어, BMW같은 차가 무수히 달리고 있다. 이렇게 외국 차가 많은 지역도 또 없을 것이다. 미국 물건 사기 운동 같은 것도 무용지물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본 반일 메시지라 할 만한 것은 아래의 그림A와 같은 '일본 타도' 스티커뿐이다. 이 스티커는 상당히 낡은 대형 미국 차의 뒤 범퍼에 붙어 있었다. 집 근처도로에서 신호대기를 받고 서 있을 때 이 차가 내 차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게 뭔지 잘 몰랐다. 가운데의 빨간 원이 너무나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일장기라기보다는 꼭 우메보시 도시락처럼 보였다. 분명히 이 스티커를 제조한 업자는 일본 국기가 정확하게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몰라서, "좌우지간 하얀 바탕에 빨간 원을 그려 넣기만 하면 되지 뭐" 하는 투로 적당히 만든 것을 게다. 그런 저런 대충 주의가 왠지 우습다면 우습다. '우습다면 우습다'하고 하니까 칼럼니스트인 앤디 루니가 쓴 이상한 반일 칼럼이 생각나다. 그것은 일본이 덤핑을 하고 있으니 미국에서도 덤핑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 일부를 발췌해 보겠다. 미국 정부는 반드시 포드와 크라이 슬러 와 GM에 지원금을 내야 한다. 일본에서 파는 차 한 대당 2,500달러씩 원조하면 된다. 콜베트를 원가보다 싼값에 파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일본의 어느 가정에나 미국 차가 두 대 정도는 늘어서게 되고, 혼다는 파산할 것이다. 그러면 일본시장도 미국 제품에 마지못해 문호를 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앤디 루니는 텔레비젼의 해설자로서 또 유머 칼럼니스트로서 유명한 사람이지만, 가끔씩 농담과는 거리가 먼 상당히 보수적인 정치신조를 토로하곤 하는데, 그것도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전체 문맥 면에서 봐도 그가 농담조로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실제로 보수적인 신조를 가진 일반적인 미국인이라면, 그런 문장을 읽고 "그래, 맞는 말이야"하고 수긍했을 게 틀림없다. 그가 언급한 덤핑이나 지원금 등에 대해서 나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논평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이 칼럼을 읽고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일본의 어느 가정에나 미국 차가 두 대 정도는 늘어서게 되고"라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이쪽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문예 에이전트, 출판사, 잡지의 편집자 중 80 퍼센트 정도가 여성이다. 모두들 유능하고 열성적이며 건강하다. 매일매일 바쁘고 피곤하거나 짜증날 때도 있고, 낙심하기도 할 텐데, 언제 만나도 언제 전 화해도 밝고 건강한 목소리로 생긋생긋 웃으며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다. 가끔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며 "나는 오늘도 건강하다. 나는 오늘도 건강하다"하고 자 신을 타이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자세는 대단하다고 생각 하며, 그녀들과 함께 일하는 게 즐겁다. "편집자 중에 여성들이 많은 이유는요, 솔직히 미국에서는 편집자들의 월급이 그다지 좋 지 않기 때문이에요. 일본하고는 다르죠. 우리는 돈 때문이 아니라, 출판이 정말로 좋아서 일하는 거예요. 경제적인 면을 보면, 대개는 남편들이 있어서 돈은 남편이 벌어다 주지요." 그 중의 한 명이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구체적인 사정이 있다고 해도, 뉴욕의 건강한 아줌마들이 그야말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답게 씩씩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녀들에게는 가정생활이 있어서, 일본에서 편집자들과 어울리던 것처럼 "어때요. 오 늘밤 어디서 식사라도 할까요?"라고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대개 언 제나 한 시간으로 끝나는 비즈니스 런치다. 가끔 "사모님과 같이 저희 집에 저녁 식사하러 오세요" 하고 초대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 런 일은 극히 예외에 속한다. 일본도 남자 편집자의 수가 줄어들고, 그 대신 주부 편집자가 늘어나면,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도 더욱 산뜻해지고, 능률적으로 변해져서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만큼 과감하게 출판사사원의 월급을 줄이고...... 따위의 말은 무서워서 도저히 큰소리로 할 수 없 지만. 나는 이렇게 정말 건강한 여성들을 보고 있다면, 미국의 페미니즘은 이런 곳에서부터 건 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걸, 강하게 느끼게 된다. 나는 - 아마도 내 자신이 실제로 몸을 움 직이며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 핑계만 대는 사람보다는 현실적으로 몸 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나에게 "당신은 왜 남성 작가들의 글만 번역하는 거죠? 무슨 의미가 있어 요?" 하는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 뭐 특별히 그런 질문들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렇게 지엽적인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는 세상에서 성실하 게 살아가고 싶다. 어쨌든 나는 주장하는 사상이 옳건 그르건 간에 무엇인가를 등에 업고 무턱대고 큰소리치 며 거들먹거리는 사람은 - 남자는 여자든 - 기본적으로 신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당신 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뒷이야기 내 생각에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개념'이라는 것이 일단 확립되면, 그것이 점점 커지고 강해져서 이상주의적. 배타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흔히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 다"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인간이 개념을 모방하는"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 개념을 예. 아니오, 예. 아니오로 답하며 열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끝까지 추구해 가면, 예를 들어 동물 애호를 부르짖는 사람이 고기 공장을 습격해 영업을 방해하거나, 낙태 반대 론자가 낙태 수술을 하는 의사를 총으로 쏘거나 하는,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일이 일어난다. 본인이야 지극히 진지하다고 하겠지만. 아마도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양한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성립된 나라라서 공통 개념이라는 것이, 공통 언어만큼이나 커다란 가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 고 나는 상상한다. 그것이 모든 걸 연결해 주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면 가끔 지루해질 때가 있다. 고등학교 때의 학급 활동 시간에 고지식한 학급 위원인 여자아이에게 "무라카미의 사고방식은 좀 이상해요"라고 추궁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원래 천성이 그 런 걸. 그렇게 말하는 너도 얼굴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라고 정색을 하며 말하고 싶어진다. 물론 그런 말을 실지로 하지는 않지만. 안자이 미즈마루 씨는 "무라카미 씨의 얼굴은 요즘 제가 그리는 초상화의 얼굴과 점점 더 비슷해지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데, 어쩌면 이것도 "인간이 개념을 모방하는"경우일지도 모 른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 - 영, 불, 독 등 7개 국어 배우며 여행하며 겪는, 고통과 즐거움은 작가적 수업과 참된 글 쓰기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 한 1년 반 전의 일인데, 집 근처의 어학 학교에 두 달쯤 스페인어를 배우러 다닌 적이 있 다. 미국에 와서 스페인어를 배운다는 게 어쩐지 이상하기는 하지만, 한 달 정도 멕시코 여 행을 떠날 계획도 있었고, 또 영어 소설을 번역하다 보면 스페인어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할 때가 많기 때문에,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착실하게 공부해 보려고 한 것이다. 미국 사람들과 함께 영어를 쓰며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니까, 영어 연습도 되겠구나 하는 계산도 물론 있었다. 학교는 그 유명한 벨리츠였지만, 운 좋게도 할인 기간이었기 때문에 등록비는 아주 쌌다. 교과서도 비싸지 않았다. 학교측이 '적극적으로 추천' 하는 연습용 테이프 세트를 사면 상당 히 비싸지지만, 내 경우는 이제까지 어학 테이프라는 걸 제대로 활용한 기억이 거의 없어 사지 않았다. 나는 일본에서 이런 종류의 학원에 다닌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아는 사람에게서 들은 얘기를 토대로 상상해 보면, 일본의 어학 학교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비하면, 비용은 훨씬 싼 것 같다. 미국에는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에, 교사를 구하기가 쉬운 것도 그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 바로 뒤에도 라틴 아메리카 계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구역이 있는데, 그 곳을 지날 때에는 거의 스페인 말만 들려 온다. 한 반에 학생은 네명이고, 수업은 저녁 일곱 시부터 시작한다. 솔직히 나는 해가 진 다음 에 일하거나 공부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수업이 그 시간에만 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을 마친 다음에 공부하러 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나말고 학생으로는 나이 든 여성 두 명, 서른이 약간 넘은 듯한 여피족같이 보이는 흑인 한 명이 있었다. 여성들 중 한 명은 푸에르토리콘가 어딘가에 공동 소유의 별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곳에서 겨울을 보낼 때가 많아서, 본격적으로 스페인어를 배우고싶다고 겨울을 보낼 때가 많아서, 본격적으로 스페인 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남편이 은퇴한 뒤에 는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나이 든 미국인들 중에는 그런 동기로 스 페인 어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다른 한 여성은 왜 스페인 어를 배우려고 하는 지 모르겠다. 문제는 척이라는 여피족 같아 보이는 흑인인데, 그 사람은 무슨 은행이 다니고 있는데 일 이 끝난 후 서둘러 저녁을 먹고 벨리츠에 온다는 것이었다. 차림새는 언제나 단정했다. 랄프 로렌 셔츠를 입고 아르마니 안경을 쓰는 그런 분위기다. 흑인이긴 해도 살결이 꽤 흰 편에 가까운 커피 브라운이었다. 그는 스페인 어를 배우고 싶어서 배우는 게 아니었다. 어떤 목적인지는 미처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은행 상사에게 석 달 후에는 스페인어로 말할 수 있도록 해두라는 명령을 받고, 하는 수 없이 스페인 어를 배 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그 스페인 어 학습 명령에 대해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았다. 척은 수 업 시작하기 전 몇 분 동안 우리에게 "나는 사실 어학 공부 따윈 하고 싶지 않아요. 수업료 는 은행에서 대주고 있으니까 괜찮지만"이라든가, "오늘은 텔레비전에서 볼 만한 농구 시합 을 해요. 집에서 맥주나 마시며 그 시합을 봤으면 좋겠는데"라든가, "하루 일과를 끝낸 다음 에도 이런 걸 해야 한다니, 정말 참을 수가 없다구요"와 같은 불평을 중얼중얼 늘어놓곤 했 다. 척은 영화 같은 데서 자주 보는 매우 적극적인 미국의 엘리트 비즈니스맨과는 이미지가 다르다. 원래 어학적인 센스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공부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서인지, 척은 문 법도 발음도 거의 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때문에 수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 다. 그러면서도 쓸데없는 말은 잘했다. 예를 들어 이런 투의 불평을 했다. "왜 그렇게 동사가 이상하게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그런 걸 일일이 따져 봐야 소용이 없을 텐데도 툭하면 트집이다. 그리고 자기가 틀리면 "나는 대학에서 라틴 어로 학점을 땄기 때문에 스페인 어는 잘 몰라요"라고 변명을 했다. 도대체 어떤 대학을 다녔길래, 그 실력으로 라틴 어 학점을 딸 수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 주제에 화제가 어학 이외의 이야기로 번지면 주절주절 잘도 떠들었다. 자기는 이 초 급 스페인 어 교실에서는 맥을 못 추지만, 사회에 나가면 잘 나가는 인간이라는 걸 과시하 고 싶어했다. 한마디로 짜증나는 사람이었다. 교사도 상당히 힘들어하는 것 같았지만, 미국에 있는 이런 유의 학교 교사들은 학생들로 부터 약간의 항의만 들어와도 그대로 잘리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가장 뒤떨어지는 학생 의 진도에 맞추면서 수업을 진행시켜 나가야 한다. 누군가가 한군데에서 이해를 못하면 앞으로 나가지를 못한다. 그 정도가 되면'학생'이라기 보다는 '고객'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그런 저런 이유 때문에 나는 처음에 열 번 정도 나 가고는 그 수업에 나가는 걸 그만두었다. 수업 그 자체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지만, 척이라는 남자와 함께 수업하는 것은, 완전히 헛고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의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학을 배운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내 경험에 비 춰보면, 어학은 어느 정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팽개치고 나간다"는 스파르타 식으로 엄격하게 다루지 않으면 가르치기도 어렵고 외워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조금씩 혼자 스페인 어 공부를 계속 했는데, 소설을 쓰 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져 도중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래도 배낭을 짊어지고 멕시코에 혼자 여행을 갔을때는, 아주 기초적인 스페인 어 지식 만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최근 6년 사이에 5년 정도는 일본을 떠나 외국에서 지내고 있다. 그러니까 외국어를 쓰지 않으면 살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선택해서 그렇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삼스레 이 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래도 외국어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기간이 짧고 긴 것엔 차이가 있지만 지금까지 여러 가지 외국어를 배워왔다. 물론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는 영어를 배웠고, 대학교 때는 독일어를 선택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불어를 잘하는 친구한테서 불어를 배웠다. 스페인 어와 마찬가지로 불 어도 상식정도의 지식이 없으면, 영어소설을 번역할 때 상당히 곤란했기 때문이다. 사실 프 랑스에는 아직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불어로 말을 해본 경험은 전혀 없다. 불어는 그저 읽 을 줄만 알 뿐이다. 그리스 어는 그리스에 가서 살기 위해 일본에 있을 때, 한 대학의 그리스 어 강좌에 다니 면서 꽤 오랫동안 공부했다. 이탈리아 어는 간단하게 독학으로 익혔지만, 한동안 이탈리아에 서 살았기 때문에, 식사, 쇼핑, 길 묻기 정도는 할 수 있다. 터키 어도 터키 여행을 가기 전 에 한달 정도 집중적으로 개인 교습을 받았다. 그런 다양한 언어를 공부할 때에는 꽤 재미있었고, 그 당시에는 나 자신도 스스로 어학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그것은 아무래도 나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나는 경향적, 성격적 으로 외국어 습득에 별로 소질이 없고, 특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 '소질 없음'이 내 안에서 점점 뚜렷해지는 느낌이 든다. 요즘에는 '이젠 안 되겠는데, 더 이상 어학 공부를 할 수 없겠어'라고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내 안에서 외국어 습득이라는 항목의 우선 순위가 시간이 지 나면서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어학에 투자하는 시간이 아까워진데 있다. 젊었을 때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고, 미지의 언어를 습득한다는 정열 같은 것도 있었다. 또 지적 호기심 도 있었고, 무엇인가를 정복해야겠다는 흥분도 있었으며, 새로운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에 대 한 기대도 있었다. 일종의 지적 게임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흔이 넘고 앞으로 나에게 유효한 시간이 어느 정도나 남겨져 있는가에 대해 슬 슬 신경이 쓰이게 되자, 스페인 어나 터키 어의 동사 활용 따위를 닥치는 대로 외우는 것보 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작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좀처럼 어학 공부를 할 수가 없다. 아득바득 노력하지 않아도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학을 익힐 수 있는 천재라면 몰라도, 나처 럼 고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는 사람은 나이 들면 공부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그리고 몇 개 국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해도 나라고 하는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 할 수 있는 건 어차피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번에 스페인 어를 배우면서 그런 것들을 절실히 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학 공부에 정신을 집중할 수 가 없었다. 척처럼 심하지는 않아도 도저히 공부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 지 않았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튼 구문의 이해니, 단어 암기니, 정확한 발음 연습이 니, 하는 것들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해지고 있다. 물론 나이를 먹어서 지적 집중력의 절 대량이 줄어든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시간이 부족하게 되었다는 단순한 이유가 더 크 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게 무엇이든 마구 다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벌써 2년 이상 살고 있고, 10년 간 줄곧 영어 소설을 번역해 왔기 때문에, 물론 어느 정도의 영어 회화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건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고역스럽다. 나는 일본어로 도 얘기를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지껄이면 지껄일수록, 하면 할수록 마음이 무거워 지기 일쑤인데, 영어로 말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영어를 써가며 이 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말할 것도 없이 영어 회화 실력이 나아 질 리가 없다. 흔히 일본 사람들은 말을 잘 못한다는 점에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어학 실 력이 향상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런 유의 부끄러움은 별로 느끼지 않는다. 말이 막히건, 문법이 틀리건, 발음이 부정확하건, 그런 건 남의 나라 말이니까,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기의 생각을 모국어로 거침없이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은 외국어 를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 해도, 역시 그 언어로 능숙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본래 성격적 경향의 문제라서 고치려고 생각해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모국어로 도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영어로 노래를 부른다고 갑자기 잘 부르게 되지 않는 이치와 똑같다. 게다가 내가 나가고 있는 곳은 대학의 동양어 학과이므로 교직원이나 학생들 대개가 모두 유창하게 일본어를 한다. 내가 영어를 하는 것보다 훨씬 유창하고, 그 사람들도 연습을 위해 일본어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나도 무심결에 일본어로 얘길 하게 되어, 그 바람에 내 영 어 회화 실력은 더 더욱 늘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경제학과나 철학과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은 싫어도 영어를 쓸 수밖에 없어, 1년 정도 지나면 잘하게 된다. 지난번에 학생들과 같이 세미나를 하면서, 오랜만에 고지마 노부오씨의 (아메리칸 스쿨)을 찬찬히 읽었는데, '아 이건 정말 그래' 하고 공감한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영어 교사인 이사라는 주인공이 전쟁 직후의 시대의 영어로 말하는 데에 깊은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아메리칸 스쿨에 견학하러 갈 수밖에 없었고, 그 곳에서 영어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안됐다면 안됐고, 웃긴다면 웃기는 이야기인 데, 외국어로 말하는 작업에는 많든 적든 '안 됐다면 안됐고 웃긴다면 웃긴' 부분이 있게 마 련이다. 나는 누구만큼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영어로 열심히 얘기하면서도 문득 '왜 이렇게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가게 점원이 "왓(뭐야?)" 하고 큰소리로 되물을 때나, 자동차 정비 공장에 가서 아저씨를 상대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것저것 상태를 설명하거나 할 때면, 가끔 자신에 한심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거리를 걷다가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미국 꼬마가 막힘 없이 유창하게 영어로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이들도 저렇게 영어를 잘하는데' 하고 생각하며 놀랄 때가 많다. 생 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고, 일일이 놀랄만한 일이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문득 그런 생각을 하 게 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하기야 내 의지로 일본을 떠나 왔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저번에 뉴욕에 사는 메리 모리스라는 작가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메리는 작년 한 해 동안 프린스턴 영문과에서 창작코스를 가르쳤는데, 나는 거기에서 그녀를 알게 됐었다. 프린스턴 영문과에는 조이스 캐롤 오츠, 토니 모리슨, 럿셀 뱅크스 같은 쟁쟁한 작가들이 있는데, 황공해서 좀처럼 그들 곁에는 다가갈 수가 없다. 그 중에서 토니 모리슨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것으로 유명하다. 내 눈으로 직접 명세서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런 소문이 있다. 2주일에 한 번씩 창작과 교수들의 오찬 모임이 있어서 나도 몇 번 초대를 받았지만, 문지 방이 높은 것 같아 무심코 망설이게 된다. 거기에 비하면......