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여자가 쓴 한국여자 비판 글쓴이: 도다 이쿠코 출판사: 현대문학 머리말 한국여성들과 어울려 살기 위하여 한국에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활기차게 보인다. 내 주변에 있는 일본에서 온 친구들 모두가 그렇게 입을 모아 말한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싸움을 하는 남녀의 경우 젊은 애인들이든 중년 부부든 목소리 큰 편은 거의가 여자고 싸움 과정에서도 여자가 우세한 경우가 많다. 가정에서도 부부싸움의 승리자는 내가 아는 한 항상 여자다. 남편들은 "남자가 져야 가정이 평화롭다"고 변명을 하지만 실제로는 싸움에 임하는 자세에서부터 싸움을 구사하는 전략까지 여자의 승리일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인지 "아내가 무섭다고"고 고백하는 한국남자도 꽤 많다. 아이들 일이나 집안일에 대해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 아내는 항상 내 의견을 물어 보지도 않고 혼자 판단해서 결정 하고는 나중에 그 결과만 알려요. 그래도 나는 그것이 차라리 좋다고 생각해요. 만약 내가 결정을 내렸는데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아내한테 얼마나 야단을 맞겠어요? 그러니까 이대로가 좋다는 거지요. 음식도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것은 별로 해주지 않아요.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요. 하지만 난 밖에서 사 먹으면 되니까 그것도 괜찮아요. 나도 수박을 좋아하는데 아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이들도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는 아내와 기호가 비슷해지니까 우리집에서는 여름에 수박을 사 먹는 일이 없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지요. 나만 참으면 되는데요, 뭐..."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나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몇몇 한국 남자들에게 들었다. 왜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이렇게 까지 강할가? 한국은 유교의 나라여서 남자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우리 외국인들은 분명히 배웠는데... 이런 현상은 결코 옜날부터 있어 온 일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 유학중이던 1980년대 중반즘, 나는 하숙집 근처에서 남편에게 얻어 맞아 얼굴이 시퍼렇게 멍든 부인들 모습을 가끔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 당시는 여자보다 남자가 강했다고 볼 수 있었다. 여자는 약한 존재여서 남자가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의식이 일반적으로 깔려 있어서인지, 당시 버스나 전철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20대 후반인 내가 젊은 남자한테 자리를 양보받은 적도 몇 번 있었다. '요즘 한국 남자가 연약해져서 여자가 대신 씩씩해진 것일까?' '그동안 억압받아 왔던 여자들의 스트레스가 이제 와서야 폭발한 것인가?' 한국에 사는 우리 외국인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지만 정확안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여자가 강해진다는 것은 같은 여자 입장에서 보면 결코 나쁜일이 아니지만 실은 강한 한국 여자들은 우리 외국인한테도 위협을 느끼게 하는 두려운 존재이다. 지금부터 15년전, 내가 한국에 유학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공중목욕탕에서 아줌마들이 벌거벗은 채 죽자고 싸우던 그 놀라웠던 광경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를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 아줌마는 무섭다'는 느낌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날이 많아지면 많아 질수록 엷어지기는커녕 더욱 증폭 되었다. 그리고 한국어를 잘 못하던 그 당시보다도 한국어를 거의 알아듣는 지금, 나는 더 강하게 '한국 여자가 무섭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는 아줌마뿐만 아니라 아가씨도 무섭다. 무서운 아가씨가 무서운 아줌마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지겠지만 그래서 나는 쇼핑하 ㄹ때 판매원에게 뭔가 물어볼게 있을 경우 아줌마 직원보다 젊은 아가씨를 여자 직원보다 남자직원을 골라 말을 건다. "차를 부딪치려면 아줌마보다 아저씨 차에 부딪치자" 한 일본인 주재원의 농담이다. 물론 상대를 골라 가면서 일부러 사고를 낼 리는 없지만 그 정도로 한국 아줌마 운전자와 사고를 내면 뒷일이 무섭다는 얘기다. 나도 그렇다. 모르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말싸움이라고 할 때면 상대가 아줌마일 경우 나한테 잘못이 없어도 아예 처음부터 승부를 포기해 버린다. 억울하지만 나에겐 한국 아줌마를 이길 자신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대로 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나, 그리고 이 책을 같이 써준 몇몇 사람들)는 앞으로도 계속 이 나라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이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한국 여자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당사자들한테 외국인의 눈에 한국 여자들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알리고 싶어서 이 책을 기획했다. 한국사회도 급속히 국제화되어 가고 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의 수도 급증했다. 또 나도 그중 한사람이지만 한국인과 결혼하는 외국인 수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을 올바로 이해하려고 하는 한국인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그래서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때로는 쓸슬하다. 좀처럼 좋은 한국 친구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며 한국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특히 상대의 마음에 심하게 상처 입히고, 때로는 화목한 국제결혼 가정을 파괴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당사자들도 반드시 알아 두었으면 한다. 이 책을 만드는 데 협조해 준 외국인과 재외교포의 수는 모두 합쳐 200명에 달한다. 그리고 원고를 써준 사람의 대부분이 여성이며 모두 한국에 몇 년씩 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중 개인 사정으로 인해 글쓴이를 밝힐 수 없는 사람이 몇몇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많은 목소리를 모아 독단을 피하고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 여자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묘사해 보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쓴 목적이다. 또한 동시댈ㄹ 사는 일본 여자들의 현실에 관해서도 한국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일본에 관해 씌어진 책이 한국에서 많이 출간되었고 때로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 많은 부분이 저자의 편견으로 인해 사실이 왜곡되고 한정된 만남과 교류 속에서만 관찰한 탓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전체적 모습이 파악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것에 대해 나는 항상 유감스럽게 생각해 왔다. 일본 여자들의 가치관도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에 어떤 원인이 있는가를 알고 그 변화가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가를 한국 독자에게 물어보고 싶다. 이 책에 묘사된 한국 여자는 평균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특이한 존재가 많을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기이한 일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런 사람들과의 체험은 더 강하게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도 비슷한 유형이 많이 나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특이한 여자들'이 한국 사회 전체에 상당히 널리 분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혹시 한국 여자의 강인함, 낙천적이고 유머 러스한 감각이야말로 다음 세대를 이뜰어가는 원동력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일 여성들 끼리 마음을 열고 많은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 세상은 더욱 살기 좋아질지 모르겠다.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한, 일 여성들이 마음을 열고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 졌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는다. 1999년 11월 도다 이쿠코 1장. 설문조사를 통해서 본 한국여성의 이미지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 여성 무엇이든 ‘우리 것이 최고야’라는 말의 실상 얼마 전, 한 한국 남성에게 일본 여성의 이미지를 생각나는 대로 솔직히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못생겼다, 몸가짐이 헤프다, 몸매가 나쁘다, 남편에게 지극 정성이다, 검소하고 절약 하는 생활 태도를 가졌다 등등을 열거했다. 경상도 출신인 그 남성은 40대 초반의 나이로, 대외적인 신분은 ‘예술가’지만, 경제적으로 보면‘실업자’라고 해야 마땅한, 어떤 의미에서는 극히 선진국형 인간이다(이와 같은 계층의 사람은 국가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면 숨쉴 수조차 없겠지만). 물론 그가 대한민국 남성을 대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본 여성에 대한 이같은 이미지는 어느 정도 한국 사회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한국 여성에 대해서도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예쁘다, 몸매가 좋다,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 질투가 심하다 등등의 사실을 열거했다. 그것으로 보아 한국 남성들은 한국 여성들이 외양은 보기 좋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더라도 먼저 예쁘다, 몸매가 좋다 등을 꼽은 것으로 보아서, 한국 남성은 무척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매일 그런 자기 나라 여성들을 쳐다보면서 흐뭇한 기분으로 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말을 한 후 이 경상도 남자는 내 속마음을 간파한 듯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국 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은 80퍼센트가 미인이지만 일본은 그 비율이 확실히 떨어져요. 일본 남성은 정말로 불쌍해요.” 일본 남자는 불쌍하다는 동정까지 받으면서 참고 있으려니, 나는 갑자기 내 조국에 사는 일본 여성들에게 면목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것이 최고야!”라며 농산물도, 음악도, 여성도 뭐든지 자기들 것이 제일이라고 자랑하는 한국인의 주관적 자기 평가가 아닌, 한국에 주재하는 일본인들(170명)에게 질문하여 한국 여성의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할 때 일본인만 조사하면 객관성이 떨어질지 모르므로, 그 밖의 외국인들 (31명)에게도 참고 삼아 이 점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물어 보았다.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일본인 170명 중 129명(76퍼센트), 그 밖의 외국인 31명 중 22명(71퍼센트)이 모두 함께 뽑은 랭킹 1위 항목은 ‘한국 여성은 화장이 너무 짙다!’였다. <제1위> 한국 여성은 화장을 너무 짙게 한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은 한국 여성의 짙은 화장에 우선 놀란다. “피부가 숨쉴 수 없을 것같이 파운데이션을 두껍게 바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35세, 남성, 캐나다, 대학교수), "죽은 사람처러 검은색 립스틱을 바른 사람을 은행 창구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60세, 남성, 일본, 상사 근무)는 등의 불만으로부터, “모 여대에서 나오는 여성들을 보았을 때 모두 매춘부인가 하고 생각했다”(40세, 남성, 미국, 여행자) 등 극단적인 지적까지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전에 모 여대 근처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하숙생 들의 얼굴이 시간에 따라 너무 심하게 변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누군가로부터 “잘 잤어요?”라고 인사를 받으면 순간 “어, 저렇게 못생긴 여자가 누구지?”하고 잠깐 혼란에 빠진다. 잠시 후 아침 식사 테이블에 앉았을 때는 이미 그 문제의 못생긴 여자는 완벽하게 화장을 끝낸 터라, ‘조금 전의 그 여자가 이 여자인가’하고 연결시켜 보지만 너무 차이가 나서 잘 가늠할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이런 혼란(?)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 평소 내가 알고 지내는 PD한 사람이 지방취재 때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서 밤중에 자신이 좋아하던 탤런트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고 한다. “실은 전부터 좋아했었어요”라고 속삭였는데, “와, 깜짝 놀랐어요. 눈썹이 없는 귀신인 거 있죠, 거기 있던 여자는.” 그 탤런트는 “나도 오래 전부터 당신이 마음에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 PD는 그녀의 얼굴이 무서워서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물론 이런 예는 극단적인 경우이고 ‘화장’이라는 것은 하나의 ‘문화’이므로, 사실 외국인이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서양 근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아온 우리들은 아프리카 오지인들이나 아시아 소수민족의 화장을 보면 확실히 이질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나쁘다’고 지적할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한국 여성의 짙은 화장도 그것이 이 나라의 고유한 ‘문화’라고 한다면, 외국인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빈틈없이 화장한 한국 여성도 이 나라의 ‘간판’으로서 당당하게 세계로 나아가 어필하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간판’하니까 떠오르는데,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한국 여성의 짙은 화장과 함께 놀라는 것 중 하나는 화려한 선전용 간판들을 들 수 있다. 빨간색 혹은 노란색의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대형 간판이 난립하는 가운데 온 거리를 둘러싼 크고 작은 현수막은 유럽 등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또한 일본이나 홍콩 등 아시아 지역에서도 거대 도시의 일부 환락가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한국인은 화장도 간판도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거듭 말하지만, 어떻게 화장을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다. 특히 그것이 민족문화라는 큰 차원의 문제라면 외국인으로서는 더욱 할말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주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화장을 하는 데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식사를 마친 다음 그대로 좌석에 앉은 채 화장을 고치는 행동이나, 화장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모두 에티켓에 벗어나는 일이다. 예전에 경험했던 일인데, 신촌에서 의정부에 갈 일이 있어 기차를 탔다. 그런데 그 기차 안에서 나는 수색역에서 장흥역까지 거의 1시간 동안 계속해서 거울을 쳐다보는 젊은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주위에는 노인분들이 줄곧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처음 한국에서 기차를 탄 것은 1990년경이었다. 그때 통일호를 타고 갔는데 기차 좌석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더니 일행이었던 한국인 남성이 내게 주의를 주었다. 우리 주위에는 도중에 기차에 오른 입석표 승객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분도 섞여 있었다. 그런 분들 앞에서 단정치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왜냐?”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나에게 그는, “지정석이므로 자리를 양보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노인들에게는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 순간 나는 예의를 존중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관습에 깊이 감동했었다. 그런데 그날 내가 교외선 기차에서 본 그 젊은 여성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지정석도 아닌데 자리를 양보하기는커녕 정신없이 화장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아무리 진한 화장을 용인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해도 화장을 한다는 이유로 아름다운 전래의 경로문화까지 무시하는 것은 좋게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여자가 지나치게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그만큼 여자가 다른 능력으로 인정받기 힘들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2위> 한국 여성은 기가 대단히 세다 이 항목에서는 일본인과 다른 외국인 간에 약간의 의견 차이를 볼 수 있었다. 일본인은 170명 중 125명(74퍼센트)이 “한국 여성은 기가 세다”고 대답한 데 비해, 다른 외국인은 31명 중 10명(32퍼센트)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일본 여성에 비해 한국 여성이 더 기가 센 것으로 보인 것같다. 몇 년 전 이런 일이 있었다. 한국인 여자친구들에게 통역을 부탁받아 서울 시내의 유명 호텔 라운지에 간 적이 있었다. 여자친구들의 거래처 사람들은 일본 남성들이었다. 우리는 재빨리 서류를 펼치고 협상에 들어갔다. 웨이트리스가 차를 가져다준 것은 그로부터 몇 분 후의 일이었다. 테이블 위에 세워 놓은 촛불이 옆에 둔 전표에 옮겨 붙어, 불길이 서류에까지 번졌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불을 꺼서 큰 화재가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문제는 불을 끈 다음에 일어났다. 내 친구드로가 웨이트리스 간에 큰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 전표를 둘 수 있죠? 이건 당신들 잘못이에요.” “아닙니다. 손님들이 부주의했기 때문입니다. 계산은 어떻게 할 겁니까, 전표가 타버렸으니.” “전표 따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쪽은 서류가 탔단 말이에요.” 화채 뒤처리는 하지도 않은 채, 한국 여성들은 라운지 안이 떠나가도록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밤 식사 약속은 취소되고 말았다. 일본측 손님들이 너누 놀라 이후의 일정을 취소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여성은 정말 무섭군요. 와! 깜짝 놀랐습니다.” 이들 일본 남성들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이런 경우 손님과 웨이트리스가 서로 “죄송합니다”라며 사과의 말로 일관했다. 거기에 지배인까지 끼여들어 몸을 낮추고 머리를 숙이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여자들끼리 말다툼하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한국에서는 시장에서도, 아파트 공원에서도 여자들끼리 하는 말싸움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서로 머리채를 움켜잡고 흔들면서 싸우는 광경도 가끔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언젠가는 포장마차에서 취한 손님을 상대로 옷을 찢겨가면서까지 싸우는 아줌마를 보고 나는 그만 기절할 뻔했다. 맨손으로 강도와 싸운 은해 여직원 이야기도 내게 는 놀랍기만 했다. “이 나라 남자들은 정말 힘들겠어요.” 이렇게 서두를 꺼낸 사람은 한국의 유명 기업체에 근무하는 일본인 독신 남성. 그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한국에 온 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맞았어요.” 아시아에서 일본 남성의 좋지 않은 언행이 비판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때린다는 건(남성과 여성을 떠나서라도) 용납하기 힘든 행동이다. 재한 일본인 사이에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이야기가 있다. 어떤 한국 여성이 애인인 일본 남성의 귀국을 막기 위해 김포공항 출국 로비에 큰 대자로 누워 :“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고 큰 소리로 계속 고함을 질렀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 여성의 성정이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한다. 잘못하면 이런 특이한 사건 때문에 한국 여성의 이미지가 나쁘게 굳어질 수도 있다. 또 어떤 한국 여성은 일본에 있는 본사까지 애인을 쫓아가서 “00씨, 나와라”고 외쳤다고 한다. 애인이 안 나오자 소지하고 있던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려다가 경비원한테 붙잡혔 다고 한다. 이런 행동은 한국과 한국인 전체에 마이너스가 될 뿐 아니라 사실 가해자인 일본 남성에게도 피해의식을 심어 주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한국 남성 중에는 “맞아요. 한국 여자는 정말로 무서워요”라며 일본 남자들에게 동정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알고 지내는 40대의 한국 부인은 웃으면서, “남편이, 밖에서 만나는 아줌마들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다. 너무 그악스럽다”는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3위> 한국 여성은 2세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다 전세계 어느 나라의 부모도 자기 아이에게는 기대를 건다. 하지만 ‘한국 여성의 이미지’ 조사에서 이 내용이 제3위라는 높은 순위로 랭크된 것을 보면, 한국의 경우는 자녀에 대한 기대의 크기가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른 듯하다. 일본에서도 부모가 자녀에게 기대를 걸지만 나름대로 기대를 거는 방식이 있다. 내 친구 중 규슈에서 300년간 계속해서 술을 만들고 있는 양조장집 아들이 있다. 그의 생기는 아소산 근처에 있는데 물이 맑은 곳으로 자연 이곳에서 만드는 술은 그 맛도 좋다. 양친은 아들이 대대로 이어오는 훌륭한 술 빚는 기술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부모와 크게 싸움을 하고 동경으로 갔고, 결국엔 신문기자가 되었다. 그런데 10년 후쯤 “아버지가 쓰러졌다”며 고향에서 부르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돌아가 마침내 양조장을 계승하여 양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라면 일본에서는 쓸어 담고도 남을 정도로 많다. 그런 전통에 의해서 14대까지 도자기 굽는 기술을 전수한 집안이 사쓰마야키의 심수관가이다. 이와는 달리 한국인의 피가 섞였지만 기술 전수를 도중에서 그만둔 집안은 아라타야키의 이참평가 쪽이다. 이와 같은 전통 장인의 경우뿐만 아니라 철도원의 아들은 철도원, 야구선수가 되는 경우가 일본에는 너무나 많다. 이같은 직종 세습이 가능한 것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기대’가 그 이면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기대’는 어떨까? 1960년대에 일본에서도 ‘교육에 극성스런 엄마’라는 뜻의 ‘교육마마’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자녀를 유명한 유치원에 입학시키려고 안달하거나 초등학생에게 방과후 학원 학습을 시키는 등 아이들 교육에 극성을 부리는 엄마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어머니들의 극성이 그 시절의 일본 엄마드로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이 ‘교육에 극성스런 엄마’가 생겨난 원인에 대해서 한 일본 평론가는 이렇게 분석했다. 일본 여성에게는 자신과 아이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우선 일본에서는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이 적다.(일본은) 여성이 진정한 의미에서 한 사람의 성숙한 인격체로 단련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런 점은 비단 공부뿐만이 아니다. 여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좋다는 생각 때문에, 갓난아기 때부터 ‘여자 주제에’, ‘여자라면’이라는 식의 말로 어떤 장난도 금지시킨다. 나무타기부터 물고기잡기까지. 따라서 자연히 일본 여성의 경우 자발성이 없어진다. 회사에 다니는 여성의 경우에는 남자 상사도 마찬가지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동성인 여성이 방해하여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다른 여성이 승진하는 것을 싫어 하는 것이다. "아이다 유지, '일본인이 잊은 것'에서" 아이다 유지의 이런 지적을 오늘날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다 유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즉 (여성에게는)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여 사회에 부딪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그 결 과, 침대에서의 공상처럼, 자신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고 멋대로 믿어 버린다. 이렇듯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과신하는 것과 함께 남편, 특히 자식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게 된다. 실제로 내 어머니도 그랬다. 자신은 여자라서 기회가 없었을 뿐 시대가 좋았더라면 동경대학 정도는 가볍게 붙었을 거라면서 언제나 내가 다니고 있던 지방대학을 무시하는 말을 하곤 했다. 한국의 어머니들을 보아도 그런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들은 자신이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기회만 있었다면 분명히 성공했을 것이라는 심한 착각(?)에 빠져 있다. 반면에 아버지들은 경쟁사회에서 시달리면서 자신의 실력을 대충 알게 되어, ‘오이 덩굴에 가지는 안 열린다’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된다. 최근 일본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상승한 탓인지, 교육에 있어서도 ‘아이들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큰 기대를 걸지만, 중학생 정도 되어서 자녀들의 등수가 대책 없이 곤두박질칠 때쯤 되면 “바보 아들은 어쩔 수 없어”하며 극성스럽던 자신의 야망을 거두어 버린다. 그리고는 자아실현 쪽으로 방향을 수정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자식을 교육시킬 때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어머니처럼 지독한 가족이기 주의를 내세우는 부모는 거의 없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처럼 자식을 의사나 검사로 만들어 가족 전체가 성공하려는 욕망은 없다. 일본의 경우 아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 출세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하는 정도이다. “어쨌든 장남만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결사적인 정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험 당일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엄청난 추위 속에서 대학 교문에 매달려 자식의 합격을 기원하는 한국 어머니들의 모습은 우리 일본인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장면이다. 물론 온 가족이 사이좋게 일심동체가 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 이다. 다만 한국 어머니들의 교육 방식을 보고 있으면, 타인과의 경쟁의식을 지나치게 부추기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보기에 좋지 않다. 초·중학생 때부터 학급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도 불쌍하지만, 그 아이들의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친한 친구의 아이들과 비교하는 등 흡사 대리전쟁을 방불케 하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어 더욱 안타깝다. 일본에서도 1970년대 입시학원에서는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말고 적이 라고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그런 탓일까, 많은 한국인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현재 일본인들의 인간관계는 매우 냉랭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지금은 크게 지양되어 정상궤도에 근접하고 있다. 부모의 지나친 기대를 등에 진 한국의 아이들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불쌍해 보인다. 한국의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가끔씩 학교 성적이 나빠서, 혹은 시험 결과가 나빠서 고민하다가 자살한 아이들의 뉴스를 볼 수 있다. “아빠, 엄마 죄송합니다...”로 시작되는 아이들의 유서는 너무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제4위> 한국 여성은 친구를 소중히 한다, 그런데... 일본의 유학생이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감동하는 것은 그 친밀한 인간관계다. 한국인 자신도 “한국인은 정이 많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정이 많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처럼 한 10년쯤 한국에 살고 있으면 “정이 많은데, 왜 가난한 소년 소녀 가장이 많을까?” 혹은 “이렇게 잘 사는데, 왜 해외입양아가 없어지지 않는 것일까?” 혹은 “거꾸로 한국인이 냉정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우선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정이 많다”는 주장에 대한 것인데, 실제로 외국에서 한 번도 산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어느 나라 국민과 어떻게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일까? 미국에서 자란 한 해외입양아 여성이 한국으로 생모를 찾으러 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끝까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 “한국인만 뜨거운 정이 있는 건 아니에요. 어느 나라에나 그런 정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지요. 적어도 나를 버린 엄마나 그 주위에 있었던 한국 사람들보다는 나를 길러준 미국인 양친이 훨씬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한국인들은 ‘정이 많다’는 것과 함께 ‘친구가 제일’이라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일본에서 유학은 유학생들의 경우 아직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친구’라고 불려진 후 갑작스럽게 ‘깊은 사귐’이 시작되었다고 놀라워한다. 특별한 용건이 없는데도 전화를 하고, 또 주말마다 어딘가로 데리고 가고, 게다가 가족의 대소사 등 갑자기 개인적인 은밀한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일본에서는 친구도 오랜 시간을 들여 아주 천천히 만든다. 특별한 용건이 없는데 서로 전화를 하는 정도의 관계는 만나서 수개월 후에나 이루어지며, 한번 그런 관계가 이루어지면 정말 평생을 만나는 깊은 사이가 된다. 또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만나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난 후에나 가능하다. 그때도 한국인처럼 부친의 직업이라든가 형제의 출신대학 등을 말하는 경우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것은 결혼할 상대가 아닌 이상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성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본에 간 한국인 유학생은 “일본인을 친구로 사귈 수 없 다”고 외로워하는 것이며, 반대로 한국에 온 일본인 유학생은 “나는 인기가 있다”고 오해를 하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인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너와 나는 친구니까’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 한다. 일본에서 ‘친구’라는 말은 ‘사랑해’라는 말과 같이 현재는 죽은 언어에 가깝다. 1960년대의 청춘소설에는 등장했었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실제 친구들끼리 말로써 '친구', 진짜 친한 친구를 계속 확인하면 도리어 이상하게 여긴다. 그것은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들이라도 일상적으로 자주 ‘사랑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일본인은 한국인이 자주 “우린 친구죠” 혹은 “엄마, 사랑해요”하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무척 당황해 한다. 그런데 이 ‘친구니까’하는 말은 한국인에게 살인적일 만큼 위력을 가진 말이 아닐까? 이 한마디로 수억의 돈이 왔다갔다하고 가정파탄이 나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사람은 영국 유학 중 IMF 사태가 터져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서 중도에 대학원을 그만둘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때 돈을 보내준 것은 가족이 아닌 바로 ‘친구’였다. ‘친구니까’라며 지원해 준 약 천만 원 정도의 돈 덕택에 그녀는 무사히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이것은 친구의 덕을 본 경우지만, 대부분의 경우 친구로 인해 터무니없는 피해를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한국 남성은 ‘친구니까’라며 부탁하는 보증서에 서명을 하는 바람에 36평짜리 아파트와 퇴직금 전액을 날렸다고 한다.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고, 80세가 된 어머니는 누나집에 가고 본인은 원룸 월세방으로 옮겨야 했다. 평화롭던 가족이 친구 덕분에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라디오의 ‘인생상담’을 듣고 있으면,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다. 가족의 다른 한쪽에는 비밀로 하고 어느 순간 아내나 남편이, 친구나 친척이 빌린 돈의 보증인이 되어 버린다. “친구니까 하면서 부탁을 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한국인이 친구를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평소 다른 사람에게는 “보증 같은 것은 절대 서는 게 아니야”라고 충고하면서도 자신은 친구의 부탁을 받으면 거절을 못한다. 이에 비해 일본인은 친구나 친척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따라서 친구 때문에 거금의 보증을 서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그러니 한국인이 볼 때, 일본인은 얼마나 차가운 사람들일까? 일본에서는 자신이 아무리 어려운 경우에 처해도 결코 '친구이기 때문에' 폐를 끼치지는 않는다.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한국인은 과연 정이 많은 것일까? 혹시 우유부단한 것은 아닐까? 한국인과 결혼한 한 일본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매번 친구에게 이용당하고 배반당하기만 한다. 배반을 당한 후에는 상대방을 향해 너는 이제 친구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를 다시 만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정이 깊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우유부단해서 그렇게 행동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은 혈연 이외의 인간관계 만들기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국 신세대 젊은이들의 교우 관계는 기성세대와는 달리 정이 없는 차가운 관계로 보인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다니는 한 일본인 학생은, “정투성이인 아저씨들 세대와 젊은 세대는 아주 달라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해타산적이에요. 교수와 연고 관계가 있는 사람이나 혹은 자신의 출세에 도움을 줄 만한 사람밖에는 만나지 않아요”하고, 아주 심하게 말하기도 한다. <제5위> 한국 여성은 몸매가 예쁘다 이 항목도 일본인과 그 밖의 외국인 간에 조금씩 의견 차이가 있었다. 일본인 170명 중 93(55퍼센트), 그 밖의 외국인은 31명 중 7명(23퍼센트)이 이렇게 지적했다. 역시 구미인은 육감적인 여성을 좋아하는 데 비해, 우리 극동인은 한국인풍의 날씬한 여성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한국을 방문한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 여성은 ‘다리가 예쁘다’며 놀란다. 분명 한국에는 늘씬하고 가는 다리를 가진 여성이 많은 대신 일본 여성처럼 굵고 굽은 다리를 가진 사람은 적은 것 같다. 일본 여성의 흉한 다리 모양은 정좌하는 습관이 원인이라고들 분석하지만, 내 생각에는 한국과 일본 여성간의 운동량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한국 여성에 정통한 어느 일본 남성의 지적을 들어보자. “한국 여성은 성장기에 거의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근육이 붙는 방식이 매우 느슨하다.” 일본에서는 소학교(한국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정규 시간에 강도 높은 운동을 의무적으로 하게 한다. 한 주에 4시간이나 되는 체육시간에는 철봉이나 매트 운동, 단거리, 마라톤, 배구나 농구 등을 정말 확실하게 시킨다. 특히 철봉이나 뜀틀은 실기 시험도 치르기 때문에 잘 못하는 학생은 늦도록 학교에 남아서 연습을 해야 한다. 게다가 체육수업 이외에도 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내가 다니던 소학교에서는 ‘숙제를 하지 않으면 운동장 다섯 바퀴 돌기’ 혹은 ‘한자 시험에서 몇 점 이하면 복도에서 무릎 꿇기’와 같은 불합리한 체벌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 성적 부진은 공부를 통해 만회해야 할 텐데 왠지 운동으로 벌을 주곤 했다. 아마 일본의 나쁜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가 아닐까. 또한 여름방학에도 아침부터 라디오 체조를 해야 했고, 학교에 가서는 수영 보충수업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욱이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체육대회 이외에도 전교 마라톤 대회라든가 계절마다 반 대항 구기대회 등이 있어서 공부와 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특히 한국과 다른 점은 방과후에 하는 클럽 활동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반수 이상의 학생이 참가하고 있어 때로는 정규 수업보다 의미가 더 클 때도 있었다. 나도 중학교, 고등학교 6년간 농구부에 소속되어, 수업 시작 전 1시간, 방과후 2시간씩 운동을 했고, 여름방학에는 거의 매일 그야말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농구 연습을 했다. 