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 향락의 중국사 지은이: 이나미 리츠코 출판사: 차림 역사의 블랙홀을 찾아 나는 이제 역사의 아이러니 하나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사치향락이라는 문화형태가 어 떻게 자기파멸과 역사의 유산이라는 경계에서 줄달음질치며 어떻게 생성, 소멸하는가를 살피려는 것이 다. 그것은 자기를 죽이는 사치와 후세를 보듬는 사치의 구별이고 물질적 사치와 정신적 사치의 구분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기원전 12세기의 은나라 주왕에서 금세기 초의 청나라 서태후를 관통하는 3천 년의 중국 역사에서 블랙홀의 마력으로 지속되어 온 사치의 전모를 찾기 위해 내가 차용한 개념은 역동 성이다. 왜 역동적 사치인가? 이 책에서 다루는 향락의 역사는 황제라는 절대군주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절대 권력체제가 다극분화되어가는 지점에서 귀족과 상인으로 옮겨가는 쾌락의 주인공을 분명하게 부각시키 려는 데 목적이 있다. 장과 막을 달리 하며 등장하는 사치의 주역들이 내뿜는 광기와 열정과 맹목의 추 구는 역동성 그 자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리하여 중국 왕조의 역사는 화려한 죽음의 꽃, 주지육림의 반복적 운행이었다. 부패한 왕조를 대신 하여 들어선 새로운 체제와 그 몰락의 순환적 고리마다에는 반드시 왕조의 멸망을 촉진하는 악마가 있 었는데, 그는 타락과 부패의 화신으로서 당대의 온갖 재앙적 요소를 응축한 존재이다. 예컨대 그 대표격 으로 환관을 들 수 있다. 초고밀도의 힘으로 빛마저 탈출할 수 없게 만드는 블랙홀처럼 이들은 악마적 향락의 극치를 달렸다. 황제에서 귀족과 상인, 마침내 사치의 블랙홀인 환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벌인 사치향락의 행각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재물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치향락은 물질에 서 시작하여 물질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같은 물질 지향적인 사치를 외면하고, 해방감에 가득찬 정신적 사치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통쾌무비한 일탈의 정서이며 세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는 지식인들의 자유분방한 기 백으로 표현되었다. 유교문화권의 지식사회에 이상적 이미지로 남아 있는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유영의 글은 정신적 사치 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누구도 주량을 짐작할 수 없었던 유영은, 자신이 남긴 단 한편의 산문 주덕송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인 선생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천지개벽이후를 하루, 일만 년을 한 순간, 태양과 달을 자기 집 대문, 온 세상을 자기 집 뜰로 생각한다. 어디를 갈 때는 수레 바퀴자국 흔적이나 족적을 남기지 않고, 거처도 정해진 곳이 없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 삼아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멈출 때는 술잔을 손에 들고 움직일 때는 술잔과 호리병을 매달고 간다. 오로지 술을 마시는 데만 정신을 쓰고 그 밖의 일에는 일체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한 송대의 탁월한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던 소동파 역시 죄인의 처지에 떨어져 가난을 밥처럼 먹전 시절에 돈이 떨어지면 다시 생각한다고 내뱉으며 야인으로 떠돈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내보이고 있다. 여러분들은 환관의 사치와는 또 다른 문화를 이들에게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새로운 것이며 무엇이 파멸의 동인인가? 역사로 들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의문 앞에 나는 짤 막한 화두를 던져본다. 욕망은 블랙홀인가? 그렇다면 역사는 그 욕망에 대한 해부학인가? 아마도 해답 은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들이 역사 속의 비현실적인 현실로 들어갈 차례이다. 제 1장 황제의 사치향락 권력이 강화되면 될 수록 그들의 마음 한켠에느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메울 수 없는 진공상태가 점 점 확대되며 또아리를 틀게 된다. 황제들은 블랙홀이라고나 불러야 할 심적 공허감을 어떻게든 메꾸어 보려고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며 현란한 사치에 빠져들었다. 1. 주지육림 총명한 악마 주왕 중국 역사상 절대권력을 손 안에 거머쥔 천자가 끝없는 향락에 빠진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은왕 조(지원전 약 1700년 - 기원전 약 1100년)의 주왕은 그 최초의 인물이다. 은나라는 현재까지 그 실재가 확인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왕조로서, 거북의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를 불로 지지면 생겨나는 균열의 형태나 수를 보아 길흉을 점치고 중대사를 결정하는 주술적인 제정일치 국가였다. 그러나 세계 최고수준으로 일컬어지는 세공된 청동기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문화적인 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주왕은 은나라에 앞선 전설의 왕조인 하나라 최후의 천자 걸과 함께 걸주라 불리는 폭군의 대명사로, 전설에 묻혀있는 고대왕조 은나라 제 30대 천자이다. 주왕은 결코 무능한 천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타고난 천성이 총명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행정수 완도 보통을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탁월한 지적 능력에다 맨손으로 맹수와 결투를 벌일 정도로 힘도 셌 다고 하니 그야말로 호랑이에 날개 달린 격이었다. 다만 주왕은 이 축복받은 자질을 오로지 나쁜 방향으로만 발휘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총명함 을 무기로 충직한 신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으며, 뛰어난 말솜씨로 자신의 잘못을 덮어 보리고 흰 것 을 검은 것이라 우겨댔다. 무엇이든지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있게 된 주왕은 승리의 쾌감에 취해 이 세 상에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서 완전히 기고만장해져 버린다. 이렇듯 거칠 것 없던 즉위 9년째, 주왕은 징벌한 유소씨로부터 절세미녀를 상납받았다. 바로 달기이 다. 타고난 호색한인 주왕은 한눈에 달기의 미모에 반해 맹목적인 사랑에 불탔으며, 그때부터는 오로지 달기를 껴안고서 한껏 사치를 부리며 향락의 나날을 보낼 뿐이었다. 주왕은 어떠한 궤변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사치를 부렸다. 그는 우선 사슴각이라는 어전에다 엄청 난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거교라는 창고에 대량의 곡물을 저장해 놓았으며, 진기한 것이면 무엇이든 궁 전 가득히 모아들였다. 게다가 별궁에는 사구(모래언덕)라는 정원을 만들어 놓았고, 건물을 확장하기도 하는 등 자신을 위한 위락단지를 조성하여 각 지방에서 모아들인 들짐승이나 새를 놓아 기르게 하였다. 물론 미녀도 전국에서 불러들였다.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경비는 권력을 휘드르며 명분없는 세금을 거둬들여 조달하였다. 주지육림의 늪 권력과 온갖 부를 거머쥔 주왕은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위락단지인 사구에 연못을 만들어 술을 가득 채워 놓는가 하면 나뭇가지에다 말린 고기(당시에는 최고의 요리였다)를 주렁주렁 매달아 육림을 조성하였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남녀가 술래잡기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달기를 옆에 끼고 그 광경을 보 면서 밤새도록 연회를 즐겼던 것이다.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주지육림이다. 결국 주왕은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한 엄청난 재물로 장난감 상자를 뒤엎어 놓는 듯한 모래언덕 별궁 을 조성하고, 밤새도록 마소처럼 먹고 마시는 데 다 써버린다. 이런 유형의 사치는 오로지 먹고 마시는 데 마구잡이로 부를 탕진한 것이기 때문에 저급한 사치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러한 주왕의 사치향락 행태에 대해 어느 역사가는 주왕은 이른바 주지육림에서 단지 술을 마셨던 것으로, 당시의 사치는 무엇이든 분량을 중시했던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게다가 사치라는 문자를 볼 때 원래 사는 큰 사람이라고 쓰고, 치는 많은 사람으로써 모두 분량적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고 서술하 고 있다. 정상적인 테두리를 벗어나는 욕망을 탕진하는 행위는 자칫하면 잔혹한 사디즘으로 이어진다. 주왕의 경우도 그런 잔학성을 나타내는 에피소드가 수없이 많다. 재물을 탕진하는 방식은 물량적 범주를 벗어 나지 못했던 반면, 잔혹함을 발휘하는 데는 매우 다양한 방식을 구사했다. 예를 들면 무도함이 극에 달한 주왕에게 반기를 든 제후는 포락형으로 처벌했다. 이것은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위에 죄인을 눕히고 기둥 밑에서 불을 달구는 형벌이다. 물론 죄인은 미끄러지면서 불 속으로 떨어져 곧 타 죽게 되는 것이다. 심지 굳은 중신들 대부분이 주왕을 떠나 국외로 탈출한 후에도, 오직 혼자 남아 주왕에게 충언을 다 한 숙부 비간도 어김없이 주왕의 잔혹한 취미의 희생양이 되었다. 비간의 간언에 화가 난 주왕은 성인 의 가슴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나 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한가 하면서, 산 채로 비간의 가슴을 절개하 여 심장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무도함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사치와 음란, 잔 혹함을 끝없이 즐기던 주왕은 주나라의 무왕이 이끄는 제후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사슴각의 보물전에 쫓 겨 올라가 호화찬란한 보석이 박힌 옷을 몸에 휘감고, 불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고대 은왕조는 이렇게 멸망했던 것이다. 주나라 무왕은 주왕이 총애했던 달기 역시 모든 악의 근원으로 단죄하여 처형했다고 한다. 황제들의 물량주의 사치 중국의 역사는 은나라 주왕을 시작으로 하여 사치와 음란, 잔혹한 행위로 광분하다가 자멸하는 것이 왕조 멸망의 전형이 되었다. 망국의 천자는 아니지만 진시황제(기원전 259년 - 기원전 210년)나 한무제(기원전 156년 - 기원전 87 년)등 고대의 황제에서부터, 수양제(569년 - 618년)나 당의 현종(685년 - 762년) 등 중세의 황제를 거쳐, 명나라 만력제(1563년 - 1629년)나 청나라 건륭제(1711년 - 1799년) 같은 근세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사 치삼매경으로 이름을 날린 최고 권력자들이 부린 사치의 양상은 주왕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요컨대 어떤 경우든지 보물과 식량, 미녀 등 이것저것 모두 한손에 거머쥔 다음에 거대한 건조물이나 정원을 조성하기도 하고 호화판 여행을 떠나는 등, 말하자면 양적 개념에 입각한 대대적 물량소비작전 을 벌였던 것이다. 최상의 권력이란 아마도 그것을 수중에 넣을 자의 신경을 엄청난 기세로 마비시키는 속성이 있는 듯 하다. 권력이 강화되면 될 수록 그들의 마음 한켠에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메울 수 없는 진공상태가 점점 확대되며 또아리를 틀게 된다. 황제들은 블랙홀이라고나 불러야할 심적 공허함을 어떻게든 메꾸어 보려고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며 현란한 사치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런 사치 충동이 자극을 찾다 잔학성과 연결되었을 때 결정적인 타락이 시작되며 마침내 자 신의 권력기반을 무너뜨리며 파멸에 이르는 것이다. 주왕도 주지육림의 향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무서운 기세로 파멸의 구렁텅이에 곤두박질쳤던 경우인데, 절대적인 권력에 불가피하게 따라 다니는 지 독한 암흑의 마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낸 예이다. 2. 사후불멸을 꿈꾼 광기의 역사 진시황 출생의 비밀 기원전 221년 진왕 정(시황제)은 5백여 년 이어진 춘추전국의 분열국가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전역을 통일,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제국 진왕조를 세웠다. 13세 약관에 나이에 부친 장양왕의 뒤를 이 어 진나라 왕위에 오른 지 26년 만에 중국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이 위대한 패자 진왕 정의 출생에는 의문이 남아 있는데, 장양왕의 친자가 아니라 후원자 여불위(? - 기원전 235년)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대상인이었던 여불위는 상품의 가치를 찾아내는 데 귀 신 같은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 여불위의 촉수에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진 진나라의 서출 공자 자초(후예 장양왕이 됨)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촉수에 걸려든 쓸 만한 물건을 놓치는 법이 없는 여불위는, 불우함을 구실 삼아 자초에게 접 근하여 곤궁한 처지에 있던 그의 후원자가 되었어며, 교묘한 정치공작을 펼쳐 마침내 기원전 249년 자 초를 진나라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진왕 정은 여불위와 자초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 는 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 자초는 여불위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서 마주친 조나라의 수도 한단 출신의 미녀 에 반해, 여불위에게 간청하여 자신이 맞아들였다. 이 미녀가 실은 여불위의 애인으로, 이미 그의 아들 을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녀는 그 사실을 숨기고 자초으 애희가 되고 이윽고 사내아이를 낳는다. 이 아이가 진왕 정이라는 것이다. 자초, 즉 장양왕은 여불위의 덕택으로 진나라 왕위에 오르지만 즉위한 지 불과 3년 만에 죽고, 기원전 247년에 13세의 진왕 정이 뒤를 이었다. 정식으로는, 이듬해인 246년이 진왕 정의 원년이 된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탓으로 실권은 모두 배후 실력자인 여불위가 장악했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여불위는 호 사스런 저택을 지어 3천 명의 식객을 두고 그 중에서 글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뽑아 백과전서 여씨춘추 를 편찬하는 등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게다가 여불위는 태후에 올라선 진왕 정의 모친과 다시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 진왕 정이 성 장함에 따라 추문으로 이어질 것이 뻔한 태후와의 관계가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을 두려워하여, 음탕한 태후에게 노애라는 정력 센 사내를 소개해 주고 관계를 끊어버렸다. 태후는 환관으로 가장하여 궁중에 들어온 노애를 총애하여 몰래 두 명의 아들까지 낳았다. 태후의 이같은 애정행각은 오래가지 못하고 진왕 정 즉위 9년인 기원전 238년에 발각된다. 22세의 청 년 군주 진왕 정은 과감하게 이 사건을 처리하였다. 반란을 꾀한 노애를 잡아들여 일가족과 가신을 모 조리 사지를 찢어 죽이고 태후가 낳은 아들도 살해한 뒤 이 애정행각의 주모자인 여불위의 관직을 박탈 하여 실각시킨 것이다. 여불위를 극형에 처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자초를 왕위에 오르게 한 절대적인 공로를 배려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여불위는 실각 후에도 은연중 세력을 유지하였고, 이에 화가 난 진왕 정은 여불위를 촉나 라 사천성으로 유형을 보냈다. 기원전 235년의 일이다. 유형 통지를 받은 여불위는 이것이 마지막임을 받아들이고 독을 마시고 자살한다. 진왕 정은 이 시점에서야 명실공히 진나라 최고 권력자가 되었던 것 이다. 철저한 기능주의자 진왕 정은 질척질척한 피의 고리를 단절하고 부친살해를 단행함으로써 자립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전환점으로 진왕 정은 권력 재패에 대한 불타는 의지로 천하통일의 발걸음을 착실하게 밟아 나갔다. 목 표는 오로지 권력뿐. 목적을 위한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야심가 진왕 정의 모습을 위료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벌처럼 날카롭게 높은 코, 째진 듯 치켜올라간 눈초리, 매나 독수리처럼 튀어나온 가슴, 승냥이 같은 목소리. 진왕 정의 이러한 풍모는 애정이 부족하고 호랑이나 이리 같은, 즉 인간적 구속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약육강식의 본능만이 번뜩이는 인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는 재빨리 태연하게 남에게 자기를 낮추지만 뜻을 이루었을 때는 예사로 남을 깔보고 죽여버린다. 나는 어떤 지위도 관직도 없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보고) 그는 늘 필요이상으로 나에게 자신을 낮추고 있다. 만일 진왕 정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노 예로 만들 것이다. 이런 인물 옆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진왕 정의 위압적이고 사나운 풍모, 잔인하고도 혹독한 공격성을 띤 성격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위료가 간파한 대로 그 복잡한 출생 배경 때문인지 정서가 바싹 메마른 진왕 정은 인간을 무슨 기구의 부품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진왕 정은 인간에 대한 불신, 혐오가 밑바닥에 깔린 철저한 기 능주의를 잣대로 인간을 보았다. 그의 이러한 기질적인 기능주의는 실은 진나라의 전통적인 국가체제와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애초 진나라는 진왕 정이 최초로 통일을 이루기 130여년 전인 효공(재위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 년) 시대에, 상앙(기원전 300년 - 기원전 328년) 의 정책에 따라 법률을 강화하고 부국강병에 힘쓴 결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진왕 정은 이른바 상앙의 변법이념을 계승하고 더욱 확대강화하여 천하통일의 최대무기로 삼았던 것이다. 진왕 정의 가장 뛰어난 참모는 이사(? - 기원전 208년)였다. 이사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는 성 악설을 주장한 순자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초나라 출신이지만 입신출세를 위해서는 초대국인 진나라에 서 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야심만만하게 진나라로 건너갔다. 그때는 마침 진왕 정이 왕위에 올랐을 즈음이었다. 이사는 처음에는 여불위의 식객으로 있다가 그의 추천으로 진왕 정의 시중을 들면서 급속도로 두각을 드러내 진왕 정의 천하통일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진왕 정은 이사의 적절한 조언을 받아들여, 즉위 17년째인 기원전 230년 한나라를 쳐부순 것을 시작 으로 조, 위, 초, 연을 잇달아 정복하고, 기원전 221년 39세에 제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전국 여섯 나라를 모두 병합, 마침내 숙원인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우주의 지배자 황제 천하를 통일한 진왕 정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최고권력자인 자신의 호칭을 결정한 일이었다. 진나라에 앞선 통일왕조 주나라의 천자는 왕이라고 칭했지만 춘추전국의 난세를 거치면서 제후도 모 두 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진왕 정은 왕이라는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라는 호칭을 채 택하게 되었다. 황은 천제(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이며, 제는 전설의 5인의 성왕 5제에서 따온 것이다. 동시에 진왕 정은 시호(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적에 따라 붙이는 호칭)제도를 폐지하고, 스스로 시황제 라고 이름지어 이후의 황제를 2세 황제, 3세 황제라고 칭하도록 신하에게 명하였다. 아들이 부친의 행실 과 공적을 논하고, 신하가 임금의 행실과 공적을 논하여 시호를 붙이는 것이 불경스럽기 그지없다는 게 시호 폐지의 이유였다. 아울러 황제 스스로는 짐으로 호칭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러한 호칭이나 제도를 시행한 진왕 정의 목적은 물론 자신이 범인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높은 위치에 있음을 표시하려 한 것 이었다. 이리하여 시황제가 탄생한 셈인데, 이러한 행위는 스스로를 천제에 비유하여 모든 것의 시초라고 공 언하는 것으로 만인이 두려워할 만한 강력한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의 이면에는 부친 살해 로 피의 단절을 과감하게 단행하여 자립을 달성한 자신이야말로 천하의 시원이며, 모든 것이 자기 로부터 시작된다는 무의식이 작용했으리라.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이 된 시황제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천하통일의 실체를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 에 착수하였다. 우선 중국 전역을 36개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해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꾀하였으며, 동시에 도량형, 화폐, 거궤(수레 양쪽 바퀴 사이의 폭), 문자를 통일하 는 등 사회, 경제, 문화 제도까지 정비 통합하였다. 이렇듯 강력한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7국으로 병립해 있던 전국 시대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적 대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 탁월한 합리주 의자이자 기능주의자인 시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대업적을 단기간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 다. 아방궁, 지상과 천상을 대응시키다 누구도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지위에 오른 시황제는 어떤 일이든 방대하게 치르기를 좋아했는데 사치 또한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다. 다만 주지육림의 긴 밤의 연회로 에너지를 소진한 은나라 주왕과는 달리 시황제가 부린 사치에는 일종의 역동성이 흐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축조한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단히 뛰어난 거대 건축광이었다. 이런 경향은 이미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두드러져 제후를 무너뜨릴 때마다 궁전을 모방한 어전을 진나라 수도 함양 (협서성 함양시의 동북)에 세우고 전리품으로 획득한 미녀나 악기 등을 모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말하 자면 정복기념관이다. 천하통일에 성공할 즈음 위수 북쪽에는 잇달아 세워진 궁전이 즐비하였고, 각 궁전 사이를 통로로 연 결하여 장대한 궁전 단지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시황제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가 된 이듬해인 기원전 220년 위수 남쪽에 새로운 대 궁전인 신궁을 세워 이것을 극묘라고 개칭하였다. 극묘의 극은 하늘의 중심 별자리인 북극성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지배자, 즉 신이 되고자 한 시황제가 지상공간을 천상세계와 명확하게 대응시키 려는 구상으로 새 궁전을 세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상은 즉위 8년 후(기원전 212년) 역시 위수 남쪽에 장대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아방궁 의 궁전 단지를 세우면서 한층 활기를 띤다. 아방궁의 중심이 되는 아방전전은 동서 5백보(약 6백 75m), 남북 50장(약 1백 13m), 위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였다. 이 아방궁은 2층 건 물의 통로를 통하여 위수를 건너 북쪽 함양의 궁전 단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같은 공간 배치 계획은 하늘의 별자리와 정확하게 대응한다. 즉 아방궁은 천제가 거처한다고 전해 지는 자미궁(북두칠성의 북동쪽에 있는 15개의 별로 구성되는 영역)에, 위수는 은하수에, 위수 북쪽의 함양에 있는 궁전 단지는 영실(페가수스 자리의 두 별. 천자의 궁이라고 전해진다. 군주의 대궐을 세울 때 기준이 되며, 이 별이 정남쪽으로 보이는 때가 건축의 호기라고 전해진다) 에 각각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황제가 자신의 본거지를 함양의 궁전에서 아방궁으로 옮겼다는 것은, 그가 인간적인 존재 인 군주의 차원을 넘어 천제가 되고자 하였음을 뜻한다. 시황제는 이렇듯 장대한 공간 배치 계획을 실 행하면서 지상뿐 아니라 천상세계를 포함한 전 우주의 지배자가 되고자 거의 광신자에 가까운 권력 추 종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저승까지 지배하고 싶은 소망 게다가 아방궁은 빙 둘러서 있는 중층의 긴 복도를 통하여 여산의 시황릉(여산릉)과도 연결되어 있었 다. 여산릉은 기원전 247년, 시황제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건축하기 시작하여 천하통일 후 건축계획을 대 폭 확장하였다. 이 어릉은 70만 명의 죄인을 동원하여 완성되었는데 아방궁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춘 호 화찬란한 지하궁전이다. 저 유명한 병마용이 발견된 곳이 바로 이 여산릉이다. 내부에는 수천에 달하는 실물과 꼭같은 크기의 관리, 병사, 말 등의 토우를 빼곡히 세워 놓았고 지상 의 궁전에서 보물을 옮겨와 가득 채웠다. 또한 인공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끊임없이 수은을 집어넣어 인어 기름으로 등을 밝히는 영구적인 장치를 고안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지하궁전의 입구에 접근하면 기계장치 화살이 자동적으로 발사되도록 하는 등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외부 침입에 대비했 다. 여담이지만 몇 해 전에 제작된 홍콩영화 진용은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 못지 않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이 영화의 세트가 여산릉이었다. 이 세트는 공상과학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능 안에서 비행 기가 날아 다니는 등 포복절도할 정도었는데, 상상할 수 없는 여산릉의 규모를 방불케 하여 박력이 넘 쳐흘렀다. 아방궁의 위치와 구조가 우주의 지배자가 되려 한 시황제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산 릉은 저승 즉 명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시황제의 소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실세계를 지하에 완벽하게 재현하여 사후에도 명계의 왕자로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시황제의 끝내 채우지 못한 꿈이 었던 것이다. 불사의 선약을 찾아서 아방궁, 여산릉 등 거대 건조물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황제의 갈망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 그것은 물론 죽음을 말한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권력을 획득하여 현세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위치에 오 르자, 천제나 명계의 황자를 흉내내어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고 영생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시황제의 사후불멸에 대한 소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방사들의 어설픈 술수에 넘어가 거금을 쏟아부으며 불로장생의 선약이나 신선을 찾아 헤매는 일도 허다하였다. 예를 들면 기원전 219년 시황제가 천하를 돌아다니던 중에 신선술의 본고장인 산동의 낭사에 들렀을 때, 제나라 방사 서시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그에게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태운 대선단을 지휘하게 하여 선인이 기거한다는 동해의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이 있는지 찾아보게 하였다. 물론 이 대대적인 신산 수색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도저히 단념할 수 없었던 시황제는 서시등 제나라 방사를 포기하고 새로 이 연나라 방사 노생등에게 불사의 선약을 찾도록 집요하게 주문하였다. 기원전 212년 이 광적일 만치 집요한 선약 찾기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노생 등 연나 라 방사들은 선약을 찾아내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므로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변명하면서 발뺌을 해 왔 는데, 마침내 발뺌할 거리가 바닥나자 구름으로 몸을 가리고 도망가버린다. 이것을 안 시황제는 격노하 여 노생 등과 관계가 있는 방사는 학자들을 마구 잡아들였고, 혹독하게 심문한 끝에 그 중 4백 60명 남 짓한 사람을 생매장형에 처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갱유 사건이다. 갱유 사건의 발단은 영생에 대한 갈망으로 눈이 먼 시황제에게 가짜 방사 서시와 노생이 선약을 찾는 다고 속임수를 써 거액의 돈을 뜯어낸 데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시황제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황제는 거대건축 세우기, 선약 찾기, 나아가 천하순유 등으로 거액의 자금과 대량의 인력을 동원하 여 그야말로 목욕탕 물 쓰듯 부를 탕진하였다. 천하순유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천하통일 이듬해 (기원전 220년)부터 죽음 (기원전 210년) 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아주 빈번히 천하순유에 나섰는데 이를 위해 황제 전용 도로를 닦고 가는 곳마다 기념비를 세우는 등 지극히 대규모적인 사업을 벌였던 것이다. 천 하순유는 표면적으로는 물론 진제국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행차였지만, 순유 때마다 신선사상과 관계 가 깊은 산동의 지태산을 방문하는 것으로 보아 실은 선인 선약 찾기 작업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지 태산은 신기루가 잘 생기는 토양으로 유명하며 여기서 볼 수 있는 신기루의 신비한 인상 때문에 삼신산 전설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시황제의 합리주의 정책 이렇게 보면 시황제는 천하통일 후 불멸의 생이라는 비합리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어, 천하통일을 달 성한 원동력이었던 철저한 합리주의나 기능주의를 완전히 상실해버린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시황제는 정치가로서 어디까지나 대단히 뛰어난 합리주의자요, 기능주의자로 놀라운 솜 씨를 발휘하였다. 갱유사건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분서 사건은 조금도 사그러들 조짐이 없는 시황제의 엄혹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갱유사건 전년인 기원전 213년 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진언을 듣고 진기 이외의 모든 사서 및 민간에 서 소장하고 있는 시경, 서경, 제자백가 등의 문학서나 철학서를 모조리 몰수한 다음 소각하는 조치를 취했다. 사상통제를 철저히 하기 위해 언론탄압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서적을 소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의학, 점, 농업 등 실용서는 제외하였다. 실용서만을 남 긴 것은 기능제일주의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시황제다운 방식이다. 그리고 조정에서 일하는 학자 70명 만은 어떠한 책을 소장하여도 관계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황제의 분서정책으로 모든 문학서나 철학서가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이 사건에서 그는 관리 가능한 어용학자에게만 지식을 전유하게 하고 민간에는 실용서 외에는 유통을 허용하지 않아 통제 를 용이하게 하려는 무서운 의도를 드러냈다. 독재자의 지배욕망이 못 미치는 데가 없음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진시황은 일중독자 지배 욕망의 예를 더 들자면 시황제는 모든 안건에 대하여 직접 결재하여 처리하였다. 시황제는 지칠 줄 모르고 각 건물마다 긴 통로로 연결된 광대한 궁전 단지를 옮겨다니면서도 공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 았다. 종국에는 공문서가 늘어나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자 하루 업무량을 정하기에 이르렀는데, 저울에 문 서를 쌓아 올려 무게를 달아 하루에 한 석(1백 20근, 약 30킬로그램)씩 처리하기로 정하고, 목표량을 달 성할 때까지는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고 한다. 당시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은 터라 문서는 목간(나무를 얇게 저민 판)이나 죽간(대나무를 얇게 저 민 판)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종이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분량이었을 것이다. 거의 일중독자에 가까운 일처리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호사스러운 궁중 안에서 오로지 공문서 결재에 쫓 기는 시황제의 모습에서는 사치를 즐길 기미 따위는 조금도 엿볼 수 없다. 시황제는 장대한 아방궁을 짓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즐기기보다는, 그러한 거대건축 의 설계 계획을 세우고 건조하는 일 자체가 목적이자 쾌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산릉의 건축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꾸어 말하면 시황제는 욕망이 성취되는 과정만을 즐긴 것이다. 