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메리는 나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성 격도 개방적인 데다가 사이토 에이지라는 친구를 서로 다 알고 있어, 비교적 편안하게 사귈 수 있었다. 에이전트도 같고, 내가 멕시코에 갈 때 마침 그녀의 책이라는 흥미진진한 멕시코 여행기 를 갖고 가서 읽기도 했고 - 이 책은 일본어로도 번역되었는데, 일본어 제목은 잊어버렸다 - , 그녀도 내 책을 우연히 읽었고 해서 비교적 친하게 교제하게 되었다. 메리는 브루클린의 한적한 곳에 살고 있는데, 바로 근처에는 폴 오스터 부부가 살고 있고, 거기에 맨해튼에서 온 모나 심프슨 부부까지 합세해서, 그날 저녁은 상당히 활기찬 디너 시 간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선 안타깝게도 나 같은 사람은 거의 대화에 끼지 못한다. 한 사람하고 얘기할 때는 그냥 그런대로 불편하지 않지만, 네 명이 되고 다섯 명이 되어, 얘기가 기관총 처럼 빠르게 진행되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고작인 형편이 된다. 이야기 자체는 상당히 흥미롭지만, 가만히 두 시간 정도 듣다 보면, 신경이 피로해지고 이 완되어 버린다. 신경이 이완되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내가 하는 영어도 점점 이상해진다. 소 위 '베터리가 나간' 증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외국어로 대화를 해 본적이 있는 사람은 대개 가 그런 증상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아무튼 폴 오스터와 만날 수 있었던 건 참으로 즐거웠다. 나는 전부터 오스터라는 사람은 상당히 뛰어난 악기 연주가가 아닐까 하고 내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당 신의 문장은 구조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매우 음악적으로 느껴지고, 뛰어난 연주가의 스타일 을 연상하게 하는데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답 했다. "나는 악기를 연주할 줄 모릅니다. 가끔 집에 있는 피아노를 두들기기는 해도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 말은 맞다고 생각해요. 나는 소설을 쓸 때 언제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 음악을 만들어 내는 걸 생각하면서 쓰거든요. 악기를 잘 다룰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도 곧잘 하곤 합니다." 내가 그를 정확히 맞히지는 못했지만 크게 빗나가지도 않은 정도라고 해야 할까. 내가 영어로 유창하게 말할 수 없는 걸 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외국어를 술술 할 수 있 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해서, 개인과 개인의 마음이 쉽게 통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 한다. 막힘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을수록, 절망감이 더 심해질 수도 있 고, 더듬거리며 대화를 나눌 때야말로 마음이 더 잘 통하는 경우도 있다. 악기의 연주에 비유하자면, 기가 막힌 테크닉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명확하게 음악을 표 현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물론 테크닉은 없는 것보다는 잇는 편이 낫 다. 우선은 악보를 읽을 수 없으면 연주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말하면 잘못 치거나 혹은 도중에 막혀서 연주를 그만두더라도, 심금을 울리는 연주는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 경험에 비해 보면, 외국인에게 외국어로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비결은 이 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1)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먼저 자신이 확실하게 파악할 것. 그리고 그 요점을 되도록 빠른 기회에 우선 짧은 말로 명확하게 할 것. (2) 자기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쉬운 단어로 이야기 할 것. 어려운 말, 멋들어진 말, 상대 의 마음을 끌려고 하는 말은 필요하지 않다. (3) 중요한 부분은 되도록 한 번 말하고 또 바꿔 말할 것. 천천히 말할 것. 가능하면 간단 하게 비유를 하며 말한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 점에 유의하면, 그다지 유창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이 주의 사항은 그대로 '문장 쓰 는 법' 이기도 한데 어떨까. 뒷이야기 얼마 전에 메리가 보스턴에 와서 새 책을 낭독해서 나도 들으러 갔었다. 끝난 후에는 같 이 일식집에 가서 초밥을 먹었다. "토니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돼서 프린스턴은 굉장히 떠들 썩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경사스런 일이다. 아내는 가끔 토니 모리슨과 우피 골드버그를 혼동할 때가 있다고 한다. 난처한 일이다. '사내아이'의 동심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싶다. -운동화 신고 매달 한 번은 이발소 가며, 일일이 변명하지 않는 '사내아이' 이미지, 그걸 버리고 싶지 않다. 이제 나는 도저히 '사내아이'라고는 불릴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사내아이'라는 말에는 아직껏 이상하게도 마음이 끌린다. 그 말의 울림이나 거기에 담긴 느낌 같은 것이 참 좋다. 세상에는 "야, 저 녀석은 진짜 사나이야"라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지만, 나에게는 역시 '사나이'라는 말보다는, '사나이'라는 말보다는, '사내아이'라는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듯 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니까 너는 덜 떨어지고 사회화 되지 못한 데다 유아적인 거라구"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현실적인 연령과는 별관계없이 - 물론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 성립되어 있는 일종의 사물에 대한 견 해, 가치관의 문제가 아닐까?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어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사내아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게다. "그럼, 사내아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 되는데, 이런 것은 대가 심정적이 면서 감각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굳이 정의를 내리려고 들 면 못할 것도 없지만, 빙빙 돌려서 말을 하게 되니까 꽤나 답답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당신에게 있어서 '사내아이'의 이미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 까? 라는 의미의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할 것이다. 조목조목 쓰자면 다음 과 같다. (1)운동화를 신고 다니고 (2)한 달에 한 번(미장원이 아니라)이발소에 가며 (3)일일이 변명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의 '사내아이'의 이미지다. 간단하다. 이 세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이라면 나이와는 관계없이, 적어도 나한테 그 사람은 '사내아이'인 것이다. 그리고 나도 꽤 오래 전부터 이 세 가지 조건을 어떻게든 만족시키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제시된 조건이 간단 명료하다고 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간단한가 하면, 물론 그렇지가 않다. 단 세 개의 단순한 항목일지라도, 오랜 기간에 걸쳐 부지런히 지켜 나 가려면 역시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고, 그 결과 일종의 철학 같은 게 생기게 된다. 아니, 철학이라는 표현은 약간 과장일지도 모른다. 경험적 관점이라고 하는 게 더 가까울 것 같다. 그런 조건을 지키려고 고생하다 보면 - 그 고생이 어느 정도 객관적 필연성을 갖 느냐, 라는 것과는 거의 관계없이 - 종종 철학, 아니 경험적 관점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여하튼 내 경우를 검증해 보라. 항목 (1) 에 관해서는 지금도 완전히 사내아이의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 나는 1년이면 320일 정도는 운동화를 신고 지낸다. 가끔 구두를 신거나 하면 어쩐지 신분을 사칭하는 듯 한 기분이 들어 도무지 안정감이 없다. 특별한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이 점에 관한 한은 거 의 문제 없다. 그러나 (3)의 "일일이 변형하지 않는다"는 항목을 실행해 나가기란 정말 어렵다. 생활을 해나가면서 딱히 변명할 작정은 아니었어도 무심결에, "아니, 사실은요 ......" 하고 마치 변명 하는 투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퍼뜩 깨닫고 씁쓸해 했던 적이 종종 있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젊은 시절은 제쳐놓고, 어른이 되어 깊고 폭 넓 게 사회와 관계를 맺고 어느 사이엔가 복잡한 인간 관계 속에 말려들게 되면, 변명과 해명 을 전혀 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런 단계 단계에서 해야만 할 해명을 하지 않으면 현실적인 손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오해 끝에 깊은 상처를 받게도 된다. 다른 사람에게 폐 를 끼치게 되거나 본의 아니게 소중한 친구를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평범한 세계에서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내가 속해 있는 문학 관계 사회는 얘기가 한 층 더 복잡해 진다. 이곳에서는 여러 의견이 속속 활자화되어 광범위하게 배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에 대한 변명, 해명도 결과적으로 광범위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단 그 변명 사이클에 들어가고 나면, 그야말로 하나에서 열까지 일일이 변명을 해야만 된다. 어디까지가 정말로 필요한 해명이고, 어디까지가 정말로 필요치 않은 변명인 가, 하는 경계선을 점점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됐을 때부터 글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변명을 하는 일만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그리 강인한 사람이 못 되니까, 일상생활 속에서는 무심코 변 명 따위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글을 이용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약간 과장된 변명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설령 전세계적으로 오해를 받는 다고 해도, 그건 그것일 뿐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소설가라는 건 좋든 싫든 그렇게 모두에게 쉽게 이해 받을 수 잇는 존재는 아니다"라는 뜻이다. "아는 게 힘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소설가에게는 오히려 "오해는 힘이다"라는 쪽이 옳지 않을까? 소설의 세계에서는 이해에 이해를 거듭해서 얻어진 이해보다는, 오해에 오해를 거 듭해서 얻어진 이해쪽이 때때로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뭐 그런 일에 대해 쓰기 시작하자면 한이 없고, 그야말로 푸념이 될 것만 같으니, 슬슬 항 목 (2)의 이발소 얘기로 옮겨야겠다. 사실은 이 이발소 문제야말로 이번 원고의 중심적인 화 제다 . 최근 6년간 거의 외국에서 살면서 나는 이발소 때문에 정말 고민하고 괴로워해 왔다. 이 세상에서 나처럼 자주, 그리고 심각하고 진지하게 이발소에 대한 걱정을 하며 살아온 사람 은 - 물론 이발업계 관계자는 별도로 하고 - 여간해선 없을 거라는 생각조차 들 정도다. 어 쨌든 이발소 문제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쓸 공간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나는 특별히 헤어스타일에 공을 들이는 사람은 아니다. 사전을 보면 알겠지만, 별로 이렇 다 할 만한 멋이 없는 평범한 헤어스타일이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걸쳐서는 시대적 인 사정도 있고 해서 비교적 머리를 길렀지만, 그 이후로는 달리거나 수영하기 좋게 되도록 짧게 머리를 자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술미적 감각이라곤 완전히 배제된 헤어스타일이다. 사실 헤어스타일 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퍼머도 하지 않고, 포니테일형으로 묶지도 않고, 크림도 오일도 무스도 아무 것도 바르지 않는다. 그저 똑바로 깎아서 빗으로 빗을 뿐이다. 그런 평범한 헤 어스타일을 고집하며서, 왜 그렇게까지 심각한 고민을 해야만했는지, 당신은 의문을 갖게 될 런지도 모른다. 내 머리카락은 약간 특이해서 균형을 잡기가 무척 까다롭다. 적당히 짧게 깎으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까딱 잘못하면 정말 비참한 꼴이 된다. 이발소에서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 고, 망연자실해서 1주일 동안밖에 나가지 않았던 적도 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간단하게 는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일본에 있을 때는 언제나 도쿄의 한구석에 있는 이발소에 다녔었다. 나는 그 이발소를 15 년 쯤 다녔다. 두 달에 세 번 꼴 정도로 그곳에 가서 "안녕하세요" 하고 의자에 앉곤 했다. 그뿐이다.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라. 그곳 사람들은 내 머리카락을 어떻게 깎으면 좋은가를 잘 알고 있어 요령 있게 처리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나라시노에서 후지사와로, 후지사와에서 오이소로 옮겨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깎을 때는 늘 전철을 타고 도쿄까지 나왔다. 이른바 유니섹스 미장원 같은 데는 가 본 적이 없다. 원래 나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머리를 감는 건, 인간성에 대한 대단한 모독이라고 생각 했다. 그때 사람은 완전히 얼빠진 바보처럼 보일 테고, 그런 얼굴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건 치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외국에서 살게 된 이후에는, 머리가 자랄 때마다 일일이 도쿄로 돌아갈 수도 없어, 어쩔 도리 없어 현지의 이발소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이발소와 외국의 이발소 사이 에는 상당한 기술적 차이가 있다. 딱 잘라 말해서 분재 가꾸기와 잔디 깎기 정도의 차이다. 미국 이발소의 중심 명제는 그저 단순히 자라난 머리카락을 짧게 깎는 것이지, 결코 머리 카락을 다듬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어찌 됐건 소요시간만큼은 압도적으로 짧다. 손님이 의 자에 앉으면 가위로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자른 뒤에, 전동 이발 기계로 목덜미 부분을 찌리 릭 찌리릭 다듬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10분 내지 15분 정도면 거뜬히 끝나 버린다. 머리를 감겨 주지 않는 것조차 많다. 머리를 감겨 준다 해도, 자르기 전에 감겨 주기 때문 에, 목이며 옷이 머리카락투성이가 되어 버린다. 감수성이란 손톱만큼도 없다. 물론 대개의 경우 머리 모양은 지독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한 번은 런던의 스위스 가든이라는 지하철 역 근처의 이발소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의자 에 앉자 젊은 남자 이발사가 와서 내게 일본인이냐, 자기네 가게에는 처음이냐고 물었다. 그 렇다고 대답하자 그러면 누군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여기에 왔느냐고 또 물었다. 나는 아니 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럼 당신은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군요" 하고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왜냐하면 말이죠. 일본인의 머리카락은 서양인의 머리카락과는 머릿결이 다르거든요. 머 리 생김새도 다르고 얼굴 생김새도 다르죠. 그러니까 일본인에게는 일본인에게 맞는 헤어 컷이라는 게 있는 법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확실히 그렇죠"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도 영국의 이발소에서는 그렇게 까다로운 건 생각지도 않을뿐더러, 또 실제로 일 본인에게 머리를 깎을 수 있는 사람도 없죠. 이해하실 수 있어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녀석들은 머리라는 걸 쓰지 않는답니다. 경험에서 배우질 못하죠. 그렇지만 나는 그걸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이발소를 했는데, 이 근방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그래서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본인의 머리를 깎아 왔거든요. 어떤 식으로 일본인 의 머리를 깎으러 온 당신에게 행운이라고 한 겁니다." 나는 "아하. 그렇습니까" 하고 대꾸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런던에게 도저히 이발소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쫓겨, 어쩔 수 없이 눈 을 질끈 감고 근처의 아무 이발소에나 뛰어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이발소는 정말로 지독했다. 컷은 서툴고, 가위는 잘 들지 않 았으며, 셔츠는 머리카락 투성이가 되었다. 완성된 헤어스타일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도저히 내 얼굴이 아니었다. 하기야 원래 그렇게 칭찬 받을 얼굴도 아니지만, 그렇게 까지 심하게 만들건 없지 않나 싶었다. 이런 얼굴을 한 사람과 어떤 사정으로 마주 앉아서 밥을 먹게 된다면, 틀림없이 뭘 먹어도 입맛이 싹 가실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진짜 내 얼굴이었다. 이발사 아저씨 본인은 "어떻습니까? 행운이었죠?" 하고 대단히 만족해 했고, 이야기의 흐 름으로 봐서는 팁도 보통 이상으로 많이 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얼마 동안 은 외출할 수 없었다. 면도할 때에도 되도록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덕분에 방안에 틀 어박혀 내내 일반 할 수 있었으니 뭐 잘된 일인 것 같지만, 어쨌거나 런던에 체류할 때는 머리가 길어져도, 절대로 스위스 가든역 근처의 이발소만큼은 가지 말기를 이 나라를 찾는 모든 분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스에서 살았을 때는, 이따금 아테네의 미장원에 갔었다. 나는 줄곧 섬에서 살았기 때 문에, 언제나 아테네까지 머리를 깎으러 갈 수는 없는 일이어서, 무슨 용무가 있어 아테네에 나갈 때마다, 그 미장원에 들르는 게 얼마동안의 습관이었다. 그 곳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 로 들어간 유니섹스 미장원이었다. 마침내 그리스의 이발소에 질려 버린 나로서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것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그 곳에 들어갔던 것이다. "아아, 더 이상 사내아이가 아니어도 좋다. 제대로 된 인간한테 제대로 머리를 깎고 싶 어." 그런 심정이었다. 미장원은 아테네의 고급 주택가 안에 있고, 청결하고 밝은 유리로 들어쳐진 장식도 여피 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했다. 물론 요금은 싸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술은 좋아서 깎은 모 양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아테네에 갈 때마다 그 미장원을 찾게 되었다. 종종 머리말에 서글픈 표정의 이발사 아저씨가 서서, "어째서 당신은 우리와의 관계를 끊 고 미장원 같은 데만 다니게 되었소?" 하고 힐책하는 꿈을 꿨다. - 이건 사실이 아닌 이야 기지만, 그래도 이발소에 다니지 않게 되니까, 퍽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딱 히 이발소에 의리라든가 빚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그 미장원에는 약간 기묘한 문제점이 있었다. 머리를 감겨 준 뒤에, 면봉을 양손에 하나씩 아무 말 없이 건네주는 것이다. 똑바로 나를 눕히고 머리를 감겨 주고나서는, 수건으 로 쓱쓱 닦아 준 후에 머리 감겨 주는 아가씨가 다짜고짜 면봉 두 개를 쥐어 주고는 어디론 가 가버리는 것이다. "이걸로 스스로 귀를 청소하세요"라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틈도 없이 머리 감기가 끝나면 미용사가 다가와서 가위를 들고 다음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는 면봉 두 개를 꽉 쥔 채, 끝까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는 거다. 보기에도 바보스러울 뿐더러 거북하기 짝이 없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나는 이해 가 되지 않았고,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당신처럼 귓속이 더러운 인간의 귀는 청소해 줄 수 없어, 앞으로는 깨끗이 하고 다니라 구." 그런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귓속이 더러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자 점점 더 신경이 쓰여 결국 그 미장원에도 가지 않게 되고 말 았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면봉을 건네 받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는 건 심장에 좋 지 않을 것 같았다. 미국에 와서도 얼마 동안은 집 근처의 이발소를 시험해 보았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이발소 아저씨들은 거의가 이탈리아계 사람들이다. 20세기 초에 뉴저 지에서 건축 붐 같은게 일어났고, 그때 건축 노동자 수가 모자라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석공 을 불러왔다는데, 미국에서 사는 게 더 편했는지, 많은 사람이 그대로 눌러앉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신천지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 보려고, 빈곤과 불황에 찌들린 고향 마을에서 일 가 친척들은 불러 들였다. 이탈리아 이민자들 대부분은 뱃삯만 내고 겨우 미국 땅을 밟긴 했지만, 자본이라고 불릴 만한 건 전혀 없었고, 개척자가 사라져 버린 미국에서, 농사 지을 땅을 새로이 얻는 것도 쉽 지 않았기 때문에, 재빨리 급료를 받을 수 있는 기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프린스턴 부근의 건축업자, 조경업자, 빵 가게 주인 중에는 이탈리아계 사람들이 많다. 마찬가지로 자본을 갖고 있지 않았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 역시, 재빨리 급료를 받을 수 있는 경찰, 군인, 소방원 등 공직 사회로 많이 진출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미국의 각 민족 의 직업적 분포도를 살펴보면 꽤나 재미가 있다. 그런 까닭에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 대학에 있었던 무렵부터, 줄곧 이발소를 해오고 있을 것 같은 할아버지들이, 지금도 여전히 이탈리아 어가 섞인 영어를 지껄이면서, 여유롭고 한 가하게 교수들이며 학생들의 머리를 깎아 주고 있다. 이발소 분위기도 퍽이나 고풍스런 아 메리카 스타일로 제법 운치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기술적으로는 확실히 전근대에 가깝다 몇 집 시험해 보았지만, 두 번 다시 가고 싶은 이발소는 한군데도 찾을 수 없었다. 집 근처의 유니섹스 미장원에도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과연 기술적으로는 좀더 세련되고 머리도 나름대로 정성껏 깎아 주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미용사 중에 무턱대고 마 구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어서 두손을 들고 말았다. 이발소의 이탈리아 아저씨는 세면대로 갈 때 "안디아모 시뇨레"라고 하는 정도일 뿐 거의 말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유니섹스 미장원 쪽은 서비스를 한답시고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 지만, 훨씬 수다스러웠다. "무슨 일을 하고 계세요?", "대학에 계십니까? 