물론 체육 전문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고 보통의 진학학교였는데도 말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자전거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아 이것도 청소년기에 운동량을 늘리는 데 한몫을 한다. 이상이 나를 비롯한 많은 일본 여성이 굵고 두꺼운 다리를 갖고 있는 데 대한 이유 또는 변명이다. “몸매가 예쁜 한국 여성을 질투하는가봐”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또 솔직히 이런 별명을 해야 하는 것이 괴롭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왕 몸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더 하자면, 이 앙케트 가운데는 “한국 여성은 몸매가 예쁘다”는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 자세한 지적인 있었으므로 여기에 소개하기로 하겠다. “팔과 다리는 가늘지만 몸통은 다부지다.”(30대, 여성) “골격이 굵다. 날씬해 보이지만 뼈대는 굵다.”(30대, 여성) “허리도 가슴도 없다.”(20대, 남성) 등 그러나 무엇보다 몸매와 관련하여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와 아가씨는 완전히 다른 인종처럼 보이는데, 왜 그렇게 다른 거죠?”(20대, 여성)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의 목욕탕을 좋아해서 종종 가는 편인데, 그곳에서 주의 깊게 관심을 갖고 보는 것 중 하나는 한국 아줌마들의 훌륭한 체격이다. 나는 일본의 온천도 좋아해서 일본 아줌마들의 나체에도 익숙한 편이지만, 같은 동양인, 같은 중년인데도 확실히 살이 붙는 형태가 한, 일 여성들 간에는 다르다. 한국 아줌마가 몇 배 더 살이 쪘다. 한국 아줌마들이 살이 찌는 원인에 대해서 ‘체질이 북방계라서 그렇다’고 추론하는 사람도 있으나, 취재 결과 다음 세 가지 원인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아줌마들과의 비교이다). 첫번째는, 언제나 방바닥을 뒹굴며 지내고 있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일본과 한국은 서양이나 중국과 달리 방바닥에 앉아 생활한다. 따라서 살짝 눕게 되는 기회가 많은 편인데, 일본에서는 밤에 자는 시간 이외에 방바닥에 눕는 것을 매우 상스러운 행동으로 여긴다. 그래서 나는 태어난 이래로 엄마나 친척 아주머니가 대낮부터 다다미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 또한 상당히 몸이 아플 때 외에는 대낮에 방바닥에 눕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도 여성이 윗사람이나 남자 앞에서 누워서 뒹구는 것을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이라고 여겨 그런 경우는 없지만, 혼자 있을 때나 여자친구끼리 모이면 예외인 것 같다. 여성들이 누워서 뒹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가옥 구조상 따뜻한 온돌 탓이라고도 생각되지만, 먹자마자 바로 눕는 것이 비만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두번째는, 친구나 동네 아줌마들끼리 누워서 항상 뭔가를 먹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것은 한국에서 하숙생활을 한 재한 외국인들은 물론이고 사회생활을 한 사람들 모두가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특히 최근에는 시내 버스 안에서도 무언가를 먹고 있는 아줌마 예비군(?)도 있는데, 제발 그것만은 그만두어 주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먹는 양이 지적되었다. 한국의 아줌마는 밥을 한 그릇 가득 퍼서 먹는데, 이것도 살찌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 때문인지 한국에 유학온 일본 여성 중에는 “한국에 와서부터 살이 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 요리는 맛이 있기도 하지만 퍼 준 만큼 어쩔 수 없이 다 먹게 되기 때문이다. 아줌마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한국 여성은 아가씨나 아줌마나 걷는 자세가 매우 아름답다. 등을 쭉 펴고 똑바로 앞을 보고 걷는데, 그 자세만은 꼭 배우고 싶다. <제6위> 한국 여성은 아름답다 이번 이미지 조사에서 분명해진 것은 한국 여성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재한 외국인층은 30대 의 일본 남성이라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20대 남성으로서 “한국 여성은 아름답다”고 대답한 사람은 일본인 46명 중 18명(39퍼센트), 기타 재한 외국인은 31명 중 10명(32퍼센트)임에 비해서, 30대 일본 남성은 22명 중 11명(50퍼센트)으로 꼭 절반이 한국 여성이 아름답다고 대답했다. 더욱이 한국 여성이 자국 여성보다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30대 일본 남성은, 매우 그렇다고 생각한다 2명, 그렇다고 생각한다 13명, 같다고 본다 6명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가히 민족적 대배반(?)을 저지르고 있다. 이것은 20대 일본 남성의, 매우 그렇게 생각한다 3명, 그렇게 생각한다 14명, 같다 17명,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8명,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7명인 것과는 퍽 대조적이다. 덧붙여서 40대 이상의 일본 남성도, 그렇게 생각한다 10명, 같다 6명,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3명으로 한국 여성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아, 역시 일본의 중년 남성은 한국 여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 남성 중에는 한국 여성이 아름답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성형수술 문제와 둘째, 취직 차별에서 비롯된 문제를 꼽는다. 성형수술 문제는 아래에 별도의 항목이 있으므로 거기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취직 차별에서 비롯된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앞에서 20대 남성과 30대 이상의 남성 간에 의견 차이가 있다고 했는데, 그 원인으로는 보는 대상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즉 대다수가 유학생인 20대 일본 남성과 샐러리맨으로 처자를 가진 30대 남성의 생활권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설문조사의 대상이 된 20대 남성들은 연세대와 서울대를 비롯하여 서울 소재 대학에 적을 둔 외국인 유학생이다. 따라서 그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한국 여성이란 같은 대학이나 타 대학의 여학생, 또는 하숙집 아줌마나 지방 출신의 하숙생, 또는 이런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식당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이 중심이 될 것이다. 이에 비해 샐러리맨인 30대 일본 남성들은 같은 직장이나 근접 사무실의 여직원, 자택이 있는 동부 이촌동 주변의 고급 아파트에 사는 부인들, 혹은 접대를 하거나 받기 위해 가는 요정이나 룸살롱의 여성들을 주로 접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즉 20대 남성이 대체로 평범한 보통의 한국 여성을 만나는 데 비해 30대 일본 남성의 경우는 어느 정도 '선택된 사람들'과 주로 접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것은 스튜어디스나 뉴스 캐스터는 물론이고 호텔의 프런트나 대기업의 안내처 근무요원, 금융기관이나 백화점 등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에 근무하는 여성 직장인은 주로 미인을 배치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한국인들도 인정한다. 한국에서 산 지 20년이 된 일본 남성은 이렇게 말한다. “지방에 사는 여성과 서울에 사는 여성의 얼굴은 매우 다르다. 서울에 있는 기업은 여직원을 채용할 때 용모를 전형 조건으로 넣고 있다.” 한국에서는 미인이 아니면 유수한 기업에 취직할 수 없는 ‘취직 차별’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에서도 지금부터 10년 전 한 대기업 출판사가 여사원의 채용 조건으로 “키 작고, 못생기고, 안경 쓴 사람은 안 된다”는 차별 항목을 두고 있던 것이 발각되어 국회를 뒤흔들 정도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것은 기업이 여성을 그 사람이 가진 집무 수행 능력으로 판단하지 않고, 이른바 ‘직장의 꽃’ 정도의 존재로밖에는 취급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여성 차별 사례를 보여준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그후 여성단체나 국민의 감시가 강해져서 노골적인 차별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이 보면 “왜 저런 여성이?”라고 할 것 같은 사람이 NHK방송의 뉴스 캐스터를 맡고 있거나, 대기업의 안내처에 앉아 있는 경우를 수시로 발견할 수 있다. 1999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의 「기업의 외모 위주 여성채용 여정」이라는 기사에서 볼 수 있듯 한국에는 외모에 의한 취직 차별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한국 여성들은 취직을 위해 성형수술까지 감행하는 것이다. <제7위> 한국 여성은 성형 미인이다 연세대의 한국어 어학당은 한국 내에서도 가장 역사 깊은 한국어 교육기관으로, 지금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모이는 곳이다. 코스는 1급부터 6급까지 6단계로 나뉘어 '가갸거겨'부터 시작해서 교과에 따라 기본적인 인사, 간단한 일상회화를 배우고, 중, 상급반이 되면 더듬거리면서도 한국어를 사용하여 토론시간을 갖는다. 그 토론에서는 대개 각 개인이 한국 사회에서 느낀 체험을 중심으로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예를 들면 내가 어학당에 다니던 10년 전에는 “한국의 샐러리맨은 왜 양복에 흰 양말을 신을까?”라는 문화복장학적인 문제나 “한국인은 부딪쳐도 사과하지 않는다”는 식의 공중 도덕에 관한 문제, 그 밖에 교육 문제나 여성 차별에 관한 문제 등 여러 가지 분야에 관해 토론했다. 그 중에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반드시 화제가 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 여성은 왜 성형수술을 하는가?”하는 문제이다. 내가 어학당에서 성형수술에 관해 토론했을 즈음 나를 가르쳤던 한국인 선생은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아직 10대였던 미국인 학생을 빼고는 미국인, 재미동포, 네덜란드인, 말레이시아 화교, 일본인과 재일동포들로 이루어진 우리 학급의 학생들 모두가 그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았다. “한국 여성은 왜 모두성형수술을 하는 건가요?” 처음으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일본 여성이었다. 선생님은 이 질문에 대해 아름다운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한국 여성, 누구나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 극히 일부 사람만 성형수술을 하지요.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의 그 쌍꺼풀과 높은 코는 뭡니까? 그건 타고난 것입니까?” 그것만은 지적하지 말아야 한다고 모두들 참고 있었는데, 그만 콸라룸푸르 출신의 한 여성이 이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지적을 받은 선생님은 예쁜 선이 들어간 쌍꺼풀진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또 아름답게 오뚝 선 코를 킁킁거려 가며 반론을 제기했다. “성형이란 얼굴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쌍꺼풀 수술이나 코를 높이는 수술은 성형 안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분명히 나는 쌍꺼풀 수술과 코를 높이는 수술을 받았지만, 이 정도라면 일본인도 모두 하지 않습니까? 왜 일본 잡지에는 그런 수술에 대한 소개의 글이 가득 실려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며 그 순간 벌떡 일어난 것은 20대의 재일동포 여성이었다. “일본에서 쌍꺼풀 수술이나 코 높이는 수술을 받는 것은 가수나 탤런트, 혹은 물장사를 하는 사람들뿐이예요. 보통 사람의 경우 성형수술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 선도 들어오지 않아요. 적어도 내 친구 중에는 그런 수술을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단언할 수 있어요.” 재일동포의 확신에 찬 발언을 들으면서, 선생님은 계속 강경한 태도를 유지해 나가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그리고는 성형수술을 전혀 한 적이 없고, 그 사실을 얼굴로 증명하고 있는 나를 향해, “성형수술이 뭐가 나빠요?” 하며 따지듯이 물었다. “개인의 자유이긴 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신체에 칼을 들이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나는 논어의 말을 빌려 한국어로 말하려 했으나, 그 선생님은 “신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하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일본인들은 보수적이군요.”하며 놀라워했다. 일본인이 보수적이라고 말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엄마는 나와 내 여동생이 귀고리를 하려고 귀에 구멍을 뚫으려 했을 때 마지막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신체발부...”였다. 내가 아는 PD 한 분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옛날에 우리 민족은 부모로부터 받은 머리카락을 절대 자르지 않으려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단발령에 대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지금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하군요.” 그러나 우리가 한국인의 성형수술을 문제삼았던 것은 특별히 유교적 전통 때문은 아니었다. 토론의 끝부분에서 재일동포 여성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이 쌍꺼풀 없는 작은 눈 때문에 일본인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쌍꺼풀 수술이 받고 싶었는지 몰라요. 그래도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용모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해 냈습니다. 그래서 한국 여성들이 아무 생각 없이 성형수술을 하는 것을 보면 자부심을 상징하는 민족의 얼굴에 칼을 들이대는 행동처럼 보여 정말로 용서할 수 없어요.” 이 이야기를 들으며,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재미동포 여성도 가늘고 긴 쌍꺼풀 없는 눈을 반짝이며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That's right." 흥분해서 그런지 그녀는 영어를 썼다. <제8위> 한국 여성은 아이들을 응석받이로 키운다 한 영국인 영어 강사의 이야기.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993년경으로, 영국의 경제 불황이 마침내 끝나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대학원을 나왔어도 취직을 하지 못했던 그는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실업자가 흘러 넘치고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은 술과 마약의 유혹에 빠져 있었다. “영어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그가 전세계에 뿌린 이력서를 보고 그를 뽑아준 나라는 한국이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빌린 돈으로 간신히 비행기표를 사서 서울에 왔다. 그 당시 그는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한국에 온 그는 크게 놀랐다. 한 번도 마음에 둔 적이 없을 정도로 아시아의 작은 국가인 ‘한국’이 물질적으로 풍족한 것은 물론이고, 고도의 소비문화를 누리고 있었다. 더구나 학생들이 부모님에게서 받은 용돈으로 영어회화를 배우거나 일류 메이커 옷을 사입는 등 사치에 여념이 없는 것을 보고 그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직 첫 급료가 나오기 전이어서 생활비가 없었던 그는 영국에 있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돈 좀 보내주세요.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돕는 게 당연하단 말예요.”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입 닥쳐(Shut up)"라고 한마디 하더니 그만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년 후 그의 부인이 된 한국 여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그의 아버지는 국립대학의 주임 교수이고, 어머니도 지금은 퇴직을 했지만 전문대학의 교수였다고 한다. 이른바 중산층의 비교적 유복한 부모도 성장한 자식을 지나치게 돕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영국식 교육이다. 이런 영국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시아의 부모들은 터무니없이 자녀들에게 후한 부모라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도 같은 아시아인의 일본인이 볼 때, 자식에게 무척 후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한국인 부모, 특히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이다. 우선 내가 놀란 것은 한국에서는 쉬고 있다, 혹은 공부하고 있다, 혹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병이 나서 쉬고 있는 것도, 학생 신분으로 공부를 하는 것도, 또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도 아닌 사람이 한국 사회에는 너무 많다. 이른바 모라토리엄(moratorium: 청년이 성숙한 사회인이 되기 전에 갖는 유예 기간)이라는 것이 20대를 포함하여 30대에까지 적용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물론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며, 회사를 그만두고 실업자가 된 사람도 있다. 또 인생의 목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막노동이든 배달이든, 뭔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굶어 죽게 되어 있다. 대학을 졸업한 자식들을 벌어 먹일 정도로 일본의 부모들은 후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나이를 먹어서도 부모에게 기생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혹은 육체적으로 어디가 아픈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한국에는 다 자란 아들을 보살펴 주는 부모들이 아주 많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대학원생 신분이면서 부모의 돈으로 결혼하고 그것도 모자라 부모로부터 돈을 받아 유학을 떠나는 커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그 두 사람이 이후 진정으로 자립할 수 있을까, 하고 외국인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또 한국에는 나이 많은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긴 채, 직장에 다니는 젊은 커리어 우먼들도 많다. 그 직장 여성들은 아이를 주말에만 본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대구에 있는 부모에게 아이를 맡겨 놓았기 때문에 아이를 만나는 것은 한 달에 한 번뿐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이다. 서양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은 가족간의 유대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 도와 주던 것이, 최근에는 부모만 일방적으로 자식의 응석을 받아 주며 도와 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현재 한국의 50대 전후인 사람들은, 과연 자식들이 노후에 자신들을 보살펴 줄까 불안해 한다고 들었다. 또 한 가지, 외국인에게, 한국 여성은 아이들을 응석받이로 키우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른바 한국 여성들의 ‘가정교육’이다. 한국의 어머니는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타인에게 폐를 끼쳐도 제대로 혼을 내지 않는다. 예를 들면 목욕탕에서 아이들에게 요구르트를 먹이는 엄마들이 많다. 공공장소에서 먹는 것 자체도 문제인데(심한 아이는 탕 안에서 먹고 있다), 요구르트가 엎질러져 타인의 발에 묻어도 기껏해야 엄마가 대신해서 사과하는 정도이다. 일본의 부모라면 그런 경우 아이들로 하여금 직접 사과하도록 따끔하게 교육한다. 내 여동생이 작년에 두 살 된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놀러 왔을 때였다. 걸음이 서투른 조카가 이태원에 있는 어느 구두방에서 마네킹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동생은 조카를 엄하게 꾸짖은 뒤, “아저씨에게 사과하라”며 머리를 숙이게 했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두 살짜리 아이가 머리를 숙이니까 점원은 놀란 듯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일본인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하기 위한 가정교육이다. 서양인들에게서 자식에게 너무 후하다고 비판받는 일본 부모조차 이 정도이다. 물론 나는 서양의 가정교육이 전부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무 어른스러운 서양 아이들은 아이같지 않아서 귀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아시아식 가정교육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윗사람에게 경어를 사용하는 한국의 훌륭한 예절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가정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전통적인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젊은이가 노인을 보고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되니까 말이다. <제9위> 한국 여성은 경쟁의식이 강하다 이 설문조사에서는 한국에서 산 기간, 즉 재한 연수도 고려했다. 따라서 재한 연수에 따라 한국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약간씩 다른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재한 연수에 따라 격차가 심했던 것이 바로 이 항목이었다. 비록 전체 순위로는 9위에 머물렀지만, 재한 연수가 5년 이상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국 여성은 경쟁의식이 강하다” 는 이 항목이 5위를 차지했다. 즉 한국에 관해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한국 여성을 볼 때 이러한 이미지를 강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한국 여성과 결혼해 14년간 서울에 살고 있는 한 40대 일본 남성에 의하면, 그의 아내는 이웃집 승용차의 차종, 대학 동기생이 아파트 평수, 친구 가족의 해외 여행지는 물론이고, 부부의 섹스 횟수까지 모두 알고 있다고 한다. 그의 한국인 아내는 타인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비교하면서 때로 기뻐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여성의 경우에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한국 남성들도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것을 제멋대로 '제일' 혹은 '가장'이라는 말을 써서 수식하는 경우가 많다. “동양에서 제일 높다”고 그 높이를 자랑하는 남산 타워나 63빌딩의 경우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며, 제주도의 식물원 혹은 마산 해안에 있는 공룡의 발자국 등등, 한국인들이 '제일'이라고 꼽기 시작하면 그 내역은 한도 끝도 없다. 이때 반드시 염두에 두는 경쟁국이 있는데, 바로 일본이다. 63빌딩이 그때까지 동양에서 제일 이었던 일본 선샤인 빌딩의 60층을 의식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또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몇 개 땄는지 그 수를 셀 때는 반드시 일본을 비교 상대로 하여 한국인들은 이겼다, 졌다를 평가하는 것 같다. 이에 반대 일본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대신 자국의 전회 성적만 가지고 비교하는데, 이런 태도는 양국간에 실로 대조적이다. 일본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제일.....’을 너무 모른다. 예를 들면, 일본인이 동양에서 '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많이 노벨상을 수상했고(8명), 동양에서 가장 먼저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1951년), 남성용 속옷의 앞 자크 부분을 개발한 것도 실은 일본 주부였다는 것 등등 많이 있다(내가 이 사실을 아는 것도 친절한 한국 사람이 말해 주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일본인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며 또한 관심도 없다. 일본인이 알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세계 제일의 장수국’ 정도다. 다시 한국 여성의 경쟁의식으로 돌아가면, “한국 여성은 아이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항목에서 다룬 것처럼, 한국에서는 여성이 활약할 수 있는 장이 한정되어 있어 남성에 비해 실제로 경쟁 현장에 서게 되는 일이 많지 않다. 그 때문에 특히 가정주부가 되면, 그녀들의 경쟁의식은 대부분 남편과 아이를 통해 발현된다. 인기 텔레비젼 드라마 은실이에 등장하던 ‘극장 사장 부인’과 ‘병원 원장 부인’은 분명 그 전형으로, 표면상으로는 둘도 없는 친구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심한 경쟁의식과 질투가 불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상당한 부자로 잘 살고 있으니 남부러울 게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타인과 비교해 그를 이겨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한국 여성, 특히 중류층 이상의 한국 부인들은 미국적 자본주의의 충실한 신봉자다. 신흥 자본 주의 국가였던 미국은 유럽에 이기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공통된 전통문화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적인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극히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위치를 역사와 전통속에서 검증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비교나 경쟁으로 확인해 가는 방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때때로 미국을 매우 닮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강렬한 경쟁의식이야말로 두 나라의 자본주의를 발달시켜 저 ‘한강의 기적’을 불러 일으켰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한국인 중에도 일본과의 이런 비교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도 물론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 한국 남성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인상적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뭐든지 일본에 이기려고 한다. 올림픽, 월드컵, 자동차, 선박, 반도체 등등, 그러나 이제는 질렸다. 왜 우리는 맨날 일본을 목표로 삼아야 되나? 일본 사람은 자기들대로 잘 살라 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행복하게 살면 되지.” 확실히 그렇다.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가치와 개량화된 수치나 첨단기술이 아닌,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이다. 한국 여성도 학력이나 재력 혹은 기성의 가치관에 의해서 좌우될 것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제10위> 한국 여성은 몰개성적이다 이 조사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외국인이 한국 여성에게 갖는 이미지는 과거 서양인이 일본인에게 갖고 있던 이미지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화장이 진하다” 혹은 “아이를 응석받이로 키운다” 등은 1960년대 일본인이 많이 비판을 받던 문제들이었으며, “한국 여성은 개성이 없다”는 항목의 '개성이 없다'는 문제도 많은 외국인들이 이미 일본 여성들에게 지적했던 내용이었다. 어떤 미국인은 “일본인만 유행에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오니 한국인이 더 심해서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개성이 없다’는 내용은 주로 화장이나 헤어 스타일, 복장에 관한 것들이었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모두 패션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똑같은 모습을 하고 거리를 걷고 있다. 물론 발 끝에서 머리 끝까지 모두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외국의 거리에 비해 서울 거리의 여성들은 대체로 비슷비슷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 “이화여대 앞을 보세요. 상인들이 팔고 있는 옷도, 걷고 있는 여자들의 패션도 완전히 개성이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개성이 있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 같은 여자는 남자친구를 만날 수 없는 거죠.” 이 말을 한 사람은 미국인 영어 교사인 캐롤이다. 신장 180센티미터, 금발에 긴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그녀는 분명 서울에서는 금방 눈에 띄는 개성파 여성. 그러나 이 점이 남자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사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한편 개성이 없다는 말을 바꾸면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 있다’는 말도 된다. 분명 일본 여성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미의 패션잡지들을 흉내내고 있으며, 한국은 거기에 더하여 논노(Nonno)등 일본의 잡지까지 첨가하여 참고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일본이든 한국이든 근대적인 양복문화 자체가 서양의 것을 모방한 것이므로 국가도 개인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개성적으로 소화해 나가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일본인이 양복을 자신의 문화로서 개성적으로 입을 수 있게 된 것은 겨우 1970년대쯤 부터이다. 다카다 겐조(KENZO)라든가 미야케 잇세(ISSEI·MIYAKE)가 파리콜렉션에 가한 충격은 이제 양복은 구미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헐렁한 의상 형태나 여러 개를 겹쳐입기, 한 장의 천으로 표현해 내는 컨셉이나 자유롭게 형태가 변화하는 옷 등은 구미의 것을 모방하거나 단순히 개량한 것이 아닌, 일본적인 신체와 의복과의 관계에 기초를 둔 창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많다. 그러한 패션의 시대적 선구자들이 우선 구미에서 인정을 받은 후 자국민들에게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구미 콤플렉스가 강한 일본인과 한국인들은 자국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외국에서 인정받는 순간 그 권위 앞에 빠르게 엎드리겠지만, 그것만으로 진정 그들의 패션이 이해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일본인도 한국인도 구미 콤플렉스가 심하며 유행에 아주 약한 편이다. 유명 탤런트가 쓴 작은 선글라스가 젊은이 전체의 공통된 패션이 되기도 하고, 잘 알려진 미제 운동화를 사려고 긴 줄을 서기도 한다. 한, 일 양국간에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작은 인형이 돌연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유명 메이커 제품이나 혹은 그 제품의 모조품이 유행하는 경향을 보이는 등 유행에도 약간의 권위가 필요한 듯하다는 바로 그 점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유행과 개성 없음에 관해서 “한국인은 권위에 약하고, 일본인은 집단 의식에 약하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런 결과를 초래한 최대의 원인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의 청소년들을 제복과 치열한 입시 경쟁으로 구속해 버리는 두 나라의 획일적 교육제도에 있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순위 밖의 항목> 한국 여성은 야하다? 조사 결과 상위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한국 여성은 성에 대해 개방적이다”, “한국 여성은 섹스를 좋아한다”고 대답한 사람들도 있었다. 중국인 세 명은 그만두고라도, 한국인이 볼 때 '성 개방 왕국'인 일본에서 온 일본인 19명(한국 여성은 성에 대해 개방적이다 8명, 한국 여성은 섹스를 좋아한다 11명)이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 한국에 산 지 5년 이상 되는 장기 체재자들인 그들은 직·간접적으로 그런 한국 여성을 만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나 자신도 몇 번인가 한국 여성은 섹스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5년 전쯤의 일인데, 일본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명동에 있는 해물탕집에 간 적이 있었다. 30대부터 50대까지의 여성 6명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종업원인 아줌마가 돌연 말을 걸어왔다. “일본 남자 좀 소개해 줘요.” 그녀는 이혼해서 무척 외롭다고 했다. 내가 놀란 것은 그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40대 후반이나 50대쯤으로 보이는 그 아줌마는 갑자기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그런데, 일본 남자 거기는 어때요?” 너무 기가 막혀 말을 못하고 있으니까 그 아줌마는 이어서, “남자는 거기가 가장 중요해. 돈 같은 건 없어도 거기가 훌륭하면...” 운운하며 횡설수설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완전히 할말을 잃어버렸다. 맹세해도 좋지만, 일본에서는 대낮에 식당 아줌마가 이같은 질문을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저 아줌마가 이상한 거예요.” 한 한국인 친구가 무안한 듯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손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여자 종업원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 아줌마들은 모이면 자주 섹스 이야기를 한다. 한증막이나 목용탕 같은 ‘여성의 정원’에서 벌거벗은 아줌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난 주에는 세 번 했어요” “우리는 네 번 했어요”와 같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가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작년에 상영된 처녀들의 저녁식사 는 영화를 보니 아가씨들이 섹스 이야기로 꽃을 피오구 있었다. 영화이기 때문에 그런 대화가 가능했던 것일까?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사전에 면밀히 조사, 취재하여 극히 사실에 기반을 둔 이야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여성들끼리는 자신의 섹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일본 여성은 몸가짐이 헤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을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정말 그렇다. 특히 부부간의 일은 절대로 비밀이다. 그래서 한국 여성들이 나누는 섹스 이야기를 들으면 그 대범함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한국의 카바레다. 일본에도 카바레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남성 전용으로, 쇼를 보면서 직업적인 호스티스들과 노는 곳이다. 일본의 카바레는 한국처럼 아줌마, 아저씨가 술을 마시면서 춤추고 노는 곳이 아니다. 섹스 왕국이라 불리는 일본에는 많은 섹스 관련업소가 있지만, 모두 남자들을 위한 것이며, 여성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물장사하는 여성들이 일이 끝난 후에 가는 호스트 클럽 정도로, 상대해 주는 사람들도 모두 프로 남성들이다. 한국과 같이 ‘보통의’(직업적인 프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아저씨나 아줌마를 만날 수 있는 ‘동네 카바레’나 혹은 ‘묻지마 관광’과 같은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최근 이런 문제에 신경을 쓴 탓인지 아저씨·아줌마 커플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지난 주 정동진 횟집에서 본 50대의 두 사람도 분명히 부부는 아니었다. 일전에 대학로 레스토랑에서 옆자리에 있던 아줌마와 아저씨도 꽤 이상한 사이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평일 대낮에 맥주를 마시며 레스토랑에서 껴안고 있는 것은 동양인 부부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집 근처에 있는 여관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았다. 옆집 식당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여관 이용자의 대부분이 나이가 꽤 있는 아줌마와 아저씨들이라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더 좋은 호텔에 가요. 여기는 유부남, 유부녀 전문이에요.” 자,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은 성이 개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일본에서는 잡지, 비디오, 유흥업소까지 성에 대한 어떤 터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의 이야기다. 또한 그런 곳에서 갖는 성관계란 어둡고 끈적끈적하다. 성이 음침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또는 한국 사람의 성문제는 환하고 대범하다고 보여진다. 좋다 나쁘다의 가치평가 문제를 떠나서 아무튼 한국은 정말 ‘성이 개방된 곳’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도, 살이 쪄도, 짧은 손톱을 빨갛게 칠한 섹시한 아줌마들. 솔직히 말해서, 요즘에는 그런 것들이 약간 부럽게 느껴진다. 음악을 코에 건 공주님들 "나, 이 옷 입기 싫어“ 서울 올림픽의 열기도 식은 1988년 10월. 나는 국립 오페라단의 연출을 맡은 일본인 연출가의 통역으로 국립극장에 다니고 있었다. 근 10년 동안 오페라 합창단에 소속되어 많은 무대에 섰던 내게 가까이에서 보는 한국 오페라계는 올라움의 연속이었다. 또한 3년간 유학생으로서 생활하고 있던 때에는 깨닫지 못했던 일들을 현장에서 직면하고 자꾸 분노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물론 “일본이 옳다!”고 소리 높여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는 한국의 방식이 있으며, 그것을 따라야 잘 될 수 있다면 내가 뭐라고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러 일본으로부터 연출가를 초청해 놓고는 왜 저럴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국립 오페라단에 연출가로 초청된 외국인들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려고 한다고 한다. 초청때와는 달리 내한해서 겪어보면 말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것 을 한국인의 논리로 밀고 나가려고 하기 때문일까? 오페라의 경우, 연출가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조명, 디자이너, 무대 장치가를 선택한다. 의상도 그렇다. 의상 디자이너는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합창단 한 사람 한 사람 몫의 디자인화를 그린다. 그렇게 때문에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1988년 한국의 국립 오페라단 솔리스트에게 의상 디자이너의 지시대로 의상이 주어졌다.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성격에 따라 완벽하게 고증을 한 의상이었다. 그러나 합창단에게는 새로운 의상을 맞춰 줄만한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 극립극장이 보관하고 있는 의상 중에서 연출가가 선택한 것을 주었다. 