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그래도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18가지 이유 지은이 모모세 타다시 출판사 사회평론 1 왜 한국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식당이 없을까 30년 만에 경례를 받아보다 책을 내는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 어쩌다 책을 내게 되어 나로서 는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다. 책을 내고 얼마 안 있어 한국에 주재하는 일본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9시쯤 퇴근하면서 지하철을 탔는데 자리에 앉아서 보니까 앞사람이 당신 책을 읽고 있 데. 야, 모모세 책을 많이 읽나보다 그랬는데 옆쪽을 보니까 그 사람도 같은 책을 읽고 있는 거 야. 야, 모모세 책이 대단하구나? 기분 무지하게 좋더라구 그래? 기분이 우쭐해졌다. 일본에 갈 때 있었던 일이다. 김포공항에서 여권 검사를 하는 사람이 내 여권을 보더니 모모세? 하더니 내 얼굴을 보고는 혹시, 책을 쓰신 분 아니세요? 저도 그 책 을 읽어보았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고 안녕히 다녀오시라며 경례까지 했다. 뒤에 서 있던 사람들도 이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야? 뭐야? 하면서 쳐다보았다. 30년 동안 김포공항을 오갔어도 난생 처음 받는 인사였다. 그거 참... 그런데 비행기를 탔더니 스튜어디스들이 또 내 책을 읽어봤다는 것이었다. 또 김포공항에 가면 서점이 있는데 판매원들이 내 얼굴을 다 알아보는 것이었다. 일본어판도 나왔기 때문에, 일본 나 리타 공항에 내리면 공항 구내서점에도 내 책이 깔려 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도 내 얼굴을 알아 보는 사람이 생겼다. 참 나로서는 상상도 못한 경험을 해본 것이다. 이거 내가 유명인사가 됐나? 일본에 있는 초등학교, 대학교 동창들로부터도 연락을 많이 받았다. 한 친구가 야 어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옆사람이 네 책 얘기를 한참 하더라구. 그래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중에 아 그 사람 내 친한 친구라고 했지. 그래가지고 악수도 하고 인사도 했지. 자제 덕분에 나까지 기분이 좋던걸. 하는 것이었다. 내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었을 때 일본에서도 흥미를 가지고 취재를 오는 기자들이 있었다. 민간 입장에서 그리고 특히 오랫동안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했던 사람이 슨 한 국론은 일본에서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흥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일본기자들 중에는 나에게 모 모세 씨, 모모세 씨는 아무래도 한국에 오래 있었으니까 한국에 좀 아부하는 거 아닙니까? 하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왜 한국에 아부를 합니까? 하고 되받는다. 그러면 십 중팔구는 그 동안 일본 매스컴이나 일본책에 나온 것과는 한국이 많이 다르잖습니까? 하고 말한 다. 그러면 나는 그러니까 그런 그동안 잘못된 얘기를 매스컴 같은 데서 많이 했기 때문에 만들 어진 한국에 대한 이미지예요. 하고 덧붙인다. 다음에 나오는 반응은 그런가? 이다. 여러 차례 강 연을 할 기회도 있었다. 대부분은 내 얘기를 아주 우호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럴 때는 한국사람들 은 일본사람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나에 대단히 관심이 많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갖게 된다. 앞서 얘기한 일본기자의 경우도 그렇지만 강연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 이다. 한국과 일본이 많은 교류가 있고 또 오가는 사람도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진짜로 양국 의 사람들이 예민한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속내 얘기를 서로 해본 경험은 의외로 드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게 되니까 처음에는 어색하고 귀찮게까지 느껴졌지만 이제는 강연을 어디서 해 달 라고 해도 거의 사양하지 않고 대부분 응하게 된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 게 한국과 일본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인 것 같아서. 나는 한국에 아부하는 것 아니냐던 기자한테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이 한국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지. 그런데 서로 거래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나? 거래를 하려면 상대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 아냐? 이 말은 한국인들 에게도 그대로 해줄 수 있는 말이다. 처음 만나서 속내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한 번, 두 번 만나고 노래도 같이 부르고 하면 그때 가서야 속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다. 만나다 보면 좋지 않은 사이라도 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걸 미운정이라고 하겠지만, 미 운정 고운정이 드는 사이가 진짜 좋은 사이이다. 한일간을 그런 사이로 만드는 데 내 책이 일조 를 했다면 다행이겠다. 한국에서 운전하면 승진에 지장이 있어요 나는 자동차를 좋아한다. 운전도 좋아하지만 수리하는 것도 웬만큼은 자신이 있다. 대학 시절 나는 자동차 서클에 든 적도 있다. 전공이 공학이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자동차가 좋았기 때문이었 다. 친구들과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아 고물 도요타를 거의 거저 가격에 한 대 샀었는데 엔 진도 고치고 다른 데도 손보고 해서 우리 나름대로는 새 차 를 만들어 긴자거리를 신나게 누볐던 기억도 있다. 그럴 때면 친구들과 서로 핸들을 잡으려고 다투기도 했다. 그당시 친구들 가운데 지 금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으니 순수한 아마추어였다. 면허는 다 있었지 만 막상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갈 때는 차에 세 사람 이상 타지 않았다. 혹시 사고가 날지도 모르 는데 그러면 몇 사람은 별사고 없이 남아 있어야 뒷 수습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여튼 조심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까 다들 나보다 운전을 훨씬 잘했다. 운전을 잘하기도 하지 만 운전 습관이 많이 달랐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이리 끼여들고, 저리 끼여들고, 한동안은 눈 이 돌 지경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같이 운전하는 입장인데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너무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본도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세 가지 신호등이 있는데 일본 에서와 달이 한국사람들은 노란 불일 때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서로 꼬인다. 일본도 길이 많이 막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푸른신호등이 켜져 있어도 차가 엉킬 것 같으면 절대로 가지 않는다. 억지로 가면 오히려 자기에게 손해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또 있다. 내 가 퇴근하는 길인 서울역에는 여섯 시만 되면 교통경찰이 나와 서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풍경은 거의 볼 수 없다. 공사를 한다거나 갑자기 사고가 났다거나 아니면 외국에서 VIP가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이 친구가 남대문과 서울역 방향만 가게하고 나머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거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가 신경 쓰는 큰길로 다니지 않는다. 당연히 그 경찰이 나 와서 유도를 하면 차가 더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만 그런가? 한쪽 길만 생각하고 나머지 길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큰길만 생각하고 작은 길은 생각하지 않으니까 차들이 더 골치가 아프다. 분명히 무전기는 들고 있는데 이상하다. 그리고 그나마 1시간 반 정도 하다가는 들어가 버린다. 그러려면 아예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중에 한국 친구에게 들으니까 거기 나온 경찰 들은 대부분 의무 복무하는 거란다. 그러니까 군인이라는 얘긴데 몇 달만 고생하면 사회에 복귀 할, 그래서 자기 일에 프로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서울의 교통체증을 맡길 수가 있 을까. 모를 일이다. 단순히 길이 막히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 막힌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바쁘고 직장이나 가정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 아닌가? 무엇보다도 한 국의 운전자들은 자동차를 너무 위험하게 몬다. 서울 시내에서는 낮에도 100킬로미터 이상 달리 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니 밤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예 시내에서는 40킬로미터 나 50킬로미터 이상으로는 주행을 못하게 규제를 할 수는 없을까. 사실 40킬로미터로 주행한다고 해도 장애물을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최소한 30미터는 밀려간다. 이건 상식이다. 이렇게 속도 규제를 하면 안전에도 좋은 것은 물로 사람들이 차를 끌고 나오지 않을 것이다. 버스나 지 하철이 더 빠를 테니까. 일본을 다녀온 사람이면 다 느끼는 것이겠지만 일본사람들은 한국사람들 이 보기에 복장이 터질 정도로 버스를 천천히 몬다. 그건 제한 속도가 40킬로미터로 정해져 있어 서다. 일본에는 아예 태코미터가 있어서 4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면 영락없이 적발이 된다. 그러 다 보니 스스로 양보한다. 서울에서는 앰뷸런스하고 버스가 나란히 달린다. 앰뷸런스가 먼저 가야 하는데도. 빨리 가야할 것은 또 천천히 간다는 얘기다. 나는 시내에서는 80킬로미터, 100킬로미터 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서울의 도로 사정이 안 좋다고 하지만 내가 돌아다녀본 바에 의하면 서울은 도로도 넓고 사정이 아주 좋은 편이다. 그런데도 교통 사정이 나쁜 건 그렇게 좋 은 길을 엉망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드웨어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소프트웨어, 사람들의 마인드가 잘못돼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교통문화와 한국의 교통문화가 다르다 보니 나 는 지금은 거의 운전을 하지 않는다. 물론 포항제철을 건설하면서 포항 현장에서 근무할 때는 직 접 운전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회사에서 기사가 딸린 업무용 차량을 지원해주기도 하지만 휴일에도 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내가 차를 좋아하는데도... 이유는 단순하다. 도멘의 사규가 한국에선 운전을 하지 못하게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한국에 주재하는 직원이 운전을 할 경우 인사고과에서 마이너스 평점을 받는다. 이건 우 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일본회사들도 마찬가지다. 왜 그러냐고? 한국에서 운전하는 일은 대단 히 위험한 일이라고 일본기업들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전을 하다가 사고라도 조금 나 봐라. 차를 세워놓고 서로 잘못했다고 큰 소리를 치는 판에 한국문화도, 한국어도 서툰 일본인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걸 보고 일본사람들 과민반응을 보이는구먼 하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타는 회사차는 회사에서 한국 렌터카에서 기사까지 한꺼번에 렌트한 차를 타는 경우다. 한 국에 와 있는 일본인들 중에 예외는 있다. 바로 대사관이다. 한국사람들이 대사관 차를 따로 알아 보고 조심해주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운전에 대사관 직원들이 특별한 노하우 를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 대사관 직원들은 면책특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면책특권을 갖고 있으니 접촉사고가 하나 나더라도 우리 같은 민간기업인들과 달리 불이익을 당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운전하다 사고가 난다? 아이고 생각함 해도 아찔하다. 그래서 우리 는 차를 운전하지 못한다. 2천3백 명 가운데 단 두 명만 자가용으로 출근하는 회사 IMF가 닥치니까 가장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길거리에 차가 줄어든 것이다. 차들이 이동하 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지금은 다시 원상복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국사람들은 아직까지는 부자인가 보다. 아니 한국사람들도 깜짝 놀라서 차를 놓고 다녔다가 다시 생각해보니까 아직은 차를 몰고 출퇴근을 하고 장을 봐도 될 만한 살림살이라는 걸 깨달은 걸까? 얼마 전 한국을 찾아온 한 일본기자가 내게 물었다. 아니 지금 한국이 IMF인 게 맞습니까? 아 니 1년 전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차도 많고, 거리 풍경도 똑같고... 이 말이 좋은 얘긴지 나쁜 얘긴지 지금도 모르겠다. 일본 도멘 본사에 근무할 때 나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포항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해서 2년 정도 일본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쿄 근방, 한국으로 말 하면 한 안양쯤 되는 거리에 있는 집에서 출퇴근을 했는데 50분 정도 걸렸다. 그건 내가 특별히 지하철을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다. 우리 도멘 본사에는 직원이 2천3백여명 되는데 회장, 사장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차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이 없다. 부사장만 해도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주 차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고 또 주차할 공간도 없다. 외부에서 손님이 온다든가 해서 정 필요할 경우는 렌터카를 쓴다. 이걸 보고 일본은 나라와 회사만 부자지 개인은 가난하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거꾸로 한국은 개인들이 너무 여유가 있다. 처음에 삼도빌딩에 한국 도멘이 입 주했을 때 우리 회사에 주차공간이 10대가 배정됐다. 그런데 우리 회사차는 4대뿐이었다. 그래서 6대 분량의 주차공간은 돌려줄 테니 그만큼 관리비를 싸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주차관리인이 말하길 벌써 나머지를 우리 회사사원들이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지점장 허 가도 받지 않고 누가 그렇게 쓰고 있다는 말이냐. 고 물으니 관리인은 우물우물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우리 회사 직원들 가운데 누군가가 재빨리 주차장 공간을 잡아놓았는지도 모 른다. 결국은 6대 주차장 공간을 돌려주고 관리비를 돌려받았다. 한국적 정서로 보면 야박하게 들 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그런 식으로 한다. 우리만이 아니다. 미쓰비시, 미쓰이 다 그렇게 한 다. 그 회사들도 직원이 몇천 명이 되지만 도쿄에 있는 일본 본사에서도 직원들이 사용할 수 있 는 주차공간은 회장, 사장 또는 부사장까지 해서 기껏해야 두세 대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기업은 지나칠 정도로 인심이 후하다. 지금은 IMF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겠지만 예전에 는 회사에서 개인들 주차비와 교통비 보조로 기름값이 나오지 않았는가? 일본도 한국처럼, 아니 한국보다 차를 가지고 있는 인구가 더 많겠지만 개인의 차량유지비를 보조해주지는 않는다. 일본 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일이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나홀로 차량도 없고 차를 가지고 있어도 운전 을 하는 경우는 주말이 아니면 아주 드물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보다 일본이 후진국이 되는 것인가?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국기업들은 채무가 많다. IMF로 인해 늘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30대 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이 97년말 현재 자기 자본의 518.9퍼센트나 된다. 생각해보면 직원들 주차비나 기름값을 회사가 빚을 내서 주어왔다는 얘기가 되는 것 아닌가? 일본에는 카풀 도 없다. 다들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데 카풀이 필요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물론 일본은 여러 가 지로 대중교통 수단을 발전시켜놓고 있다. 지하철만 해도 특급이 있어서 예를 들면 수원에서 시 청까지 두 군데만 서고 논스톱으로 달리는 식이다. 한국수준에서 그런 기술이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직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대중 교통체계 의 문제점을 말하기 전에 한국인 개인들의 의식변화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왜 한국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식당이 없을까? 한국 생활이 오래된 나는 못 먹는 한국음식이 없다. 맵든 짜든 가리지 않으며, 아주 좋아한다.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에 두고 한국에서 혼자 생활하는 나는 가끔 혼자 된장찌개를 끓여 먹기도 한다. 나는 일본에 돌아가서도 한국음식을 먹는 경우가 많다. 대개는 본사에 볼일이 있어서 돌아 가게 되는데 그때는 몇 사람이 어울려서 한국식당을 가게 된다. 한국에 있는 한국사람들은 잘 모 르겠지만 일본에서는 한국 요리가 인기다. 동경에 가면 거리마다 한두 군데씩은 한국요리집이 있 을 정도고 텔레비전에서는 한국요리를 만드는 프로를 방송하기도 한다. 건강식품이고 맛도 좋다 고 해서 기무치 가 인기를 끌고 있어 한국사람이 나와 김치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다. 한국에는 여러 가지 김치가 있는데 전라도식은 어떻고 경상도식은 어떻고 백김치는 어떻고... 이렇게 가르쳐 준다. 일본 가정집에서는 한국식 부침개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갈비, 불고기, 곱창전공, 김치 같 은 것들은 일본에서도 유명한 음식들이다. 그런데 내가 일본에서 갈비를 먹으러 갈 경우 일본사 람들이 하는 한국음식점에는 절대로 안 간다. 왜냐하면 일본사람이 하는 갈비집은 맛이 없기 때 문이다. 한국에서 먹는 갈비맛이 안 난다. 마늘이나 고춧가루는 한국것이 제맛이다. 한국사람들이 하는 갈비집에서 느낄 수 있는 갈비집 분위기도 느낄 수 없다. 아마도 한국인 재일교포들이 많아 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한국사람이 하는 갈비집을 찾는데 고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국사람이 하는 한국음식점이 일본에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한국에서 일식을 먹는 경우는 대개 일본 에서 비즈니스 관계로 사람들이 왔을 때다. 그런데 이상한 건 왜 한국에는 일본인들이 하는 식당 이 거의 없냐 는 것이다. 요즘 일본문화 개방 문제를 많이 얘기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보면 일본 사람이 한국에서 일본식당을 많이 만들 수 있게 하는 문제도 아주 중요하다. 일본 텔레비전에 한 국사람이 나와서 한국김치 담그는 법을 강의하는 것, 그게 바로 한국문화가 일본으로 들어오는 것 아닌가? 거꾸로 일본음식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도 문화교류가 되는 것 아닌가? 물론 한국에 일식집은 많다. 일본에 한국음식점이 많은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일본에 가서 일본 인이 하는 한국음식점에 가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는 일식집엘 가지 않는다. 한국 의 일식집은 일본인이 주인인 경우가 거의 없다. 그리고 주인은 아니더라도 주방장이 일본사람인 경우도 호텔 일식집 이외에는 거의 구경할 수 없다. 한국사람이 하는 일식집은 진짜 일식집과는 맛이 완전히 다르다. 물론 모양이나 스타일은 일본식이지만 맛이나 분위기, 그 내용은 진짜 일식 집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국적 불명이다. 그러니까 한국사람이 사시미(회)를 먹었다, 스시(초밥)을 먹었다 해도 진짜를 먹어본 건 아닌 셈이다. 참치만 해도 냉동돼서 오는 것이니까 재료와 냉동까 지는 같을 수 있겠지만 언 참치를 녹이는 해동과정이나 그 참치에 칼이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는 데서 오는 미묘한 맛의 차이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나 다 알겠지만 미각이라는 게 얼 마나 예민한가. 그리고 가격도 너무나 비싸다. 일본 음식이 그렇게 비싼 것만도 아닌데 말이다. 일본음식도 업소마다 메뉴도 다르고 싼 것도 많은데 일식이라고 무조건 비싸게 받는 업자가 이상 한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본요리라는 건 사시미, 스시 아니면 스키야키, 덴뿌라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이라고 해서 매일 이런 음식을 먹는 건 아니다. 일본사람들이 평상시 에 먹는 음식을 먹어보는 경험도 중요하지 않는가?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나한테 갈비나 불 고기를 일주일에 몇 번이나 먹느냐고 묻는다. 한국사람들로 매일 갈비나 불고기를 먹는 건 아니 지 않는가. 하여튼 난 그런 이유들로 해서 한국사람이 하는 일식집은 안 간다. 나는 일본에서 사 람들이 왔을 땐 그런데 갈바엔 불고기집을 가자 그런다. 그건 제맛이날까. 실제로 일본에서 손님 이 왔을 때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일식집에 갔다가 나중에 불평을 들은 적도 많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 때문에 일주일 내내 갈비, 불고기만을 번갈아 먹은 적도 여러 번이다. 한국에서 고기는 다 양한 메뉴, 다양한 조리법을 가지고 있다. 그걸 보면 한국에서 고기를 먹은 역사가 길다는 것, 음 식문화의 깊이나 다양성 같은 걸 느끼게 된다. 물론 생선의 경우는 일본이 훨씬 다양하다. 이게 바로 문화의 차이이고, 이런 것들이 오고가는 것이 문화교류고 개방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생각 해보면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식당만 없는 게 아니라 독일식당, 이태리식당, 러시아식당 다 그런 것 같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한국의 음식문화가 대단히 폐쇄적이 라는 느낌을 준다. 독신생활을 하는 내가 세탁물을 맡기러 자주 가는 곳이 조선호텔이다. 그곳에 있는 주방장들이 프랑스식, 이태리식, 독일식으로 고향식 소시지를 만들어 판 적이 있었다. 인기 가 좋았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이게 문제가 됐다. 보건복지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홈메이드 소시지를 만들어서 파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고향식 소시지가 금지되었다. 요즘은 다시 괜찮다고 하긴 하는 데 당시에는 소시지 업체가 보건복지부에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고 한다. 그 소시지는 결국 외국사람이 와서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자기네들 소시지 를 가르쳐주는 기회고 또 문화교류가 되는 것 아니었을까. 이런 걸 보면 외국인들은 무슨 생각이 들까? 아니 일본사람이 일식집 하나 제대로 하기 힘든 나란데 어떻게 가서 장사를 하고 공장을 짓지? 일단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같은 데는 일본식당이 많다. 그건 들어가기가 그만큼 쉽다는 거고 공장도 마찬가지 문제가 된다. 한국경제는 볼륨도 커져 있고 글 로벌화되어 있으니 이제 한국이 무슨 북한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자면 외국돈이 많이 들어와야 한다. 지금 정부도 나아가려는 방향이 그러하고 그러자면 이런 기초적인 문제에서 부터 받아들일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내가 즐겁게 일본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는 일식집이 늘어나도록 해달라. 이 작은 일에 대한민국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 호탄이 될지도 모른다. 장관님 장관님, 문화관광부 장관님 한국 텔레비전 가운데 내가 가장 즐겨보는 프로가 바로 9시 뉴스 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시간 에 문화관광부 장관님이 나오셔서 일본영화를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왜 그런 뉴스를 장관이 직접 나와서 발표를 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더구나 국제영화 제에서 수상한 작품들부터 우선적으로 수입을 허가해준다는 단서를 덧붙인데 대해서는 더더욱 이 해가 되지 않았다. 일본영화 가운데 영화상 받은 작품이 과연 몇 개나 있을까? 장사꾼인 내가 문 화를 잘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아마 몇 개 없을 것이다. 장관 발표로도 열 개 조금 넘는 것 같은 데... 나는 그 뉴스를 보면서, 열 개 남짓밖에 안 되는 거라면 이미 큰 영화사들이 다 수입선을 잡 아 놓았을 것이고 그러면 영화 개방을 한다고 했을 때 이익을 볼 사람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 닐까? 개방 발표 이전에도 이미 일부 영화수입업자나 대기업이 일본영화 사재기에 나섰다는 보도 가 있었다. 내 귀에는 장관이 발표하는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있겠지만 뒤엣 수군수군대 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영화상 받은 작품이 얼마 안되니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그렇게 되 면 영화수입가만 높아지는 것 아닐까? 실제로 일본 영화 중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러브레터 라는 영화는 벌써 수입 가격이 열 배 이상 올랐다고 한다. 일본 NHK 방송을 보면 김연자라는 한 국가수가 자주 나오는데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느낌을 주는 가수이다. 하지만 그 가수가 활동할 때 일본정부에서 김씨 성 가진 가수 만 노래시켜라. 또는 나이가 40대 이상 된 여자 가수만 방송에 나올 수 있다. 이래서 된 거는 아니지 않은가? 김연자라는 가수가 일본사람들이 좋아하게끔 일본말로 엔카를 아주 잘 부르니까 인기가 있어서 나오는 것 아닌가? 조용필이 일본방송에 나온 것도 그렇다. 일본정부에서 나서서 한 일이 아니다. 정부가 문화에 대해서도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이런 식이면 차라리 안 하 느니만 못한 게 아닌가? 상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작품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정부가 일본문화를 개방할 때 이런저런 제한을 풀고 다 들어와라 하면 3개월이나 6개월 정도 한국의 모 든 도시들에 다 들어올 것이다. 당분간 일본영화제 특집 기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막혔던게 풀렸으니 특수가 있을 테니까. 일본 영화에는 포르노도 저질 만화도 있고 하니까 더 난리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뭐가 좋고 나쁜지는 한국사람들이 구별하게 되는 것 아닌가? 물론 나 는 한국에서 일본의 저질 문화가 들어오는 걸 걱정하는 목소리도 알고 있고 오히려 그런 것들만 들어와서 활개를 치다가 그러잖아도 저질 문화라고 비난받는 일본문화가 한국인들에게 더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한다. 하지만 한국영화를 심의하는 방식의 기존 제도 로도 그런 영화들을 최소한 여과할 수는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은 예상치 못한 데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람들이 홍콩영화를 좋아하지만 그게 홍콩 내에서 어떻게 평가되고 얼마나 좋아하는지가 한국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부산 지역에 가면 일본 텔레비전을 다 볼 수 있다. 일본 텔레비전은 심야시간이 되면 성인물이 넘쳐난 다. 이런 건 정부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결국은 한 나라의 국민들의 문화수준이 여과를 하고 흡수를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국민들의 여력을 믿지 못한다면 뭘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어떤 일본 영화를 수입할 것인가 하는 데 신경쓴 것보다 한국 영화를 어떻게 일본에 수출할 것인 가 하는 데 더 신경을 쓰는 것이 훨씬 생산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크게 인 기를 끌었던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라는 영화가 있다 그게 일본에 수출되었는데 대중들의 반응이 별로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그 영화가 일본사람들의 구미를 당기지 않아서였을까? 꼭 그 렇게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히려 일본에서 서편제를 수입한 프로덕션이 안 좋았던 게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전 일본에 오싱이라는 탤레비전 드라마가 있었다. 어렵게 자라 성 공한 여자의 이야기였는데 한국에서는 80년대에 그 책이 출판되어 많이 팔린 거로 알고 있다. 그 러나 그 작품은 무슨 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한 작품이 아니다. 그런데도 오싱은 중국이나 동남 아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나는 오싱이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히트를 했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아시아에서 일본사람들과 한국사람들도 통하는 정서가 상당부분 있는 게 아니냐는 점 을 말하려고 하는 거다. 서편제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고 다른 영화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장관님이 나와서 일본영화 수입해서 번 돈의 일부를 일본에 유학 가는 학생들에게 준다든 지, 일본영화에서 나온 수익금이니까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쓴다든가 뭐 이런 건설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무래도 보기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문화 개방이 늦었다는 생각을 조금은 한다. 하지만 일본문화 개방이 늦어서 큰 문제라고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오히려 한 국의 지도자들이 일본에 대해 좀 이중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한국사람들의 대일 감정이 야 역사적 뿌리가 있고 또 한국사람과 일본사람들의 생활방식 차이에서 오는 여러 가지 정서적 차이도 있다. 한국사람들의 적극성을 무례하다고 받아들이는 일본사람도 있고 일본사람들의 남에 대한 배려나 조심스러움을 표리가 부동하다, 쩨쩨하다고 받아들이는 한국사람도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화해 못할 부분도 있다.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과거 일제시대에 가해자와 피해자 로 입장이 달랐던 사람들은 과거의 하나의 문제를 놓고 출발하는 지점이 다른 것이다. 또 정서적 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서로 뒤돌아 서서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 역시 쪽발이들이야. 역시 조센징이야 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게 현재의 솔직한 모습이다. 그러나 서로가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자주 대해야, 아 우리가 이게 문제구나, 저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구나. 아 저 사람들은 좋 을 때는 이렇게 표현하고 싫을 때는 저렇게 표현하는구나 하는 걸 이해하게 된다. 물론 그래도 남 는 문제들은 많을 수밖에 없다. 형제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리고, 부부끼리도 의견이 엇갈리는데 하 물며 나라가 다른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사회에서는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일본을 보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기업의 지도자들이 중요하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대기업의 경우를 보면 처음부터 미국이나 유럽과 거래를 한 곳은 별로 없다 대부분 일본하고 거래를 시작 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많이 배운 것도 사실일 것이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전회장 같은 분의 예 를 굳이 들지 않아도 한국보다 앞서서 산업을 개발하고 세계시장에 뛰어들었던 이웃나라 일본으 로부터 배우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자동차 하고 거래를 하면서 일본에게 많이 배웠다. 미쓰비시는 이런 점에서 좋은 회사다, 배울 게 많다 이런 얘기를 정 회장 님이 일본사람에게야 한적이 있겠지만 자기 입으로 한국사람들에게 얘기한 적은 없지 않나? 실제 로 지도자들은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배우면서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일반 국민들이 갖고 있는 반일감정을 거스르는 언행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 지도자들만 배우고 공 부해야 하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공부해야 발전이 빠른 법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일본 문화 개방이 늦어진 이유는 반일감정 때문이라기보다 지도자들이 그럴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더 빨리 배우는 걸 가로막고 있는 정서 적, 문화적 장벽을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부셔버렸어야 한다는 생각이고 그 점에서 일본문화 개방 이 좀 늦어진 것이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한국인들의 적극성과 능력을 수십 년 동안 보아 왔다. 내 눈 앞에서 황폐한 땅에 세계 제1의 기업이 탄생하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진행되어 온 걸 목격한 사람이다. 일본문화를 개방하면 일본의 저급문화가 한국을 휩 쓸 것이라 고 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런 말 그대로 한 때 휩쓸었다가도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말 것 이다. 그 지나간 자리에 배울 건 배우고 버릴 건 버리는 합리적인 태도가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 다. 증류수는 먹을 수 없는 물이다. 어떻게 순수하게 좋은 것만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뒤섞이게 마련이다. 김포공항에서 느끼는 것들 지난 6월 하순에 업무차 일본에 일시 귀국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김포공항에서 느꼈던 것이 있다. 30년 가까이 공항을 오가면서도 왜 이에야 그런 느낌을 갖게 된 건지, 평소에도 느꼈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친 건지는 모르겠다. 오후 3시에 도착한 그 날 김포공항은 그다지 혼 잡하지는 않았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도착 후에는 입국심사를 받게 되어 순번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김포공항의 경우는 입국심사 창구가 아홉 군데가 있고 그 중에서 한 군데는 외교 관이나 항공기 승무원용으로 되어 있다. 나머지 여덟 군데 가운데 내국인용이 네 군데인데 이게 내가 보기에는 불합리하다. 경기가 나빠졌다곤 하지만 한국을 찾는 외국인은 많다. 당일에도 외국 인용으로 남아 있는 네 군데 입국심사 창구는 길게 줄이 이어져 있었다. 내국인은 귀국증명 스탬 프를 찍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외국인에 비교해서 걸리는 시간이 짧다. 그러나 웬만큼 많아도 빨리빨리 통과가 된다. 그런데 외국인의 경우는 언어도 안 통하고 입국카드를 작성하는 법에도 서툴다보니 심사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내국인 입국수속이 끝나면 그 창 구들도 외국인 입국수속 창구로 바뀌겠지만 아예 처음부터 내국인으로 세 군데 외국인용으로 다 섯 군데 정도로 배분하면 어떨까.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호텔에서 숙박을 하게 될 것이다. 즉 한국에서 돈을 쓸 사람이라는 얘기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도착해서 최 초로 한국인과 접촉하게 되는 곳이 공항의 입국심사 창구다. 최초의 인상이 한국에 대한 인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입국수속 담당자들에게는 매일 반복하는 일이다보 니 아무런 느낌이 없겠지만 처음 공항을 찾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할 수도 있는 일이 아 니겠는가. 외국인을 배려하지 않는 나라라는 인상이 들게 된다. 입국수속 담당자들도 보면 무표정 한 얼굴로 일을 한다. 창구에 처음 온 외국인에게 어서 오십시오 라고 인사를 하고 여권을 보는 정도의 여유는 있으면 좋지 않을까? 김포공항에는 두 개의 청사가 있는데 내가 일본을 왕래할 때 이용하는 항공편은 거의 항상 대한항공이므로 제2청사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국제선 1청사는 어 떤지 모르겠다. 2청사의 경우를 유추해 보면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일본을 왕래할 때 일본항공사나 미국항공사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대한항공을 이용하는 이유는 무슨 규정이 있다기보다는 항공료가 비교적 싸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싼 것은 아니다. 하 지만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면서 한국에서 돈을 버는데 굳이 다른 항공사를 이용할 필요가 있 겠나 하는 생각에서 30년 가까이 대한항공을 이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충실한 고객이니 이런 요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입국심사를 마 치고 화물 검사를 하게 되는데 검사대 앞에서 길게 열을 지어 대기하게 된다. 보통 두 명의 담당 자가 두 군데에서 우선 세관 신고서의 내용을 보고 검사대로 갈 사람과 검사 없이 입국할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데 두명이 하다보니 시간이 좀 걸린다. 그렇다고 다른 담당자가 없느냐 하면 그건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날도 대여섯 명의 직원들이 검사대 근처에 서 있었다. 특별히 하는 일 없 이 잡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친절하게 입국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검사대로 향하기 전에 사전 에 체크를 하는 모양인데 이게 오히려 역효과로 시간만 더 잡아먹는다. 분류를 하는 것이라면 손 짐만 가진 사람과 짐을 가진 사람을 별도로 분류하면 꽤 빨리 끝낼 수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 되고 사람 수도 두 명이 하는 게 아니라 특별히 하는 일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투입해서 하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나는 별로 유창하지는 않지만 한국말로 입국 승객들이 길게 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명이서 정리할 게 아니라 사람을 증원시켜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 랬더니 그 사람도 납득이 가는 듯 알았습니다.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말을 하자마자 그 자리를 떠나 출구로 향했기 때문에 관계자가증원 되고 승객 줄이 여러 줄로 늘어났는지는 확 인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뒤에 후쿠오카에 일이 있어 귀국길에 다시 한 번 2청 사를 통과하게 되었다. 보니까 화물 검사대 앞의 직원 수는 두 명에서 네 명으로 증원되었으나 입국심사는 예전과 같이 내국인이 네 군데, 외국인이 네 군데 그대로였다. 입국심사를 하기 위해 컴퓨터에 입력하느라 내국인과 외국인의 창구를 나눌 필요가 있는지 어떤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이런 것만으로는 고치지 않는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할 마음만 있으면 되는 일 아닐까? 이런 것까지 대통령에게 얘기하면 좀 그렇지만 나는 대통령이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우리들과 같이 똑 같은 순서로 입국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랫동안 고생을 했지만 아무래도 VIP로서 출입국을 했었기 때문에 나 같은 경험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변하고 공무원 도 상층부는 변하는데 국민과 접촉하는 곳은 변하지 않고 있다. 신정부 발족 후 1년이 가까워지 는데 국민들은 뭐가 달라졌나 하고 체념하는 듯한 기분도 드는데 이것은 국민과 직접 만나는 곳 이 변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우선으로 나라의 첫관문인 김포공항의 개혁에 착수하면 어떨까. 하면 됩니다 2 변두리 극장 사장님의 속타는 사연 대한민국은 없다 한동안 현대자동차가 신문과 방송을 연일 가득 채운 적이 있다. 지난 5월 27일 시작된 현대자 동차 파업 사태 때문이었다. 아 이 어려운 때에... 하고 나는 가슴을 졸이는 심정으로 사태의 진 행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부는 낮이나 밤이나 해외투자를 유치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던 때가 아닌가. 외국인들이 정비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던 정리해고가 법으로 정해졌고, 또 현대 자동차 파업의 현안이 정리해고 문제였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도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 심깊게 지켜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난국에 중요한 두 집단 노 와 사 가 왜 무조건 하나 가 되지 못하는지 안타까웠다. 나는 우선 경영진에게 프로 의식은 있는가 물어 보고 싶었다. 현대 가 정리하려고 했던 인원은 8천 명에 달한다. 그러면 8천 명을 자르려면 그들이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회사 사정이 좋아지면 다시 복귀시킬 것인지 이런 문제부터 정정당당하게 밝히 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서 여러분들을 자르지만, 남아 있는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2년, 아니면 3년 안에 정상화시켜 여러분들을 다시 부르겠다. 이런 눈물겨운 호소를 할 수는 없는 것인지. 이런 약속을 할 수 있는 경영자가 사원들의 남은 인생까지도 책임지는 프로 경영자 아닌가. 따지고 보면 매년 수백 명, 수천 명씩 뽑아서 인원을 과다하게 만든 책임은 노동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경영진에게 있다. 일본기업은 아무리 큰 회사라 해도 그렇게 무지막 지하게 사람을 뽑지는 않는다. 경제는 언제든지 어려울 수 있는 법이다. 경기가 좋다고 무조건 사 람을 뽑는 게 아니라 불경기에 대비해 적절한 고용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도 경영자에겐 있는 것 이다. 경기가 좋다고 식당 아줌마들까지 현대 직원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 아닌가? 고용에 거품이 있었다면 경영진에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노조도 마찬가지였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겠지만 기업이 잘돼야 수입이 늘어나고 일자리도 늘어나는 것 아닌가? 기업 경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요구는 현실성이 없는 법이다.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 다. 이번 사태에서 노조가 많이 양보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노조 측에서 선택한 파업의 시 기는 주문량이 많이 밀렸을 때라고 들었다. 물론 노조의 입장에서는 그럴 때 파업을 해야 파업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조의 입장만 아니라 현대자동차라는 회사의 입장 에서 보면 분명히 손해다. 노조는 회사에 속하지 않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을 얘기하자면 대한 민국이라는 국가 전체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손해다. 노조의 이익을 위해 국가 이익은 논외로 쳐 도 되는 것인가? 한국의 노조는 국가 전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경험이 부족한 것 같다. 노조도 국가경영의 한 책임을 맡고 있는 집단이다. IMF라는 국가 전체의 난관 속에서 노조만을 생각하 는 것은 노조의 이미지를 생각해도 장기적으로 손해가 아닐까? 나는 파업이나 투쟁을 하더라도 공장을 돌릴 수는 없었을까 하고 아쉽게 생각한다. 6, 70년대 한국에는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구호 가 있었다. 나 역시 그 구호에 공감을 많이 했고 또 포항에서는 그런 식으로 일하기도 했었다. 한 참 지난 얘기기는 하지만 그때 그런 구호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직도 만흥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의 진행을 보면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아예 노조 가 우리는 투쟁을 하면서도 일한다 는 각오와 자세로 투쟁에 임했다면 어땠을까? 실정 모르는 얘 기일까? 처음에는 회사측에서 그냥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속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 면 과연 회사는 보고만 있을 수 있었을까? 회사보다도 더 책임 있는 노조의 투쟁 자세에 국민들 은 더 지지를 보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노동운동, 특히 현대자동차 같이 큰 노조는 단순한 회사측과의 힘겨루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민적 명분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가 남는다. 올해 노사정의 합의로 그 동안 허용되지 않았던 정리해고가 법으로 허용되었다고 하지만 그 법은 한국 현실에선 전혀 지켜질 수 없는 법이다. 이런 판단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지 키지 않을 법을 무엇하러 만든단 말인가. 정부가 나서서 만든 법도 지키지 않으면 정부의 약속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외국인들은 모두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것 역시 한국의 대외신인도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경우다. 예를 들어 얘기해 보자. 이 런 일이 생기면 한국에 진출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일본 중소기업의 입장에서는 겁이 버럭 날 수 밖에 없다. 20명, 30명밖에 안 되는 직원을 데리고 사업하는 중소기업에서는 그런 식의 파업이 일 어나면 그냥 하루아침에 망하게 된다. 한국에 투자해야겠다고 짐을 꾸렸던 사람들도 짐을 다시 풀어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들 아버님, 어머님, 삼촌, 형들이 고생하면서 싸우고 일해 오 늘의 이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면 후대의 젊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도 젊은 정세영회장의 2세였고 노조위원장도 젊은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항상 위만 보자면 끝이 없다. 현대자동차 파업을 보면서 나는 노동자도 보았고 경영자도 보았지만 그 것보다 앞서 존재하는 좀더 상위의 무엇, 바로 나라, 국가는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경찰병력이 국가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국가의 모습일까. 현대 사태에서 대한민국은 없 었다. 국민들의 의식을 규제하는 국가의 존재가 너무도 한국사람들 의식 속에는 희미하다. 왜 나 라는, 그런 애국심은 월드컵 경기나 한일전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삼성과 현대의 이해 못할 라이벌 의식 삼성과 현대 두 회사 사람들이 만나서 저녁에 술을 먹다가 서로 언쟁을 벌였단다. 현대의 금강 산 유람선하고 박세리의 골프(박세리는 삼성물산이 지원하는 것이니까)하고 어느 것이 더 수익성 이 높은 장사냐 하고. 물론 얘깃거리가 전혀 안 되는 건 아니겠지만 이런 식으로 사사건건 삼성 이 잘했냐, 현대가 잘했냐 하고 얘기할 문제인가? 박세리의 골프는 전국민이 기뻐하고 격려해야 할 경사이고 자랑거리이다. 그런데 이런 걸 하나 놓고도 라이벌 의식으로 부딪치다니... 보지 않아 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야, 촌스럽게 소떼나 몰고 판문점을 넘다니, 판만 벌리지 그게 무슨 돈 되냐? , 뺀질뺀질하게 골프나 해서 돈 벌 생각을 하냐, 오히려 소떼 몰고 가는 게 얼마나 한 국적이냐 임마 아마 친구들 사이라면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을 것이다. 한국의 삼성과 현대의 라이벌 의식은 유명하다. 아마도 그 명성은 국제적일 것이다. 현대와 삼성은 스타일도 다르다. 현 대가 저돌적인 추진력을 갖고 있다면, 삼성은 관리에 능하고 신사적인 느낌을 준다. 평판도 그렇 지만 사람들을 경험해보면 과연 그렇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다. 매출액을 놓고 업계 1위, 2위 경 쟁도 치열한 것 같다. 얼마 전 기아 인수전에서 기아가 현대로 넘어갔을 때 삼성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우리가 졌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제 매출액이나 자산 규모에서 2위로 처지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현대나 삼성에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분명 있을 텐데, 아무리 친한 사이 라도 일단 판이 벌어지면 치열한 경쟁이다. 경쟁뿐이다. 현대나 삼성은 서로 손을 잡아야 하는 일 이 있어도 절대로 손을 잡지 않는다. 아이고 그 친구들하고 할 바엔 차라리 외국기업하고 하자 이런 식이다. 그 덕분에 도멘이 돈을 벌었던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삼성이 물건을 현대에게 사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러면 현대에게 바로사면 될 것을 도멘에게 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서로 는 거래를 직접 안 하겠다는 얘기다. 우리 도멘이야 장사니까 좋은 일이지만 나라 차원으로 봐도 기업 차원으로 봐도 손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충남 서산의 석유화학 단지에 있는 현대와 삼성 석유화학 공장들에서 벌어진 일을 얘기한 적도 있다. 두 회사가 석유 화학 산업의 원료인 원유를 들여오는데, 두 회사에서 필요한 양이 각각 10만 통이었음에도 우리 도멘에서 두 회사의 원유를 25만 톤짜리 유조선에 함께 실어오면 어떻냐고 해도 라이벌 회사라서 안된다고 담당자가 펄쩍 뛰 었다. 물론 최근에는 원료 공동구매에 두회사가 합의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경쟁 좀 그만 하라 고 얘기하고 싶다. 자산 규모가 100조 90조 얘기해도 그게 다 빚인데 자산 규모 자랑이 빚자랑이 지 뭐가 있냐는 거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실제로 쓸 수 있는 돈이 얼마냐 아닐까. 그게 실력 이다. 실제 경영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더 문제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삼성과 현대식의 라이벌 경쟁은 없다. 실제로 어제의 경쟁자가 내일은 손을 잡고 합작을 해서 하나의 회사가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게 경제 현장이다. 그것은 일본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영 원한 라이벌 의식이라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것은 자유로운 발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 과한 것이다. 이런 경쟁의식에서 무슨 합리적인 빅딜이 가능하겠는가? 한국말로 냅둬, 이렇게 살 다 죽을래 인가? 일본기업은 해외로 진출할 때 아무리 경쟁업체라고 해도 손을 잡는다. 프로젝트 가 있으면 미쓰비시, 미쓰이 다 함께 몇 대 몇으로 손을 잡는 것이다. 왜 그러냐? 국내에서는 경 쟁을 한다고 해도 외국에 나가면 같이 협력해야 할 상대라는 것이다. 경쟁자는 국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본 정부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통산성이 개 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주식회사가 성립되는 것이다. 지난 80년 일본에서 중국 석유개발 프 로젝트를 추진할 때 보면, 일본측에서는 일본석유공단을 참가체제 중심으로 일중석유개발주와 성 북석유개발주를 만들었다. 이 두 회사에는 석유관련 13개 회사, 석유정제 관련 17개 회사, 전력 관련 9사 및 열강 8사 등 석유 공단과 관련 민간기업이 공동출자해서 만든 것이다. 결국 이 프로 젝트에 직간접으로 연관되는 기업체들 모두를 효율적으로 조직하여 일본주식회사의 총역량을 효 율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 일본인 것이다. 한국 같으면 각사가 모두 전투적으로 나선다, 따로따로 덤벼드는 한국과 조직화된 일본이 붙으면 승산이 어느 편에 있겠는가. 삼성과 현대가 왜 손을 잡 아야 하느냐, 그건 삼성 때문도 아니고 현대 때문도 아니다. 국가경제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국경 없는 시대로 가는데 나라 안에서도 경계를 지어 놓으면 좋아할 것은 외국 기업들밖 에 없는 것이다. 수 년 전에 한국의 가전제품이 일본에 진출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후로는 침체되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AS때문일 것이다. 일본인들은 가전제품을 구입할 때 애프터서비스나 수리 등의 사후 관리가 용이한가를 중요시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한국의 휴대폰도 모토롤라를 많이 쓰다가 삼성, 엘지로 많이 바뀌었다. 물론 품질이 모토로라에 뒤지지 않으니까 그랬기도 하지만 사실 모토로라 제품이 고장났을 때 AS하는 것 보다도 삼성이나 엘지 가 훨씬 편하니까 그런 것 아닌가? 한국 가전업체들이 일본시장을 파고들려면 가전업체들이 각사 의 판매 루트를 갖고 있으면서도 애프터서비스는 한국산 제품이라면 어느 회사 것이라도 해주는 거점을 공유해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전자 메이커들이 판매와 AS를 각각 따로 따로 갖는 것은 경비가 많이 들어 경쟁력을 약화시킬 테니까. 그런데 어떻게 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삼 성과 현대가 손을 잡았을 때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은 훨씬 배가될 것이다. 그것이 건설이 되었 든 반도체가 되었든 조선이 되었든 마찬가지다. 세상은 넓고 협력할 일은 많다 삼성과 현대만을 얘기했지만 이것은 한국에 있는 회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구매를 할 때도 업계가 서로 정보 교환을 하지 않으니까 서로 싸게 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알아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일본상사는 서로 욕하는 사이일망정 상사끼리 만나서 정보를 교환한다. 직급별로도 만난다. 업계간의 모임도 많다.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기업활동상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모임들이다. 가 끔 만나는 게 아니라 정례화되어 있다. 반도체면 반도체끼리, 업종을 세분해서 그 분야로 들어가 면 또 아래 수준의 업체끼리도 모임이 있다. 정보가 구체적으로 공유된다. 그러다 보면 같은 집안 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러니까 설비 투자를 할 때도 경쟁적으로 마구 일을 벌이는 것 이 아니다. 그래서 무리한 투자는 아예 자체적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정부가 통산성 차 원에서 관여를 한다. 일본기업끼리 싸우지 마라는 차원에서 관여를 한다. 왜? 해외시장으로 나가 면 협력해야 하는 관계고 이미 시장이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로 넓혀진 상태에서 혼자 움직이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 주식회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도 이미 해외 시장이 국내시장보다도 중요한 것이 많지 않은가? 반도체, 조선, 자동차, 철강 모두 해외시 장이 중요하다. 그 생산설비는 국내 수요에만 충당되기에는 너무나 많지 않은가? 한국기업들은 해외로 나가면 한국 주식회사를 만들어야 한다. 삼성하고 현대가 경제연구소 같은 싱크탱크를 같 이 운영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같이 해봤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함께 연구하고 함께 사업을 추 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라이벌 의식 때문에 어려울까? 아무래도 사심 없는 사람이 중간에 끼긴 해야 할 것 같다. 협력은 조금씩 진척되고 있다. 한국말로 시작이 반이니까 더 좋아지겠지. 주식회사 대한민국을 기대해본다. 비행기 좌석을 예약하겠다는 거야, 뭐야? 요즘 나에게는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 내가 전화를 직접 받는다고 책에 썼기 때문일까 여성 독 자들로부터도 전화를 상당히 많이 받았다. 약간은 의외라 내가 조금은 짓궂게 아니, 제 전화번호 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라고 물어 보면, 출판사에 문의해서 알았는데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 다가 용기를 냈다는 대답을 듣곤 했다. 그 가운데에는 자주 전화를 주시는 분들도 더러 있다. 부 산에 산다는 한 주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전화를 한다. 