전공은 뭔데요?", "미국은 마음에 드세요?", "일본에는 징병제가 있나요?", "일본에는 왜 미국차가 팔리지 않죠?" 등등의 얘기를 연달아 물어서 좀 피곤했다. 지난번에 내 머리를 깎아 주었던 앤드류라는 미용사는 나이가 40대 중반 정도로, 이미 머 리숱이 성근 사람이었다. 그의 전용 거울 앞에는 세 딸과 아내의 사진, 집과 개의 사진이 장 식되어 있었고, 게다가 작은 성조기가 다섯 개 정도 죽 세워져 있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머리를 깎으려고 미장원을 찾아온 처지라서 미 용사의 가족 사진이나 성조기 같은 걸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머리를 깎는 동안 언제 끝날지도 모를 딸 자랑을 하는 데는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었다. 결국 지금은 뉴욕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미장원에 다니고 있다. 구태여 1시간 15분이 나 걸리는 뉴욕까지 나가서 머리를 깎는 것 도 바보 같은 짓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런 선 택에 이르기까지는 2년 간에 걸친 다양한 시행착오와 절망과 낙담뿐만 아니라, 무산된 기대 와 쓴 웃음과 피곤함이 있었던 것이다. - 변명할 생각은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뉴욕에 나갈 볼일도 있어서, 내친김에 미장원도 들르지 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깎으러 간다. 미장원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싹둑싹둑 하는 가벼운 가위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문득 도쿄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아마 그 '싹둑싹둑' 하는 소리가 외국인 이발소 내지는 미장원이 내는 '싹둑 싹둑' 하는 소리와 약간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본인 이발소나 미장원인 경우, '싹둑싹둑'이 일의 흐름에 따라 '삭삭' 하는 가벼운 소리 가 되고, 그 소리가 또다시 시냇물 소리 같은 '사각사각' 하는 소리로 바뀌어 간다. 그런 작 업의 진행 방식에는 '일본이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설득력이 있다. 그런 까닭으로 현재는 (2)의 "이발소에 가며"라는 항목은 유감스럽지만 실천되고 있지 않 다. 매달 위를 보고 누운 채 남의 손으로 머리를 감고 있다. 사람이 언제까지고 '사내아이'로 머무르고 있다는게 쉽지는 않은 가 보다. 도쿄로 돌아가면 다시 전의 단골 이발소에 다녀야 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과연 그게 언제가 될지. 뒷 이야기 지금은 보스턴에서 단골 헤어 살롱을 발견했다. 유감스럽지만 이발소는 아니고 유니섹스 미장원이다. 거기에서 레니라는 미용사에게 매달 한 번 머리를 깎고 있다. 레니는 스포츠맨인 데다 채식주의자라서 내가 가면 늘 스포츠나 채식에 관한 얘기를 한 다. 왜냐하면 내가 맨 처음 갔을 때 수영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그 의 머리속에 이 사람은 건강파구나, 하는 정보가 입력된 것 같다. 프린스턴에서 이웃으로 지냈던 경제학자 캔들리 씨가 미국의 이발소에서는 맨 처음에 나 누었던 화제가 영구적으로 정착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었 다. 병아리가 태어나서 맨 처음으로 본 것을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는 근처의 이발소에서 맨 처음에 우연히 테킬라 얘기를 하고 말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장장 몇 년 동안이나 테킬라를 마시는 법이며 테킬라를 사용한 칵테일 만드는 법 같은 것에 대해 이발소 아저씨와 얘기를 나누는 처지가 되었다고 했다. "정말 피곤해요. 원래 테킬라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정말 딱한 일이다. 난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나면 이성을 잃는다. 일반적으로 미국 영화는 통속화와 타성화로 재미가 없다. 하지만 있다금 주옥편을 만나기 도 한다. 나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갈 때, 밤중인데도 헤드라이트 를 켜지 않거나, 반대편 차선을 달리다가, 아슬아슬한 파멸적 위험의 일보 전, 아찔한 순간 도 경험한다. 난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나면 이성을 잃는다. (양들이 침묵)을 보고 오는 길에 정신을 차려보니 차가 도로 왼편으로 달리고 있어 식은 땀을 흘렸다. 며칠 전 뉴욕에 가서 로버트 알트먼의 세 작품 시사회를 보고 왔다. (숏 컷) 이라는 제목 의 영화로, 레이몬드 카버의 여러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레이몬드 카버의 미망인인 테스 갤러거가 전화를 걸어,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끼리 갖는 시사회가 있는데, 혹시 시간이 있으면 같이 보러 가지 않겠느냐며 초대해 주었다. 그녀는 로 버트 알트먼 본인도 올 겁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테스는 워싱턴 주에서 살고 있지만, 뉴욕 대학에서 짧은 기간 동안 문학 강의를 맡고 있 어, 그리니치 빌리지의 호텔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시간이 있든 없든 그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사회장은 그리니치 빌리지의 현상소 안에 있는 아담한 촬영실이 었는데, 이 시사회는 조촐한 파티도 겸해서, 와인과 맥주와 가벼운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녁 여섯 시에 시작 이라서, 사람들은 상영 전에 떠들썩하게 환담을 나누며 먹고 마셨다. 손님은 전부 서른명 정 도였는데, 그들은 업계와 관계있는 백인 뉴요커들뿐으로, 대개는 아는 사람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모임은 정확하게 말해서 시사회가 아니었으며, 소설로 말하자면 초교지를 공개하는 느 낌에 가까웠다. 타이틀과 배우 이름은 자막에 들어가 있었지만, 스테프들의 이름은 아직 들 어가 있지 않았다. 상영 전에 알트먼이 나와서, "이건 거의 완성된 영화이긴 하지만 약간 바뀔지도 몰라. 상 영 시간이 세 시간 정도로 긴 영화니까 단단히 각오하고 보라구, 화장실은 저쪽이야, 사양하 지 말고 다녀오라구" 하며 웃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 않는 영화였다. 이 영 화는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 소설 몇 편을 모자이크 식으로 구성해서 만든 것인데, 상당히 변형되어서 대체 몇 편이나 되는 카버의 단편이 삽입되었는지 쉽사리 알 수 없었다. 손가락 을 꼽아 가며 보았는데,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따져 보니까, 전부 아홉 개였다(나중에 테스 한테 물었더니 자기도 세어 보긴 했는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대부분은 단편 소설의 또 단편이었는데, (개를 버리다),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 (발 밑을 흐르는 깊은 강), (다이어트 소동)은 스토리 전개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 다. 그 아홉 편의 카버의 원작이 제공하는 이야기 외에도, 로버트 알트먼과 시나리오 작가들 이 만들어 덧붙인 독창적인 이야기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었다. 영화속에서는 더 이상은 헤 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삽화가 거의 끊어지지 않고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시 간적으로는 하루인가 이틀 동안의 이야기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히 많은 사람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떠올릴 테고, 아마도 감 독의 의도 역시 확실히 그 쪽이 아니었나 생각될 것이다. '묵시록' 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딱 들어맞는 영화다. 이 작품을 대걸작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어쩌면 더러는 두서없는 실패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난 전혀 실패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이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건 인정한다. 그런 사람을 보고 "이걸 이해 못하다니 말도 안돼"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흑백 논리적 평가는 이 영화에서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령 이 영화가 작품상으로 실패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강인하게 다가오는 불가사의한 설 득력이 있는 존재감은, 그런 결점을 메우고도 남는다...... 심지어는 그 나머지 여분만으로도 반년 정도는 족히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박력이 있다고 느껴졌다. (플레이어)도 확실히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숏 컷) 쪽이 위험 부담이 있는 것을 상쇄할 만큼의 깊인 있는 영화가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다 보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참 재미있었지' 하는 실감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한밤중에 로스앤젤레스 상공에 농악을 공중 살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가까운 미래의 로스앤젤레스 대지진으로 끝난다. 아무튼 여러 대목에서 강렬한 세기말적 파멸의 냄 새가 감돌고 있었다. 무대는 줄곧 로스앤젤레스 근교 도시인데, 그 같은 교외 신흥 주택지 전체를 살균한 무기 적인 광경이 알트먼의 영화적 표현기법의 분위기에 딱 어울리고 영상 처리도 매우 훌륭하 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미국영화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미국에서나 만들 수 있는 영화다. 나 자신도 미국의, 예컨대 뉴저지든 캘리포니아든, 대도시 근교를 차를 타고 가다가, 격심 한 무력감에 휩싸였던 경험이 있다. 여기 하나의 작은 도시가 있다. 도로를 따라 계속 가면 이윽고 건물이 즐비한 거리는 끝난다. 조금 더 지나가면 변두리에 거창한 종합 쇼핑센터가 나온다. 그 안에는 복합 영화관이 있고, 물품 보관소가 있고, 버거킹이 있고, 편의점이 있고, 비디오 대여점이 있다. 좀더 지나가면 숲이며 강이며 평범한 자연이 펼쳐진다. 그 지대를 빠져 나가면 이윽고 다 시 다른 거리가 나타난다. 그 변두리에는 물론 또 종합 쇼핑센터가 나타난다. 또 평범한 자 연이 있다. 그리고 또 다음 거리가 있다...... 어쨌든 이런 것의 끝없는 연속이다. 거리와 거리 사이에는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다. 그렇지만 대개는 비슷하다. 특히 캘리포 니아 같은 곳은 지형이 밋밋하고 평탄해서 자연이 단조로움만큼,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은 훨씬 크고 훨씬 깊어진다. 한없는 그런 거리와 자연의 끝없는 연속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산다는 건 대체 어 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문득 빠지게 된다. 그런 무력감은 미국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다. 유럽에서도 맛볼 수 없고, 일본에서도 맛볼 수 없는, 절대적인 아메 리칸 오리지널이다. 영화 (숏 컷) 속에 삽입된 무수한 삽화의 나열이 관객에게 주는 쓸쓸함도, 그런 미국의 지 표 이동적 무력감과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영화가 하나의 삽화에서 다음 삽화로 옮아가면, 우리는(적어도 나는) 하나의 도시에서 또 하나의 도시로 이동한다. 그 하나하나는 다른 이야기임이 분명한데도, 우리는 서서히 그 모 든 것들의 차이를 제대로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시사회를 보고 있는 동안에 나는 점점 머리가 마비되어, 그 영화가 비쳐 주는 교외 신흥 주택지의 나른한 세기말적 악몽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러한 감각은 물론 커버의 소설 세 계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기본적으로는 역시 알트먼의 특기일 것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카버가 이루어 낸 집요하기까지 한 개인적인 세계에 영감을 받 아, 차츰차츰 부풀어 오른 역시 집요하기까지 한 알트먼의 개인적인 세계일 것이다. 그것은 부풀고 부풀고 부풀어서 팽창이 거의 한계에 이르러, 이제는 아득한 저 멀리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애초에 그 곳에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 만다.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카버의 세계고,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알트먼의 세계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아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플레이어)가 그린 허구 속의 허구의 세계를 보는 동안, 그 허와 실을 갈라놓고 있는 한 꺼풀의 베일을 관객들은 스스로도 잘 깨닫지 못한 채, 이쪽으로 빠져 나가기도 하고 저쪽으 로 빠져 나가기도 하듯이, 우리는 이 영화 속에서 카버와 알트먼 사이에서 일어나는, 스코어 보드가 없는 미국의 스코시 게임 같은 걸 보게 된다. 이 영화는 제작 과정을 담은 비디오도 있는데, 타이틀은 (Luck, Trust&Ketchup) Robert In Carver Country 이다. 나는 이 비디오도 보았는데 (내가 본 것은 2시간 5분짜리로 정식 으로 극장에서 상영될 영화는 1시간 40분 정도 짜리가 될 거라고 했다), 그 안에서 알트먼 은 이 영화의 재미는 이야기 속에 퍽 많은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 등장 인물 간에 현실적인 연관이 별로 없다는 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이 (웨딩)이라는 영화에도 많은 인물이 등장했지만, 그들은 결혼식에 초대된 손님들이 라. 다들 어딘가 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야기에도 처음부터 일 관성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이 (숏 컷)의 등장인물 대다수는 서로 알지 못하는 타인들이다. 배경이 된 장소만 해도 (플레이어)는 할리우드 영화계라는 친밀한 공동체인 작은 세계가 무대였지만, 이 영화 에서는 로스앤젤레스 교외라는 엄청나게 크고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 세계로 아메바 처럼 확 장되어 있다. 그처럼 지나치게 가혹한 혼돈 속에서, 일관성을 가진 하나의 영화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까? 그것이 바로 알트먼 감독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 인가? 예상대로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 '간단하지 않음'이 이 영 화의 강렬한 매력의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보면 알게된 테니, 보기 전에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떠벌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 아서 그렇게 장황한 설명은 하지 않겠는데, 이 영화 속에는 다양한 장치가 있다. 가령 (다이어트 소동)에서 커피 하우스의 웨이트리스 역으로 등장한 릴리 톰린은, (사소하 지만 도움이 되는 것)에서는 남자 아이를 친 운전사로도 나온다. 그리고 다른 삽화에서는 여주인공의 어머니역이기도 하다. 그처럼 사람들은 여러 장면에서 스쳐 지나가고, 제각각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연결되거나 연결되지 않는다. 하나의 이야기와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 한 사람의 인물과 또 한 사람의 인물, 하나의 거리와 또 하나의 거리가 그러한 접합점의 도 움을 받아 겹쳐지고 연결되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자체는 전혀 설명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으로 연결되 어 있을 뿐, 그 연결에 의해 무언가가 구체적으로 이야기되거나, 증명되거나, 혹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의미 없는 틀에 박히지 않은 영 화 감각은, (바톤 핑크)에서도 (알몸의 린치)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숏 컷)의 또 하나의 멋진 부분은 뭐니뭐니 해도 배역의 절묘함, 그리고 그들이 탁 월한 연기력이었다. 특히 톰 웨이츠와 릴리 톰린의 부부 연기는 우습고도 슬프며, 정말 압권 이었다. 둘 다 진짜 멍청할 대로 멍청해서 정말 괜찮았다. 평범한 미국인들의 평범한 애수가 참으로 평범하지 않고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교통 경찰 역인 팀 로빈스의 엉뚱하게 남자다운 척하는 연기도 굉장했다. 만약 나 에게 그럴 자격이 주어진다면 무조건 팀 로빈스에게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주고 싶다. 내가 느끼기에는 재즈 가스 역으로 나와 클럽 무대에서 계속 노래하는 애니 로스의 역할 ( 이 것은 물론 알트먼이 나중에 만들어 덧붙인 인물이다.)은 다소 의도적으로 과장된 것 같 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애니 로스니까, 좋게 보아주지 않을 수 없다. 잭 레몬은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에서 아이를 잃은 불쌍한 아버지의 또 그 아버지 역으로 출연하고 있는데, 동시에 (과자 봉지)에서는 바람피운 게 들통나 이혼하게 되는 아버 지 역도 겸하고 있었다. 그의 연기는 연기 자체로서는 확실히 뛰어나게 돋보인다. 무엇보다 9분 간에 걸친 독백을 별로 힘들이지도 낳고 해냈다. 단지 연기가 너무나 진지한 나머지 '의 외'의 부분이 없어서, 이 영화의 틀에 박히지 않은 전체적인 흐름에는 약간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건 뭐 취향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휴이 루이스가 단역으로 나와 무척 기뻤다. 이 사람은 (백 투더 퓨 처)에서는 대사가 단 한 줄이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다 섯 줄 정도 되었다. 휴이 루이스도 이대로 잘 나가도 보면 왠지 '제 2의 톰 웨이츠'가 될 것만 같다. 본인이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밖의 출연자들도 매우 좋았다. 앤 아처. 백 헨리, 프레드 워드. 로버트 다우니 주니 어...... 일일이 꼽아 보자면 한도 끝도 없는데, 다들 알트먼 감독의 작품에 참여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열심히 자발적으로 생각하면서, 다양한 연기를 펼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애니 로스는 비디오 속에서 "훌륭한 스태프와 일한다는 건 훌륭한 리듬 세션과 함께 무대 에 서는 것과 같은 거죠"라고 감상을 피력했다. 실제로 촬영현장은 그런 분위기였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하나에서 열까지 다 훌륭하고 멋지다는 건 아니다. 보고 있자면 ' 이 건 좀 별론데'하고 생각되는 부분도 몇 군데 있었다. 이런 건 없어도 괜찮지 않았나 싶은 삽 화도 여기저기 보였다. 가령 테스는, 마지막 지진 장면에는 약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나도 그 기묘 한 라스트 신에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머리가 나쁜 탓인지 모르겠지만 너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알트먼에게 솔직하게 그 말을 할 작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최 종적인 완성작은 내가 본 것과는 좀 다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영화에는 "좀 석연 치 않은 구석이 있긴 해도, 그런 것쯤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강 인함 힘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커피를 마시면서 테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숏 컷)이라는 타이틀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그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 겨 있다고 한다. 하나는 "짧게 베인 상처", 또 하나는 "지름길", 마지막 의미는 글자 그대로 "영화의 짧은 컷"일 거라고 했다. 과연 의미 심장하다면 의미 심장한 타이틀이다. 사실은 (월출을 기다리며)의 질 고드미로우도 몇 년 전쯤부터 카버의 원작으로 영화를 찍 고 싶어했고, 시나리오도 완성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상업적으로는 성 공할 것 같지 않은 작품이라. 미국에서는 자금을 대주겠다는 사람을 찾지 못해 영화로 만들 지 못했다. 나는 우연한 인연으로 그녀의 부탁을 받고 일본에서 자금을 대줄만한 사람을 찾아보았지 만, 거품 경제로 돈이 남아도는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그런 현실적인 일에는 몹시 어두운 편이라서 평소에는 그런 일에 전혀 관여하지도 않지만, 레이몬드 카버를 위한 일이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힘껏 애써 보려고 했던 것이다. 한여름 내내 도쿄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약간은 이상한 여러 가지 경험도 하고, 좀 희한한 여러 사람들도 만났었다. 그녀의 시나리오는 나도 읽었지만, 로버트 알트먼의 솜씨와는 사뭇 달랐다. 고드미로우가 포착한 카버의 세계에는 알트먼이 몰고 간 듯한 난잡한 세기말적 미국의 감각이 아니라, 좀 더 직선적이고 좀더 소품적이며, 좀더 황량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황량함은 알트먼의 대담한 각색에 비하면, 카버의 오리지널 세계에 좀더 가까웠다. 미니머리즘적이라는 표현이 좀더 정확하다. 물론 오리지널 세계에 가까워야 더 좋다는 건 아니지만, 되도록 "또 하나의 선택지"로서, 고드미로우 판 카버의 영화가 빛을 보길 원했다. 뭐 이런 소리를 해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고, 알트먼이 그만큼 뛰어난 영화를 만들었으니까,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 긴 하지만. 그런데 보통 미국영화는 왜 그렇게 재미가 없는 걸까? 확실히 영화 요금은 싸다. 낮 시간에는 3달러 75센트면 된다. 400엔 남짓한 싼 입장료다. 게다가 텅텅 비어 있다. 그렇지만 어떤 영화를 봐도 어떤 것 하나씩 재미있는 게 없다. 영화 라는 건 요금이 싸면 그걸로 만사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싸도 두 시간을 헛되이 낭 비해 버렸다는 허망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영화가 끝난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미국 영화란 게 이렇게 따분한 것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대부분의 경우였다. 어느걸 봐도 억지로 갖다 붙인 듯한 자동차 추격이나 섹 스신, 그렇지 않으면 로버트 드니로, 알파치노와 비슷한 연기다. 아무튼 지난 2년 반 동안 꽤 많은 미국 영화를 봤는데, "이건 진짜 재미있었어" 하고 무 릎을 친 영화는, (양들의 침묵)과 (용서받지 못 한 자), 두 편과 이 영화 (숏 컷)정도다. 이 래서야 미국영화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 영화가 그렇게 재미없게 되어 버린 첫 번째 이유는, 할리우드가 두드러지게 보수화 됐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독창적인 작품이 적고, 이거나 저거나 전에 어 떤 영화에선가 본듯한 것뿐이다. 보잘것없는 시리즈물, 재 제막물의 홍수. 그러고 요 근래 미국 사회의 정치적 분위기도 미국 영화를 통조림처럼 재미없게 만든 원 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들한테 손가락질을 받지 말아야지, 손가락 질을 받지 말아야지, 하는 자세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영화란 원래 두루뭉실한 것이 아닐까, 점잔 떠는 표정을 짓기 시작하면 영화의 매력이란 대폭적으로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느끼고 있다. 이렇게 말하긴 좀 뭣하지만, 도대체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리처드 기어라든가, 엘리자베 스 테일러 같은 사람이 잘난 척하며 하는 설교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다. 설령 그게 옳은 말일지라도 말이다. 아니, 옳은 말이니까 더욱 듣고 싶지 않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 습니까? 솔직히 나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면 이성을 잃는 버릇이 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혼란 스러워지고 마는 것이다. 