사서에서도 시황제가 음식물, 음악, 여성 등 현세적인 쾌락에 흥미를 보였다는 기록은 전혀 나타나 있 지 않다. 물론 후궁에는 전국에서 불러 모은 수천 명이나 되나 미녀가 북적거리고 있었지만 특정한 미 녀를 총애했다는 기록은 없다. 시황제는 인간을 도구 이상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 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고 어느 누구도 그런 시황제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시황제는 골수에서부터 냉철한 합리주의자였던만큼 현세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 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각성된 합리주의가 일찍이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제국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된 셈인데, 그러나 그의 최대 약점은 초인에 대한 갈망, 불멸에 대한 욕망이었다. 이리하여 극단적인 합리성과 동시에 극단적인 비합리성이 기묘한 형태로 어우러져, 아주 꼼꼼하게 정 무에 힘쓰는 반면 거대건축을 세우거나 선약 찾기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부질없이 낭비를 거듭하는 양극단을 오고가는 불균형이 생긴 것이다. 먼지가 되어버린 진시황의 꿈 끊임없이 영원할 삶을 찾아 헤매던 시황제는 그런 소망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210년 천하순유 도중 중 태에 빠져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때 나이가 50세. 진나라 왕이 되고 나서 37년째, 황제가 되고 나서 11 년째의 일이다. 시황제가 죽고 호해가 뒤를 이어 등극했는데, 일체의 비판을 봉쇄한 독재권력은 반드시 안에서 썩어 들어간다는 철칙대로, 진왕조는 내부에서부터 급속도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각지에서 반 란이 일어나 또다시 중국 전역에 혼란 상태가 전개되고, 이 전란의 한가운데서 마침내 항우와 유방이라 는 두 사람의 영웅이 홀연히 떠오른다. 기원전 207년 2세 황제 호해는 유방의 군대가 함양에 당도한 시점에서 자살을 감행하였고, 이미 자멸 상태에 빠져 있던 진왕조는 시황제의 사후 불과 3년도 못가서 멸망해 버린다. 이윽고 유방을 밀어 젖히고 함양에 입성한 항우의 군세는 파괴와 약탈의 극을 달렸다. 아방궁을 비롯 한 모든 궁전은 불에 탓는데 그때 궁실을 태운 불이 3개월 간이나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호위병 사도 소용없이 시황제의 관을 거둔 여산릉 또한 약탈의 대상이었다. 먼지와 재로 돌아간 궁전, 마구 짓 밟힌 묘릉. 막대한 돈을 들인 시황제의 못다 이룬 꿈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3. 거대한 건축광 맹처의 치마폭에 매달린 공처가 문제 진왕조는 시황제가 즉위한 지 불과 40년 만에 멸망했지만, 진나라의 뒤를 이어 고조 유방이 세운 한 왕조는, 전한 후한 시기를 합해서 약 4백 년에 걸쳐 중국 전역을 지배했다. 전한 왕조 제 7대 황제인 무제(기원전 156년 - 기원전 87년)는 화려한 사치를 좋아하는 인물로 시황 제와 나란히 일컬어지는 존재이다. 다만 한나라 무제의 사치는 거대건축을 세우려는 경향이나 막대한 돈을 뿌린 선약 찾기에서도 모두 시황제의 경우를 답습했을 뿐 특별한 독창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수양제(569년 - 618년)는 황제들의 사치 향락사에 일획을 긋는 인물이다. 본명은 양광이 며 수왕조의 창립자인 문제 양견(541년 - 604년)의 둘째 아들이다. 2세기 말에 후한 왕조가 약해지자 중국 전역은 분열과 혼란의 상태로 접어든다. 4세기 이후에는 대체 로 양주의 회수를 경계로 하여 한민족왕조가 남부를 지배하고, 이민족 왕조가 북부를 지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세간에서 말하는 위진남북조 시대이다. 양견은 북조 북주의 외척인데, 581년 북주를 무너뜨리고 수 왕조를 세웠으며 이어 589년에는 남조의 진을 무너뜨리고 중국 전역을 통일, 4백 년에 이르는 위진남북조 분열상황에 막을 내렸다. 양견은 관리등용 시험인 과거제도를 창설하여 관료기구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꾀하는 등 탁월한 정치수완의 소유자였다. 그는 또한 질실강건을 제일로 삼는 진지한 인물이며, 언제나 열심히 정무에 힘써 쾌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렇게 나랏일에 충실하니 수의 국력은 비약적으로 강해지고 국 고에는 엄청난 자산이 축적되었다. 문제 양견의 진지한 외곬에 박차를 가한 인물은 맹처 독고 황후였다. 문제는 선비족의 명문 독고 씨 출신인 부인에게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태생과 관련하여 문제 자신은 후한의 양진을 시조로 하는 한민 족 출신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문제와 독고 황후는 대단히 사이가 좋았다. 문제는 남녀관계에 엄격한 황후 때문에 측실도 들이지 않 아, 당시에는 드물게 일부일처제를 엄수하여 5남5녀 모두 황후의 친자를 둔 모범적인 남편이었다. 그렇지만 독고 황후의 결벽성에는 조금 병적인 데가 있어 아들에서부터 친척이나 중신에 이르기까지 남녀관계가 문란한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다. 황태자인 장남 양용도 난잡한 여성관계 때문에 모친에게 혐오를 산 사람 중 한명이다. 폭군의 본성을 숨긴 수완가 양제 독고 호아후는 그런 양용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대신에 일견 진실해 보이는 둘째 양광을 매우 사랑 하게 되었다. 양광은 사태를 파악하는 눈치가 매우 빨랐으므로 본처 이외의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남몰래 깊숙이 숨기는 등 술책을 부려 품행이 방정함을 가장함으로써 모친의 기분을 맞추었다. 양광은 문제와 독고 황후가 자신의 집을 찾으면 미녀는 모두 별실에 숨기고 나이 든 여자와 추녀만을 밖으로 나오게 하여 독고 황후를 기쁘게 하는 한편, 전혀 향응을 멀리하며 생활하고 있음을 가장해 보 이려고 일부러 악기의 현을 끊고 먼지투성이인 채 두어 아버지 문제를 매우 감격하게 했던 것이다. 양광의 수완은 보통이 넘어 인기를 위한 공작에도 심혈을 쏟았는데, 수렵에 나가 큰 비를 만나 주위 사람이 우비를 입으라고 권하면 사졸이 모두 비를 맞고 있는데 나 혼자 입을 수 없다 는 식으로 말하여 감동을 불러일으켜 자신에 대한 좋은 평판을 조성하였다. 후에 세상에 둘도 없는 폭군의 본성을 드러내 기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양광은 이런 식으로 독고 황후의 총애를 무기 삼아 황태자 양용 밀어내기를 도모하였는데, 양광이 결 정적으로 우위에 서게 된 것은 명목상이기는 해도 남조의 진을 공략하는 총사령관이 되어 대승을 거둔 일이었다. 여기에다 양광과 결탁한 중신 양소가 부친 문제에게 황태자 양용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거짓말까 지 한 끝에 마침내 600년, 양용은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양광이 황태자가 되었다. 양광은 온갖 나쁜 수단을 동원하여 형을 끌어내리고 후계자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앞날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파 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피보다 진한 사치욕 아니나 다를까, 양광이 부친의 뒤를 이어 수의 2대 황제가 되기에 이르러 대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앞 서 양광이 황태자에 책봉된 지 2년 만인 602년에, 독고 황후가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렇게 되자 마침내 문제는 독고 황후의 엄격한 감시에서 해방되었고 여봐란 듯이 후궁 미녀를 총애하는 등 급속히 문란해 졌다. 문제는 멸망한 남조 진의 황녀였던 진부인을 가장 마음에 들어하였는데 이 여인의 존재가 무서운 사 건의 계기가 된다. 604년, 문제는 진부인 등을 데리고 수도 장안 서쪽에 있는 별궁인 인수궁으로 나들이하던 중 병에 걸 려 그대로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중신들과 함께 별궁에 대기하고 있던 양광이 진부인을 강간하려고 하였다. 이에 저항한 진부인이 병실로 도망쳐 들어가자, 문제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 고 다그쳐 물어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고는 독고가 나를 그르쳤구나 하며 몹시 흥분해서 태자 자리를 박 탈했던 양용을 즉시 불러 들이도록 하였다. 양용을 복귀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정보를 입수한 양광의 충신 양소는 이 사실을 즉시 양광에게 알려 엄중경계 태세를 취하도록 하였으 며, 양광의 측근에게 문제의 병실을 포위하도록 하고 진부인 등 궁녀들을 별실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얼 마 지나지 않아 문제는 숨을 거둔 것이다. 사서에도 병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술은 없다. 그러나 혼자 남겨진 문제가 양광 측근의 모종의 조치대상이었음은 틀림없다. 양광이 부친을 살해했는지에 대한 진상은 진나라 시황제의 친아머지가 여불위인지 아닌지와 마찬가지 로 역사의 어둠에 묻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엄청난 사치로 이름을 날린 진의 시황제와 수양제(양광)가 둘다 부친 살해 용의자라는 것은, 그들 의식의 밑바탕에는 혈육중의 혈육인 아버지의 피를 뿌려서라도 호사를 부려보겠다는 피보다 진한 사치에 대한 욕망이 흘러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벌였던 일련 의 사치 행각을 탕진에 탕진을 거듭함으로써 부친 살해의 원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받 아들인다면 지나치게 현대적인 해석일까? 이야기를 다시 되돌려 보자. 문제가 죽은 후 양광은 무리없이 수의 2대 황제가 되었고 그 누구도 두 려워하지 않고 욕망이 닿는 대로 사치에 빠져들었다. 근검절약형이었던 문제가 축적해 놓은 재산이 엄 청났기 때문에 이제는 쓸 일만 남은 것이다. 200여 리에 달한 양제의 대선단 양제도 시황제와 마찬가지로 거대 건축광이었다. 양제가 벌인 최대의 토목공사는 뭐니뭐니 해도 대운 하의 건설이었다. 605년 즉위와 동시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해 안에 회수 북부지대의 백만여 명에 달 하는 백성을 동원하여 황하에서부터 회수 북부지대에 이르는 통제거를 캐통시켰다. 이어 회수 남부지대 의 십만여 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회수에서부터 장강(양자강)에 이르는 한구를 개통했다. 이 대운하 개통에 따라 수도 장안에서부터 강남의 강도-지금의 양주까지 곧장 배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화북과 강남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남북 교통이 용이해진 것은 확실하지만, 양제가 대운하 건설 계획에 몰두한 것은 결코 그런 사회경제적 관점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 리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쾌락이 있었을 뿐이다. 대운하가 완성되자 양제는 수만 척의 배를 건조한 다음 곧바로 즉시 부도인 낙양에서 강도로 행차하 였다. 양제가 탄 용주배는 높이 45척(약 14km), 길이 2백장(약 600m)이고, 4층으로 되어 있으며, 맨 위 층은 황제가 쓰는 궁전과 개인용 방, 그 밑 2층에 후궁용 방이 1백 20개, 맨 아래층에는 환관용 방이 있 었다. 황후가 타는 배도 황제의 것에 비해 소형이긴 했지만 설비는 거의 비슷하였다. 황제와 황후의 뒤를 이어 제왕, 공주, 관료, 승려, 비구니, 도사 등이 탄 수천 척의 배가 따르고 나아가 호위함 수천척이 연이 어 뒤따랐는데, 이 화려하며 아름답게 꾸며진 대선단은 전체 길이가 2백여 리 (약 100km)나 되었다고 하니 놀랄 만한 일이다. 더욱이 운하이기 때문에 도중에서 물줄기가 정체하는 곳도 있는가 하며 또한 물살을 거슬러 가야 하 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운하의 양 끝에 어도라 불리는 도로를 조성하여 인부를 배치하고 배가 순탄 하게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인부들이 배에 달려 있는 줄을 교대로 잡아당겨 인력으로 배를 움직이게 하 였다. 양제의 대선단이 처음으로 행차에 나섰을 때 줄을 잡아당기기 위해 동원된 인부는 10만 여명에 달했 다고 한다. 대운하 개통, 호화선 건조, 그리고 대선단 운항으로 확실히 사상 최대의 인원과 자금을 동원 했을 것이다. 그 후에도 양제의 운하 건설에 대한 정열은 가일층 더하여, 북으로는 북경의 남서쪽 탁군에 이르는 영제거를 건설하고, 남으로는 항주에 이르는 강남하도 개착하는 등 운하를 더 연장하였다. 이리하여 중 국의 남북은 북의 탁군으로부터 남의 항주가지 4개의 운하로 끊기는 지점 없이 연결되었다. 자연의 변화조차 멈추게 한 황제 권력 양제는 대운하 개통과 병행하여 궁전과 대정원, 대규모의 식량저장 창고 등의 건설에도 대단한 노력 을 기울였다. 즉위하자마자 2백만 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부도 낙양과 그리 멀지 않은 수안현에 착공한 별궁, 현인 궁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달렸다. 또한 낙양 서쪽에 조성된 황제용 위락단지인 별궁 서원은 은나라 주왕 의 모래언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양제의 섬세하고 빈틈없는 취향에 맞추어 꿈결같은 분 위기를 연출하였다. 둘레가 2백 리의 서원 중앙에는 커다란 연못을 팠다. 연못 속에는 동해의 삼신산인 봉래, 방장, 영주 를 본뜬 축소 인공산을 조성하여 정상까지 빽빽하게 누각을 세웠다. 서원의 북쪽에서부터 연못까지는 수로를 파서 만들고 그 끝에는 열여섯 채의 건물을 늘어 세웠다. 각 건물마다 미녀들이 대기하여 양제 의 방문을 기다렸다. 양제는 서원을 그대로 확대한 형태로 장안에서 강도에 이르는 대운하를 따라 40개의 별궁을 짓고 나 서 이르는 곳마다 미녀 후궁과 유희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후궁이란 본디 황제가 사생활을 보내 기 위한 궁전을 이르는 말이었는데, 이것이 전이되어 황후를 비롯하여 황제가 거느리는 궁녀들의 총칭 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예기 혼의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천자는 1인의 황후 이외에 3인의 부인, 9인의 빈, 27인의 세부, 81인의 어처로 순번대로 순위를 매긴 총 1백 20인의 후궁을 거느릴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명칭은 시 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지만 이 규정이 후세에까지 후궁제도의 전형이 되었다. 요컨대 황후를 정점으 로 하여 순위가 낮아질수록 수가 늘어나는 피라미드 형태이다. 물론 인원수는 꼭 규정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늘릴 수 있는 구조였다. 서 진의 무제(재위 265년 - 290년)는 후한 말에서부터 3국 분립 시기의 분열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단기간 에 중국 전역을 통일한 인물인데, 3국 중 마지막 남은 오나라를 무너뜨리자마자 음탕하기로 소문난 오 나라 최후의 황제 손혹의 아름다운 후궁 수천 명을 거두어 무제의 후궁은 일거에 1만 명 이상으로 늘어 났고, 그는 수많은 미녀들에 빠져 순식간에 몸을 망쳐버렸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시인 백락천은 유명한 장한가에서 후궁의 가려는 3천 명, 3천의 총애 한몸에 있었구나 라고 표현하였다. 요컨대 양 귀비가 현종의 아름다운 후궁 3천 명분의 총애를 독점하였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이 3천이라는 숫자도 반드시 과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양제의 호사스런 성격으로 보아 아마 서진의 무제에 못지 않은 수의 미 인을 후궁으로 모아 곳곳에 있는 별궁에 기거하게 하고 난잡한 애정행각에 빠져들었던 것이리라. 서원으로 이야기를 되돌려 보자. 낙엽 지는 계절의 고적함을 싫어했던 양제가 고안해낸 착상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양제는 색색깔의 비단 옷감을 꽃이나 나뭇잎 꼴로 잘 라서 줄기에 붙이고 색깔이 바래면 다시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다는 등, 정원이 사시사철 화려한 색채 를 띠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양제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비록 인위적이지만 자연의 변화까지 멈추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양제는 무엇이건 겉치레와 화려함을 좋아했는데 관료의 옷과 장신구에도 사치를 부리도 록 하였다. 예를 들면 관에 빠짐없이 성대한 깃털 장식을 붙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 전역의 새라 는 새는 모조리 잡아 털을 뽑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첨단장치의 서재 양제는 대운하와 서원의 건설에서부터 관료의 깃털장식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인간의 힘으로 개조하여 인공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 인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인 위적인 것을 좋아한 양제는 인공의 극치인 기계장치 제작을 대단히 좋아하였다. 예를 들면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고 그 일대를 행차할 때는 수백 명의 호위병화 함게 행전이 라는 바퀴 달린 커다란 수레를 타고 이동하고, 숙박할 때는 조립식 판자를 무수하게 연결시켜 행전 주 위를 완전히 푹 덮어 씌웠다. 이것은 행성이라고 불리는 장치인데 조립된 판자의 높이는 20여 장(약 60m), 주위의 길이는 2천 보(약 3km)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외적의 습격에 대비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서 행전에 자동발사 활을 장치하고 이 활에 줄을 연결하였다. 침입자가 줄을 건드리면 발사되도록 한 것이다. 낙양의 궁전에 만든 황제 전용의 서재 구조는 대단히 독특하다. 양제는 시황제와 달리 독서를 좋아하 여 글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 때부터 수집하여 장안의 궁중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서 적에도 관심이 깊었다. 그래서 37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정리하여 3만 7천여 권을 골라낸 다음 특히 귀 중한 50부를 뽑아 필사본을 만들고 수도 장안과 부도 낙양의 관문전에 분산하여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관문전 앞에 설치된 양제 전용 서재야말로 기계장치 제작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서재 바깥에 비밀 누름장치가 있어 이것을 밟으면 문이 열리고 위에서 신선 인형이 슬며서 내려와 문 안의 장막을 걷어올리면서 양제를 안으로 인도한다. 독서를 마친 양제가 밖으로 나와서 다시 비밀장치를 밟으면 원 래대로 장막이 쳐지고 문이 닫히는 구조였다. 이는 피해망상 기미가 있는 양제의 고육책이지만 그렇다 해도 기발하기 이를 데 없다. 피해망상으로 인한 불면증 양제는 대운하에 초호화 배를 띄우고 장성의 끝까지 행전을 타고 순유하며 기계장치가 설비된 서재에 서 독서에 열중하는 등 더할 나위 없는 사치삼매경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해가 갈수록 피해망상이 심해 져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부친인 문제와 형 패태자 양용을 비롯한 육친아나 신하를 잇달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 연이은 토목 공사와 더욱이 세 번에 걸친 고구려 정벌 실패, 백성의 불만이 격화하여 각지에서 반란의 불길이 타오 르기 시작하는 등 양제가 점자로 피해망상에 빠져드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증세는 즉위 8년째인 612년경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해 도둑이 들었다며 벌떡 일어나는 등 밤에는 전혀 숙면을 취하지 못해 몇 명의 궁녀들에게 몸을 맡기고 깜빡깜빡 졸곤 했는데 이런 상태가 몇 년이 나 계속되었다. 양제는 화려한 궁전 안에서 물밀 듯이 엄습하는 파멸의 예감에 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616년, 반란이 더욱 거세어지자 위험을 느낀 양제는 대운하를 통하여 강도의 별궁으로 피난하였다. 여 기에서 1년 남짓 자포자기한 상태로 향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수도 장안 후에 당나라 왕조의 창설자인 고조 이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동요한 강도 별궁의 근위군이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양제를 살해하였다. 618년 3월, 그때 양제는 50세, 기묘하게도 시황제가 죽은 나이와 똑 같다. 수나라 왕조의 2대 황제가 되고 나서 14년째의 일이었다. 양제라는 호칭은 수나라 멸망 후 618년에 당나라 왕조가 서고 나서 붙인 시호인데 폭군임을 상징적으 로 나타내는 칭호가 되었다. 양 이란 색을 좋아하여 도리를 등지고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을 괴 롭힌 자에게 붙이는 시호 라고 전해진다. 시황제의 진왕조와 양제의 수왕조는 대단히 유사한 점이 많다. 진나라는 5백여 년 남짓 이어진 춘추 전국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시황제가 왕이 되고 나서 불과 40년 만에 멸망하였고 그 뒤를 이은 한왕조는 4백 년에 걸쳐 중국 전역을 통일하여 지배하였다. 한편 수나라 는 후한왕조 멸망 후 4백 년 이어진 위진남북조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 왕조를 수립하였는데 이 또한 약 40년 2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당왕조는 3백 년에 걸쳐 존속하였다. 요약하면 진나라나 수나라는 수중에 거머쥔 거대한 권력을 지탱하지 못한 채 자멸하여, 뒤를 잇는 대 왕조를 위해 길안내 노릇을 한 셈이 된다. 황제 사치향락사에서 시황제와 양제는 특기할 만한 존재인데 이러한 길 안내 노릇을 하고 단명한 왕 조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그때까지 사분오열되어 있던 광대한 중국이 모두 자신의 영토이며 모든 권 력이 자기 한손에 집중되어 있다는 현기증 나는 현실 앞에 황홀함과 동시에 맹렬한 압박감에 시달렸음 이 틀림없다. 이리하여 그들은 뭇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재물 대탕진을 되풀이하다가 그저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시황제와 양제의 차이점 시황제와 양제는 이렇게 재물 대탕진을 되풀이한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결코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는 다름 점이 존재한다. 새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시황제는 진왕조의 창설자이며 자기 손으로 일궈낸 부를 탕진한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비용을 자신이 조달해낸 것이었다. 이에 반해 2대인 양제는 부친 문제가 양초 대신 손톱 에 불을 붙일정도로 근검절약하여 모아놓은 부를 일거에 다 써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부와 권세가 대단한 부모를 둔 방탕한 자식의 전형일 뿐이다. 그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차이는 시황제의 재물탕진이 현세 초월적 성향을 띤 반면, 양제의 경우는 대 운하의 건설조차 화북에서부터 풍광이 뛰어난 강남까지 곧바로 떠들썩하게 행차하는 것이 목표였듯이, 철두철미하게 현세적 쾌락을 탐닉한 점이다. 그러므로 양제의 사치는 오히려 주지육림식의 은나라 주왕의 사치행태와 비슷하였다. 주왕이 별궁의 모래언덕에 말린 고기 숲을 만들었다면 양제는 서원을 능견꽃과 능견 잎으로 장식하는 등 재물의 힘을 빌어 자연의 순리조차 거스르려고 했지만, 기본적인 발상 자체는 다르지 않다. 또한 양제는 결벽증이 있는 어머니 때문인지 반대급부로 호색본능을 폭발해 마구잡이로 색을 탐하였 지만, 음탕한 어머니를 둔 시황제는 미녀보다도 신선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 이 현실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인지 현실 초월적 욕망을 좇는 것인지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으로서 상당 히 흥미진진하다. 위대한 정치가였던 시황제는 스스로 고안해낸 정치, 경제, 문화제도로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사치의 결정체인 아방궁은 한줌 재와 먼지로 돌아가고 여산릉 역시 몇 차례나 수탈의 대상이 된 끝에 지금은 문화유적 으로 보존되어 있는 데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시황제의 사치는 현실적인 효용가 치를 전혀 생산해내지 못한 것이다. 한편 양제는 정치가로서는 거의 평가할 만한 장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건설했던 대운하는 그 후 중국의 남북교통의 요충으로 활용되었다. 양제는 아마 당시 사 람들이 꿈조차 꾸지 못했던 효용가치가 있는 사치를 부린 것이다. 참으로 풍자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현실의 한정적 틀을 과감히 깨뜨린 막대한 낭비과정에서 때로는 예상도 할 수 없는 문화가 잉태되는 것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쨌든 주왕, 시황제, 양제로 이어지는 사치향락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왠일인지 몹시 숨이 가빠진다. 그들의 사치에는 지옥을 생각하고 즐긴다고나 해야 할 듯한 광적인 처절함이 있을 뿐 평안하 고 한가로운 해방감은 전혀 없다. 그들이 욕망 충족을 위해 부를 탕진하는 것과 비례하여 파멸의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황제들은 사치나 탕진에 자신을 잊을 만큼 단순하지는 않았으므로, 파멸의 그림자가 자신들을 집어삼킬 것을 직 관적으로 느끼면서 더욱더 낭비로 치닫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된 것이다. 황제의 사치는 어딘지 모르 게 우울함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제 2장 귀족의 사치향락 귀족들의 사치는 황제들의 노골적인 권력 과시형 사치나 상인의 사치에서 보이는 번쩍번쩍한 생명 력이나 강렬한 상승욕구 경향을 촌스러움의 극치라고 배타시하였다. 그들은 섬세한 미적 세계를 추구하 지만 어딘지 모르게 뿌리에서부터 깊이 병들어 있는 듯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련미를 추구하는 귀 족사치의 특성이다. 1. 세련된 미의식 귀족은 청류파에서 태어났다. 2세기 초, 후한왕조 멸망에서부터 6세기 말 수왕조가 세워질 때까지 약 4백 년은 위진남북조 시대이 며 문화사적으로 6조라고 총칭되는 시대이다. 짧은 주기로 왕조가 흥망했던 이 시대는 혼란과 분열의 난세였다. 중국을 삼분한 위 오 촉 삼국 병립 상태는 위를 멸한 사마씨의 서진왕조(265년-316년)의 전국통일로 일단 해소되기는 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내란 때문에 국력이 약해진 서진이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자, 소란상태에 빠진 화북을 피하여 강남으로 옮겨간 이주민들이 서진왕조의 일족인 이 전의 황제 사마예(276년-322년)를 옹립하여 타향에서 유랑정권인 동진왕조를 세우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대체로 회수를 경계로 하여 북쪽은 이민족의 왕조가 지배하고, 남쪽은 한민족의 왕조가 지 배하는 남북분열 상황이 확정되어 3백 년 가까이 이어지게 된다. 더욱이 강남의 한민족 왕조만 보아도 약 3백 년의 남북분열 기간 동안 동진(317년-420년), 유송(420년 -479년), 제(479년-502년), 양(502년-557년), 진(557년-589년) 등 다섯 왕조가 어지러이 교체되었다. 그야 말로 난세의 극치였다. 그러나 실상 이 시대의 진정한 주인공은 왕조의 주인이 바뀌어도 아랑곳없이 항상 정권의 요직을 차 지하고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면서 이 시대에서 저 시대로 굽힘없이 살아남은 귀족들이었다. 이 귀족 들이 현란한 육조문화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육조 명문귀족의 원류는 후한 말에 환관이 주도했던 부패한 정치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며 역대 왕조에 서 중추적 구실을 해온 청류파라고 불리던 저항파 지식인층이다. 거듭되는 탄압을 헤치고 살아남은 청류파 지식인은 삼국지의 영웅 조조(155년-220년)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라 판단하고 속속 조조의 위나라에 참가하여 천하통일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조 조 정권의 모든 요직은 무관을 밀쳐내고 청류파 지식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류는 위에서 진으로 계승되었는데, 조조 정권의 수뇌부로 변신한 후한 말 저항파 지식인 중 에서 산동성 낭사를 근거지로 하는 낭사 왕씨를 비롯한 신흥귀족이 탄생하였고, 이후 육조 시대를 통하 여 세력을 자랑하는 문벌귀족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궁중의 식사가 맛이 없다? 귀족의 사치가 두드러지게 되는 것은 귀족의 자제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저항파 지식인이었던 선조들에 대한 기억도 흐려지던 서진 시대에 들어서부터이다. 서진왕조는 청류파 지식인으로 조조 산하로 들어가 서서히 기반을 닦은 사마의(179년-251년), 그 장남 인 사마사(208년-255년), 2남 사마소(211년-265년)의 부자 3대가 음험하고 주도면밀한 준비공작을 거듭 한 끝에 사마소의 장남 사마염(236년-290년) 때에 이르러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탄생시킨 것이다. 서진왕조는 출발에서부터 전망도 없이 패색이 짙었는데 귀족들은 배금주의에 빠져 사치경쟁에 몰두하 였다. 이러한 경향은 서진이 280년 위 오 촉의 삼국 중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오를 멸망시키고 중국 전 역을 일단 통일한 뒤 더욱 격심해졌다. 사마염, 즉 서진의 무제는 당초 이러한 사치 풍조에 뭔가 제동장치를 마련하고자 했지만, 서진왕조의 창업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으로서 위진 교체기에 사예교위(규칙위반이나 반체제적 행위를 단속하는 사 람에 해당)로서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 하증까지 사치삼매로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규제를 단념했 다고 전해진다. 하증은 식도락으로 재물을 탕진했는데 구미당기는 음식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하루에 1만 전이나 썼 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증은 입이 매우 고급스러워 궁중 요리까지 맛이 없다고 젓가락도 대지 않을 정 도였다. 일이 이지경에 이르자 무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도 사치에 몰입, 오나 라 궁전에서 온 강남의 미녀에 빠져 색을 밝히다가 애석하게도 단명하기에 이른다. 찐쌀 말린 것을 연료로 사용하다 세상이 온통 사치 풍조의 회오리에 휩싸이는 가운데 서진의 귀족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기발한 사 치행태를 연출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온갖 정열을 쏟았다. 진나라 시황제나 수나라 양제와 같은 최고 권력자인 황제들은 무인의 황야를 혼자 걷고 있는 형국이 어서 경쟁의 원리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족, 그것도 명문귀족은 가문의 명예를 건 자존심이 밑천이 되었다. 위진 귀족의 에피소드 모음집 세화신어의 태치편은 가문의 명예를 걸고 경쟁을 벌였던 귀족의 사치행 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일례를 보자. 왕개가 쌀을 쪄서 말린 것으로 밥을 짓자, 석승은 양초로 밥을 짓고, 왕개가 푸른 능견으로 안감을 댄 보라색 비단천으로 길이 40리(약 17km)가 되는 장막을 만들자, 석승은 50리(약 21km)나 되는 비단 장막 으로 대응하였다. 석승이 산초나무를 벽에 칠하자, 왕개는 적석지를 벽에 칠하였다. 왕개(연대미상)는 무제의 어머니 동생이며, 석승(249년-300년)은 서진왕조 창업공신 석포의 아들이다. 이 두 사람에다가 왕제(연대미상)를 합한 3인은 서진의 사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3파전이라고 할 만큼 사치경쟁을 치열하게 벌였다. 이 에피소드의 초점은 왕개가 찐쌀 말린 것을 연료로 쓰면, 뒤질세라 석승은 양초를 쓰고, 석승이 산 초나무를 벽에 칠하자 왕개는 적석지를 칠하여 대항하는 등 비싸거니와 본래의 쓰임새도 아닌 물건을 이렇게 무턱대고 연료나 도료로 소비했다는 사실이다. 사람 젖으로 키운 돼지 왕제의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는 사치의 탐닉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왕제는 무제 사마염이 살아 있을 적 자신의 집을 방문하자 그를 대접하는 데 모두 청보석(유리의 옛 이름으로서 당시에는 칠보 중 하나였다) 그릇을 사용하고, 백여 명 남짓한 시녀는 전부 비단 바지와 웃 옷을 입고 음식물을 손으로 바쳤다. 삶은 돼지고기가 맛과 빛깔이 아주 진하여 여느 맛과 달라 이를 이 상하게 생각한 무제가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왕제는 사람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무제 는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식사를 끝내지도 않도 가 버렸다. 이것은 왕개나 석승도 쓰지 않은 방법이었 다. 왕제는 오나라 토벌에서 큰 공을 세운 왕혼의 아들로서 무제의 사위였다. 돼지에게 사람 젖을 먹여 키웠다는 이야기는 결코 유쾌한 이야기는 못되는데, 이쨌거나 당시에는 이런 것이 최고 사치의 하나라 고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로 찐쌀 말린 것이나 양초를 연료로 하여 지은 밥과 사람 젖을 먹여 키운 돼지고기가 맛이 좋으 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만, 서진 귀족들은 이와 같이 값비싸고 진기한 재료를 눈에 띄지 않는 연료, 도료, 사료 등으로 사용하여 소비하는 것이야말로 사치의 진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얽히고 설킨 사치형태가 기묘함의 정도를 더하면서, 사치에 물든 귀족들의 감각도 역시 세련 에 세련을 거듭하여 이상한 데까지 예리하게 되어 갔다. 앞에서 얘기한 하증도 이름난 식도락가이자 미 각의 예민함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순욱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순욱은 어느 날 서진 무제의 연회석상에서 죽순을 먹고 밥을 청했다. 그는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 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오래 써서 낡은 나무를 장작으로 만들어 지은 것이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고, 몰래 사람을 시켜 조리장에 가서 물어보게 하였는데 실제 오래된 마차의 각목을 사용하고 있었 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앞서 말한 찐쌀 말린 것이나 양초를 연료로 하여 밥을 짓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천재적 미각의 소유자는 사용하는 연료 등 조리 과정을 중시하는 풍조에서 생 겨난 셈이다. 순욱은 미각뿐만 아니라 음악적 감각도 뛰어났으며 서화와 물건을 감식하는 데도 발군의 실력을 자랑 하는 인물로, 비서감(궁중의 도서를 관리하는 비서성의 장관)으로 일할 때 전한 시기 유향의 별록에 기 초하여 궁중 서적을 분류하거나 하남성에 있는 급군의 오래된 무덤에서 나온 죽서를 정리하기도 하였 다. 