여름이면 덥지않냐, 가을이면 날씨가 선 선해져서 일하기가 편하겠다, 이런 식이다. 그럴 때면 나는 흐뭇해진다. 그렇다고 이분들이 다 일 본말을 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덕분인지 나는 내 한국말 솜씨가 더 좋아졌다는 칭찬도 여러 번 듣게 되었고, 거꾸로 나 때문에 일본말 배우는 데 재미를 붙였다는 독자들의 전화도 종종 받게 되었다. 언젠가 한 번은 대구에서 나하고 나이가 같 다며 찾아오신 손님이 있었다. 사전에 전화도 없이 불쑥 찾아오셨는데, 마침 내가 내근중이라 인 사를 하게 되었다. 그랬는데 그분께서 자신을 독자라고 소개하고는, 내 책을 너무나 잘 읽었다며 자기 고향의 특산물을 나에게 선물하는 것이 아닌가! 노란 복숭아 한 상자. 그게 한국말로 천도복 숭아라고 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하여간 좋은 선물을 주셔서 너무나 고맙게 받고 우리 직 원들 모두 나눠 먹은 유쾌한 경험도 있다. 직원들이 지점장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덕에 맛있는 과일까지 얻어먹었다고 재미있어 했다. 불쑥 이라는 표현이 혹시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 다. 하지만 내가 그런 표현을 한 데에는 사전 약속 없이 불시에 쳐들어와서 불쾌했다는 의미는 결코 담겨 있지 않다. 때로는 이런 생각지도 않았던 만남이 삶에 활력이나 새로운 전기를 불어넣 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게 걸려오는 전화 중에는 일자리를 구하는 전화들도 꽤 있다. 나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했는데 도멘에서 근무할 수 없겠 습니까? , 혹은 도멘에서는 사람 뽑지 않습니까? , 이런 식이다. 이런 경우 나는 열이면 열 우리 는 지금은 직원 채용 계획이 없습니다. 라고 정중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나의 이런 대답을 들으면 전화기 너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 그렇군요 하면서 전화를 바로 끊는다. 이런 전화를 받을 때 면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싱거운 사람아냐? 만일 자기 자신에게 정말 자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절실하게 직장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왜 나한테 직접 찾아오지 않았지 ? 우리 회 사가 지금 당장 직원 채용 계획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설사 지금 계획이 있더라도 그런 식으로 걸려오는 전화에는 일단 계획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게 솔직한 내 심 정이다. 물론 한국회사에서 사전 약속 없이 사장님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렵다는 것 은 나도 알고 있다. 하물며 구직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장님 전화 역시 사장님이 직접 받지 않는다. 그래서 지레 짐작으로 전화만 걸어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직접 전화를 받았다. 그렇다면 불쑥 찾아가더라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못할 까? 전화로 얘기하는 것과 만나서 얼굴을 마주보며 얘기하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십년쯤 되었을까. 내가 거래처를 방문하고 회사에 돌아오니 내 책상위에 이력서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어, 이게 뭐지? 총무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물어 보니 어 떤 젊은 아가시가 지점장님을 만나고 싶다며 왔길래 없다고 했더니 이력서를 내놓으며 나는 이 회사에 취직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안 계시니까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 떻게 보면 맹랑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친구라는 생각 이 들었다. 당시 우리 회사는 직원 채용 계획이 없었지만, 이 정도 자신감과 배짱이라면 얼굴이라 도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화를 해 만났더니 이 친구 아주 야물어 보이는 게 아닌 가. 결국 그 아가씨는 우리 회사에 취직이 되었고,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한 후 대학원에 진학했 다. 아마도 취직해서 진학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려고 했던 듯 싶은데, 우리는 좋은 사람을 쓰게 되어서 좋았고, 그 아가씨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해서 좋았으니 이거야 말로 일거양득. 내게 퇴직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 거라는 거는 독자들의 상사에 맡기겠다. 요즘 경제가 어 렵다. 있는 직원까지 자르는 판이다. 그런데 전화로 직원 채용 계획 있냐고 물어 본다면, 이건 숫 제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격이 아닐까? 한국사람들은 술 마실 때는 아주 활달한 것 같 다. 숫기가 대단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때는 너무나 소심한 것 같다는 느낌 이 든다. 뭐가 부끄러울 게 있을까? 그래서 나는 그런 전화를 받을 때면 내가 꼭 항공사의 직원 이 된 기분이 든다. 여보세요? 거기 도멘항공사죠? 오늘 일본행 비행기편 있습니까? 없다 고요? , 알겠습니다. 완전히 이런 식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구에서 천도복숭아를 가져 오신 독자분처럼 갑자기 불쑥 나타나 나 이런 사람인데 당신들 나 한 번 써 볼 생각 없소? 라며 자신 있게 어프로치하는 천도복숭아 같은 멋진 젊은이를 만나고 싶다는 기대를 해본다. 변두리 극장 사장님의 속타는 사연 서울 변두리에서 극장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극장은 동시 상영, 그러니까 프로 두 개를 하 는 극장이었다. 당연히 간판도 허름하고 의자도 낡아서 구식이었다. 거기에 나오는 프로라야 반포 르노 비슷한 영화들이었다. 그 사람은 그 극장을 몇십 년 동안 하면서 돈도 벌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아들에게 경영을 물려주게 되었다. 아들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아버지와는 달리 대학도 번듯한 데를 나왔다. 그런 젊은이가 보기엔 이 극장이 너무 구식이고 후졌다 새로 경영 을 맡은 아들은 아버지를 설득했다. 새로 투자를 해서 극장을 번듯하게 만들자고 그리고 프로도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자고. 아버지는 지금까지 그럭저럭 꾸려왔는데 뭐 하러 바 꾸냐고 반대를 했지만 아들의 고집에 못 이겨 결국은 극장을 개조했다. 그런데 결과는 망했다. 극 장이 바뀌었으니까 당연히 옛날 동시상영프로를 보던 고객들은 떠나버렸는데 새로 찾아와야 할 손님은 찾아오질 않았다. 그럭저럭 돈이 좀 되는 이 극장은 그럭저럭 돈을 까먹는 극장으로 바뀌 어버린 것이다. 나는 사업이 2세로 넘어간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고 하 는 것이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지금 대부분 2세 경영체제로 옮겨가 있다. 삼성은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신 다음 이건희 회장이 뒤를 잇고 있고 현대도 정주영 회장체제에서 2세 체제로 전환중이 다. 그런데 이 2세 경영체제로의 전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도 많다. 2세들은 창업 주들과는 달리 엘리트 교육을 받고 미국, 일본 유학을 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의 경영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경영 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상 태에서 창업주의 2세이기 때문에 그 큰 기업의 조타수가 그 2세에게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극장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 진로도 2세가 실패한 경우 아닌가? 미국에서 경영학을 배웠다고 해도 회사 경영 경험은 짧다. 기업의 경영은 흥망성쇠 를 겪게 되고 노회한 지혜나 감각도 필요로 된다. 젊은 패기만으로는 힘에 부치는 일이 많게 되 는 법이다. 주위의 아는 친구나 선배들이 건설이 돈 된다고 얘기를 하면 그래? 해보자 하고, 반 도체도 삼성하고 거래를 하면 되니까 해보자. 이런 식으로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관리가 안 된다.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30대 재벌 2세가 건설업을 한다고 할 때 그가 상대하는 하청업 체들은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아무리 경영학을 공부했다고 해도 한국의 공사현장, 업계의 현장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업이 잘되면 요행인 것이다. 왜 소주를 시바 스리갈 같은 세계적 주류로 키울 생각은 못할까? 존 글렌 상원의원이 탑승했다고 유명한 이번 디 스커버리 호에는 일본여성도 한 명 탑승했다. 그것은 일본의 업체들이 스폰서를 했기 때문에 가 능한 일이다. 디스커버리 호에 진로가 협찬을 해서 우주에서 알코올이 인체에 어떤 작용을 하는 지 이런 실험을 해 달라 뭐 이런데 신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닐까? 아마 리더가 이렇게 도전적으로 뛰면 회사에서 술먹는 회식을 안 해도 분위기가 활기차질 것이다.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젊은 재별 2세들끼리 교류도 많을 것이다. 친구를 만나면 너 아직도 소주 하냐 21세기 정보통신 시대 에 아직도 소주만 만드느냐 이런 식의 얘기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위기면 경쟁적으로 돈을 빌려서 이 사업 저 사업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창업주가 그만한 기업이라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그 2세인 자식도 평가를 안해 준 셈이다. 자신이 이룩해 놓은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자신은 경험도 지식도 부족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데는 이 사회의 책임도 크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소주면 소주, 바늘이면 바늘, 이쑤시개면 이쑤시개, 그것 하나를 잘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 풍토에서 젊은 2세들은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도 세계를 생각하 면 시장은 엄청나게 넓다. 당연히 할 일도 많다. 한국에서는 기업체를 2세인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다른 능력 있는 전문 경영인이나 기술자에게 물려준다고 하면 큰 화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게 화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논란 이 된다. 대기업의 경우 일본의 2세들은 주주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주가 지배하는 기업 에서 2세가 사장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옷감장사로 출발, 가장 오래된 재벌그룹 중의 하나인 미쓰이그룹의 경우 미쓰이 가족의 지분은 거의 없어졌고, 후 손들에게 이름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을 뿐이다. 도요타자동차, 혼다자동차, 스즈키 자동차 등은 창업자의 성씨를 따 회사 이름을 지었는데 그 창업자 가족의 주식 지분은 현재 1퍼센트 이하란 다. 일본의 위스키 회사 산토리도 창업자의 이름을 딴 회사지만 그 가족의 주식 지분은 역시 1퍼 센트 미만이다. 은행을 비롯해 여러 기업집단들이 분산 소유하고 있는 형국이다. 미쓰이 물산은 미쓰이 은행 주식 4.99퍼센트, 다이쇼 해상화재 주식 2.99퍼센트, 미쓰이 조선 주식 0.34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미쓰비시 은행은 미쓰비시 상사 주식 4.77퍼센트, 미쓰비시 중공업 주식 3.9퍼센 트, 일본전지 주식 5.07퍼센트를 갖고 있다. 현재의 한국재벌들의 소유구조 같은 것은 일본에서는 45년 이전에 볼 수 있는 체제이다. 물론 일본은 맥아더 사령부가 점령했을 때 재벌을 인위적으로 해체한 점도 있고 해서 한국과 일본을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 사회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기업을 누가 소유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기업이 얼마나 훌륭하게 발전해 고용을 창출하고 좋은 제품으로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고 좋은 수익을 올리느냐가 중요한 일이다. 이런 원칙에서 보았을 때, 2세라고 해서 무조건 대를 이어 소유권과 경영권을 모두 행사는 것이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더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어 경영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에선 아직 이런 얘기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의 경제계는 지금 2세 체제 로 전환중이다. 지금의 경제 난국은 2세 체제로의 전환과정에서 생겨났다. 검증되고 준비된 경영 자들이 기업을 맡아 운영해야 나라가 발전할 것이지만 이 경제 난국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앞선 세대의 신화를 능가할 새로운 경제 지도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설렁탕 집에 가나 한국 대통령이 근무하는 청와대는 참 좋은 곳에 있다. 북악산의 풍경도 풍경이지만 경복궁을 끼고 있어 왠지 왕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뭐 대통령이 나랏님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 로 한국의 대통령이 주는 무게는 대단하다. 그리고 청와대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이발소, 식당, 수영장 뭐 없는 게 없다. 난 이런 재미있는 생각을 해본다. 김대중 대통령은 설렁탕은 한국인이 만든 최고의 음식이다. 는 얘기를 할 정도로 설렁탕을 좋아했다던데. 그러면 자주 가던 설렁탕 집 도 있었을 텐데, 그런 집이 있었다면 대통령은 잘 가던 설렁탕 집을 이제 5년간은 가보지 못하겠 구나. 임기가 끝나면 가겠구나라고... 경호 문제도 있고 뭐, 격 문제도 있을 것이다. 김영삼 전 대 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칼국수를 그렇게 좋아했다면 분명히 잘 가는 칼국수 집이 있었을 것이다. 단골집 말이다. 그런데 그도 임기중에 가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가면 대번에 화제가 될 것이다. 임기 후에도 쉽게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수상은 자기 단골집을 가끔 간다. 뭐 장어덮밥 을 좋아하는 수상이 있으면 그는 하루 업무를 끝내고 그 장어 집으로 간다. 물론 낮에 갈 수도 있다. 일본에는 1백 년 넘은 장어집이 많다. 그 허름한 집에 가서 장어를 먹는다. 한국처럼 수많 은 경호원을 대동하고 요란하게 가지도 않는다. 가서 장어덮밥을 맛있게 먹고는 주인에게 이렇게 인사를 한다. 몇 대째 한 군데서 장어덮밥을 이렇게 맛있게 하다니 대단하시군요. 제 다음 수상 도 또 앞으로 많은 수상들도 이 집 장어덮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주인에게는 최고의 칭찬인 것이다. 주인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상을 배웅한다. 내가 알기로 일본 수상들은 이런 집 들을 적어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일본 수상이라고 매일 고급 일식집에만 다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대통령이 이런 이야기를 그 설렁탕 집 주인에게 했다면 아마 그 설렁탕집 주인은 뭐 대통령이면 다냐, 내가 이걸 평생하고 내 아들까지 이짓을 하라고, 아예 욕을 해라 욕을 이라 고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간 다음에는 아마 사진을 크게 붙이고 대통령이 다녀간 집 하고 광고를 해댈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할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런 걸 즐겼 던 것으로 알고 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한바퀴 돌고 해장국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가게 주 인들은 그런 것을 광고했고 자부심으로 생각했지만 경국 박정희 대통령의 단골집 중 지금까지 남 아 있는 집은 거의 없다고 한다. 맛으로 승부한 게 아니라 별 소용없는 허세를 가지고 나섰기 때 문인 것이다. 아마 장사가 잘되서 값도 올리고 가게도 크게 넓혔다가 석유파동 등 어려운 세파에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일본 장어덮밥 집은 수상이 왔다가도 그걸 자랑으로 내세우고 값 을 올리거나 가게를 확장하지 않는다. 절대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항상 자기 가게를 찾는 손님을 만족시킨다는 자세로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길게는 2백 년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장인정신 은 일본의 전통을 이어오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기술입국의 단초가 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단골 설렁탕 집에도 가고 단골 이발소에도 가는 담 낮은 청와대의 주인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 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정말 보기에 좋을 것이다. 게다가 대를 이은 설렁탕집 주인이 그 다음 다 음 대통령을 손님으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맞는 모습은 더욱 보기 좋을 것이다. 한국은 펀더멘탈이 좋다 한국사람이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다. 한국은 펀더멘탈이 좋다는 말이다. 경제의 기본이 좋다 는 뜻이다. 상황이 어려워지다 보니 이 말은 한국의 희망적인 미래를 얘기하는 것 같아 더 듣기 가 좋아진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결론만 얘기하면 펀더멘탈이 좋다고 보지 않는다. 한국 이 지금 동아시아 나라들보다는 낫다는 말을 칭찬으로 들을 입장은 아닐 것이다. 일본, 미국을 따 라잡겠다고 뛰던 나라가 그런 얘기를 듣고 기분 좋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흔히 펀더멘탈이 좋다고 할 때 기계설비가 좋다는 얘기도 들어 갈 것이다. 물론 한국의 기계설비는 일본에 비해서 도 좋은 것들이 많다. 최근에 투자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설비만으로 따지면 과거에 투자된 일본 에 비해서 좋은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 설비투자에 소요된 자본은 대부분 차입에 의존한 것이 다. 빚내서 산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외부 차입에 의존한 이 설비들이 과연 그 기업의 것인 가? 한국의 것인가? 이렇게 마련된 펀더멘탈을 좋다고 할 수 있는가? 좀더 들어가서 얘기해보면 대기업을 떠받쳐줄 중소기업이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경제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 기업도 뿌리를 튼튼히 내려서 상호관계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도요타는 무수히 많은 부품 부 청업체들의 연합이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가 좋은 회사라는 것은 도요타자동차가 훌륭한 하청업 체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뿌리들이 튼튼하기 때문에 도요타가 뿌리가 튼튼한 회사고, 일본 경제의 뿌리가 튼튼하다는 얘기다. 현대나 대우의 협력업체들이 취약하다는 것은 결국 현대나 대 우가 취약하다, 뿌리가 약하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무슨 펀더멘탈이 좋은가? 한국의 현대건설이 시공하는 건설현장에는 중소 아스콘 업체들이 얼씬도 못한다. 매출액 4조원이 넘는 이 회사가 중 소기업 고유업종 인 아스콘 제조업에 참여, 직접 시공하기 때문이다. 그게 어디 현대만의 경우인 가. 해외에서 수출계약을 맺기로 한 중소업체들은 최종계약을 맺기 전에는 비밀을 지키느라고 불 안에 떤다. 대기업들이 파고 들어와 물량을 뺏아가는 게 불안해서다. 한국은 훌륭한 중소기업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또 한 가지 재벌 기업들이 벌이고 있는 사업 은 많지만 돈을 버는 사업은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몇 년 간 삼성이 활발하게 사업을 벌 인 기반은 삼성 반도체의 막대한 수익이었다. 그러나 삼성반도체를 제외하고 얼마나 많은 기업들 이 타당한 수익을 내는지는 의문이다. 결국 삼성 반도체가 어려워지면 그룹 전체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어떤 기업군이든 주력 사업이 있는 법이지만 주력 사업의 수익에 대한 의존도가 이렇게 높아서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삼성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한국 도 어린이 비만이 문제가 되고 있다. 커다란 몸집. 그러나 그것이 그 어린이의 튼튼한 체력을 뜻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 몸집은 커졌지만 기초 체력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 몸집은 커졌지만 기초 체력은 해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고 걱정 이 많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큰 몸집이 튼튼한 체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한 가지. 나라 전체 의 산업구조나 채산성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주력 수출품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다는 걱정들이 많다. 그것은 한 재벌그룹에서 어느 한두 생산 분야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고, 반면에 다른 분야의 자생력은 취약하다는 지적과 똑같은 문제다. 팔만 지나치게 길다든가, 머리만 지나치게 크 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문제다. 나라의 경제도 사람의 몸과 같아서 균형적인 발전이 필수적이 다. 한국은 인구 5천만에 가까운 큰 나라다. 홍콩같이 어느 한 부분만 특화발전시킬 수는 없는 나 라 아닌가? 외국투자 유치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펀더멘탈이 좋다는 것은 외국 투자가 입자 에서는 투자하기 좋은 나라인가? 그 점 역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몸집이 크다고 오래 사는 것은 아니다. 비만은 성인병의 원인이다. 끊임없이 잔병을 치르며 고생하기 마련이고 장수도 힘들 다. 한국경제는 나이는 30대지만 체력지수는 60대에 이른 사람과 같다. 결국 나는 한국경제의 펀 더멘털이 좋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한국경제를 낙관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지 펀더멘털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펀더멘털을 좋게 만드는 일은 한국이 IMF라는 병을 이겨내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기초적인 체력을 쌓는 일에 비 교할 수 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차근차근 나서는 한국의 펀더멘털을 위해 파이팅 을 외쳐본다. 자존심 때문에 망하는 나라 한국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대단히 강하다.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 나쁠 것은 없다. 좋은 일 이다. 하지만 강한 자존심은 좋은 면도 있지만 나쁜 면도 있다. 자기 발목을 붙잡아 놓는 질곡으 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한국사람들은 우리는 5천 년의 역사를 가진 배달민족이라고 얘기한다. 우수 한 민족성을 자랑한다. 물론 한국은 자랑할 만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자존심이 좀더 나가면 남에 대해서 공격적으로 나간다. 일본이라고 하면 어, 그 쪽발이들. 이렇게 얘기한 다. 그건 좀 문제다. 나는 한국의 리더들은 국민들에게 자존심을 고취하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 강한 자존심으로 국가의 목표도 세우고 국민을 단결시키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밑의 사람들까지 모두가 자존심만을 세운다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도 많다. 일본 쪽발이들 이 렇게 얘기하면 축구 한일전에서는 그 힘으로 이기기도 하겠지만 일본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제대 로 배우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나라가 빠르게 성장하고 발전하는 나라의 국민들은 다들 자존심이 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강한 자존심이 잘 돼야겠다 , 나는 할 수 있다 는 심정으로 되어서 무언가 일을 이루어 내는 원동력이 되는것일 테니까. 일본도 과거 에는 자신들밖에 몰랐다. 그 강한 자존심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대동아전쟁이고 진주만 폭격이었던 것 아닐까?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자존심만으로 다른 나라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세 계무대에 가면 양보할 일도 있다.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있어야 서로간에 대화가 성립한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은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오픈 마인드가 있어야 빠른 속도로 남을 배울 수도 있다. 일본에 대해서든, 대만에 대해서든, 미국에 대해서든 배우려고 한다면 자존 심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옛날 한국의 양비들은 아무리 추워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지 않는 법이어서 세수를 하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서 옷을 다 적셨 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런 식의 자존심은 지극히 비실용적이다. 지나친 자존심은 남들 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평가하는 데 대단히 인색한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에 70년대에 새 마을 운동이 있었다. 그 뒤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 씨가 맡으면서 많은 문제를 야 기시켰고 친여성 조직으로 변질되어 이미지가 좀 안 좋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이 경제개발의 기초가 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식의 긍정적인 평가는 한국 내부에서는 거의 없다. 박태준 회장이 제철소를 제대로 발전시킨 것에 대해서도 또 정주영 회장이나 이병철 회장, 김우중 회장 같은 사람들이 해낸 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너무 인색하다. 그 정도는 특혜만 있으면 우리도 할 수 있다. 는 식이다. 그러나 설사 특혜가 있었다고 해도 누 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남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배우 수가 없다. 배울 것이 분명히 있음 에도 그까짓 것 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혼자 선배들이 해 온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 기 업이 오랫동안 전문가로 근무하지 않는 것도 나는 불필요한 자존심 때문이라 생각한다. 내가 왜 남의 밑에서 일해? 나가가서 내사업을 해야지. 이런 식이다. 그 자존심 때문에 기업도 나라도 발 전하지 못한다. 한국은 엄청난 속도로 변했고 발전해왔다. 그 원동력은 강한 자존심이었을지 모른 다. 그러나 이제 세계무대에 등장한 한국은 자존심만으로는 남들을 상대할 수 없다. 혼자 사는 세 상이 아닌 것이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 제품의 소비자는 한국에만 머물지 않는다. 미국, 일본, 중국, 대만, 유럽, 아프리카, 남미 모두가 한국 제품의 소비자들이다. 그 외국인들이 바로 왕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시장에 파고들 수 있다. 과유불급, 지나 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한국인의 자존심도 과유불급에 속하는 것중의 하나가 아닐까? 은행 유감 한보 사태를 지켜보면서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갔다. 성공여부도 불확실한 공법 으로 제철소를 짓겠다는 발상도 이해가 안 갔다. 수십 억짜리 공사도 아니고 몇 조가 들어가는 공사를 그렇게 불확실한 전제 위에서 추진한다? 한국은 부동산 담보로 대출을 한다. 그런데 담보 설정도 부족해 은행은 막대한 돈을 뜯겼다? 그것도 참 이해가 안 갔다. 가계 대출을 받아 본 일 반 서민들이나 중소기업 하는 사람들로서는 자기들은 그렇게 받기 힘든 대출을 어떻게 저렇게 쉽 게 받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이 개입해서 은행에 압력을 넣어서 대출을 해 줬다? 그것 역시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아니 정치인이 기업 사정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은행은 기업 경영상황을 분석하는 게 전문인 곳이다. 그런 곳에서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돈을 꿔 준다? 그건 데 거의 모든 은행들이 또 거기에 개입되어 있다. 외국에선 그 은행들 이름을 모르나? 다 안다. 그렇게 이름 있는 은행들이 그런 식으로 사업을 하니, 외국 사람들은 아 한국은 다 그런가 보 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한국은 삼류 국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은행들은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은행에 있는 돈은 자기 돈이 아니다. 고객의 돈이다. 국민의 돈이다. 남 의 돈을 그렇게 마음대로 쓰는 은행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 그런 은행들을 망하게 만드는 게 고 객과 기업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객 예탁금이든 무엇이든 보호해 주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그런 은행들을 외국에 내놓는다고 팔릴 리도 없다. 그냥 망하게 만들어서 한국이 한국 돈 으로 수습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직원들 일자리가 걱정이 돼서 그러나? 그러나 외국은행들 이 들어오면 더 무자비할 정도로 직원들은 정리가 될 것이다. 나가게 되는 직원들은 지점의 점포 보증금이라도 빼서 주면 될 일이다. 이거야 금융권을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의 얘기고 사태는 그렇게는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은행 얘기가 나왔으니 외국 상사에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한마디는 해야겠다. 한동안 은행에서 신용장을 개설해 주질 않아서 무역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개설해주기로 하고도 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의 신용만큼이나 기업의 신 용도 중요하다. 국가의 신용이라는 것은 총체적으로는 이런 무역하는 기업들의 신용까지 포함해 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 거래보다도 민간기업들의 외국 거래량이 훨씬 많은 것 아닌가? 신용장 개설이 제대로 도질 않아서 외국하고의 거래에 장애가 생기는 것은 좀 문제다 싶다. 한국 의 은행에서 가장 개선되야 할 점은 조사부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은행 조사부는 회사의 최고 엘리트들이 가는 곳이다. 행장이 될 사람은 반드시 조사부를 거쳐야 한다. 조사부는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시장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시장을 조사한다. 자동차면 자동차, 엔지니어로 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일본 수출 은행에서 한국 프로젝트로 융자를 받게 되면 조사 부가 당연히 한국에 조사를 하러 온다. 이 조사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지 부동산 담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조사부가 이런 기술, 상품으로는 미국 시장에 어림없다 이렇게 판단하면 대출 담당 자가 대출을 추진하겠다고 해도 안 되는 시스템이다. 당연히 조사부는 은행에서도 서열이 높다. 매일매일 거래하는 거래 업체에는 방문을 하지 않지만 10억 대출 업체가 경기가 좋아서 공장 성 비도 늘리고 운전 자금도 필요하니 20억으로 대출을 늘려 달라고 하면 그런 경우에 간다. 업체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자문을 구하기도 하는 곳이 조사부다. 그런데 한국의 은행들은 조사부 기능을 하는 곳은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조사부가 있었다면 한보 사태 같은 것이 일어났을 리도 없다. 아마 은행장 중에 이런 조사부 출신이 있었 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행 직원들은 거래처에 자주 간다. 공장이 잘 돌아 가는지, 원료는 잘 공급되고 제품은 제대로 팔리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은행원들 은 공장에 가는 경우가 별로 없다. 아마 대출받거나 하면 한 번 방문조사를 하는 정도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은행 담당자가 공장 현장에 가면 공장에서 용돈이 궁해서 왔나? 아, 아들이 학교에 들어가나 보군. 뭐 이런 식으로 본다. 새로운 거래처가 생기면 은행측에서는 지점장이 나타나서 식사 모임을 만든다. 한국에서는 돈이 필요한 사람이 식사 모임을 준비하겠지만 일본은 거꾸로다. 요즘은 일본도 경기가 어려워져서 그런 모임이 줄긴 했다고 하지만. 한국이 일류 국가로 발전하 는 데 가장 크게 개선돼야 할 부분이 있다면 아마 금융권이 아닐까 싶다. 재벌의 과다한 차입경 영을 비난하지만 은행이 주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이 바 로 서야 기업이 바로 선다. 모든 사업은 돈이 있어야 하는 가능한 것이고 가야 할 곳에 돈이 제 대로 가게 만드는 일 그것은 바로 은행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대통령이 돈을 꿔 달라고 하나 한국은 해외자금 유치에 여념이 없다. 대통령이 나서고 장관이 나선다. 그러나 난 대통령이 돈 꾸는 데 나서는 나라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대통령이 움직이 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나선다고 꼭 일이 잘되라는 법이 있나? 작년 IMF가 올 때 당 시 구제금융 받은 액수는 250억 달러였다. 그러나 그 돈이 국제사회에서 그렇게 큰 돈이 아니었 다. 2, 30억 달러만 준비하면 되는데 무언가 고리가 끊어지니까 상황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물 론 잠깐의 외화수급 문제로 IMF 사태가 온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미국, 일본에 가 서 도와달라고 했지만 문제는 파이프라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재무부 장관을 만난다고 그래 어 려우니까 얼마든지 쓰라 며 돈을 꿔줄 리가 없는 것이다. 잠깐의 공식적인 만남으로 오랜 시간에 걸친 교류와 신뢰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 어려울 때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일본회사에서는 선임 사 장이 나가면 그 사람을 회장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형식적으로만 모시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아무 연관없이 사업을 해나가는 걸 무서워하기까지 한다. 관계를 여러 기업들이 그런 식으로 운 영되지는 않는다. 그냥 라인이 바뀌면 사람이 바뀌고 과거와 별관계 없이 사업을 해 나간다. 그러 나 그 대표는 회사를 대표해 관계를 맺고 활동을 해 온 것이다. 그 사람이 맺었던 관계는 소중한 회사 자산이다. 선임 장관도 소중한 국가 자산이다. 선임자들을 잘 대우할 때 그 사람이 맺은 관 계들이 제대로 이어져 오는 것이다. 한국은 그런 점이 부족하다. 한국이 미국과 일본을 하루이틀 상대해온 것이 아닌데 그 소중한 인맥을 그냥 방치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로부터 김영삼 대통령 시절을 거치면서 지금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 이르기까지 정권이 바뀌면서 인맥이 변했다. 과거로부터 이어가야 할 인맥도 많을 것이다. 그런 점들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한보사건이 터졌을 때 일본업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있다. 박 태준 회장이 쫓겨나지만 않았더라도 한보철강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 이라는 얘기였다. 말 도 많고 탈도 많았던 코렉스 공법. 한보는 이 코렉스 공법을 대규모로 상용화하겠다는 계획이었 는데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직 어디서도 확인되지 않은 위험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것이 위 험한 시도인지, 시장성이 있는지를 검토할 사람들이 집권층에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과거와 단절 해야 할 것이 있긴 하지만 이어 가야 할 것도 있다. 정치인으로서의 박태준은 논외로 하자. 그러 나 경영인으로서의 박태준의 경험이나 또 대일 창구로서의 박태준의 경험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이어가야 할 자산이다. 그것은 그런 경험을 한 본인도 의식해야 할 점이지만 새로운 인맥으로 형 성되는 집권층도 노력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그런 박태준 같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 겠는가? 그런데 한국은 외국에 가서 로비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절 실히 필요하다. 지금 70년대 박동선 사건을 일으켰던 것 같은 로비를 하자는 건 아니지 않는가? 로비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일이다. 지금 일보, 미국 경제계에 누가 꾸준히 접촉을 하고 있는가? 장관만 한 번 보낸다고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공식 회의장에는 나타나지 않아도 일하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얼마 전 일본수출입은행에서 40억 달러를 차입하기로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장관이 공식 요청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꾸준히 관계를 맺고 일해 온 파이프라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을 보면 한국은 너 무 스스로를 과신한 것 같다. 경제력이 있으니까 우리가 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것 아닐까.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것도 그런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이 되어 갈 수록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모 두 잘라버린 것이다. 그래서 파이프라인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효과도 불확실한 상태에서 대통 령이 나서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한국 장관들은 권위의식이 강하다. 일본에 간 장관이 일본의 반 도체 공장이나 자동차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는가. 나는 별로 없다고 알고 있다. 장관은 한 나라 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데 너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오히려 장관은 국민을 대표해서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일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다. 또 주재원들을 활용하라는 것 또 한 누누히 강조하는 것이다. 현재 일본에 있는 1만 명의 주재원들은 점조직으로 흩어져 있다. 이 들을 모아야 한다. 그래서 수많은 지일파의 파이프라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만나는 일 본 과장이 나중에 경제계의 대표가 되거나 일반 공무원이 장관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미국 도 마찬가지 유럽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초가 하나씩 쌓일 때 한국은 외교의 묘수를 둘 밑천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현재의 장관이 많은 일을 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장관이 꾸준히 관계를 맺어 놓으면 나중에는 또다른 파이프라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은 젊은 나라다. 활 력 있는 나라다.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고 또 기존의 사람들이 물러간다. 정치도 변한다. 그러나 주식회사 대한민국을 생각한다면 정견이 어떠하든 국익을 위해 과거의 관계들을 온전하게 이어가 려는 노력을 서로 해야 할 것 같다. 나라도 마찬가지고 기업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 좀 도와줍시다. 도멘은 약속어음을 발행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우리가 약속어음을 발행하면 이상하게 생각한 다. 금융기관 쪽에서 도멘 요새 무슨 문제 있는가 하는 식으로 얘기를 한다. 우리는 거래하면서 다른 업체들의 약속어음을 받기는 한다. 이것은 도멘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대기업들 이 하청 업체한테는 무조건 당좌수표를 준다. 그것은 현금과 같으니까. 대신 받을 때는 어음을 받 기도 한다. 그러니까 대기업들이 그만큼 중소기업에게 혜택을 주고 도와주는 셈이다. 그런데 한국 은 오히려 거꾸로인 것 같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납품을 할 때는 4개월, 5개월짜리 어음을 받는 데 부품이나 자재를 사려면 현금이나 1개월, 2개월짜리 어음을 끊어 줘야 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 업이 힘이 세니까 중소기업은 제품은 이미 만들어 놓았고 생산라인은 돌아가야 하니 어쩔 수 없 이 그런 어음을 받아 할인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할인에 드는 금융 비용은 중소기업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돌아간다. 한국은 왜 그런 식으로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아무래도 사정이 좋은 것은 중소기업, 하청업체가 아니라 대기업이지 않은가? 일본도 60년대에는 어음 결제가 70퍼센트에 달 했다. 그러나 현재는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재무구조가 좋아지면서 그런 점 도 있겠지만 정책적으로 의식적으로 중소기업을 도와주려는 마인드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중소기 업 사장님들은 항상 돈 때문에 쩔쩔맨다. 몇 년 전인가 텔레비전에서 밤에 중소기업 문제를 토론 하는 걸 보았는데 거기에 중소기업 관련 단체 사람이 나와서 하는 말이 지금 우리가 중소기업 문제를 토론하는 이 시간에도 중소기업 하시는 분들 중에는 많은분들이 돈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 니고 계실 거다... 사장이 엔지니어 출신이면 생산현장에서 생산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대부분의 중소기업 사장님들은 돈 문제 때문에 생산은 신경 못 쓰고 있다. 이러니 회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는 것이다. 한국 내에서도 중소기업의 자금 문제는 심각한 모양이다. 벤처기업 얘기가 많지 만 벤처기업들이 주문을 받아 놓고도 자금문제 때문에 도산하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필요한 자 금을 조달해주는 은행이다. 한국에서 중소기업 하는 분들이 정부에서 중소기업 지원책을 마련했 다고 해서 그 은행에 쫓아가 보면 은행에서는 담당자들이 정부가 무슨 지원책을 마련했어도 돈 은 우리 은행에서 주는 거니까, 대출을 할 건지 말 건지는 우리가 판단한다. 부동산 담보는 있느 냐?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이래서 무슨 기금을 만들어 놓아도 실제로 대출이 나가는 건 미미 하다. 부도기업이 많아져 대출을 오히려 신중하게 처리하다 보니 은행에는 돈이 넘쳐 난다는 것 이다. 기업은 돈이 없어서 죽어가고... 그러니 중소기업에게 정부 대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 히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해서 담보가격이 낮아졌으니 있던 대출을 갚으라고 한다. 이러니 한국에 서 새로 사업을 하려면 이미 부동산이든 뭐든 자산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사업을 시작하기도 힘 들고 시작했다고 해도 자금문제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제대로 일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 되어버 리는 것이다. 일본만 해도 은행에서 부동산 담보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 담보가 없어 도 대출이 가능한 경우는 많다. 이미 제품을 팔아서 외상매출채권이 발생했으면 그것을 담보로 돈을 꿀 수도 있다. 그러니까 중소기업이 담보가 없다고 해도 그 회사가 가진 기술력을 평가해서 잠재력을 평가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 벤처기업이 뛰어난 기술력으로 시장을 개척해 주문을 받아 놓고도 도산해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은행이 해야 할 일이 이런 것 아닌가 생각 한다. 중소기업을 살리자 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정부와 대기업과 은행이 머리를 맞대고 좋은 아 이디어를 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경영 체질을 개선할 수 있고 그래야 정말 기업하는 분들이 맘놓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 도와주는 나라 좋은 나라다. IMF와 한국 언론 한때 한국은 언론공화국 이라는 말이 있었다. 언론의 힘이 강하다는 얘기다. 민주사회에서 언론 의 힘이 강한 것은 당연하다. 언론은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에 이어 제4의 권부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언론공화국이라 할 때는 제4의 권부가 아니라 가장 힘이 센 권부라는 느낌을 주 었기 때문에 나온 얘기인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막강한 언론의 힘이 좀 약화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IMF가 오니까 신문사도 어디가 망할지 모른다고 하고 현대나 한화 같은 재벌그룹 들도 일 년에 몇천억 씩 생기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언론사 경영에서 손을 떼는 일이 생겼고 다른 언론사들도 무리한 출혈경쟁에서 생긴 빚을 감당하느라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일 큰 문제는 신뢰도나 깊이에 국민들이 회의를 느낀 때문은 아닐까 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IMF 재협상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김대중 후보는 당선되면 IMF와 재협상을 벌이겠 다고 공약을 발표했다. 그때는 학생들이 IMF 재협상을 가지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던 때였다. 집 권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는 IMF 재협상은 인기발언이라며 김대중 후보를 공격했 다. 나는 그때 참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 김대중 후보나 이회창 후보는 대통령 후보니까 여 러 가지 주장을 할 수 있을 데고 또 그것이 바로 정책 토론 아닌가? 누가 옳건 누가 그르건 둘이 쟁점을 놓고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언론의 태도였다. 언론에서는 IMF 재협상 운운은 국가의 신용도를 떨어뜨린다, 현실성이 없다고 김대중 후보의 공약을 비판하고 있 었다. 물론 언론도 주장을 펼 수는 있지만 좀 일방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 즉 청와대에서는 지금 상황이 어려워져서 돈을 꾸는데 무슨 딴지 거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얘 기가 흘러나온 것 같다. 물론 당시 학생들의 주자처럼 즉각 재협상을 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 다. 김대중 후보가 그때 그런 식의 무모한 재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잘못이다. 하지만 당시의 토론 내용을 보면 그렇게 무리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 정부는 측이 당선되었 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정도 자율적인 경제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것들 을 되찾아 온 것 같다. IMF가 주장하는 해법은 결국은 유럽식, 미국식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은 당연한 상식이지만 유럽, 미국네에서도 IMF의 활동 방식과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이견이 있 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아시아라고 해도 나라마다 경제 개발, 경제운영 스타일이 천차만별이 다. 수요 감소로 기업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한국 같은 나라에 무조건적인 긴축을 강요한 것도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은행들이 방만한 운영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BIS 비 율 8퍼센트 요구도 문제다. 가뜩이나 어려운 조건에서 정상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기업활동까지 붕괴시키는 것이다. 사실 BIS 비율 8퍼센트는 지난 88년 일본에 밀리던 미국측에서 일본을 견제 하기 위해 올려놓은 기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당시 일본은 한국의 IMF와 같은 극심 한 어려움이 없었고 방만한 운영으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기 대문에 주식이나 전환 사 채를 통해 그 기준을 맞추었고 결국 대출 축소나 환수를 통해 일본계 기업의 활동을 위축시키려 던 미국측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비켜나갈 수 있었던 사정은 다르다. 이처럼 경제상황이 나라마다 다른 것을 놓고 IMF의 단일한 잣대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지금은 IMF에서도 많은 정책 수정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 때 그렇게 IMF재협상이 말도 안 되는 인기정책이라고 비난했던 언론은 정확했나? 별로 정확한 진단은 해주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언론인들도 한 번 일 본과의 격차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여러 군데서 강연을 해보았지만 언 론관련단체나 회사에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나야 사실 장사꾼에 불과하니까 별문제지만 사태의 진행과 언론의 보도가 별로 맞아 들어가지 않는 걸 보면 한국언론은 결국 공부가 모자란 게 아닌가 싶다. 나는 한국의 문제를 지도자들의 문제라고 주장했는데 거기에는 언론의 문제도 포함된다. 사실 IMF가 오기 전에 어느 언론사도 한국경제의 상황이 이토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거론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언론은 사회의 목탁 이라고 하듯이 이 사회 가 가는 방향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진단을 해주어야 하는데 삼성자동차 같은 상식적으로 봐도 불합리한 문제를 문제라고 제대로 거론한 언론도 별로 없다. 일본에서 대표적인 신문을 들면 니 온케이자이, 아사히, 마이니찌 세 개를 든다. 다른 신문들도 있지만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는 비교 가 안 된다. 이들 신문은 내각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고 있다. 언론이 정치를 함께 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런데 이 신문은 각각 입장이 다르다. 물론 각각의 신문의 주장이 틀렸어도 거의 사과를 하지 않는다. 이 점은 한국의 신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걸 보면 언론의 속성이 그러니 한국 언론만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좀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언론은 다른 언론사의 주장 이 틀렸을 때는 다른 신문에서 맹렬하게 비판을 한다. 그래서 스스로는 사과를 하지 않더라도 구 독률도 떨어지고 직원 이동까지 생겨 결국 심판을 받는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을 보면 서로 주장이 똑같으니까 설사 어느 한 곳이 틀린 주장을 했어도 그 틀린 주장이 틀렸다고 판명이 나도 비판하는 언론이 없다. 그 점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견제 하는 일도 없으니 한국의 언론은 견제받는 일이 없다. 여러 다양한 목소리가 충돌하고 조화를 이 루며 올바른 결론을 찾아가는 게 민주주의라면 한국 언론계에는 아직 민주주의 질서가 잡혀 있지 않은 느낌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언론사끼리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 게 암묵적이 관행이라고까지 얘기하는 데는 할 말이 없다. 아무리 동업자의식이 있다고 해도 언론은 좀 다른 영역 아닌가? 언 론공화국, 좋은 얘기다. 민심이란 일반적으로 언론을 통해서 여과되고 어떤 입장으로 표명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책임지는 언론, 깊이 있는 언론이 나라를 지배하는 그런 한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본 사람들보다 배신을 잘하는 한국사람들 첫 번째 사례. 우리 회사 직원들이 돼지고기 사건 이라고 부르는 일이 7, 8년 전에 있었다. 사 건의 내용은 이렇다. 한 직원이 미국에서 돼지고기 수입을 담당했었다. 몇 년 동안 그 일을 하다 보니 미국 쪽의 공급선과 한국 쪽의 수입선 모두를 잘 알게 되었다. 이쯤 얘기하면 벌써 이런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것이다. 어느 날 그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좀 시간이 지나다보니 한국 쪽의 수입선들이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거래가 끊어져 다른 거래선을 찾아가는 수입선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한참 뒤 에 알고보니 회사를 나간 직원이 중간에서 그 공급선과 수입선을 그대로 가지고 나가버린 것이 다. 그 직원은 회사 내부의 자산을 훔쳐간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도 이건 일본 회사에서 한국사람이 벌인 일이니까 한국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래 이해할만도 해 하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꾸 벌어지면 한국에 진출해 있는 기업 입장에서는 어떤 생각이 들 것인가? 이걸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나? 솔직히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고 그 사람이 나가서 잘하면 좋지 뭐? 이런 단계까지 가 있다. 그러나 그런 내가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고 그럴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업계는 그리 넓은 것만은 아니어서 다 만나게 된다. 두 번째 사례. 20여 년 간 일본의 대기업과 거래를 해 오던 한 무역상이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기계류도 수입하고 또 한 부분에서 청정한 공기를 유지해야 하는 사업 부분에서 정전기를 이용한 공기청정 기를 수입하게 되는데 그것을 수입, 가공해서 한국내 기업체들에 공급하는 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분 밑에서 일하는 한국직원에게 그 일을 맡기면 4, 5년 지나면 거래처를 따로 떼어 나가는 것 이다. 그런 일이 5, 6년에 한 번씩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수요도 별로 많지 않은 그 업종에 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경험 축적이 안된다. 그리고 나간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하지 말란 법이 있나? 이런 일은 조그만 중소업종에서는 너무나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 역 쪽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다. 이런 풍토에서는 밑의 사람을 믿고 일을 맡길 수가 없다. 물론 법 적으로 문제를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배운 노하우, 거래처 모두 를 떼서 나가는 일들은 아마도 업무상 비밀을 훔쳐간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물론 기존 회사의 사 장님의 잘못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필요하면 충분한 대우와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그 러나 어쨌든 안타까운 것은 하나의 사업체가 꾸준히 발전해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한국적 관행이 나로서는 쉽게 승복할 수 없는 것이다. 나가서 같은 업종의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자기가 맡았던 거래처까지 끌고 나가는 것은 문제다. 경쟁도 필요하지만 협력, 파트너십도 필요하다. 이런 식으 로 나간 사람이 어떻게 과거에 같이 일하던 사장님의 격려를 받을 수 있겠는가. 세 번째 사례. 나 는 한국 중소기업의 의뢰로 중소기업의 인력을 직접 일본에 연수시키는 일을 여러 차례 해왔다. 일본기계를 제대로 만져서 더 나은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많은 인력들이 지 금도 일본으로 연수를 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중소기업을 찾아가 그 사람을 찾으면 그 사람은 없다. 얼마전에 다른 회사로 더 좋은 대우를 받고 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섭섭하다. 물론 그 사람이 옮긴 회사에 가서 더 열심히 일하면 좋은 것이다. 하니만 우리가 그 사람을 일본에 연수 보낼 때는 그 사람 개인만을 본 것은 아니다. 