그게 도쿄라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자동차를 타고 영화를 보러 가니까 문제가 좀 심각해진다. (양들의 침묵)을 본 뒤에는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차가 도로 왼편으로 달리고 있어 양동 이 하나 가득 채울 만한 식은땀을 흘렸다. (올리비에, 올리비에)를 보고 올 때는 한밤중인데 도 라이트를 켜지 않고 달리다가 주위에 있던 운전자들이 고함을 치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 었다. 그래서 인지 재미있는 영화를 본 뒤에는 "조심해요. 라이트는 켰어요? 안전벨트는요? 우 측 통행이니까 착각하면 안 돼요" 하고 아내한테 일일이 주의를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재 미있는 영화가 적다는 건 안전하다는 말이 되긴 하지만...... 뒷이야기 (숏 컷)은 1993년 10월에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신문과 잡지의 평은 더 할 나위 없이 좋았 지만, 상영관 수는 유감스럽게도 예상했던 대로 적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맞춰 카버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관련 서적도 몇 권 나오고, 잡지에서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시나리오도 출판되었다. 여러 작가들, 친구들, 편집자들이 그에 얽힌 추억담을 한데 엮은 책도 나왔는데, 그 중에는 내가 쓴 글도 있다. 나는 사물을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몸을 움직여서 생각하고,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고,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되도록 많은 나라의 말을 배워, 되도록 많은 나라에서 살거나 여행하며 작품을 쓰는 까닭은, 보다 참된, 그리고 인간적인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사물을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몸을 움직여서 생각하는 사람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고,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지금까지 벌써 몇 권이고 몇 권이고 소설을 쓸 만큼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가끔 만나곤 한다. 생각해 보니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특히 미국에서 살게 되면서부터 그렇다. 그렇다고 그 말을 미국인들이 하는 건 아니고, 미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이 곧잘 그렇게 말한다. 아마도 그건 맞는 말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모국을 떠나서 남의 나라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꽤나 힘든 일일 테고, 그러다 보니 틀림없이 여러 가지 흥미로운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마음도 강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장차 실제로 소설을 쓰게 될는지, 물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곰곰이 생각게 되는 건데, 나 자신은 이제까지 꽤 많은 여러 편의 소설을 써왔지만, 현실의 내 삶 속에서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일 같은 건 거의 경험한 적이 없다. 그야 40년이 좀 넘게 살아왔으니까,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말이 될 거다. 신기한 사람도 여럿 만났고, 운명의 전환에 놀란 적도 있었다. 생각날 때마다 혼자서 빙긋 웃게 되는 즐거운 일도 있었고(내용은 조금도 가르쳐 줄 수 없다), 다시 생각하기만 해도 화가 나는 일도 있었다. 조마조마했던 일도, 등골이 오싹오싹했던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경험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단한 경험을 한 사람은 이 세상 천지에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할 만한 일은, 내가 지고 있는 경험 보따리 안에는 애석하게도 하나도 없다. 만약 내가 지금까지 소설을 쓴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객관적으로 보아 "나는 몇 권의 소설을 쓸 만큼 재미있는 경험을 했어요" 라고 현시점에서 남에게 말할 수 있느냐고 한다면,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절대 불가능하다.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을 듯하다. "내 인생은 내 나름대로는 재미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소설이 될 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흥미로운 경험을 한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법이다. 나는 옛날부터 남의 이야기를 듣는 걸 무척이나 좋아해서, 그런 이야기를 해줄 만한 사람들을 붙잡고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한다. 특별히 소설의 소재로 써야겠다거나, 뭐 다른 별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재미로 듣는 게 목적이다. 정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아연 실색하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배를 움켜쥐고 웃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하룻밤 내내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도 지겹지 않다. 현실은 소설보다 기이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재미있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 기가 막힌 경험에 필적할만한 소설을 쓸 수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물론 평범하지 않은 일들을 충분히 경험하고 나서, 그것을 평범하지 않은 재미있는 소설로 완성하는 잭 런던 같은 스타일의 작가들도 있긴 하지만, 내가 이제까지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에 지나지 않지만, 일단 어떤 압도적인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 경험이 압도적일수록 그것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심한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게 아닐까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당시 자기가 생생하게 느낀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현할 수 없다는 스트레스는, 당사자에게는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건 내 경험을 토대로 말할 수 있는 건데,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이런 식으로 쓰고 싶다.'라는 마음이 강하면 막상 책상 앞에 앉아도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아주 선명하고, 현실감 있는 꿈을 기억하면서, 남에게 설명할 때의 초조함과 비슷하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설명을 해서 그때의 감각을 누군가에게 전하려 해도, 정말로 거기에 있었던 건 자꾸만 새어나가고 사실과는 어긋나게 된다. 그와는 반대로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경험을 한 적은 없지만, 작은 기쁨이나 슬픔 같은 걸 남과는 다른 관점에서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체험들을 뭔가 다른 형태로 바꿔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좀더 소설가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정말로 내 인생에서 남들에게 얘기할 만큼 대단한 경험을 한 적이 없다. 황당한 이야기를 쓰는 존 어빙이 "만일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것만을 썼다면, 독자들은 아마 20페이지 정도 읽고는 잠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 마음은 나도 이해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어쩌면 20페이지까지도 읽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소설가들이 다양한 현실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으로 소설을 써서 출판을 했을 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별 생각 없이 편하게 지내 왔는데, 나와의 관계에 은근히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왜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을 찬찬히 들어보니, 그 사람들은 내가 어쩌면 자기들의 이야기를 모델로 해서 다음 소설을 쓸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간신히 예전대로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미국에 온 후로 여러 대학을 다니며, 미국 학생들과 얘기를 나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공식적인 강연보다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이 모여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을 주고 받고 하는 것이 훨씬 좋다. 수업이 끝난 다음에 다 같이 경양식 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기분 좋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이럴 때는 미국 학생이나 일본 학생이나 거의 비슷하다. 강의실에서는 교수님 앞이라고 얌전을 빼고 있던 학생들도 마음놓고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대개 일본 문학이나 일본어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로, 대부분이 난생 처음 소설가를 만나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소설가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것들을 무척 궁금해한다. 그들 중 몇 명은 소설을 쓰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런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소설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알고 싶어한다. 그들은 대개 이런 질문을 한다. (1) 대학 시절에는 무엇인가를 쓰고 싶어했는가? (2) 첫 소설은 어떻게 출판하게 되었는가? (3) 소설을 쓰는 데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나는 나라고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설가이기 때문에, 내 경우를 일반화해서 소설가란 이런 거고, 소설은 이렇게 하면 쓸 수 있으며,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면 된다, 라는 투로 가르치는 게 불가능할뿐더러, 또 그렇게 해봐야 별 의미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정론을 일일이 설명한다 해도 별수 없을 테니, 하는 수 없이 내 경우는 이렇다고 구체적으로 예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학생들도 앞뒤가 잘 들어맞는 이론이나 개념보다는, 그런 손에 잡힐 듯한 다채로운 사실 쪽을 훨씬 좋아한다. 그런 식으로 가는 곳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소설가가 되었는지를, 다채롭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소설가가 된 건 거의 요행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참 용케도 나는 소설가가 되었구나, 하고 나 스스로가 깊이 감탄하고 만다. 물론 나는 학생 시절에도 뭔가를 쓰고 싶어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화 각본을 쓰고 싶었다. 각본이 안 되면 소설도 괜찮다는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영화 쪽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와세다 대학의 영화 연극과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뭔가를 쓰겠다는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몰랐고,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쓰고 싶은 소재나 주제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영화 각본 같은 것을(혹은 각본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 명백한 이치다. 하지만 영화 각본을 읽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강의는 듣지 않아도 매일같이 학교의 연극 박물관을 드나들며, 동서고금의 영화 각본을 모조리 읽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그렇게 한 것이 큰 공부가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써지지 않을 때는 무리해서 억지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주는 것은, 뭔가를 쓰고자 하는 젊은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충고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했으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아니, 거꾸로다. 결혼하고 일을 시작한 다음에 졸업했다). 그리고 가혹한 현실 생활에 쫓기면서, 내가 뭔가를 쓰고 싶어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빛을 갚아야 했기 때문에, 아무튼 아침부터 밤중까지 한눈 팔 틈도 없이 열심히 일해야만 했다. 그런 생활을 7년 간 계속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우리 가게의 메뉴에는 룰 캐비지(역주: 고기와 양파를 다지고 양념해서 양배추 잎으로 싸서 삶는 서양 음식)가 있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자루에 가득 들어 있는 양파를 다져야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대량의 양파를 짧은 시간 안에 눈물을 흘리지 않고 썰 수 있다. 손이 저절로 척척 움직이는 것이다. "자네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양파를 써는 비결이 뭔지 아나?" 나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묻곤 한다. 학생들은 "아뇨"라고 대답한다. "눈물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썰어 버리는 거야."(웃음)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의 눈은 초롱초롱해진다. 아마 평소에 그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얘기라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어느 정도는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내게는 어떤 가능성이 있는 걸까 에 대한 불안일 텐데, 그들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스무 살 때는 불안했었다. 아니 불안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 하느님이 오셔서 다시 한번 나를 스무 살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다면, 아마도 나는 "정말 감사하지만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라고 거절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런 시절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스물 아홉 살 때,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어느 봄날 오후, 진구 야구장에 야쿠르트 대 히로시마 팀의 대항전을 보러 갔었다. 외야석에 눕다시피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힐튼이 2루타를 쳤고, 그때 갑자기 "맞아, 소설을 쓰는 거야" 하고 생각했다고 말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대체로 학생들은 모두 멍한 표정을 짓고 이렇게 묻는다. "저...... 그럼 그 야구 시합에 뭔가 특별한 요소가 있었던 건가요?" 나는 학생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게 하니라 그것은 계기에 불과했지. 태양의 빛이라든지 맥주 맛, 2루타 공이 날아가는 모양, 그런 여러 가지 요소가 딱 맞아 떨어져 내 안에 있는 뭔가를 자극했겠지. 말하자면 내게 필요했던 것은 자기라는 실체를 확립하기 위한 시간과 경험이었던 거야. 그것은 뭐 특별하고 유별난 경험일 필요는 없어. 그저 아주 평범한 경험이어도 상관없지. 그 대신 자기 몸에 충분히 배어드는 경험이어야만 해. 나는 학생 때 뭔가를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던 거야. 무엇을 써야 하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나에게는 7년이라는 세월과 고된 일이 필요했던 거겠지. 아마도." "만일 그 4월 어느 날 오후에 야구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무라카미 선생님은 소설가가 되었을까요?" "who knows(누가 알겠나)?" 그런 걸 누가 알 수 있을까? 만일 그날 오후에 야구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고,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특별한 불만 없이 인생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봄 날 오후 진구 야구장에 가 한적한 외야석 - 그 당시 진구 야구장에는 정말 사람이 없었다.- 에 앉아, 데이브 힐튼이 좌익수쪽으로 멋진 2루타를 날리는 걸 보고 나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첫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내 인생에서 유일한 '엑스트라오디너리(엄청난)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선생님은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세요? "잘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런 유의 일은 많든 적든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언젠가는 일어난다고 생각하네.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이 딱 들어맞아 결합하는 계시적인 순간이 언젠가는 온다고 보지. 적어도 그런 일이 꼭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편이 더 즐겁지 않을까?" 아무튼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나는 일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미국에서 몇 년에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가 될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도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것들은 소설을 쓰는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교육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학교에서 이런 것을 배워두길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어릴 적에 나는 지금 공부를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어른이 돼서 "그때 좀더 열심히 공부 해둘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정말 그럴까, 하고 의아하게 여겼던 기억은 있지만, 도대체 어떤 뜻으로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그때 공부를 더 잘해 둘걸"하고 후회한 적이 단 한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진실을 조금이라도 배운 것은 20대의 나날이었으며, 그 당시 나는 말 그대로 육체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무튼 몸을 움직여 일하면서 매달 필사적으로 빚을 갚아나가느라 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니, 생각하려고 해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영양소가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노동은 가장 좋은 교사였고 '진짜 대학'이었다. 예를 들어 가게를 보고 있으면, 매일 많은 손님이 온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이 다 내 가게를 마음에 들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소수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열 명의 손님 가운데 한두 사람만이 가게를 마음에 들어한다면, 그 한두 명이 당신이 하는 일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한다면, 그리고 다시 한번 이 가게에 와야겠다고 생각해 준다면, 가게는 그런 대로 유지되어 나가게 마련이다. 열 명중에 여덟이나 아홉 명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열 명중 한두 사람만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하는 편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런 것을 가게를 운영하면서 피부로 절실히 느꼈다. 정말이지 뼈를 깎듯이 그것을 배웠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이 내가 쓴 글을 형편없고 시시하다고 깎아 내려도, 열 명 중 한두 사람에게 내가 전하고자 했던 생각이 재대로 전달된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굳게, 일종의 생활 감각으로서 믿을 수가 있다. 나에게 그런 경험은 다시없는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소설가로서 살아가기가 훨씬 힘들었을 테고, 이런 저런 면에서 내 본래의 페이스가 깨졌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동료 작가인 무라카미 류와 함께 있을 때 했더니, "하루키 씨는 대단하네요. 나 같으면 열 명이면 열 명이 다 좋다고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나쁠 텐데"라며 감탄했다. 그런 면은 분명히 무라카미 류답다고 오히려 내가 감탄했다. 내 자랑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건 자랑이 될 수도 없지만- 나는 머리로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다. 어떤 쪽이냐 하면 실제로 몸을 움직여서 생각나는 사람이다.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고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실제로 몸을 움직이며 돈을 벌어 생활을 꾸려왔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서 일한다는 건 오로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간혹 내가 소위 '문학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이물인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일본을 떠나서 생활하게 된 데는, 어쩌면 그런 '이물감'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매일 뛰거나 수영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무슨 일이든 잘해 낼 수 없는 것도 그 탓인지 모르겠다. 소설 쓰는 것에 대하여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것이란 거의 없다. "아무튼 실제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만일 마음속으로부터 절실하게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비록 지금을 잘 쓸 것이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쓸 수 있는'시기는 반드시 온다고 생각해. 그때까지는 현실의 경험을 벽돌을 쌓아 올리듯 하나하나 소중하게 쌓아 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예를 들면..... 