대단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다만 순욱은 이러한 미적 감각이 뛰어난 것과는 정반대로 보신을 위해서라면 무제에게 아첨까지 일삼 는 등 염치고 체면이고 가리지 않아 뜻 있는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어쨌든 위진 시대의 귀족은 후술하 는 석승도 그러하지만 한통속으로 묶을 수는 없는 다양한 행태를 연출했다. 카타르시스를 위한 사치 당시의 귀족들이 사치를 다투어 찐쌀 말린 것이나 양초를 연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하증처럼 궁중의 요리는 맛이 없다고 입에 대지도 않는 등 황제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의 행태는 귀족들이 얼마나 절대 적인 힘을 발휘하며 일세를 풍미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귀족들의 사치벽은 보이지 않는 곳에 사치를 부리고 진기한 소재를 소모품으로 흔적도 없이 써버리는 것으로, 시대의 기념비적인 만리장성이나 대운하 건설로 권력을 과시한 황제들의 사치와는 아주 대조적 이다. 여기에는 틀림없이 농후한 퇴폐적인 분위기를 띤 귀족적 미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의식이 뭔가 범인과는 다른 일을 하여 남에게 주목받기를 원하는 마음의 화려함과 결부되어 더욱더 세련됨을 응축한 사치경쟁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치경쟁에는 뭐니뭐니 해도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귀족들은 대체 어디에서 자금을 충당했 던 것일까. 석승, 왕개, 왕제 즉 사치 삼인방의 경우 왕개는 무제의 숙부, 왕제는 무제의 사위라는 식으로 왕실 인척으로서 이를테면 금이 떨어지는 나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므로 당연히 자금이 넉넉했을 것이다. 석승은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엄청난데다가 자신이 호북성 형주의 자사(장관)로 재직하고 있을 때 원 정오는 상인들을 위협하여 강탈한 금품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고 전해진다. 위진 시대 귀족들은 대개 정치권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던 고급관료이며 강력한 군사 권까지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화조풍월을 즐기며 문화적인 우월감을 느끼는 데 만족하는 이른바 귀족적인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들은 사마씨가 4대에 걸쳐 반대세력에 대하여 가차없이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조 씨의 위나라를 야금야금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위태로운 위진교체기에서도, 재빨리 대세를 파악하고는 목숨을 걸고 사마씨에 가담하여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한층 강 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석승이 산적과 흡사한 행위를 하거나 순욱이 역겨우리만치 아첨하는 인간이라 하여도 결코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위진 시대의 귀족들은 후한 말 저항파 지식인으로서 도의적 고결함을 자랑하던 선조들과는 달리 선비 가 지켜야 할 지조와 절재마저 내팽개치고 세상 물정대로 힘의 논리에 적극 순응하며 살아남은, 어딘가 깊은 곳에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러한 정신적 상처를 해소하려는 무의식의 작용으로 철저히 탕진하며 당치도 않은 사치경쟁을 벌여 카타르시스를 얻으려 했 을 것이다. 중국 제일의 수전노 왕융 서진 시대의 귀족들 사이에는 석승 등으로 대표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경쟁을 벌이는 부류가 있는 반면, 돈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축재와 재산증식에 광분한 수전노 귀족이 또 하나의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귀족사회에는 화려하게 재산을 날려버리는 자, 오로지 모으기만 하는 자, 어느 쪽이건 돈이 잇으면 날 개가 없어도 날 수 있고 발이 없어도 달릴 수 있다(노포 지음, 전신론)는 식으로, 돈이 없는 것은 생명 을 잃는 것과 진배없다는 노골적인 배금주의 논리가 판치고 있었다. 명문귀족 낭사 왕씨 일족이었던 왕융은 사마씨 세력이 나날이 강해지던 위나라 말기, 죽림칠현 - 노 장사상의 무위자연 이념을 모토로 일체 현실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사마씨 세력에의 합류를 암묵적으로 거부했던 일곱 선비 - 의 일원이었는데, 훗날 사마 정권의 수뇌로 변신한 경력이 있다. 수전노 인간의 일화를 모은 세화신어 검색편은 굴절된 수전노 왕융의 모습을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 다. 사도 왕융은 신분도 높고 집과 대지, 멋므, 소 치는 사람, 기름진 논, 수력제분기 같은 재산이 아주 많 아 낙양에서 견줄 만한 자가 없었다. 증명서와 장부 정리에 쫓겨 언제나 부인과 함께 등불 밑에서 주판 을 놓고 있었다. 세상의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심을 초월하는 것을 첫째 가는 덕목으로 꼽았던 죽림칠현의 정신은 흔 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있다. 왕융은 수전노였다. 부리던 아랫사람이 결혼할 때 홑옷 한 장을 선물했는데, 뒤에 새삼스럽게 그 대금 을 청구하였다. 수전노 왕융은 수전노로서의 세간의 평을 은근히 즐긴 듯한 면도 있었다. 이 밖에 전해지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왕융은 집뜰에 심어져 있는 오얏나무의 열매를 비싼 값에 팔 곤 했는데, 다른 사람이 씨앗을 입수하면 장사는 끝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오얏열매의 중심 부분에 송곳 으로 구멍을 뚫에 팔았고, 딸이 시집 갈 때 사돈 댁에 수만 전을 빌려주었는데 돈을 갚기 전까지는 친 정 나들이 온 딸을 외면하였다고 한다. 역시 수전노다운 모습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수전노형의 왕융은 귀족의 퇴폐적 미의식을 사치경쟁으로 유감없이 발휘한 석승 등의 사치 삼인방과 는 아주 대조적이다. 하지만 사치형이등 수전노형이든 단순하고 평범한 것을 거부하고 무엇이든 독특한 한 가지에 집중적으로 정열을 쏟아부어 범인과는 다르다는 세상의 평판을 얻으려고 한 점은 한결같았 다. 서진 시대 귀족들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도 돈만 있으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황금 제일주의에 빠져 돈을 펑펑 써대는 사치를 부리거나 그 반대로 매우 인색하게 굴지라도 결코 그들이 현실주의자임을 의 미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든 몇 개의 에피소드처럼 귀족들은 한 가지 사치를 부리거나 인색하게 굴 때, 거기서 풍겨나는 뉘앙스와 다양하고 풍부한 갖가지 표현 형태를 중시하였으며 본질적으로 금전을 노리개 삼아 자신만의 독특함을 추구하는 추상적인 유희를 즐겼다고 할 수 있다. 곡물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으면 된다. 당시 귀족사회에서는 배금주의적 풍조와는 정반대로 청담이라고 불리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담론이 크게 유행하였다.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신경을 흥분시키는 작용을 하는 오석산이라는 마약이었다. 귀족들은 약으로 기분을 한껏 띄우고는 밤새도록 지칠 줄도 모른채 뜬구름 잡는 말의 유희에 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석산을 석종유, 석유황, 백석영, 자석영, 적석지 등 다섯 종류의 광물을 복잡한 과정을 거쳐 조합한 상당히 값비싼 물건으로 이후 육조 시대를 통하여 귀족의 상징처럼 애용되었다. 요약하자면 서진 시대 귀족들은 사치, 수전노 풍조, 마약을 복용하면서까지 청담에 빠지는 일 등 그들 이 보이는 행태는 동일한 정신적 토양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서진왕조는 성립 당초부터 불안정한 체제였는데 모든 사람들 눈에 그 기반의 취약함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귀족들은 위진 시대의 교체기에 받은 정신적 상처와 아무리 애를 써도 눈사태처럼 무너져 가는 시대의 흐름을 막아낼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현실도피 충동에 사로잡힌 채 추상적인 유희에 몰입하였 다. 따지고 보면 재산증식이나 사치경쟁도 그 일각에 불과하였다. 이런 와중에 무제 사마염이 죽자 8왕의 난이라 불리는 피붙이간에 서로 먹고 먹히는 사마 일족의 내 란이 발발하여 순식간에 서진왕조는 공중분해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무제의 뒤를 이은 장남 혜제의 우둔함이 최대의 악재였다. 혜제는 내란과 더불어 토지가 황폐해져 백성이 잇따른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곡물이 없 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 고 물었다는 이야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참으로 어이없는 인물 이었다. 8왕의 난의 원흉을 혜제의 무능을 구실로 넉살좋게 앞에 나선 부인 가후였다. 권세욕의 화신인 가후 는 음모를 꾸며 잔인하게 반대세력을 쳐나갔는데 이것이 혼란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서진은 8왕의 난이 수십년 간 계속되어 거의 괴멸상태에 이른 시점에서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받고 명맥을 다해 마침내 한민족 왕조는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기에 이른다. 귀족들의 불길한 예감이 적 중한 것이었다. 왕희지와 고개지를 낳은 동진귀족의 정신주의 그러나 명문귀족은 위나라에서 서진왕조에 이르기까지 자산들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놓고 있었으므 로 한민족의 지배영역이 회수 이남으로 제한되고 동진왕조가 성립된 뒤에도 그들의 우월성은 그대로 유 지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초 동진왕조 자체가 화북에서 이주해온 귀족들의 연합으로 성립된 정권이므로 낭사 왕씨나 태원 왕씨, 나아가서는 양하 사씨 같은 명문 귀족의 세력은 한층 강력해질 뿐 이었다. 동진귀족의 경우 서진귀족과 같이 돈을 펑펑 쓰는 물질적인 사치는 세련되지 못한 촌스러움의 극치라 고 경멸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치는 결코 찬탄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물론 대대로 내려온 영지나 재 산을 버리고 겨우 살아남아 부랴부랴 강남으로 피난왔기 때문에, 특히 동진 성립 이후 당분간을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여도 물질적인 사치 따위를 기대할 수 없었다. 동진왕조의 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지자 귀족들은 물질적인 사치는 접어두었지만 사교 모임을 날로 화 려하게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청담이 일세를 풍미하는 가운데 언어감각의 세련됨과 뛰어남을 서로 다 투고, 평범한 대화에서도 색다른 기지를 살려 줄곧 익살을 떨고, 감각을 흥분시키는 작용을 하는 오석산 을 앞다투어 복용하였다. 이렇듯 물질보다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진의 귀족사회 분위기는 귀족들의 미의식이나 예술감각을 더욱 세련되게 하는데 힘을 기울였고, 서성이라 불리는 왕희지(307년 - 365년)와 화성이라 불리는 고개 지(346년 - 407년)를 낳기에 이른다. 왕희지는 명문 낭사 왕씨 일족이지만 정적 태원 왕씨 일족인 왕술과의 알력에 혐오를 느껴 오십 세를 눈앞에 둔 355년에 과감하게 정계를 은퇴, 산천의 경치가 빼어난 회계군 산음현(절강성 소흥시)에 은둔 하였다. 그의 최고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난정시서는 정계은퇴 2년 전인 353년 3월 3일에 당시 회계 군수였던 왕희지가 그곳에 살고 있는 명사들을 모아 산음현 교외의 명승지 난정의 별장에서 곡수유상(굽이쳐 흐 르는 시냇물에 술잔을 띄우고 순서대로 잔을 건져올려 자작시를 읊는다)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후 참 석한 사람들의 작품을 정리하여 난정시를 묶어냈을 때 서문으로 첨부한 것이다. '금'곡 연회와 '난'곡 연회 서진 시대 석승의 금곡시서는 교외의 별장에서 연회를 열고 참석자의 시를 묶어 정리하면서 서문을 붙인 것이다. 이것은 296년 하양의 금곡간(하남성 맹현 서쪽)에 있었던 석승의 호화로운 별장에서 왕후 라는 인물의 송별연을 열었던 때의 것으로 왕희지의 난정시서의 선례로 꼽을 수 있다. 석승은 호화로움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자주 연회 자리를 옮겨 높은 장소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물가에 늘어서 앉기도 하였다. 이동할 때에는 거문고(금), 슬(고대 중국의 현악기로서 항상 거문고 와 합주되었다. 금슬의 연원), 생황(관악기의 하나), 축(대로 만든 거문고 비슷한 악기) 등 모든 악기를 수레에 실어 나르고 수레를 멈추는 것과 동시에 일제히 연주하도록 하고 각각 시를 지었다 고 금곡시서 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악기의 반주를 넣어 흥을 돋우는 대규모의 화려한 연회였다. 이에 반해 왕희지의 난정 연회쪽은, 이 땅에는 높은 산, 험한 봉우리, 무성한 숲, 길게 뻗어난 대나무 가 있다. 또한 좌우에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며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있어서 이것을 이름하여 유상 곡수라고 하고 그 물가에 나란히 앉았다. 사죽관현의 성대한 연주는 없지만 잔을 비워 시가를 읊으면 풍악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은 없다. -난정시서- 는 식으로 의식적으로 호사스러움을 배제하고 마음 맞 는 사람끼리 모여 아름다운 자연과 마주하고 생각하는 것을 시가로 표현해내는 조촐한 자리였다. 금곡 연회와 난정 연회의 차이점은 동진귀족들의 사치나 미의식이 서진귀족들의 벼락부자 취향의 현 란함을 탈피하고 어떻게 세련미를 높여나갔는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들의 별장 이름에 자연스레 드 러나 있듯이, 그것은 바로 돈에서 난으로 사고의 중심이 이동한 것이다. 왕희지의 난정시서는 동진의 환현(369년-404년)이나 당태종(599년-649년) 등 후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될 정도로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왕희지의 글은 그가 살아 있던 당시에도 평판이 높아 호사가들 사이에서 서로 가지려고 다투었는데 왕희지는 전혀 무관심하였다. 예를 들면 왕희지가 어느 서생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 집에 있던 나뭇결 이 매끌매끌한 책상에 마음이 끌려 그 위에서 붓을 휘달려 글을 써내렸다. 행서와 초서가 반씩 섞인 훌 륭한 솜씨였는데, 훗날 아무 것도 모르는 서생의 부친이 무심코 그 필적을 지워 버려 서생은 매우 낙담 했다고 한다. 또한 산책을 하는 도중 육각형의 대나무 부채를 팔고 있는 노파와 만났는데, 그때 왕희지는 재미있게 생긴 부채 모양에 흥이를 느꼈는지 부채를 손에 들고 한 장에 다섯 글자씩 글씨를 썼다. 팔 물건을 아 주 망쳐 놓았다고 볼멘 얼굴을 하고 있는 노파에게 왕희지는 왕우군의 글씨라고 하면 백전은 될 것이오 하고 타일렀다. 아니나 다를까 부채는 날개돋힌 듯 팔리고 노파는 또 부채를 가지고 왕희지에게 달려갔 지만 그는 웃으며 상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세간의 평판 여하와 무관하게 왕희지에게는 글도 일종의 즐거움의 대상이고, 취미의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재능의 극치, 그림의 극치, 바보의 극치 노련한 성인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서성 왕희지와는 대조적으로 화성 고개지는 대단한 기인이자 삼 절할 사람이라는 것이 당시 한결같은 평판이었다. 삼절이란 재절(재능의 극치), 화절(그림재주의 극치), 치절(바보의 극치)을 말한다. 속임수처럼 보이는 환상술에 열중한다든지, 광적인 서화 수집광 환현에게 그림을 사기당해도 그 그림 은 너무나도 훌륭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신령과 교감하여 승천해 버렸다 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곤 했다. 또한 고개지의 치절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상식을 벗어난 기벽과는 정반대로 고개지의 그림에는 천재적인 면이 있는데 특히 대상의 특징을 정교 하게 포착해낸 인물화에 탁월하였다. 고개지는 배해의 초상화를 그릴 때, 뺨 부분에 세가닥의 털을 그려넣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 자 고개지는 이렇게 말했다. "해는 슬기롭고 날쌔며 글이나 말의 조리가 분명하여 시원스럽고 훌륭한 견식이 있었다. 이 털이야말 로 그 견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곰곰히 뜯어보니, 과연 세 가닥의 털을 더함으로써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 없을 때보다 한결 나은 듯이 생각되었다. - 세화신어 교예편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개지 그림의 혼이 들어있는 듯 살아있는 모습과 똑같게 그려내는 섬세하고 뛰어 난 화법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동진에서 제일가는 수집가 환현이 고개지의 치절을 이용해 마구잡이로 그림을 뺏으려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환현은 동진왕조 찬탈 직전까지 일을 도모했던 동진 중기의 거물 환온(312년-373년)의 아들이다. 그는 짧은 자복(장래의 활약을 기하면서 지금은 남에게 굴종하여 때를 기다림) 기간을 거쳐 402년 동진 말기 의 혼란을 틈타 병사를 일으켜 순식간에 수도 건강(남경)을 점령하고 제위를 탈취했지만 삼일 천하로 끝나 결국 패하여 죽고 말았다. 환현의 수집벽은 거의 병적이었는데 서화는 말할 것도 없고 남의 훌륭한 저택이나 정원까지 속임수 도박을 벌여 빼앗는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광적인 수집가였다. 광적인 수집가들, 수양제와 당태종 광적인 수집가에 관해서 말하자면 수나라의 양제는 애서광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양제의 책에 대한 애정은 매우 각별해 다음과 같은 믿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양제 사후 4년째였던 무덕 4년(621년) 당나라 왕조는 양제가 낙양의 관문전에 비밀리에 보관했던 귀 중서 약 8천 권을 수도 장안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 당시 나중에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상관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양제가 그가 꿈을 꾸는 베갯머리에 서서 어찌하여 내 책을 장안으로 옮기는 것이 냐 하며 큰소리로 꾸짖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제의 8천 권의 서적을 실은 배가 장안으로 향했는데, 갑자기 몰아닥친 태풍이 배 를 덮쳐 서적은 한 권도 남김 없이 유실되어 버렸다. 그런 직후 상관의는 또 양제의 꿈을 꾸었는데, 이 번에는 양제가 아주 기쁜 듯이 내 책을 되찾았노라 고 말하였다고 한다. 애서광의 귀기 서린 집념을 보 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나라 제 2대 황제 태종(재위 627년-649년)은 스스로 진서 라는 왕희지전 을 쓸 만큼 왕희지의 옹호자였으며 왕희지 글 수집광으로 전해진다. 태종은 왕희지의 글을 남김없이 입 수할 것을 명령하여, 2천 2백 90지, 13질, 백 28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수집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양 희지의 최고 걸작이라고 전해지는 난정시서만을 종적이 묘연하였다. 혈안이 된 태종은 난정시서를 수중에 넣으려는 일념만으로 8만 가지의 수단을 동원해 행방을 찾던 끝 에, 왕희지가 살았던 회계군 산음현 부근의 영흔사에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 나 영흔사 주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난정시서를 바치려 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사람을 시켜 왕 희지의 다른 글을 영흔사에 가져가도록 하여 주지를 방심하게 만들고 감쪽같이 속요 난정시서를 빼돌렸 다. 숙원을 푼 태종은 이글을 그지없이 아끼다가 자신의 무덤에 묻도록 유언을 했다고 한다. 저승에 가서도 애서에 대한 편집광적 집념을 버리지 못했던 양제와, 무덤에까지 난정시서를 가지고 갔던 당태종은 수집광의 집념이 얼마나 강하게 소유욕과 독점욕으로 연결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양보다 질을 중시했던 사치 경향 동진왕조는 거의 바보나 다름없었던 안제와 그를 에워싼 정부 관료의 부패와 타락, 사회불안이 날로 심해지자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420년 환현의 난으로 인하여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안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송 왕조를 세운 인물은 환현을 물리친 무관 유유였다. 이미 패색이 짙 은 동진의 사마정권을 단념하고 있던 권세 귀족들은 재빨리 변신하여 유유 정권에 협력하였다. 위진 교 체기 이래 계속되어 온 귀족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진 왕조의 동쪽 천도라는 역사적 사건을 사이에 두고, 귀족들의 생활양 ㄱ이 나 미의식은 귀족 시대의 막을 올린 서진에서 동진에 걸쳐 더욱 세련되어졌다. 사치 면에서도 서진귀족들이 돈의 위력에 바탕을 둔 사치경쟁에서 카타르시스를 얻으려고 했다면, 동 진귀족들은 왕희지의 난정 연회가 상징하듯이 쓸데없는 허식을 배척하여 마음의 양식을 쌓고 정신의 풍 요로움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꾸어 말하면 귀족들은 돈을 듬뿍 쓰며 온갖 것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섬세하고도 우아한 문화적 우 수 집단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물량작전이었던 황제들의 사치와 이면을 강조하는 사치경향이 두드러졌던 서진귀족의 경 우를 비교해 보면, 처음부터 귀족들이 양보다 질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귀족들의 질 중시 흐름이 동진에 이르러 물량작전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촌스러움의 극 치라고 치부하게 되었고 물질보다 정신의 질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둔 우수한 귀족문화를 꽃피우게 되었 다. 2. 여자들의 환상공간 송대 이후의 새로운 귀족들 중국 고전백화 장편소설의 최고 걸작 홍루몽은 18세기 청나라 상류사회 대귀족의 화려한 생활을 묘사 한 작품이다. 엄밀히 말하면 대귀족이라는 표현에는 약간 문제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중국사상 문벌귀족이 출현 한 것은 3세기 중엽인 위나라 말기이며, 이후 그들은 육조 시대를 통틀어 대대로 황제를 보좌하는 정권 의 요직을 차지하며 일세를 구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특권계급으로서 문벌귀족은 당나라(618년-907년) 에 들어와 점점 내리막길을 걷다가 마침내 소멸하기에 이른다. 송나라(960년-1279년) 이래 귀족을 대신했던 부류는 국가시험인 과거에 합격하여 등용된 고급관료였 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관계에 입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관료는 일대로 제한되었으며 세습 귀족과는 아주 달랐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송나라 이후 사치의 주역도 귀족에서 고급관료, 나아가서는 진신(원래는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고 재산도 제법 모아서 관료생활에서 은퇴한 뒤 향리로 돌아간 사람들을 말한다) 으로 바뀌었다. 명나라(1368년-1644년)도 중반기 이후가 되자 일종의 지방호족이 된 진신-특히 강남의-중에서 세련미 넘치는 별장이나 정원을 소유하고 서화를 수집하거나 1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그들은 물론 귀족 계층은 아니었지만 생활양식이나 미의식이 귀족화되었던 것이다. 홍루몽은 이렇게 면 면히 이어져 온 귀족 문화의 본질을 응축한 것이다. 홍루몽을 쓴 조설근은 정말로 극적인 운명의 전환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의 선조는 명왕조를 멸망시 키고 청왕조(1644년-1911년)를 세운 만주족이 중국 본토를 노리고 남하하자마자 항복하여 포의(만주어 로 노예라는 뜻)로서 청나라 정권에 들어갔다. 그러나 포의는 청나라 황제에게는 확실히 노예였으나 사 회적으로는 황제의 심복으로서 힘을 행사하였고 지위도 매우 높았던 것이다. 특히 조설근의 증조모가 청조 제 4대 황제인 강희제(재위 1661년-1722년)의 유모였기 때문에 조씨 집 안에 대한 강희제의 배려는 각별하였다. 이 덕택으로 증조부 조새가 강남의 견직물 생산 총감독에 해당 하는 강녕직조에 임명된 뒤 3대 4인에 걸쳐 연달아 이 직책을 차지하게 된다. 남경을 본거지로 하는 강녕직조는 대단히 수입이 좋은 직책인데다 직물업 총감독이라는 간판 이면에 는 이제 갓 성립된 청왕조를 위해 반청의식이 강한 강남의 정세를 탐색하여 황제에게 자세히 보고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관료제도 바깥쪽에 있지만 황제와 직결되는 이 중요한 자리를 세습한 것은 조씨 집안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힘과 부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홍루몽, 퇴락한 귀족 조설근의 잃어버린 시간 조씨 집안은 조설근의 조부 부인(1658년-1712년)의 시대에 전성기를 부구하였다. 조인은 교양이 높은 탁월한 인물일 뿐 아니라 강남에 행차한 강희제 일행을 네 번이나 남경 자신의 집으로 맞이하여 방대한 연회를 열 정도로 재력 또한 대단하였다. 그러나 조인이 세상을 떠나고 10년 후 조가의 비호자였던 강희제의 시대로 막을 내리고, 옹정제가 즉 위하니 조씨 집안의 운명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옹정제 5년(1727년)에 공금 횡령으로 고발당 하여 재산몰수 처분을 받고 조씨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나이 어렸던 조설근도 호사스러웠던 생활에서 일순간 빈궁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 죽는 그 순간까지 조설근의 삶에는 볕이 들지 않았다. 불우한 조설근은 실제로 대귀족 그 자체였던 조씨 집안의 영광에서 몰락의 과정을 문학적 창작물로 구체화하는 대대적인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홍루몽은 바로 조설근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서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 피나는 창작의 나날은 조설근의 수명을 단축시켜 홍루몽은 결국 미완인 채 끝나 버렸다. 홍루몽 1백 20회 중 조설근 자신이 직접 쓴 것은 80회까지이고 후반부 40회는 조설근 의 구상을 기초로 고악이 집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완으로 끝났지만 조설근이 사력을 다해 집필 한 홍루몽은 중국 고전 소설사에 우뚝선 금자탑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설근은 홍루몽에 주도면밀한 허구적 상황을 설정했는데, 시대와 장소(일단 장안으로 되어 있으나)도 명백하지 않고 무대가 되는 가가도 단지 개국 공신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가가 일족의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은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시조인 영국공 가인의 자손으 로서 4대째 후손인 가진을 당주로 하는 영국부(8동쪽 저택)이며, 또 하나는 가인의 동생 가원의 자손으 로서 현재 3대째 후손인 가사를 당주로 하는 영국부(서쪽 저택)이다. 홍루몽의 이야기 세계는 후자인 영 국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남성지배논리를 거부한 남자 가보옥 홍루몽의 주인공 가보옥은 영국부 당주 가사의 동생 가정의 차남이다. 귀공자 가보옥은 용모뿐 아니 라 머리도 아주 총명한 소년이었는데 다만 성격이 좀 기괴했다. 그는 여자는 물에서 나온 몸이고, 남자 는 진흙에서 나온 몸, 나는 여자를 보면 상쾌하지만 남자를 보면 냄새가 나서 가슴이 울렁거리고 역겹 다(제 2회)고 공언할 뿐만 아니라 금릉십이채라고 불리는 미모의 자매나 종자매 나아가서는 시녀들과는 잘 어울려 즐겁게 노는 반면, 어른스런 남자가 되기 위해 필수인 사서오경 공부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 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남자이면서도 남성의 지배논리를 외면하는 가보옥과 개성적인 미소녀들이 만들어내는 복잡 다양한 모습이 홍루몽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 홍루몽의 최대 특징은 수십 명에 달하는 가족과 수백 명에 이르는 하인들로 구성된 가가라는 대가족 의 내부에 초점이 맞추어진 점이다. 내부이기 때문에 중심이 되는 것은 물론 여자들이며 외부족인 존재 인 성인 남자들은 존재 자체가 아주 희미하게 다루어졌다. 두 개의 영국부를 합한 가가 전체의 최고 권력자는 영국부의 당주인 가사, 그리고 가정의 어머니이자 가보옥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가모(태사군)이다. 그러므로 가보옥의 부친 가정이 소녀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는 아들을 항상 언짢게 여겨 어떻게든 근성을 뜯어고치려고 했으나, 가모가 손자 가보옥을 극진히 아 끼므로 경솔하게 손을 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예를 들면 광대에게 마음을 빼앗겨 제정신을 잃고 시녀와 문제를 일으킨 보옥에게 화가 난 가정이 울 분을 풀 겸 보옥을 호되게 꾸짖자, 대노한 가모는 보옥을 감싸 성인이 된 아들 가정을 심하게 몰아대며 그가 두 번 다시 보옥을 때리거나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맹세하여도 도무지 용서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너는 나를 돌볼 생각이 없는 것이야, 그렇다면 이 집을 나가 보옥을 데리고 남경(가가의 비 어 있는 집이 있는)에라도 가겠다 고 씩씩거리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마침내 진퇴양난에 빠진 가정 은 엉엉 울며 가모에게 용서를 구하는 형편이었다. 귀족 사치의 백과사전 이러한 예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가가 일족에서 가장 윗세대에 속하는 가모는 말하자면 가가의 대모이며 보옥의 엄부 가정되 그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는 아들로서 다만 넙죽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홍루몽이 묘사하는 대귀족 가가의 내부세계는 대모인 가모를 정점으로 구성된 여자 중심의 세계였다. 결국 소녀를 지고하게 여기고 세속에 물든 남자를 혐오하는 가보옥은 그의 감각과 가 치관을 높이 평가하는 대모의 비호 아래 여자들 세계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허락받은 특권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홍루몽은 호화로운 의복, 공들인 요리, 사치스런 일상 용품, 세련미를 응축한 듯한 정원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구석구석을 묘사하여 귀족 사치 백과사전이라고 부를 만한 일면이 있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사치를 실컷 향수하는 주인공이 역시 여자들이라는 점이다. 여자들은 어떤 의복과 액세서리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여성인 왕희봉(당주 가사의 장남 가연의 처)을 예로 들어보자. 금실로 꿴 진주와 여러 가지 보석으로 치정을 곁들인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다섯 마리의 봉황이 각각 입에 진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한 갈래지은 비녀를 꽂고, 목에는 웅크리고 않은 교룡과 합하여 만든 진 주를 장식으로 한 순금 목걸이를 걸고, 치마에는 넙치모양으로 새긴 장미색 옥을 정반대 색깔의 녹색 실로 꼬아 달고 있다. 몸에는 꽃들 사이를 날아 다니는 나비들을 금실로 수놓고, 꼭 맞게 만든 진홍빛 외제 공단 저고리를 입고, 더욱이 위에서부터 은서 모피를 안감으로 대고 오색 실로 모양을 낸 옅은 회 청색의 예복을 걸쳐 입고 있으며, 밑에는 꽃을 흩뿌린 도안으로 엷고 보드라운 비취색의 바탕이 쪼글쪼 글한 비단 치마를 입고 있다. -(제 3회) 육조귀족도 무색해질 정도의 우아함이다. 더욱이 글짓시 대화인 시회를 개최하여 시재를 겨루는 인물 은 임대욱(보옥의 부친 쪽 사촌누이. 보옥이 가장 사랑하는 소녀)이나 설보채(보옥의 모친 쪽 사촌 누이. 임대옥의 경쟁자)를 비롯한 소녀들인 것이다. 이 소녀들은 공부를 싫어하는 보옥 따위는 발 밑에도 미치 치 못할 만큼 교양과 감각이 뛰어났다. 이러한 홍루몽의 이야기 구조는 대모인 가모가 군림하는 대가정 내부의 여자 세계에서 여자들, 특히 미혼 소녀들의 물질적 정신적 사치 행태를 그려낸 것으로, 중국의 전통적 사회구조를 문학이라는 범주 를 매개로 하여 송두리째 뒤집어 보여준 것이다. 그렇지만 성적 차이를 불문하고 가정 안에서 윗세대를 무조건 존중하고 어머니의 힘을 그지 없이 높 이 받드는 것은, 실은 예로부터 내려온 중국 전통이었다. 어쨌든 부모에 대한 효행은 유교사상의 기본이 념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홍루몽의 특징은 가모의 어머니의 힘을 극단적으로 강하게 그려내고 또한 모든 여자들을 남자의 괘의 치 않는 자신과 힘이 있는 존재로 형상화한 점이다. 홍루몽의 작자 조설근은 유교사사의 효행이념을 역 으로 취하여 또 하나의 이념인 남존여비사상의 존립기반 자체를 부정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반골정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여자들의 천국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가의 소녀들이 화려한 나날을 보낸 무대는 영국부 안에 만든 대관원이라 불리 는 큰 정원이었다. 대관원은 원래 가보옥이 누이로 궁중에 들어가 귀비가 된 원춘이 친정 나들이 올 때 맞이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영국부의 한켠에 만든 정원이었다. 이 대관원은 석승의 금곡원이나 왕희지의 난정처럼 경치가 빼어난 명소를 골라 지은 별장과 달리 도 회지 한가운데에 만든 완전한 인공정원이다. 인공정원은 제한된 공간을 절묘하게 꾸며 세계를 모형으로 연출한 것이다. 우선 대관원의 문을 들어서면 돌연 흙을 모아 만든 축소판 산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 산이 없다면 정원속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와 아무런 매력도 없어져 버립니다 (제 17회의 가정의 말) 하고 말했다. 이 축소판 산을 돌아가면 각양각색의 기괴한 모양을 한 거대한 흰 돌들이 무리지어 서 있고, 돌 사이 로는 작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축소판 산으로 전모를 가리고 길을 구불거리게 하여 거리감을 나타 낸다. 이것은 이른바 중국식 정원의 기본적인 공간처리술이다. 대관원은 이런 기본 구조에다 더욱 특이한 것은 곳곳에 맑은 물이 흐르게 되어 있어, 산 넘고 물 건 너 거닐다 보면 나무와 꽃으로 이어지던 사위에 어느덧 요소요소 독자적 풍모를 띤 아름다운 건물이 홀 연 출연하도록 되어 있다. 