그 회사의 대표로 그 회사 의 미래를 맡을 사람으로 연수생으로 뽑아서 일본에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배워온 기 술을 그 회사의 가치와 재산으로 활용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회사에 있음으 로 해서 가질 수 있었던 경험과 기술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사 람에 대한 투자는 조직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 사람 개인에 대한 투자로 끝나버린다. 그 사람은 그 회사에 있음으로 해서 가질 수 있었던 경험과 기술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사람에 대한 투자는 조직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 사람 개인에 대한 투자로 끝나버린다. 그 사람은 자기가 배운 게 회사의 자산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한국 의 중소기업 직원들은 대기업으로 어떻게든 옮기거나 돈을 많이 주는 곳으로 이직을 한다고 한 다. 또 기술을 배워서 자기가 직접 회사를 차리기도 한다.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요즘은 중소기업의 임금수준도 그렇게 낮은 것이 아닌데...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큰일을 해야된다 는 자존심이 강하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큰 데 좋은 데로 옮기려고 한다. 한우물을 파기보다는 머 슴도 부잣집에서 해야한다는 속담을 더 믿는 것일까? 그래서 적성이나 장래성보다는 무조건 대기 업에서 일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조건 나가서 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일까? 한국사람들은 그런 형태에 익숙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배신 이랄 수도 있는 여지도 많다. 일본에서라면 이런 식의 형태는 존재하기 힘들다. 따로 사업을 한다고 해도 기존에 몸담고 있던 업체의 거래처를 떼어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자기가 배운 것을 자기만의 재산 으로 삼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일본식 사고방식의 한계라면 할 말은 없지만. 일본 사 람들은 대부분 조직인으로서의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어떻게 보면 시계의 톱니바퀴랄까? 자신을 조직의 톱니바퀴의 하나로서 인식하는 자세가 강하다. 톱니바퀴라도 잘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조직의 톱니바퀴로서의 자신에게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 람들에게 열심히 일해서 몇 년 뒤에는 이사도 되시고 승진하세요. 하고 술자리에서 건배라도 할 라치면 아니 나보고 그때까지 있으라는 거야. 하며 욕으로 받아 들인다. 결국 그 사람은 다른 곳 에서 잘될 수 있겠지만 전체가 잘되는데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회사를 나가서 다른 회사를 차리면 그 회사에 들어온 부하직원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일한다. 이게 반복되고 있 는 게 한국사회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런 회사를 다녀. 몇 년 전 우리 회사의 한국인 직원이 겪은 이야기다. 그 직원은 한국의 이른바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다. 섬유부 쪽의 일을 맡아서 열심히 하다가 몇 년 전에 회사를 나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데 회사를 나간 후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얘기를 하던 끝에 털어놓은 얘기중에 이런 것이 있 었다. 거래처에 그 친구가 나가서 거래처 사람을 몇 번 만나다 보니 소주도 한잔하고 개인 신상 얘기를 하게 됐는데 그 거래처 사람이 이렇게 얘기를 하더란다. 아니 그렇게 좋은 대학을 나왔 는데 왜 도멘 같은 데서 걸레 장사(섬유의류에서 취급하는 물품을 같은 업종 사람끼리는 이런 식 으로 얘기하곤 한다)를 하고 있어요. 대기업들도 좋은 데 많은데... 뭐 전에 있던 직장에서 사고친 일 있어요? 뭐 우리 회사가 그렇게 좋은 회사라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일류대학을 나 와서 취직하면 안 되는 법 있나? 좀 섭섭했다. 동경대면 일본에서 최고의 대학으로 친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뭔가 급이 다른 사람이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그런 동경대 출신들도 도멘에는 입 사 동기를 비롯해서 많이 있다. 일본 내에서 우리 회사가 대기업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리고 일류대를 나오면 꼭 대기업에만 취직해야 하는 법이 있나? 일류대를 나온 한국의 대학생이 중소기업에 취직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요새는 IMF라서 사정이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일류대를 나온 사람이 중소기업에 취직하면 일류대를 나온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의 따돌림 을 받는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도멘에 있던 직원이 겪은 것보다 훨씬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저 친구 뭐 좀 모자라서 여기로 온 거 아냐? 몇 년이나 있으려고 여길 왔나? 이런 식이니 동료들과 어울리기도 쉽지가 않다. 소주 한잔 먹으면서 얘기를 해도 회사 동료들의 속내 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다. 위 간부들도 마찬가지로 대접한다. 이런 분위기니 동화가 된다는 건 한 계가 있다. 아예 창업주의 아들이나 친인척이라면 어차피 별종이니까 미래의 사장으로 대접받으 면서 어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게 먼전지는 모르겠지만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런 사 람들은 실제로 입사했다가도 금방 회사를 나가게 된다. 많은 중소기업에서는 세칭 일류대 출신이 지원을 해도 아예 뽑지를 않는 경우도 많다. 회사의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 한다. 여기는 자네가 있을 곳이 아니네. 이건 점잖은 사람들 얘기고, 속으로는 네가 얼마나 오 래 붙어 있겠냐. 하는 식으로 터부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세칭 일류대 출신들을 보면 일류 대 다음에는 대기업 이런 식의 생각에 젖어 있다. 일류대 출신이 발붙이기 힘든 중소기업의 분위 기에 앞서 대학 졸업생들은 자기들은 중소기업에 갈 신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모르 긴 몰라도 일류 대학생들은 아무리 지금 취직이 어려워도 중소기업에 들어가기보다는 차라리 실 직 상태에 있기를 선택하는 경우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안전한 취업이 보장되는 사법고시, 행정고 시 시험 준비생이나 대학원 진학 지망생이 대폭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 좋아 공부고 시험준비생이지 사회적으로 보면 실업자나 마찬가지 아닌가? 고시에 합격하는 사람들이야 한정돼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교수 임용이 안된다고 난리인 판에 대학원에서 몇 년 공부를 더 한다 고 해서 그 길을 따라가 취직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귀중한 젊은 인력이 그런데 몇 년씩 이나 사장된다는 게 한국경제의 입장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 나는 모르겠다. 한국에는 어쩌면 신분제도의 의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IMF가 오고 보니 대기업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다. 세칭 일류대 출신들이라고 해도 지금 멀쩡한 젊은 나이에 명예퇴직이다, 정리해고다, 도산이다 해서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요즘 귀농운동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농촌을 살리자는 것은 좋은 얘기다. 그리고 지나친 도시집중은 문제가 많다. 하지만 옛날 양반들이 조정에서 쫓겨나면 아예 시골로 들어가서 은인자적하는 식의 생활을 하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거라면 그건 마찬가지로 봉건적인 신분 의식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도시에서 더러운 꼴 보느니 아예 이것저것 안 보고 은퇴해 버리겠 다는 생각 말이다. 옛날 양반들이야 시골로 내려가면 땅도 있고 가진 재산도 있었는지는 모르지 만 요즘 내려가는 사람들이 그걸 리도 없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갈고 닦은 직업적 역량들이 그대 로 사장되어버리는 것이 내 눈에는 아깝다는 말이다. 하지만 개인을 탓하기에는 중소기업에 다닌 다는 것이 너무나 힘든 게 현실이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대기업과 관련을 맺고 있고 하청 생산을 하고 있다. 중소기업에 대기업 거래처 담당 과장이라도 떴다 하면 그 공장은 비상이 걸린다. 황제 의 칙사가 나타난 것이다. 온갖 접대에 신경이 집중된다. 대기업과의 거래중단은 회사 생명의 중 단을 의미하는 일이니 이제 서른이나 먹었을까 하는 대기업 대리, 과장에게 회사의 나이 먹은 부 장, 사장이 쩔쩔 맬 수 밖에 없다. 그런 자리에 자기도 능력있다고 생각하는 같은 또래의 젊은이 가 있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 것인가. 역시 대기업에 취직해야 돼. 이꼴 저꼴 보느니 차라리 그만 두고 말지. 이런 생각을 하게 도지 않을까. 아는 사람 하나가 대기업에서 부장까지 지내다 가 명예퇴직을 당해 중소기업에 들어간 일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제일 참기 힘들었던 것이 구겨진 자존심이었다고 한다. 대기업 부장으로 있을 때는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청업자들이 먼저 찾아와 자기 앞에서 굽신대고, 접대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거꾸로 굽신거리고 대접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것도 대기업에 그냥 있었다면 자기의 한참 밑의 직원이었을 과장급 사원들에게 말이다. 친척들이나 가까웠던 친구들 까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게 느껴졌다고 한다. 심지어 아내까지 자신이 다니는 직장을 창 피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고 한다. 자격지심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한국사회의 씁쓸한 한 단면이기도 할 것이다. 역시 중소기업이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인재들이 중소기업으로도 가게 되고 또 그래야 중소기업이 발전하게 되는 것 아닐까? 재벌들의 회장실은 살리고 경제연구소는 없애라 한국재벌의 회장실은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 인적 재원은 물론 회사의 모든 실권을 장악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회장실의 권력이 아니라 회장 1인의 권력이 강했던 것이다. 삼성이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것도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고 한 다.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반대하더라도 회장의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추진되는 것이다. 올해 정부가 재벌개혁의 핵심으로 회장실의 해체를 내세운 것도 이런 재벌의 의사결정구조를 바 꿔보겠다는 것이었다. 단 몇 퍼센트의 주식을 가진 회장이 모든 기업을 지배하는 것이 한국재벌 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지난 봄 모든 기업들은 지금 가지 기업의 전권을 휘둘러오던 회장실 또는 비서실을 해체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규모를 축소했을 뿐이지 회장실의 기능은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단지 구조조정 본부 나 기회조정실로 이름만 바꾸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몇몇 그룹은 이런 구조조정 본부도 아예 없앤 곳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기업들이 아직은 옛날의 회장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회장들이 대표이사를 맡게 된 것은 참 바람직하다. 지금까지 재벌의 회장들은 경영 실패로 인한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들은 결정은 자기가 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납득하기 어려운 시스템으로 기업을 경영해 왔던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해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의 대표 이사,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건설의 대표이사를 맡게 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대기업의 잘못된 경영책임을 이제는 회장들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정부는 재벌의 상호지급보증을 금 지해 부실사를 지원하거나 부실대출을 금지시켰다. 어느 정도의 재벌개혁이 현실화된 것이다. 하 지만 난 한국의 경제 현실에서 회장실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 온 대기업의 계열사는 별로 없다. 모두 회장실의 지시를 받아왔다. 이건 회장실의 역기능이다. 하 지만 회장실의 순기능도 있다. 과거 회장실은 회사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신속한 의사결정과 역 량을 집중해서 기업의 성공을 이끌었다. 현대도 그렇고 삼성도 그래왔다. 난 지금도 기업에서는 이런 역할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역할을 모든 계열사가 갖추는 것은 한국기업 현실로는 불가 능하다. 지금 몇몇 기업은 사장단 회의 같은 여러 가지 정보수렴장치를 마련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것은 회장실이 아직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조건 나쁘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는 것은 민주적인 생각이 아니다. 이모저모 따져서 살릴 것은 살리고 없앨 것은 확실 히 없애야 한다. 회장실이 바로 그런 숙고가 필요하다. 회장실을 단지 재벌 실패의 모든 책임을 지고 무조건 없애는 것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없애야 할 것은 한국 최고의 싱크 탱크라 고 재벌들이 광고하는 경제연구소들이다. 한국의 경제연구소에는 아주 우수한 인재들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기업의 포켓만을 생각한다. 단지 재벌의 이익만을 위해서 복무하는 연구소인 것이다. 일본에는 기업들이 이런 경제연구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경제연구소 는 금융사 소속으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연구한다. 생각해보라. 자기 회사의 이익과는 무관 하게 경제 연구를 하는 것과 회사의 입김 아래 연구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물론 각 기 업의 경제연구소도 순기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기업의 경제연구소가 제대로 기능을 했다 면 IMF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재벌들의 경제연구소가 없어져야한다고 본다. 아니면 기업 별로 존재하는 경제연구소가 단일한 목적을 위해 통합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서 볼 수 없었 던 새로운 싱크 탱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싱크 탱크는 정부가 관리하거나 기업이 연합해서 관 리해야 한다. 특히 각 기업은 지역주재원이나 생생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루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정보를 연합할 수 있는 연구소는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연구소라든지 중국연구소, 아프리카 연구소 등 국가나 기업이 연합해서 운영을 한다면 반드시 성과가 나온다고 본다. 또 삼성이나 현 대, 엘지, 대우 등 기업들이 이들 연구소의 판단 아래 손을 잡고 함께 사업을 추진한다면 한국의 경쟁력은 배가될 것이다. 거기다 대기업이 함께 손을 잡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국민들에게 아, 재벌들이 달라졌구나 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3 한국이 그래도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있는 18가지 이유 뭐?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다구?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사실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고 나서 은근히 걱정을 많이 했다. 한국에서 근무한 지 햇수로 30년이 되었 다고는 하지만 난 엄연한 일본인이 아닌가.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다니. 한국사람이 썼다고 해도 욕먹을 제목이다. 지인들도 걱정을 해주었다. 모모세 씨, 이 책 내고 무슨 사고나서 유명해지는 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은 내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유명해질 가능성보다 내 책 제목이 한국사람들을 자극해서, 무슨 봉변이라도 당해 유명세를 탈 가능성이 더 높다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그래요? 만일 그렇게 되면 내가 지점장으로 있는 도멘이라는 회사의 이미 지까지 나빠지게 된다. 회사에 몸을 담고 있는 나로서는, 주위의 그런 지적이나 우려를 들을 때마 다 솔직히 겁이 안 날 수 없었다. 몇 해 전에 일본을 소재로 해서 많이 팔린 책 가운데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이라고 해서 별볼일 없다는 내용이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 책이 그렇게 많이 팔렸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사람들이 자존심이 강했기 때문 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사실 꼭 누구를 따라잡자는 것만은 아니었겠지만, 한 국사람들이 그 동안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했으며 지금 또 하고 있는가! 굳이 한강의 기적 이라 는 말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30년을 한국에서 보낸 나로서는 한국사람들이 그 동안 흘린 땀과 눈물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한국사람들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건드린 다? 안 될 얘기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마음에 두고 있던 제목은 한국인이 되고 싶은 일본인 이었다. 그러나 출판사의 반응은 의외로 완강했다. 제목이 너무 약하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책 제목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실제로 한국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도 않았던 나는 나대로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출판에는 프로 가 아니다. 해서 결국 어찌 어찌 하다가 출 판사의 꾀임 에 넘어가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라는 무지막지한 제목에 동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걱정은 기우였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그 덕분에 조금은 유명 인사가 된 나는 많은 한국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내게 우 리의 약점을 솔직히 꼬집어주어 고맙다. , 자칫하면 잊어버리고 지나갈 뻔했다. 고 말했던 것이 다. 물론 한국사람들은 예의가 바르기 때문에 서로 마주보는 자리에서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 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출판한 사회평론으로 항의 전화가 여러 번 왔었다고 하며, 개중에 어떤 서점의 나이 지긋한 사장님께서는 우리는 그런 기분 나쁜 책은 진열하기도 싫다. 고 말씀하시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당초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과분한 환대를 한국사람들로부터 받은 것 같다. 연속되는 강연 요청과 매스컴의 인터뷰, 하루에도 몇 번 씩 걸려오는 독자들의 전화와 편지들... 대통령에서 가정주부까지, 내가 평범한 상사맨이었다면 꿈 도 꿀 수 없었을 다양한 분야의 한국사람들과 만나서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은 내 생에 있어 최대의 영광이자 보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나는 30년이나 한국에서 생활했다 는 내가 어떻게 지레 짐작만으로 그런 걱정을 했을까 생각해보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왜 나는 이 런 착각을 했을까? 여기에서 나는 한국사람들의 자신감과 개방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아마도 10년, 20년 전이라면 또 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뭐? 어쩌구 어째? 그 러나 지금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다. 일본인 모모세 타다시가 한국은 죽어도 일본 을 못 따라잡는다. 고 감히 주장해도 그래 무슨 소린지 한 번 들어나 보자. 며 여유 있게 반응하 고, 거기서 취할 것이 있으면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한국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나는 갑자기 한국이 무서워진다. 어쩌면 내 시계는 70년대 포항제철 건설현장에서 멈춰버린 것이 아닐까? 요 즘 한국은 어렵다. 이른바 IMF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한국은 과거와는 뭔가 다른 것 을 갖고 있다 고 나는 믿는다. 비단 자신감과 개방성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몇십 년 전에 한국 이 일본과 수교하고 내가 한국에 젊은이로 와서 겪었을 때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이미 다른 나 라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졌느냐?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전적으로 한국사람들의 몫이겠지만, 한국사람들은 한국인이 되고 싶은 일본인 모모세 타다시가 그 답을 찾는 데 동참하 겠다고 한다면 결코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혹시라도 제목을 보고 오해하셨을 수도 있는 분들을 위해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내가 굳이 이 말을 꺼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출판 사로부터 들은 일부의 반응 때문이 아니다. 내 책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자 일본의 유수한 출판사들에서 출판제의가 들어왔다. 나로서는 고마운 제의였기 때문에, 한국측 파트너인 사회평론 과 상의를 하고 여러 지인들에게 자문도 구하고 하여 올 봄에 일본어판이 출간되었다. 한국어판 책에 발문까지 써준 사해, 내 책이 과연 일본에서도 먹혀들 수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간에 일본어판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행복한 기억이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어느 날 나고야에 있는 한 재일교포가 일본어판 출판사인 문예춘추사와 도메에 항 의 전화를 했다는 내용의 텔렉스가 본사로부터 날아들었다. 그런 반한적인 책을 출판하다니! 즉시 책을 전량 회수하고 공개 사과하지 않으면 도멘 본사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 나는 덜컥 겁이나 본사에, 출판사에, 심지어는 사회평론의 동경 주재기자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협조를 구했 다. 다행히 별다른 불상사 없이 사태는 정리되었지만, 물론 오해가 완전히 풀렸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교포는 책을 읽어보기는 커녕 책 광고만 보고 그렇게 항의를 했다고 한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일에 이렇게 민감한 걸 보면 나는 한국인이 되고 싶은 일본인 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임은 분명한 것 같다. 우리 영감님 모모세씨 책 읽어봤어요 나는 올해 8월 하순 청와대에서 김대준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일본의 유명한 월간지인 문 예춘추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10월초 방일에 맞추어 기획한 인터뷰에 인터뷰어가 되었던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그 나라의 최고위층을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한 국에 주재했지만 대통령과 만나서 긴 시간 동안 대화한 것은 물론이고 청와대에 가 본 것도 처음 이었다. 대통령을 만난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긴장이 되었다. 인터뷰하기 전 대기하고 있던 나의 그런 긴장을 풀어준 것은 청와대 젊은 비서의 한마디였다. 아 모모세씨! 우리 영감님 모모세씨 책 읽어봤어요. 하는 것이었다. 젊은 사람이 대통령 각하 라고 하지 않고 우리 영감님 그러니까 괜히 편해지고 가깝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일본말로 자기 상사를 오야지 오야지 하는 것처럼 아주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한국에 와서 내가 대통령의 얼굴을 직접 본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지난 81년 2월 18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난 경험이다. 당시 포항제철은 4기 설비를 준공하여 연산 조강능력 8백50만톤 체제를 갖추었고 명실상부한 일관체철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나는 포항제철 건설에 기여한 공로로 산업포장을 받았다. 그때는 광양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내려왔었다. 그런데 그 당시 대통령이 떴다 고 할 때 그 각하를 맞던 현장 의 분위기나 수행팀의 분위기는 사뭇 삼엄했다고 할까? 좀 위압적이랄까? 그런 기억이 있었다. 대통령이 오기 전날 예행 연습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들은 영감님이라는 말은 아 세상이 뭔가 바뀌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나중에 들으니 보통 국가원수 인터뷰에는 편집장이나 사장이 나오는 법인데 그 사람들은 오지도 않고 인터뷰어만 나왔는데도 흔쾌히 응해주던가 하는 사람들의 질문도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추진하면서는 그런 느낌은 전 혀 받질 못했다. 젊은 비서관의 말처럼 대통령께서 모모세 선생의 책을 읽고 호감을 갖고 계셨 기 때문 이었을까? 인터뷰어로 나와서였을까? 대통령은 상당히 편했다. 시간은 1시간으로 한정돼 있었다. 역시 대통령은 바쁜 사람이어서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외국어대 일본 어과 교수님이 통역을 맡았는데 대통령은 아 일본어는 통역할 필요 없어요. 내 한국어만 일본어 로 통역하세요. 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통역하고 하려면 시간이 더 걸리게 되니까. 나는 대통령이 일본어를 잘하는 것도 놀랐지만 그것보다도 더 놀란 것은 대통령의 실용적인 태도였다. 아무리 인터뷰라고 하지만 공식적인 행사였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는 자기 나랏말로 듣고 자기 나랏말 로 대답하는 것이 관례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것은 국가의 체면과 관계된다는 말도 있고... 또 외국어를 잘 못하는 사람을 외무부 장관으로 두는 것이 좋다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데 대통령의 태도에는 그런 형식적이거나 의전적인 면들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또 한 번 감동했 다. 일본사람들이 이렇게 인터뷰를 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분명히 아 대단히 실용적인 사람이 대통령이 됐구나, 한국을 다시 봐야겠구나 할 것 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무서워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언어구사 능력과는 별도로 과거의 대통령들한테 서라면 이런 실용적인 태도가 있었을까? 나는 별로 상상이 안 간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권위적이고 의식적인 어떤 것을 느끼고 있었던 나였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 삼 등 전직 대통령들에 비해 세대가 젊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나이가 많으면 많았지?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 중에서 두 개는 빼야 되겠는 걸? 나는 이렇게 좋은 느낌을 받고 나서는 내가 어렵게 만난 대통령이라서 이렇게 좋은 느낌만 받았나 하는 걱정 도 해보았다. 기업은 사람이다 오늘의 삼성을 키운 이병철 전 회장의 평소 지론 중에 이런 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 업은 사람이다. 맞는 말이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아무리 기계가 좋고, 재료가 좋아도 그걸 다루는 사람이 엉터리면 나오는 물건도 엉터리가 된다. 그래서 일본에서 일본원료를 사서 일본에 수출해도, 또 미국기계를 사서 미국에 수출해도 팔리지가 않는 것이다. 곱창 골목에 곱창 구이집이 몇 개가 나란히 있고 재료가 똑같아도 주인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국은 좁은 국내시장을 갖고 있고(그러나 한국이나 일본만큼 큰 시장을 갖고 있는 나라도 그렇게 많은 것만은 아니다) 부존 자원도 풍부하지 못하다. 일본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일본이나 한국이 이 만큼 많이 서구나라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사람의 힘이 아닐까 한다. 지난 8월 한국증시 분석가로 유명한, 자딘 플레밍 서울지점의 스티브 마빈 이사를 만났을 때 알게 된 것인데 그가 슨 책 한국에 제2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의 서문에 마빈은 이렇 게 썼다. 한국인은 전체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사업가적인 기질도 있으며, 근면하고 검소하다. 이 말은 칭찬도 의견도 아니다. 그저 사실일 뿐이다. 한국을 상대하는 사람이라면, 한국인을 아 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가장 큰 원동력이 바로 이 점이다. 박태준 회장이 아무리 포철을 만들고 싶었어도, 삼성이 반도체를 하고 싶었어도, 현대가 조선소를 하고 싶었어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 개발을 하고 싶었어도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없었다면 그런 꿈은 한낮 몇 사람의 꿈으로 끝나고 말았 을 것이다. 그 때는 없었지만 훌륭한 인재들이 키워졌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한국의 뿌리깊은 교육 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라도,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자식들을 교육시키려고 하는 열성이 미국의 부모들에게는 없다. 아마 이것은 동양, 특히 한국의 부모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또 이게 부모들이 자식들로부터 노후에 부양을 받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한국의 뿌리깊은 전통이 다. 이 점에서 한국인들은 후손을 위한 희생을 당연한 덕목으로 알고 있다. 자식들에 대한 희생은 미래를 향한 투자이다. 어느 나라라고 한국처럼 빠른 시간 내에 근대화와 산업 개발을 하고 싶지 않은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어느 나라 지도자라고 한국의 지도자들처럼 빠른 시간 내에 나라를 발전시키고 싶지 않은 지도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성과를 이룬 나라는 한국 외에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자신들이 가진 자산을 잘 키워가고 있는가 의문이다. 그건 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삼성의 사시가 인재 제일주의 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 삼성은 훌륭 한 인재를 키우고 있는가? 선친 이병철 회장 때처럼 그런 정신이 회사를 지배하고 있는가? 삼성 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한국기업에서 인재를 키운다는 것은 거의 친위대를 키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친위대를 키우는 것은 인재를 키운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것은 인재를 죽 이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런 분위기가 확대되면 조직은 훌륭한 인재를 받아들여서 사람을 죽여버 리는 곳으로 변질되어버린다. 위의 지시에 그대로 순응하는 사람만이 살아남게 되고, 튀는 훌륭 한 인재는 견딜 수 없어 회사를 떠나게 된다. 인재가 들어와서 바보가 되는 것이다. 이게 한국의 기업문화다. Lead or Left 라는 말이 있다. 이끌든가 떠나라는 말이다. 이끌고 선도하지 않으려면 조직을 떠나라는 얘긴데... 한국의 기업은 리드하는 인재들을 키우지 못한다. 결국 리드할 수 있는 인재도 떠나게 된다. 조직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사심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회 사, 그 조직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친위대로 자기의 조직을 만들면 회사가 잘될 때는 상 관이 없다. 그러나 회사가 잘 안 되고 있을 때, 그 회사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때 그건 사장 님이 하실 일이 아닙니다. 내가 대신 하겠습니다. 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나서는 사람이 없다. 사 장님이 가셔서 해결해야 합니다. 하는 식이다. 난세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지도자로서 자질이 있 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반대할 때는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능력과 소신을 키워가게 마련 이다. 회사는 그런 자질들을 키워줘야 한다. 나는 삼성이 아무리 인재 제일주의 라고 해도 그런 자질들을 키우는 회사라는 얘기는 별로 듣지 못했다. 이제 한국의 경제는 볼륨이 커졌다. 커진 볼 륨은 과거와 같은 뛰어난 몇몇 지도자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법이다. 지도자도 커져야 한다. 그것 은 지도자 개인의 역량도 커지고 대응력도 커져야 한다는 뜻도 되지만 지도자가 집단으로 형성되 야 한다는 말도 된다. 한국은 지금 커진 몸집을 관리할 수 있도록 뇌수도 커지고 대동맥도 커져 야 하는데 뇌수도, 대동맥도 커지지 못해 비틀거리는 상태와 비슷한 것 아닐까? 지금 한국은 교 육 개혁에 한창인 모양이다. 물론 앞으로 키워야 할 인재는 과거와 같은 이재는 아닐 것이다. 과 거 권위주의적인 시대의 인재와는 다른 좀더 창의적이고 세계 일류로 나라를 발전시켜야 할 인재 를 키워야 할 것이다. 이른바 출세를 위해 모두가 판검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하는 식의 일률적 인 교육으로 세계시장에서 승리라는 인재를 키우기는 힘들 것이다. 관심 분야를 넓혀주고 거기서 일류가 되려고 노력하는 인재들을 키우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라면 만들기도 일류, 도 자기도 일류, 선반도, 컴퓨터도 일류가 되는 밑바탕이 키워질 것이다. 한국경제에 대한 독설가 로 알려진 마빈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왜 한국의 연구기관들, 예를 들면 KDI 같은 한국의 대표적 인 연구기관에서 계속 틀린 엉터리 보고서가 만들어지는지, 한국에도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 이 있을텐데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고 얘기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의문에 해답을 찾 을 수 있었다고 했다. 왜냐? 똑같은 기관에서 낸 보고서의 질과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 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그 기관의 리더들이 바뀌었기 때문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즉 올바른 내용 을 바뀌었어도 그것이 바로 전달되지 못하게 지도자들이 언론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 것 역시 조직에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것 아닐까 한다는 것이었 다. 나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경쟁력이 불확실한 업종들을 통폐 합해서 공기업으로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자동차라든가, 조선이라든가 지금 당장 이익을 낸다고 안심할 게 아니라 10년, 20년 후를 대비해서 세계일류의 경쟁력 있는 기업을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이다. 빅딜은 그런 구상 위에서 진행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 런 얘기를 사석에서 하면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을 맡아서 끌어갈 사람 들이 있습니까? 난 그런 사람들에게 단호히 얘기한다. 왜 없습니까? 검찰출신, 무슨 정치인 출 신 하는 구태의연한 발상으로 망한 경우가 많지만. 그 누구라도, 특히 젊은 사람들 중에 그런 일 을 해낼 사람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부터가 문젭니다.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우수 한 사람들입니까> 박태준 회장이 처음부터 제철을 알았습니까? 정주영 회장이 조선을 처음부터 알았습니까? 이병철 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한국에서 일하면서 한국사람들이 무능하다고 생 각해본 적은 없다. 잘못된 관행, 시스템, 지도자의 프로의식, 노동자의 프로의식 같은 것을 문제로 지적한 적은 많아도. 나는 왜곡된 시스템이 올바로 잡혀지고 또 흡수용량이 작고 동맥경화증에 걸린 기존의 리더십이 올바로 교체된다면, 그렇게 되가고 있지만, 당연히 IMF라는 난국을 극복할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낼 인재들이 화산처럼 터져나올 거라고 믿는다. 기업은 사람이다. 모 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한국은 우수한 인력이라는 가장 훌륭한 자원을 갖고 있다. 그 우수 한 인재들의 앞을 가로막고 이는 장애물들이 걷힌다면 한국은 다시 비약할 것이다. 하면 된다 한국인은 하면 되는 민족이다. 난 그걸 믿는다. IMF라는 난국에 처한 한국은 지금 제2의 건국 운동을 벌이고 있다. 좋은 이야기다. 나라의 기초를 다시 다진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다. 한국인은 목표가 정해지면 무서운 단결력과 추진력으로 돌파해 내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제2의 건축 을 해서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그것까지 있다면 한국사람 들은 더 힘차게 목표를 향해 돌진해 나갈 것 같다. 언젠가 얘기를 들었더니 한국이 외침을 받은 적이 역사이래 무려 931회에 달한다고 한다. 삼국시대 이후 거의 2년에 한 번 꼴인 셈이다. 그러 면서도 나라의 독립과 자존을 지켜온 나라다. 강력한 몽고의 지배도 결국은 이겨냈고, 일제시대도 이겨냈다. 일본도 오랜역사를 가져왔지만 바다로 둘러싸인 유리한 지리적 조건에서 나라를 지켜 온 것과 중국 같은 큰 나라가 스스로를 지켜져온 것은 차이가 있다. 결국 한국은 수많은 위기를 돌파해 낸 나라라는 얘기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포항제철 건설현장에서는 하면 된다 는 구호를 내걸고 일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싸우면서 건설한다 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는 현장 노동자들의 모습은 실로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한국인은 하면 된다 는 얘기를 하면 아마 요즈음의 한국사람들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걸 체험한 사람 이다. 실감나지 않겠지만 내가 처음 한국에 왔던 1968년은 바로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던 해다. 그 이전에 한국에는 고속도로도 없었던 나라다. 건설한 경험도 전무한 나라였다. 지금과 그때를 비교해 보라. 당시 포항제철의 공사는 일본회사들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국에는 제철 소 건설의 경험이 없으니 일본회사들은 아무래도 한국을 얕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포 철의 노동자들은 일본회사들이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주장한 일들을 보라는 듯이 하나하나 이루어 나갔다. 예기치 못한 사고와 공사 지연이 여러 차례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일본회사들이 안 된다 고 하는 일들은 눈앞에서 하나하나 해결되어 갔다. 그런 일들이 연속됨에 따라 얕보는 듯한 태도 는 점차 진심어린 친절과 존경의 자세로 바뀌었다. 열정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일본회 사가 다섯 달이 걸린다는 콘크리트 공사를 포철 노동자들은 두 달만에 끝냈다. 현장에는 대낮처 럼 불이 밝혀졌고 감독자들은 운전기사 옆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고 껌을 주며 잠을 쫓아내면서 공사기간을 단축시켰던 것이다. 어느 비오는 가을 밤 현장에 나갔더니 길가에 레미콘 차가 줄줄 이 서 있었다. 피로를 못 이긴 나머지 앞차가 서자 뒤이어 오던 차들이 모두 서서 운전대에 머리 를 박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쏟아지는 피로를 감당할 수 없었겠지만 다시 깨워 작업을 진행했 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목표한 공정을 앞당겨 해냈을 때 누구의 선창이랄 것도 없이 마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은 당연했다. 일본사람들은 제철 사업을 지원하면서도 아마 뭐, 얼마 나 하겠어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포철 사람들은 제철 보국하겠다. 기필코 일본을 따라잡겠다 는 각오로 일했고 그것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포항 갯벌에서 오직 하면 된다 는 신념 하나로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은 한국이 세계 조선업계 에서 가장 앞선 나라 중의 하나가 됐지만 사실 한국이 세계 조선업에 뛰어든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현대가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밖에 없는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 기공식을 한 게 1972년이다. 유럽의 조선 역사는 2백년, 일본의 조선 역사는 1백년에 이른다. 그것으로 30년만에 모두 추월해 낸 게 한국인이요, 현대그룹이다. 황량한 갯벌 사진과 유조선 도면 한 장만으로 외국 에서 돈을 빌리고, 또 선박수주까지 받아내 그것을 빈틈없이 성공적으로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외국인들은 아마도 다들 배가 뜨기나 할까? 하며 보고 있었을 텐데도... 나는 70년대 현대건설을 비롯한 건설회사들이 중동의 사막현장에서 어떻게 신화를 이루어냈는가도 알고 있다. 가족을 부 양하기 위한 책임감 하나로 중동의 건설현장에 뛰어든 노동자들 역시 포철 노동자들 못지 않은 신화를 이루어냈다. 모랫바람 부는 뜨거운 사막의 현장에서 수용소 생활과 같은 고통을 그들은 이겨낸 것이다. 밤을 낮 삼아 일한 그들은 부족한 경험과 기술을 오직 하면 된다 는 신념으로 극 복해낸 것이다. 삼성에서 반도체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일본에서 그걸 긍정적으로 바라본 사람 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쉽게 말해 한국을 얕보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제품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경쟁력있는 상품을 만들기는 힘들 것 으로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이 반도체 산업을 구체적으로 구상한 1982년까지 삼성그룹 내에도 반도체 사업 경험자가 단 한 명도 없었 다. 그러나 한국은 해냈다. 1984년 64KD램 생산에 성공했고, 1986년 256KD램 수출로 세계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이제 반도체 산업은 세계 일류기업으로 세계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을 하 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88년도에 올림픽을 치러냈다. 올림픽을 치르면서 이 넓은 서울거리에 휴 지 하나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서 아, 이 나라는 무서운 나라다. 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상 한 게 아니었을까? 70년대에 유신이 정치적 억압 상황과 겹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사람들로 서는 후한 평점을 매기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 80년대에 국민소득 1천 불, 집집마다 자동차를 소유한 나라라는 홍보를 대대적으로 한 적이 있었다. 결국 그 목표 역시 이루어졌다. 이 제는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정도로 목표를 초과 달성한 것이다. 한국인은 말 그대로 하면 하면 된다 는 정신 하나로 오늘의 한국을 만든 사람들이다. 일본이 서구 열강에 맞서 지금 의 위치에 온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나는 한국인이야말로 말 그대로 기적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라고 생각한다. 바로 하면 된다 는 정신이 무기였다. 나는 현재의 IMF를 극복하는 데 가장 필요 한 것이 바로 하면 된다는 정신의 회복 아닐까 싶다.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을 해야 하느 냐 하는 목표를 올바로 설정해주는 일이다. 한국은 아시아의 리더, 나아가 세계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인들에겐 공허한 말로 들릴까? 전혀 공허한 목표가 아니다. 한국은 96년도 통계 로 4천 8백억 달러의 국민총생산으로 세계 11위를 기록했고 교역량은 제12위의 나라가 되어 있 다. 지금의 IMF는 그런 수치상으로 나타난 성장에 내실을 기하라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한 차례의 비약을 위해서는 시련이 필요한 수도 있다. 나는 IMF 사태를 맞으면서 한국사람들이 이제는 끝났구나 , 좋던 시절은 다 갔구나 라는 식의 자찬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그것 은 한국인이 가진 가장 무서운 무기인 하면 된다 는 정신의 실종을 뜻하는 것이다. 자신감과 의 지가 꺾이면 이루어질 일이 없다. 한국인들이여 부디 무릎꿇지 마라. 이것은 한국에 30년 가까이 근무한 한 외국인의 응원의 목소리다. 또 한 가지 젊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지금 IMF를 만든 것은 선배 세대의 책임이다. 라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물 론 앞선 세대의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과제가 던 져진 것 아닌가. 지금의 사태에 선배 세대가 책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오늘 의 한국을 만들었다. 아무도 그걸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젊은 사람들이 분발할 때가 온 것이다. 제2의 기적은 젊은 세대의 몫이다. 도전을 기회로 삼자. 이것이 내가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 이다. 세계의 지도국가들은 지금 이른바 G7으로 모이고 있다. 여기에 아시아 국가로서 일본이 유 일하게 끼여 있다. 나는 한국이 G8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서방선진국을 상징하는 나라는 아마 10개국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은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다. 한국이 더 서둘러서 자기 개혁을 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G10. 세계를 움직이는 10개국에 들어가자. 우리는 자격이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21세기가 아시아의 시대 라면 한국은 그 시대를 한국의 시대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은 조금만 더 분발한다면 21세기에 당 당히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목표를 그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세워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IMF를 극복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극복해서 어디 로 갈 것인가 하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G8으로 가자. 세계의 지도국가가 되자. 21세기에 세계의 리더가 된 한국을 나는 보고 싶다. 나는 믿는다. 한국은 하면 되는 민족이라는 것을. 포항제철이 세계 초일류기업인 이유 1 나는 포항제철 건설현장에서 박태준 회장과 함께 일했다. 동성연애하는 거 아니냐는 놀림을 받 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당시 나는 젊은이로서 가족을 일본에 놔두고 단신으로 포항제철 건설 현장에 와 있었다. 그런 젊은이가 귀여워 보였던 것일까? 박 회장은 나를 아꼈다. 건설현장에 있 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토방생활한 거나 마찬가지의 청춘의 중요한 몇 년을 현장에서 보낸 것이 다. 나는 박태준 회장을 좋아한다. 그 분의 정치 행적이야 나로서는 뭐라 말할 입장이 못되지만 현장에서 겪은 박태준 회장이야말로 세계 일류기업인이었다. 포항제철 역시 세계 일류기업이다. 일본의 신일본제철이 배우려고 하는 기업이다. 기업이 일류가 되려면 리더가 먼저 일류여야 한다. 포철이 세계 일류가 된 이유는 그 지휘봉을 잡은 박태준 회장이 세계 일류였기 때문일 것이다. 박태준 회장은 언제나 현장에서 살았다. 매일 아침부터 안 돌아 다니는 데가 없다. 인부들 숙소의 화장실까지 갔다. 한 번은 몇십 미터 되는 고로를 올라갔다. 공단 같은 데 가면 높은 굴뚝이 있고 그 굴뚝에 사다리가 붙어 있다. 고로를 올라가려면 그런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아마 높 은 굴뚝을 가진 업체의 사장님들 중에서 그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간 사장님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래 직원들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박태준 회장은 기어코 고로 꼭대기를 올라가고 야 마는 것이다. 현장의 직원들은 박태준 회장 차가 나타나면 우리 현장에는 제발 오지 마라. 고 했다. 조금 일이 잘되면 우리 현장에나 좀 오지. 라며 말을 바꾼다. 그러나 일이 잘되었을 때는 보고가 즉각 가니까 오질 않는 것이다. 어쨌든 현장의 우리들은 박 회장이 현장에 없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박 회장이 현장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 긴장을 풀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일본 을 떠나 현장에서 토방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건 아마 박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에 가족을 모 두 놓아두고 포항현장에서 마찬가지로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포항에 있을 때 나중에 총 리가 된 나카소네 당시 통산성 장관이 포항(서울도 아닌 지방인데)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시 골 까지 와서 진출해 일하고 잇는 현장을 확인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나카소네 수상의 중학교 후배라는 인연으로 그 때 현장에서 인사를 드렸지만 장관의 시골 방문에 감명을 받았었다. 기업 이든 누구든 리더가 가져야 할 제1의 철학은 현장 중심주의 다. 박태준 회장은 그것을 신념으로 가지고 있던 분이었다. 당연히 현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1차 준공식 때 포철 직원은 물론 우리 같은 외국인 기술자들도 얼싸안고 내 일처럼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철에서는 1차로 준공이 되거나 단계별 공사가 끝났다고 해서 이거 했으니까 좀 쉬자 라는 경우가 없었다. 항상 일을 만들어 갔다. 현장의 중장비는 모두가 돈이라고 판단해서인지 절 대로 놀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장비와 인원을 계속 활용할 수 있는 계획을 끊임없이 세웠다. 포철 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전쟁하는 심정으로 일 했던 것 같다. 아마 돈을 받는 직장이라는 생각 만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애국하는 일이며 산업의 기초를 다지는 중요한 일이 다. 우리는 전쟁중이다. 라는 생각으로 일했던 것이다. 게다가 포항제철은 아이디어도 좋았다. 포 항제철은 단순히 일본 기술만을 그대로 수입한 것만은 아니었다. 포항제철의 부두는 U자형이다. 원료, 재선, 제강, 압연, 선적 이렇게 레이아웃이 되어 있어서 부두의 한쪽으로 석탄, 철광석 등의 원료가 들어가면 다른 편 부두쪽에는 다른 공장들이 늘어 제품생산과 선적까지 일괄처리할 수 있 도록 건설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합리적인 생산라인이었다. 당시의 신일본제철만 해도 그렇게 되 어 있질 않았다. 당연히 일본측이 가르쳐준 것도 아니지만 포철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목해서 공사를 진행했다. 포철에서 처음 건설해서 성공한 경우였다. 제철은 운송업이라고도 한다. 원료에 서부터 선적까지. 이 과정을 얼마나 경제적인 것으로 만드느냐가 경쟁력을 크게 좌우한다. 그런 점에서 포철의 경쟁력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거기다 또 한가지 포철 건설에는 새로운 아이디어 가 있었다. 보통 공장을 건설할 때는 그 생산 흐름에 따라 공사에 착수한다. 하지만 포철은 마지 막 과정인 압연설비부터 건설하기 시작해 가장 먼저 완성시킨 다음 바로 제품 생산에 들어간 것 이다. 철강 생산과정 중에서 제강 단계에 만들어지는 것이 슬라브, 두꺼운 철판이다. 보통 40센티 두께에 길이 5밀리짜리, 20밀리짜리 쇠판이 만들어져 압연단계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는 이 판 을 누르고 펴서, 즉 압연해서 자동차용이나 건축용, 조선용 철판을 만든다. 0.5밀리에서 몇십 센티 두께의 철판을 만들어야 하므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게 된다. 공장을 건설해도 이런 기술을 습 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포철에서는 마지막 과정인 압연설비부터 완성시켰기 때문에 어 려운 기술을 바로 습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압연공장은 만들었지만 거기에 들어갈 슬라브는 아직 생산하지 못해서 슬라브를 수입하게 됐다. 그러자 왜 제철소를 만드는데 슬라브를 수입하 느냐 는 말이 나왔다. 슬라브를 수입하려면 뭐 하러 제철소를 만드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공 장부터 만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슬라브를 우선 수입만 하면 다른 공장이 아직 완공되지 않더 라도 물건의 생산을 시작할 수 있다. 박 회장은 공장을 놀리지 않은 것이다. 제철소는 일본측과 협의를 해서 만드는 것이지만 어디를 먼저 만들 것인지의 우선 순위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 그까짓 것 하겠지만 당시 일본을 비롯해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식으로 압연공 장부터 지어서 바로 생산을 시작하면서 기술을 습득해 나간 방식은 없었다. 그건 바로 포철이 세 계 최초로 아이디어를 내서 성공시킨 케이스였으며, 박태준 회장의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당시 포 철은 일본의 차관을 도입해서 건설된 것이었다. 차관은 보통 도입 후 몇 년 간 이자를 내지 않는 거치기간이 있다. 포철은 거치기간 몇 년은 이자를 내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그 전이라도 어떻게든 이익을 내자는 발상으로 사업을 운영한 것이었다. 더구나 압연공장에서 제품 을 생산해내는 기술을 제대로 발전시키려면 공장을 다 지어놓고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러나 포철은 그 기술을 압연공장을 먼저 만들어놓고 실제 생산을 하면서 익혔기 때문에 전공장 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단축시킨 것이다. 포항제철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서 경쟁중인 신일본제철이 일본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어진 것은 2차대전 전이다. 전쟁 후에 수리를 하긴 했지만 제철소를 다시 짓지는 않았다. 신일본제철이 포항제철을 보면서 아 이렇게 도 할 수 있구나. 하고 부러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마 중국이나 북한이 제철소를 새로 짓는 다면 틀림없이 포항제철을 보고 따라 배울 것이다. 아직 박태준 공법이라는 이름이 붙지는 않았 지만 이 공법에는 박태준 공법 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할 것이다. 뭐 포철공법 이라고 이름붙여질 수도 있겠지만... 박태준 회장은 지난 87년 광양제철소의 제1기 설비(연산 2백70만톤 규모)를 준공 한 직후 베세머 금상(Bessmer Glod Medal)을 받았다. 이 상은 영국 금속학회에서 주는 것인데 베세머식 전로를 발명한 영국의 헨리 베세머가 1874년에 창설한 상으로 철강업계의 노벨상 으로 불리는 상이다. 세계 철강업계가 포철을 세계 일류의 제철소로 발전시킨 박태준 회장을 높이 평 가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박태준 회장이 무슨 상을 탄 것까지는 알아도 왜 탔는지는 모를 것 이다. 그냥 포철을 오래 했고 큰 사업체로 키웠으니까. 하고 막연히 생각할 것이다. 박태준 회장 이 상을 탄 이유가 이같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제철업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시아에서는 베세머 금상을 받은 사람이 단 두 명이다. 