그렇지, 열심히 사랑을 한다든지 말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런 거라면 저도 할 수 있겠네요" 하고 누군가가 대꾸를 하고, 그러면 다들 웃음보를 터뜨린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때가 영영 오지 않으면 어떡하죠? 하고 말한다. 또 다시 몇 명이 웃는다. 그럴 때 나는 오슨 웰슨의 영화, <시민 케인>에 나오는 음악 학교 교사의 잔인한 대사를 주저하지 않고 이용하곤 한다. "몇 사람은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부를 수 없다.(Some people can sing, others can't)." 내가 난생처음으로 소설을 써서 <군조>지의 신인상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실은 얼마 전 소설을 썼는데 신인상을 받게 되었어요"라고 말했더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한 명도 빠짐없이 내 얘기를 믿지 않았다. 다들 그것을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그중 몇 명은 내가 소설가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지금도 의혹의 눈으로 보고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어지간히도 소설과는 동떨어진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 날들로부터 아득히 멀어지고, 일본에서 멀어지고, 롤 캐비지로부터 아득히 멀어져서,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니, '흥분에 찬 경험'이 있고 없고와 상관없이, 살아간다고 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뭔가 매우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뒷이야기 이 원고를 쓰던 도중에 야쿠르트가 세이부 라이온스를 꺾고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15년만에 일본에서 가장 강한 팀이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첫 소설을 쓴 것이 전에 야쿠르트가 우승했던 해다. 진구 야구장에 다니면서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열심히 원고 용지의 빈칸을 매웠었다. 야쿠르트 구단 창설 29년만의 첫 우승이었고, 나도 꼭 스물 아홉이었다. 세월은 정말 빠르게 흘러간다. 15년 전에도 뛰던 사람들 중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 사람은 가도, 야에카시, 스기우라 정도일 게다. 일본에서 지내지 않다 보니 프로 야구와도 멀어졌고, 솔직히 나머지 선수들은 잘 모른다. 특히 투수들은 거의 얼굴을 모른다. 그래서 우승을 했다고 해도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선수들의 이름보다는 오히려 멤버 표에 나열되어 있는 코치들의 이름을 봐야 감동이 되살아난다. 이세, 카지마, 와카마쓰, 야스다, 후쿠토미, 오다, 아사노, 미즈타니, 시부이...... 그립다. 아직도 다들 스와로즈의 유니폼을 입고 후진을 지도하고 있다. 하기야 다른 방면에 소질이 없어서 원래 있던 곳에서 코치를 하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데이브 힐튼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히로오의 메이지야 앞에서 받은 그의 사인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쇼핑 철학-양복에서 파워북까지 이탈리아에서는 멋이 있는 양복을 많이 사 입었지만, 미국에선 사고 싶은 것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50년대나 60년대는 물론, 10년 전만 해도 미국에 오면 사고 싶은 것 천지였는데, 더 이상 Made in U.S.A.는 매력이 없다. 다만 큰마음 먹고 산 미제 파워북은 나의 오랜 고민을 풀어 줬다. 그전엔 산책을 하다가도 원고가 타버리면 어떻하나, 하고 안절부절못한 적도 있었다. 쇼핑 철학-양복에서 파워북까지 -이탈리아에선 좋은 양복을 많이 사 입었지만, 미국에선 양복도 다른 물건도 별로 살 게 없다. 다만 파워북은 오랜 고민을 풀어 줬다. 미국에서 살게 된 이후 약간 의외로 느꼈던 일 가운데 하나는 시내를 한가롭게 걸어 다녀도 특별히 사고 싶은 게 없다는 점이었다. 가게의 쇼 윈도를 들여다보아도 "이건 탐이 나는데" 하는 마음이 드는 물건이 왠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건 딱히 내 물욕이 요즘 들어 급속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살았을 때는 집 밖으로 한 발짝만 나서도 물욕이 그야말로 하늘다람쥐처럼 펄럭펄럭 하늘을 날아와서 등에 찰싹 달라붙어, "사시오, 사시오, 더 사시오" 하고 귓가에 속삭이며[로마에서는 왠지 "사시오" 하는 뜻의 오사카 사투리 " "(역 주:표준어는)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정확한 근거를 요구해 오면 곤란하지만, 좀처럼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았었다.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수중에 있는 돈을 다 털어 버리고 곤경에 처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사고 싶은 것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덕분에 쓸데없이 돈을 쓰지 않게 되어 불평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째 여우에게 홀린 듯한 이상야릇한 기분도 든다.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결코 그러지 않았었다. 옛날이라고 해도 미국이란 나라가 구석구석 갖고 싶은 것 투성이로 보이던 보물 창고였던 50년대나 60년대까지 구태여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바로 10년 전쯤에 미국에 왔을 때만 해도, 시내를 걸어다니면 탐이 나서 사 가지고 돌아가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주머니 사정이나 비행기의 무게 제한을 고려해서 참아야 했던 게 꽤나 고역스러웠던 걸로 기억된다. 가령 양복이라면 브룩스 브라더스, 풀 스튜어트, J.프레스 같은 가게에 한 번 발을 들여놓기만 해도 괜히 신바람이 나서 마음이 들떴던 것이다. 청소년 시절을 수수한 "밴 재킷" 일변도로 보냈던 세대로서는, 그런 본고장 아이비 리그에 납품하는 고급 브랜드 표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고, 또 실제로 옷을 여러 벌 사 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보스턴의 브룩스 브라더스에 들어가 셔츠를 고르고 있었더니, 브룩스 브라더스의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기품 있는 할아버지 점원이 나를 맞이한 적이 있었다. 뉴잉글랜드 지방 특유의 점잖은 억양의 영어를 훌륭하게 구사했던 그 할아버지는 양복점 점원이라기보다는 마치 하버드 대학의 교수님 같았다. 여름철이긴 했지만 티셔츠에 꾀죄죄한 운동화를 신은 가벼운 차림으로 가게에 들어간 내가 매우 황송해 했던 기억이 있다. 역시 본고장은 굉장하구나, 일본 양복점의 젊은 점원과는 차원이 다른데, 하고 그때 깊이 감탄했다. 그런데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뉴욕이나 보스턴의 브룩스 브라더스 같은 데를 들어가도, 사고 싶은 게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 옛날과 거의 똑같은 디자인과 재질의 양복을 팔고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만, 어쩐지 그게 예전처럼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전반적인 시대의 흐름 탓인지도 모르고, 내가 이탈리아에서 몇 년 간 사는 동안 색상이 화려하고 멋이 있는 현지의 양복을 날마다 보아 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동부의 전통 있는 상점의 양복들이 지금의 내 눈에는 딱딱하고 고루하게 비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건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서 객관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단정을 짓기는 어렵다. "아니, 당신 말은 틀렸어. 아메리칸 트래드는 지금도 신선하고 매력적이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무수히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건 없다. 나는 결코 그런 복장을 비난하거나, 그런 옷을 애호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려는 게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지만,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싶은 대로 입을 권리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내가 느끼고 있는 바를 개인적으로 글로 쓰고 있을 뿐이다. 돈 테이크 잇 퍼스널(Don't take it personal. 역주: 제발 고깝게 받아들이지는 마시길). 하지만 분명히 말해서 오늘날 미국의 젊은이들은 그런 종류의 양복은 거의 입지 않는다. 나는 지금 이른바 동부 '아이비 리그'에 속하는 프린스턴 대학에 있는데, 이곳은 60년대의 아이비 스타일 시대로 치자면 마치 메카 즉 성역 같을 테지만, 실제로 살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 학생들은 다들 정말 지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축 늘어진 셔츠에 청바지, 줄 없는 치노 팬츠(역주: 군복 작업복을 만드는 카키색 무명으로 만든 바지)에 1년 쯤은 빨지 않았을 것 같은 운동화 차림으로 뒹굴뒹굴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여학생들도 화장기라곤 없고, 머리도 그냥 풀어헤쳐 늘어뜨리든가, 아니면 하나로 질끈 묶고 다닌다. 멋부리고 다니는 학생은 거의 없다. 오히려 옷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패션처럼 되어 있다. 공부나 운동에 바빠서 옷처럼 쓸데없는 것에 일일이 신경 쓸 짬이 없다는 메시지 같다(확실히 옆에서 지켜보면 안쓰러울 정도로 바쁜 것 같다). 굉장히 단정하고 말끔한 옷을 입은 학생들이 다니는 일본 캠퍼스에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 놓으면, 그들은 전부 틀림없이 뚤어지게 쳐다보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받을 것이다. '청빈 사상'이 아니더라도 이런 데서 생활하다 보면 새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가끔 필요해서 '더 갭'이나 '바나나 리퍼블릭' 같은 청소년용 캐주얼 웨어 가게에서 티셔츠나 반바지를 사는 정도다. 덕분에 미국으로 온 뒤에는 거의 옷에는 돈을 들이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다들 저마다 멋지게 옷을 입고 있어 나도 주위에 맞춰 나름대로 옷에 신경을 쓰면서 살았다. 옷 색깔을 맞추거나, 거의 습관적으로 '오늘은 이런 곳에 가니까 이런 옷차림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인이 되라"는 격언도 있지만, 정말 말 그대로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옷에 대해선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날이면 날마다 대충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적당히 편안하게 입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나는 원래 귀찮은 건 딱 질색인 인간이라 그런 생활에는 금방 젖어든다. 작년에 일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양복을 사야만 해서, 뉴욕에 가서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결국 이것저것 고르며 헤매다가 이탈리아 브랜드 제품을 사게 되었다(양복을 고르고 사는 것만큼 귀찮은 일은 없다. 그야말로 순수한 형태의 시간 낭비다. 어쩌면 세상에는 그런 걸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모처럼 미국에 있으니까 미국 양복을 사면 좋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가게에 들어가서 둘러보고 한 번 입어 보고 나면, "이건 어째 좀 그렇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몸에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하기야 나는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양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니까, 잘난 척하고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지만 말이다. 패션이란 재미있는 것으로 마일즈 데이비스는 50년대부터 60년대 전반에 걸쳐서 브룩스 브라더스 제품의 양복 이외는 입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잘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이 느껴지지만, 그 당시에는 브룩스의 트래드 슈트가 그에게는 가장 '차분한' 패션이었다. 마일즈가 재즈에 등장한 40년대는 비 밥(be-bop, 역주: 잘 정돈된 듯한 스타일을 벗어나 새로운 주법 사운드를 만들어 내려고 시도한, 4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나온 재즈 연주 스타일)의 전성기로, 재즈를 하는 사람들은 다들 요란한 정장을 입고 화려하고 정열적인 연주를 했다. 그렇지만 마일즈는 그런 무리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단 한 사람으로, '차분한' 브룩스 슈트를 입고, 조용한 클래식조로 트럼펫을 불었다. 인텔리 중산 계급의 아들이라는 축복받은 환경에서 자란 마일즈로서는, 기발하고 천박한 복장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좀 거북스러워했지만, 이윽고 비 밥이 한물가고 쿨 재즈(cool jazz, 역주: 열광적인 비 밥 스타일에 반해, 냉정하고 편안한 스타일 속에 지성적인 내면을 갖춘, 40년대 후반과 50년대 초에 유행했던 연주 스타일)의 시대가 도래해 신세대에 의한 동부의 하드밥(hard-bop, 역주:50년대 중반에 유행한 재즈 유행 스타일)이 기세를 떨치게 되자, 마일즈 쪽이 연주나 복장에 있어서 단연코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 덕분이라 해야 할지 50년대에는 마일즈뿐만 아니라, 재즈 뮤지션들 거의 다가 말쑥한 아이비 스타일의 옷을 입었었다. 자연스런 어깨, 스리 버튼, 버튼다운 셔츠, 반짝거리는 코도반 구두……. 사실은 나도 고교 시절에는 여러 재즈 음반 재킷을 보고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하고 가슴 설레던 사람이다. 마일즈 데이비스 자서전 (마일즈)를 읽으면, 그가 예전에 얼마나 브룩스 브라더스의 옷을 동경하고 가슴을 불태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젊은 날의 우상은 프레드 아스테어와 케리 그란트였고, 그 두 사람처럼 맵시 있게 옷을 입고 싶어했다니, 그건 정말 굉장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스타일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하나의 복장 스타일도 논리적인 이론이나 선전으로 확산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직접 '실례'를 보고, "그래? 이렇게 옷을 입으면 되는 건가?", "그래? 이렇게 글을 쓰면 되는 거구나" 하는 식으로 몸으로 느낀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다. 마치 마일즈가 영화관 스크린에서 케리 그란트라는 '실례' 혹은 주연 배우를 보고, 좋아, 나도 저런 옷을 입어야지, 하고 결심했던 것처럼, 50년대의 젊은 재즈 음악가들이 마일즈라는 찬란한 '실례'를 보고 그런 옷을 입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령 정치가를 예로 들면 60년대의 존 F.케네디나 로버트 케네디의 옷맵시는 아직 양복과는 인연이 없었던 10대 초반의 내가 봐도,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멋있었다. 그들은 아메리칸 트래드를 참으로 훌륭하게 자신감을 갖고 입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기에는 '양복을 입는다'라는 단순한 물리적 행위를 뛰어넘은 좀더 깊고 중후한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있는 냄새나 감촉이 공간을 초월해서 직접 찌르르하고 전기가 전달되는 듯한 위력이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당시 미국의 사회 체제를 자연스럽게 몸에 휘감은 강인한 자기 확신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영화로 말하자면, 나는 고교 시절에 폴 뉴먼의 (움직이는 표적)을 열 번쯤 보았다. 잭 스마이트가 감독한 이 영화는 작품 자체도 매우 담백해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 베스트 10에 들어가는데, 내가 이 영화를 그렇게 여러 번 봤던 이유는 폴 뉴먼이 입고 있던 옷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무렵 폴 뉴먼의 옷맵시를 전적으로 동경했다. 당시에는 유감스럽게도 비디오 같은 편리한 것이 없어서 전부 다 극장에 가서 봤다. 이 영화에서 폴 뉴먼이 입은 옷은 서부풍의 약간 캐주얼한 트래드였는데, 그 가뿐함이 영화의 분위기와 딱 어울려 매력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특별한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폴 뉴먼이 그러한 분위기에 맞춰 아무렇지도 않게 '걸치는 방법'은 참으로 뛰어나서, 재킷을 입는 법이나 선글라스를 끼는 법 하나에서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는 듯했다. 그런데 역시 내 개인적인 의견에 지나지 않지만, 양복을 맵시 있게 입고 걸친다는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말하자면, 요즘 미국에서는 예전처럼 그렇게 카리스마적인 '영웅'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음악이나 영화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나지만 정치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부시 대통령은 아예 그런 방면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니까 딱딱하고 고루한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현대통령인 젊은 빌 클린턴도 도무지 신통치 않다. 고급 양복을 입긴 하지만, 어째 양복에 '입혀졌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옷맵시가 뛰어나지 않다고 해서 정치가로서의 직무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존 F.케네디의 스타일이 사카모토 규의 헤어스타일까지 바꾸어 놓은 걸 생각하면, 압도적이기까지 했던 그 전파력을 생각하면, 약간 서글퍼지기도 한다. 결국 미국 자동차의 판매 부진이 그대로 미국 경제의 기반 침하를 상징하듯이, 미국적인 양복과 옷맵시의 영향력 쇠퇴는 그대로 미국 사회 체제에 대한 자기 확신의 쇠퇴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이렇게 말하는 게 좀 무리한 결론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양복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말았는데, 미국에서 살 만한 것을 별로 발견하지 못하게 됐다는 얘기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미국에서 2년 반을 살면서 대체 무얼 샀는지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는데 진짜 중요한 건 산 적이 없다. 가구는 어느 정도 샀다. 의자라든가, 책상이라든가, 책꽂이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원래 대학 직원을 위한 가구 딸린 주택이라 그렇게 많은 가구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건 필요에 따라 조금씩 사고 있는 형편이다. 바겐 세일 기간에 가까운 가구점에서 사거나 아니면 중고 가구점에서 산다. 반쯤은 이케아(스웨덴 제로 미국에서는 다들 아이케어라고 발음하지만)다. 차는 앞에서도 썼지만 독일제 폴크스바겐을 샀다. 스테레오 장치는 덴온의 자그마한 것, 텔레비전은 소니, 비디오는 샤프 것을 샀다. 그것들을 물론 모두 일본제다. 레코드 플레이어는 B&O(덴마크제), 헤드폰은 독일제. 디스크 램프는 이탈리아제. 전자 레인지는 파나소닉, 커피 밀은 독일제. AT&T의 팩시밀리, 이건 미국제겠거니 했는데 뒤쪽에 "메이드 인 저팬"이라고 또렷이 써 있었다. 다리미는 독일제. 그럼 대체 미국 제품은 어디에 있을까, 샅샅이 뒤져 겨우 발견한 게 자전거다. 부분적으로 일본제 부품이 쓰이긴 했지만, 미국제 부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소품이긴 하지만 수첩과 지갑, 그것은 집 근처에 있는 코치(COACH)라는 가게의 물건을 사용하고 있다. 체중계도 아마 미국제일 거다. 주위를 빙 둘러보아도 우리 집 안에서 눈에 띄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제품은 대충 그 정도였다. 아무리 경제의 국제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미국 경제에 다소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경제 사정에 상당히 어두운 나조차도 하게 된다. 여기까지 썼을 쯤에, 커다란 미국 제품 하나를 샀던 것이 갑자기 생각났다. 등잔 밑이 어둡다던가, 지금 내 손 앞에 있는 매킨토시 랩톱 PC, 파워북 160/80이다. 이건 대학의 컴퓨터 센터에서 2,200달러를 주고 산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산 것 중에서는 자동차 다음으로 값비싼 물건인데, 그래도 일본에서 사려면 두 배 가까이 줘야한단다. 이 기계에서 일본어 워드 프로세서 기능을 사용하려면 베이직 소프트웨어를 교체해야 하는데, 이게 약간 귀찮다면 귀찮은 점이다. 그러나 그것만 끝내 놓으면 나머지는 아무 문제없다. 이처럼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이니까 매캔토시 컴퓨터가 구석구석까지 순수한 미국 제품인지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메이드 인 아메리카"라 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제품으로서 매우 뛰어나고 게다가 싸다. 적어도 옛날에 비하면 거짓말처럼 싸다. 미국에서도 대히트 상품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요즘은 새로운 PC를 이용해서 원고를 쓰고 있다. 아직 사용법을 충분히 익히지 못했고 외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 글을 쓰는 작업만을 따진다면 예전의 워드 프로세서 쪽이 훨씬 단순하고 즐겁지만, 이렇게 일본을 떠나 살면서 직업적으로 글을 쓰며 원고를 보관하거나 검색하는 따위의 작업을 고려하면 앞으로는 역시 필연적으로 PC로 이행되어 갈 것이다. 생각해 보니 6년 전에 (노르웨이의 숲)(역주: 한국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출간)을 쓸 때는 대학 노트의 빈칸을 만년필이나 수성 볼펜으로 빽빽이 메우곤 했었다. 그때는 유럽을 전전하던 시절이라 쓰다만 원고가 없어져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튼 긴 장편 소설인 데다가 왕성한 기세로 쓴 거라, 한 번 써놓은 원고를 잃어버린다면 다시 쓴다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엉엉 우는 수밖에 없었다. 산책을 하다가도 방에 남겨 둔 원고가 화재로 타버리면 어쩌나, 하며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도 밖에서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죽을 맛이었다. 당시 아테네나 로마에서는 대량의 원고를 복사하기가 참으로 힘들었고(지금은 약간 편해졌을까?), 복사한 원고를 일일이 보관해 두는 것도 큰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순식간에 디스켓을 복사하고, 그것을 우편으로 보내서 보관해 둘 수도 있다. 출판사에도 디스켓을 우편으로 보낼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통 종이에 보통 펜으로 보통 글씨로 글을 쓰면서도, 그 점에 의심 한 번 품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겨우 6년 전이다), 이 엄청난 속도의 변화에 새삼 놀라게 된다. 생각해 보면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일본인들이 메이지 유신 이래 100년 이상에 걸쳐 '펜이나 연필로 글자를 쓰는' 행위를 계속해 왔고, 그 점에 별달리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워드 프로세서나 PC를 쓰기 시작하면서 문체에 변화가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직접 손으로 썼을 때에도 문체는 꽤 자주 변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5~6년 동안 내 문체가 제법 변했다고는 생각하지만, 문체의 변화 자체는 나에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고, 어디까지가 기계와 관계 있고, 어디까지가 기계와 무관한 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다. 