확 트인 지점에 당당하게 우뚝 선 정전, 푸른 대나무 숲이 펼쳐진 곳에 흰 벽으로 단장해 지적인 분 위기를 자아내는 세련된 몸집의 소상관, 입구에 진홍색 해당화를 심고 방 안도 정교하게 세공된 가구들 로 장식하여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이홍원, 두약과 형무를 비롯하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향 초에 둘러싸인 우아한 형무원, 꽃이 무리지어 만개한 수백 그루의 살구나무와 어우러진 소박한 시골집 풍의 도향촌 등 인간이 상상해 낼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취향을 이 건물들이 실현해 낸 것이다. 대관원은 산이 있고 계곡이 있으며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물이 있어, 그야말로 정밀하게 설계 된 세계의 모형인 것이다. 가가가 막대한 돈을 들여 만든 대관원에는 원춘 왕후의 친정 나들이가 끝난 뒤 보옥과 그이 자매와 종자매들이 각각 시종을 거느리고 살게 된다. 귀공자 보옥은 호화로운 이홍원에, 날카롭고도 섬세한 임 대옥은 세련된 소상관에, 임대옥과는 대조적으로 균형감각이 뛰어난 냉정한 설보채는 우아한 형무원에, 보옥의 죽은 형 가주의 과부 형수 이환은 시골집 풍의 도향촌에 각각 거처했던 것이다. 공간 환상의 극치 대관원에는 특권적 존재인 보옥 외에는 여자만이 거처할 수 있고 그것도 소녀와 과부로 제한된다. 대 관원은 남자의 분위기는 조금도 풍기지 않는 완벽한 소녀들의 정원인 것이다. 대관원은 왜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홍루몽의 이야기 구조와 깊은 관계가 있다. 홍 루몽의 소설세계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보옥과 여기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원래 천상의 여인 세계 태허환경의 주인이었는데 지상세계로 내려가고 싶은 소망을 버릴 수 없어 인간으로 태어나 가가의 사람 이 되었다고 한다. 대관원은 꿈의 나라 태허환경을 그대로 지상에 옮겨다 놓은 셈이다. 조설근의 상상으로 태어난 대관원은 지상에 내려가고자 하는 천상세계의 꿈과 환상의 정원인 태허환 경과도 겹쳐지면서 결국 이중의 의미에서 환상의 정원이 된다. 정원이란 본래 인간의 공간에 대한 환상에서 기초하는 것이 아닐까. 공간을 설계하여 나무나 꽃을 심 고 혹은 산을 축소하여 만들고 또한 시냇물을 흐르게 하는 등 상상을 구체화해 나간다. 몰락한 가문의 조설근은 자신이 설계한 공간 환상을 실현해 낼 자금이 없으므로 오로지 붓으로 대신하려 했던 것이다. 보고 들은 훌륭한 정원의 기억을 더듬고 가꾸어 되살려낸 환상 정원에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환상의 소녀들을 살게 한다. 이렇듯 대관원은 조설근의 못 이룬 꿈의 결정체임과 동시에 인간에 게 가능한 공간 환상의 극치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호화롭기로 치자면 이토록 호화로운 정원은 없을 것 이다. 예술의 경지에 달한 음식 사치 홍루몽에 함축되어 있는 귀족의 사치는 대관원뿐만 아니라 의식주 등 모든 영역을 빠뜨리지 않고 있 는데, 여기에서 음식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하루는 유 할머니라는 시골 노파가 가가를 찾아왔는데, 가지를 완전히 가공한 가상 이라는 요리를 대 접받고 맛이 너무 좋아 깜짝 놀라는 장면이다(제 42회). 그 유 할머니 딸의 시가는 왕씨인데 왕부인(보 옥의 어머니)과 왕희봉의 친가이고 역시 대귀족인 왕씨 일족과 성씨가 같다는 점 때문에 갖고 대우를 받고 있었다. 노파는 가상을 먹으면서도 도무지 그 재료가 가지라는 것을 믿을 수 없어서 그렇게 만드는 비결을 묻 자 왕희봉은 이렇게 대답한다. "간단해요. 가지를 따서 껍질을 벗겨 깨끗한 속살만 남기고 잘게 다져서 닭 기름에 튀깁니다. 따로 닭 의 가슴 고기와 표고버섯, 신순(새로 돋아난 죽순), 마려(버섯의 일종), 오향부간(다섯 종류의 향료를 넣 어 두부를 조려 말린 것), 갖은 말린 과실을 모두 잘게 다져 (가지와 함께) 닭 스프에 넣고 약한 불에 끓인 다음, 참기름을 조금 넣고 거기에 지게미로 만든 기름을 첨가하여 잘 섞어 항아리에 담아 엄중히 봉합니다. 먹을 때는 볶은 계조(닭 발 혹은 가슴 살을 주사위 모양으로 자른 것)와 약간 석으면 되죠." 이야기를 들은 유 할머니는 나무아미타불! 열 마리쯤 되는 닭이 들어가는구나. 그 때문에 이렇게 맛이 나는구나 하고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였다. 시간을 들이고 복잔한 과정을 거쳐 자르고 끓이고 섞은 다음 일정 기간을 봉해서 담가두는 이 조리기 술은 거의 예술적이며, 연료에 공을 들인다고는 해도 그다지 식욕을 돋우지 못했던 서진귀족의 요리법 과는 천양지차이다. 하찮은 가지이긴 하지만 복잡하고 오묘하며 섬세한 맛을 낼 것 같은 느낌이 글을 통해서도 절로 느껴진다. 이 예에서 알수 있듯이 홍루몽 세계에 상징적으로 나타난 청조의 귀족들이 보여준 음식에 대한 사치 는, 단지 비싼 것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벼락부자 취미이다)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공 을 들여 요리하는 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예를 들면 보옥은 설보채의 오빠인 설반의 생일 잔치에서 돈으로 사는 음식물이나 의복은 결국 역시 내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 쓸 글씨나 그림이야말로 내것이 됩니다.(제 26회) 라고 하며 손수 만든 서화를 선물하려고 하였다. 또한 소녀들이 생일 선물로 준비하는 것은 거의 다 손수 바느질하여 만든 자잘한 도구였다. 물론 가 가의 소년소년는 실내에서 거주하는 몸이며 정해진 용돈밖에 지닐 수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들이 비 싼 물건보다 정성을 들여 손수 만든 것을 더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미의식과 가치관의 소유자임을 잘 알 수 있다. 귀족 사치의 특징, 세련과 퇴폐 육조귀족에서 홍루몽의 대귀족에 이르는 귀족들의 사치의 본질을 요약해보면 호화롭고 현란한 생활양 식을 마음껏 누리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풍요로움의 초월을 추구하여 돈과 바꿀 수 없는 정신적 가치를 중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모 가모를 정점으로 하는 홍루몽의 대귀족 가가는 대관원 건축으로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것을 기 점으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고 마침내 몰락하여 모든 부귀영화도 한바탕 꿈으로 사라져 버린다. 대관원에서 웃고 소곤거리던 소녀들도 병약한 임대옥이 사랑하던 보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조설근이 지은 화려한 환상세계는 이렇게 얼어붙 고 막을 내리는 것이다. 홍루몽은 근본적으로 불행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 퇴락하기 시작한 대귀족 일가를 무대로 귀족 사치 의 본질을 웅변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설근 자신의 경험을 생각해 보더라도 상당히 암시적이다. 육조귀족에서부터 홍루몽에서 보이는 귀족들의 사치는, 황제의 노골적인 권력과시형 사치나 다음 장 에서 서술한 상인의 사치에서 보이는 번쩍번쩍한 생명력이나 강렬한 상승 욕구 경향을 촌스러움의 극치 라고 배타시하였다. 그들은 섬세한 미적 세계를 추구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뿌리에서부터 깊이 병들어 있는 듯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련미를 추구하는 귀족사치의 특성이다. 제 3장 상인의 사치향락 그때는 마침 이교아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주방에슨 생선이나 고기 요리와 온갖 반찬이 있었고, 상 을 내오기 시작하는데 끝이 없었다. 우선 과일 네 접시와 야채 절임 네 접시가 놓이고, 다음으로 두어 한 접시, 집오리 지게미 절임 한 접시, 오피계 한 접시, 무로공 한 접시 등 술 안주 네 접시가 나온다. 이어 네 종류의 요리를 날라왔는데, 한 접시는 얇게 저며 경단식으로 튀긴 고기, 한 접시는 지방이 듬뿍 들어 있는 양간, 또 한 접시는 매끈매끈한 미꾸라지였다. - 금병매 중에서 1. 욕망의 자기증식 상인의 신화 도주공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에는 교역으로 떼돈을 번 고대 중국 대상인의 전기가 들어 있다. 맨 처음 등장하는 대상인은 범려이다. 범려는 춘추시대에 월왕 구천(? - 기원전 465년)의 참모로 활약 한 인물이다. 구천이 온갖 어려움 끝에 숙적이었던 오왕 부차(? - 기원전 473년)를 물리치고 천하의 패 왕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범려의 공이 컷다. 그러나 그 뒤 범려는 구천의 인간성은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은 가능하나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은 불 가능하다는 생각과 멍청히 있다가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구천에게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뱃길 을 통해 제나라로 탈출하였다. 이리하여 범려는 치이자피라고 이름을 바꾸고 상인 자질을 한껏 발휘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뒤이어 춘추열국의 상거래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도나라로 옮겨 가 이번에는 주공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점포를 열었는데, 물건을 저장해 두었다고 시기를 노려 판매하는 방법으로 역시 큰 돈을 벌었다. 범려, 즉 도주공은 기회포착 능력이 뛰어나 문자 그대로 일확천금을 세 번이나 거머쥘 수 있었다. 그 런데 그 중 두 번은 과감하게도 가난한 친구나 먼 친척에게 나누어 주었다. 도주공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욕심을 버려야 할 때와 단념할 때를 알았는데, 노년에는 조금도 주 저하지 않고 사업에서 손을 떼고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그 뒤 자손들은 사업을 더욱 번성시켜 마침내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제후의 슬기로운 계략가에서 억만장자로 화려하게 변신한 도주공의 이야기는 상인 신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 더 하자면 범려는 월나라에서 탈출했을 당시, 오나라 왕 부차를 농락하기 위 해 자진해서 오나라에 들어갔던 운명의 미녀 서시를 같이 데리고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주공은 기원전 5세기 고대 중국의 뛰어난 대상인이었는데, 중국에서 상업이 본격적으로 번창하기 시작한 것을 훨씬 이후인 근세에 들어서이다. 즉 11, 12세기의 송대부터이며, 상인 계층이 멸시당하지 않고 요직을 차지하게 된 것은 15, 16세기 명대 중기 이후부터였다. 그러므로 황제의 사치, 귀족의 사치와 대비되는 상인 사치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명대의 상인 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명대의 장편 백화소설의 걸작 금병매에서는 상인 사치의 극단적 인 예를 엿볼수 있다. 금병매는 주인공인 벼락부자 서문경의 무한한 욕망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이제 부터 금병매를 중심으로 상인의 사치 행태를 탐구해 보도록 하자. 금병매의 서문경 금병매는 16세기 말 명나라 말기 만력연간(1573년-1620년) 때쯤 쓰여졌다. 이야기는 수호전의 에피소 드에 살을 붙여 서문경과 반금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지은이는 소소생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실제로는 어떤 인물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아주 교양 있는 지식인이라는 점만은 틀림없다. 지은이가 송대 이래 번화가의 일반 서민 생활에 근거한 신흥 문학장르인 소설의 작자임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결코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금병매는 문학의 새로운 장르인 소설에서 신흥 벼락부자인 상인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장편 이다. 금병매의 시기적 배경은 12세기 초 북송 말기로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 무대는 지은이가 살고 있던 16세기 명나라 말기였다. 금병매의 주인공 서문경은 산동성 청하현의 약장수였는데, 젊었을 때부터 방탕하고 불량하고 짝이 없 어 남들이 싫어하던 인물이었다. 다만 눈치가 빨라 상술이 뛰어났고 점차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음탕 하기가 자기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 반금련과 만났을 때 그는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였다. 그때 이미 그는 현의 관공서에 얼굴을 내미는 등 지역 유지 명단에 올라 있었다. 금병매에서는 서문경의 색정광으로서 편력을 전면적으로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인으로서 승승 장구하여 대사업가로 변해가는 과정, 조정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나가는 모습 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마디로 서문경은 색정이 달아오르는 것에 비례하여 정력적으로 사업을 벌여나갔던 인물이었다. 살인도 서슴지 않는 색정 편력의 동반자 단적으로 말하면 금병매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서문 경의 색정 편력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서문경은 반금련과 우연히 만나기 전에 이미 정실 부인 오월랑 이외에도 기녀 출신 이교아, 하녀 출 신 손선아 등 두 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는 일부다처제라서 처와 첩의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 고 있었다. 게다가 가난한 지방관리의 딸이었던 오월랑은 정실이지만 후처였다. 서문경의 애정행각에 둘도 없는 상대역이었던 반금련은 바느질집 딸이었다. 9세 때 아버지가 죽고 어 머니 손으로 왕초선이라는 관리 집으로 팔려가서 화장하는 법에서부터 노래, 춤, 음악을 완전히 통달하 게 되었다. 왕초선이 죽자 반금련의 어머니는 또다시 재산가인 장대호의 하녀로 딸을 팔아 넘겨, 어느새 반금련은 그와 깊은 사이가 되었다. 장대호의 부인은 이러한 관계를 눈치채고 노발대발하며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장대호는 마지못해 반금 련을 시집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상대로 선택된 사람은 떡장사를 하는 땅딸보 추남 무대였다. 반금련은 참을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무대와 살림은 차렸다. 이때 호랑이를 잡아 용맹스럽기로 소문난 관리로 임명된 무대의 동생 무송이 등장한다. 반금련은 무 송의 늠름한 남자다움에 홀딱 반해 버린다. 반금련은 온갖 유혹과 교태를 부려보았으나 형을 끔찍히 생 각하는 무송은 조금도 출장을 가게 되었다. 무송은 형에게 음탕한 형수한테서 눈을 떼지 말라고 신신당 부하고 여정에 올랐다. 무송이 우려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일어났다. 서문경이 우연히 반금련을 보게 되었는데 요 염기가 철철 넘치는 모습에 그만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무대와 반금련 부부의 이웃에 사는 왕노파에게 거금을 주고 소개를 부탁하였다. 노련하고 교활한 왕노파가 돈을 두둑이 챙기고서 무 대가 눈치채지 않도록 두 사람을 만나게 하니, 그들은 깊은 사이가 되었다. 반금련도 정력 좋은 서문경에게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왕 노파의 집에서 밀회를 거듭하는 가운데, 그 토록 사람 좋은 무대가 부인의 부정을 알아차린다. 어쨌든 무대에게는 호걸인 동생이 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서문경과 반금련은 왕 노파의 충고대로 무대에게 비소를 마시게 하여 독살해 버린다. 서문경은 약재상이기 때문에 비소를 구하는 일 따위는 식 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무대를 직접 죽인 사람은 반금련이었지만, 사체의 처리에서부터 장례식까지 모든 뒷일을 도맡아 매듭 지은 사람은 왕노파였다. 왕노파는 서문경과 반금련조차 몸을 사릴 정도로 간악하고 교활한 인물이었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온 무송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는 관청에 소송을 냈다. 그러나 서문경의 뇌물 에 녹아 있던 관리들은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무송은 서문경을 때려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서문경이 현의 관리 이외전과 술을 마시고 있던 요리점으로 달려 들어 갔다. 그러나 정작 서문경은 도망가 버리고 없었고 엉뚱하게도 이외전을 죽이게 된다. 이 사건 때문에 무송은 살인죄로 체포되어, 사형을 간신히 면하고 청하현에서 멀리 떨어진 맹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위험인물이 없어지자 서문경은 반금련을 다섯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리하 여 무대를 살인한 공범자들은 정정당당하게 성의 유희를 벌였던 것이다. 친구 마누라까지 탐한 서문경의 정력 서문경은 처와 첩을 합해 모두 세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반금련이 넷째 부인이 아니라 다섯 째 부인이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반금련이 남편을 죽인 뒤 장례식이다 뭐다 하고 뒤처리에 급급할 때, 다른 한편에서 서문경은 빈틈없는 왕노파가 시키는 대로 또 한 명의 여자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네 번 째 부인은 포목점을 꽤 크게 하는 자식 없는 과부 맹옥루였다. 서문경은 셋째 부인이 병으로 죽자 넷째 부인으로 맹옥루를 맞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정실 부인의 오월랑, 둘째 부인이 기생 출신 이교아, 셋째 부인이 하녀출신 손설아, 넷째 부인 맹옥루였는데, 여기에 다하여 반금련이 다섯 번째 부인이 된 것이었다. 맹옥루는 서문경과 혼담이 있기 전에 관리 아들의 후처로 들어가라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 나 맹옥루는 굳이 가난한 관리 아들의 정실보다 돈 많은 상인 서문경의 넷째 부인 자리를 택할 정도로 이재에 밝고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맹옥루의 선택에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때 이미 사농 공 상 순의 전통적인 계층 구분이 희미해지고 최하층이었던 상인이 떠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색정광 서문경은 다섯 명의 처와 첩 사이를 오가면서도 반금련의 하녀인 춘매와 깊은 관계 를 맺는 등 매우 바쁘게 여성 편력에 나섰다. 그 와중에 유곽 또한 빠뜨리지 않고 드나들었기 때문에 정말 대단히 분주하였다. 이런 서문경 앞에 또 한 명의 몹시 매력적인 미녀가 등장한다. 서문경과 한패 거리인 옆집 화자허의 처 이병아이다. 이병아는 원래 양중서라는 고관의 부인이었는데 양가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된 탓으로 헤어지게 되었 다. 그 뒤 환관 화태감의 조차인 화자허의 정실부인이 되었고, 화태감이 병으로 죽은 뒤 화자허 부부는 그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아 태감의 고향 청하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돈에사 시간까지 남아노는 화자허는 서문경의 놀이패거리에 끼어들게 되었는데, 사실 그 패 거리는 서문경의 측근들일 뿐이다. 주로 가업인 포목점이 파산한 뒤 유곽에서 파묻혀 살고 있는 응백작 을 비롯하여, 부자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떡고물이나 주어 먹으려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화자허는 그야 말로 둘도 없는 물주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의 꾐에 빠져 며칠씩이나 유곽에 머무는 등 화자허의 생활은 완전히 난잡하게 되었다. 화자허의 부인 이병아는 칠칠치 못한 남편에게 점점 정나미가 떨어져 갔다. 이 무렵 아주 정력적이고 의지할만한 서문경을 알게 된 것이다. 서문경은 정력적일 뿐 아니라 중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미 남인 반악(서진의 시인) 못지 않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병아는 이 미남자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고, 적 극적으로 기회를 만들어 순식간에 깊은 사이가 되었다. 서문경은 부지런히 담을 타고 넘어 이웃집 이병아에게 들락거렸다. 이런 와중에 화자허는 화태감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에 휘말려 관에 끌려가고 말았다. 당황한 이병아는 삼천 냥에 달하는 금은재보를 서 문경에게 맡기고, 관에 손을 써 화자허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서문경은 관의 고관들에게도 얼굴이 알 려져 있었으므로, 큰 돈도 들이지 않고 모양 좋게 화자허를 풀려나게 했다. 그러나 석방의 조건은 가옥과 전답을 모두 팔아 다른 친척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었다. 화자허는 풀려나기는 했지만, 집을 팔아야 했고, 부인 이병아에게는 질책을 당해야 하는 등 완전히 진퇴양난에 빠 져 버렸다. 서문경에게 집을 사달라고 울면서 부탁했지만, 그는 이병아와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 워 전혀 상대하지도 않았다. 이병아는 화자허에게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이병아가 삼천 냥의 재산도, 관에서 풀 려나게 하는 데 다 들어갔다고 하기로 서문경과 미리 짜고 빼돌려 화자허는 그야말로 빈털털이가 되었 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화자허는 구매자를 찾지 못한 채 울며불며 집을 떠났다. 비록 그는 돈을 빌려 따 로 집을 구했지만, 실의에 빠진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열병으로 죽게 되었다. 악의 논리가 생의 에너지 반금련의 남편은 독살되고 이병아의 남편은 쫓겨나 병사하였다. 돈 많고 정력적인 서문경과 만난 사 람들은 이렇게 몰락해 갔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논리 그 자체인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어느 경우에나 꼭 여자가 공범이 되고 오히려 서문경을 부추겨 약한 남자를 도태시 켜 버렸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어느 정도 희미해져갈 무렵 서문경은 이병아에게서 받은 삼천 냥의 자금으로 이웃 화자허의 집을 사들였다. 그리고 호화로운 정원을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하 였다. 이리하여 서문경은 예전의 약속대로 이병아를 여섯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려 하였다. 그런데 이 일만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정실 오월랑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힌데 이어, 서문경의 전처가 낳은 딸의 시가쪽 인 진가가 모종의 사건에 말려들어 대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진자의 친척인 조정 중신 양전에 탄핵을 당하고 시아버지 진흥도 함께 연루되어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서문경의 딸과 사위 진경제가 서문경 집으로 피신했는데 이로 인해 서문경까지 처벌받는 사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때 서문경은 잔뜩 겁을 먹고 아랫사람들 득달같이 관청으로 보내 으레 그랬듯이 뇌물작전을 써서 간신히 죄를 면하게 되었다. 서문경이 이 사건으로 허둥대는 사이에, 이 병아는 서문경이 데리러 오는 것을 기다리다 못해 반죽음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다 가끔 치료하려 오는 가난한 의사 장죽산과 깊은 사이가 되어 그 남자와 재혼해 버렸다. 이 사실을 안 서문경은 분통이 터지지 않을 리 없다. 딴 사람을 내세워 장죽산을 호되게 닦아세운 다 음, 장죽산이 빌린 돈 삼천 냥을 떼어먹었다고 억지 누명을 뒤집어 씌워 관청에 끌려가게 하였다. 이병아가 삼천 냥을 관에 뇌물로 갖다바쳐 장죽산은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이병아 는 이 남자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그의 곁을 떠나 버린다. 결국 이병아는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고 서문 경의 여섯째 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반금련은 서문경의 다섯째 부인이 되고 나서도 이랫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등 갖은 풍파를 일으켰 다. 이윽고 이병아가 서문경에게는 첫 아들은 관가를 낳아 주었다. 자연히 서문경의 애정이 이병아에게 기울어지자 반금련은 질투에 불타올랐다. 그러다 자신의 욕정을 위해 남편을 독살했던 독기가 다시 발 동외어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관가를 앙심을 품고 해코지하였다. 결국 관가는 일 연도 못되어 죽어 버 렸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병아는 여섯째 부인이 되기 전에는 상당히 강렬한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데 여섯째 부인이 된 뒤에느느 마치 악귀가 떨어져 나간 듯이 부드럽게 변한다. 그러다 이병아는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아도 자라지 않는 관가를 키우는 데 심하게 시달리다 관가가 죽자 비탄에 빠져 더욱 쇠 약해졌고, 그만 죽어 버렸다. 어쩌면 금병매에서는 인간의 강한 생명력은 독기 서린 악의 논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의 광연 이야기가 앞서 나갔는데 서문경은 소원대로 이병아를 여섯째 부인으로 맞이하고 나서 장사의 규모도 훨씬 커졌다. 그리고 뇌물을 부지런히 바친 덕분에 조정의 실력자와도 관계가 돈독해져 갔다. 그는 관가 가 태어났을 즈음에는 산동 제형소의 이형(재판을 담당하는 관청의 차관) 지위에 오르고, 뒤에는 수장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악랄한 장사를 하기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문경은 여섯 명의 처와 첩에 둘러싸여 아쉬울 것 없는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욕망이란 끝 없이 꿈틀대고 기승을 부릴 대로 부려야만 하는 것. 여자를 밝히는 색광증은 더욱 심해져 하녀들이나 기생은 말할 것도 없고 양가집 과부에서부터 고용인의 부인에 이르기까지 거의 손대지 않는 여자가 없 었다. 서문경은 이 정도로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촌각이 아까울세라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남자 몸종 을 상대로 남색까지 탐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야말로 정력의 화신이라 불러야 마땅한 인물이다. 상대 여자들 중에는 래왕이라는 사람의 아내인 송혜련처럼 서문경과의 관계가 드러나 자살한 불행한 예가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눈치껏 처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서문경이 부리던 어떤 사람의 아내는 남편과 한패가 뒤어 의도적으로 서문경과의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금전을 요구하거나 물건을 조르기도 했다. 낯 두꺼운 서문경도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렇듯 서문경은 미친 듯이 성의 유희에 빠져들다 급기야는 피로가 겹쳐 이 생활이 고달퍼지게 된다. 음탕한 반금련은 치사량에 가까운 미약(성욕을 돋우는 약)을 서문경에게 주고 마침내 그는 목숨을 잃는 처지가 된다. 그때 서문경의 나이 33세. 미친 듯이 여색을 탐한 서문경의 말로였다. 졸부의 음식 사치 생각해 보면 상인 서문경은 여성관계뿐 아니라 의식주 모든 면에 대해서도 욕망으로 점철된 삶을 살 았다. 그는 재산이 늘어날수록 번드르르하게 차려 입힌 처와 첩을 여러 명 거느리고 쉴 새 없이 연회를 열 었다. 물론 온갖 산해진미나 맛좋은 술을 대접했다. 게다가 집에는 한껏 화려하게 꾸민 정원을 조성하는 등 의식주 모든 면에 걸쳐 주저없이 돈을 퍼부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송혜련은 끝에 가서 자사랗는 처지가 되었지만, 서문경과의 관계로 득의만면했을 때에는 눈부시게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진주로 장식한 머리띠를 하고, 금등롱 귀걸이를 너울거리고, 겉옷 아래에 있는 붉은 명주 바 지에 수놓은 무릎 바대와 넓은 소매 자락 안에는 향다목서환(향기 나는 차와 물푸레나무로 만든 구슬) 을 넣어 서너 가지나 되는 향을 몸에서 풍기고 있었다. -금병매. 제 23회 게다가 음식대접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연회에서도 눈길을 끌 만한 점이 발견된다. 금병매에는 서문경의 엽색가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노골적인 묘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음식에 대한 묘 사가 많다. 예를 들어 보자. 서문경이 호승(인도에서 온 승려)-서문경의 수명을 단축하는 데 쓰인 미약 제공자-을 대접하는 장면이다. 그때는 마침 이교아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주방에는 생선이나 고기 요리나 온갖 반찬이 있었고, 상을 내오기 시작하는데 끝이 없었다. 우선 과일 네 접시와 야채 절임 네 접시가 놓이고, 다음으로 두어 한 접시, 집오리 지게미 절임 한 접시, 오피계 한 접시, 무로공 한 접시 등 술 안주 네 접시가 나온다. 이어 네 종류의 요리를 날라왔는데, 한 접시는 흰 파와 함께 볶은 호두가 들어간 고기, 한 접시는 얇게 저며 경단 식으로 튀긴 고기, 한 접시는 지방이 듬뿍 들어있는 양간, 또 한 접시는 매끈매끈한 미꾸라지였다. 다음에 또한 탕과 밥이 나왔는데, 탕은 그럿 안에 두 개의 고기 경단이 가늘고 긴 고기 덩어리를 사이 에 둔 모양으로 하고 있어 일룡이주탕(한 마리의 용이 두 개의 진주를 가지고 노닐고 있는 탕)이라 불 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큰 접시에는 정수리가 갈라진 고기 만두가 그득 담겨 있었다. -금병매. 제 49회 거기에다 생선류, 조류, 수육, 간 등등 번쩍번쩍 기름기가 흐르는 값비싼 음식을 이것저것 끝도 없어 내왔다. 과연 돈을 흥청망청 써 대는 졸부 기질을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 요리사도 아닌 하녀 출신 손설아가 조리장을 꾸리고 있는 만큼, 영양이나 차림새의 균형 때위는 아랑곳없이 어쨌거나 가짓수가 많은 것만이 대수였다. 그리고 그의 처와 첩들은 매번 희희낙낙 처음부 터 상에 달려들어 꾸역꾸역 먹어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금병매에서 나타난 서문경의 음식에 대한 사치 행태는 심미적 기준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요컨 대 닥치는 대로 성욕을 방출하여 엽색행각을 연출했던 것과 같은 똑같은 방식이었다. 무한증식의 욕망 서문경이 부린 사치의 성격은 여성관계와 의식주에서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세련미를 추구했던 귀족의 경우와 아주 대조적이다. 오히려 주왕과 같은 고대 황제들의 물량작전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원도 황제의 거대한 정원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작은 규모였다. 또한 최고의 권력을 휘둘러 전국 각지에서 불러들인 황제의 후궁에 비하면, 서문경이 부지런히 촉수를 뻗어 주위에 모은 여자들의 수 따위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양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던 사치라는 점에서는 확실히 황제의 경우와 공통된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상인 서문경의 사치 행태가 단순하게 황제의 사치 행태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황제의 욕망충족은 구심성이 그 특징이며, 여자건 물건이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 없는 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일극 집중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황제의 구심성에 반하여, 상인 서문경의 경우는 욕망 자체가 무한증식해 나가는 원심성을 가 지는 것이 최대의 특징이다. 여성관계만 보아도, 서문경은 보통 이상의 뛰어난 정력과 팽창 일로를 걷던 재력에 보조를 맞추어 여자들에게 촉수를 뻗쳐나간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도 일종의 강렬한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황제는 상대 여성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권력의 힘으로 미녀라는 미녀는 모두 끌어모았다. 그 러나 서문경의 경우는 애정편력의 상대 여성 대부분이 자신들의 색욕이나 혹은 그의 재산에 대한 구미 가 발동하여 적극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어 나가는 행태였다. 이 때문에 서문경과 여자들 사이에는 매 상황마다 먹느냐 먹히는냐 하는 힘의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남녀관계의 역동성은 금병매가 서문경의 엽색행각기에 머무른 황색소설(요컨대 에로소설)류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키는 요인이다. 금병매의 이러한 특성은 서문경의 상대 여자들이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들 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즉 반금련과 이병아는 모두 어릴 적에 다른 집으로 팔려가는 등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는 가운데 결혼 하고, 그 뒤 서문경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서문경과 공모하여 남편을 죽음에 몰아넣은 끝에 서문경의 집에 들어갔다. 셋째 부인 맹옥루도 역시 재혼이다. 이 박에 서문경이 관계한 여자들은 세파에 닳고 닳은 기생 아니면 하녀, 부리던 사람의 아내 등 모두 억센 여자들뿐이었다. 때묻지 않고 순진한 사 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작가가 서문경의 상대역으로 이러한 여성만을 배치한 것을 관계의 역동성을 중시한 금병매의 이 야기 구조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좀더 파고 들어가 보면 명나라 말 지배적인 시류로 자리잡고 있던 퇴 폐적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지식인이었던 작가는 서문경의 상대역을 아주 닳고 닳은 여자로 설정함으로써 모종의 의도를 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벼락부자가 된 상인계층의 주체할 줄 모르는 욕망과 천박한 졸부 근성이 빚 어낸 기괴함을 야유하고 있는 것이다. 성욕에 비례한 자산증식 돌이켜 보면 서문경의 내부에서 삽시간에 세포분열 하듯이 늘어난 것은 비단 성욕만이 아니었다. 서 문경은 처음에는 약방만 경영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병아가 맡긴 3천 냥 등을 밑천으로 전당포를 열었다. 그리고 잇달아 다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불과 7-8년 만에 엄청난 돈을 움켜쥐게 된다. 금병매에서는 상인 서문경이 번창하는 모양을 중매쟁이 노파 문수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대목은 중매쟁이 노파 문수가 서문경의 청을 받고 대가집 음탕한 과무 임태태에게 찾아가 중 매를 서는 장면이다. 현청 앞의 서문 나리(서문경)는 지금 제형원 장관으로 계신데, 관리들에게 돈을 빌려주거나(흔히 말하 는 고리대금업), 포목전, 약방, 비단전, 실집 등 네 다섯 개의 점포를 열고 있으며, 이것 말고도 해운업까 지 운영하여 양주에서 소금을 사들이고 동평부(산동성 동평현)에서는 향나무와 밀을 거둬들이고 있습니 다. 