무대나 조명에는 어울리지 않는 색채의 드레스도 있었으나 현실을 고려 할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때 한 솔리스트가 말 했다. “합창단이 입은 드레스는 고운데, 내 것은 지저분한 색이지? 입고 싶지 않아!” 그리고 원작에서 지정하고 있는 안대도 “이런 것 차고는 노래할 수 없어!”하며 벗어 버렸다. 이런 행동은 무대인으로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행동이었어지만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연출가와 나 밖에 없는것 같았다. 역시 이 오페라의 타이틀 역을 맡아주는 남성도“이 모자는 싫어." ”이 호박바지와 스타킹은 싫어”하며 마음대로 바꿔버렸다. 어울리지 않는 것은 의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체형 때문이었으나, 그렇게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오페라 무대는 프랑스 인형의 품평회가 아닌데도... 의상을 입은채 화장을 하거나 식사를 하지않는 일본과는 달리 화장을 하고 당당하게 바깥 식당에 가는것도 한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내가 본 것은 어느 민간 오페라단에서의 일이었는데, 아무도 심지어 단장조차도 주의를 주지 않았다. 그런 행동은 한국에서는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이었다. "의상? 내 것도 아닌데 뭐“ 하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이 잘못하고 있는것 아냐? 일본의 경우 지휘자 아래 부지휘자가 있다. 대체로 부지휘자는 지휘자의 제자가 많은데, 지휘자가 사정이 생겨 올 수 없을때는 연습을 대신 맡긴다. 그들 이외에도 음악연습을 충실하게 시키기 위한 스텝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이런 경우가 생기면 모인 사람들이 자주적으로 연습을 진행한다. 연습중 어떤 프리마돈나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피아니스트에게 "당신이 잘못 하고 있는 것" 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또 본 지휘자가 와서 지휘봉을 휘두르는데 아무래도 박자를 맞추기가 힘들자 "이런 상황에서는 노래 할 수 없어요. 지휘가 안 좋아요“ 하며 남의 탓을 돌리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에서 지휘자는 피아니스트든 윗사람 혹은 프리마돈나의 한마디에 무조건 잠자코 따른다.이래서는 결코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종적인 사회, 계급적인 사회의 폐해일가? 목소리만 아름답다고 해서 오페라를 하는것은 아닐텐네... 사족이지만 한마디 더하면 일본에서는 극장에 들어가면 청소하는 아줌마에게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해야 한다고 배웠다.그것은 무대 뒤에서 뒷바라지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공연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상, 조명, 소품들을 담당하는 스텝에게도 연습실에 가면 먼저 인사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의 프리마돈나는 인사는 커녕 의상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노래 할 부분이 너무 적어! 일본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오페라 가수 A씨의 이야기. 몇 년 전 동경에서 한일 가수 네 명이 참여하는 음악회가 열려, 한국으로부터 온 A씨와 그녀가 추천한 바리톤이 함께 출연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같은 음악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음악회는 일본측은 한국어로 한국측은 일본어로 부르도록 되어 있었으며 노래할 곡목도 많았다. 나는 일본어를 잘하는 A씨 앞으로 동경에서 악보를 보내면서 일본어를 잘 모르는 바리톤에게 자질구레한 일, 예를 들면, 노래 불러야 할 곳, 일본어로 된 지휘 내용등을 써서 첨부했다. 그런데 서울에 가서 내가 바리톤에게 전화를 하자 " 나는 어느 부분을 노래 합니까?"하고 당황한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A씨로부터 단지 악보만 넘겨 받았을 뿐이라고. 일본어를 잘 알지 못하는 바리톤에게 A씨가 당연히 친절하게 가르쳐 줄 것이라고 믿은 우리들이 너무 낙관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왜 잘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바리톤께서는 일본어를 잘 모르잖아요.“ 화를 내는 내게 오페가 가수 A씨는 악보를 넘기면서 한마디 할 뿐이었다. "내가 노래 할 부분이 너무 적어!' A씨는 한국의 대학원을 나온 후 동경의 대학원으로 진학햇다. 공부에 몰두할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타고난 자질이 우수한 것인지 그런A씨가 유학을 거의 끝낼 무렵의 일이다. A씨는 대학원의 석사학위 논문을 번역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한 장에 번역료를 얼마 주면 좋을까하고 내게 전화해 왔다. 어쩌다 우여곡절끝에 내가 맡게 되었다. "사례는 필요없습니다. 그렇지만 초가을에는 내가 바쁘니까 여름까지 반드시 원고를 보내 주세요“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후 내가 몇 번이나 독촉을 했는데도 원고를 담은 두꺼운 봉투가 도착한 것은 이미 가을 바람이 불고 있던 무렵이었다. “ 왜 약속한 때에 보내지 않았어요?난 이제 시간이 없어요.” 내가 말하자 A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저는 내년 3월에 졸업을 할 수 없지 않아요. 곤란해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에게는 주저하는 빛이 전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어렵게 시간을 내어 짬짬이 번역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때로는 던킨 도넛 가게에서, 때로는 찻집에서 부지런히 일해 마침내 끝을 냈다. 번역해 놓은 것을 건네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그녀는 내가 일을 돕고 있던 음악사무소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심히 논문을 고쳐쓰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지도교수님이 논문이 너무 완벽한 일본어로 되어 있으면 누군가 대신 해준 것이 되어 난처 하다고 들었거든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본인이 하지!’ 하는 말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후 논문 통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A씨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녀에게서 엽서가 왔다. 거기에는 “이젠 서울로 돌아갑니다 .감사합니다”라고만 쓰여 있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 같은 대학원에 유학했던 한국인 남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A씨는 같은 이야기라도 항상 모르는 척했지요.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냉정했어요. 그런데 내가 한국에서 유명한 음악 평론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갑자기 인사하러 오더군요.” 역시 같은 대학원에 다니며 A씨와 지도교수도 같은 선배 한국인 여성은 흥분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오페라 가수 A씨가 일본의 음악회에 출연할 때 꽤 많은 표를 부탁 받았어요. 외국에서는 아는 사람도 없을텐데 힘들거 같아서 표를 파는데 도움을 주었지요.그런데 내가 서울에서 공연을 할 때, 그녀는 서울에 있으면서도 오지도 않았어요. 도움을 주기는 커녕.” 후에 알게된 것이지만, 오페가 가수 A씨는 별 어려움 없이 자란 부잣집 딸이었다. 이미 결혼해서 자녀를 두고 유학을 왔지만, 노래에만 전념하면 되는 팔자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나는 한국 여성 중에서 그런 타입이 가장 싫다. 그렇지만 많은 한국 여성들이 이런 타입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다. 런던에 유학하고 있는 일본인 여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시험 전날 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한국인 유학생이 서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내일 아침까지 어떻게 해서라도 리포트를 제출하지 않으면 안 돼요. 도와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했다. "나도 내일 시험이 있어 도와 줄 수가 없어요"하며 거절하자 그녀는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 라고 말했다 한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 언젠가 한국인들을 향해 나도 이런 말을 한번 쓰고 싶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한국 여성의 약삭빠름 평소에 잘 보여 두면 자기한테 이득이 되는 사람한테만 만면에 웃음을 지어보이는 A씨. 아첨을 해두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면 , 나를 대하는 테도도 갑자기 달라진다. 호칭도 ‘선생님’이 되고 음성도 간사해진다. 이러한 아첨이 귀엽게 비쳤는지, 그녀를 지원하는 일본인 스폰서가 있었다. 그 덕택에 그녀는 일본에서 노래할 기회가 많았다. 내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상대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면 A씨야말로 최한의 인간이다." 라고 어떤 한국인 남성에게 흥분해서 모조리 털어놓자 내 말을 들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내가 보아도 잘 압니다.하지만 열심히 자신이 노래할 자리를 만들려고 하고 있질 않습니까? 저는 이해 할 수 있어요." 너무나 관대한 한국인 남성들! 그렇지만 그러한 관용이 오늘날 한국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는 음악가 하면 대체로 부잣집 출신이라고 생각한다. 음악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음대 여학생들 중에는 공주님이 많다. 그리고 이런 공주님들이 나중에 교수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게 된다. 나는 솔직히 말해 이런 사람들에게서 교육을 받을 한국의 2세 음악가들이 걱정이 된다. 앞에서 내가 보아온 이들 여성들은 이제 과거 한국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실력만으로 해외무대에 서는 한국인 성악가들도 수없이 많다. 그러한 사람들이 점차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국 오페라를 만들어 내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언제였었는지 잊었으나, 어떤 젊은 한국인 남성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여성은 특별한 미인도 없지만 특별히 못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일본 여성은 매우 놀랄 정도로 미인이 있는가 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못생긴 사람도 있다." 작년에 서울에서 택시를 탔는데, 딸을 일본에 유학보내고 있다는 운전기사가 말했다. "우리나라 여성은 확실히 예뻐요. 일본여성과 비교해서요. 그렇지만 우리나라 여자들이 예쁜 것은 얼굴 뿐이지요.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서비스 제로인 백의의 천사들 엄살을 떨어야 치료도 받을 수 있다! “운이 없었다” 한국인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한국에서 산 3년간 나는 확실히 운이 없었다. 은행의 창구 직원이 여성이었던것도, 우연히 들어간 옷가게 점원이 여성 이었던 것도, 전화를 받은 사람이 여성이었던 것도 모두 내가 운이 없었던 탓이다. 한국에 온 지 삼년째가 되던 해 가을,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의 충격에 비해서는 경상이었지만 얼마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그러나 처음 실려간 병원은 도저히 환자의 병구완에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편의 판단에 따라 서울 시내병원의 외국인 전용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곳은 시설은 물론 환자 대우도 좋다고 평판이 나 있었다. 한 일본인 친구에게서 " 한 번은 입원할 가치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평소 나는 한국인들의 서비스 자체에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병원은 일본에도 알려져 있는 한국의 대재벌이 경영하는 큰 병원의, 그것도 외국인 전용 병동이었었으므로 당연히 쾌적한 입원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입원 다음날이 되자 사고 당시에는 몰랐던 상처가 드러나면서 몸의 여기저기가 새롭게 아파왔다. 범퍼에 부딪힌 좌대퇴골에 큰 멍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오는 회진 의사에게 그 부분과 팔, 허리 등 그때 그때 아픈 부위를 설명했다. 사흘째부터 드디어 본격적인 통증이 몰려왔다. 나흘째 되는날 아침, 나는 당시 정형외과 진찰을 받고 싶다는 뜻을 간호사에게 전했다. 통증도 그렇지만 나중에 후휴증이 생겨 가해자측과 교섭할때 카르테에 기록이 없으면 불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그래요?"하고는 별말 없이 병실을 나가 버렸다. 그후에도 나는 간호사가 병실에 올 때마다 진찰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간호사들은 나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애매한 미소만 띤 채 고개를 갸웃하며 병실을 나갔다. 점심 때쯤 되자 나는 화가 치밀었다. "왜 아프다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 거야“하며 짜증을 내고 있는데,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녀는 한국인과 결혼해 20년 가까이 한국에 살고 있었다. 내 상태를 걱정해 전화한 그녀에게 나는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호소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게 설명해 주었다. "평소 한국인들은 실제 통증보다 백 배 정도 과장해서 주장하니까, 간호사들이 그저 아프다고 하는 정도의 일본사람 말에는 전혀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거야." 내 말을 듣고 그녀는 , "더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 안돼“라고 충고했다. 왜 '아프다는 것만으로는 한국에서 통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일에 체력과 신경을 쓰면 더 아파질텐데. 나는 맥이 빠져 수화기를 놓았다. 그후 점심 때 약을 갖다주러 온 간호사에게 나는 다시 강한 어조로 물었다. "아침부터 진찰을 받고 싶다고 했는데, 받을 수 있어요, 없어요?" 힐난하듯 하는 내 말에 간호사는 "조금만 기다리세요“하고 병실을 나갔다.곧 다른 간호사가 와서 내 허벅지의 멍을 보고는 "주사를 놓을까?"라고 귀찮은 듯 내뱉고는 나갔다. 곧 다른 간호사가 와서 진통제를 놓을 준비를 했다. 그쯤에서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다. "후자켄나(웃기지마)! 난 진찰을 받고 싶다고 했어 뭐야 그건? 그런걸로 넘어가려고 하는 거야? 웃기지 마! 난 어제부터 아프다고 했어. 그런데 아무 처치도 안해주고, 이것도 병원이야!?" 나는 일본어로 쏘아 붙였다. 간호사는 일본어를 모르니까 내가 뭐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면서도 아무튼 심하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녀는 당황했는지 "자.....잠깐만 기다리세요“하고 서둘러 병실을 나가려 했다. 그 뒤에 대고 나는 몰아붙이듯 쏘아댔다. "잠깐 기다려라, 잠깐 기다려라, 아침부터 몇 번이나 그랬어요? 이번엔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정말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잽싸게 해요“ 나는 소리를 지르며 베개 밑에 있던 책을 그녀에게 던졌다.책은 그녀의 어깨를 스쳐 벽에 부딪혔다. 던졌을때의 기세와 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커버와 본체가 분리된 책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마루에 떨어졌다.그 순간, 그녀는 안색이 변하면서 병실을 뛰쳐나갔다. 곧 여러명의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네 명의 여자가 내 침대를 에워쌌다. 주임 같아 보이는 간호사가 내 왼쪽에 선 사복 여성을 가리키며 “이분은 통역이에요. 일본어로 말하세요”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아침부터의 전말을 이야기 했고 그녀는 간호사들에게 그 말을 통역했다. 통역의 설명을 들은 후 주임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방사선이 2시 부터라서..." 통역할 것도 없었지만 나는 다시 통역을 통해 들었다. “아침부터 말했는데 오후라고? 더구나 나는 정형와과 진찰을 받고 싶다고 했잖아요. 어쨌든, 일본인은 당신들처럼 아프다는 큰소란은 안 피워요. 그래도 일본인이 아프다 하면 정말 아픈거라구요!” 통역이 이말을 전해주자 주임은, "우선, 뼈에 이상이 없는지 보지 않으면 안돼요. 그래도 방사선 진찰은 2시 부터라서”라고 말했다. “그럼 2시가 되면 내가 진찰을 받을 수 있는 거군요.” 주임은 통역을 통해 내말을 듣고 당황한 듯 어린 간호사에게 지시했다. “빨리 방사선과에 예약해 둬.” “그럼 방사선 진찰 후 정형외과 진찰도 되는 거죠?” “오늘 될지는 모르겠어요. 오후 진찰이 만원일지도 몰라요.” “아침부터 말했는데 왜 빨리 예약하지 않았어요?” “우선 방사선 진찰을 안하면...” “그럼 왜 오전중에 그 처치를 안 했죠?” “방사선 결과를 모르면......” 또 시작이다. 똑같이 반복되는 입씨름. 부상당한 몸과 정신에 이런 실랑이는 나쁜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환자를 상대로 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간호사의 무신경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결국 이 사람들은 화가 난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와 있을 뿐,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고 있다. 좋게 말하면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는것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지나치게 소중히 한다. 물론 미풍양속이다.그러나 거기에는 만일 자기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면 자기를 대신해 난리쳐주는 존재를 확보해 둔다는 자기 방위적인 의미도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듯 헌신적인 가족과 친구가 없다면 이 나라에서는 살 수 없으니까. 일본 여자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날 일본에서 어머니가 오실 예정이었다. 남편 회사의 직원이 어머니를 안내해서 간호사 대기실 앞을 지나칠때 한 간호사가 직원에게, “그녀가 오늘 화가 많이 났어요. 화가 나서 책을 던졌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니 그 직원도 오랫동안 건성으로 일본인과 일해온것이 아니어서 , “무슨 짓을 했어요? 당신들이 뭔가 화낼 일을 한 게 아니에요?” 하고 되받아쳤다고 한다. 그들은 결국 나를 화나게 한 자기들의 잘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것 같았다. 오후에 주임급 간호사가 찾아왔을 때 남편회사의 직원이 다시 "왜 바로 처치하지 않았느냐?"고 항의 했다. 그랬더니 그 간호사는 "그렇게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일본인이 아프다고 하면 정말 아픈거다“라고 직원이 말하자 "서로 감각이 다르니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 "바로 감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외국인을 위한 클리닉이 있는것 아니에요?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한다면 외국인 클리닉이라는 간판을 내리는게 어때요?"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국의 병원에서 일본처럼 '환자의 고통에 민감하라‘는 직업정신을 요구할 수는 없다. 독일에서도 그곳에 살던 친구에 의하면 환자 자신이 "아프니까 마취해줘요“라고 하지 않으면 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 발 앞서 처치해주는 일본인 병원이 특수한 경우라 하겠다. 그러나 나는 정형외과 진찰을 받고 싶다고 분명히 주장했었다.그 주장하는 방법이 한국과 다르다고 해서 모르는체하는 사고방식을 나는 이해 할 수 없다.외국인도 한국인처럼 손발을 휘둘러가며 층 전체에 울려퍼지도록 큰 소리로 떠들어 대라는 것인가? 나의 통역을 해준 여성도 실은 일본인 사이에서는 매우 평판이 나빴다. 의사에게 질문해 주었으면 하는 내용을 말해도 제대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진찰 후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야 할 때 는 아예 자리에 없기 일쑤였다. 이쪽이 한국어를 조금 한다는 것을 알면 “아시네요”하면서 금방 어디론가 가버렸다. 접수창구의 귀찮은 듯한 볼멘 표정과 태도도 어느쪽이 서비스를 받는 쪽인지를 모르게 한다. 지난번에도 친구가 고열이 내리지 않는 아내의 진찰을 부탁하려고 전화를 걸어, “좀 빨리와 주세요”하고 불평을 했더니 상대방은 아직 접수가 안된다고 한 모양이었다. “벌써 아침 10시에요. 도대체 몇시에 상태가 더 나빠져야 접수를 받아준다는 거예요?” 하도 어이가 없어 친구는 큰 소릴 질렀다고 한다. 그렇게 불친절한 대접을 받으면서 우리 외국인들은 고액의 통역료를 꼬박꼬박 지불해야 한다.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흘러 , 다행히 후휴증없이 건강하게 일본으로 돌아와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병원의 의사나 직원의 덕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감사의 마음을 느낀다면 상처를 예쁘게 봉합해준 처음 입원한 병원의 의사에 대해서 일뿐이다. 나는 담당간호사가 여성이었기에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후에도 여러 상황에서 한국의 여성 때문에 불쾌한 일을 당했지만, 그것도 모두 내가 운이 없었던 탓이겠지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본 여자로 태어났으이까. 비교 일본여교사의 생활과 직업의식 당돌한 아이들, 기죽은 선생님 최근 일본의 학교에서는 ‘학급붕괴’ 현상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수업시간 중 학생들이 갑자기 소란을 피워(잡담,돌아다니기, 싸움 등)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내 친구인 남자교사(40대,교사경력은 20년에 이르고 한,일 합동 수업연구회에서 실무보고로 칭찬을 받기도 한 우수한 교사이다)가 5학년 담임을 맡았다.그런데 현재 ‘수업중에 불이 붙은 걸레가 날아디니는’교실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어린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나 자신도 붕괴하고 있는 학급의 담임을 맡아 1년간의 분투끝에 가까스로 정상적인 학급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심신의 피로 때문에 목에서 어깨, 팔까지 마비가 되는 경견완증의 발병과 지병인 십이지장궤양이 악화됨에 따라 휴직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러한 학급의 붕괴현상은 일찍이 23년간의 교사생활동안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학급붕괴의 한 예를 들면 , 학급의 당번 역할로 그룹을 정하고자 해도 "누구누구와는 싫다", "하고 싶지 않다"며 학생들이 제멋대로 굴어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당번이 정해진 후에도 당번 역할(동식물 사육 담당, 급식담당, 칠판청소 등)을 성실하게 하는 아이가 오히려 바보 취급을 당할 정도로 태만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 이다. 수업 중에도 주위와는 상관없이 계속 싸움을 하는 학생도 있다. 예를들면, 답이 틀린 아이에게 한 아이가 “바보!”라고 욕하면, 답이 틀린 아이는 “뭐야! 너 죽어”라고 응수하면서 서로 치고받는다. 그런 아이들은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손장난을 하고 있거나 숨어서 노트에 낙서를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수업중에 만화책을 펴 놓고 읽기도 한다. 싸움도 상당히 격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치고 받고, 책상과 의자를 차서 쓰러뜨린다. 때로는 책상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책, 필통 등을 던지는 정도는 늘상 있는 일이다. 나는 문제의 그 학급에서 교사용 테이프, 연필깍이가 부서져 있는 등 제대로된 물건이 하나도 없는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약 1개월 사이로 로커의 창문이 깨졌고, 화장실의 문도 덩크슛 흉내놀이로 매달리고 차고 해서 부서졌다. 어느 날은 금붕어 어항에 칠판용 분필을 던져넣어 굼붕어들이 전멸해 있기도 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한 장난이 날마다 계속된다. 놀이도구를 학교에 가져오는 것은 다반사이고 차임벨이 울리고야 교실에 들러와 착석하는 등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준비물을 안가져 오거나 숙제를 안해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수업 중에 몇 번 씩이나 주의를 주지 않으면 안되므로 수업진도도 느려진다. 오늘은 무슨일이 일어날까?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될까? 나는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므로 언제나 피곤했다. '학급붕괴'를 묘사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학원의 이러한 붕괴현상은 교내 폭력 등과 함께 이전부터도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는 고학년의 경우만 몇 년에 한 번 꼴로 ‘거칠어진 학급’이라는 표현하에 교사 전체가 대책을 강구하는 정도였다.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이러한 학급붕괴가 저학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더욱이 그것이 어떤 특정한 경우가 아니라 학년 전체로 번져가고 있는것이 특징이다. 초등학교의 학급담임을 맡고 있는 교사의 대다수가 학급담임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적이 있다는 통계가 신문에 발표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교사들에게 신경증이나 스트레스성 질환이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도 많이 나오고 있다. 이유 없이 메슥거리고 빡도는 일본 어린이들 전체적으로 일본 학교교육의 위기라 불리는 점에 관하여 알아보자. 1998년 현재 일본 부등교아(이전에는 등교거부아 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 되었으나, 거부하면서 가고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갈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인정하는 표현으로 바뀌었다.)의 수는 의무교욱 단계인 초중학생만 해도 약 10만명이다. 거의 모든 초,증학교에 부등교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교실에는 가고 싶지 않지만 의무실이라면 가도 좋다는 어린이를 위해서 의무실 등교라는 방법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교장실 등교라는 경우도 있다.교실에서 모두가 받는 수없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양호 선생, 혹은 다른 선생에게 개별적으로 학습지도를 받을 수 있다). 부등교인 채로 한번도 학교수업에 출석하지 않거도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의무교육이므로 낙제는 없다. 부등교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학급내에서의 이지메가 원인인 경우도 적지 않다. 학교내의 이지메와 따돌림은 이제 교사나 학교의 힘으로는 해결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된 일로서, 최근 어린이들 사이에 메슥거린다‘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화가 난다, 또는 열받는다라는 단어의 과격한 표현으로, 어디까지나 어린이들에게는 생리적 현상의 표현이다. 남을 때리거나 물체를 파손한 학생에게 "왜 이런 폭력을 행했느냐?"고 물으면 그는“메슥거리니까”하고 대답한다. 이유는 없다. 생리적 현상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저놈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메슥거린다."고 하면서 이지메(집단으로 무시하고 굴욕적인 별명을 붙이거나 소지품을 부수는 등 괴롭힘을 계속하는 행위)를 정당화 하는 이유로 삼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메슥거린다‘에서 '빡돈다’라는 단어도 많은 어린이들이 사용한다.'빡돈다‘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이제는 생리현상에대한 설명이기보다는 즉각적인 반응에 가깝다.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행동이 유발되는 상태의 설명이다.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사용하는 중학생의 살상사건이 잇따르자 학교에서는 나이프를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소지품 검사를 하는 학교도 나왔다. 동성인 학생간, 혹은 남학생이 여핵생을 다치게 하는 사건들이 연발하다가 마침내 교사가 희생되는 일까지 일어났다.1998년,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26세의 여교사가 수업에 지각한 중1남학생에게 주의를 주는순간, 그 남학생이 "까불지마!"하며 갑자기 버터플라이 나이프로 여교사를 찔러 그 자리에서 사망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처럼 교내 폭력은 점점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발생건수를 보면 1996녀에는 1862건이었지만 1998년에는 8000건으로 증가했다. 중학교 5개교 중 1개교 꼴로 발생한 셈이다. 그중 학생들의 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교사의 수는 569(1998년)으로 15명이 고교, 나머지 554명이 중학교 교사였다. 학교 내에서, 대낮에,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찔려 죽는다는 이러한 쇼킹한 사건은 '빡도는 어린이들‘이라는 표현을 낳아 '빡돌지 않는 어린이로 기르기위한 식생활’ 등을 광고 문안으로 내건 책들이 다수 출판되기도 했다. 문부성도 서둘러 대책 마련에 부심중이다. 그러나 원인을 구명하지 못한채, 충실한 가정교육을 그 해결책으로 보고 가정교육노트라는 소책자를 초중학생들의 가정에 배포한 정도여서 좋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린이들의 변화는 어른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으로 여겨야 하지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1997년에 일어난 고베 초등학교 살인사건은 어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살인을 저지른 소년은 당시 14세였다. 소년은 망치와 칼 등을 가지고 다니며 부근의 초등학생들은 연쇄적으로 덮쳤다. 피해자 중 소녀 한 명이 사망하고 또 한명의 소녀는 중상을 입었다. 소년이 체포된 것은 세 명째의 희생자인 소년을 죽이고 그 목을 절단하여 자기가 다니던 중학교의 문앞에 갖다놓은 후였다.더 이상 잔인 할 수 없는 행위를 한것이다.범인인 소년은 신문사에 범행 성명문을 보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다.이것은 게임이다“라며 어른들을 비웃었다. 체포 후 범인의 자택에서 톱,칼 ,고양이 시체 등이 발견 되었었는데, 그때까지 부모와 학교 교사들은 범인인 소년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평범한 아이라 생각되는 , 평소 비행 경험도 없고 타인들의 눈에도 잘 뛰지 않던 아이들이 계속해서 잔혹한 사건을 벌이는 시대가 되고 만것이다. 현실감이 희박한 아이들의 감동없는 세상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현재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한 내용에 귀를 기울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다음과 같다.즉 지금의 아이들은 살아 있다는 실감이 희박하다는 것이다.앞서 언급한 고베 초등학생 살해 사건의 범인인 소년도 스스로를 '투명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에게 자기의 목숨도 가볍고 남의 목숨도 가볍다. 초등학생 중에는 죽인다‘는 말을 너무도 간단히,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텔레비젼 게임에 열중하는 아이가 늘어난 영향일지도 모른다. 텔레비젼 게임의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죽어도 리셋버튼을 누르면 몇 번이라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생생한 표정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생각된다.감동이 없고, 남의 세계에 침입하는 경우도 없으며, 남이 자기 세계에 침입하는 것도 싫어한다.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 항상 무언가에 떨고 있다.그런 불안감 때문에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어떤 아이들은 칼을 가지고 거리를 걷는지도 모른다. 또 남과의 관계 형성도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다.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친구간 누구도 진심으로 화를 내지도 않고, 자기 주장을 하지도 않고, 겉으로 보기엔 아무일도 없는 상태로 유지하고 있지만, 그 연결고리가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따라서 붕 떠있는 자아는 만화와 텔레비젼 에니메이션,게임의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사이를 쉽게 왔다갔다 하다가 마침내는 현실과 잘 구별이 되지 않는 카오스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린이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우리들 어른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들 교사와 학교인 지도 모른다 어늘날 교사가 위축되어 버린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십수 년 전부터 학교애 대한 사회의 비판이나 간섭이 높아지고 있다. 부모 맘에 들지 않는 담임을 학부모들이 내쫓는 행위는 이제 드문일이 아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어린이와 마음으로 대화하지 않고 공부만 가르치는 샐러리맨 교사가 늘고 있다. 성적을 매기는 시기는 사무작업이 많아 바쁘기는 하지만,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부모로 부터 아이들의 이지메에 관한 상담 신청을 받았으면서도 모른 척 이를 거절한 교사도 있었다. 교사들에게는 이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성적표를 가한내에 제출하는 것이 더 중요한 듯 하다. 교사가 사무 능력으로 평가받는 풍조도 강해져 느긋하게 아이들과 놀고 있을 수도 없게 됐다. 그 결과 아이들과의 의사소통 범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증학교에서는 '내신서‘라는 것으로 학생들 목을 조이고 있다. 고교 진학이라는 장래에의 패스포트가 선생이 쓰는 내신 성적이 따라 좌우된다. 학생들은 일상생활의 행동 전체가 점수화 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학생들은 선생님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하지 못하게 되고, 마음 한구석에는 관리자에대한 불신감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동급생과 선배의 이지메가 무서운 중학생은 자연히 주변에 신경을 쓰고 지기 주장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된다. 선생님에게도 상담할 수 없다. 결국 학교에서 자유로이 공부할 수도 없게 되자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늘어나서 최근 문부성이 학원과의 연대, 공존 방안을 제창하고 나섰다. 결국 학교 교욱의 패배를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너무 바쁘고 지쳐있는 교사들 일본 교사의 업무에는 한계가 없다. 수업 준비와 교재연구는 하면 할 수록 끝이 없다.아이들이 집중 할 수 있도록 이해하기 쉽게 수업을 구성하는데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더욱이 초등학교 에서 담임이 여러교과를 가르치기 때문에 제대로 준비하려면 시간이 너무도 많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하교한 후에 이런 저런 회의가 있어서 (사무적인 업무 외에도 생활지도와 행사, 써클활동 등 학교의 전체적인 생활지도가 있다.아무리 소규모의 학교라도 30항목 정도 되는 수업 이외의 업무 활동이 있다. 이것들을 각각 몇 명씩 그룹으로 나눠 분담하면 1인 5역 이상을 담당하게 되어 매일 어떤 종류든 회의가 있고, 때로는 하루에 2,3개의 회의가 열리는 날도 있게 된다)결국은 집으로 돌아와서까지 일을 하게 된다. 교사들의 가방은 커서 누구나 금방 알아 볼 수 있다. 채점해야 할 프린트물, 아이들의 작문, 수업 준비 자료와 참고서, 성적 기록부등을 항상 넣고 다녀야 하는 까닭이다. 나는 매년 주요 교재로 쓰이는 교과서를 사서 집에서 보는 교재로 삼고 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갖고 다니다가 잃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험지 채점과 수업준비, 성적표의 소견란 기입은 나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의 거의 모든 교사가 집에 가져가서 하고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일을 전부 처리하려고 하면 매일 밤 9시까지 남아서 일하고, 휴일에도 때로 아침부터 학교에 가서 일해야 한다. 학교에 있는 동안은 아이들이 제출한 일기를 보거나 교재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다. 한 학급당 학생 수가 많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40명이 정원인데 시험지 채점이나 통신표 기입등은 인원이 많으면 처리하기가 어렵다.그 인원 이상의 경우 아이들 하나하나의 태도를 살피면서 학습지도를 하는 것이 어려워 진다. 담임교사의 또 하나의 큰 업무는 생활지도이다. 요즘 가정은 어머니가 전업주부인 집이 적은 데다 양친이 모두 바빠서 아이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까지 눈길이 미치치 못한다. 또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 많은 일본에서는 도덕교육도 학교에 맡기게 된다.일본의 학교는 학생의 생활예절과 도덕교육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실정이다. 그 밖에도 교사는 급식지도, 청소지도 뿐만이 아니라 싸움이나 불량행위, 장난 등의 뒷처리 문제와 아이들의 주장까지 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생활지도에 교사들이 쓰는 시간과 에너지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 학생들의 스트레스가 깊어지고 문제 행동이 늘어나는 배경에는 가정의 붕괴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엄마나 아빠가 없는 결손가정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또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주는 정보가 범람하고 있는 것도 아이들이 문제 행동을 일삼는 데 큰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폭력과 성을 묘사한 책이나 광고물이 어린이들이 볼 수 있는 장소 (편의점의 잡지 매장과 전철안 등)에 버젓이 비치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용납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사에게는 어린이들을 건전한 인간으로 키우는 일이 가장 큰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교사가 너무 바쁘고 지쳐있기 때문에 아이들과 여유있게 대화를 나누거나 학생들과 놀면서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애환 교사직은 남녀의 임금격차도 없고 발언권도 평등한 전문직으로서 자신의 창의성을 살리면서 일 할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직장 여성들은 '꽃과 같은 장식품' 정도로 간주되어 경시되는 경우가 많다.또 결혼과 출산을 계기로 퇴직을 요구당하는 예도 많다. 이에 비해 교사라는 직업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도 평생 계속할 수 있는 데다가 일을 통한 성취감도 크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보람있는 직업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평생 이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항상 불안하다. 몇 번이나 위기를 경험하고 지금도 교사라는 내 직업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첫 위기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찾아왔다. 