볼펜이 만년필로 바뀌어 문체가 변했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고,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그런 질문을 받으면 솔직히 말해서 또 질문이야 하는 지겨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단 하나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나쓰메 소세키나 다니자키 준이치로, 미시마 유키오의 글은, 혹은 요시유키 준노스케(요시유키 씨는 아직 현역이므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의 글은 워드 프로세서나 PC로는 쓸 수 없다는 것이다-아니면 상당히 쓰기 힘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어는 가까운 장래에 필기구 혁명에 의해서 '베이직 소프트웨어의 변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아니면 나중에 확인될 것이다. 이것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고,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의 문제도 아니며, 냉전 체제의 붕괴라든가, 농업 인구의 감소 등과 마찬가지로, 그저 '거기에 있는' 현실인 것이다. 아무쪼록 이 일로 나를 비난하지 말아 주십시오. Don't take it personal. 뒷이야기 그 후에 좀더 큰 컴퓨터가 필요해져서 매킨토시의 LC 라는 걸 샀다. 모니터도 있고 레이저 프린터도 있고 대단한 것이다. 옛날에는 펜과 원고지와 책상 대신에 쓸 감귤 상자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마음 편히 즐겁게 어디서나 일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꽤 큰 짐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다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큰 파워 앰프라든가 중량급 트랜스미터 같은 게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혀 몰랐는데 코치(COACH)는 일본에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메이커인가 보다. 얼마 전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신발 가게에 갔더니 점원이 이렇게 묻는 거였다. "일본인 관광객이 와선 모두들 코치는 없습니까, 코치는 없습니까 하고 물어 보는데, 코치가 일본에서 그렇게 유명한가요?" 그러고 보니 보스턴 중심지의 코플리 스퀘어에 있는 코치 상점의 점원은, 미국인 손님에게는 상냥하게 굴면서 일본인에게는 상당히 고압적으로, 마치 원숭이라도 다루듯이 거만하게 굴었다. 나는 사정을 몰라서 어쩐지 굉장히 나쁜 가게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이 책의 담당 편집자인 기노시타 요코(가명) 씨도 이곳에서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하니, 이건 나 한 사람만의 착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에 비하면 프린스턴의 코치 상점은 상품도 잘 갖추어져 있었고 무척 친절했다. 나는 여기에서 1994년용 수첩의 속지를 샀다. 속지만 12달러나 하니 좀 지나치게 돈을 긁어 모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도 들긴 했지만. 학력과 지위가 뭐길래 대학 사회도 피라미드 같은 위계 질서가 지배한다. 학력 자랑, 점수 자랑, 직위 자랑, 그 모든 지식 사회의 속물 근성에 나는 치를 떨면서, 개인적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의 소중함을 새삼 절실히 느낀다. 학력과 지위가 뭐길래 학력 자랑, 점수 자랑, 피라미드 같은 위계 사회에서의 직위 자랑, 그 모든 속물 근성에 치를 떨면서, 개인적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우곤 한다. 전에 고등 학교 때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는 이야기를 썼더니 한 독자로부터 "무라카미 선생님은 와세다 대학을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공부도 하지 않고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라는 항의 같기도 하고 힐책 같기도 한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아, 그런가. 그런 세상이 되었구나, 하고 나는 그 편지를 읽으며 꽤 감탄했는데, 그건 그렇고 만일 나의 그런 발언 때문에 누군가 상처를 입었다면 아무튼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언제나 되도록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이 넓은 탓으로 무엇을 어떻게 써도 어디선가, 반드시 상처를 입거나 화를 내는 사람이 나오세 되는 것 같다. 특히 대학에 관한 일로 많은 사람들이 민감해진다는 사실을 나는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내가 고등 학교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고등 하교 때는 거의 매일같이 마작을 하거나(잘하지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최악의 유형이었다) 여자 아이들과 놀거나 재즈 카페에 틀어박혀 있거나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거나 했다. 담배도 피웠고 학교도 잘 빼먹었다. 물론 낙오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보조를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성적이 아주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도 없다. 노느라고 훨씬 더 바빴고 더 즐거웠다. 수업 시간에는 대개 소설을 읽었다. 그런 일들을 지금에 와서 거창하게 쓰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하는 말을 독자들이 믿지 못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므로 일단은 설명해 두겠다. 그런데 어떻게 와세다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하면,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당시 외세다 대학, 특히 문학부는 들어가기가 지금과는 달리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자면 뭣하지만, 내가 다니던 고등 학교에서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사람들 중에, 두뇌가 명석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한 인재라고 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떤 편이었냐 하면……아, 이 얘긴 그만두는 게 좋겠다.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취직을 해볼까 하고, 한 텔레비전 방송국 사람을 찾아갔었는데, "안됐지만 와세다 졸업 가지고는 어떻게 할 수가 없군" 하고 차갑게 거절당한 적도 있다. 그렇게 출신 대학만으로 사람을 간단히 차별해 버리는 불합리함에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매스컴과 관련있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좀더 자유로울 거라고 속 편하게 믿고 있었다-,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럭저럭 납득을 하긴 했다. "어느 대학에 들어갔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들어가서 무엇을 얼마나 공부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소리라도 한 번 크게 질러 보았으면 좋았겠지만, 대학에 들어간 후로는 고등 학교 때보다 공부를 더 안 했으니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옛날부터 도저히 남한테서 진지하게 뭔가를 받을 수 없는 곤란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그런 경향이 초등 학교에 들어간 후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가지, 내 학업을 일관되게 방해해 온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고 싶지 않은 것, 흥미가 없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않는다(못한다)'는 것이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제멋대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 하고 싶은 일, 흥미 있는 일은 어떠한 어려움을 감수하고라도 내 페이스를 지키며 끈기 있게 한다. 이 성격은 -일에 관해서이긴 하지만- 지금도 변함없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체계적으로 되었다. "정말 이상한 성격이네요" 하고 아내는 늘상 비꼰다. 아내는 쉴새없이 일을 벌이고, 그 일을 할 때는 푹 빠져서 열중하는 대신 금세 싫증을 내는 성격이라,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있으면 가끔 화가 난다고 한다. 뒤에서 뭔가로(예를 들어 포크나 볼펜 끝으로) 찌르고 싶어진단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이것이 본래 나의 성격인걸. 공연히 쿡 찌르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가 되어서 가장 기뻤던 건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전업 작가가 되면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일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오히려 생활 쪽을 조정하면 해결될 일이다. 이만큼 내게 잘 맞는 생활도 없기 때문이다. 처음 몇 년 간은 여러 가지로 시행 착오를 겪었지만, 그러는 사이에 점점 익숙해져서 내 나름대로의 작가 생활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시스템의 근본 사상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하고 싶은 일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며 한다"는 한마디로 설명이 다된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아무데도 속하지 않는 전업 작가가 되었으니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라카미 씨는 베스트 셀러를 쓴 작가니까 그렇게 하고 싶을 대로 할 수 있는 거지요,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에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개중에는 있지만(그런 발상이나 말투를 일본에서는 진저리칠 정도로 경험했었는데, 왜 그런지 미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기본적인 성격의 문제다. 나는 책이 이 정도로 많이 팔리지 않던 시절부터 계속 일관성을 갖고 지금처럼 해왔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약간 부드러운 협조적 성격이 결여된 자세는, 내 의도와는 달리 간혹 주위에 시끄러운 문제를 불러 일으키곤 한다. 하긴 아내가 뒤에서 찌르고 싶을 정도의 인간이니, 그것도 어쩔수 없는 노릇인지도 모르겠다. 중학교나 고등 학교 시절에는 내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부모님이 잔소리를 하는 정도지, 특별히 그 일 때문에 주변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화를 내는 사람도 없었고, 나의 인격을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마음놓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할 수 있었다. 나는 책 읽는 걸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틈만 나면 문학 서적을 읽었는데, 결과적으로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국어 성적만은 나쁘지 않았다. 영어는 고등 학교에 들어가고부터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페이퍼 백을 눈에 띄는 대로 읽어, 영문을 읽는 것 자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 외의 세세한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탓에 영어 성적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중간보다 조금 잘했던 걸로 기억된다. 내가 지금 번역 일을 꽤 많이 하고 있는 걸 그 당시 우리 영어 선생님이 아신다면, 아마도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다. 사회 과목 중에서는 세계사를 제일 잘했다. 왜냐하면 나는 추오코론샤에서 나온 (세계의 역사)라는 전집을 중학생 때부터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되풀이 되풀이 읽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는 "소설보다 재미있다"라는 것이 이 전집의 선전 문구였던 것 같은데, 그것은 과대 광고는 아니었다. 그 책은 정말 재미있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사이에 세계사에 대한 웬만한 사실은 자연스럽게 외우게 되어, 특별히 그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역사라는 긴 머리 속에 전후좌우의 대략적인 위치 개념만 잡혀 있으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과목이다. 시험을 치르기 전에 몇가지 연호나 인명 등 세부적인 사항만 무조건 외우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개인적인 기호의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같은 회사에서 나온 ≪일본의 역사≫쪽은 몇십 번씩 읽으며 암기할 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 와세다 대학의 입시 과목은 세 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국어와 영어와 세계사를 선택하면, 그렇게 고생해서 공부하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사설 학원이나 입시 학원 같은 데도 전혀 다니지 않았다. 그 당시는 편차치(역주: 학력 검사 결과가 집단의 평균치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를 수치로 나타낸 것)라는 것이 아직 없었을 때라, 수학적인 사실은 잘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어림짐작으로 보자면, 당시 와세다 대학은(적어도 문학부는) 그 정도로 적당히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만 하는' 식으로 공부해도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요즘에는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기도 힘들어졌어, 옛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지, 문학부도 굉장해, 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런 말을 들어도 나는 이해가 잘 안 된다. 편차치의 등급이 도쿄 대학과 같은 수준이라는 말을 들어도, 애초부터 내 머리 속에는 편차치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와세다 대학에 다닐 때 뭔가 좋은 점이 있었다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만' 공부하는 학생들이 걱정 없이 태평하게 입학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런 '태평한' 분위기가 사라진 와세다 대학에 어떤 좋은 점이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와세다 대학이 어떻게 바뀌었다고 해도, 졸업한 지 20년 이상이나 된 나와는 별로 관계없는 일인 것 같다. 워낙에 나는 대학교가 한 번 부른 적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국립 대학에 들어가리라는 부모님 때문에 나는 1년 동안 재수하며 지겨운 수학과 생물을 머리 속에 우겨 넣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잘되지 않아, 결국 아시야 시립 도서관의 독서실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허송 세월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 익숙하지 않은 일에 섣불리 손대는 게 아니며,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수월하게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공부하지 않고도, 1968년에 와세다 대학에 그럭저럭 입학할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인데, 어쩐지 이런 내용을 써서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된 듯싶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는데 당신과 같은 해에 와세다 대학을 떨어졌어. 괜히 우쭐해 하며 잘난 체하지 마!"라고 말이다. 누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로서는 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사과하는 수밖에 없지만, 솔직히 한편으로는 지금에 와서 그런 일에 신경 써봐야 뭘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시험에는 적성도 있고, 운도 있고, 그때의 상황도 있다. 게다가 무엇보다 겨우 대학에 관한 일이다……라고 말해도, 그 '겨우' 때문에 떠올리기 싫은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도 마음이 좀 아프다. 프린스턴 대학에는 일본 관청이나 회사의 사람들이 꽤 많아 파견되어 공부하고 있다. 체류 기간은 대개 1년으로 회사나 관청이 그 동안의 경비나 월급을 지불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관청이나 회사에서도 엘리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모양이다. 나는 내 일이 바쁘고 동양학과 내에서만 사람들과 알고 지낼 뿐이라서, 그런 사람들과 마주앉아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지만, 내가 아는 몇 명에게 들은 바로는 그런 '파견 그룹' 내부에서도 출신 대학이나 회사, 혹은 관직에 따라 의사 히에라르키(역주: 피라미드 모양의 위계 질서. 신분 제도)가 생긴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학력이나 직책이 거의 그대로 이곳 미국으로 옮겨지는 모양이다. "저는 ○○대학 출신인데, 다른 분들은 도쿄 대학 출신이라 주눅이 드네요" 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도 -프린스턴에서는 아니지만-그런 히에라르키의 풍경을 엿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의 일이니까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별로 보기 좋지는 않았다. 오해할까 봐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건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틀이 바뀌어진 일본 사회의 그물코에 얽매여 있지는 않다. 아주 평범하게 외국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찌 된 영문인지 흔히 말하는 '초 엘리트'다. 만나서 일단 인사를 하고 난 다음부터 "사실 저는 1차 공통 시험 성적은 몇 점이구요" 하고 밑도 끝도 없이 설명하기 시작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갈 때는 1차 공통 시험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느닷없이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나는 뭐가 뭔지 알 턱이 없다. 그런데 더 알 수 없는 건 자기 소개 대신, 1차 시험 점수 얘기를 꺼내는 사람의 심리 상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런 사람들이 일본에서 엘리트 관료로서 세력을 떨치며 잘난 척하는 걸 생각하니(미국까지 와서도 꽤 잘난 척하고 있다), 그건 좀 곤란한 일이구나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프린스턴에서 공부하고 있는 일본인 여학생에게 했더니, "아, 그런 일은 흔히 있어요. 새삼스럽지도 않아요. 지난번에도 그런 사람을 봤는데요"라고 했다. 뉴욕에서 전철을 타고 돌아올 때 우연히 옆에 일본 남자가 앉았는데, 그는 파견 그룹의 관리로, "나는 ○○성에서 ○○과장 대리 (라던가 뭐라던가)인데요, 공통 1차에서는 ○○점을 받았습니다" 하고 끝없이 자가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웃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상대도 안 했더니, 화를 내며 짜증 섞인 몇 마디를 남기고 다른 쪽으로 가버렸단다.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요?" 하고 그녀도 어이없어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처럼 일본을 떠나 외국에서 지내고 있으니 적어도 1년 동안만이라도 일본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그저 한 사람의 순수한 인간으로 다른 사람들과 편하게 사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자아 의식이나 자기 인식, 세계관, 호흡기나 소화기 속에는 '1차 공통 시험'·'○○성'·'○○과장 대리'라는 요소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박혀 있어서, 새롭게 뭔가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과 접할 때, 그런 까다롭고 복잡한 필터를 통과시키지 않으면 치명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히에라르키는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이런 저런 희비극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물론 일본 관청에서 파견되어 미국에 와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꽤 소탈하고 재미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실하게 공부에 전념하는 인상이 좋은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 성실한 사람들이 아마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을 싸잡아 평하는 걸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좀 이상한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나만의 편견이 아니라 많은 '보통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내 생각에는 그런 사람들은 미국의 엘리트 대학 같은 곳에 파견하지 말고, 1년 정도 그들이 근무하는 빌딩의 청소라도 시키는 게 괜찮을 것 같다. 아니면 벽지에서 자원 봉사 활동을 시키는 것도 괜찮겠다. 그렇게 하는 편이 일본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좋다. 관청뿐만 아니라 엘리트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문제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저런 녀석들이 다니는 회사의 물건 따위에는 앞으로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겠다(예를 들어 다시는 이런 항공 회사의 비행기는 타지 말아야지, 저런 신문사의 신문과 잡지는 절대로 보지 말아야지)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과 만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아무래도 일반 기업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배양된 1차 공통 시험을 치룬 사람만큼 상식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도대체 뭐가 그리 잘났을까 싶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외국에 있을 때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회사측에서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파견을 보내는 건지, 아니면 외국에 오면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는 건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만 경험에 비춰 보면 조금 '작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희박한 것 같다. 회사가 크고 유명하면 할수록 약간 위태로운 느낌의 사람들이 많아진다. 일본에 있을 때는 잘 몰랐던 사실을 외국에 나와서야 새삼스레 알게 된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일본이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엘리트가 활개치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그걸 깨닫고 나는 상당히 놀랐다. 아니 놀랐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 가치보다는 자기가 속해 있는 회사나 관청의 이름, 혹은 자기가 받은 공통 1차 시험의 점수를 훨씬 더 진심으로 소중하게 생각해, 그것이 그대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도, 나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 것 중의 하나였다. 