지배인이 수십 명이고 도의 채태사(북송 말 조정에서 권세를 구가한 채경을 말한다)님은 이 양반의 양아버지(뇌물작전을 펼쳐 서문경은 채경과 부자관계를 맺었다)이고, 주태위(채경과 결탁하여 역시 악명 높은 인물)는 이 양반의 친척입니다(서문경의 지배인 한도국의 딸이 집사의 첩으로 되어 있다). 순무(지 방의 최고 장관)님이나 순안(각지를 순회하여 지방관리를 감찰하는 직책에 해당)님까지도 모두 절친한 사이이고, 부나 현의 지사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소유하고 있는 전답은 끝없이 넓고, 쌀은 창고 안에 썩을 만큼 있습니다. 붉은 것은 금, 흰 것은 은, 둥근 것은 진주, 빛나는 것은 보석입니다. 그 분 곁에는 대낭자, 이분은 청하좌위 오장관의 따님으로 후 처입니다만, 말고도 첩이 대여섯 명되고, 노래 춤 음악에 능란하여 총애를 받고 있는 시녀가 수십 명이 넘습니다. -금병매. 제 69회 이러한 중매쟁이 말 속에서 여자도 사치품의 일종이며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함을 잘 알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서문경이 뇌물작전으로 조정의 실력자와 교분을 두텁데 쌓아 왔다는 사실 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재산 증식을 거듭한 결과 서문경의 자산은 동산과 부동산을 합쳐 10만 냥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경의 유산 그러나 이러한 경이적 성공도 난잡한 미약 남용으로 서문경의 죽자마자 흔적도 없이 무로 돌아가 버 린다. 지배인이나 총지배인이 잇달아 배신하고, 갑자기 팽창한 기업형태가 파산하기 시작하면서 정실부 인 오월랑은 원래의 약방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정리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경과 관계가 있었던 여자들도 집에서 나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며 그 대부분은 비참한 말로를 걸 었다. 예컨대 반금련은 다시 중매쟁이집 왕노파 밑으로 되돌아간 끝에 전남편 무대의 동생 무송에게 복 수를 당해 살해되고 만다. 금병매의 이야기 세계는 이리하여 벼락부자 상인 서문경이 여자에 장사에 과잉욕망을 극한까지 증식 시킨 나머지 파멸하고, 그 파멸과 동시에 그의 욕망의 대상도 역시 한자락 꿈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지 점에서 막이 내린다. 생각해 보면 그토록 많은 여자들과 관계하면서 서문경에게는 자식이 적었다. 처음의 정실부인이 낳은 딸과 이병아와의 사이에서 생긴 관가, 거기에 후처인 오월랑이 서문경이 죽은 뒤 얼마 안 있어 낳은 효 가까지 합해 이남일녀를 두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이 세 명의 자식마저, 관가는 허약하여 요절하고, 딸은 서문경 사후 반금련과 관계하랴 유곽출입하랴 완전히 긴장이 풀려버린 남편 진경제에게 구박당하고 들볶여 자살하고, 단 하나 남은 유복자 효가도 운 명의 끈에 조종을 당해 북송 말기 동란의 와중에서 출가해 버리니 결국 서문경의 혈통은 끊어진 것과 다름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결말지어지는 금병매의 서술방식은 결코 단순히 인과응보라거나 권선징악이라는 상투적인 형 태에 따른 것은 아니다. 서문경의 과잉에너지는 폭발 끝에 파멸에 이르는 길밖에 다른 수가 없었고, 결국, 분수를 지킨 고대의 대상인 도주공이 부여준 지속성이라는 것과는 애치당초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금병매의 종말에서 서문 경의 혈통 단절이 암시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다만 개인으로서의 서문경은 파멸하여 그 혈통이 끊어진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상업체계 자체는 아무 런 영향없이 지속되어 제2, 제3의 서문경을 낳는다. 그 증거로 금병매 작가는 서문경이 망한 뒤 청하현에서는 제 2의 서문경으로서 장이관이라는 인물이 급속히 두각을 드러내 서문경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산을 불려가는 한편 그 역시 색광 같은 쾌락에 빠지 는 모습을 덧붙여 쓰기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꿀에 모여드는 개미처럼 이 장이관의 주변으로 응백작을 비롯한 서문경에게 알랑거리며 꾀어들었던 패거리들이 이동하고, 서문경의 제 2부인이었던 기생출신 이교야도 역시 약삭빠르게 자리를 옮겨 장이관의 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요소들을 모아서 생각해 보면 무한증식을 그 특징으로 하는 서문경적인 존재의 욕망충족 스타일 은 금병매가 씌어진 명나라 말기의 사회에서 급속하게 확산된 상업체계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문화를 사들인다 청대의 염상 1644년, 약체 일로를 걷고 있던 명나라 왕조가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왕 조가 중국 전역을 지배하였다. 이와 같은 명청 교체시기에 발전도상에 있던 상품경제는 일시적으로 타 격을 받았는데, 대상인들은 재빨리 전향함으로써 다시 일어서 전대를 능가하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상업도시로 번창한 곳은, 과거 수나라 양제가 각별히 여겨 그곳에 행차하 기 위해 대운하까지 건조했던 강소성의 양주였다. 남북교통의 요충인 양주는 상업, 특히 염업의 발전과 함께 이 지역으로 주거지를 옮긴 산서성 출신의 산서상인과 안휘성 휘주 출신의 신안상인의 양대 상인 집단을 비롯한 대부분의 염상들이 활약하는 무대 가 되었다. 청 왕조는 명 왕조 방식을 답습하여 정부의 감독하에 한정된 염상에게 면허증을 교부하고 전매권을 주었다. 더구나 이 권리를 세습시켰다. 여기에서 전매권을 얻은 양주의 염상은 대대로 상상을 불허하는 이익을 획득하고, 정부 쪽도 또한 불로소득으로 염상에게서 막대한 세수입을 거두어들이는 구조가 완벽 하게 제도화된 것이다. 염상은 양회(강소, 안휘, 강서, 호북, 호남 등 다섯 개의 성 대부분과 하남성 일부를 합한 염전구역의 명칭)의 제염업자로부터 한 근(약 6백 그램)에 10문씩 사들인 소금을 장강 중류 지역인 한구(호북성 무 한시)까지 운반하여 되파는 것만으로도 이미 50문-60문이 되었다고 하니 그 이윤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이미 청나라 초기에 양주의 염상이 이렇게 양회의 염해 지대에서 사들여 장사한 해염의 양은 매년 10 억 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였기 때문에 말할 필요도 없이 양주에 있는 염상 중에는 금은을 진흙과 모래처럼 하찮게 여기는 재산가가 많았다. 그들은 1천만 냥 이상의 재산을 가져야 비로소 부상이라 부르고 백만 냥 이하 인 자는 논의대상에서 제외하고 모두 통틀어 소상이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앞에서 거론한 추정자산 10만 냥인 금병매 주인공 서문경은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 는 청대 양주의 소상 순위에도 들지 못할 정도이다. 시대가 바뀌어 상업체계도 한차례 정비되었다는 점 을 고려한다해도 어차피 서문경은 상업체계의 말단에 매달려 있던 산동의 시골 부자에 불과했던 것이 다. 부유한 염상의 사치 규모는 엄청나게 커서 정말로 눈의 휘둥그레질 만하다. 의식주에 돈을 쏟아부어 맘껏 사치를 부렸는데, 양주의 어느 식도락가인 염상 등은 식사 때마다 데리고 다니는 고용 요리사에게 열 몇 가지 종류의 코스 요리를 준비시키고, 테이블에 한 코스씩 죽 늘어놓게 하고는 마음에 들지 않으 면 가볍게 머리를 흔든다. 그러면 즉시 그것이 거두어지고 다시 다음 코스가 죽 차려지는 식이었다고 한다. 한다. 서문경의 균형을 무시한 마구잡이식 향연과는 천양지차이다. 황제도 놀란 강춘의 접대 물질적 사치 면에서, 염상이 가진 부의 어마어마한 저력이 유력없이 발휘된 것은 뭐니뭐니 해도 황제 를 대접할 때였다. 양주의 염상이 번영의 극에 달한 것은 18세기 청조 제 4대 황제인 강희제(재위 1661년-1722년) 후기 부터 제 5대인 옹정제(재위 1722년-1735년)를 거쳐 제 6대 건륭제(재위 1736년-1796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다. 그 존재 형태로 보아 조정안의 염상이었기에 그 사이 부유한 염상은 조정에 막대한 세금을 납부한 것 이외에도 거의 매년 토목공사, 군비 등의 명목으로 몇 만 냥, 몇 십만 냥, 화려한 경우에는 몇 백만 냥 에 달하는 기부금을 조정에 헌납해왔다. 더욱이 빈번하게 수행된 황제의 남순(강남순유) 때에는 그 비용을 부담할 뿐 아니라 대대적으로 접대 하는 데 쓰일 호화로운 정원까지 건조하여 오로지 황제가 좋은 인상을 받도록 하는 데 집중되었던 것이 다. 그 중에서도 1753년 건륭제가 남순길에 올랐을 때 대염상 강춘이 했던 접댄는 전설적이었다. 이 때 강춘은 건륭제의 양주 체재비용 일체를 부담한 다음 아낌없이 재물을 써서 건륭제를 몹시 놀라게 만들 었다. 양주의 대흥원을 방문했을 때 건륭제는 어떤 장소에서 걸음 멈추고 측근을 돌아보며 "여기는 북경 의 남해의 경도춘음과 몹시 흡사한데 백탑(라마탑)이 빠져 있는 것이 애석하구나"하고 말했다. 이를 전 해들은 강춘은 즉시 황제의 측근에게 몰래 일만 냥의 뇌물을 주어 백탑의 설계도를 입수, 대규모의 인 부를 동원하여 벼락치기 공사를 강행, 하룻밤 사이에 백탑을 완성시켰다. 다음날 다시 대흥원을 찾은 건 륭제는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하고 만져보다 진짜인 것을 알고 더욱 놀라며 "염상의 재력은 과연 대단하구나"하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문화인'이 되고 싶다 그러나 황제도 깜짝 놀란 이와 같은 물질적인 사치보다도 양주의 염상이 진정으로 열중한 것은 정신 면에서의 사치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고금의 희귀본, 명화, 유서 있는 문물을 수집한 다음, 이러한 물건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문학자, 학자, 화가, 서가의 후원자가 되어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들 역시 시문을 짓고 서화를 하는 '문화인'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양주의 대염상은 문화적 후견인으로서 정말로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 이 중에서도 장서가로서 유명 한 사람은, 앞에서 든 강춘 및 양주의 이마라 칭해진 마일관, 마일로 형제이다. 특히 두 동의 서고에 가득 들어찬 마가의 장서는 1762년 당시 건륭제가 모아들였던 정도의 방대한 서 물을 수집, 총서 사고전서를 편찬했을 때 부름에 응하여 7백 76종의 희귀본을 헌상했을 만큼 대단한 것 이었다. 염상이 문화적 후원자인 까닭은 이러한 물량과 함께 뛰어난 장서를 사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까워하 지 않고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의 방대함이라는 기반하에서 려악(1692년 -1752년)이 마가의 장서를 이용하여 송시기사를 편찬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와 문인이 크게 은혜를 누렸던 것이다. 문화적 후원자로서의 염상은 또한 그들 솔하에 몸을 의탁한 지식인이나 예술가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뒷바라지 하였다. 예를 들면, 강춘은 풍취 있게 꾸민 원정(정원에 설치한 정자)인 추성관, 수월독서루, 강산초당에 많은 지식인이나 예술가를 장기적으로 묶게 하여 개중에는 명나라 말기 문학자 오위업의 순 자 오헌이라든지 서가 방정관처럼 20년 이상이나 체류한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교양이 높고 명사와의 교류가 넓은 점에서는 강춘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마일관 마일로 형제는 더욱 철저하였다. 일로와 친교가 있던 이름 높은 학자 전조망(1705년-1755년)이 때마침 소령낭산관에 머무르 던 중 고약한 질병에 걸리자 막대한 비용을 써 가며 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하였다. 이밖에 마형제가 결 혼해서 장례식까지 더할 나위 없이 그야말로 죽음까지 보살핀 학자와 문인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 다. 18세기의 양주에 출현하여 독특한 화풍으로 잘 알려진 일군의 화가 양주팔괴(김농, 정섭, 이선, 황신, 나빙, 이방응, 왕자신, 고상을 말한다)도 역시 염상과 깊은 연계가 있었다. 염상들 쪽은 그들에게 거금을 지불하고 그림을 그리게 하여 그 그림을 객실에 장식하거나 다른 이에게 선물함으로써 예술적 후견인으 로서의 만족과 긍지를 맛보았다. 화가들 쪽도 그것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다. 거기에는 주고 받는 관 계가 성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화가들은 염상이 명화를 구입할 때 가까를 사지 않도록 진위 를 감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일도 있을 법하다. 문화적 후원자의 헌신 그것은 접어 두고, 문화적 후원자로서의 양주 염상의 활동은 정말로 다기하여 연구 및 교육기관인 서 원개설을 위해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고 수많은 학자를 초빙하여 그들의 연구에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 다. 그 중에는 대진(1723년-1777년), 단옥제(1735년-1815년), 왕염손(1744년-1832년), 왕중(1745년-1794 년), 홍양길(1746년-1809년), 손성연(1753년-1818년) 등 청대 고증학의 내로라하는 대학자들 거의가 포함 되어 있어 청대 고증학은 염상들의 후원에 힘입어 동반자로서 하여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염상은 인쇄 사업의 물주가 되어 고금의 서적을 간행하기 위해 아낌없이 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양주는 예로부터 인쇄기술에 탁월한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이런 이유도 있 어 마씨 형제는 서적 간행에도 대단히 열심이었는데 이름 높은 고증학자인 주이존(1629년-1709년)을 위 해 그의 저서 경의고 간행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했는데 이런 이유로 그 책들은 마판서라고 칭해졌다. 또한 사원보(원보는 금은을 자물쇠 모양으로 주조한 옛날 화폐)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대염상 황씨 4 형제도 서적 간행에 조력을 아끼지 않아 송대에 편찬된 태평광기라든지 명대에 편찬된 삼재도회 같은 총서에서부터 당시 양주와 인연이 깊었던 오경재(1701년-1754년)가 쓴 백화장편소설 유림외사에 이르기 까지 그 간행자금을 부담했던 것이다. 더욱이 양주의 인쇄술이라고 하면 조금 시대는 거슬러 올라가지만 홍루몽의 작가 조설근의 조부 조인 (1658년-1712년)도 간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조인은 1704년 강녕직조(남경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견 직물 생산을 감독하는 강녕직조국의 장관)와 겸임으로 양회순염어서(양회의 염업을 감독하는 장관) 지위 에 올라 양주의 염상에게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1705년에 그는 강희제의 명을 받아 4만 8천 9백여 수의 당시를 담은 전당시, 음운별로 분류 한 대사서 패문운부를 편찬간행하는 총책임자가 된 것을 비롯하여 양주에서 잇달아 큰 서적을 편찬간행 하기에 이른다.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간행사업은 조인 자신의 자금제공에다 양주의 염상 이 빠짐없이 자금을 분담함으로써 비로소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상상을 초월하를 부를 소유한 청대의 염상은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서 정말로 다방면에 걸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염상의 재산 쓰는 양상은 물론 부의 규모야 다르지만 앞에서 이야 기한 금병매의 주인공 명나라 말기 상인 서문경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참으로 흥미 깊은 점이 있다. 정 원 하나만을 예로 들어 보아도 서문경은 자기집 정원에 만든 건물에 첩들을 살게 하고 육체적 향락에 빠진 나날을 보냈다. 게다가 첩들의 거처 이층은 창고가 되어 반금련의 주거 이층은 영업용 약재, 이병 아의 이층은 자신의 경영하는 전당포의 금고에 들어갈 수 없는 전당 잡힌 물건의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서문경의 묘하게 공리적인 면도 있는 쾌락의 정원에 비하면 거의 사설 도서관이나 사설 미술관이라 해도 좋을 만한 설비를 갖추고 많은 명사나 예술가를 머물게 한 청대 양주 염상의 지적 분 위기에 넘친 원정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물론 16세기 명나라 말기의 상인상을 허구라는 필터를 통해 극단화한 금병매의 세계와 18세기 청대 양주에 실재한 염상의 세계를 아무런 매개 없이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서문경이 고대의 황제 주와 비슷하다고 한다면 염상에게는 바로 육조귀족의 풍격이 있다. 상인의 사치도 이렇게 시대의 경과와 함께 한없이 세련되고 그 수준을 높여 스스로도 역시 사대부화하고 있었 다. 이에 비해 금병매의 주인공 명말 상인 서문경은 전통도 사대부 문화도 지체도 모른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자신만의 욕망 충족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체면 따위는 개의치 않는 서문경의 모습에는 틀림없이 유교 이데올로기에 꼼짝달싹 못하는 중 국의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들 수 있는 일종의 파괴적인 에너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무리 부가 문화를 침식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긴박감이 흐른다 해도 청대 염상이 상승지향에 따라 전통적인 체제 속에 스스로 얽혀 들어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 수준 높음을 무조 건 찬양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금병매의 벼락부자 상인 서문경과 양주의 염상 간에 현저하게 보여지는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금병 매가 명왕조의 지배력이 쇠잔하고 종래의 정치 및 사회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던 뜨거운 시대 16세기 명나라 말기의 산물임에 비해, 청대 염상의 최전성기가 18세기 이 민족 왕조인 청의 지배력이 안정강화 되고 정치 및 사회체제가 견고해진 차가운 시대에 해당되는 점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폐허가 된 염상의 꿈 그러나 그토록 호사스러움을 자랑한 양주 염상의 영화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8세기를 정점으로 하여 그 이후 쇠퇴의 외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해마도 조정에 납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부금이 서서히 염상의 경영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던 데다, 문화예술의 후원자로서 지나치게 재산을 소비하고 초호화판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양주 염상의 영화도 종막을 고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상이 최고로 번영한 18세기 양주의 상황을 상술한 양주화방록(이두 지음. 건륭 60년, 1795년에 완성되었다)이라는 수필이 있다. 이 양주화방록이 쓰여지고 나서 약 40년 후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한 것으로도 알려지는 이름 높은 학자 원원(1764년-1849년)은 이 글을 위해 발문을 붙여 다음과 같 이 기록하였다. 양주의 전성기는 건륭 4, 50(1775년-1785년)년이며 나는 어릴 때에 이 눈으로 보았다. 가경 8년(1803 년) 양주에 들러 옛 친구와 함께 평산에서 모임을 열었는데 그 후 점차로 쇠퇴하여 누대는 기울어 무너 지고 꽃이나 나무들은 말라 비틀어지게 되었다. 가경 24년(1819년) 양주에 들러 친구인 장기당과 함께 도춘교를 건넜을 때 시를 지어 옛날을 그리워 하였다. 최근 십 수년 동안에 황폐함은 도를 더하였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양주는 염업도시인데 원정을 지은 옛날의 염상들 대부분은 장사를 그만두고 빈궁 중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 서관에 머물던 가난한 지식인도 또한 그 대부분이 청빈에 시달리고 하급관리 하인 고용인 소상인들은 모두 먹고 살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두가 양주화방록을 쓴 것은 건륭 60년(1795년)의 일이고 당시 번영하던 정경이나 풍물을 남김 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양주화방록의 그림에 따라 원정을 찾아가 보니 그 7,8할은 황토가 되어버렸 다. 양주 염상의 공들여 풍취 있게 꾸민 원정이 무참한 폐허로 변한 모양을 기록하는 이 원원의 후기가 쓰여진 것은 도광 14년(1834년)의 일이었다. 염상의 영환느 이렇게 하여 물거품 같은 덧없는 꿈으로 사 라져간 것이다. 은나루 주왕, 진나라 시황제, 수나라 양제, 또한 육조의 귀족, 홍루몽의 대귀족 가가, 그리고 금병매의 서문경에서부터 청대 양주의 염상. 그들이 황제이건 귀족이건 상인이건 일반적으로 극도의 호사와 사치 라는 것은 멸망, 몰락, 파멸을 배후에 숨겼을 때에 최고조에 달하는 성싶다. 마치 꺼져 가는 불꽃의 최 후의 빛처럼. 그 정도로 파멸과 사치충동은 깊은 지점에서는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긴밀하게 연결된 것 이었다. 그러나 또한 이와 같이 결국에는 몸을 망치고 가정이나 나라를 파멸시킬 만큼 처절한 사치나 향락은, 양제의 개인적 쾌락을 위한 대운하가 남북교통의 요로가 되고 육조귀족의 거의 병적인 방탕이 왕희지나 고개지의 서화를 낳고 지위상승을 노리는 청대 염상의 후원 열풍이 많은 대학자나 대화가를 사회에 배 출했듯이 후세에 귀중한 선물을 남기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도를 넘은 탕진의 사정거리는 근검절약을 제일로 삼는 빈핍한 공리주의가 발밑에도 못미칠 정도로 훨 씬 길었다는 것이다. 제 4장 사치향락의 블랙홀 무뢰배 출신의 위충현은 문맹이었는데 이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 였다. 그래서 짬만 나면 자기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관리의 이름을 뇌리 속에서 되살려내어 증오심 을 불태우고 가장 효과적인 보복 수단을 생각하고는 즐거워했다. 설사 그 대상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인 물이라고 해도 일단 기억의 밑바닥에서 되살아 나오면 위충현은 그들의 자손에게 철저하게 복수하고 파 산으로 내몰아갔다. 1. 환관의 저주받은 사치 스스로 거세하는 사람들 환관이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거세함으로써 남성 기능을 상실한 지극히 인공적인 존재이다. 중국 역사상 환관의 탄생은 3천 년 전인 은나라 왕조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이후 20세기 초의 청나라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환관은 면면히 존속해오고 있었다. 당초 환관의 시초는 정복한 이민족 포로나 죄수를 거세하여 궁정 내부에서 사역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시대가 바뀌어 그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자궁(스스로 거세하는 것)'하여 환관이 되기를 자처하 나는 자가 증가하였다. 남성 기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후궁의 거처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용된 환관은 황제의 혼란스러 운 사생활의 공범자가 되어 어느덧 황제를 음으로 조종하는 어두운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왕조가 아 무리 교체되어도 절대권력자로서의 황제가 존재하고 후궁이 있는 한 어두운 권력자 환관도 역시 계속 존재한다는 구조이다. 저 절대무비의 권력을 구가한 시황제의 진나라에서조차 시황제가 죽자 곧바로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 던 환관 조고가 주도권을 장악하여 그 멸망을 재촉했다. 이러한 예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환관 의 어두운 권력이 한도를 넘어 팽창하는 것은 어김없이 왕조가 막판으로 기울어 최후의 불꽃을 피울 때 이다. 중국 역사상 환관의 해독이 가장 극심했던 것은 후한(25년-220년), 당(618년-907년), 명(1368년-1644 년) 시대였다. 이 왕조들은 어느 쪽이나 환관의 전횡에 의하여 정치기구를 갈기갈기 찢긴 끝에 멸망의 외길을 걸었다. 무덤 만드는 취미 후한은 시종일관 외척과 환관의 헤게모니 싸움에 농락당한 왕조였다. 환관의 우위가 결정적이게 된 것은 후한 제 11대 황제 환제(재위 146년-167년) 때이다. 환제는 맹위를 떨치는 외척 양기 일족을 일소하기 위해 단초, 좌관, 서황, 구원, 당형 등 다섯 환관의 힘을 빌었다. 이 다섯 환관은 비밀리에 일을 꾸며 근위군단을 움직여 일사천리로 양가 일족을 일망타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제는 천하가 그들의 것이었다. 단초 등 다섯 명의 환관은 그 공적에 의해 제후에 봉해지고 오후라고 불렸다. 일족 가신을 수입이 좋은 지방관리직에 앉혀 권세를 휘둘러 뇌물도 잡히는 데로 받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하여 제 욕심을 채운 끝에 다투어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기르는 개나 지 니고 있는 말까지 금은이나 새털로 장식하여 사치 삼매경에 빠졌던 것이다. 환제 시대에는 이 다섯 명 이외에도 후람이라는 환관도 또한 권세를 휘둘렀다. 그 수법은 다른 사람 의 주택 3백 81채, 전답 1백 18경(약 5백 41헥타르)을 빼앗은 다음 궁전에 버금가는 호화장대한 대저택 을 짓는 등 참으로 악랄한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후람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당당한 규모를 가진 분묘를 건조하였다. 환관은 유산을 남길 만한 자손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온갖 재산을 동원하여 장지와 분묘를 꾸미는 데 열중하였다. 후람은 그 악행의 응보로 결국 탄핵받아 자살했는데 그것도 빙산의 일각이고 환관집단의 발호는 점점 극심해질 뿐이었다. 167년 환제가 죽자 후손을 두지 못한 두 황후는 아버지 두무와 상의 하여 일족 중에서 12세인 유굉을 골라 제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바로 영제(재위 168년-189년)이다. 여기에서 또한 후한왕조 항례인 외 척과 환관의 사투가 재연되게 된다. 이때 외척 보무는 환관의 전횡에 반발하는 저항파(청류파) 지식인과 동맹을 맺고 환관세력을 섬멸하 려고 했다. 그러나 이 환관 섬멸작전은 주도면밀하게 펼쳐져 있던 환관의 정보망에 걸려 사전에 발각되 어 수포로 돌아가고 보무는 쫓겨다니다가 자살하고 만다. 이 쿠데타 미수사건으로 위기감을 느낀 환관집단은 비판세력을 철저하게 봉쇄하기 위해 169년 환제가 살아있을 때의 제 1차 '당고의 금'을 몇 배 상회하는 규모의 제 2차 '당고의 금'을 발동, 저항파 지식인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여 처형했던 것이다. 뇌물이 생명 이리하여 환관의 세력은 날로 강성해졌는데, 최고권력자인 영제는 즉위하자마자 선대 황제인 환제가 남긴 재산이 너무나 적은 데 실망하고, 즉시 궁궐 문에 표찰을 내걸어 관직을 팔게 하는 등 대대적인 매관매직 사업을 수행하여 열심히 축재에 매달렸다. 물론 놀기도 좋아했는데, 이 유희 방식도 특색이 있었다. 모의 점포를 죽 만들어 후궁에게 늘어서게 하고 궁녀들을 장사치로 세운 다음 자신도 상인으로 분장하여 놀았다고 하니 애당초 어지간히 장사가 좋았던 모양이다. 영제와 환관은 이념 없는 욕망의 충족, 쉽게 말하면 돈과 권력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비슷 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당시 세력을 가졌던 환관은 조충, 장양, 하운, 단규, 송전 등 '십상시'라고 불리우 는 자들이었다. 영제는 그들을 친애하여 평상시에 "장상시(장양)은 나의 아버지, 조상시(조충)는 나의 어 머니이다"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이런 형편이므로 십상시는 더욱더 기세등등해져 모두다 궁전 버금가는 대저택을 갖추었으며 그 사치 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었다. 한번은 영제가 궁중의 망루에 오르고 싶다고 하자, 당당하게 우뚝 솟은 자신들의 호화저택을 보는 것 이 두려워진 환관은 "천자는 높은 곳에 올라서는 아니되옵니다"라고 구슬렸다고 한다. 그들 환관의 주된 재원은 말할 필요도 없이 뇌물이었다. 그런데 이 환관의 뇌물을 둘러싸고 희비극도 펼쳐졌다. 맹타라는 재산가가 벼슬길에 입문하고 싶어 십상시의 한 사람인 장양에게 환심을 사려고 연 줄을 찾아 장양의 노비들에게 오랜 기간 동안 거액의 뇌물을 주었다. 그러나 맹타는 뜻을 이루지 못하 고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미안하게 생각한 노비들이 뭔가 은혜를 갚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맹타는 "너희들은 머리 숙여 절 만 하라"고 말했다. 당시 장양의 집 앞은 언제나 면회를 청하는 자들의 수레가 몇백 대나 줄을 지어 기 다리고 있고 며칠을 매달려도 면회를 못하는 자까지 있었다. 어느 날 맹타의 수레가 마지막으로 다가오자 장양의 노비들이 일제히 맹타에게 절을 하고 다른 수레 를 제치고 즉시 맹타의 수레를 선도하여 한 대만 안으로 불러 들였다. 이 모양을 지켜본 수많은 면회자 들은 깜짝 놀라 맹타가 장양과 특별히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다투어 맹타에게 진귀한 물품들을 바치 게 되었다. 맹타는 이 모든 것을 장양에게 바치니 크게 기뻐한 장양은 맹타를 양주 장관에 임명한 것이 다. 막다른 곳에 몰린 맹타의 작전이 승리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환관의 세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덧붙이자면 이 맹타의 아들이 삼국 시대 촉나라 장군을 지내면 서 배반하고 위나라에 항복하고 최후에는 또한 위나라를 등지고 촉나라로 돌아간 저 변신에 능한 맹달 이다. 술수에 능한 것은 아무래도 혈통인 모양이다. 수염 없는 자는 모두 죽여라 환관정치에 의한 부패가 이렇게까지 뇌물, 뇌물하고 진행되었다고 하면 말할 필요도 없이 후한왕조에 는 이미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184년 황건의 난이 발발하여 후한왕조는 커다란 상혼을 입었다. 마 침내 189년 환관과 결탁하여 매관매직을 일삼던 영제가 사망하고 하후의 소생인 소제가 즉위하였다. 하후의 오라비인 하진은 후한의 외척들이 했던 그대로 환관집단의 섬멸을 도모하였지만, 이 쿠데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선수를 빼앗겨 역시 반대로 환관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번만은 환관이 생각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하진의 쿠데타 계획에 가담한 사예교위 원소 등이 하진이 살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군사를 이끌고 궁중으로 쳐들어가 환관을 모두 살 해해 버린 것이다. 원소 등의 환관 주살은 너무나 철저하게 실행되었다. 수염이 없었기 때문에(환관은 수염이 나지 않는 다) 환관으로 몰려 살해당한 자도 있었고, 쫓겨다니다가 알몸이 되어 환관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이고서 야 겨우 살아난 자까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죽임을 당한 환관은 2천명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후한왕조의 고질병이었던 환관은 간신히 섬멸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환관의 멸망과 동시 에 후한왕조 그 자체도 역시 이 시점에서 실질적으로 멸망하고 만다. 성 불능자인 환관은 왕조가 썩기 시작했을 때 우둔한 황제에 기생한 부패균처럼 음습하게 번식하여 그 멸망의 가속도를 붙인 존재이다. 후한뿐만 아니라 고래로 환관이 망한 때와 왕조가 망한 때가 기묘 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마도 이때문일 것이다. 고역사가 있기에 안심하고 잘 수 있다 당나라 또한 환관이 맹위를 떨친 시대였다. 이 왕조에서 환관 전횡의 계기를 만든 것은 양 귀비와의 비련으로 유명한 제 6대 황제 현종(재위 712년-756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환관 고역사(684년-762년) 였다. 고역사라고 하면, 궁중의 연회에 불려온 대시인 이백(701년-762년)이 취기를 빌어 이 권세 높은 대환관을 일부러 욕보이려고 그 면전에서 갑자기 발을 내뻗어 자기의 신발을 벗기라고 강요하여 현종의 노여움을 사 추방령을 당한 에피소드로 유명한 바로 그 인물이다. 이백의 이 '통쾌한 에피소드'에서는 고역사가 단지 희롱당한 악역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실 고역사의 현실 정치에서의 역할에는 상당히 복잡한 면이 있었다. 고역사는 원래 영남(광동성) 출신이며 698년경 영남의 소수민족 반란을 진압한 당나라 왕조의 장군에 의하여 측천무후(재위 690년-705년) 밑으로 보내진 것이 그 궁정생활의 출발이었다.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역사는 궁정에 들어오기 전 소년 시절에 이미 거세되었던 듯하다. 여걸 측천무후가 죽고 난 뒤 당나라 왕조는 극심한 권력투쟁에 휩싸였다.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해 퇴 위당했던 무후의 셋째 아들 중종이 복위했지만 710년,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아내 위후에게 독살당한다. 이 때 역시 측천무후에 의해 퇴위당한 경험이 있는 중종의 동생 예종의 셋째 아들로 총명한 이융기, 후 에 현종이 되는 그가 고모인 태평공주(무후의 딸)와 결탁하여 위후 일파를 주살하고 부친 예종을 복위 시켰다. 머지 않아 이융기는 또한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태평공주를 죽이고 부친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 아 즉위하기에 이른다. 측천무후는 잔인하고 비정하기는 했지만 반면에 정치감각은 탁월한 위대한 여제였다. 그런데 며느리 인 위후나 딸인 태평공주는 무능한 데도 불구하고 권력욕이 강하여 측천무후도 흉내내기 어려울 만한 존재였다. 현종은 이 성가신 존재를 제거하고 기울었던 당 왕조의 기둥뿌리를 바로 세웠던 것이다. 총명한 고역사는 이 피투성이의 권력투쟁 동안 시종일관 현종에 현력하여 분골쇄신 궁정 공작에 몰두 하여 현종 황제 탄생의 최대 공로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현종도 고역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각 지에서 조정에 도착하는 상소문도 우선 고역사가 훑어 보고 하찮은 것은 단독으로 처리하고 중요한 것 만 현종의 결재를 받는 형국이었다. 고역사는 실질적으로 재상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현종은 평소에 "고역사가 수반이 되어 일을 처리해 오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잘 수 있다"고 하여 그의 유능함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고 전 해진다. 재산을 쓰면 자산이 늘어난다? 이토록 신임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역사가 출세를 노리는 야심가들의 절호의 표적이 된 것은 말할 필 요도 없다. 현조이 만년에 양 귀비를 총애하여 향락에 빠지면서 정치에 소홀하게 되자 눈에 띄게 세력 을 확대한 양국충이나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 등도 처음에는 고역사에게 아첨하여 발판을 마련한 패거리 였다. 고역사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예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고역사는 여현오라는 말단 관리의 미모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환관이 아내를 갖는다는 것도 묘한 이야기이지만 후한 이래 환 관이 아내를 갖는 것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던 일이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이 덕택에 여부인의 아버지 여현오가 일약 자사(주의 장관)로 발탁된 것을 비롯 하여 그 일족은 빠짐없이 고위관직을 얻었다. 