출산을 위한 휴가는 산전 8주간 산후 8주간 이다, 그후 아이가 만 한 살이 되는 생일을 맞기까지 육아 휴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살 미만의 아이를 맡아 줄 탁아소는 보육시간이 짧거나 모유를 줄 수 없는 등 조건이 나쁜 곳이 대부분 이며 찾기도 힘들다. 아이가 세살이 될때까지는 엄마 손으로 기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어서 나도 학교에서 계속 근무해야 하는지 많이 망설였다.동료교사 중에는 아이를 손으로 손수 기르고 싶어 교사직을 포기한 사람도 몇명 잇다. 그러나 교직에 계속 있고 싶었던 나는 산학기부터 복직을 목표로 탁아소에 딸을 맡겼다. 유아반이 없었지만, 나는 매일 아침 생후 8개월된 딸을 탁아소에 맡기고 직장으로 향했다. 아직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딸 주위에서 큰 아이들이 뛰어 다니다가 부딪힐까봐 언제나 걱정스러웠다.아이를 탁아소에 맡길때는 엄마를 찾으며 우는 소리를 안들으려고 귀를 막고 뛰어서 문을 나섰다.그래도 딸의 울음소리가 언제까지나 귀에서 떨어지지 않아 하루 종일 괴로운 날도 있었다. 저녁이 되어 데리러 가면 언제나 내 딸이 마지막 순서였다. 딸은 혼자 베란다에 나와 내가 나타날 문을 가만히 쳐다보며 1사간이상 난간에 매달려서 기다리고 있었다.노란 탁아소 가방을 어깨에 메고 오직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열이 나거나 전염병이 걸리기라도 하면 탁아소에 맡기지도 못하므로 직장에 갈 수도 없었다. 미열인 경우에는 모르는 척 맡길 수도 있었지만, 조마조마해 하며 직장에 도착하는 순간 탁아소에서 아이를 데려가라는 전화가 결려 오기도 했다. 어떤때는 아이가 전염병에 걸려 며칠동안 탁아소에 맡길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직장을 쉴 수 없어 먼 시골에 계신 어머니를 부르거나 베이비 시터를 쓰곤 했다. 딸아이가 세살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아빠가 탁아소로 딸아이를 데리러 가면 좋아하기는 커녕 엄마가 오라고 말하곤 했다. 또 “다른 애들의 엄마처럼 집에 있으면 좋을텐데”라고 말해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도 했다.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는 것을 다른 아이들의 경우와 차이나는 행동으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딸의 친구는 엄마가 파트타임 노동자라서 아이를 빨리 데리러 왔다. 풀 타임으로 일하는 나는 직업상 빨리 퇴근 할 수 없거나 가끔 휴일에도 쉴 수 없다는 것을 딸에게 이해시키기가 어려웠다. 아이가 “제발, 엄마 직장 그만둬”하고 애원한 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갑자기 비가 내릴 때 딸에게 우산을 갖다주지 못해 오랫동안 하늘을 원망스레 노려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가끔 그때가 생각이 난다. 그래도 희망을 걸어볼 대상은 아이들과 교사가 아닐까? 여교사가 아이를 기르면서 동시에 직장에 다니는 어려움은 자녀들의 숫자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여교사 가정의 자녀는 보통 독자가 대부분이고, 많다고 해도 기껏 둘일 경우가 많다. 나 또한 무남독녀로 형제가 없는 외로움을 크게 느끼며 자랐기 때문에 둘째아이를 바랐지만, 피로탓인지 임신이 되질 않았다. 4년 후 간신후 둘째가 생겼는데, 동료 선배 교사들은 " 아이를 둘이나 낳다니 사치다“라고 말했다. 옛날에는 육아휴업제도가 없어서 출산을 한 여교사는 산후회복이 채 안된 몸으로 일하러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자기가 기를 수 없어서 젖먹이를 남에게 맡겨 기른 사람도 있었다. 육아문제 다음으로 여교사에게 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은 나이와 함께 찾아오는 체력의 문제다. 체육시간에 뜀틀이나 철봉시범을 보이려다가 체력이 약해 부상을 입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뭐야, 선생님이 그것도 못하다니." 이런 아이들의 불평처럼 제대로 시범을 못 보이게 되면 교사로서의 권위는 무너지고 자신감도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업무상의 책임은 느는데 체력은 계속해서 저하될 뿐이다. 피로가 축적되어 매일 여기저기 아픈곳이 생기기도 한다. 현재 나의 상황도 그렇다. 그런데 이런 현상보다 더 큰 문제는 너무 시간에 쫓기다보니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는데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한 학급의 아동수를 줄이고 수업 내용도 줄여서 학습을 강제로 하거나 아이들을 몰아세우지 않아도 된다면, 늙은 교사도 경험을 살려서 교단에서 참 실력을 발휘 할 수 있을지 모른다.이것은 젊은 여교사에게도 매우 필요한 정책으로 생각된다. 여교사 중에는 특히 독신 여성이 많은데, 연애와 결혼에 신경쓰지 못할 만큼 일에 몰두해 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열정증후군‘여성 교사가 늘고 있는 것이다. 연애를 하거나 가정을 돌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인생의 스승이 될 수도 있는 교사의 자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 남편도 맞벌이 교사라서 일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도 , 밤 늦게나 휴일에 학생들 문제를 해결하고 지도하는 일에 시간을 빠앗기는 것도 서로가 이해해 주고 있다. 가장 바쁜 학기말에는 부부의 일이 겹쳐 집안은 전쟁터가 되지만 , 여름방학, 겨울방학 기간도 같아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잇점도 있다. 남편이 전혀 다른 직종에서 일했더라면 내가 일을 계속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몇 번이나 교직을 그만두려 했던 내가 지금까지 교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아이들의 이해와 협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숙한 나를 믿고 따라준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인간적으로 삶을 꾸려가면서 진심으로 마주볼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드는 일이 교사에게 주어진 참다운 과제가 아닐까? 4장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한국의 ‘보통 아줌마’ 한국 아줌마가 있는 화려한 세상 목욕탕에 팬티를 넣어 놓은 아줌마들 한국과 일본은 닮은 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이 많은데, 목욕탕이 그 전형적인 예다. 일본의 목욕탕은 너무 뜨겁다든지(특히 동경), 한국의 목욕탕에는 반드시 사우나가 붙어 있다든지 하는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 또 일본의 목욕탕이 저녁부터 밤까지 영업을 하는 데 비해 한국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영업한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충격을 준 일본의 목욕문화는 따로 있었다. 일찍이 한국인들은 일본에서 목욕탕 주인인 남성이 여자 탈의실까지 감시하는 것을 보고 일본인을 ‘동양의 야만인’이라고까 지 말했다. 한편, 한국에 사는 일본 여성은 한국의 목욕탕에 들어가 보고는 “더럽다, 그리고 아줌마들이 대단하다”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증언 모음은 목욕탕을 비롯해 지하철, 버스, 식당 등에서 만난 ‘놀랄 만한 아줌마 시리즈’다. 한국의 목욕탕(남탕은 모르지만)은 지저분하다. 여기저기 먹고 버린 음료수 팩이나 병이 굴러다니고 일회용 칫솔의 비닐포장이 버려져 있다. 머리카락도 여기저기 늘어붙어 있다. 따라서 항상 발끝을 들고 다녀야 한다. 옆에 사람이 있어도 자기 몸에 물을 좍좍 끼얹는다. 비누 거품이 옆 사람의 몸에 날아와 앉아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무리 붐벼도 한번 자기 손에 넣은 의자는 결코 내놓지 않는다. 남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더욱이 샤워기를 틀어 놓은 채 내버려 두는 등 일단 목욕값을 냈으니까 물을 절약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열심히 때를 벗긴다. 몇 번이나, 질리지도 않고 감탄할 정도로 손을 바꿔 가면서 구석구석까지 닦는다. 내가 사우나탕에서 나와 욕조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풍덩하고 한 아줌마가 탕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굉장한 기세로 발차기를 시작했다. 물보라가 일었다. 옆에 있던 아줌마가 노려보는데도 그 아줌마는 발차기를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사우나탕에 들어갔더니 그 아줌마가 또 그곳에 있었다. 문제의 아줌마는 그곳에서도 오일 바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일을 다 바른 아줌마는 드디어 마사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사지가 끝나자 다시 욕조에 들어가 발차기 연습을 시작했다. 욕조의 수면에 퍼지는 오일 같은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발차기 연습은 몇 번이고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왜 저렇게 자신의 몸만 위하는 것일까? 나는 얼굴과 몸 이전에 먼저 마음과 공중도덕을 닦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재한 5년, 음악가) 한국의 목욕탕에서는 수영을 해도 좋은 건가? 일본에서도 가끔 아이들이 목욕탕에서 헤엄을 치다가 부모에게 야단을 맞는 일이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헤엄을 치는 사람이 주로 어른인 아줌마들이다. 굉장한 물보라를 일으키기 때문에 옆에서 씻고 있으면 차가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한번은 목욕탕 속으로 들어가다가 물 속 깊이 잠수하고 있던 아줌마의 몸을 밟아서 무척 놀랐다. 머리까지 담그면 머리카락이 빠져서 물이 더러워질 것 같은데도 그 아줌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한 2년, 학생) 한국의 사우나실에는 어디나 ‘세탁물을 널지 마시오’라고 씌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반드시 팬티와 브래지어가 널려 있다. 동양 제일의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설마 아줌마들이 그 글자를 읽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런 어느 날. “여기다 팬티를 널어 놓은 사람이 누구예요?” 어떤 아줌마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유는 벽에 널어 놓은 하얀 팬티 때문이었다. 그 아줌마는, “사우나실에 팬티를 널면 건강에 안 좋아요. 섬유의 입자가 사우나의 증기에 의해 공중으로 퍼지고, 또 호흡에 의해 몸 속으로 흡수돼요. 그 중에서도 팬티의 입자는 더 문제예요. 어쨌든 사람의 가장 지저분한 부분을 감싸고 있으니까.”하면서 일장 연설을 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래, 그래”하고 맞장구를 쳤고 일부는 무시하고 사우나실을 나갔다. 나는 벌거벗고 연설하는 아줌마가 말한 ‘지저분한 부분’에 신경이 쓰였다(섬유가 아니면 입자는 안 나오는 건가?). 일본에는 팬티를 너는 아줌마도, 그것에 대해 전문적인 이론을 펴는 아줌마도 없다. (재한 8년, 신문기자) 같은 동양인이라도 목욕탕에 가면 일본 여성과 한국 여성의 차이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어? 어디가 다릅니까?” 남성들은 흥미진진해 하겠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신체의 차이가 아니다. 일본인은 어쨌든 몸을 숨긴다. 타월로 몸을 싸고 들어와 씻을 때도 몸을 구부리고, 다리도 접은 채이다. 이에 비해 한국 여성들은 정말이지 당당하다. 맨몸으로 들어와 다리를 쫙 벌리고 힘 좋게 씻는다. 그래서 일본인은 한국의 목욕탕에 들어서면 눈 돌릴 곳을 찾지 못해 난처할 때가 많다. 한국 여성들은 친구와 같이 있을 때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옆사람이 전혀 모르는 남이면 '보는 것',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더구나 아줌마 중에는 “당신은 가슴이 작군요”하며 코멘트를 하는 사람도 있어서 이런 풍토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기도 한다. 더욱 놀랄 일은 벌거벗은 채로 탈의실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걸까? (재한 3년, 주부) 3년쯤 전에 일본의 관광잡지를 위해 한국 목욕탕을 집중 취재한 일이 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인데, 서울 시내의 목욕탕도 지역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내 감상으로는 강북보다는 강남이 시설은 좋지만 사람들의 수준은 더 낮은 것 같다. 강남 목욕탕의 아줌마들은 하루 종일 목욕탕에서 자기 자랑과 남의 욕만 하고 있거나, 다이어트나 화장품, 성형수술에 대한 이야기에 깊이 빠져 있다. 탈의실에서 벌거벗은 아가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도 강남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여성들을 보고 있으면 절로 의문이 든다. 대체 가사는 언제 돌보는 걸까?하고. 강북의 목욕탕은 규모가 작아서인지 하루 종일 죽치고 있는 사람은 적다. 모두 잽싸게 씻고 나가는 듯하다. (재한 8년, 잡지기자) 한국 아줌마들은 밤중에 친구들끼리 한증막에 가곤 한다. 일본 아줌마에게는 밤에 가족을 두고 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아줌마들은 자유로운가 보다. (재한 3년, 출판사 근무) 뻔뻔스럽지만 양심적인 아줌마들 껌을 딱딱 소리내며 씹는 아줌마는 용서 못한다! 전철 속에서 커다랗게 껌 씹는 소리가 들려 올 때마다 나는 소름이 끼친다. 운 나쁘게도 겨우 앉은 옆자리에 이런 아줌마가 앉으면 피곤하지 않다면 벌떡 일어나 다른 차량으로 옮기겠지만, 피곤해서 이동하고 싶지 않은 때는 정말 울고 싶어진다. 그때를 위해 나는 외출시 반드시 가방에 워크맨을 넣어둔다. 혹시 껌 씹는 소리가 들려오면 즉시 귀에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높이는 것이다. (재한 15년, 주부) 한국의 휴대폰 사용 매너가 엉망인 것은 비단 아줌마들뿐만이 아니다. 작년이었든가, 잘못된 휴대폰 사용에 대해 주의를 준 남자를 휴대폰으로 때린 아가씨도 있었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갑자기 “그건 밀가루를 넣어야지!”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휴대폰 을 한 손에 든 아줌마가 다리를 쩍 벌리고 우뚝 서서 외치고 있었다. “계란은 두 개 정도면 돼. 파!? 파는 제일 나중에!” 아마 요리 이야기인 듯했는데, 전철 안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휴대폰이란 본래 비상용이 아닌가. 긴급한 용무가 있을 때 부득이 짧게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는 업무에 바쁜 비즈니스맨 같은 계층만이 갖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본과 한국에서는 어느새 학생들 사이에도 퍼지고, 특히 한국에서는 가정주부들까지 갖고 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휴대폰 본래의 의미가 크게 손상되고 말았다. 밀가루, 계란, 파 집에 돌아가 천천히 이야기하면 안 되나? (재한 5년, 대학강사) 비교적 한산한 전철 안, 내 옆자리도 그렇고 군데군데 좌석이 많이 비어 있었다. 어느 역에선지 전철이 서자 아줌마들이 단체로 탔다. 붐비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아줌마 네 명이 한꺼번에 앉으려니 옆에 앉은 승객이 따라서 움직여야 했다.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한 아줌마가 내 옆에 오더니 말없이 미는 것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가방으로 마치 물건을 치우듯이. 나는 화가 나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한마디 하시면 안 돼요? 아무 말도 없이 밀다니 실례 아니에요?" 그러자 그 아줌마는 “어머, 내가 밀었어?”하고 방긋 웃었다. 이것도 한국적인 매너일까? (재한 3년, 대학원생) 전철을 탈 때 우선 내리는 사람을 위해 길을 터주는 것이 매너일 것이다. 서울의 전철에도 이런 예절이 정착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모두가 비켜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아줌마가 다른 사람들을 확 밀치고 뛰어가더니 문 맨 앞에 가서 우뚝 서는 것이었다. 그때의 순발력이라니, 정말 대단했다! (재한 6년, 일본어 교사) 한국 아줌마들은 뻔뻔스럽지만 부드러운 면도 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젊은이가 버스나 전철 안에서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얼마 전에도 전철을 탔더니 경로석에 아베크족이 앉아 있었다. 남녀간에 서로 껴안고 만지고 하는 것이 보는 쪽이 오히려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 노인이 탔다. 그러자, 문제의 아베크족도, 옆자리의 워크맨을 듣고 있던 아가씨도 순간적으로 노인을 못 본 척 한다. 조금 후 노인은 단념한 듯 건너편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아가씨 앞에 섰다. 그런데 이 아가씨도 노인을 무시하고 끝까지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이럴 때 한국 아줌마들은 아주 양심적이다. 버스에서든 전철에서든 노인이 타면 일부러 자기 자리 쪽으로 불러서까지 자리를 양보한다. 비록 그것이 남을 밀어젖히면서 간신히 확보한 자리일지라도, 아낌없이! (재한 8년, 신문기자) 시장, 백화점을 누비는 제멋대로 아줌마 군상들 바겐세일에 이성을 잃는 것은 일본 아줌마나 한국 아줌마나 마찬가지다. 세일용품으로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브래지어 앞에서 한 아줌마가 계속해서 브래지어를 착용해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줌마는 매우 뚱뚱한 데다 스웨터 위로 대보고 있었기 때문에 A컵이 맞을 리가 없었다. 무리하게 훅을 여미는 아줌마를 보면서 상품인 브래지어가 늘어나 못쓰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재한 3년, 일본어 교사) 빵집에 갔는데 빵을 하나씩 눌러 보는 아줌마가 있었다. 빵의 단단함을 측정하고 있는 것이겠 지만 그 광경을 보고 나는 “아줌마, 그 손 씻었어요?”하고 묻고 싶었다. (재한 10년, 주부) 남대문 시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앞에서 김밥을 파는 차가 왔다. “비켜, 비켜, 비켜!” 차를 모는 아줌마가 외치고 있었지만, 나는 미처 피하지 못해 타이어에 발을 치이고 말았다. 너무 아파서 “아야!”하는 나를 보고 아줌마는 돌아보면서 “다쳤니?”하더니, 곧 “괜찮을 거야”하면서 빙긋 웃으며 가버렸다. 아줌마, 아픈 건 내 발인데, 어떻게 당신이 괜찮다는 걸 알아요? 어째서 사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빙긋 웃고 말아요? 말로만 비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주의해야 된다는 생각이 정말 안 들어요? (재한 8년, 번역가) 아줌마뿐만 아니라 한국인 중에는 발을 밟거나 부딪쳐도 사과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놀랍지만 더 이상한 것은 밟힌 사람의 반응이다. 조금 얼굴을 찌푸릴 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한국인은 발을 밟히는 데 대해 유독 참을성이 많은 것일까? (재한 5년, 학생) 가끔은 섹시하고 귀여운 한국 아줌마들 반상회 같은 것은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웃간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것이라는 원래의 취지는 좋았지만 지금은 아줌마들의 패션쇼장이 되어버렸다. 같은 아파트의 다른 층에 잠시 가는 것뿐인데 왜 두꺼운 화장에 옷을 차려입고 가야 하는지. 외출하고 돌아와 화장을 지울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면 몰라도 이때를 위해 일부러 화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정말 그 기분을 모르겠다. “지금부터 밤일 나가십니까?”하고 묻고 싶어진다. 그렇게 차려입고 반상회에 가서는 남의 집을 신기한 듯 유심히 둘러본다. 이런 행동은 남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인지. (재한 15년, 주부) 한국 아줌마는 어디서나 춤을 춘다. 관광버스 속, 유람선 안, 공원에서도 춤을 춘다. 그것도 아주 잘 춘다. 항상 추니까 춤솜씨도 늘 수밖에. 문화센터의 동료와 함께 가라오케에 갔을 때 아줌마들의 무대에 감동을 받았다. 노래에, 춤에, 토크에. 한 아줌마는 노래를 부르면서 치마를 치켜올리고 팬티까지 보여 주었다. 그런데 아주 섹시하고 멋있었다. 일본 아줌마들에 비해 한국 아줌마들은 엔터테이너로서의 수준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생각된다. (재한 2년, 학생) 한국 아줌마는 가끔 귀엽다. 여자끼리라면 항상 큰 소리로 대화하던 사람도, 남자가 끼면 갑자기 얌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문화센터의 클래스에서도 남자 수강생이 들어온 그날부터 갑자기 아줌마들의 복장도, 화장도 화려해진다. 식당 아줌마도 남자 손님에게는 굉장히 친절한 것을 볼 수 있다. 한국 아줌마는 몇 살을 먹어도 항상 소녀 같다. (재한 3년, 학생) 김포공항 국제선 면세점에서 향수 매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종업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심코 몸을 내밀어 바라보는데, 종업원 아가씨 두 명이 쭈그리고 앉아 수박을 먹고 있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수박을 먹던 아가씨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들에게서는 지금이 근무 중이라는 것도, 여기가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일터라는 의식도 전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은 시장이나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물건을 팔고 있는 아줌마와 똑같았다. (재한 2년, 주부) 아줌마들은 물론 한국 여성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시장의 옷가게 구석에서 김치찌개를 먹는 언니들, 국물이 옷에 튀면 어떻게 하나 싶다. 그러나 내가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은 미장원에서 밥을 시켜 먹는 언니들이다. 된장찌개 냄새와 파마약 냄새가 섞여서 나는 거의 토할 뻔했다. 손님이 적은 시간에 교대로 나가서 먹고 오면 안 되는 것일까? (재한 10년, 주부) 일본의 어느 시골 마을에 한국인 교수가 대학원 진학 예정자인 한국 여학생 두 명을 데리고 국제 교류 세미나에 참가했다. 추운 겨울, 마을의 폐교를 개조한 숙사에서 자취를 하면서 마을 주민과 학생이 교류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한국 여학생은 단체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마을의 나이 많은 직원이 쓰레기통을 비우고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추운 건 다 마찬가지인데 난로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얼굴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카레라이스를 만들 때, 한국 아가씨들은 양파도, 감자도, 당근도 모두 따뜻한 물로 씻어내고 껍질도 벗기지 않은 채 잘라서는 껍질이 붙은 부분은 모두 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물어 보니 집에서 한 번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가사노동이 여자만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생이라면 공부와 화장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한국식 교육방법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만은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다. 이런 여자들이 엄마가 되면..., 역시 무서운 아줌마가 되겠지. (재한 3년, 학생) 몇 년 전에 없어졌지만, 유학생들이 많이 살던 국제회관이라는 기숙사가 있었다. 이곳에 아침마다 한 아줌마가 와서 복도와 화장실, 샤워실 등을 청소하는데, 전혀 성의가 없었다. 화장실과 샤워실에다 물을 쫙쫙 뿌리고 걸레로 대충 닦을 뿐이었다. 그 직후에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이 엉덩이가 흠뻑 젖어서 울상을 지어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청소 아줌마는 여간 멋쟁이가 아니어서 입술에는 언제나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그리고 청소를 하고 나면 자기도 샤워를 하는 것이 거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화장실이 급해도 “좀 기다리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는 전혀 서둘지도 않고 자기 할 일을 다 해야만 나오는 것이었다. (재한 4년, 음악가) 미워할 수 없는 씩씩한 달동네 아줌마들 사람을 끄는 달동네 아줌마들의 박력과 생명력 현대식 고층빌딩이 줄지어 서 있는 패셔너블한 거리, 하얀 나선형 고속도로가 아름답게 한강에 비치는 오후의 서울, 그러나 30년 전까지, 이 도시 대부분이 달동네였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한국의 고도 성장은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이주해 달동네에 살았던 노동자들에 의해 성취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 달동네는 부대 시설이나 교통 문제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 불편했지만, 인정미와 활기가 넘치는 나름대로 살기 좋은 동네였다. 현재 중, 고교생 자녀를 둔 아버지, 어머니들은 그런 달동네에서 놀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그러나 오늘날의 달동네는 표준적인 가정으로부터 격리되어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경제 성장의 혜택을 못 받은 사람, 실패한 사람들의 대기장처럼 생각되는 곳이 달동네인 것 같다. 나는 이처럼 극히 인간적인 공간을 좋아해 서울 체재 중 종종 달동네를 찾곤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런 위험한 곳에는 가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달동네를 방문하면 밤길이 어두워 길을 찾기 어려운 시내와 사정이 그다지 다를 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달동네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증식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달동네가 서울 사람들에게 완전히 ‘무서운 미지의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은 시간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곳에 살고 있는 아줌마들을 만나보면, 그들의 박력과 생명력에 금새 압도된다. 달동네 아줌마들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겨내고 굳세게 살아가고 있다. 이곳의 생활이 처음에는 힘들었다고 누구나 입을 모아 말한다. 물론 어려울 때는 서로 돕고 시간이 있을 때는 함께 모여 수다를 떠는 즐거움도 있지만, 너무 밀접한 주거환경 때문에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어려운 고민도 안고 있다. 어떤 아주머니는 달동네에 와서 공동변소에서 용변을 보는 것이 싫어 한 달 동안을 참았다가 병이 났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면역이 되었지만, 이사올 당시에는 모기가 날아다니고 냄새가 나는 변소가 두려워 어쩔 수 없었다고 하다. 게다가 골목길에서도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말소리도 너무나 잘 들리고.... “그래도 많은 아이들이 잘 자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주머니가 이렇게 물어왔다. 그들에 따르면, 밤 2시 정도가 되면 여기저기서 변소 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아, 지금 끝났구나, 금방 알지.”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이 많이 태어난다는 것은 낮은 출생률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부러울 뿐이다. 의지할 것이라곤 곗돈밖에 없어 나는 ‘전세’라는 한국 특유의 임대제도에 대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아, 서울의 달동네 가정들을 방문하면서 가끔 물어 본 적이 있다. 대답을 듣고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은 여전 하지만 이렇게 여러 가정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놀란 것이 있다. 가계를 꾸려 가는 일을 부인이 거의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자들은 벌이도 하지 않는 주제에 가계를 걱정하는 배려도 별로 하지 않는 것같이 보였다. 이야기가 집안의 경제 문제에 이르면 남자들은, “그 얘기는 마누라한테 물어 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달동네에서는 부인들이 하루벌이 부업을 하거나 계를 들어 어떻게 해서든 돈을 융통해 한 달 한 달을 견디고 있었다. 남편은 전혀 가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경제력이 없는 남편과 사는 부인일수록 생활력이 강하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갑자기 생면부지의 일본인이 집에 찾아와서, “댁의 전세는 얼만가? 월세는 얼마를 주고 있나?”등을 물었으니 의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은 어느 주부에게서 물세례를 받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몸이 불편하여 언뜻 보기에도 생활이 어려워 보였다. 부인이 홧김에 남편 욕을 하는 동안 당사자인 남편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었다. 한밑천 잡으려고 남편이 빚을 낸 가정도 형편은 비슷했다. 바깥 주인은 기를 못 펴고 아내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어떤 가장은 아내가 번 돈을 중국에서 탕진하고 돌아온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집 아내는 그런 역경에 굴하지 않고 달동네의 아줌마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어가 변하여 된 말로, ‘야메’(무허가 장사)라고 부른다(대체로 한국에서는 안좋은 말을 할 때 일본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는 부인의 발언권이 압도적으로 컸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혈족간의 결속이 강한 나라다. 힘들 때는 친척이 도와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달동네에서 설날이나 추석에 고향에 돌아가 친척과 만나는 가정은거의 없다. 본디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친척이라도 먼 지역으로 이사해 가면 서로의 정은 점차 멀어져 간다. 가난한 가정일수록 친척과의 만남은 적어진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남편도 친척도 의존할 수 없는 경우, 완전히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주부들 사이에 보급되고 있는 계는 분명 큰 역할을 하는 듯햇다. 어떻게 저 적은 수입으로 매달 곗돈을 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 용기가 대견스러울 정도이다. 계를 하다 깨져도 또 새로운 계를 시작하려는 용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몇 번이나 깨지는데도 계주를 계속하는 아줌마를 보면, 한국에서의 계라는 것은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낙천적인 성격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계주를 어지간히 신용하고 있거나 할 경우가 아니라면 도저히 참여할 수 없는 돈놀이란 생각이 든다. 남편이 일자리가 없어서 빚이 점점 늘어가도, 아내는 어떻게 해서든 동네에서 또 돈을 빌려 온다. ‘돈은 천하를 돌고 도는 것’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지만, 한국은 그보다 한 수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것 같다. 가난하지만 자존심은 버리지 않았다 집 문제만 해도 그렇다. 가정을 지키는 것은 여성의 일이라고 하는 유교적인 사고방식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밖에서 놀고(일하고?) 있는 남자들에 비해 집에 있는 시간이 긴 여성들이 집안 대소사를 담당하고 있다. 여자들이 전세값 등 집주인과의 경제적인 교섭, 이웃간의 싸움, 물건이나 돈의 미묘한 거래 등을 전담하고 해결하는데 그 방법이 놀라웠다. 예를 들면, 어떤 30대 주부는 살고 있는 연립 주택이 경매에 걸린 것을 알자, 같은 건물의 세입자들과 힘을 합쳐서 새로운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타내는 작전을 눈부시게 성공시켰다고 한다. 내가 “새로 온 세입자는 불쌍하네요”라고 하자, 그녀는 “녜, 그렇지만 속임을 당하는 쪽도 미련한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이런 말을 한 여성의 직업이 교사여서 나는 더 놀랐다. 1980년대 후반부터 부동산 붐을 타고 등장한 ‘복부인’들은 재개발 딱지를 노리고 달동네 복덕방으로 출몰했다. 집을 사는 것도 여성, 빌리는 것도 여성이므로 전세계약을 할 때 여성끼리만 하기도 한다. 집을 한 채 더 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그런 부자 집주인이라면 세를 조금 싸게 조절해 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어떤 아줌마가 “.있는 사람이 더해” 라고 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또한 이런 외지에 사는 집주인뿐만 아니라 원래 달동네에 살고 있던 사람들 중에도 조금씩 경제적 여유가 생겨 집주인이 된 사람도 있다. 세입자들은 한결같이, 옛날에 서로 어려웠으니 세입자의 처지를 이해해 줄 것 같지만, 오히려 이런 사람이 주인이 되면 세입자를 더 무시한다고 한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입장 차이는 이처럼 확연한 것이다. 같은 집에 세입자들만 살고 있는 주부들은 서로를 별로 어려워하는 모습이 없으나, 집주인 과 함께 살고 있는 주부들은 물과 전기를 사용하는 일에도 매우 신경을 쓴다. 주인과 같이 사는 세입자들의 신경쓰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신의 아이가 주인집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에도 세입자 부모들은 마음을 졸인다. 집주인은 자기 아이가 세입자의 아이들로 부터 나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자기 집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는 가정을 아예 세입자로 받아주지 않는 집주인도 많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정이 많다고 일컬어지던 달동네조차 이제는 돈으로 인간관계가 좌우되고 있는가 생각하니 슬프기 짝이 없다. 돈이 있는가 없는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달동 네 아줌마들에게 공통적으로 어른거리는 생각은 ‘우리는 가난하지만 자존심은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차별받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멋진 모습을 하고 나가요. 딸도 직장에 갈 때는 멋지게 차려입고 나가요. 그래서 언젠가 딸이 열이 나고 아팠을 때 동료들이 집으로 병문안을 와서는 ‘아니, 이런 곳에 살고 있었니? 항상 멋진 차림새를 하고 다녀서 몰랐어’라고 말하기까지 했지요. 하긴 뭐 알았으면 여기저기서 무시당하기만 했겠지요. 절대로 남한테 달동네에 사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달동네 입구는 버스 종점일 경우가 많다. 먼지를 뒤덮어 쓴 일반 버스가 엔진을 멈추면, 안으로 부터 요란스럽게 치장한 여성들이 우르르 내려온다. 그런 아줌마들을 볼 때마다 왠지 슬퍼진다. 그러나 그녀들의 화려한 치장만을 나무라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몇 번 좋지 않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하루는 서울의 유면한 모 호텔에 들어갔더니 “여기에는 손님이 쓸 만한 방이 없습니다”하는 것이었다. 그후 같은 곳에 이른바 ‘유한마담’풍 차림을 하고 갔더니, 전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환대를 받았다. 은행에서도 그랬다. 한국은 화려하게 꾸미지 않으면 인간 대접을 못 받는 슬픈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절대 좋지 않은 태도라고 믿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은요,” 한 달동네 아줌마가 말했다. “좀더 인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대로 된 사람이란, 적당히 양보할 줄 알고 비록 싫은 일이 있어도 참아줄 줄 알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배려를 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을 의미 하잖아요.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올바를 사람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이 말이 나에게는 “달동네 사람들은 돈은 없어도 인간미는 아직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들렸다. 아줌마 패션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전형화된 한국 아줌마들의 패션 일본에서‘아줌마 패션’이라 하면 사람에 따라 연상되는 스타일이 다소 다를 거라 생각 되지만, 여기 한국에서는 ‘아줌마 패션’이라 하면 대개가 비슷한 스타일을 연상할 수 있다. 우선 헤어스타일을 보면, 그 이름도 ‘아줌마 파마’로 불리는 뽀글뽀글한 파마가 있다. 옷은 헐렁헐렁하여 여미는 부분도 없고, 치마는 허리가 고무줄로 된 롱 스커트, 바지는 몸빼 스타일이 대표적으로 연상된다. 아줌마 패션을 규정하는 것 중에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은 상하복, 구두 등의 색상과 디자인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타일로 떳떳하게 외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어엿한 아줌마 자격 보유자로, 십중팔구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진짜 한국 아줌마라고 할 수 있다. 손질이 간단해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아줌마 파마는 개인의 자유라고 치자. 헐렁하고 활동이 쉬운 옷, 이것도 인정한다 치자. 어느 시대 물건인지 모를 디자인, 이것도 만물을 소중히 하며 자신의 치장보다는 가족을 우선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한국의 아줌마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자. 그러나 너무도 튀는 색채감각, 이것만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진황록색 바탕에 빨강, 검정, 노랑 등의 무늬가 난무하는 셔츠에 새하얀 바지, 검은 구두, 체크무늬 상의에 체크무늬 바지(그것도 놀랄 만한 배색의 것, 줄무늬 겉옷에 줄무늬나 체크무늬 바지의 변종도 있다), 분홍색 꽃무늬 셔츠에 검정색 상의, 파란 바지....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차림이 될까. 적어도 한 번이라도 거울을 본다면 보통 일본인으로서는 도저히 저렇게 차리고는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듯한 옷차림의 아줌마를 여기저기에서 목격하게 된다. 물론 한국인과 일본인은 국민성도 다르고, 개인의 성격과 취향도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점을 고려하고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수준이 있다는 의미이다. 너무도 이상하게 조합된 의상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이들은 저절로 피곤해진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깊게 관찰하면 이러한 아줌마 패션에도 두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상의, 치마, 가방의 개별 아이템은 나름대로 괜찮으나 조화가 되지 않는 것. 또 하나는 개별 아이템 자체가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정도의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해도 전체적으로 조화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시스루 패션, 이것만은 인정할 수 없다! 아줌마 패션으로서 일본인의 눈에 두세 가지 거슬리는 것이 있다. 우선 속이 다 비치는 시스루 패션을 들 수 있다. 시스루 패션의 기본은 검정이나 흰색으로, 이것도 검정이나 흰색의 브래지어를 받쳐 입지(색을 맞춰 입듯이) 않으면 안 된다. 옛날부터 모시를 입어 왔기 때문에 속이 비치는 데 저항이 없는가 보다 하고 멋대로 생각해 보 기도 하지만, 젊은 아가씨의 배꼽티 패션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아줌마가 자신은 브래지어가 훤히 비치는 의상을 입고 돌아다니는 데 대해 침묵하는 점은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간다. 또한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번쩍거리는 장신구를 좋아하는 듯하다. 젊은 세대는 빤짝핀, 아줌마는 커다란 보석(그것도 대개 가짜)이 붙은 반지와 목걸이를 하고 있다. 그것도 세트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목걸이와 반지, 귀고리와 반지가 세트로 번쩍거린다. 일본인 아줌마들 중에도 이런 장신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만 대개는 악취미라고 여겨지고 있다. 여름이 되면 풍미하는, 발목까지만 오는 스타킹도 눈에 거슬린다. 