현역 기 업인으로 상을 탄 사람은 박태준 회장 한 명뿐이다. 지금부터 70년전에 베세머 금상을 수상한 사 람은 혼다 코타로라는 일본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동경대 교수였으며, 이에 반해 박태준 회장은 현역 제철소의 대표였다. 일본 철강업계도 세계적으로 알아주지만 업계 출신으로 단 한 명도 그 상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1901년 신일본 제철의 전신인 관영 야하다제철소가 첫 고로에 불을 붙 인 이래 1백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일본이지만 교수인 혼다 코타로 외에는 아직 수상자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사람들은 포철을 얼마든지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30년 만에 이런 세계적 기업을 만들어낸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평가에 인색하다. 내가 어릴적에 일본에서 배울 때 일본제철이 몇백만 톤을 생산한다고 하면 야, 엄청나다. 대단하 다. 그런 식으로 감탄한 일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남의 업적에 대해 야, 대단한데... 이렇게 인 정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뭐 포철이 세계 일류기업이라고? 나한 테도 돈 줬어 봐. 그 정도는 나도 한다고... 그러나 누군가가 이룬 성과를 그렇게 낮추는 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아 선배들은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뭔가를 이루어 냈다. 이제 우리는 그 기반 위에서 또 다른 뭔가를 이루어 내야겠다. 이런 식으로 각오를 하는 게 생산적인 자세가 아닐까? 포스코는 세계 1위의 기업이라면서 왜 자동차용 철강은 수입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 다. 제1위 기업이라고 모든 걸 생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는 제철소가 하나뿐이다. 그런데 자동차 강판은 니켈, 크롬도 들어가는 좀 복잡한 공정이다. 100만 톤 만들 수 있는 제철소 도 그런 것을 만들면 20만 톤밖에는 만들 수 없다. 그러니까 자동차용은 수입하고 대신 한국은 산업용 철강을 만들어 남는 것은 수출하겠다는 합의가 일본업계하고도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분업, 협력의 문제이지 포철의 능력과는 무관한 일이다. 포철은 이미 85년 12월 미국의 US스틸과 50대 50의 합작으로 자본금 4억 달러의 합작회사 UPI를 설립했다. US스틸은 1901년 유명한 강철왕 카네기와 모건재벌이 합쳐져서 발족시킨 미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철강업계의 대명 사였던 회사다. 포철은 이제 그 회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도를 넘어서 우위에 서 있는 단계 에 와 있는 것이다. 또 통일이 되어도 포철은 충분히 북한의 철강 수요를 충족시킬 것이다. 북한 쪽의 수요가 생긴다 해도 아마 포철을 혁신하는 차원에서도 충분히 통일특수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포철 건설현장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은퇴를 했다. 포철에 아는 사람들 이야 몇몇 있지만 함께 일했던 사람은 유상부 회장과 이구택 사장 그런 분들 정도다. 하지만 내 젊음이 담긴 포철. 거기서 일하던 시절, 그 기백 모두가 그립다. 황량한 영일만의 모래벌판에 세 계 최고의 제철소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하며 하면된다 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던 그 시절 그 때가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포항제철은 그때 모든 것이 일류였고, 앞으로도 그 기업정신 을 잘 살려나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포항제철이 세계 초일류기업인 이유 2 70년대에 포항제철에 있을 때 야간 근무중인 제강공장의 크레인 운전기사 한 사람이 잠이 들어 서 대형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이 얘기는 1권에서 했는데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니 조금 설명을 해두자. 용광로에서 나온 쇳물을 전로에 옮기는 공정이 있다. 나온 쇳물에 산소나 아르곤 같은 가스를 넣게 된다. 철에 탄소가 많으면 가공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금을 만들려면 거 기에 크롬이나 아르곤 같은 것을 넣게 된다. 크레인 운전사가 야간근무중에 3호 전로로 옮겨야 한 용광로의 쇳물이 1호 전로와 1호 혼선로 사이의 작업판에 쏟아버린 것이다. 그 쇳물이 제강공 장 지하의 케이블 매설로를 따라 흐르면서 공장의 케이블과 전선을 몽땅 태워버린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변전소 작업중이었으므로 내가 책임지고 복구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당시에 신일본제 철이 못한다고 한 일을 포철이 해낸 일은 1권에서 얘기한 바가 있다. 여기서 하려고 하는 얘기는 좀 다른 얘기다. 당연히 박태준 회장이 현장으로 왔고 중간간부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 다. 크레인 운전기사가 졸았습니다. 는 답이 나왔다. 크레인 운전기사가 사색이 되었음은 물론이 다. 아마 짤리겠구나 하고 생각했겠지만 크레인 운전기사는 다행이 징계를 받지 않았다. 박태준 회장이 간부들에게 당신들은 잠을 안 자는가? 크레인 운전기사가 졸았다면 그 사람이 졸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게 아닌가. 그걸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은 회사의 책임이다. 라고 말하며 오 히려 직원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살피지 못한다고 중간간부들을 꾸짖었다. 결국 나중에 그 크레인 운전기사가 왜 졸게 되었는지를 박 회장은 보고받았다. 아침에 집에 가서 쉬어야 하는데 학교가 멀리 있고 아이가 어리다 보니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주고 뒷바라지 하느라 제대로 쉬질 못했다고 합니다. 박태준 회장. 그렇다면 크레인 운전기사가 조는 일이 앞으로도 또 생길 수 있 다. 집에서 쉴 수가 없는데 당연하지 않느냐. 그러면 우리가 아예 학교를 편하게 보낼 수 있게 여 기에 학교를 짓자. 부하직원들의 공장 내에서의 작업환경만이 아니라 집에서 쉴 수 있는 환경까 지도 마련해 줘야 한다. 그래서 결국 포항의 공단에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훌륭한 교육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포항공대는 우수한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포항에는 대학교뿐만이 아니라 고등학교도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부터 포항공단에 고등학교가 있었던 것은 아 니었다.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은 다수가 서울에 집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서울에 있고, 본인은 내려와 포항에서 일하다 보니 토요일이면 모두 서울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1주일 에 한 번씩 포항과 서울을 왕복하는 생활은 피곤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일요일 현장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서울에서 포항까지 내려와야 하니 제대로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포철 에서는 아예 가족들 전부가 내려와라, 그렇게 하려면 이곳에서도 서울 못지 않은 훌륭한 고등학 교를 만들어야겠다. 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서 포항의 고등학교의 수준이 단번에 서울 만큼의 수준으로 올라갔다. 사실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많이 얘기하지만 이런식으로 해서 서울과 지방의 격차도 줄이게 되니 좋은 일 아닌가? 일본의 대기업들은 여건이 되면 유치원, 학교를 먼 저 지어놓고 이렇게 좋은 환경이니까 우리 회사에 들어와 달라 이런 식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 다. 공장 있으니까 일하러 와라가 아니다. 일류의 노동자가 만들어지려면 회사가 그 사람이 일류 로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아무것도 회사에서 해주는 것 없이 직원 들에게 일류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회사 안에서의 노동자만이 아니라 가정과 지역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편하게 마음놓고 일할 수 있게 만드는 회사가 일류회사다.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다?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라고 한다. 한국을 비롯해 태국, 인도네시아, 중국까지 모든 나라가 IMF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흔들리고 있는 최근 사태들을 생각하면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로 들리기도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는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아시 아의 시대 라고 하면 아시아에 있는 한국사람들은 괜히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한국이 바로 아시아 의 떠오르는 나라 아닌가. 그러나 좋아할 것도 없다. 21세기가 아시아의 시대라고 했을 때 그게 한국을 지칭해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21세기가 아시아의 시대가 된다고 해도 한국이나 일본의 시대는 아닐 가능성도 많다. 나는 한국과 일본이 다가오는 아시아시대에 함께 아시아의 리더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지금의 G7에 한국이 하나 추가되어 한국과 일본이 똑같이 아시아의 리더 로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한국과 일본의 파 트너십을 얘기하고 싶다. 우선 한두 가지 얘기를 하도록 하자. 아시아에는 중국, 인도, 방글라데 시, 인도네시아 등과 같이 인구가 많은 나라가 있고 네팔, 라오스, 스리랑카와 같은 인구가 적은 나라도 있다. 각 나라들은 조금이라도 더 부유한 나라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산업개 발과 외국으로부터의 투자 유치에 열심이다. 빈곤한 나라가 조금이나마 더 풍요롭게 생활 할 수 있는 나락 되는 것은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바람직한 일이지만 약간의 불안감도 없지 않다. 다른 나라가 대거 진출해 온다는 의미가 되는데, 진출 한 직역에 일부 산업만이 남고 나머지는 사라지 게 된다면 아시아의 일부가 세계의 쓰레기장 으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한국도, 일본도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이들 지역이 그렇게 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 라도 진정한 아시아의 리더로서 한국과 일본이 손잡고 이들 나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비용이 들게 되겠지만 리더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한국과 일본이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하겠 는가. 한국과 일본은 그 동안 쫓고 쫓기는 관계였고,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일본은 따라잡아야 할 라이벌로 인식되어왔다. 앞으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함께 아시아의 리더라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은 많고 비용도 얼마가 들지 모른다. 가령 공해 문제나, 환 경파괴, 환경오염 문제들을 보더라도 대기오염, 수질문제, 녹지감소 문제 등 이루 셀 수가 없을 정도다. 특히 중국의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유황산화물이나 질소산화물 등은 대기의 흐름상 반드시 한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국, 일본 모두 봄이면 중국 대륙의 황사가 날아 오는 나라가 아닌가. 지난 11월 12일 김대중 대통령의 방중을 기념하여 북경 노동자운동장에서 열린 한중 축구 국가대표팀의 친선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본 사람은 느꼈을 것이다. 운동장 이 쪽 에서 저 쪽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스모그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 개발은 심각한 대기오염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 중국은 앞으로 경제성장이 본격화될 나라다. 더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상황은 현재보다 더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은 전 력에 필요한 많은 부분을 화력발전으로 충당하려 하고 있고 그 원료는 대부분 자국 내의 석탄으 로 조달하려고 한다. 물은 오염되면 눈으로 보고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대기는 눈으로 보고 쉽 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기오염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다. 중국과 한국, 일본의 하늘 에 떠돌고 있는 공해 물질이 이미 5, 60만 톤이라고 한다. 앞으로 50년도 지나지 않아 한국과 일 본은 대기오염 때문에 마스크 가 필수품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부터라도 대책 마련에 서둘러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과 일본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생산 기반을 갖고 있는 나 라이며 우수한 기술자들도 많다. 이 두 나라가 협력하여 중국의 석탄화력 발전소에 대기오염 방 지 설비를 설치해야 한다. 이 설비는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것이므로 양국에서 연구 개발함으 로써 비용을 낮출 수 있다. 수질문제도 있다. 그것은 오염뿐만 아니라 홍수도 커다란 문제다. 방 글라데시는 홍수 피해가 아주 고질적이다. 태풍이나 히말라야 산맥의 융설수도 하나의 원인이 되 고 있다고 한다. 그 해결을 위해서는 다목적 댐을 건설해야 한다. 댐을 건설하게 되면 농업 안정 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한에도 이런 다목적 댐이 필요하다. 녹지의 감소는 종이의 원료인 펄프 를 목재에 의존하는 것이 큰 원인 중 하나이지만 인도네시아의 산불 사건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화전농업이 커다란 원인 중 하나이다. 아시아에는 아직도 이와 같은 한국에서 성공하여 국 가 부흥의 한 요소가 되었던 새마을운동 을 가르쳐줘야 한다. 새삼스레 웬 새마을운동 이냐 할지 도 모르겠지만 농촌에 관심을 갖고 체계화된 영농기술과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농업뿐만 아니라 산업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댐을 만들어 물을 확보하면 물은 농업뿐만 아니라 수력발전에도 사용될 것이다. 라오스나 캄보디아 같으면 이 전력을 태국에 팔 수도 있다. 비료는 무상 원조로 해결할 수도 있다. 근래의 북한 식량부족 해결책으로 쌀, 식료품 지원을 하고 있다. 정주영 회장 은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 그러나 식량 지원은 근본적인 방법은 아니다. 북한에 바로 한국 이 벌였던 새마을운동 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런 얘기는 단편적인 얘기에 불과하다. 나는 한국 과 일본이 손을 잡고 협력함으로써 아시아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미국은 캐나다, 멕 시코와 경제동맹을 맺었고, 유럽도 마찬가지로 큰 경제동맹을 결성했다. 나는 한국에만 오랫동안 근무하다보니 미국이나 유럽에 가본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 지역에도 지사가 있고 주재원이 있어서 동료들과 함께 각 지역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다른 지역의 공통된 점이라면 물가가 싸다 는 점이다. 아마도 경제동맹국내에 국제 분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영 국에서 광우병 사건으로 세계가 떠들썩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큰 문제로 부각된 것은 그게 단순히 영국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 경제동맹국재에서 영국이 소 고기를 공급하는 국가로 국제 분업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시아의 경제동맹은 어떤 가? APEC(아시아, 태평양경제협력체)이 있긴 하다. 여기에는 미국이나 대양주 국가들도 참여하고 있다. 이들에게 아시아가 매력 있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현재로는 경쟁력 있는 일본 이나 한국을 주목표로 해서 아시아에서 경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20년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국계 국가들이 주목표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서구사회에 서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라고 할 때 사실 그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한국이나 일본이 아니다. 바로 중국을 비롯한 중국계 아시아 나라들인 것이다. 한국은 2년 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했다. 일본과 한국은 아시아의 리더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진심으로 한국과 일본을 리더로 인정해 주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도, 일본도 국내적으로 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아시아에는 스 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나라들이 많이 있으며, 이들 나라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리더가 아닌가. 앞으로 한국과 일본은 한 계단 올라간 곳에서 교류를 해야 한다. 계단을 하나 오 르면 주변의 모습이 잘 보이기도 하지만 주변에서도 잘 보이게 된다. 서양사람들이 21세기의 주 역은 아시아다. 라고 말할 때 한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그 말을 무턱대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그 주역에서 한국도 일본도 배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려해야 한다. 그 걱정도 가지고 있고, 이해 관계도 있는 것이다. 똑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면 파트너십이 형성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쟁관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들 에게 일본과의 경쟁에만 신경 쓰다가 다른 것들을 못 보는 우를 범하지는 말라고 충고하고 싶은 것이다. 지난번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때 한일 양국은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 한 행동 계획 을 마련하였다. 내용은 사실 별 새삼스러운 게 아닌 것 같다. 그 동안 각 기업에서 시도해온 것들이다. 다만 양국의 최고 지도자가 직접 논의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나는 무엇보다도 한일 수뇌부간의 교류가 더욱 빈번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2차대전 때 서 로 적으로 싸웠던 독일과 프랑스를 보면, 앙숙지간인 독일의 콜 수상과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조차도 70회 이상의 회담을 가졌다고 한다. 정부 수뇌부들이 움직이는 건 아주 중요하다. 정부가 움직이면 민간 교류도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비로소 결실이 생길 것이다. 서먹서 먹한 사이였던 영국과 프랑스도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 를 공동 개발한 결과 현재 양국은 유로 터널로 견고하게 맺어져 있다. 나는 진정으로 한국과 일본이 21세기 세계 경제의 지도자로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된다면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면서도 아시아시대의 주역으 로 함께 설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 양쪽에 마 음의 국적을 갖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절대로 외국에 팔아서는 안 될 것들 외자 조달에 여념이 없는 정부는 포스코, 한국전력, 한국통신 같은 기업들까지 외국에 팔겠다고 한다. 달러가 없어서 그런 기업을 판다? 한마디로 안되는 일이다. 나라가 망해도 그런 기업들을 파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라가 망한다는 건 바로 그런 기업들이 외국에 팔리는 걸 말하는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30년 동안 그 기업들을 어떻게 키워왔는데 그걸 외국에 넘긴단 말인가? 한 마디로 그 기업들을 파는 일은 바보짓이다. 외국기업의 대리인이 아니라면 그런 발상은 있을 수 없다. 한 나라의 기간 산업을 외국에 파는 나라는 없다. 이건 국민운동을 벌여서라도 막아야 할 일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다고 하더라도 팔아서는 안 된다. 한국경제의 볼 륨이 그렇게 작은 것이 아니다. 한국이 지급 유예까지 가는 배수진을 친다고 하면 상대방도 어느 정도 양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께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망한다고 해도 일본 경제에는 별 영향이 없다는 일본 내부의 분석도 있지만,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둑이 무너질 때는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약한 곳부터 조금씩 무너지다가 어느 한 순간 갑자 기 무너지는 것이다 일본경제의 외형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한국이 망하는 것은 일본경제의 둑 중 어는 한 곳을 결정적으로 약하게 만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계경제에 미치는 여파도 적지 않게 된다. 달러가 모자란다는 것은 외국에서 물건을 사느라고 모자란 것이다. 그렇다면 자동차다 뭐다 불요불급한 것을 모두 막고 끼니를 거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팔아서는 안 된다. 해외여행? 2∼3년 꾹 참고 다음에 가자고 해야 한다. 이런 것은 지도자들이 분명하게 방향을 잡 아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현실적으로 지금 공기업 매각을 하려고 한다 해도 잘 되지가 않 는다. 지금 파는 것은 헐값이다. 외국자본은 어떻게 해서든 이들 알짜배기 기업을 싼값에 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외국자본 앞에 이 기업들을 헐값에 넘겨줄 수는 업는 일이 다. 현재 외환 유동성의 위기는 어느 정도 가신 것처럼 보인다. 정상화가 되면 주식으로 외자는 모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한국은 분명히 정상화로 간다. 호황도 오게 될 것이다. 그런 시기가 오면 성장의 견인차를 모두 잃어버린 한국은 무엇으로 성장을 할 수 있 단 말인가? 외국 투자가들의 무책임한 비판을 한국정부가 너무 의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 다. 빅딜을 해결하는 히든 카드 정부는 매일 재벌기업들에게 빅딜을 하라고 재촉이지만 기업은 그다지 움직이는 기색을 보이질 않는다. 청와대에 가서 식사를 할 때는 예, 예. 하지만 나오면 그냥 그냥 그대로다. 얼마 전에 기 업들이 자체적으로 회사를 통폐합하는 구조조정을 시행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 일반인들에게는 이 름도 생소한 기업들이었다. 사실 재벌그룹들 중에서 현재의 IMF에 대해서 자신들이 책임이 있다 고 생각하는 기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한민국에 위기는 왔지만 우리는 어쨌든 이 업계에 리 더가 됐고 우리는 잘해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빅딜을 하라 고 하니 그게 될 리가 없다. 더구나 반도체, 석유화학, 자동차, 조선 모두 어느 정도는 성공을 했 다. 현대도, 대우도, 삼성도 모두 성공을 한 것이다. 일부 기업들은 잘못한 것도 있지만 그 기업들 입당에서는 다 성공한 기업이다. 그런데 그런 기업들을 서로 내놓으라고 할 때 내놓을 기업이 없 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동차든 반도체든 절대로 내놓지 않는다. 게다가 어떤 분야 든 지금 어렵다고 해도 몇 년 있으면 시장이 엄청나게 넓어져 돈을 벌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하고 있다면 더더구나 그렇다. 사실 재벌이 비난받고 있지만 그 동안 한국의 경제발전에 재벌기업이 기여한 바 역시 크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강제로 눌러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공기업을 조커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게 현실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한 외국 상사맨의 아이디어 정도로 들어주면 좋겠다. 포항제철, 한 국통신, 한국중공업, 한국전력, 한국가스공사 등 공기업들은 많다. 아주 매력적인 기업들이다. 매 출액도 크고 수익도 많다. 포철은 두 군데나 된다. 이들 기업을 줄 테니까 당신들 기업을 내놔라 이렇게 얘기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포철을 하나 떼어줄 테니까 현대자동차를 내놔라. 대우자동차를 내놔라 이렇게 얘기하자는 것이다. 포철은 큰 회사니까 자동차하고 다른거 하나를 더 내놔라.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빅딜이 안 됐다. 우선 기업들이 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포철이나 한전 같은 매력적인 기업이 나오면 이거 마음이 통하는 걸 하는 반응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재벌기업끼리는 절대 빅딜을 제대로 하지 못한 다. 어떤식으로든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공기업을 빅딜의 카드로 쓰는 일은 절대 이국에 팔면 안 될 공기업을 국내 자산으로 남기는 일이기도 하고 또 필요한 빅딜을 성과 있게 이루어내는 방법 이기도 하다. 물론 예를 들어 포스코를 재벌에 준다면 국민 정서상 이건 불공평하다, 특혜다 그런 얘기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경영권은 그대로 두고 돈만 내는 것이다, 인사를 재벌기업이 마 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하고 설득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포스코가 그냥 현대제철소나 대우제철소로 바뀌고 말 테니까. 이것은 정부가 나서서 막아야 한다. 포스코를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는 발상은 지금과 마찬가지의 일을 반복하는 셈이다. 그것은 금지해야 한다. 나라기업 을 민간기업에게 맡기는 것은 아파트를 아파트 관리인에게 맡기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간부들이 전부 현대에서 나와서 앉아 있는 일과 같은 경우는 있어서는 안된다. 빅딜은 해서 무엇하냐는 얘 기가 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놔두면 다 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 실 빅딜은 정부가 힘이 있을 때, 나라경제가 힘이 있을 때 했어야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 했으면 좋았을 일이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 라는 말이 있다.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질질 끌다가 일본이나 미국의 경기가 풀려서 장사 가 잘되면 빅딜은 왜 하는가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지금 경기가 안 좋으 니까 빅딜을 해야 한다는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무리 장사가 잘되더 라도 빅딜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장사가 잘된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불필요한 과당 경쟁이 생 기게 된다. 결국 빅딜은 한국경제의 20년 후, 30년 후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 년 뒤 세계경제에 경쟁력 있을 한국의 산업이 무엇인가? 한국을 벌어 먹일 산업이 무엇인가? 이 런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 무엇인가를 강구하는 일이다. 이것은 삼성 과 현대가 현대와 대우가, 엘지가, 에스케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밑그림을 그리는 일 이다. 나는 그런 차원에서 빅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에 정부가 끼지 않으면 어 떤 일에 끼겠는가. 내가 공기업을 민간기업에게 넘겨야한다는 얘기는 결국 민간기업을 공기업으 로 만들어야한다는 얘기도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20년 후에 경쟁력이 있 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일류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철강 산업도 마 찬가지다. 그러나 자동차에 대해서는 불안하게 생각한다. 나는 일본도 과연 현재의 업체들이 10 년, 20년 뒤에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한국의 자동차 업체들에 대해서 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합병했다. 결국 세계의 자동 차 업계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 지는 이와 관련해 세계 자동차회사를 타업체를 인수할 능력이 있는 강력한 업체와 인수 대상이 되는 업체로 분류한 적이 있는데, 인수 능력이 있는 업체로 GM, 포드, 도요타, 혼다, 폴크스바겐, BMW 등을 들었고 인수 대상이 될 기업체로 닛산, 스바루, 현대, 대우, 기아 삼성 자동차 등을 거론한 바 있다. 국내 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다는 현대자동차의 근로자 1인당 생산대수가 연간 30대(96년 기준)인데 비 해 일본 도요타는 1인당 100대로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양적으로 작년 생산량은 285만대에 달했지만 올해 외환위기로 내수가 급감해 공장 가동률은 50퍼센트에도 못 미치고 있는 수준이다. 올해 자동차 업체의 생산능력이 현대 180만대, 기아 72만대, 대우 62만대, 삼성30만 대인데 비해 국내 수요는 작년에는 147만대였지만 올해에는 100만 대에도 못 미칠 것으로 예측하고 잇다. 상 황이 이렇게 심각한 지경이다. 해외 시장이 잘 뚫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자동차를 하나로 합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예 공기업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세계 일류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생존이 가능하다. 이런 주장을 하면 자동차 회사를 하나로 만들면 경쟁이 없어질 텐데 경쟁이 없으면 품질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 면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그러면 그 동안 한국에서 현대, 대우, 기아, 아시아, 쌍용자동차가 경쟁을 했다고 해서 한국자동차의 품질이 높아졌냐고? 국내용으로 대충대충 만든 것이다. 지금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예정에는 자동차를 수출용과 국내용으로 따로 만들었다. 국내용은 길도 좁고 많이 달릴 일이 별로 없으니까 시속 160킬로미터로 만들고, 미국 수출용은 길도 넓고 달릴 데도 많으니까 시속 220킬로미터로 만들고, 이런 식이었다. 당연히 수출용 제품의 생산단가가 더 높은 것이다. 싸게 만들려고 국내용으로 따로 만든 것이다. 지금은 두 개를 다 합쳐서 똑같이 만 들고 있다. 그러면 당연히 국제용 제품의 질도 올라가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자동차 업계도 이미 어떻게 해야 제품의 수준이 올라가는가 하는 것은 기술자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경쟁은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외 기업들과 경쟁하는 것이다. 미국의 GM, 일 본의 도요타 이런 기업들과 경쟁하는 것이다. 현대와 대우, 삼성 이런 기업들끼리 경쟁하는 게 아 니다. 그건 진검승부가 아니다. 포철은 국내에 경쟁업체가 없다. 포철이나 삼성반도체 모두 세계 기업들과 경쟁하면서 일류기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이나 대우, 현대에게 제철소를 주면서 자 동차회사를 하나로 만들어라. 그래서 세계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일류기업이 10년, 20년 뒤에 세계시장에서 활개칠 수 있게 만들자는 게 내 제안이다. 나는 석유화학 분야에 대해서도 마찬가 지로 얘기하고 싶다. 나는 석유화학 분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얘기하고 싶다. 석유화학 분야는 지금 설비 과잉이다. 일본에서는 처음에 현대, 삼성이 엄청난 투자를 하는 걸 보고 야, 큰일났구 나 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일본기업들은 통산성에서 반대를 해서 증설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당시 일본 통산성에서 반대를 한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의 석 유화학 분야 투자는 한국 내수시장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시장이 성장할 것을 염두에 두 고 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시장은 장사가 만만치 않은 곳이었고, 결과적으로 아직까지 시장이 충분하게 개척되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중국시장도 성장할 것이 고, 그런 대대적인 투자가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이 분야에 대해서도 공기업 수준으로 통폐합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해외시장을 겨냥했다면 경쟁은 이미 세계 유 수의 다른 기업들과 하는 것이다. 세계와의 경쟁에서 한국은 하나다. 주식회사 대한민국 하나가 다른 나라들의 다른 기업과 경쟁을 하는 것이다. 현재 조선업은 흑자다. 그러나 조선도 중점관리 가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도 미쓰비시와 미쓰이가 조선업을 하고 있는데 점차 수주 량이 줄어들고 있다. 핀란드, 노르웨이가 약해지니까 현재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현대, 대우, 삼성이 하면 10년, 20년 뒤에는 쇠락할 가능성이 적 지 않다. 그러면 10년, 20년 뒤를 미리 보고 합쳐야 하는 것이다. 반도체에 대해서도 나는 마찬가 지라고 생각한다. 삼성, 현대, 엘지 모두가 뛰어든다고 해서 10년 뒤에도 잘된다는 보장은 없다. 빅딜이 되면 설비가 많아도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다. 퇴출시키지 않고 가동을 하면 된다. 빅딜로 인해 공장가동률이 낮아진다고 해도 외국에 파는 것보다는 한국 내에서 빅딜을 하는 것이 낫다. 모든 기업을 다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 때 해야 하는 것은 힘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잘되면 좋지만 세상엔 그런 법은 없다는 게 상식이다. 공부 도, 달리기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작곡도 잘하고 이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한국 속담에 열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밥 걱정한다는 속담이 있지 않는가? IMF나 미국에서 공기업을 만들지 말 라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이다. 한국이든 태국이든 리더가 되는 산업이 있는 법 이다. 그런데 IMF가 그 나라의 사정을 살피지는 못하고 반대만 한다? 그러면 그 나라의 경제적 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잘못된 정책은 고쳐지게 마련이다. 한국은 IMF의 반대를 무서워해서 는 안된다. 외국에서 반독점법으로 문제를 삼는 것에도 야 이게 우리가 살길이야 라며 당당하게 진행해야 한다. 큰 방향을 정하고 거기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 이런 경제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는 돈이 필요하다. 그러면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해야 한다. 국채를 갚지 못하면 국가는 파산이다. 설비, 고용을 효율적으로 해서 파산되지 않아야 한다.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한국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공기업을 경영할 우수한 인재들이 많다.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정치바람을 타고 인맥으 로 좌우되는 사람이 아닌 진짜 국민의 대표를 뽑아야 한다. 국회의원 출신, 검찰 출신 그런 사람 이 하는 시대는 끝났다. 나는 한국에는 우수한 인재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 사람 을 나는 한국에서 일하면서 숱하게 많이 만났다. 그런 사람들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것은 그 동안의 정치가 올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부도 새로 만들어졌고, 누가 정권을 담당 하든 세상은 바로 서 가기 시작하고 있다. 나는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업종을 정리 하면, 재벌이 차지하는 경제력이 사실 많이 줄어들 것이다. 아마 이것이 재벌의 오너십을 점진적 으로 약화시키는 한 방법이다. 지금은 재벌의 힘이 너무 강해서 정치권이 뭘 하려고 해도 경제권 을 장악하고 있는 재벌에 막혀 무엇을 해 볼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난 이런 방법 이 재벌의 규모는 조금 작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수익성이라는 측면에서 현격히 향상시킬 수 있는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공기업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느 한 기업을 중심으로 재편 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바꿀 수도 있다. 하여튼 나는 세계시장에서 주식회사 한국이 일류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를 한다면 여러 가지 건설적인 방법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대단히 파격적일 수도 있지만 생각해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을까? 빅딜은 나라와 재벌들을 위해 서 꼭 해야 되는 일이고, 이것이 성공해야만이 21세기 한국경제의 청사진이 더욱 또렷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지도자들과 일본의 지도자들 언젠가 30대 후반의 젊은이를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 젊은 이는 얘기 끝에 요즘 30대 후 반 40대 초반의 사람들 중에도 정리해고가 된 친구들이 많다고 하면서 우리 세대는 고생이 많아 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말은 자신들은 7,80년대에 유신이다, 군사독재다 해서 고생을 했는데 직장을 다닌지 10여 년이 되고 보니 이제는 회사에서도 필요 없다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 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 세대만 고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윗세대가 직장에서 해고되 는 고통은 어떨 것인가? 아직도 자녀들을 더 키워야 하는데 50이 된 나이에 평생 동안 다닌 직장 이 망해서, 혹은 정리해고가 돼서 직장에서 나와야 한다면 얼마나 암담할 것인가? 또 이제 대학 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해야 할 나이에 해고가 아니라 직장을 가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요 즘의 젊은이들은 얼마나 암담할 것인가. IMF가 닥친 뒤 상황을 보면, 역시 고통은 일반 국민들이 당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빼돌려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빼돌릴 방법이 있는 것도 아 니고, 대개는 기업에서든 정부 조직에서든 열심히 일만 해온 사람들인데 누가 잘못했느냐를 따져 보면 결국 IMF는 지도자들의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전에도 한국이 일본에 20년 뒤쳐 져 있다면 그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들의 마인드 때문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아마 한국국민들 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를 알게 될 수록 한국역사의 특징은 귀족이나 영웅들보다 는 민중의 역할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용운이라는 분의 책을 소개받아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책의 내용은 이랬다. 고조선이 한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전쟁이 미처 시작되지 전 부터 고조선에서는 한나라에 항복하려는 대신과 장군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왕과 민중들이 끝까지 맞서서 싸울 뜻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재빨리 성을 빠져나가 버렸고 그 뒤에 성안에 있던 자를 매수해 끝내는 왕을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도자도 없는 농민들은 힘을 합해 왕이 죽은 뒤에도 6개월 동안이나 한나라의 대군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당나라 군대가 한국 땅에 그대로 주저앉으려 하자 10년 동안이나 옛고구려와 백제의 땅에서 당나라 군대와 싸워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열심히 싸운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즉 농민들이었다고 한다. 귀족들은 전쟁에서 도망가버 리지만 농민들은 끝까지 싸워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버린 것이다. 몽고군이 고려에 침입했을 때도 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강화섬에 숨어 들어가 있을 때 농민들만이 맞서 싸웠다. 임진왜란 때도 마 찬가지였다고 한다. 왕이 도망갈 때 일반 백성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항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 대신에 의병 투쟁을 끝까지 벌인 것이 바로 농민들이 아니었던가. 일본의 한 역사학자는 한 국의 의병이란 파리떼와 같다. 파리 때문에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아무리 잡아도 뒤이어 붙는 파 리떼가 있는 곳에서는 살 수 없다. 고 했다고 한다. 물론 한국의 의병을 파리떼와 같다고 하는 말 을 한국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좋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한국의 의병들이 일본군을 물리친 것 아닌가. 일본사람 입장에서 그걸 한국사람 듣기 좋게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들어두면 좋을 것이다. 칠백의총이니 만인의총이니 하는 무덤들은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에 떼죽 음을 당한 의병들이 묻힌 곳을 말하는게 아닌가? 조선왕조가 망했을 때에도 일본군과 맞서 싸운 의병의 주력도 농민들이었다고 들었다. 그때 조선 왕조의 왕과 귀족들은 일본천황이 주는 귀족 대우에 만족하거나 도쿄에서 편히 지내고 있었던 것 아닌가? 일반 백성들은 아마도 나라가 망하 는 걱정보다도 나라가 망하면 자신들의 처지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열심히 싸우지 않았을까? 실제로 일제시대때 한국인들은 징병으로 탄광에서 고생하고 전쟁에 끌려가고 또 여자 들은 정신대로 끌려가서 고생하지 않았는가? 한국은 식민지시대를 거쳤고, 또 한국전쟁이라는 민 족상잔의 비극을 거쳤다. 그리고 힘겹게 경제건설의 시기를 겪어왔다. 그 경제 건설에 이어 민주 정부를 세우려는 힘겨운 노력을 전개해왔고, 이제 힘들게 그 성과를 보고 있는 셈이 아닌가 싶다. 20세기에만도, 몇차례의 국난을 거친 것이다. 아마 지금의 IMF도 말 그대로 국난이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를 보면 한국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일본 역사에서는 중요한 고비에 일반 백성들이 나선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할 때도 보면 일본은 무사집단이라는 일종의 귀족지도자 집단들간의 움직임을 중심으 로 역사가 만들어져 왔다. 당시의 전쟁을 일반 농민 백성들은 전쟁놀이를 보듯 도시락 싸들고 구 경을 했다고 하니까. 그 뒤에 메이지 유신으로 중앙집권적인 나라가 생기기 이전에 끝나버린 것 이다. 아마 일본은 섬나라였고 옛날의 문제는 주로 일본내부에서만 생긴 문제들이었으니까 그랬 을 수도 있지만 역시 일반 백성이 커다란 역할을 했던 한국과는 역사가 다른 것만은 분명하다. 아마 이번 IMF라는 국난을 극복하는 데도 나는 역시 일반 백성, 한국의 국민들이 큰 역할을 하 리라고 믿는다. 한국의 역사가 그랬으니까. 한 가지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한국의 지도자 들에 대해서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역사를 보면 이승만 정권 시절 이후 일본의 역사와 유사한 점을 느낄 때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시대때 교육을 받았고 일본 육사를 나온 분 아닌가. 일본 육사는 일본 무사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교육시키는 곳이었다. 가르치고 배운 것은 장단점 모두였을 것이다. 요즘은 5.16구데타라고 하지만 5.16이후의 정권을 보면 나는 영주를 중심으로 무사집단이 지배하던 일본의 과거 정치를 연상할 때가 많다. 일본의 근대화의 기초를 닦은 것이 메이지 유신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 유신이라는 말을 따오기도 했다는 데서도 그런 연상은 더 욱 두드러진다. IMF는 생각해 보면 그냥 외환위기나 일시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박정희 대통 령 이후 한국을 지도해 오던 지도자 집단의 지도력의 위기? 혹은 붕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가 지나치게 오래 끌어와서 국민들의 반발을 받은 것도 그렇고, 특히나 김 영삼 전 대통령 시기까지 와서 문제가 터진 걸 보면 그렇다. 혹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무능, 부 패 그런 말들을 많이 한다.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 당시 김영삼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불 렀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문민정부라는 용어상의 차이에 그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박정희 0대 통령 시절부터 이어져온 시대와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고 새로운 정비가 근본적으로 시작되었 어야 하는 그런 차이를 갖고 있었던 것인데 그런 점에는 미흡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참사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과거의 질서가 무너지는 신호탄이었던 모양이다. 성수 대교 붕괴도 있었고 당산철교도 다시 공사를 하고 있고 또 얼마 전에는 지은 지 얼마 안되는 국 립도서관에 금이 갔다는 얘기도 들리고 남산 2호터널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 건 다 내가 오가던 곳들인데, 일본에 있는 지인들은 그런 소식을 들으면 내게 전화를 해서 안부 를 묻기도 한다. 별일 없냐고 물론 별일은 없다. 서울은 넓은 곳이고 인구 천만에 그런 사고에 내 가 낄 확률은 그만큼 희박하니까. 하지만 한국에서 무슨 사고가 나면 내게 전화를 거는 것처럼 한국의 이미지는 그런 사고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하여튼 지금의 한국은 옛날에 구축해 놓은 것들이 무너지고 뭔가 새롭게 정비해야 하는 과도기적인 시대가 진행중인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지도력이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이자 종착역이 아닌가 싶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당시의 무사 출신에 뿌리를 둔 지도자집단이 한계에 부딪친 것이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마도 대동아 전쟁에 이은 진주만 폭격이었을 것이 다. 그것은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과거 전국시대에 죽을 각오로 싸운다는 무사도 정신으로 무작정 전쟁을 일으켜 전국민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은 것을 미친 짓이 아니라면 무어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과거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무언가는 연속되고 계승된다. 하지 만 일본의 경우, 지도력의 근본적인 붕괴는 그 당시 있었던 것이고 맥아더 점령 시절을 거치면서 지도력은 새롭게 개편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도 그이후 수십 년 새로운 문제가 발생해 왔고 또다 시 새로운 지도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일반 국민들의 참여가 높았다는 것은 한편으로 한국이 일본보다도 국민 참정의 뿌리가 깊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박정 희 전 대통령 이후 시기를 국민 참정이 높았던 시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도력이 달라져야 하고 좀더 민주적인 바탕 위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지도력을 성공적으로 만들 가능성은 어찌 보면 일본보다도 한국이 더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시기 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고 제2의 건축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어려운 시절을 맞아 새롭게 정부가 구성됐다는 것은 잘된 일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뭔가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시기이니까. 내가 지도자의 의식을 얘기할 때는 정부집단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조직을 포함한 민간조 직의 지도자들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미움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고언을 덧붙이고 싶다. 과거 일본의 지도자집단, 무사집단의 전통에 의하면 그들에게는 확실한 책임의식이 있었다. 외국인들은 볼썽사납게 느끼기도 하지만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하고 책임을 지지 못하면 할복이라 도 해서 책임을 지는 전통이다. 그러나 탈세나 부패, 오직 등으로 문제가 된 한국의 지도자들은 얼마나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는가. 난 그렇게 책임지는 자세를 느끼지 못하겠다. 남자답지 못하 다고 할까? 국민들은 그래서 노태우 전 대통령보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더 점수를 주는지도 모르겠다. 독설가 마빈의 본심 올 여름에 한국에 제2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책이 나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책의 필 자는 스티브 마빈으로 그는 쌍용증권의 조사부 이사로 있다가 최근에 자딘 플레밍 증권의 조사담 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빈은 연속해서 몇 년째 한국 최고의 증시분석가로 한국 내는 물론 세계 적으로도 선정된 유능한 분석가다. 공교롭게도 그의 책이 내가 책을 낸 출판사에서 나와서 우연 히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라 심각한 얘기는 하지 않고 식사만 나누었다. 다 시 한 번 만나기로 했으나 그 뒤 마빈은 미국, 일본 등지의 출장으로 바빴고 나도 이 일 저 일로 바빠서 아직까지 다시 만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마빈은 한국의 경제 상황을 아주 비관적으 로 보고 있다고 해 한국 내에서는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한국 증권계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장사가 안되는데 마빈이 그런식으로 계속 주장을 하니까 증시에 오려고 하는 사람 들도 떨어져 나가고 외국인들도 다 떠나간다고 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청와대에서도 내부 보고 중에 마빈의 책은 너무 비관적으로 한국 상황을 보고 있으니까, 읽을 필요가 없다는 구절까지 나 왔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는 일본에서 수년 간 일한 적도 있어서 영어를 못하는 나는 마빈과 일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면서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내가 느낀 것은 마빈의 한국에 대한 애정이 었다. 그의 부인도 한국사람이다. 그의 책 제목 한국에 제2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제목에서도 암시하듯 금융이든 산업계든 개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위기가 다시 올 수 있다는 주장이 실려 있었다. 사실 그런 식으로 느끼는 사람이 마빈뿐이었을까? 한국에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 많았겠지만, 왜? 이런식으로 사람들 기운 빠지게 해 하는 생각에 제대로 그런 분석을 내놓지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 같다. 왜 한국사람들은 본심을 읽지는 못하는 것일까? 마빈은 분석가이지 무슨 정치인이나 재계 지도자가 아니다. 한국이 열심히 하면 되다는 식의 격려나 나는 한국을 좋 아한다는 얘기 같은 건 그가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적어도 그가 투자분석가로서 쓰는 글에서 는 말이다. 그런데 냉정할 수밖에 없는 글을 냉정하게 쓴다고 비난하면 마빈으로서는 좀 답답했 으리라 본다. 한국사람들은 아마 듣지 않아도 아니 자기가 한국에 몇 년이나 있었다고 한국을 마 치 다 아는 것처럼 그래하고 비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빈이 결국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렇게 가면 위기가 오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 해보자는 얘기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글에는 나타 나지 않지만 마빈의 마음속에는 간절한 것이다. 왜 한국사람들은 귀에 듣기 좋은 얘기를 해야만 좋아하나 모두가 잘된다고 얘기해도 마빈처럼 비관적으로 냉정하게 보는 사람도 필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논의들이 자유롭게 나와서 사태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다. 물론 마빈의 말이 증시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니까 더욱 더 그런 반응이 나타났을 것이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증권시장에서 투자가협회라는 곳에서 마빈은 타이거 펀드의 앞잡이다. 한 국 증시를 망치고 있는 마빈은 증시를 떠나라는 격문을 돌리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또 어떤 증권 딜러는 자기와 마빈 가운데 누가 더 수익을 올리나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빈은 투자전문가가 아니라 증시분석 전문가다. 영역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영역으로 와서 경쟁을 해보자고 하는 건 공정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런 식의 반응이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어쨌거나 최근에 한국 증시도 살아나고 있고 마 빈도 입장을 바꿔서 증권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을 하기도 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마빈의 난처한 입장이 좀 줄어들려나. 마빈도 나보다는 세월은 짧지만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활동하 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 그래서 동병상련의 심정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는 게 아니라, 기아가 삼성을 인수해야 한다 올 여름 한국경제계는 기아 인수를 둘러싼 기업 전쟁으로 시끄러웠다. 삼성, 현대, 대우에다가 포드까지 끼여든 기아 인수건은 1차, 2차, 3차대전까지 치렀다. 결국은 현대가 기아를 인수하는 것으로 끝났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삼성이 기아를 인수하는 것에 비하면 한결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작년에 낸 책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에서도 삼성의 자동차 진출부 터가 잘못된 일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 인연으로 삼성의 사장단 앞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물론 그 사장단 앞에서도 나의 삼성자동차 진출에 대한 비판은 여전했다. 내 주장을 뻔히 알면서도 나를 불러서 강연을 하게 할 정도로 삼성이 훌륭한 회사인 것은 분명하 다. 그걸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을 내는 98년 12월이라는 시점과 한국이 죽어 도 일본을 못따라잡는 18가지 이유라는 책이 나온 지난해 8월 사이에는 중요한 사건이 있다. 바 로 IMF다. IMF 사태로 인해 한국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어려워졌고 여기에는 한국의 5대 기업 에 속한다는 삼성, 현대, 대우 모두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도 삼성은 다시 자동차 진출에 기업의 사활을 거는 듯했다. 내년도 사업계획에서도 삼성은 자동차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참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한때는 이왕 기아는 무너졌고 삼성도 자동차를 포기하게 되면 엄청난 소해를 보게 될 테니 기아를 삼성에게 주는 게 어떤가 하는 견해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퍼졌던 것 같다. 