그런 특수한 가치관에 의해 지탱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국에서 살기 전까지는 잘 몰랐었다. 그야 물론 얘기는 듣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실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살 때는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럴 기회도 없었고 필요성도 없었다. 그런데 외국에서 살다 보면 그런 '엘리트'들을 만날 기회가 적어도 일본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많아진다. 왜냐하면 외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데다가, '엘리트(준엘리트)'와 '가난뱅이(준가난뱅이)'라는 두 개의 양극단적인 카테고리로 분명하게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겨우 엘리트는 회사나 관청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고, 가난뱅이들은 스스로 어떻게든 생계를 이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충 상상이 가겠지만, 엘리트는 엘리트끼리 가난한 사람은 그들끼리 뭉쳐 있다. 그 두 개의 계층이 교류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후자에 가까운 사람들인데, 그래도 중간층이 없는 만큼 아무래도 엘리트 계층 사람들의 존재가 일본에 있을 때보다 눈에 띄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렇구나, 여태까지는 모르고 지냈는데, 이런 사람들이 일본을 움직이고 있구나" 하고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하기야 그 쪽에서도 "세상에, 이런 멍청한 인간이 작가가 되어 무지한 서민을 속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의 대 베스트 셀러였던 마이클 크라이튼의 (떠오르는 태양)을 읽었을 때, 그것은 분명 잘 쓰여진 소설이기는 하지만, 크라이튼의 소설치고는(사실 나는 그의 팬이다) 좀 깊이가 없고, 구성이 엉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보통 독자들이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제공하는데, 이 소설은 그런 점이 좀 부족했다. 사설이 너무 길고 인물 설정이 너무 도식적이어서, 그 때문에 이야기로서의 종합적인 설득력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의견이다. 거기에 나오는 일본의 엘리트 비지니스맨은 마치 종이에 인쇄되어 있는 걸 그대로 오려 낸 것처럼 인간성이 결여된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져 있어, 나는 도저히 그런 인물이 현실에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물을 때, 그런 식으로 대답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좀 있는 일본 사회의 슈퍼엘리트들을 보고 나자, 어쩌면 크라이튼 씨가 쓴 게 맞고, 내 현실 인식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암담해졌다. 그렇지만 성실한 사람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어쩌다가 눈 오는 날 아침에 평소엔 잘 눈에 띄지 않는 검은 토끼를 본 것뿐이 아닐까? 나는 정말 진심으로 그렇다고 믿고 싶다. 뒷이야기 미국에서 살다 보면 일본식 식사가 그리워진다. 이번에 일본에 돌아가면 맛있는 걸 이것저것 먹어야겠다고 이따금 생각하는데, 그럴 때 웬일인지 와세다 대학의 학생 식당에서 먹던 점심 메뉴가 눈앞에 떠오르니 이상한 일이다. (산케이 스포츠)따위를 펼치고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 있는 A런치 정식을 먹으면 맛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내 자신이 무섭다. 맛있었다는 기억은 전혀 없는데 말이다. 아내는 문학부 협동 조합의 작은 식당에서 먹던 구이가 꽤 맛있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있을까. 난생처음 월급 받고 가르치는 즐거움 찾고 나는 학문적인 흥미 없고 문학이란 개인적인 작업이며 그 해석은 불가능한 거라고 믿었었지만... ... "프린스턴이여, 안녕"이라고 하면 "라바울이여, 안녕"(역주: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라바울에서 철수하는 심정을 담은 노래)같이 들리지만,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그저 이사를 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풍속, 습관, 언어가 다른 남의 나라에서 짐을 꾸려 이사를 하는 것이어서, 단순히 이사라고 해도 상당히 힘든 작업이다. 지금은 매사추세츠 주의 이사 간 새집의 작업실에서 이 원고를 쓰고있다. 아무튼 덥고, 짐도 아직 덜 풀었고, 이사했다는 통지도 친지들에게 보내야 하고, 솔직히 말해 녹초가 되어 버렸다. 미국에서는 주가 바뀌면 여러 가지 일들을 처음부터 다시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이사할 때보다 훨씬 힘이 든다. 지쳤다. 정말 한동안은 이사하고 싶지 않고, 짐을 싼 상자는 보기도 싫다고 하면서도, 또 몇 년 지나면 "자,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하는 게, 뭐니뭐니 해도 이사에 따르는 무서움이 라고 하겠다. 버트 바칼락의 노래에, "이제는 사랑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적어도 내일까지는"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사는 사랑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사랑보다 이사를 더 많이 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프린스턴 대학은 꽤 살기가 편해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2년 반이나 있게 되었다. 처음 1년 반 동안은 교환 교수 자격이었고(보통은 1년인데 부탁해서 반년을 연장했다.), 그 후에는 교환 강사라는 생소한 자격으로 바뀌었다. 이 타이틀을 받으면 체류 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데, 그 대신 강의를 하나 맡아서 가르쳐야 했다. 강의를 하면 수입이 생겨-이것은 실로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봉급이다-대학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대의명분이 서고, 그래서 체류 연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1주일에 두 번 강의를 하면 한 단계 더 높은 교환 교수가 될 수 있는데, 좀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교수가 되기 위해 미국에 온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결국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를 1주일에 한 번만 하기로 했다. 남에게 뭔가를 가르친다는 게 정말 서툴고, 강사 자격증도 없고, 생전 가정 교사 한 번 해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외국까지 와서 이렇게 엄청난 이을 해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겼지만, 이 땅에서는 자격증이니 경험 같은 게 그리 큰 문제가 된지 않는 모양이다. 현대 임분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그리고 나의 술친구이기도한-호세야가 1년 동안 장기 휴가를 얻어서 프린스턴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워야 하는 사정도 있었다. 원래는 영어로 해야 하지만, 내 영어 실력으로는 대학원생을 상대로 문학을 논한다는 게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되어 일본어로 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내가 30대였다면 이 기회에 열심히 분발해서, 어떻게든 영어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겠지만, 40대도 중반에 접어들어,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일하게 되다 보니,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과 정력을 본래의 내 일 이외의 다른 일에 들린다는 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나는 세미나의 주제로 "제3의 신인"(역주:1950년대에 등장한 전후파에 뒤이은 세대의 작가들에 대한 총칭)을 택했다. 교재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전반 사이에 씌어진 책 중에서 선택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 그룹에 속하는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무척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근대나 현대에 상관없이 일본 작가의 작품은 별로 읽지 않았는데, 그래도 곰곰이 생 해 보니 요시유키 준노스케, 쇼야 준조, 고지마 노부오, 야스오카 쇼타로, 엔도 슈사쿠 같은 작가들의 작품은-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지만-비교적 열심히 읽은 편이다. 그 대부분은 내가 소설가가 된 후에 의식적으로 읽은 것이지만, 그 이전에 읽은 것도 깨 있다. 나는 쇼야 준조의 <풀 사이드의 작은 경치> <정물>이나 고지마 노부오의 <아메리칸 스쿨>을 학생 시절에 읽었는데,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많지 않은 일본 소설들에 속한다. 제1,2차 대전 이후의 전후파에 비하면, `사소설적`이라 고 평가받는 이들의 소설군에, 왜 내가(미안하지만 `사소설` 알레르기인 내가) 그토록 마음이 끌리는가, 하는 것이 이번 세미나를 통한 나 자신의 개인적인 테마였다. 마침 좋은 기회니까 전부터 막연히 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이 의문을 계통적으로 밝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론에 대해서 쓰기 시작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다른 기회에 상세히 쓰겠다. 그런데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매주 한 번 세시간(!) 동안 토론하는 건, 나 자신에게도 즐겁고 유익한 일이었다. 내 느낌이나 생각을 구체적인 말로 쉽게 설명하고, 칠판에 그림이나 도표를 그려 놓고 설명하거나, 세부적인 의미에 대하여 논쟁하는 사이에, 그때까지 나도 잘 몰랐던 것들을 문득문득 깨닫게 되거나, 혹은 학생들이 제기하는 의견이나 질문에 "그렇군, 그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볼 수도 있겠군" 하고 자극 받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는 학구적인 사람이 아니고, 학문으로서의 문학에 흥미를 느껴 본 적도 거의 없고, 결국 문학이란 개인적인 작업이며, 그 해석은 불가능한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 그런 식의 집단 토론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심했는데 , 횟수를 거듭할수록 세미나에 참가하는 게 즐거워졌다. 매주 단편 두 작품 혹은 장편을 하난 읽었고, 에토 준의 (성숙과 상실)을 부교재로 썼다. 일본어로 읽고 일본어로 토론하는 것이어서 1주일에 단편 하나면 되지 않을까 싶어 처음에는 그렇게 했었다. 그런데 대학원생들이 "이렇게 하면 곤란합니다. 읽는 분량을 좀더 늘려 주십시오"라고 요구해 와 스케줄이 빡빡해졌다. 학생들에게는-특히 미국인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정말 열심히 노력하며 따라와 주었다. 절로 머리가 수그러진다고 해야 할까, "이봐 정말 그렇게 공부해도 괜찮겠어?" 하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미국인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아무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는 무척 기쁜 일이긴 하지만, 세미나에는 대략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확실히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인 학생 다섯 명, 일본인 학생 다섯 명일 참가했는데, 일본 학생들은 동양 문학 전공자가 아니라 다른 학부의 학생들이었다. 미국인 학생 두 명은 400자 원고지에 일본어로 상당히 긴 학기말 리포트를 써냈다(이 노력에는 역시 A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이 리포트 안에서 다룬 텍스트를 보면, 수적으로는 쇼야 준조의 (정물)이 가장 많았고, 다음이 야스오카 쇼타로의 (나쁜 동료)와 (해변의 광경)이 많았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의 작품이 미국의 젊은 학생들에겐 비교적 읽기 쉽고 비평하기 쉬운 것인지도 모른다. 고지마 노부오의 작품은 토론 때는 가장 활발하게 거론됐는데, 좀 버거서워서인지 이 작가의 작품을 선택한 학생은 거의 없었다. 어쩐 미국 학생은 요시유키 준노스케의 (나무들은 푸른가)를 다루었다. 내 강의에서는 이 작품은 다루지 않았지만, `제3의 신인`의 작품이라면, 어떤 걸 다뤄도 좋다고 했기 때문에 그건 그 나름대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내가 이 작품을 너무 오래 전에 읽은 탓으로,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대학 도서관에는 요시유키 준노스케의 전집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나무들은 푸른가)를 수록한 책은 대출 중이었다. 그래서 그 닉이라는 학생(록 밴드를 하면서 일본 문학을 연구하고 있는 조금은 괴짜인 남학생)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책이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있으면 빌려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영어로 번역된 것을 읽었습니다. 그 영역 본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만"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요시유키의 작품을 하는 수 없이 영역 본으로 읽게 되었다. 읽지 않으면 리포트를 채점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을 영역 본을 읽은 학생이 영어로 쓴 리포트를 채점하는 것이니까, 나도 영역 본을 읽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퍽 복잡한 얘기긴 하지만. 실제로 읽어 보니, (나무들은 푸른가)의 영역 본은 꽤 번역이 잘되어 있었다. 대충 읽어 본 바로는 번역이 `나무랄 데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것은 원래 하나의 언어로 씌어진 것을 `어쩔 수 없이 편의상`다른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라, 아무리 꼼꼼하게 잘해도 완전히 똑같아질 수는 없다. 번역에 있어서는, 뭔가를 택하고 뭔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뭔가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취사 선택`이라는 것은 번역 작업의 근간에 있는 개념이다. 나는 이 영역 본을 읽으면서 문득 "정말 이 번역은 잘되었는데, 이걸 다시 한 번 일본어로 고치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요시유키의 원작에 얼마나 가까워(혹은 멀어)질까? 다음 문장은 내가 시험삼아 영어로 번역된 걸 다시 일어로 번역한 그 첫 부분이다. 외국에서 배우고 돌아온 귀국 자녀들처럼 일본 말이 어색한 요시유키 준노스케의 문학이라고나 해야 할까..... 이키 이치로는 육교 위에서 발을 멈추고, 뒤돌아보고 눈 아래 펼쳐진 저녁노을로 물든 거리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매일 시간에 일터로 떠났다. 그리고 매일매일 이 다리 위에 서서 그 거리들을 바라보았다. 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것으로 반쯤 싸여 있었다. 그것이 진짜 아지랑이인지, 아니면 수없이 많은 높은 굴뚝으로부터 피어 올라 층을 이루어, 이 일대의 거리를 덮어 버린 연기 때문인지, 그것을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어느 쪽이 됐든 거리는 언제나 아지랑이에 싸여 있었다. 그 아지랑이에 싸인 거리를 볼 때마다 가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감정을 경험하게 됐다. 하나는 이제부터 거리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짜증스런 기분이었다. 그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단조로운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다리에서 그대로 뒤돌아 집으로 돌아가서, 이불을 덮고 다시 잠을 잘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또 하나는 이 끝없는 아지랑이의, 어두컴컴한 심연을 향해 내려간다는 조금은 자극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두 개의 감정 중에서 어느 쪽을 느끼는가는 그날그날에 따라 달랐다. (The Showa Anthology), KODANSHA INTERNATIONAL 이것은 원작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머리로, 되도록 원문(영어)에 충실하면서 요시유키의 문체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번역한 것이다. 진지하게 번역을 하면, 문장으로서 좀더 세련된 번역문이 되겠지만, 여기서는 원문과 대비되는 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상당히 직역을 했다. 그런데 일본어로 씌어진 원문은 사실 다음과 같다. 육교 위에서, 이키 이치로는 멈춰 서서 눈 아래 펼쳐지는 해질 무렵의 거리로 눈을 돌렸다. 매일, 이 시각이 그의 출근 시간이다. 그리고, 그는 매일 다리 위에 멈춰 서서, 거리를 바라본다. 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것 속에 반쯤 감겨 있었다. 그것은 진짜 저녁 아지랑이인지, 이 지대를 둘러싸듯이 우뚝 솟아 있는 몇십 개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매연이 층을 이루어 거리 위를 뒤덮어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나, 거리는 아지랑이 속에 잠겨 있었다. 아지랑이 속의 거리를 내려다볼 때, 그의 마음속에 이는 감정이 두 종류 있다. 하나는 그 거리로 내려가는 게 매우 내키지 않은 기분이다.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단조로운 일에 관한 것을 그는 우울한 기분으로 생각한다. 다리 위에서 그대로 발길을 돌려서 집으로 돌아가,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잠들고 싶어진다. 또 하나는 아지랑이 때문에 흐릿한 `까닭 모를 장소로 내려간다`고 하는 자극적인 기분이다. 그 두 종류의 감정 가운데 어느 쪽인가가, 그날에 따라 그의 안에서 일어난다. (신선 현대 일본 문학전집33-전후소설집(2)) 씌어져 있는 것은 같지만, 이렇게 다시 번역해 보면 꽤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우선 원문에는 과거형과 현재형이 뒤섞여 이는데, 영문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전부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도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전부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한자의 글자 모양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문체의 미묘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불가사의한 탄력성도 사라진다. "아지랑이 때문에 흐릿한 까닭 모를 장소"는 영문에서는 "the unfathomable shadowy depths of the mist"로 되어 있다. 이것은 상당히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되지만, 이 영문을 통해서 거꾸로 원작의 문장을 짐작하기엔-물론 그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번역의 가치와는 직접적으로 관계없지만- 역시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 개인적인 감상인데, 영문 번역본으로 요시유키 준노스케의 단편을 읽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상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고전 악기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비슷한 `다시 보기`식의 재미가 있다. 그런 것에 일일이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어쩌면 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학생들이 제출한 학기말 리포트에 점수를 매기고, 이것으로 난생처음 하는 `선생`으로서의 의무도 다했다. 드디어 프린스턴하고도 이별이다. 이번에는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어떤 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본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친지가 괜찮다면 이쪽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해서(그렇지만 그는 장학금을 받아 우리와는 반대로 일본으로 가버려서, 결국 우리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것에 내팽개쳐지는 처지가 되었다)가게 된 것이다. 이사하는 곳은 서부든 중서부든 어디라도 괜찮지만, 업무 관계가 뉴욕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동부 연안의 북쪽에 머무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아내가 이번에는 돈이 좀 들더라도 마음 편하게 이사를 하고 싶다며, 일본어가 통하는 일본계의 이삿짐 센터에 맡기자고 했고, 나도 일이 바빠서 될 수 있으면 잡다한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일본계 이삿짐 전문센터에 전화를 걸어 견적을 뽑으러 오라고 했다. 나는 이것저것 편리한 점도 있어 보통의 미국의 이삿짐 센터보다 50퍼센트 정도 더 비싸질 게 아닌가라고 막연하게 예상하고 있었는데, 자그마치 4,400달러(여기에 보험금이 더 붙는다)가 나와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꼼꼼하게 잘 챙긴다고 해도 조심조심 다뤄야 할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뉴저지에서 매사추세츠 정도의 거리에 그 가격은 해도 너무한 것이다. 그 정도라면 차라리 짐을 전부 처분해 버리고 다시 목적지에 가서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원래 살던 집은 가구 제공 조건이었기 때문에 짐이 그렇게 많지도 않아서 도와 줄 사람만 있으면 차라리 내가 트럭을 빌려서 옮겨도 될 정도지만, 학교는 이미 여름 방학에 들어가 버려서 유감스럽게도 주위에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와 힘없는 아내 둘이서, 무거운 짐을 2층까지 올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근처의 다른 운송업자를 열심히 찾아다닌 끝에, 겨우 일손이 비어 있는 곳을 발견하고(미국에서는 여름이 이사철이라 이 시기에 2주 후의 이사를 예약하기가 상당히 힘들다),서둘러서 견적을 뽑아 달라고 했다. 다음날 견적을 담당하는 사람이 와서 집안을 둘러보고 가구와 상자 수를 계산하고는 "이 정도라면 980달러(보험금 포함)인데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다. 물론 우리에게 불만이 있을 리 없다. 어쨌든 처음에 뽑은 견적의 4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인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이삿짐 센터는 약속 날짜도 안 지키고, 짐도 잘 잃어버리며, 가구에 흠집도 잘 내고, 아주 제멋대로인 데다가, 거칠다고 여러 사람이 겁나는 얘기를 하는 거였다. 근처에 사는 루시는 "내가 워싱턴 D.C.에서 이사올 때는 짐을 실어 보내는 게 약속한 날짜보다 이틀이나 늦어지는 바람에, 상자에 넣어 둔 짐을 풀 수도 없어, 별수 없이 남편과 함께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잤어"라고 했고, 메그는 "소중한 고가구가 엉망이 되었어"라고 했으며, 안나는 "도중에 이삿짐 상자 하나가 없어졌는데 결국은 나오지 않았어. 그런데 보험도 안 되는 거야"라고 했고. 타라는 "제대로 견적도 뽑고 약속도 했는데, 이삿짐 센터 트럭이 결국 오지 않았어"라고 했다. 일본계 이삿짐 센터는 비싸기는 하지만, 그렇게 심한 사고는 거의 빚어지는 일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대학측에서 이사 비용을 대줄 경우에는 모두들 일본계 이삿짐 센터에 맡겨요. 아무튼 편하고 제대로 해주니까요" 하고 어떤 교수가 가르쳐 주었다. 우리의 경우도 짐을 내가는 것도 대충 사흘 중의 어느 하루에 한다는 것이고, 새집으로 배달해 주는 날짜도 어느 사흘 중의 하루라는 식으로, 그야말로 대충대충-일본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날텐데- 이었는데, 그래도 이번 이사는 고맙게도 특별한 문제없이 끝냈다. 