이것은 아줌마만이 아니라 젊은 여성에게도 일반화되어 있는데, 무늬가 들어간 것도 있다. 맨발로 신는 것보다 구두를 신는 데도 편리하고 바지를 입는 기회가 많으므로 합리적이라는 것은 잘 알겠지만, 일본인에게는 역시 저항감이 있는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맨발은 실례이긴 해도 샌들에는 발목까지 오는 스타킹보다 맨발이 산뜻하고, 슬리퍼 같은 신발에 매우 간소한 복장을 할 때는 판타롱 스타킹을 신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자식과 전혀 안 닮은 한국의 성형 엄마들 결혼 전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멋쟁이라는 말을 들으려고, 혹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이려고 정말 열과 성을 다한다. 화장, 패션에 몰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이라도 다리가 길어 보이게 하려고 굽이 5센티미터 이하인 구두는 신지 않으며, 같은 이유로 바지도 서울의 거리를 청소하고 다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길게 입는다. 그런 멋쟁이 여성이 결혼해서 아줌마가 되면 언제부터인지 복장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을 보이는데, 왜 그럴까? 혹시 미혼 시절 그토록 매일 복장에 신경을 쓴 결과 지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관광차 온 일본인에게 한국의 미혼 여성에 대한 인상을 물으면 ‘화장이 진하다’는 지적이 많은 한편, “대단해요!”하고 감탄하는 소리도 있다. 그것은 화장이나 헤어스타일, 의상에 이르기까지 마치 패션잡지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차림새를 하고 거리를 다니는 것이 너무나 피곤한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에게 있어서 결혼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중대한 목표다. 때문에 결혼하기까지는 눈물 어릴 정도로 지극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일단 결혼이라는 큰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복장은 이미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미혼 여성에게 아름다움은 최대의 무기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불경기로 취직 자리가 좁아지자, 딸에게 성형수술이라도 시켜서 조금 더 조건이 좋은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는 부모마저 나오고 있다. 전철 안에서 미인인 엄마가 자신의 얼굴과는 전혀 닮지 않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이 나라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부자처럼 보이기를 원치 않는 일본인의 품성 전 국민이 샐러리맨 중류 사회라는 일본에서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거나, 슈퍼에서 쇼핑을 하거나’,‘차를 가지고 있거나, 없거나’,‘어떤 복장을 하고 있든’, 그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재력을 판별하기가 어렵다. 일본에서는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 일할 필요가 없는 부자라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돈은 있어도 차가 싫어서 사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같은 품질이라면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의 상점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 일반적 소비형태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차림새로 볼 때도 낡은 옷차림인 사람이 정말 큰 부자이기도 하고, 브랜드로 치장하고 다니는 젊은 여성이 신용카드의 연체라는 지옥에 빠져 있기도 한다. 차의 경우도, 한국인이 봤을 때 가난하게 보이는 집의 아들이 고급 외제차를 몰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분발하면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외제차 정도를 굴릴 만큼의 부자는 된다. 그러나 인건비가 싼 한국에서는 권력도, 뛰어난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해도 부자가 될 확률은 매우 낮다. 한국의 인건비가 일본에 비해 어느 정도 싼가 하면, 대략 말해서 급료는 일본의 1/2, 일본과 비교해서 훨씬 싼 아르바이트 시급의 경우는 4분의1내지 5분의1 정도이다. 더욱이 저소득층으로 내려갈수록 양자의 격차는 더욱 커진다. 결혼한 여성의 경우를 보자. 일본에서도 아내가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편의 사회적 위상을 벗어나 한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입장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자유롭게 삶을 구가하는 여성들도 상당히 많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편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고, 자기가 어떤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사람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배경이 그 사람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을 판단할 때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색채 감각은 어릴 적부터 길러진다. 여기서 전체 한국 아줌마의 명예를 고려하여 덧붙이자면, 모든 아줌마가 앞에서 거론한 것 같은 옷차림을 하는 것은 아니고, 또 아줌마만이 그런 의상을 입는 것도 아니다. 패션 센스가 없는 것은 아저씨도 마찬가지(아저씨의 옷을 아줌마가 사기 때분일까?)다. 게다가 젊은이 중에도 동세대의 한국인 눈에까지 이상하게 보이는 차림을 한 사람이 꽤 있다. 옷의 색깔에 관해서는, 한국에는 검정이나 회색, 흰색 등의 옷을 입는 사람이 많고, 듣자 하니 그런 색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나 좀더 물어 보면 ‘무난한 색이니까’라든지 ‘나는 색채 감각이 별로 없어서’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일본인은 세계적으로 볼 때 디자인과 색채에 대한 감각이 있는 민족인 것 같다. 원색보다 중간색을 좋아하지만 같은 검정과 회색이라도 미묘한 색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옷은 그 옷감에 따라 같은 색이라도 느낌이 크게 다르고 일광과 조명에 따라서도 미묘하게 달라지는데, 그 차이를 알고 어떤 것이 자기에게 맞는지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일본인 가운데는 많은 듯하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어릴적부터 과자 포장지, 광고 등 생활 주변에 가까이 있는 물건 중에서 세련된 디자인과 다양한 색채의 것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매일 하는 식사를 봐도 일본인은 그날의 요리에 맞춰 접시를 선택하며, 비록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손이 많이 간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맛있게 보이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 예쁘게 식단을 차린다. 반면에 한국 요리는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가 거의 붉은 빛이 난다. 그릇 색깔도 흰색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 모양도 거의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다. 이런 작은 차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일상적으로 쌓여 어느새 감각 차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또 하나 알기 쉽게 예를 들면, 회화나 도자기, 공예 등의 분야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다르다 (전문가는 별도로 하고 일반인의 경우만 볼 때). 일본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런 분야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도 그 집에 걸린 그림을 보고 좋은 그림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 많다. 이에 비해 한국인의 경우는 거실에 그림이 걸려 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컨대 미적인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까. 주체성 없는 한국 여성의 패션 감각 패션으로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유행이라고 하면 막말로 개나 소나 일제히 그것을 따른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센스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일단 유행하는 패션을 입으면 무난하게는 보이니까. 심한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의상을 입어 보며 그것이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옷가게의 판매원도 그 옷이 그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예쁘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다”라는 말을 연발하면서 사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으로 오랜 시간 길들여진 사람들이 아줌마가 되었을 때 갑자기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찾아 입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터무니없는 디자인의 옷을 ‘예쁘다’고 착각하고 비싼 값을 주고 구입하여 입고 돌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고가의 옷이면 무조건 좋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많다. 때문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통일 브랜드(그것도 알기 쉽게 브랜드명이 눈에 띄는 곳에 부착되어 있다)로 치장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의상이 조화가 될 때도 있지만 일본인으로서는 조금 창피해 하며 피하는 스타일이다. 한국에서는 패션이 자기가 속한 계층의 부의 상징, 즉 어느 정도의 돈을 갖고 있는가 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물론 어느 정도 품질과 디자인이 좋은 옷이 대체로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 자기에게 어울리는 옷인가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또한 색상 선택은 옷의 가격에 관계없이 자기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엷은 색의 옷을 입을 기회가 많지 않다. 음식에 고춧가루가 들어가는 것이 많고, 또 국물도 숟가락으로 먹어서 더러워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더러워질 가능성도 높다. 한국은 공과 사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아, 일본인의 생각에 공중도덕이라 여겨지는 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다. 지하철은 분명히 공공 교통기관이며 이런 공공 장소에서는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자기 아이가 전철 안을 뛰어다니는 것에는 주의를 주어도 옆사람의 공간까지 침범하거나 구두로 옷을 더럽히는 일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는 지하철 등 공공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와 자가용을 이용할 때의 옷을 구별해서 입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또한 여성의 치마도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이 많은 사람 중에는 여성이 다리를 내놓고 걸어다니는 것에 대해 말도 안 된다는 관념을 가진 사람도 있고, 식당이든 남의 집이든 마루에 앉는 경우가 많아 치마 차림은 불편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한국 여성의 패션 센스 향상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아줌마들의 터무니없는 패션은 지금까지 거론한 것처럼 단지 아줌마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또 지금의 아줌마 세대는 젊은 시절 패션에까지 신경 쓸 경제적, 사회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개선해 가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부터 패션 센스를 키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일하는 데 편리한 아줌마 패션을 하고 있어도, 일단 유사시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아이템으로나마 멋쟁이가 될 수 있는 아줌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5장 한국의 어머니는강하다 우리 아들은 내꺼야 어머니를 택할 것인가? 애인을 택할 것인가? 혼자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의 이성 친구에게 애정을 품거나 열렬하게 연애를 하게 되는 일은 매우 흔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 모두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급증하는 국제결혼의 그늘에는 한국 남성과 사귀면서도 결혼을 못하고 실의에 빠진 채 귀국하는 다수의 외국여성들이 있다. 그 중에서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주위 사람들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깨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국 남성과의 연애에 실패한 외국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어머니를 택할 것인가? 애인을 택할 것인가?’로 고민하는 한국 남자와 그 뒤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그의 강한 모친의 모습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온 여성들은 대개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든가 아니면 취직 경험이 있는 20대 중반 이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기 위해 유학을 시도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여성들인 만큼 그들은 자립의식이 높다. 자신의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버는 일 정도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여성들이 한국의 대학에서 만나는 남성은 대개 연하일 경우가 많다. 그 중에는 일곱 살 연하의 한국 남성과 결혼한 일본 여성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순탄하게 결혼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외국인(혹은 재일교포)이라는 것과 연상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우선 결혼에 장애가 된다. 그러나 남자의 모친이 결혼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이해타산으로 이루어지는 얄팍한 결혼문화 서울대에 유학한 재일 한국인 S양. 자기보다 다섯 살 연하인 같은 과 학생과 4년간 사귀었지만, 그는 돌연 어머니가 정해 준 한국 여성과 결혼해 버렸다고 한다. 어느 날 그녀는 그에게서 이런 고백을 들었다. "너를 사랑하지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기 때문에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에는 자신이 없어. 부모가 정해 준 사람과 결혼하겠지만 그녀에게 애정이 없어. 너와 헤어져도 죽을까지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그만 해. 삼류소설도 아닌데! 나랑 결혼하겠다고 왜 어머니께 말씀 못 드려?" 이렇게 소리치는 그녀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너는 재일 한국인이고, 집안도 안 좋고, 더구나 연상이고......" 이렇게 말하는 그의 집안도 별로 유복하지는 않았다. 부모가 교사인 서민층 가정으로, 집안 운운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지적이었다. 그러나 삼형제 중 막내로 유일하게 서울대를 나온 그는 그의 모친이 온갖 기대를 걸고 있는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였다. 고생고생해서 서울대를 졸업시켰으니 이제부터는 이 아들에게 의지해 살아가겠다는 이해타산이 빤했고, 그렇기 때문에 며느리감에 대해서도 지나칠 만큼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서울대에 다니는 아들을 둔 엄마들은 보상심리가 굉장히 강해요. 자기 아들을 이만큼 키운 데 대해 보상받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며느리로 삼고 싶은 여자는 우선 부모가 부자라서 장래 자기 아들의 출세에 도움이 될 사람이어야 해요. 같은 서울대생이라도 가난한 여자면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아요.” 결국 그가 결혼한 사람은 학교 선생으로 모친과 같은 카톨릭 신자인 아가씨였다. 특별히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공무원이니까 수입은 안정적일거라는 이해타산이 앞섰던 것일까? 현재 대학 강사인 그녀는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결혼 상대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있지만, 소캐팅에 나갈 때마다 환멸을 느낀다고 한다. 처음 만나는 상대방이 묻는 것이 “부모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집은 자택입니까?” “부모님의 수입은?” 등등 온통 돈 문제뿐으로, 아무도 그녀 자신에게는 관심을 표시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이나 영국인 남자와 사귈 때는 집안 사정같은 것을 놓고 대화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결혼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서로의 가족 구성이나 부모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게 당연한거죠. 상대와 자신이 잘 맞는지가 가장 중요하며 결혼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은 다른 것 같아요. 이 나라에서는 결혼이 이해타산적으로 이루어져요.” 엄마 없이는 못 하는 마마보이들 한국에서는 나잇살이나 먹은 남자들도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 가장 맛있다”,“어머니가 담근 김치가 먹고 싶다”는 말을 정말 아무런 부끄러움도 거리낌도 없이 말한다. 더구나 “중학생때까지 어머니 젖을 만지면서 잤다”는 등등 그들이 들려주는 경험담은 일본인에게는 징그럽게만 느껴질 뿐이다. ‘한국 남자는 전부 마마보이다’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혹은 전철 안에서 고등학생 정도의 남자애가 엄마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란다. 일본이라면 바람난 아줌마와 젊은 제비라고 착각할 광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정말 모자지간일까 관찰해 보곤 한다. 한국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아들의 경우도 그런 것에 익숙하다. 몇 살이 되었든 한국의 모친은 아들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고 아들도 모친에게서 떨어 질 줄 모른다. 한국 남자들은 마치 주인을 따르는 충견처럼 어머니에게 충실하고, 한국 사회도 그것이 정도라고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결혼 상대를 정할 때 '어머니 마음에 드는 여자',‘어머니와 잘 지낼 수 있는 여자' 라는 조건이 한국 남자에게는 필수적인 항목이 된다. 이에 비해 일본인의 감각으로는 부모를 버리고 애인을 택하는 남자가 산뜻하게 받아들여진다. 애인보다도 부모를 택하면 보기 흉한 마마보이라고 경멸한다. 세상의 이치로 볼 때 부모는 자식보다 먼저 돌아가실 분이므로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가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 온 여자들이기에 한국 남자는 그녀들에게 한심해서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의 응석받이로 비친다. 한국 남자들은 겉보기에는 믿음직스럽게 보여도 정신적으로는 어린애이다. 그것이 오히려 귀엽게 비칠 때도 있긴 하지만... 한국 남성은 누구와 결혼하는가? 앞에서 언급한 S양은 끝내 자기 애인의 모친과 대면할 기회조차 얻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만날 때는 어머니가 틀린 말을 해도 절대 말대답을 하지마.” “무슨 말을 해도 네,네 하고 대답해.”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하지 말고 복장도 너무 화려해선 안돼.” 자기 어머니를 만나기 전 그가 S양에게 요구하는 조건에는 끝이 없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돼?”하고 그의 말을 반박했더니, 그는 겁을 집어먹고 결국 어머니와 만날 수 있는 기회마저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로 이야기할 기회는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녀가 자신의 아들보다 연상이라는 것을 알고는 처음부터 꽤 강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우리 아들하고 사귄다구?” “예.” “너희 집안은 뭘 하니? 형제는 몇이야? 고향은? 집은 전세야? 아니면 자기 집이야?” S양 집안에 대한 그녀의 질문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이런 소리까지 들었다. “네가 얼마나 잘난 앤지는 모르겠다만, 난 웬만해서는 우리 아들을 너와 결혼시키지 않을테니까, 그리 알아.” 그리고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나중에 그의 모친은 자기 아들에게 “여우가 우리 아들을 꼬셨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전화 직후, 그는 부랴부랴 선을 보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결혼해 버렸다. 장래를 약속한 애인이 허망하게 모친의 품으로 돌아가는 걸 그녀는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인의 어머니와의 대결, 아수라장이 된 이야기 연세대에 유학한 재일 한국인 K양의 경우도 애인이 여덟 살 연하였다. 결혼을 생각했을 때도 그녀는 나이 차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일본에서 어머니가 왔을 때도 주저 없이 그를 소개했다. 그런데 그는 연상의 그녀와 교제하는 것을 부모에게 숨기고 있었다. 성적이 떨어지자 학교에서는 그의 부모에게 경고장을 보냈다. 항상 아들을 훌륭한 우등생이라고 믿고 있던 그의 부모는 놀라서 서울까지 단숨에 올라왔다. 그러나 하숙집에서 아들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자취방에서 같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숙집 친구들에게서 그녀의 존재에 대해 들은 부모는 두 사람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가 대문을 여는 순간 대로한 모친이 달려들었다. “이년아! 세상에 우리 아들이 이런 꼴을 당하다니. 어째서 애지중지 키운 우리 아들이 이렇게 됐느냐? 너, 왜 이런 어린애를 속여서 냉큼 너희 나라로 돌아가!” 그러자 아들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머니, 저 이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아이고, 뭐라고? 결혼? 이 할망구랑? 네가 몇 살인데? 네가 학교를 졸업하면 이 계집애는 완전히 할망구야! 그런 할망구랑 대체 무슨 결혼? 널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 야, 이년아! 내 아들이 고등학생 때 매일 점심과 저녁 도시락까지 싸주며 이제까지 고생고생 키워 왔는데. 대체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우리 아들한테는 더 잘 어울리는 상대가 따로 있다는 걸 모르겠니? 지금까지 내 말만 들었는데... 아이고, 이게 웬일이야...” "저는 지금까지 계속 어머니 말씀에 따라왔어요. 그러나 이번엔 어머니가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아이고, 이를 어떡해.” 그때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아들을 때렸다. “뭣 하는 거예요? 내 아들 때리지 말아요! 내 아들이예요, 내 아들!” 다급히 외치면서 아들을 감싸는 어머니. 아버지는 “이 고얀놈!” 하고 호통치면서 더욱 세게 아들을 때렸다. “그만둬요!” 아들을 몸으로 막는 어머니.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더니 그녀의 뺨도 때린다. “뭐 하는 거예요?” 꼭 껴안는 아들과 어머니. 너무 무서워서 방구석에 멍하니 서 있는 K양. 그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나가 있어.” 방을 나선 그녀는 그후 방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휴학계를 내고 군대에 입대했고, 그후 몇 번인가 그녀가 면회를 갔지만 그는 그 사실을 결코 어머니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며 극도로 신경을 썼다. 결국 그녀는 일본에 있는 부모의 주선으로 선을 보고 일본으로 돌아가 결혼했다. “그의 어머니가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말을 많이 했는데, 어쨌든 내가 4년간 한국에 살면서 들은 말 중 가장 더러운 말이었어요. 나는 그런 엄청난 아수라장 속에서도 부모에게 존대말을 쓰는 아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이지? 여기에 든 예 외에도 애인의 어머니 때문에 강제로 헤어진 여성의 이야기를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한국 남자의 결혼은 정말로 그의 어머니에 의해 좌우된다. 그럼, 그때 아버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군대를 찾아 위문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봐도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라며 눈물을 흘리는 남자는 많지마, “아버지가 보고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온 학생도 “엄마가 보고 싶다”고는 말해도, “아빠가 보고 싶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 같은 외국인에게는 그 점이 정말 이상하게 보인다. 한국 가정은 가부장제가 철저해서 부친이 절대 권력을 갖고 있다고 지금까지 들어왔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머니고, 아버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한국의 아버지는 자녀의 교육에 관한 것은 전부 어머니에게 맡기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인생의 전환기가 되는 진학 때도, 취직 때도, 결혼 때도 반드시 어머니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되거나 중요시된다. 사정이 이러고 보니 밖에서 볼때 강한 어머니 뒤에 있는 아버지는 그 존재마저 희미해져 그 실체를 분명히 파악할 수조차 없다. 한국의 아버지들이여, 숨은 채로 그래도 계실 건가요? 아이들을 지배하는 어머니 경쟁심 때문에 허리가 휘는 한국의 학부모들 “한국은 국가 예산 중에서 국방비 지출이 큰 때문인지 교육비에까지 예산의 혜택이 골고루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느 학교를 보아도 설비가 정말 빈약한 것을 알 수 있어요. 음악실도 급식을 위한 조리실도 그렇고, 체육관은 아예 없어요. 도서관이라고 해도 아이들이 읽은 지 오래된 책들만 있을 뿐이예요. 일본의 학교와 비교하면 정말 그 질이 많이 떨어져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부족되는 부분을 학부형들이 부담하고 있는 거죠. 우리 아이 세명을 초등학교에 보낸 1년 전부터 5년 전까지 내가 경험했던 것을 되돌아보면, 한국의 선생님이 아이들의 부모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도 컸다는 생각이 들고 학부모들도 그것에 응하려고 열심히들 했던 것 같아요. 제일 힘들었던 것은 아이가 신입생이었을 때였어요. 선생님으로부터 청소기를 사주었으면 하는 부탁도 있어 엄마들끼리 모였는데, 냉장고도 사주자는 제안이 나왔어요. 아이들이 먹을 우유가 썩으니까 교실에 냉장고가 필요하다면서요. 일본이라면 학교의 비품이므로 당연히 학교측 예산으로 부담해야 할 것을 한국에서는 일일이 부모가 사지 않으면 안 돼요. 화장실 휴지까지 아이들이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되니...” “젊은 선생님들은 오히려 부모들에게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하지만, 50대 정도의 나이 든 선생님들은 부모로부터 뭔가 받는 걸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학년마다 담임이 바뀌고, 또 신학기에는 교실의 미화검사가 있어서 어머니들이 선생님 책상에 덮을 커버나 교실의 커튼, 오르간이나 텔레비젼의 커버, 교실을 장식하는 화분 들을 새롭게 교체하자고 의견을 내놓았어요. 교실에 비싼 난초 화분을 놓아주어도 아이들이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해 말라 버리거나 죽어 버리는데도 우리 아이의 교실에는 꼭 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엄마도 있어요. 다른 교실과 경쟁해서 자기 아이가 공부하는 교실이 가장 예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이것도 저것도 바꾸려고 엄마들이 경쟁을 하는거죠.” “아이가 반장이나 부반장이 되면 더욱 힘들어요. 아이가 반장이 되면 친구들에게 노트를 나누어 주거나, 학교 행사 때는 음료수를 사서 돌리거나, 소풍 때는 선생님이나 버스 운전기사 몫까지 김밥을 만들어 보내거나 해야 해요. 그런데 그 중에는 소풍 때 일식집에서 선생님 몫의 생선회와 매운탕을 배달시키는 엄마까지 있어서 정말 놀랐어요. 일본이라면 감히 생각 할 수도 없는 일이죠.” “일본에는 PTA(Parent Teacher Association: 교육 효과의 향상, 아이들의 행복 실현을 목적으로 1879년 미국에서 결성된 조직으로, 일본에서는 패전 후 학교 단위로 결성됨)라는 조직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학교와 부모를 연결시키는 조직이지, 특정한 반과 부모를 연결시키는 것은 아니예요. 아이가 반장이 되든, 학생회장이 되든 부모가 특별한 것을 준비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학교에 천만 원을 기부한 부모가 있는데, 그 집 아이는 학생회 부회장이 되었다고 해요. 내년에는 회장이 될 거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죠. 그러니까 담임과 교장을 초대해서 식사 대접하는 것을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한국 엄마는 아이에 대해 지나치게 간섭한다. "요즈음은 꽤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사회 전체가 교사에게 촌지를 주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이 점은 모든 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는 듯이 보여요. 젊은 엄마들도 그런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요. 게다가 첫째 아이 때는 부모가 열심히 신경을 쓰지만, 둘째, 셋째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잖아요. 그래서인지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우리 반은 막내들뿐이라 부모님들이 학교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어요. 선생들은 첫째 아이가 많은 교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강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교실 청소를 엄마가 해주는 것을 당연시하는 듯해요. 일본이라면 반드시 학생이 해야 하는 일인데...... 교실은 아이들이 사용하는 방이므로 어디까지나 아이들이 책임감을 갖고 청소를 하도록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엄마들이 대신해 주는 것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저는 정말 아이의 자립성을 키우고 싶어요." "대개 한국의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면 쫓아가서 아이를 일으켜 줘요. 그러나 외국인은 아이가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보고만 있어요. 그런 교육이 한국 아이들을 나약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내 눈으로 보면 우리 아이는 아직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는데, 학원 선생님은 우리집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잘 하려고 애쓴다며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요. 한국식으로 자라난 아이들이 너무 자립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거꾸로 우리 아이가 눈에 띄는 것 같아요." "한국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를 확실히 나타내지 않아서 무엇을 해도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어 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듯한 느낌도 들구요. 오늘은 문제집을 여기까지 해라, 그리고 이번에는 저것을 해라 하며 부모들이 아이를 꽁꽁 붙들어매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학교 선생님들도 아이와 같은 눈높이로 대등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아요. 위에서 꽉 찍어누르며 명령만 내리죠. 그리고 도통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모르고 뭔가 받기만 하려하고, 기대만 잔뜩 하는 것 같아요. 특히 초등학교 여교사들이 그런 경향이 심한 것 같아요." 기초가 없는 껍질뿐인 초등교육 "초등학교 교사의 집에 책상이 없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어요. 집에서는 수업 준비도, 학과 공부도 하지 않나 봐요." "외국어 과목 선생님들 중에도 수업 준비를 꼼꼼하게 하지 않고 교과서만으로 대충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들이 많아요. 자기 나름대로 자료를 찾아서 복사를 하거나 만들어서 가르칠 생각은 하지 않고......" "한국의 선생님들은 아이디어가 부족해요. 30대의 젊은 선생님들은 컴퓨터로 자료를 만들거나 수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공부를 하거나 하지만, 나이 든 선생님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엄마들에게 무엇을 만들어 와라, 무엇을 준비해 오라고 항상 요구만 하고 있어요." "함께 차를 마셔도 선생님들끼리 교수법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일은 없어요. 담임은 자신의 반 학생들 외에는 관심도 갖지 않는 것 같아요." "숙제도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게 꼼꼼히 토대를 만들어 준 다음 내줘야 하는 것 아니예요? 갑자기 어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방법은 학교에서 가르쳐 줘야하는데 가르치지 않으니까 결국 부모가 도와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쓸 수 없게 되는 거죠. 한국의 학교 교육은 공들여 차근차근 쌓기보다는 겉으로만 치장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좋은 것을 만들 수 없어도 확실하게 기초를 쌓아 가는 것이 중요하고, 또 언젠가는 그것이 결실을 맺겠지 하고 장기적인 전망하에서 교육 방법을 구성하고 있지 않는거죠. 어떻게든 서둘러 따라잡고 단숨에 앞질러 해치우는 식의 날림공사뿐이예요. 물론 그것은 교육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는 문제점들이라고 생각하지만요." "한국의 교육을 장구형이라고 지적하는데, 중간은 적고 잘하는 아이와 잘 못하는 아이로 양극화되어 있어요. 중간층을 만들려는 노력이 부족한 듯해요. 앞으로만 달리다 보면, 낙오된자는 그대로 그 자리에 고착되어 버리게 돼요. 그래서 시험 성적을 보면, 40명이 채 되지 않는 학급에서 평균 90점 이상인 아이가 10명 이상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거기에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성적의 아이들인 것이지요." "미국 학교에서 선배의 교과서를 후배들에게 물려준다는 이야기가 소개되자, 갑자기 우리 아이의 학교에서도 그것을 실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방식이 너무나 황당하지 뭐예요. 아, 글쎄 신학기가 시작되는 날부터 이튿날까지 작년에 사용한 교과서에 씌어진 글자를 전부 깨끗이 지워서 가지고 오라고 해서, 온 가족이 총동원되어 한밤중까지 교과서의 이곳 저곳을 지우개로 지우지 않으면 안 됐어요. 그런데 종이 질이 좋지 않아 찢어져 버리거나 해서 물려받은 아이들이 교과서를 받고도 기뻐하지 않자, 부모들이 책방에 우르르 몰려가 책을 사는 바람에 새로운 교과서가 품절되는 소동이 일어났다고 해요. 이런일을 하려면 사전에 아이들에게 이 교과서는 후배에게 물려줄 예정이므로 깨끗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도 한 후 시간을 두고 시작해야 하잖아요.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해보자고 덤비니까 그 부담이 학생과 부모에게 그대로 전가되는 셈이죠. 이런 계획 설정들은 한국의 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생각해요." 아버지 부재, 어머니에게만 맡기는 교육 "아이들의 선생님에게 인사하러 갔을 때 나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래서 '바빠서 아이의 일을 잘 챙겨 주지 못할지도 모르니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했는데, 담임인 여선생님으로부터 '아이의 교육이 제일 중요한데 어머니가 대학원 같은 데 다니면서 어떻게 합니까' 하는 말을 들었어요. 일하고 있는 엄마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했다고 들었어요. 엄마가 집에 있어 아이들의 일을 봐 주는 것이 제일 좋다고 말이예요. 그러면 선생님의 아이는 어때요? 당신도 일하는 엄마잖아요.라고 정말 한마디 해주고 싶었어요." "뭔가 선생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아이를 학교에 인질로 잡히고 있는 것 같아 말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들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이 아이는 엄마가 일하고 있으니까 안 된다, 이 아이는 엄마가 없으니까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하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아이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갖거나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어요." "아이의 교육 따위 일로 아버지가 일일이 학교에 얼굴을 내밀다니, 하는 생각이 한국의 아버지들에게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아이 일 때문에 학교에서 오라고 하면 엄마가 가는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한국에서는 생각하나 봐요." "일본은 PTA의 회장이 남잔데, 한국에서는 육성회 회장도 엄마예요."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집안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이었어요. 그분은 가족들이 아무 반찬도 없이 찬밥에 김치만으로 밥을 먹고 있을 때도 자신은 고기를 싸가지고 친구와 등산을 가버리거나, 축음기를 사와서는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등, 어쨌든 아이들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과거에는 그런 아버지들이 정말로 많았다고 들었어요." "아버지는 항상 바쁘니까 아이의 교육에 쓸 시간 같은 건 없다고, 지금까지도 본인도 주위 사람들도 누구나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죠. 하지만 점차 변하는 것 같아요. 평일에 하는 아이의 체육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휴가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는 정말 칭찬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어머니! "이 나라의 50대 이상 어머니들은 가난한 시대에 힘들게 자란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자식들이 대신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경향이 강한 듯해요. 그래서 그런지 아이에 대해 지나치게 큰 기대를 거는 성향이 있어요. 그리고는 바로 주위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랑하고 싶어해요." "일본에서는 거꾸로 눈에 띄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도록 조심해요. 눈에 띄면 곧 바로 이지메를 당하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는 부모 모임이 열리면 바로 아이들의 자랑이 시작되요. 