그러니까 삼성의 자동차 진출을 그냥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다음에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삼성이라도 살려주자는 의견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재벌들이 그 동안 해온 방식 그대로다. 은행에 서 돈을 꿔서 일을 벌여놓고 돈을 더 꾸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망한다, 조금만 더 도와다오, 그러 면 이왕에 돈이 물린 은행은 어쩔 수 없이 그 동안 쏟아부은 돈이 아까워 추가 대출을 하게 된 다. 경제 상황의 악화를 두려워하고 또 기존에 대출을 도와준 정치권 역시 어쩔 수 없이 다시 물 려들어가 그 기업의 협박성 요구에 눌려 은행에 다시 압력을 넣는다. 한보가 은행권에 돈을 요구 한 방식도 이런 식 아니었는가 IMF 이후에도 계속된 수천억의 구제금융도 결국은 이런식이다. 삼성도 결국 기아를 무너뜨리면 어쩔 수 없이 삼성자동차를 도와줄 수밖에 없지 않나 이렇게 생 각한 것 아니었을까 INF가 오지 않았으면 삼성의 강력한 자동차 사업 추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 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상황이 과거와는 달라졌고 삼성을 도와주면 삼성만 망하는게 아니 라 현대, 대우 두 자동차 메이커까지 함께 망하게 된다는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미 한국자동차 메이커의 생산 능력은 수요를 초과한 상태이고 그 수요 초과 상태는 한국 시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동차 산업은 안팎으로 협공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의 전략이 성공하기는 힘들 것이다. 삼성측 사람을 만났더니 자신들이 자동차사업 진출 계획을 잡으니까 현대, 대우가 자동차 생산을 늘렸다고 다른 기업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업 계획은 당연히 그렇게 상대방이 생산 능력을 키울 것이라 는 것까지 감안해서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현대나 엘지에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 때 바 로 삼성이 한 일이 생산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경쟁자의 진입의 여지를 없애기 위한 목적이 있 었을 것이다. 물론 해외시장을 겨냥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나 엘지측에서는 삼성이 자동차 에 뛰어들면서 현대나 대우에서 한 말을 그대로 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닐까 지금은 삼성, 현대, 엘 지 등 반도체 회사들이 해외시장에서의 가격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협의를 통해 생산량을 줄인다 고 발표해 놓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삼성에게 기아를 준다는 발상부터가 문제다. 기아자동차는 망했다곤 하지만 공장, 기술,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인력도 있다. 하지만 삼성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기아에게 삼성을 주는 게 아니라 삼성에게 기아를 줘야 한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일찍 결정이 났으면 IMF 라는 어려운 경제상황에서도 계속된 삼성 의 자동차 투자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삼성도 분명히 어려울 때가 올 것이다. 삼성반도체가 아무리 장사가 잘된다고 하더라도 어려울 때가 올 것이다. 그런 것들이 예상되는데 도 삼성이 자동차를 한다 그걸 삼성그룹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혹은 총수가 좀 비싼 취미를 갖고 있어서 계속 추진한다 나는 정말 큰일날 일을 삼성이 추진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다. 삼성도 이 미 완성차를 생산하고 있지 않느냐고 삼성이 현재 만드는 차래야 삼성 SM 5시리즈 2000CC 중형 차에 불과하다. 부채가 이미 4조이고 여기서 언제 메리트를 얻어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기를 기대 할 수 있겠는가 생산량, 부채. 자동차를 만들 때 2000CC 차를 만드는 게 좋은 건 아니다. 800CC 도 있고 사륜 구동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자동차 제조사는 풀세트를 가지는 걸 좋아 하게 된다. 대형차와 사륜 구동 생산라인이 없던 대우니까 쌍용을 인수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 느 자동차 회사도 삼성을 인수해서 조절하는 건 가능하지만, 거구로 삼성이 다른 곳을 인수해서 조절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최소한 삼성에 비하면 현대가 기아를 인수한 것은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단 하나 문제가 잇는 것은 그 정도의 자동차를 생산 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력, 그러니까 노동자의 수가 너무 많다는 얘기다. 아마 200만 대 규모를 생 산한다 하더라도 2만 명이 되는 게 아니라 합쳐도 6, 7천 명으로 충분해야 가능할 것이다. 지금의 현대는 노동자 1인당 생산대수가 일본 도요타에 비해 3분의 1 수준이니까. 이걸 감안해서 새롭게 기업을 재조직해야 하는 문제가 남을 것이다. 얼마 전 현대그룹의 박세용 실장이 제철소 건설을 2천년가지 연기해야겠다는 얘기를 했다. 내가 만나본 바로 박세용 실장은 제철사업에 대한 대단 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 현대의 제철소 진출에 대해서도 오너의 취미가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내 견해는 좀 다르다. 물론 현대의 제철소 진출이 필요하더라도 현재의 상황은 신중론을 필요로 한다. 기아자동차 인수를 비롯해 현대가 제철 사업에 관심을 가지던 상황과는 많이 바뀌어 있으니까. 결국 삼성 내부에서도 기아 인수에 신중론이 득세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 다. 삼성의 기아 인수가 무산된 것은 일을 추진한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삼 성의 기아 인수가 무산된 후 주식시장에서는 삼성 관련주가 일제히 상승했다. 이것이 상식적인 감각이다. 사업적인 선견지명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상식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반도체 사 업에 뛰어들었던 삼성의 이병철 회장의 선견지명이 삼성과 한국을 한 단계 올려놨다면 이제 상식 이 삼성과 한국을 한 단계 올려놓게 될지도 모른다. 언젠가 언론보도에 삼성이 자동차를 만드니 까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고 들었다. 참 어이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얘기 를 해보자. 일본상사들은 삼성이 어디로 가는지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장사하는 사람들로서 직업 적 감각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닛산과 제휴해서 삼성이 자동차를 한다고 했을 때 일본사람들은 야, 닛산이 장사 잘하고 있구나 그러고 있었다. 일본상사들이 보았을 때는 그건 닛산이 투자해서 돈을 들이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게다가 닛산은 일본 내에서 도요타에 많이 밀 리고 있던 처지였다. 일본 내로 들어온다고 해도 충분히 말이 될만큼 역량을 가진 삼성이라는 회 사를 상대로 닛산이 괜찮은 장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관계자들을 비롯 해 코트라, 대사관, 기업체 직원 등 일본에 가있는 한국 기업 관련 주재원들이 만 명이나 된다. 그 사람들이 일본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몰랐을까? 다들 일본사람들은 삼성의 자동 차 진출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런 의견들이 삼성의 자동차 진출 을 결정할 정부 정책담당자들이나 금융관계자들에게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참으로 의문이 다. 당시 국내에서도 삼성이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하는 얘기가 돌고 있지 않았는가 삼성이 드 디어 무리한 일을 벌이고 있구나 하는 얘기가 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비합리적인 일이 벌 어지는 것, 뻔한 사태의 문제점이 알려지지 않고 문제 있는 정책이 집행되고 돈이 나오고 하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당연히 언론에도 삼성이 로비를 했을 것이고 정부에도 로비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안 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인 것이다. 삼성은 항상 신중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훌륭한 회사였다. 지금도 그러하고. 오히려 그 신중함과 합리성이 지 나쳐서 문제라고 할 정도로. 삼성에 대해 그런 경험과 이미지를 갖고 있는 나로서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은 참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다. 어쨌거나 사필귀정. 일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자동차 산업에 진출해 진퇴양난에 빠진 삼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도 마 저 풀어야 할 숙제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눈 대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96년 11월 OECD에 가맹한 한국은 그 불과 1년 후 아시아 통화위기에 빠져 급격한 원화가치의 하락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대외적 으로 파산 직전인 상황까지 몰렸다. 당시 김영삼정권은 IMF(국제통화기금)에 긴급 융자를 요청, 약580억 달러의 지원을 받아 위기는 모면했다. 하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시장 개방, 부실금융기관 정리, 통폐합 등 경제 개혁에 관한 강도 높은 압력을 받고 있다. 금년 2월 취임 후 생각지 않은 IMF 체제하에서 경제 재건을 신정권 최대의 과제로 안고 최근 반 년 동안 힘겨운 대처를 계속해 온 김대중 대통령과 10월에 예정된 방일을 앞두고 서울시내 중심에 있는 청와대에서 인터뷰를 했 다. 인터뷰는 종합상사 도멘의 현지법인, (주)도멘 한국법인의 모모세 타다시 회장이 맡았다. 그는 한국주재 통산 28년째를 맞은 상사맨으로 한일 비즈니스의 산증인이라 할 만한 존재이다. 그의 저서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없는 18가지 이유 (문예춘추)는 한일 양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어 김대통령도 한국어판으로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오늘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통령에 취임하신 지 어느새 반 년 가까이 되었습니다만 지금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김 대통령 한마디로 말해 대통령이 란 것이 이렇게 어려운 직업이라는 걸 취임 전에는 몰랐습니다. 최근 반 년 간 특히 현재 우리나 라가 처해 있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지금은 아직 이렇다 할 성 과가 없지만 외화준비액 문제 등 부분적으로는 대단히 호전되어 있습니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개혁이 성공한다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전반적으로 좋아지리라고 기대합니다. 10월에 방일을 예정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아마 국빈 자격으로 방일하시게 되겠지요. 25년 전에 동경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대통령께서 납치되었던 사건(김대중 사건)을 생각하면 이번 방일에 각별한 생각을 갖고 계시리라 추측됩니다. 김 대통령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때 나는 원래대로라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 목숨을 구해 지금 한국을 대표해서 방일하게 되었으니 정말이지 감개무량합니다. 25년 전 사건 이후 많은 일본국민 여러분이 걱정해주셨습니 다. 제가 방일하면 틀림없이 감개무량해하시는 일본국민들이 많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감개무량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면 늘 일본 천황의 방한이 화제에 오릅니다. 이를테면 2002년 월드컵이 한일 공동 주최로 열리게 되는데 한국에서 개회식이 거행됩 니다. 이 개회식이 천황폐하 방한의 좋은 기회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 십니까. 또 한국사람들 가운데는 천황이라는 말에 대해서 아직 옛날의 안 좋은 감정을 느끼는 분 들도 많은 모양인데 대통령께서 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김 대통령 우호국의 국가 원수가 서로 왕래할 수 없다는 것은 무척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번 방일을 계기로 일본 의 천황께서 장래 방한할 때에 한국국민이 따뜻하게 환영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은 생 각입니다. 민족주의 보다 협동하려는 노력이 중요 월드컵 공동 개최는 한일 우호 친선에 공헌함은 물론 장래 이러한 세계적인 이벤트를 공동으로 주최하고 싶은 나라들에 있어서도 상당히 뜻 있는 실험일 것입니다. 성공적인 공동 개최를 위해 대통령께서 는 무언가 아이디어를 갖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면 이번 공동 개최를 기념하 여 월드컵의 주제가를 한일 공동으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김 대통령 무척 좋은 생각입니다. 지 금 제가 말하고 있는 이 시점에도 양국의 축구협회 관계자들이 공동PR 혹은 문화행사 개최에 대 해 협의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은 국제화시대입니다. 경제면에 있어서도 WTO(국제무역기구) 체제하에서 국경 없는 경제가 추진되어 우리도 세계에 녹아들고자 하고 있고 세계도 우리를 받아 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는 과거와 같이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울 것이 아니라 협 동하려는 노력이 보다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월드컵의 한일 공동 개최는 국제화를 향한 협 력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포츠로 말하자면 미국의 메이저 리그에는 박찬호 투수가 활약하고 있고 여자 프로골퍼인 박세리 선수는 메이저 대회에서 연승하는 등 대단 한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두 선수는 어려운 시기에 상당히 밝은 화제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김 대 통령 예 골프에서는 박세리 선수뿐 아니라 미국의 여자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한국의 박지은 선수 가 우승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의 경우 세계 무대에서는 남성보다도 여성 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 같아요(웃음). 박세리 선수는 환경 면에서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냉혹한 훈련에 연습을 거듭했고 게다가 그 와중에 훌륭히 영어를 습득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그녀의 프로정신에 정말이지 경탄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장장 40여 년의 경험을 가진 프로정치인입니다만 한국의 기업경영자나 노동자도 더더욱 그런 프로의식에 눈떠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현 재의 경제위기도 틀림없이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 대통령에 예 그렇습니다. 한국 국민은 건 국이래 50년간 4개의 가혹한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시련을 전화위복 의 계기로 만들어온 것입니 다. 첫 번째 시련은 1948년에 공산당의 저항을 무릅쓰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입니다. 두 번 째 시련은 6 25에 동란입니다. 한국전쟁시에 국토가 거의 모두 공산화된 위기에 처했었지만 그 때도 공산주의를 격퇴하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시련은 6 25에 의한 전후의 폐허 속에서 일어서 세계에서 11번째의 경제대국으로까지 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년의 대통령선거를 통해 50년만에 민주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를 이룩한 것입니다. 한국국민은 이 네 가지 어려운 시련을 극복해왔기 때문에 현재의 경제 위기에 있어서 이를 전화위복 의 계기로 삼 을 수 있을것입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의 발전을 달성해 이번 위기를 선진국 대 열에 진입하기 위한 도약대로 삼는 것에 국민 여러분도 찬성하고, 또 그렇게 행동해 주리라고 믿 고 있습니다. 일본의 좋은 문화는 수용한다 음악이나 소설 등의 분야를 통해서 일본문화는 점차 한국에 수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것이 아직 폭넓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항상 한국에 일본의 문 화를 개방하고 싶다고 말씀하고 계신데, 물론 대단히 기쁜 일이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급격하게 무차별로 일본문화가 들어오는 것에는 불안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사진이나 영상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저속하다는 이유로 또 새로운 일본 비판의 씨앗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문화 개방에 역행하기 쉽습니다. 그 러니 모든 것을 민간자본에 맡기지 말고 시간을 들여 개방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대통령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염려는 정말이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문화를 받 아들임에 있어 정부가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한 한 나라의 사회질서에 있어 해가 되는 저급한 문화는 역시 배제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물론 좋은 문화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테고, 그를 위한 노력은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 곳에 와 서 알았습니다만 일본인과 하나가 되어 한글로 5.7.5의 3구 17음으로 된 일본의 단형시를 만들고 있는 한국분도 계십니다. 퍽 훌륭한 교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테면 일본에서 스모를 초빙 하면 어떨까요. 김대통령 글쎄요 일본에 스모가 있는 것처럼 한국에는 씨름이라는 전통 스포츠가 있습니다. 일본의 스모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하여 한국의 씨름과 비교하면 틀림없이 공통점을 발 견할 수 있겠지요. 민족간, 국가간에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하고 협력해가기 위해 그러한 교류는 정 말이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일 양국은 문화적으로 공통점이라고 할까요. 뿌리를 같이 하는 점이 적지 않습니다. 미국의 어느 학자가 일본의 문화는 한국 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잘 수 용하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은 동지이기 때문에 서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 을 위해서는 일본인의 일부 전국민은 아닙니다만 가 갖고 있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일찍이 그러한 의식이 적지 않은 일본인에게 있었습니다만, 전후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상당히 변하지 않았을까요 특히 젊은 사람들은 전혀 차별 의식 을 갖지 않은 쪽이 훨씬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김대통령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는 차별의식이 희박해진 경향이 있음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직 그러한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일본인의 의식이 점차 시정되고 있는 것은 이는 무척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불황으로 힘들어하고 있지만 한국은 한 층 심각하다. IMF와 합의한 금융 바로세우기와 시장자유화 정책에 의해 차입금 의존체질이 정착 한 기업은 즉시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도산하여, 실업자가 급격히 증대했다. 도산 거수는 사상 최 고, 실업자는 금년에 200만명을 넘으리라고 추측되고 있다. 주가가 급락하고 매출도 잇달아 저하 되었다. 한국 경제위기의 커다란 요인으로 정권, 은행, 재벌의 유착이 지적되고 있다. 정권으로부 터 특혜를 입은 기업은 다각화를 추진, 항공기와 자동차에서 백화점까지 계열 기업을 다수 거느 려 재벌이 되었다. 확대의 무기가 된 것은 계열 기업끼리 상호간 채무보증을 통해 정권의 영향력 이 강한, 독립성이 빈약한 은행에서 흔한 물처럼 쉽게 얻은 차입금이었다. 심각한 경제 문제에 대 해 여쭙겠습니다. 현재 대통령께서는 IMF 주도에 의한 경제 재건에 대처하고 있는 셈입니다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구미의 기준을 아시아에 적용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 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또 현재 추진하고 있는 개혁을 통해 무엇을 목 표하고 계십니까. 김대통령 IMF 가 우리에게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개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IMF 가 요구했기 때 문에 개혁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개혁을 추진하 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개혁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병행, 발전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지 않 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우리나라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현재의 아 시아 경제 위기라는 것은 바로 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만일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졌다면 당연히 그 결과로서 시장경제도 발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제 기능을 했다면 우선 첫 번째로 정경이 유착하여 부패하 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기업은 국제의 자유경쟁에 의해 단련되어 나 아가 국제시장에도 진출해 그곳에서의 경쟁에서도 당당히 이길 수 있는 발전을 이루었을 것입니 다. 그런데 실제로는 권력과 기업이 결탁하여 자유로운 경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권력과 유 착한 기업은 국제시장에서의 경쟁에서 이기기보다는 권력의 특혜를 입으면서 유리한 융자를 받거 나 혹은 이권을 얻어 손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국제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노력은 소홀히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WTO 체제하에서는 경쟁은 무한히 계속됩니다. 약한 기업은 국제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한국의 기업은 외국으로부터의 투 자를 얻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에는 채무를 변제하는 것도 불가능해졌습니다. 그 결과로 통화위 기가 일어 한국 전체의 경제위기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보더라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처럼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할 수 있던 시대에는 그 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국제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임금은 올라가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저 는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현재의 이 어려운 상황을 하나의 좋은 기회로 포착해 교훈으로 삼아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의한 철저한 자유경쟁을 통하여 체질을 강 화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래 아시아 사람들은 근면하고 매사를 마지막까지 해내려 는 강한 의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기 부여만 할 수 있으면 아시아는 다시 한 번 비약할 수 있 을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고 적어도 한국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국기업에도 국내기업에 뒤지지 않을 우대 조치를 지금 일본도 긴 불황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금융기관의 거액의 부실채권이 커다란 문제 가 되어 정부는 그 대응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보시기에 일본의 경제재건정책을 어떻 게 생각하십니까. 김 대통령 우린 지금 우리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는데 남이 하고 있는 것에 대 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은 없습니다 (웃음) 단지 보도를 통해 보자면 현재 일본에서는 한편에 서 감세 등에 의한 경기부양책 다른 한편에서는 금융시스템 개혁이라는 커다란 두 개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더군요.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경제전체에 대해서 양국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대통령 일본 방문 시에도 이것만은 꼭 말하고 싶습니다만 한일 양국이 자기 나라의 경제 재건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 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력은 아시아 경제에 있어 상당히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는 만큼 일본 뿐 아니라 아시아 경제 전체를 정비하여 재건하기 위해 일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주셨으 면 합니다. 한국은 그를 위한 협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한국경제 부흥의 핵심은 외국으로부터의 자본 도입에 있다고 대통령께서는 이전부터 강조하고 계십니다. 외국기업의 투자를 늘려가기 위 해서 어떠한 방책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예를 들면 저는 일본상사의 한국법인에 근무하면서 오랫 동안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만 일본기업에도 좀더 우대 정책을 취해 주실 수 없나 생각하고 있습 니다(웃음). 외국기업으로부터의 법인세수는 내려가더라도 고용기회가 늘면 그것에 의해 세수감소 는 결국 커버되지 않을까요. 김 대통령 외국인의 투자에 대해서는 국내기업에 뒤지지 않은 정도 의 편의를 정책으로는 외국기업이 한국 내에서 주식을 무제한으로 보유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더욱이 모든 적대적인 엠앤에이도 자유로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에 추가해 현재 국회에서 심의중인 외국투자촉진 법안이 가결되면 외국기업에 대한 면세 조치도 취할 수 있 고 혹은 융자면에서도 우대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2월에 설립된 정리해고법에 따라 추진되고 있는 기업의 과잉인원 정리를 둘러싸고 한국의 노사관계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약 1천5백 명의 정리해고를 발표한 현대자동차에서 5월말부터 3개월에 걸친 파업이 계속되어 공장을 점거한 노조 원 3천명이 기동대와 대처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사이 조업은 중단되었고 약 1천억 엔에 이르 는 손실이 발해한 끝에 해고 대상자를 대폭으로 줄이는 것 등으로 노사가 합의해 8월말이 되어서 야 간신히 수습되었다. 이는 당초 계획이 크게 변동된 것으로 앞으로의 영향이 우려되고 있다. 일 본이나 여러 외국 기업이 한국에 진출하려 함에 있어 가장 머리가 아픈 것이 극심한 노사대립 문 제입니다. 이번 위기에 처해서도 파업장면이 전세계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외국기업이 한국에 진출하는 데 있어 노사대립 문제가 큰 애로점의 하나로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입니까. 김대통령 그러한 문제는 모든 노동자에게 공통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노동자들이 상당히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두 개의 커다란 전국적인 노동조합연맹이 있는데 정부는 그 두 개의 노조와 합의를 이뤄 기업측이 자유로이 소위 정리해고 가 가능하도록 한 법안이 이미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그러한 합의가 노조와의 사이에 교환된 것인데 현대자동차에서 노동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대단해 큰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러나 이 사건에 의해서도 내 생각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물론 아무리 경영 상황이 어렵 다하더라도 경영자가 제멋대로 불필요한 해고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해고할 수 있습니다. 그 제도를 확립하는 데 있어 저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실업자의 확대는 피할 수 없다 직장을 잃은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실로 사활이 달린 문제이고 기업도 파업 등으로 커다란 손상 을 입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김 대통령 물론 노동쟁의가 심각해 지는 것은 경영자 측이나 노동자측 쌍방 모두에게 있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측은 종업원의 해고를 가능하면 피해야 할 것이고 자제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필 요한 최소한의 해고조차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6월에 대통령께서는 5개 은행과 재벌 산 하의 기업 등 55개 사의 강제 정리를 발표하셨습니다. 일본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조 치인데 아직도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이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김 대통령 금융기관이건 다른 산업이건 경쟁력이 없는 기업들은 반드시 새로이 출발하든지 혹은 폐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계속 그런 방향에서 개혁을 추진할 것이고 9월말에는 대강의 정리가 끝 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반 기업에 대해서는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자발적으로 정리하도 록 요구할 생각입니다. 만일 스스로 정리할 수 없는 경우에는 정부가 정리를 명하지 않을 수 없 겠지요. 대담한 개혁을 대통령의 강한 의지에는 경탄하지만 한편에서 실업자의 증대가 신경이 쓰 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루에 1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한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서는 어떻게 대책을 취하실 것입니까. 김 대통령 정부로서는 개혁을 추진하는 기간에는 불행하고 도 유감스럽지만 실업자의 발생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실업률이 20퍼센트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래서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머지 80퍼센트에 속하 는 사람들의 직장은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20퍼센트의 실업자도 나오지 않도록 무리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업이 잇달아 도산하고 경제는 더욱 악화되어 모두를 잃게 되 고 전원이 실업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실업자 문제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정부는 금년 2월에 노사정 즉 노동자 사용자 정부 3자가 참가한 위원 회에서 합의를 얻었습니다. 5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실업자 대책에 상용키로 결정하고 이를 추 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그 후 대책비가 5조 원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새로이 10조 원 으로 늘었습니다. 이 10조 원은 실업자에 대한 최저한의 생활보장비로 사용됩니다. 매일의 식비 자녀의 의류비용 자녀의 고등학교까지의 교육비에 대해서는 정부가 최저한의 보장은 행한다고 국 민에게 설명해서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업 측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재벌을 비롯한 기업 의 개혁이 이번 경제 구조 개혁의 골자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 기업과 정부간에는 이 미 개혁에 대한 5개항의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첫째로 기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입니 다. 외국의 투자가에 대해서나 국내의 주주에 대해서도 그 기업의 구석구석까지 숨김없이 모든 것을 공개하도록 이미 법적인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둘째로 기업간의 채무보증에 있어서의 개혁 입니다. 지금까지 예를 들면 재벌그룹의 계열기업간에 서로 빚보증을 해 금융기관으로부터 많은 융자를 받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실적이 좋은 기업이 실적이 나쁜 기업에 경솔하게 빚보 증을 해주었기 때문에 별문제 없던 순조로운 기업마저도 실적이 악화되어 도산해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계열기업간의 채무보증을 금하고 앞으로는 이런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셋 째로 기업 재무구조의 효율화와 엄정한 운영을 요구 철저하게 낭비를 없애도록 하여 기업의 자금 이나 자산을 일시적으로 은폐한 후 전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했습니다. 네 번째 개혁은 재벌 그룹 오너의 책임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재벌그룹의 오너는 그룹기업의 이사로는 등록이 되어 있 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오너의 경영에 대해서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사로서 등록할 것을 의무화하여 만일 운영을 잘못하여 책임이 있다고 보여지면 민사 책임과 형사책임 양방의 책임을 추궁받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네 개의 개혁은 이미 실천에 옮겼 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충분한 대응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다섯 번째의 개혁은 소위 말하는 빅딜 입니다. 거대 재벌그룹이 문어발 식으로 여러 가지 방면에 필요 이상으로 진출하고 있는 것 이 우리나라의 경제구조상 커다란 문제로 되어있습니다. 빅딜이란 지나치게 많은 계열 기업을 정 리 축소하기 위해 재벌간에 기업 국제경쟁력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대처는 아직 이제부터의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2년 후에 다시 일어선다 개혁의 대상인 재벌은 은행에서 거액의 융자를 받고 있습니다. 은행의 자금은 원래 국민의 돈 인 만큼 이것은 보증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국가가 재벌에게 융자한 것이나 다름없으 니 차라리 그들 기업을 일시 국유화하여 대담하게 구조조정한다는 생각은 아닙니까. 한국은 국채 가 상당히 적은 나라인 만큼 재원에 국채를 발행한 후 경제가 호전되었을 때의 세수에 의해 충분 히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위기에 빠진 금융기관에 대해 국유화가 검토 되고 있습니다만. 김 대통령 그것은 시장경제 원칙에는 그다지 합치하지 않는 방법이 아닐까 생 각합니다. 현재 한국에는 많은 국영기업이 있지만 그 실적은 좀처럼 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문에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만약 기업을 지원한다면 민영인 채 로 지원할 것입니다. 반드시 국영화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 건국 50주년을 맞 이하여 한국에서는 제2의 건국을 위한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제 2의 건국을 위하여 아픔을 동반한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종종 발언하고 계신데 한국의 미래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김 대통령 우리는 현재 상당히 커다란 곤란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상 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의 아픔과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현재 추진 하고 있는 개혁이 잘 진행되면 우리나라는 2년 후에는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21 세기는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현재의 공업화 사회에서 정보 지식 문화 산업이 되는 사회로 변해갈 것입니다. 한국국민은 그러한 정보 지식 산업이 중심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특 성을 갖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육에 상당히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고 대단히 근면한 국민입 니다. 또한 상당히 많은 문화적인 자산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힘을 합쳐 노력하면 21세 기는 이러한 한국민족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세기가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기반 이 정보 지식 문화 산업으로 이행해가는 것은 우리들 한국국민에게 있어 상당히 바람직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과도 긴밀한 협의를 거듭하여 협동의 노력을 기울여 간다면 21세기 의 양국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 합니다. 오늘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결실 있는 방일을 기대하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자유당때 얘기 한국말로 자유당때 얘기를 좀 해야겠다. 너무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비난하지 말아줬으면 좋 겠다. 지금 한국은 외자유치 전쟁중이다. 당연하다. 해외 채무 때문에 오늘의 IMF가 왔기 때문이 다. 하지만 들어오는 돈이라고 모든 돈이 좋은 것은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계의 돈은 장기적 으로 한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소로스 같은 투기꾼들은 단기차익을 노리고 들어오 기 때문에 한국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도 바로 돈을 해외로 빼돌려버려 호미로 막아도 될 문제를 가래로 막아야 하는 문제로 증폭시켜버리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단기차익을 노려 그런 상황을 조장하는 경우도 많다는 얘기다. 사실 IMF도 이런 단기차익을 노리는 돈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면서 수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달러가 아예 투자로 자본금을 유치하려고 한다. 그 런 점에서는 일본자본의 유치가 좋은 점이 많다. 일본에서 오는 외자는 단기차익을 노리고 오는 돈들은 별로 없다. 대부분 장기로 특히 투자와 관련된 돈들이 들어올 가능성이 많다. 지난 4월초 일본에서 120여 명 정도의 투자조사단이 내한하여 각 지역 공업단지를 시찰한 일이 있었는데 아 직까지는 어떤 구체적인 투자가 실행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일 본인이 자주 드나드는 술집에 들러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면 특히 금융기관 사람들의 인사 교체를 비롯해 한국사무실 문을 닫는다는 얘기를 더 많이 듣는다.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얘기를 더 자 주 듣는다는 얘기다. 이건 한국내 사정이라기보다는 일본 금융회사들의 사고들 때문이긴 하지만... 현재 이미 한국에 진출해 있는 일본 기업을 보면 모두 일본에서도 일류인 기업들이다. 이처럼 일 류기업들만 진출해 있는 나라는 아마 아시아 여러 나라들 중에서 오직 한국뿐이지 않을까 한다. 한국은 일본의 대기업들만이 아니라 중소기업들에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일본의 중소 기업들은 만만치 않은 기술력과 자본력을 가지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자. 미쓰비시중공업이 한국 에 들어오는 일이 쉬울까 한국에 대우중공업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이 망했을 때 인수하러 들어오는 것인데 그 경우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일본 중소기업들이 한국에 들 어온다면 한국시장보다도 일본시장을 염두에 두고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대 일본 수출이 당연히 늘게 된다. 일본사람들이 일본사람들의 취향 선호도를 더 잘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제품의 품질관리도 한국시장을 겨냥한 것과는 다르다. 미국에 도요타가 있으면 일본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경제에도 도움이되는 기업이 아닌가. 유 럽의 경우도 고용 문제 때문에 외국기업이 들어오는 것을 적극 환영한다. 일본 중소기업이 들어 오면 한국 중소기업이 망할 거라는 소리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작게 보기 때문이다. 현재의 WTO 체제는 국경없는 경쟁시대를 만들었다. 시장경쟁은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잇다. 국내시장에 서만 통하는 기업은 이미 존재하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기업은 빨리 문닫는 게 낫다. 노 동자들도 있는데 어떻게 문을 닫느냐 하지만 그런 자극이 없으면 한국경제는 발전할 수 없다. 이 들 한국에 진출하는 중소기업은 한국의 대기업에 납품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경우에도 이런 업체들이 있으면 품질 경쟁이 치열해지고 따라서 대기업 현대 대우 삼성이 생산하 는 상품의 질 또한 덩달아 높아지게 될 것이다. 품질 경쟁 없이 대기업과의 관계에 따라 그냥 납 품만 하는 상태에서 언제 상품의 질이 높아지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일본에서 중소기업 사장들은 만나서 한국으로 한 번 들어와보지. 하고 권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다. 당신이 있으니까 한번 들어가고 싶은데... 스트라이크 때문에...(주먹을 쥐면서) 데모하잖아 일본의 중소기업 사장들은 한국이 대만보다 시장이 크고 따라서 매력이 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 내 시장에 판로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대기업과 중 소기업이 인맥관계 등을 통해서 인적으로 맺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가격과 기술력 등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파고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으로 가볼까 하다가 도 결정적으로 마음을 돌리게 되는 원인은 노동자 파업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사실 대기업은 어 느 정도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있다. 재고 관리를 통해서라든가 자금 수급의 여유라든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경우는 노동자 파업에 대처할 능 력이 없다. 노동자들 파업 때문에 납기일에 맞춰 물건을 대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거야 그 중소기 업의 사정이지 물건을 받아야 하는 발주 업체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회사는 그대로 끝 장이다. 그런 이유로 중소기업 사장들은 한국에 들어올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들 대 만이 낫지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내 얘기가 무슨 자유당 시절 야기냐고 하 겠지만 외국자본 특히 중소기업 유치를 위해서는 그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일정 기간 노동자들의 파업은 없다는 식의 가이드라인이나 규정 같은 것을 정부가 만들 필요가 있다. 물론 ILO 위반이 라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고 또 노동조합에서 행동권 제약이라는 반대의 소리로 많을 것이다. 그 러나 외자유치의 필요와 노동자들의 권리의 중간에서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을 만 들어낼 수는 없을까 예전에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진출했던 일본기업에서 파업이 많이 있었다. 그 때 상황은 자세히 몰라도 일본기업이 잘못한 게 많다고 생각한다. 퇴직금도 안 주고 도망간 일본 사장들도 많다. 그러니 일본까지 노동자들이 쫓아오는 건 당연하다. 아무리 노동자가 파업을 했다 고 해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 사건 때문에 일본기업가가 부도덕 하고 못 믿을 사람으로 아직까지 인식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때 일본인 사장님들이 특별히 사람이 나빠서 그랬는가 그건 아니다. 그 당시 7 80년대에 진출해 있던 기업들은 주로 한 국의 값싼 노동력에 매력을 느끼고 들어온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섬유산업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중국이나 월남이면 몰라도 한국은 지금 그런 기 업을 부를 필요가 없다. 그때의 실패를 일본도 한국도 모두 알고 있다. 다시 그런 실패를 반복하 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공해 산업이 몰려와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것들을 걱정하고 있다면 한국은 자신을 너무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반도체나 자동 차 석유화학 등은 세계적 수준이다. 일본의 경쟁력이 있는 중소기업이 들어온다면 지금의 수준은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지금은 일본경제도 어렵다. 이럴 때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확실한 이점이 있는 투자라는 점을 알려줘야 한다. 나는 일본 월간 문예춘추 의 기획으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일 본기업이 진출했을 때 세금 면에서 어떤 우대를 할 것인지 하는 점을 물어본 적이 있다 대통령은 적극적인 답변은 피했다. 대신 엠앤에이도 자유롭고 토지소유도 허가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답변 을 했었다. 그런데 아마 일본인은 당분간 한국에서 토지를 사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버블 경제가 한창일 때 미국 부동산에 대거 진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거의 다 실패하고 철수한 경험 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토지를 산다 좀 회의적이다. 그런 것들보다도 내 생각에 더 확실한 이 점을 줄 수 있는 것은 세제상의 우대 조치 같은 것이다. 세금에 특혜를 준다면 더 많은 기업이 들어오지 않을까 한다. 세금을 싸게 해준다면 세수가 줄어드는 게 아니냐고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한 국내의 기술발전이나 고용 증가 같은 효과를 생각한다면 한국에 이익이 되는 면이 훨씬 많을 것이다. 특히 중소기업에게는 효과가 클 것 같다. 또 한 가지 어떤 기업이든 다 들어와 라 하는 백화점식 투자유치도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 는 분야가 석유화학인데(자동차 부속도 석유화학에 속하는 것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어떤 아이 템 같은 식으로 특화를 하는 것이 좀더 효율적일 것이다. 좀더 조사할 수 있다면 아예 특정기업 들을 정해 어디 어디는 한국에 들어오면 어떠냐 하고 제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 게 특화를 해야 그들에 한해서 세제 면에서 특혜를 준다든가 노사 문제에서 한국 진출 중소기업 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특별 방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특혜를 주고 보호해주는 정책을 펼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어떤 분야의 어떤 아이템들이 필요한지를 정 부나 대기업이 잘 모르는 것이다. 일본에 주재해 있는 관계자들이 1만명은 될 텐데 아마 유학생 까지 합치면 엄청난 숫자가 될 것이다. 이들이 정보를 가져오고 정부가 정책으로 입안하는 과정 이 아쉽다. 일본에 주재하는 상사원들이라면 일본 술집거리인 아카사카에 무슨 무슨 술집이 있다 는 정보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알고 있어야 할 문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진정으로 애국하는 사람이라면 연구하고 정보를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이 문제가 돈이 드는 문제도 아니고 단지 사람들의 마인드만 바꾸면 되는 문제로 여겨진다. 특화해 서 선정하고 진출한 기업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한일간에 국제 분업화로까지 발전시킬 정도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중소기업은 언어부터 시작해서 비자 받는 일 살집을 찾 는 일 이런 간단한 것들부터 모두 문제가 된다. 특히 서울이 아니고 지방으로 진출한다면 더 그 렇다. 중소기업은 경험도 부족하고 인력도 달리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한국정부가 나서서 다 도 와주겠다고 해야 한다. 그런 적극적인 자세가 있어야 대기업보다 약한 우대와 특별한 보호가 필 요하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 얘기는 자유당 시절 얘기가 아니다. 도대체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몇 년입니까 지난해 책을 내고 나서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친구로서 이곳 저곳에 강연을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한 국사람들이 어떤 강연이든 꼭 하는 질문이 있다. 지겨울 정도로 자주 물어오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몇 년입니까 하는 것이다. 난 그러면 딱 잘라서 20년이라고 말한다. 그럼 강연장은 우와라는 아수성으로 가득 찬다. 이는 아니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난다고하는 감탄사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그렇게 뒤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대라고 흥분하기도 한다. 혹은 IMF 때문에 그 차이가 더 벌어진 것이 아니냐 며 자조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IMF 때문에 한국의 국민소득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2002년은 되야 다시 1만 달러대의 국민소득을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우스갯소리지만 북한에서 제 일 좋아하는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는 말이 있다.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북한과 남한의 소득 격 차를 줄여놓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IMF와 무관하게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IMF 이전이나 지금이나 일본과 한국의 격차는 여전히 20년이다. 현재 환율로 평가되는 소득만을 기준으로 한국 과 일본의 격차를 평가할 수는 없다. 국민소득 차이가 늘어났으니까 격차가 늘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낮아져 있는 국민소득은 곧 회복될 것이다. 국민소득보다 중요한 것은 산업구조, 기술력, 노동력의 수 준, 경제의 하부구조와 같은 문제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IMF 이전이나 이후나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 다. 이미 한국은 IMF 이전에 반도체나 철강 같은 부분에서 일본을 따라잡았고, 이것은 IMF 이후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계 1위의 자리를 차지한 부분도 있다. 나는 20년이 있으면 한국이 일본을 능가할 수 있는 분 야가 여러 개 더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는 그 정도의 저력은 충분히 있다. 그만큼의 가능성이 있다 는 이야기다. 일본사람인 내가 20년이라고 말한 것은 한국은 죽어도 안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20년 이면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다. 물 반잔을 놓고도 물이 아직 반 컵이나 남았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야 물을 벌써 반이나 마셨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내가 긍정적으로 말한 것을 한국사람들은 왜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일본사람이라 서 그런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탓도 잇지 않나 싶다. 나는 한국의 국민들을 탓 하려는 게 아니다. 국민들이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비난하지만 나는 국민들이 아니라 당시 지도자들이 샴페 인을 터뜨리고 싶어 안달이지 않았나 싶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국은 OECD 가입을 위해 노력했고 가입에 흥분했었다. 그것은 당시의 지도자들의 의지로 추진된 것이다. 실제로 경제의 하부구조를 발전시키고 개선하 는 데 주력하기 보다 수치상의 문제나 혹은 외형적인 어떤 모습들에 집착해 사태를 정확히 보지 못하게 만 든 것은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나는 그 지도자들이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 취하려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만은 아직 OECD에 입하지 않았어도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다. OECD 가입이니 1만 달러니 하는 것으로 국민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정치적인 쇼일 수는 있지만, 한 나라를 책임지는 지도자들이 할 일은 아니다. 따라잡기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자각, 그럴 때 더욱 경제 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지도자의 자각이 있었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 5년의 치적이 IMF로 사라 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차입경영에 의한 과다한 기업채무, 과다한 외채, 기형적으로 단기차입이 많았던 외채의 구조, 그리고 결국 비효율적인 것으로 드러난 무모한 투자 이런 것들은 한국의 경제를 멍들게 만들었다. 그것은 노태우 전대통령에 이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집중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다. 왜 과거 국민들이 이룩해 놓은 성과를 정치적 홍보물로 이용하는 데만 골몰했는지 모를 일이다. 일본이 서구를 따라잡겠다는 서구화, 산업화를 시작한 역사는 이미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시작해서 1백년의 역사가 넘는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본격적인 서구화, 산업화를 시작한 역사는 60년대부터 시작해 이제 40년에 불과 한 세월이다. 1백년 가까운 격차가 있었던 데서 이제 3∼40년만에 20년의 격차로 줄여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걸 왜 부정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이는가. 사실 일본의 GNP는 4조 1920억 달러(97년)로 4000억 달러에 불 과한 한국의 10배 가까이 된다. 1인당 GNP도 3만 달러 수준으로 현재 한국의 5배 정도다. 이런 일본을 한국 은 수치적으로 따라잡으려고 한다. 한국사람들은 일본을 라이벌로 본다. 세계경제, 아시아경제에서 함께 경 제를 발전시켜가야 할 동반자, 친구의 측면도 있건만 결코 친구로는 보지 않는다. 이런 의식의 차이는 물론 역사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은 이런 라이벌의식만 부추기기도 한다. 경제 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이다. 라이벌 의식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라이벌 의식만으로는 사태가 정 확히 보이지 않는다. 한국이 이본을 라이벌로 보는 것이 일면 타당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전제에 서 나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한국은 일본과만 경제전쟁을 하려고 하는가 일본만 라이벌인가 그래서 나 는 한국인들이 극일을 준비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한국인들은 극미는 준비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다. 