또한 여부인이 사망한 때 장례식의 화려함으로 말하면 전 대미문으로 조정 안팎을 막론하고 고관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참례하니 그 수레와 말의 행렬이 고역사 집 뜨락에서부터 묘지까지 이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고역사의 재산은 왕후를 능가할 정도였고, 호화찬란한 보수불사라는 불교사원 및 화봉도사관이 라는 도교 사원을 자력으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재산을 펑펑 써도 그의 자산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더욱더 늘어나는 구조가 되어 있 었다. 예를 들면 보수사에 커다란 종을 설치하자 그 종을 개종하는 것을 축하하러 수많은 고관이 몰려 들어 평상시에는 한 번 치고 축의금 10만 전을 내던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는데 스무 번이나 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 지지 않으려고 계속 종을 울려 적게 친 사람도 열번을 쳤다고 한다. 거액의 축의금 이 이렇게 하여 고역사의 품으로 굴러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대규모 제분 공장을 경영하여 여기서 도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권력의 역전 40여 년에 걸친 현종의 재위기간 중에 고역사에 대한 현종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져 사그라질 줄 몰랐 다. 그것은 고역사가 부귀영화의 극을 누리면서 어디까지나 현종에 대해서는 충실함을 다하고 한도를 넘어서 결코 주제넘는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고역사는 영악한 사내였던 것이 다. 그러나 현종과 고역사의 이인삼각은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755년, 만년의 실정이 꼬투리가 되어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자 현종은 수도 장안을 탈출, 도피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마외(섬서성 흥편현의 서쪽)에 왔을 때 성난 호위병사들 강요에 못이겨 양 귀비를 죽이는 등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촉나라의 성도까지 도망쳤다. 이때 고역사는 성도까지 수행하고 이듬해인 756년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뒤 이미 퇴위하여 상황제가 된 현종과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다. 정국을 주물렀던 악랄한 양 귀비의 사촌 오라비 양국충도 역시 마 외에서 성난 병사의 손에 걸려 죽임을 당한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관 고역사가 아무 탈 없이 돌 아온 것은 병사의 격분을 살 만한 행실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을 역으로 증명하다 할 것이다. 현종의 그림자로 살아온 고역사도 결국은 현종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769년 숙종(현종의 3 남. 756년 현종에 이어 즉위하였다)의 환관으로서 세력을 키운 이보국의 조종으로 검중(귀주성)에 유배 된 것이다. 763년 숙종이 죽은 후 고역사는 겨우 사면되었다. 그는 장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야 비로소 자신이 유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이 사망했음을 알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 의 나이 79세였다. 대체로 고역사에게는 같은 환관이라고 해도 후한의 '십상시'와 같은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음습한 면 은 없었다. 물론 현종도 만년에는 실정을 저질렀지만 원래 영명한 군주이고 애당초 후한의 영제와는 비 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들은 당나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화려한 시기에 살았기에, 그 관계성 측면에서도 단순히 황제와 그 욕망의 장치로서의 환관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종의 만년에 들어서 당나라 왕조는 최고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이후 대를 거듭할수록 활력을 잃고 부패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양길에 접어든 당왕조에서, 현종이 충실한 환 관 고역사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던 것이 방아쇠가 되어 환관의 세력은 극단적으로 강화되니 황제 를 폐위하는 것도 그 뜻대로 하는 역전현상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화려한 환관 고역사 의 존재는 역시 당왕조 멸망에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 내각 원나라 말기 혼란을 수습하고 명 왕조를 설립하여 황제 독재체제를 확립한 주원장(재위 1368년-1398 년)은 역대 왕조가 환관들로 인해 약체화한 것을 거울 삼아 환관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환관을 경계한 주원장조차 환관을 완전히 배척한 것이 아니라 몇백 명은 남겼을 정도 로 황제에게 환관은 필요악 같은 존재였다. 이런 형국이니 주원장의 유훈은 흐지부지 공문화되고 만다. 주원장 사후에 2대 황제가 된 조카 건문 제(재위 1398년-1402년)를 멸망시키고 3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영락제(재위 1402년-1424년)는 찬탈자라 는 열등감으로 인해 관료를 신뢰하지 않고 환관을 중용하였다. 직접적으로는 이것이 명 왕조의 고질병 이라고 할 만한 환관 전횡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환관의 세력은 날로 강력해지기만 할 뿐이다. 제 5대 선덕제(재위 1425 년-1435년) 때에는 '사례감'이라는 환관내각제도가 정비되어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그 이후 점차로 절대 권력자인 황제와 밀착한 환관에 의한 그림자 내각 쪽이 고급관료로 구성된 표면의 내각보다 우세한 힘 으로 정국을 좌우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이 그림자 내각은 '동창'이라 불리우는 정보기관을 관할하여 전국적으로 스파이망을 둘러쳐 놓 았다. 환관의 정사에 대한 개입이 제도화된 데다가 정보기관까지 장악했을 정도라면 그 뒷일은 불을 보 는 뻔한 것이다. 제 6대 황제 정통제(재위 1435년-1449년) 시대의 환관 왕진, 제 11대 황제 정덕제(재위 1505년-1521 년) 시대의 환관 유근 등은 이러한 제도를 악용하여 지식인 관료를 탄압, 배제하여 독살스러운 대성공을 거두었다. 검은 부부의 음모 모든 왕조가 그렇듯 말기에 가까워짐에 따라 으레 나이 어린 황제가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멸망의 장막을 치는 역할처럼 어린 황제를 결딴내 못쓰게 만들고 국가 기반을 뒤엎는 환관의 존재가 크게 두각 을 나타내게 된다.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멸망을 앞둔 제 16대 황제인 천계제(재위 1620년-1627년)가 바로 이 경우 에 해당된다. 이 시기 명 왕조에서도 파렴치한 악랄성 앞에서는 저 왕진이나 유근도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악의 화신이 출현한다. 바로 위충현(1568년-1627년)이다. 위충현은 젊었을 때 방탕무뢰하였는데 수시로 도박에 져 놀림감이 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충동 적으로 거세하고 환관의 길을 걷기로 작심하였다. 만력 연간(1573년-1620년)에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가 마침내 황제의 장손인 주유교, 즉 뒷날 천계제의 생모인 왕부인 전선(식사를 주관한느 직책)이 되었다. 성불능자인 환관은 성적 결함의 대체행위로서 식 도락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특기를 살려 궁중 요리를 담당하는 환관들이 꽤 있었다. 게다가 신분이 높은 환관은 요리 솜씨가 뛰어난 환관을 요리사로 고용하고, 쌀은 물론 기름, 설탕, 간 장, 식초 등 조미료를 음미하여 풍성한 식생활을 즐기며, 그렇게 단련된 미각으로 교대로 황제용 요리를 담당했다고도 전해진다. 미래 황제의 식사를 담당하게 된 위충현은 이때부터 상관인 환관 위조를 통하여 환관내각의 일원인 왕안에게 아첨하는 등 맹렬하게 출세공작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위충현이 두각을 나타냈을 때, 반세기 가까이 제위에 앉아 있던 만력제가 서거, 1620년에 장남인 광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 지 이 새 황제는 미약을 너무 많이 복용하여 1개월 만에 갑자기 죽고 만다. 이리하여 제위는 아직 16세 인 광종의 장남 천계제가 물려받게 된 것이다. 위충현이 세력을 확대하는 데 둘도 없는 동반자가 된 것은 이 천계제의 유모인 객씨이다. 객씨는 엄 청난 음모가였는데, 나이 어린 천제는 즉위하자마자 그녀에게 봉성부인이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할 만큼 집착하였다. 음탕한 객씨는 처음에는 위충현의 상관 위조나 부부나 다름없었는데 얼마 안 있어 위충현 과 깊은 관계에 빠져 위조에게 등을 돌렸다. 이 객씨를 둘러싼 삼각관계로 인해 위조와 위충현이 대립하게 되어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 르자, 천계제의 즉위와 동시에 환관내각에 수장이 된 왕안이 중재에 나서 위조를 달래 몸을 빼게 하고 가까스로 소동을 가라앉혔다. 이리하여 악녀 객씨와 악인 위충현은 꺼릴 자 아무도 없이 정식 '대식'(환 관과 궁중여자 관리 쌍)이 되고 한몸이 되어 권력에 대한 전면 착취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이 검은 부부가 최초로 착수한 일은 리더 환관 왕안을 쫓아낸 것이었다. 환관이라 해도 왕안은 강직 한 성격으로 교양 수준도 높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객씨와 위충현의 은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위충현 은, 이 배은망덕한 행위를 주저하였으나 객씨에게 질타를 당하고 마침내 왕안을 잡아들여 살해하였다. 사대부 콤플렉스 이리하여 두려운 사람이 없어진 위충현은 환관 내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정보기관 동창을 자신의 지배아래 두어 전대미문의 공포정치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16세기 초두, 만력 연간 중반기 이래 환관파(환관 및 이에 영합하는 관료)에 반대하는 지식인층인 '동 림당'이 대두하여 이 양파는 격렬한 주도권 다툼을 반복해왔다. 위충현은 배후의 내각에서 실권을 장악 하자 동림당 대탄압에 나서 일거에 주요한 멤버들을 투옥, 학살하였다. 더욱이 주목할 일은, 삼조요전 이라는 동림당 범죄사를 날조하도록 하여 악선전을 퍼뜨림으로써 그 숨통을 뿌리째 끊어 버리려고 했던 점이다. 무뢰배 출신의 위충현은 문맹이었는데 이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였 다. 그래서 짬만 나면 자기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관리의 이름을 뇌리 속에서 되살려내어 증오심을 불태우고 가장 효과적인 보복 수단을 생각하고는 즐거워했다. 설사 그 대상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이 라고 해도 일단 기억의 밑바닥에서 되살아 나오면 위충현은 그들의 자손에게 철저하게 복수하고 파산으 로 내몰아갔다. 이 악마적인 기억력을 십분 살려 위충현은 또한 순식간에 동림당을 일소하고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 까지 값진 비중 있는 관직을 모두 자신의 입김이 먹혀드는 자로 독점해 버린다. 생각해 보면 청류파 지식인을 탄압한 후한의 환관도 그러하였지만, 대개 음의 존재인 환관은 양의 존 재인 선비에 대하여 철저한 보복을 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위충현의 동림당 탄압은 가장 극단적인 경우 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림당을 매장시킨 위충현은 나아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펼쳐져 있던 동창 의 정보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관료는 물론이고 서민조차 떠도는 소문 속에서 조금이라도 위충현 을 비판하면 첩자에게 붙잡혀 손이 뒤로 묶이고 가혹한 형벌에 처해지는데 몸의 가죽을 벗겨내거나 혀 를 뽑아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도읍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요양(요녕성)의 사창가에서 어떤 사내가 무심코 비판적인 말을 했다가 즉 각 동창에 체포되었다는 예를 보아도 그 첩보망의 위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조직화라는 점에서 는, 위충현은 두려워할 만한 재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신이 된 환관 천계제는, 그러한 위충현 마음대로 정치기관이 갈갈이 찢겨져 수습이 불가능한 대혼란 상태에 빠져도 전혀 관여할 수 없었다. 유모 객씨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이 황제는 만사에 대하여 유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목공에 빠져 들었다. 일단 목공을 설계하기 시작하면 그 일에 열중하느라 그밖의 일에 는 완전히 무관심해져버렸다. 위충현은 항상 교묘하게 이 틈을 보아 임금에게 일을 아뢰었다. 그러면 황제는 귀찮다는 듯이 "알아서 하시오 좋도록 하시오"라며 제대로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렇듯 황제가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태평스럽게 '아이들 장난'에 빠져 있을 동안에 위충현은 안팎의 대권을 한 손에 장악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3천 명의 환관 군단을 조직하여 궁중에서 군사훈련을 실시, 위력을 과시하였다. 더구나 자신도 항상 완전무장하고 궁중에서 말을 타고 다녔는데 심지어는 황제의 면전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멀리 외출할 때의 그 위풍당당하고 화려한 행렬은 황제와 견줄 정도이고, 그가 통과하는 곳에서 는 관리들이 두 손을 땅에 짚고 머리를 숙여 절하고 제각기 '9천세'라고 환호하였다. 황제에게는 '만세'라 하기 때문에 천세만 줄인 것이다. 위충현에 대한 환호는 결국 '9천9백세'까지 격상되었다. 위충현에 대한 아첨은 그 끝이 없어 심지어는 살아있는 그를 모시는 '생사'를 세우는 풍조가 전국 각 지에 퍼졌다. 아첨하는 사람들은 위충현의 그림과 조각앞에서 '9천9백세'라고 환호했던 것이다. 고작 문맹의 한 환관이 황제 독재제도의 맹점을 틈타 이토록 맹위를 떨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한통속인 객씨는 물론 이러한 '지아비' 위충현의 눈부신 진출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녀는 천계제의 총 애가 다른 데로 옮아가는 것을 경계하여 황후에서부터 후궁 여성들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아이를 임신하 기만 하면 잇달아 연금시키거나 살해하여 그 싹을 도려냈다. 그래서 천계제는 결국 후손을 두지 못했던 것이다. 참으로 음험하고 끔찍한 책사였다. 이처럼 권세를 떨쳤기 때문에 위충현과 객씨의 생활이 황제를 웃돌 정도로 호사스러웠을 것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에게 궁중은 자기집과 매한가지였다. 과거 서원의 연못에서 뱃놀이를 했을 때 위충현과 객씨가 호화로운 큰 배에 타고 느긋하게 연회를 연 것에 비해 천계제는 두 명의 젊은 환관을 대동했을 뿐이고 조심스럽게 작은 배에서 놀고 있었다. 돌풍 이 불자 위충현의 큰 배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나룻배 같은 황제의 작은 배는 맥없이 뒤집어져 환관 은 두 명 모두 익사하고 황제도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엔트로피 흡수장치 그러나 환관은 환관, 어차피 황제에게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위충현 부부가 자가약농지물(자기 집 약 상자 속에 든 약처럼 아무 때나 필요하면 유효하게 쓸 수 있는 사물이란 비유)처럼 여기고 있던 천계제가 1627년에 사망하고 그 아우인 숭정제(재위 1627년-1644년)가 즉위하자 위충현은 유형에 처해 져 자살하고 객씨도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봉살형에 처해졌다.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결국 7년 남짓이었다. 그러나 이 악의 화신인 환관이 지배했던 광기의 시간은 이미 피폐의 도를 넘은 명 왕조를 순식간에 붕괴의 늪으로 끌고 갔다. 숭정제는 결코 무능한 황제는 아니었으나 이 붕괴를 향해 치닫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만주족 청이 노도처럼 남하하기 시작하고 풍운이 급박함을 고하는 가운데 한 발 일찍 유민 반란군 유적의 선봉 장 이자성이 수도 북경을 제압했을 때 숭정제는 막다른 궁지에 몰려 자살하였으니, 명 왕조가 멸망하는 순간이었다. 명나라 멸망 직전에 자금성에 있던 환관의 총 인원은 일설에 따르면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명의 시조 홍무제 당시 수백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약 2백 배가 된다. 위충현의 권력 착취에 의해 환관은 비약적으로 불어났다. 절제하지 못하는 욕망에 비례하여 무한증식하는 존재인 환관들이 수백 겹으로 황 제를 에워싸게 되었다. 요약하면, 거세에 의해 남성적 기능을 상실한 환관이라는 존재는 그 회복불능의 근원적 결함을 가지 고 스스로 바닥을 알 수 없는 블랙홀로 전화하여 최고권력자인 황제의 엔트로피를 흡수하는 장치가 된 것이다. 왕조가 피폐했을 때, 후한의 환관이나 위충현의 경우에서 두드러지듯이, 이 블랙홀 장치로부터 대대로 누적된 불순한 에너지를 응축시킨 존재가 돌출하여 본체인 왕조 자체를 사멸에 이르도록 내몬 것이다. 이러한 환관의 저주받은 사치는, 바로 과잉에너지의 폭발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이 특유의 음침함과 교활함으로 채색되어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2. 피의 쾌락 희대의 살인귀 장헌충 명나라 말기의 유적 장헌충(1606년-1646년)은 다른 이인, 기인 명단에서 뺄 수 없는 중국 역사상에서 도 극히 드문 희대의 살인귀로서 흉흉한 전설에 둘러싸인 인물이다. 18세기 후반에 쓰여진 야사 촉벽(팽준사 지음)은 그러한 장헌충 살인귀 전설을 극단화한 것이다. 그러 면 장헌충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우선 그 역사적 맥락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환관 위충현의 발호에 따라 명 왕조는 회복불능의 타격을 받았다. 명나라 최후에 황제가 된 숭정제는 즉위하자마자 혼란의 원흉 위충현을 멸하였는데, 때는 이미 늦어 사회는 점점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갔다. 숭정 연간(1628년-1644년) 초기, 극빈지역인 섬서성의 농민 항쟁을 시발점으로 마침내 중국 전역을 반란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유적이라고 총칭되는 이들 반란군은 처음에는 수많은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서서히 한쪽은 이 자성(1606년-1645년)을, 한쪽은 장헌충을 리더로 하는 두 개의 커다란 그룹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이자 성과 장헌충은 둘 다 유적의 본거지 섬서 출신이며, 일찍부터 반란군에 가담하여 급속도로 두각을 나타 낸 인물이다. 장헌충은 큰 키에 여위 몸, 얼굴은 약간 황색을 띠었으며, 성격은 기민용맹하고 과단성이 있는데다가 협기가 넘쳐 당초 반란군들 사이에서 황호라고 불렸다고 한다. 장헌충이 이자성과 헤어지는 계기가 된 것은 1635년(숭정 8년) 영양(하남성 정주시)에서 반란군 72영 (부대)의 수뇌들이 모여 대회를 열었을 때 작전계획을 둘러싸고 가장 나이 많은 리더 고영상의 부대 이 자성과 대립, 패배한 일이었다. 이후 장헌충은 차츰 고영상 이자성 그룹과 별도의 행동을 취하게 되며, 마침내 자기 군대를 이끌고 남하, 호북성으로 들어갔다. 고영상은 대회 이듬 해에 죽어 이자성이 그 세력을 이어받게 되었고, 이러 써 반란군의 양국분화 형세가 확정되었다. 호북에 들어간 장헌충은 토착 농민 반란부대를 흡수, 세력을 확대하여 호북성에서부터 안휘성 일대에 걸쳐 명나라 군대와 전투가 거듭하였다. 이 사이 명나라 군대에 격파당해 궁지에 몰려 1638년(숭정 11 년) 위장항복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도 장헌충은 뱅부상서 웅문찬에게 금괴 1천 개, 한 말들이 용기에 가득 넘칠 만큼의 진 주 등의 금은보석을 뇌물로 갖다바치며 세력을 보존하였고, 이듬해에는 신속하게 태세를 정비하여 다시 한번 반기를 들고 공세로 돌아섰다. 정부군의 총책임자인 국방대신이 유적으로부터 아무 거리낌도 없이 뇌물을 받을 정도로 명나라의 정 치기구는 철저히 부패해 있었다. 어찌 되었던 장헌충은 거듭 사천성에서부터 호북 안휘성을 양다리에 걸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싸 워 1643년(숭정 16년)에는 호북의 군사거점인 무창을 탈취, 대서왕이라고 자칭하기에 이른다. 큰 뜻은 사라지고 살인광이 되다 이 시점까지 장헌충은 명말청초의 문학자 오위업(1609년-1672년)이, "맨 처음 장헌충이 무창에 근거했 을 때에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에 지배하에 두었던 도시에 대하여 그렇게까지 참살은 하지 않았다."(오 위업저 수관기략 제 10권 염정뢰)고 말하고 있듯이 반권력 무장집단의 지도자다운 면모를 남기고 있으 며, 잔혹한 살인벽은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 장헌충이 살인마 기질을 폭발시킨 것은 젊은 명나라 장군 좌량옥의 공격을 피해 1644년(숭정 17년)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촉나라 땅, 즉 사천성으로 들아가서부터의 일이다. 그해 6월, 장헌충은 중경을 함락시키고 이어 8월에는 성도를 함락시켜 촉 나라 땅 전역을 제압, 황제 를 자칭하였다. 한편 이자성은 같은 해 3월, 수도 북경을 제압, 명 왕조를 멸망시켰는데, 2개월 뒤인 5월 에는 다음 시대의 진짜 주역인 만주족 청의 공격을 받아 북경에서 쫓겨났다. 요컨대 장헌충의 촉 입성 은 이러한 중심부의 정권교체극이 매듭지어진 뒤 감행된 것에 다름 아니고, 그 상상을 초월하는 살인벽 이 폭발한 것도 바로 이 시점부터였다. 이 점에 대하여 장헌충을 자주 언급하는 노신은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촉벽과 같은 종류의 책은 장헌충의 살인 사실을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매우 산만하기도 한데,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살인을 위한 살인'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맨처음에는 결코 그렇게 살인은 하지 않았다. 물론 황 제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이자성이 북경으로 진격하고 이어 청군이 산해관으로부터 침입해 와 자신에게는 몰락의 길밖에 남겨져 있지 않게 되고부터 살인, 살인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천하에 이제 자신 의 것은 없고, 지금은 타인의 것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이것은 말대의 풍아한 황제가 죽기 전 에 선조나 자기가 수집한 서적, 골동품, 보물 종류를 소각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심리이다. 그에게는 군대는 있었지만 골동품 같은 것은 없었다. - 준풍월담 수록 신량만기 역시 노신다운, 그야말로 탁월한 견해이다. 그 말대로 장헌충 자신이 점차 형세가 불리하게 되자 "사 천의 인간은 아직 절멸하지 않았도다. 손에 넣었으니 내가 이를 멸한다. 한 사람이라도 남에게는 넘겨주 지 않겠노라"(촉벽 제 3권)고 선언했다. 가공할 말한 '몰살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출세의 기준은 살인 횟수 이런 이상심리를 축으로 하여 촉 땅으로 들어간 장헌충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살인, 살인'을 철저 하게 실천했다. 장헌충의 난으로부터 약 1백 년 후에 쓰여진 촉벽은 과장된 표현이 많고(이 책에 기록된 사망자 수는 당시 촉나라 땅의 인구를 훨씬 뛰어넘는 식으로), 사실 그 자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 여지는 '장헌충 살인귀 전설'만큼 목적을 상실하고 파괴만을 일삼는 과잉 욕망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 낸 예는 드물다. '욕망의 블랙홀'이란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 촉벽을 기초로 장헌충 살인귀 전설을 더 듬어 보기로 하자. 촉 땅 주민을 모두 죽이기로 결심한 장헌충은 수하의 부장이나 병사를 사방으로 파견하여 심산유곡에 까지 들어가 인간사냥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살인의 기준을 정하고 주민 중에서 남자들을 살해하 여 그 수족 2백대-여자의 경우는 이것의 두배가 필요-를 획득한 자는 파총(최하위 사관)에 임명한다느 느 식으로, 살인을 많이 할수록 출세시킨다는 방침을 채택했다. 이 때문에 하루에 수백 명을 죽여 단번에 도독(사령관)으로 발탁된 병사도 있었다. 이리하여 조직적으 로 대살육을 실시한 결과 몇 십만이나 되는 주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하여 "촉나라 주민은 한 사람 도 살아남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촉벽 제 3권)고 할 정도였다. 주민뿐만 아니라 촉 땅에 살고 있던 항복해온 명나라 관리도 예외없이 살해했다. 그 방식은 예르르 들면, 장헌충의 조정에 방문하러 온 관리들이 엎드려 인사하고 있는 곳에 수십 마리의 맹견을 불러들여 서 개가 냄사를 맡은 자를 끌어내어 참살하는 식이었다. 이 방법은 '천살'이라 불리운다. 이러한 양상으로 끊임없이 관리들을 죽여 나갔고 처형법도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예컨대 포노(수족을 잘라버린다), 변지(등 줄기를 두 개로 가른다), 설추(공중에 매달아 놓고 등을 창으로 푹 찌른다) 등에서 부터 산 채로 가죽을 벗기를 방식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살인 기술을 구사한 것이다. 살인을 위한 살인 장헌충은 일단 관리등용문인 과거도 실시했는데 때로는 그것도 살인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한 적절한 무대가 되었다. 과거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서생을 모이게 한 뒤 시험장 문 좌우에 높이 4척(약 1백 24 센티미터)의 줄을 걸쳐 놓는다. 순서대로 나오게 한 다음 똑바로 선 채 이것을 통과하게 하여 걸린 자는 즉시 죽여 버린다. 1백 20센티미터 남짓한 줄에 성인 남자가 걸리지 않을 리가 없다. 이리하여 이따금씩 섞여 있던 어린 아이 두 명을 남기고 1만 명이나 되는 서생들이 남김 없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르르 황당무계하다고도 하는데 블랙 유모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장헌충 살인귀 전설은 아직도 산더미처럼 남아 있다. 원래 적대적 존재였던 촉나라 민중, 관리를 남김없이 죽여 없애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장헌충 은 자기편 사람들에게도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꾸만 궁지에 몰려 촉에서 거주하기가 어렵게 되자 이번에는 자기 부하와 병사가 너무 많아서 걸리적거린다고 말하고, 5백 명 정도의 고참군단만 남 기고 나머지는 정리해버리려고 하였다. 가장 신뢰하는 부하가, 그래서는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고 반대하며 대신에 하나의 묘 안을 제시하였다. 군대 내부에 순찰을 강화하고, 무엇이든지 병사들의 결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구실 삼 아 죽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있었네, 소란을 피웠네, 도박을 하고 있었네 등등의 이유로 잇달아 처형했기 때문 에 불과 하루 사이에 죽임을 당한 병사와 그 가족의 수는 무려 10만 명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움츠러든 병사들은 입도 뻥끗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걸려드는 자가 없어지게 되어 체포의 기준을 달성할 수 없게 된 순찰 병사들이 애가 타서 필사적으로 안달하게 되었 다. 그들은 벽에 구멍을 내는가 하면 마루밑에 숨어 들기도 하고, 침실에 잠입하여 휘장 뒤에서 엿듣기 도 하여, 평범한 부부의 소리를 감춘 웃음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갑자기 뛰어들어 그들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장헌충군 병사들은 아마 가족 단위로 이동했던 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장헌충은 이렇게 하여 전력을 스스로 소진하고 자멸의 길로 질주했던 것이다. 귀여워서 죽이다 장헌충에게는 보통의 인간과는 반대로, "술에 취해 있을 때는 온순하지만 깨어나면 흉악해져 하루라도 눈앞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지 않으면 기분이 언짢아진다"(촉벽 제 3권)는 기벽이 있었다. 이 울적한 기분에 홀리면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가족이라도 죽여버린다. 어느 날 밤, 무료한 저녁 시간을 보내던 장헌충은 갑자기 "오늘은 아무도 죽일 자가 없었는가"하고 호 통을 치고 측근에게 명하여 아내 및 애첩 수십 명에다 하나뿐인 자식까지 죽여 버렸다. 다음날 이 일을 씻은 듯이 잊고 아내와 애첩을 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서 측근이, 어젯 밤 명령에 따라 살해해 버렸다고 보고하자 장헌충은 왜 말리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고 이번에는 측근에 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장헌충의 의사표현 및 감정표현은 모두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증오하기 때문에 죽일 뿐만 아니라 귀엽다는 이유로 죽이기도 했다. 한번은, 두되가 명석하고 풍채 또한 발군의 인물로서 과거에서 수석합격한 자가 나타나자 그를 마음에 들어 한 장헌충은 이것저것 선물을 주는 등 보기 드물게 친절하 게 대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끝에, 그는 문득 눈썹을 찡그렸는가 싶더니, "나는 그놈이 지독하게 귀엽다. 그냥 보기만 해도 귀여워서 견딜 수 없어진다. 나는 그놈과 만나는 것이 두렵다. 너희들 나를 위해 그놈은 데꺽 '수습'하 라"고 말하고 부하에게 명하여 '수습'시켜 버렸다. 여기에서 '수습'이란, 일가권속 모두를 죽이는 살인을 가리키는 은어에 다름 아니다. 장헌충의 '귀여움'을 받아 살해당한 인물은 이 수재만이 아니었다. 장헌충은 친구들과 사귀는 것을 몹 시 좋아하여 친지와 만나면 밤을 세워 술을 마시고 산더미 같은 토산물을 주어 돌려보내곤 했다. 그리 고는 손님이 돌아가는 길에 부하를 보내 잠복시켜 두고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게 하는 것이다. 장헌충은 이들의 머리를 궤짝 속에 넣고 군대가 이동할 때마다 수레에 싣고 운반하였다. 왜 이런 일 을 했던 것인가. 그것은 패거리 중에 술 상대가 없어 적막할 때에 궤짝에서 머리를 꺼내 죽 늘어 놓고 잔을 돌려 술을 따라 권커니 작커니 하며 살아 있는 자와 마주하는 것처럼 소리내어 부르거 즐거워한 것이다. 머리를 상대로 한 이 소꿉질 연회를 이름하여 '취수환연(머리들의 잔치)'이라고 한다. 유일한 즐거움 무차별 살인을 거듭한 끝에 장헌충은 개나 소까지 여덟 갈래로 찢어 죽이고, 용의주도하게 자기의 뒤 를 이어 촉을 영유할 자를 위해 종자를 남기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그는 살아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섬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청이나 민가는 말할 것도 없고 정 원, 역참, 사원, 궁전 누각 등 모든 건축물을 파괴하였다. 장헌충군이 통과한 뒤의 촉의 거리는 그야말로 기와 부스러기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할 만큼 철저히 폐허화되었다. 피에 굶주린 장헌충의 명운이 다한 것은 촉을 영유한지 2년쯤 지난 1646년 12월의 일이었다. 부장인 유진충이 한증으로 진격해온 숙왕이 이끄는 청나라의 군세에 항복한 데다 고향 섬서로 북상하여 철수할 수 있는 퇴로를 끊기고 봉황산(사천성 서충시에 있는 산)에서 청군의 급습을 받아 사살된 것이다. 그 때 장헌충 41세. 장헌충이 죽기 얼마 전에 삼국 시대의 촉나라 제갈량(181년-234년)의 예언을 새긴 비문이 출토되었는데 거기에는 "피리를 부는 데 대나무를 쓰지 않고, 한 줄기의 화살이 가로질러 가슴을 맞춘 다"는 구절이 있었다. 사람들을 이를 청나라 숙왕이 장헌충을 사살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즉 촉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영웅 제갈량을 인용하여 장헌충의 말로를 암시한 셈이다. 그리고 장헌충의 사 체를 파헤쳐 보니 심장이 아주 새까맣다든지 그 모양이 오각형이고 간장은 없었다든지 하는 설도 있다. 요컨데 보통의 심장처럼 하트가 아니고 악마적인 특이체질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촉벽은, 촉나라 각지에 퍼져 있는 장헌충 살인귀 전설을 수집하여 이랬느니 저랬느니 과장을 보태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 힘을 너무 기울인 탓인지 기교가 없어, 블랙 유머의 냄새 가 강한 살인을 소재로 한 희극의 걸작으로도 간주되고 있다. 장헌충은 훌륭한 정원에도, 호화로운 식사에도 흥미가 없고, 원래 여성을 혐오하는 기질이 있었기 때 문에 미녀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사치 도락은 오로지 '살인, 살인, 살인'뿐이었던 것이다. 장헌충은 갈 곳을 잃은 과잉 에너지를 죽음에 미쳐 소진하고 있는 악마와도 비슷하다. 이와 관련하여 조르쥬 바 타이유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명체는 지표 에너지의 작용이 결정하는 상황 속에서, 원칙적으로 그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이상의 에너지를 받는다. 과잉 에너지, 즉 부는 하나의 조직(예컨대 한 개의 유기체)의 성장에 이용된다. 만일 그 조직이 그 이상 성장할 수 없든지, 혹은 잉여가 성장 중에 모두 섭취될 수 없으면 당연히 그 에너지 를 발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관계없이 화려한 형태로, 그렇지 않으면 파멸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소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라이벌인 이자성에 선수를 빼앗기고 이어 만주족 청나라 왕조의 기초가 기틀을 마련해 나가는 형세를 눈앞에서 보면서 촉나라에 고립되어 희망도 없어진 전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 장헌충은 바로 스스로의 과잉 에너지를 살인으로, 끝까지 소비한 셈이다. 장헌충 전설의 장치 촉벽 등의 자료에서 보여지는 장헌충의 상은 대강 이와 같은 것인데, 장헌충이 상당히 가혹한 일을 했음에는 틀림없으나 결코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장헌충 살인 귀 전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화려하게 윤색되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될 수 있었던 것일까. 노신은 신량만기에서 계속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장헌충은 죽이는 것에 의하여 병사를 얻고 그 병사를 이용하여 또한 죽였다. 