예를 들어 한 엄마가 이번에 우리 아이의 성적이 좋았다고 말하면, 다른 엄마가 지난번 시험의 평균이 몇 점이었냐고 되물으면서, 우리 아이는 90점을 받아 과학고등학교에 진학 시킬 예정이라는 등 말하는 상대에게 압력이라도 주는 듯이 노골적인 자랑을 시작해요.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처음 엄마는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 아이에게 바로 화풀이를 하는 거죠. 학부모들이 만나 자유롭게 말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자랑만 한다면 어떤 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데 말이예요.“ “제사 때 여자는 죽어라 음식을 장만하지만 정작 제수를 올리거나 절을 할 때는 남자밖에 참여하지 못하잖아요. 시어머니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너는 여자니까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남자니까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항상 말씀하세요. 하지만 나는 그런 양육방식은 취하고 싶지 않아요. 어릴 적부터 그런 차별을 당하면 어른이 돼서도 반드시 어떤 나쁜 영향이 올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남자와는 반대로 여자는 어차피 시집을 가면 고생하니까 결혼하기 전까지는 가사는 돌보지 안하도 좋다는 양육방식을 취하는 집도 있지요. 대학을 나와서 취직도 하지 않은 채 집에서 놀고 있는 시누이가 전혀 가사를 돕지 않아서 같이 살고 있는 장남의 며느리인 내가 더 짜증이 나요.” “한국에서는 세대간의 갭이 너무 커서 같은 한국인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갈등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 나라는 사회적으로는 남성 중심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과거로부터 여자의 힘이 강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여성은 뒤에서 남자를 움직이고 있으니까 말이예요.” “아이들을 보아도 역시 여자아이가 거만하게 굴어요.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미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보다 강한 것 같아요.” 아이 사랑에 대범한 한국인들 "지금 일본에서는 교육 현장이라는 말이 잘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이 난폭한 짓을 하고 있어요." "일본은 선생님이 학생을 지나치게 부드럽게 다뤄요.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존대말을 하는데도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반말로 대답해요." "한국도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아직 유교의 가르침인 연장자를 존경하는 정신을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젊은이들도 어른들에게 꼬박꼬박 인사하는 것을 보면." "윗사람이나 연장자들에게 마음을 쓰는 것은 집 안에서도 잘 가르치고 있어요. 우리도 시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어 아이들이 무엇이든 할머니를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말로 좋은 태도라고 생각해요." "일본인은 기술적이고 한국인은 예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따라서 세밀한 계획 없이 일에 뛰어든 한국일들은 무슨 일을 해도 마지막 끝마무리가 깨끗하지 않은 것 같아요. 반대로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일에 뛰어드는 일본인은 그 계획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다시 바로잡지를 못해요." "아이들에게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한국에서는 '선생님의 교육방법이 나쁘다‘고 말해요. 하지만 일본에서는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를 보면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요." "한국인은 아이에 대한 허용 범위가 커요. 예를 들어 비행기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얼러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이들이예요. 하지만 일본인은 모두 귀찮은 얼굴을 하고 봐도 못 본 척하지요." "한국인은 스킨쉽이 많은 것 같아요. 쉽게 아이들에게 뽀뽀를 하는 걸 볼 수 있는데, 그것도 고등학생 정도의 조카에 대해서까지 그러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죠. 특히 한국 엄마는 마치 아이의 몸을 쓰다듬듯이 귀여워하는데, 반대로 일본의 아이들은 그런 피부 접촉이 너무 부족해서 사랑에 굶주려 있어요." “최근 일본의 아이들은 제멋대로이고, 단체행동도 하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어요. 의자를 치우라고 선생님이 말해도 그 정도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많아요. 그때 일본 엄마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누어져요. 할 수 없어도 좋다고 하는 사람, 아이들의 손에서 의자를 빼앗아 정리해 버리는 사람,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황해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으로 갈라지지요. 아마도 한국이라면 당황해 하는 엄마는 없을 것 같아요. 한국의 엄마는 항상 자신의 아이에게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죠. 때론 그것이 부럽기도 해요.” “텔레비젼 드라마에서도 나라마다 가진 특색이 묻어나는데, 일본인은 권성징악물을 좋아해요. 악인은 마지막까지 악인이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악인에게도 실은 착한 마음이 있다고 하는 묘사방식을 택해요. 또 한국인들은 사업에 실패해도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데 비해 일본인은 한번 절망해 버리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그런 어른의 모습을 보며 자라고 있는 것이구요.” 비교-일본 유아교육의 실태와 현실 보모, 교사, 간호사 역할을 하는 보육마마 우리집에는 두 딸이 있다. 지금 큰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고, 작은아이는 탁아소의 4세아 반에 다니고 있다. 큰아이가 생후 8개월이던 때 나는 아이들을 맡기고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보육제도를 이용한 지도 어느덧 8년이 되었다. 나의 육아 경험을 통해 일본 중에서도 도쿄의 보육 사정이 어떤지, 그 한 단면을 소개하려고 한다. 큰 아이는 처음에 기타쿠에 있는 ‘보육마마’한테 맡겼다. 보육마마는 보모, 교사, 간호사 등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 개인 주택에서 3세 미만의 아이들을 혼자서 세 명까지 맡아서 보육하는 제도다. 내가 첫아이를 맡길 당시 맡기는 측인 나의 부담은 월 2만 엔이었다. 거기에 행정 당국으로부터의 보조가 아이 한명당 월 6만 엔 정도 주어진다고 들었다. 가정의 분위기를 띠고 있어 영아의 경우는 탁아소보다도 좋다는 평이었다. 그런데 보육마마 제도는 우리 아이의 경우 전혀 맞지가 않았다. 개월수가 다른 아이들 세 명을 보모 혼자 맡아서 돌보기 때문인지 문 밖으로 산책도 데려가지 않았고, 따라서 아이들은 세 평 정도의 작은 방안에서 종일을 보내야 했다. 하루 일과는 그저 방안에서 텔레비젼을 보거나 몇 개 없는 장난감으로 놀이를 하는 것 뿐이었다. 당연히 아이도 흥미를 느낄 리가 없었다. 우리 아이는 꽤 고집이 센 편이라 그런 환경에 절대로 적응하려고 하지 않았고, 하루 종일 엄마한테 돌아가겠다고 울기만 했다. 그런데 한 달을 지내다 보니, 결국 모자가 함께 병이 나 쓰러지고 말았다. 우리 아이도 지쳤지만, 나도 매일 두 끼분의 이유식 도시락을 싸고 모유를 짜서 냉동해야 하는 등 아이를 맡기기 위해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날마다 피로가 쌓여 갔다. 게다가 아이는 하루 종일 울기만 한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밖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우리 아이 말고 다른 두 아이들은 거기서 잘 지내고 있었으므로 보육마마 제도 자체가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아이에게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좋은 탁아소를 스스로 찾아라 그때 어떤 사람이 보육마마한테 맡기지 말고 좋은 사립 탁아소를 찾아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공립 탁아소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그러나 사립 탁아소는 아주 좋은 곳도 있고, 아주 이상한 곳도 있다. 그러니까 실제도 방문해 아이한테 맞는 곳을 찾으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사립이라고 해도 도쿄에서는 ‘공,사 격차 시정’이 있어서 공립하고도 격차가 거의 없고, 각종 보조금이 나오기 때문에 경제적인 면에서도 부모의 부담은 공립과 거의 같다고 해도 좋다. 단지 원래의 경영 주체가 사립이므로 보육 내용에 있어서 공립과 다른 그 나름의 독자적인 특색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아직 바람이 차가운 2월경, 나는 아이를 포대기로 업고 자전거를 타고 탁아소를 돌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에는 사립 인가 탁아소가 2,3군데 있으나, 모두 자전거로 20분 정도 걸릴 정도로 꽤 멀었다. 그러나 직접 방문해 보니 보육마마와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탁아소는 영아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창문 밖에서 엿보는 것만 허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탁아소에서는 영아실 방안까지 보여 주었다. 방안에 있던 보모가 우리 아이에게 ‘이리와’하고 말을 건네자 우리 아이는 좋아서 그 쪽으로 기어가 버렸다. 거기에는 작은 아이들이 올라탈 수 있는 놀이기구도 있고, 숨기놀이를 할 수 있는 반침도 있어 우리 아이가 매력을 느낀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우리 아이를 그 탁아소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일본에서 보기 드물게 온돌 시설도 있고, 탁아소 전체가 나무 재질이 주는 따뜻함을 강조해서 설계된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보육환경을 자랑하는 도쿄 일본의 복지제도는 각 자치단체마다 천자만별이지만, 아이들의 보육에 관해서는 '아동복지법' 이라는 법률의 적용을 받고 있다. 이 법의 기본 이념은 '어린이도 어른과 같이 하나의 인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념을 따라 이 법은 아동에게 열악한 환경이 주어지는 것을 금지하고, 아동들이 누구나 행복하게 자라날 수 있는 권리를 지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도쿄도의 보육제도는 일본에서는 최고 수준에 있다고 한다(그만큼 도쿄에서는 많은 여성이 일하고 있다고 하는 말도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도쿄도에 혁신적인 도지사가 취임했던 시대에 이미 실현된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보육문제보다도 노인 복지문제로 행정의 중점이 옮겨져, 보육면의 법률적 개선 작업은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영아 보육의 기준은 국가에서도, 도쿄도에서도 아이 3명당 보육자 1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우리 아이가 다닌 사립 탁아소에도 영아반 정원 9명에 항상 담임 선생이 3명이었다. 도쿄도의 경우 거기에다 영아를 맡은 탁아소에 간호사를 배치하도록 의무화했다. 식사 때를 비롯하여 일손이 더 필요할 때는 시간제 보모 1,2명이 도와준다. 그래서 영아 9명을 항상 어른 4,5명이 돌보는 이상적인 환경이 이루어져 있다. 4,5세 아동의 경우, 국가 기준은 아이 30명에 보육자 1명이지만 도쿄도에는 복수담임제(예를 들어 아이들 30명이 있는 반에는 담임교사가 2명)가 실시되고 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탁아소에서는 아이들 30명에 보육자 3명 체제를 실현하고 있다. 아이들의 개성을 중시하고, 자유롭게 여유로운 보육환경을 유지하는 데는 충분한 인원 배치가 필수적이다. 도쿄도에서는 국가 기준과의 차액(인건비)을 각 탁아소에 보조하고 있다. 급식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국가 기준은 급식 중 주식은 아이의 부모가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빵이나 밥을 매일 집에서 가지고 오도록 한다. 이에 비해 도쿄도에서는 주식비를 보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이가 주식을 가져 오지 않아도 되도록 완전급식제도가 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도쿄 바로 옆에 있는 사이타마현이나 가나가와현, 지바현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부모가 수입이 없으면 보육료는 공짜 인가 탁아소에는 조치제도라는 것이 있다. 각 지방 자치단체의 보유과 등 행정기관이 공,사 격차 시정을 위해 공립 탁아소뿐만 아니라 사립 탁아소에도 직원의 기본급을 보장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부모 쪽은 공,사립의 구별 없이 양친의 수입에 따라 25단계 정도의 보육료가 자치단체마다 설정되어 있다. 도쿄도의 경우 생활보호를 받는 세대 등에는 최저액인 ‘공차’가 적용되며, 최고액은 약 5, 6만엔이다. 물론 부모가 지급한 이 정도의 보육료만으로는 탁아소 경영이 불가능하며, 부족분은 정부,도,구에서 보조한다. 이 조치제도 덕택에 우리집 같은 빈곤 가정에서도 마음에 드는 사립 탁아소에 아이들을 맡길 수 있고, 보육료를 위해 엄마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본말전도가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그러나 현재 이 조치제도의 폐지가 예정되고 있어 사립 탁아소에는 독립 채산적 경영이 요구되고 있다). 이렇게 우리집 큰딸은 6년간을 이 탁아소에는 보내고 졸업했다. 정원이 넓지는 않아도 닭들이 뛰어다니고 과실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때가 되면 아이들은 버찌, 금귤, 감, 앵두, 귤 등을 따서 보물처럼 간직하거나 몰래 먹기도 했다. 아이들은 여름이면 진흙놀이에, 물놀이에 신나게 놀았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때부터 뒷골목 산책은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낮잠을 자기 전에는 모두 잠옷으로 갈아 입었고,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선생님이 그림책을 읽어 주셨다. 이렇게 환경이 좋은 탁아소에서 유아기와 어린 시절을 보냈으므로 우리 딸은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제대로 이웃과 교제한 적도 없고, 또 처음 경험하는 육아여서 이것저것 전문 서적들을 읽어가면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지만, 탁아소에서 나처럼 직업을 가진 많은 다른 엄마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낡은 사고방식 여전해 일본에서, 특히 도쿄와 같은 도시에서는 아파트 안에서의 ‘밀실 육아’가 점차 사회문제화 되어 매스컴에 자주 보도되기도 한다. 인간관계가 소원한 도쿄라는 사막의 한복판에서는 지역 사회가 붕괴하고 이웃과의 교제도 단절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젊은 엄마들이 육아에 대해서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어린아이를 가진 여성이 사회에 나가 활동한다는 것은 그나마 이 정도로 철저히 보육제도가 정비되어 있다고 하는 도쿄에서도 아직은 어려운 형편이다. 일본에서는 최근 부모가 아이들을 죽이거나 아이가 부모를 죽이는 사건이 종종 일어나 매스컴에 센세이셔녈하게 보도되기도 한다. 육아는 여자가 하는 일로 치부하고 가정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남편들, 육아는 가정주부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사회적인 무관심 때문에 폐색된 모자 관계가 과도한 긴장 상황을 불러일으켜 이것이 일정한 선을 넘으면 사회적 '사건' 으로 비화되는 것이다. 여자의 행복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있다는 낡은 사고방식이 일본에서는 아직도 지배적이라 엄마들 자신도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탁아소가 많이 보급되어 있는 도쿄에서도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면 그 아이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여론이 여전히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 때문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직장을 그만두는(그만둘 수밖에 없는) 여성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만3세 혹은 4세가 되면 유치원에 통원시키든가 탁아소에 맡기도 시간제로 다시 근무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사는 도쿄 기타구는 인구가 30만명인데, 구립 탁아소 39개소, 사립 탁아소 12개소를 합해서 51개소의 탁아소가 있다. 규모로는 정원 100명 정도의 탁아소가 가장 많다. 한편 유치원은 구립 8개소, 사립 27개소인데 4,5세 아동에 한해서 보면 탁아소에 다니는 아이보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유치원과 탁아소의 공통점, 차이점 유치원과 탁아소의 차이는, 행정적으로 말하면, 유치원은 문부성 관할이고 탁아소는 후생성 관할이라는 데 있다. 종래에는 유치원은 교육을, 탁아소는 보육을 필요로 하는 아이를 맡는 차이가 있었으나, 요즈음은 양자의 내용이 거의 같다. 단지 보육시간을 볼 때 유치원은 대개 오전반인 데 비해 탁아소는 아침 7시경부터 저녁 7시 정도까지 부모가 일하는 시간에 따라 각각 아이들의 보육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또한 유치원은 대개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지만, 탁아소는 급식이 실시되고 있으므로 일하는 부모는 식사 준비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어 매우 바람직하다. 선생님의 수는 유치원의 경우 30명의 원아에 담임 1명 정도가 일반적이다. 많은 아이들을 한 선생이 돌보게 되면 자연히 규율이나 규칙등이 강조되고 교육면에 있어서도 미니 초등학교처럼 되어 버린다. 시간표를 만들어 문자 읽기, 쓰기, 숫자 놀이, 영어 등 조기 교육에 힘쓰고 있는 곳도 많다. 유치원파 엄마들이 아이가 3,4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각종 학원에 다니게 하는 것도 최근에 유행하는 현상이다. 과열된 조기 교육 현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취학 전인 만큼 탁아소 아이의 부모도, 유치원 아이의 부모도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아이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났으면 하는 소박한 육아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착한 아이 만들기에 급급한 부모와 학교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러한 육아관이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단지 '무럭무럭' 을 강조해 왔던 부모들이 학교 교육의 영향으로 규칙을 지키는 일이나 잃어 버린 물건을 점검하는 일 등에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어느새 부모는 아이들을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키우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부모들은 무언가 꺼림칙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학교생활을 무난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현실주의로 점차 흘러가게 된다. 현재 일본의 초등학교에서는 저학년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교육내용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한자는 1학년 때 80자, 2학년 때 160자, 산수는 2학년까지 두 항의 덧셈, 뺄셈, 그리고 구구단까지 암기해야 한다. 교사들은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는 교과 내용을 아이들 머릿속에 집어 넣기에 급급하고, 부모들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뒤쳐지지 않게 공부하도록 몰아세워 아이들로부터 학교 다니는 재미를 빼앗고 있다. 부모도 선생도 어른의 말을 잘 듣고 그대로 따르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는 가치관을 어린이한테 심어 준다. 결국 아이들은 정말로 느긋한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친구들과의 신뢰 관계를 확인해 가면서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학교는 대체 어디로 가버렸는가? 교실에서의 어른과 아이들 사이의 살벌한 인간관계에다 주위 사람들의 감시까지 더해져 티없이 밝게 자라나야 할 아이들의 감수성이 망가지고 있는 것같이 여겨진다. 이대로 가면 일본 아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패기 없고, 남의 말을 잘 듣고, 자기 머리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자기 의견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자기 주장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이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은 정녕 나만의 노파심일까? 6장 외국인 며느리는 한국 시어머니의 제물 외국인 며느리 노릇 너무 힘들어 아무도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미국에서 그의 좋은 성격에 끌려 만나기 시작했을 때 국적 문제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느나라 사람이라는 것ㅗ다 그가 내게 너무도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물론 부모님은 딸이 멀리 떨어져 고생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우리들의 결혼에 반대했어요. 대만에서는 한국의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않은데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질이 나쁘고 싼 물건뿐이거든요. 대만인은 한국이 대만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나는 한국으로 시집 갈 것을 결정했을 때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어요. 남편과 나는 그때까지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 젊으니까 열심히 공부하면 한국어 정도는 빨리 마스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나이를 먹은 일본인은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아서 나의 부모님도 크게 반대했어요. 한국은 가난한 나라이니 고생할게 뻔하다고 집집마다 화장실도 없어 요강으로 일을 본다고 말할 만큼 오늘의 한국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세요. 지금도 일본에 계신 부모님은 텔레비전을 통해 한국이 imf로 힘들어 하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는 곧 돌아오라고 하세요"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이 말은 국제 결혼한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는 말일 거예요. 그렇지만 결혼하고 나니 결혼전에 생각한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내가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고 했을 때 결혼 전 남편은 그런 것은 사서 먹으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김치를 담그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결혼했지만, 내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시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었어요. 약속과 다르다고 남편에게 항의했더니 imf로 경제 상태가 많이 나빠져서 그런다고 조금만 참아 달라고 했어요. 그런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시집 식구와 같이 사는 삶에 지쳐서 친정으로 돌아갈 까 하고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예요" "게가 한국에 와서 반년 정도 지났을 때 제 남편이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어요. 나는 그 당시 한국어도 거의알지 못했고 119에 전화하는 것조차 알지 못했는데 조카'딸이 옆에 없었다면 남편은 죽었을지도 몰라요. 어쨌든 응급조치를 한다고 타월에 물을 적셔 남편의 이마에 올려 놓았는데. 그것이 한국의 방식과 달라 그의 조카가 그렇게 하면 삼촌이 죽어 버린다고 큰 소동이 났어요. 겁에 질려 있던 나는 더욱 당황했어요. 남편을 입원시켜야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은 건지 알수가 없었어요. 그런 나에게 맡겨 놓을 수는 없다고 남편의 누나가 병원까지 따라가 주었어요. 하지만 손님이 병문안을 올때마다 남편의누나는 자신의 동생이 회사에서도 일 때문에 힘든데 집에 돌아오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내와 상대를 해야 하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동생이 쓰러졌을 때도 옆에 아내밖에 없었다면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다. 결혼 전에는 자신이 맛있는 음식을 꼬박꼬박 만들어 먹였는데 요리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일본 여자가 와서 자신의 동생을 이렇게 해놓았다는 등, 온갖 푸념을 늘어놓았어요. 그러니 병문안을 온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이 차가을 것은 뻔했고 나는 당연히 몸둘바를 몰랐죠. "나 자신도 의지하고 있던 단 한사람, 남편이 쓰러져 불안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남편의 가족들은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나는 나처럼 한국인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 온 외국인 친구들에게 신세한탄을 하거나 위로를 받거나 하면서 다행히 그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그런 친구들이 없다면 분명 나는 미쳐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말은 못하지만 들을 수는 있어! "내가 한국어를 못하니까 처음에는 시댁 식구들이 내 앞에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막 하더군요. 그런데 나는 말할 수는 없어도 들을 수는 있으니까 더 괴롭더라구요. 오히려 전혀 알지 못한다면 오히려 편할 텐데 하고 생각했어요" "내가 일본인이라는 것 때문에, 시집 식구들로부터 상당한 저항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 얼마간은 시집에 갈 때마다 시누이가 한국에도 예쁜 여자가 산처럼 많은데 왜 이렇게 형편없는 자그만 일본 여자를 데리고 왔냐고, 커다론 목소리로 말하곤 했어요. 내가 한국말은 잘 못해도 듣는 것은 거의알아 들을 수 있었어요!" "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고 있던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돌연 작아진 적이 있어요. 내가 방에 있었으니까 나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는데 매우 기분이 나빴어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도 나한테 뭔가 욕을 하고 있으면 바로 알 수 있어요" "한국인은 생각한 것을 바로 내뱉어요. 일본인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상대에게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면 말하지 않는데 말이예요. 그것이 예의잖아요. 그런데도 일본인을 보고 겉과 속이 다른 교활한 인간이라고 하면 화가나요. 내 생각에는 오히려 한국인이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이예요. "특히 가족간에는 아무런 말이나 막 해요 상대방이 상처를 입는 것 따윈 고려하지도 않고서 당신의 행동이 나빴어 반찬의 간이 맞지 않아 아리를 안는 방식이 서툴러 하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요. 한국인끼리라면 보통 하는 대화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우리 외국인들은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 한마디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일이 많아요" "남편이 쓰러졌을 때 모두 내 탓이라고 말하는 것이 특히 괴로웠어요. 그래서 후에 내가 시집 식구들에게 일본에서는 근거 없는 말을 마음대로 할 경우 명예훼손으로 법에 고소할 수도 있다고 말하자 너무들 놀라더군요. 물론 그렇게까지 하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내가 그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시집과의 교제방식을 모르겠다 "처음에는 한국어를 거의 알지 못했으므로 시집에 갈 때마다 긴장했어요.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어떻게하면 좋을지도 몰랐죠. 한국인들은 종종 가족단위로 모이는데 언제나 나는 식사 준비만 했지요" "역시 한국말 배우는 것보다도 시집 식구와 어떻게 사귀면 좋은지를 알지 못해 가장 힘들 었어요. 일본과는 전혀 인간관계가 다르니까요. 그런데도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니 매우 신경 쓰였어요" "대만에서는 그렇게 가족 단위로 모이는 기회가 없는데 한국은 거의 주말마다 모여요. 그것도 만나서 외식을 하거나 밖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집에 모여 모두 함께 식사를 하는 정도뿐이예요" "며느리는 남편의 가족을 위해 밥을 준비하는 존재 같아요. 가족이 모여도 늘 나만 외톨이예요. 무얼 말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시집에 식구들이 모일 때마다 나는 너무라 힘 들어요.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가능하면 안 가려고 하고 가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예요" "말도 할 수 없고 한국도 잘 모르니까 한국인이면 혼자서 해결 할 수 있는 자질구레한 일까지 시집 식구들엑 상의해야 돼요. 시장에 갈 때도 누군가 같이 가누어야 하고 남편은 일이 바빠 항상 집에 없으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시어머니 시동생의 손을 빌리게 되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시동생과 시어머니가 크게 싸움을 했을 때는 정말 괴로워서 밤새도록 울었어요. 밥도 잘 넘어 가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가족 일만, 아버지는 외부 일만 "김치 담는 일은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김정은 정말 힘들어요. 더구나 무슨 요리를 만들든지 한국에서는 항상 너무 많이 만들지 않으면 안 돼요. 채소를 가득 씻어서 자르다 보면 내가 식당 아줌마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일은 기계를 사용하면 되는데 하고 생각되는 것까지 한국에서는 하나하나 손으로 하잖아요. 마늘도 껍질 벗긴 것을 슈퍼마켓에서 사면 좋은데 일부러 시장에서 껍질을 까지 않은 것을 사 와서는 여자들이 모여 집에서 까잖아요. 또 그것을 손으로 빻고 믹서를 사용하면 좋은데됴 그런 시간이 있으면 나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할 텐데. 한국 아줌마들은 가족을 위해 무슨 음식을 하더라도 손으로 하는 것 같아요. 그래야 손맛과 정이 담져겨 있다고 하면서, 대단한 정성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럴 시간이 있다면 나는 자신을 위해 쓰고 싶어요" "한국의 여자들은 자신이 하루종일 김치를 만들더라고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남편이나 아이들 일만 생각하고 마치 그들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가족을 위해 엄마가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엄마는 하루종일 가족을 위한 일만 하는데도 아빠는 전혀 집에 없다는 거죠. 아무리 엄마가 열심히 한다해도 엄마의 사랑과 아빠의 사랑은 다르잖아요. 두 사람의 사랑을 골고루 받지 않으면 아이들은 균형있게 자라지 못하니까요" "나는 미국에 유학까지 하고 대학을 나왔는데도 지금은 매일 집에서 아이와 놀면서 가사를 돌볼 뿐이예요. 영어도 잊어버린 데다 점차 자신이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이 아까워요" "내가 아이들을 맡기고 뭔가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시어머니는 절대 허락해 주지 않아요. 아이들은 엄마가 보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부인은 집에서 남편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 라면서요" 한국 엄마들의 피해망상 "내가 친정에 가는 것을 시어머니는 좋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빠의 결혼식이 있어 친정에 가고 싶다며 말하니까 너는 남편이 고생해서 번 돈을 친정에 가서 그런 식으로 써도 좋으냐며 막 화를 냈어요. 시어머니는 한국인 며느리라면 자신은 그런 귀찮은 일 없이 편히 살 수 있는데, 하고 말하며 네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한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으면 안와도 좋다면서요. 그때까지는 출산이라든가 이런저런 일이 있어 1년에 두 번 정도 친정에 갔지만 그 이후에는 시어머니가 신경쓰여 벌써 1년 가까이 친정에 못 갔어요. 그렇지만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하는 것은 나한테만이 아니예요. 시동생이 처가에 가는 것도 좋게 생각하지 않아요. 귀가가 늦어지기라도 하면 큰 소리로 야단을 치세요. 그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우리 시어머니가 아들밖에 없어 며느리의 마음을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시어머니도 우리들과 같은 여자인데" "우리 시어머니는 아들이나 며느리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면 무섭게 화를 내요. 며느리가 한마디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면 며칠이고 말도 하지 않아요. 그런데 나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도 잘 모르는데다, 무엇이 시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시어머니가 화내는 것이 무서워 요즈음은 오히려 아무것도 이야기하고 싶지가 않아요." "맞아요 맞아요 우리도 같아요. 한국 시어머니의 자존심은 정말 대단해요." "댁의 시어머니도 그래요? 나는 우리 시어머니만 특별히 성격이 비뚤어져서 그렇다고 생각 했어요." "한국의 엄마들은 모두 피해망상이 있나봐요.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성질을 내니까요." 시어머니도 무섭지만 시누이도 무섭다 "시어머니도 무섭지만 시누이는 더 무서워요. 무조건 친정식구들 편만 드니까요. 내가 일요일에 남편에게 아이들을 공원에라도 데리고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 손위 시누이는 자기 동생은 매일 일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니 주말에는 집에서 쉬어야만 된다고 나를 야단쳐요. 내게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지요. 같은 남자라도 남편과 동생은 다른 것 같아요. 동생은 피붙이니까" "결혼하고 얼마 지난 후 '네가 잘 먹이지 않아 우리 동생이 말랐다고' 시누이에게 야단을 맞았어요. 남편은 뚱뚱한 편이어서 오히려 다이어트를 시켜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시집 식구들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가령 조카에게 '네 삼촌은 내 생일도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해주 않는다고'고 말하면 곧 시누이 귀에 들어가 큰일이 나요. 동생이 피곤해서 그러니 네가 그것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구요. 무심코 가볍게 한 말도 꼬투리를 잡아 꼭 잔소리를 해요.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해요?" "뭔가 말하다 말꼬리를 잡히는 것이 싫어서 시집에 가면 될 수 있는 한 이야기하지 않고 조용히 있어요. 그래서 더 스트레스가 쌓이죠" "남편이 차를 사서 처음으로 맞은 추석때였어요. 시골에 사시는 시어머니 댁에 올해는 자가용으로 갈 수 있게 됐다고 기뻐하고 있는데, 차가 없는 작은 시누이가 자기들 가족이 그 차로 갈테니(물론 운전은 나의남편 몫) 나와 아이들은 큰 시누이차로 가라는 거예요. 우리 아이는 아직 어려서 옷을 여벌로 가져가야 하고 기저귀 등 짐이 많아 틀림없이 남편이 반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시누이가 말한 대로 하라고 했어요. 남편은 누라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것을 아주 기뻐하는 것 같았어요" "친정 동생에게는 이것저것 신경을 뜨는 시누이가, 자기 시댁에는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건지... 한국인의 생활에는 프라이버시가 없다 "주말에 시누이 집에 가면 우선 내 남편을 위로부터 아래까지 ㅎ어봐요. 다음에 나를 보고는 내가 새로운 양말이라도 신고 있거나 하면 양말 살 돈이 있으면 남편 양말을 먼저 사서 신기면 어떻겠느냐고 비꼬아요. 그래서 시누이 집에 갈때는 절대 새 옷 같은 건 안 입고 가요" "오랜만에 우리집에 오면 시누이는 어딘가 변한곳은 없는지 살피듯이 우선 집안을 빛 둘러 점검하고 난 후에 비로소 소파에 앉아요" "시어머니는 항상 내게 네 남편은 일 때문에 피곤해 하니까 잘 대해 주어야 한다든가,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소중히 사용하라고 말해요.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나는 시어머니가 나를 믿고 있지 않구나 하는 생각에 슬퍼져요" "우리집 열쇠를 시어머니도 가지고 있어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좋좋 입에 오시기도 해요. 그럴때면 아침에 바빠서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던 그릇을 정리하든가 냉장고에 아무것도 반찬을 가지고 와서 넣어주시기도 하죠.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도 싫었어요. 너는 쓺 없는 며느리라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같이 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만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는 것 같아 싫어요. 오기전에 전화라도 한 통화 해주면 좋겠는데 항상 오고 싶은 때면 아무때나 내가 있건 없건 마음대로 열쇠로 열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샤워를 하고 벌거벗은 채 목욕탕에서 나오다 시어머니가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란적도 있어요" "한국의 생활에는 프라이버시가 없어요. 남의 집 냉장고를 마음대로 열어보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해요" "프라이버시가 없는 것은 독립심이없다는 증거예요" "집들이를 할 때 였는데 시누이들이 이래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하면서 테이블의 위치에서부터 서랍 안의 물건까지 여기에 있던 것을 저기에 저기에 있는 것을 여기에 전부 마음대로 옮겨 버렸어요. 시누이들이 집에 돌아간 후 나는 필요한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찾느라 고생을 많이 했어요" "내 가족의 삶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때나 와서 내가 산 커튼의 색이 좋지 않다든가, 가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가 하는 그런 잔소리를 왜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한국인은 무엇이든 다른 집과 비교해서 다른 사람과 같게 하지 않으면 불편한가 봐요. 이런 가구는 신혼부부답지 않다며 잔소리예요. 그것도 우리들의 개성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는데" "너희 집에는 냄비도 없고 접시도 없어 하는 잔소리를 시누이로부터 들었는데 그런 일은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도 없는 일이예요. 친정 엄마라도 딸의 집에와서 마음대로 찬장이나 냉장고를 열어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요" "냄비 하나 사는데도 시어머니와 의논하라고 시누이가 말했을 때는 아예 질려버렸어요" "일본에 친구들이 출산을 축하한다며 아기 옷을 여러벌 사서 소포로 보내 주었어요. 나는 바빠서 바로 그것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방구석에 상사 그대로 놓아 두었죠. 그런데 하루는 시누이들이 집에와서 내가 과일을 사러밖에 나간 사이에 자기들 마음대로 상자를 열고는 이것은 우리 것, 저것은 너희 것 하며 내용물을 나누고 있었어요. 