아 마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미국을 이겨라고 대답할 거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은 다르다고 할 것이다. 일본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도 라이벌이고 경제 전쟁의 적이다. 나 는 일본이 오늘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세계 1위의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정신없이 뛰었기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도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목표를 더 크게 작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할 단계다. 일본은 한국을 견제하고 미국은 한국을 도와준다는 순진한 생각까지 하는 게 한국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것 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생각이다. 미국을 따라잡을 생각을 할 때 일본과 협력할 일도 눈에 보이게 된다. 한 국은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여온 이래 목표를 일본에다 뒀다. 어떻게든 일본의 경제력을 따라잡으려고 노 력해 왔다. 그래서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대만과 홍콩에 추월당하고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등이 바짝 한국 뒤를 따라오고 있다. 한국은 일본을 목표로 하고 경제개발을 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 는 세계경제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다.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석유화학은 한국의 5대 주력 수출상품이 고 그것은 일본의 5대 주력 수출상품과 일치한다. 그러나 한국은 후발 주자다. 후발 주자는 유리한 점과 불 리한 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외형적인 주력 산업의 유사성만으로 앞서 출발한 나라를 따라잡는 것은 한계 가 있다. 그에 앞서 출발한 나라도 전력을 다해 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리한 점도 있다. 몇몇 분야를 중점 관리하여 한 분야씩 차례로 따라잡을 수도 있다. 또한 기존의 앞서 출발한 나라가 커버할 수 없는 분 야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동일한 분야에서도 차별화할 수도 있다. 그것은 한 업종 내에서도 국제적인 분 업의 양상으로까지의 발전시킬 수도 있는 노력이다. 일본이 주력 수출상품을 개척해온 것은 이본을 둘러싼 해외시장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기술력으로 뒷받침되어 왔다. 한국은 한국을 둘러싼 해외시장 환 경 속에서 자신의 발전 전략을 짜야 한다. 여기서는 일본 따라잡기의 시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한국의 경 쟁자가 일본일 수는 있지만 일본 하나만이 경쟁자도 아니고 일본만이 한국의 시장도 아니다. 오히려 일본을 공부하는 만큼 대만과 홍콩 싱가포르를 연구했다면 지금 아시아의 용으로서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 이다. 일본 따라잡기가 아니라 일본 건너뛰기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 일본을 이기겠다는 생각에 만 파묻혔을 때 좁아지는 시각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극일과 극미를 동시에 이룰 묘수는 하나다. 그건 극기다. 자기 자신을 알고 남을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OECD 가입 과 IMF를 거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와 비하를 동시에 겪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진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또 한국의 잘못을 정확히 시인하고 고치려는 사람도 드물다. 남들 얘기를 하는 게 아니 다. 바로 한국인 스스로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그렇게 되면 2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리고 일본에서 배울 것은 확실하게 배워라. '학일'을 목표 로 세워라. 일본이 이만큼의 성장을 이루고 또 휘청하기도 하는 이유를 배워라. 아 우리는 저래야겠구나, 저 건 하지 말아야겠구나 하고 제대로 배워보라는 것이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수상은 Look the east 라며 일 본을 배워라고 주장했다. 한국도 일본을 한 번 선입견을 버리고 잘 살펴보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나서 '용일 '하라는 거다. 일본과 손을 잡고 세계시장에 나가자는 것이다. 잘라 말하면 일본기업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한국기업과 일본기업이 손을 잡으면 상당한 경쟁력이 생길 수 있는 분야들이 많다. 일본도 한국이 필요하다. 나는 한보 사태를 보면서 한보 사태 전에는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5년으로 생각했었는데 다시 20년의 차이 가 난다고 수정하기로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근거는 바로 지도자들의 마인드의 차이라고 언급한 것이 다. 경제에서든 정치에서든 대한민국이 한보 사태에서 물의를 빚은 지도자들 밖에 갖지 못한다면 20년의 격 차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변화를 강제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다. 중요한 것은 IMF와 같은 외부의 자극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다. 국민들이 그런 변화를 즉, 지도자들의 마인드의 변화를 강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지도자들의 마인드가 변한다면 한국과 일 본의 격차는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좁혀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내가 강연을 가면 한국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격차가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그리고 20년 하면 와하고 똑같이 놀랄 것이다. 그때 그래 20 년만 지나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생각할 수 있는 분들이 앞으로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 람이다. 그리고 20년 후 일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제대국 코리아를 기대한다. 여자들만 못한 한국 남자들 낯선 한국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의 하나가 한국여자들이 예쁘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 아홉 젊은 나이였으니 여자가 먼저 눈에 띈 건 당연했을 것이다. 그 당시 일본거리에서 보는 일본여자들은 주로 무채색이나 중간색 계통의 옷을 많이 입고 있었는데 한국여자들은 노랑, 빨강 같은 원색 옷들을 많이 입고 있었다. 무채색이나 중간색은 그냥 스쳐 지 나가게 되는데 원색 계열의 색깔은 아무래도 눈에 자꾸 들어왔다. 여자들의 얼굴도 몸도 일본과 는 달리 자꾸 눈에 띄었다. 아마도 몸매에 자신이 있어서 그런가? 하여튼 그런 옷들이 잘 어울리 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지금 와서 옛날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촌스럽구나 하는 느낌을 갖겠지 만 그건 세월이 흘러 패션 감각이 변하니 그런 것이고 그 당시는 세련되고 예쁜 여자들이 많은 나라구나 하는 느낌을 이국에서 온 청년은 갖게 되었다. 유행에도 민감해 유행에 따라 온 거리가 똑같은 옷으로 물결치듯 그려지는 것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참 예쁘구나 이렇게 겉에서 보는 느낌만을 가졌던 여자들을 일 속에서 많이 겪게 되었다. 한국지사에도 한국 여성들이 여러 명 있었고 지금까지 많은 직원들이 거쳐갔다. 그러면서 한국여자들에 대해 어떤 일반적인 평가를 갖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여성들은 아주 우수하다. 남자들보다도 훨씬 낫 다. 일에 대한 욕심도 있고 열정도 뒤지지 않는다. 이건 내 생각만이 아니다. 대통령께서도 나와 의 인터뷰 중에 웃으면서 아무래도 세계무대에서는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앞서간다고 농담을 하 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 유행했던 말 중에 전쟁이 끝난 후 질겨진 것은 양말과 여성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어려운 전후 상황에서 일본여성들이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상 황을 보여주는 말이다. 일본여성의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말이다. 일본여 성의 억척스러움이 전후 복구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억척스러움이 나 강인함에 있어 한국 여성들이 일본여성들보다는 한수 위다. 한국여성들은 한마디로 대단하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한국 여성들이 강인한 것은 어머니로 살아온 세월 과 관계가 있지 않나 한다. 한국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 일제시대 때는 징용 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월남전도 있었다.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죽 었어도 남은 가족들이 있다. 그 자식들과 노부모들 그리고 가정을 책임지고 생활을 꾸려가야 하 는 것은 여자들이었다. 또 남자들이 살아남아 있었다고 해도 생활을 혼자서만 책임지기는 힘들었 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가장이 사라진 공백을 메워야 했다. 한국의 여자들은 온 실 속의 화초로 살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강인한 생활력은 대를 이어 딸들에게도 물려 진 것 같다. 이런 한국여성의 강인함은 경제적인 풍요를 이룬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한국여성들 은 남자들과도 잘 어울리고 성격도 참 좋다. 일을 맡겨도 야무지다. 올림픽이나 국제대회에 나가 도 여자들이 메달을 따는 일이 더 많다. 일본도 그런 면이 있긴 하다. 일본도 나라가 험한 꼴을 많이 겪어 그런지... 하지만 일본 여자들보다 한국여자들이 훨씬 잘하니까 한국 남자들이 여자들 한테 밀린다는 얘기를 더 듣게 돼 있다. 어떤 사람은 남존여비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 살아남으려 면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난 꼭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 한국여성이 그렇다 고 해서 무례하거나 남자를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용인된 자연스러운 틀 안에서 그렇게 야무지게 일을 하니까 더 보기가 좋은 것이다. 반면에 한국남자들은 자신의 직급 에만 너무 안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부장이라는 직책은 업무 범위와 책임이 넓어졌다는 뜻 이지 신입 사원 때의 패기는 던져놓고 적당히 자리 보전에만 신경써도 되는 자리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대충 하루 종일 도장하나 찍는 일밖에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반면에 여성은 다르다. 어떤 때는 회사에서 여성들이 싸움닭으로 변신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회사에서도 매너리즘에 빠진 직속 상사의 면전에서 항의를 해 나까지 곤 란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한국여성들의 근성조차 맘에 든다. 내가 한국여자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 각오를 한 번 들으면 짐작을 할 것이다. 정년이 가까운 나는 회사를 그만 두는 경우 한국에서 사업을 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만일 내가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면 남자들은 하나도 안 뽑고 여자들만 뽑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일에 있어 프로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란 조직은 아직 여자가 사장이나 이사 등 높은 직위를 맡기에 는 너무 경직되어 있다. 군대처럼 남자들만의 룰로 짜여져 있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미 능력 있는 여성들이 진출한 지 오래다. 그런 진출은 조직의 변화로 인해 앞으로 더 활발해질 것이다. 도멘에는 아직 여자 부장이 없다. 그러나 당연히 도멘에도 여자부장이 곧 생길 것이다. 한국여자들이 그런 근성으로 맹렬하게 일을 한다면 부장이 아니라 여성 한국인 지점장도 나올지 모른다. 한국남자들도 하지 못한 일을 먼저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남자들은 조금 긴장해야 할 것 같다. 포철 유회장의 가슴속 이야기 한국과 일본은 협력을 해야하지만 역시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서는 따라잡아야 할 경쟁자다. 내 가 협력을 강조할 때는 한 면만 보지 말라는 얘기다. 그래서 오히려 일본 따라잡기가 효율적으로 되지 않는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얘기다. 포항제철소가 건설되고 난 후 박태준 회장은 광양 제철소 건설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 업계에서는 반대를 했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냐는 것이었 다. 얼마 전 광양제철소에서 일본기업인들과 한국 중견기업인들이 만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현재 포철의 유상부 회장이 만찬을 주체했는데 만찬 시작 전에 인사말을 했다. 인사말은 이런 내 용이었다. 여기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싶지만 광양제철소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하는 역사를 좀 얘기하고 싶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포항제철을 성공적으로 준공하고 난 후 광양제철소를 하겠다고 했을 때 일본정부는 반대를 했습니다. 세계철강 수요를 생각할 때 그리고 한국의 입장에서 추가적인 제철소가 필요하겠느냐는 것이었지. 당시 OECD에서도 반대를 했습니다. 철강생산량이 과잉이라는 마찬가지의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시 상황만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고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포항제철 건설 당시에는 일본과 계약을 해서 일본 의 협조 속에 건설을 했지만 이 광양제철소 건설에는 협조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용광로 설비는 영국과 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부 생산 설비는 오스트리아와 계약을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당시 나가노 일본 경단련 회장이 나섰습니다. 이렇게 하면 한국 일본 둘다 나빠진다. 가까운 나라끼리 이럴필요가 없다. 둘 다 손해다. 그래서 나머지 압연 시설은 일본의 신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과 계약을 했습니다. 광양제철 건설에서도 보듯이 일본 경제계와 한국 경제계가 어려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를 극복하고 지금은 오늘처럼 여기 계신 일본기업 인들과 한국기업인들이 공통의 관심사를 놓고 한일이 어떻게 서로 협력할 수 있는가 하는 회의를 할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나는 유 회장의 연설을 들으면서 오랜만에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 놓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유 회장은 이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모모세 씨가 계십니 다. 작년에 귀중한 한국 체험을 책으로 펴내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아 마 한국이나 일본 모두에게 귀중한 경험이라는 것을 독자들이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 다. 모모세 씨는 포철 건설 때부터 좋은 친구였고 오래된 친구입니다. 포철 건설 후에 일본에 있 다가 다시 한국에 도멘 지점장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과 나는 지금까지 친구였고 앞으로도 친구 일 것입니다. 한일 관계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려운 시기도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만 길게 봅시다. 당시 광양제철소 공사의 규모는 포철에 비하면 작은 것이었다. 도멘도 참여를 했다. 철강에 가스를 주입하는 가스탱크 건설과 관련된 일이었다. 미쓰비시를 비롯 해 몇 군데가 부대 설비와 관련해 참가했다. 당시는 일본에서 대한경계론이 높아진 시기였다. 부 메랑 효과를 얘기하던 시절이었다. 박 회장은 일본에 오랜 친구들이 많았다. 아마 그 친구들을 통 해서도 박 회장은 광양제철소 건설에 반대하거나 회의적인 얘기들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 회장은 일본 도움을 받지 않아도 할 수 있다. 는 의지로 추진했다. 지금 광양은 잘 가동되고 있는 훌륭한 회사가 되어 있다. 나는 일본 따라잡기에만 몰두하는 것이 문제라고 얘기했지 일본 을 따라잡지 말라고 얘기한 것은 아니다. 한국은 때로 무리한 투자를 하기도 한다. 한국의 수출 주력 상품은 조선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등으로 일본의 수출 주력 상품과 일치한다고 지 적했다. 그러나 일치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닐 수 있다. 경쟁자들이 강한 만큼 어려운 싸 움의 현장이긴하지만 많은 가능성을 갖고있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이 하니까 포기하라는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이 앞서 있으니까 따라잡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얘기 아닌 것이다. 석유화 학이든 조선이든 반도체든 분야가 같더라도 한일간에 분업적인 협력이 가능한 것들은 많다. 또한 다른 생산품을 만들 수도 있다. 똑같은 상품으로 부딪치는 것보다 효율적인 경쟁은 많다. 포철에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오늘의 한국 상황을 보면서 한국의 투자가 무리한 것이었고 그것이 오 늘의 위기를 만든 원인이라는 지적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무리한 투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이 무리한 투자라 하더라도 1조 달러에 이르는 한국 만한 설비를 갖춘 나라 더욱이 그것들을 운영할 인력과 기술력 경험을 갖춘 나라는 아시아에선 한국과 일본뿐이다. 난국을 극복하는 일은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의 경제구조 속에서 한국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는 일에 다름아닐 것이 다. 한국에게 일본은 협력해야 될 대상이다. 동시에 경쟁해야 될 대상이다. 광양제철소에서 유 회 장이 했던 오래 참았을 속내 이야기가 여운을 남긴다. 내가 본 대우그룹과 삼양사 한국사람들은 내게 한국기업들 비판도 하고 그러시는데 괜찮게 생각하시는 기업 없습니까 하고 묻는다. 만나는 기업인들이야 많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회사와 거래가 있어야 깊은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이니까 나로서는 그런 일반적인 얘기를 할 입장은 아니고 거래하면서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경우만 얘기해보겠다. 나는 삼양사를 좋은 회사라고 생각했다. 삼양사는 아마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기업 중 하나일 것이다. 현재의 김상하 회장은 상공회의소 회장으로도 유명한 분이다. 해방 이 후부터 회사 이름이 그대로 남아서 성공하고 있는 기업들 중 이름이 알려진 기업은 아마 삼양사 나 삼성 같은 경우 정도가 아닐까 싶다. 옛날의 화려했던 것에 비하면 그 동안 눈부시게 성장한 기업들이 많지 때문에 근년의 삼양사는 상대적으로 기업 규모도 작고 눈이 잘 가지 않는 회사긴 하지만 이 회사는 2세 경영으로 이행중인 상태가 아니라 벌써 3세 경영체제를 준비중인 오래된 회사다. 하지만 다른 대기업들에서 보는 형제들간의 경영권 다툼이라든가 신경전 같은 걸로 말이 오르내리는 회사가 아니라는 점도 좋아 보인다. 우리회사 도멘이 삼양사와 거래를 시작한 것은 지난 86년도 부터다. 삼양사는 섬유 쪽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거래는 섬유 쪽 관련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삼양사는 일본기업 중에서 미쓰비시 미쓰이하고만 거래를 해왔다. 내가 삼 양사와 거래를 하고 싶다고 해서 처음부터 사장님이나 회장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담당자나 부장부터 만나게 된다. 만나는 과정에서 참 이 회사라면 거래를 정말 하고 싶다 는 인상을 강하 게 받았다. 거래는 서로 합리적인 조건 서로간에 이익이 되어야 성립된다. 그래서 거래 협상을 한 다 하더라도 인상이 좋다고 해서 꼭 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오랜 비즈니스를 경험한 나로서는 처음에 한번 만나면 아 거래가 되겠다 거래를 할 만한 기업이다 아니다. 하는 판단을 가지게 된 다. 그런데 거래 때문에 그 회사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 분들의 태도는 지금은 거래가 잘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업은 하루이틀 하는게 아니다. 설사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닌가. 하는 것으로 일관했 다. 한두 차례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사업이다. 오늘 안 돼도 꾸준히 관계를 하다 보면 내 일 아니 모레는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래는 설사 맺어졌다. 해도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나는 거기서 오랫동안 사업을 해온 어떤 기업의 장기적인 안목이나 뿌리 같은 걸 느꼈다. 또 직원들의 태도 하나하나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해온 역사 깊은 기업을 운영해 온 경영자의 철학이랄까 하는 것들이 철두철미하게 배어 있다는 인상을 깊게 느꼈다. 결국 삼양 사와는 거래가 진행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우리 회사는 삼양사가 수입해야 하는 섬유원료 부분에서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회사와 거래하게 되는 것은 판매 를 하는 회사 입장에서도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거래를 하면서 좋은 인상을 받은 기업 중 또 하나가 대우그룹니다. 대우그룹은 70년대 사업을 시작할 때 도멘과 거래를 시작했다. 60년대 후반 당시 대우가 출발한 것은 섬유 쪽이었고 나는 도멘에 있었다곤 하지만 포철 쪽을 담당했으니 분 야는 달랐다. 하지만 대우는 곧 자동차 조선 등으로 진출했고 대우는 도멘을 통해 자동차 생산 설비를 수입하기도 했다. 나는 대우의 김우중 회장을 만나거나 거래를 하면서 그 회사는 좀 잘됐 으면 좋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인상을 주는 회사라야 잘되는 법이다. 김우중 회장은 이런저 런 자리에서 도멘과의 거래가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 도멘의 도움이 있어서 오늘 이렇게 성장 할 수 있었다.고 얘기를 하곤 한다. 인사치레의 말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의 대우는 예 전의 대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그런 성장에는 작은 도움 하나하나를 잊지 않고 고마워할 수 있는 태도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대우에도 아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가면 편안하게 사람들을 만난다. 대우는 다른 기업들이 친인척으로 회사를 나누는 것과는 달리 전문 경영인들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회사 직원들도 누구나 나도 열심히 하면 올라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진취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인지. 좁은 국내시장 에 머물지 않고 해외로 해외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분위기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생긴 분위기라면 좋은 것이다. 한 번은 대우와의 거래 때문에 대우를 방문한 도멘 본사의 직원이 놀라서 전화를 해왔다. 과장급 직원이었다. 제가 담당자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요. 김우중 회장이 자기 관심 사항이라고 해선지 불쑥 담당자들끼리 얘기하는데 들어왔어요. 그 과장은 담당자 회의에 그룹 회장이 관심을 보이고 끼여드니까 놀래서 나에게 즉시 보고를 한 것 이었다. 그런 태도 역시 좋은 것이다. 그 거래는 잘되었다. 대우도 삼양사도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으로 안고 있을 터이지만 아마도 그런 분위기라면 더 뻗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4 시작이 반이다 와 백리 길도 구십 리를 가야 반이다 의 차이 결국 만년 부장으로 정년을 맞는 나 나는 올해 말로 정년이 된다. 어느 땐가부터 나는 정기 인사철이면 혹시나 하고 이사 승진을 기다렸는데 역시 그냥 지나가 버린게 벌써 몇 해째인지 모른다. 섭섭하지 않을 리 없다. 다른 지 역에서 근무했던 동기들은 벌써 이사로 승진했는데 도멘은 한국에서의 경험을 무시하나 하는 생 각도 여러 번 했다. 또 동료들이 그런 말을 해 올 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보다 더 섭섭하다 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부장으로 정년을 맞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 서 말하는 만 년 부장이 된 것이다. 한국 같으면 만년 부장이 되면 회사에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 다. 얼마 전에 한국의 한TV 프로그램 중에 만년 과장인 50대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그런 풍경은 보기가 드물다. 그래서 그 프로 는 코미디 같은 느낌을 준다. 한국에서 50이 되어서도 과장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본 일이 없으니 까. 하지만 일본에는 만년 부장이 많다. 부장까지 승진하지 못하고 차장으로 정년을 채우는 경우 도 많으니까. 일본에서는 40대 중반의 과장들도 많다. 승진이 일단 늦은 것이다. 그리고 회사원의 꽃 이라고 부르는 이사의 수도 한국에 비하면 대단히 적다. 삼성그룹의 경우 97년까지 85조 매출 이사가 130명이나 되었는데 90년 매출이 209억 달러 한화로 약 25조에 달하는 일본의 소니사는 이사가 겨우 14명이 있을 뿐이다. 부장이라는 자리도 회사내에서는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직책이 다. 경영진은 아니지만 관리자라는 지위에 오른 것이고 그 분야에 서는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 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니 그 부장이라는 직책에 있다가 정년을 맞는다고 해도 부끄럽거나 추한 것은 아니다. 한국 같으면 그 나이 되도록 승진을 못했으면 직장에서 나가라고 하는 얘긴데 그것 도 못 알아듣고 그 자리에 눌러 있다니 하는 눈총을 받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경우는 입사 후 보 통 3년 정도 지나면 대리로 승진하고 다시 3년 정도면 과장이 된다. 그러니 30대 초반이면 과장 이 되는 것이다. 나이 40이면 차장 정도. 되는 사람이 많고 40대 중반이면 부장 빠르면 40대에 그 리고 늦어도 50초 중반에는 이사가 된다. 이게 대기업의 엘리트 사원들이 밟게 되는 일반적인 승 진경로이자 인생항로이다. 지금은 아무 기업이나 들어가려고 하지만 예전에는 한국의 대학생들은 봉급도 세고 승진 연한도 짧은 기업을 선호했다고 한다. 입사 3년 후에 대리를 시켜주는 기업들 을 선호했다고 한다. 한국은 직급에 거품이 심하다. 도멘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평사원이던 한 한국직원이 내게 와서 저 거래처에서 제가 상대하는 사람이 부장급인데 제가 말발이 먹히려면 저도 과정 정도는 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과장 명함 하나 파주십시오 하는 것이다. 내 심 우습기도 했지만 직급 좋아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일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모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자네 맘대로 해 문방구에 가서 과장이나 부장 명함을 파라구. 라며 대답했다. 좋아하는 그 친구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대신 자네가 부장이나 과장만큼 일을 해야되는 거야 알았지. 순간 그 친구는 망설이는 표정을 보였다. 내가 부장이니까 나를 대신할 수 있게 완벽하게 일하라는 뜻이었는데 그 친군 아마 부담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직 급은 직급만큼의 책임이 있는 것이고 그 직급에 걸맞는 능력을 갖춰야하는 건 상식이다. 과장이 부장으로 승진을 하면 그 당사자보다 아랫사람이나 거래처 사람이 당연한 일이야 라고 말해 줘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인사라고 말할 수 있다. 중소기업에서는 서른을 갓넘은 부장도 흔하게 만난 다. 하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관리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물론 나이가 지긋하고 프로의식을 가진 부장들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기업은 직급 인심이 확실히 후한 편이다. 한국사람들이 타이틀에 민감하다는 것을 경영자들도 아는 것일까 그러나 한 국사람들은 자존심이 세다고 할까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쉽 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목소리도 크다 하지만 목소리는 목소리고 일은 일이다. 일의 겉과 속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목소리가 작으면 손해를 본다고 알고 있다. 어떻게든 자 신은 더 큰 일 더 좋은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비해 일본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일본에서 과일을 실은 트레일러가 운전 부주의로 전복된 사 고가 났었다. 그런데 그 운전자는 회사에 전화를 해서 사건을 보고하고 그 자리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이 일본사람이 잘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신우일신하는 마음으로 다시 열심히 일을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람이 자신의 일과 그 책임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일본인들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자기 일에 대한 책임의 식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 하려고 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 선을 다하려고 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인사고과가 나빠 번번이 승진에서 탈락해 이사가 되지 못한 한국기업의 부장이 정년퇴임까지 있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아서라도 이사 자리로 옮기려고 한다. 아예 회사를 차려 사장이 되기도 한다. 나처럼 주변의 비아냥거림에 도 불구하고 만년부장으로 꿋꿋하게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시는 한국인 부장님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 어쩌면 한국 독자들은 만년 부장이니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도멘에서 최선을 다했고 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시작이 반이다와 백 리 길도 구십 리를 가야 반이다 의 차이 얼마 전 일본에서 14대에 걸쳐 도자기를 만들어온 심수관 씨가 한국에 온 적이 있다. 그의 선 조가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후 약 4백 년 만에 다시 한국을 온 것이다. 심수관 씨는 일본에서도 정평이 난 예술인이다. 또 4백년간 도자기만 만들어온 가원의 후계자인 것이다. 그의 작품전은 대통령이 참가할 정도로 성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좀 우스운 가정이기는 하지만 그의 조상이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오늘의 심수관 씨가 도예가가 됐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1대 심수관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일본땅으로 끌려온 것이니까 좀 어폐가 있을지는 모 르지만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골자만 이해해주면 좋겠다.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라는 게 솔직한 내 생각이다. 한국에는 실제로 이렇게 대를 이어 기술을 전승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기술인을 천대했다. 사농공상이라고 해서 기술인을 대접하지 않았다. 또 도 공들도 자신의 이름이 알려져 조정에 부름을 받는 것을 꺼려했다. 수공업자 가운데 어떤 직업은 천민취급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한국 풍토에서 심씨 일가가 계속해서 도자기를 만들었을지 는 의문이 들기도 한 것이다. 심씨 일가가 유명 해져서 혹시 돈이라도 벌었다면 양반 족보를 사 고 자식들을 공부시켜 출세시키는 데 골몰했을 것이다. 이 고생 이 천한 짓은 우리 대에서 끝내 자 고 작심했을 것이다. 최근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나이 많은 분들은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 서 고민이라고 하질 않는가. 일본 도쿄 아사쿠사지에 가면 에도시대의 맛을 잇는다 는 2백년 된 덴뿌라집이 있다. 이 집 근처에는 이와 같은 백년 넘은 덴뿌라집이 여럿 있고 손님들도 많다. 일 본에는 이처럼 몇 대째 우동집 메밀국수집 과자집 등을 해 온 가게들이 많다. 교토에 있는 어떤 집은 2백 년 동안 불이 꺼지지않고 가다랭이 국물을 우러내고 있는 집도 있다. 200년 동안 우려 낸 국물맛을 상상해보라. 또 이런 집들은 대부분 증조부 등 선조들이 시작해서 그 후손들이 가업 을 잇는 것이 특색이다. 아들이 없으면 데릴사위를 들여서라도 그 집의 전통을 잇는다. 이런 것은 음식뿐만 아니라 다도 노래 꽃꽂이 등 다양하다. 레이제이 가는 일본 천황가에게 시가를 가르치 는 일을 4백 년 간 계속해왔다. 이런 식으로 한 분야에 최고의 직능을 인정받으면 그 가문은 이 에모토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대접을 받기 위해서 사람들이 몇 대째 같은 일 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몇백 년 간 한 우물을 파라 똑똑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라는 속담처럼 장인 정신을 높이 치는 풍토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왔다. 일본을 통일시킨 장군으 로 히데요시 이에야스를 얘기하지만 같은 시대에 가마솥 만들기의 천하제일은 쓰지오 지로 다도 에서는 센리규가 천하제일 이렇게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 장인 정신을 막부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인정해왔다. 또 그런 사람이 일본의 신화를 이루기도 했다. 노일 전쟁에 참가한 한 물리학자는 연 구에 몰두하느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노일전쟁의 육군대장인 노기장군의 이름도 몰랐고 심지어는 노일전쟁이 시작된 것도 몰랐다는 게 미담으로 전해지고 2차대전이 아무리 치열했어도 엔지니어 들은 전쟁에 동원하지 않았다는 게 일본다운 정신으로 전해지는 사회다. 혼다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 회장도 자전거 수리공 출신이었고 파나소닉의 마쓰시다도 전기 수리공 출신이었다. 하 지만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은 새우는 뛰어도 강을 건너지 않는다 라는 속담처럼 자신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꽉 짜여진 일본사회의 구조도 구조지만 일본인들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 장인정신을 이어왔다. 이 장인정신은 일본의 근대화의 기초가된 것은 물론이다. 나는 이것 을 프로의식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한국사람은 대부분 프로의식이 없다. 한국사람이 잘못돼서 그 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30여 년 간 산업화 과정 속에서 빨리빨리 하는 식으로 살아왔기 때 문일 것이다. 그런 것이 효과를 거두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빨리빨리 하다보니 역효과로 나타나는 것이 대충대충 이다. 그런 식으로 만들던 제품들은 이미 동남아나 중국에서도 다 만들 수 있다. 가격도 그 쪽이 훨씬 저렴하다. 한국의 반도체나 철강은 다르다. 그 쪽은 프로 의식이 있어 보인다. 일본의 설비와 기술을 가져와 일본보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다. 세계 1 위라는 칭호에 걸맞는 무엇이 있다. 그것은 프로의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일본설비를 그대로 도입해서 일본 원료로 제품을 만들었는데 왜 일본시장을 뚫기가 어렵냐 라는 중소기업 사장을 만났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샘플을 몇 개 보니까 일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제품이었다. 일본에서 나온 것보다 더 성능 좋은 제품을 만들기 보다는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제품을 그대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일본시장 아니 세계시장을 뚫을 수가 없다. 한국 인들이 일본설비와 일본기술 일본원료를 가지고 제품을 만든다고 할 때 첨가해야만 하는 것이 있 다. 그것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근성이다. 그 근성이 바로 프로의식이다. 그 프로의식이 있을 때 끝없는 궁리 속에 더 좋은 기술이 개발되고 설비도 개량될 수 있다. 원료를 보는 눈도 좋아진다. 나는 한국의 중소기업을 많이 돌아봤다. 사장은 물론 말단 직원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 나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 프로의식을 가진 분들은 생각보다 적었다. 나는 중소기업 사장을 만 날 때 작업복을 입고 있으면야 여기는 됐다. 이런데랑은 거래를 해도 되겠다. 라고 생각한다. 그 런데 한국의 중소기업 사장 백 명을 만나면 한 두세 명 정도만 작업복을 입고 있다. 일본의 중소 기업 사장들은 백이면 백 다 작업복을 입고 있다. 한국의 사장님들은 작업복을 입고 있으면 창피 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건 프로의식이 부족해서다. 내가 가도 아예 자기 방에서 나와 보지 않는 사장들도 있다. 일종의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왜 사장실은 그렇게 넓 은지 모르겠다. 대기업의 사장실과 거의 맞먹는 분위기다. 죄송한 얘기지만 이런 식으로 기업을 경영하니까 근로자들이 파업을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까지 든다. 일본의 사장은 자기가 작업복을 입고 기계도 만지고 물건도 만드는 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자기 직원들의 아들 생 일까지 기억한다. 같은 공장에서 이삼십 년을 함께 근무했으니까 그런 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스트라이크가 드물다. 사장이 같이 일하니까 직원이 한눈을 팔 수 없는 것이다. 사장 이 프로니까 직원들도 프로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인정해주는 사회가 일본이다. 일본에는 잇쇼겐 메이 라는 말이 있다. 하나하나에 목숨을 바치라는 뜻이다. 요즘은 야쿠자도 쓴다고 해서 의미가 혼탁해져 있지만 원래는 좋은 말이다. 이 말에 일본사람들의 일을 대하는 태도가 한마디로 들어 있다. 한국인에게 이런 일본인의 일을 대하는 대로 적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 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그 자부심으로 생활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한국의 중소기업 은 물론 한국경제가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흔한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 라 는 우리 속담과 90리를 오면 반 온 것이다 라는 일본 속담은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말해주는 대 조적인 말이 아닌가 싶다. 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하면 된다 는 정신으로 맹렬하게 산업 화를 향해 돌진해왔다. 그것이 오늘의 발전된 한국을 만든 힘이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은 불가 능도 가능케 만든 한국의 불굴의 도전정신을 상징해주는 말이라고 나는 느낀다. 일본의 요즘은 그런 정신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90리를 가면 반 온 것이다 라는 일본 속담을 새겨야 할 시기가온 것 같다. 프로정신 장인이식 한국은 그런 것들로 완성된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럴 때 내가 좋아하는 냉면집이나 설렁탕 집들이 아마 몇백 년 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를 해본다. 북한의 인공위성 미사일 얼마 전에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동으로 한일 양국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내가 미사일 발 사 소동이라고 말한 것은 일본적 시각이다. 북한은 인공위성을 발사해 성공적으로 궤도에 안착시 켰다고 발표했으며 미국은 궤도 진입에 실패한 인공위성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반면 일본은 처음의 시각을 그대로 유지 미사일 발사 시험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놀란 것은 아마 한국보다도 일본이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은 휴전선으로 북한과 대치하는 긴장 상태에 익숙해져 있지만 아무 래도 일본은 한 발 뒤에 있다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미사일 발사 소동은 아 북한이 거기에다가 원자탄을 장착해 쏘면 바로 일본 열도 곳곳이 폭격 대상이 되는 판이니 일본이 흔들 리지 않을 수 가 없었을 것이다. 인공위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공위성을 쏠 기술이면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니까. 북한은 지금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 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미사일 인공위성 발사 소동을 보면 먹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 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세계의 흐름에서 완전히 주변부로 밀려 있는 나라가 자기의 건재를 알리 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북한에 관심을 가진 나라라야 중국 소련 미국 일본 그리고 한국 정도가 아닐까 북한 정치에 문외한인 나로서야 더 이상 어떤 말을 할 수가 없 다. 식량난 속에서도 미사일 인공위성 개발에 나서고 있는 북한을 보면 1930년대 일본 군부의 맹 목적인 정책들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이번 인공위성 발사를 두고 한국에는 그런 기술이 없다고 얘기하는 한국인들이 많은데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내 생각에 한국은 만들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인공위성 새로 만드는데 돈이 얼마가 드는가를 계산해보자. 그런데 그걸 국내에서 만드는 게 그 렇게 급하지 않고 또 미국이나 유럽에 부탁해서 하는 게 돈이 싸게 든다면 외국에 부탁해서 발사 해야 한다.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 한국이 수입하는 물건들 중에서 한국이 꼭 못 만들어서 수입 하는 게 아닌 것들이 많다.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는 게 한국 내에서 만드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 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건 수입하고 다른 걸 만드는 게 더 수익성이 높고 현실정에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공위성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인공위성 개발은 급한 일이 아니니 까 그 돈은 당장 급한 다른 좋은 데 쓰고 인공위성은 사서 하자 이게 나는 균형잡힌 사고라고 생 각하고 한국에는 이런 균형잡힌 사고가 있는 게 좋은 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북한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북한이 서방국가에는 물론이지만 중국에 부탁한다고 해서 중국이 들어줄까 나는 좀 회의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이 그런 일처리 방식을 싫어한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 인공위 성 원자탄 같은 것들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다 공개되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나라 는 많을 것이다. 한국도 마음먹고 거기에 주력한다면 오래지 않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국이 원자탄을 개발했다고 해서 지금 당장 어떤 실익이 있는가 국민적 자존심을 세우는 데는 도 움이 될 지 모르지만. 외교문제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엄청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비행기 도 한국이 못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두 대 만드는 것이라면. 하지만 그걸 만들었을 때 어떤 시장을 파고 들 수 있나 하는 걸 생각해봐야 하는 게 자본주의이다. 그런 계산 없이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만든다 그건 폐쇄국가에서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선택하는 방법이다. 만드는 단가도 높고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도 판로가 보장되지 않을 때 거기에 국가의 역량을 우 선 순위로 배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 발상에서 비행기를 수입하고 있다. 처음 에는 날개를 만들어 납품하고 그 다음에는 설계를 하고 뭐 이런 식으로 해서 비행기를 완전 자급 자족으로 제작하겠다는 발상도 있긴 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지만 그것은 경제성이 없다. 상업용이 냐 군사용이냐 또 시장성은 있느냐 이런게 감안되어야만 시작 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라면 할 수 있고 또 그런 방식으로 추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내 눈에 그게 북한의 딜레마요 비극으 로 보인다. 식량난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비극이 아니 고 무엇인가 일본이 30년대에 제로 전투기를 만들었다. 그걸로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한국사람들 중에는 왜 아직도 그 당시 일본처럼 비행기를 만들지 못하느냐 하고 울분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 다. 하지만 그때 일본은 지금 북한과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엉뚱한 목표에 미쳐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미국하고 못 살겠다 그런 판단으로 대륙 침략에 진주만 폭격에 나선 것이다. 그러면 제로 전투기를 만들었다고 미국에 이길 수 있었을까 미국과 싸워야 했을까 그 당시 군부의 판단 은 광적인 것이다. 그 판단으로 인한 일본 국민들의 고통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건 국민들이 원했던 것이 아니다. 제로 전투기를 만들기 위해 투자한 돈을 다른 데 투자했다면 국민들은 더 행복했을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인공위성 개발에 대해서도 30년대 일본 군부에 말한 것을 똑같 이 얘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의 우선 순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는 지도자를 갖고 있는 국민은 불행해진다. 그런데 지금 북한에 누가 그런 충고를 할 수 있겠나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북한 국민 들이 김정일 정권에게 우리는 지금 50년 60년 전 일본이 걸었던 잘못된 길을 답습하고 있다. 라 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상황일수록 한국의 역할이 중요한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이다. 내가 도멘에 들어오고 난 직후 한국에서는 한일수교 반대 데모가 굉장히 크게 일어났 었다. 일본에서 우리도 뉴스를 보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반대하는데 우리가 굳이 수 교를 하느냐 더 시간을 두고 해도 되는 게 아니냐 그런 의견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한일 수교 는 이루어졌다. 한국 일본 외에 미국의 시각도 작용하고 했을 테지만 당시 한국내에서 대일 굴욕 외교라는 반대 여론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물론 한국의 정치인이나 일본 정치인 사이에서 몇 가 지 잘못도 있었을 수 있겠지만 한일 수교 자체는 불가피하고 필요했던 것 같다.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는 그런 느낌을 갖는다. 한국내에서도 북한과의 관계를 급격히 열어가는 데 반대 여 론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도 조일 수교에 대해서 소극적인 시각도 있다. 그러면 나는 30여 년 전의 한일 수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었나 하고 생각해보는 태도를 지금의 대 북한관계에 대해서도 3 40년 뒤에는 어떤 평가가 내려질 수 있을까 하는 시각을 갖다대 보는 게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현대에서는 금강산 유람선 개발사업에 한창이다. 아마 이 책이 나올 때 쯤이면 이미 금강산을 갔다온 사람들이 생겨나 있을 것이다. 금강산 유람선은 물론 현대라는 기업의 기업활동이니까 여러 경제활동상의 권리를 선점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 러나 이런 움직임들이 꽉 막혀 있는 북한을 열어놓는 수많은 자극제 중의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 다. 당장 현대가 금강산 유람선에서 돈을 벌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익이 생기면 당장 눈 앞의 이익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대는 큰 기업이니까. 예를 들면 거기서 생기는 이익으 로 북한에 유학가는 남한 유학생의 학비를 대준다든가 거꾸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유학오는 학생 들의 학비를 대주는 기금 같은 것을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꿈을 꿔본다. 북한이 열리고 긴 장이 이완되는 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문제 이전에 남북간에 불필요한 돈을 절약하는 일이다. 그건 돈되는 일이다. 맘 편히 살 수만 있다면 100억 달러든 200억 달러든 내놓겠다 북일 수교가 북한과 일본 간의 중요 현안이지만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뭐 하러 북한이랑 수 교를 하냐 이렇게 생각한다. 시장성도 별로 없고 노동력은 있지만 수준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 고 바로 옆에 같은 민족인 한국이 있다. IMF로 국민소득이 6천4백 달러 8년 전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지만 그건 금방 다시 올라갈 거고 북한 보다는 한국이 매력적이다. 지금 같으면 열심히 개발 에 나서면서 국민소득이 5달러 10달러씩 계속 올라가고 있는 중국도 매력적이다. 바로 구매력이 올라가고 있다는 얘기가 되니까. 그러나 북한은 국민소득이 오르기는커녕 떨어지고 있는 나라다. 또 자기 나라 식량문제 해결에 주력해야 하는데도 미사일 인공위성 개발에 온 신경이 집중돼 있 는 이상한 나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일본 내부에서는 골치 아프다 돈 주고 이런 분위기도 있다. 나는 일본이 북한과 수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를 위해서 북한이 돈을 달라고 하면 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마 많은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요구액이 100억 달러든 200 억 달러든 줘야한다. 물론 일본이 돈이 없으면 주고 싶어도 못 주겠지만 돈은 가지고 있다. 올해 의 외환보유고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2139억 달러에 이르고 또 배상금이 한 번에 현찰로 나 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북한측에서 그 돈은 배상금이라고 굳이 주장하면 배상금이라고 해도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다. 사실 현대사에서 전쟁이 끝나고 배상금을 제대로 치른 나라가 얼마나 되는가. 배상금을 내는 일이 뭐가 부끄러운 일인가. 식민지를 만들어 피해를 주고 전쟁을 일으키 고 그것은 물론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걸 사죄하면서 배상을 하겠다는 자세는 부끄러운 일 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북한이 그 돈을 가져다 어디다 쓰려고 하는지 그건 확실히 알아야 하 겠다는 입장이다. 일본사람들에게 150억 달러는 큰돈이 아니다. 그러니까 제발 우리가 맘 편히만 살게 해다오 미사일이니 이런 걸로 우리를 불안에 떨지 않게만 해다오 이런 심정에서 그런 돈을 지불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북한측의 입장에서는 미사일 인공위성 개발로 인해 이런 식 으로 돈을 벌 계산까지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을 내심 반대한다고 믿고 있다. 현상이 변화하는 것은 항상 불안요인이 따른다. 남북한 관계가 변한 다고 했을 때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변할지 정확히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로 인한 불안요인 을 감싸안기 보다는 현재가 낫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반도 가 통일되어 강력한 경쟁자가 생기는 걸 견제하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로 인해 일본이 정책적으로 한반도 통일을 반대하는지는 나로서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도 가능하지 않을까 동독과 서독이 통일이 하면서 7 8년 고생했고 지금도 그 후유증을 안고 있다. 통일이 된다면 북한 사람들도 남한 사람들과 같은 질의 삶을 누리고 싶어할 것이다. 남한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하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수요를 채울 물건이 없다. 아파 트도 세워야 하고 화장지도 필요하게 되고 북한에 공장도 세워야 한다. 그러면 그 물건은 어디서 나오느냐. 물론 남한에서 많은 것들이 올라가겠지만 현재 한국의 생산을 위해서도 일본으로부터 의 수입이 막대하게 발생하는데 북한까지 합쳐지면 더 막대한 수요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 면 일본 입장에서는 월남전 이후 최대의 특수가 생기게 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 수요가 그 때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한국도 일본 비즈니스 입장에서는 시장이다. 당연히 시장이 확대되는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는 굳이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한다 혹 은 양보해서 말해도 반대만 한다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통일이 되면 한반도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군사력이 다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자원이 절약되고 생산적으로 쓰이게 될 것이다. 그 군사력을 일본을 향해서 배치한다 그건 별로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다. 한국사람들 입장에서 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일본의 자위대는 일본사람들 감각으로는 장난감이다. 북한 미사일도 못 찾 는 군대가 어디 있나 이런 생각이다. 소련 연방이 붕괴하기 이전 일본의 가상 적은 소련이었다. 소련 연방이 붕괴된 지금 일본 사람들 마음속의 가상적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장 큰 경계 대상이 누구일까 그것은 아마도 미국일 것이다. 한일간에는 많은 오해가 가로막고 있다. 양국간의 이해가 한반도 통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일본 전화기의 비밀 일본 굴지의 전자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회사의 한 전화기 담당 과장이 자기회사의 신 제품 전화기를 가져왔다. 뭐 특별한 기능이 있는 전화기냐고 물어봤지만 그런 전화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뭐가 특별한 전화이기에 이 큰 회사의 과장이 내게 보여주는 것일까 하고 전화기를 들어봤다. 그런데 나는 깜짝 놀랐다. 수화기가 너무 부드러운 옷감 같기도 하고... 그 과장은 웃으 면서 소비자는 수화기를 들고 쓰는데 온도에 민감하고 부드러운 플라스틱을 사용해서 통화할 때 느낌이 좋은 수화기를 만들려고 한 것이죠 라고 말했다. 내가 야 이런 것까지 신경씁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요즘 소비자들은 까다롭거든요 라며 그냥 웃고 있었는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일본기업들은 이런 식으로 제품을 끊임없이 개선해서 소비자의 마음을 읽어내는 제품을 내놓 고 있다. 워크맨이나 자동카메라 같은 대표적인 제품말고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한 국에도 요즘 냉동실과 냉장실의 위치를 바꾼 내장고가 나오기도 하고 숨어 있는 1인치라며 화면 이 넓어진 TV도 만들고 있다. 