자기는 이제 끝장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모두 다같이 멸망의 말로에 이를 것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도 또한 타인의 것이나 공공의 것은 그다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장헌충의 행동은 일견 기괴하기는 하지 만 실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기괴한 것은 그들 살해된 사람들이 어찌하여 언제나 팔짱을 낀 채 수수 방관하고 머리를 곧추세워 그에게 살해당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청 왕조 숙왕이 그를 사살해 주고, 겨우 청나라의 노예가 되어 구제받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더욱이 이것이 이른바 '피리를 부는 데 대나무를 쓰지 않고 한 줄기 화살이 가로질러 가슴을 맞힌다'는 예언대로, 옛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라는 식으로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와 관련하여 노신은 매우 냉소적인 어조로 중국 역사를 다음과 같이 두 개의 범주로 구분해 보였던 적이 있다. 가령 겉치례가 요란한 학자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사서를 편찬할 때, '한민족 발상 시대', '한민족 발달 시대', '한민족 중흥 시대' 따위의 나무랄 데 없는 제목을 잡으려고 하는데 그 호의에는 감사하지만 표현 방식이 뭔가 복잡하다. 좀더 직설적인 표현이 여기에 있다. 1.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시대 2. 당분간 안온하게 노예로 살 수 있는 시대 이 순환이 '선대 유학자'가 말하는 '일치일란'인 것이다. 난을 일으킨 자들은 후대의 신민 입장에서 보면 주인이기 때문에 도로를 청소해온 셈이 되며, 그러므로 '천자를 위해 구제했던 운운'등으로 평가되는 것 이다. -등하만필 분 수록 그렇다면, 장헌충으로부터 심대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예언이다 뭐다 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이민 족 청이라는 새로운 주인에게 기꺼이 몸을 굽혀 '당분간 안온하게 노예로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 된다. 어쩐지 수상쩍은 이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장헌충 살인귀 전설이 더욱 부풀려지고, 화려함을 더 해 갔다고도 할 수 있다. 요컨데 장헌충은 그 뜻에 반하여 다음 세대의 주인인 청나라에 공헌하기 위해 명나라 구체제를 파괴 하고 피의 살육으로 '도로청소'를 과도하게 하다가 자멸한 것이다. 이를 두고 간신히 청나라 노예의 지 위로 떨어진 사람들은, "지독한 것은 장헌충이다", 하고 마침내 그를 희대의 살인귀로 몰아갔던 것이다. 3. 왕조 향락사 총결산 사라진 가능성 황제 독재체제의 맹점을 틈 탄 환관의 전횡, 그 환관과 결탁한 탐욕스러운 관료의 발호, 이러한 말기 적 증상속에서 명 왕조의 정치기능은 정지되고 국가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 결과 사회 불안이 격 화되고 민중반란이 빈발하여 마침내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대 이래 친숙한 왕조 멸망의 정석을 그대로 밟았던 것이다. 명이 지배하는 시대는 이렇게 하여 진절머리날 만큼 정석대로 종말을 고했지만 그 과정에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견고한 관료제도로 지탱된 전통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뒤엎을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첫째로, 이미 제 3장에서 말했듯이, 명나라 후반 15-16세기에 이르면 상업이 현저하게 발전하고 자본 의 논리하에 움직이는 상인계층이 경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었던 점이다. 둘째로, 이탁오(1527년-1602년)에게서 보여지듯이 관료제도의 이론적 지주가 되어온 유교 이데올로기 의 기만성을 파헤치고 욕망의 논리에 기초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사상이 생겨나 그 것이 광범한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던 점이다. 특히 이 두 번째 점은 관료제도를 지탱하는 지식인, 요컨대 사대부 계층 자체의 의식변혁을 재촉하는 움직임이었다. 실제로 명나라 중기 이래 왕조정치가 함몰됨에 따라 관료사회에서 탈락하여 거의 광적으 로 '나 자신의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지식인도 증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명나라 황제 독 재제도가 말기증상에 빠져 감당할 수 없는 몰락의 에너지를 폭발시킨 결과 이자성이나 장헌충을 중심으 로 하는 농민의 무장봉기가 확산되어 명나라 왕조는 그 숨통이 끊겼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노신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지배자인 만주족 청나라를 위해 '도로청소' 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나라 왕조는 이렇게 하여 여러해에 걸쳐 쌓인 고름을 도려내고, 보기 좋 게 정화된 전통적 체제인 황제독재와 관료제도를 더욱 강화하여 소수의 만주족이 압도적 다수인 한민족 을 통치하기 위한 절호의 도구로 이용했던 것이다. 사상은 엄격히 통제되고 상업도 만주의 소금상이 그러했듯이, 결국 황제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없었 다. 요약하면 명에서 청으로 왕조만 바뀌었을 뿐 정치 사회 경제 사상이 모두 그대로 전통의 주술적 강 박에 의하여 동결되고 만 것이다. 재색을 겸비한 맹렬여성 서태후 중국 최후의 왕조가 된 청(1644년-1911년)은 이민족 왕조로서 긴장감이 강하고, 황제 중에도 우수한 인물이 많았다. 이 때문에 역대 왕조의 어리석은 황제들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치에 빠져 금세 무 능력자가 되어 종말을 맞은 예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왕조에서건 대를 거듭할 때마다 엔트로피가 괴어 마침내는 어처구니가 없는 도깨비 같은 존재를 배출하여 자멸하곤 하였다. 청 왕조의, 아니 유사 이래 이어진 왕조시대의, 막을 내리는 악역으 로서 등장하는 것이 저 악명 높은 서태후(1835년-1908년)다. 만주 기인이라는 하급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난 서태후는 키가 1백 75센티, 야무진 미모의 소유자였다. 만주족이므로 물론 전족도 하지 않았다. 빼어난 미모에다 교양수준도 높아 16세 때에는 오경은 물론, 사 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역대의 정사인 이십사사까지 통독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요컨데 재색을 겸비 한, 평범한 남자들을 한 다발로 데려다 놓아도 도저히 따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1852년, 18세 때 후궁으로 선택되어 궁정으로 들어가 청조 제 9대 황제인 함풍제(재위 1850년 -1861년)의 사랑을 받아 1856년, 황제의 장자인 재순(뒤에 동치제)를 낳는다. 이것이 그녀의 지위를 비 약적으로 높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다 점차로 현실도피적으로 변한 함풍제가 유능한 서태후에게 정무를 맡기게 되니, 이를 기화로 그녀는 강렬한 권력욕을 공공연히 드러내 정치의 중앙무대에 뛰어들었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자 중국이 예전처럼 '고립된 중화제국'의 꿈을 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아편전쟁(1840년-1842년)의 패배를 계기로 하여 중국은 마지못해 세계사의 수라장으로 끌려들어가 구미 열강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중국의 근대는 서구물결의 충격에 의해 패배와 좌절로부터 시작 되었던 것이다. 이미 내리막길에 접어든 청 왕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듭되는 패전조약 체결, 막대한 배상금 지불, 영토 할양으로 열강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면서 종래의 정치체계에 매달려 연명을 꾀하는 것 뿐이 었다. 서태후는 이렇게 하여 멸망해가는 청왕조 최후의 발버둥을 상징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다 아편전쟁 10년 후인 1850년 함풍제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만흥한'을 기치로 내세 운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여 중국 내부에서도 대규모 반란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1856년에는 제 2차 아편전쟁이라 할 만한 '에로우호 사건'이 일어나고 1860년에는 영불연합군이 북경 에 침입하였다. 화려한 베르사이유식 정원으로 알려진느 별궁 원명원이 완전 파괴된 것도 이 때의 일이 다. 연합군 침입이 임박하자 무조건 도망갈 준비를 하던 함풍제는 황후와 서태후, 황태자 재순까지 데리 고 열하의 별궁으로 피난하여 그대로 머물던 끝에 이듬해 1861년 병사하고 만다.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서태후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적대세력을 일소하고 실권을 장악, 1862년, 6세된 친아들 동치황제를 보좌하여 소위 '수렴정치'를 개시하였다. 이 때는 이미 함풍제의 하나뿐인 정식 황후 (동태후)도 후견인으로 나서게 되어 동 서 양태후(그녀들의 궁전의 위치에 따라 이렇게 불렸다)가 나란 히 수렴정치를 수행하는 희한한 양상이 벌어졌다. 이런 형태는 약 11년 간 이어졌는데 그 동안 증국번이라든지 이홍장 등 유능한 한인관료가 활약한 덕 택에 '동치중흥'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사회적으로도 비교적 평온한 상태가 이어졌다. 왕조사의 최후 그러나 1873년(동치 12년), 18세가 된 동치제의 결혼을 둘러싸고 사건이 일어난다. 동치제가 어머니 서태후가 권하는 상대를 거부하고 동태후가 권하는 상대를 고른 것이다. 격노한 서태후는 동치제에 대 한 압박을 강화하고 그로 인해 동치제는 이듬해 사망해 버린다. 역사상 최고권력을 장악했던 여성들, 예컨대 전한 시대의 고조 유방의 처 여후, 당나라 여제 측천무후 도 역시 자신의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자마자 친자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극단적인 경우는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녀들에게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모성애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선악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 그녀들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태울 만큼 강렬한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 었기 때문에 남성 논리가 관철되는 정치 환경 속에서도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자손을 둘 겨를도 없이 동치제가 젊은 나이에 죽은 뒤 서태후가 고를 후계자는 불과 4세인 조카(여동생의 아들) 순친왕 재첨, 즉 광서제(재위 1874년-1908년)였다. "어린 자라면 교육할 수 있다." 는 것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이리하여 동서 양태후의 제 2차 수렴정치가 재개되는데, 이번에는 서태후의 힘이 현격히 우월해진데 다 설상가상으로 1881년 동태후가 급사(서태후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함으로써 완전히 서태후의 독무 대가 되었다. 1889년에 서태후는 광서제가 성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자진해서 은퇴하여 자금성에서 별궁 이화원으로 옮겨 유유자적한 생활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광서제에게 '친정'을 허용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뿐이었다. 그녀는 정보원을 풀어 황제의 동정을 감시하고 결 코 실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광서제의 친정은 1898년까지 9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그 동안 1894년부터 1895년에 걸쳐 일어난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고, 이 기회를 틈탄 열강국이 잇달아 강경하게 이권을 요구하는 등 상황은 점점 더 참 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위기감을 더해간 개혁파 지식인은 광서제 밑으로 결집하여 정치 겨 제 사회 기구 전반에 걸친 발본적 개혁을 단행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1898년에 시작된 이른바 '무술변 법' 운동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서태후가 변법운동에 반대하는 보수세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어 이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되고(그 대단한 서태후도 구미 열강을 꺼려하여 살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퇴위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다시금 서태후가 명실 공히 최고권력자의 지위에 복귀하였다. 이 제 3차 수렴정치는 이후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서태후가 죽은 것은 1908년 11월 15일 광서제의 죽음보다 불과 하루 늦은 것이었다. 그 때 나이 74세. 함풍제 사후 정권을 장악하고부터 47년간, 약 반세기 동안 권력투쟁을 이겨내고 수반의 자리를 사수한 이 여성은,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역시나, 꿈이여 다시 한번 식으로, 광서제 동생의 아들로서 불과 3 세였던 부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마지막 황제 부의가 즉위하고 3년 후 신해혁명에 의하여 중화민국이 탄생하면서 청나라는 멸망했다. 3천 년에 걸친 왕조 시대는 이렇게 하여 마침내 종말을 맞은 것이다. 사치의 국제화 중국 최후의 왕조 청나라와 운명을 함께 한 서태후는 결국 3천여 년 동안 이어져온 황제적 사치향락 을 총결산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녀가 황제는 되지 못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녀는 궁중의 여자 관리나 환관에게 자신을 '노물야'(부처님이라는 뜻)라고 부르게 하고, 광서제에게 는 '친파파(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점으로 볼 때, 원래 남자이고 싶어한 여성으로 볼 수 있다. 그 러므로 그 사치 스타일도 과거의 어느 황제에게도 뒤지지 않는 장대한 것이었다. 중국 사치향락사의 핵심요소는 정원, 식사, 연극 등 세 가지로 이야기되는데 이 중 어느 면에서나 서 태후는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 정원은 1888년 북경 교외 만수산 기슭 곤명호 부근의 풍광 뛰어난 곳에 화려함을 집결시켜 놓은 듯한 별궁 이화원을 조경했는데, 여기에다 전기도 끌어들이는 등 과거 어느 황제의 정원보다도 훨씬 쾌적하 게 조성했다. 이를 크게 흡족해 한 서태후는 엄동설한에 자금성으로 되돌아가는 이외에는 모두 이곳에 서 지냈다고 한다. 명나라 궁전을 그대로 계승한 자금성은 설비가 낡고 전기도 없이 단지 넓기만 할 뿐이어서 그다지 거 주하고 픈 마음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화원을 건조하는 데는 2천만 냥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이 것은 1874년에 창설된 세 개의 해군용 군사비를 유용함으로써 충당되었다. 당시 열강과의 전쟁에서 계 속 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태후의 식도락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이 방면에서 이름을 날린 청나라 제 6대 황제 건륭제도 얼굴 을 붉힐 정도였다. 서태후 전용 부엌에느느 항상 수백 명의 요리사들이 최고의 요리기술을 응축시켜 요 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하루 네 번씩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그 중 두 번이 정찬이며 이 때는 1백 그릇의 요리가 차려 졌다고 한다. 오정격 편저 '만족식속여청궁어선'(1988년 요녕과학기술출판사 간)에 인용된 자료에 의하면, 서태후의 식사를 위해 규정상 다음과 같은 재료가 매일 준비되어 있었다. 반육 50근, 멧돼지 1마리, 양 1마리, 노황미 1되 5합, 강미 3되, 갱미면(멥쌀국수) 3근, 백면(흰 국수) 15근, 교맥면(메밀국수) 1근, 밀가루 1근, 완두 3합, 참깨 1합5작, 백당 2근 1냥 5전, 분당 8냥, 봉밀(벌 꿀) 8냥, 호도열매 4냥, 송인(소나무 열매) 2냥, 계란 28개, 구기자 4냥. 이 밖에 연와(제비집), 어시(생선 지느러미살), 은이(목이버섯) 등이 적당량 준비된다. 이 중 연와는 이미 언급한 '홍루몽'에서도 약용 인삼과 함께 귀중한 물건인데 그것도 마음껏 쓰고 있 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모두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서너가지에만 손을 댈 뿐 나머지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손을 대지 않은 채 물려나온 요리는 그대로 버려졌기 때문에 엄청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연극도락도 매우 뛰어나 민간 극단을 자주 불러 공연하도록 한 것을 물론이고 궁중에서 '남부성반'이 라는 고용극단을 만들어 배우를 양성하는가 하면 경극을 몹시 좋아하여 수시로 그들에게 상연하게 하고 즐겼다. 이밖에도, 만주 귀족의 딸로서 단기간이지만 만년의 서태후를 반든 경험이 있는 덕령(1898년-1944년) 의 회고록에 따르면, 희귀한 것을 좋아하는 서태후는 러시아 서커스단을 이화워능로 불러 구경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시대가 시대인 만큼 사치에도 국제화 물결이 밀어닥쳤던 것이다. 덕령은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4년 동안 파리에 주재한 적도 있어 영어와 프랑스어에 뛰어났다. 당시로서느느 드물게 서구적인 교양을 갖춘 이 여성을 특별히 돌바준 서태후는 그녀에게 영 어를 배우려 한 적도 있지만 정말 안되겠는지 불과 두 과를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의식 비용이 국가수입의 6분의 1 만사에 화려함을 좋아한 서태후가 특별히 그 사치충동을 폭발시킨 것이 지금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 는, 1894년 11월 29일 그녀의 60세 생일잔치였다. 때마침 청일전쟁이 발발한 그 시기에 그녀는 의복, 액 세사리, 파티 등등을 위해 모두 1천만 냥 남짓한 비용을 마구 썼다고 한다. 이 금액은 청나라 국가 세입 의 6분의 1이나 차지할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 60세 생일에는 온갖 취향을 총합한 향연을 벌였는데 그 중 극치는 서태후의 분신이라 할 만한 환 관 이연영이 계획한 방생 의식이었다. 이것은 새장에서 새를 일제히 놓아주는 것으로, 서태후를 위해 음 덕을 베풀고자 하는 시도였다. 마침내 당일 방생을 하자 새장에서 놓여난 새는 창공으로 날아갔는데 그 중 몇 마리인가가 되돌아 왔 다. 의심스러워하는 서태후에게 이연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불야의 은덕을 사모하여 새도 날아 가지 않는 줄로 아옵니다." 이리하여 자존심이 세워진 서태후가 크게 기뻐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사실 이 이야기에는 내막이 숨겨져 있다. 교활한 이연영은 미리 부하 환관에게 명하여, 놓여나도 즉시 돌아오도록 비밀리에 새를 훈련시켜 두었던 것이다. 게다가 날아간 새도 서태후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언덕 뒤에 내려앉도록 훈련시켜, 새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붙잡아 곧바로 팔아버릴 계획을 꾸 미고 있었다. 서태후의 사치가 왕조 최후의 정수를 응결할 것이라고 한다면, 왕조의 부속물인 환관의 아첨 기술 및 이익 추구 기술도 더할 데 없이 정련돼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태후가 권력투쟁에 승리하는 데 훌륭한 동반자가 된 환관 이연영은 원래 멋부리기를 좋아했던 서태 후의 '소두태감'(머리를 빗어주는 계통의 환관)이었다. 사내가 되고 싶어했던 서태후가 멋을 부렸다는것 도 좀 묘한 느낌을 주지만, 그녀는 매우 자의식 과잉이었기 때문에 어쨌거나 의복, 액세서리에 집착하여 외양을 화려하게 꾸몄다고 한다. 그런데다가 외제 화장품이나 향수를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옆에 가면 머리가 아풀 지경이었다고 덕령은 술회하였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젊었을 때부터 헤어스타일에는 이상할 정도로 신경질적이어서 소두태감이 빗 은 머리를 늘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출세의 야망에 불탄 이연영은 여기에 착목하여 북경 안의 유곽 을 모조리 뒤져 기녀들간에 유행하고 있는 헤어스타일을 연구해 솜씨를 닦아 서태후의 머리를 빗어올렸 다. 이를 계기로 서태후의 총애를 받게 된 이연영은 이후 서태후가 죽을 때까지 궁중에서 절대적인 권세 를 누리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덕령은, 이연영이 너무나도 악질의 잔인한 사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저주받은 존재' 서태후는, 역대 황제들이 역사의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그 풍모조차 분명치 않는 것과는 달리 1백 매 이상의 사진을 남겼다. 그 대부분은 1903년 70세 생일을 앞두고 찍은 것인데 촬영한 사람은 덕령의 둘 째 오빠이다. 자의식 과잉이던 서태후는 이 문명의 이기에 몹시 호기심을 보였다. 그녀는 촬영할 때 분장하는 것을 특히 좋아해 기묘하게도 스스로 '대자대비 관음보살'로 분하여 '위타천'(불법 수호신 중의 하나)으로 분 장한 이연영 등을 대동하여 카메라 앞에 서기도 하였다. 이 사진들에서 보여지는 서태후는 오히려 비장함까지 엿보이는 험한 표정이 특징적이다. 이 표정은 국비를 쏟아부은 사치도 결국 권력욕에 사로잡힌 그녀의 마음을 결코 온화하게 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 는 듯하다. 고대 황제, 은나라 주왕에서 시작되는 황제의 물질적 사치는 이렇게 하여 최후의 왕조 청나라 서태후 에 의해 막이 내렸다. 근대에 들어 왕조라는 제도 자체가 쇠약하고 파탄에 빠진 이 시점에서, 사내인 황 제는 엔트로피를 폭발시킬 만한 힘도 이미 가질 수 없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과거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토록 권력의 블랙홀에 함몰되지 않을 수 없었던, 궁 녀들을 한을 응축시킨 듯한, 맹렬여성 서태후가 돌출하여 성대하게 엔트로피 폭발시킴으로써 무대의 막 을 내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서태후에게 아무런 명예가 되지 않는다. 시대착오적 권력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처절하게 사치에 빠진 끝에 그녀가 남긴 것은 열강에 의해 갈갈이 찢긴 무참한 중국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다룬 후한, 당, 명의 환관, 명말의 장헌충, 청의 서태후는 모두 왕조 교체기 혹은 종언기의 세기말적 상황하에서 누적된 엔트로피를 폭발시켜 탕진과 소진으로써 몸을 망치고 사회에 파국을 일으 킨 자들이었다. 그들은 역사의 저주받은 존재이며, 그 탕진과 사치는 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무엇 하나 기여하지 못했다. 만일 그들의 존재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모든 부 정성을 짊어지고 자폭함으로써, 어찌 됐든 피로하고 피폐한 국가와 사회의 신진대사를 재촉한 데서 찾 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스스로를 회복하고 다시 살아나는 강인한 문명국가 중국의 '블랙홀'이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 5장 정신의 탕진 "살아서 이 세상에 있으면 언젠가는 열리게 되는 법. 죽어서 저 세상에 몸을 의탁하는 것도 또한 괜 찮은 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비슷한 것이니, 단지 떠돌가가 타향에 있는 것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 죽 림칠현을 시작으로 하여, 다른 차원의 자유를 추구했던 육조지식인 귀족, 어떤 때나 꺾이는 일 없이 인 생을 즐겼던 소동파, '시은'으로서 꿋꿋하게 살며 표류했던 당인. 이렇게 하여 그들의 정신의 방탕, 정신 의 사치의 궤적을 더듬어 보면 말할 수 없을만큼 통쾌한 해방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 술독에 빠지고 약물에 취해서 죽림칠현 황제, 귀족, 상인으로부터 역사의 블랙홀에 이르는 중국 사치향락사에서 지식인 집단인 사대부를 빼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대개 지식인은 빈곤한 계층이기 때문에 - 꼭 그렇지만도 않았지만 - 사대부의 사치는 죽림칠현 이래 대개 정신의 사치, 정신의 방탕이 중심을 이룬다. 죽림칠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완적(210년-263년), 혜강(223년-263년), 산도(205년-283년), 유영(연대 미상), 완함(연대미상), 상수(연대미상), 왕융(234년-305년) 등 일곱 사람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3세기 중반, 조씨의 위에서 사마씨의 진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격동의 전환기였 다. 이 위험한 시대에 죽림칠현은, 새로이 등장한 정권의 반대파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 사마씨의 첩 보망을 피하기 위해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이념에 기반한 독특한 생활방식을 창조했다. 그들은 쓸모없 는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여 그 생을 마치고자 했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왕융이 명문귀족 '낭사 왕씨'의 일족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 귀족층이었다. 육조 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층과 사대부층은 거의 일치하였다. 이 점이 근세 이후의 사대부층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죽림칠현이 후세에 알려진 모습처럼, 정치적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 죽림에 모여 다 함께 술에 취하고 음악을 즐기는 식으로,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죽림칠현 전설이, 기성 정치체제 속에서 살기를 강요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배척하고, 자유롭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후세의 사대부에게 이상형이 된 것은 틀림없다. 몽환적 인생관 죽림칠현이라 해도 생활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리더격인 완적이나 혜강의 일견 자유분방한 생활방식 도 실제로는 권력기구와의 숨막히는 긴장관계 속에서 신변의 안전을 꾀하면서도 반항적 태도를 관철하 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강하다. 이에 반해 주량을 알 수 없는 대주가로 알려진 유영은 이 세상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정신을 통째로 탕진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완적이나 혜강처럼 영향력 있는 거물도 아니었다. 또한 문학자로서도 초일 류급에 속했던 완적이나 혜강과느느 달리 겨우 한 편의 산문-술의 효용을 칭송한 '주덕송'(문선 제 47 권)이라는 작품- 만을 남겼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매우 홀가분한 처지였기 때문에 더욱 돋보였 다고도 할 수 있다. 유영은 '주덕송'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인 선생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천지개벽 이래 이후를 하루, 일만 년을 한 순간, 태양과 달 을 자기 집 대문, 전 세계를 자기 집 뜰로 생각한다. 어디로 갈 때는 수레 바퀴자국 흔적이나 족적을 남 기지 않고, 일정한 주거조차 없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 삼아서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멈출 때는 술잔을 손에 들고 움직일 때는 술잔과 호리병을 매달고 간다. 오로지 술을 마시는 데만 정신을 쓰 고 그 밖의 일에는 일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유영의 이러한 유유자적한 술 찬가의 근본은 번거로운 현실세계에서 빠져나와 천지자연과 일체가 되 고자 함이다. 넉넉한 생성과 소멸의 섭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존재의 모습이라는 노장 사상의 이념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장대한 몽상을 자신의 몸속에 끌어들이기 위한 필수품이 바로 술이라는 것이다. 유영의 삶은 '술에 젖은 것' 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외출할 때는 항상 한 병의 술을 걸친 후 작은 수레에 타고는 시종에게 가래(흙을 퍼 담는 기구)를 지니고 뒤따라오게 하여 "죽으면 즉 시 묻으라"고 말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꿈을 꾸듯이 살려고 한 것이다. 왜 나의 잠방이 속에 들어오는가 이 확신범적 알코올 중독자들에게는 이 밖에도 술에 얽힌 일화가 많다. 예를 들면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끊으라고 애원하는 처에게, 신에게 기도하고 금주 서원을 세울 테니 신주를 가져오라고 해놓고는, 술을 가져오자, "하늘은 유영을 낳고, 술로써 이름을 날리게 하신다"며 기도를 하는가 싶더니 신주를 단 숨에 들이키고 금세 곤드레만드레 취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그는 취하면 집 안에서 옷을 홀딱 벗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비난하자, 숙련된 노장철 학의 과장법을 방패 삼아 정색을 하고 나섰다. "나는 천지를 집으로 생각하고 집안을 잠방이라고 생각한 다. 자네들은 왜 내 잠방이 속으로 들어오는가"라고 응수해 상대방을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영이 언제나 그렇게 전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대취한 상태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상대방이 주먹을 치켜들고 때리려고 하자 유영은 유들유들한 말투로 이렇게 받아넘겼다. "나 는 계륵(닭의 갈비뼈. 버리기는 아깝지만 그다지 쓸모도 없다는 것의 비유)이기 때문에 자네의 주먹을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되네." 상대방은 웃어넘기고 긴장은 그 자리에서 풀렸다. 유영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장대한 우주적 환상속에서 정신의 해방을 꿈꾸면서도 우주와 인간을 대비하여 현세의 부질없음을 내보였다. 그는 이렇게 몸을 굽힘으로써 밀려오는 외부의 압력을 비켜가려 한 것이다. 술독에 빠져 산 유영은 위험하다 싶을 때 몸을 굽히는 방법을 완전히 체득하면서 정신적 방 탕을 다하여 위진교체기를 큰 실수없이 살다가 유유히 천수를 다하려 했던 것이다. 이후 서진 동진을 통해 이러한 유영의 정신적 쾌락을 앞세우는 농샬랑(적극적인 관심이 없어 행동에 열의가 없는 모양)한 생활방식을 추종하여 술없이 무슨 인생이 있으랴, 하고 기절할 때까지 취하는 것을 즐기는 모방자가 속출하기에 이른다. 위진 시대는 지식인 귀족들이 쾌락 추구에 모든 것을 내맡긴 시대였다. '지식인은 곧 정치적 인간'이 라는 중국 전통의 공식이 깨끗이 없어진, 역사상 드문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오석산의 유행 육조를 통하여 지식인 귀족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것이 바로 오석산을 복용하는 것이다. 이 역시 쾌 락원리를 추구하면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오석산은 석종유, 석유황, 백석영, 자석영, 적석지 등 다섯 광물 을 조합한 마약이다. 제조공정도 까다로웠기 때문에 오석산은 꽤 값이 비싸 보통 서민으로서는 도저히 손댈 수 없는 것이 었다. 그러므로 역으로 오석산을 '복약'하고, 그 후 독성을 발산시키기 위한 '행산'이라고 칭하는 산보를 하는 것이 귀족의 지위를 과시하는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이 때문에 모방자도 잇달았다. 수나라 후백의 소화집 '계안륵'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번화가에서 가난한 남자 하나가 괴로워하고 있어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복석'했기 때문에 열이 나 서 지금 '석발'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사내가 오석산을 살 수 있을 리 없었기 때문에 계속 추궁 을 하니 사내는 "어제 먹은 쌀 밥 속에 돌이 들어있어서, 지금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부 귀의 심벌로서의 오석산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 오석산을 최초로 복용한 사람은 죽림칠현과 거의 동시대인인 하안(190년?-249년)이다. 동시대인이 라 해도 자연파 7현과 귀족 살롱파 하안과는 스타일이 달라 전혀 교류가 없었다. 하안은 어머니가 조조의 측실이었기 때문에 조조의 양자로 궁중에서 자란 멋쟁이이고 유명한 미남자 였다. 그는 또한 상당한 재능을 가져 위나라 말기 정시연간(240년-248년)의 귀족 살롱의 총아로서 그 이 름을 날렸다. 하안은 오석산을 복용하고, "오석산을 마시면 질병이 치료될 뿐 아니라 정신까지 뚜렷해지는 것을 느 낀다"고 선전했다. 하안이 그렇게 말하니 효과는 커서 금세 오석산은 위말 귀족사회에서 대유행하기에 이른다. 하안은 유행의 첨단을 열어젖히는 센스에 탁월했다. 그는 오석산뿐 아니라, 육조 시대를 통해 귀족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던 철학강의 '청담'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탁상공론의 쾌감 오석산과 청담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가 있었다. 오석산은 신경을 자극하여 정신적 긴장 을 높인다. 철학적 주제를 둘러싸고 밤을 새워 토론을 하는 청담의 결정적 승부처는 반사신경의 예민함 과 탁월한 언어감각에 있기 때문에 오석산의 복용은 청담의 몰입과 직결된다. 청담의 내용은 크게 인물 비평과 순수철학론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철학론은 이런 식으로 전개된 다. 예를 들면 '장자' 천하편의 '도달하되 도달할 수 없다'를 테마로 잡았을 때, 서진의 악광이 불자(중들 이 가지고 다니는 법구의 하나로서 말꼬리, 삼 등을 묶어서 자루를 단 것인데, 청담 때 손에 들고 있다 고 한다)의 자루를 탁자에 갑자기 탁하고 치며, 질문자에게 "도달했는가"하고 묻는다. 질문자는 물론 "도 달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불자를 탁자에서 떼고, 악광이 말한다. "만일 도달했다면 어떻게 지나갈 수 있으리." 거기에서 질문자는, 과연 "도달하되 도달할 수 없다"고 납득한다. 이것은 위진 귀족들의 에피소드집 "세화신어" 문학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대강 이와 같은 어조로 연연 히 탁상공론을 겨루는 것이 청담의 진수이다. 그리고 오석산에 의한 자극은 이러한 청담의 흥취를 더해 주는 절호의 촉매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석산은 강력한 정신적 흥분과 고양을 가져오는 반면 부작용도 몹시 강했다. 처음 오석산을 복용하면, 약의 독이 퍼져 신체가 울컥 뜨거워진다. 