아놀드 슈왈츠네거 비슷한 체형에 문신을 새긴 사내가 세 명 정도 와서. 나는 하나도 벅찰 것 같은 무거운 짐을 한꺼번에 세 개씩 번쩍번쩍 들어 올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짐을 다 날랐다. 밤길에 마주치면 약간은 가슴이 철렁할 것 같은 몸집의 사람들이었지만, 감탄할 정도로 일도 잘하고 꽤나 친절했다. 내가 겪은 많은 이사 경험에 비추어 말한다면, 일본의 이사업체 종업원들은 대체로 "이 일은 해야 하는 일이니까"라는 분위기로 표정 없이 조용하고 체계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 사람들은 "우린 프로요, 프로"하는 느낌으로, 그야말로 근육의 힘 자랑을 하듯이 큰소리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당당하게 일을 한다. 미국에서는-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육체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주체적인 인생의 선택이기도 하다. "힘이 굉장하네요" 하고 칭찬하면, "당연하죠" 하는 표정으로, 기쁜 듯이 싱긋 웃는다. 이런 사람들은 힐러리 클린턴과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새집의 마룻바닥에 이삿짐으로 꾸린 상자들이 높다랗게 쌓이고 "이봐요, 많은 행운이 함께 하길" 하고 기운찬 작별 인사를 남기고, 그 운송 트럭이 떠난 후, 나와 아내는 아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는 낯선 외국 도시에 둘만이 남겨지고 말았다. 서글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할 수 없지, 뭐.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여기저기 흔들흔들 방황하고 있는 거니까, 라고 자위하고 만다. 미국인들이 흔히 말하듯 "더운 것이 싫으면 처음부터 부엌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다. 어찌 되었든 새로운 장소에 내가 있고, 그 곳에 새로 시작해 볼 만한 생활이 있다는 건 멋진 일이 아닌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하게 될는지, 이젠 정말 나도 모르겠다. 뒷이야기 지난번에 요시유키 준노스케의 똑같은 문장을 일본 학생 다섯 명에게 일본어로 번역해 보라고 했었는데, 아주 재미있었다. 물론 다들 영어를 잘해 거의 틀리지 않았지만, 거의 다 mist를 `안개`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물론 오역이 아니다. 사전에 mist는 `옅은 안개` 혹은 `아지랑이`라고 나와 있다. fog보다는 옅고, haze보다는 짙은 것이 mist다. 다만 이것은 해질 무렵의 도시 얘기라서 아무래도 저녁 안개보다는 저녁 아지랑이라고 해야 느낌이 더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접어두고 그저 mist=안개라고만 하지 말고 적어도 선택지에 대해 일단은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앞으로 점점 자연에 대한 종래의 일본인다운(꽃과 새와 풍월과 같은) 정신적인 것이 변질되고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도시 생활에서는 안개와 아지랑이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리고 더 재미있었던 건 여학생은 과거형과 현재형을 섞어 가며 번역을 했고, 남학생은 과거형만 써서 번역했다는 점이다. 뒤에 남은 말 내가 외국에 자주 나가 산 까닭은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글`을 쓰기 위해, 주위로부터 아무 도움도 영향도 받지 않는 제로 상태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슨 운명인지 내게 자명성을 갖지 않는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슬픔에 가까운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쓰기 전에도 여행기라고 할까, 체류기라고 할 만한 책을 한 번 낸 적이 있다. (먼 북소리)라는 책이데, 나는 그 책에다 약3년 간에 걸친 유럽 체류에 대한 예길 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책에 수록된 글의 대부분은 `첫인상` 내지는 기껏해 봐야 `두 번째 인상`을 적은 것이었다.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을 그 곳에 머물러 있었지만, 결국은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의 눈으로 주위 세계를 바라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스쳐 가는 사람에게는 스쳐 가는 사람으로서의 관점이 있고, 그 곳에 뿌리내린 사람에게는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만이 갖는 관점이 있다. 양쪽 다 나름대로 장점이 있고, 보이지 않는 사각 지대도 있다. 반드시 첫인상을 토대로 글을 쓰면 깊이가 없고, 오래 살면서 차분하게 지켜본 사람의 관점은 깊이가 있고 올바르다는 건 아니다.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만큼 오히려 보지 못하는 접도 있다. 얼마나 자신의 관점과 진지하고 유연하게 관계 지을 수 있는가. 그것이 이런 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걸 잘 이해한 뒤에, 다음에는 `두 번째 인상` 내지 `세 번째 인상` 정도의 눈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애초에 생각했었다. 모처럼 이번에는 미국이라는 사회에 `속해서` 생활하는 거니까, 뭔가 신선한 것, 새로운 것에 중점을 두고 글을 씨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선 곳에서 시간을 두고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진으로 말하자면 표준 렌즈만을 사용해서 보통 거리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을 찍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유럽에서 돌아와서 한동안은 일본에 정착해서 한가롭게 지낼 작정이었다. 생각해 보니 벌써 여러 해 동안 이사만 다니며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나도 이제는 그리 젊지도 않고, 슬슬 한곳에 정착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유럽체류의 거의 끝 무렵에는 좀 지친 상태였었다. 나도 `오랜만에 온천에나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면 전철을 타고 어디 가까운 온천 여관으로 훌쩍 떠난다거나, 여름에는 대낮부터 국숫집 같은 데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추운 계절에는 꼬치집에서 따끈한 정종을 마시고, 몸을 따뜻하게 하며 홀가분하고 속 편한 생활을 만끽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첫머리에서도 쓴 것처럼 1990년 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1년 동안 일본에서 살아 본 뒤, 그리고 무척 고민한 끝에 결국 또 짐을 싸들고, 미국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지치지도 않고 다시 외국에 나올 생각을 한 것은, 일본에서 한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지내는 동안 확실히 나는 그리 젊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직 그다지 늙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나는 여러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아직 그런 일이 가능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경험을 해두고 싶었다. 그런 연유로 그럭저럭 3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 확실한 것은 나도 잘 모른다. 아무튼 지금 쓰고 있는 장편 소설을 완성하고 나서 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지 하면서, 아무런 예정도 잡히지 않은 채. 이국 땅에서 (이런 표현은 좀 구식이지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상태다. 유럽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오랫동안 일본에서 떨어져 지내면서,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은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아무 탈없이 원활하게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나라고 하는 한 인간이 혹은 한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일본에서 사라져 버려도, 누구 하나 특별히 곤란해하거나 불편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코 심사가 뒤틀려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결국 나 같은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건 자명한 이치고, 인간이 한 사람 늘어나거나 줄어든 정도로 세상이 혼란해진다면 세상은 몇 개가 있어도 모자란다. 하지만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자기의 소임 따위에 바쁘게 쫓기다 보면, 그런 자기의 무용성과 샅은 것에 대해서 찬찬히 깊게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내가 지금 여기에서 비행기 사고나 식중독으로 갑자기 죽는다 해도, 사태는 거의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직 젊은 나이에 정말 안된 일이네요"라고 말해 주는 사람도 개중에는 몇몇 있을지도 모르지만, 1년 정도 지나고 나면, 아마 모두들 나라고 하는 인간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가끔은 생각이 나기도 하겠지만, 내가 없어서 특별히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약간 과장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외국에 오랫동안 나가 있다는 건, 나 자신의 사회적 소멸을 미리 경험해 보는 의사 체험을 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것과 조금 비슷한데, 외국에서 지내는 것의 장점 -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좀 의문스럽지만- 중의 하나는 자기가 단순히 한 사람의 무능력한 외국인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로 언어 문제가 있다. 내 경우에는 외국어로 나를 제대로 표현하는 게 실제적으로 불가능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의 20-30퍼센트밖에는 상대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제대로 전달은커녕 전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다. 외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처음부터 차별 받는 경우도 있다. 안 좋은 이도 상당히 많이 겪었다. 속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험을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차별을 받거나 이방인으로서 말도 안 되는 배척을 받기도 하는 모든 걸 빼앗긴 제로 상태인, 알몸인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마조히스트는 아니지만, 약자나 무능력한 사람이나 그런 식으로 허식이나 과장이 없는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혹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쳐 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소중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본다. 그 당시에는 물론 화도 나고, 마음도 상하고,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속 편하게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만, 나중에 냉정하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내가 일본에 있을 때 항상 느꼈던 갖가지 종류의 복잡한 고민보다는, 이렇게 개인이라는 자격에 바짝바짝 다가오는 직접적인 `어려움`쪽이 내게는 더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면 일본어가 변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미국인들도, 일본인들도 그렇게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이 좀처럼 알기 힘든 일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변한 것 같기도 하고, 그다지 면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네, 역시 바뀌더군요" 하고 대답할 때도 있고, "아뇨, 특별히 변한 것 같지는 않네요" 하고 대답할 때도 있다.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대답한다. 무책임하겠지만,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갑자기 받으면 정확하게 대답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예를 들어 오래된 친구를 만났는데 갑자기 "너 사람이 변했어. 그렇지? 변했지?"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그 말에 제대로 답할 수 있겠는가? 대답할 길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5년이든 10년,20년이든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사람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변하지 않는 게 오히려 훨씬 이상한 이관된 불변의 존재로서 그대로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로 "사람이 변했다"고 해도, 그것이 도대체 어떤 측면을 지적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정의해 주지 않으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대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어나 문체의 변화 같은 것도 그와 마찬가지다. 언어란 항상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것은 공기에 따라 변하고, 사고 방식이나 행동 양식에 대응해서 변한다. 교제하는 상대와 연령에 따라 면하고, 자기 입장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외국에 산다는 것도 그런 변화 요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간단하게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만일 정확하고 진지하고 성실하네 대답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예, 아무래도 제 일본어는 미국에 온 이후 변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서 그 이외의(즉 내가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 이외의) 선택지가 만들어 냈을 변화와 지금 여기에 있는 변화를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 검증할 수는 없으니까, `미국에서 삶으로써 내 일본어가 변했는가` 하는 당신의 질문에 대해 지금 내가 여기서 대답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증명할 수 없는 잠정적인 가설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얼굴을 마주하고 듣는다면 아마 상대방은 머쓱해 할 테고, 대화를 계속할 화젯거리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당하게 그렇다고 하기도 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어차피 내가 어떻게 말한다 한들 그것 때문에 세상이 좋아지거나, 나빠질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만일 내 말 한마디에 세상이 좌지우지된다면, 나는 소설을 쓰고 있을 새도 없이 진지하고 성실하게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정확하게 대답을 할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진지하고 성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미국에 와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혹은 일본어라는 언어에 대해서 상당히 진지하게 정면에서 직시하며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젊었을 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조금이라도 일본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말하자면 조금이라도 일본어 적인 것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나라는 인간의 본질에 더 `가까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지간히 비애국적인 발상 같지만, 누가 뭐라던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나와 일본어의 타협점을 ㅊ기 위해 정말로 모든 방법이나 수법, 관점을 총동원해서 악전고투했다. 그 당시의 내 글을 지금 읽어보면, 정말 여러 가지로 힘들었겠구나, 하고 남의 일처럼 감탄한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그 악전고투 끝에 내 나름대로 `타협점을 찾은` 일본어 문장 스타일을 조금씩 익혀 감에 따라,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로 일본을 떠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나는 점점 일본어로 소설 쓰는 행위를 좋아하게 되었다. 일본어라는 언어가 내게 있어 점점 사랑스럽고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일본으로의 복귀를 뜻하는 건 아니다. 외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고 서양에 물들었던 사람이 일본 문화 지상주의자처럼 되어 돌아오는 일은 흔히 있지만,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것과는 또 다른 얘기다. 왜냐하면 나는 특별히 일본어가 다른 언어보다 언어적으로 우수하다는 것 같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어가 외국어에 비해서 얼마나 아름답고 우수한 자질을 가진 언어인가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지만, 나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본어가 굉장한 언어로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생활에서 배어 나온 언어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어라는 언어의 특질 그 자체가 우수해서 그런 건 아니다. 모든 언어의 가치는 기본적으로 똑같다는 게 언제나 변함없는 나의 신념이다. 그리고 모든 언어의 가치는 기본적으로 똑같다는 인식이 없으면, 정당한 문화 교류도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서른 살 때, 어쩌다가 우연히 작가가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은 거의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어(이것은 내 나름대로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건데, 얘기를 시작하면 길어질뿐더러 전에도 어딘가에 쓴 적이 있어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 때문에 나보다 앞선 전 세대의 작가들로부터 구체적으로 표현 방법이나 문체를 배우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모델로서 존경하는 작가도 특별히 없었다. 사소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초보적인 인식조차 없었다. 특별히 일본 문학을 싫어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저 단순히 일본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때까지 읽었던 많은 영문 소설이나, 혹은 다른 언어를 번역한 소설을 읽으며, 스스로 소설을 쓰기 위한 방법을 배워야 했다. 즉 일종의 대리모 같은 것으로부터 한번 걸러져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기 위한 문체난 방법을 배워야 했던 것이. 그것은 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냐고 한다면 나도 대답하기가 곤란하지만, 상당히 오래된 일이고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제 와서 좋다 나쁘다를 따져 봐야 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출발점이 어찌 되었든 나는 그로부터 15년 동안 내 손으로 나 자신의 소설을 쓰기 위한 일본어 문체를 마치 벽돌을 쌓아올리듯 차곡차곡 만들어 와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씩 이기는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일본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슬픈 외국어)라는 제목은 나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절실한 울림을 갖고 다가온다. 책제목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부터 수시로 이 말이 내 머리 속에 떠오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보스턴에서 매일매일 생활하면서, 이발소 의자에 앉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거나, 대학 근처에 있는 던킨 도넛에서 커피와 도넛을 사거나, 누군가가 연 파티에서 포도주에 입을 댈 때나, 건널목에서 자동차 핸들 위에 양손을 얹고 멍하니 신호를 기다릴 때, 이렇다 할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불쑥 `슬픈 외국어`라는 말이 만화에서 박스에 표현된 대사처럼 머리 위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슬픈`이라고 해도 그것은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외국어가 잘되지 않아 슬프다는 건 아니다. 물론 약간은 그런 점도 있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슨 운명 때문인지 나에게 있어 우리말처럼 설명의 필요 없이 스스로 명백한 성격의 자명성을 갖지 않는 언어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에 가까운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쩐지 말을 빙빙 돌리는 것 같아서 미안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된다. 그리고 가끔 일본에 돌아오면 이번에는,"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은 정말로 우리에게 있어 자명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그러나 물론 이런 나의 사고 방식은 적절한 것이 아닐 게다. 왜냐하면 분명성에 의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명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한동안 일본에서 지내면 이 자명성은 내 속으로 다시 조금씩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자명성이라는 것은 영구 불변의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에 대한 기억이다. 어디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어떤 부분에서는 이방인이고, 우리가 언젠가 그 자명하지 못한 영역에서 무언의 자명성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으스스한 회의의 감각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작가로서, 나는 아마도 이 `슬픈 외국어`를 끌어안고, 계속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올 바른 일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비난을 받아도 곤란하고, 칭찬을 받아도(하기야 칭찬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곤란하다. 그 곳이 내가 다다른 곳이고, 결국 거기까지밖에 이르지 못한 것이니까.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잡지(책)에 연재한 원고를 약간 수정한 것이다. 그리고 단행본으로 엮을 때, 몇 가지 새롭게 첨가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뒷이야기`라는 형식으로 각각의 글 뒤에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