평소에 생각한다면 대단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상품 으로 나오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런 제품들이 판매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 이다. 이런 식의 아이디어는 높은 기술력보다도 시장을 읽어내려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본 말로는 이것을 카이젠 이라고 한다. 이 카이젠을 일본성공의 요소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차근차 근한 제품 개선을 통해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의지야말로 일본상품을 세계 일류품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중소기업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개선은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있는 것이다. 대규모 투자나 기술개발이 아니라 자기 제품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 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제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시스템 개선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각 기업들이 하고 있는 제안왕 제도가 바로 그 런 것이다. 이런 제품의 아이디어는 판매와 직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디어의 결과는 금세 나타난다. 그 결과에 대한 명확한 포상이 있다면 사원들의 사기는 올라갈 것이고 매출도 증가할 것이다. 또 제품도 시장에서 착실한 명성을 쌓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최고경영자가 얼마 나 절실한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아랫사람들이 바꾸자 바꾸자 하고 말해도 윗사람이 안돼 라고 한마디만 해버리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게 되니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칼국수를 먹 고 부정부패 척결 운운했지만 아랫사람들은 갈비짝을 받지 않았던가. 즉 하나하나씩 변해야지 외 국에서 무작정 설비와 기술을 도입한다고 일류제품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차근차근 자신의 제품 과 공정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근성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이라고 자신을 낮게 보고 있지는 않은지 한국중소기업인들은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대기업에도 기죽지 않는 기술개발의 첫단추는 바로 이런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작은 출발이 언젠가는 경쟁력 있는 탄탄한 알토란 같은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업어주고 안아주고는 없다 한국이 중소기업을 하기에는 힘든 나라임에는 틀림 없다. 가끔 중소기업 사장님들을 만나면 우 스갯소리로 한국에서는 기업을 하느니 땅을 사는 것이 낫습니다 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무슨 소 리냐고 생각했지만 이내 수긍이 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팍팍한 대출 관행 대기업의 횡포 잦은 규제와 정부의 무정책 등 한국중소기업의 환경은 정말 좋지 않다. 하지만 나 는 한국의 중소기업이 약한 이유가 외부환경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속담 중에 온부리닷꼬 라는 속담이 있다. 한국말로 하면 업어주고 안아주고 쯤 될 것이다. 세상에 그렇게 해주는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중소기업하는 분들을 만나면 가끔 이 속담이 생각나다. 대부분 이분들은 나한테 모모세 씨 요즘 뭐 돈벌 만한 좋은 아이템 없어요 라 고 자문을 구한다. 이건 좀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제대로 하려면 내가 아이디어를 가지고 새로 운 제품을 만들었는데 한 번 보시고 판로를 생각해 주십시오. 라고 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래야 나도 신이 나서 하나라도 더 이야기를 해줄 것 아닌가. 내가 이런 기술이 있는데 아직은 제품을 만들 수는 없다. 이 제품의 시장성은 앞으로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이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 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일본밖에 없다. 그럼 일본에서부터 이 기술을 가지고 있는 중간 제품을 들여와서 내가 기술도 배우고 수익도 올리겠다. 그러니까 도와다오. 이런 식으로 틀과 목표를 가 지고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 한 10년쯤하면 자기 브랜드로 멋지게 일본시장이나 세계시장에 진출 하지 않겠는가 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자기 내부에 달려 있다. 일본의 중소기업은 한국에 비해 강하다. 그 이유는 물론 정부나 사회분위기 법률 등 외적인데서도 찾을 수 있다. 하 지만 그것은 중소기업을 키우려는 업계의 풍토와 중소기업인의 프로의식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일 본 경제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일본경제는 산업조직이 고도로 하청 계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요타 자동차의 생산능력이 연산 4백만 대 정도고 거기에 종사하는 종업원수가 7만명 정동일 때 미국 GM의 연사 대수는 510만 대 종업원 수는 76만명 정도였다. 당연히 일본의 도요타가 미국의 GM에 비해 1인당 생산단위가 월등이 놓다. 이차이는 일본과 미국의 산업조직의 차이 때문이다. 미국이 자동차 생산에 투입되는 부품류의 압도적인 부분을 자체생산하고 있는데 비해 일본의 도요타는 핵심부품만 직접 생산하고 대부분은 하청기업에 의존하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이다. 자신이 직접 만들기 보다 양질의 중소기업제품을 쓰게 되면 당연히 인건비나 생산비등 모든 비용이 절감되는 것은 당연하다. 도요타 아니 일본 주식회사의 경쟁력은 그래서 중소기업에 서 나오는 것이다. 대기업이나 종합상사는 계열 중소기업에 자본참여나 운전자금 대여까지 하면 서 중소기업을 관리한다. 경영권을 갖고자 함이 아니라 둘 사이에 이해관계를 공고히 해 업무협 력 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일본은 매년 세계 특허의 4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세계 제 1의 특허 왕국이다. 이 특허는 95퍼센트 이상이 기업들이 내는 것이다. 특히 중소기업이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다. 그렇게 실력이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대등하게 사업을 하는 것이다. 또 일본의 대기업은 무리해서 중소기업의 업종을 빼앗지 않는다. 기본적인 부품이나 재료를 구태여 대기업이 만들기보다는 질좋은 중소기업 제품을 사다가 쓰는 편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기업들은 중소기업들을 경쟁시키고 관리하는 데 더 중점을 둔다. 당 연히 한국처럼 인위적으로 중소기업 보호품목을 지정해 두지도 않는다. 일본에는 매년 1만 개 이 상의 기업들이 도산한다.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을 보여준다. 도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3 40년 된 중소기업이라면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고 보면 틀림없다. 대기업도 이런 중소기업에게 믿음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 은행도 기술력 하나 를 보고 돈을 빌려준다. 이런 기술력이라면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업들과도 거래를 하게 된다. 대기업은 중소기업 관리에 만전을 기한다. 특정부품을 발주할 때 두세 개 업체에 경쟁적으 로 발주를 하여 끊임없이 원가절감이나 품질향상을 하게 만든다. 후배가 하는 사업체니까 올해도 내년도 하는 밀어주기는 있기 힘들다. 역으로 하청업체도 한 곳으로만 거래하는 것이 아니다. 다 른 곳에도 납품을 한다. 이런 식으로 하청 중소기업도 독립적인 강한 생명력을 갖는 기업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 마부치라는 모터생산 업체가 있다. 대형모터가 아니라 VTR 카메라 장난감 등에 사용되는 소형모터 전문 생산업체인데 내구성과 안전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중소기업은 일본기업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업들에게 모터를 공급하고 있다. 일본에 세계적인 VTR 카메라 제조업체가 있다 소니나 캐논이 있다고 하면 그 핵심부품인 모터를 만드는 마부치라는 업체가 있 기 때문에 그 제품들이 좋은 것이다. 기술개발에 대한 일본 중소기업 업체들은 독자적인 기술개 발은 물론 서로 연합해서 대기업 연구진이나 대학교수 등을 초청 강의를 받기도 한다. 이런 중소 기업단체들은 일본의 도시나 지역마다 각 업종별로 구성돼 활발하게 활동중이다. 여기에 비해 한 국의 중소기업들은 온실 속의 화초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대기업과 정부가 중소기업 육성 에 열성을 가지지 않는 점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대기업만 탓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세계경쟁의 시대다. 중소기업도 한국의 한 부분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한부 분으로 나가야 한다. 어떤 분들은 기술력보다 담보나 연줄을 더 내세우는 한국풍토에 서는 공허 한 말이다. 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은 변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질서가 얼마나 냉혹한 지 스스로 깨닫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관행은 금세 고쳐질 것이라고 본다. 그러지 않으면 공멸뿐 이다. 일본 중소기업의 또하나의 강점은 인간관계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관계라는 말은 매우 추상 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아주 간단하다. 사장은 사장답게 직원은 직원답게 일하라는 것이다. 사장 이 공장을 내 꺼 라고 생각하면 직원들은 당연히 공장을 사장 꺼 라고 생각하게 된다. 남의 것을 직원들이 알아서 챙기게 되지는 않는다. 사장은 아침에 잠깐 들렀다가 외부에 결혼식이 있다고 나가고 골프나 치러 다니면 직원들은 대충대충 물건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그 기 업은 망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집단의 소속감이 대단하다. 그 소속감은 기업에도 이어진다. 사장 도 회사를 자기꺼라고 하기보다는 우리꺼로 여긴다. 우리의 한 사람이니까 자신만 혼자 양복을 입고 있을 수 없다. 작업복을 입고 직접 일을 한다. 이런 식으로 같이 고생하고 같이 기뻐하니까 회사의 어려움을 쉽게 이길 수 있고 승승장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중소기업은 중소기업 달력 이 있다. 일요일이 빨간 날이 아니라 수요일 금요일이 빨간 날인 달력인 것이다. 이들 기업들은 일요일에 놀지않고 자신 공장의 제품 납기일이 수요일 금요일에 노는 것이다. 이런 것을 노동자 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것이 자신의 회사가 잘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 노동자들 은 자신의 회사를 위해 옥쇄를 각오하고 있는 프로들인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일본 에서는 중소기업 기술자가 대기업으로 옮기는 일이 드물다. 한국은 스카우트라며 그런 이직을 영 전으로 보는데 일본은 그 반대다. 일본은 배신행위로 보고 가족이나 친구들이 그 행위자체를 부 도덕하다고 본다. 사장과 그 회사를 저버리고 단지 돈을 많이 주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게 가기 보다는 일본사람들은 야 여기서 내가 좀더 노력해서 회사를 좀더 좋게 해야 겠다는 쪽으로 힘을 모은다. 명문대 출신이 중소기업에 오면 한국에서는 아예 뽑지를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있어봤자 금세 다른 데로 옮길 텐데 뽑아봤자 남의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일본도 일류대 출신이 중소기업을 가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대접 은 한국과는 좀 다르다. 동경대 출신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일본에서도 단 번에 화제가 된다. 동경대 학생이라면 일본에서도 입신출세를 보장받은 사람들로 치부되는 분위 기가 있기 때문이다. 더 좋은 데 있는 데 왜 여기에 왔지 라고 물으면 그 일본인은 자신이 그 중 소기업에 느끼는 매력과 포부를 이야기 한다. 간부들은 그 점을 높이사고 동경대 출신은 그 기업 의 한 가족이 돼서 해고 되지 않는 한평생 그 기업을 다닌다. 이런 일본기업의 풍토를 단지 일본 사회의 분위기만으로 한정짓지 말기를 바란다. 그 분위기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일본 중소 기업인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직원들에게 아낌없는 관심과 투자 그리고 한가족이라는 의식을 심어주면 그 기업은 주식을 사원들에게 나눠주는데 이런 스톡옵션제도 바람직한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기술력과 꽉 짜여진 인간관계. 이 두 가지는 내가 생각하는 일본 중소기업의 강점이다. 이것만 있으면 어떤 한국 중소기업도 한국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독도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음으로 내가 많이 듣는 질문은 좀 민감한 부분이다. 처음에는 이런 문제를 일개 도멘의 한국 지사 대표인 나한테 왜 물어보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일본대사관 직원도 아니고 일본정 부의 생각을 대표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런데도 한국사람들은 한일간에 가장 민감한 문제의 하 나인 독도문제를 일본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참 뭐라고 얘기하나 난감하다. 지금 독도는 한국땅이다. 오래 전부터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증거도 있었지만 실정법 상으로 현재 한국경찰과 주민이 독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몇 년 이상 주민이 거주하면 땅으로 인정된다는 식으로 곧 국제법상으로 한국땅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접안시설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 만 이런 현상황을 아주 쉽게 뒤집어보면 상황은 반전될수 있다. 일본사람이 만약 그런 식으로 독 도에서 상주하면 일본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심각한 문제가 생기겠지만 하지만 극단적으 로 한일관계가 아주 나쁘게 풀려서 독도문제가 그렇게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국정부는 국민의 반일정서만을 너무 의식하지말고 일본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독 도는 한국땅으로 인정을 해달라. 그렇지만 독도를 우리가 배타적으로 사용하지는 않겠다. 독도를 일본도 이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 어부들이 조업을 하다가 폭풍우를 만나면 대피할 수 있게 해주 겠다. 북한에게도 열어 놓겠다. 일종의 공동이용권을 주겠다고 제안하면 일본은 귀가 솔깃할 것이 다. 일본은 그래 한국이 그렇게 열린 자세로 나오면 우리도 독도 문제 해결은 꼭 필요한 카드니 까 한국과 손을 잡겠다는 식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즉 한일 양국이 서로 양보하고 협력한다 면 한국은 실질적인 독도의 점유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일본 또한 다른 섬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문제는 두 나라가 역사 문제나 한일 문제를 얼 마나 벗어나 실리를 추구할 수 있느냐는 자세인 것이다. 그 부분은 일본도 한국도 자유롭지가 못 한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음으로써 북한 러시아 중국과의 영토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 한다면 독도는 동북아의 평화에 큰 공여를 한 셈이 된다. 작은 섬 독도를 크게 품는 방법이 아닐 까 생각한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장사만 하는 사람이 독도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 는지 잘 알 리가 없다. 이건 일본인으로서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니까 내 생각이 아무리 깊이가 없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앞으로 혹시 나에게 무슨 질문이 있더라도 제발 독도 문제를 어떻게 보십 니까 같은 거는 빼주었으면 좋겠다. 일본의 지역감정 한국의 지역감정 일본은 네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혼슈 큐슈 시코쿠 훗카이도 네 개다. 그런데 이 혼슈 라는 말은 지금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훗카이도 사람들은 동경이나 오사까 등을 혼슈라 고 부른다. 혼슈는 한자로 쓰면 本(본)州(주) 이다. 가장 중심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일본은 이 혼슈라는 말을 쓰지 않고 무슨무슨 현으로 부른다. 우리가 중심이고 너희는 변방이다 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는 일본인과 정부의 의도다. 일본도 지역감정이 당연히 있었다. 일본은 많 은 섬으로 이루어져 지역적 고립이 있는데다 지방영주들이 할거하는 일본만의 독특한 봉건사회를 거쳤다. 오키나와 같이 근대에 들어와 일본으로 편입된 지역도 있다. 일본사투리는 중국사투리보 다는 덜하지만 한국보다는 심한 편이다. 일본이 근대화를 시작한 백수십 년 전 모든 지역은 벽을 허물고 명실상부한 하나의 일본이 됐다. 이 때부터 일본의 지역감정은 시작됐다. 벽을 허물고 하 나가 되어왔다고 하지만 일본은 수백 년 동안 완전히 서로 다른 나라처럼 수십 개의 번이 전쟁을 벌이면서 살아왔던 나라니까. 심한 지역차별도 있었다고 한다. 통일이 되었으니 전쟁은 끝났지만 대립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마 열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었다고 할까. 그래서 소화시대에는 장관직에 각 지역출신들을 고루고루 등용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년이 지난 지금 일 본의 지역감정은 아주 미미하다. 또 일본정부는 이 감정을 없애기 위해 국가의 투자를 균형 있게 하려고 노력해왔고 일본전체를 이으려고 다리를 놓았고 전국을 신칸센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미 일본은 오래 전부터 1일 경제권이라는 목표 아래 이 계획을 추진했고 이미 성과를 거둬왔다. 그 러나 자기 출신지역에 대한 자부심은 한국만 아니라 일본에도 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이런 것 은 공통된 감정이니까. 지금 대표적으로 남아 있는 지역으로 남아 있는 지역감정이라면 관서지방 과 관동지방의 대립 정도라고나 할까 관서지방은 상업과 역사로 관동지방은 정치와 공업의 중심 지로 남아 있다. 관동지방의 대표적인 도시는 동경이고 관서지방의 대표적인 도시는 오사카이다. 일본사람들이 하는 말에 관서지방 사람은 돈이 생기면 맛있는 것을 먹고 관동지방 사람은 멋을 낸다는 말이 있다. 기질의 차이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사실 요리는 관서지방이 발달했다고들 말한다. 아무래도 중국이나 한국과 가깝고 어족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관동지방 즉 동경은 정치와 유행의 중심지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그렇지만 전쟁 후에 이 두 지방이 내놓고 대 립을 하거나 특정한 지역 출신을 차별한 적은 없다. 그냥 재미있게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한국 의 지역감정은 일본과는 다른 것 같다. 현대자동차의 파업 당시 장관과 국회의원이 울산으로 파 견됐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갖는 무게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현대의 공장이 있는 곳이 울산 이 아닌가 울산은 경상도 지방이고 그럼 이런 것도 지역감정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파업이 전라도 지방에서 일어났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물론 내 생각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파업으로 경상도 지방이 들썩거린다면 현 정부는 최대의 위기 를 맞이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이미 그 지역출신 정치인들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자주 만나는 외국인들도 전라도 출신 대통령이라서 경상도에 경찰병력을 진입시키지 못하는 거 아닌가 전라도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면 비호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초기 부터 진압에 나설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큰 충돌없이 현대자동 차 파업은 끝이 났다. 이렇듯 한국의 지역감정은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지역감정이 제일 심하게 터져나오는 것은 역시 선거 때다. TK니 PK니 서로 자기 지역을 연고로 정치를 한다. 그리고 자 기지역출신 사람들만 등용하고 다른 특정지역에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한국사람들이 모두 겉으 로는 걱정하는 고질병이 되어 있다. 겉으로 걱정하는 것만큼 진정으로 걱정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한국은 영국처럼 지역감정이 심한 것은 아니다. 영국은 4개의 지역이 다른 나라처럼 따로 논다. 신페인 당이니 뭐다 하며 종교적으로 갈려 있기도 하다. 한국은 거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 골이 깊다는 지역감정도 30년이 채 되지 않는 것이다. 또 도저히 정치적이나 문화적 종교적으로 상종을 못하겠다고 전쟁을 하거나 대량살육을 한 적도 없었다. 이런 지역감정은 양간 의 노력과 시간이 흐르면 쉽게 없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거기다 이번에 대통령은 소외당해온 전 라도 출신이 아닌가 소외받아온 만큼 생각하는 것도 남다를 것이고 그 생각을 현실로 옮겨주길 바란다.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땐 내가 한국사회를 잘 몰라서 그랬기도 하지만 전라도 사람 경 상도 사람 이런 식으로 나뉘고 지역감정이 극심했던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기억을 하려고 해도 전라도 경상도 이런 문제로 화제를 올린 기억도 별로 안 나니까. 난 누가 이 나라를 이렇게 갈라 놨는지 모르겠다. 얘기를 들으면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겼다고도 한다. 박 정희 대통령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지금 한국은 세계 여러 나라들과 심각한 경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전쟁 중이다. 같은 편끼리 그만 싸우고 눈앞의 적을 바라보자. 되로 준 선물은 되로 갚고 말로 준 선물은 말로 갚는다 일본인들은 철저하게 더치페이다. 한국사람들은 이런 걸 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한국사 람들은 1차는 김 사장이 2차는 이사장이 3차는 박 사장이 사는 방법을 선호한다. 일본사람들은 1 차를 사면 사람 숫자로 비용을 나눠서 지급한다. 몇백 엔이나 십 엔까지도 정확하게 계산한다. 그 래서 한국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 쫀쫀하다고 한다. 깍쟁이 같고 정이 안 간단다. 하지만 그건 일 본사람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일본사람들은 남에게 부담을 주기도 싫어하고 부담을 떠안는 것도 싫어한다. 어느나라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사람들은 그런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편이다. 따라서 선물이나 저녁식사 같은 것을 쉽게 응낙하지 않는 편이다. 아주 가까운 사이라면 어느 정도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데 부담이 없을 수는 있어도 그렇게 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일본사람들의 접대문화는 한국과는 다르다. 한국기업은 접대를 받는 쪽은 칼자루 를 쥐고 있는 쪽이 대부분이고 접대를 하는 쪽은 뭔가 아쉬운 기업이 대부분이다. 응당 접대에서 는 봉투가 왔다갔다한다. 이런 아래에서 위로의 접대를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한국을 특혜와 편법이 판치는 나라로 만든 것이다. 반대로 일본기업은 받으면 받은 만큼 돌 려주게 돼있다. 일본 개인들의 생각도 그렇지만 기업문화도 그렇다. 내가 만약 A사로부터 접대를 받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 접대를 받으면서 그 접대의 견적을 대충 뽑는다. 아 여기는 얼마정도 하겠구나. 또 그 회사측과 수인과의 관계라든지 식사의 종류나 술의 종류 하나하나 다 따져서 그 다음날 회사에 보고를 하게 되어 있다. 회사에 보고를 하면 상사는 그러면 언제 언제 A에게 식사 대접을 하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면 직원들은 A사가 했던 것과 비슷한 분위기의 음식점을 골라 식사대접을 해준다. 만약 그 쪽이 접대골프를 하면 이쪽도 접대골프를 그 쪽이 요정을 하면 이쪽 도 요정을 선택한다. 일본사람의 특성이기도 한 이런 방법은 한쪽의 일방적이 접대를 막아주기도 하고 또 한쪽이 그 쪽 접대에 너무 부담을 갖지 않게 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장점이 있기도 하다. 또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제대로 된 관계를 키울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일본은행은 오히려 대출 받은 기업이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그들을 접대한다. 우리은행과 거래를 해주셔 셔 감사하다고 꼭 번창하시라고 이런 점은 한국은행이나 대기업들이 본받아야할 접대문화인 것이 다. 일본의 정부쪽과 기업쪽에 업무관계가 있었는데 결국 기업이 제대로 일을 하게 됐다. 이러면 기업쪽에 고마워서 대접을 꼭 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식사나 한 번 하시지요. 하면 정 부쪽의 담당자는 웃으면서 그러지요 하고 대답하고 만다. 그러나 그 담당자가 그 초대에 응할것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다. 그 사람은 그러지요 하고 대답만 할 뿐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나타난다면 아마 라면이나 간단히 먹을 정도의 접대정도일 것이다. 한국식으로 생각하는 접대자 리에는 물론 나타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게 일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정 접대를 하려면 그 정부쪽 사람과 관계 있는 인맥 을 모조리 찾는다. 아마 한국도 그 인맥을 찾겠지만 그래서 그 관리가 예를 들어 메이지대학이면 메이지대학 동창을 찾아서 접대를 한다. 담당자끼리는 절대로 접대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접대라면 이게 어떤 접대인가 하겠지만 나가는 사람은 자기가 있던 조직 에 무슨 일로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모두에게 다 공개를 한다. 그리고 접대를 받아봐야 한국정도 의 수준으로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그 이상을 강요하면 그 회사와는 다음의 관계가 이어지지 않 는다. 아주 무례한 그 회사는 그런 회사야 하는 식으로 된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적어도 이게 제대로 된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한다. 나머지는 예외적인 일탈이다. 한국처럼 접대받는 것을 당 연시하는 분위기는 적어도 일본에는 없다. 정부든 기업이든 마찬가지다. 접대라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회사와 회사가 즉 갑과 을이 서로의 계약을 위해서 좀더 편안한 자리를 만들어보자는 것 아 닌가. 그렇다면 서로에게 부담을 주고받기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대화의 자리가 돼야 한다. 그래서 서로에게 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접대가 정도를 벗어나면 그것은 접대가 아니라 공범을 만드는 일이 된다. 일본중소기업도 망한다 일본에는 갑자원대회라는 유명한 고교야구선수권 대회가 있다. 이 갑자원대회에는 전부 49개의 본선 진출권을 놓고 지방에서 약 천 개의 고등학교가 예선전을 치른다. 이 예선을 뚫고와서 중앙 무대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야구를 하는 것이 일본고교선수들의 꿈인 것이다. 여기 서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면 일본의 우상이 되는 것은 물론 프로야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 다. 야구를 하는 선수라면 모두 그것을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실력이 없으면 야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한다. 일본중소기업도 마찬가지다. 일본중소기업은 강하다. 하지만 일본중소 기업의 그 강함에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있는 것이다. 이들이 강한 뒤에는 패자의 눈물이 있는 것 이다. 갑자원대회와 똑같다. 모두 수준 높은 중소기업이 되기 위해 이들이 들이는 노력은 눈물나 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매년 1만 5천 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부도를 내고 무너지고 있다. 기술력으 로 승승장구하는 중소기업의 뒷면에 이런 아픔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수십년간 대기업과의 거래 로 신뢰를 쌓아왔다고해도 기술개발에 뒷전이면 도태된다. 대기업이 하청을 준다고 해도 한 군데 에만 발주를 하는 게 아니라 몇 군데에 줘서 경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중소기업 의 노력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필사적인 노력의 대가는 금세 나타난다. 일본시장에서 경 쟁력을 가지면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안정적으로 밀어준다. 대기업의 기술이전도 한국과 달리 일 본은 쉽게 이전된다. 또 대기업은 자금 등을 지원하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모든 공정을 대기업 이 처리하지 않고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에게 분담시킨다. 인건비나 다른 부대비용 없이 대기업은 안정적으로 부품이나 용역을 조달할 수 있고 그것은 일본 대기업은 안정적으로 부품이나 용역을 조달할 수 있고 그것은 일본 대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또 세계시장에도 얼마든지 진출할 수 있다. 실전과 같은 경쟁을 이미 일본 내부에서 겪었기 때문에 일본시장에서 성공한 기업이라 면 세계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기업에는 전관예우 같은 것이 없다. 한국에 는 대기업 직원이 회사를 차리면 예의 차원에서 얼마간 그 회사와 거래를 한다고 한다. 한국은 기업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이와 같은 전과예우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런 전관예우는 통하지 않는다. 일본은 품질관리에 매우 엄격하다. 거래선들이 아무리 전관예우로 부품을 가져다 쓴다고 해도 현장에서 다른 업체의 제품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면 끝이다. 특히 공장간부의 목 소리는 무게가 실려 있다. 그러니 중소기업의 사장은 대부분의 신경을 대기업 구매담당자나 임원 들과 술자리를 하거나 골프약속을 잡는 데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드는 데 주력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이런 경쟁에서 뒤져 망했다면 그 기업을 할 말이 없 는 것이다.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고 종업원들을 격려했다면 그렇게 쉽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망하는 기업은 있게 마련이다. 사업이란 기7 운3이라고 하지 않 던가 한국은 기3 운3 줄 연줄 인맥을 얘기한다 4정도 되려나. 열심히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망한 기업이라면 사원들은 마지막까지 사장과 같이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사장은 자 기 재산을 내놓아서 사원들의 마지막을 배려한다. 자못 비장한 것 같지만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얼마전에 한국의 한 중소기업 사장이 직원을 해고시키면서 자신의 재산의 일부를 직원들에게 나눠져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화 제가 될 일도 아닌 것이다. 한국처럼 회사는 망해도 사장은 산다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사가 부도가 났을 때 그 고통은 사장만 당하는 게 아니다. 부도가 나서 회사를 옮겨야하는 경 우 그 직원들은 이른바 패잔병 취급을 당하는 게 현실이다. 부도로 인해 다른 회사와 합병을 하 면 직급이 한 계단씩 낮아지는 수모를 감내해야 한다. 실제로 여러 해 전 아다카산업을 인수한 이토추는 아다카 산업 전직원의 직급을 한등급씩 깍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전사원은 자신의 회사를 위해 하나로 뭉쳐 옥쇄를 각오한 심정으로 열심히 일하게 된다. 미국이라면 회사를 옮길 수록 직급과 월급이 올라가겠지만 일본은 회사를 옮길수록 직급과 월급이 내려가는 양상까지 벌 어지는 것이다. 부도나 실패라는 단어는 쓰라린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매년 있는 그 수많은 부도 의 담금질 속에서 오늘의 일본을 키워온 것이다. 서양 속담에 실패한 자만이 성공의 단맛을 안다 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자고 일어나니까 정년 퇴직이라니 나는 1938년 11월 30일생이다. 그러니까 올 11월 30일이 지나면 나는 육십이 된다. 한국 나이로 는 환갑이 된 것이다. 하지만 축하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날이 바로 내 정년 퇴직날 이니까. 나는 얼마 전에 회사에서 퇴직금 수령과 세금계산을 위해 일본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드디어 정년퇴직이 코앞으로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엊그제 입사를 한 것같은 데... 벌써 36년이 지나갔다니... 자고 일어나보니까 정년퇴직을 하게 된 것처럼 그 30여 년이 하루 밤같이 짧게 느껴진다. 물론 나는 작년에 도멘 한국지사 회장으로 3년간 재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섭섭하거나 아득하다는 감정은 아직은 없다. 일본 본사에서는 부장으로 정년퇴직하자만 한국법인 인 도멘 한국지사에서는 앞으로도 2년간은 그동안 해온 일을 열심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 람으로는 얻기 힘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하고 또 한국과 일본에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정년이라는 단어가 날 묘한 감상에 젖게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직원들은 벌써 꽂을 산다. 식사를 같이 한다 라며 분주하다. 하지만 나 는 얼마전에 난 정년퇴직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을 하는 거니까 그런 준비들은 하지 말라고 이 야기를 했다. 그래도 할 건 해야되는 것 아니냐는 직언들도 있었지만 당사자의 의견이니까 이론 없이 받아들여졌다. 내가 36년간 한 게 뭐가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역시 포철이 먼저 생각 났다. 포철의 준공에는 한국인들의 의자뿐만 아니라 나의 청춘 10여년이 담겨져 있다. 거기다 포 철은 나에게 최고의 영예이자 선물인 훈장을 안겨줬다.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줬고 한국의 가능성을 알게 해줬다. 아직까지도 포철은 생생하고 가슴벅찬 기억이며 내게 큰 재산으로 남을 정도라고 자부하고 싶다. 그밖에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국기업가들과 직원들의 얼굴도 생각난다. 그러나 나는 정년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다. 도멘 회장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나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유감스 럽게도 그 사업의 내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퇴사후 고향 군마현으로 돌아가 편 안한 노후를 즐기실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본다. 군마현은 내 유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아름다운 곳이고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 나를 부르는 곳이 있다. 구체적으 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용기를 준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일본의 내 고향 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나는 젊고 새로운 사업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이 있는 한 나는 36년을 그렇게 살아왔듯이 일 속에서 삶을 정리하고 싶다. 언젠가 흙이 될 몸 60이 됐다고 쉬지 않으련다. 그보다 더큰 바람은 필요하지도 않은데 남아서 추해지는 내 모습을 보이 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자신이 필요한 존재인가에 대해 누구나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마련이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나의 한국 생활은 보람있었다. 남부끄러 울 것 없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는데 앞으로는 어떨지. 나는 정말 필요한 존잰지 일말의 불안감 은 남는다. 추해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지나봐야 그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모양이다. 5 나도 어머니에게 내복을 사드리고 싶다 나도 어머니에게 내복을 사 드리고 싶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에게 내복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언제 부터 생긴 풍습인지는 모르지만 참 좋아보인다. 그 동안 키워주셔서 이렇게 내 손으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내복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신입사원을 공채하는 때가 대부분 겨울이니까 따뜻하게 보내시라 는 뜻인 것 같다. 일본도 옛날 사람들은 그 렇지만 한국의 부모들도 자기 돈으로 자기 옷을 사는 데는 인색한 것 같다. 자식들 옷은 잘 챙겨 줘도 자기들은 오래된 낡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부모님들이니까 내복이야 또 잘 챙겨 입지도 않을 테고 아마 그러니까 자식들이 이제부터 챙겨드리겠습니다 하는 뜻인가 보다. 그런 한국의 젊은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부모님께 뭘 해 드렸나 하는 회한 같은 게 생겨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런 선물을 해드린 기억이 없다. 하긴 일본에서는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한 테 뭘 선물해드리고 하는 풍습은 없으니까 나도 그랬던 모양이다. 부모님을 잘 모시는 건 유교적 인 한국전통이다. 유교전통은 낡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좋게만 보인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이 런 풍습은 배워 갔으면 좋겠다. 돌이켜 보면 난 좀 철없는 불효자였다. 형제들 중의 바로 밑의 동 생은 한국으로 치면 구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그 동생이 언젠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형은 회사에 입사하고 외국에만 있었으니까 부모님을 자주 못 찾아뵌 거야 그렇다 치고 참 불효 자인 거 아냐 라고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이 자식이 왜 이러지 하며 의아해 있는데 동생의 말은 이랬다. 내가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어머니한테 돈을 타 쓴적이 자주 있지 않았냐는 것이다. 사실 이 그랬다. 매달은 아니지만... 그 때 어머님이 가계부에 무어라고 썼는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뭐 라고 쓰셨는데 모모세 교육비라고 썼어. 형은 대가 졸업하고 취직해서도 교육비를 받아 뭐 교육 비 하하하 동생과 나는 한바탕 웃었다. 사태의 발단은 이렇게 된것이었다. 내가 졸업한 군마대학 은 지방 대학이다. 그리고 신입사원 발령을 나고야로 받았다. 사택에 있었으니까 먹는 것과 자는 것은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낯선 땅에서 말단 신입사원이 되어 회사에 들어가니 나이 지긋한 부 장님도 계시고 과장님도 무섭고 일은 잘 모르겠고 하면 실수투성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신입사원들끼리 모이면 스트레스가 폭발했다. 게다가 총각인 나는 객지에서 혼자 생활하 는데 회가 사택이라 신입동료들과 밤마다 야 어디가서 놀자 하고는 놀러 나갔다. 날마다 그러니 월급을 받아도 돈이 모자랐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용돈 좀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맹세코 매달 보내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걸 어머니와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이 알고 있었다니. 동생은 어머니가 가계부를 책상에다 두니까 들춰보다가 그걸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어머님이 돈을 보내면서 그걸 가계부에 자식 교육비라고 적어놓았다니. 지 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리기도 하지만 우리 어머니 정말 멋있네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어머님도 아버님도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다.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모모세는 한국 사 람이 될거냐고 물어보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던 게 지금까지 마음에 걸린다. 부모님들 계실 때 잘 해드립시다. 10년이면 사람 마음도 변한다 30년 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김포공항의 첫 느낌은 어둡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지방 공항 같 은 느낌이었다. 그 당시는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한국 근무가 썩 내키지 않았던 나에게 어둠침침한 공항에 혼자 떨어진 공항만큼이나 어둠침침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둡지 않 았다. 지금은 환해진 공항 그것도 한국의 달라진 모습 중 하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는 안 좋은 것도 있다. 한국 속담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는 말이 있는데 내가 더 절실하게 느끼는 건 10년이면 사람 마음도 변한다 는 것이다. 68년에 처 음 한국에 있을 때는 어두운 공항부터 해서 경제규모도 작고 물건도 귀해서 사정이 어려웠다. 한 일 간에는 국교정상화를 놓고 한일 수교 반대운동도 있었던 시절이다. 식민지시대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고 그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니까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그렇게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하나하나 인간적으로 만나면 일본인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아주 따뜻하게 대하는 배려 같은 것들이 있었다. 아마 내가 젊은이라서 더 잘 대해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족하고 떨어져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려들 때문이다. 일상생활을 해나가기가 힘들었다면 나는 몇 년 있다가 무슨 수를 써서든 돌아 가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것은 한국사람들에게서 많은 배려를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었 기 때문이다. 68년 겨울 서울에 주재해 근무할 때 6 5명이 함께 살던 숙소가 있었는데 숙소를 수 리하면서 나는 여의도에 있는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겨울 어느 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도저히 회사를 출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회사 출근버스가 오질 않는 것이었다. 회사 에 못 가겠다고 전화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회사는 나가야 한다. 이게 일본식이다. 하긴 미국 같은 데서 눈이 많이오면 어떻게든 학교에 나오는 어린이들은 한국인이거나 일본인 중국인 같은 동양계 학생들이라고 하니까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지만... 택시는 있겠지 하고 기다리는데 30분 이상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햇빛이 드니까 눈이 조금씩 녹아 구두는 물이 새고 추워 서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일본은 한국보다 따뜻한 나라니 한국 온 지 얼마 안되는 내가 얼마나 추위를 탓겠는가. 택시도 없고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런데 매일 회사 출근버스만 타고 다녔으니 어 떤 버스를 타야하는지도 모르고 때마침 숙소를 수리하느라 출근도 혼자해야 하는 곤란한 처지였 다. 오들오들 떨면서 기억을 되살리니 선배들이 가르쳐준 것이 있었다. 당시 도멘 사무실은 지금 시청앞 KAL빌딩 앞에 있는 대한빌딩에 있었다. 서울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니까 서울역가는 버스를 타면 서울역에서 내리면 된다고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한글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글자라고는 ㅇ 자에 ㅕ 자가 붙으면 그밑에 ㄱ 받침 이 있을 때 역자가 되고 ㅑ 자가 붙으면 약 자가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나가는 버 스 제일 위에 역 자가 붙은 것만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었다. 버스 번호도 모르고 버스 안내판 을 읽을 수도 없으니 한 시간 가까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지나가던 차가 내 앞에 멈추더니 타라는 것이었다. 내가 일본사람처럼 보였는지 일본말로 그냥 타라고 하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20여 분 동안 나는 한국말을 모르니 말을 할 수도 없고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젊은 사람이었던 그 양반도 말이 없어서 고맙다는 얘기도 하지 못했다. 경황이 없어서 명함을 교환했는지 어쨌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국 1시간 정도 늦기 는 했지만 사무실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난 신입사원 시절이었고 또 한국에 온 지도 얼마 안되는 시절이었다. 긴장된 직장초년병 시절에 출근도 제대로 못하게 된 난감한 처지에 처한 나 에게 그 분이 얼마나 고마웠는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그 분이 가벼운 마음으로 고 마움을 베풀어주니까 고마운 마음은 한결 더 했다. 그렇지만 요즘은 이렇게 베풀어주는 마음을 느끼기가 힘들다. 자기들 일 챙기기 바빠서 그런지 남을 배려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함께 사는 이웃이라는 느낌이 없어졌달까. 나는 아파트에 사는데 퇴근하면서 아파트 일층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다가가면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은 나를 보았을 것이 틀림없는 데도 그냥 문을 닫고 올라가 버린다. 참 이렇게 야박할 수가 있나.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난 정 말 옛날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난 10년이면 사람 마음도 변하는가 하고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지 금 젊은이들의 부모님 시대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포장마차를 하는 사람이든 해장국집을 하는 사람이든... 해장국집들은 통행금지가 끝나자마자 새벽 4시면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아마 이 사람이 매일 아침 여길 들르니까 맛있게 대접해야지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난 해장국을 좋아한다. 추운 겨울 아침 해장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 오셨어요. 하면서 날씨도 추운데 한그 릇 들고 오늘도 열심히 일하쇼 하고 젊은이를 격려해주던 그 분들이 그립다. 요즘은 사람들이 한 결같이 야박하고 정없는 그달그달 월급나오는 것에만 만족하는 샐러리 맨들처럼 변해버린 것 같 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부모님 세대는 열심히 일해서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는데 과연 요즘의 젊 은이들은 그 분들 만큼 많은 것을 이룩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일등 신랑감 나는 좀 보수적인 사람이다. 쉬운 말로 구식이다. 가정에서 환영 받는 일등 신랑감은 아마도 회 사가 6시에 끝나면 7시까지는 집에 꼬박꼬박 들어가고 휴일이면 가족들과 외식을 하거나 놀러가 는 사람일 것이다. 일본도 그렇겠지만 한국도 요즘은 가정적인 사람을 일등 신랑감으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신세대들은 술도 별로 안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남자도 친구도 있고 회사 동료도 있고 또 거래처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매일 6시 퇴근 7시 집에 도착. 이렇게 생 활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거 이 사람 무슨 문제 있는 사람 아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솔 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회사에서 몇 년이나 제대로 일할지 걱정된다. 우리 회사나 대부분 일본 회사의 경우 일등 신랑감이라고 하면 6시 퇴근 7시 집에 도착 이렇게 하지 않는다. 자기도 고민이 있을 수 있고 아래 사람이 무슨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또 거래처 사람이 한 번 얼굴이나 봅시다 이렇게 얘기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나 24시간밖에 없는데 회사 안에서 서 류나 팩스 전화만으로 알수 없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 그건 회사 근무시간이 끝난 다음 의 시간을 이용해서 풀거나 알아야 되는 것들이다. 직급이 위로 올라갈수록 그런 일들이 많이 생 기게 마련이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점심 약속이 생길 수도 있고 저녁 약속이 생길 수도 있다. 나 는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가족만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회사를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고 본 다. 기업이 발전하려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의 중심이 회사에 가 있어야 한다. 많은 일 들을 회사의 일을 중심으로 해서 사고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 역시 한참 발전해가는 나라 아닌가 그 발전은 조직을 우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당연히 조직은 그런 사람들을 필 요로 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일을 잘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래처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알고 보니 오늘이 장남의 생일이라고 했을 경우 장남생일이야 내년에도 있는 건데 하고 생각하는 게 내 스타일이다. 나도 아들이 있다. 30년 가까이 해외에서 근무하니 아버지로서 내가 무얼 해주 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러면 나는 나의 아버지한테 무얼 받았나 잔정을 받은 것은 별 로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 아닌가 어려울 때면 아버지 생각이 나고 그 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젊었을 때는 아버지가 해준 게 뭐 있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나이가 먹어가면서 점차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 만큼이라고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게 동양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이다. 나는 아무리 해도 미국 사람들처럼은 못하겠다. 엘리베이터 를 타면 미국 사람들은 여자를 먼저 태우겠지만 나는 그렇게 못한다. 탈 때도 내가 먼저 타고 내 릴 때도 내가 먼저 내린다. 이게 나한테 익숙한 행동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보수적이다. 한국의 주부들은 아마 일요일인데도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면서 놀러가자고 해도 난 집에 있을 테니 아 이들하고 나갔다오라.는 남편의 말을 들으면 속터져 할 것이다. 그러나 나도 집에 가면 그보수적 인 회사인간이 되고 싶다. 일본에서는 여자들이 오랫동안 참다가 남편이 정년을 맞으면 그 때 비 로소 이혼소송을 제기해서 이혼을 하는 일들이 생겨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어쩌면 나 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가 일본에서 많다는 정년이혼을 당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 게 움직이게 되는 걸 어찌하랴. 이것봐 난 여기서 제일 시끄러운 외국인이야 악천후가 아니면 나는 매주 토요일 골프를 치러간다. 한국친구들과도 가끔 가지만 일본인 친구 들과 주로 많이 간다. 골프장에 손님도 많고 해서 난 늘 새벽 5시에 골프장으로 출발한다.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를 푸는 유일한 시간이니까 나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그런데 새벽 일찍 일 어나서 오니까 아침을 챙겨 먹을 시간이 없다. 거기다 난 혼자 사는 신세 아닌가. 당연히 밥은 클 럽하우스에서 먹을 수밖에 없다. 새벽에 일어나면 입도 깔깔하니까 보통 토스트를 즐겨 먹는다. 그런데 얼마 전 주말에 그 클럽하우스에 가서 토스트를 시켰더니 토스트가 안 된다고 하지 않는 가 방금 전까지도 토스트를 먹는 사람이 있는데 왜 안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 는 일본인 친구들은 그럼 해장국을 먹자고 했다. 나는 가만히 있다가 종업원을 불렀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물었다. 왜 토스트가 안되는 거죠 빵이 없는거요 아니면 계란이 없는 거요 너무 쎄게 나오는 거 아니냐며 친구들은 내 눈치만을 살폈다. 매주 내가 여기서 토스트를 먹었는데 왜 안 되는 거냐 고 따져 물었다. 그리고는 나는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그랬더니 종업원은 죄송하다며 토스트를 가져왔다. 친구들은 유명인이 이야기하니까 역시 다르다 고 감탄했다. 난 동 양사람이고 외국인이니까 사실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주방 에 계란이 있는 것도 봤고 방금 사람들이 토스트를 먹는 것도 봤다. 그런데 토스트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니까 화가 났던 것이다. 아마 토스트가 값이 싸니까 그걸 팔기보다는 비싼 해장국을 팔 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은 식당주인이 손님에게 지켜야 하는 약속을 저버린 것 이다. 배신행위인 것이다. 그런 일을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쉽게 말하는 그 종업원에게 화가 났 던 것이다. 그 클럽은 한국에서 가장 경영상태와 서비스가 좋다는 한 유명 호텔의 소유였다. 식당 은 서비스가 생명인데 한국 최고의 호텔이 운영하는 식당이 그렇다면 문제이다. 손님이 지불하는 음식값에는 음식값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서비스 비용이 포함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사람 대접을 받으려면 호텔에 가서 밥을 먹어라 는 말이 있다. 그런데 왜 이 호텔은 이런 것인지 의문이 들었 다.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는 것은 한국에서 상식이다. 경미한 접촉사고를 놓고 거리에서 차가 막 히든 말든 큰소리로 싸운다. 음식점에서도 큰 목소리로 주문을 하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가차없다. 이날 나는 한국사람들처럼 소리를 크게 친 덕에 토스트를 먹었다. 하지만 내가 한국사람을 닮으 려고 시끄럽게 소리치게 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음식점이라면 손님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 또 그 약속은 손님과의 약속이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이다. 이 집에서 음식을 하기 때문에 새벽부터 빈 속으로 오는 손님이 잘못된 것인가 또 좀더 비싼 음식을 시켜먹지 않은 것이 잘못인가 나는 그런 식으로 고객을 대하는 그 클럽하우스에 불평을 한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을 대고 메뉴판에 나와 있는 음식을 내놓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사실 나는 그 호텔의 사장과 친분이 있다. 내가 말없이 해장국을 먹고 그 다음날 그 클럽하우스의 일을 이야기했더라면 어땠을까 그게 더 효과가 있었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은 바뀌어도 서비스는 금세 나빠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 마음이다. 나는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마음가 짐을 고쳐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 번에도 나는 토스트를 시킬 것이고 그곳에서 맛있는 토스트 를 친구들과 먹고 싶다. 