남편과 나이차가 있는 시누이는 손자가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이것은 자기 손자에게 준다며 이렇게 많이 있으니 어차피 다 사용할 수 없지 않느냐고 했어요. 한 발만 늦었어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 친구들이 부내준 그 아기 옷들이 전부 시누이들의 가방속에 들어갔을 거예요. 내게 한마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그때 나는 정말로 화가 나서 이것은 당신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내 친구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아이를 위해 귀요운 옷을 골라 주었는데 정작 우리아이에게는 한 번도 입혀 보지 못한 채 그것을 가지고 가려고 하다니! 나는 친구들의 마음이 깃들인 선물이어서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왠지 거꾸로 내가 구두쇠가 된 것 같아 괴로웠어요. 시누이들은 이렇게 많이 있으니 몇 장 준다고 해서 나쁠 것 없지 않느냐며 투덜대면서 옷을 돌려 주었는데 큰 시누이는 이것만은 가지고 같다며 가장 귀여운 턱받이를 가지 가방에 넣어 버렸어요" "시누이는 우리집에 올 때마다 옷장을 열어보고는 뭔가 새로운 옷이 늘어나지 않았나 체크해 요. 내가 잠시 시장에 간 사이에 마음대로 내 옷을 입고 있거나 좀 입에 볼게 하며 내게 말할때는 이미 90퍼센트는 입고 있는 상태예요" "시누이와 같이 화장을 할 때 그녀의 립스틱 색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내가 가지고 있던 립스틱을 발라보면 어떨까요. 하며 권했어요 그러자 시누이는 어 그래, 하며 당연한 것처럼 내 립스틱을 자신의 가방에 넣어버렸어요. 그리고 나중에 새것이 아닌 쓰단 만 것을 자신에게 주었다고 잔소리까지 했어요. 나는 줄 생각이 없었는데도 말이예요" 며느리는 언제나 찬밥만 먹는다! "시어머니는 항상 내 남편에게만 이것 먹어라 저것 먹어라 하면서 나에게는 한마디도 해주지 않아 슬퍼요. 대만이라면 함께 살고 있지 않는 가족을 손님처럼 생각해서 함께 살고 있는 가족 보다 더 잘해 주는 것이 보통이예요. 아들은 엄마가 자신에게 맛있는 것을 나누어 주지 않아도 삐치치거나 하지 않겠지만 며느리는 데려온 사람이니까 자신의 혈연보다 더 잘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만 사람들은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한국의 시어머니는 새로운 반찬이 있으면 먼저 자신의 아들 앞에 놓아 며느리 손에 닿지 않게해요. 밥이 부족할 경우에는 며느리라 여자들이 찬밥을 먹으라고 해요" "우리집도 그래요. 시누이의 집에 갈때마다 항상 내개 돌아오는 것은 찬밥뿐이예요" "대만 사람들은 절대로 찬밥을 먹지 않는 습관이 있어요. 따뜻하게 하든가 죽으로 만들든지 그렇지 않으면 볶거나 해서 반드시 따뜻한 밥을 먹어요. 따뜻한 국에 찬밥을 말아먹는 습관도 없어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찬밥이 나왔을 때 매우 놀랐어요. 고기도 맛있는 반찬도 모두 남자들 앞에만 늘어놓고 남자들이 먹기를 대강 끝내고 반찬이 남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그제야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을 향해 너희들도 먹으라고 해요. 나는 기분이 상해서 다 먹었어요라고 대답했어요. 실은 더 먹고 싶었지만..." "집에서 삼계탕을 만들면 시어머니는 고기는 남자들만 주고 여자들에게는 죽밖에 주지 않아요. 나는 닭고기를 너무 좋아하는데! 그러때면 엄마가 생각나요.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닭고기를 그것도 가장 맛있는 다리 부분을 항상 내게 주셨거든요. 한국에 시집오기 전에는 나도 집에서 공주님처럼 자랐는데..." "가족단위로 모여 매운탕을 먹을때가 가장 싫어요. 커다란 냄비에 끓인 것을 남자들이 먼저 먹은 후 그 나머지를 여자들끼리 먹는데 냄비안에는 남자들이 먹던 생선뼈가 가득하죠. 그걸 보면 배는 고픈데도 전혀 식욕이 나질 않아요" "식사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 접시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매우 이상해요. 다른 사람이 먼저 젓가락을 댄 것을 나중에 먹는 것이 너무 역겨워요. 그래서 내 의견을 말하면 같은 가족이 먹는 건데 뭘 그러냐며 거꾸로 잔소리를 들어요. 이런 습관은 음식문화의 차이겠지만 한국인의 방식이 그대로 세계에서 통용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아쉬워요." "맛있는 반찬이 있을 때, 왜 며느리에게는 먹으라고 한마디도 말해 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먹으라고 해도 나는 많이 먹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데요. 도대체 나는 이 집에서 어떤 존재인가 생각하면 슬퍼져요" "한국은 남존여비 사상이 강해서 언제나 남자가 먼저고 여자는 나중이예요. 대만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어요. 집에 손님이 오면 모두 함께 이야기를 하고 같이 식사를 하는데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 이잖아요" 아이들 키우기에도 국가간 차이가 있다 "아이들이 밤중에 울때마다 시어머니는 체해서 그런다고 하면서 무조건 소화제를 먹이라고 해요. 원인이 무엇인가 잘 살펴보지도 않고서 그리고는 손가락을 따서 피를 내면 된다고 하시며 아이의 손가라긍ㄹ 바늘로 찌르려고 하지요. 당연히 아이는 아프니까 큰 소리로 울어요. 그러먼 시어머니는 '이 애가 많이 체했나 보다, 불쌍하게'하시며 몇번이고 침을 놓으려고 해요. 그럴때면 나는 아이를 안고 집에서 도망치고 싶어져요. 그런 상황에서 남편은 시어머니와 함께 아이의 손가락을 바늘로 찌르려고 해요. 소독도 하지 않은 바늘로 아기의 손가락을 찌르려고 하다니 믿을 수 없어요!" "한 번은 내가 아이들의 손톱을 손가락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서 자르고있는데 시누이가 자신에게 줘 보라며 아이를 데려가서는 손톱을 싹둑싹둑 잘라 버렸어요. 걱정한 대로 피부까지 잘려서 피가 나오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러자 시누이는 도리어 '이 정도는 괜찮아'하며 울고 있는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는 거예요. 손가락에서는 피가 나오고그걸 본 아이는 더 크게 울고, 나는 새파랏게 질려 그만두라고 하면서 시누이의 손으로부터 아이를 빼앗았어요" "아기에게는 끓인 물만 먹이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약수로 만든 물김치라며 거기에 밥을 말아 아직 돌 전인 아기에게 먹였어요. 나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고 싶었지만 젖이 잘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도 나는 어떻게 해서든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려고 하는데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아기가 배가 고파 울고 있으니 가여워서 안된다고 하시며 바로 우유를 먹이게 했어요. 그때 너무 괴로웠어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되는 때였어요. 시어머니가 우리 집안의 소중한 아이를 떨어뜨리거나 하면 큰일이라고 하시며 엄마인 내게 아기를 안기지도 않았어요. 그때 나는 아이를 낳기위해 죽을 정도로 고생한 나는 도대체 뭔하 가흔 생각이 들어 허무해졌어요" "한국인들은 자신이 말한것도 들은 것도 바로 잊어버리는 속성이 있지만 일본인은 잘 잊지를 못해요. 그래서인지 아무리 잊어버리려고 해도 계속 가슴속에 남아 있는 말들이 있어요. '젖도 잘 나오지 않는 유방따윈 뭣 하러 달고 다니냐'고 시어머니가 말했을 때 나는 두 번 다시 한국에서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될 수 있는 한 과자를 먹이고 싶지 않은데, 시어머니나 시누이는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초콜릿을 계속 줘요. 그러고서는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는다든가, 충치가 있다든가 하면 엄마의 책임으로 몰아 나를 혼내요. 그렇게 말하려면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아이들에게 초콜릿 따위는 주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혼하고 싶다고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시어머니가 전화를 해서 내일 가겠다고 하면 무서워요. 내게 뭔가 사정이있는지 없는지는 물어 보려고도 하지 않아요" "전화하고 오는 건 그래도 나아요" "김장철, 명절, 생일, 제사 모두 무서워요. 아무래도 시집에 가고 싶지 않을때는 꾀병을 부려서 가지 않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면 걱정이 된다며 가족들이 우리집으로 모이게 되어 더 힘들어요. "때로는 혼자 있고 싶어요" "명절 때마다 여자들이 무엌에 모여 요리를 만들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스트레스가 쌓여요. 가족이나 친척의 소문 따위는 내게 아무런 흥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의 일인지도 잘 모르겠으니까요. 그리고 시어머니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비교만 해요. 어느 집 딸은 나보다 늦게 결혼을 했는데도 아들을 낳았다든가 하는 식이죠. 직접 말하시는 않지만 내가 딸을 낳을 것을 넌지시 비난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어느 집 며느리는 매일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등 시어머니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든가, 어느 집의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선물을 사주었다든가 하는 말을 들으면 왠지 내가 너무 나쁜 며느리라고 지적받는 느낌이 들어요" "내게 가장 심하게 스트레스를 주는 건 우리 남편이에요. 그는 중국말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시집 식구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남편은 내 친정 엄마의 생일조차 잊어버리고 말을 못한다는 핑계로 전화도 하지 않아요. 내가 없마의 생일 선물을 사 보내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자신은 결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결혼 한 후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마스터 했는데 남편은 일본말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것이 원인이 되어 부부싸움이 일어나요. 그럴 때마다 이혼하자며 내가 화를 내면 잠시 동안은 일본어를 배우는 척하다가 조금 지나면 또 배우려고 하지 않아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친정에 갈 때도 함께 가지 않아요" "시집 식구와의 왕래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남편에게 풀려고 해도 남편은 무조건 당신이 참으라고만 말해서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여요. 그러면 당신은 내 부모님께 도대체 무엇을 해 주었느냐고 물으면 결국엔 싸움만 될 뿐이예요" "만약 남편이 한국 여자와 결혼했다면 절대로 이런 방식은 용납되지 않았을 거예요. 추석이나 설날, 생일 때마다 친정에 가거나 처가에 전화로라도 인사를 하잖아요. 이렇게 생각하니 한국인과 결혼한 것이 아주 후회가 돼요. 나만 손해를 복 있는 것 같아서 정말로 이혼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예요" 비교" 일본의 고부갈등 문제도 변하고 있다 천년간 해결책을 찾지 못한 고부 갈등 헤이안시대 중기의 대표적 여성 문학 작품인 '마쿠라노 소오시'는 궁정의 여관이었던 세이쇼나곤의수필로 11세기 초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 장인에게 칭찬을 받는 사위, 시어머니에게 칭찬을 받는 며느리는 주인의 욕을 하지 않는 하인등과함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존재로 꼽힌다. 헤이안 시대 귀족층의 결혼은 남자가 여자를 방문하는 '방문혼'이 많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 후에 남자의 집으로 여자를 맞아들이는 일도 있었다. 이는 사위든 며느리든 결혼 사대의 부모에게 특히 동성의 부모에게 환영받는 것은 드문일이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고부 갈등 문제는 적어도 천녀간 좋은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유교적인 '이에'의식이 지배했던 옛날에는 아내는 '남편의 집으로 들어가는' 존재였고 장남의 아내는 남편의 양친과 동거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었다. 이 시대에 장남은 가업과 재산의 상속자였으며 그 아내는 홀로 생활를 꾸려가야 하는 차남이아 다른 아들들의 아내보다 살아가는 조건이 좋은 편이 었다. 장남이 가문을 상속하면 아내는 그 집안의 가사를 잇는다고 보아도 좋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남의 아내는 시어머ㅣ에게 가사의 방법을 배우고 그 집의 문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런 가치관은 2차대던 후 크게 바뀌고 있다.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적출자의 상속권이 평등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의식은 그리 간단히 변하는 것이 아니어서 여전히 장남은 가문을 계승하고 큰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여자에게 가장 바람직한 결혼 상대의 조건으로서 '집, 차를 갖고 있고 할멈은 없는 남자'라는 말이 유행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이 시기는 지방에서 도시로 나와 일하는 사람이 늘어 핵가족화가가 시작된 시기여서 '자기 집과 차를 갖고 있고 시어머니가 없는 남자'가 이상적인 결혼 상대로 꼽혔다. '할멈 없음'이란 말은 카드놀이에서의 '조커빼기'에 빗댄 말일 것이다. 카드 놀이에서 '조커빼기'란 마직막으로 조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다는 규정으로 시어머니가 있어서 생활을 즐길 수 없다는 기분이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시어머니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꽝을 뽑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기피하는 현상이 있었는데 바꿔 말하면 남편의 부모와 동거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도 된다. 1955년까지는 자식의 결혼과 동시에 동거를 하게 되는 부모가 전체의 거의 90퍼센트였다. 부모세대도 자식세대도 전전의 '이에' 의식이 남아 있는 동안 며느리의 입장이 불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전후 세대가 결혼 적령기로 성장하자 '할멈 없음'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대립을 에도시대 전기 한 의사의 가정에 비춰 그린 것이, 1966년 발표된 아리요시 사와코의 소설 '하나오카 세이슈의 처'이다. 하나오카는 난학(에도시대에는 서양학문을 이렇게 불렀다.)을 공부하고 외과의 선구자가 되어 세계최초로 마취수술을 성공시켰다. 하나오카의 부인은 마취약의 실험대상이 되어 개발중이던 약의 부작용으로 실명했는데 실은 시어머니 즉 하나오카의 모친도 실험대상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아나오카에세 도움이 되려고 경쟁하면서 마음껏 시기심을 불태웠다. 마취 수술의 성공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하나오카는 부인과 어머니의 불화를 못본 체하고 의사로서의 명성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작자인 아리요시 사와코는 그 후에도 환경파괴나 고령화가 초래하는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은 '복합오염' '호아홀한 사람' 등을 발표했다 '하나오카 세이슈의 처'는 고부 갈등 문제의 근원에 남편이자 자식인 남자의 무관심이있음을 꼬집은 소설이었다. 고도 성장의 한가운데에서 일에 열중해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자들의 모습이 그 배경에 그려져 있었다. 고부 갈등은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한 테마 1970년대에는 인구가 점점 도시로 집중하여 핵가족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한 가구당 어린이 숫자가 적어졌다. 1975년에는 자식이 결혼한 후 자식과 동거하는 부모가 전체의 37.5퍼센트로 대폭 감소했다.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델레비전 드라마가 1976년에 방영된 '이웃의 잔디밭'이었다. 뒤에 '오싱'을 쓴 작가 하시다 수가코의 작춤이다. 이 드라마는 바라고 바라던 집 한채를 손에 넣은 30대 부부가 남편의 모친과 동거하게 되는데 고부 갈등이 생겨나고 여기에 자식들가지 연루되어 결국에는 남편의 외도로까지 발전한다는 내용이다. 말하고싶은 것을 마음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시어머니에게 처음에는 잠자코 있던 며느리가 이윽고 자기 주장을 하게 된다. 이 드라마는 고부 갈 등을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라 뚜렷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그 전의 작품들과 달리 획기적이었다. 방영초기부터 많은 투서가 날아들었는데 압도적 다수의 의견은 '현실에서만도 너무 괴로운데 드라마에서까지저렇게 보기 싫은 시어머니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고한다. "핵가족화가 진행되어 설마 아직까지 고부 갈등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나는 정말 놀랐다"고 작자인 하시다는 뒤에 술회했다. 그녀의 의도는 내 집 마련에 혈안이 되어 가정 자체를 소홀히 하는 세상에 대하여 겉포장 보다는 내용물이 소중하지 않은가하고 묻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을 쓰면서 '새삼스럽게, 고부 갈등 문제는 영원한 테마임을 깨달았다고'말한 하시다는 그 후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가족들의 문제를 많이 다루었는데 주로 고부간의 갈 등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을 많이 썼다. 1926년생인 하시다의 작품에서는 그녀 세대가 갖는 시어머니에 대한 염려가 배어나오지만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에 보는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그래도 하시다의작품이 항상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믿는 시청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일이 되어가고 있는 며느리 학대 '이웃의 잔디밭'이후 고부 갈등은 다양한 형태로 텔레비젼 드라마에서 묘사되었는데 1992년 방영된 '줄곧 당신을 좋아했었다'는 모친과 아들이 한패가 되어 며느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스토리고 '이웃의 잔디밭'과는 다른 의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의 내용을 살펴보면 모성 콤플렉스로 인해 정신적으로 자립하지못한 아들 후유히코가 주인공이다. 그는 결혼해서까지 모친이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하는데 모친도 아들에 대한 애착이 심해 그의 자립을 도우려는 생각이 전혀없다. 당연히 고부 갈등이 불거지고 그 갈등은 며느리와 시어머니, 남편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한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기업전사인 남편, 그런 남편에 불만을 품고 자식, 특히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해 온 모친에게 양육된 후유히코는 모친에 의해 철저히 응석받이로 길러진다. 그 결과 그는 집 밖에서는 의젓한 인물로 행동하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떼를 쓰는 아이처럼 고집을 부리고 난폭하게 군다. 정신적으로 볼 때 정말로 유치한 그의 응석을 그래도 모친은 계속해서 받아준다. 이 드라마 방영의 영향으로모친에게서 자립하지 못한 남자는 '후유히코씨'라 불리며 여자들이 피해야 할 결혼 상대의 대명사가 되었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항상 심각한 고부 갈등만을 그려온 것은 아니다. 며느리 세대용 드라마에서는 시어머니와며느리의 대립이 코믹 터치로 그려진다. 이들 드라마에서 며느리는 자기 주장을 펴면서도 시어머니와 꽤 사이좋게 지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고부간의 형태를 제시하기도 한다. 서스펜스 드라마에서조차 부수적인 스토리로서 주인공인 여의사와 검사, 그리고 성질 급한 시어머니 이야기가 등장하곤한다. 그만큼 고부 관계는 큰 성멸없이 이해시킬 수 있으면서도 약간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즉 양념으로 쓰기 좋은 이야기이다. 고부관계에 대한 이러한 묘사 방식은 광고에서도 볼 수 있다. 며느리: 매화와 벚꽃은 마치 시어머님과 저 같아요. 시어머니: 어느쪽이 벚꽃이라는 말이니? 이 대화는 우메보시와 벚꽃 절임을 조합한 상품의 광고에 나오는 것인데 우메보시는 껍질에 주름이 많아 노인을 암시한다. 며느리로서는 어쪽이 벚꽃인가는 말할 필요도 없이 뻔하지만 시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묻고 있는 것이다. 유머러스하게 묘사되어 있으므로 험악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보는 쪽은 충분히 고부간에 있을 수 있는 대화구나 하고 피식 웃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고부간이 모두 그렇게 기분 좋게 서로 빈정댈 수 있을 정도인가 하면 아직은 그렇지 않다. 여름 휴가 같은 때 시댁을 방문한 뒤면 반드시 몸이 아프다는 여성도 있다. 그녀는 자기 시어머니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1주일 정도 함께있는 기간동안 시어머니와 마찰이 일지 않도록 좋은 며느리 역할을 연기하느라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고한다. 그런가 하면, 텔레비전 프로에서 젊은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놀라기도 한다. 이 프로 가운데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장면에서 "어머님은 어머님 멋대로 행동하시네요"라고 말하는 며느리에 대해 시어머니는 '너는 남의 말을 제대로들어야 된다"라고 응수하고 있는데 이런 대화가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 가정을 취재한 프로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놀랍다. 남편이 자기 부모를 소중히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아내에게도 역시 부모와 가족이 있다. "이웃의 잔디밭'은 아직 아내의 친정어머니가 남편과 시어머니 편을 들어주는 시대의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시어머니 때문에 고생할 정도라면 딸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더 많다. 핵가조고하가 가소고하되면서 자식수가 줄고 딸만 있는 가정도 많아 졌다. 그 결과 농가나 상점 등, 부모와의 동거 및 가업계승을 전제로 하는 결혼은 점차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 결과 시아버지나 시어머니 쪽이 며느리의 눈치를 보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무조건 시어머니에게 복종해 온 며느리가 자기 며느리에게도 똑같은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반복되어 온 '며느리 학대'는 이제 전설이 되고 있다. 20대, 30대 며느리 세대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염려하는 차원에서 결혼식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가 며느리에게 절교를 당한 시어머니도 있다. 고부 갈등이 원인이 되어 부부간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이혼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모 세대도 노후의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져, 자식 세대에 기대기보다는 자기들끼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낫다는 쪽으로 의식이 바뀌고 있다, 이제 고부 관계는 노후의 간호 문제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후지이 하시코: 1956년 시즈오카현 출생 사이타마대학교 교양학부 일본문화학과 졸업 후 프랑스에 유학 마이니치 신문사가 발행하는 마이니치 소학생 신문 편집부를 거쳐 프리랜서 작가로 현재에 이른다. 환경문제, 교육문제, 원예관계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주간지, 월간지 등에 기고하고있다. 7장 외국인 남자도 할말이 있다 그래도 나는 한국 아줌마가 좋다 남편의 ‘기’를 살리며 꿈을 키워주는 한국 아줌마들 '아줌마'라는 호칭은 '아주머니'보다 친근감 있는 호칭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주머니를 결코 '아줌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때로 ‘아지매!’등, 텔레비젼 드라마에서 본 부산 사투리를 흉내내어 유머러스하게 부를 때도 있지만, 그 외엔 반드시 ‘아주머니’라고 부르려고 노력한다. 거기에는 그녀들에 대한 내 나름의 존경과 애정이 담겨 있다. 일본인 중에 아줌마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불쾌한 기분이 들어 반드시 주의를 준다. 그런데 아주머니란 어떤 개념인가? 특히 연령상으로 언제부터를 아주머니라고 규정하는가? 결혼하면 무조건 아주머니가 되는 것 같은데, 미혼일 경우에는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특히 아가씨와 아주머니와의 중간에 있는 연령층의 사람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예를 들어 가게 등에서 말을 걸 때는 ‘언니’로 하면 된다. 다만 이것으로는 일반명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1970년대의 한국 유학시절에 아가씨와 아줌마의 중간적인 호칭으로 '아가마'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그 이후 이 단어를 한국 사회에 정착시키려고 노력해 왔지만 아직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아가마’어딘가 어감이 좋지 않지만 아직 내게는 이것보다 더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주머니보다 친근한 의미가 보다 강한 아줌마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아줌마는 기혼자이면서 아이가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럴 때 한국 아줌마는 비로소 더욱 힘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하여 한국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아줌마들의 풍경’ 에 감동한다. 외국인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치는 한국의 아줌마란, 가정주부에 앞서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아줌마이며, 각종 상점과 식당 등에서 일하는 아줌마다. 그 풍경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활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아줌마들의 강한 생활력에 감동한 뒤, 외국인들은 우려 섞인 말들을 한다. “남자들은 어디 있지? 그녀들은 모두 과부일까?” 그러나 물어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남편이 있어도 남편을 대신해서 일해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남편은 뭘 하고 있는 걸까? 아무 일도 안 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갈비집이나 식당에서 남편인 듯한 남자(아저씨)를 보아도 열심히 일하는 쪽은 아줌마들이고, 아저씨는 잠자코 금고 앞에 앉아 있거나 곧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느다. 쉽게 말해 남편들은 놀고 있다. 남자는 왜 놀고 있는가? 아줌마들이 놀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멋있는 남자, 즉 남편에게는 시시한 일을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남편, 즉 멋있는 남자란 밖에서 일하기보다는 ‘서방님’이 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방’이란 한자로 쓰면 서재를 의미하는 ‘서방’이다. 아줌마에게 있어서 멋있는 남자란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앉아서 생활과 무관한 정치나 철학(도덕)을 논하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그런 남자 중 하나인 자기 남편이 식당에서 주방을 들락거리거나 손님의 비위를 맞추고 돈을 주무르는 등의 시시한 일을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하면 ‘남자 체면’이 손상되는 것이다. 때문에 아줌마는 남편이 언젠가는 그럴듯한 훌륭한 일을 하는 날을 꿈꾸면서 열심히 생활전선 에 일을 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한국 남자는 항상 꿈을 꾸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자기 모습은 진짜 자기 모습이 아니고, 자신도 언젠가는 멋진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꿈을 그 꿈은 사장이었다가, 정치가였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아줌마들은 남자, 즉 남편이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주는 반면에 일본의 아줌마들은 남편의 꿈을 깨버린다. 일본의 아줌마는 언제나 남편에게 “그런 꿈 같은 것만 생각하면서 놀지 말고 아르바이트라도 해보는 게 어때요!”라고 말한다. 일본의 아줌마들은 남자가 노는 것을 극도록 싫어한다. 일본에서는 농민도 무사도 몸을 움직여야 남자답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남자는 괴로워’이지만, 한국의 아줌마들은 남자를 놀게 해준다. 한국의 남자는 죽을 때까지 즐겁게 꿈을 꿀 수 있다. 한국에서는 ‘꿈꾸는 서방님’이야말로 가장 남자다운 남자인 것이다. 이상은 내가 1970년대에 처음 한국을 방문한 후 한국 아줌마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에 대한 서술이다. 내가 지나치게 전통적인 것일까?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이상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처음 한국 아줌마들에게 가졌던 이런 이미지를 변경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그럴듯한 남자들이 직업없이 많이 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백수인 남자가 결코 비참해 보이지 않는다. “뭘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아, 뭐, 백수지요”라고 말하면서 당당하게 웃는다. 놀고 있는 남자, 놀고 있는 남편을 그 정도로 당당하게 만드는 아줌마의 힘은 정말 위대하며 또 존경할 만하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한국 아줌마는 ‘남자의 기’를 결코 죽이지 않는다. 남자를 언제나 격려해 주고 남자에게 언제나 꿈을 꾸도록 해준다. 그래서 아줌마가 건재하는 이상 한국은 언제나 꿈이 있고 미래가 있고 영원히 살아 숨쉬는 나라이다. 그러기에 그 호칭은 아줌마가 아니라 존경심을 담아 ‘아주머니’여야만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전통 문화를 오늘에 전승하고 있는 아줌마들 ‘문화’란 무엇인가? 학문적으로 말하면, 문화란 그 민족이 예로부터 전승시켜 오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예로부터 자자손손 전하고, 계승해 온 것들이 바로 문화의 진수이다. 따라서 문화의 핵심은 사람들의 생활과 생활양식 그 자체이다. 그러면 바로 그 생활의 중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먹는 것과 아이를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사와 육아가 있어야만 가족이 유지되며 생활이 이어진다. 모든 문화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 노래, 춤, 놀이 등에서 비롯되는 예술을 포함한 이른바 문화라는 것도 모두가 이 ‘생활’ 을 기점으로 한다. ‘생활’을 기점으로 하는 문화가 누구에 의해서 이어지는가 하면, 그것은 여성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은 아이를 키움으로써 문화(즉 전통)의 계승자가 된다. 외국인이 타 국가, 타 민족을 가장 잘 이해하려면 바로 그 나라의 여성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여성은 그 민족의 문화, 그 자체이다. 여성이라고 하면, 한국의 경우 어머니와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아가씨는 생활인이 아니고, 또 육아와는 무관하므로 문화의 참다운 전승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한국 아가씨와 아무리 사귀어도 외국인은 한국 문화의 진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는 오로지 아주머니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언제나 아주머니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나의 신조어인 ‘아가마’도 좋지만 아가씨만으로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 아가씨에게는 한국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머니 만세”를 외치는 것이다. 한국 아줌마가 얼마나 멋진가는 한국 아가씨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요즘 아가씨(젊은 여성)들부터 점점 문화의 향기를 잃어 가고 있다. 특히 우리 외국인들은 한국 아가씨를 될 수 있는 한 피하려 한다. 고유한 문화를 느낄 수 없어서이다. 그 결과, 우리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고유한 문화를 느낄 수 있게 하는 한국 아줌마에 대한 평가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아줌마에게 문화라니?”하고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르나, 한국에서는 아줌마야말로 문화의 살아 있는 실체이다. 여기서 하나의 문화 형태인 예의, 혹은 매너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한국에서 생활하는 우리 외국인들 사이에서 자주 화제가 되는 한국 사회의 단골 문제점들이 몇 가지 있다. 이전에는 교통문제가 그랬는데, 최근에는 소음이 주는 고통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의 명동은 오늘날 외국인에게는 소음의 지옥이다. 패션 매장과 구두가게 등에서 륨을 크게 높이고 스피커를 통해 시끄러운 음악을 경쟁하듯 내보내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 거리, 문화의 거리가 이제 세계적으로 추악한 소음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와도 창피해서 안내할 수가 없다. 명동뿐만 아니라 서울의 거리 전체가 소음의 지옥으로 화한 느낌이다. 소음과 함께 외국인들이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아가씨들의 예의 부족 문제이다. 사람과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타인에게 양보할 줄도 모르고, 양보를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르며, 택시 승강장에서는 태연히 새치기를 한다. 엘리베이터와 빌딩의 출입문에서도 언제나 자기가 우선이다. 엘리베이터에서는 남이 있건 말건 언제나 자기들끼리 큰 소리로 말하고 웃고 떠든다. 길이나 복도에서는 부딪히기 전에는 결코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남을 배려하고 남의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도시인의 기본적인 매너가 그들에게는 전혀 없다. 정말로 안하무인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러한 현상을 ‘공주병’이라고 하는 걸까? 한국 아가씨 들 사이에는 지금 공주병이 만연하여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 그러나 아줌마들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한국 문화를 대변한다는 듯이 전통적 예의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에게는 자신보다 연장자나 남성에게 양보를 하는 전통적 매너가 아직도 남아 있다. 길에서 아가씨는 내게 몸을 부딪쳐도 태연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줌마는 부딪치지 않도록 신경도 쓰고 부딪치면 반드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할줄 안다. 남의 양보를 받으면 웃는 얼굴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아줌마에 비해 한국 아가씨들에게는 미소가 없다. 모두 시무룩하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얼굴은 ‘타인은 안중에 없다’는 전형적인 공주병 증세일까? 모르는 사람에게도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도시인의 기본 매너이다. 아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친절한 것은 시골 사람들의 매너법이다. 그런 만큼 한국의 거리는 지금 촌스러운 ‘시골 공주’로 가득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인생 경험이 풍부하고 ‘문화’의 향기를 듬뿍 풍기는 한국 아줌마가 좋다. 아가씨는 세상에 자기밖에 없다. 다른 사람은 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부르짖는 듯한 한국 아가씨들은 ‘시골 공주병’과는 거리가 멀다. 세상은 모두 사이좋게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이어받은 ‘문화’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도 미소를 보여 줄 수 있고 마음을 열어 놓는 친절도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 아줌마가 없으면 이 나라는 사막이 된다. 전통 문화를 아직도 지니고 있는 아줌마에 의해 한국 사회의 예의와 매너, 즉 질서는 간신히 지켜지고 있다. 한국 아줌마, 파이팅. 구로다 가츠히로 산케이 신문 서울 지국장이며 논설위원. 1941년 오사카 출신. 한국인의 발상, 나의 서울 백서,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한국어판), 한국인의 역사관 등 한국 사회를 날카로운 시각에서 분석한 많은 저작이 있다. 어느 일본인 주재원의 고백 한국 여자를 애인으로 갖는 것은 두려워 1998년 가을 현재,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인은 약 1만4천명, 그 중 남자는 약 5천명이다. 일본인 학교가 중학교 수준까지만 개설되어 있어서 교육 시설이 미비한 데다, 일본에서 1, 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이유들 때문에 단신 부임자도 많다. 독신자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근에는 30대 ‘주재원 사무소장’도 있다고 한다. 한창 나이인 청춘 남녀가 있는 직장에서는 온갖 로맨스가 꽃핀다. 외로운 독신의 일본인 남성,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한 젊은 한국 처녀. 일본 남성은 일본 여성과는 또 다른 독특한 매력을 지닌 한국 처녀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다. 도덕적인 사람은 “남자가 여자를 자기 마음대로 했겠지”하고 경멸하며 비난을 퍼부을지 모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여자의 ‘무서움’과 접하게 되는 일본 남성이 생겨난다(재한 일본인 중 여성이 많은 데는 흥미깊은 이유가 있지만, 한국 여성과는 관련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한 독신 주재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30대인 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일본에 남겨 두고 서울에 부임했다. 그러나 독신 생활이 외로웠던 그는 직장에서 알게 된 한국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상대는 20대 후반의 독신 여성으로 코가 오뚝 솟은 미인이었다. 그녀에게서는 요즘 일본 여성 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절함이 느껴졌다. 혼자 식사하는 습관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 남자 혼자 사는 생활은 그에게는 고통스러웠으니, 주말에 시장을 보거나 함께 식사해 주는 한국 여인을 거부할 만한 강한 힘이 없었다고 그를 꾸짖지는 말자. 그는 한일 양쪽의 여자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관계를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관계가 시작된 지 수개월 후였다. 일본에 사는 여자친구가 보낸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남자의 아파트에 놀러온 한국 여성이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일이 시작되었다. 일본어를 알고 있던 이 여성은 그에게 자기 외의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격노했다. “그때부터 지옥 같은 수개월이 시작됐다”고 이 일본 남성은 술회했다. 우선 무엇보다 난처했던 것은 한국 여자친구의 “휴대폰 공격”이었다. “책임지라”는 상투적인 말로 시작된 이 협박들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신 걸려 왔다. 평일 대낮부터 죽인다, 회사에 말해버린다, 평생 복수하겠다는 등의 말이 휴대폰을 통해 계속 들려 왔다. 한국 여성은 오히려 업무 시간을 노려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부탁이니까, 업무 중에는 제발 걸지 마”하고 애원해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남자는 신경쇠약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 남자가 불운했던 것은 한창 두 사람이 싸우는 도중에 가방 속에 있던 국제전화요금 청구서까지 발견되어 버린 일이었다.