그대로 참고 있으면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어쨌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일어설 힘이 없는 사람은 부축해서라도 일어서게 해서 걷게 해야만 한다. 독을 발산시키기 위한 이러한 운동을 '행산'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따뜻하게 데운 술을 마셔 약의 작용이 천천히 전신에 골고루 퍼지도록 해야 했다. 이때 찬 술 은 목숨을 앗아가기 때문에 절대로 마시면 안된다. 다만, 오석산의 별명이 '한식산'이라 불리우는 그대로, 음식물만은 차게 한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오석산 복용에는 항상 생명의 위험이 따른다. 또한 해독을 위한 번거로운 절차가 불가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특이한 정신의 앙양상태에 홀린 사람들은 다투어 이 약을 찾아다녔 다. 수백만 명이 중독사 그러나 아무리 신중하게 해독해도 장시간 복용한 중독자는 약의 힘으로 얻은 정신의 자유, 정신의 방 탕에 비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작용으로 피부가 짓무르고 혹심한 가려움에 시달리거나 몸에 항상 열이 나서 추운 겨울에도 내의 한 장만 입고 차가운 돌 위에 누워야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쉽게 흥분하여 조그만 일에도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증상들은 아직 덜한 쪽이고 더 무서운 단말마적 상태에 빠지는 사 람도 많았다. 예를 들면 서진의 배수(224년-271년)라는 인물은, 오석산을 남용한 끝에 착란상태가 되어 극심한 오한 과 발열에 떨고 눈도 멀어, 영문을 모른 채 계속 절규했다. 당황한 주변 사람들은 계속 고열이 나니까 차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고 금기사항인 찬 술을 마시게 한 다음, 수백 석(1석은 약 19리터)의 물을 마구 끼얹었는데 불쌍하게도 배수는 절명하고 말았다. 서진의 학자로서 역시 오석산 중독으로 고통에 시달린 황보밀(215년-282년)은, 이 조치가 완전히 잘못 이었다고 비난하고, "10석(1석은 약 27kg) 벌건 숯도 2백 석의 물을 끼얹으면 차거워지는 법이다. 약의 열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10석의 벌건 숯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수 백 석이나 되는 물을 끼얹으면 추 위 탓에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어쨌거나 대량의 벌건 숯이 인용돼 나오는 것을 보아도 오석산 중독 발작의 발열이 얼마나 처참한 것 이었는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오석산 중독으로 어이없이 절명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 여가석(1883년-1955년)이 방대한 독서와 기억 력으로 온전하게 되살려 정리한 정평 있는 오석산 연구서인 '한식산고'에서는, 위나라 정시연간에서부터 당나라 현종의 천보연간(742년-755년)까지 약 5백 년 동안에 오석산으로 중독사한 사람들이 수백만 명 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더욱이 이 5백 년은 바로 귀족의 시대에 해당된다. 그러나 육조를 절정기로 하는 이 귀족의 시대는 귀족이라는 말이 떠올리는 나긋나긋한 이미지와는 정 반대로 극심한 권력투쟁과 전쟁이 잇따른 난세였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어두운 이 시간대에 살 았던 지식인 귀족은, 술과 약을 매개로 하여 죽음과도 같은 광기로 정신적 방탕을 다했던 것이다. 약파는 미남, 주파는 추남? 그들 중에는 술과 약을 병용한 자도 많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시 '주파'와 '약파'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 다. '주파'를 대표하는 인물은 물론 유영이고, '약파'의 대표주자는 말할 필요도 없이 하안이다. 유영은, 키가 불과 1백 44cm밖에 안되는 극단적으로 작은 추남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외견상의 풍모 에는 전혀 무관심하여, "느긋하게 마음을 멀이 놀게 하고, 육체를 흙덩이나 나무조각처럼 여겼다"('세화 신어' 용지편)고 한다. 이에 반해 미남으로 유명했던 하안은, "하안은 나르시스트로서, 언제나 하얀 분을 손에서 떼지 않고, 걸을 때는 자기의 그림자를 되돌아볼 정도였다."('삼국지' 위서 제 9권. 배송지 주해 '위략')고 하며, 더욱 이, 유행에도 관심이 깊고, 여성의 옷을 즐겨 입는 스타일리스트였다는 설도 있다. 하얀 분을 바르고 치 장하는 것은 데카당스의 미학을 체현한 육조 귀족에게 널리 보여지는 현상이며,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분칠을 하고 다녔는지는 접어두고, 하안을 효시로 하여 서진의 재상 왕연, 동진 초기의 위개, 동진 말 기의 왕공 등 '약파' 중에는 뛰어난 미남이 많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파' 중에는 이렇다 할 미남이 눈 에 띄지 않는다. 모두 유영과 비슷한 추남뿐이라고 하면 좀 지나친 표현이지만, 아무튼 그런 분위기가 없지도 않다. 하안에서 출발한 청담과 '약파'의 관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으나, '주파' 사람들은 기절할 때까지 취하 는 것을 쾌락으로 즐겼기 때문에 변변히 말도 못하고, 물론 청담 따위는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청담은 '약파'의 전매특허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미모의 청담의 명수를 스타로 하는 '약파'쪽이 야만스러운 '주파'보다도 현격히 농후한 데 카당스 색채에 물들어 있으며, 그런 까닭에 한층 더 육조 귀족사회의 기풍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존재 였다고 볼 수 있다. 하인에게 자신을 묻는 데 사용할 삽을 지니게 하면서 술에 탐닉하여 정신적 자유를 추구했던 유영을 비롯한 대주가들, 약물 중독으로 미쳐 죽는 자를 보면서도 굳이 약을 남용하여 정신의 앙양을 꾀했던 오석산 중독자들. 그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현실도피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도피에는 이미 보았듯이, 자기 몸을 모조리 태워버릴 듯한 처연한 에너지가 투입되었다. 육 조 지식인 귀족은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각각의 의식이나 방법대로 정신적 바탕을 다하였다. 그리하 여 정치원칙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현실사회와는 차원을 달리 하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기 위한 고유 한 방법을 모색하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2. 유배도 즐겨 지방 근무를 자청한 소동파 과거에 합격한 진사가 고급관료가 되어 황제를 보좌하는 형태로 정치기구의 중추로 부상한 것은 송나 라(북송 960년-1126년, 남송 1127년-1279년) 시대에 들어서부터였다. 진사를 중심으로 하는 근세적인 사대부 계층이 탄생한 것도 이 이후의 일이다. 과거의 문호는 비교적 널리 개방되어 있어 농민이나 상인의 자제도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세습귀족의 경우와는 달리 개인의 능력에 달려 있는 사대부는 유동적인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도 중반기 이후가 되면 진사출신의 관료간에 당쟁이 극심해져 정국은 빈번히 대혼란에 빠 졌다. 근세적 사대부의 정신적 사치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존재인 소동파(1036년-1011년. 본명 은 소식. 동파는 호)도 급진적인 국가기구 개혁을 주장하는 신법당과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구법당의 격렬한 싸움에 휘말려 어지러운 운명의 전환을 경험했다. 탁월한 문학자로서 유달리 눈에 띄는 존재였던 소동파는 구법당의 인물이다. 그는 신법당이 헤게모니 를 잡을 때마다 눈엣가시가 되어 벽지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생활을 즐기는 소동파의 뛰어난 재능은 오 히려 이러한 역경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소동파가 두 살 아래인 동생 소철과 함께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한 것은 1057년, 그의 나 이 22세때 일이다. 이 때 뒤늦게나마 부친 소순도 함께 관계에 진출하였다. 이들 3인의 부자가 '삼소'라고 불리우는 송대 굴지의 문장가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소동파는 세차게 솟아오르는 샘물 같은 창작력으로 생애 약 2천8백 수나 되는 시를 짓고 수많은 산문을 남겼다. 소동파 의 이름은 일찍부터 당시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새로운 시편이 나올때마다 읽혀질 정도로 인기가 있었 다. 소동파는 문학자로서 탁월할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도 서예가로서도 초일류였다. 게다가 또한 요리-동 파육으로 유명-와 의술, 약학, 토목건축-서호를 준설하고 진흙과 모래를 이용하여 소제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어쨌든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소동파의 성격은 명랑하고 활달하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낙천적인 태도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고, 천성적인 호기심을 활용하여 곧 즐거운 소재 를 찾아냈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너무 딱딱한 것은 성에 맞지 않아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지방 근무 쪽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발탁되어도 기분이 좋지 않아 걸핏하면 중앙에서 도망칠 궁리만 하였다. 하지만 소동 파는 관리로서도 대단히 우수하기도 했다. 돈이 떨어지면 또한 생각합니다 그런 탓에 1071년, 36세 때 풍광이 뛰어난 항주의 통관(부지사)으로 부임한 이후 지방근무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79년 그가 44세이던 청천벽력 같은 필화사건이 일어난다. 많은 시문에서 황제를 어 둠으로 비방했다는 죄상에 따라 체포구금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신법당과 의 알력이 원인이었다. 다행히 사형은 면했지만 황주(호북성)으로 유폐되게 되었다. 소동파 최초의 유죄이다. 황주 땅을 밟았 을 때의 인상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평소부터 이 입 때문에 성가신 일을 일으켜 왔던 것이 나 자신도 우습다. 나이를 먹으면서 함부로 하 는 정도가 더 심해져 왔다. 하지만 여기는 장강이 성곽을 에워싸고 흐르기 때문에 반드시 훌륭한 고기 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빼어난 대나무 숲이 근처 산들에 펼쳐지니 죽순의 향내가 감도는 듯하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유배된 몸이라는 것도 아랑곳 없이 목청을 울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소동파는 오 히려 즐거이 가족까지 몽땅 황주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죄인의 몸이라 급료마저 중단된 상황 이었기 때문에 점점 궁색해져 갔다. 그는 이 곤견을 여러 가지 궁리를 다하여 벗어난다. 황주에 막 도착했을 때는 급료가 중단되고 가족도 많아 걱정을 많이 했다. 열심히 절약하여 매일 1백 50문 이상은 쓰지 않도록 했다. 매월 1일이 되면 4천 5백문의 돈을 꺼내 30포로 나누어 천장에 매달아 둔다.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걸어놓은 보따리에서 한 포를 내리고 즉시 보따리를 치워버린다. 따로 커다 란 대나무 통을 준비하여, 쓰고 남은 돈을 저금하여 손님대접에 사용한다. 이것은 가운노(소동파의 항주 부지사 시절 친구)가 가르쳐준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가진 돈으로 1년 남짓 살 수 있다. 돈이 떨어지면 또 생각한다. - 문인인 주관에게 쓴 편지 소동파는 이처럼 가난한 상황에서도 부지런히 모은 접대비를 사용하여 마음 가는 데까지 교류를 즐겼 다. 소탈한 그를 교제범위는 매우 넓었다. 그의 친구 중에는 불교에 관심이 강했기 때문에 승려도 많았 으며 인근의 농부도 있었다. 손님을 초대하거나 손님이 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오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 병자처럼 되었다. 그리고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밀주를 담그기도 했는데, 묵히는 방법이 미숙해서인지 언제나 실 패하여 마신 사람은 급성 설사에 걸려 버렸다고 한다. 이듬해에 두 번째로 유배되어 혜주(광동성)로 갔을 때는 계수나무로 술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아들들의 증언에 따르면 형편 없었다고 하니 그처럼 대단한 소동파도 술 만드는 일만큼은 별로였던 것 같다. 새로운 사의 방향성 황주 시절 소동파가 가장 친하게 교제한 인물은 진조였다. 진조는 황주에서 조금 떨어진 기정에 살고 있던 옛친구이다. 소동파는 허물 없는 사이인 진조를 유머 넘치게 놀리고는 매우 즐거워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사자후라는 것은 화가 나서 고함치며 앙알앙알 잔소리 하는 사나운 아내라는 뜻이다. 잠도 안 자고 담론풍발 불교철학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진조가 맹처의 질책을 들은 순간,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툭 떨어뜨리며 움츠러들고 마는 모양을 희화화한 것이다. 진조의 부인은 '유씨'라고 한다. 유씨 일족은 하동(산서성 서부)의 명문인데, 이를 빗대어 소동파는 하 동(유씨)의 사자후(고함치는 소리)라고 조롱했던 것이다. 더욱이 진조는 바람둥이였는데 그는 맹처 유씨 의 질투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소동파의 이 폭로 때문에 진조는 이후에 공처가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말기에 소동파와 절대적인 신뢰관계에 있었던 동생 소철은, 형이 유배되자 즉시 황주로 달려왔다. 소 철은 '입 때문에 성가신' 일을 당한 형을 염려하여 헤어질 때 쉿! 하고 손가락을 입을 막아 보였다. 하지 만 한 가지를 보면 만 가지를 알 수 있듯이, 유배상태에서도 제멋대로 지껄이니 그 충고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리하여 황주 생활 1년 남짓, 소동파는 계획대로 빈털털이가 돼버렸다. 그러나 워낙 친구가 많은 사 람이기 때문에 위기가 닥치면 든든한 구원자가 등장해서 도와주었다. 옛 친구인 마몽득이라는 인물이 소동파 일가의 궁색한 모습을 보고 관청과 교섭하여 병영터였던 거친 땅을 빌려주었다. 소동파는 그 땅을 '동파'라 이름하고, 즉시 스스로 개간하기 시작한다. 밭일에 정성을 쏟는 이 생활에도 소동파는 곧바로 적응했다. 하지만 이 역시 "밤이 되어 동파에서 술을 마시고, 취했는가 생각하니 또한 취기가 돌았다. 돌아온 것 은 삼경쯤. 하인은 천둥 같이 코를 골아 문을 두르려도 전혀 반응이 없다. 나는 지팡이에 기대어 냇물 소리에 귀기울일뿐"이라는 식이었다. 원래 소동파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극소량의 술에 도 기분 좋게 취했다. 또 하인의 코고는 소리가 높은 것을 말했지만 사실 소동파 자신의 코고는 소리도 크기로 유명했다. 지금 인용한 것은, '임강선' 이라는 작품의 일부이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원래는 정해진 멜로디에 얹 혀 구가되는 '사'(중국의 운문체의 하나)라는 양식에 따른 작품이다. 화류계에서 나온 '사'는, 당나라 말기 부터 문인들에게 주목받게 되었는데 주로 남녀관계의 감상적인 정서를 읊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동파는 이러한 기존의 경향을 대담하게 전환하여 사상적인 내용에서부터 하인의 코고는 소리까지도 자유자재로 읊어냄으로써 이 장르의 영역을 일거에 확대시켰던 것이다. 쐐기 맛이 너무 좋다! 황주 생활 동안 소동파는 밭농사에 힘 쓰는 한편, 수많은 친구와 교제하면서 짬을 내서 인근의 명승 지를 찾아 다니는 등, 생활을 즐기면서 정력적으로 많은 시문을 지었다. 도저히 유배된 몸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팔면육비(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는 수완과 능력이 있음)의 대활약이었다. 그러나 이 생활을 마감할 순간이 다가왔다. 유배된 지 6년 후인 1085년, 소동파의 나이 50세 때 신법 당 후원자 신종 황제가 사망하고 10세의 철종이 즉위하여 구법당 후원자인 태황태후(철종의 조모)가 섭 정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온세상은 구법당의 시대가 되니 소동파도 명예를 회복하고 중앙으로 올라가 극적인 승진 을 거듭, 순식간에 한림학사(황제의 비서관)라는 지위에 오른다. 태황태후는 원래 소동파의 열렬한 지지 자였기 때문에 각별히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구법당 내부에서 권력항쟁이 격화하기 시작 하면서, 무슨 일이든 솔직하게 말하는 소동파에 대한 공격도 강해졌다. 이에 염증을 느낀 소동파는 1089년 지방근무를 희망, 과거 부지사를 지냈던 항주에 지사로 부임한다. 서호를 준설하여 소제를 축조한 것은 이 당시에 일이다. 이후 1093년에 충실한 후원자였던 태황태후가 서거할 때까지 소동파는 중앙의 부름을 받고 올라갔다가 곧 지방근무를 자청하여 어지러운 전임을 되풀 이했다. 태황태후 사후 정국은 또다시 격변한다. 신법당 후원자였던 철종의 친정이 개시되자마자 신법당이 부 활, 구법당에 보복을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소동파도 1094년 10월 이름뿐인 관직을 제수받고 혜주로 좌천된다. 더욱이 1097년 4월에는 중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로 유배되었다. 주민들 대부분이 소수민족인 여족이었던 해남도는 당시 세계의 끝과 마찬가지였다. 62세의 소동파는 이 미개한 섬에 셋째 아들 소과만을 데리고 건너갔던 것이다. 그러나 소동파는 여기에서도 변함없이 여유작작, 오히려 물을 만난 고기처럼 활기 넘치게 생활했다. 쐐기를 먹어보고는 "조정의 명사들은 이 훌륭한 맛을 모를 것이다. 모두들 이곳으로 모셔와 이 맛을 함 께 나누고 싶다"고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소동파의 유머 감각은 어떤 상황에서도 수그러드는 법을 몰 랐다. 춘몽 아주머니 소동파는 여족인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중앙의 간섭 때문에 관사에서 쫓겨나 한 푼도 없이 집을 지어 야 하는 상황에서도 여족인들은 앞장서서 거들어 주었다. 비록 허술한 오두막집이었지만 소동파는 하늘 을 품은 듯이 편하게 생활했고 마음 내키는 대로 여족 친구들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나한 기분으로 여족 네 명의 친구들을 차례로 찾아갔다 돌아오는 길, 내나무 가시와 등나무 덩굴에 걸려, 걸으면 걸을수록 길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소똥 자국을 따라가면 돌아가는 길을 금방 알수 있다. 내집은 외양간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산책을 좋아하며, 때로는 커다란 표주박을 머리에 이고, 논두렁길을 태평스럽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기도 하였다. 그런 소동파의 모습을 본 시골 노파가 "한림학사님, 옛날의 부귀도 지금 와서는 일장춘몽입니다"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소동파는 훌륭한 이야기라고 감탄했고, 그 이후 근방 사 람들은 그녀를 '춘몽 아주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더욱이 소동파는 이 춘몽 아주머니를 칭송한 시도 지었다. 흔히 그림에서 보게 되는 도롱이 삿갓에 짚신을 걸친 모습은 해남도에서 지내던 소동파의 생활 그 자 체였다. 소동파가 이런 모양으로 걸어가면 여자와 아이들은 재미있다고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며 뒤를 따라가고, 동네 개들도 짖어대면서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소동파는 열대섬, 해남도의 생활을 마음껏 즐기면서 그 오두막집에서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동진의 은둔시인 도연명의 시에서 차운(남이 사용한 운자를 같은 순서로 써서 한시를 짓는 것)한, 이른 바 화도시를 지어 한단계 성숙한 시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밖에 부친 소순의 유지를 받아 동생 소철과 분담하여 작업하고 있던 오경 주석 중에서 서경의 주석 도 완성했다. 그리고 아들 소과를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쓴 수필류를 수집 정리하기도 했다.(뒤에 동파 지림으로 정리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마감할 때가 되었음을 분명히 느끼고 해남도에서 차분히 생애를 총결산하는 작업 을 수행했던 것이다. 긴장을 풀어 헤치는 장난기 해남도 생활이 4년째에 들어선 1100년, 철종 황제가 사망하고 휘종 황제가 즉위하자 또다시 정세가 변화하여 소동파는 사면이 되어 중국 본토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소동파에게 남겨진 시간은 이 제 거의 없었다. 이듬해 1101년, 남경 부근까지 왔을 때 중병에 걸려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향 년 66세였다. 소동파는 근본적으로 역시 분명한 사대부였다. 좋건 싫건 관계없이 그 인생은 관료사회와 견고하게 맺어져 있었고, 살펴 본 대로 극심한 부침을 거듭하여 살아갔다. 하지만 그는 사대부 관료로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외부로부터 규정된 형태로 행동하는 일 은 결코 없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하고 싶다'는 내적 욕구를 우선시했다. 소동파의 인생철학은 다음 과 같은 말속에 담겨 있다. "인생은 한 순간 머무는 것이니 어찌 즐기지 않을 수 있으리요." 소동파는 융통성 없이 고지식하게 번민하거나 심각해지지 않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면 빠질수록 천 재적인 적응력과 다양한 재능으로 삶을 즐길 소재를 찾아내 유쾌하게 곤경을 타개해 나갔다. 그만큼 재 미있는 사람은 다시 없다. 이러한 소동파의 모습은 이상한 것에 목숨을 걸고 '정신의 방탕'을 다한 육조 지식인 귀족과는 달리, 긴장을 풀어헤치는 풍성한 여유와 장난기로 보는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갖게 한다. 소동파야말로 참된 의미에서의 '정신적 사치'를 철저히 실천한 인물로서, 훗날 사대부의 동경의 대상 이 된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3. 표류하는 시은 소주의 사대명인 명대 말기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기에 걸쳐 중국 굴지의 대도시였던 소주에 '오중의 사재'라고 그 이름을 떨친 문인 그룹이 출현했다. 축윤명(1460년-1526년), 당인(1470년-1523년), 문징명(1470년-1559 년), 서정경(1479년-1511년)이 그들이다. 그들은 모두 서화시문의 무엇이든 통달한 사람들이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당인은 특히 화가(미인화가 유명)로서 이름을 날렸다. 당인의 자는 백호인데 만년에 불교에 심취하여 육여라고 불렀다. 그는 소주의 고깃간(주막이라고도 전 해진다) 집 아들이었다. 머리가 좋아 장래를 기대한 부친이 일찍부터 공부를 시켜 교양을 쌓게 되었다. 당인의 선생은 소주에서 으뜸가는 화가 심주(호는 석전, 1427년-1509년)였다. 그는 시은(거리의 은둔 자)으로서 생애를 일관했던 인물로서 그림과 시문은 소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훌륭한 선생 밑에서 수학한 당인의 재능은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는데, '오중의 사재' 중 한 사람으로서 10세나 연상인 축윤명이 먼저 교제를 청할 정도였다. 서예가로서 걸출한 재능을 가진 축윤명은 오른손가락이 6개였다. 이 때문에 '지산' 혹은 '지지산'이라고 스스로 칭했다. 그는 마시기, 치기, 사기-술 도박(마작) 여자- 의 3박자를 두루 갖춘 도락자로서, 기행으 로 유명했다. 당인은 기인 축윤명과 전생애에 걸친 친구가 되어 항상 함께 돌아다녔다. 축윤명은 당인과는 달리 관리의 아들이었다. 그는 과거에 계속 낙제하다가 후년에 다른 루트를 통해 관리가 되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이 또한 은자적 사대부로서 '시은'적 생애를 살았다. 당인의 또 다른 친구 문징명은, 서화시문 모두에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다만 그는 축윤명이나 당 인처럼 화류계에 출입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문징명 역시 과거에는 낙제했다. 한때는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중앙으로 초빙된 적도 있었지만 관료사회와는 성격이 맞지 않아 결국 소주로 되돌아온다. 이후 그는 '오중의 사재' 중 혼자 장수하여 90 세까지 살아 오랫동안 소주 문단의 거물로서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문징명과 당인은 나이가 같아 14,15살 무렵부터 친구사이로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향락파인 당인과 착실한 인물인 문징명은 전혀 성격이 달랐지만, 자기에게 없는 상대방의 장점을 서로 인정하여 변함없 는 우정을 맺었다. 더욱이 진사 출신 관료였던 문징명의 아버지 문림은 일찍부터 당인을 이해하는 사람 으로, 자신의 교제망을 통해 당인의 재능을 널리 알려주었다. 인생의 전환점 당인부터 이야기해 보자. 친구 축윤명과 문징명은 과거에 낙제하여 관료사회에서 밀려나고 말았지만 당인은 어땠는가. 당인은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과거 예비학교인 부에 다녔는데, 놀기 좋아하는 장난꾸러기로 행실이 단정맞지 않았다. 어느 날, 악동끼리 과수원 옆을 지나치다가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걸 훔쳐 먹어야겠다고 맨 먼저 당인이 담을 넘어 들어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분명 히 혼자서 정신없이 먹고 있는 것이라고 안달복달하고 있던 패거리중 하나가 담을 넘어 들어가자마자 풍덩, 하고 똥통에 빠져버렸다. 살펴 보니 옆에 당인이 있는데, 조금 있다 모두 올 것이니 기다라라고 한다. 조금 지나자 차례로 패거 리들이 풍덩풍덩 떨어져 내렸다. 모두들 완전히 누런 색이 돼버렸다. 장난이 이런 정도니 공부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축윤명도 여기에는 기가 막혀, 학교에 이름만 올리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나 공부에 열중하든지 생각을 중단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엄중하게 당인을 꾸짖었다. 이 충고를 새겨들은 당인은 마음 을 굳게 세워 장남을 딱 끊고 1년 동안 한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했다. 이 덕택으로 1498년, 29세 때 남경에서 실시된 향시(지방의 과거시험)에 멋지게 수석합격한다. 향시 수석합격자는 해원이라고 일컬어진다. 당인이 당해원이라고 불리운 것은 이 때문이다. 향시 합격자는 그 이듬해 수도 북경에서 실시되는 본 시험 회시(중앙의 과거시험)에 임하는 것이 관 례였다. 성적이 뛰어난 당인이 이 회시에 합격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여 기에 함정이 있었다. 그가 생각지도 못한 커닝 하건에 연계되어 체포투옥된 것이다. 그 결과 실격하고 만다. 일설에는, 당인이 회시 수석합격자로 결정되어 있었는데 발표에 앞서 이 정보를 알아챈 동향 사람 도 목이라는 사내-이 남자도 함께 시험을 보았다-가 시기한 끝에 관계 당국에 있지도 않은 일을 밀고했던 것이 이 사건의 발단이라고 알려져 있다. 도목을 이때 당당하게 합격하여 그 나름대로 순조로운 관료생 활을 보냈지만, 당인은 평생 이 인물을 혐오했다. 후년에 절교상태에 있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 쓸데 없는 참견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마침 도목이 오는 것을 모른 채 그 친구집을 찾아간 당인은, 도목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그대 로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또한 당인의 친구, 그 온건한 근엄거사 문징명조차 도목의 이야기가 나오면 안색을 싹 바꾸고 혐오감 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들을 종합하면, 당인의 생애에 불운한 획을 그은 커닝 사건에 도목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반골의 도시 소주 그것을 그렇다 치고, 수치스런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꿈이 깨진 당인은 상심하여 고향 소주로 돌아왔 다. 이런 당인에게 태도를 표변하여 냉대하는 자도 물론 많았다. 그를 잘 이해했던 첫째 부인이 젊은 나이에 죽고 그 뒤 맞이한 두 번째 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던 이 여성은, 낙방한 당인에게 기대할 바 없다고 훌쩍 떠나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소주라는 이 대도회지에는 관료사회에서 영원히 떨쳐난 당인을 안아줄 만한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예로부터 비단의 명산지로서 번창한 소주는, 14세기 중반 원나라 말기의 대혼란기에 명 왕조의 창립자 주원장의 라이벌 장사성의 근거지였다. 장사성에게 초청을 받아 소주로 옮겨온 문인도 많아 풍 치 있는 소주 문화의 꽃이 만개했다. 그러나 명 왕조가 탄생하자 주원장은 장사성을 지원한 소주의 호족과 상인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가하 는데, 그 공격의 화살은 문인들에게 겨누어졌다. 이리하여 소주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대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주원장의 대탄압은 역으로 소주 사람들 사이에 불굴의 반권력 정신을 키우는 계기가 된 다. 이리하여 소주에는 명대 중기 이래, 과거의 영화를 되찾은 뒤에도 권력의 힘에 아랑곳하지 않는 강렬 한 저항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당인의 스승 심주를 비롯하여 사대부 지식인이면서도 관료사회 와 등을 돌린 '시은'이 계속하여 잇달아 소주 문화의 담당자로서 등장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던 셈 이다. 도회지 은자의 세련됨 그 사건이 있고 얼마 후에 여행을 떠나 상심을 치유한 당인은 이러한 소주의 기풍을 배경으로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 도화오라는 곳에 주거지를 정하고 관료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강남풍류제 일재자'라는 인장을 만들어 자작 그림과 시문을 팔아 생계를 꾸리고, '시은'중의 '시은'으로서 단호하게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엉뚱한 행동도 어울려져 당인의 인기는 높아져서 소주 사람들은 다투어 그 작품을 찾았다. 이에 당인은 가게를 내고 의뢰에 따라 쓴 시문을 철해 장부를 만들어 그 표지에 '이시(대복장)'이라고 기록하 여, 글을 팔아 세상을 살아가는 모양을 과시했다고 하니, 더욱 멋진 변신이었다. 앞에서 나온 소동파는, 자신이 처한 상황 자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아무리 어려움에 빠 져도 자신의 처헌 상황 자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아무리 어려움에 빠져도 자신의 의도와 는 무관하게, 속세에서 생활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딴 세상의 '한림학사님'이었다. 그런데 상인계층으로부터 상승하려다 실패한 사대부 당인은 처음부터 보통 사람의 일원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속인 수준에서 살고자 했다. '강남풍류제일재자'라고 자칭하고 대복장이라는 장부를 과시한 것 도 그런 결의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똑같은 은둔이라고 해도, 사천성 벽촌의 대지주 출신이었던 소동파는 전체적으로 농민지향성 이 강하여, 대도시 소주에서 태어나 자란 생짜배기 도시인 당인의 경우와는 전혀 같이 논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발이 묶인 사대부 당인의 지극히 도회지적이었던 '시은' 생활은, 상인이 힘을 강화하여 관료 제일주의라는 전통적인 사회체제에 변화의 조짐이 엿보였던 명나라 시대가 아니고는 나올 수 없다 하겠다. 그런데 글을 팔고 그림을 파는 매문매화 생활도 안정된 뒤 당인의 기인다움은 점입가경으로, 동 료인 축윤명과 한패가 되어 수많은 기행을 거듭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고정화된 것을 싫어하는 생 활방식을 반영해서인지 그들에게는 변장하는 취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걸식하는 거지로 변장하여 부호 들을 놀린다거나, 도사로 분하여 관청에서 도관(도교 사원)의 보조금을 우려내 유흥비로 써버렸다고도 한다. 특히 당인의 변장 취미는 유명했다. 어느 날 당인은 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스쳐지나 가던 배 안 의 미녀에게 한 눈에 반해 그 뒤를 쫓았다. 그녀가 어느 퇴직한 고관의 집에서 일하는 시녀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는 당장 능숙하게 변장을 하여 가난한 서생 행세를 하며 그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그 집 고용인으로 채용되어 들어갔다. 이후 열심히 근무한 끝에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 모양 좋게 그 시녀 추 향과의 결혼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회자된 에피소드인데, 이를 소재로 하여 희곡과 소설이 제작되기 도 하였다. 명나라 말, 풍몽룡이 편찬한 단편소설집 '삼언'의 경세통언 제 26권에 담긴 '당해원, 인연에 일소한 일'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이것은 기인 당인의 자유분방한 생활방 식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았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궁극적 사치 권력기구의 조작에 튕겨 나와 그 허망함을 뼈져리게 느낀 후 반권력, 반관료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하 여 소주의 '시은'으로서 꿋꿋이 살다 간 당인, 그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은 1523년, 54세 때였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작품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살아서 이 세상에 있으면 언젠가는 열리게 되는 법. 죽어서 저 세상에 몸을 의탁하는 것 또한 괜찮은 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비슷한 것이니, 단지 떠돌가가 타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기성의 가치관을 타파하고 솔직하게 스스로의 욕망을 긍정하고 전통사회의 틀을 넘어 표류했던 당인 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죽림칠현을 시작으로 하여, 다른 차원의 자유를 추구했던 육조시인인 귀족, 어떤 때나 꺾이는 일 없이 인생을 즐겼던 소동파, '시은'으로서 꿋꿋하게 살며 표류했던 당인. 이렇게 하여 그들의 정신의 방탕, 정 신의 사치의 궤적을 더듬어 보면 말할 수 없을 만큼 통쾌한 해방감을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처럼,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절대적 자유를 목표로 하는 정신의 유희에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사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