아이 저 시끄러운 사람 또 왔잖아 라고 그 종업원들이 뒤에서 욕하지 않 기를 바란다. 내가 소주를 못 먹는 사연 난 술을 잘 못 마신다. 내 주량이라야 보통때 맥주 두 병 정도 대학 시절에도 주로 먹은 술은 맥주였다. 나는 한국에는 많이 익숙해졌고 한국 음식은 모두 잘 먹지만 한국사람이 가장 즐겨먹 는 술인 소주와는 친해지지 못했다. 그건 술로 인해 몇 번 고생했기 때문이다. 68년 2월 처음 한 국에 왔을 때 나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왔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내려다보니 산에 나무가 안보이는 것이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나무가 없는 걸 보니까 야 이거 어떻게 나무도 없는데 사 람들이 사나... 하는 심정이었다. 어째든 조금 삭막한 심정으로 한국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지금까 지 즐겁게 지내고 있으니 살면 정이 드는 법인가 보다. 68년 명동의 사보이호텔 앞에 본전다방이 있었고 그 앞에 진고개집이 있었다. 명동 앞뒤로 고개가 있어서 진고개라고 했다던가. 내가 도멘 한국지사를 찾아가자 한국에 온 걸 축하한다고 선배들이 나를 데리고 진고개집에 갔다. 그 집에 서 불고기를 먹었다. 물론 나는 불고기를 그 때 처음 먹어본 것인데 냄새도 좋고 맛도 좋았다. 야 맛있다. 하고 있는데 고기와 소주잔이 나왔다. 난 한국 오기 전가지 소주를 먹어보지 못했다. 물 론 일본사람 중에서도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소주를 좋아하는 일본친구들도 한 국 소주를 마셔보고는 이건 인간이 마시는 술이 아냐. 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좋은 것도 있을 텐데 왜 그런걸 마시냐고 그랬다. 그랬더니 선배들이 말하길 한국에선 엘리트가 먹는 술이 소주라면서 잔도 작으니까 괜찮아. 하면서 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면 받겠습니 다. 하곤 손을 내밀어 소주잔을 받았다. 선배들이 술을 따르고 잠시 후 나는 술을 마시려고 입에 대면서 먼저 코로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리곤 난 그냥 쓰러졌다. 소주를 마시기는커녕 냄새만 맡 고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선배들은 내가 술냄새 때문에 그런 거라곤 짐작도 못하고 몸에 무슨 문 제가 있나보다. 하며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는데 숙소가 가깝고 완전히 뻗어버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어서 숙소로 데려다 뉘어놓았다. 가지고 있던 짐은 선배들이 다 숙소로 옮겨주고... 한국에 와서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 너무 미안했다. 다음 날 선배들은 상사에게 야단을 맞았다.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야 사람이 오자마자 쓰러지게 만들고. 아니 이 사람이 소주 한잔에 갔겠어 도대체 어디로 데려간거야 예 진고개집에 갔었습니다. 그래 이 사람 너무 긴장해서 그랬나 다음부터 선 배들이 나한테 소주를 권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한국에 와서 포항 현장에서 근무할 때 그 힘든 일과 후에 마시는 소주는 참 좋아 보였다. 특히 겨울철에 고기를 먹을 때나 국물 먹을 때 한국사람들은 소주가 어떤 술보다 맛있다고 손을 추켜 세웠다. 난 옆에서 맥주를 마시기만 했다. 술자리에서 내가 소주를 못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 한국사람들은 좀 놀란다. 아니 모모세 씨는 한국에서 30년 간 한국사람이랑 일했으면서 소주를 못 먹어요 그러면서 나를 놀리기 도 한다. 가끔은 나도 소주를 멋있게 한잔 하면서 카 하고 싶기도 하다. 물론 그러면 병원에 실려 가겠지만...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싸우면서 건설하자 라는 구호 아래 열심히 일했고 또 한국사람 처럼 소주를 마시다가 쓰러지기도 했으니까 이렇게 맥주를 마시면서도 느긋하게 소주를 먹는 기 분을 내는 것이다. 한국사람 다 됐네 한국에 오래 있었다고 하니까 일본사람들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사람들의 장점은 뭐고 단점은 뭡니까 그러면 나는 왜 그렇게 질문을 합니까 당신이 생각하기에 장점은 이 거고 단점은 이건데 모모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얘기해야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벌써 그 사람은 내가 한국사람 편을 들려고 하는 줄 알고 왜 한국사람 처럼 얘기하느냐 한국 사 람 다됐네. 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일본사람하고 얘기를 할 때는 그 사람들이 한국사람의 단 점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으면 그건 그런게 아니고... 하고 설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똑같은 질문을 한국사람들이 하는 경우도 많다. 아마도 자신들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마 치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는 것처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받 으면 나는 정말 할 얘기가 없다. 30년 가까이 있다보니까 장점 단점 뭐 이런 식으로 구별지어 얘 기하기가 참 곤란하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의식하지 않고 생활했다. 설사 한국이 외눈박 이 나라라고 해도 내가 수십 년 간 그 외눈박이 나라에 살다보니까 외눈박이가 정상인지 아닌지 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실 어떤 장점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장점만 있는 게 아니고 뒤집어보면 그건 단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그 사람 참 똑똑하지 하면 똑 똑하긴 한데 좀 깍쟁이야 하는 뜻으로 될 수도 있고 그 사람 참 성실해 하면 융통성은 좀 부족하 지 하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건 아닌가 한국에 와서 오래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 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으로 있는 구로다 마쓰히로라는 사람이 있다. 구로다 씨의 서울 체류도 오래 되었다. 아마 16년 정도 되었을 것이다. 얼마 전 한일관계 토론회 자리에서 만나 얘기를 하다가 자기도 소주를 마시면 마시고 나서 캬 한다는 것이다. 그건 완전히 한국식이다. 그러면 주위에서 구로다 완전히 한국사람 다 됐구만 한단다. 내가 한국사람 다 됐다는 걸 느낄 때는 여러번이지만 내가 얼큰한 국물을 마실 때의 느낌이 바로 그런 것 같다. 뜨겁고 좀 매운 음식을 먹을 때 한국사람들은 땀을 흘리면서도 어 시원하다. 고 얘기한다. 나도 처음에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아니 한 여름에 에어컨 도 안 틀었는데 뭐가 시원해 했었다. 하긴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아이들은 자기 아빠가 음식점에 서 음식을 먹으면서 어 시원하다. 고 하면 아빠 뜨거운 거 먹으면서 왜 시원하다고 그래요 한다 니까. 그런데 오래 살다보니 지금은 정말 시원하게 느껴진다. 땀이 흐르면서도 말이다. 그러면 같 이 식사를 하던 일본사람들은 내가 처음에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아니 더운 여름 에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서 뭐가 시원하다는 겁니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당신들도 더 오래 있어봐. 다 알게 된다구. 시원하다는 느낌을 알게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 오래 있으면 다 그렇게 된다. 일본 상사맨의 일요일 일요일에도 나는 아침 6시나 7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골프약속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일 요일을 길게 보내려는 나의 생활신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직장인들은 대부분 일요일이면 늦게 일어난다. 일요일 느긋하게 서두르지 않고 늦잠을 즐기려는 직장인의 마음을 내가 왜 모르 겠는가 하지만 나에게 일요일은 그렇게 보내기엔 너무나 금쪽 같은 시간이다. 내가 일요일날 그 렇게 일찍 일어난다니까 사람들은 놀란다. 아니 토요일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골프를 치고 일요일 에도 새벽 일직 일어나고... 휴일에 그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무슨 어린앱니까 아니면 잠이 없으신 가요 난 71년부터 83년까지 12년을 포철 현장에서 보냈다. 내 30대를 꼬박 포철 건설에 바친 셈 이다. 현장은 항상 긴박하다. 공기(工期)도 공기지만 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당연히 일요일이 어디 있겠는가 인부들이 나오지 않는 일요일에도 늘 현장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당시 현장의 분위기는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나도 기계가 아닌 이상 하루쯤 쉬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근사한 호텔 같은 데서 뜨끈한 물로 목욕 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함박스테이크를 폼나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요일은 내게 없었다. 일 또 일이었다. 그러다가 정말 공기가 끝나거나 어떻게 일이 없는 일요일이 오면 나는 너무 감 사했다. 폼나게 쉴려면 대구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쉬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기보다는 뭘 배워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골프였다. 그때는 시간도 없고 제대로 배우 지도 못해 내 골프 실력은 형편 없었다. 하지만 골프가 내 유일한 취미가 된 지금 내 골프 실력 은 싱글이다. 내 또래에서는 강자에 속한다. 각종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여러 번 우승을 했다. 그 때 투자한 보람이 지금 나타나는건가 아무튼 난 골프장에서 인기가 있는 편이다. 실력도 있는데 다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아마 골프를 배우기도 어렵고 치기도 힘들었던 때에 비해 지금은 좋아하는 골프도 마음껏 치고 실력도 좋으니까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일요일 아침 에는 보통 일찍 일어나서 진공 청소기도 돌리고 물걸레질도 하며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려 빨 래도 한다. 그리고 구두도 닦는다. 나는 가정부를 두지 않고 직접 한다. 느긋하게 내 시간을 즐기 려는데 가정부를 두면 아무래도 그 시간이 내 것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다. 그리고 간단하게 고 기와 계란과 대파로 덮밥 일본말은 돈부라고 함 을 만들어서 아침을 먹거나 두부를 넣어 된장찌 개를 끓여 먹는다. 이런 것도 귀찮으면 토스트를 구워 먹는다. 점심 때는 청소와 빨래를 마치고 약속이 있으면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 약속이 없으면 여러 가지 밀린 일들을 정리한다. 강연이나 원고 준비도 이때 해결한다. 이렇게 슬슬 오후가 되면 근처 골프연습장에 나가 전문가들에게 한 수 배우고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다. 이렇게 해가 일찍 떨어지는 요즘 같은 겨울철의 일요일 저녁 에는 가끔 쓸쓸하다는 생각도 든다. 내 아파트는 방이 네 개인 셈인데 한곳은 옷을 넣어두고 한 방은 서류나 책들을 넣어둔다. 한 방은 침대 그리고 또 한 방은 거실이다. 거실에는 소파와 책 서 류 그리고 텔레비전이 있다. 지금 집은 이사온 지 1년쯤 된다. 나는 잘 못 느끼지만 우리 집을 어 쩌다 방문하는 사람들은 내 아파트가 좀 삭막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하긴 내 아파트 벽에는 흔 한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다. 일하다 들어와서 잠시 쉬는 곳 그런 느낌을 주는 모양이다. 하긴 당연하다. 어느 집이나 남자 혼자 사는 곳은 여자들의 손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온화하고 부드 러운 느낌이 없게 마련이다. 왠지 썰렁하고 정이 안 가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사실 나 는 별로 못 느끼지만 남들의 반응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좀 안됐다는 느낌을 갖고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해서 내 아파트가 어지럽거나 지저분한 것은 아니 다. 나는 10여개 되는 허리띠 넥타이 20개 모두 방에 하나하나 가지런히 걸어놓는 사람이다. 질서 있게... 다섯 켤레 있는 구두도 신발장에 가지런히 구두약이 칠해진 채 놓여있고... 그러나 그런 반 듯한 질서에도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은 장식이 거의 없는 사무적이 현장 사무실 분위기 같은 것 을 느끼는 모양이다. 이렇게 길고 긴 일요일을 보내면서 여유로움과 궁상맞음 그리고 쓸쓸함 같 은 참 다양한 감정의 부침을 느끼는 나를 정면으로 본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하니까 다행이야 모 모세. 라고 중얼거리며 숙면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든다. 내겐 또 새로운 일주일이 있으니까... 이 게 일본에서 낯선 땅 한국으로 건너와 30년 가까이를 혼자 생활하고 있는 한 일본 상사맨의 일요 일이다. 6 인재 개발에 실패한 모모세 지점장이 꼭 하고 싶은 얘기 젊은 사람들이 부러워 얼마 전 일본의 여자 대학생들이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일본의 학생들이 찾아뵙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해놓고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했다. 학생들은 일본의 메이지대 도쿄대 같은 명문대 학 생들이었다. 똑똑하고 활기에 넘쳤다. 역시 젊음은 좋은 것이다. 학생들은 경제학부 상학부에 속 하는 학생들로 연합강의였는지 같은 강의를 듣는 4학년 학생들이었다. 내 책을 읽고 한국경제에 대해 물어보려고 왔다는 것이다. 앞으로 미국도 갈 계획이라고 했다. 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면서 각 나라의 경제현황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각 나라를 방문한 경험이나 결과를 늘 인터넷으로 보고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문예춘추 일본어판 책을 들고서 왜 이렇 게 생각하느냐며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대학생들을 만나봐라 한국과 일본이 차이는 있지만 중국이나 필리핀 학생들 만나는 것보다는 훨씬 대화가 잘 될 수도 있다. 고 충고 해 주었다. 학생들은 졸업을 하고 나서 회사원이 되려는 생각도 하고 있지만 자기 아이디어로 사 업을 하고 싶다고 말해다 내게 무슨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지 듣고 싶어하기도 했다. 난 한국에 와서 뭐가 제일 좋더냐고 했더니 교통비가 싸서 정말 좋다고 했다. 여행비용은 각자가 부담하는 것이니 더 절감했겠지. 사실 일본은 교통비가 대단히 비싸다. 지하철 1회용 승차권 하나가 한국 돈으로 보통 5천원은 하는 셈이다. 잠자리는 인터넷에서 만난 한국 학생 집에서 해결한다고 한다. 그 한국학생의 아버님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이라고 했다. 난 참 좋은 세상을 살고 있구나 하고 부러워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일본의 60년대에는 해외여행이라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아마 그 학생들처럼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면 견문이 많이 넓어질 것이다. 역시 경제가 여유가 있 어져야 사람들의 생각도 넓어지는 법이다. 내 대학시절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말하기는 힘 들었다. 나도 생각 넓은 젊은이로 살고 싶었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의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들 역시 대학시절에 외국여행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대학생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은 90년대에 들어서나 생긴 일이다. 난 그런 나라를 만 드는 데 일조를 했다는 생각으로 나를 위로하곤 한다. 한국에도 요즘 젊은이들을 부러워하면서 나같이 자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이면 가족들과 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IMF라 외식 같은 건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옛날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많아진 셈이다. 옛날 에 호텔에서 식사를 하면 손님은 외국인들 뿐이었다. 한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요즘은 사정이 다 르다. 이런 걸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1주일 내내 열 심히 일한 사람이 가족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런 때가 유일한 것이다. 밖에서 일하면서 손님들하고 맛있게 식사를 했는데 거기에 우리 가족들도 데려가보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다. 이건 낭비가 아니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가족을 배려하게 되고 생각하게 된 여유가 난 부럽다. 게다가 한국에서 나는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까. 생각해보면 나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부모님하고 외식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마도 없었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일본에 가면 아내나 자식들하고 외식을 자주 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일본에 가는 경우는 어쩌다 가는 것이니까 업무상 외에도 오랜만이라고 연락해 오 는 사람 또 오랜만에 보는 회사 사람들하고 식사하고 얘기하느라 바쁘다. 그러면서도 나는 가족 들과 외식을 나오는 사람들의 여유나 기쁨 같은 것들을 부러워한다. 젊은 사람들이 지금 누리는 여유를 나는 누리지 못하고 정년퇴직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국에도 이런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 들이 많을 것이다. 고생도 팔자라는데 이런 게 그런 사람들의 팔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젊은 사 람들이 한국이든 일본이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오늘의 여유가 그나마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이나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골프를 치기 전날 삼겹살을 먹는 이유 일본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방법은 한국사람보다 한수 아래다. 갈비나 불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삼겹살 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사람들은 삼겹살이라고 해서 따로 먹지 않는다. 난 한국 에 오기 전에 베이컨은 먹어봤어도 삼겹살을 먹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삼겹살을 처음 먹었을 때 그 맛에 반해버렸다. 값도 싸고 또 아무 양념도 안 된 것이 색다른 맛이었다. 그런데 한 5년 전쯤 인가 텔레비전의 요리시간에 삼겹살이 비타민 B가 많은 좋은 식품이라고 강사가 말하지 않 는가 야 삼겹살이 맛만 좋은 줄 알았는데 영양도 아주 만점이구나 앞으로 삼겹살을 많이 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는 골프를 치기 전날이면 반드시 비타민 B의 보고인 삼겹살을 먹는다. 물론 삼겹살을 먹는다고 다음날 버디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기분이다. 삼겹살을 먹어서 든 든하다라는 식으로... 나는 비타민하고 아주 재미있는 인연이 있다. 61년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였 다.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질을 하는데 왼쪽 입술에서 자꾸 치약이 새는 게 아닌가 어 이거 봐라 하는데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좋아지겠지 생각했는데 상태는 더 심해졌다. 입술은 움 직이지 않았고 한쪽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아주 걸작이었다. 네가 남자라서 참 다행이다. 이건 안면마비라는 병인데 고치기가 아주 힘들 건든 그러니까 만약 네가 여자라면 웃지도 못하고 무뚝뚝하게 앉아 있을 텐데 시집이나 가겠냐 그런데 모모세군은 남자니 까 장가는 갈 수 있지 않나. 아니 불치의 병에 걸린 환자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의사가 있 다니... 난 불치의 병이 걸렸다는 사실보다 의사의 그런 태도에 질려버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의사가 날 안심시키려고 농담식으로 말한 건 아닌지 싶다. 어쨌든 그 의사는 신경계에 좋다는 아라나민 비타민 한국의 아로나민이라는 영양제를 일본에서는 아리나민이라고 한다 을 주 고 매일 두 알씩 열 번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굴을 열심히 마사지 해주라는 게 처방의 전 부였다. 그때는 아리나민이 5밀리그램짜리밖에 없어서 그렇게 두 알씩 자주 먹어야 했다 얼굴이 제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야 그때의 감격이란... 비타민이 없으면 이렇게 신경 쪽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나는 경험적으로 알았고 비타민의 소중함을 알았다. 그러나 난 비타민을 서양사람 처럼 약재로는 섭취하지 않는다. 비타민 A는 당근이나 장어 비타민 B는 삼겹살 비타민 C는 귤이 나 과일로 섭취한다. 이런 식의 섭취방법은 자취생활 30년의 이력이 만들어 준 경험적인 것이지 만 효과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나다. 내가 지금 이렇게 건강하니까. 그렇다고 골프를 치기 전날에만 비타민 B에 매달리는 건 아니다. 난 가끔 직원들에게 회식을 하러 갈 때 어이 비타민 B 먹으러 가지. 한다. 그러면 직원들은 야 삼겹살 먹으러 가자는구나 하고 금세 알아듣는다. 삼겹살은 회식 을 하기에 딱 좋은 음식이다. 맛도 좋은데다가 굽는 것 또한 재미있고 가격도 싸다. 거기다 비타 민이 풍부해 직원들의 건강까지 좋게 해주니까 더 없는 음식이다. 난 오늘도 직원들이랑 밀린 이 야기를 하면서 비타민 B를 섭취할 생각이다. 그리고 기분 좋게 내일 필들로 나가서 내 실력을 보 여주고 싶다. 조니워커라는 이름에 눈이 멀어서... 내가 소주를 못 먹는 것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다. 그럼 양주는 마시냐고 물어 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양주도 못 마신다. 소주는 25도인데 양주는 40도가 아닌가 내가 양주를 먹은 것은 딱 두 번 이다. 그것도 한국에서 처음 먹어 봤다. 결과는 두 번 다 KO였다. 68년 한국에 와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 양주를 먹어봤다. 거래처에 갔는데 거래처 사장님하고 술을 한잔 하게 되었다. 그 런데 사장님이 조니워커 블랙을 시키는 게 아닌가 아 이런 고급술을... 그 당시에는 최고의 술이 조니워커였다. 나도 말로만 들어봤던 술이었다. 그러니 조니워커가 나와서 안 마실 수도 없고 해 서 에이 모르겠다 하고 한 모금 입에 넣었다. 그런데 입과 목구멍이 난리가 났다. 타는 것처럼 뜨 거웠다. 그래도 거래처 사장님 앞에서 뱉을 수도 없고 먹으려니까 입에서 불은 나고 이거 또 큰 일 났다. 병원에 실려 가는 거 아냐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 았다. 눈을 떠보니 다음 날 아침이었고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그 사장님을 찾 아갔다. 거래처 사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런 실수를 했으니... 이거 어쩌지 하고 바짝 긴장해 서 말이다. 그리고 사장을 만나서 잘 하지도 못하는 한국말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다가 안 돼서 일본말로 와다시와 어쩌고... 하며 사과를 했다. 그랬더니 웬걸 그 사장님은 일본말로 모모세 씨가 아주 맘에 들었어 그렇게 다운되니까 술 사준 맛이 나던데 오늘 또 한잔 하자고 하는 것이 었다. 당연히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후 조니워커만 보면 그때의 생각이 나고 촌스러웠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 사실 그때 나는 젊고 또 어수룩한 면이 있어서 거래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동생 삼자는 사장님들도 있었다. 그러니 그런 분들이 권하는 술잔을 뿌리치느라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국사람들은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아무튼 한국에서 소주와 양주를 조심하 던 내가 이번에는 일본에서 임자를 만났다. 포철근무를 끝마치고 일본에 있던 나한테 전화가 온 것이다. 박태준 사장이었다. 박 사장은 포철에서 일했던 일본인 관계자를 모두 모으라고 했다. 부 지런히 연락을 해서 어제의 전우 들이 모두 모였다. 박 사장은 야 오래간만이다. 덕분에 공사 잘 끝났네. 하며 술판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박 사장은 다짜고짜 위스키를 맥주잔으로 돌리기 시작했 다. 현장 분위기가 물씬 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한잔 먹으니까 벌써 정신이 몽롱해졌다. 박 사 장 앞에서 어떻게든지 정신을 추스르려고 애를 썼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박 사장의 야 노래 불러. 소리를 몇 차례나 들었지만 노래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박 사장이 야 이렇게 술 못하는 사람하곤 우리 현장에서 일 못해. 하는 말까지 했지만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나는 물론이고 그 날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다들 거기서 완전히 다운되었다. 그 와중에도 미쓰비시 사람들은 2차 3차 까지 간 모양이었다. 독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처럼 나는 그 쓰디쓴 양주도 한국 덕분에 배웠다. 물론 다시는 먹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지만... 하지만 양주의 향기만큼 진한 추억을 나는 가 지게 됐다. 지금은 난 양주 욕심도 소주 욕심도 내지 않고 오직 내 입에 맞는 OB맥주를 두 병씩 시켜서 느긋하게 마시면서 노릇노릇한 삼겹살을 즐긴다. 이 정도면 나도 한국인이 아니냐면서... 내가 죽으면 도멘이 한국에서 철수할지도 몰라 도멘 한국지사에서 일하다가 죽은 사람은 모두 두명이다. 한사람은 대연각 화재 때 또 한사람 은 대구 금오호텔 화재사고로 죽었다. 둘 다 피할 수 없는 화재사고로 죽었으니 한국 사회에 무 슨 잘못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두사람이 운이 없었다. 내가 68년 서울로 발령을 받 았을 때는 막 김신조가 넘어와서 일본에서도 큰 화젯거리가 된 때였다. 게릴라가 넘나들고 전쟁 이 발발하지도 모르는 서울에 가는 것은 나에게 큰 모험이었다. 무장간첩이 나타나는 나라는 싫 습니다. 는 나를 위해 회사의 상사가 서울은 괜찮냐고 서울 지점 직원에게 물어 봤더니 서울은 넓어서 게릴라전하고 도멘하고는 상관없다 무장간첩이 나타난 곳은 회사하고 1시간 떨어진 거리 다 안심하고 부임하라 는 전문을 보내줬다. 나는 그 말만 믿고 안심하고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 말은 거짓말인 것을 알게 됐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나는 아무래도 무장 간첩이 나타났다는 말이 신경이 쓰여 어느 날 회사 운전기사에게 김신조가 나타난 곳을 가보자고 얘기했다. 가봤더니 당시 도멘이 있었던 사무실과 김신조 사건이 난 곳은 차로 10분 거리였다. 그 때의 황당함이라니... 어쨌든 한국은 처음부터 상당히 위험한 나라라는 생각을 심어줬던 것만은 사실이다. 대연각 화재는 내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줄 정도로 큰 화재였다. 그때가 크리스마스였 는데 나는 포항제철 현장에 있었다. 일본은 크리스마스가 휴일이 아니었지만 그날은 현장이 쉬었 다. 하지만 나는 그날 아침 서울 지점에 전화를 걸어서 윤두병 부장에게 본사에서 도착한 설계도 면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모레 가져다주겠다. 고 발을 뺐고 나 는 현장에서 막일꾼 한테 무슨 크리스마스 이브냐고 여자 친구랑 데이트 약속 취소하고 빨리 가 져오라고 했다. 서울에서 포항까지 오는 비행기를 타고 그 친구는 40킬로그램 정도나 되는 설계 도를 투덜거리면서 가져왔다. 그 비행기는 포항은 물론 울산 부산을 거쳐 서울로 가는 경제적인 비행기였다. 지금 그런 비행 노선이 있다면 항의가 대단했겠지만 당시는 울산 포항등 공업개발을 위해서 임시로 만든 노선이었다. 산업개발을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여하튼 그 친구랑 현장 사무 실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데 새벽에 대연각에 화재가 났다는 뉴스가 나왔다. 큰 화재였고 수많 은 사람이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고 죽는 장면이 생생하게 텔레비전 화면에 잡혔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에게 물어 봤다. 대연각에는 우리 거래처 사람이 없냐고 그랬더니 도요레이온 사람이 몇 명 대연각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럼 우리 직원들은 없느냐고 했더니 없다고 했다. 나중에 알아보 니까 도요레이온에서 온 사람들은 다 죽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에게 그것 봐라. 서울에서 데이 트하지 않고 여기 오길 잘하지 않았느냐. 고 농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본사 섬유부의 과장 한명이 그날 죽었다. 그는 양복을 입고 여권을 주머니에 넣고 있어 신원이 가장 먼저 파악 됐다. 서울 지점에 올라 갔더니 분위기가 영 안 좋았다. 본사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직원을 혼자 놔 두고 뭐한 거냐고 난리가 났다. 나는 다행히 서울을 떠나 현장에 있었지 때문에 심하게 문책을 당하지는 않았다. 또 한 명 화재로 죽은 직원 역시 섬유부 사람이었는데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그 친구는 나보다 몇 년 후배 직원인데 내가 가끔 일 때문에 서울에 가면 모모세 선배 안녕하십니까 현장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하고 깍듯이 인사를 하던 친구였다. 난 부서도 다르고 별로 말도 해보지 않았는데도 그 친구는 붙임성이 그렇게 좋았다. 그해 연말 도멘 의 지점장이 연말 행사는 다 미루고 쉬어라. 고 했는데 이 친구가 현장 동료들이 고생을 많이 해 서 한 번 내려가 봐야겠다며 기어코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에 있는 금오호텔은 포항에 있는 도멘 직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래밭만 있는 포항에는 당연히 호텔이 없었고 경주 에도 장급 여관 몇 개가 고작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호텔은 대구에나 가야 있는 위락 시설이었 다. 또 금오호텔은 일본의 호텔 분위기도 나고 일식당도 있어서 더욱 인기가 있었다. 또 대구는 철도와 고속도로가 있어 교통도 편했다. 그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연말에는 조금 느슨했고 이 친구는 새벽 4 5시까지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술을 먹은 상태로 넥타이도 풀지 않고 자 다가 사고나 나서 질식사했던 것이다. 이 친구가 묵은 곳은 2층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이 친구가 짐을 풀면서 야 잘됐다. 2층이니까 불이나도 뛰어내리면 되니까 안심할 수 있겠다. 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그런데 이 친구의 시신을 서울로 옮겨서 빈소를 차리려는데 서울 장충동 사택에 있는 한국 관리인들이 객사한 사람은 집으로 들이는 법이 아니라고 끝끝내 반대해서 결국 관리인들을 집으로 돌려 보냈고 우리 일본인들끼리만 그 친구의 빈소를 차려주었다. 대연각 화재는 영화 타워링 같은 끔찍한 사고였기에 기억에 남았고 금오호텔 사건은 아끼는 후배를 잃었던 사고라서 생생하다. 하지만 대연각 화재 때 아 불이 나면 저렇게 해야겠구나 하고 마음먹은 요령을 25년이 지난 올해 유용하게 써먹었다. 나는 당시 서울 한남타 워라는 아파트를 숙소로 쓰고 있었다. 남산이 보이는데다 지하에는 수영장도 따로 있는 꽤 괜찮 은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에는 유명한 외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나는 한남타워 4층에 숙소가 있었 다. 그날은 골프 약속이 있어서 6시부터 서둘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부터 비가 내렸 고 골프 약속은 취소됐다. 그래서 의자에 않아서 잠깐 졸았을까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운전 기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지점장님 큰일났습니다. 지금 지하 수영장에 불이 났습니다. 자다 가 전화를 받아서일까. 놀란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어 봤더니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나고 있었다. 순간 문을 닫았다. 연기가 방안 까지 밀려왔다. 나는 납짝 엎드렸다. 자연스럽게 어이구 큰일났구 나. 이걸 어쩌면 좋은가 짧은 탄식이 나왔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나는 입고 있던 양복하 고 넥타이를 벗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양복의 세탁비가 걱정이 되어서 양복을 곱게 옷장 속에 걸어 놓았다. 나중에 한국사람들이 말하길 일본사람들은 깍쟁이라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정 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옷을 벗어둘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리곤 허름한 티셔츠 에 면바지로 갈아입고 어릴 때 배운 것이기는 하지만 대연각 화재를 보면서 아 나도 저럴 때는 저렇게 해야겠다 고 생각한 적이 있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손전등을 들고 비상계단을 향해서 내려갔다. 나는 4층에 살았는데 보통 승강기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기 때문에 다섯 번만 돌면 일층이니 금방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을 열고 내려왔을 때 이미 계단은 연기로 가 득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경에는 석유 그을음이 새까맣게 내려앉았다. 그런 연기를 뚫고 2층까지 왔을까. 여기가 도대체 어딘가 하고 계단을 더듬어 보니 2층이었다. 그런데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너무 힘이 들어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그냥 쉬고 싶었다. 아직 두 번이나 더 내려 가야 되는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석유 냄새의 환각작용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담배가 너무 피고 싶어졌다. 그래서 주머니를 뒤졌더니 담 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담배를 피는 대신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담배가 없었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아마 그때 담배를 피웠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화재로 죽은 두 사람이 생각났다. 야 바보같이 지금 내가 뭐하 고 있는 거야 지점장인 나까지 죽으면 회사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어쩌면 도멘 서울지사를 폐 쇄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나는 젖먹던 힘을 다해서 계단을 두 번 돌아서 1층으로 내 려왔다. 1층에는 구경꾼들이 가득했다. 그 구경꾼 중에서 운전기사를 발견하고 나는 운전기사를 불렀다. 그런데 그는 나를 못 알아봤다. 만화에나 나올 법하게 숮검정으로 서 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후 1주일 간 나는 천식으로 고생했다. 기침할 때마다 검은 가래가 나왔지만 병원 에 가지 않았다. 나는 살아난 것만으로 감사했다. 그 한남 타워에는 나 말고 두명의 일본인이 더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도카이은행 서울 지점장이었는데 7층에 살고 있어서 불이난 줄도 모르고 천하태평이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은 2층에 살던 도쿄해상화재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 전부터 자신은 불이나도 걱정이 없다고 우리에게 자랑하곤 했다. 보험회사 사람답게 항상 사고에 대비하는 자세가 몸에 배었는지 불이 나도 자기는 베란다에서 나무를 타고 뛰어내리면 걱정이 없 다고 큰소리를 치곤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 화재사건의 유일한 부상자가 됐다. 그는 화재 당 일 평소에 말하던 대로 불이 나자 정말 베란다로 나와 나무에 매달렸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날은 골프 약속이 취소될 만큼 비가 많이 왔다. 당연히 나무는 미끄러웠고 나무로 몸을 날렸던 그는 나무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것이다. 일단 사고를 면하고 나니 죽느냐 사느냐 하던 순간도 농담거리가 되는 법이다. 나중에 그를 만나서는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말을 하니까 그런 사고가 난 거라고 놀려댔던 기억이 난다. 싸우면서 건설한다 라는 구호 아래 30년 간 물불 안 가리고 전쟁처럼 근대화를 이룩해 온 나라 한국에서 두 명밖에 죽지 않은 것은 그나 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화재로 죽은 두 직원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의 아줌마들 나는 도멘 서울 사무소가 있는 서대문 근처의 음식점 아주머니들에게 인기가 있는 편이다. 나 와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음식점 아주머니들이 나를 환대하고 유독 내게 서비스를 잘해 주 는 걸 보고 부러워한다. 내가 가는 음식점과 집 앞의 슈퍼와 과일가게 등에서 만나는 아줌마들의 푸근한 입담도 한국에서 사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내가 지난 30년 가까이 한 번도 바꾸지 않고 다녔던 세탁소와 양복집이 있다. 특히 세탁소 아주머니는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주 친하게 만 나온 분이다. 이 아주머니는 내가 책을 쓴 다음 신물에 나오고 텔레비전에 나오면 그것을 다 보 고 있다가 어제는 어디에 나오셨고 그제는 어디에 나오셨고 하며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떻게 하 루종일 일하면서 내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는지 참 놀랍기도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 아주 머니의 따뜻한 환대야말로 내가 매일 그 집을 찾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주머니들에게 환대를 받아서인지 나는 한국 아주머니들에게 점수를 후하게 준다. 일본식 감각으로 하면 한국사 람들은 역시 억세다. 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활발하고 시원시원한 한국의 아주머니들이 나는 좋 다. 그래서 한국의 단어 가운데 아줌마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이 아줌마란 말은 외국인인 내가 듣기에도 참 푸근하고 친밀감 있게 느껴진다. 여보세요 도 나는 그렇게 느끼는데 참 사람을 편하 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에서 아줌마라는 말은 여자를 낮춰 부르는 느낌이 있는 말이라고 한다. 난 그런 걸 몰랐다. 하긴 요새는 그래서인지 식당 같은 데서 나는 아줌마하고 부 를 때도 있지만 유행에 맞춰 언니야 하고 부를 때가 많다. 한국 친구들에게 아줌마라는 말은 오 바 상 이라는 일본말보다 훨씬 더 정감이 있는데 왜 낮추는 느낌을 주느냐고 물어봤더니 한국 친 구들의 대답 왈 아줌마들은 억세고 시끄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 루이스랑 한국의 지하철에서 빈자리가 있으면 누가 빨리 앉는 줄 아느냐면서 아줌마들이 더 빠르다는 농담도 가르쳐줬다. 그 러면서 일본여자들은 다소곳 하고 조용해서 좋지 않느냐고 내게 반문한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 본 아주머니들도 똑같이 수다스러워. 그랬더니 진짜야 하고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이다. 나는 이어 서 여자들은 대개 비슷한거야.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설마 하며 내말을 믿지 않았다. 한국 아줌 들처럼 시끄럽기야 하겠냐는 것이다. 사실 일본여성들도 예전과 다르게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아 이들도 시끄럽게 군다. 한국 아줌마와 아이들이 별난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 아줌마들은 뛰어노 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다는 것이고 일본여성은 이야기에 한눈을 파는 것이 다르다. 조용히 시키라고 하면 일본여자들은 내 아이한테 왜 큰소리냐고 따지지 않고 조용히 주의를 준다. 나는 그 친구에게 한국 아줌마들이 드세고 시끄럽다는 것은 그만큼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 아니냐고 반 문했다. 그런 것들이 그대로 생활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한국인 친구들은 생활력과는 다른 문제라고 슬쩍 대답을 피했다. 나는 한국 친구들에게 불평들을 하지만 당신들이 그렇게 밖 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가도 부인들 바로 아줌마들 이 따뜻하게 기다려 주지 않느냐 고 물어봤다. 아침에는 해장국도 끊여주고... 그랬더니 한국인 친구가 요즘 그렇게 간 큰 남자가 어딨 냐 며 웃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의 부인들은 틀림없이 아침에 따뜻한 북어국을 끓여놓을 것이라 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내 나이 또래인 그 사람들의 부인들은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삶을 지켜본 여성들이다. 그렇게 힘들게 산 자기 어머니를 이해하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그 분들의 행동과 말 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니까 당연히 남편에게 쿠사리를 주면서도 아침이면 뜨끈 한 북어국을 끓여 내놓을 것이다. 난 그런 한국남자들이 부럽다. 독신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누릴 수 없는 특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한국의 아줌마들을 좋아하지만 내가 이해 못하는 딱 한 사람 의 아줌마가 있다. 한 사람뿐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바로 우리 아파트 위층의 아주머니이다. 우리 집 위층이 작년 베란다 공사를 했다. 아마 아파트 베란다를 마루로 쓰려고 공사를 한 모양 이었다. 그런데 공사가 잘못 됐는지 올 여름 물이 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세계지도를 천장에 그 리더니 급기야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 베란다에 책상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원고라든가 강 연집 서류 등 꼭 필요한 것이 젖을 뻔했다. 다행히 미리 치워놓아서 크게 낭패를 보지는 않았다. 나는 관리인을 불렀고 그는 위층 아줌마를 불러왔다. 그 여자는 현관문 밖에서 우리 천정을 보더 니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들어와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이다.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나도 그 여자에게 전화를 하거나 가서 따지지 않았다. 주위 사람이 그 아줌마에게 따지라고 했지만 난 그건 한국식이잖아. 난 그런데 익숙하지가 않다구.... 하고 답했다. 오히려 그 여자 겨울을 대비해서 빙판을 만들어 산타크로스 썰매가 쉽게 들어오게 하려나 보지하 고 되지도 않는 농담으로 응수했다. 그렇게라도 말해야 내가 스트레스를 덜 받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외국인이라서 혹은 불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천장을 고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 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내년 8월이면 계약이 만료된다. 과연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이 사람이 그때까지도 베란다를 고치지 않고 놔두려고 하는지 두고볼 작정이다.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것 보다 그게 더 무섭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 것이다. 혹시 이 책을 읽으면 그 아주머니가 베란다 를 고쳐줄는지... 남에 대한 배려와 친절함을 모르는 사람이 조금은 긴장을 늦추게 하는 훌륭한 매너이다. 한국의 아줌마들은 그런 것들이 있다. 처음에는 무뚝뚝해 보여 서먹서먹하기도 한 게 한국의 아줌마들이지만 몇 번 만나서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네며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 줄 수가 없 다. 자기가 할 일만 딱하고 마는 게 아니라 남을 살피며 푸근하게 마음을 써 준다. 또 강한 생활 력하며... 그런 한국 아줌마들을 나는 참 좋아한다. 한국 남자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다. 한글이 좋다고 한자를 무시하지 맙시다 앞에서도 내가 아줌마 라든지 여보세요 같은 단어에 애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말은 발음이 좋아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 다 기분이 좋을 것 같다. 나는 공과대학 기계학과 출신이다. 그 런 내가 이런 단어들에 각별한 감정을 갖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극과 극 은 통한다고 하지 않던가. 기계나 말이나 사람이 이용하는 도구이고 사람의 뜻을 담아서 쓰는 도 구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은가 아무튼 나는 한국 단어가 주는 그 묘한 맛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 다. 예를 들면 무척 추운 겨울날 아침 대부분 사람들은 야 오늘 무척 춥네. 라고 할 것이다. 이 말은 일본말로는 호라 쿄우와토테모사므이네 이다. 그런데 어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네. 라고 하면 춥다 보다는 덜 춥지만 바람이 분다든지 추워진 것을 체감할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일본어에는 없다. 이런 멋진 표현을 쓰는 나라는 아마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한국어를 깊이 있게 공부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매일매일 날씨에 관한 한국어를 듣고 있으면 야 이런 단어 가 있어 하고 놀라는 때가 많다. 아마 한국사람들은 오히려 그 맛을 알면서도 쓰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렇게 날씨나 색깔 또는 양태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접하면서 나는 한국이 문화적으로 상당히 수준이 높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말은 그 나라 사람들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여우비 산들바람 보슬비 같은 단어들을 들을 때마다 참 흐뭇하고 즐겁다. 한국 사람의 재치랄까 유머나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말을 만들어 쓰던 사람은 한자를 주로 사용하는 양반이 아니라 분명히 평민들이었을 텐데 이런 단어를 만들어 썼다는 점도 재미있다.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자를 쓴다. 한자는 의미가 분명한 글자다. 글자 하나가 뜻과 상징과 모양을 가지고 있는 문자이다. 한국이나 일본 모두 한자문화권이다. 그렇지만 일본과 달리 한국은 한글전용 표기를 고집하고 잇다. 방송에서도 영어단어를 사용하면 그 다음 날 큰일이 난다고 들 었다. 한국사람들의 국어사랑이 대단한 건 그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그렇다. 서울 거리에 나가 면 이건 도쿄인지 홍콩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전부 영어표기 일색이다. 한글사랑은 구호에만 그 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또 한글을 전용한다면서 한자를 게을리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한자는 읽 는 순간 의미가 바로 온다. 제재하면 뜻이 모호해도 제재 하면 금세 뜻이 새겨진다. 특히 요즘 젊 은이들은 한자에 어두워서 자기 이름도 한자로 못 쓰는 대학생이 많다고 들었다. 아마 어려운 내 이름을 한자로 읽을 줄 아는 젊은이들은 아주 드물 것이다. 앞으로 인터넷으로 세계가 한데 엮일 것이다. 우리 회사도 인터넷으로 많은 업무를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 는 언어는 영어다. 영어는 이제 국제표준어가 됐다. 그 다음은 어딜까 바로 중국이다. 이 두 나라 말이 아마 인터넷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은 틀림없다. 중국은 13억 중국 본토인에다가 화 교까지 포함해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이다. 거기에 중국문화권인 한국 일본 싱가 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까지 합치면 중국문자의 지배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같은 문화권인 한국은 유리한 출발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 유리한 점을 제대로 자각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아무 소득 없는 형식적인 한글사랑을 외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거리에 나서면 한국은 영어를 더 사랑하는 나라 같다. 실속도 없도 의미도 없는 한글전용 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한자도 모르고 그렇다고 영어공부에 치여 한국말의 깊은 맛도 모르는 얼치기 젊은이들이 많아질까 우려가 된다. 아마 나처럼 비가 내리면 이건 가랑비다 보슬비다 장 대비다 구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간다면 이런 말은 언젠가 사어 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좀 답답하다. 한국말은 매우 아름답고 정겹고 따뜻하다. 이 말의 뜻과 맛을 잘 살려서 쓴다면 한국사람들도 좀더 여유 있고 느긋해지지 않을까 나도 그런 멋스러움을 한수 배우고 싶다. 한국말이 멋있다면서 왜 한자를 쓰라고 하느냐 모순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 모순되지 않게도 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지 않게느냐고 역으로 묻고 싶다. 나야 언어에 대해 문외한 이니까... 단 한국말은 멋지지만 앞으로의 국제화시대에서 한자의 중요성을 살려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만은 지적해두고 싶다. 인재 개발에 실패한 지점장이 꼭 하고 싶은 얘기 우리 도멘 한국지사의 직원은 일본인이 10명 한국인이 28명이다. 내가 한국 도멘의 지사장으로 부임한 것은 지난 1986년 그러니까 약 13년을 한국의 지사장으로 근무했다. 지사장이라는 직책은 자기 일을 하면서도 한 부서의 최고 책임자이자 현장의 야전 사령관으로서 인재를 키워야 하는 자리다. 나의 후임 그 다음 후임으로 지점장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키워 놓아야 하는 자리이다. 회사에는 신입사원들이 들어온다. 그들은 꿈 많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미래의 씨앗이다. 회사라는 밭은 이들을 받아서 훌륭한 열매를 맺도록 도와줘야 한다. 상사나 경영자는 이 씨앗을 키우는 농부 같은 사람도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한국에서의 지점장 생활을 돌이켜보면 인재 를 키우는 데는 실패했다는 결론이다. 나는 특히 한국인 직원들을 보면서 나의 바로 다음 지점장 은 아니라도 다음 다음 지점장 정도는 한국인 출신이 되었으면 그리고 그런 인재를 키워야지 하 는 욕심을 내심 품고 있었다. 그리고 틀림없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자 신이 없다. 내가 몸담고 있는 도멘이라는 회사는 섬유에서 출발하여 기계 석유화학 등으로 분야 를 넒힌 회사다. 당연히 도멘이라는 하나의 회사라도 분야가 여럿으로 나뉘어 있다. 나는 포철 일 을 오래 했으니까 그 관련분야는 잘 안다. 포철 사업으로 한국에서 훈장도 받았고 본사 사장으로 부터 표창도 받았으니 나름대로는 전문가이다. 하지만 도멘 사업의 모든 분야를 알지는 못한다. 나는 도멘에 있는 직원들이 유능한 인재들이니까 다른 분야는 그 사람들에게 전권을 맡기려고 했 다. 어떻게 보면 방임주의라고 할까. 물론 신입사원들에게까지 맡길 수는 없지만... 그래서 나는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일이 잘 안되면 나에게 가져와라. 책임은 내가 지점장이니까 진다. 하지만 당신들이 알아서 결정해라. 이런 태도로 십수 년을 일관했다. 그 스타일을 바꿔보려고 한 적은 없다. 그러나 결과가 좋았다고 얘기하지는 못하겠다. 인재가 제대로 컸다고 얘기할 수 없는 게 결과로 나타나 있으니까. 나는 절대로 여기서 직원들이 문제가 있다고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건 완전히 내 책임이다. 같이 일하다 보면 나같은 사람에게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 다. 나는 일요일이라도 일이 있으면 나와서 일을 하자는 식이다. 그래서 일요일에 나와서 일을 하 자고 얘기하면 이렇게 말한다. 일요일에요 아내도 있고 자식들도 있고...일요일에는 집안에 볼 일 이 있는데. 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 일하는 태도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오래 일하는 사람들은 나같이 일하는 방식에 적응하는 사람들이 된다. 나부터 이렇게 인재개발에 실패한 사람이니 나도 할 말은 없지만 한국에서도 인재얘기를 많이 하지만 한국기업이 인재개발 을 훌륭히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 가지 얘기만 덧붙이고 싶다. 나는 군마공업대학이 라는 지방 대학을 나왔지만 내가 종합상사를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대학교 2학년 시절부터 였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그냥 취직이라기보다 취직해서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꿈을 대 학 2학년 때 정한 것이다. 그러니 일이 힘들어도 내가 선택한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할 수밖 에 없었다. 그런 경험으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앞으로 인재들은 하나부터 열까 지 모두 가르쳐주는 식으로 키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우나 현대에 취직하는 사람들이 1년에 2 천명이라고 할 때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회사도, 취 직하는 사람도 처음부터 정리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봉급이 많으니까 들어온다고 얘 기할 수 있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어차피 입사한 2천명이 회사에 모두 남아 있을 수는 없 는 노릇이다. 더구나 2천명씩이나 사람을 뽑을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회사에서 그중에 30년 뒤에 필요한 사람은 20명뿐이다 하면 들어오는 사람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남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 회사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 회사를 나갔을 때 아니 그 친구, 대우에서 그렇게 밖에 못 배웠어, 현대는 그렇게 가르치나 하는 소리를 듣기 않아야 한다. 결국 대기업은 그렇게 인재를 키워서 한국 경제에 이바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신입사원 같은 젊은 이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에는 사람마다 돌아갈 자리가 그렇게 많 지가 않다. 승진하고 그 회사에 꼭 필요한 간부로 남는 것은 예전에 비해 한층 더 어려워질 것이 다. 그러면 대학 때부터 분야를 넓게 잡고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일본이나 미국에 유학 갔다 와서 국내에서 자리를 잡아야겠다 그것도 꼭 대기업에 무슨 사장이 되야겠다 이런 식의 목표만 잡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인도네시아 네팔 같은 곳에 가서 농사를 하면서 새마을 운동을 전해야 겠다 나는 캄보디아를 가서 봉사활동을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한국경제가 국내 시장에만 눈을 돌리고 있을 때의 시각으로 보면 앞으로는 자리도 없지만 눈을 세계로 넓히면 얼 마든지 개척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리고 양적으로 더 크게 더 크게 하는 식으로 성장 일변도로 발전해 온 게 한국이지만 눈을 좀더 세밀하게 뜨면 조선기능에서 어느 부분 자동차에서 어느 부 분 하는 식으로 더 넒은 세계가 눈에 보일 것이다. 자신이 성장해야 할 부분을 좁게 잡더라도 어 느 분야마다 세계와 호흡하고 경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보면 작은 일이 아닌 것이다. 왜 본 사에서 이사되고 사장되고 하는 식으로 모두가 똑같은 식으로 발전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생각과 꿈이 같으면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경쟁이 불필요하게 강화된다. 요즘 젊은이들의 눈으로 보면 이미 많을 일들이 이루어졌고 선배들이 이미 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자기가 갈 자리는 없 어 보인다. 그건 그 선배 세대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그 후배 세대가 으레 하는 생각들이다. 그 다음 세대의 꿈은 선배와는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새롭게 자기들이 할 일도 보이는 법이다. 이미 앞선 세대가 많은 것들을 이루어 놓은 걸 탓할 필요는 없다. 그건 사실 좋은 출발조건을 갖추어 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이 마음에 든다. 김우중 회장은 세계 곳 곳에 젊은 사람이 가야 할 곳이 많다고 얘기한다. 젊은 사람들은 넓게 생각해야 하고 그렇게 젊 은 사람들의 눈을 키워주는 경영자도 많아야 한다. 지금 젊은이들은 대기업에 취직해서도 어려운 일을 시키면 난 못해.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 눈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난 후배 인재들을 키우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렇게 말할 자격 이 없는 정도는 아닐 것 같아서 감히 이런 말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