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부쩍 더 심해진 이 한국 여성은 그가 업무 시간에 걸 수 없는 ‘심야의 긴 통화’를 체크하여 전화번호를 메모했다. 그러고는 일본의 여자친구에게까지 전화공격을 시작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둔 매일 밤의 한일 삼자 회담 “헤어져라”, “너나 헤어져라”하는 고성이 오가면서 뒤틀릴 대로 뒤틀려 버렸다. 남자는 흡사 바늘방석에 앉은 듯했다. 그리고 갈등과 마찰이 최고조에 이른 어느날 이 남성은 서울 시내의 한 대로변에서 예의 한국 여자친구에게서 습격을 받게 되었다. 노상에서 그 남자의 목을 조른 후, 여자는 “책임을 져, 그러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 여성의 모습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수라의 형상' 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 여성을 밀치고 간신히 그 자리를 모면할 수 있었으나, 그녀는 노상에 쓰러진채 "엄마"하고 목놓아 울었다. 아무튼 대단한 소동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 남성이 일본의 여자친구에게 애원하여 삼각관계를 정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후 그 한국 여성과 어떻게 되었는지는 문제의 일본 남성이 말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그가 "한 오백 년은 산 것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아무튼 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남성이 '한국 여성의 무서움을 알았다'고 하는 데는 후일담이 좀더 남아 있다. 이 사건 덕분에 몇 킬로그램이나 빠졌다고 하는 이 남성. '고생도 나누면 가벼워진다'는 생각에 서 자신의 체험담을 일본인 동료들에게 털어 놓았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비슷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군, 하며 다소 마음이 가벼워지기는 했지만 그는 아직도 한국 여성만 보면 피하고 싶다고 한다. 이 남성이 들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압권은 임기가 끝나 일본으로 돌아가려던 한 일본인 사업가가 김포공항에서 패스포트를 난도질당한 사건이다. 한 일본인 사업가가 한국에 체류하던 중에 사귄 한 한국 여성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노가 폭발한 여자가 가위를 들고 공항에 난입, 그의 여권을 산산조각 잘라 버렸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요지다. 그 일본인이 그후 어떻게 귀국했는지는 모르지만, 거래 회사의 환송객도 있었을 법한 공항에서의 ‘참변’을 생각해 보면 당사자로서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싶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일본인 남성이 혼자 사는 아파트에 밤마다 찾아와서 큰 소리로 울며 문을 두드리는 한국 여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배우고 싶은 한국 남자의 한국 여자 조정법 일본 남성들에게는 ‘자신의 창피를 여러 사람 앞에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는 무언의 약속이 있다. 자주 술자리를 같이 해도 남녀 사이에 관계된 추태를 스스로 이야기하는 법이 절대로 없다. 문제의 남성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술이 취해서 푸념을 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한국 경제의 전망'이나 '한일간의 진정한 이해 관계는 무엇인가' 등등 진지한 주제를 말하던 우리 일본 남성들이 사실은 남몰래 한국 여자의 무서움에 떨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성실한 한국 여성들에게서는 빈축을 살 만한 이야기들이다. 사실 그 이야기들을 확인해 보지 않는 한 모두가 사실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자신의 체험을 마치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처럼 말한 것일 수도 있고, 별것 아닌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동안 재미있게 각색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이야기의 신뢰성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한국에 사는 적지 않은 수의 일본인 남성이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런 이야기를 마음속에 감추고 한국 여성에게 ‘두려움’을 안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취재를 생업으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닌 일본 남성들 사이에서 이렇게 순식간에 여러 가지의 에피소드가 모아질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 걸 알고 있으면,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라고 말하는 한국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알고 있으면서도 실수하는 것이 남녀간의 성 문제이다. 따라서 위험을 감수하고 일본 남성들은 한국 여성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일본인 남성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직후 이번에는 한국 남성에게 물어 보았다. 한국 여성은 일본인에게만 무서운 것인가? 하고. 그러자 친구인 한국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경험이 없지만, 신문에 보면 부부싸움 도중 칼부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시장에서 아줌마들이 격렬하게 싸움을 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구요.”그렇다면 전술한 남성으로부터 들은 ‘공포스런 한국 여성’의 행태는 상대가 ‘기가 약한 일본인’이라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 “한창 부부싸움을 하던 중, 화가 난 부인이 프로판 가스 꼭지를 틀어서 건물이 폭발했다”는 등의 뉴스는 일본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일본인 앞에서 한국 여성이 보여 주는 행동은 오히려 ‘상당히 절제된 것은 아닌가?’하는 느낌마저 든다. 자부심 강한 한국 남자들은 좀처럼 ‘한국 여자가 무섭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다. 그들이 한국 여성들에게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남자들이 그런 두려움을 태연히 참고 있는 것은 왜일까? 서울 주재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에 크게 관심이 있으며, 반드시 알고 싶은 부분이다. 무서운 한국 여성의 조정법은 역시 경험이 풍부한 한국 남성에게 물어 봐야만 할 것 같다. 외국인 남성의 사위살이, 친척이라는 미궁 너무 가까워서 피곤한 한국의 친척들 "친척이 항상 들끓어요. 그들이 집에 있는 음식을 계속 먹어 치워요." 입을 열자마자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한국에 장가온 미국인 남편이었다. "동양에서는 친척과의 연대가 강하다는 걸 듣긴 했지만, 그래도 남의 것을 마음대로 먹거나 냉장고를 멋대로 여는 데는 깜짝 놀랐다." 일본인 남편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한마디 말도 없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먹더군요. 일단 먹는 것을 발견하는 데 무엇보다도 빠르죠. 게다가 마음대로 냉장고를 열고는 "아니, 계란이 하나밖에 없잖아"하며 화를 내기도 해요. 그리고 그걸 프라이해서 먹어 버려요. 아무리 친척이지만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미국인과 일본인 남편이 한국에 살면서 무엇보다도 놀라는 것은 한국인의 친족관계다. 이야기를 좀더 들어 보자. "제일 놀란 것은, 일본에 갔다 왔는데 한국인 친척이 우리 아파트 방에 들어와서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어요." "어떻게 방에 들어옵니까? 친척 분이 열쇠를 갖고 있나요?" "관리인이 들여 보낸 것 같아요. 늘 오니까 얼굴이 익어서." "그러니까 친척이라고 해서 열쇠를 줘 버린 거네요. 한국의 친척은 정말 가족 같군요." "가족이라고 해도 그렇죠. 체면을 전혀 안 차려요. 선물을 줘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 해요. 오히려 왜 더 좋은 걸 사오지 않았느냐, 왜 한 개만 사왔느냐 불평을 하죠. 참을 수 없을 정도예요." 다른 미국인 남성은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부는 36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친척이 와서 살게 되었지요. 방이 남지 않느냐면서. 처음엔 참았지만, 좀체 나가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말했더니, 너희는 둘밖에 없으니까 원룸이라도 빌리지 그러냐는 거예요. 내 집인데, 왜 내가 나가야 해요?" 미국인에게는 아무리 친척이라도 자기가 아닌 한 모두 '남'이다. 또 일본 사회에서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 남편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도 참을 수가 없다. "내가 일에 지쳐 돌아왔는데 친척이 와 있었어요. 오는 것 자체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지만, 12시 넘어서까지 가지 않고 나중에는 차로 배웅해 달라고 하는 데는 할 말을 잃었어요. 아내는 언니와 형부의 명령을 거스를 수가 없구요. 밤중만이 아니에요. 일요일 아침 6시에도 불러내요. 큰 책상을 실어야 한다면서. 택시를 타고 당신이 오라고 하면, 자신은 택시값이 아깝다고 해요. 내 몸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는 건지, 원."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들의 한국 친척에 대한 이야기는 끝도 없다. 일본인 남편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인도 지나치게 밀접한 친척 관계에 피곤을 느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처는 친구에게 남편이 일본인이라 친척 상대할 일이 없어 편하다고 말하곤 하거든요.” 예의바르지만 남 같은 일본의 친척 일본의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친척을 만나지 않는다. 추석이나 정월, 그리고 관혼상제 때 만나는 것이 고작이다. 사이좋은 형제라도 전화로 안부를 묻는 정도다. 또 교통이 발달한 오늘 날에도 친척집이 며칠씩 머무는 일도 없어졌다. 그러나 한국인 아내는 그것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내 친구는 부인을 데리고 1년에 두 번 정도 일본으로 귀국하는데, 본가에 가도 양친만 만난다. 다른 친척들은 결혼식 이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양친의 집에 체재하는 기간을 일주일 잡으면 한국인 처는 "더 오래 있고 싶다"고 하고, 반대로 일본인 어머니는 "좀더 빨리 갈 수 없냐"고 하신다. 아무리 일본인 어머니라도 아들과 며느리, 또는 손자가 반가울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남'과 함께 지내는 기간으로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날짜는 4, 5일이 고작이며 그 이상은 피곤해 한다. 완전한 남이면 또 몰라도 친척이라는 존재만큼 신경쓰이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 어머니는 한국인 며느리라서 아무래도 신경을 더 쓰는데, 이에 비해 한국인 며느리는 자유분방한 듯이 보인다. 자기 집도 아닌데 갑자기 청소를 시작하는가 하면, 뭐든지 잘 먹고 또 준 것만으로 모자라 스스로 더 가져다 먹기까지 한다. "잘 먹으면 좋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 말은, 25년 전 자기가 처음 시댁에 머물렀을 때는 긴장해서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는데, 이 며느리는 너무 편안해 하는 것 같이 보이나 봐요. 하긴 처는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하게 행동하니까요." 또한 일본인 어머니는 며느리가 자신의 팔짱을 끼는 것도 놀라워한다. 일본인은 부모 자식 간에도 손을 잡거나 껴안지 않는다. 쌈짓돈이 주머니돈, 친척간의 돈 문제 이렇게 진한 한국인의 친척 관계는 한국 사회를 잘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 친척끼리 불만도 있을 수 있지만 좋은 점도 있기 때문이다. 한 영국인 남자는자신의 아파트를 팔고 자기 나라로 귀국하기까지 호텔이나 친구 집에 폐를 끼치지 않고 부인의 친척집에서 신세를 졌다고 한다. 또 어떤 일본 남성의 경우 부인이 출산을 하자 부인의 이모가 가족을 데리고 1개월간이나 도와 주러 와서 정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이라면 남편이 부인의 시중을 드는 것부터 가사까지 돌봐야 한다. 다만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친척간의 돈 문제이다. “형제에게서 돈을 빌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게다가 빌려도 절대 돌려주지 않아요. 친척간에는 지갑이 마치 하나인 것 같아요.” 일본인 남편이 무엇보다도 놀라는 것은 처가에서 부인의 동생 학비와 결혼식 비용까지 대라고 하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빌리고 나중에 돈을 벌면 갚는 것이라면 몰라도 무상원조, 즉 그냥 줘 버리는 것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일할 수 없는 노인인 장인, 장모의 경우라면 도와 주는 것이 납득이 가지만,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이제부터 활발히 일할 나이인 동생을 결혼한 누나가 도와 줘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또 돈이 없으면 소박하게 결혼식을 올리면 좋을 텐데 돈을 꾸어서까지 호화판으로 결혼식을 하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간다. 어떤 주재원 부인은 전화가 오면 화장실에 가서 받는다고 한다. 남편은 그때마다 ‘또 친척에게 돈을 꾸어 주는구나’하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는 실직 중인 친척이 매달 돈을 꾸어 달라고 해서 부부간에 싸운 적도 있었다. “그 친척은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닙니다. 일본이라면 막노동이라도 할 텐데. 친척이 봐 주니까 정신을 못 차리는 겁니다.” 남편은 이제껏 참았던 것까지 터뜨려 싸움이 커졌고, 집 안의 물건이 부서지기까지 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은 뒤로 그 부인은 남편에게 비밀로 하고 친척에게 돈을 빌려 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나면 악귀같이 변하는 다혈질 아줌마들 한국 여성이 일본 여성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이다. 특히 화났을 때의 한국 여성은 평소와는 너무나 달라서 흡사 낯선 사람처럼 보인다. “사소한 일로 갑자기 화를 내요. 그때는 눈빛도 음성도 달라져요. 마치 귀신이 든 것 같아 정말 무서워요. 독일에도 히스테릭한 여성이 있지만 한국 여성은 그것과는 전혀 달라요.” 한국 여성과 결혼한 독일 남성의 말이다. 일본 남성도 역시 “한국인 아내가 갑자기 화를 낸다”고 말한다.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데서도 한국의 아주머니는 언제나 화를 내고 있잖아요. 정말로 사소한 일에 너무나 감정적이 돼요. 냉정한 대화는 있을 수 없어요.” “아이에 대해서도 그런가요?” “화를 내죠. 한국인들이 쓰는, 그 특유의 회초리 있잖아요. 그걸로 때려요.”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자기 아이를 애지중지한다고들 한다. 공공장소에서 제멋대로 굴어도 야단을 치지 않아 외국인에게 그 점을 늘 지적받는데, 집 안에서는 양상이 다른 것 같다. “한국인은 공공장소는 태연히 더럽히면서도 자기 집 안은 아주 깨끗하게 하잖아요. 같은 식이에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이가 밖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해도 화를 내지 않아요. 하지만 집 안을 어지럽히거나 시끄럽게 하면 불같이 화를 내죠.” 구미의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공중도덕을 배운다. 일본 아이들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듣는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확실히 한국의 어린이에 비해 어린이다운 발랄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은 그보다 오래 전부터 구미와 일본의 도시에서는 아예 어린이의 모습 자체를 잘 볼 수 없다. “애들은 매일 집사람과 같이 있어서 제 엄마를 닮는 것 같아요. 미친 듯이 격렬하게 우는 모습을 보면 역시 한국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 아이가 우는 모습이 일본의 보통 아이들하고 다르다고 말하면서, 그 일본 남성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요리 솜씨는 엉망이어도 재테크에는 열심 결혼한 한국인 여성들은 가사노동에 어찌나 열심인지, 하루 종일 쓸고 닦는다. 그러나 일본 여성과 달리 특별한 취미가 없다. 커튼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독서를 하는 등 취미 활동을 별로 하지 않는 듯하다. 오로지 텔레비전 보는 일에만 열중한다. “슬픈 것은 저녁밥을 먹는 즐거움이 없다는 것이에요. 식탁위에는 항상 같은 반찬이 놓이죠. ‘우리 것이 최고’인 것은 알겠지만 조금은 연구를 해도 좋은 것 아닌가요? 일본 여성이라면 아무리 집안일을 싫어해도 외국 요리 한두 가지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한국 가정의 요리에는 전혀 융통성이 없어요.”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는 식당 반찬도 가정집의 반찬도 거의 같다. 처음엔 맛있지만 금발 질려 버린다. “하지만 한국 부인들에게도 장점이 있죠?” “내가 피곤하다고 하면 보약을 지어 주기도 하고, 가족 건강에는 신경을 많이 쓰지요.” 일본 여성이 남편을 위해 집에서 약을 달인다거나 남편에게 정력에 좋다는 음식을 해주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다. 한국 부인들은 재테크에도 뛰어나다. “집사람의 관심은 오직 돈과 집에만 있는 것 같아요. 주식이다 뭐다 하면서 재테크는 열심히 하죠. 그런 면에서 일본 여성보다 생활력이 강한 것 같아요. 그렇게 좋아하는 친척과의 대화도 들어 보면 돈얘기뿐이에요. 누구네 아파트 평수가 얼마냐 하는 것에는 굉장히 신경을 써요. 친척 중 누군가 부자가 되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뭐, 한국에서는 돈만 있으면 법도 움직인다고 하니까.” 무슨 이야기를 해도 결국은‘친척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외국인 남편이 한국인 아내에게 가장 갭을 느끼는 것도 역시 친척 문제일 것이다. “저에게도 빨리 교수가 되라고 야단이에요. 그렇게 되면 친척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릴때 보증인이 될 수 있다나요....” 아아, 한국인의 친척들. 비교. 일본 남자의 의식은 어떻게 변해 왔는가? 달라지는 가사 분담의 개념 ‘주부’라는 단어가 생긴 것은 10년 정도 전쯤인 것 같다. 집에서 가사를 책임지는 남편을 의미하는 말로, 이 경우 경제적으로 한 가정을 지탱하는 것은 주로 부인 쪽이다. 남편은 밖에서 일하고 부인은 가정을 지킨다는 종래의 패턴이 완전히 역전된 형태이다. ‘주부’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전에도 그런 부부들이 있었지만,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경우여서 예외로 쳤다. 그러므로 ‘주부’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된 것은 가정 내에 이런 선택도 있을 수 있음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내 친구 중에도 ‘주부’가 있다. 그는 47세의 ‘잘 나가지 않는’ 음악가이다. 39세인 아내는 통역사와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편인 그가 가사를 담당하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부인이 집에 있는 시간에도 부부가 함께 식사를 준비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는 완전한 전업 주부가 아니므로 밖에서 일할 때도 있다. 그런 때는 부인이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지낸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남편이 가사를 잘 맡아 하는 친구 부부도 있다. 이 40대 후반 부부의 경우, 부인이 가사를 처리하는 방식이 대충대충이어서 두 번 손이 가게 되는데, 그럴 때면 남편이 거의 도맡아서 마무리를 한다. 그 남편의 양친도 맞벌이 부부여서 서로 협력해서 가사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도 남자가 집안일 하는것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잘하고 못하고는 적합과 부적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의 주부생활’이라는 수필에서, “결혼하고 2년째쯤 되었을 때의 일인데, 나는 반년 정도 ‘주부’노릇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이렇다 할 일도 없이 극히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반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한 페이지였던 것 같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말하자면, 세상의 남자들은 일생 중 적어도 반년이나 1년 정도는 주부 역할을 해 보아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라며 주부 역할을 예찬하고 있다. 부부가 같이 돈벌어도 가사노동은 여자의 몫 일본의 경우 맞벌이는 1960년대부터 증가해 왔는데, 부인이 일을 갖고 있더라도 가사는 부인 몫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가령 남자는 매일 집에 있어도 가사노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람을 느끼는 일을 하든,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가나 연구가든, 집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가사는 여자의 일이며, 남자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으로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애초에 남자들은 가사의 노하우를 알지 못했다. 1970년대까지는 여성이 기업에 취직해도 결혼하면 퇴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결혼 후 회사에 남으려고 해도 육아휴가는커녕 출산휴가조차 얻는 것이 어려웠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남녀간 임금 차가 있고, 여자에게는 보조적인 일밖에 맡기지 않는 직종간 차별도 있었다. 여성이 결혼해도 계속 할 수 있는 일은 교사 혹은 공무원 정도였다. 아내가 집 밖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장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에 가사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도 있었다. 남녀가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대학을 졸업해도 사회로 나오는 순간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해 여자들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1975년에 ‘나(여자) 만드는 사람, 나(남자) 먹는 사람’이라는 카피를 내건 인스턴트 라면 광고가 여성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그러한 여자들의 마음을 반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가 바로 세계 여성의 해로, 유엔이 주최한 회의가 멕시코에서 열린 직후의 일이었다. 집에 놀러 온 남자친구에게 여동생과 함께 라면을 끓여 주는 시시한 광고였지만, ‘나(여자) 만드는 사람, 나(남자) 먹는 사람’이라는 문구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여성단체는 이 광고를 여자는 요리를 하고 남자는 먹는다고 하는 남녀의 역할 분담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크게 반발했다. 규탄의 대상이 된 남자들은, 비난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 했었지만, 결국 이 광고는 방영된지 약 2개월 만에 중지되었다. 남자의 가사 분담은 세계적 추세 이렇게 여성측의 자아 선언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아내가 일 때문에 밖으로 나가면 가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런데다 어린아이가 있으면 누군가 보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핵가족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가사를 맡길 수 있는 부모가 가까이 없는 가정도 많아 졌다. 따라서 남편이 집에 있으면 육아도 담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실제로 주부임을 자인하는 남성이 가사를 담당하게 된 경위는 여러 가지로, 적극적 의미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맡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탁아소를 이용한다 해도 양육에 지장이 있다든가, 부인 쪽이 수입이 많아 남편이 퇴직했다든가, 남편이 퇴직하여 부인이 가계를 지탱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경우 등 그 이유는 실로 다양하다. 어떤 부부는 어느 쪽이 가사에 적합한지 고민하다가 남편 쪽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젊은 세대에 가사에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여자가 경제력을 갖고 있는 구미의 예를 보아도 당연한 흐름이다. 그러나 현재도 통계적으로 보면 남편의 가사 참여는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난다. 1988년 판의 ‘국민생활백서’에 의하면, 일을 가진 남성의 가사 시간은 20대에서 50대까지 어느 쪽도 평일은 10분 이하로,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안 하는 것과 같은 비율이다. 그 내용도 쓰레기를 내놓는다, 이불을 갠다, 덧문을 열고 닫는다 등으로, 본격적인 가사노동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30대 남자가 일요일에 34분 정도 가사에 참여하는 것이 남자들의 가사 참여시간 중 최장 시간 인데, 이 경우는 요리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0세 전후의 버려진 남자들 남편들의 의식이 크게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중고년 세대이다. 그들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출세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다. 과거 그들은 일요일이면 취미삼아 책상을 만들거나 집이나 전기제품을 수리하며 보냈다. 그러나 대량소비 시대, 테크놀로지 시대가 되자 남자가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더구나 일요일에는 회사의 접대 골프로 외출하든가 아니면 휴식을 위해 잠만 잔다든가 해서 남편의 존재 의의는 오직 돈을 벌어오는 것에 한정되어 버렸다. 고령화 사회가 되어 정년 퇴직후 20년 정도의 시간을 부부가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바로 그 순간 남자는 집 안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인이 자신보다 먼저 병으로 쓰러지거나 또는 죽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부인이 없으면 속옷도 손수건도 양말도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주변 정리도 할 수 없는 이 남자들은 자식들에게조차 소외 당한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중고년 이혼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집에서는 ‘밥, 목욕, 잠’이라는 세 단어밖에 말하지 않던 남편을 아내는 내심 지겨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계 꾸려나가기, 아이들 교육, 친척이나 이웃과의 교제 등 생활 속의 자질구레한 일을 남편과 상의하려고 해도 일에 지친 남편들은 잘 받아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자신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고 부인에게는 자유를 주고 있다는 생각으로 부인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부인이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더욱 남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남편의 정년 퇴직과 함께 이혼을 요구하는 부인들이 출현한 것 이었다. 아이들을 다 키울 때까지 남편을 참아내고 있던 아내는 퇴직금의 반을 위자료로 받아 자유의 몸이 되어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60세 전후에 아내에게 버려진 남자들은 생활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요리를 통해 새로운 인생 찾아 이런 현실에 부딪치면서 정년 퇴직을 앞둔 남자들은 가정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부인이나 아이들에게서 외면을 당하게 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60세 전후까지 회사가 전부였던 남자들은 별다른 취미도 없고,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도 거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이 남자들은 ‘커다란 쓰레기’로 불렸고 혹은 ‘젖은 낙엽’이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젖은 낙엽’이란 정년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몰라서 집 안에서는 물론 장보러 갈 때도 부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남자를,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에 빗댄 말이다. 이러한 상황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된 것은 부부 중심의 삶에서 부인이 먼저 쓰러지는 경우가 생기면서부터였다. 가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남편은 자녀들뿐만 아니라 사회 복시 시설의 도움을 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남자의 요리’라는 제목의 잡지 특집 기사나 책이 나왔고, 자치단체도 요리교실 등을 고령화 대책 사업으로 내놓고 남편들의 자립을 촉진하는 운동을 전개해 왔다. 빨래나 청소는 전자제품의 도움을 받고 세세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가사노동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리의 경우는 스스로 하지 않으면 외식을 하든가 인스턴트 식품이나 레토르트 식품을 사서 대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것들이 대체로 나이 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아닌 데다 또 비경제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먹는 것은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남자들이 요리에 흥미를 갖는 또 하나의 배경으로서, 프로 요리사의 기술이나 지식이 주목을 받게 된 것에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젊은 세대는 남자든 여자든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해 온 남자들이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프로 요리사는 반드시 남자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집 안에서 하는 요리도 남자가 여자보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최근 중고년 남성을 대상으로 한 요리교실이 어디서나 성황이다. 이 과정을 통해 처음에는 부엌칼을 사용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던 남자들이 마침내 요리의 재미를 발견한다. 퇴직했으니 시간도 충분해서 손으로 쳐서 만드는 메밀국수에 열중하기도 하고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나오고 있다. 요리를 배움으로써 노후생활에 대한 불안이 해소될 뿐만 아니라 남는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는 등 요리를 배우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침대 광고에도, 침상에 누운 부인에게 남편이 식사를 마련해 먹이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 남편이 만든 요리를 먹은 부인이 “오늘은 60점”이라고 말하면, 앞치마를 두른 남편이 조금 실망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그러면 부인이 “조금씩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나은거예요”라고 격려한다. 이 광고의 부부가 너무도 멋지다고 생각되는 것은 남편이 부인을 위해 가사를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불황으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남자들은 가정과 그 생활의 무대가 되는 집에 대해서도 관심을 높이고 있다. 어쩌면 남자가 가사 능력을 발휘하여 가족의 중심에 서게 되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는지 모른다. (후지이 히시코) 이 책을 읽고 한국 여성들의 실상을 해부한다(이나미 소설가, 신경정신과 전문의) 필자도 한국의 못말리는 아줌마 중 하나이지만, 가끔은 이 땅의 여자들이 정말 싫을 때가 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특히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좀체 꺼내지 않는다. 무엇보다 성차별의 혐의를 받을 수가 있고, 잘못하다가는 “자기도 똑같은 주제에, 왜 잘난 척이야”라는 식의 노골적인 비난이나 “잘 나간다고 남자들 사회에 편입해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라는 가시 돋친 말들을 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성들의 허위의식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비판을 할 수가 있는데, 이는 그동안 대부분의 기득권을 남성들이 갖고 있어 왔고, 아무래도 남성이 강자였기 때문이었다. 강자를 공격 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그 도덕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에 매력적인 일이다. 반대로 약자의 결점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얼핏 매우 쉬워 보이지만 잘못하다가는 여론의 몰매를 받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한국 여자들은 거의 인생의 대부분을 남편과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불평등한 모든 조건들을 참고 견디었으며, 여러 가지 폭력의 희생물로 살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한국의 여성들을 비판하는 담론은 사실 설 자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미국 같은 교묘한 인종차별의 나라에서 흑인들이 성공하면 할수록 흑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더 어려운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도 싶다. 일본 여성들을 포함해서 외국인들이 본 한국 여성 비판서 ‘일본 여자가 쓴 한국 여자 비판’ 은 이렇게 숨죽이고 있던 한국 여성비판론자들이 갖고 있던 저간의 말못할 답답함을 상당히 후련 하게 씻어 주리라 본다. 예컨대 한국 여성들이 갖고 있는 그야말로 뻔뻔스러운 매너들이 이 책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잘 담겨져 있다. 공중 장소에서의 아줌마들의 행동들, 예컨대 여럿이 같이 쓰는 공중 목욕탕에서 머리를 담그고 풍덩풍덩 자맥질하는 여자들, 아무데서고 모이면 음담패설로 낄낄대는 중년 부인들, 일단 부딪치면 멱살부터 잡고 소리소리 지르는 용감한 여성 전사들, 그냥 두어도 좋을 피부를 직업 여성처럼 회칠을 하고 무서운 눈화장을 한 채 요란한 노출 패션을 마다 않는 젊은 아가씨들 같은 우리의 자화상들은 외국인들이 뭐라고 흉을 보기 이전에 이미 충분히 부끄러움을 느끼게끔 하는 모습들이다. 사적인 공간에서도 그렇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들은 대부분, 한국 가정의 ‘경계 없이 남의 공간 침범하기’나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다’식의 애매한 친족관계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또 다소곳하고 순종적인 동양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만났던 한국 여성들 중 일부가 영화 ‘미저리’의 주인공 이상으로 상대방에게 집착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데 두 발 두 손 모두 드는 모양이다. 물론, 외국인들과 교제를 용감하게 시작하는 여성들 중에는 관습이나 전통에 대해 매우 저항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 여성만으로 모든 한국 여성을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매맞는 여성들, 성폭력의 희생자가 된 여성들이 너무 많고 그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야말로 눈물을 머금고 상담을 하곤 했다. 실제로 한국의 성폭력 범죄율은 지구촌에서도 매우 높은 편에 든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엔 어떻게 된 일인지 남자나 자기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여성들이 점점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길가에서 아무나 붙잡고 욕하는 여성들을 보면 충분히 그 변화를 느끼게 한다. 징그럽게 주위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고도 아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무서운 여성들이나 사랑이라는 포장으로 상대방 남성이나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흡혈귀처럼 빨아먹고 착취하는 여성들도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이들 여성과는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너무나 신산한 세월을 오랫동안 견뎌온 탓에, 너만은 나처럼 억울하게 살지 말고 네 멋대로 살아보라는 우리 어머니들의 메시지를 받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여자는 무조건 참고 살라는 터무니없는 불평등한 교육에 반항하기 때문일까. 요즘 우리 사회의 여성들 중에는 선진 사회의 여성들보다 더 드세고 더 이기적인 이들이 확실하게 많아진 것 같다. 이런 시기에,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보다 객관적인 눈으로 우리 나라 여성들의 실상을 가감없이 해부해 주어 참 반갑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들을 때에는 자존심도 좀 상하고, 우리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그들의 우리 문화에 대한 무지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일단은 그들의 지적을 주의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받아들일 것은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할 것을 반성해서 보다 성숙한 한국 여성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고단한 아줌마들도 기왕 반란을 일으키려면 그야말로 멋있게 일으키면 어떨까. 시시하게 어설픈 성해방론자가 되거나, 적어도 자기와 자기 식구들만 아귀같이 챙기는 욕심 사나운 가족 이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남들에게 좋은 일은 못할 망정 쓸데없는 폐는 끼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당당하게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은 억대 연봉을 자랑하거나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소리 없이 성숙한 자녀 교육을 실천하는 여성들,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이 되는 성실한 여성들에게서 나는 이 사회의 중심과 기둥을 읽고 본다. 그런 여성들이 많은 사회가 결국 행복한 나라,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런 여성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지기 위해서는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적나라한 모 습을 참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들의 보다 객관적인 판단이 무엇인지 자세히 읽다보면 한국의 여성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나올 것이다.